romance 5
‘천사들도 체취가 있겠지? 안젤리는 좋은 향이 나던데.’
남자만 가득 들어찬 이 밀폐된 방.
착각이겠지만, 내 코에 홀아비 냄새가 맴돌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이나 천사나 고추들은 다 똑같지 뭐.
천사들에게 건넨 안젤리의 공손한 말은 무시당했다.
단아한 안젤리의 목소리가 울리기에는 회의장 안이 지나치게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역시 기억을 지워야 해! 변수를 놔둘 수는 없어!”
“너무 강경책이지 않은가? 기억의 금제는 원칙상 본인의 동의가 필요해.”
“그렇게 안이하게 처리할 안건이 아니야! 적다고 한들, 확실히 존재하는 확률의 무게를 생각해!”
“발언의 금제 정도면 적당하지 않나? 지상의 간섭을 최소로 줄이며, 인간의 의사를 묵살하지 않는 최선의 조치지.”
“놈들이 인간을 납치해서 기억을 읽어 낸다면? 이미 늦었어! 천계에 올라온 인간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 문제! 그것만으로 흥미를 느낄 놈들이 많아. 네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을 텐데?”
“으음… 아니,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었군…”
그들은 회의장에 들어온 나를 신경조차 쓰지 않고 격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내게 위험한 일은 없을 거라더니, 기억을 지운다는 등 살벌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때, 3쌍의 날개를 가진 나이들어 보이는 천사와 눈이 마주쳤다.
“음? 당사자가 왔구먼.”
“쳇. 후딱 잡아서 기억을 지우고 풀어주자고. 괜히 마음 아프게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나?”
“그래. 괜히 나쁜 짓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군. 기억을 지우는 것은 금방이니 어서…”
“잠깐, 허허…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지 않나? 다들 성급하게 굴지 않는 게 어떤가?”
아주 지들끼리 다 해먹고 있었다.
적어도 내게 지금 무슨 일이 발생한 건지 간단히 설명이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그조차 없었다.
“우선 인간의 의사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네.”
“필요 없다니까! 일일이 동의를 구하기에는 시안이 너무나 중요!…”
“죄송한데, 저와 관련된 일이니 제게도 발언권을 주실 수 있습니까?”
이대로 얌전히 기다리면 며칠이고 날 세워둔 채 회의할 기세였기에 끼어들기로 했다.
“음! 일단 그가 할 말이 있다고 하니 듣는 것이 어떠한가?”
“…어차피 기억을 지운다고 하면 울며 빌거나, 화낼 것이 분명한데…”
“펜릐엘.”
“알았다고.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기껏 총대 멨더니… 젠장, 마음대로 해.”
이름이 특이하네…
펜릐엘이라 불린 신경질적인 천사는 표정이 아주 불만스러워 보였다.
또한 작은 목소리로 ‘다들 속으로는 강제적인 기억 금제에 동의해 놓고는…’, ‘착한 척하느라 나서지 못하는 걸 기껏 내가 앞장섰더니…’, ‘나만 나쁜 놈 됐잖아…’ 라며 툴툴대었다.
저 말은 사실이다.
펜릐엘의 ‘강제 기억 소거’ 의견에 명확하게 반대 의사를 밝히는 천사는 눈앞의 늙어 보이는 천사가 유일했다.
이 늙은 천사를 제외하고는 암묵적으로 펜릐엘의 의견을 동의하고 있었다.
펜릐엘이 입을 열 때마다, 다른 천사들은 거들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으니까.
“그럼… 일단, 제게 문제가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그것부터 알아야 제가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니까요.”
“…자세히는 말하지 못하지만, 자네의 생명을 넘어서… 자칫하면 차원 전체가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네.”
“이봐, 어차피 기억의 금제를 걸거나, 발언의 금제를 걸 텐데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 주는 것이 어때? 계속 이런 식으로 돌려 말하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지 모르잖아?”
“확실히…”
늙은 천사는 펜릐엘의 말에 고민에 잠겼다.
그것도 잠시,
곧 천사의 입이 열렸다.
“알겠네. 이 회의장을 나갈 때까지, 또는 1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내게 걸려있던 발언의 금제를 일시적으로 해제하도록 하지. 이를 허가 해 주겠는가?”
“동의.”
“동의한다.”
“예. 동의합니다.”
늙은 천사는 발언의 금제라는 것이 확실히 해제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선지 몇 번 허공을 향해 입을 뻐끔대었다.
곧 확신이 든 천사가 내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 26화 >
“…세상에는 천사가 있으니 악마도 있다네. 그리고 신의 힘이 담긴 자네의 시스템은, 그들의 입장에서 아주 먹음직스러운 먹이지.”
“악마… 말입니까?”
“그래. 상상해보게. 자네가 가진 시스템이 무한의 삶을 사는 악마에게 넘어가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단 2일 만에 버러지 같던 신체 능력을 일반인 수준으로 끌어 올려준 시스템의 힘.
그걸 생각해 보면…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지겠군요.”
“그렇지. 그렇게 얻은 힘을 악마가 선한 일에 쓰겠나? 상상하지 못할 만큼 악독한 일에 사용하겠지. 지상 전체가 위험할 정도로.”
천사가 있으니 악마도 존재하리라 생각해 오긴 했다.
그들이 천사들처럼 지상에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늙은 천사의 말을 들어보니 지상에 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닌 듯했다.
“그러므로 악마들은 그 시스템을 비롯한 신의 힘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흠… 자네에게는 이렇게 비유를 하는 것이 좋겠구먼. 악마들의 목적은 자네의 시스템을 해킹하는 것이라네.”
“해킹?”
“그래. 시스템을 해킹하여 소유자를 자신에게 옮기고, 귀찮은 퀘스트 클리어 없이 보유 카르마만 무한대로 늘려 초월적인 힘을 손에 얻는 것. 그것을 노리겠지.”
시스템을 해킹해 소유권을 변경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의 악마라면, 이미 손에 들어온 시스템의 보유 카르마를 늘리거나, 아이템을 무한정으로 사들이는 것쯤은 손쉬울 것이다.
해킹하는 악마는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비유가 그럴 뿐이니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천사들이 시스템에 접속할 방법이 존재한다면, 아무리 보안이 뛰어나더라도 언젠가는 악마에게 침입을 허용 당한다네. 1만 년이 걸리던, 2만 년이 걸리든 상관 없지. 악마들은 무한의 삶을 사니까.”
“그 벌레들의 집착과 광기를 생각한다면 1만 년 동안 그것만 시도할 놈이 수두룩하게 널리고 널렸어!”
“지상의 시간의 흐름과 천계의 시간 흐름, 지옥의 시간의 흐름이 모두 별개로 흐르니… 자네 입장에서는 악마들이 시도한 지 1초도 되지 않아 시스템을 빼앗긴 거로 느껴질게야.”
이런 시발.
1만 년 2만 년 하길래, 나랑 전혀 상관없는 이야긴 줄 알았다.
그 정도 시간이면 인간의 문명이 몇 번이나 스러졌다 다시 생기기 충분한 시간이니까.
그런데 각 차원의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 순식간에 해킹당한다니!
이해하기 난해한 내용이었지만, 그들의 표정을 봤을 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너무나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시간과 관계없이 시스템을 탈취할 수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건 저랑 관련 없는 시스템 자체의 문제 아닌가요? 어째서 제가 문제가 되는 거죠?”
“시스템에 악마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안배해 놓은 조치 때문이지.”
“방비가 이미 되어 있었군요?”
휴…
나는 작게 안도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일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다니.
심지어 그것이 가능성 수준이 아니라 거의 확실하게 일어날 일이란 것을 생각해봤을 때,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분명 신이 만들어 놓은 방비이니, 절대 악마들이 뚫지 못하겠지?
“…아니. 방비 따윈 없네.”
“예?”
이게 무슨 헛소리야.
“잠깐… 그게 무슨 개소… 아니, 무슨 헛소리에요? 방금 조치를 해놨다면서요? 그런데 방비가 안 됐다니요?”
“음… 조치는 되었지만, 방비는 하지 않았네.”
나는 큰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천사의 말을 논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하나의 결론이 나온다.
‘천사도 늙으면 치매가 오는구나!’
이런 결론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저 늙은 천사의 헛소리를 듣고서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신기한 거지.
좁혀진 내 미간을 본 천사가 보충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설명이 너무 부족했군. 까마득히 오래전, 어차피 뚫리는 것이 예정된 수많은 시스템의 보안에 대한 한가지 의견이 나왔다네. 그 의견이 실현된다면 그 누구도, 어떠한 일이 있다고 한들 뚫을 수 없는 방법이었지.”
“그 방법이 뭡니까?”
“시스템 자체를 밀폐·독립 시켜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네. 그것이 제작자라고 한들.”
…이해할 수 없는 답안이다.
물론 문 자체를 없애버려 밀봉해버리는 것 또한 방의 침입을 막는 방법의 하나다.
아무리 뛰어난 도둑이라도, 문이 없으니 들어올 방법이 없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방의 주인도, 방을 건설한 건설자도 못 들어간다.
물론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방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존재하는 시스템이다 보니 소유자인 나는 사용할 수 있었다.
더 정확히는 내가 도둑의 손길로부터 방 안의 지켜져야 할 물건이다.
그러나 이런 식이면…
한번 만든 시스템 설정의 변경이나 패치 같은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껏 시스템 내부의 수정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한 겁니까?”
“그래. 시스템을 수정할 방법은 없다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되어있지.”
대외적으로 그렇게 되어있다라…
악마와 같이 시스템을 탐낼만한 자들은 그렇게 알고 있지만,
실제론 알려진 것과 달리, 시스템을 수정하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다.
내가 눈치챈 것과 같이.
“실제로는 시스템을 통제할 ‘문’을 없애지 않으셨군요.”
“…”
늙은 천사는 반박하지 않음으로써 내 말에 긍정했다.
“어째서 그랬습니까?”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네. 앞서 말했지만, 그 얼마나 견고한 방벽이라고 한들… 영원의 시간 앞에서 스러지는 것은 필연 아닌가? 확률이 한줄기라도 존재한다는 것은, 무한의 앞에선 ‘반드시’를 뜻하니.”
천사의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성격상 절대 납득하지는 못했다.
의미 없는 행동에 불과하니 그저 손 놓고 포기하라니?
“이해할 수 없군요. 그래도 방비를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설령 헛짓거리에 불과하다고 한들, 발버둥이라도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자네와 나의 관점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군. 그럴 수밖에… 자네는 필멸자이고, 우리는 불멸자이니.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겠지. 우리의 시선에서 자네가 말한 ‘발버둥’이란, 정해진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눈을 닫는 어리석은 행위와 다르지 않다네.”
“…그렇다고 한들…”
“무엇보다 방비하는 것보다 나은 수가 있지. 그들이 자발적으로 시도할 엄두조차 못 내게끔 한다면?”
악마가 시도할 엄두를 못 내게 하는 방법…
나는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다.
이미 천사가 전부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게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내릴만한 판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맥상 그 방법이란 건 분명 이것밖에 없는데… 말 그대로 너무 도박 수 아닌가?’
나는 반신반의하며 내가 떠올린 방법을 말했다.
“’방에 문이 없으면 들어올 수 없다.
문이 없는 방을 침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관리자는 방을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 사실 문이 있지만, 없는 척하면…
관리자는 들어갈 수 있지만, 침입자는 침입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라는 건 아니겠죠?“
눈이 질끈 감긴다.
나는 내 스스로가 틀렸길 바랐다.
천계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고 이 눈앞의 천사가 꾸짖어 주었으면 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당장 1초 뒤 악마가 시스템을 탈취했다고 한들 이상할 것 하나 없었기에.
“자네가 생각한 것이 맞다네.”
씨발.
왜 항상 내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을까?
그놈의 방법이라는 것이 너무 허술해서 발안자의 멱살을 쥐고 물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멍청한 의견을 낸 것인지.
수많은 악마 중 한 명이라도 탈취를 시도한다면?
수많은 천사 중 한 명이라도 이 비밀을 발설한다면?
혹시 천사 중 첩자나 배신자가 있다면?
변수가 수도 없이 많아서 반박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나는 천사를 향해 손바닥을 펴 보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표정은 말 그대로 황당함 그 자체.
표정 연기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표정이었다.
“이거 참… 일일이 말하기도 힘드니 그냥 정보를 머릿속에 직접 전달해 주도록 하겠네. 그럼 자네의 의문도 어느 정도 풀릴게야.”
천사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잊고 있던 기억을 찾은 것처럼 자연스레 정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아기천사가 나에게 박찬영 관련 기억을 줬을 때와 비슷했다.
…
“…이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실제로 가능했지. 자네가 상상할 수 없는 세월 동안 이 비밀이 지켜졌고, 단 한 번도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으니.”
10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믿지 못하던 그 ‘방법’.
그러나 이제는 천사들이 이런 방법을 채택한 이유가 이해가 가버렸다.
‘젠장… 천사들이 너무 인간같이 생겼기에 착각해 버렸잖아.’
악마와 천사를 인간과 같은 시점에서 놓고 보면 안 되었다.
천사와 악마는 인간이 아니다.
불멸의 삶을 사는 초월자들이다.
그렇기에…
“불멸자는 의미 없는 시간을 버텨내지 못하지.”
“인간이 살기 위해 밥을 먹는 것처럼… 당신들도 그럴 수밖에 없는 거군요. 살기 위해서.”
불멸자에게 ‘살기 위해서’라는 말을 쓰니 우습지만, 그들에게도 죽음은 있다.
육신은 스러져도 소생한다.
영혼은 불변하여 결코 손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아가 무너진다면, 그것이 바로 불멸자의 죽음이다.
빈 껍데기가 된 인형만 남는 것이다.
“자네가 영원을 사는 초월자라 생각해 보게나. 산이 협곡이 되고, 바다가 사막이 되는 무량억겁(無量億劫)을 무의미한 행동에 쏟아 부을 수 있겠는가? 광활한 시간, 자아조차 휩쓰는 소용돌이를 표류하며 불확실한 목표만을 쫓을 수 있겠는가?”
‘거 뜬구름 잡는 소리 잘하시네.’
저 쓸데없는 비유가 가득 들어찬 말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
그런 시간을 단 한 가지 일에만 매달려도 그 끝에 ‘과실’이 있다면,
쏟아부은 시간에 의미가 있음을 스스로가 알고 있기에 자아는 무너지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불멸자의 자의식은 매우 강력하니까.
그러나 몇천 년 몇만 년이고 빈 독에 물을 채우는…
가령 문이 없는 방에 들어가려고 한다는 끝 없고, 의미 없고, 과실 없는 행동에 미치지 않고 버텨낼 수 있을까?
‘그런 게 가능하면… 그건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니지.’
인내심과 광기의 수준이 아니다.
감정과 생각을 잃어버린 기계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어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자아가 사라진 기계가.
“물론 몇몇 모자란 이들이 ‘문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우리의 주장을 거짓으로 치부하고 탈취를 시도할 수는 있다네. 실제로 악마가 꾸준하게 2천 년 정도 시도한다면 충분히 뚫을만한 보안 수준이고. 그러나…”
“100년도 버티지 못하겠네요.”
“그래.”
아무리 멍청한 생물이라도 지성체인 이상 한 달만 지나면 깨달을 것이다.
만약 입구가 없다는 천사의 말이 진실이라면?
1만 년이 지나더라도, 다시금 그만한 시간이 지나가더라도, 또 그 배의 시간이 지나가더라도…
쏟아부은 시간과 관계없이 물리적으로 불가능 한 일이니,
영원히 시스템을 뚫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내 행동은 무슨 의미가 있지?
라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시스템이 뚫리기까지 2000년.
무려 2000년 동안이나 위 의문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의심하고, 가능성을 의심할 것이 분명하다.
탈취를 시도할 때, 잘 때, 먹을 때, 쉴 때를 가리지 않고 24시간 내내.
“한 티끌 존재하는 의심에 매여 안식 없는 나날만을 보내게 될 게야. 100년? 아니, 끊임없는 정신적 고문에 뇌가 이지(理智)를 포기한 채 스스로의 자아를 죽이는 데는 50년이면 차고 넘치지.”
시스템을 뚫을 실력을 갖춘 이들은 이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시도 자체가 자살이라고.
똑똑한 이들만이 시스템을 뚫을 수 있지만, 똑똑한 이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론상 절대로 뚫릴 수 없는 방벽 완성이다.
“완벽하네요. …입구가 있다는 것만 알려지지 않으면요.”
“그래. 그래서 자네가 불려온 것이라네. 자네는 알아버렸으니까.”
이런 시발.
왜 그런 중요한 힌트를 한낱 인간이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게 관리했던 거지?
누구야? 이런 중대한 실수를 한 천사가.
“으으…”
끙끙 앓는 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객석에 앉아있던 안젤리가 시꺼멓게 죽은 얼굴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키 크는 약을 인벤토리에 넣은 것, 안젤리가 나를 배려해서 한 행동이라고 했지?
‘안젤리가 그랬으면 인정이지.’
나는 태도를 바꿨다.
기본적으로 나는 예쁜 여자에게 매우 관대하다.
그것도 저 정도로 아름다우면 웬만한 것은 용서할 수 있다.
경국지색의 뜻이 나라를 기울게 하는 미인이라고 했던가?
우리 안젤리는 차원을 기울일 뻔했다.
그러니 어떤 경국지색 미녀보다 안젤리가 더 아름다운 것이 분명했다.
< 27화 >
껌뻑 껌뻑.
“어라?”
눈을 뜨니 내 방이다.
내게 익숙하던 자취방이 아닌, 혼자 살기에 쓸데없이 넓은 박찬영의 방.
머릿속은 복잡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깔끔했다.
그렇기에 이변이다.
나는 분명 천계에 올라가서.
안젤리를 만나고.
그녀를 따라 회의장으로 들어갔는데.
정신을 차리니 내 방이다.
마치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성공한 것 같네? 기억의 금제.”
옆에서 듣기 좋은 미성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작고 아름다운 얼굴이 보인다.
그림으로 그린듯한, 사진으로 찍은듯한,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미녀.
안젤리다.
바로 지근 거리에서 안젤리의 목소리가 들려왔음에도 어째선지 나는 깜짝 놀라지 않았다.
마치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여기에 있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안젤리? 네가 왜 여기 있어?”
“음음! 주변에 악마는 없는 것 같고… 그럼… ‘사실 천계는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어.’”
“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야?”
안젤리의 말이 이해가 불가능했다.
마치 ‘하늘보리를 항공 연료로 사용한 가습기’, ‘수족관에서 전기를 충전하는 손 소독제’ 같은 뜬금없으면서도 엉뚱한 소리였다.
술을 잔뜩 먹었을 때나 할법한 맥락이 이해가 안 가는 말.
또다시 안젤리의 4차원 병이 도진 걸까?
“좋아! 인식의 금제도 제대로 된 것 같네!”
“…”
이쯤 되니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겪은 일이 단순한 순간이동이 아니라는 것을.
그 밖에 안젤리는 내가 이해하지 못 하는 말을 몇 번을 더 하더니, 나의 어벙벙한 표정을 보고 완전히 만족하였다.
“끝났어?”
“응! 내 업무는 방금 걸로 끝! 갑자기 상황이 휙휙 바뀌어서 당황스러웠지??”
“뭐… 그렇지.”
“이제는 네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우선 물어볼래?”
“…”
방금까지는 당황했지만, 특성의 덕에 빠르게 감정을 추스른 후, 스스로를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면 너무 뻔한 클리셰였다.
나는 아마도 기억이 지워진 것 같다.
회의장에서 일어난 일과, 지구에 도착하기까지의 기억을 전부.
무엇보다 안젤리가 말한 ‘기억의 금제’라는 단어에서 확신을 얻기도 했고.
‘아. 그러고 보니 어째서 천계로 불려갔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네?’
기억을 되짚어가며 점검을 해보니 빈자리가 하나둘씩 발견됐다.
분명 아기천사가 질색한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기는 한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반드시 한가지의 사실을 확인해 봐야 한다.
“첫 번째 질문을 할게. 다른 건 몰라도, 이 질문에는 솔직하게 대답해 줬으면 해. 그래 줄 수 있을까?”
“알겠어! 반드시 사실만 말할 것을 약속할게!”
“좋아. 나는… 나의 의지로 내 기억을 지운 거야? 아니, 적어도 기억을 지우는 일에 나의 동의가 있었어?”
“…와…와아… 상황 파악이 엄청 빠르네? 기억이 지워진 것을 깨달았구나? 나는 분명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물을 줄 알았는데…”
“어쨌든. 대답은?”
안젤리의 대답을 재촉했다.
나는 이 질문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렇기에 이 질문의 대답만큼은 사실대로 말해 달라고 한 것이다.
“응! 순수한 찬영의 의지였어! 기억의 금제는 물론, 우리가 권유하지도 않은 인식의 금제를 자발적으로 받겠다 나설 정도로!”
“인식의 금제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스스로의 기억을 지우길 선택했다고 이해해도 될까?”
“맞아!”
“정말이야? 그 말에 거짓은 없는 거지?”
“정말이라니까! 으으…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정말로 너의 의지였어!”
솔직히 증거를 보여주더라도 나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시간을 돌리고 기억을 지우는 천계가 과연 증거 하나 조작하지 못할까?
증거랍시고 내 스스로의 입에서 기억을 지우겠다는 말에 동의하는 영상을 보여주더라도 나는 완전히 믿지 못할 것이다.
내 뇌를 만지작거려서 나를 조종했을지 어떻게 아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인간 하나를 최면 거는 것이, 시간을 돌리는 것보다 훨씬 쉬울 것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거기까지 의심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치면 이 세상이 정말로 실제한 세상인지, 내가 기억하는 나의 삶이 조작된 것이 아닌지까지도 끝도 없이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철학적인 인간과 거리가 멀었기에 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당장 존재하는 현재의 나.
그렇기에 나는 안젤리의 말을 믿기로 했다.
“믿을게.”
“응! 고마워!”
안젤리의 확답을 들은 뒤 줄곧 불안하던 속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강제가 아니라면 괜찮다.
기억이 지워졌다고 한들, 그때의 판단을 내린 것 또한 나다.
남들에게는 낯이 뜨거워져 절대로 말하지 않겠지만…
의외로 나는 나 자신을 신뢰한다.
‘과거의 내가 최선의 판단을 했겠지 뭐.’
내가 손해를 보는 거래를 했을 것이란 생각은 절대 들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든 악착같이 이득을 보려 하는 것이 내가 아는 나 자신이다.
“좋아. 그럼 가장 중요한 의문이 풀렸으니 다음 질문은 편하게 할게.”
“얼마든지!”
“우선… 너 지구에 있어도 괜찮은 거야? 아기천사는?”
지금껏 천계와 나의 연결고리는 안젤리가 아니라 아기천사가 도맡고 있었다.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안젤리의 성격상, 지금까지 나를 만나러 지구에 내려오지 않았다면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내려오지 못하는 이유가.
하지만 이제 와서 지구에 내려와 있다니?
원래대로라면 방금의 설명도 아기천사가 맡고 있어야 정상적이다.
“내 후배는 지금 천계에서 내가 하던 업무를 다른 천사에게 인수인계 중이야. 후후후… 그리고 내가 여기 있는 이유? 그건 말이지… 찬영이 천계에게 받기로 한 대가와 관련이 있습니다아!”
“내가 받기로 한 대가?”
“응! 찬영은 스스로의 기억을 지울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고, 얌전히 동의하는 대신 천계에게 자신의 요구를 3가지 들어달라고 요청했어!”
“허! 3가지나?”
“기억을 지운 보상으로 3가지의 작은 소원은 과하지만, 찬영이 전부 합당한 이유를 대어가며 천사장님을 설득했기에 들어주기로 했지!”
오호라.
이거 참, 뜻밖의 이득이다.
발송인은 과거의 나.
수취인은 지금의 나.
과거의 내가 준비한 안배라…
깜짝 선물을 뜯어 보는 기분으로 고맙게 받기로 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나! 천계의 엘리트로 소문이 자자한 바로 내가 찬영을 지켜주기 위해 지구로 강림했단 말씀!”
“지켜준다? 무엇에게서 지켜준다는 거야?”
“음… 지금의 찬영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찬영은 천계에 올라간 순간 ‘천계의 부름을 받은 인간’이라는 꼬리표가 악마의 관심을 끌 것을 깨닫고 있었어. 그래서 그에 대한 대비를 정당하게 요구했지.”
“악마… 그래. 천사가 있으면 악마도 있을 법하지. 그럴듯한 이유네.”
“그뿐만이 아니야. 지금까지 혼자서 찬영을 담당한 아기천사는 천계 측 실수에 대한 보상의 결정권이 없었잖아?”
“그렇지. 원인을 제거 못 하니 자잘한 실수가 계속 튀어나올 텐데, 그때마다 아기천사를 거쳐 가며 천계와 협상하면… 으… 서로 불편할 테지.”
“맞아. 그래서 어느 정도 실권을 가지고 있는 내가 후배와 함께 추가로 담당자가 된 거야. 찬영이 자신과 친분이 있는 나를 담당자로 배정해 달라고 요구했거든. 게다가 담당 인원이 2명이면 실수가 터지기 전에 미리 잡아낼 확률도 엄청 높아질 테고!”
“그야말로 내가 할법한 말들이네.”
“응! 그 높으신 분들 전부가 입을 꾹 닫고 찬영의 설득에 넘어갔다니까? 덕분에 나는 한동안 천계의 업무로부터 해방됐다 이 말이야! …사실 내가 한 실수가 문제가 되어서 이 사달이 난 건데, 사과하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혼자 편하게 있다니…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지만…”
“그리 신경 쓰지 마. 나 사실 엄청 까칠한 성격이다? 나랑 마음이 맞는 네가 아닌 다른 담당자였으면 고생 좀 했을 거야. 오히려 다른 천사들도 너를 고마워 할걸?”
암.
남자가 내 담당자가 된다?
가만 안 두지.
무조건 FM대로, 내가 합법적으로 가능한 진상질은 모조리 부릴 것이다.
“음… 찬영 때문에 시간을 세 번이나 돌린 사건은 유명하니까… 다들 꺼려하긴 하더라. 오히려 나를 격려해 주는 눈치였어.”
“그렇지?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 내 기억에는 없지만, 실수일 뿐이라며? 지금은 잘 처리 됐고.”
“응!… 고마워… 기운이 좀 나는 것 같네. 히히.”
풀죽은 모습도 귀엽다.
귀가 접힌 강아지를 보는 것 같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기에 이대로 계속 보고 있으면 시간이 하염없이 흐를 것 같다.
정신 차려야지.
“크흠!”
다시 본론으로.
내가 천계에 요청한 것들은 겉보기에 합당하기 그지없다.
아무래도 나 자신을 믿은 것은 현명한 생각이었나 보다.
과거의 내 생각이 눈에 보이듯 읽힌다.
실수에 대한 재빠른 조치를 위한 추가 인력 투입?
원활한 협상을 위한 결정권 보유자의 수반?
악마의 공격에 대한 대비?
전부 핑계다.
사실은 안젤리랑 가까이 지내기 위해서 그런 것이 틀림없다.
그 무엇보다 장담할 수 있다.
“그럼 설마… 안젤리는 오늘부터 지구에 사는 거야??”
“응! 24시간 악마의 위협에서 찬영을 지켜줘야 하니까! 그…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이 집에서 살기로 했는데… 위에서 찬영에게 미리 허락을 구하긴 했지만, 호…혹시 기억이 지워지면서 생각이 바뀌었다든지?…”
세상에…
나는 스스로의 계략에 전율이 일었다.
이 상황을 전부 계산하여 유도했다고?
도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 거지!
살아오면서 본 모든 여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천사와 한 지붕 아래에서 동거라니…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그래서 방금 아기천사가 인수인계 중이라고 했구나.
안젤리와 아기천사가 외근을 하는 만큼, 그녀가 하던 업무를 누군가가 이어받아야 할 테니…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안젤리면 당연히 환영이야!”
“그래? 그렇지? 히히! 나도 기뻐! 앞으로 잘 부탁해?”
“응! 혼자 살기엔 집이 쓸데없이 넓어서 빈방이 많거든? 좋아하는 곳으로 골라잡아! 원한다면 내 방이라도 비켜 줄 수…”
“그…그런 민폐를 끼칠 리 없잖아! 가장 작은 방이면 충분하거든!”
“농담이야. 내 방의 옆방이 내 방 다음으로 큰 방이니 그곳을 사용하면 되겠다.”
방은 최대한 내 방의 근처에 잡아줘서 자주 얼굴을 마주치도록 했다.
안젤리는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 하나 없이 순수하네. 내게 흑심이 있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건가?’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설원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순수하던 소녀를 어른으로 만드는 것 또한 남자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나의 고상한 취미 중 하나가,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캔버스 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다.
쓰레기라고?
나 쓰레기 맞다.
앞으로의 일상이 기대되어서 몸이 근질거린다.
“사실, 내가 찬영을 담당하게 된 건 보상이라고 보기 힘들잖아? 악마로부터의 보호는 당연히 해줘야 하는 조치고… 두 번째부터가 진짜 보상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야!”
아니.
나는 안젤리를 얻은 것이 무엇보다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뒤의 보상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한들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기대가 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설마 새로운 특성을 준다든지?”
“아쉽지만 그건 아니야. 내 후배가 말했지만, 너에게 첫 번째 특성을 준 것도 정말 예외 중 예외였다고?”
“역시 그런가.”
거참 특성 한번 얻기 더럽게 빡세네.
사실 나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특성의 유용함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제정신이면 그런 것을 쉽게 넘겨주지 않겠지.
갑자기 안젤리가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왜 갑자기 저런 눈빛을 보이지?
설마 내 새까만 흑심을 눈치챘나?
하지만 눈치를 보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으음… 찬영이 요구한 두 번째 보상은 특별한 ‘스킬’을 주는 것인데… 혹시 방금 말이 이해가 가?”
“응? 당연히 이해가 가지? 스킬을 받는 게 왜?”
“…휴. 다행히 이건 인식의 금제에 안 걸렸나 보네.”
으음?
저 말을 들으니 무언가 떠오를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의심스러운 것은 없었다.
“앗! 부작용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마, 찬영.”
“음… 알겠어.”
아마 내가 천계에서 받은 조치와 관련된 무언가인가 보다.
괜히 건드릴 필요는 없겠지.
이미 끝난 이야기니까.
“그나저나, 내가 받는 스킬이 뭔데?”
안젤리는 내게 대답하는 대신 자신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곧, 내 눈앞에 시스템 창 하나가 생겨났다.
< 28화 >
띠링!
* * *
[스킬 이름]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
[레벨] 1 Lv
[속성] 복합
[타입] Passive
[상세]
숨을 내쉬는 것으로 짧은 시간 동안 신체 능력을 강화합니다. (매력을 제외한 모든 스텟 5초간 +2)
또한 몸속의 탁한 기운을 빼냅니다.
해가 떠 있으면 이 효과가 1.5배로 증폭됩니다.
숨을 들이쉬는 것으로 자연에 존재하는 기를 흡수 합니다.
또한 오감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달이 떠 있으면 이 효과가 1.5배로 증폭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
* * *
나는 차근차근 스킬의 설명을 읽어봤다.
그리고 나온 한가지 결론.
“…이게 말이 되는 효과야?”
“신선이 사용하는 호흡법이니 당연히 강력하지. 신선들은 반신이긴 해도, 신은 신이니까! …이 스킬, 어떤 세계관을 완결하더라도 해금하지 못하는 귀한 스킬이라고?”
신들이 쓰는 호흡법이라…
말도 안 되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해가 떠 있으면 모든 스텟이 3씩 증가.
웬만하면 5초 이내에 한 호흡을 마치니 반영구적인 효과나 다름없다.
스텟 하나를 올리는데 내가 겪은 고생을 떠올리면 믿기지 않는 성능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기’라는 것은 분명 마나를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정확히 어느 정도의 성능인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겠지만, 전자의 경우를 봤을 때 절대 뒤지지 않는 성능을 보일 것이 확실하다.
가장 고무적인 것은, 이 스킬은 고작 레벨1의 스킬이란 것이다.
성장할 여지가 어마어마하게 남은 만큼 기댓값이 한도를 모른 채 치솟았다.
“만족하지?”
“…이보다 더 없을 정도로.”
“히히! 이거 내가 추천한 거야! 다른 옵션에 가려져 있지만, 몸속의 탁기를 빼내는 효과가 찬영한테 엄청 도움 될 것 같아서!”
“탁기? 내 몸에… 탁기가 있어?”
“엄청 많이! 짜고 맵고 기름진 것만 먹는 자극적인 식습관, 낮과 밤이 뒤바뀐 불규칙한 수면 패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나태한 생활 태도에서 발생한 탁기가 무려 20년에 걸쳐 쌓인 육체라고?”
“변명하자면, 그중 실제로 내가 한 것은 하나도 없어.”
개 같은 백하민 씹새끼.
똥을 아주 푸짐하게 싸질러 놓고 가셨다.
그 새낀 내가 열심히 관리한 깨끗한 몸을 노력 하나 없이 가져갔으니 좋아 죽겠지?
말로만 좋아 죽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뒤져버렸으면 한다.
“당연히 알고 있지! 하지만, 그 탁기를 평범한 방법으로 뿌리까지 뽑으려면 20년의 두배인 40년도 부족해. 그러니 내가 두 팔 걷고 추천한 거고!”
“40년… 젠장, 길기도 하네. 확실히 내게 딱 필요한 스킬이야.”
“아! 참고로 이 스킬은 찬영이 ‘저는 시스템에 간섭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곧 기억이 지워집니다. 오늘이 시스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란 뜻이죠. 그렇기에 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보상으로 유용성과 희귀성, 둘 다 보유한 스킬을 주십시오.’라고 해서 얻어낸 보상이야! 그 이후 스킬 추천은 내가 한 거고!”
“뭐? 방금 말, 무슨 뜻이야? 이해가 안 됐는데…?”
“으음… 역시 이 정도는 아웃인가… 아무튼! 그냥 받으면 돼!”
시스템 창이 사라지며 내 몸에 힘이 깃든다.
지금 시간은 해가 하늘에 뜬 낮.
굳이 스텟 창을 확인하지 않아도 몸 전체에 활력이 깃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력과 청력도 좀 더 좋아진 것 같아…’
안 그래도 좋은 눈에 스킬의 힘이 더해지자 눈앞이 더욱 선명해진다.
농담이 아니라 밤이 되어 오감이 조금만 더 강해지면, 눈을 감은 채 숨소리만 듣고서 사람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그래 봐야 멀지 않은 거리에서만 구분이 가능하겠지만.
“그런데… 탁기가 많이 쌓이면 어떻게 되는 거야?”
“음… 겉으로만 보면 당장 피부가 나빠지는 것이 끝이겠지만… 각종 잔병에 걸리기 쉬워지고, 탈모라는 병도 오고, 그… 큼큼! 서…성 기능도 불능이 되기도 하고… 엄청 많이 안 좋아!”
안젤리는 ‘성 기능’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귓불을 붉히며 헛기침을 해대었다.
평소의 나라면 그 귀여운 장면을 뇌 속에 담아두고자 했겠지만…
지금 나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다고?
탈모?
지금 탈모가 온다고 했나?
‘이런 미친. 이 스킬이 없었으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널 뻔했네.’
모든 판타지 세상을 뒤져보면 탈모약 하나쯤은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나는 그런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내 인생은 취향의 여자와 타락한 삶을 즐기기에도 짧은 것이다.
게다가 서지 않게 된다니,
차라리 나는 자살을 선택하겠다.
섹스 없는 삶이 삶인가?
“나는 스킬을 얻었으니까 괜찮은 거지? 괜찮은 거 맞지?!”
“어? 어어… 아마 찬영은 탈모와… …아무튼!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다행이다.
나는 이 스킬을 추천해 준 안젤리가 미치도록 고마워졌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보상으로는…”
“내가 보상으로 예상한 것이 단 하나 있는데, 그게 아직까지 안 나온 걸 보니 이것 같은데?”
“오! 정말? 뭘꺼 같아?? 맞춰 봐!”
“—— — - — — —. 맞지?“
“와! 대단해! 맞췄어! 어떻게??”
“기억은 지워지기 전부터, 내가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거든.”
내가 ‘테라포밍’ 소설 속에 들어가면서 쓸데없이 고생한 이유가 이것이 없어서다.
이런 일을 두 번 겪고 싶지는 않으니 당연한 요구다.
‘그보다 이런 건 처음부터 쓸 수 있게 해주지… 왜 괜히 막아둬서… 하긴, 그러니까 천사들도 이 요구를 합당하다고 여겨 수락한 것이겠지.’
지금 당장 성장에 보탬이 되는 보상은 전혀 아니지만, 다음 소설에 들어갔을 때 훨씬 편해진다.
그것만으로 이 보상을 얻을 가치가 충분했다.
* * *
스읍-
“후-”
리더의 어깨는 항상 무겁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조직이 위기에 처해 있을수록 왕관은 무거웠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괴물이 나도는 이계에 떨어진 모든 현대인을 책임지는 쉘터장이자,
다른 사람들이 친근감을 담아 부르는 ‘닥터’란 별명을 가진 중년의 사내가 도저히 금연을 하지 못하는 것은.
스읍-
매캐한 연기가 쉘터장의 폐를 채운다.
그리고, 깊은 숨결과 함께 내뿜어졌다.
“후우—”
수많은 남자들이 스스로의 몸을 깎아내리는 짓임을 알면서도,
또 돈이 그렇게 많이 드는 것을 알면서도 꿋꿋하게 담배를 입에 무는 이유가 무엇일까?
쉘터장은 그 이유를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스으읍——
“하아아——”
무언가를 어깨에 지닌 자일수록 한숨을 내뱉으면 안 된다.
한숨에 담긴 리더의 불안함이 짊어진 대상에게까지 전염이 되기 때문이다.
짊어진 자는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가장들에게 한숨은 금지되어 있다.
“으음…”
하지만 손에 담배가 들려있다면 다르다.
오른손에 든 담배 한 개비의 불이 떨어지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은…
남자들은 한숨을 쉬길 허가받는다.
그들은 한숨을 쉬는 것이 아닌, 담배를 태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수억 명의 애연가들이 자신의 부인, 자녀, 그리고 추종자들에게 이 사실을 숨겼다.
5년 전만 해도 쉘터장이 결코 알지 못했던 이 감춰진 진실을…
이제 마음속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스읍—
“콜록! 콜록콜록!”
오랜만에 입에 댄 담배라 그런지 숨이 턱 막혔다.
쉘터장의 눈은 끊기지 않는 기침 속에서도 결코 들고 있는 서류 뭉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서류 뭉치를 뒤로 넘기며 과거의 이력을 빠르게 흩어본다.
펄럭! 펄럭펄럭!
“저번 달, 100명. 저저번달, 100명. 작년, 100명. 100명. 100명 100명…”
턱!
다시 맨 처음으로.
“이번 달…… 101명.”
스읍——
“후우우…”
원인이 무엇일까?
이건…
무얼 의미하는 거지?
똑똑똑!
고요한 방의 적막을 깬 것은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였다.
쉘터장은 담배를 지져서 끄고, 양손으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표정을 풀었다.
그의 긴장이 누군가에게 전해지면 안 되었다.
리더는 어느 순간에도 굳건하게 버텨줘야 아랫사람들이 안심하니까.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목소리를 가다듬고 부드럽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끼이익…
“좋은 아침입니다. 쉘터장님.”
“닥터라고 부르라니까.”
“아, 닥터.”
“후후. 강요는 아니야. 편한 데로 부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방문자를 맞이한다.
쉘터장의 수족이 되어주는 비서 중 한 명이었다.
다행히 어색한 미소는 아니었는지 방문자 또한 쉘터장을 보며 마주 웃어주었다.
“어제 제게 시키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음… 결과는 어땠지? 역시 없었나?”
“아니요, 있었습니다. 단 한 번.”
뭐?
부드럽게 지어진 쉘터장의 미소가 당황으로 흔들렸다.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쉘터장은 비서에게 맡긴 일에 성과를 기대하지 않았다.
가능성이 너무나 낮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확인 절차로써, 큰 기대감을 갖지 않고 부탁 한 일이었다.
뜻밖에 주어진 실마리에 자동으로 눈이 크게 띄어진다.
“어,어디 줘 보게.”
쉘터장은 살짝 다급하게 비서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건네주는 서류를 받아 자세하게 살펴보니…
펄럭!
“7년 전… 101명…”
7년 전.
과거에도, 지구에서 이 세계로 전이한 사람들이 101명으로 기록된 흔적이 보였다.
마치 이번 달처럼.
* * *
“47초. 48초.”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왠지 오랜만에 본 것 같은 얼굴.
물론 전혀 반갑지 않다.
“53초. 54초.”
이미 지구에서 충분한 휴식은 물론, 간단한 준비 운동까지 꼼꼼히 마치며 몸을 긴장시키기까지 했다.
소설 속에 들어오자마자 지옥 같은 훈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했으니까.
“59초. 휴식 끝! 오호? 안색이 좋아졌군.”
“…착각 아닐까요?”
눈썰미 좋은 대머리 같으니라고.
그나저나 오늘이 며칠째지?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나흘째인가?
며칠 남지 않았다.
테라포밍의 첫 번째 주요 챕터가.
그때를 대비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카르마를 모아야 한다.
“휴식 시간 끝났다니까! 뭐 하고 있나! 어서 일어나지 않고!”
“넵!”
“좋아! 그럼 다음 종목은…”
* * *
- 드르러엉…
달과 별이 밝아 그리 어둡지만은 않은 밤.
나는 훈련하면서 나온 메세지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불러왔다.
[조건이 만족되었습니다.]
[신규 스텟, ‘마나’가 개방됩니다.]
[이제부터 타인의 상태창에서 마나 스텟 또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영향으로 마나가 1 늘어납니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나는 눈을 감은 채 명상을 시도했다.
정확히는 명상하면 떠오르는 좌선의 자세를 한 뒤, 숨을 규칙적으로 들이쉬고 내쉬었다.
“흐으읍! 후우우…”
최대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다시 내쉰다.
이 간단한 행동을 30분째 반복하였다.
- 드르렁…
“흐으읍!”
띠링!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영향으로 마나가 1 늘어납니다.]
‘드디어!’
살이 뒤룩뒤룩 찐 허벅지를 어떻게든 가부좌 틀기까지 성공했다.
그러나 이제 슬슬 다리의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기에, 내가 기다리던 시스템 메세지가 나오자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상태창.”
띠링!
* * *
[이름] 박찬영
[직업] -
[힘] 9 [민첩] 9
[체력] 6 → 7 [지능] 5
[기교] 1 [매력] -23 → -22
[마나] 0 → 2
[특성] 『자연치유』
보유 카르마: 4230
* * *
‘좋아!’
다시 눈을 감은 채 내면의 마나로 불리는 무언가를 느끼기 위해 집중했다.
이미 나의 소유하에 있어서 그럴까?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설탕 한 알 만큼 작고, 가벼운 양이었지만…
내게 있어 그 무엇보다 재미있는 장난감이었다.
이 티끌이 모이고 모이면 게임이나 영화처럼 마법을 쓰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
게다가 오늘 하루를 전부 훈련에 쏟아부었기에 체력 스텟도 하나 추가로 늘어났다.
테라포밍 세계의 시간 기준으로 오늘 늘어난 체력 스텟만 무려 두 개.
200 카르마를 아낀 것이다.
‘이쯤 되면 훈련도 할 만 한데?’
성장이 눈에 보이니 의욕이 솟는다.
상태창의 순기능이라 할 수 있겠다.
게다가…
5000 카르마 모으기가 내일이면 끝날 것이 확실해졌다.
부족한 카르마는 1000 카르마도 안되니 확신할 수 있었다.
- 드르러어엉…
내일이 기다려진다.
나는 코를 고는 브랙과 조금 떨어져 누워 잠을 청했다.
눈을 감자 잠이 몰려들었다.
…
“허…”
* * *
[이름] 박찬영
[직업] -
[힘] 9 [민첩] 9
[체력] 7 [지능] 5
[기교] 1 [매력] -22
[마나] 2 → 6
[특성] 『자연치유』
보유 카르마: 4230
* * *
“숨을 들이쉴 때 마나 늘어나는 거, 잠잘 때도 포함이었어?”
뭐 이런 개사기 스킬이 다 있지?
물론 불만 따윈 절대로 없다.
< 29화 >
점심 식사 이후.
점심밥보다 훨씬 달콤한 1시간의 휴식이 나를 반겼다.
굳이 식사 시간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지구로 귀환하면 마음껏 쉴 수 있지 않으냐고?
물론 그렇긴 하다.
하지만…
‘한번 나태함이 몸에 익숙해지면, 그걸 뜯어고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데…’
몇 년 전…
육체적인 힘겨움과 다른 의미의 시련이 떠오르며 온몸에 소름이라도 돋은 듯 떨린다.
그 경험을 한 번 더 하라고?
차라리 이 지옥 훈련 기간을 두배로 늘리겠다.
나에게 있어 나태란, 마치 한번 금연에 성공한 사람이 다시 담배를 입에 대는 것과 같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행동이다.
난 그 무서움을 알고 있기에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대곤 한다.
무엇보다 중간중간 너무 많은 휴식을 가지면 훈련이 안 된다.
피하지도 못할 훈련인데, 얻어가는 것이 하나라도 많으면 더 좋지 않겠는가?
너무 버티기 힘들 때만 지구로, 그것도 30분을 넘지 않을 정도로 짧은 휴식만 취하고 왔다.
단순히 신체가 지친 정도는 특성의 덕에 30분이면 전부 회복하고도 남으니까.
그 이상 쉬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나태함이다.
“상태창.”
띠링!
* * *
[이름] 박찬영
[직업] -
[힘] 9 [민첩] 9
[체력] 7 [지능] 5
[기교] 1 → 2[매력] -22
[마나] 6 → 7
[특성] 『자연치유』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 버프, 매력 제외 모든 스텟 +3 (00:00:04)
보유 카르마: 6,480
* * *
브랙은 나와 같은 훈련을 해놓고도 체력이 남아도는 것 같았다.
어제도, 그제도 그랬듯이 점심 식사 후 식후 운동 삼아 훈련소에 얼굴을 비추러 다녀온다고 했다.
그렇기에 상태창을 불러내는 것에 망설임은 없었다.
드디어 보유 카르마가 5,000을 넘겼다.
또한 5,000 카르마를 쓰더라도 돌발 상황을 대비할만한 여유분은 남아있다.
웬만한 사태는 ‘하급 포션’을 14개나 살 수 있을 정도의 카르마면 충분할 것이다.
하드모드 퀘스트를 해금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상점창을 조작했다.
* * *
[기능]
이름: 하드모드 퀘스트
레벨: -
효과: 높은 난이도의, 높은 보상을 가진 퀘스트가 랜덤으로 출현합니다.
상세: 노멀 퀘스트와 별개로 하드모드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하드모드 퀘스트는 클리어하는데 많은 시간, 노력, 행운이 필요합니다. 실패 또는 중도 포기 시 패널티가 있으나, 발생했을 때를 한정해 퀘스트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가격: 5,000카르마
[구매하기]
* * *
이제 와서 망설일 생각은 없었다.
곧바로 구매하기 버튼을 눌러 기능을 잠금 해제했다.
띠링!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이후, *HARD MODE* 퀘스트가 랜덤으로 출현합니다!]
내가 이 퀘스트를 망설이지 않고 해금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곧 발생할 이 소설의 첫 번째 챕터의 사건에서 반드시 한 개 이상의 하드 모드 퀘스트가 발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기 천사의 말로는 시스템에 AI가 있다고 했다.
내 주변에서 큰 사건이 생길 때야말로, 내게 하드 모드 퀘스트를 내주기 딱 좋은 조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 사건이 발생하기까지는 며칠이 남았다.
그 사이에 하드모드 퀘스트가 발생하면 좋겠지만, 그럴 확률은 낮겠지.
하지만 이런 나의 예상은 멋지게 빗나갔다.
띠링!
* * *
*HARD MODE*
[퀘스트]
내용: 총각 딱지 떼기.
상세:
상대가 이성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합의한 상대에게 순결을 바치세요!
동정(Virginity)을 버리세요!
(단, 강간의 경우는 서로 합의가 되지 않은 성관계이기 때문에 퀘스트가 클리어되지 않습니다.)
첫 번째 *HARD MODE* 퀘스트는 이 퀘스트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예외적으로 이 *HARD MODE* 퀘스트는 거부가 불가능합니다!
대신, 제한 시간과 패널티가 없죠!
보상: 영구적으로 일반 퀘스트 완료 보상 25% 증가.
제한 시간: 없음.
실패 조건: 없음.
실패 패널티: 클리어 전까지 이 퀘스트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포기 패널티: 이 퀘스트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 * *
[*HARD MODE* 퀘스트가 수락되었습니다!]
“이게 뭔…”
강제로 수락되는 퀘스트라고?
이런 시발.
내가 알기로는 퀘스트가 클리어되기 전까지, 그다음 퀘스트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즉, 나는 이 퀘스트를 챕터가 시작되기 전까지 클리어하지 못하면…
하드모드 퀘스트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하나 날리게 된다!
“젠장, 일단 퀘스트 내용부터 확인해야… 어?”
그런데 내용을 읽으니 상황이 심상치 않다.
단순히 누군가와 ‘섹스를 해라’라는 퀘스트 내용이면 성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다를 떼라니?
내겐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난 이미 아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육체적인 부분까지 모두.
“뭐야…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띠링!
[*HARD MODE* 퀘스트, ‘총각 딱지 떼기’ 클리어!]
[클리어 보상 ‘영구적으로 일반 퀘스트 완료 보상 25% 증가’를 획득하였습니다!]
“??…”
퀘스트가 스르륵 나오더니, 자기 혼자 수락해 버리고, 또 덥석 클리어가 완료되었다.
게다가 보상으로 던져 준 것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일반 퀘스트의 완료 보상을 25%나 증가 시켜 준다고?…
“허… 이미 5,000 카르마 값은 하고도 남았네…”
그런데 아무래도 좀 꺼림직하다.
난 이미 동정이 아니니 퀘스트가 자동으로 클리어가 된 것이 납득이 가기도 하면서,
동시에 버그 아닌가 하는 의심 또한 생긴다.
내가 이 시스템을 만든 천계가 그리 꼼꼼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의 인디 게임처럼 버그가 넘치는 것이 바로 이 시스템이다.
“천사야. 듣고 있어? 잠깐 나와봐.”
- and I↗ will always love you↗↗
“부르셨나요 찬영님??”
오직 내 귀에만 들리는 노래와 함께 등장한 아기 천사.
왠지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라 반가웠지만,
천사에게 빠르게 본론을 꺼내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거 문제 되지는 않아?”
“음… 괜찮을 것 같네요. 아마 시스템 AI가 클리어 처리한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다행이다.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오류가 생겼을 까봐 불안했었거든.
“그러고 보니 그 인수인계라는 건 거의 끝났어?”
“예!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요! 저도 곧 선배님과 함께 찬영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될 것 같아요!”
“으음… 그래?”
“…평소에는 표정 관리를 그렇게 잘하시면서, 왜 제가 간다니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표정을 지으시나요?…”
“네 착각이야.”
“씨잉… 선배님한테는 안 그러시면서 왜 저만…”
너를 놀리는 것이 재밌어서 그런다고 하면 화내겠지?
일부러 표정 연기까지 해 가며 놀리는 맛이 있다.
무엇보다 이렇게 놀리다가도 사과만 하면 쉽게 용서해 준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쓰레기 같네.
“찬영님은 좀 더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에 감사해야 해요! 저랑 선배님 같은 엘리트가 두 명이나 붙어서 케어해 주니까요!”
“뭐? 엘리트? 누구랑 누가?”
“저 말이에요!! 저! 저랑 선배님이요!”
그게… 맞는… 거야?…
나는 세계에 존재하면 안 되는 문장을 들은 것처럼 얼굴이 굳어졌다.
“…진심이야?”
“애초에 저랑 선배님이 일류가 아니었다면 시스템을 만드는 중요한 일을 상부에서 맡겼을 리가 없잖아요! 저랑 선배님은 천계에서 일 잘하기로 유명한 페어라고요!”
“음… 천국이란 의외로 극심한 인재난에 시달리고 있구나…”
“이이이익!!”
아기천사는 화를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아…
저걸 보고 있으니, 그만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더 놀려버리고 만다.
“첫날에 날 만났을 때 어리바리했던 것 기억 안 나? 넌 이미 그때 첫인상이 깊숙이 박혀 들어갔어.”
“그…그건… 그때 너무 정신 없었어서!… 미리 준비해 놓은 예상 리스트를 완벽히 벗어나는 몸을 바꿔주는 소원에,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서로 기억을 보충해 주되, 천계의 인권 법률에 접촉되지 않게끔 분류해서 넣어주고, 거기다 제 스케줄 상 원래 해야 하는 일까지…”
주절주절주절…
아기 천사는 당황해서 변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말을 끊지 않고 묵묵히 천사의 말을 들어주었다.
당황해서 허둥지둥 변명하는 모습이 꽤 흥미진진했기에.
“…그랬던 거라고요! 아시겠어요? 무…물론 그때의 제가 실수를 많이 한 것은 맞지만, 그건 평소의 제 모습이 아니에요!”
스스로를 엘리트라고 주장하는 아기 천사.
반박할 수 있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안젤리도 후배는 잔 실수가 잦다고 말했고…
무엇보다 내가 지금 이 녀석을 가지고 노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 그럼 앞으로는 일류다운 모습 보여줄 거야?”
“당연하죠!”
“좋아! 그럼 앞으로 실수가 나오면 전부 스스로가 책임지는 거지? 믿는다?”
“네! 맡겨만 주세요! ……어? 그건 좀 다른 이야기지 않나요?…”
좋아.
이걸로 앞으로 실수가 더 나오면 천계에서 보상은 보상대로 뜯고, 아기 천사에게 빚도 지울 수 있게 됐다.
엘리트 천사 만세다.
“으엥? 저기… 방금 한 말 뭔가 좀 이상하지…”
“잠깐잠깐, 나 물어볼게 있어.”
“어… 네… 물어보세요.”
물리기는 허락하지 않는다.
실제로 물어볼 것도 있긴 하고.
내게 있어서 나름 중요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천계에 올라갔을 때 여성 천사는 없고 죄다 남자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거야?”
“아하! 그거 말씀이시군요! 음… 찬영님은 직접 천계도 다녀오신 분이니 말씀드려도 괜찮…겠죠?”
“…그걸 나한테 물으면…”
크흠!
“제가 지난번에 아직 제게는 이름과 성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었잖아요? 하급 천사는 중급으로 승급할 때 자신의 이름과 성별을 직접 선택할 수 있어요.”
“너는 아직 하급 천사고, 안젤리는 중급 천사인 거야?”
“네! 선배님을 포함한 중급 이상의 천사들은 전부 자신의 이름과 성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에요.”
“뭐야. 그럼 다들 스스로 남자를 선택한 거? 왜 그렇게까지 성비가 불균등해져?”
사실 나도 남자로 살 건지, 여자로 살 건지 물어본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남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래야 여자랑 뒹굴 수 있으니까.
여자를 좋아하는 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가 여자가 되는 것은 기필코 사양하겠다.
“음… 남자와 달리 여자들은 그… …주기적으로 컨디션이 흐트러지잖아요? 그것도 며칠씩이나…”
“천사들도 월경이 있다는 뜻이야?”
“읏! 일부러 돌려 말한 건데! 한 번에 알아들으셨으면 되묻지 마세요!”
오.
이건 매우 흥미로운 정보다.
‘월경 같은 생리 현상이 있다는 건… 천사들도 성기가 있으며, 여성 천사의 경우 임신까지 가능하다는 뜻이군. …인간과 천사는 종족이 달라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물리적으로 천사와 섹스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중에 안젤리랑 좋은 관계가 된 뒤, 같은 침대에 누웠더니 ‘천사들은 성령으로 잉태해서 생식기가 없어!’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김칫국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지만…
“안젤리는 왜 성별을 여자로 결정 한 거야? 나야 안젤리가 여자인 것이 훨씬 좋지만, 그녀 스스로는 불편한 점이 많을 것 같은데.”
“선배님은 발키리가 되고 싶어 하거든요. 아! 발키리가 뭐냐면…”
“전투의 처녀들, 이었나?”
“맞아요! 신이 가진 가장 날카로운 칼날, 피를 마시고 자라는 전쟁터의 백색 꽃, 차원 변방을 둘러싼 뚫리지 않는 울타리 등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우는 숭고한 영혼들! 하아… 너무 멋있지 않나요?”
아기 천사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선망하듯 읊조렸다.
안젤리의 영향을 받아 발키리에 동경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음…
전투하는 ‘처녀’들이라…
설마 비처녀가 되면 발키리가 못 되는 건 아니겠지?
차마 이 의문을 아기 천사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속보일 테니까.
“너는 선배처럼 되기를 원해왔었지? 그럼 이미 성별을 정해놨겠네?”
“예! 저도 여성을 선택해서 선배와 같은 길을 걸을 거예요! 약속했거든요! 선배가 먼저 발키리가 된 뒤, 제가 뒤따라서 발키리가 되기로!”
오호라?
즉, 이 눈앞의 가지고 놀기 딱 좋은 천사가 나중에는 안젤리 같은 미인이 된다는 뜻인가?
< 30화 >
뭐, 그렇다고 한들 내가 아기 천사를 대하던 태도를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아기 천사가 중급 천사가 되기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중간에 여성이 되겠다는 결심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해봐. 응원할게.”
“…네? 아 네… 감사합니다?…”
“뭐야, 내가 순순히 응원해 주니까 이상해? 또 괴롭혀 줄까?”
“으악! 아니요! 괜찮아요! 그럼 의문은 전부 풀리신 것 같으니 전 가볼게요!”
- and I↗ will always love you↗↗
아기 천사는 도망치듯 내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좋아. 드디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왔군.’
며칠 뒤 발생하는 첫 번째 챕터의 주요 사건.
그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바로 훈련소 내부다.
나는 반드시 그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훈련소 안에 있어야 한다.
사실, 이번 챕터의 사건은 나로서는 엮이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다.
아무리 소설을 구석구석 읽어 봐도 내가 이득을 뽑아낼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드 모드 퀘스트만 없었다면!’
무려 첫 번째 퀘스트로 전체 일반 퀘스트 클리어 시 획득 카르마를 25%나 늘려주는 보상을 준 퀘스트다.
과연 본격적인 패널티가 달린 보상은 얼마나 대단할까?
하지만 위험하기 때문에 보상을 확인하지도 않고 기회를 놓치라고?
나는 그런 아까운 짓거리 못 한다.
일단 나오는 퀘스트부터 확인해 보고, 정 수지가 안 맞으면 깔끔하게 포기하면 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위 계획이 전부 실행되기 위해서는 훈련소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일시적으로라도 이 지옥 훈련을 중지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브랙의 설득이 필수겠지.
“젠장… 벌써 1시간이 지났나…”
멀리서부터 근육질의 대머리가 나에게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다시 훈련할 시간이다.
* * *
- 탁탁탁!
인간을 한 꺼풀 벗어난 각력으로 땅을 쭉쭉 밀며 나아간다.
‘흐음… 역시 2주일이나 얼굴을 비추지 않는 건… 너무 위험해.’
베넷 교관이 어떤 심정으로 악당의 역할을 맡는지 자신은 잘 알고 있다.
그녀에겐 항상 미안한 감정을 느낀다.
내게 뻔뻔한 연기를 할 수 있을 재능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마음이 여린 그녀에게 이런 역할을 떠넘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래서야 이제는 다신 볼 수 없는 친구를 마주할 면목이 없다.
‘이런 식으로라도 매일 훈련소에 얼굴을 비추는 수밖에 없겠어.’
훈련소에 가는 이유엔 남들에게 밝히지 못할 사정이 있다.
나는 주기적으로 난동을 피우는 베넷 교관을 말리고,
그녀로부터 훈련생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는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그녀가 한 노력이 전부 허사로 돌아가고 말겠지.’
내가 훈련소에 가지 않으면, 말릴 사람이 없는 베넷 교관은 날뛰지 못한다.
무려 2주 동안.
망각의 동물인 인간이 첫인상을 잊기에 충분하고도 넘치는 시간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훈련생들을 통제하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괜히 이런 골치 아픈 연극을 해대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나온 해답이 이것이다.
식후 운동이라는 핑계를 삼아, 매 점심시간마다 훈련소를 방문하는 것.
방금 전도 미리 합을 맞춰 놓은 연극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다음 난동을 부리는 날을 3일 뒤로 정했었나?’
- 탁탁탁!!
당연한 이야기지만…
베넷 교관은 매일같이 난동을 부리지는 않았다.
주로 2~3일에 한 번의 주기로 그녀가 난동을 부렸고,
내가 말리는 것을 반복했다.
난동이 예정된 일자는 3일 뒤다.
그러나 나는 내일도 모레도 훈련소에 얼굴을 비출 것이다.
훈련생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다.
평소에는 전혀 안 보이다가 베넷 교관이 난동을 부릴 때만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서 말리는 모습만 보여준다면…
눈치 빠른 사람은 이상한 점이 있음을 손쉽게 알아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난동을 부리지 않는 날에도 꾸준히 훈련소에 얼굴을 비춰야 하는 것이다.
- 탁탁탁… 탁!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박찬영 훈련생! 몸을 풀게! 곧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하아… 네엡…”
나는 도착하자마자 나를 기다린 훈련생에게 말했다.
고작 1시간의 휴식이다.
그러나 마나 각성을 하며 특수한 능력을 손에 넣은 그는 그것만으로 오전의 피로를 전부 날려버린 듯 활기가 차 있었다.
도무지 부러움을 감출 수 없는 훈련에 특화된 신체다.
‘그뿐만이 아니지…’
이 훈련생을 처음 봤을 때.
그를 훈련시키는 일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의 신체만 보아도 얼마나 나태한 삶을 살아왔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기에.
그러나 이 훈련생은 말만 저리 퉁명스레 할 뿐,
정작 훈련에 들어가면 묵묵히 나의 지시에 최선을 다해 따라와 주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수백 명을 훈련 시키면서도 보지 못했던, 깜짝 놀랄 정도로 강력한 정신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훈련생이다.
“좋아! 그럼 첫 번째 훈련은…”
…
“저도 훈련소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은 갑작스러웠다.
오후의 훈련까지도 무사히 마친 뒤.
훈련생이 저녁을 먹으며 꺼낸 말은 나를 약간 당황시켰다.
“…어째서지?”
“어째서냐고 하시면… 설마 저를 2주 동안 훈련소에 접근도 못 하게 하실 생각이셨습니까?”
으음…
내가 점심때마다 훈련소에 다녀온 것이 부러웠나?
그도 훈련소 안에서 친해진 친구가 있을 테고…
딱히 박찬영 훈련생을 훈련소에 데려가더라도 안될 것은 없다.
다만, 문제 되는 것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데리고 가지 않았을 뿐.
“…자네는 나와 달리 다리가 느려. 왕복에 2시간이 걸릴 테지. 그럼 그날 훈련은 일정대로 진행하기 힘들 텐데?”
“그건…”
“설마 이곳에 올 때처럼 자신을 업고 가달라는 것은 아니겠지? 음… 아무래도 같은 남자를 두 번이나 그런 식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꺼려지는군…”
부상자를 이송하는 것이면 또 모른다.
그러나 굳이 업어 가면서까지 그를 훈련소에 데려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자네를 데리고 갈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으면 고민해 보겠네. 단,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처럼 어린애 같은 사유는 당연히 안 되겠지.”
“…전투 조는 모두 팀 단위로 활동하고 있죠?”
“음? 아직 그 이야기는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서 들었지?”
“광년이 교관님한테서요. 첫날 그분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곳에서는 눈치가 없으면 ‘팀’ 전체가 몰살된다고.”
“…확실히 그랬던 것 같군.”
“그 말을 대충 짜 맞췄습니다. 다행히 예상이 맞았네요. 뭐… 생각해 보면 괴물을 상대할 때, 팀 단위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요.”
첫날, 이 세계에 떨어져 혼란스러웠을 상황에서 스치듯 들은 말 한마디를 잡아챈 다라…
그저 우연일 뿐인가?
그 스스로도 말하길 끼워 맞춘 거라고 하기도 했고…
일단 그의 말을 더 들어보기로 했다.
“아무튼. 전투조 대부분이 팀으로 움직인다면, 당연히 훈련소에서도 팀 단위 훈련이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정확하다. 기초 체력 단련이 어느 정도 완료되면, 본격적인 팀 단위 훈련이 시작되지. 한데 그것이 왜?”
“이대로 가면 저는 정상적으로 팀 단위 훈련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뭐?”
나는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고민을 했다.
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어째서 그런 판단이 나온 것이지?
나는 곧 그 해답을 훈련생의 입에서 들을 수 있었다.
“훈련소에 남아있는 훈련생들은 제가 없는 2주간 서로 얼굴을 익히고, 고된 훈련을 함께하며,”
“동료애가 생기겠지. 애초에 훈련의 강도가 높은 이유 중 하나가 동료애를 키우기 위해서니…”
“맞습니다. 전부 서로를 어느정도 믿을 수 있는 아군이라고 여길 겁니다. 50여 명 중 저만을 제외하고요.”
“…”
“물론 시간이 지나면 저와 훈련생들 사이의 어색한 기류는 사라지겠지만… 팀 훈련에서 제가 속한 팀에 민폐가 되겠죠. 대비할 수 있다면, 대비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낭비 될 시간을 줄이는 것을.”
“음…”
“서로 부대끼며 훈련은 하지 못하더라도, 얼굴만 익혀둘 수 있으면… 앞서 말한 부작용은 훨씬 덜해질 것입니다.”
…
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다.
여태껏 이런 식으로 따로 훈련생을 불러내어 개인 훈련을 진행한 적이 없었으니 당연하다.
‘하아… 아직도 난 부족하구나… 교관이란 놈이 훈련생에게 훈련 관련 내용 수읽기에 뒤지다니…’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베넷 교관이 첫날에 흘린 말을 잡아챈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훈련생은 겉보기와는 전혀 다르다.
나태한 듯 보이나 실은 성실하고,
해이한 듯 보이나 실은 독기 있고,
어리석어 보이나 실은 현명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런 성격으로 이렇게 관리가 되지 않은 몸이 되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저… 교관님? 제 말에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까? 어째서 대답을…”
“아. 미안하군. 잠깐 넋 놓고 있었다. 그래. 자네의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훈련소에 갈 때 자네를 데리고 가도록 하지.”
씨익.
훈련생이 미소 지었다.
* * *
“후우…”
지구에서 복습 삼아 소설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왔다.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3일 뒤.
정말 다행히도 내가 훈련소에 있을 수 있는 점심 시간대다.
행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이 딱딱 들어맞는 아귀였다.
‘젠장… 허리 아파라…’
나라고 브랙에게 업혀서 가는 것이 좋을 리가 없다.
남자와 살을 맞댄 채 격렬하게 움직이라니?
평소의 나라면 죽어라 거절했을 것이다.
승차감 또한 최악이다.
브랙의 몸은 성벽처럼 단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겨내었다.
모든 것은 하드 모드 퀘스트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했는데, 내 정성을 봐서라도 꿀 같은 퀘스트 좀 내줬으면 좋겠다.
“찬영씨!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예 뭐… 똑같죠. 힘들게 훈련하고, 곯아떨어지고…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더라고요. 어? 키가 조금 크신 것 같은데요? …착각인가?”
이야.
얘 눈썰미 엄청 좋네?
내가 약으로 인해 한 달에 걸쳐 14cm가 커지니, 하루에 0.5cm씩 자란다.
지구와 테라포밍 속에서 보낸 시간을 대략 합쳐보면 6일쯤 되니 3cm 안팎으로 자랐을 것이 분명하다.
그걸 감으로 눈치채다니, 정말 주인공답다고 해야 할지…
“하하! 그런가요? 사실 제가 어렸을 때 한약을 잘못 먹었거든요. 이렇게 공기 좋은 곳에 오니 몸 안에 있던 독기가 빠져나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아하! 과연…”
앞으로 키가 급격하게 커지더라도 의심받지 않을 만한 떡밥도 좀 뿌려두기로 했다.
단순히 한약의 탓으로 하기에는 아주아주 빠른 급성장을 할 예정이지만,
뭐 어떤가?
내가 내 입으로 한약이 원인이라고 했고, 실제로 키가 자란 것을 눈으로 보았는데.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강인과 잡담을 하며 점심시간을 보내고.
나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드는 광년이를 이를 갈며 노려보고.
저녁에 훈련하며 퀘스트를 깨고.
다음날이 되고,
또 다음날이 되고,
마침내 사건 당일의 아침이 밝았다.
< 31화 >
지구에서 보낸 시간은 소설 내용을 복습하거나, 훈련할 때 잠깐 쉬기 위해서만 사용했기에 아직 일요일 저녁이다.
내가 겪은 일수는 며칠이나 지났지만, 지구의 기준으론 청소 업체 직원이 온 당일의 저녁이란 뜻이다.
“상태창.”
띠링!
* * *
[이름] 박찬영
[직업] -
[힘] 9 → 10 [민첩] 9 → 10
[체력] 7 → 8 [지능] 5
[기교] 2 → 5 [매력] -22 → -21
[마나] 7 → 29
[특성] 『자연치유』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 버프, 매력 제외 모든 스텟 +3 (00:00:05)
보유 카르마: 8,355
* * *
스텟은 전부 훈련으로 인해 상승한 것이다.
카르마는 사용하지 않고 모아두었다.
퀘스트 보상이 무려 25%나 늘어난 덕에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양의 카르마가 모였다.
내가 며칠간 지내면서 깨달은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알려주겠다.
스킬,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영향으로 일정 주기마다 마나가 늘어나는 효과.
단 한 번이지만, 이 효과가 지구에서도 발동되는 것을 확인했다.
소설 속 세상이 아니라, 지구에도 마나가 있다는 뜻이다.
‘물론 소설 속 세상에 비하면 확연히 느린 속도로 오르는 것 같았지만…’
세계마다 공기 중에 흩어진 마나의 농도가 다른 걸까?
내게는 좋은 이야기다.
테라포밍 보다 마나가 풍부한 세계로 간다면 이 스킬의 효과가 더욱 뛰어난 효율을 보인다는 뜻이니까.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
너무 좋은 스킬이다.
정말로 말도 안 될 정도로 좋은 스킬이기에, 나는 지금 고뇌에 휩싸여 있다.
차라리 조금만 덜 좋았더라면 이렇게 밤낮으로 고민할 일은 없었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무얼 이리 고뇌하고 있느냐면…
바로 모아둔 카르마의 사용처다.
아이템은 쓸만한 게 없었다.
대부분이 현대에서 사용할 법한 편의 위주의 일상생활용품들이다.
스킬 또한 살만한 것이 없었다.
합기도나 검도, 무에타이 같은 지구에도 존재하는 무술은 있었지만…
‘고작 0레벨, 1레벨 스킬이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기에 내게 좁혀진 선택지는 단 두 가지가 남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모두 매력적이라서 지금까지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다.
첫 번째.
모든 카르마를 스텟의 상승에 쏟아붓는다.
띠링!
* * *
[체력]
8 → 9
[필요 카르마] 100
* * *
[취소되었습니다.]
* * *
[힘]
10 → 11
[필요 카르마] 300
* * *
[취소되었습니다.]
예상대로 스텟의 십의 자릿수가 변하자, 필요한 카르마 양이 늘었다.
무려 3배로.
그렇다고 한들 8,000이 넘는 카르마는 충분할 정도로 많다.
카르마를 전부 스텟을 올리는 데 사용하게 되면 20까지 올릴 수 있는 스텟이 2개나 된다.
20의 스텟이면 어느 정도 일까?
광년이와 브랙의 스텟 평균이 30을 웃도는 것으로 기억하니까…
막 훈련소를 수료하고, 몬스터와 싸울 자격을 얻는 전투직의 스텟과 비슷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부족해. 적은 최소한 교관급 스텟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두 번째.
“…”
띠링!
* * *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
1Lv → 2Lv
[필요 카르마] 8,132
* * *
스킬의 레벨을 올린다.
그런데 왜 필요 카르마 양이 딱 떨어지지 않고 애매한 값이냐고?
그건 바로 스킬의 숙련도 때문인 것 같다.
처음 스킬 레벨을 올리는데 필요한 값을 확인했을 때 9,400 카르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날이 지날수록 점점 가격이 내려가더니, 지금은 8,000대까지 떨어졌다.
아마 처음엔 1만 카르마로 시작해, 숙련도가 쌓이며 가격이 내려갔나보다.
스킬 창에서는 숙련도를 표시해 주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레벨업 가격을 보며 숙련도가 어느 정도 쌓여 있는지 유추가 가능했다.
숙련도가 100% 전부 차면 자동으로 레벨업 될지는 미지수지만…
다시 본론으로.
스킬 레벨을 올렸을 때, 증가 수치를 확인할 수 있다면 확실히 비교해 본 뒤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이건 안 보여주냐고…”
아쉽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 당장 무력의 증가량을 비교해 보면 스텟을 올리는 것이 압도적으로 높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다르다.
마나를 흡수하는 능력이 강해지면 좋은 것은 물론이고…
‘스텟이 낮으면 낮을수록 훈련으로 스텟이 올라갈 확률이 높겠지.”
10의 스텟을 훈련으로만 11로 올리는 것이, 20을 21로 올리는 것보다 훨씬 쉬울 게 분명했다.
“젠장…”
더는 고민할 시간이 없다.
사건은 곧 발생하고, 그 전에 이 카르마를 미리 써놔야 한다.
급박히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여유롭게 카르마를 사용하고 있을 틈은 없을 테니까.
…사실, 내 취향으로 따지자면 이미 정해져 있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한다면 무조건 후반 빌드를.
인기 AOS 게임을 한다면 무조건 극 후반용 영웅을.
RPG 게임의 스킬 포인트 분배는 무조건 후반에 좋은 퍼센트 증가 패시브에.
배를 째다가 죽는 상황이 나오더라도 일단 째고 보는 것이 나라는 인간이었다.
초반에 탄탄한 기반을 만들어 놓으면 얼마나 거대하게 돌아오는지 똑똑히 알기 때문에, 더욱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배를 쨌기 때문에 당하는 손해를, 남들보다 훨씬 덜 볼 자신이 있기에 하는 선택이기도 하다.
나의 마음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었다.
“…”
띠링!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레벨이 2가 되었습니다!]
* * *
[스킬 이름]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
[레벨] 2 Lv
[속성] 복합
[타입] Passive
[상세]
숨을 내쉬는 것으로 짧은 시간 동안 신체 능력을 강화합니다. (매력을 제외한 모든 스텟 5초간 +3)
또한 몸속의 탁기를 빼냅니다.
해가 떠 있으면 이 효과가 2배로 증폭됩니다.
숨을 들이쉬는 것으로 자연에 존재하는 기를 흡수 합니다. (Lv 2)
또한 오감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달이 떠 있으면 이 효과가 2배로 증폭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
* * *
보유 카르마가 줄어 200가량밖에 남지 않았다.
고작 하급 회복 포션을 2개밖에 사지 못하는 금액.
약간 불안하긴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이제는 낮 한정으로 모든 스텟이 6 올라간 효과를 받는다.
전체스텟 증가가 3에서 6으로 변경이라…
이 정도면 카르마를 스텟에 쏟아부은 것과 극심하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8,000 카르마를 쏟아부을 가치가 충분한 스킬이었다.
“이걸로… 준비는 됐다.”
* * *
소설 테라포밍의 첫 번째 주요 시나리오.
그건 바로 반군의 훈련소 습격 사건이다.
현 쉘터의 지휘 방침에 많은 불만을 가지고 쉘터를 탈주한 자들.
그들이 모여 이곳을 습격한다.
가장 무서운 점은, 탈주자 대부분이 전투직이란 것이다.
원작을 읽었기에 나는 전말을 대충 알고 있다.
오래전.
한 훈련소의 교관이 가르치던, 가르쳤던 대부분의 훈련생을 이끌고 대규모 탈주를 감행했다.
그 와중에 주동자였던 교관은 사살되었지만…
그가 교육했던 훈련생들은 한데 뭉쳐 반군의 불씨가 되었고, 현재까지 쉘터를 위협하는 무리가 되었다.
탈주자 대다수가 전투직이었기에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주거지를 만드는 것은 손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는 단점이 있다.
‘바로 인력이 뼈저리게 부족하다는 것.’
그들도 매일같이 몬스터와 싸우니 사망자가 넘쳐난다.
그러나 우리와 다르게 그들은 줄어드는 전투직을 보충할 수 없었다.
지구에서 이곳으로 전이되는 사람들이 소환되는 장소는 바로 쉘터의 내부.
중앙 지휘소의 주변에서 소환되었으니까.
내가 처음 소환되었을 때를 떠올려 보자.
그곳 주변에 건물은 없었지만, 얼마 걷지 않아 중앙지휘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 지휘소에서 훈련소까지 몇 시간을 걸어야 했고.
소환 장소는 쉘터의 내부인 것이다.
‘원작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주변을 공터로만 만들어 두고 건물을 세우지 않은 이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
차원 이동이 어떠한 원리로 진행되는 것인지 모르는 만큼, 도저히 전이 장소에 물건을 둘 수 없는 것이다.
오래된 판타지 소설에서도 많이 나오지 않았던가?
순간이동 좌표에 물건이나 벽이 있으면, 공간에 복수의 물질이 겹쳐 산산조각 나버린다는 내용이.
인간이 산산조각 나는지, 나지 않는지 시험할 수도 없었기에 그냥 빈 공터로만 놔두었을 것이다.
소환되기까지 근처에도 오지 않다가,
소환이 된 것을 확신한 뒤에야 우리에게 다가온 브랙들을 기억해 내면 간단히 유추할 수 있다.
어쨌든.
반군의 습격 목적은 우리를 납치하는 것이다.
쉽게 납치가 가능한 쉘터 외곽에 있는 주민들은 전부 노인 아니면 어린애.
전부 짐이나 다름없어 납치할 가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사지 멀쩡하고, 반항하지 못할 정도로 약하며, 젊다.
주기적으로 사상 세뇌만 해준다면 전투직으로 써먹기 딱 좋은 먹잇감.
그것이 그들이 바라보는 우리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급한 것은 전투직이 아닌, 의사나 건축가 같은 전문직이겠지만…
‘그들은 쉘터 중심에 엄중한 보호를 받으며 지켜지고 있지.’
제정신이 아니면 이 넓은 쉘터의 중심까지 습격해올 리 없다.
곧 있을 습격의 희생자는…
원작에선 주인공의 활약으로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교관급 무력의 인물들이 여럿 오기 때문에 실종자는 다수 발생한다.
원래는 그들을 막아낸다고 내게 이득이 없었기에 그들이 습격할 때 피해 있을 예정이었으나, 처음 받은 하드모드 퀘스트의 보상을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게다가 조금 친해진 블랑이, 원작에서는 이름 모를 엑스트라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하루 룸메이트를 하며 친해진 이들이 납치를 당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내 목숨까지 걸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하기도 그랬다.
‘일단 돌아가는 상황의 위급함 정도를 직접 봐야 판단할 수 있어.’
“으아아악!! 제발!”
“낄낄낄! 왜? 싫어?”
“으으!!…”
멀리서 광년이가 지랄을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또한 그녀에게 희생당하는 훈련생의 고통에 찬 목소리도.
어제랑 엊그제 점심시간에는 잠잠하길래 좀 변했나 했더니…
역시는 역시였다.
그러나 나는 몸을 긴장시켰다.
광년이가 지랄을 시작했다는 것은, 몇 분 지나지 않아 반군들이 습격해 온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럴 때 혼자 행동하는 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놈들에게 납치당하기 딱 좋은 상황일 테니.
탁탁탁!
나는 빠르게 다리를 놀려 소리가 난 장소로 이동했다.
“싫어? 싫냐고. 엉?”
“죄…죄송합니다…”
도착하니 훈련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바닥에 배를 대고 쓰러진 훈련생과 그의 등 위에 두 발을 올려 쪼그려 앉아 있는 광년이였다.
“뒷담을 까는 건 좋아. 까는 건 좋은데, 들키지를 말았어야지 이새끼야.”
“다…다신 안하겠…”
광년이 손아귀에는 뒤로 꺾인 훈련생의 손목이 잡혀 있었다.
광년이가 살짝 손에 힘을 주자…
“끄아악! 아파요! 부러…부러져요!!”
“새끼 아직 아프지도 않을 텐데 엄살은…”
- 윽! 으윽!
아마 이 훈련생은 뒷담을 하다가 걸린 것 같다.
쯧쯧…
광년이 말이 맞다.
뒷담을 하더라도, 걸리질 말았어야지.
초인적인 그녀의 청력을 벗어나 뒷담이 가능한지는 논외로 하고.
그때였다.
띠링!
효과음과 함께 하드모드 퀘스트가 발생했다.
< 32화 >
* * *
*HARD MODE*
[퀘스트]
내용: 인명 피해 저지.
상세:
곧 훈련소 안으로 의문의 습격자들이 쳐들어옵니다!
그들의 목표는 훈련생들입니다!
습격자들이 훈련생들을 납치하지 못하게끔 지키세요!
그들은 강력합니다.
맞서 싸울 생각은 하지 마시고, 지원군이 올 때까지 최대한 도망 다니세요!
어쩔 수 없이 맞서 싸워야 한다면…
행운을 빌겠습니다.
보상: 스킬, 천권일각(千拳一脚) Lv0 [Active] [물리]
제한 시간: 습격자들 전부 제압되거나, 쉘터 밖으로 나갈 때까지.
실패 조건: 사망자 발생. 혹은, 훈련생이 쉘터의 밖까지 납치.
실패 패널티: 다음으로 클리어하는 일반 퀘스트 보상 4번이 0 카르마가 됨.
포기 패널티: 다음으로 클리어하는 일반 퀘스트 보상 2번이 0 카르마가 됨.
* * *
[’인명 피해 저지’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쳇…
사실, 나는 실패 패널티가 ‘보유한 카르마 중, XX를 깎습니다.’ 이런류로 나올 걸 예상했었다.
그래서 일부로 카르마를 한계까지 사용하며, 패널티를 꼼수로 피해 보려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미래에 받을 보상을 줄인다니…
‘젠장. 시스템에 AI가 있다는 말… 정말이네.’
아쉽게 나의 작은 노림수는 실패로 돌아갔다.
퀘스트의 내용은 간단하다.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게 막으라는 것이다.
‘난이도는… 애매하다.’
만약 습격자와 맞서 싸우라고 했다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적과 나의 스텟의 차이는 아무리 좋게 봐줘야 2~3배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도망치는 것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원작에선 주인공이 아슬아슬한 차이로 지키기 실패했기 때문이다.
내가 있다면 충분히 막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보상은?
천권일각?
상세 스킬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만 보면 전투와 관련된 스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주 높은 확률로, ‘마나’를 매개체로 하는 무술일 것이다.
‘하 씨발… 고민하게 만드네…’
내가 앞으로 전투 관련 스킬을 얻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적어도 이 테라포밍을 완결 짓고,
또 다음 소설을 완결 지어서야 상점 창에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나올 것이다.
그럼 늦어도 너무 늦는다.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덕으로 마나를 얻으면 뭐 하나.
결국 쓸 수 있는 건 단순한 신체 강화와 목소리에 주목도를 올리는 정도인데.
이런 무식한 사용법은 현대 문명으로 치면, 전기를 그저 사람 지지는 곳에만 사용하는 꼴이다.
잘만 사용하면 빛부터 시작해 통신, 기계 자동화 등등 기술만 있다면 수많은 상상을 실현 시키는 전기인데…
지금 내게는 마나를 이용할 ‘기술’이 없다.
마나의 사용법을 연구하고, 몇 대에 걸쳐 그 실효성을 몸으로 시험하며 발전시킨 제대로 된 무술은…
무식하게 마나를 신체에 때려 박는 것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력의 효율이 높을 것이 뻔했다.
‘해보자. 죽지는 않을 테고, 실패하더라도 손해는 고작 1,000 카르마도 안되니…’
[*HARD MODE* 퀘스트가 수락되었습니다!]
“이봐. 이제 슬슬 그만하는 게 어떤가.”
“이 새끼가 기어오르려고 하잖아.”
“끄으으윽!”
어느샌가 브랙이 나와 광년이를 말리고 있었다.
“잘못했을까요? 안 했을 까요?”
“끄으윽… 잘못…했…”
“다시는 그럴 거예요? 안 그럴 거…… 젠장!”
“안그…안 그러겠습니… 어?”
“…씨발. 브랙?”
“맞는 것 같군…”
갑자기 광년이가 괴롭히던 훈련생을 놓아주었다.
그의 등을 밟고 있던 발을 땅으로 옮겨 몸을 바르게 세웠다.
‘시작인가?’
습격자가 왔다.
* * *
"…씨발. 브랙?”
크리스의 목소리에 긴장이 담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감각이 맞다면 지금 상황은 전혀 웃을 수 없었으니까.
“맞는 것 같군…”
브랙이 그녀의 생각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차라리 부정을 해줬으면 좋았겠지만…
넷?
아니, 다섯.
놈들은 자신의 기세를 숨길 의지조차 보이지 않고 걸어오고 있었다.
‘개새끼들이. 기습인 주제에 당당한 척을 하고 앉아있어?’
크리스는 생각했다.
겉보기 이쁜 거 존나게 좋아하는 놈들답다고.
그녀에겐 다행인 이야기다.
적어도 조금이나마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으니까.
- 흐읍!
숨을 크게 한번들이 쉰 후,
“토오옴!! 놈들이다!! 달려!!”
거대한 소리와 함께 내뱉었다.
탁탁탁탁!!
크리스가 부른 ‘톰’이란 사내는 훈련소 내부의 직원 중 가장 막내인 아이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훈련소 밖을 빠져나가는 소리만이 예민한 그녀의 귀에 들려 왔을 뿐이다.
마나가 담긴 크리스의 목소리는 훈련소 전체에 퍼졌고, 톰 역시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톰은 재빠르다.
몇 년 전, 그가 마나 각성을 하면서 얻은 이능 때문이다.
단순히 달리기를 빠르게 만들어 주는 정도지만, 지금은 그 능력은 어느 때보다 유용했다.
톰은 곧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의 12구역 전투직 합숙소에 도착할 테고, 소식을 접한 지원군은 초인의 이동 속도로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리라.
크리스는 놈들의 목표를 알고 있다.
훈련생들.
그녀는 훈련생을 우선적으로 대피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정말 엄청난 행운이지만, 오늘 그녀가 벌인 난동 때문에 훈련생들 전부가 이곳에 모여있었다.
게다가 같은 교관인 브랙까지 이곳에 있었다.
‘…생각해 보니 좆 될 뻔했잖아?’
식은땀이 크리스의 등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우연찮게 브랙이 훈련소 내부에 있어 준 것을 진심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만약 브랙이 개인 훈련 때문에 자리를 비웠더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행운이 겹쳤어. 더 이상의 행운을 기대해선 안 되겠지… 우선 병아리들을 대피시켜야 한다.’
그녀와 브랙이 빠질 수는 없었다.
둘이서 습격자들의 발을 묶어야 하니까.
이끄는 자를 지목해줘야 한다.
크리스는 빠르게 머릿속에 넣은 훈련생들의 프로필을 떠올렸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훈련생들을 통솔할만한 인물이 누가 있지?
‘시발…’
내키지 않았지만, 최근 가장 두각을 보이는 훈련생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가 살펴본 그는 평소에 원인 모를 침착함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야! 이강…”
“박찬영 훈련생! 훈련생들을 이끌고 대피하게! 습격이야!”
“예! 알겠습니다!”
‘브랙?’
크리스는 브랙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화들짝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저 이름은 그녀와 브랙이 너무나 잘 아는 이름이다.
‘아.’
0.3초도 안 되는 찰나의 시간.
크리스는 스스로가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이곳에는 박찬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잊고 있었다는 것이 우스웠다.
그녀와 배를 맞댄 적이 있는 박찬영.
그를 보고 있자니 이유 있는 강렬한 죄책감이 크리스를 괴롭혔기에, 일부러 눈앞에서 잠시 떼어 놨다.
브랙에게 훈련 계획서를 전달 함으로써.
브랙의 입에서 박찬영의 이름이 호명된 것은 크리스로선 의외인 일이다.
첫날과 둘째 날.
입이 닳도록 칭찬해댄 이강인 대신에 나온 이름 하필 박찬영이라니?
며칠간 훈련을 하면서 이름을 부르는 게 익숙해졌기 때문인 걸까?
그렇다면 브랙의 판단 실수리라.
크리스의 마음에는 안 들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이강인이란 훈련생은…
‘패닉에 빠진 평범한 병아리’보다 괜찮은 판단을 내릴 테니까.
그녀는 공적인 일과 사적인 감정을 분리 할 수 있었다.
크리스는 브랙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표정을 보고는 살짝 놀랐다.
표정을 보니 잘못 호명한 것은 아니었다.
브랙은 자신이 지목한 박찬영을 단단히 믿고 있었다.
‘뭐야. 도대체 훈련을 하는 며칠간, 뭘 봤길래 저리 확신에 차 있는 거야?’
크리스는 의문을 풀 시간은 없었기에 브랙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이미 훈련생들은 박찬영의 주도하에 도망가고 있었다.
확실히 패닉에 빠진 평범한 병아리는 아닌 것 같다.
‘후… 슬슬 보이네.’
…
멀리서 놈들의 인상착의가 보이기 시작했다.
“제라드… 저 씹새끼가 직접 오다니… 제정신이 아닌 건가?”
“…안 좋아… 놈을 잡을 기회지만, 우리의 목숨이 우선이다. 최대한 장기전으로 끌어 봐야겠군…”
“당연하지. 버티기만 하자고.”
터벅터벅
현재 반군의 총통 제라드.
거대한 곰 가죽을 통째로 뒤집어쓴 그가 북부 훈련소에 도착했다.
크리스는 입을 열었다.
“사람이 없긴 없나 봐? 기습에 고작 다섯인 걸 보면.”
비죽대며 웃음을 흘렸다.
두 명과 다섯 명.
어느 쪽이 유리한지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그러나 상대는 우리가 2명이 전부인지, 아니면 훈련소 내부에 교관이 더 있는지 모른다.
허세는 기본으로 깔고 가야 한다.
“다섯이면 충분하지. 이곳에 전투직은 너랑 브랙, 두 명밖에 없잖아?”
‘젠장…’
크리스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미간을 좁혔다.
어째서인지 이곳의 정보가 이미 놈들에게 밝혀져 있었다.
정찰 당한 건가?
허세에서 도발로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그쪽 구역 몬스터는 아주 행복하겠어? 매번 배를 불려 주는 고깃덩어리가 친절하게 배달까지 가고… 아주 살 맛 나지 않을까?”
“프흐… 어설픈 도발은 집어치워.”
대화를 길게 끌고 가면 끌고 갈수록 좋겠지만, 상대는 그 정도까지 멍청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도발해야 한다.
“투항해라. 투항한 뒤, 우리와 뜻을 함께해라. 어째서 더 커다란 행복을 마다하는지 모르겠군.”
“아직도 그 병신 같은 컨셉 밀고 있는 거야? 아! 설마 그 쓰레기 같은 사상 속 보호해야 할 ‘주민’이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였어? 이제야 이해가 가네! 뒈져나가는 네 동료보다 몬스터가 훨씬 더 행복한 꼴을 보아하니.”
“…나를 욕하는 건 참겠으나, 우리의 철학까지 모욕하는 것은 못 봐주겠군.”
- 으드득…
미친년을 연기하며 누군가를 도발하는 실력은 엄청난 경지에 닿은 크리스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이번에도 도발이 확실하게 먹혀들어 갔다.
제라드는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크리스에겐 희소식이다.
타앗!
한껏 움츠린 그의 몸체가 폭발하듯 크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탁탁탁!
훈련생들은 상황이 심상치 않게 굴러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습격’이라는 단어가 똑똑히 들려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모두 한마음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내가 향하는 방향은 건물의 안이었다.
원작에서는 이강인이 이들을 이끌었지만, 어째선지 브랙이 직접 나를 지목했다.
“계획은! 있습니까?”
이강인이 내게 따라붙으며 물어왔다.
그의 얼굴을 보니 내가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면 억지로라도 지휘권을 가져가려는 듯 보였다.
“일단 무장부터 해야겠죠. 저희는 무기를 써본 적은 없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강인씨… 무기고가 있는 곳. 어딥니까?”
나는 무기고가 있다는 것만 알지, 정작 어디에 위치해 있는 지 모른다.
각 방의 위치마저 세세히 묘사하는 소설은 없지 않던가?
하지만 주인공은 알고 있다.
그는 이 훈련소에서 3개월 이상 직접 생활해 본 회귀자니까.
“…제가 왜 그것을 알 것이라 생각했죠?”
거 급한데 그런 건 좀 넘어가지.
회귀에 대해 민감한 건 알겠는데, 상황 좀 가리자.
“강인씨는 교관들의 주목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훈련소의 구조에 대해 귀띔을 들었다든지, 질 좋은 무기를 선점하면서 무기고의 위치를 파악 했을 거라 생각했죠. 모른다니 어쩔 수 없군요. 아직 남아있는 직원을 찾아서 물어보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앞장서죠.”
탁탁탁!
이제라도 나서주니 다행이다.
나와 훈련생 무리는 이강인을 따라 건물 내부의 무기고로 이동했다.
“문이…”
“당연히 잠겨 있겠죠. 잠시 비켜주세요.”
최근 지옥 같은 훈련을 하며 나 스스로는 체감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 살이 빠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어마어마한 몸무게를 자랑하는 몸뚱이다.
적어도 여기 있는 이들 중 가장 무거울 것이다.
나는 다섯 걸음 정도 물러나 있다, 있는 힘껏 문을 향해 어깨를 부닥쳤다.
콰앙-!
나의 힘 스텟은 버프를 모두 더하면 무려 15로, 좀 많이 폐급인 전투직에 가까울 정도다.
폐급이더라도 초인은 초인.
나무로 만든 문이 150kg에 근접한 무게의 충격을 받으며 하단 부분이 비틀렸다.
- 콰지직!
비틀린 부분을 발로 차며 틈을 벌렸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강인이 힘을 보태 주어서 좀 더 쉽게 문을 열 수 있었다.
곧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면서 부드럽게 열리는 문.
우리는 모두 무기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무얼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서 있는 훈련생들에게 명령했다.
“들고 휘두를 수 있을 정도의 무게를 가진 창을 챙기세요. 방어구는 챙기지 말죠. 의미 없을 겁니다.”
“…한걸음이라도 더 도망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네. 무엇보다 교관님들이 긴장할 정도면… 인간이든, 괴물이든 가죽 갑옷 정도는 쉽게 찢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들으셨죠? 다들 창을 손에 쥐시면 됩니다.”
스윽!
나름 깔끔 해 보이는 창을 손에 쥐어봤다.
무게도 적당했고, 길이도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내 창은 이걸로 하자.
“아… 저… 칼같은 건 안 되나요?”
“칼이 닿는 거리까지 겁먹지 않고 습격자와 마주할 수 있으면 추천해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창을 선택하세요. 위협만을 하며 시간을 끄는 데에는 창이 최고입니다. 수십 명이 동시에 겨누고 있으면 웬만해서는 파고들지 못하거든요.”
“저희는 뭉쳐있으니, 최대한 다수의 이점을 살리는 것이 좋을 겁니다. 칼은 사정거리가 짧아 그것이 안될 테고요.”
나의 말을 이강인이 거들어주었다.
창은 입문이 쉽다.
전쟁터에서 병사들에게 칼보다 창을 쥐여주는 이유가 이것이다.
단체로 훈련시키기 너무 편하니까.
적어도 칼보다는 입문의 난이도가 훨씬 낮다.
이강인이 한 말 또한 맞다.
이강인을 제외하곤 습격자가 인간이며, 소수란 사실을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다수가 소수를 상대하기 좋은 창을 추천한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죠?”
원작 속 이강인은 훈련소 내부에서 농성한다.
훈련소에서 제일 큰 식당에서 바리게이트를 쌓고, 침입하려는 습격자들을 창으로 견제하면서.
하지만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밖으로. 탁 트인 곳으로 갈 겁니다.”
< 33화 >
“흐음…”
내 말을 들은 이강인이 침음을 흘렸다.
아마 생각이 복잡할 것이다.
나와 판단이 갈렸으니까.
그가 알고 있기로 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할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회귀자.
미래를 알고 있는 자신의 시야가 좀 더 넓으리라 생각하겠지.
“…죄송한 말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 예상을 증명해 주듯, 이강인이 나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나는 그가 설명하기 전에 이강인이 할 말을 미리 짚었다.
“건물 내부에서 농성하는 것 말인가요?”
“!!… 맞습니다.”
그는 강하다.
우유부단과는 거리가 확연히 멀고,
머리도 꽤 잘 돌아가서 현명한 축에 든다.
하지만 그것이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저 판단은 이강인의 실수다.
“농성은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닐 겁니다.”
“이미 제 생각을 알고 계셨군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 하신 건가요? 식당은 농성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저희 전부를 넉넉히 수용할 수 있지만, 입구는 좁죠. 의자와 책상으로 만든 바리게이트 뒤에 몸을 숨기며 50개의 창날을 들이밀면 절대로 들어올 수 없을 겁니다.”
이강인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내게 물어보았다.
고개를 돌려 훈련생들을 쳐다보았다.
스윽…
- 강인씨 말이 맞지 않아? 밖으로 나가면 훨씬 위험할 것 같은데…
- 건물 안은 엄폐할 공간도 많다는 것 같고…
- 바…밖으로 나가기 무서워…
내 눈에 익은 몇 명을 제외한, 다른 훈련생들 전부가 이강인의 말에 동조하는 눈치였다.
그의 말이 합당하게 들리는 것 또한 원인 중 하나였지만, 나와 완벽히 상반된 그의 외모도 한몫을 했을 테지.
청자를 설득 하는 데는 논리뿐만이 아니라 화자의 신뢰성 또한 큰 영향을 끼치니까.
나태함에 몸이 찌든 것처럼 보이는 나와, 훈련 때 항상 두각을 보이는 이강인.
둘 중 누구의 말에 무게가 실리는지는 안 봐도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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