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4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주 그냥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저 싱글벙글 웃는 얼굴.
이마에 딱밤을 쎄게 놓고 싶은 충동이 든다.
얄밉지만 웃는 얼굴이 꽤나 귀여웠기에 내가 한번 접어주기로 했다.
< 19화 >
“아… 졸려 뒤질 것 같아…”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아침 구보 후, 아침을 먹으며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특히 운동 후 찾아오는 노곤함이 더욱 나를 괴롭힌다.
몸과 정신이 피곤한 것은 아니다.
어제 침대 위에서 한 운동과, 밤샘으로 인한 정신적 피로는 특성의 덕에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20년 넘게 수면시간을 어기지 않았던 나의 생활 패턴이 악재가 되었다.
“내가 자초하긴 개뿔… 절대 나를 못 자게 한 게 누군데?”
나는 불만이 담긴 눈빛을 담아 블랑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전혀 반성하는 눈치가 아니다.
태연히 남은 아침을 전부 입에 쓸어 넣은 블랑은 음식을 씹으며 내게 말을 했다.
“제일 관심 없다고 한 놈이 제일 빠르게 움직였으니 그러지! 적어도 언질이라도 줬으면 그렇게 안 괴롭혔어!”
무슨 말을 하든 상관은 없는데 제발 음식은 다 삼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비위가 상해 아침을 못 먹겠잖아.
“게다가 결국 밤새 물어봐도 자세한 건 하나도 말 안 해줘 놓고.”
“말해 줬잖아. 광년이가 술에 취해서 벌어진 우연이었다고.”
“설마 그걸 믿으라는 건 아니겠지?”
에휴…
계속 해봐야 새벽의 대화가 반복될 뿐이었다.
나는 내 주위를 둘러싼 룸메이트 4명을 바라보았다.
의외로 마음에 둔 여자를 빼앗긴 사람과 빼앗은 사람 사이의 어색한 기류는 하나도 없었다.
어젯밤.
방을 들어갔을 때, 모두들 생각보다 털털하게 반응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나를 축하해 주는 분위기였다.
서로 사귀는 것은 아니란 걸 듣고서는 좀 덜해지긴 했지만, 나를 향한 질투는 거의 없었다.
특히 블랑의 경우는 그런 치욕을 겪고서도 마음에 뒀길래 꽤나 진지한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이들과 광년이는 만난 지 2일도 안 되었지… 연정이 깊어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으려나?’
원나잇.
광년이가 내게 허락해 준 것은 고작 한 번이다.
두 번 째 요구했을 때는 둘 중 하나겠지.
호쾌하게 허락해주던가, 두번 다시는 허락을 받지 못하던가.
평소 그녀의 호탕한 성격을 생각해 보면 전자일 확률이 높긴 하지만, 세상에 절대란 건 없다.
물론 나는 그녀와 원나잇으로 끝낼 생각은 전혀 없다.
‘뭐, 한번이 될지 두번이 될지는 전부 내 행동에 따라 달린 것이겠지.’
남은 아침을 입에 전부 넣은 뒤, 자리를 떴다.
* * *
오전 훈련에 대비해 훈련생 전원이 각자 몸을 풀고 있을 때,
멀리서 광년이가 나를 보며 생긋생긋 웃고 있다.
심지어 눈을 마주치니 이쪽을 향해 작게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
뭐지?
쟤가 웃으면 불안하다.
심지어 나를 향해 달갑게 손을 흔드니 공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설마 어제 내 섹스 스킬에 반해버린 건가?’
음… 가능성 있다.
내가 말하긴 뭐하지만, 어젯밤의 만족도는 90점은 가볍게 넘었을 것이다.
이거 잘만하면 두번째 밤이 멀지 않을 것 같다.
“박찬영 훈련생! 나를 따라와라.”
뭐야?
브랙이 나를 불렀다.
광년이면 몰라도 그가 나를 부를 이유는 전혀 없었기에 의문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따라오면서 들어라.”
저벅 저벅…
브랙은 앞서 걸어가며 내게 말을 했다.
그나저나 계속 이렇게 걸어가면 훈련장이랑 멀어질 텐데?
이쪽은 훈련장의 방향도, 훈련소의 방향도 아니다.
나는 열심히 브랙의 의도를 추측하면서 발을 움직였다.
“박찬영 훈련생. 자네는 지구력과 체력은 나름 준수하나, 민첩성과 유연성이 심각하게 떨어지지. 원인은 알고 있나?”
브랙은 손에 든 종이 몇 장을 넘겨가며 네게 말했다.
저 종이의 정체는 체력 측정 당시 내 정보에 더해 출신과 국적 등을 기록해 놓은 파일이다.
다시 말해 내 프로필이다.
내 민첩성이 떨어지는 원인이라…
이 질문의 답은 하나밖에 없다.
“…살 때문이 아닐까요?”
“알고 있군. 자네는 심각한 고도 비만이야. 어떻게 전투직으로 배정받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 움찔!
약간 찔리는 곳이 없지 않아 있기에 놀랐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또한 작게 ‘그렇군요…’라고 말하며 어물쩍 넘어갔다.
“그러나 이미 한번 훈련소에 입소한 이상, 교관들은 자네를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어.”
나는 슬슬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깨닫기 시작했다.
첫날과 둘째 날에 언급이 없기에 그냥 넘어가려는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다니!
예상치 못한 시간차 공격에 등이 땀에 젖었다.
“그 정도의 살을 가지고 있으면서 평균을 넘어서는 지구력이라니! 자네는 분명 살을 빼면 두각을 보일게 틀림없어! 그래. 살을 뺀다면.”
“하하! 어차피 훈련소 3개월을 지나면 자동으로 빠져있지 않을까요?”
“아니! 그렇게 심한 비만으로는 앞으로의 훈련에 큰 지장이 있어! 그런 자네를 위해 특별한 교육과정을 한 개 준비했지.”
다른 말로 지옥 훈련?
그 특별한 교육과정이란 것의 내용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내게 들이밀지 마…!
“교육 기간은 14박 15일. 자네는 교육기간 동안 다른 훈련생들이 하는 모든 체력 훈련에 열외 되어 나와 1:1 맞춤형 훈련을 시행할 예정이야. 이 기간도 너무 짧지만, 사정상 최대한 줄이고 줄인 것이니 양해 바라네.”
브랙은 선심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24시간 밀착 1:1개인 PT를 무료로 해준다고?
그것도 2주일 동안?
진심을 담아 말하겠는데, 필요 없다!
나는 이곳에서 3개월, 현실의 3개월을 합쳐서 6개월간 천천히 살을 빼낼 생각이었다.
그런다 15일 만에 빠지게 생겼다.
사실 이 정도 살덩이면 6개월 안에 빼는 것도 무척 빡세게 빼는 것이다!
6개월이 반개월로?
어떤 지옥이 펼쳐질지 자동으로 머리에 그려졌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두려웠다.
“아무리 그래도 14박 15일은 너무 깁니다!”
“나 역시 전례 없던 특이 케이스인 자네와 맞춤형 훈련을 하고 싶었으나… 내가 빠지면 그녀 혼자서 훈련생 전원을 통제하며 훈련을 진행해야 할 테니 큰 고민이었지. 그러나 오늘 아침, 그녀가 스스로 찾아와서 내게 먼저 제안을 하더군! 자네를 ‘위해’ 특수한 훈련을 한가지 만들자고!”
“그녀라면 설마…”
그녀라는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웃는 얼굴.
“그녀라면 그녀지. 나를 제외한 교관은 한 명밖에 없지 않나?”
“광년이… 이 개…”
새끼야!
겨우겨우 뒷말을 삼켜냈다.
“기뻐하게! 자네를 위해 밤새 교육 과정까지 생각해 온 모양이더군! 심지어 그렇게 내게 미루던 업무를 2주간 본인 혼자 내 몫까지 하기를 자처하며! 내용이 무척이나 힘들어 보이긴 하지만… 그녀도 생각이 있으니 이런 훈련을 만든 것이겠지! 그녀의 희생을 보아 열심히 생각해 온 훈련 과정 전부를 채택했네!”
뒷골이 땡긴다.
오늘 아침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던 그녀의 얼굴… 아니 면상이 떠오른다.
지금이라면 전력으로 달려가 칼침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름이 마음에 안드냐? 박찬영이란 이름이 잘못된 거냐고!!’
도망… 도망가야 해…
브랙 이 사람,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시작되면 멈출 수 없다.
터억!
“자네는 오늘부로 바뀌어 줘야겠네. 자네의 의지가 아니라, 나의 의지로.”
뒤돌아 도망가려던 내 어깨를 큼직하고 두꺼운 브랙의 손이 덮었다.
나는 절대 도망갈 수 없을 거란 걸 직감했다.
‘고문! 고문에 대한 대비 되어있다면서! 이거 고문 아니야? 고문이잖아!’
시스템을 주고 간 천사에 대한 항의를 해봤지만, 나를 구원해 줄 시스템 창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강력한 힘에 의해 질질 끌려갔을 뿐이다.
나를 향해 탐스럽게 아가리를 벌린 지옥의 입구를 향해.
* * *
브랙이 전직 트레이너라고 했던가?
그 말은 정확했다.
그는 사람의 한계를 몰아붙이는 방법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움직여! 움직여! 오른쪽 다리만 쓰면 쥐난다! 그러면 나중에 더 힘들어져!”
‘끄으으윽…!’
풍덩! 풍덩!
브랙이 말한 대로 왼쪽 다리에도 힘을 줘 물을 찼다.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가 몇 번 고생한 뒤, 차라리 말을 듣는 것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뼛속 깊이 알아버렸다.
풍덩! 풍덩!
“뚱뚱한 사람은 물에 뜬다! 겁먹지 말고 팔다리 움직이는 데 집중해!”
“흐읍! 푸하!”
물 위로 고개를 내밀어 숨을 들이마시고, 팔과 다리로 물을 가로질렀다.
수영 선수들이 왜 코어 근육이 대단하지 알 것 같다.
전신이 힘들었지만, 특히 등허리의 코어근육이 땡기듯 아파왔다.
내가 갑자기 왜 수영을 하고 있냐고?
브랙은 내 몸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지나친 육상운동을 하면 관절이 상할 수 있다며, 쉘터 외각의 강 하류로 데리고 왔다.
내리쬐는 태양의 더위를 피할 수 있으니 좋은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전혀 아니다.
내가 ‘훈련 도중 체력이 다해서 물에 빠지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물어보자 ‘내가 살릴 테니 걱정하지 말고 물속에서 기절해라.’라는 답변을 들었다.
참으로 공포스러운 답변이 아닐 수 없다.
기절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훈련이라니…
심지어 육지에서처럼 지쳤다고 포기하며 드러누울 수도 없었다.
진지하게 한번 죽고, 시간을 돌리는 것을 고려해봤지만…
첨벙! 첨벙!
“푸흐흐흡! 콜록! 콜록! 콜록!”
아무리 진짜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익사는 절대 아니다.
진짜 폐에 물이 차 맞이하는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오늘 깨달았다.
‘안락사! 제발 안락사시켜줘!’
코와 입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강물.
내제된 생존 본능 때문에 무의식적인 체력의 한도의 한도까지 끌어다 사용하고 있었다.
이 후폭풍이 저녁에 어떻게 돌아올지,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
제발 자연치유가 내 생각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길…
“유산소! 전신! 게다가 부상의 위험도 적다니! 이처럼 완벽한 운동은 찾기 힘들지!”
수영의 유용성은 인정하겠다.
그렇지만 도저히 내가 하고 싶지는 않다.
첨벙! 첨벙!
‘개같은… 광년이… 씹새…’
팔다리가 혹사로 인해 벌벌 떨려가면서도 원한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식사와 수면 모두 이 강 근처에서 해야 했기 때문에 내가 광년이를 보는 건 14일 뒤가 될 것이다.
14일뒤… 딱 14일 뒤 보자.
뿌드드득…
이가 갈린다.
“자 이제 그럼 몸이 덥혀졌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예? 본… 본격적인 시작이라니요?”
시작은 1시간 전에 한 것 아니었는가?!
지금도 지쳐서 손발이 벌벌 떨리는데,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구라지?
* * *
타닥타닥!
느긋하게 흐르는 강줄기 옆.
따스한 모닥불이 마음이 편안해지는 소음을 내며 타오른다.
고개를 들면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 고개를 돌리면 강물에 비친 푸른 달.
감성이 충만해져 당장에라도 낯부끄러운 시를 한 수 읊게 하는 기분을 들게 하는 절경이다.
…옆에 있는 사람이 모닥불의 빛에 반사되어 대머리가 번쩍거리는 근육질 남자만 아니었다면.
펄럭 펄럭.
“전날 측정한 체력검사가 잘못되었군. 기록보다 훨씬 신체능력이 양호해! 으음… 역시, 반백 명을 동시에 측정하면 이런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구만…”
브랙은 나의 프로필을 보며 말을 했다.
어제의 체력 검사 결과는 정확했을 것이다.
갑자기 늘어난 스텟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겠지.
“자! 오늘 저녁은 케틀렙토마구셉소의 가슴살과, 체력 회복에 효과가 있는 약초를 넣고 끓인 스튜라네!”
나를 향해 건네지는 죽이 담긴 그릇.
간단하게 치킨이라 부르지 않고 케틀…어쩌고의 풀네임을 부르는 사람은 브랙이 유일하지 않을까?
광년이 때문에 저 이름만 들으면 마구섹스가 떠올라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탄수화물을 줄이고, 단백질에 치중한 영양식이지! 내가 손수 떠먹여… 줄 필요는 없을 것 같군.”
타악!
‘떠먹여 주긴 뭔… 여자면 몰라도 대머리 남자한테? 내가 미쳤냐?’
나는 브랙이 내미는 접시를 두 손으로 공손히, 그러나 단호하게 뺏었다.
그런 나를 떨떠름하게 흩어본 브랙이 입맛을 다셨다.
왜 남정네들 끼리 밥을 먹여주려고 하는 거지?
설마 브랙의 취향이?…
…훈련기간 동안 내가 위험한 건 육체적 고통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는 슬쩍 브랙에게 떨어져 앉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젠장, 오늘 밤 잠도 제대로 못 자겠는데?
그러나 이런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브랙이 내게 밥을 먹여주려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네, 신기하군. 하루종일 고강도 훈련을 하다 한번 길게 휴식을 하게 되면, 근육이 풀어져 지금쯤 사지가 움직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브랙은 열심히 수저로 음식을 떠먹는 내 팔을 쳐다보았다.
“잘만 움직이는군.”
움찔!
나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허겁지겁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수영하고 난 뒤 특유의 허기와, 휴식의 달콤함에 취해 미처 생각이 닿지 못했다.
평소라면 분명 브랙이 먹여주려고 한 시점에서 눈치를 챘을 텐데!
“훈련 동안 엄살을 피운 건가? 아니… 그렇다기엔 내 경험상 한계까지 몰아붙인 게 분명한데…”
꿀꺽!
설마 내가 특성이라는 특이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나?…
“생각할 가능성은… 박찬영 훈련생. 혹시 공기 중 무언가가 느껴지는 게 있나? 예를 들어 마나라던가.”
…뭐요?
마나?…
‘변명할 기회다!’
전혀 짐작지 못한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나는 이것이 거짓말을 할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
속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그에게 시스템과 특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지 않은가?
“확실히 뭔가 느껴지는 것 같긴 한데… 아직은 명확히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다만, 지구의 공기와는 좀 다른 것 같네요.”
“으하하하! 역시!”
내 말에 브랙은 반색을 했다.
나는 남몰래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계가 마법이 있는 세계라서 다행이다.
< 20화 >
“축하하네. 박찬영 훈련생. 아마도 자네는 마나 각성을 한 것 같네. 이 세계에 온 지 일주일도 안돼서 각성이라니, 전례 없던 속도야!”
팡팡!
브랙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마나각성.
나는 이 단어를 이미 알고 있다.
이렇게 빠른 시간안에 각성을 하게 되면 주위의 이목이 쏠리겠지만, 특성을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2주간 한 시간도 빼놓지 않고 나와 같이 행동할 브랙이 특이사항을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일단… 모르는 척을 해야겠지?’
원작을 통해 마나 각성이 뭔지 대강 알고는 있지만, 나는 처음 듣는 소리인 것 마냥 궁금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자신의 신체에 발생한 이변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해 보일 테니까.
“마나각성이 정확히 뭔가요?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는 것? 엄청난 괴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
흐흐!
브랙은 웃는 얼굴로 대답을 해주었다.
내가 마나각성을 했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분 좋은 눈치였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에 온 모든 인간은 마나각성을 겪지. 자네처럼 빠르던, 그렇지 않던.”
“그럼 쉘터에 살던 주민들 전부가…”
“마나각성자지. 다만, 가진 힘의 크기가 무척이나 미약할 뿐.”
“…전투직은 다른 거군요.”
“그래. 마나를 머금은 몸은 단련할수록, 몬스터와 싸울수록 한계 없이 강해져.”
브랙은 그리 말하면서 자신도 매일 거르지 않고 개인 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오늘 훈련 중, 나의 곁에서 같이 몸의 단련을 하였다.
그때는 체력의 차이를 보여주며 나의 의욕을 끌어내려는 건가 했지만, 그런 목적이 있었다니.
“그런데 마나각성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는 것 같은데요?… 단순히 몸이 일정 이상 강해졌다는 걸로 판단하나요?”
“보통은 그렇지. 자네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쿡! 쿡!
브랙이 나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찌르기 시작했다.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본적이 있지? 베넷… 크흠. 광년 교관이 보여준 마법 같은 행동.”
베넷은 광년이의 본명이다.
그녀는 훈련생들에게 말해준 적이 없지만, 나는 상태창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브랙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광년이라고 고쳐 말했다.
브랙도 광년이라고 부르는구나…
성실한 그의 입에서 요상한 단어가 나오니 무척이나 어색했다.
게다가 ‘광년이’라는 멸칭에 ‘교관’이라는 존칭이 붙어나오자 우스울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브랙도 자신이 말해놓고 어색했는지 내 가슴을 찌르던 손으로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그가 말한 마법적인 힘.
그건 광년이가 첫날 훈련생들에게 보여준 불덩이를 꺼내거나, 허공에서 살아있는 치킨을 꺼낸 일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네. 첫날에 봤죠.”
“크흠! 마나각성을 한 사람 중 극히 일부에게 특이한 현상이 발견됐는데, 원리의 해명이 되지 않는 마법적인 힘을 사용 가능하게 되곤 한다네.”
꾸욱!
브랙은 다시끔 나의 재생능력을 의미한다는 듯 나의 가슴을 눌렀다.
“그런 힘이 발현된 이상, 자네는 이미 마나각성을 했다고 추측할 수 있지.”
“교관님에게도 이런 특이한 현상이 있었나요?”
절래절래-
브랙은 고개를 저었다.
“내게 특수한 능력은 없지만… 불만을 느낀 적은 없지!”
콰직-!
브랙은 주먹만한 조약돌을 한 손으로 들어, 악력만으로 부수며 그리 말했다.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알 수 있었다.
기본기와 육체가 완성되어 있으면 잡기술은 필요 없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자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브랙의 육체는 단련되어 있었다.
“마나각성을 했으니 다른 이들에 비해 성장이 눈에 띌 정도로 빠를 테야!”
이러면 차라리 오해받는 것이 내겐 더 이득이다.
실제로 내가 마나각성이란 것을 했는지는 둘째치고, 시스템으로 스텟을 늘려 갑작스레 성장을 하더라도 다들 충분히 납득할만한 근거가 생겼기 때문이다.
힘숨찐 놀이 같은 것은 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나는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저의 재생 능력은 유용한가요? 활용한다면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을까요?”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는 브랙에게 조언을 얻기로 했다.
그와 나의 전투경험은 비교조차 할 수 없으니 내가 생각지 못한 활용법을 제안해 줄 수 있다.
내 특성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재생능력이라 확신하는군… 본인의 능력이니 알 수 있는 건가?”
“하하! 알 것 같기도 하고, 착각 같기도 한 것처럼 애매해요. 제 감이 맞는다면… 대단치는 않지만, 피로 회복이 빠르다거나, 작은 상처를 회복하는 정도일걸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유용하지!”
으음-
브랙은 짧게 고민했다.
“자잘한 상처 치료나 훈련 중 부상의 위험이 큰 고강도 훈련을 부담 없이 할 수 있다는 건 자네도 알 테고…”
“오늘 확실하게 알았죠.”
나는 무리 없이 움직이는 팔다리를 보며 말했다.
“…전투할 때 선택지가 무척이나 넓어지겠군. 살을 주고 살을 취해도… 자네가 확실하게 이득이라는 뜻이니까.”
살을 준다는 선택지 자체를 고르고 싶지는 않지만, 사용하려면 사용할 수 있는 수는 알아두는 것이 좋다.
즉,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끌고 갈 수록 무조건 이득이라는 건가.
단순히 한 번의 싸움을 지구전으로 이끌라는 말이 아니었다.
싸우고 후퇴하고, 싸우고 후퇴하고를 일주일만 반복해도 상대는 지치리라.
반면 나는 이론상 최상의 컨디션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전투를 질질 끌면 나보다 강한 상대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나보다 강한 상대에게 치명상을 받지 않고 도망칠 수 있다는 전제하에만 사용할 수 있는 패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나저나, 체력 회복이라니… 딱 지금 필요한 능력이야! 계획을 대폭 수정해야겠어! 내일, 원래는 근육통을 고려해 첫날보다 덜한 일정을 짰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군!”
도무지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다.
이런 시발, 역시 특성은 절대 들키면 안 되었다.
적어도 이번 반 개월간은 들켰으면 안 됐는데!
* * *
드르렁-!
쉘터의 밖.
게다가 동물이 많이 찾는 강가의 근처지만 습격의 걱정은 없었다.
브랙이 말하길 담당 전투직들이 숼터의 근처의 몬스터를 꾸준히 소탕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식수를 보급하는 이 강 주변은 더욱 확실하게.
찌르륵-! 찌르륵-!
실제로 벌레 우는 소리와 브랙의 코골이만 들려올 뿐, 우리를 제외한 기척은 찾아볼 수 없었다.
“상태창.”
띠링!
* * *
[이름] 박찬영
[직업] -
[힘] 9 [민첩] 9
[체력] 5 [지능] 5
[기교] 1 [매력] -23
[특성] 『자연치유』
보유 카르마: 1530
* * *
“역시…”
보유 카르마가 대폭 늘어나 있다.
내가 정신없이 훈련하는 사이 퀘스트가 완료된 덕분이겠지.
이상했다.
너무 상황에 딱딱 맞는 퀘스트가 나온다.
훈련을 하고 있을 때는 마침 하고 있는 훈련 관련 퀘스트가.
쉬고 있을 때는 친구를 만들라는 등 기타 퀘스트가.
“이 퀘스트 창… 자아가 있는 건가?”
“있느냐, 없느냐로 따지면 있다고요?”
“으악!”
허억! 허억!
놀란 가슴으로 뒤를 돌아보자 바로 뒤쪽에 방긋방긋 웃는 천사가 보인다.
어둡기 그지없는 숲 한가운데의 심야지만, 별과 달이 밝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따악!
“악! 천…천사에게 폭력을?!”
“갑자기 나타나지 마.”
“천벌이 두렵지 않은가요?!”
“지난번 내게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천벌 못 내린다면서.”
으으!
그렇게 억울한 눈으로 쳐다보아도 약점을 말해준 네가 잘못이란다.
애초에 갑자기 말을 걸지만 않았어도 딱밤을 때릴 일이 없었고.
보통 만화나 창작물에서 신의 사자가 등장할 때면 휘황찬란하게 빛을 뿜으면서 나타나지 않나?
그런데 얘는 소리소문없이 나타났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다.
‘사실 화려하게 나타나도 곤란하긴 하지.’
“왜 왔어?”
“…딱밤의 일은 넘어가는 건가요? 좋아요. 한번 봐 드릴게요. 그냥… 별일 없나 안부 차 왔죠.”
말로만 뒷케어를 해준다는 건 아니란 뜻인가?
천계가 신경을 써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와준 건 고마운데, 앞으로는 기척 좀 내고 와. 매번 이렇게 놀라야겠어?”
“히잉… ‘신은 언제나 당신의 곁에 있습니다.’가 저희 방침인데…”
“그거랑 매번 놀라게 하는 거랑 관련이 있는 거야?”
끈질기게 요구한 결과,
안절부절못하는 천사의 약속을 받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다음부터는 기척을 내고 등장하기로 하는 것을.
“으으… 이렇게 특수효과 없이 등장하는 소박함이 좋은 거라고요…”
“나는 필멸자라 신의 시선은 잘 모르겠네. 아무튼, 이 퀘스트 창에 자아가 있다고?”
“음… 자아라기보다는 유능한 인공지능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려요. 대화는 당연히 불가능! 시스템 창이랑 친구는 못한다고요?”
놀리는 말인지 순수하게 건네는 말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간다.
“할 수 있다고 해도 할 생각이 없어. 다른 사람 눈에는 허공에 대화하는 미친 사람으로 보일 것 아니야.”
“지금도 충분히 그렇게 보여요! 저 다른 사람 눈엔 안보여서. 히히.”
딱밤 한 대 더 때려도 될까?
손이 근질근질했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럼 내 상황에 맞춰서 퀘스트가 나오는 거야?”
“네에! 앗! 이참에 무슨 무슨 퀘스트를 했는지 구경이나 해볼까요?”
“야! 쪽팔리게 그런 걸 왜…”
“우와! 어…엄청 많이 하셨네요?!”
내가 말리기도 전에 확인한 것인지 천사가 크게 감탄했다.
커다란 눈망울을 쉴 새 없이 깜빡이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시스템을 받은 지 며칠 안됐죠? 그런데 이렇게나 많이… 대…대단… 조금은 다시 봤어요?”
“칭찬은 입 말고 카르마로 줘.”
“못 줘요… 전에도 말했지만… 제게 읽기 권한은 있지만, 쓰기 권한은 없거든요.”
너무 속물적인 요구만 계속했나?
다시 봤다는 천사의 눈이 전처럼 차게 식었다.
마치 미래계획 없이 인생을 사는 친구를 보는 걱정과 한심함이 섞인 눈을 떠올리게 했다.
“크흠! 농담이야.”
“예 뭐… 농담이라 믿을게요… 아무튼, 이런 진척속도면 얼마 안 돼서 ‘현실 귀환’기능 해금 퀘스트가 나오겠는데요??”
뭐?
나는 천사에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 말은 이 지옥 같은 훈련도 브랙 몰래 쉬어가면서 할 수 있다는 뜻이잖아!
물론 해금이 훈련이 끝나기 전에 되어야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구…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남은 것 같은데?”
“어디보자… (전)박찬영씨 기준으로 한달이 지나갈 때 쯤 풀리도록 했으니… 어라? 이 정도면 당장 내일 발생 하겠네요?”
사랑한다 천사야!
나는 당장이라도 천사에게 달려가 뽀뽀를 퍼붓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그정도로 내게 희망이 가득 찬 소식이었다.
다짐했다.
내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퀘스트부터 닥치는 대로 깨겠다고.
‘…잠깐.’
흥분했던 이성이 돌아오자, 중요하게 확인해야 될 것이 생겼다.
나는 다급하게 천사를 바라보았다.
“눈…눈이 이상해요! 왜 저를 그렇게 핏발 선 눈으로 바라보나요?!”
“…그러고보니 넌 암컷이야 수컷이야?”
“동물도 아니고 천사보고 암컷·수컷이라뇨! 무척무척무척 실례입니다!”
내가 생각해도 무신경한 발언 같았기에 사과했다.
심통이 난 얼굴도 무척 귀여웠지만, 그런 말을 입으로 꺼냈다가는 더욱 화낼게 분명했다.
다행히 천사는 너무나 간단히 사과를 받았다.
“고의는 아닌 것 같고… 용서할게요! 저는 ‘누구씨’처럼 남의 실수를 두고 빚을 지우는 행동은 안해요! 천사니까!”
“흠흠…”
하지만 얼굴이 두껍기 그지없는 ‘누구씨’는 절대 천사에게 쌓아둔 빚을 변제하지 않았다.
신의 사자에게 빚을 지울 일이 앞으로 얼마나 있다고…
순간의 쪽팔림 때문에 후회할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켁… 지독해라… 마음속에 삼각형 따윈 없는 건가요?”
지금 열심히 구르면서 양심을 쿡쿡 찌르고 있다.
“혹시 너 남자는 아니지?”
“여자도 남자도 아니에요. 아직 안정해졌어요. 이름도 못 받았고요.”
즉 남자는 아니란 건가.
그러면 된다.
아무리 아이의 모습이라도 남자에게 뽀뽀하고 싶단 생각이 든 것 자체가 내겐 충격이었기에 꼭 확인이 필요했다.
스스로 여자를 정말 좋아한다 자부해왔기 때문에 더욱.
신의 사자에게 성별을 물어본 이유가 고작 이런 얼탱이가 없는 이유 때문이냐고?
맞다.
맞는데 뭐 어쩔건가.
“다행히 생각보다 잘 지내고 계시는 것 같고… 전 가볼게요?”
“그래. 다음에 볼 때는 기척 좀 내고.”
천사는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주변은 다시 적막함으로 가득 찼다.
힐끗.
드르렁-
브랙은 전혀 잠에 깬 눈치가 아니었다.
안심하고 오늘 모은 카르마를 사용할 수 있으리라.
‘오늘 훈련, 기절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지… 그 이유는…’
브랙이 나의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훈련의 강도를 조절해 줬기 때문이다.
그걸 감안한다면…
역시 스텟에 카르마를 투자하는 것 보다 모아두는 것이 더 나으리라.
이유는 간단하다.
‘당장 훈련기간 동안 높은 스테이터스가 필요하지 않아.’
지금 훈련은 단체 훈련이 아닌, 나에게 맞춰진 개인 훈련이다.
여기서 스텟을 늘려봤자 내 한계가 늘어난 것을 깨달은 브랙이 훈련 강도를 올릴 것이 뻔했다.
즉, 스텟을 올려도 훈련 시간이 늘면 늘었지 절대 덜 힘들어지지 않았다.
‘결국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던 15일간의 지옥은 확정… 좋아.’
내가 한 선택은 카르마를 모아 뛰어난 스킬이나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다.
오히려 잘 됐다.
이렇게 느긋하게 스텟 걱정 없이 카르마를 모을 기회는 적었다.
다른 훈련생들과 같이 훈련을 하면, 상위권에 들기 위해서 스텟의 투자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상점창을 열어 구매 가능한 목록을 활성화 시켰다.
< 21화 >
띠링!
* * *
[소모품 상점]
상처약 [5카르마]
물 1L [5카르마]
.
[기능 상점]
-구매 가능 목록 없음-
[스킬 상점]
.
* * *
기나긴 창이 주르륵 올라온다.
나는 필터를 적당히 활용해 가며 쓸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역시… 1500 카르마 가지고 살만한 물건은 없나…”
그나마 구매를 고려해볼 만한 물건은 소모품 항목에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유용하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대부분 식자재나 생필품이네… 포션 같은 것도 없고.”
지구에서 구할 수 없는 판타지적인 물건은 ‘키 크는 약’이 유일했다.
즉, 전부 급하게 필요하지 않았다.
[스킬 상점]과 온갖 아이템이 있는 [기타] 상점.
기대와 달리 질이 낮은 물건밖에 없었기에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심지어 기능 상점은 구매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네…”
기능이라면 분명 짐작 가는 것이 있다.
이 소설에 처음 진입할 때 본신으로 진입할지,
또는 주인공이나 그 주변 인물로 진입할지 선택하는 기능이 있었다.
아직 해금되지 않았다고 경고 메세지가 뜨며 강제로 본신으로 진입이 고정되기는 했지만, 분명 이 기능 상점에서 그 기능을 구입해서 해금할 수 있으리라.
하나 더 있다.
첫째날 천사가 흘리듯 말해준 덕에 존재를 눈치챈 기능.
‘소설 진입, 혹은 현실 귀환 시 소유한 물건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기능’이다.
만약 해금할 수 있다면 어마어마하게 유용할 건 불 보듯 뻔하다.
“뭐… 지금 당장 쓸만한 건 하나도 없지만…”
괜찮다.
애초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1530 카르마.
지금 내가 보유한 카르마다.
천사는 퀘스트 클리어 속도가 대단하다고 띄워주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단 하루 만에 모은 카르마다.
많은 수치일 리가 없다.
물론 (전)박찬영의 기준으로 한 달 치 분량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양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그 새끼가 병신인 거지 내가 뛰어난 게 절대 아니야.’
지금까지의 퀘스트 중, 나만이 클리어 가능한 어려운 퀘스트도 없었고…
평범한 사람도 독기를 가지고 미친 듯이 한다면 이 정도의 카르마는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고작 하루 만에 모을 수 있는 카르마 가지고 유용한 스킬과 아이템을 손쉽게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은 없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목표.
카르마를 어느 정도 모아서 무엇을 살지 정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아무 계획 없이 무작정 카르마만 모으는 짓은 머저리나 할 행동이다.
‘무엇보다 뚜렷한 보상이 눈에 보이면 의욕이 샘솟기도 하고.’
나는 상점 창의 필터를 좀 더 상세하게 조정했다.
구매 가능 목록만 표시하는 필터를 제거하고, 1,000 ~ 5,000 카르마의 가격 상품만 표시하도록 설정했다.
주르륵!
“엇?!”
* * *
[소모품 상점]
1등품 자연산 송이버섯 0.5kg [1,000카르마]
천삼(天蔘)등급 홍삼 3뿌리 [1,000카르마]
.
[기능 상점]
하드모드 퀘스트 해금 [5,000카르마]
[스킬 상점]
어설프지는 않은 칼질 0Lv [1,000카르마]
눈뜨고 봐줄만한 몸놀림 0Lv [1,000카르마]
.
[기타]
합성 섬유 재질의 방한용 외투 [1,000카르마]
마리아쥬 홍차 티 세트 [1,000카르마]
.
* * *
“하드모드 퀘스트?”
5000 카르마 비용의 기능이 하나 생겼다.
다른 것보다 기능에 대해 궁금해했던 탓일까?
눈에는 오로지 그 상품만이 들어왔다.
띠링!
* * *
[기능]
이름: 하드모드 퀘스트
레벨: -
효과: 높은 난이도의, 높은 보상을 가진 퀘스트가 랜덤으로 출현합니다.
상세: 노멀 퀘스트와 별개로 하드모드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하드모드 퀘스트는 클리어하는데 많은 시간, 노력, 행운이 필요합니다. 실패 또는 중도 포기 시 패널티가 있으나, 발생했을 때를 한정해 퀘스트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가격: 5000 카르마
[구매하기]
*경고. 보유한 카르마가 부족합니다.
* * *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 기능은 가능한 빨리 해금해야 하는 기능이라고.
“지금까지 실패 패널티가 거의 없었던 이유는 하드모드 퀘스트 때문인가…”
‘실패 패널티’라고 할만한 것이 있었던 적은 단 한 번이었다.
소설에 진입한 첫날.
쉘터장, 닥터에게 내 인적사항을 말해줬을 때 뿐이다.
그때 받은 퀘스트에는 전투 직군으로 배정받지 못할 경우, 배정받을 때까지 처음으로 돌아가는 패널티가 달려있었다.
“그 이후 나온 퀘스트들은 실패 패널티가 사실상 없었지…”
즉, 원래 퀘스트 실패 패널티는 하드모드 퀘스트를 위해 만들어진 기능이라는 뜻이다.
나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단순히 감을 믿고 이 기능을 목표로 정하는 것이 아닌, 최대한 이성적으로 이 기능의 유용함을 판단하고자 했다.
시스템 창에 적힌 ‘높은 보상’.
유추해보건대 분명 카르마와 아이템, 스킬을 보상으로 줄 확률이 높았다.
어떠한 경로던 카르마 자체의 수급 창구는 늘리면 늘릴수록 좋다.
“특히 이 기능은 시간이 지나면 5000 카르마 따위는 만회하고도 남을 테니…”
그러나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면 호구나 다름없다.
이 시스템 메세지에 속으면 안 된다.
단순히 퀘스트를 실패했을 때, 퀘스트 창의 ‘실패 패널티’만이 패널티가 아니다.
‘내가 도전하고 실패했을 때의 내가 처한 상황’ 이란 현실적인 실패 패널티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오크를 죽여라]란 퀘스트가 주어졌을 때, 실패 패널티가 500 카르마 차감이라고 한다면…
단순히 실패했을 때 500 카르마만 차감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오크의 사냥을 나서서 실패했을 경우가 어떤 경우겠는가?
바로 역으로 오크에게 당했을 경우다.
즉, 나는 500 카르마 차감과 별개로 오크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고, 죽음과 회귀로 인해 [소설 완결] 보상이 줄어들겠지.
그때 느끼는 고통과 트라우마는 별개고.
“그러니 결론은…”
정해져 있다.
이 기능을 빠르게 해금해야 한다.
특히 나의 본신의 힘이 약하면 약할수록 더.
단점을 잔뜩 늘어놓은 것에 비해 결론이 이상하다고?
전혀 이상하지 않다.
내 스텟이 높아지면 분명 ‘--를 죽여라’ 따위의 단순한 일이 아닌…
‘--국가를 자신의 세력 안으로 합병해라’, ‘--의 흉포한 악룡을 완벽히 길들여라’ 같은 터무니 없는 퀘스트를 내줄 것 같거든.
힘이 강해질수록 불가능한 일은 줄어드니, 그에 맞는 난이도를 유지하려면 토악질 나오는 조건이 줄줄이 달라붙을 것이 분명하다.
반면 지금의 나는?
달성하기 힘든 일이 널리고 널렸다.
시도한다고 해도 목숨이 위험하지도 않고, 실패해도 불구가 되지 않는 ‘달성하기 힘든 일’이 많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실패 패널티가 강하지 않다, 이 사실 자체만으로 빠르게 해금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카르마의 수입을 늘리는 기능은 반드시 해금해야 해. 빠르게 하면 할수록 좋겠지.”
운영이 중점이 되는 게임들은 수입을 빠르게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물론 하드모드 퀘스트란 게 클리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워 단 한 번도 클리어하지 못한 채 5000 카르마를 통으로 잃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런 극단적인 가능성을 일일이 신경 쓰면 절대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다.
묻지마 살인을 두려워해 출근도 퇴근도 하지 않는 건 술안주로도 쓰지 못할 우스갯소리지 않은가?
목표가 정해졌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5000 카르마를 모을 것이다.
* * *
해가 밝았다.
따스한 햇볕이 물안개 낀 강가를 밝혔고, 나는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눈이 부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힘들어 죽을 것 같아서.
“끄아아아악!!”
“우하핫! 재생능력이란 것, 성능이 확실해! 역시 자네도 이런 능력이 생기니 훈련 의욕이 샘솟나 보지? 어제보다 확실히 열정적이군!”
“네에에에엡!!”
“좋아! 그 기세로 5개만 더!”
“끄으으읍…!”
살을 빼는 것이 목적인데 도대체 왜 나는 무산소 근력 운동을 하고 있을까?
그 원인은 재생 능력을 극도로 활용하고 싶다며 일정을 대폭 수정한 브랙에게 있다.
‘죽여… 차라리 죽여줘…’
사실 나 또한 무산소 운동을 추가로 하는 것에 동의했다.
브랙의 말처럼 특성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함이 아니다.
대부분 일정 시간 이상이 필요한 유산소 운동에 비해, 무산소 운동의 퀘스트가 훨씬 빠르게 클리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드모드 퀘스트 기능의 해금과 현실 귀환 퀘스트의 등장을 앞당기는 것.
두 가지 목적이 있는 나는 최대한 빠르게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싶었다.
적어도 오늘 새벽까지는.
“네에엣…! 다스어어엇…!”
“한 개! 딱 한 개만 더! 한 개만 더 하면 5분 휴식 준다!”
“씨이이이바아알…!”
각오는 했지만 직접 해보니 미치도록 후회된다.
차라리 유산소가 좋다.
무산소는 팔다리 근육이 찢어지는 것같이 아프기 때문이다.
실제로 근육이 찢어지는 것 또한 맞고.
운동 좀 해본 사람들은 유산소가 훨씬 힘겹다고 평가한다.
단순히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은 하다 보면 어느 정도 익숙해지지만,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느껴지는 흉부의 통증은 몇 번을 겪더라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은 어질어질하지, 눈앞은 흐려지지…
금방이라도 호흡곤란과 패닉이 올 것 같은 그 좆같은 기분은 나도 엄청나게 싫어했다.
“좋아! 5분 휴식.”
“흐아아아…”
철푸덕!
그러나 지금 나는 유산소가 더 편하다.
특성의 덕에 숨이 잘 안 찼고, 숨이 차더라도 정신과 시야는 멀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치유는 근육이 찢어지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내가 느끼는 고통 또한.
심지어 운동 강도가 내가 상상한 것을 훨씬 넘어섰다.
그 때문일까?
퀘스트의 클리어 속도는 어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아침 먹은 것을 게워내지만 말도록.”
오늘 아침이 소화에 좋은 죽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토하고도 남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속이 메스꺼웠지만, 목젖을 치는 음식물을 억지로 참아내었다.
단백질 섭취와 별개로, 이 비대한 육체는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팠기 때문에 공복에 시달리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육체 자체의 위 크기가 무척 크다.
그렇기에 평소 식사 시간에도 딱 1인분만 먹기 위해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뷔페식으로 원하는 만큼 마음 것 먹을 수 있는 훈련소의 식당 특성상, 유혹을 견디는 것 또한 고역이었다.
지금은 브랙이 알아서 식단관리까지 해주었지만.
“58초… 59초… 휴식 끝! 다음 훈련으로 넘어가지!”
개 같네.
5분이 이렇게 짧았나?
* * *
한 세트의 훈련을 마치고 반 시체 마냥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볼을 땅에 댄 채로.
흙이 입안에 들어왔지만 뱉어낼 기운도 없었다.
띠링!
[체력 스텟이 1 올라갔습니다.]
그래…
어제에 이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강도의 훈련을 하는데 스텟까지 안 올라가면 억울해서 못하지.
의욕이 조금 살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이왕 훈련하는 거 열심히 하면 스텟이라도 오르지 않겠나 싶었기에 노력했는데, 다행히 기대가 배반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희소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띠링!
* * *
[퀘스트]
내용: 수영 1km 하기. 어떤 영법이든 상관없음.
보상: ‘현실 귀환’ 기능.
실패 패널티: -
* * *
초탈한 마음가짐으로 쌓인 퀘스트 발생 메세지를 지우고, 클리어 메세지를 치우길 반복하던 그때.
흐려지던 내 의식을 또렷하게 만드는 글자가 등장했다.
“드디어!… 드디어어!…”
갓 햇볕에 말려 보송보송한 이불과,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물을 마음껏 사용한 샤워, 미세먼지와 매연에 뿌옇게 흐려진 하늘이 눈에 아른거린다.
분명 인간의 육신에 잠재된 모든 힘을 다 썼다고 자신했지만, 출저를 모르는 힘이 몸에 맴돌기 시작했다.
“끄으으으윽!”
억지로 쓰러진 몸을 일으켰다.
이것만 끝내면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한다.
다리와 팔이 매너모드 된 핸드폰마냥 부들부들 떨렸지만, 어떻게든 일어서는 것에 성공했다.
“아니? 분명 끝까지 쥐어짰을 텐데!? 설마 정신력만으로?… 대…대견해! 대견하다! …좋아! 휴식 시간을 지키는 것 역시 무척이나 중요하지만, 그런 정신력을 보여준다면 도저히 참을 수 없지!”
“수…수영… 수영으로…”
“허허! 심지어 본인이 나서서 훈련 내용을 고르다니? 그것도 전신 운동인 수영을? 그렇게 지친 상태로 수영이라… 후회는 없나?”
대답할 기운은 없었다.
몸을 움직이는 데 집중해 도무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뇌가 반쯤 썩어버린 좀비처럼 비적비적 강가를 향해 움직였다.
첨벙… 첨벙…
차가운 물이 발목을 거쳐 종아리를 적신다.
거의 구르듯 들어갔기 때문에 금방 가슴께까지 물이 차올랐다.
아…
물에 들어오면 이것이 좋다.
150kg 가까이 되는 몸무게가 부력 덕에 떠올라 가해지는 부담이 훨씬 덜해진다.
좀 머리가 돌아가는 느낌과 함께 한줄기의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생각해 보면 쉬던 거마저 쉬고 수영을 해도 상관없지 않나?…’
이런 시발!
고작 5분의 휴식이라고 해도 자연치유가 있는 내게는 그 시간의 유무가 천지 차이나 다름없다.
퀘스트가 도망갈 리도 없는데, 왜 이렇게 허겁지겁 물로 들어왔지?
내가 이렇게 멍청했나?
갑자기 너무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자처한 일이니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
내 멍청함을 자책해야지 뭐…
…시발!
그래도 억울해!
나는 몸이 지쳐서 대가리가 안 굴러가는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정상 참작해서 1분 전으로 시간을 돌려줘!
“아… 저기… 다시 생각해 보니…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지 않나요?… 과도한 훈련은 부상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고…”
“시도도 해보기 전에 포기하지 마라! 방금의 정신력을 다시 되새겨라! 너는 무슨 심정으로 다리를 일으켰나!”
내가 훈련을 하고자 하는 의지만으로 몸을 일으킨 줄 아는 브랙은 흥분해서 나를 다그쳤다.
내 목적은 1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 리가 없는 브랙은…
“이미 물에 들어온 이상 한 세트가 끝날 때까지 휴식은 없다! 준비 자세 실시!”
절대 물러서겠다는 눈이 아니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눈에서 느껴지는 습기는…
수영 준비 자세를 하며 튄 물방울이겠지?
< 22화 >
“아으아아… 아으으…”
내가 얼마나 이 창을 보고자 노력했는가.
고작 이 글자 몇 줄이 뭐라고.
“으아어… 아으…”
띠링!
* * *
[현재 진입중인 소설] - 테라포밍
지구로 귀환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요]
* * *
난 해냈다.
마지막에는 수영하는 사람이 아니라 물에 빠진 개미 같아 보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해냈다.
아무리 느리게 흘러가는 강의 하류라고 한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뒤지게 힘든 일이다.
고작 1km 헤엄치는데 1시간이 넘게 걸린 이유다.
몸이 지친 탓도 있고.
“33초… 34초… 35초…”
육지에서 죽어가는 나를 보며 휴식 시간 5분을 소리 내며 재는 브랙.
평소라면 경기를 일으키며 조금이라도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길 빌었겠지만…
지금의 내게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다.
“끄으으으…”
나는 뒷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예] 버튼을 눌렀다.
지금 내겐 무엇보다 휴식이 간절했다.
푸드코너의 맛보기 음식 같은 5분가량의 짧은 휴식 말고, 한 끼 먹는 데 4시간이 필요한 12코스 요리처럼 길고 느긋한 휴식이 필요했다.
존나게 이쁜 여자가 ‘섹스할래?’라며 유혹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나의 휴식을 방해할 수 없다.
띠링!
[지구로 귀환합니다.]
약간 어지러웠고, 몸이 붕 뜨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의식이 빨려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저절로 눈이 감기며 요상한 기분에 몸을 맡겼다.
…
눈을 뜨니 집이었다.
지구의 기준으로 지금은 토요일 저녁.
걱정할 것 하나 없이 마음껏 쉴 수 있었다.
“으어어…”
몸은 땀과 강물로 젖었고, 침대는 냄새났지만…
훈련소의 목제 침대와 야외에서 하는 노숙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안락했다.
최고의 휴식은 수면이라고 했다.
나는 자연스레 침대에 누워 잠에 빠져들었다.
* * *
끼익… 쿵…
덜컹덜컹…
얼마나 많이 잤을까?
어디선가 나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창문을 보니 날이 바뀌었나 보다.
시곗바늘이 일요일 아침임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덜컹… 덜컹덜컹…
…근데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천사에게 받은 기억에 의하면 이 집에 사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절대로 이 집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선 안 되었다.
“씨발 뭐야. 도둑인가?”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발생한 돌발상황에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한 손에는 핸드폰의 112를 누른 채 통화 버튼만 누르면 경찰에게 연락이 가게끔 했고, 다른 한 손에는 방 안에 굴러다니는 무기로 쓸만한 것을 쥐려고 했다.
그러나 쓸데없이 깔끔한 방은 쓸만한 무기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찾은 것은 그나마 길쭉하고 단단한, 모기약이었다.
‘어…어쩔 수 없으니 일단 이거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상점창을 둘러본다면 쓸만한 무기를 찾을 수 있겠지만,
어떤 고생을 해가며 모은 카르마인지를 떠올리니 도무지 손이 가지 않았다.
카르마로 무기를 사는 건 인기척을 죽이고 다가가 정말로 도둑인 것을 확인한 후 구매 해도 늦지 않다.
살금살금…
나는 조심조심 걸으며, 방문을 소리가 나지 않게 열었다.
소리가 났던 거실을 향하는 길.
발꿈치를 들어 발소리를 죽이며 코너를 돌려던 그때,
거실을 나와 복도로 들어온 남자와 마주쳤다.
“!!”
“아. 안녕하세요.”
꾸벅.
파란색 모자를 쓰고, 파란색 조끼와 파란색 바지를 입은 남자였다.
그는 나를 보자 고개를 숙이며 작게 인사했다.
나는 당황해서 모기약으로 남자를 때릴 뻔했다.
그런 나의 행동을 제지한 건 불법 침입자라기엔 너무나 태연한 그의 행동이었다.
그는 전부터 나 ‘박찬영’을 알고 있다는 듯,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다시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그래.
바닥을 걸레 같은 것으로 닦았다.
“…누구신가요?”
“예? 오늘 일요일입니다?”
일요일이 뭐.
이름이 일요일이라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뇌 정지가 왔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후우…
침착해지자.
일단 그의 행동을 봐서는 도둑은 아닌 것 같았다.
집주인을 마주쳐도 당황하지 않았고, 심지어 내게 고개 숙여 인사까지 건넸다.
혼란을 어느 정도 추슬렀다.
침착하게 그의 행동을 살펴봤다.바닥을 닦는 행동, 집 안을 청소하는 것 같았다.
딱 하나 생각나는 가설이 있다.
“혹시… 청소업체 직원이신가요?”
“예. 맞습니다. 일요일 08시, 주 1회 맞으시죠?”
“아… 네…”
‘이런 개 같은 천사야! 인간관계 전부 동기화했다면서!’
상황을 완벽히 깨달은 나는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쥐고 있던 모기약을 살며시 등 뒤로 숨겼다.
아…
그러고 보니 화장실에 있던 면도기도 일회용 면도기였지?
어쩐지 그 새끼가 지내던 집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하다고 했다.
분명 페트병과 과자 봉지 같은 일회용품이 발 디딜 틈 없이 깔려있어야 자연스러울 텐데.
“그… 제가 문을 안 열어 드린 것 같은데 어떻게 들어오셨나요?…”
“예전에, 매번 아침마다 일어나서 열어주기 싫다며 고객님이 비밀번호를 알려주셨습니다.”
직원분이 ‘매번 열어주기 싫다며’라며 돌려 말했지만, 내게는 ‘매번 열어주기 귀찮다며’라고 들렸다.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방에서 현관으로 걸어가기 귀찮다고 타인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준 다라…
그 새끼는 생각이 있는 걸까?…
아무래도 이 직원이 떠나면 현관 비밀번호부터 바꿔야 할 것 같다.
“…오늘 비밀번호 바꿀 것 같으니, 다음 주부터는 초인종을 눌러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예… 그럼 마저 부탁드립니다.”
꾸벅.
직원은 내게 고개를 한 번 더 숙이더니,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청소하기 시작했다.
거실과 복도를 닦고, 각 방의 먼지를 청소하고, 쓰레기통을 비웠다.
그리고 쌓여있던 설거지까지 해줬다.
‘…이렇게 보니 엄청나게 편하긴 하네?…’
“아, 오늘은 일어나 계시니 이불도 빨 수 있을 것 같네요. 가져갈까요?”
유일하게 이불만 냄새나는 이유가 이거였나…
아마 지금까지는 청소 직원이 이불을 빨지 못한 눈치였다.
잠깐, 그럼 저 이불 얼마 동안 안빤거지?
설마 저 연갈색 이불, 원래 하얀색이었어?
…알면 안 되는 것을 깨달은 기분이다.
우욱… 토악질이 나온다.
이불을 빠는 것은 무조건 찬성이다.
그러나 그동안 나는 덮고 잘 것이 없다.
예비 이불이 있나?
적어도 내 방의 장롱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이 집에 남는 이불이 있나요?…”
“네… 제가 알기로는… 손님방에 예비 침구류가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걸 집주인인 네가 모르면 어떡하냐…’라는 눈이다.
시발.
내 잘못은 아니지만, 존나게 쪽팔리네.
얼굴이 뜨거워진다.
* * *
“으아앗… 죄송해요… ‘인간관계’의 기준을 서로 간의 이름을 아는 것으로 필터링했더니 이런 불상사가… (전)박찬영님은 직원분의 이름은커녕 몇 시에 방문하는지조차 몰랐거든요… 이 시간에는 한창 퍼질러 자고 있을 시간이라…”
어디 버그 많은 인디게임의 개발사도 아니고, 천국이 이렇게 날림으로 일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어디서부터 불만을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머리가 아파왔다.
“…이런 잔 실수 같은 것 대비할 수는 없는 거야? 한두 번도 아니고.”
“그게… 마땅한 방안이…”
“그냥 그 새끼 기억을 통째로 복사해서 나한테 주면 되잖아?”
“천계에도 지구처럼 인권 관련된 다양한 법들이 있어서요…”
안된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 요구를 거절하려면 대안이라도 내놔봐. 안된다고만 하지 말고.”
“그래도 다행히 이번에는 큰일 없이 넘어갔고…”
“내가 만약 그 직원을 도둑으로 착각해서 때렸으면? 흉기로 때렸으니 특수폭행이네? 특수폭행은 합의해도 징역인데, 방금 나 인생 좆될 뻔 한 거 아니야?”
“으으으…”
어딜 순순히 넘어가려고 하시나.
내가 상황 파악을 잘해서 다행이지, 조금만 더 당황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분명 다른 평행세계의 나는 지금쯤 감옥에 갇혀있을 것이다.
그럼 내가 그 복수를 대신해 줘야지.
“내놔.”
“히이이익!”
당당하게 합리적인 요구를 했다.
절대 자해공갈 같은 양아치 짓이 아니다.
나는 법정에 스더라도 무조건 승소를 확신할 만큼 떳떳했다.
대안이 없으면 보상이라도 해줘야지.
안 그래?
“특성, 내놔.”
“트윽서엉?! 안돼요오오!!”
빼액-!
천사는 절대 안 된다는 듯 크게 소리 내며 거절했다.
그러나 절대란 건 없지.
이미 한번 받은 것, 두 번은 못 받을 이유가 없다.
자연치유의 유용함을 뼈저리게 맛본 나는 특성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이게 범용적인 특성의 위력이면, 한 곳에 두각이 드러난 특성은 얼마나 대단할까?
심지어 그것이 전투에 관련 된 특성이라면?
군침이 싹 도네.
“안되는 게 어딨어? 지난번처럼 회의하고 와. 기다릴게.”
“처음에 쉽게 얻으셔서 몰랐겠지만, ‘자연치유’ 특성의 지급도 하늘에서 며칠 동안 밤새 회의한 결과 체결된 안건이란 말이에요!”
며칠 동안 회의를 했다고?
내게는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다녀왔길래 회의란 것이 금방 끝난 줄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천국에서 ‘특성’이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나 보다.
“심지어 그때는 ‘소원’과 얽혀있어서 예외 중의 예외의 경우였어요! 절대절대절대 두 번은 없을 거예요!”
“앞으로 오늘처럼 발생한 실수들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네?”
나는 침을 입술에 발라 적셨다.
약 팔기를 시작해 볼까?
“생각해 봐.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이런 문제가 앞으로 몇 번이고 일어날 텐데, 그때마다 서로 얼굴 붉혀야겠어? 지금 딱 특성 주면,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절대 불만을 말하지 않을게. 그 ‘실수’가 100번이든, 1000번이든.”
“배…백번… 천 번…”
이건 내가 걸 수 있는 최고의 패다.
미래를 파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내가 특성에게 거는 기대가 크단 뜻이었다.
과연 내 제안이 엄청나게 매력적이었는지 천사는 처음에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과 반대로, 꽤나 고민하는 듯했다.
“그으으으…래도 안돼요오오오! 역시 안된단 말이에요오!! 최초의 특성이면 몰라도, 두 번째 특성은 안 돼요!”
젠장…
이래도 안되나?
조금만 더 흔들면 될 것 같기도 한데…
“그러지 말고…”
“으아앙! 어…어떻게 해야… 저, 선배한테 조언 좀 듣고 올게요!”
“앗! 잠깐!…”
- and I↗ will always love you↗↗
천사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사라졌다.
젠장,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면 안 되는데!
좀 더 혀를 잘 놀려서 흔들면, 특성을 뜯어낼 가능성이 존재했을 것 같았기에 천사를 보내준 것이 후회된다.
허공에 휴트니 휘스턴의 ‘and i will always love you’가 울려 퍼지고 있다.
천사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갑자기 웬 노래냐고?
천사가 등장할 때도 이 노래가 나오길래 나도 그걸 물어봤는데,
이게 바로 지난번에 나와 약속한, 나를 놀라게 하지 않고 나오는 방법이라고 한다.
앞으로 등장·퇴장 시 이 노래를 틀겠다고 했다.
왜 하필 이 노래냐고 묻자,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란다.
뭐…
나야 놀라지만 않으면 상관없으니 천사의 취향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그래도 천사가 약속은 정확하게 지키는 것 같았다.
당황해 인사도 없이 사라지면서도, 약속대로 노래는 틀고 사라졌으니.
“참 애는 착한데… 머리가 나쁘네…”
본인 앞에서 말하면 상처받으니 없을 때 말하자.
천사보고 착하다고 하는 것은 칭찬일까, 아니면 물고기가 물에서 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이야기일까?
- and I↗ will…
“곧 오려나?”
다시 허공에 노래가 들린다.
세 번째 듣다 보니 뭔가 이 상황에 기시감이 든다.
아.
어디서 경험했나 했더니…
친한 친구나, 애인에게 특정 벨소리를 지정해 놓은 것과 같은 느낌이다.
핸드폰 화면을 보지 않아도 벨소리만 듣고 ‘아! XXX구나!’라고 눈치채는 것 같은 기분.
“저 왔습니다!”
분명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천사는 엄청나게 당황한 상태였다.
그러나 돌아온 천사의 얼굴을 봐도 당황한 낌새는 없었다.
조금만 감정이 변해도 바로바로 얼굴에 드러나는 천사의 특징상, 아마 혼란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아쉽네.’
기껏 감정을 흔들어 놓은 내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
좀 더 흔들면 어영부영 특성 한 개를 뜯어낼 수 있었을 것 같았는데.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선배에게 조언을 구한 천사가 좋은 조건을 들고 오는 것 정도였다.
“그래서. 좋은 답은 들고 왔어?”
“그 전에! 찬영님, 저를 속이려고 했죠!”
“…내가 뭘?”
“거짓말쟁이! 사기꾼! 어차피 이런 ‘실수’는 평생 많아야 5번도 일어나지 않을 텐데, 100번 1000번 일어날 것처럼 말씀하시다니!”
들켰다.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그 새끼의 삶을 생각해보면, 이런 실수는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일일 확률이 높았다.
상황을 직접 경험한 것도 아닌데, 당황해서 횡설수설했을 것이 분명한 천사에게 설명을 들은 것만으로 내 노림수를 꿰뚫어 보다니.
그 선배라는 천사, 얘랑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유능한 것 아닌가?
내 담당 천사와 바꿔주길 요구하겠다.
“…거짓말은 안 했어. 난 진짜로 앞으로 일어나는 실수들, 전부 용서해 줄 생각이었다고?”
“이익! 사기꾼! 사기꾼! 사기꾸우운!! 제가 당황한 틈을 타다니! 이젠 안속아요! 이미 다 알고 왔다고요!”
“…”
“게다가 특수 폭행 그거! 폭행 당사자와 그 자리에서 거액으로 합의를 하면 경찰에 신고 접수가 안 되니 징역형 안 받잖아요! 정말 때렸다고 하더라도, 천계 쪽 과실이니 합의금 전액 지원 나갈 것 이미 알고 계셨죠!!”
“쳇…”
이것까지 들켰나…
천사라고 다들 멍청한 건 아닌가 보다.
아기천사의 말대로다.
사과와 함께 억 단위 돈을 쥐여주며 신고하지 말아 달라고 약식 계약서를 쓰면 된다.
그 약식 계약서가 법정 효력이 있든 없든, 계약서의 존재 자체만으로 청소업체 직원 입장에서 나를 신고하는 건…
서슴없이 억 단위 돈을 펑펑 쓰는 사람을 적으로 돌리는 부담스러운 행동이 된다.
게다가 이미 받은 수억원의 돈을 뱉어내야 할 확률이 아주 높으니, 정상적인 사고방식의 사람이라면 신고하지 않는다.
순수한 천사에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작은 교훈을 내려주고자 한 내 시도는 실패했다.
이러면 특성은 완전히 물 건너 갔네.
나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뭐… 알았으면 어쩔 수 없고.”
한창 열 받은 듯한 천사의 표정이 또 볼만했다.
좀 미안하긴 한데, 얘는 웃거나 무표정일 때 보다 화내는 표정이 귀엽다.
볼이 최대로 빵빵해져서 붉어진 것이 보들보들한 인절미를 떠올리게 하거든.
아, 귀엽다는 건 당연히 어린애를 귀여워한다는 의미다.
내가 실실 웃고 있는 것이 열 받았는지, 천사가 내게 쏘아붙이듯 말을 했다.
“그…그렇게 계속 천사를 놀리다간 천벌 받을 거예요!”
“천벌 안 받잖아.”
“으아아악!! 왜 한번을 안 져주세요?!”
< 23화 >
“야. 네 선배라는 분, 천사지? 그 천사랑 내가 대화 하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 좀 불러와 봐.”
“앗! 절대 안 돼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찬영님 만큼은 절대로 못 만나게 할 거예요! 큰일이 난다고요!”
갑자기 천사가 나를 무척 경계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웬 경계?
그리고…
나랑 그 천사가 만나면 큰일이 난다고?
“뭐야. 나랑 네 선배 상성이 안 좋아? 서로 마주치면 엄청 싸우는 양극 같은 성격이야?”
“으… 그 반대인데… 아무튼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뭐, 저리 반대하는데 강요하기도 뭐하다.
“그럼 준비한 보상은? 설마 없는 건 아니겠지?”
없다고 하기만 해봐라.
나는 천계가 질색할 만큼 진상부릴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후우후우… 있습니다. 보상. 그렇게 노래를 부르시는 보상, 드릴게요!”
아직 분노가 덜 가라앉았는지, 내게 씩씩대면서 말을 했다.
볼 한번 꼬집어 보겠다고 하면 화낼 게 분명하니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오…
화난 건 화난 거고, 일은 일이란 건가?
역시 착하지만 쓸모없는…
내가 아는 천사였다.
“화 좀 가라앉혀. 나도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행동이었다고. 악의로 한 짓은 아니잖아? 어떻게, 마실 거라도 줘?”
“후우… 예. 좀 주시겠어요? 전 분명 천사인데, 왜 이렇게 속이 탈까요…”
덜컹!
나는 냉장고를 열어서 안에 있는 마실 거리를 꺼내려 했다.
하지만 냉장고는 비어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 내 집이 아니었지? 미안하다. 마실 게 없는 것 같은데? 차가운 수돗물이라도 줘?”
“이 인간이…!”
자신을 놀리는 줄 안 천사는 다시 분노했고, 나는 다시 달래주었다.
물론 화는 금방 풀렸다.
천사가 이래서 좋다.
본성이 착한지 사과만 꾸준히 하면 화를 금방금방 풀거든.
절대 나는 천사를 호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렇다.
그나저나 청소 직원이 마실 것까지 채워주지는 않나 보네.
하긴, 거기까지 바라는 것은 너무 과하다.
이미 면도기 같은 일회용품을 챙겨주는 정도로 충분히 밥값을 한다.
청소업체의 고용 비용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잡담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해온 보상이란 것이 뭔데?”
“’잡담’ 인가요…”
찌릿!
“후우… 아무튼. 이게 저희가 준비해온 보상이에요.”
천사는 허공에 아주 작은 웜홀을 열어, 그 안을 뒤적였다.
소설, ‘테라포밍’에 있는 지구와 연결된 웜홀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손을 웜홀에 넣었다 뺀 천사의 손에는 작은 물건이 들려있었다.
둥근 플라스크 모양의 유리병.
그리고 그 안에 든 붉은 색의 액체.
판타지 소설 짬밥, 게임 짬밥 좀 먹은 사람이면 그 정체를 쉽게 예측 가능했다.
“포션?”
“예. 포션이에요.”
천사는 내게 포션 한 개를 넘겨줬다.
포션이라…
어느 판타지 세계관에서도 ‘예비 생명’이라고 불리는 대단한 물건인 건 알긴 하지만…
“분명 유용하겠지만… 내게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은데? 이거 아직 소설 속으로 못 가져 가잖아. 지구에서는 쓸 일도 없는 포션을, 그것도 고작 1개는 전혀 수지에 안 맞는데…”
다칠 일이 많은 소설 속에서 받는다면 쓸모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직 지구의 물건을 소설 속으로 물건을 가져가는 기능을 해금하지 못했다.
한동안 이 포션은 지구에서밖에 쓰지 못한단 것이다.
뭐…
지구에서도 누구나 상상 가능한 사용 방법이 있긴 하다.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다친 재벌 관계 인물에게 거액을 받고 파는 것.
그런 인물을 찾는 것부터가 문제이긴 하지만, 70억 인구 중 고작 이 정도 조건의 인물이 없을 거라 생각하기 힘들다.
그런데 그건 멍청한 짓이다.
그렇게 할 거였으면 진작에 ‘키 크는 약’을 팔아서 돈을 벌었지.
물론 돈은 좋다.
꽁돈을 거부할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나도 돈 겁나게 좋아한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조급하게 굴 필요가 전혀 없다.
지금 아무리 거액을 받고 포션과 키 크는 약을 팔아도, 5년 뒤쯤이면 나는 그 정도의 돈은 푼돈으로 여길 정도로 부자가 되어있을 것이다.
오만이 아니라, 논리적인 추론이다.
미래에 돈을 벌고자 한다면 벌 방법이 무궁무진하다.
굳이 수상쩍고 판타지적인 요소가 있는 포션과 키 크는 약이 아니라,
3 카르마 짜리 흰 티를 겁나게 팔아도 원가가 없으니 매출이 곧 순이익이고.
지구와 소설 속에 물건을 가지고 가는 것이 가능해지면…
소설 속에서 금덩이를 가져오면 된다.
내게 중요한 것은 현금이 아니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온갖 재화보다 카르마가 훨씬 가치가 높아지는 특이점이 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돈은 필요하지만, 결코 목적이 되지 못한다.
나는 이 포션을 지구에서 파는 근시안적인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음… 역시 어쩔 수 없이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약간 스포일러 해드릴게요.”
“스포일러?”
천사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뭘 말하려고 하길래 저리 뜸을 들일까?
“상점 창이요,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으셨어요?”
상점 창이 이상하다?
짐작 가는 것이 없었기에 잠자코 이어질 천사의 말을 기다렸다.
“좀 더 정확히는… 상점 창에 물품이 너무 없지 않나요?”
“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했다.
분명 좀 이상하긴 했다.
내가 생각한 시스템의 상점 창이란, 지금처럼 생활용품이나 편의용품이 아닌…
‘마법서, 영약, 몬스터의 가죽, 마법이 부여된 칼같은 판타지적인 물건을 기대했지.’
그러나 현실은 지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물건밖에 없었다.
스킬 상점의 항목에도 마법과 관련된 건 찾을 수 없고, 단순히 몸을 쓰는 법이나 병기를 다루는 스킬들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보유한 카르마가 부족해서 그런 줄 알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나?
“상점 창도 다른 시스템 기능들처럼 구매 가능한 물품들이 잠겨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구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대부분인 거였죠.”
“아하… 그럼 상점 창의 해금도 카르마를 써서 해야 해?”
“아니요. 상점 창의 해금은 좀 다른 방식이에요. 두 가지 방식이 있어요. 첫 번째는 소설을 완결하는 거예요.”
“소설의 완결?”
“네. 소설도 여러 세계관이 있잖아요? 판타지, 무협, SF, 퓨전 등등… 거기서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을 처음부터 다 살 수 있게끔 하면 오버 밸런스잖아요. 그래서야 (전)박찬영님이 인간적으로 성장할 ‘시련’이 안 돼요.”
“…확실히.”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무궁무진하다.
특히 SF…
과학이 극도로 발전한 미래의 세계관 속 물건 하나만 잘 구매하면, 백 개의 스킬보다 훨씬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희는 소설 한 개를 완결하면, 그 세계관 속 물건들을 해금되게끔 조치했어요. 예를 들어, 판타지 세계를 완결지으면 드래곤 하트를, 무협 세계를 완결지으면 수천 가지의 영약이 해금되죠.”
“그럼 상점 창의 해금에는 엄청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사실상 초반부에는 거의 못쓰겠네…”
“제가 해금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씀드렸죠?”
다른 하나의 방법이라…
나는 어렵지 않게 그 방법을 예측할 수 있었다.
주어진 단서가 너무 많았다.
첫 번째로, 내게 보상으로 준 포션.
그러나 포션 한 개는 보상으로 받기에는 너무나 박하다.
두 번째로 내가 보상을 받기 위해 설명을 들어야 하는 이유.
천사가 꺼리면서까지 이 이야기를 해준 것 자체가 단서가 되었다.
“내가 획득한 물건은 해금 되나 보네? 이 포션처럼.”
띠링!
나는 상점 창을 열어 구매 가능한 목록을 확인했다.
* * *
[소모품 상점]
.
고급스러운 향수 [95카르마]
키 크는 약 [100 카르마]
하급 포션 [100 카르마]
.
* * *
“역시…”
즉, 이 포션의 해금 자체가 보상이란 건가.
내게 준 포션 한 개는 샘플이자 보너스고?
좋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이 포션의 이름이 하급 포션인가보다.
100 카르마라…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은 아니다.
정확한 성능 또한 모른다.
하지만 비상시 망설이지 않고 구입이 가능한 가격이란 것에서 높은 점수를 줬다.
“눈…눈치가 엄청 빠르시네요?! 크흠!”
“어. 고마워.”
띠링!
* * *
[소모품]
이름: 하급 포션
레벨: -
효과: 경구 섭취 또는, 상처 부위에 뿌리는 것으로 상처를 서서히 치료합니다.
상세: 후유증이 있는 상처를 상흔이 남는 정도로, 불구가 되는 상처를 후유증이 있는 정도로, 죽음에 가까운 상처를 불구가 되는 정도로 치료해줍니다. 이 포션을 너무 신뢰하지는 마세요. 어디까지나 ‘하급’ 포션입니다.
가격: 100 카르마
[구매하기]
* * *
시스템의 설명 덕에 천사에게 물어볼 거리도 줄어들었다.
아주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포일러가 되어버렸지만… 원래 이 정보는 첫 번째 소설인 ‘테라포밍’이 완결되면 확인 가능한 정보에요…”
소설을 완결시키면 그 세계관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건가??
“상관없잖아. 그 정보를 클리어 전에 얻는다고 한들 영향이 가는 것도 없고.”
“…있긴 해요. 아직 모르시겠지만.”
“뭐?”
“찬영님은 똑똑하니까 실마리를 얻게 되면 바로 눈치채실 거에요. 왜 영향이 간다고 했는지…”
또 거창한 떡밥을 뿌려댄다.
소설이나 만화를 읽을 때는 이런 떡밥을 보면 기대가 됐지만, 현실이 되니 다 필요 없고 빠르게 알고 싶다.
“어차피 눈치챌 거 미리 말해주면 안 돼?”
“안됩니다! 선배님이 제 입으로는 절대절대절대 알려주지 말라고 했어요.”
몇 번을 설득해보아도 도무지 요지부동이다.
아마도 그 선배 천사가 단단하게 말해두었나 보다.
결국 나는 캐묻기를 포기했다.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다른 한 가지 의문이 생겼기에 깊게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나중이 되면 알게 된다고 하고.
“근데 상점 창에는 판타지적인 물건 하나 있던데? ‘키 크는 약’. 그거 설마 지구에 진짜로 있는 거야?”
“설마요. 그건 저희가 서비스로 박찬영 님 인벤토리에 ‘키 크는 약’을 넣었다 빼서… 앗!”
“인벤토리라니? 게임에 나오는 그거?”
“…또 스포일러 해버렸네요. 아직 기능 해금이 되지 않으셔서 못 쓰실 거예요.”
그래서 키 크는 약이 유일하게 구매 가능한 판타지적인 물건이었구나.
음?
잠깐만…
…
‘내 인벤토리에 키 크는 약을 넣었다 뺐다고?… 이거… 전에 한 말과 모순되는 것 같은데?…’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인벤토리…
내 소유권…
키 크는 약…
소유권…
시스템…
시스템?
“잠깐, 너 지난번에 분명히 시스템에 대해 읽기 권한만 있다고 하고, 쓰기… 읍?!”
“!!”
터업-!
절레절레절레절레절레!!!
내 입을 양손으로 막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고개를 젓는 아기천사.
필사적으로 내 말을 막았다.
절박할 정도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지금 이 말을 하면 안 된다는 뜻 같다.
천사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입을 열면 내가 위험해진다고.
‘젠장… 이거 잘못 건드린 것 같은데…’
내가 의문을 느낀 부분은 간단하다.
지금까지 ‘시스템에 간섭할 수 없다’라고 강조하듯 말해 온 천계다.
그러나 시스템 속 인벤토리에 멋대로 아이템을 넣고, 멋대로 아이템을 회수하는 행동은 마치…
간섭이 가능해야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닌가?
나는 이 점을 물어보려 했고,
방금 천사에게 저지당했다.
끄덕…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여 말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절레절레…
천사는 나를 향해 고개를 몇 번 더 젓고는, 아주 천천히… 천천히 내 입에서 손을 떼었다.
내가 단 한마디로 하면 다시 입을 막을 기세였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식은땀이 나온다.
“푸하…”
두리번… 두리번…
천사는 명백하게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사람… 아니면 그 밖의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이 집에는 나와 천사 둘밖에 없는데도.
내가 찌른 말은 분명히 천사를 넘어선, 천계의 약점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이용할 생각을 해선 안 된다.
그 이전에 관련된 발언조차 하면 안될 것 같다.
나는 논리를 중요하게 여기기에 감이란 것을 신봉하지는 않지만, 이번만큼은 감을 따라야 할 것 같은 기분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든다.
누군가 이곳을 보고 있는 건가?
천사가 별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지만…
만약 누가 보고 있다면 이렇게 어색한 공기여서야 무슨 일이 있었다고 금방 눈치채버린다.
아까의 대화가 들켜선 안 된다면, 평범한 대화를 연기해야 한다.
나름 연기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평소의 유쾌함을 가장하는 데 성공했다.
“…천사의 날개나, 천사의 고리 같은 것도 아이템 취급이야?”
스윽…
“예? 그건 왜… 앗! 지금 만지시려고 했죠! 후후, 소용없어요! 소유권이 일정 시간 이상 인정 돼야 상점 창에 등록되거든요?”
-메롱
천사도 이쪽 의도를 눈치챘는지, 나의 장난을 평소처럼 받아줬다.
그 연기가 너무나 어색했다는 것은 비밀로 하자.
나름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 같으니.
…아깝네.
저 날개와 고리, 특별해 보였는데.
사실 장난이 아니라, 장난인 척하는 노림수였다.
혼란스러운 틈에서도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자가 일류다.
“아…아…아무튼… 저…저어는… 이만 가보 올테니이… 나중에! 봐요! 하하!”
- and I↗ will…
끝까지 어색하게 행동하네…
저렇게 연기를 못하니 도리어 수상해 보인다.
그렇기에 나도 천사를 빠르게 보내고 싶었다.
사실 천사가 연기를 못할 거란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평소에 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니까.
노래가 흘러가며 천사는 사라지고, 나는 배웅하려던 그때.
- …always love youuuu…↘↘
노래가 갑자기 늘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천사의 얼굴을 보니 본인이 노래를 끈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내게 당황한 목소리를 소식을 전했다.
아주 놀라운 소식을.
“방금 연락이 왔는데… 찬영님을 데리고 천계로 올라오라는데요?…”
“뭐?”
< 24화 >
이루지 못한 것이 산처럼 쌓인 한 많은 삶.
안식을 얻다…
그래도 천국 정도면 성공한 인생 아닌가?
천국에 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사람이 차고 넘치는데.
당연하지만 진짜 죽은 건 아니다.
천국에서 볼일이 끝나면 다시 지상으로 내려갈 것이다.
이제는 관광하는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천국에 올라온 것은 색다른 경험이니까.
“후아아아아… 찬영님이 눈치가 좋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은 지금이 처음이에요오… 진짜진짜진짜 다행이다…”
“뭐어. 그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려나? 찬영이 잘 대처했지. 고맙게도.”
그래서 천국을 직접 올라온 내가 말해주자면, 생각보다 천국은 별거 없다.
천국의 묘사는 간단하게 한 줄로 설명하겠다.
다른 엄청나게 중요한 얘기가 있으니까.
“아니 잠깐, 따지고 보면 이 일도 찬영님이 눈치가 좋아서 발생한 일이 아닌가요?… 으으…”
“애초에 내가 눈치챌 원인을 만들면 안 됐지… 미안해. 역시 이건 내 잘못인 것 같아…”
“아…아니에요! 선배님! 선배님은 아무 잘못 없어요! 다 제가 못나서…”
천국.
무지개 떠 있고, 구름 떠 있고, 커다란 건물 있으며, 날개 달린 (남자)천사들이 파리마냥 돌아다닌다.
끝.
그럼 중요한 얘기가 뭐냐고?
당연히 여자 얘기다.
눈앞의 내 취향의 한가운데에 적중하는 누님을 살펴보자.
우선 가장 눈에 띄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금발.
머리카락이 길면 그 끝이 갈라지며 상하기 쉽고, 또 윤기가 사라진다.
단발의 여성들의 머리에 유독 생기가 있어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이 비단 같은 머릿결은 그렇지 않았다.
결은 결대로 엉키지 않고 살아있으며, 손에 머리칼을 쥐었다 놓으면 손바닥에 꽃향기가 남아있을 것 같은 압도적인 비주얼이다.
과연, 인간이 아닌 천사인 것을 실감하게 된다.
피부가 희다.
단순히 희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마치 가재들이 뛰노는 맑고 깨끗한 개울물을 보는 것 같은 피부.
스트레스와 피부 트러블과는 다른 세상,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은근 대담하게 앞섬을 노출한 상의의 틈 사이 보이는 가슴은…
내 빅데이터에 의하면 저건 D컵이다.
꽉 들어찬.
가슴의 모양을 잡아주는 브래지어가 없음에도 저렇게 아름다운 형태를 유지하는 가슴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내 보잘것없는 손에 저 가슴을 담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분명히 믿을 수 없는 탄력을 보일 것이다.
솔직히 나는 얼굴의 미(美) 중, 80% 이상은 눈이 얼마나 예쁘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못생겨도 눈이 이쁘면 괜찮다는 평을 듣고,
아무리 예뻐도 눈이 못생겼으면 별로라는 평을 한다.
그래서 이분의 눈이 어떻게 생겼냐고?
5,700자 이상으로 구구절절하게 표현하고 싶지만, 참겠다.
그저 하늘을 그대로 담은 듯한 푸른색을 띤 빠져들 것 같은 눈이라고만 말하겠다.
금빛의 기다란 속눈썹과 작고 앙증맞아 손가락으로 쿡 눌러보고 싶어지는 코.
손으로 흩으면 생크림 케이크처럼 뭉개질 것 같이 부드러워 보이는 볼에는 미소를 지을 때마다 보조개가 드러났다.
나는 여자가 웃는 모습이 좋다.
특히 저렇게 단아한 입술을 가진 미인이 호선을 그리면 보는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하다못해 팔다리의 길이, 굵기, 형태마저 무엇 하나 흠을 잡을 수 없었다.
사소한 것까지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난 이분이 ‘천사가 아니라 사실은 미의 여신이었습니다’라고 해도 놀라지 않고 믿을 것 같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금발 벽안의 미녀.
그냥… 그냥…
한마디로 개쩔었다.
아까 지상에서 농담으로 생각한 요청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싶다.
제발 담당 천사 이 분으로 바꿔주세요…
“천사야.”
“네?”
“너 커서 이렇게 돼라.”
“헤헷! 찬영님도 선배님의 훌륭함을 눈치 채셨나 봐요? 저도 선배님이 저의 롤 모델이에요! 꼭 선배님처럼 훌륭한 천사가 될 거예요!”
“그래… 반드시 그래야 한다…”
“뭐…뭐야, 눈앞에서 그렇게 칭찬해대면 부끄러운데…”
스윽…
살짝 붉어진 얼굴로 머리를 귀 뒤로 넘긴다.
그 덕에 지금껏 머리로 가려진 가느다란 목선이 약간 드러났다.
새하얗고, 가냘픈.
저거 알고 하는 거지!
지금 나 유혹하는 거 맞지?!
눈나 나 쥬지가 이상해…
아니, 농담이 아니라 방금 목선 때문에 진짜 커졌다.
시발 눈치 채이면 좆되는 거 아니야?
나는 티가 나지 않게 허리를 앞으로 굽혀서 최대한 발기를 숨기고자 노력했다.
“아기천사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엄청 믿음직스럽고, 똑똑하신 선배 한 분이 계신다고.”
깜빡깜빡!
내 말을 들은 천사의 눈망울이 나를 향해 깜빡거리더니, 곧이어 보기 좋은 웃음으로 바뀌었다.
“아하하핫! 엄청 웃겨! 찬영은 매번 그 말로 나랑 대화를 시작하는구나?”
“매번?… 저를 알고 있나요? 제 생각에는 초면인 것 같은데…”
내가 이름을 알려주기 전에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놀랍지 않다.
아기천사의 상담을 받으며 내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는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그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그녀를 한번 본 뒤 잊었을 리는 없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예쁜 여자에 대해서는 절대로, 절대로 잊지 않으니까.
“허억! 설마 나를 잊어버린 거야? 찬영! 실망이야… 흑흑…”
갑자기 그녀가 깜짝 놀란 몸짓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손등을 눈에 대어 우는 척을 했다.
우는 것이 아니라 우는 척이다.
깜짝 놀란 몸짓도 너무 과장되어서 연기인 것이 확실하게 티 났다.
아기천사가 연기를 못하는 건 그 선배에게도 원인이 있나 보다.
‘…왜 저런 삐그덕 거리는 몸짓 하나하나가 전부 귀여울까?’
음…
귀여운 건 귀여운거고…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 거지?
“어… 그… 죄송합니다?…”
“푸훗… 푸하하! 그리 어색하게 받지 마! 내가 이상해 보이잖아?”
찰싹!
아담한 손이 내 어깨를 아프지 않게 치고 지나간다.
후…
안타깝다.
그녀는 세계를 뒤흔들 미모를 가졌지만, 그에 어울리는 청초한 성격은 가지지 못했나 보다.
방금의 행동과 말로 그녀의 성격을 유추해보자면… 그녀는 약간 사차원이었다.
그래도 괜찮다.
극도의 얼빠인 나는 예쁘기만 하면 별난 성격 정도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녀 정도의 외모면 차원을 위태롭게 만들어도 용서할 수 있다.
“으으… 표정을 보니 여기서 더 놀리면 정말로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오해하겠네… 알겠어. 궁금해하던 것 말해줄게!”
내가 궁금해하던 것?
“응! 내 후배한테 들었겠지만… 찬영 때문에 시간을 돌린 적이 있다고 했지?”
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나를 왜 알고 있는지.
시간을 돌리기 전, 나는 지금 백하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 새끼를 족치기 위해 SNS 테러, 대학교 내 정치 등 수많은 시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번 성공해 시간을 돌렸고.
내겐 기억이 없지만, 아기 천사는 시간을 돌리기 전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었다.
아기천사의 선배인 그녀가 기억이 없으리라 생각하긴 힘들었다.
그리고 시간을 돌릴 정도의 일이면 분명 그 원인이 되는 내가 이 천계에 한 번 이상 올라온 적이 있었겠지.
정말로 나를 만난 적이 있구나.
과거? 미래? 아무튼 시간을 돌리기 전에.
“와. 한마디만 했는데 전부 깨달은 거야? 하긴, 이래야 내가 아는 찬영이지.”
“저랑… 과거에 친했습니까?”
“친하냐고오? 글쎄에에… 음…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해도…
나는 기억이 없으니 잘 모른다.
하지만 그녀와 나는 친하게 지냈을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다.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나였다면 분명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 했을 테니까.
“모르겠어? 힌트… 줄까? …적어도 이런 장난 할 정도의 사이였다? 에잇!”
와락!
“!!”
깨달았을 때는 내 품에 그녀가 안겨있었다.
내 키가 작아 그녀가 내게 안겨있다기보다는 내가 그녀에게 안겨있는 모양새였지만, 내게 안겨 온 것은 확실히 그녀였다.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살결과 살결이 닿는 부분이 부드럽다.
너무나 달콤한 향기가 난다.
나는 전혀, 정말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표정 관리가 완벽히 깨지고 말았다.
“아…”
곧 그녀가 내게서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아쉬운 마음에 탄식을 뱉고 말았다.
포옹은 1초가 약간 넘는 순간에 불과했지만, 너무나 강렬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아하하핫! 이상한 얼굴! 찬영의 당황한 표정은 진짜 보기 힘든데, 이것만으로 시간을 돌릴 가치가 있다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요… 으으… 그 현명하던 선배님은 어디 가고 이런 얼빵한… 이래서 찬영님을 선배님이랑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라고요… 왜 선배님은 찬영님 앞에만 서면 이렇게…”
“엄청 반가워서 그래! 나도 후배 앞에서는 편하게 대하잖아?”
“몇십 년을 함께 손발 맞춰온 후배보다, 일수로만 따지자면 며칠 안 지낸 사람을 더 좋아하면 제가 무슨 심정일까요!”
“그…그렇지 않아! 나는 둘 다 똑같이 좋아해!”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린가요?…”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그녀와 나의 사이는 좋았나 보다.
방금 건 손에 꼽을 정도로 친한 이성 친구가 아닌 이상, 할 수 없는 장난이다.
사람과의 관계 중 내가 주도권을 빼앗긴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상상치 못한 의표를 찔린 덕에 완벽히 당했다.
그것도 아주 기분 좋게.
“그러고 보니 저는 천사님의 이름을 모르네요. 실례가 안 된다면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아! 설마 우리 아직 통성명도 안 했었어? 우와… 새…생각해보면 찬영 입장에서는 이름도 모르는 초면의 상대가 친한 척 하며 안긴 건가? 내가 너무 신냈네… 으으…”
“선배님은 그걸 지금 눈치채신 건가요… 하아…”
이 사람이 정말 아기천사에게 조언을 해줬던 선배가 맞나?
내 머릿속을 전부 꿰뚫었기에 분명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쪼…쪽팔려…”
머리를 감싸고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다.
“으으… 나는 찬영의 담당 천사의 파트너인 안젤리야. 미안, 당황했지? 너무 반가워서 그랬어…”
“반갑습니다. 안젤리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어?… 어라? 어라아?… 어… 잘… 잘 부탁해…”
안젤리에게 편하게 말을 놔도 그녀는 반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극존칭을 사용했다.
나를 당황하게 한 것을 약하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녀의 기억 속, 나는 편하게 말을 주고받는 친한 상대였을 것이다.
그렇게 일방적인 친밀감을 보낸 상대가 본인에게 거리감을 느끼며 극존칭 대우를 하자 약간 충격받은 눈치다.
“어… 어떡하지?… 후배야… 분명 지난번과 지지난번에는 내 이름을 안 뒤부터 편하게 반말을 했는데… 왜 이번에는?…”
“…아까 선배님 스스로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찬영님은 선배님이 초면이라고요?… 그렇게 스스럼없이 장난치면 당연히 부담스럽죠…”
“역시 그렇지?! 으아… 망했어… 딱 5분만 시간 돌릴까?”
“천사장님이 그런 이유로 시간을 돌리겠다는 걸 허가해 줄 리가 없잖아요!”
“알아… 나도 그냥 해본 말이야…”
표정이 휙휙 바뀌는 게 보는 맛이 있다.
어떤 표정을 하더라도 아름답기에 더욱.
장난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안젤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기껏 그녀가 내게 품은 호감이 줄어들 수도 있으니까.
“안젤리? 이렇게 말하는 게 더 편한 거야?
“앗! 그…그렇긴 한데… 억지로 할 필요는…”
“나야 편하게 얘기하면 좋지 뭐.”
“…그래?”
풀 죽어 있던 안젤리의 얼굴에 화색이 깃든다.
그녀는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방금의 사건 때문에 내게 쉽게 말을 건네지 못하는 듯했다.
방금처럼 과도하게 친한 척을 하면 내가 싫어할까 봐 명백히 조심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렇게 나의 눈치 보고 있는 안젤리를 감상하는 것도 좋았지만,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를 위해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주기로 했다.
“아기천사와 너는 선후배 관계인 거야?”
“앗! 으응! 사수와 부사수, 선배와 후배, 파트너와 파트너… 그런 관계야!”
“그럼 서로 가끔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 다시 한번 잘 부탁해.”
“나야말로 내 후배 잘 부탁해! 가끔 잔 실수가 있긴 해도… 귀엽지 않아? 히히”
안젤리는 내가 말을 걸어줘서 기쁜지, 해맑게 웃음 지으며 아기천사의 빵빵한 볼을 잡아 늘였다.
아기천사가 그리 싫어하지 않는 것을 보니 서로 간 자주 했던 애정표현의 일종인 것 같았다.
“스…슨부에늼!…”
그러나 내 눈에는 아기천사가 보이지 않았다.
장난을 치며 순수하게 웃는 안젤리가 미치도록 귀여웠다.
핸드폰이 있었다면 쪽팔림과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네가 웃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도 괜찮냐고 허락을 구해버렸을 정도다.
“응! 귀여워! 엄청 귀엽다!!”
“봐봐! 네가 말한 것과 달리 너를 좋아하잖아? 평소에 장난이 많은 건 찬영의 짓궂은 애정 표현인 거야. 방금 귀엽단 말에 얼마나 진심이 듬뿍 담겨있는지 너도 알았지?”
“그으으… 즈브그 흔 믈이 으닌 긋 긑은드…”
해석하자면 ‘저보고 한 말이 아닌 것 같은데…’다.
볼이 잡혀 아기 천사의 말이 늘어진 것이 다행이다.
덕분에 안젤리가 알아듣지 못했으니까.
터벅터벅.
아.
미녀와 친분을 쌓는 것에 비하면 별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지금 우리는 안젤리의 안내를 받으며 회의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처음 천계에 도착해 긴장해 있는 내 앞에 안젤리가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표정을 굳힌 내게 불이익은 없을 거라며 안심시켜주었다.
그 덕에 지금 나는 크게 걱정을 하고 있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다.
아기 천사가 전력을 다해 막은 덕에 발언도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단순히 추측뿐인데, 그 정도 가지고 벌을 받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천국에서.
‘무엇보다…’
대화가 통하는 상대면, 스스로가 호구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오히려 내가 호구를 잡았으면 잡았지.
< 25화 >
“아까 네 후배한테 조언을 해준 것도 안젤리 너야? 나름대로 머리 굴린 건데, 다 들켰나 보네.”
“쿡쿡! 찬영은 항상 그런 잔꾀가 많으니까! 그래서 재미있단 말이야? 원래 몸의 주인이던 박찬영 말고, 네가 우리가 만든 시스템을 가져가서 좋아!”
“…크흠… 좋게 봐주니 고마워. 최근 나도 생각보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몸이 바뀐 것이.”
“헉! 그러고 보니 몸이 바뀐 건 너한테 별로 좋은 얘기가 아니었지?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니까… 미안해… 내가 배려가 없었네…”
“하하! 아니야. 나도 이제 와선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대부분이니까. 주로 안젤리 네가 열심히 만들어 준 이 시스템 덕에.”
“마…마음에 들어? 그치? 엄청 열심히 만들었다?”
“쓰면서 확실하게 느꼈지. 네 후배한테 귀띔으로 들었는데, 제작하는 과정이 전혀 평탄치 않았다던데?”
“맞아 맞아! 정말, 말도 못 한다니까! 무슨 일이 있었냐면…”
나는 최대한 집중해서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목표는 오로지 안젤리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다.
어떻게 하면 끊김 없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
간단하다.
상대방의 말 중, 새로운 정보를 잡아낸 뒤 그것을 이용해 새로운 화재를 이끌어나가는 것을 반복하면 된다.
예를 들어 방금 안젤리가 한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라는 말에서 ‘시스템을 만드는 과정’같이
이렇게 한 번의 끊김도 없이 대화를 이어나가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맞는다’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돌려지기 전에도 이런 식으로 안젤리와 친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상대방이 노력한 것, 시간을 쏟아가며 이룬 것을 칭찬하면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공부가 특기인 사람에겐 ‘어! 내 친구도 그 자격증 시험 봤는데! 올해 유독 시험이 어려웠다고 엄청 앓는 소리 하더라고. 와… 나는 다들 어렵지 않게 따는 한국사 자격증 취득에도 애먹고 있는데, 대단하네!’라며 가벼운 칭찬을.
운동선수에겐 ‘그 운동 종목은 트레이닝할 때 주로 어떤 종류를 하나요?? 역시 하체? …오! 대퇴직근이라면, 허벅지 쪽 근육이 맞죠? 예상이 맞았나 보네요! 사실 요즘 저도 헬스장 가서 하체 단련만 죽어라 하고 있거든요. 실례가 안 된다면 조언 좀 구해도 될까요?’라며 상대의 전문지식을 뽐낼 기회를.
글 쓰는데 지친 작가에게는 ‘작가님 재밌어요!’라는 선플을… 이건 아닌가?
어쨌든.
중요한 건 칭찬을 하는 도중에도 나와의 공통점을 찾아 엮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상대방이 자세하게 알고 있는 전문 분야를 흥미 있다는 듯이 들어주면 그것만으로 호감이 팍팍 쌓인다.
지금처럼.
“…어떻게 하겠어? 고치라는데 고쳐야지… 그렇게 95% 이상 완성된 시스템을 이거 변경해라, 저거 바꿔라, 7번이나 뜯어고친 끝에 하는 말이 뭐였는지 알아?”
“뭐였는데??”
“그냥 처음에 만든 거로 하자더라고! 믿을 수 없지 않아? 나랑 후배가 몇 달간 밤새워가며 일한 결과물이 쓰레기통에 박혔을 때의 상실감은…! 으으…”
“…세상에… 내가 천국을 욕하자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분은 유달리 까다로운 것 같네…”
절레절레…
나는 질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직접적으로 그녀의 상사를 욕하면 혹시라도 불쾌해 할까 봐, 표정으로 욕을 대신했다.
그 왜, 내가 나의 동생이나 형·누나를 욕하는 건 괜찮지만, 남들이 욕하는 것은 불쾌하지 않은가?
설령 내가 먼저 욕하기 시작했더라도 미묘하게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다.
굳이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아도, 표정으로 욕을 하면 충분한 호응이 된다.
“정말! 해도 너무했어!”
끄덕끄덕!
과연 표정만으로 나의 의도가 충분히 전해졌는지, 안젤리는 흥분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느끼는 건데… 찬영님이 이렇게 친화력이 좋은 분이셨나요?…”
“아니, 나도 이런 적은 거의 없지! 그냥 안젤리와 마음이 잘 맞는 것 같아.”
솔직히 평범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비위를 맞출 수 있긴 하다.
그러나 안젤리가 우리의 대화를 똑똑히 듣고 있다.
첫 만남부터 내게 친밀감을 팍팍 느끼고 있는 안젤리다.
여기서 더 친해지기 위해서…
안젤리 본인만이 나를 특별하게 여기는 것이 아닌, 나 또한 안젤리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음을 어필했다.
뭐, 지금 당장은 특별하게 여긴다고 한들 고작 ‘마음이 잘 맞는 친구’ 정도 겠지만…
작고 작은 호감이 쌓여서 애정이 되는 것이다.
남녀 사이의 영원한 우정?
그딴건 없다.
“그치? 신기해! 누군가와 이렇게 빠르게 친해진 적은 처음이야! 천사들이랑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왠지 모르게 안젤리와의 잡담은 재밌는 느낌?”
“맞아 맞아! 뭔가 찬영과의 대화는 즐거워! 으, 이 느낌이 그리웠어… 찬영이랑은 대화할 기회가 엄청 적었단 말이야…”
신나하는 안젤리를 보자 집중해서 대화를 유도한 보람이 있는 듯 해 가슴이 뿌듯해진다.
머리가 좋은 것과 별개로 천사들은 다들 순수한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만나본 천사들은 그랬다.
“…찬영님… 왜 선배님에게는 평소의 저를 대하듯 하지 않으신 건가요? 저는 맨날 괴롭히고, 놀리고, 화나게 만들면서! 제게도 방금처럼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에이, 아까 내가 말했잖아! 찬영이 너한테 장난을 치는 건 애정표현이라니까? 그렇지 찬영?”
“하하핫!”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웃음으로 넘겼다.
미안하지만 나의 친절함은 여자 한정이다.
아기 천사의 평등한 대우를 해달라는 요구는…
미래에 안젤리처럼 입이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 천사가 되는 날 고려해주도록 하겠다.
“곧 회의장 도착이야! 찬영은 인간이니까 고상한 예법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상식상의 행동을 한다면! 찬영은 똑똑하니까 무슨 뜻인지 알지?”
“응.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게. 안내 고마웠어 안젤리.”
“내 일인데 뭘. 헤헤. 들어가면 딱 봐도 높아 보이는 천사들이 질문을 할 거야. 결과가 나쁘더라도 찬영을 해치기 위한 게 아니니까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말아줘… 찬영을 천계로 부른 이유는 찬영을 지키기 위함이니까.”
“혹시 안젤리도 같이 들어가?”
“나도 관계자이니 같이 들어갈 거야. 물론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지만… 그래도 지켜보고 있을게. 힘내!”
나를 보고 작게 웃는 안젤리.
솔직히 말하자면 안젤리와 내가 연인이 될 확률은 어마어마하게 낮을 것이다.
그녀는 천사고 나는 인간이다.
신분과 종족의 격차 이전에 그녀와 나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나 멀다.
지상과 천계.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오늘이 지나면 만나는 건 고사하고 대화조차 나눌 기회가 거의 없겠지.
아까 그녀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와 대화할 기회가 적다고도 했고.
하지만 만나지 못한다고 한들, 나와 안젤리 사이에는 아기천사라는 고리가 있다.
또한 아기천사가 놀러 오듯 지상에 나타나는 걸 보면…
천계와 지상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오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떡각이 1%라도 있는 한, 내 전력을 다해 시도할 것이다.
실패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것도 아닌데, 시도 안 하면 병신이다.
탁!
안젤리가 움직이던 발을 멈추었다.
딱 봐도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방의 앞에서.
“여기가 회의장이야. 내가 먼저 들어갈게.”
끼이이익…
안젤리는 내 키의 세 배가 넘는 거대한 크기의 문을 힘들이지 않고 열었다.
그녀가 강한 건지, 문에 마법적 조치가 되어 있는 건지 몰랐지만, 내게 깊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안젤리가 망설이지 않고 걸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저도 선배님 곁에 있을게요. 따라 들어오시면 돼요.”
이어서 아기천사가 그녀의 뒤를 따라가자, 나도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터벅. 터벅.
회의장 내부는 밝았다.
중심에 거대한 원형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고, 그 주위를 빼곡한 의자가 둘러쌌다.
저 외각의 빼곡한 의자들이 객석인가보다.
“천사장님. 인간 박찬영이 도착했습니다.”
안젤리가 공손히 나를 소개했다.
그녀가 말한 ‘딱 봐도 높아 보이는 천사들’을 향해.
건물 밖에서 봤던 남자 천사들과 안젤리들은 모두 한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 두 쌍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안젤리가 ‘천사장’이라고 부른 인물은 4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8장의 거대한 날개를 달고 있으니 겁나게 높아 보인다.
어렴풋이 휘광 같은 것도 보이는 것 같고.
‘근데 왜 다 고추밭이냐. 젠장.’
고위 천사라길래 혹시 여자면 안젤리보다 예쁘려나, 기대 좀 했더니 아주 대차게 배신당했다.
맨 앞의 천사도 남자. 두 번째 천사도 남자. 남자. 남자…
거의 남자밖에 없었다.
남자와 여자의 성비가 9:1의 수준이었다.
젠장.
‘천사’ 하면 균형의 수호자잖아?
그럼 성비의 균형도 맞춰야 하지 않나?
그러고 보니 건물 밖에서도 안젤리를 제외하고는 여자 천사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파리처럼 날아다니는 것들은 전부 남자 천사였지.
나는 천계에서도 남자 천사들만 외근직 돌리고, 여자 천사들은 내근직으로 꿀 빠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라 그냥 여자 천사 자체가 적나 보다.
평소에 여성 할당제는 병신같은 소리라고 생각해 온 나다.
그런데 이곳에는 좀 필요할 것 같다.
주로 내 안구 건강을 위해.
Comentários
Postar um comentár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