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2

뜻인가요?”
“제 신체를 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벌레잡이로 빠질 수 있었어요. 하지만 강인씨 덕에 검사원이 귀띔해 준 ‘전투직’을 하기로 했죠.”
“저의 덕이요?”
전혀 짐작 가는 것이 없다는 표정이다.
아직 내 말을 완전히 믿지 않고 있었다.
작게 호흡을 가다듬은 뒤.
본격적인 연기를 시작한다.
나를 향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 그를 속여야 한다.
“강인씨는 저와 상반된 사람이잖아요. 키 작고, 못생기고, 뚱뚱한 저와 완벽한 반대죠.”
“…으음 그건…”
“억지로 부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이니까요. 그보다… 평소 저는 외적인 부분은 몰라도, 머리와 정신력만은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자만해 왔어요. 아직 이룬 것은 없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두각을 보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이건 지구에서 미리 생각해 둔 스토리다.
정교함을 더하고자 몸이 바뀌기 전 그 새끼의 이야기를 섞었더니, 금방 그럴싸한 사연이 만들어졌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느끼면 안 돼.’
대화 상대에게 진심이 와 닿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생각한 정답은 이것이다.
- 후우…
기나긴 말을 하기 위해 잠깐 숨을 고른다.
곧, 그와 나 사이에는 오롯이 내 목소리만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구에서 전… 갑작스러운 상황에서의 대응에 나름 자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 모두가 당황할 때, 저만은 이성적일 거라 생각해왔죠.”
이강인과 마주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몸을 돌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초점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빈 허공이지만, 보이지 않는 풍선이라도 떠 있다는 듯 그곳을 응시해 바라보았다.
거의 노려보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그러나 조금 전. 실제로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 제가 어땠을까요?”
어떤 이는 상대방에게 진심을 전할 때, 눈을 본 채 말을 하라고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했을 때만이 효과가 있다.
“주변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공황했고, 패닉 했으며, 비이성적이었죠. 그리고 침착해 보이는 강인씨가 눈에 들어왔고, 깨달았습니다.”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대략 1M 남짓.
친분이 없는 사이인 상태에선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어째서냐고?
피아가 구분되지 않은 대상이 나를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거리에 들어와 있음에서 오는 유전자에 각인된 위기본능.
그것이 불편함이라는 생체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아. 나는 평범한 사람이구나. 남다를 것이라 자부했던 내 지성은… 남들과 전혀 다르지 않구나. 근거 없는 자만에 불과했구나.”
이 상태에서 그와 눈을 마주한 채 이야기한다면 어찌 될까?
올곧은 시선과 단호한 말은, 무의식에서 본인이 공격받고 있다고 느껴버린다.
“강인씨야 말로 평소에 제가 상상하던 제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누구보다 정확하게 상황을 분석하는. 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죠.”
생각해 봐라.
초면인 사람이 코앞에서 단호한 어조로 말을 하면, 왠지 불편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기에 절대 언어에 담긴 뜻 그대로를 수용하지 못한다.
“제가 상상하던 저 자신은 허상이었습니다. 제 실상은 남들과 같은 정신력에, 남들보다 못한 육체를 가진 머저리였죠.”
지금은 다른 곳을 응시하며 다짐하듯 내뱉는 것이 더 좋다.
나랑 그는…
친하지 않으니까.
“부끄럽지만… 패배감을 느꼈습니다. 저보다 월등한 외모에, 월등한 정신력을 가진 강인씨에게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약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치 자책을 하는 것만 같아 보이도록.
“그래서 억지로 발악했습니다. 일부러 평소라면 하지 않을 선택을 했습니다. …‘전투조’에 지원하는 것 말입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찬가지로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지금의 나는 ‘쪽팔림 때문에 도저히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있음’을 연기해야 했다.
“누군가는 반발심에서 기인한 합리적이지 못한 선택이라 할지도, 강인씨를 향한 패자의 아집이라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잠깐의 망설임.
후에 이어질 말에 청자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기초적인 화술이다.
뻔하지만, 그만큼 뚜렷한 효과를 보이기에 남용하지 않도록 주의해가며 사용하곤 한다.
“…그대로 패자로 남기는 싫었습니다. 힘겨운 일에 눈 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여태까지 그래 왔듯 망상만 하는 것이 아닌, 직접 손과 다리를 움직여 움켜쥐어 보고 싶었습니다. 비록 실패한다고 해도요.”
목소리에 실린 힘을 차근차근 높이기 시작했다.
이강인을 바라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일방적으로 쏟아 내는 말을 무언가에 홀린 듯 듣고만 있었다.
“저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제게 있어 강인씨는 경쟁자입니다. 언젠가 이겨야 할 대상이죠.”
기나긴 나의 말이 슬슬 끝을 보여왔다.
다행히 이강인은 분위기에 잘 휩쓸려 주었다.
그는 중간에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경청했다.
고맙게도.
“그래서 강인씨와 친해지고 싶었습니다. 지금 제가 강인씨를 질투까지 하는 건 너무 꼴사납잖아요?”
말을 끝맺으며 고개를 돌려 이강인을 바라봤다.
미간은 살짝 모으고, 눈은 의식적으로 크게 뜨며, 입술은 끌어 올려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보인다.
고개를 약간 들어 햇빛을 받아 얼굴 굴곡의 음영을 지웠다.
거울을 보며 연습하던 ‘자신감 넘치는 표정, 야외버전’이다.
‘하나. 둘. 셋.’
“앗!…”
속으로 3초를 센 뒤,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정신이 든 척을 하며 놀란 얼굴을 했다.
“…아… 저를 전혀 모르실 텐데, 너무 갑작스럽게 제 얘기만 했네요!… 재미없으셨죠? 공감도 하나 안되셨을 테고. 불쾌해하셔도 제가 할 말이 없네요…”
“아! 아닙니다! 전혀!”
“죄…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쌓인 말이 막 나와버려서…”
나는 횡설수설 변명하는 척을 했다.
일부러 어색한 표정을 지어냈고, 당황한 척 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원래 이런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감정이 격해져서…”
“좋은 이야기를 들었네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왠지 저까지 의욕이 샘솟는 기분입니다.”
“하아… 정신이 드니 엄청나게 쪽팔리네요.”
“하하하하! 창피할 것 없습니다! 제 눈에는 보기 좋았어요. 하하하!”
나는 쪽팔려서 열이 오른 척 얼굴에 손부채 질을 했다.
동시에 냉철하게 이강인의 표정을 읽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웃음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첫 만남과 달리 그의 표정은 한결 시원해 보였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한 꺼풀 벗겨 낸 듯한 모습이다.
마치, 해가 진 깊은 산 속을 혼자 거닐 때.
뒤쪽에서 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긴장한 채 가려진 수풀을 걷었더니…
귀여운 새끼 토끼가 낸 소리란 걸 보고, 귀신이나 맹수인 줄 알고 긴장한 자신이 우스워 웃는 것 같았다.
…성공했나?
“…내가 과거와 달리 당황하지 않았기에…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였군… 나비효과인가…”
“예? 뭐라고 하셨죠?”
“아! 아닙니다.”
성공 했군.
이 육체는 청력이 좋다.
지금은 못 들은 척해야 하지만.
열심히 연기한 보람이 있다.
‘이걸로 의심은 사라졌겠지.’
이강인이 회귀하기 전에도 전투직이었다.
회귀 전, 그가 있던 훈련소에 내가 있을 리 없다.
나는 소설에 난입한 이방인이니까.
내 몸은 안 좋은 의미로 무척이나 눈에 띄는 몸이다.
초고도비만에, 키는 무척이나 작은 단신이다.
이런 특이사항을 가진 인간을 한번 보면 쉽게 잊을 리 없다.
그건 주인공도 마찬가지가 분명하다.
회귀 전.
자신이 같이 훈련한 훈련생 중, 없던 사람이 생겼다?
그것도 저런 눈에 띄는 사람이?
당연히 의심이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속인 것이 바로 그 이유다.
열심히 대가리 굴려 만들어낸.
이강인도 회귀 전에는 처음 이 세계로 전이했을 때 엄청나게 혼란스러워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와중, 단 첫날에만 볼 수 있는 다른 직군 배정자의 얼굴을 모두 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3달간 함께 먹고 자며 훈련할 예비 전투직들이라면 몰라도.
그렇기에 이강인은 전 회차의 내가 벌레잡이를 했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끔 유도했으니까.
“강인씨는 제 은인이죠. 저를 망상에서 현실로 일깨워주셨잖아요. 자의가 아니라고 한들, 감사한 건 감사한 거죠.”
“이거 참, 제가 한 것도 없는데…”
“아니에요. 강인씨가 없었다면 평소처럼 몸이 편한 벌레잡이를 했을 겁니다. 그러면 상위 계급이 될 기회조차 없었을 테고요.”
좋아.
이제는 나를 의심하고 있지 않다고 확신했다.
분명 자신의 행동 탓에 나비효과가 발생한 것이라고 여기겠지.
그의 눈에 나는 내면의 열등감을 이겨내고자 도전한, 의심하기 모호한 사람으로 비칠 것이다.
그런 그의 이어질 행동은 무엇일까?
‘나를 자신의 옆에 두겠지!’
이강인에게 나는 회귀 전과 달라진 첫 번째 이변이니까, 더 이상의 나비효과를 막기 위해 나를 옆에 둘 것이다.
내가 이강인과 따로 행동하다 그가 알고 있는 미래에 변수가 생긴다면?
현명한 사람이라면 분명 그런 일을 예방하고 싶을 것이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왠지 저도 찬영씨가 상당히 친근하게 느껴지네요. 하하!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보도록 하죠!”
“정말입니까? 하하! 다행이네요. 적어도 제 스스로가 꼴사나워지지 않아서.”
“이거 따라잡히지 않게 노력해야겠는걸요? 저를 따라잡는 것, 쉽지 않을 겁니다.”
“쉬울 거라 생각 안 했습니다. 저도 나름 전력을 다해 부딪힐 거라.”
씨익.
역시!
예상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이걸로 최초로 정해둔 목표는 달성인 건가!’
이로써 겉은 서로 간 친분이 있는 관계지만…
이강인은 나의 돌발 행동을 감시하고, 나는 ‘주인공’의 돌발 행동을 감시하는 비이상적인 관계가 완성되었다.
첫걸음이 성공적이다.
“일어서! 이제 출발한다!”
휴식의 끝을 알리는 광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앉아있던 훈련생들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나 또한 발목을 풀며 다시 이동할 준비를 했다.
“찬영씨, 체력이 꽤 남으신 것 같은데… 가는 길에 잡담이나 할까요?”
“저야 좋죠.”
< 8화 >

띠링!   

=   
[퀘스트]  
내용: 친구를 한 명 만드세요!  
보상: 80 카르마.  
실패 패널티: -  
=   

‘친구를 만들라니… 내가 애도 아니고…’

퀘스트 내용에 황당해하고 있을 때, 이 시스템이 몸이 바뀌기 전 박찬영을 위해 만들어졌단 것을 기억해 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유치원생 같은 퀘스트 내용도 이해가 가능했다.
다행히 패널티도 없었고, 내용도 무척이나 쉬운 편이었다.
불만이 있다면 이강인과 친해지기 전에 퀘스트가 나와줬으면 하는 정도.

퀘스트 창을 보며 고민에 잠겨 걷길 몇 분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훈련소에 도착했다.
해는 이미 넘어가는 와중이라 하늘이 붉었다.

쉘터의 외각으로 가면 갈수록 점점 낙후되는 시설과는 반대로, 훈련소의 외관은 의외로 무척이나 깔끔했다.
중앙 지휘소의 합금만큼은 아니지만 잘 마감된 목재를 보아하니 적어도 비바람 맞으며 잘 일은 없을 것 같다.

하긴, 훈련소의 시설이 개똥 같으면 당장 저 지랄 같은 광년이가 가만히 있지 않겠지.
기대치 않던 문명의 편의를 맛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허억… 드디어… 도착…”  
“으… 발에 물집 잡혔어…”  
대부분의 훈련생들은 얼굴이 밝아 보였다.
한참 긴장된 분위기 속에 말없이 걷다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니 긴장이 풀린 듯하다.
무엇보다 드디어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분위기가 좋았다.

소설대로라면 본격적인 훈련의 시작은 내일이다.
나 또한 마음 편히 쉬면서 퀘스트를 깨며 얻은 카르마를 사용할 생각에 가슴이 들떴다.

“오늘은 늦었으니 쉰다! 다섯 명당 하나의 방이다! 룸메이트는 니들끼리 알아서 정해!”
“음… 이강인 훈련생, 잠깐 나를 따라와라.”  
“예.”  
“아, 젠장. 설마 벌써 특별대우? 납득할 수가 없는데.” 

브랙 교관이 이강인을 불러내었다.  
그런 브랙에게 광년이가 불만을 터뜨렸다.  

“그래도 대화가 필요하지. 네가 직접 겪지 않았나? 그의 실력은 진짜야.”
“그래서 뭐.”  
“두각을 보이는, 또는 재목이 있는 훈련생을 선별하는 것 또한 우리의 업무다.”
“…그래 너 일 존나게 잘한다!”  

광년이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짜증이 담긴 시선으로 이강인을 향해 쏘아붙이듯 말했다.

“야 씨발놈. 브랙한테면 몰라도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나대지 말라고. 알아들어?”
“…알겠습니다.”

- 퉷.  

이강인과 광년이 사이의 불화는 익숙지 않았다.  
원작을 달달 외운 내가 시뮬레이션 한 관계는 이렇게 날카롭지 않았으니까.

“…저는 따로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다음에 또 얘기 나누죠. 찬영씨.”
“네. 먼저 들어가세요.”  

브랙이 이강인을 데리고 건물을 향해 사라졌다.
분명 오전에 광년이와 싸운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겠지.

‘젠장…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이강인이 이렇게 따로 교관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본편에 없던 내용이다.
광년이의 마음에 들어서 싸움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큰 변수가 일어나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   

훈련소는 주택가 주변에 있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나무를 베어 튼 숲의 길 끝에 훈련소가 있었다.

밖에서 본 훈련소의 크기는 꽤 큼직했다.
길게 누운 직사각형 모양의 2층 건물.
특이한 구석 하나 없이 흔하게 볼 수 있는 형태였다.

저벅 저벅.   

“하암…”   
“어… 저… 교관님? 저희는…”
“뭔데? 쉬라니까? 왜 안 쉬어?”
“아니… 그러니까…”  
“몰라. 나 퇴근 시간이야.”

광년이는 멍청히 서 있는 우리를 버려둔 채 건물로 들어갔다.
쉬라고 해 봤자, 건물 내부에 존재하는 방이 한두 개도 아닐 테고…
우리는 어디가 숙소인지 전혀 모른다.
쉬라는 말을 들어도 그저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다.

걸어가는 광년이를 붙잡을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그리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다는 것은 훈련생 모두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나는 숙소가 어딘지 알고 있다.
다만 여기서 아는 체 해봐야 수상하기만 할 뿐이니 입을 다물고 있을 뿐.
가만히 기다리면 어차피 알게 된다.

“어… 어쩌지?…”  
“일단 따라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여기서 가만히 서있는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건 없고…”

의견이 하나로 모인 훈련생들은 멀어지는 광년이의 뒤를 따라 발을 옮겼다.
더 멀어져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것 같았기에.

우르르…  

건물 외부는 물론 내부도 깔끔했다. 
주기적으로 청소를 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빨래나 청소, 요리는 누가 하냐고? 
다행히 훈련생이 하지는 않는다. 
이곳에 고용된 인원들이 따로 있다. 

부스럭 부스럭!  

아니나 다를까, 곳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훈련소 내부의 첫인상은…
일단 내부가 청결하다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합격점이다.
무엇보다 내부에 전기가 들어와 있다.
지금 밖은 해가 거의 다 져서 상당히 어두워졌다.
하물며 훈련소에 유리로 된 창은 하나도 없다.
대부분이 환기를 위해 만들어진 나무 창문이다.
원래라면 실내가 밝지 않아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천장 곳곳에는 전등이 매달려 있어 충분히 밝았다.

그렇게 광년이를 따라가며 내부를 구경하던 그때, 그녀가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도 그녀를 따라가 2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엉? 뭐냐? 너네 왜 2층으로 올라와?”
“네? 어… 어디가 숙소인지 몰라서…”
“아! 나 말 안 했어? 여기 건물 전체가 숙소야. 훈련은 죄다 밖에서 하거든. 1층은 훈련생 숙소, 2층은 교관 및 직원 숙소.”
“가…감사합니다.”  
“엉. 다섯 명이서 방 1개 잊지 말고. 아 참, 1층에 식당이랑 목욕탕도 있는데, 그 커다란 식당을 숙소라 착각하고 자는 머저리는 없으리라 믿을게.”

계단 위에 올라선 그녀가 진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내려봤다.

와…   
뜬금없지만, 방금 실감했다.
그녀는 웃으니까 확실하게 미인이다.

심지어 우리는 계단 몇 칸 위에 올라가 있는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 말은 각도상 외모에 너프를 몇 단계는 받는다는 뜻이다.
어떤 영화배우도 굴욕 사진을 피하지 못한다는 존못 각도…
그런데도 광년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마치 후광이 있는 것 같았다.  

‘아!’   

모든 사람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있는 와중, 나는 눈치챌 수 있었다.

‘의도한 건가? 아니면 단순한 우연?’

계단의 중간층.
활짝 열린 나무 창에서 쏟아져 오는 노을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색은 노을을 닮은 주홍빛이다.
그렇기에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실제로는 그저 머리카락이 노을빛을 반사하는 것이었지만, 주홍빛 노을과 주홍빛 머리카락이 어우러져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착시를 일으켰다.존못 각도 따윈 간단히 씹어먹어 버릴 만큼 너무나 몽환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오히려 이런 각도였기에 노을빛에 눈이 부시지 않고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면, 그녀 인생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진을 찍는 것이 가능할까?
계획된 연출이라고 믿는 것이 더 신뢰가 가는 기적적인 우연이다.

몸매는 또 어떠한가?
몸의 가리지 않은 부분이 가려진 부분보다 몇 배나 많은 덕에 그녀의 슬림한 몸매가 전부 드러났다.
측면에서 오는 노을빛 덕에 부드러운 근육의 태가 더욱 부각되어 보였다.

하얀 피부 또한 흉터만 아니었다면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아니, 오히려 몸 곳곳의 흉터가 의상과 어울려 더욱 섹시해 보였다.
남자가 미인에 환장하는 것은 전 세계 공통인 걸까?
그동안 보여준 광년이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남자 훈련생 대부분이 그녀를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솔직히 여자를 밝히는 나도 마찬가지로 그랬고.
꿀꺽…
잠깐의 정적.
그 때문에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는 유독 크게 들려왔다.
게다가 그 소리는 그녀의 귀에까지 닿은 듯했다.
당연한가?
그녀의 청각은 인간의 한계를 훨씬 웃도니까.
광년이는 눈썹을 약간 들어 놀랍다는 듯 우리를 향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호오?”
그리고 장난기 넘치는 미소가 얼굴에 그려졌다.
아…
젠장, 저 표정을 보니 납득을 했다.
어째서 저런 성격에도 그녀가 남자 훈련생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지.
그 정도로 그녀의 표정은 관능적이었다.
남자의 심금을 흔드는 분위기가 이곳에 깔려있었다.
“뭐야, 지금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
그녀의 머리보다 훨씬 붉은 혀가 입술을 흩고 지나갔다.
행동 하나하나, 말투 하나하나 전부 악동 같은 유혹을 담고 있었다.
괴력을 담고 있으리라 도무지 상상이 불가능한 부드러운 손이 천천히 상체를 향해 올라간다.
집중해라 박찬영!!
몸이 바뀌기 전, 나는 시력이 엄청나게 나빴다.
그러나 이 육체의 시력은 무척이나 좋은 편에 속했다.
그렇기에 손쉽게 안력을 끌어올려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
최대한 집중해서 그녀의 가슴 쪽을 바라보았다.

“좋아. 뭐, 나도 그걸 싫어하지 않고.”

새하얀 손이 그녀의 상의에 닿는다.
아니, 상의라고 하기에 저 옷은 너무 노출이 심하다.
배와 허리가 전부 드러난 스포츠 브라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스르륵!  

외출복 보다는 가죽으로 된 타이트한 캐미솔에 가까운 상의.
그녀는 상의를 스스로 들어 올려 자신의 가슴을 내보였다.

“어엇?!”  

스륵!

0.5초쯤 되었을까?
올라간 상의는 곧바로 다시 내려가 가슴을 가리는 역할에 충실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놓친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미리 집중했던 덕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슬림한 몸매에 의외로 볼륨있는 가슴과…

‘피…핑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와…”
“미친년…”
“개 쩐다…”

남자들은 감탄했고, 여자들은 경악했다.
어느 세상에 자신의 가슴을 애인도 아닌 사람에게 자의로 내보이는 여자가 있을까?
그것도 수십 명의 사람을 앞에 두고.
나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기행이다.
광년이라는 별명이 붙는 이유가 충분히 납득할 정도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장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방금의 행동은 놀이에 불과했다는 듯, 열기가 담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2층 왼쪽 끝에서 3번째 방. 나랑 하고 싶은 사람은… 밤에 찾아오던가… 킥!”

저벅! 저벅!

장난스래 혀를 내밀며 우리를 유혹한 그녀는, 마지막 폭탄을 떨군 뒤 유유히 2층으로 올라갔다.
시발…   
섰다.   

< 9화 >
“이봐 찬영. 너는 안 갈 거야?”
“나는 안가.”
블랑 프랑수아.
내게 말을 건 인물이자 오늘 하루 룸메이트가 된 남자다.
성에서 알 수 있다시피 프랑스 태생 22살 청년이다.
“너야말로 진심으로 갈 생각인 거야?”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 법! 세계 어디를 가도 들을 수 있는 유명한 격언이지.”
“정 그렇다면… 행운을 빌어줄게.”
“흐흐흐… 오늘은 느낌이 무척 좋아.”
그 느낌, 별로 믿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런 속내를 숨긴 채로 오매불망 밤을 기다리는 블랑을 딱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내일 아침 위로나 해줘야겠다.
그나저나 블랑이 어디를 그렇게 가려고 하냐고?
당연히 광년이의 방이다.
조금 전 광년이의 충격적인 행동과 발언은, 훈련소 남자들의 마음을 현재 진행형으로 흔들고 있었다.
이것이 함정임을 아는 나조차 혹했을 정도이니 말 다했지.
맞다.
방금 전 광년이의 유혹은 함정이다.
정확히 무슨 함정인지는 내일 아침의 즐거움으로 놔두도록 하겠다.
“그런데 블랑, 우리 친구 맞지?”
“뭐? 한국에는 간지럽게 그런 걸 물어보는 풍습이 있어? 그래도 대답하자면 당연히 친구지!”
띠링!
* * *
[퀘스트] <완료>
내용: 친구를 한 명 만드세요!
보상: 80 카르마.
실패 패널티: -
* * *
빠른 퀘스트 완료에 만족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블랑이 인종차별이나 외모차별을 하지 않는 호탕한 남자라서 다행이다.
‘음… 보답 삼아 지금이라도 블랑을 말려야 하나?’
관두자.
저렇게 들뜬 상태에서 남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지.
괜히 반감만 산다.
어차피 간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그냥 트라우마가 하나 생길 뿐이다.
‘아… 근데 확실히 꼴리긴 하네. 한 발 뺄 수도 없고…’
냉정한 이성과 별개로 나의 양물은 아직까지 건강함을 뽐내었다.
벌써 일이 발생한 지 1시간 가까이 흘렀음에도…
이 몸은 아무래도 욕구가 무척이나 강한가 보다.
물론 나 또한 섹스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렇게 정신과 육체가 환장스러운 콜라보레이션을 일으켜, 한창 뜨거운 속을 달래야 했다.
‘젠장, 자연치유는 이런 것은 어떻게 못 해주나?’
못해주나보다.
1시간째 이 상태인 것을 보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방을 잡았다.
고로 이 방에는 5명의 남자밖에 없었다.
나를 제외한 4명의 남자들은 광년이의 방에 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격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내가 혼잣말을 하더라도 별로 신경을 쓸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
“상태창.”
* * *
[이름] 박찬영
[직업] -
[힘] 4     [민첩] 1
[체력] 2    [지능] 5
[기교] 1    [매력] -23
[특성] 『자연치유』
보유 카르마: 130
* * *
‘보유 카르마 130’을 보자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작 초반퀘스트 2개를 클리어한 보상이다 보니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겠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선은 상점 창을 먼저 열기로 했다.
직접 능력치를 올리는 것보다 값싸게 먹히는 영약 같은 것이 있다면 구매하기 위해서다.
띠링!
[<도움> 전체 상점 창의 길이는 전부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척이나 깁니다! 상단 필터의 <구매 가능한 목록만 열람>항목을 활성화하세요!]
나는 시스템의 권장대로 필터를 한 뒤, 다시 상점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분명 필터를 했음에도 무척이나 스크롤이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주르르륵!
* * *
[소모품 상점]
상처약 [5카르마]
물 1L [5카르마]
빵 2개 [5카르마]
자연산 더덕 [15카르마]
.
[기능 상점]
-구매 가능 목록 없음-
[스킬 상점]
어설픈 칼질 0Lv [10 카르마]
어설픈 창질 0Lv [10카르마]
어설픈 몸놀림 0Lv [10카르마]
.
[기타]
커터칼 [3카르마]
흰 티 [3카르마]
얇은 반바지 [3카르마]
.
* * *
“종류가 왜 이렇게 많아…”
스크롤을 쭉쭉 내려가며 목록을 살펴봤지만, 좋아 보이는 것은 그리 없었다.
싼값의 물건이나 스킬들은 분명하게 하자가 있는 것이 많았다.
특히 스킬의 경우는 설명을 읽어보면…
* * *
[스킬]
이름: 어설픈 칼질
레벨: 0Lv
효과: 칼을 손에서 놓칠 확률이 아주 약간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상세: 어린아이가 할 법한 어설픈 칼질입니다. 도저히 남에게 칼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하지 못할 수준입니다.
가격: 10카르마
[구매하기]
* * *
이런식의 구매 의욕을 떨어뜨리는 수준의 스킬밖에 없었다.
심지어 ‘줄어듭니다.’도 아니고,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다.
이런 곳에 10카르마나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차라리 모아서 한 개의 좋은 스킬을 사는 것이…
“엇!”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다른 목록을 살피던 중, 소모품 상점에서 내 눈길을 끄는 상품 한 가지를 발견했다.
* * *
[소모품 상점]
.
고급스러운 향수 [95카르마]
키 크는 약 [100 카르마]
.
* * *
키 크는 약!
나는 홀린 듯이 그 상품을 터치해 상세 설명을 띄웠다.
* * *
[소모품]
이름: 키 크는 약
레벨: -
효과: 1개월 동안 신장 2cm 상승.
상세: 1개월간 천천히 2cm의 신장을 상승시키는 약입니다. 상체와 하체의 비율이 1:1로 자랍니다. 중첩 가능합니다.
가격: 100 카르마
[구매하기]
* * *
“헉!”
무의식적으로 구매 버튼으로 향하는 나의 손가락을 막았다.
이 신체로 24시간밖에 살아보지 않았지만, 작은 키는 큰 불편함 중 하나가 되었다.
모든 사람을 올려다봐야 하는 행동은 생각보다 자존감을 깎았다.
키가 큰 삶을 살아오다 작아지니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조급하게 결정하지 말자. 일단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이…’
부족한 것은 턱없이 많다.
전체적으로 부족하기 짝없는 스텟, 짐이나 다름없는 살덩이, 작은 키…
마음 같아선 외모부터 전부 뜯어고치고 싶지만, 그러면 미래가 감당이 안된다.
이 세계의 상황이 그렇게 안일하게 행동할 정도로 가볍지 않다.
당장 내일 훈련에 따라가려면 힘과 체력을 올리는 판단이 맞다.
그러나…
“역시 키부터 어떻게 해야돼.”
키를 늘리게 되면 따라오는 이득이 상당하다.
같은 근육량이면 키가 큰 사람일수록 유리하다.
힘의 효율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또한 키를 늘리게 되면 움직이는데 크게 방해되는 살덩이 역시 조금은 들어갈 것이다.
155cm 150kg와 185cm 150kg은 비율부터가 상당히 다를 테니까.
혹시 모르니 [외모 편집]항목에서 즉시 키를 늘릴 경우 어느 정도 카르마가 필요한지 확인해 보았다.
그럴 일은 적겠지만, 약으로 늘리는 것보다 시스템으로 늘리는 것이 카르마가 적게 사용될 확률이 있기 때문이다.
“100카르마에 1cm인가… 약의 효율이 2배 정도 좋네.”
약과 다른 점은, 외모편집으로 키를 늘리게 되면 다리의 길이만 늘이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한 달을 기다릴 필요 없이 즉각적으로 늘어나기도 하고.
큰 매력은 느끼지 못했다.
당장 카르마가 부족한 내게는 1cm가 더 크는 것이 중요했다.
망설이지 않고 [구매하기]버튼을 눌러 약을 구매했다.
턱!
갑자기 내 손에 작은 유리병 하나가 나타났다.
나는 갑자기 나타난 병에 놀라 누가 본 사람이 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그거 분명히 신호라니까? 안 갈 거야?”
“우리끼리 우르르 가서 뭐할 건데? 우리만 올 것 같아? 적어도 10명은 갈 것 같은데…”
“10명이서 한 여자랑… 우웩… 나는 죽어도 싫어.”
“이 세계에서 이번 기회 아니면 언제 여자랑 해보게?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지!”
“난 그렇게까지 굶지 않았어. 내 상식상 여럿이서 그런 짓을 하는 건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
“나도 동의. 가려면 블랑 너 혼자 가.”
다행히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다들 대화에 집중하고 있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재빠르게 병을 열어 내용물을 마셨다.
‘사과 주스 맛…’
한모금 안되는 약을 소리 안 나게 삼킨 뒤, 유리병을 주머니에 숨겼다.
이런 유리병도 이곳에선 흔하지 않은 물건이다 보니 들키지 않게 처리할 필요가 있다.
약을 먹은 뒤, 몸에 변화는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걱정은 없었다.
시스템이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남은 카르마는 30.
혹시 이것으로 스텟을 늘릴 수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카르마가 부족합니다!]
“쩝…”
이 카르마는 아껴둬야겠다.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그나저나 다음 퀘스트는 언제 오지?
빠르게 깨서 팍팍 모으고 싶은데.
아니나 다를까, 이런 생각을 품자마자 바로 다음 퀘스트가 올라왔다.
* * *
[퀘스트]
내용: 일찍 일어나기! 다음날 누가 깨우기 전, 스스로 일어나보세요!
보상: 100 카르마.
실패 패널티: -
* * *
“…”
역시 너무 쉬운 퀘스트다.
일찍 일어나는 것은 일찍 자면 그만인 이야기니까.
심지어 이번 퀘스트를 깨면 키 크는 약을 한 번 더 먹을 수 있다!
나는 만족스럽게 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내게 배정받은 침대… 라고 하기 민망한 목제 가구 위에 몸을 뉘었다.
끼이익!
“뭐야. 벌써 자게?”
“응. 결국, 가는 건 너 혼자?”
육중한 몸무게 덕에 침대가 비명을 질렀고, 덕분에 이쪽을 돌아본 블랑과 눈이 마주쳤다.
블랑은 다른 남자들과 달리 혼자서 옷의 먼지를 털고, 머리를 정리하는 등 아주 부산을 떨었다.
“그렇게 됐어. 나야 반갑지. 여럿이서 하다가 중간에 남자끼리 눈 마주치면 그거만큼 뻘쭘한 일이 없거든.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나는 좋아.”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 대한 친절한 해설 고맙다.
그나저나 단 한 명만 간다니…
의외로 상당히 적은 숫자다.
당장 계단에서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남자 대부분이 달려갈 기세였다.
아마 다들 휴식하며 머리가 식은듯하다.
광년이의 함정에 희생되는 남자가 적은 것은 좋은 소식이다.
희생된 남자 중 블랑이 있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뭐… 힘내봐. 슬픈 일 있어도 기죽지 말고.”
“하하! 까이는 것을 두려워하면 여자를 얻지 못한다고?”
“까이는 것을 말한 건 아닌데…”
어깨를 으쓱여 대답을 살짝 돌린 뒤, 이불을 뒤집어썼다.
퀘스트를 깨기 위해선 일찍 잘 필요가 있다.
다행히 오후 내내 걸으며 운동한 덕인지 노곤한 기분에 휩싸여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 * *
“하아암…”
띠링!
* * *
[퀘스트] <완료>
내용: 일찍 일어나기! 다음날 누가 깨우기 전, 스스로 일어나보세요!
보상: 100 카르마.
실패 패널티: -
[퀘스트]
내용: 아침 산책! 새벽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50M 산책하기.
보상: 50 카르마.
실패 패널티: -
* * *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주위가 어둡다.
전등은 켜지 않았다.
나머지 3명이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랑은… 돌아오지 않았나.”
쯧쯧…
블랑의 침대는 빈자리 그대로였다.
나는 쩍쩍 하품하며 퀘스트 창을 확인했다.
퀘스트가 클리어 됨과 동시에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했다.
잘됐다.
어차피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나서서 퀘스트를 주다니…
끼이익!
침대에 일어나서 건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벽의 찬 공기를 마시고 있으니 정신이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특성의 덕분에 잠은 이미 깬지 오래지만.
아직 어두운 밖을 천천히 걸으며 상점에서 키 크는 약을 다시 사서 먹었다.
100카르마가 날아갔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로써 한 달 동안 총 4cm가 자랄 것이다.
“어디… 눈에 띄지 않는 곳이…”
건물 주변을 돌아다니다 드디어 적당한 곳을 발견했다.
나무와 수풀이 우거져 온종일 그늘진 곳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다가가 나뭇가지로 땅을 조금 파내었다.
곧 작은 웅덩이만 한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곳에다 유리병 2개를 넣은 뒤, 주위에 소리가 퍼지지 않게 큰 돌로 으깨었다.
파삭! 파삭!
곧 유리병은 유릿가루가 되었고, 구덩이에 흙을 메꾸니 감쪽같이 흔적이 사라졌다.
이것으로 유리병의 보유 여부로 쓸데없는 의심을 받을 만한 부분은 사라졌다.
순조롭게 목적을 달성했다.
“좋아… 이제 건물로 들어갈…”
“어? 뭐야. 사람이었어? 야생 동물인 줄 알았네.”
깜짝이야!
1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조차 없었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나를 웃으며 내려다보는 광년이가 보였다.
“여기서 뭐 해?”
< 10화 >
봤나?
유리병을 깨서 땅에 묻는 수상하기 그지없는 행동을…
해가 뜨지 않아 주변이 어두운 것은 도움되지 않는다.
초인에 가까운 그녀는 새벽의 어둠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을 테니까.
“아하하… 그냥 일찍 눈이 떠져서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야야, 그 덩치에 쭈그려 앉아서 흙장난 치니까 진짜 야생동물인 줄 알았잖아. 멧돼지나 뭐 그런… 잠깐, 이 세계에도 멧돼지가 있나?”
“제가 땅을 파는 것을 좋아해서요. 땅을 파며 사색에 잠기면 복잡한 생각도 잘 정리되기도 하고… 하하…”
“그래? 신기한 놈이네.”
다행히 못 본 것 같다.
남몰래 가슴속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광년이에게 트집을 잡히는 것은 정색한 채 사양하겠다.
이렇게 1:1로 대화를 하는 것조차 피곤하다.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싶은 것이 본심이다.
“전 그럼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잠깐.”
“예?”
“너 땅 파는 거 좋아한다고? 잘됐네. 따라와.”
젠장.
붙잡혔다.
광년이는 내 대답조차 듣지 않고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반항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냥 대단한 볼일이 아니길 바라면서 따라가는 수밖에.
얼굴이 죽상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저벅 저벅…
띠링!
* * *
[퀘스트] <완료>
내용: 아침 산보! 새벽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50M 산책하기.
보상: 50 카르마.
실패 패널티: -
* * *
걷는 도중 퀘스트 완료 창이 나왔지만, 지금 당장 카르마를 사용할 순 없었기에 손을 휘저어 시스템 창을 내렸다.
지금 당장은 시스템 창에 신경 쓸 시간이 안 나온다.
띠링!
[<알림> 사용자의 의지에 의해 짧은 시간 동안 시스템 알림이 비활성화됩니다.]
괜찮은 기능인데?
싸우다가 갑자기 시스템 창이 뜨면 방해될 수도 있으니 사용처가 많은 기능이다.
나는 알림창 또한 닫고 걸음에 집중했다.
목적지까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광년이의 걸음이 멈춘 곳은 숙소의 옆에 있는 꽤 널찍한 공터였다.
그곳에는 나무 한 개를 통째로 잘라낸 듯한 나무 기둥 5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아니, 진짜 나무 몸통이 맞았다.
가까이서 보니 줄기가 쳐내진 자국만 있을 뿐, 나무껍질이 벗겨지지 않았다.
“뭐해? 땅 파.”
“예?”
“너 땅 파는 것 좋아한다며. 여기서 실컷 파.”
“어… 저 혼자서요?”
“자. 여기 삽.”
“…”
까라면 까자…
괜히 땅 파는 것 좋아한다고 핑계를 댄 내 잘못이지…
개씨발…
“더. 더 깊이. 좀 제대로 파봐.”
“헉헉… 여기서 더 깊이요?”
“존나 답답하네, 비켜봐! 이렇게 팍팍 파라고!”
나름 열심히 팠지만, 잠깐의 시간 동안 사람 한 명이 팔 수 있는 깊이는 그리 깊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이 답답했는지, 광년이는 나를 옆으로 밀치고는 삽을 뺏어 들어 파내기 시작했다.
퍼억! 퍼억! 퍼억!
어찌나 삽이 깊이 들어갔다가 나오는지, 삽이 땅에 꽂힐 때마다 ‘팍팍’이 아닌 ‘퍽퍽’소리가 났다.
존나게 잘 파네.
나 시키지 말고 네가 좀 파라…
“이렇게! 어? 이렇게! 깨작깨작 파지 말고 시원하게 파란 말이야!”
시발…
그게 하란다고 되냐?
너는 능력치가 되니까 그런 삽질이 가능한 거고.
이런 속마음과 다르게 나의 입은 공손했다.
맞으면 쾌감을 느끼는 특이한 취향의 사람들이 있다던데, 적어도 나는 아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 이제 해봐.”
팍! 팍!
기합이 잔뜩 들어간 척을 하며 손과 삽을 과장되게 움직였다.
사실 흙이 파지는 속도는 전과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보기에는 훨씬 시원시원하게 파는 듯 보였다.
그제야 광년이는 만족하는 눈치였다.
하…
나는 군대를 가 본 적은 없지만, 군대가 어떤 분위기인지 충분히 알 것 같다.
‘지구에선 군대에 가지도 않을 텐데 왜 소설에서 이렇게 고생해야 하느냐고!’
나는 전혀 정상적이지 않은 체질량 지수 덕에 5급 전시 근로역을 배정받았기에 군대에 갈 일도 없다.
몸이 바뀌기 전, 그 새끼가 병역 판정 검사를 받은 것이 천사의 덕에 기억 속 남아있다.
억울해서 미치도록 힘을 키우고 싶었다.
본인이 시켜놓고 정작 자신은 지켜보고만 있는 성질 더러운 년 때문에 더 화가 난다.
‘몇 달 후에 보자… 넌 진짜 가만히 안 둔다…’
“그만!”
“허어억… 허어억…”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결국 내 앞에는 사람이 들어가면 허벅지까지는 빠질듯한 깊이의 좁은 구덩이 한 개가 완성되었다.
그제서야 앉아서 구경만 하던 광년이가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서 일어났다.
“흐읍!”
공터에 나뒹굴던 거대한 나무기둥은 광년이의 기합 한 번에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선 구덩이 앞으로 가더니, 그 나무기둥을 구덩이에 꽂았다.
쿵!
나무기둥은 땅 아래에 1M 이상 내려앉았음에도 높이가 3M는 되어 보였다.
광년이가 구덩이와 나무기둥 틈에 흙을 발로 쓱쓱 밀어 넣기 시작하자, 나도 눈치껏 구덩이의 틈을 메우는 일을 거들었다.
곧 흔들리지 않고 땅에 고정된 나무기둥 한 개가 완성되었다.
그나저나 이 기둥은 어디에 사용하려고 한 걸까?
어디 새로운 건물을 짓는 곳에 사용되나?
광년이는 몇 번 나무기둥을 두들겨 보고선 만족했는지 작게 웃었다.
“흐흐…”
“저… 이제 끝난 건가요? 전 가봐도 되죠?”
안 그래도 없는 체력에 노동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좀 있으면 훈련도 시작할 텐데 벌써 체력을 빼서 괜찮을지 걱정되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아직 새벽이다.
지금부터라도 휴식을 취한다면 특성의 효과로 컨디션을 완벽히 찾는 것이 가능하리라.
…물론 이런 나의 기대를 광년이는 산산이 부숴버렸다.
“끝? 무슨 소리야. 아직 4개 남았잖아.”
“4개요?…”
광년이는 선보인 괴력에 비해 얇고 새하얀 팔을 내밀어 공터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리고 나는 손끝이 향한 곳을 보고선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광년이의 손끝은 아직 나뒹구는 4개의 나무기둥을 가리키고 있었다.
설마 이 짓을 4번이나 더 반복해야 한다고?
“아니죠?”
“맞아. 해.”
설마가 맞았다.
* * *
나는 도합 3개의 구덩이를 판 뒤,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광년이가 발로 내 뱃살을 툭툭 건드는 것조차 반응할 힘이 없었다.
결국 남은 구덩이 2개는 광년이 스스로가 파야만 했다.
진짜 존나게 욕먹은 것은 덤이다.
내가 2시간에 걸쳐 구덩이를 3개 팠는데, 광년이는 단 5분 만에 구덩이 2개를 파내었다.
시발 내 도움 필요 없었잖아.
그냥 남을 괴롭히는 게 취미인 놈이다.
“뭐… 사실 도움은 별로 안 됐어.”
이년은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난 착하니까 보답은 해 주기로 할까? 도와준 대가로 존나 재밌는 것 보여줄게! 지금 훈련생 전부 깨워서 정문 앞으로 집합시켜.”
존나 재밌는 것.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이 일렬로 늘어선 나무기둥 5개의 용도를.
아앗…
툭툭.
“야, 그만 쉬고 일어나. 언제까지 땅바닥에 누워있을 거야?”
“허억… 허억… 알겠습니다…”
진짜 일 시켜놓고 쉬지도 못하게 하네.
개같은 년.
나는 뒤뚱뒤뚱 몸을 일으켜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숙소의 방문을 두드리며 훈련생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똑똑똑!
“교관님이 일어나시랍니다!! 건물 앞에 집합하세요!!”
똑똑똑!
9개의 방을 돌아다니며 깨운 뒤, 마지막으로 내가 잤던 방으로 가 남자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일어나! 교관이 집합하래!”
“아… 나 아침에 약한데…”
“5분만… 5분 뒤에 다시 깨워…”
“일어나!”
그렇게 깨우자 다들 겨우겨우 제정신을 찾았다.다들 일찍 잤음에도 많이 피곤해 보였다.
하긴, 보통은 6~7시간쯤 걸으면 아무리 많이 자도 피곤하기 마련이다.
나처럼 특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 종아리 터질 것 같아…”
“뭐야, 블랑 얘 안 들어왔네?”
“헉! 진짜 교관이랑 한거 아니야?”
“와… 그런 것 같네… 나도 갈 걸 그랬나?”
궁금하던 블랑의 근황, 곧 있으면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된다…
* * *
“다들 모였어?”
“아! 저기… 저희 방의 한 명이 사라졌습니다!”
“걔 이름이 뭔데?”
“마이크입니다!”
“아 걔? 걔는 괜찮아. 또 없는 사람?”
그렇게 훈련생 중 블랑을 포함해 총 5명의 인원이 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년이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웃음으로 우리를 인솔하기 시작했다.
바로 내가 새벽부터 땅을 팠던 그 공터로…
“헉!”
“마이크!”
“읍!!”
“미친 저거 블랑이야?”
“읍!! 읍읍!!”
나무 기둥 5개.
사라진 인원 5명.
그리고 나무기둥에 거꾸로 매달린 인원 5명.
밤새 사라졌던 훈련생들을 우리는 공터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꺄악!!”
“더…더러워!…”
곳곳에서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등을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를 본 듯한 끔찍한 혐오감을 담은 비명.
5명의 남자가 거꾸로 매달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매달린 5명 전부 바지가 벗겨져 자신의… 하물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너무 황당한 광경에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경악했다.
“주목! 여기 이 새끼들은 감히 하늘 같은 교관님이랑 떡 한번 쳐보겠다고 야밤에 내 방에 기어들어온 건방진 놈들이다!”
“읍읍!! 으읍!!”
오히려 거꾸로 매달려 있었기에 모인 훈련생 전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거리는 발기 되지 않은 소세지들을…
으 씨발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역겹네.
어느 남자가 같은 남정네 고추 봤다고 좋아할까.
질색했으면 질색했지.
“그러므로 푸훗…! 크흠. 그러므로 본 교관은 주제 모르는 훈련생들에게 벌을 줄 의무가… 푸흡… 아 씨발 존나 웃기네.”
결국 웃음 참기를 실패한 광년이는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하긴, 당사자만 아니라면 상당히 우스운 광경이기는 하다.
나도 불쌍함과 웃김과 혐오감을 1:1:1 비율로 느끼고 있었으니까.
“읍읍읍!!”
“하고 싶은 말이 많나 봐? 좋아. 말 해봐.”
“푸하… 죄…죄송합니다! 반성하고 있으니 제발 풀어주세요!…”
“음… 좋아! 내가 하는 질문에 솔직히 대답하면 풀어줄게!”
“알겠습니다! 무엇이든 할테니 질문 좀 빨리…”
대답할 자유를 얻은 이름 모를 훈련생은 절박하게 광년이의 질문을 재촉했다.
자신의 하물이 만인에게 공개된 상황이 어지간히 수치스러운 것 같다.
광년이는 훈련생의 심정이 짐작이 가는지 아주 느긋하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음… 그래?… 음… 그럼… 첫 번째… 질문은…”
“제발 빨리!”
“재촉하지 마! 물어볼 거 까먹었잖아! 이대로 5분만 더 고민해 볼까?”
“흐윽… 죄송합니다… 빠르게 대답하고 싶은 마음에…”
“용서할게. 나는 참 속이 여려서 문제야… 얼굴도 이뻐, 심성도 고와, 몸매까지 완벽해… 이러니 남자들이 쉽게 보고 덮치려 들지… 안 그래?”
“마…맞습니다!…”
“그럼 왜 그랬어 시발련아.”
“죄…죄송…”
무호흡 갈굼을 받는 훈련생의 얼굴은 이미 절반 정도 죽어 있었다.
저 표정을 보니 웃음 짓는 것 조차 죄책감이 든다.
한편 등골이 섬뜩하다.
소설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기둥이 5개가 아니라 6개가 되었을 테니까.
“어젯밤에 내 방에 들어와서 뭘 하고 싶었던 거야?”
“그… 그건…”
“오호? 배짱 있네. 감히 대답을 안 해?”
“대답하겠습니다! 교… 교관님이랑…”
“나랑? 나랑 뭐?”
“섹스! 섹스를 하고 싶었습니다!”
여자 훈련생들의 눈이 차게 식었다.
이름 모를 훈련생을 향한 혐오감 상승량이 범상치 않다.
어찌나 혐오스럽게 보는지,
지구에서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을 때, 길가다 내 얼굴을 마주친 초면의 여자만큼 인상을 찌푸렸다.
씨발.
아무튼 저 훈련생은 앞으로 여자를 만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이 훈련소 안에서는…
“더러운 새끼…”
얼음처럼 싸늘하게 식은 말이 여자 훈련생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거리가 멀어 저 훈련생들에게 들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들었다면 분명 멘탈이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다.
“푸훗… 야 야. 쟤가 너보고 더러운 새끼래.”
“흐으윽…”
악마같은 년…
광년이는 그걸 또 친절하게 전달해 주고 앉아있다.
“그럼 잘못 했으니 벌을 받아야 할까? 안 받아야 될까?
“저… 지금 이게 벌이 아닌가요?…”
“뭐지?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데? 15분 뒤에 다시 질문할 테니 잘 생각해 봐.”
“으읍!! 읍읍읍!!”
옆쪽, 아직 입의 재갈이 풀리지 않은 다른 희생자가 잘못 대답한 훈련생을 향해 격렬하게 반응했다.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냥 원하는 대답을 해 줘!! 이 좆같은 상황부터 피하자고!!’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벌을 받아야 합니다! 꼭 받고 싶습니다! 벌주십시오!”
“그래? 나서서 벌을 달라는데 안 줄 수도 없고… 초범이니 가볍게 딱밤 한 대씩으로 갈까?”
광년이는 손가락을 허공에 튕기며 딱밤을 때리는 동작을 취했다.
그 말을 들은 5명은 어땠을까?
그냥 벌이든 뭐든 빠르게 끝내주고 이 쪽팔린 상황을 끝내줬으면 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우리가 들어오자 한동안 꿈틀대며 반항하던 5명들이 조용히 벌을 주길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자 그럼, 첫 번째 딱밤 갑니다!”
따아악!
“꺼어어억!… 어…째서…”
“으 시발…”
“미친련… 미친련…”
“아오… 내가 다 아프네…”
“히익…”
광년이가 딱밤을 때리는 것을 본 사람… 아니, 남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뒤로 뺐다.
튕긴 손가락이 향한 위치가 하필 고환을 노렸다.
물론 정말 때리기 좋은 위치에서 흔들거리고 있긴 했지만…
으…
보기만 해도 소름이 쫙 올라오며 아랫배가 살살 아파져 온다.
과연 딱밤을 맞은 이름 모를 훈련생은 눈동자를 위로 뒤집으며 고통에 거세게 몸부림쳤다.
“끄으으윽…”
“으읍?! 으읍?! 으읍!!”
“으읍!!”
그리고 옆의 상황을 지켜보던 4명이 경악을 하며 살기 위해 몸을 흔들었다.
안타깝게도 단단하게 묶인 줄은 헐거워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따악!
따아악!
저항하던 하지 않던 차례대로 딱밤식은 거행이 되었고, 마지막으로 프랑스 태생의 정열적인 청년이 남았다.
블랑…
어제저녁 좀 더 확실히 말렸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소설에서는 단순히 유머스러운 헤프닝으로 묘사되었기에, 이렇게 잔혹할 줄 몰랐어…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남일 이라고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조용히 눈을 감고 묵념을 했다.
‘강해져라…’
따아아악!
“끄으으으읍!!”
“킥킥킥!!”
* * *
“괜찮아? 아직도 아파?”
“허리 두들겨 줄까?”
“그래도 블랑, 네 것이 다섯 명 중 제일 컸어.”
광년이는 딱밤을 전부 때리고도 희생자들을 풀어주지 않았다.
아직 물어볼 것이 남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렇게 몇 분을 더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아진 희생자들은…
브랙이 상황을 발견한 뒤, 그가 직접 풀어주고 나서야 겨우 속박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친구들, 나 혼자 있고 싶어…”
“…그래. 괜찮아지면 말하고.”
“미친개… 아니… 미친년한테 물린 셈 쳐라.”
하루 룸메이트를 하며 약간 친해진 우리 4명은 블랑을 위로했다.
정말 성 기능을 불구를 만들 것도 아니고, 광년이가 후유증이 남지 않게끔 힘 조절이 한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딱밤식을 보는 것 자체가 남자 훈련생들에게는 무척이나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쳇. 조금만 더 늦게 오지! 한참 재밌었는데.”
“제발… 이런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은 그만두면 안 되겠나?”
브랙이 이마를 짚으며 광년이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 광년이는 잔소리 따위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했다.
“킁킁… 아 손가락에서 오징어 냄새나잖아!”
“…”
“좆같네… 음? 생각해 보니 좆같은 것이 아니라 좆이 맞잖아? 자지 냄새니까.”
사람이 말을 저리 천박하게 하는 것도 재능이란 생각이 든다.
광년이를 보고 있으면 참 외모가 아깝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미인인데…
“야! 켄지! 내 앞으로 와봐!”
“네? 저…저요? 저는 갑자기 왜…”
“넌 씨발 앞으로 한 번만 더 내가 묻는 말에 되물으면 존나 처맞는다.”
“히익! 알겠습니다!”
탁탁탁!
이젠 눈에 익은 벗겨진 머리가 재빠르게 광년이의 앞으로 달려간다.
머리의 주인은 어제 광년이에게 꾀병 부리다 찍힌 야다치 켄지다.
“아~ 해.”
“아?… 으겍! 퉷퉷퉷!”
야다치 켄지는 광년이가 시키는 데로 입을 ‘아’하고 벌렸다.
그리고 그런 켄지의 입안으로 광년이의 손가락이 들어갔다.
5명의 고환을 때린 그 손가락이…
“어때? 오징어 맛나? 킥킥킥!”
“우…우웩!…”
미친년…
< 11화 >
“왼발! 왼발! 맞춰서 뛴다! 왼발! 왼발!”
“허억! 왼발! 허억! 왼발!”
“뒤처지면 나한테 엉덩이 차인다! 뛰어! 뛰어! 뛰어!”
“끄아악!”
탁탁탁!
우리는 아침부터 달리고 있다.
매일 아침마다 훈련생이 해야 할 구보라고 한다.
구보치고는 무척이나 빠른 것 같지만, 아무튼 구보란다.
대머리 교관 브랙이 앞서서 성큼성큼 뛰어가고 있었고, 광년이가 우리를 뒤에서 쫓고 있다.
광년이이게 차이기 싫으면 죽어라 뛰는 수밖에 없었다.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척추가 저릿할 정도의 강도로 차였다.
나?
나는 차인 횟수가 양손으로 셀 수 있는 숫자를 넘어섰다.
몸이 물리적으로 무거워 빠르게 뛰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같은 년이 내 엉덩이가 쿠션감 있어서 차는 맛이 있단다.
“허억… 허억…”
“야! 준비운동이나 다름없는데 벌써 지치면 어쩌자는 거야!”
퍼억!
“아악!”
살살좀 차라!
체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특성 덕에 스텟상 보이는 체력 이상의 지구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속도다.
155cm의 짧은 다리로는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일반인이 구보하는 속도를 맞출 수 없었다.
퍼억!
“제발!…”
“제발? 제발 뭐. 꼬우면 빨리 뛰던가! 고개 앞으로 돌려! 넘어진다!”
진짜.
내가.
어떻게.
해서든.
복수한다.
두고 보자.
씨이발.
나름 자신 있었던 표정관리가 도무지 안 된다.
분노와 복수심으로 일그러진다.
퍼억!
“악! 왜요! 이번엔 안 느려졌잖아요!”
“표정 관리 안하냐? 인상 안 풀어?”
“개같은 년!”
“크하하하! 내 별명이야!”
욱해서 나도 모르게 진심이 담긴 욕이 튀어나왔다.
헌데 욕을 먹어도 오히려 좋아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인간이다.
“앞으로 세 바퀴만 더 뛴다! 몇 바퀴?”
““세바퀴!””
“목소리가 작다! 다섯 바퀴! 몇바퀴?”
““다서어엇바퀴이이!!!””
“뛰어!”
““으아아악!””
브랙 저 인간도 훈련할 때만큼은 평소와 달리 무척이나 엄격했다.
난 이 훈련소 생활을 전부 수료하면 이제부터 나를 소개할 때 군필이라고 소개할 것이다.
반박 안 받는다.
* * *
“물… 무울…”
“콜록 콜록…”
“죽을 것 같아…”
빈속에 뛰니 더 힘들다.
아침은 물론이고 어제저녁도 먹지 못했다.
목마르고 배고파서 더이상 힘도 안 났다.
꼬르르륵…
“휴식 끝! 이제 아침 식사를 하러 간다! 식사 시간은 1시간! 정확히 1시간 뒤에 이 자리에 집합한다! 이상!”
식사시간이 시작됐음에도 일어나서 식당으로 향하는 훈련생들은 없었다.
훈련생들 모두 지쳐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저는 먼저 식사하러 가보겠습니다.”
“와아… 강인씨는 전혀 지치지 않아 보이네요. 대단해요!”
“하하. 너무 띄워 주지 마세요.”
“아뇨… 멋있어요. 헤헤…”
한쪽에서는 이강인이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드라마 한편을 찍고 있었다.
저런 외모를 가진 이성을 두고만 보고 있을 리 없지.
“가지가지 하네…”
이제는 다리에 힘이 풀린 척하며 이강인의 어깨에 기대는 여자까지 있다.
온갖 연약한 척, 가냘픈 척, 순진한 척 총동원하여 아양을 부리고 있었다.
심정이 어떠냐고?
눈물 나게 부럽다…
나도 여자 좋아하는데…
내가 가진 것은 저 여자보다 더 큰 가슴살뿐이다.
“내겐 믿을게 너밖에 없다… 상태창.”
띠링!
* * *
[이름] 박찬영
[직업] -
[힘] 4     [민첩] 1
[체력] 2    [지능] 5
[기교] 1    [매력] -23
[특성] 『자연치유』
보유 카르마: 430
* * *
선남선녀들의 멜로 영화를 보고 있자니 배가 아파와서 상태창을 불러내었다.
내가 제일 달리기가 느렸기에 다른 훈련생들과 나 사이의 거리가 꽤 되었다.
어?
보유 카르마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
“430 카르마?”
분명 남은 카르마는 80 카르마가 되어야 정상인데?
아침에 약을 사고 남은 카르마 30과, 땅을 팔 때 클리어 한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50 카르마가 내 마지막 기억이다.
그 이후엔…
“아! 설마 알림창 비활성화 상태가 조금 전까지 계속 유지된 건가?”
나는 재빠르게 퀘스트창의 알림 이력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 *
[퀘스트] <완료>
내용: 아침 산보! 새벽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50M 산책하기.
보상: 50 카르마.
실패 패널티: -
[퀘스트] <완료>
내용: 땀이 날 정도로 아무 운동이나 해보기.
보상: 200 카르마.
실패 패널티: -
[퀘스트] <완료>
내용: 실외에서 100M 뛰어 보기.
보상: 150 카르마.
실패 패널티: -
[퀘스트]
내용: 무릎을 바닥에 댄 상태에서 푸쉬업 3번 성공하기.
보상: 150 카르마.
실패 패널티: -
* * *
방금까지 분노했던 것이 거짓말같이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진다.
이게 금융치료인가 뭔가 하는 그것인가 보다.
자동으로 얼굴에 웃음이 실린다.
“야야, 저쪽 멀리 보여?”
“저 돼지? 와… 혼자서 실실 웃는 것 봐…”
“으으… 진짜 못생겼다.”
혼자 좋아하는 나를 발견했는지 여자무리 중 하나가 나를 가리키며 말을 했다.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시력 청력 후각 등 오감이 좋은 이 신체는 그 말들을 똑똑히 들었고…
그래, 나를 마음껏 욕하고 무시해라.
나는 내 할 일이나 하련다.
‘그래도 저년들 얼굴은 기억해 둬야지…’
나는 몸이 바뀌기 전부터 독하고 뒤끝이 있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독하지 않으면 하루도 빠짐없이 헬스장을 나가지도, 한끼 한끼 칼로리를 계산하며 식단조절을 하지도 못한다.
“흐읍! 흐읍!”
나를 향하는 시선을 무시한 채 바닥에 무릎을 댄 상태로 푸쉬업을 했다.
개인 시간이 있을 때 최대한 빠르게 퀘스트를 깨는 것이 좋다.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면 이럴만한 체력도 없을 테니까.
띠링!
* * *
[퀘스트] <완료>
내용: 무릎을 바닥에 댄 상태에서 푸쉬업 3번 성공하기.
보상: 150 카르마.
실패 패널티: -
* * *
이제 내게 있는 카르마는 580 카르마.
무려 키 크는 약을 5개나 마실 수 있는 정도다.
나는 걸음을 옮겨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 정도의 카르마가 쌓이니 스텟에 투자할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키 크는 약을 5개 구매하자.”
역시 아니었다.
아무리 기본 스텟이 낮다고 해도 특성의 덕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되었다.
쉽게 지치지 않고, 조금만 쉬어도 체력이 회복되었으니까.
그 증거로 지금 나는 고작 3분 만에 숨이 고르게 돌아왔다.
이정도면 어느정도 훈련에 따라갈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 섰다.
장기적으로 보면 아무리 봐도 키를 늘이는 것만 한 선택이 없다.
방금 구보하며 그것을 더욱 실감했다.
단순한 뜀 걸음 정도도 신장의 차이 때문에 이토록 힘겨운데 다른 훈련은 다를까?
꿀꺽 꿀꺽!
자연스래 손에 쥐어진 병 5개를 연달아 마셨다.
그리고 병을 처리하기 위해 슬며시 자리를 옮겼다.
이미 밥을 먹으러 출발한 이강인과, 아침의 일이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고개를 숙인 채 혼자 생각에 잠긴 블랑.
나에게 신경을 기울일 만한 사람은 없었다.
새벽과 마찬가지로 유리조각을 땅에 묻은 뒤, 식사하기 위해 발을 옮겼다.
‘이것으로 나도 한 달 뒤면 169cm…’
1차 목표가 생각보다 빨리 달성됐다.
170cm 정도면 절대 작은 키는 아니니까.
지금처럼 키 때문에 불편을 겪는 일은 드물게 일어날 것이다.
이제 앞으로 얻는 카르마는 무조건 약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투자할만한 여유가 생긴 것이다.
* * *
훈련 첫날은 훈련생 개개인의 체력과 능력을 측정한다면서 극한까지 몰아 붙였다.
단순하고 외우기 쉬운 동작이지만, 뒤질 것 같이 힘든 동작을 몇 번 몇십 번 반복했다.
의외로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은 광년이가 아니었다.
주로 브랙이 나서서 훈련생들을 굴렸다.
“엉덩이 더 내려! 더! 더!! 스쿼트 안 해봤어? 더 내려! 그 상태에서 버텨! 15초 버틴다!”
“허리 펴! 척추 다친다!”
“다리 높게 안 들어? 그게 45도야? 무릎 굽히는 놈은 20초 추가다!”
여기저기서 훈련생들이 죽어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작 설정에서 브랙은 외인부대 출신이었으며, 은퇴 후 헬스장의 트레이너로 살아가고 있었다.
참으로 쉘터의 교관으로서 이 이상 어울리는 사람을 찾을 수 없는 인재다.
“우웩! 우웨에에엑!”
식사 후 너무 격렬하게 몸을 움직여 토를 하는 사람까지 종종 보였다.
우리에겐 좋은 소식이다.
토한 토사물을 치울 때까지 훈련은 중단되었으니까.
약 5분도 안 되는 짧은 휴식시간이지만 달콤하기 그지없는 휴식이었다.
“허억… 허억…”
“야… 좀 천천히 치우자…”
“안 그래도 그러고 있어요…”
훈련생들은 한마음으로 눈치껏 설렁설렁 청소해 가며 휴식시간을 조금이라도 길게 늘이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지금 교관들은 우리에게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았다.
브랙과 광년이는 우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먼 위치에서 서로 진지한 얼굴로 대화하며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이번 기수… 커리큘럼을…”
“…확실히… 지난 기수들… 기초 체력 상태가…”
밝은 귀로 언뜻 들리는 단어를 들어보니 훈련생들의 교육 방향을 결정하는 듯싶었다.
의외로 광년이는 진지한 얼굴로 적극 의견을 내비쳤다.
‘그녀는 우수한 교관이다.’라는 소설 속 묘사가 진실이라니…
도저히 믿고 싶지가 않다.
그야 누구라도 저년에게 엉덩이를 10번 넘게 차여보면 장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저번 기수…사망자…사인이…중점으로…”
“…그래…사망률…최우선…”
시발.
방금 사망률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았나?
잘못 들었겠지?
잘못 들었을 거야.
원작에서는 훈련 도중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고…
“진짜 특성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 했네…”
이렇게 몇 분 쉬는 것만으로 소모된 체력이 돌아온다.
그에 비해 다들 걷는 것조차 힘겨워 다리를 떨고 있었다.
무려 그 이강인조차 지쳤는지 무릎에 손을 대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띠링!
* * *
[퀘스트]
내용: 5분간 교관의 지시에 반항하지 않고 따르기.
보상: 300 카르마.
실패 패널티: 클리어 전까지 이 퀘스트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 * *
몸이 바뀌기 전 박찬영이라면 교관의 지시에 5분조차 따르지 못하고 반항한다는 뜻인가…
하긴, 그 새끼라면 지금까지 교관의 명령에 따르기는커녕 못한다고 드러누웠을 것이 뻔했다.
지금의 내게는 어렵지 않은 퀘스트다.
나는 이미 2시간 넘게 교관의 지시를 따랐다.
게다가 그들의 지시에 거스를 생각 또한 없었다.
폐급으로 찍히는 순간 지금보다 더한 지옥도가 펼쳐진다.
“하루 정도는 참아 볼 생각이었는데…”
“첫날부터 이 정도로 굴리는 게 말이 돼?!”
“더는 못하겠어요… 팔이 어깨 위로 안 올라가요…”
길어진 교관들의 회의 탓에 감시가 소홀해졌다.
또한 훈련생들이 짧은 휴식을 하며 머리가 돌아갈 정도로 기력을 찾게 되었다.
‘비합리적인 상황에 대해 불만이 튀어나오기에 아주 완벽한 조건이지…’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주로 체력적으로 많이 떨어지는 여자 훈련생들의 입에서.
‘힘들다’에서 ‘못하겠다’로, ‘못하겠다’에서 ‘안 하겠다’로.
시간이 흐를수록 훈련생들 사이에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끼어들지 않는 건가…’
슬쩍 이강인을 쳐다보았지만, 팔짱을 낀 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처럼.
‘옳은 판단이다.’
누누히 말하지만, 교관들의 청력은 인간을 초월했다.
내가 교관의 말을 조금이나마 엿들을 수 있었던 거리에서, 교관들이 훈련생의 말을 듣지 못할까?
교관들은 이미 훈련생들 사이의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아니, 일부러 유도하고 있었다.
고의적으로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것이겠지.
언젠가 확실하게 일어날 반항을 자신들이 통제가 가능할 때 처리 하기 위해서.
“강제로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내가 왜 이런 걸…”
“그냥 안 하겠다고 하자. 훈련생 과반수가 안 하겠다고 하면 지들이 뭐 어쩔건데?”
“설마 이 많은 사람 전부를 하나하나 때리기야 하겠어요?”
“차라리 때리라고 해… 맞고서 드러누우면 더는 안 시키겠지…”
정말로 맞아보면 절대 그런 소리 안 나올 텐데…
어제와 오늘 아침.
교관이 얼마나 사람을 무자비하게 때리는지, 얼마나 고약한 짓을 하는지 훈련생 모두 두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나 보다.
이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그야 그럴 법하다.
생판 처음 보는 타인이 느끼는 고통과 수치스러움 따위보단, 당장 본인이 죽도록 힘든 것에 온통 신경이 쏠려있을 테니.
“좋아. 내가 대표로 말할게.”
“언니! 저…저도 뒤에서 도울게요!”
“다들 동의하시죠? 제가 직접 교관과 담판을 지을 테니, 뒤따라와 주세요!”
크게 목소리 높여 말하는 이는 없었지만, 저 여자의 말에 모두 동의하는 몸짓을 했다.
앞장서서 나선 여자의 이름은 리 샤오린.
아다치 켄지, 블랑 프랑수아 다음으로 세 번째 본보기가 되어 줄 사람이다.
< 12화 >
결과적으로 항의하러 간 사람은 훈련생의 전체가 아니었다.
2명의 훈련생이 리 샤오린의 제안을 거절했다.
당연히 그 주인공은 나와 이강인이다.
“…거절하겠다고요?”
“네. 저는 계속해서 훈련을 받겠습니다.”
“모르겠어요? 이건 훈련생 전부가 항의해야 의미 있는 시위라고요!”
“알고 있습니다.”
“흠… 눈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유감이네요.”
“그러게요. 전 눈치가 있는 편이죠. 그래서 이런 선택을 고른 것이고요.”
그 말에 리 샤오린의 눈이 씰룩였다.
이강인의 말투가 마치 ‘너희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라는 의미를 내포한 듯 들렸기 때문이다.
리 샤오린의 뒤쪽 친하게 지내던 여자들이 이강인을 향해 동조해 달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지만…
이강인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공과 사는 구분한다는 것인가.’
소설에는 주인공과 비중 없는 엑스트라의 관계에 대해 세세한 묘사가 없었기에 몰랐다.
리 샤오린은 이강인을 불만스래 쳐다본 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쪽은 왜요?”
“저는 자의로 이 훈련을 받기를 선택했습니다.”
“…이미 한 명이 빠진 상황에서 둘이 되더라도 큰 상관은 없겠죠.”
여기서 대화가 끊어졌다면 좋았겠지만, 리 시오린은 그럴만한 눈치는 아니었다.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모여있는 모두가 듣기에는 충분하고 남았다.
“…저 남자와 다르게 쓸모 있어 보이지도 않고. 딱 봐도 기생충같이 생겨서는… 오히려 잘 됐어요.”
누가 보아도 나를 향한 말이었다.
말 좆같이 하네?
네가 심통이 난 것은 이해가 가지만, 내가 화풀이 대상이 될 이유는 못되지.
“글쎄요, 능력 없어 보이는 것은 그쪽도 마찬가지네요.”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당신은 누군가를 이끌만한 리더가 전혀 못 된단 뜻입니다.”
“너! 말 다 했어?”
“맞습니다. 저 존나게 못생겼죠. 근데 그걸 왜 당신에게 들어야 합니까? 너, 나랑 친해?”
“…그…”
“후… 성인이면 말은 가려서 합시다. 상대의 외모를 평가질하는 건 확실히 기분 더럽지만 넘어갈 만 해요. 그러는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니고… 단,”
나도 속으로는 상대의 외모를 평가하기도 했기에 그것까지 막아설 생각은 없다.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건 역겨우니.
하지만…
“입 밖으로 뱉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사방이 조용했기에, 우리의 대화를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나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여기 모인 이들은 기본적으로 현대인들이다.
적어도 인종 차별이나 외모 차별이 못 된 짓이란 것을 교육받은.
완전히 내 편을 드는 인물이 나오는 건 기대도 안 하지만,
외모로 인한 편파적인 시선은 어느 정도 걷혔을 것이다.
“계획이 조금 흐트러진 정도로 감정적으로 되지 마세요. 당신에게 힘을 실어 준 사람들이 지켜 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리더로서의 신뢰도는 떨어지고 있겠네요.”
“…쓸데없는 참견이야.”
“그럼 쓸데없는 참견 하나 더 해두죠. 당신의 어설픈 계획,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은데… 실패 할 겁니다.”
“나도, 나도 계획이 있어. 아무 생각이 없진 않다고…!”
“뭐, 그렇다면야. 아무튼 원하시는 결과를 얻길 바랄게요.”
나는 별로 흥미가 없다는 듯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하품을 했다.
열 좀 받으라고.
효과가 있었다.
내 얼굴을 본 리 샤오린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나와 리 샤오린 사이의 공기가 험악해진다.
이런 갈등은 원작에 전혀 없는 내용이었다.
후일 혼자 제안을 거절한 이강인은 ‘젠장~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거냐고!’라는 식으로 주변인들에게 호감을 얻을 뿐…
나와 리 샤오린이 싸워 그녀의 생각이 달라지면 원작의 흐름과 달라질 가능성이 생겨난다.
그럼에도 나는 리 샤오린과 대립했다.
이유?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냥 참기 싫었을 뿐이다.
리 샤오린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시비를 걸었고, 나는 참고 싶지 않았기에 참지 않았다.
그저 그럴 뿐이다.
우습게 보지 마라.
이거 정말 중요한, 내가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좀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보자면, 사람은 말과 행동이 위축되게 행동할 경우 무의식적으로 성격까지 소심해지게 된다.
아무리 그것이 연기라고 한들 영향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어떤 노력을 해 가며 겨우 뜯어고친 성격인데…’
그런 상황을 극도로 경계할 뿐이다.
원작의 흐름을 틀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만, 나 자신이 더욱 중요하다.
육체가 박찬영이 되었다고 마음마저 박찬영이 되어서는 되돌릴 수 없다.
리 샤오린의 눈매는 날카롭다.
광년이보다 더욱.
사나운 암사자가 연상되는 미인이었다.
원래의 박찬영이라면 미인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으리라.
특히 저렇게 사나워 보이는 외견의 미인에게는.
하지만 나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다만, 우리가 합심해 얻은 결과물을 대가 없이 공유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
우리를 지켜보는 50여 명의 시선을 의식한 걸까?
의외로 리 샤오린은 한발 물러섰다.
일부러 더욱 화내라고 긁은 것인데…
내가 한 말에 찔리긴 했나 보다.
시뻘건 얼굴로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을 보니.
그래도 생각만큼 멍청한 인간은 아닌 것 같다.
“누구 말대로 기생충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 제 고향에는 ‘김칫국부터 마신다’라는 말이 있는데… 왠지 그 말이 떠오르네요.”
“푸훗…”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옆에 선 이강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리 샤오린은 나를 한 번 더 쏘아보더니,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뒤돌아 걸어갔다.
타이완 넘버원 마렵네.
“앗! 언니! 같이 가요!”
우르르…
모두가 교관을 향해 가자, 주변에는 나와 이강인 밖에 남지 않았다.
욱해서 리 샤오린과 싸우긴 했지만, 다행히 원작의 흐름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옆에서 열심히 웃음을 참던 이강인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가 나를 향한 시선에 변화가 있었다.
기존에는 흔한 돌멩이를 보는 눈이었다면, 이제는 괜찮은 수석(水石)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찬영씨는… 생각보다 재밌는 분이셨네요? 게다가…”
“예?”
“혹시 저 여자분의 무리에 합류하지 않은 이유가 또 있습니까? 왠지 찬영씨가 자의로 훈련을 선택했다는 것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는 듯해서요.”
이강인이 기대를 담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건…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건가?’
이유라…
이강인은 정해둔 답이 있다는 눈치다.
나는 이강인이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과연 여기서 정답을 말하는 것이 내게 도움이 될까?
잠깐의 생각 후, 나는 입을 열어 이강인에게 대답했다.
“이유가 없습니다. 저희의 요구를 교관들이 들어줄 이유가.”
“이유라… 이유라면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단체로 요구하면 교관들도 어쩔 수 없을 텐데요.”
“생각의 실마리는 이렇습니다. 매달 100명의 인원이 쉘터로 오는데… 과반수가 넘는 인원이 예비 전투직을 배정받다니,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매년 1,200명의 고정적인 인구 증가는 확실히 부담된다.
이건 쉘터 내 자체적인 출산율을 제외하고 계산한 결과다.
100명 중 어린아이와 노인, 장애인은 소수.
인원 대부분이 성인이다.
물론 문명이 발전하기 전인 쉘터의 상황에서, 당장 1인분이 가능한 성인 100명은 막대한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곳이 지구였다면.
“듣고보니 그러네요. 아무리 사망자가 많이 나오는 직업이라고 해도… 절반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마 처음부터 이렇게 비율이 높지는 않았을 겁니다. 단순한 1차 생산직… 집을 짓고, 벌레를 잡고, 물을 보급하고, 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포화되어 넘치기 때문에 잉여 인력을 모두 전투직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밭을 일구는 사람이 너무 많다기에는 굶는 사람이 나오고 있는 걸요? 훈련소에 오는 도중 보지 않았습니까? 너무 굶어 뼈의 윤곽이 드러난 사람들이…”
이강인의 말에 쉘터의 외각 쪽에 사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모든 것이 부족해 보였다.
음식도, 옷도, 위생도, 자존감도.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누구도 물자가 풍족하다는 말은 빈말로도 하지 못할 것이다.
물자는 풍족하지 않다.
그러나 인력은 남아돈다.
이 양립할 수 없는 조건이…
이곳에서는 가능하다.
“이 세계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고 했지요. 숲 곳곳에 영역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들… 아마 농사지을 땅이 부족한 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전투직입니다.”
“그 말은…”
“몬스터들을 몰아내어 농사를 지을 땅을 넓힐 전투직이, 사망률도 높아 입을 줄여줄 전투직이, 가장 많이 필요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비율을 전투직으로 돌리는 행동은.”
이 세계는 몬스터가 있기 때문에 인구가 성장하는 속도를 식량 생산량이 따라가질 못한다.
당장 저 광활한 숲은 빈 땅이 아니다.
몬스터라는 주인이 있는 것이다.
1인분을 하는 성인이 100명이 뿅 하고 생기더라도 땅이 부족해 농사를 짓지 못한다.
나는 정확하게 그 점을 짚었다.
‘나는 정답을 말하겠다, 이강인. 너는 어떻게 나올 것이지?’
정답을 말하는 것이 내게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 일차적인 목적에는 크게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으리라.
시작했으면 망설이지 말자.
길게 말을 이어 뱉느라 지친 숨을 골랐다.
결론을 내뱉기 위해.
“즉, 쉘터의 중앙 지휘소에서 교관들에게 일괄적으로 명령이 내려왔을 겁니다. 특수한 경우가 아닌 한 훈련생 모두를 전투직으로 들이라고 말이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네요.”
“예. 그렇다면 저렇게 아무런 대안 없이 일방적인 요구를 하는 훈련생들에 대한 교관의 행동은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없죠.”
“그들은 요구를 거절당하겠네요.”
“거기다 괘씸죄까지 추가해서요. 가담하지 않은 저희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체벌이 있는 세계에 연좌제가 없으리라 생각하기 힘들어요. 아마 앞으로의 훈련은 지난 기수보다 더욱 고되지 않을까 싶네요…”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설 속에서는 광년이에게 예쁨 받는 이강인은 기합에서 열외된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이강인과 광년이는 서로 마찰이 생겨버렸다.
아마 기합 열외를 기대하긴 힘들 것 같다.
“어떻게 그렇게 적게 주어진 정보로 여기까지… 대단한 통찰력이네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말하는 강인씨도 깨닫고 있던 눈치던데요? 알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이유는… 찬영씨와 조금 다릅니다. 과거, 같은 정보가 주어졌는데도 나는…”
“이곳에 와서는 저와 공통된 생활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전날 교관들이랑 한 면담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었나 보네요.”
“하하. 네. 일단 그런 걸로 해두죠.”
이강인은 말 중간을 흐렸다.
그 뒤에 이어질 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회귀했기 때문에 알고 있었겠지.
“…기대했던 것을 한참 넘어선 대답… 이런 인물이 숨어있었다니…”
“네?”
이강인이 중얼거리는 말,
물론 전부 들었다.
이 신체의 귀는 밝으니까.
그러나 못 들은 척 해주었다.
그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서는 안 된다.
적어도 지금은 너무 이르다.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금의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나의 쓸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이강인과 계속 신뢰와 친분을 쌓아야 한다.
나의 최우선 목표는…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할 때, 조언을 구할 수 있는 현명한 동료이자 친구.’
그야말로 주인공을 통제하고 싶은 내게 가장 이상적인 위치다.
* * *
‘겁쟁이 새끼들!’
무리에 합류하지 않은 남자 2명이 나왔다.
그놈들의 생각은 뻔하게 읽혔다.
분명 일본인 남자가 당한 폭력에 겁먹은 것이다.
심지어 돼지남은 직접 폭력에 노출되지 않았음에도!
저 미친년의 기행에 희생된 일본인과 5명의 남자들까지도 용기 있게 무리에 합류했다.
그런데도 겁먹다니?
‘쓸모없어! 정작 그놈들이 내 무리로 들어오더라도 내 손으로 쳐냈을 거야!’
훈련을 하지 않겠다는 요구를 할 생각은 아니다.
훈련 강도를 낮추는 정도로 타협할 생각이다.
이 정도면 교관으로서도 충분히 양보할 만한 일이다.
내가 계획이 없다고?
우스워서 반박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확실히 폭력이 두려운 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저기 한심하게 눈을 내리깐 일본인 남자는 당시에 ‘맞을만하다’라는 분위기가 생겨났었어. 선을 넘은 발언 때문에… 물론 생각보다 폭력이 과하긴 했지만. 오늘 새벽의 5명도 죄가 있는 건 마찬가지였고.’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달랐다.
지금 우리들은 잘못이 없다.
이번에는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정당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는 합리적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합리적인 요구를 했는데 되돌아온 것은 이유 없는 거절과 일방적인 폭력이라고?
‘오히려 좋아. 이 50여명의 인원들은 더욱 단합할 테지. 교관이라는 공통적인 적을 두고!’
우리의 요구를 수용해도 이득, 수용하지 않아도 이득이다.
가장 큰 이득을 얻는 것은 자신이고!
‘그 정신 나간 미친년은 딱 봐도 생각이 없어 보였어… 조금만 도발하면 금세 폭력을 휘두를 거야!’
그년에게 맞는다고 한들 불구가 될 정도까지 맞을 리가 없다.
정도 이상으로 폭력이 가해지면, 여태까지 그런 것 처럼 대머리 교관이 나서서 말릴 게 분명하니까.
여자 쪽과 달리 남자 교관은 합리적인 행동을 보여왔기에 계획의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우리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는다면?
내가 할 일은 그냥 몇 대 맞아준 다음, 주저앉아서 펑펑 울면 된다.
다행히 자신은 객관적으로 평가해도 미인이다.
남자든 여자든 일방적인 폭력에 희생당해 울고 있는 미인을 보게 되면 누구든 보호 심이 들 수밖에 없다.
심지어 자신들을 위해 총대를 메고 나선 여인의 눈물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동정표를 사 무리의 최우선적인 보호를 받겠지.
우리의 요구가 수용된다면?
힘든 훈련이 줄어든다.
게다가 자신은 영웅이 된다.
폭력에 겁먹지 않고 용기 있게 나선 리더라는 평이 나돌 것이다.
또한 어려운 거래를 성사시키며, 현명하고 따를만 한 리더라는 이미지가 생긴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조직원에게 보호받는 것은 당연하고.
둘 중 무엇도 좋다.
어떤 경우라도 자신은 50명에 가까운 무리에게 최우선으로 보호받는다!
작게 미소가 나왔다.
‘이런, 아직은 표정관리를 해야지. 동정표를 얻기 위해서는 순진한 척을 해야 하니…’
계획을 생각하면 조금 전 돼지남과의 다툼은 실책이었다.
적어도 내가 먼저 돼지를 비꼬았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잠자코 넘어가기엔 돼지남의 목소리에는 신경을 긁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냥 외모가 더러워서 기분이 나빠졌기에 그런 걸지도.
‘내 계획이 어설프다고? 하!’
당장 돼지남에게 달려가 말해주고 싶다.
내 계획은 이미 완성이 되어있으며, 어떠한 방향으로 향하더라도 이득이라고.
나는 너와 다르게 계획을 위해 폭력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다고.
그러나 말을 아끼었다.
보는 눈이 많다.
계산적인 면모를 보여서는 동정표를 사지 못하니까.
그래도 울화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신은 항상 감정이 문제였다.
계획까지는 좋으나, 항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일을 그르치곤 했다.
…이번만큼은 실패하면 안 되었다.
‘먼저 대화를 시도한 뒤, 폭력을 당하면 눈물을. 거래 분위기가 나돈다면 협상을. 우선 우리의 요구를 말하는 것이 먼저야…’
어느새 교관들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정확히는 우리가 다가간 것이지만.
긴장하지 않으려 했지만, 상대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예상할 수 없는 미친년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긴장된다.
마음속으로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한 뒤, 말을 꺼내었다.
“교관님. 저희가 의견을 통합해 보았…”
“이번 기수는 순진하네. 주동자가 이렇게 대놓고 나서주다니… 덕분에 편해졌어.”
짜악-!
‘어?’
뺨이 얼얼하다.
1초 뒤 깨달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나는 뺨을 맞았다.
< 13화 >
푸른 하늘에 여유롭게 떠다니는 구름.
멍하니 뻥 뚫린 하늘을 보고 있으면…
북부 훈련소의 미친 교관, 크리스 베넷은 이곳이 마치 지구 같다고 느꼈다.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기에.
그녀는 그럴 때면 항상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총을 쓸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사일, 박격포, 지뢰… 현대 기술이 들어간 수백 수천의 무기들.
자신보다 강력한 생명체의 목숨을 손쉽게 앗아갈 수 있는 화약 무기.
종류는 상관 없다.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크리스 베넷은 두 팔 벌려 환영할 수 있었다.
‘그러면 괜히 마음 아프게 이런 좆같은 훈련을 억지로 시킬 필요도 없었잖아…’
그러나 그녀의 세계에게 허용된 것은 냉병기 뿐이었다.
추가로 마법 비스무리 한 것도.
‘젠장… 정말로 신이란 것이 있긴 하나 보네.’
외계인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허나 매달 100명을 차원 이동시키고, 원인 짐작조차 가지 않는 방법으로 문명에 제약을 걸어버린 존재가 있다면 그게 신이랑 다른 것이 무엇인가.
개미 입장에서 그녀가 신인 것처럼, 그녀 입장에선 그들이 신이랑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항상 스스로를 설득하고는 한다.
모든 것은 현대 화기를 금지한 빌어먹을 신 때문이라고.
자신은 그저 바닥을 치는 전투직의 생존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나름의 발버둥일 뿐이라고.
실제로 그녀의 생각은 그리 틀린 말 없었다.
‘…변명인 걸 알지만, 이게 내가 생각한 최선의 방법인 것을 어떻게 하라고.’
설렁설렁 훈련을 진행하면 지금이야 편하겠지만, 실전에 투입된 순간부터 시한부 인생 시작과 다를 바 없다.
지금의 훈련 강도는 크리스 베넷이 생각해 놓은 마지노선이었다.
이 이상 난이도를 내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전투직 사망률이 치솟을 게 그녀의 눈에 뻔히 보였기에.
크리스 베넷은 반드시 사람들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지켜내야 했다.
오래전 스스로에게 새긴 맹세다.
죽기 직전까지 저버려서는 안되는.
그러한 골치 아픈 이유로, 다가오는 훈련생 무리를 보며 조용히 손목을 풀었다.
* * *
“교관님. 저희가 의견을 통합해 보았…”
“이번 기수는 순진하네. 주동자가 이렇게 대놓고 나서주다니… 덕분에 편해졌어.”
짜악-!
뺨을 치는 것은 사람의 기를 꺾는데 무척이나 효율적이다.
충격이 머리에 그대로 직격하기에 시야가 흔들리고 감각이 뒤섞인다.
게다가 때릴 때마다 귀 근처에 울리는 큰 타격음은, 아무리 억센 사람이라고 한들 잠시나마 위축될 수밖에 없다.
또한 극도로 굴욕감을 일으켜 상하관계를 뼛속 깊이 새기는 데 효과가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은…
타격점이 넓어 피부가 터질 수는 있으나, 뼈가 부러질 확률은 낮다.
후유증이 없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크리스 베넷은 리 샤오린의 뺨을 내려쳤다.
“무슨…!”
짜악-!
그녀는 눈 앞 훈련생의 말이 이어지게 두지 않았다.
머리를 굴리도록 두지 않았다.
이미 리 샤오린의 계획은 전부 알고 있었다.
수년에 걸친 크리스 베넷의 교관 경력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 많았던 탓이다.
결코 리 샤오린에게 주도권이 가도록 두지 않으리라.
야생에서 시야를 잃는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동물은 눈 주변을 가격당하는 것에 본능적으로 큰 거부감을 느낀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훈련받지 않은 한, 급소가 밀집된 머리. 그것도 눈의 바로 옆을 맞게 되면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다.
수만 년에 걸쳐 진화한 생존 본능에 불을 지폈다.
짜악-
“리 샤오린. 21세. 중국 출신. 맞지? 너 눈 예쁘다!”
크리스는 밤새 그녀의 방에 찾아오는 훈련생들을 기다리며 훈련생 프로필을 외웠다.
50명 전부를 외우기엔 시간이 부족했기에 눈여겨 볼만한 훈련생들을 추려서.
리 샤오린의 정보 또한 추려낸 프로필에 들어있었다.
그녀는 명백한 요주의 인물, 여자 무리의 리더였기 때문이다.
크리스가 이걸 내뱉는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너에 대해 알고 있다, 자신의 정보가 상대에게 파악되어 있음에서 오는 혼란을 주기 위해서다.
노림수는 먹혀들었다.
리 샤오린은 자신의 신상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무의식적으로 몸이 놀라 굳어버렸다.
그녀의 당황이 크리스에게 읽혔다.
‘여태껏 주동자는 다들 그랬지만… 이 훈련생 역시 독기가 있어.’
그녀가 느낀 리 샤오린의 눈빛은 억셌다.
크리스가 겪은 이강인이란 남자 훈련생처럼.
그러나 다른 점 또한 있었다.
이강인은 올곧았다.
감정은 격렬했으나, 투지라는 하나의 감정만을 띄고 있었다.
허나 리 샤오린은 다르다.
수십 개의 감정이 섞여 있다.
그리고 그 끝에 있었던 것은…
바로 공포였다.
‘아직 부족해.’
실제로 리 샤오린을 굴복시키기엔 한참 부족했다.
크리스로서는 좀 더 공포를 부추길 필요가 있었다.
짝-!
고작 6초가 흘렀다.
리 샤오린이 크리스에게 말을 건 뒤 걸린 시간이.
같이 항의하려 몰려든 훈련생은 크리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아직까지 당황한 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분위기는 이미 만들어졌다.
크리스와 리 샤오린 사이에 선뜻 껴들기 어려울 만한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
‘내가 의도한 대로.’
짜아악-
짜악-
짜악-!
여섯 번, 일곱 번, 여덟 번…
손바닥이 뺨을 갈길수록 점점 리 샤오린의 눈 속 독기는 사라져 갔다.
마음속 반항심을 대체하여 점차 굴복과 공포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슬슬인가?
크리스는 곁눈질해 훈련생들을 흩어 보았다.
“말려야 하지 않아?…”
“우…우리가?…”
역시 폭력이 계속되니 훈련생들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들이 나서기 전에 조치를 해야 한다.
그녀는 남모르게 브랙에게 신호를 보냈다.
“으음…”
신호를 본 브랙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타고난 큰 덩치, 훈련 때 고압적인 행동, 그리고 이 인원들의 책임자이자, 그녀 자신과 동등한 ‘교관’이라는 위치.
훈련생들은 브랙의 존재를 눈치챈 뒤, ‘브랙 교관님이 나서려나 봐.’로 생각이 바뀌었다.
‘뭐, 말릴 생각은 없겠지만.’
말 그대로 브랙은 존재감만 과시할 뿐, 전혀 크리스를 말리려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사전에 브랙과 크리스가 계획한 시나리오가 그러했으니까.
크리스는 다시 리 샤오린에게 집중했다.
여러 번 뺨을 맞았음에도 그녀의 눈에는 독기와 반발이 완전히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이런 일차원적인 폭력과 고통만으로는 그녀를 굴복시키기엔 부족했다.
크리스는 손을 내리고 훈련생에게 물었다.
“어때, 좆같아?”
“저는 정당한 요구를 하기 위해…!”
짜악-!
“어때, 좆같아?”
“제가 맞을 이유는 하나도…!”
짜악-!
“어때, 좆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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