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1

< 1화 >
몸이 무겁다.
숙취 때문이 아니라 살집 때문에.
배를 만져보아도 느껴지는 건 선명한 식스팩이 아니라 두툼한 살집이다.
내가 어떻게 식스팩을 만들었는데…
3년간 꾸준히 헬스장에 출근 도장 찍고, 식단 조절까지 병행한 노력의 결실이다.
턱살에 파묻혀 드러나지 않은 목을 당겨 어떻게든 내 발끝을 내려보기 위해 노력했다.
“씨이이발…”
올곧이 서서는 뱃살에 가려져 발가락은커녕 다리조차 볼 수조차 없다.
허리를 숙여보았지만, 앞구르기 하려는 인간 탱탱볼로 보일 뿐이다.
유전적 축복이라 여겼던 나의 커다란 키는 어디 가고 155cm 유사 탱탱볼 씹돼지가 여기 있다.
대한민국 사나이로서 많은 고난을 이겨내었지만, 도저히 제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누가 자연스레 받아들일까?
키와 몸무게의 숫자가 비슷해 보이는 돼지로 변하다니.
도저히 욕을 하지 않고선 배길 수 없어 손바닥으로 얼굴을 짚었다.
…여드름 때문에 얼굴 전체가 울퉁불퉁하다.
“진짜 개같네.”
이쯤 되면 되레 감탄이 나온다.
외모 상위 0.1%가 차은●, 원●이라면 하위 0.1%는 이 신체가 아닐까?
확실히 세상 어디를 찾아보아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육체다.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전 세계 남자들은 자존감이 조금은 올라갈 것이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눈앞에 새하얀 날개를 단 아기천사가 싹싹 빌고 있다.
마치 만화 속 큐피드를 떠올리게 한다.
얼굴을 울상으로 일그러뜨리며 몇 번이고 재차 사과하는 아기천사.
귀여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사소한 잘못은 흔쾌히 용서할만한 위력을 보이고 있었다.
열 오른 나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지만.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그래.
상사들의 명령 사이에 끼인 중간관리자의 고충.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래도 이건 선 넘었지 씨발.
'씨발'이란 말이 머리에 가득 차 입에 맴돈다.
씨발.
“저희가 어떻게든 보상을…”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져 와 손을 들어 두피를 꾹꾹 지압했다.
팔을 들 때 팔뚝 살이 덜렁덜렁 흔들렸다.
그 감각에 기분이 더욱더 바닥으로 치닫는다.
* * *
금요일 밤!
듣기만 해도 들뜨는 것을 억누르기 힘든 마력이 담긴 단어다.
특히 20대 초반 특유의 혈기가 들끓는 남자들에겐.
나 또한 여러 술집을 오가며 시린 옆구리를 데워줄 파트너를 찾아다녔다.
쉽게 말해 금요일 밤 친구들과 함께 헌팅을 나왔다.
“까인 놈은 알지?”
“알아서 눈치껏 빠져라. 남 장사하는데 훼방 놓지 말고. 모르는척하지 마. 너 말이야, 너. 존나게 까이면서 눈치까지 없으신 분.”
“뒤질래? 너 지난번 미팅 때 존나 꼴아서 분위기 씹창낸 썰 풀어? 얘들아, 이 새끼 술 적당히 먹여라. 다들 허탕치기 싫으면.”
“죄송합니다… 제가 졌습니다… 제발 그것만큼은 비밀로…”
“와 그런 개꿀잼 썰을 아직도 안 풀었다고? 얼마 주면 푸냐?”
친구들의 잡담을 한 귀로 흘리며 거리를 오가는 여자들의 스캔에 집중했다.
그렇게 떡 한번 쳐보겠다고 돌아다니길 몇 시간, 어느새 자정을 넘겨 날이 토요일로 넘어갔다.
겨우겨우 인원 맞는 여자 그룹을 찾아내어 합석까지 성공했다.
우리는 합심해 분위기를 띄우고, 웃기고, 각자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서로 눈치껏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찍어 공략을 시작했으나…
“젠장… 남친 있는 여자가 헌팅 포차에는 왜 오는 거야… 애초에 계산하기 전에 말을 하던가… 계산 다 해놓고 안된다니…”
유일하게 나만 까였다.
여자를 잘못 찍은 죄로.
여자들 중 딱 한 명만 솔로가 아니었는데, 그게 하필 내가 찍은 여자였다.
솔직히 나는 헌팅 성공률에 자신이 있었다.
내가 합석 권유 담당이었으니까.
자고로 그룹에서 제일 잘생긴 놈이 합석권유 하는 것이 남자들 사이에선 국룰이다.
그래야 여자들이 합석을 수락할 확률이 비약적으로 올라간다.
친구들에게 은연 중 인정을 받을 정도로 내 비주얼은 봐줄 만했다.
훈훈한 얼굴에, 키도 크고, 운동도 열심히 해 어깨도 넓다.
그런데 왜 까였냐고?
2차를 가자고 은근슬쩍 말했더니 남친이 있단다.
예상치 못한 합석권유에 웃고 즐기기까지는 했으나,
정작 2차를 가려니 남친에게 미안해져서 거절했나 보다.
남친이 있는 걸 몰랐으면 몰라도, 뻔히 남친이 있다는데 친구들 앞에서 찝쩍대기 뭐해 빠르게 손을 뗄 수 밖에 없었다.
휘잉-
새벽 공기의 찬 바람이 유독 시린 옆구리를 흩고 지나간다.
평소에 차원이 다른 헌팅 성공률을 빌미로 친구들을 실컷 비웃었다.
그 업보의 대가는 혼자 까인 나를 향한 웃음 섞인 친구들의 시선이었다.
솔직히 돈만 있었으면 혼자서라도 헌팅을 시도했을 테지만…
“에휴…”
빈곤한 대학생의 지갑은 예산이 한정되어 있다.
결국 불운을 저주하며 집으로 발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철컥!
아무도 없는 불 꺼진 자취방.
불을 켤 필요는 없다.
렌즈만 빼고 바로 잘 거니까.
세안 정도만 끝낸 후 불 꺼진 방 안에서 손끝의 감각만으로 렌즈를 빼내는 데 성공했다.
올라오는 술기운에 침대에 눕자마자 잠을 잘 수 있었다.
웅성웅성-
한참 단잠에 빠져있을 때,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 깨어났다.
얼마나 시끄러운지 술기운 덕에 깊게 잠에 빠졌음에도 깨버렸을 정도였다.
“…바꿔…고!…”
핸드폰 알람이나 화재 경보음은 확실히 아니었다.
사람의 목소리다.
비몽사몽한 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뭐지? 자취방에 올 만한 사람은 없는데…’
친구들은 어제 전부 홈런을 쳐서 아침부터 찾아올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처음 듣는 목소리다.
심통이 잔뜩 나서 듣기 싫은 목소리.
SNS에서 종종 보이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진상 고객 특유의 톤이었다.
“바꿔달라고!!”
“아니… 그게… 아무래도… 저희가 따로 준비한 것들이 있는데, 한번 확인해 보시고 결정하시는 것이…”
“됐고, 바꿔달라고!!”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 두 눈에 담긴 풍경은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의심하게 만들었다.
나는 분명 자취방에 들어와 잤는데…
주변이 모두 하얗다.
마치 영화 속 CG 처리된 장면처럼 아무런 물건도, 굴곡도 없는 흰색의 공간이었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었나…”
그리고 공중에 떠있는 아기 천사를 봤을 때는 확실히 꿈이라고 생각했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풍기는 뚱뚱한 남자 또한 생각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남자는 아기천사에게 윽박지르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귀여운 아기천사에게 화를 낼 수 있지?
참 생긴 대로 사는구나.
“앗! 일어나셨군요! 그게… 상황이…”
“야! 바꿔줄 거야? 말 거야?!”
“히익! 잠시만요! 적어도 이분께 설명이라도 드려야…”
눈이 선명해지자 나는 남자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대학 동기 중 한 명으로 안 좋은 의미로 유명한…
박찬영이었다.
이름을 모를 수가 없다.
저 덩치는 아무래도 눈에 띄니까.
“쟤가 왜 내 꿈에 나오냐… 진짜 개꿈이네… 잠깐, 이것도 돼지꿈이라고 쳐주나?”
대학이다보니 중·고등학교 때와 다르게 노골적인 왕따는 없다.
그러나 남녀 불문하고 ‘박찬영을 어떻게 생각해?’라 물어본다면, 누구나 어색한 얼굴로 ‘나랑은 좀 안 맞는 것 같아.’ 라고 돌려 말하겠지.
간단히 말해 박찬영은 비자발적 아싸다.
물론 친하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은 손에 꼽는다.
다른 사람과 차이점은 아주 약간 그를 좀 더 알고 있다는 것 정도인데…
그조차 이제 와선 의미 없고, 올해 박찬영과의 접점은 없다시피 하다.
“죄송한데 꿈이 아니에요! 어? 꿈이 맞나? 꿈이 맞긴 한데, 꿈이 아니에요! 이건 실제 상황이라고요!”
이야.
아기 천사의 울먹이는 얼굴, 정말 생동감 있네.
내 돼지꿈 발언을 들은 박찬영은 얼굴이 험악해졌다.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을 저리 일그러뜨리니 정말… 추했다.
그 후 박찬영은 굳게 결심한 얼굴로 내뱉었다.
“역시 정했어. 난 바꿀 거야. 바꿔야겠어.”
“으아악! 잠시만요! 일단 이분 취기부터 깨우고 이야기하죠!”
짝!
아기천사는 갑자기 두 손을 마주쳐 손뼉을 쳤다.
그러자 지금껏 술기운과 잠결로 몽롱했던 내 정신이 순식간에 또렷해졌다.
그제야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 상황은 꿈이 아니라는 것을.
“…이게 지금 꿈이 아니라고?”
“그래요! 지금 상황이 엄청엄청엄청 심각하다고요!”
내가 정신을 차리자 화색을 띄우며 내게 속사포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박찬영의 실종된 아버지가 사실은 다른 차원의 세계로 전이한 거고…”
“그렇죠.”
“거기서 마왕을 무찌르고 세계를 구해서 그쪽 신이 약속한 소원권을 받았고…”
“네…”
“그런데 이미 하렘이든 영생이든 이루고 싶은 건 모두 이뤘다? 딱히 지구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던 박찬영의 아버지가 지구에 남긴 아들을 떠올렸고…”
“안타깝게도요…”
“본의 아니게 부모로부터 방치된 아들에게 소원권을 넘겼다?”
“정확합니다.”
“뭐야. 개꿀이네! 공짜 소원권! 영생이라든지 평생을 써도 못쓰는 돈이라든지 빌면 되지 않아?”
“그렇쵸… 보통 그런걸 비는 게 정상이죠… 저희 예상 리스트에도 있었고…”
이야, 박찬영의 아버지가 영웅이라고?
그에게 찾아온 행운이 부러웠다.
무려 신이 직접 들어주는 소원이라니!
하지만 나는 이 시점까지 왔을 때 이름 모를 불안이 온몸을 더듬는 것을 느꼈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설명을 들어보면 나랑 전혀 관련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믿어야 할지 의심 가는 사정을 내가 들을 이유 또한 없다.
“음… 문제가 되는 게 그 소원이…”
“야! 바꿔줄 거야? 말 거야?!”
“잠시만요! 그러니까… 박찬영님의 소원이 말이죠…”
말을 이으려는 천사의 얼굴은 불안과 고뇌로 일그러져있었다.
무척이나 골치 아픈 상황을 마주했을 때 나올만한 표정이다.
그리고 나는 곧 천사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같은 과 백하민과 몸을 바꿔 달라는 소원입니다…”
“…뭐?”
갑자기 내 이름이 나오기에 짧은 시간 뇌정지가 왔다.
뭐랑 뭐를 바꿔?
슬쩍 고개를 돌려 박찬영을 본다.
뚱뚱하고 못생겼다.
다시 천사를 봤다.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아니! 왜? 무한한 돈과 영생을 내버리고?!”
“너! 너도 나 못생겼다고 생각하지! 나도 못생기고 싶어서 못생기게 태어난 거 아니라고! 나도 잘생기게 태어나고 싶었어!”
순간 찔려서 움찔했지만, 여기서 말을 받아치지 않으면 되돌릴 수 없는 커다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반박했다.
“아무리 그래도 영생을 버린다고?!”
“오래 살면 뭐해! 60년 못생길 걸 평생 못생긴 걸로 바뀌는데!”
“돈은! 성형수술하면 되잖아!”
“너랑 몸을 바꾸면 시간이 걸리지도 않고, 아프지도, 부작용도 없는데 굳이?”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나랑?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것 있어??”
“평소에 네가 나를 속으로 경멸하고 비웃는 거 모를 것 같아?! 다 알고 있다고!!”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나는 딱히 박찬영을 무시한 적이 없었다.
그와 나의 관계는 완벽한 타인에 가까웠다.
평소 대학에서 박찬영이 무얼 하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속으로 경멸하고 비웃었다니?
순수하게 망상과 열등감이 분명했다.
어이가 없어서 입이 벌어졌다.
“나…나도 너처럼 잘생긴 얼굴로 살아가면서 여…여자들도 막 갈아치우고… 후리면서 살 거야!”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비웃거나 무시한 적이 없어! 전부 오해야!”
“거짓말 하지 마! 약삭빠른 새끼! 지금 억울해하는 얼굴이 전부 연기인 거 알아! 세상 전부가 속아도, 나…나는 안다고!”
“뭔!…”
사람이 정말로 억울하면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박찬영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음침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안 되겠다. 전혀 나를 믿어주는 눈치가 아니었다.
“흐흐… 너 정도면 분명 여자들이 알아서 돈이고 선물이고 바치겠지…”
돌아버릴것 같았지만, 최대한 머리를 굴려본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박찬영을 설득해야만 한다.
그의 생각을 돌릴만한 소원을 계속해서 생각해낸다.
“진정하고 생각해봐! 내가 잘생기긴 했어도 연예인이나 모델만큼 잘생긴 건 전혀 아니잖아? 차라리 얼굴과 몸을 연예인급으로 바꿔달라는 건 어떨까? 그게 훨씬 여자들이 좋아할걸??”
“나를 항상 비웃던 네가 나처럼 못생겨졌으면 좋겠어! 어때? 막막하지? 노력 하나 없이 태어나서 가진 걸로 나를 무시해?!”
노력 하나 없이 가졌다니!
내가 얼마나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는지 전혀 모른 채 뱉는 말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런 걸로 반박해 봐야 믿어줄 것 같지도 않고, 반감만 살 뿐이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머리를 굴려야 한다!
상대가 명확한 갑이기 때문에 잘 구슬려서 설득할 필요가 있다.
박찬영이 내게 느끼는 감정은 명확하다.
열등감.
…솔직히 여기서 짚이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박찬영과 나는 중학교 동창이다.
그러나 당당히 말하겠는데, 내게 잘못은 단 하나 없다.
이 세상 누가 물어도 떳떳이 말할 수 있다.
“고작 얼굴 좀 생겼다고… 나랑 똑같이 왕따였던 놈이… 알아?! 너랑 나의 차이점은 외모밖에 없어!”
계속되는 궤변에 나도 머리가 뜨거워졌다.
자연스레 입이 험악해진다.
“네 손으로는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남이 가진 것을 질투만 하는 삶이 만족스럽냐?”
“나도 외모만 좋았어도 이렇게 안됐어! 내가 뭘 하기도 전에 다들 경멸스래 쳐다보는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되도 앉는 핑계 대지 마! 운동을 해! 머리카락을 잘라! 피부를 관리해! 아가리로만 할 수 있다 말하는 건 누구나 가능해!”
“시발… 너도 똑같아. 잘생긴 놈은 못생긴 사람을 절대 이해하지 못해… 그래서 네가 느껴야 하는 거야. 못생긴 채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이 노력해 이룬 것을 질투하는 삶이라니.
진절머리난다.
나도 솔직히 자세히 보면 생얼이 그렇게 잘난 편은 아니다.
이런저런 자잘한 점이 모이고 모여 훈훈한 남자로 보이는 것이다.
단점도 있다.
시력이 너무 나빠 안경을 못 쓴다.
안경알이 너무 굵어 곧바로 너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매일 거울 앞에서 표정 연습을 한다.
10분에 한 번씩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라고 현타가 오는데도, 꾸준히 하루 1시간씩 표정 연습을 한다.
태어나길 뼈가 얇게 태어나 근육이 잘 붙지 않았다.
체지방률만 줄이면 태가 보인다는 식스팩도 만드는 데 2년이 걸렸다.
존나게 좁은 어깨를 조금이라도 키우기 위해 얼마나…
하.
그만하자.
제기랄…
1시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
나는 박찬영의 외모가 아니라, 그의 사상을 혐오하게 되었다.
“흐흐… 그… 그럼 너는 내가 되어도 지금처럼 여자들이 꼬인다는 말이지?”
“이런 시발! 그런 말이 아니잖아!”
“봐봐! 너도 자신 없으면서! 역시 나는 너랑 몸을 바꿀 거야!”
박찬영이 나를 음침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나는 조급해진 심정으로 천사를 바라보았다.
“이거 내 의사는 상관없어? 나는 거부할 권리 없는 거야?”
“그게… 일단 소원은 들어주고, 뒷감당은 전부 천계 쪽에서 하는 걸로 되어있어서…”
개같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막대한 부를 소원으로 빌 때, 수많은 돈이 단번에 사회에 풀리며 시장 경제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경제 인플레이션인가 뭔가도 있고.
영생은 말할 필요도 없다.
21세기 전국에 CCTV와 신분증이 완벽히 보급된 시대에 늙지 않는 것을 숨기는 건 불가능 할 테니.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소원은 무척이나 한정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로 납득이 가능할 리가!
그 말은 내가 거부할 권리는 없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이 소원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부분은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쪽에서도 계속해서 설득했던 것이고요.”
“내 알 바 아니잖아? 뒷감당은 너희 몫이고!”
“그게 무슨 억지야! 아무리 소원이라고 해도 이런 게 어디 있어!”
“한 세상을 구한 대가라는 게 좀 무거워서 말이죠… 저쪽 세상과 이쪽 세상 신끼리 얽힌 약속 같은 것도 있고요… 저희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경악했다.
“아…안타깝다니! 무슨 소리야! 아직 확정 아니잖아! 그렇지?”
“제가 아무리 설득해도 도무지 들으시질 않으셔서 마지막으로 당사자인 백하민님께 설득을 맡겨볼 생각이었지만 보시다시피…”
“내 생각은 변함없어! 바꿔줘!”
천사의 목소리가 슬슬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바뀌었다.
정말로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이건 시발 현실이 아닐 거야.
아직 잠에 덜 깨 자각몽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해.
“그럼… 소원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아…안돼!!”
“죄송합니다… 저희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곧 눈앞이 어두워지며,
귓가에 나의 목소리로 경박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고,
정신을 잃고 다시 일어났을 때는…
나는 박찬영이 되어있었다.
< 2화 >
일어나니 박찬영은 사라져있었다.
흡연자가 항상 입에 달고 사는 ‘담배 땡긴다’ 라는 기분이 이런 건가?
담배 냄새에 질색하던 나였지만 당장은 그 기분을 무척이나 공감했다.
머리가 복잡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만약 내 눈앞에 술과 담배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술을 피고 담배를 마시리라.
“괜찮으신가요? 부작용은 일체 없으실 텐데…”
“…”
“어라? 이상하네… 분명 제대로 성공했는데?”
아기천사가 내 눈높이로 날아올라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을 정리한다.
현실부정하며 포기하는 것은 내 성격과 맞지 않다.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 더 나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당장 해야 할 것은…
“너는 분명 이렇게 몸을 교체하는 소원은 문제가 될만한 부분이 있다고 했어. 맞지?”
“네. 맞아요. 이런류의 소원은 제3자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일어났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알다시피! 나는 직접적인 피해를 받은 피해자야. 그러면 이에 대한 조치는? 설마 아무것도 없는 거야?”
“아뇨! 있습니다! 그 부분은 저희 쪽에서 최대한 백하민님… 아! 이제는 박찬영님이네요. 박찬영님의 요구를 수용할 생각입니다.”
하…
내 목에서 흘러나오는 익숙지 않은 목소리가 나의 신경을 자극한다.
화를 최대한 눌러담았다.
지금이 중요하다.
내 요구를 최대한 수용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되돌릴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좋아. 그러면 내 요구를 말할게. 나는 이 몸으로 살 생각이 없어. 적어도 나와 똑같이 생긴 육체를 준비해줘. 그 육체로 내 영혼을 옮겨주고!”
당연히 내 육체를 되돌려달라는 요구는 안될 것이다.
그런 멍청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차선이다.
나와 똑같이 생긴 몸이라면 잃어버린 모든 것을되찾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세상에 백하민이 둘이라도, 내가 진짜 백하민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건 쉬울 테니.
“안됩니다.”
“뭐? 어째서!”
“소원이 ‘백하민과 몸을 바꿔줘’이기 때문입니다.”
“하…”
짜증나지만 단박에 이해해 버렸다.
“만약 소원이 ‘백하민으로 살게 해줘’ 혹은 ‘백하민에게 빙의하게 해줘’ 라고 한다면 가능한 요구입니다. 하지만…”
“’백하민과 몸을 바꿔줘’라는 소원에는 내가 ‘박찬영’의 몸으로 사는 게 포함되어 있다는 뜻?”
“맞습니다.”
맞는말이라 어떻게 할 수도 없다.
그 자식이 빈 소원에는 자신이 백하민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도 있지만, 백하민이 박찬영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젠장!
이게 안 된다면…
“좋아! 외모는 어떻게 해도 좋으니까,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인간관계나 시험 성적 이력, 사회적 지위, 기타 등등을 돌려줘!”
“안됩니다.”
“이건 왜! 딱히 소원에 위반되는 건 없잖아!”
“그게… 애매한 부분인데요… 악마 같은 경우에는 딱 소원만 이루어 주고 어떻게 되든 신경을 쓰지 않는데 저희는 아시다시피 천사고, 이 소원도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이루어주는 것이다 보니 처리는 되도록 깔끔히 해주거든요.”
“그래서?”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소원을 빈자의 의사에 크게 반하는 요구는 못 들어 준다는 것이죠… 직접 말로 하지는 않았어도 박찬영님의 ‘백하민이 지금까지 자신처럼 고통받았으면 좋겠다’ 라는 의사가 있었기에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시발!
이거 좀 억지 아닌가?
왜 천사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찾아서 한단 말인가??
나로서는 악마와의 거래가 훨씬 나았겠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이게 잘못된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게 세계를 구한 소원이다 보니 대놓고 모든 걸 바로잡아 드리진 못한단 말이죠…”
“끄응…”
“그래서 약간 편법으로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되찾으시는 건 충분히 가능합니다. 물론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심하게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극단적으로는 내가 앞으로 박찬영으로 살며 쌓는 모든 것들을 천사가 나서서 무너뜨리지 않나 걱정했다.
최악은 피했지만, 차악도 만만치 않다.
이런 몸뚱이로 처음부터 시작하라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내가 요구하는 족족 전부 안된다 하니 방법이 없잖아!”
“그래서 보여 드릴게 있는데… 이건 원래 박찬영님께 소원으로 드리려고 저희가 준비한 물건입니다. 거절당했지만요.”
“준비한 것이 있다고?”
“네. 혹시 ‘상태창’이라고 한번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이거 혹시 그거인가?
뭔가 어디서 많이 읽은 듯한 상황이다.
일단 반신반의하며 입을 열어 상태창을 내뱉었다.
띠링!
* * *
[이름] 박찬영
[직업] -
[힘] 4     [민첩] 1
[체력] 2    [지능] 5
[기교] 1    [매력] -23
[특성] -
보유 카르마: 0
* * *
“이건 뭔데?”
“간단합니다! 카르마로 자신의 외모를 바꾸거나, 신체 능력을 올린다! 쉽죠?”
“외… 외모를 바꿀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키! 몸무게! 얼굴은 물론이고 동공의 색깔마저 바꿀 수 있습니다! 단번에 확 바뀌는 게 아닌 만큼 ‘소원’에도 제약을 받지 않고, 잃어버리신 것 그 이상으로 돌려받으실 거의 유일한 방법이죠!”
눈이 번뜩여 상태창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상점], [보유 스킬], [퀘스트], [외모 편집]이 보인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건…
“소설 진입?”
“이 시스템은 애초에 박찬영님… 그러니까 바뀌기 전 박찬영님에게 맞춰 제작된 맞춤 시스템이에요. 목적은 박찬영님의 인간으로서의 성장이죠.”
“…확실히 그놈은 인간이 덜되긴 했지.”
“예… 다른 차원에 계신 아버님도 보호자 없이 홀로 자란 박찬영님을 걱정하셔서 저희에게 부탁했습니다. 박찬영님이 비뚤어지지 않게 잘 부탁한다고…”
박찬영의 아버지는 그 새끼와 다르게 생각이 깊은 사람인 것 같다.
호부 아래 견자 없다는 말이 있던데, 개소리다.
“그런 박찬영님의 인격이 성장할 수 있게끔, 그러면서도 그분이 흥미를 느낄만한 것을 찾은 결과 이 시스템이 개발되었죠!”
“중학교 때, 그 새끼 취미가 소설을 읽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거랑 관련이 있는 거야?”
“네! 현재는 연중 되었지만, 재미있게 본 소설들의 뒷부분을 본인이 직접 완결짓는 것은 나름 흥미로운 것이 아닐까요?”
“…확실히 흥미가 가긴 하네.”
내 취미 중 하나가 웹소설을 읽는 것이다.
그렇기에 천사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잘 보고 있던 소설이 연재를 중단해서 가슴 아픈 적이 몇 번이었는가?
“소설 속으로 들어가 그 소설을 완결 지으면 이 [외모 편집]기능을 이용해 키를 늘리거나 얼굴을 잘생기게끔 할 수 있는 거야?”
“오! 상당히 비슷하게 맞추셨어요! 정확히는 소설 속으로 들어가면 상황에 따라 ‘퀘스트’가 주어지는데, 이 퀘스트를 클리어하시면 시스템에 사용되는 재화인 카르마를 얻습니다!”
“그리고 그 카르마를 사용해 상점을 이용하거나 외모를 편집할 수 있다?”
“넵! 이해가 상당히 빠르시군요?”
어깨를 으쓱여 대답을 대신했다.
확실히 판타지 소설을 좋아한다면 반길만한 상황이다.
그런데 아무리 천사라 해도 이런 시스템을 손쉽게 만들지는 못할 텐데…
단 한 명만이 사용할 시스템을 이렇게 정성스레 만든 이유가 뭘까?
평범한 사람이 ‘연중 된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능력’을 얻을 만한 일은 없을 것이다.
나의 경우나 그 새끼 처럼 특이한 일을 겪지 않는 한.
“그런데 왜 수고를 들여서 이런 시스템까지 만든 거야? 그냥 그자식 수명을 늘려주고 돈 조금 쥐여주면 되지 않아??”
“하하… 박찬영님의 아버님은 천계의 은인이잖아요. 소원권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부탁은 들어드려야 마땅하죠. 그래서 이곳의 박찬영님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해 봤더니 아시다시피…”
추악함이 가득 찬 그 새끼의 언행이 다시금 떠오른다.
“잘 살고 있지는 않았지. 그 성격이면 큰돈이나 영생을 얻는다고 행복하게 살 것 같지도 않고.”
“그렇죠. 그렇기에 열심히 만들었지만, 이 시스템을 보지도 않으시고 거부당했죠…”
그래 그래.
니들 착하다.
천사야. 아주 천사가 따로 없어.
그렇게 착하면 내 몸도 돌려줬으면 좋겠다.
시발…
“보상을 대신하여 이 시스템을 받으시겠어요?”
“음…”
“사실 이 시스템은 고작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보상치고는 너무너무너무 과해요. 아무래도 비교 대상이 세계를 구한 보상이다 보니까요. 그래도 저희가 정말 죄송한 면도 있고, 이 시스템도 열심히 만들었는데 이번 기회가 아니면 쓸 일이 전혀 없어서 드리는 것이에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고민이 되기는 한다.
꼼짝없이 박찬영으로 살아야 할 위기에 이런 거라도 받아야 하지 않겠나?
이것보다 더 좋은 보상을 받을 자신도 없고.
“좋아. 근데 이거 환불 가능하지? 쓰다가 차라리 다른 보상을 받는 게 나을 것 같으면 그렇게 해줘.”
“알겠습니다. 언제든 불러주세요! 그런데 아마 불만 없으실 거에요. 자신 있습니다!”
“흐음…”
“상태창을 부를 때는 전 처럼 ‘상태창’을 입으로 소리 내면 됩니다!”
“…왜 굳이 ‘상태창’을 입으로 외쳐야 하는 거야?”
“에이, 이런건 클리셰를 따라가는 게 당연하잖아요!”
“…”
“그럼! 만족하신 것으로 알고 원래 박찬영님이 계시던 장소에 보내드리겠습니다!”
* * *
“킁킁! 이게 무슨 냄새야?”
끼이이익!
침대에 뉘인 몸을 일으키자 제작자의 예상을 초월한 무게를 버티던 침대가 비명을 지른다.
내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는 바로 인간의 체취였다.
머리 기름 냄새, 숙성된 땀 냄새, 코 천장을 찌르는 겨드랑…
“젠장… 일단 씻자.”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집구석을 돌아다니며 욕실을 찾았다.
혼자 살기에는 과하게 넓은 집을 돌아다닌 결과, 곧 욕실을 찾을 수 있었다.
문을 열자 나를 반기는 뜻밖에 깨끗한 욕실.
그러나 온몸 구석구석을 씻고 말겠다는 나의 다짐과 다르게 간단한 세안밖에 하지 못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사는 집에 샴푸가 없냐…”
린스랑 트리트먼트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샴푸가 없는 것은 좀 심하지 않은가?
욕실에 있던 것은 일회용 면도기와 비누가 끝이었다.
그보다 방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깨달은 건데, 이런 식으로 내가 알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당장 집의 구조는 물론, 현관 비밀번호도, 핸드폰의 잠금패턴도 모른다.
그렇게 곤란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천사가 나타났다.
“아! 박찬영님!”
“으악! 깜짝이야!”
“생활에 불편한 부분은 방금 처리했으니 이제 곤란한 일은 없을 거에요!”
“뭐? 무슨 소리야. 나 지금 이 집의 비밀번호도… 어?”
갑자기 내 머릿속에 현관 비밀번호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박찬영의 핸드폰 번호, 통장 비밀번호 등등…
이 정도면 불편함 없이 생활이 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박찬영 인간관계 관련 정보는 하나도 안 떠오르는데? 이러다 그 새끼가 알던 사람을 만나게 되면 좀 곤란해지지 않을까?”
“어… 하하… 그게 인간관계까지 전부 동기화 되신 거에요…”
“…”
인간관계가 적다 못해 한 명도 없다는 건 좀 놀라운 소식이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새로 시작하는 마음가짐으로…
그 새끼의 친구가 있었다고 한들 나와 성격이 전혀 맞지 않을 텐데, 오히려 좋은 것이 아닐까?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불편하신 거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연기처럼 사라지는 천사를 배웅하며 생각을 정리한다.
이제 내가 해야 할 것은 뭘까?
당장 시스템을 사용해서 소설 속으로 진입?
운동을 하면서 살 빼기?
아니다.
“박찬영… 아니 백하민이 된 그 새끼부터 조져야지.”
나는 박찬영이 되며 마음속 깊이 새긴 결심을 떠올렸다.
당연히 이제는 백하민이 된 그 새끼의 인생을 좆되게 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부수고 말 테다.
난 네 생각보다 독한 놈이고, 넌 그걸 몰랐다 이 씹새끼야.
그 새끼가 먼저 가만히 있는 나를 건드린 거다.
당장 핸드폰을 꺼내 카카●톡, 페이●북, 인스타●램을 설치했다.
그리고 백하민의 계정으로 로그인한 뒤, 빠르게 손가락을 놀린다.
온갖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오랜 친구마저 손절할만한 게시물을 SNS에 올리기 위함이다.
“어디 보자… 그래, 먼저 이걸로 시작할까? ‘저는 사실 13세 이하의 여자아이에만 흥분하는 아동 성애자… 초경을 시작한 여자는 제 취향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 일본 제국의 황국 신민으로써 다케시마를 일본의 정당한 영토로 인정… 또한 위안부는…’”
그때였다.
갑작스레 한창 작성하던 게시물이 지워지고, 계정에서 로그아웃되었다.
버근가?
아직 올리기 전이었는데!
나는 다시 백하민의 계정으로 로그인을…
로그인…
“어?”
어찌된 일이지?
내가 몇 년간 쓰던 SNS의 계정 ID와 패스워드가 기억나지 않는다!
“으어어어…”
“으허헉?! 깜짝이야!”
갑자기 매우 지친 표정의 아기천사가 소리소문없이 나왔다.
고작 5분 전 멀쩡한 것을 봤는데, 마치 며칠을 밤샘 노동한 것 처럼 다크서클이 무척이나 내려와 있었다.
“아… 애초에 이 시점으로 시간을 돌려서 말씀드리는데, 제발 그거 하지 말아주세요… 부탁입니다…”
“뭐? 뭔소리야?”
“지금 시도 하시는 SNS 테러 말이에요. 정말 철저하고 지독하게 해버리시던데… 천계조차 수습해보려다 포기하고 그냥 시간을 되돌렸다고요…”
“뭐??”
방금… 시간을 돌렸다고 했나?
“계정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 다시 시간을 돌렸더니, 대학에서 그렇게 끔찍한 정치질을… 으… 생각보다 무서운 분이셨군요… 아시겠어요? 이번이 3번째에요 3번째!”
“…”
“저희가 항복할게요! 어차피 작정하고 하시는 거 아무리 막아보려 해봐야 못 막으니 그냥 항복할게요! 도대체 어떻게 300개가 넘는 친구 전화번호는 전부 외우고 있는 거에요?!”
“음… 어찌 된 것인지 지금은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기억을 더듬어봐도 내 친구였던 사람들의 세부 정보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이름 나이 생일 주소 연락처 취미 정도는 전부 외우고 있었는데?
지금 기억에 남은 것은 이름과 나이뿐이었다.
“과거에… 아니 미래에 심하게 당했으니까요! 저희도 박찬영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아버님의 부탁인 ‘아들이 잘살았으면.’에 위배 돼서 막을 수밖에 없어요!… 막았나 싶으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백하민님의 인생을 나락으로 보내버리니… 제발 그 시스템으로 만족하시면 안 될까요??”
놀랍다.
확실히 나는 백하민의 인생을 조질 생각이었지만, 천사가 항복할 만큼 크게 성공하다니.
그것도 3번이나.
“적어도 백하민님이 불행이 아닌 평범한 생이라도 살게 해주세요… 어떻게 아무 도움 없이 맨몸으로 사람을 그렇게까지 망가뜨릴 수 있을까요…”
“…박찬영… 아니, 백하민의 인생이 3번 망가졌다고?”
“예!! 그것도 천계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시간을 되돌려야 할만큼 철저히!”
천사는 한이 맺혔다는 듯 나에게 계속해서 하소연했다.
나는 천사의 기나긴 하소연 중, 중요한 점을 짚는 것에 성공했다.
‘내가 몇 번이나 복수를 시도한들, 천계가 막아서는 건가…’
단순히 방해와 제재의 정도가 아니다.
무려 시간을 돌려버리니 도무지 손을 쓸 수가 없다.
그렇다고 순순히 복수를 포기해야 한다?
‘개소리 하지 마.’
나는 3번이나 복수에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 시간이 되돌려져 ‘없었던 일’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놈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내 손으로 녀석에게 복수하지 않고선 도무지 화가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좋아. 얌전히 포기할게. 대신 대가를 내놔.”
“뭐… 뭘 더 내놓으라고요?! 드릴 것도 없어요!”
“잘 찾아보면 있지 않을까?”
“악마! 악마가 틀림없어요!”
“그래서? 수락할 거야 말 거야?”
“으… 잠시만요! 이 이상은 제 선을 넘어선 문제라고요! 잠깐 위에서 회의하고 올게요!”
입으로는 얌전히 포기하겠다고 했다.
당장 천사의 제안을 거절한다고 한들 얻을 이익이 없다.
오히려 앞으로의 행동을 전부 경계 당해 복수와 더욱 멀어지겠지.
놈의 인생을 나락으로 처박을 수 있다면 기꺼이 허리를 숙이고 때를 기다리겠다.
나는 선제공격을 당해놓고 잊고 살만큼 착한 놈이 절대 못 된다.
< 3화 >
“좋아요!”
잠깐 사라졌다 돌아온 천사는 결심했다는 듯이 내게 말을 건넸다.
“보상, 드릴게요! 대신에 몸이 바뀐 것에 대한 보복성 행동은 금지입니다!”
“…그 보복성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은?”
“오로지 저의 주관입니다!”
“음, 그거 믿어도 되는 거야?”
“저는 이래 보여도 자격시험을 통과한 정식 천사랍니다? 제 직책에 맹세코 최대한 공정하게 판단할 거에요!”
복수에 대한 선이 애매하다라…
복수할 의지가 가득한 내겐 그닥인 이야기다.
‘천사’의 주관적인 기준이란,
아주 빡빡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알겠어. 그런데 백하민 쪽에서 나를 적대할 수도 있잖아? 그것에 대한 보복은 안되는 거야?”
“그런 건 어느 정도 허용됩니다! 물론 정도를 넘어가면 제가 나서 둘 사이를 중재하겠습니다!”
역시 선제공격을 유도하는 방법밖에 없는 건가.
상세한 계획은 아직 없지만, 어렵지 않게 성공할 것 같다.
간단한 도발…
타인이 보기에는 도발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행동에도 크나큰 의미를 부여해 해석하는 게 놈이니까.
의외로 복수의 시간은 머지않을지도 모르겠다.
“좋아. 그럼 그 보상이란 건?”
띠링!
* * *
[이름] 박찬영
[직업] -
[힘] 4     [민첩] 1
[체력] 2    [지능] 5
[기교] 1    [매력] -23
[특성] 『자연치유』
보유 카르마: 0
* * *
갑작스럽게 상태창이 떠올랐다.
나는 곧바로 전과의 차이점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특성에 ‘자연치유’가 추가되었다.
“이거 좋은 거야?”
“엄청 좋은 거에요. 아니, 특성들은 대부분이 굉장한 거에요. 얻기도 엄청엄청엄청 힘들고, 효과들도 뛰어나죠.”
“특성은 상점에서 카르마로 살 수 있는 것 아니었어?”
“스킬은 구매 가능하지만, 특성은 안돼요. 후천적으로 특수한 경험을 하며 얻을 수는 있지만… 쉽게 얻지는 못하실 거에요.”
천사는 재차 특성의 희소성을 강조했다.
물론 희소성과 유용성이 별개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적당히 천사의 과대포장을 걸러 들었다.
“오… 확실히 희귀하고 좋은 것인가 보네. 그래서 효과는 뭐야? 자연치유라고 하면… 팔이 잘려도 다시 재생된다든지?”
기대를 담아 물어봤다.
내가 상상한 것은 드래●볼의 피콜●.
누가 봐도 부럽기 그지없는 재생능력의 소유자다.
“조금 달라요. 상상하시는 것처럼 몸이 빠르게 재생되지는 않을 것이에요…”
“물론 상처가 아무는 속도가 범인과 뚜렷이 차이가 보일만큼은 되지만… 이 특성의 장점은 기력, 체력, 정신력, 마나를 가리지 않고 범용적인 재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정신력을 재생시켜주는 스킬은 거의 없다시피 한 걸 보면 무척이나 좋은 특성이죠!”
뚜렷한 장점은 없지만, 어느 상황에서나 유용함을 보장받는다는 뜻인가…
“좋은 것이라며 강조한 것치고는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은데?”
“그건 아직 박찬영님이 겪어보지 못하셔서 그래요. 바로 느끼실만한 효과를 하나 꼽자면, 근육이 찢어지고 회복되며 느껴지는 근육통은 앞으로 거의 느끼실 일이 없을 겁니다! 정신이 피로해서 느끼는 무력감과 스트레스 또한 막아주고요.”
확실히 이렇게 들으니 나쁘지 않게 들린다.
이 육체 곳곳에 뒤룩뒤룩 찐 살을 빼려면 운동은 필수인데, 근육통을 지워준다니!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능력이다.
“좋네. 그런데 다른 특성은 어떤 종류가 있어?”
“예를 들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악성’ 특성을 가졌고, 아이작 뉴턴이 ‘직관’ 특성을 보유했죠. 물론 특성을 가졌다고 전부 성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특성·재능과 관련 없는 삶을 평범히 살거나, ‘연설’ 특성을 가졌지만 몰락한 아돌프 히틀러가 그 예시죠.”
…이렇게 들으니 특성이란 게 정말 특별하고 희귀한 능력이란 걸 실감하게 된다.
천사가 예시로 들어준 인물들은 전 세계 누구나 알만큼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예시로 든 것들이 유난히 강력한 특성이긴 하지만… 자연치유와 달리 범용성이 떨어진답니다.”
“특성을 2개 이상 얻기는 진짜 힘들겠네… 아니, 그 전에 2개 이상 보유한 인물이 있어?”
“알버드 아인슈타인, 예수 그리스도, 석가모니, 공자, 칭기즈칸 등등이 있네요. 이들은 각각 특성을 5~6개씩은 가지고 있었어요. ‘자연치유’가 어느 한 곳에 두각을 보이는 특성이 아니라 한들, 특성 보유 자체가 얼마나 거대한 특전인지는 아셨죠?”
“…”
위인을 넘어, 몇몇은 인세에 강림한 신으로 모셔지는 인물들이 나오자 내 불만은 쏙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천사와의 거래를 받아들였다.
“그럼 저는 정말로 가볼게요? 더 하실 말씀 없으시죠?”
…찜찜하다.
어떤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생각이 날듯 말듯 머릿속을 괴롭힌다.
분명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잠시만!”
“네? 뭐가 더 있나요?”
천사는 사라지려다 말고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얼굴만 보아도 ‘또 무엇을 요구하려고…’라 생각하는 것이 읽힌다.
아니, 그보다 나는 자신의 멍청함에 한숨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지 않고 있었다니!
“잠깐, 소설에 들어가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설마 정말로 죽는 것은 아니지?”
“아앗! 제가 말씀 안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당연히 소설 속에서 죽으셔도 현실에는 영향이 하나 없습니다!”
“그럼 죽게 되면 내가 들어간 소설은 어떻게 되는 거야? 처음부터 다시? 아니면 그걸로 그 소설은 재도전이 불가능?”
“아무런 패널티 없습니다!”
뭐?
실패했음에도 패널티가 없다는 것은 의외다.
생각해 보면 시스템 그 자체가 소원권의 보상인데 패널티가 있는 것이 이상한가?
“굳이 있다면 죽었을 때의 정신적인 충격일까요? 아! 그마저도 박찬영님은 특성으로 인해 정신적 데미지는 거의 없겠네요.”
“…평범한 사람이 죽는 경험을 여러 번 하면 미치는 것 아니야?”
절래절래
“사람은 그리 쉽게 망가지지 않아요. 고문을 당하다 죽으면 몰라도… 물론 고문의 대비는 시스템 속에 해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패널티가 없다는 건 정확히 무슨 뜻이야?”
“사망하시게 되면, 플레이하실 때의 과거로 언제든 돌아갈 수 있습니다! 죽기 5초 전으로도, 말씀하신 대로 처음부터 시작하실 수 있죠! 다만, 시간을 앞으로 감는 것은 안 되니까 주의해주세요!”
확실히 사망 패널티는 없었다.
오히려 자살을 감수한다면, 언제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이다.
거래로 얻은 특성보다 수십 수백 배 더 좋은데?…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듣지 않고 넘어갈 뻔했다니, 정말 큰일 날 뻔 했다.
“이렇게 소설은 무제한, 무기한 도전 가능합니다. 그러니… 제발 한번 도전한 소설을 중간에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포기?”
“네. 완결을 볼 자신이 없어 중간에 세계를 방치하는 것 말이에요. 만약 한 세계를 포기했다고 판단되면 아주아주아주 강력한 패널티가 부과돼요. 그러니 반드시 주의해주세요.”
“…”
천사는 최대한 무서운 표정을 지으려는 듯했지만, 귀여운 얼굴 탓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천사가 말하는 내용을 흘려 들을 수는 없었다.
신과 천사가 말하는 ‘패널티’가 가벼울 리 없으니까.
“아시겠지만 소설 속 세계는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저희가 만든 세계죠. 그러니 그들을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만든 세계라면 포기를 하더라도 상관없지 않아? 너희는 언제든 세계를 다시 만들 수 있잖아.”
천사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치면 지금 박찬영님이 계시는 이 세상 또한 오래전 저희가 만든걸요? 저희로서는 그들과 이 세계는 차이점이 전혀 없어요. 그저 세계의 크기가 크냐 작냐의 차이뿐이죠.”
“즉 그들도 나와 같이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이다?”
“맞아요.”
하, 젠장.
애초에 포기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 외모를 뜯어고칠 생각이었으니까.
내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소설 속에서 사람을 죽여도 살인… 이런 뜻 인가…’
내가 읽어온 판타지 소설들은 전반적으로 평화와 거리가 무척이나 멀었다.
나 또한 언젠가 내 손을 더럽힐 일이 있으리라 예상을 했다.
어차피 가상의 인물이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으리라 자위할 예정이었으나…
이제는 그게 막혔다.
‘…좋아. 상관없어. 나서서 살인은 하지 않겠지만 나 죽이겠다는 놈 안 죽일 수는 없지.’
천사는 쓰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는 듯한 표정이다.
“…내가 소설 속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문제는 없는 거야? 이 시스템 천사가 만든 건데?”
“천계는 아주아주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인간의 의사를 강제하지 못해요. 개입도, 처벌도, 보상도 모든 것이 불가능하죠. 그래도 가급적이면 그런 행동은 줄여달라고 부탁할게요.”
“장담은 못하지만, 노력해 볼게.”
슬쩍 대답을 흘려 넘겼다.
나 또한 소설 속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범죄에 가담할 확률이 충분히 있다.
“마지막으로… 퀘스트와 별개로 소설 완결 시 추가 보상을 드리는데, 이건 진행 중 몇 번 사망하셨는지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되니 알고 계시면 돼요.”
내 의문을 전부 해소시켜 준 천사는 시스템에 관련된 몇 가지 설명을 더 해주고 이번에야말로 사라졌다.
* * *
“후우…”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욕실을 나온다.
천사가 떠난 후 나는 밖으로 나가 필수품을 몇몇 사왔다.
샴푸, 바디워시, 린스, 트리트먼트, 헤어드라이어, 빗, 면도 크림 기타 등등…
그리고 방금 냄새나는 몸을 깨끗하게 씻은 참이다.
“그나저나 의외네.”
온 몸을 구석구석 씻다 보니 알 수밖에 없었다.
내 하물의 크기를.
보통 작은 키와, 고도비만 남성에 대한 속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가?
분명 살에 파묻혀 거기 크기도 작을 것이라고.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체중 감소가 성기 크기에 영향이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으니까.
그런 나의 걱정과 달리 의외로 이 신체의 성기 크기는 평균은 되어 보였다.
이 비대한 살에 파묻혀 있음에도.
“물론 그 새끼가 실제로 사용해 본 적은 없었겠지만. 상태창!”
나는 곧장 시스템을 불렀다.
이유는 당연히 진입 가능한 소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천사의 설명대로라면 현실에 내가 지니고 있는 물건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나중에 상점에서 아직 잠겨있는 시스템 기능을 해방하면 달라진다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물질적인 준비가 소용이 없다.
필요한 건 들어갈 소설의 배경조사다.
* * *
[소설 진입]
테라포밍 - 57화 연재 중단. 작가 필명: 서울새
현재 상태: 연재
* * *
소설 진입 창에는 아직 한가지 소설만이 존재했다.
이 소설…
나도 분명 본 적이 있는 소설이다.
나름 베스트 상위권에 든 적이 있는 소설이니까.
배경은 판타지, 소설 속 분위기는…
“젠장, 이거 시작부터 엄청 빡세네…”
암울하다.
소설 속 분위기도 암울하고, 내 기분도 암울하다.
아무리 본 적이 있는 소설이라고 한들 세세한 부분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행히 인터넷에 올라온 소설은 지워지지 않고 아직 남아있었다.
나는 최대한 내용을 머리에 욱여넣으려 노력하며 집중해 읽었다.
2시간 뒤.
마침내 연재된 내용 전부를 파악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후… 좋아. 쫄지 말고 들어가자!”
내가 소설 속에 있는 동안 현실에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지금 당장 진입을 하더라도 내게 리스크는 없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시스템의 ‘테라포밍’을 터치했다.
띠링!
[테라포밍으로 진입합니다.]
세상이 정지되듯 점점 느려지고, 나의 의식도 어디론가 빨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때, 갑자기 내 뒤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박찬영님! 그러고 보니 말씀드리지 않았던 게… 으악! 늦었다! 망했어!”
뭐?…
* * *
* * *
[최초 진입 옵션을 선택해 주십시오.]
- 본신으로 진입.
- 엑스트라로 진입.
- 주·조연으로 진입.
- 주인공으로 진입.
* * *
[기능이 해금 되지 않았습니다. 강제로 ‘본신으로 진입’으로 고정됩니다.]
“으악!”
“뭐야! 여긴 어디야!”
웅성웅성.
나무에 둘러싸인 꽤 널찍한 공터.
그곳에 근 100명에 달하는 인원이 모여 떠들고 있다.
물론 나도 사람들의 중간에 껴 있었다.
사실 100명에 달하는 인원이 아니라 정확히 100명이 맞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고 있던 옷과 전혀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소설 ‘테라포밍’속에 들어왔다.
“젠장, 말하지 않은 것이 뭔데! 사람 엄청 불안하게 만드네…”
“죄송해요… 으으… 이미 늦었으니 빨리 말씀드리고 전 시말서 쓰러 가볼게요…”
“으악! 깜짝이야!”
바로 귀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옆을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의 천사가 보였다.
“아! 저는 박찬영님에게만 보여요. 걱정 마세요.”
“그런 것보다 너 까먹은 게 왜 이렇게 많아? 건망증 있어?”
“죄… 죄송합니다…”
하아…
한숨이 나온다.
부디 그 까먹은 일이란 것이 심각한 내용만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내게 말해줄 게 뭔데?”
“그게 말이죠… 제가 전에 자유롭게 소설 밖으로 나올 수도, 들어갈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런데?”
“크흠… 생각해보니 첫 소설에 한정해서 어느 정도 퀘스트를 진행하지 않으면 현실로 돌아갈 수 없어요…”
“뭐?… 그런 중요한 걸 잊으면 어떻게 해!”
시발.
내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
저 말은 퀘스트를 계속 실패하면 현실로 못 돌아가고 영원히 이곳에 갇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
“걱정 마세요! 초반 퀘스트는 무척 쉽기도 하고, 금방 ‘현실 귀환’ 기능을 해금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나마 다행히다.
꼼짝없이 몇 년이고 이 소설 속에 있어야 하는 줄 알고 식겁했다.
“도대체 왜 이런 쓸데없는 조치를 해놓은 거야? 귀찮게. 이런 중요한 기능을 잠가 놓을 이유가 있어?”
“현실귀환 기능을 잠가놓지 않으면 (전)박찬영님의 성격상 조금만 힘들어도 포기해버릴 것 같아서요…”
…빠르게 인정했다.
이야 이거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
설득력이 넘친다.
“…이거 네가 임의로 해제하면 안 되는 거야? 나는 박찬영이 아니니까 그럴 일 없잖아.”
“저는 못해요! 제가 아니라도 누구도 못해요! 그러니 어쩔 수 없습니다… 소설 속에 들어가기 전에 말씀드렸어도 바꿀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거에요. 대비도 못 하고요. 그저 마음가짐의 차이죠. 열심히 퀘스트 깨실 수밖에는…”
“너네가 만든 건데 왜 못해? …이쯤 되면 네가 무능한 것이 아닐까?…”
“못하는데, 이유는 말씀 못 드려요! 말씀드리면저 시말서로 안 끝난다고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저리 울상 지으며 부탁하는데 더 캐묻기도 뭐하다.
캐묻기는 그만뒀지만, 뜯어낼 건 뜯어내야지.
“그럼… 이번의 실수로 내 피해에 대한 보상은?”
“으… 역시 요구하시는 건가요… 악마…”
“부당한 건 전혀 아니잖아?”
“옳습니다… 이…이건 순전히 저의 부주의로 인한 실수니까… 조금 전 ‘자연치유’의 경우처럼 상부에서 보상해 주지 않아서…”
“그럼?”
“그냥 제 앞에 빚을 하나 달아 두는 것으로…”
천사의 빚 하나라…
나쁘지 않다.
아주아주 쓸모가 많을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그 새끼에게 할 복수에 관련된 쪽으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거래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시말서 쓰러 가는 천사를 웃는 얼굴로 배웅했다.
그때였다.
무척이나 굵은 목소리가 전방에서 들려왔다.
“여러분! 제게 집중해 주십시오!”
어찌지된건지 100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뚫고 모두의 귀에 박히듯 들려왔다.
나는 키가 작아 사람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멀지 않은 장소에 목소리의 주인이 있겠지.
드디어 시작이다.
나의 좆같은 고생길이…
< 4화 >
“성함은?”
“박찬영입니다.”
“국적이 어디 신가요?”
“한국입니다.”
“나이는 어떻게 되시죠?”
100명 모두 간단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물론 납치니 뭐니 하며 통제에 따르지 않는 인원 또한 있었다.
그러나 우리를 찾아온 무리는 자신들의 질문에 답하면 모든 의문을 해결해 준다며 대답을 강요했다.
별 수 있나?
사람들은 그저 묻는 말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 비밀로 감출만 한 질문도 아니었기에 순순히 따랐기도 했고.
“15세 미만, 50세 이상이신 분들은 저를 따라와 주세요!”
“토목·건축 관련 자격증 소지하신 분!”
“혹시 의사나 간호사, 그 밖에 의료 관련 재직자가 계십니까? 의대생, 수의사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말씀해 주시면 큰 대우를 약속드립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아! 저 의사입니다!”
질문에 일어난 2명의 의사가 호위를 받으며 우리와 떨어졌다.
부럽다.
저 사람들은 꿀 빨겠지?
젠장, 이쪽이나 저쪽이나 의사는 대접받는구나…
“직업이 있으신가요? 대학생이시면 전공이나 보유하신 자격증이 있으시면…”
아…
여기서 내가 거짓말로라도 전문직인 척하면 고생따위 안 할 텐데…
띠링!
* * *
[퀘스트]
내용: 전투 직군을 배정받으십시오.
보상: 50 카르마.
실패 패널티: 처음부터 재시작.
* * *
첫번째 퀘스트가 나왔다.
잔꾀는 허용하지 않는다라…
상관없다.
내 목적은 이 소설을 완결짓는 것이다.
전투장면 하나 없이 완결되는 판타지 소설?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무척이나 힘든 길일 것이다.
차라리 어느 정도 고생을 감수하고 본신의 전투력을 올리는 것이 빠르다.
소설을 이것만 클리어할 것도 아니고, 하루빨리 무력을 손에 넣을 필요가 있다.
물론 죽을 위험도 무척 크겠지만…
죽어도 죽지 않는 내게 큰 리스크는 아니다.
나는 남자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대학생이고, 철학과입니다.”
“아… 철학…”
갑자기 눈앞의 남자가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존나 문송합니다.
그래도 전투 직군으로 배정받으려면 문과가 최고다.
필요도가 낮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철학과가 아니지만, 이곳에서 필요도가 제일 낮은 철학과라고 대답했다.
그때, 남자가 나를 위아래로 흩어보며 앞선 사람들과 다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 실례지만 혹시 선천적인 병이나 장애가 있으신가요? 배에 물이 찼다든지… 아무래도 신체가 조금…”
“…장애 하나 없이 건강한 몸입니다.”
“음…”
남자는 의심쩍은 눈으로 나의 비대한 신체를 흩어보았다.
여기서 몸이 불편한 척하면 분명 퀘스트를 실패한다!
어떻게 해서든 전투 직군으로 빠져야 할 필요가 있다.
시발…
이게 뭐하는 짓이지.
고생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 같이…
“그… 제가 몰래 귀띔 드리는 건데, 몸이 불편하시면 솔직히 말씀해 주시는 것이 나으실 겁니다. 이대로면 신체적으로 매우 힘드실 거에요.”
“제 취미는 운동이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자신 있습니다.”
“…예? 그 몸으로? 아 죄송합니다. 방금은 제가 무례했네요.”
처음 본 남자의 배려는 고맙지만, 피눈물을 흘리며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선천적 어쩌고 비대증 같은 복잡한 병명을 대며 빠지고 싶다.
아무리 부활한다고 한들 누가 죽음의 경험을 반길까?
“으음… 본인이 그리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네요. 저쪽 커다란 키를 가진 대머리 남자가 보이시죠? 저쪽에 가시면 됩니다. 행운을 빌어요.”
“감사합니다.”
“…혼란스러우실 텐데 무척 침착하시네요. 당장 다른 사람들은 무척 신경질적인데… 보기 좋아요. 그런 마인드, 앞으로 무척 도움 되실 겁니다.”
남자는 턱을 들어 주변을 가리키며 의외라는 눈빛을 내게 보냈다.
남자의 말대로 다른 사람들은 온갖 불안과 불만이 가득 차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평가가 더욱 의외였다.
내가 이런 식으로 흘러갈 것 이란 걸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보다 침착한 것은 맞다.
특성의 도움도 있었고.
‘하지만 의외라는 눈빛을 받을 정도로 행동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애초에 나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고 있다.
당장 저 멀리 보이는 티 나게 잘생긴 주인공만 해도 나보다 훨씬 침착한 듯 보였다.
음…
아마 심술이 가득 들어찬 외모에 비해 신중해 보이는 행동이 대비되어 그렇게 느껴진 것이리라.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 외모의 장점이다.
애초에 장점인지는 의심스럽지만.
나는 남자의 안내대로 대머리 남성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5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슬슬 배정이 끝난 것 같군요.”
들은 적 있는 목소리다.
처음에 우리를 집중시켰던 굵고 커다란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 대머리 남성이었다.
그렇단 말은 이 남성이 앞으로 매일 같이 얼굴을 볼 중요한 주·조연 중 한 명이란 뜻인데…
나머지 한 명은 어디 있지?
“크흠!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금부터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 드릴 테니…”
“여긴 어디야!”
“나를 풀어줘! 나는 납치할 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목적이 뭡니까! 돈? 아니면 종교적 갈등에 의한 국가 협박?”
웅성웅성--
“여러분? 여러분? 진정하시고 일단 제 말을…”
남성의 말이 끝나자 지금까지 억눌러 왔던 불안이 폭발하듯 질문의 세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반백에 달하는 인원 전부가 소리 높여 입을 열자 주변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였다.
쩔쩔매던 대머리 남성을 걷어차며 여자가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마치 아기 천사가 홀연히 나타난 것과 비슷하게.
“아! 씨발 때려쳐! 매번 그렇게 질질 끌 거야? 말로만 해서 얘들이 믿겠냐? 어?”
“…이봐. 설명은 나한테 맡긴다고 하지 않았…”
“네 꼬라지를 봐라. 나보고 속 터져 뒤지라고? 어느 세월에 씨발 다 설명하고 출발할 건데? 첫날부터 야근할 거야?”
“…하아… 결국 이렇게 되는군.”
“불만이 있으면 니가 똑바로 하세요. 나도 일하기 싫어 시발. 야! 좆밥새끼들아! 반갑다! 여기 이 답답한 새끼 이름은 브랙! 앞으로 나랑 얘 둘이서 니들 가르칠 교관이니까 기억해 둬!”
여자의 목소리 또한 남자처럼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타인의 주목을 이끄는 마력이 있었다.
물론 소설을 읽은 나와, 회귀한 주인공은 목소리에 담긴 마나의 힘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가 장난기 많은 상의 미인, 옅은 주근깨, 노을을 닮아 붉은빛을 띄는 단발, 배꼽과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고마운 패션…
내가 기억하는 소설 속 특징과 똑같다.
이 소설 최고의 아웃풋, ‘광년이’의 등장이다.
“내 이름이 따로 있기는 한데, 썅년, 개년, 좆같은년, 미친년이라고 불릴 때가 더 많아! 참고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별명은 광년이야! 귀엽지 않아? 킥킥!”
나는 주위 아무도 듣지 못하게끔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상태창을 읊조렸다.
그녀의 상태창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소설 속 주인공 다음으로 주의해야 할 인물이니 자세한 정보 확인은 필수나 다름없다.
띠링!
* * *
[이름] 크리스 베넷
[직업] 교관
[힘] 31     [민첩] 45
[체력] 33    [지능] 35
[기교] 39    [매력] 49
[특성] 『자애』
* * *
소설속에도 그녀의 본명은 나오지 않고 항상 ‘미친년’아니면 ‘광년이’라고 불렸다.
그랬기에 나에게도 그녀의 본명은 생소했다.
아니, 그딴 것 보다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특성이 있다!’
자애?
설마 자애(慈愛)일 리는 없고…
아마 100%에 가까운 확률로 자애(自愛)일 것이다.
저 여자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다니, 농담조차 못 된다.
세상에…
얼마나 자기 자신을 아끼면 특성에 ‘자애’가 나타날 정도지?
미리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한 나르시시즘이다.
특성과 별개로…
광년이의 스텟은 평균 이하의 나와, 평균인 주위 사람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사실 스텟이 아니더라도 드러난 그녀의 피부 곳곳의 상처가 아문 흉터 자국들만 보아도 베테랑이라는 느낌이 팍팍 든다.
특히 목에 난 상처들은, 무슨 짓을 해야 저런 급소에 상처가 저리 많이 남는지 궁금할 정도다.
“뭐…뭐야…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보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당신! 당장 대답해!”
“목적이 뭐야!”
순식간에 등장한 그녀에 놀란 사람들은 곧 브랙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광년이가 보여준 행동은…
질문을 전부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하기 시작했다.
‘니들은 떠들어라. 나는 내 할 일 하겠다.’라는 의사가 강하게 느껴진다.
평범한 사람은 하지 않을 선택이지만, 확실히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그녀의 말에 담긴 마나의 힘은 주변이 시끄럽든 그렇지 않든 착실하게 사람들의 귀에 박혀 들어갔으니까.
“여기는 지구가 아니야. 존나게 판타지한 세상이지. 다들 반지의 제왕 알아? 거기랑 비슷해. 오크 나오고, 엘프 나오고, 괴물 나오고… 엘프는 못 봤지만 나머지 둘은 있더라.”
“뭐라고요?…”
사람들의 반응은 똑같았다.
광년이를 미친년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녀의 기행에 사람들의 얼굴은 차차 굳어갔다.
“마법사도 있고. 당연하지만 마법도 있어.”
화륵!
그녀가 펼친 손바닥 위에 불이 생겨났다.
불꽃 정도가 아니라 농구공쯤 되는 큼지막한 불이.
“뭐야! 마…마술?…”
“마법 새끼야. 마법! 그리고 힘도 존나게 세져.”
콰앙-!
간신히 눈으로 쫓아갈 만한 속도로 움직인 광년이가 맨손으로 바위를 때렸다.
당연하지만 바위는 산산조각이 나 부서졌다.
“이게 무슨…”
“음… 그리고 또… 아! 너네 주변 봐봐. 다들 인종이 다르지? 그런데 말이 전부 통하네? 존나 신기하지 않냐?”
“엇!”
“지금 내가 하는 말… 영어가 아니야! 무…무슨 언어지? 어떻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거 선물!”
푸드덕! 푸드덕!
께엑! 께에에엑-!
광년이는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새 한 마리를 잡아 던졌다.
새는 무척이나 부자연스레 나타났다.
그 생물을 새라고 해도 좋을까?
어지간한 송아지 크기만 한 크기에, 날개는 퇴화하였는지 몸통과 비교하면 무척 작았다.
마치 방사능에 영향받은 변종 닭과 같은 모양새였다.
미리 알고 있긴 했어도 실제로 보니 충격이다.
나 또한 혼란스러웠지만, 자연재생의 힘인지 무척이나 빠르게 가라앉았다.
“이놈 이름이 7글자쯤 되는 존나 긴 이름이었는데, 까먹었고. 그냥 우린 치킨이라고 불러.”
“히익!”
“이…이거 뭐야!”
“이쪽 세계에서 양식에 성공한 유일한 동물… 동물인가? 아무튼, 우리가 먹을 음식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고마운 생명이지. 아! 물리면 손가락 잘리니까 조심하고.”
그 말에 사람들이 날뛰는 새로부터 더욱 멀어졌다.
“…정식 명칭은 ’케틀렙토마구셉소’다. 7글자가 아니라 8글자지.”
“아! 그래! 마구섹스! 다시 생각해도 존나 웃긴 이름이야. 그치?”
“하아… 제발 말 좀 교양있게…”
광년이의 옆에 있던 대머리, 브랙이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아무튼 케틀…어쩌고는 하필 우리들의 중심으로 떨어졌다.
그 덕에 모두 그 생명체를 톡톡히 볼 수 있었다.
당연히 모두 케틀…
…치킨으로부터 떨어지려고 소란이 일어난 것은 덤이고.
“자, 나는 상황 파악이 느린 머저리입니다, 손들어. 이 상황은 몰래 카메라고, 저건 뭐 정교한 로봇이나 유전자 조작 실험체 같고… 아무튼 다 짜고 치는 거 같다, 거수.”
“내…내가 믿을 것 같아! 어떻게 내가 이런 이상한 언어를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놈들 전부 미쳐있어! 그래! 마약! 환각제 같은 거지!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말을 꺼낸 인물은 동양계 중년 남성이었다.
소설을 보면 자주 있지 않던가?
튜토리얼 요정에게 화내다 죽는 양아치가.
이 중년의 남성도 그런 역할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충 예상한 나는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그렇다고 나서서 막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눈치가 없으면 본인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
괜히 나섰다가 저년한테 찍히면 그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다.
저년한테 찍히고도 멀쩡할 사람은 주인공밖에 더 있을까?
“개 같은 년! 빌어먹을 년! 나를 여기서 풀어줘! 내가 너 같은 년을 얼마나 본 줄 알아? 옷 입은 꼬라지를 보면 너도 똑같겠지! 돈 좀 쥐여주면 쉽게 가랑이를 벌리는…”
퍼억-!
“컥!…”
“잘 들어. 여기서는 아가리를 함부로 놀리면 처맞는 거야. 아니꼬와? 왜 이 씨발놈아. 어디 다른 차원에 있는 경찰한테 찾아가서 고소라도 해보던가.”
“이… 이익! 이 년이! 나도 가만히 있을 것 같…”
휘이익! 척!
“주먹에 힘 안 풀어? 이 새끼가 상황파악이 안 되나 보네. 괜찮아. 처맞다 보면 알게 돼.”
“아악! 악! 팔! 팔 부러져요! 알겠으니까 팔 놔주세요!…”
퍽-! 퍼억-! 퍽-!
“커헉… 그…그만…”
“이야, 새끼 깡다구 있네. 아직도 인정을 안 해? 아직도 여기가 지구 같아? 어?”
“아니… 악! 아니요…! 아악!…”
주먹이 깔끔하게 명치로 파고든다.
중년 남성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자 허리를 숙여 몸을 둥글게 감쌌지만, 주먹은 요령 좋게 급소를 골라 때려 박혔다.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전혀 자중하지 않은 폭력에 놀라 굳어 있었다.
퍼억-! 퍼어억-! 빠악?!
주먹과 발길질의 강도는 점점 더 강해져 갔다.
정말 이러다 큰일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 누구도 이 상황이 연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남자는 조금이라도 주먹을 막기 위해 쓰러져 몸을 공처럼 말았다.
소설대로라면 지금쯤이다.
우리의 주인공이 나서는 장면이.
“너무 과합니다. 그쯤 하시죠.”
“뭐야 이새낀?”
휘익-! 탁!
한창 광년이가 주먹질을 할 때 뒤로부터 주인공이 말을 걸었다.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우리의 광년이는 누가 말을 걸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뒤로 발을 날렸다.
그림 같은 뒤차기가 주인공의 명치를 향했지만, 놀랍게도 주인공은 오른손을 들어 쏘아지는 발을 잡았다.
역시 회귀자…
능력치는 전부 초기화되어도 전투 센스는 남아 있다는 건가.
“허, 너 지금 막았냐?”
“이미 모두들 지금 상황이 현실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더는 주먹을 휘두를 이유가 사라졌지 않습니까?”
나와 무척이나 대비되는 잘생긴 얼굴과 큰 키.
멋들어진 얼굴로 멋들어지게 나서자 참으로 ‘주인공’답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의 등장만으로 분위기를 바꾸었으니까.
시발… 나도 얼마 전까지 저런 키와 얼굴을 가졌었는데…
뭐, 바로 앞에 일어날 일을 짧게 스포일러 하자면…
광년이는 자신의 발을 막은 건방진 신입의 얼굴이나 보자며 고개를 돌리고, 주인공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한다.
이유?
자신의 발을 막는 뛰어난 전투 센스를 보여서도, 타인을 감싸는 심성 때문도, 강자에게 맞서는 용기를 보여서도 아니다.
그냥 얼굴이 잘생겨서다.
정확히는 얼굴이 옛 애인을 닮았다며 교육기간 내내 챙겨준다.
그렇기 때문에 광년이에게 찍히지 않는 사람은 주인공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주인공은 ‘어? 이건 과거와 다른 흐름인데?’ 라며 당황한다.
‘어? 이건 과거와 다른 흐름인데?’라니…
항상 침착하던 주인공과 무척이나 대비되는 순진한 반응이라 확실히 기억한다.
주인공이 회귀하기 전, 광년이는 주인공의 외모가 전 애인과 닮아 마음에 들어 하는 헤프닝은 없었다고 한다.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이유가 나오기 전에 소설이 연재를 중단해버렸으니.
“오냐, 어떤 간덩이 부은 놈인가 얼굴이나 볼까?”
대충 다음 나올 광년이의 말이 예상이 간다.
아마 ‘너 얼굴 가죽 좀 마음에 든다? 전남친 닮았네. 우리 저쪽 가서 뽀뽀나 좀 할까?’ 였던가?
소설에 들어오기 전, 대사를 하나하나 외울 기세로 읽었기에 아직도 어렴풋 기억이 난다.
광년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인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이런 건방진 새끼가. 너 지금 얼굴 믿고 깝친거냐? 내가 그런 거 신경이나 쓸 것 같아?”
“…”
“…지금 뭐하자는 거냐? 자세를 잡아? 한번 해 보자고? 와 나 씨발 진짜 내가 어지간히 좆밥으로 보였나 보네.”
‘그래. 이렇게 주인공에 반한 광년이가… 잠깐, 뭐?’
“넌 내 손으로 조진다. 브랙! 봤지? 이 새끼가 먼저 개긴거다?”
“…적당히, 너무 과하지 않게 해라.”
“적당히는 씨발아. 야! 너, 콩죽 좋아하냐?”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왜긴 이빨 다 부러져서 앞으로 넌 그것밖에 못 먹을 테니까 새끼야.”
‘어? 이건 소설과 다른 흐름인데?’
(테라포밍 세계의 북부 훈련소 교관, ‘광년이’라고 불리는 크리스 베넷입니다!)
< 5화 >
휘익-! 퍼억-!
“크윽…”
“개새끼야. 자세 똑바로 잡아라. 못 막으면 뼈 나간다?”
파악! 탁-!
광년이가 다시금 도약해서 달려든다.
그녀와 맞서는 남자는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고 막는 것을 반복하였다.
잘생긴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것을 보면 피하는 것조차 무척이나 버겁게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광년이가 몸을 움직이는 속도가 전혀 범상치 않았으니까.
지구에서 볼 수 없었던, 인간을 초월한 속도로 몸을 움직이며 주인공의 사각을 찾아내었다.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는 이강인의 반격과 반대로, 광년이의 주먹은 착실하게 신체를 타격하였다.
“상태창.”
띠링!
* * *
[이름] 이강인
[직업] 회귀자
[힘] 12      [민첩] 13
[체력] 15    [지능] 9
[기교] 13   [매력] 63
[특성] 『팔방미인』『강인』
* * *
주인공 답게 특성이 2개인가…
그것도 보기만 해도 무척이나 좋아 보이는 것들로.
아무리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스텟의 차이가 몇 배나 난다.
저렇게 버티는 것만 해도 자신의 재능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것이 이강인의 목적이겠지.
재능을 증명하고 교관들의 지원을 한몸에 받는 것.
도박에 가깝지만, 성공하면 무엇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으리라.
‘젠장! 그런 걸 신경쓸 때가 아니야!’
어째서 소설과 내용이 달라졌지?
신이 소설 속 세상을 만들면서 수작을 부린 건가?
아니, 그것은 아니다.
아기천사는 소설의 그대로를 만들었다며 내게 못을 박아두었다.
천사에게 미리 물어봤던 질문이니 확실하다.
그렇다면 짐작 가능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나라는 변수가 생기며 내용이 달라졌다?… 벌써?…”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아직 소설에 진입한 지 1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심지어 이건 내가 제일 경계하고, 조심했던 상황이다.
나는 소설을 읽었기에 연중 되기 전까지의 미래를 알고 있다.
당연하지만 미래의 지식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원작의 그대로 흘러가게끔 변수는 최대한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미래의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지금껏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끔 행동을 제한했었다!
혹시 놓친 것이 있었나?
지금까지 나의 행적을 빠르게 되새기기 시작했다.
…젠장 모르겠다.
도저히 광년이의 행동 변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절대로 튀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벌써 미래가 바뀌어버린 것이지?
턱! 빠악! 턱!
“벌써 지쳤어? 팔이 느려졌는데? 음… 좋아. 인정할게. 이 정도면 웬만한 머저리에게 개갤 만한 실력은 되네. 물론 그렇다고 너를 용서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처맞을 짓을 했으니 처맞아야지. 안 그래?”
“하아… 하아…”
“나는 씨발, 눈치 없는 새끼들이 싫어. 지구에서는 눈치가 없으면 본인만 손해를 보지만, 이곳에선 팀 전체가 몰살되거든. 그런 의미에서… 너랑 저 새끼는 감점. 알아?”
광년이는 아직까지 쓰러져있는 중년 남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후우… 좋아. 진정됐어.’
미친듯이 요동치던 내 감정도 빠르게 잦아들었다.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자연치유, 생각보다 아주 좋은 특성이야.’
이정도면 갑작스러운 기습이나 배신에 거의 정신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다.
미래가 틀어졌지만, 괜찮다.
언제까지고 원작 그대로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는 나의 이익을 위해 원작을 틀 생각이었고,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굵직한 사건들은 광년이와 이강인의 사이와 관계없이 일어난다.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사건들은 아직까지 무척이나 많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무척이나 집중해서 상황에 따라가야 할 필요가 있으리라.
지금 이 변수가 얼마나 크게 돌아올지 아무도 모르기에…
나는 광년이를 쳐다보았다.
마나를 담은 공격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나름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손쉽게 주인공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녀는 미친년이지만 놀랍게도, 아주 아주 놀랍게도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전사이자 교관이다.
아무리 폐급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그녀의 손을 거치면 엘리트 전사가 된다.
한 기수의 총 교육기간이 3개월이니, 고작 3개월 만에 전사가 그녀의 손에 탄생하는 것이다.
그것도 수십 명이나.
둘의 싸움은 서서히 끝을 보이고 있었다.
점점 그녀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였고, 곧 막는 횟수보다 유효 타격 되는 수가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크윽!…”
보기만 해도 고통이 느껴진다…
이제는 체력이 다 떨어져 악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가만히 팔짱을 끼고 구경하던 브랙이 나섰다.
주먹을 올려 이강인의 얼굴을 내려치려던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만하지.”
“놔. 아직 멀었어. 이 새끼 눈을 봐. 아직 안 꺾였어.”
“더 하면 내일 훈련에 지장이 있다.”
“그냥 뼈 몇 개 부러뜨리고 4개월 동안 치료한 뒤, 다음 기수랑 같이 훈련시키면 되잖아.”
“이 예비 훈련생과 7개월 동안 얼굴 보겠다고? 그냥 지금 그만둔 다음 3개월 뒤 보내.”
“…씨발. 알겠으니까 놔.”
팍!
광년이는 잡혀있던 팔을 뿌리친 뒤, 브랙의 뒤로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브랙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 바닥에 대자로 쓰러져 쉬고 있는 이강인과, 중년 남성에게로 다가와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말은 저리해도 어디 금이 간 곳은 없을 겁니다. 일어나서 대열에 합류하세요.”
“예… 분란을 일으켜 죄송했습니다.”
이강인은 순순히 브랙의 말에 따라 지친 몸을 일으켜 우리에게 걸어왔다.
사과의 목소리에는 진정성이 담겨있어 브랙은 의외라는 눈빛을 보내었다.
당연하다.
이강인의 목적은 교관과의 대립이 아니라 자신의 증명과 지원이니까.
선을 잘 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년 남성의 행동은 달랐다.
“으윽! 저 다리가 부러진 것 같습니다. 아까 저년한테 맞을 때 다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음? 그럴 리가…”
“아악… 다리가 너무 아픕니다… 제가 선천적으로 뼈가 약해서…”
남성은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나는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저거… 꾀병이네.’
정말로 다리가 부러졌다면?
그럴리가 없다.
이 소설에서 사람을 조절하며 패는데 광년이 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없다.
아마추어도 아니고 그녀가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이런 씨발놈이!”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뚱한 표정으로 딴짓하던 광년이가 남자의 말을 듣고 격분해서 달려왔다.
나조차 남자의 말이 꾀병임을 알았는데 직접 때린 그녀가 모를까?
확실히 광년이의 말 대로 남자는 눈치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다친 사람을 치료해준다는 말을 듣고 꾀병을 부린 모양인데, 제 무덤을 판 것이다.
저렇게 어설프게 머리 좋은 사람이 가장 고생한다.
“이 개새끼가 입을 털어? 너 시발 덜 맞았구나?”
“히익! 아…아니!… 저는 진짜로 아파서…”
“그렇겠지 이 시발놈아. 피해라. 안 피하면 죽는다.”
갑자기 광년이는 옆에 있던 어지간한 경차만 한 돌덩이를 들어 올렸다.
…근력이 강한 걸 알고 있긴 했는데 이 정도로 강했나?
과연 그 무게는 그녀에게도 버거웠는지 힘을 쓰느라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자세히 보니 분노 때문에 얼굴이 붉어진 것 같다.
힘겹게 머리 위로 돌을 들어 올린 그녀는…
그 커다란 돌덩이를 중년 남자에게 집어 던졌다.
“으…으아악!!”
콰--앙-!!
“콜록!콜록!”
거대한 흙먼지가 퍼지며 시야를 가렸다.
하지만 나는 흙먼지가 피어오르기 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돌이 날라오자 다리가 부러졌다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몸을 던져 피한 것을.
역시 부러졌다는 소리는 꾀병임이 드러났다.
아주 과격한 방식으로.
다리가 부러지면 일어서는 것은커녕, 아파서 땅에 딛지도 못한다.
“야 이 시발놈아. 다리가 뭐 어째?”
“아… 그…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너 이름이 뭐야.”
“그… 그건 왜…”
“대답.”
“그러니까… 물어보시는 이유를…”
“대다압!!”
“아다치 켄지입니다!”
“일본인? 뭐 좋아. 넌 내가 주시한다. 대가리가 멍청해서 무슨 뜻인지 모르지? 너 찍혔다고. 나한테. 앞으로 편하게 생활할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또 괜히 미친년이 아니거든.”
“히익!…”
광년이는 살기 등등한… 아니, 광기 등등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소설에는 저렇게 대놓고 찍힌 인물은 없었는데…
주인공과 광년이가 마찰 한 것이 이런식으로 돌아왔다.
물론 내 알빠는 아니다.
안찍혀도 힘든 것이 그녀와의 생활이다.
도대체 찍히게 되면 얼마나 지랄을 할까?
어후 끔찍해…
“두 번 말 안 해! 매달 지구로부터 무작위 100명이 이곳으로 전이된다! 너희는 그 재수없는 100명 중 하나이고! 이유는 몰라! 마찬가지로 처음 보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 또한 원인 불명이다! 신의 뜻인지, 고등 생명체의 장난질인지, 밝혀진 건 없지만 그냥 그렇게 이해해!”
이 소설의 제목인 ‘테라포밍’.
말 그대로 다른 차원의 행성을 개척하는 내용이다.
“이곳은 자원이 너무나 부족하다! 그에 비해 먹여야할 입은 넘치도록 많지! 당연하지만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른 생활 수준을 보장받는다! 의사, 공학자, 과학자 등의 전문직들이 가장 큰 대우를 받는다!”
100명이 도착하면 가장 먼저 전문직을 분류하고, 장애인, 어린아이, 노인을 분류한다.
그리고 남는 것이 몸이 건강한 것 외에 장점이 없는 인원들이다.
바로 우리.
“너희들은 쓸모없는 인간으로 판단되었다! 쓸모없는 기술을 가지고 있거나, 그마저도 없는 사람들! 그것이 너희다! 그런 놈들을 먹여 살릴 만큼 우리 쉘터는 부유하지 않아!”
어린아이와 노인마저 일하고 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전문분야에서 맡은 일을 하고 있다.
지금 당장 1인분을 못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제외하고 없었다.
“그런 네놈들이라도 제구실을 할 수 있다! 성별, 나이, 출신 예외는 없어! 전원 3개월간 훈련을 받으며, 수료 즉시 전투조로 투입된다! ‘전투’조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설명 안해도 알겠지?”
광년이는 자신의 신체에 새겨진 상처를 슬쩍 내비쳤다.
그것으로 설명은 충분했다.
충격적인 말에도 반항은 하나 없었다.
그야 사람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패는 사람 앞에서 배짱 좋게 불만을 말할 사람이 있을 리가.
심지어 돌을 던진 행위는 좋게 봐줘야 살인미수다.
말 그대로 미친년 앞에서 대놓고 반항할 만큼 간이 부은 사람은 없었다.
“전투직 종사자들은 전문직보다 뛰어난 대우를 받는다. 지구에서 고만고만하던 너희들이 상위 카스트가 될 기회라고?”
“저… 그… 위험하지 않나요?”
“당연히 위험하지. 그러나 훈련소 중도 퇴소는 자의로 불가능하다. 인권? 선택의 자유? 개인의 다양성 존중? 좆이나 까. 오로지 교관의 판단하에 도무지 개선이 불가능하다 판단될 때만 퇴소할 수 있다!”
“퇴…퇴소 되면 어떻게 되나요? 설마 괴물들이 있는 숲에 버려지는 건…”
그 말에 광년이가 사악하게 웃음 지었다.
그 웃음에 나와 주인공을 제외한 사람들이 긴장에 침을 삼켰다.
나는 진실을 알고 있기에 그녀가 겁을 주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이곳이 막장 세계관이라도 사람의 죽음을 쉽게 보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21세기에 살던 현대인들이 전이한 세계인 것이다.
그녀가 말한 뉘앙스처럼 상황이 극단적이지 않다.
당장 굶어 죽는 사람은 적다.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많을 뿐…
“뭐, 사실 다른 직군으로 배정받지. 그렇게 배정받은 직업 대부분이 벌레잡이 아니면 잡일이야.”
그 말에 다른 사람들 모두 눈에 띄게 얼굴이 환해졌다.
만약 퇴소당하더라도 확정적으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버…벌레잡이가 뭔가요?”
“말 그대로 벌레잡이야. 숲에서 벌레를 잡아 모아오는 거지. 주로 노인, 어린이, 장애인, 그리고 퇴소당한 쓰레기들이 하는 일이고.”
“예? 벌레들을 왜… 혹시 벌레를 식량으로 쓰나요?…”
“워, 훈련 일정이 아니라 벌레잡이 일에 흥미가 많나 보네? 존나 의심스럽게.”
“아…아니… 그냥…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씨익.
“그래? 그런 거로 하지. 아무튼, 벌레를 우리가 왜 먹어? 먹는 놈은 따로 있는데.”
께에에엑-!
광년이는 턱짓으로 치킨을 가리켰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이해하였다.
모은 벌레들은 전부 치킨의 양식에 사용되리라.
모인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엄청나게 안심하는 눈치였다.
아마 여기 모인 인원 대부분이 훈련에서 퇴소 판정을 받게끔 행동할 것이 눈에 보였다.
가령 교관에게 반항한다든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다던가…
아무리 고되고 더러운 일이라 해도, 괴물과 싸우며 죽음이 스쳐 지나가는 전투직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과연 그리 흘러갈 정도로 교관들이 만만할까.
이곳은 폭력이 금지되지 않은 세상이다.
어디까지 ‘교육’이라는 명목 아래 허용되는지…
이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전투직에 종사하는 자는 쉘터 내 최고의 대우를 받습니다. 물론 현대에 비하면 부족한 면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이곳은 역설적으로 현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까지 가능합니다.”
“현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뇨??”
“아무래도 이곳은 계급이 대놓고 존재하다 보니…”
“그래! 만약 네가 벌레잡이가 되고… ‘이놈’이 전투직이 된다? 너는 그럼 얘가 대달라 할 때마다 대줘야 해.”
휘익-!
눈치 빠른 훈련생 몇몇이 깜짝 놀라 광년이가 가리킨 ‘이놈’을 일제히 쳐다보았다.
나는 표정이 무척이나 썩어들어갔다.
광년이가 지목한 ‘이놈’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이런 씨발, 이렇게 많은 사람 중 하필 왜 나를 예시로 들어?
사실 나는 그 답을 알았다.
눈에 띄고, 존나게 못생겼으니 그렇겠지.
“예? 대…대달라니… 그게 무슨…”
“섹스 말이야 시발년아. 섹스! 아 좆같네. 이번 기수 눈치 없는 새끼들이 왜 이렇게 많냐. 존나 꼴받게.”
“저…정말이에요?”
하아…
광년이의 곁에서 한숨 소리가 새어나온다.
다른 한 명의 교관인 브랙이 내뱉은 한숨이다.
“…이봐, 너무 극단적인 예시잖아. 물론 공식적으로 성 상납은 금지를 하고 있긴 하지만… 일부가 암암리에 행하곤 합니다. …아니, 부끄럽지만 사실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마… 말도 안 돼!…”
“이봐, 이제야 조금 감을 잡은 것 같은데… 퇴소 조치는 절대 좋은 게 아니야. 서열이 아주 밑바닥으로 처박히는 것이니까. 뭐, 직접 쉘터 내 상황을 보면 내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절실하게 깨달을걸?”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고 있다.
특히 여자들은 내가 벌써 성 상납을 요구한 것 마냥 혐오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씨이이발…
가만히 있는 나한테 왜 그러냐 진짜…
< 6화 >
“이곳이 우리 쉘터의 중앙 지휘소다. 이곳에서 훈련소 입소 수속을 밟게 되면 자네들은 정식 훈련생이다. 본 교관도 앞으로 훈련생들에게 말을 놓도록 하겠다.”
“브랙, 그거 알아? 너 진짜 FM충이야.”
“칭찬인가? 고맙다.”
“하… 꼴통 새끼. 그래 칭찬이다. 칭찬.”

현대의 문명을 전부 잃어버리고 사람의 손으로만 지어진 건물은 어떻게 생겼을까?
나무와 말린 덩굴을 엮어 만든 나무집이나, 땅을 다지고 입구를 막은 동굴을 예상했다면 틀렸다.

의외로 세련되고 튼튼해 보이는 외벽을 가진 거대한 건물이 우리를 반겼다.
자세히 보니 건물 전체에 분해와 조립을 염두에 둔 것 마냥 작은 블록 형식으로 나누어진 이음새가 보였다.
‘그 이전에… 저건 전부 금속이지.’

소설 설정을 알고 있는 나는 저 자재들이 가볍고 튼튼하면서, 복잡한 이름을 가진 합금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참고로 현대에서도 존나게 비싸고, 존나게 가공이 힘든 금속이다.
가공이 힘든 금속이 왜 지구도 아닌 이곳에 있냐고?
곧 알게 된다.
“꼴들이 살면서 처음 KFC 본 촌놈 같네. 킥! 그만 두리번대고 따라와!”
사람들은 건물 안에 들어서도 주변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쉘터 내 가장 중요한 건물이라고 해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곳곳에 현대의 손길이 닿아있었다.
시계, 유리, 그리고 전기까지.
내부에 있던 사람들은 바쁘게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있었다.
가끔 우리를 향한 짧은 시선 또한 느껴졌다.
이 장소에 있으면 마치 이곳이 지구의 조금 이색적인 연구소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기 저 눈에 띄는 웜홀만 없었으면.
“저기… 저건 뭔가요? 저것도 마법 같은 것인가요?”
“아. 저거? 저거 지구로 통하는 차원 문이야. 우리가 만든 건 아니고, 원래부터 있었어.”
“지구! 지구로 통하는 통로라고요?”
그 말에 전원이 깜짝 놀랐다.
물론 나와 주인공은 제외하고.
무리 내에 작은 소리가 소근소근 들려온다.
앞서 걸어가는 교관은 듣지 못하겠지만, 나는 무리내에 있었기에 들을 수 있었다.
이 육체의 청각이 좋았던 이유도 있고.
“뭐야, 돌아갈 수 있는 것 아니야?”
“저기로 들어가면…”
“근데 위험해 보이잖아요… 부작용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블랙홀에 맨몸으로 들어가면 분자 단위로 산산이 찢긴다고 하던데…”
“블랙홀처럼 위험한 것이었으면, 저렇게 차단막 하나 없이 대놓고 내놓지 않았겠죠. 제겐 오히려 안전해 보이는데요?”
실제로 저 웜홀은 지구와 이어져 있다.
아마 웜홀의 입구 쪽에는 어느 나라의 정부에게 발견된 즉시 그 자리에 건물이 지어져 있지 않을까?
소설 속에 묘사는 없었기에 나도 추측만 할 뿐이었다.
“이익! 나는 이대로 못 살아!”
그때였다.
앞에 있던 사람들을 거칠게 밀치고 사람 한 명이 뛰쳐나왔다.
뭐지?
원작에는 이런 사건이 없었다.
나는 어떤 사건에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끔 온몸을 긴장시킨 채로 돌발 행동을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누군가 했더니 광년이에게 찍힌 일본인, 마다치 켄지였다.
“훈련? 전투? 내가 왜 그런걸 해야 해! 잘 있어라 썅년아! 나는 지구로 갈 거야! 흐하하! 너 같은 미친년이나 실컷 괴물들이랑 싸우다 뒈져!”
“엇? 안됩니다! 멈추세요!”
마다치 켄지는 자신을 실컷 두들겨 팬 광년이에게 후련한 표정으로 욕을 퍼붓고, 곧장 차원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차원문 주변을 연구하던 연구원들이 제지하려 했지만,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마다치 켄지를 막지 못했다.
그제서야 그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미친…’
나는 곧 이어질 미래를 예상하고 이마를 짚었다.
내가 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차원문에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한 마다치 켄지는 멋지게 차원문으로 몸을 날렸다.
마침내 허공을 가르던 몸이 차원문에 닿았고…
우당탕!
“케헤엑!”
몸은 차원문을 관통하여 차원문 뒤쪽 바닥에 얼굴부터 처박혔다.
당연하지만 차원문은 아무런 변화 하나 없이 여전히 그 위치에 존재했다.
“푸하하하핫!! 아하하하!! 들었어? ‘나는 지구로 갈꺼야!’ 존나 멋있어. 푸하핫!!”
“킥킥…”
“크흡…”

건물이 떠나가라 웃는 사람은 당연히 광년이였다.

솔직히 나도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바닥에 처박힌 마다치 켄지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면 도무지 참으려야 참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어수룩해 보였던지 소란을 구경 온 연구원 몇 명 또한 입을 가리며 웃는 것이 보였다.

“야, 넌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설마 했는데, 어떻게 예상한 그대로 행동 하냐? 존나 웃겼어. 아 아직도 눈물 나네. 크히힉!”
“이…이게 어떻게 된… 분명 지구랑 이어져 있다고… 이! 이이!… 나를 속였구나! 이 개 같은 년!”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시뻘게 질 수 있구나.
분노 때문인지 고통 때문인지 쪽팔림 때문인지 얼굴을 검붉게 물들인 마다치 켄지가 소리쳤다.
게다가 바닥에 얼굴을 부딪힌 충격으로 코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몇몇 연구원들은 웃음을 참지 못해 주저앉기까지 했다.
- 푸흐흐흐…
- 아… 웃으면 안 되는데… 킥킥…
“…후우. 방금 내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이 차원문은 일방통행이다. 지구에서 이곳으로밖에 이동하지 못하지. 차원 문이라기 보다는 입구와 출구 같은 개념이라고 보아도 좋겠군.”
“이야, 일부로 말 안 한 보람이 있어. 이 새끼 눈치가 좆같이 없어서 개폐급인줄은 알았는데 이쯤 되면 존나 웃기네! 한 바퀴 돌아서 호감이야. 와… 벌써 훈련 들어갈 때가 기대된다. 넌 오늘부터 내 장난감이다. 알겠어?”
“자…장난감이라니… 사람이 어떻게…”
“너 아까 나보고… 뭐? 썅년? 미친년? 뒈져라? 딱 2시간 전처럼만 처맞을까?”
“하…하지만… 아까 그게 별명이시라고…”
“하긴, 우리가 서로 별명을 부를 만큼 친하긴 하지? 왜 이 씨발놈아. 이참에 서로 말 놓자고는 안 하고?”
“…하겠습니다… 장난감…”
마다치 켄지는 고개를 숙이고 예비 훈련생들의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중앙 지휘소 건물은 지상 위로 총 3개의 층이 있었다.
교관들의 안내에 따라 마지막 층을 올라가자, 보기만 해도 높은 사람이 있을 것 같은 방이 보였다.
다른 방들은 전부 문이 한 짝으로 되어있었지만, 이 방의 문 만큼은 2개의 문짝으로 되어있었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끼익…
방은 무척이나 넓었다.
50명의 인원이 단번에 들어찼음에도 넉넉할 만큼.
“어서 오세요. 이번 기수의 훈련생들인가요?”
“아직은 예비입니다.”
“하하. 그렇네요.”
전형적인 영국계 미국인이다.
진갈색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쳐내 위로 올린 스포츠 컷, 구레나룻에서 턱 라인까지 이어진 친 커튼(Chin curtain) 수염.
멋지게 늙은 서양 중년인의 표본이었다.
“저희 쉘터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남자가 나를 발견하고 가볍게 웃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 * *
“다시 보네요.”
“이런 대단한 분이셨습니까?”
“하하. 제가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서요. 매달 신입들을 마중 나가고 있죠.”
“의사 겸 물리학자 겸 생물학자라니… 쉘터장님은 대단하네요.”
“감사하게도 대학에서 학위 동시 취득을 허가해 줬거든요.”
나는 그의 천재성을 칭찬한 것인데…
그는 자신의 업적이 관대한 대학의 덕이라고 공을 돌렸다.
평범한 사람은 동시 취득을 허가한다고 한들 단 하나도 제대로 따내기 힘들다.
그런 그의 천재성과 겸손함을 인정받아 모두 기꺼이 그에게 리더의 자리를 맡긴 것이겠지.
“쉘터장님이라고 부르시지 마시고 닥터라고 불러주세요. 다들 그리 부르거든요. 마음에 드는 별명이기도 하고.”
“닥터라, 많이 어울립니다.”
“그렇죠? 하하하.”
눈앞의 있는 남자는 소설에 처음 들어왔을 때 만난 나의 이력을 조사하던 남자다.
몰래 전투직을 빼라며 배려해준 바로 그 사람.
설마 그 사람이 쉘터의 리더라니, 소설속에 묘사되지 않은 이스터에그다.
그래서 나는 그의 얼굴을 본 뒤, 찾아온 당황을 특성을 이용해 빠르게 잠재워야 했다.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차원문은 일방통행인데, 지구와 통신은 가능하다니.”
“오! 흥미 있으신가요? 그건 지구 쪽에서 차원문을 향한 물리력이 유지가 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에요! 지구에서 차원문을 향해 사과를 던지면, 이 차원문에서 운동력을 가진 사과가 날라오죠. 전기 또한 전자의 이동에 의한 물리현상의 일종이기 때문에 이를 응용해 유선으로 이어진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하하…”
“이런, 죄송합니다. 철학과라고 하셨죠? 관심 없으셨겠네요… 제가 한번 빠지면 저도 모르게 말이 많아져서.”
나는 어깨를 으쓱여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어필을 했다.
잡담도 좋지만 빠르게 용무를 마쳐야 한다.
뒤에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출신지는 한국의 서울, 남겨진 재산은 없고… 안부를 전할 친구나 부모님도 없다… 맞습니까?”
“예.”
“흐음… 정말로 없습니까? 사정이 있으신 듯한데, 이번 기회가 아니면 지구쪽과 완전히 인연이 끊기게 됩니다. 아무래도 통신 장비는 쓸데가 많아 사적인 일로 사용하지 못하니까요.”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박찬영씨는 지금부터 훈련생 신분입니다.”
띠링!
* * *
[퀘스트] <완료>
내용: 전투 직군을 배정받으십시오.
보상: 50 카르마.
실패 패널티: 처음부터 재시작.
* * *
[50 카르마를 획득했습니다!]
드디어 첫 번째 퀘스트를 완료했다.
메세지를 보자 첫걸음을 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장 카르마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들뜬 가슴을 억누르고 닥터에게 배웅을 받고 방을 나섰다.
“그럼, 기회가 될 때 다시 보죠.”
“예. 무탈하길 바랄게요. 박찬영씨.”
* * *
“허억… 허억…”
나를 제외한 사람들의 입에서 숨찬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입소를 마치고 훈련소로 향하는 길.
훈련소는 쉘터의 외각, 가장 북쪽에 있었다.
의외로 쉘터는 엄청난 넓이를 자랑했다.
그야 한 달에 인구가 100명씩이나 증가하니 당연한 이야기인가?
가장 중심에 있는 중앙 지휘소에서 훈련소로 향해 3~4시간을 걸었음에도 도착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전부 지쳐 보였다.
물론 아무런 짐 없이 지급받은 수통만 든 채 맨몸으로 이동하였기에 낙오자는 없었지만…
의외로 나는 버틸만했다.
걸어 다니면서 떨어지는 체력의 속도보다, 특성의 덕에 회복되는 회복력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목이 무척이나 마른 것은 어쩔 수 없다.
당장 수통을 들어 전부 마셔버리고 싶었지만, 얼마나 뒤 도착할지 모르기에 최대한 아껴 마실 필요가 있다.
“잠깐 휴식한다! 전과 마찬가지로 10분 뒤 출발이다!”
“으헉!”
털썩!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오가는 길 한가운데에 주저앉았다.
물론 나는 살짝 숨찬 수준이었기에 서서 잠깐 숨만 고르는 것으로 충분했다.
남은 10분의 시간 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쉘터 외곽의 건물들은, 중심 쪽 주택가의 세련되고 깔끔한 퀄리티와 상당히 차이 났다.
이쪽은 가공이 덜 된 원목을 이용해 지어진 건물이 줄지어있다.
급조한 티가 팍팍 났다.
힐끗 힐끗…
그곳에 주거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확실히 이제는 쉘터의 외각에 가까워진 것이 체감되었다.
딱 봐도 낙후되어 보이는 시설, 헤지고 거친 옷, 충분히 먹지 못해 비쩍 마른 팔과 다리…
서열이 낮은 사람들은 쉘터의 외곽에 살고 있나 보다.
무엇보다 눈동자에 생기가 없다.
오로지 우리를 향한 거부감과 배척만이 담겨있었다.
약간의 두려움도.
그야 그럴만하다.
우리들은 아직까진 훈련병이라고 하더라도 3개월 뒤면 넘볼 수 없는 서열에 위치해 있을 테니까.
“안전한 삶을 사는 대신 바닥을 치는 생활 수준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대신 받는 높은 대우 중의 선택이라…”
“그들이 틀린 것은 절대 아니죠. 그저 선택을 했고, 받아들인 결과일 뿐입니다.”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깜짝 놀란 속을 숨기기 위해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이강인!… 네가 왜?’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회귀자 이강인이었다.
< 7화 >
“…이쪽 생활에 대해 잘 알고 계시네요.”
“그냥 교관들이 해준 말을 듣고 유추했을 뿐입니다. 아마 훈련소에서 퇴소당하게 되면 저희도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그걸 바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물론 그런 분들도 도움이 될 겁니다. 중요한 일은 아니더라도, 옷을 만들거나 물건을 옮기는 일에는 사람의 손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침착하게 이강인의 눈을 응시했다.
그는 나와 대화를 이어나가길 바라는 듯했다.
다만, 전혀 호의적인 시선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의심하는… 나라는 인간을 알아보기 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행동이 빨라!… 난 적어도 훈련소에 도착하고 나서 접근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원작을 읽으며 파악한 그는, 육체뿐만이 행동력까지 강인한 사람이다.
실제로 이강인이라는 인간은 망설임이 없는 듯했다.
회귀하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승부수를 걸며 교관에게 덤벼들고, 요주의 인물인 나에게 말을 걸었다.
“박찬영이라고 합니다.”
“엇… 혹시 한국인이신가요?”
“예. 설마 그쪽도?”
“네. 이강인입니다. 설마 싶어 말을 걸어봤는데, 걸기를 잘했네요.”
“그러게요. 이쪽에서 고향 사람을 볼 것이라 그리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내게 주인공을 적대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무조건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그를 적대한다고 내게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
내게는 소설 속 지식이 있지만, 고작 초·중반부밖에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짧다.
그러나 주인공에게는 회귀 전 지식이 있다.
또한 사건의 중심에는 대게 주인공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 반드시 이용해야 하는 나로서는 그와 친하면 친할수록 도움이 된다.
당연하지만 그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경계부터 풀어줄 필요가 있다.
“사실, 저는 강인씨랑 친해지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말을 걸어주신데다가 한국 사람이라니, 이런 우연도 다 있네요.”
“…저를 전부터 알고 계셨나요?”
이강인의 눈매가 조금 더 날카로워진다.
이제는 확실히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당황할 필요 없다.
숨기는 것 하나 없다는 듯이 밝은 미소가 중요했다.
다행히 표정 관리는 나름 자신 있는 분야다.
“그럼요. 제겐 강인씨에게 갚아야 할 빚이 하나 있거든요.”
“예? 빚이요? 분명 저와 찬영씨는 초면일 텐데요?…”
“하하.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기억하시나요? 그때의 강인씨는 상당히 눈에 띄었죠. 남들이 전부 당황스래 소리 지를 때, 혼자서만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무엇보다 강인씨의 키가 무척 큰 편이잖아요? 인기 많게 생기기도 했고요.”
내 입에서 남자의 외모를 칭찬해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것도 내 의지로…
거부감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참을 수밖에.
“하하… 감사합니다.”
“아마 그때 당시 저희의 거리가 좀 되어서 강인씨는 저를 못 봤을 수도 있겠네요. 보시다시피 제가 키가 좀 작아서.”
“아하… 그나저나 제게 빚이 있다는 것이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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