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nel 22
다음 차례가 자신인 줄도 모르고.
-쩌엉
그녀는 갑작스럽게 발목에 스며드는 한기를 느꼈다.
고개를 돌려 다리를 보니 어느새 두 다리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이럴 수가...! 나는 [중급 냉기 저항]이 있는데...?’
비록 중급이라고 하지만 내구와 마력 능력치, 냉기를 다루는 기술 등의 영향으로 웬만한 냉기는 무시할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그녀의 상식을 깨부숴버렸다.
-뻐억!
당황한 차가운 대지에게 진수가 순식간에 짓쳐들었다.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적을 상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이 없다.
그는 다른 형제단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주먹질 한 방에 카라텔을 정리해버렸다.
“컥...!”
믿었던 카라텔 두 명마저 쓰러졌다.
맥심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너, 너...!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진수의 뒤에서 긴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 너구나.”
기다렸다는 듯 밝은 얼굴로 돌아보는 진수.
그의 뒤에 나타난 것은 카라텔, 검은 죽음이었다.
“아니, 여기는 원래 말을 안 들으면 바로 주먹을 보여주는 곳이잖아? 그래서 난 주먹부터 먼저 든 거지.”
“그 무슨...!”
검은 죽음은 어이없다는 듯 대꾸하려 했지만 이내 말문이 막혔다.
형제단이 일처리 하는 방식에서 폭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였으니까.
-후욱!
진수가 그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검은 죽음은 곧장 칼을 빼들며 그를 견제했다.
비록 애검이었던 리빙 소드는 진수에 의해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는 강자였다.
-팅! 팅!
맨손과 칼이 부딪히는데 금속음이 울려 퍼진다.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심지어 일부러 날 봐주는 거 같은데....’
몇 차례 공방이 오가고 제3자들이 보기에는 박빙의 승부가 펼쳐지는 듯했다.
이윽고 진수가 검은 죽음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으며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자, 이대로 조용히 들어. 기술 써서 말하는 거라 너한테만 들리는 거니까.”
[바람의 속삭임] 기술을 사용해 검은 죽음에게 말했다.
“내가 그냥 찾아와서 얘길 했으면 분명히 너희는 내 말을 안 들었을 거야. 심지어 너희나 나 둘 중 하나가 끝장이 날 때까지 자존심 세우고 싸웠을지도 모르지. 니가 내 편을 좀 들어줘. 그러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결론이 나올 거야. 심지어 너는 형제단 내에서 입지도 좋아질 거고.”
‘우리 형제들을 이렇게 해쳐놨으면서 이제 와서 평화를 찾는다고?’
검은 죽음이 표정을 찡그리며 한 마디 쏘아붙이려 했다.
“어차피 지금 여기에 있는 너희 애들 아무도 안 죽었으니까 너무 화내지 말고. 오히려, 니가 날 안 도와주면 정말로 피를 보게 될 수밖에 없겠지. 내가 힘이 부족해서 부탁하려는 거 아니야. 피를 덜 보려고 이러는 거지. 나 좀 도와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진수가 말했다.
그 말에 검은 죽음이 재빨리 바닥에 널브러진 헌터들을 살폈다.
대부분 기절을 하거나 전투에 참여하지 못할 정도로만 다쳤을 뿐이지 정말 아무도 죽지는 않았다.
검은 죽음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내가 받기로 한 목숨 값. 이걸로 갚으라고.”
“... 알겠다.”
* * *
“자, 이제 얘기를 좀 해볼까?”
형제단의 보스인 맥심과 진수가 마주 앉았다.
장내는 빠르게 정리가 되었고 대부분의 헌터들은 치료를 받으러 물러났다.
어차피 그들이 있어봤자 진수에게서 맥심을 지키지 못한다는 걸 알았고, 검은 죽음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선 결과였다.
“얼마 전에 나타난 몬스터의 둥지란 거 알지?”
먼저 운을 뗀 것은 진수였다.
“그래. 박종대란 놈이 떠들었던 거지. 시베리아 한복판에 생겨나고 주위론 몬스터가 득시글대고 있다.”
“몇 차례 보고를 들어서 알겠지만, 몬스터의 둥지란 게 생기기 전부터 이미 꾸준히 시베리아에 몬스터가 늘어나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건 운명파 놈들이 작업을 쳐놨던 거고.”
“알고 있다. 페챠가 돈에 눈이 멀어서 멍청한 짓을 했지. 이후에 우리도 시베리아의 몬스터들이 민간인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다.”
“그러면 뭐 말이 쉽게 통하겠네. 몬스터의 둥지는 사실 박종대가 말한 것처럼 파괴하면 안 되는 거야. 그게 진짜로 몬스터를 불러내는 게 아니라는 건 알잖아?”
진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긴 설득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우리 형제단도 박종대라는 놈에게 동조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몬스터가 넘치는 건 실질적인 문제지. 특히, 그 기둥 주위에 필드 보스 몬스터 수준인 괴물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어.”
“몬스터 정리는 걱정하지 마. 내가 일부러 그거 때문에 온 거니까. 내가 몹들 다 처치하면 나중에 웬 놈들이 기둥을 부수지 못하게만 해달라고.”
진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가 러시아까지 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형제단과 손을 잡고 몬스터의 둥지 아니, 차원의 축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차원의 축 주변에 강력한 몬스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거기 지키고 있는 필드 보스는 파투스가 신경 써서 준비한 몬스터겠지. 하지만 이제는 내 먹잇감이다 이 말이야.’
변했네...?
“켕!”
진수의 전기톱이 하얀 귀화를 두른 채로 맹렬히 돌아갔다.
형제단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일말의 자비도 느껴지지 않는 공격이었다.
-서리 늑대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서리 늑대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아이스베어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아이스베어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순식간에 몬스터 두 마리가 전이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방에는 몬스터 천지다.
진수는 쉬지 않고 도끼를 던지고 전기톱을 휘둘렀다.
[분열]로 작은 진수들을 만들어 제각기 싸우도록 했음에도 적의 수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였다.
‘형제단이 앓는 소리를 할 만큼 많긴 많네.’
시베리아에 있는 차원의 축 근처에 가까이 가니 늑대, 곰 형태의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서로 다른 종류의 몬스터들이 함께 있는 것도 꽤 놀라운 일이었는데, 제법 조직적으로 움직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머리가 좋은 놈들이었나?’
단순하게 돌진하는 게 아니라 에워싸면서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고 진수를 지치게 만들려는 의도가 보였다.
약한 다수가 강한 소수를 상대하기에 아주 적합한 전략이었다.
상대가 진수가 아니었다면.
-[괴물왕녀] 무리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힘 +1, 민첩 +1, 체력 +1, 내구 +2, 마력 +1
“니들이 아무리 차륜전을 써봐라 내가 지치나. 니들이 털리나. 난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어.”
-휘리릭 퍽!
왼손으로 도끼를 집어던지니 주위를 빙빙 돌던 늑대 몬스터 하나의 머리가 날아갔다.
-블루 울프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블루 울프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사방이 적이니 굳이 애써서 조준을 할 필요도 없었다.
[특급 공구 숙련] 덕분에 신경을 안 써도 치명타를 입혔지만 말이다.
-휘익! 쾅!
진수는 몬스터들이 다가오면 다가오는 대로, 거리를 벌리면 벌리는 대로 차근차근 수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강력한 마력이 빠르게 접근하는 것을 감지했다.
다가오는 마력 덩어리를 눈으로 확인하니, 얼음으로 된 화살이었다.
잽싸게 화살을 피했는데, 그의 바로 앞에서 터지며 작은 얼음 알갱이를 쏟아냈다.
얼음 조각들은 하나하나가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쪼개져 진수의 전신을 휩쓸었다.
그에게 큰 대미지를 주지는 못 했지만 상당히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짐승형 몬스터들에 화살을 사용한 기술이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몬스터가 있었다.
“아, 얘네들 어지간해서는 보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만나네.”
진수가 고개를 들어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핏줄이 비쳐 보일 것만 같은 창백한 피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싸늘한 표정.
마치 조각상처럼 미려한 외모.
뾰족한 귀.
손에 든 얼음으로 된 활.
‘프로스트 엘프.... 딱 괴물왕녀 무리에 어울리는 녀석이야.’
드워프가 몬스터로 나타나면 으레 엘프도 떠오르기 마련이다.
엘프도 던전이나 균열을 통해서 만나볼 수 있는 몬스터 중 하나였다.
대신 그들은 드워프보다도 더욱 등장이 드물었다.
드워프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유사한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이성을 잃어버린 녀석들이었다.
몸놀림이 몹시 민첩하고 동물형 몬스터 그리고 식물형 몬스터와 교감을 한다는 특징이 있다.
“전이시키면 파투스교 놈들을 확실하게 괴롭혀줄 수 있겠네.”
프로스트 엘프가 나타난 이후부터 짐승형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튼튼한 곰 몬스터들이 진수를 가로막고 늑대들은 팔다리를 노려왔다.
녀석들을 공격하면 프로스트 엘프의 화살이 매섭게 날아오는 식이었다.
-퍽! 쩌적
얼음 화살이 옆구리에 적중한다.
곧장 화살 주위로 허옇게 서리가 꼈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툭툭 털어버리는 진수.
“...!”
무표정이었던 프로스트 엘프의 얼굴에 놀람이 나타났다.
진수는 [상급 냉기 저항]에 [불곰] 특성까지 지니고 있어 웬만한 빙결 공격은 무시할 수 있었다.
그저 수많은 적들이 거슬릴 뿐.
“안 되겠다. 오랜만에 불꽃놀이 좀 해야겠네.”
진수는 [바람의 속삭임]으로 사방에서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는 분신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시를 받자마자 본체를 향해 [강철 거미줄]을 쏘아 보낸다.
진수도 거미줄을 마주 발사했다.
서로의 거미줄이 맞닿아 연결된다.
진수를 중심으로 [강철 거미줄]이 마치 거미집의 뼈대처럼 뻗었다.
“돌아!”
분신들이 일제히 거미줄을 연결한 채로 달리기 시작했다.
손에서 계속 거미줄이 뽑혀 나왔고 진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몬스터들에게 엉겨 붙었다.
가느다란 거미줄은 그냥 신경에 거슬릴 뿐 아무런 공격력도 없고 움직임을 막지도 못한다.
하지만 작은 진수들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최대한 많은 몬스터들에게 [강철 거미줄]을 연결했다.
프로스트 엘프를 제외한 대부분의 몬스터들에게 거미줄이 붙었을 때, 진수의 손에서 환한 불꽃이 나타났다.
-화르륵!
[백년 도깨비불]이었다.
하얀 귀화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미줄을 슬근슬근 태우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삽시간에 번지는 불길.
거미줄을 매개로 옮겨 붙은 도깨비불은 몬스터들의 살과 마력을 태우며 거세게 타올랐다.
“캬아악!”
“켕!”
“쿠워어어!”
짐승형 몬스터들의 고통에 찬 비명이 시베리아를 가득 채웠다.
마력을 먹이 삼아 타오르는 [백년 도깨비불]은 아무리 차가운 눈 더미에 비벼 봐도 꺼지지 않았다.
교감을 하던 몬스터들의 절규가 쏟아지자 프로스트 엘프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들의 고통이 전해오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으니까.
-스르륵
진수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녀석들을 뛰어넘어 프로스트 엘프 앞에 떨어졌다.
뱀파이어 로드의 검은 망토가 하늘하늘 흔들리며 떨어진다.
그 모습이 엘프의 눈에는 마치 마왕 강림처럼 보였다.
“아, 니네 애들 아픈 거 보기 싫으면 빨리 덤비든가.”
웃음기 가득한 어조.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프로스트 엘프지만 조롱하는 의도임은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뿌드득
프로스트 엘프가 이를 갈더니 얼음으로 검을 두 자루 만들어냈다.
눈빛으로는 이미 진수를 수십 조각으로 토막 내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살벌한 눈길을 받은 진수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또 활이나 쏘면서 도망 다니면 귀찮아질 뻔 했는데 역시 도발하길 잘 했어.’
-스노우베어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스노우베어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진수와 프로스트 엘프가 대치하고 있는 사이에도 도깨비불은 활활 타올랐다.
고통스러워하던 몬스터들의 생명의 불꽃이 하나씩 사그라들었다.
“이야~ 니 부하들 살살 녹는다.”
엘프의 눈에 조급함이 떠오른다.
이내 이를 악물고 진수에게 덤벼들었다.
얼음검을 교차해 진수의 반격을 대비하며 동시에 찔러 들어왔다.
그런 프로스트 엘프를 맞이하는 건....
-쾅!
슬레지 해머, 일명 오함마였다.
어느새 [차원의 틈]에서 양손 망치를 꺼낸 진수가 [빙의]로 흑우의 힘까지 빌려 힘차게 휘둘렀다.
망치 머리에 단단한 요철이 쓰였기에 마력이 담긴 얼음 따위는 버티지 못하고 박살이 나버렸다.
프로스트 엘프는 그대로 망치에 가슴팍을 얻어맞고 줄 끊어진 연처럼 날아갔다.
진수가 그 뒤를 바짝 쫓았다.
-후욱- 퍽!
공중에 떠있는 프로스트 엘프에게 망치를 내리쳐 바닥에 꽂아버린다.
그대로 목을 한 번 더 내려찍어 마무리를 지었다.
-프로스트 엘프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프로스트 엘프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짐승형 몬스터들을 이끌고 형제단을 애먹이던 필드 보스 몬스터가 간단하게 정리되어버렸다.
시베리아 벌판을 제 집처럼 차지하고 있던 몬스터 떼도 거의 죽어갔다.
[백년 도깨비불]이 붙지 않았거나 버티고 있는 녀석들은 작은 진수들이 찾아내 해치웠다.
‘동물형 몬스터들을 다루고 활도 쏘고 하니까... 얘 이름은 아르테미스로 해야겠다.’
-프로스트 엘프 [아르테미스]가 [괴물왕녀] 무리에 합류합니다.
특수임무가 있어서 그런지 아르테미스는 곧장 괴물왕녀 무리에 들어갔다.
시베리아에서 전이시킨 다른 몬스터들도 모두 아르테미스의 뒤를 따랐다.
-파투스교가 [괴물왕녀] 무리를 공격합니다.
특수임무에 표기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파투스교에서 이번 공격을 최후의 싸움으로 여기고 큰 전력을 보냈을 것이다.
‘설마 지지는 않겠지...?’
진수가 다리를 떨며 상태창을 살펴보았다.
혹시라도 전황이 나빠지면 골드를 퍼부을 생각이었다.
-서리 늑대 [이름 없음]의 사망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민첩 +1
확실히 격렬한 싸움이 펼쳐지고 있는지 사망하는 전이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상태창에 있는 괴물왕녀 무리의 전이자들 그림에 상처가 하나씩 생겨났다.
-아이스베어 [이름 없음]의 사망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체력 +1, 내구 +1
아직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아이스베어가 죽었다.
‘안 되겠어. 골드를 써야겠다.’
특수임무의 시간도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결판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수는 뒤늦게 후회하지 않기 위해 상점을 열었다.
그때 그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고블린 [고돌]이 전투에 참여합니다.
-[공방] 무리가 전투에 참여합니다.
[흰둥이] - 현재 상황 : 전의를 불태움 “징크스께서 우릴 지켜주신다!”
고돌이가 도착했다.
진수가 고돌이에게 보냈던 [중급 냉기 저항]과 [크리스탈 실드]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한 것이다.
추운 지역, 그리고 수정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으로 가라는.
고돌이는 그랑조를 소환해 탑승했다.
‘탑승 로봇이 휘두르는 양손검은 못 이기지.’
고돌이와 공방의 참전 이후로 괴물왕녀 무리의 전이자들은 상처가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진수의 생각은 드워프의 유물을 가지고 있는 고돌이가 도와주면 전투가 수월해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고돌이가 함께 있던 공방 무리까지 데리고 왔으니 파투스교는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이윽고 특수임무의 제한시간이 끝났다.
-[괴물왕녀] 무리가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특수임무 달성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힘 +12, 민첩 +10, 체력 +11, 내구 +12, 마력 +13, 골드 +50, [융합] 특성 강화
다수의 몬스터들을 전이시키고 고돌이와 공방을 전투에 참여시킨 덕분에 전투에서 승리했다.
괴물왕녀 무리를 지원한 정도에 따라 보상이 달라진다는 내용대로 엄청난 양의 보상을 받았다.
능력치만 도합 58이 오르고 골드도 50까지.
“[융합] 특성이 [초융합]으로 변했네...?”
무엇보다 지금까지 진수에게 수많은 능력을 주었던 [융합] 특성이 강화된 것이 기뻤다.
특성 쪽이 보통 그렇듯 정확히 어떤 점이 변했는지는 다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몇 가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기술과 기술의 융합이었다.
[전장의 뿔나팔]과 [석화의 시선]을 융합하여 [전장의 뿔나팔] 소리를 들은 이들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킬 수 있게 되었다.
[성창 소환]과 [고속 투척] 기술의 융합이나 [모래 연막]과 [유체화]의 융합도 가능했다.
기술의 변주가 훨씬 늘어난 것이다.
‘아마 기술끼리 섞는 거 말고도 더 기능이 늘어났을 거야. 앞으로 더 기대해도 좋겠지.’
당장 깨달은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했기에 진수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가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차원의 축이란 것도 한 번 보고 가야겠지.”
임무 보상의 기쁨을 충분히 만끽한 그는 고개를 돌려 차원의 축을 보았다.
* * *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거대한 기둥.
분명 눈앞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굉장한 존재감을 내뿜으면서 동시에 인지하기 어려운 묘한 감각을 주었다.
진수는 안내 메시지로만 봤던 차원의 축을 직접 확인하니 복잡한 심경이었다.
“역시, 내 선택이 옳았다니까. 모처럼 재밌는 상황이 나오고 있어.”
그런 진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성별이 구분되지 않는 목소리.
마치 신처럼 느껴지는 엄청난 압박감.
디에고와 계약했던 오세였다.
“오랜만이네.”
진수는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지만 일부러 편한 척 말을 하며 스스로의 긴장을 풀었다.
그가 성장한 것인지, 오세가 힘을 덜 쓴 것인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완전히 움직임이 멈추지는 않았다.
“그런가? 나한테는 시간이라는 게 크게 의미가 없어서... 하하! 특히 요즘은 재미난 구경을 하느라 더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니까.”
오세의 목소리에서는 즐거움이 한껏 묻어 나왔다.
“그래서 그런데, 내 부탁 좀 들어줘. 아마 너한테도 나쁘지 않은 일일 걸?”
오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바닷길
“부탁이라니? 아니, 잠깐. 근데 너...?”
진수는 불현듯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지난 번 만났을 때 오세는 머릿속에 직접 말을 거는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귀에 정확히 들리는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중성적으로 생긴 사람이 있었다.
표범이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아아, 이거. 이쪽 세상을 돌아다니기 좋은 몸으로 하나 만들었지. 저번에 그 상태로는 인간들이 너무 쫄잖아. 안 그래?”
오세가 실실 웃으며 답했다.
확실히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주위에 압박감을 뿜어대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부탁이 있으면 니 계약자한테나 부탁하지 왜 나한테 그래? 아니면 직접 움직이던가.”
진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나는 누구처럼 계약자를 억지로 움직이는 스타일이 아니야.”
오세는 양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누구는 분명 파투스를 뜻하는 것이리라.
“직접 하기에는... 이 몸을 만들어내느라 계약자 한 명한테 얻을 수 있는 영향력을 다 소진해버렸고.”
‘그렇다면 지금 이놈은 아무 힘이 없다는 말 아닌가...?’
오세의 말을 들은 진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영향력을 다 쓴 초월적 존재를 해치운다면 이 세계에서 몰아낼 수 있다는 게 아닐까 하는.
“물론 이 몸이 죽는다고 해도 진짜 나한테 타격을 주지는 못해. 몸이 사라졌으니까 내가 쓸 수 있는 영향력은 다시 생기게 되고.”
진수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은 모양이다.
“그럼 너 같은 존재들을 이 세계에서 몰아낼 수는 없는 거야?”
“물론 방법이야 있겠지. 근데 누가 멍청하게 자기 약점을 그렇게 떠들고 다니겠어? 그렇지? 너 방금 되게 무례한 질문 한 거야.”
오세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하지만 표정에서는 전혀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재밌어 하는 얼굴이었다.
마치 스무고개 같은 놀이를 하는 것처럼.
“방금 이야기의 연장으로, 내 계약자한테 시키면 위험할 수도 있잖아.”
뻔뻔한 소리를 내뱉는다.
진수는 그 이야기에 기가 찼다.
‘그 위험할 수 있는 걸 왜 나한테 시키는데....’
그의 불만스러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세는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들은 계약자가 있어야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지? 내 하나뿐인 계약자가 죽으면 여기 구경도 못 한다고. 물론 나는 여기에 업을 별로 쌓지 않아서 추가로 계약자를 더 찾으면 되긴 하지만.... 난 은근히 순정파라 보통 계약자는 하나만 둬.”
오세가 느긋하게 걸어가 은은히 빛나는 차원의 축을 검지로 두어 번 두드렸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차원의 축을 드러내는 건 꿈도 못 꾸지.”
차원의 축이 드러나게 만든 것도 파투스의 짓이라는 이야기였다.
‘다시 말하면 파투스만 어떻게 하면 차원의 축도 사라지고... 만사 오케이란 소린데....’
진수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오세가 말을 빙빙 돌리는 탓에 방법이 손에 잡힐 듯 말 듯 했다.
“어쨌든, 내 부탁은 이거야. 일본에 있는 차원의 축으로 가줘.”
“일본에? 거기 뭐가 있는데?”
“항상 말하지만, 직접 이야기하면 재미가 없다니까 그러네. 일단 가봐. 그러면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거야. 내 부탁은 그게 전부야.”
오세의 눈은 반달을 그리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봤을 때 그는 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파투스를 방해하는 걸 즐기는 듯 보였다.
이번 부탁이라는 것도 진수에게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파투스의 행보에 훼방을 놓는 일이리라 예상됐다.
“알겠어. 일본에 있는 차원의 축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거지?”
진수가 대답을 했는데 어느새 오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제멋대로라니까.’
진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든 뒤 핸드폰을 꺼냈다.
연락해야 할 곳은 두 군데였다.
‘형제단한테 이제 여기 지키라고 하고, WP클랜한테 전 세계의 차원의 축과 관련된 동향을 좀 파악해달라고 해야지.’
그가 러시아로 오는 일주일동안 어떻게든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났을 것이다.
박종대에게 동조하거나 자기들 나름의 결론을 내거나.
그러한 정보를 취합하여 최대한 차원의 축을 많이 지켜내야 한다.
‘자료가 모일동안 나는 일본에 다녀와야겠네.’
진수는 연락을 돌리며 전속력으로 이동했다.
* * *
일본으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늘길과 바닷길.
게이트 사태 전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세부 방법은 상당히 달랐다.
비행 능력과 전투 능력을 모두 지닌 각성자가 바다를 건너 날아가야 한다.
덤벼드는 비행 몬스터들을 상대하면서.
‘[빙의]로도 바다를 건널 정도의 비행 능력은 못 빌리니까... 하늘길은 기각.’
그렇다면 남은 것은 바닷길이다.
일본과 가까운 항구에서 배를 타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보통 한국이나 러시아의 항구를 통해서 배편을 찾게 된다.
“마, 러씨아 배는 거칠어서 못 탄다이가. 금마들 뭐 술 퍼먹고 운전하드마. 배도 뭐 음주운전 하면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제.”
라고 술에 잔뜩 취한 부산갈매기 길드장 조태준이 말했다.
어찌나 술을 많이 마셨는지 입을 열지 않아도 술냄새가 풍길 정도였다.
‘각성자가 취할 정도면 거의 술독에서 샤워라도 한 거 아닌가...?’
진수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부산갈매기 길드와는 일면식이 있었다.
복해대성을 찾으러 왔을 때 배도 빌리고 대화도 나누고 했었다.
“근데 지난번에 그 복해... 랑 뭐 어떻게 된 일이고?”
조태준이 복해를 언급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햄, 햄 하면서 따랐던 자가 거대한 몬스터로 변했으니 확 태세전환을 하는 건 민망하고 그렇다고 계속 존칭을 붙이는 것도 난처한 듯했다.
‘로켓몬스터도 나중에 일본 진출을 할 수도 있고 하니까.... 이 사람들 면을 좀 세워주는 게 좋겠지.’
“그때 복해님이랑 싸웠던 할아버지 있잖아요? 그 사람이 저주 같은 걸 써서 몬스터화 시켰던 모양이더라고요. RD라고 저기 중국에서 온 놈들 중 하나였어요.”
진수의 설명에 조태준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맞나? 아, 어쩐지~ 복해 햄이 몬스터일 리가 없는데 뭐가 이상하다 했다. RD인가 뭔가 하는 금마들은 죄 털렸다드마, 마 그런 게 권선징악 아니겠나! 크하하! 얘들아, 복해 햄 몬스터 아니었단다!”
“아 맞습니까?”
“그때 그 영감님 좀 이상했다 아입니까.”
“우리 괜히 의기소침해 있었네요. 크흐흐!”
진수가 대충 꾸며 둘러댄 말을 들은 부산갈매기 길드원들이 하나같이 잘 됐다면서 술잔을 들었다.
거친 바다 사내들 같으면서도 은근히 순진한 모습이다.
“근데 지금은 복해님도 없는데 왜 여기 이렇게 다 모여 계세요...?”
부산갈매기 길드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해운대 바닷가에 모여서 진탕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과의 거의 유일한 배편을 운영하는 길드였다.
일본으로 꽤 자주 왕래를 하기에 상당히 바쁜 집단으로 알려졌다.
‘근데 이 꼴은 무슨 백수들 같잖아....’
진수는 뒤에 이어진 생각은 굳이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
“후우.... 그게 좀 복잡다. 어떻게 된 거냐면....”
부산갈매기 길드는 대규모 균열 사태가 일어나고 박종대가 방송에서 떠들어도 별 상관하지 않고 평소대로 지냈다.
그들은 주로 바다에서 활동하는데 해양 몬스터는 딱히 늘어난 것 같지 않았으니까.
‘아무래도 그랬겠지. 대규모 균열이 일어난 건 운명파가 미리 작업을 쳐놓은 거랑 파투스가 나중에 자기 계약자들 생명력으로 일으킨 거니까.... 사람이 없는 바다에는 균열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을 거야.’
그래서 꾸준히 일본에 드나들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쪽의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고 한다.
“뭐 다들 약이라도 빨았는지 조금 몽롱한 얼굴들을 하고 있데? 그러더니 조금씩 항구 쪽에서 몬스터를 키운다는 인간들도 보이고.... 하여간 희한한 꼴이었다.”
몬스터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가 누그러들고 반대로 몬스터들의 공격성도 줄어들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항구 쪽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본 전체에 나타난 변화라고 했다.
“그러드만 갑자기 뱃길을 막아버렸다이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콱 끊어버리니까 우리도 마 씅 나지. 그래서 이제는 안 가기로 했다. 금마들 뭐 지들 기분 좋을 때는 살랑~살랑~거리드마 그렇게 뒤통수를 치네. 쯧쯧, 역시 일본놈들은 믿을만한 놈들이 못 된다.”
조태준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면...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우리 영역까지는 태워다 줄 수 있는데, 일본 영해부터는 들어갈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넘을라치면 귀신같이 알고 쫓아오드라.”
그의 얼굴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필요할 때는 부산갈매기 길드의 배를 유용하게 써먹다가 한 순간에 배신을 당했다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갈 수 있는 곳까지만 좀 태워주시겠어요? 이후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마 괘안켔나? 일본놈들 요즘에 몬스터도 잘 안 잡아서 그쪽에 몹이 꽤 많을 건데?”
“하하, 그건 괜찮아요.”
‘어차피 일본 영해까지 배 타고 가는 것도 헤엄치면서 방향 잡는 게 힘들어서 그런 거일 뿐이니까....’
* * *
-철썩!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위에 작은 배 하나가 떠있다.
그 위에는 진수와 조태준이 서있었다.
“저~쪽에 저 섬 보이나? 저게 쓰시마다, 쓰시마 섬. 우리나라 영해에서는 저게 제일 가까운 일본 땅이거든? 저기 찍고, 그 다음에 이키 섬 찍고, 후쿠오카 쪽으로 들어가는 게 그나마 수월할 거다. 근데 뭐 비행 기술 같은 거 있나?”
“헤엄쳐서 가면 돼요.”
“헤엄? 마! 아무리 헌터래도 여기서 수영하면 그대로 마 삼도천까지 헤엄쳐 가는 거다.”
진수의 대답에 조태준이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진수는 아랑곳 않고 그대로 배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흐흐. 다음에 또 봬요!”
차가운 바닷물에 몸을 맡긴 그는 조태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그대로 잠수했다.
조태준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가 사라진 곳을 보다가 이내 뱃머리를 돌렸다.
-꼬르륵
‘[수중 호흡]을 이제야 써보네.’
바다의 왕자 무리가 차원의 축을 발견했을 때 보상으로 받았던 특성이었다.
물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을 쉬는 데에 아무런 불편이 없다.
호흡 문제가 없으니 막헤엄을 쳐서라도 일본을 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쿠우우우!
진수가 열심히 팔다리를 휘젓고 있는데 앞에서 물살을 가르며 거대한 생명체가 접근했다.
어두운 물속에서 마주한 거대 생물은 상당한 공포감을 주었다.
‘일단 마력이 느껴지는 걸로 봐서는 몬스터구나! 물 때문에 시야가 가려지니까 무슨 몬스터인지 알 수가 없네.’
-쿠루루룩
그의 머리 위에서 환한 창이 나타나더니 엄청난 속도로 쏘아졌다.
[성창 소환]과 [고속 투척]을 합친 결과물이었다.
-작살고래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작살고래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아, 작살고래였어?’
진수는 작살고래에게 꼬치구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일본을 향해 계속 헤엄쳤다.
그렇게 정체불명의 해양 몬스터들을 [차원 전이]로 하나씩 알아가며 나아갔다.
‘이 맛에 아쿠아리움을 가는구나!’
인지상정
“푸하! 아무리 숨 쉬는 데에 불편한 게 없다고 해도 역시 맨 공기가 좋네.”
수면 위로 진수가 솟아올랐다.
곧장 바닷가의 절벽 쪽을 향하여 [강철 거미줄]을 발사해 뭍으로 빠져나왔다.
-작살고래 [꼬치구이], 타이거 오르카 [범고래], 인면어 [아리엘], 캐논크랩 [공갈탄]이 [바다의 왕자] 무리에 합류합니다.
-[바다의 왕자] 무리의 급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힘 +6, 민첩 +11, 체력 +10, 내구 +5, 마력 +6, 골드 +20
“아, 역시 체력 늘리는 데엔 해상훈련만한 게 없다니까.”
이번 급성장 보상을 받으면서 체력 능력치가 300이 되었다.
맨몸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도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음, 근데 여기는 공기부터가 뭔가 좀 다르네....’
조태준이 알려준 대로 쓰시마 섬을 거쳐 이키 섬, 그 다음으로 일본 본토에 도착했다.
각 섬을 지나칠 때는 거의 직선거리로 달려 빠르게 통과했다.
헤엄을 칠 때는 몬스터들을 해치우면서 이동해야 했기에 감각에 집중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물에서 나와 보니 대기 중에 퍼져있는 마력이 다른 곳과는 달랐다.
‘마력 성격 자체가 다른데.... 마치 다른 차원으로 넘어온 것처럼.’
고산지대에서 지내다 바닷가에 온 듯이 온몸에 익숙지 않은 느낌이 가득했다.
“이게 환경이 좀 달라서 그런가...? 차원의 축이 두 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
차원의 축은 마력을 사용하는 각성자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존재감을 내뿜는다.
그런데 일본에 도착하고 나니 차원의 축의 존재감이 불분명했다.
한 위치에 존재한다는 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두 개의 약한 차원의 축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마치 초점이 맞지 않는 렌즈로 한 사물을 볼 때 상이 두 개 맺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쨌든 가리키고 있는 곳은 한 군데니까 그 방향으로 가보자.’
달라진 공기 중의 마력 조성.
계속해서 신경에 거슬리는 차원의 축.
진수는 일본에 도착한 뒤로 계속해서 자신이 있으면 안 될 곳에 온 듯한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우선 발걸음을 떼었다.
* * *
“이야.... 여긴 무슨 디지몬스터나 포켓괴물 속 세상 같네.”
전투 헌터가 된 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진수는 나름대로 다양한 형태의 도시들을 경험해봤다고 생각했다.
한국 내에서도 도시마다 분위기가 달랐고, 무법지대, 러시아, 중국의 다양한 사람들도 봤다.
그런데 그 중 단연 최고로 기이한 곳은 일본이었다.
진수는 일본을 구성하는 네 개의 커다란 섬들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섬부터 일본의 중앙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그 과정 중에 여러 마을과 도시들을 거쳤다.
게이트 사태 이후로 인류는 몬스터와의 끝없는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그러한 상식에서 벗어난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화르륵!
길거리에서 타코야끼를 굽는데 샐러맨더가 가열을 돕고 있다.
타이니 오우거가 짐을 옮기고 켄타우로스가 마차를 끈다.
몬스터들의 눈에서 인간에 대한 적의가 전혀 보이지 않고 상당히 잘 섞여서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게이트 사태 이후로 몬스터라는 존재가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진수에게 굉장히 생소한 광경이다.
어떻게 보면 몽환적인 동화 속 나라 같기도 했다.
‘헌터넷에서 일본에는 몬스터랑 결혼한 각성자도 있다고 하더니... 이런 분위기라 가능했던 건가...?’
한 때 헌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주제였다.
극한의 가능충이라거나 역겹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엘프나 머메이드 계통이라면 고려해보겠다는 의견도 나오긴 했었다.
그마저도 농담조의 의견이 대부분이었지만.
“저기요. 말씀 좀 묻겠습니다.”
진수는 정령 계열의 몬스터를 데리고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외국에서 와서 그런데요. 여긴 왜 몬스터들이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 거죠?”
“하하, 역시 우리 일본은 몬스터들에게도 미움 받지 않는다... 랄까요? 얼마 전에 아마테라스께서 강림하시고 나서부터 우리들은 팔백만 신과 연결이 됐어요. 싸우기 좋아하는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죠.”
팔백만 신(八百万の神).
말 그대로 팔백만이라는 수의 신을 뜻하는 말은 아니다.
일본 특유의 만물에 영혼이나 정령이 깃들어 있어서 수없이 많은 신이 존재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런 개념을 몬스터와 결합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스운 꼴이지만 놀라운 것은 실제로 일본에 있는 몬스터들은 인간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다만, 이게 가능해진 건 차원의 축이 나타난 이후부터라는 게 좀 이상해.’
자랑스럽게 말한 일본인의 말에 따르면 일본 땅에 태양이 내려오고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도 함께 강림했다고 한다.
팔백만 신의 위에 군림하는 아마테라스가 나타나고 나서 몬스터들이 고분고분해졌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최소 한 마리의 몬스터가 연결되었다.
-슈슉
일본인 사내가 정령 계열 몬스터를 사라지게 했다가 다시 소환해 보였다.
‘[차원의 틈]에 물건을 넣었다 뺄 때랑 비슷하네.’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형태에 대한 감상이 아니었다.
[차원 전이], [차원의 틈]으로 인해 차원적인 교류, 변화에 익숙한 진수다.
일본인이 몬스터를 소환하는 방식 자체가 균열이나 [차원 전이]와 비슷한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아마테라스라는 건 뭐예요?”
“뭐라니요? 말씀에 주의해주세요. 몸소 이 땅에 내려와서 실재함을 증명하신 살아있는 신이신데요. 방금 전에 제가 바람의 신을 불러내는 걸 봤잖아요?”
그의 주장대로면 차원의 축이 생겨났을 때 함께 나타난 몬스터인 듯했다.
‘시베리아에 있었던 프로스트 엘프 같은 필드 보스 몬스터인가...?’
가장 먼저 든 의심은 역시 파투스가 차원의 축을 몬스터의 둥지로 꾸미기 위해 불러낸 몬스터인가 하는 점이었다.
사실상 가장 유력한 가설이기도 했다.
일본인들이 차원의 축을 땅에 내려온 태양이라며 숭배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파투스가 굳이 한정적인 영향력을 사용해가면서 몬스터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 이유가 없잖아?’
오히려 몬스터가 날뛰도록 해야 파투스의 목적에 부합할 것이다.
분명히 비정상적인 상황.
어쩌면 차원의 축이 둘인 듯 느껴지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 하하. 제가 워낙 놀라서 말실수를 했네요.”
진수가 재빨리 얼버무렸다.
사내의 표정이 상당히 살벌했으니까.
‘근데 고작 일주일 정도 전에 나타난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강한 믿음을 가질 수가 있나? 잠깐... 지금 [특급 정신 보호]가 작동되고 있는 거 같은데....’
일본 내에 들어온 뒤로 느꼈던 묘하게 마력이 다른 느낌.
그것 때문에 [특급 정신 보호]가 약하게 발동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제야 조태준이 했던 일본인들의 얼굴이 몽롱해보였다는 말이 떠올랐다.
‘차원의 축이 나타난 뒤로 누가 또 일본 전체에 수작질을 부리고 있구나.’
“그 아마테라스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세요?”
그리고 수작질을 부리는 중심에는 아마테라스라고 불리는 존재가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 * *
진수는 이틀에 걸쳐서 일본의 중앙부까지 이동했다.
정령 계열 몬스터를 다루던 사내의 말에 따르면 아마테라스라는 존재가 후지산에 있다고 했다.
차원의 축의 존재감이 가리키는 위치가 후지산인 듯했다.
굳이 도시를 고집하지 않고 직선거리로 달려온 덕에 빠르게 후지산 근처까지 올 수 있었다.
-쾅!
“캬아악!”
“거기 도망 못 치게 막아!”
“다리부터 잘라버려!”
으슥한 산길을 통과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본에 온 뒤로 전투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저절로 관심이 갔다.
‘아마테라스 덕분에 몬스터한테 미움 받지 않는 놈들이 왜 싸우고 있는 거지?’
진수는 [투명화]를 사용하여 소란스러운 곳으로 향했다.
“키아아!”
보팔 래빗, 파이어폭스 등의 몬스터들이 한 데 모여 있고 그 주위로 인간과 몬스터들이 둘러싸고 있다.
포위당한 몬스터들은 인간에게 적개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내 인간 무리가 수세에 몰린 몬스터들에게 공격을 쏟아 부었다.
인간의 편에 있는 몬스터 중에는 파이어폭스도 있었는데 동족들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불덩이를 쏴댔다.
‘이 자식들 싸우기 좋아하는 다른 나라들이랑은 다르다더니.... 그냥 공격성을 가진 몬스터를 죄다 죽이고 있는 거였네. 하여간 음흉한 놈들이라니까.’
몬스터를 모두 죽이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겉으로는 모든 몬스터와 평화롭게 지내는 척 포장을 하고 뒤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이중성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끼리도 서로 싸우는 마당에 아무리 공격성이 줄어든 몬스터라고 해도 모두 사람한테 우호적이라는 게 말이 안 되긴 하지.’
일본인들이 몬스터를 몰아놓고 처치하는 것을 본 덕에 아마테라스라는 존재가 그들의 주장처럼 완전한 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진수는 다시 원래 목적지인 후지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두 눈으로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산.
그리고 그 정상에 솟구친 환한 빛의 기둥.
과연 모르는 사람은 땅으로 내려온 태양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한 모습이다.
‘그래서 이렇게들 둘러싸고 있는 거겠지.’
후지산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여러 개의 신사들이 세워져 있거나 세워지고 있고 돗자리, 텐트 등을 설치해 자리 잡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아주 난리도 아니구만....”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진수는 [투명화]와 [유체화]를 사용했다.
후지산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은근히 다른 이들을 견제하며 산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는 괜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바로 차원의 축으로 가려고 했다.
-파지지직!
여러 신사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치는데 갑자기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동시에 제법 강한 반발력이 진수를 밀어내려 했다.
“칫, 결계인가?”
반발력은 간단히 무시하고 나아갈 수 있었지만 후지산에 들어가려는 걸 들켰다.
어느새 진수를 향해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다루는 몬스터들이 몰려왔다.
진수는 재빨리 [차원의 틈]에서 가면과 방어구, 뱀파이어 로드의 망토를 꺼내 착용했다.
전투태세라기보다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어디 도둑놈처럼 슬금슬금 숨어 들어가느냐!”
눈썹이 역팔자를 그리고 있는 험상궂은 스님이 호통을 쳤다.
그의 곁에는 텐구가 서있었다.
붉은 얼굴에 커다란 코, 허리춤엔 큰 칼을 찬 요괴형 몬스터.
등에는 까마귀의 날개가 달려 더욱 위압감이 느껴졌다.
텐구 외에도 일본에서만 볼 수 있다는 캇파나 오니 같은 몬스터들이 상당히 많이 보였다.
아무래도 일본 전설에서 나타났던 녀석들을 다루게 되니 더욱 아마테라스를 신봉하게 된 경향도 있었을 것이다.
‘괜히 잘 지내는 몬스터를 전이시키면 미안하니까 몰래 들어가려고 한 건데.... 이렇게 도둑놈 취급을 하면 도둑질을 해줘야겠지.’
“네놈 정체가 뭐냐!”
진수가 가만히 사방에 나타난 몬스터들 종류를 훑어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자 스님이 다시 한 번 소리를 쳤다.
“정체를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이지.”
이 세계의 파괴를 막기 위해,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몬스터를 때려잡고 다니는 로켓몬스터의 대표 되시겠다.
유희
“끄으으...”
진수에게 도둑놈이라고 칭했던 스님을 포함한 모든 각성자들이 바닥에 나뒹굴며 신음을 냈다.
텐구, 캇파, 오니 같은 몬스터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 행방은 진수의 만족스러운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일식 뷔페라도 다녀가는 기분이네. 어차피 싸우게 될 거 괜히 숨는다고 [유체화]랑 [투명화]를 썼어.’
새로운 전이자를 일곱 마리나 채울 수 있었다.
그것도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종류의 몬스터들로.
요괴형 몬스터를 그들의 종족명 그대로 불렀는지 정직하게 텐구는 텐구로, 캇파는 캇파로 이름이 붙어 전이됐다.
‘쯧쯧, 이름을 좀 성의 있게 지어줘야지.’
진수는 땅바닥에 쓰러져 끙끙 앓는 사람들을 보며 혀를 찬 뒤 시선을 후지산 정상 쪽으로 돌렸다.
이제 차원의 축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 이는 없었다.
* * *
후지산을 오를수록 점점 차원의 축의 존재감이 커진다.
그와 동시에 산 정상에 차원의 축이 두 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다만 시베리아에서 봤던 것보다는 훨씬 약한 느낌이었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만 진수에게는 평지나 다름이 없었다.
거의 나는 듯이 내달려 정상에 도착했다.
그런 진수를 맞이한 것은....
“크아앙!”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여우였다.
정확히는 불타는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
허공에 누워있던 그것은 진수를 발견하고는 입을 쩌억 벌린 채 달려들었다.
‘저게 그 태양신이라는 아마테라스인가...?’
짓쳐드는 속도가 상당히 위협적이었기에 진수는 바로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만!”
“끼잉....”
금방이라도 진수의 머리를 물어뜯을 것 같던 녀석이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작은 울음소리를 내며 멈췄다.
웬 사내가 반려동물을 꾸짖기라도 하는 양 검지를 펼쳐 흔들었다.
짐짓 화난 척 입을 앙다물었지만 눈빛은 그다지 진지하지 않았다.
그걸 알아차린 여우가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가 머리를 비볐다.
“찾아온 손님 놀래키지 말라고 했지? 너 같은 덩치가 장난치면 사람들은 얼마나 겁나는데! 심술부리지 말고 딴 데 가서 놀고 있어.”
그는 여우의 토실토실한 볼살을 양손으로 잡고 흔든 뒤 엉덩이를 쳐서 보냈다.
‘이 사람... 아니, 사람이 맞긴 맞나? 차원의 축이... 느껴지는데.... 혹시 이쪽이 아마테라스인가?’
진수는 눈앞의 남자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보았다.
반면에 사내는 몹시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진수가 자신을 해할 수도 있다는 의심이 단 한 톨도 들지 않는 듯했다.
“혹시... 아마테라스...?”
퍽 우스운 질문을 던진다.
마땅히 떠오르는 적절한 물음이 없었다.
그러한 상황을 이해하는지 사내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그만!”
남자가 말을 이어나가려 하는데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사내는 어이쿠 하는 표정으로 움츠러들었다.
“히잉....”
“당신! 나 찾아온 사람 놀리지 말라고 했지?”
이어 한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는 스스로 아마테라스라고 자칭하던 남자를 혼냈다.
“도리이를 노리는 인간이면 어쩌려고 그래! 아이고 내가 못 살아 정말!”
가슴을 두드려가며 야단을 친다.
도리이(鳥居)는 보통 일본의 신사 입구에 있는 우물 정 자(井)를 닮은 문이다.
일본 토착 신앙에 따르면 신의 영역과 일반 세계를 잇는 역할 혹은 단절시키는 결계의 역할을 한다고 믿어졌다.
“다른 나라에서는 도리이를 몬스터의 둥지라면서 없애야 된다고 난리치는 인간들도 있잖아!”
이야기하는 꼴을 보니 이들은 차원의 축을 도리이라고 부르는 듯했다.
‘그리고 이쪽은... 오세랑 비슷한 존재인데.... 대체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 거지?’
마치 초월적 존재와 인간이 서로 연인처럼 행동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내의 경우 차원의 축 역할을 하는 듯하지만 아무런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비각성자라는 뜻이었다.
‘근데 목에는 마석증 반점이 있고.... 마석증이란 거 각성자한테만 나타나는 병이 아니었나...?’
“내가 아마테라스야. 무슨 일로 찾아왔어?”
이윽고 여성의 외형을 지닌 초월적 존재가 자신을 아마테라스라고 밝혔다.
아마테라스로 착각하게 만든 여우, 아마테라스인 척 하려던 남자에 이어 진짜 아마테라스의 등장이었다.
진수는 아마테라스와 차원의 축 역할을 하고 있는 사내를 번갈아 살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눈치로 봐서는 저 남자한테 차원의 축이나 오세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는 편이 낫겠다.’
[바람의 속삭임]을 사용해 아마테라스에게만 들리게 말을 전했다.
-차원의 축을 찾아서 왔어. 파투스가 먼저 파괴하기 전에.
차원의 축과 파투스라는 말을 들은 아마테라스의 표정이 굳었다.
이어 진수를 보는 눈빛이 사나워졌다.
마치 장난감을 뺏기지 않으려는 아이의 모습 같기도 했다.
-그 많은 차원의 축 중에서 여기로 온 이유는 뭐지?
머릿속에 직접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전달 방식을 사용한다.
역시나 남자에게 이야기가 들리지 않게 한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오세가 여기로 와보라고 하던데. 재밌는 구경을 하게 될 거라고.
확실히 기이한 광경을 보게 되긴 했다.
아마테라스는 오세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얼굴에서 불쾌함이 뚝뚝 떨어졌다.
-그 살쾡이 같은 자식이...!
“당신, 가서 미호 간식 좀 챙겨줘.”
하지만 이내 불쾌감을 미소로 가리며 사내에게 부탁을 했다.
웃는 낯이지만 목소리에서는 저항하기 힘든 압력이 느껴졌다.
그녀의 말을 들은 남자는 표정이 살짝 멍해지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대한 여우에게로 갔다.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바로 기분 나쁜 표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 재미중독자는 왜 또 나를 건드려? 안 그래도 파투스 그놈 때문에 이번 유희는 얼마 안 남았는데!”
“유희...?”
진수가 그녀의 이야기 중에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을 짚었다.
“그래, 유희. 나나 오세, 파투스 같은 것들은 꽤 많은 힘과 능력을 얻는 대신 어디 하나씩 부족한 상태가 돼.”
아마테라스는 오세와 달리 꽤 설명을 자세히 해주었다.
초월적 존재들은 각자 결핍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오세는 끝없는 따분함.
파투스는 힘에 대한 갈망.
“내 경우엔...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일종의 애정 결핍이라고 할까.”
그래서 차원의 경계가 약해지는 때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각자의 결핍을 충족시키려 한다.
파투스는 차원의 축을 망가트린 뒤 그 차원이 가지고 있는 힘을 집어 삼키는 것.
아마테라스는 일정 영역 내에서 자신을 일방적으로 따르는 자들을 만들고 제사장 역할을 하는 이와 일종의 가족처럼 지내는 유희를 즐긴다.
“말이 유희지 사실 이때만큼은 항상 진심이라고. 보통은 비각성자가 주는 영향력이 적다고 계약조차 안 하는데 나는 그런 걸 따지지 않잖아.”
그녀는 자신을 믿어달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음....”
‘이쪽도 극한의 가능충이었네.’
진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초월적 존재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뭐 침팬지나... 고블린, 오크 정도의 포지션일 텐데....’
아마테라스가 참 나라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니까 너도 우리 같은 녀석한테 선택을 받은 거 같은데....”
그녀는 진수를 살피며 말했다.
특히 팔의 마석증 반점 쪽을 유심히 보았다.
“이거 굉장히 복잡하네. 첫 계약자는 파투스 그놈인데 다른 녀석이 꼼수를 써서 가로챘어.”
꼼수.
이전에 오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너 지금 어디 다른 차원이랑 연결되어 있지?”
“어...?”
진수는 답을 하지 않고 적당히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의 대답이 필요해서 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아마테라스는 혼자 떠들었다.
“그쪽 차원의 관리자가 파투스 계약을 비틀어서 자기가 썼네. 아주 영리했어. 자기 힘은 덜 들이고 파투스의 영향력은 빼돌릴 수 있고. 덕분에 파투스한테 안 들키면서 차원과 차원 사이의 연결점으로 만들었어.”
다시 말해, 진수가 [차원 전이]로 전이자들을 보내주고 있는 차원의 관리자가 진수의 현재 계약자라는 것이다.
그가 파투스와 계약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차원 전이]를 얻었다.
마석증으로 고생은 했지만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럼 나는 파투스의 계약에서 완전히 벗어난 거야?”
“그런 셈이지. 어디론가 또 연결이 되어 있는 거 같긴 한데, 파투스랑은 아니야.”
‘이래서 오세가 날 여기로 보냈구나.’
아마테라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진수의 현재 상황을 아마테라스를 통해 듣게 하는 것.
일본에 있는 차원의 축을 확보해서 파투스의 움직임에 방해를 하는 것.
아마테라스가 화내게 만들어 재미를 느끼는 것.
‘그리고... 분명 파투스와 관련된 다른 힌트가 있는 거 같아. 이건 다른 단서들이 더 모이면 알게 되겠지.’
진수는 직전 오세와의 대화부터 아마테라스의 이야기까지 일종의 스무고개의 과정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는 것은 이 다음의 단계도 있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니가 차원의 축을 찾은 이유는 뭐야? 혹시 부수려고 하는 건 아니지...?”
아마테라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너 정도의 인간이 부수겠다고 나서면 나는 그걸 막을 힘이 없어.”
그녀는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일본에서 아마테라스를 깊이 믿는 이들을 계약자로 만든 상태라고 한다.
그들을 통해 얻은 영향력으로 임시 차원의 축을 만들어 몬스터를 유순한 상태가 되게 했다.
마치 오세가 진수를 뱀파이어들의 임시 차원의 축으로 만든 것처럼.
그래서 더 이상 힘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내가 유희를 좀 더 오래 즐길 수 있게 해줘. 그럼 나도 보답을 할게.”
“보답?”
어차피 진수로서는 차원의 축을 절대 부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아마테라스가 나서서 보답을 하겠다고 하니 그는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었다.
-휘익!
그녀가 휘파람을 불자 처음 진수에게 달려들었던 커다란 여우가 허공을 밟으며 달려왔다.
“혹시 봤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몬스터들을 [차원의 틈]으로 넘나들게 할 수 있어. 이 아이를 너한테 귀속시켜줄게. 전투력도 제법이고, 하늘을 날거나 할 때 꽤 쓸 만할 거야.”
확실히 공중을 마음대로 뛰노는 몬스터라면 진수에게 아주 도움이 된다.
진수는 일부러 고민을 하는 척 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아마테라스의 제안을 수락했다.
만약 파투스의 계획이 무산되면 차원의 경계가 옅어진 기간 동안은 유희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 그럼 미호를 귀속시켜줄게.”
아마테라스가 오른손을 뻗어 진수를 가리켰다.
그러자 이내 붉은 마력이 뿜어져 나와 진수의 마석증 반점으로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커다란 여우 몬스터도 진수에게 들어갔다.
-구미호 [미호]가 당신에게 귀속되었습니다.
-구미호 [미호]의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구미호는 이미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진수에게 귀속이 된 덕인지 이름을 다시 짓게 되었다.
‘얘는 헤라가 맞겠다. 결혼과 가정의 신이니까....’
진수는 아마테라스와 저 멀리서 걱정스럽게 이쪽을 보고 있는 사내를 보며 구미호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초융합]의 효과로 아마테라스의 권능과 [차원 전이]이 합쳐집니다.
-구미호 [헤라]는 [차원의 틈]을 거쳐 지정하는 전이자에게 전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원할 때 당신의 곁으로 소환이 가능합니다.
[초융합] 특성으로 인해 아마테라스도 예상하지 못한 효과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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