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nel 21
‘나한테는 [도구 일체화]가 있으니까. 딱 좋네.’
진수의 내구 능력치와 [상급 재생력], [탄성체질]이 적용된다면 면도날 같은 예리함을 살리면서도 훌륭한 내구도를 챙길 수 있다.
기존에 사용하던 도끼는 투척에 강세였다면 이번에 얻은 녀석은 주력 무기로 쓰기에 손색이 없었다.
“흐흐, 득템했네.”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가 절로 나왔다.
“저 도끼살인마를 이렇게 쉽게...!”
자야와 바타르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진수가 전력을 다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용의 기운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검은 오러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디론가 다녀온 사이 더욱 강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김진수님. 드디어 이제 때가 온 겁니까?”
진수가 도끼를 살피고 있는데 통갈락이 말을 걸었다.
그의 뒤로 상당한 덩치의 바타르와 자야가 섰다.
그들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핍박 받던 동족이 해방되리라는 기대감에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진수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진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중국 내의 몽골족이 해방될 기회는 지금이 최적이었다.
‘용의 사자라고 거짓말하고 기대하게 만들었으니까 네이멍구자치구 해방은 내가 책임지고 도와야지.’
그가 자금성을 폭파시키고 몽골족에게 먼저 온 이유였다.
“갑시다. 네이멍구자치구를 독립된 나라로 만들러.”
통갈락의 집 문이 열리고 진수가 앞장서서 걸어 나왔다.
그 뒤로 통갈락과 바타르, 자야가 나온다.
이어 도시 골목골목으로 풍채가 좋은 몽골족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위풍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 * *
‘네이멍구자치구에 용이 나타났다.’
중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들.
그 중에서 네이멍구자치구의 소식은 굉장히 빠르게 퍼져나갔다.
중국의 북쪽의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구역이면서 몽골족의 행보가 다른 소수민족들에겐 상당히 큰 의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금성이 파괴된 직후 한동안 잠자코 있던 몽골족.
그들을 억제하고 있었다 알려진 임설의 비보를 시작으로 거침없이 움직였다.
네이멍구자치구의 츠펑시부터 후허하오터시, 시린궈러맹 등등 대부분의 지역에서 정부 소속의 인물들을 몰아냈다.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의 중심에 용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워낙 용에 대한 민간신앙을 가지고 있던 몽골족이었기에 급격한 변화의 이유로 삼기 꽤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이제 우하이시만 해결하면 완전히 독립이 되겠네요.”
소문이 무성한 네이멍구자치구의 용, 진수가 통갈락을 보며 말했다.
그들은 요 며칠 동안 굉장히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제 남은 것은 네이멍구자치구 남서쪽에 위치한 우하이시뿐.
닝샤후이족자치구와 가까이 있는 도시라 큰 어려움은 없을 듯했다.
-휘우웅- 쾅!
그렇게 우하이시를 향해 가던 진수와 몽골족 앞에 마치 유성 같은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커다란 충돌음과 함께 모래먼지가 피어올랐다.
“다들 뒤로 물러서요.”
자욱한 먼지구름이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진수가 뒤따르던 몽골족 사람들에게 말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있었으니까.
-후우욱!
진수는 바람생성기를 꺼내 먼지를 걷어냈다.
“야, 니가 그 용인가 뭔가 하는 놈이지?”
모래먼지 사이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오연한 눈빛으로 진수에게 묻는다.
“....”
진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새끼.... 그래, 자기 입으로 용이네 뭐네 하기는 쪽팔리겠지. 난 WP클랜의 풍극안이다.”
“뭐? WP클랜...?”
풍극안의 말에 진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WP클랜이라는 이름은 중국 정부나 운명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무거웠으니까.
“WP클랜이 중국 내전에 개입하는 거냐?”
“크흐흐....”
진수의 물음에 풍극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A vs S
“니가 말하는 우리 쪽이라는 건, WP클랜을 말하는 거야? 아니면 중국 정부의 편에 서라는 거야?”
진수는 풍극안에게 되물었다.
우리 쪽이라는 표현은 너무 두루뭉술했으니까.
그런 질문이 꽤나 긍정적으로 느껴졌는지 풍극안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뭐... 우선은 나, 풍극안을 따르라는 거지. 그 다음엔 WP클랜으로 들어올 수도 있고....”
‘이놈 봐라? 명확하게 얘기를 하질 않네?’
풍극안은 계속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WP클랜이 중국 내전에 개입하는 건가?”
“크흐흐....”
진수의 물음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으로 답한다.
“그나저나, 너 어디 출신이야? 몽골족 중에서 S급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는데. 생긴 것도 그쪽으로 보이지는 않고.”
동양인의 외모.
유창한 중국어.
풍극안은 진수를 중국인 출신 S급 헌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 A급인데?”
그 어떤 것도 맞지 않는 추측이었지만.
“뭐? 미친, 그럴 리가 없는데...? 뭐 일부러 힘을 숨기고 있는 놈인가?”
S급 헌터의 감각은 몹시 날카롭다.
특히 굉장히 많은 경험과 생사를 오가는 전투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전투 능력에 대한 가늠은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
풍극안이 느끼기에 진수의 수준은 A급은 아득히 뛰어넘은 정도였다.
“야, 너 따라와 봐.”
그는 이미 진수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자리를 옮긴다라.... 날 보자마자 영입 제안을 했다는 건 어느 정도 내 능력을 파악했다는 거겠지. 그럼 힘으로 찍어 누르기 좀 부담스러울 거야. 그럼 날 데려가려는 곳에 일행이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
풍극안이 진수를 살필 때 진수도 마찬가지로 풍극안을 관찰했다.
전투 헌터로 활동한 기간이 아주 길지는 않지만 그동안 만티코어나 노쇠한 화이트 드래곤 등 강적들을 상대해봤기에 안목은 충분했다.
그렇기에 WP클랜 소속이라고 하는 이 헌터에 대한 가늠도 이미 끝이 났다.
“이동하자니까? 여기 있는 놈들 다 죽는 꼴 보기 싫으면.”
진수가 뜸을 들이자 풍극안이 재촉한다.
“통갈락씨.”
“예, 김진수님.”
“제가 없어도 우하이시는 처리하실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덕분에 저희 아이들은 거의 피해가 없었으니까요.”
네이멍구자치구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진수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
강적을 해치우고 쉬는 틈 없이 몽골족의 전력이 감소하지 않게 동분서주 했으니까.
그들에게 이제 진수는 신앙의 대상이었던 용보다 더욱 중요한 존재가 됐다.
“그럼 저는 자리를 비울 테니 마무리를 부탁할게요.”
“맡겨만 주십시오.”
진수는 통갈락에게 말을 건넨 뒤 풍극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됐어.”
‘어디 무슨 속셈인지 보자.’
진수와 풍극안 두 사람은 남쪽으로 이동했다.
‘확실히 S급이 다르긴 다르네.’
그들은 순식간에 수십 킬로미터를 주파했다.
일부러 [빙의]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흡이 조금씩 가빠짐을 느꼈다.
-[새초미 무리]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힘 +2, 민첩 +4, 체력 +2, 내구 +1, 마력 +3
숨 차는 게 겉으로 드러나려고 할 즈음, 성장 보상으로 체력이 회복되었다.
덕분에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풍극안보다 살짝살짝씩 더 앞서나갈 수 있었다.
마치 이 정도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이놈 봐라...?’
그 모습에 풍극안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동력은 자신에게 꽤 자부심 있는 능력이었는데 진수가 더 우위에 있다는 것처럼 나왔으니까.
-까득
풍극안은 작게 이를 갈더니 조금 무리해서 속도를 냈다.
그렇게 서로 보이지 않는 견제를 하며 빠르게 이동했다.
-턱
“후, 나 왔어.”
네이멍구자치구를 벗어나는 위치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풍극안은 그들 앞에 멈춰서며 말했다.
아주 작게 한숨 비슷한 깊은 숨소리가 함께 나왔다.
풍극안 자신은 전혀 티를 안 냈다고 생각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들었다.
“저기가 그 몽골족네 용이야? 확실히 보통은 아니네.”
기다리고 있던 두 명 중 여성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진수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이내 눈에 이채가 돌았다.
‘중국인으로 보이는 헌터가 세 명.... WP클랜이 진짜 개입을 한 건가? 아니면 그 중에 중국 출신들만 나온 걸 수도 있겠어.’
WP클랜에 소속된 중국인 헌터가 딱 세 명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이 자리에 그 셋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근데 이 친구 우리랑 같이 움직이기로 한 거 맞아? 영 분위기가....”
여성이 진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수는 경계하는 표정을 전혀 숨기지 않고 있었다.
“이 자식 여기까지 순순히 따라와 놓고 왜 또 튕겨?”
풍극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풍극안 너 또 혼자 넘겨짚은 거 아니야? 넌 항상 상황을 너 좋을 대로 해석하잖아.”
여성이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한 사내도 풍극안을 보며 고개를 가볍게 가로젓는다.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지.”
진수가 입을 열자 두 사람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 됐다.
풍극안은 혼자 얼굴이 붉어졌다.
“너희 쪽으로 붙으라는 게 WP클랜에 들어오라는 거냐고.”
“흥, 너 아직 A급이라면서?”
풍극안이 코웃음을 치며 답한다.
하지만 진수의 눈은 다른 두 사람의 표정을 빠르게 훑었다.
‘얼굴들을 보아하니 WP클랜에서 이 셋만 온 거 같네.’
여성은 풍극안의 반응을 살피며 재밌어했다.
남성은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건 풍극안을 포함한 셋이 WP클랜에 진수를 가입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시사해주었다.
“내가 A급이라 WP클랜에 가입 못 시키는 거 아니잖아? 그냥 너희가 중국 내전에 끼어들려고 하는 거고, 날 써먹으려고 하는 것뿐이겠지.”
“이, 이게...?”
정곡을 찔린 듯 반박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오히려 내가 제안을 할게. 내 밑으로 들어와라. 너, 조금 전에 봐서 알겠지만 이미 몽골족이 나를 따르고 있고, 반정부 세력과도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너희가 정부에 큰 연이 있는 게 아니라면 오히려 나를 돕는 게 이득이 될 수 있다니까?”
“그 말은... 여기서 널 처리하고 목을 가져가면 정부한테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거네.”
진수의 말을 들은 여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찬가지로 풍극안도 상당히 반가운 소식을 들은 표정이었다.
“하... 얘네들이 매를 버네.”
대놓고 진수에게 살기를 드러내는 둘의 모습에 진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느끼기에 풍극안과 여성 헌터 모두 S급이라고 하지만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정도였으니까.
“그래, 어디 약육강식의 법칙대로 해보자고. 거기 당신도 덤빌 거야?”
진수가 대화에 별로 참여하지 않고 있는 나머지 한 사내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저 묘족놈. 이런 때에도 발을 빼네.”
풍극안이 허리띠를 푸르며 투덜거렸다.
그의 허리띠는 마력이 스며드니 이내 낭창낭창한 검으로 변했다.
여성 또한 마력을 운용하며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건방진 A급 헌터 새끼. 건방 떤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WP클랜원 둘이 진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S급,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렇게 엄청난 수준은 아니야.’
싸움이 시작된 이 시점에서도 힘을 아끼고 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진수가 파악한 저들의 힘이 전부일 것이다.
진수는 씨익 웃으며 전투 준비를 했다.
-스슥
[차원의 틈]을 연다.
드워프제 마력회로가 적용된 방어구.
뱀파이어 로드의 망토.
바람생성기.
묵빛의 전기톱까지.
-위이이잉!
“어...?”
진수의 기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어 [빙의]를 통해 화이트 드래곤 흰둥이의 힘을 빌려온다.
[드래곤 피어]가 쏟아지며 적들의 심장을 옥죄었다.
-뿌우우!
곧바로 연달아 터지는 [전장의 뿔나팔]까지.
인장반지의 힘을 받아 두 헌터의 힘을 약화시키고 진수는 더 강해졌다.
“자, 잠깐.... 이거 뭔가....”
풍극안이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지만 물은 이미 엎어졌다.
* * *
중국 묘족 출신의 S급 헌터 원화는 놀라운 광경을 마주했다.
A급 헌터라는 사내가 S급 헌터인 풍극안과 왕사영을 꺾은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갓 진급한 S급 정도라고 느껴졌다.
그런데 완전히 싸울 준비를 갖추고 나니 수준이 급격히 올라갔다.
‘마치 수십의 동료들이랑 같이 싸우는 것 같았어....’
손바닥에서 나온 초록색 마력이나 방어구의 마력 회로가 밝게 불타며 능력을 향상시켜주는 것은 상식선에서 이해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몸 위에 덧씌워진 검은 오러가 아주 기이했다.
힘이 부족할 때면 소 인간의 형상으로, 기민해야 할 땐 원숭이로, 어떨 땐 용이 되어 보조했다.
손발이 잘 맞는 짝을 수없이 많이 두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자, 이제 나랑 약속을 좀 하자고.”
A급 헌터 한 명과 S급 헌터 둘의 싸움.
결과는 놀랍게도 A급 헌터의 승리였다.
불구가 되지 않았다 뿐이지 아주 철저하게 짓밟아버렸다.
물론 압승은 아니었지만 부상을 당한 부위는 이미 다 회복이 되었다.
“둘 다 경험이 많으니까.... [영혼의 약속] 알지? 내 밑으로 들어오는 걸 조건으로 기술을 쓸 거야. 대우는 아주 잘 해줄 테니까 너무 아깝게 생각하지 마.”
진수는 WP클랜 소속의 두 사람을 무릎 꿇린 뒤 [영혼의 약속]을 사용했다.
훗날 로켓몬스터가 중국에 진출했을 때 자리를 주기로 하며 부하로 삼았다.
“내가 둘 다 목을 따버릴 수도 있었는데 살려줬잖아. 그러니까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다고. 알겠지?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열심히들 해.”
상당한 궤변이었지만 그가 두 사람을 봐주면서 상대한 것도 맞았다.
‘대단한 실력이었어. 나중에 WP클랜에 주목할 만한 헌터가 있다고 보고해야지.’
원화는 속으로 크게 감탄했다.
WP클랜 내에서도 진수를 1:1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으니까.
“자, 다 됐다. 이제 허튼 짓 하다가는 바로 헌터 인생 조지는 거야. 대신 열심히 하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줄 거고. 저기 중원에 정부나 운명파가 차지하고 있는 곳 털어서 먹으면 그건 내가 눈감아줄게.”
어차피 풍극안과 왕사영이 중국 정부에 충성심이 있거나 애국심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번 내전에서 정부의 편을 들어주면 정부가 우세해질 것이고 그 대가로 한 몫 단단히 챙기려던 것이다.
진수의 말대로 정부의 영역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들로서도 손해는 아니었다.
“그래, 눈빛 좋네. 빨리 중원 쪽으로 가서 재미들 봐봐.”
[영혼의 약속]으로 인해 진수를 배신하면 특기와 기술들이 날아가게 생긴 둘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적어도 정부가 운영하던 성 하나는 차지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흐흐흐. 저놈이 덤벼줘서 졸지에 S급 헌터 부하 두 명이 생겼네. 단순히 S급 헌터가 아니라 WP클랜 소속으로. 이건 진짜 큰 소득이다.’
WP클랜은 세계 평화에 기여하겠다는 명목으로 활동하는 집단이다 보니 정보 측면에서도 얻을 게 많았다.
풍극안과 왕사영을 거둔 덕분에 앞으로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되리라 예상됐다.
‘몽골족 쪽도 거의 정리가 된 것 같고... 이제 운명파만 털면 얼추 해결이 되겠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운명파는 자신들의 발원지인 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쪽에서 여전히 건재하다고 했다.
운명파와 블루 오아시스.
긴 여정의 마무리를 지을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유물의 주인
-서걱!
날카로운 도끼날이 살갗을 쩌억 갈랐다.
하지만 순식간에 아물어버리는 상처.
날붙이는 큰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으... 이거 느낌이 괴상하네.”
진수가 소름 돋아 하면서 말했다.
그가 도끼질을 한 대상은... 마찬가지로 진수였다.
완전히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캬악!”
그러나 행동하는 모습이 달랐다.
공격을 당한 쪽은 마치 짐승처럼 굴었다.
어떻게 보면 몬스터 같기도 했다.
-퍽!
이번엔 목을 쳐버렸다.
몸통과 머리가 나뉘어 바닥을 구른다.
“켁!”
비명을 지를지언정 죽지는 않았다.
머리에서 분신이 나와 머리를 들고 몸에 다시 붙였다.
기시감이 드는 광경이었다.
‘이야.... 날 상대하던 놈들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머리를 잘라도 살아있고 분신을 계속해서 뽑아낸다.
몸을 반쪽 내면 그 안에서 새로 튀어나온다.
상처는 금방 회복되고 힘까지 좋으니 적으로 만나면 몹시 골치가 아플 것이다.
실제 진수는 온갖 장비를 착용하고 [빙의]로 전이자들의 힘까지 쓸 수 있으니 훨씬 강하다.
“근데 얘는 왜 고장이 났어? 다른 사람들을 복제하면 멀쩡하게 행동한다던데.”
진수는 눈앞에 보이는 멍청한 진수를 보며 혀를 찼다.
자신과 똑같은 외형을 가지고 금수처럼 구는 모습은 지켜보기 상당히 고역이었다.
-슈슉
[차원의 틈]에 도끼를 집어넣고 양손 망치를 꺼내든다.
[상급 재생력]과 같이 빠른 회복을 하는 상대는 베는 것보다 타격이 효과적이었으니까.
-퍼억! 퍽!
흑우의 힘까지 가져와 후려치니 금방 마무리가 되었다.
역시 자신과 신체 능력이 비슷한 적과 싸울 때는 [빙의]가 답이었다.
-도플갱어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도플갱어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도플갱어면 역시 메타몽이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작명을 끝냈다.
-도플갱어 [메타몽]이 [꾸러기 수비대] 무리에 합류합니다.
-[꾸러기 수비대] 무리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민첩 +2, 마력 +4, 골드 +10
메타몽을 전이시키면서 보상을 받았지만 사실 능력치나 골드 때문에 도플갱어를 처치한 게 아니었다.
-스르륵
진수의 외형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뭉개지더니 이내 창백한 피부를 지닌 모습으로 변했다.
“오오, 로드시여! 원하시는 걸 얻으셨나이까.”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뱀파이어가 그걸 보고 감탄했다.
진수가 변한 것은 그 뱀파이어의 형상과 똑같았다.
[빙의]로 도플갱어 메타몽의 변신 능력을 빌린 것이다.
‘도플갱어처럼 능력치나 특성, 기술 따위를 복제하지는 못 하지만 이것만 해도 충분하지.’
조금 전 진수가 도플갱어를 상대할 때는 [상급 재생력]이나 [마트료시카], [분열] 등의 능력까지 똑같이 복제가 되었다.
덕분에 현재 자신의 생존력이 얼마나 징글징글한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그래서 혹시 [빙의]로 변신 능력을 빌리면 능력 복제도 될까 했는데 아쉽게도 불가능한 듯했다.
그나마 외형 복제는 완벽하게 된다는 게 다행이었다.
‘이것도 [유체화] 같은 종류라서 몬스터 아니면 활용하기 복잡하다 그랬으면 골치 아팠지.’
진수는 운명파로 향하기 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왔다.
유럽, 중국, 러시아 등에 퍼져있는 뱀파이어들에게 변신 능력이 있는 몬스터를 찾으라고 명했고, 블라디보스톡에서 도플갱어를 찾아낸 것이다.
‘맘 같아서는 그냥 운명파에 쳐들어가서 다 때려 부수고 싶지만.... 그랬다간 또 꼬리 자르고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
완전한 마무리를 위해서 만전을 기하고자 했다.
지난번 가면을 쓴 괴한이 싸우면서 운명파가 이미 진수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런 상황에서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놈들의 영역을 돌아다니는 것은 적에게 대비를 하라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꼴.
그래서 변신이 되는 몬스터를 수소문한 것이다.
‘[빙의]로 몬스터의 능력을 빌리는 건 [차원 전이]를 가지고 있는 내 가장 큰 무기니까.’
-스르륵
도플갱어의 변신 능력을 확인한 그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블루 오아시스가 아직도 조금씩 돌아다니고 있다고?”
진수가 뱀파이어에게 물었다.
각지에 퍼져있는 뱀파이어들이 텔레파시를 통해서 블루 오아시스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해왔다.
유럽 국가들, 러시아, 중국, 동남아 나라들 등등 어디에나 블루 오아시스가 소량씩 유통되고 있는 걸 발견했다는 것이다.
“예, 로드시여. 유통하는 자들이 추적당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굉장히 몸을 사리고 있지만 음지에서 계속 퍼지고 있습니다. 효과 좋고 값이 싸서 모든 계층의 인간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이 자식들.... 내전중인데도 여전히 약을 만들고 있다는 말이야? 아니지. 오히려 돈 나갈 일이 많으니까 더 필사적으로 마약을 파는 건가?’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쨌든 상황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이제는 직접 가서 보고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고생했다. 이제 다시 블루 오아시스 흔적들 찾아줘.”
진수는 뱀파이어를 보내고 나서 걸음을 옮겼다.
운명파가 시작되었던 지린성을 향해.
* * *
-고블린 [고돌]이 [공방] 무리와 조우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를 향해 가던 진수의 눈앞에 안내 메시지가 하나 나타났다.
‘아 얘네들이 지금까지 만난 적 없었나?’
최초로 전이를 시켰던 전이자인 고돌이.
처음으로 차원의 축이라는 요소를 찾아냈던 헤파이스토스가 속해있는 공방 무리.
양쪽 다 상당히 초기 전이자들이었지만 실제로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당신의 신탁, ‘싸우지들 말어’의 효과로 [고돌]과 [공방] 무리가 서로 우호적으로 대합니다.
다행히 진수의 종교를 믿는 녀석들이라 서로 반목하지는 않았다.
반목은커녕 단순 동료의 차원을 넘는 교류가 생기기까지 했다.
-드워프의 유물 [그랑조]가 [고돌]이 지닌 마법의 검에 반응합니다.
[공방] 무리가 처음 복원했던 유물이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종의 탑승 로봇 같은 물건이었기에 복원을 시킨 뒤로 움직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요정의 호수에서 얻은 검에 반응을 보였다.
‘뭐야. 저게 자동차 키 같은 거였나?’
상태창의 그림에서 그랑조가 나타나고 이내 고돌이가 마법의 검을 든 채로 탑승했다.
-[공방] 무리가 [고돌]에게 [그랑조]의 소유권을 이양합니다.
-[고돌]의 급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힘 +3, 민첩 +2, 체력 +2, 내구 +2, 마력 +1, [고돌]의 기술 중 하나
드워프의 유물을 얻은 덕인지 고돌이가 급성장을 했다.
진수는 능력치와 함께 예전에 상점에서 사서 보내줬던 [바람의 속삭임] 기술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준 걸 돌려받은 셈이네. 틈틈이 애들한테 좋은 기술이랑 특성들을 보내놔야겠어.’
전이자가 가지고 있던 고유의 능력뿐만 아니라 상점에서 구입한 것도 보상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게 드러났다.
그렇다면 훗날 [용사] 특성이나 [수룡의 숨결], [뇌신의 축복] 같은 것들도 얻게 될 수도 있으리라.
“그나저나, 드워프들도 저쪽 차원이 박살나기 전에 뭔가 중요한 역할을 했었던 건가...?”
차원의 축을 드워프의 유물들이 지키고 있는 경우가 꽤 있었다.
어쩌면 발전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차원의 수호자 같은 일을 하던 녀석들인지도 몰랐다.
마법의 검도 [용사] 특성을 보내준 뒤에야 요정의 호수에서 뽑을 수 있던 것이었으니 터무니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스르륵
[빙의]로 고돌이의 힘을 빌려본다.
확실히 그랑조를 얻기 전보다 전반적인 능력이 향상된 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엄청난 차이는 아니네. 탑승 로봇에 탄 상태로 불러낼 순 없는 건가?’
다음에는 그랑조를 불러내봤다.
하지만 고돌이 때보다 못한 결과였다.
내구도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것은 느껴졌지만 조종석이 비어있어서 그런지 힘이나 마력 같은 출력 면에서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으니까.
“아, 이거 둘 다 동시에 [빙의]로 불러올 수 있는 방법은 없나?”
그렇게 된다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사용해본 바로 [빙의]는 한 번에 한 대상에게밖에 적용이 안 됐다.
“으음.... 아쉽지만 일단 넘어가자. 언젠가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진수는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운명파가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다시 움직였다.
* * *
“어우, 좋~다! 이 좋은 걸 형님들은 왜 못 하게 막는 건지 모르겠네.”
어둠이 깔린 밤거리에 사내 한 명이 살짝 비틀거리며 걷는다.
두 눈에는 초점이 조금 풀린 상태다.
무언가에 취한 듯했다.
향긋한 술의 단내일까?
그의 몸에서는 달달한 향이 퍼져 나왔다.
“어디 보자... 여기로 갈까나.”
흔들리는 눈으로 거리를 훑던 사내는 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느릿느릿 걷던 걸음걸이에 이내 힘이 들어갔다.
“누구야? 내가 누군지 알고 쫓아오는 거냐?”
얼큰하게 취한 것처럼 보이던 그의 눈빛이 살벌하게 돌변했다.
아무도 없는 골목이지만 온몸에 기세를 끌어올리며 거세게 호통을 친다.
“누구긴. 운명파 조무래기 아니야?”
달빛이 만든 짙은 그림자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싸늘하지만 왠지 모르게 위압감이 느껴지는 음성이다.
사내는 생각보다 위험하다고 느꼈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조, 조무래기라니. 나한테 해를 끼치면 운명파에서 가만히 두지 않을 걸? 우리 형님들께서는 나랑 차원이 다른 분들이시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아보지만 딱히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운명파에서 알게 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어둠 속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알게 된다면 말이야.”
그림자에서 사람이 불쑥 나왔다.
온몸에 검은 천을 두르고 망토를 입은 모습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운명파의 남자와 똑같이 생겼다.
“그래, 형님들께서 아끼시는 니 이름이 뭐야?”
“허, 헉...!”
난데없이 자신과 똑같이 생긴 자가 나타나자 사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놈... 모, 몬스터구나!”
그는 어둠 속에서 나타난 자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아, 이러면 곤란한데.”
검은 차림의 사내가 순식간에 상대를 무력화시킨 뒤 목을 꺾어버렸다.
“이렇게 나오면 내가 이름부터 신상정보를 다 찾아야 되잖아.”
사내로 변신한 진수는 짜증난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이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내의 시체가 사라지고 눈앞에 안내 메시지가 나타났으니까.
-계약자 [장명명] 차원 전이 성공.
‘어...? 계약자라고? 확실히 그냥 조무래기라고 하기엔 마력 수준이 상당해 보이긴 했지만....’
진수가 그를 타겟으로 정한 이유는 운명파 소속이지만 간부급은 아닌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침투해 정보 수집을 하기 용이한 정도의 직위일 듯했으니까.
그런데 뜬금없이 계약자라면서 전이가 되어버렸다.
‘이름을 알아낼 필요가 없는 건 좋지만....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진수는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같아...!
“어이, 명명이! 어제 퍼런 거 좀 챙겨가더니 어떻게 멀쩡하게 나왔네?”
사람 좋아 보이는 사내가 호탕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이놈, 멀쩡한 게 아니었구만! 크흐흐. 형님들한테 안 걸리게 조심하라고.”
-팡 팡
그는 조용히 주변 눈치를 살피고 있던 이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아, 아아. 예. 하하.”
“조금씩 맛보는 건 괜찮아도 우리 일에 지장 줄 정도로 빨면... 모가지 날아가니까.”
사내가 제법 친근하게 말을 붙이고 다른 한 쪽은 어색한 단답을 몇 차례 반복했다.
그러고 나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출근을 하는 시간인 듯 보였다.
보통의 회사처럼 다들 출근 아침의 피곤함을 토로하며 떠들어댔다.
“명명이, 너 얼마 전에 균열 작업 하고 왔지? 오늘은 균열 인원 경호 다녀와라.”
처음에 말을 걸었던 남성이 작업을 지시했다.
아무래도 이들 중에서 중간 관리자급의 인물인 듯했다.
“뭐 하는지는 알지?”
“그, 그럼요. 하하.”
이마 위로 흐르는 땀.
떨리는 목소리.
누가 봐도 전혀 모르는 것 같은 대답이었다.
“짜식이,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아주 좋아. 그러니까 어제 내가 응? 약도 좀 챙겨준 거지. 임마, 앞으로 이 형님 줄로 잘 서란 말이야. 중원에서 온 지 이제 몇 개월밖에 안 됐는데 뭘 알겠냐. 크크. 말이 경호지 사실상 그냥 짐 옮기는 거야, 짐. 인솔자 따라가서 적당히 시키는 것만 하고 오면 돼.”
-툭 툭
사내가 다시 어깨를 두드려줬다.
‘후, 이놈으로 골라서 변신하길 잘 했네.’
어젯밤 계약자 장명명을 전이시킨 뒤 도플갱어의 능력을 사용한 진수.
장명명은 그가 노린 대로 적절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좋은 인물이었다.
“자, 오늘도 빡세게들 일해보자고!”
사내는 진수를 한 무리에 배정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을 나선 그들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북서쪽에 있는 산악지대로 향했다.
‘얘네들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이어 펼쳐진 광경에 진수는 눈살이 찌푸려졌다.
넓게 퍼진 사람들이 상아빛 막대기를 하나씩 지급 받더니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범위한 곳에서 마력이 휘몰아친다.
이윽고 하늘에 자그마한 점 같은 것들이 나타났다.
‘여기에 왜 이렇게 균열을 만들어...?’
인공 균열이었다.
그들이 받은 막대기는 사람의 뼈로 만든 도구.
균열을 일으키는 데에 마력과 함께 상당한 생명력이 소진되는 듯했다.
-털썩
한 차례 마력을 쏟아낸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리가 풀리거나 기절했다.
‘기절도 기절인데.... 마석증이 생기네...?’
운명파가 균열을 모종의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인공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막대기에 마력을 불어넣던 몇몇 인물들에게서 마석증 반점이 생겨나는 모습은 그의 시선을 잡아끌기 충분했다.
손등이나 목처럼 노출된 부위에 바로 마석증이 나타났는데, 옷 아래에 감춰진 것까지 생각해보면 운명파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마석증을 앓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장명명이란 놈도 전이가 됐던 거구나. 운명파에 계약자가 엄청나게 많아지고 있겠네.’
진수는 어젯밤에 예상치 못하게 전이시킨 일이 떠올랐다.
‘이렇게 강제로 마석증이 생길 수도 있는 거라면... 나도 혹시 어렸을 때 고아원에서 뭘 당했던 건가...?’
뉴트럴바이오에서는 고아원 아이들을 데리고 기술과 특성을 만드는 연구를 했다.
운명파는 구성원들에게 생명력을 뽑아 균열을 일으키고 마석증에 걸리게 한다.
진수도 어렸을 때 고아원에서 무언가 당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있던 고아원은 균열 때문에 사라졌고 말이지.’
이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에 그저 추측만 해볼 뿐이다.
“자~ 경호하러 온 놈들! 저 쓰러진 자식들 챙겨라! 돌아가자!”
진수가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작업이 끝났다.
인솔자는 경호 인력들에게 기절한 인원을 옮기라 명령했다.
“예, 알겠습니다!”
균열 작업을 하는 사람보다 경호 인력이 더 적었기에 한 사람당 최소 두 명은 챙겨야했다.
진수는 적극적으로 나서 어깨 위로 세 사람을 얹고 움직였다.
“호오, 열심히 하네.”
일부러 인솔자의 앞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니 진수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하, 형님들께서 번거로우실 일 없게 해야죠!”
제법 싹싹한 태도에 인솔자의 태도가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진수는 그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저기, 그런데요.... 여기에 균열을 왜 일으키는 거예요?”
움직이면서 가볍게 잡담한다는 정도로 질문을 던진다.
“균열 작업? 뭐, 블루 오아시스 재료도 하고... 마석도 얻고 그런다고 하더라.”
“블루 오아시스 재료요? 그러려면 몬스터를 잡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균열 작업을 위해 온 인원은 균열 징조가 나타나는 단계에서 모두 철수하고 있다.
몬스터를 처치하는 역할까지는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뭐, 나중에 몹들 잡는 팀이 올 수도 있는 거고.... 형님들이 까라면 까는 거지. 자식아, 너나 나 정도 되는 사람들은 괜히 궁금해 하지 말고 시키는 것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아, 예. 하하.”
‘블루 오아시스 재료를 얻겠다고 균열을 일으켜? 이거 아주 미친놈들인가....’
진수는 뉴트럴바이오 때 겪어봐서 안다.
균열을 무차별적으로 일으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대규모 균열로 인해 얼마나 많은 피해가 생기는지.
그런데 그걸 그저 마약 재료를 위해서 저지른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게다가 참여하는 사람들을 마석증에 밀어 넣기까지.
여러모로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저 그런데 균열 작업에 참여하고 생긴 반점은....”
인솔자에게 마석증에 관해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는 의외로 가벼운 태도로 답했다.
“아아, 그거?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치료 받으면 돼. 우리 운명파랑 계약된 병원 있거든. 왜, 너도 벌써 반점 생겼어?”
“예, 얼마 전에 생겼더라고요.”
“그러면 여기로 가봐. 운명파에서 왔다고 하면 아마 알아서 처리해줄 거야.”
인솔자가 한 병원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래도 마석정제주사 처치를 지원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수는 그 주소를 잘 적어두었다.
* * *
“흐으으...!”
한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소리를 냈다.
얼굴은 상기되어 있는데 몸은 추운 듯 보이는 상반된 반응이다.
‘마석정제주사 후유증은 아무리 맞아도 적응이 안 되지.’
그 모습을 훔쳐보던 진수는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십 수 년 동안 마석정제주사 처치를 받아왔기에 잘 알고 있었다.
‘뭐, 저 사람이 후유증 겪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마석정제주사를 맞은 사람의 반점을 유의 깊게 주시한다.
커져있던 반점이 줄어들다가 일시적으로 특정한 문양을 만들었다.
여러 개의 원형으로 나뉘어 마치 표범 무늬 같은 형태가 된다.
이후 빠르게 반점이 작아졌다.
‘나나 민우혁의 문양이랑 같아...!’
병원의 벽 너머로 [유체화]와 [투명화]를 써서 침투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균열을 일으키며 생긴 마석증 반점의 문양을 확인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주사를 맞은 사람들 모두 동일한 모양을 만들었어.’
러시아에서 봤던 디에고의 경우에는 진수와 전혀 다른 문양이었다.
그는 오세라는 존재와 계약을 했기에 그에 맞는 형태를 만든 것이다.
계약한 존재에 따라 다른 문양을 만드는 마석증 반점.
‘그렇다면 균열을 일으킨 사람들이랑 내가 다 같은 존재와 계약을 했다는 건가?’
운명파 소속의 인물들은 대부분 마석증을 앓고 있다.
그렇기에 병원에는 거의 매일 마석정제주사 처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진수가 본 것이 세 명.
그리고 그 셋이 모두 동일한 마석증 반점 문양을 가지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래, 차라리 잘 됐어. 전혀 단서를 못 찾고 있는 것보다 뭐라도 가닥을 잡은 거니까. 운명파 놈들을 털다 보면 또 새로운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겠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려 했지만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바로 해결할 수 있는 걸 우선으로 처리하는 것.
괜한 고민으로 시간을 버리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나았다.
‘내가 다음으로 해결해야 하는 건... 블루 오아시스다.’
-스윽
진수는 [유체화]로 병원의 벽 너머로 사라졌다.
* * *
“어이! 거기 바닥에 피 안 떨어지게 조심해! 임마, 다리 한 쪽 끌차 밖으로 삐져나왔잖아!”
“빨리 빨리 움직여! 또 시체 한 차 갖고 오는 거 안 보이냐!”
“뭐 얼마나 죽인 거야? 망할, 오늘은 좀 편히 가나 했더니....”
고성이 오가는 장내.
고약한 악취가 코를 찌른다.
사람들은 호통을 치거나 들으면서 잽싸게 움직였다.
한쪽에서는 트럭에서 무언가를 꺼내 끌차에 싣고 한쪽에서는 절단기를 쉴 새 없이 작동시키고 있다.
‘어디선가 몬스터를 엄청 때려잡고 있긴 한가보네.’
진수는 다시 장명명의 모습을 한 채로 운명파의 작업장에 들어왔다.
그가 찾아낸 곳은 수많은 트럭이 오가는 창고 같은 곳.
무언가 꾸준히 운반되고 있다는 건 블루 오아시스와 연관이 되어있으리란 생각이었다.
‘블루 오아시스를 몬스터로 만드니까 분명 여기서 연결점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작업장 안에서는 분주히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트럭에 온갖 몬스터의 사체를 담아온다.
이후 사람들이 끌차에 싣고 절단기로 가져간다.
절단기에서 마석은 마석대로, 신체부위는 신체부위대로 분리를 했다.
“어, 장명명. 오늘 균열 경호 작업 다녀와서 일 끝나지 않았어?”
장명명의 모습을 한 채로 구경하고 있는 진수에게 누가 말을 걸었다.
그를 익히 알고 있는 듯한 말투.
“아, 안녕하세요. 오늘 일이 빨리 끝나기도 했고... 이런 데에서 열심히 하면 콩고물을 좀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흐흐흐.”
블루 오아시스에 취해 밤거리를 비틀거리던 녀석이다.
은근히 마약에 대한 관심을 내비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물이었다.
“크크, 자식... 몇 번 맛보더니 정신을 못 차리네. 그래, 오늘 갑자기 트럭들이 몰아서 와서 일손도 부족한데 공장으로 가는 거 좀 도와라.”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 헤헤.”
진수는 비굴한 웃음을 지어준 뒤 그의 지시를 들었다.
그의 말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기에 그리 어색한 연기는 아니었다.
몬스터 사체를 가지고 가는 공장이 뭘 만드는 공장인지는 뻔했으니까.
“자, 여기 정리한 것들 가지고 출발해.”
얼마 지나지 않아 몬스터의 사체가 차곡차곡 담긴 공간압축가방을 전해 받았다.
그를 포함해 네 명의 사람들이 양손에 짐을 들었다.
이미 수차례 공장으로 다녀와 봤는지 가방을 받은 사람들은 지체 없이 출발했다.
덕분에 헤맬 필요 없이 곧장 공장으로 갈 수 있었다.
공장의 위치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북쪽, 큰 도로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 이런... 진가구한테 연락을 좀 해봐야겠는데.’
공장에 도착한 진수는 반정부 세력의 간부인 진가구의 연락처를 찾아야 했다.
일단 여기부터 정리를 해야겠네
연변조선족자치주 도시 바깥쪽에 세워진 커다란 공장.
굉장히 수상한 파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숨길 생각도 없는지 아주 요란하게 가동되고 있었다.
공장을 찾겠다고 도플갱어까지 잡은 진수의 노력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건물이 깨끗한 걸 보니까 지어진지 얼마 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장명명의 모습을 한 채로 양손엔 공간압축가방을 든 진수.
그는 앞서 가는 사람들을 쫓으며 눈으로는 재빨리 공장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외벽부터 안쪽의 설비까지 모두 상당히 깨끗했다.
커다란 철제 문이 열리는데 경첩의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몬스터 사체 가공이 블루 오아시스 제조보다 더 손이 많이 가나?’
커다란 공장으로 함께 온 일행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가방을 들고 옮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도시 내부에 몬스터 사체를 가공하는 장소가 여러 군데 있다는 의미였다.
“자~ 저쪽에다 가방 다 던져놓고 가면 된다!”
“이야, 역시 몬스터 옮기는 작업이 제일 편하다니까!”
“내일도 똑같이 배정 받았으면 좋겠네.”
“넌 균열 작업 들어간 지 좀 됐으니까 곧 균열 작업할 거 같은데?”
공간압축가방을 들고 온 사람들이 잡담을 하면서 한 구석에 짐을 던지고 갔다.
총 네 명이 왔다가 공장을 떠난 것은 셋뿐이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 말고도 왔다 갔다 하는 인원이 워낙 많았으니까.
-스슥
[유체화]를 사용해 공장 내부로 들어온 진수.
바깥에서는 다 보이지 않는 시설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엄청난 양의 블루 오아시스들.
공정이 완료되어 한 곳으로 쏟아지고 있는데 규모가 보통이 아니었다.
필히 공장을 운용하고 있는 인원도 엄청날 것이라 예상이 가능했다.
‘아, 이런... 진가구한테 연락을 좀 해봐야겠는데.’
처음에는 자금성의 때처럼 [드래곤 브레스]로 날려버리면 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없애기에는 여건이 영 마땅치 않았다.
지하나 내부에 숨어서 마력을 모을 공간도 없었고, 공장 곳곳에 공격에 대한 방비가 잘 되어 있었다.
온갖 설비들에 새겨진 방어 주술진이나 공격형 기술 사용을 감지하는 마력 회로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키약트르나 헤파이스토스 같은 애들한테 받은 지식이 없었으면 멋모르고 [드래곤 브레스] 시전 했다가 역으로 털릴 뻔 했네.’
범위 기술로 공장을 한 번에 날릴 수 없다.
그렇다면 혼자 힘으로 블루 오아시스 제조에 관여하고 있는 이들을 박멸하긴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진수가 [분열]을 사용한다고 해도 분명 빠져나가는 인원이 있을 테니까.
‘여기에 있는 반정부 세력의 힘을 빌려야겠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비롯한 지린시 전반에서 반정부 세력은 힘을 제대로 못 내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 정부에게 핍박 받는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이니 분명히 반정부 세력은 존재할 것이다.
진가구의 경우에는 진수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다.
분명히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게 이득이라는 걸 알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까 여기에 있는 자료들을 좀 뒤져보자. 혹시 다른 곳에 또 공장이나 생산 시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예전에는 지린성의 서쪽에 있는 창춘시에서 공장을 운영했었다.
진수가 태워버리기 전까지는.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다시 공장을 세웠지만 여기가 전부가 아니라면 일이 복잡해질 것이다.
-스르륵
[유체화]로 벽들을 통과해 공장 내부를 돌아다닌다.
‘오, 여기라면 자료가 좀 있겠네.’
그가 발견한 것은 사무실이었다.
컴퓨터들과 온갖 서류들이 있는 곳.
아무래도 블루 오아시스 생산과 관련된 이런저런 자료가 있을 듯했다.
다행히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바로 서류들을 확인해볼 수 있었다.
“음... 역시 공장이 세워진지 얼마 안 됐구나.”
서류들에서 연변공장생산일지를 찾았다.
일지에 기록이 시작된 게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생산량은 처음에는 소량이더니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왜 이렇게 생산을 늘린 거지? 다른 것들도 찾아봐야겠다.’
이번엔 컴퓨터 쪽으로 눈을 돌렸다.
가장 상석으로 보이는 곳에 있는 컴퓨터를 켜보니 비밀번호가 걸려있다.
진수는 아쉽지만 포기하려다 모니터 아래에 붙어있는 메모지를 발견했다.
[pw : q1w2e3r4!]
[명필] 특성의 능력인지, 삐뚤빼뚤한 필체에서 무신경한 중년 남성의 느낌이 든다.
이 자리의 주인인 것 같았다.
“에이, 그래도 설마 이런 걸 중요한 컴퓨터 비밀번호로 쓸까?”
진수는 반신반의하면서 비밀번호를 입력해봤다.
기다렸다는 듯이 잠금이 해제된다.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안의 정보를 확인해보았다.
‘아.... 이곳저곳에서 소규모로 조금씩 만들다가 아예 여기로 집중을 한 거구나.’
몬스터 사체를 가공하고 녹여내어 마약으로 만드는 공정을 처리해야 한다.
상당히 복잡한 과정이기 때문에 비밀리에 제조하면 효율이 영 좋지 않은 듯했다.
때문에 제대로 된 설비가 있는 곳에서 본격적으로 생산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한 것이다.
운명파가 중국 정부와 결탁하고 마약 제조를 숨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에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대규모 공장을 세우고 다른 곳에서는 블루 오아시스를 만들지 않는 것 같았다.
“나한테는 아주 잘 된 일이지. 여기만 털면 되니까.”
진수는 희소식에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이어 컴퓨터에 있는 자료들을 더 찾아봤다.
그 중 유통이 된 지역들을 정리해놓은 문서를 찾을 수 있었다.
‘러시아, 유럽, 중동, 인도... 아프리카에,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뿌렸다고? 얼씨구, 호주랑 뉴질랜드에도 보냈네. 이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 않나? 배송비가 감당이 안 될 텐데....’
게이트 사태 전후로 대륙간의 교류가 굉장히 줄어들었다.
부산 앞바다에서 진수가 경험한 것처럼, 바다에는 해양과 공중 몬스터들이 들끓는다.
높은 등급의 헌터들이 싸우기에는 제한이 많은 환경이라서 몬스터 토벌도 쉽지가 않았다.
따라서 바다를 건너 배송을 하기 위해서는 큰 비용과 인력이 들어간다.
그것도 아주 고급 인력이.
미국에서 헌터계의 슈퍼맨으로 불리는 피터 켄트 같은, 비행이 가능하면서 전투 능력까지 지닌 각성자의 힘을 빌려야 하니까.
“이렇게까지 해서 마약을 퍼트린다고...? 나중에 미국에 따로 공장을 세울 생각이었나....”
보통의 사람인 진수 입장에서는 마약상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블루 오아시스를 만드는 시설을 파괴하고 운명파를 없애는 것뿐.
‘그러려면 이제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는 반정부 세력을 찾아가봐야겠지.’
충분히 정보를 수집한 그는 조용히 공장을 빠져나갔다.
* * *
-펑!
“저쪽에 고블린 잡아!”
“힐러 마력 다 떨어졌어요?”
“비행 몬스터도 나왔어! 공중 조심!”
균열의 징조도 보이지 않는데 몬스터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걸 막아서고 있는 다수의 헌터들.
진수는 진가구를 통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반정부 세력과 연락이 닿았다.
그쪽에서 찾아오라는 곳으로 왔더니 이 난리통인 것이다.
‘일단 여기부터 정리를 해야겠네.’
-스윽
[빙의]로 흰둥이의 힘을 빌려온다.
마력을 가득 실어 [드래곤 피어]를 사방에 뿌렸다.
“허, 헉...!”
“크릉....”
사람이고 몬스터고 가리지 않고 엄청난 위압감에 움직임이 멈춘 채 주저앉는다.
비행 몬스터들은 날개 굳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소란스럽던 전장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모두가 자세를 낮춘 가운데 진수 홀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수확을 하는 농부처럼, 몬스터들의 생명을 앗아간다.
그림자가 마치 악령의 손길처럼 놈들의 숨통을 비틀었다.
순식간에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이 죽어나갔다.
워낙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일부 몬스터가 사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는 것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지옥박쥐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지옥박쥐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
.
.
-자이언트 맨티스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전이된 건 7마리네. 다들 자잘한 몹들이긴 하지만 덕분에 진압이 수월했어. 전이자 수 늘린 것도 꽤 짭짤하고. 흐흐.’
진수가 안내 메시지들에 잠깐 눈길을 준 뒤 나머지 몬스터들을 해치웠다.
[석화의 시선]과 [죽음의 그림자]를 함께 사용하니 약한 몬스터 처리엔 아주 제격이었다.
“여기 하문휘씨가 누구죠?”
몬스터 떼를 학살한 뒤 헌터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감탄을 했다.
몇날며칠 지속된 전투 때문에 거의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겨우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납니다. 그쪽은 누구...?”
피로에 절어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지만 태도만큼은 당찬 사내가 대답했다.
“진가구씨를 통해 연락했던 김진수라고 합니다.”
“아...! 당신이....”
스스로 하문휘라고 밝힌 남자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진가구에게서 자금성을 무너트린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반신반의 했었다.
비록 자금성이 완파된 것이 사실이고, 정부 세력이 많이 밀려서 운명파도 지린성으로 대부분 돌아왔다고 하지만, 그게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은 믿기 힘들었으니까.
그런데 조금 전의 모습을 보니 전혀 과장이 아니었겠구나싶었다.
“우리한테 부탁할 게 있다고 들었는데요. 근데 과연 도움이 될지....”
진수의 엄청난 능력을 보고 나니 과연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는 반정부 세력이 그에게 뭘 해줄 수 있기나 할까 의문이 들었다.
그들도 그렇게 약한 세력은 아니었지만 최근에 계속해서 전력이 약해지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어디선가 굉장한 수의 몬스터들이 연일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민간인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반정부 세력은 반정부 활동을 멈추고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는 상황.
‘아, 운명파 자식들이 대책 없이 균열을 터트린 게 이런 목적도 있었구나.’
블루 오아시스의 원료도 얻고 반정부 세력을 견제할 수도 있다.
마석은 마석대로 팔아먹을 테니 신나게 균열을 일으켰을 것이다.
“차라리 민간인 피해는 조금 감수하고 운명파를 치는 거는요?”
“우리 내부에서도 그런 의견이 있었죠. 그런데 우리 목표를 이루자고 민간인을 저버리는 건 아니지 않냐는 주장이 워낙 강해서....”
베이징에서 만났던 홍칠곡 같은, 이상적인 정의를 좇는 인물들이 있었나보다.
현실을 더 중요시하는 진수와는 별로 맞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진수에겐 그들의 이상적인 정의를 현실적으로 이뤄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쏟아지는 몬스터 쓸어버리고 나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 그렇...습니다만.... 워낙에 양이 많아서 당신도 완전히 해치우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다수의 반정부 세력을 고생시킨 괴물들이다.
하문휘가 보기에 아무리 강한 진수라고 해도 결국 지쳐 나가떨어지리라 예상이 되었다.
“그건 해봐야 아는 거죠.”
진수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묘하게 하문휘가 아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임무를 받으시겠습니까?
포문을 열다
-임무 달성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힘 +3, 민첩 +4, 체력 +3, 내구 +5, 마력 +7
진수는 온몸에 묻은 몬스터의 피와 살점 등을 털어내며 안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몇 시간동안 이어진 기나긴 전투가 끝났다.
반정부 세력이 막고 있던 몬스터는 확실히 대단한 수였지만 큰 어려움은 없었다.
‘싸우는 중에도 체력이랑 마력 능력치가 야금야금 올라줘서 지칠 일이 없었지.’
대량의 몬스터들 앞에서 임무를 요청했다.
새로운 전이자를 환영하는 [차원 전이]는 전이시킨 몬스터의 수에 따라 능력치가 오르는 임무를 주었다.
총 22 종류의 전이자를 새로 보내면서 임무가 달성됐다.
여기에 전투 중에 오른 능력치가 힘 1, 민첩 2, 체력 2, 내구 1, 마력 3.
이제는 특성과 기술을 제외한 능력치만으로도 어지간한 A급 헌터는 눌러버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특히 마력이 높아서 좋지. 제일 주력기인 [빙의]가 마력 능력치에 영향을 받으니까.’
진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상태창을 닫았다.
상당히 오랫동안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컨디션은 최고 상태였다.
전투가 끝난 직후 임무 보상으로 능력치가 오른 덕분이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하문휘는 그저 경악스러울 뿐이었다.
‘이 사람의 끝은 대체 어디인 거지...? 힘, 속도, 마력, 전투 지속력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어...!’
그 외에 다른 반정부 세력의 헌터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우리가 죽어라 막던 몬스터들을 고작 몇 시간 만에....”
“근데 힘든 기색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돼?”
“사람이 아니라 괴물인 거 같은데....”
“싸우게 되면 무조건 저 사람 편에 서야겠다.”
진수가 휴식을 취하고 있으라 말하고는 몬스터들을 처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안한 마음에 가시방석 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어디보다 안전하다고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이 자리에서 진수가 싸우는 모습을 본 헌터들은 그에게 경외감마저 생겼다.
“자, 이제 다 됐죠? 그럼 중요한 이야기를 좀 해봅시다.”
진수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 모여 있는 인원이 연변에 있는 반정부 세력 전부인가요?”
십 수 명의 헌터들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다.
몬스터들과 싸우느라 제대로 정비를 못한 탓도 있겠지만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운명파가 크게 득세를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들이 전부라면 아무리 진수가 돕는다고 해도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비롯한 지린성에서 운명파를 몰아내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닙니다. 다른 구역에서 몬스터를 막고 있는 인원도 있고, 도시 내부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운명파에 비해... 부족하긴 하지만요.”
“음... 그렇군요. 저보다는 여기에서 더 오랫동안 저놈들을 봐왔으니까, 객관적으로 전력을 비교했을 때 제가 돕는다면 반정부 세력이 이길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요?”
하문휘는 그의 질문에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조금 전 싸우는 모습을 참고하여 계산하는 듯했다.
“6할 정도... 될 것 같군요.”
진수의 압도적인 무력을 본 직후였다.
흥분감에 전력을 보다 높은 수준으로 잡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문휘는 이길 확률을 60%로 생각했다.
그만큼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운명파의 위세가 대단했던 것이다.
“6할이라... 상당히 위험하네요.”
“... 그렇습니다.”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한다면 다음에 기회를 노려도 됩니다. 저는 저대로 방법을 찾아보죠.”
진수는 하문휘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운명파와의 싸움에서 스스로는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반정부 세력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목숨을 거는 쪽이 선택을 하는 것이 옳다.
그게 진수의 생각이었다.
“아뇨. 이번이 지나면 기회는 없을 겁니다. 하죠.”
하문휘가 불타는 눈빛으로 답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각 지역마다 반정부 세력이 패권을 차지하면서 점차 독립적인 국가로 분리가 되었다.
그와 함께 반정부 세력은 점점 약화되어가는 것이다.
그들의 전력이 새로운 국가로 들어가게 되기에.
앞으로 힘을 빌려올 구석은 줄어들고,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운명파는 계속 강해지고 있다.
거기에 몬스터들의 습격까지.
진수가 돕는 이번이 그들에게도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제 계획을 한 번 들어보시죠. 그 6할의 확률, 7할, 8할까지 끌어올려줄 테니까.”
그의 대답을 들은 진수가 자신의 계획을 공유했다.
블루 오아시스 공장 내부를 모두 살펴보고 그들의 전력을 바탕으로 세운 계획이었다.
“이 인원만으로 말씀이십니까?”
하문휘는 어느새 진수에게 극존칭을 쓰고 있었다.
압도적인 힘을 본 뒤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낮추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공이 떨리고 의문이 생길 정도의 이야기였다.
“어차피 저를 제외한 사람들의 역할은 크지 않아요. 차라리 혹시 모를 비밀 유지가 더 중요하거든요. 이대로 아침까지 휴식 취하다가 공장 돌아가기 시작하면 바로 치죠.”
몬스터 방어에 나선 십 수 명의 인원들로 공장을 둘러싼다.
그리고 진수가 홀로 공장에 들어가 파괴하겠다는 계획이다.
혹시라도 도망치는 인원들이 있으면 그들만 막아달라는 것.
“아마 공장이 터지고 나면 운명파가 수습하느라 바빠질 겁니다. 그럼 그때 여세를 몰아서 지린성 전체에서 들고 일어나자고요. 그때 제가 얘기한 방법대로 움직이시고.”
“... 가능하시겠습니까?”
진수가 얘기한 운명파를 직접 공격할 때의 방식은 그에게 굉장히 부담이 큰 방법이었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하문휘와 달리 당사자인 진수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당연하죠.”
“좋습니다. 그럼 말씀대로 해봅시다.”
그는 할 수 있다 다짐이라도 하듯 진수의 손을 잡으며 악수했다.
* * *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북쪽에 있는 블루 오아시스 공장.
날이 밝자 어김없이 파란 연기를 뿜어내며 가동되기 시작했다.
공간압축가방을 들고 들어가는 사람들.
큰 도로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트럭들.
분주한 분위기가 가득한 건물 주위로 십 수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아주 빠른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펑 펑
그의 몸 위로 원숭이 형상이 나타나더니 다수의 분신들을 만들어냈다.
그대로 공장을 에워싸며 들어간다.
“뭐, 뭐야!”
“경비 뭐하고 있어?”
“으악!”
진입과 동시에 고함과 비명, 폭발음 따위가 뒤섞여 소란을 만들었다.
벽의 일부가 허물어지기도 하고 이내 굴뚝에서 나오던 파란 연기도 멈춘다.
몇몇 사람들이 공장에서 도망쳐 나왔지만 주변을 지키고 있는 인원에게 붙잡혀 포박 당했다.
-쿵, 쿵!
“후워어어!”
몇 십 분이 흐른 뒤, 건물 내부에서 커다란 충돌음과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포박된 운명파 인물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흐흐.... 갑자기 습격해서 혼란이 있긴 했지만 경비대장님은 못 이기지. 운명파 안에서도 전투력으론 손에 꼽히는 실력자라고. 이제 곧 너희가 포박당해서 무릎을 꿇게 될 걸?”
그 중 한 명이 반정부 세력들을 노려보며 경고했다.
경비대장이라는 자를 몹시 신뢰하고 있는 듯했다.
-콰앙!
굉음이 터진 뒤, 공장 건물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빠져나왔다.
아니, 빠져나온 게 아니라 내던져졌다.
안에서 누군가가 온몸을 거미줄 같은 것으로 묶고선 집어던진 것 같았다.
-화르륵
이어 건물 전체에 불이 붙었다.
백색의 불꽃과 뻘건 화염이 뒤섞여 타올랐다.
특이한 것은, 블루 오아시스가 불탈 때 특유의 파란 연기와 달큰한 향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계약자 [양소룡]이 [꾸러기 수비대] 무리에 합류합니다.
블루 오아시스 공장에 방화한 뒤 나온 진수의 눈앞에 안내 메시지가 나타났다.
경비 대장이 상당히 강했기에 제압하는 정도로는 끝낼 수가 없었다.
놈도 다른 운명파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계약자였다.
양소룡 외에도 경비 인원 다섯 명을 더 해치웠는데 그들 모두가 계약자로 전이되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공장을 없앨 수 있었어. 블루 오아시스도 상당히 챙겼고.’
진수는 공장의 저장고에 있는 블루 오아시스를 모조리 [차원의 틈]에 집어넣었다.
‘이게 다 전이자들의 성장 동력이 되어줄 테니까.’
기왕 만들어진 약인데 굳이 활용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블루 오아시스 제조에 관련된 자료들은 철저하게 파기하고 불까지 질렀으니 운명파의 마약 사업에는 아주 치명타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 다음으로는 마약 사업이 아니라 운명파 본진에 치명타를 때려 박을 차례지.’
진수는 공장 밖에 던져놓은 사람들을 [강철 거미줄]로 한 데 묶어서 반정부 세력에게 끌고 갔다.
* * *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갑작스럽게 블루 오아시스 공장이 파괴되었다.
운명파에선 사태 파악에 정신이 없어졌다.
한참 타오르는 화마를 잡는 데에만도 상당한 인력이 들어갔다.
범인이 누구인지 특정하고 사라진 블루 오아시스의 행방을 찾기 위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북쪽으로 운명파의 이목이 집중됐다.
운명파가 상대적으로 약해진 도시의 남쪽.
큰 무리의 사람들이 도심에 나타났다.
반정부 세력이었다.
그들은 연변조선족자치주 남쪽부터 치고 올라가려는 계획인지 빠르게 운명파가 운영하는 건물로 향했다.
-오늘, 드디어 헌터 대전의 결승전이 치러집니다. 전 세계의 주요 방송국에서 실시간으로... 속보입니다!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 남쪽에서 무력 충돌이 예상....
거리에 틀어진 뉴스와 라디오 등에서 반정부 세력의 움직임을 알렸다.
이미 전국적으로 정부 및 운명파와 반정부 세력의 갈등이 만연한 상황이었다.
무력 충돌이라는 표현만으로도 어떤 의미인지 전달이 되었다.
반정부 세력은 이미 운명파의 영역으로 진입했기에 뒤늦은 속보는 그들의 기습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운명파가 정말 전혀 몰랐다는 가정 하에 말이지.’
하문휘는 굳은 얼굴을 한 채로 나아갔다.
도시에 있는 모든 반정부 세력의 인원들을 데리고 왔다.
이번에 실패한다면 그들은 완전 끝이다.
더 나아가 연변조선족자치주가 포함된 지린성 전체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이렇게 내전으로 난리가 났는데 저 헌터 대전은 계속 운영이 되는구나. 하긴, 전 세계에서 주목하는 스포츠니까 그럴 만도 한가....’
속보가 나오기 전에 뉴스에서 떠들던 내용이 생각났다.
누구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누구는 재미를 위해서 싸우는 꼴이 우습기도 했다.
“아이고~ 대의를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하는 분들이 이렇게 찾아오셨어?”
반정부 세력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한껏 비꼬는 말투가 거슬렸다.
그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전혀 없었으니까.
“하... 결국 내부에 간첩이 있었나.”
하문휘가 착잡한 눈빛으로 정면을 보았다.
골목골목에서 운명파의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는 운명파 병력의 대다수가 모인 듯 보였다.
원래 계획은 북쪽에 운명파가 신경 쓰는 사이 남쪽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각개격파를 하려고 했다.
총 전력을 비교하면 반정부 세력이 약세인 건 분명했으니까.
그런데 그들의 계획을 어떻게 미리 알고 북쪽으로 모여든 것이다.
당장 보이는 헌터들의 수만 해도 반정부 세력을 상회한다.
“연변의 암 덩이들을 한 번에 처치할 수 있겠네. 흐흐흐.”
운명파의 선두에 있는 인물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래, 너희 운명파 암 덩어리들이 한 데 모여줘서 다행이야.”
그의 말을 하문휘가 이어 받았다.
“전원! 지정된 팀별로 움직여라!”
하문휘가 우렁차게 외치자 반정부 세력의 헌터들이 일정 단위로 나뉘기 시작했다.
각 단위의 팀장들은 미리 약속된 내용이 있는지 팀원들을 이끌고 산개했다.
순식간에 운명파와 대치하고 있던 반정부 세력은 뿔뿔이 흩어졌고 단 한 명만이 거리에 남았다.
-휘우웅-
검은 망토와 검은 방어구를 두른 사내.
몸 위로는 드래곤의 형상을 한 오러가 덧씌워져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엄청난 양의 마력이 응집되고 있다.
“어...?”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운명파 헌터들이 당황했다.
“이거 참, 내가 전쟁의 포문을 열게 됐네.”
진수가 씨익 웃으며 [드래곤 브레스]를 날렸다.
천지를 울리는 충격과 함께 운명파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결승전
-꽈르릉!
넓은 범위에 벼락이 거세게 내려친다.
사람들의 머리에 피뢰침이라도 달려있는지 번개 줄기 하나 허투루 떨어지는 것 없이 정확히 헌터들에게 명중했다.
“이, 이게...?”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홍칠곡이 말을 더듬었다.
심선우의 번개뿐만이 아니다.
박가은은 아주 잘게 쪼개진 얼음 조각들을 공기 중에 퍼트려 적들의 호흡기를 얼려버렸다.
그들의 광범위 공격을 버티며 접근한 운명파 헌터들은 바위곰 이종학에게 육탄전으로 저지당했다.
덕분에 체력과 마력 모두 고갈되었던 진수는 빠르게 회복을 할 수 있었다.
“하하, 대표님 많이 힘들어 보이시네.”
“제 때 와줘서 고마워요. 정말 죽을 뻔 했네요.”
한바탕 번개를 흩뿌린 심선우가 진수에게로 다가왔다.
진수는 진심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그들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 위험한 상황이었다.
“우리 김진수 대표님 호출인데 서둘러 와야죠. 미리 무법지대를 뚫어놔서 금방 올 수 있었어요. 역시 선견지명이 대단하시네요.”
진수가 중국으로 오기 전에 지시한 것이 러시아, 중국으로 육로를 뚫어놓으라는 것이었다.
덕분에 관계가 좋은 러시아와는 거래처를 만들어 로켓몬스터를 진출시켰고, 중국으로도 바로 진입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었다.
이번 연변조선족자치주 건으로 진수는 몰래 로켓몬스터에 연락을 보내놨었다.
반정부 세력과 진수의 힘만으로 성공률이 6할이라면 외부세력의 힘을 빌리면 되니까.
“근데, 저 사람은 뭐죠? 몸속에 영혼이 둘...? 아니면 셋인 거 같은데....”
심선우가 분개하고 있는 홍칠곡을 보며 말했다.
그는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천둥새] 특성을 가졌다.
그의 눈에 홍칠곡은 상당히 괴이한 상태였다.
‘아, 그래서 진가구의 [거짓 간파]에 안 걸렸던 거구나....’
그 말을 들은 진수는 홍칠곡이 진가구를 속일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중인격 같은 상태라 반정부 세력의 활동을 할 때면 정의로운 척 하는 인격을 전면에 내세웠다가 뒤에서 다른 인격으로 호박씨를 깐 것이다.
“저도 궁금한 것들이 좀 있으니 일단 다 두들겨 팬 뒤에 물어보죠.”
워낙 능력치가 높았고 [상급 재생력]이나 [녹룡의 화신] 같은 특성이 회복을 도와주었기에 체력과 마력이 거의 완전히 돌아왔다.
반면에 운명파의 헌터들은 [차원 전이]에 의해서 전이된 이들도 다수였고 여전히 부상이 그대로였다.
홍칠곡의 얼굴에 절망감이 드러났다.
‘근데... 이놈들이 전부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운명파에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추가적인 지원이 나타나지 않았다.
운명파의 수장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도 없었고 지난번 박빙으로 싸웠던 가면 쓴 괴한도 보이지 않는다.
진수는 의아함을 가득 안고 전투를 재개했다.
자잘한 운명파의 헌터들은 로켓몬스터 헌터들 선에서 정리가 되었다.
운송 업무와 운송로 개척으로 인해 전투 경험이 쌓인 덕분에 실력이 확 늘은 것이다.
진수는 [빙의]로 다시 흑우의 힘을 받아 홍칠곡을 상대했다.
몇 대 맞는 것을 감수하고 신체부위를 붙잡는 순간, 대결은 끝이 났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홍칠곡의 사지는 박살나버렸다.
“커헉...!”
바닥에 널브러져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린다.
진수는 그런 그의 멱살을 잡고 심문했다.
조금 흔들리기만 해도 격통이 일어났기에 별도의 고문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어이, 너네 대장은 누구야? 어디에 있길래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안 나타나는 거야?”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시작된 싸움이 승기를 잡아갈 때, 지린성 전체의 반정부 세력에게 연락이 갔다.
지린성 곳곳에서 운명파를 몰아내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많은 전력이 이곳에 모여 있었기에 반정부 세력의 봉기는 성공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운명파의 움직임이 여전히 뜨뜻미지근하게 느껴졌다.
“쿨럭! 흐흐.... 우리의 뒤를 쫓아오는 악마가 있을 거라 듣긴 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야.... 평화로운 세상이 곧 다가왔는데....”
“악마? 평화로운 세상? 뭔 소리야. 어어? 야 임마!”
홍칠곡은 진수의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동문서답을 하더니 숨이 멎었다.
그런데 [사신의 감각]에 그의 생명력이 뽑혀 나와 어디론가 향하는 게 감지되었다.
“야! 아직 죽을 정도는 아니었잖아? 근데 왜....”
멱살을 잡고 있던 진수가 몇 차례 그의 시체를 흔들었다.
-투둑!
전투로 인해 헤졌던 옷이 뜯어지며 홍칠곡의 가슴팍이 드러났다.
커다랗게 퍼져있는 마석증 반점.
충분히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마석정제주사를 안 맞고 싸우러 왔던 건가...?’
진수가 반점을 보며 의문을 품는데 곳곳에서 운명파 헌터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실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고꾸라진 그들에게서 생명력이 빠져나오는 게 느껴진다.
동시에 마석증 반점이 순식간에 커지는 것도.
“와아아!”
골목과 건물 사이에 숨어서 견제하던 반정부 세력의 인원들이 환호하며 나왔다.
그들의 눈에는 운명파 헌터들이 모두 쓰러지는 것만 보였으리라.
하지만 진수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뉴트럴바이오 때랑 비슷해. 아니, 훨씬 심각한데....’
그의 시선은 하늘 위로 향해 있었다.
온통 시커멓게 변한 하늘.
비구름 따위가 아니었다.
벌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햇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전투는 끝이 났고 조용한 가운데 반정부 세력의 헌터 몇이 기뻐하는 목소릴 낼 뿐이다.
진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로켓몬스터의 인원들은 잠자코 있었다.
-로, 로드시여...! 균열이....
그의 머릿속으로 뱀파이어들의 텔레파시가 전해왔다.
유럽, 러시아, 중국 등등의 위치에서 서둘러 소식을 전한다.
[사신의 감각]에도 사방에서 생명 반응이 나타나는 게 느껴졌다.
-박종대 선수! 챔피언과 등을 맞대고 전투에 임합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심.
곳곳에 켜진 디스플레이는 더욱 환하게 보였다.
그 화면에서 나오고 있는 것은 헌터 대전의 결승전이다.
도전자 박종대와 현 챔피언이 보인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대결을 하고 있지 않았다.
끝없이 쏟아지는 몬스터를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헌터 대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저곳에도 균열이 발생했다는 의미였다.
‘마석증을 앓고 있던 운명파 헌터들을 매개로 전 세계에 균열을 일으켰어...!’
지금까지 수집된 정보를 종합한 결론이었다.
헌터 대전 결승전은 그야말로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시합이다.
선수 보호를 위해 대단한 수준의 경비 인원이 있었을 텐데 결국 선수들이 몬스터와 싸우게 되었다는 건 균열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정말 제2의 게이트 사태나 다름없는 재앙이 시작된 건지도 모른다.
-퍼버버벅!
화면에서 박종대가 시그니처 기술인 [주먹난타]를 사용해 몬스터들을 짓뭉개버렸다.
챔피언도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었지만 박종대와는 압도적인 기량 차이가 드러났다.
아무런 장비도 착용하지 않은 그의 손에 순식간에 장내가 정리되었다.
-여러분!
몬스터를 모조리 해치운 박종대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비록 아직 헌터 대전의 챔피언은 되지 못했지만 조금 전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헌터 대전을 시청하던 사람들을 집중시키기엔 충분했다.
-지금 대규모 균열 사태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던 갈등은 잠시 내려놓고 힘을 합쳐 이 어려움을 이겨나가야 할 때입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전을 생각하고 한 말일까?
아니면 세계 어디선가 진행되고 있을 전쟁들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속내는 어찌되었든 몬스터들이 쏟아지는 상황과 맞물리며 박종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더욱 좋아졌다.
-쾅!
그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보랏빛 마력이 불기둥처럼 떨어져 박종대의 온몸을 감쌌다.
마치 신화에서 나오는 장면 같기도 했다.
‘아니, 잠깐만... 저 보랏빛 마력...!’
박종대는 마치 계시를 받는 듯 흰자를 까뒤집으며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인간 여러분. 나는 이 세계의 관리자입니다.
지금까지의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와는 다른 신비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남성 같기도 하고 여성 같기도 한 오묘한 톤이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이의 입을 통해 말을 전합니다.
전 세계에 송출되고 있는 헌터 대전의 라이브 방송이었다.
과연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일시에 말할 수 있는 방법이긴 했다.
-이 세계는 지금 위기에 빠졌습니다. 차원의 구분이 약해지고 다른 세계의 괴물들이 우리 세계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예전에 오세라는 존재에게 들었던 내용과 흡사한 이야기였다.
다만 진수는 그 말에서 모순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일어난 대규모 균열은 누군가가 강제로 일으켰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저는 비록 세계의 관리자이지만 직접적으로 개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 여러분께서 힘을 합쳐 이 상황을 극복해야 합니다...!
박종대의 입을 통해 말을 전하는 존재는 애원하듯 말했다.
그 목소리는 굉장히 호소력이 짙었다.
진수조차도 순간적으로 마음이 움직일 정도로.
‘[특급 정신 보호]가 작동 됐어. 이 자식 뭔가 수작질을 부리고 있었던 거야.’
아마 진수가 의심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특급 정신 보호]조차 발동되지 않고 넘어갔을 것이다.
교묘하게 실제로 신뢰를 주는 상황과 이야기, 기술을 섞어서 세뇌 아닌 세뇌를 시키고 있었다.
-곧 이 세계 곳곳에 몬스터를 만들어내는 물질이 드러날 것입니다. 바로, 몬스터의 둥지라는 것입니다. 그 몬스터의 둥지를 파괴하세요! 여러분이 힘을 합치면 가능합니다!
“몬스터의 둥지...?”
“그게 지금까지 균열과 던전을 만들어낸 건가?”
“지금 이럴 게 아니라 바로 저거 찾아내야 하는 거 아니야?”
같이 화면을 보던 반정부 세력과 로켓몬스터의 헌터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이미 박종대를 통해 전해진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일단 인지도가 좋았던 박종대의 입을 빌려 전달되었고 뭔가 신비롭고 신성한 듯한 분위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 한몫 했다.
추가로 진수의 [신뢰] 특성 같이 은근한 정신 조작 능력까지 사용했으니 넘어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하.... 이 자식 봐라...?”
오직 진수만이 화면에 보이는 박종대를 향해 적대적인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커다란 제국을 무너트리고... 몬스터의 둥지를 없애야 된다고 주장을 한다 이거지....’
진수는 이제야 운명파가 왜 중국 내부에서 온갖 분열을 야기하고 소모적인 싸움을 일으켰는지 이해가 됐다.
노네임이 이야기했던 상황이 그대로 이쪽 차원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이 차원엔 그 모든 걸 알고 있는 내가 있다는 거지.’
왜? 그리고 어떻게?
예전에 저주받은 성지에서 파투스교도들이 악마를 소환할 때 보랏빛 기운을 사용했다.
노네임도 파투스교의 보랏빛 마력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화면에 보이는 보라색의 마력 기둥.
‘그 때 그 가면 쓴 놈도 마력의 색깔이 보라색이었지.’
진수의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수집되었던 정보들이 조합되었다.
박종대의 입을 빌려 전 세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존재는 파투스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운명파를 통해 인위적인 균열을 일으키도록 하고 블루 오아시스를 유통시키게 만든 것도 배후에 파투스가 있었을 것이다.
“잠깐, 그럼 나한테 마석증이 생기게 만든 것도 저놈이란 말이잖아?”
운명파의 헌터들에게 나타났던 마석증 반점의 문양이 떠오른다.
병원에서 확인해봤을 때, 민우혁과 운명파 헌터들, 자신의 마석증 반점 모양이 같았다.
-헉, 헉...! 이 무슨...?
어느새 박종대를 감싸고 있던 마력 기둥이 사라졌다.
그는 잠시 혼란스러운 듯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이내 상황 파악이 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분. 조금 전 이야기했던 존재, 저는 믿겠습니다. 모든 각성자분들께도 느껴질 겁니다. 몬스터의 둥지의 존재감이.
그의 말대로였다.
대규모 균열이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 곳곳에서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다.
각성자라면, 마력을 다루는 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게 몬스터의 둥지가 아니라 차원의 축이라는 거지만.’
진수는 안다.
차원의 축을 몬스터의 둥지로 여기고 부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러 종족들이 공존하던 저쪽 차원에서 차원의 축이 파괴되었을 때, 그것을 지키던 드워프가 한낱 몬스터처럼 변해버렸다.
탑승 로봇부터 온갖 마력공학 장비를 만들 정도의 지성체가 이성을 잃은 짐승의 모습으로 전락했다.
이쪽 세계는 지성체가 인간뿐인 곳이다.
그렇다면 과연 차원의 축이 망가졌을 때 제2의 드워프는 누가 될 것인가?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다.
-여러분, 우리 함께 몬스터의 둥지를 부숩시다! 제 몸으로 이 세계의 관리자에게 계시를 받으며 힘도 함께 받았습니다.
박종대가 능숙하게 보랏빛 마력을 온몸에 둘렀다.
지금까지 어떤 각성자들에게서도 나타나지 못했던 독특한 마력이었다.
-이제 더 이상의 게이트 사태는 없을 겁니다! 몬스터로 인해 고통 받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승리를 쟁취합시다!
열변을 토하는 그의 모습에 화면을 보던 헌터들은 한껏 흥분했다.
얼굴에 열기가 감돌며 당장 몬스터의 둥지라는 것을 부수고자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지긋지긋한 균열도 끝장을 낼 수 있겠어.”
“드디어 평화가 오는 건가...?”
진수의 얼굴도 붉어졌다.
다른 헌터들과는 조금 다른 이유였지만.
방금 전 보랏빛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파투스가 세계의 관리자인 척 속였듯이 박종대도 마치 처음 힘을 받은 것처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아! 저 자식이 그 가면 쓴 놈이었구나!’
박종대도 진수와 같은 시기에 마석증이 발병했다.
그의 마석증 반점을 보지 못했지만 어떤 형태일지는 안 봐도 뻔하다.
진수와 같은 파투스의 문양.
그럼 남은 의문은 이거다.
왜? 그리고 어떻게?
‘일단, 몰려오는 몬스터부터 해치우자. 그 다음 저놈과 차원의 축을 어떻게 해결할지 생각해보자.’
“모두 긴장 풀지 마세요! 몬스터들 코앞까지 왔습니다!”
진수는 로켓몬스터와 반정부 세력 헌터들에게 외쳤다.
그의 말대로 대량의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 * *
“우리가 명색이 S급 헌터들이고 제2의 게이트 사태를 막기 위해 모였는데, 겨우 스포츠 선수의 말을 따르는 것은 웃기지 않습니까?”
한 회의실.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강대한 기운을 숨기지 않고 뿜어내고 있어 범상치 않은 인물들임이 느껴졌다.
“정말 그런 이유인가요?”
처음 발언한 사내의 말에 반박하는 여성.
쏘아붙이듯 앙칼진 목소리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하, 박종대라는 헌터가 헌터 대전에서 활약하던 게 불만인 게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 같은데요.”
사내는 정곡을 찔렸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말하신 대로 우리 WP클랜의 창설 목적은 제2의 게이트 사태를 막기 위함이죠.”
회의실에 모인 인물들은 다름 아닌 WP클랜의 구성원들이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대규모 균열 사태, 그리고 이어진 몬스터의 둥지 건으로 회의를 하게 된 것이다.
“여러 나라들에서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S급 헌터들만 가입할 수 있고, 클랜에 들어온 이후로는 출신은 잊고 세계를 위해서 움직이기로 했죠. 그런데, 실제로도 그랬나요?”
WP클랜에 거대한 힘이 모인 탓에 그들의 위상은 나날이 높아졌다.
덕분에 WP클랜원을 배출한 집단도 저절로 수혜를 입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WP클랜원이라는 것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는 인물들도 많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 내부에는 정말 세계 평화를 바라는 자들과 이권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들로 나뉘게 되었다.
“흠, 흠! 지금까지 클랜에서 제시한 활동에 반하는 사람은 없었잖아요? 너무 공격적으로 이야기하지 마시고, 지금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나 이야기하죠.”
다른 인물이 여성의 비난에 가까운 질문을 막았다.
“... 좋아요. 박종대라는 인물에 대한 자료는 다들 회의 전에 한 번씩 읽어보고 오셨을 거예요. 대한민국 출신이지만 활동은 중국에서 더 많이 했어요. 헌터 대전에서 굉장히 많은 활약을 했고,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죠. 운명파랑 연관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운명파는 얼마 전에 반정부 세력에 의하여 괴멸되었어요.”
그녀는 운명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중국 한족 출신의 두 헌터, 풍극안과 왕사영이 있었다.
중국 내전에 직접 관여한 둘을 은근히 비난하는 눈빛이었다.
“어쨌든 전 세계에 기둥...이라고 해야 할까요. 엄청난 마력을 내뿜는 구조물이 생겨났죠. 그 근처에는 실제로 다수의 몬스터들이 나타났고 놈들의 수준은 전반적으로 상당히 높아요. 어지간한 A급 헌터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강한 개체도 있고요. 박종대는 그걸 몬스터의 둥지라고 불렀죠.”
“박종대의 입을 빌린 이 세계의 관리자였죠.”
그녀의 설명에 누군가가 첨언했다.
“그래요. 이 세계의 관리자라고 주장하는 자라고 할게요. 사실 좀 터무니없는 주장인 것 같지만요.”
여성이 탐탁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명은 그 정도면 됐고, 그래서 우린 어떻게 할지나 빨리 정하면 되는 거 아니오.”
“맞아요. 지금 박종대는 전 세계의 여러 각성자들에게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모으고 있어요. 금방이라도 쳐들어갈 기세고요. 이번 회의에서는 우리가 박종대의 손을 들어 함께 몬스터의 둥지를 칠 것인지, 아니면 좀 더 신중을 기할 것인지를 정해야 돼요.”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장내는 조용해졌다.
깊은 생각에 빠진 사람도 있었고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는 자도 있었다.
그때, 풍극안이 손을 들었다.
“뭐죠?”
현 상황에 대해 쭉 설명한 여성이 그를 지목했다.
“내가 이번 사태에 대해서 이야기할 분을 데리고 왔어.”
그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앞서 전해들은 것도 없었을 뿐더러 풍극안이 다른 사람에게 존칭을 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안은 회의 전에 미리 언질을 했어야... 후,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죠. 풍극안씨가 데려온 사람을 회의에 참석시키는 데에 동의하시나요?”
짜증 섞인 표정을 지은 그녀는 다른 클랜원들에게 물었다.
가장 먼저 왕사영이 긍정의 표현을 했다.
이어 몇은 찬성을, 몇은 반대했다.
전체 찬반이 비슷한 상황.
풍극안이 묘족 출신의 원화에게 눈빛을 보냈다.
“... 저도 동의합니다.”
원화의 발언에 이어 남은 인물들도 찬성했다.
‘풍극안과 원화는 서로 으르렁대는 사이 아니었나? 대체 누구를 데려왔길래....’
그녀는 개인적으로 풍극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가 데려온 자를 참석시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이제는 궁금증이 더 커졌다.
“좋아요. 과반수가 동의했으니 풍극안씨가 데려왔다는 그 사람,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시죠.”
풍극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바깥으로 나갔다.
비록 회의실에 WP클랜의 구성원이 아닌 인물을 불렀다고 해도 대다수의 클랜원들은 별로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명실상부 전 세계 헌터들 중에서도 최상위급의 인물들이었다.
자부심과 자존심이 그 누구보다도 높았다.
WP클랜원들은 제각기 주변에 있는 자들과 자신의 의견을 떠들어댔다.
“흠...!”
회의실 문이 다시 열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벅, 저벅, 저벅
무려 S급 헌터 십 수 명이 자신들의 힘을 전혀 숨기지 않은 채 한 공간에 있다.
그 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어지간한 S급 헌터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다리가 풀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중을 받을만하다.
하지만 숨 막히는 위압감을 뚫고 한 사내가 보무도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여기에 있는 클랜원들이 상어나 고래라면... 저 헌터는 바다 같다.’
줄곧 WP클랜의 회의를 주재하던 여성의 감상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회의실 안에 있던 모든 헌터들이 떠들던 말을 멈추고 이목을 집중했다.
어떻게 보면 순해 보이는 인상의 동양인 남성이다.
그렇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절대 약하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S급 헌터들이 뽐내듯, 제멋대로 퍼트려 소용돌이치는 대기 중의 마력이 사내의 주변에서는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게 클랜원들의 눈길을 끈 이유이기도 했다.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온 김진수라고 합니다.”
진수의 간단한 자기소개에 WP클랜원들의 시선이 한 쪽으로 몰렸다.
그곳엔 WP클랜의 한국인 출신 헌터, 우대한이 있었다.
사방에서 무언의 질문이 담긴 눈길이 쏟아지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는 사람이라는 표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대한이 S급 헌터가 되었을 때 진수는 F급 일당 헌터로 몬스터 부산물 채취를 하고 있었다.
“형제단이랑도 몇 번 만나보고, 적룡파나 운명파랑도 싸워봤는데 WP클랜과 직접 접촉하게 된 건 처음이네요.”
눈치 빠른 몇이 진수가 한 말의 진의를 이해했다.
형제단과 적룡파에서 이어져 운명파까지.
전 세계에 퍼져서 꽤 많은 사람들을 중독 시키고, 여러 문제를 일으킨 블루 오아시스와 관련된 집단들이다.
세계 평화를 표방하는 WP클랜이 나설 명분이 없지 않은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하고 있던 것에 대한 은근한 비난.
그리고 그러한 큰 사건에 관여했다고 하는 자기 PR의 성격을 지닌 발언이었다.
‘여기도 블루 오아시스에 관련된 인간이 몇 있네. 직접적으로 파투스랑 연결이 된 건지 그냥 뒷돈을 받아먹은 정도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진수는 이야기를 하면서 빠르게 WP클랜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여기까지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었으니까.
“뭐, 다들 바쁜 분들이시니까....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이야기하죠. 여러분, 이 세상에서 몬스터가 없어지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냐!”
“웬 듣도 보도 못한 놈이 감히 우릴 모욕해?”
그의 말에 몇몇 헌터들이 흥분해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폭력을 휘두를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그런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예상이라도 한 듯 진수의 입 꼬리는 슬쩍 올라갔다.
여러분은 뭐가 되죠?
“이 세상에서 몬스터가 사라진다면, 여러분은 뭐가 되죠?”
진수는 흥분한 WP클랜원들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몬스터가 없어져도 우리 힘은 그대로일 텐데 무슨 허튼 소리지?”
“그래요. 굉장히 힘이 세고, 마력 폭발을 일으키고, 얼음을 만들고.... 여전히 대단은 하겠지만 쓸모는요? 지금까지와 같은 가치를 지닐까요?”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질문이지만 눈빛에서 보이는 건 답이었다.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권세. 부와 명예. 이런 걸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요?”
“우, 우리는 그런 이권 때문에 모인 게 아니야! WP클랜은 세계 평화를....”
“세계 평화? 좋죠.”
반발하는 이의 말을 매섭게 끊어버린다.
“우리의 손 안에서 말입니다.”
진수는 의도적으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들키고 싶지 않은 속내를 들춰내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들이 일방적으로 비도덕적인 게 아니라 함께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넌지시 말한 것이다.
혹시라도 있을 죄책감을 뭉그러트리기 위해서.
‘지금 내가 WP클랜에서 공략해야 되는 건 진심으로 세계 평화를 바라는 이들이 아니야. 오히려 욕심 때문에 세계의 혼란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이지.’
아이러니한 생각이었다.
사실 정공법이라면 이들에게 몬스터의 둥지는 사실 몬스터의 둥지가 아니라고 알려야 했다.
그것들은 차원의 축이라는 것으로, 저게 망가지면 세상이 멸망한다고 말이다.
‘근데 그렇게 하면 누가 믿어주겠어?’
박종대와 파투스는 전 세계인들이 보는 앞에서 기가 막힌 퍼포먼스라도 보여줬다.
그러나 진수는 가진 게 별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진실을 부르짖는다 해도 제대로 통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진실이나 정의 따위의 낭만적인 걸 찾는 것보다 욕망을 긁는 편이 더 효과적이지. 그러면 이 사람들이 당장 움직이는 건 멈춰 세울 수 있어.’
진수의 예상은 꽤 잘 들어맞고 있었다.
벌써 표정이 달라진 헌터들이 상당수 눈에 들어왔다.
그때, 누군가가 회의장 바깥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나에 대한 정보를 가지러 가는 거겠지.’
“솔직한 말로, 헌터들의 가치라는 건 몬스터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만약에 몬스터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전쟁 병기나 치안 유지를 위한 도구밖에 더 되겠어요? 비각성자들에게는 오히려 공포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죠.”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우리가 몬스터의 둥지를 부수지 못하게 막기도 뭐하고....”
“당신!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 우리 좋자고 몬스터를 없앨 기회를 날리겠다는 거야?”
“틀린 소리는 아니잖아! 난 각성하기 전의 그 가난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이 이기적인 자식이!”
“나도 저 말이 맞는 거 같은데....”
어느새 장내에는 진수의 말에 감화된 자도 있었고 여전히 몬스터를 없애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진수가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않아도 그들끼리 시비를 가리느라 소란스러웠다.
얼마 안 있으면 무력 충돌까지도 생길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계속해서 소란이 이어지는데, 조금 전에 밖에 나갔던 자가 돌아왔다.
그는 회의 진행을 하던 여성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띠링
-띠링
-띠링
직후 여성 헌터가 무언가 조작을 하니 모든 WP클랜원들의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나왔다.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비난하거나 의견을 내놓았지만 한편으로는 핸드폰을 확인하기도 했다.
“뭐야, 겨우 A급이었어?”
“로켓몬스터...? 도시 간 운송 서비스 업체?”
“꽤나 굵직한 일들에 엮이긴 했네.”
그들끼리 싸우던 것은 점점 잦아들었다.
무언가를 읽으며 혼잣말을 하는 것이, 아마도 진수에 대한 신상정보를 핸드폰으로 받은 듯했다.
상당히 다양한 반응들이 보였다.
일단 대부분 진수의 첫인상에 비해서 낮은 헌터 등급에 가소로워 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봐, 당신 김진수라고 했나?”
“예. 맞습니다.”
“겨우 A급 헌터주제에 여기 와서 그런 시건방진 소릴 했던 거야?”
A급 헌터도 절대 누군가에게 주제에 라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WP클랜에 A급 헌터 시절을 겪지 않은 헌터는 없었다.
그들의 가입조건이 S급 헌터였으니까.
그렇기에 A급과 S급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도 잘 알고 있었다.
“헌터 등급이 중요한 일인가요?”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는 진수.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해서 간질간질했다.
그리고 풍극안과 왕사영도 그와 같은 심정이었다.
진수는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풍극안과 왕사영은 이미 한 번 겪어봐서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지리라 예상이 되었기에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직 애송이라서 모르나본데, 여기 있는 사람들이랑 그쪽이랑은 사는 세상이 달라. 난 또 우리 클랜에 가입 안 한 S급 헌터인 줄 알고 괜히 살짝 공감했네. 어디 하룻강아지가 범 앞에서 떠들어?”
진수가 속인 적은 없지만 왠지 속았다는 기분에 흥분한 헌터들이 화를 냈다.
그들은 불쾌한 기색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아, 그러면 한 판 붙던가. 어차피 여기 앉아서 주둥이만 나불대고 있던 놈들이 뭐 잘났다고 그렇게 뻐기나?”
예의 바르게 말하던 진수의 태도가 한 순간에 뒤집혔다.
어떻게 보면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인데 도리어 더욱 상대를 깔보는 듯한 말투로 나온 것이다.
“뭐...?”
“건방진 A급이 설쳐서 불만인 사람?”
아예 한손을 들며 묻는다.
마치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거수투표 하라는 듯이.
진수는 그러면서 동시에 WP클랜원들의 눈빛을 빠르게 훑었다.
“당신, 당신, 당신.”
들고 있던 손을 그대로 뻗어 세 명을 지목한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진 않던 사람들이다.
‘내 기세에 눌린 놈들이지.’
회의실에 들어올 때부터 약하게 [드래곤 피어]를 사용했다.
덕분에 쟁쟁한 S급 헌터들의 이목을 한 번에 사로잡을 수 있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온 압박감이 있기에 그들은 진수가 제법 강한 무력을 지녔으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지금 지목한 세 명은 S급 헌터가 될 정도로 강하기는 하지만 진수를 완전히 압살할 자신은 없는 인물들이었다.
“어디 한 번 그 대단한 S급 헌터의 힘을 보여주시던지. 셋이 동시에 덤벼봐.”
‘하지만 이렇게 하면 나서지 않을 리가 없지.’
아무리 기세에서 눌렸다고 해도 S급 헌터가 셋이다.
WP클랜에 있는 그 누구도 동시에 세 명을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반대로 말하면 세 명이 동시에 덤벼서 진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할 것이다.
“아주 오만한 분이시네.”
“그렇게 바라면 뜨거운 맛을 보여주지.”
“겁이 없는 건지... 눈이 없는 건지....”
그들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지만 어느새 WP클랜원들은 진수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진수에게 반발하려던 자들은 훨씬 많았다.
그런데 그가 세 사람을 지목한 덕분에 그 셋이 전체 의견을 대표하는 꼴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클랜원 세 명이 함께 싸우면 무조건 이기리라는 인식 때문도 있었다.
“어디 누가 눈이 없는 것인지 한 번 가려보자.”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진수.
WP클랜원들은 처음에 풍극안이 진수를 부를 때 존칭을 사용했다는 걸 완전히 잊고 있었다.
* * *
“이럴 수가...!”
회의를 이끌던 여성 헌터, 아멜리는 경악에 찬 말을 뱉었다.
그나마 WP클랜에서도 강자로 꼽히던 그녀이기에 소리라도 낼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했다.
“자, 이제 A급 헌터 말을 경청할 준비들 되셨나?”
진수가 너덜너덜해졌던 한쪽 어깨를 재생시키며 입을 열었다.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았고, 상당히 격렬한 전투를 치렀음에도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스카이피아] 무리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민첩 +2, 체력 +1, 마력 +2, 골드 +10
전혀 지치지 않은 것은 다른 비밀이 있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가 지목한 세 명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내가 왜 몬스터가 없어지면 안 된다고 하는지 어느 정도 납득들을 했을 겁니다. 그렇죠?”
진수는 WP클랜원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기세에서도, 힘에서도 그가 우위에 있었다.
반발을 하려던 세계 평화 지향의 헌터들도 분위기 때문에 나서지 못했다.
‘아까 회의 내용을 [중급 청각]으로 슬쩍 들어보길 잘 했어. 여기 내부에서도 정의를 추구하는 인원이 한 3~40%, 나머지는 이득을 챙기려고 하거나 생각이 반반인 사람들이었지.’
만약 그들이 모두 WP클랜 창설 목적에 부합하는 인물들이었다면 다른 작전을 사용해야 했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호하지만 처음 세계 평화를 주창하던 것에서 변질이 된 덕분에 한결 수월하게 뜻을 이룰 수 있었다.
“내가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게이트 사태 수준으로 몬스터가 넘치지는 않게 조절할 방법을 찾아볼게요. 대신 당분간은 자중들 하고 계시고.... 혹시 도움을 요청하면 긍정적으로 검토나 해줘요.”
결국 WP클랜은 잠시 결정을 미루기로 했다.
몬스터의 둥지를 파괴할지 그대로 둘지.
진수에게는 그들이 당장 박종대의 편에 서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였다.
‘지금까지 그쪽에 붙은 인원만 해도 부담스러우니까....’
마음 같아서는 바로 박종대를 찾아가 따져 묻고 싶었다.
왜 파투스의 편에 섰는지, 몬스터의 둥지 아니, 차원의 축을 파괴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 지 알기나 하는지에 대해서.
하지만 이미 박종대는 순식간에 상당한 규모의 세력을 모았고 그들을 뚫고 박종대에게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급한 불을 끄고 차근차근 사태를 정리하고자 한 것이다.
‘그놈이 이곳저곳에 헛짓거리를 해놓은 덕분에 나한테도 써먹을 수 있는 패가 꽤 생겼거든.’
진수는 WP클랜에서 목적을 이루고 나왔다.
여유 부릴 틈 없이 바로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야했다.
파투스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파투스교가 [아틀란티스] 국을 공격합니다.
-파투스교가 [괴물왕녀] 무리를 공격합니다.
-파투스교가 [망자 군단] 무리를 공격합니다.
그의 눈앞에 안내 메시지가 연달아 나타났다.
저쪽 차원에서 파투스교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자식이... 내가 차원의 축을 지키려고 한다는 걸 눈치 챘나?’
지금까지 진수의 활동은 블루 오아시스를 없애려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파투스의 본 목적인 차원의 축을 지키기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그것을 인지하였는지 저쪽 차원에서 파투스교가 전이자들을 공격한 것이다.
‘아틀란티스나 망자 군단은 워낙 강하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다른 녀석들이 좀 힘들 수도 있겠어.’
전이자 목록을 살피던 그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특수임무 발생
“오, 딱 좋네. 어차피 가려던 곳이랑 임무 내용이 겹치겠어.”
특수임무 내용을 확인한 진수가 만족스럽게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목숨 값
-설인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설인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움직이는 눈사람처럼 생긴 몬스터가 진수의 공격을 받고 사라졌다.
‘설인이면... 이름은 올라프라고 해줄까.’
-설인 [올라프]가 [괴물왕녀] 무리에 합류합니다.
이름을 지어주니 곧장 안내 메시지가 나타났다.
진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특수임무를 확인했다.
-특수임무 : 27:22 동안에 [괴물왕녀] 무리 지원하기 !
-보상 : [괴물왕녀] 무리를 지원한 수준에 따라 차등 지급
처음에는 168:00이던 숫자가 27:22까지 줄어들었다.
‘일주일이면 결판이 난다는 소리겠지....’
168은 일주일을 시간으로 환산한 숫자였다.
매분마다 임무 내용의 숫자가 줄어들었으니 그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 일주일의 의미는 상세 내용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파투스교에게 [괴물왕녀] 무리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환경에서 유리하지만 전력 면에서는 불리합니다. [괴물왕녀] 무리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십시오. 전투의 승패, 당신의 지원이 무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특수임무를 받은 직후 진수는 100골드를 사용했다.
괴물왕녀 무리에 속한 12개체의 전이자들에게 [특성 랜덤 박스]를 하나씩 구입해 보내주었다.
눈에 띄게 대단한 특성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제법 강해졌다.
덕분에 무리 급성장으로 진수에게 힘 7, 민첩 9, 체력 6, 내구 8, 마력 7, 골드 20이 돌아왔다.
100골드 중 40골드는 고돌이에게 사용했다.
녀석에게 [중급 냉기 저항] 특성과 [크리스탈 실드] 기술을 보내줬다.
-고블린 [고돌]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체력 +1, 내구 +2, 마력 +1
[고돌] - 현재 상황 : 이동 중
진수에게 특성과 기술을 받은 직후 고돌이는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27시간 남았네. 이 정도면 꽤 빠듯하겠지만 그래도 생각한대로 움직일 수 있겠다.”
그는 찬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형제를 위하여!”
다수의 헌터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돌진한다.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공포를 이겨내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진수가 있었다.
-퍽! 퍽!
그는 무기도 들지 않고 맨손으로 헌터들을 맞이했다.
적수공권이라고 해도 그 손에 담긴 힘은 어마어마했다.
주먹질 한 방에 몇 명의 사람들이 날아간다.
일부는 다시 몸을 일으켰지만 그에게 직접 타격당한 이는 무조건 전투불능이 되었다.
“저, 저런 괴물이 어디서 나타났지...?”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사내는 오금이 저려옴을 느꼈다.
수없이 많은 헌터들을 상대하고 있는 진수의 목표가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툭
헌터들 중 한 명이 가까스로 공격을 적중시켰다.
하지만 예리한 칼날은 진수의 피부조차 뚫지 못했다.
이제 보통의 쇠로 만든 칼에는 흠집도 나지 않는 육체가 된 것이다.
칼을 찌른 사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어질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쾅!
날파리를 쳐내듯 손등으로 그를 후려쳐버린다.
그 가벼운 손짓에 멀리 날아가 버리는 사내.
“보, 보스! 일단 몸을 피하십시오!”
“저희 형제들이 목숨을 바쳐 시간을 끌겠습니다!”
의자 주위에 있던 이들이 사내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도망치는 순간 이미 형제단은 끝이다. 형제들을 버린 보스를 누가 따르겠나?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는 편이 낫다.”
사내는 바로 러시아 레드 마피아, 형제단의 보스 맥심이었다.
“카라텔들에게서 소식은 없나?”
“아마 가까이에 있던 붉은 바람과 차가운 대지가 곧 올 겁니다...!”
누군가가 맥심의 질문에 답하는 순간, 상당히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후우웅!
곧이어 칼날 같은 바람이 불어오며 진수를 밀어냈다.
아니, 밀어내려 했다.
결과적으로는 그의 머리카락만 휘날리게 되었지만.
“이놈! 거기 멈춰라!”
-콰드드득!
진수가 말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는데 바닥이 솟구치며 그를 완전히 가두어버렸다.
순식간에 흙으로 된 돔이 세워지고 싸늘한 냉기가 흙을 얼렸다.
“오오, 카라텔들께서 오셨다!”
“이제 살았어...!”
형제단의 헌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진수의 전진이 멈추고 그가 흙벽에 갇힌 뒤 두 사람이 나타났다.
공중에서 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사내.
땅 밑에서 솟아오르는 여성.
둘 다 보유한 마력이 대단한 듯했다.
분노한 감정이 마력에 실려 사방으로 넘실댔으니까.
“카라텔들이 잠시 보스 곁을 비운 틈을 타서 습격하다니...! 저열한 자식!”
바람을 다루는 자가 비난의 말을 씹어뱉었다.
“붉은 바람, 그러니까 당신은 내 볼일 끝난 다음에 돌아다니라고 그랬잖아.”
땅 밑에서 나타난 여성은 사내를 나무랐다.
“차가운 대지 너만 급한 거 아니잖아!”
“당신은 그냥 심심해서 자릴 비웠으면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둘은 이미 진수를 제압하기라도 한 듯 떠들었다.
“나 답답한 거 못 참는 거 알잖아?”
“그래도 일의 경중이라는 게....”
-삐이이이-
“음?”
그들이 서로 언성을 높이는데 진수를 가둔 흙 안쪽에서 주전자 끓는 소리 같은 것이 났다.
어느새 흙은 시뻘겋게 달궈졌고 틈 사이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부에서 엄청난 고열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피, 피해...!”
가열되고 있는 돔 주변에 광풍을 일으키고 흙벽을 세운다.
-쾅!
이내 예정된 폭발이 일어나 진수를 가뒀던 흙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열기 때문에 녹아버린 흙은 서로 엉겨 붙어 단단한 돌이 되었다.
돌조각들은 수류탄의 파편처럼 강하게 튀었다.
형제단에서 손꼽히는 강자 둘이 펼친 방어책을 간단하게 뚫고 주위에 있던 헌터들에게 쏟아졌다.
“크악!”
“으윽!”
방어를 위해 펼친 기술이 도리어 역공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다량의 마력을 퍼부은 탓에 카라텔 둘의 속은 진탕이 되었다.
“아니, 다 큰 어른들이 붉은 바람, 차가운 대지 이러고 앉았네. 크흐흐. 중2병이 뒤늦게 너무 세게 온 거 같은데.”
흙을 터트리며 나온 진수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러시아어로 말하면 느낌이 좀 다르지만 인장 반지로 통역해서 들으니 너무 우스웠던 것이다.
“붉은 바람이라.... 이런 느낌인가?”
진수는 [빙의]로 화염강철거미 간장의 힘을 빌려왔다.
동시에 바람생성기를 꺼내 바람을 일으킨다.
[파이어 인챈트]와 바람을 섞으니 붉은 불길이 기류를 타고 흩날리기 시작했다.
-휘이익- 퍼벙, 퍼엉!
그대로 마력으로 만든 불꽃이 붉은 바람에게로 쏟아졌다.
그도 바람을 일으켜 막아보려 했지만 마력량에서 이미 한참 차이가 났다.
온몸이 불탄 채로 날아가 처박혀버리는 붉은 바람.
“부, 붉은 바람...!”
차가운 대지가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놀라 소릴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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