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nel 2

진수는 일시에 돌진하는 놈들의 공격에 상처를 좀 입었지만 결국 큰 피해 없이 처치할 수 있었다.
마지막 한 녀석만 빼고.
“꾸욹...!”
진수의 공격에 오른쪽 다리를 다친 보팔 래빗은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천천히 도망갔다.
도망치는 녀석을 그대로 두고 바닥에 있는 사체를 갈무리하기 시작하는 진수.
“흐흥~”
아주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여유롭게 움직였다.
‘다섯 마리나 만났을 때는 재수 옴 붙었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진수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의 전투 능력이 보팔 래빗 두세 마리 정도를 상대하는 수준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차원 전이의 보상으로 얻은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스스로 다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다섯 마리와 싸워보니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죽일 수 있는 정도였다.
아무리 움직임이 단순하다고 해도 몬스터는 몬스터.
한 마리만 도심에 나타나도 살육을 일으킬 수 있는 녀석을 무려 다섯 마리나 해치웠다.
‘그렇다면 그놈까지 노려볼만하지.’
보팔 래빗의 다리를 벤 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공격이었다.
이 녀석들은 강적을 만나면 구역의 대장에게로 도망치는 습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 구역의 대장이라고 한다면 필드 보스 몬스터일 가능성이 높다.
‘코볼트도 특수개체인 코볼트 소서러를 따로 차원 전이 시킬 수 있었어. 그렇다면 필드 보스도 또 보낼 수 있는지 실험해볼 필요가 있어.’
이 모든 게 차원 전이 특성을 알아가기 위한 안배였던 것이다.
보팔 래빗들의 사체를 모두 갈무리한 진수는 차원 전이시킨 보팔 래빗의 이름을 모르모트라고 지었다.
‘허접한 몬스터기도 하고, 차원 전이 특성을 알아보기 위한 실험 대상이니까.’
보팔 래빗들의 사체부터 전이자 이름까지 다 정리를 마친 진수는 마지막 녀석이 도망간 방향을 보았다.
놈의 다리에서 나온 피가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주고 있었다.
“식은 죽 먹기구만!”
진수는 보팔 래빗이 남긴 흔적을 따라서 뒤를 쫓기 시작했다.
입씨름
녀석이 도망간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대략 5분 정도 빠르게 움직이니 얕은 계곡 같은 지형이 나왔는데 거기에 중형견만 한 토끼 한 마리와 진수로부터 도망친 보팔 래빗이 있었다.
계곡 안쪽엔 크고 작은 굴이 파여 있고 먹다 남은 사체와 뼛조각이 보였다.
그 중에는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해골들도 상당히 많았다.
“꾸욹!”
진수가 몸을 숨긴 채로 안을 살피는데 몸집이 큰 보팔 래빗이 코를 킁킁대더니 그가 숨은 방향으로 짖기 시작했다.
‘이런 개 같은.... 토끼도 후각이 예민하다더니....’
어차피 지형이 기습을 하기에는 받쳐주지 않았기에 검을 뽑아들고 놈을 향해 다가갔다.
-콱!
“어, 어? 뭐하는 거야?”
진수가 놈을 경계하며 접근하는데 녀석이 돌연 부상 입은 보팔 래빗의 목을 물어뜯었다.
“키엑!”
바닥에 흩뿌려지는 피.
덩치가 큰 변종 보팔 래빗은 바닥에 웅덩이진 피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더니 눈에 광기가 돌기 시작했다.
온몸의 근육이 울끈불끈 힘이 들어가고 묘하게 덩치도 커진 듯한 모습이었다.
“꾸워억!”
크게 포효를 하는 변종 보팔 래빗.
놈은 이내 멧돼지처럼 돌진했다.
-파박, 파박, 파박!
경쾌한 발소리, 하지만 그 위압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콰앙!
진수가 몸을 날려 피하자 그대로 계곡 벽면에 놈이 부딪혔는데 그 충돌음이 마치 포격이라도 떨어진 것 같았다.
‘저기에 맞으면 내가 차원 이동하게 생겼는데.’
진수의 이마 위로 식은 땀 한 줄기가 주르륵 흘렀다.
놈은 그가 들어봤던 보팔 래빗 필드 보스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허세 떨기 좋아하는 헌터넷에서도 이런 만렙 토끼가 있다는 이야기는....’
그는 잡념을 이어가지 못했다.
잔뜩 피어오른 먼지구름 속에서 다시 변종 보팔 래빗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흡!”
진수는 다시 한 번 몸을 피하면서 검을 휘둘렀다.
-퍼억
회피와 함께 이루어진 공격이었기에 힘이 많이 실리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기대보다도 훨씬 미미했다.
검이 놈의 두터운 가죽을 겉 부분만 갈라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한 것이다.
‘이 방법으로는 조금 힘들겠는데.’
진수는 자신의 공격이 별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주변을 살펴봤다.
마치 항아리 내부처럼 좁은 입구가 있고 적당한 높이의 벽이 사방을 막고 있는 모양새.
벽면에는 변종 보팔 래빗이 부딪힌 자국으로 가득하다.
진수는 벽면으로 붙어 손으로 가볍게 쓸어보았다.
“꾸욹!”
그새 다시 짓쳐드는 녀석.
진수는 가까스로 놈의 공격을 피했다.
이번에는 멀찍이 피하는 게 아니라 거의 스치듯 움직였다.
자칫하면 한쪽 팔이 으스러질 뻔할 정도로.
-쿠웅...!
지금까지와는 깊이가 다른 묵직한 충돌음.
게다가 흙먼지도 얼마 피어오르지 않았다.
“아프지? 거기, 전체가 바위더라고.”
진수는 계곡 내부에 유독 충돌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위치를 발견하고 손으로 훑어봤다.
겉에 진흙이 좀 묻어 있어서 육안으로 구분은 잘 되지 않지만 촉감으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바위가 박혀 있다는 것을.
“이제 끝을 보자.”
그는 변종 보팔 래빗에게 달려들어서 검을 찔렀다.
어설픈 베기보다 한 점에 집중되는 찌르기가 확실히 깊이 들어갔다.
“꿱! 꾸엑!”
이제야 대미지를 받는지 녀석의 입에서 처음으로 포효가 아닌 비명이 나왔다.
놈의 하얀 털이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꾸욹!”
연달아 공격을 받던 녀석이 순간적으로 진수의 머리를 향해 튀어 올랐다.
역시 토끼답게 엄청난 속도였다.
-휙!
그 찰나에 진수는 본능적으로 변종 보팔 래빗의 공격을 파악하고 재빠르게 피해냈다.
특성 [야성]의 감각이 발휘된 것이다.
일당 헌터였던 진수가 수월하게 전투를 치를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이 놈이 어딜?”
회피 동작 이후에 마치 의도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녀석의 뒷다리를 잡아챈 진수.
그대로 바닥에 있는 힘껏 패대기쳤다.
-퍽!
“켕!”
변종 보팔 래빗은 흰 눈처럼 하얀 배를 제대로 노출했다.
“어디, 토끼 간 좀 보자.”
-푸욱!
진수의 검이 놈의 복부를 꿰뚫었다.
깊게 들어간 검이 가슴팍까지 파고들었지만 피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녀석의 사체 자체가 이 세상에서 씻은 듯 사라졌으니까.
-변종 보팔 래빗 [새초미] 차원 전이 성공.
-첫 임무 달성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새초미]의 특성 중 하나
-임무 달성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골드 +5
차원 전이에 성공했다.
‘뭐야, 이 악취미스러운 이름은.’
마치 요술봉을 휘둘러 변신을 할 것만 같은 이름이었다.
물론 놈이 변신을 하긴 했었다.
‘죽은 보팔 래빗의 피냄새를 맡고 미친 토끼로 변신을 했지....’
[김진수]
힘:4 민첩:7 체력:8 내구:3 마력:5
특성 : [하급 근력] [하급 내구력] [차원 전이] [야성] [절연체] [중급 재생력] [광전사]
기술 : 없음
골드 : 5
[R.I.P.] - 사망자 수 : 1
[고돌] - 현재 상황 : 이송 중
[포세이돈] - 현재 상황 : [수룡의 숨결] 습득 중
[제우스] - 현재 상황 : 마굴에서 휴식 중
[모르모트] - 현재 상황 : 녹색 숲으로 차원 전이
[새초미] - 현재 상황 : 녹색 숲으로 차원 전이
[5/5]
[상점]
진수는 자신의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세 마리의 몬스터와 나란히 두 마리의 토끼 그림이 있다.
터치를 해보니 둘 다 녹색 숲으로 차원 전이가 되었다는 문구가 나온다.
“녀석들, 그래도 같은 종족에 같은 지역이니까 둘이 시너지를 내서 잘 살았으면 좋겠네.”
비록 조금 전까지는 서로 목숨을 노렸지만 이제는 소중한 성장 동력.
진수는 진심으로 녀석들이 잘 커가길 빌었다.
‘그나저나 특수 개체나 필드 보스는 일반 몬스터랑은 또 별개로 취급이 되는 게 맞았어. 그렇다면 앞으로 차원 전이를 시킬 수 있는 종류는 정말 무궁무진하지!’
진수는 이번 토끼 사냥을 통해 알게 된 앞으로의 가능성에 기뻐했다.
‘근데, 이 5/5는 뭐길래.... 아까 분명 임무 달성이라는 메시지가 보였던 거 같은데...?’
그가 상태창 하단에 있는 숫자를 노려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지지직하는 노이즈를 발생시키더니 글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나는 안내 메시지.
-임무 목록 해금
-임무를 받으시겠습니까?
임무.
전이자를 다섯 마리 채웠을 때도 보였던 단어다.
대체 누가 왜 무슨 임무를 준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임무엔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당연하지!”
-임무 : [새초미]의 토끼굴에서 [새초미]의 부하 보팔 래빗 10마리 차원 전이
-보상 : [특성 랜덤 박스]
진수의 대답이 나오자마자 안내 메시지는 임무 내용을 보여줬다.
이어 그가 내용을 모두 읽으니 상태창으로 임무 내용이 들어갔다.
[5/5]라고 쓰여 있던 자리였다.
‘아, 해금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이제 임무 내용을 알려준다는 소리였구나.’
진수는 바뀐 자신의 상태창을 보면서 깨달았다.
‘그나저나 점점 특성 항목이 길어지고 있네.’
벌써 7개나 되는 특성들.
그가 [하급 근력]과 [하급 내구력]을 얻기까지는 굉장한 노력이 동반됐었다.
그마저도 없던 시절엔 상태창에서 볼 것은 오직 능력치뿐이었고.
근육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웨이트 트레이닝과 마력을 담은 몽둥이질을 버텨가며 겨우 하급 특성을 얻었다.
그런데 [차원 전이]가 생긴 이후부터는 그야말로 탄탄대로다.
물론 위험하긴 했지만 몬스터 하나 잡았다고 특성이 생기는 건 말이 안 되는 일.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사기 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만큼 정말 무시무시한 수준이지. 특히 요 [야성]은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정도야.’
능력치만 따져봤을 때, 진수가 코볼트며 보팔 래빗을 사냥할 수 있는 수준이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야성은 본능적으로 적이 어디를 공격할 것인지 그리고 적을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알게 해줬다.
한 마디로 포식자가 될 수 있게 해주는 특성인 것이다.
‘어쩌면 [야성] 하나만으로도 D급 헌터들이랑 비벼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하급, 중급 이렇게 나뉘는 특성이 아니라 더 발전할 여지는 없지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특성이야.’
이어 그의 시선이 옆에 있는 다른 특성들로 향했다.
[절연체], [중급 재생력]은 이미 봤고 새로운 특성 [광전사]가 눈에 띄었다.
‘변종 토끼 녀석이 피 냄새 맡고 커다래졌던 그건가?’
진수는 새초미가 싸우던 모습을 떠올리며 특성의 능력을 유추해봤다.
고통에 둔감해지고 전반적인 신체 능력이 올라간다.
‘덩치도 더 커졌던 것 같고.... 뭐, 이것도 언젠가 쓸 일이 생기겠지. 또 알아? [절연체]처럼 적절한 순간이 올지.’
그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상태창을 닫았다.
자신의 상황을 한 차례 정리했으니 이제 다시 나아갈 시간이다.
계곡 벽면에 뚫려있는 구멍들.
허리를 숙이면 사람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굴도 있었다.
“그래, 일단 들어갈 수는 있는 구멍으로 들어가야지.”
진수는 검을 빼들고 가장 큰 토끼굴로 들어갔다.
“뀌엑!”
좁디좁은 토끼굴에서 한 시간은 돌아다녔을까?
보팔 래빗이 일반 토끼보다 훨씬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방대한 너비의 토끼굴을 탐색하며 체감할 수 있었다.
진수는 이제 아홉 마리째 보팔 래빗을 처치해 차원 전이를 시켰다.
특이한 점은 처음 차원 전이 시켰던 보팔 래빗과는 달리 임무를 받아서 차원 전이 시킨 녀석들은 상태창에 따로 칸을 차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놈들은 자그마한 토끼 모양이 되어서 새초미의 다리 근처에 그려졌다.
‘종류별로 한 마리씩 차원 전이 시킬 수 있다는 가설이 틀린 게 아니라 이번 경우가 특이 케이스인 것 같네.’
아마도 필드 보스였던 새초미는 부하를 부리는 특성이나 기술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 임무에서도 새초미의 부하인 보팔 래빗을 차원 전이 시키라고 했고, 전이된 녀석들도 새초미의 그림에 달라붙은 것이리라.
“이제 하나만 더 잡으면 되는데...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진수가 움직일 수 있는 크기의 통로는 다 뒤져보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보팔 래빗이 보이지 않았다.
남은 것은 겨우 기어서 들어갈 수 있는 구멍들뿐.
‘[야성]이 있으니까 불의의 습격이 있어도 대처가 가능할 거 같긴 한데....’
진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결국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보팔 래빗이 좁은 통로에서 덤비면 한쪽 팔로 목을 감싸 보호하고 나머지 팔로 목숨을 끊는다.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위기 상황에서도 바로 실행할 수 있는 조치를 정해둔 채로 작은 구멍에 들어갔다.
“으... 점점 좁아지는 거 같은데?”
처음엔 팔을 쭉 펼 수 있는 크기였던 통로는 이제 팔꿈치로 기어가야 하는 정도가 됐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지? 라는 생각이 들 즈음, 어두운 굴속에서 붉은 안광을 마주한 진수.
“헛!”
세웠던 계획대로 먼저 목을 한쪽 팔로 감싸며 보호했다.
보팔 래빗은 그를 만나자마자 달려들었고, 그와 동시에 방어에 성공했기에 녀석의 공격은 그의 팔뚝을 갉아먹는 데에 그쳤다.
이어 반격을 하려던 진수의 코로 비릿한 혈향이 파고들었다.
진수는 자신의 내면에서 무언가 흉폭한 자아가 일어나려 하는 것을 느꼈다.
[야성]과는 다른 느낌.
이건....
‘[광전사]다! 자, 잠깐!’
진수는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려 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토끼굴에 들어오기 전에 생각했던 [광전사]를 쓰게 되는 순간.
바로 지금이었다.
보팔 래빗은 그런 상황도 모른 채 키싱구라미처럼 진수의 팔뚝과 얼굴을 야금야금 뜯고 있었고 그러한 행동은 [광전사]의 발동을 더욱 가속화했다.
“임마, 그만해! 자꾸 그러면... 커진다고!”
[광전사]의 효과.
정신이 전투에 최적화된다.
근력, 체력, 내구, 민첩 등의 신체 능력이 강화된다.
고통에 둔감해진다.
회복 속도가 빨라진다.
마비 내성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체구가 커진다.
“억!”
진수는 안 그래도 비좁았던 통로 속에서 덩치가 커지면서 완전히 끼어버렸다.
한쪽 팔을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갑자기 불어난 진수의 모습에 보팔 래빗은 말 그대로 토끼눈이 되었다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녀석의 정열적인 입맞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진수는 이를 까드득 악물었다.
“너만 입 달렸냐? 나도 있다, 이 자식아!”
진수는 [야성]의 감각과 [광전사]의 효과로 보팔 래빗이 달려드는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춰 놈을 마주 물 수 있었다.
‘싸움 수준 실화냐.... 영장류의 싸움이 맞나? 가슴이 울컥해진다.’
토끼와 서로 치악력 대결을 하던 진수는 녀석의 목덜미를 문 입에 힘을 주어 바닥에 짓눌렀다.
[광전사]의 힘 덕분에 수월하게 제압할 수 있었다.
‘끝이다!’
-쾅! 쾅! 쾅!
마치 헤드뱅잉을 하듯 보팔 래빗을 바닥에 수차례 내려친 진수.
목에 담이 올 것만 같았지만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한 헤드뱅잉 끝에 그는 입안에 물려 있던 녀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차원 전이가 된 것이다.
-임무 달성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특성 랜덤 박스
숨을 헐떡이며 토끼굴에 끼여 있는 진수의 눈앞으로 환한 빛과 함께 특성 랜덤 박스가 오픈되기 시작했다.
“으악! 눈뽕!”
진수는 팔로 눈을 가리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며 특성 랜덤 박스가 열리는 것을 보았다.
토끼와 거북이(수정)
-두구두구두구
예전에 들어봤던 빠른 템포의 드럼 소리와 함께 안내 메시지가 나타났다.
-[특성 랜덤 박스] 사용으로 특성 [융합]을 얻었습니다.
‘융합? 무슨 특성인지 감은 잘 안 잡히지만... 제우스가 합체를 좋아할 이름이니까 제우스한테 줘야겠다.’
진수는 전이자 선택창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그의 눈앞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뭐야, 왜 누구한테 줄 건지 물어보질 않지?’
그가 의문을 품는 순간, 안내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융합]의 효과로 [하급 근력]과 [하급 내구력]이 합쳐집니다.
-[하급 전사의 신체] 특성이 생겼습니다.
-[융합]의 효과로 [야성]과 [광전사]가 합쳐집니다.
-[울프헤딘] 특성이 생겼습니다.
주르륵 나타난 내용들에 진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성이 합해졌다는 안내 메시지들이 나오고 [광전사]로 인해 커졌던 몸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니, 나한테 주는 거면 미리 말을 해주라고! 내 건줄 알았으면 네 발로 걷는 게 아니라 포복이라도 해서 더 빨리 잡았지.’
그가 속으로 툴툴대자 다시 안내 메시지가 나타났다.
-앞으로 보상에 적용 대상이 표기됩니다.
“뭐, 뭐야. 내 속마음을 읽고 있어?”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진수.
하지만 이 이후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끄응.... 왠지 감시당하는 기분인데. 그런데 특성이 합쳐지다니, 이런 경우가 있나?”
그는 상태창을 열어 확인해보았다.
[김진수]
힘:4 민첩:7 체력:8 내구:3 마력:5
특성 : [차원 전이] [절연체] [중급 재생력] [융합] [하급 전사의 신체] [울프헤딘]
기술 : 없음
골드 : 5
[R.I.P.] - 사망자 수 : 1
[고돌] - 현재 상황 : 이송 중
[포세이돈] - 현재 상황 : 요정 이끼 섭취 중
[제우스] - 현재 상황 : 과일박쥐와 대치 중
[모르모트] - 현재 상황 : 녹색 숲에서 휴식 중
[새초미] - 현재 상황 : 부하들과 영역 확장 중
-임무 : 없음
[상점]
7개였던 특성이 [융합]을 얻었음에도 오히려 6개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몸에서 느껴지는 힘이 줄어들었냐하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더 힘이 솟는 것 같은데.’
특성이 합쳐지면서 더 좋은 특성이 된 것 같았다.
[하급 근력]과 [하급 내구]가 [하급 전사의 신체]가 되면서 근력, 내구뿐만 아니라 체력, 민첩 등의 전반적인 능력이 올라간 것 같다고 할까.
“근데 울프헤딘은 뭐야? 이건 영 직관적이지 못한데.”
진수는 몸이 다시 줄어든 덕분에 자유로워진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해봤다.
‘울프...헤...딘.... 늑대인간? 베르세르크?’
검색해서 나온 내용은 늑대인간을 부르는 말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오딘의 광전사, 베르세르크라는 자료도 나왔다.
얼추 종합해보면 광전사와 야수를 합쳐놓은 의미 정도로 유추할 수 있었다.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전사의 신체만 보더라도 더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다운그레이드가 되지는 않는 것 같으니까.’
진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토끼굴에서 빠져나왔다.
-우두둑!
오랫동안 굽히고 있던 허리를 스트레칭 해주니 관절이 비명을 지른다.
“꺄악!”
그리고 어디선가 누군가의 비명도 들려왔다.
이 곳은 보팔 래빗 서식 필드.
몬스터 필드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이 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겠지만.
‘아, 다음 임무 받으려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진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쫑긋 세웠다.
멀리서 작게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팔 래빗의 독기 가득한 울음소리, 무언가 묵직한 무기가 땅을 내려치는 소리 등등.
‘그냥 실수로 한 대 맞은 거였나 보네.’
비명 소리가 더 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싸움이 이어지는 듯하여 그냥 무시하고 임무나 받기로 했다.
‘야, 임무 줘, 임무! 듣고 있지? 임무 받을게!’
진수는 아까 자신의 생각을 읽고 반응을 했던 걸 떠올리며 속으로 말을 걸었다.
-임무를 받으시겠습니까?
그의 생각이 맞았는지 안내 메시지는 진수에게 임무를 받을지 물어왔다.
“어. 이번엔 좀 편하고 보상 좋은 걸로 부탁해.”
진수는 3인분 같은 2인분을 시키는 태도로 대답했다.
-임무 : [손재주] 특성을 지닌 몬스터 차원 전이
-보상 : 차원 전이된 몬스터의 특성 중 하나
곧이어 나타난 임무 내용.
진수는 안내 메시지를 읽으며 묘한 표정과 함께 턱을 긁적거렸다.
임무 내용이 상당히 난해했으니까.
‘아, 빌어먹을. [손재주]를 가지고 있는 몬스터가 뭔지 내가 어떻게 알아.’
핸드폰으로 다시 검색을 해봤지만 몬스터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까지 알고 있는 경우는 없었다.
애초에 몬스터도 헌터들과 같이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검색 결과에는 몬스터 손재주 수준.jpg 이라던지 그런 손재주면 몬스터라고 봐도 되지 않냐 와 같은 농담조의 내용들뿐이었다.
“하아, 이러면 곤란한데....”
진수는 갑자기 찾아온 난관에 머리를 쓸어 넘겼다.
“꺅!”
그 순간 다시 들려온 비명 소리.
조금 전에 비명이 터져 나온 쪽이었다.
‘곤란한 상황인 건가? 일단 한 번 가보자. 봐서 별 문제 없으면 내버려두지 뭐.’
힘도 생겼고 지금 당장 여유도 있다.
그런데도 누군가 위협을 받고 있는데 모르는 척 할 정도로 그가 삭막한 사람은 아니었다.
‘[차원 전이]가 생기기 전이었다면 눈을 돌렸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선함은 여유로부터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차원 전이를 얻고 능력을 가지게 된 진수는 심적으로 대단한 여유가 생겼다.
그것은 마음가짐에서 시작해 겉으로 보이는 태도, 표정, 아우라로 드러났다.
예전엔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인상이었는지 지금 그의 모습은 어깨를 펴고 얼굴도 밝았다.
덕분에 소심해보이던 얼굴도 부드러운 미남형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 자신이 인식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휘익- 쿵!
진수가 싸우는 소리가 퍼지고 있는 곳에 도착하니 그곳엔 한 여성과 보팔 래빗 한 마리가 있었다.
여성은 여리여리한 외형에 어울리지 않는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힘이 부족해서 오히려 도끼에 휘둘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가뜩이나 민첩한 움직임을 가지고 있는 보팔 래빗이다.
양손으로 힘겹게 찍어대는 도끼질에 당할 리가 만무했다.
“꾸욹!”
보팔 래빗은 여성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는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뛰어올랐다.
“어어?”
진수는 도끼를 회수조차 하지 못하고 무방비가 된 그녀를 보며 도우려 했지만 이미 상황은 늦었다.
보팔 래빗이 여성의 목덜미를 깨물어버린 것이다.
“꺅!”
예의 그 비명 소리가 또 나왔다.
하지만 토끼가 떨어져 나온 곳에는 그저 조금 불그스름한 이빨 자국이 났을 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아 있었다.
짐작해보건대, 방어 계열의 특성이나 기술이 있는 것 같았다.
공격은 느려서 몬스터에게 스치지도 않고, 방어력이 좋아서 타격을 입지 않는다.
그야말로 토끼와 거북이의 모양새였다.
-부웅~ 부웅~ 쿵!
그렇게 지루한 전투가 이어졌고, 진수는 이걸 도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암.”
영 결착이 나지 않는 꼴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하품을 해버린 진수.
보팔 래빗은 이 단단한 먹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또 다른 적이 나타난 걸 발견했다.
“꿁!”
여성과 진수를 번갈아 보던 녀석은 짧게 짖고는 미련 없이 뒤로 돌아 도망 가버렸다.
“앗! 어디 가!”
도끼를 든 여성은 한참 싸우던 대상이 꽁무니를 빼버리자 당황하며 외쳤다.
그리고 이내 보팔 래빗이 시선을 돌렸던 쪽을 돌아보았다.
어색한 자세로 서있는 진수를 발견한 그녀.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가를 계산하는 듯했다.
동작대로 생각하는 것도 느릿한지 상황 파악에 시간이 걸리는 모습이었다.
“아!”
몇 초가 더 지나서야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이해를 한 듯 탄성을 낸다.
이내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여성.
그녀는 진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저기요!”
짐짓 화가 난 척을 하며 진수를 불렀다.
뭔가 노리는 것이 있어 보이는 과장된 표정과 몸짓.
진수는 옛날에 고아원에서 같이 있던 동생들이 생각났다.
저렇게 나올 때면 꼭 억지를 부려 간식을 더 달라거나 놀아달라고 칭얼거렸다.
“그쪽 때문에 다 잡은 몬스터 놓쳤잖아요!”
“다 잡은...이요? 보팔 래빗 털 한 가닥 못 건드리는 것 같던데요.”
진수는 일부러 더 짓궂게 대답했다.
왠지 어린 동생을 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여성.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싸우는 걸 보고 있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아, 아니거든요! 이게 다 방심을 유도하는 계획이었다고요!”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을 가지고 있긴 하죠. 얻어맞기 전까지는.”
“누가 얻어맞았다고 그래요? 상처 하나 없잖아요!”
“상처가 안 생겼다고 안 맞은 건 아니잖아요? 그냥 목숨을 건진 것뿐이지.”
“으으....”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진수의 말에 그녀는 결국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제 슬슬 1페이즈가 끝났으니 2페이즈로 넘어갈 타이밍인데.’
“아, 몰라! 어쨌든 그쪽 때문에 놓쳤으니까 책임져요!”
자신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모습에 진수는 피식 웃었다.
“어어? 왜 웃어요! 아 빨리 도와줘!”
곧 있으면 바닥에 뒹굴 기세로 땡깡을 부리는 그녀.
억지 다음은 땡깡. 2페이즈의 패턴이다.
‘다 큰 어른이 어린애처럼 구는 걸 보는 것도 꽤 곤욕스럽네.’
옛날 생각이 나는 익숙한 행동에 툭툭 건드려봤지만 정말로 나잇값 못하는 모습이 나오니 조금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방방 뛰며 보팔 래빗을 잡는 걸 도와달라고 하는 여성.
진수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
“그래요, 그래. 알겠으니까 이제 좀 진정해요.”
우선 떼를 쓰는 것부터 멈춰 세웠다.
“보팔 래빗을 왜 잡으려고 하는지, 뭐가 필요한 건지를 먼저 듣고 도와줄게요.”
진수는 그녀를 돕기로 했다.
그건 그녀가 귀염성 있는 예쁘장한 얼굴을 지녔기 때문도, 그녀의 억지 주장에 넘어갔기 때문도 아니었다.
이제는 못 본지 5년은 족히 된 고아원의 동생들이 그녀의 모습에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여성이 이 보팔 래빗 서식 필드에서 능력에 맞지도 않는 도끼를 휘두르며 사냥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도 있었다.
보팔 래빗에게 상처조차 나지 않는 방어력이라면 상당히 괜찮은 특성이나 기술이다.
그렇다면 굳이 도끼를 들고 괜한 고생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부러 연약함을 강조할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가 맞다면... 어쩌면 서로 윈-윈이 될 수도 있을 거야.’
“정말요?”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어떤 헌터가 일면식도 없는 다른 허접한 헌터를 돕겠다고 나설까.
그녀로서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음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진수가 도와준다고 하자 기쁨 반 걱정 반의 얼굴이 되었다.
“제가 왜 보팔 래빗을 잡으려고 하냐면요....”
자신이 보팔 래빗을 잡으려는 이유를 조잘대기 시작하는 여성.
하지만 진수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말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슬쩍슬쩍 움직일 때 드러나는 팔뚝이나 발목 부근.
그는 옷 아래 감춰진 부위에 보이는 흔적을 아닌 척 하며 살펴보았다.
별주부전(수정)
“와아! 정말로 F급 헌터시라고요?”
도끼를 들고 있던 거북이, 김하연은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그녀가 한참동안 실랑이 했던 보팔 래빗을 진수가 꽤 힘겹지만 큰 부상 없이 처치했기 때문이다.
“E급으로 진급 신청 하셔도 되는 거 아니에요? 저 토끼 엄청 빠르던데 공격도 다 막아내시고....”
물개박수를 치면서 놀라는 그녀의 모습에 진수는 머쓱해졌다.
일부러 힘을 감추면서 천천히 잡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반응을 하니 몇 대 맞기라도 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보팔 래빗 간도 챙기셨으니까 목적 달성 하셨죠?”
진수는 김하연에게 보팔 래빗의 간을 건넸다.
그녀가 보팔 래빗을 잡으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 간이었다.
어디서 퍼진 민간요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난폭한 토끼들의 간이 치료제로 사용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하연은 가족의 병을 치료하는 데에 필요해서 집에서 도끼를 챙겨서 나왔다고 했다.
“정말 감사해요! 솔직히 아까는 제가 고집을 부렸어요. 혼자였다면 아마 오늘 내내 도끼를 휘둘렀어도 토끼 한 마리 못 잡았을 거예요.”
그녀는 필요하던 것이 손에 들어오자 솔직해졌다.
“제가 이 은혜는 꼭 갚고 싶은데... 저희 집으로 같이 가시겠어요?”
갑작스러운 제안.
‘처음 보는 남정네를 어떻게 믿고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하는 거지?’
진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처럼 굴었다.
“이거 보이시죠? 사실 이 도끼도 아이템이거든요. 저희 집이 꽤 잘 살아요. 같이 가시면 분명히 부모님이 보상 해주실 거예요!”
김하연은 도끼를 들어 보이며 흔들었다.
이내 그 무게를 못 이겨 몸이 휘청거렸지만.
‘저 도끼가 아이템이었단 말이야...?’
아이템이라는 말에 진수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 그러면 집까지 가는 길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데려다드릴까요?”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부모님은 필요 없다고 하셨는데 제가 이거 몰래 들고 나온 거거든요~”
“아, 배고파! 저녁으로 맛있는 거 먹을까요?”
“도착해서 너무 놀라지 마세요!”
김하연은 진수에 대한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것인지 쉴 새 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 꽤나 멀었기에 별 쓸 데 없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는데, 아직 인가가 나오지 않는 청계산 초입에서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순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멈추지 않던 그녀의 입도 굳게 다물어졌다.
“이야, 그림 좋은데?”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아, 형님! 그게 언제 적 멘트입니까. 저기 가시나 어이없어 하는 거 안 보이십니까?”
곧이어 앞을 가로막는 세 명의 사람들.
그들은 모두 날붙이나 몽둥이 따위를 손에 들고 있었다.
“거, 헌터 친구. 오늘 여기서 번 마석이랑 부산물들 내려놓고 갑시다. 이런 게 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라고.”
형님이라 불린 사내의 말에 진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초짜 헌터들을 털어먹는 놈들이 있다더니....’
청계산은 이제 전투 헌터가 되려는 이들이 많이 찾는 필드다.
보팔 래빗은 움직임이 빠르지만 워낙 패턴이 단조로워서 전투 경험도 쌓고 마석을 얻기도 쉬운 몬스터였으니까.
잔챙이 헌터들이 많이 모이면서 이 근방에는 몬스터를 잡는 헌터만 오는 게 아니었다.
초보 헌터들을 사냥하는 악질 헌터들도 무리를 이루어서 초보 헌터들의 장비, 그들의 수확물을 빼앗기 위해 몰려들었다.
지금 진수를 둘러싼 이들처럼.
-푹
진수가 허리춤의 검에 손을 뻗는 순간, 옆구리로 무언가가 쑤욱 찔러 들어왔다.
“후우....”
크지 않은 통증, 하지만 아니길 바랐던 일이 일어난 안타까움에 진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옆에 있던 김하연이 기다란 침을 찔러 넣은 것이다.
“미, 미안해요! 제가 살려면 어쩔 수가....”
진수가 그녀를 돕겠다고 했을 때, 그녀의 얼굴에 드러났던 걱정스러운 표정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호의를 악의로 돌려주게 될 예정이었으니까.
김하연은 양손을 벌벌 떨면서 뒷걸음질 쳤다.
“크하하하! 김하연이, 그렇게 못하겠다고 하더니 아주 제대로 찔렀네! 이봐, 친구. 그거 마비침이야. 호랑이도 쓰러지는 물건이라고. 목숨 아까운 줄 알면 반항하지 않는 게 좋을 걸?”
아마도 이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걸걸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진수는 옆구리에 박힌 침을 뽑아냈지만 이미 몸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토끼와 거북이가 아니라 별주부전이었네....’
“겨우... F급 헌터 잡겠다고... 이런 짓까지...?”
진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사람을 속여서 유인하고, 네 명이 포위하는 데다 마비침까지 사용.
그의 말에 악질 헌터들의 대장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안전제일이라고. 흐흐, 그리고 애초에 사람한테 쓰는 용으로만 준비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몬스터 포획도 상당히 쏠쏠한 돈벌이거든.”
대장은 말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덕분에 진수는 쓰러지기 전에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휴우, 완전히 마비 돼서 쓰러지는 연기까지 할 뻔 했잖아.”
몸이 휘청거리며 위태로워 보이던 그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꼿꼿이 섰다.
살짝 풀린 듯한 눈빛도 명정해진 것이, 처음부터 마비에 걸리지 않았다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광전사]의 능력이 포함된 [울프헤딘] 특성.
마찬가지로 마비 내성 효과가 있었다.
“이 쓰레기 같은 놈들, 사실 이미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지.”
진수는 이미 헌터넷에서 이 근방에 대한 정보를 찾으며 초짜 헌터들에게 장비와 마석 등을 강탈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온라인에는 그 수법부터 조심해야 하는 점까지 많이 퍼져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수가 일부러 김하연의 꾐에 넘어간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요즈음 이들이 몬스터를 생포하여 팔아넘기는 일도 함께 하고 있다는 점.
손쉽게 새로운 차원 전이 대상을 찾아낼 수 있겠다는 기대였다.
두 번째는 김하연에게서 볼 수 있는 폭행의 흔적들이었다.
고아원 동생들을 떠올리게 하는 그녀는 옷에 가려져 잘 안 보이는 목덜미, 팔뚝 같은 곳에 멍이나 상처가 있었다.
김하연은 그 흔적들이 잘 보이지 않게 하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진수는 오히려 그 덕분에 상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동생들이 어디서 다치고 오면 하던 행동과 비슷했으니까.
방어 능력이 있는 그녀에게 상처가 남을 정도면 상당히 수위가 높은 폭력이 자행됐을 것이다.
김하연의 태도나 표정, 몸에 있는 흔적까지 종합해봤을 때, 아마 폭행과 협박 등에 못 이겨 동조를 하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데에서 F, E급 헌터들에게 강도짓을 하는 녀석들의 수준은 끽해야 E급 정도다.
D급만 돼도 이런 자잘한 짓을 하는 것보다 훨씬 큰돈을 만질 수 있으니까.
다시 말해 [야성]을 가지고 있던 때의 진수도 이 정도 헌터들은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오늘 모두 손 씻게 해줄게.”
-스릉
진수가 검을 뽑아 들었다.
“마, 마비를 어떻게...? 김하연! 이놈 F급 맞아?”
당황해서 소리치는 사내에게 김하연은 겁먹은 듯 움츠리며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였다.
“흐, 흐흐.... 어떻게 [마비 저항] 같은 특성이라도 갖고 있었나보네. 시벌롬이 사람 쫄게 만들고 있어!”
그는 진수의 헌터 등급을 알고 나니 자신감이 생긴 듯했다.
이내 김하연을 향해 손을 뻗자 그녀가 가지고 있던 도끼가 대장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척!
그의 손아귀에 자석처럼 달라붙는 도끼.
아이템이라더니 그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크흐흐. 어이, 애송이. 이게 바로 아이템이라는 거야. 네 몸뚱아리에 두르고 있는 싸구려 장비들이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핫!”
-휘리릭!
대장은 말을 마치자마자 짧은 기합과 함께 도끼를 냅다 던졌다.
도끼는 허공을 가르며 쏜살같이 진수를 향해 날아왔다.
-캉!
진수는 검을 들어 도끼를 막았지만 급히 상체를 숙이며 회피 동작을 취해야 했다.
그의 검이 두 동강 나면서 도끼를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 도끼가 가진 능력 중에 날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는 듯했다.
“차원이 다르다고 했지? 그리고 재밌는 걸 보여주지.”
자신의 공격에 진수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듯하자 신이 난 그는 진수의 뒤로 떨어진 도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다시 회수가 되는 도끼.
“나한테 귀속이 돼서 내 손이 잘리지 않는 한 언제든 이렇게 회수할 수가 있다고. 크하하하! 제법 실력이 있다고 우쭐했나본데, 잘못 걸렸어! 얘들아, 조져버려!”
그는 진수의 뒤로 둘러싸고 있던 셋에게 명령했다.
그들은 각자 들고 있는 무기를 진수에게 겨누며 천천히 접근했다.
앞에는 도끼를 든 두목, 뒤에는 잔챙이 셋.
진수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사방을 훑었다.
마치 사냥을 하는 맹수의 눈빛이었다.
“잘못 걸리긴 했네.”
먼저 움직인 것은 진수였다.
그는 슬금슬금 다가오는 부하들 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놈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F급을 아득히 넘어서는 속도였다.
그 신속함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녀석의 어깨에 반으로 잘린 검을 내려찍었다.
끝이 뭉뚝해진 덕분에 더욱 큰 고통을 줄 수 있었다.
“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는 사내.
진수는 아랑곳 않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을 빼앗았다.
곧장 비명을 지르는 남자의 허벅지를 찌르고 복부를 차 나머지 부하들을 향해 밀친다.
“으어어.”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료의 모습에 완전히 굳어버린 두 명.
전투가 시작된 후 진수의 분위기는 마치 한 마리의 야수 같았다.
진수는 그들의 모습을 비웃다가 잽싸게 뒤로 한 바퀴 굴렀다.
-휘리릭!
그의 뒤에서 두목이 도끼를 투척한 것이다.
마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듯 본능적인 감각으로 공격을 피한 진수.
무조건 맞췄다고 생각했던 두목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너, 실수했어.”
짐승이 으르렁대는 것처럼 낮게 읊조린 진수는 곧장 그에게 달려들었다.
급하게 도끼를 향해 손을 뻗어보았지만 그보다 진수가 빨랐다.
-퍽, 퍽!
자신을 막아보려고 내민 손을 먼저 후려치고 뒤이어 도끼를 향해 뻗은 손까지.
두 개의 살덩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으아아악!”
-투욱
[울프헤딘]의 영향일까?
진수는 손속에 사정을 일절 두지 않았다.
피가 왈칵 나오는 자신의 두 손목을 보며 비명을 지르는 두목.
그리고 회수되던 도끼는 힘을 잃고 지면으로 추락했다.
“아, 너는 손을 못 씻겠구나.”
진수가 그를 보며 말했다.
* * *
악질 헌터들의 대장을 제압하자 나머지 부하들은 전의를 잃고 항복했다.
진수는 그들 일당을 모두 포박하고 헌터범죄전담기관에 신고했다.
“자, 이제 노력의 결실을 수확해볼까. 너희 포획해놓은 몬스터들 어디 있어?”
그의 가장 큰 목적은 역시 몬스터였다.
헌터범죄전담기관에서 신고를 받고 오기 전에 위치를 파악해둬야 했다.
“저, 저기 큰 나무둥치 뒤쪽으로 굴이 있습니다.”
“야 이 병신아! 그걸 말해주면 어떡해!”
“너처럼 손목 잘리느니 협조 하는 게 낫지, 모자란 새끼야!”
그들은 그리 유대가 끈끈하지는 않았는지 자기네끼리 물어뜯기 시작했다.
진수는 그들이 서로 싸우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부하 한 놈이 말한 굴로 향했다.
거기엔 과연 여러 개의 철창이 있었고 보팔 래빗부터 시작해서 고블린, 코볼트 등의 수준 낮은 몬스터들이 몇 있었다.
‘그래도 코볼트 서식 필드를 다시 갈 필요는 없어졌네.’
굴속을 쭉 살피며 수확이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하던 진수.
시큰둥하게 마지막 우리를 보았는데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니, 얠 어떻게 잡았지?”
그곳엔 진수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수준의 몬스터가 있었다.
특급이라니
보석과 광물을 좋아하는 난쟁이.
타고난 장인으로 세공부터 대장일까지 잘 하는 이종족.
판타지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존재.
바로 드워프다.
그리고 게이트가 열린 지구에도 드워프가 생겼다.
다만 판타지 세상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조금 다른 놈들이었다.
이종족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지성이 부족하고 육식을 즐긴다.
하지만 스스로 무기를 만들어내고 또 잘 다루었기에 신체 능력에 비해서 상대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몬스터.
땅딸막한 키에 비해 힘이 강해서 예리한 도구로 수많은 헌터의 발목을 끊어낸 녀석들이다.
“와, 저놈들이 무슨 수로 드워프를 포획했지?”
그런 악명 높은 몬스터가 우리에 갇혀 있었다.
‘하, 이걸 그냥 내다 팔면 돈 깨나 버는 건데....’
진수는 산 채로 그를 노려보는 드워프의 모습에 잠시 고민을 했다.
하지만 몬스터 중에서 [손재주] 특성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은 녀석이 뭐냐고 한다면 단연 드워프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임무를 달성할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돈이 다 떨어져 가고 있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진수는 우리 속에 있는 드워프와 코볼트를 처치했다.
-코볼트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코볼트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드워프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드워프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임무 달성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드워프 [이름 없음]의 특성 중 하나
“캬, 이 맛이야!”
진수는 연달아 나타나는 안내 메시지를 보았다.
실질적으로 당장 득이 되는 내용은 하나뿐이었지만 차원 전이를 시킨 몬스터들이 앞으로 계속 보상을 보내올 것이다.
“코볼트는 돈뭉치의 뜻을 이어 받는 느낌으로 돈다발이라고 하자. 드워프는 역시... 헤파이스토스로 해야겠지?”
이제는 수월하게 이름을 짓는다.
올림포스 신들에게서 딴 작명을 이어가려고 하니 큰 어려움이 줄어든 것이다.
[김진수]
힘:4 민첩:7 체력:8 내구:3 마력:5
특성 : [차원 전이] [절연체] [중급 재생력] [융합] [하급 전사의 신체] [울프헤딘] [특급 공구 숙련]
기술 : 없음
골드 : 5
[R.I.P.] - 사망자 수 : 1
[고돌] - 현재 상황 : 도시 카토에 갇힘
[포세이돈] - 현재 상황 : 호수 슬라임과 대치 중
[제우스] - 현재 상황 : 마굴에서 휴식
[모르모트] - 현재 상황 : 녹색 숲 탐색 중
[새초미] - 현재 상황 : 부하들과 영역 확장 중
[헤파이스토스] - 현재 상황 : 불의 산으로 차원 전이
[돈다발] - 현재 상황 : 사르 평야로 차원 전이
-임무 : 없음
[상점]
“헉!”
작명을 끝내고 임무 완수 보상을 확인하려 상태창을 연 진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특성 목록 끝에 있는 [특급 공구 숙련] 때문이었다.
‘특급이라니...?’
[하급 근력]이나 [중급 재생력]과 같은 특성들은 등급이 나눠져 있다.
많이 활용할수록 점차 등급이 올라가긴 하지만 그에 들어가는 노력이 엄청 필요하다.
하급 특성이라면 평생에 걸쳐서 상급까지 올리는 일도 드물 정도.
이 등급 체계는 하급-중급-상급-최상급-특급-완벽 순서로 올라간다고 알려져 있다.
특급이면 완벽의 바로 아래 단계.
등급의 뒤에 붙은 요소를 거의 귀신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등급이었다.
“근데 왜 하필 공구 숙련이야...!”
검술 혹은 검 숙련이었으면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칼잡이 헌터가 됐을 것이다.
검을 쓰는 헌터는 일단 인기가 많아서 전투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헌터 학원에서 강사로 모시기도 하고 개인 방송으로 검을 사용하는 묘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근력 같은 신체 능력 특성이 특급이었으면 그것 하나로 능력치를 무시하는 강자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진수가 얻은 것은 공구 숙련.
삽, 몽키 스패너, 빠루, 망치 등을 잘 다루게 되는 것이다.
‘어디 가서 망치의 신이라고 하면 아주 망신이지....’
분명 특급 특성이면 좋은 것이 맞는데 왠지 모르게 머리가 아파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진수가 잠시 기쁨과 아쉬움 사이에 있는데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몇 대의 차량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아, 왔나?”
진수는 굴에서 나가 악질 헌터들을 포박해놓은 곳으로 갔다.
녀석들이 갖고 있던 무기는 모두 한 데 모아놨고, 혹시 몰라서 두목의 양손도 같이 두었다.
두목과 그 부하들은 아직도 서로 으르렁 대고 있었는데 차량들이 오는 소리가 들려오자 점점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헌터범죄전담기관의 명성 덕분이었다.
등급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는 능력을 지닌 헌터들.
게이트가 발생한 이후로 헌터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자연히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헌터도 많아졌다.
이에 대한민국에서는 헌터범죄전담기관을 창설하게 된다.
모두가 헌터로 이루어진 이 기관은 헌터 범죄자들에게 철퇴를 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헌터들이 자신의 능력을 악용하여 범죄를 저지를 경우에 그 여파가 크기 때문이었다.
또한 현 기관장이 공명정대하기로 유명한 헌터였기에 아직까지는 부패와는 거리가 멀어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기관으로 우체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기도 했다.
-끼익!
호송 차량 다섯 대와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달려와 포박되어 있는 헌터들 앞에 멈췄다.
“김진수 헌터?”
승용차에서 내린 젊은 남성이 진수를 향해 다가왔다.
180은 훨씬 넘어 보이는 키, 탄탄해 보이는 몸.
어두운 톤의 피부는 더욱 건강해 보이게 해줄 법도 했지만, 눈 밑의 짙은 다크서클이 그의 전반적인 인상을 피로해보이게 만들었다.
“반갑습니다. 수사관 박철준입니다.”
그는 인상에 맞게 살짝 갈라지는 허스키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네, 기관에 신고한 김진수입니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가볍게 통성명을 한 박철준은 오른손을 들어 진수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뭐지?’
그의 모습에 진수가 의문을 품는 사이, 그는 진수와 포박되어 있는 자들을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나서 바닥과 주변을 살펴보았는데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흔적들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음, 음. 알겠습니다. 얼추 신고하신 내용과 들어맞는군요.”
박철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같이 온 헌터범죄전담기관의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지시를 내렸다.
“A조는 거기 포박된 사람들 수송 차량에 한 명씩 태우고. B조! 저기 나무둥치 뒤쪽에 뭐 있는지 찾아봐. 이놈들 그쪽에서 기어 나왔네.”
“헛?”
진수는 포획되어 있는 몬스터를 자신이 내다 팔기 위해서 신고할 때 일부러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박철준이라는 사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대략적인 위치를 지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놀란 진수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냈다.
“팀장님! 여기 이 손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딴 것들 챙겨가서 뭐하게? 몬스터 밥 될 수 있으니까 소각해버려.”
진수가 혹시 몰라서 모아뒀던 두목의 양손이 새카만 재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에 두목은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어 수송 차량에 몸을 실었다.
“김진수 헌터. 등록된 정보를 보니까 F급이네요. 그런데 싸우는 실력은... D급이라고 해도 충분하겠어.”
박철준 수사관은 진수를 보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진수는 그가 대체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특성이나 기술을 더 얻은 모양인데 진급 신청 해봐요. 내가 장담하는데 E급으로 올라가는 건 문제도 아닐 테니까.”
“아, 예.”
“그리고... 범죄자 잡느라 무기도 잃으셨는데 뭐라도 챙기셔야지. 이거 가져가세요.”
-휘익
박철준은 두목의 도끼를 가볍게 들어 진수에게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든 진수.
“이놈들이 요즘 이리저리 초보 헌터들도 건드리고... 어디 연구소랑도 엮여있는 거 같던데 덕분에 일에 진척이 좀 있겠네요. 고맙게 됐어요. 아, 이거 제 명함입니다. 혹시라도 헌터 범죄 관련된 건 있으면 연락주세요.”
그는 그렇게 감사 인사와 명함을 남기고는 인원을 정리해서 떠났다.
이제 남은 것은 진수와 범죄자 헌터 두목의 양손으로 만든 숯뿐이었다.
‘기관 수사관이 다르긴 다르구나...! 특성이나 기술도 아니고 눈썰미로 굴까지 찾아내다니.’
진수가 어안이 벙벙한 상태가 된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물론 몬스터들을 잃어서 돈이 날아간 것도 원인 중 하나였지만 말이다.
저 정도 실력이라면 데려간 범죄 헌터들을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헌터들의 범죄는 법도 따로 제정되었고 처벌도 무겁다.
게다가 수사에 온갖 특성과 기술을 활용하기에 사실관계를 철저하게 파악해서 적절한 처벌을 할 것이다.
특히나 협박과 폭력을 써가면서 사람을 부리고, 초보 헌터들에게 강도짓을 한 두목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김하연도... 안타깝지만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지. 아무리 강요받았다고 해도 남한테 해를 끼친 건 사실이니까.’
진수는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게 떠나가는 수송 차량들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모든 정황을 확인하고 나면 그래도 적극적으로 범죄에 가담한 이들보다는 적은 처벌을 받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휙, 휙!
상념을 떠올리던 진수는 자신이 스스로도 모르게 도끼를 아주 가볍게, 그리고 능숙하게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하연이 아주 힘겹게 쓰던 도끼였지만 그의 손에서는 마치 장난감처럼 자유롭게 움직였다.
비유하자면 검술의 달인이 검을 자신의 수족처럼 다루는 듯한 모습이었다.
“뭐야? 분명 묵직하긴 한데....”
근력에 의해 편하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익숙함? 요령?
손이 저절로 적절한 무게중심을 찾고 도끼 자체의 무게를 어떻게 활용하면 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진수는 자신의 손에 들린 도끼를 보았다.
장작을 패는 도끼보다는 짧지만 양손으로도 휘두를 수 있는 정도의 크기는 됐다.
두목이 사용했던 것처럼 투척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고, 한손, 양손 모두 활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하지만 도끼날이 아주 큰 편은 아니었기에 메인 장비로 쓰기에는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헌터용 검을 반으로 갈라버릴 정도의 위력이니까 당분간은 주력 무기로 쓸 수밖에 없겠네.’
도끼의 손잡이를 살펴보던 그는 타원형으로 움푹 들어간 부분을 발견했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에 안에는 복잡한 패턴이 그려져 있었다.
진수는 범죄 헌터 두목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한테 귀속이 돼서 내 손이 잘리지 않는 한 언제든 이렇게 회수할 수가 있다고.’
진수는 그 오목한 위치에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붉은 빛이 복잡한 패턴을 따라 밝혀지다 이내....
-푹!
작은 침이 나와 그의 엄지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몇 방울의 피가 송골송골 맺히더니 도끼 손잡이에 있는 패턴에 스며들었다.
-우웅, 우웅
도끼 전체가 두 차례 진동을 하더니 진동도, 빛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진수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아이템이 자신에게 귀속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쓰기에도 좋고. 맘에 드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부웅 붕-
‘평소에 소지하고 다닐 수 있게 커버 같은 걸 좀 구비해야겠네. 참, 그러고 보니 아직 다음 임무를 안 받았지?’
새로운 무기를 살피고 나자 아직 임무를 받지 않은 상태라는 게 떠오른 진수.힘:6 민첩:8 체력:10 내구:5 마력:6
특성 : [차원 전이] [절연체] [중급 재생력] [융합] [하급 전사의 신체] [울프헤딘] [특급 공구 숙련]
기술 : [도깨비불]
골드 : 5
[R.I.P.] - 사망자 수 : 1
[고돌] - 현재 상황 : 카토 검투장에서 훈련 받는 중
[포세이돈] - 현재 상황 : 요정의 호수 탐색 중
[제우스] - 현재 상황 : 마굴에서 휴식 중
[모르모트] - 현재 상황 : 녹색 숲 탐색 중
[새초미] - 현재 상황 : 녹색 숲 거주 영역 구축 중
[헤파이스토스] - 현재 상황 : 불의 산 동굴 탐색 중
[돈다발] - 현재 상황 : 사르 평야 탐색 중
강철거미 [이름 없음] - 현재 상황 : 그림자 숲으로 차원 전이
[간장] - 현재 상황 : 죽음의 산맥으로 차원 전이
[막야] - 현재 상황 : 죽음의 산맥으로 차원 전이
-임무 : 없음
[상점]
그대로 숨을 가다듬으며 상태창을 확인해봤다.
벌써 10마리나 되는 전이자들.
‘이름이 간장과 막야라.... 특징에 맞게 잘 들어가긴 했는데, 처음부터 이름이 있는 놈들이랑 없는 놈들의 차이는 뭐지?’
진수는 고돌, 새초미, 간장, 막야를 보았다.
하지만 굉장히 인간적인 작명이라는 것 외에는 상태창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유추하는 것을 포기하고 더 아래를 보니 임무 항목이 보인다.
‘임무 달성이 됐는데 왜 어느 전이자한테 특성을 줄 건지 안 물어보지...? 아, 몰라. 일단 나부터 좀 챙기자.’
완전히 녹초가 된 그는 강철거미의 이름을 아라크네로 짓고 상태창을 닫았다.
-드워프 [헤파이스토스]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체력 +1
헥헥대던 진수는 보상으로 체력을 받으며 순식간에 회복이 되었다.
“오, 운이 좋군.”
그러나 진수의 운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융합]의 효과로 [무리] 특성과 전이자 목록 기능이 합쳐집니다.
무리
-전이자들을 무리 단위로 관리합니다.
-무리를 이루게 될 경우 힘과 성장 속도가 강화됩니다.
-변종 보팔 래빗 [새초미]와 보팔 래빗 [모르모트]가 무리를 이룹니다.
-전이자의 첫 무리 형성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민첩 +1, 힘 +1
-[새초미] [모르모트] 무리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화염강철거미 [간장]과 빙결강철거미 [막야]가 무리를 이룹니다.
-[간장] [막야] 무리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진수의 눈앞으로 안내 메시지가 쏟아져 나왔다.
“어우, 깜짝이야. 뭐가 많네. 우선 새초미네는 새초미 무리로.”
-[새초미] [모르모트] 무리의 이름을 [새초미 무리]로 지으시겠습니까?
“응.”
-전이자 무리의 첫 작명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골드 +5
[차원 전이] 특성은 뭐든 처음으로 할 경우엔 보상을 주는 듯했다.
‘아직 첫 실행 보상이 남아있을까? 왠지 기대되는데.’
전이도 시켜봤고, 전이자가 죽기도 했다.
상점도 써보고, 임무도 달성하고 무리까지.
이제 [차원 전이]가 가진 모든 기능을 다 써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항상 새로운 기능이 나오기 전까지는 상상을 못해본 것들이 나타났기에 진수는 왠지 아직 남은 게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품었다.
“간장이랑 막야는 그냥 간단하게 간장막야라고 하자.”
-[간장] [막야] 무리의 이름을 [간장막야]로 지으시겠습니까?
“오키.”
상태창에 따로 그려지던 몬스터들이 무리를 이루고 나서는 같이 붙어서 표시가 되었다.
“보기가 한결 낫네.”
진수는 몸을 일으켜 다른 헌터들에게 돌아갔다.
창을 사용하던 헌터는 이미 운명을 달리했고 다른 이들은 다행히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
남아있던 최지원이 제 때에 응급처치를 한 덕분이었다.
“진수씨! 정말 감사해요. 진수씨가 아니었으면 여기서 모두 죽었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대단하시네요.”
“저기, 제가 F급이라고 뭐라고 한 건 그냥 열심히 하자고 한 거였어요. 그, 제가 그래도 리더니까.... 하하... 고맙게 됐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진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오히려 진수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연거푸 인사를 하는 통에 난감할 정도였다.
상당히 틱틱거리던 정효원조차 그의 대단함을 떠들어댔으니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보스 몬스터가 허물어놓은 통로를 치우고 겨우 밖으로 나오자 던전 문 앞에는 일당 헌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진수가 일을 했었던 팀이었다.
“어, 김씨 아녀? 김씨!”
던전에서 나오는 진수를 보고 누군가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정씨 아저씨!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게. 김씨 이제 공략조가 됐나봐? 잘 됐구만.”
같이 일당 헌터 일을 하던 정유현이었다.
오지랖이 넓지만 또 그만큼 정도 많던 사람이다.
그는 진수가 일당 헌터를 하는 것에 대해서 항상 안타까워했기에 던전에서 나오는 그의 모습에 자기의 일처럼 기뻐했다.
“우선 여기는 임시로요. 저도 던전 공략조는 처음 와봤어요.”
“그렇게 하나씩 처리하는 거지. 어이구, 염병 저놈은 또 저 지랄 났네.”
진수와 이야기를 하던 정유현은 현장반장에게 또 소소한 갑질을 하는 정효원을 보며 눈을 흘겼다.
“저짝이랑은 어떻게 알고 같이 일하는 거야?”
“그냥 헌터넷에서 구인 글 보고 왔는데 우연히 그렇게 됐어요. 신기하죠?”
“신기는 무슨, 저런 망할 인간이랑은 자주 일하지 말어. 그나저나 반장 양반 또 안주거리 생겼구만. 또 자기 밑에서 전투 헌터 나왔다고.”
아니나 다를까 정효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현장반장의 시선이 진수에게로 향해 있었다.
“자~ 이제 들어들 갑시다!”
현장반장은 곧이어 박수를 치며 일당 헌터들을 던전 안으로 들여보냈다.
“어이구 이제 들어가네. 김씨, 다음에 한 잔 하자고.”
정유현은 진수를 향해 술잔을 넘기는 제스처를 하면서 던전으로 들어갔다.
“아는 분이에요?”
“아, 정효원씨. 저도 예전에 일당 헌터 좀 뛰었었거든요.”
“어! 저도 그랬는데. 이거 공통점이 있었네요. 오늘은 덕분에 살았어요. 여기 일당 헌터들 삯은 내가 낼게요. 고마워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정효원은 진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일당 헌터로 일 하셨었는데 갑자기 어떻게 그렇게 세지셨대? 뭐 좋은 거라도 드셨나봐?”
“뭐, 뒤늦게 헌터 능력 터지는 경우 있잖아요. 제가 그랬었나봐요. 어느 날 갑자기 특성 생기고, 능력치 오르고. 하하.”
진수는 딱히 정효원과 사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그다지 거짓말도 아니었다.
“음.... 그랬구나. 예, 알겠습니다. 던전에서 아이템은 안 나왔지만 강철거미가 꽤 많이 나와서 정산하면 몫이 적지는 않을 거예요. 정산은 어떻게, 돈으로 정리해서 드릴까? 아니면 마석이랑 돈이랑?”
“마석이랑 돈으로요.”
“예, 그래요. 다음에 또 봅시다.”
진수가 자신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을 눈치 챘는지 정효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진수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고는 떠났다.
“저, 저기요!”
이제 끝인 줄 알았더니 또 누군가가 진수를 불렀다.
화염을 다루는 헌터, 최지원이었다.
“진수씨 따로 공략조나 길드 같은 데에 소속되지 않으셨다고 했죠?”
그녀는 던전 공략 중에 들었던 이야기를 상기하며 말했다.
“네. 전투 헌터로 전향한지 얼마 안 돼서....”
“와, F급 헌터시라더니 진짜였나 보네요. 진짜 대단하다. 저는 처음 던전 들어가서는 소리 지르느라 바빴거든요.”
최지원이 눈을 빛내며 진수를 보았다.
“저도 프리로 전투 헌터 뛰고 있거든요. 공략조 자리 생기거나 필드에서 파티 사냥할 때 사람 부족하면 서로 알려주기로 해요.”
그녀는 자신의 핸드폰을 진수에게 내밀었다.
진수는 그녀의 전화기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찍었다.
“그러시죠. 저도 기회 닿으면 연락드릴게요.”
“에이, 뭐야~ 기회 안 닿아도 가끔 안부 차 연락 줘요!”
-찰싹
최지원이 진수의 어깨를 쳤다.
그러자 갑자기 붉어지는 진수의 얼굴.
“어머, 농담이에요. 은근히 쑥스러움이 많으시네. 나중에 연락할게요!”
최지원은 호호 웃으며 다시 한 번 어깨를 두드리고 갔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진수의 얼굴이 붉어진 게 부끄러워서가 아니라는 것을.
진수는 찰싹 때리는 그녀의 행동을 [울프헤딘]이 공격으로 여기고 반격하려던 걸 억누르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손 한번 더럽게 맵네.’
* * *
집으로 돌아온 진수는 피로감을 느끼며 짐을 정리했다.
체력 능력치가 오르면서 육체적인 피로는 회복이 되었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해소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충 치워놓은 뒤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파묻는 진수.
그는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얼마나 잠들었을까?
아직 채 12시가 지나지 않은 시각, 진수는 전화벨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누구지?’
진수는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정효원씨가 왜 전화를 했지.’
액정에 나타나 있는 이름은 정효원.
진수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진수씨?
“예. 말씀하세요.”
-자고 있었나보네. 그, 던전 보스몹 잡으셨잖아요?
“아, 예, 예.”
보스 몬스터라는 말에 진수는 잠이 한 순간에 달아나버렸다.
-일당 헌터 작업반에서 말하길 보스몹 사체가 없다고 하는데 뭐 아는 거 있어요?
진수가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차원 전이를 시키면 사체가 남지 않는다는 것.
다행스러운 부분은 처음에 간장을 처치할 때는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고 해도 막야 덕분에 죽이지 못했다고 생각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막야를 해치울 땐 사람들이 못 봤다는 점이었다.
‘차분히 말하자. 난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그래요? 희한하네요. 분명히 보스가 색깔 바뀌고 나서 던전 안 쪽으로 도망갔고요. 저희 있던 곳에서 많이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죽였거든요.”
-그래요? 이거 참 이상하네요. 어쨌든 잘 모른단 말이죠?
“네, 네. 그 정도 놈들이면 마석도 큼지막한 게 나왔을 텐데....”
‘좋아 이 정도면 완벽하게 아쉬워하면서도 안타까워하는 느낌을 줬겠지?’
-알겠습니다. 미안하지만 보스몹 사체가 없어서 정산 금액이 생각보단 많이 안 나올 거 같네요.
“어쩔 수 없죠. 혹시 모르니까 안 쪽까지 잘 찾아보시라고 하세요.”
진수는 마지막까지 혼신의 연기를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휴우. 식은땀이 다 나네. 이거 [차원 전이] 때문에 앞으로 파티 사냥이나 던전 공략조에는 못 들어가겠다. 그나저나 이 정도면 연기 쪽으로 나가도 되겠어? 전혀 이상함을 못 느끼는 것 같던데. 하하.”
* * *
“보스 몬스터들이 사라진 걸 일부러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진수가 자신의 연기력에 감탄하는 시각, 정효원은 어두운 방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항상 껄렁껄렁한 태도를 보이던 그가 경직된 모습으로 말을 했다.
“던전에서 나올 때 짐이 많지 않았다면서요?”
“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본 게 맞다면 김진수가 싸우다가 화염강철거미를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사라지게?”
“격렬하게 싸우는 척 하더니 갑자기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없어졌습니다.”
정효원의 말에 어둠 속에 있던 자가 잠시 침묵했다.
“김진수라는 헌터가 그러면 공간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요?”
“공간 능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봤을 때는....”
“정효원씨. 내가 변명 싫어하는 거 알죠? 확실한 것만 얘기해요.”
정효원은 그 싸늘한 말투에 입을 다물었다.
공간 능력은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드문 능력이었다.
김진수가 어떤 수를 썼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공간 능력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은 극히 적을 것이다.
“... 김진수가 전투 헌터가 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습니다. 아직도 F급이라고 하니 조만간 진급 신청을 하게 되면 그 정보를 빼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우선 지켜보도록 하죠. 고블린에 보팔 래빗, 강철거미들까지. 사체도 남지 않고, 추적 장치도 먹통이 되어버렸어요. 마치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것처럼요.”
“죄송합니다.”
“최소한 고블린은 김진수가 데려간 게 확실해요. 보통의 고블린에겐 하나밖에 통하지 않는 조합제를 세 개나 사용하는 것으로 봐서는요. 그리고 아직 실험체가 살아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아, 넵.”
“그렇다면 김진수가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쪽일 가능성이 높아요. 우선 조심스럽게 정보를 알아보세요. 이번처럼 섣불리 실험체를 가져다가 어설픈 함정 파지 마시고.”
-뿌드드득!
그는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단단한 원목으로 되어 있던 팔걸이가 비명을 질렀다.
“후우, 어쩌면 저쪽도 우리와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서로 협력을 하는 긍정적인 관계가 될 수 있으니 적대적으로 움직이지 마세요. 실험체들은 우리만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연구한 결과라서 저들이 데리고 있어봤자 큰 성과를 얻진 못할 거예요. 평화적으로 돌려받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세요.”
* * *
-[간장]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내구 +1
-[막야]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마력 +1
“이야! 이번 던전행의 최대 성과는 역시 너희들이다!”
진수는 아침에 일어나자 자신을 반기는 보상 메시지에 기뻐하며 외쳤다.
관심
[던전 정산이 완료 되었습니다. 지정된 헌터 협회 지회에서 수령하시기 바랍니다.]
간장과 막야의 보상으로 흐뭇한 미소를 짓던 진수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제 들어갔던 던전의 정산금과 마석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오, 드디어! 협회 가는 김에 진급 신청도 해야겠다.’
이미 능력치만 놓고 봐도 E급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아쉬웠던 점이 기술의 부재였는데 [도깨비불]을 얻었으니 E급은 무조건, D급도 노려봄직했다.
“흐흥~ 헌터 생활 3년만에~ 진급을 하는구나~”
진수는 기분이 한껏 좋아졌는지 노래를 하듯이 흥얼거렸다.
일당 헌터 생활을 하면서 아저씨들과 함께 일하다보니 가끔씩 그들의 말투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 * *
“진급 신청을 위한 검사가 있겠습니다. 여기 감정석에 손을 올려주시겠어요?”
헌터 협회의 안내원이 창구 옆에 놓여있는 동그란 보석을 가리켰다.
분홍빛이 감도는 표면에 금색으로 자잘한 글씨들이 새겨져 있었다.
“네.”
진수가 안내원의 요청에 따라 감정석이라는 보석에 손을 올리자 은은한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우우웅-
대략 몇 초간 아주 미세한 진동이 발생한다.
조금 뒤 진동이 멈추고 감정석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네, 다 됐습니다. 손 떼셔도 됩니다.”
안내원은 감정석에 연결된 화면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었는데, 진수가 살펴보니 그의 능력치부터 작성하는 것이 보였다.
“힘 7, 민첩 9, 체력 11, 내구 6, 마력 7로 총합 40입니다. 기존에 등록되었던 능력치가 총합 13이었는데 세 배가 넘게 성장하셨네요. 흔치 않은 경우인데 축하드립니다.”
안내원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특성도, 능력치도 낮았던 F급 헌터가 갑자기 성장해 진급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최소한 활성화 되지 않은 특성이 있었거나 능력치에서 특이사항이 있는 경우에나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게 중론이었으니까.
“특성은 7개, 기술은 1개로 감정 되었습니다. 각 항목들 적어주시겠어요? 공개를 원하지 않으시면 비공개로 두셔도 됩니다. 다만 진급 심사에서 낮은 점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감정석이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것은 능력치까지인 듯했다.
특성과 기술에서는 몇 개인지 정도만 확인할 수 있어 이 부분은 헌터가 밝히는 것으로 처리를 하고 있었다.
“네, 특성이랑 기술 모두 적을게요.”
진수는 안내원에게 서류를 받았다.
각 항목을 차례차례 채워나가는 그.
특성 일곱 가지와 기술 하나를 적어서 서류를 돌려줬다.
“[절연체]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투와 관련된 특성, 기술이네요. 능력치 총합 때문에 진급은 D등급이 최대이므로 특성 검증은 하지 않고 기술 검증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내원은 진수에게 기술 검증실로 가라고 안내를 받았다.
‘융합 덕분에 [차원 전이]를 숨길 수 있어서 다행이야.’
진수는 분명 서류에 일곱 가지 특성을 적어서 냈다.
다만 [차원 전이] 대신 [울프헤딘]을 [광전사]와 [야성]으로 나눠서 기입했다.
그 스스로 [차원 전이]와 [울프헤딘]을 제외하고는 아주 특이한 특성은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진수는 실상 [중급 재생력]도 회복력 특성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대단한 특성이라는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진수 헌터님. [도깨비불] 기술을 가지고 계시다고요?”
기술 검증실에 도착하자 그 안에 있던 인물이 진수를 반겼다.
“흐흐... [도깨비불]을 가진 헌터는 드문데 오늘 좋은 구경을 하겠네요.”
그는 입맛을 다시며 진수를 보았다.
마치 초콜릿 상자를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좀 이상한 사람인 거 같은데... 빨리 보여주고 나가야겠다.’
진수는 손 위에 푸른 귀화를 일으켰다.
물리적인 불이 아니었기에 뜨거움도, 소리도 발생하지 않았지만 파랗게 타오르는 불꽃의 모양은 그 자체로 눈길을 끄는 힘이 있었다.
“햐...!”
기술 검증원은 진수의 손 위로 피어난 불꽃에 넋을 잃은 듯 입을 헤 벌린 채로 관찰했다.
손을 가까이 가져다 대면서 온도도 느껴보고 무언가 도구를 들고 와 불을 붙여보는 등 굉장히 진지한 태도로 검증을 진행했다.
‘별난 구석은 있지만 그래도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네.’
-찰칵, 찰칵!
진수가 검증원에 대한 속마음을 바꾸려는데 그가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서는 [도깨비불]을 찍어댔다.
이내 안주머니에서 누가 봐도 개인 수첩으로 보이는 노트에 필기를 하기 시작했다.
“흐흐흐, 도깨비불... 물리력은 없음. 마력을 연소시킴. 마력이 풍부한 대상일수록 강한 타격. 한 번 접촉할 때마다 효과가 중첩....”
중얼거리면서 광적인 태도로 글씨를 적어갔다.
‘그냥 미친놈이었구나.’
진수는 이내 [도깨비불]을 거두었다.
이미 충분히 기술 검증은 했고 이 이상은 검증원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으로 보였으니까.
“엇!”
푸른 불꽃을 신나게 관찰하던 검증원이 탄식을 냈다.
마치 간식을 뺏긴 강아지처럼 금방 낑낑거리는 소리라도 낼 듯한 표정이었다.
“기술 검증은 충분히 된 것 같은데요?”
진수가 쌀쌀맞게 묻자 그는 풀이 죽은 채로 답했다.
“예.... 맞습니다. [도깨비불]이 맞네요....”
“그럼 이제 다 된 거죠? 가봐도 될까요?”
“네... 가보셔도 됩니다....”
진수는 그의 말에 바로 뒤로 돌아 검증실에서 나가려고 했다.
“자, 잠깐만요!”
하지만 검증원은 끝까지 질척거렸다.
“혹시 그 기술을 어떻게 얻으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사실 [도깨비불]은 일부 고블린 샤먼들이 사용하는 것 외에는 헌터가 사용한 전례가 거의 없어서.... 그냥 다른 헌터들처럼 각성하듯이 생긴 건가요? 몬스터의 기술이 헌터에게도 기술화될 수 있다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 같은데요...!”
열정이 불타는 그의 눈빛.
하지만 진수로서도 모든 것을 다 알려줄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고블린 언어를 알고 있는 것, 더 거슬러 올라가 [차원 전이]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와야 할 테니까.
“그냥, 얻었어요.”
그의 기술에 대한 열의에 말해주고 싶은 마음도 조금 동했다.
그렇지만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 자신의 중요한 능력을 알려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진수의 대답에 검증원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스스슥
그는 자신의 수첩에 무언가를 적더니 진수에게 내밀었다.
“이거 제 연락처예요. 그래도 나름 우리나라에서 헌터랑 몬스터들 기술에 대해서는 빠삭하다고 자부하거든요. 궁금한 게 생긴다면 연락주세요. [도깨비불]의 활용법도 제가 연구한 내용들 알려드릴 수 있고요.”
그가 준 쪽지에는 조민준이라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알겠습니다. 혹시 여쭤볼 게 생기면 전화 드릴게요.”
진수는 조민준의 연락처를 주머니에 대충 넣고 기술 검증실에서 나왔다.
처음 진급 절차를 밟았던 창구로 돌아가자 안내원이 신용카드 크기의 무언가를 건넸다.
“조민준 검증원이 꽤나 관심을 보였나 봐요. 워낙 기술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분이라 조금 성격이 독특하죠? 그래도 국내에선 상당한 권위가 있는 연구자라고 해요. 저는 그런 쪽을 잘은 모르지만. 어쨌든 여기 D급 헌터 라이센스입니다. 축하드려요.”
안내원이 내민 것은 바로 헌터 라이센스였다.
F급일 때는 따로 라이센스가 존재하지 않고 서류상으로 등록이 될 뿐이었다.
F급은 전투력이 높지 않고 조금 강한 일반인 정도였기에 균열이 발생해도 동원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일상에서 헌터라고 증명을 할 일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E급부터는 균열이 발생했을 때 통제되고 있는 구역에 들어가거나 헌터 협회의 요청으로 활동을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헌터 라이센스는 E급부터 발급이 된다.
이런 배경으로 헌터 라이센스가 없는 F급은 헌터도 아니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제 D급이 되셨으니 필드도 다니고 하실 거죠?”
안내원이 라이센스를 받아드는 진수에게 이어서 말했다.
“네. 오크 필드 쪽으로 가보려고 하는데요.”
어차피 [차원 전이]가 몬스터의 사체를 남기지 않기 때문에 던전 공략조에 들어가기엔 곤란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가급적 필드를 돌며 힘을 키운 다음에 혼자 던전을 깰 수 있는 정도가 되면 던전을 들어가려는 게 진수의 계획이었다.
“요즘 오크 필드 쪽에 이상한 소문이 좀 돌고 있거든요.”
“이상한 소문이요?”
“몬스터를 잡고 갈무리 하고 있으면 빨간 눈을 가진 투명한 몬스터가 나타나서 사체를 훔쳐간다고 해요.”
“투명한 몬스터요?”
“네. 몸은 완전히 투명하고 빨갛게 동그란 것이 허공에 뜬 채로 나타나는데 그게 눈일 거라는 이야기가 많아요.”
진수는 안내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더욱 오크 필드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 새로운 몬스터는 더 많은 성장을 의미했으니까.
‘운 좋게 그 몬스터 특성에서 투명화 같은 거라도 얻는다면 최고지!’
진수는 소문을 전해준 안내원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헌터 협회 건물을 나섰다.
“보자.... 바로 삼성역으로 가면 얼추 시간이 맞겠네.”
고블린사육사에게 연락해 강철거미 마석과 콩이장군을 교환하기로 한 진수.
역시나 만남은 삼성역에서 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고블린사육사는 지난번과 같이 깔끔한 양복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여기 강철거미 마석입니다.”
진수가 마석을 건네자 고블린사육사가 잠시 마석을 지그시 보았다.
“안 받으세요?”
“아, 받아야죠. 마석 구하시는 데에 어려움은 없으셨습니까?”
“강철거미 나오는 던전에서 보스 몬스터가 좀 까다롭긴 했지만 그래도 큰 탈 없이 구했네요.”
“좀 까다로웠다라.... 허허. 알겠습니다. 여기 콩이장군 받으시죠.”
그는 뭔가 석연치 않은 말투로 말하고는 진수에게 알약을 주었다.
“나중에 또 필요하게 되면 연락 주십시오. 그럼 이만.”
콩이장군을 건네고 서둘러 자리를 뜨는 고블린사육사.
진수는 그 뒷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집으로 돌아갔다.
* * *
“오늘 보니 어떻던가요?”
정효원이 누군가에게 보고를 하던 어두운 방.
이번에는 정효원과 고블린사육사, 그리고 어둠 속의 인물 이렇게 셋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희 실험체에 대해서 조금 까다로웠다... 라고 평했습니다.”
“조금 까다롭다?”
-톡톡톡톡
어둠 속의 인물이 의자의 팔걸이를 검지로 두드렸다.
불편한 심기가 감추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 김진수의 진급 서류를 확보했습니다.”
정효원이 이 때다 싶었는지 자신의 공로를 내밀었다.
“말해봐요.”
“능력치 총합은 40. 특성은 7개로 [중급 재생력] 외에는 눈에 띄는 것이 없습니다. 기술도 [도깨비불]이라는 것 하나밖에 없고요.”
정효원은 마치 별 거 아닌 녀석이었습니다 하는 말투로 말했다.
“[중급 재생력]이라고요?”
“네. 맞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하아.... 자꾸 그렇게 답답한 소리만 할 거에요? F급이었던 헌터가 갑자기 D급이 됐어요. 아무런 전조 증상도 없이.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나요?”
정효원은 그 말에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 놈도 혹시 그럼 저처럼...?”
F급 일당 헌터였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D급 헌터가 된다.
정효원은 정확히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이를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자신이다.
“그래요. 어디선가 우리랑 같은 실험을 하고 있다는 뜻이죠. 문제는 [중급 재생력]이에요. 아직까지 우리가 구현해낸 특성은 [상급 회복력]이 최대죠. 그런데 [재생력] 특성을 추출, 부여하는 데에 성공했다? 우리보다 더 앞서고 있는 집단이 있다는 뜻이라고요. 강철거미 실험체들이 사라졌다고 했죠? 분명 값비싼 공간압축 가방 같은 것을 사용했을 거예요.”
“그, 그렇다면 김진수라는 놈을 잡아다가....”
-쾅!
정효원의 이야기를 듣던 자가 의자의 팔걸이를 강하게 내려쳤다.
그 손짓에 팔걸이는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내가 그렇게 어설프게 나서지 말라고 했죠!”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노가 공기를 무겁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말단의 인물을 건드려봤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몰라요? 오히려 경계심만 가지고 숨어들 거라고요. 이제부터 김진수에게는 접근도 말고 신경도 끊으세요. 그자의 뒤에 있는 곳을 찾아내는 게 급선무입니다.”
“네, 넵! 알겠습니다.”
“그 빈약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김진수가 말한 조금 까다로웠다는 말이 무슨 의미였겠어요? 우리 실험체들을 잡는 것이 조금 까다로웠다는 말이었을까요?”
그의 말에 반응을 보인 것은 고블린사육사였다.
“아... 혹시 저희 실험체에서 연구 데이터를 얻는 게 조금 까다로웠다는...?”
“그렇죠. 아주 무서운 놈들이에요. 그렇게 은근슬쩍 우리에게 경고를 한 거죠. 자신들이 앞서고 있다. 그리고 김진수 정도의 인물에게도 [재생력]을 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어필도 한 거고요.”
“과연....”
고블린사육사가 감탄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국내에서 몬스터와 헌터에 대한 연구 역량을 지닌 집단을 모두 조사해보세요. 다시 말하지만 김진수에게 특성을 준 곳이 어딘지 파악하는 게 가장 먼저예요.”
“넵!”
“예, 알겠습니다!”
정효원과 고블린사육사는 힘차게 대답하고 빠르게 방을 나섰다.
* * *
-[고돌]의 급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내구 +1, [고돌]의 특성 중 하나
그 시각, 진수는 고돌이에게 콩이장군을 섞은 영양제를 보냈다.
“이야, 고블린사육사 덕분에 특성을 받는구나!”
미지의 존재
진수는 고돌의 급성장 보상을 확인하기 위해 상태창을 열었다.
[김진수]
힘:7 민첩:9 체력:11 내구:7 마력:7
특성 : [차원 전이] [절연체] [중급 재생력] [융합] [하급 전사의 신체] [울프헤딘] [특급 공구 숙련] [중급 후각]
기술 : [도깨비불]
골드 : 5
[R.I.P.] - 사망자 수 : 1
[고돌] - 현재 상황 : 검투 시합 대기실에서 대기 중
[포세이돈] - 현재 상황 : 요정의 호수에 거주 영역 구축 중
[제우스] - 현재 상황 : 거대 땅강아지와 대치 중
[새초미 무리] 거주 영역 : 녹색 숲
[새초미] [모르모트]
[헤파이스토스] - 현재 상황 : 불의 산 동굴에서 공동 발견
[돈다발] - 현재 상황 : 사르 평야에서 휴식 중
[아라크네] - 현재 상황 : 그림자 숲에서 탐색 중
[간장막야] 거주 영역 : 죽음의 산맥
[간장] [막야]
-임무 : 없음
[상점]
고돌이에게 조합 영양제를 보낸 후 대략 30분이 지나고 나서 받은 보상.
그의 상태창 특성 목록에 [중급 후각]이 생겨 있었다.
-킁킁
진수는 갑자기 코로 들어오는 방대한 정보량에 잠시 적응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현재 집안에 있는 물건들과 과거에 있었던 것들이 동시에 느껴진다.
하지만 그 냄새의 진하기로 충분히 구분이 가능했다.
가까이에 있는 냄새들이 익숙해지자 느낄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나고, 그 중에서 특정 냄새만 인지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중급 후각]이기 때문에 후각으로 드라마틱한 능력을 낼 수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현재 상황을 시각뿐만 아니라 후각까지 이용해서 판단할 수 있는 정도는 충분히 됐다.
‘좋아. 이제 고돌이한테 영양제도 보냈고, 임무 하나 받고 나서 오크 필드로 가보자.’
-임무를 받으시겠습니까?
“어.”
-임무 : 전이자 목록 15 개체 채우기
-보상 : 전이자에게 [지식 랜덤 박스] 전달
“오, 다행히 이번에는 던전으로 들어가는 임무가 아니네.”
진수는 새로 받은 임무를 보고 화색이 돌았다.
지난번에 던전을 돌면서 공략조에 들어가는 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처치하는 몬스터의 사체가 남지 않았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임무가 던전 보스를 잡으라는 쪽으로 나오면 혼자 던전에 갈 수 있게 될 때까지 강제로 임무가 묶이게 될 테니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몰래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라도 생긴다면 모를까.’
사실상 몰래 들어가는 것도 도둑질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지난 강철거미 던전 때처럼 예상치 못한 강한 보스가 나와서 위기에 빠진 공략조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면 꺼려지는 임무인 것이다.
보통은 던전의 등급을 파악하고 들어가기에 그런 상황이 발생할 일도 거의 없었고.
“그런 의미로 이번 임무는 아주 무난하고 좋다 이 말이지. 보상은 조금 거시기 하긴 하지만.”
공부랑은 담을 쌓고 살던 진수였기에 상점에서도 지식 쪽 카테고리는 크게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임무 보상인 [지식 랜덤 박스]도 영 탐탁지 않았다.
‘그래도 나한테 오는 게 아니니까 몬스터들한텐 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어? 일단 빨리 사냥이나 가자.’
진수는 필드 사냥을 위한 도구를 챙겨서 오크 서식 필드로 향했다.
코볼트 필드와 고블린 필드를 거쳐 가야 하는 오크 서식 필드.
혹시 특수 개체인 고블린 샤먼이나 레드 고블린 등의 녀석들을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고블린 필드 쪽을 통해서 움직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오는 건 일반 고블린들 뿐이었다.
‘그래, 돈 번다고 생각해야지. 애초에 헌터 생활 하는 것도 마석증이랑 돈 때문이었으니까.’
[차원 전이] 덕분에 성장하는 희열에 빠져있었더니 통장이 메말라가고 있다.
그렇지만 오크 사냥을 시작하면 다시 잔고가 채워지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었다.
‘오크 정도의 몬스터부터는 부산물이랑 마석의 가격이 엄청나게 뛰니까.’
고블린은 장비를 잘 갖춘 일반인들이 합심하면 처치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오크는 다르다.
마주치면 고블린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칠 정도로 강하고 호전적인 녀석들인 것.
여기부터는 완전히 헌터들의 영역이 된다.
그만큼 오크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뜻이다.
“쿠워어어억!”
-쾅! 쾅!
‘몬스터의 위험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는 말이기도 하고!’
진수는 괴력이 담긴 주먹을 거칠게 휘두르며 돌진하는 초록색 덩어리를 가까스로 피했다.
털이 없다 뿐이지 기다란 팔과 온몸을 가득 채운 경이로운 근육들, 커다란 울음소리까지.
초록색 고릴라라고 해도 무리가 없어 보이는 괴물이었다.
-퍽!
진수는 오크의 공격을 피하며 놈의 오금에 도끼를 찍어 넣었다.
그리고 왼손에 든 송곳을 수차례 녀석의 허벅지에 쑤셨다.
엄청난 속도로 송곳이 틀어박힐 때마다 푸른 불꽃이 진해졌고 오크는 괴로움에 비명을 질렀다.
-부웅!
고통스러워하던 녀석이 주먹을 휘둘렀지만 진수에게는 닿지 못했다.
오히려 큰 동작 덕분에 진수의 추가적인 공격을 허용하는 꼴이 됐다.
허벅지를 찌르던 송곳이 놈의 겨드랑이를 노렸다.
다리를 무력화시킨 이후에 한쪽 어깨 관절을 넝마로 만든 진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오크의 머리를 도끼로 날려버렸다.
“후우! 역시 오크부터는 영 쉽지가 않네.”
-휙!
진수가 습관처럼 도끼와 송곳을 털었다.
하지만 두 공구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오크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오크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오키, 한 마리 채웠고.’
진수는 오크의 이름을 [아레스]로 지어줬다.
“이제는 오크도 부상 없이 잡다니, 감개무량하네.”
진수는 이름을 지으면서 감회가 남다름을 느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블린 한 마리를 처치 못해서 죽을 뻔했는데 이제는 전투 헌터의 수문장이라고도 불리는 오크를 잡는다.
비록 호쾌한 싸움은 아니었지만 [도깨비불]의 특징을 살려서 송곳을 챙긴 것이 확실히 도움이 됐다.
‘그 기술 덕후 연구원 덕분에 송곳을 생각할 수 있었지.’
헌터 협회의 기술 감정원이었던 조민준이 했던 말이 힌트가 됐다.
‘한 번 접촉할 때마다 효과가 중첩.’
다시 말해서 빠른 공격과 시너지가 좋은 기술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진수의 주무기는 [특급 공구 숙련] 때문에 공구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떠올리게 된 것이 바로 송곳이었다.
‘근데 무기 자체의 공격력이 너무 약해. 돈이 좀 생기면 다른 무기를 알아봐야겠어.’
분명 빠른 공격속도와 공격력을 모두 갖춘 무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은 돈도 없고 시간도 없었기에 우선 송곳으로 싸우고 있지만 말이다.
“흐음. 필드에 다른 사람이 있네.”
진수는 무기들을 허리춤에 차며 공기 중의 냄새를 맡았다.
[중급 후각] 덕분에 시야가 가려지는 숲 지형에서도 주변에 뭐가 있는지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했다.
“음? 오크를 하나 데리고 이쪽으로 오는 거 같은데....”
미지의 인물은 오크와 전투를 벌이며 조금씩 진수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혹시 전투에 휘말려 귀찮은 일이 생길까 진수는 그들이 오는 경로에서 조금 비켜났다.
-쾅! 콰앙!
-휙- 팍!
오크의 과격한 돌격, 그리고 민첩하게 피하며 자잘한 공격을 날리는 헌터의 싸움.
헌터는 아직까지 타격을 받은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공격도 오크에겐 치명상을 입히기에 부족했다.
마치 바위에 칼질을 하는 모양새였다.
“헉, 헉! 더럽게 딴딴하네 이거.”
그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불평을 터트렸다.
그러던 중 진수와 눈이 마주친다.
“저, 저기요!”
황급히 진수를 부르는 헌터.
“이놈 좀 같이 해치워주시면 안 될까요? 마석이랑 부산물은 다 드릴게요!”
이대로는 승부가 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진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진수로서는 손해 볼 게 없는 제안.
허리춤에서 도끼를 꺼내들었다.
“쿠워억!”
오크가 눈앞의 사내에게 덤벼드는 순간, 진수가 득달같이 접근해 놈의 발목을 찍었다.
앞으로 뛰쳐나가는 힘과 잘린 발목.
결과는 볼썽사납게 바닥에 뒹구는 오크의 모습이었다.
-퍽!
사내가 어그로를 끌어준 덕분에 손쉽게 오크를 처치한 진수는 바로 마석부터 챙겼다.
“어휴, 감사합니다. 큰일 날 뻔 했는데 덕분에 목숨은 건졌네요. 하하.”
족제비 상의 얼굴을 지닌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진수에게 감사를 전했다.
호리호리한 몸집, 날카로운 눈매는 빠르게 움직이는 전투 스타일과 꽤 잘 어울렸다.
‘오크 필드에 오기엔 좀 약하지만....’
“아니에요. 저야 원하는 대로 오크 사냥을 했으니까요.”
진수의 대답에 사내는 양손 엄지를 치켜들었다.
“크으, 진짜 멋있었어요. 도끼로 시원하게 팍, 팍! 하하. 헌터 경력이 되게 많으신 거 같아요.”
“뭐 그렇진 않고요. 한 몇 년 헌터 생활 했죠.”
진수는 자꾸 칭찬을 하며 말을 걸어오는 그에게 적당히 대꾸를 하며 오크 사체를 갈무리했다.
확실히 사체를 갈무리하는 솜씨는 숙달된 헌터의 그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당 헌터로 일을 하면 가장 많이 늘어나는 것이 바로 몬스터 사체 갈무리 실력이었으니까.
그 모습을 보는 족제비 상 헌터의 눈이 빛났다.
“역시, 그러시구나. 어쩐지 실력이 장난 없으시더라. 어쨌든 고맙습니다. 저도 사냥 하러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세요.”
그는 적당히 말을 끊는 진수의 태도에 눈치껏 말을 줄이고 오크 서식 필드 안 쪽으로 떠나갔다.
‘저 실력이면 오크 필드에 있는 게 손해일 거 같은데....’
진수는 오크를 잡지도 못하면서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의아한 눈빛으로 보았다.
보통의 오크 하나에 쩔쩔맬 정도면 고블린이나 코볼트를 사냥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신경을 끊고 다른 오크의 냄새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고, 진수는 돈도 마석도 더 많이 모아야 했으니까.
-푹 푹 푹 푹!
송곳이 신들린 듯 오크의 피부를 꿰뚫는다.
작은 구멍 안쪽으로 시퍼런 귀화가 피어오르고 오크의 생명을 갉아먹었다.
[특급 공구 숙련] 덕분에 이제 송곳을 전투에 사용하는 것도 능수능란해졌다.
-퍼억!
마무리는 역시나 도끼질.
두꺼운 가죽 때문에 치명상을 입히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송곳으로 대미지를 누적시키고 도끼로 마무리하는 전투법이 오크한테 꽤나 잘 통했다.
진수는 벌써 네 마리째 사냥을 성공할 수 있었다.
‘어?’
오크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진수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아니, 눈에는 보이지 않고 냄새만 나기에 코치를 챘다고 해야 할까.
무언가가 그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놈이다!’
헌터 협회 안내원이 말했던 소문의 몬스터.
빨간 눈을 가진 투명한 존재가 엄청난 속도로 접근했다.
‘눈이 아닌데?’
허공에 떠있는 빨간 색 동그란 것은, 엄밀히 말하면 평면적인 문양이었다.
워낙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기에 정확한 모양은 잘 보이지 않았다.
기척으로 느껴지는 것은 보통 성인 남성의 크기.
시각과 후각, 기척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서로 큰 괴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느낌이 이 미지의 존재에 대해서 불쾌한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
도깨비감투
“어딜!”
어느새 지근거리에 다가온 투명한 존재.
진수는 허공에 떠있는 빨간 문양을 향해 도끼를 세차게 휘둘렀다.
-휘익!
하지만 그것은 유유히 진수의 공격을 피해낸다.
-후욱!
진수의 귀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놈이 신속한 움직임으로 그의 바로 옆까지 접근한 것이다.
‘이런...!’
-사악!
진수는 재빨리 송곳을 꺼내서 투명한 존재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휘둘렀다.
그의 손끝에 무언가 걸리는 감각이 전해졌다.
“흐읏!”
허공에서 들려오는 작은 신음소리.
진수는 자신의 공격이 들어갔음을 깨닫고 연달아 송곳을 내질렀다.
하지만 더 이상 무언가를 베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내 허공에 떠있는 붉은 원형 문양도, 인기척도 남아있지 않았다.
“빌어먹을. 놓쳤네.”
진수는 놈이 사라진 것을 인지하고 갈무리하던 오크 사체를 보았다.
소문대로라면 투명한 몬스터는 사체를 훔쳐간다고 했다.
하지만 진수가 처치한 오크의 사체는 바닥에 떡하니 남아있었다.
“그래도 사체는 지켰.... 아니, 이 썩을 놈이?”
어느새 오크의 사체에는 마석과 중요 부산물들이 사라져있었다.
진수의 옆으로 다가왔을 때, 오크 사체에서 돈 될 만한 부분들을 챙겨간 모양이었다.
“아, 내 돈! 이 자식 다시 만나면 진짜 작살을 낸다.”
진수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예상보다 빠른 속도 탓에 놓쳤지만 다시 마주친다면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보팔 래빗 [모르모트]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민첩 +1
타이밍 좋게 모르모트가 보내온 보상이 그를 달래줬다.
“아, 그래. 다음에 절대 당하지 말라고 민첩 능력치를 올려주는구나.”
진수는 눈을 감고 후각에 집중했다.
시각을 통제하니 냄새가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마치 냄새로 된 길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피 냄새가 옅긴 하지만 쫓아가는 데에 문제는 없겠어.’
진수의 송곳에 상처를 입은 녀석은 아주 적지만 출혈이 있었다.
혈향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진수.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점점 냄새가 진해졌다.
‘상처가 더 벌어질 정도의 손맛은 아니었는데...?’
그는 더욱 서둘러 피 냄새를 쫓았다.
이제는 후각뿐 아니라 청각으로도 방향을 알 수가 있었다.
-쿠웅!
“끄아악!”
육중한 충돌음과 비명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런, 실력이 안 되면 욕심을 버렸어야지...!’
진수는 코끝을 스치는 익숙한 냄새에 혀를 가볍게 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도착한 곳에는 흉폭한 기세를 하고 있는 오크 한 마리와 족제비 상의 헌터가 있었다.
사내는 오크에게 공격당해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오크도 후각이 상당히 발달한 몬스터.
진수가 그를 피 냄새로 찾아냈듯이 옆구리에 난 피 때문에 놈에게 잡힌 듯했다.
“커억...! 사, 살려...!”
“쿠와악!”
-쾅!
진수를 발견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내의 복부로 오크의 두 주먹이 내리꽂혔다.
그는 짧은 비명만을 남긴 채 정신을 잃었다.
기괴하게 꺾인 허리로 봤을 때, 생존을 장담할 수 없어 보였다.
“쿠워어억!”
족제비 상의 헌터를 처치하고 이내 진수를 발견한 오크.
녀석은 대기를 쩌렁쩌렁 울리는 커다란 포효를 내질렀다.
‘저거... 오크 워리어 아니야?’
오크도 역시 특수개체가 존재한다.
그 중에서 육체적으로 뛰어난 녀석이 바로 오크 워리어.
외형적으로는 크게 구분이 가지 않지만 방금처럼 포효를 내지르며 사기를 올리는 워크라이 따위의 기술을 쓴다.
-휘리릭! 퍽!
진수는 멀리서부터 도끼를 투척하며 전투를 개시했다.
놈은 역시 특수개체답게 다리를 향해 날린 도끼를 팔뚝으로 무난하게 막아냈다.
튼튼한 팔뚝에 가로막힌 도끼는 한눈에 봐도 생채기만 남겼을 뿐이었다.
-쌔액!
진수는 충분히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동요하지 않고 도끼를 회수했다.
“쿠워어억!”
잔뜩 성이 나 덤벼드는 오크 워리어.
오크 종족 특유의 육중한 돌진이 들어왔다.
“이래야 오크답지.”
진수는 놈의 얼굴을 향해 도끼를 날렸다.
다시 팔을 들어 막는 오크 워리어.
덕분에 하단에 대한 시야가 가려졌다.
진수는 상체를 깊게 숙이며 달려들었다.
-쿠웅!
“쿠억!”
그는 낮게 태클하며 한쪽 다리를 감싸 안았다.
힘껏 내달리는 놈의 힘을 역이용하자 거체가 바닥에 쉽게 고꾸라졌다.
진수는 잽싸게 송곳을 꺼내 녀석의 아킬레스건을 끊었다.
그리고 바로 몸을 뒤로 굴리며 오크 워리어에게서 멀어졌다.
그가 있던 자리에 곧장 떨어지는 머리통만한 놈의 주먹.
-쾅!
아마 바로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수는 뒤로 빠지며 동시에 도끼를 회수했고, 오크 워리어는 주저앉은 채로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일어서는 게 쉽지 않았다.
“하앗!”
기합성과 함께 도끼를 크게 휘둘러 놈의 머리통을 내려찍었다.
손을 들어 막아보지만 고통의 시간만 늘어날 뿐이었다.
이내 진수의 도끼가 오크 워리어의 머리를 가격했다.
“컭!”
짧은 비명.
특수개체 오크 워리어는 순식간에 눈을 감았다.
‘무기를 들고 있는 녀석이었으면 쉽지 않을 뻔했어.’
다행히 나무 몽둥이조차 들고 있지 않은 적수공권의 오크 워리어였기에 전투가 수월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수도 꽤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이내 사라지는 녀석의 사체.
-오크 워리어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오크 워리어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진수는 전이시킨 오크 워리어의 이름을 [고블린]이라고 지었다.
오로지 초록색 피부만 보고 순간적으로 떠올린 단어를 이름으로 지어준 것이다.
“오크 워리어 이름이 고블린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골 때리네.”
그의 뒤틀린 위트 덕분에 훗날 오크 워리어 [고블린]은 사상 최강의 고블린들 중 하나로 악명을 날리게 된다.
“그나저나... 이 양반은....”
작명을 마친 진수는 족제비 상의 헌터를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오크 워리어가 마지막에 날린 일격으로 척추가 끊어져 그대로 절명을 한 듯했다.
진수는 조금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사체를 살폈다.
다만 불쌍하다거나 안타깝다는 감정은 전혀 읽히지 않았다.
‘능력에 안 맞게 어부지리를 노리니까 끝이 안 좋을 수밖에 없지.’
볼썽사납게 기역자로 꺾여있는 몸을 반듯하게 눕히고 나니 옆구리 쪽에 나있는 날카로운 상처가 눈에 들어온다.
오크의 주먹질에 당해서는 생길 수 없는 자상이었다.
‘그런데 투명하게 될 수 있는 기술이 있는데 왜 오크 워리어한테 당한 거지?’
진수에게 덤벼들어 오크의 마석과 부산물을 훔쳐간 투명한 존재.
바로 눈앞의 시체가 그 정체였다.
정확히는 시체가 되기 전의 사내.
사실 진수는 이 자가 투명화한 채로 옆을 스쳐지나갈 때부터 이미 알아차렸다.
앞서 마주쳤을 때 맡았던 체취가 났으니까.
다시 만난다면 참교육을 시켜주겠다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근데 이 두건은....”
그의 머리엔 웬 두건이 하나 씌워져있었다.
검은 천에 빨간색 동그란 문양이 박힌.
‘잠깐, 저 빨간색 원... 투명화 됐을 때 드러났던 그거인 거 같은데?’
진수는 두건을 집어 들었다.
외형적으로는 특별할 것 없는 모양이다.
다만 손으로 잡는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평범한 물건이 아닌 아이템이라는 것을.
일반적인 물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아, 혹시 이걸로 투명해졌던 건가?”
그는 두건을 머리에 뒤집어써봤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투명화를 위한 마력 운용 방법이 입력됐다.
기술 [도깨비불]을 습득했을 때와 동일하게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아이템과 상호작용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운용 방법을 알아도 두건이 없으면 투명화를 사용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와, 이거 진짜 신기하네.’
마력이 두건을 거쳐 움직이자 소리 소문 없이 몸이 투명해졌다.
스스로 인지를 하고 있지만 자신의 눈에도 신체부위가 보이지 않는 경험은 정말 놀라웠다.
-스윽
두건을 벗자 약간의 현기증이 생겼다.
마력의 소비, 감각의 괴리, 처음 사용하는 아이템에 대한 낯섦 등의 복합적인 이유인 듯했다.
“어휴, 이거 마력 소모가 장난 아닌데?”
[도깨비불]을 사용할 때와는 달리 마력이 뭉텅뭉텅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횡재했네.”
진수는 두건을 잘 챙겨두었다.
“흠, 내 오크를 스틸하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시체 정도는 처리를 해줘야겠지.”
사내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진수.
헌터 생활을 하면서 시체를 보는 것은 익숙했다.
하물며 자신의 몫을 노리다 횡액을 당한 이에게 안타까운 감정이 생길 정도로 무르진 않았다.
천애고아가 몬스터, 그리고 몬스터보다 더 끔찍한 인간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독해야 했으니까.
“뭐야. 겨우 오크 워리어한테 죽을 실력이면서 자루도 안 챙기고 다녔어?”
진수는 그의 짐을 뒤져보았다.
오크들의 부산물과 마석이 담겨있는 가방과 몬스터 사체 해체 도구, 돈 일부와 지갑이 전부였다.
우선 지갑을 열어 헌터 라이센스를 확인했다.
“어디보자, 이명배씨. 이거 아주 그냥 오늘만 사는 인간이었네.”
진수는 투덜거리며 자신의 가방에서 검은색 천을 꺼냈다.
일명 자루라고 불리는 도구로 헌터들, 특히 필드에서 사냥을 하는 헌터들은 거의 필수로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다.
헌터 협회로 전송되는 위치 추적 장치가 부착되어 있는 자루인데 주로 필드에서 사망한 경우에 그 시체를 담는다.
혹은 탈출하기 힘든 위치에 고립되었을 때 사용하기도 한다.
보통은 자신이 사망했을 때 다른 헌터들이 시체나마 가족에게 보내주길 바라며 구비하는 물건이었다.
진수는 자루에 이명배의 시체를 넣고 나무 위에 걸어 놨다.
특수한 천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잘 봉인하면 냄새가 거의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무 위처럼 몬스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둔다면 시체가 훼손되는 일은 잘 없다.
자루에 달린 위치 추적 장치에 사망한 시체라는 신호가 발생하게 처리한 진수.
아마 몇 시간 내로 헌터 협회에서 인원을 보내 수습을 할 것이다.
헌터 협회에서 하는 헌터 지원 업무 중 하나였다.
“후, 그래도 자루 값 정도는 들고 있어서 다행이야.”
진수는 이명배의 지갑에 있는 돈과 오크 부산물, 마석들은 모두 챙겼다.
그의 말과는 달리 자루의 가격을 넘어서 진수가 한 달 동안 일당 헌터 생활을 하는 것보다 많은 수익이 생겼다.
사망한 헌터의 소지품은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갖는다.
헌터 사회에서는 크게 지탄받지 않는 일이었다.
몬스터와의 전투는 언제나 목숨을 거는 일이었고, 헌터들은 이익에 목숨을 바친 인간들이었으니까.
-특수임무 발생.
-임무를 받으시겠습니까?
진수가 이명배의 시체를 처리하고 나자 눈앞에 처음 보는 안내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미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새로운 임무가 나타나?’
“일단 못 먹어도 고지!”
지금껏 임무를 받아서 손해를 본 적은 없었기에 진수는 흔쾌히 특수임무를 받았다.
유물
-특수임무 : 안내에 따라 이동하여 몬스터를 차원 전이시키기
-보상 : 골드 +10
‘골드를 10이나? 특수임무라서 보상이 더 큰가 보구나!’
진수는 임무 보상들 중에서 특성 다음으로 골드를 선호했다.
적절히 사용하면 능력치 하나를 올리는 것보다 훨씬 큰 이득을 주었으니까.
당장 5 골드를 사용하여 고돌이에게 보낸 영양제가 [중급 후각]이 되어 돌아왔고, 그 덕분에 투명화 아이템까지 얻지 않았는가.
골드를 충분히 모아 놓으면 추후에 임무에서도, 아니면 성장이 정체되었을 때에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보상이었다.
‘그런 골드를 10이나 준다면 무조건 해야지!’
진수는 기쁜 마음으로 특수임무 내용을 살폈다.
‘안내에 따라 이동하라고...? 무슨 안내?’
의아해하던 진수가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으음...! 뭐지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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