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nel 18

디에고가 벌써 진수의 이야기를 퍼트리고 다닌 것이다. 
한국에서 온 김진수라는 녀석이 추위를 만들던 몬스터를 처치했다고. 
“앞으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무조건 잘 해주지!” 
“여기 헌터들은 춥다고 술이나 퍼먹었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는데 외국에서 와서 해결해주다니.” 
본의 아니게 국위선양까지 한 셈이 되었다. 
끝없이 감사 인사를 들으며 사람들 사이로 헤쳐 나온 진수. 
아직 오늘 일정은 시작도 안 됐는데 하루가 다 지나간 것 같았다. 
다행히 시간이 흐를수록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휴우, 잘못하면 늦을 뻔했네. 빨리 가야겠다.” 
어느 정도 움직이는 데에 지장이 없어진 그는 파벨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갔다. 
가는 길에 혹시나 해서 메신저를 확인해봤다. 
그가 보냈던 메시지를 박종대가 읽었다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물론 답장은 없었다. 
‘이걸 그냥 읽고 씹어버리네.... 망할 자식이. 거기서 하는 일이 없는 거 아냐?’ 
진수는 가볍게 투덜거리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서 바로 가면을 꺼내 썼다. 
“아, 오셨어요?” 
가면을 쓴 채로 다가가는 진수에게 인사하는 파벨. 
자신을 제압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캐물은 상대에게도 상당히 천진난만한 태도였다. 
‘진짜 누가 이용해먹기 딱 좋은 인간이야....’ 
진수 자신도 그 점을 이용하고 있지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순수한 인물이었다. 
그가 일하는 곳과 옷 등에 도청장치를 부착했었다. 
도청장치를 통해서 그동안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니 파벨은 정말로 블루 오아시스를 수돗물에 푸는 게 선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침에 날씨가 따듯해지고, 뉴스를 통해서도 이상 현상이 사라졌다는 말을 듣더니 남은 약은 진수에게 줘야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조금 있으면 여기로 올 거예요.” 
파벨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으니 트레이닝복을 입은 한 사내가 나타났다. 
껄렁껄렁한 태도를 하고 있는 그는 양손에 공간압축가방을 들고 있었다. 
“파벨, 임마. 옆에 그 자식은 뭐야?” 
사내는 턱짓으로 진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굉장히 경계하는 눈빛. 
“아, 안톤. 여기는 다른 도시에서 오신 분이야. 우리 도시가 추위를 잘 이겨내는 비결이 궁금해서 오셨대.” 
“다른 도시? 다른 도시 어디? 벨로고르스크는 아니겠고.... 비로비잔 쪽인가?” 
“어? 그, 그건....” 
진수에게서 아무것도 듣지 못한 파벨이 이내 입을 다물고 진수를 보았다. 
마찬가지로 안톤이라 불린 사내도 진수에게 눈을 돌린다. 
“음, 내 얘기는 우선 두 사람 볼일이 끝난 뒤에 따로 했으면 하는데. 많은 사람들한테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라. 그쪽도 그렇지 않나?” 
뭔가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자 안톤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아아, 해코지 하려는 건 아니니까 걱정은 말고.” 
진수가 양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보여줬다. 
공격할 생각이 없다는 제스처였다. 
[빙의]로 화이트 드래곤의 [드래곤 피어]를 살짝 빌려오고 [신뢰] 특성이 함께 발동되자 안톤이 순순히 납득을 했다. 
“그, 그렇다면... 여기 파벨이랑 이야기 끝내고 다시 말하자고.” 
“아아, 난 이제 됐어. 날씨도 풀렸고, 약을 계속 보면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만 써도 될 거 같아. 오늘 내가 받기로 한 몫을 그냥 이 사람한테 줘.” 
“뭐? 그게 니가 멋대로 결정할 일이냐? 이게 오냐오냐 봐줬더니 선을 넘네.” 
안톤은 손을 올려 파벨을 때리려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 평소에도 종종 폭력을 가하는 듯했다. 
“그만.” 
진수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어이, 이제 내 볼일 볼 테니까 가봐.” 
진수는 파벨을 돌려보냈다. 
마력을 뿜어 압박하니 안톤은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자, 약에 대한 이야기는 나랑 하자고.” 
파벨이 어느 정도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진수는 안톤에게 말했다. 
“가면 뒤에 숨어서 말하는 놈이랑 무슨 이야기를 해? 우선 가면부터 벗어.”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무는 법이다. 
강하게 압박당하던 녀석이 반발하며 소리쳤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진수는 이내 가면을 벗었다. 
말단에게 얼굴을 노출시킨다고 큰 리스크가 생기지는 않으리란 계산이었다. 
“아, 안 돼. 안 돼....” 
그가 가면을 벗어 얼굴을 보여주니 갑자기 주저앉는 안톤. 
몹시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이었다. 
‘이거 왜 이래? 나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진수는 굉장히 억울했다.
영혼의 약속
“자, 잘못했습니다! 목숨만은 제발... 자비를...!” 
안톤은 갑자기 사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두 손을 싹싹 빌었다. 
그저 진수는 가면을 벗고 얼굴을 보여줬을 뿐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우선 분위기를 깨지 않고 잠자코 있어보기로 했다. 
아무런 단서가 없으니 안톤이 혼자만의 오해로 더 입을 열기를 기다린 것이다. 
“검은 죽음께서 직접 방문하실 거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절대 카, 카라텔(кара́тель)께 누가 될 일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파벨 저 녀석이 말을 저렇게 했어도 잘 구슬리면 다시 블루 오아시스를 퍼트릴 수 있을 겁니다...!” 
‘카라텔?’ 
징벌자, 응징 등의 의미를 담은 러시아어다. 
하지만 인장 반지가 통역해주는 것은 일종의 고유명사처럼 들려주었다. 
아마도 검은 죽음이라 불리는 인물이 카라텔이라는 직함을 지닌 듯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진수. 
그는 속으로 기쁨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찌됐든 이 상황이 나한테는 나쁘지 않네. 조금 더 긁어볼까?’ 
흰둥이의 [드래곤 피어]를 보다 강하게 끌어올렸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위압감. 
비각성자는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강력했다. 
“이, 이미 이 도시의 대부분의 사람들한테 블루 오아시스 중독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2주 만 더 수돗물에 약을 푼다면 사람들이 약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가 될 겁니다!” 
안톤이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채로 벌벌 떨며 말했다. 
“위에서 제게 맡겨주신 일은 그러면 끝이 나지 않습니까...? 제발....” 
진수는 잠자코 [드래곤 피어]를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더 이상 안톤에게서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살려달라, 죄송하다, 임무는 곧 완수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저 블라고베셴스크에 블루 오아시스를 퍼트리라는 명령을 받은 게 전부인 듯했다. 
약을 퍼트리는 목적 같은 것은 전혀 모르는 꼬리 중의 꼬리. 
‘이 오해를 유지하는 건 이제 전혀 득 될 게 없겠네.’ 
진수는 [드래곤 피어]의 출력을 반 정도로 거둬들였다. 
러시아에서 퍼지고 있는 블루 오아시스에 대해 더 알아내려면 안톤의 상급자를 봐야한다. 
계속해서 검은 죽음이라는 자를 사칭해봤자 더 얻을 게 없었다. 
“당최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안톤은 주저앉은 채로 숨을 헐떡이다 진수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어...? 너, 너... 카라텔이 아니...야?” 
그는 진수가 검은 죽음이 아니라는 걸 눈치 챘다. 
블루 오아시스를 알고 있는 정황. 
러시아에서 보기 드문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의 동양인. 
온통 검은 옷차림. 
엄청난 위압감까지 더해지며 지레 겁을 먹었지만 반응을 보니 헛발질을 한 것이었다. 
‘이, 이게 더 안 좋은 상황일 수도 있어...! 예전에 멀리서 검은 죽음을 봤을 때보다 지금 날 옥죄었던 압박감이 더 강하다....’ 
안톤은 마른침을 삼켰다.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진수의 눈치를 살핀다. 
“혼자 주저앉았다가, 떠들었다가, 화냈다가.... 됐고, 나는 블루 오아시스가 필요해. 너희도 약을 퍼트리면 퍼트릴수록 좋은 거 아닌가?” 
그가 모르쇠로 나오자 안톤은 억울한 심정이었지만 일단 살 구멍이 있겠다는 생각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내, 내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안톤의 말투는 상당히 공손해졌다. 
세계 어디든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 
러시아의 주먹패인 그에겐 더더욱. 
“내일 오후.” 
“에?” 
진수의 갑작스러운 말에 얼빠진 소리를 낸다. 
“내일 오후까지 답을 가져오든 결정권이 있는 상급자를 데려오든 하라고. 시간은... 내일 오후 다섯 시에 보는 걸로 하지.” 
-스으으 
다시 [드래곤 피어]를 강하게 끌어올렸다. 
배짱 좋은 러시아 사내의 두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진수가 일방적으로 정한 시간이지만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마냥 고개를 끄덕인다. 
‘디에고가 내일 오전에 마석정제주사를 맞기로 했으니까 다섯 시 정도면 되겠지.’ 
약속 시간을 정한 기준은 지극히 진수의 마음대로였다. 
“이만 가봐.” 
마치 하급자에게 명령을 내리듯이 말한다. 
하지만 이미 기세에서 밀린 안톤은 고개를 주억거린 뒤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는 게 전부였다. 
진수는 떠나가는 그의 뒤로 분신을 붙였다. 
‘워낙 저놈이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어서 큰 도움은 안 됐네. 그래도 카라텔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정보를 찾아보면 뭔가 나오겠지.’ 
* * *
“흐으으....” 
사내의 신음소리가 방을 채운다. 
“잘 찍혔나요?” 
“전체적인 모습부터 디테일한 부분까지 다 보이도록 카메라 두 대로 찍었죠.” 
기운이 빠져 의자에 몸을 파묻은 남자를 두고 두 사람이 속닥거렸다. 
“어디 한 번 확인해보죠.” 
카메라에 잡힌 영상을 확인하는 이들. 
진수와 여의사였다. 
그들은 디에고에게 마석정제주사를 놓은 뒤 마석증 반점이 변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음, 확실히... 문양이라고 표현하신 게 이해가 되네요.” 
진수는 카메라에 잡힌 마석증 반점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덩어리의 반점은 주사 처치를 받은 뒤에 잠깐 모양이 변했다. 
원형의 테두리 안에 동그라미와 십자가 같은 모양들을 잠깐 그렸다가 사라진 것이다. 
“휴우우.... 김진수씨의 반점과 같나요?” 
디에고는 마석정제주사 특유의 후유증에 끙끙 앓으면서도 궁금증이 더 컸는지 질문을 했다. 
“아뇨, 제 경우는 이런 문양의 모습이 아니었거든요. 딱히 비교를 안 해봐도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네요.” 
진수가 서울의 의사가 찍었던 자신의 반점 모양을 핸드폰에 띄웠다. 
그의 반점은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이 여러 개로 나뉜 모습. 
디에고의 것은 커다란 원 안에 십자가와 동그라미, 선들이 배열된 형태였다. 
“지난번에 주사를 놨을 때도 이런 모양이었나요?” 
“제 기억이 맞다면 거의 동일한 것 같네요. 그때 사진이나 영상을 남기지 못했지만 이런 형상이었어요.” 
의사는 지난 마석정제주사 처치 당시를 떠올리며 답했다. 
“일단은 저랑 같은 모양은 아니지만 주사 처치를 받으면 마석증 반점이 잠깐 문양을 만든다는 건 확실해졌네요.” 
“맞아요. 학계에 보고하고 세계 각지에서 마석증 환자에게 처치를 하고 있는 의사들이 케이스를 모으다보면 앞으로 새로운 가설, 정보가 나올 거예요. 그러면 언젠가 마석증도 인류에게 정복된 병 중 하나가 되겠죠.” 
의사가 사명감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오우, 맞아요. 아폴로 신이 우리를 돕기를.” 
디에고가 태양의 신이자 의술의 신인 아폴로를 찾으며 함께 기원했다. 
-위스프 [아폴론]이 [그린스킨] 무리에 합류합니다. 
-[그린스킨] 무리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민첩 +2, 체력 +1, 마력 +3 
그의 말에 진수는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 
어제 안톤을 보내고 나서 블라고베셴스크 주변에 전이시킬 몬스터가 없나 둘러보았다. 
그러던 차에 발견한 것이 위스프. 
밝게 빛나는 몬스터길래 오랜만에 올림포스 신들 중에서 아폴론이라는 이름을 준 것이다. 
디에고는 이탈리아 출신이라 아폴로라고 하지만 결국 그놈이 그놈. 
‘아이고, 그 아폴로... 방금 촉수괴물 아프로디테 밑으로 들어갔는데.... 뭐 어쨌든 나를 돕긴 도왔네. 성장 보상으로....’ 
진수는 그에게 하하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김진수씨는 일부러 러시아까지 왔는데 좀 아쉽겠네요.” 
의사가 그의 어색한 웃음을 오해했는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에요. 이번에 러시아 온 건 여러모로 저한테도 좋았어요.” 
진수가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다. 
실제로 여러 러시아에 온 덕에 얻은 게 많았으니까. 
화이트 드래곤 흰둥이를 전이시키고, 파벨에게서 남았던 블루 오아시스들을 모두 받았다. 
이로 인해서 진수의 전력이 엄청나게 성장했다. 
‘게다가... 디에고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이득도 봤지.’ 
그의 눈이 핸드폰으로 향했다. 
[러시아에서 태극기 휘날린 놈 누구냐] 
[어제부터 여기 사람들이 한국인한테 겁나 잘 해줌;] 
[김진수가 보드카보다 좋다고 하는데 무서울 정도네...] 
러시아에 체류 중인 한국인들이 헌터넷에 여러 글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결과 하루 사이에 진수의 인지도가 고공행진을 했다. 
[‘이 남자’ 덕분에 러시아 미녀들이 한국을 외친다] 
[러시아보다 한국인 한 명이 더 강했다] 
[키미태 영상을 본 레전드 러시아인 반응(feat.ㄱㅈㅅ)] 
덩달아 비뚤어진 애국심의 콘텐츠들까지 쏟아져 나왔다는 문제가 있긴 했다. 
영상이든 글이든 그에게 양해를 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 이놈의 국뽕 콘텐츠 때문에 얼굴이 다 화끈하네....’ 
어찌됐든 헌터 사회에서 진수의 이름은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덕분에 그가 대표로 있는 로켓몬스터가 국내에서 완전히 자리 잡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유재찬의 말에 따르면 몇몇 러시아 사업체에서 벌써 로켓몬스터와 거래를 하고 싶다는 연락이 올 정도라고 했다. 
‘여기에 이제 블루 오아시스가 왜 아직도 돌고 있는지까지 파악이 된다면 금상첨화겠지.’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병원에서 나왔다. 
* * *
“블루 오아시스를 받았으면 한다고 들었소.” 
오후 다섯 시, 안톤은 정확히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나이가 꽤 지긋한 사내와 함께. 
“블루 오아시스에 여러 가지 효과가 있잖아? 블라고베셴스크에서는 마력을 강화시켜주는 효능을 톡톡히 이용했고.” 
실은 마약의 향정신성에 의해서 추위에 둔감해진 것이지만 일부러 반절만 아는 척을 했다. 
일부러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상대방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긴장감이 풀어지기 마련이니까. 
“허허, 제법 많은 걸 알아보셨군. 그래, 우리도 밑지는 장사만 할 수는 없으니까. 적어도 어떻게 쓰려고 하는지 정도는 듣고 싶소만....” 
사내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스치듯 지나가는 그의 눈빛은 제법 매서웠다. 
“실은 내가 지내는 곳에 균열이 좀 많이 생겼어. 몬스터들을 잡아야 하는데 헌터들의 수는 제한적이고.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찾던 와중에 일시적으로 마력을 증폭시켜주는 약을 듣게 됐지.” 
“블루 오아시스를 말이군.” 
“맞아. 그래서 헌터들한테 흡입시키고 몬스터들을 한 번에 해치우려고 하는 거지. 놈들을 처치하고 나면 마석이며 부산물도 많이 나올 테니까 그 때 약에 대한 대금도 후하게 치를 수 있을 거야.” 
사내는 진수의 말을 듣고는 조용히 그와 눈을 맞췄다. 
그의 본심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려는 듯이. 
‘하지만 어림도 없지.’ 
진수는 [석화의 시선]을 아주 살짝 쐈다. 
안구 건조증처럼 눈이 따끔거릴 정도로만. 
“크흠... 눈이 좀....” 
이내 사내는 눈을 끔뻑거리며 양손으로 문질렀다. 
“그래서, 약을 줄 수 있겠어? 나도 꽤 급하다고.” 
재촉하는 진수. 
사내는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 답했다. 
“알겠소. 블루 오아시스를 주지. 대신 계약을 하는 조건이오. 나는 [영혼의 약속] 기술을 가지고 있소. 이게 무슨 의미인지 혹시 설명이 필요하신가?” 
[영혼의 약속]은 아주 독특한 기술이었다. 
서로가 동의한 내용을 마력으로 약속하는 것이다. 
약속 내용에는 약속 이행에 대한 조건과 불이행시 패널티까지 설정할 수 있다. 
“설명은 필요 없어.”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지. 조건은 간단하게 우리는 블루 오아시스를 1톤 공급하겠소. 그쪽은 30억 루블만큼의 마석 및 몬스터 부산물을 주시오.” 
‘1톤에 거의 500억 원 정도라 이거지....’ 
진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해봤다. 
박철준에게 들었던 블루 오아시스의 시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이 조건을 이행하지 못할 시, 상대방에게 특성과 기술을 하나씩 주는 걸로.” 
사내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추가 조항을 걸었다. 
진수에게 꿍꿍이속이 있다면 감히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꼼짝없이 블루 오아시스를 제 값을 주고 구입해야 한다. 
그 정도 되는 전투 헌터에게 특성과 기술은 500억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하지.” 
아무런 반발 없이 수락하는 진수. 
둘이 서로 손을 맞잡으니 각자의 손끝에서 마력이 한 줄기씩 나와 허공에 약속 내용을 썼다. 
그리고 이내 사라졌다. 
“[영혼의 약속]은 제대로 작동 됐소. 내일 아침, 이 자리로 블루 오아시스 1톤을 가져오지. 약속대로. 당신도 특성과 기술을 잃고 싶지 않다면 꼭 약속을 지키시오. 후후후.” 
사내는 그 말을 남기고 연기처럼 흩어져버렸다. 
아마도 [영혼의 약속]을 사용한 뒤 진수가 해코지를 할까봐 미리 수를 써뒀던 모양이다. 
‘꼭 약속을 지키라고? 과연 약속을 어기는 게 내가 될까? 흐흐흐.’ 
진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약속대로
“그놈의 정체는 아직 몰라.” 
진수에게 [영혼의 약속]을 사용한 사내가 말했다. 
“하지만 균열이 많이 생긴 곳에서 왔다고 하니까 힌트가 없는 것은 아니지. 최근에 균열이 많이 발생한 지역 위주로 리스트업을 해봐.” 
그는 누군가에게 업무를 지시했다. 
“내일 이후로 블루 오아시스가 1톤이나 유입될 테니까 약을 흡입한 인구가 늘어난 곳을 찾으면 될 거야.” 
사내는 진수의 정체와 출신 등을 알아내기 위해서 애쓰고 있었다. 
‘백날 찾아봐라. 그렇게 해서 찾을 수 있나. 블루 오아시스 받으면 다 전이자들 먹일 건데 무슨 수로 파악할 거야.’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지트 천장 위에서 [중급 청각]으로 내용을 엿듣고 있던 진수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이제 슬슬 물건이 올 때가 됐는데....”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확인한다. 
사내와 그의 부하들은 상당히 늦은 시간임에도 퇴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블루 오아시스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안톤이란 놈한테 분신을 붙여놓길 잘 했어.’ 
분신으로 안톤을 쫓아왔던 진수는 한 차례 그들의 아지트를 뒤졌다. 
창고 등에서 블루 오아시스가 소량밖에 보이지 않았다. 
약속한대로 1톤이나 되는 양을 준비하려면 외부로부터 받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구르릉 
밖에서 묵직한 엔진음이 들렸다. 
상당히 커다란 차량이 온 듯했다. 
‘도착했네.’ 
진수는 분신들을 만들어 천장 위로 던졌다. 
작은 진수들은 [유체화]를 사용해 건물 밖으로 나갔다. 
“저쪽 창고 앞에 차 세워놓고 물건 내립시다!” 
두터운 장갑이 덕지덕지 붙은 전투 헌터용 트럭이 건물 앞으로 왔다. 
이곳저곳에 할퀸 자국 따위가 보이는 것이, 블라고베셴스크 내에서만 돌아다니는 차는 아닌 듯했다. 
건물에서 사내들 여럿이 나와 트럭 근처로 다가갔다. 
“지단장님, 어디로 옮길까요?” 
그들은 [영혼의 약속]을 사용하는 자를 지단장이라고 불렀다. 
“창고 출입구 근처에 쌓아놔. 내일 아침에 바로 뺄 거니까.” 
“옙!” 
“빨리 내리고 집에 가자!” 
덩치 좋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가 나무로 된 상자를 하나씩 날랐다. 
그들은 꽤 커다란 박스임에도 번쩍번쩍 들어올렸다. 
‘저놈들 힘이 저렇게 좋았나?’ 
작업을 지시하던 지단장이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잠깐! 거기 상자 하나 이쪽으로 들고 와봐.” 
그는 한 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목당한 자는 군말 없이 상자를 들고 지단장에게 향했다. 
-끼익 
상자를 열어보는 그.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다 이내 새파랗게 핏기가 사라졌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상자가 다 비어 있잖아!” 
지단장은 트럭의 짐칸으로 뛰어갔다.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듯 거칠게 상자들을 하나하나 열어본다. 
그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졌다. 
“왜, 왜 약이 없어!” 
그는 길길이 날뛰며 트럭을 운전해온 자를 추궁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겠는 건 운전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짐을 받아서 여기까지 갖고 왔을 뿐인데 지단장이 난리를 치고 있었으니까. 
‘이거 잘못하면 꼼짝없이 기술이랑 특성을 뺏기게 생겼다. 안 돼...! 그럴 순 없어!’진수를 압박하기 위해서 일부러 기술과 특성을 하나씩 빼앗는 조항을 넣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지단장에게 독이 된 것이다. 
“일부러 물건도 더 넉넉하게 요청을 했는데...! 너, 너...! 빨리 돌아가서 물건 다시 받아와! 최대한 빨리 달려서 내일 안으로 무조건 블루 오아시스를 가져와. 빨리!”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트럭에서 내린 그는 순간 현기증이 나는지 이마를 감싸며 비틀거렸다. 
트럭 운전사는 눈치를 보더니 차에 타고 재빨리 떠났다. 
갑자기 쏟아진 스트레스에 어지러움을 느낀 지단장. 
그는 떠나가는 트럭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 내가 헛것이 다 보이나...?’ 
트럭의 짐칸에 자그마한 인간이 서서 사악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인 뒤 다시 보니 작은 인간 같은 것이 사라졌다. 
“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을 좀 세워야겠어....”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든 그는 비틀거리며 건물로 돌아갔다. 
-가국 [몽치]가 블루 오아시스를 섭취하여 성장합니다. 
-민첩 +1 
‘와, 이 자식 약 냄새는 귀신같이 맡는구나.’ 
전이자들 중에서 블루 오아시스에 가장 빠져있는 몽치가 [차원의 틈]에서 블루 오아시스를 금세 빼먹었다. 
가져가지 못하도록 설정하기 전에 재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거의 한 2톤은 가져온 거 같은데.... 나한테 1톤 팔아먹고 남은 걸로 블라고베셴스크에 다시 풀 생각이었겠지? 이놈들은 그냥 냅두면 안 되겠다.’ 
전투 헌터용 트럭이 건물 근처로 다가왔을 때, 진수는 분신들을 트럭으로 보냈다. 
[투명화]와 [유체화]를 사용해 짐칸으로 숨어 들어간 작은 진수들은 가득 채워진 블루 오아시스를 [차원의 틈]에 모두 빼돌린 것이다. 
이어 약을 가져온 곳으로 돌아가는 트럭에 분신을 붙여놓기까지. 
‘여기에 있는 놈들한테 얻어낼 건 이제 하나밖에 없네.’ 
* * *
지단장과 약속을 했던 장소에 미리 도착한 진수. 
얼마 지나지 않아 지단장이 한숨도 못 잔 듯 퀭한 얼굴로 나타났다. 
“좋은 아침~” 
그의 마음고생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밝게 인사한다. 
하지만 사내는 진수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거참, 빡빡하네. 약속대로 블루 오아시스 1톤이나 넘겨.” 
지단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지단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것이, 무언가 속내를 감춘 듯 보였다. 
“[영혼의 약속] 내용이, 이쪽에선 블루 오아시스 1톤을 제공하고 당신은 30억 루블만큼의 마석 및 몬스터 부산물을 주기로 했소.” 
“그랬지.” 
“그럼 약속 내용대로 30억 루블 정도의 대가를 먼저 내놓으시오.” 
사내가 진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름 머리를 굴린 것이 맞교환으로 우겨서 쌍방 과실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영혼의 약속]을 할 때 나중에 주겠다는 조항은 안 넣지 않았소? 계약서를 쓸 때는 내용을 꼼꼼히 살폈어야....” 
“여기.” 
의표를 찔렀다고 생각했는지 점점 목소리에 자신감이 생기던 지단장. 
진수는 그에게 무언가를 던져주었다. 
그는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그거, 드래곤 하트야. 30억 루블은커녕 50억 루블도 넘을 걸? 당신, 분명히 받았어.” 
간장막야 무리가 드래곤 레어를 차지하면서 보상으로 받았던 약화된 드래곤 하트였다. 
비록 약화되었다고 해도 가치는 50억 루블 그 이상이다. 
진수의 약속 이행 조건은 단박에 충족되었다. 
“뭐, 뭣...?” 
지단장은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보았다.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드래곤 하트가 아니라고 해도 대단한 보물임은 분명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얼떨결이라고 해도 진수가 건넨 것을 스스로 받았으니 [영혼의 약속]의 조건에도 부합된다. 
“잠깐만... 하하. 너무 급하게 이러지 마시고.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배송이 조금 늦어지고 있어서 그런데, 오늘 내로만 드리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완전히 약자의 입장이 된 그가 자세를 바짝 낮췄다. 
“정말 오늘 약을 넘길 수 있어?” 
진수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지단장의 두 눈이 흔들렸다. 
그는 품에서 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예, 저 블라고베셴스크의 지단장입니다. 어제 블루 오아시스 추가 요청을 드렸었는데... 언제쯤 받을 수 있을지.... 예? 그게 무슨...! 아, 안 됩니다! 오늘 꼭 받아야, 여보세요? 여보세요?” 
뭔가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는지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약속을 지키셔야지?” 
진수의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단장에게는 마치 저승사자의 목소리 같았다. 
“저, 아마 도시에 있는 약들이랑 원래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양을 합치면 1톤 정도 될 겁니다. 하하. 그럼 그거 모으는 시간만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딘가로 메시지들을 급히 보냈다. 
“잠깐만 기다려주시죠. 하하.” 
비굴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한다. 
진수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잠자코 서있었다. 
‘음.... 이제 거의 다 온 거 같은데?’ 
대략 30분 정도 지나자 [사신의 감각]에 다수의 사람들이 감지되었다. 
흉흉한 마력을 보니 하나같이 각성자들인 것 같았다. 
“지단장님!” 
“어, 그래. 다 모아 온 거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단장의 뒤로 섰다. 
그 수가 한 백 수십 명은 되었다. 
“예, 한 명도 빠짐없이 왔습니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모았다는 게 블루 오아시스를 말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당연히 이 도시에 남은 블루 오아시스는 1톤이 안 될 테니까.’ 
파벨에게 조금 남았던 약은 진수가 벌써 수거했다. 
저들의 창고에도 블루 오아시스는 충분치 않았다. 
블라고베셴스크에 있는 약 전체가 1톤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일 것이다. 
“쳐라!” 
지단장이 진수를 가리키며 명령을 내렸다. 
“형제를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그들은 알 수 없는 구호와 함께 돌격했다. 
사방을 에워싸며 짓쳐드는 녀석들. 
그러나 여전히 진수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하여간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니까.” 
그의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뒤이어 검은 오러가 몸을 감쌌는데, 그 형상이 마치 거미처럼 보였다. 
“너희는 너희가 날 포위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내가 너희를 포획한 거야. 흐흐흐.”
-팍! 
진수의 손에서 [강철 거미줄]이 쏘아져 나왔다. 
한 높은 건물에 거미줄이 명중하자 풍선 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얇은 거미줄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마치 거미줄로 된 돔이 일정 구역을 뒤덮은 모습이었다. 
“거미집에 잡힌 먹잇감은 벗어날 수가 없지.” 
-푸슉! 푸슉! 
그는 [강철 거미줄]을 쏘며 급격히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들은 도망칠 수도 없고, 진수와 싸워 이길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작은 발악 후에 거미줄에 꽁꽁 묶이는 것뿐. 
전투는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끝이 났다. 
“자, 이제 약속대로. 기술 하나, 특성 하나였지?” 
진수가 거꾸로 매달려있는 지단장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미 체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슈우욱 
그의 심장 부근에서 마력 덩어리가 뽑혀 나오더니 진수의 가슴팍으로 흡수됐다. 
[김진수] 
힘:174 민첩:167 체력:175 내구:166 마력:245 
특성 : [차원 전이] [상급 재생력] [융합] [특급 공구 숙련] [도구 일체화] [증폭기] [발키리] [사신의 감각] [신뢰] [탄성체질] [체질 확장] [야수체질] [마트료시카] [상급 냉기 저항] [수중 호흡] [질긴 힘줄] [드래곤 스케일] [명필] 
기술 : [백년 도깨비불] [강철 거미줄] [유체화] [분열] [전장의 뿔나팔] [죽음의 그림자] [석화의 시선] [성창 소환] [빙의] [모래 연막] [영혼의 약속] 
골드 : 220 
[명필] 특성과 [영혼의 약속] 기술이 새로 생겼다. 
‘[명필]이야 뭐... 조금 그렇지만 [영혼의 약속]은 언젠가 요긴하게 쓸 일이 있겠는데.’ 
상호간의 동의가 있다면 약속을 확실하게 지킬 수 있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이 지단장이라는 자가 말장난으로 약속 불이행을 넘어가려고 했던 것처럼 쓰기에 따라서 일방적인 이득을 얻을 수도 있을 듯했다. 
“아차차, 내 거 돌려받아야지.” 
진수는 지단장의 품에서 약화된 드래곤 하트를 꺼내 [차원의 틈]에 집어넣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블라고베셴스크에 블루 오아시스를 퍼트리려 하던 자들을 잡아들이고 마무리를 하려는 차에 진수의 전화벨이 울렸다. 
헌터범죄전담기관의 박철준 수사관이었다.
형제단
-푸슉 푸슉 
진수는 [강철 거미줄]로 포박해둔 이들을 모두 한 데 모아 놓은 뒤 박철준 수사관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김진수 헌터. 지난번 국제형사경찰기구에 알아봐달라고 했던 블루 오아시스 건 확인해봤습니다. 
“아, 뭐라고 하던가요?” 
‘역시 박종대 그놈보다는 박철준 수사관님이 훨씬 낫네.’ 
그는 마침 블루 오아시스와 관련된 자들을 붙잡아 두고 있던 차라 반갑게 물었다. 
-국제형사경찰기구에서 블루 오아시스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처리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다만, 현재 생산은 막았는데 이미 유통된 양은 아직 다 수거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꽤나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문제는 내가 2톤 분량을 아주 여유롭게 수급하는 상황을 봤다는 거지. 정말 생산이 멈췄는데도 그만큼 양이 나온단 말이야? 그럼 기존에 얼마나 많이 만들어놨던 거야?’ 
안톤이라는 자가 말할 때 벨로고르스크라는 도시는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그 말인즉 벨로고르스크에도 블루 오아시스가 유통되고 있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 
겨우 두 도시에서만 이렇게 대량의 마약이 퍼지고 있을까? 
‘아냐, 뭔가 국제형사경찰기구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 분명해.’ 
-지금 유통되는 흐름을 파악하면서 유통망을 근절하고 있다고 하니 기다려보라고 했습니다. 
“음... 그렇군요. 일단은 그럼 그 국제형사... 인터폴에 러시아의 블라고베셴스크랑 벨로고르스크 그리고 스코보로디노 이 세 도시에서 블루 오아시스가 유통되고 있다고 전해주세요. 수사할 때 참고하라고요.” 
스코보로디노는 어제 밤, 블루 오아시스를 배달한 트럭이 돌아간 도시였다. 
마찬가지로 블루 오아시스가 퍼져있을 것이다. 
-도시명 정확히 해서 다시 메시지로 보내주겠습니까? 러시아 도시명은 영 어렵군요. 
주해응의 인장반지에 전반적인 언어 능력을 개선시켜주는 효과도 있었기에 진수는 금방 러시아 지명도 알아듣고 기억할 수 있었다. 
반면에 박철준은 끝의 세 도시의 이름을 동시에 들으니 그저 헛갈릴 뿐이었다. 
“예, 메시지 다시 넣어드릴게요.” 
진수는 바로 통화를 유지하면서 세 도시의 이름을 보내주었다. 
“수사관님, 여쭤볼 게 좀 있는데요.” 
그가 전화를 끊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불량배 무리라고 해야 할까요? 폭력적인 각성자들과 마찰이 좀 있었거든요. 근데 러시아어로 ‘형제를 위하여!’라고 외치더라고요.” 
그들이 진수에게 돌격하기 전에 외쳤던 구호였다. 
워낙 우렁차게 소리쳐서 놓칠 수가 없는 말이었다. 
-형제를 위하여라.... 러시아의 레드 마피아인 형제단에서 그런 구호를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형제단이요? 레드 마피아면 되게 규모가 큰 범죄 집단 아닌가요?” 
진수는 [강철 거미줄]에 개별 포장되어 꿈틀거리고 있는 자들을 잠시 돌아보았다. 
-러시아 최대 크기의 단체긴 하죠. 그런데 지금 있는 곳이 러시아 극동 지역 아닙니까? 
“예, 그렇죠. 중국 헤이허시랑 마주보고 있는 곳이에요.” 
-마찰을 빚은 자들의 수는요? 
“백하고도 몇 십 명 정도요.” 
-그 정도 규모면 지금 있는 도시에서 헌터 범죄를 처리하는 기관에 넘기면 될 겁니다. 도시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수준은 아닐 거예요. 형제단은 주로 유럽 인근의 도시들에 집중하고 있거든요. 러시아의 범죄자 헌터에 대한 대우가 굉장히 엄격하니 확실하게 처벌해줄 겁니다. 
러시아도 정부의 힘이 굉장히 강한 나라였다. 
게이트 사태가 터진 직후 정부에서 각성자에 대한 통제 및 운용을 발 빠르게 해낸 덕분이었다. 
‘이놈들 모두 착한 러시아인이 되겠네.’ 
특히나 각성자들을 확실하게 대우하는 한편, 처벌도 강력한 걸로 유명하다. 
범죄를 저지른 각성자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어딘가에서 강제 노역을 당하는 게 발견됐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려왔다. 
“이놈들은 그렇게 처리하면 되겠네요. 참, 혹시 카라텔이란 건 뭔지 아세요?” 
박철준과 통화를 한 김에 다 물어보기로 했다. 
이런 것은 헌터 위키에도 나오지 않았기에 헌터 범죄에 대해서 잘 아는 그의 전화가 여러모로 반가웠다. 
-형제단에서 배신자 처치, 무력 충돌 등에 활용하는 간부급 인물들이 카라텔이라고 불립니다. 최소 A급 헌터의 전투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죠. 
박철준은 형제단의 카라텔에 대해서 그가 아는 것을 모두 이야기해주었다. 
워낙 비밀스러운 인물들이기에 정보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하나하나가 가공할 수준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 
형제단 내에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지닌다는 것. 
그 수가 열 명을 넘지 않는 걸로 알려져 있다는 것까지. 
“카라텔 중에서 특이하게도 동양인이 한 명 있다고 하더군요. 호리호리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사소한 정보를 끝으로 카라텔에 대한 이야기를 마쳤다. 
‘그놈이 검은 죽음이겠지. 이거 잘하면 이용해먹을 수 있겠어.’ 
진수는 박철준의 설명을 듣고 앞으로 움직일 방향을 어느 정도 구상할 수 있었다. 
통화를 마친 그는 즉시 형제단 블라고베셴스크지단의 인물들을 [강철 거미줄]로 한 묶음이 되게 감았다. 
그 뒤 경찰서를 향해 질질 끌고 갔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단 한 명이 힘으로 끌고 가는 광경은 상당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일부러 가면을 쓰고 온몸엔 검은 옷을 입었다. 
모자나 후드 따위는 쓰지 않고 의도적으로 검은 머리카락을 노출시켰다. 
“블라고베셴스크에 있는 형제단이었던 자들이오. 규율을 어겼으니 더 이상 형제단이라고 할 수는 없지.” 
그는 경찰에게 형제단 인물들을 넘기며 말했다. 
이미 도시 내에서 요주의 대상인 자들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형제단임을 검증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 병원에 들렀다가 스코보로디노로 가야겠다.’ 
* * *
블라고베셴스크를 중심으로 한 사람이 형제단의 지단 하나를 통째로 없앴다는 소문이 퍼졌다. 
검은 옷에 검은 머리를 지닌 인물. 
혹자는 블라고베셴스크에서 큰일을 해낸 한국인인 김진수가 한 일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이름은 가려지고 검은 죽음의 소행이라는 루머가 주류로 자리 잡았다.
형제단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한때 검은 죽음이 형제단에 피바람을 일으켰단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봤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에서 검은 죽음을 연상하는 것이 러시아 사람들한텐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흐, 이놈의 마석정제액은 적응이 안 된다니까.” 
짝퉁 검은 죽음은 병원 쇼파에 몸을 파묻은 채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다. 
‘예상대로 흘러가주네.’ 
러시아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한국 헌터들의 커뮤니티인 헌터넷에서도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동영상 플랫폼에 올라온 러시아의 영상을 캡쳐해서 직접 자막을 달아 퍼 나르고 있었다.
‘형제단의 말단인 안톤 같은 녀석도 검은 죽음이라는 이름을 알고, 오해해서 벌벌 떨 정도니까. 당연히 그에 걸맞은 힘이랑 비슷한 특징을 보여주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소문이 나겠지. 이제, 스코보로디노에 가서 거기 있는 녀석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을 보자.’ 
형제단 전체가 블루 오아시스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라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진다. 
하지만 주류가 아닌 지역의 지단에서 자체적으로 행동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 몇 군데만 해치우면 될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블루 오아시스 공급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듯한 스코보로디노시로 가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김진수씨. 여기 마석정제액을 담은 캡슐들이에요. 오늘 사용하는 걸 보니까 혈액 내에 캡슐 형태로 투여를 해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하는군요.” 
블라고베셴스크에서 마석정제주사 처치를 하는 여의사가 기다란 캡슐 몇 개를 들고 왔다. 
진수는 그녀의 참관 하에 서울에서 가져온 캡슐을 [유체화]로 혈관에 직접 삽입했다. 
그 결과, 마석증 반점이 줄어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마석정제액 캡슐만 충분히 가지고 있다면 병원에 방문하지 않더라도 마석증 반점이 커졌을 때 처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길게, 멀리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는 거지.’ 
혈액 내에서 금방 녹는 캡슐이라 보관이 쉽지 않은 물건이었지만 진수에겐 [차원의 틈]이 있다. 
진수는 의사가 건넨 캡슐들을 받아 들고 병원 밖으로 나섰다. 
* * *
-아이스 엘리멘탈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아이스 엘리멘탈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임무 달성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마력 +3 
진수는 온몸이 얼음으로 된 몬스터를 [백년 도깨비불]로 녹여 전이시켰다. 
트럭이 움직인 길을 따라서 온 그는 틈틈이 임무를 받았다. 
어차피 몬스터와 만날 거, 보상이나 챙기자는 생각이었다. 
덕분에 힘 4, 민첩 2, 체력 3, 내구 4, 마력 5, 골드 20이 늘어났다. 
“이름은, 얼음보숭이라고 하자.” 
-설녀 [엘사], 눈토끼 [라판], 아이스 엘리멘탈 [얼음보숭이]가 [괴물왕녀] 무리에 합류합니다. 
전이자들도 몇 개체가 늘어났다. 
“어디~보자~ 지도로 봐서는 이제 거의 다 도착을 했는데...?” 
핸드폰을 꺼내 지도를 확인해본다. 
스코보로디노에 거의 근접한 상태였다. 
‘제법 작은 도시라고 했으니까, 우선 멀리서 동태를 좀 살펴보고 들어가 보자.’ 
진수는 헌터 위키에서 봤던 정보를 떠올렸다. 
스코보로디노는 서쪽으로 가는 큰 도로와 북쪽으로 가는 큰 도로가 만나는 커다란 삼거리 근처의 도시라고 했다. 
규모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유통 상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물자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상당히 풍족한 도시다. 
“라고 했는데.... 저건 도시라고 하기 보다는 요새 아니야?” 
길을 따라서 계속 가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인공물이 있었다. 
상당히 높은 벽이 둘러진 곳. 
벽 위로는 경계를 서는 헌터들이 보이고 곳곳에 설치된 총 따위도 있었다. 
‘정부한테 속한 군인처럼은 안 보이는데....’ 
경계를 서고 있는 이들의 복장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사조직의 소속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도시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사조직이라면... 역시 형제단이겠네.’ 
블라고베셴스크와는 달리 스코보로디노는 완전히 형제단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듯했다. 
“일단 임무나 또 받아놓고 가보실까.” 
이동하는 내내 임무로 재미를 봤기에 다시 [차원 전이]의 임무를 받았다. 
-임무 : 안내하는 몬스터 전이시키기 
-보상 : [달의 심장] 특성 
“어...?” 
임무를 받으니 어느 한 지점을 가리키는 감각이 발동 됐다. 
그 위치는 스코보로디노의 지하를 향하고 있었다. 
‘저기에 뭐가 있길래? 보상 이름도 심상치 않은데....’ 
진수는 요새나 다름이 없는 도시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전속력으로 달리니 몇 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신 상당히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쿵 쿵 쿵 
압도적인 신체 능력에 [빙의]로 변종 보팔래빗 새초미의 다리 힘까지 빌려왔다. 
한 걸음마다 엄청난 거리를 도약한다. 
소란스럽게 도시에 다가오는 그를 보고 경계를 서는 헌터들이 우왕좌왕했다. 
-후욱- 
어느 정도 스코보로디노에 가까워지자 전력 질주한 힘 그대로 뛰어들었다. 
공중에서 [빙의]의 대상이 바뀐다. 
토끼의 모양이 금방 소로 변했다. 
-콰앙! 
그의 손에 요새의 문이 박살나버렸다. 
“스코보로디노 지단장 나오라 그래.”
뭔 불사신도 아니고...
-꿀꺽 
형제단의 소코보로디노 지단장 맥심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자신의 목젖 움직이는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들렸다. 
시베리아 호랑이 앞에 선 토끼처럼 꼼짝도 할 수 없다. 
그만큼이나 눈앞의 인물이 쏟아내는 위압감이 엄청났다. 
“블라고베셴스크지단 이야기는 들었겠지.” 
온통 시커먼 차림을 한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제단에 속했다면 누구나 들은 이야기. 
블라고베셴스크의 형제단 지단이 완전히 파멸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꼽히는 게 검은 죽음.... 잘못하면 우리 지단도 그 꼴이 될 수 있다.’ 
맥심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거, 검은 죽음님.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하하.... 그런데 무엇 때문에 저희를 찾....” 
“블루 오아시스.” 
그의 말을 자르며 한 단어가 나온다. 
짧지만 아주 무거운 말이었다. 
“그, 그건 페챠님께서 지시하신....” 
“지금 나한테 페챠의 이름을 듣고 입을 다물라는 건가.”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더 짙어졌다. 
심기가 몹시 불편해진 듯했다. 
‘이런 빌어먹을.... 카라텔은 간부의 명령도 안 먹힌다더니, 진짜였어.’ 
형제단 러시아 극동 지역을 총괄하는 간부의 이름을 대도 태도가 전혀 누그러지지 않는다. 
소문대로 오직 형제단의 보스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자들다웠다.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저희도 지시를 받은 일이라서 직속상관의 명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맥심이 잔뜩 움츠러든 채로 답했다. 
최대한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페챠가 블루 오아시스로 뭘 하라고 했지?” 
다행히 트집을 잡히지는 않았다. 
“약을 줄 테니까 최대한 많이 퍼트리라고 했습니다. 가급적이면 시베리아 근처에 중독자들을 만들라고요.” 
“시베리아 근처에?” 
“예, 예.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몬스터가 늘어서 사람들도 많이 죽어나가는 곳에 왜 약을 유통시키라는 건지.... 돈도 안 될 텐데 말이죠. 저희도 의아하던 차입니다.” 
맥심의 말에 검은 차림의 사내가 눈을 빛냈다. 
“그래, 페챠는 지금 어디에 있지?” 
“예? 페챠님께서 함부로 자리를 비우지 못 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언제나처럼 이르쿠츠크를 지키고 계십니다.” 
맥심은 그가 왜 이런 당연한 것까지 묻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원체 종잡을 수가 없는 인물. 
괜한 이야기를 했다가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 
“알겠다. 이제 지하로 가자.” 
“네?” 
그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블루 오아시스에 대해서 묻던 자가 갑자기 왜 지하 얘기를 꺼낸단 말인가. 
“내가 두 번 말해야 되나?” 
“아닙니다, 아닙니다.” 
차디찬 러시아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지단장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것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벽 내부가 꽤 말끔해. 이건 상당히 근래에 세워졌다는 뜻이지.’ 
검은 죽음으로 위장한 진수는 소코보로디노에 들어와 바로 주변을 살폈다. 
문을 박살내며 소란을 야기하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정보를 수집한 것이다. 
벽 외부에는 할퀴거나 움푹 파인 전투의 흔적이 상당했다. 
‘뭘 지키기 위해서 벽을 쌓았을까?’ 
아직까지 특별한 단서는 없었다. 
하지만 진수는 임무가 가리키고 있는 존재와 큰 연관이 있을 것이라 직감했다. 
그래서 소코보로디노 지단장을 찔러본 것이다. 
그리고 쩔쩔매는 그를 보며 자신의 노림수가 통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 알겠습니다.” 
검은 죽음의 위상은 생각보다 대단한 듯했다.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단장이 이내 눈을 질끈 감고 안내를 시작했으니까. 
‘지하에 이런 시설을 갖추고 있네.’ 
소코보로디노는 겉에는 요새의 형태를 하고 있고 지하엔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기지가 있었다. 
특이한 점은 곳곳에 은빛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는 것이다. 
‘인테리어 소품일까? 아니면 범죄자들이어도 구원은 받고 싶은 욕심?’ 
진수가 맥심의 안내에 따라 이동했다. 
지하의 한 방에 도착하자 그의 눈이 커졌다. 
가면에 가려져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 이 자식들.... 블루 오아시스가 아니더라도 다 없애야 될 놈들이구나.’ 
방 안에는 눈과 입이 가려진 사람들이 묶여 있었다. 
어른들부터 아이까지 가리지 않고. 
“인신매매?” 
진수가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넵, 정부에게 꼬리 잡히지 않게 잘 하고 있습니다. 형제단에 누를 끼치지 않게 하겠습니다.” 
맥심이 아무런 죄책감 없는 목소리로 답한다. 
그는 이걸 빌미로 검은 죽음에게 해를 입지 않기만 걱정할 뿐이었다. 
“여기 말고.” 
진수는 속이 부글거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스스로 범죄 집단의 고위 간부라는 마인드 컨트롤을 하느라 아주 진땀을 빼야 했다. 
‘임무가 가리키는 방향은 여기가 아니야. 더 숨기고 있는 뭔가가 있다는 말이겠지. 거기까지 털고 여기는 완전히 박살낸다.’ 
침착하게 말하는 그를 보며 맥심의 눈빛이 떨렸다. 
진수의 눈치를 보며 무언가 속으로 계산하는 듯했다. 
“내가 알아서 갈까?” 
진수는 그를 밀치고 임무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침없는 행보를 보며 맥심이 재빨리 따라 붙었다. 
“아이고, 정말로 알고 오셨군요!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는 벌벌 떨면서 고개를 박고 사죄했다. 
진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보았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안내나 하라는 듯이. 
맥심은 그의 눈빛을 받고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혼자서는 찾아가기 힘들 정도로 이리저리 돌다가 이윽고 한 위치에 도착했다. 
바닥에 철제 문이 달려 있는 곳. 
“여기입니다.” 
맥심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수는 사실 뭐가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다 알고 있는 척을 해왔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철컥 
바닥의 문에 걸린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무거운 문을 연다. 
문의 두께만 해도 10cm는 충분히 넘어 보였다. 
‘재질은 던전산 금속인 거 같고.... 어디 뭘 숨기고 있나 한 번 보자.’ 
진수는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온통 어두컴컴한 곳. 
최소한의 조명장치도 달려있지 않은 듯했다. 
‘여기에 뭐가....’ 
-쿵! 
그가 주변을 살펴보는데 갑자기 철문이 굳게 닫혀버렸다. 
“죽어라! 네놈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 어둠 속에서 살아남지는 못할 걸?” 
닫힌 문 뒤로 들려오는 맥심의 목소리. 
그는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며 웃었다. 
‘난 [유체화]만 써도 그냥 위로 올라갈 수 있는데.... 너 이따 올라가서 보자.’ 
나름 함정에 빠졌지만 진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슈우욱! 
그 순간, 무언가가 빠르게 접근했다. 
어둠이 사위를 감싸고 있었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신의 감각]에도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생명 반응도 미약했다. 
하지만 [야성]은 송곳과도 같은 살기를 정확히 감지해냈다. 
-화르륵 
미지의 존재가 거의 접근했을 때 [백년 도깨비불]을 사용했다. 
백색 귀화가 허공에 나타나고 지하를 밝혔다. 
“꺄악!” 
빛이 퍼짐과 동시에 새된 비명이 들렸다. 
시야가 확보된 진수는 눈앞에 한 여성이 손으로 빛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빛을 무서워하는 것인지 가련한 모습으로 떨었다. 
“음?” 
긴 생머리에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리여리한 몸. 
커다란 두 눈은 [백년 도깨비불]이 반사되어 빛났다. 
조금씩 불빛에 적응이 되었는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린다. 
드러난 얼굴은 굉장히 미형이었다. 
특히나 뭐가 그렇게 두려운지 불안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남녀를 떠나 측은지심이 생길 것만 같은 모습이다. 
“저기....” 
진수는 그녀에게 말을 걸며 다가갔다. 
눈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여성. 
깊고 검은 눈동자가 매혹적이었다. 
-빡! 
천천히 접근한 진수는 바로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내려쳤다. 
“어디서 수작질을 부려?” 
그는 이어서 공격을 수차례 이었다. 
-빠악! 빡! 
수차례 머리를 맞은 여성의 얼굴이 흘러내렸다. 
정확히는 얼굴에 뒤집어쓴 누군가의 얼굴가죽이 떨어진 것이다. 
“너, 사람 잘못 골랐어.” 
외형을 아름다운 인간인 척 꾸미고 매혹하는 기술까지 사용하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진수에겐 [특급 정신 보호]가 있었다. 
경찰한테 보이스피싱을 거는 꼴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게다가 [차원 전이]의 임무가 정확히 녀석을 가리키고 있었기에 인간이라고 착각할 일은 전혀 없었다. 
“캬아악!” 
짐승과 같은 소릴 내며 멀리 떨어지는 몬스터. 
그 속도가 범상치 않았다. 
‘그래도 한 가닥 하는 놈이라 이거지.’ 
맥심이 카라텔이라고 생각하는 이를 처치하기 위해서 밀어 넣은 곳이다. 
어쭙잖은 몬스터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화르륵 화륵 
진수는 사방에 불꽃을 띄웠다. 
253이나 되는 마력 덕분에 층 전체를 환하게 밝힐 수 있었다. 
불이 들어오자 지하의 참상이 훤히 보였다. 
바닥에는 말라붙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피가 모조리 빨린 모습이었다. 
‘인신매매라고 위장을 하면서 이놈 먹이로 준 거구나.’ 
그는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몬스터가 빛을 피해 기둥의 그늘 속에 몸을 숨겼다. 
“이제 그림자가 무서워지게 될 걸?” 
진수의 몸 위로 검은 오러가 덧씌워졌다. 
아주 시커먼 새의 형상이다. 
-스윽 
손을 들어 [죽음의 그림자]를 사용하니 감각이 확장되며 주변에 있는 그림자들이 마치 신체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기둥의 기다란 그늘은 하나하나가 촉수가 되어 꿈틀대기 시작한다. 
괴물이 몸을 숨긴 그림자가 녀석의 몸을 휘감아 들어올렸다. 
-쾅!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친다. 
돌로 된 바닥이 깨질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었다. 
-팍!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는 않았다. 
짙은 어둠에 섀도우 호크 찜닭의 [빙의]로 강화된 [죽음의 그림자]를 마력을 발산해 흩어버렸다. 
그림자와는 다른 짙은 어둠이 녀석의 온몸을 감쌌다. 
느껴지는 마력량이 가볍게 볼 수준이 아니다. 
-슈욱! 
스스로 검은 탄환이 되어 날아오는 몬스터. 
진수는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며 피했다. 
순식간에 수십 번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전투 능력은 진수가 확실히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놈은 목이 부러져도, 가슴이 꿰뚫려도,몸이 반 토막이 나도 죽지 않았다. 
수없이 치명상을 입혀도 죽지 않고 금방 살아나버리니 승부가 나지 않는 것이다. 
“뭔 불사신도 아니고.... 이 시체들도 싸우다 지쳐 죽은 거 아니야?” 
바닥에 수없이 뒹굴고 있는 말라붙은 시체를 본다. 
그리고 이어 위층에 놓여 있던 은빛 십자가가 떠올랐다. 
“이거 생각보다 답은 간단했던 거 같은데.” 
[빙의]의 대상을 변경했다. 
찜닭에서 스톤 골렘 피그말리온으로. 
여전히 빠르게 돌진하는 몬스터를 정면으로 맞이한다. 
쾌속히 짓쳐드는 녀석에게 박치기를 꽂아버렸다. 
-쾅! 
힘과 힘의 격돌. 
하지만 [빙의]로 스톤 골렘을 덧씌운 진수 쪽이 더욱 묵직했다. 
괴물을 멈춰 세운 진수는 손을 뻗어 녀석을 단단히 붙잡았다. 
-슈웅 
이어 [성창 소환]으로 빛의 성창을 불러냈다. 
성창이 뿜어내는 강렬한 빛에 녀석의 몸을 감싸고 있던 어둠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리고 공포에 젖은 표정. 
마지막 발악으로 다시 매혹을 사용해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푸욱! 
빛으로 된 창이 몬스터의 심장을 관통한다. 
지금까지와 달리 녀석은 회복을 하지 못하고 사지를 바들바들 떨다 이내 사라졌다. 
-뱀파이어 퀸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뱀파이어 퀸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임무 달성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달의 심장] 특성 
피로한 싸움이 끝나고 임무 보상을 획득했다. 
‘[달의 심장].... 이건 무슨 효과가 있는 특성인지 모르겠네.’ 
상태창에 나타난 특성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내게... 오라.... 나를... 취하라.... 
그 순간, 진수의 귀에 환청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인가...?
-만월의 힘을... 지닌 이여.... 
진수는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방금 막 전이시킨 뱀파이어 퀸의 이름을 지어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당장 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스르륵 스륵 
그가 향한 곳에는 바닥에 마법진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어둠이 물질로 화한 것처럼 시커먼 무언가가 비정형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진수는 그 검은 물질이 자신을 부른 존재라는 걸 알아차렸다. 
-두근 
또한 임무 보상으로 받은 [달의 심장] 특성이 반응한다는 것도. 
‘소코보로디노 지단장이 숨기고 있던 게 저거였나 보다. 내가 저걸 빼앗으러 왔다고 생각했겠지. 뱀파이어 퀸은 최근에 데려왔을 거고.’ 
그는 지금까지 상황들을 종합해서 판단했다. 
자신을 검은 죽음이라고 오해하는 상황에서 죽으라고 소리치며 지하로 밀어 넣었다. 
그건 어지간해선 해치우기 힘든 뱀파이어 퀸을 믿었던 것이리라. 
-나는... 로드의... 징표.... 나를... 취하라.... 
검은 물질은 몇 가지 이야기만 반복적으로 속삭였다. 
‘자동응답기 같네.’ 
본능적인 이끌림에 왔지만 무작정 정체불명의 물건에 손을 댈 생각도 없었다. 
[특급 정신 보호]가 그의 정신을 명징하게 지켜주고 있다. 
유혹에 쉽사리 넘어갈 리가 없었다. 
다만 저 검은 물질의 속삭임은 유혹, 매혹 따위라기보다는 보다 원초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이 주변에 있던 게 뱀파이어 퀸이라고 했지. 그러면 저게 얘기하는 로드는 뱀파이어 로드를 말하는 건가?” 
-뽀옹 
진수는 [분열]을 사용해 분신을 뽑아냈다. 
작은 진수도 동일한 특성을 공유한다. 
[달의 심장]에 저 검은 물질이 반응하는 것이라면 분신에게도 동일한 현상을 보일 것이다. 
“가봐.” 
그가 작은 진수의 등을 재촉하듯 쿡쿡 찔렀다. 
이에 분신이 본체를 살짝 흘겨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분신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검은 물질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스르륵 스르륵 
마치 광풍이 부는 날 널어놓은 담요처럼 움직인다. 
이윽고 작은 진수가 마법진의 중앙에 도착했다. 
검은 물질을 향해 손을 뻗자 그것도 마찬가지로 분신의 손을 향해 뻗어온다. 
-스르르륵 
손가락과 물질이 맞닿는 순간, 작은 진수의 온몸을 검은 물질이 뒤덮었다. 
검은색 미라가 된 것처럼 전신이 꽁꽁 싸매졌다. 
“헛, 위험한 거였나?” 
숨통마저 다 틀어막은 듯 보이는 분신의 모습. 
진수는 언제든 몸을 뺄 준비를 하고 조심스럽게 살폈다. 
“와우, 이거 작살나는데.” 
작은 진수가 돌연 우아하게 한 바퀴를 돌았다. 
그와 동시에 검은 물질은 후드가 달린 망토로 화했다. 
자그마한 드라큘라 백작처럼 보인다.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이는 분신은 망토의 칼라를 매만졌다. 
-스윽 
그러더니 갑자기 진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경계를 하고 있던 그가 분신을 막아 세우려고 하는데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뭐야?” 
“어딜 보시는 겁니까?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뒤에서 분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그림자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거 해될 거 없겠다. 그럼 이만.” 
작은 진수는 망토 끝을 잡으며 인사를 하는 시늉을 했다. 
그 뒤에 [분열]을 해제했다. 
-스르륵 
검은 물질은 작은 진수가 사라지니 잠시 당황한 것처럼 우왕좌왕 하다가 진수에게 날아왔다. 
그것은 아주 부드러운 실크처럼 포근하게 몸을 감쌌다. 
사용하는 방법은 이미 분신에게서 공유 받았다. 
착용과 동시에 사용법을 알게 해주는 타입의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팡-! 
비로소 완전한 망토의 형태가 갖춰지며 한 차례 넓게 펼쳐졌다. 
“야, 이거 물건이네.” 
진수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뒤에 주변에 흩뿌려놨던 도깨비불들을 모두 껐다. 
온통 어둠으로 뒤덮이자 망토의 진가가 발휘된다. 
물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단 몇 초 만에 처음 내려왔던 철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착용하는 것 자체로 이미 전반적인 신체 능력이 강화되는데, 어둠이 짙을수록 그 효과가 배가되네.’ 
여기에 망토를 펼치면 체공 시간을 늘릴 수 있었다. 
바람 생성기와 함께 사용하면 일시적으로 비행도 가능할 듯했다. 
진수는 철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득! 
[죽음의 그림자]로 두터운 금속 문을 찢어버렸다. 
망토로 인해서 기술이 강화된 것이다. 
‘여기에 [빙의]로 찜닭 힘까지 빌리면 장난 아니겠는데.’ 
진수는 가벼운 감상을 떠올린 뒤 위층으로 도약했다. 
후드를 쓴 그는 온몸이 어둠으로 둘러싸였다. 
공허룡 코트까지 착용한다면 어디에 침투한다고 해도 정체를 들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게 검은 죽음에 걸맞은 비주얼이지.” 
그는 [사신의 감각]으로 주변의 인간들을 살폈다. 
지하층에는 납치당한 사람들만 느껴졌다. 
그리고 지상에서 다수의 생명 반응을 감지할 수 있었는데, 상황이 꽤나 복잡한 듯했다. 
-스르륵 
[유체화]를 사용한 그는 지상으로 올라왔다. 
은빛 십자가와 뾰족한 무기를 들고 싸우는 헌터들. 
인간을 닮았지만 창백한 피부를 지닌 자들이 소코보로디노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다. 
기다란 손톱으로 할퀴는 모습에 진수는 벽 외부에 남아있던 자국들이 떠올랐다. 
‘저놈들을 막으려고 벽을 세웠던 거구나.’ 
팔이 떨어져 나가고 머리가 부서져도 죽지 않고 살아나는 녀석들. 
그 모습은 뱀파이어 퀸과 비슷했다. 
‘형제단 놈들이야 다 죽어도 상관없지만 이대로 밀리면 도시 안에 있는 민간인이나 지하에 잡혀있는 사람들까지 위험해질 테니까.’ 
진수는 [빙의]로 흰둥이의 힘을 빌렸다. 
마력을 쏟아 부어 [드래곤 피어]를 사방에 쏘아냈다. 
싸우고 있던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하지만 아무도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 
몇몇 심약한 헌터들은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 
오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내심 놀랐다. 
소코보로디노에 쳐들어온 괴물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린 것이다. 
진수는 놀란 기색을 숨기고 천천히 걸었다. 
그가 향한 곳은 형제단의 소코보로디노 지단장, 맥심에게로였다. 
“그, 그걸 어떻게....” 
맥심은 진수의 어깨에 둘러져있는 망토를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소중한 물건을 빼앗기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너... 너 때문에 모든 게 망했어!” 
그는 분노에 눈이 멀었는지 진수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소리쳤다. 
형제단은 이미 거의 절멸한 상태고, 그 자신의 무력은 진수에 비할 바가 아니다. 
말 그대로 미치기라도 한 듯했다. 
“네놈이 뱀파이어 로드의 징표도 앗아가고, 문을 부순 탓에 이 괴물들도 못 막고.... 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맥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너라고 남의 거 안 뺏었나? 더 강자라는 이유로 목숨까지 가져간 놈이 징징대기는.” 
진수가 싸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맥심은 바로 죽이지 않고 말을 거는 그의 모습에서 도리어 희망을 본 듯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가 그래도 수십 년 동안 형제단에 헌신했지 않습니까? 제발 그동안의 노고를 생각해서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는 차디찬 동토에 이마를 거세게 내려찍으며 빌었다. 
금방 이마가 찢어져 얼굴에 피칠갑을 했다. 
목숨을 건져보겠다고 발악하는 모습에 진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걸로 뭐 하려고 했던 거야?” 
망토를 매만지며 묻는다. 
맥심은 즉시 대답을 했다. 
“우, 우연한 기회에 뱀파이어 로드의 징표를 얻게 됐습니다. 보통 사람은 손을 대는 즉시 온몸의 피가 끓어올라 절명하게 됩니다. 그래서 뱀파이어 퀸을 이용해 힘을 약화시킨 뒤 제가 착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뱀파이어 로드의 징표를 얻게 된 과정부터 뱀파이어 퀸을 포획해 지하에 가둔 이야기, 인신매매를 하는 겸 제물로 삼은 것까지 모조리 이야기했다. 
“이 망토에 대해서 알려준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고?” 
“예, 예. 맞습니다.” 
맥심은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뱀파이어 로드의 징표, 뱀파이어 퀸, 그 외의 뱀파이어들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고 했다. 
굉장한 위압감을 지닌 사람이었는데 그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전신이 시커먼 그림자로 뒤덮인 모습이었고 목소리조차 여러 개의 목소리가 겹친 듯이 들렸다는 것이다. 
‘디에고가 말했던 그 괴상한 몬스터랑 비슷한 느낌이네.’ 
“블루 오아시스는?” 
“제,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게 전부입니다. 정말로 그거는 제가 더 아는 게 없습니다...!” 
그가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꼼짝없이 이르쿠츠크에 있는 페챠란 놈을 만나러 가야겠네.’ 
맥심의 이야기를 모두 들으니 블루 오아시스에 대해서는 더 단서가 없었다. 
뱀파이어 로드의 징표에 대해서는, 착용한 자가 뱀파이어들을 부릴 수 있게 된다는 말에 약화시키기 위한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형제단의 일개 지단장이 아니라 간부급까지 될 더 큰 야망을 품어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스으윽 
진수는 [드래곤 피어]를 거둬들였다. 
맥심을 짓누르던 어마어마한 압박이 사라졌다. 
그의 눈에 희망의 빛이 감돌았다. 
“살려주시는 겁니까, 검은 죽음님?” 
“검은 죽음이라는 이름을 걸고.”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조용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연신 고개를 주억거린 그는 아직도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대로 뒤로 돌아 소코보로디노의 문을 향해 가려고 했다. 
다만 문제는 몸을 일으킨 게 그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크르르....”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몬스터, 뱀파이어들도 어느새 선 채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거, 검은 죽음님...?” 
“이걸 어쩌나. 내가 검은 죽음이 아니네.” 
어깨를 으쓱하는 진수. 
그 모습을 보며 절망하는 맥심. 
어느새 뱀파이어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사지를 찢어버렸다. 
‘어디 가서 또 사람들한테 어떤 해코지를 할 줄 알고.’ 
진수는 일말의 안타까움도 느끼지 못했다. 
“자, 이제 이놈들이 문젠데....” 
그는 맥심을 공격한 몬스터들을 보았다. 
녀석들에게서 적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망토를 가지고 있으면 이놈들을 부릴 수 있다고 그랬....’ 
뱀파이어 로드의 징표를 테스트해보려고 했던 진수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컴컴해지는 듯했다. 
숨이 턱 막히고, 몸이 굳는다. 
감각은 그대로였지만 뇌가 그대로 멈춰버린 것 같았다. 
-내 장난질을 훼방 놓다니.... 딱히 공을 들였던 건 아니지만, 계약으로 얻은 힘을 제법 썼는데 말이야. 
누군가가 머릿속으로 직접 말하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사신의 감각]에 느껴지는 생명 반응은 전혀 없었다. 
강한 몬스터, 예를 들면 화이트 드래곤을 만났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 옥죈다. 
‘신, 신인가...?’ 
그는 속으로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그 정도로 항거할 수 없는 수준의 힘이었다. 
선 채로 굳어있는 그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림자가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없는 목소리. 
진수는 이 존재가 디에고와 계약을 한 존재라는 걸 직감했다.
오세
-꽈드득 
진수는 이를 악물며 손가락 끝에 집중했다.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는 상황. 
0에는 무얼 곱해도 0이지만 1이라도 만들어낸다면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에게 1은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이었다. 
-기껏 욕심 많고 적당히 멍청한 인간을 꼬드겨서 재밌는 그림을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그걸 홀라당 빼먹었다 이거지? 
그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림자로 이루어진 존재는 자기 이야기를 떠들었다. 
진수의 어깨 위에 한쪽 팔을 턱하니 걸친 채로 여유롭게 말하는 모습. 
전혀 긴장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주변엔 온통 뱀파이어들에 의해 죽은 시체가 즐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공을 들이던 녀석은 죽었고. 내가 힘을 써서 불러놓은 뱀파이어 무리는 갈 길을 잃었어. 
그것은 뱀파이어 로드의 징표를 툭툭 건드렸다.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진수의 목덜미로 훅 접근하더니 이내 속삭이듯 말한다. 
입김이 그의 피부를 훑고 지나갔다. 
마치 예리한 면도날이 목줄기를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움직여라, 움직여!’ 
괴물이라 표현하기에도 부족한 존재가 바로 옆에 서있음에도 진수는 온 신경을 손가락에 쏟았다. 
이윽고, 그의 검지가 꿈틀거렸다. 
몸의 극히 일부분이지만 통제권을 되찾았다. 
이어 모든 신경이 되살아나며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팟! 
“허억, 허억, 헉...! 너, 너 뭐야?” 
마비가 풀리자마자 진수는 번개처럼 그것으로부터 멀어졌다. 
그 모습을 본 그것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으로 진수를 보았다. 
-움직였어? 한낱 인간 주제에? 하하하! 하하하하! 
뒤이어 즐거움이 잔뜩 묻어나오는 광소를 터트린다. 
-내가 뭐냐고? 글쎄. 뭐처럼 보여? 무엇이라고 느껴? 신? 악마? 아니면 몬스터? 
루마니아에서 디에고는 그것을 보고 몬스터라고 생각했다. 
진수는 신을 만난 것인가 싶을 정도의 위압을 느꼈다. 
-이렇게 차원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진 곳에서는 몬스터란 소리를 듣곤 하지. 나를 악마라고 표현하는 녀석들도 상당히 많아. 그리고 개중에 수준 높은 놈들은 내게 신이냐고 묻더라고. 
그것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호선을 그렸다. 
-어떻게 보면 악마고, 어떻게 보면 신이지. 뭐 어쨌든, 나는 그냥 나야. 오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자신을 오세라고 소개한 존재는 예상보다 호의적으로 나왔다. 
진수에게 상당한 흥미를 보이는 듯했다. 
-조금 전까지는 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거 같아서 기분이 별로였거든. 근데 이제 괜찮아.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니까. 
오세는 멀찍이 떨어진 진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너, 나랑 계약하자. 내가.... 
“권능을 빌려주겠다고?” 
진수는 녀석이 하려던 말을 가로챘다. 
디에고에게 제안한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래. 어떻게 알고 있네? 
신기해하는 오세. 
진수는 그 모습을 보며 이 존재가 신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전지전능이라는 형태의 신은 아닌 게 분명했다. 
“너, 그 계약이라는 걸 해서 뭘 하려는 거지? 목적이 뭐야? 게이트 사태, 균열 같은 것도 니가 일으킨 거냐?” 
마치 여러 차원을 경험해본 것처럼 말하는 녀석. 
진수는 [차원 전이]를 통해 게이트 사태, 균열, 던전 따위의 일이 차원 간의 전이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그가 사는 차원에 생긴 재앙의 근원이 이 오세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됐다. 
-뭔가 많이 알고 있구나? 야, 근데 너 왜 나한테 반말 하냐? 
오세는 여러모로 놀란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너도 반말하잖아.” 
사실 진수가 오세에게 아득바득 말을 놓는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굴종하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자 작은 반항이었다. 
-아니,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 신기해서~ 보통 인간들은 날 만나면 설설 기면서 온갖 아부와 비굴한 태도를 보이거든. 배짱이 좋은데?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오세는 오히려 그런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여기에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 나타나는 건 내가 한 게 아니야. 아니, 그 누구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그냥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하면 돼. 차원마다 주기적으로 경계가 흐릿해지는 순간이 오거든. 그 순간을 무난히 보내면 차원은 다시 문을 걸어 잠그고 평상시로 돌아가는 거지. 
녀석은 진수의 물음에 순순히 답을 해주었다. 
-여기도 아마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닐 거야. 너희 신화 같은 걸 보면 몬스터들이랑 비슷하게 묘사된 것들이 나오지 않아? 
만티코어, 미노타우로스, 평천대성 등의 몬스터들이 그랬다. 
옛 이야기에서 나오는 괴물들이 그대로 나타난 듯한 모습. 
-이때의 기록이 나중에 발견되면 비슷한 평가를 받게 되겠지. 지금 초능력을 갖게 된 이들은 전설 속의 영웅, 구원자 같은 걸로 기억될 거고. 물론, 그놈의 눈에 띈 이상 너희들에게 후대라는 건 없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뭐? 그게 무슨 뜻이야?” 
마지막에 굉장히 불길한 소리를 뱉는다. 
진수가 더 추궁해봤지만 오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내 목적이 뭐냐고 물었지? 나는 따분한 걸 못 견디는 성격이거든. 그래서 재밌는 거, 맛있는 걸 찾아 다녀. 내가 봤을 때 여기가 제일 재밌는 곳이라서 온 거야. 그리고 더 재미있는 상황을 만들려는 거지. 
선문답 같은 소리를 하는 오세. 
“그놈이라는 게 뭔데?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거야?” 
-말했잖아, 난 재밌는 걸 보러 왔다고. 그걸 다 얘기해주는 건 별로야. 
녀석이 검지를 좌우로 흔들어보였다. 
-나랑 계약을 하면 좀 더 이야기를 풀어줄 수도 있는데.... 너한테 해가 될 건 없어. 조금 번거로워지긴 하겠지만. 
번거로워진다는 말의 의미는 마석증을 두고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얼레? 이거 재밌네. 
오세는 진수를 훑어보다 그의 왼팔에 시선이 멈췄다. 
-그래, 이중계약은 안 되지. 이미 어떤 놈이 꼼수까지 써먹은 것 같고 말이야. 그래도 재밌는 구경은 할 수 있겠어. 
녀석이 의미를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하더니 주변에 서있는 뱀파이어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뱀파이어들과 오세 사이에 이어진 아주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드러났다. 
처음부터 연결이 되어있었던 듯 갑자기 생겨난 것이다. 
오세는 자신의 몸에 연결된 실들을 거칠게 뽑았다. 
이어 진수를 향해 손을 내미니 실들이 마석증 반점이 있는 위치로 쏘아졌다. 
-원래는 계약을 해서 생긴 힘으로 이놈들을 복구시키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니까. 니가 이 뱀파이어 무리의 작고 소중한 차원의 축이 되어줘라. 이 차원에 내 계약자가 적어서 더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겠네. 
실이 연결되자 본능뿐인 괴물 같던 뱀파이어들의 눈에 총기가 돌았다. 
기다랗게 뺀 손톱이 줄어들고 멀끔한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아무것도 안 받고 이렇게까지 해줬으니까 앞으로 열심히 활약 좀 해줘라. 근래 들어서 제일 흥미진진한 상황이니까. 크흐흐. 
오세는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마치 꿈이라도 꾼 것처럼 몽롱하다. 
‘차원의 축이라는 단어를 들을 줄이야. 저쪽 차원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겠네.’ 
진수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오세가 정작 중요한 말은 안 하고 수수께끼 같은 소리만 던지고 사라졌으니까. 
‘그놈이라는 건 누구고, 이미 내가 계약중이라니?’ 
디에고의 경우에는 분명하게 계약을 맺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수는 아무리 과거를 되짚어 봐도 그런 기이한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 
“로드시여....” 
그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고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형태가 된 뱀파이어 중 하나가 진수를 부른 것이다. 
로드라는 명칭으로. 
녀석들은 어느새 모두 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우, 강화를 시킨다는 게 아예 몬스터의 틀을 벗어나게 만들어놓고 갔네.’ 
뱀파이어들의 외모만 변한 게 아니었다. 
그저 햇빛을 못 쬔 인간이라고 해도 믿겨질 만큼이나 총명해 보인다. 
게다가 이 녀석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또한 상당했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A급 헌터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몬스터들 수십 마리가 진수에게 충성을 보이고 있다. 
분명 무척이나 좋은 일이지만 한숨이 먼저 나왔다. 
‘어휴, 바닥엔 사람 피랑 살점이 낭자하고 뱀파이어들이 예를 다하고 있네. 마왕 이미지는 저쪽 차원으로도 충분한데.’ 
진수는 파투스교도 볼렌테가 차원을 넘어 자신을 죽이러 왔던 게 떠올랐다. 
여기서도 몬스터들의 수장이 되면 헌터들의 표적이 될 것이다. 
“너희들 혹시 뭐 먹고 사냐?” 
“로드시여,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는 혈액을 통해 삶을 영위합니다.” 
눈앞이 캄캄하다. 
“혹시 사람 피만 먹어야 돼?” 
“더러운 몬스터의 피를 마셔도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습니다. 하오나 결국 인간의 피를 섭취하지 못한다면 성장이 멈추게 됩니다. 로드께서 필요하실 때 저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불충을 저지르게 될 겁니다.” 
뱀파이어들의 대표로 말하는 녀석이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성장이 멈춘다는 것은 분명 큰 문제였다. 
오세의 말을 들어보면 오세 못지않은 존재가 무언가 꾸미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가능한 한 많은 전력을 확보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 피를 먹으라고 할 수는 없잖아.’ 
진수는 뱀파이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 북쪽으로 가서 몬스터들 피를 먹으면서 지내라. 나중에 내가 부를 때까지. 가능한 한 사람이 보이면 피하고. 먼저 공격받지 않는 이상 싸우지 마.” 
그는 핸드폰을 꺼내 시베리아의 범위를 뱀파이어들에게 알려주었다. 
“알겠습니다, 로드시여.” 
“그리고 혹시 시베리아에서 이상한 짓 하는 인간 발견하면 나중에 나한테 알려주고.” 
소코보로디노 지단장 맥심이 말하길, 블루 오아시스를 시베리아 주변 도시에 퍼트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몬스터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블루 오아시스에 대해 의심을 했던 것과 이 상황이 굉장히 잘 들어맞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단순한 마약 문제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단 말이지.’ 
진수는 [차원의 틈]에서 블루 오아시스 1톤을 꺼내 공간압축가방에 담아 뱀파이어들에게 주었다. 
사람 피를 먹지 못해 멈춘 성장을 블루 오아시스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약쟁이의 신 징크스 강림이다.’ 
블루 오아시스를 맛본 뱀파이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로드시여! 역시 위대하십니다!” 
“제가 로드를 모시게 된 것은 만월의 축복입니다!” 
“감사합니다! 로드께 무한한 영광을!” 
마약을 흡입하고 황홀해하는 녀석들을 보며 진수는 배덕감과 뿌듯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 이제 너희들 갈 길 가라. 나도 가야할 곳이 있으니까.” 
그는 뱀파이어들을 진정시키고 시베리아로 보냈다. 
이어 자신은 페챠라는 자가 있는 도시, 이르쿠츠크를 향해 출발했다. 
* * *
“검은 죽음이 스코보로디노지단도 없애버렸다고?” 
“예. 그, 그런 소문이 있습니다.” 
몸과 머리가 분리된 사내. 
기이하게도 머리는 여전히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리고 그 머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누군가. 
“너, 내가 누구인 거 같아?” 
“거, 검은 죽음....” 
-퍽! 
답하던 머리는 이내 발길질에 의해 터져버렸다. 
“건방져.” 
사내를 완전한 영면에 들게 만든 자는 불쾌하다는 듯이 말을 씹어 뱉었다. 
그가 건방지다고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저벅 저벅 저벅 
이내 걸음을 옮긴다. 
그의 뒤에는 토막 난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검은 죽음
“검은 죽음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형제단 이르쿠츠크지단에 때아닌 소동이 일었다. 
전신을 검은 색으로 가득 채운 인물이 방문한 것이다. 
이미 블라고베셴스크지단, 소코보로디노지단의 이야기는 유명했다. 
소코보로디노지단의 멸망 이후 2주가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제법 강한 각성자라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기간이다. 
“페챠에게로.” 
이르쿠츠크 지단장이자 형제단의 간부 중 하나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모습. 
검은 죽음이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형제단의 헌터들은 지체하지 않고 그를 지단장 페챠에게 안내했다. 
-끼이익 
화려하게 장식된 성당 같은 건물의 문이 열린다. 
마찬가지로 온갖 색들이 조화롭게 내부를 채운 방이 드러났다. 
그 중앙에는 크고 빛나는 의자가 있었다. 
의자에 앉아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성. 
이르쿠츠크 지단장 페챠였다. 
“먼 길 오셨네. 여기까진 어쩐 일로 방문하셨을까?” 
어지간한 이는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떠는 검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과연 러시아 최대 범죄 조직인 형제단의 간부다운 모습이었다. 
“블루 오아시스에 대해서 물으러 왔다.” 
가면을 쓴 동양인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페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표정, 그리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이다. 
“그거 때문에 이 난리를 쳤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텐데....” 
사내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말을 잇는다. 
“한국에서부터 말이야.” 
“...!” 
가면으로 얼굴이 가려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눈에서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검은 죽음, 아니 검은 죽음으로 위장한 진수는 예상치 못한 발언에 말문이 막혔다. 
“처음에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 엉덩이 무거운 검은 죽음이 극동까지 와서 지단을 하나씩 손수 뭉갠다? 정말 드문 일이거든. 그런데 알고 보니 한국 그 자그마한 나라에서 온 녀석이 소꿉놀이를 하는 거였다니. 하하. 기도 안 차는 일이지.” 
페챠는 괘씸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위대한 형제단이 겨우 한국의 헌터범죄전담기관에게 속을 거라곤 그 누구도 생각지 못 했을 거야.” 
‘응? 헌터범죄전담기관이 왜 나와?’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진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한국이라는 이야기를 할 때만 해도 형제단의 정보력이 뛰어난 것이라 생각을 했다. 
하지만 콕 집어서 헌터범죄전담기관을 지목한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인터폴에서 정보가 샜다.’ 
박종대와 연락이 되지 않아서 헌터범죄전담기관의 박철준 수사관을 통해 국제형사경찰기구에 연락을 했다. 
그로 인해서 러시아에 블루 오아시스가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이 전달됐다. 
박철준 수사관이 국제형사경찰기구에 제보한 모양새가 됐으니 한국의 헌터범죄전담기관이 블루 오아시스를 쫓아 러시아까지 움직였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혀가 굳어버렸나? 지금까지 검은 죽음 행세를 하면서 잘만 떠들고 다녔을 텐데, 뭐라고 말 좀 해보지?” 
페챠가 조롱하듯 말했다. 
그에 화답하듯 진수의 몸 위로 드래곤의 형상을 한 오러가 덧씌워졌다. 
흰둥이의 [드래곤 피어]가 발동된다. 
“흐읏...!” 
그에게서부터 퍼져 나오는 위압감에 페챠는 숨을 쉬는 게 힘겨워졌다. 
“크흐, 흐...! 나를 죽이면... 이르쿠츠크의 민간인까지 다... 죽이는 거야...!” 
호흡 곤란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페챠.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르쿠츠크 주변에는... 몬스터가 별로 없지.... 그게... 왜일까?” 
힘겹게 입을 뗀다. 
그러고 보니 화려한 의자로부터 은은한 마력 파동이 느껴졌다. 
진수가 도시 근처에 도착했을 때부터 감지했던 것이다. 
그는 [드래곤 피어]의 출력을 조금 낮췄다. 
“허억, 헉.... 흐흐흐. 도시를 함부로 벗어나지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형제단의 간부가 됐겠어? 다 이 몬스터를 쫓는 기술, 그리고 그걸 강화시키는 특성 덕분이지. 내 기술이 사라지는 순간 몬스터들이 쏟아져 들어올걸?” 
페챠는 겨우 호흡을 안정시켰지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저 멀리 한국에서부터 블루 오아시스를 쫓아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대단한 희생정신이야. 기왕 행동한 김에 조금만 더 희생하는 건 어때? 목숨을 내놓는다던지.” 
-짝짝 
꺄르르 웃으며 박수를 두 번 친다. 
그러자 방 밖에서 다수의 헌터들이 들어왔다. 
하나하나가 모두 강대한 기운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었다. 
“해치워.” 
그녀의 명령에 헌터들은 진수에게 덤벼들었다. 
“형제를 위하여!” 
그들은 평소에도 무리를 지어 전투를 하는 것이 익숙한 듯 보였다. 
합을 맞추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온 마력을 실어 화이트 드래곤의 [드래곤 브레스]를 날린다면 한 방에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러면 자연스럽게 페챠의 목숨도 사라진다. 
그녀는 일부러 자신이 있는 방에서 싸움을 건 것이었다. 
“덩치는 산 만한 놈들이 왜 이렇게 날파리처럼 싸우는 거야!” 
형제단의 헌터들은 모두 우락부락한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 스타일은 진수의 공격을 뭉쳐서 막아내거나 다가가면 빠르게 흩어지며 회피를 했다. 
그러다 빈틈이 보이면 개별로 덤벼 공격을 시도하는 방식이었다. 
“적당히 해줄 수가 없겠네. 뜨거운 맛을 보여주마.” 
진수는 [차원의 틈]에서 전기톱을 꺼냈다. 
-우르릉! 
거친 엔진음을 토해내는 전기톱. 
오랜만에 작동되는 터라 왠지 좋아하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이어 톱날에 불꽃과 전기가 덧씌워졌다. 
[백년 도깨비불]과 [빙의]로 진, 카자마에게 빌린 [라이트닝 인챈트]였다. 
그의 높은 마력 능력치 덕분에 방 내부의 온도가 후끈 달아올랐다. 
-화르륵, 파지지직! 
진수의 손에 무기가 들리자 전투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 
뭉쳐서 막으면 떼로 부상을 입고, 뿔뿔이 흩어지면 손에 걸리는 한 명은 무조건 전투불능이 되었다. 
“이. 이럴 수가.... 이르쿠츠크지단에서도 선별한 인원들인데....” 
페챠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패닉 상태가 되었다. 
가짜 검은 죽음을 압박해서 그 뒤에 있을 헌터범죄전담기관의 인물까지 끌어내려고 했는데, 그녀가 준비한 인원이 상대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니가 잘못 생각한 게 두 가지가 있어.” 
마지막 헌터를 해치운 뒤 진수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하나, 나를 함정에 빠트려서 처치하려고 했으면 적어도 카라텔이란 놈들 한둘은 준비해뒀어야 돼.”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둘, 내가 헌터범죄전담기관이랑 연관이 있다고 해서 꼭 그 소속일 거란 생각은 오산이지.” 
-푹! 
진수가 송곳으로 페챠의 손을 의자채로 꿰뚫었다. 
“끄악!” 
“다시 말하면, 내가 움직이는 동기가 꼭 정의구현 따위의 간지러운 게 아닐 수 있다는 거야.” 
-꽈드득 
그는 송곳을 천천히, 더 깊게 눌렀다. 
페챠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불의의 습격을 당한 탓에 더욱 아프게 느껴졌다. 
“자, 이제 대화를 할 준비가 된 것 같으니까 처음 내용으로 돌아가 볼까? 블루 오아시스. 왜 퍼트리는 거야?” 
진수가 송곳을 하나 더 꺼내며 물었다. 
누가 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당의 면모가 보였다. 
‘악랄한 연기가 점점 느는 것 같네.’ 
“마, 말할게! 말한다고!” 
전투능력이 아닌 기술과 특성으로 간부가 되었기 때문일까. 
페챠는 생각보다 간단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가 블루 오아시스를 퍼트린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돈. 
하지만 블루 오아시스를 퍼트리는 게 돈이 되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또 중국놈들이야?’ 
평소 교류가 종종 있었던 운명파의 인물이 그녀에게 거래를 제안했다고 한다. 
시베리아 근처 도시들에 블루 오아시스 중독자들을 많이 만들면 큰돈을 주겠다고.
그리고 시베리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형제단의 간부가 그깟 돈 때문에 그놈들 말을 들었다고?” 
“말이 간부지. 사실상 이 의자에 진열된 장식품이나 다름이 없어. 맘대로 도시를 떠날 수도 없고, 하루의 대부분을 여기에 묶여있어야 된다고. 돈을 잔뜩 벌어서 형제단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떠나려고 했는데....” 
“호오, 과연 그런 속셈이었군.” 
페챠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는데 어디선가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그 음성에 깜짝 놀라더니 덜덜 떨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당신이 여기에...?” 
공포에 질린 페챠의 시선이 진수의 뒤편으로 향한다. 
이에 진수도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검은 방어구에 검은 가면,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인물이 서있었다. 
“... 검은 죽음...인가?” 
사내의 외형과 페챠의 반응으로 미루어봤을 때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답이었다. 
“너구나. 가짜.” 
굉장히 무뚝뚝한 말투였다. 
진수가 형제단의 헌터들을 속이기 위해 말수를 줄였던 것이 통한 이유가 있었다. 
“아, 그건 내가 미안하게 됐다. 근데 처음부터 내가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고....” 
그가 변명을 하려고 하는데 검은 죽음이 신경도 쓰지 않고 페챠를 향해 나아갔다. 
-챙 
허리춤에서 검을 하나 뽑아든 채로. 
“워, 워. 잠깐만. 여기 죽이면 이르쿠츠크에 만들어진 결계 같은 게 없어진다잖아.” 
“외부인은 끼어들지 마라.” 
하지만 검은 죽음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변절자를 징벌하는 건 카라텔의 의무이자 권리다.” 
그는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어느새 진수를 지나 페챠의 곁으로 다가갔다. 
-서걱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목을 친다. 
진수는 그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야이...!” 
그러나 이어진 광경에 더욱 놀라 말문이 막혔다. 
머리가 떨어진 페챠는 죽지 않은 것이다. 
‘쟤도 [머리 분리]를 갖고 있었나?’ 
진수도 나름 재미를 봤던 특성이다. 
그렇지만 페챠의 표정을 보니 [머리 분리]로 살아남은 것은 아닌 듯했다. 
그녀는 절망감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아아...! 다 끝났어....” 
검은 죽음은 페챠의 머리를 들어 의자의 팔걸이에 올려두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인지 손 바로 앞에 머리가 있음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목을 쳐서 몸만 죽이는 것이 검은 죽음의 능력인 것 같았다. 
“검은 죽음의 검은 죽음이군.” 
진수가 그 모습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무슨 말이지?” 
그의 말은 인장반지에 의해서 저절로 통역이 되었기에 그의 끔직한 유머는 전해지지 않았다. 
나이 많은 일당 헌터들과 일하다 보면 이따금씩 튀어나오게 되는 말장난이었다. 
“아, 아니야.” 
“이상한 놈이군.... 너는... 나랑 풀어야 될 문제가 있지.” 
검은 죽음이 검을 하나 더 뽑았다. 
그 순간 진수에게 안내 메시지가 나타났다. 
-특수임무 발생. 
-특수임무 : 검은 죽음 차원 전이시키기 
-보상 : [망자 군단] 무리의 성장 
‘검은 죽음을 전이시키라고? 얘도 계약자 뭐 그런 건가?’ 
그는 임무 내용을 확인하고는 검은 죽음을 위아래로 훑으며 질문했다. 
“혹시 앓고 있는 지병 같은 거 있어?” 
진수는 마석증에 대해 묻고자 한 것이지만, 순간 그의 모습은 몹시 장기매매꾼처럼 보였다.
절대 적으로 만들어선 안 되겠어
-카가가강! 
톱날이 거세게 움직이며 검을 갉아먹으려 들었다. 
그리 두껍지 않지만 마력이 씌워진 검은 쉽사리 망가지지 않았다. 
검은 죽음이 두 자루의 검으로 전기톱을 힘겹게 막아냈다. 
[빙의]를 통해 흑우의 힘을 빌린 진수에게 완력으로 이겨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쌔액! 
하지만 그를 검은 죽음으로 만들어준 것은 완력이 아니었다. 
검은 죽음의 등에서 거뭇한 무언가가 빠르게 뽑혀 나와 허공으로 치솟았다. 
손잡이부터 날까지 온통 시커먼 검이었다. 
그것은 오롯이 홀로 움직이는 듯 허공을 가볍게 선회하다 진수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헛!” 
검은 죽음의 복부를 발로 차며 옆으로 구른다. 
면도날보다도 예리한 검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며 머리칼을 몇 가닥 잘라냈다. 
몇 초라도 늦었다면 허공에 흩날리는 건 머리카락이 아닌 핏줄기였을 것이다. 
“아니, 칼이 혼자 날아다니면 반칙 아니냐고.” 
“흥, 지옥에 떨어지거든 그렇게 변명해라.” 
투덜거리는 진수에게 검은 죽음이 차갑게 답했다. 
“그럼 나도 반칙 좀 쓰자.” 
-뽀옹 
진수는 손 위로 분신을 하나 만들어냈다. 
[분열]을 한 번 사용하는 정도라면 여전히 신체능력에서 검은 죽음에게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듯했다. 
-휘리릭 
[차원의 틈]에서 뱀파이어 로드의 망토를 꺼내 작은 진수에게 둘러주었다. 
“알지?” 
“맡겨만 줘!” 
이미 계획을 세우고 뽑아낸 분신이다. 
어떤 의도로 [분열]을 썼는지는 굳이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작은 진수는 바람 생성기를 사용해 공중으로 떠올랐다. 
몸이 가벼운 덕에 제약 없이 하늘을 날 수 있었다. 
-쉬익! 
다시 한 번 진수를 노리는 시커먼 검. 
-태앵! 
하지만 그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어디선가 빛으로 이루어진 창이 날아와 검의 옆면을 맞춘 것이다. 
“나이스 샷!” 
진수가 하늘 위에 떠있는 분신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공중에서 네일건을 꺼내든 작은 진수도 손가락을 마주 들었다. 
진수가 [분열]을 사용한 이유. 
시커먼 검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이 무슨....” 
분신을 사용하는 그의 모습을 본 검은 죽음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너도 저승 가서 할 말이 생겼네.” 
진수는 한층 여유가 생겼다. 
-화르륵 
[백년 도깨비불]이 더욱 거세게 타오른다. 
환한 빛과 뜨거운 열기에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질 정도였다. 
진수는 조금이나마 검은 죽음의 기세가 주춤하는 것을 눈치 챘다. 
‘이 때 몰아쳐야 돼!’ 
한껏 여유로운 척 했지만 사실 그의 속은 편치 않았다. 
힘에서는 그가 우세했지만 검을 다루는 기교, 속도 등에서는 검은 죽음이 앞서갔다. 
[야성] 덕분에 본능적으로 피해낼 수 있었지만 녀석도 점점 진수의 움직임에 적응하고 있었다. 
검은 죽음이 회심의 공격으로 혼자 움직이는 검을 쏘아낸 것처럼, [분열]을 사용한 뒤 [백년 도깨비불]의 출력을 올린 게 진수의 승부수였다. 
-후욱- 깡! 카드드득 
전기톱을 마치 망치 휘두르듯 거칠게 후려친다. 
아무리 더 빠른 몸놀림을 가졌다고 해도 이미 기세에서 밀리는 상태였기에 검은 죽음은 정신없이 방어에 매진했다. 
마력을 갉아먹는 기이한 불꽃을 경험했기에 어쭙잖게 피하다 잘못 스치면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조금만 더...!’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진수는 있는 힘껏 공격하고 검은 죽음은 필사적으로 막는다. 
힘차게 공세를 유지하는 진수의 힘이 빠질 법도 한데 힘도 속도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체력 능력치가 170을 넘는 이유도 있었지만 또 다른 비결이 있었다. 
-슬라임 [포세이돈]이 블루 오아시스를 섭취하며 성장합니다. 
-체력 +1 
[차원의 틈]으로 블루 오아시스를 조금씩 풀며 능력치를 올린 것이다. 
체력 능력치가 향상되면 가빠지던 호흡이 금세 회복된다. 
힘이나 민첩이 오르면 이어지던 전투 수준에 적응하던 검은 죽음의 허를 찌를 수 있다. 
‘이거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놈이지? 싸우는 도중에도 계속 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 
검은 죽음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처음에 싸우기 시작했을 때는 꽤 어려운 상대지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치 자신을 가지고 놀기라도 한 것처럼 적응하면 더 강해지고 적응하면 새로운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감히 나를 내려다 봐?” 
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했다. 
어금니를 깨물며 한 마디를 뱉었다. 
‘뭔 소리야? 보상빨로 겨우 버티고 있구만.’ 
진수는 그의 말에 의문을 품었지만 그런 여유는 이내 사라졌다. 
검은 죽음의 몸 위로 묵빛의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전투 능력을 향상시켜주는 버프였는지 전투의 양상이 달라졌다. 
진수를 지나쳐 페챠에게 다가가던 그 기묘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손에 잡히지 않는 연기 같은 몸놀림이었다. 
-챙! 챙! 
정면승부를 피하고 미꾸라지 같이 움직이며 측면과 후면에서 공격해 들어온다. 
진수는 재빨리 전기톱을 [차원의 틈]에 집어넣고 한손 망치와 도끼를 꺼냈다. 
앞에서 사용하던 무기와 전혀 다른 종류였지만 마찬가지로 제 몸처럼 능숙하게 다룬다. 
반면에 검은 죽음에게는 다시 적응해야 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한국에 이런 괴물이 있었다고...?’ 
검은 죽음은 금세 땀범벅이 되었다. 
기묘한 움직임을 사용하는 데에 그만큼 많은 체력과 마력이 소모되었으니까. 
-지잉 
이를 악물며 진수에게 덤벼들던 그. 
진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몸이 잠깐 마비되었다. 
“잡았다!” 
움직임이 멈춘 것은 아주 찰나였지만 그들 정도 되는 수준에서는 충분히 승부가 갈릴 수 있는 기회였다. 
진수가 망치를 크게 휘둘러 양손의 검을 모두 걷어내고 곧장 도끼를 휘둘렀다. 
-쒸이익! 
하지만 이 또한 검은 죽음의 노림수였을까? 
분신과 싸우던 흑색의 검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짓쳐들었다. 
-서걱! 
엄청난 속도로 진수의 머리를 잘라버린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검은 죽음이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를 그렸다. 
-뽀옹 
진수의 잘린 머리에서 작은 진수가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작은 진수는 나오자마자 뛰어올라 시커먼 검을 잡았다. 
이어 목이 잘린 진수의 몸이 [차원의 틈]에서 양손 망치를 꺼내 내려찍었다. 
-까앙! 
묵직한 슬레지해머가 검신을 후려쳤다. 
쇳소리가 아닌 비명소리 같은 괴음이 터져 나왔다. 
이에 뭔가를 느꼈는지 [빙의]의 대상을 징크스의 성지에 자리 잡은 휴고로 바꿨다. 
[축복의 대지]를 사용하니 검은 칼이 잘게 떨린다. 
검은 죽음 또한 괴로움을 느끼며 입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 나왔다. 
-후웅- 챙그랑! 
다시 한 번 내려친 공격에 검이 완전히 두 동강 났다. 
조각난 단면에서 시커먼 것들이 뿜어 나오다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검은 죽음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검은 죽음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임무 달성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망자 군단] 무리의 성장. 
-[망자 군단] 무리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힘 +3, 민첩 +5, 체력 +4, 내구 +5, 마력 +4, 골드 +10 
‘어...? 임무가 말하는 검은 죽음이란 게 이거였어?’ 
진수도 어렴풋이 시커먼 검이 언데드 계열의 무언가라는 것은 눈치 챘었다. 
슬레지해머로 내려쳤을 때 [사신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게 언데드의 기운이었으니까. 
죽은 자의 혼 따위가 뭉쳐져 만들어진 리빙 소드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검 자체가 임무 목표인 검은 죽음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쿨럭!” 
인간 검은 죽음이 각혈을 했다. 
아마 검과 기술 따위로 연결이 되어있었던 듯했다. 
[차원 전이]에 의하여 강제로 연결이 끊어지면서 타격을 입은 모양이다. 
그는 전투를 이어나가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이 정도면 누가 위인지 알았겠지? 목숨까지 빼앗지는 않을게.” 
진수가 잘렸던 머리를 붙이며 자비를 베푼다는 양 말했다. 
이는 그의 마음이 너그러워 한 행동은 아니었다. 
‘러시아에서 제일 큰 범죄 조직이랑 척을 질 필요는 없지. 게다가 이 기회에 카라텔한테 빚을 지워놓는 게 훨씬 이득이잖아?’ 
살아가며 가급적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듯 보이는 검은 죽음에게 아량을 베풀어 놓는다면 훗날 분명히 큰 도움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의 계산대로 검은 죽음은 복잡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승부에 승복하는 마음. 
패배한 자신에게 실망스러움. 
살았다는 안도. 
상대가 자신을 봐줬다는 불쾌함. 
“목숨 값은 언젠가... 꼭 갚지.” 
그는 입가에 거무죽죽한 피를 묻힌 채 말했다. 
진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어 검은 죽음에게 블루 오아시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페챠의 말 대로면 형제단의 주도 하에 마약이 유통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의 운명파에 의해 형제단의 인원들이 움직였다는 것은 상당히 자존심 상할 일이다. 
“너희도 몬스터가 강해지는 건 질색일 거 아니야.” 
“물론이다. 몬스터는 약하고 돈 되는 놈들이 제일이지. 내 검은 죽음이라는 이름을 걸고 형제단에서 블루 오아시스를 퍼트리는 자들을 뿌리 뽑겠다.” 
검은 죽음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운명파와 결탁한 자들을 해치워야겠다는 생각도 컸지만 진수를 의식한 것도 없지 않았다.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이다.... 절대 적으로 만들어선 안 되겠어.’ 
임무 보상 덕분에 체력과 마력이 금방 회복됐다는 걸 모르는 그는 격렬한 전투가 끝나자마자 힘든 기색이 사라져버린 진수를 보며 다시 한 번 경악한 것이다. 
그는 보스에게 한국에 엄청난 헌터가 있다고 보고 해야겠다 생각했다. 
* * *
“뭘 찾았다고?” 
진수는 시베리아의 수많은 산들 중 한 곳에 도착했다. 
시베리아로 보낸 뱀파이어 중 한 녀석이 텔레파시를 보내왔는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인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몬스터들을 불러내는 것 같았습니다.” 
뱀파이어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보고했다. 
그의 말을 듣자 진수는 검은 죽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요즘 러시아에 균열이 많이 생기고 있다. 이상할 정도로. 그걸 조사하고자 시베리아로 이동하던 중에 네 소문을 듣고 여기로 온 것이다.’ 
형제단에서도 기이하게 여기고 있는 상황. 
진수는 분명 자연적인 현상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뱀파이어가 그 실마리를 찾아냈다. 
“어느 쪽이야?” 
“텔레파시로 전해드렸던 곳은 저기입니다. 그 이후에 남쪽으로 이동하는 걸 확인했습니다.” 
“하루 차이면 얼마 이동 못 했겠네. 쫓아가보자.” 
“다른 혈족이 발견했다고 하니 급히 움직이실 필요 없습니다, 로드시여.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시베리아에 넓게 퍼진 녀석들이 서로 텔레파시를 주고받으며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그래. 그리고 그 텔레파시라는 거... 혹시 나도 배울 수 있나?” 
처음 텔레파시를 통해 보고를 받았을 때 진수는 굉장히 놀랐다. 
머릿속에 의념이 전해지는 경험은 굉장히 신기했다. 
동시에 뱀파이어들에게 만이라도 텔레파시를 쓸 수 있다면 굉장히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입니다, 로드시여. 로드의 징표를 몸에 가까이 두신다면 편히 사용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는 이동하면서 뱀파이어들에게 전할 수 있는 텔레파시 사용법을 배웠다. 
“저 자입니다.” 
몇 십 분 정도 빠르게 이동한 끝에 뱀파이어가 발견했다는 수상한 인물을 목도할 수 있었다. 
‘하, 이 자식들 진짜 그냥 두면 안 되겠네.’
서울 귀환
뱀파이어가 안내한 곳에는 웬 동양인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손에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내 막대기로부터 기이한 마력이 뿜어져 나와 위로 솟구쳤다. 
‘이 마력....’ 
진수는 예전에 느껴봤던 마력의 느낌에 하늘 위를 쳐다봤다. 
검은 점 하나가 허공에 떠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균열이 발생할 징조였다. 
‘뉴트럴바이오 때 봤던 그 균열 일으키는 도구구나. 저것도 다 사람 목숨으로 만든 거겠지.’ 
한국에서 활발히 사용하던 때보다 뭔가 더 연구가 진행되었는지 균열이 열리는 속도가 몹시 빨랐다. 
방금 전에 검은 점이 나타났는데 어느새 몬스터를 곧 쏟아낼 듯 검은 구멍이 커진 것이다. 
“너희는 저놈 죽이지 말고 붙잡아. 나는 균열에서 나오는 몬스터를 처치할 테니까.” 
“로드시여, 저 연약한 인간을 포획하는 데에 저희 둘이나 필요치는 않습니다. 몬스터를 처치하시는 데에 부족한 손이나마 보태도 되겠습니까?” 
뱀파이어는 충성심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물었다. 
“대기하고 있다가 내가 정리하라고 하면 그 때 도와줘.” 
“알겠습니다, 로드시여.” 
편하게 뱀파이어한테 전투를 다 떠넘겨도 되겠지만 균열에서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 모른다. 
지금까지 전이시킨 적 없는 종류의 녀석이 나올 수도 있으니 진수가 먼저 나서는 게 좋으리란 계산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뱀파이어들은 솔선수범하여 전투에 앞장서는 그의 모습에 감탄을 할 뿐이었다. 
“새로운 로드께선 우리 혈족들을 정말 아껴주시는군.” 
“전투 능력도 워낙 출중하시니 몬스터 따위에게 애먹으시지도 않겠지.” 
그들의 생각대로 균열에서 나온 몬스터를 처치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Comentários

Postagens mais visitadas deste blog

apocalipse 9

magia 10

magia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