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nel 15
-신탁을 내리십시오.
“너희 거 남들한테 뺏기지 말고 잘 지켜라.”
비록 빈집털이를 한 것이지만 진수의 손에 들어온 성지.
누구한테도 뺏길 순 없다.
-[휴고]가 당신의 신탁을 받듭니다.
[휴고] - 현재 상황 : 신탁을 널리 알림 “징크스를 따르는 자의 소유는 징크스님께서 불과 같은 눈길로 지켜주시리라!”
‘아니 그렇게까지 해주겠다는 건 아니었는데....’
-신탁의 효과로 당신을 믿는 이들은 무언가를 지킬 때 더욱 큰 힘을 냅니다.
-[휴고보스] 무리가 징크스의 성지 중앙에 있는 차원의 축을 발견했습니다.
-보상을 받습니다.
-골드 +50
‘저쪽 차원 인간들은 왜 이렇게 차원의 축이란 걸 못살게 구는 거야?’
징크스의 성지에도 차원의 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덕분에 이번 특수임무에 사용한 골드를 어느 정도 채웠다.
줄어든 골드에 비해서 얻은 능력치는 대단한 수준이었기에 진수는 몹시 흡족한 마음이 됐다.
-임무 달성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성창 소환] 기술
이어서 임무가 달성되며 보상을 받았다.
기술 이름만 봐도 어떤 능력인지 알 수 있었다.
‘저주받은 신의 창을 보낸 게 은근히 속 쓰렸는데 오히려 더 좋아졌네. 흐흐.’
요괴형 몬스터들이 가득한 RD 본사에서 성창을 불러내볼 수는 없었기에 우선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 순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두 사람이 진수에게 다가왔다.
“어이구, 팀장님. 여긴 언제 오셨어요?”
“진수씨, 여기 있었네요.”
퍼즐 조각
“아, 주선생님이랑 볼일이 있으셨구나. 저는 반가워서 인사드리러 왔거든요. 신경 쓰지 마시고 말씀들 나누세요. 하하.”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보이는 장우종.
천안과 포항 운송로 구축 작업에 팀원으로 함께 갔던 사람이다.
워낙 사교성이 좋은 인물이었기에 진수를 발견하고 아는 체를 한 듯했다.
‘음, 그새 또 다른 헌터들이랑 친분을 쌓았나보네.’
진수는 그에게 마주 인사를 하면서 그의 뒤쪽을 보았다.
처음 보는 헌터들.
기운으로 봐서는 요괴도 아니었고, 분위기도 중국에서 넘어온 RD의 인물들은 아닌 것 같았다.
“얼마 전에 같이 운송로 작업 다녀온 팀원들이거든요. 제가 또 포항에서 팀장님 덕분에 만든 장비 자랑을 엄청 했습니다. 하하하.”
진수의 시선을 알아차린 장우종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너스레를 떤다.
“잘 사용하고 계시다니 저도 좋네요. 나중에 또 어디 작업 같이 가시죠.”
“저야 좋죠. 믿고 가는 김진수 팀장님이신데요. 아마 RD 내부에서도 팀장님 이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을 거예요. 하하. 제가 워낙 자랑을 많이 하고 다녀서....”
진수의 뒤쪽에 주선생이 잠자코 있는 것을 본 장우종은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 짓고 떠났다.
“저 헌터가 소문의 근원이었네요.”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장우종이 멀리 떨어지자 주선생이 입을 열었다.
“소문이요?”
“포항에 다녀온 팀의 팀장이 팀원들을 엄청 챙겨줬다는 이야기가 퍼졌더라고요. 진수씨가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하고 다닐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소문의 근원지가 어딘지 궁금했거든요.”
주선생은 요괴 간부들 중에선 그래도 RD 내부적으로도 신경을 많이 쓰는 자였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장우종이 정말로 열심히 떠들고 다닌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잘 하고 있네. 운송로 작업을 다닌 한국의 헌터들한테 내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퍼지면 퍼질수록 좋지.’
애초에 이런 이유에서 장우종과 다른 팀원들을 신경써주었다.
운송로 경로에 익숙한 헌터들은 나중에 진수의 자산이 되어줄 수도 있으니까.
특히 장우종은 남들과 쉽게 친해지는 인물이었기에 좋은 평판을 퍼트리기에 제격이었다.
“하하, 그냥 뭐 같은 팀이니까 서로 으쌰으쌰 한 거죠.”
주선생에게는 겸손한 모습으로 좋은 이미지를 쌓는다.
지금 진수의 입장은 요괴 간부들과 인간 간부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중이다.
한쪽에서 등을 돌리는 상황이 오지 않게끔 처신을 잘 해야 한다.
“그래요. 진수씨야 워낙 일도 잘 하고 사람도 성실하니까. 제가 진수씨를 찾은 건 뭐 그런 소문 때문은 아니고요. 부산 건 때문이에요.”
진수는 순간적으로 식은땀이 흘렀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다.
주선생이 그를 부산으로 보냈고, 그 이후에 복해가 없어졌으니 그녀가 부산에 대해 묻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긴장한 기색을 감출 수 있었다.
“부산 건이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얼굴로 되묻는다.
“부산에서 복해 오라버니를 만났죠?”
“예. 부산에 도착해서 바로 복해님부터 찾아갔죠.”
“뭐 이상한 낌새는 없었나요?”
“거기 헌터분들이랑 의형제처럼 즐겁게 지내고 계시던데요. 부산갈매기 길드인가.... 덕분에 배도 쉽게 빌릴 수 있었고요.”
진수는 복해를 만났던 날의 일들을 주선생에게 이야기했다.
복해가 허원화를 섬에 데려다 놓고 혼자만 돌아왔다.
부산갈매기 길드 헌터들을 도와주고 친하게 지내고 있더라.
부산갈매기 길드에게 작은 배를 빌려서 허원화를 구하러 갔다.
돌아와서 자신은 배를 반납하고 거래처들을 찾아갔다.
이런 내용들이었다.
“흐음, 진수씨 얘기는 허원화 영감이 복해 오라버니를 만나러 갔다는 말이죠? 진수씨는 그 모습을 못 봤고요.”
“예, 맞아요. 복해님 관련해서 궁금하신 게 있으면 허원화님께 여쭤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허원화에게 물어보라 말하는 진수.
허원화가 진수에게 누명을 씌우거나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허원화가 주해응한테 내 실드를 쳐줬지. 그 정도라면 주선생한테도 허튼 소리는 안 할 거야. 그럼 복해 건의 쟁점은 인간 간부인 허원화에게 향할 것이고.’
진수가 결백하다는 듯, 아니 어떤 잘못이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안 하는 듯한 태도로 말하자 주선생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허원화 영감한테 다시 확인을 해봐야겠네요. 이제 막 복귀해서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요.”
“예, 그래야겠네요. 부산이 멀긴 멀더라고요.”
그녀의 말에 진수가 동의하며 대화를 마쳤다.
물론 [차원 전이]의 보상 덕분에 지금 그의 컨디션은 최고였지만.
* * *
“마침 저도 김진수 헌터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잘 됐군요.”
피곤이 가득해 보이는 얼굴.
허스키한 목소리.
진수는 오랜만에 박철준 수사관을 만났다.
“예, 이제 RD가 슬슬 중국 쪽에서 마약을 받아오려는 것 같아요. 저한테 북쪽 무법지대를 거쳐서 대륙 접경지역에 다녀오라는 업무를 줬거든요.”
“그렇군요. 국내에서 유통망을 얼추 만들고 이제 연결을 굳건히 하는 중인 것 같던데... 그 사이에 약을 들여오려는 모양이네요. 날짜는요?”
“아마 며칠 내로 출발할 것 같아요. 제가 수령하는 양을 보고 본격적으로 유통을 시작할 타이밍을 가늠해볼게요. 우선 출발, 도착할 때마다 한 번씩 연락드리고요.”
박철준 수사관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난 번 천안 때도 느꼈지만 아무래도 헌터범죄전담기관이 도시마다 완전히 범죄를 통제할 수는 없겠더군요. 그러니 마약은 애초에 풀리지 않게 막아야 됩니다.”
“RD가 빠져나갈 수 없는 완벽한 기회를 만들어봐야겠네요. 제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는요....”
진수는 박철준에게 그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계획을 공유했다.
RD의 현장직과 사무직 간부들 사이에 균열이 있고 이간질로 서로 반목하게 만들려 하고 있다.
블루 오아시스가 확실하게 RD의 수중에 있고 간부들끼리 싸움으로 신경을 쓰지 못할 때 급습하여 뿌리를 뽑는다는 계획.
‘현장직 간부들의 정체가 실은 몬스터라는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지. 그쯤이면 이미 내 상태창에 들어가 있을 거니까.’
“좋군요. 역시 김진수 헌터는 그냥 헌터로 있을 재목이 아닌데 말이죠.”
박철준이 탐난다는 듯한 눈빛으로 진수를 보았다.
“하하, 아니에요. 그나저나, 저한테 연락을 하려고 하셨다는 건 왜...?”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을 짚으며 화제를 돌렸다.
박철준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뉴트럴바이오의 정효원 기억하시나요?”
정효원.
뉴트럴바이오에게 힘을 받고 그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자다.
맨 처음 진수에게 [차원 전이] 특성이 발현되었던 날, 고돌이를 만난 던전을 깼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두 번이나 헌터범죄전담기관에 잡아넣었던.
“예, 물론이죠.”
“정효원을 취조하다 보니까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정효원한테 마석증이 생겼다는 내용 같은 것이요.”
진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헌터범죄전담기관에서 마석증이란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김진수 헌터도 마석증을 앓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정효원의 경우에는 후천적으로 발생했다고 하더군요.”
“마석증이 후천적으로요? 물론 저도 아주 어렸을 때는 마석증이 없었지만.... 어쩌다가 생겼는지도 말하던가요?”
“정효원이 말하길, 인위적으로 균열을 일으키면서 생긴 것 같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증상이 없다가 몇 차례 반복적으로 균열을 발생시키니 마석증이 나타났다고요. 그리고 점점 더 심해졌다는군요.”
부산에서 들었던 소문과는 별로 연관성이 없는 내용이었다.
“혹시 뉴트럴바이오의 다른 사람들한테도 마석증 증상이 나타났다고 하던가요?”
“들어보니 마석증이 생긴 인물은 몇 없다고 했습니다.”
“음, 혹시 나두경은요?”
진수는 고블린사육사, 나두경이 마석증을 가졌었는지 물었다.
그를 죽였을 때 잠시 흐릿해졌던 것 같았으니까.
“나두경은 약간 징조만 있고 마석증이 생기지는 않았다고 했습니다. 임병옥의 경우에는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다고 하는데... 최종적으로 생겼었는지는 알 수가 없네요.”
‘마석증이랑 [차원 전이] 사이에 뭔가 연관이 있는 건가...?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긴 한데 왠지 그럴 것 같은 기분인데....’
뉴트럴바이오의 대표 임병옥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전이가 되었다.
계약자라는 이유로.
그리고 부산에서 들은 소문에 따르면 마석증에 걸린 사람들이 특이한 몬스터를 만났고, 계약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한다.
퍼즐 조각이 조금씩 맞춰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한테 [차원 전이]가 생긴 이유도 마석증이랑 연관이 있을지도... 아니다. 이건 너무 간 것 같네.’
마석증이 생기고 특성이나 기술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간혹 들린다.
진수도 그런 케이스였다.
워낙 어렸을 때라서 완전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육체와 관련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마석증이 생기면서 그의 상태창은 텅텅 비어버렸다.
나중에 노력을 통해서 겨우 [하급 근력]과 [하급 내구] 특성을 각성시켰었다.
반대로 마석증이 생기면서 능력이 더 증가했다는 경우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운이 좋아봤자 기존의 능력을 유지하는 정도.
진수의 고아원 동기 박종대가 그런 사례였다.
그는 다행히 마석증이 생겼음에도 특성과 기술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했었다.
“마석증 이야기는 그냥 김진수 헌터도 마석증이 있다고 해서 꺼내본 거고요. 더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복잡하던 진수에게 박철준이 말을 이었다.
“뉴트럴바이오에게 기술 자문을 하던 중국 쪽 단체가 있다고 하더군요.”
“중국... 단체요?”
요즘 들어 중국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뉴트럴바이오에서 생체 실험을 통해 얻은 자료를 주고 중국 단체에서는 균열을 일으키는 방법을 공유해줬다고 합니다.”
“아....”
진수는 의문이 조금 풀렸다.
확실히 뉴트럴바이오에서 원래 연구하던 인공적으로 특성, 기술을 만드는 것과 강제로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분야가 달랐다.
서로 다른 연구를 하던 자들이 정보 공유를 통해서 접점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선가는 또 인위적으로 균열을 일으키고 있을 수 있다는 말이겠네요.”
“그럴 가능성도 농후하죠.”
농후하다 못해 분명히 그럴 것이다.
순수한 지적 호기심으로만 연구를 했을 확률은 희박하니까.
“그 중국 단체의 인물이 찍힌 폐쇄회로 영상을 확보했어요. 김진수 헌터가 중국 쪽과 교류가 생길지도 모르니 얼굴을 봐둬서 나쁠 건 없겠죠.”
박철준 수사관이 노트북으로 CCTV 영상을 하나 재생했다.
구조로 봤을 때 남산에 있던 대형 연구소 내부인 것 같았다.
임병옥과 대여섯의 연구원들이 어떤 남성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기술적인 대화가 오가는지 서로 고개도 끄덕거리고 자료도 제시하는 모습들이다.
점점 CCTV로 접근하면서 사내의 얼굴이 또렷해진다.
이윽고 뉴트럴바이오에 기술 자문을 해주고 있는 자의 모습이 식별될 정도로 가까워졌다.
‘아, 이런.... 아무래도 중국에 가봐야겠는데.’
영상을 보는 진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무법지대
박철준 수사관이 보여준 CCTV 영상에 정확히 잡힌 인물.
진수와 같이 마석증을 앓고 있던 민우혁이었다.
중국 쪽에서 주로 활동한다던.
“아니, 이 사람이 왜...?”
진수는 그가 영상에 나타나자 화들짝 놀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아는 사람인가요?”
그의 반응에 박철준이 물어온다.
“아, 예. 따로 친분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 번 마주치고 인사 정도는 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같은 병원에 다녀서요.”
진수는 병원 이야기를 하니까 지난 번 병원에서 마주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박철준 수사관에게 인체 실험을 하는 단체가 뉴트럴바이오라는 이야기를 듣던 날.
임병옥이 자신을 드러냈던 그 날, 민우혁을 봤었다.
‘한국으로 종종 넘어오던 이유가 뉴트럴바이오 때문이었어...?’
“정효원이 말하길 이 사람이 뉴트럴바이오에게 적룡파를 연결해주었다고 하더군요. 놈들이 한국으로 넘어왔을 땐 이미 김진수 헌터가 뉴트럴바이오를 몰아붙이고 있는 상황이었고요. 다른 뉴트럴바이오의 인물들에게 교차 검증을 해보니 적룡파 쪽이랑 마찰이 좀 있었다고 합니다.”
“마찰이요?”
“막상 한국에 오니 뉴트럴바이오가 적룡파에게 적절한 의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거죠. 적룡파의 인원들이 분노하며 임병옥을 찾아가는 걸 몇몇이 봤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 균열 사태가 발생했고요.”
그날의 소동이 떠올랐는지 박철준의 얼굴이 굳었다.
“뉴트럴바이오 사람들은 하나같이 임병옥이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균열을 일으킨 게 이상하다고들 말했습니다. 균열을 일으킬 때 시전자의 의지가 중요한데, 임병옥의 목표인 헌터들보다 민간인에게 더 피해를 주는 일을 했다고요.”
‘그날 임병옥도 자신의 뜻으로 균열을 일으키는 것 같지는 않았지.’
“그렇군요. 아마... 적룡파의 누군가가 수를 썼었나 봐요.”
진수는 자신이 짐작하는 바를 말했다.
“정황상으로는 그렇기는 한데, 적룡파가 균열을 일으키는 연구를 하던 놈들도 아니고 그렇게 힘을 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군요.”
박철준은 진수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했다.
‘운송로에 설치하는 석판에 차원과 관련된 주술이 적용됐다고 했지. 그 술법을 사용하던 놈이 임병옥을 강제한 게 분명해.’
조민준이 분석했던 내용을 떠올려본다.
균열을 연구하던 녀석들이 아니더라도 차원과 관련된 능력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놈도... 차원 전이가 되는 계약자일지도 모르지.’
진수는 RD의 인간 간부들의 면면을 떠올려봤다.
가장 의심이 가는 것은 언데드를 주술로 조종하던 허원화와 RD의 우두머리인 주해응.
‘주해응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네. 평천이 형님이라고 할 정도면 보통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주해응에 대해 떠올리던 그는 문득 주해응이 시킨 일을 하면서 민우혁과 마주쳤던 일이 생각났다.
물론 진수는 [투명화]를 쓰고 있었기에 일방적으로 봤던 것이지만.
“혹시 CCTV에 잡힌 이 사람, 근래에 RD랑 접촉한 일이 있나요?”
뉴트럴바이오가 사라진 지금, 민우혁이 한국을 방문한 이유는 적룡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가 확인했을 때, RD와 만나는 정황은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가로젓는 박철준.
‘음... 일단은 주의를 좀 해야겠다. RD만 정리 되면 중국으로 넘어가서 민우혁을 찾아봐야겠어.’
진수는 박철준 수사관에게 민우혁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공유했다.
사실상 얼굴만 아는 사이였기에 그가 마석증을 앓고,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간혹 마석정제주사를 맞는다는 것, 얼마 전에도 한국에 왔었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 * *
주해응의 집무실.
상석엔 당연히 주해응이 몸을 파묻고 있고, 그의 양 옆으로 네 인물이 앉아 있다.
오른쪽 자리에는 진수가 착석한 채로 가볍게 반지를 매만진다.
왼쪽에는 돼지상인 사내와 원숭이상의 남자, 쥐상인 인물이 있었다.
셋 다 진수에게는 익숙한 얼굴들이다.
‘저 둘은 저번에 전이시킨 적 있는 돌원숭이랑 화광수과고... 여기 돼지 닮은 친구는 지난번에 시 서펜트 알 받을 때 봤던 녀석이네.’
진수와 세 요괴들을 살피던 주해응이 의자 등받이에서 상체를 떼었다.
“오늘 이렇게 자네들을 부른 이유는 알고 있겠지?”
요괴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진수도 마찬가지로 긍정의 눈빛을 보냄으로 답했다.
“압록강변에 있는 중국의 지안시로 가야 하네. 이건 그간 북쪽의 무법지대를 왕래하면서 잡아둔 비교적 안전한 길과 지안시에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등을 정리한 자료일세. 출발하기 전에 숙지하도록 하게.”
주해응이 서류봉투를 나눠주었다.
“이번 운반 업무에서는 강렵, 자네가 역할을 잘 해주게나. 아무래도 무법지대에도 몇 차례 다녀와 봤고, 무력적으로도 뛰어나잖나. 허허.”
그는 돼지를 닮은 사내에게 말했다.
“맞아요. 저강렵 형님이랑 같이 가면 뭐 무서울 게 없죠. 헤헤.”
돌원숭이가 주해응의 말에 동의하며 비굴한 웃음을 짓는다.
둘이 추켜세우는데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저강렵.
꽤 오만한 얼굴이었다.
“주 대표님. 근데 이 녀석은 왜 같이 가는 겁니까? 우리만 다녀와도 충분한데.”
저강렵은 주해응에게 탐탁지 않은 듯 말했다.
그는 묘하게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서 사용했다.
“이제 앞으로 운반할 일이 자주 생길 텐데, 항상 자네들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서 김 팀장이 이번 기회에 길을 좀 익히고 물건 받는 과정을 배우라고 동행시키는 거지.”
“흥, 비리비리한 게 짐꾼으로 쓰기도 뭐해 보이지만, 뭐 알겠습니다.”
진수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한다.
-김 팀장, 기분이 좀 상하겠지만 괘념치 말게. 이번 운반 일에 제대로 적응만 한다면 앞으로 정말 우리 적룡과 함께 할 수 있을 게니까.
진수가 잠자코 앉아있는데 그의 머릿속으로 주해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해응을 보니 그는 말을 하지는 않고 허허 웃고만 있었다.
그의 능력이거나 인장 반지의 기능 중 하나를 통해서 진수에게만 말을 건 듯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아마 함께 할 수가 없을 텐데.... 흐흐흐.’
주해응의 말에 화답하듯 싱긋 웃어 보인다.
물론 미소에 담긴 뜻은 조금 달랐지만.
뒤이어 저강렵에게 시선을 옮기는 진수.
‘하지만 여기 찡찡이는 나랑 함께 할 수 있겠지.’
그는 이미 저강렵의 이름도 지어놓았다.
* * *
-쾅!
“키아악!”
저강렵이 휘두른 쇠스랑에 타이니 트롤의 머리가 짓뭉개진다.
비록 열화 버전의 트롤이라지만 엄청난 회복력과 생명력을 주력으로 삼는 녀석이 한 방에 죽어버린 것이다.
그 위용에 놀란 나머지 놈들이 괴성을 지르며 도망쳐버렸다.
“킁! 경로를 이따위로 잡아주니까 재미도 없고... 짜증만 나네. 차라리 인간들 모여 있는 구역을 지나쳤으면 여자들도 많았을 텐데.”
놈이 신경질을 부리며 구시렁거렸다.
이어 허리를 숙여 타이니 트롤의 사체에서 심장을 거칠게 뜯어내더니 입 안에 털어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헤헤, 맞습니다.”
돌원숭이가 저강렵의 눈치를 살피며 타이니 트롤의 굵은 핏줄들을 뽑았다.
별미라도 되는 듯 후룩 집어먹는 녀석.
종족명에 타이니가 붙는다곤 하지만 타이니 트롤의 덩치도 신장만 2m에 육박한다.
덕분에 요괴 셋이 먹어도 양이 충분했다.
트롤 계통의 몬스터는 피에 마력이 많이 들어있다.
그래서 요괴들이 심장, 혈관 따위를 먹어치우는 듯했다.
“저놈 때문에 일부러 이런 길로 가는 거겠지.”
저강렵이 진수를 노려봤다.
무법지대를 거쳐 중국으로 향하는 길.
주해응이 준 자료에는 어떤 경로로 가면 될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옛 평양개성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간다면 이동이 수월했을 테지만 RD에서 지정한 경로는 평양의 동쪽으로 산길을 타도록 되어 있었다.
무법지대에도 사람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지역들이 있었고, 가급적 그러한 곳들을 피하는 방향으로 길이 정해진 것이다.
‘무법지대에선 몬스터보다 인간이 더 무섭다... 라는 격언 때문이겠지.’
RD에서는 최대한 문제가 생기지 않을만한 경로를 선택한 것이겠지만, 저강렵은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 너! 아무리 짐꾼으로 왔다고 해도 싸울 때 방패 역할이라도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놈은 진수를 아예 짐꾼 취급했다.
진수도 그런 녀석의 태도대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한 발 빠져 있었다.
‘어차피 이놈들 앞에서 [차원 전이]를 시킬 수도 없고 [차원의 틈]에 부산물을 챙길 수도 없는데 괜히 힘 뺄 필요 없지.’
그런 이유로 저강렵이 지금처럼 시비를 걸기도 했다.
“저강렵님이 워낙 강력하셔서... 제가 나설 틈이 없네요. 하하.”
“그런가? 크하하!”
그럴 때면 가벼운 칭찬을 던졌다.
우둔한 녀석은 금방 흡족한 표정이 되어 걸음을옮겼다.
진수는 그 뒤를 보며 눈빛을 매섭게 빛냈다.
‘주변에 느껴지는 생명 반응이 많네. 조만간 저놈 멱 딸 기회가 있겠어.’
“밍기적거리지 말고 빨리 따라 와!”
어느 새 꽤 멀리 떨어진 저강렵과 두 요괴들.
“아, 예. 갑니다!”
진수는 대답을 한 뒤 발걸음을 뗐다.
그와 동시에 [분열]을 사용해 분신을 하나 만들었다.
-뽀옹
분신은 바로 타이니 트롤 하나의 뒤를 쫓았다.
[사신의 감각]에 다른 생물들이 최대한 적게 감지되는 방향으로 도망친 놈이었다.
‘역시 산길에서는 거미줄이 유용하다니까!’
진수의 1/8 정도 크기인 분신이 짧은 다리로 뽈뽈 뛰어봐야 타이니 트롤을 따라잡을 수 없다.
하지만 [강철 거미줄]을 이용해서 나무와 나무 사이로 빠르게 움직이니 금방 거리를 좁혔다.
“잡았다 요놈!”
신속하게 이동하던 속도 그대로 몸을 날린다.
타이니 트롤은 갑자기 머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본체도 [성창 소환]을 궁금해 하더라고.”
태양이 하나 더 떠오른 듯, 허공에 밝게 빛나는 창이 나타났다.
휴고가 저주를 해제한 저주받은 신의 창, 빛의 성창이었다.
“등짝! 등짝을 보자!”
-철컥!
[차원의 틈]에서 네일건을 꺼내 성창을 장전한다.
곧장 발사되는 빛의 성창은 마치 레이저를 쏜 것처럼 한 줄기 빛을 만들었다.
“키에엑...!”
화끈거리는 통증에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는 타이니 트롤.
녀석의 가슴에 어느새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상처 주위는 뜨거운 열기에 자글자글 익고 있었고, 워낙 빠르게 관통당해 제대로 인지를 못한 것이다.
-타이니 트롤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타이니 트롤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타이니 트롤은 이내 사라져 진수의 상태창으로 들어갔다.
“와...! 이거 엄청 좋은데?”
기존에 저주받은 신의 창을 발사하는 건 작살을 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빛의 성창은 무게도 거의 느껴지지 않고 빛 자체로 공격을 하는 듯했기에 분신이 사용하기에 훨씬 좋았다.
-샤삭
게다가 소환을 해제했다가 다시 기술을 사용하면 빠르게 회수도 가능하다.
“여러모로 저주받은 신의 창을 보낸 건 훌륭한 선택이었어.”
-슈슉
작은 진수가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분열]을 해제했다.
-부스스
분신이 사라지고 얼마 뒤, 수풀을 헤치고 웬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코를 킁킁거렸다.
“으음.... 고약한 몬스터 냄새가 나는데....”
쇠꼬챙이처럼 빼빼 마른 몸,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
온몸에는 방금 묻은 듯한 피와 살점들이 보였다.
마치 예리한 송곳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는 계속해서 코를 벌름거리며 어디론가로 향했다.
그 방향의 끝에는 진수 일행이 있었다.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무법지대에 온 지 이틀째 되었다.
저강렵이 앞장서서 움직였고, 진수는 뒤따라가며 종종 지도를 확인했다.
‘묘하게 서두르는 것 같은데.... 주변에 느껴지는 시선 때문에 그러나?’
진수 일행의 이동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이틀 만에 무법지대를 거의 통과하여 압록강에 거의 다다른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저강렵의 걸음이 빨라져 예상보다 일정이 앞당겨졌다.
움직이는 내내 누군가가 감시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신의 감각]에도 몬스터, 인간, 동물 등 수많은 생명체들이 주변에 움직이는 게 감지됐다.
‘우리가 이렇게 몸도 숨기지 않고 요란하게 움직이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지나가는 게 신기하긴 하네.’
서로가 이미 정해진 패턴대로 살아가는 것인지 직접 부딪히지 않으면 다가오지 않았다.
굶주려 먹잇감을 찾는 몬스터들이 아닌 이상에는.
-솨아아
멀리서 큰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위치나 지도를 바탕으로 봤을 때, 압록강에 거의 도착한 듯했다.
“무법지대, 무법지대 말만 했지 실은 그리 위험할 것도 없지. 킁!”
표면적으로는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진수는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못했다.
멀리서부터 계속 누군가가 쫓아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으니까.
‘굳이 얘기해줄 필요는 없겠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면 저강렵이란 녀석을 전이시킬 기회가 된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진수 스스로는 목숨을 건질 자신이 있었다.
“저기 압록강 보이네. 저기만 건너고 나면 바로 지안시다. 똑바로 봐두라고.”
저강렵이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이내 빠르게 강을 건넜다.
* * *
무법지대와 맞닿아 있는 지안시의 분위기는 상당히 독특했다.
좌판에 몬스터의 사체며 마석 따위가 아무렇게나 진열되어 있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모두 흉터 한둘은 기본으로 지니고 있다.
공권력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무법지대의 연장선 같은 곳이었다.
‘하긴 단순히 무법지대랑 가까워서만은 아니긴 하지. 지금 중국 상태가....’
게이트 사태가 발생하고, 개개인에게 힘이 생기면서 전 세계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흔히 선진국이라 불리던 곳이 오히려 미개한 모습이 되기도 하고, 의외로 자유분방하던 곳에서 결속이 잘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 중에 남한과 북한은 아주 극명하게 운명이 갈린 케이스.
북한은 체제가 박살나고 아예 나라가 사라져 무법지대가 되었다.
반면에 남한은 헌터를 중심으로 게이트 사태를 이겨내 국가의 형태를 유지한 채로 복구할 수 있었다.
‘중국은 그 중간 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
중국이라는 나라가 아예 명맥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외부에서는 여전히 중국 전체를 하나의 나라라고 여기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부의 상황은 좀 복잡했다.
마치 춘추전국시대가 다시 열린 것처럼 지역별로 쪼개진 모양새.
성 단위로, 자치구 단위로 나뉘어 각자 지역의 패자가 다스리는 형태가 된 것이다.
‘중국 정부가 제대로 통제하는 곳은 흔히 중원이라고 부르는 대륙 중앙 쪽의 성 몇 개 정도고....’
중국 땅에서 온 RD의 인물들 대부분이 조선족 말투를 사용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적룡파는 아마 지린성 특히 연변조선족자치구에서 한 자리 하던 단체일 것이다.
“이런 망할. 운명파 새끼들, 지방은 아주 관리에 손을 놨네.”
“그러게요. 저희가 올 때마다 점점 더 개판이 되어 가네요.”
엉망이라고 느낀 것은 진수뿐만이 아니었다.
지안시에 도착하자마자 욕지거리를 씹어뱉는 저강렵.
화광수도 거기에 동조해서 불만 섞인 목소리를 냈다.
“우리가 관리할 때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쯧!”
그들은 투덜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몇 번 와봤다는 이야기대로 익숙하게 어디론가 향한다.
도착한 곳은 구석진 위치에 있는 건물이었다.
“어유, 오셨습니까.”
저강렵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나오는 인물.
주해응이 전해준 자료에 사진이 들어있던 자였다.
‘블루 오아시스 냄새가... 거의 피부에 배어있네.’
몸에 묻거나 한두 번 흡입한 정도로 나는 냄새가 아니다.
보다 깊이 관여를 하고 있지 않으면 이렇게 체취처럼 향내가 스며들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흔들림 없는 눈빛은 이 자가 블루 오아시스의 소비자가 아닌 공급자라는 걸 알려주었다.
“예상일보다 더 빨리 도착하셨네요. 물건 한 번 확인해보시죠. 오신 김에 평소처럼...?”
입 앞에 검지와 중지를 펼쳐서 댄다.
아마 요괴들이 평소에 오면 블루 오아시스를 즐기고 간 모양이었다.
그의 동작에 화광수와 돌원숭이의 표정이 헤벌쭉해졌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하지만 의외로 저강렵은 태도가 전혀 풀어지지 않았다.
“흐음.”
뒤를 한 번 돌아보는 녀석.
진수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인가 했는데 놈의 시선은 더 뒤의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아니. 오늘은 물건만 받아서 빨리 간다.”
“예? 형님 그게 무슨....”
“이제 막 도착했는데 조금 쉬었다가 가시죠~ 헤헤.”
두 하급 요괴가 청천벽력 같은 소릴 들은 듯 말한다.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저강렵이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이에 블루 오아시스 공급책이 손을 내저었다.
“지난번엔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물건에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지금 바로 확인 해보시라니까요?”
진수가 물건을 받아왔을 때 독극물을 섞은 건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아마 꽤나 크게 마찰이 있었을 것이다.
저강렵이 차분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거 때문이 아니니까 너희는 걱정할 거 없어. 너희 둘, 정 그러면 내가 물건 확인하는 동안만 잠깐 맛만 보고 와라. 대신 10분 안에 돌아와야 돼.”
“크헤헤. 역시 저강렵 형님. 저희 마음을 잘 아신다니까.”
“다른 형님들이랑은 다르시지!”
쥐와 원숭이가 기쁜 듯 조잘대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너는 내가 확인한 물건들 들고 갈 준비나 해둬!”
진수에게는 쌀쌀맞게 말한다.
하지만 진수는 별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그러겠노라 말하곤 공급책에게 공간압축주머니를 받았다.
“킁, 킁!”
블루 오아시스 알갱이가 잔뜩 포장된 비닐팩.
저강렵이 하나씩 코를 박고 검수했다.
돼지계열의 요괴라 그런지 녀석도 후각이 몹시 발달한 듯했다.
일을 할 때는 꽤나 신중한 편인지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게 있으면 내용물을 풀어서 확인해보기도 한다.
하급 요괴들한테 말한 대로 검수에는 귀신같이 10분이 소요됐다.
“으음....”
저강렵은 무언가 심기가 불편한 듯 침음을 냈다.
검수가 끝나고도 몇 분간 하급 요괴들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녀석은 발끝으로 땅바닥을 툭툭 치며 불안한 것인지 불쾌한 것인지 모를 기색을 드러냈다.
“어이. 짐 챙겨놔. 1분 뒤에도 안 오면 우리끼리 간다.”
진수에게 턱짓으로 블루 오아시스가 담긴 공간압축주머니 세 개를 가리켰다.
비록 중량도 가벼워지는 기능이 있다곤 하지만 수백kg은 되는 무게.
하지만 진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방 세 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저강렵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이 인간 놈.... 제법인데.’
반쯤은 골탕을 먹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겉보기에도, 느껴지는 기세도 그리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주선생이나 다른 요괴 간부들에게 인정받는 게 영 탐탁지 않았다.
그런데 무법지대에서 중국 땅까지 오는 빠른 행군에도, 힘을 쓰는 모습에서도 상당한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멍청한 것들은 왜 안 오는 거야? 차라리 저 인간 놈이 낫네.’
저강렵의 속에서 진수를 인정하는 마음이 조금씩 생겨났다.
“후우....”
짜증이 치미는 듯 한숨을 내뱉는다.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돌원숭이가 급히 뛰어왔다.
녀석의 인중에 푸른 가루가 아직 묻어 있었다.
“헤헤, 형님. 저 왔습니다.”
아직 약기운이 다 가시지 않았는지 살짝 혀 꼬부라진 발음이다.
“저놈한테 주머니 두 개 받아.”
저강렵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에? 다 해서 세 갠데 제가 두 개나 들어요?”
이상하다는 듯 되묻는 돌원숭이.
저강렵의 본심은 사실 진수의 짐을 좀 덜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갑자기 태도를 뒤집는 건 낯간지러운 일.
녀석은 적당한 말로 둘러댔다.
“늦게 온 벌이다. 이제 바로 출발할 거니까 잔말 말고 빨리 들어!”
그가 화난 것 같은 목소리를 내니 돌원숭이가 서둘러 공간압축주머니 두 개를 진수에게서 뺏듯이 가져갔다.
묵직한 무게에 녀석의 자세가 흐트러진다.
“화광수 녀석도 한 개만 더 흡입하고 온댔으니까 곧 올 겁니다. 형님.”
돌원숭이가 화광수를 기다리자는 의도로 말을 꺼냈다.
동료를 챙기려는 생각이라기보다는 녀석이 오면 자신의 짐을 나눠서 들 거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의도가 어떻게 되었든 저강렵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녀석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 아니. 바로 출발한다.”
“에? 형님 조금만....”
“애새끼도 아니고 알아서 돌아오겠지! 빨리 가자니까!”
버럭 소리를 지른 저강렵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돌변한 모습에 놀란 것은 진수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왜 급발진 하는 거지.’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일단 표면적으로 지금 무리의 리더인 저강렵의 말을 따랐다.
돌원숭이도 눈이 동그래져서는 입을 다물고 발을 떼었다.
-솨아아
지안시에 올 때는 압록강 중간에 있는 섬인 벌둥도로 뛰어 넘고 다시 무법지대로 도약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런데 지금은 뭐가 그렇게 급한지 바로 무법지대를 향해 점프했다.
-풍덩!
가장 먼저 뛴 저강렵이 물에 빠진다.
남은 거리는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그 뒤로 바로 뛰어드는 돌원숭이.
공간압축주머니를 두 개나 들고 있기에 도약 거리가 훨씬 짧았다.
진수는 충분히 한 번에 강을 건널 능력이 있었지만 일부러 돌원숭이랑 비슷한 수준으로 뛰었다.
-후웅-
그가 높이 뛰는데 멀리 벌둥도 쪽에서 한 인간의 생명 반응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쇠꼬챙이처럼 마른 사내가 물에 젖은 채로 섬 위에 올라서고 있었다.
땅으로 올라와서 킁킁대는 남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수 방향을 본다.
-풍덩!
그 타이밍에 진수가 물에 빠졌다.
빼빼마른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다시 지안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둥도에서 다시 압록강을 헤엄쳐 지안시로 들어간 그.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아주 불쾌한 듯한 표정으로 변한다.
그의 시야가 향한 곳은 약에 취한 채로 황급히 압록강을 향해 뛰어가고 있는 화광수.
“몬스터... 몬스터다....”
사내의 분위기가 싸늘해지며 화광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지켜야 돼.... 몬스터는 다 죽인다.”
그는 초라한 행색과는 달리 엄청난 속도로 돌진했다.
“뭐, 뭐야!”
갑자기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으며 달려오는 인간을 발견한 화광수는 손톱을 길게 빼며 대응했다.
블루 오아시스를 먹어 정신은 조금 몽롱하지만 힘은 넘치는 상태.
어지간한 인간 헌터 따위는 갈가리 찢어발길 자신이 있었다.
“안 그래도 버려져서 짜증나는데!”
화광수의 날카로운 손톱이 허공을 가른다.
이에 정면으로 맞서는 사내는 뼈와 가죽밖에 안 보이는 주먹을 내질렀다.
-콰직!
볼품없는 주먹이 단검처럼 예리한 손톱과 부딪혔다.
그러자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손톱들.
“헉...?”
화광수는 깜짝 놀란 표정 그대로 머리가 터져버렸다.
남자의 주먹이 손톱을 부숴버리고도 속도가 줄어들지 않고 놈의 얼굴을 후려친 것이다.
화광수의 몸이 인간 형태에서 거대한 쥐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그 광경을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보는 사내.
“이놈이 아니야... 그 몬스터는 어디 갔지?”
공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핀다.
이내 다시 코를 벌름거렸다.
그의 고개가 묘하게 저강렵과 진수가 지나간 방향으로 향했다.
“음... 저쪽에도... 있는데...?”
머리를 갸우뚱하던 그는 중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압록강을 건너서 넘어온 진수 일행.
공간압축주머니를 한 곳에 모아놓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했다.
저강렵은 어디로 갔는지 돌원숭이와 진수만 있는 상황.
돌원숭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공간압축주머니에서 블루 오아시스 뭉치 하나를 꺼냈다.
“약 한 대 할래?”
“좋죠. 한 대 말아드릴게요.”
진수가 검지를 펼치며 말했다.
그는 돌원숭이에게 블루 오아시스를 받아들며 씨익 웃었다.
‘돼지 사냥을 시작할 때가 됐다.’
위험한 거 아니야...?
“푸하, 시원~하게 세수도 하고 좋네. 그치?”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 압록강에서 나온 진수와 요괴들.
강을 건너고 나니 저강렵의 태도도 되돌아왔다.
긴장한 모습이 확 풀어져서는 다시 껄렁댔다.
‘아까는 왜 그랬던 거지? 뭐에 쫓기는 것 같은 기색이었는데.’
진수가 느끼기에는 여전히 주변에서는 그들을 감시하는 듯한 눈길이 감지됐다.
그가 알아차렸던 그들을 쫓아오던 자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니다. 다른 데로 가는 것 같은데.... 포기했나?’
강을 건너오고도 일정 간격을 유지하고 있던 기척이 점점 멀어진다.
“넘어오면서 물건은 잃어버린 거 없지? 임마, 약 못 빤 거는 중간에 시간 나면 조금씩 빼서 맛봐.”
저강렵은 돌원숭이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출발했다.
이에 하하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돌원숭이.
하지만 저강렵의 시선이 돌아가자 바로 인상을 구겼다.
마치 상사 앞에서 억지 미소를 짓는 것 같은 모습이다.
‘사회생활은 뭐 인간이든 요괴든 똑같구나.’
돌아가는 길도 지안시로 올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끔 나타나는 몬스터들과 자기들의 삶을 살아가는 무법지대의 구성원들.
그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진수 일행.
무법지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퍽 평화로운 여정이었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꺄악!”
수풀을 가르며 퍼지는 새된 비명.
누가 들어도 여성의 비명소리다.
‘무법지대에서 고작 여자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도와주러 갈 이유가 없지. 개돼지도 아니고 말이야. 좀 더 수준 높은 어그로를 준비해야....’
하지만 진수의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저강렵은 돼지가 맞았다.
그것도 서울에서 출발할 때부터 여자 타령을 하던 돼지.
비명소릴 들은 놈은 저열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어이. 이제 좀 쉴 때가 되지 않았어?”
압록강을 건너서 출발한지 그리 많이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안시에서 거의 휴식을 취하지 않았기에 돌원숭이는 옳다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둘, 물건들 지키면서 쉬고 있어. 나는 잠깐 볼일을 보고 올 테니까.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어. 흐흐흐....”
저강렵은 입술을 날름날름 핥으며 말했다.
“뭐, 물건 안 잃어버릴 자신 있으면 너희끼리 가던지! 킁! 나약한 놈들!”
한 차례 조소를 지어보인 녀석은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잽싸게 움직였다.
압록강을 건넌 뒤 건성건성 걷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저, 저 돼지새끼! 힘 좀 세다고 더럽게 재네.”
저강렵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니 돌원숭이가 흉을 보기 시작했다.
얼굴 가득히 기분 나쁜 기색이 역력했다.
“뭐 편히 쉴 수 있는 곳에서는 이유도 안 말해주고 재촉하더니, 이딴 곳에서 쉬고 있으라고? 진짜 개같이 구는구나. 어휴. 내가 조금만 더 셌어도 꾸익꾸익 비명을 지르게 해주는 건데.... 후우....”
한 차례 욕지거리를 뱉은 녀석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공간압축주머니에서 블루 오아시스 뭉치 하나를 꺼냈다.
“약 한 대 할래?”
예의상 권하는 얼굴.
본심은 자기가 빨리 흡입하고 싶은 모양이다.
“좋죠. 한 대 말아드릴게요.”
진수가 검지를 펼치며 말했다.
씨익 웃으며 블루 오아시스 뭉치를 받는다.
가방을 뒤지는 척 하면서 [차원의 틈]에서 물건 몇 개를 꺼냈다.
‘블루 오아시스 가루를 감쌀 수 있는 담배 종이랑... 몬스터 마취제, 라이터 정도면 되겠네.’
그는 [차원의 틈]을 얻은 뒤에 전이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물건들 외에도 헌터 활동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놨었다.
불에 태워서 굴 따위에 연기를 집어넣는 몬스터 마취제는 필수 품목이라고 할 수 있다.
“자, 여기 특제 블루 오아시스입니다. 하하.”
돌원숭이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진수가 건넨 담배를 물었다.
이미 지안시에서 블루 오아시스를 흡입하고 약 기운이 풀리지 않았기에 미세하게 섞인 마취제 냄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손수 불까지 붙여주는 진수.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다.
“응? 콜록 콜록! 아이고 이게 무슨 냄새야!”
돌원숭이는 눈이 화등잔 만해지며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입에서 뗐다.
그 모습에 진수는 순간 긴장했다.
놈이 마취제를 눈치 챘다면 제압해야 했으니까.
“죽여주는 냄새네!”
하지만 이내 뻐끔뻐끔 담배를 빨아대는 녀석.
그냥 정신없이 흡입하느라 사레가 들렸던 모양이다.
“너도 하나 말아서 퓌....”
순식간에 한 대를 태운 돌원숭이가 기절하듯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공기 중에 연기를 퍼트려 마취시키는 약을 직접 폐 속에 밀어 넣었으니 한 시간은 곯아떨어져 있을 것이다.
“꺅!”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비명이 들린다.
하지만 처음 나왔던 비명소리와는 조금 결이 달랐다.
정말로 급박한 것 같은 음성이다.
‘저강렵이 소리 지른 사람을 찾아냈나 보네.’
진수는 [사신의 감각]으로 저강렵의 위치를 찾아냈다.
곧바로 방어구와 전기톱을 착용하고 걸음을 옮겼다.
* * *
“크흐흐...! 뭔가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내가 도와준다니까 그러네.”
허름한 옷차림에 무식하게 생긴 쇠스랑을 든 저강렵이다.
어지간하면 별 도움도 안 되어 보이고, 도움을 받고 싶은 외형도 아니었다.
하물며 두 눈에 색욕까지 넘실댄다.
‘시발, 똥 밟았네!’
여성은 진수 일행이 무법지대에 들어오고 꾸준히 그들의 뒤를 쫓아왔다.
그녀는 나름의 방식으로 무법지대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외부에서 무법지대로 들어오는 헌터들을 속여 약탈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적당히 긴장이 풀렸을 때 기습을 해서 손쉽게 원하는 바를 이뤄왔다.
이번에도 호의를 베풀려고 하는 순간을 노리려고 했다.
그런데 이 돼지 같이 생긴 놈은 애초에 호의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하는 수 없지.... 이걸 쓰는 수밖에.’
아랫입술을 깨문 그녀는 뒷짐을 졌다.
이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렇다면... 부탁을 좀 드려도 될까요?”
“흐흐. 좀 더 크게 말해보라고. 아니면 나한테 다가오라는 뜻인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여성을 향해 가는 저강렵.
녀석의 손이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는 순간, 뒷짐을 졌던 그녀가 빠르게 손을 앞으로 돌렸다.
여성의 수중에 들어있는 것은 다름 아닌 권총이었다.
그것도 마력회로가 덕지덕지 새겨져 있는 물건.
누군가가 어설픈 마력공학을 이용해서 개조를 한 총인 듯했다.
-쾅!
방아쇠가 당겨지고, 총소리가 아니라 거의 대포 소리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끄악!”
저강렵이 복부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후덕한 몸집이 뒤로 조금 밀릴 정도의 충격이었으니 고통스러울 만도 했다.
“... 이 정도 장단 맞춰줬으면 됐지? 흐흐흐.”
녀석이 보통의 헌터였다면 말이다.
배를 감쌌던 양팔을 풀고 왼손으로 복부를 슬슬 문지른다.
옷에 꽤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지만 피부는 불긋할 뿐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니가 먼저 날 자극한 거다?”
저강렵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가리킨다.
음심 가득한 얼굴로 달려드는 녀석.
여성이 권총을 다시 한 번 발포하려는 찰나, 누군가가 둘 사이에 불쑥 들어왔다.
-휙, 퍽!
한 바퀴 빠르게 돌며 권총을 빼앗고 뒤돌려 차기로 저강렵의 복부를 걷어찬다.
돼지 요괴는 달려들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몸이 날아갔다.
“위험한 걸 갖고 다니네. 이건 압수.”
-콰드드득!
맨손으로 권총을 비틀자 원래의 형태가 사라져버렸다.
“아, 안 돼...! 그게 없으면 난 어떡하라고...!”
절망스런 표정이 되는 그녀.
하지만 진수의 얼굴엔 별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 본인 인생은 알아서 하시고. 당장 여기서 목숨 건지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고 빨리 피하는 게 좋을 걸?”
그녀는 바로 진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돼지상의 사내가 날아간 방향에서 웬 거대한 몬스터가 튀어나왔으니까.
여성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전력으로 도망쳤다.
“크아아악! 너 이 새끼! 주선생이 오냐오냐 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커다란 이족보행 돼지 형태가 된 저강렵은 난데없이 나타나 자신을 걷어찬 게 누군지 확인했다.
이제야 조금 마음에 들려고 하던 인간 놈이다.
그런데 건방지게 자신에게 대적하고 노리던 먹잇감을 놓아주다니, 당장 찢어 죽여도 모자란 일이었다.
“머리통만 남겨서 들고 가주마!”
-쿵쾅 쿵쾅!
분노에 차 제자리에서 몇 차례 뛴 저강렵은 자신의 무기인 쇠스랑을 양손에 단단히 쥐고 돌진했다.
-후웅!
엄청난 풍압을 일으키며 짓쳐드는 쉬스랑.
진수는 전기톱을 마주 휘둘러 대응했다.
“킁! 인간 따위가 감히 힘으로? 내가 평천 형님에 비할 데는 못 되지만 간부들 중에서는 한 손에 꼽힌다!”
저강렵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친다.
과연 녀석이 자신만만할 만했다.
쇠스랑과 전기톱이 부딪히자 진수는 팔이 뽑혀 나가는 줄 알았다.
[상급 악력]이 아니었다면 볼썽사납게 전기톱을 놓쳐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지!’
[야성]의 본능적인 감각으로 저강렵의 강력한 힘을 받아 빠르게 몸을 한 바퀴 돌렸다.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자세를 낮추니 저절로 놈의 다리를 노리는 공격이 된다.
“흐읍!”
그걸 본 녀석이 다리에 힘을 주었다.
원하는 부위의 방어력을 올리는 기술을 지녔는지 매섭게 돌아가는 전기톱이 튕겨져 나온다.
‘정면으로 맞붙는 건 좀 어렵겠네.’
진수는 전기톱을 [차원의 틈]에 집어넣었다.
“호오? 이놈, 이상한 능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허공에서 물건이 사라지니 신기한 듯 쳐다본다.
하지만 진수가 [차원의 틈]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은 신기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절대로 살려 보낼 생각이 없다는 거지.’
맨손이 된 그는 사방으로 [강철 거미줄]을 날렸다.
주선생의 싸움을 보고 배운 방식이다.
“허, 주선생이 아끼더니 이런 것까지 가르쳤어?”
저강렵도 주선생의 전투 스타일이라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하하, 이런 건 처음 볼 걸?”
-뽀옹, 뽀옹
진수가 양손에 [분열]을 두 번 사용했다.
[왕성한 번식] 특성이 적용되며 총 넷의 분신이 나타났다.
분신들을 공중에 집어던진다.
그러자 녀석들은 거미줄을 타고 빠르게 흩어졌다.
“어어...?”
요괴의 시선이 바빠진다.
-철컥!
놈이 오른쪽 위에 있는 분신을 보면 왼쪽에 있던 녀석이 네일건으로 성창을 쏜다.
빛으로 된 창이 저강렵의 등을 파고들었다.
“끄악!”
빛의 성창은 기본적으로 사마의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진은과 같이 요괴형 괴물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저강렵.
아까 권총에 맞았을 때 낸 거짓 비명과는 결이 다른 진짜였다.
-후웅!
잔뜩 성이 난 녀석이 쇠스랑을 휘둘렀다.
담긴 힘이 워낙 강해 [강철 거미줄]을 끊고 분신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퍽!
하지만 놈이 분신들에게 신경을 쏟으면 본체가 육탄전을 걸었다.
[분열]을 두 번 사용했어도 본체엔 아직 80%의 힘이 남아있다.
맞부딪혔을 때 우위를 점하지 못할 뿐이지 진수의 힘 정도면 충분히 녀석에게 타격을 주었다.
-퍽!
-철컥!
-콰득!
진수와 작은 진수들이 마치 한 몸처럼 연계를 하며 저강렵을 공략했다.
‘사실 한 몸이 맞긴 하지만.’
사실상 분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본체가 함께 싸우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아주 손쉽게 합을 맞출 수 있었다.
일방적으로 압박하던 진수가 잔뜩 신이 나 공격 템포를 더욱 높였다.
“크아아아!”
그 순간, 저강렵이 포효를 하며 쇠스랑을 휘둘렀다.
정확히 분신 하나를 후려갈긴다.
“끄악!”
작은 진수가 비명을 지르더니 반 토막이 나버렸다.
녀석이 이어 다음 타겟을 노리기 위해 고개를 돌린다.
“어딜 공격하시는 거죠?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시선을 돌리는 순간 저강렵의 귓가에 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쇠스랑으로 해치웠다고 생각했는데 분신이 멀쩡하게 서있었다.
양손으로 빛의 성창을 쥔 채.
“핫!”
키가 작은 분신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성창을 찔러 넣었다.
놈이 방어력을 높이는 기술을 사용하기도 전에 창날이 파고든다.
“뀌에에엑!”
저강렵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목숨을 잃었다.
RD의 간부들 중에서도 제법 강한 녀석인데 압도적으로 이겼다.
조금만 더 강해진다면 내부분열을 일으킨 뒤 충분히 승부수를 띄워볼 만했다.
-저팔계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저팔계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아, 얘가 저팔계였어? 뭐, 생긴 걸로 얼추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긴 했지만....’
진수는 저팔계의 이름을 찡찡이라고 지어줬다.
이로써 12간지가 완성되었다.
‘올림포스 신들보다 이쪽을 먼저 모았네.’
-저팔계 [찡찡이]가 [간장막야] 무리에 합류합니다.
-드레이크 [후라이]가 [찡찡이]를 보며 입맛을 다십니다.
어느새 장성하여 덩치가 커진 후라이.
갑자기 나타난 통돼지에 식욕이 당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두려워하며 도망치던 [찡찡이]가 후각으로 죽음의 산맥에 숨겨진 드래곤 레어를 발견했습니다.
-특수임무 발생.
-특수임무 : [간장막야] 무리를 도와 드래곤 레어 정복하기
-보상 : 드래곤 레어의 보물 중 하나
소 뒷걸음질 아니, 돼지 뒷걸음질에 쥐를 잡은 격이었다.
“잠깐, 근데 드래곤 레어면 위험한 거 아니야...?”
레어-저팔계 [찡찡이]가 드래곤 레어 수호 골렘과 대치합니다.
[찡찡이] - 현재 상황 : 도주 시도에 실패
드레이크인 후라이를 피해서 움직이다가 드래곤 레어를 발견한 찡찡이.
덕분에 드래곤 레어를 정복하라는 임무도 받았지만 당장 혼자서 드래곤 레어의 수호 골렘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던 듯했다.
상태창에 나타난 녀석의 현재 상황엔 도주에 실패했다는 표기가 되고 있었다.
‘아 이러면 임무가 바로 실패할 것 같은데....’
임무 내용이 간장막야 무리를 통해 드래곤 레어를 정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건 찡찡이가 다른 전이자들을 데리고 오면 성공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일 수 있었다.
진수는 녀석이 우선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봤다.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온 것이 바닥에 널브러져있는 쇠스랑.
차원 전이가 되기 전에 저강렵이 사용하던 무기다.
‘그래도 자기 전용무기 같은 물건인데 보내주면 좋겠지?’
쇠스랑을 바닥에서 들어올렸다.
“끙...! 이거 생각보다 엄청 무거운데?”
힘 능력치가 100을 넘고 [상급 악력] 특성도 가지고 있었지만 들어올리기에 상당히 묵직했다.
저강렵의 힘을 다시 한 번 체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래봤자 싸움에선 내가 이겼지.’
진수는 찡찡이에게 무기를 보내줬다.
“이것도 아이템이라고 30골드를 잡아먹네.”
비아이템 전송으로 보내려 했다가 실패하고 다시 아이템 전송을 이용했다.
상태창에 있는 찡찡이의 그림에 쇠스랑이 나타난다.
[찡찡이] - 현재 상황 : 수호 골렘 1기 파괴 후 도주
다행히 진수의 의도대로 찡찡이가 살아남았다.
-[간장막야] 무리가 드래곤 레어를 향해 진격합니다.
-특수임무가 진행되는 동안에 [간장막야] 무리를 선택하면 상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주받은 성지 때와 마찬가지로 전이자 무리의 상황이 창으로 나타난다.
찡찡이를 필두로 거대한 드레이크와 진, 강철거미 떼가 이동하고 있었다.
강철거미 떼는 붉은 거미와 푸른 거미의 명령을 받는 듯했다.
‘어유, 간장이랑 막야도 더 커진 것 같네. 특히 간장이.’
옛날에 던전에서 마주쳤을 때는 둘의 크기가 많이 차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간장의 덩치가 훨씬 컸다.
진수가 예전에 전달했던 [파이어 인챈트] 기술 덕분에 더 많은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간장막야] 무리가 드래곤 레어에 진입합니다.
드디어 찡찡이의 안내를 받아 죽음의 산맥에 있던 드래곤 레어에 들어갔다.
진수도 전이자들의 상황을 보여주는 창으로 드래곤 레어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상상했던 거랑은 좀 다른데?’
보통 판타지의 드래곤 레어라고 하면 금은보화가 쌓여 있고 온갖 희귀한 무구들과 진귀한 물건이 가득한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화면에 보이는 것은 우중충한 분위기의 동굴 정도였다.
번쩍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고 수많은 도둑들이 들어와 털어간 것 같은 비주얼.
굉장히 넓은 동굴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몸 이곳저곳이 깨져 있는 낡은 골렘들뿐이다.
심지어 이름이 드래곤 레어인데 드래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저쪽 차원에서 위험한 몬스터를 만났다는 걸 본 적이 없네. 항상 위협적인 건 인간들밖에 없었고....’
전이된 몬스터들의 활동 범위는 굉장히 넓었다.
그렇다면 그 지역에 있는 필드 보스 격의 괴물들과 격돌할 법도 한데, 그런 경우가 없었다.
마치 저쪽 차원에서 강한 몬스터가 모두 없어지기라도 한 듯이.
“뭐, 나랑은 별 상관이 없나?”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진수는 이내 시큰둥한 표정이 되었다.
저쪽 차원에 몬스터가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쪽 차원에서는 여전히 균열을 통해 괴물들이 쏟아지고, 요괴형 몬스터들이 사람들 돈과 생명을 빨아먹겠다고 수작질 부리고 있는데.
그는 다시 간장막야 무리의 상황으로 눈을 돌렸다.
-[간장막야] 무리가 드래곤 레어 수호자들과 전투를 시작합니다.
드디어 시작된 싸움.
드래곤 레어의 수호자들은 대부분 골렘이었다.
추가적으로 정령처럼 생긴 녀석들도 몇 있었는데, 모습이 몹시 흐릿한 게, 마력이 충분치 못한 듯했다.
수호 정령들과 대치하는 건 바람의 상급 정령이라 불리는 진, 카자마다.
‘그래도 쪽수에서 좀 밀리겠는데.... 안 되겠다.’
잽싸게 상점 목록을 훑어본다.
20골드로 기술 [라이트닝 인챈트]를 구입했다.
-진 [카자마]의 급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민첩 +1, 마력 +2, 골드 +10
진이 내뿜는 바람에 전기 이펙트가 섞였다.
위력도 상당히 강해졌는지 드래곤 레어의 수호 정령들을 압도한다.
‘이게 초풍신이지!’
진수가 격투게임 강철주먹에 나오는 기술명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수호 골렘들과 싸우는 모습을 살펴봤다.
간장막야 무리는 상당히 밸런스가 잘 잡혀 있었다.
간장과 막야, 강철거미 떼가 거미줄로 적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찡찡이가 쇠스랑을 들고 앞에서 육탄전을 벌였고 후라이는 브레스를 내뿜으며 골렘들을 하나씩 무력화시켰다.
‘무난하게 이기겠는데?’
전황을 살피니 큰 위협은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5골드짜리 [특성 랜덤 박스]를 두 개 구입했다.
-[특성 랜덤 박스] 구입으로 특성 [빠른 숨결]을 얻었습니다.
-[특성 랜덤 박스] 구입으로 [눈치]를 얻었습니다.
‘브레스도 숨 쉬는 거...지?’
진수는 후라이에게 [빠른 숨결]을, 찡찡이에게 [눈치]를 주었다.
-[간장막야] 무리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힘 +1, 민첩 +2, 체력 +1, 내구 +1, 마력 +1, 골드 +5
특성을 전달하고 나니 전세가 확실히 굳었다.
특히 후라이가 보다 빠르게 브레스를 날려 골렘들을 파괴한 게 주요했다.
-임무 달성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드래곤 레어의 보물 중 하나
결국 드래곤 레어의 수호자들을 해치우고 임무가 달성된다.
‘근데 저기에 보물이랄 게 남아있어?’
보물은커녕 금속 조각 하나 보이지 않는 동굴이다.
진수는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보상에 대해서 의심했다.
-슈우욱
그 순간 그의 눈앞에 무언가 나타났다.
-두근 두근
일정한 박자로 움직이고 있는 것.
아주 익숙한 박자다.
-드래곤 레어에 남아있던 마지막 보물, 약화된 드래곤 하트를 얻습니다.
진수의 머리만한 심장이 홀로 뛰고 있었다.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마력이 울컥울컥 샘솟았다.
“헉...? 드래곤 하트?”
드래곤 계열의 몬스터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게 바로 심장이다.
드래곤은 따로 마석을 지니고 있지 않았고, 심장에 엄청난 양의 마력이 응축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우선 빨리 보관을 해야겠다.”
진수는 약화된 드래곤 하트를 [차원의 틈]에 집어넣었다.
다른 전이자들이 군침 흘리지 않게 설정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력원의 소실로 드래곤 레어 내부에 존재하던 마법진이 무력화됩니다.
-[간장막야] 무리가 약화된 차원의 축을 발견합니다.
-보상을 받습니다.
-힘 +1, 민첩 +1, 체력 +1, 내구 +1, 마력 +5, 골드 +30
이어지는 안내 메시지들.
소실되었다는 동력원은 아마 드래곤 하트일 것이다.
‘[차원 전이] 이게 임무 보상을 이용해서 마법진을 깬 거 같은데...?’
텅텅 빈 드래곤 레어, 드래곤 하트로 움직이던 마법진, 약화된 차원의 축.
녹색 숲에서 차원의 축이 봉인되어 있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느껴졌다.
또 저쪽 차원 인간들의 소행일 듯했다.
‘몬스터들이 전이된 지역마다 저 차원의 축이라는 게 있는 건가....’
진수는 조금씩 [차원 전이]의 목적이 뭔지 알 것도 같았다.
간장막야 무리의 일이 마무리되는 걸 확인한 그는 돌원숭이에게로 돌아갔다.
여전히 약에 취해 헤롱헤롱거리고 있는 녀석.
진수가 돌원숭이를 흔들어 깨웠다.
“저강렵님 아직도 안 오셨는데 그냥 우리끼리 가죠.”
“에? 어? 응.... 응? 어. 그래.”
판단력이 흐려진 녀석은 그의 말에 무조건 고개만 끄덕거렸다.
진수는 일부러 짐도 혼자 짊어지고 출발했다.
“뭐 우리끼리 가라고 하더니 진짜로 안 와버리네요.”
“하여간 출발할 때부터 여자 여자 거리더니 어디서 여자 목소리 들리니까 헐레벌떡 뛰어가는 거 봐요. 으휴....”
“그래도 혹시 몰라서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어디 가서 놀고 있는 건지....”
“약은 중간중간에 조금씩 맛봐도 된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복귀하는 길에 진수는 돌원숭이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마치 최면이라도 거는 것처럼.
저강렵이 실제로 했던 말과 교묘하게 왜곡한 말을 섞인 내용들.
약기운이 많이 남아있던 돌원숭이는 간간히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그렇지, 그렇지 하는 말을 하면서 동조하기 시작했다.
[신뢰] 특성까지 작용하며 아주 손쉽게 녀석을 구워삶을 수 있었다.
-가국 [몽치]가 블루 오아시스를 흡입합니다.
-[몽치]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내구 +1
진수는 덤으로 블루 오아시스도 꽤나 빼돌렸다.
돌원숭이는 스스로가 몇 시간이나 약에 취해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황.
녀석이 착각하고 있는 흡입량만큼을 [차원의 틈]에 집어넣었다.
덕분에 전이자들이 블루 오아시스를 가져가고 보상을 보내왔다.
그 양이 힘 2, 민첩 3, 체력 2, 내구 3, 마력 2.
‘이놈도 괜히 떠들어봤자 자기한테 불리한 걸 아니까... 함부로 입을 놀리진 않을 거야.’
그는 옆에서 비틀비틀 걷고 있는 돌원숭이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그렇게 별 탈은 없지만 별일은 있게 RD에 복귀했다.
넷이 갔는데 복귀한 것은 둘.
하지만 물건은 멀쩡하다.
진수와 돌원숭이는 RD의 간부들에게 불려가 진상조사에 응했다.
“그러니까... 화광수는 지안시에서 약을 흡입하느라 떨어졌고, 저강렵은 복귀하는 길에 여자 목소리를 듣더니 제멋대로 사라졌다?”
“예에, 예. 맞습니다.”
돌원숭이가 잔뜩 긴장한 상태로 대답했다.
“블루 오아시스는 저강렵이 좀 빼먹으라고 해서 이렇게 양껏 처먹었고?”
짜증난다는 듯 묻는 제천에게 돌원숭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마찬가지로 진수도 동의한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후우.... 그래, 항상 말썽을 피우는 놈이긴 하지.”
제천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뭔가 탐탁지 않은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콕 집어서 말을 하지는 못했다.
“물건의 양이 제법 줄어들긴 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지. 이 녀석들의 탓을 하긴 좀 그래. 게다가 김진수 팀장의 경우에는 블루 오아시스를 흡입한 흔적이 전혀 없지 않은가?”
허원화가 진수의 편을 들어줬다.
그의 말대로 인간이 블루 오아시스를 흡입하면 응당 나타나는 증상이 전혀 없었다.
블루 오아시스의 양이 줄어든 원흉은 돌원숭이일 것이라는 뜻이었다.
“지안시의 블루 오아시스 공급처에서도 똑같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강렵 형님이 뭔가 서둘러서 움직이셨고, 화광수 형님이 뒤늦게 떠나셨다고요.”
황계문의 이야기까지 더해지며 진수와 돌원숭이에게 향하던 의심이 거의 걷혔다.
더 추궁할 건덕지가 없었으니까.
“그래, 고생들 했네. 김 팀장은 한 번 운반을 다녀와 봤으니 앞으로 팀을 이끌고 움직일 수 있겠지?”
주해응의 말로 진상조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회의실에서 나오는 진수의 얼굴엔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 * *
진수가 지안시에 다녀온 뒤로는 하급 요괴들을 데리고 몇 차례 블루 오아시스 운반을 하게 되었다.
기회를 틈타 요괴들도 전이를 시킬 수 있었고 블루 오아시스를 빼돌려 능력치도 상당히 올랐다.
두세 번에 한 번씩 의심받지 않는 선에서 하급 요괴를 보냈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렇게 무탈한 한 달이 흘렀다.
“이런 빌어먹을! 동생이 한 달 동안 보이지 않는데 진정하게 생겼어?”
그러한 평화를 깬 것은 제천이었다.
격돌
-그렘린 [기즈모], 타이니 트롤 [볼진]이 [아틀란티스] 무리에 합류합니다.
-백택 [단조], 비위 [녹치]가 [꾸러기 수비대] 무리에 합류합니다.
-비두만 [레고]가 [스카이피아] 무리에 합류합니다.
지난 한 달 간 무법지대를 드나들며 전이시킨 녀석들이 자리를 잡았다.
기간이 기간인 만큼 진수의 능력치도 상당히 올랐다.
힘 14, 민첩 11, 체력 13, 내구 13, 마력 18, 골드 55.
‘이제 곧 약을 시장에 풀 것 같은데.... 나도 작업을 칠 때가 됐네.’
RD는 야금야금 농축된 블루 오아시스를 들여와 놈들의 창고 깊숙한 곳에 쌓고 있다.
진수는 헌터범죄전담기관의 박철준 수사관과 상황을 공유하며 RD를 덮칠 시점을 재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RD 본사 건물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과 굉음이 일어났다.
-쾅!
건물 꼭대기 층 벽면이 터져나갔다.
주해응 대표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다.
RD 본사에 있던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이었다.
재빨리 건물을 벗어나는 자들과 충격의 근원지로 찾아가는 이들.
RD에 고용된 한국의 헌터들은 대부분 전자였고, RD의 원 소속인 요괴 및 적룡파 인물들은 후자였다.
그리고 그 중간쯤 되는 진수는 누구보다 빠르게 건물 위로 올라갔다.
“이런 빌어먹을! 동생이 한 달 동안 보이지 않는데 진정하게 생겼어?”
올라가는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천 자네 마음은 잘 아네. 하지만, 지금처럼 중요한 시점에 무법지대를 모두 수색하라고 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마지막 행보가 여색을 밝히느라 경거망동한 것을....”
이어 주해응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린다.
얼핏 차분한 것 같았지만 그 기저에 상당한 짜증이 깔려있었다.
“가국, 알유, 복해 그리고 내 동생 강렵이까지. 더 아래로 내려가면 훨씬 많은 녀석들이 없어졌어. 근데 너희 인간들은 뭘 하고 있지?”
“허어, 이보게 제천. 그래도 말은 좀 가려서....”
“이런 씨, 말을 가려서 하기는. 너나 가려서 해. 지금 나도 터지기 일보직전이니까.”
분노에 눈이 먼 듯 소리를 지르는 제천.
진수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움직일 시간이 빨리 왔네.’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는 사이에 평천, 주선생, 허원화 등의 간부들이 나타났다.
“평천, 자네 동생을 좀 말려보게나.”
주해응이 평천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허허.... 이 친구들이....”
“형님, 제천이 녀석의 말이 일리가 있지 않겠소? 나도 처음에는 몇몇 동생들이 사라진 게 그저 녀석들의 일탈이라고 생각했소. 그런데, 이렇게까지 길게 자리를 비울 놈들이 아니오. 특히 알유가 그렇지.”
“알유가 사라지는 순간은 평천 너도 보지 않았느냐?”
허원화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알유가 사라지는 순간을 봤다고?’
그들이 고(蠱)를 통해서 알유를 감시했다는 걸 몰랐던 진수는 깜짝 놀랐다.
“그래, 봤지. 그래서 더 의심스러운 거다. 너희 인간들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고, 특히 그 이후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꼈으니까.”
진수를 통해서 요괴들의 던전 활동을 견제했던 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복해의 때도 이상한 구석이 있었지.”
평천이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상당히 많은 인원이 구경을 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대부분 RD 내부자들이었다.
“분명 허영감, 그대가 복해를 만나러 간 뒤에 행방불명이 되었어. 주선생이 그대에게 물었을 땐 별다른 일은 없었다고 했지?”
“그, 그래. 부산의 헌터들이랑 재밌게 지내고 있었다.”
“김진수. 네가 볼 때는 어떻더냐?”
평천의 질문이 진수에게로 넘어왔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눈이 휘둥그레진 그.
“예? 아.... 허원화님이 조금 화가 나신 것 같긴 했지만... 어떻게 해코지를 할 것까진....”
“화를 냈었다?”
진수의 말을 제천이 받았다.
“이 노인네가, 주선생한텐 그런 얘기 없었잖아? 노망이 들었거나 개수작을 부리려는 거였겠지...!”
제천의 목소리가 점점 격정적으로 바뀌었다.
녀석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RD 소속 인간들도 조금씩 웅성대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괴물 새끼들 말 더럽게 많네.”
“누구 덕분에 편하게 있는 줄도 모르고....”
“위계질서 한 번 잡아야 하는 거 아냐?”
저절로 요괴들과 인간들이 대립하는 구도가 되어간다.
“그만, 그만!”
‘흡...!’
주해응으로부터 엄청난 위압감이 터져 나왔다.
[특급 정신 보호]가 있는 진수마저도 무릎이 후들거릴 정도.
그의 표정은 분노에 가득 차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웃기지도 않은 꼴이야! 대륙에서 이 작디작은 나라로 쫓겨 온 것도 부끄러운데, 이토록 단합이 안 돼서 어떻게 하자는 거야!”
모두가 한 순간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강압적인 방법이었지만 사태가 더 나빠지는 것을 확실하게 막는 듯 보였다.
‘이러면 곤란한데.’
그리고 그건 진수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비록 소환문을 통해서 너희들을 불러냈다지만 서로 형님, 동생 하는 이유는 가족처럼 지내고자 함이 아니었는가! 평천, 약속을 잊었느냐.”
주해응은 일부러 문제의 발단이 된 제천이 아닌 평천에게 물었다.
평천은 요괴들의 우두머리.
게다가 서로의 약속에 의해 주해응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자연스럽게 누가 위에 있는지 보여줘 요괴들이 더 활개 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아니...오, 형님.”
평천이 어금니를 깨물며 답했다.
이에 제천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지만 화를 억누르려는 태도도 같이 나타났다.
그때, 하급 요괴들이 모인 곳에서 작은 소란이 생겼다.
“이 새끼들아 그러니까 깝치지들 말라고!”
“윽!”
“어떤 자식이야?”
숙여지던 평천의 고개가 돌아간다.
그 방향에서는 RD의 인간들과 요괴들이 작게 다투기 시작했다.
서로 밀치고 가볍게 치는 등 물리적인 충돌도 생겼다.
“형님, 어떤 놈이 우리 쪽 동생을 친 모양인데요.”
하급 요괴 하나가 평천과 제천 등에게 들리도록 이야기했다.
이미 아슬아슬하던 평화가 단박에 박살났다.
-쾅!
제천이 어디선가 기다란 봉을 꺼내더니 벽을 후려쳤다.
다시 한 번 터져 나가는 건물의 벽면.
건물 주위에 있던 헌터들은 더욱 멀리 떨어졌다.
“멈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전춘성이 소릴 쳤다.
그의 몸 주위로 마력의 파동이 느껴진다.
무언가 힘을 사용하는 듯했다.
-지잉
하지만 주선생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면서 마력을 뿜어낸다.
마치 거미줄처럼 찐득찐득한 느낌을 주는 힘이 공간을 장악했다.
“우리가 언제까지고 목줄을 차고 있을 줄 알았나보죠?”
그녀의 등 뒤로 기다란 거미 다리 네 개가 뽑혀 나온다.
“하여간 인간들은 잘 해주면 본색을 드러낸다니까.”
사람들에게 가장 우호적이라고 할 수 있던 주선생마저 적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어쩌다가...! 음!”
탄식을 뱉던 주해응의 시선이 빠르게 진수에게로 향했다.
그의 손에 여전히 착용된 인장 반지.
그런데 묘하게 덩치가 커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주해응에게 진수의 목소리가 전해진다.
‘이 새끼들아 그러니까 깝치지들 말라고!’
처음 누군가가 요괴를 공격하면서 나왔던 이야기다.
진수의 분신이 인파로 숨어 들어가 혼란을 야기한 것이다.
반지를 낀 채로 [분열]이 해제되며 그 정보가 주해응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그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이미 사태는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요괴 간부들이 하나둘씩 본모습을 드러내며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니까.
-씨익
주해응의 시선을 마주 받으며 진수가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대로 뒷걸음질 쳐 하급 요괴들과 RD의 인간들이 싸우는 난장판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주해응의 표정은 차갑게 굳었다.
“허형, 춘성이. 공간 결계를 부탁하네. 아무래도 오늘 힘을 좀 써야겠어.”
주해응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그의 요청에 허원화와 전춘성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우웅, 우웅
먼저 움직인 것은 전춘성이었다.
그의 몸에서 나온 마력은 허공에 주술진을 만들었다.
뒤이어 허원화가 품에서 누런 종이 다발을 꺼낸다.
종이에 주술진을 그려 부적을 만드는 게 아닌 허공에 박힌 진에 종이를 흩뿌렸다.
마치 종이로 된 기둥 같은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샤아악!
기둥을 중심으로 어두운 막이 펼쳐진다.
RD 본사 건물을 모두 뒤덮으며 외부의 인물들과 격리시켰다.
“후우... 대표님 다 됐습니다.”
“그래. 고맙군.”
한 걸음 내딛는 주해응.
-콰직!
그와 동시에 공간 전체에 엄청난 압력이 가해졌다.
하급 요괴들과 RD의 인간들이 순간적으로 무릎을 꿇을 정도.
여전히 자리 서있는 것은 RD의 간부급 인물들과 진수뿐이었다.
주해응이 싸늘한 눈빛으로 진수를 본다.
“형님, 오늘 다시 한 번 승부를 볼 수 있겠소.”
하지만 이내 시선을 돌려야했다.
평천이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드러내며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검은 비단처럼 윤기가 도는 가죽.
하늘을 찢을 듯 단단한 두 뿔.
숨만 쉬어도 울끈불끈 움직이는 거대한 근육.
평천은 어떻게 보면 미노타우로스와도 비슷하게 생긴 괴물의 형상으로 변해있었다.
“그래, 기어오르는 걸 보니 누가 위인지 다시 알려줄 필요가 있겠구나.”
공간 전체를 짓누르던 압력이 한 지점으로 모여든다.
바로 평천을 향해서.
위에서만이 아니라 사방에서 강하게 압축한다.
덕분에 무릎을 꿇었던 이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비로소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쉬익!
주선생이 [강철 거미줄]을 흩뿌린다.
-펑펑!
분신을 만들며 달려드는 제천.
이에 허원화는 종을 꺼내 흔들었다.
“그어어어....”
뚫린 벽면을 통해 인영이 수없이 많이 날아왔다.
이지를 상실한 듯 보이는 눈동자.
창백한 피부와 단단히 굳은 관절.
흔히 말하는 강시들이다.
“제게 힘을 주소서...!”
전춘성은 허공에 몸을 띄우더니 곧 눈을 뒤집어 깠다.
이내 희끗한 무언가가 몸 위로 씌었다.
-쩔렁!
덩치가 큰 그에게 어울리는 언월도가 나타났다.
신기하게도 언월도 또한 희끗한 상태였다.
“관성제군을 가로막는 자, 누구더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러고는 바로 언월도를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쾅!
-샤악!
“죽여 버려!”
“우매한 인간들!”
“짐승 새끼들이 감히?”
간부들뿐 아니라 하급 요괴들과 인간들도 뒤엉켜 싸워댔다.
인간의 형상을 벗어던진 녀석들이 아무래도 우세했다.
-고획조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고획조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진수가 있었다.
주해응의 시선을 피해 숨어든 그는 아직 전이시키지 않은 종류의 하급 요괴들을 중심으로 처치하고 있었다.
서로 싸우고는 있다고 하지만 아직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격화되지는 않은 상황.
진수는 조금 전세를 넓게 살피며 인간과 요괴의 균형을 맞추고 전이자 목록을 채웠다.
‘하급 요괴는 에피타이저, 메인 디쉬는 역시 간부급 녀석들이지.’
그는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평천과 제천, 주선생을 보았다.
-특수임무 발생.
어부지리를 노리던 그의 눈앞에 안내 메시지가 나타났다.
-특수임무 : 계약자 차원 전이시키기
-보상 : 계약자의 핵심 기술 중 하나
‘핵심 기술이라고...?’
진수는 난장판이 된 장내를 훑어보았다.
특수임무가 원하는 계약자라는 녀석이 누구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두 번째 계약자
-파삭!
진수의 양손 망치가 돌원숭이의 머리를 부쉈다.
강력한 힘에 강력한 무기가 내는 시너지.
비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녀석의 몸이 허물어진다.
“헌터분들 뒤로!”
하급 요괴들과 사람들이 뒤섞인 난장판 속에서 한국의 헌터들을 찾아냈다.
RD에서 일하는 헌터들은 대부분 E~C급 정도.
하급 요괴조차 감당하기 힘든 자들이란 뜻이었다.
진수는 [유체화]를 적절하게 이용하며 헌터들을 대피시켰다.
“가, 감사합니다!”
“헉, 이게 무슨 일이야.”
다행히 RD의 싸움에 휘말린 헌터의 수가 많지는 않았다.
“아, 장우종씨가 말했던 그 팀장님이시구나!”
진수가 동분서주 하며 사람들을 돕는 와중에 그를 알아보는 이들도 있었다.
이에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워낙 상황이 긴박했기에 구구절절 이야기를 풀 시간은 없었다.
‘한국 와서 패악질 하는 RD놈들이야 죽어도 상관없지만 일반 헌터들까지 피해를 입힐 수는 없지.’
한 데 모인 헌터들은 여섯 명.
혹시 놓친 사람이 있을까 장내를 훑어봤지만 한국 헌터들은 더 보이지 않았다.
“이 근처는 위험하니까 다들 1층으로 내려가세요. 그리고 저 검은 막이 흩어지면 바로 빠져나가시고요.”
“티, 팀장님은 같이 안 가세요?”
아까 진수를 알아봤던 자가 물었다.
“저는 여기 상황이 더 번지지 않게 해보려고요. 저런 몬스터들한테 당할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진수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가 그렇게 나오니 헌터들도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저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차원 전이]를 발동시킬 수는 없지.’
그가 헌터들을 대피시킨 데에는 물론 선의도 있었지만 필요에 의한 것도 있었다.
이제 걸림돌이 사라졌으니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설 때가 왔다.
[유체화]와 [투명화]를 사용한 진수는 다시 싸움판 속으로 숨어들었다.
* * *
“허어, 곤란하군.”
주해응의 이마 위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평천과 맞붙으면 그가 확실히 우위에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오롯이 평천에게만 신경을 쓸 수 있지가 않았다.
-수우욱!
하급 요괴 한 녀석이 그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려 한다.
주해응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손을 뻗어 놈을 우그러트렸다.
“후후후...!”
그의 신경이 잠시 흐트러진 틈을 타 평천이 짓쳐든다.
마치 거대한 트럭이 돌진하는 것 같은 위압감이다.
-텅
급히 반발력을 일으켜 놈의 돌격을 피했다.
‘이놈들, 준비를 꽤 철저히 했어.’
침음을 내며 다시 평천을 압박하는 주해응.
요괴들이 RD와 함께 활동하는 것은 그들이 적룡파 시절에 소환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소환을 하며 걸었던 계약을 해지하면 크게 약화되거나 소환이 해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주선생이 이 공간에 사이한 마력을 풀어놓으니 계약 해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덕분에 하급 요괴들이 날뛰고, 간부급 요괴들에게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쑤욱
“흡!”
게다가 저 요상한 창.
싸움터 이곳저곳에서 밝게 빛나는 창이 솟아나와 요괴며 RD의 간부들이며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했다.
그 탓에 하급 요괴들을 제압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놓쳤다.
“케엑!”
빛으로 이루어진 창이 쇠뿔을 단 요괴를 꿰뚫는다.
상처를 입은 부위부터 붕괴되더니 이내 사체가 사라져버렸다.
-교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교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진수는 [유체화]로 건물 바닥과 천장을 돌아다니며 [성창 소환]을 사용했다.
성창이 지닌 사마의 힘 덕분에 하급 요괴들을 손쉽게 해치울 수 있었다.
‘아직 전이시킨 적 없는 놈들을 골라먹는 맛이 있네.’
방금 처치한 교나 맥, 도철 같은 녀석들로 전이자 목록을 채웠다.
동시에 정말 위험한 존재들, RD의 간부들이 싸우는 모습을 살폈다.
-펑, 펑, 펑
제천이라고 불리던 녀석은 소위 말하는 손오공과 특징이 유사했다.
요괴 모습이 되니 원숭이처럼 변했는데, 돌원숭이들과 비슷하게 생겼다.
봉을 휘두르며 싸우는데 분신을 수없이 만들고 잽싼 몸놀림과 강한 힘을 지녔다.
이에 맞서는 것은 허원화였다.
‘복해랑 싸우면서 말한 준비가 이런 의미였구나.’
부산의 해운대에서 복해와 싸울 때 신장들을 소환해 힘겹게 싸우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강시들을 불러내 제천의 분신을 상대하고 온갖 부적으로 본체를 쫓았다.
표정에도 여유가 가득한데,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불러내는 신장과는 달리 이미 세팅을 해둔 강시를 부리는 것이 훨씬 손쉬운 방식인 듯했다.
‘저쪽이 계약자일 가능성이 제일 높은 것 같은데....’
언데드 위주이긴 하지만 무언가를 소환하고 명령을 내린다는 점과 부적이 계약서 같은 느낌도 들기에 유력한 계약자 후보다.
그러나 무력적인 측면으로 봤을 땐 주해응이 훨씬 강력했다.
중력을 다루는 것인지 손을 뻗는 것만으로 압력을 가하며 밀고 당기는 힘을 사용한다.
아주 단순한 능력처럼 보였지만 요괴의 우두머리인 평천을 압도하면서 동시에 하급 요괴들을 견제할 정도였다.
‘그래서 요괴 간부들을 아직 처치할 수가 없어.’
또 다른 요괴 간부, 주선생은 허원화와 맞붙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완전한 요괴 형태가 되었다.
거미의 몸통에 머리 대신 인간의 상체가 붙어있는 기괴한 형상.
거미 몸통의 등판엔 사람의 얼굴처럼 생긴 무늬가 있었다.
-샤사삭
사방에 아주 얇은 거미줄을 쳐놓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싸우는 스타일은 여전했다.
완전한 거미 모습이 된 덕분인지 눈으로 쫓기도 쉽지 않은 속도로 움직인다.
-쿠웅!
“갈!”
몸 위로 귀신이 씌인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허원화가 그녀를 상대하고 있다.
관성제군이라 자칭하던 것으로 보아 관우의 힘을 빌려온 듯했다.
그에 걸맞게 희끗한 언월도를 시원시원하게 휘둘렀다.
허공에 걸린 거미줄을 끊고 구름거인을 압도하던 주선생의 마력탄을 동강냈다.
둘의 싸움은 막상막하.
묘하게 주선생의 힘이 줄어든 듯 보이긴 했다.
‘전황을 생각하면 허원화를 먼저 노려야겠네. 계약자일 가능성도 높으니까.’
진수는 시선을 돌려 제천과 싸우고 있는 허원화를 보았다.
다섯 구의 강시들이 뻣뻣한 몸을 움직이며 원숭이 요괴를 압박한다.
그러다 돌연 한 구가 다른 강시에게 손을 뻗었다.
“어엇...?”
당황하는 노인.
부산에서 한 차례 경험했던 일이다.
분명 완전히 혼령을 제압하여 언데드로 만들었는데 자신의 제어를 벗어났다.
그 순간, 허원화에게 빈틈이 생겼다.
예상치 못한 강시의 행동 때문에 생긴 공간의 빈틈.
“키악!”
그 빈틈을 노려 제천이 봉을 찔러 들어갔다.
이에 부적들을 겹겹이 쌓아 막는다.
부산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힘을 직접 써야 하는 주술이었기에 시시각각 표정이 어두워졌다.
-푸욱!
“헉...!”
허원화의 눈이 자신의 가슴팍으로 향한다.
심장을 정확히 관통하여 튀어나온 창.
그것은 부적을 뚫기 위해 정신이 팔린 제천까지도 꿰어버렸다.
“네놈...!”
고개를 돌려 창을 쥐고 있는 진수를 보았다.
그가 [죽음의 그림자]로 강시를 움직였을 때 생긴 빈틈은 하나가 아니었다.
공간의 빈틈보다 더욱 컸던 것은 허원화의 정신적 빈틈.
스스로 강시를 다루는 주술을 믿지 못하게 된 그 틈 때문에 제천의 공격을 부적으로 막게 된 것이다.
주의력이 흩어진 것은 당연지사였고, 진수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그에게 공격을 성공시켰다.
-딸랑
늙은 도사의 종이 다시 흔들린다.
강시들이 진수를 향해 덤볐지만 이내 진수의 손짓에 따라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 모습을 본 허원화의 눈이 부릅떠졌다.
-쑤욱, 퍽!
진수는 성창을 뽑은 뒤 즉시 그의 목을 쳤다.
눈을 감지도 못하고 머리가 떨어져버린 허원화.
아이러니하게도 도사의 죽음으로 인해 강시들은 눈을 감을 수 있었다.
‘허원화는 계약자가 아니었군.’
-제천대성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제천대성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도사의 누런 도복이 붉게 물들 뿐 그의 시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짧게 혀를 차는 진수.
마음속에 가책 따위는 전혀 없었다.
허원화가 다룬 강시들은 태생부터 몬스터가 아니다.
하데스의 지식과 [사신의 감각]이 보통의 사람으로 만든 언데드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인간을 죽여 강제로 부리는 자, 몬스터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지금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마찬가지였다.
“허형...! 네 이놈!”
진수가 허원화를 처치하는 광경을 주해응이 발견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노를 터트린다.
그는 평천에게 향하던 힘을 모두 돌려 진수를 압박하려 했다.
그 순간 굳어지는 몸.
진수가 [석화의 시선]을 날린 것이다.
완전히 돌로 변하지는 않았지만 불의의 습격에 일시적으로 몸이 굳었다.
“나와의 승부에서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는 없을 텐데?”
평천이 두 뿔을 앞세워 달려들었다.
마비가 풀린 주해응이 뒤늦게 반발력을 만들어 밀어냈지만 이미 평천의 뿔에 한쪽 옆구리가 찢겨진 뒤였다.
“크윽...! 평천 네 녀석을 우선 무릎 꿇려야겠구나...!”
굳은 결심이 섰는지 주해응의 온몸에서 마력이 들끓기 시작했다.
평천도 근육이 꿈틀대고 핏줄이 도드라진다.
서로 전력으로 힘 대결에 돌입한 것이다.
공간이 일그러져 보일 정도로 큰 압력이 한 지점으로 몰아친다.
비단결 같던 평천의 가죽이 짓눌려 찢어졌다.
유려하게 뻗은 뿔이 조금씩 뒤틀린다.
이를 어찌나 강하게 악물었는지 잇몸이 뭉개지며 피가 흘러 나왔다.
-콰드드득...!
그렇다고 주해응이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평천이 압력 자체를 찢어버리려는 듯 두 손을 뻗어 움켜쥐자 그의 얼굴이 대춧빛처럼 달아올랐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얼굴이 붉다 못해 점점 거무죽죽해졌다.
둘의 힘 싸움이 고조되어 가는데, 주해응의 위쪽 천장에서 진수가 뚝 떨어졌다.
-뿌우우우!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전장의 뿔나팔].
주해응의 인장 반지의 능력 중 하나인 소리를 내는 기술의 강화가 적용되었다.
추가로, 주해응에게 진수의 입에서 나온 [전장의 뿔나팔] 소리가 다시 한 번 전달된다.
이중으로 타격을 가한 셈이었다.
“끄아아악!”
온 마력을 쏟는 순간 정신적인 타격을 받자 그의 마력이 폭주했다.
-우둑, 우두둑!
주해응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고, 평천의 온몸에선 뼈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장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잡고 거칠게 꺾어버리는 진수.
주해응은 목뼈가 부러지며 그대로 절명했다.
“커헉, 헉...!”
평천은 그 모습을 보고 진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부들부들 떨리는 두 다리로 보아, 조금 전 주해응의 마력 폭주로 인해 다리뼈가 부러진 상태인 듯했다.
강력한 근육으로 뼈를 지탱하며 겨우 걷고 있는 상황.
표정은 고통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굴종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기개가 대단하네.’
진수는 마력회로가 새겨진 방어구를 소환해 착용했다.
마력을 돌려 신체 강화를 한 뒤 양손 망치를 휘둘러 평천의 정수리를 정확히 내리쳤다.
더 고통을 주지 않고 한 번에 처치하기 위함이었다.
-쩌엉!
쇠와 뼈가 부딪혔는데 마치 범종을 치는 듯 커다란 소리가 났다.
여전히 부리부리한 눈으로 진수를 응시하는 평천.
진수는 망치를 다시 치켜들었다.
-평천대성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평천대성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하지만 재차 공격할 필요는 없었다.
평천은 강인한 눈빛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전이되었으니까.
“오, 오라버님!”
주선생이 그 모습을 보고는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이미 반쯤 정신을 놓은 것처럼 무작정 달려든다.
그녀는 진수가 들고 있는 망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정확히는 망치 머리에 들어간 요철을 향했다.
음습한 마력이 쏟아져 나와 요철로 스며든다.
마력은 망치 손잡이를 타고 진수에게로 흘러들어왔다.
-팅-!
주선생과 이어진 마력이 그의 머리에 도달하자 파동을 일으키며 튕겨져 나갔다.
‘요철을 이용해서 내 정신에 침투하려고 했나본데, [특급 정신 보호]는 못 뚫지.’
“윽!”
마력 반발에 주선생이 순간적으로 무력화됐다.
진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분열]을 이용해 분신을 만들어 그녀에게 집어던졌다.
가까이 날아가자마자 바로 네일건을 소환한 뒤 빛의 성창을 장전하여 발사한다.
-철컥!
빛줄기가 인간 몸과 거미 몸을 동시에 관통했다.
진정한 본체가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인면지주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인면지주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주선생이 사라지자 그녀가 공간에 둘러놓은 끈적한 마력도 사라졌다.
하급 요괴들을 지탱하고 있던 힘이 없어지며 하나둘씩 소환이 해제되었다.
소환문을 통해 요괴들이 대거 사라지자 전춘성이 비틀거렸다.
“하, 하하. 살았다...!”
요괴들이 사라지자 전춘성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요괴들의 속에서 살았다는 데에 안심한 것이다.
-퍽!
“어?”
빠르게 회전하는 광석이 전춘성에게 날아와 박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
그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다.
거기엔 진수가 웬 장갑을 낀 채로 손을 뻗고 있었다.
-계약자 [전춘성] 차원 전이 성공.
-특수임무 달성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계약자의 핵심 기술 중 하나
계약자는 바로 전춘성이었다.
요괴 소환의 주체.
다른 차원에서 요괴를 불러낸 그는 스스로가 다른 차원으로 전이되었다.
그리고 그의 기술을 받은 진수는 기묘한 체험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조상님이...
-네게 힘을 주겠다.... 내 손을 잡아라.
-날 꺼내줘! 뭐든 할게!
-도움이 필요하지 않나?
.
.
.
임무 달성으로 전춘성의 기술을 받음과 동시에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다.
그의 주변에서 수많은 존재들이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존재들.
진수는 그 중 가장 강한 기운을 내뿜는 존재에게 손을 뻗었다.
-퉁!
하지만 그의 손은 무언가에 가로막혀 튕겨져 나왔다.
그와 함께 새로운 기술의 사용법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용하기에 따라서 초월적인 힘을 낼 수도 있는 기술.
하지만 큰 제약이 있었다.
바로 단독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
시전자와 연결된 존재들의 능력을 몸에 받아들여서 힘을 빌리는 기술이었다.
상태창을 열어 기술 목록을 확인해보았다.
‘[빙의]라....’
기술 목록에 새로 나타난 기술명이다.
‘핵심 기술이라고 하길래 요괴 소환 같은 거라도 받는 줄 알았는데....’
진수는 상당히 실망했다.
그가 알고 있기로 [빙의]를 제대로 쓰기는 굉장히 복잡했다.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특성이나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에게 흔쾌히 힘을 빌려줄 존재도 찾아야 된다.
‘꽝...이라고 할 수 있겠네. 쯧,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여기 정리 좀 되면 조민준씨 찾아가봐야겠다.’
기술에 광적으로 빠져있는 조민준이라면 어떤 꼼수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전화벨이 울리며 상념을 걷어낸다.
전화기 액정을 확인한 진수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아, 오셨어요? 이 건물 주변에 쳐져있는 막 걷히면 들어오세요.”
짧은 통화를 마친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전춘성과 허원화가 함께 만든 부적 기둥.
진수는 기둥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RD의 인물들은 긴장하는 눈치로 움찔거렸다.
주해응부터 전춘성까지 인간 간부들을 죽이는 걸 봤으니 두려울 만도 했다.
“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상관하지 않고 부적 기둥에 손을 얹는다.
원시적인 주술 지식과 마력회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 내용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냥 부수면 되겠네.’
진수는 [차원의 틈]에서 전기톱을 꺼냈다.
톱날에 진은이 섞여있기에 주술을 더욱 쉽게 파괴해줄 것이다.
-위이이잉!
전기톱이 요란하게 움직이자 이내 기둥이 갈가리 찢어졌다.
곧 RD 본사 건물을 에워싸고 있던 검은 막이 흩어졌다.
뚫린 벽을 통해 공간 결계가 사라졌음을 알아차린 자들이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무미건조하게 지켜보는 진수.
그냥 보내줄 뿐 아니라 장비들을 [차원의 틈]에 집어넣고 [유체화]를 사용해서 빠르게 건물 아래로 내려갔다.
-스윽, 스윽
바닥을 뚫으며 순식간에 지하 창고까지 내려왔다.
그는 창고 구석진 곳에 쌓여있는 상자를 열었다.
비닐에 포장이 되어있음에도 후각을 자극하는 달콤한 향내.
지금껏 중국에서 운반해온 블루 오아시스들이었다.
진수는 파란 가루가 든 뭉치들을 [차원의 틈]에 집어넣었다.
‘RD 놈들 잡아들일 증거는 필요하니까 좀 남겨놓긴 해야겠지.’
그는 대략 10% 정도를 남기고 모조리 챙겼다.
창고 구석에 분신을 하나 만들어둔 뒤 밖으로 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모습으로 1층으로 올라간다.
“아, 왜 이러심까?”
“내 아무것도 안 했소!”
1층은 또 다른 난장판이 펼쳐져 있었다.
꼭대기 층에서 쏟아져 내려온 인물들이 갑자기 쳐들어온 사람들에게 포박되고 있다.
진수는 그들 사이에서 한 키 큰 남성을 발견했다.
박철준 수사관이었다.
“아, 수사관님.”
가볍게 목례하며 다가가자 그도 고개를 끄덕인다.
“김진수 헌터, 약은 어디에 있습니까?”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묻는다.
예전에 한 차례 허탕을 쳐본 경험이 있기에 그럴 것이다.
“아, 지하에 있는데요. 일단은 RD 사람들이 다 내려온 건 아닌 것 같으니까 그 사람들 잡아들이고 찾으러 가시죠. 참, 여기 결계 같은 거 없어지자마자 나온 헌터들 있죠?”
진수는 그가 대피시킨 헌터들을 떠올렸다.
“예, 여섯 명이 바로 나오더군요.”
“그 사람들 제외하곤 다 RD 관계자라고 보시면 되겠네요.”
10분 정도 흐르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박철준은 일부는 건물 주변을 통제하고 일부는 건물 내부를 수색하라 지시했다.
그리고 블루 오아시스를 챙길 부하 둘을 데리고 진수와 함께 지하 창고로 향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김진수 헌터 메시지를 받고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뻔 했습니다.”
지하로 향하는데 박철준이 말했다.
제천이 주해응의 집무실에서 날뛰기 시작할 때 보냈던 메시지가 바로 박철준에게 오라는 연락이었다.
지속적으로 무법지대를 오가며 연락을 취해두었기에 긴급한 요청에도 바로 인력을 투입할 수 있었다.
“저도 갑자기 일이 이렇게 진행될 줄은 몰랐네요. 그래도 수사관님이 워낙 빠르게 대응해주셔서 잘 해결된 것 같아요.”
“저보다는 김진수 헌터의 공이 크죠. RD 내부에 침투해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약이 국내에 풀렸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을 뻔 했습니다. RD는 사람들의 고통을 빨아먹고 큰돈을 벌었을 거고요.”
박철준 수사관이 정말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창고 앞에 도착했다.
박철준이 데려온 부하들이 창고 문을 뜯어낸다.
진수는 한 발짝 물러서 [분열]을 해제했다.
다행히 그 사이에 아무도 창고에 들어오지 않았다.
-텅!
두터운 철문이 해체되어 열렸다.
진수는 앞장서서 들어가 블루 오아시스가 담긴 상자를 가리켰다.
“조심하세요. 포장이 되어 있어도 농축된 제형이라서 향이 강하니까요. 호흡을 참으시거나 적어도 코를 막고 열어보셔야 될 거예요.”
그의 조언대로 코를 막고 내용물을 확인한다.
상자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그들.
진수는 박철준 수사관에게 쭉 확인해보다 문제가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하고 창고를 벗어났다.
‘나는 더 챙길 게 남았지.’
다시 RD 건물 위층으로 올라간다.
그동안 운송로 구축 작업을 다녀와서 보고하러 갔던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 안에는 온갖 자료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여러 운송로들에서 주의해야 할 부분.
경로에 따라서 필요한 헌터의 수준.
소요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등의 내용들이다.
그 외에도 사무 처리 매뉴얼 따위도 눈에 보이는 대로 챙겼다.
‘이제 내 사업도 시작해야 되니까.’
이런 운영 경험에서 나온 자료들은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덕분에 상상 이상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 * *
진수는 RD 본사에서 얻은 자료들을 유재찬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사무 처리를 담당해주고 있으니 진수 자신이 내용을 파악하는 것보다 효율적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더 급한 일이 있었다.
“도깨비! 오랜만에 보는 거 같네요. 하긴 평생 새로운 기술이 안 생기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럴 수 있죠. 오늘은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예요?”
조민준이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
진수가 방문할 땐 항상 그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었다.
물론 가끔은 귀찮은 일을 시키기도 했지만 지적 갈증을 해결해주는 값으로 그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혹시 [빙의] 기술도 잘 아세요?”
진수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조민준의 표정은 예상보다 복잡했다.
“[빙의]...요? [빙의]를 얻은 거예요?”
온갖 기술에 대한 정보를 섭렵한 그였지만 [빙의]는 조금 결이 다른 기술이었다.
“혹시 [접신]이나 [차력], 무슨무슨 신의 축복이나 가호 이런 기술, 특성 같은 거 갖고 있어요?”
‘제우스가 [뇌신의 축복]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내 건 아니지.’
진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음... 그러면 [빙의]를 쓰기가 어려운데....”
조민준도 특별한 방법을 알고 있지는 않았나보다.
그나마 [신의 축복], [신의 가호] 계열을 가지고 있다면 [빙의]를 써먹을 수 있다는 단서는 얻었다.
진수는 꽤 실망을 했지만 애써 미소를 지었다.
조민준을 찾은 것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으니 큰 손해는 아니다.
“도깨비. 이건 진짜 흔치 않은 경우긴 한데요....”
진수의 표정을 본 조민준이 자신감 없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원래 정확한 정보를 기반으로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그였기에 미신과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꺼려졌다.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고, 혹시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는 내용.
뜸을 들이던 그는 이야기를 이었다.
“가끔씩 [빙의]를 얻은 각성자들 중에서... 강력한 조상신이 있어서 그 힘을 빌려오는 경우도 있다는... 루머가 있거든요.”
온갖 최첨단 장비가 즐비한 실험실에서 완전한 연구자의 복장을 갖춘 사람이 어렵게 꺼낸 말이, 조상신이라니.
진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마치 길을 묻는 척 하다가 기운이 맑다는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그래...서요...?”
“그런 소문도 있고 하니까... 한 번 미친 척 하고 [빙의]를 써보라는 거죠. 하하.... 뭐 손해 볼 건 없지 않겠어요?”
진수가 [빙의] 기술을 익히면서 습득한 사용 방법에 따르면, 힘을 빌릴 주체가 없을 때 [빙의]를 사용하면 영혼이 무방비 상태가 된다고 했다.
RD 본사에서 시험 삼아서라도 기술을 바로 사용해보지 않았던 이유다.
그는 잠시 조민준을 응시했다.
그저 기술에 대한 열망밖에 읽을 수 없는 눈빛.
‘기술밖에 모르는 바보지....’
진수는 그의 말대로 [빙의]를 일단 사용해보기로 했다.
혹시 모를 어떤 존재가 얻어 걸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는 마력을 끌어올려 [빙의]의 사용 방법대로 움직여보았다.
처음 사용해보는 기술이다 보니 마력 흐름이 어색하다.
특히 즉각적으로 마력이 기능으로 전환되는 게 아닌,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미지의 존재에게 마력을 보내는 것이기에 더욱 어려웠다.
-스으윽
더욱 강하게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은 채로 마력을 퍼트린다.
그 순간, 기이한 감각이 느껴졌다.
다수의 존재들이 곁에 있는 것 같은 느낌.
[빙의]의 운용법대로 마력을 움직이니 그 느낌이 더욱 강해졌다.
진수는 그 감각을 파헤쳤다.
마력이 이끄는 길을 따라 정신이 여행을 떠나는 듯하다.
그리고, 그 끝에 다다르니 수십에 이르는 존재들이 진수를 맞이했다.
그는 그 중에 가장 친숙한 존재에게 손을 내밀었다.
-스으으...
귀신같은 존재가 진수의 몸 위로 나타났다.
희끗한 모습이 전춘성이 싸울 때의 모습과 비슷하다.
대신 진수에게 [빙의] 된 존재는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체구는 작지만 커다란 검을 들고 있었다.
“후워어어억!”
진수의 몸 위로 희끗하게 겹쳐진 존재가 [워 크라이]를 사용하며 포효한다.
그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조민준.
더듬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도, 도깨비! 혹시 조상님이... 오크셨어요? 아니, 이건 고블린인 거 같기도 하고....”
진수는 예상치 못한 패드립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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