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nel 10

내니까 그나마 괜찮아.”
그는 부적을 품에 넣으며 말했다.
‘확실히, 귀신 계통이니까 괜찮겠지.’
천장 위에서 [유체화]를 써 방 안을 살피던 작은 진수.
황계문이 적당히 얼버무린 방이 괴물들에게 부적을 나눠주는 곳임을 확인한 뒤에 [분열]을 해제했다.
‘부천이라고 그랬지...? 근데 구성원들도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자리를 잡았을까....’
분신의 기억을 공유 받은 진수는 의아해하며 던전 정보를 확인하는 어플을 켜서 부천에 발생한 던전을 검색해봤다.
세 군데가 나왔는데 이미 던전 공략 권한이 팔린 곳은 한 곳뿐이었다.
‘생각보다 임무를 빨리 깰 수 있겠어. 그것도 양질의 몬스터로.’
분신으로 봤을 때, [사신의 감각]은 얼굴이 흙빛인 자가 언데드 몬스터라고 알려주었다.
어떤 종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앞선 경험에 따르면 꽤나 강한 녀석일 것이다.
“이 정도면 저희 조직 구성은 어느 정도 알려드린 것 같네요. 어떻게, 오늘부터 던전 활동을 시작하실 건가요?”
진수에게 RD 본사의 이곳저곳을 안내한 황계문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활동할게요. 하하, 오늘 설명 들은 것들 때문에 정신이 조금 없네요.”
적당히 둘러댄 진수.
황계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귀가하시는 건가요?”
“아, 예.”
“그럼 배웅해드릴게요. 내일부터 던전 활동 연락이 가도록 처리는 해놓겠습니다.”
황계문이 앞장서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의 뒤를 따라 승강기에 들어선 진수는 지하 훈련실에서 전이시킨 몬스터 네 마리의 이름을 고민해보았다.
‘귀신이라... 이름을 그러면....’
호랑이 사체에 들어있던 창귀는 토시오.
황동 인형을 움직이던 시귀는 에나벨.
독연을 뿌리며 해골에 빙의했던 역귀는 사다코.
시체에 들어있던 반인반묘 모습의 몬스터 묘귀는 홍콩할매.
네 마리는 모두 망자 군단 무리에 합류했다.
‘나머지 하나도 오늘 채워줄 테니 딱 기다려라.’
“흐흐흐.”
새로운 기술을 받을 생각에 흐뭇해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진수.
그런데 문 앞에서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다.
“아!”
진수가 비록 잡념에 빠져있었다고 해도 [야성] 특성을 가지고 있다.
복잡한 전투 중에 쏟아지는 공격도 피할 수 있는 능력.
상대방이 고의성을 지니지 않고선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과장되게 외치는 소리.
진수는 자신과 부딪힌 자를 보았다.
“눈을 어디다가 두고 다니는 거야?”
원숭이를 닮은 사내가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로 서있었다.
“가국 형님!”
황계문이 원숭이를 향해 외친다.
“뭐야, 이 냄새 지독한 놈은?”
“오늘 면접 봤던 김진수 헌터입니다.”
황계문의 말에 가국이라 불린 자가 진수를 훑어봤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다.
“역하구만. 면접에 안 들어가길 잘 했어. 코가 떨어질 뻔 했네.”
가국은 코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회의실 문 앞에서 면접자가 남자라는 말에 자리를 피했던 녀석인 것 같았다.
“원숭이! 왜 괜히 시비야? 나보다 냄새도 못 맡는 게.”
그의 뒤쪽에 서있던 자가 타박을 한다.
그는 강아지상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야구자와는 달리 개의 느낌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이 개새끼가? 너도 저 더러운 냄새 때문에 머리 아플 거 아니야. 대신 말을 해줘도 난리야?”
“그래도 그따위로 말하는 게 예의는 아니지. 이제 한 솥 밥 먹을 사인데.”
“한 솥 밥은, 개밥이나 처먹어라.”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가국.
둘은 이제 진수는 신경도 안 쓰고 으르렁거렸다.
“가국 형님, 알유 형님. 왜들 이러십니까. 김진수 헌터 곤란하게.”
황계문이 그들 사이로 들어가 중재를 하려 했다.
다만 그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었다.
‘여기 아주 노다지구나? 전이시킬 놈들이 쏟아지네. 일단 다음 타겟은 골랐다.’
진수는 전혀 곤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울 지경.
“그러게 누가 저런 엿 같은 거 입고 다니래? 저 들고 있는 가방도 좀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킁, 킁
가국이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아, 진은 때문에 이러는구나.’
진수는 가국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요괴들에게 상극인 진은을 몸에 두르고 다니니 아무래도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공간압축 주머니 속 전기톱에 섞인 진은의 냄새도 약간이나마 맡는 듯했다.
‘공간압축 주머니에서 냄새가 안 빠져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예민한 부분이라서 감지해낸 건가?’
진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성능 좋은 거 입고 다니는 거지. 가죽에 가려져서 별 영향도 없는데.... 여자 헌터가 입고 다녔으면 아무 말도 안 할 거잖아?”
“크흐흐! 당연한 소릴. 오히려 좋지.”
가국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것 봐. 쓸데없이 시비 걸고 다니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 그러다 또 평천 형님한테 얻어맞지 말고.”
“끄응...! 그 얘긴 하지 마라.”
알유가 평천의 이름을 꺼내자 가국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아무래도 한 번 된통 혼이 난 적 있는 모양이었다.
“나가던 길이죠?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요. 원래 지랄 맞은 놈이라.”
이어 진수에게 말을 거는 알유.
그는 굉장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진수는 그에게 가볍게 목례한 뒤에 밖으로 나왔다.
“죄송합니다. 가국 형님이 조금 예민한 편이셔서....”
사과를 하는 황계문.
진수는 괜찮다는 듯 웃어보였다.
“뭐, 이제 외부에서 주로 활동을 할 테니까 자주 마주치진 않겠죠. 혹시 모르니까... 저 분은 주로 어디서 활동하세요?”
아주 순수한 목적으로, 궁금해서 물어본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물론 그건 진수의 생각일 뿐, 대놓고 어색한 얼굴이었다.
‘아... 역시 조금 기분이 나빴나 보네. 피해서 다니려나보다.’
황계문은 모르는 척 가국이 주로 활동하는 범위를 알려주었다.
RD의 인간들 사이에서도 가국은 별로 평이 좋지 않다.
워낙 변덕이 심하고 고약한 성격이었으니까.
진수가 불쾌하게 느끼는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건방진 원숭이 새끼. 운송로 뚫는 일에 투입될 예정이란 말이지? 운송로 쪽 활동에 참여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
황계문의 짐작과는 달리 진수는 가국과 일부러 마주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게 RD 소속으로 보게 될지, 다른 가면을 쓴 채로 볼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예상 밖의 일로 시간을 뺏었네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인사를 받고 RD 본사를 떠난 진수.
그가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부천이었다.
* * *
던전이 생긴 곳은 부천시에 있는 공원이었다.
부천장미원이라는 이곳은 한 때 장미들이 아름답게 꽃피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끔 식물형 몬스터가 나타나기도 하면서 버려진 상태였다.
장미뿐만 아니라 여러 식물들이 제멋대로 자라나 공원이라기보다는 작은 숲처럼 느껴질 정도의 모습이 되었다.
‘이 안쪽에 던전이 생겼다 이거지? 기회가 닿으면 언데드 몬스터 말고도 추가로 전이자를 챙길 수도 있겠어.’
진수는 공간압축 주머니에서 호랑이 가면을 꺼내 썼다.
던전의 위치는 이미 파악하고 왔다.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는 그.
RD에서 클리어하는 던전이기 때문에 대기하고 있는 일당 헌터들도 없었다.
던전 안에서만 조심하면 되는 것이다.
‘던전을 얼마나 깼으려나?’
[유체화]를 사용해 던전 안으로 들어간 진수.
RD의 공략조를 찾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
[사신의 감각]에 생명력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느껴지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이렇게 대놓고 생명력을 빨아들이는데 아무런 반발이 없다고?’
진수는 보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다수의 사람들에게서 생명력이 빠져나와 한 곳에 모이는 게 느껴졌으니까.
-스르륵
던전 벽을 통과해 슬쩍 벽 너머를 살핀 그는 상황이 상당히 묘하다고 생각했다.
흙빛 얼굴을 한 자는 뒤에 쭈그려 앉아서 한손은 바닥에 짚고 나머지 손으론 담배를 피고 있었다.
나머지 등급이 낮은 헌터들은 앞에 나서서 싸우고 있는 상황.
진수가 잡으러 온 자를 중심으로 바닥에 붉은 기운이 맴돌고 있는데 아마도 다른 이들을 약화시키고 생명력을 빼앗는 기술로 보였다.
‘문제는 적아구분 없이 자기를 제외한 모두에게서 생명력을 뽑아낸다는 거지.’
놈과 함께 싸우고 있는 헌터들은 몬스터들과 싸우면서 동시에 생명력을 도둑질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에 당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
‘상당히 더러운 놈이네. 자칫하다간 다른 헌터들한테 공격을 받을 수도 있겠어.’
자신들이 공격받고 있다는 걸 모르니 RD의 몬스터를 습격하면 분명 진수를 적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진수는 전투를 벌이고 있는 광경을 쭉 지켜봤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굳이 골치 아픈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나...?’
* * *
RD에 들어와 던전을 돌고 있는 헌터들.
그들은 희한하게 오늘 함께 온 RD의 고등급 헌터와 같이 싸우면 부쩍 피곤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몬스터들에게 광범위 디버프를 걸어주어 전투를 원활하게 이끌어주었기에 큰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
“드라이어드를 이렇게 여유롭게 잡다니, 신기하네.”
헌터들 중 한 명이 나무로 된 인간형 몬스터를 상대하며 입을 열었다.
원래대로면 C급 헌터들이 붙어야 되는 놈들이다.
그런데 E급 헌터인 자신이 상대하고 있으니 흥분이 될 법도 했다.
“저 뒤에 양반 덕분이죠 뭐.”
“그러게요. 이번 던전도 큰 피해 없이 거의 다 클리어 했네.”
드라이어드를 거의 다 처치한 그들은 긴장감 없이 움직였다.
뒤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헌터가 디버프를 걸면 몬스터들은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마치 땅이 발을 붙잡는 것처럼.
도망치지도, 다가오지도 못하는 몬스터를 처치하는 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위이이잉...
“이제 저기 두 마리만 처치하면.... 음?”
여유롭게 무기를 흔들고 있던 한 헌터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 안 들려요?”
-위이이잉...!
멀리서부터 던전 벽을 타고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
그 소리는 그들이 인지한 순간부터 엄청난 속도로 커지고 있었다.
-위이이잉!
-쑤욱!
흙빛 얼굴의 헌터가 앉아있는 뒤쪽 벽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대로 빠르게 짓쳐든 그것은 세차게 움직이는 전기톱으로 흙빛 헌터의 등을 꿰뚫었다.
“으아아아아!”
힘껏 기합을 지르며 뛰쳐나가는 호랑이 가면을 쓴 괴한.
“커헉!”
RD의 고등급 헌터를 전기톱으로 꿰뚫었음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그는 쭉 달려 나가 드라이어드까지 한 마리 전기톱에 꽂은 채로 소릴 지르며 사라졌다.
“뭐야?”
“뭐였지?”
“이게 뭔...?”
남아있는 헌터들은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서로 어처구니없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차원의 틈
-콰드드득!
부천장미원 던전의 끝.
넝쿨들이 벽면을 채운 동굴처럼 보이는 공간에 기묘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조잡한 호랑이 가면을 쓴 인물이 전기톱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 전기톱에는 세 사람이 꿰뚫려 있었다.
나무로 된 인간이 둘, 흙으로 된 사람이 하나.
“끄르르르...!”
“끼익!”
“그어어...!”
던전에서 나오는 식물 몬스터인 드라이어드와 보스 몬스터 엘더 드라이어드.
그리고 RD 소속의 괴물인 흙빛 얼굴을 한 헌터였다.
이제는 온몸이 흙으로 이루어진 몬스터로 변해있었다.
세 마리 모두 공교롭게도 생명력이 질긴 종류였기에 나란히 복부가 관통되어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드드득!
진수는 더욱 빠르게 톱날을 돌려봤지만 놈들은 버둥거리기만 할 뿐, 죽지는 않았다.
본의 아니게 세 녀석들이 서로 강제로 스킨십을 하게 된 꼴이었다.
“그어어어....”
어느새 붙여놓았던 부적의 힘이 다했는지 흙 인간은 품속에서 새 부적을 꺼내려 했다.
아마 진수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화르륵!
하지만 놈의 시도는 이내 무위로 돌아갔다.
톱날에서 하얀 불길이 치솟으며 순식간에 세 몬스터의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백년 도깨비불]의 화려한 데뷔.
에너지 효율을 높여주는 전기톱과의 시너지로 더욱 강력한 위력을 보여줬다.
-건예자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건예자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드라이어드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드라이어드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엘더 드라이어드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엘더 드라이어드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갑작스럽게 등을 관통당한 채로 드라이어드와 부비적거리던 건예자.
영문도 모르고 진수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차원 전이를 당해버렸다.
그가 있던 자리엔 다시 붙이려던 부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휴, 이놈이 긴장감 없이 있어서 다행이야.”
진수는 바닥에 떨어진 부적을 주우며 말했다.
흙에 귀신이 빙의한 형태였던 녀석은 그냥 상대하려고 했으면 상당히 까다로웠을 것이다.
특히 주변의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약화를 걸기 때문에 몸으로 부딪히며 싸우는 그에게는 쉽지 않은 전투 방식이었다.
거기에 어지간한 물리 공격엔 죽지도 않는 생명력까지.
‘어차피 이놈이 다른 헌터들을 속이고 있는 상황이라서 야구자 때처럼 다른 헌터들이 적대시하는 분위기를 만들긴 힘들지.’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암살이었다.
정석적인 방식의 암살은 아니지만.
‘누가 죽였는지만 모르면 암살 아니겠어? 기왕 조지는 거 보스까지 전이시킬 수 있었고.’
-임무 달성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헬 그림리퍼 [하데스]의 기술 중 하나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임무 목표만 본 덕분에 손쉽게 해결이 됐다.
“이쪽인 거 같은데...?”
“근데 드라이어드 하나도 겨우 잡는데 보스는 어떡하죠?”
“RD 쪽 헌터가 살아있길 바래야지 뭐.”
멀리서부터 헌터들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C급 위험도인 드라이어드 던전이지만 그들은 E~D급 헌터들.
RD의 몬스터를 대동하여 던전을 공략하고 있었기에 보스 몬스터에 대한 고민을 하는 듯 보였다.
진수가 헌터인 척 하던 건예자를 전이시켰으니 그들로서는 보스 몬스터가 아예 사라진 게 다행인 일이었다.
진수는 그들이 다가오기 전에 [투명화]와 [유체화]를 사용해 던전을 빠져나갔다.
‘우선 RD에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이거나 좀 알아봐야겠다.’
그의 손에는 사용하지 않은 깨끗한 상태의 부적이 들려 있었다.
* * *
“도깨비! 오랜만이네요. 요즘엔 뭐 없어요? 새로운 기술이라던지. 달라진 기술이라던지. 뭐 그런 거. 흐흐흐.”
진수가 방문한 곳은 바로 기술 연구자 조민준의 개인 연구실이었다.
지난번 헌터 협회에 방문했을 때 자리를 비운 걸 보고 이번엔 미리 연락을 하고 왔다.
“우선 이거 좀 봐주실래요?”
그는 조민준에게 부적을 내밀었다.
“오호, 중국 헌터들이 가끔 쓰는 물건이네.”
헌터와 몬스터들의 기술을 꿰고 있는 조민준답게 부적을 보자마자 어떤 물건인지 알아봤다.
고이 접혀있는 부적을 조심스럽게 푸는 그.
돌발행동도 서슴지 않는 평소와는 다르게 굉장히 신중한 모습이었다.
-스르륵
완전히 펼친 부적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투명한 유리판 같은 것을 가져와 위에 올려두었다.
“휴우. 이제 됐다.”
“뭘 한 거예요?”
“이 부적은 주변에 있는 몬스터한테 반응을 해요. 사용자가 몬스터거나 부적을 사용할 수 있는 각성자라면 의도대로 움직이겠지만, 저처럼 비각성자가 잘못 만지면 아무 몬스터에게나 날아가 붙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마력 처리가 된 수정 같은 걸로 덮어둬야 자세히 살필 수 있어요.”
[도깨비불] 실험을 위해서 용아병도 아무렇지 않게 꺼내오는 연구실이다.
분명 그보다 위험한 몬스터들도 데리고 있을 게 뻔하니 부적을 조심스럽게 다룬 것이 이해가 갔다.
“흐음, 이건 어디서 났어요?”
“말을 하는 몬스터가 가지고 있더라고요.”
“몬스터가 말을요? 물론 가끔씩 뛰어난 지적능력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들도 있긴 하지만... 드문 일인데....”
조민준이 특이하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 부적이 말을 하게 해준 거 아니에요?”
“그려진 걸 보면 언어랑 관련된 효과도 분명히 있거든요. 그런데 이건 언어 능력을 향상시켜주는 게 아니라 통역을 해주는 기능이에요.”
그는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돋보기를 들어 부적을 좀 더 살폈다.
평범하게 생긴 물건이었는데 가만히 보니 마력이 느껴졌다.
잡동사니처럼 굴러다니던 것이 실은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흐음.... 다시 확인을 해봐도 못하던 말을 해주게 하는 기능은 안 보이는데.... 다만 특이한 점이, 공간이나 차원 계통의 기술이 적용된 것처럼 보이네요. 이건 흥미롭네. 워낙 보기 드문 쪽이라 저도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아, 그걸 붙이니까 몬스터가 말을 할 뿐만 아니라 지능도 좀 올라간 것 같았어요.”
“지능이요? 신기하네.... 얼마 전에 헌범기관에서 부탁해가지고 비슷한 부적을 본 적 있었거든요. 아마 같은 사람이 만든 것 같네요. 굉장히 창의적인 방법으로 능력을 활용하고 있어요. 이거 참 재밌네.”
조민준의 얼굴에 흥분감이 드러났다.
“헌범기관에서 가지고 있던 부적은 이미 사용을 해서 일부 내용이 소실된 거였거든요. 근데 이렇게 아주 새 거라면 훨씬 얻을 게 많죠. 오호... 이런 식으로도 쓸 수가 있단 말이지?”
어느새 그는 부적에 거의 얼굴을 파묻을 기세로 살펴보고 있었다.
‘음, 지난번에 자리를 비운 게 기관에 가있었던 건가?’
가만히 부적 관찰에 탐닉하는 조민준을 본다.
그는 계속해서 무언가 중얼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모양이면 무언가를 불러오는 것 같은데... 희한하게 그 대상이 지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지. 차원을 넘어서 정령이나 언데드를 소환하는 술식이랑도 비슷하고. 아이템 같은 데에서 보이는 마법진이랑 유사점도 보이네.... 여긴 왜 이렇게 쓴 거지?”
‘차원...?’
조민준의 혼잣말에서 차원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들려왔다.
몬스터들과 차원, 그리고 자신의 특성인 [차원 전이].
요 근래에 서로 연관성이 많다고 느끼는 일이 자주 생기는 것 같았다.
‘혹시 또 모르지. 다른 차원에서 [차원 전이] 특성을 가진 인간이 이쪽으로 몬스터를 보내는 게 균열이나 던전으로 나타나는 건지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진수는 이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그 양이 너무 많았다.
전 세계에 쏟아지는 몬스터는 밤낮도 없고 수도 엄청나다.
자연재해 같은 거라고밖에 설명을 할 수가 없는 규모.
그가 잠시 상상했던 것처럼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이건 장비들을 더 갖고 와서 살펴봐야겠네. 뭐 또 새로운 기술 같은 건 없어요?”
진수가 잡념에 빠진 사이 조민준은 부적을 충분히 살펴본 듯했다.
“네? 아... 부적 쪽은 어때요?”
“일단 아까 말한 대로 통역 기능이 있고, 차원 너머에서 무언가를 불러들이는 효과가 있는 걸로 보여요. 지금 장비가 좀 부실해서 많은 정보를 얻지는 못했어요.”
조민준이 잠시 부적을 살펴보고 알아낸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부적 효과가 지속되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부적에 담긴 마력이 다 소모되면 기능이 사라질 거예요. 아이템 같은 종류는 아니라서, 만들면서 담은 마력을 더 충전하거나 하지는 못 하고요. 그리고 부적이 작동하고 있을 때 마력을 흘려보내면 효과가 폭주하게 될 거 같거든요. 이건 한 번 테스트를 해봐야 될 거 같네요.”
많은 정보를 얻지 못했다는 말과는 달리 그는 짧은 시간에 부적에 대해 상당히 많은 걸 알아냈다.
특히 부적을 폭주시키는 것은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충분히 많은 걸 알려주신 거죠. 하하. 감사합니다.”
“고마우면 빨리 새 기술 가져와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이마를 감싸 쥐며 말하는 조민준.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기술이 생겼는데요.”
그의 모습에 진수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조민준의 눈이 순식간에 초롱초롱해졌다.
“무슨 기술인데요? 이번에도 몬스터들이 쓰는 건가요? 어떤 종류죠?”
“[워 크라이]....”
“아, [워 크라이]....”
시무룩해지는 조민준.
그에게 [워 크라이]는 전혀 흥미로운 기술이 아니었다.
“...랑 [망자의 손길]이라는 기술이에요.”
“와! [망자의 손길]! 그것도 몬스터가 쓰는 기술인데?”
“아 그림리퍼 아시는구나!”
조민준은 조울증이라도 앓는 사람처럼 다이내믹한 감정기복을 보여줬다.
[망자의 손길]은 언데드 몬스터 다섯 마리를 차원 전이시킨 뒤 받은 보상이다.
하데스의 기술인데 안 그래도 이름이 아무래도 꽤 살벌해서 조민준에게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지금 바로 써보세요!”
“네? 그냥 써도 되는 기술인가요?”
당장 보고 싶다는 듯 진수에게 기술을 써달라고 하는 조민준.
이 기술이 어떤 효과를 내는 건지 모르는 진수였기에 순간 머뭇거렸다.
“절 향해서 써도 상관없는 기술이에요. 일단 써 봐요.”
그는 전혀 문제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조민준을 향해 손을 뻗고 마력을 움직인다.
기술을 얻었을 때 사용방법은 이미 본능적으로 익힌 상태였다.
-스으으...!
마력이 음울한 기운으로 치환된다.
묵직하고 끈적한 기운은 이내 조민준을 향해 흘러갔다.
-꽈드득
죽음을 닮은, 축축하지만 달콤한 향에 이끌려 불투명한 손들이 사방에서 솟구쳐 오른다.
조민준을 에워싸는 손들.
마치 지옥으로 끌어당기는 원혼의 모습처럼 보였다.
“아...!”
진수는 [망자의 손길]이 발동된 것을 보고 자신도 한 차례 경험해본 기술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림리퍼와 싸울 때 사체들이 일어나 몸을 옭아매게 만들었던 그 기술이었다.
“[망자의 손길]은 물리력이 대단한 기술은 아니에요. 하지만 대상의 움직임을 가로막는 기술로 상당히 괜찮죠. 특히나 작용하는 매커니즘이 재밌는데, 일종의 사령술로 이 주변에 있는 원혼의 잔재에게 명령을 내리는 방식이에요. 만약에 언데드가 있다면 [망자의 손길]을 쓰면 상대방을 붙잡도록 할 수도 있죠. 꽤나 수준이 높은 기술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망자의 손길]은 활용도가 상당히 높은 기술이었다.
죽음이 많이 일어난 공간에서 그 힘이 더욱 강해지는 특징.
숙련도에 따라서 보다 정교한 컨트롤이 가능하다는 점.
마력을 많이 사용하면 다수를 상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등.
조민준의 설명과 그의 기술 테스트를 거치며 [차원 전이] 임무에 대한 만족도가 더욱 높아졌다.
* * *
-임무 : [새초미 무리]가 녹색 숲을 정복하도록 돕기 !
-보상 : [차원의 틈] 해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수는 임무의 덕을 더욱 톡톡히 보게 됐다.
죽음의 산
“녹색 숲을 정복...?”
RD에 들어가 던전 공략 활동을 시작한 진수.
그동안 자잘한 임무들을 달성하며 능력치와 골드 보상을 받았다.
힘 2, 민첩 4, 체력 2, 내구 1, 마력 2, 골드 10.
바로 직전에 보상을 받은 임무가 보팔 래빗 5마리를 전이시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새초미 무리가 녹색 숲을 정복하게 도우라는 임무를 받게 되었다.
-변종 보팔 래빗 [새초미]가 녹색 숲을 정복해나가는 중, 숨겨진 공간을 발견했습니다. 숨겨진 공간엔 인간들이 의도적으로 봉인해놓은 흔적이 있습니다. 봉인에 의해 숲의 생명체들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새초미]가 봉인을 해제하고 녹색 숲을 오롯이 다스릴 수 있도록 도우십시오.
임무 상세 내용을 살펴보니 또 인간들과 관련된 임무였다.
‘망자의 통로에서는 차원의 축을 뒤틀리게 만들었다더니, 여긴 또 봉인이야? 저쪽의 인간들도 자기네가 사는 곳을 어지간히 들쑤시고 있나보다.’
진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근데 [차원의 틈]은 또 뭐야?”
지금까지의 보상들에서 볼 수 없던 단어다.
뒤에 해금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상점과 같이 새로운 능력인 듯 보였다.
[차원 전이]의 능력은 아직도 다 밝혀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건... 고민을 좀 해봐야겠네. RD 안에서 잠자코 던전 돌던 것도 변화를 좀 줘야겠고.’
근래에 잠자코 RD에서 요청하는 던전들을 돌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이들이 지금 주력하는 것은 세 가지 정도로 보였다.
하나가 돈을 버는 것.
무서운 기세로 서울 주변에 나타나는 던전들을 깨나가고 있었다.
원래도 상당히 자본이 풍족해보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더 많은 돈을 긁어모았다.
수익성이 모호한 던전들까지 자체적으로 뒤처리 헌터들을 운용하니 돈이 되었다.
‘현장 반장님이 요즘 앓는 소릴 자주 하는 걸로 봐선 일당 헌터들 일감이 부족할 정도지.... 정씨 아저씨를 미리 헌터 협회로 빼놔서 다행이야.’
RD도 나름대로 법을 어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하긴 어려웠다.
다만 기존에 일하던 일당 헌터들이 힘들어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기에 마음이 좀 불편했을 뿐.
이들의 두 번째 목표는 데리고 있는 요괴형 몬스터들을 먹이는 것이었다.
주로 던전에서 생명력을 흡수하거나 정기를 빨아먹는 식으로 움직이는 걸로 보였다.
처음에는 무작정 잡아먹는 방식이었는데, 이제는 수법이 점점 교묘해졌다.
헌터들은 체력 능력치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생명력을 흡수해도 큰 티가 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낸 듯했다.
‘그래도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잃으면 헌터라고 해도 수명이 줄어들고 성장이 감소하지. 모기보다 악랄한 놈들이야.’
마지막으로 RD는 다른 도시들과 연결하는 운송로를 뚫는 데에 상당한 노력을 들이고 있었다.
자신들이 데리고 있는 요괴들을 보내기도 하고, 몇몇 거점 삼기 좋은 위치를 지정해 포상금을 걸기도 했다.
“이번 임무 때문에라도 운송로 작업을 한 번 뛰어야겠네.”
진수는 RD의 운송로 계획을 살펴보았다.
춘천시와 수도권을 연결하는 루트.
그 중간에 봉화산을 거쳐 가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봉화산 길은 뚫리지 않았지. 엄청난 놈이 길목을 막고 있으니까....’
그가 노리고 있는 녀석.
봉화산을 수많은 헌터들의 봉분으로 만든 필드 보스가 있었다.
* * *
-드라이어드 [모쿠진]과 엘더 드라이어드 [그룻]이 [새초미 무리] 무리에 합류합니다.
진수가 봉화산 초입에 들어섰을 때,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내용을 확인한 진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오, 어떻게 내 생각을 읽었나? 이 놈들도 콩고물 얻어먹겠다고 따라붙었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는다.
그의 표정과는 달리 주변의 분위기는 상당히 음산했다.
[사신의 감각]에 느껴지는 죽음의 기운이 엄청난 수준.
정말 어마어마한 수의 생명들이 여기서 끝을 맞이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나도 조심해야지. 자칫 잘못하다간 나도 여기에 뼈를 묻을 수 있어.’
진수는 들고 있던 전기톱을 고쳐 잡았다.
언제든 방비할 수 있도록.
-스르륵 스륵
주변을 경계하며 걷고 있는 그의 귀에 조용히 수풀을 헤치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기에 [중급 청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미처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놈인가...?’
-스르륵 스르륵...
진수가 귀를 기울이자 소리가 오히려 작아졌다.
걸음을 멈춘 채 사방으로 시선을 돌린다.
온통 수풀이 우거진 공간.
바람이 불며 나뭇잎들이 흔들리니 시야가 어지럽다.
-꿀꺽
이내 호흡마저 멈췄다.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순간!
무언가가 뒤쪽에서 빠르게 달려드는 것을 느꼈다.
-스앗!
빠르게 몸을 틀며 돌진해온 것을 손으로 잡아챈다.
길쭉한 생명체.
뱀이었다.
[사신의 감각]에 잘 느껴지지 않는 자그마한 생명력.
놈은 삐쩍 곯아서 거의 뼈와 가죽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 깜짝이야. 노릴 거면 다른 작은 짐승을 노리지 하필 골라도... 헉!”
-팍!
생명의 불씨가 꺼지려고 하는 뱀을 놔주려고 하는데, 돌연 흙바닥을 뚫고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진수는 자신도 모르게 그걸 향해 뱀을 집어던졌다.
도끼를 투척하던 습관 때문이었다.
죄책감일까? 날아가는 뱀의 애처로운 눈빛이 그의 시야에 정확히 들어왔다.
잠시 슬로우모션처럼 느껴지는 찰나가 지나가고 현실로 돌아온다.
-콰드득! 뿌득!
땅에서 솟구친 것은 커다란 나무뿌리였다.
그것은 날아오는 뱀을 잡아채서는 휘감은 뒤 생명력을 쪽쪽 뽑아 먹었다.
-팍!
그 광경을 보던 진수의 뒤에서 또 다시 땅을 뚫고 나오는 나무뿌리.
나무뿌리는 살아있는 동물처럼 빠르게 움직여 진수의 다리를 휘감으려 했다.
-스르륵
워낙 빠른 속도였기에 진수는 [유체화]를 사용해 몸을 뺐다.
아니, 빼려고 했다.
하지만 [유체화]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수의 발목은 나무뿌리에 잡혔다.
“엇?”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진수.
그는 그제야 나무뿌리에 사이한 기운이 서려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기운 때문에 [사신의 감각]으로 급습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아... 이런...!”
발목으로 시작해 다리를 감싸며 뻗어온다.
한참 굶은 구렁이처럼 거칠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쿡! 쿡!
나무뿌리 겉면에서는 가느다란 가시가 나와 휘감은 위치에 꽂아 넣는다.
그걸 통해서 생물의 체액과 생명력을 빨아먹는 듯했다.
‘그리고 마비도... 시키는 건가...?’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올라온다.
[상급 독 내성]과 [광전사]가 있음에도 어지러울 정도면 어지간한 헌터들은 잡히는 즉시 죽음을 목도했을 것이다.
진수도 생명력을 뺏기고 투입되는 마비 독액의 양이 늘어나자 점점 몸이 굳어가는 걸 느꼈다.
-파지직!
무릎까지 감싸던 나무뿌리에서 순간 스파크가 튄다.
보호구의 무릎 부분에 있던 진은이 나무뿌리에 씌어있던 기운을 순간적으로 거부하며 걷어낸 것이다.
-스르륵
진수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즉시 [유체화]를 사용해 몸을 빼냈다.
“헉, 헉, 헉...!”
굳어가던 폐를 쥐어짜 숨을 들이킨다.
죽음의 문턱을 넘을 뻔 했다.
-팍!
-스스슷!
그가 나무뿌리로부터 벗어나자 주위에 다수의 나무뿌리들이 나타났다.
개수가 많아지니 조금씩 [사신의 감각]에 놈들이 이어진 본체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위이이잉!
전기톱을 가동시킨 진수.
톱날에 섞인 진은과 맹렬히 돌아가는 톱날의 위압감에 나무뿌리들도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진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발을 떼자마자 방금 서있던 자리에서 뿌리 끝이 슬쩍 올라왔다.
조금만 늦었다면 다시 발목을 잡아챘을 것이다.
‘이제 한 번이라도 잡히면 안 돼...!’
그의 방어구 아래에 진은이 덧대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방금과 같은 기회가 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제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한 번이라도 잡히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콰드득! 푸드드드!
쉼 없이 뛰고 휘두르고 구른다.
절벽에서도, 바닥에서도, 나무 사이에서도 공격이 짓쳐들었다.
마치 산 그 자체와 싸우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가고 있어!’
온통 나무와 풀이 가득하기에 녀석의 본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진수가 스스로 가는 방향이 맞다고 확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녀석의 공격이 좀 더 다채로워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뿌리를 통해서만 가하던 공격이, 어느 순간부터 나뭇가지나 넝쿨 따위의 방법도 섞기 시작했다.
놈의 중심에 다가가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퍽!
옆에서 후려치는 나뭇가지를 전기톱으로 막아낸다.
하지만 워낙에 강력한 힘이었기에 진수는 바닥을 몇 바퀴 굴렀다.
떼굴떼굴 구르던 진수는 이내 멈췄다.
그의 눈 바로 앞에 보이는 해골.
“헉!”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니 해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병장기들과 옷가지 등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는 모습.
죽음의 산이 된 봉화산의 모습이었다.
“쿠워어억!”
육중한 목관악기의 울림이라고 할까.
머리와 심장을 같이 뒤흔드는 괴성이 들려온다.
진수는 그제야 수없이 쌓인 해골들 뒤로 보이는 시커먼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기둥의 중앙 몇 군데가 가로로 갈라진다.
갈라짐은 이내 눈과 입의 모습이 된다.
“쿠워어어억!”
입을 크게 벌리며 다시 한 번 포효하는 그것.
봉화산의 필드 보스, 데스 트렌트였다.
-후웅!
놈은 진수를 노려보며 거대한 줄기를 내려찍었다.
마치 고가도로가 통째로 달려드는 것 같은 위압감이다.
멀리 있는 적을 공격할 때는 길이를 늘리는 대신 두께를 줄이고, 가까이의 적을 공격할 땐 두껍고 묵직해지는 듯했다.
-쾅!
바닥에 깔려있던 해골들이 산산조각이 나 비산한다.
진수는 [강철 거미줄]을 이용해 가까스로 피했다.
“후워어억!”
[워 크라이]를 사용해 스스로의 신체 능력을 향상시킨다.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다리가 후들거려 놈에게 대적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소문으로 들어서 어느 정도 마음의 대비는 했지만 놈은 상상 이상이었다.
어쩌면 수많은 헌터들을 잡아먹으며 더욱 강해졌는지도 모른다.
-부웅- 쾅! 후웅! 쿵!
데스 트렌트는 진수를 향해 공격을 쏟아냈다.
가지를 망치처럼 찍고, 넝쿨을 채찍처럼 휘두른다.
두터운 뿌리들은 바닥에서 솟구치며 한시도 숨을 고르지 못하게 압박했다.
이에 진수는 [백년 도깨비불]과 [강철 거미줄]로 응수했다.
부족한 기동력을 거미줄로 보완하고, 이동한 즉시 거미줄에 백색의 귀화를 붙여 대미지를 축적시킨다.
하지만 놈은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불이 더 번지지 않았다.
“아, 이러면 좀 곤란한데...?”
한동안의 공방은 서로가 치명타를 입히지 못했다.
진수의 공격은 데스 트렌트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않는다.
데스 트렌트의 공격은 진수가 모두 피해냈다.
다만 꺼지지 않는 [백년 도깨비불]이 군데군데 달라붙어 놈을 조금씩 좀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쿠워어억!”
-쾅! 쾅! 쾅!
날파리 같은 진수에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는지 녀석이 광분을 하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로 사방을 무차별적으로 내리찍는 데스 트렌트.
놈은 이내 입을 쩍 벌리더니 마력을 한껏 끌어 모았다.
그 순간, 진수는 보았다.
놈의 입 속에 녹색의 심장이 드러나는 것을.
-우우우웅! 콰과과광!
그 녹색의 심장에서부터 강력한 마력파가 터져 나왔다.
얼마나 강력한지, 파동의 궤적에서 벗어났음에도 공기가 빨려 들어가며 하마터면 휘말릴 뻔했다.
바위든 나무든 가릴 것 없이 마력파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쿠워억!”
데스 트렌트가 진수를 맞추지 못한 것에 다시 한 번 분노를 터트렸다.
곧이어 넝쿨과 잔뿌리들이 진수를 잡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피하지 못하도록 붙잡아맨 후에 마력파를 쏘려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피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있는 진수.
데스 트렌트의 넝쿨이 그의 발목을 잡아채 들어올렸다.
-뿌드드득!
놈이 광기에 찬 웃음을 터트리는 것처럼 아가리를 커다랗게 찢는다.
-우우우웅!
다시 한 번 초록색 심장이 모습을 드러내고, 압도적인 양의 마력이 놈의 입으로 몰려들었다.
이제 마력파가 쏘아지면 진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스윽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는 데스 트렌트.
진수는 녀석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후욱!
그의 손에서부터 뻗어 나오는 음울한 기운.
그 기운은 봉화산 전체를 감싸고 있던 죽음의 기운을 끌어당겼다.
사이한 힘이 모이며 녀석의 마력을 흩어버렸다.
-콰드득, 콰득! 콰드드득!
주변에 널려있는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내 무수히 많은 손들이 나타나 데스 트렌트의 입을 위아래로 쭉 찢었다.
엄청난 힘을 지닌 녀석이었지만 입을 다물어 심장을 보호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놈이 만들어낸 죽음의 대가였다.
진수의 손끝에 하얀 불꽃이 피어오른다.
“입 벌려. 특식 들어간다.”
비밀스러운 단서
“우워어어억!”
거목이 비명을 지른다.
넝쿨이며 가지며 하얀 불꽃을 꺼트리기 위해 휘두르지만 번번이 가로막힌다.
[망자의 손길]이다.
놈이 지금까지 죽여 온 생명들의 잔재가 힘이 되어 녀석의 살고자 하는 발버둥을 짓눌렀다.
-화르륵! 화륵!
나무로 된 거체는 쓰러지지도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친다.
놈의 녹색 심장에 모였던 엄청난 생명력과 마력을 불사르며 백색의 불길이 치솟았다.
그렇게 한참을 타오르던 데스 트렌트.
영원히 불탈 것 같던 녀석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데스 트렌트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데스 트렌트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이윽고 봉화산 근처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던 악명 높은 필드 보스가 사라졌다.
여전히 죽음의 기운이 산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다시 생명이 돌아올 것이다.
‘이름은... 페르세포네로 할까.’
순간 치코리타라고 지어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앞으로 잘 하라는 의미에서 봄과 씨앗의 여신 이름을 주었다.
-데스 트렌트 [페르세포네]가 [새초미 무리] 무리에 합류합니다.
진수가 의도한대로 데스 트렌트 페르세포네는 녹색 숲으로 가 새초미 무리로 들어갔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도 임무는 달성이 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지.’
그럼에도 동요하지 않는 진수.
데스 트렌트가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성질이 있고 강력한 몬스터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저쪽 차원의 인간들은 헬 그림리퍼도 상대하는 족속들.
필드 보스 몬스터 정도로는 부족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쿵!
진수는 공간압축 주머니에서 궤짝을 하나 꺼냈다.
크기가 상당했는데, 이것 때문에 주머니에 공간이 부족해 산 초입부터 전기톱을 들고 이동했던 것이다.
“이걸로 마무리 친다!”
상점에서 5골드를 사용해 궤짝을 전송했다.
-비아이템을 전달할 전이자를 선택하십시오.
페르세포네를 지정한다.
커다란 상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새초미 무리] 무리의 급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힘 +1, 민첩 +2, 체력 +3, 내구 +3, 마력 +2, 골드 +10
물건을 받은 건 페르세포네였지만 무리 자체가 성장했다.
아마 드라이어드인 모쿠진과 엘더 드라이어드 그룻, 데스 트렌트 페르세포네가 동시에 효과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수가 보낸 물건은 다름 아닌 식물 성장 촉진제였으니까.
“크흐흐, 현대 과학의 맛 좀 봐라.”
게이트 사태가 터지고 인류에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겼다.
당장의 생존 문제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먹을 것을 수급하는 게 큰 난관이었다.
농업이나 축산업을 하려고 해도 몬스터로 인해서 여러모로 위험요소가 많았다.
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나온 것이 바로 이 식물 성장 촉진제.
지력을 순식간에 소모하는 대신 식물의 성장을 엄청나게 끌어올리는 물건이다.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물건이라는 거지.’
데스 트렌트는 직접적으로 생물의 생명력을 흡수하기도 하지만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게 기본이다.
녀석한테 식물 성장 촉진제를 먹이면 봉인을 이루는 힘을 쪽쪽 빨아먹을 거라는 게 진수의 계산이었다.
-임무 달성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보상 : [차원의 틈] 해금
“나이스!”
그리고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임무가 달성되며 [차원의 틈]이라는 보상을 받았다.
“허어어...!”
보상 메시지가 나타남과 동시에 신음 소리를 내며 눈을 하얗게 치뜨는 진수.
그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손에 들고 있던 전기톱이 일그러지듯 접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입고 있던 방어구가 조각조각 나뉜다.
진수를 중심으로 여러 사물들에게서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돌멩이가 구부러지고 뼛조각이 휜다.
-스슥 스스슥
-파지직
-지이잉
마치 공간이 이 차원에서 떨어져 나가는 듯, 여러 겹으로 분리되어 보이기 시작한다.
온갖 물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그 본모습을 알아보기도 힘들어지는 순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왔다.
돌멩이도, 뼛조각도, 손에 들고 있는 전기톱과 입고 있는 방어구까지.
마치 한 순간의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착각은... 아니었지만.’
-슈슉
진수의 손에 들려있던 전기톱이 갑자기 사라졌다.
방어구도 한 순간에 없어진다.
그가 눈을 돌려 주변을 훑어보았다.
데스 트렌트에 의해서 죽었던 헌터들의 물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슈슉 슈슈슉!
그의 의지에 따라서 어디론가 사라지는 물건들.
엄청난 양의 사물들이 없어졌다.
-사삭!
진수가 다시 집중을 하자 방어구가 다시 나타났다.
그냥 나타난 게 아니라 사라지기 전과 같이 그가 착용한 상태였다.
저절로 입혀진 방어구를 보며 진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네. 엄청 유용하게 쓸 수 있겠어.”
[차원의 틈] 해금 보상을 받으며 그는 본능적으로 이 기능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새로운 기술을 얻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일종의 아공간 보관소 같은 능력이었는데, 그의 의지대로 물건을 보관할 수도, 꺼낼 수도 있었다.
착용하고 있던 물건은 보관했다가 다시 빼낼 때 고스란히 입어진다는 점에서 굉장히 훌륭했다.
‘물론, 아무 물건이나 무작정 집어넣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조금 복잡한 개념이었는데, 남이 소유한 물건은 맘대로 [차원의 틈]에 넣을 수 없었다.
일종의 관념적인 결속이라는 느낌이었지만 정확한 이해까지는 하지 못했다.
“어쨌든 내 거랑 주인 없는 물건은 다 집어넣을 수 있다는 거지.”
-슈슉
진수는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온갖 아이템, 헌터 장비, 마석 등을 쓸어 담았다.
아이템과 장비들만 중고로 팔아도 엄청난 돈이 될 것이다.
물건을 보관하는 공간의 역할만으로 대단한 기능을 얻었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닌 거 같지만.... 음?”
그가 주위를 거의 정리해 가는데 멀리서 누군가 접근하는 기척을 느꼈다.
[중급 후각]이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체취를 감지했다.
한 차례 맡은 적 있는 냄새였다.
-슈슉!
진수는 급히 입고 있던 방어구와 공간압축 주머니에 있는 도끼, 진은 송곳들을 [차원의 틈]에 집어넣었다.
“... 이번에 지린성 쪽에서 샘플 온다면서? 본토에서도 인간들이 아주 환장하던 물건이니 잘 하면 여기서 세력 늘리는 데에 큰 도움이 되겠어.”
굉장히 말을 빠르게 하는 남자의 음성이 들린다.
무언가 잔뜩 기대하고 있는지 목소리에서 흥분한 기색이 느껴졌다.
“맞습니다. 아마 모레쯤 본사에 도착하면 우선 소량씩 시장에 풀어서 반응을 봐야겠죠.”
“크흐흐, 나도 맛 못 본 지 한참 됐는데... 조금 챙겨놔!”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아마도 그들의 목표는 진수가 서있는 위치.
정확히는 RD의 운송로 루트에 있던 방해물, 데스 트렌트일 것이다.
“뭐야! 여기 있다면서?”
잔뜩 신이 난 목소리가 순식간에 뒤바뀐다.
장난감을 뺏기기라도 한 듯 성난 소릴 내는 녀석.
RD 본사에서 진수에게 시비를 걸었던 가국이라는 놈이다.
“저놈이 왜 여기에 있지? 너 뭐 연락 들은 거 있어?”
그는 자신의 옆에 따라오던 사내에게 물었다.
기세로 봐서는 RD 소속의 인간.
몬스터는 아니었다.
“아, 김진수 헌터가 이쪽 운반로 길목 몬스터 퇴치를 하겠다고 본사에 연락을 해뒀었네요. 근데... 필드 보스까지 해치웠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핸드폰을 보며 말하는 그.
“이걸 진작에 알아봤어야지! 내 시간만 날렸잖아! 저런 더러운 놈 볼 시간에 길거리에 다니는 인간 여자들 구경하는 게 낫지!”
길길이 날뛰는 가국.
‘뭐야. 일부러 진은이 사용된 장비를 모두 [차원의 틈]에 넣어놨는데.... [차원의 틈]에 들어가도 냄새를 맡는 건가?’
놈의 반응에 진수가 당황했다.
지난번 RD 본사에서 가국이 시비를 건 이유가 진은 냄새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원의 틈]에 넣으면 숨길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는데 이번에도 진수를 향해 더러운 놈이라고 표현을 한다.
이러면 앞으로 후각에 예민한 요괴들을 상대할 때 상당히 귀찮아질 수 있다.
“저도 몰랐죠. 저 분이 속옷에 신발만 신고 사냥을 하는 악취미가 있는 줄은....”
핸드폰을 보던 남자가 민망해하는 표정으로 진수를 힐끔 봤다.
진수가 진은이 들어간 장비를 급하게 [차원의 틈]에 넣느라 미처 옷을 입지 않았던 것이다.
헌터용 안전화에 속옷을 입고 가방을 짊어지고 있는 성인 남성.
가국이 더러운 놈이라고 말을 한 게 이해가 됐다.
-킁, 킁!
코를 벌름거리는 가국.
“그래도 더러운 냄새는 이제 안 나는데...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놈이 경멸하는 눈빛을 보내온다.
“아, 하하. 이상한 놈이랑 싸우다가 옷이 다 찢어져서....”
진수는 급히 [차원의 틈]에서 대충 아무 옷가지나 공간압축 주머니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옷을 꺼내는 척을 했다.
흙바닥에 굴러다니던 낡은 옷을 주워 입은 진수.
상하의 조합도, 사이즈도 영 맞지 않아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으.... 그래도 너 나름 높은 등급 헌터라면서? 계문이한테 들었어. 돈 벌어서 어디다 쓰냐. 옷도 좀 잘 입고 다녀.”
“하하, 이번에 잡은 몬스터 포상금 받으면 챙겨 입어야죠.”
진수가 데스 트렌트가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이거 니가 잡은 거 맞아? 부산물 같은 건 어떻게 했어?”
가국이 눈을 가늘게 뜬다.
“제가 따로 아는 뒤처리 팀이 있어요. 같이 오래 일했던 분들이라 일감 좀 나눠줬습니다.”
준비해뒀던 멘트를 날리자, 놈이 의심을 거두는 듯했다.
‘이놈을 만나서 다행이야. 포상금 신청할 때 내가 데스 트렌트를 잡았다는 증거를 대기가 참 곤란했는데, 이놈이 증인이라고 하면 되겠어.’
“그나저나, 이쪽으로 오시면서 뭐 재밌는 이야기라도 하시는 거 같던데 뭐였어요?”
진수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가국과 사내를 떠봤다.
“아~ 그런 게 있어. 너도 열심히 하다보면 나중에 조금 얻어다가 맛 볼 수 있을 거야. 아주 뿅 간다고. 킥킥!”
입을 다무는 남자와 장난스럽게 말하는 가국.
놈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입이 헤벌쭉 찢어졌다.
‘대체 뭘 들여온다는 거야? 이건 좀 알아봐야겠는데.’
굉장히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둘.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진수는 RD의 활동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단서를 찾았음을 직감했다.
“뭐 어쨌든, 여기까지 왔는데 허탕만 치고 갈 수는 없지. 얌마! 다른 곳에 해치울 놈 있어?”
가국이 턱을 벅벅 긁으며 옆에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는 다시 핸드폰에서 정보를 살펴봤다.
“아, 동쪽으로 좀 더 움직이면 나오는 몬스터 필드를 좀 뚫어달라는 요청도 있네요.”
“필드?”
“예.”
“잡스러운 것들이란 말이잖아?”
녀석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음... 네, 강한 몬스터는 아니네요.”
“그럼 꺼져! 누굴 잔바리로 보나. 에라이, 누구 때문에 허탕 쳤네. 오늘은 그냥 돌아가자. 퉷!”
가국은 퉁명스럽게 말을 하고는 사내를 데리고 사라졌다.
여전히 제멋대로 구는 모습에 진수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가진 능력이 뛰어나니까 RD의 인간들이 저놈을 데리고 있는 거겠지. 데스 트렌트를 혼자 사냥하러 온 것만 봐도 그렇고....’
정황으로 봐도, 대화를 들어도 놈의 목표는 데스 트렌트를 토벌하는 것이다.
진수가 데스 트렌트를 노릴 수 있었던 건 [망자의 손길]이 가진 특수성 덕분이었고, 만약 본신의 힘만으로 붙었다면 이기기 힘들었으리라.
저 가국이라는 놈이 이렇게 가벼운 태도로 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원숭이 사냥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해야겠어.’
진수는 어느새 멀리 떨어진 녀석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띠링
-코볼트 소서러 [제우스]가 [차원의 틈]에 있는 전기석에 관심을 보입니다.
“어?”
-띠링
-띠링
-띠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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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판 랜덤 박스
-드워프 [헤파이스토스]가 던전 마력 측정기에 관심을 보입니다.
-드레이크 [후라이]가 강철거미 견갑을 궁금해 합니다.
-듀라한 [김봉식]이 갑옷 세정제를 탐냅니다.
-변종 웨어타이거 [호치]가 캣닢 냄새를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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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팔 래빗 스켈레톤 [U-4호]가 예리한 앞니에 흥미를 가집니다.
[차원의 틈]에 넣어놨던 대량의 물건들.
전이자들이 어떻게 느끼는 것인지는 몰라도 각자 관심사에 맞는 물건들에 반응을 보였다.
-[헤파이스토스]가 던전 마력 측정기로부터 영감을 받아 성장합니다.
-[차원의 틈]에 의한 첫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중급 악력] 특성 강화
-[헤파이스토스]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체력 +1
-[U-4호]가 예리한 앞니를 흡수하며 성장합니다.
-[U-4호]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힘 +1
이윽고 두 전이자가 성장을 하며 보상을 보내왔다.
[중급 악력]은 [상급 악력]으로 성장했고, 손아귀에 한층 강한 힘이 생긴 걸 느낄 수 있었다.
‘왜 [차원의 틈]인가 했더니... 이쪽 차원과 저쪽 차원의 사이쯤 되는 공간인 거구나.’
한바탕 전이자들이 물건 구경을 하고 나니 보다 상세한 개념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상점의 물건 전송과는 유사하면서도 다른 기능이었다.
[차원의 틈]에 들어있는 물건들은 전이자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무작위성이 강하다.또한 전이자에게 영감을 주거나 성장을 끌어낸 물건은 완전히 저쪽 차원으로 넘어가서 사라지게 된다.
전이자들에게 넘어가지 않길 바라는 물건들은 직접 지정을 할 수 있었다.
‘전기톱, 방어구, 진은 송곳, 도끼는 바로 지정을 해놔야지. 이건 안 돼...!’
서둘러 자신의 장비들을 제외시킨 진수.
“쩝. 크게 한탕 했다고 생각했더니... 마석들이나 꺼내서 쓰고 일단 나머지는 [차원의 틈]에 넣어놔야겠네. 중고품 팔아서 돈 좀 버는 것보다 전이자들 성장시키는 게 더 이득이니까.”
앞으로 전이시킬 몬스터들도 뭘 좋아할지 모른다.
진수는 전이자들이 좋아할만한 것들을 좀 [차원의 틈]에 넣어놔야겠다 생각했다.
* * *
서울로 돌아온 진수는 먼저 RD에 데스 트렌트 사냥 포상금을 신청했다.
포상금은 5천만 원.
바로 다음날 진수의 통장으로 입금이 되었다.
‘어차피 해치우려고 했던 몬스터를 잡았는데 꽁돈까지 생겼네. 흐흐.’
진수는 그 돈을 들고 바로 동묘 시장으로 갔다.
평소라면 동묘에 가는 것은 김건이 있는 공방에 용건을 보기 위해서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그는 동묘 시장의 잡다한 물건들이 널려 있는 좌판을 살펴봤다.
장비는 무조건 안전한 것을 추구하는 그였지만 어차피 [차원의 틈]에 채워 넣을 것들을 굳이 새 제품으로 구입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오히려 냄새나는 걸 좋아하는 놈들도 있는 것 같고....’
데스 트렌트의 주변에 있던 물건들을 모조리 [차원의 틈]에 넣어놓으니 지속적으로 전이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언데드 몬스터들은 자신의 신체 부위와 관련이 있는 사체나 뼈 따위를 좋아했고, 헬하운드나 거대 늑대 같은 개과 몬스터는 노즈워크라도 하는지 오래된 물건들을 기웃거렸다.
서울로 돌아와 포상금을 받고 동묘 시장으로 오는 사이에도 몇 개의 물건들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힘 6과 민첩 1을 추가로 받은 진수.
힘 능력치가 50이 되면서 이제 RD의 덩치 큰 몬스터, 평천과 악수를 해도 일방적으로 밀리진 않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자~ 골라, 골라! 좌판에 있는 물건들이 무조건 3개에 5만원!”
“이게 뭐냐고 하면, 저~ 용산에 나타난 던전에서 나온 아이템인데, 한 번 사용하면 D급 헌터도 오우거를 잡게 해준다 이거야!”
“새 거나 다름없는 헌터 장비들입니다. 이 반질반질한 것 좀 보세요! 이거 사가면 돈 버는 겁니다!”
동묘 시장에는 온갖 상인들이 호객행위를 하며 떠들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정말 진실을 말하는 비율이 얼마나 될까?
죽은 헌터의 유품이나 던전 뒤처리반이 몰래 빼돌린 물건, 장물에 정말로 중고 장비까지.
이 시장으로 흘러 들어온 물건은 팔고 있는 상인들도 정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야말로 현실판 랜덤 박스라는 거지. 내가 여기서 볼 건 오직 가격뿐이다.’
헤파이스토스의 지식으로 마력 회로를 읽어낼 수 있기에 최소한 마력공학이 적용된 물건에서 꽝은 피할 수 있다.
그 외에는 그저 운에 맡기는 수밖에.
진수는 뭐라도 하나 걸려라 하는 마음으로 동묘 시장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묶음으로 파는 장비들, 겉보기엔 쓰레기나 다름이 없는 아이템, 오염돼서 손으로 잡기도 겁나는 물건까지.
-독성 슬라임 [플러버]가 맹독을 섭취하고 성장합니다.
-[플러버]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체력 +1
그가 구입한 것들 중에는 실제로 위험한 물건들도 섞여있었다.
“이 창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야! 이 끝에 묻어 있는 이 피딱지! 이거 보여? 이게 바로 신의 피다~ 이 말이야!”
“신한테 왜 피가 있어? 신이 아니라 피융신이었나본데.”
시장 한 구석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물건을 잔뜩 구입한 진수는 잠시 휴식도 취할 겸 왁자지껄 사람들이 떠들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거기엔 한 노점상이 물건들을 들어 올리며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입담이 꽤 좋은지, 아니면 그의 말을 반박해도 잘 받아들여서 그런지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있었다.
“요거, 요거! 이 양탄자가 한 때는 하늘을 날아다녔다고. 지금은 그 힘을 다 해서 이러고 있지만, 집에다 들여놓으면 또 언제 다시 날아오를지 모르지.”
“이 반지는 어떤 보석을 끼우냐에 따라서 다른 능력을 주는 아이템이야!”
“드래곤 알아? 살아있는 드래곤의 눈을 뽑으면 그게 보석으로 변하는데, 이 구슬이 바로 용안석이라 이거야!”
상인의 말은 무척이나 허황된 내용들이라서 구경꾼들도 물건을 살 생각은 안 하고 그냥 재미삼아 이야기를 듣다가 자리를 떠났다.
진수도 처음엔 잠시 쉬기 위해 그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좌판 한 구석에 놓여있는 한 물건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저거 마력회로는... 꽤 그럴듯한데?’
헤파이스토스의 지식으로 봤을 때, 마력을 소비해 방어막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아이템.
물론 군데군데 망가진 부분이 있어서 작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저것만 500만 원 안쪽으로 사도 이득이겠는데? 김건 사장님한테 갖다 드리면 좋아할 물건이야.’
마침 상인이 진수가 눈길을 주고 있는 아이템을 들어올렸다.
“이게 마지막 물건이야! 이거 설명 끝나면 나 더 안 팔어.”
으름장을 놓고 시작하는 상인.
하지만 그 누구도 물건을 사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소소한 유흥거리가 끝나는 걸 아쉬워할 뿐.
“이 아이템으로 말하자면, 저~기 미국에서 건너온 보물이다 이거지. 미국에 있는 큰 헌터 연합. 그 뭐더라... 패드립스였나....”
“패트리어트!”
“아~ 아. 그래. 패트리어트! 그놈들이 아주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던 건데, 내가 입수를 했다 이 말이야. 이게 어떤 용도로 쓰이는 거냐면. 세 개의 보물이 있어. 그 세 개가 모두 모이면 엄청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거지. 그 패트리어트의 수장이 절대 깨지지 않는 방어 기술을 쓴다고 하잖아? 그것도 쳐부술 수 있다고 해서 놈들이 이걸 그렇게 찾아다닌다는 거야.”
상인의 설명은 완전히 엉터리였다.
마력회로는 아주 간단한 형태다.
마력을 주입하면 그걸 소모해서 전방을 막는 방어막을 만든다.
오직 그 기능뿐이기에 그의 말은 기본적인 이해도 없는 허풍이라는 뜻이었다.
“보물 세 개가 안 모이면 아무 기능도 없어요?”
슬쩍 떠보는 진수.
“아이, 진짜 중요한 물건은! 그렇게 막 쓸 수가 없는 거야. 이것만 갖고는 뭐 마력을 넣든 마석을 꽂든 뭔 난리를 쳐도 아무 소용이 없어.”
상인은 저 아이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아무 소리나 주워섬기는 게 분명했다.
“그럼 뭐 별 쓸모가 없네.”
김이 샜다는 듯 말을 하자, 상인이 진수의 눈치를 슥 살폈다.
“흠, 뭐 그래서 좀 저렴하게 줄 수도 있는데....”
“저렴하게 얼마요?”
진수가 되묻자 주변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실컷 떠든 상인은 동묘 시장에서 제법 유명한 사람이었다.
나름 재밌게 이야기를 꾸며내지만 제대로 된 물건을 파는 경우가 한 번도 없다는 허풍선이.
그런 사기꾼에게 또 한 명이 걸렸구나 구경거리가 생긴 것이다.
“오백!”
아주 손해를 본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으며 한 손을 쫙 펴며 말하는 상인.
“하나만 있으면 작동도 안 하는 물건을 누가 오백 주고 사요. 그냥 관상용으로 사볼까 했는데 너무 비싸네.”
“그럼 얼마쯤이면 되겠는데?”
인상을 쓰며 묻는 상인.
“후....”
진수도 지지 않고 마주 인상을 쓰며 깊게 한숨을 쉰다.
“이백오십. 누구한테도 별 쓸모가 없는 물건이잖아요?”
“에이, 그건 안 되지!”
“....”
반값을 후려치는 진수의 말에 바로 거절하는 상인.
진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 사백오십은?”
묵묵부답인 진수의 태도에 상인이 다시 흥정을 시도했다.
그의 입이 열리는 순간 진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금 상황에 아쉬운 건 상인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삼백이요.”
“으음.... 사백은 어때?”
“삼백이십. 이게 최대치예요.”
못을 박아버리는 진수.
그가 보기에 상인은 아이템의 가치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지금 당장 팔아먹고 싶은 마음이 클 뿐.
진수는 자신이 배짱을 부리면 상인이 백기를 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여기에 있는 물건 전부 오백으로 하는 건?”
그때, 상인이 예상치 못한 승부수를 던졌다.
좌판에 있는 물건들은 총 여덟 가지.
그가 보기엔 모두 쓸모없는 것들만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려고 하는 것도 마력회로 지식이 없었다면 쓰레기라고 생각했을 거야.’
진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하시죠.”
애초에 방어막을 만드는 아이템의 가치만 해도 500만 원은 넘는다.
혹시나 나머지 잡동사니 중에서도 전이자의 성장을 도와줄 물건이 있을지 모르는 일.
진수는 상인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래도 득템했네. 이거 김건 사장님한테 갖다드리고 이제 RD 본사로 가야겠다.’
김건의 공방에 아이템을 전해준 그는 동묘를 벗어났다.
약 800만 원 정도를 사용했고, 아이템 하나에 능력치도 올렸으니 꽤나 소득이 있었다.
동묘 시장에서 움직인 그가 향한 곳은 RD 본사.
‘그때 봉화산에서 가국이 샘플이 모레 온다고 말했지. 하루가 지났으니까 내일 온다는 말인데... 일단 이번 새벽부터 대기를 해보자.’
데스 트렌트를 잡고 나서 들었던 것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사람들이 환장을 했다는 물건.
진수는 그 샘플이라는 것을 훔치려 하고 있었다.
[분열]을 네 번 사용해 분신들을 RD 건물 주변에 배치한다.
진수 자신도 한 길목을 맡아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는지 감시했다.
“하~암.”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진수.
무료함에 하품을 하는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가고일 [휴고]가 저주받은 신의 창에 흥미를 가집니다.
파란 가루
‘저주받은 신의 창? 나한테 그런 게 있었나?’
진수는 안내 메시지를 확인한 뒤 [차원의 틈]에 집중을 했다.
처음에는 정확한 물건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가고일인 휴고가 관심을 가진다는 포인트를 가지고 살펴보니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게 진짜로 신의 피였던 건가?’
[차원의 틈]에서 꺼내든 것은 바로, 고장 난 아이템을 팔던 허풍선이 상인의 창.
창날의 끝에 검붉은 피딱지 같은 것이 묻어있는 상태 그대로였다.
-휙, 휙!
창을 허공에 몇 번 휘둘러본다.
하지만 뭔가 특별한 느낌은 오지 않았다.
전기톱이나 도끼를 쓸 때처럼 [특급 공구 숙련]과 [도구 일체화]의 적용을 받지 못했기에 오히려 전력이 약화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신 중에서 좀 급이 떨어지는 놈인 건가....”
던전에서 나오는 아이템이 비싼 것은 현대 기술로 구현하지 못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마력 회로가 적용된 아이템들.
김건이 신체강화와 자동 수복이 되는 방어구를 만들었지만 드워프 헤파이스토스와 그 무리들이 개선시킨 수준까지는 끌어올리지 못한다.
이 외에도 마법이나 주술 따위의 아직 현대 기술로 해석 및 재현해내지 못하는 아이템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접두사가 신이 붙었다면 그 능력을 기대해봄직했다.
‘이건 전이자한테 넘기지 말고 챙겨둬야겠어. 가고일한테 신의 창은 좀 과하지.’
가고일이 창을 사용하는 몬스터는 맞다.
하지만 주로 투창 후에 혼비백산하는 적을 공중에서 습격하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창 자체의 위력이 크게 중요하진 않다는 것.
‘절대 아까워서 그러는 건 아니고....’
진수가 저주받은 신의 창을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훑어봤다.
좌판에 있을 때는 볼품없어 보이던 창이 지금은 왠지 예술적으로 보였다.
군데군데 우그러진 창대, 뒤틀려있는 창날과 창대의 연결부위.
게다가 창의 끝에 말라붙은 검붉은 피까지.
“어쩌면 그 사장님도 이 창을 내놓으려고 그렇게 좌판을... 아이고!”
혼자 저주받은 신의 창을 들고 주접떨고 있던 진수는 급히 몸을 숨겼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3시를 바라보고 있었고, 고요한 도심에 한 승합차가 나타났다.
시커먼 외형과 유리창엔 선팅이 아주 진하게 된 차량.
누가 봐도 수상하게 생긴 차였다.
진수는 창을 [차원의 틈]에 급히 집어넣고 호랑이 가면을 꺼냈다.
가고일이 창에 눈독 들이지 못하도록 설정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스스슥
네 군데에 보내놨던 분신들을 모두 불러왔다.
힘을 거의 회복한 진수.
건물들 위로 뛰어넘어 차량에 더욱 가까이 움직였다.
-킁, 킁!
그의 [중급 후각]에 달큰한 냄새가 잡혔다.
뇌를 직접 자극하는 것만 같은 향기.
그러면서도 뭔가 익숙한 향이었다.
‘저 차가 분명하네.’
수상하고 매력적인 냄새를 맡은 진수는 RD에서 기다리는 물건을 실은 차라는 걸 확신했다.
-뽀옹
손끝에서 분신을 하나 만들어낸 진수.
달리는 차를 향해 힘껏 집어던졌다.
-슈욱, 퉁!
너무 세게 던져 분신이 차에 치일 뻔 했지만 [강철 거미줄]로 차의 천장에 착지할 수 있었다.
아직 분신의 기억이 돌아오진 않았지만 진수에게 온갖 욕을 쏟아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작은 진수가 달라붙은 차는 RD 본사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려주는 검은 잠입복을 입었다.
동묘의 김건에게 가서 받은 물건이었다.
‘봉화산에서 샘플 얘기를 듣자마자 김건 사장님한테 부탁드리길 잘 했네.’
RD에 도사리고 있는 몬스터들은 진은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
그가 진은이 덧대어진 방어구를 입고 저 건물에 들어간다면 들개 소굴에 악취를 풀풀 풍기면서 잠입을 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래서 준비한 게 이 잠입복.
머리까지 완전히 덮고 얼굴은 호랑이 가면을 써서 가린다.
몸은 신축성 좋은 몬스터 소재를 사용해 활동성과 방어력이 모두 뛰어났다.
‘대신 통기성은 영... 벗으면 냄새 엄청 나겠네.’
새로운 장비를 착용하며 짧은 감상을 마친 진수는 [투명화]를 사용한 뒤 RD의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의 마력 능력치도 벌써 53.
[유체화]와 [투명화]의 지속시간이 제법 늘어났다.
중간중간 해제하여 마력을 회복해주면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스스슥
지하주차장에 들어선 진수의 몸이 조금 커졌다.
승합차에 붙여서 들여보냈던 분신이 돌아온 것이다.
분신의 기억에 따르면 승합차에서 라면 박스만한 상자를 꺼내 지하 1층에 있는 창고로 옮겼다.
창고의 내부까지 들어가려 했지만 [유체화]와 [투명화]를 써서 침투하기엔 분신의 마력으론 지속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
‘다시 어디론가 옮기기 전에 빨리 가야겠다.’
늦은 새벽 시간이라 RD 본사 건물엔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CCTV와 가끔씩 돌아다니는 인원들만 피해가며 빠르게 움직였다.
‘아, 냄새가 난다.’
진수는 승합차에서 났던 향기를 맡았다.
달달하고 왠지 자꾸 맡고 싶은 향.
그 향기가 진수를 안내했다.
-스르륵
두터운 창고 문이 무색하게 [유체화]로 통과한 진수.
혹시 몰라 [투명화]까지 사용했지만 박스를 옮긴 자들은 물건을 두고는 이미 떠난 듯했다.
창고의 잡다한 물건들 사이에 평범한 듯 놓여있는 상자.
진수는 먼저 창고에 CCTV가 있는지 확인해봤다.
네 구석에 모두 설치되어있는 감시 카메라.
무작정 움직이면 그가 상자를 훔치는 게 뻔히 보일 것이다.
‘일단 사각지대에서 마력을 좀 회복하자.’
물건들 사이에 숨어 [유체화]와 [투명화]를 풀었다.
대신 청각, 후각 등의 감각들을 최대한 끌어올려 누군가가 오지는 않는지 경계했다.
서서히 차오르는 마력.
‘누가 온다.’
진수는 벽 너머에서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들었다.
대화를 하면서 걸어오고 있는 듯했다.
“아, 조금만 챙겨오면 안 되나? 티도 안 나게.”
“안 됩니다. 평천 형님께서 물건에 아무도 손대지 말라고 직접 말씀하셨어요.”
“하~ 미치겠네. 그럴 거면 포장이나 잘 하던가. 냄새는 살살 풍기고, 건들지는 못하게 하고. 크르르.”
경박한 목소리.
진수가 몇 차례 들었던 익숙한 말투였다.
원숭이를 닮은 가국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음에도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낼 만큼 이성의 끈을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었다.
‘저게 뭐길래 저러지?’
진수는 상자에 담긴 샘플이라는 게 뭔지 더욱 궁금해졌다.
“나 몰래 다른 놈들 빼주기만 해. 평천 형님보다 내가 먼저 잡아서 족칠 거니까!”
으름장을 놓는 가국.
그의 옆에 있는 건 창고를 관리하는 인원인 것 같았다.
느껴지는 기세로 봐선 보통의 인간.
가국이 사나운 말투로 겁박하니 공포에 질린 듯 보였다.
-킁, 킁!
“하아.... 바로 앞에 있는데 아주 미치게 만드네. 윽, 근데 이건 뭐야? 내가 연변에서 물건 들고 오는 놈들 잘 좀 씻고 다니게 하라 그랬지! 땀 냄새가 아직도 진동을 하네. 웩!”
창고 문 쪽에 코를 처박고 냄새를 맡던 가국이 헛구역질을 하며 성을 냈다.
개 요괴들 못지않은 후각의 소유자답게 시큼한 땀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리고 그 냄새의 진원지는 상자를 옮긴 일꾼들과 잠입복을 입은 진수였다.
-꿀꺽
예상치 못한 가국의 행동에 당장이라도 [투명화]를 쓸 태세를 갖춘 진수.
녀석이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 맡는 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킁! 내가 예의주시 하고 있으니까 아무도 얼씬 못하게 하라고!”
한창 코를 박고 있던 녀석이 다시 한 번 창고 관리자에게 소릴 치고 떠나갔다.
‘드디어 갔네. 덕분에 마력은 다 회복 됐다.’
가국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진수는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꽤 시간이 흘렀기에 마력은 완충 상태.
[유체화]와 [투명화]를 사용한 진수는 상자로 다가가 내용물 하나를 손으로 잡은 뒤 [차원의 틈]으로 보냈다.
그리고 다시 CCTV의 사각으로 돌아와 물건을 꺼내들었다.
‘이게 대체...?’
[차원의 틈]에서 꺼낸 물건은 비닐로 잘 포장된 파란 가루였다.
사람을 홀리게 만들 정도로 달콤한 향기를 막기엔 비닐 한 겹은 너무나 무력했다.
진수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떡 삼켰다.
“후우우....”
깊은 한숨을 쉰 그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알아채지 못하는 상태.
당장이라도 눈앞의 비닐을 찢고 파란 가루의 향을 탐닉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콰득!
탐욕이 마음을 채우려는 순간, 진수는 혀를 강하게 깨물었다.
입안을 채우는 혈향.
그와 동시에 체구가 조금 커지며 정신이 가라앉았다.
[광전사]의 효과가 발동한 것이다.
이내 전투욕구가 치솟았지만 이 향기의 유혹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헉, 헉, 헉.... 큰일 날 뻔했네.”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은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급히 [차원의 틈]에 던져 넣었다.
숨을 몰아쉬며 폐에 깨끗한 공기를 채운다.
몇 번 반복하고 나니 괜찮아졌다.
‘이거, 마약이다. 검사 같은 거 안 해봐도 알 수 있어.’
진수는 상자에 들어있는 샘플이라는 물건의 정체를 알아챘다.
향정신성 약물, 흔히들 마약이라고 부르는 것임이 분명했다.
일반적으로 비각성자보다 더 강한 정신력을 지닌 헌터를 잠깐 사이에 홀릴 정도로 강한 약.
RD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아주 지독한 마약을 들여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마약 단속에 더 철저하다는 걸 알았어야지.’
다시 한 번 [유체화]와 [투명화]를 사용한다.
상자로 다가간 진수는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고 뒤적였다.
-쿵! 쿵! 쿵!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나보다 먼저 건드리고 있어!”
그 순간, 건물 전체가 울릴 정도로 과격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상자에서 빼낸 거 다 알아! 안 그래도 참기 힘든데 냄새가 더 진해졌잖아! 크아아!”
이성을 반쯤 잃은 가국이었다.
놈은 여전히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음에도 네 발로 달려 창고로 빠르게 접근했다.
진수가 처음 마약 한 뭉치를 꺼냈을 때 퍼져 나간 냄새를 맡은 듯했다.
-쾅!
창고 앞으로 뛰어온 녀석은 즉시 두터운 문을 뜯어버렸다.
“후욱, 후욱...!”
하지만 창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상자도 누가 건드린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웬 소란이냐?”
잔뜩 화가 나 달려온 가국의 뒤로 평천이 나타났다.
항상 제멋대로 굴던 가국이 웬일로 조용해진다.
“그, 그게... 누가 물건을 건드린 거 같아서....”
“물건을?”
“네, 네.... 냄새가 진해졌습니다.”
“쯧. 네 녀석이 하루 종일 약 생각만 하니까 그런 거겠지. 한 번 열어봐라.”
가국은 자신을 하찮게 보는 평천의 눈빛을 받으며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파란 가루들이 비닐에 잘 포장된 채로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아...? 이게 왜....”
뇌를 찌르는 듯 자극적인 향기에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이성을 단단히 붙잡는다.
“뭐라고 말을 해봐라.”
“아, 아닙니다....”
가국은 고개를 숙인 채 상자를 다시 닫았다.
* * *
RD 본사에서 나온 진수는 곧장 헌터범죄전담기관으로 향했다.
박철준 수사관에게 헌터 범죄 관련하여 볼 수 있겠냐 문자 메시지를 보낸 그.
새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철준 수사관은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아, 김진수 헌터. 잘 지냅니까.”
박철준 수사관이 퀭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며칠을 집에 들어가지 못했는지 옷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고 머리는 까치집을 만들고 있었다.
“예, 그럭저럭요. 바쁘실 테니까 바로 본론부터 말씀드릴게요. 지난번에 말씀드린 RD에서 마약을 유통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진수의 말에 박철준 수사관의 눈빛이 변했다.
피로감에 절어있던 모습이 사냥에 나서는 굶주린 맹수의 기세로 바뀌었다.
“혹시, 증거도 있습니까?”
박철준의 물음에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비닐에 작게 포장된 파란 가루였다.
“가능하다면 지금 바로 쳐들어가야 합니다.”
할 땐 하고 놀 땐 놀자
“의심이 가는 정황은 발견했지만.... 물증을 잡아내진 못 했습니다.”
새벽에 RD 본사를 급습한 헌터범죄전담기관.
하지만 그들은 진수가 제보한 마약을 찾아내지 못했다.
“의심이 가는 정황이라면...?”
“말씀해주신 창고로 바로 향했는데 그곳에 인사불성이 된 헌터가 한 명 있었습니다.”
상황을 들어보니 창고에 진수가 말한 대로 상자도 있었고, 공기 중에 달큰한 냄새도 났다고 한다.
하지만 파란색 가루로 된 마약은 찾지 못했고, 파손된 상자 위에 복부가 팽창된 채로 누워있는 사내가 있었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그에게서 마약 반응을 검사하기 위해 머리카락과 혈액을 채취해왔다.
‘아, 설마....’
모든 설명을 듣고 나니 짐작 가는 바가 있는 진수.
“그 헌터, 인중이 길고 귀가 크던가요?”
“예, 어떻게 아셨죠?”
가국이다.
참을성 없는 원숭이가 일을 낸 것이 분명했다.
헌터범죄전담기관이 도착하기 전에 놈이 참지 못하고 마약을 털어먹은 것이리라.
‘복부가 팽창된 건... 내가 친 장난 때문이겠지.’
진수는 포장되어있는 마약을 [차원의 틈]으로 빼냈다.
그러면서 같은 부피의 헌터 전투식량을 채워 놨다.
상자만 뜯어서 보면 마약들이 멀쩡히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가국은 아마 약에 취해서 자기가 마약 10%에 전투식량 90%를 먹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마약인 줄 알고 코로 미숫가루를 흡입한 셈이었다.
“아...닙니다. 그냥 찍어봤어요.”
RD 본사 수색을 다녀온 헌터범죄전담기관의 요원은 채취해온 머리카락과 혈액에서 마약 양성 반응이 나오면 그걸 빌미로 수사를 확대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마약 양성 반응은커녕 사람털이라는 결과나 나오나 모르겠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진수.
마약 유통으로 RD를 잡아넣는 것이 물 건너간 상황에 그가 헌터범죄전담기관에 아직 남아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감식반에서 그가 가져온 마약을 분석하고 있었기 때문.
-고블린 [고돌]이 블루 오아시스에 관심을 보입니다.
-드워프 엔지니어 [토니]가 블루 오아시스에 흥미를 가집니다.
-코볼트 [돈다발]이 블루 오아시스를 유심 깊게 봅니다.
.
.
.
-야구자 [강다리]가 블루 오아시스를 탐냅니다.
파란 가루, 블루 오아시스를 [차원의 틈]에 넣은 직후 거의 대부분의 전이자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취할 수 없도록 제외를 시켜놓긴 했지만 전이자들이 단체로 약쟁이가 될 뻔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진수로서는 궁금증이 차올랐다.
대체 이 약은 뭔가?
“김진수 헌터. 감식반에서 가져온 마약에 대한 검사 결과가 나왔다고 하는군요.”
때마침 박철준 수사관이 반가운 소식을 들고 왔다.
“그 파란 가루의 이름은 블루 오아시스. 중국의 지린성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던 마약이라고 합니다. 김진수 헌터가 가지고 온 것은 아주 농축된 형태이고, 이걸 물에 희석시켜서 파란 물약으로 판매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비닐에 포장이 되어있음에도 강력한 향기를 품었던 것이 농축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블루 오아시스는 몬스터의 사체로 만든 약입니다. 마석이 섞여 있어서 비각성자보다는 오히려 각성자들한테 더 큰 자극과 유혹, 중독성을 지니고 있어요. 인간한텐 독성이 있어서 오래 복용하면 신경계의 손상이나 시력의 상실, 신체 능력의 저하 등의 악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음... 몬스터한테는요?”
“몬스터를 소재로 만든 약이다보니 몬스터들한텐 크게 악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몬스터를 더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보고도 있네요. 이거 몬스터 손에 들어가지 않게 주의해야겠군요.”
“아, 그래요?”
“예. 대신 인간과 유사성이 있는 몬스터한테는 중독성이 좀 있다고 합니다.”
가국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녀석의 모습으로 봤을 때, 블루 오아시스가 몬스터에게 주는 해로움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았다.
중독이 된다고는 하지만 블루 오아시스가 주변에 없을 때는 딱히 찾지 않는다.
여기에 몬스터를 강하게 만들어주기까지.
놈의 머리카락이나 피에서도 약물 양성 반응은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오히려 잘 됐어.’
RD에서는 진수가 마약을 가져갔다는 걸 모른다.
여전히 그들의 소속으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약을 들여온다는 정보를 미리 파악해서 빼돌리면 된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다들 약이나 빨아라.’
진수는 [차원의 틈]의 블루 오아시스에 걸어놨던 제한을 일부만 남겨놓고 풀었다.
전이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약을 가져갔다.
-[고돌]이 블루 오아시스를 섭취하여 성장합니다.
-[고돌]의 성장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민첩 +1
역시 약으로 몸 키우는 맛을 아는 고돌이가 스타트를 끊었다.
이후로도 블루 오아시스를 먹은 전이자들이 성장하여 힘 1, 민첩 3, 내구 1, 마력 2가 올려주었다.
-블루 오아시스를 섭취한 전이자들이 당신을 칭송합니다.
-블루 오아시스의 약효를 받고 있는 이들이 당신의 말을 귀담아 듣습니다.
-신탁을 내리십시오.
‘약 기운에 취해서 신탁을 받는 거면 그냥 환청 아니냐.’
진수는 기분이 굉장히 복잡해졌다.
‘신도들한테 마약 먹이고 숭배 받는 사이비 교주가 된 기분이네.’
하지만 기분은 기분이고 챙길 건 챙겨야 하는 법.
이내 진수가 작게 중얼거렸다.
“할 땐 하고 놀 땐 놀자.”
-서로 떨어져있는 전이자들이 동시에 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당신의 종교에 이적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남습니다.
-신탁의 효과로 당신을 믿는 이들의 휴식 효과가 상승합니다.
블루 오아시스를 먹은 전이자들이 춤을 추는 모습이 됐다.
주변에는 음표가 떠다니는 것이 상당히 즐거운 듯했다.
진수는 신이 난 녀석들을 보다 이내 상태창을 닫았다.
박철준의 설명이 아직 안 끝났으니까.
“이 블루 오아시스가 중국에서는 한동안 큰 이슈였다고 하더군요. 요즘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니 우리나라에 흘러들어왔을 줄이야....”
박철준이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우선 수도권을 중심으로 마약이 풀리는 정황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마약 범죄 쪽은 굉장히 엄중한 사안이니 최대한 인원을 돌려봐야겠군요.”
“저도 계속해서 관련된 정보 생기면 공유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번번이 신세를 지게 되네요.”
진수는 박철준의 인사를 받으며 헌터범죄전담기관을 나섰다.
다시 RD의 본사로 움직이는 그.
새벽에 난리가 났었다는 걸 전혀 모르는 척 방문했다.
“저쪽 치우고!”
“지하 1층 청소할 사람 좀 더 보내줘요!”
RD 본사 분위기는 굉장히 어수선했다.
1층 출입구와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통로가 모두 난장판이 되어 있었고, 지하 1층에서부터 지상까지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뭔 일이 더 있었나...? 기관에서 건물에 구멍을 뚫을 정도로 움직이지는 않았을 텐데....’
진수는 지나가는 RD 소속 직원을 붙잡아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어휴, 새벽에 평천 형님께서 한바탕 뒤집어놓으셨소. 아주 천지가 뒤바뀌는 줄 알았소.”
그는 조선족 말투로 깜짝 놀란 심경을 전한다.
“가국 형님을 들이받는데, 아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겠소? 뭐, 가국 형님께서 고개를 처박고 싹싹 빌어서 살았지.”
‘이 구멍이 들이받아서 생긴 거라고...?’
거의 땅굴이나 다름없는 구멍을 보며 진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저 힘이 조금 센 호구인 줄 알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녀석이었던 것이다.
지하 1층, 블루 오아시스가 보관되어 있던 창고까지 시원하게 뚫려있는 구멍.
진수가 그 흔적을 살피는데 지하에서부터 말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헤, 평천 형님. 제가 이 코로. 물건 훔쳐간 놈을 잡아다 바치겠습니다.”
굉장히 어눌하고 느릿한 말투.
그런데 익숙한 목소리였다.
“지금은 아무런 냄새가 안 난다고 하지 않았느냐?”
뒤이어 들리는 것은 평천의 목소리.
굵고 힘찬 음성이다.
“예에. 어디다가 숨겼는진 모르겠지만, 아주~ 아~주 조금은 어제 새벽에 왔던 인간들 쪽에서 납니다. 헤.”
“가국 말이 맞습니다. 제가 추적을 해봐도 이 나라의 헌터범죄전담기관이라는 곳에서 미약하게 블루 오아시스의 냄새가 납니다. 누군가가 훔쳐서 신고를 한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 멍청한 놈이 이번 샘플을 다 처먹었으면 아마 이렇게 살이 찌는 게 아니라 약에 취해서 한동안 잠만 퍼질러 잤겠죠.”
“나아아아안 멍청하거든?”
이어서 말하는 이는 가국과 투닥거리던 알유라는 자였다.
서로 으르렁거리더니 은근히 편을 들어주는 모습이다.
알유의 말을 들어보니 조금 얼빠진 소리를 하고 있는 게 가국이었던 듯했다.
주사를 부리는 것처럼 다량의 블루 오아시스에 취해 있는 상태였다.
‘파란 가루를 더 얻는다고 해도 전이자들이 한 번에 다량을 섭취하게 하면 안 되겠어.’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진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나저나, 기관에는 내가 갖고 있던 마약 중에 일부만 내놨는데 그 냄새를 맡았다고? 거리가 멀어도 농축된 가루 상태면 쉽게 냄새를 맡는 모양이네. 저 원숭이 상태가 완전히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서 작업을 좀 쳐야겠다.’
진수는 평천이 거대한 구멍을 뚫어놓은 것에 놀랐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놀란 점이, 평천의 공격을 받은 가국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점이었다.
몸으로 버텼든 어떤 기술을 사용했든, 가볍게 볼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가국은 살짝 맛이 가있는 상태.
거기에 멀리 있는 헌터범죄전담기관의 블루 오아시스 냄새는 맡아도 바로 근처에 있는 진수가 [차원의 틈]에 보관한 마약 냄새는 못 맡고 있다.
진수의 머릿속에 가국을 사냥할 계획이 떠올랐다.
“알유 네 말대로 물건이 새나간 것은 맞는 것 같다. 가국 이놈이 정신 차리려면 며칠은 더 있어야 할 테니 네가 잘 데리고 다니면서 물건을 찾아봐라.”
“알겠습니다, 형님.”
“저어 괜찮습니다, 형님. 형님한테 맞은 게 아파서 글치....”
창고 쪽에서 나누던 대화는 가국과 알유가 탈취당한 블루 오아시스를 다시 찾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진수는 내심 기뻐하며 자리를 떴다.
‘준비해야 할 게 몇 개 있겠네. 우선 동묘에 공방부터 가자. 겸사겸사 저주받은 신의 창도 같이 확인해보고.’
* * *
“흠, 어디서 매번 이런 신기한 것들을 찾아오는 거요?”
공방 주인 김건이 저주받은 신의 창을 살피며 말했다.
눈에 감도는 마력.
식별 기술을 사용하는 듯했다.
“소재는 확실히 던전제 중에서도 굉장히 좋은 재료를 썼수. 근데 어떤 기능이 있는지는... 내 분야가 아닌 쪽이라서 알 수가 없겠네.”
이내 마력을 갈무리하며 식별 기술을 해제한 김건.
그의 주 종목은 소재와 마력회로 방면이었다.
저주받은 신의 창이 훌륭한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것까지는 알아낼 수 있었지만 성능까지는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이건 마법 아이템이나, 성직 계열 그런 쪽을 전문으로 하는 감정사를 찾아가는 게 좋겠수.”
진수는 그의 결론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보통 물건은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창날에 묻어 있는 검붉은 것만 마지막으로 봐주실래요?”
창을 팔던 상인의 말에 따르면 신의 피라고 했다.
진수의 물음에 다시 식별 기술을 사용하고 창날을 살피는 김건.
“흠, 이건....”
의외
김건이 식별 기술을 해제하며 입을 열었다.
“이건 페인트요. 그것도 아주 싸구려 페인트.”
“예?”
“그냥 페인트 가게에서 제일 싼 페인트 가져다가 창술 연습 같은 거라도 한 모양이우. 이건 벗겨내는 게 낫겠는데?”
‘그 사장님은 진짜 쥐뿔도 모르고 있던 게 맞았구나.... 신의 피는 무슨....’
진수는 동묘 시장 좌판에서 창과 아이템을 팔았던 상인을 떠올렸다.
창에 묻어 있는 게 신의 피라고 하던 상인.
아무래도 페인트의 신이었나 보다.
“그거 페인트 좀 싹 다 제거해주세요.”
“잠깐만 기다리쇼.”
-우우웅!
김건은 공방 구석에 있는 벨트 그라인더를 켰다.
빠르게 돌아가는 벨트에 사포가 달려 손쉽게 날을 갈아주는 도구였다.
차분히 창날에 묻은 페인트들을 제거하기 시작하는 그.
-위이잉! 팅!
그러다 돌연 벨트 그라인더의 벨트 사포가 끊어졌다.
“어이구.”
“사장님 괜찮으세요?”
“이거 날이 보통 예리한 게 아니네. 페인트가 벗겨지고 나니까 확실히 진면목이 나와. 여 벨트만 바꾸고 금방 해드릴게.”
페인트가 굳어 있는 걸로 봐서는 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창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이 아주 첨예하게 살아있는 창.
김건은 벨트 그라인더를 다시 세팅하고 조심스럽게 페인트를 마저 떼어냈다.
“여깄수.”
페인트를 완전히 제거한 저주받은 신의 창.
특이하게도 날의 모서리가 검은 색이었다.
“재료 원래 색상은 은빛이라 변색이 된 게 아닌가 싶긴 한데... 지금도 워낙에 예리해서 제 역할을 잘 하고 있으니.... 굳이 더 갈거나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수.”
김건이 창날에 대해서 짧게 감상을 말했다.
“음...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진수는 그의 말을 듣고 창으로 손가락 끝을 살짝 찔러봤다.
마치 두부에 칼이 들어가는 듯 거의 저항이 느껴지지 않았다.
-스윽
의도보다 훨씬 깊게 들어간 창날.
그는 깜짝 놀라 날을 빼냈다.
-주르륵
손가락 끝에서부터 출혈이 생겼다.
‘[상급 재생력]이 왜...?’
[중급 재생력]에서 [상급 재생력]으로 향상된 특성.
덕분에 회복력이 굉장히 증가했었는데, 저주받은 신의 창에 찔리고 나니 출혈이 쉽게 멈추지 않았다.
“어이구, 거 예리하다는데 뭐하는 거요?”
그 모습을 본 김건은 화들짝 놀라서 응급처치 도구를 가져왔다.
“이게... 허, 참....”
진수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
시간이 지나자 [상급 재생력]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해 피가 멎었다.
‘뭔가 있긴 있구나.’
저주받은 신의 창이 이름만 그럴듯한 게 아니라는 걸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사장님, 혹시 아이템 감정 하는 분 누구 아는 사람 있으세요?”
진수는 김건에게 아이템 감정사를 소개 받았다.
동묘 시장 한 구석에 있는 감정사.
김건보다는 가게에 손님이 더 많은 편이었다.
“어서오세요! 뭘 도와드릴까요?”
“이거 좀 감정 받고 싶어서요.”
“예, 아이템 감정 비용은 300만 원입니다.”
동묘 시장 같은 곳에 정체불명의 아이템이 굴러다니는 이유 중 하나.
바로 값비싼 감정 비용이었다.
진수가 가지고 있는 [투명화] 아이템처럼 착용과 동시에 그 기능을 알 수 있는 아이템이 있는 반면, 아이템인 것은 맞는데 능력을 바로 알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개중엔 정말로 별 효과가 없어 값이 안 나가는 것들도 있었기에 감정을 받지 않고 시장에 싸게 풀리기도 했다.
‘물건은 8개에 500만 원 주고 샀는데... 하나 감정 비용이 300만 원이니까.’
하지만 저주받은 신의 창은 확실하게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감정 비용을 아까워할 필요가 없다.
진수는 바로 아이템 값을 지불했다.
“음, 이거 되게 특이하네요.”
감정사가 입을 열었다.
“일단 아이템 자체적인 능력은 굉장히 약화되어 있는 상태예요.”
“약화요?”
“예. 이걸 사용하면 사용자의 신체 능력을 향상시켜주고, 언데드나 악마형 몬스터 이런 놈들한테 더 많은 타격을 주는 아이템이거든요? 뭐 흔히 말하는 성검의 창 버전이라고 할 수 있죠.”
설명을 들을수록 진수의 마음속에서 저주받은 신의 창의 주가가 점점 올라갔다.
“근데, 이 능력의 근원이 마력이 아니네요. 아이템 능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근본적인 힘의 연결이 굉장히 미약한 상태라서... 원래의 능력은 기대하기가 어렵겠어요.”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다시 추락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저야 감정만 하는 거니까 그거까진 모르죠. 힘의 근원이 되는 요소를 찾아서 연결하거나 뭐 그러면 본래의 기능을 할 거 같네요.”
감정사가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다.
“아... 알겠습니다.”
실망감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진수.
“근데....”
창을 챙겨서 나가려는데, 감정사가 설명을 이었다.
“원래 기능은 아닌데, 창날에 웬 저주가 걸려있네요? 사용자한테 안 좋은 저주는 아니고. 출혈의 저주예요. 여기에 베이면 피가 콸콸 나온다. 뭐 그런 거죠.”
진수는 아까 공방에서 손가락을 찔렀을 때가 떠올랐다.
[상급 재생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가 잘 멎지 않았었다.
그게 바로 출혈의 저주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었다.
“창 재질이 뭔지는 제 분야가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소재가 튼튼하다면 출혈의 저주만 붙어있어도 상당히 고급 아이템 취급을 받습니다. 아마 몇 천만 원은 훌쩍 넘을 걸요?”
소재는 김건에게 이미 검증을 받았다.
‘마지막에 좌판에서 산 건 완전 이득 봤네. 아, 혹시 다른 물건들도...?’
진수는 마지막 좌판에서 샀던 나머지 6개의 물건도 모두 꺼냈다.
감정사에게 조심스럽게 내밀어본다.
“...?”
그가 내민 물건들을 보더니 감정사가 궁금증을 가득 담은 눈빛을 보내왔다.
“저기, 고객님. 아이템이 아닌 물건은 제가 감정을 할 수가....”
나머지 물건들은 아이템조차 아닌 꽝이었다.
이미 아이템과 저주받은 신의 창 두 개만 해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물건들이었으니 아쉬울 건 없었다.
진수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감정소를 나왔다.
‘이거 성능 테스트를 좀 해봐야겠다. 어차피 오크들을 좀 잡아야 할 일이 있으니까 겸사겸사....’
저주받은 신의 창을 들고 오크 서식 필드로 향한다.
지금 진수의 실력이라면 맨손으로도 오크들은 상대할 수 있다.
조금 미숙한 무기를 써도 위험할 일은 없었다.
* * *
“쿠워억...!”
상체에 문신이 새겨진 오크가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졌다.
-오크 샤먼 [이름 없음] 차원 전이 성공.
-오크 샤먼 [이름 없음]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창에 꿰뚫린 녀석이 이내 사라진다.
“오, 운이 좋군.”
오크 서식 필드로 온 진수.
그는 저주받은 신의 창을 사용해보며 오크들을 학살하다시피 사냥했다.
그러다 발견한 필드 보스, 오크 샤먼.
기존의 필드 보스였던 오크 워리어는 진수의 상태창에서 [고블린]이 되어버렸기에 새로운 필드 보스가 생긴 것이다.
‘이름은... 스랄이라고 해주자.’
진수는 오크 샤먼의 이름을 지어주고 나서 창을 몇 바퀴 빙빙 돌렸다.
이제는 꽤나 손에 익은 모습이었지만, 전기톱이나 도끼 등을 다룰 때와 비교해보면 아직 어색한 느낌이 있었다.
“아, 역시 창을 직접 쓰기는 힘드네. 써먹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좀 찾아봐야겠어.”
저주받은 신의 창은 확실히 성능이 좋았다.
창 자체가 일단 굉장히 튼튼했고, 출혈의 저주 때문에 일단 적이 스치기만 하면 계속해서 피를 흘리게 만들었다.
‘근데 그건 전기톱도 마찬가지 아니냐?’
창을 쓰면서 계속해서 들었던 의문이 바로 이것이다.
결국 저주받은 신의 창은 [차원의 틈]으로 들어갔다.
물론 전이자들이 가져가지는 못하게 해두었다.
“우선 지금 당장 원숭이 사냥에 써야 하니까.”
진수가 김건에게 방문했던 것, 오크 서식 필드에 온 것, 저주받은 신의 창의 성능을 테스트해본 것.
모두 가국을 잡기 위한 준비의 일환이었다.
‘이제 준비는 거의 끝났다. 김건 사장님한테 부탁드린 물건을 받고 세팅만 해놓으면 돼.’
진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오크 서식 필드에서 떠났다.
그리고 헌터넷엔 오크 서식 필드에 오크가 갑자기 확 줄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 * *
“와, 그새 복구를 다 했네?”
오크 서식 필드에서 RD 본사로 온 진수는 어느새 다 메워진 구멍을 발견했다.
요즘 한국에서 돈을 쓸어 담고 있는 단체답게 긴급 복구가 가능한 재료들을 사용한 듯했다.
짧게 감탄을 한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킁킁
1층 로비에서 잠시 눈을 감고 코를 벌름거리는 진수.
지하 주차장을 이용하는 경우 아니면 RD 본사에 방문하는 대부분은 1층을 거친다.
‘알유나 가국이나 차를 타고 다니는 것 같지는 않았어.’
그가 후각으로 찾는 것은 견원지간의 둘.
공기 중에 남아있는 냄새의 흔적을 훑는다.
첫 만남 때처럼 엘리베이터를 탄 듯했다.
진수는 승강기에 타서 가장 높은 층을 눌렀다.
올라가다가 그들이 빠져나간 흔적을 다시 찾으면 될 것이다.
-위이이잉- 띵
빠르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눈을 감고 집중을 하던 진수.
그런데 그가 누르지 않은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평천과 함께 면접을 봤던 주선생이 들어왔다.
“아, 또 뵙네요. 김진수 헌터였죠?”
그녀는 상당히 반갑게 인사를 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진수에 대해서 꽤나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옥상 가시나 봐요? 저도 가끔 올라가서 바람을 쐬곤 해요.”
주선생은 가장 꼭대기 층이 눌려있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하하, 제가 높은 곳을 좋아해서....”
적당히 둘러댄다.
물론 그런 이유로 올라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의심을 사는 것보단 그냥 알유와 가국을 내려가면서 찾는 편이 나았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다.
“면접 때는, 깔창 같은 걸 까셨었나 봐요. 그때 키가 좀 크다고 봤는데.”
주선생이 어색했는지 말을 다시 걸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같이 서니 진수와 주선생의 키가 엇비슷한 정도였다.
“그날은 컨디션이 좋아서 그렇게 보셨나 봐요. 하하. 오늘은 평소 힘의 90% 정도네요.”
“호호, 그런가요? 그나저나, 그날 가입하시고 활약이 꽤 대단하다고 하던데.... 가국이 노리던 몬스터도 먼저 해치웠다면서요?”
데스 트렌트에 대한 이야기인 듯했다.
“녀석이 돌아와서는 엄청 씩씩대더라고요. 다음에 한 번 저랑 사냥 같이 가요.”
가볍게 웃으며 말하는 주선생.
진수도 마주 미소를 지으며 그러자고 답을 했다.
그러나 웃는 표정과는 달리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가국보다 윗줄이란 말이지?’
요괴형 몬스터들은 자신보다 위인 녀석들을 부를 때 형님, 누님이라고 호칭을 붙인다.
그런데 주선생은 가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명백히 자신보다 아래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위아래를 정하는 기준이 단순히 나이는 아닐 것이다.
-띵
엘리베이터가 제일 위층에 도착했다.
함께 내리는 진수와 주선생.
진수는 사실 옥상으로 가는 길을 몰랐기 때문에 미묘하게 주선생보다 살짝 느리게 움직였다.
이윽고 둘은 옥상 위로 올라왔다.
확실히 탁 트인 하늘을 보니 오랜만에 여유를 갖는 것 같고 기분이 좋아졌다.
“안 그래도 가국이 얘길 했는데 마침 저기에 있네요.”
진수가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는데 주선생이 바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건물 앞쪽을 보는 진수.
그곳엔 가국과 알유가 있었다.
꽤나 멀리 있어서 자세한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중급 청각]에 들리는 대화가 딱 그들이었다.
“야, 원숭이. 아직도 취해있냐?”
“나 아안 취했거든? 처음부터 취한 적도 없거드은?”
여전히 서로 틱틱거리고 있는 둘.
그러다 갑자기 동시에 고개가 같은 방향으로 돌아간다.
“맞지?”
“맞아아.”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르게 어디론가 달려갔다.
“뭐 재밌는 일이라도 떠올랐나 봐요?”
그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진수.
주선생이 궁금하다는 듯 물어온다.
“네? 아, 이따가 친구랑 놀기로 해서요. 흐흐흐.”
진수는 못내 즐거운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냄새
가국과 알유는 지금 상황이 아주 기가 막혔다.
분명하게 느껴지는 블루 오아시스의 냄새를 맡고 나왔는데, 조금 지나고 나니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뭐야? 너도 분명히 맡았지?”
“어어. 달콤한 냄새가 났는데....”
둘은 후각에 집중하며 주변의 냄새를 맡았다.
“엇?”
“난다, 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나는 농축된 블루 오아시스의 향기.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달려 나갔다.
“허어,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어떤 자식이 장난질이야...!”
“순간이동을 쓰는 놈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이렇게 냄새가 끊어질 수가 없는데....”
알유가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론을 해본다.
물건을 들고 움직이면 냄새의 흔적이 남는다.
후각에 예민한 가국과 알유는 공간압축 기술이 적용된 가방이나 주머니에 들어간 물건도 희미하게나마 맡을 수 있었다.
특히 블루 오아시스처럼 자극적인 냄새가 나거나 진은과 같이 역한 경우는 더욱 쉽게.
“야아... 이번엔 두 곳이다.”
가국이 턱을 벅벅 긁으며 말한다.
여전히 블루 오아시스를 과량 복용한 후유증이 남은 듯 어눌한 말씨였다.
알유는 그런 가국의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놈을 믿고 따로 찾아보자고 하긴 좀 그런데....’
“일단 한 곳부터 쫓아가보자.”
알유는 둘이 같은 곳으로 가보자고 권했다.
“흥, 자신 없냐? 내가 먼저 찾을까봐?”
“너 혼자 가면 또 못 참고 물건 다 처먹을까봐 그러지. 이 원숭이 새끼야!”
그의 말에 정곡이 찔린 듯 움찔하는 가국.
알유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뱉었다.
“에휴.... 그러다 진짜 평천 형님한테 맞아 죽는다 너.”
평천의 이름이 나오자 가국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복부를 쓰다듬는 것이, 얼마 전에 맞았던 게 떠오른 듯했다.
“아아알겠어. 그럼 빨리 가보기나 하자. 지금도 계속... 멀어지고 있으니까.”
주눅이 든 가국이 알유를 재촉했다.
냄새가 나는 두 군데 중에서 가까운 곳을 향해 다시 뛰어가는 둘.
하지만 그들이 다가가니 또 냄새의 흔적이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알유와 가국 둘 다 인내심이 바닥났다.
“크아악! 어떤 새끼가 자꾸 이딴 짓거리를 하는 거야!”
블루 오아시스 냄새가 나서 쫓아가면 사라지고, 또 다른 곳에서 냄새가 난다.
또 뒤쫓으면 금방 없어지고 다시 새로운 위치에서 나타난다.
이제는 약을 올리는 듯 두 군데가 아니라 세 군데, 네 군데 점점 수가 늘어났다.
“따로 움직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알유가 결국 가국에게 각자 쫓자고 말했다.
누가 장난질을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추적하는 수가 늘어나면 언젠가 실수를 하지 않겠냐는 계산이었다.
“크흐흐. 그래! 그래!”
알유의 말에 신이 난 듯 대답하는 가국.
놈의 태도 때문에 알유는 말을 물려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국이 블루 오아시스를 찾아서 다시 흡입한다고 해도 최소한 범인은 잡을 수 있을 테니까.
“너, 평천 형님이 이번에도 실수하면 진짜 반 죽일 거라고 그러셨어. 명심하고 움직여라.”
“키헤헷!”
가국에게 마지막으로 경고를 전했지만 녀석은 듣지도 않고 뛰어가 버렸다.
알유는 작게 한숨을 쉰 뒤에 가국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킁, 킁!
“흐으응...! 이놈, 드디어 실수를 했구나!”
알유와 떨어져 나와 블루 오아시스 냄새를 뒤쫓은 가국.
이후로도 서너 번을 놓쳤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매번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지만 조금 전에 도착한 곳에서 하수도로 내려간 희미한 냄새 자국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냄새가 아래로 깔리는 걸 이용해서 우릴 속였어! 교활한 놈...! 크흐흐. 알유는 아직도 머엉청하게 무작정 뛰어다니고 있겠지? 흐흐흐.”
-텅
가국은 맨홀 뚜껑을 열고 신속하게 내려갔다.
놈은 지금까지 냄새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비밀을 알아냈다고 자신했다.
앞서 움직였던 곳들 중에는 지하로 통하는 구멍이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가국은 아직도 블루 오아시스에 반쯤 취해있었기에 그 정도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철벅
한달음에 하수도로 뛰어든 녀석.
먼저 코를 찌르는 악취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나서 바로 이어지는 농축된 블루 오아시스의 희미한 향기를 맡고 씨익 웃는다.
“잡았다, 요놈!”
-뿌드득!
“사람이 없는 곳으로 다닌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크흐흐흐!”
주변을 한 번 쭉 둘러본 가국은 이내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체구는 인간 형태일 때보다 오히려 작아진다.
대신 상체는 커지고 몸에는 근육이 울끈불끈 올라왔다.
얼굴은 창백하고 온몸엔 검푸른 털이 자라난다.
변이를 마친 가국은 흰 안광을 번뜩이며 냄새를 맡았다.
제어가 풀린 후각이 명확하게 블루 오아시스의 냄새를 쫓았다.
“이거 식은 죽 먹기구나! 캬하하하!”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녀석이 네 발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악취가 나는 물을 피해서 벽을 타며 뛰는데 그 속도가 엄청났다.
한참을 달려 나가던 가국은 하수도 내에 물길이 모이는 공동에 도착했다.
블루 오아시스의 달콤한 향기도 공동에 머물러있었다.
-킁킁!
“여기 어딘데....”
녀석이 도착했음에도 블루 오아시스의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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