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ida 1
도서명: 앙신의 강림 1
출판년도: 2004. 1. 16
지은이: 쥬논
발행인: 이순영
펴낸 곳: 북박스(주)
봉사자: 이소라
프롤로그
아르만 제국의 서남방에 위치한 다트리인 성은 제국 남부의 상업 중심지인 대도시
프라인을 방어하는 제일 관문일 뿐만 아니라, 남부 전체를 방어하는 중심축이다.
또한 이곳에는 아르만 제국의 핵심 전역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붉은사자 기사단이
머물고 있다.
그 이름만으로도 위풍당당하던 다트리인 성이건만 지금은 온통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성내에 팽배해진 긴장감만큼 분위기도 음울하고 날씨까지 음산하다.
휘이잉
약간은 빛이 바랜 붉은 패너플리(Panoply; 갑주)를 장착하고 한손에는 키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장창을 꽉 움켜 쥔 기사들. 그들의 눈은 굳은 결의로 빛나고 움켜쥔
주먹에는 힘이 가득 들어가 있다. 성벽 위에 일렬로 늘어선 기사의 숫자만 해도
모두 200 여명. 제국 최고를 다투는 붉은사자 기사 단 전원이 성벽을 사수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대단한 전쟁이라도 치를 듯한 분위기다. 성채 아래에서도 수만이
넘는 군사들이 각자 무기를 든 채 북을 울리며 두려움을 이기려고 애쓰는 모습이고,
곳곳에 배치된 흰 로브의 마법사와 신관들이 공포를 이기는 주문을 걸며 병사들을
독려하는 중이다. 어디 그뿐인가? 성채의 첨탑에는 솜씨 좋은 궁수들과 석궁이
하늘과 땅을 향해 날카로운 화살촉을 빛내고 있다.
붉은사자 기사들의 패너플리에는 상위의 방어 마법 주문이 걸려있는데다, 기사의
움직임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근력증가, 가속마법, 그리고 체력회복 마법도 함께
보완되어 있다.
하지만 그 위용의 이면에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공포가 섞여 있었다. 기사단의
이름이 말해주는 용맹한 사자 같은 용기로도, 다이아몬드처럼 굳건한 신앙심으로도,
넘치는 기사의 신념으로도 온몸에서 배어나오는 공포의 감정을 미처 숨길 수가
없다.
쏴아아
무섭도록 긴 침묵이 이어지던 어느 한 순간!
바람소리만 황량한 가운데 다트리인 성 남쪽 방향으로부터 무언가 기분 나쁜
먹구름이 바람을 타고 성을 향해 서서히 밀려들어오자, 첨탑의 궁수들로부터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웅성거림은 이내 전채 병사들에게 퍼져나가며 성 전채를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마법사들이 몇 차례 공격 마법을 퍼붓고, 신관들이 영창을
외워봤지만 무소용, 마치 해일에 돌을 던 진 듯이 흔적도 없다.
어느새 코앞까지 검은 먹구름이 소용돌이처럼 성을 중심으로 조여 들더니, 마치
지옥이 지상에 아가리를 벌리듯 동체 중앙을 블랙홀처럼 쩌억 개방했다.
쑤아악
동시에 지상에는 뿌연 안개가 사방에 깔려 성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메워
버렸다.
"저, 저기다!"
기사 한명이 무엇을 발견한 듯 목 터지게 외치자 군중들의 시선이 모두 한 지점에
가서 멎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 끝, 안개 가득 차 희끗거리는 허공에는 검은
로브를 눌러써서 얼굴도 보이지 않는 괴인이 유령처럼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저자가 그 악마다. 전원 공격! "
기사단장의 고함과 동시에 수천 개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장거리 마법이
난무하며, 붉은 사자 기사 들이 검에서 오러(aura)를 뿜어내며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막상 이 엄청난 공격을 한 몸에 받은 괴인은 그저 로브 아래로 비릿한
웃음을 보여주며 서서히 두 손을 벌려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릴 뿐이었다.
츠츠츠
그때 뭔가가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검은 기류들이 괴인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고, 그 기류에 휘감긴 것 은 무엇이든, 그것이 화살이든,
사람이든, 미스릴로 만들어진 패너플리든, 심지어 기사들이 뿜어내 는 오러나
마법까지도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소금이 물에 녹는 것처럼, 어이없고도
허무하게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기사와 마법사들의 두 눈에 떠오른 믿을 수
없다는 의구심은, 이내 지독한 절망과 공포로 바뀌었다. 어느새 성벽을 넘어온 짙은
안개는 바로 옆 동료의 얼굴도 보이지 않을 만 큼 찐득하게 대지를 감싸 안았고, 그
안에서는 듣기에도 끔찍한 비명소리가 밀물처럼 퍼져나갔다.
크아악!
꺼억!
안개에 휘감긴 모든 병사들은 목을 쥐어뜯고 손으로 석벽을 긁으며 괴로워하며 하나
둘 고꾸라져갔다. 치유 마법을 뿌리는 신관들도 병사들의 모습이 온통 얼굴이
뭉그러지고 온몸에 기포가 돋아나며 칠 공에서 피가 터져 나오자 질린 표정으로
비칠거리며 물러설 뿐 속수무책이다.
" 이, 이건 말도 안 돼. 아아, 이건 재앙이야! "
" 으아 아아! 제발 살려줘! 으아 아아아!"
" 아아아~ 신이시여, 제발 저희에게 자비를. "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성문을 열고 도주하려 했지만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고꾸라지며 뭉그러진 몸뚱이를 대지에 처박았다. 성벽 위 기사들 상황도 비슷해서
온 몸에 오러를 두르고 안개의 접근을 막아 보았지만 마나가 고갈 되면서 오러가
수그러들자를 두르고 안개의 접근을 막아 보았지만 마나가 고갈 되면서 오러가
수그러들자 이내 피부에 기포가 솟구쳐 올라오며 무너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붉은사자 기사단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기사단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악을 쓰며 저주를 퍼붓더니, 발악이라도 하듯이 신형을 날려 괴인에게 폭사했다.
같이 죽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푸화학
하지만 그런 갸륵한 시도마저 괴인의 손에서 피어오른 녹색 불꽃과 부딪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녹색으로 영롱히 빛나는 불꽃이 오러를 뚫고, 그리고
패너플리마저 뚫고 몸에 틀어박히자 기사 단장은 온몸이 갈가리 찢겨져나가고
타들어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수십 미터 아래 성바닥으로 거칠게 곤두박질 쳐
버렸다.
츠츠츠
뱀의 비늘처럼 일어나는 녹색 불꽃은 삽시간에 기사단장을 태워 버리고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순식간에 거대한 뱀처럼 똬리를 틀며 성탑 10여개를 줄지어
휘감았다.
안개가 다트리인 성을 뒤덮은 지 반시간,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풀 한 포기도
남기지 않은 채 짙은 먹구름과 안개는 주변 수십 킬로미터를 장악하며 천천히
북상을 시작했다.
바람의 이동에 따라 서서히.
인구 백만에 육박하는 대도시 프라인을 향해서.
1. 크로노스의 신탁
" 단 한명의 생존자도 용납하지 않는다. "
눈처럼 흰 패너플리에 황금빛 독수리 문장, 육중한 흰 투구 위에는 눈부시도록 붉은
수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있다. 신성제국(神聖帝國) 루안이 자랑하는 흰 독수리
기사단을 진두지휘하는 요오크 후작의 눈이 야성의 매처럼 매섭게 빛이 났다.
가지런히 정돈된 흰머리, 흰 눈썹, 흰수염, 그리고 큰 키에 비교적 마른 체형.
일견하기에도 성정이 칼같이 날카롭고 얼음처럼 냉정할 듯한 모습이다.
백마 위에 올라앉은 요오크 후작이 일갈 사자후를 터뜨리자 백색의 패너플리를 걸친
기사들이 선이 떠나갈 듯한 함성과 함께 질풍처럼 말을 내달렸다.
그 수가 무려 200 여기.
새벽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각, 어슴푸레 사물의 윤곽이 보일 정도로 세상은 아직
어둡다.
100여 채 정도 가구가 모여 사는 조그만 마을은 평상시 모습대로 고요하고
적막하다. 집에서 키우 는 가축들도 모두 자고 있는 시각이기에 조용한 바람 소리만
윙윙거릴 뿐이다.
두두 두두두
하지만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거세게 울리더니,
화르르륵 화르륵
순백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던진 불쏘시개가 촌락의 가옥들을 태우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비명 소리가 퍼져 나갔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온 신성마법의 축복을 받은 기사들의 검에서는 뿌연 우윳빛의
오러가 광채처럼 타올랐고, 거기에 스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사람이건,
가축이건, 집의 담벼락이건 가리 지 않고 갈라지고 무너지고 쓰러졌다. 평범한
서민들의 배를 가르고 머리를 자르면서 기사들의 눈동자에 괴로움이 어린것도
한순간, 뒤이은 요오크 후작의 고함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고 눈에 힘이 솟았다.
"일체 사정을 봐주지 말라! 저들은 신의 뜻에 대항하는 악의 종자들이다."
삽시간에 백여 개 남짓한 가구가 모두 불길에 휩싸이고, 불을 피해 도망쳐 나온
자들은 기사들의 검 에 베여 넘어졌다. 죽는 자들의 눈에도, 그리고 압도적인
힘으로 살육을 벌이는 흰 독수리 기사단의 눈에도 요악한 화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마을이 전화에 휩싸이는 가운데 마을 외곽 쪽에 위치한 가장 허름한 모옥에서도
다급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제릭스, 굴테인, 하이시스, 그리고 지온.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전부터
일깨워 왔지만 너 희는 우리 크로노스 교단의 미래다. 교의 성지가 불타오를 때
수많은 장로들이 너희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
사내아이 셋과 여자 한명.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귀를 기울이는 네 아이들
앞에는 30대로 보이는 여인이 서있다. 요악하도록 아름다운 바탕을 일부러 꾸미지
않고 허름한 촌부의 모습으로 가리고 있는 여인의 눈에는 다급함이 가득하다.
"저주 받을 루의 개들이 벌써 여기까지 찾아왔을 줄은 몰랐다만, 그래도 걱정
말아라. 너희 는 평소 연습한대로 이 비상통로를 따라 빠져 나가면 된다. 그러면
숲에서 너희를 기다리는 교우가 있을 거야. 이제부터는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너희를 돌봐 줄 것이다. "
"테미스는 어떻게 하고요? "
여자아이 하이시스의 질문에 테미스라 불린 여인의 눈가에 어둠이 깔렸다.
"난 저들을 막아야지. 이래봬도 크로노스님의 영광스런 열아홉 사제 가운데 하나야.
저들 몇은 지옥으로 보내 줄 수 있어. 그리고 가능하면 나도 몸을 빼서 너희를 쫓아
갈 생각이고. "
여인의 마지막 말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 아이들은 그 사실을 그녀의 표정으로부터
읽을 수 있었다.
"그럴 리 없지만 만일에 일이 잘못되면 각자 재주껏 숲을 빠져나가 남쪽으로 가서
숨어 있거라. 그러걋?잘못되면 각자 재주껏 숲을 빠져나가 남쪽으로 가서
숨어 있거라. 그러고 있으면 후일 누군가 너희를 찾아갈 거야. 너희에게는
크로노스님의 표징(表徵)이 있으니까. "
뭐가 걱정되는지 잠시 말꼬리를 흘리던 여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 어서 움직여, 어서. 그리고 꼭, 복수를 잊지마라, 복수를. "
아이들이 지하로 연결된 땅굴로 빠져나가자, 여인의 눈가가 검붉게 물들며 사이한
기운이 뿜여져 나왔다.
"루의 개들아, 다 오너라! 다 죽여주마! "
불타오르는 벽을 부수고 뛰쳐나간 여인은 두 팔을 벌리며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인의 미 간 정중앙에 푸른 Y 문양이 타오르듯이 나타났다.
" 저기 악신 크로노스의 마녀가 나타났다. "
언덕 위에서 마을을 주시하던 요오크 후작이 크게 외치자 기사들은 일사분란하게
대열을 갖
추며 테미스를 에워싸는 진용을 형성했다.
"우리의 신 크로노스시여 전능한 파괴의 손을 내려주시고 불로써 이 세계를
정화하소서. "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저주가 내뱉어지더니,
화르르륵
모옥들에서 타오르는 불꽃 사이로 타죽은 시신들이 불길에 휩싸인 채로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기사들 과 대치를 이뤘다.
"그 마녀는 크로노스 교단의 19 사제 가운데 한명이다. 모두 화염의 구울들과 직접
부딪치지 말고 성력으로 밀어내기만 하라. "
요오크 후작은 명을 내리자마자 손수 검을 뽑아 들고는 순식간에 마상을 박찼다.
화려하게 장식된 그의 검에서는 어느새 흰 오러가 1 미터 가까이 쭈욱- 뿜어졌고,
말이 다 끝나기 도 전에 테미스의 코앞에 득달했다. 오러에 둘러싸인 검과 사람의
손이 부딪치는데 불똥이 튀며 금속음이 울렸다.
검붉은 핏줄이 징그럽게 두드러진 테미스의 양손은 시커멓게 죽어 보인다. 그런데도
성국 루안이 자랑하는 기사 요오크 후작의 검과 직접 부딪치고도 흠집하나 나지
않았다.
" 흥, 무고한 임산부와 태아를 더러운 크로노스에게 제물로 바치고 얻은 파괴의
손이냐? 악독한 마녀. "
요오크 후작이 하늘의 신장처럼 준엄하게 외치며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곧이어
그의 전신이 성스러운 후광에 휩싸이고, 검에 형성된 오러는 눈 뜨기도 힘들도록
빛을 내뿜었다.
"우리의 주신 루의 권능을 빌어 맹세하니, 이제 마녀의 힘은 성스러운 검 아래 한낱
모래와 같아지리라. "
요오크는 성기사 가운데 성기사로 추대 받는 인물이다. 그의 굳은 신념과 강인한
정신, 그리고 뛰어 난 검격은 성국 루안에서도 발군으로 꼽히고 있다.
요오크의 검에서 뿜어지는 빛에 비칠거리며 물러서는 테미스는 두려움을 떨치며
이를 악물었다.
저자의 검에 얼마나 많은 사제들이 죽었던가!
교의 제사장도 저자의 검을 막지 못했거늘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한창 도주중일 아이들을 떠올리면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누가
뭐라고 비난해도 크로노스 교는 그녀의 신념이며, 아이들은 그녀의 미래다.
기사들과 대치중인 화염의 구울들을 모두 불러들여 요오크를 공격하게 명한 뒤,
그녀 스스로도 빛무 리에 휩싸인 요오크에게 손수 뛰어들었다. 저 빛이 그녀에게
상극임을 잘 알고 있지만, 어떻게든 요오크와 같이 죽기라고 하려는 속셈이다.
"너의 뜻대로 될 줄 알았더냐? 루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검은 사악함이 범접할 수
없다. "
화악 화악
테미스의 검붉은 양손은 철판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고 석벽도 감자처럼 으깨
버리지만, 요오크의 오러가 스치고 지나가자 어이없이 잘려 나갔다. 다가서던
화염의 구울들도, 빛무리에 닿자마자 뼈대까지 성화(聖火)에 휘감기며 한줌의 재로
타버렸다. 일합의 겨룸으로 손가락 네 개가 잘린 테미스의 눈가로 절망이 어렸다.
그녀에게는 저 빛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장벽처럼 느껴졌고 전의가 사그라졌다.
그리고 그녀가 다 물러서기도 전에 바람처럼 따라잡은 요오크의 검이 둥근 궤적을
그리자, 그 궤적 안에 위치해 있던 그녀의 좌수는 팔꿈치 아래로 썽둥 썰려나가며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도 함께.
요오크의 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빛무리가 더 길게 늘어나더니 연속에서 좌로 비스듬한 원을 그리고 우로 비스듬한
원을 그리며, 마 치 빛의 원이 고리에 고리를 이으며 펼쳐지듯이 공간을 메우며
달려들었다.
발 빠르게 몸을 뒤로 빼며, 뼈 무덤을 소환하고, 저주의 늪을 소환하고,
공간이동까지 했건만 요오크 의 검은 이 모든 것을 무처럼 베어버리고 그녀의 턱
끝을 둘로 쪼갰다.
공간 이동이 조금만 늦었어도 턱이 아니라 머리가 양단 되었을 거란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 졌다. 아랫니가 덜덜 떨리며 턱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는 가운데, 그녀의
우수가 발악하듯이 요오크의 검 사이도 들이밀어졌지만 그도 헛손질.
원을 그리는 요오크의 검은 어느새 방어로 바뀌어 테미스의 우수마저 써걱 팔목에서
베어버렸다. 양손을 다 잃고 그녀가 얻은 것은 겨운 한숨 돌릴 틈뿐이다.
"베어버렸다. 양손을 다 잃고 그녀가 얻은 것은 겨운 한숨 돌릴 틈뿐이다.
"나의 검 아래 이정도 버틴 것은 칭찬해줄 만 하다만, 시간 끄는 것은 의미
없을게다. 숲으로 도 망간 악의 종자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테니. "
"무, 무슨 소리냐? 그, 그걸 어떻게? "
"이미 성기사들이 그곳에 대기 중이다. "
" 서, 설마?! 으으- 아르테인이? "
" 흥, 이제 눈치 챘나본데, 열아홉 사제 가운데 아르테인은 위대하신 교황성하의
부름을 받고 크로노스 교단에 잠입했을 뿐이다. 오로지 악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
" 으아 아아! 아르테인! 이 배교자! "
피눈물을 뿌리며 악을 쓰는 테미스의 미간 사이로 요오크의 검이 짙은 빛무 리와
함께 떨어졌다.
화륵
불로 지지는 고통도 잠시, 전신이 세로로 양단되며 쓰러진 테미스의 눈은 불길에
쌓인 모옥을 응시하고 있었다.
원한으로 부릅뜬 채로.
쏴아아
세차게 내리는 비 덕분에 마을을 잿더미로 만든 불길은 모두 잡혔다.
하지만 이미 모든 가구는 다 타서 재만 남았고, 목재와 시신이 타서 엉겨 붙은 탓에
모양만 더 지독 해졌다.
흰 독수리 기사단의 말발굽이 지나간 지도 열흘, 그리고 비가 오기 시작한지도
사흘이 지났다.
폐허의 틈새, 마을 중앙 촌장의 집 바닥이 잠시 들썩들썩 하더니 두꺼운 널빤지가
삐익 거리며 올라왔다.
무엇이 그리 조심스러운지, 올라온지도 한참을 지나서야 어두운 가운데 눈동자
하나가 스윽 드러났 다.
' 아무도 없는 것 같아. 탐색 마법은 해지 되었고. '
소곤거리는 소년의 음성이 울리더니 이내 널빤지가 다 들어올려지고 나서
다람쥐처럼 빠르게 소년 하나가 지하에서 튀어나왔다.
이윽고 하나 둘 빠져 나오는 아이들의 수는 모두 넷.
사내 셋 여아 하나다.
' 테미스는 죽었겠지? '
두 번째로 나온 굴테인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살기 짙은 모습, 그리고 민첩한
몸놀림과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다.
한눈에 봐도 전설의 다크앨프와 인간 사이에 낳은 변종임을 알 수 있다. 머리는
진한 붉은 빛을 띄고 있어 어딘지 모르게 테미스를 연상시킨다.
굴테인의 우울한 음성에 처음 나왔던 아이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가 있잖아. 복수할 수 있는 우리가. '
제릭스는 일행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데다 눈이 영활하게 돌아간다. 덩치가 크고
뼈대가 굵은데 다 금발에 수수해 보이는 모습이다.
그가 일행의 리더격인 듯, 모두 그를 중심으로 모여 있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여자 아이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 탐색마법이 해제된 것은 잠시 뿐이야.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숲으로 도주했던
대역들에게 심 어 놓은 생명의 등이 모두 꺼진 것으로 보아, 테미스의 예상대로
아르테인이 배교자일 테고. 모두 잊지 않았겠지? 아르테인의 주특기가 무엇인지? "
" 예지, 그리고. 정신교란! "
" 맞아. 그러니까 우린 안전한 상태 아니라 잠시 시간만 벌었을 뿐이라고. "
하이시스의 말에 제릭스의 눈가에 분노가 자리잡았다.
" 빌어먹을, 안되겠어. 우리 여기서 흩어지자. "
" 흩어지자고? "
굴테인의 물음에 제릭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 중 한명만 잡혀도 아르테인은 머리 속을 뒤져서 나머지를 죄다 찾아낼 수
있어. 그러니까 서로 어디 있는지도 몰라야 해. 각자 도망치다 보면 최소한 한둘은
도주할 수 있겠지. "
" 하지만 도주 후에는?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
" 각자 힘을 길러. 우리는 크로노스님의 축복을 받았으니까 어디에 있던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까 야. 그리고 10년 뒤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 "
제릭스의 냉철한 말에 바로 하이시스가 동조했다.
" 지금 찢어지자. 제릭스의 말대로 우리 크로노스교가 망하기 직전에 장로들이 우리
기억 속에 교단의 방대한 유산을 나누어서 남겨 놓았다고 했어. 그 유산을
각성한다면 복수할 수 있는 길이 보일 거야. "
모두들 그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네 아이 가운데 제릭스가 가장 먼저 등을
돌리며 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결심이 섰다면 바로 행동하는 것이 좋다.
뒤이어 굴테인이 움직이고 하이시스도 떠났다. 떠나기 전 쥬논에게 손을
흔들어보이더니 빠르게 모 습을 감추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아이는 쥬논.
검은 머리에 약간 마른 편. 이목구비 하나하나는 뚜렷하고 잘생겼지만, 한참을
들여다봐도 잘 기억 이 나지 않을 듯한 소년이다.
말도 없고, 특색도 없다.
심지어 존재감마저 느끼기 힘든데, 아마도 외모에 아무 특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점은 윤기 있는 검은 머리카락 정도.
쥬논이라 불리는 마지막 소년도 퍼붓는 비를 맞으며 마을을 떠났다.
나머지 셋과는 달리 숲이 아니라 마을의 오솔길을 택한 점만 다를 뿐이다.
십사 년 전 정월, 크로노스의 신탁은 사도들에게 한 가지 예언을 내렸다.
< 나의 축복을 받을 아이를 찾아 준비하라. 그를 통해 나의 진정한 힘이 현신할
것이오, 나의 뜻 이 이루어지>?준비하라. 그를 통해 나의 진정한 힘이 현신할
것이오, 나의 뜻 이 이루어지리라. >
교의 제사장 에그몬트 루시반이 크로노스에게 물었다.
" 그를 어찌 알아보나이까? 미천한 종이 눈이 멀었거늘 그를 어찌 알아보나이까?
그가 어떤 모습으 로 저희에게 오나이까? "
신탁이 답했다.
< 그는 너희 종들 가운데 하나의 모습으 로 너희에게 갈 것이오, 스물 둘의 해가
바뀌면 스스로를 자각하여 뜻을 펼칠 것이다. 그는 시련과 함께 성장할 것이며
고통의 불속에 타오를 것이며 마침내 새 세상을 열 것이다. 그는 바로 나의
살아있는 현신이다. >
제사장 에그몬트는 목이 타는 갈증을 참기 어려웠다.
" 우매하기 그지없는 제가 어찌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그가 언제 오는지, 그리고
사내인지 여자인 지만이라도 신탁을 내려 주십시오. "
< 그는 어둠이 극에 달하는 매해의 마지막 날 자정에 태어날 것이며, 현재로부터
사년 안에 모습 을 드러낼 것이다. 그는 남자의 모습으 로도, 또한 여자의 모습으
로 갈 수 있다. 그를 찾아 준비하라. 나의 종이여. >
그날, 제사장의 지상 명령이 교단의 각 지부로 퍼져 나갔다.
매해 12월 31일 자정에 아이를 낳도록 모든 교도들은 전념을 다하라는 것과, 그
아이들을 제사장 앞으로 데려 오라는 명이다.
크로노스는 난교와 음행에서 오는 열락을 추구하는 종파다.
명이 전달되자마자 12월 말일이 오기 10개월 전부터 약 한 달간 모든 교도들은
각지에서 집단적으로 난교와 음행에 빠져들었고, 그 해 말일 자정에 마침내 첫 아이
제릭스를 얻었다.
사년에 걸친 음행을 통해 매년 한명씩 신기하게도 네 명의 아이가 선택되었으며,
그들의 이름은 각 자 제릭스, 굴테인, 하이시스, 그리고 쥬논이었다.
난교를 통해 얻어진 아이들은 대개 대부(代父)의 성을 따르는데, 네 아이에게는
대부도 없고 성 또한 받지 못했다.
제사장은 자세한 신탁의 내용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교의 장로들이나 19
사제 심지어 네 아 이에게조차 함구했다.
덕분에 교의 장로들은 네 아이 모두 축복의 아이로 받아들였고, 그들 모두에게
골고루 크로노스 교 단이 쌓아 온 지식과 전통을 전수했다.
그리고 교 단이 루안 성국의 성기사들에게 처절하게 붕괴되기 직전, 제사장
에그몬트는 또다시 신탁 을 받았다.
< 나의 축복과 권능을 받은 그 아이에게 시련의
Comentários
Postar um comentár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