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1

제1화
위대한 엑스트라.
그게 용사의 일행이었던 내 별명이었다.
이것 말고도 내 별명은 많았다.
미친 재능으로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멸망의 시대 때 온갖 대단한 족적을 남겼으니까.
진창의 성자, 빛의 발굴자, 어둠 속 등불, 등등.
‘사실 다 돈 벌려고 한 일이었는데. 돈 안 되는 명성만 얻었어.’
나는 쿨럭 피를 토하고는 거지 같았던 과거를 떠올렸다.
내 나이 스무 살 때.
거지 같던 가문에서 탈출 후 뒷골목에서 뒹굴며 한창 성공의 꿈을 품고 있었을 때.
마도 제국의 ‘사혈의 마왕’이 빛의 진영을 침범했다.
시작된 대전(大戰).
그때만 해도 난 이렇게 생각했다.
‘일생일대의 기회야. 커다란 공을 세워 전쟁이 끝난 후, 끝장나는 부귀영화를 누려주겠어!’
그런 마음으로 온갖 개고생을 하며 숱한 일을 해내고, 막판에는 용사 일행에까지 합류했는데, 개털이었다.
용사 일행은 졌고, 마왕이 이끄는 마도 제국의 손에 빛의 진영은 멸망했다.
‘하, 인생. 이럴 줄 알았으면 그딴 개고생은 절대 안 했을 텐데.’
최소 용사 일행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미 다 늦은 후회.
최후의 순간, 이런저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군.”
보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리는 화상.
…아니, 용사 에반이었다.
“내가 아니라, 크리스, 네가 용사가 되어야 했는데.”
옆에서 대마법사 라냐가 맞다는 듯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크리스 님이 잡다한 기술들이 아닌, 검과 마법만 제대로 익혔다면 우리가 이렇게 패하지 않았을 텐데.”
용사 일행이 숱하게 한탄했던 내용이었다.
내가 멸망의 시대 때 여러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건, 미친 천재성 때문이다.
무엇이든 순식간에, 탁월하게 익혀버리는 규격 외의 재능.
그 재능을 바탕으로 때로는 신의(神醫)가 되고, 때로는 천 리 앞을 내다보는 길잡이가 되고, 때로는 위대한 장인이 되는 등 각양각색의 온갖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불행히도 난 검과 마법을 익히지 않았다.
‘용사 일행을 곁눈질한 것만으로도 상당히 높은 수준에 오르긴 했지만.’
4성(成).
내가 용사 일행과 함께 다니며 뒤늦게 이룩한 경지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냐면, 4성 프라임 클래스는 재능 없는 이는 평생 닿지도 못하는 경지였다.
그런 경지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이, 따로 수련도 하지 않고 곁눈질만으로 이룩한 거다.
그것도 검과 마법 양쪽으로.
내가 용사 일행에 합류한 건, 멸망의 시대 후반부, 3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으니 그야말로 미친 성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였다.
사람들이 아쉬워했던 것은.
-크리스님은 여러 잡기(雜技)가 아니라, 검과 마법을 익혀야 했어.
내가 검과 마법을 익혔다면, 전쟁의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거라고.
어쩌면 용사와 마왕의 경 지인 9성을 뛰어넘어 10성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고.
심지어 용사 일행은 이런 망발을 하기까지 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크리스 님을 용사로 추대했을 텐데.”
나는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됐거든? 내가 용사는 무슨 개뿔.’
고생은 이번 삶으로 충분했다.
만약, 정말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부귀영화나 잔뜩 누리게 부잣집 아들이나 되었으면….’
하지만, 나는 더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라그나로크’가 완성된 거다.
사혈의 마왕의 목표는 단순히 세상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세상의 멸망, 라그나로크를 일으키는 것.
검은빛이 온 세상을 물들였고, 세상은 멸망을 맞았다.
그런데, 왜일까?
최후의 순간,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제발, 다음 생은 부잣집 아들내미….’
그 바람 탓이었을까?
회귀했다.
대략 15년 전.
그러니까, 본격적인 ‘멸망의 시대’가 시작하기 5년 전 과거로 돌아온 거다.
그것도, 원래의 몸이 아닌, 바라던 대로 어마어마한 부잣집 아들로.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부잣집이긴 부잣집인데, 가문 이름이 ‘암흑 마가(魔家)’였다.
불길한 명칭에서 알 수 있겠지만, 마도 제국의 명문가였다.
빛의 진영의 희망이었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킨 마왕의 나라, 암흑의 제국의 도련님이 된 거다.
심지어 이 몸.
개망나니다.
* ? ?* ? ?*
‘빌어먹을, 말도 안 돼.’
나, 크리스는 우울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저택의 정경이 보였다.
그런데.
-크라라락!
정원에 고블린들이 있었다. 고블린들이 섬세한 손길로 정원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저 뒷산에서는 트롤이 용맹한 소리를 내며 도끼로 나무를 넘어뜨리고 있었고, 하늘에서 와이번이 끼룩 날아오더니, 편지 한 통을 건네주고 사라졌다.
“…….”
크리스는 침묵했다.
마경에서나 볼 법한 몬스터들이 저택에서 평화롭게 각자의 일을 하고 있다니.
이유가 있었다.
이곳은 마도 제국이었다.
마인, 흑마법사, 흑요(黑妖), 마수들이 활보하며 마왕들이 군림하는 어둠의 제국.
훗날 빛의 진영을 멸망시키는.
‘왜 회귀를 해도 마도 제국의 인물로 회귀한 거야! 으아악!’
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가 바란 건 그냥 평범한 부잣집 아들내미였다고!!’
하지만, 머리를 뜯어도 바뀌는 건 없었다.
정신을 차린 지 벌써 삼 일, 그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결정해야 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크리스는 슬그머니 이렇게 생각했다.
‘…그냥 앞으로 일어날 일 따위 관심 가지지 말고, 부귀영화나 누릴까?’
충분히 가능한 환경이었다.
암흑 마가는 대륙에서 손에 꼽는 명문. 즉, 어마어마한 부자 가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으아아!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빛의 진영이 멸망하는 걸 가만히 놔두면 이 몸도 무사할 수가 없어!’
이유가 있었다.
‘사혈의 마왕이 그런 미친놈이었을 줄은.’
처음, 마도 제국이 빛의 제국을 침범했을 때만 해도 다들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어둠의 진영인 ‘마도 제국’과 빛의 진영인 ‘크루세이드 연합’이 다투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대전(大戰)이 끝나갈 무렵.
마도 제국의 군세를 이끌던 사혈의 마왕의 진정한 속셈이 밝혀졌다.
사혈의 마왕은 그저 빛의 진영을 지배하려는 게 아니었다.
‘라그나로크. 온 세계의 멸망이 목적이었지.’
그 사실을 눈치챘을 때, 사혈의 마왕을 막을 수 있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사혈의 마왕은 점령지의 모든 인간을 학살해 제물로 삼고, 라그나로크를 일으켰다.
빛의 진영뿐 아니라, 온 세상을 멸망시키는.
그러니까,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세계 멸망에 휩쓸려 이 몸도 죽게 된다는 거다.
‘제길, 막아야 해.’
크리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문제는 내가 마도 제국으로 회귀했다는 건데. 마인으로서 세상을 구할 방법을 찾아야 해. 마인으로서… 으아아!’
차라리 빛의 진영의 인물로 회귀했으면, 나았을 거다.
하지만, 하필 마인의 몸이라니.
거지 같아도 이렇게 거지 같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야.’
크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마도 제국의 정점에 올라야 해.’
단순히 주동자였던 사혈의 마왕을 막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멸망을 일으키려는 건, 사혈의 마왕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마도 제국의 수많은 이가 사혈의 마왕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도 제국의 꼭대기에 올라 놈들을 막을 수 있을 만한 존재가 되어야 해. 즉, 최상위 서열의 마왕이 되어야 해.’
크리스는 구체적으로 생각했다.
‘일단, 이 몸의 가문, 암흑 마가를 손에 넣겠어. 그리고, 최상위 서열의 마왕이 되어 마도 제국을 지배하겠어.’
또한, 이렇게 하면 그에게도 커다란 장점이 있었다.
‘마도 제국은 대륙 최강의 대국. 그러니 마도 제국의 정점에 오르면 부귀영화도 끝장나게 누릴 수 있을 거야.’
이런 처지가 되었지만, 부귀영화의 꿈을 포기한 건 아니다.
마인들의 나라인 마도 제국은 자타공인 세계 최강의 힘을 지닌 대국.
그런 곳의 마왕이 되면, 평범한 금수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대단한 영화를 누릴 수 있으리라.
크리스는 굳게 다짐했다.
‘일단, 마왕이 되어 멸망을 막겠어. 그리고 난 후에는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하고 팽팽 놀면서,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려주겠어!’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크리스가 깃든 몸의 정체.
신분 자체는 괜찮았다.
마도 명문가, ‘암흑 마가’의 핏줄이었으니까.
마도 제국의 핵심에 가까운 신분.
문제는 이 몸이 망나니란 거다.
‘그냥 망나니도 아니라, 천하의 개망나니이지.’
크리스가 깃든 몸은 빛의 진영 측에까지 유명한 개망나니였다.
결국,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되는.
- 개밥으로도 못 쓸 쓰레기 자식. 가문의 보호만 아니면, 내가 저놈을 찢어 죽였을 텐데.
- 얼마 남지 않았어. 본가에서도 저놈을 파문하는 걸 고려 중이라니까.
한마디로, 쓰레기 중의 최고 쓰레기가 이 몸이었다.
언제 폐기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최악의 상황.
그런 쓰레기 망나니에서 마도 제국의 정점까지 올라야 하는 극한의 조건이지만.
‘할 수 있어. 충분히 가능해.’
크리스는 간단히 자신감의 이유를 생각했다.
‘나는 천재이니까.’
그가 멸망의 시대 때 온갖 위대한 족적을 남길 수 있게 해주었던 원동력.
불세출의 재능.
사실, 천재라는 단어마저 그의 재능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니, 할 수 있었다.
‘시작하자.’
제2화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회귀 후 크리스는 고민했다.
목표는 정해졌다.
마도 제국의 정점에 올라 부귀영화 성취와 세계 구원을 동시에 이루는 것.
그렇게 되려면?
‘이 암흑 마가를 먼저 내 손에 넣어야 해.’
다행히 그가 깃든 몸의 가문인 암흑 마가는 마도 제국을 기둥처럼 지탱하는 열두 개의 명문가 중 하나였다.
그런 암흑 마가를 자신의 발아래 두면, 목표에도 성큼 가까워질 것이다.
‘문제는 내가 적통이 아니라, 방계의 핏줄이라는 건데.’
그가 깃든 몸의 이름은 ‘크리스티앙 반 배런 카자르’.
우연인지, 원래의 이름인 크리스와 비슷한 이름이었다.
중요한 건 미들 네임.
방계를 의미하는 ‘반(van)’.
즉, 그는 암흑 마가 ‘배런 공작가’의 방계 혈족 가문인 ‘카자르 백작가’의 아들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어. 마도 제국은 방계 핏줄에게도 계승권을 인정하니까.’
방계 혈족 가문 출신이어도 본가를 손에 넣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다.
물론 거기에는 조건이 붙는다.
-능력이 있다면.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적통 핏줄을 짓밟을 수 있을 만큼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면.
즉, 수많은 적통 경쟁자들보다 압도적인 능력을 선보여야 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마도 제국은 철저한 강자존이란 것이다.
힘에 미친 놈들.
그게 마인이었으니까.
강해지면 된다.
‘일단, 망나니에서 탈피부터 해야겠지.’
그런 마음으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카자르 백작.
암흑 마가의 방계 혈족 가문인 카자르 백작가의 주인이었다.
“무슨 일이지?”
아버지, 카자르 백작이 그를 맞았다.
섬뜩한 마기가 느껴졌다.
‘6성(成)의 고위 마인.’
이전 삶 때도 흔하게 볼 수 없는 강자였다.
아버지의 눈빛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당연했다.
‘난 개망나니니까.’
정확히는 그가 깃든 이 몸의 주인이 개망나니였다.
한숨이 나왔지만, 극복해야 할 일이었다.
“사고를 친 지 얼마나 됐다고 염치없이 얼굴을 들이민 거지? 자숙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아니면, 그새 또 못 참고 사고를 친 거냐?”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면? 허튼수작을 부리려는 거면, 꺼져라. 당장에라도 네놈의 목을 베고 싶은 심정이니.”
아버지, 카자르 백작은 아들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은 듯했다.
급히 말을 하였다.
“지금까지 저지른 잘못을 사죄하러 왔습니다.”
“…뭐?”
“그간의 잘못, 죄송했습니다. 정말로.”
크리스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카자르 백작은 순간 몸이 굳었다.
그러다가 불처럼 화를 내었다.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얼마 전 그런 끔찍한 사고를 쳐놓고, 뭐, 사과? 지금 날 조롱하는 거냐?”
살이 오싹해질 정도로 매서운 기세가 몰아닥쳤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크리스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믿지 않으시는 것 이해합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전 기억의 일부를 잃은 상태입니다.”
이 몸에 깃든 후 기억의 일부를 잃었다고 둘러댄 상태이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잘못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깊게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카자르 백작은 우뚝 입을 다물고 매섭게 크리스를 노려보았다.
당연하지만,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불신과 분노만이 가득했다.
당연했다.
크리스도 사과 한 번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사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이 사과에는 다른 의도가 있었다.
밑밥이었다.
“잘못했다고 말만 해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요. 그간 저지른 과오를 반성하겠습니다. 절 징벌동(洞)으로 보내 주십시오.”
“!!”
“기간은 한 달. 한 달 동안 그간의 잘못에 대해 자숙하고 나오겠습니다.”
카자르 백작의 얼굴이 처음으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징벌동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하는 이야기냐?”
“네.”
크리스는 마인들의 세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용사 일행 중 마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어둠의 수다쟁이’.
별명만큼 수다쟁이였던 그녀는 묻지도 않은 마인들의 세계에 대해 끝없이 떠들어댔다.
‘징벌동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지.’
신분 높은 마인이 죄를 저질렀을 때 벌을 받는 곳으로 빛 한 점 들지 않고 오감이 차단되는 곳이다.
며칠만 있어도 정신이 피폐해져서 나오는 곳이지만.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장소야. 남들의 눈을 피해 당분간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해.’
카자르 백작은 비웃음 섞인 표정을 지었다.
“징벌동에서 한 달이나 있겠다고? 네놈은 반나절도 버티지 못할 거다.”
“힘든 곳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버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버텨야 한다고?”
“네, 그 정도는 해야 변할 수 있을 테니까요.”
“!!”
크리스는 똑바로 카자르 백작의 눈을 바라보았다.
“더는 지금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변하겠습니다.”
“…….”
무언가 이전과 다른 아들의 기백을 느낀 걸까?
카자르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변하겠다고, 네놈이?”
“네, 반드시.”
하지만 카자르 백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네놈이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한 게 몇 번인지 아느냐? 항상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똑같이 말했지. 앞으로는 변하겠다고. 지켜봐 달라고. 기억나는 것만 열 번이 넘는다. 그리고 넌 매번 내게 커다란 실망감만 주었다.”
“…….”
“어쨌든, 좋다. 가문의 징벌동을 열어주지. 네가 안에서 아무리 애원해도 한 달이 지날 때까지 문은 열리지 않을 거다. 못 버티겠으면, 차라리 안에서 죽도록.”
차라리 죽어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이야기치고는 살벌했지만, 이곳이 마인들의 제국이란 것을 생각하면 카자르 백작의 반응은 굉장히 ‘온화한’ 편에 속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카자르 백작이 형형한 눈빛으로 크리스를 노려보았다.
“네 망종 짓을 눈감아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만약, 네 말대로 변하지 않을 시, 널 가문에서 파문하겠다.”
파문.
그건 죽음을 뜻한다.
온갖 패악질을 저지른 그에게 이를 가는 마인이 한둘이 아니니까.
가문의 보호가 사라지는 순간, 그는 산산이 찢겨 죽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가 약속대로 변한다면, 제가 요구하는 부탁을 하나 들어주십시오.”
“부탁?”
카자르 백작은 황당하단 얼굴을 하였다.
그러다가 사납게 말하였다.
“그래, 좋다. 네가 변하기만 한다면,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지. 하지만 너도 명심해라. 또 날 실망하게 할 시, 그때는 널 파문이 아니라 사자 굴에 산 채로 던지겠다.”
카자르 백작은 차갑게 내뱉었다.
그렇게 아버지와의 대화가 끝났고, 크리스는 징벌동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가문의 고용인들이 크리스에게 들리지 않게 수군거렸다.
“망나니가 징벌동에 들어간다고 했다던데?”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뭐, 얼마 전 친 사고가 워낙 심각하니 백작님의 분노를 잠시 피하려는 것 아니겠나?”
“하긴, 극독 마가의 영애를 모욕하였으니. 그것도 정통 직계 혈통을.”
극독 마가.
암흑 마가와 마찬가지로 마도 제국을 지탱하는 열두 개의 기둥 중 하나였다.
아무리 망종이라도 그런 곳의 적통 영애를 모욕하다니.
미쳐도 이런 미친 짓이 없었다.
“백작님께서 그 망나니의 잘못을 무마하기 위해 극독 마가에 직접 사과하셨다고 하던데.”
“하, 백작님은 참 마인답지 않으시지. 내 아들이었다면, 진즉 팔, 다리 하나쯤은 잘랐을 텐데.”
“듣자 하니, 이번에 그 망종 놈이 벌인 일로 본가의 높은 분들도 극심히 분노하였다고 하더군. 경쟁 상대인 극독 마가에 체면을 구겼으니.”
“그러니, 망나니 놈도 눈치를 봐서 징벌동에 들어가려는 거겠지. 물론 가봤자 얼마 못 버티겠지만.”
고용인들은 입술을 비죽거렸다.
“얼마나 버틸 거로 보는가?”
“길어야 이틀?”
“난 하루 본다네.”
“난 반나절.”
가문의 이들은 크리스가 징벌동에서 얼마나 버틸지로 내기를 하였다.
가장 길게 건 사람이 이틀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크리스가 반나절, 아니, 몇 시간 안에 울며 살려달라고 애원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뭐라 떠들거나 말거나, 크리스는 착실히 징벌동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좋았어. 준비 끝.’
그는 자신이 준비한 짐을 보며 감탄한 얼굴을 하였다.
‘명문가가 좋기는 하구나. 마정석을 이렇게 쉽게 구하다니. 그것도 종류별로.’
말만 해도, 밑의 사람들이 딱딱 필요한 걸 가져다 바쳤다.
이전 삶 때는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다.
‘이 마정석은 진짜 희귀한 것 아닌가? 이거 구하려고 용사 놈이랑 엄청나게 고생했는데.’
크리스는 혀를 내두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징벌동으로 향했다.
사령술로 소환한 ‘데스 나이트’가 징벌동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간수로 데스 나이트를 쓰다니. 거참, 마도 제국답군. 이거 마음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겠지?’
크리스는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데스 나이트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데스 나이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안심하고 징벌동에 들어가려는데, 뜻밖의 음성이 그를 붙들었다.
“형님.”
시선을 돌리니, 이 몸과 똑 닮은 소년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크리스는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테른.”
테른 반 배런 카자르.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친동생이었다.
내놓은 망나니인 그와는 다르게 착실한 모범생.
그리고.
‘2년 뒤 이 몸이 죽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놈이지.’
마인 동료였던 ‘어둠의 수다쟁이’는 마인 사회에서 일어났던 온갖 이야기를 다 해주었는데, 그중에는 지금 깃든 몸인 크리스티앙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크리스티앙이 어떤 망나니였고, 결국 어떤 식으로 처참한 최후를 맞았는지 말해 주었는데, 그 중심에는 눈앞의 테른이 있었다.
“무슨 일이냐?”
미래의 일이지만, 자신이 깃든 몸을 죽게 하는 이라고 생각하니 말이 곱게 나가진 않았다.
‘어차피 서로 사이도 안 좋은 것 같고.’
지금도 딱 봐도 시비 걸러 온 것 아닌가?
“표정을 보니, 날 걱정하여 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테른은 눈썹을 꿈틀했다.
“…당연히 그런 이유로 온 것은 아닙니다.”
테른은 차갑게 답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저벅, 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살을 에는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경고하러 온 겁니다.”
“!!”
크리스를 보는 테른의 붉은 눈동자에 경멸이 깃들었다.
“형님이 가문의 수치인 것은 잘 알고 있겠죠.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인지 모르지만.”
파앗!
섬뜩한 검날이 크리스의 목에 내려앉았다.
“또다시 가문의 명예에 먹칠한다면, 맹세하거니와 그땐 제가 형님을 죽이겠습니다.”
“…….”
크리스는 힐끗 눈동자를 굴렸다.
검날에 닿은 피부가 따끔하더니, 주륵 피가 흘렀다.
‘아프잖아, 썅.’
크리스는 욕설을 삼켰다.
무섭다기보다는 짜증이 났다.
‘내가 산전수전 굴러먹은 게 얼마인데, 고작 이런 협박으로 겁을 먹겠어?’
멸망의 시대 때 온갖 일을 경험하며 수많은 업적을 쌓았던 크리스다.
당연히 이런 협박 따위에 위협을 느낄 턱이 없었다.
“치워라.”
“…뭐?”
“치우라고 말했다.”
제3화
테른의 눈이 커졌다.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들어 검날을 손가락으로 잡고 옆으로 치웠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어서일까?
테른은 당황해 입을 다물었다.
“지금 무슨….”
“알았다.”
“뭐라고요?”
“가문의 명예에 먹칠하지 말라는 네 말 잘 알아들었다고.”
“!!”
크리스는 가만히 테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뭐 더 할 말 있나?”
“…….”
테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할 말이야 많았다.
하지만 왜일까? 삐딱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을 보고 있으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지?’
테른은 당황했다.
천재라 불리지만, 아직 경험 없는 어린아이.
그는 지금 크리스에게서 전해지는 느낌이 ‘위압감’이란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음에도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저 한심한 가문의 수치에게 위압감을 느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그의 형, 크리스티앙은 이전에 비해 무언가 달랐다.
‘변했다고, 저놈이?’
말도 안 되는 일.
테른은 바득 이를 갈고는 으르렁거렸다.
“다시 경고하지만, 또 배런 카자르의 이름을 모욕하면, 제가….”
“가만두지 않겠다는 거지? 그래, 알아들었다니까? 너 되게 할 일 없나 보구나? 묻지도 않았는데,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 것 보면. 아니면, 내가 관심이라도 가져주길 바라?”
“!!”
테른은 화악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죽일 듯 크리스를 노려보더니 휙 등을 돌려 사라졌다.
‘내가 진상을 상대해온 게 얼마인데. 날 상대하려면 아직 멀었다, 애 멍멍이 놈아.’
크리스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어릴 때는 귀여웠네.’
사실, 크리스는 테른과 구면이었다.
이전, 멸망의 시대 때 마주한 적 있었다.
테른은 나름대로 유명한 마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어린애여서 그런지 귀여운 면이 있어 보였다.
어쨌든 그건 중요치 않은 일.
그는 테른에 관한 생각을 지우고 징벌동의 입구를 손으로 잡았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강해질 때였다.
* ? ?* ? ?*
징벌동에 들어가자 완벽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 들리지도 않고.’
혀를 움직여 핥았는데, 역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히 빛과 소리만 차단된 게 아니란 거다.
손, 발에서도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흑마법에 의한 효과인가? 저주 계통?’
그나마 감각이 허락된 건, 미세한 손끝의 감각뿐이었다.
가지고 온 물품을 더듬어 만질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굶어 죽지 않게 하려는 조처였다.
확실히 이런 공간에 오래 있으면 정신이 극도로 피폐해질 것 같았다.
어째서 마인들이 징벌을 받는 곳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큰 소용 없는 일이지.’
그는 과거 온갖 일을 해봤다.
그중에는 ‘트레져헌터’도 있었다. 그것도 정상급의 트레져헌터였다.
마도 제국과 맞서는 데 도움이 되는 온갖 보물들을 찾아내 ‘빛의 발굴자’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세상이 망해가는 판국이라, 보물을 발굴해도 제대로 값을 지불해 줄 사람이 없어서 중간에 때려치웠지만.’
어쨌든, 유적을 탐험할 때는 감각이 차단당한 채 희미한 청각 하나, 흐릿한 촉각 등에만 의지해서 움직일 때가 흔했다.
따라서 지금 이곳은 크리스에게 별반 힘든 환경이 아니었다.
‘도리어 내가 예전에 가봤던 곳들보다 훨씬 낫지. 이곳은 함정도, 암살당할 위험도 없으니까. 외부의 시선에서도 완전히 차단되어 있고.’
과거 경험했던 지옥들이랑 비교하면, 이곳은 뭐, 편안한 호텔과도 같달까?
그리고 가장 커다란 장점.
‘오감이 차단당했으니, 내부를 더욱 깊게 관조할 수 있어. 이건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기연과도 같은 환경이야.’
상승의 단계에 이르는 수련 중에는 일부러 오감을 차단하는 것도 있다.
오감을 차단함으로써 집중력을 극대화하고 오로지 스스로를 바라보게 하는 거다.
마침 지금 크리스가 하려는 일도 오감을 차단하는 게 필요했다.
만약 징벌동이 아니었다면, 크리스는 다른 방법을 사용해 오감을 차단해야 했을 거다.
‘체질 개선 먼저 하자.’
이 몸은 개망종 망나니답게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안 좋은 것들을 얼마나 많이 접한 건지, 노폐물도 극심했다.
몸이 심각히 망가져 있었다.
‘하지만 괜찮아. 환골탈태하면 되니까.’
놀라운 이야기였다.
환골탈태!
경지에 이르고 나서 몸의 체질이 변하게 되는 거다.
환골탈태를 이룬 몸은 완벽한 건강을 찾게 되고, 검술 등을 익히기 좋은 체질이 된다.
검을 익히는 이라면, 누구든 바라 마지않는 일.
하지만 실제로 환골탈태를 경험하는 이는 극히 일부였다.
높은 깨달음뿐 아니라, 운이 따라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환골탈태를 하겠다니?
‘나는 인위적으로 육체를 환골탈태시킬 수 있으니까.’
인위적인 환골탈태라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진짜였다.
‘고대 유적에서 관련 비술을 익힌 적이 있어.’
원래는 실현 불가능한 비술이었다.
극도로 뛰어난 의술 지식 및 천부적인 마나 운용 감각, 또한 ‘신체 변형술’을 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조건을 모조리 충족하는 이는 세상에 없었다.
크리스를 제외하면 말이다.
‘난 의사로도 활동한 적이 있으니까.’
그냥 의사 수준이 아니라, 신의(神醫)라고까지 불렸다.
돈 벌려고 이 악물고 열심히 공부한 덕인데, 돈은 못 벌고, 성자라 불리며 잔뜩 고생만 했던 기억이 난다.
‘내 마나 운용력은 용사와 대마법사도 감탄한 것이고.’
마지막 신체 변형술.
이것도 다룰 줄 알았다.
과거, 멸망의 시대가 시작하기 이전에.
지옥 같던 가문에서 탈출 후 뒷골목을 전전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도둑질, 길거리 연주, 도박, 등등 온갖 잡기들을 익혔는데, 서커스단에 들어가 신체 변형술을 익힌 적도 있었다.
물론, 광대들이 쓰는 신체 변형술은 저급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크리스가 이리저리 조금 손을 대니 완벽한 축골공(縮骨功)으로 개량되어 버렸다.
이런 이유로, 크리스는 인위적인 환골탈태를 할 수 있었다.
‘시작하자.’
크리스는 마정석을 꺼냈다.
환골탈태 단계마다 각자 다른 성질의 마나를 품은 마정석이 필요했는데, 다행히 모두 구해올 수 있었다.
‘시작은 노폐물을 정화하는 것부터.’
백(白) 기운의 마정석에서 마나를 추출했다.
그래서 노폐물이 쌓인 곳으로 흘려보냈다.
지직.
백의 마나에 담긴 정화의 힘이 노폐물을 태웠다.
지루한 단계였다.
하지만 중요한 단계였다.
조금이라도 노폐물이 남는다면, 환골탈태는 실패하게 된다. 도리어 큰 내상을 입고 병신이 될 수도 있었다.
‘해박한 의학 지식을 알고 있어야 하는 이유지.’
마나가 움직이는 큰 혈맥 말고도, 신체 구석구석의 해부학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노폐물이 쌓여 있을 곳을 일일이 백의 마나로 정화해 주어야 했다.
천부적인 마나 운용 감각이 필요한 이유.
다행히 크리스의 마나 운용 감각은 다른 이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게 뛰어났다.
아니, 비단 마나 운용력만이 아니었다.
모든 일에 그랬다.
- 넌 진짜 미친놈이야.
어느 날 용사 에반이 했던 말이었다.
- 네가 용사가 되었어야 했는데.
크리스는 잡념을 떨쳤다.
꼼꼼히 노폐물을 모조리 불태운 이후,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화(火)의 기운이 담긴 마정석을 꺼냈다.
몸을 튼튼하게 만드는 연단의 단계였다.
‘으으. 이거 진짜 아프던데.’
하지만 해야 했다.
크리스는 눈을 딱 감고 자신의 목표를 떠올렸다.
‘마도 제국의 정점에 올라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개뿔.’
크리스는 고개를 젓고는 진짜 목표를 속으로 외쳤다.
‘마왕이 되어 반드시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려주겠어!!! 겸사겸사 세계도 구하고!’
그 외침과 함께 화악 뜨거운 기운이 들어왔다.
연단의 과정이 시작된 거다.
뚜둑, 뚜둑.
섬뜩한 소리와 함께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환골탈태의 시작이었다.
* ? ?* ? ?*
크리스가 징벌동에 들어간 이후 시간이 흘렀다.
벌써 7일.
크리스의 아버지인 카자르 백작은 눈썹을 지그시 찡그리고 있었다.
“아직 구조 요청을 하지 않았다고?”
“네, 백작님. 안에 들어가 볼까요?”
카자르 백작가의 집사, 콕스가 염려스럽게 말했다.
창백한 인상의 그는 하프 뱀파이어였다.
뱀파이어 주제에 정이 많은 편이라 이전에도 종종 크리스를 걱정하고는 하였다.
“어쩌면, 구조 요청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도.
카자르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징벌동은 아주 끔찍한 곳이다.
처음에는 무시한다.
고작, 오감을 차단하는 게 뭐가 대단하다고?
흔히들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징벌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산산이 무너지게 된다.
완벽한 적막.
누구도 없고,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는 공허 속에서 극심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
심지어 비명을 질러도 그 소리가 자신에게 들리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쳐버리는 게 징벌동이었다.
‘괜히 징벌동에 들여보냈나. 정신력이 강인한 마인이 들어가도 버티기 어려운 곳인데.’
카자르 백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들의 정신력이라면, 징벌동에서 완벽한 폐인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카자르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아들, 크리스티앙은 원래 이렇지 않았다.
장래가 촉망되던 아이였다.
하지만 뛰어난 재능에 오만해졌던 걸까?
조금씩 비뚤어지더니, 완전히 망가지게 되었다.
‘지금처럼 계속 버러지처럼 살 바에는, 차라리 이번에 폐인이 되거나 죽는 게 나을지도.’
비정한 생각이 아니었다.
나름대로의 부정(父情)이었다.
다만, 그는 마인이니 밖의 사람들과 사고방식이 달랐다.
이렇게 아들이 스스로의 명예를 더럽히며 벌레 같은 삶을 이어갈 바에는 아비인 그가 목숨을 거두는 게 옳은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 변하겠습니다.
마지막에 크리스티앙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하면서 보였던 아들의 눈빛이 자꾸만 뇌리에 떠올랐다.
이전과 무언가 달랐다.
‘또. 그렇게나 속아놓고, 뭘 더 기대하는 거냐.’
조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보고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도련님이 징벌동에 가지고 들어간 물품들입니다. 위험 품목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
카자르 백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이 쎄했다.
“환몽석을 들고 갔다고 합니다.”
“!!”
카자르 백작이 이를 바득 갈았다.
환몽석(幻夢石).
마정석의 일종인데, 신기하게도 환각을 경험하게 해준다.
그 느낌이 마약을 했을 때와 비슷해, 귀족들이나 부유층 사이에서 마약 대신으로 애용되는 물품이었다.
마약과 다르게 환몽석은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환몽석은 끊기로 하지 않았던가?”
크리스티앙이 벌인 망종 짓 중에는 당연히 환몽석에 취하는 것도 있었다.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들고 간 것으로 봐서.”
집사는 말끝을 흐렸다.
카자르 백작은 맥이 풀려 의자에 몸을 뉘었다.
변하기는 무슨.
남들 눈을 피해 징벌동 안에서 환각에 취하려는 거였다!
“오감이 차단되는 징벌동에서 환각에 취하다니.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모르니, 당장 징벌동을 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련님의 목숨을 보장할 수가…!”
“…아니, 그만두도록.”
“네?”
카자르 백작이 싸늘해진 음성으로 말하였다.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라고.”
그런 그의 눈동자에는 티끌만큼의 기대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 ? ?* ? ?*
그때, 징벌동.
‘환골탈태에 성공했어.’
크리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4화
‘마지막엔 아슬아슬했어. 잘못했으면 죽거나 폐인이 되었을지도.’
환골탈태는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백(白)으로 노폐물을 정화하고, 화(火)로 연단하고, 토(土)로 굳건하게 만들며, 수(水)로 막힘없게 하며.
하나하나가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가장 어려운 건 마지막 단계, 몽(夢)의 과정이었다.
‘인위적으로 깨달음을 경험해야 하니.’
환골탈태는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다.
깨달음에 맞추어 신체가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되는 거다.
그러니, 인위적으로 깨달음을 체험하게 해야 했다.
‘환몽석이 필수지. 다행히 쉽게 구했어.’
환몽석으로 체험한 인위적인 깨달음 중에서 비술을 사용해 환골탈태를 이루어냈다.
크리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맑아진 숨결이 흘러나왔다.
외양도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삐쩍 마른 몸은 여전했다. 그거야 피폐하게 지내 근육이 상해 그렇게 된 거니.
하지만 내부의 상태가 완전히 달라졌다.
검술을 익히기에 최적의 상태가 되었다.
또한, 골격 자체가 좋아져 앞으로 살이 붙고 근육이 생기면 겉으로 보기에도 이상적인 상태가 될 거다.
얼굴도 변했다.
여전히 성질은 나빠 보였다.
하지만 피부 및 혈관에 쌓인 안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얼굴이 맑아지며, 기품이 흘렀다.
고고한 귀공자 같은 외모가 된 거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게 있어.’
크리스는 내부를 관조하였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배꼽 밑 코어(단전).
그곳에 두 개의 홀이 있었던 거다!
‘흐흐, 크리스식 환골탈태 성공.’
이게 크리스가 이번에 환골탈태하며 극심히 고생했던 이유였다.
그는 환골탈태를 진행하며 코어를 두 개로 늘렸다. 안쪽의 이너 코어, 바깥쪽의 아우터 코어로.
미친 시도였다.
세상 어디에도 코어가 두 개인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한 가지 발상을 떠올렸다.
‘어차피 코어는 관념적인 거고, 환골탈태는 깨달음에 맞춰 몸이 변형하는 거니, 환골탈태 중 코어가 두 개라는 관념을 가지면, 실제 코어도 두 개로 늘릴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이들이 들으면 뭔 개소리냐고 욕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공했다.
중간에 꼬여서 죽을 뻔했지만, 해냈다.
‘흐흐, 좋아.’
굳이 코어를 두 개의 층으로 나눈 건 이유가 있었다.
‘이래야, 빛의 진영 측 힘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크리스의 손에서 파앗 빛이 터져 나왔다.
1성(成) 마법, ‘라이트’였다!
‘굳이 마기만 익힐 필요는 없잖아?’
전생에서 빛의 진영 측 검술과 마법을 4성까지 익힌 크리스였다.
아마 시간이 있다면 더 높은 수준까지 익혔을 거다.
그 능력을 버리기 싫었다.
‘이 빛의 능력은 내 숨겨진 비장의 무기가 될 거야.’
들킬 걱정도 없었다.
크리스는 ‘빛’의 코어를 ‘어둠’의 코어 안쪽에 숨겨놓았다.
바깥의 어둠의 코어 덕분에 빛의 마나 코어는 완전히 가려지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빛의 마나 코어의 혈맥을 어둠의 코어 쪽으로 연결하여 이중 위장을 하였다.
다른 사람이 직접 코어를 들여다봐도 들킬 걱정은 없었다.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빛의 진영 측 검술과 마법을 익히고 나가야겠어.’
밖으로 나가면, 빛의 진형 측 힘은 익히기 어려웠다.
남은 시간은 20일 남짓.
그 안에 최대한 성취를 얻어야 했다.
크리스는 수련에 매진했다.
한 번 갔던 길이라 거슬러 올라가기는 쉬웠다.
“후으읍.”
숨을 들이마셨다.
용사가 사용하던, 크루세이드 연합의 최고 명문가인 검술 명가 마이어 가문의 호흡법이었다.
계속해서 보다 보니 어쩌다 훔쳐 배우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엄청 시달렸지.’
크리스는 용사 에반의 호흡법을 따라 했다가 어마어마하게 시달리게 되었다.
어떻게 따라 한 거냐, 혹시 자신 가문의 비서를 본 적이 있냐, 등등.
그냥 곁눈질로 따라 한 거라고 말해도 도통 믿지 않아, 정확히 어떤 식으로 따라 한 건지, 천천히 호흡하는 법을 보여 주었는데, 
‘그때 보여준 표정이 걸작이었지.’
용사 에반이 그렇게 얼빠진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았다.
- 어, 어떻게?
그리고 더 자세히 크리스가 하는 호흡법을 관찰한 후에는 더더욱 경악한 얼굴을 했다.
- 비슷하지만, 달라. 다른데, 더… 뛰어난?
애초에 용사가 쓰는 호흡법은 너무 고난이도라 크리스 같은 초심자가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적당히 자신에게 맞는 식으로 바꿔 썼다.
이른바 크리스식이랄까?
- 더 간단하고, 효율적이야. 어떻게 이런?!
용사 에반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냥, 호흡법의 기본에 따랐을 뿐인데.’
호흡법.
자연에는 ‘정기’가 있다.
그 ‘정기’를 호흡으로 받아들인 후 ‘빛’의 기운으로 바꾸는 게 ‘마나’.
‘어둠’의 기운으로 바꾸는 게 ‘마기’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마나’가 더욱 안정적이고 정순했으며, ‘마기’는 불안정한 대신 파괴적이며 음습했다.
크리스는 용사의 호흡법에서 다른 부분은 다 버리고, 자연의 정기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마나로 전환하는 부분만 축약해 익혔다.
어떻게 그렇게 했냐고?
‘몰라, 되는 걸 어떻게 해.’
크리스는 자신이 한 바를 믿지 못하던 용사 일행들에게 해주었던 말을 똑같이 떠올렸다.
그냥 됐다.
되는 걸 어떻게 하라고?
파앗!
빛이 크리스에게 모여들었다.
마나가 빛의 홀에 쌓이고 있는 거다.
그리고 얼마 뒤.
크리스는 충만감을 느꼈다.
그릇 하나가 만들어졌다.
1성(成)의 경지에 발을 들인 거다.
‘이전보다 더 빨리했네. 한 번 해봤던 거니 당연한 건가?’
전생 때는 얼마나 걸렸더라?
그때도 하루는 안 걸렸던 것 같다.
뭐, 1성이니까.
이제 배움을 시작했다는 의미의 ‘러너’의 단계. 그것도 갓 발을 들인 것일 뿐이다.
물론, 다른 이들은 아무리 빨라야 1년, 천재라고 불리는 이들도 6개월은 걸리는 일이었지만, 크리스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갈 길이 멀어.’
그 뒤, 크리스는 수련을 반복했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며칠이나 흘렀을까?
5일? 7일?
갓 만든 그릇에 마나가 계속해서 차올랐다.
빠르게.
비정상적인 속도로.
작았던 그릇이 점점 커지고 단단해져 갔다.
그리고 그 그릇조차 부족할 정도로 마나가 차오른 이후.
파앗!
크리스의 몸에 마나가 휘돌았다.
마나로 신체를 강화할 수 있는 단계.
2성(成), ‘유저’의 경지에 오른 거다.
인제 크리스의 육체는 일반인은 비교할 수 없게 단단하고, 빨라지리라.
“이제 웬만한 기사만큼은 강해진 건가?”
마도 제국의 바깥에는 기사라고 거들먹거리는 주제에 2성에도 못 이른 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화염이여, 피어오르라.”
파앗!
화염이 피어올랐다.
2성의 원소 마법, 파이어 볼이었다!
‘뭐, 이미 머릿속에 있었던 거니.’
원래 기사든 마법사든 2성의 경지에 오르는 건 쉽지 않았다.
단순히 마나를 쌓는 것뿐만이 아니라, 기사의 경우 마나로 체내를 강화하는 요령을 깨쳐야 하고, 마법사는 2성의 경지에 이르는 마법 술식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리스의 경우 다 해봤던 거니, 요령이 있어서 쉬울 수밖에 없었다.
…뭐, 사실 이전에도 별로 오래 안 걸리긴 했었다.
‘2성까지야 뭐, 기초이니.’
2성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피 터지게 노력하는 검가나 마탑의 문하생들이 들으면 피를 토할 천인공노할 생각이었다.
평범한 범재들의 경우 2성에 오르는 데도 5~10년은 걸리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어쨌든 나가기 전까지 3성까지는 이루고 가야 해.’
3성.
그때부터는 어딜 가나 당당한 하나의 정예 전력으로 취급받는다.
기사단에서도 중요 전력.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주축을 이루는 전력이었다.
‘빠듯하네. 최대한 해보자.’
다시 수련을 박차는 순간이었다.
크리스는 다급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경지가 오르며 일부 감각이 돌아왔는데,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직 한 달이 되지 않았는데?’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징벌을 끝내려는 건가?’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발소리가 작고 조심스러웠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킬까 염려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설마, 암살자?’
등골이 쭈뼛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순순히 당하고 있지는 않아.’
크리스는 굳게 생각했다.
상대는 그가 못난이 망나니라고만 생각하고 있을 거다.
그러니 방심한 틈을 노리면 이길 수 있었다.
‘와라. 후회하게 해줄 테니.’
그리고.
상대가 징벌동의 문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잔뜩 몸을 긴장시켰는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상대는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문 사이로 난 희미한 틈을 통해,
툭.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뭐야?’
크리스는 당황했다.
그게 끝.
상대는 다시 사라졌다.
물건을 건네주는 게 목적이었다는 듯이.
‘뭐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건을 확인한 크리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새끼들이.’
환몽석이었다.
* ? ?* ? ?*
환몽석을 떨어뜨리고 간 의도야 뻔했다.
‘내가 환몽석에 취해 망가지길 바란 거야.’
크리스는 자신이 환골탈태를 위해 환몽석을 들고 왔다는 걸 떠올렸다.
누군지 모를 상대는 그 사실을 알고, 크리스가 환몽석에 완전히 취해 망가지도록 수를 쓴 거다.
‘환몽석은 심하게 취할 시 마약보다도 치명적인 결과를 만드니까.’
그는 환몽석을 툭툭 치며 생각했다.
‘어떤 놈이지? 자, 생각을 정리해보자.’
크리스는 몇 가지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첫째, 이 몸이 망가지기를 바라는 이가 있다.
‘어쩌면 이 몸이 망나니가 된 것도, 누군가 의도한 것일지도.’
둘째, 상대는 가문의 중요 인물이다.
‘내가 징벌동에 들어올 때 환몽석을 들고 왔다는 걸 알고 있는 인물이야.’
그리고 보안이 삼엄한 징벌동에 은밀히 접근했다.
그건 상대가 보안의 빈틈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경계를 선 놈과 다 한통속일 수도 있지.’
크리스는 피식 웃었다.
‘개판이구먼.’
암흑 마가 배런가의 명예로운 방계 카자르 백작가.
왠지 안이 썩어 보였다.
그것도 가문의 주인인 카자르 백작은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뭐, 나쁘지 않네. 아니, 도리어 좋아. 잘됐어.’
뜻밖의 생각이었다.
잘됐다니?
이유가 있었다.
‘내가 발돋움할 제물로 삼아주겠어.’
그는 마도 제국의 정점에 서는 게 목표다.
첫 번째 목표는 암흑 마가.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몸담고 있는 방계 가문인 카자르 백작가를 먼저 손아귀에 넣어야 했다.
만약, 가문을 좀먹고 있는 놈들이 있다면, 공로로 삼기 아주 좋으리라.
‘그 전에 3성 먼저.’
크리스의 호흡이 깊어졌다.
파앗, 빛이 그의 몸에 감돌았다.
이윽고 약속한 한 달이 지났다.
* ? ?* ? ?*
“오늘이 도련님과 약속한 날입니다. 가보지 않으실 계획입니까?”
카자르 백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가보기 싫었다.
갔다가 괜히 기대할까, 싫었다.
어차피 실망할 텐데.
그런데 집사가 조심스럽게 권하였다.
“도련님과 마지막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직접 가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
“아니면, 어쩌면 예상외로 잘 버티고 나오실 수도 있고요.”카자르 백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실컷 환각에나 취해 있겠지.”
아들이 환몽석을 들고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든 기대를 버린 카자르 백작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자네 말은 따르지.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카자르 백작의 눈동자에 매서운 안광이 흘렀다.
“따르겠습니다.”
“아니, 나 혼자 가지.”
만약, 징벌동의 문을 열었는데, 크리스가 정말로 환몽석에 취해 있다면, 살심을 억누르지 못할 것 같았다.
카자르 백작은 집사를 물리고는 직접 징벌동으로 향했다.
그리고 숨을 들이켜고 징벌동의 문을 열었다.
제5화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유독 거슬리게 울려 퍼졌다.
곧 마주할 아들의 모습에 신경이 곤두선 거다.
‘분명 엉망이겠지.’
카자르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한 점의 기대조차 짓밟으며 문을 완전히 열었고.
“!!!”
카자르 백작은 눈을 크게 떴다.
“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셨군요.”
그의 아들, 크리스티앙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전과 달라진 차분한 태도, 깊은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 ?* ? ?*
정적이 흘렀다.
카자르 백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았다.
‘놀랍긴 하겠지. 설마, 내가 멀쩡히 버텼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크리스는 입술을 비틀며 말하였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변해서 나오겠다고.”
“…….”
카자르 백작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환몽석에 취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저 당당한 눈빛은 뭐란 말인가?
‘저놈이 저런 눈빛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나먼 옛날, 어렸을 적 총기 넘치던 때를 지나고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카자르 백작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고작 지금 모습 하나 가지고 아들을 믿기에는, 지금껏 쌓인 실망이 너무 컸다.
“용케 버텼나 보군. 아니면, 징벌동의 저주가 체질에 잘 맞았든지.”
“그거 나름대로 칭찬인 거죠?”
“기고만장하지 말라는 말이다.”
카자르 백작이 여전히 싸늘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난 여전히 네놈을 믿지 않으니 말이다.”
“…….”
“언제 또 망종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이전처럼 말이다.”
사실, 그의 아들이 나름대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반짝 괜찮아지는 척해서 기대하면, 여지없이 몇 배는 되는 실망을 안겨준 아들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것 같기도… 아니, 아니야. 뭘 또 기대하려는 거냐?’
카자르 백작은 괜히 기대감이 올라오는 자신의 마음을 억지로 억눌렀다.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버지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라고?”
“네. 나름대로 열심히 버텼으니, 가벼운 부탁 정도는 드려도 괜찮겠지요. 검은 늪 기사단의 훈련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
카자르 백작이 놀란 얼굴을 했다.
암흑 마가는 세 개의 방계 기사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어둠의 삼지창이라 불리며, 그중 하나가 카자르 백작가의 검은 늪 기사단이었다.
“검은 늪 기사단은 너 같은 놈이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검은 늪 기사단은 방계인 카자르 백작가의 소유이면서 동시에 본가의 소유이기도 했다.
그러니 크리스티앙이 카자르 백작의 아들이어도, 검은 늪 기사단에 들어가는 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암흑 마가 본가의 허락이 떨어져야 하는데, 망나니로 유명한 그에게 허락해줄 리가 없었다.
“종자로 받아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훈련장만 빌려서 쓸 수 있게 해달라는 겁니다.”
“…….”
“검은 늪 기사들의 용맹한 모습을 보면 자극될 것 같아서요. 이 정도는 가능하지 않습니까?”
일단, 체력을 길러야 했다.
환골탈태했어도 따로 신체 단련은 해야 했으니.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훈련장을 같이 쓰면서 검은 늪 기사단의 비기를 익힐 생각이었다.
어떻게?
간단하다.
‘훔쳐 배우면 돼.’
망나니인 그에게 쉽게 가문의 비기를 가르치려 들지 않을 테니, 곁눈질로 기초적인 것부터 훔쳐 배울 생각이었다.
크리스는 애초에 누군가에게 정식으로 배운 적보다는 이런 식으로 곁눈질로 재주를 훔쳐 배운 적이 많았다.
카자르 백작은 대답 대신 한참이나 크리스를 쏘아보다가 대답했다.
“만약 검은 늪 기사단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일 시, 그때는 각오해라.”
크리스는 씨익 웃었다.
승낙이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뭐지?”
“검은 늪 장서관의 출입을 허가해 주십시오.”
장서관.
책들을 모아두는 곳이다.
다만, 검은 늪 장서관은 일반적인 곳과 달랐다.
‘카자르 백작가의 흑마법 비술을 모아둔 곳이지.’
당연히, 허락된 이들만 출입할 수 있다.
카자르 백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네놈에게 장서관을 열어달라고? 미쳤구나.”
“저도 가문의 핏줄이니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네놈 스스로 그 자격을 바닥에 버렸지. 이전에 장서관의 비서를 암시장에 팔아 버리려고 했던 것은 기억 안 나느냐!”
“…….”
카자르 백작은 이런 의심마저 들었다.
혹시 지금 멀끔한 모습을 보이는 게, 장서관의 출입을 허락받아 도둑질을 하려는 건 아닌지.
지나친 의심일 수도 있지만, 크리스티앙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멜린의 추천서를 받아와라. 그러면 장서관을 열어주지.”
멜린.
검은 늪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암흑 마가 본가 출신의 마인으로 지극히 냉철한 성격이었고, 약자, 특히 못난 망나니를 버러지로 보았다.
그런 이의 추천서를 받아오라는 건 절대 장서관을 열어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 정도쯤이야 당연히 해낼 수 있다는 듯이.
“그러면 가 보겠습니다. 훈련장은 오늘부터 이용토록 해도 되겠지요?”
“…그래.”
크리스는 걸음을 옮겨 저택 쪽으로 사라졌고, 이전과 확연히 다른 그 걸음걸이를 보며 카자르 백작은 혼란에 사로잡혔다.
* ? ?* ? ?*
크리스는 몸을 씻고 식사한 후 곧바로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하자 훈련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훈련을 멈추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마인이 많이 모여 있는 걸 보니 어색하네.’
암흑 마가가 자랑하는 기사단답게 모두 정예의 마인들이었다.
인간뿐 아니라, 마도 제국답게 어둠 속성의 아인족들도 꽤 많았다.
라이칸슬로프, 뱀파이어, 다크 엘프 등.
모두 최소 2성 이상으로 보였고, 상당수가 3성 이상, 4성급의 강자도 드문드문 보였다.
‘고작 방계의 기사단이 저 정도 수준이라니. 밖에선 왕국 유수의 기사단은 되어야 이 정도 수준인데.’
크리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 마인들의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뭐야? 저 새끼는?”
“병신 도련님이잖아? 여기에는 왜 왔어?”
아무리 그래도 백작의 아들인데, 대놓고 저런 욕설이라니.
밖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이곳은 마도 제국이다.
힘이 곧 법인 곳.
따라서 약자는 대접받지 못한다.
그게 아무리 높은 신분이라도 말이다.
특히, 이 몸처럼 행태마저 엉망이면 말할 것도 없다.
‘이 몸도 검은 늪 기사들에게는 감히 행패를 부리지 못했다고 하지.’
그때, 한층 앙칼진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어디라고 형님 따위가 감히. 당장 꺼지십시오.”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동생, 테른이었다.
‘검은 늪 기사단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나. 하긴, 나 대신 실질적인 후계자 대우를 받고 있으니.’
테른이 분노까지 일렁이는 눈빛으로 으르렁거렸다.
“이곳은 당신 같은 버러지가 감히 함부로 올 곳이 아닙니다.”
크리스는 팔짱을 꼈다.
별로 무섭지는 않지만.
‘계속 저렇게 으르렁거리게 두는 것도 피곤하겠지.’
“테른, 네 그 말은 백작님을 비난하는 것이냐?”
“…뭐라고요?”
크리스가 입술을 비틀었다.
비웃듯.
“내게 훈련장 출입을 허가한 것은 백작님이시다. 그런데 네 발언은… 마치 백작님이 잘못된 결정을 했다고 폄훼하기라도 하는 것 같구나.”
테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중에 악명 높은 마인이 될지라도 지금은 애송이일 뿐이니 말로 크리스를 당해내는 건 당연히 무리였다.
그런데 또 다른 음성이 들렸다.
“백작님의 결정을 존중하지만, 솔직히 당신이 믿음직스럽지는 않군요.”
“!!”
크리스는 흠칫하였다.
다른 이들과 비교도 안 되는 강렬한 마기가 느껴졌던 거다.
고개를 돌리니, 아름다운 외양의 고혹적인 여인이 서 있었다.
‘부단장 멜린!’
검은 늪 기사단의 악명 높은 부단장이었다.
멜린은 싱긋 웃는 얼굴이었는데, 강렬한 마기가 크리스를 짓눌렀다.
기세로 제압하려는 거다.
원래의 크리스티앙이었다면 오금을 지릴 기세였지만.
크리스는 숨을 가다듬고는 태연히 고개를 숙였다.
“부단장님을 뵙습니다.”
“…….”
부단장 멜린의 눈빛이 일순간 변하였다.
‘이걸 견뎠어?’
부단장 멜린은 작정하고 기세를 내뿜었다.
망나니 도련님과 같이 훈련장을 쓰라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긴 하였지만, 오줌이라도 지리게 하여 쫓아낼 작정이었던 거다.
하지만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놀란 기색의 멜린을 보며 크리스는 속으로 이죽거렸다.
‘이런 협박, 익숙하거든?’
강자란 것들은 만날 때마다 이렇게 기세로 힘자랑을 한다.
멸망의 시대 때 하도 그런 힘자랑을 당하다 보니, 자연스레 대처 요령이 생겼다.
“어쨌든 알겠습니다. 부단장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니, 조건을 걸죠. 제가 이 훈련장을 이용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증명이라면?”
“마인에게 증명이라면, 하나겠죠.”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바로, 힘.”
“!!”
“지금 당장 이 자리의 마인 중 하나와 겨루어 승리해 보이겠습니다.”
그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다들 저 개망나니가 돌았나, 하는 반응이었다.
멜린은 불쾌하단 얼굴을 하였다.
“장난이 지나치시군요. 당신이 귀한 도련님이라고 해도, 검은 늪 기사단을 모욕하고도 가만히 넘어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크리스의 결투 제안을 망나니의 되바라진 장난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장난이 아닙니다. 대신, 조건이 두 개 있습니다. 첫째는 마기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신체의 능력으로만 결투하게 해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전 방탕한 생활로 마기의 그릇을 잃어서.”
“…….”
“아,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가급적 맨손 결투면 좋겠군요. 이것도 아시다시피, 제가 검에서 손을 뗀 지 너무 오래되어서.”
멜린은 황당한 얼굴을 하였다.
“바라는 게 많군요. 두 번째 조건은 뭐죠?”
“결투 상대를 지목하게 해주십시오.”
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늪 기사단의 가장 약한 이를 지목해도 저 망나니보다는 몇 배는 강할 것이다.
크리스는 멜린 옆에서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어린 소년에게 말하였다.
“테른, 너다.”
“…뭐라고요?”
“네가 내 결투 상대라고.”
테른은 멍한 얼굴을 하였다.
크리스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번 기회에 형제간에 깊은 대화를 나누자꾸나.”
물론, 주먹으로 나누는 대화를 말한다.
* ? ?* ? ?*
장내가 조용해졌다.
다들 크리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잠시 후.
“저 미친 도련님이 드디어 제대로 미친 거야?”
“요즘 망나니들은 자살을 저런 식으로 하려고 하나?”
기사단의 마인들은 황당하다는 듯 떠들었다.
모두 크리스가 돌았다는 반응이었다.
지목당한 테른은 얼굴을 시뻘겋게 달구고 있었다.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는지 극도로 분노한 얼굴이었다.
“이… 감히.”
제6화
“아니, 잠시만.”
부단장 멜린이 곤란한 얼굴로 중재했다.
“그러지 말고, 적당한 상대를 찾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테른 님의 경지가 2성인 것은 알고 계시겠죠?”
2성.
놀라운 이야기였다.
테른의 나이는 고작 열세 살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검이나 마법을 익혔을 때 2성에 도달하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이십 대가 넘어서였다.
재능이 없으면 아예 2성의 문턱을 밟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본 기사단에는 종자들도 많이 있으니, 도련님과 어울려 주기에 적당할 것 같은데요.”
종자만 되어도, 크리스를 흠씬 두들겨 패 주기 충분할 것이다, 라고 부단장 멜린은 생각했다.
“아니, 이왕 자격을 증명하는 거, 제대로 해야겠지요. 테른과 겨루기를 원합니다.”
“!!”
“자! 테른, 네 생각은 어떠냐? 너도 내심 이런 자리를 바랐을 것 같은데?”
크리스는 건들건들 말했다.
“아니면, 설마 형에게 겁먹은 것은 아니겠지?”
테른은 이를 바득 갈았다.
테른의 머릿속에서 인내심의 줄이 끊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투에 응하겠습니다.”
부단장 멜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내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테른 공자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내 책임은 아니니까.’
검은 늪 기사단의 기사가 결투 중 저 망나니 놈한테 큰 부상이라도 입히면 아무래도 그녀의 입장이 곤란해진다.
하지만 테른은 형제이니 이 결투는 형제끼리의 다툼.
무슨 사고가 일어나도 그녀의 책임은 한결 가벼워진다.
‘원래도 망나니 형을 증오했으니, 가볍게 끝내지 않겠지. 이왕이면, 다리 하나쯤은 불구로 만들면 좋을 텐데. 테른 공자의 마음이 약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으려나.’
그녀는 마인답게 약자를 경멸했다.
특히, 크리스티앙 같은 망나니는 최악이었다.
‘버러지면서 감히 주제도 모르고 검은 늪 기사단의 영역을 더럽히려고 하다니.’
그런 생각은 기사단의 다른 마인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테른 도련님, 저 새끼 이번 기회에 조져 버리십시오!”
“몸성히 돌려보내면, 오늘은 특훈입니다!”
그런 열렬한 환호 속에서 둘은 결투를 위해 연무장에 올랐다.
크리스가 요구한 대로 마기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하는 결투였다.
“감히….”
테른이 바득 이를 갈며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크리스가 부단장 멜린에게 물었다.
“결투의 룰은 어떻게 합니까? 상대가 항복할 때까지?”
“아니요.”
부단장 멜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가는 저 못난 망나니가 한 대 얻어맞자마자 항복할 수도 있으니까.
“그건 너무 싱겁겠죠. 전투 불능에 이르러야 진 것으로 하죠.”
다분히 크리스를 골탕 먹이려는 규칙이었다.
마인들이 좋아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다들 얼른 크리스가 피떡이 되길 기대했다.
“규칙 들었지? 어떻게 하냐?”
크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 엄청 맞아야 한다는데?”
“!!”
테른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잔뜩 화난 그가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퍼억!
크리스의 주먹이 테른의 안면을 강타했다.
피가 튀어 올랐고, 크리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하고 있냐, 싸움 시작했는데.”
* ? ?* ? ?*
사실, 이건 사기를 친 거나 다름없었다.
마기를 제한하고, 맨손으로 하는 결투라니.
‘이런 조건이면, 검은 늪 기사단을 통틀어도 내 상대가 될 수 있는 마인은 거의 없을걸?’
그는 마인으로서는 1성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빛의 진영, 즉 ‘성휘(星輝)’의 경지로 표현하면 3성급 기사였다.
반면, 테른은 이제 갓 2성.
애초에 그의 실력이 훨씬 뛰어났다.
심지어 회귀 전의 그는 3성이 아니라, 4성급 경지였다.
‘4성이면, 중소 기사단에 가면 부단장이나, 최고 간부 자리를 노릴 만한 실력자이지.’
그뿐이 아니다.
그는 환골탈태까지 이루었다.
아직 근육이 붙지 않아 겉으로는 비리비리해 보이지만, 내실은 누구보다 튼튼했다.
그런데 아무리 뛰어난 수재라도 이제 고작 열세 살 꼬맹이인 테른이 그의 상대가 되겠는가?
‘어림도 없지.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 아, 나랑 같은 엄마인가.’
급히 패드립을 삼간 크리스는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테른의 머리가 뒤로 튕겨 나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크리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테른에게 가깝게 붙었다.
복부에 꽂히는 무릎.
고통에 자연스레 허리를 숙이자, 주먹을 위로 휘둘렀다.
퍼억!
깔끔한 소리와 함께 테른이 바닥에 쓰러졌다.
“…….”
“…….”
장내가 고요해졌다.
다들 눈을 부릅뜨고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헛것을 보고 있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테른 도련님이 방심했나?”
“그래서 그렇겠지? 아니면 말이 안 되잖아.”
그 생각은 테른 본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이를 바득 갈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몰골이 좋지 않았다.
얼굴은 피범벅이었고, 머리가 울려서인지 다리도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겁니까?”
“수작?”
“아니면 제가 형님께 당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테른은 바락 소리를 질렀다.
크리스는 피식 비웃었다.
“이게 수작을 부린 것으로 보이니? 그러면.”
퍼억!
다시 주먹이 꽂혔다.
“더 맞아야겠구나.”
또다시, 퍼억!
테른의 코에서 주륵 피가 흘러내렸다.
‘음, 조금 심한가.’
굳이 일부러 테른을 고른 이유가 있었다.
‘한번 패주어야 했으니까.’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끝없이 땍땍거리며 피곤하게 굴 게 빤히 보여 기회를 마련한 거다.
뭐, 주먹질이 오고 가다 보면 형제간의 정이 싹틀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물론, 주먹은 일방적으로 이쪽에서 주기만 할 것이지만.
‘그리고 다른 중요한 이유도 있지.’
크리스는 그 ‘목적’을 위해 테른을 자극했다.
“그런데 너, 코피 많이 난다. 어, 우는 거 아니지? 음, 미안한데… 형이 호, 해줄까?”
“크아아악!!!”
테른이 괴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외쳤고.
드디어 크리스가 의도한 행동을 하였다.
파앗!
테른의 주먹이 검은 기운에 물들었다.
마기를 발현한 거다.
“크아아악!!”
테른이 이성을 잃고 크리스에게 마기에 싸인 주먹을 날렸다.
뒤늦게 검은 늪 기사단의 마인들이 당황했다. 부단장 멜린도 아차, 하였다.
‘저 마기에 적중당하면 죽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죽으면 그녀의 입장이 아주 곤란해진다.
하지만 개입하기엔 늦었다.
멜린의 안색이 하얘졌다.
그런데 크리스가 아무도 모르게 씨익 미소를 지었다.
‘빙고. 의도한 대로 나와주었네. 샌님처럼 꾹 참으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다 의도한 대로였다.
크리스는 힐끗 부단장 멜린을 보았다.
‘자, 두 눈 뜨고 잘 보라고. 내가 어떻게 하는지.’
이 결투를 통해, 그는 부단장 멜린의 눈에 들 생각이었다.
멜린은 암흑 마가 본가의 마인.
또한, 대전란의 시대 때 6성급 마스터의 경지까지 오를 거물이니까.
방법은 간단했다.
경악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힘이 약한 이가 강한 이에게 맞서는 방법은 간단하지. 힘을 흘리면 돼.’
문제는 이게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이 맞아야 흘릴 수 있다는 거다.
맨손으로 마기에 닿으면, 흘리기도 전에 치명상을 입게 될 거다.
그래서 크리스는 다른 방법을 썼다.
크리스는 테른의 눈을 힐끗 보았다.
테른은 이성을 잃고 치명적인 공격을 펼친 자신에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 당황 때문일까?
마기의 기운이 일정치 않았다.
크리스는 이번엔 마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날아오는 마기가 불꽃처럼 너울거렸다.
불규칙적으로 춤을 추는 기운 속에 순간적으로 약한 부위가 드러났다.
크리스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타악 그 약한 부위를 쳤고, 충격으로 테른의 주먹을 둘러싼 마기가 산산이 흩어졌다.
“아?”
테른의 눈이 당황으로 커졌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퍼억!
주먹이 꽂혔다.
정통으로 꽂힌 주먹에 테른은 뒤로 넘어져 쓰러졌다.
기절한 거다.
“…….”
장내가 고요해졌다.
기사단의 마인들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지? 왜 마기가?”
“테른 님이 저 망나니가 다칠까 봐 마기를 거둔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날아오는 마기의 약한 부위에 타격을 주어 마기를 해체한다는 건, 그들의 상식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단 한 명,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힘을 지닌 고위 마인, 부단장 멜린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경악과 불신이 섞인 눈동자로.
‘성공했네.’
크리스는 멜린의 반응을 보고는 속으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자격으로 충분하겠습니까?”
“…그래요.”
멜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애써 당황을 숨기고 있었지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크리스의 눈에는 다 보였다.
크리스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이제 검은 늪 기사단의 밑천을 털어먹을 때였다.
* ? ?* ? ?*
그날부터 크리스는 훈련장에서 검은 늪 기사단과 함께 훈련했다.
다만, 같은 훈련을 받는 건 아니었다.
같은 공간이지만, 완전히 따로.
검은 늪 기사단은 정해진 기사단의 수련을 하였고, 크리스는 혼자서 기초 체력 훈련을 하였다.
마인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행패를 부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신경에 거슬리는지 마인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날파리가 옆에서 웽웽 날아다니는 것 같군.”
“생각보다 얌전하긴 하다만.”
“망나니도 자기 주제는 아는 거지. 감히 검은 늪 기사단에 행패를 부릴 깜냥은 없을 테니.”
“열심인 척하는 모습도 얼마나 갈지. 이틀?”
“난 하루.”
“난 반나절.”
테른을 이겼지만, 마인들의 평가는 여전히 박했다.
마인들은 크리스가 꼼수를 부려 테른을 이겼다고 생각했다.
크리스가 마지막에 마기를 파훼한 것도, 테른이 손속을 봐준 거로 오해했다.
“테른 도련님이 아니라, 내가 나섰어야 했어. 그러면 혼쭐을 내줄 수 있었을 텐데.”
마인들이 그렇게 구시렁대고 있을 때였다.
차가운 질책이 들렸다.
“잡담이나 떠들고 있다니. 다들 한가한가 보군.”
“부단장님?”
“쓸데없는 이야기 할 시간에 검이나 더 휘두르도록!”
부단장 멜린의 호통에 마인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훈련에 열중했다.
평소보다 날카로운 모습이었다.
‘왜 저러지?’
‘저 망나니 놈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신가?’
반쯤 맞는 짐작이었다.
멜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결투. 도대체 뭐지?’
그녀는 결투의 시작부터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크리스 때문이었다.
제7화
‘도대체?’
테른의 움직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훌륭했다.
어린 나이임이 믿기지 않게 격투의 기본이 확실히 잡힌 동작.
지금까지 얼마나 피나는 수련을 해왔는지 동작만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반면, 저 망나니의 동작은,
‘엉망이었지. 격투의 기초도 모르는 듯한 동작들.’
그런데. 그럼에도.
‘강했어. 그것도 압도적으로.’
멜린은 그 이유를 깨닫고 경악했다.
‘전투의 흐름을 완전히 꿰뚫어본 거야.’
테른의 공격은 강하고, 빨랐다.
하지만 닿지 못했다.
반대로 크리스티앙의 공격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여지없이 테른을 타격했다.
그건, 크리스티앙이 테른의 행동을 모조리 예측했기 때문이다.
머리로든, 감이든.
‘전투에 천부적인 감각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
하지만 진정 그녀가 경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지막 순간. 마기의 가장 약한 부위를 가격해 마기를 흐트러트렸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했다.
어마어마한 눈썰미, 찰나의 순간에 반응할 수 있는 반응 속도, 정확히 그 취약점을 놓치지 않을 감각 등등.
그 모든 게 어우러지면 말이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과 같았다.
‘그런 일을 제대로 마기도 쌓지 않은 저 망나니가 해냈다고?’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지금도 자신이 헛것을 본 건 아닌가 헷갈릴 지경이었다.
멜린은 순간 하나의 단어를 떠올렸다.
‘천재…인 건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암흑 마가의 혈통들은 모두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다.
그렇기에 마도 제국을 지탱하는 열두 기둥 중 하나인 거다.
‘그러고 보니 저 망나니도 어릴 적에는 천재란 소리를 들었다고 했지. 지금에 와서는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마도 명문가에서 천재란 소리를 들으면, 그건 정말로 뛰어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천재라도 그런 일이 가능한 건가.’
멜린은 혼란스러웠다.
어느 정도로 뛰어난 천재여야 가능한 것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에쉬드 드 배런 공자님을 능가하는 재능일지도.’
에쉬드 드 배런!
‘드’라는 미들네임에서 알 수 있듯, 암흑 마가 본가의 적통이었다.
암흑 마가의 차세대 어린 세대 중 최고의 천재라 불리며, 사실상 후계자로 꼽히고 있는 인물.
‘아니야, 지나친 생각이야. 그분과 비교는 무슨.’
설사, 크리스티앙이 그런 천재라고 해도 너무 늦었다.
크리스티앙이 방탕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 다른 또래 경쟁자들은 훨훨 날고 있다.
이미 절대로 좁힐 수 없는 격차가 벌어져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것도 같지만.’
멜린은 힐끗 시선을 돌려 크리스를 보았다.
그는 열심히 훈련장에서 구보 중이었다.
몇 바퀴째지?
스무 바퀴? 아니, 어쩌면 서른 바퀴가 넘었을 수도 있다. 한참 전부터 쉬지 않고 뛰고 있었으니까.
예상외로 근성 있는 모습.
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군. 이미 늦었어.”
언제 배움을 시작하느냐는, 성취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늦게 시작할수록 코어가 정순하지 못하고, 혈맥도 딱딱하게 굳어 있다.
이룰 수 있는 경지에 한계가 있었다.
크리스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니, 그 정도면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였다.
‘잘해야 3성이나 4성의 중급 마인 정도가 한계겠지.’
멜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1성을 이루는 데는 얼마나 걸리려나? 최소 1년은 걸리겠지? 아니, 늦게 시작했으니 2년 훨씬 넘게 걸릴지도. 더구나 핸디캡도 있으니.’
핸디캡.
과거 크리스티앙은 마기를 익혔었다.
그때 그가 도달한 경지는 무려 2성.
역대급으로 빠른 성취에 암흑 마가 본가마저 들썩였지만, 천재는 자만하였고, 방탕한 생활에 쌓은 마기를 모두 흐트러트리고 말았다.
이렇게 마기를 한번 잃으면 다시 쌓는 게 몇 배는 더 어려워진다.
‘재능이 아깝군.’
멜린은 크리스를 보며 혀를 찼다.
* ? ?* ? ?*
그리고 며칠 뒤.
‘이제 1성인가.’
크리스는 방 안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어둠의 코어에 이전에 없던 하나의 그릇이 생겼다.
마도(魔道)로도 1성의 경지에 오른 거다.
‘마기가 익숙하지 않아, 오래 걸렸어.’
오래 걸렸다.
다른 이들이 들으면 입을 쩍 벌리며 욕할 소리였다.
아무리 재능 있는 이라도 최소 반년 이상 걸리는 게 1성의 성취였다.
‘이전에 이 몸이 익혔던 마기의 찌꺼기들이 남아 있어 더 오래 걸렸어. 그것만 아니었다면 더 빠르게 도달했을 텐데.’
크리스는 손에 마기를 모아보았다.
“어색하네.”
희미한 검은 기운이 모여들었다가 흩어졌다.
‘같이는 안 되나?’
크리스는 양손에 각각 빛의 ‘마나’와 어둠의 ‘마기’를 발현해 보았다.
됐다.
한쪽에는 밝은 빛의 기운이, 다른 쪽에는 시커먼 어둠의 기운이 모여들었다.
‘혈맥에 무리가 가서 실전에서 쓰기는 아직 무리네. 두 힘을 동시에 쓰는 거는, 나중에 경지가 더 올라야 가능하겠어.’
크리스는 의자에 기대앉고는 부저를 울렸다.
그러자 으스스한 음성이 들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마치 유령처럼 희미한 몸체.
아니, ‘처럼’이 아니다. 진짜 유령이었으니까.
나타난 건 악명 높은 악령, 밴시였다!
크리스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미친, 밴시를 하녀로 쓰다니. 아무리 마가(魔家)라도 너무하잖아.’
지금은 그나마 익숙해졌지만, 처음 하녀랍시고 나타난 밴시를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심지어 밴시는 청순하게 예쁜 외모에 메이드복까지 입고 있었는데, 더 꺼림칙했다.
‘나중에 꼭 바꿔야지. 인간 시종으로.’
아무리 마도 제국이라도 유령을 시종으로 부리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 그의 수발을 들던 하녀도 인간이었다.
하지만 망나니였던 그가 자꾸 시종, 하녀에게 행패를 부리자 분노한 카자르 백작이 밴시를 크리스티앙의 전담 하녀로 정한 거다.
[도련…님…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주스 좀 줘.”
[처녀의 피… 주스…로 하면 되겠습니까?]
“…딸기 주스로.”
[처녀의 피… 주스가 맛이 왓따인데?]
“…딸기로 달라고.”
처녀의 피 주스를 마시는 마인은 없다.
밴시는 나름대로 장난을 친 거지만, 유령이 저러니 도저히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밴시는 깔깔 웃으며 사라졌고, 곧 딸기 주스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래도 이건 좋네.’
크리스는 빨대로 딸기 주스를 쪽쪽 빨며 생각했다.
‘이 풍요로움. 내가 바라던 거야.’
원하면 딱딱 바라는 게 나온다.
옷, 침대, 먹는 것까지 모두 훌륭했다.
밴시가 하녀인 것만 빼면, 그야말로 그가 이전 삶에서 바랐던 삶이었다.
‘고작 이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지. 마도 제국의 정점에 올라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려주겠어.’
세상도 구하고 말이다.
크리스는 그런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훈련장으로 갈 생각이었다.
사실, 원래 그는 게으른 천재 유형이라 이런 고된 훈련이 즐겁지는 않았지만, 목표가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부귀영화, 파이팅!’
마음속으로 구호를 외치고는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저택을 나서기 전, 그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또 훈련장에 가십니까, 도련님?”
소름 끼치게 하얀 안색.
날카로운 송곳니.
카자르 백작가의 하프 뱀파이어 집사, 콕스였다.
뱀파이어 일족답게 날카로운 외양이었지만,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어 전체적인 인상도 부드러웠다.
“응, 지금 가려고.”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콕스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물론 도련님께서 열심이신 건 너무 기쁘고 대견합니다. 이 콕스, 남들이 다 도련님을 손가락질해도 포기하지 않고 믿고 있었거든요.”
크리스는 그 말에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이놈 봐라?’
말이 굉장히 시건방졌다.
눈빛은… 크리스를 위하는 척하고 있지만, 과연 진짜 속마음은 어떨까?
“뭘 믿어?”
“네?”
“난 너한테 믿어달라고 한 적 없는데? 네가 뭔데 날 믿고, 포기하느니, 마느니 하는 거지?”
“!!”
콕스는 숨을 들이켰다.
그제야 콕스의 눈에 크리스의 모습이 다시 들어왔다.
이전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
못난이 망나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눈빛은 당당했으며, 못난 모습에 가려져 있던 고고한 기품이 흘러나왔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고고한 시선이 콕스에게 꽂혔다.
“다음부터는 조심해.”
“죄, 죄송합니다.”
집사 콕스는 허겁지겁 등을 돌려 사라졌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는 크리스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저놈, 뭔가 구린 냄새가 나는데.’
눈여겨보기로 하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하자 훈련장이 조용해졌다.
힐끗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훨씬 시선이 부드러워졌네.’
시간이 지나도 어떤 행패도 부리지 않고 묵묵히 구석에서 훈련만 하고 있자, 조금씩 다른 시선을 보내기 시작한 거다.
심지어 호의적인 마음을 품은 이도 있었다.
‘설마, 저 망나니가 진짜 변했나?’
‘이전과 다른데?’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저래 봤자 반짝이겠지.”
“두고 봐. 얼마 못 가 다시 늘어질 테니까.”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생각이 바뀌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기사단의 마인들은 이전처럼 대놓고 크리스를 향해 이죽거렸다.
“신분만 아니면, 저 망나니 새끼는 내가 반쯤 죽여놓는 건데.”
거칠게 이야기한 마인이 낄낄 웃고 있을 때였다.
이전과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거기, 말 다했나?”
“!!”
크리스였다.
막 그를 씹던 마인은 숨을 들이켰다.
“자네, 이름이 뭐지?”
“…캐닌입니다. 검은 늪 기사단의 스콰이어입니다.”
스콰이어, 종자를 뜻한다.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캐닌. 내게 했던 말을 다시 해보지.”
“…….”
캐닌의 얼굴이 굳었다.
크리스는 비죽 웃었다.
“왜? 정면에서는 말하기 어려운가 보지? 스콰이어 캐닌, 자네 같은 이를 뭐라고 하는지 아는가?”
“…….”
“비겁한 겁쟁이라고 하네.”
“!!”
캐닌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말이 심하십니다.”
“심해? 뒤에서 험담이나 하던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목검을 들어.”
“…네?”
“자네와 나, 둘 다 명예가 상했으니 해결 방법은 하나이지 않겠는가?”
크리스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힘으로 해결을 봐야지. 마인답게 말이야.”
이제 슬슬 마인들의 마음을 얻을 때가 되었다.
힘으로.
* ? ?* ? ?*
난데없이 벌어진 결투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부단장님, 저거.”
“내버려둬.”
“네? 하지만?”
만류하려던 마인은 당황했다.
지난번 결투와 다르다.
비록 목검이지만 무기를 들었고 마기의 제약도 없었다.
크리스티앙은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멜린은 냉랭히 말했다.
“마인의 명예를 걸었으니 알아서 하겠지. 힘이 있으면 명예를 지킬 것이고.”
멜린은 크리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힘이 없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겠지.”
사실, 멜린은 보고 싶었다.
크리스가 과연 어떤 저력을 보여줄지.
‘나도 참, 헛된 기대를 하는군.’
멜린은 스스로의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난 결투 때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지만, 무슨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는 건지.
아니, 지난번에 자신이 본 게 제대로 본 것이었는지조차 헷갈렸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제8화
‘하지만 그때 내가 만약 잘못 본 게 아니었다면.’
멜린의 눈동자가 깊게 빛났다.
‘어쩌면 또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여줄지도.’
그런 기대를 품고 결투를 관전했는데.
그녀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퍼억!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야?’
멜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훈련장에 있던 마인들 모두가 똑같은 반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크리스가 아니라, 캐닌이.
얼굴에 정면으로 목검을 얻어맞고 피를 흘리며.
단 한 방에.
크리스가 피식 웃으며 검은 늪 기사단을 둘러보았다.
“검은 늪 기사단도 별것 없군. 또 나설 자는 없는가?”
* ? ?* ? ?*
장내가 고요해졌다.
마인들은 당황했다.
‘어떻게 된 거지?’
‘어쩌다 캐닌이 쓰러진 거야?’
다들 방금 벌어진 광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투가 시작되자마자 캐닌은 거칠게 크리스티앙을 밀어붙였다.
‘비록 종자이지만, 캐닌은 1성의 경지에 오른 마인. 저 망나니가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지.’
‘얼마나 버티려나?’
‘10초?’
‘5초?’
그렇게 모두가 그의 패배를 점치고 있을 때였다.
순식간에 승부가 갈렸다.
크리스티앙의 목검이 캐닌의 공격을 뚫고는 정면으로 캐닌의 인중을 후려갈긴 거다.
그리고 결과는 이러했다.
‘도대체?’
‘캐닌 놈도 방심한 건가?’
하지만 두 번째다.
두 번째인데 이걸 단순히 방심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모두가 혼란스러워할 때 훈련장에 울려 퍼지는 오만한 음성.
“또 나설 자는 없는가? 지금껏 보니, 나에게 유감이 있는 이가 많았던 것 같은데.”
크리스는 피식, 재수 없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누구든 나와보지. 검은 늪 기사단의 대단한 실력을 한번 구경해보고 싶으니 말이야. 정말 소문만큼 대단한지 잘 믿어지지 않아서.”
“!!”
마인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인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한 명을 지목했다.
기사단의 정식 단원, ‘2성급’ 마인이 앞으로 나섰다.
“토른이라고 합니다.”
“뭐, 굳이 내 이름을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검은 늪 기사단을 모욕한 것을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그거야 보면 알 일이고.”
크리스는 검 끝을 까닥거렸다.
“덤벼.”
그 모욕적인 언사에 도전자로 나선 마인, 토른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까앙!
목검과 목검이 부닥쳤다.
찌릿 크리스의 손목이 울렸다.
‘내 의도대로야.’
크리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방금 일부러 검은 늪 기사단을 자극했다.
2성급 마인이 나설 거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자존심상 나 같은 망나니를 상대하기 위해 더 높은 수준의 마인이 나서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
지금 나선 놈은 딱 여러모로 그의 상황에 알맞은 상대였다.
일단, 2성까지는 현재 그의 능력으로 아슬아슬 상대할 수 있었다.
‘비록 마기의 양은 내가 부족하지만, 이 정도는 상대할 수 있어.’
파창! 탁! 끼익!
목검이 서로 오고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연무장이 고요해졌다.
다들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한 거다.
“뭐하는 거야?!”
“얼른 끝내버려!!”
겉으로 보기에는 2성급 마인인 토른이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끝을 내지 못했다.
아니, 끝을 내기는커녕.
‘뭐지? 뚫을 수가 없어!’
투박한 상대의 반격에 탁, 탁 공격의 맥이 끊겼다.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면 교묘하게 피하거나, 공격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았다.
‘앞에 두 사람, 방심한 게 아니었어.’
토른은 침음을 삼켰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자신보다 약하다.
하지만 도리어 자신이 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는 여유가 넘치는데 자신은 안간힘을 다해 발버둥 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말도 안 돼.’
한편, 결투 당사자인 토른 말고도 또 경악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부단장 멜린이었다.
‘…말도 안 돼.’
부단장 멜린은 놀람을 감추지도 못했다.
‘그때,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지금, 크리스티앙이 보이고 있는 동작들.
하나하나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뛰어나서?
아니, 정반대.
뛰어나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숙달된 검술로 상대를 압도했다면 놀라울 게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티앙은 변변치 않은 동작으로도 도리어 상대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불가능한 일을 해내고 있는 거다.
‘…미친, 어떻게 저렇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정말 까마득한 천부적인 전투 센스를 가지고 있으면 저런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천재라도 진짜 저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기지 않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장내가 죽은 듯한 고요로 가라앉았다.
모두 눈을 부릅뜨고 크리스티앙을 바라보았다.
한편, 크리스티앙은 속으로 생각했다.
‘슬슬 끝낼까? 볼 건 다 본 것 같으니.’
그가 오늘 난장을 부린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마인들 사이에서 인정받기 위해.
강자존이 최고인 마인들의 사회에선 힘으로 인정받는 게 최고니까.
정식 단원인 2성급 마인을 쓰러뜨리면 그를 향하는 시선도 적잖이 바뀔 거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가 있지.’
크리스는 눈을 깊게 가라앉혔다.
자신을 향해 목검을 휘두르는 마인의 모습이 보였다.
크리스가 보는 건 더 많았다.
첫째, 검을 움켜쥔 손목의 자세.
손아귀의 각도.
팔의 근육이 어떤 식으로 응축되었는지.
발은 어떻게 앞으로 나왔는지.
그래서 마기는 어떤 식으로 뻗어 나와 힘을 강화하는지.
그러니까 검은 늪 기사단의 기초 검술, ‘진흙 검법’이 실제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본 거다.
‘대충 이런 식이었군.’
그간 구보를 하면서 틈틈이 검은 늪 기사단의 훈련 장면을 보았다.
대충 움직임을 파악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멀찍이 봐서 훔쳐보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거다.
‘이만하면 되었겠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목검을 휘둘렀다.
파앗!
마기가 몸에 퍼졌다.
이제 갓 1성에 이르렀을 뿐인, 미약하기 그지없는 마기.
하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건 ‘얼마나’보다 ‘어떻게’냐니까.
같은 마기라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천지 차이였다.
결투 상대, 토른이 강한 마기를 휘두르고도 옷자락에도 닿지 못했던 것과 다르게, 크리스의 검은 너무나 쉽게 토른의 허를 꿰뚫었다.
퍼억!
크리스의 검이 토른의 관자놀이를 강타했고, 급소를 강타당한 토른은 눈을 뒤집고 기절했다.
“…….”
미칠 듯한 침묵이 마인들을 짓눌렀다.
모두 방금 일어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경악이 연무장 안에 퍼졌다.
“미친… 저 망나니 도련님이 저렇게 강했다고?”
“강한 게 아니야. 마기의 성취, 검술 동작 등은 형편없어.”
“그게 더 대단한 거지. 제길.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일이 가능한 거지? 마기는 이제 겨우 1성에 올랐을까 말까 할 정도이던데.”
“아니, 그런데 마기를 안 익혔던 거 아니었어? 언제 1성에 도달한 거지?”
감탄,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악과 충격이 마인들 사이를 휩쓸었다.
순간, 마인들 모두의 얼굴에 똑같은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천재?’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천재가 아니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보통의 천재가 아니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재능이면 저런 일이 가능한 거지?’그들은 정예 마인.
천재라 불리는 이들을 처음 본 게 아니다.
이 자리에도 나름대로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되는 이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저런 일이 가능한 재능은 지금껏 보지 못했다.
‘저 망나니가 저런 재능을 숨기고 있었다니.’
마인들의 시선이 변하기 시작했다.
마인들의 사고방식은 단순하다.
철저한 강자존!
강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약자를 멸시한다.
지금껏 크리스티앙이 경멸받았던 건 망나니짓을 한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가 약했기 때문이다.
약한 주제에 한심한 망나니.
만약 그가 강했다면, 선을 넘지 않는 다소의 방종 정도는 너그럽게 이해하는 이도 많았을 거다.
물론, 강하더라도 선을 넘는 잘못은 엄격하게 제재받지만, 원래 마도 제국의 마인들은 강자에게 관대하다.
‘좋았어. 예상대로의 반응이야.’
크리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런 반응을 노리고 오늘 일을 벌였다.
그래도 겉으로는 일절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고, 계속 짐짓 싸늘한 얼굴로 일관했다.
그게 더 마인들의 마음을 얻는 데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 크리스의 의도는 적중해 마인들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전혀 우쭐해하시지 않는군.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건가.’
‘이전보다 훨씬 마인다워지신 것 같군.’
원래도 크리스가 깃든 몸의 얼굴은 성질이 나빠 보였다.
거기에 환골탈태를 이루어 고고한 귀공자 같은 기품이 흘렀는데, 싸늘히 얼굴을 굳히고 있으니, 어딘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강자의 오만은 마인들이 환호하는 덕목이었다.
마인들은 어설픈 겸손보다 솔직한 오만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지켜봐야겠어.’
그렇게 크리스를 향한 마인들의 시선이 바뀌고 있을 때, 크리스가 또다시 상상도 못 한 일을 하였다.
‘고작 이 정도로 끝내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니까.’
“실망이군. 내가 검은 늪 기사단에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것 같아.”
“!!”
또다시 기사단을 모욕하자, 마인들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강자를 존경하는 것과 별개로 자신이 속한 기사단을 모욕하면 열 받는 건 당연하니까.
마인들이 발끈하여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크리스가 더더욱 미친 발언을 하였다.
“부단장님은 제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크리스가 입술을 비쭉 일그러트렸다.
누가 봐도 재수 없게.
“기사단의 실력이 변변치 않은 것은, 부단장님의 책임도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저 미친놈이 부단장 멜린을 도발하고 있는 거다!
‘미친놈.’
‘변하긴 개뿔. 그냥 더 미친 거였어.’
‘말려야 하는 것 아니야?’
부단장 멜린은 헛웃음을 흘렸다.
“도련님,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두어 기뻐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너무 주제넘게 기어오르는 것은 아닌지요?”
“글쎄, 그건 더 지켜보면 알겠지요.”
크리스는 목검을 까닥거렸다.
“부디 부단장님께서 검은 늪 기사단의 실력을 알려 주시지요.”
“!!”
멜린에게 결투를 신청한 거다.
그녀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망나니, 내가 전력으로 나서면 넌 1초 안에 죽어.”
경어도 집어치웠다.
제9화
크리스도 그 경고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전력을 다해 겨루면 당연히 제가 부단장님을 이길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전력을 다하실 겁니까? 본가에서 나온 높은 분이 저 같은 망나니를 상대로?”
“…….”
“사용 가능한 마기는 1성까지, 저주는 금지. 그걸로 겨루어보죠. 혹시, 1성으로 이길 자신이 없으면 2성까지로 올려 드릴까요?”
멜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저 망나니는 지금 1성의 마기만 쓰면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도발하고 있는 거다.
무려 4성.
그것도 4성 상(上)의 경지의 마인인 그녀에게.
“1성까지도 필요 없어. 그것의 절반만 사용하도록 하지. 검술도 기초인 ‘진흙 검술’만 쓰고.”
질끈.
그녀가 머리를 묶었다.
“대신, 결투가 끝난 후, 날 모욕한 대가로 네 두 다리를 부러뜨리겠다.”
엄포가 아니었다.
진짜 그대로 시행하리라.
그나마 그가 방계나마 암흑 마가의 혈통이니 부러뜨리는 것에 그치지, 만약 다른 이가 그녀를 이렇게 도발하였다면 고작 이 정도로 끝내려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크리스는 끝까지 이죽거렸다.
“결투에서 제가 지면 그렇게 하죠. 하지만 부단장님이 졌을 때도 어떻게 하실지 생각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
“제가 질 것 같지는 않은지라.”
멜린은 몇 번인지 모를 헛웃음을 흘렸다.
저 천둥벌거숭이의 미친 소리에 화를 내야 하는지, 황당해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네가 이기면 네 부탁은 뭐든 들어주지. 그게 어떤 부탁이라도.”
“그거 조금 위험한 조건인 것 같은데요?”
“괜찮아. 무슨 조건이든.”
파앗!
멜린의 몸이 순간적으로 가속했다.
그녀가 검집째로 크리스를 내려쳤다.
쩌억!
간신히 방어한 크리스를 보며 그녀가 차갑게 속삭였다.
“어차피 넌 오늘 여기서 걸어 돌아가지 못할 테니까.”
* ? ?* ? ?*
건방진 놈.
멜린은 생각했다.
이제 놈이 대단한 재능을 가졌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어쩌면 저놈의 재능은 본가의 후계자로 꼽히는 ‘에쉬드 드 배런’ 공자님에 비견할 만할 수도 있다.
충분히 오만할 수 있는 재능.
하지만 거기까지다.
오만하다고, 주제를 모르는 건 곤란하다.
‘마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주제 파악이지. 오래 살고 싶으면.’
강자존인 마인들의 사회라고 질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도리어 철저한 규칙이 있었다.
바로 강자에게 굴종하는 것.
그런 기준에서 지금 크리스티앙의 행동은 그저 앞뒤 모르고 미쳐 날뛰는 망종의 어리석음에 불과했다.
‘버릇을 고쳐야겠군. 카자르 백작님에게는 감사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 이 기회에 은혜를 갚는 셈 쳐도 좋겠지.’
그녀는 오늘 크리스티앙을 철저히 ‘교육’할 생각이었다.
다시는 오늘처럼 주제 파악 못 하고 원숭이처럼 구는 일이 없도록.
저 망나니 놈도 나중에는 그녀에게 감사하게 되리라.
‘강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법을 알려 줘야겠어.’
방법은 간단했다.
패면 된다.
실컷 맞다 보면, 저절로 강자를 향한 존경심이 생기리라.
그런 마음으로 재차 검집을 휘둘렀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멜린이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크리스가 간신히 방어하는 양상으로 결투는 흘러갔다.
구경하는 마인들 모두 곧 승패가 나리라 생각했다.
‘역시 상대도 안 되는군.’
‘그래도 부단장님을 상대로 제법 오래 버티는군.’
‘재능은 진짜라는 건가.’
마인들은 크리스가 예상외로 오래 버티자 감탄 섞인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래 봤자다.
저 망나니 놈은 곧 쓰러지리라.
그러니까, 곧.
금방.
그런데… 그 금방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
멜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 기량상 상대도 되지 않는데, 이상하게 공격이 닿지 않았다.
멜린은 기시감을 느꼈다.
테른 때도 그렇고… 조금 전 결투들 때도… 이러지 않았나?
크리스가 히죽 웃었다.
“무언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 같군요.”
“!!”
“부단장님도… 생각보다 별것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멜린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이후에는 듣지 못한 모욕이었다.
분노한 그녀가 이를 바득 갈았다.
저 모기처럼 짜증 나는 망나니 놈을 단번에 제압할 생각이었다.
코어에서 피어오른 마기가 검집으로 향했다.
진흙 검법 중 강한 공격법 중 하나인 진흙 내려치기.
약속한 대로 1성의 절반 정도에만 해당하는 마기였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저 망나니 놈을 제압하기에는 충분하리라.
하지만 강한 의지가 담기면서 그녀의 자세에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동작이 일부 커진 거다.
그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실수.
아니, 어쩌면 실수는 아니었다.
동작이 커졌다고 하나 큰 차이는 아니었고, 일반적으로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녀에게는 불행히도, 크리스티앙은, 정확히는 그 안에 깃든 이는 일반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용사가 감탄했을 만큼의 천재.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고작 며칠 사이에 진흙 검법을 속속들이 파악한 상태였다.
진흙 내려치기를 할 시 어떤 틈이 생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
예상치 못한 좁힘에 그녀가 당황했다.
서로 간의 거리가 달라졌다.
그렇다면 공격도 달라져야 했다.
문제는 그녀의 방금 동작이 컸다는 거다.
동작을 변환시키는 것에도 미세한 딜레이가 생겼다.
크리스는 역시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이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임을 알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절대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과감히 움직였다.
코어에서 뻗은 마기가 몸으로 뻗어 나갔다.
아직 미약하기 짝이 없어서 몸 전체를 강화시키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일부만 강화했다.
가장 필요한 부분만.
그리고 그녀의 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
멜린은 그 움직임에 더욱 당황했다.
더 안으로 들어오다니? 이러면 상대도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가 없다.
순간, 그녀는 크리스의 속셈을 눈치챘다.
‘설마?’
하지만 늦었다.
설명은 길었지만, 눈 한 번 깜빡할 짧은 순간이었고, 허를 찔린 그녀가 동작을 바꾸기에는 무리였다.
그 결과,
퍼억!!
크리스의 이마가 그녀의 콧잔등을 정통으로 들이박았다.
마기로 강화한 박치기였다.
* ? ?* ? ?*
장내가 고요해졌다.
몇 번째인지 모를 침묵이었다.
이전과 다르게, 마인들은 입을 뻥긋도 하지 못했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부단장님이 왜?’
결투 시작부터 지금까지.
크리스는 일방적으로 밀렸다.
당연했다.
아무리 1성의 반절로만 마기 사용을 제한했다고 해도 서로의 수준이 너무 차이가 났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크리스가 안으로 파고들더니 박치기에 성공했다.
멜린이 보인 빈틈을 절묘하게 노린 수가 성공한 것이지만, 마인들은 그것까지 알아볼 눈썰미는 없었다.
크리스는 코피를 주륵 흘리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멜린을 보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결투도 엄밀히 말하면 사기나 마찬가지지.’
놀라운 생각이었다.
그 생각처럼, 이 결투는 사실 크리스가 모두 의도한 바였다.
‘아무리 4성의 마인이라도 이렇게 힘을 제약하고 내 상대가 될 리 있나. 특히, 마검사(魔劍士)가.’
마검사.
검과 마법을 동시에 쓰는 기사를 뜻한다.
암흑 마가는 전통적으로 검과 마법을 동시에 다루는 게 장기인 곳이었다.
검을 위주로 익히면서, 다양한 흑마법을 보조로 사용했다.
검은 늪 기사단은 특히 흑마법 중 ‘저주’ 마법을 능숙하게 활용하는 것으로 명성 높은 집단이었는데, ‘저주’를 봉인한 건 손 하나, 다리 하나를 묶고 싸운 거나 다름없었다.
만약 멜린이 순수하게 검술에 치중한 마인이었다면, 크리스도 이렇게 쉽게 허를 찌르지는 못했을 거다.
‘검술 수준만 따지면, 3성 정도이려나. 마검사들은 이룬 경지에 비해 개개의 성취는 떨어지기 마련이니.’
물론 설사 그렇더라도 대단한 일이긴 했다.
모두의 찢어질 듯한 눈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경악, 충격, 혼돈, 불신이 엉망진창으로 섞인 시선이 크리스에게 향했다.
그때, 멜린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의외로 분노한 얼굴은 아니었다.
도리어, 왜인지 모르게 후련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녀는 손등으로 코에서 흐른 피를 거칠게 닦았다.
“아까 했던 이야기는 사과해야겠군요. 제가 도련님을 너무 무시했던 것 같습니다.”
멜린이 다시 말을 높였다.
크리스를 인정한 거다.
얼굴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골수 마인.
오래간만에 상대할 만한 적수를 만나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거다.
‘방계로 파견 와서 매일 지겹게 시간만 죽이고 있었는데, 이런 즐거움을 만나다니.’
버릇을 고쳐 주겠다는 생각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이 순간, 멜린은 크리스를 자신의 ‘적수’로 인정했다.
물론, 크리스는 엄밀히 말해 그녀의 상대가 아니었다.
제대로 힘을 발휘하면, 전혀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이렇게 피가 끓어오르는데.
방금 틈을 찔려 크리스가 파고들던 순간이 떠올랐다.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는 미칠 듯한 감각.
그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 맹수와도 같은 과감성.
짜릿했다.
최근 들어서 이런 즐거움은 처음이었다.
“앞으로는 다를 거랍니다. 집중해서 가지요.”
멜린이 혀를 핥았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진중해진 눈빛이었다.
그런데 크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곤란할 것 같은데요. 이미 승부는 끝났거든요.”
“네?”
“목 보세요.”
멜린은 당황하며 목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희미한 생채기가 느껴졌다.
“언제?”
“아까 박치기하면서 손톱으로 긁었습니다. 만약 제 손톱에… 독이 묻어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아시겠죠?”
멜린은 벙찌게 되었다.
크리스의 말이 옳았다.
그녀가 졌다.
“하지만… 이건… 이건….”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방심해서 그런 거라고?
머저리나 할 법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진짜 끝이라고?
이렇게 허무하게 졌다고?
무엇보다 그녀는 달아오른 흥분을 날리고 싶지 않았다.
저 천재와 제대로 검을 겨루고 싶었다.
또 그 짜릿함을 느끼고 싶었다.
결국, 그녀는 자존심을 굽혔다.
“…한 번 더 가죠.”
“흐음? 패배를 인정하시지 않는 겁니까?”
멜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망설이다가 답했다.
“아니, 인정해요. 당신이 이겼어요.”
그녀가 패배를 인정하자, 장내가 술렁였다.
“그런데 왜 구차하게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멜린은 민망함에 살짝 뺨을 붉혔다.
“…부탁하는 겁니다. 승패를 떠나, 도련님과 제대로 검을 겨루고 싶습니다. 대신, 결투에 응해줄 시, 추가로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겠습니다.”
그 공손한 청에 마인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고고한 부단장이 저렇게 저자세를 보이다니.
“내기에 진 것 말고, 추가로 부탁 하나를 더 들어주겠다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대단한 일이었다.
아까 결투에서 승리한 대가를 합쳐 백지수표 두 장.
그녀가 암흑 마가 본가에서도 나름대로 인정받는 마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 가치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별반 내키지 않는군요.”
“!!”
“당신을 두 번 움직일 수 있는 권리. 고작 그게 무슨 대단한 권리라고.”
멜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크리스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앞에 선 멜린에게만 들리게.
“당신이 아예 내 앞에 무릎을 꿇겠다는 조건이라면 모를까.”
제10화
멜린이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충성을 맹세하라는 이야기였다.
결투 한 번, 그것도 힘을 제약하는 약식 결투에 대한 대가로는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이미 암흑 마가 본가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는가?
그녀의 충성을 받는 ‘로드’는 암흑 마가의 가주이자 8성급 절대지경의 마인인 마군주(魔君主) 노르디언 공작이었다.
“불가능한 조건이라는 것은 아시겠죠?”
“글쎄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데요.”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암흑 마가의 ‘공자’가 된다면, 당신이 나를 따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지요.”
공자.
암흑 마가의 혈통 중 후계 계승권을 인정받은 이들을 뜻한다.
현재 총 다섯 명이며, 그들은 가문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만들며 후계 다툼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 다섯 명 모두 적통이며, 방계는 한 명도 없었다.
“방계인 당신이 공자라고요?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말 안 될 거라 생각합니까?”
“!!”
크리스가 피식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말도 낮추었다.
“난 될 거라 생각하는데.”
멜린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무언가 아까와 분위기가 달랐다.
쩌릿하게 느껴지는 긴장감.
묵직한 공기.
멜린은 크리스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의 정체를, 신음을 흘리듯 읊조렸다.
‘위압감.’
멜린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하였다.
변한 건 안다.
눈앞의 존재는 이전의 망나니가 아니다.
하지만 위압감이라니?
이건 단순히 재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위압감은 그만한 격이 있어야 갖출 수 있는 거였다.
하지만 눈앞의 애송이는 어떤 자격도 없었다.
그렇다면.
‘타고났다고?’
멜린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간혹 그런 존재가 있다.
날 때부터 남들 위에서 군림하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들. 태생적인 지배자들.
그런 이들은 자라면서 자연스레 남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위압감을 갖추게 된다.
‘도대체?’
멜린은 혼란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편, 크리스는 그런 멜린의 반응을 보며 속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서라. 지금껏 쌓아온 경험이 다른데.’
부단장 멜린.
마기로 노화를 억눌러 겉모습은 젊어 보이지만, 최소 40에 가까우리라.
이전 삶, 크리스보다 많은 나이였다.
하지만 크리스는 대전란의 시기를 무려 10년이나 경험했다.
빛의 진영이 마도 제국에 멸망할 때까지 무수히 많은 일을 겪고, 수많은 업적을 쌓았다.
심지어 용사 일행에 합류하기 전에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잠깐이나마 거대한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의 위치에 올랐던 적도 있다.
그러니 부단장 멜린을 압박할 위압감 정도야 얼마든지 선보일 수 있었다.
크리스는 멜린이 반쯤 넘어왔다고 생각하며 쐐기를 박기로 하였다.
“물론, 쉽게 할 결정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고작 힘을 제약한 결투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그러니 이렇게 하도록 하죠.”
“…무슨 말입니까?”
“한 달 뒤에 저와 결투하는 것으로 하죠. 대신, 그때는 어떤 제약도 없이 제대로 겨루는 것으로.”
“!!”
멜린은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제안이었다.
“힘을 제약하지 않으면 당신이 날 이길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렇겠죠.”
크리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천재라도 한 달 만에 4성급의 마인과 싸워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이전 삶에도 4성의 경지에 이르는 데 3년이 걸렸으니.’
성(成)으로 표현하는 경지는 위로 올라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오르기 어려워지며, 실력 차이도 극단적으로 벌어지게 된다.
하지만.
“가끔은 계란이 바위를 깨는 일도 생길 수 있는 법이니까요.”
“!!”
“앞으로 한 달간 저를 지켜봐 주십시오.”
크리스는 멜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 달 동안 제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해내는지, 최종적으로 어떻게 변해 있는지 모두 지켜본 후 판단하십시오. 제가 당신의 충성을 받을 만한 존재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멜린은 침묵하였다.
뭐라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고작 한 달 가지고 뭘 어떻게 하겠다고?’
한 달이란 시간은 아주 짧은 시간이다.
그가 아무리 천재라도 시간의 한계는 있었다.
그게 당연한 상식이지만.
하지만.
“…알겠습니다.”
멜린은 이렇게 답하였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게.
“…한 달간 지켜보지요.”
왜인지 눈앞의 존재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을 이룰 것 같기도 하다는 예감이 들었다.
크리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지요.”
* ? ?* ? ?*
‘좋았어!’
방으로 돌아온 크리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늘 결투에서 의도한 바를 모두 이루었다.
강한 힘을 선보여 마인들의 시선을 바꾸게 하였고, ‘진흙 검술’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도 파악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멜린의 마음을 흔드는 데 성공했어.’
멜린은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암흑 마가 본가의 마인이니까.
크리스는 이곳 카자르 백작가를 넘어 암흑 마가 전체를 집어삼킬 생각이니, 그녀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면 큰 도움이 되리라.
‘그런 걸 떠나, 멜린은 아주 유명한 마인이 되기도 할 거고.’
대전란 때 멜린은 무려 6성(成)의 고위 마인이 되어 있었다.
6성.
‘마스터’라 불리는 경지.
그러니, 반드시 그녀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
‘물론 아직 완전히 내게 넘어온 건 아니지만, 한 달이면 충분하지.’
그녀와 약속한 한 달.
그동안 그는 여러 일을 해낼 작정이었다.
‘일단, 검은 늪 장서관 먼저.’
검은 늪 장서관.
카자르 백작가의 흑마법 비기가 보관된 곳이었다.
그는 아버지인 카자르 백작을 찾아갔다.
“여기, 멜린 부단장의 추천장입니다. 부단장과의 결투에서 승리하여 받아 왔습니다.”
“…….”
그의 아버지, 카자르 백작은 당황한 얼굴을 하였다.
당연했다.
호적에서 팔 것을 고민하고 있던 와중, 아들이 완전히 변해 버렸으니까.
“…결투에서 검은 늪 기사단의 마인들을 이겼다고?”
“네, 마인들의 기본기가 부족해 이겼습니다. 검은 늪 기사단도 별것 없더군요. 훈련에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카자르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별것 없다니.
크리스티앙이 이긴 상대들은 당연히 카자르 백작도 아는 이들이었다.
마기의 경지가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를 들을 자들도 절대 아니었다. 수련에 매진하여 기본기만큼은 남들 이상으로 탄탄한 이들이었다.
더구나, 아들이 이긴 상대 중에는 말도 안 되는 이도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부단장 멜린을 이겼다.
‘믿을 수 없어.’
아무리 힘을 제약했다고 하지만,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그에게, 멜린이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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