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ocalipse 2

“변종이다! 변종부터 죽여! 수류탄이든 뭐든 있는 건 다 던져!”
이번엔 윈기옥을 던지듯 자동차를 양손으로 들어 올린 변종에게 모든 화력이 집중됐다.
콰앙― 콰앙―
연속해서 울리는 수류탄 폭음과 함께 K-3 기관총이 연신 불을 내뿜었다.
투다다다다다다―
크롸아아아아―
이 정도 화력까지 무시할 수 없었는지 변종의 몸이 주춤주춤 떨리며 상처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변종은 손에 든 차를 옆에 내팽개치고는 양팔을 교차해 얼굴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을 노리는 것은 변종만이 아니었다.
변종에게 화력이 집중되자 자연히 일반 좀비들을 막던 화망이 사라지는 결과가 발생했다.
저지 수단이 사라진 기회를 틈타, 좀비가 순식간에 군인들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끼에에에에에엑!”
“으, 으아악!”
지나치게 좁혀진 거리에선 순수 화기로는 좀비 웨이브를 막을 수 없었다.
일선에 있던 군인들이 쓰러지며 도미노처럼 저지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크롸아아아아아―
총을 던지고 도망가는 군인들을 주먹으로 내려찍는 변종과 함께 모든 걸 포기했다는 듯이 총을 버린 군인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
커지는 군인의 눈과 함께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살…”
“끼에에엑!”
나를 향해 입을 열던 군인에게도 좀비들이 덮쳤다.
좀비에게 깔린 군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는 더 안 들어도 뻔했다.
살려달라는 거였겠지.
공중에 뜬 채로 변종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한참 군용차량을 무기처럼 휘두르는 놈의 뒤통수에 염력을 집중해볼 생각이었다.
크롸아아아아―
“…동시엔 무리네.”
마나가 빠져나가는 동시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아직 염력으로 공중부양과 상대타격을 동시에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나를 거두며 미련없이 팔을 내렸다.
그리고 원래의 목적지를 향해 다시 날기 시작했다.
군인의 마지막 시선이 계속해서 나에게 박혀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를 살려야 하는 이유가 전혀 없었다.
* * *
스륵―
한 시간 만에 내 몸이 육지에 발을 디뎠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주상복합상가의 옥상이었다.
출발할 때보다 확연히 줄어든 마나가 느껴졌다.
좀비 웨이브를 구경한다고 예상치 못한 시간이 너무 많이 지연됐다.
마나를 회복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길게 뻗은 ‘예술로’와 그 왼편에 있는 ‘중앙 근린공원’이 보였다.
원래였다면 산책하는 사람들과 운행하는 차들도 활기가 가득했던 곳인데….
차들이 달려야 하는 아스팔트엔 햇빛에 말라붙은 핏자국만이 흥건했다.
걸어서 5분이면 도달할 오른편엔 ‘인천광역시청’이 보였다.
저 시청 바로 밑이 목적지인 도서관이었다.
‘마나를 반 정도는 채우고 움직이자.’
인벤토리에서 에너지바를 꺼내먹는 와중에 멀리서 무언가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냥 좀비였다면 그렇게 시선을 끄는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짧은 팔다리로 무언가가 도로 한복판을 아장아장 걷고 있었다.
“…애새끼잖아?”
초등학생 정도라면 이해했다.
이런 세상이 와도 뭐, 운이 존나게 좋다면 살아 있을 가능성이라도 있으니까.
하지만… 저건 너무 어린데?
높게 쳐줘야 3살짜리였다.
마치 별세계라도 온 듯이 태연하게 도로 중앙을 걷고 있는 어린아이라.
“개같이 기괴하네.”
아장아장 걷던 어린아이의 발걸음이 그 순간 뚝―하고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정확히 나에게로 돌리기 시작했다.
‘씨발? 이게 들렸다고?’
어린아이의 빨간 눈과 마주하며 아이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전신이 미쉐린 타이어 마스코트처럼 겹겹이 주름에 가득 차 있었다.
저건 ‘아이가 복스럽게 생겼다.’의 정도를 넘어선 비정상적인 체형이었다.
비정상.
‘…변종.’
생각과 동시에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아이가 치아가 하나도 없는 입을 벌렸다.
“빼애애애애애액!”
보통 좀비의 포효와는 격이 다른 소음이 내 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순간 몸을 휘청거릴 정도였다.
서둘러 마나를 움직여서 변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 소음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지 일단 저 아가리를 최대한 빨리 닫고 싶었다.
사이비 아줌마를 처치할 때처럼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씨이이발 좆됐네.”
“빼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목을 찢어버리려 해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팔과 다리 아니 전신이 염력에도 요지부동이었다.
변종의 전신에 가득한 주름이 눈에 띄었다.
“저게 혹시 그 전설의 실전 압축 근육이냐?”
더 이상의 염력은 낭비였다.
무슨 일이 발생해도 공중으로 튀면 되기에 마나의 회복에만 집중할 생각으로 염력을 거둬들였다.
“으, 으아아아악! 저게 뭐야!”
그와 동시에 내가 있던 상가 바로 오른편 건물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안경을 쓴 남자와 책을 테이프로 붙여 전신을 보호한 남자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여자였다.
“빼애애애애애애액!”
우렁찬 괴음에 정면으로 노출된 일행의 다리가 사시나무 떨듯이 떨렸다.
태어났을 때부터 목구멍에 마이크가 박힌 채로 태어난 게 아니라면 저건 분명히 변종이다.
하지만 고작 저렇게 큰 소리로 빼액거리며 잠시 균형을 잃게 하는 게 끝이라고?
근육 덩어리 변종과 비교하기도 미안한 성능이었다.
분명히 뭔가가 더 있다.
그리고 그건 아마 저 사람들이 확인시켜 주겠지.
난 영화를 관람한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어, 어떡하지? 강산이는 언제 나오는 거야?”
“씨발, 뭔 말만 하면 강산, 강산. 비켜봐, 새끼야.”
불안해 보이는 안경잡이를 밀치며 야구 배트를 든 책갑옷 남자가 변종에게로 달려가 야구 배트를 휘둘렀다.
뻐억―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야구 배트를 놓친 책갑옷이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아!”
크게 꺾인 채로 마구 경련하는 책갑옷의 오른손.
‘븅신새끼, 염력으로도 끄떡없는 게 잘도 되겠다.’
주저앉은 채로 흐느끼기 시작하는 남자 뒤로 건물에서 두 사람이 더 튀어나왔다.
“경민아! 무슨 일이야?”
“혀, 형님! 지금 저, 저 여자가 나가봐야 한다고 그, 개, 개, 개지랄을 떨어서 나갔는데…”
횡설수설하는 안경잡이를 진정시키는 남자.
멀리서 봐도 기럭지나 체형으로 존잘의 기운이 무럭무럭 느껴졌다.
‘…죽일까?’
그리고 존잘남과 같이 나온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주저앉은 책갑옷을 부축했다.
우락부락한 다리에서 원래 운동을 하던 남자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산아! 이거, 예감이 안 좋은데?”
“태산아! 일단 철수 데리고 저 새끼한테서…”
끼에에에에에엑!
그들의 바쁜 의사소통을 뚫고 좀비들의 하울링이 울려 퍼졌다.
변종의 울음소리와 함께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들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와 있는 나에게만 보이는 풍경이 있었다.
멀리서부터 사방에서 좀비들이 변종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 맞다. 소리.”
저 변종의 역할을 유추할 수 있었다.
저 빼액거림은 소리에 민감한 좀비들을 불러모으는 일종의 ‘사이렌’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발견하면 그 즉시 소리를 질러서 좀비 웨이브를 불러 모으는 변종.’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었는지 일행들이 순식간에 밀집 대형으로 모였다.
존잘남의 뒤에 딱 붙어 있던 여자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존잘남에게 무언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초인이 된 육체로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여자에게서 무언가를 들은 존잘남이 어딘가를 확인하듯이 바쁘게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돌리는 방향이 위에서 볼 때 정확하게 좀비들이 진입하고 있는 방향이었다.
“아영 씨가 좀비가 온다는데….”
“형! 저, 저년 때문이에요! 저년이 밖에 나가야 한다고만 말하지 않았어도!”
“내가 분명히 상황만 파악하고 있으랬잖아. 철수는 왜 저렇게 된 거야?”
“저, 저, 저는 가만히 있자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끙끙대던 책갑옷을 확인한 운동남이 존잘남에게 말했다.
“산아, 상태가 심각해. 도서관으로 돌아가자.”
“도서관에 간다고 해서 치료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래도 일단 안전한 곳을 가야 내가 뼈라도 맞춰 볼 수 있어.”
“알고 있어. 일단 서둘러서 움직이자.”
이어지는 대화를 엿들으며 나는 여자의 얼굴이 올라가는 순간을 기다렸다.
‘들어라. 제발 들어라. 얼굴을 봐야돼. 얼굴을.’
저 일행들이 도서관에서 왔다는 것보다 나는 저 고개 숙인 여자의 얼굴 확인이 급했다.
존잘남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여자의 몸이 다시 한 번 부르르 떨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젠 지상에서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할 만큼 좀비들이 가까이 왔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그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곳에 계속해서 계시면 위험합니다!”
일행들의 고개가 나에게 향했다.
나는 손을 흔들며 다시 소리쳤다.
“이쪽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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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 조우 (4)
조우 (4) ― 인천 남동구 구월동 상가 옥상
“그곳으로 올라가면 저희는 고립됩니다!”
듣기 싫은 존잘남의 음성에 나는 다시 답했다.
“그곳이든 여기든 어차피 고립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끼에에에에엑!
이미 사방에서 튀어나온 좀비들로 딱히 피할 곳도 없었다.
좀비 웨이브를 구성하는 숫자로 볼 때 저들이 자력으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변종이 소리를 지른 순간부터 이미 불가능했다.
잠시 고민하던 존잘남이 고개를 끄덕이며 운동남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와 동시에 일행들이 내가 있던 건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안경잽이가 선두에서 달렸고 그 뒤를 책 갑옷과 책 갑옷을 부축한 운동남이 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듯이 존잘남과 여자가 뒤따랐다.
여자는 호위라기보다는 존잘남에게 붙어있는 것에 가까웠다.
끼에에에엑!
그들이 내가 있던 건물로 들어오자마자 변종이 있는 곳에 좀비들이 득달같이 몰려들었다.
조금만 행동이 늦었어도 그들은 이미 저승길로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좀비 중에 일부가 건물로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약간의 염력을 이용해서 달려들려는 좀비들을 크게 밀쳤다.
철푸덕―
역시 변종에게만 아직 무리였던 거지, 일반 좀비들에게는 과할 만큼 잘 먹혔다.
끼이익― 쾅!
옥상 문이 강하게 열리며 안경잽이가 미끄러지듯이 들어왔다.
허억― 허억― 허억―
급하게 몰아쉬는 숨과 함께 안경잽이의 안경이 김으로 가득했다.
그 뒤를 이어 일행들이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존잘남이 문을 닫으며 그 옆에 있던 의자로 철문을 막았다.
“…….”
숨을 고르는 일행과 나 사이에 기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책 갑옷이 흘린 야구 배트를 언제 가져왔는지 안경잽이가 방망이를 내게 뻗으며 소리 질렀다.
“다, 당신 누구야!”
뭔 경련이라도 왔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방망이를 보고 있자니 불쾌감보다 안쓰러움이 앞섰다.
안심하라는 듯이 양손을 머리 위로 들고 흔들기까지 하며 최대한의 미소를 보였다.
“안심하세요. 위험하신 것 같아서 도움을 드린 것뿐입니다.”
안경잽이의 야구 배트를 슬며시 내린 존잘남이 일행의 앞에 섰다.
난 존잘남보다는 그 뒤에 과할 정도로 붙어있는 여자의 얼굴을 스캔했다.
하얀 피부와 작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가늘고 긴 체형에 어울리지 않게 쫄깃해 보이는 하얀 허벅지에 발기하려는 자지를 필사적으로 죽였다.
‘이건 대박이다.’
계속해서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존잘남의 얼굴을 확인했다.
뭐, 잘생겼다. 끝.
나를 관찰하듯이 이리저리 살펴보던 존잘남이 말했다.
“…이곳에 사시는 분이십니까?”
“아!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도 안 했네요. 저는 한구원입니다. 이곳에 사는 건 아니고요. 한마음 아파트에서 왔습니다.”
“저는 강산입니다. 저희는…”
입을 달짝거리던 놈이 입술을 깨물더니 말을 이었다.
“어쨌든 반갑습니다.”
최대한 정보를 흘리기 싫어하는 것이 보였다.
아직 나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거겠지.
운동남이 내 눈치를 보며 강산에게 귓속말을 했다.
“산아, 숙식의 흔적이 없어. 이곳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이 아니야.”
난 그 이야기까지 엿들으며 저들의 처분을 생각했다.
‘죽일까?’
여자만 남기고 다 죽이는 것이 간단하지 않을까?
굳이 저 남자들은 내게 쓸모가 없었다.
거기다가 강산의 옷자락을 쥐고 있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NTR을 당하는 것처럼 살심이 열정적으로 치솟았다.
“저… 한구원 씨. 몇 가지만 여쭈어 보겠습니다.”
“그러세요.”
죽일까? 말까?
고민을 거듭하며 회복된 마나를 가늠했다.
아직 답이 정하지 못한 순간, 숨을 다 고른 안경잡이가 강산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여자를 보며 소리쳤다.
“형, 잠시만! 그것보다 저 여자부터 빨리 어떻게 해버려야 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안경잡이의 매도에 고개 숙인 여자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단단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씨발… 이거 갑자기 남자들 목이 날아가는 스너프쇼가 시작되면 저 여자는 백 퍼센트 기절 각이다.
기절한 여자 보지에 내 동정을 소모할 수는 없었다.
깊게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싫었다.
방금 누군가의 자비로움 덕분에 자기 목숨이 연장된 지도 모르는 안경잡이가 목소리를 다시 높였다.
“저 여자가 좀비들을 부른 거라니까! 갑자기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지랄을 해서 나가니까 변종이 있었던 거라고! 분명히 연관이 있어!”
“이경민. 일단 목소리부터 죽여.”
“형! 이번엔 진짜라고! 그러니까 각성자니 뭐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할 때 내가 무시하자고 했잖아! 저년은 백퍼 변종이야! 예비 감염자 말을 왜 믿냐고오!”
각성자.
익숙한 단어에 눈빛이 반짝였다.
저 여자가 각성자?
하지만 그렇다기엔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신체 스펙을 가졌다.
아까 분명히 강산의 옷자락을 쥐며 숨을 고르는 것을 확인했었다.
‘스탯을 하나도 못 찍은 건가?’
강산은 안절부절못하는 여자를 확인하더니 답했다.
“이경민. 한 번만 더 소리 지르면 입을 테이프로 붙여버릴 거야. 그리고 아영 씨는 예비 감염자가 아니고 기절했다가 늦게 일어난 거라잖아.”
“…하아, 그걸 믿냐고. 어쨌든 오늘은 나오는 게 아니었어. 내가 나오지 말고 도서관에서 더 버티자고 했잖아. 그러게…”
도서관.
다시 한 번 그들의 입에서 재확인하는 ‘도서관’이라는 단어.
고맙다. 안경잡이야.
삐죽거리며 삐져나오려는 미소를 가까스로 숨겼다.
투덜거리는 안경잡이, 이경민에게 운동남이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경민아, 말조심 하자. 응?”
“어, 네, 넵. 죄, 죄송합니다.”
이경민의 어깨를 주물럭거리던 운동남이 강산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리곤 나를 보며 말했다.
“반가워요, 형씨. 나는 서태산. 저쪽은 뭐 이미 강산인 거 알았고. 여기 이 친구는 이경민, 저기 잠깐 다친 친구는 김철수, 그리고 저…”
서태산이 꺼림칙하다는 듯이 입맛을 다지더니 다시 말했다.
“저 여자는 윤아영.”
제일 쓸모 있는 정보가 나왔네.
윤아영이라 이름도 예뻤다.
씨발 원래 이런 거는 주인공이 딱 보자마자 정보 파악으로 상대방을 스캔하는 게 정석인데.
나만 ‘제3의 눈’ 없어! 나만 씨발 ‘현자의 눈’ 없어!
서태산의 활약으로 이경민의 폭주가 가라앉자 강산이 다시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실례지만 어째서 이곳에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 당연하죠. 뭐, 그렇게 비밀도 아닙니다.”
작게 미소 지어주며 서태산과 강산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경민을 진정시키고는 다시 강산의 뒤로 이동한 서태산.
이 무리의 리더는 저 강산이라는 존잘남이군.
작게 혀를 굴리며 말을 이었다.
“먹을 것도 다 떨어지고 더는 집에 있기 막막해서 ‘파밍’을 조금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인터넷에서 이쪽 부근에 생존자 그룹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요.”
생존자 그룹이라는 소리에 서태산 옆에 있던 이경민의 몸이 움찔했다.
와, 진짜 내가 저쪽 리더였으면 저놈은 첫빠따로 죽였을 텐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강산이 서태산과 눈빛을 교환했다.
“‘파밍’을 하셨다기엔 가방이 없으신데요?”
“아, 좀비에게 쫓기는 와중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바보같이 옥상에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런 와중에도 저희를 도와주셨군요.”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데 이유가 있나요. 그나저나 아영 씨와 철수 씨는 괜찮으십니까?”
아 귀찮네.
마음속으로 규칙을 정했다.
한 번만 더 말대답하면 그냥 죽여야지.
내 마지막 물음에 소외돼있던 김철수의 고개가 들렸다.
크게 꺾인 손목이 아직도 덜렁거리고 있었다.
‘최소로 잡아도 탈골에 골절이군.’
그제야 나와의 대치를 끝낸 강산이 김철수에게 다가갔다.
그런 강산을 뒤따르던 윤아영이 서태산의 서슬 퍼런 눈빛에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다시 밖을 살폈다.
아직도 변종 주위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좀비들의 무리가 그대로 도로 한복판에 있었다.
일단 저 새끼들을 치워야 했다.
“철수야, 그러니까 내가 섣부르게 행동하지 말라고 했잖아.”
“으으으으… 아, 아파… 소, 손이…”
“하아….”
완전 애새끼들의 모임이군.
몇 분 보지도 않았는데 정확하게 이해했다.
두 명의 트롤러, 아니 세 명인가?
어쨌든 트롤러를 데리고 다니지만, 인간 노릇 하는 두 명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암 생성 파티.
내가 강산이었다면 저 두 사람은 절대로 데리고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슬슬 제대로 염력을 발동할 만큼 회복된 마나를 보며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이 염력을 인간에게 쓰냐? 아니면 좀비에게 쓰냐.
단지 윤아영을 강간하는 것이라면 지금도 충분히 가능했다.
각성자도 아닌 인간들은 좀비보다 더 쉽게 염력으로 으깨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윤아영을 내 신도로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워질 거란 확신이 들었다.
사이비 아줌마에게 했던 급발진과 똑같은 짓을 하는 것이다.
사람을 존나 죽이고는 ‘님 이제 저 믿으셔야 함.’ 이 지랄을 하면 누가 ‘오, 알겠음요.’라고 하겠는가.
일단, 저놈들을 살리고… 도서관에 합류한다.
윤아영을 내 신도로 만든 뒤에, 그때 죽여야겠다.
김철수의 상태를 확인한다고 내게 등을 돌리고 있는 일행을 확인한 후에 변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으깨버린다거나, 뜯는다거나 그런 물리적 행위는 저 새끼에게 먹히지 않았다.
염력이 집중되자 낌새를 눈치챈 변종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빼애애애애애애애액!”
다시 울부짖기 시작하는 변종의 몸을 공중부양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들기 시작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변종의 몸이 허공에 뜨기 시작했다.
‘일단 꺼져, 이 새끼야!’
남아있던 마나를 다 태우며 변종을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빼애애애애에에에에에엥―”
멀어지는 소리와 함께 좀비들이 발광하며 그 소리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란 강산 일행을 보곤 급한 기색으로 소리쳤다.
“조, 좀비들이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나가려면 지금뿐입니다!”
“가자! 태산이 넌 철수 좀 부축해줘. 아영 씨는 잘 따라오시고요. 그리고…”
그룹원들을 챙기던 강산이 나를 바라보았다.
“구원 씨도 갈 곳이 없으시다면 저희와 함께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이런 사태에서 성인 남성은 상당히 중요한 전력이 된다.
그룹의 리더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지.
내가 보인 행동처럼 동글동글한 성격의 젊은 남성이라면 더더욱.
“그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나는 윤아영을 보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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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 조우 (5)
조우 (5) ― 인천 남동구 구월동 상가골목
우리는 좀비가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도서관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장 선두에서 주위를 경계하던 강산과 서태산의 대화가 들렸다.
“…속도가 너무 느린데.”
“이 자식이 지금 정신도 못 차리잖아. 조금만 달려도 엉엉 운다고 난리일 걸?”
서태산이 정신을 놓고 골골대는 김철수의 머리를 가볍게 후렸다.
찰랑거리는 머리에서 식은땀이 후두두 떨어졌다.
‘으, 개같이 더럽네.’
뒤쪽도 답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으, 으으으.”
이경민의 억눌린 신음이 조금씩 흘러 내리고 있었다.
제 딴에는 참고 있지만 내 눈은 못 속였다.
쩔뚝이는 다리와 걸을 때마다 잔뜩 찡그리는 표정.
옥상까지 정신없이 뛰는 와중에 어디 한 군데가 접질린 것 같았다.
‘자기 공격에 자기 손이 나가는 병신. 도망치다가 다리 다치는 병신. 레전드 듀오네.’
나는 실룩이는 윤아영의 엉덩이 감상을 그만두고 이경민의 몸을 살짝 부축했다.
깜짝 놀라던 이경민이 나를 보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며칠이나 안 씻은 것인지 확 다가오는 썩은 내에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필사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경민 씨,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아, 많이 티 났나요? 감사합니다.”
“조심하세요. 이런 세상에서는 자기 몸이 재산 아니겠어요?”
“아하하….”
잔뜩 흐려지는 목소리와 갈 곳을 잃은 눈.
이어지는 대답은 없었다.
씨발, 여기서 그렇게 받으면 내가 뭐가 되는 거냐?
걱정을 담은 질문이 쓸데없이 왜 다쳤느냐는 질책 아닌 질책이 돼버렸다.
이게 그 아포칼립스 꼰대냐?
이 새끼… 사람을 한순간에 개새끼로 만드는 재능이 있네.
나만의 찐따 레이더에 확신의 레드가 연신 반짝였다.
이 새끼는 ‘진짜’다.
다시 목을 가다듬으며 엄청난 비밀을 말하듯이 목소리를 죽였다.
“…저, 경민 씨. 궁금한 거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뭐, 뭔데요?”
“혹시 강산 씨와 태산 씨는 형제인가요?”
“…네?”
당황한 듯이 나를 바라보는 이경민.
난 한껏 모자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강산, 태산. 돌림자 아니었나요?”
“……성이 다른데 어떻게 형제예요?”
“…아하!”
이제 깨달았다는 듯이 멍청한 표정을 지어주자 이경민의 표정이 순식간에 우쭐해진다.
그래, 이 새끼야.
이런 새끼들은 상대방의 모자란 점을 알아야만 자신감을 얻는 타입이다.
“그런데 구원 씨는 그동안 어떻게 사셨나요?”
얼씨구, 이제는 자기가 먼저 묻기까지 했다.
“…뭐, 아침에 재난문자 온 거 본 후로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갔어요. 오늘이 처음 나온 겁니다.”
“아, 저는 도서관에 공부하러 왔다가 이 사달이 났네요.”
“오, 무슨 공부요?”
“아…, 공시 준비하고 있었어요.”
“문과 셨구나? 저도 문과였는데.”
서서히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이경민의 목소리가 점점 활력을 얻었다.
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대화의 주제를 내가 원하는 거로 조금씩 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 여성분, 많이 불안해 보이던데 계속 같이 있어도 괜찮나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구원 씨도 저 여자 주위로 가지 마세요. 철수는 팔이었지만 그다음은 아무도 몰라요.”
저 병신 새끼 팔은 스스로 부러졌는데 그게 왜 우리 아영이 탓이야?
이렇게까지 이경민이 윤아영을 핍박할 수 있는 이유가 뭘까?
이 무리의 리더인 강산의 행동 양식으로 볼 때 이 그룹은 아직 갈 때까지 간 그룹은 아니었다.
원시인처럼 여자면 겁탈하고 남자면 노예로 삼는 하드보일드 그룹은 아니란 것이다.
그럼 아직, 미모가 가진 힘은 여전히 강력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의 성욕이 폭발하는 이런 상황에서 평소의 사회에서보다 더한 힘을 가지게 될 텐데.
저렇게까지 윤아영을 혐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한껏 으스대며 내게 주의사항을 나열하던 이경민에게 살짝 키워드를 흘렸다.
“‘예비 감염자’일 확률이 있다는 거죠?”
“확률이 아니고 무조건이에요. 정신을 차려보니 화장실에서 일주일이 지나있었다는 게 말이 되는 변명이냐구요. 코로나처럼 ‘무증상 보균자’ 비슷한 게 틀림없다니깐요!”
새로운 개념을 알았다는 듯이 ‘당신 정말 유식하시군요!’ 눈빛을 열심히 쏴주니 이경민의 목소리가 점점 더 열기를 띄었다.
“그런데 왜 같이 다니는 건가요?”
“하, 가을이 누나하고 사서님은 일단 격리라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산이 형이 반대해서 저렇게 된 거에요.”
가을이 누나라.
도서관 그룹에 여자가 더 있다는 뜻이구나.
“자기가 무슨 각성자래요. 이게 무슨 판타지 소설이냐구요. 그러면서 좀비 하나 처리 못 해서 벌벌 떨면서 무슨 각성은 얼어 뒤질.”
이제는 자기 화를 주체 못 해서 술술 정보를 뱉는 이경민을 향해 강한 동조의 눈빛을 쏴주기만 하면 됐다.
잘한다.
잘한다, 우리 트롤 새끼.
그러니까 우리 씹트롤님의 말씀을 요약하자면 그렇다.
윤아영은 좀비 아포칼립스 발생 일주일 후에 갑자기 여자 화장실에서 튀어나왔다.
경계하는 그룹원들에게 자신은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것뿐이라 설명했다.
식량과 식수 없이 어떻게 인간이 일주일 동안 잘 수 있느냐는 가을이라는 여자의 물음에 윤아영은 자신이 각성자라는 웃기지도 않을 무리수를 투척한다.
윤아영은 순식간에 ‘예비 감염자’로 낙인 찍힌다.
격리될 위기에서 그룹의 리더인 강산만이 그녀를 변호하며 자신이 ‘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는 윤아영의 헛소리를 한 번 믿어보기로 한다.
여기서 ‘예비 감염자’가 무엇인지 살살 긁으니 우리 경민에몽이 또 대답했다.
역시, 찐따와 ‘지적 허영심’은 언제나 함께였다.
최초의 좀비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아느냐는 물음에 븅신같은 표정으로 ‘박쥐를 먹어서 그렇나?’라고 답하니 이경민이 병신 보는듯한 표정으로 실실 웃었다.
아, 씨발 장단 맞춰주는 것도 일이네.
“아무도 몰라요. 생화학 테러도 전염병도 아니에요. 아, 물론 박쥐를 먹어서도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기절한 사람들이 일어나니까 좀비가 됐다니깐요.”
열람실 책상에 고개를 박았던 사람들이 잠시 졸았던 게 아니라 일제히 좀비가 되어 옆 사람을 덮친 아비규환의 현장.
거기서 딱 봐도 정신도 없이 울고불고 튀었을 새끼가 뭔 전쟁 베테랑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데 진짜 주먹으로 한 대 후리고 싶었다.
기절에서 깨어난 인간들이 좀비가 되며 아포칼립스가 시작되었지만, 그중에서도 한참이나 깨어나지 않은 인간들도 있었단다.
기절해 있는 인간들은 기묘하게도 좀비들이 전혀 공격하지 않았고, 이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인식을 심기 시작했다.
지금 기절해 있는 저 사람은 깨어나면 좀비가 될 ‘예비 감염자’라고.
그제야 궁금했던 것들이 다 이어졌다.
일주일 전 사람들이 갑자기 기절하는 순간.
그 사람들 중에는 1차 감염자도 있었지만 각성자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뉴스에서 잠들어 있던 ‘예비 감염자’들이 가득 찬 병원이 불타고 있던 영상이 기억난다.
씨발― 그것들이 다 좀비들이 아니고 각성자들이었네.
누가 설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악랄의 끝을 달리는 설정이다.
뭐, 나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각성자들이 많이 줄었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더더욱 특별해지는 거니까.
“그러니까 구원 씨도 조심하세요. 저 예비 감염자가 잘 때는 절대 주위로 가시면 안 돼요!”
이경민이 마지막에는 일부러 누가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 타겟이었던 윤아영의 몸이 다시 한 번 크게 떨린다.
그 모습을 뒤돌아 확인한 강산이 눈짓으로 이경민에게 주의를 줬다.
전혀 아랑곳하지 않던 이경민이 서태산이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바로 합죽이가 되는 광경을 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이건, 생각보다 너무 퍼펙트한 상황이었다.
뭔, 강아지보다 더 벌벌 떠는 윤아영에게 [결핍 파악]을 시전했다.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와 관심]
좋아. 아주 좋아.
순식간에 윤아영을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그림이 그려졌다.
“다행히 아무 탈 없이 잘 도착했네요.”
내가 이경민을 통해 살살 정보를 긁는 동안 극한의 집중력으로 주변을 탐색했던 강산이 굵은 땀을 팔로 닦았다.
이미 이 주변의 좀비들은 변종이 날아간 쪽으로 다 이동한 뒤였지만 뭐, 무능력자가 그걸 알 턱은 없었다.
이제는 쓸모없어진 출입 통제소를 지나 바로 왼쪽에 파란색 5층 건물이 보였다.
[중앙 도서관]
조금 더 앞으로 걸으니 도서관 정문 앞을 빈틈없이 가로막은 책장들이 우리를 반겼다.
오, 저걸 바리케이드 용도로 막아놓은 건가?
제대로 된 좀비 웨이브가 들이닥친다면 수수깡 부서지듯이 뚫리겠지만 그렇다고 쓸모가 없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문을 대신하는 책장을 똑똑 두드리니 안쪽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산이야?”
“나야. 가을아.”
끼이이익―
무거운 책장이 서서히 열리더니 한 여자가 바로 강산을 껴안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같은 말만 반복하는 여자의 포옹에 잠시 당황하던 강산이 멋쩍은 웃음과 함께 여자의 등을 두드렸다.
아마 저 여자가 이경민이 말했던 ‘가을’이라는 여자일 것이다.
강산의 어깨에 파묻혀있던 얼굴이 들리며 눈물을 흘리던 얼굴이 보였다.
“어디 다친 곳은 없지? 다른 사람들도 다 무사해?”
“…응. 그… 가을아.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아.”
드라마를 쳐 찍던 두 사람 중 강산이 그제야 나를 소개했다.
“아, 가을아. 이쪽은 한구원 씨. 위험한 순간에 우릴 구해주셨어. 이제부터 우리와 함께 하실 거야. 구원 씨 제 친구인 성가을입니다.”
강산의 손짓이 향하는 곳으로 가을의 시선이 따랐다.
“이름이 가을 씨군요? 안녕하세요, 가을 씨?”
“네.”
강산에게 향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눈빛.
그 차가운 눈빛이 너무나 어울리는 도도한 얼굴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윤아영. 그리고 저 가을이라는 여자.
‘도서관으로 오길 잘했다.’
이곳은… 잭팟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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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 중앙도서관 (1)
중앙 도서관 (1) ― 인천 중앙도서관
짧은 인사를 끝으로 일행은 도서관에 들어섰다.
반쯤 부서진 액자들과 벽면을 장식하는 핏자국들이 아포칼립스 직후의 도서관을 상상케 했다.
여전히 내 부축을 받고 있는 이경민이 내가 두리번거리는 것을 알아차리고 답했다.
“이것도 나름 치운 거에요. 원래는 핏자국들로 바닥이 그냥 빨갰다니깐요.”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대충 대답해주며 앞을 살폈다.
“미안해, 별 소득은 없었어.”
“아니야, 괜찮아. 아직 며칠 버틸 식량은 남아있어. 너가 무사하면 된 거야.”
강산은 가을이라는 여자에게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고 있었고 그런 강산의 어깨를 서태산이 톡톡 건드렸다.
“어, 태산아.”
“일단 철수부터 데리고 올라갈게. 이경민! 너도 빨리 와라.”
“……네, 네? 저요?”
“그래. 새로 온 형씨한테 바퀴벌레처럼 딱 붙어서 뭐하는 거냐? 내가 다치면 다쳤다고 바로 말하라고 했지?”
“하, 하하. 죄송해요, 형님.”
어색한 웃음과 함께 이경민이 절뚝거리며 서태산과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잘 가라, 설명충새끼.
냄새는 좆같았지만 조금은 고마웠다.
그나저나, 이 큰 건물에 남아 있는 사람이 별로없는 건가?
한 건물을 점거하고 있는 그룹이라기에는 현재 내가 파악인 인원들이 너무 적었다.
서태산 일행이 올라간 계단을 계속해서 주시해도 더 이상 내려오는 인원이 없었다.
“저… 구원 씨?”
강산의 물음이 들려왔다.
“네. 이야기는 끝나셨나요?”
“하하… 그, 가을이가 잠시 와달라고 하네요.”
난감하다는 듯이 웃고 있는 강산의 뒤로 팔짱을 낀 채로 조용히 나를 노려보는 성가을이 있었다.
흐음, 분위기가 이상한데?
성가을의 눈빛이 동네 편의점 면접 보던 때의 사장님 눈빛과 비슷했다.
“네, 무슨 일이시죠?”
“…한마음 아파트에서 오셨다구요?”
“네, 그렇습니다.”
“그곳도 구조대가 간 거로 아는데 왜 아파트에 남으셨어요?”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으실까?
큼지막한 눈망울에 의심과 의문이 가득 차 있었다.
“좀비 영화 많이 보셨나요?”
“……네?”
“원래 좀비 아포칼립스 클리셰 중에 대피소에 간 사람들은 모두 죽거든요.”
“…지금 영화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무슨 문제 있나요?”
“…허.”
의문을 담아 물어보니 가을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 가을아… 내가 다 확인하고…”
“산이 너는 가만히 있어. 윤아영 건은 네 말대로 했잖아. 이런 건 원래 꼼꼼하게 확인해야 해.”
“…응.”
그러고 보니 우리 아영이는 어디로 간 거지?
어느 순간에 유령처럼 사라졌다.
팔짱을 낀 성가을이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교차된 팔로 인해 더 도드라지는 가슴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러고 보니 이런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옷차림이었다.
분홍색 블라우스에 하늘거리는 하얀색 테니스치마 그리고 검정 단화.
중간에 검게 칠해지고 핏자국이 뭍은 자국이 보였지만 본질 자체를 흐리진 못했다.
뭐, 존나게 꼴렸다는 말이다.
“한마음 아파트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꽤 되는데 옷이 되게 새거 같으시네요?”
“네. 좀비들이랑 친구거든요. 인사하니까 잘 가라고 보내주던데요?”
“……네에에에?!”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에 방긋 웃어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게 의심스러우시겠죠. 처음 보는 낯선 이를 경계하는 자세는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전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저에게 신뢰를 쌓을 시간을 주시죠. 물론 그 전에 감시자를 붙이든, 뭐, 그와 비슷한 조치를 하시든 모두 감내하겠습니다.”
“…제가 너무 신경질적이었던 것 같네요. 그 점은 사과드릴게요.”
살짝 고개 숙이는 성가을을 보며 미소 지었다.
라운드넥이 잠시 벌려지며 뽀얀 윗가슴이 드러났다.
씨, 씨발… 지린다.
“하하하하, 가을이가 낯을 많이 가려서요. 일단 올라가시죠. 소개해드려야 할 사람들도 있고, 장소들도 있습니다.”
이제 대충 상황이 마무리 된 건지 강산이 서둘러 내 팔을 잡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뒤쪽엔 아직도 의문을 풀지 못한 가을이 꺼림칙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만약 강산 같은 놈이 저 눈빛을 했으면 바로 찢었겠지만, 미모는 모든 걸 용서케 했다.
미녀면 괜찮다.
아, 물론 나한테 박힌다는 전제로.
“지하 1층에 지상 5층으로 이루어져 있구요. 지하 1층은 원래 매점인데 전기가 나간 이후로 어두워서 못 써요. 가시면 안 되구요.”
2층 또한 현재는 아무 용도가 없어서 쓰지 않고 있다고 했다.
“3층은 원래 열람실이 크게 있었는데 사람들이 다 모여서 싹 밀어버렸어요.”
원래라면 무수히 많은 책장과 책으로 빼곡해야 했을 3층이 넓은 공터로 변해있었다.
오른쪽 구석에는 긴 탁자와 함께 건조식품과 과자 같은 식량들도 채워져 있었고 중앙에는 긴 책상과 함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원래 지하 1층에서 모여서 먹었는데 이젠 여기서 먹어요. 식사는 하루 2번. 오전 10시와 오후 4시에요.”
“으, 으으으으 아, 아파요! 태산이형! 아프다고요!”
“참어, 이새끼야. 계속 계집애 같은 비명을 지르네. 니가 관우냐?”
접질렸던 이경민의 발을 서태산이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팔이 덜렁거리던 김철수 옆에는 다른 여자 한 명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분은?”
“아, 김은별 사서님이세요. 편하게 사서님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난 또 부상자를 돌보길래 혹시 의사인가 했네.
덜렁거리던 팔을 책으로 고정해 테이프로 묶는 고전적인 치료방식을 보니 의사는 확실히 아니였다.
저렇게 테이프로 압박을 주면 오히려 더 안 좋을 텐데.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대충, 응급조치를 마친 김은별 사서가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안경 때문인지 지적인 이미지의 여성이었다.
얼굴로 나이를 가늠한다면… 삼 심대 초반?
“식량을 구해온다더니 입을 더 늘려왔네.”
“하하, 내일은 조금 더 멀리 나가볼게요.”
“됐어. 죽지나 마. 쨌든, 난 김은별이야. 내가 나이가 더 많아 보이니 편하게 말할게.”
“아우,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전 한구원입니다.”
“구원? 기독교 집안이니?”
“아, 그건 아닙니다.”
“다행이네. 난 무교거든.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쨌든, 잘 지내보자.”
가을보다는 훨씬 편하게 통성명을 마치고는 마지막 4층에 도착했다.
“5층은 옥상이라서 별로 상관 안 하셔도 돼요. 어… 그런데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참, 빨리도 물어본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나이가 중요한 대한민국의 위대한 유교질서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저요? 스물일곱요.”
“…와,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요?”
“뻔한 칭찬을 하시네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하하하, 전 스물세 살이에요. 말 놓으세요, 형.”
살갑게 웃는 강산을 보며 이 새끼는 대가리에 총을 맞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룹의 리더이면서 새로 들어온 나에게 형형 거리겠다는 건가?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정신머리였다.
“뭐, 그럼 편하게 할게.”
“휴, 이제 조금 숨이 트이네. 4층도 원래는 디지털 자료실이었는데 쫙 밀고 사람들 쉴 수 있는 개인 공간으로 만들어 놨어.”
“개인 공간?”
“뭐, 그렇게 거창한 건 없고 그냥 잘 수 있는 곳이야. 일반 자료실은 남자들이 쓰고, 디지털 자료실은 여자들이 써.”
“혹시 내가 더 못 뵌 사람은 있어?”
“아니야. 사서님이 끝이야. 원래는 훨씬 많았는데… 조금, 의견 차이가 나서 대피소로 떠났어.”
말끝을 흐리는 강산을 보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깐 이 캠프에 총인원은 나를 포함해서 8명이라는 거군.
너무 소소한데.
뭐, 일단 이 사람들 중 쓸모있는 사람들만 신도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은 파밍 하면 되니까.
염력이 레벨이 높아진다면 분명히 다른 사람과 나를 동시에 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뭐 날아가다가 보이는 인간을 낚시하듯이 낚아오면 그만이었다.
“음… 이쪽을 형 자리로 하면 되겠다.”
분명히 누군가가 썼던 흔적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책장으로 양옆을 막은 작은 공간에 담요 하나와 베개로 쓴 것 같은 책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담요가 몇 개 없어서. 어쩔 수가 없어.”
“나 그렇게 찬 밥, 더운밥 구별하는 사람 아니야.”
“하하, 다행이네. 형 그러면 나는 내려가 볼 테니까 오후 4시에 3층에서 봐. 아, 시계는 저 위에 달려 있어.”
마지막으로 벽면 중앙에 걸린 시계를 가리킨 강산이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분명, 이리저리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겠지.
“좋아. 시작해보자.”
나는 상태창에서 다시 한 번 스킬을 확인한 후에 스킬을 실행했다.
[성역 선포 Lv.1]
[교주에게는 추종하는 자들의 영토가 필요합니다. 종교를 창시하고 성역을 선포하십시오. (주의) 이 스킬은 한 번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성역 선포 Lv.1을 실행합니다!]
[‘인천 중앙 도서관’을 성역으로 설정하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경고창이 팝업처럼 튀어나왔다.
[‘인천 중앙 도서관’은 현재 불신자의 비율이 신도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정말 실행하시겠습니까?]
아, 그렇다니깐.
[‘인천 중앙 도서관’에서 작은 종교가 탄생합니다! 종교의 이름을 정해주세요!]
하, RPG에서 가장 고민하는 순간이 왔다.
씨발, 이름을 지어야 할 때가 제일 짜증 나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종교 이름에는 중복이 없을 거라는 거지.
뭐, 그렇게 대단한 이름을 지을 생각도 없었다.
그냥 내가 살았던 아파트와 내 이름을 합쳤다.
“한마음 구원교.”
[종교 ‘한마음 구원교’가 탄생합니다. 교주는 한구원입니다. 종교의 탄생지는 ‘인천 중앙 도서관’입니다.]
[성역 관리 탭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성역 안에서의 교주의 능력이 증폭됩니다! 모든 스킬의 효율이 2배 상승하며 미니맵이 활성화됩니다!]
[전용 스킬 성역 선포 Lv.1가 종속의 액 Lv.1로 변경됩니다!]
……
* 팁 : 성역 관리 탭으로 성역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눈을 어지럽히는 메시지의 폭주와 동시에 내 시야 오른쪽 상단에 익숙한 인터페이스가 자리 잡았다.
“와, 이건… 대박인데?”
게임에서 자주 보던 미니맵이었다.
도서관의 전체적인 모습과 함께 도서관에 있는 사람들의 전체적인 위치가 보였다.
현재 두 명을 제외한 전부가 3층에 모여 있었다.
한 명은 4층 일반 자료실에 있는 나.
그리고 한 명은 4층 여자 화장실에 조용히 박혀 있는 윤아영이었다.
순식간에 스펙이 두 배로 뛴 염력과 마나가 느껴졌다.
이제 도서관 안에서는 지금의 나를 막을 사람은 존재치 않았다.
나는 상태창을 확인하며 여자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화 보기―――――――――――――――――――――
EP.13 중앙도서관 (2)
중앙도서관 (2) ― 인천 중앙도서관 4층
[종속의 액 Lv.1]
[당신이 배출하는 모든 액체는 대상에게 강력한 종속과 발정, 그리고 중독을 유발합니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효과가 증대합니다.]
전용 스킬이자 일회용 스킬이었던 [성역 선포]가 사라지고 [종속의 액]이 그 자리를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내 침하고 정액이 돼지발정제 비슷한 게 된다는 말 아닌가?’
홀리 쉣트!
그렇게 생각하니 바로 레벨을 올리고 싶었다.
신앙이 지금 얼마있었지?
[보유 신앙 : 450]
200만큼 다시 채워진 신앙을 스킬 레벨에 투자했다.
[종속의 액 Lv.1 -> 종속의 액 Lv.2]
[200 신앙이 소모됩니다.]
[그릇된 신앙이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뭐, 효과는 윤아영에게 써보면 되겠지.
여자 화장실에 도착하자 안쪽에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마, 내가 윤아영의 입장이었다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단지 기절했다가 일어난 죄밖에 없는데 세상은 뒤집어져 있었고, 사람들은 자신을 병균 취급한다.
특히나 사람 간의 관계를 매우 중요시여기는 여자, 그것도 어린 여자라면 지옥에 지옥이 더해진 씹지옥의 재림이겠지.
뚜벅뚜벅.
화장실을 울리는 걸음소리에 윤아영의 들썩이던 어깨가 턱하니 굳었다.
조심스레 올린 얼굴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했다.
태연한 표정으로 세면대까지 걸어간 후에 수도꼭지를 올렸다.
단수때문인지 수도꼭지에는 한방울의 물도 나오지 않았다.
“여, 여기는… 여, 여, 여자 화장실인데요….”
처음으로 길게 들은 윤아영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겁먹은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나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아무런 대답 없이 다시 수도꼭지를 내리며 윤아영에게 [결핍 파악]을 시전했다.
[누군가의 따뜻한 관심과 위로]
그녀에게는 지금 백마탄 왕자님이 필요했다.
일부러 크게 털썩이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깜짝 놀란 듯이 움찔거린 그녀의 몸이 나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하지만 더 멀어지지도 않았다.
“…….”
그 이후로 아무런 말없이 화장실 벽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우물쭈물거리며 나를 보던 윤아영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기묘한 침묵이 계속됐다.
“…여기에 있으시면 저한테 감염되실 수도 있어요.”
“…….”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의 윤아영에게는 대화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제가 ‘예비 감염자’래요. 화장실에서 잠시 기절했을 뿐인데… 정말 그것 뿐인데.”
그녀의 말에 물기가 진해진다.
난 나긋나긋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냈다.
“제가 듣기로는 ‘예비 감염자’가 아니라 각성자라고 하셨댔는데.”
“…제가 미쳤었나봐요.”
고개를 든 그녀가 허공의 무언가를 응시한다.
난 그녀가 자신의 상태창을 보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정말 이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녀의 눈은 의지도 희망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슬슬 자지에 피가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강제로 그녀를 취한다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
그녀는 반항도 못하고 나에게 박히겠지.
하지만 난 지금 좆물받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말에 죽을 수도 있는 충실한 광신도를 원했다.
물론 나에게 열렬히 몸을 바치는 것 또한 포함한.
“좀비도 있는데, 각성자라고 말도 안 될 건 또 뭐있나요?”
“……네?”
“오히려 정말로 ‘위기를 감지’하실 수 있다면 그건 대단한 능력 아닌가요?”
정말로 기나긴 시간 끝에 처음으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망울에 가득 맺힌 내 얼굴이 보였다.
“아영 씨가 이런 자리에서 죄인처럼 있을 이유가 전혀 없어요.”
“제, 제 말을 믿으시나요?”
“그럼요. 당연하죠.”
인벤토리에서 꺼낸 손전등이 내 주위를 공전한다.
그리고 그 광경을 발견한 윤아영의 눈이 찢어질만큼 커졌다.
“우린 같은 존재인걸요.”
“어, 어어어어어!”
“쉿!”
어버버거리던 윤아영이 깜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막았다.
종교단체가 괜히 시간 아깝게 모여서 집회를 열거나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다.
신도들이 한 자리에 모임으로써 ‘아, 다른 사람도 나와 같구나.’라는 동질감을 심어주기 위함이다.
포교에서 동질감을 주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단계였다.
거기다가 우리는 지금 같은 비밀을 공유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안에서 내 존재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 다음 단계다.
* * *
“더 자세한 이야기는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죠.”
미니맵 옆에 표시된 전자 시계가 오후 4시를 가리켰다.
어느덧 강산이 이야기했던 식사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일부러 대화의 여지를 두며 여자 화장실을 나와 3층으로 향했다.
우물쭈물대던 윤아영이 나의 뒤를 졸졸 따르기 시작했다.
3층에 도착하자 안에선 이미 도란도란한 대화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긴 탁자에는 참치캔과 편의점 김밥이 놓여있었다.
저것들이 오늘 먹을 식량인 듯 싶었다.
서태산과 이야기중이던 강산이 우릴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형! 마침 데리러 가려했는데 시간 맞춰서 잘 왔네?”
“이거 뭐라도 거들어야 했는데 괜히 미안해지네.”
“아냐아냐, 처음 왔는데 적응할 시간도 필요하지, 어서 앉아. 아, 뒤에 아영 씨도 자리에 앉으세요.”
탁자 끝으로 이동해서 자리에 앉자 그 옆에 윤아영도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다.
탁자의 중앙에는 강산이 앉고 그 양 옆에는 서태산과 가을. 그리고 가을의 바로 옆에는 김은별 사서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경민과 김철수가 그 뒤를 이었다.
윤아영과 함께 온 나를 보고는 이경민이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마치 믿었던 아군이 배신한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첫 만남부터 트롤짓으로 대화할 시간이 없었던 김철수는 나를 아니꼽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저 새끼가 미쳤나?’
당장이라도 눈을 후벼 파버리고 싶었지만 대의를 위해서 참았다.
아직, 아직은 캠프에 스며들 필요가 있었다.
앞쪽 라인의 대화소리가 줄어들더니 성가을의 목소리가 들렸다.
“먹기전에 밥맛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들어. 이제 식량이 정말 얼마 없어. 버티고 버텨서 일주일 정도야. 그러니까 불침번 중에 몰래 참치캔 까먹으면 뒤질 줄 알어. 알겠어? 김철수?”
“……나만 그런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만….”
“내가 분명히 배터리 아껴야한다고 스마트폰으로 게임도 하지 말라고 했을텐데.”
“…아, 게임은 진짜 안했다니까.”
김철수의 투덜거림을 익숙하다는 듯이 무시한 성가을의 눈이 우리쪽으로 향했다.
“어쨌든, 산아, 저 여자는 이제 어떻게 할거야?”
“하아….”
“오늘 나갔던 이유 중에 제일 큰 이유가 저 여자의 헛소리를 검증하는 거 아니였어? 그러니 이제 처분을 내려야지.”
성가을에 냉혹한 의문에 윤아영의 전신이 다시 오돌오돌 떨리기 시작했다.
“저도 가을 누나 의견에 찬성합니다. ‘예비 감염자’는 하루라도 빨리 도서관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이번엔 나도 저 띨띨이 의견에 찬성이야. 위험한 도박을 굳이 할 필요는 없잖아?”
이경민과 김은별의 동조에 강산의 얼굴이 고뇌에 물든다.
“아니, 형! 이건 진짜 아니에요. 저 여자랑 같이나가니까 처음 본 변종이 튀어나왔잖아요! 혹시라도 도서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저희는 다 끝장이라구요!”
“…경민아, 어쨌든 아영 씨가 위기를 감지한 건 사실이잖니.”
“아니! 진짜 답답하네! 위기를 감지한게 아니고 위기를 가져왔다니깐요!”
평소라면 이경민의 폭주를 제지했을 서태산이 이번에는 묵묵히 이경민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또한 굳이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겠지.
시작부터 철저히 한쪽으로 기운 시소였다.
단지, 그룹의 리더가 반대쪽에 있었기에 의견이 통일되지 못했을 뿐이다.
“어쩌면 정말로 아영 씨가 각성자일수도 있잖아. 그럼 소중한 전력을 잃어버리는거야.”
“아니, 인터넷에서도 각성자이니 뭐니 그런 말 하나도 없었는데 무슨 말이에요.”
“인터넷이 끊긴지도 이미 3일이나 지났어. 아영 씨가 깨어난 건 바로 어제고.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가 전부는 아니야.”
“아니, 강산형 말대로라면 저 여자가 슈퍼 히어로라는 건데! 그럼 왜 좀비 하나 못 죽이고 벌벌 떠는 건가요? 지금 저 모습을 보세요!”
이경민의 물음에 강산은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강산 또한 확실한 근거를 통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벌벌 떨고 있는 어린 여자를 사실상 죽여야 한다는 것이 꺼림칙할 뿐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그룹을 설득하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탁자 밑으로 조용히 윤아영의 손을 잡았다.
벌벌 떨던 몸이 더 크게 움찔거렸다.
손깍지를 낀채로 엄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쓸어내렸다.
‘와… 살이 쫄깃쫄깃하네.’
과거였다면 바로 뺨싸대기를 맞을 행동이었지만 윤아영은 어떠한 보복도 없이 조용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다소 끼림칙하지만 그녀 자신에게 행해지는 무음의 격려이자 유일한 응원이었다.
난 반대쪽 손을 들며 반대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음, 조금만 더 지켜보는게 어떤가요?”
“굳이 왜 그래야 하는데요?”
의견 피력을 이경민에게 일임한 듯이 조용하던 성가을이 내 의견에 곧장 반응했다.
‘존나 앙칼지네, 이년이.’
강산의 바로 뒤쪽에 있는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의 시간과 그 옆에는 그룹원들의 이름이 한번씩 적혀 있었다.
“저기 적혀있는 시간과 이름. 불침번 표 아닌가요?”
전기가 사라진 곳에서 밤은 매우 빠르게 찾아온다.
6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의 12시간의 긴 어둠.
그 어둠에 대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비가 바로 불침번일 것이다.
좀비가 무슨 주말엔 쉬는 것도 아닐테니 매일 매일 불침번을 서야 할 것이고.
나와 윤아영이 없던 시절엔 12시간을 6명이 책임져야 했겠지.
하루 2시간씩 꾸준히 자다 일어나서 불침번을 선다면 아마 매우 기분이 좆같을 것이다.
컨디션에 악영향이 무조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뭐 결론은.
이들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밤을 버티기 위해서, 그리고 그 비축한 체력으로 파밍을 나가기 위해서.
“식량을 둘째치더라도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람이 너무 모자랍니다. 저희에겐 아영 씨도 귀중한 전력이라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잠시 아영 씨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영 씨는 경민 씨나 가을 씨가 말씀하시는 것처럼 위험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혹시나 문제가 생긴다면 제가 전부 책임지겠습니다.”
“책임이라는 말로 가볍게 회피할 상황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오늘 처음 만난 사람과의 신뢰라면 더더욱.”
어떻게든 오늘 결판을 짓겠다는 의지가 다분했다.
확실한 사실 없이 위협이 된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제 누군가의 생사에 관여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당연히 성가을과 이경민이 멍청하다고만하고 끝낼 이야기는 아니였다.
분명히 21세기는 과학의 발전과 함께 증거와 논리의 시대였다.
하지만 과학으로 입증할 수 없는 좀비의 출현은 현대인들의 머리에 크나큰 충격을 입혔다.
시체가 일어나서 사람을 무는데 과학이 이젠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람들의 방어기제가 더욱 활발하게 발동하기 시작했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기 전에 일단 치워버리면 되는 것이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신뢰를 쌓을 시간을 주시죠. 물론 아영 씨도 함께요. 전우조처럼 제가 아영 씨와 계속해서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오늘 불침번부터 같이 서기로 하죠. 어떻게 생각해? 강산아.”
일부러 이야기의 결정권을 그룹의 리더에게 넘겼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이 입을 달짝거리던 성가을이 강산을 쳐다보더니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 아무리 너라도 지금 말하는 건 리더의 권위를 해치는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을테니까.
잠시 고민을 거듭하던 강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작은 이유 하나하나에 사람들을 내쫒다보면 결국 우리에게도 좋을 건 없을거라고 봅니다. 아, 너무 심각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배가 더 고픈데요? 일단 밥부터 빨리 먹죠.”
강산은 참치캔을 따는 것으로 더이상 이견을 받지 않겠다는 것을 표했다.
좋아, 역시 너는 착해빠졌구나.
윤아영의 처분이 ‘보류’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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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 중앙도서관 (3)
중앙도서관 (3) ― 인천 중앙도서관 3층
달그락거리며 일회용 숟가락이 참치캔을 후비는 소리가 울렸다.
“으으으, 이거 김밥 상한거 같은데. 가을 누나, 다른 거 없어?”
“김철수, 유통기한 있는 것부터 먹어야한다고 했지. 불만 가지지 말고 감사히 먹어.”저새끼는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지?
운을 생존에 때려박은 버스충이네.
김철수가 표정을 한껏 찡그리는 것을 구경하던 나는 반쯤 남은 참치캔을 윤아영에게 넘겼다.
참치캔을 싹싹 긁어먹던 윤아영이 놀란 눈으로 내가 넘긴 참치캔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거 저한테 주는거냐고 무언으로 묻는 눈빛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얼굴이 새빨개진 윤아영이 조심히 참치캔을 자신에게로 가져간다.
“가, 감사해요….”
속삭이는 감사를 끝으로 그녀가 다시 참치캔에 얼굴을 박는다.
무슨, 일주일은 굶은 것처럼 먹네.
아, 진짜 굶었지?
나는 나중에 배가 고프면 포인트로 해결하면 됐다.
포인트로 사는 음식들이 비싸긴 비쌌지만 맛이나 청결면에서는 저 쉰 김밥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다섯 시를 조금 넘긴 시간, 강산이 박수소리와 함께 말했다.
“자, 오늘 하루는 여기서 마무리 할게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잘 주무시고 내일도 최선을 다해보죠.”
그말과 동시에 의자 끄는 소리가 울리며 사람들이 일어났다.
김은별 사서는 참치캔 등의 쓰레기들을 모았고, 서태산은 구석에서 들고온 아령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슬슬 해산하는 무리 사이에서 강산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강산에게 걸어가니 내 옷자락을 누군가가 살짝 쥐는 것이 느껴졌다.
윤아영이 강산에게 그랬듯이 이젠 내 옷자락을 쥐고는 날 따라오고 있었다.
음식 하나 줬다고 따라오는건가?
정말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아… 아영 씨도 잘 오셨네요. 불침번이랑 이리저리 알아야 할 것들 때문에 잠깐 불렀어.”
“일단 고맙다는 말부터 할게. 그냥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한 건데 혹시 기분나빴던 건 아니지?”
“가, 감사해요. 강산 씨.”
우리의 감사에 강산이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에이, 오히려 나서줘서 내가 고맙지. 나도 아영 씨가 적어도 좀비는 아닐거라고 믿어.”
저 선한 웃음을 봐라.
이 그룹은 절대로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저런 호구가 그룹의 리더인 이상.
“자, 일단 오늘 두 분은 초번을 서실겁니다. 아영 씨는 혹시 초번이 뭔지는 아세요?”
“…처, 처음 아닌가요?”
“네. 그것만 아시면 돼요. 자, 일단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도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일겁니다. 그럴땐 손전등을 이용하세요. 손전등은 저기 있구요.”
강산이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 책장에 가지런히 정리된 손전등들이 보였다. 그리고 스마트폰들에 연결되어 있는 무수한 보조배터리들까지.
“하하, 대단하죠? 가을이가 다 준비한 것들이에요. 꼼꼼하죠? 단수랑 단전에 대비해서 물도 4층에 모아놨어요. 거기서 간단하게 세수정도는 하셔도 됩니다.”
나는 놀라움이 가득찬 눈으로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채로 우리를 보고 있는 성가을을 바라봤다.
저런 호구 리더가 있는데도 그룹이 유지되던 이유가 있었군.
유능한 참모가 붙어 있었구나.
저런 것들은 하나하나 천천히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하게 준비해야 할 일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좀비 사태가 발생한지 겨우 일주일.
패닉이 온 머리를 진정시키는것도 모자라 미래를 대비하고 있었다.
‘넌 우리 종교의 행정실장으로 내정이다.’
그렇게 자신이 운명이 결정된지도 모르는 성가을이 계속해서 차가운 눈빛으로 우리를 스캔하고 있었다.
그렇게 본다고 뭐가 튀어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내가 가진 검은 속내를 직감으로 깨달은 건가?
진짜 재밌는 여자였다.
그때 이경민이 통 하나를 낑낑거리며 들고 왔다.
“강산형, 들고 왔어요.”
“아, 수고했어. 들어가서 쉬어.”
“헤헤, 네.”
왠지 모르겠지만 급하게 사라지려는 이경민을 서태산이 불렀다.
“경민아.”
“…네, 넵!”
“어디 가? 형이랑 운동 해야지.”
“하, 하하하. 오늘 다리가 접지른 게 아직도 조금….”
“꼭 이럴땐 능구렁이처럼 잘 빠져나가네. …가 봐.”
“수, 수고하십셔!”
바람처럼 사라지는 이경민을 보던 강산이 통에 든 등산용 스틱을 꺼냈다.
“어, 이건 혹시나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쓸 비상용 무기. 원래 훨씬 괜찮은 것들이 많았는데….”
강산이 씁쓸한 눈길로 등산용 스틱을 어루만졌다.
“뭐… 지금 우리에겐 제대로 된 무기가 별로 없어.”
하긴, ‘파밍’을 나간 전투조의 무장이 괴상한 책갑옷과 야구 배트라니.
이건, 무장을 거의 포기한 행태와 다를 바 없었다.
강산은 다른 효과적인 무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룹에서 찢어진, 대피소로 간 사람들이 무기를 챙겨서 나갔구나.’
안 봐도 비디오였다.
하지만 밤에 몰래 훔쳐 떠난 것이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데.
아니, 이런 세상에서 어느 누가 무기를 넘겨준단 말인가.
“후욱― 후욱―”
한창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는 서태산의 우락부락한 근육이 보였다.
저런 놈이 강산 주변에 딱 붙어있는데 어떤 놈이 무기를 가져갈 수 있었을까?
‘씨발, 저새끼 옆에서 자는 새끼는 무슨 죄냐?’
운동충새끼의 땀냄새와 함께 잠에 드는 사람이 내가 아니길 간절하게 빌었다.
사내 새끼의 땀냄새라니, 씨발 정말 죽어도 싫었다.
등산용 스틱과 위급할 때 써야할 스마트폰을 인계받고는 강산의 안내에 따라 1층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계단의 난간에는 반쯤 녹은 촛대가 불꽃과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1층 로비에는 탁자와 의자 두 개. 그리고 중앙엔 책을 불태우고 있는 드럼통이 보였다.
“넘치는 게 책이라서 밤에 어두운 걱정은 안해도 돼.”
전기가 없는 와중에 나름 착실하게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들이 보였다.
“시계는 저기 있으니 시간 잘 확인해. 흠… 이제 나도 가볼테니까 2시간 뒤에 다음 순번에게 잘 인계해줘. 아마 내 기억으로는 태산인데 태산이는 운동을 조금 오래해서 아마 자고 있진 않을 것 같아. 그럼, 수고해.”
쉴 생각에 기쁜 탓인지 두 계단씩 올라가는 강산을 뒤로하고는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조금 있다가 윤아영이 또 다른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탁― 탁―
드럼통의 불꽃 튀기는 소리만이 적막한 공간을 장식했다.
나는 등산용 스틱을 이리저리 만지며 윤아영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도, 도와주셔서 가, 감사합니다.”
“뭘, ‘같은 각성자’끼리 당연한 거야.”
“…아.”
갑작스러운 반말에 당황한 눈치였지만 난 굳이 사과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일방적인 계몽의 시간이었다.
난 내가 깨어난 순간부터의 일을 적당히 각색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좀비를 죽이며 스탯을 올리고 스킬을 생성한다.
각성자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지만 윤아영에게는 생소한 별세계였을 것이다.
말 솜씨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신하지는 못하지만 나름 스펙타클한 경험들답게 윤아영이 집중하는 것이 보였다.
언제인지도 모를 순간부터 그녀와 얼굴을 마주한 채로 대화하는 내가 있었다.
그녀의 눈망울에 다시 한 번 내가 맺힌다.
쐐액― 쐐액―
좀비를 식칼창으로 죽인 대목에서는 재연이라도 하듯이 등산용 스틱이 마녀 지팡이처럼 허공을 날았다.
그녀는 마치 히어로영화를 보듯이 내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점점 그녀와 나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한참이나 이야기에 집중해있는 그녀의 손을 슬며시 맞잡았다.
“…흐익!”
이상한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하지만 난 오히려 더 태연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잠시 꼼지락거리며 이리저리 손을 빼려하던 윤아영이 결국 손에 준 힘을 서서히 거두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미연시에서도 개연성없다고 욕먹을 스킨쉽이었지만 나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다.
어쩌면 사랑과 종교는 비슷한 면이 많았다.
충실해야하고 독실해야했으며 자신의 공간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받아드려야했다.
난 종교로서도 남자로서도 윤아영에게 각인되어야하니 이런 스킨쉽은 나에게 필수불가결의 요소였다.
손을 맞잡은 채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내가 염력으로 몸을 띄운 부분에 이르렀다.
윤아영은 내가 인천 상공을 날아다녔다는 말에 거짓말 치지 말라는 핀잔을 놓기에 이르렀다.
어느정도 나를 편하게 대하는 것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시범을 보여주겠다는 듯 일어서서 서서히 내 몸을 공중에 띄웠다.
두 눈이 동그래진채로 그 모습을 보던 윤아영이 혹시 자신도 띄울 수 있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염력을 발동시키니 공중에 뜬 그녀가 신기하다는 듯이 허우적대더니 까르르거리며 웃었다.
그녀를 지상에 안착시킨 뒤에 자리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염력으로 날아다니며 관찰했던 일들을 적당히 꾸며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좀비에게 괴멸당하는 군대와 시민들.
그 모습을 묘사하며 나는 말에 뜨거운 열기를 심었다.
그녀의 눈을 보며 나는 반복해서 말했다.
‘좀비에게 당하는 일반 인간들은 너무나 열등했다.’
‘하지만 우리는 좀비에게 대항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우리는 인간들보다 특별하다.’
‘그러니 우리는 좀비 세계에서 이런 이들을 계도하여야 한다.’
이야기의 중간중간에 세뇌하듯이 반복했다.
계속되는 이야기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을 제지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동의 또한 하지 않은 눈빛이었다.
시스템이 [성역 선포]을 발동할 때 말했던 ‘불신자’라는 말이 떠올랐다.
꺼림칙하다는 듯이 숙이는 고개를 보며 살짝 혀를 찼다.
역시, 한 번에 가능한 작업은 아니었다.
맞잡은 손을 놓으며 어느새 2시간이 지났다는 언급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나를 졸졸 따르는 윤아영을 보며 작게 미소지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세 번.
결국 내 말을 ‘진짜’로 믿을 때까지.
원래 세뇌란, 반복이 가장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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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 중앙도서관 (4)
중앙도서관 (4) - 인천 중앙도서관 4층
서태산과 교대한 나는 딱딱한 사전을 베개로 삼은 체로 허공을 응시했다.
<성역 관리>
[건설 가능한 시설]
[종교 시설]
1. [기도실]
2. [참회실]
3. [감찰원]
……
[편의 시설]
1. [상수도]
2. [소형 발전기]
3. [화장실]
4. [배식소]
……
흠, 그냥 터치만하면 건설할 수 있는 건가?
간단하게 기도실을 터치해봤다.
[기도실]
[신도들이 교주를 찬양하는 기도실입니다. 기도실에서 기도를 드리는 신도가 많아질수록 교주의 신앙 수급량이 늘어납니다. 건설 시 2000 신앙이 소모됩니다.]
흡사, 타이쿤 게임류의 건축 탭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번엔 편의시설 쪽의 화장실을 터치했다.
[화장실]
[신도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을 건설합니다. 건설 시 신도들의 행복도와 충성도가 상승합니다. 화장실 건설에는 상수도 연결이 선행되어야 가능합니다. 건설 시 4000 신앙이 소모됩니다.]
뭔, 이제는 기본이 천 단위였다.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알겠다.
종교시설 등에서 신앙 수급량과 신도를 관리하고 편의 시설의 건축으로 신도들에게 안락함을 느끼게 한다.
그 형태가 마치 ‘빠져나가기 싫은 감옥’과도 같았다.
한번 더 터치하자 도서관으로 보이는 3D 맵이 떠올랐다.
그리고 빨간색으로 색칠된 화장실이 내 손짓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니 조건만 충족된다면 저 빨간색이 초록색으로 바뀌면서 내가 원하는 위치에 설치된다는거구나.
좋아, 내일부터 좀 빡세게 신앙을 모아야겠다.
작은 다짐과 함께 성역 관리 탭을 닫고 천장을 바라봤다.
미니맵에 표시된 시간은 이제 막 밤 9시를 넘기고 있었다.
원래라면 오히려 아침보다 더 활발히 사회가 움직일 시간이었다.
눈을 괴롭히듯 반짝이는 네온사인과 ‘불야성’이라는 말이 아쉽지 않은 밤거리.
회식 중인 회사원들과 큰 소리로 떠드는 남녀의 웃음소리로 가득해야할 술집들.
번화가 도로를 오가는 자동차들의 경적소리와 누군가의 술주정.
그럼 난, 슬슬 밤 타임 알바를 기다리며 교대를 준비하겠지.
대충 맥주와 안주를 사고는 서둘러 집으로 달려가서 게임 속 길드원들과 인사하며 숙제를 시작했겠지.
그게 나를 이루던 일상이었다.
그 재미없지만 평화롭던 일상이 한 순간의 꿈이었다는 듯이 사라져있었다.
무음.
이제는 아침에 울리던 포성과 총성까지 멈춘 이 완벽한 무음이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날은 오지 않을거라고.
그런 절망의 시대에서 오히려 나는 흥분을 느꼈다.
좀비를 죽일 때 느낀 희열.
그리고 스킬을 올리며 느끼는 전능감.
누군가의 머리 꼭대기에서 상황을 관찰하는 우월감.
거기다가 부드럽고 쫄깃한 여자의 손까지.
내가 누릴 수 없던 ‘특별함’이 이젠 나에게 있었다.
이 세상에서 죽은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즐거워서 오히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미안하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었다.
내 머릿속은 윤아영을, 그리고 이 캠프를 내 것으로 만들 계획만을 계속해서 떠올리고 있었다.
* * *
잠에 들었던 정신이 천천히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조용한 발거음으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서서히 눈을 뜨니 아직도 완연한 어둠이 보였다.
아침이라서 누군가 깨우러 온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용건이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좀비이거나.
둘 모두 나에게 좋은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다.
미니맵을 곁눈질하며 염력을 준비했다.
“오, 오, 오빠.”
미니맵에서 윤아영의 이름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날 깨우려는 목적이라기엔 너무나 멀고 작은 목소리.
반응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살금살금 다가온 그녀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오빠… 이, 일어나 보세요.”
“…아영이니?”
“…네.”
천천히 일어나 인벤토리에서 꺼낸 손전등으로 그녀를 비췄다.
그녀는 둥둥 떠다니는 손전등에 흠칫하고는 계속해서 벌벌 떨기 시작했다.
함께 불침번을 서며 염력을 구경할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심지어 자신의 몸을 띄워줄 때는 즐겁다는 듯이 웃었던 것이 무색했다.
불안하다는 듯이 주위를 계속해서 살피던 그녀가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온다.
윤아영은 내 옷자락을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또 괴, 괴물이 왔어요. 엄청 가까이 있어요. 고, 곧 여기로 올지도 몰라요.”
그녀가 ‘위기를 감지’했다.
나는 사심이 가득 담긴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윤아영을 진정시켰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윤아영의 떨림이 점점 진정되는 것을 보며 미니맵을 살폈다.
아직, 도서관에 적의 침입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도서관 가까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좀비든지, 변종이던지 한번 살펴보기는 해야겠네.’
계속해서 내가 곁에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며 그녀의 어깨를 살짝 안았다.
이젠 안 놀랄 법도 한데, 또 움찔거리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이 손이 어깨가 아니라 그녀의 소중한 밑으로 간다면 그녀는 어떻게 할까?
그때도 지금처럼 아무 말도 없이 받아들일까?
그것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일단 이 귀찮은 상황부터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
우리는 윤아영이 말하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두워진 공간을 내가 띄운 손전등이 환하게 밝혔다.
그녀의 발걸음이 1층으로 향했다.
1층에 진입하며 나는 어깨를 안았던 손으로 염력으로 띄운 손전등 쥐었다.
“에, 에엥? 여, 여기는 왜….”
갑자기 내려온 우리를 보며 깜짤 놀라는 이경민의 목소리에 주위를 살폈다.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은 가히 가관이었다.
탁자에 굴러다니는 몇 개의 과자 봉지와 이경민의 손에 붙들린 스마트폰.
뭐, 시계를 가로로 보는 것이 아니라면 저건 아마 ‘게임’을 하는 중이었겠지.
스마트폰에 연결된 보조배터리도 보였다.
‘정말 폐급 중에 일등급 폐급이네.’
“하, 하하하. 그, 그게 말이죠.”
서둘러 변명의 시동을 거는 이경민을 무시한 채로 윤아영에게 물었다.
“이곳이니?”
“…이, 이곳이 제, 제일 가까워요.”
로비를 울리는 대화에 이경민의 표정이 급격하게 차가워졌다.
“자, 잠깐만요. 저, 저년이 왔다는 건… 씨, 씨발!”
쿵―
이경민이 탁자에 방치되있던 등산용 스틱을 집는것과 문을 막던 책장이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책장을 단숨에 무너뜨린 무언가가 이경민을 향해서 말 그대로 ‘날았다’.
비정상적으로 발달되어 있는 허벅지가 눈에 확 들어오는 좀비였다.
“끼에에에에엑!”
“으, 으아아아아아!”
순식간에 마운트하듯이 이경민을 덮친 좀비의 아가리에 등산용 스틱이 들어섰다.
비명을 지르는 이경민의 부들부들 떨리는 팔과 어떻게든 이경민을 먹으려는 좀비간의 사투가 벌어졌다.
끼끼긱―
좀비의 치악력을 견디지 못한 등산용 스틱이 서서히 휘어지고 있었다.
‘변종이네.’
이경민의 입장에서는 매우 운이 안 좋은 상황이기는 했다.
일반 좀비도 어쩌지 못할 일등급 폐급에게 딱 봐도 특수한 기습을 가할 수 있는 변종이라니.
이건 소 잡는 칼을 닭에게 휘둘러진 거지.
애꿎은 우리 병신 닭이 불쌍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는 강산처럼 저런 병신까지 데리고 있을 아량이 못됐다.
‘그냥 이참에 죽는것도 나쁘진 않겠다. 이른바 명예로운 죽음인거지.’
불굴의 베테랑 이경민.
일반 좀비가 아닌 변종 좀비에게 기습으로 세상을 떠나다.
이경민은 어떻게든 변종의 마운트 자세를 벗어나려고 아등바등거렸다.
등산용 스틱이 서서히 내려옴과 동시에 이경민의 고개도 옆으로 돌았다.
마치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외면하듯이.
그러다 이경민과 윤아영의 눈이 마주쳤다.
체념이 가득하던 이경민의 눈이 급격하게 다른 것으로 차올랐다.
눈알에 가득한 원망과 저주가 보였다.
“저, 저어어어어어어! 저 씨발련이이이이이! 내, 내말이 맞았잖아! 내가 맞았던거잖아아아아아!”
“히, 히이이익!”
그 어떤때보다 격하게 몸을 떨던 윤아영이 자발적으로 내게 안겼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내 머리에 섬광이 내달렸다.
“끼에에에엑!”
“이경민! 비켜!”
이경민의 몸에 처박히기 일보 직전인 변종의 머리가 강력한 염력에 고정된다.
쐐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폭발적으로 줄어드는 변종과 나 사이의 거리.
당황한 변종의 몸에 내 몸통박치기가 작렬했다.
사실, 몸통박치기인척하는 염력 발동이었다.
쾅―
부서진 책장에 처박힌 변종을 주시하며 바닥에 널부러진 등산용 스틱을 주웠다.
이미 제대로 사용할 수도 없을 만큼 휘어져있었지만, 아무것도 안 든 것보다는 나았다.
등산용 스틱을 오른손에 쥔 채로 이경민을 보호하듯이 등졌다.
“끼에에에엑!”
부서진 책장 파편들과 함께 변종의 몸이 들썩였다.
급격하게 줄어들었다가 팽창하는 놈의 허벅지가 보였다.
‘아기 변종’처럼 특별한 능력을 가진 변종은 아닌 듯 했다.
아마 근육 덩어리처럼 철저한 전투형 변종이겠지.
저 발달된 허벅지에서 터져나오는 가공할만한 스피드로 사냥감을 덮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나의 홈그라운드였다.
성역의 효과로 2배의 효율을 자랑하는 ‘모방 성체’의 염력이 변종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끼, 끼에에에에엑!”
어떻게든 염력에 벗어나기 위해서 변종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미니맵을 확인했다.
‘씨발 빨리 좀 와라.’
이정도 소음이 위쪽에 들리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서둘러서 이쪽으로 달리고 있는 강산과 서태산의 이름표가 보였다.
“경민아!”
긴박함을 내뿜는 강산의 고함을 들으며 나는 일부러 기합성을 내질렀다.
“이야아아아!”
그리곤 보통의 인간이 낼 수 있는 빠른 속도로 변종에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에엑!”
염력에 고정되어 있는 변종이 최후의 표효를 내질렀다.
계속해서 전신을 들썩였지만 내 염력이 조금 더 강했다.
“죽어! 이새끼야!”
변종의 머리에 스틱이 박히며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변종을 처치하셨습니다.]
[500 신앙을 획득합니다.]
[변종에 관한 지식을 획득합니다!]
[변종 ‘프로그’]
[프로그는 발달된 허벅지로 상대에게 예상치 못한 기습을 가합니다. 프로그의 발달된 허벅지는 잠시나마 공중에서 활공을 가능케 할 정도입니다. 프로그는 일반 좀비와 달리 열기에 크게 반응합니다.]
탁― 탁―
이 와중에도 충실히 타오르던 드럼통을 확인했다.
저 변종이 이곳에 온 것이 완전한 우연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 이경민! 괜찮아?”
“아무도 이경민한테 가까이 가지마!”
급하게 이경민에게 다가가던 강산이 성가을에 말에 주춤했다.
정신이 나간 듯이 멍해져있는 이경민을 주시하던 성가을이 나에게 말했다.
“…죽었나요?”
“네. 확실하게 죽였습니다.”
“…물리셨나요?”
“음, 저는 당연히 안 물렸고, 경민이도 아마 물리진 않았을 겁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성가을이 여분의 등산용 스틱을 강산과 서태산에게 건네며 다시 말했다.
“5분만 그곳에서 가만히 있어주세요.”
“5분이면 바로 알 수 있나보군요?”
“여태까지 제가 봐왔던 대로라면요.”
난 어깨를 으쓱거린 뒤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그러시죠.”
얼음같던 5분이 지나고 강산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이경민에게 달려갔다.
“경민아!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으, 으으, 혀, 형?”
“그래! 나야, 강산이 형. 정신이 좀 들어?”
“머, 머리가….”
한껏 얼굴을 찌푸리며 머리를 붙잡던 이경민의 눈이 윤아영에게 향했다.
“주, 죽여야 해. 주, 주…”
“얘가 갑자기 뭐라는 거야? 경민아? 이경민?”
“저, 저년을 죽여야 해! 내, 내말이 맞았잖아! 내 말이 맞잖아아아아! 저 씨발련 때문에 벌써 몇 번이나 뒤질뻔한거야아아아!”
그룹원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윤아영에게 몰렸다.
한껏 움츠려든 윤아영이 서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숨길 수 없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죽여야 해! 죽여야 한다고! 저 씨발련은 변종을 부르는 년이라고! 마녀다! 마녀였다고! 씨발 마녀였어!”
현대판 마녀사냥의 재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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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 윤아영 (1)
윤아영 (1) ― 인천 중앙도서관 3층
탁자 중간에 놓인 촛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서로가 서로를 겨우 인식할 만한 불빛에 의지하며 일행 전원이 다시 3층에 모였다.
누런 눈꼽을 단 채로 표정을 한껏 찡그린 김철수와 비교적 담담한 김은별을 확인하는 중에 강산의 한숨이 탁자에 흘렀다.
“하아…….”
그는 관자놀이를 양 손으로 주무르며 고민하고 있었다.
“형, 한 번이면 우연이지만 두 번이면 사실이에요. 굳이, 굳이 저희가 저 여자를 붙잡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잔아요.”
아까의 발광은 신기루였다는 듯이 오히려 차분하게 강산을 설득하는 이경민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리고 강산 또한 비슷한 걸 느끼는지 떨떠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말했던 것과 별 다른 차이점이 없잖아. 오히려 난 아영 씨가 정말로 위기를 감지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그 난리가 벌어졌을 땐 보이지도 않던 변종을 2번 연속으로 본다고요? 저희도 인터넷에서 말하는 것만 들었잖아요!”
“…….”
이야, 이건 확신이 들었다.
결국 이경민의 주장에 무게추가 기울 것이다.
난 그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선조들의 말씀 중에 버릴 것은 없구나.
정말로, 개똥이 쓸데가 있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윤아영이 매미처럼 나에게 들러붙었다.
이제는 스스로 내 손을 양손으로 잡으며 나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떨고있는 몸때문인지 진동기능이 있는 젤리가 내 팔에 붙어있는 것 같았다.
그녀도 알 수 밖에 없다.
이젠, 정말 나뿐이란 걸.
“좋아, 그것보단 변종 하나에 우리 입구가 그렇게 뚫렸다는게 더 큰 일이야. 당분간은 ‘전투조’가 전부 나가는 건 금지야.”
어느새 의견은 한 쪽으로 통일되고 성가을이 그 다음에 관해 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끝나면 안 되지.
“음, 왜 당사자랑 제 의견을 안 들으시죠?”
“한구원 씨가 반대한다고 해봤자, 대세를 거스를순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다수결에 따라주시죠.”
“제가 왜 그래야하는데요?”
“…뭐라구요?”
나는 뚱한 표정으로 김철수와 김은별을 가리켰다.
“흠, 갑자기 지적해서 죄송하지만 변종을 처치한 저와 자고 있던, 아, 물론 그게 죄라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자고 있던 철수 씨와 은별 씨가 왜 같은 한표입니까?”
아포칼립스에서 민주주의라니, 생각보다 순진한 여자였네.
“아영이는 자고 있던 저를 깨워서 변종의 위협에서 경민이를 구한겁니다. 오히려 감사를 받아야 마땅한거죠.”
“아, 아니라니깐요! 진짜…”
“넌 조용히 해, 이경민.”
다시 발광을 시작하려는 이경민을 제지한 성가을이 다시 말했다.
“그걸 어떻게 믿죠?”
“증거라… 그렇게까지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렇겠죠. 저희 캠프는 두 분이 합류하기 전까지 매우 안전했어요. 변종은 커녕, 좀비 한 마리도 보기 힘들었죠.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나면 저희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저희라… 그래 너희의 ‘우리’에는 아영이는 없구나.
오히려, 좋아.
난 진한 미소를 그리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
“그런 건 모두 짐작일 뿐입니다. 확실한 팩트는 ‘아영이의 말에 따라 변종을 처리한 저’뿐이라는 거죠. 그리고 제가 뭐 어린애처럼 칭찬을 바라건 아니지만 이런 반응이라니….”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리며 은근한 협박을 곁들었다.
변종을 처치할만한 전투력을 가진 나를 이렇게 홀대할거냐는 돌림말이었다.
그리고 성가을은 그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물론 구원 씨에게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아영이에게는 감사하지 않습니까? 아영이 덕분에 제가 변종을 죽였는데요.”
“…그건.”
이래서 어른들이 일은 티나게 하라고 했구나.
변종을 죽였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나와 달리 윤아영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후우… 정말로 그렇게까지 윤아영을 감싸는 이유가 뭔가요? 예뻐서?”
뭐랄까, 성가을은 정말로 교과서적이었다.
메시지에 공격할 거리가 사라지자 바로 메신저인 나를 공략하다니.
그래, 내가 물소로 보였다, 이말이지?
“딱 하나 뿐입니다. 우리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안보였는데 상당히 오글거리는 말을 잘도 하시네요.”
떨떠름한 기색의 성가을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건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암구호니까.
어느새 밖이 밝아져 오고 있었다.
긴 밤이 지나고 드디어 새벽이 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믿어봅시다. 아영 씨는 이제부터 정말로 위기를 감지한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야기해주세요. 저는 아영 씨를 믿습니다.”
“형!”
“너도 오늘 놀랐을 텐데 몸조리부터 잘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하아….”
고개를 숙인 이경민의 작은 욕짓거리가 들렸다.
한참이나 나에게나 들리던 욕을 내뱉던 이경민이 고개를 들어 윤아영을 노려봤다.
전혀, 납득하지 못한 모양새였지만 오히려 나에겐 그게 더 좋았다.
좋아, 저 놈을 더 부채질 해보자.
“모두 들어가셔서 조금이라도 더 쉬세요. 자, 모두 일어납시다.”
해산을 명하는 강산에 따라 모두가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도 안절부절하는 윤아영에게 ‘그곳’에서 기다리라고 하니 그녀의 고개가 미세하게 끄덕였다.
난 서둘러 자리를 떠나고 있던 이경민의 뒤를 잡았다.
그리곤 어깨를 살짝 치니 놈이 몸을 돌려 나를 확인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 왜요!”
“몸은 좀 괜찮아?”
“그, 그 마녀한테나 가시지! 갑자기 저한테는 왜 온거죠?”
마녀라. 그래, 난 윤아영이 마녀가 됐으면 좋겠다.
은근한 미소와 함께 이경민의 귀에 속삭였다.
“난 사실 네 의견도 일리가 있다고 봐.”
“…네?”
당황스러울 것이다.
사실상 추방을 막아낸 일등공신이 자신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같은 사람이니까 불쌍해서 반대하긴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아영이는 조금 의심스럽긴 해.”
미끼를 던지자마자 아가리를 넘어 식도까지 바로 삼킨 이경민이 오줌이 마려운 듯이 발을 동동거렸다.
“그, 그렇죠! 형도 그렇게 생각했죠! 그,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쉿! 조용히 해. ‘마녀’가 듣겠다.”
“아, 아! 죄, 죄송해요.”
이경민의 양 어깨를 잡고선 신뢰감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난 가까이 붙어서 윤아영을 감시할 생각이야.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처리해야겠어.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싼 똥이잖아?”
“그, 그런 생각이셨군요! 역시, 역시! 혀, 형의 말이 맞아요. 가, 감시를 했어야 했는데.”
이경민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난 조용히 놈의 멍청한 사고회로가 작동하는 것을 지켜봤다.
“자, 자백하게 해야 해요! 혀, 형이 노력하시는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저도 노력해볼게요.”
“명심해야해. 아무도 모르게.”
“처, 철수는 믿을 수 있어요.”
김철수라….
그래, 찌질이가 한 명 더 늘어나면 그것 또한 금상첨화겠지.
“흠…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그, 그렇죠. 가, 감사해요, 형!”
뭐가 감사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경민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우리들만의 비밀이야. 다른 사람이 안다고 해봤자 그룹에 동요만 일어나지,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거야. 알잖아, 강산이가 얼마나 착한 리더인지?”
“그, 그럼요! 저, 저만 믿으세요. 그, 그 마녀가 제 입으로 본색으로 드러낼 수 있게 마구마구 신경을 건드릴거에요.”
아, 너무나 즐거웠다.
단순히 염력으로 찍어누르는 것보다 이런 짓이 훨씬 더 내 흥미를 자극했다.
굳게 결의하는 이경민을 보내고는 4층의 여자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봤던 때와 똑같이 윤아영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뚜벅뚜벅.
화장실을 울리는 발소리에 미어캣처럼 그곳을 확인한 윤아영이 나인 것을 알고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그녀 옆에 앉으며 인벤토리에 있던 과자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먹을래?”
“…그, 그, 그….”
우물쭈물거리지만 그녀의 시선이 정확하게 과자에 집중되어 있었다.
살살 흔드는 과자에 따라 그녀의 동공이 이동했다.
살짝 웃은 뒤, 과자를 건네주자 서둘러 받은 그녀가 봉지를 뜯으려 낑낑댔다.
다시 건네받은 과자를 대신 뜯어준 뒤에 그녀의 손을 당연하다는 듯이 맞잡았다.
이젠 이런 걸로는 놀라지도 않는지 그녀가 남은 한 손으로 허겁지겁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으움, 네, 네.”
“나도 각성자라고 말했으면 됐을텐데… 왜 안 그랬어?”
“오, 오빠가… 비, 비밀이라구.”
정말로 순진하고 착해빠졌구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자 얼굴이 홍당무가 된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잡았던 손을 놓고는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으, 으으….”
그녀는 앓는 소리와 함께 그런 내 행동을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정말로 요즘엔 보기 힘든 순종적인 여자였다.
이만큼 예쁜 장난감이 또 있을까?
검은 머리칼에 숨겨져있던 그녀의 귓바퀴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경민과 김철수는 이제 철저하게 윤아영을 괴롭힐 것이다.
우리 순진한 아영이는 과연 어떻게 대처할까?
그리고 얼마나 아파할까?
그리고 그 아픔을 누구에게 치유받으려 할까?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와 관심]
나만이 채워줄 수 있는 그녀의 결핍.
그녀는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서 뭐든지 할 것이다.
나만이 그녀의 기준이 되고, 나만이 그녀의 모든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와! 15화!
저도 드디어 플러스에 입성할 수 있는 회차에 들어섰네요!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써주시는 댓글들은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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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 윤아영 (2)
윤아영 (2) ― 인천 중앙도서관 2층 계단
짧은 휴식 뒤에 맞이한 아침 식사 시간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중 하나가 유사 상황에 대비하여 전투조의 인원을 잠시 줄이고 캠프 방어에 힘쓰자는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오늘 ‘파밍’을 떠나는 인원은 강산과 김은별 단 두명이었다.
남은 인원은 2층에 넘칠 정도로 많은 책장을 1층 로비에 지그재그로 배치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정문이 뚫렸을시에 코너링에 약한 좀비들의 진로를 막을 생각이라는 것이 성가을의 의견이었다.
참 아기자기한 방어책이었다.
그래도 시간낭비라 칭할 정도의 일 또한 아니었다.
어차피 밖을 나가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남는 것이 시간이었으니까.
서태산과 나는 지금 책장을 양 옆에서 든 채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후욱―”
서태산이 힘을 모으듯 짧게 심호흡했다.
어제 그렇게 운동을 하고는 씻지 않았는지 구린 냄새가 진동을 했다.
씨발― 초인이 되니 이런 감각 또한 확장됐는지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냄새가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표정을 찡그리고 있는 나를 확인한 서태산이 말했다.
“비실비실해 보이는데 꽤나 힘 좀 쓰네?”
“뭐, 딱 효율적인 근육만 기르긴 했지.”
우락부락한 서태산이 팔이 한번 꿈틀거렸다.
“그런 게 있다면 나도 좀 가르쳐주면 좋겠는데, 형씨?”
“안 돼, 나만 꿀빨거야.”
“힘을 대놓고 뺐는데도 책장이 옮겨지는 근육이라….”
책장을 사이에 두고 서태산의 눈이 번들거렸다.
난 능글맞은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난 ‘협동’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누구는 ‘관찰’을 하고 있었네.”
“글쎄, ‘의심’이라는 정확한 말이 있는데.”
대화를 빙자한 신경전 사이에도 우리는 착실히 걸음을 옮겨 1층 로비에 책장을 내려놓았다.
쿵―
책장의 무게에 작은 먼지 바람이 이는 것을 보던 서태산이 다시 말을 이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속셈?”
“왜 그렇게까지 윤아영을 감싸는 거지? 정말로 농담이 아니라 한 눈에 반했나?”
“우리 태산 씨는 무엇에 화가 난 걸까? 내가 윤아영을 살린 거? 아니면…”
일부러 말을 흐리며 일종의 텀을 두었다.
서태산과 내가 탐색하듯이 서로를 응시했다.
“아니면… 성가을의 말을 거역해서?”
살짝 찔러보는 말에도 서태산의 눈빛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코웃음을 친 서태산이 나에게 말했다.
“가을에게는 언제나 강산이뿐이야, 형씨.”
“알지, 알지. 뭐, 그쪽들의 연애사업에는 나 또한 그렇게 열렬한 관심은 없어. 그렇다면 서태산이라는 개인은 성가을의 주장이 더 옳다고 여겼나보지?”
서태산은 긍정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의문을 담아 물었다.
“그럼, 그때 말하지 지금에 와서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이야기가 왜 이렇게 점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물었던건 형씨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느냐는 거였어.”
“물론 난 아니지만, 그걸 꿍꿍이를 가진 사람한테 물으면 그 사람이 대답해줄까?”
“안 해주지. 나도 알아.”
서태산은 나에게 경고했다.
“그치만 내가 말하면 그때부터 조심은 하더라고.”
오우 쉣.
이게 어디서 좀 놀아본 형님의 포스인가?
이제야 알겠다.
그냥 딱 봐도 도서관 캠프의 전투력 원탑인 서태산이 책장이나 옮기는 잡일을 하고 있는 이유.
강산이 김은별이라는 상대적인 약자를 데리고 파밍을 갈 수 밖에 없는 이유.
성가을은 서태산을 이 곳에 울며 겨자먹기로 남겨 둘 수 밖에 없었던 거다.
나를 감시하기 위해서.
자기 할 말만 마치고 계단을 오르는 서태산을 쳐다봤다.
“피곤 하시겠어? 못난이 리더 보필한다고?”
서태산이 몸을 돌려 찡그린 표정을 내게 보였다.
난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어서 말했다.
“에이, 우리 솔직해지자. 임금님 없는데서는 임금님 욕도 한다는데 뭐 어때? 그냥… 조금 답답하다는 거지. 안 그래? 뭐랄까… 너무 착하다?”
“그 착함 덕분에 살았던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닌데, 형씨.”
“…아하!”
강산과 서태산을 보면 항상 궁금하던 점이 바로 그거였다.
왜 서태산이 강산의 뒤에 서길 자처했을까.
그렇구나.
넌 강산한테 큰 빚을 지고 있었구나.
목숨빚을.
나 또한 계단을 오르며 서태산의 어깨를 토닥였다.
“우리 태산이가 죽을뻔 했었구나. 정말 무서웠겠다.”
우쭈주거리는 내 표정에 모욕을 당한 듯이 얼굴이 붉어지는 녀석에게 [결핍 파악]을 시전했다.
[안전한 보금자리, 죽을 걱정 없는 내일]
죽음은 추상적이다.
가장 무서운 것임을 알지만 사실, 그렇게 와닿지는 않는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사람들은 알게 된다.
어쩌면, 정말로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그건,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을만큼 무서운 일이구나.
뿌드득―
내 손아귀에서 내뿜는 힘이 서태산을 짓눌렀다.
“크, 크으윽―”
평소에 단련한 힘을 하나도 쓰지 못하고 서태산의 무릎이 서서히 꿇려진다.
그 고통과 굴욕감이 가득한 표정에 서서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때도, 지금도.
한 번 죽음의 공포에 노출된 이들은 이젠 작은 위협에도 트라우마를 느끼게 된다.
서태산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는 어떻게든 일어서려했지만 당연하게도 초인의 근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분노는 경악으로 경악은 체념으로.
체념은 공포로.
다이나믹한 감정의 편린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피가 터질 듯이 빨갛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간다.
나는 계속해서 그의 어깨를 짓누르며 웃고 있었다. 서태산이 핏기가 모두 사라진 얼굴로 멍하니 나를 볼때까지.
그 모습에 흡족한 마음으로 손을 때고는 그를 향해 방긋 웃어주었다.
“그래도 내가 형인데, 나이도 어린 새끼가 형씨, 형씨거리면서 깝치면 형이 화가 나요? 안 나요?”
“…….”
“왜 대답이 없지?”
무릎 꿇은 서태산의 앞에서 뺨을 톡톡 치자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무서운 걸까?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다.
“뭐, 중학생처럼 파이팅있게 서열정리 조금 한 거 가지고 누구한테 쪼르르 달려가는 일러바치는 계집애같은 짓은 안 할거지?”
“…….”
“우리 동생이 너무 대답이 없네. 형이 살짝 화가 나려 하는데?”
“…안 해.”
“씨발, 왜 그렇게 말이 짧지. 우리가 친했냐?”
“…안 합니다.”
“그래, 그래. 우리 태산이 착하네.”
웃는 얼굴로 어깨를 두들겨주자 서태산이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말해도 돼. 진짜 뒤지고 싶으면.”
“…….”
“가 봐. 어깨 아프겠다.”
입술을 깨물던 서태산은 도망치듯이 계단을 올라갔다.
원래였다면 그와 나의 포지션은 정반대였을 것이다.
서태산의 경고를 듣고 보내줘야만 하는 내가 있었겠지.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지 않았을때는 내가 그랬듯이 육체의 제재가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 주력 스킬인 염력을 쓰지도 않고 저런 체격의 남자를 가볍게 주무르고 있었다.
정말로, 인간은 능력자에 비해 열등했다.
어쩌면 윤아영에게 세뇌하듯이 말한 내용이 내 마음속 깊이 새겨진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등한 인간은 이런 세상에서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 * *
“벌써 다 끝나셨나요? 태산이는 어딨죠?”
“책장을 들다가 무리를 했는지, 잠시 쉰다고 하던데요?”
“…태산이가요?”
“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이지는 날이 있는거겠죠?”
의심 가득한 성가을의 눈을 무시하며 의자에 앉았다.
3층 탁자에 가득 쌓인 프린트지들이 보였다.
인쇄된 지도와 서바이벌 상식들, 간단한 무기들을 만드는 법들과 응급 조치들.
이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 된 정보들이 가득했다.
‘아직 프린터가 작동할 때 뽑을 수 있는건 다 뽑은 것 같은데?’
성가을이 그 중에서도 손에서 놓치 않는 종이를 곁눈질했다.
인천시 곳곳에 파란색과 빨간색로 메모와 표시가 되어있는 지도였다.
“뭔지 물어봐도 돼요?”
“아니요. 그만 가주세요.”
나를 무시하는 것을 티내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시선에 지도에서 벗어나지를 않았다.
서태산보다 더 노골적인 반응이었지만 저 도도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냥 웃음만 나왔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난 혼잣말하듯이 성가을에게 말을 걸었다.
“음… 파란 건 뭐 방어하기 좋은 곳이고, 빨간 건 혹시 음식을 구할 수 있는 곳인가?”
“…….”
“정말로 중요한 정보가 있는데, 이걸 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하아.”
성가을의 긴 숨소리와 동시에 그녀의 맑은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뭔데요?”
“오히려 제가 제발 들어달라고 하는 꼴이 됐네요. 아… 이러면 말하기가 조금 싫어지는데.”
“그럼 말하지 말던지요.”
다시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는 그녀에게 손사래쳤다.
“에헤이, 성격이 너무 급하시네. 가을 씨가 말했었잖아요. 제가 오기전까지 도서관은 평화로웠다고.”
언제봐도 질리지 않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적 없어요? 인천시 전체 인구가 얼마더라… 한, 300만 됐나? 그중에 10%만 좀비가 되도 30만인데. 이곳은….”
내 손가락이 도서관을 가리켰다.
“여기는 유동인구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잖아요. 근데 왜 좀비가 없었을까요?”
“…다른 볼일들이 있나 보죠.”
멍청한 대답같지만 오히려 말속에 뼈가 있었다.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 또한 확신은 못해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좀비에게 강한 자극이 되는 소음. 인천시를 뒤흔들던 폭음과 총성. 그리고 이제는 울리지 않는 그 소음들.”
그것은 하나의 결과로 귀결됐다.
성가을의 마지못한 답변이 들렸다.
“…대피소가 무너졌겠죠.”
“빙고!”
좀비 웨이브를 막던 군대의 괴멸이 기억났다.
분명, 뭉쳐서 막는 것이 더 편할텐데 왜 그렇게 톡 튀어나와서 좀비 웨이브를 막고 있었을까?
마치 시간이라도 벌 듯이 말이다.
거기다가 총알도 아끼지 말라던 지휘관의 고함과 총을 난사하는 소리로 가득하던 현장이 떠올랐다.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 대피소가 무너진 좀비들이 이제는 어디로 갈까요?”
“…아시나요?”
“모르는데요?”
“……예?”
멍청해지는 그녀의 얼굴에 웃으며 말했다.
“그곳에 가만히 박혀있어주면 좋겠지만, 글쎄요….”
아니라는 것에 내 전부를 걸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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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 윤아영 (3)
윤아영 (3) ― 인천 중앙도서관 3층
나를 깨운 아저씨 좀비가 생각났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내 문을 이마로 두들기던 그 좀비.
“본의 아니게 국가가 벌어주던 골든 타임도 이젠 끝이라는거죠.”
슬슬 우리에게 노출되던 변종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뭉치고 뭉친 거대한 적의가 공동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이젠 거리를 떠돌기 시작할 것이다.
식량이 쌓여있던 탁자를 둘러보았다.
그렇게 충분한 식량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난리 속에서 버틸 식량은 충분한가요?”
“마치 자신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말씀하시네요.”
“아! 이럴땐 저도 성가을 씨의 ‘우리’에 포함되나요?”
“당연하죠. 당신이 먹은 귀중한 우리 캠프의 음식을 기억하는데요.”
아, 그건 좀 억울한데.
김밥은 손에도 안 댔고, 참치 캔 또한 윤아영에게 전부 줬는데.
실실 웃으며 다시 말하려는 순간 성가을의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재밌나요?”
“응? 갑자기?”
“네, 갑자기요. 재밌으시냐구요. 이 모든 상황과 결과가.”
얼굴에 가득하던 웃음이 지워져갔다.
“그거 아세요? 좀비가 나타나고 하루도 안 지났을때는 당신과 비슷한 사람들도 많았대요. 정말로 좀비가 나타났다고, 영화같은 일이 일어났다며 웃고 떠들던 새끼들.”
그녀의 음성에 깊이 담긴 경멸이 보였다.
“여자를 강간하고, 도시락 하나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자기 세상이 왔다는 듯이 날뛰던 놈들. 그놈들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흠, 어떻게 됐는데?”
“저도 모르죠. 뒤졌는지 살았는지.”
“…뭐?”
그녀는 내 말장난을 따라하며 냉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그거 하나는 확실하죠. 그 새끼들의 애미애비도 아마 좀비가 돼서 그 새끼들의 살코기를 갈구하며 지옥을 떠돌고 있겠죠.”
“마치 나를 향한 패드립으로 들리는데?”
“맞아요. 이럴땐 눈치가 빠른 게 참 다행이네요.”
이젠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메마르게 새어나왔다.
이 여자도 능력자인가?
목숨이 여러 개 달린 스킬이라도 있는거야?
“갑자기 이렇게 급발진하는 이유가 정말 궁금한데?”
“그냥 점점 선명해진거죠. 이야기를 나눌수록 당신이란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와, 솔직히 무지 당황스러운데….”
끼이익―
의자 끄는 소리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혹시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어?”
“설마요. 당신은 제가 지금 당신 얼굴에 침을 뱉어도 못 죽여요.”
“와, 대화가 갑자기 너무 흥미진진하네. 진짜 나도 궁금하다, 왜?”
그녀가 갑작스레 팔짱을 꼈다.
이런 순간에도 존재감이 폭발하는 그녀의 가슴이 보였다.
“어떻게든 날 따먹고 싶으니까.”
“…허!”
씨발, 독심술이라도 있나?
다시 실실거리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까는 순수한 재미였는데 이제는 솔직히 나도 내 가슴에 들끓는 불길의 정체를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겠다.
그래, 예쁜 년들은 언제나 그렇듯 예쁜 값을 한다니깐?
“커― 커억!”
들어올리는 손에 맞춰서 성가을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서는 끓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유, 윤아영도 정말 ‘각성자’가 맞았군요.”
“맞아, 전부 네 말이 맞아.”
예상했다는듯한 그녀의 말.
그래, 저런 행동들 또한 나의 이상행동을 유발하기 위한 미끼였겠지.
그래, 세상은 언제나 나보다 우월한 놈들의 놀이터였다.
난 그중에서도 상당히 평범한 찌질이였을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방심했었나?
아니, 방심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럼, 너무 들떴었나?
음, 그건 조금 그랬던 것 같다.
난 인정하기로 했다.
교주니 뭐니 지랄을 했지만, 난 아직도 내 자신을 인간에 가두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들처럼 생각하고, 또 행동했다.
“꺼― 꺼어억―”
고통에 겨워 눈알이 뒤집힌 성가을을 내 바로 앞까지 당겼다.
숨구멍을 찾지 못한 뇌가 떨리듯이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 앞에서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첫째, 난 지금 당장이라도 널 따먹을 수 있어. 그러니까 갑인 척 행세하지마, 이 덜떨어진 인간년아.”
털썩―
허어어억― 허어어어어억―
땅에 내동댕이쳐진 그녀가 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흘렸다.
입가에는 마저 삼키지 못한 침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까와 달리 적당한 강도의 염력이 정신을 회복하지 못한 그녀의 몸을 다시 내 앞에 세웠다.
그리곤 그녀의 가슴을 쥐어짜듯이 잡았다.
“흐, 흐윽! 뭐, 뭐하는 거야!”
몽실거리는 촉감과 함께 강한 중독성이 드는 가슴이었다.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며 염력을 이용해 그녀의 블라우스를 벗겼다.
“하, 하지마! 하지…끼아아악!”
분홍빛 유두를 꼬집자마자 극적인 반응이 새어나왔다.
“으으, 으이익!”
애무가 아닌 고문을 당하는 듯이 그녀의 몸이 계속해서 펄떡였다.
난 그런 그녀 앞에서 두 번째 손가락을 내밀었다.
“둘째, 혀 깨물면 너 대신 강산이 죽는다.”
똑똑한 그녀는 내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경악에 가득찬 눈을 무시하곤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흐, 흐읍!”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뒤로 단단히 닫힌 이빨의 벽이 느껴졌다.
열라는 듯이 혀로 톡톡 치는데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꽉 무는 것이 느껴졌다.
양 손으로 분홍색 젖꼭지를 잡아 땔것처럼 뒤로 당겼다.
“흐, 흐으으으으응!”
자꾸만 열리려는 입을 그녀는 초인적으로 참아내고 있었다.
쪼옥― 쪼옥―
그녀의 입술을 계속해서 빨아당기며 전신에 걸었던 염력을 풀었다.
푸는 동시에 허벅지가 풀린 듯이 무너지는 그녀의 몸을 허리에 팔을 넘어 감싸안았다.
그리곤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흐, 흐음, 으음―”
살살 원을 그리는 나의 애무에 그녀가 내쉬는 콧김이 내 인중에 느껴졌다.
그리곤 천천히 팔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그녀가 발작을 하며 내 손을 잡아챘다.
깜짝 놀란 귀여운 눈망울에 웃어주며 내 손을 잡아온 두 손을 오히려 내가 잡아챘다.
그녀의 눈에 당황이 스치는 것이 보였다.
“흐, 흐아아앙!”
내가 발동한 염력이 그녀의 보지를 강하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열린 입에 내 혀가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에베에에에―”
서로 얽히기 시작하는 혀에 그녀가 옹알이 비슷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AV처럼 그녀와 내 혀가 바깥에서 만나 서로를 애무했다.
가끔씩 그녀가 정신을 차린 듯이 혀를 내빼려할때는 여지없이 보지를 염력으로 긁었다.
마치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강하게 비비는 허벅지.
보지로 내려오려는 양손이 덜덜 떨렸지만 이미 나에게 꼼짝없이 잡혀있었다.
쪼옥― 흐으음―
콧소리와 함께 내 혀와 얽혔던 그녀의 혀가 다시 돌아갔다. 들어간 혀와 함께 무언가를 꿀꺽 삼키는 그녀의 목젖을 본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녀와 키스한 순간부터 [종속의 액]이 발동되고 있었다.
그후로 한참동안이나 그녀에게 내 타액을 주입시켰다.
그녀의 손을 막고 있었던 내 손은 어느새 그녀의 보지 둔턱을 부드럽게 쓸어담고 있었다.
앙 다물어진 둔턱 사이에 끈쩍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손가락을 비비자 만져지는 찐득거리는 액체.
‘애액.’
[종속의 액]의 효과로 인한 발정이다.
그녀의 보지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으려하니 그녀의 몸이 펄떡이더니 나를 밀쳤다.
“하, 하지마아아! 하악― 하악―”
오히려 밀친 자신이 밀려난 상황에서 그녀의 허벅지가 더없이 베베 꼬였다.
잔뜩 붉어진 얼굴과 땀으로 잔뜩 젖은 머리카락과 젖가슴.
난 다시 그녀의 목을 붙잡으며 속삭였다.
“반응이 상당히 새롭네. 혹시 아직 한번도 강산이랑 안 해봤어?”
“…다, 닥쳐어!”
그녀의 고음에 커다란 가슴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감상하던 나는 천천히 그녀의 블라우스를 다시 입혀주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꺼낸 휴지로 그녀의 몸 곳곳을 닦아주었다.
그리곤 손가락 세 개 폈다.
“셋째, 네 몸은 이제 내 장난감이야.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누군가 죽을거야.”
물론, 그 누군가는 네가 사랑하는 강산이야.
귀에 작게 속삭이자 그녀의 몸이 다시 한번 펄떡였다.
“뭐야, 귀가 성감대야?”
“흐, 흐으으윽! 꺼, 꺼져!”
다리가 풀린듯 땅바닥에 쓰러진 그녀가 스스로 허벅지를 비볐다.
그리곤 원망의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원망의 눈빛 한 편에 자리잡은 욕망이 보였다.
이대로 자신을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분홍빛 욕망.
과연, 저렇게 똑똑한 여자도 발정에는 어쩔수 없는 건가?
난, 네 번째 사항을 읊폈다.
“넷째, 난 네가 쑤셔달라고 울부짖을때까지 너랑 섹스 안 해줘. 그러니, 최대한 빨리 부탁하길 바랄게.”
장난기어린 미소에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찡그러졌다.
울지도 그렇다고 웃지도 못하는 광경에 더 진한 웃음이 맺혔다.
“아, 그리고. 앞으로 나한테 패드립은 하지마. 자체 패드립 면역인 집안이라서.”
3층 정면에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못해도 30~40분은 지체됐구나.
우리 아영이가 이경민하고 김철수한테 얼마나 괴롭혀졌는지 확인하러 갈까?
3층 열람실의 문을 여는 동시에 그녀가 물었다.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울분을 삼키는 듯한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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