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ão 7
까?"
내 질문에 아무르 영주가 고개를 저었다.
"원래 털이 있는 생물의 털을 뽑는다고 해서, 그게 털이 없는 존재가 되진 않소. 털을 밀어버린 존재가 될 뿐이지."
"그럼 아무르 영주님의 말씀대로라면 털이 많은 드워프는 인간이 아닙니까?"
아무르 영주가 살짝 어깨를 떨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드워프의 털은 우리가 말하는 그런 털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지 않소? 저 평원의 수인들처럼 온 몸에 털이 북실북실하게 난 것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지. 드워프 중에는 드물게 온 몸에 털이 나는 부류가 있다고 하나 이런 것은 예외로 치고 있소."
"둘 다 털이 많은 데 어느 한 쪽은 예외가 되고, 어느 한 쪽은 인간이 아닌 것으로 분류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드워프는 우리 인간 사회에 융화되고 싶어하고 수인들은 그러지 않기 때문이지. 그들은 매년 동부 평야 지대를 약탈하면서 우리를 괴롭힌다오."
"그렇다면 인간 사회에 융화되고 싶어한다면 수인도 인간입니까?"
"그건 그런 수인이 나타났을 때 다시 논할 문제요."
아무르 영주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었다.
"그래봐야 인어는 푸른 피가 흐르지 않소? 결국엔 우리와 다른 피가 흐르는 생물이라는 말이오. 우리와 다른 피가 흐르고 다른 생태를 공유하는 존재를 어찌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소? 인어는 인간이 아니오. 그리고 이 사건은 인어가 인간을 살해한 끔찍한 사건인 것이지. 북부의 루비콘 대공께선 이번 비보를 전해듣고 매우 비통해하셨소. 자신의 아들이 인어에게 죽었다는 걸 납득하실수도 없다고 하셨지.
루시우스 사제장. 그대가 정녕 인어가 인간이라고 주장할 생각이라면 루비콘 대공 앞에서도 그렇게 말해보시오. 평생 아인들을 잡아 죽여온 그 앞에서 인어도 인간이라 주장해보란 말이오."
"인어가 인간이 되지 못한 건. 우리들이 인간이 되는 걸 거부했기 때문이지 그들의 자격이 모자란게 아닙니다. 모욕이란게 무엇입니까? 모욕은 상대가 수치심을 느끼게 할 목적으로 낯부끄럽거나 더러운 욕설을 내뱉는 게 모욕입니다. 우리는 돼지를 모욕하지 않습니다. 아무르 영주. 당신은 영지민의 개가 당신에게 짖는다면 그걸 모욕이라고 받아들입니까?"
"그렇지 않소."
"그럼 영지민의 개를 조롱한 적 있습니까?"
"없소."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만을 모욕합니다. 인간만이 모욕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고 분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루비콘 콘드릭스는 그 날 제 아내인 페타 이브에게 '물고기 작부' '반물고기' 같은 단어를 사용했으며 인어가죽 지갑을 보여주는 것으로 계속해서 도발을 자행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루비콘 콘드릭스는 제 아내를 모욕한겁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지언정, 루비콘 콘드릭스는 사망하기 직전까진 제 아내를 모욕을 느끼는 인간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제 아내는 루비콘 콘드릭스의 발언을 듣고 모욕을 느껴 공격을 한 것입니다."
아무르 영주가 말했다.
"아인종에 대한 단어를 언급했다고 그들이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빈약한 논리요. 그리고 모욕을 느낀다고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잘못된 논리요. 개나 고양이도 자신에게 신발을 던지면 이빨을 드러내는 법. 모욕감을 느낀다는 것만으로는 그들은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소.
설령 루비콘 콘드릭스가 인어를 인간으로 봤다고 해도 이 주제에 무슨 차이가 생기오? 다른 사람들이 인어를 인간으로 보겠소? 내가 저 의자를 인간으로 부른다고 한다면 사제장도 저 의자를 인간으로 볼 의향이 있소?"
"이야기가 자꾸 맴도는 군요. 인간이라 불릴 수 없는 이유가 인간이라 불릴 수 없기 때문 하나입니까?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은 인간이라 불리기 때문에 인간일 뿐이지 않습니까."
"우리와 인어는 본질적으로 다르오."
"뭐가 다릅니까? 붉은 피와 푸른 피 이야기는 더 이상 듣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번 재판으로 말미암아 인어를 학살하는 무의미한 이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합니다. 인어가 우리 사회에는 없어선 안될 중요한 자원입니까? 인어를 죽이지 않으면 인어들이 배를 침몰시키나요? 지난 10년 간 인어에 대한 선박 피해 건수는 페타 이브를 제외하자면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인어는 충분히 우리에게 공존을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듣지 않았죠."
"인어들이 전부 평화롭다고 말하려하지만, 당신의 부인이 전과가 있지 않소? 결국 인어가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힘이 없어서지 그들이 평화롭기 때문이 아니오. 당신 아내의 전과가 이를 증명하오."
"그리고 인어를 폭력적으로 만든건 인간입니다.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는 법. 당신의 발언은 노예사냥꾼에게 맞서싸운 사람을 가리켜 폭력적이라고 비난하는 꼴입니다."
"하지만 인어는 인간이 아니지. 새끼를 잃은 곰이 마을을 습격한다면, 사제장은 그 곰을 동정하여 마을의 인원으로 받아줄 것이오? 만일 그대의 영식이 곰을 괴롭히다가 곰에게 죽었다면, 그대는 곰에게 복수하지 말고 풀어주자고 제안할 수 있겠소?"
"결국에는 인어가 인간이 아니라는 말씀밖에 하지 않으시는군요. 인어는 우리와 공존할 수 있는 인간입니다. 인어는 우리와 공존을 희망하고 있으며, 사람의 지능과 언어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존을 희망하는 쪽과 무자비하게 칼을 들이대는 쪽. 어느 쪽이 '인간적'입니까? 곰과 같은 맹수와 비교할만큼 인어가 위험합니까?"
아무르 영주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한마디 뱉었다. 꾹 다문 입술에서 그의 고집이 느껴졌다. 나는 진짜로 저 쥐새끼 수염 영주의 대가리를 깨버리고 싶었다.
"인어는. 인간이 아니오."
"인어가 인간이 아니길 바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물었다. 아무르 영주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다시 물었다.
"인어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그저 인어가 인간이 되면 인어 가죽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귀족들과 일부 대천신교 성직자들이 인어 가죽으로 만든 장식품을 즐겨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어의 비늘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아름답기 때문이죠. 그걸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까? 자신들이 인간의 가죽으로 장식품을 만들어서 몸을 치장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으니, 인어는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아닙니까?"
"그대가 어떻게 우긴들 인어는 인간이 될 수 없소. 결국에는 푸른 피를 흘리고 물고기를 먹으며 하반신이 물고기인 존재지 않소. 그런 존재가 어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란 말이오? 그들이 사람이 된다면 그 다음엔 누가 사람이 되겠소? 평원의 수인? 산맥의 아인? 그렇게 하나하나 인간이 되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양보해야 되겠소? 사제장은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많은 것을 놓치고 있소. 아무도 그런 미래는 바라지 않을거요."
푸른 피 이야기가 또 나왔다. 내가 다시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재판장의 문을 박차고 누군가 들어왔다.
"시시한 토론은 그만두게! 지금 이 시간에도 북쪽에선 아인들이 광산을 탈취하기 위해 움직이고, 동부 평야에선 수인들이 들끓고 있으니! 어찌 남부 사제장은 이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는가? 인어가 사람이라고? 서부 해안지대에서 인어들이 집단으로 선박을 습격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인어는 인간이니 모욕해선 안된다고? 인어는 인간이 아니야! 인어는 우리를 습격하는 적일 뿐이다! 아인도 수인도 전부 물리쳐야 할 대상일뿐! 인간 왕국은 드워프 왕국, 엘프 왕국과 힘을 합쳐서 이 사태를 헤쳐나가야 함을 왜 아직도 모르는가! 루시우스 사제장! 당장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게! 나는 내 아들이 죽은 것에 대해 큰 보상을 바라지 않아! 저 잔악한 인어를 튀겨죽이는 것! 이 사건은 그것만으로 종결하길 원한다!"
루비콘 대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부의 따뜻한 날씨가 무색할만큼 두꺼운 옷을 입은 그는, 북부라는 관념적인 존재를 인간으로 그대로 그려낸 것 같았다. 덥수룩한 수염과 2M는 되어보이는 거대한 키. 그리고 억센 인상과 부리부리한 눈동자까지. 그는 가공할만한 첫인상과 함께 재판장을 지배했다.
이제 진짜 게임 시작이었다.
자, 정정당당한 승부다.
"아, 루비콘 대공.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루비콘 대공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말했다. 루비콘 대공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나를 쳐다보다가 눈을 찌푸렸다. 내가 반가운 옛 친구를 만나듯이 살갑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이 매우 불쾌해보였다. 그는 혀를 차면서 노골적인 증오를 드러냈다. 일그러진 입에서 냉정한 발언이 흘러나왔다. 생김새에 비해서 말하는 내용은 꽤 이성적이었다.
"루시우스 사제장. 그대에게 원한은 없네. 그대가 인어와 결혼한 것 자체도 존중하는 바고. 하지만, 그 인어를 물고기 작부라 부르는 건 모욕이 될 수 없으며, 고작 그런 이유로 내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도 납득할 수 없네. 인어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
"왜 인어는 인간이 아닙니까? 루비콘 대공께서 생각하시는 인간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엘프도 드워프도 전부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는데, 어찌하여 인어는 인간이 될 수 없습니까?"
나는 그렇게 질문하면서 루비콘 대공의 상태창을 열었다. 싸우기 전에 상대의 전력을 파악해야 했다. 내가 알던 게임 속 지식으로는 루비콘 대공은 동레벨 때 다른 직업군 캐릭터보다 월등한 성능을 자랑하는 전사 캐릭터였다. 만일 그 설정이 여기도 적용된다면 조금 더 조심히 싸워야 했다.
이름: 루비콘 알리샤르
레벨 : 38
직업 : 북부 대공
스텟
힘 : 110
민첩 : 80
지능: 98
행운: 100
특성
역전의 전사
불리한 상황일수록 스텟이 추가로 상승합니다.
최대 원래 스텟의 2배까지 상승할 수 있습니다.
공포의 존재
아인종에 대해서 2배의 데미지를 입힙니다.
돌격병
단단한 물체에 대해 2배의 피해를 입힙니다.
나는 루비콘 대공이 생각보다 존나 쎈 걸보고 혀를 찼다. 북부에서 빡세게 몬스터 사냥을 하고 다니다 보니 레벨이 저 지경으로 오른 모양이었다. 물론 내가 못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역전의 전사] 효과로 내 대가리가 터질 수도 있었지만, 성검이 있는 이상 그럴 일은 불가능했다.
루비콘 대공은 내 질문에 눈을 찌푸렸다. 그는 말했다.
"나는 그대와 그딴 논의를 하고 싶지 않네. 인간이 무엇이냐의 정의를 여기서 따진들 인어가 인간이 되는가? 아니. 어떤 말을 해도 변하지 않아. 인어는 인간이 아니고, 여기서 정의가 재정립될 일도 없지."
"루비콘 콘드릭스는 제 부인 앞에서 물고기 작부, 반 물고기 같은 발언을 했습니다. 이는 저를 모욕한 셈도 되는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죽였다면 루비콘 콘드릭스의 죽음에 대해 재판을 걸지 않으셨을겁니까?"
루비콘 대공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서 그게 그대에 대한 모욕이지? 살인 전과에 남들을 겁간하고 다닌 인어에게 작부라는 호칭보다 더 훌륭한 호칭이 어디있겠나? 만일 내 아들이 그 인어를 살인마나 강간범이라 불렀으면 죽지 않았을까? 그대는 죄를 사면받았으니 세간에선 그녀의 죄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말라 말하고 싶은건가? 피해자들도, 이 사건에 분노한 이들도 전부 그대를 존중했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그대의 못난 물고기 작부는 고작 그 한마디를 견디지 못해서 사람을 죽였지. 인어가 왜 인간이 아니냐고? 수치를 모르는 놈들이기 때문이다! 그딴 중범죄를 저지르고도! 인간 행세를 하며 행복하게 살 생각을 하는! 네 놈의 그 더러운 작부년은 수치를 모르는 괴물에 불과하단 말이다!"
루비콘 대공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러댔다. 창백한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볼만했다. 역시 북부에서 오랜 세월 살아오며 이종족에 대한 증오를 쌓아온 인간다운 언변이었다.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루비콘 대공의 발언에 조금이나마 동조하고 있었다. 재판관도 루비콘 대공의 발언에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 역시 밀릴 수 없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말문이 막히면 끝이었다.
"엄연히 죄는 사면 받았으며 저는 대천신교와 왕궁에 의해 결혼을 허가받았습니다."
"결혼 허가는 염소랑도 받을 수 있다. 북부에서 몇 명이 그런 식으로 자기 암염소랑 결혼 했었지. 루시우스 사제장! 그 염소들도 전부 인간이라고 주장하고 싶은가?"
"죄를 사면받아도 사람은 평생 죄인이라는 겁니까? 대천신교의 관점과는 다르군요.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남은 생애를 속죄하며 사는 것이죠. 이브는 자신의 죄를 사면받고 새 삶을 살기 위해 노력중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이에게 작부라는 표현을 하며 모욕을 준 것은 루비콘 콘드릭스였죠.
그건 단순히 제 부인에 대한 모욕이 아니었습니다. 루비콘 콘드릭스는 제 부인이 대리인 자격도 없으며, 반물고기에 물고기 작부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부인을 영지 대리인으로 세운 제 결정을 비웃는 행위이자 제 권위까지 무시한 행동이며, 부인은 영지 대리인으로서 합당한 행동을 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더라도 상황은 똑같았을 겁니다. 루비콘 콘드릭스는 칼에 찔려죽는 게 아니라 머리가 산산히 부서졌겠죠."
"그건 인어가 인간일때나 성립하는 이야기지. 내 아들의 죽음 이야기는 거기까지 하게."
"인간이 아니더라도 문제는 없습니다. 집 지키는 개가 도둑을 물어죽였다면, 루비콘 대공은 개가 사람을 죽였다고 소리를 지르실겁니까?"
"내 아들이 도둑이란 소리인가?"
"아무르 영주가 인간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렸는지 아십니까?"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라! 루시우스 사제장!"
루비콘 대공이 다시 한 번 씩씩거리며 화를 내고 있었다. 아무르 영주가 루비콘 대공을 말리기 위해 옆으로 다가왔지만, 그는 아무르 영주를 밀쳐냈다. 루비콘 대공은 죽은 아들을 참 아꼈던게 분명했다. 내가 아들을 도둑에 빗대서 표현하자 벌써 고혈압으로 폭발해 죽을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아무르 영주가 말했습니다. 인간은 두 다리로 걷고 붉은 피가 흐르며 털이 없는 존재다."
"루시우스 사제장!"
다시 한 번 루비콘 대공이 외쳤다. 재판장이 떠나가라 크게 울린 소리에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말했다.
"네. 루비콘 대공. 당신의 아들은 도둑입니다. 아주 간악한 방법으로 제 영지의 예산을 탐하려 한 도둑이지요. 거기다 당신의 아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무슨 망발을 하는가! 사제장! 더 이상의 모욕은 참지 않겠다!"
루비콘 대공이 화를 냈다. 나는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역시 다혈질인 인간은 감정 변화가 눈에 보여서 편했다. 거기다 루비콘 대공의 반응은 굉장히 재밌었다. 그의 얼굴은 달마대사의 초상화처럼 일그러졌다가 다시 풀어졌다.
"당신의 아들, 루비콘 콘드릭스가 두 발로 걸을 수 있습니까?"
루비콘 대공이 벙찐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뭐, 뭐?"
당연히 걸을 수 없었다. 저승에 간 놈이 무슨 수로 발을 옮기겠는가. 지금이라도 루비콘 콘드릭스가 일어나서 걷는다면 나는 기꺼이 패배를 인정할 의향이 있었다.
"혹시 지금 당신의 아들의 몸에 붉은 피가 흐르고 있습니까?"
"뭐가 어쩌고 어째!!"
죽은 지 며칠이 지났으니 이미 장례식을 치뤘던가 했을거다. 루비콘 대공은 칼자루에 손을 올리고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말했다.
"당장 사과하게 루시우스 사제장!"
"무엇을 사과하란 말입니까? 아무르 영주와 루비콘 대공의 논리에 따르자면, 인간이 아닌 것이 인간이 아닌 것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것을 인간이 아니라 불렀을 뿐입니다."
"내 아들은 인간이다!"
"그럼 증명해보시면 되겠군요. 지금 여기서 루비콘 콘드릭스가 두 발로 걸으면서 말하는 걸 보여주신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죽은 자가 어찌 걷는단 말이냐!"
"그럼 인간이 아니군요."
"끄아아아아아악!"
루비콘 대공이 마침내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발작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고혈압으로 뒤진다면 참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로 건강이 안좋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씩씩 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르 영주. 루비콘 콘드릭스가 인간이 아닌 것에 동의하십니까?"
"닥쳐라! 루시우스 사제장! 당장 칼을 뽑아라! 이딴 말장난에 놀아나지 않겠다! 애초에 이딴 재판으로 옳다 그르다가 결정될 일이 아니지 않느냐! 그대가 마왕을 물리쳤다고 내가 두려워할 줄 아는가! 결투다! 결투로 이 분쟁을 끝내겠다!"
"좋습니다."
나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뒤쪽에 챙겨온 성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그럼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 재판의 결과를 결투로 가리는 데 동의해주시겠습니까?"
루비콘 대공도 재판관을 쳐다봤다. 재판관은 고개를 끄덕이고 헛기침을 했다.
"그럼, 의견이 합치되지도 않고, 제가 쉬 결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니 결투로 이번 재판의 결과를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르 영주가 놀란 표정으로 루비콘 대공을 말리며 말했다.
"대공 어르신. 저 쪽은 마왕을 물리친...."
"닥쳐라 이놈아! 애초에 네가 헛짓거리를 해서 벌어진 일이지 않느냐! 이번 일이 끝나면 네게도 책임을 물을테니 닥치고 있어라! 그리고 루시우스 사제장!"
나는 고개를 들었다. 루비콘 대공은 내가 들고있는 성검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보는 검이니까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는 무기를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사제장. 만일 이 결투에서 내가 이긴다면, 그대는 방금 전 내게 한 모욕을 사죄하고, 그대의 인어 부인과 그 어미의 신병을 내게 넘기게."
"루비콘 대공은 제가 이길 경우 앞으로 저와 아무르 영지 사이에 일에 개입하지 않으며 루비콘 콘드릭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제게 묻지 않으셔야 합니다. 또한 당신의 아들이 제 부인을 모욕한 것을 사과해주셔야 겠습니다."
"얼마든지 해주겠다! 빨리 덤벼라!"
루비콘 대공은 싸움에 미친 개처럼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나는 칼을 고쳐쥐고 심호흡을 했다. 나는 이번 승부에서 이 새끼를 아예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이 좆같은 새끼가 어깃장을 놔서 던전 탐사후 3P나 하면서 쉬는 내 휴가 계획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솔직히 이 놈이 사과를 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나는 이번 일을 마치고 아무르 영지도 두들겨패러 가야했다.
그렇게 루비콘 대공이 칼을 뽑아들었다. 두껍고 긴 검신이 내 눈에 들어왔다. 키가 큰 대공인 만큼 검도 길쭉한 것을 쓰는 모양이었다. 나는 성검을 고쳐잡으며 잠시 고민했다. 차라리 메이스를 쓰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씨발 결투에서 아예 죽여버리려면 이 성검이 최고였다.
재판관이 가운데 서서 외쳤다. 어차피 간이 회장이었던 관계로 주변의 기물들을 싹다 물리자 근사한 공터가 만들어졌다. 나는 칼을 고쳐쥐었다. 검술은 배운 적 없었지만 스텟빨이 있는데 이기겠지.
"그럼. 정정당당한 '승부'를 합시다."
칼에 묘한 힘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대공의 대검과 내 성검이 맞부딪혔다. 불꽃이 튀면서 묵직한 울림이 사방으로 퍼졌다. 살을 에는 듯한 소리에 사람들이 움츠러들었다. 나는 생각보다 가벼운 후폭풍에 어깨를 풀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머리 위에 떠오르는 문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상사]와 대결을 하고 있습니다. 확고한 충성심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현재 정정당당한 승부의 효과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대상에게 상처를 입히면 일정시간 후 사망합니다.
챙!
그리고 두 번째로 칼을 부딪힌 순간, 청량한 소리를 내며 대공의 검이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당황한 대공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확고한 충성심은 내 지인이나 관계있는 인물에게 4배의 추가 데미지를 주는 효과다. 즉, 지금 대공이 받는 충격은 내 스텟의 4배 정도의 힘이라는 말이었다. 그걸 무식하게 정면으로 받았으니 칼이 날아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공은 관록있는 전사였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뒤로 조금 뛰어올라서 날아간 검을 받으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바닥에 내려앉은 대공이 잠시 비틀거렸지만, 그 빈틈을 캐치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대공의 팔이 후들후들 떨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대공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그나저나 이 성검 은근 능력 허용범위가 넓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난 대천신교 사제장인데, 영주를 겸하고 있으니 비슷한 영주면서 더 직위가 높은 대공을 상사로 취급해주고 있었다. 대공은 칼을 고쳐쥐면서 말했다.
"무식한 힘이로군."
"대단한 관록이십니다."
대공은 증오를 잊고 호승심에 불타는 것 같았다. 그는 오랜만에 적수를 만난 야수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대공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딛고 크게 칼을 휘둘렀다. 횡방향으로 휘두른 검을 성검의 날을 이용해서 빗겨쳤다.
매끄럽게 미끄러진 칼날이 허공을 가르고 대공의 몸이 검을 따라가며 빈틈을 만들었다. 나는 대공을 향해 뛰어들었다.
"어딜!"
대공이 아예 몸을 크게 돌려서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나는 내 얼굴을 노리고 날아오는 검날을 가까스로 튕겨냈다. 방어할 때는 적용이 안되는 건지 뒤로 살짝 밀려나며 시큰한 충격이 찾아왔다.
대공은 내가 살짝 머뭇거리자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내 멱을 따버리겠다는 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을 휘둘러오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대공의 검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방금 전 충격이 심했던 것일까 검로가 일정하지 못했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니까.
초조한 건 대공 쪽이었다. 첫 공격에서 사실 승부는 났다고 봐야했다. 대공의 손은 지금도 떨리고 있었으니까. 그는 몸을 크게 돌려서 내 머리를 다시금 노렸다. 나는 피하지 않고 성검을 휘둘러서 대공의 검을 다시 한번 받아쳤다.
쾅!
이번엔 대공의 검이 아예 박살이 났다. 하늘로 치솟은 파편이 은빛 별가루가 되어 우수수 떨어졌다. 반짝거리는 그것들은 몹시 아름다웠지만, 정말 위험한 것들이었다. 나는 급히 몸을 피했고, 대공은 쏟아지는 자신의 칼날 파편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끄아아아아아악!"
대공을 비롯한 주변의 구경꾼들이 파편을 쳐맞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말이 아름다운 은빛 별가루지 하나하나가 수십년동안 싸우고도 날이 안상했던 명검의 칼조각이었다. 그딴 걸 맞으면 사람이 무사할리가 없었다.
관중들이 온몸을 긁어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혼돈의 틈바구니에는 아무르 영주도 끼어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루비콘 대공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그는 헬레이져 속편을 찍는 배우마냥 온몸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대공은.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병신 같이 자신의 부서진 칼날 파편을 쳐다보고 있던 대공은 얼굴이 걸레짝이 된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마 그는 많은 생각을 했겠지. 그래서 단 한방에 부서진 칼날을 보고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을게 분명했다. 나는 이 혼돈의 틈바구니에서 성검으로 대공의 손을 살짝 긁으며 그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루비콘 대공!"
"눈이..! 눈이이이!!!!"
루비콘 대공은 자신의 눈가를 가리키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비위가 좋은 나도 대공의 얼굴을 차마 자세히 볼 수가 없을정도로 만신창이였다. 아마 이 상처를 다 치료하고 흉터가 남고나면 북부대공 부모님도 이 새끼가 누구인지 못알아볼게 분명했다.
나는 그런 루비콘 대공의 머리채를 잡고 뒤흔들며 외쳤다.
"패배를 인정하세요 루비콘 대공!"
"치료를...! 치료르으을!!"
루비콘 대공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나는 주먹을 쥐고 그의 배때지에 시원하게 한방을 꽂아넣었다. 비명을 질러대던 루비콘 대공이 풀썩 쓰러져서 토악질을 해댔다.
"끄억....끄윽....치료를....치료를....!"
"패배를 인정하세요 루비콘 대공!"
"끄아아아! 끄아아아아아!"
"패배를! 인정! 하시란 말 입니다!"
"졌다! 내가 졌다! 끄아아아아!"
"재판관! 빨리 판결을 내리세요!"
이미 나와 결투 중이었던 루비콘 대공을 제외하고 다른 인원들은 사제에게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치료라고 해도 힐 한 방에 끝나는 단순한게 아니었다. 파편이 몸에 박혀 있기 때문에 그걸 다 빼내고 힐을 해줘야 했다. 그러니 이미 관중석은 칼날 조각을 빼내는 비명소리로 가득했다.
"살려줘어어어!"
"끄아아아악! 끄아아악!"
심약한 재판관은 이 지옥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재판 현장은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한쪽 관중석이 완전히 피바다가 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누워서 신음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누군가 비명을 질렀고 수시로 바닥에는 칼날 조각을 빼내는 소리가 났다.
"빨리이이....! 끄아아아아!"
그리고 루비콘 대공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어린애같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눈이이....! 눈이....!"
"재판장!"
나는 다시 재판장을 다그치며 루비콘 대공의 머리채를 잡고 뒤흔들었다. 전의를 잃은 그는 이미 내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재판장도 제정신이 아닌 듯 했다. 그는 내가 몇번이나 소리를 질렀는데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끄아아아앙! 끼아아아아!"
"재판장!"
"네! 네!"
재판장이 드디어 대답을 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는 루비콘 대공을 아주 곤죽으로 만들어버린 걸 보고 기겁을 했다. 재판장은 내가 고갯짓에 서둘려 판결을 내렸다.
"끼으으윽....까읅....!"
"그, 그럼! 아무르 영지와 루비콘 대공. 그리고 페타 루시우스 사이에서 벌어진 재판을 판결하겠습니다! 재판 결과 페타 루시우스의 스, 승리! 따라서 루비콘 대공은 페타 루시우스에게 사과하시고..... 아, 아무르 영지에게 페타 루시우스는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루비콘 대공을 놓아주었다. 결투가 끝나는 걸 지켜보고 있던 사제들이 다가와서 루비콘 대공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나는 굳이 해주고 싶지 않아서 뒤로 물러났다. 치료하려면 대공 얼굴에 박힌 검 조각을 빼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극혐이지 그건.
그렇게 재판이 끝났다. 아무르 영주는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고, 루비콘 대공은 시력을 잃었으나 목숨은 건졌다. 재판이 끝났으니 이제 돌아가는 길. 간이 회장이 정리되고, 아무르 영지 측 인사들이 슬금슬금 나를 피해서 영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길거라 생각했던 재판을 병신같이 지고 말았으니 할 말이 있을리 없었다.
나는 굳이 아무르 영주를 붙잡지 않았다. 며칠 쉬다가 아주 조져버릴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루비콘 대공은 올때는 당당하게 말을 타고 온듯 하나, 돌아갈 때는 요양 마차에 몸을 실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원인불명의 고열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도 루비콘 대공은 마차 창문 너머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눈에 붕대를 감고, 잠깐 사이에 수척해진 얼굴은 방금 전까지 위풍당당했던 대공이 맞나 싶었다.
"좋은.... 승부였네."
루비콘 대공은 시력을 잃었지만, 한 점 후회도 없어보였다. 무인들은 자기가 손해를 봐도 멋진 승부에 집착한다던데 그 느낌이었다. 그는 이제 영지로 돌아가려는 내 길을 가로막고 떠들기 시작했다.
대충 북부 영지에서 싸운 이래로 나같은 강자는 처음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상태창을 열어젖혔다. 루비콘 대공의 상태창에는 독으로 뒤질 때까지 얼마나 남았는 지 표시되고 있었다.
* 사망까지 30초.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부는 잠시 쉬기 위해 구석으로 가 있었고 마차 안에는 시종도 없었다. 호위병들도 나와 단 둘이 대화하고 싶다는 루비콘 대공의 요청에 따라서 전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쉬고 있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근데 그거 아십니까 대공?"
대공은 자기 이야기를 떠들다말고 내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내 마누라를 튀겨죽이려하고, 그의 아들은 나를 모욕했다. 이대로 대공이 만족스럽게 죽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욱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이 왜 아프신지. 알고 계십니까?"
"무, 무슨...."
"제가 칼에 독을 발라놨기 때문입니다."
"뭐, 뭣....?"
대공은 내 말을 이해못한 얼굴이었다. 개운해보였던 그의 얼굴에 천천히 어두운 그림자가 짙어졌다. 비로소 내 말을 이해한 듯 싶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의 앞에서 소리내 웃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이..이이익...! 이....이 더러운 놈!! 이 천인공노할....!"
10. 9. 8. 7. 6.
"여, 여봐라! 당장...! 빨리 아무나 와라! 와서 이 더러운....끄으윽....! 끅...!"
5. 4. 3. 2. 1
"이럴 순 없다! 내 마지막 결투를...! 내 결투가 이런...끄으으윽..끄으윽...!"
마침내 루비콘 대공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뒤늦게 달려온 호위병들이 루비콘 대공의 상태를 살피며 내게 물었다.
"아니 사제장님! 이게...이게 대체 무슨....!"
나는 최대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결투에서 졌으니 제게 사과해달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대공께서는 그 말이 그렇게 화가 나셨던 모양이군요. 악을 쓰며 인정할 수 없다고 화를 내시더니 갑자기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그런...."
병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와 대공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남의 와이프를 튀겨 죽이려고 한 새끼가 곱게 죽을 필요가 어디있을까.
하지만 나는 대천신교의 사제장. 자비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루비콘 대공이 찌질하게 뒤졌다고 날조하는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저택을 향해 한걸음 옮겼다. 마침 퇴근하는 시에리가 저 쪽 방향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걸어오는 걸 보고 황급히 달려왔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을 쫓아오는 듯 쫄쫄 뛰어오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그녀는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물었다.
"어, 어떻게 됐나요?"
"이겼어요."
아주 개박살을 내주고 왔다. 북부 대공은 죽었으면 이브는 이제 사람이다. 나는 시에리를 꼭 끌어안아주며 그렇게 말했다. 시에리는 그 말에 겨우 안심한 듯 한숨을 푹 쉬며 주저앉았다. 맨바닥에 주저앉아서 치마가 더러워졌지만, 시에리는 신경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나는 시에리의 팔을 잡으며 다시 일으켰다.
"아아....."
"시에리. 왜 그래요?"
"저는, 저는 그....이브 씨가 어떻게 되는 줄 알고...."
내가 간 사이에 둘이 많이 친해진 모양이었다. 기왕 친해질거면 둘이 침대에서 친해지는 게 나는 좋은데. 나는 시에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가 있는 한 그럴 일은 없어요. 아시겠어요. 시에리? 항상 저를 믿어야 해요. 저를 믿어야 한다구요."
"네...."
시에리가 나를 꼭 끌어안은 채 내 말을 되새겼다. 나는 시에리의 등을 쓸어주며 수영장 방향을 바라봤다. 수영장보다는 작은 연못에 가까운 그 곳에서 셀루는 유유히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녀는 수영 중에 내가 다가오는 걸 발견하고 내가 있는 모서리로 헤엄쳐왔다. 그리고 물 속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
"죽여놨죠. 대공은 멱을 따버렸고, 아무르 영주도 박살났어요. 재판은 아예 이겼다고요.“
내 생각보다 셀루는 훨씬 덤덤하게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이야기하다가 조금 맥이 빠졌다. 셀루는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내게 물었다.
"그럼 이제 이브는 인간이야?"
"인간이에요. 당신도 뭐, 제가 인간이라고 쳐줄게요."
"헤흐."
셀루는 내 말에 웃었다. 그녀는 기분 좋은 듯이 수영장 아래로 몸을 푹 담궜다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물가로 몸을 내민 채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멋지네."
"그렇죠? 이브는요?"
"몰라. 아까 전에 잠깐 나왔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갔어."
그래서 나는 시에리를 끌어안은 채 저택으로 들어갔다. 시에리의 심장이 콩닥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시에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기저기를 뒤져보고 있었다. 복도를 청소하던 아이라가 나를 보고 다가왔다.
"영주님! 재판은 어떻게 되셨나요?"
"훌륭하게 끝냈어요. 아이라. 집은 잘 보고 있었나요?"
"네! 영주님! 그러니까...그.....상을...주시는....건....."
아이라가 얼굴을 붉히며 은근한 요구를 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이브를 찾았다. 아이라에게 포상을 주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지만, 오늘은 이브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게 더 중요했다. 아마도 내 방에 그녀는 있으리라. 나는 시에리를 자기 방으로 보낸 뒤 다시 이브를 찾았다. 내 방문을 열면 그녀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나를 슬쩍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존나 늦어."
"어떻게 됐게?"
"몰라. 나 이제 생선 튀김 되는거야? 응?"
이브가 일어나서 물었다. 그녀는 침울한 기색을 숨기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씩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브는 그 고갯짓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리다가 뒤늦게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씨발.... 이겼다고? 그 씨발 말도 안되는 재판을 이겼어?"
"당연하지. 씨발 내가 누구냐?"
"....개새끼...."
이브가 나를 꾹 껴안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이브의 등을 토닥여 주면서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가장의 기쁨이란 거구나. 보람찬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나를 응원해주는 아내가 껴안아준다. 이렇게 좋은 날이 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전생에선 이런 삶을 꿈꾸곤 했었다. 아르바이트를 뛰면서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가면 여동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달 약값으로 씨발 돈이 몇십만원이 깨졌었지. 그 때랑 지금이랑 비교해보자면, 현재 내 삶은 비현실 그 자체였다.
"신랑?"
이브가 멍하니 서있는 내게 말을 걸었다. 너무 옛날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멍하니 서있었다는 걸 자각하고 이브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존나 멋있지?"
"존나 멋있어. 빨아줄까?"
"하지마. 이빨 날카로워서 쫄린다."
어지간하면 참고 받아보겠는데 이브 이빨은 너무 날카로웠다. 애초에 인어들은 바다 최상위 포식자들이었다. 인간만 안건드리지 상어부터 거북이에 이르기까지 이빨만 들어가면 다 뜯어먹을 수 있는 극단적인 포식자들. 나야 인어를 떡치는 모습 말곤 못봤으니 사람 취급하지만
어릴 적부터 상어 뜯어먹는 인어들을 쳐다보면 인간이란 생각이 안들만 했다.
"근데 상어고기 맛있냐?"
"뭔 상어고기?"
이브가 달라붙어있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상어 지느러미가 그렇게 맛있다는 데 나중에 바다가면 셀루나 이브한테 한마리 잡아달라고 해볼까? 이브가 대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자 나는 다시 물었다.
"너네 바다에서 상어도 잡아먹잖아."
"아아, 그 상어. 맛없어. 먹지마. 씨발 진짜 존나 맛없어."
이브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쑥 내밀었다. 이브의 설명에 따르자면 고기 전체에 찌린내가 나서 진짜 배고플 때나, 상어가 자기들 영역에 쳐들어왔을 때나 먹는 간식 같은거라고 했다.
"그래서, 나한테 상어 잡아달라고 하려고 했어? 아니 뭐 굳이 원한다면 잡아다줄순 있는데.....진짜 맛없다?"
"맛없으면 됐고, 너 혹시 방어 이런거 아냐?"
"뭐야 그게."
"광어."
"뭔데."
"장어. 참돔, 참치"
"뭐 마법 주문 같은거야?"
씨발 이 동네는 바다에 인어랑 거북이랑 상어 밖에 안사는 건가? 생각난 김에 물고기 파티라도 하려고 했더니 이브가 그 물고기들을 몰랐다. 어쩌면 이름이 다른 걸수도 있었다.
"아니, 그 존나 크고 통통하게 생겨서 살튼튼해 보이는 물고기 있잖아."
"아아, 개복치? 그것도 별론데."
"아니 씨발. 바다에 왜 그딴거 밖에 안살아? 좀 맛있는 생선은 없나?"
"씨발 왜 나한테 화를 내? 맛있는 생선? 음..... 모르겠는데. 솔직히 물속에서 쳐먹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 진짜 상어같이 존나 맛없는 거 아니면 다 비슷해."
".....됐다. 그럼. 물고기 파티 하려고 했는데 관두자."
어차피 에스타에서 생선을 사오지도 못할테니 나는 물고기 파티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아무르 영지 정리하고 나면 이제 시간이 좀 남을텐데 시간 날 때 셀루 데리고 물고기 낚으러 가면 되겠지. 내가 침대에 걸터앉아 이브가 자연스럽게 옆에 앉았다.
나는 이브의 머리카락을 쓸면서 물었다.
"그럼 뭐해줄거야?"
"빨아주는 건 싫다고 했으니까...... 뭐해줘야되지?"
"너 뒤로 해봤냐?"
"뒤?.....씨발 뒤?"
이브는 잠깐 내 말을 고민하다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슬쩍 뒤로 물러나며 자신의 엉덩이를 가렸다. 뭐지. 이 세계관에서 뒤로 섹스하는 건 금기였나. 몇명 애널 섹스하는 컷씬 있던걸로 기억하는데?
뭐 아예 셀루같이 대체 뒤로 하려면 어디다 박아야 하는 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뒤로 하는 게 그리 크게 문제될 거 같진 않았다. 더욱이 이브는 일단 허벅지까진 인간이라 그 쪽도 인간이었으니까.
"아니 씹.... 뒤? 아..... 안될거 같은데...."
"뭐야 뭐든 해준다며."
"씨발 뒤에 그게 어떻게 들어가."
이브는 내 좆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내 거근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이브가 스텟 95짜리 좆사기 인어긴 하지만 그래도 씨발 안되는 건 있었다. 이건 나중에 해보기로 하고, 나는 지금 이브한테 무슨 보상을 받아야 꼴릴 지 생각하고 있었다.
"씨발 사내 새끼가 왜 이리 오래걸려. 어차피 하나 밖에 없잖아. 어?"
이브가 자신의 허벅지를 슬슬 쓸어올리면서 내게 말했다. 그녀는 그냥 시원하고 아주 질척한 섹스를 하는 걸 원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거보다 훨씬 꼴리고 좆되는 시츄에이션을 원하고 있었다. 내가 고민하던 차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아, 영주님. 저에요. 시에리. 그..... 일단 오늘 재판 축하드리고.....그....힘드셨으니까, 위로를 혹시 필요하신가....해서....."
"아, 들어오세요."
그렇게 시에리가 방으로 들어왔다. 이브는 매우 미묘한 표정으로 나와 시에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 상황 자체가 좀 불편해보였다. 시에리 역시 이브가 옆에 있는 걸 보고 좀 뻘쭘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녀의 눈은 내게 말하고 있었다.
'왜 들어오라고 하신거지?'
"이브. 셋이서 같이 섹스할래요?"
"뭐?"
이브가 얼굴을 살짝 구기면서 나와 시에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시에리도 얼굴이 새빨개진 채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특이하게 시에리는 꽤 괜찮아보이는 반응이었는 데, 이브는 그렇게 달가워 보이지가 않았다.
"왜 그래요 이브? 혹시 그.... 셋이 하는 건 인어들 사이에서 좀 안좋게 통하는 그런....."
"아니, 그런건 아닌데. 내가 좀 이런 플레이에 안좋은 기억이 있어서."
"안좋은 기억?"
씨발 3p를 해봤다고? 이혼해야 되나? 내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난 걸까 이브는 황급히 수습에 나섰다.
"아니, 내가 한 건 아니고. 씨발 인어들 중에 몇몇이 이제 창관에 팔려가면 인어가 따먹히는 게 아니라 씨발 인어 피를 뽑아서 손님들이랑 창녀들이 몸에 치덕치덕 바르고 섹스를 하거든. 인어 피에 최음 효과가 있으니까. 인어를 옆에 이렇게 묶어놓고 거기서 이제 피를 살짝살짝 뽑아서 바르는 거지."
"......씨발."
암만 생각해도 난 이 세계관에서 제법 선량한 축에 속한다. 나는 이브가 더 안좋은 기억을 토해내기 전에 그녀의 옷을 냅다 벗겼다. 민소매 티셔를 위로 들쳐올리자, 이브가 놀란 표정으로 옷을 내리려고 했다. 그녀는 시에리를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시에리에게도 말했다.
"시에리. 벗어요. 다."
"아, 네....."
시에리는 고분고분 옷을 벗었다. 이브는 그런 시에리를 기막히다는 눈길로 바라보다가 자신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나는 벌써부터 흥분으로 요동치는 내 물건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이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브가 말했다.
"진짜 개변태새끼."
"그래도 사랑하죠?"
".....몰라."
이브는 그렇게 말하면서 침대에 누웠다. 시에리가 주춤주춤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시에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아서 이브 옆에 눕혔다. 두 사람이 전부 누워있자, 이런 절경이 따로 없었다.
3P는 인정이지.
나는 시에리의 가슴을 주무르며 그녀의 배를 핥아나갔다. 시에리는 몸을 움찔움찔 떨면서 내 애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뽀얀 살결에 맞닿을 때 마다 내 좆이 움찔움찔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게 얼마만에 맛보는 시에리일까. 나는 배에 얼굴을 묻으며 계속해서 혀를 움직였다.
"흐으.....여, 영주님....가, 간지러워요...."
"루시우스라고 부르라 했잖아요."
"루, 루시우스....읏...."
나는 더욱 더 고개를 아래로 내려서 그녀의 여성기 위로 혀를 훑어내렸다. 정리된 음모 위로 내 혀가 맞닿으며 까슬까슬한 감촉이 느껴졌다. 시에리는 허벅지를 움츠리며 반사적으로 내 머리에 손을 댔다.
"후....씨발. 둘이서만 즐기네."
그리고 이브가 등 너머에서 나를 꼭 껴안은 채 속삭였다. 그녀의 손이 내 성기를 붙잡고 천천히 위 아래로 훑어내리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감각이 내 몸을 지배하고 나는 저금 더 허리를 뒤로 뺀 채 시에리를 더 애무하기 시작했다. 균열 사이에 혀를 밀어넣고 열심히 훑자 시에리가 허리를 비틀며 비음섞인 달콤한 신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흐응...흥....루시우...스....흣...."
"음란하네요. 시에리."
그녀의 계곡에서는 애액이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마 핥지도 않았는 데 이 정도였다. 장시간 꾸준히 개발해온 그녀의 성기는 이제 내게 맞춰진 음란한 몸이 되어 있었다. 시에리는 그 모습이 부끄러운지 계속해서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다.
"괜찮아요."
나는 시에리의 균열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시에리가 허리를 틀며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나는 그녀의 허리가 들썩이는 만큼 거칠게 손가락으로 그녀의 질벽을 애무했다.
"흐응....흣...."
그리고 그러는 동안 이브가 내 좆을 애무하고 있었다. 쿠퍼액이 새어나와 귀두를 흠뻑적셨다. 나는 시에리를 향한 애무를 멈추고 이브를 끌어안았다. 한창 즐거움에 빠져있던 시에리가 안타까운 신음성을 흘리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이브를 끌어안은 채 시에리 옆으로 누웠다. 빳빳하게 선 내 좆이 더욱 강조되어 보였다.
시에리는 내 좆을 쳐다보고 묘한 신음을 흘렸다. 나는 내 옆에 누운 이브의 가슴을 주무르면서 말했다.
"시에리. 제 위에서 직접 움직여보겠어요?"
"네...네?"
나는 시에리의 허리를 붙잡아서 내 몸 위로 세웠다. 그녀의 비부와 내 성기가 맞닿으며 야릇한 자극을 주었다. 나는 달아오르는 쾌감 속에서 시에리의 질과 내 성기를 서로 맞추었다.
"자, 이제 허리를 내리세요."
"네....흐읏....."
시에리가 천천히 내 좆을 잠식해갔다. 얇은 균열이 내 좆을 뿌리까지 삼키는 걸 보며 나는 묘한 만족감이 찾아오는 걸 느꼈다. 시에리는 힘겹게 몸을 떨며 내 물건을 끝까지 받아들였다. 그녀가 뜨거운 숨을 내뿜으며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나는 이브에게 말했다.
"올라타. 빨아줄테니까."
"사제장이란 새끼가 말하는 거 존나 천박해 진짜."
이브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내 얼굴 위로 올라왔다. 얇은 균열과 애액이 흘러내려 뻐끔거리는 질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녀의 질구 안으로 혀를 집어넣고 서슴없이 핥아갔다.
"흐응....흣....하읏....."
이브는 매트리스를 꼭 쥔 채 쾌감에 허덕이고 있었다. 허벅지가 내 얼굴을 조여오면서 비부가 코를 압박했다. 나는 혀와 손가락을 전부 사용해서 이브를 괴롭혀댔다. 내 하반신에서 서투르지만 둔탁한 쾌감이 찾아오고 있었다.
"하읏....흑......너무....흐윽...."
시에리가 허리를 크게 위 아래로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쪼그려 앉은 채 최선을 다해서 허리를 내리 찍었다. 내 배를 지지대 삼아서 열심히 허리를 놀리는 그녀는 내 좆에서 느껴지는 쾌감에 중독된 듯 했다.
"예쁘....네."
이브는 그렇게 말하며 시에리의 가슴을 주물렀다. 오랜 시간 단련된 레즈의 손길에 시에리는 걷잡을 수 없이 거친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응..! 이브 씨...그렇게...만지시...면....하응!"
나는 이브가 더 수작부리는 걸 막기 위해 이브의 보지를 손가락까지 사용해서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브는 시에리를 애무하는 걸 멈추고 다시 매트릭스를 짚은 채 쾌감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신랑...자, 잠까만....흐읏...하읏...읏...."
이브는 허리를 덜덜 떨며 허공에 손을 허우적 거렸다. 시에리는 그러는 중에도 열심히 방아를 찧고 있었다. 이미 내 허리는 시에리와 내 액체들이 뒤섞여서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그녀가 엉덩이를 한 번 내려 찍을 때 마다, 찰싹! 하는 찰진 소리가 울려퍼졌다.
"흐윽! 앙! 아아! 아아읏!"
시에리가 신음성을 지르며 허리 움직이는 속도를 더욱 빠르게 했다. 서툴렀지만, 쾌감에 허덕이면서 몸을 움직이는 그녀에게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이브는 이브대로 내 애무에 시달리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시, 신랑...잠깐...만...흐읏...흥...아응...."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슬슬 사정을 할 것 같아서 허리에 힘을 주어 시에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하윽! 흐윽! 흥..! 흐읏....! 아아...!"
시에리가 눈을 크게 뜨며 허리를 숙이더니 내가 쳐올리는 대로 허리를 들썩였다. 그녀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숨을 헐떡거렸다.
"루시우...스...잠시...만....! 흐응! 흐윽! 아윽!"
"하으....으윽...아...아아으....! 시, 신랑.....나....나....!"
그리고 시에리의 몸을 꿰뚫을 듯이 내 좆을 쳐올리며 나는 강하게 사정했다.
"아아아아아아앙!"
시에리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몸을 벌벌 떨며 신음성을 내질렀다. 꿀럭꿀럭, 내 좆은 사정을 멈추지 않았다. 하얀 액체를 끝없이 시에리의 몸에 뱉어냈다. 시에리는 묘한 만족감을 느끼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흐으으으....."
내가 사정하는 것과 동시에 이브는 신음성을 흘리며 역시 늘어졌다. 나는 몸을 움직여서 둘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이브는 기댈 곳이 없어지자 엉덩이를 위로 세운 채 그대로 축 늘어졌다. 시에리 역시 기운이 빠진 듯 허벅지 사이로 정액을 질질 흘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나는 내 손으로 용두질을 하여 좆을 세운 뒤 엎드린 이브의 뒤로 갔다. 이미 충분한 애무로 풀어진 그녀의 보지는 선명한 분홍빛 속살을 드러내며 날 유혹하고 있었다. 나는 시에리의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운 뒤 이브의 보지에 내 좆을 삽입했다.
"아아....아읏..."
이브가 숨을 헐떡이며 엉덩이를 살짝 흔들었다. 분홍빛 엉덩이 구멍이 빼꼼 보였다. 나는 엄지 손가락으로 항문을 콕콕 누르며 이브에게 들이 박기 시작했다."앙! 아응! 자, 잠깐만... 잠깐만! 신랑! 거기...건드리지 마...! 으읏!"
"어딜? 어딜 건드리지마?"
"흐응! 앙! 아응! 그...엉덩이....건드리지...햐응! 응! 하응!"
나는 이브가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게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였다. 내 허벅지와 이브의 엉덩이가 맞부딪힐 때 마다, 이브는 신음성을 내지르며 이불을 찢을듯이 움켜쥐었다.
"아응! 앙! 아앙! 앙! 하아아...! 아읏!"
나는 줄기차게 이브의 엉덩이와 질을 공략하며, 다린 한 손으로는 내게 기대고 있는 시에리의 비부를 애무하고 있었다. 방금전까지 격렬한 섹스에 돌입했었던 시에리가 내 손에 몸을 내맡긴 채 신음을 흘렸다.
나는 그런 시에리의 턱을 붙잡고 키스했다. 시에리를 내 얼굴이 떨어지지 않도록 본인이 턱을 잡아서 얼굴을 고정했다. 내 허리가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이브가 격렬한 신음성을 흘리는 도중에 나는 시에리와 키스하고 있었다.
"아응! 신랑...! 왜...왜....말이 없...흐응!"
이브가 갑자기 조용해진 내가 불안했는 지 신음성을 내면서 나를 불렀다. 나는 그녀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시에리와의 입맞춤을 중단했다. 시에리는 내가 뻗은 손가락 위로 자신의 보지를 갖다대고 스스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하응...응....으응...."
"여깄어. 여기."
나는 허리를 움직이며 이브에게 내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브는 헐떡거리면서도 내 목소리가 들리자 다시 안정을 되찾은 듯 했다. 그녀는 신음성 사이로 웃음을 흘리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앙! 앙! 좋아...좋아아....으윽....읏...!"
다시 한 번 사정할 것 같았다. 나는 허리를 더욱 더 빠르게 움직이며 그녀의 쾌감을 북돋았다. 마치 터널을 지난 뒤 외풍을 맞이하듯, 내가 빠르게 움직일수록 더더욱 강한 쾌감이 나를 덮쳐왔다. 이브가 이블을 꼭 쥔 채 신음성을 토해냈다.
"하으으으으으응..!"
이브는 그렇게 이불에 얼굴을 박은 채 신음을 토해냈다. 한 번 사정을 했던 내 좆은 여전히 기운차게 정액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브는 내 육봉이 정액을 토해낼때마다 허리를 부르르 떨며 헐떡거렸다.
"하윽....흐...."
"나중엔 너네 엄마도 불러서 같이 할까?"
".....미친 개씹변태새끼 진짜....."
이브가 나를 쳐다보며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렇게 썩 나빠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나는 인어랑 3P를 하려면 대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건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씨발. 암만 생각해도 각이 안나왔다. 대체 팔딱거리는 물고기랑 뭔 자세를 취해야 되지?
"루시우스...."
시에리가 다시금 내게 엉겨붙어 왔다. 내가 침대 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있으니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엎드린 이브의 몸을 뒤집고 그 위에 시에리를 겹쳤다. 어색하게 마주 본 두 사람이 서로 시선을 피했다.
나는 천천히 이브의 보지에 다시 좆을 삽입하고, 손으로 시에리의 균열을 쑤시기 시작했다.
"하윽..! 흐응..!"
"앗...아앗..앙...."
두 사람이 동시에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손으로 쑤시는 만큼 시에리는 격하게 반응했고, 이브 역시 내 움직임에 맘춰서 허리를 흔들며 숨을 헐떡거렸다. 나는 정신없이 두 사람의 몸을 탐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나는 이브와 시에리가 정신을 잃고, 내가 갈증으로 물을 찾을 때까지 이 짓거리를 반복했다.
다음날 아침 기분 좋게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이브와 시에리는 서로 매우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왜 그래? 어제 할거 다해놓고."
"아니. 신랑. 진짜 존나 어색하다니까?"
"네.... 그게....좀."
"뭐가?"
"반대라고 생각해봐."
"씨이발. 아침부터 그딴 상상하게 만들래?"
3P를 마치고 눈이 마주친 두 남자. 흠..... 씨발. 좆같네.
시에리는 내가 욕한 걸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변명했다.
"이브한테 옮았어요."
"진짜 개새끼야 아주."
이브는 투덜거렸다.
며칠이 지났을까. 나는 슬슬 아무르 영지에 아주 정중한 편지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르 영주가 선을 넘은 건 맞지만, 지금 아무르 영지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전쟁을 일으켜서 영주 모가지를 따버린다면 더 이상 영지를 복구할 방법은 없었다.
대가리가 없으면 모든 사업이 진행이 안될테니까. 또 그렇게되면 영지전에서 내가 아무르 영지를 먹어버린 셈인데, 그러면 아무르 영지의 난민들은 페타 영지가 떠안아야될 가능성이 높았고 대천신교에서도 사제장답지 못한 행동에 대해 강한 질책을 할게 분명했다.
이미 대공 모가지까지 땄으니 더 이상 잔인하게 나갈 필요는 없었다. 나는 내 일이 늘어나는 게 더 짜증났다. 아무르 영지에서 수작을 부리려한 건 맞는데 어쨌든 주동자 중 한명은 뒤졌고, 그 애비까지 죽이지 않았는가.
나는 그래서 정중한 사과문과 함께 소정의 사죄품을 대천신교에 기부할 것, 그리고 지원은 알아서 할테니 기부 요청 편지를 보내지 말것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죽이는거야 나중에 영지 복구되고 나면 무슨 트집이든 잡아서 죽여버리면 됐으니까. 그렇게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로빈이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죠?"
나는 요새들어 로빈이 문을 두드릴 때 마다 심장도 같이 뛰는 것 같았다. 어찌된 게 로빈이 알려주는 소식마다 좀 좆같은 경험을 동반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른 모양이었다. 로빈은 머리를 긁적이며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로빈."
"아, 그게..... 아무르 영지 영주님이 찾아왔습니다."
"군대라도 이끌고 왔나요?"
"아니요. 혼자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저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계십니다."
아, 뭔지 알겠다. 내가 결투장에서 루비콘 대공을 줘팬걸 보고, 자기도 그런 꼴이 될까봐 먼저 사과하러 온게 분명했다. 매우 훌륭하고 약삭빠른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사제장씩이나 되서 사과하러 온 사람한테 모욕을 주진 못할테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약삭빠른 판단이 아주 마음에 안들었다.
왜 먼저 사과하지? 내가 사과를 해달라고 요구사항을 적은 문서를 보낸다음에 와야하는 거 아닌가? 이러면 아무르 영주가 더 착해보이잖아? 거기다 이러면 요구사항을 걸기도 애매해졌다. 저 새끼가 먼저 무릎을 꿇어버렸으니까. 사제장만 아니었으면 그냥 무시하고 조건을 걸었겠지만, 나는 성직자다.
용서와 관용을 메시지로 삼는 씨발 성직자. 죄를 뉘우친다면 받아들여야 된다. 지금까지 내가 이브랑 아이라를 용서한 논리가 그랬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사과는 폭력이다. 내가 원하는 순간에 하지 않으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좆같음을 안겨줄 뿐이니까. 이런 건 용서할 수 없었다. 죄와 벌에는 정해진 순서가 있어야 했다. 내 직위를 이용해서 사과를 날로먹으려하는 아무르 영주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아무르 영주가 실제로 반성했다고 해도 나는 믿을 생각이 없었다.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물며 자기 지인과 보좌관을 토막낸 인간을 곱게 용서하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사과만 받고 적당히 끝내려 했던 계획을 철회하기로 했다. 신뢰관계 앞에서 개수작을 부린다면 나도 개수작을 부릴 수 밖에 없다. 나는 로빈에게 말했다.
"1층에서 아이라를 불러오세요."
아이라는 내 부름에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오랜만에 불러준 내게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말했다.
"아이라. 제가 시키는대로 잘 하면, 오늘 밤 잠도 못자게 해줄게요."
"네, 네!"
아이라는 프리스비를 목격한 보더콜리처럼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이라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내가 현관에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아무르 영주는 대가리를 땅에 박고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루시우스 사제장님! 제가 아무르 영지의 영지민들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 눈이 멀어! 큰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사제장의 부인을 인간이 아니라는 논리로 겁박하려 했던 저를 용서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근데 이 새끼 재판할땐 건방지게 굴더니 갑자기 존댓말쓰네.
사람들의 시선이 아무르 영주에게 박혔다. 아무르 영주는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한 것이겠지. 게임 상에서도 아무르 영지는 잠깐 스쳐지나가는 곳이었다. 몬스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영주.
우리 영지의 예산을 빼돌리려던 것도 아마 진짜로 영지민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머리를 써본 것에 불과했으리라. 하지만 그런 뒷배경이 있다고 해서 내가 그를 용서해줄 필요는 없었다. 덕분에 이브가 생선튀김이 될 뻔 했고 우리 영지의 예산이 날아갈 뻔 했으니까.
아무르 영지의 영주가 먼저 사과하러 온 건, 사과부터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무르 영주는 현재 내 부인을 모욕했고, 동시에 이브를 대리인으로 내세운 내 권위를 모욕했으며 루비콘 대공까지 끌어들여서 일을 좆같이 복잡하게 만들었다.
지금 확실하게 박살내지 않으면 나중에 이 새끼가 뭔짓을 할지 몰라 뒷맛이 찝찝했다. 애초에 편지 하나로 아무르 영주를 용서해주겠다는 내 계획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나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다잡고 그에게 미소를 보였다. 아무르 영주는 눈을 힐끔 위로 올리면서 내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쥐새끼같은 수염이 축 늘어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르 영주의 호위병은 없었고 말끔해보이는 마차 하나만 저택 앞에 서 있었다. 마부는 마차 위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아무르 영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나세요 아무르 영주."
"네, 네 사제장님."
아무르 영주는 군대에서 막 제식교육을 끝마친 신병처럼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영주께서 이런 몰골을 보이시면 안되시죠. 일단 방으로 가서 차라도 한잔 하시죠."
"......네, 네. 알겠습니다."
일단 여기서 아무르 영주가 계속 사과하고 있는 걸 막아야 했다. 내가 이 상황을 질질 끌수록 아무르 영주에게 유리해졌으니까. 그래서 나는 용서하겠다는 말을 안꺼내고 일단 아무르 영주를 끌어들였다.
아무르 영주는 밖에있는 마부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뒤 저택으로 들어갔다.
아무르 영주는 1층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는 앉아있었다. 나는 아이라를 호출했다.
"아이라!"
"네. 영주님!"
아이라가 내려오더니, 아무르 영주를 보고 잠시 겁먹은 듯 몸을 움츠렸다. 아이라는 저번 속죄의 행군에서 정신 나갈 때까지 쳐맞은 이후, 이 저택 사람들이 아닌 사내들을 좀 무서워했다.
"잠시 제가 할 일이 있으니까. 일단, 이 분 시중을 좀 들어주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아이라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물론 시중이라고 해서 아무르 영주에게 몸을 대달라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아이라를 아무르 영주에게 내맡기고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나는 바로 옆방에서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성검을 만지작 거렸다. 날이 정말 날카로워서 나조차도 손을 잘못대면 베일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한테는 '정정당당한 승부'의 독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일까. 저번에 칼날 만져보다가
- 소유주에게는 정정당당한 승부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라는 메세지가 떴을 때 얼마나 놀랐는 지 모른다. 그 뒤로 나는 저택에서 커다란 상자를 하나 구해서 쓰지 않을 때는 거기다가 박아두었다. 절대 열지말라고 이브나 시에리 아이라한테도 신신당부했고.
애초에 내가 '승부'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으면 독은 적용되지 않지만, 그래도 날이 존나 날카로워서 위험했다.
내가 칼날을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때우던 중, 드디어 기다리던 비명이 울렸다.
"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악! 하지 마세요! 이러지 마세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성검을 살포시 놓아두고 다시 옆방으로 달려가 문을 박찼다. 그곳에는 내가 예상한 그 장면이 있었다. 아이라의 상의는 속옷이 드러나도록 찢겨져 있었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르 영주는 당황한 표정으로 일어나서 아이라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아이라는 나를 보자마자 내게 달려들어서 내 가슴팍에 안겼다.
"영주님....무서웠어요....흑흐흑...."
비명소리를 듣고 기사들부터 시종까지 전부 이 방으로 달려왔다. 아무르 영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오해!"
"무슨 오해죠? 설명해주세요 아무르 영주."
"저, 저 여자가 스스로 옷을 찢었습니다! 스스로 옷을 찢으면서 비명을 질렀단 말입니다!"
"그 말을 저보고 믿으라는건가요?"
아이라는 눈물을 흘리다말고 나를 쳐다보고 씩 웃었다. 아무르 영주에게는 보이지 않는 각도였다. 아이라의 옷도 내가 찢기 쉽도록 살짝 칼집을 내놓은 상태였다. 나는 아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르 영주. 어찌 제 저택 한복판에서 대천신교에 귀의한 여인을 추행할 생각을 하신거죠? 제가 시중을 들라고 했다고 하여 밤시중과 같은 음행을 행해도 된다 오해하신 건가요?"
아무르 영주는 답답해서 죽으려고 했다. 나는 웃음을 참고자 억지로 내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영주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저 여자가! 저 여자가! 제게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야 이 걸레같은 년아! 네가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런 짓을 하느냐!"
변명을 하다가 스스로 폭발한 아무르 영주가 아이라에게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나는 아이라를 가려주며 말했다.
"어찌 추행하신 분이 아녀자에게 이리도 적반하장으로 나오십니까? 사과를 하고자 제 저택에 오셨으면서 또 다시 제 권위를 모독하시는 겁니까? 제 앞에서 대천신교의 교인을 비하하다니, 저는 당신이 사과했다는 것도, 뉘우쳤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군요."
"아이고! 사제장님!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질 수 없다는 듯, 아이라가 눈물을 쏟아내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영주님! 절 믿어주실거죠? 흐흑...흑....저 아무르 영주님께서... 빨리 가, 가슴을 내보이라며...."
"어찌 그런 망측한 짓을 하십니까? 아무르 영주. 부인이 있으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사제장님! 저 시녀가 저를 음해하는 것입니다! 저를 왜 믿어주시지 않습니까! 아이고오!"
영주가 억울해죽겠다는 듯이 가슴을 팡팡치며 따지기 시작했다.
"여기 이렇게 증거가 있는데 아직도 발뺌하시다니, 실망이 큽니다. 아무르 영주님."
"증거가 어디있단 말입니까!"
"피해자의 눈물이 증거입니다!"
이 말. 꼭 한 번 해보고 싶었어.
"그, 그 무슨 말도 안되는....."
아무르 영주가 무릎을 꿇었다. 말도 안되겠지. 말도 안되서 억울하고 답답할거다. 왜 이런 불합리한 일을 겪어야 하는 지 모르겠지. 나는 아무르 영주가 기운이 쭉 빠진 걸 보고 다시 물었다.
"어찌 말도 안된다고 말씀하십니까?"
"증거가....증거도 없는 일로 어찌 사람을 이리 핍박하십니까? 어찌 저 여자의 말만 싸고 도십니까?"
"영주님! 너무 무섭습니다 흑흑...."
아무르 영주가 다시 반박하려고 들자 아이라가 눈물을 흘리며 다시 나를 꼭 끌어안았다. 기사들의 인상이 팍 구겨지고 시종들이 서로 속닥대기 시작했다. 이 쯤에서 아무르 영주는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범의 아가리에 홀로 머리를 들이밀었다는 것을. 로빈이 말했다.
"말씀만 하십시오. 영주님. 당장 체벌을 준비하겠습니다."
"이럴 순 없습니다! 증거도 없이 사람을 핍박할 수는 없단 말입니다! 맹세컨데 저는 하지 않았습니다! 루시우스 사제장! 그 여인이 얼마나 소중하던지 부디 판단을 바로 하시길!"
아무르 영주는 로빈의 말에 더욱 화를 내며 따지고 들어갔다.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면 이 문제로 오래 끌 필요가 없었다. 나는 아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미 당신은 제 호의를 저버리고, 저를 속이려 들었습니다. 제가 당신의 맹세를 믿을 이유가 있습니까? 로빈. 당장 이 잔인무도한 영주를 지하 감옥에 가두세요. 내일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처벌은 그 때 논의하도록 하죠."
"이럴 순 없습니다! 이럴 순 없다고! 놔라! 놔라 이 놈들아!"
이 문제로 왕궁 주관 재판에 끌고갈 생각은 없었다. 증거도 없는 일을 재판으로 끌고가면 내가 불리해지니까. 어차피 재판은 영주가 걸어야 하며, 아무르 영지의 영지 대리인이 지금 우리 영지에서 벌어진 상황을 알았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후 일거다.
아무르 영주가 지하 감옥으로 끌려간 뒤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부를 붙잡아오게 시켰다.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마부는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내 앞으로 끌려왔다. 그는 갑자기 경비원들이 자신을 붙잡아서 데려오자 몹시 놀란 표정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제가 왜 끌려가는 겁니까?"
"아무르 영주가 제 저택에서 음행을 벌이다가 체포 당했습니다. 불행한 일이죠."
"무슨..... 영주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십니다!"
마부는 아무르 영주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영주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다시 못박았다.
"분명히 무슨 오해가 있을 겁니다. 영주님은 그러실....."
"그 말은 마치, 추행 당한 피해자한테 잘못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 군요."
"네?"
"나이든 귀족들은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 실수다. 오해다. 그냥 손이 살짝 닿은거다. 네. 분명히 오해가 있었을겁니다. 하지만, 상대가 수치심을 느꼈다면 그건 엄연히 추행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오해할 수도 있지만, 난 시종들한테 개인적으로 손댄적 없다. 루시우스 사제장 이미지를 유지하려면 그딴 짓은 안해야되기 때문이다.
"무슨..... 아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옆방에 잘 모셔두세요."
나는 마부를 옆방에 집어넣고 병사들로 하여금 감시하게 했다. 병사들은 내가 조금 멀어지자마자 마부를 놀리기 시작했다.
"너네 영주님 진짜 조졌다야. 영주님이 아끼는 여자를 건드렸다고."
"이번에 영주 부인을 건드리려고 한거랑 합쳐서 진짜 죽을지도 몰라."
나는 방으로 올라왔다. 이브가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가끔씩 방을 찾아보면 랜덤 이벤트처럼 그녀가 스트레칭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말했다.
"이브. 지하감옥에 아무르 영주를 잡아놨어."
"아무르 영주? 그 씨발놈?"
"어."
"나 지금 좀 내려가봐도 돼?"
"근데 이번에 죽이면 진짜 복잡해지니까 죽이지마라? 아니 때리지도 마. 아니다. 너 그냥 나랑 같이 내려가자 죽일거 같으면 너 그냥 집어던져버리게. 손대면 귀찮아져."
"신랑. 나 못믿어?"
못믿었다. 저번 재판 건은 이브 지분도 조금 있었으니까. 이브가 그 루비콘 뭐시기 아들 배때지에 칼 안꽂고 주먹으로 줘패기만 했어도 여기까지 안갔을 일이었다. 나는 그런 감정을 담아서 이브를 말 없이 쳐다보았다. 이브는 슬쩍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니, 뭐. 알았어. 같이 가. 같이 가자고."
그렇게 나와 이브는 지하감옥을 찾았다. 아무르 영주는 벌써부터 실의에 빠져있었다. 이브는 아무르 영주를 보고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새끼가 걔야?"
"히익....."
아무르 영주는 이브를 알아본듯 했다. 그가 시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은 에스타 도시의 연쇄살인강간범 인어의 현상수배지를 봤을테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는 이브를 보자마자 몹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영주가 외쳤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딱히 난 지금 아무르 영주한테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었다. 여자였으면 존나 따먹었겠지만, 이 새끼는 쥐새끼 수염을 가진 남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브는 아무르 영주와 대화하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야, 씨발. 너 나 알지."
"히, 히이이익...."
이브는 바로 얼마전에 자길 모욕했다는 이유하나로 루비콘 대공 아들 배때지에 칼을 꽂은 년이다. 그걸 전해들었을 아무르 영주가 지금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는 지는 현재 표정 하나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덜덜 떨면서 철창 너머 가장 멀리있는 벽에 몸을 붙였다.
"그, 그만두시오! 내게 이런 짓을 해서 무사할 것 같소! 나는 영주요! 적법한 영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어느 역사서에서도 없던...."
"무슨 짓? 씨발. 무슨 짓 새끼야. 내가 너한테 뭐 했어? 너는 내가 보낸 병사들 개패듯이 패놨잖아."
"히이이이익! 자,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영주는 다시 엎드려서 빌기 시작했다. 죽는 것보단 무릎꿇는 게 나았다. 내가 물었다.
"아무르 영주. 반성하고 있나요?"
"네!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럼 벌을 받으실 각오가 되어 있으신거죠?"
"무, 무슨 벌 말씀이십니까!"
"추행을 한 자는 최대 60일 간의 강제 노동형에 처한다. 영지 법에 나와있는 이야기죠. 영지간 문제로 일을 벌릴 생각은 없으니, 이걸로 합의를 보시죠."
"그, 그건 안됩니다!"
"왜 안되죠?"
"60일이나 제가 영지를 비우면.... 영지에서 진행되는 복구 사업이....멈추고 맙니다. 부디 제 영지민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자꾸 반성할 생각은 안하고 영지민들을 인질로 잡으시는군요."
"여, 영지민들을 인질로 잡다니.... 당치도 않은....."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잖아요? 무슨 죄를 지어도, 종교인 입장에서 아무르 영지의 영지민들이 죽으면 안되니 페타 루시우스 사제장은 용서해줄것이다. 그런 안일한 생각을 품고 사과하러 오신거잖아요?"
"아닙니다! 단언코 그런게 아닙니다!"
"그럼 왜 제가 따로 조건을 걸기전에, 제 저택 앞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신거죠? 거기서 제가 당신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조건을 걸면 저는 뭐가 되죠?"
"그건....."
아무르 영주가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아무런 이유없이 행동하는 정치인은 없다. 나는 이브에게 말했다.
"안되겠어요. 이브. 그냥 잔인하게 죽여버리죠. 당신 영지민들은 당신 부인이 대리가 되어서 알아서 하겠죠. 우리가 당신을 죽여도 될 명분은 차고 넘친다는 거 아시죠?"
어차피 아무르 영지는 우리를 영지전에서 절대 못이겼다. 꼬우면 싸워서 이겨야지. 재판에서 이미 '아무르 영지와의 갈등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어서 이겼기 때문에 이 건에 대해 재판도 못걸었다.
아무르 영주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내 협박이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온 듯 했다. 그래도 사제장이 대놓고 영주를 죽이진 않을거라 생각한 모양인데 그건 아주 잘못된 편견이었다.
게다가 아무르 영주의 부인이 그리 내정을 잘할 거 같지는 않았다. 보좌관도 뒤져버린 마당에 그녀가 내정을 잘했으면 아무르 영주가 저렇게 불안해 할리 없으니까. 애초에 귀족 부인 중에 내정을 잘하는 인간은 많이 없었다.
"아, 안됩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영주님! 영주님!"
여기까지다. 지금 이렇게 정신적으로 몰려있을 때, 조건을 걸어야 했다. 나는 진짜로 철창문을 열고 아무르 영주를 죽여버리려드는 이브를 붙잡아 말리면서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할까요? 약간의 조건들에 동의만 해주신다면,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드리죠."
"야, 약간의 조건 말씀이십니까?"
아무르 영주의 눈빛은 절박해보였다. 이브는 내게 허리를 붙잡힌 채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 * *
그렇게 다시 아무르 영주는 지하 감옥에 갇힌지 2시간 만에 다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동안 영주를 걱정하고 있던 마부는 조금 핼쑥해져 있었다. 마부는 아무르 영주를 보자마자 울먹거리며 말했다.
"영주님!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그게....."
"정숙하세요. 그럼 마부. 당신은 우리가 조약을 맺는 것에 목격자가 되어주어야 겠습니다."
귀찮은 신파극은 보기 싫었다. 나는 최대한 빨리 이 사건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도장은 가져오지 않았습니다만...."
"피로 지장을 찍을거니까 상관없습니다."
나는 미리 작성해뒀던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옆방에서 두꺼운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아무르 영주는 계약서 내용을 읽어보고 다시 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정말 이게 끝입니까?"
- 1. 아무르 영지는 페타 영지에게 지원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1-1.대천신교의 기부금 한도 내에서 페타 영지는 아무르 영지를 도와줄 수 있다.
- 2. 이상의 조건을 따르는 것으로 페타 루시우스 사제장은 아무르 영주 및 아무르 영지에게 루비콘 콘드릭스 살해 사건에 대한 보상을 묻지 않는다.
"끝입니다."
어차피 아무르 영지는 지금 존나 가난해서 보상금 내놓으라고 말해도 내가 욕먹을 뿐 얻는게 없었다. 그냥 조약이나 맺으면 그만이지.
이것만 사인하면 보내주겠다. 안그러면 죽여버리겠다. 간단한 양자택일이었다. 계약 쪽 조건이 존나 단순하고 쉬운데다가 어찌 보면 아무르 영지에게 괜찮은 계약이었다. 구호 편지 보내지 말라는 말 한줄만 달랑 적혀있으니까.
오히려 내가 아무르 영주를 죽여서 얻는 게 아무것도 없는 조약이었다.
"그..... 지장은 어떻게...."
"이걸로 찍을 겁니다."
나는 상자에서 내 성검을 꺼내들었다. 새파란 날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리 대천신교 측 공증인도 불러온 상태였고, 영주의 공증인은 저 마부였다. 영주는 그 칼의 정체를 알고 몸을 움츠렸다. 나는 칼로 내 손을 살짝 베어서 피를 내며 말했다.
"네. 아무르 영주. 그 칼이에요. 루비콘 대공과의 '승부'에서 승리한 그 칼이죠."
그리고 나는 영주의 손가락 앞으로 칼을 가져다 댔다. 영주는 스스로 손가락을 칼로 긁고, 피로 지장을 찍었다. 앞으로 몇분 남았나. 나는 아무르 영주의 상태창을 열었다.
* 정정당당한 승부로 사망까지 51분 남았습니다.
참고로 독이 발동할 때까지 30분이다. 독이 발동한 다음 뒤지는 건 개인차가 조금씩 있었다. 나는 최대한 빨리 아무르 영주를 내 저택에서 쫓아냈다.
이제 어떻게할거냐고? 기다리면 답이 나온다.
사람은 모두 죽기 마련이다. 어디서든 어떻게든 죽고 만다. 내일 아침 회사에 출근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않던 회사원이 지병으로 쓰러져 죽는 일은 빈번했다. 교통사고 후 괜찮다고 말하던 노인은 며칠 뒤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곤 했다. 이처럼 죽음은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아무르 영주가 우리 저택에서 떠나고 자신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사망한 건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 뒤 아무르 영주가 마차에서 사망했다는 비보를 전해듣고 나는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우리 저택에 왔을 때 부터 얼굴빛이 안좋더라니....."
이브는 그 말에 피식,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 저택에서 아무르 영주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건 시에리 뿐이었다. 그런데 뭐 어쩌겠는가. 사람이 죽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일 뿐인데.
하지만 아무르 영주 부인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듯 했다. 아무르 영주가 사망하기 전 내 저택을 들렀다는 점, 그리고 나와 결투를 했던 루비콘 대공이 사망했다는 점에서 아무르 부인은 내가 어떤 종류의 수작을 부린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제기했다.
말이 어떤 종류의 수작이지, 이는 노골적으로 독살을 의심하는 태도였다. 정황 증거는 내가 봐도 완벽했다. 저택에 들린 뒤 죽은 영주. 나와 결투한 뒤 죽은 루비콘 대공. 나랑 엮인 두 사람이 전부 시름시름 앓다가 끅하고 죽어버렸으니 의심할 근거는 충분했다.
하지만 정황증거가 완벽한 만큼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증거가 있을리 없었다. 루비콘 대공의 몸에서도, 아무르 영주의 몸에서도 독은 검출되지 않았다. 전부 사인은 원인불명의 고열이었다. 어떤 몸에 부작용이 뒤따르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고열에 시달리다 죽은 것이다.
아무르 영주 부인은 이번 영주 독살과 루비콘 대공의 사망 건에 대해서 재판을 신청했다. 사건의 진실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독이 있었을것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루비콘 대공은 나와의 결투 후 사망했고, 아무르 영주는 칼로 지장을 찍은 뒤에 사망했으니까.
루비콘 대공이 독으로 사망했다는 게 증명되면 재판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나는 기꺼이 내 검을 증거로 제출했다. 내 성검의 독은 무색무취이며 내가 '승부'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발동되지 않는다. 독이 나올리 없었다.
그렇게 벌어진 2차 재판. 영주의 부인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저 간악한 사제장이 자신의 남편을 죽였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사제장은 아주 잔인한 사람입니다! 어찌 이 지경까지 우리들을 괴롭히십니까? 왜 제 남편을 데려가셨습니까? 왜 루비콘 대공을 그리 잔인하게 죽이셨습니까?"
그녀의 호소에도 재판장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일단 영주급 인사가 재판을 걸면 재판은 반드시 열린다. 나는 반문했다.
"증거 있습니까?"
그러면 아무르 부인은 대답도 못하고 다시 크게 울며 나를 가리키면서 분통을 터뜨릴 뿐이었다.
"어떻게...어떻게 그런 말을....! 흐흑....흐흑....사제장! 양심이 있다면 자백하세요! 제발....제발 부탁드립니다....흐흑...흑....!"
"눈물은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저를 재판장에 세우셨으니 증거는 있을거라고 믿습니다."
나는 당당하게 나올 수 있었다. 증거 따윈 없었으니까. 내가 칼에 독을 바르는 걸 본 사람도 없다. 칼에서 독이 나온 것도 아니었다. 정황 증거만 있을 뿐이다. 내가 아무르 부인을 같은 방법으로 독살했다면 아무르 영주는 나에게 재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증거가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재판장에 있는 건 머리가 잘돌아가는 아무르 영주가 아니라 머리가 안돌아가는 아무르 부인이었다. 그녀는 감정적으로 재판을 열었고, 그 대가는 무죄선고였다.
"아무르 부인. 결투에서 제가 독을 사용했다는 건 대단한 모욕입니다. 부인께서 사제장이라는 직위에 대해 잘 모르시는 듯하니, 이 건에 대해서 따로 따지고 들진 않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말했다. 아무르 부인은 내가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분노하는 것 같았다. 아무르 영주는 혼자 페타 영지에 가서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정황은 확실하다. 나는 말했다.
"증인으로 당시 아무르 영주를 모셨던 마부를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마부가 튀어나왔다. 마부는 재판 시작 때 상황을 증언하기 위해 한 번 이 증인석에 올랐었다. 나는 마부에게 질문했다.
"마부. 제가 아무르 영주를 지하감옥에서 꺼내왔을 때, 그에게 상처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럼 제가 아무르 영주를 때리거나 고문하는 소리를 들은 바 있습니까?"
"그.....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아무르 부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외쳤다.
"당신은 힐을 사용할 수 있는 사제지 않습니까! 독을 주입한 뒤에 상처를 치료하면...."
"굳이 독살을 할거라면 독을 먹이거나 주사하면 됩니다. 아무르 부인. 저는 아무르 영주가 꼼짝도 못하게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독 하나를 못먹여서 아무르 영주에게 상처를 입힐 것 같습니까? 어차피 죽일 거였다면, 왜 굳이 독을 주입하고 상처를 치유해준 뒤 다시 위로 올려보내서 독살시킨단 말입니까?"
"조약을 맺게끔 하려는 거였겠지요! 조약을 맺게 하고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럴거면 그냥 때려죽이면 됩니다. 아무르 영지는 제가 아무르 영주를 때려죽인다고 해서 항의할 여력이 있습니까? 제가 때려죽이면 안될 명분이라도 있습니까?"
"그건....."
굳이 따지자면 남부 사제장으로서 내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 라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조약 상으로는 내가 영주를 죽여서 얻는 이득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감정적인 복수를 할거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없을테니까. 나는 다시 영주 부인에게 물었다.
"그리고 제가 수상한 걸 주사했다면 아무르 영주가 마부에게 한마디라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마부. 아무르 영주에게 그런 발언을 들었습니까?"
"......듣지 못했습니다."
들었을리가 없다. 아무르 영주 본인도 독에 당한 건지 몰랐을 테니까. 아마 그냥 너무 무리해서 식은 땀이 나는 거라 생각했겠지. 그렇게 끙끙앓다가 어느 순간 뒤진 것이다. 마부가 몇 번 마차 안을 확인했으나, 정신적인 피로로 지쳐 잠든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영주 부인은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재판관도 찝찝한 표정이었지만 증거는 없었다. 영주 부인이 말했다.
"검! 검에 독을 발랐겠지요!"
"마부. 제가 지장을 찍을 때, 아무르 영주만 피로 지장을 찍었습니까?"
"아닙니다. 사제장님도 피로 지장을 찍었습니다."
"사제장이 본인을 치료했는 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검에는 독이 검출되지 않았지요. 검사에서도 알아낼 수 없고, 당한 사람도 알 수 없으며 시체에 흔적도 남지 않는 극독을 제가 썼다고 주장하고 싶으신 건가요?"
"그....."
영주 부인은 다시 말문이 막혔다. 내가 그딴 독을 썼다고 주장해봐야 개소리에 불과했으니까. 개연성이 없었다. 내가 아무르 영주를 그 고생을 해가며 죽일 개연성이.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죽은 루비콘 대공의 명예를 더럽히는 건 싫지만, 아무르 영주와 루비콘 대공이 닿은 건 제 칼만이 아닙니다.
"아!"
재판관이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뒤이어 얼굴색이 흙빛이 되며 고개를 저었다. 영주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결투 당일. 루비콘 대공의 칼이 산산 조각 나면서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그리고 그 파편을 가장 많이 맞은 건 아무르 영주와 루비콘 대공이었다.
"가장 많은 파편을 두들겨 맞았고, 노환인데다가 심적으로 많이 약해져 있었던 루비콘 대공은 얼마지나지 않아 사망했죠."
"아, 아니야....."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루비콘 대공 다음으로 많은 파편을 맞았던 아무르 영주가 루비콘 대공과 똑같은 증상을 보이며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우연일까요?"
재밌게도 많은 사람들이 파편에 맞았지만, 대부분 한 두군데 박힌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가까이 있던 아무르 영주는 전신에 파편을 맞았고, 루비콘 대공은 얼굴에 집중적으로 파편을 얻어맞았다.
"지, 지금 루비콘 대공이 칼에 독을 발랐다는 겁니까?"
재판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강직하고 정정당당하며 호탕한 성품으로 이름 높았던 그 루비콘 대공이다. 하지만 나를 정황만으로 의심할 수 있다면, 루비콘 대공도 마찬가지로 의심할 수 있었다.
"만일이 그렇다는 것이죠. 저도 그 루비콘 대공이 저를 이기기 위해 칼에 독을 발랐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때 결투를 보신 분들은 아실겁니다. 저는 루비콘 대공을 찌른 적이 없습니다. 제 칼은 애초에 루비콘 대공에게 닿은 적이 없었죠."
루비콘 대공의 손등을 긁은 건 정말 티나지 않게 저지른 일이었다. 당시 파편으로 난리난 현장에서 그걸 자세히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공식적인 결투 재판의 기록 상에서 루비콘 대공은 본인의 칼에 의해 부상을 입었고 마지막에 주먹으로 제압당했다.
"하지만 너무 기간이 차이나지 않소?"
루비콘 대공은 결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하지만 아무르 영주는 결투 때 독에 걸렸다고 친다면, 최소 이틀 내지 사흘은 지나서 사망한 셈이었다.
"아무르 영주가 더 젊으니 가능한 일입니다. 독도 개인차가 있고 계속해서 요양을 하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루비콘 대공이 치명상으로 인해 지나치게 빨리 약효가 돈 것일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세계관에는 하루나 이틀 정도의 텀을 두고 약효가 도는 독들이 있었다. 암살용으로 개발된 것들. 게임 내에서는 암살 미수 사건 퀘스트에서 등장하며, 아주 위험한 독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재판관이 머리를 싸매며 고개를 저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겠지.
나는 말했다.
"재판관님. 루비콘 대공과 아무르 영주가 똑같은 증상으로 죽은 건 우연일까요? 혹시, 루비콘 대공의 지난 결투 상대 중에 그렇게 끙끙앓다가 죽은 사람이 더 없었습니까?"
".....있소."
없을리가 없다. 결투를 존나게 많이 했던 인간인데 두세명 정도는 더 있을게 뻔했다. 결투에서 지고 쇠독이나 홧병으로 뒤지는 놈들은 꽤 있었으니까. 루비콘 대공의 칼을 조사해보려고 해도 이미 박살난 터라 녹여버린지 오래였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저는 루비콘 대공의 명예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으나, 의심을 한다면, 만일 이 결투에 독살이라는 의심을 씌운다면 그 화살은 루비콘 대공에게 향해야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의외로, 루비콘 대공이 칼에 독을 발랐을 개연성은 충분했다. 나를 죽이고 싶어하고, 처음부터 재판장에 무기를 들고 들어왔으며, 먼저 결투 재판을 제안했고, 가장 많은 파편을 맞았던 두 사람이 다 똑같은 증세로 뒤졌으니까.
오히려 내가 독살할 개연성이 없었다. 난 당시 결투의 승자였다. 독살이 캥긴다면 그냥 루비콘 대공을 죽여버리면 그만이었다. 결투의 승자가 패자를 죽이는 것 가지고는 대천신교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독살했다는 게 성립하려면, 굳이 죽여도 아무 리스크 없는 결투석에서 죽이지 않고 30분 뒤 루비콘 대공이 독살당하게끔 만든 뒤, 아무르 영주도 굳이 나한테 썩 이득이 되는 것도 아닌 조약을 맺게한 뒤 굳이 같은 독을 사용하여 독살해야했다. 전자와 후자. 둘 중 하나만 하지 않아도 내가 독살했다는 의혹은 제기될 수 없었다.
그러니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는 이득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루비콘 대공이 얻는 이득은 아주 훤히 보였다. 마왕을 물리친 용사일행을 죽였다는 명성. 그리고 곱게 죽이지 않겠다는 원한.
그리고 우연히도 루비콘 대공의 무기로 상처를 입은 두 사람.
논리적인 근거가 없는 죽음은 사람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장 높은 가능성으로 의견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재판관도 재판에 참석했던 이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와 함께, 나는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기는 소리를 들었다. 쩌저적. 루비콘 대공 명예에 금가는 소리.
그렇게 나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로서 나는 대천신교로 부터 아무르 영주를 죽였다고 질책당하는 일이 없었다.
재판은 언제나 공명정대한 법이다. 다행히 루비콘 대공이 독을 발랐다는 의혹은 의혹과 소문으로 일단 그친 듯 했다.
루비콘 대공도 하늘에서 자신이 누명을 쓰지 않았음에 안심하고 있겠지. 어쩐지 별이 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무죄 방면된 나는 아주 평화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옆 영지에서는 아무르 영주를 대신하여 아무르 부인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지만, 역시 영주와 영주 부인은 그 역량 차이가 확연했다. 사업들이 영 신통치 못하게 진행된다는 이야기가 주기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영주 부인은 사람부리는 법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무르 영주가 기반 복구 사업은 다 깔아놔서 영지가 아주 피폐해지진 않았다는 점일까. 간간히 아무르 영지 측에서 난민들이 오고 있었지만 나는 모두 거절했다. 대천신교 측에도 저번에 난민을 받은 이상 추가적으로 영지민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해둔 상태였다.
아무르 영지까지 박살이 난 뒤, 나는 아주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을 보내는 중에도 나는 이 게임의 진정한 엔딩을 보기 위해선 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내 기억상으로는 마왕을 잡으면 엔딩이었는데, 마왕을 잡았음에도 새로운 흑막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에반젤린.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캐릭터였다. 다시 게임 스토리를 되짚어보면서 그런 비슷한 이름을 가진 캐릭터가 있던가 생각을 해봤는데, 기억나지 않았다. 사천왕 중에도 에반젤린이라는 이름은 없었고, 마왕을 잡고 파고들기 용으로 나타나는 이벤트 보스 중에도 에반젤린 같은 이름은 없었다.
대체 누구지? 에반젤린에 대해 어떻게 조사해야 하는 거지?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단서는 마왕의 사천왕들이었다. 저번에 죽여버린 흘러내리는 뭐시기를 제외하면 사천왕은 현재 3명이 남아있었다. 라미아 종족의 여왕인 나태한 르아, 서큐버스인 매달리는 러비안, 도플갱어인 메아리치는 커틀러스.
이 중 매달리는 러비안은 드래곤 산맥 퀘스트에서 만날 수 있었다. 드래곤 산맥에 존재하는 드래곤들을 자극해서 북부를 박살내는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루비콘 대공 레벨이 현재 30을 훌쩍 넘었다는 거나 러비안이 레벨 20 언저리에서 노는 약한 보스라는 걸 생각해 봤을 때,이미 루비콘 대공이 죽여버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도움이 안되는 늙은이 새끼.
라미아 여왕 나태한 르아는 게임 상으로는 서부 해안지대를 습격하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저번에 루비콘 대공이 말한 소식이나 서부 해안가에서 인어들이 깽판을 친다는 소식을 생각해보자면, 이 새끼도 인어들한테 뒤진 모양이었다.
도플갱어인 메아리치는 커틀러스는 대천신교 본부에서 대천신교를 무너뜨리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이 역할을 수행할 때 커틀러스가 대외적으로 흉내내는 인물인 본부 고위 사제장 메이헴이 따로 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걸로 봤을 때, 얘도 뭔가 문제가 생긴게 분명했다.
사천왕들은 마왕의 힘에 비례해서 강해진다. 힘의 근원인 마왕이 뒤진 이상 사천왕들 자체는 진짜 아무것도 아닌 악마 새끼들에 불과했다. 우리들은 꾸준히 뭔가를 사냥하고 단련하면서 레벨이 올라가지만 사천왕들은 오로지 마왕이 강해지는 만큼 강해진다. 그래서 원작에서는 마왕이 뒤진 순간 사천왕들도 전부 사라지기 때문에 사천왕 퀘스트를 나중에 깨는 게 불가능했다.
나는 혹시 사천왕들이 우리가 마왕을 깨는 순간 전부 뒤졌거나 레벨이 안올라서 무리하게 계획 운용하다가 전부 객사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단서는 얘네들 밖에 없는 데 얘네들이 놀랍도록 활동을 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주님. 편지가 왔어요."
"편지?"
아이라가 내게 편지를 전해줬다. 대체 누구의 편지인지 가늠이 안갔다. 루비콘 대공 장례식에라도 와달라는 편지일까? 나는 편지 겉면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편지의 주인공은 에이에이였다. 겉면에는 여전히 엘프 왕국 아힐데른으로 보내달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에리나 이 병신같은 년이 그렇게 잡소리를 다 떠들어대더니 또 에이에이한테 아헬데른으로 편지 보내는 법을 안알려준 모양이었다. 에리나가 그래도 근본이 공주다 보니 '아힐데른 아힐데른 에리나 앞'이나 '엘프 왕국 에리나 공주 앞'이라고 적는다고 해서 바로 그 쪽으로 보내주지 않는다. 그런식으로 보내는 편지가 존나 많기 때문에 애초에 우체국 선에서 그냥 다 폐기해버리기 때문이다.
겉면에 엘프어로 적혀있거나 영주급 인사 이상의 직인이 찍힌 편지만이 아힐데른 우체국을 통과할 수 있다. 엘프와 인간은 서로 교류하고 있었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폐쇄적이었다. 인간은 엘프의 숲에서도 제한된 구역만 들어갈 수 있으며, ‘성지’로 불리우는 지역에는 접근 할 수 없다.
나는 이 편지를 에리나에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예전이라면 에이에이한테 그짓거리 했다가 걸리면 죽을 수도 있기에 일단 해줘야 했지만, 나에겐 성검이 있으니까. 에이에이가 에리나한테 편지를 안보내야 내가 주기적으로 에리나를 따먹기 좋았다.
벌써부터 머리에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편지가 오지 않으니 몸이 달아서 내 영지로 찾아오는 에리나. 그녀는 상심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섹스를 한다. 상상만 했는데도 하반신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용사님이네요. 무슨 편지를 보냈을까....."
나는 편지를 열어보았다. 얘가 대체 어떤 모험을 하고 있는 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저번에 자지가 돋아나는 약을 찾으러 바다로 갔으니, 이번엔 서부 해안가로 갔나? 어쩌면 자지 이식 수술 같은 걸 받기 위해 드워프 왕국으로 갔을 수도 있었다.
- 안녕. 에리나. 나는 지금 북부 대공님의 도움을 받아서, 여기 드래곤 산맥에 와 있어. 마법의 달인인 드래곤들이라면 날 남자로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이 편지는 최소한 한달 전에 보내온 것이니 그 때는 북부 대공이 살아있었을 터였다. 지금쯤이면 북부도 난리가 났을텐데 에이에이는 지금도 북부에 있으려나?
- 북부 대공 어르신은 참 친절한 분이야. 내 검 실력을 보고, 아주 훌륭한 솜씨라고 칭찬도 해주셨고, 내게 없는 실전 경험을 끌어올려야 한다며 자주 대련도 요구하셨지. 보좌관 아저씨도 북부 대공 어르신을 존경하더라고.
이거 무슨 NTR 비디오 같은건가. 편지의 첫 서두에 북부 대공 칭찬밖에 없었다. 나는 편지를 계속 읽어내려갔다.
- 수련도 마쳤고, 북부에서 대공 어르신에게 많은 신세를 졌어. 에리나. 혹시나 나중에 북부 대공 어르신을 만나게 된다면, 네가 나 대신 소정의 답례품을 좀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이런 부탁이 실례인건 알지만, 그래도 지금 내가 북부 대공 어르신에게 해드릴 게 없는 걸.
지금 에리나가 답례품을 보내봐야 조의금 용도로 밖에 안쓰일터였다. 나는 코웃음을 치고 계속해서 글을 읽어내려갔다.
- 그러고보니까 에리나. 본격적으로 산맥을 탐험하기도 전에, 이상한 서큐버스 하나를 만날 수 있었어. 대공의 성에서 겨우 탈출했던 모양이야. 내 옆에서 산맥 지형을 알려주던 기사님이 너무 놀라면서 칼을 뽑았거든. 이름이 러비안? 이랬나?
비쩍 말라서 다 죽어가는 몰골이었지만, 그래서 눈빛은 아주 흉흉하게 살아있는 악마였지. 나한테 이렇게 말하더라고, '나는 마왕님에게 정절을 바치기 전엔 죽을 수 없어!'
씨발 처녀 서큐버스? 처녀 서큐버스라고? 나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편지에 힘을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냥 서큐버스도 아니고 처녀 서큐버스라고? 너무 아까웠다. 씨발 처녀인줄 알았으면 내가 올라가서 강간하는 건데. 서큐버스한테 강간죄 같은 건 성립되지 않는다. 그냥 악마 새끼들에 불과하니까.
- 훌륭한 전사의 눈빛이었지만, 날 이기기엔 역부족이었어.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버렸지. 에리나. 이 산맥엔 아주 위험한 놈이 숨어있는 것 같아. 하지만 그래도 너를 위해서라면 난 어디든 갈 수 있어.
"씨발!"
내가 소리지르나 아이라가 놀라서 쳐다보았다. 나는 편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나서 다시 아이라에게 씩 웃어보이며 물었다.
"왜 그래요?"
"아, 아니에요."
아이라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일에 집중했다. 나도 아이라의 반응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재화가 죽었다는 비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처녀 서큐버스가 이렇게 뒤지고 말았다. 희귀템을 이렇게 죽여버리다니 좆같은 용사새끼. 그나저나 북부 대공은 뭘하려고 사천왕 중 하나를 자기 감옥에 가둬놓았던 걸까? 어쩌면 그도 왕궁의 명으로 에반젤린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용사가 벌인 사건들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게임이 끝날 때까지 드래곤 산맥에 잠들어있는 드래곤들은 깨어나지 않는다. 히든 보스 중에도 드래곤은 없고, 이벤트 퀘스트나 추가 요소로도 드래곤은 끝끝내 등장하지 않았다. 이브와 달리 이번에는 에이에이가 붙잡힐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드래곤을 빼면 그 동네에서 제일 쌘게 러비안인데 러비안이 뒤졌으니까.
산맥의 아인들은 에이에이가 혼자서 전부 도륙할 수 있는 애들이었다.
"그러면....."
그렇지만, 에이에이의 편지로 확실히 알아낸게 있었다. 사천왕들은 아직 살아있다는 거. 어디서 뭘하고 있는 지 모르겠지만, 일단 러비안이 살아있는 걸로 보아 다른 사천왕들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대천신교 본부에 한 번 가봐야 하나? 내가 고민하던 그 때, 로빈이 또다시 문을 두드렸다.
"영주님. 보고드릴게 있습니다."
로빈이 맨날 보고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경비 및 치안 문제는 전부 기사단장인 로빈에게 우선적으로 보고가 들어가니까.
"말씀하세요. 로빈."
"영지 변방에 수인족 하나가 날뛰고 있습니다."
"수인족이요?"
수인족이라는 말에 나는 물음표를 띄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인족이 날뛰고 있다면 일단 큰일이었다. 나는 지체없이 메이스를 집어들고 로빈을 따라 나섰다.
"비켜! 비켜라!"
그곳에는 수인이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쫑긋한 귀, 그리고 엉덩이 부분에 길게 자란 꼬리. 사실 수인보다는 할로윈에 남친을 위해 고양이 코스프레를 한 여자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병사들 한가운데에 서서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목에는 노예의 증거인 쇠사슬이 달려 있었고,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나는 병사들을 옆으로 물렸다. 병사들 한가운데에 틈이 생기자, 그 쪽으로 달려들려던 수인은 틈을 내가 막아서자 좀 당황한 눈치였다.
그녀는 발톱을 세우며 외쳤다.
"성직자! 비켜! 난 도망치는 중이다! 자유를 찾아갈거다!"
"당신, 노예인가요?"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인간들! 날 노예라 부르지 마라!"
수인은 소리를 질러대며 발톱을 세웠다. 나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인한테도 성검이 먹히나?
이름: 아모리
종족 : 고양이 수인
레벨 : 23
스텟
힘: 25
민첩: 56
지능: 4
행운 : 23
특성
날카로운 발톱
갑옷을 입지 않은 상대를 공격할 때는 데미지가 전부 치명타로 들어갑니다.
평야의 지배자
초원에서 이동속도가 2배로 올라갑니다.
수인은 인어랑은 사정이 조금 다른 종족이었다. 인어들은 아예 인간들이랑 생활권을 공유하지 않음에도 인간들에게 두들겨맞는다면, 수인들은 인간, 엘프들과 땅 문제로 갈등을 빚는 종족이었다. 수인들은 사냥이나 기초적인 생활을 위해 넓은 평야가 필요한데, 이 넓은 평야는 인간들에게 있어선 밭이나 농지로 쓰이는 땅이었으니까.
또한 이 평야에서 생활하는 수인들이 가끔씩 숲까지 다가오곤 해서 엘프들 입장에서도 수인들은 매우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시로 수인들을 사냥하기도 하고, 노예로 쓰기위해 납치하기도 했다. 수인들은 전투능력의 최대치는 낮지만 평균치가 높은 아이들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길러서 호위용 노예나 일꾼으로 쓰기 적합했다.
지금 눈 앞에서 병사들한테 위협을 가하는 저 수인 역시 이런 노예로 생활하다가 탈출한게 분명했다. 병사들은 수인의 무서움을 경계하는 지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떨면서도 자신이 두렵지 않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발톱을 세우며 으르렁댔다.
여기 사람들에겐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내게 지금 고양이 수인이 하는 행동은 할로윈 특집으로 인방하는 여자 BJ가 고양이 옷 입고 만원짜리 도네 리액션 취해주는 느낌에 가까웠다.
"오지마! 오지마라!"
앙칼진 비명을 지르며 고양이 수인이 손을 휘적휘적거렸다. 나는 메이스를 치켜들고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는 내가 자기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 같았다. 꼬리를 내리고,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소리만 질러대는 게 느껴졌다.
"으으.....오지마라! 오지마!"
깡!
오랜만에 들리는 이 청량한 소리. 수인은 내 메이스에 머리를 얻어맞고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언제나 남들의 골통을 깨부시는 건 내게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을 안겨줬다. 역시 성검은 인성질할때나 써야한다. 나는 발로 수인을 톡톡 건드리며 다시 상태창을 열었다.
몸이 벌벌 떨고 있길래 나는 혹시나 또 백치 특성을 개방한건가 겁이 났지만, 다행히 백치 특성은 없었다. 나는 로빈에게 말했다.
"데리고 가죠.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는 지 알아봐야 겠어요."
일단 이 고양이 수인은 따먹을 생각이 없었다. 얼핏보면 젊고 매력적이었지만, 자세히보면 목이나 다리에 주름살들이 좀 보였다. 나는 이번 기회에 성검으로 실험을 좀 해볼 생각이었다. 수인이나 아인 어인에게 성검의 독이 통하는 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거 알아보자고 셀루를 죽일수는 없었으니까.
다시 영지 저택으로 귀환한 내 옆에서 고양이 수인이 활어처럼 펄떡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겨우 눈을 떴다. 팔과 다리를 밧줄로 묶어둔 터라 걱정할 건 없었지만, 나는 그래도 메이스를 부여잡고 수인을 경계했다.
"여긴...."
수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수영장에서 셀루가 헤엄을 치다가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걔는 뭐야?"
셀루는 내가 새로 신붓감이라도 데려온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수영장 바깥으로 몸을 살짝 내밀며 혀를 쭉 빼물었다. 바닥에 떨어진 참치처럼 로빈의 등에서 팔딱거리던 수인은 셀루를 보더니 눈을 크게 뜨며 갑자기 온몸에 힘을 주었다.
"으아아아아!"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초인적인 힘으로 밧줄을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갑작스럽게 셀루한테 달려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카아- 빈 모그.....
"인어! 도망쳐라! 같이 도망치자!내가 너를 자유롭게 만들어주겠다!"
그렇게 외치고는 셀루의 어깨를 붙잡고 수영장 반대편으로 도망치려하는 게 아닌가. 저 년 진짜배기였네. 하지만 셀루는 당황하지도 않고 자신을 붙잡은 수인의 손을 끌어당겼다. 수상비를 쓰는 것처럼 물 위를 달리려들던 수인은 셀루의 억센 힘에 이끌려 물 속으로 쳐박혔다. 그녀는 물에 빠진 수인을 다시 건지며 내게 물었다.
"뭐야. 얘 뭐하는 애야?"
"푸하! 인어여! 나와 도망치자! 너는 노예로 살 필요가 으픕...픕..."
셀루는 수인이 떠들때마다 물 속에 얼굴을 쳐박고 다시 끌어올리는 걸 반복했다.
"어픕...! 인어여! 노예로....살...필으픕...!"
"나 노예 아닌데. 헤흐..."
셀루가 나랑 섹스하는 사이라 해도 그녀 역시 근본이 싸이코패스인 년이다. 인간들 시체 사이에서 자위하던 애가 수인한테 동지애 따위가 있을리 없었다. 셀루는 수인을 풀어달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그녀를 사용해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어픕....프하...! 인여어어프....! 제바앍....!"
"나 노예 아니라니까?"
몇 번 더 수인을 물에 담갔다 빼자, 고양이 수인은 물에 축 젖은 채 늘어졌다. 눈빛이 멍-한걸 보니 제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셀루는 늘어진 고양이 수인을 내게 집어던지며 물었다.
"그래서 걔 누구야?"
"마을에서 병사들과 싸우던 수인이에요. 누군지는 지금부터 알아봐야죠."
그렇게 나와 로빈은 고양이 수인을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나는 성검을 가지고 지하로 내려왔다. 지하감옥 문을 잠그자, 그 소리에 고양이 수인이 눈을 떴다.
"끄아아! 너, 넌 뭐냐! 성직자! 성직자가 어찌 이런 짓을 하나!"
"성직자가 뭐 별건가요. 영주는 쳐들어오는 적을 배제할 의무가 있어요."
나는 성검의 날을 슬슬 훑으며 말했다. 고양이 수인은 팔다리가 전부 쇠사슬에 구속되어 있었다. 그녀는 열심히 사슬을 풀어내려고 애썼지만, 이브도 못푸는 존나 단단한 드워프제 사슬이었다. 힘 20짜리가 풀 수 있을리 만무했다.
한참 동안 쇠사슬을 풀려고 낑낑대던 그녀가 마침내 힘이 빠져서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묘하게 숨소리가 힘에 부쳐보이고 눈이 풀린 것 같았지만, 나는 그냥 물에 빠진 후유증이려니 하고 넘겼다.
"끄으으! 풀어라! 풀어! 나에겐 가족이 있다! 나는 내 가족들을 구해서 돌아가야 한다!"
"가족이 있다고요?"
"내 딸 엘시! 내 딸 엘시를 구해야 한다!"
"엘시?"
엘시라고? 나는 다시 한 번 히로인 전설의 내용을 되새겼다. 고양이 도적 엘시. 분명히 히로인 중에 있는 캐릭터였다. 노예 생활을 하지만 항상 밝고 긍정적인 소녀. 얘가 걔 엄마라면 생각보다 나이가 많다는 뜻인데.
"당신 몇살이죠?"
"으....올해로 48살이다!"
음...... 불가능. 차라리 젖가슴 48개 달린 여자랑 하고 말지 48살은 좀 힘들다. 나는 당초 계획대로 그냥 죽여버릴까하다가, 성검을 집어넣기로 했다.나는 싸이코패스 살인마가 아니다. 성검으로 콕 찔러서 비겁하게 독살을 한다니.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일단 그녀에게 알아볼 것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빠르게 질문했다.
"그럼 당신의 이름은?"
"아모리."
수인은 자신을 아모리라고 소개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엘시는 어디에 갇혀 있죠?"
"으.....그건....."
내가 엘시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아모리는 주저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아모리를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아모리. 생각해보세요. 밖에 인어도 저렇게 잘 살고 있잖아요? 저는 아모리의 딸을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은거에요."
"그, 그런가? 너, 너는 믿어도 되는 인간인가? 그러면 왜 나를 묶어놨지?"
"당신이 제 영지민들을 공격했으니까요."
"그건, 미안하다....."
아모리가 고개를 저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상하게 말투에 기운이 없는 게 좀 신경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용서해줄게요."
"그런가! 고맙구나. 너는 아주 착한 인간이다."
아모리는 매우 단순한 여자였다. 나는 그렇게 수인의 생태와 엘시의 행방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엘시는 현재 동부에 있는 에버딘 영주의 영지에서 노예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엘시를 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지만, 인간들에게 속아서 노예로 잡히고 말았다."
"이제 노예로 잡힐일은 없을거에요."
엘시랑 아모리나 둘다 잘대해준다면 뭐 안떠나겠지. 수인들은 단순해서 은근히 꼬시기 쉬웠다. 그렇게 몇가지 질문을 더 했다. 아모리는 순순히 대답해주고 있었다. 인어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게 퍽 인상깊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아모리에게 물었다.
"아모리. 혹시 에반젤린에 대해 알고있나요?"
셀루는 에반젤린을 만난 적 있다고 말했었다. 제법 나이있어보이는 이 수인도 에반젤린을 만났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아모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누구냐. 그건. 모른다."
"정말 몰라요? 가면을 쓰고 후드를 입은...."
"아, 본적 있다."
"본 적 있다고요?"
이건 대단한 수확이었다. 에반젤린을 본 적이 있다?
"어디서요?"
"우리 부족장을 만나러 온다며 예전에 찾아온 적 있었다. 가면과 후드. 분명히 본 적 있다. 네가 말하는 그 여자인지는 모르겠다."
"여자라고요?"
"그래. 여자다. 목소리가 여자였다."
"부족장과는 무슨 이야기를 했죠?"
"모른다. 부족장이 제법 긍정적으로 받아들인것만 기억하고 있다."
"무슨 옷을 입었나요? 정확히 어떤 후드와 어떤 가면이었죠?"
".....말할 수 없다?"
씨발. 또 금제였다. 아모리 본인도 입을 우물거리며 말하려고 했지만, 나오는 말은 한결 같았다.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다! 말할 수가 없어! 뭐지? 이게 대체 뭐지?"
아모리가 쇠사슬을 흔들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금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진정하세요."
"그, 그래 진정했다."
그런데 아모리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며 얼굴빛이 창백했다.
"이상하다....성직자...머리가 아프다..."
"그래요?"
나는 아모리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아까 씨발 백치 특성은 없었는데?
* 머리에 과한 충격을 받은 뒤 지나치게 무리하여 뇌에 쇼크가 일어났습니다. 1분 뒤 사망합니다.
"씨발?"
좆됐나. 여기서 뒤진다고? 아까 기절시킨다고 후려친게 너무 쌨던 모양이었다.
"....이상하다 성직자....믿으라고 했는데...왜...."
"진정하세요. 나을거에요. 괜찮을거에요."
하지만 이미 아모리를 고칠 방법은 없었다. 그녀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인것 같지도 않았다.
"인간한테....또....! 인간을....! 믿으면...! 안됐는데....! 너...! 내 딸을 어떻게 할거냐....!"
나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힐을 써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내...딸....! 내 딸을....!끄윽....!"
발버둥치던 아모리가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그녀의 맥박이 완전히 멈춘걸 확인하고, 걸음을 옮겼다. 동부 평야지대의 에버딘 영주랬지? 아모리가 죽더라도 계획에 지장은 없었다.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아모리의 희생으로 우리 영지는 조금 더 발전할 수 있겠지.
"영주님. 그 수인은....."
"아, 제가 너무 강하게 제압을 했던걸까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지하감옥의 문을 다시 열었다. 시종을 시켜 로빈을 호출하니, 로빈은 금방 지하감옥으로 달려왔다. 나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쓰러진 수인 아모리의 시체를 가리켰다. 로빈도 나를 따라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영주님께서 자책하실 일이 아닙니다. 우리 영지를 침범한 자를 배제하시는 건, 영주러서 당연히 하셔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수인은 자유를 원하던 사람이었을 뿐이죠. 대천신교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으로서, 자유를 원했던 사람을 이리도 무자비하게 내치는 게 옳은 행동이었을까요? 아니죠. 저는 죄를 지은 겁니다. 로빈. 이 수인의 장례식을 치뤄주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죽었을 때 하는 정도로 하면 되겠습니까?"
"네. 그 정도면 충분해요."
그리고 나는 동부 평야지대의 에버딘 영주에게 쓸 편지를 작성했다.동부 평야지대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어서 미리 이렇게 편지로 방문할 것임을 알리는 게 좋았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대충 이랬다.
에버딘 영주 고생한다. 나는 루시우스 사제장인데 조만간 너네 영지 한 번 들릴거다.
노예니 뭐니 하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읊어줄 필요가 없었다. 방문의 본격적인 목적은 가서 이야기해도 충분했으니까. 원작 게임에서 엘시는 주인공이 픽업해갈 때까지 계속 노예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느긋하게 가서 목적을 말해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지금 내 책상 위에는 대충 아모리가 가지고 있던 물건 중에 엘시가 알아볼법한 물건이 놓여있었다. 하트 모양의 목걸이. 목걸이 디자인 자체가 좀 특이했는데, 노예한테 줄만한 물건은 아니었고, 수인들이 보통 가지고 다닐만한 물건도 아니었다. 보통 수인들은 장신구 같은 걸 안차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이거 말고는 아모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 그럴 듯 해 보이는 건 없었다. 건빵 몇개와 말린 육포 하나. 그리고 동전 몇푼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목걸이 뒤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
뭐지? 이건 대체 무슨 목걸이지? 혹시 아모리는 변신하는 마법소녀 였나? 믿음 소망 사랑이 뭐야? 어쩌면 엘시한테 보여주면 답을 알지도 몰랐다. 나는 일단 책상에 목걸이를 던져놓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여행 준비는 금방 마칠 수 있었다. 저택 앞에선 수인 아모리의 장례식이 간소하게 열리고 있었다. 변방의 소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모리가 누구냐고 쑥덕거리고 있었고, 변방에서 싸웠던 병사들은 영주님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수인 장례식을 치뤄주냐고 궁시렁대고 있었다.
나는 짐을 실은 마차에 올라타서 출발 준비를 했다. 내 마차 옆으로 이브와 셀루, 그리고 아이라와 시에리가 다가왔다. 이브는 정말 못마땅해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번엔 또 어디가?"
"잠깐 동부 평야지대에요. 이번에 죽은 수인이 제게 딸을 부탁했거든요."
"씨발, 또 따먹으려고?"
"따먹는다뇨. 이브. 영주 부인이잖아요. 교양있는 단어를 쓰도록 하세요."
"겁탈하려고?"
"거둬들이는거죠."
이브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셀루가 그 말에 웃으면서 혀를 살짝 내밀었다. 시에리가 말했다.
"정말 혼자가도 괜찮으시겠어요?"
"문제없어요. 시에리. 오히려 혼자가 편한 걸요."
영지에 기사단원들이 적어서 내가 기사단원들을 호위로 차출해가면 인력에 문제가 생겼다. 게다가 호위병들을 데리고 가면 내 개인적인 활동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에 나는 어지간하면 호위 병사까지 뽑아서 데리고다닐 생각이 없었다. 정 불안하면 에버딘 영주가 알아서 해주겠지.
"야, 진짜 괜찮은거지?"
이브는 더욱 더 불안해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붙잡았다. 이브가 걱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내가 이브에게 또 영지를 맡기고 가는 이 상황일 것이다.
"문제없죠."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브를 건드릴 수 있는 놈은 없었다. 북부 대공이 이브를 건드렸다가 칼맞고 뒤진 상황에서 누가 이브한테 깝치겠는가. 이브 본인은 모르겠지만, 현재 남부에서 가장 무서운 영주 패밀리가 우리였다.
"그런데 이번에 또 귀족이 똑같은 일로 시비걸면 그냥 두들겨패서 감옥에 붙잡아놓으세요."
"알았어."
물론 그렇다고 또 죽이면 일이 귀찮아졌다. 나는 이번에는 시비걸어도 죽이지 말라고 다시 한 번 신신당부한 다음에야 마차를 몰았다. 동부의 에버딘 영주의 얼굴을 보기 위해.
* * *
"어서오십시오. 루시우스 사제장."
나는 엄연히 따지자면 페타 영지의 영주 겸 루시우스 사제장인데, 날 영주라고 부르는 귀족을 만난 기억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웃는 얼굴로 에버딘 영주의 환대를 받아들였다. 그는 내가 온다는 소식에 날짜를 맞춰서 병사들을 이끌고 나를 환영하기 위해 몸소 나왔다.
에버딘 영주는 동부의 수인들을 물리쳐온 역전의 용사다운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몽골인이나 사모아인 계통의 혈통을 물려받은 듯 어마어마한 덩치에 근육이 다부졌으며, 억센 인상은 황소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북부 대공이 중후한 노장같은 느낌이었다면, 에버딘 영주는 야만 전사같았다.
그가 입은 정복은 이미 근육을 이겨내지 못해서 터질듯이 부풀어올라있었다. 말 고삐를 쥔 손은 두툼해서 사람 얼굴만 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에버딘 영주가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이 곳에 살고 있는 수인 한 명을 풀어주고자 왔습니다. 에버딘 영주 당신이 아무쪼록 제게 협조해주셨으면 좋겠군요."
"수인을? 수인 노예들 말씀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전부가 아니라 단 한 명 말씀이십니까?"
전부 풀어달라고 제안한 인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말했다.
"그건 현실적이지 못하지요. 대천신교는 노예제에 반대하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노예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 일이 많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단 한 명입니다."
대천신교는 엄밀히 따지자면 노예제를 반대한다기 보다는 종교의 귀의한 이들이 노예를 두는 것을 엄금하고 있었다. 귀족 중에서도 대천신교를 믿는 이들은 노예를 두고 있지 않았고, 사제장을 비롯한 대천신교의 종교인들 역시 노예 매매는 하고 있지 않았다.
해방을 목적으로 한 노예 매매 이외의 노예매매는 철저하게 금지되고 있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사실, 얼마 전에 제 영지로 노예 생활에서 탈출한 수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떨고 있었죠. 워낙 강하게 저항을 하며 영지민들을 다치게할 위험이 있어, 제가 직접 손을 써서 제압했습니다만, 그 손속이 너무 거칠었던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저런."
"그녀에게 딸이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대천신교의 사제장으로서, 동부에 있는 모든 수인들을 노예 신분에서 풀어줄수는 없지만, 그래도 제 실수로 죽이고만 수인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에버딘 영주는 내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줬다. 나는 일단 에버딘 영주의 저택에서 짐을 풀고 바로 노예 시장으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엘시는 노예 시장에서 노예들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일단 저택에서 잠시 쉬시죠."
그렇게 에버딘 영주의 초대를 받아들여서, 나는 저택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했다. 엘시를 만나서 '해방' 시켜준 다음, 나는 엘시 어머니의 이야기를 이용해서 그녀를 꼬드길 생각이었다. 수인들은 가족 관계가 끈끈했으니 어지간하면 넘어오리라.
그렇게 엘시가 내 영지로 오게되면, 그 다음부턴 적당히 내 영지에서 정착할 것을 권유할 생각이었다. 인어도 부인으로 받았는데, 이제와서 수인 한두마리 영지에 넣는다고 문제될게 없었다.
나는 욕탕에서 느긋하게 몸을 핀 채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에버딘 영주의 안내를 받고 노예들이 모여있는 노예 시장으로 향했다. 에버딘 영지에는 동부 최대의 노예 시장이 있으며, 이곳에는 아직 팔리지 않았거나 팔렸는데 너무 쓸모없어서 버려진 노예들이 모여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마법사의 실험용 재료로 끌려가고 일부는 가혹한 공사현장으로, 일부는 의학 연구용으로 끌려갔다. 엘시는 이런 노예 시장의 인간 노예쪽 통로를 지키고 있었다. 원작 게임에서 그녀는 다른 수인들 몇명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이 일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인간 노예는 엘시가 상관할 바 아니었으니까.
에버딘 영주는 내가 그런 엘시를 데려가고 싶다고 하자 조금 아쉬운 눈치였다. 엘시만큼 충직하고 강한 노예가 얼마 없을테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수인들은 동료애와 가족애가 끈끈하니까. 인질이 잡혀있다면 그들만큼 충직한 놈들이 없었다. 나도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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