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ão 6

는 사이 에이에이와 한창 달콤한 밀담을 나누던 에리나가 내게 다가왔다.
"에리나 공주님 아니신가요?"
"그대는 비늘달린 것에 성욕을 느낀다지."
"제 결혼 생활에 대해 공주님이 왈가왈부 하실 줄은 몰랐네요."
"닥쳐라. 더러운 놈. 엘프가 되었기로 어찌 인어와 그딴 짓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네 음행에 어머님께서도 경악을 금치 못하셨다. 페타 시리우스의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우리 에리나 공주님께선 공주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행동만 하셨나요?"
내 질문에 에리나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엘리전으로 끌고가면 불리한 건 에리나 공주였다. 내 사생활은 오픈된 상태였지만, 에리나 공주의 스캔들은 아직 감추어진 상태니까. 계속 귀찮게 굴면 나도 같이 죽는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물었다.
"제게 시비를 걸려고 오신건 아닐텐데요."
에리나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직 에이에이에게 내가 임신했다고 알리지 않았다."
"혼전 임신을 숨기셨군요."
"닥쳐라. 나는 이번 던전 공략 중에 어떻게든 에이에이와 맺어질 생각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제게 왜 하시는거죠?"
"그 때까지만 입을 다물어다오. 나는 에이에이에게 여자끼리 아이를 만들 수 있는 비술을 알아냈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오늘 에이에이와 맺어지고, 시간이 지나며 부푼 배를 보여줄 생각이다. 네 소원대로, 이 아이는 나와 에이에이의 아이가 되는게지."
"그렇군요. 근데 여왕님은 어떻게 설득하셨나요?"
".....네가 알바 아니다."
내가 에리나의 엄마였다면 뒷목을 잡다못해서 거품물고 기절했을거다. 아무래도 말하는 폼을 보니 어떻게든 여왕의 허락을 받은 듯 했다. 사실 아이를 만드는 데 어떤 변명을 하든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에리나가 어떻게든 여자끼리 애를 만들었다고 우기려는 게 웃길 뿐이었다. 그걸 에이에이가 믿는 것도 웃길 뿐이었고.
역시 빡대가리 공주. 이래서 궁전 안에서 싸고돌면 사람이 망가지는 법이었다.
"네. 뭐, 저는 용사님과 당신의 행복을 바라니까요."
에리나는 그 말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역시 너는 참 이상한 놈이다."
애인 붙잡겠다고 남의 애기 임신하는 공주가 할말은 아닌 듯 해서 나는 웃어넘겼다. 우리는 그렇게 수도를 벗어나 던전 앞에 도착했다. 던전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rpg 게임 속 던전이었다.
동굴 앞에는 가고일 동상이 두개 세워져 있었고 횃불도 불타고 있었다. 던전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이 우리를 보자 대신 암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경비병은 말했다.
"지금까지 이 문을 넘어서 다시 돌아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게임에서도 그렇게 말했다. 다만, 이렇게 겁주는 것에 비해 지나치게 쉬운 던전인게 문제였을 뿐. 성검 던전은 게임 내에서도 정말 쉬운 이벤트에 속했다. 주인공의 솔로 플레이를 염두에 둔 탓인지 동레벨대 다른 던전에 비해 나오는 적들의 수도 적었고, 패턴도 단순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차례 게임과 현실이 약간씩은 다르다는 걸 체감한 나는 조금은 긴장감을 가지며 던전에 입장했다. 게임에서는 가디언 한마리만 등장했지만, 현실에서는 문이 열리자마자 기관총을 쏘는 로봇이 나타날수도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문이 열리고, 우리는 아래로 쭉 펼쳐진 계단을 따라 지하 1층으로 내려왔다. 지하 1층에는 거대한 골렘이 있었다. 주변에는 뼈무더기가 잔뜩 쌓여있었다. 1층도 통과하지 못한 인원이 대다수 인듯 했다.
골렘 역시 여기저기 부서지고 망가진 것이 오랜 세월 싸워온 듯 했다. 우리는 골렘 앞에 멈춰서서 상황을 살폈다. 카린이 말했다.
"전부 강하고 묵직한 둔기에 부서졌습니다. 아무래도 이 골렘에게 당한듯 한데..... 작동 원리를 모르겠군요."
"뭔가 요구 조건이 있는게 아닐까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는 아직 골렘에게 좀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가까이 다가가자는 말에 에리나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내키지 않았다. 나보다 덩치가 두배는 커보이는 골렘 앞에 선다니, 현실에서도 하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겁없는 카린과 에이에이가 먼저 앞으로 한걸음 내딛었고, 그와 동시에 골렘의 안광에 불이 들어왔다. 나는 빠르게 상태창을 열어서 골렘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름: 스톤 골렘
종족 : 스톤 골렘 (변화함)
레벨 : 32
스텟
힘 89
민첩 20
지능 0
행운 0
특성
마법내성
마법에 내성을 가집니다. 마법 데미지를 60% 덜받습니다.
물리 내성
물리 데미지에 내성을 가집니다. 물리 데미지를 60% 덜 받습니다.
“변화함?”
“네?”
에이에이가 내 중얼거림을 듣고 돌아보았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종족에 변화함이 달려있다는 건 다소 의아한 요소였다. 하지만 그거 말고도 상태창에는 당장 신경쓸게 많았다. 일단 스톤골렘의 기본 스펙부터 좀 귀찮았다.
무난한 스텟이었지만 때려부수는 데 좀 골치아플 패시브를 둘둘 두르고 있었다. 나는 메이스를 꺼내들었고, 카린은 방패와 검을, 에리나도 활을 꺼내들었다. 에이에이는 칼을 뽑다말고 골렘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뭔가 말하고 싶은게 있나본데요?"
우리가 전부 멈춘 그 순간, 골렘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 중, 순결한 자만이 이 문을 열수 있다."
그 말에 내가 눈을 찌푸리고, 카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에이에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에리나! 우리 에리나라면 될거에요."
아 씨발. 좆됐다.
"자, 잠깐만! 에이에이!"
"잠깐만요!"
진정하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지금 여기서 에이에이가 눈깔이 돌아버리면 난 무조건 죽는다. 저 인성 파탄난 엘프공주가 미투를 걸었으면 걸었지 내 편을 들어줄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에리나가 동시에 에이에이를 불러세우자, 에이에이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십니까?"
카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애써 침착을 가장하고 있었다. 에리나는 벌써부터 비오듯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예전부터 생각하는 건데 저 년은 거짓말을 너무 못했다. 에리나가 아가리를 털기 전에 내가 어떻게든 이 사태를 원만하게 정리해야 했다.
"자, 용사님. 들어보세요. 여성의 순결이라는 건 좀 상대적인 이야기잖아요. 그렇죠?"
"무슨 소리세요. 사제님. 에리나는 저 말고 다른 남자는 만난 적도 없다고 한걸요."
"그러니까, 이제 골렘의 기준에선 에리나 공주님이 순결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거죠."
"네?"
에이에이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누구든 '니 여친이 처녀가 아닐수도 있어요.'라고 말하면 존나 불쾌해하기 마련이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골렘이 엄청 까다로워서, 손을 잡거나 껴안거나 하는 것만으로도 순결을 잃었다고 생각할수도 있잖아요?"
"그건....."
"순결은, 처녀성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우우웅, 하는 웅장한 소리가 울리며 골렘이 말했다. 저 새끼 인공지능인가? 에이에이가 골렘을 쳐다보고 다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렇다네요. 에리나. 빨리 와. 그..... 사제님에게 밝히긴 좀 낯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랑 에리나는 아직 서로 그.....걸 한 적이 없거든요."
"자, 자 기다려보세요 용사님.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사제님 혹시 모른다니 무슨...."
"그, 그래! 에이에이! 내가 처녀가 아닐 수도 있지 않느냐!"
뭐라는 거지 저 미친년이. 나와 에이에이가 대화하는 중에 에리나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끼어들었다. 나도 에이에이도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에이에이의 얼굴은 여자친구의 혼전임신 소식을 들은 사람 같은 충격에 빠져 있었다
"에리나?"
에이에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에리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횡설수설했다.
"그, 그러니까! 내가 처녀가 아니란 건 아닌데..... 그.... 아닐 수도 있다는거다! 그러니까.....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라질 수도 있는 법이고......그.....기준이란게 다르지 않느냐! 그러니까.....그......아무튼 내가 하면 위험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저년이 저번처럼 '나는 엘프 왕국 대표 걸레다!'라고 소리치기 전에 이 사태를 종결시켜야 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내가 이 사태와 관련이 없다면 팝콘 뜯으면서 구경했겠지만, 여기서 사태가 잘못되면 에이에이가 칼부림이라도 할지 모르는 일이다. 걸레 드립 때문에 뒤진 사제가 될 수는 없었다.
"용사님. 잠깐 우리 저 쪽에서 이야기하죠."
나는 용사를 데리고 한쪽 구석으로 갔다. 에리나에겐 눈짓으로 입 다물라는 시그널을 보냈고,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린은 영문을 몰라서 뻘쭘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자, 용사님. 여자에겐 비밀이 많은 법이에요. 그렇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누구나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한텐 잘보이고 싶어하는 법이에요. 그렇잖아요?"
"네. 맞아요."
"에리나 공주님은 용사님을 가장 좋아하구요. 이건 누가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죠?"
"네."
"그러니까, 용사님.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진정하시고. 지금 순결성을 원하는 자리에 공주님이 한사코 나가지 않으려는 건, 그러니까, 과거에 어떤 남자와 연이 있었다는 뜻 아닐까요?"
"네?"
에이에이는 심각하게 인상을 구겼다. 그 이쁜 얼굴은 구겨져도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만약이라는 이야기죠.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는 법이잖아요. 엘프는 용사님보다 오래 살아요. 그 긴시간동안 에리나 공주님이 누군가와 만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렇지만....."
"혹시 용사님은. 에리나 공주님이 순결하지 않다고 해서 버리실 생각이신가요? 에리나 공주님은 정말로 용사님을 좋아하고 있어요. 과거는 아무 상관이 없는거죠. 에이에이 당신은 옛날에 좋아하던 사람이 없었나요?"
"그건....."
"용사님. 지금 당신만을 바라보는 공주님이 과거를 숨기도록 배려해주세요."
"사제님은, 에리나의 과거를 알고 있나요?"
"저도 모르죠. 하지만, 서로 숨길 건 숨겨야 더 아름다운 관계가 되는 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나보네요."
나는 에이에이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에리나는 여전히 불안해보였지만 표정으론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손뼉을 마주쳐서 주의를 집중시킨 다음 말했다.
"자, 그러면 순결한 자는 우리 용사님이 나서기로 했습니다."
"네?"
에이에이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대꾸했다.
"성관계 한 적 없는 여성. 맞으시잖아요. 전 결혼해서 안되고, 솔직히 이런 자리에서 기사님의 그....여부를 캐묻거나 노출시키는 것도 실례같거든요."
"알겠습니다."
에이에이가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골렘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에리나는 벌써부터 불안에 떨며 내 팔뚝을 툭툭 치고 있었다.
"어쩌지...어쩌지....내가 처녀였다면....."
"공주님. 제발 닥쳐주세요."
골렘의 눈에 다시금 푸른 빛이 들어왔다. 그는 눈에서 내뿜는 빛을 마치 레이저처럼 사용하여 에이에이의 몸 이곳저곳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에이에이의 몸을 훑어보던 골렘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문을 열 자격이 있다."
그렇게 말한 골렘은 육중한 몸을 옆으로 옮기고 다시 눈을 감았다. 골렘이 있던 자리에는 큼지막한 문이 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에이에이에게 다가갔다.
"용사님! 괜찮으세요?"
"아, 네. 네. 괜찮아요."
에이에이는 일단 안부를 묻는 우리를 재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은 아무런 저항없이 쉽게 열렸다. 문이 열리면서 문에 붙어있던 돌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나갔다. 문 아래에는 또다른 계단이 있었다. 계단의 양 옆으로는 횃불들이 타오르고 있었다.
"누가 설치해놓은거지?"
해골들의 상태를 보면 제법 오랜시간 아무도 안온듯 한데 횃불은 방금 전에 놓아둔 것처럼 활활 불타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하고 한 층 더 내려가보기로 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길. 길고 긴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 우리는 담소를 나누기 쉬웠다. 나와 카린의 등 뒤에서 에이에이와 에리나가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려왔다.
"미안해 에리나."
"무, 무슨 소리냐 에이에이! 네가 미안할게 무엇이냐! 오히려 그 위험한 함정에 나서지 못한 내가...."
"내 멋대로 너를 착각하고 있었어."
"뭐, 뭣?"
"네 과거는 묻지 않을게. 그.... 과거가 어땠든 넌 지금 내 반쪽이니까."
"아....아아아....."
에리나는 울기 직전이었다. 저러다가 혹시 고해성사한다고 나랑 섹스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괜히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에이에이가 과거를 용서한다고 했지만, 그건 자길 만나기 전의 과거이야기였다. 자기가 여행간 사이에 다른 남자 애를 뱄다고 말하면 에이에이가 성자라도 당장 칼을 뽑을거다. 나는 다리가 살짝 떨려오는 걸 느꼈다.
"사제님. 안색이 좋지 않으시군요."
카린이 말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아, 그렇게 보였나요? 아니에요. 이 불빛 때문에 과하게 창백하게 보이는 거겠죠."
"혹시 속이 안좋으신거라면 제가 비상약을 챙겨왔습니다."
사제한테 약을 주겠다는 것 만큼 웃긴 것도 없었지만 이런 우직함이 게임 내에서 카린의 매력이기도 했다. 세계 최강의 용사가 파티원이라해도 자신이 대신 싸우겠다며 기꺼이 전위로 나서는 우직함. 무뚝뚝한 기사에겐 큰 가슴과 그런 매력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분명히 여기 약이 있을텐데.....엇."
약을 찾던 카린이 주머니에서 몇가지 물건을 떨어트렸다. 천에 감싸서 보관한 작은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감자칼?"
감자칼이었다. 부엌에서 감자 껍질 깎을 때 쓰는 그 감자칼. 카린은 고개를 저으며 감자칼을 집어들었다.
"감자칼이 아닙니다."
"감자칼이 아니라고요?"
"범죄자들을 고문할 때 쓰는 도구입니다. 이걸로 피부를 한겹씩 벗겨내죠."
"씹....."
미친년. 미친년. 나는 욕을 하려는 걸 겨우 참았다. 지하실에 있던 새빨간 고깃덩어리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니 여기 그딴 건 왜 가져온거지?
"그건 왜 가져오신건가요? 던전 탐사일 뿐인데."
"도굴꾼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도굴꾼을 여기서 가죽을 벗겨버리겠다고요? 도굴은 그냥 현행범으로 걸리면 징역 아니었나요?"
"도굴 말고 다른 범죄행위를 저질렀는지, 저는 알아낼 의무가 있습니다."
나는 카린과 더 대화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가죽 주머니를 뒤지다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약은 두고왔나보네요."
감자칼은 챙겼는데 약은 두고왔다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년 앞에서 범죄를 저질렀다간 나는 이제 노란 머리 엘프가 아니라 빨갱이가 되고 말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지하 2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똑같은 골렘이 서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옆에 쌓인 시체의 수가 조금 더 적었고, 골렘도 조금 더 깨끗했다는거. 골렘 자체의 스펙은 아까와 똑같았다. 또 처녀성인가? 우리가 한걸음 앞에 나서자 골렘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마음이 순수하고 선량한 자. 앞으로 나와 문을 열어라."
에이에이와 카린이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에리나가 입꼬리를 추켜올리며 히죽, 웃었다. 뭐, 이건 어렵지 않게 변명할 수 있었다. 나는 에이에이를 슬쩍 밀며 말했다.
"용사님이 여기에 적당할 것 같네요."
"네? 하지만 저는...."
"용사님을 올곧은 마음으로 항상 한 명의 여인만을 바라보셨고, 또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마음으로 마왕 퇴치에 앞장서셨죠. 저는 용사님이 가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나는 에이에이가 반론할 틈도 없이 그녀를 떠밀었다.
골렘의 눈에 다시금 푸른 빛이 들어왔다. 그는 눈에서 내뿜는 빛을 마치 레이저처럼 사용하여 에이에이의 몸 이곳저곳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에이에이의 몸을 훑어보던 로봇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문을 열 자격이 있다."
그렇게 말한 골렘은 육중한 몸을 옆으로 옮기고 다시 눈을 감았다. 골렘이 있던 자리에는 큼지막한 문이 있었다. 아까보다 훨씬 깨끗하고 튼튼해보이는 문이.
에리나는 나를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나저나 이거 에이에이랑 나랑만 왔어도 됐겠는데.
생각해보면 간단한 이야기였다. 이 던전은 에이에이 혼자서도 깰 수 있어야 했으니까 일단 에이에이를 들이밀면 대부분 클리어가 가능했다. 그 뒤로 '용감한 자'나 '강인한 자' 같은 뜬구름 잡는 질문에도 일단 에이에이를 앞에 내세우니 골렘들이 말 없이 문을 열어줬다.
마치 요금을 내고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에이에이도 자기가 문 앞에서면 문이 열리는 상황을 조금 즐기는 듯 했고, 에리나는 뭐가 그렇게 뿌듯한지 본인이 더 우쭐대고 있었다. 그녀의 폼은 마치 내게 '봐라. 우리 에이에이가 이렇게 대단하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내게 묘한 불쾌감을 주고 있었다.
그냥 이번에 한 번 또 따먹을까. 기회봐서.
그렇게 몇차례 관문을 통과해서 우리는 순식간에 7층까지 도달했다. 긴장감 하나 없이 에이에이가 앞에 서기만 하면 문이 열리는 걸 몇번이나 봐왔던 우리는 던전 탐색이 아니라 산책 나온 기분이었다. 에리나가 대놓고 하품을 했고, 카린은 그런 에리나를 슬쩍 째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차마 왕국 기사 신분으로 이웃나라 공주에게 훈계를 할 수 없어서 참은 듯 했다. 나는 차라리 카린이 지금 에리나의 배때지를 한대 갈겨줬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럼 내가 편들어줄텐데.
사실 내 입장에서도 에리나를 책망하기는 조금 찔리는 게, 나 역시도 매우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던전 자체가 아주 힘들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모양 이 꼴로 프리패스를 해버리니 맥이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보정을 받아서 우리를 엿먹이는 기괴한 장소로 변해있을거라고 생각했던게 오히려 이상한 보정을 받아서 지나치게 쉬운 장소로 변하고 말았다.
“우왓.”
7층에 제일 먼저 들어선 에이에이가 놀라는 소리를 냈다. 뒤이어 들어온 나도, 카린도 에리나도 전부 움찔 할 수 밖에 없었다.
7층에는 지금까지 본 어떤 골렘보다 거대한 골렘이 서 있었다. 높은 천장에 머리가 닿았고, 몸은 방 안을 가득채우다시피 했다. 옴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들어찬 몸뚱아리 위에 작은 머리가 달려있었다. 우리가 다가오자 머리에서 빛이나며 말했다.
"마왕을 물리치는 사명을 받은 용사여. 지금 앞으로 오라."
"역시....!"
또 에이에이였다. 나 역시 별 생각없이 에이에이를 앞으로 이끌었고, 그녀 역시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나는 심심풀이 삼아서 골렘의 상태창을 관찰했다.
이름: 메가 골렘
종족: 메가골렘 (변화됨)
레벨: 78
힘: 250
민첩:40
지능:0
행운:0
특성
견고한 몸
물리데미지를 80% 덜받습니다
나는 스텟을 보고 식은땀이 쭉 흐르는 걸 느꼈다. 이딴 게 게임 속 던전에 있었던가? 레벨도 레벨인데 데미지 감소가 너무 씹사기라 못때려부술 것 같았다. 골렘은 내가 호달달 떠는 사이 에이에이에 대한 스캔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그대는 문을 열 자격이 있다."
그리고 골렘의 몸이 둘로 나뉘어지더니 그 틈으로 문이 생겼다. 에이에이도 나도 꺼림칙한 얼굴로 그 문을 바라봤다. 문 옆에 있는 골렘의 몸체가 너무 위협적이고 단단해보여서 잘못 지나가면 가루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에이에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걸음을 내디뎠다. 우리는 에이에이를 따라 앞으로 걸음을 내걸었다. 다행히도 우리가 지나갈 때까지 골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다 지나가고 나서야 골렘은 그 육중한 몸체를 움직여서 다시 입구를 닫았다. 시발 생각해보니까 이러면 어떻게 나가지.
"무, 문이 닫혔다고?"
에리나가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린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나가는 길이 있을겁니다. 죽이려거든 우리가 지나갈 때 저 골렘으로 눌러버렸을 테죠."
"끔찍한 소리 하지말거라!"
"그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나갈 길은 있을겁니다."
"없으면 어떻게 하란 말이냐? 우리 에이에이는....."
"용사의 반려라는 자각이 있으시다면, 조금만 냉정한 모습을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용사는 에이에이님이지 당신이 아닙니다."
"그....그건....."
카린이 매우 단호하고 냉정한 태도로 에리나를 깠다. 에리나는 에이에이를 쳐다봤지만, 에이에이도 이번만큼은 쉴드쳐줄 수 없었는 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웃을 뿐이었다. 사실 이전까지 던전이 지루했던건 사실이라도 에리나가 이렇게 난리칠만큼 곤란한 상황은 아니기도 했다. 아직 아래층에 뭐가 있는 지도 확인하지 못했으니까.
여기서 에이에이가 에리나 편을 들면 나도 카린편을 들어서 저 참피년을 사정없이 깔 생각이었건만, 역시 사람됨됨이가 훌륭했다. 그녀는 현대에 살았다면 의사나 변호사가 됐을텐데, 시대를 잘못만나서 용사가 되고말았다.
에리나는 심통이 난 표정으로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초조해보였다. 하긴 지금까지 이 일행에 참여해서 아무런 활약을 못했으니, 초조한 것도 당연했다. 오히려 에이에이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여서 미움을 사는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는 듯 했다. 에이에이는 이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는 것 같았지만.
긴 계단의 끝에 환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드디어 성검을 마주할 시간인듯 했다. 게임에서 성검은 그냥 하얀 빛무리에 감싸여있는 모양이라 그 모습을 제대로 알 수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성검의 디자인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마지막층. 우리는 방 가운데에 일렁이는 환한 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거대한 구슬을 가져다놓은 듯 둥근 빛을 쉼없이 뿜어내는 그 빛덩어리는 성스럽고도 고결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에이에이가 내게 말했다.
"사제님."
그래. 성검은 남자만 잡을 수 있었다. 무슨 좆같은 설정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성검은 무조건 남자가 잡아야 했다. 에이에이는 지금 여자가 됐으니 할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성검 쪽으로 한걸음 발을 내뻗었다. 내가 다가오자 빛무리가 희미하게 흐트러지더니 더욱 강하게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언데드가 아닌데도 온몸이 찌릿찌릿하고 강한 압박이 느껴졌다. 에이에이를 비롯한 다른 일행도 비슷한 감각을 느끼는 지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빨리 성검을 가져와야 한다.
게임 상에서는 '성검을 뽑는다.' 한문장으로 표시된 과정이 실제로는 이렇게 괴롭고 힘들고 압박적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성검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성검이 내뿜는 파장은 나를 거부하듯이 더욱 강렬하게 일렁거렸다. 나는 이 빛을 무시하고 팔을 뻗어서 겨우 빛 속을 헤집었다.
강렬한 빛무리 안 쪽에서 딱딱한 칼자루가 잡히는 게 느껴졌다. 바닥에 꼭 박혀있는 듯 칼자루는 대충 움직여선 뽑히지 않았다. 내가 검을 잡자 사방으로 내뿜던 빛무리가 잠잠해지며, 점차 커다란 백열전구 같은 모양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을 압박하던 기운이 사라지고 공동에는 고요가 내려앉았다. 에리나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허탈한 숨을 쉬었다. 카린도 겨우겨우 숨을 내쉬며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에이에이가 물었다.
"사제님. 괜찮으세요?"
"네. 뭐....."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방금전까지 느껴진 압박감이 마치 꿈이라도 꾼 듯 사라져있었다. 내 손에 꼭잡힌 칼자루에 힘이 실렸다. 나는 힘차게 칼을 바닥에서 뽑아냈다. 다시 한 번 빛이 환하게 퍼지더니, 잠잠해지며 칼이 제 모습을 되찾았다.
"그건....."
"처음보는 검모양이네요."
"신기한 모양이구나."
일본도였다.
씨발 맞다 이거 일본겜이었지. 나는 꺼림칙한 얼굴로 일본도를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확실히 그립갑은 좋은 데 내가 쓸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나같이 제대로 검술을 배운 적 없는 사람은 일단 막아도 타격을 주는 메이스 같은 무기로 줘 패는 게 훨씬 유용했다. 나가면 바로 왕한테 넘겨버려야지. 나는 그런생각을 하면서 상태창을 불렀다.
고대의 성검
남자만이 쥘 수 있는 고대의 무기입니다. 누가 사용했는지, 어떤 목적으로 사용했는 지는 수수께끼이나 성검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특성
정당한 대가
등 뒤에서 찌른 상대를 즉사시킵니다.
상대에게 깊이 10cm 이상의 상처를 내야하며 인간에게만 적용됩니다.
정정당당한 승부
칼에서 맹독이 생성됩니다. 생성을 원하면 '승부'라고 외치면 됩니다.
독은 무색무취이며 닿은 상대는 30분 뒤 원인불명의 고열에 시달리다 사망합니다.
인간에게만 적용됩니다. 칼의 소유주가 죽을 위기에 처하면 독의 효과가 즉시 발동합니다.
확고한 충성심
자신의 주인, 상사, 친구, 연인, 가족, 부하를 공격했을 때 4배의 추가 데미지를 줍니다.
근데 효과를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이 칼은 내꺼다. 효과가 존나 마음에 들었고, 또 남이 쓰기엔 너무 위험한 효과라서 내가 가지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나는 이게 성검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게 성검이라고? 내 사람을 뒤에서 찌르면 즉사시키는 게 성검?
심지어 악마나 몬스터 관련 효과는 없었다. 원작에서 성검은 그냥 주인공의 올스텟을 강화시켜주는 아주 평범한 물건이었는데, 왜 이딴 물건이 튀어나온거지? 내가 의아한 얼굴로 칼을 이리저리 바라보고 있자 에이에이가 물었다.
"그, 검을 들었는데, 어떠신가요? 좀 강해진 것 같으신가요?"
"아니요. 아무래도 제겐 용사의 재능은 없나보네요."
"그런가요? 아쉽네요."
에이에이는 정말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좀 어이가 없었다. 성검이라고 뽑았더니 사람 죽이는 살인병기가 튀어나왔으니까. 나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성검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옆구리에 묶었다. 검집도 없는 칼인데 날은 기막히게 잘들어서 묶는 것도 조심히 묶어야 했다.
"근데, 이제 어떻게 나가죠?"
에이에이가 물었다. 성검을 뽑았음에도 불구하고 위층으로 향하는 골렘은 문을 열어줄 생각도 안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문을 두드려봐도, 골렘은 미동도 없었다. 내가 메이스를 꺼내며 물었다.
"부숴볼까요?"
"아니요. 조금만 기다려보죠."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이 던전을 공략하면서 시간을 제법 보내기도 했고, 여기서 조금 쉬면서 생각해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카린도 에이에이의 의견에 동감했다. 에리나는 드물게도 그 의견에 반색하며 말했다.
"좋다. 그럼 여기 공동에서 쉬는 게 어떤가? 내가 아까 실프를 이용해 둘러보니 이 공동 사이 사이에 작은 방들이 많이 있었다. 쉬고나서 거길 둘러볼겸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게 좋을 듯 한데.....에이에이 네 생각은 어떻지?"
"좋은 것 같아."
"그럼 그렇게하죠."
"좋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성검이 있던 공동으로 내려갔다. 확실히 아까는 몰랐는데 이 최하층 방에는 작은 방들이 몇개 더 있었다.일단 쉬자. 그리고 생각하자.
우리는 잠시 쉬고 지하 대공동을 탐색하기로 했다. 어차피 던전 공략에 며칠은 걸릴 것이라 생각하고 여러가지 장비들을 가져왔기 때문에 야영 준비를 하는 것은 쉬웠다. 던전 안에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었고,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공간도 아니었기 때문에 탐색은 아주 여유로웠다.
이 최하층 공동은 마치 곰발바닥 같은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앙에 있는 커다란 방에 성검이 있었고 이 방을 기점으로 총 4개의 작은 방이 있었다. 방들에는 특별한 물건은 없었다. 누가 썼는 지 알 수 없을만큼 오랜 세월이 지난 침대와, 벽에 박힌 쇠사슬들만이 이 방의 용도를 짐작하게 만들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침대가 2개였다는 거.
아마도 SM클럽.....
"감옥이군요."
카린이 말했다. 그래, 아마 이 곳은 감옥이었을거다. 나는 머릿속을 헤집었던 음란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다시 조사에 집중했다. 나와 같이 오른쪽 방 조사를 맡은 그녀는 방에 있는 선반을 뒤적거리다가 낡은 문서를 찾아냈다. 내가 옆에서 슬쩍 보았지만 무슨 글자인지 알아볼 수 가 없었다.
"무슨 글자인가요?"
"인간들이 쓰던 고어라서 사제님을 알기 힘드실겁니다. 보면....."
"고어를 읽을 줄 아시나요?"
"도굴꾼들이 자기들이 훔친 장물의 값어치를 숨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조금은 할 줄 압니다."
매우 실리적인 이유로 배운 고어였다. 말하는 걸 보자면 몇가지 잔재주가 더 있을 것 같은데, 특성 창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카린은 더듬더듬 문서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내용을 보니, 죄인들은.....지켜라..... 대충 이것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밖에 다른 단어들은 좀 생소한 단어라서 올라가서 해독해봐야 할듯 합니다."
카린은 가방에 문서를 말아서 집어넣었다. 그 밖에 다른 물건은 없었다. 두 방 모두 똑같은 내용의 문서가 있었지만, 해독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카린은 문서를 두 장 전부 챙기고 방에서 나왔다.
이미 에리나와 에이에이는 밖에 나와있었다. 에리나는 에이에이와 팔짱을 끼고 있다가 우리가 오자마자 슬쩍 떨어지며 헛기침을 했다.
"그래, 그쪽은 조사가 끝났느냐?"
"네. 끝났습니다. 공주님께선 어떠십니까?"
카린이 물었다. 에리나는 사슬과 침대밖에 없는 방이었으며 아마도 감옥으로 추정된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 방에서 고대 문서를 발견했는데, 자신이 대충 읽은 바. 죄인들이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이곳으로 내려온 듯 하다고 말했다.
"무언가를 지킨다면...."
"아마도 성검이겠군요."
카린이 말했다. 논리적인 결론이었다. 이 지하까지 내려와서 무엇인가를 지킨다면 성검말곤 없었으니까. 그저, 시간이 너무 지나서 전부 썩어 없어진 것인지 경비병들은 그 흔적조차 없었다. 카린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뭐가 말인가요?"
내가 물었다. 카린은 방들을 둘러보고 나서 말했다.
"화장실이 없습니다."
그것도 그랬다. 감금해서 지하에서 지키는 시설인데 화장실이 따로 없다? 방이든 어디든 한군데 모아서 쌌을텐데 아무 흔적도 없다는 건 말이 안됐다. 이렇게 깊숙한 공간이라면 어디서든 생리현상을 해결하긴 햇을 터인데, 이 공동 안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거기다 식량창고도, 무언가 밥을 해먹을 수 있는 공간도 아무것도 없었으며 심지어 감시 병력이 있을법한 공간도 없었다. 이 죄인들은 성검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내려와서 출퇴근이라도 했단건가? 골렘들이 지키는 지하 7층을? 굳이?
골렘들을 설치하기 전에 임시로 만든 공간이라면 벽에 붙어있는 쇠사슬이 이상했다. 애초에 동굴의 구조 자체가 층마다 골렘들을 배치하고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구조였다. 그런데 맨 밑 층엔 사람들을 모아놓고 성검을 지키게 한다? 저 메가 골렘을 뚫을 수 있을 정도의 인간을 고작 사람 몇명으로 막는다고?
"이상하네요. 너무 이상해요."
이상했다. 이 던전 자체가 몹시 이상했다. 가둬놓는다기엔 너무 허술했고 목적이 없었다. 지키고자 사람을 고용했다기엔 너무 삭막한 환경이었다.
"으스스한 이야기구나."
에리나가 팔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게 없었으니 으스스한 이야기였다. 방 가운데 피워놓은 모닥불만이 환하게 타고 있었다. 에리나는 슬슬 에이에이의 옆으로 붙으며 말했다.
"헌데, 그....밥이라도 먹는 건....."
"좋은 것 같습니다."
카린이 에리나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동안은 계속 탐사할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식량을 꽤 넉넉하게 가져온 상태였다. 모닥불에 냄비를 올리고 가져온 재료들을 풀어넣자 금방 걸쭉한 수프가 만들어졌다. 카린은 가방 안에서 빵을 꺼내서 인원들에게 분배했다.
그리고 수프를 하나씩 그릇에 담고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일어나며 말했다.
"그....잠시 볼일을 좀....."
얼굴이 새빨개진게, 무슨 볼일인지 알 거 같았다. 오른쪽 끝방으로 카린이 사라지자 에리나도 꽤 오래 참았던지 방들 중 하나로 향했다. 뒤이어 에이에이도 좀 난감한 얼굴로 일어나서 왼쪽 끝방으로 향했다. 이 새끼들 나 빼고 단체로 화장실을 가네.
아무래도 방금 전 성검의 압박이 제법 묘한 자극을 준게 틀림없었다. 난 멀쩡했으니까.엿보러 가볼까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여기서 그딴짓을 했다간 칼맞기 딱 좋았다. 고작 오줌싸는 거 하나 때문에 내 평판을 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앞에 김이 모락모락나는 스프를 보며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내가 미약 하나를 안쓰고 아직 들고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거다. 씨발 이거다. 하늘이 준 기회였다. 나는 에리나 자리에 있던 수프에 지체없이 약을 다 쏟아부었다. 최하급 미약이라 이상할 정도로 발정이 나진 않겠지만, 던전 내에서 에이에이랑 떡칠 생각을 하던 미친 엘프한테는 특효약이리라.
나는 약만 들이붓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들을 기다렸다. 금방 돌아온 카린은 얼굴을 붉힌 채 말했다.
"혹시, 그...소리 들렸습니까?"
"무슨 소리 말씀하시나요?"
".....아닙니다."
카린은 구태여 더 설명하지 않았고 나 역시 구태여 더 묻지 않았다. 이제 밥먹을 시간이잖아. 뒤이어서 에리나도 에이에이도 모습을 드러냈다. 에이에이는 혼잣말로 '익숙하지 않아.'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고, 에리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식사시간. 카린은 방금 전의 냉정한 태도는 온데간데 없이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자, 그....잘먹겠습니다...!"
모두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허겁지겁 수프를 들이키고 빵을 뜯어먹었다. 에리나는 수프를 먹다말고 얼굴을 찌푸리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모두들 아무 말 없이 먹고 있으니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그렇게 맛이 이상한가?
수프를 비우고 나는 대충 클린 마법을 써서 그릇을 깨끗하게 치웠다.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나서 우리는 한타임 쉬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으니까. 이제 남은 건 소화 좀 시키고 저 골렘을 때려부수던지 해서 밖으로 나가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가방을 베개 삼아 누운 뒤 에리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씩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숨이 점점 거칠어졌고 가랑이를 비비적대며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점점 숨이 거칠어지는 걸 느낀 에이에이가 에리나에게 물었다.
"에리나? 왜 그래?"
"응....아, 아니...아무것도.....아니다."
생각보다 미약이란게 효과가 어마어마하게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레벨도 높고 나름대로 튼튼한 엘프한테도 최하급에 불과한 미약이 저 지경으로 효과를 준다니, 나는 얼핏 사람들이 미약을 금지시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최하급이 저정도인데 최상급 쯤 되면 아주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게 틀림없었다.
나는 교역 도시에서 발정이 난 채 쓰러져있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하루 종일 자위를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가랑이를 비비고 있던 인간들. 이브랑 셀루는 그 때 최상급 미약 비스무리한 걸 쓴걸까? 인어의 피에 최음효과가 있다고 했는데, 그걸 사용하면 그렇게 되는 건가?
"하아....하아....."
에리나는 점점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엘프가 약빨을 잘받는 건지 최하급 미약이 생각보다 존나 쌘건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눈감고 쉬고있던 카린도 눈을 슬쩍 뜨고 에리나를 쳐다봤고, 에이에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에리나를 바라봤다.
"에리나? 괜찮아? 몸이 뜨거운데...."
"아흣...!"
에이에이가 에리나에게 손을 대자, 그녀는 음란한 신음 소리를 흘리며 몸을 비틀었다. 카린이 몸을 일으켰다. 에이에이가 당황한 얼굴로 에리나를 바라봤다. 에리나는 나를 슬쩍 노려봤다.
아무래도 내가 뭔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나말곤 그럴 사람이 없긴 하지, 하지만 이 이상 뭔가 따지진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에이에이의 손을 잡더니 벌떡 일어났다.
"에, 에리나?"
"따라오거라."
에리나는 그렇게 에이에이를 데리고 방으로 사라졌다. 귀신같이 화장실로 안쓴 방을 골라가는 걸 보면 아직 제정신이긴 한듯 했다. 그리고.
"자, 잠깐만 에리나...잠깐....! 아흑....이런건...너무...!"
"그, 그만....하윽.....잠깐만...너무 격렬..아아...이런건...!"
"아항...아앙...! 하응....으응...! 미안...미안해...에리나.. 이제...한계야....! 흐읏....!“
적나라하게 음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소리만으로도 대충 둘이 뭘 하고 잇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서로 쑤셔대고 있을게 분명했다. 하지만 신음소리는 에이에이의 것만 들려오는 걸 보니 에리나는 도통 만족하지 못하는 듯 했다.
카린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돌렸다. 에이에이에 자지러지는 비명소리에 나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엇다. 나는 커진 하물을 손으로 슬쩍 내리누르며 에리나와 에이에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에이에이가 멍-. 한 표정으로 에리나에게 질질 끌려나왔다. 에리나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어...으읏....."
에이에이가 몸을 떨며 배낭 위로 몸을 던졌다. 그녀는 숨만 헐떡이며 몸을 꿈틀대고 있었다. 남자였을 때는 절륜했으니 여자였을 땐 민감한 여자가 된건가?
에리나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자신의 허벅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은근 슬쩍 옷 위로 부푼 내 성기를 과시하며 몸을 돌렸다. 에리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가 말했다.
"루시웃.... 너에게.....할 말이 있다....엘프 왕국 일이니.... 잠시...방으로...따라...오도록....."
그녀의 시선은 내 부푼 양물로 향해있었다. 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노리는 바였다.
"흐음.....음....츕....."
에리나는 내가 방으로 오자마자 나를 끌어안고 입을 맞춰댔다. 내 입을 열고 억지로 혀를 들이밀자, 나 역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천천히 에리나의 가슴을 주무르며 허리 벨트를 풀었다. 한참동안 키스를 하던 에리나가 혀를 빼내며 말했다.
"네가 수작을 부린 것이지?"
"설마요."
곱게 '미약을 탔습니다.' 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 나는 에리나에게 한 번 씩 웃어주고 다시 키스에 돌입했다. 에리나는 울퉁불퉁한 벽을 붙잡고 내 혀를 받아들였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연스럽게 받으시네요. 오늘따라 더 적극적이시고."
"네가....네가....수작을 부려서 그런게다. 으읍..."
"후....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가 던전 공략을 하러 와서 무슨 수작을 부릴거라 생각하시는거죠? 수프는 다같이 먹었잖아요. 정말 제가 수작을 부렸을까요? 공주님?"
"닥쳐라...흐응....응....네가 분명히...흣..."
"받아들이세요. 공주님. 공주님이 음란한거에요."
"아니다.... 그럴리 없다....분명히 네 수작 때문이다...."
에리나가 몸을 비틀었다. 나는 에리나의 팬티를 벗겨냈다. 이미 번들번들한 애액이 흘러넘쳐서 허벅지까지 적시고 있었다. 내가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에리나가 신음을 흘렸다.
"햐응!"
"쉿."
에리나는 자기가 소리를 지르고도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에이에이가 들어선 안된다. 에이에이가 들을 지도 모른다. 이 사실이 에리나의 쾌감을 더욱 자극하는 듯 했다. 그녀는 다리를 살짝 벌린 채 내 손길을 갈구고하고 있었다. 나는 균열 틈으로 천천히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그녀의 몸을 유린했다.
내 손가락에 맞춰서 에리나는 몸을 비틀며 고개를 흔들었다. 미약의 효과 때문인지 그녀는 쾌감에 허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소리를 지르면 안되기에, 그녀는 손을 애써 입을 틀어막고 있을 뿐이었다.
"공주님. 그냥 인정하세요. 용사님에게 만족하지 못했잖아요."
옷도 벗겨지지 않았다. 옷을 벗긴 흔적도 없다. 에리나가 에이에이를 만진 순간, 에이에이는 낯선 쾌감에 잠식되어 한번에 자지러진게 틀림 없었다.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간 시간은 길어야 3분. 에리나가 3분 안에 만족할 수 있을리 없지만, 여자로서는 처음 쾌감을 맛보는 에이에이에겐 이야기가 달랐다.
"으읍....읍....."
에리나가 입을 막은 채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의 보지는 나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분홍빛 균열이 잔뜩 흥분하여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다리를 들어올렸다. 엘프인 에리나의 몸은 더없이 가벼웠다. 벽을 지지대 삼아서 그녀를 들어올리니 에리나가 두려운 듯 기쁜듯한 눈빛을 보냈다.
기대를 한다면 그에 응해줘야 하는 법. 나는 단숨에 에리나의 중심부를 꿰뚫었다.
"으으으읍...! 으읍...! 끄으으으으.....!"
에리나가 허리를 들썩이며 순간적으로 눈을 까뒤집었다. 한동안 허리를 벌벌 떨면서 경련하던 그녀는 겨우 정신을 다잡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빨갛다 못해 터져버릴듯한 얼굴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만족감과 쾌감, 그리고 죄책감이 어우러져 있었다.
나는 허리를 크게 빼고 단숨에 그녀에게 다시 집어넣었다. 에리나는 그 몸짓에 맘춰 허리를 흔들며 교성아닌 교성을 질러댔다.
"으읍..! 읍! 으읍! 으으읍...!"
에리나는 최선을 다해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신음 소리가 새어나갈까봐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참아낸다고 해서 쾌감의 크기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또한 입을 틀어막는다고 소리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에리나는 입을 틀어막고 있을 뿐 신음 소리를 적나라하게 울리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껏 허리를 부딪히고 있었다. 오늘 내 포지션은 레즈 커플에 난입한 금발 거근 양아치다. 커플 중 한 명의 허리를 푹푹 쑤시면서 NTR을 즐기는 양아치인것이다. 나는 에리나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있는 힘껏 그녀를 들어올렸다.
"으읍?!"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나는 그녀의 몸체를 오나홀처럼 이리저리 흔들며 내 자지에 내려꽂기 시작했다. 아주 깊숙한 중심부까지 꿰뚫리는 경험은 그녀에게도 아주 신선한 것이었음에 틀림 없었다.
"으으읍! 끄읍! 끕! 으읍! 흡! 으읍! 아읍!으으...아응..!"
에리나가 슬슬 입을 틀어막은 손을 풀며 신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신음 소리가 방 안을 울리고 있었다. 이 소리는 백프로 들린다. 이 소리를 에이에이나 카린이 못들을리 없었다. 애초에 에이에이가 바보가 아니라면 그 순간에 눈치를 챘을 터 였다. 에리나가 나를 부른 순간, 에이에이는 이미 사태를 파악했을거다.
하지만 나는 아까까지의 나와 달랐다. 아까 전의 에이에이는 내 피지컬로 이기기 힘든 상대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 당장 에이에이가 나에게 싸움을 건다고 해도 나한테는 성검이 있었다. 에이에이가 이 사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에게 싸움을 건다면, 난 에이에이에게 성검의 힘을 맛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
히로인이 한 명 줄어드는 건 아쉽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정정당당한 승부에서 진거니까.
"제 자지가 좋은거죠 그렇죠?"
"헤응! 으응! 아응! 응! 하응! 조, 좋아...! 깊....깊어어어!"
에리나가 소리를 지르며 나를 와락 껴안았다. 보지가 꾸욱꾸욱 내 좆을 조여오고 있었다. 내가 에이에이의 이름을 언급하거나 바람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줄 때 마다, 그녀는 온몸을 떨면서 배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에리나 이 년. 의외로 거짓말하는 거에 쾌감을 느끼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허리를 흔들며 그녀를 더욱 벽에 밀어붙였다. 에리나는 침을 질질 흘리며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이 동굴 천장 어딘가에 있는 천국을 찾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흐리멍텅한 고개를 내게 돌리고 나는 다시 키스했다.
"으읍...! 흡! 하읍! 으읍...! 으응!"
에리나의 신음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칼부림에서 자신이 생겼다 해도 진짜로 나는 건 좀 곤란했다. 나는 열심히 허리를 놀리며 다시 입을 뗐다. 에리나가 혀를 쭉내민채 역으로 내게 키스를 요구해왔다.
"하으.....츕...츄릅....츕....."
에리나는 내 혀가 마치 과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빨아대며 타액을 교환했다. 내 입고 에리나의 침으로 번들거렸고, 내 상의는 에리나가 억지로 끌어당기는 통에 잔뜩 구겨져 있었다.
에리나의 흰 피부는 내가 붙잡은 모양대로 손자국이 나 있었다. 가슴도 거칠게 벗겨서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그 음란한 자국을 가릴생각도 하지 않은 채 내게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흐응...! 좋아...! 좋아! 좋아아아앗...!"
"공주님. 용사님과 저 중에 누구 자지가 더 좋은가요?"
"그...흐응...몰라....항....몰라아.....!"
"모른다뇨? 알고 계시잖아요? 공주님이 제게 이걸 원했잖아요?"
"허읏....으읏...응.....아응...앙...아앙...!"
나는 움직이는 걸 멈췄다. 쾌감에 끄트머리에서, 내 옷깃을 붙잡고 몸을 비틀던 에리나가 눈물이 고인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다시 물었다.
"공주님. 공주님이 원하시는 게 뭐죠?"
"허으....빠, 빨리....움직...여라....루시웃..."
"뭘 말인가요 공주님?"
"네.....네....그걸....움직이란 말이다....흐읏....."
"뭘 말인가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나는 허리를 움찍움찔 감질나게 조금씩 움직였다. 슬쩍슬쩍 질벽을 내리누르자 에리나의 얼굴은 점점 쾌감에 미쳐 안달이 난듯 했다.
"....지."
"네?"
"네.....자지를 빨리....움직여...주면....좋겠다...."
"그렇군요."
"히윽..! 하윽! 흑! 으응! 아앙!"
나는 다시 허리를 움직여 그녀의 보지를 푹푹 쑤시기 시작했다. 살과 살이 맞물리면서 찐득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소리를 덮을만큼 큰 소리로 에리나가 신음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정도 소리면 슬슬 에이에이가 나를 뒤에서 쑤실 것 같아서 슬쩍 슬쩍 뒤를 신경써야만 했다.
다행이 뒤에 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히 뒤에서 서늘한 감각을 느낀 것 같았는 데 기분 탓인듯 했다. 나는 허리를 힘차게 움직여 에리나의 깊숙한 곳까지 내 좆을 찔러넣었다.
"으으으으으응!!"
에리나가 허리를 튕기며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쾌감에 북밭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렸다. 헐떡이며 내뿐는 단숨이 내 얼굴에 닿으며, 그녀의 쾌감을 짐작케 해주고 있었다. 나는 에리나가 질벽을 쪼이는 것에 맞춰 힘차게 그녀의 몸 안에 사정했다.
에리나는 다리를 움찔움찔 떨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에리나의 몸에서 내 좆을 빼냈다. 에리나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숨을 내쉬고 있었다. 에리나는 이걸로 만족한 것 같았지만, 나는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
수도로 오는 동안 물을 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제가 숙소에서 딸치고 있으면 모양새가 그러니까. 애초에 나 역시 에리나한테 물을 뺄 생각으로 온 참이었다. 에리나는 내가 자신의 얼굴에 성기를 가져다대자 멍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빨아주세요."
".....미친 놈 같으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리나는 입으로 내 성기를 머금었다. 이미 몇번이나 해봤으니 그녀의 펠라는 제법 능숙했다. 나는 허리를 천천히 앞뒤로 움직이며 그녀의 애무를 즐기기 시작했다. 나는 에리나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물었다.
"용사님이 다 듣지 않았을까요?"
"흐릅....츕.....그....그건...."
정말 대책없이 저지르고 본 걸까. 에리나의 눈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나는 그런 에리나의 입에 다시 자리를 물리고 열심히 흔들었다. 에리나는 고민하면서도 내 좆을 열심히 애무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허리를 움직였을까 나는 다시 한 번 사정했다.
"으읏....."
에리나는 입으로 내 정액을 전부 받아내고 바닥에 뱉어냈다. 나는 내 몸과 에리나의 몸을 클린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옷을 다시 입었다. 에리나는 어색한 자세로 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카린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들었구나. 그리고 에이에이는 구석에서 귀를 틀어막고 웅크려있었다.
"아, 아아....."
에리나가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찢어지는 지 그에게 다가갔다. 에이에이는 반쯤 울면서 입술을 악물고 있었다. 에리나가 그녀에게 손을 대자, 에이에이는 마치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에리나는 보더니 눈물을 닦아내고 씩 웃었다.
"이야기는.... 다 끝났어?"
천사네. 천사야. 호구 새끼.
분위기가 불편하다. 너무나도 불편했다. 카린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있었고, 에리나는 에이에이 옆에서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에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차라리 눈깔이 돌아서 나를 쑤시려 했으면 죽여버리기라도 하겠는데, 뭔가 아주 나쁜 짓을 당한 사람처럼 저러고 있으니 마음이 찝찝했다.
꼭 내가 나쁜 짓 한거 같잖아.
우리는 그렇게 다시 계단을 올라서 문 앞에 당도했다. 골렘은 여전히 출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칼부림을 하든 승부를 내든 일단 나가서 해야할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이 문을 열고 나갈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부숴보죠."
내가 말했다. 에이에이는 그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마치 교통 안내 인형이 된듯 굳은 움직임에 내가 다시 한 번 에이에이의 이름을 불렀다.
"용사님?"
"아! 네. 네. 뭐라고 하셨죠?"
"이걸 부수자구요."
나는 골렘이 막고있는 문을 가리켰다. 내가 만지고 있는 부분은 골렘의 어디일까? 엉덩이? 등? 나는 매끈한 골렘의 표면을 만지작거렸다. 카린과 에이에이가 칼을 뽑아들었다. 나 역시 메이스를 꺼내들었다. 내가 메이스를 꺼내든 모습에 카린이 물었다.
"성검은 안쓰십니까?"
"검은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래도 성검으로 때려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뭔가 성검과 특별한 작용을 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방금 전에 성검의 상태창을 확인했으므로 그딴 기능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지만, 이걸 말로 설명하기는 참으로 곤란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카린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칼 자체는 잘들었기 때문에 돌도 썰어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단단한 골렘의 표면에 칼을 가져다댔다. 역시 명검이라 그런걸까. 날부분과 골렘이 서로 맞닿자 골렘이 마치 두부처럼 슥 베였다. 만질때는 철을 방불케하는 단단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게 검이 명검이라 그런건가? 나는 칼날이 돌에 박히는 걸 보고 더욱 더 깊게 밀어넣어 보았다.
"끄아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엄청난 크기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나를 비롯한 일행들이 전부 귀를 틀어막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동굴이 일시적으로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눈 앞에 상태창이 하나 떠올랐다.
- 특성 정당한 대가의 영향으로 메가 골렘이 즉사합니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 즉사해? 씨발 사람만 된다면서. 골렘이 사람이야?
하지만 나는 그렇게 따지고들 시간이 없었다. 골렘이 정말 허물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엇다. 단단한 철로 만들어졌던 골렘이 마치 슬라임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우리의 눈앞에 7층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골렘은 흐물흐물하게 녹아서 바닥에 넓게 퍼져있었다. 그리고 골렘이 흘린 진액을 바닥이 끝없이 흡수하고 있었다.
"이건....."
카린이 입을 막으며 천천히 골렘의 잔해쪽으로 다가갔다. 거대하게 부풀었던 골렘의 몸체가 차츰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팔다리가 분명치 않게 비대했던 골렘은 점점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사람. 그래 이건 사람이었다. 나는 상태창을 불렀다.
* 죽은 자의 상태창은 확인 할 수 없습니다.
씨발. 그랬지. 쭉쭉 줄어들던 골렘은 마침내 어느 사내의 형상을 갖춘 채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등에는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카린은 그 마법진을 한번 쓸어보았다. 마법진의 아래쪽에는 방금 내가 낸 것으로 보이는 칼자국이 깊게 나있었다.
"마법진이군요. 아마, 누군가 마법을 통해 골렘으로 변신시킨 것 같습니다."
"골렘으로 변신?"
"네. 아마도 이게 고대인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게 맞을겁니다. 고대에는 죄인들의 자아를 유지한채 억지로 몸을 골렘으로 변형하는 마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존나 끔찍한 마법이었다. 그 말대로면 이 새끼는 제정신인 상태로 지하 7층에서 지금까지 봉인되어 있었다는 말이었다. 언제올지도 모르는 성검을 찾는 용사를 기다리는 채로. 기약없이 죽을수도 잠들수도 없이 계속.
나는 여기서 다시 의문이 들었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봉인한게 성검이 맞나? 성검이면 왕궁 지하 같은 곳에 보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이런 던전에 보관했지? 그것도 이런 믿을 수 없는 죄인 새끼들을 써서. 카린은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카린씨? 칼은 왜?"
"마법진을 가져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시체를 들고 올라갈순 없으니 등가죽을 벗겨서 마법진만 가져가서 연구하는 게 좋아보입니다."
".....위에 병사들이 있으니 병사들에게 인계하는 건 어떨까요?"
"그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카린의 표정이 묘하게 아쉬워 보였다. 이 년 보아하니 계속 범죄자들 가죽 벗기다 보니 거기에 맛들린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허리춤에 가죽벗기는 단도를 차고 다닐리가 없었다. 감자칼에 단도까지 준비하다니 기사가 안됐으면 분명히 이브급의 연쇄 살인마가 됐을거다.
일단 시체는 이곳에 두기로 하고, 우리는 다시 위층을 올려보았다. 위에는 골렘이 6마리가 더 있었다. 나는 여기서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여기있는 일행들이 전부 층수를 가늠해보는 걸 보아 전부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혹시, 그....여기 방에 있던 사람들은....."
에이에이가 떨리는 손으로 최하층을 가리켰다. 최하층에 방 4개. 방마다 침대는 두개 최대로 잘 수 있는 인원은 8명. 이 던전의 골렘은 총 7개. 그렇다면 사람도 7명. 침대 수와 대충 맞는 인원. 화장실도 식량 창고도 없는 공간. 감시 병력도 없는 깨끗한 공간.
등 뒤에 마법진이 그려진 사내. 골렘으로 변신.
그들은 죄다 죽거나 사라진게 아니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 지하에 머물렀던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에리나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몸을 떨었다. 상당히 소름돋고 찝찝한 이야기였다. 에이에이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내 손에는 성검이 들려있었다. 아니, 나는 이게 솔직히 성검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 검은 여기있는 죄인들을 희망고문하기 위해 가져다놓은 검일수도 있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간단했다. 골렘들을 모조리 찔러서 해방시켜주는 것.
나는 칼날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한명씩 해방시켜주죠."
우리가 성검을 가지고 왔으니 이들이 더이상 경비 업무를 할 필요도 없었다. 호기심에 들어온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으며, 저 골렘들을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우리는 어차피 골렘들을 제거해야 했다.
후속 조사대마다 에이에이를 동반시킬수 없으니까.
나는 6층 5층 4층 계속 층을 올라가면서 골렘들의 엉덩이를 한 번씩 푹 푹 찔러줬다. 그럴 때 마다 골렘들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이 쪼그라들었다. 죽을 때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는 걸까? 해방해줘서 고맙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인사를 들을 생각도 없엇지만.
나는 골렘을 하나하나 푹푹 쑤시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원본이 사람이라면 변신해도 이 검의 효과는 먹히는 구나. 의외로 응용이 좋은 검이구나. 라고. 사람이 변신한 골렘에게 효과가 먹힌다면, 늑대인간이나 좀비 같이 원래 사람이었던 부류에게도 이 검이 먹힐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첫번째 효과가 그냥 배신 때리라고 있는 효과일줄 알았는데 의외로 범용성이 좋았다.
1층에 있는 골렘의 엉덩이를 푹 쑤셔주자, 마지막 골렘까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사람으로 변신했다. 그렇게 이 던전에는 매 층마다 깡마른 사내 7명이 쓰러져있는 미스터리 테마 방탈출 카페같은 공간으로 변신했다.
모든 사내의 등에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그들은 전부 머리를 빡빡밀고 손에는 수갑을 찼던듯 흉한 자국이 있었다. 나는 마지막 사내까지 죽은 걸 확인한 다음 대천신교 식으로 기도를 하였다. 에리나가 말했다.
"너도 죽은자를 애도할 줄 아느냐?"
"사제장이니까요."
에이에이는 그런 나와 에리나의 모습을 보고 고민에 빠진 듯 했다. 나는 사실 이 시점에서 에리나의 구라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아무리 에리나가 미친년이라도 저런 에이에이 앞에서 '아기 만드는 금술' 같은 씹소리는 안하겠지.
그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카린이 대표로 던전을 지키는 병사에게 아래층에 있는 시체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병사들이 금새 시체를 인계했다. 던전에서 있을 때는 잘 몰랐지만 이렇게 밖으로 나오니 시체들은 여기 왕국 사람들과 확실히 인상이 좀 달랐다.
시체들이 왕궁으로 떠나는 걸 보고 카린이 물었다.
"일단, 전부 왕궁으로 가시지 않겠습니까? 같이 가시면 보고와 함께 큰 보상이 있을겁니다."
일단 성검의 소유주인 나는 무조건 가야 했으나 에리나나 에이에이는 굳이 갈 이유가 없었다. 이들의 임무은 던전의 탐사가 끝이었으니까. 애초에 왕궁의 명령이나 보고에 연연할 이유도 없는 이들이기도 했고.
그래서 카린은 '큰 보상'으로 이들을 꼬드겼다. 에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다. 나는 이제 내 왕국으로 가서 아기 만드는 비술을...."
"아, 예."
카린은 깔끔하게 말을 잘랐다. 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리나는 누가 옆에서 때리기 전에는 자기 거짓말을 굽히지 않는 타입이었다. 카린은 이미 에리나를 완벽한 걸레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던전에서 그 사건 이후 아주 차가운 시선으로 에리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카린은 동정하는 눈빛으로 에이에이를 쳐다봤다. 그녀는 말했다.
"용사님께선?"
"아, 저는...."
"물론 에이에이는 나랑 같이 아힐데른으로....."
에이에이가 에리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에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이에이를 바라봤다. 나도 카린도 무의식중에 무기로 손을 뻗었다. 당연히 에이에이가 에리나를 때릴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이에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에리나. 용서할게."
"뭐, 뭣?"
"내가 여자라서, 만족하지 못하는 거잖아? 그렇지?"
"그, 그건....."
에리나가 할말을 찾아서 눈을 굴렸다. 하지만 할 말이 있을리 없었다. 에이에이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날 사랑하지 에리나?"
"다, 당연한 소리다. 난 항상 너만을....!"
에이에이가 에리나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남자가 되서 돌아올게. 반드시."
그리곤 에리나의 볼에 입을 맞추곤 숲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카린은 더욱 더 눈을 가늘게 뜬 채 에리나를 쳐다봤다. 에리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에이에이가 사라진 숲을 보며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돌아가기 전에 에리나 한 번 더 따먹어야지.
이른 아침 영주 집무실에 이브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벌써 시에리는 서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영주 부인으로서 입어야하는 드레스가 매우 불편했다. 발을 가려주기 때문에 맨발로 다녀도 된다는 점은 좋았지만, 치렁치렁한 옷은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안녕하세요."
시에리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이브에게 인사했다. 그녀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은 없었으나 어색한 기운은 한껏 감돌고 있었다. 이브는 손을 흔들며 씩 웃어보였다.
"안녕."
그 웃음에 시에리는 살짝 몸을 떨었지만 그래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브의 눈을 슬쩍 피했다. 이브는 그대로 집무실 의자에 앉았고 시에리는 서류를 가져다둔 채 옆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오늘부터 이브는 영주 대리로서 일할 시간이었다. 페타 루시우스가 인수인계를 해주긴 했지만, 평생 해적이며 노예로 살았던 이브에겐 너무 과분한 위치였다. 여기에 더해 오늘 자신을 보조할 시에리는 매우 어색한 태도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어색하다.
이브는 이 방의 공기가 너무 답답하고 어색했다. 이브도 지금 시에리의 심정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평생 자기랑만 떡칠줄 알았던 영주님이 갑자기 외간여자를 데려온 상황이 아니던가. 거기다 그 외간 여자가 자기 상관이 된 상황이었다. 이브는 여기까지 생각해보고 시에리는 참 착한 여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기였으면 이 상황에 대해서 욕이라도 뱉었을거다. 시에리 멱살도 한 번 잡아봤을거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꼬장이라도 피웠을게 분명했다.
"음.... 오, 오늘 뭐해야 돼?"
하지만 시에리는 그러지 않았다. 시에리가 너무 착하고 얌전하게 굴고 있으니 이브로서도 막나가기가 껄끄러웠다. 이브는 서류를 정리하면서 시에리에게 물었다. 영주의 기본적인 스케줄 표는 아이라와 시에리가 들고 있었는데, 오늘 아이라는 다른 일이 있어서 시에리가 그 스케줄 표를 전담 받았다. 시에리는 들고있던 수첩을 펼치며 말했다.
"오늘은 영지 시찰이랑, 결재 서류 정리가 있습니다."
"영지 시찰?"
"네. 영주님이 이건 꼭 넣으라고 하셨어요."
"아니 잠깐만, 나보고 영지 시찰을 하라고? 괜찮은 거 맞아?"
이브가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영주가 인정한 대리인이라도 사람들의 시선은 달갑지 않을게 분명했다. 이 동네에서 인어는 차별받는 수준이 아니라 사람 취급을 못받았다. 그런 인어의 혼혈이라고 하면, 서부나 동부 숲지대에서 사는 아인종과 비슷한 취급이었다.
노예로 대우하기 딱좋은 정도. 아니면 먹거나 요리에 쓰기 좋으며 마법 실험 재료로 딱 쓰기 좋은 샌드백.
그런데 루시우스는 그런 이브에게 영지 시찰을 나가라고 한것이다. 이브는 그 단어에 묘한 거부감이 들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 정말 해도 되는 건가? 지금 이브가 느끼는 감정은 마치 부모님이 갑자기 지갑을 통째로 넘겨줬을 때의 심정과 비슷했다. 정말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가? 정말 괜찮은 건가?
시에리가 눈을 깜빡거리며 이브를 쳐다봤다. 이브는 불안한 얼굴로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패악질을 부리는 것과 권력과 책임이 따르는 일을 하는 건 조금 차이가 있었으니까.
"진짜, 진짜 괜찮아? 씨발 난리나도 책임 못진다?"
이브는 그래서 다시 한 번 더 시에리의 의사를 물었다. 시에리도 사실 지금 이브를 정말 시찰에 내보내도 될지 걱정하고 있었다. 페타 루시우스가 좋은 영주라서 사람들이 결혼 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 뿐이지 사람들이 인어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진 건 아니었으니까.
특히 범죄자 출신 인어라면 그 인식은 시궁창과 다를게 없었다. 이브에 대한 편견을 벗어달라고 외치기엔 이브를 둘러싼 소문들은 사실이었고, 사실이라고 믿고싶지 않을 만큼 잔혹했다. 하지만 결국 시에리도 이 영주의 말을 따르는 사람에 불과했다. 시에리 입장에서는 루시우스가 시찰을 지시했다면 반드시 시찰을 해야했다.
".....그래도.....그....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씨발."
이브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루시우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지시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자길 놀리려는 건 아닐테고, 대체 무슨 생각일까? 대충 생각해보면, 영지 사람들과 친해져보라고 제안한 것일텐데, 어떻게 생각해도 불행한 미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를테면 도발을 자행한 영지민에게 화가나서 이브가 칼부림을 하거나, 이브와 영지민 사이에 시비가 붙어서 영지민이 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브는 찝찝함을 드러내며 시에리는 시찰을 하기로 했다. 로빈이 호위를 위해 기사들을 붙여주겠다고 했지만 이브가 거부했다. 이 동네 기사라고 해도 본인이 더 강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브는 은연중에 누군가 자신에게 달려들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잡다한 뒷말이 안나오게 만들기 위해선 무력 시위를 하는 게 아주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브는 선원들이 불만을 터뜨릴 때도 선원 중 한 명의 목을 뽑아버리는 묘기를 통해 입을 다물게한 전적이 있었다.
이브는 신발을 구겨신고 외출용 정복으로 갈아입은 뒤 시에리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드레스도 벗어버릴까 했지만, 기껏 입으라고 준 업무용 정복이었으니 일단 입고 나가기로 했다. 아침부터 영지는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 번 두들겨맞은 소작농들은 매우 근면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고 길거리에는 아침부터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이브와 시에리가 마을 여기저기를 천천히 돌아보고 있었다.
"아이고, 좋은 아침입니다. 수녀님."
"네......아, 여기 영주 부인이신 페타 이브님께 먼저 인사를 드리셔야 해요."
"아, 그렇습니까.... 거, 안녕하십니까."
엎드려 절받기라는 게 이런것일까. 이브는 시에리가 강권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인사하는 영지민들에게 약간의 짜증을 느꼈다. 노골적인 경계와 차별. 이브의 피부에 와닿는 건 지난 몇년간 꾸준히 자신이 목도해왔던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다 족쳐버렸을텐데, 기껏 루시우스가 잘 닦아놓은 영지에서 그런 깽판을 치기는 조금 찔렸다.
"씨발."
"말을 가려서 해야 돼요. 이브님."
"그냥 이브라고 불러. 너나 나나 우리 신랑 마누라인데."
"그, 그건....그러니까 그....."
시에리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횡설수설했다. 이브는 그 표정을 보고 씩 웃으며 물었다.
"왜. 부끄러워? 응? 우리 신랑이랑 섹스하니까 어땠냐? 존나 잘하지?"
"아, 아으....그, 그만 해주세요. 그, 그런 외설스러운 이야기는...."
"그래서, 좋았어?"
".....네."
시에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수치심에 빨갛게 물든 얼굴을 보니 이브는 그나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루시우스가 가끔 시에리를 놀리는 걸 보고 왜 저러나 싶었는데, 직접 해보니 재밌었다. 이브는 기분좋게 웃으며 다시 걸어나갔다. 갑작스럽게 돌변한 이브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흠칫, 두려움에 떨었다.
이브는 시에리의 등을 툭툭 치며 앞으로 계속 걸어나갔다. 한 번 웃고나니까 영지민들이 뭐라고 말하든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이브는 다시 시에리에게 물었다.
"넌 근데 우리 신랑 뭘 보고 반했냐?"
"그..... 제가 어릴 적에 대천신교 수도회에서 수행을 했는데 거기서 처음 만났어요."
"그래? 엄청 오래됐네."
"네. 그래서 거기서도 엄청 재밌게 놀고 그랬거든요. 그....잘생겼고, 착했으니까."
"그 때 부터 좋아했구나. 우리 신랑 씨발 어릴 때 부터 꾼이었네."
"그, 그런 생각으로 저랑 놀아주신게 아닐거에요."
시에리가 루시우스의 인망을 변호했다. 물론 그의 밑바닥까지 본 이브 입장에서는 씨알도 안먹히는 소리였다. 지금까지 본 루시우스의 인성에 따르자면 수도회에서도 이미 한 명 정도는 손댔을게 분명했으니까.
"정말 좋은 분이었어요. 그.... 최근에는 저를 구해주기도 하셨구요."
"구해줘? 뭐에서?"
"제가 원래 여기 영지가 아니라 옆 영지 수도원에서 회계 담당을 하고 있었거든요. 거기 영주가 좀.... 과하게 달라붙었는데, 영주님이 저를 이 쪽으로 옮겨주셨어요."
"뭐야. 우리 신랑. 너한테 꽂혀있었잖아."
"그, 그런가요?"
시에리가 얼굴을 붉히며 헤헤 웃었다. 하지만 시에리는 그러다가도 결국 정실 부인으로 이브를 택했다는 점을 떠올리고 급격하게 표정을 굳혔다. 이브는 시에리가 하는 생각을 대충 알 것 같았다.
"난 원래 죽었어야 됐는데, 우리 신랑이 살려준거야. 웃기지? 살인마에 여자들도 막 강간하고 다니는 개년이었는데. 그런 사람을 부인으로 해주겠대. 진짜 이상하지 않냐?"
시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동의해도 이상했고 아니라고 말해도 이상했으니까. 이브는 떠듬떠듬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그.... 내가 하고싶은 말이 뭐냐면..... 나는 네가 뭐 정실이 누구냐 그런 거 따진다면 너한테 다 양보할 생각이라고. 응? 무슨 말인지 알지? 어차피 서로 서로 계속 얼굴보고 살건데 그런 좆도 아닌 걸로 싸우면 좀 그렇잖아?"
"그, 그렇죠."
내심 이브를 질투했던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시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한듯,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운 듯 우물거리는 입모양을 보고 이브가 말했다."그리고 너랑 나랑 사이좋게 지내면 신랑도 좋아할거라고. 응? 우리 둘이 같이 침대로 가면 얼마나 좋아하겠어?"
"여, 영주님은 그런 음탕한 분이 아니세요."
"지랄한다 진짜."
이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시에리의 변호를 물리쳤다.
"야. 인어한테 박는 순간 이미 끝난거야 알아?"
"그, 그러니까 그런 음탕한 이야기는....."
멀리서 병사가 한 명 달려오고 있었다. 이 주제로 더 이야기하려던 이브는 입을 다물고 그 쪽을 바라봤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병사는 아주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오더니 숨을 몰아쉬며 경례했다. 대충 인사를 받아준 뒤 이브는 짐짓 근엄한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무, 무슨 일이지?"
"여, 영주 부인께 보고드립니다. 지금 영지 경계면에서 아무르 영지의 보좌관이 '영지 대리인'으로 왔다면서 자신을 빨리 들여보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전혀 들은 바 없는 이야기인지라, 그 어떻게 해야하는 지...."
"뭔 개소리야? 영지 대리인은 나잖아. 아무도 뭐라 안했었는데 이제와서 왜 지랄이야?"
"아, 그러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그 쪽에서는 빨리 책임자를 불러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어서, 그.... 아무튼 빨리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지 부임 첫날부터 귀찮은 일이 생겼다. 이브와 시에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눈을 찌푸렸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페타 영지는 크게 3곳의 영지와 인접하고 있었다. 한 곳은 이전에 루시우스가 머리를 깨버렸던 델몬 영지. 그리고 하나는 현재 몬스터의 습격을 직격으로 받아서 거의 호흡기만 붙여둔 상태인 카이던 영지. 그리고 현재 페타 영지에 '영지 대리인'을 보냈다며 난리치고 있는 아무르 영지.
아무르 영지 역시 현재 몬스터 습격으로 인한 후유증에서 채 벗어나지 못해 사정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루시우스의 영지에다가 구호를 요청하고 있었는데, 이런 곳에서 대리인을 보냈다는 말에 시에리는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영지 대리인은 귀족만 가능하다며. 영주 말고 영지 대리인을 세울 수 있는 귀족이 있어?"
"보좌관은 귀족일수도 있어요."
경계면으로 향하는 길, 이브의 질문에 시에리가 답했다.
"우리 페타 영지는 저나 아이라가 보좌관을 대신해서 업무를 도와드리고 있지만, 다른 영지들은 유착관계가 있어서 귀족 자제들이 영주 업무를 미리 체험하게끔 서로 보좌관으로 보내곤 하거든요. 그래서 보좌관이 다른 가문 귀족 영식이라면 우리 영지에 대리인으로 보낼 수가 있어요."
"영지 대리인이 되면 뭐가 좋은데?"
"아마도....."
시에리가 말끝을 흐렸다. 아무르 영지는 지금껏 꾸준히 페타 영지에 지원을 요구하고 있었다. 만일 아무르 영지의 보좌관이 영주 대리를 맡는다면, 페타 영지의 예산을 동원해서 아무르 영지에 지원하게끔 할 수도 있었다. 시에리가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아마, 우리 영지의 예산을 노리는 것 같아요. 지금 아무르 영지가 많이 어렵거든요."
"아아, 대리인이 된 동안에는 어느 정도 예산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어떻게든 대리인 권한을 얻어보겠단거구나."
"네. 어차피 우리 영주님은 사제장이시니까, 구호 목적에 쓰인 예산을 돌려달라고 하실수는 없을거에요."
"의외네. 너라면 당연히 아무르 영지를 도와야한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영주님이 허가하신 적 없는 일이니까요."
시에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시에리의 마음 속에서는 대천신교의 교리보다 페타 루시우스의 명령이 더 우선시되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브는 발을 불편하게 만드는 신발 때문에 짜증이 났다.인상을 찌푸린 이브가 경계면에 도착 했을 때, 그곳에는 한 사내가 병사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호위기사로 보이는 기사가 두 명 정도 서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영지의 대리인이 되어주겠다지 않느냐! 나는 저 북부 루비콘 대공의 아들 루비콘 콘드릭스다! 내 신원을 증명하기 위해 가문의 문장도 가지고 왔으며 아무르 영주님의 친서도 가지고 왔다."
"아니, 그러니까 저희는 아무 이야기도 못들었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콘드릭스 보좌관님. 저희가 멋대로 이렇게 외부 귀족을 들이면 나중에 영주님이 경을 치실겁니다."
"네놈들은 사제장이 무서우냐 저 북부의 대공이신 우리 아버지가 무서우냐?"
사내는 자신을 루비콘 콘드릭스라고 소개했다. 동시의 자신이 북부 대공의 아들이며, 아무르 영지와 루비콘 가문의 문장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줄것이라고 말했다. 가까이 걸어가던 중에 이브가 시에리에게 물었다.
"루비콘 가문이 어디야?"
"드래곤 산맥 바로 아래있는 가문이에요. 북부에서 엄청 영향력있는 가문으로 이름이 높죠."
"너 되게 똑똑하다?"
"대천신교에 제일 기부를 많이하는 가문 중 하나거든요. 제가 수도회에서 수련할 때 루비콘 대공님도 한 번 뵌 적 있었어요. 되게 좋으신 분이었는데......"
시에리가 말끝을 흐리며 루비콘 대공의 아들 루비콘 콘드릭스를 바라봤다. 이브는 시에리가 흐린 말미에 어떤 말이 들어갈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어디서 저런 망나니가 왔나 싶었겠지. 루시우스한테 대리인에 대한 언질을 줬다면 이브나 시에리가 몰랐을리가 없었다.
루시우스가 그런걸 깜빡할 성격도 아니었고, 애초에 대리인으로 이브를 지정하고 나간 상태였으니까. 영지 법 상으로도 영주 부재 시에 제 1의 우선권을 가지는 건 영주의 배우자였다.
"에헴."
이브는 헛기침을 하여 시선을 끌었다. 경비병들은 이브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해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이브의 뒤에서 시에리가 '영주부인'이라고 입모양을 해주고 나서야 경비병들은 황급히 일어나서 이브에게 인사했다.
"오, 오셨습니까 부인!"
"어, 그래....요. 수고 해....요?"
이브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평소였으면 '고생한다 씨발놈들아.'라고 말했을텐데, 차마 영주 부인이라는 직함을 달고 그런 말을 할수는 없었다. 팔자에도 없는 가식을 떨고 있으니 몸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콘드릭스는 이브를 훑어보더니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저는 신랑의 아내. 이브라고 합니다."
"뭐?"
"아니. 그러니까, 그.... 뭐시기. 페타 루시우스의 아내. 이브라고 합니다."
이브의 얼굴이 빨개졌다. 시에리가 얼굴을 가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경비병들이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콘드릭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아, 알고있소. 페타 루시우스가 물고기 작부를 부인으로 삼았다는 이야기."
"뭐, 뭐?"
콘드릭스의 폭탄 발언에 경비병들이 일제히 얼음이 되었다. 시에리도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고 이브가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아닌가? 소문이 그러하던데, 두 발로 걷는 걸 보니 인어가 아닌거 같기도 하고. 혹시 사실이 아니라면 사과하지."
정중한지 싸가지가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놈이었다. 이브는 욕을 쏟아뱉고 싶은 걸 참고 말했다.
"아, 네. 오해가 있으시...네요. 저는 인어 혼혈인.... 이브라고 합니다. 큰 범죄를 저질렀으나 우리 신랑의 은총으로 사면받고 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뻔뻔한 종자다 이것이로군."
이브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면 욕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시에리가 안절부절한 얼굴로 이브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아무르 영지는 별거 아니었지만 루비콘 대공은 북부를 호령하는 대귀족이었다. 지금 이브가 그 아들을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리면 어디까지 화가 미칠지 알 수 없었다.
"영지 법에 따르자면 영주 대리인은 귀족이나 이에 상응하는 직책을 가진 자가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부인에게 우선권이....."
"부인? 인어 혼혈에게 법적인 권한이 있을것 같나? 하나만 묻지 그대가 이 왕국의 국민임을 증명하는 패는 가지고 있나?"
있을리 없었다. 이브는 엄연히 따지자면 탈주 노예 신분이었으니까. 시에리가 이브를 변호했다.
"이미 페타 영지는 아힐데른 왕국의 에리나 공주님께서 영지 대리인을 맡으신 바 있습니다. 인간이냐 아니냐, 왕국의 국민이냐 아니냐는 영지 대리인의 자격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엘프 왕국은 드워프 왕국과 마찬가지로 우리 왕국과 상호 협력조약을 맺은 상태다. 우리가 언제 인어랑 상호 협력조약을 맺었나? 인어는 고기와 가죽이 팔리는 몬스터에 불과하다. 몬스터를 대리인으로 세우는 걸 이웃 영지에서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심지어 대량 살인과 성범죄 전과가 있는 몬스터를 누가 믿을 수 있겠나. 당장 권한을 내려놓고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인어."
"이런 씹....."
시에리가 다급하게 이브의 입을 틀어막았다.
"왜. 혹시 네 더러운 몸뚱이에 손이라도 댈까 두려운가? 걱정하지 마라. 난 고향에 부인이 있는 몸이다. 영지에 있는 동안 어떠한 사치도 부릴 생각없다. 그저 아무르 영지 구호에 필요한 물품들을 좀 빌릴 뿐이다. 반물고기년이 남을 돕는다는 생각을 할리가 없지."
"뭐 이 새끼야? 반물고기?"
콘드릭스는 이브가 앞으로 불쑥 튀어나오며 욕을 하자 순간 움찔했으나 이내 표정을 고치고 말했다.
"다시 말하겠다. 나는 내 이웃 영지를 잠시라도 몬스터가 맡고있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이 씨발년이!"
푸욱!
이브는 그 말에 꼭지가 돌았다. 옆에있던 경비대의 칼을 뽑더니 그대로 콘드릭스의 배를 쑤셨다. 콘드릭스는 당황한 얼굴로 배를 움켜쥔 채 무릎을 꿇었다. 호위기사들이 놀란 얼굴로 칼을 뽑고 달려왔으나 경비병들에게 막혔다.
"끄억....끄어어억....이, 이게 무슨....짓이냐...귀족을 공...격하다니..."
"이 씨발놈아! 나 영주 부인이야. 근데 씨발 영주 부인한테 반물고기? 넌 오늘 반 시체가 되서 돌아갈거다 개같은 새끼야!"
경비병도 기사도 시에리도 모두 돌발상황에 얼어붙었다. 이브는 콘드릭스의 배에서 칼을 뽑아냈다. 콘드릭스는 배를 움켜쥔 채 바닥을 구르며 피거품을 토해냈다.
"꺼흑....끄흑...."
몇바퀴 구른 콘드릭스가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는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지갑을 꺼냈다. 영롱한 빛깔을 내는 아름다운 지갑이었다.
"도, 돈은 얼마든지....줄테니...빠, 빨리...사제를....."
"이 새끼가 근데 보자보자 하니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시에리가 치료해주기 전에 이브가 다시 한 번 화를 내며 한 번 더 콘드릭스의 배때지를 갈라버렸다. 이번엔 아예 날을 세워서 배를 반으로 쪼개버린 것이었다. 콘드릭스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브를 쳐다봤다.
"이 개새끼가 내 앞에서 인어가죽 지갑을 꺼내? 이 씨발 나 꼴받으라고 일부러 그러냐? 넌 씨발 곱게 못죽을거다!"
경비병들을 물리친 호위 기사들이 달려왔다. 이브는 자신에게 칼을 뻗은 기사의 팔을 통채로 뽑아버렸다. 기사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허물어졌고, 이브는 주춤하는 다른 기사에게 달려들어서 주먹으로 투구를 후려쳤다. 투구가 움푹 패이면서 기사가 주저앉았다.
"사, 살려줘....살려줘....내가...내가...잘못했어...."
시에리가 겨우겨우 치료를 해주어서 콘드릭스는 목숨이 붙어있었다. 가늘게 숨을 쉬고 있는 그를 쳐다보며 이브가 거칠게 숨을 쉬었다. 이 감각. 아주 오랜만이었다. 이브가 웃으면서 물었다.
"너, 이름이 뭐라 그랬지?"
"코, 콘드릭스.....루비콘 콘드릭스...."
"아주 예쁜 이름이네. 인어로 태어났으면 훌륭한 인어가 됐겠어. 그거 알아? 인어는 씨발 전부 여자만 태어난다는거. 새끼야. 살고싶다 그랬지?"
"살려줘....살려줘...."
이브가 숨을 내쉬며 칼날로 콘드릭스를 가리켰다.
"지금부터 널 거세할건데. 그러고도 살아있으면 보내줄게 좆같은 새끼야."
"끼윽...그, 그만둬...그만둬...."
"이브! 그만해요! 그만! 그러다가 진짜 큰일나요!"
진짜로 콘드릭스의 바지를 벗기려던 이브를 시에리가 뜯어말렸다. 보좌관을 죽여버리면 진짜 돌이킬 수 없었다. 이브는 자신을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말리는 시에리를 쳐다보고 한숨을 쉬며 칼을 던져버렸다.
"야, 꺼져."
그리고 콘드릭스를 발로 툭툭치며 밀어냈다. 콘드릭스는 벌떡 일어나서 황급히 자신의 영지를 향해 달렸다. 몇걸음이나 달렸을까. 갑자기 꼿꼿하게 멈춰선 콘드릭스는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버렸다. 내장이 작살난 상태에서 억지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좆됐네."
이브가 중얼거렸다. 시에리는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맨바닥에 기사 두 명이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기사 중 한 명은 팔이 뽑힌 쇼크로 즉사했고 다른 한 명은 머리가 움푹 들어간 상태로 바닥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시에리의 치료로는 살릴 수 없는 정도였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루비콘 콘드릭스가 사망했다.
그 날 페타 영지는에는 세 명 분의 시체가 더 생겼다.
"씨발."
이브가 길모퉁이에 놓인 돌 위에 걸터앉은 채 욕을 뱉었다.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짜증을 냈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시에리는 이미 멘탈이 나간듯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일단 저지를 때는 속이 시원했는 데, 생각해보면 이건 대형 사고였다.
인어 혼혈 출신 영주 부인이 귀족을 찔러죽인 사건이다. 그것도 상대는 북부 대공. 이브가 느낄 때 사제장이라는 직위가 얼마나 높은 지는 체감되지 않았지만 대공쯤 되면 아주 높은 직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대공의 아들이라면 얼마나 이름을 떨치는 인간인지도 알고 있었다.
"어쩌지?"
"몰라요."
이브가 시에리에게 물었다. 시에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침울하게 앉아있었다. 시에리라고 방법을 알리 없었다. 이브가 머리카락을 비비꼬면서 짜증을 냈다. 죽여버린건 후회하지 않았다. 여기서 죽이지 않았으면 분명히 귀찮아졌을 테니까. 대리인이 되겠다며 여러모로 귀찮게 할게 분명했으니 죽여서 입다물게 하는 게 나았다.
"그냥 다 묻어버릴까? 여기 3명 말고 온 사람도 없는데."
"그러다가 조사로 걸리면 더 큰일날거에요. 이 부분은 차라리 솔직하게 밀고나가시는 게 나을거에요."
시에리가 조언했다. 어설프게 시체를 숨겨서 사건을 은폐하는 건 불가능했다. 북부 대공의 아들이 아무 말도 없이 몰래 나왔을리 없으니까. 오히려 아무르 영지에 온갖 방식으로 광고를 하고 나왔을게 분명했다.
북부 대공 정도면 마법사를 고용할수도 있었고, 이 주변에 탐문을 지시할수도 있었다. 대충 숨겼다가 역풍을 맞으면 그때는 정말 빼도박도 못했다.
"씨발. 그래도 이 새끼가 잘못한거잖아."
이브는 바닥에 널부러진 콘드릭스를 끌고오며 말했다. 영주 부인인 이브를 작부며 반물고기라는 멸칭으로 부른 시점에서 콘드릭스의 미래는 예정되어 있었다. 이브가 콘드릭스를 칼로 쑤신 순간부터 이 사건의 결말이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그래도 북부 대공의 아들이라고요. 게다가, 게다가 아무르 영지의 보좌관이기 까지한데, 어떻게하죠?"
"신랑오면 그냥 다같이 도망갈까?"
이브는 시체들을 발로 툭툭치며 물었다. 죽은 자에 대한 존중이 조금도 없는 그 모습에 시에리가 말했다.
"그래도 시체는 좀 내버려둬주세요. 이제 죽었잖아요. 그리고 도망가도 어디로 가겠어요."
"씨발 대공 아들 아니었으면 배때지 갈라서 자반 고등어로 만들었어. 그나마 시체는 온전히 보내야되니까 손 안대는 거지."
"그럼 일단 시체는 보내는 걸로 하는거죠?"
시에리는 아파오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이브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시체를 보내야 이야기가 이어졌다.
"일단 시체는 보내자. 그릭 저기서 어떻게나오나 보자. 씨발 내가 꿀릴게 뭐 있어. 남의 부인한테 작부니 반물고기니 그딴 소리 하는 건 칼맞고 싶다는 뜻 아니야?"
이브가 말했다. 이브에게도 나름대로 당위성이 있긴 했다. 원래 남의 부인을 모독하는 건 결투로 처리해야 할만큼의 중대한 문제였으니까. 콘드릭스는 이브가 사면을 받아 위축되었으니 어느 정도 강하게 나가면 쫄거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가 실수한게 있다면 이브는 어지간한 왕실 기사보다 강했고, 결투라는 말도 없이 배에 칼을 꽂아버릴만큼 거침없었으며, 성격이 매우 더러웠다는 점이었다. 이브는 콘드릭스가 죽어가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아주 조금 궁금했다.
"그건 그렇긴 한데요. 그래도....."
시에리가 말끝을 흐렸다. 대천신교 종교인의 입장에서 이브의 편을 들어선 안됐지만, 그녀가 생각해도 콘드릭스가 죽은 건 자연사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녀는 누구의 편을 들어 확실하게 말하기가 애매했다. 두 사람과 경비병은 시체를 아무르 영지로 다시 보내기로 합의한 뒤 공문을 곁들이기로 했다.
"뭐라고 쓸까."
이브가 물었다. 펜을 든 시에리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콘드릭스가 영주의 부인에게 과도하게 무례한 발언을 하여 우발적으로 죽였다. 어때요?"
"너무 솔직하잖아. 그렇게 쓰면 내 잘못도 있어보인다?"
"하지만, 솔직하게 써야....."
"아니 내 잘못으로 끝나면 나 엄마랑 같이 삶아져서 뒤진다니까? 씨발 내가 인어 스튜 되려고 여기까지 왔어?"
"그, 그럼 어떻게 써요?"
시에리가 이브의 거친 발언에 살짝 위축된 채 물었다. 이브가 말했다.
"결투했다고 해."
"결투요?"
"씨발 너네들. 내가 결투하는 거 봤지?"
이브가 주변에 있던 경비병들에게 물었다. 시체를 수레에 담고 있던 경비병들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논리적으로 아주 말이 안되는 건 아니었다. 작부라고 모욕을 당한 이브가 결투를 신청했고, 결투 중 콘드릭스가 사망했다.
"그런데 그럼 기사들은요? 결투를 루비콘 영식이랑 했으면 기사들이 죽은게 설명이 안되잖아요."
"결투가 끝나고 날 죽이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죽였다?"
"저라면 안믿어줄거에요."
"씨발 어쩌란거야 그럼."
"그냥 충돌이 있어서 사망했다고 쓰는게 어떨까요?"
"명료하네. 누구 책임인지도 모호하고. 그렇게 하자."
그렇게 이브와 시에리는 서류를 정리했다. 시에리는 경비병을 호출해서 영지 기사 중 한 명과 병사 두명에게 시체를 이끌고 아무르 영지로 가게 했다. 시에리는 본인이 직접 가려고 했지만 이브가 뜯어말렸다. 보좌관이 죽은 문제로 아무르 영주가 꼭지가 돌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점에서였다.
"그럼 아무도 보내선 안되잖아요."
"네가 인질로 잡히거나 죽으면 내가 우리 신랑을 무슨 낯으로 보냐?"
이브가 자신이 가겠다고 우기는 시에리를 타박했다. 시에리는 루시우스를 들먹이자 금방 얌전해졌다. 그렇게 시체를 실은 수레가 기사 한 명과 병사 두 명을 데리고 아무르 영지로 향했다. 이브와 시에리는 매일같이 아무르 영지에서 어떤 반응을 할지 소식을 기다렸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아무런 소식이 없이 시간이 흘렀다. 이브는 최대한 빨리 루시우스가 돌아와주길 바라고 있었다. 시에리 역시 병사와 기사들이 상처없이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보좌관이 이례적일 정도로 개죽음을 당한 사건이니 아무르 영지의 대응이 전혀 예측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흘 째 되는 날. 영지 경계에서 드디어 보고가 들어왔다. 이브는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서 보고를 들었다. 이브에게 날아온 건 문서 하나였다. 이브는 먼저 문서를 펼쳤다.
- 아무르 영지는 인어가 사람을 죽이고 당당한 이 천인공노할 작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이 사건에 대해 정식으로 왕궁에 재판을 요청할 것이며, 대천신교에도 이 결혼에 대해 항의할 것임을 알린다.
사제장의 위세를 등에 업었다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양 내키는대로 활동하는 방종한 인어는 그 더러운 지느러미가 잘리고 끓는 기름에 쳐넣어져 죽을 것이다. 그리고 페타 영지는 루비콘 콘드릭스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 마땅한 대가를 치뤄야 할 것이다.
우리의 각오를 표현하기 위해 그대에게 소정의 선물을 보낸다.
"씨발."
이브는 종이를 보자마자 찢어버렸다. 결국엔 이브 잘못이라는 뜻이었다. 이브 입장에선 매우 억울할 뿐이었다.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대리인을 보낸 것도 그 쪽이고, 먼저 모욕을 한 것도 그 쪽이었다.
하지만 아무르 영지는 이 모든게 이브의 잘못이라고 매도하고 있었다. 이브는 이래서 인간들의 정치판이 싫었다. 노예 시장에서 살 때도 그랬다. 노예들은 항상 자기들끼리 파벌을 만들었다. 우두머리 한 명으로 모든 결정이 끝나는 인어들과는 너무 달랐다.
이브는 시체들과 같이 갔던 병사들을 찾았다. 이딴 선전포고에 가까운 문서를 보냈으니 걔들을 무사히 돌려보냈을리 없었다.
"병사들은?"
이브의 질문에 시에리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부 두들겨맞아서 빈사 상태로 돌아왔어요. 일단 목숨은 건졌지만, 한동안 치료를 해야 한다고 해요."
이브가 욕을 하려던 걸 가까스로 참았다. 아이라가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이브는 인상을 팍구기며 중얼거렸다.
"개새끼들."
이브가 욕설을 뱉으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일이 너무 커졌다. 이렇게 되면 돌이킬수가 없었다. 이브는 하루 빨리 루시우스가 돌아오길 기도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이 개판을 수습할 수 있을테니까.
* * *
"헤윽.....아흑...흐으....."
에리나가 다리를 벌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균열 틈새로 정액이 주르륵 새어나왔다. 혀를 쭉 내민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침실에서 일어나 에리나의 가슴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곧 영지로 귀환해야 하는데, 이브랑 시에리가 잘하고 있을까? 설마 어디서 개좆같은 사고를 친 건 아니겠지? 내가 생각했을 때, 현재 영지에 시비가 걸릴만한 요소는 없었다. 있다고 해봐야 영지 대리인 문제인데, 이 것도 어디서 억지로 밀고들어오는 건 엄연히 월권행위였기 때문에 가능성 없었다.
"에리나. 일어나요."
나는 대충 시간을 계산해보며 다시 에리나의 다리를 주물렀다. 탄력있는 허벅지가 중독될 것 같은 질감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에리나는 신음을 흘리며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나는 빳빳하게 다시 선 내 좆을 문지르며 에리나를 들어올렸다.
"아앗....."
에리나가 뭐라고 말할새도 없이 나는 에리나를 내 좆위에 앉혔다. 단숨에 중심부를 꿰뚫은 성기에, 에리나가 녹아내리는 듯한 신음성을 흘렸다. 허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내 배에 자신의 부드러운 피부를 비벼댔다. 나는 내 가슴과 에리나의 등을 밀착한 상태로 허리를 쳐올렸다.
"아흑...흐흑....윽....으윽...."
내가 움찔움찔 가볍게 허리를 튕겨주기만해도, 에리나는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며 신음을 흘렸다. 나는 에리나의 허벅지를 주무르며 다리를 더욱 넓게 벌렸다. 에리나가 혀를 쭉 내밀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내가 속삭였다.
"기분 좋죠. 에리나?"
"모, 몰라....몰라아.....흐응....으윽....."
섹스를 하면서도 나는 영지가 신경쓰였다. 이브가 영지민을 도륙내거나 영지민들이 이브가 싫다고 시위를 하는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그 잡다한 것들을 잊어버리기 위해 다시금 허리를 놀렸다.
“하윽....! 흐응...! 좋아...더...더...!”
씨발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나는 허리를 움직이며 이브를 믿기로 했다.
"천하에 음탕하기 짝이 없는 놈 같으니. 너 같은 녀석이 대천신교의 사제장으로 있으니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 것이다. 내가 그만두라고 말할 때 그만둬야 하거늘, 내 뱃속에 아이라도 잘못....."
"그런 사제랑 뒹구셨잖아요. 자기 얼굴에 침뱉기라고요."
헤어지는 날, 에리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다시 한 번 내게 욕을 하려고 했다. 나는 깔끔하게 그녀의 욕설을 차단했다. 아직까지도 자신은 깨끗하고 나쁜건 나라는 식으로 몰아가려 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그녀는 자신이 쾌감에 중독됐다는 걸 절대 인정하려들지 않는 것 같았다. 이미 에이에이에게도 공인받은 관계인데 그냥 쿨하게 오픈하면 안되려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막상 에리나가 헤벌레하고 내게 벌리면 재미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지금 정도가 딱 좋았다.
쾌감에 중독됐지만 인정하려들지 않는 저 모습. 저 정도가 꼴리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에리나가 엘프 왕국 방향으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준 다음, 나는 본격적으로 영지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에리나랑 떡친다고 하루 정도 더 소비했지만, 생각보다 던전 공략이 더 빨리 끝났기 때문에 문제될 건 없었다.
나는 너무 빨리 돌아와서 놀라는 이브와 시에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얼굴이 미소가 걸리는 걸 느꼈다. 돌아갔는데 침대에서 둘이 정분나있으면 좋겠다. 그대로 3P나 하게.
"실례합니다. 루시우스 사제장님."
수도에서 내가 떠나려는 걸 알아챈 것일까.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내 숙소의 문을 두드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급보를 전하는 것 같아서 나는 짐을 싸다 말고 그대로 돌아서서 문을 열어주었다.
왕궁의 관리가 편지 한장을 들고 내게 와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아, 그.... 그게.... 그.... 아무르 영지에서 페타 영지에 재판을 걸어서, 이 건에 대한 사실을 알려드리기 위해......"
"씹....뭐라고요?"
나는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오는 걸 참고 다시 물어야 했다. 누가 누구에게 재판을 걸어? 씨발 재판? 지금까지 기부금 다 털어서 도와줬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쳐? 나는 열이 뻗치는 걸 겨우 참아냈다. 이브가 사고를 쳐서 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것일수도 있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는 법. 이브가 사고를 쳐서 재판이 열린거라면 일단 봐달라고 도게자를 박아야 했다. 이브는 지금 사건 터뜨리면 바로 골로 가는 유리몸이었으니까.
"그게, 페타 부인이 루비콘 대공의 아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루비콘 대공과 아무르 영지에서 페타 영지에 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벌이는 중입니다."
".....누구를 죽였다고요?"
"루비콘 대공의 아들입니다."
"루비콘 대공은 북부에 사는 데 그 아들을 어떻게 우리 이브가 죽이죠? 이브가 북부까지 놀러가기라도 한건가요?"
내 영지는 남부에 있고 루비콘 대공의 땅은 북부에 있었다. 말이 남부 북부지 그 가운데에 수도가 있다는 걸 감안하면 존나 먼거리였다. 말타고 달리면 한달은 잡아야하는 거리. 근데 그 영지의 아들을 이브가 죽였다니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부두술이라도 배웠나? 대체 어떻게 죽였지?
"아, 그게 실은 아무르 영지의 아무르 영주와 루비콘 대공이 아주 친한 사이라서 이번에 차기 영주가 되기 전 기본적인 행정에 대해 익히기 위해 보좌관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루비콘 콘드릭스가 아무르 영지로 왔다고 합니다."
"네. 그렇군요. 그럼 이브가 아무르 영지로 가서 갑자기 루비콘 대공의 아들을 때려죽인건가요?"
나는 그래도 이해가 안됐다. 아무르 영주에 조용히 있는 루비콘 대공 아들이 왜 이브한테 죽지? 원래 원한 관계가 있었나? 내가 생각하는 가장 말이 되는 시나리오는 평소에 원한관계가 있던 이브가 루비콘 콘드릭스를 때려죽였다는 건데, 나도 아무르 영지 보좌관이 누군지 모르는 데 이브가 알리 없었다.
"그게, 영지 대리인 문제로 다툼을 벌였다고 합니다."
"영지 대리인이요? 아무르 영지?"
"아닙니다. 페타 영지의 대리인 문제로 다툼을 벌이다가, 루비콘 대공의 아들이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더욱 이해가되지 않았다. 씨발 왜 아무르 영지에 있던 북부 대공 아들이 내 영지에서 대리인 문제로 다투지? 대체 영지에 뭔 지랄이 일어난거지?
"대체 왜 다툰거죠? 제 영지 대리인은 페타 이브일텐데요."
"그.... 아무르 영지에서는 이제, 인어같은 몬스터가 영지 대리를 맡는 걸 용납할 수 없다고, 루비콘 대공의 아들을 대리인으로 내세우려 한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물론 아무르 영지는 내가 영지에 있는 동안 그딴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나한테 먼저 문제 소지가 될 수 있으니 루비콘 대공의 아들을 대리인으로 세우는 게 어떻냐고 제안을 했으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루비콘 대공의 아들을 믿는 게 아니라 루비콘 대공이 믿을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작에도 등장하는 인물인데 제법 카리스마있고 중후하고 멋있게 생겨서 인기가 많았다. 이 게임이 야겜이라는 점과 대공이라는 신분 때문에 드래곤 산맥 퀘스트 때말곤 동료로 들어오지 못하지만.
그런데 나한테 먼저 제안을 하는 게 아니라 이브가 혼자 있을 때를 노려서 대공이란 신분을 과시하며 들어온다? 이건 너무나 꿍꿍이가 뻔히 보이는 짓거리였다. 그 쪽에선 이브가 어버버하다가 대충 자리를 넘겨주는 걸 원했겠지. 하지만 원하는 대로 안된 모양이었다. 이브한테 뒤진걸 보니.
"그래서 왜 죽인거죠? 이브가 그냥 보자마자 싫다면서 칼침을 놨나요?"
"그게, 이제 페타 영주 부인과 당시 경계를 서던 경비병들의 증언에 따르면, 루비콘 콘드릭스가 페타 영주 부인에게 '물고기 작부', '반물고기' 같은 폭언을 했으며 이를 참고 넘기려던 영주 부인 눈 앞에서 인어가죽 지갑을 흔드는 행위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잘 죽었네요."
"네?"
관리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란거지. 남의 부인을 모독하는 건 결투 신청감이다. 그냥 모독도 아니고 물고기 작부라니. 이건 이브만 욕하는 게 아니라 나까지 물고기 작부를 부인으로 둔 미친놈이라고 욕하는 소리였다. 내가 돌아갔어도 루비콘 대공의 아들은 뚝배기가 터졌으리라.
"아니, 아닙니다."
관리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내 앞에서 더이상 루비콘 콘드릭스를 옹호했다간 본인도 그 놈을 따라갈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무르 영지에선 대체 무슨 낯짝으로 재판을 신청한거죠? 부인을 모욕한 건 죽어도 할 말 없는 행위였고, 죽었으니 할 말도 없을텐데. 거기다 제 영지에 멋대로 권위를 내세워 밀고들어오려고 한건 루비콘 대공 측에서 반성해야 될 사안 같습니다만."
"그게, 아무르 영지와 루비콘 대공 측에선 인어는 사람이 아니니. 모욕이 성립되지 않으며, 이 사건은 인어 혼혈출신 부인이 상대를 일방적으로 살해한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서....."
".....그렇군요."
머리가 지끈거렸다. 짜증나는 문제를 걸고 넘어진 것이다. 이브는 사람인가? 나는 셀루의 말이 떠올랐다. 어느 날 대포가 말을 하게 된다면, 너는 그 아이를 사람이라고 불러줄거냐고. 너가 그렇게 불러준다고 한들, 다른 사람들은 대포를 사람으로 받아들이겠냐고.
나는 영지로 돌아가겠노라 말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짐을 정리했다. 이브가 좆같은 사건에 엮였으니 최대한 빨리 영지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셀루의 말을 지워버리기 위해 중얼거렸다.
"씨발 사람이라고 다르겠냐고."
* * *
가는 길만큼 돌아가는 길도 길었다. 영지에 도착한 나는 생각보다 온건한 영지 분위기에 놀란 참이었다.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로빈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기사단원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내가 생각한 것 만큼 절망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로빈. 이브랑 시에리는?"
"아, 집무실에 있습니다."
"재판은 어떻게 됐죠? 재판관이 파견 나온다고 들었는데."
"이틀 뒤에 재판이 열릴거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렇군요. 그 사이에 별 일은 없었나요?"
"그게....."
로빈이 망설였다. 인명사고라도 난건가? 일단 최종적인 군 지휘권을 가진 내가 없으니 아무르 영지 측에서 군사적인 도발을 실행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고 로빈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무르 영지에 시체를 전달하러 간 기사 찰스와 병사 두 명이 폭행당했습니다."
"뭐라고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 새끼들 전쟁하자는 건가? 시체를 전달하러 간 애들을 구타해? 내가 메이스를 집어들고 물었다.
"끔찍하네요. 치료는 다 해주었나요?"
"예. 일단 페타 부인께서 영지 예산과 사제들을 동완하여 치료중이고, 보상금도 드렸습니다."
"그렇군요. 이브는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던가요?"
"그... 제가 보복을 하자고 강권했습니다만, 페타 부인께선 영주님이 오시기전에 더 문제를 만들 순 없다고 거절하셨습니다."
이미 대공의 아들을 죽인 것만으로도 대형 사고였다. 여기다가 병사와 기사들의 복수를 한다고 쳐들어가기 시작하면 진짜 전쟁이었다. 아무르 영지에서 재판을 신청한 상태니, 지금 전쟁을 시작해봐야 어차피 재판 때문에 질질 끌릴수 밖에 없었다.
이건 이브가 그나마 잘 참은 문제였다. 병사들의 복수는 저 재판이 끝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았다. 나는 메이스를 문지르며 로빈을 격려했다. 로빈의 표정은 침울하기 그지 없었다. 몇명 안되는 기사가 구타당했으니 사기가 말이 아닐테지.
나는 메이스를 다시 허리춤에 꽂아놓고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의 분위기는 묘하게 조용했다. 내가 문 앞에 다가가도 안에는 기척이 없었다.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엔
"아으....."
"으......"
시에리와 이브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시에리는 손까지 번쩍 들고 있었고 이브는 시에리를 힐끔 쳐다보고 내 눈치를 보더니 자신도 천천히 손을 올렸다. 시에리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 말에 뒤따라서 이브가 말했다.
“그....미안해....그러니까 그게.....”
나는 이 귀여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이브 엉덩이라도 좀 때려주려고 했는데, 이 모습을 보고있으니 그런 생각이 싹 달아났다. 반성의 태도가 너무 확실했다.
"뭐하세요?"
"그.....일단.....그....반성한다는 마음으로....."
"이브 씨는 죄가 없고....제, 제가 말리지 못해서......"
씨발. 화를 낼 수가 없잖아.
이 사건은 아주 복잡한 사건이었다. 복잡하기도 했고 엿같기도 했다.
상대랑 나 둘 중에 어느 한쪽이 조금만 끗발이 안좋았으면 애초에 성립하지도 못할 재판이기도 했다. 이브가 자길 모욕했다고 영지민을 죽여버렸다면 아무도 문제삼지 않았을거다. 뒤진 가족이 내가 무서워서 재판도 못걸테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죽은 게 북부 대공의 아들이었다.
내가 남부 사제장이 아니라 그냥 시골뜨기 영주였으면 이브가 대공 아들을 죽였다는 소리를 들은 즉시 튀어야 했을거다. 내가 사제장에다가 마왕을 물리친 용사일행이나 되니까 인어가 인간이냐 아니냐라는 개 좆같은 주제를 두고 재판이라도 해주는거다.
나는 차라리 아무르 영지와 영지전으로 끝장을 보고싶었지만, 그러기엔 문제가 많이 복잡했다.
일단 아무르 영지가 루비콘 대공과 함께 재판을 건게 문제였다. 재판은 영지들끼리 갈등이 일어났을 때 전쟁 이전에 아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분쟁 해결 도구였다. 보통 사안이 별거 아니거나, 전쟁을 벌이면 서로의 피해가 너무 크거나, 누가봐도 개좆같은 트집을 잡아서 상대 영지를 공격하려고 할 때 안전장치로 쓰이는 물건이었다.
일단 영지끼리 재판이 걸리면 그 즉시 왕궁의 재판관이 내려오며 두 영지 사이의 분쟁은 재판 기간동안 중단된다. 그리고 해당 분쟁에 대한 재판 결과가 나오면 두 영지는 깔끔하게 이 결과에 대해 승복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날씨가 너무 더우니 아무르 영지를 쳐들어가겠다며 군사를 일으켰다고 치자. 그러면 아무르 영지는 이 사안에 대해서 재판을 걸수가 있다. 재판이 시작되면 그 동안 나는 아무르 영지를 공격할 수 없으며 재판관은 내가 아무르 영지를 공격한 이유가 정당한지 각자의 증언을 취합하여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만일 정당하다는 판결이 나오면 나는 그대로 아무르 영지에 돌격해서 박살을 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사안이 부당하다는 판결이 나오면 나는 그동안 아무르 영지에 입힌 피해를 배상해야 하고, 군사를 물려야 한다. 또한 다른 정당한 이유를 찾을 때까지 아무르 영지와의 분쟁은 금지된다.
쉽게 말해서 이 치사한 아무르 영지 새끼들이 내가 무기 들고 쳐들어가면 다 죽을걸 아니까 일단 전쟁 대신 재판을 걸었다는 뜻이었다.
물론 문제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단순히 재판을 건게 문제라면 재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재판을 건 귀족과, 이 재판의 주제가 무엇이냐가 또 문제였다.
재판을 건 귀족은 아무르 영지와 더불어서 루비콘 대공이었다. 루비콘 대공은 게임 설정 상으로도 북부 드래곤 산맥 근처 지방을 지배하는 귀족이었다. 그는 산맥에 살고 있는 아인들을 토벌하여 광산을 개척했고, 원작 게임 퀘스트 중에는 일시적으로 동료로 들어와 활약하기도 하는 등 대단한 실력과 권력을 가진 무인이었다.
북부 광산의 절반 정도는 그의 영지 안에 있으며, 아인들을 내쫓으며 단련된 그의 군사들은 수도의 근위병들과 맞먹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거기다 대천신교에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내는 대천신교 제 1의 물주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서 북부 전체를 호령하는 귀족이라는 뜻이었다. 이브는 이런 놈의 아들이 모욕을 줬다고 냅다 쑤신거고.
재판 주제도 참 난감했다. '이브가 인간이 아니므로 루비콘 콘드릭스가 행한 발언은 모욕이 아니다. 따라서 이브가 루비콘 콘드릭스를 죽인건 정당한 권리가 아니며 우발적이고 끔찍한 살인 사건에 불과하다.'
나는 나랑 결혼했으니 당연히 이브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 증거로 대천신교와 왕궁에서 허가받은 문서를 제출하면 될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서류들을 뒤져보니 아니었다. 나와 이브의 결혼을 인정한 대천신교의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남부 사제장의 결정은 대천신교의 모토를 그대로 이어받는 아름다운 결정이다. 우리는 사랑에 국경도 종족도 없음을 인정하며 그대의 선택을 존중한다. 허나 이 결정으로 인해 빚어질 사회적 파장이나 논란을 고려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을 남긴다.
'사랑에 국경도 종족도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니까 내가 인간이 아닌 몬스터 새끼랑 결혼해도 존중해주겠다는 발언이지 이브를 인간 취급해주겠다는 문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런걸 증거로 내면 루비콘 대공이 이브를 튀겨죽일 생각에 신이나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출게 분명했다. 게다가 내가 애걸복걸해서 대천신교가 내 편을 들어 이브를 인간이라고 말할리도 만무했다. 누구 편을 들기 존나 난감한 재판이기 때문이었다.
한 명은 마왕을 물리쳤으나 인어박이인 남부 사제장이고, 한쪽은 대천신교에 제일 많은 기부금을 내고 인어한테 아들이 뒤진 북부 대공이었다. 어느 쪽이든 한 쪽을 편들기 정말 애매한 밸런스였다.
그래서 나는 대천신교가 이 재판에 개입할거란 기대를 아예 접었다. 종교는 끼어들지 못한다. 그들 입장에서도 나나 북부 대공이 자신들을 끌어들이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왕궁의 문서 역시 이브가 인간이라고 증명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 왕궁에서는 페타 루시우스의 요청을 수락하여 살인자 이브와 그의 어미 인어를 죄에서 사면한다. 허나 이브가 페타 루시우스와 이혼하거나 기존 범죄에 준하는 행위를 할시 이 사면령은 취소되어 죄인 이브와 그의 어미 인어를 팽형에 처한다.
여기서 죄'인'을 쓰니까 이브를 인간 취급한다는 건 씨알도 안먹히는 소리였다. 인어도 '인'어인데 사람취급 안해주고 아인도 아'인'인데 사람취급 안해주는 세상이었으니까.
이 문서는 내가 재판에서 졌을 경우 이브가 인어 덴뿌라로 변신할 것이라고 증명해주는 것에 불과했다.
애초에 연쇄살인에 연쇄 강간까지 수십 단위로 벌여서 도시 전체에 악명을 떨친 인어를 사면하고 영주랑 결혼시켜준 거 자체가 내가 마왕 물리쳤으니까 가능한 존나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냥 사람도 저짓거리 했으면 나라를 구하는 거 아니면 사면받기 힘들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이랬다.
이브가 북부 대공의 아들을 쑤셔 죽인 것에 대해 아무르 영지와 북부 대공이 재판을 걸었다. 여기서 이브가 사람이 아니라고 증명되면 이브는 그대로 이브 튀김이 될것이고, 이브가 사람이라고 증명되면 나는 아무르 영지로 찾아가서 영주 대가리를 깨버릴 수 있다.
이브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면, 이브가 아무르 영지의 보좌관 겸 루비콘 대공의 아들을 죽인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이므로 나는 보상을 토해내야 하고, 또한 우리 영지의 병사들이 두들겨맞은 것 역시 합리적인 선에서의 보복행위므로 이에 대해 항의 할 수 없다.
물론 진다고 곱게 '바삭하게 튀겨주세요.'라고 말하며 이브를 내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지는 즉시 재판장에서 깽판치고 애들 데리고 튈 생각이었다.
근데 루비콘 대공은 왕궁과 대천신교 모두에 영향력이 큰 사람이고 내게는 이브가 사람이라고 증명할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쉽게 말해서 이미 튀는 걸 전제로 한 불리한 재판이라는 뜻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뱉었다. 기분 좋게 던전 공략을 마치고 왔는데 감당하기 빡센 일이 날아와 있었다. 내가 한숨을 쉬자 내 옆에서 무릎꿇고 있던 이브가 어깨를 움츠렸다.
"반성했어요?"
"아니, 그러니까....응."
이브가 뭐라 변명을 하려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이브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다음부턴 그런 놈있으면 두들겨패서 감옥에 가둬놔요. 내가 죽이면 아무 문제 없으니까."
"신랑. 우리 이제 어쩌지? 좆된거 아니야?"
이브는 자연스럽게 신랑을 붙이며 내게 물었다. 무릎까지 꿇고 기가 죽은 걸 보니 확실히 절박하고 초조한게 느껴졌다. 나는 이브가 이렇게 기가 죽은 걸 보니 신기했다. 나는 일어나서 그녀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다 잘될거니까."
"정말이지? 그렇지?"
이브는 미안해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얘한테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있단게 나는 좀 신기했다.
"나갔다올게요. 그리고 무릎은 이제 안꿇고 있어도 돼요."
"알았어....."
이브가 말끝을 흐리며 내가 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나는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1층으로 내려왔다. 1층 창문 너머로 유유히 헤엄치는 셀루의 모습이 보였다. 생각해보니까 이브가 죽으면 셀루도 죽었다.
나는 마당으로 나와서 셀루에게 말을 걸었다.
"셀루."
"무슨 일이야? 야외에서 하고 싶어서?"
셀루는 혀를 장난스럽게 내밀며 내게 물었다. 나는 지금 떡칠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 둘 다 생선튀김 되게 생겼는데, 그런 말이 나와요?"
너무 여유로워 보이는 셀루의 표정을 보고 나는 살짝 짜증이 났다. 재판을 뒤집을만한 물건은 안보이는데, 지면 리스크가 존나 컸다. 내 짜증에 셀루가 웃었다.
"헤흐. 오늘따라 기분이 안좋아보이네."
"안좋죠. 셀루 당신이 말했잖아요. 이브는 사람들 틈에 섞여 살아야한다고. 그런데 그 결과가 이 모양이에요. 이브가 사람이 아니니까 죽어야한다고 재판을 건다고요."
"이기면 이브는 사람이야?"
셀루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셀루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재밌네."
"그래서 더 이기기 힘들겠죠. 인어가 사람이라는 판결이 나오는 건 말도 안되니까. 게다가 상대는 북부의 대공이잖아요. 그 양반이 두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잠깐만. 나는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거 잘하면 재판을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재판은 판관이나 그 때 그 때 재판 당사자들의 합의에 따라서 판결 방식을 다르게 정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아무리 해도 의견 합치가 나지 않으면 마상 경주나 결투 등으로 결과를 보라고 중재하기도 했다.
나는 셀루랑 말하다 말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재판에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루비콘 대공은 생각보다 다혈질인 인물이다. 거기다 게임 내 드래곤 산맥 퀘스트 당시 레벨은 대강 20 정도. 계속해서 아인들을 토벌하느라 지금은 더 강해졌다고 쳐도 내가 못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북부에서 전장을 지휘하는 인간이 마왕을 물리쳤다는 이야기에 쫄리가 없다. 이 재판. 결투로 끌고가기만 하면 내가 이길 수 있었다. 어차피 인간이냐 아니냐를 증명하는 싸움이었다. 이런 싸움은 말잘하는 놈이 이기는 법이다.
어떻게든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서 대화 화제를 돌리고, 말도 안되는 궤변으로 계속해서 루비콘 대공을 자극한다면, 루비콘 대공이 먼저 칼을 뽑아들고 나한테 싸우자고 할 가능성이 컸다. 그럼 나는 당당하게 성검을 뽑고 정정당당한 승부를 외치겠지.
딱 대라 씨발놈들아.
시간이 흐르고 흘러 재판 당일. 나는 굳은 표정으로 재판장에 출석했다. 증거로 제시할 물건이라곤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성검과 메이스 뿐. 상대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루비콘 대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북부에서 직접 오는 건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상대 자리에는 아무르 영주만이 서있을 뿐이었다.
나는 입맛을 다셨다. 이러면 곤란했다. 여차하면 영주랑 재판관 둘 다 대가리 깨고 튀어야지
그는 살집이 있고 수염을 쥐새끼 같이 기른 남자였다. 아무르 영주는 말했다.
"페타 루시우스 사제장. 그대가 인어를 사랑하는 건 존중하나, 인어가 귀족의 영식을 죽이는 사건은 용납할 수 없소. 그대도 이해해 주길 바라오."
나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본 재판에 들어가서 다시 이야기할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르 영주도 내가 대답하지 않자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무시하기로 작정한 이상 도발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재판관께서 들어오십니다."
재판관이 우리가 있는 간이 회장에 출석했다. 그는 법관 옷을 입고 있었고 긴 수염과 까탈스러워보이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깡마른 얼굴 위로 엄격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재판장 자리에 올라서서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아무르 영지 및 루비콘 대공과 페타 영지의 분쟁 조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양 측은 페타 이브가 인간이다. 혹은 인간이 아니다 라는 근거나 논리를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아무르 영주가 입을 열었다.
"이 주제로 더 재판을 진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어는 이제껏 인간들의 사냥감이었고, 놀잇감이었습니다. 사람 말을 한다는 게 어찌 인간의 증거가 된단 말입니까? 악마도 사람말을 할 수 있으며 고블린들도 제한적으로 사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저 산맥의 아인들도, 동부 초원의 수인들도 사람말을 할 수 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들이 사람입니까? 사람처럼 생각하고 사람처럼 말하는 것을 흉내낼 뿐, 저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단순히 사람 말을 한다고 인간으로 취급해선 안됩니다."
재판장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아무르 영주에게 물었다.
"아무르 영주님. 아무르 영주께서 생각하시는 '인간'의 정의란 무엇입니까?"
아무르 영주가 그 말에 곰곰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두 다리로 걷고 붉은 피가 흐르며 털이 없는 존재요."
"그럼 제가 닭의 털을 다 뽑으면 그건 인간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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