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1
프롤로그.
[ ······비틀어라. 죽이고 싶다면. ] 남자의 심장에 박힌 검이 울컥거리고 있었다. 머지않은 삶의 그 끝자락에서, 남자는 도도하게 자신의 죽음을 종용했다. [ ······ ] 검을 움켜쥔 여자는 아무 말없이, 비틀었다. 가슴이 어그러지며 핏물이 솟았으나, 남자는 아주 작은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 너는 여전히······ 가질 수 없기에 아름답구나. ] 느리게 올라간 남자의 손끝이 여자에게 닿았다. 그 손가락에 묻은 핏줄기가 여자의 볼에 번지었다. 여자에게 표정은 없었다. 시리도록 굳건하고 냉연한, 그가 반했었던 모습 그대로. 생애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마땅한 아름다움이었다. 남자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마지막 한마디가 각혈하듯 역류했다.
[ 빌어먹을 년······ ] 빌어먹을 년, 이라며.
“휴. 이제 안 튕기네······.” 나는 정상적인 화면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캐릭터의 설정을 확인했다.
「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 :성향 ─ [ 악 ] :초기 직업 ─ [ 수석교수 ] :초기 마나 ─ [ 3,357 ] :재능 등급 ─ [ 6 등급 ] :재능 종류 ─ [ 마법 : 조작 계열 / 원소 토(土), 화(火) 속성 ] :특성 ─ [ 6 개 ] :성격 ─ [ 13 개 ] 데큘레인. 이 게임의 중간 보스 중 하나인 네임드 악당. 분기가 아주 다양한 중요 빌런이라 그간 오류가 많았는데, 게임 내내 간교하고 드러운 짓을 일삼던 놈은 참 다행스럽게도 오류 없이, 플레이 타임 11 시간 만에 죽어버렸다. 이번 사인은 약혼자에 의한 검상.
“저, 우진 씨?” 다시 게임을 진행하려던 참이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 예. 아라 씨.” 화장을 지웠음에도 특유의 눈은 여전히 크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특별한 관리 없이도 윤기나게 찰랑인다. 이목구비가 웬만한 배우라 해도 믿을 이 여자의 이름은, 유아라. 직책은 팀장. 내가 일전에 사귀었던, 아니 나와 사귀어주셨던 분이다.
“테스트 잘 하고 있어요?” 그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예. 하고 있습니다~” 유아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흘겨보던 나는, 문득 그 목에 걸린 새로운 악세사리를 발견했다.저도 모르게 입술이 비죽였다. “요즘 뭐, 썸은 잘 되고 계시나봐요?” “응? 아······ 글쎄요?” 유아라도 어깨를 으쓱였다. 서로 어느 정도 비슷한 제스처는, 함께 만나면서 닮아간 부분이었다.
“잘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으음~” 나는 괜히 마우스만 드르륵 드르륵 긁었다. 소문으로 익히 알고는 있었는데, 막상 본인에게 직접 들으니 속이 썩 꼬이는 느낌이었다.
“근데 그건 왜요?” “······왜긴.” 우리의 이별은 이미 6 개월 전 이야기였다. 그 결말에 누가 잘했냐 못했냐의 문제는 없었다. 그저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않게 되었을 뿐.
나는 타고난 한량이었고, 녀석은 타고난 워커홀릭이었다. 녀석의 향상심은 천하태평한 나를 어찌저찌 먹고 살 수는 있는 놈으로 이끌었지만, 녀석은 결국에는 내 성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내가 바뀌지 못했다.
“부디 결혼까지 하시길 빕니다~” “······하아.” “아이고. 좀 찌질했나?” 눈썹을 치근덕거리며 비아냥거렸다. 그 따위 도발에 유아라는 걸려들지 않았다. “일할 준비나 해요. 설정 바뀐 거 있다니까, 모델링 수정해야 할 수도 있어요.” “또? 아니······ 작가 님은 뭐 맨날 바꾼다냐.” 나는 한숨을 내쉬고 시계를 보았다. 오후 9 시. 벌써 밤이 되었건만 퇴근은 아직도 멀었다. “아. 데큘레인 보고 있었나보네요?” 내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유아라가 피식 웃었다.
“예. 11 시간만에 죽었어요. 근데 이거 편법 좀 쓰면, 게임 시작하자마자 바로 죽일 수도 있겠는데, 중간보스 맞아요?” “그게 저희 게임 매력이잖아요. 데큘레인은 놔두면 놔둘수록 더한 악당이 되니까, 가능한 초반에 죽여야 게임이 좀 쉬워져요.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서 난이도가 달라지는 거죠.” “······하긴.” 게임 테스트는 나를 포함한 회사의 전직원이 이미 수십 수백번 돌렸다. 나도 4 회차까지는 했고. 아마 총 1,000 번 정도는 리플레이 되었을 텐데, 데큘레인이라는 중간 보스는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근데 그거는 알아요? 이 캐릭터 모델이 우진씨였대요.” “······데큘레인이요?” “응. 그래서 저는 시작하자마자 얘부터 죽여요.” “뭐라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모니터에는 ‘빌어먹을 년—’ 이라는 대사가 아직도 아른거리고 있었다.
“후후. 모델링하면서 못 느꼈어요? 외모 비슷하잖아.” “아니, 나 작가 님이랑 만난 거 두번이 끝인데?” “회사 지나가다가 봤나봐요. 아무튼, 봐요. 성격도 비슷하잖아.” “······성격이 비슷해? 유언이 빌어먹을 년인데?” “비슷한데.” “쯧······ 그러니까 니가 나한테 차인거야.” 유아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겁먹은 척 두 손을 들었다.
“아이고, 미안. 이것도 찌질했나?” 어쩔 수 없다. 찌질하다는 말을 듣고 찌질하게 되어서, 더 이상 찌질하지 않을 수 없거든. 결국 유아라도 참지 못하고 말려들었다.
“······넌 진짜 찌질하다.” “네가 찌질하다고 생각하니까 찌질하게 느껴지는 거지. 네 성격은 무슨 파라노이아거든? 나니까 받아줬지.” “조용히하고 게임이나 봐. 테스트 소감은 어때?” 여전한 화제 돌리기에 순순히 응해주기로 했다. 나는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두었다. “게임 자체는 재밌어.” 게임 배경은 대략 14~20 세기의 문화가 뒤섞인 판타지.
전체적인 틀은 초거대 RPG 지만, 주안점은 스토리 텔링이다. “문제는 이게 망하면 회사도 망한다는 거지.” 콘솔 게임 불모지인 대한민국에서 돌연변이처럼 등장한 REW. 창사(創社)하자마자 연이어서 게임을 성공시키더니, 어느새 전세계가 주목하는 기업이 되어버린 이 REW 에서, 그 동안의 수익과 투자금을 죄다 때려박아 만든 AAA 급 게임.
실패하면 좆된다.
문자 그대로 좆된다.
“걱정마. 절대 안 망해. 플레이 영상 반응 못 봤어요? 전세계서 난리였잖아.” 플레이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게임의 스토리와 난이도가 달라진다.
싱글게임이지만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닌, 고도의 AI 를 장착한 여러 ‘네임드’ 캐릭터와 함께하기에.
그 신선한 방식과 그간 REW 가 쌓아 올린 명성 덕분에, 국내외 게이머들은 물론 해외 여러 웹진들마저 ‘GOTY(Game Of The Year)’ 기대주에 우리 게임을 올렸다.
“싱글 콘솔로 IP 명성만 올리면, 돈은 온라인으로 긁어모을 수 있는 포멧이야. 우리, 무조건 성공해.” 그 말대로 이 게임에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많고, 직업도 많다. 기사, 마법사, 악마, 악마 사냥꾼, 행정가, 모험가, 용병, 왕, 귀족 등등······ 플레이어는 게임 속에서 어떤 사람이든 될 수 있다.
“그래. 그러면 나도 좋지. 보너스 받으니까.” 설핏 웃은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저기 계시네.” 내 자리는 창가인지라 회사 바깥의 길가가 보인다. 회사의 입구 근처에, 반들거리는 외제차 한 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근데, 저 사람은 나보다는 안 찌질한가?” 웃으며 창밖을 가리켰다. 이제는, 이런 말도 여유로이 할 수 있게 되었다. 녀석도 풋- 하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너랑 다른 의미로 좋은 사람이야.” 나도 좋은 사람이었다, 는 그 말이면 충분했다. 녀석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도, 나는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었다. “그래? 다행이네.” 물론 여전히, 아주 조금은 속이 안 좋긴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녀석의 말대로, 저 차에 탄 남자는 좋은 사람이다. 양아치같은 놈이었다면 오히려 화났을 텐데.
“응. ······그런데, 그리고······. 있잖니. 그······.” 유아라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렇게 혼자서 쭈뼛거리며 고민하다가, 곧 아무것도 아니야- 하며 돌아서겠지. 그런 녀석의 습관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이미 알고 있다. “아라 씨. 우리, 3 년 전에 처음 봤잖아요? 무슨 말씀을 하려고 그러세요?” 사내 연애는 비밀이다. 입사하기 전부터 사귀었지만, 아무튼 사내 연애였기에 비밀. “······그러게. 나 무슨 말 하려고 했더라······.” 유아라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째깍, 째깍, 째각. 서로 마주보며 흐르는 짧은 침묵, 초침의 소리가 거슬릴만큼 요란하다. ······이런 어색한 순간에 먼저 입을 여는 쪽은, 언제나 유아라였다.
“그럼, 우진 씨. 전 퇴근할게요.” “그래. 쉬어요.” “네. 우진 씨도 수고해요.” 또각또각─ 그녀는 하이힐 소리와 함께 멀어진다. 그 뒷태는 내가 본 어느 누구보다 완벽하지만, 실은 외면보다도 내면이 더 아름다운 여자다. 그만큼 멋진 사람이다. 내 일생 최고의 행운. 사람이야말로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을, 처음으로 납득시켜준 은인. “······잘 가라.” 그녀에게 닿지 못할 말. 그저 나 혼자에게 하는 말. 그 자체가 한심한 것 같아, 한숨을 내쉬고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아니 근데, 작가님도 너무하시다.” 이미 뒤져버린 데큘레인이라는 캐릭터를 보고 있자니 금세 머리털이 곤두섰다. 이 개차반이 나라고? 어이가 없네.
······닮은 꼴이기는 한데.
확실히 외모 베이스가 나 같기는 하다. 모델링하면서도 누구 닮았다 했더니, 그게 나였을 줄이야. “외모 업그레이드나 해줘야겠다.” 대외적으로 골드행은 끝났지만, 회사와 작가의 욕심은 남았다. 하여 나에게 마스터 권한까지 주면서 마지막 모델링을 부탁했다.
“어디보자.” 캐릭터가 잘생겨진다고 싫어할 사람은 없다. 아무리 악당이라지만, 내가 모델이라니 면상이라도 제대로 꾸며줘야지. 나도 어디 가서 못생겼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으니. “······됐다.” 빠르게 수정 작업을 끝낸 내 시야에, 문득 캐릭터의 「특색」이 보였다.
“흐으으음······.” 이 게임에는 캐릭터의 개성을 결정짓는 두 가지 특색이 있다.
기본 스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특성’, 그리고 간접적인 영향을 주는 ‘성격’. 네임드 캐릭터일수록 이 특성과 성격의 보유 개수가 많다.
「특성」 :위압과 기품 :신동 :마법 범재 :부러질지언정 :미적 감각 :악당의 운명 데큘레인의 특성은 위 여섯 개.
세상에 「신동」과 「마법 범재」의 조합이라니. 그야말로 악 중 악, 최악이다.
「성격 」 :선민의식 :결벽증 :규칙적인 습관 :승부욕 :존귀한 예법 :예민함 :권위적 :허세와 여유 :단단한 정신력 :교양 강박증 :무교······.
성격은 그 외 다수. “성격이 많이 구리네.” 아무리 나라도 선민의식, 결벽증, 허세 따위는 없는데. 권위적일 수 있는 권위도 없고. 괜시리 모니터만 불만스레 노려보던 나는, 특성과 성격 칸 옆에 늘어진 코드들을 힐끔거렸다.
“······흠흠.” 아무도 없는 사무실. 나는 눈치를 보면서 다른 특성·성격 코드들을 구경했다. 뭐 트롤짓할 건 아니고, 그냥 재미 삼아서 스크롤을 내리다가······ 발견된 한 가지.
「이해력」 “적어도 넌 찌질하지 말아라.” 이해심과 비슷한 거겠지. 성격이 아니라 특성으로 분류돼 있지만 뭐 어때.
나는 이해력을 데큘레인의 특성으로 넣었다. 그 다음은 대부호 재력가······ 돈이라도 많아야지.
딸칵─ 딸칵─ 딸칵─ 그 외에도 여러 특성을 장난 삼아 추가했다. 「대부호 재력가」, 「미다스의 손」, 「육안」, 「철인」, 등등······ “뭔 짓이냐 이게.” 이것 저것, 별로 티 나지 않을 특색만 5 개 쯤 넣다가 현타가 왔다. 나는 마우스에 손을 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이유 모를 헛웃음이 입밖으로 흘렀다.
“······허 참. 7 년이었는데” 7 년.
너에게도, 나에게도, 7 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한순간에 끝나버리기에는 너무 긴.
아니, ‘순간’이라 느끼는 건 어쩌면 나 뿐이었다. 너는 다만, 서서히 지쳐갔겠지. 또 느리게, 이별을 준비했겠지.
나는 그저, 너의 변화를 자각하지 못했을 뿐······ 띠로링─ “으어!” 요란한 알림.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 REW (5/107) ] [ 레인 : 우진 씨, 아직도 작업하고 계세요? ] 사내 메신저였다. 발신인은 이 게임의 작가이자, AI 부서의 총책임자 레인 씨.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외국인이다. [ 아, 네. 혹시 모델링 뭐 바꾸고 싶으신 거 있으면 지금 말씀하세요. 바로 바꿔드릴게요. ] 나는 방금 추가했던 특성들을 지우기 위해 마우스를 움직였다. [ 레인 : 아뇨······ 그건 아니구. 저는 그냥 보려고 기다리고 있어요. ] 흠칫 멈췄다. 뭘 본다는 거지? 날 본다는 건가? 주변을 둘러봤으나 아무도 없었다.
[ 뭘 봐요? 저요? ]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모니터를 보았다. 이윽고, 싱긋 웃는 이모티콘과 함께 답장이 왔다.
[ 레인 : 포항항^-^ 아뇨~ 창 밖을 보세요!] 별 생각 없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투명한 유리, 그 저편의 하늘에.
빛이 탄생하고 있었다.천지를 밝히며 낙하하는 섬광.
인간의 핏줄처럼 허공에 새겨지는 번뜩임. 낙뢰.
크게 열린 동공으로, 그토록 맹렬한 빛줄기가 밀려들었다. 거대한 충격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사무실을 덮친 빛무리는 내 시야를 어둠으로 물들였고, 뒤늦은 천둥이 귓전을 두드렸다.
콰르르르르릉─!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
데큘레인. (1) “저희야 조용하니까 편하긴 한데 말예요······ 뭔가 불안하지 않으세요?” 요 근래, 유크라인 대저택의 분위기는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도에서도 손꼽힐만큼 장려한 이 저택에서는 고요가 오히려 유별난 일이었다. “얘, 그런 말 하지마. 괜히 씨될라. 가만히 있어, 가만히.” 흔치 않은 평온이 하녀와 시종들은 어색했지만, 일주일 줄곧 이어지자 어느 정도는 적응하게 되었다. “아 혹시, 프하이르덴 소가주 님과 잘 되고 계신 걸까요?” 젊은 하녀의 물음에 하녀장은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렇겠니? 차라리 그 반대라면 몰라도.” “그래요? 일주일 동안 칩거하신 건 또 처음이라 헷갈려요. 청소 확인도 안하시구.” “지금이라도 편히 쉬어둬. 언제 또 닦달하실 지 모르니······.” 저택 주인의 기이한 변화를 두고 시종들은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글쎄. 데큘레인 당주 님께서 이곳에 정착하신 건 10 년 전이니까······.” 그들의 주인이 워낙 유명하고 예민한 인물인 터라 여러 화제가 많았고, 그 이야기의 흐름은 쉽게 끊기지 않았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끼이이이익── 현관문이 훤히 열리더니, 도도한 구두소리가 홀을 타고 번졌다. 또각─ 또각─ 서늘하면서도 불길한 울림.
황급히 일어난 하녀들은 우수수 달려가 불시의 방문객 앞에 도열했다.
“······그 남자는 어디 있어?” 이렇듯 날카롭게 묻는 귀빈은 흑색 단발의 미인이었다. “네, 주인 님께서는 지금······.” 예민하기로는 주인님만큼 정평이 난 누이동생, 예리엘. 그녀의 등장에 하녀들은 고개를 조아렸다.
“안내해.” 시종들은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그녀를 안내했다. 다 함께 대저택의 중앙 계단을 올라 가장 높은 곳, 한 층 전체가 방으로 쓰이는 대문 앞에 섰다. 똑똑─ 이 집안의 누구나 두려워하는 그 문을 예리엘은 대수롭지 않게 노크했다. 똑똑─ 반응은 없었다.
똑─똑─! 똑─똑─!
몇 번 더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던 예리엘은 참지 못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야!” 깔끔한 방에, 흐트러진 얼굴의 미남이 누워 있었다. 머리카락은 푸르스름한 수정처럼 은은하게 빛났고, 희고 고운 피부와 반듯하며 이지적인 이목구비는, 오늘따라 유독 어둡게 가라앉은 채였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뭇 여심의 마음을 흔들만했으나, 예리엘은 그딴 것들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쏘아붙였다.
“너 뭐해!” 예리엘의 건방진 말버릇에 시종들은 몸을 떨었다. 그러나 하극상을 당한 대저택의 주인이자 당주, 데큘레인은 다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몇 번 자면 깨어날 줄 알았다. 한데 깨어나지 않는다. 여전히, 꿈 속이구나.” 그 말에 하녀들은 어떤 단정을 지었다. 역시, 프하이르덴 아가씨와의 사이가 잘못되어도 어떻게 단단히 잘못되었구나! “또······.” 예리엘도 그의 말을 비슷하게 이해한 듯 미간을 짚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데큘레인을 제외한 모두가 떠올리는 사람의 이름은 ‘율리 폰 데이아 프하이르덴’. 북부 프하이르덴 가문의 차녀이자,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의 현 약혼자. 대외적으로 두 사람은 혼인이 약속된 관계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미친 듯이 다르다. 데큘레인은 율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듯하나, 율리가 데큘레인에게 느끼는 감정은 거의 혐오에 가까운 것이다. 추측 따위가 아니라, 이미 정평이 나 있을 정도로.
“그 여자 생각은 이제 그만 좀 하지? 강연도 죄다 캔슬하고, 뭐 하는 짓이야 이게?” “······강연?” “그래!” 예리엘은 명품 클러치 백에서 문서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 종이 뭉치를 좌르륵 침대에 내던졌다.
“당신이 직접 나서서 하겠다고 한 거잖아. 그래놓고 여기서 이렇게 병신처럼 있으면, 가문 면상에 먹칠하겠다는 거야 뭐야?” “······.” “오늘 건 대학에서 하는 거니까 꼭 참석해! 그 자랑스런 교수직도 짤리기 싫으면!” “너는······ 참 당돌하군.” 데큘레인이 피식 웃었다. 그 순간 예리엘은 심사가 뒤틀렸다. 그녀의 새하얀 관자놀이에 혈관이 맺혔다. “내가 당돌한 게 아니라, 네가 멍청한 거야! 이 병신아!” 무척이나 험악한 욕설. 하녀들은 크게 몸을 떨었지만, 정작 주인께서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징벌이라도 했을 터인데. 어찌 이리 무기력해지셨을까. 평생 이랬으면 좋겠다.
“······알겠으니 나가거라.”“흥.” 예리엘은 코웃음을 치고 문 밖으로 나갔다. 당장 그녀도, 여자에게 차였다고 폐인처럼 되어버린 저 병신 같은 꼴을 오래 보고 싶지는 않았다.
“예, 예, 예리엘 님. 식사라도, 준비해드릴까요?” “됐어.” “그래도 먼 길 오셨는데. 잠시, 잠시만요!” “아 됐다구!” 다수의 시종도 황급히 그녀를 뒤따랐다. 오늘은 주인 님의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하니, 최선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 * * “······강연이라.” 나는 데큘레인의 동생 예리엘이 건넨 서류를 보았다. 강연 제목은 「 제국황실대학 수석교수 데큘레인 : 마법의 기초적인 이해와 마력에 대한 마음가짐 」. 또한 그 목차는 다음과 같았다.
1. 속성과 계열에 따른 마법의 구분. 2. 파괴·보조·소환·정령 등 마법 계열별 술식의 대략적 이해. 3. 올바른 마력 사용법······.
“무슨 마법이 이리도 다양하단 말이냐.” 마법이 무수한 세상에 과학은 어디로 갔는가······ 충분히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였거늘.의미도 없는 개소리를 지껄이다가 침대에 누웠다. “······하아.” 일주일이 지났다.
어느새, 눈 깜짝할 사이에 일주일이나 지나버린 것이었다. 그 동안 나는 내가 이곳에 갇힌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꿈인줄 알았으나 아니었고, 루시드 드림인줄 알았으나 아니었고, VR 인줄 알았으나 아니었고. 가장 납득할만한 이유는 내가 벼락을 맞아 뒤졌다는 것. 따라서 사후 세계를 체험하고 있다는 것······ 아무튼, 나는 빌어먹을 게임에서 나를 모델로 만들었다는 캐릭터,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이 되어버렸다. 참고로 데큘레인은 게임 전체의 연결 고리쯤 되는 놈으로, 수많은 네임드 캐릭터의 숙적, 혹은 플레이어의 중간 보스 쯤 되는 네임드 악당이다. 내 부모의 원수- 내 연인의 원수- 우리 마을의 원수- 내 공적을 가로챈 원수- 등등. 이 외에도 원한을 산 사람이 많을 게 분명한, 오직 죽음과 난관을 위해 직조된 빌런. 물론 레인 님은 이 캐릭터에도 작은 반전이 있다 하였으나, 그 반전이 설마 내가 이 놈에게 빙의한다는 것이었나······. “거의 모든 루트에서 죽을 터인데.” 이 악당은 악당 답게, 거의 필연적으로 죽는다. 플레이어가 직접 죽이든, 네임드를 사주하여 죽이든, 지멋대로 네임드와 싸우다가 죽든, 암살을 당하든, 어떤 식으로든 죽는다. 유명 히어로 무비의 보라색 민머리 대갈통처럼.
“그것보다, 이건······.” 나는 예리엘이 내던지고 간 종이들을 정리했다. 한 손에 쥐고 스윽 훑어보니, 강연 일정이 오늘이었다.
“······가는 것이 옳다.” 강연은 난생 처음이지만, 마냥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이상 게을러 퍼질 수는 없다. 어떻게든 움직여야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뭐라도 알아내야 돌아가든 말든 할 테고, 무엇보다······ [ 최우선 생존 목표 : 게임에 필요한 존재가 되시오. ] [ 사이드 퀘스트 : 대학 강연 ] ◆ 상점 화폐 + 0.5 시야의 구석에 아른거리는 저 요상한 문장들. 저것과 예리엘 때문에라도 이제 슬슬 활동을 재개해야한다. 이 놈의 ‘사망 변수’ 중에는 동생 예리엘도 있을 뿐더러, 저 ‘상점 화폐’는 꽤 중요하거든.
다행스럽게도 강연에 필요한 지식? 태도? 경험? 따위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해력」── ◆ 등급 :고유 (固有) ◆ 설명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마력을 소모하여 발동할 수 있다.
────── 이 세계에 갇히기 전, 「이해심」이라 착각하고 추가했던 「이해력」. 나는 이것의 성능을 믿는다. 아닌 게 아니라, 자그마치 고유 등급이다. 게임의 후반부에나 등장하는, 내가 플레이하던 캐릭터도 얻지 못한 고유 등급.
“씻자······.”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청결한 환경, 뜨뜻한 온수, 수압 좋은 샤워기. 온통 마음에 드는 것들 뿐이었다. 말끔히 샤워를 마친 뒤에 드레스 룸의 문을 열었다. 내 아파트보다 넓은 방에는 온갖 귀중품과 양복이 가득했다. 나는 오직 감각만으로 옷을 골랐다. 하얀 셔츠와 귀족적인 남색 수트. 푸른 넥타이와 지적인 안경. 그 위에 코트를 걸치고, 전체적인 인상에 어울리는 향수를 뿌린 뒤, 머리카락은 한 올도 남김 없이 깔끔하게 위로 올린다.
그리고 거울을 보았다.
“······.” 이 정도 스타일이면 솔직히 느끼할 법도 한데, 오히려 고고하다. 흘러 넘치는 듯한 에고는 대단히 오만하지만, 우아한 품위 또한 분명히 공존하고 있다. 이는 아마 「위압과 기품」과 「미적 감각」이라는 특성, 그리고 「존귀한 예법 」이라는 성격의 작용일 터.
실제로, 나는 예법에 어긋나는 언행을 할 수가 없다. 아무리 배고파도 제멋대로 음식을 퍼먹을 수 없고, 아무 말이나 지껄일 수 없으며, 모든 격조와 교양을 다하여 운신해야 한다. 또한 내 입장에서도 그러는 편이 자연스럽다. 자신의 성격 자체가 아예 그렇게 변한듯, 비효율적인 예절이 오히려 양반다리보다 편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투박하고 무식한 광경을 보면 경멸과 모멸도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지경. “······이 놈한테 잡아먹히지는 않겠지.” 이 캐릭터는 특히 ‘성격’ 쪽에 많은 특색이 있었다. 당장 시스템 로그에 기록된 것만 해도 「존귀한 예법」, 「선민의식」, 「 결벽증」, 「권위적」, 「교양 강박증」 등등.
그러한 성격들은, 거의 확실히 나에게 전염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연을 해야 한다는 이 ‘의무’조차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나는 탁월하고 존귀한 귀족이므로······ 는 개뿔. “우진.” 거울 속 미남을 노려보며 되뇌었다. “김우진.” 나는 나를 잃지 않을 것이다. 이딴 거지발싸개같은 캐릭터에 집어삼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게 네 이름이다.” ‘집 우(宇)’와 ‘참 진(眞)’의 우진.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이자,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키 크고 잘 생긴, 그러나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찌질이. “찌질하고 게으른 새끼.” 그게 나다. 찰싹—!
나는 두 뺨을 때리고 문 밖으로 나왔다. * * * 뚜벅— 뚜벅— 선명하고 규칙적인 구두소리. 부드러이 움직이는 긴 다리. 과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격조의 걸음걸이. 나 자신도 감탄할만한 고풍을 선보이며 정원의 자동차 앞에 섰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근현대 포드 시절에나 있었을 엔티크한 디자인의 차량. 이 세계에서는 이놈이 부의 상징이다. “가겠다.” “예!” 시종이 열어준 뒷좌석에 오르자, 내 옆자리에 어떤 작고 올망졸망한 녀석이 이미 앉아 있었다. “······?” 뒤집어 쓴 로브 후드 아래, 귀엽지만 경직된 얼굴을 나는 바라보았다.
“교수, 교수님! 좋은 정오입니다! 여기, 여기 있습니다!” 녀석은 긴장된 목소리로 말하며 뭔가를 내밀었다. 웬 문서 묶음이었다.
“······자네, 마법사인가?” “네? 앗, 네. 네에······ 저, 저는 교수님 휘하의······ 벌써 삼년 째······.” “농담이었다.” 나는 기품있게 웃고 그 문서들을 보았다. 강연과 관련된 내용일 줄 알았는데, 대본이었다. 강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 하나하나가 기록된 대본. 이대로만 읊으면 된다는 거겠지. 하긴, 데큘레인이 강연 준비를 스스로 할 리가 있나.
애초에 이 놈은 겉만 번지르르할 뿐 재능은 그닥이다. 당장 보유 특성도 천재나 수재가 아닌 「마법 범재」이니, 이런 대본은 나도 바라던 바다.
“수고했다.” “······네?” 그런데,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에 마법사가 당황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칭찬이 내 배알도 뒤틀고 있었다. 명백한 「성격」의 전염이었지만,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만 했다.
눈 딱 감고 한 마디만 더 추가했다.
“고생했다. 도착할 때까지 쉬고 있어라.” “아, 아 네! 네에!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마법사는 거의 시체처럼 조용히 있었다. 로브 아래로 드러난 입가가 흐뭇하게 삐쭉거리는 것을 보니, 칭찬이 기분은 좋은 모양이었다. “······.” 나는 손에 쥔 대본을 읽었다. 그런데 종이의 촉감이 거슬렸다. 더러운 것 같기도 했다. 다음부터는 장갑을 껴야······ 아니. 각설하고.
게임의 설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 확실한 「이해력」 덕분에 대본 내용 자체는 금세 이해되었다. 그렇게 강연 공부를 하며 약 30 분 쯤 지났을까.
“······?” 차창 밖에 흥미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나는 자연스레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정오의 볕을 받아, 반짝이는 파도처럼 찬연히 흘러가는 외부. 입구에 우뚝 선 초대 황제의 동상, 생동한 꽃과 나무로 조화롭게 이어지는 길. 드넓은 부지 안에 가득한 여러 건물과, 드높은 하늘에서 축복하듯 내려앉는 부드러운 빛무리. 그 전체로 불려지는 ‘제국 황실 대학교’. 이 몸, 데큘레인의 직장.
3D 보다 더한 실제가 되어서 내 망막에 비치는 모든 것들이······ 내 설계의 결과물이었다.
데큘레인. (2) 그 높이만으로도 위압적인, 190cm 를 상회하는 장신. 무결점에 가까운 격식의 복장과, 절로 시선을 잡아끄는 절세의 외모. 몸과 옷의 태(態)에서 드러나는 완벽한 황금비율.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귀족의 품격’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실현된 듯한 그에게는 어떤 흠결도, 빈틈도 없다. 걸음걸이, 몸짓, 표정, 그 모든 것에서 오직 그만의 기품이 흐르고 있다. “저 나쁜놈······.” 그러나 이렇듯 완벽한 외면도 누군가에게는, 아니 꽤 다수의 사람에게는 ‘가증스러운 겉껍질’에 불과하다.
“하아······.” 이프린 루나. 그녀는 데큘레인이 등장한 순간부터 치솟은 분노를 가까스로 삭이고 있었다.
말 뿐만 아니라 행동도 제법 살벌했다. 살갗에 피가 날만큼 억세게 주먹을 쥐었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그는 자신의 존속, 즉 아버지의 업적을 가로채어 폐인으로 만들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
세간은 데큘레인을 ‘술식 해석의 천재’라 찬양하지만, 그 명성은 오롯이 제 아버지의 몫이었다는 것이다······. ─······주목.
그때, 수정 구슬이 데큘레인의 음성을 증폭했다. ─강연을 시작하겠다.
수백명이 모인 넓은 강당. 데큘레인은 마침내 단상에 올라 일대를 훑어본다.
그 눈빛은 날붙이처럼 예리하고 도도하다. 당장 과도를 꺼내 두 눈알을 찌르고 싶을 만큼. “저 쓰레기······.”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데큘레인은 반드시 처죽이고 싶은 원수이지만, 오직 그 이유만으로 대학마탑에 입학한 것이지만, 뒤 없는 복수는 그저 스스로를 슬프게 만들 뿐이다. 어차피 자신의 재능은 저 남자보다 뛰어나다. 보다 더 강한 마법을 배워서 이 손으로 직접 죽이든, 더 높은 지위에 올라 사회적으로 말살하든, 복수는 숙성시킬수록 달고 맛있어지는 법.
자신은 그 달콤한 순간만을 위해 살아왔으니, 조금 더 기다린다 하여도 문제는 없다. ─반갑다.
하지만······ 골탕 정도는 먹여도 되겠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른 이프린은,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로브를 깊게 눌러썼다. * * * ······높고 넓은 강당에 들어찬 수백의 사람이 오직 나만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부담스럽게 반짝였고, 고전적인 형태의 카메라가 눈을 어지럽히는 플래쉬를 발했다.
나는 그 전부를 혼자서 마주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주 조금의 긴장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내 삶에 이런 대접은 당연한 것이라고, 이런 관심은 압박이 아닌 특권인 것이라고, 그 따위 고매한 선민의식이 내 몸에 살가죽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반갑다. 나는 유크라인 가문의 데큘레인.” 그리하여 나는 여유롭게 강연을 시작했다. 강연의 서두는 대본의 첫 줄이자, 데큘레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소개였다.
“제국황실 대학마탑의 수석교수, 원소를 관장하는 ‘모나크’ 등위(等位)의 마법사다. 물과 불과 바람과 흙의 네 속성을 부리고, 마법의 계열을 가리지 않는다.” 대강 도취적인 느낌이 물씬거리는 문장이었다.
“······알려져있다시피 마법은 크게 셋의 ‘속성’과 아홉의 ‘계열’로 나뉜다. 속성으로는 원소와 기원과 기물. 계열로는 소환과 정령. 파괴와 보조. 조작과 연성. 환혹과 조화. 그리고 특화.” 나는 대본에 적힌 말을 그대로 읊었다. 고작 그 뿐이어도 이목과 숨결은 집중되었다. 「위압적인 기품」이라는 특성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마법사는 본인의 속성과 알맞은 계열에 열중해야만 마법적 성취를 이룰 수 있다.” 말을 끝맺은 뒤 손가락을 튕겼다.
딱—! 청량한 소리와 함께 강당의 불이 꺼지고, 허공에 마법의 술식이 떠올랐다. “마력으로 술식을 이루고 발산하는 것. 그 실현의 행위가 바로 마법이다.
그러므로 마법의 구현을 위해서는 술식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제 위의 술식을 보도록 하겠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참관자들이 마법진을 볼 수 있도록. 언뜻 프랙탈과도 비슷한, 수십의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형상이었다.
“이 68 획(劃)의 술식은 법진의 형태가 곡선이고, 중심부에서 먼저 마력이 응집된 뒤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회로다. 안에서 밖으로 번지는 것은 ‘파괴’와 ‘보조’의 성격이나, 파괴마법은 법진의 형태가 직선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는 보조마법의 술식이다. 다음으로······.” 첫 번째 목차는 ‘마법의 기초’. 해당 내용의 강의는 약 15 분 동안 이어졌고, 나는 단 한순간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대본 자체가 입에 착 달라붙은 듯 자연스러웠다. 참 신기하게도─ 오늘 처음 본 이 대본의 구성을 완벽히 「이해」한 것이었다.
“······술식 기반의 마법은 이와 같다. 그러나, 마력은 항상 마법으로만 이어지고, 마법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이 술식을 익혀야 하는가?” 이제부터는 ‘마력 사용법’. 지금 이 대학교의 강당에는 마법사가 아닌 일반 학생, 기사 혹은 모험가 지망생도 있기에, 그들을 위해 따로 구성된 주제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자네들이 인체의 어떤 부위에 마력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내 말이 끝나자 허공의 술식이 흩어지고, 그 자리는 인간의 해부도가 대신했다. 각각 심장과 머리와 복부에 푸른 마력 덩어리가 들어앉아 있었다.
“첫 번째로 ‘머리’. 즉 뇌로는 술식의 상상이 쉬우니 당연히 복잡한 선(線 )과 원(圓)을 구현할 수 있다. 따라서 마법사는 보통 머리에 마나를 보관한다.” 아마 이 놈도 대가리에 마력이 있을 것이다. 수치로 표현하자면 「3,375」. 그리 높지는 않다. 분명 어떤 네임드 캐릭터의 ‘초기’ 마나가 「30,000」인 것을 보았으니.
“다음으로, ‘심장’. 심장은 혈액을 전신으로 뿜어내는 곳이니, 심장에 보관된 마나는 보다 쉽게 전신으로 퍼진다. 그런만큼 한곳에 붙드는 것이 힘들다. 따라서 심장은 마법사보다는 기사에게 어울린다.” 나는 대본의 내용이 모두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천천히, 쉽게 말을 이었다. 아마, 강연을 잘하는 방법 따위가 「이해력」으로 숙지된 것이겠지. “마지막으로, ‘복부’. 즉 뱃속의 단전은 외부와 내부가 가장 자주 섞이는 곳이니, 마법사든 기사든 일반인이든 누구에게나 범용적이다······.” 그렇게 말을 잇다가 문득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새 40 분이 지나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노력은 물론 중요하다. 다만 재능이 미천하다면 그 효율을 따질 필요가 있다. 재능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자네들 대다수의 경우에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본을 읽다가 웃을 뻔했다. 재능이 미천하다면 효율을 따질 필요가 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딱 현재의 데큘레인에게 어울리는 조언이 아닌가.
“그리고······.” 드디어 도래한 대본의 마지막. 한데 조금은 거슬리는 단락이었다. 나는 이걸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원래의 데큘레인이라면 읽었을까?
모르겠다. 읽었으니 대본으로 써 놓았겠지. “마지막으로, 질문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자 침묵 뿐이었다.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없다면—” 안도하며 돌아서려던 그때,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브를 뒤집어 쓴 마법사. 그녀는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데큘레인 교수님. 어젯밤 마법사 기숙관에서 미스테리한 술식이 발견되었습니다. 악마의 소행이라고도 추정되고 있는데, 술식 해석의 천재라는 데큘레인 교수님께서는—” “자네는 대학마탑 소속인가? 그렇다면 이름과 소속을 말하는 것이 기본일 터인데.” 나는 곧바로 말을 끊었다. 속은 다급하지만, 겉은 아주 우아하게.
본능적으로 구사되는 귀족의 화법이었다.
“예? 아, 그, 이름은—” “이미 늦었다. 예의 없는 아이의 질문은 받지 않도록 하겠다.” “······에?” 로브를 뒤집어 쓴 마법사의 하관이 시뻘개지고 있었다.
미안하긴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이해력」의 마력 소모량이 무지막지하거든. 「마력 : 2,005 / 3,375」 강연 한 번에 빨린 마력만 자그마치 1,300 이다. 처음 보는 술식을 해석하려면 이보다 훨씬 많은 마력이 필요할 텐데, 굳이 무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현기증도 좀 있는 것 같고. “강연은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겠다.” 푸흡- 푸흐흐- 크흐흐흐- 강당 한복판에서 혼자 일어난 마법사에게 조소와 냉소가 뒤섞이는 가운데, 나는 흐트러진 소매를 가다듬었다. 강연하느라 접혀진 수트의 주름을 세웠다. 외투를 걸치고 버튼을 잠궜다.
마지막으로 대본을 갈무리한 뒤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 일련의 몸짓은 흐르는 물결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래도!” 돌아선 내 귓가에 큰 소리가 울렁였다. 나는 선 채로 고개만 돌려 그쪽을 보았다. 아직까지도 서있던 이름 모를 여자 마법사가, 마력으로 술식을 그려 허공에 띄웠다. “마탑에서도 헛소문이라 치부하며 해석을 거부하고 있는 지금! 데큘레인 교수님의 명성이라면 금세, 이 마법의 계열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나는 그 끈질긴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감히 데큘레인에게 이리 당돌하다니. 뭐 저딴 캐릭터가 있나 싶지만, 술식 자체는 확실히 조금 기이하다. 평범한 마법진는 궤가 다른, 직선이나 곡선이라 규정 할 수 없고, 다만 살아있는 기생충 수십마리가 제멋대로 뒤얽힌 형상. 그 술식을 바라본 순간─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해력이 작동했다. 안구에 물감이 스며든 듯 시야가 푸르게 일변하고, 사고(思考)와 연산의 속도가 증폭되어 시간이 느려진 듯하며, 뇌의 줄기가 그 부하를 견디지 못하여 타는 냄새가 코끝에 맴돌지만······.
찰나일 뿐이다.
「마력 : 360 / 3,375」 1 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마력이 탕진되었다. 그것으로 나는 마법의 정체‘만’ 가까스로 파악할 수 있었다. [ 환혹 계열 : 결계 마법 ] 이 이상의 이해. 즉 술식을 ‘구현’하거나 ‘해체’하는 수준까지는 이 두 배의 마력으로도 부족하겠으나, 다행히 저쪽도 거기까지는 원하지 않았다. 술식의 정체만 원했을 뿐.
“지금 기숙사에 남은 새내기들이 과제 삼아 열심히 분석은 하고 있지만, 방학인지라 도움을 구할 선배나 교수님이 부족하여 진척이 없습니다. 만약 교수님께서 힌트라도 주신다면─” “힌트고 뭐고 할 것도 없다. 환혹 계열의 결계 마법이다. 누군가가 너희들을 가두려 했나보군.” “······네?” “끝이다.” 자신에 찬 확답. 당돌한 마법사는 자못 당황스러운 듯했으나,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당을 나섰다.
데큘레인. (3) [ 사이드 퀘스트 완료 : 대학 강연 ] ◆ 상점 화폐 +0.5 화장실. 화장실, 화장실. 화장실은 어디냐. 화장실이 급하다······ 이는 내가 데큘레인이 아니라는 증거. 데큘레인의 성격이 일부 옮았다 한들 그것은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나 김우진이니, 나도 모르게 쌓인 심적 부담의 결과로 아랫배가 아픈 것이다. 꾸르르르륵─ 나만 알 수 있는 생리현상이 괴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완벽한 모델-워킹을 하고 있다. 급하지만 다급하지 않게 화장실을 찾던 나는 문득 마주하게 되었다. 홀의 저편, 일직선의 복도에서 나를 바라보는 한 여인을. “······.” 나는 걸었다. 그녀는 가만히 서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간극은 자연히 좁혀졌고, 손 닿을 거리에서 내가 먼저 멈추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녀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희고 고운 머리카락과, 맑은 얼음처럼 투명한 눈은 언젠가 모니터에서 보았던, 피에 젖은 그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내가 확인한 데큘레인의 죽음 열여섯 중 여덟이, 그녀와 관련되어 있었다. “······오랜만이다.” 그녀의 이름은 율리, 이 몸의 약혼자. 그리고 훗날 기사의 정점에 오를 네임드 캐릭터.“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율리가 물었다. 나에게는 해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어떠한 표정도 없이 율리를 바라보았다. 시종이었다면 이 시선을 받아내지 못한 채 물러났겠으나, 율리는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글쎄.” 나에게는 최선이었거늘, 율리의 미간은 꿈틀거렸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일주일 전에 저와 했던 약속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가만히 서서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그 깊고 아름다운 눈망울의 밑바닥에, 불길같은 적의가 일렁이고 있었다.
“당신은 그 약속을 어기셨습니다.” “······.” 알지도 못하는 약속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치려 했다. 똥이 마려웠다.
율리는 한 발자국 옆으로 움직여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도망칠 생각이십니까.” 도망치려했다. 똥이 마려웠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든 상황은 악화될 테니. “또, 이런 식으로?” 그러나 이 여자는 도망치도록 놔두지 않았다. 송곳처럼 차가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최악이었다. “······우리가 무슨 약속을 했었지.” 정녕 모르니 물은 것이지만, 뒷목에 닭살이 올랐다. 율리의 분노가 피부에 경기를 일으켰다. 간지러웠다. 등이 뜨거웠다. 몸을 긁고 싶었으나, 이 고결한 몸은 그 따위 수준 낮은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조금 겸언쩍은 말을 이어버렸다.
“묻는 것이다. 한동안 열병을 앓아 잊어버린 듯하다.” “하.” 여자의 얼굴에 체념에 가까운 허탈이 떠올랐다. 분노보다 더한 탄식이었다. “······빌어먹을. 당신은 역시, 그 뿐이었던 겁니다.” 약혼자에게 건네는, 시리고 서늘한 음색. 슬픔과 단념이 섞인 경멸.
“가십시오.” 그녀는 자리를 비켜주었고, 나는 그녀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렇게 멀어지면서도 뒤통수는 여전히 간지러웠다. 복도를 벗어난 나는 귀빈용 화장실로 들어갔다. 누가 올까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볼일을 봤다.
“가렵고 마려워서 죽을 뻔했다······.” 나는 장을 게워내며 등허리와 목을 긁었다. 긁는 것도 자리와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한다니, 참으로 피곤한 성격이다. 이러니 오래 못 살고 죽지.
* * * 율리는 데큘레인을 보내고도 한참 동안을 그 자리에 서있기만 했다. 속에서 들끓는 울분과 부아가, 가라앉을 기미조차 없이 홍염처럼 타올랐다. 그나마 억지로 억지로 삭여내고 있었는데 웬걸, 데큘레인만큼이나 껄끄러운 상대가 나타나고 말았다. 대학의 이사장이었다.
“어머.” 꼬깔 모자를 쓴 ‘에테르’ 등위의 젊은 마법사. 영원불멸이라는 ‘이터널’ 바로 밑단계의, 유력한 대마법사 후보로 꼽히는 이사장이었으나, 성격만 따지면 율리의 인맥 중에서도 가장 악질에 속했다.
그녀는 율리를 발견하자마자 짐짓 두 손을 올려 제 입을 가렸다.
“이럴수가! 데큘레인 교수의 안사람 아니신가요?!” “······.”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따위의 말이 저 작자에게 통용되지 않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여 율리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바깥사람의 강연, 참 좋았어요~ 역시 수석교수 답게 설명도 잘 하구나,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나도 그 강의력을 배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압니다. 저도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잘라내려 했건만, 이사장은 기어코 꼬투리를 잡았다. “아니?! 봤다니요? 내조인가요? 드디어, 사이가 좋아지셨나요?” “······.” 내조, 그딴 낭만적인 목적은 결코 아니었다. 율리는 오늘, 정녕 데큘레인이 자신과 맺은 약속을 지킬 것인지, 그 결말을 두 눈으로 보기 위해 왔다.
율리는 그에게 분명히 말했다.만약 데큘레인 당신이 본인의 신의를 지킨다면, 즉 당신의 허위와 기만을 모두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자신은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겠노라고.
이는 파혼이 야기할 가문의 체면, 혹은 가문에 걸맞는 격식을 유지하기 위한 치레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고. 모든 세속적인 것을 초월하여 다만 한 명의 기사로서,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신념의 발로일 뿐이라고······. 정말 그 뿐이었는데. 분명 당신도 동의했을 터인데.
“왜 그러세요~? 오늘 강의는 멋있었는데요.” 끄드드득. 천연덕스러운 비아냥에 율리는 이를 갈았다.
데큘레인은, 기어코 마지막까지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다. 본인의 능력이 아닌, 타인의 것을 훔치고 갈취하여 이룬 업적. 그 이면의 악행과 비리를 뉘우치고 사죄하지 않았다. 그럴 용기조차 없는 남자였으니, 이제는 정말 포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본인이 조작한 허위와 기만 속에서, 영원토록 불쌍하게 살아갈 것이었다······. “······뭐양. 오늘은 별 재미 없네. 그럼, 수고해요! 저는 가볼게요!” 이사장은 입술을 샐쭉이고 떠났다. 율리는 여전히, 대리석 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이 서있었다. 발밑에서, 진창처럼 어그러진 여러 감정들이, 그녀를 집어삼키려는 듯했다.
그의 유크라인과.
자신의 프하이르덴. 언젠가, 누군가 했던 말이 귓가에 되뇌어지고 있었다.
─마법사로서 두각을 드러낸 데큘레인과, 천부적인 기사의 자질을 지닌 율리.
두 고고한 가문의 핏줄이 조화를 이룬다면, 혈통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명백히 이롭기만한 대사일 것입니다.
그러나 데큘레인의 마법적 재능이 그저 범재에 불과함을, 두 가문은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데큘레인은 자신을 ‘술식 해석의 천재’라며 세상을 속이고 교수가 되었으나······ 어떤 사건 이후로 그 잘난 이론 실적도 끊기게 되었다. 만약 두 가문이 중앙 정계와 연이 없는 가문이었다면, 혹은 덜떨어진 방계였다면, 어느 한 쪽이 길길이 날뛰었을 테지. 그들은 서로가 도도한 명문이기에 쉬쉬했다. 둘 중 어느 한 쪽이 나서서 다른 쪽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약혼은 파기되지 않을 것이고, 약혼이 파기된다 하더라도 데큘레인의 허위가 폭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율리는, 데큘레인이 스스로 자신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는, 오늘 그 무엇보다 확고한 행동으로써 자신과의 약속을 깨트렸고, 또 거부했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이 직접 말해야 할 것이다. 이 비루한 혼약의 종언을.
······기어코, 관계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녀의 등 뒤, 그림자처럼 서있던 부관이 낮은 말을 건넸다. 칠흑의 머리카락이 무겁게 가라앉은 사내, 베론이었다. 율리는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곧 강연 시간이다. 가자.”그녀는 걸었다. 그 얇은 등 뒤로 수많은 기사가 뒤따랐다. 기사의 대가(大家)이자 성지(聖地)라고도 불리는 명문가 프하이르덴의 직계혈족. 세간에서도 젊은 기사의 귀감이라 불리는 율리는, 오늘 강연 일정이 잡혀 있었다. 말뿐인 데큘레인과는 달리, 직접 시범하며 검을 맞딱뜨리는 종류의 ‘진짜 강연’이었다······.
······그녀를 따라 걷던 여러 기사 중 한 명이 우뚝 멈추었다. 치렁치렁한 흑색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그 시선은 서서히 뒤로 돌아, 떠나가는 데큘레인을 노려보았다. 차갑게 갈무리한 살기가 놈의 뒷목을 향해 뻗었다. ······율리의 기사 베론은 생각한다. 자신은 오늘, 수도 없던 번민과 고뇌의 해답을 구했다.
이는 주군을 위해, 자신의 손에 쥐어진 처결이었다.
오직 자신만이 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죽이자.
저 비루하고 더러운 남자를. 목을 자르고 토막을 내어서.
나의 주군을 행복하게 만들자······.
* * * 교내 식당. 이프린은 애꿏은 오므라이스를 뒤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강연장에서 데큘레인을 엿먹이려 했다. 데큘레인 본인이 자부하는 ‘술식 해석 능력’은 명백한 거품, 본디 제 아버지의 능력이었으므로, 속임수를 부릴 수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술식 해석을 부탁하면 당황할 게 분명했으니.
물론 데큘레인에게 찍힌다는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역으로 당해버렸다. 설마 이름 하나 말하지 않았다고 사람을 예의 없는 병신으로 만들어버릴 줄이야. 역시 만만찮은 상대다.
“쪽팔려 죽는 줄 알았네······.” 푸흐흐흐─ 푸흑─ 거리던 비웃음이 아직도 귓가에 선연했지만,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풋. 환혹계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프린은 히죽 웃었다. 역시, 이런 경험은 없어서 당황한 모양이지? 환혹마법은 무슨. 그냥 되는 대로 지껄여도 왜 하필 환혹마법이냐.
환혹마법은 아주 어려운 계열의 마법이다. 사람의 지각과 인식을 헤치고 속이기 위해서는, 가성비가 안좋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력이 필요하니까.
대부분의 환혹마법에 ‘매개’가 필수인 것은 그 때문이다.
한데, 매개도 없는 환혹? “누가 병신 아니랄까봐 진짜 병신이네.” 만족스레 뇌까리던 그때였다.
“이프린! 이프린!” 시끄러운 목소리와 발소리가 이프린을 부르며 다가왔다. 그녀는 그쪽을 보았다. 저번 주, 새내기 마법사 OT 에서 보았던 동기들이었다.
“덕분에 알았어!” “······음? 뭐를? 뭔 소리지?” 이프린은 눈만 깜빡거렸다. 동기 마법사가 이프린의 어깨에 손을 얹고 외쳤다. “어제 기숙관 정문, 그 마법 술식 말이야!” 어젯밤, 마법사 기숙관의 정문에 붉은 점액으로 새겨진 정체불명의 술식. 학계에 보고된 적 없는 술식이라 처음에는 ‘악마의 소행이다─’ 라며 난리였지만, 지금은 새내기들이 ‘해석해서 내 실적으로 쌓겠다─’며 난리였다. 계열 별로 경쟁이 붙었을 정도로.
“······뭘까? 난 아무 것도 안했는데?
“에이. 아무 것도 안하긴. 네가 데큘레인 교수한테 여쭤봤잖아.” “······엥?” 이프린은 당황스러웠다. 난 여쭤본 게 아니라 엿먹인 건데? 이게 지금 무슨 소리람?
“아~ 대박 대박. 우리는 그 교수 무서워서 물어볼 엄두도 못냈는데. 너 진짜 간 크다.” “어? 아니, 아 잠깐만. 그 마법이······ 진짜 결계였다구?” 이프린은 당황스러웠다. 그럼, 데큘레인 말이 맞았다는 거야 지금?
“어어. 진짜로. 결계라고 가정하고 술식 재구성하니까, 딱 맞네 딱 맞아.
와~ 데큘레인 그 양반도 진짜 대단하지않냐? 매개도 없는데 어떻게 환혹마법인 걸 맞히냐.” 서서히 벌어지던 이프린의 입이 거의 식탁에 닿았다. 크게 열린 입에서 히엑- 히엑- 거리는 숨소리만 흘렀다.
“고마워 이프린. 우리 이거 보고서 만들어서 올릴 건데, 네 이름도 올려줄게.” “어? 아니 그럴 필요는······ 없긴 하지만서도······ 그, 그래. 올려줘.
” “오케이!” 그들은 그렇게 싱글벙글 웃고는 우수수수 떠나갔다.
이프린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참 착한 사람들이다. 입 싹 닫을 수도 있는데 굳이 실적을 나눠준다고 하니······.
그런데, 상황 자체는 착하지 않다. 괜히 데큘레인 평판만 올라갔잖아.
“우, 운이 좋네. 찍어서 맞춰?” 이윽고 현실을 부정한 이프린은 백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개강이 머지 않은 마탑의, 어떤 교수가 작성한 강의 계획서였다. [ 원소 속성 마법의 이해 ] [ 등급 : 고급 (5 학점) ] [ 담당 교수 :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 “······.” 데큘레인의 수업. 자신은 원소 속성이 아니긴 하지만, 듣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애당초 원소는 모든 마법의 기본이라 할 수 있을 뿐더러, 예로부터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 했으니. “기다려라······.” 이프린은 강의 계획서를 노려보며 그르렁거렸다.
데큘레인. (4) 로테오 관.
방금 내가 강연을 했던 대학교 건물의 이름이었다. 십년 전 유크라인 백작가의 기부로 건축된, 대학 부지에서 세 번째로 큰 건물. 지금 나는 그 로테오 관을 나와서 교정을 거닐고 있다. 방학이라 학생이 거의 없으니 대강 관람이라도 할 생각이다.
“넓군.” 대학교의 면적은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또한 거의 전체가 평지였고, 정원과 운동장, 여러 건물과 시설, 길목을 비롯한 환경 등은 과연 우리 팀이 참고했었던 대로 미국 캠퍼스와 유사했다.
나는 우선 데큘레인의 직장인 마탑으로 향했다.
참고로 이 게임에서 최고위 대학은 ‘제국황실대학교’이고, 마탑은 그 중에서도 끝판왕에 속하는 학부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마법과는 서울대 의학과, 마탑은 서울대학병원인 셈이다. 그렇게 걷던 중, 나는 등 뒤에서 쫄쫄쫄 따라오는 녀석을 뒤늦게 발견했다. 암살자인가? 놀랄 뻔했지만, 다행히 차에서부터 함께 했었던 마법사였다.
누군진 몰라도 로브를 뒤집어 쓴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자네 이름이 조로였던가?” “네? 네에? 아뇨, 아뇨! 알렌입니다!” “헷갈렸다.” “아······ 알렌이랑 조로가······ 네, 네에······.” 나는 말 없이 걸었다. 그런 내 눈치를 보던 알렌이 갑자기 말했다.
“교수님! 그리, 그리 걸으시니 화보 같습니다. 제가, 그, 카메라라도 챙겨왔어야-” “이제 그런 말 할 필요 없다. 편히 걷거라.” “아, 네, 네에······.”예전에는 뭐 데큘레인이 시켰겠지. 마탑은 탑이라는 명사답게 대학교의 어느 곳에서나 눈에 띌만한 높이였고, 보이는 대로 걷다보니 금세 닿게 되었다.
[ 수석 교수 :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확인합니다. ] [ 인증 완료 ] 마탑의 마공학 출입문은 내 몸과 홍채를 인식하고 스스로 열어주었다.
마탑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내게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알렌에게 말했다.
“집무실로 가지.” “네!” 알렌은 헐레벌떡 달려서 로비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층수는 77. 마석으로 작동하는 엘리베이터는 대략 3 초 만에 도착했다. [ 수석교수 :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 내 집무실은 플로어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널찍하고 호화로운 집무실이었다. “······.” 내부는 무균실처럼 깨끗했고, 서가에는 웬 책들이 무지하게 많았으며, 집무책상에는 수정구슬부터 만년필, 다이아몬드 명패, 황실대학교수의 인장, 황금 지팡이 등등······. 삐까번쩍한 공간을 나는 내색 없이 살폈다. “이건 무엇이냐.” 슬며시 의자에 앉자마자 책상 위의 문서가 눈에 띄었다. 그 형태와 규격 자체는 방명록과 유사했다.
“아, 올해 신입 마법사들 후원 목록입니다!” 나는 표지를 펼치고 내용을 훑었다. │ 신입 마법사(데뷰탄) │ 제이렌 │ 19 세 │ │ 속성 : 원소 │ 주계열 : 보조 │ 후원금 : 30,000/500,000 │ 스카우팅 리포트 │ “음.” 보자마자 대강 이해가 되었다. 이 세계관의 마탑은 연구 기관이다. 우리 세계로 따지면 칼텍이나 MIT 와 비슷한 계열로, 연구비는 필수 불가결하다. 아니, 마법사에게는 현대의 과학자나 공학자보다도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실용적인, 혹은 파괴적인, 혹은 유용한 마법을 개발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마법사 본인의 발전을 위한 기본적인 식비, 수련비, 재료비 등등에도 천문학적인 재원이 소모되는 것이다.
“······?” 그 인명을 훑던 나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몇 마법사들의 이름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것이 ‘돈 되는 이름’ 임을 깨달았다. 아마도 「 대부호 재력가」와 「육안」의 조화였다.
──「대부호 재력가」── ◆ 등급 :레어 ◆ 설명 :타고난 대부호, 특출난 재력가. 이른바 ‘돈이 되는 것들’ 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직감을 지닌다. :주어지는 정보가 많을수록 그 정확도가 향상된다.
───────── ──「육안」── ◆ 등급 :레어 ◆ 설명 :직감, 특성, 마력, 따위를 눈으로 볼 수 있는 힘.
:이 자체보다는 다른 특성과 결합되어 사용된다. ───────── 돈 되는 일에는 기가 막히게 반응한다는 특성과, 특성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특성의 조화.
즉, 나는 마법사들의 이름과 장단점을 분석한 스카우팅 리포트 만으로도, 이 녀석들이 돈이 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름은 눈에 익다······.” 그러던 와중, 나는 어떤 네임드 캐릭터를 찾았다.
│ 신입 마법사(데뷰탄) │ 이프린 루나 │ 17 세 │ │ 속성 : 기물 │ 주계열 : 파괴와 보조 │ 후원금 : 0 / 10,000,000 │ 스카우팅 리포트 │ 루나, 루나, 루나······ 사진 속 여인은 옅은 회색의 머리카락에, 세상 불만스러운 비취색 눈으로 정면을 노려보고 있다. 아름답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날붙이, 혹은 덜 자란 맹수의 인상이다. 생후 3 개월 정도의 표범이나 치타.
“······.” 내가 모델링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회사에서 주워 들은 말로는, 데큘레인과 확실한 악연인 네임드. 아버지의 원수라나 뭐라나. 아무튼 그런 루나의 후원금은 0 에 머물러 있었다. 다른 신입 마법사들에게는 최소한 10,000 엘네라도 지원되었거늘.
“이 녀석에게는 왜 후원이 하나도 없지?” 나는 알렌에게 물었다. “네?” “이프린 루나라는 이름이다.” 그러자 알렌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네?” “왜 그러지.” “······네에?” “괜찮으니 말하라.” “아······ 마탑의 다른 교수 님들과 투자자 님들이 그······ 눈치를 보고······.” 데큘레인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루나의 스카우팅 리포트를 살피다가 조금 놀라운 부분을 뒤늦게 발견했다.
│ 후원금 : 0 / 10,000,000 │ “······알렌. 요즘 학식 한 끼가 얼마 쯤 하는지 알고 있나.” “아, 왕돈까스가 3 엘네입니다. 맛있습니다. 나중에 한번 드셔보······ 아, 죄송합니다.” 대략 1 엘네가 1000 원 쯤 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세상 물정을 많이 모르는 것 같구나.” 후원 최대치가 10,000,000 엘네. 후원금을 1 천만 엘네, 거의 100 억원 만큼이나 받겠다는 뜻이었다. 배 터질 때까지 먹겠다는 건가. 아무리 후원 형식이라도 나중에는 이자까지 쳐서 갚아야 할 텐데.
“후원이라······.”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이프린 루나’라는 이 마법사는 데큘레인의 적이다. 아니, 데큘레인이 그 마법사의 적이다. 그러나 데큘레인이라는 인물에게 원한이 있든 없든, 이대로 원래의 게임처럼 방치한다면 결국 ‘나’ 는, 누군가에게든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악당의 운명」─ ◆ 등급 :??? ◆ 설명 :악당의 운명. 온 세상이 그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인간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법······.
────── 악당의 운명, 이른바 필연적인 죽음.
게임 속 데큘레인은 다양한 방법으로 죽는다. 심장에 검이 처박히거나, 완드가 처박히거나, 화살이 처박히거나, 독극물을 처먹거나, 폭탄 테러를 당하거나, 뭐가 되었든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나는 다른 선택을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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