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9
그러나 그간의 꾸준한 독서와 마법 공부 덕분에 내 지식 수준은 어느 정도 향상되었고, 이 마법에서 「강화」를 담당하는 부분의 해석도 일부 성공했다.
직선은 없고 오직 곡선으로 이루어진 보조 계열의 「금속 강화」.
이제부터 나는 이 회로를 내 육신의 「염동」에 이식할 것이다.
물론 원래 「금속 강화」의 규모와 성능을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 출력을 대단히 축소할 것이고, 「염동」이 물체를 붙드는 그 순간에만 적용되도록 하여 리스크를 줄일 것이며, 「금속 강화」 술식의 일부를 목강철에 새겨 넣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프린 덕인가.” 사흘 전 이프린의 도전에서 얻은 영감, 내 마력적 부담을 완화하는 ‘촉매술’이다.
사각─ 사각─ 나는 목강철 수리검에 회로를 새겼다. 20 개 전부에 30 분이면 충분했다.
이 「금속 강화」 다음에는 「기초 복원」을 생각 중이다.
「염동」 자체에 복원력을 부여하여, 「염동」으로 다루는 물체가 스스로 회복하도록 하는 술식이다.
아마 이런 다재다능한 「염동」은 이 세상에도 없었을 테지.
하긴, 근본도 없이 짜깁기하듯 만들고 있으니. 「강화」와 「기초 복원」까지 더해지면 이제 염동력이라 하기에도 뭐하다.
“······복원 마법?” 불현듯 어떤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랍 속에서 펜던트를 꺼냈다.
이프린과 이프린의 아버지가 함께한 사진. 그러나 정작 아버지의 얼굴은 지워지고 없다.
복원 마법의 전문가라면, 이 찢겨진 부분 쯤은 어렵지 않게 복원할 수 있을 터.
물론 이것을 복원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만은······.
“안 하는 것 보단 낫겠지.” * * * ······제국 황실 대학마탑은 지상 101 층 규모로 대륙 최고도(最高度)를 자랑한다.
그 안에서도 특히 80 층 이상은 ‘상층부’라 하여 마탑의 내밀한 사안을 다루며, 같은 마탑 교수라 하여도 그 서열에 따라 입장 권한이 상이하다.
─좋아요! 이제 제국황실대학마탑 임원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상층부에서도 특히 최상층이라 할만한 대학마탑의 91 층.
한 층 전체가 회의실로 사용되는 플로어에 오늘, 다수의 교수가 소집되었다.
반기(半期)마다 행해지는 마탑의 정기회의였다.
─그런데 그 전에, 경사부터 축하하고 갈게요! 데큘레인 교수의 황궁 교습 마법사 발탁! 축하해요!
이사장이 나를 보며 박수를 쳤다. 이 회의실은 특이하게도 서열에 따라 계단식이었기에, 이사장이 가장 상석이었고 그 바로 밑이 나였다.
짝짝짝짝─ 다른 교수들도 박수로 화답해주었다. 나는 그저 고갯짓으로 응대했다.
─당장 내일부터 출근이라죠?! 이 일은 저희 마탑에도 영광이에요! 물론 저 어디 왕국에 루이나라는 사람도 같이 발탁됐긴 하지만, 뭐! 아무튼 첫 번째 안건부터 들어갈게요! 역시 기말고사 문제예요!
마탑의 중간고사가 이론적이라면, 기말고사는 실전적이다.
따라서 교양이 아닌 모든 강의의 시험은 ‘상황 극복’ 또는 ‘마법 실력 증명’이 주를 이룬다.
─아시다시피, 너무 슬프게도 선황제께서 승하하시며 일정이 많이 미뤄졌죠······. 그래서 되게 시간이 촉박해요! 혹시 장소 대여 따위의 준비가 필요하면 얼른 신청을 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시험을 준비하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번에 베르흐트에서 가결된 안건 알죠?! 이제 ‘악마 정화’에 마탑이 지원을 가야 하는데······ 저희 마탑에도 지원 요청이 왔어요! 조금 급박한 문제인지, 성당에서는 데큘레인 수석교수를 콕 집어서 부탁했습니다!
“······.” 나는 말없이 이사장을 바라보았다. 이사장은 배시시 웃었다.
─괜찮겠죠?
[ 사이드 퀘스트 : 악마 정화 지원 ] ◆ 상점 화폐 +2 “예.” 나는 별 말 없이 동의했다.
여기서 거절하는 건 눈치가 보일 뿐더러, 애당초 나에게는 악마가 마수보다 훨씬 쉽다. 대다수의 마법사는 반대겠지만.
─그리고 여태 폐쇄되었던 ‘어둠의 산’은 다시 개방하기로 했어요!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참, ‘마릭 개방’도 다음 주부터예요!
교수들이 낮은 침음을 흘렸다.
보수적인 그들은 현 상황을 다소 부담스러워하는 듯하나, 어쩔 수 없다.
황제는 급진적이며 호탕한 사자의 심장. 또한 베일에 휘감긴 비밀스러운 영혼.
모순적인 그녀는 플레이어의 성향에 따라 악역이 될 수도, 선역이 될 수도 있다.
─또 이번에 교수님들의 연구 프로젝트, 논문 작업 등등을, 지출과 수입으로 나누어서 재정적으로 한 번 판단해봤거든요?!
회의는, 아니 이사장의 말은 일방적으로 이어졌고, 허공에 다수의 차트가 떠올랐다.
렐린, 레트란, 시아레, 피렌즈, 로칸 등등······ 그 휘하 마법사만 수십을 거느린 교수들의 재정적인 성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참고로 신진 교수들은 서열이 딸려 이 회의에 참여하지 못했다.
─3 년 동안 연구가 정체 중인 데큘레인 교수님을 제외하고는 실적이 영 별로예요. 가만히 있어도 절반은 간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거겠죠?!
데큘레인은 3 년 동안 강연만 했다.
강연료 절반은 데큘레인에게 지급하고 나머지 절반은 마탑에 기부하는 형식이었는데, 그 수익이 다른 교수들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저, 이사장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저희 연구는 순수 학문적인 내용인라, 단순한 재정으로 판단하기에는······.
레트란의 조심스러운 변명은 분명 옳은 말이다. 렐린, 레트란, 시아레 등등의 마탑 교수는, 이따금씩 내가 무시하기는 해도, 학문적으로는 큰 성과를 이루었고 또 이뤄가고 있으니.
다만, 소모하는 마석과 휘하 마법사의 인건비가 너무나도 거대할 뿐이다.
─뭐가 됐든! 순수 학문은 돈 못벌어요?! 데큘레인 교수 중간고사 시험지는, 순수 학문인데도 돈 무지하게 벌었잖아요!
이사장이 반박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사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이번에 ‘기획조정실’이라는 부서를 5 년만에 다시 열기로 했어요! 그 실장을 임명해야 하는데, 혹시 추천할······.
그 말을 듣자마자 손을 들었다.
“제가 맡겠습니다.” ─데큘레인 교수가요?
“예.” 기획조정실. 쉽게 말하면 기획과 예산을 관리하는 자리지만, 나는 그보다 더 높은 곳을 보고 있다.
─추천이라고 했는데요, 자기를 추천하는 건가요?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을 추천합니다” ─뻔뻔하네요!
“차트상으로도 제가 알맞습니다.” 기획조정실의 장, 즉 기조실장의 권한은 물론 막강하다.
그러나, 내 최종적인 목표는 대학마탑의 ‘이사장’이다.
시점 상 아드린느는 길어도 1 년이면 대마법사로 그 지위가 격상된다.
대마법사라는 어마어마한 존재가 고작 마탑에 남는 것도 눈치가 보일 테지.
그녀가 떠난 이후, 이사장의 자리에 오르면 ‘직업 보너스’라 하여 다수의 스텟─자그마치 「1,000」에 달하는 마력을 포함한─을 거머쥘 수 있다.
─음······. 다른 교수들은 의견 없나요?
그때 나는 교수들을 노려보았다. 가능한 무섭게 치뜨고 노려보았다.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교수들은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그런데, 3 년 동안 연구가 없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연구 기획을 판단할 수 있겠어요?
“저는 실리적인 연구라면 무엇이든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게 연구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나는 회의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부끄러우나, 그 동안은 연구보다도 해결에 심취하여, ‘심포지엄’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엥? 심포지엄이요?
“예.” ─그럼 그것 때문에 여태 연구를 안했다고요?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렇지는 않으나, 잠시 한 눈이 팔린 탓입니다. 다만, 이제 그 문제도 해결 직전입니다.” 그러자 이사장은 오묘한 얼굴로 나를 내려보았다.
─흐음! 그러면, 좋아요! 밀레니엄은 아니고 심포지엄이지만, 뭐! 만약 그런 학술적인 가치와 업적을 데큘레인 교수가 이룬다면, 기조실장은 당연히 줄만하죠! 대신 문제를 풀지 못할 경우, 쪽팔림은 당신 몫이에요!
* * * “······마탑에서는 그런 소문이 있었사옵니다. ” 황궁의 서재에서, 소피엔은 환관 ‘졸랑’에게 보고를 받았다.
“그가 차기 이사장이 될 수도 있나? 행보를 보면 노골적으로 노리는 듯하다만.” “가능성은 없지 않사옵니다만, 현재 그의 연구가 정체된 터라······.” 환관의 귀는 범위가 넓었고 자세했다. 또한 상대에 따라 입이 가벼워 기사처럼 말을 아끼지도 않았으니, 편리한 장난감으로 삼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심포지엄 문제를 해결한 것과, 유크라인의 위상이 합쳐지면 기조 실장이 되기란 쉽사옵니다. 다만 이사장은 또 다른 문제이지요. 폐하의 허락도 필요할 것이옵니다.” 소피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서재의 창틀에 몸을 기대었다.
황궁으로 이어지는 ‘겸허의 길’이 한 눈에 보이는 자리였다.
이제 곧 시간이 되었다.
“음.” 때마침 한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두운 숲을 머금은 듯 심록의 장발. 날카로운 이목구비와 앙 다물린 입. 그 단단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꽉 여민 로브 코트 차림은, 황제가 보기에도 썩 아름다웠다.
“루이나, 폰 슐로트 맥퀸!” 황제는 그렇게 외쳤다. 흠칫 놀란 루이나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반갑다!” 그 호쾌한 외침에 루이나는 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극존한 예의였다.
황제의 시선이 거두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생각인듯, 그녀는 동상처럼 있었다.
곧이어, 그녀의 뒤편에서 또 다른 남자가 등장했다.
황제는 다시 한 번 외쳤다.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데큘레인은 소피엔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흔들림과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그는 기품과 정성을 다한 예법을 취했으나,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소피엔이 뒤편의 환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놈은 왜 무릎을 안 꿇지.” “전통 상 교습 마법사와 황제는 반년, 혹은 1 년 간 함께하는 벗이옵니다.
물론 예의는 갖추지만, 군신처럼 극존하지는 않사옵니다.” “그러한가.” “예. 다만 전통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옵니다. 저 사내는 정말 건방지군요.” 환관의 아양에 소피엔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리고는 창틀에서 내려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썩은 동태처럼 되어 있었다.
“막상 둘이나 뽑기는 했으나, 귀찮구나. 저들이 짐 앞에서 재미없는 마법을 떠들 꼴을 상상하니······ .” “잠시 미루어도 무방하실 것이옵니다. 아니면, 문전박대도 나쁘지 않사옵니다. 그렇게 길들이시는 것도-” “되었다. 이미 인사를 했는데 무얼.” 황제는 제 책상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서 체스판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가 피식- 조소를 머금었다.
“격무에 시달리느라 염증이 날 지경이고, 오늘은 어차피 저 ‘벗’들과의 첫 수업이니, 좋다. 체스나 두도록 하지······.” 황궁. (2) ······교수 진급 심사가 시작된지 3 개월.
마탑은 여전히, 수석교수에 대한 담론으로 떠들썩하다.
데큘레인은 독보적인 ‘술식 해석 능력’과 ‘이론적인 틀’뿐만 아니라 유크라인 가문을 뒷배로 두고 있지만, 전체적인 역량에서는 루이나가 데큘레인보다 뛰어나고, 무엇보다 그 인품의 차이 탓에 루이나 쪽이 유력하다는 여론이 여전히 대다수를 차지한다.
지금도 안하무인에 가까운 데큘레인인데, 수석교수가 되면 어떠할지 두려워 기존의 교수들도 루이나를 지지한다는 것이다.또한 마탑의 평가 기준은 가문이나 신분 따위가 아닌 ‘본인의 가치와 업적’이다. 당장 이사장인 아드린느부터 부작위 귀족 출신이니.
그러므로, 수석교수 선별 과정의 정당함을 믿었기에, 루이나는 대항했다.
유크라인의 숱한 외압과 협박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 자리가 네 가문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이제 그만두거라.
언제나 강인했던 당신의 너무나도 쇠잔하고 메마른 목소리. 아버지의 그 말이 루이나를 무너뜨렸다.
유크라인의 외압은 루이나 본인 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로 번지고 있었다.
본래 맥퀸은 전통의 12 가문에 속했으나, 10 년 전 베르흐트 회의에서 탈락한 그날부터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아버지는 큰 부상으로 마력을 잃었고, 맥퀸 가문은 그 명성을 잃었다.
이제 맥퀸에게는 유크라인에 대적할 힘이 없었다.
저 혼자 견디고 버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뒤늦게 알아차린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아버지, 어머니, 동생 뿐만 아니라, 가신과 식솔, 가문의 영지 전체가 붕괴하고 있었다.
투둑투둑······.
비가 추적이며 내리는 날이었다.
루이나는 온몸을 적시는 물줄기보다도 더 거대한 무력감 속에서 데큘레인을 찾아갔다.
“불가합니다.” 제도에서도 손꼽히는 유크라인 대저택의 외문. 그 앞에 선 경비병이 자신을 가로막았다.
“할 말이 있어서 왔다구요.” “사전 약속이 없으시다면 불가합니다.” “알아요, 아는데. 할 말이 있다구요!” “불가합니다.” “······비켜보라니까요! 루이나가 왔다고 하면 데큘레인도······.” 다수의 경비병이 그녀를 막아세웠다. 루이나는 밀치고 밀려나면서 한참동안이나 실랑이를 벌였고, 그 소란은 누군가의 한마디로 멎었다.
“무슨 일이냐.” 데큘레인이었다.
그는 대문 너머, 시종의 우산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내려보는 듯한 시선이, 무시하고 경멸하는 눈빛이 루이나는 죽도록 싫었다.
“또 너냐, 루이나.” 데큘레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루이나는 경비병을 밀어내고 옷을 털었다.
“······.” 그를 노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죽어도 하기 싫었던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정말 죽어도 하기 싫었지만······.
이윽고, 그녀는 피를 각혈하듯 선언했다.
“······포기할게.” “‘포기’?” “응.” 데큘레인은 그런 자신을 길잃은 개새끼 대하듯 굽어보았다.“내가 포기할게. 그러면, 다 끝나는 거잖아.” 루이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 “······‘그만’?” 데큘레인의 뒤틀린 입가에서 조소가 새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증오스러웠다.
“무엇을 그만하란 말이냐.” “······뭐?” 유크라인은 가문 전체를 낭떠러지로 내밀었다. 어음의 기한이 말도 안되게 단축되었고, 가문 수표도 휴지조각이 되었다.
영지가 통째로 파산할 위기였다.
“루이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통 알지 못하겠다만······” 데큘레인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느리게 걸었다. 그의 동공에 싸늘한 모멸이 깃들었다.
“만약 네가 사과를 하러 온 것이라면.” 사과.
그 빌어먹을 말이 어이 없었다.
“마땅한 자세가 필요할 터인데.” 시종이 씌워주는 우산 아래. 데큘레인의 푸른 눈이 표표하게 번뜩였다.
“너는 지금 너무 꼿꼿하구나.” 루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가 살을 파고들며 피가 흘렀다.
“······사과?” “그래. 네 가문은 베르흐트에서 탈락한 이후, 유크라인의 지원을 받았지.
그때 패망하지 않은 것도 유크라인 덕이었지. 유크라인은 맥퀸의 은혜도 모르는 짓거리를 용서해주었으나, 이제 또 다시 그 자식이 옛 버릇을 모르고 개처럼 굴려 하는데, 당연히 사과를 받아야하지 않겠나.” 데큘레인의 어투는 잔잔했고 귀족적이었다. 루이나는 주먹을 쥔 채 그를 노려보았다. 데큘레인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뿌리부터 썩은 나무는 살아날 수 없지. 좋다. 두고 보거라. 너희 가문은 그저 식물로 전락할 것이니.” 그는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그 순간 세상이 어지러웠다. 하늘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이대로 멀리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가문을 위해서라도 도망쳐서는 안 되었다.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에 루이나는 외쳤다.
“잠깐!” 데큘레인이 멈췄다. 그리고 고개만 비틀어 자신을 돌아보았다.
“······할게.” 루이나는 천천히, 입술의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찰팍— 빗물에 뒤섞인 진흙이 옷속을 파고들었다.
“······.” 이번에는 그 데큘레인도 조금은 놀란 듯했다.
“······미안합니다. 사과······ 하겠습니다.” 루이나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빗물에 뒤섞여 드러나지 않았다.
곧, 작은 조소와 함께 경멸하는 음색이 내려앉았다.
“쯧. 천하고 한심한 것.” 데큘레인은 뚜벅뚜벅 다가왔다. 빗발은 더욱 강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채 100 년도 안 된, 근본도 없고 역사도 없는 빌어먹을 가문의 개버러지가.” 꿇어앉은 그녀의 무릎 위로, 그의 구둣굽이 내려앉았다.
“자존심 하나 지키겠다고 주제도 모르고 기어 오르던 꼴은······.” 지그시 즈려밟았다. 낙인을 새기듯 꾹, 꾹, 내리찍었다.
루이나는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참 보기에 역하고 더러웠다.” 콰직─!
뒷굽이 무릎을 가격했다. 살이 찢어지고 인대가 파열되며 그 위로 피가 새었다.
루이나는 처절하게 신음을 참았다.
“썩 꺼져라. 가문의 회생을 원한다면, 내 눈 앞에서 그 빌어먹을 면상을 보이지도 마라.” 데큘레인은 짓씹듯 뇌까리며 돌아섰으나, 루이나는 그 자리에 머물렀다.
경비병은 다시 외문을 지켰고, 굵은 빗발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다.
울컥이며 솟는 출혈이 빗물과 섞이며 흘렀다.
비가 멈출때까지 용서를 구한 그 다음날, 루이나는 대학마탑에 사직서를 작성했다. 이틀 뒤에는 제국을 떠났고, 일주일이 지나자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루이나는 그날의 굴욕을 잊지 않았다.
미친 듯이 노력했다.왕국마탑의 수석교수로서 여러 논문을 집필했고, 마법을 개발했고, 그렇게 돈을 벌어 가문을 재건했고, 왕국 국민들의 존경까지 얻게 된 그 결과가 바로 지금······.
황궁이다.
루이나는 상전벽해의 기분을 느끼며 황성에 섰다. 근위병에게 신분을 제시하자 경례와 함께 문을 열어주었다.
황성의 입구에서 황궁까지는 자그마치 40 분이 걸렸다. 여러 검문이 있었고, 중간에는 마차까지 갈아탔다.
마침내 도달한, 내밀한 황궁으로 이어지는 ‘겸허의 길’.
“루이나, 폰 슐로트 맥퀸!” 황제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에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었다.
황제가 자신에게 보이는 총애에 감격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그놈의 이름을 듣고, 그놈의 얼굴을 보았을 때.
“······.” 루이나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이제는 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날의 굴욕을 두배, 세배로 되갚아줄 것이다.
마음 속 칼날을 예리하게 갈며, 루이나는 조용히 ‘겸허의 길’을 걸었다.
* * * 나는 황궁의 홀에서 루이나를 바라보았다. 루이나는 겉보기에 까탈스러운 인상이었다.
“쳐다보지 마시지요.” 실제로도 날이 서슬처럼 잔뜩 서있었다. 나는 말없이 시선을 거두었다.
“한데, 그 자리에서 꽤 오래도 버티시는군요. 당신의 ‘브레인’은 3 년도 전에 자살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번에는 루이나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대꾸했다.
“말 걸지 말지.” “······.” 나를 적대하는 사람에게 애써 착하게 굴 필요는 없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착한척 대해도 역효과만 가득할 뿐이니.
데큘레인으로 거의 반년을 살며 깨달은 간단한 사실이다.
“가벼운 몸수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시녀들이 다가왔다.
루이나가 먼저 코트를 벗고 수색을 받았다. 시녀는 루이나의 가방 가득한 물건들을 보며 물었다.
“무엇인가요?” “폐하께 진상할 선물과 수업 자료입니다.” 힐끗 보니 웬 마법서와 두꺼운 자료들이었다. 시녀 곁의 황궁 마법사가 그것들을 마법적으로 검사했다.
“예. 되었습니다. 이제, 데큘레인 공?” 나도 일어나 시녀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내 몸을 수색하는 시간은 유난히 길었다.
시녀가 내 벨벳 보따리에 담긴 물건을 바라보았다.
“무엇인가요?” “폐하께 진상할 선물이오.” 시녀가 그 보따리에서 물건을 꺼냈다. 대륙에서도 최고급으로 손꼽히는 프르두아 33 년산 와인이었다.
“······주류는 보다 자세한 과정이 필요하기에, 저희가 정밀검사한 뒤 진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소.” “쯧. 우리는 수업을 하러 왔지, 술판을 벌이러 온 게 아닙니다.” 루이나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수색은 끝났고, 우리는 시녀를 따라 황궁의 계단을 올랐다.
황제가 수업을 받는 공간은 ‘배움의 장’이라 하여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
금세 도착한 황금 사자가 조각된 문 앞에서, 시녀가 먼저 노크했다.
똑똑─ “폐하, 교습 마법사 두 분이 왔사옵니다.” ─들어오너라.
“예.” 시녀는 눈을 감고 몸을 숙인 채 문을 열었다. 황제는 본인의 의자에 앉아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안으로 한 발자국 걸어가 예를 취했다.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영광스러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루이나 폰 슐로트 맥퀸. 영광스러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반갑다.” 황제의 호위 기사 ‘케이론’이 저 뒤에 동상처럼 대동한 가운데, 시녀가 문을 닫았다.
루이나와 나는 황제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황제가 껄렁하게 물었다.
“마법이라······ 그래, 오늘은 첫 수업이거늘, 어디부터 시작하나?” 루이나가 재빠르게 나섰다.
“우선, 폐하께서 어떤 계열과 속성이 편한지부터 파악하려 합니다” “계열? 속성? 아, 팔계열 말인가.” “예.” “필요 없다. 첫 만남에 마법은 무슨. 되었느니라. 얘기나 하지.” “······?” 루이나는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품안에 가득한 수업 자료, 수업 계획서와 황제를 번갈아보며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앉도록. 수다나 떨자꾸나.” 루이나가 입술만 뻐끔거리는 사이 황제가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폐하와 함께 마법적 진리를 탐구하기 위하여 선별된 교습 마법사입니다. 수업이 아니라면 이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은 노선을 확실히 정할 필요가 있다.
황제에게 휘말리면 안 된다. 황제가 게을러지게 놔두어서는 게임의 난이도 자체가 급격히 상승하고 말 테니.
황제의 눈썹이 팔(八)자로 세워졌다.
“짐이 하기 싫다니까?” “하기 싫어도 하는 것이 전통이고, 예법이며, 공부입니다.” “······.” 황제는 나를 노려보았다. 톡- 톡- 톡- 불만스러운 듯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루이나는 말없이 내 등에 신호를 보냈다. 마법사 간의 모스 부호에 속하는 ‘위자드 코드’였다.
─지금 뭐함. 이러다 폐하 눈 밖에 남. 너 때문에 나도. 빌어먹을.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그때 황제가 눈썹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럼 이리 하지. 자네들, 체스를 둘 줄 아나.” 체스. 기본적인 룰과 그 오프닝 패턴은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었다.
다만, 이는 김우진이 아닌 데큘레인의 기억이었다. 승마나 체스 따위의 귀족적인 취미 혹은 특기는 데큘레인의 몸에 자연스레 배어 있는 것이었다.
“예. 부족하지만 할 줄은 압니다.” 루이나가 대답했다.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좋다. 그렇다면, 어떤가. 체스로 결정하지. 자네들이 이긴다면 자네들 말대로 수업을 받지. 그러나 자네들이 패배한다면, 이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언반구도 없이,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 “······.” 루이나가 원망스런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다만 의문이었다.
과연 「이해력」은 이 체스에 어느 수준까지 적용될 것인가.
“알겠습니다. 루이나, 네가 먼저 하지.” 나는 루이나의 등을 떠밀었다. 얼떨결에 튕겨나간 그녀는 나에게 표정으로 욕했으나, 곧 고개를 숙인 채 다가갔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감히 폐하의 상대로-” “둘이 머리를 맞대고 해도 상관은 없느니라.” 황제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루이나와 황제의 체스를 관찰한 뒤, 「 이해력」 의 적용 가부를 파악할 생각이었으니.
“흠. 일대일은 시시하다만, 좋다. 시작하지.” “예.” 루이나가 백이고, 소피엔이 흑이다.
탁─ 기물이 체스판을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
체스의 오프닝은 익숙했고, 대국은 천천히 이어졌다.
루이나는 한 번의 착수에도 여러 번을 고민했으나, 소피엔은 힐끗 보고는 기물을 움직였다. 그 자세만으로도 대국의 결말은 뻔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을까.
“체크 메이트.” 체스판에는 오직 흑색의 기물 뿐이었다.
“······졌습니다.” “루이나 자네는 너무 안전 지향적이고 분석적이다. 이것 참, 케이론이랑 두는 게 더 재밌겠어. 이제 다음으로, 자네인가 데큘레인?” 황제가 나를 보았다. 그 흥미로워하는 눈 속에 희미한 적의가 일렁였다.
황제는 어느새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예.” “자네는 짐을 조금 재미있게 해줘야 할 거야. 아니면 벌을 줄지도 모르니라.” 나는 루이나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앉았다.
“피차에게 기회는 한 번 뿐입니다.” “한 번?” “예.” 혹여나 마력이 오링날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었다.
“패배한다면, 저는 깔끔히 물러나겠습니다. 재대결이나 복기는 결단코 없습니다” “······그래. 네 좆대로 하거라.” 그 상스러운 말이 귀를 자극했다.
내가 백이었으므로, 선공이었다. 나는 그저 손을 움직였다. 곧 흑이 내 행마에 대응했고, 나는 손이 가는 대로 체스를 두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는 사이.
시야가 푸르게 물들었다. 시퍼런 물감이 동공에 스며든 듯했다.
「이해력」의 발현이었다.
* * * ······소피엔은 생각한다.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다.
비유하자면 들개를 보는 듯하다. 그만큼 행마가 거칠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쾌속이며 무도하다. 상당히 드세고 사나우나 아직은 조악하다.
다듬어지지 않은 야성이 유리 파편처럼 날카롭다고나 할까.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자신에게 치명상을 가할 예기(銳器).
루이나에 비해서는 수십배 흉포하고 위협적이다.
놈은 오프닝부터 난전을 유도하여 공세 일변도로 달려들었다. 빈틈이 보이면 파고들었고, 잡을 수 있다면 물어뜯었다.
소피엔은 체스판의 형세와 상대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비숍을 전개했다.
탁- 탁- 따라붙듯이 곧장 퀸이 이동했다.
퀸을 사용하는데, 구상에서 착수까지 채 3 초가 걸리지 않았다. 그 무모함에 기가 찼으나, 그렇다고 어긋난 수도 아니었다.
소피엔은 상대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놈은, 유크라인의 당주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체스판을 주시하고 있었다.
먹이가 없어 굶주렸는가, 아니면 단순히 싸움을 좋아하는 것인가.
뭐가 되었든 제 겉모습과는 썩 다른 성미를 지닌 녀석이다.
“······흥.” 그러나 이런 편향적인 행마의 약점을 소피엔은 알고 있다.
굶주린 들개는 제 공격성에 눈이 멀어, 사소한 함정에도 자멸하는 법이다.
탁- 소피엔은 착실히 쌓아가던 연결점에 일부러 허점을 보였다. 실책처럼 보이는 함정이었다.
누가 보아도 먹음직스러운 실책이지만, 이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상대는 포위된다.
소피엔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상대의 수를 기다렸다. 들개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소피엔이 유도한 그대로 걸려들었다.
들개는 자신이 트랩에 걸렸다는 것을 모르는 채 끈질기게 물어 뜯었고, 소피엔은 미소를 지었다.
탁- 나이트가 놈의 퀸을 잡았다.
이것으로 게임은 끝났다.
끝났어야 했다.
······그런데.
“······.” 소피엔은 여전히 계속되는 이 형세가 기이했다. 금세 끝날 듯했던 게임이 예상보다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놈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물을 움직였다.
황제인 자신이 놈보다 더 길게 고민할 수도 없는 노릇.
소피엔도 오기로나마 그 속도를 따라했으나, 놈은 정녕 끊임없이 공격했다.
그 공세를 성공적으로 받아치며 잡아먹었으나, 이상하게도 서서히, 수렁에 빠지는 듯한 기분이 일었다.
분명 형세는 여전히, 아니 시종일관 유리하다.
그러나, 이 묘한 분위기는 무엇인가.
승리는 코앞에 있는데, 오히려 놈에게 끌려가는 듯한 이 기이한 감각은 도대체······.
어느 순간.
데큘레인이 행마를 멈추었다. 체스는 이제 ‘엔드 게임’에 접어들었고, 황제는 기물이 잔뜩 줄어 텅 빈 체스판을 바라보았다.
그는 왜 갑자기 멈추었는가.
소피엔은 의문을 품었고, 곧 체스판의 배치로 데큘레인의 행마를 예상했다.
한 수, 두 수, 세 수······ 소피엔의 머릿속에서 기물들이 전개되었다.
놈의 비숍이 킹과 이어지는 자리에 섰고, 자신의 퀸이 놈의 비숍을 잡았으나······ 정확히 여덟 번째 수.“······.” 황제는 자신의 패배를 보았다.
만약 데큘레인이 이대로 둔다면, 어떤 행마로도 극복이 불가능한 패배였다.
아니.
‘이대로 둔다면’이 아니라, 그는 ‘이렇게 되도록 자신을 이끌어낸’ 것이었다. 여태 자신이 느꼈던 괴괴한 분위기의 이유였다.
소피엔은 이 절묘한 배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데큘레인이 체스판에 남긴 모든 기물에, 그 위치에, 모든 의미가 있었다.
내가 너무 대충 우습게 여기며 한 것인가.
대저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끌려가게 된 것인가.
황제는 침묵 속에서 눈을 들었다.
“······.” 데큘레인은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내내 체스판만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어느새 자신에게 똑바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기물을 움직이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다음 행동은 또 다시, 소피엔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툭─ 그는 스스로 킹을 쓰러뜨렸다.
백색의 킹이 체스판을 나뒹굴다 추락했다.
황제는 그 킹을 좇던 눈을 들어 데큘레인을 보았다.
“뭐하는 짓이지.” 그 무감한 물음에 데큘레인은 대답했다.
“졌습니다.” 마치 이게 당연한 결과라는 듯이.
소피엔은 되물었다.
“아직 내 킹은 잡히지 않았다만.” “이 이상 해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해답은 너의 해답이냐, 아니면 나의 해답이냐.
황제가 그렇게 묻기도 전에 데큘레인은 벌떡 일어났다.
“저희 둘 다 폐하에게 패배하고 말았으니, 오늘은 아쉽게도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약속은 일언반구도 없이 떠나가는 것.
복기도, 재대결도 없다.
데큘레인은 충실히 약속을 이행했고, 황제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황궁. (3) ······데큘레인은 떠났다.
약속했던 대로 재대결이나 복기는 없었다. 반면 루이나는 여전히 자리에 남았고, 소피엔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이나. 너는 이 형세를 어떻게 생각하나.” “······저보다는 나은 듯합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소피엔도 고개를 끄덕였다.
“훨씬 낫지. 그저 나을 뿐 아니라, 재미도 훨씬 있었느니라. 너는 너무 쫄보다, 루이나.” “······예. 죄송합니다.” “어렸을 적 누군가에게 맞으면서 자랐느냐.” “집안에서 책만 읽은 탓입니다.” 루이나는 소피엔의 말을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겉으로 내색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유크라인과 맥퀸의 사이는 썩 좋지는 않다지.” “······예.” 그러나 이 물음에도 자약할 용기는 없었다. 루이나는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15 년 전의 베르흐트 회의.
그때 맥퀸을 습격하고 탈락시킨 것이 유크라인의 전 당주다.
그는 아버지의 단전을 앗아갔고, 폐인으로 만들었다. 그래놓고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베르흐트에서는 원래 다 그런 일 아니겠느냐며 뻔뻔히 굴었고, 구원과 온정이랍시고 가문에게 재정의 지원을 제안했다.
그 대가로 요구한 것이 맥퀸의 ‘마법 비전’이었다. 훗날 맥퀸이 제 궤도에 오르면 돌려주겠다는 구색 뿐인 약속도 내걸었다.
당시의 맥퀸은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악(最惡)이냐 차악(次惡)이냐의 문제였다.
유크라인의 이런 만행은 비단 맥퀸이 처음도 아니었다.
당장 데큘레인이 당주가 된 이후로도 이딴 행각은 비일비재했고, 그 결과 다수의 마법 비전이 유크라인의 지하 서고에 잠들었다.
그렇기에, 루이나의 일차적 목표는 맥퀸의 마법 비전을 돌려받는 것이었다.
“······.” 한참 말이 없자, 소피엔은 얼굴을 숙여 루이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어이, 우느냐.” “······!” 루이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저었다. 소피엔은 그녀에게서 분노와 증오라는 감정을 어렵잖게 읽어낼 수 있었다.
이리 쉬운 일이거늘.
데큘레인에게는 아니었다. 그의 감정은 불투명했고, 먼지가 덮인 듯 매캐했다.
그 어떤 감정의 편린조차 보이지 않았다.
“루이나.” “예.” “이게 네 선물인가.” 소피엔은 루이나가 가지고 온 마법서에 손을 얹었다.
루이나는 나름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만큼, 돈으로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예. 베르흐트의 드제크단 대장로께서 소싯적 작성하였던 마법적인 깨달음에-” “읽어보지. 이제 너도 가거라. 약속은 약속이니.” “······예.” 루이나는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소피엔은 손에 턱을 괴고 체스판을 바라보았다. 두 마법사가 떠난 교실은 고요했다.
다만,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케이론. 너는 이 형세를 어떻게 생각하나.” “······.” “골몰하여도 활로가 없느니라.” 이 상황에 이르러서는 타파할 방도가 없었다. 아무리 고민하여도 그 귀결은 패배였다.
해답은 ‘애초부터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뚱한 얼굴을 보며 케이론이 말했다.
“세상은 이리 넓습니다, 폐하.” “······.” 왜인지 기분이 좋은 듯한 말투였다. 소피엔은 입가를 비틀고 그를 흘겨보았다.
“진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킹을 쥐었다. 그 손아귀에서 킹은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마력의 발현에 케이론은 눈썹을 들썩였다.
“천천히 했다면 이겼을 것이다. 녀석의 술수에 휘말리고 말았다.” 소피엔은 다시 하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놈의 속도에 말려들어 본래의 페이스를 잃고 말았으니.
“이제 교습은 내주인가.” “사흘 뒤에 기사들이 옵니다.” 소피엔은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그렇게, 그녀는 이내 자신의 심상에 잠겨들었고, 케이론도 말을 않았다.
* * * “아직은 무리였나.” 체스는 패배했다.
물론 「이해력」에 마력을 쏟아부어 다음 수를 읽어내고, 어느 정도 몰아붙이는 것까지는 가능했다.다만 마력통 전체가 20 분 만에 탈진되었다. 억지로 쥐어짜냈건만, 심지어 대국을 끝까지 마칠 수도 없었다.
덕분에 새로운 걸 깨닫기는 했다.
「이해력」의 한시적인 증폭.
대국의 순간 「이해력」은 고도로 상승하여 내가 알지 못하는 수싸움을 할 수 있게 도왔으나, 지극히 소모적인 행위였다. 「이해력」이 끝난 지금은 내가 그때 뭘 어떻게 두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으니.
‘학습’ 혹은 ‘공부’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발현이었다.
“······.” 나는 마력 탈진의 후유증을 느끼며 외성 밖 주차장으로 왔다. 주차장에는 내 차와 루이나의 차가 나란히 서있었다.
─마차를 몰던 자들도 뒤늦게 면허를 따고 있다네요.
─그래? 하긴 뭐, 요즘 귀족 나으리들은 마차를 안 타지.
운전기사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지요. 저도 일찍 알아서 다행입니다.
─근데 자네, 이 자동차 유행의 첫 단추가 누구인지 아나?
─누굽니까?
─바로 데큘레인 교수님이라는 거지. 제도의 유행은, 모두 그분으로부터 시작돼.
같은 운전기사였지만 그 차이는 확연했다. 내 운전기사의 허리는 꼿꼿했고, 루이나의 운전기사는 굽신거렸다.
“아, 오셨습니까!” “영광입니다!” 내가 다가가자 운전기사 두 명이 허리를 숙였다. 고갯짓을 하고 차에 올랐다.
“저택으로 가지.” “예!” 차량은 엔진 소리를 내며 주차장을 떠났다.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백미러를 힐끗 보았다. 바로 뒤에 루이나의 차가 따라붙었다.
별 생각 없이 다시 앞을 보았다.
“······?” 차량 앞자리의 등받이. 그 가죽 시트 위에 어떤 기운이 희미하게 아른거리고 있었다.
마력의 흔적이었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노려보았다. 그 흔적은 이내 문장의 형상을 이루었다.
「저희를 버린 것입니까.」 “제프.” “예!”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 몸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태연히 차의 내부를 휘둘러보았다.
사망변수는 없었다.
“주차하고 자리를 비운 적이 있나.” “아닙니다. 차 근처에 계속 있었습니다. 바로 근처가 황성이다보니······.” 아무리 운전기사라도 제프는 용병 출신이다.
그의 눈과 귀에 발각되지 않고 문장을 새긴 것이라면, 최소한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다.
「저희를 버린 것입니까.」 또한 이 내용으로 추정하면, 데큘레인의 원래 인맥일 공산이 크다.
만약 그럴 경우에는 다소 껄끄럽다. 분명 ‘암흑가(暗黑街)’ 출신일 테니.
“누가 다가오지는 않았나. 무엇인가를 들었다거나.” “······아.” 제프는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나 마법사가 이번에 제도에 저택을 매입했다 합니다. 아무래도 이제 거기서 머물려는 듯합니다.” “······.”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치는 풍경 속에서 한순간 어둠이 내려앉았다.
마력의 작용인 줄 알았으나, 나무의 그늘이었다.
“그런가.” 백미러를 보았다.
뒤따르던 루이나의 차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책을 펼쳤다. 침착하게 읽으면서 데큘레인의 세력에 대해 생각했다.
“······.” 플레이어 입장에서 데큘레인의 부하들은 당연히 거슬린다. 데큘레인보다도 그 전투력이 강한 네임드 빌런이 많으니.
그러나 그 인맥은 몹시 얄팍하다. 데큘레인만 죽으면, 보스의 원한을 갚아주마- 따위의 이벤트도 없이 그저 흩어질 뿐이다.
실제로 데큘레인의 암흑가 인맥은, 내가 데큘레인이 된 이후로, 그 ‘후원’을 끊자마자 덧없이 사그라들었으니.
그런데······.“생각을 좀 해봐야겠군.” 이 녀석들은 뭔가 다르다.
대강 짐작가는 이름이 몇몇 떠오르긴 하지만, 직접 눈을 보고 마주하기 전까지, 섣부른 행동은 자제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 * * 어두운 밤.
일레이드의 주도 ‘테르할’은 요즘 마릭 개방과 악마 정화 지원 건으로 분주했다. 그 덕분에, 영주성의 길테온 또한 아직까지도 업무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요즘 데큘레인이 보이는 역량이 예상 외입니다.
사그락사그락. 만년필이 휘갈겨지는 고요 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길테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데큘레인의 실전적인 기량은 어떤 사건으로 이미 ‘자세히’ 알았다.
그러나 그 이론은 전적으로 ‘그놈’의 것인 줄 생각했다.
실제로 ‘그놈’이 죽은 이후로 그의 이론도 뚝 끊겼으니.
“심포지엄이라.” 한데 심경의 변화인지, 마지막 발악인지, 아니면 새로운 두뇌를 구한건지.
데큘레인은 심포지엄 도전을 천명했다.
이 마법계에서 심포지엄 해결의 권위는 어느 정도 업적이라 할만했다.
물론 그 문제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6 번·9 번·11 번, 15 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 문제는 특별하다.
“어떤 문제를 도전한다지.” ─그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듯합니다.
“······놈의 머리 속이 궁금하군. 적궤 탄압을 반대한 것도 그렇고.” 길테온은 서명한 서류를 책상에 올렸다. 그리고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성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낮은 미소를 지었다.
“참 예측하기 힘든 놈이다. 아무렴 유크라인의 씨앗이란 말인지······.” 유크라인과 일레이드는 견원지간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비단 15 년 전의 사건이 아닐지라도, 온갖 것들로 서로 충돌하고, 박살나고, 죽고, 죽이고.
그러면서도 서로가 서로만을 숙적으로 인정하는, 참 기괴한 관계.
“······베르흐트에서 죽은 기사는 어떻게 되었다지.” ─보류 상태입니다만, 아마 영원히 보류로 남을 것입니다.
길테온은 작게 웃었다.
“허허. 갈락, 고놈이 데큘레인에게 악감정을 지니고 있었을 줄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물론 베르흐트 습격 자체를 사주한 것은 레오크 왕국이었다.
그러나, 길테온의 동생 갈락은 그 습격이 완벽할 수 있도록 한 가지 조각을 더했다.
베론.
감정에 휩쓸리는 남자를 충동질하는 것은 쉬웠다.
다만 데큘레인의 승리는 예상 외였다.
장소가 한정된 공간에서의 일대일이라면, 마법사는 저보다 두 급간이 낮은 기사에게도 절절맬 텐데.“갈락은 성격이 너무 불같단 말이지.” ······뭐가 어떻든.
이 모든 것은 갈락의 짓이다.
당연히 길테온의 개입은 전무하다.
표면적으로도, 이면적으로도······.
─요즘 율리와 데큘레인의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안다. 그 가문의 막내 기물은 운이 정말 좋구나.” 율리. 애당초 뱃속에서 죽었어야 할 생명이었으나 어떻게든 태어났고, 심지어 그 ‘저주’를 대신 맞았으면서도 살아남았다.
본래 치유가 불가능한 저주였는데, 대저 어떻게 극복했는지 길테온은 아직도 궁금했다.
─시달릴수록 강하게 피는 꽃인 듯합니다.
“많이 시달리긴 했지. 데큘레인에게도, 제 가족들에게도.” ─오히려, 그 덕분에 살아남은 것일 수도 있지요. 개인은 저마다 다른 기원( 起源)을 품고 있으니 말입니다.
길테온은 웃었다.
“너무 감성적이다. 영 쓸모 없는 가설이니, 물러가도록.” ─예.
그와 대화를 나누던 그림자는 조용히 소멸되었다.
* * * 수요일 아침.
잠에서 깨어난 이프린은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흐아아암─ 하품을 하며 무심코 뒤돌아섰다가 흠칫 놀랐다.
“참내······ 지치지도 않나.” 문에 낙서가 한가득이었다. 꺼져, 거지새끼, 더러운 년, 반푼이 등등······. 요즘, 이런 유치한 괴롭힘들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신경을 안 쓰면 적당히 멈출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날뛰었다.
“이런 짓거리가 진짜 귀족이니?” 누구의 선동·사주인지는 알 것 같았다. 벡크, 루시아, 주페른. 나름 잘나간다는 자작~백작 마도가 자식들 패거리겠지.
처음에는 그저 안쓰러웠다. 그러나, 동아리 부원들에게도 이딴 짓거리가 번지는 것은 참기 힘들었다.
“유치한 가짜들.” 이프린은 클린즈로 낙서를 닦았다.
생각해보면, 진짜 마법사는 부유섬에만 있다.
‘마탑에는 신분이 없다’는 말도 그저 허울일 뿐이다. 애당초 마탑에 남으려면, 마법적인 실전 능력과 이론 뿐만 아니라 ‘정치력’도 거의 필수에 가까우니.
정교수 심사에 교수 몇명이 관여하는지를 생각하면 딱 사이즈가 나오는 것이다.
“에휴······.” 이프린은 기숙관을 나와 교정을 걸었다.
요즘 학교 부지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미뤄졌던 학교 축제가 뒤늦게 이어지는 탓이었다.
온갖 길에 노상이 깔렸고, 주점은 물론 파티, 연극, 기사학과의 마상대결 등 볼거리 놀거리가 많았는데, 이프린은 그중에서도 ‘연극 티켓’을 살 생각이었다.
그렇게 극장으로 걷던 중.턱─!
발목이 뭔가에 걸렸다.
“으!” 이프린은 그대로 넘어졌다. 엎어진 몸에 음료수가 쏟아졌다. 촤르륵─ 튀어오르는 끈적한 방울들이 머리카락과 로브에 달라붙었다.
“아파라······.” “······아 진짜, 어떤 년이야!” 이프린은 사과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욕설이 돌아왔다. 곧 그 얼굴을 보고 이유를 알았다.
귀족 패거리, 그 중에서도 레바이론 백작가문의 루시아였다. 그녀는 넘어진 이프린을 노려보며 뇌까렸다.
“또 너야?” “하아.” 한숨을 내쉬며 일어난 이프린은 클렌즈로 온몸을 털고 피식 웃었다.
“어. 또 너구나.” “또 나긴 씨. 야! 너 그 눈알 좀 똑바로 뜨고 다녀. 음료수 쏟았잖아 너 때문에!” 루시아는 이프린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화가 치솟았지만, 대응할 가치가 없는 년이었다.
어차피 여기서 싸워도 벌점은 자신만 쌓일 거고, 그나마 공정한 데큘레인이 개입하면 그거 대로 또 헛소문이 날뛸 테니.
요즘 애들은 영 데큘레인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의 악명을 모른다.
그 교수가 직접 징계나 벌점을 내리는 일이 없어서 그런가.
“그래. 미안하다. 됐니?” 이프린은 그렇게 코웃음을 치고 돌아섰다. 걷는 그녀의 등 뒤에서 목소리들이 넘실거리며 흘러들었다.
─저 미친 또라이 진짜 개념이 없네.
─학기초부터 실비아 씨한테 까분 그 싸가지가 어디 가니? 지가 뭔데.
─맞다. 그거 알아? 저 애비, 그 교수님 밑에 있었다가 자살했대.
그 순간 이프린의 다리가 멈췄다.
─어? 섰다. 야 쟤 빡쳤나본데?
─어쩔건데, 병신 반푼이가. 진짜잖아. 쟤는 근데 자존심도 없나?
─야야. 아서라. 또 교수님한테 이르겠다. 그럼 큰일나.
─······야. 근데 요즘, 교수님들 뭉치고 있대. 데큘레인 교수가 기조실장인지 뭔지까지 하면 마탑 생활 어떨지 뻔하니까. 좀 견제하려나봐.
─아 맞다. 그거 맞아. 우리 아빠도 원래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 분이 베르흐트에서 적궤 옹호를 했다나? 그래서 반대 서명에······.
저들에게는 데큘레인이 악당이다.
데큘레인은 물론 나에게도 악당이지만, 나에게는 너희들도 악당이다.
“······머저리들.” 가까스로 참아낸 이프린은 뚜벅뚜벅 걸었다. 그리고 극장에서 티켓을 끊었다.
그 작은 종이를 찢어질 듯 움켜쥐고 보았다.
내일 밤 아홉 시. 슬픈 날의 초상.
그 뒤 혼자 밥을 먹었고, 길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부원들에게 ‘마탑에서 절대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한 뒤, 오후 세시가 되기 전에 마탑으로 돌아왔다.
[ A Class ] 오늘 데큘레인의 A Class 강의실은 넓고 높은 개활지였다.
이제 이 신묘한 변화도 익숙하다.
이프린은 제 눈치를 보는 동아리 부원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혼자 서있었다.
“반갑다.“ 3 시 정각에 데큘레인이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데뷰탄들 앞에 섰다.
“과제는 기말고사가 끝난 이후에도 제출이 가능하니 여유롭게 하도록.”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데큘레인은 그들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강의의 주제는, 순수 원소의 실전적 사용. 순수 원소의 ‘계열 적용’이다.” 계열 적용. 사실상 강의의 끝판왕이자 본론에 가까운 주제.
마법사들은 사뭇 딱딱하게 긴장했다.
“계열 적용은 다소 복잡할 듯하나 그리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시범을 보이지.” 데큘레인이 지팡이를 노면에 내리 찍었다.
쿵-!
그 울림과 함께, 온 사방에 도깨비불이 떠올랐다.
교수의 도깨비불은 그 생김새도 정갈했고, 흔들리는 자태가 우아했다.
마법보다는 예술처럼 아름다웠기에, 데뷰탄들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도깨비불은 평범한 불과 바람의 조합이다. 하지만.” 그중 하나가 데뷰탄 론도에게 달라붙었다.
론도는 흠칫 놀랐으나, 전혀 뜨겁지 않았다.
“움직여봐라.” 론도가 몸을 움직였다. 그 몸놀림이 가벼웠다. 론도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뒤이어 도깨비불은 이프린을 포함한 데뷰탄에게 달라붙었고, 그들의 반응도 론도와 비슷했다.
“도깨비 불의 보조적인 적용이다. 술식 속 바람과 불의 원소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면, 순수 원소에는 ‘원소의 단순한 조합을 뛰어넘는 특수한 효과’가 발생하지.” 일종의 조합 보너스였다.
본디 게임 속 도깨비불를 보조계열로 활용하면 이동속도와 공격속도에 영향을 끼치는데, 그 시스템이 그대로 옮겨온 셈이다.
“도깨비불은 물론 파괴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보조 계열로 활용할 때 가장 큰 성능을 발휘하지. 즉, 순수 원소마다 그 고유한 장점이 다르다.” 이프린은 모르던 사실이었다. 아니, 반응을 보니 데뷰탄 전체가 모르는 듯했다.
김우진에게나 당연한 게임적 시스템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렇듯 조화를 이룬 순수 원소는 그 특성에 따라, 걸맞은 계열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계열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쉽다. 너희가 각 계열별로 익힌 마법을 떠올리면 된다.” 그는 마력을 방사하여 간단한 파괴마법 화염구의 술식을 그렸다.
“여기서, 술식의 핵심은 이 ‘화염구’의 회로지. 이 술식에서 이 화염구의 회로를 지우고.” 술식의 핵을 이루던 화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순수 원소 ‘뇌운’이 들어선다.
“순수 원소의 술식을 이식한 뒤 회로를 연결하면 그 뿐이다.” ······잠시 침묵이었다.갑작스러운 회로와 마법의 조합에 잠시 머리가 멍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너희한테는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직접 해봐야만 알 수 있을 테지.
이프린.” 데큘레인이 이프린을 불렀다. 방금 들은 내용을 되새기고 있던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실비아. 두 사람이 나와라.” 중간고사의 1, 2 등은 좋은 표본이 되어줄 것이다.
“아무 순수 원소 마법에나 계열을 적용하여 선보여보도록.” 데큘레인은 그렇게 말했고,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프린은 파괴마법에 「뇌운」을 적용하려 했다.
그녀의 마력이 허공에 뇌운을 만들었다.
그러나.
딱─!
데큘레인이 손가락을 튕겼고, 뇌운은 흐트러졌다. 아니, 순식간에 삭제되었다.
마력 간섭이었다.
“어?” “틀렸다. 다시” 다시하라는 그 말에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아무리 계열 마법에 미숙하다지만, 그저 손가락을 튕긴 것만으로 삭제되었다는 사실에 은근 자존심이 상했다.
“예.” 이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력을 응집했다.
“다시.” 딱─!
데큘레인은 이번에도 마법을 삭제한 뒤 다시하라고 말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당장 실비아도 똑같았으니.
······그런데.
“다시.” 딱─!
“다시.” 딱─!
“조금 낫지만, 다시.” 딱─!
그 ‘다시’에는 끝이 없었다.
태동. (1) 계열 마법을 시도하던 이프린과 실비아가 땀에 젖었다. 실비아는 어찌저찌 계열 적용에 성공했으나, 이프린은 한 발자국 모자랐다.
“벡크. 루시아. 나와라.” 나는 다른 데뷰탄에게도 계열 적용을 요구했다.
그들 역시, 갈피도 못 잡은 채 제멋대로 술식만 그렸다. 그들의 마법 행사에 논리는 드물었고, 오직 직관 뿐이었다.
“······되었다.” 나는 강의실을 변형하는 수정의 전원을 껐다. 결계가 해체되며 풍경은 다시 평범한 강의실로 일변했다.
“너희들의 수준은 고작 이 정도지. 과대평가한 내 실수다. 앉아라.” 데뷰탄들은 쭈뼛쭈뼛 강의실 의자에 앉았다.
“나는 너희에게, 마법을 직관이 아닌 논리로 보는 눈을 가르치려 했다.
이론적인 틀이 없다면 직관은 길을 잃기 마련이니.” 물론 저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방법이다. 그래서 쉽지 않고, 짜증이 나고, 결국에는 다시 원점으로 회귀한 것일 테지.
“······.” 가르치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마, 나보다 강의에 성실한 교수는 없을 것이었다.
온갖 방법론과 게임 시스템, 심지어 마법적으로 더 융성했다던 고대 신정국가 시절의 서적까지 샅샅이 보았다.
먼 과거에는 논리를 중시하였고, 나 또한 ‘시스템적’으로 그게 올바르다 생각했으나, 정작 이 가르침을 체화할 재능은 많아봤자 5~6 명 뿐이니······.
속된 말로 현자타임이 왔다.
“지금부터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다.” 게임에는 여러 ‘보너스 시스템’이 존재한다.
속성 보너스, 계열 보너스, 조합 보너스, 조화 보너스 등등······.
속성 보너스는 당연히 캐릭터의 재능에 맞는 속성을 활용할 경우 그 성능 증폭과 마력 소모 감소를 뜻하고, 계열 보너스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조화 보너스’는 조금 복잡하다.
우선, 이 게임은 마법서만 습득하면 뿅- 하고 마법을 터득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마법의 실전적인 숙련도는 물론, 그 자체를 ‘내면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 회사 사람들은 ‘이해’라 부르던 그 과정은 게임 안에서도 적당한 시간이 필수적이다.
조화 보너스는 그 ‘이해’와 ‘실전적 숙련도’의 조화가 완벽할 때 발동한다.
나는 데뷰탄들에게 그러한 조화 보너스를 가르치고 싶었다.“보아라. 「도깨비 불」의 술식이다.” 「염동」으로 분필을 들었다.
칠판의 한 칸에 「도깨비 불」의 술식을 그리고, 그 다음 칸에 보조 계열의 술식을 그린 뒤, 서로 잇는 과정을 자세히 풀어서 기록한다.
아날로그적인 수업이었다.
“「도깨비불」은 ‘보조 계열’에 적용될 경우 특수한 효과를 발현하지. 이 술식과 회로의 연결 전체를 암기해라.” 이해가 어렵다면 암기부터 시작이다.
제국마탑에 입탑할 수준의 데뷰탄이라면, 어려운 내용이라도 암기를 하면서, 혹은 암기한 뒤에 이해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일 테니.
“「뇌운」은 ‘파괴’ 계열에 적용될 경우 특수한 효과를 발현하지. 이 또한 암기해라.” 나는 각 순수 원소를 알맞는 계열에 이식하는 그 ‘논리’에 대해 판서했다.
사각사각─ 분필 여섯 자루가 동시에 움직였다. 가독성을 고려하여 핵심 회로의 색상도 각각 다르게 했다.
학생들이 이 디테일에 감동하길 바라며.
“금속을 칼날처럼 부리는 「금속녹음」은 의외로 ‘소환’ 계열에 적용될 경우 특수한 효과를 발현한다. 그 신묘한 깊이를 너희는 아직 알 수 없으니, 다만 암기해라.” 필기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았고, 칠판은 총 여덟 마법의 계열 적용, 선과 원으로 따지자면 거의 수천에 달하는, 무늬인지 문양인지 모를 기하학적인 것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두 시간 동안의 수업이었다.
“끝이다.” 대답은 없었다.
절반은 죽어가는 얼굴이었고, 절반은 여전히 필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뒤늦게 내가 필기한 광경을 돌아보았다 거의 5m 높이의 거대한 칠판에, 온통 술식 뿐이었다.
“직관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무력감을 느껴봐라. 겪어 봐야 그 필요성을 알지.” 누구에게나 처맞기 전까지는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맞은 뒤에는 생각이 달라지겠지.
나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다음 주에 바로 간단한 시험을 보겠다. 준비하도록.” 시계를 보니 6 시 정각에서 11 초가 어긋났다.
나는 어마어마한 불편함을 느끼며 강의실을 나섰다.
* * * 수업이 끝나자마자 이프린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늘 데큘레인의 수업은 상당히 복잡했고 어려웠다.
[ 도깨비불의 ‘논리적인’ 보조계열 적용 ] [ 뇌운의 ‘논리적인’ 파괴계열 적용 ] [ 금속녹음의 ‘논리적인’ 소환계열 적용 ] [ ★중요★ ‘논리’, 즉 ‘마법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 “······논리.” 데큘레인은 말한다. 마법에서 논리가 길을 다지는 것이라면, 직관은 걷는 것이라고. 직관만으로는 길을 잃을 수 있고, 현상에 속을 수도 있다고.물론 쉬운 마법과 문제는 직관만으로 해결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여태 쌓은 지식이 직관의 통찰을 도울 테니.
그러나, 직관으로 지배할 수 없는 어려운 마법에 직면할 경우에는, 혹은 마법적인 미지(未知)에 처음으로 들어선 경우에는.
‘논리’라는 ‘길’은 마법 해결을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되어줄 것이다······.
“······어렵다.” 좋은 말이다. 설득력은 분명 넘친다.
문제는 그 난이도다.
처음에는 분명 1+1 처럼 간단한 것에서 시작했는데.
눈 한 번 감았다 떴더니 칠판에 기하학적인 술식이 가득했다. 그 회로를 표현하기 위한 수학적 연산도 다수였다.
“근데, 도대체 어떻게 데큘레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의 편지와 대치되는 점이 너무나 많다.
혹시, 그에게도 어느 정도 이론적 역량은 있었던 걸까?
아니면 아버지에게 배웠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는 또 다른 사람을 고용한 걸까.
“······일단 공부나 하자.” 배우고, 익히고, 습득하고, 나중에 또 도전하면 된다.
데큘레인 교수는 오히려 도전을 반기는 듯하니.
[ 12 시 00 분 ] 그렇게 미친 듯 공부하다가 어느새 자정이 넘었다.
이프린은 두툼한 노트 필기를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덜터덜─ 기숙관으로 돌아가는 길, 인적이 드문 골목을 지나던 중.
“······!” 누군가를 발견한 이프린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펑퍼짐한 실루엣은 렐린, 얇은 실루엣은 시아레 교수.
두 사람은 소곤소곤 떠들고 있었다.
“······루이나 공이 실종되었다니. 시아레 교수, 그게 정말입니까?” “네, 그렇다니까요. 폐하 교습을 마친 루이나 공이 차를 타고 떠나는 것 까지는 봤는데, 그 이후 행방이 묘연하답니다.” “왜 갑자기······ 설마, 설마 그 데큘레인 교수가?!” “쉿. 쉿쉿.” 이프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세한 내용은 마도회에서. 아직은 실종도 비밀입니다. 괜히 마탑이 혼란에 빠질 염려가 있어요.” “예. 한데 참 시기가 묘하군요. 이제 곧 반대 서명이 이루어지는데······.” 길목에서 입을 틀어막고 숨까지 참던 이프린은 그들이 떠나가자마자 호흡을 토해냈다.
“······납치? 실종?” 이프린도 루이나라는 사람은 알고 있었다.
당장 아버지의 편지에서 읽었던 이름일 뿐더러, 현 시대 마법계의 특별한 재능 중 하나.
그런 루이나를, 데큘레인이?
“에이 설마.” 교수들 말이 전부 사실인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걱정하기에는 당장 내 처지가 문제다.
현재 자신의 통장 잔고는 어떠한가.
학기 초에 있었던 10 만 엘네의 지원.
그 중 8 만 5 천 엘네가 마법서, 마법사 전용 필기구, 학과 행사비 등등으로 소모되었고, 5 천 엘네는 그나마 먹는 행복을 위하여 희생하였으니, 남은 돈은 고작 1 만 엘네였다······.
“루나 양?” 기숙관에 도착하자마자 로비의 사감이 그녀를 불렀다.
“네.” 이프린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감은 뾰족한 안경을 손가락으로 치켜세웠지만, 그 인상과는 다르게 이 기숙관에서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었다.
“편지가 여러개 왔네요. 받아요. 우편함에 넣으면 아이들이 찢을까봐.” “아, 네. 매번 감사드립니다.” “수고해요.” 이프린은 계단을 오르면서 편지를 보았다.
하나는 고향에서 온 편지였고, 다른 하나는······ 이프린의 눈이 탁구공만해졌다.
후원 증서였다.
급히 뜯어서 보니 이번에도 또 10 만 엘네였다.
“와아······.” 증서가 황금처럼 빛나고, 이프린의 동공도 반짝인다.
혹시, 내가 중간고사에서 2 등을 했다는 소문을 들은 걸까?
그러면, 앞으로도 성적을 유지하면 계속 후원해주겠다는 뜻인 걸까?
이프린은 말갛게 웃으며 증서를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고향에서 온 편지를 보았다.
“······!” 바로 다음 순간.
이프린은 발걸음을 돌려 행정관으로 달려갔다.
“저, 저기요!” 문을 열면서 외쳤다. 야밤에 사람을 맞이한 행정관 직원은 귀찮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예.” “제가 오늘 후원 증서를 받았는데요······” 고향의 할머니가 보낸 편지에는 이프린이 모르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후원금’이라는 명목으로 30 만 엘네가 입금되었다고. 이프린 네 덕분인 듯 하니 너무 고맙고 미안하니, 가족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이번에도 익명인가요?” “예. 익명이네요.” 행정관은 하품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프린은 다급히 되물었다.
“그래도 혹-” “그냥 받아요. 그쪽 상황 별로 안 좋잖아요. 누가 이름까지 드러내면서 후원하겠어요?”” “······.” 냉정한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일명 ‘미치광이 평민’ 이프린에 대한 소문은 파다했으니.
시무룩한 이프린을 힐끗거린 직원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영 그러시면, 편지라도 쓰시던가요.” “······편지요?” “예. 익명 후원이어도 편지는 전달 되니까. 뭐, 운 좋으면 답장 해주시겠죠.
벌써 20 만 엘네 후원인데. 큰 돈이잖아요.” “아······ 네, 맞아요. 그럴게요!” 이프린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편지를 싫어할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답장을 안하겠지.
편지를 보내는 행위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프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저, 편지지는요? 안주시나요?” “······본인이 구하셔야죠. 저희는 편지 맡는 일만 해요. 20 만 엘네 후원 받으셨으면 돈 많을 거 아녜요” “······네. 고마워요.” * * * 이튿날. 축제와 파티가 한창인 대학교의 마탑.
♩♬♪♬♪♩~ 외부에서 퍼레이드 음악이 자그맣게 흘러드는 가운데, 근래 몰두하던 ‘룬어와 회로의 상관관계’가 거의 완성되었다.
정밀한 해석본이었다.
심포지엄의 6번 문제에 쓰인 룬어는 총 14 자. 그 중에서 회로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단 세 개 뿐이었다.
이 연구를 토대로 심포지엄을 해결하면 될 듯했다.
나는 마력으로 문서들을 밀봉한 뒤 서류 가방에 넣었다.
“······음.” 문득, 서랍 구석의 노트 한 권이 다시 눈에 띄었다.
[ ─ ] 무제 노트.
「대부호 재력가」로든, 「악당의 운명」으로든, 그 무엇으로도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물건.
“이건······.” 나는 노트를 들었다.
애꿏은 표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휙 펼쳤다. 아무 문장도 쓰이지 않은 페이지에 손을 올렸다.
언제까지 고민만 할 수는 없다.
“해봐야 알겠지.” 마음의 준비를 한 뒤.
천천히, 마력을 불어 넣었다.
[······너는 나를 실망만 시키는구나.
근엄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김우진을 닮은, 그러나 보다 중후한 남성이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 동공에서 짙은 모멸이 반들거렸다.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다. ‘마릭’에서 성과를 내라.
나는 무슨 대답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 마력의 위압은 대답조차 용납하지 않았고, 질끈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에는, 이미 어두운 광산의 내부였다.
가냘픈 등이 나를 업고 있었다.
“······누구냐.” 나는 물었다.
“괜찮을 것입니다.” 그 목소리가 익숙했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율리였다.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웠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데큘레인은 율리에게 물었다.
“일은 어떻게 됐지.” 데큘레인은 마릭에서 ‘어떤 물건’을 회수하려 했다. 아버지의 명령이었다.
다만 문제가 발생했다. 예상치 못했던 습격이었다.
“예. 제 동료가 회수했습니다. 지상에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데큘레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섬뜩한 마기가 일렁였다. 데큘레인의 겉은 태연했으나, 심장은 미친 듯 요동치고 있었다.
“나를 지켜라.” “예.” “너는 나를 지키면 된다.” “예.” “나만 지켜라.” 율리는 근처 노면에 데큘레인을 내려놓았다. 데큘레인은 통증을 느끼며 벽에 기대었다.
“기사의 본분을 다해라.” 조바심을 내색하지 않는 그 쓸데없는 말. 본인을 희생해서라도 자신을 살리라는 그의 뜻에, 율리는 대답했다.
“예. 제가 지키겠습니다.” 그녀는 검을 쥔 채 뒤돌아섰고, 데큘레인은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광산의 저편에서 막강한 마기가 파도처럼 쇄도했다. ] “······!” 온몸이 해일에 휩쓸리듯한 감각과 함께 현실로 돌아왔다. 그날의 기억과 여러 감정이 선명하게 흘러들었다.
데큘레인의 과거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데큘레인의 과거였으나, 그 일화는 원래 나의 기억이었던 것처럼 자리잡았다.
[ 독립 퀘스트 완료 : 데큘레인의 일기장 ] ◆ 상점 화폐 +1 ◆ 특성 「유크라인」 성장 아무래도, 이 노트는 데큘레인의 일기장이었던 듯했다.
“빌어먹을······.” 나는 그 기억들에 시달리기 싫어 마탑을 나갔다.
정처 없이 대학의 부지를 거닐었다.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다.
그리 말하던 목소리가 뚜렷했다.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아니, 내 아버지가 맞았다.
데큘레인의 기억을 내가 재구성한 탓일까. 그의 아버지는 내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툭- 행인과 어깨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그는 고작 그딴 사과 한마디로 떠나갔다. 나는 저 이름 모를 천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덕분에, 혼탁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연극 보고 가세요~ 티켓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바로 근처에 극장이 있었다.
“아, 보시겠어요? 티켓이 남아 있습니다!” 호객하는 대학생이 나에게 티켓을 건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멍하니 극장 의자에 앉아 있노라니, 어느새 연극이 시작되었다.
─아빠. 아빠. 미안해요 제가······!
내 눈과 귀에는 한 조각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으······ 흐윽.” 옆의 사람은 꽤 감동스러운 듯했다.
“······흑.” 시도 때도 없는 훌쩍임이 거슬려 그쪽을 힐끗 보았다.
살짝 놀라고 말았다.
“우으······.” 이프린이었다.
울먹이는 녀석에게 나는 말없이 행거치프를 건넸다.
“아? 아, 감사하므니다, 흐으윽······.” 이프린은 눈물을 닦고 돌려주었다. 나는 바닥에 버렸다.
─정정당당해서는 그를 죽일 수 없어요! 그러는 동안 너무 많은 사람이 죽고 말 거예요! 우리 아버지도 그러다가 죽었다고요!
뒤늦게 대사를 들었다.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복수극인 듯했고, 여배우의 연기는 대단히 좋았다. 「미적 감각」으로 보기에도 썩 훌륭했으니.
그러는 사이에 쉬는 시간이 되었다.
이프린은 제 눈두덩이를 감싸안은 채 도망쳤다가, 2 부가 시작된 직후에 다시 돌아왔다.
······고마웠어요.
나를 힐끗거린 이프린이 속삭이며 팝콘을 내밀었다. 로브 후드를 뒤집어 쓴 녀석은 내 얼굴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당신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제 곁에 있으면 당신도 힘들 거예요.
저는 그를 죽인 범죄자, 살인자이니.
연극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프린은 아예 허리를 숙였다. 얼굴을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방울방울 흘렀다.
“큽! 흡! 흑!” 보기보다 감성적인 아이인 듯했다.
나는 양복의 안주머니에서 제대로 된 손수건을 꺼내 녀석에게 주었다.
“아, 흑. 감사합, 흐이이······ 흐이이이······.” 울음을 참으려는 그 소리가 끓는 주전자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다시 교정을 걷다가 아무 벤치에나 앉았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 정도 있었을까.
[ 메인 퀘스트 : 태동 ] ◆ 완료 보상 : 상점 화폐 +2 돌연, 메인 퀘스트가 발생했다.
* * * 밤 11 시.
연극이 끝나자마자 이프린은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 마법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무슨 파티가 열린다는 듯했지만, 별 관심은 없었다.
“흐응, 흥. 아, 신나게 울었네. ” 이프린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걸었다.
어떤 신사분이 준 물건이었다. 무지 비싼 것 같아서 돌려주려했지만, 정신을 차리니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이피!” 어떤 외침이 자신을 불렀다. 돌아보니 줄리아였다.
“큰일났어!” “왜?” “우리 학기 초에, 그, 기숙사에 술식, 아니 일단 따라와!” 줄리아는 이프린의 손을 붙잡고 달렸다.
그렇게 내달려 기숙관에 도착했을 때, 이프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게 뭐야······?” 기숙관의 일부가 검붉은 결계로 뒤덮여 있었다. 기숙관 중에서도 제 3 관.
평민들이 다수인 그곳이 정체 모를 안개에 휩싸였다.
“우리 학기 초에, 기숙관 벽에, 막 붉은 술식 그려져 있었잖아! 그거 아니야?!” 휘이이이잉── 파아아앙──!
폭죽은 끊임 없이 하늘을 수놓았다. 먼 곳에서 사람들의 환호가 시끄럽게 울렸다.
“무슨, 무슨 일이냐!” 뒤늦게 신고를 받은 교수들이 달려왔다. 렐린, 시아레, 레트란, 카멜······ 마탑에서 회의를 하던 그들은 이 현상을 목도하자마자 경악하여 눈을 부릅떴다.
“이건 무슨······ 웬 마기가 이렇게······.” “이런 씨. 내가 이래서 어둠의 산을 개방하기 싫었는데!” “······이사장, 이사장님은?” 렐린이 레트란에게 물었다.
“아마 부유섬에 있을 겁니다. 하필이면 오늘······.” “······.” 교수들은 차마 결계 안으로 진입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
당장 외부에서 느껴지는 마기의 농도가 심상찮다.
방독면은 필수. 최소한 현역 기사를 대동하는 것이 안전하다. 진득한 마기는 교수가 행사하는 마법일지라도 끈질기게 흐트러트릴 테니.
그들은 그저 합리적이었다.
“교수님! 어떻게 할 거예요!” 이프린이 그들에게 외쳤다. 렐린은 흠칫 놀랐지만, 곧 화난 새처럼 눈을 좁혔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인마!” “안에 사람이 있다고요!” “······.” 줄리아의 대꾸에 렐린도 입술을 깨물고 안을 보았다. 무슨 고민을 하는듯 했지만, 이미 중년에 접어든 그는 잃을 게 많은 사람이었다.
“······이 사태는 누가 처음 발견했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문제가 아니긴 무슨······ 아, 시아레 교수! 당신, 파괴계열 아니오?” “······저는 몸이 약해서요. 조금만 기다려요. 곧, 기사들이 올 거니까.” 기다리면 늦을지도 모른다.
저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하아.” 한숨을 내쉰 이프린은 줄리아에게 가방과 손수건을 건넸다.
“이피, 이거 왜?” “내가 갈게.” “뭐? 안돼!” 그러던 순간이었다.
날붙이처럼 벼려진 목소리가 공간을 파고들었다.
“무슨 일이지.” 후덥지근한 공기를 냉각하는 차가운 음색.
모두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 데큘레인.
인파 속에서 등장한 그는 여유로웠다. 일대를 휘둘러보는 시선에 한기가 묻어났고, 그의 자태는 오만할만큼 꼿꼿했다.
곧, 그도 결계를 발견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교수조차 겁먹은 이 기괴한 결계에 대한 그의 감상은.
“소란이 도를 넘었구나.” 고작 그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누구에게 무어라 하지도 않고, 무슨 말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걸었다.
뚜벅─ 뚜벅─ 유독 커다란 발소리를 일으키며, 그 결계를 향해서 나아갔다.
교수들은 그의 등을 바라보았고, 그의 걸음에 두려움과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그는 다만 귀족적이었다.
태동. (2) 결계의 외부와 내부는 확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나는 「이해력」의 눈으로 보았으나, 아무런 제반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행하는 「이해」의 효율은 그리 좋지 않았다.
“······.” 나는 다만 결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진입을 불허하는 자그마한 막은 지팡이로 찢었다.
결계 내부는 매캐하고 어두웠다. 온 사방이 홍등(紅燈)에 물든 듯 어지러웠다.
─다들, 진정해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기숙관의 복도를 지나 1 층 홀에 도달했다.
사감의 인솔 하에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교수님!” 누군가가 나를 발견하고 크게 외쳤다. 그들은 구세주라도 발견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친절하게 응대할 수가 없었다.
결계 내부의 진득한 마기가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살았다! 교수님, 이제 어떻게-” “입 다물어라.” 소란스러워지려던 일대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나는 사감을 바라보았다.
뾰족한 안경. 옷에 잡힌 주름. 먼지 쌓인 어깨. 뜯어진 손톱.
그 외의 다른 학생도 살폈다.
로브의 한 오라기. 표정을 이루는 주름. 동공의 반사······ 사소한 단서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게 다인가.” “위층에 아직 사람이 있는 듯합니다.” 사감이 말했다. 나는 서류 가방에서 목강철을 꺼냈다.
부웅 떠오른 열자루의 목강철 수리검이 계단을 타고 기숙사 위층으로 치솟았고, 나머지 열자루는 건물 지하로 하강했다.
“······.” 나는 눈을 감은 채 강철의 울림을 전해들었다.
이는 순수하게 ‘속성’의 보너스였다. 불과 흙, 금속에 재능을 지닌 자로서 애장과 교감하며 깨우친 특수 기능.
───.
목강철은 계단을 올라 각 층을 쏘다니고, 나에게 공명하며 인체의 존재를 전달한다.
동시에, 인체가 아닌 괴생명체는 자비 없이 찢어발긴다.
그 결과 5 층에 한 명, 6 층에 한 명, 9 층에 한 명, 10 층에 한 명, 총 네 명이 레이더에 포착되었다.
나는 목강철을 부려 생존자들을 인도했다.
─이, 이거 뭐야. 너 뭐니.
─따라오라는 거야?
─아, 안돼. 밖에 괴물이 있는데······.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그들이었지만, 나는 그 안에 목소리를 담았다.
“따라와라.” 목강철은 특수하게 진동하며 ‘주파수’를 만들었고, 그들에게 내 음성을 전달했다. 목소리를 들은 그들은 곧장 목강철을 따라 계단을 내려왔다.
“······우아아아아!” 이윽고, 1 층으로 탈출한 그들은 바닥에 떨어지듯 내려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사감이 그들을 추슬렀다.
사감이 물었다.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나요?” “잘 짜여진 결계다. 안으로 들어오기는 쉬워도, 탈출하기는 어려워. 마기가 활용되었으니 평범한 결계보다 갑절은 까다로울 테지.” 계산과 연산을 통한 해체는 가능하다. 결계의 ‘핵’을 「육안」으로 관측한다면 곧바로 삭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이미 마기에 중독된 마법사들은 버틸 수 없는 시간일 것이다.
“그러면······.” “쉿.” 나는 입술에 검지를 얹었다.
일대의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 고요 속에서 로브 차림의 마법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상태와 옷차림을 자세히 살폈다.
결계의 발동은 술식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스위치를 작동한 ‘술자’는 반드시 존재한다.
“······.” 이들의 겉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었고, 그만큼 완벽한 위장이었으나······ 나는 「염동」을 발동했다.
「염동」으로 그들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흥.” 피식. 내 입가가 뒤틀렸다. 문득 치솟은 경멸에 미간이 좁혀졌다.
나는 어느 누군가에게 다가갔다.
“사람의 몸에는 본인의 내력이 쌓이지. 특히, 외면과 출신을 숨겨도, 그 ‘세월’은 잊혀지지 않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몸 깊은 곳에 남지.”사감.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너의 머리카락에서는······ ‘재’가 흐르는구나.” 「염동」에 반응한 재의 흔적이 그 머리카락에서 묻어났다.
“어디, 화산더미에서 살다가 왔나. ‘잿더미’의 출신이여.” 모두가 크게 놀란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 가만히 있던 그녀는 말없이 안경을 치켜세웠다.
그리고는, 그 얼굴 가죽을 벗었다.
나는 내색 없이 놀랐다. 이번 메인 퀘스트의 주동자는 역시 네임드 캐릭터였다.
“좋은 추론이다만, 그걸 알아도 변하는 게 있나? 아니, 너는 알고 있나?” 그녀의 입은 미소를 지었으나, 눈은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잿더미 출신은, 자신들을 잿더미라 부르는 놈들은 하나도 빠짐 없이 죽여버리고 있음을.” 나는 그 말을 잠자코 들었다.
아니, 치미는 화를 억지로 삭였다. 목 언저리에 푸른 핏줄이 올랐다. 입 안이 욕설로 부풀었다.
마기의 부작용이었다.
“그러니, 너는 죽어도 싸다······.” 놈은 그리 중얼거리며 마력을 발동시켰다.
고오오오오······.
웅혼한 마력이 노면에서부터 솟아올랐지만, 그 뿐이었다. 나는 녀석의 술식을 노려보며 「이해력」의 스위치를 켰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넓어지고, 온 세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뇌리를 타고 흐르는 마력이 사고를 가속하고, 연산을 증폭한다.
한없이 느려진 듯한 시간.
특성의 고양(高揚)이 온몸을 저릿하게 달군다······.
“죽어라······?” 놈이 발동하려는 마법을 한 순간에 파악했다.
그 핵심 회로가 「육안」으로 보였으니, 「이해력」으로 간섭하여 해체했다.
츠즈즈즈즛─!
놈이 애써 이룬 마법의 결과는 고작 한 줄기 스파크.
“미친 놈이!” 놈은 곧장 또 다른 마법을 도모했다.
그조차도 보는 것만으로 해체했다.
이번에는 고작 눈덩이였다.
“이런 썅?” 물론 이 과정에 마력은 미친 듯 소모되었으나, 비슷한 속도로 외부의 마기를 마력으로 받아들였다.
“······.” 놈은 계속 노력했고, 나는 계속 해체했다.
나는 조소를 머금었다.
이토록 마기가 짙은 결계 내부에서, 「이해력」과 「육안」의 조합은 거의 모든 마법을 직접 보고 간섭할 수 있다······.
결국, 놈이 먼저 마법의 구성을 포기했다.
“······이렇기에.” 나는 침묵한 놈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너희가 잿더미라 불리는 것이다.”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또박또박 뇌까렸다.
“오물만도 못한 쓰레기. 사회에서 배척된 버러지. 인간이라기에는 그 구성( 構成)이 부족하고, 짐승이라기에도 도저히 귀여운 구석이 없는 구데기.” 놈은 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놈의 미간에 얹었다.
놈의 등 뒤에서 어그러지는 마법 응집은 그 즉시 차단했다.
“재주는 그저 꿈틀거리는 것 뿐이고, 그 천하고 더러운 근본은 구제의 여지도 없지.” “······하. 말 참 잘하시는군. 그리 잘났으면, 애들 죽기 전에 결계나 해체하시지 그래. 그건 또 못하시나.” 놈은 비웃음을 흘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이제, 네 덜떨어진 두뇌의 잘못을 말하지.” 나는 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더한 경멸로 받아쳤다.
“너무 한없이 어리석고 아둔한 탓에, 결계를 공간이 아닌 건물에 할애한 것.” 열 자루의 목강철은 생존자들을 구했으나, 나머지 열 자루의 목강철은 오히려 하강했다.
그 열 자루는 현재 기숙관 철골의 핵심 지지부에 부착되었다. 지하 암벽에 천공을 내어 건물 전체를 지탱하는 기둥들에 달라붙은 것이었다.
“그 자체가 네 지능이 현저하게 부족함을 뜻한다.” 목강철은 철골의 핵심부에 열기를 일으킨다.
또한, 고열로 달구어진 강철은 그 자체로 작약(炸藥)이라 하기에 알맞다.
놈은 뒤늦게 내 뜻을 깨닫고 되물었다.
“······죽고싶어 안달 났나? 결계를 무마하려 건물을 파괴하겠다고?” 나는 더운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어떤 성격적인 결함이 들끓었다. 고개를 옅게 숙여 놈의 귀에 대었다.
─알 로스.
놈의 어깨가 떨렸다.
─내가 너를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
나는 다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놈은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 상대를 보고 덤비라는 뜻이다.” ······이때, 지하의 목강철은 충분히 뜨겁게 달아올라 기둥을 그을린다.
머지 않아 화마가 타오르고, 그 순간 내 「화력 통제」가 작동한다.
────!
진동이 일었다. 삽시간에 증폭된 화력이 목강철과 뒤섞여 일으킨 폭굉(爆轟 )이었다.
그 이후는 정녕 찰나에 불과하다.
발파(發破)에서 이어지는 붕괴.
핵심부를 잃은 건물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폭삭 가라앉는다. 건물을 잠식한 결계 또한 그 구조가 해체된다.
콰과과과광······.
으스러진 잔해들이 비처럼 쏟아내리는 아수라장. 붕괴의 한복판에서 나는 태연히 놈을 굽어보았다.
“이제 본체로 돌아갈 때가 되었지.” “······!” 그 순간 놈은 제 이름을 말했을 때보다 더한 놀람을 표했다.
그러나 머지 않아 내 목강철이 놈의 목을 꿰뚫었고, 동공의 빛이 소멸한 놈은 마네킹으로 돌변했다.
조작 계열과 조화 계열이 극에 다르면 발현이 가능한 ‘특화 마법’의 한 종류── 인형술(人形術).
알 로스의 시그니처(Signature)다.
꺄아아아악─!
마법사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고개를 살짝 비틀어 뒤를 보았다. 전등이 박살났고 온 사방이 암흑으로 물들었지만, 생명의 피해는 없었다.
있을 리가 없었다.
콜록, 콜록.
흙먼지로 인한 기침 뿐이었다.
그들 전부는 내 「염동」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니.
* * * 이프린은 결계 외부에서 억류되어 있었다. 기어코 자신도 진입하겠다는 걸 줄리아와 교수들이 거의 억지로 붙잡았다.
“어, 어, 어! 무너진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이프린은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목도했다.
────!
기숙 3 관 전체가 붕괴되고 있었다.
그 폭발 자체는 깔끔했다. 철골의 파편이 튕기는 일 없이, 그저 일직선으로 내려앉았다. 뒤이어 거대한 흙먼지가 자욱하게 퍼졌다.
눈 깜빡할 사이의 발파였다.뒤늦게 기사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곧장 흙안개 너머로 진입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달려들기도 전에 웬 인기척이 일었다. 그들은 검을 쥔 채 잠시 물러났다.
“······?!” 데큘레인.
그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잔해와 파편의 무더기에서 아무런 탈도 없이 탈출한 그는 희생자들과 함께였다.
“괜찮으십니까!” 달라붙는 기사들에게, 데큘레인은 마법사들을 인계하고 제 몸의 흙먼지를 털었다.
“수고해라.” “예!” ······그렇게 돌아가려는데.
멀리에서 지켜보는 교수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직 못 다한 말이 조금 있었다.
“참······ 명색이 마탑 교수인 주제에, 그깟 알지도 못하는 결계 하나 무서워 이리 물러나 있는 꼴은.” 노골적으로 멸시하는 그의 시선을, 교수들은 차마 마주치지도 못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소. 반성하시오. 자성하시고.” 그는 마땅한 혐오를 담아 그들을 노려본 뒤 자리를 떠났다.
“저- 억!” “교수님.”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두명이었지만, 실비아가 한 사람을 멀리 튕겨냈다.
“괜찮으신가요.” 억양과 고저가 없는 목소리. 그 자체만으로도 안정적인 음색.
“······위험한 곳이니 물러가라.” 그는 그녀의 어깨만 살짝 두드려준 뒤 지나쳤다.
마기를 남용한 탓에, 심적 피로감이 무지막지했다.
······.
자정이 지나, 모든 사태가 수습된 뒤.
“강한가?” 멀지 않은 벤치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알 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는, 훨씬 강하다.” “온실의 화초가 아닌가?” “화초치고는 박력이 넘치는 자식이더군. 말하는 꼬라지, 그리고 그 꼬라보는 눈깔이 특히.”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며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닌 척 넘기려 했지만, 뒤늦게 오른 열이 얼굴을 뜨겁게 달궜다.
“유의해야할 점은?” “머리가 뛰어났다. 내가 구사하려는 마법은 죄다 해체당했고, 인형인 것도 간파당했지. 섣불리 육탄전을 시도할 수도 없었어. 척 보기에도 몸이 단단했다.” “경계해야겠군. 일은?”“일부만 성공했지.” 목적은 마기의 결계를 통한 생명력 흡수였다.
마법사들은 인형 제작에 썩 좋은 재료이니, 그들의 정기와 마력을 액체화하여 흡수한 뒤, 악마의 속행으로 속이는 것.
“이 정도 뿐이다.” 알 로스는 병 안에서 찰랑이는 액체를 가리켰다. 아득히 부족한 양이었다.
누군가는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앙의 길은 이처럼 어렵다. 그깟 육체를 구하는 일도 이리 방해를 받는다니.” 이들이 언제나 입에 달고 사는 표어.
신앙(信仰). 그리고 구도(求道).
알 로스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이미 죽은 신을 좇는 가엾은 놈들. 신의 부활 따위는 이루어질 리 없는 공상일 텐데, 지치지도 않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광신도들.
“다음은, 마릭이다 알 로스.”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저들과 자신의 목적은 같으니, 굳이 초를 치며 미움을 살 필요는 없다.
“흠.” 알 로스는 다만 사색에 젖었다.
데큘레인.
그 수석교수 놈이 생각 외로 어려웠다. 예상을 아득히 뛰어 넘는 기량이었다.
아니, 그 신묘한 마력 간섭과 해체는 가히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놈 앞에서 마법을 완성할 수 있는 놈이 있기는 한가.” 무슨 존재 자체가 마법사의 안티테제(Antithese)인가.
아무리 인형인 상태였더라도 그렇지······.
잿더미의 유명인은 그따위 고민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 * * 다음 날.
나는 저택 서재의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어두운 눈꺼풀 위로 시스템이 떠올랐다.
◆ 메모라이즈 현황 :초급 염동 ┏기초 화력 통제 ┣기초 유체 조작 ┗금속 강화 (진척도 33%) 일종의 ‘시각화’였다.
나는 몸 안의 「염동」을 「육안」으로 보았다. 「염동」의 술식에 「금속 강화 」와 「화력 통제」와 「유체 조작」을 비롯한 다수의 마법이 달라 붙었다.
그 회로의 교통을 정리한 뒤 조금 더 깨긋이 다듬었다.
“······.” 통증이 온몸을 짓뭉개는 듯하지만 참을만하다.
30 분 정도 그 고통을 감내하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문득, 어젯밤의 메인 퀘스트가 떠올랐다.
“알 로스는······ 빌런으로 봐야 하나.” 현재 나의 최우선 목표는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
클리어의 결과가 지구 귀환이든 무엇이든 지금으로서는 별 상관도 없다.
어차피 지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가족 따위는 없을 뿐더러, 클리어하지 못한다면, 나를 포함한 이 세계 전체가 멸망할 테니 다른 선택지도 없다.
다만 그 메인 퀘스트를 보다 쉽게 클리어 하기 위해서는, 즉 난이도를 낮추기 위해서는, 선한 네임드가 강해지거나 악한 네임드가 죽어야 한다.
여태 나는 전자에만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제 후자도 나름 경쟁적인 방법임을 깨달았다. ······데큘레인의 일기장에서 파악한 어떤 기억들 덕분이었다.
─주인님. 치안국이 찾아왔습니다.
돌연 로이가 서재 문을 노크했다.
치안국이라면, 어젯밤 일 때문인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1 층으로 내려갔다. 1 층 현관에는 이미 아는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치안 부국장 유리네 프리미엔. 남색 머리카락을 말총처럼 묶어 내린 그녀는 무표정으로 목례했다.
“무슨 일이지.” “루이나 공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 실종?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지금 들으셨으니 묻겠습니다. 실종되었다는 소식인데, 현재는 용의자-” “······나를 의심하나?”“아니요. 그저 조사일 뿐입니다. 실종된 사람이 사람이다보니.” “유리네 프리미엔. 지금 네가 상대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아라.” 의심 받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진심으로 화가 났다.
그럼에도 유리네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의심은 아닙니다. 그저 데큘레인 교수 님이 마지막 목격자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루이나 공은 황궁을 나온 직후에 실종 되었습니다.” “······.” 나는 가만히 그날의 일을 회상했다.
차를 타고 돌아가던 길. 창밖을 보던 중, 스치는 풍경 속에서 한순간 어둠이 내려앉았다. 마력의 작용인 줄 알았으나, 나무의 그늘이었다. 뒤이어 백미러를 보았을 때, 뒤따르던 루이나의 차는 사라지고 없었다······.
잠깐.
정녕 나무의 그늘이 맞았나?
혹시, 그 당시 마력적으로 탈진한 탓에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나?
“없는 듯하군요. 협조 감사드립니다.” 유리네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첩을 집어 넣었다. 직원과 함께 정원을 걸어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서재로 돌아왔다.
“······!” 그런데, 방금은 없었던 어떤 마력의 흔적이 책상 위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 문장을 해석했다.
「저희는 여전히 당신의 명령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좋지 않은 생각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쳤다.
태동. (3) “오늘 교습은 어떠셨습니까?” 황궁의 정원. 겨울이 내려앉은 풍경에서 율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피엔은 그녀를 흘겨보고 대답했다.
“썩 나쁘지 않았느니라.” 황제는 여태 기사 교습을 미뤘었다. 본인 말로는 폐관수련 때문이라 했으나, 어떤 수련이었는지는 그 누구도 몰랐다.
“다행입니다.” 율리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소피엔은 그런 그녀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한데, 네 체스 실력은 예상 외였다.” 훈련 도중 휴식 시간에 율리는 소피엔과 함께 체스를 두었다. 율리의 체스 실력은 나름 아마추어 수준이었지만, 소피엔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놈의 약혼자라기에 기대를 좀 했거늘.” “······데큘레인 교수 말씀이십니까?” 예상치 못한 이름에 율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피엔이 코웃음을 쳤다.
“네 약혼자는 다른 놈인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좀 배워라. 곁에 뒀다 뭐에 쓰려고.” “······.” 그의 체스 실력을 율리는 알지 못했다. 한데 폐하에게도 인정받을 정도였다니.
새삼, 그에 대해 아는게 참 없었구나.
“또, 짐의 동생이 네 약혼자의 사인을 원하더구나.”황제가 율리에게 어떤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데큘레인의 저서였다.
“크레토 대군 말씀이십니까.” “그래. 여기에 받아와라. 오랜만에 누이 노릇이나 하련다.” [ 원소 마법의 이해 ] 데큘레인이 작성한 마법 이론서였다. 그 지독한 난이도와 악독한 가격으로 악명 높은 서적.
율리도 나름 그에 대해 알기 위해 사비를 털어 구매했었지만, 차마 열 장 이상의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다.
“예.” “너무 복잡하기만 하고 어렵다 하더구나. 동생 놈은 그냥 하는 말이라면서 덧붙였지만, 이 말도 빼지 말고 전해라.” “······예.” 기사의 말은 길어지는 법이 없었다. 소피엔은 오히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콧잔등을 찌푸리고 손을 휘저었다.
“들어가라.” “예.” “다음부터는, 말을 좀 길게 하라. 교습 기사는 짐을 가르치는 것도 있지만, 곧 짐의 벗이자 말상대가 되어준다는 것도 있으니.” “······벗, 벗 말씀이십니까?” 율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제는 피식 웃으며 끄덕였고, 율리는 벅찬 감정을 숨기려 심호흡을 했다.
후하- 후하- 후하- “되었다. 이제 돌아가라, 벗이여.” “······예. 영광이었습니다.” 황제는 기사 케이론과 함께 황궁으로 돌아갔다. 율리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 고개를 숙인 채 기립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 뒤 시녀에게 안내를 받았다.
그녀는 정원에 따로 마련된 통로를 걸었다. 한데 시녀는 곧 어딘가로 사라졌고, 환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안녕하십니까, 율리 경. 저는 졸랑이라 합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율리는 사뭇 의심스런 눈으로 그를 보았다. 졸랑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잠시 시간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황궁의 안정을 위하여 부디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다른 기사분들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미심쩍긴했지만, 이내 그의 뒤를 따랐다.
“이곳입니다.” 광활하고 복잡한 황궁의 동녘. 그 구석의 별채에 라펠, 시리오, 그웬이 함께 있었다.
그들은 애매모호한 얼굴로 율리를 맞이했다.
“······율리 왔어?” 그웬이 손을 흔들었다. 율리는 목례로 응답하고 그들의 곁에 섰다.
시리오가 방긋 웃었다.
“이제 다 모였으니, 졸랑 씨? 무슨 일이지요?” “예.” 졸랑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긋나긋한 어조였다.
“여러분들에게 부탁할 임무가 있습니다.” “임무?” “예. 황궁의 지하에 도사리는 괴물이 있습니다. 황실 내부인은 부담스러워하는 그 괴물을, 여러분들에게 부탁하려 합니다.” “황명인가?” 라펠의 묵직한 음성이 되물었다.
“황명은 아니나, 저희의 충성입니다. 만약 이 일이 해결될 경우, 기사님들에 대한 헌사를 담아 보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충분한 보상도 뒤따를 것입니다.” “······.” 기사들은 잠시 말없이 고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웬이 말했다. 그녀는 율리를 가리켰다.
“율리도 낀다면 그 사람도 있어야해.” “그 사람이라면?” “데큘레인.” 그 이름이 졸랑은 살짝 불편한 눈치였다. 그웬은 피식 웃었다.
황궁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환관조차, 데큘레인이라는 이름은 두려워한다.
하긴 그 정치력은 여전히 유명한데, 위세는 나날이 드높아지고 있으니.
아무리 황제의 환관이라도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는 거다.
“위험한 일인 것같은데, 최소한 약혼자가 허락은 해줘야 하잖아?” 그웬이 율리를 가리켰다. 율리는 황급히 도리도리 고갯짓을 했다.
“아, 아뇨. 괜찮습니-” “맞다. 그 실전적인 기량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율리의 말을 잘라내며 라펠이 끼어들었다. 시리오도 말없는 미소로 동의를 표했다.
“······흠.” 졸랑은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유크라인 공에게도 그리 말해보지요.” 그 대답이 그웬은 어이가 없었다.
우리는 이름으로 잘만 부르더니, 데큘레인은 ‘유크라인 공’이란다. 이래서 가문 배경이 전부라는 건지······.
“그러시든가요. 율리? 오늘 나랑 밥이나 먹자.” 퉁명스레 대답한 그웬은 율리와 함께 황궁을 나섰다.
* * * 「저희는 여전히 명령을 따르고 있습니다.」 나는 놈들과 접촉할 계획을 세웠다.
단, 조바심이나 당황 따위는 결코 드러내지 않을 것이었다. 얼굴 표정과 언행 그 무엇에도 책잡힐 요소를 내색해서는 안 되었다.
물론 나에게 표리부동은 숨쉬는 것보다 쉽다. 이미 이 성격과 몸에 녹아들어 있으니.
“······주인님. 여기 있습니다.” 대응책을 고민하던 중 로이가 서류 파일을 가지고 왔다. 나는 그 내용을 읽었다.
[ 럭셔리 호텔 개축 : 블랙 크라인 ] [ 차후 무역 활로와 계획 ] [ 용병단의 임무 개요 ]투자한 사업체들이 제출한 성과들이었다. 나는 「이해력」을 동원하여 그들의 장부를 읽었다.
아무런 문제 없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됐다. 가져가라.” “예.” 좋은 소식이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로이를 돌려보낸 뒤 놈들에게 답장할 방도를 생각했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주인님.
서재 구석의 그늘에서 신형이 아른거렸다. 실물은 아니었고, 마법적인 환영이었다. 나는 놈을 태연히 바라보았다.
내가 뱉은 말은 거의 본능적이었다.
“안내해라.” * ······사람 사는 세상에 이상향은 없다.
대륙에서 가장 강성한 제국의 수도에도 명과 암은 분명히 공존한다.
빛이 찬란할수록 그 그림자는 오히려 짙듯이, 제도의 동남 ‘오클란’은 폐광 이후 지역 전체가 쇠퇴한 슬럼가다.
데큘레인의 이전 심복은 나를 그 슬럼의 지하로 안내했다. 음습하고 축축한 동굴이었다. 진득한 습기가 몸을 휘감았고, 창백한 전등이 부서질 듯 달랑거렸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그 동굴에서 두 사람이 무릎을 꿇었다. 한 명은 남자였고, 한 명은 여자였다. 서로의 얼굴에 닮은 부분이 많았다. 남매인 듯했다.
“복창하라. 내 명령은 무엇이었지.” 나는 녀석들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시험하듯 물었다.
“루이나가 제도에 발을 들이면 용서치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나는 두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들에게 사망 변수는 없고, 고작 둘이서 루이나를 납치한 그 능력은 상당히 뛰어나다 할만하다.
다만, 이 녀석들이 원하는 바는 무엇인가. 문제는 그것이다.
무심한 척 말을 이었다.
“섣불렀군.”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답하는 남자의 음색에는 불손한 마음이 엿보였다.
“저희를 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지금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반항인가.” “아닙니다. 만약 주인님이 저희를 버려 이제 주인님이 아니게 되었다면 반항도 아니지요.” “나는 너희를 버린 적이 없다. 안내해라.” 태연히 말했다. 두 녀석은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남자가 먼저 걸었고, 나는 그 뒤를 따랐으며, 내 등에는 여자가 붙었다.
곧 도착한 텅 빈 공동.
인원수에 비해 너무 넓은 지하의 한복판에 루이나는 묶여 있었다. 얼굴에는 검은 보따리같은 것이 씌워졌고, 손발은 수갑에 억류되었다. 흡사 전쟁 포로의 꼴이었다.
“어떤 처리를 했지.” “안티마톡신을 주입했습니다.” 안티마톡신은 게임에서도 유명한 마법사 전용 극약으로, 성분은 ‘안정제’에 가깝지만, 혈관을 통해 주사되면 최소한 사흘 이상은 마법을 발현할 수 없다.
나는 녀석들의 얼굴을 살폈다.
“수고했다.” 그 한마디에 기류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표정을 숨기려는 듯했지만, 내 눈을 속일수는 없었다.
불만이었다.
덕분에, 한 가지를 알았다.
저들은 내 칭찬 따위를 원하지 않는다.
“······.” 나는 만신창이가 된 루이나를 노려보았다. 그녀 곁에 붉은 기류가 선명하게 아른거리고 있었다.
사망변수.
루이나는 나를 죽일 각오를 품었다.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고민했다. 최대한 ‘있음직한 전개’를 떠올렸다.
───나는 말한다.
루이나, 내가 너를 구했다. 너를 납치한 자는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지.
루이나는 대답한다. “안 믿어!”.
사망변수는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그대로 자리를 피하고, 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루이나를 풀어준다.그럼에도 루이나는 나를 의심할 것이고, 저 남매도 나를 여전히 의심할 것이다. 사망변수 또한 해결되지 않는다.
───루이나를 죽인다.
꺄아아아악─! 루이나의 비명이 공동을 가득 메운다. 그 후 그녀는 영원히 실종되고, 사망변수도 해결되나, 나는 ‘의심하는 남매’에게 영원한 약점을 잡히게 된다.
무엇보다, 차후 루이나로부터 전개되는 긍정적인 퀘스트가 매몰된다.
그녀는 데큘레인 입장에서 적수지만, 세계관 전체로 따지면 명백한 선역의 네임드다.
극심한 손해다.
“······.” 나는 동굴 노면의 돌바닥을 염동으로 일으켜세웠다. 그렇게 의자를 급조했다.
성격의 영향을 받아 골동품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의자에 앉아 천천히, 그리고 철저히 경우의 수를 고려했다.
지금은 상황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으나, 그 주도권은 여전히 나에게 있다. 이 명령 자체가 결국에는 ‘데큘레인’의 것이니.
“여기 있습니다.” 남자가 나에게 어떤 장부를 건넸다. 나는 잠자코 받아들었다.
······그 내용을 정독하는 내 입가에 헛웃음이 떠올랐다.
데큘레인은 악독했다. 정녕 대단할만큼 악랄했다.
악독을 넘어, 세상에 이처럼 집요한 자가 또 있을까.
“재미있군.” 그 기가막힌 문장들을 통째로 읽던 나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사망변수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다.그렇기에······.
* * * 루이나는 무의식을 유영하고 있었다. 맨몸으로 망망대해를 유영하는 듯한 어지러움. 시도 때도 없이 치미는 욕지기.
시간의 흐름도 더 이상 인지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만 분노를 불태우며 버텼다. 이 납치가 누구의 짓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모르면 병신일 것이었다.
데큘레인.
루이나가 혀를 씹으며 그 이름을 되뇌인 순간이었다.
촤륵─!
얼굴을 감싼 보따리가 벗겨지며 안구에 통증이 일었다. 꽉 막혔던 입과 귀도 한순간에 트였다.
“흐어어억······!” 루이나는 숨을 토해내며 몸을 숙였다. 그렇게 헐떡이다 어두운 노면에 달라붙은 구두를 보았다.
“······.”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조금의 얼룩도, 먼지도 없는 깨끗한 구두. 맞춤제작되어 깔끔하게 접혀진 바짓단. 특유의 각을 유지한 채 꼬아진 다리. 음습한 공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 넥타이. 그리고······ 그의 얼굴.
그 순간 심장이 철렁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이목구비에 서늘한 음영이 가라앉았고, 탁한 동공은 맹금처럼 섬뜩했다.
“······당신.” 루이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두려움, 공포, 불안······ 차마 인정하기 싫은 감정들이 약해진 정신을 갉아먹었다.
무거운 위압이 몸 전체를 짓누르는 듯했다.
“두 번 다시 제도에 발붙이지 말라······.” 데큘레인은 말했다. 그 어조에는 억양도, 고저도 없었다.
“그리 말했을 터. 너는 무엇을 바라고 제도에 왔지.” 루이나는 침묵했다. 데큘레인은 그런 그녀를 비웃듯 바라보았다.
“제도에 저택을 샀다더군.” “······이래놓고 무사할 것 같습니까? 저는 황제의 교습- ” “쓸데없는 말은 필요 없다.” 데큘레인이 손바닥을 뻗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 씩 접었다. 다섯, 넷, 셋, 둘······.
“······마법 비전.” 루이나는 말했다. 데큘레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전에도 몇 번 반환 요구는 했었어요. 빌린 돈은 분명 이자까지 확실히 갚았을 텐데, 당신은 들은 체도 안했죠.” 데큘레인은 그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의 무심한 얼굴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감정이 없는 괴물처럼.
“그렇지. 그렇지만 말이다.” 데큘레인은 염동으로 어떤 문서를 가지고 왔다.
“루이나, 이 세상에는 ‘복리’라는 게 있다. 15 년 전 빌려준 액수가 1 억 엘네. 연이율은 20%였지.” 15 년 전에 작성되어, 현재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는 계약서. 그는 그 내용을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하여 총 십오억, 사천칠십만, 이천백육십 엘네.” “뭐?” 단리로 따질 경우에는 4 억이지만, 복리로 계산할 경우에는 15 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
물론, 독소조항이었다.
계약서에는 분명 단리로 명시되었으나, 맥퀸의 빚은 유크라인이 함정처럼 숨긴 ‘특약’에 의해 복리로 뒤바뀌었다.
“너희 가문은 아직 11 억 4072 만 2060 엘네를 갚아야 한다······ 아, 참.
해마다 2 억의 이자가 추가되지.” “······.” 루이나는 어이가 없는 것을 넘어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리고 토해내듯 말했다.
“황실에 제소하겠어요. 그딴 말도 안 되는-” “제국법적으로 항소는 계약 체결 이후 최대 10 년까지 가능하지. 그러나 너는 하지 않았지. 또한, 이는 ‘선황’ 시대의 사건이기에, ‘현황실’에서는 공식적인 검수가 불가능하지.” 데큘레인은, 이전 데큘레인의 술수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따위 빚 말고도, 여러 함정이 맥퀸의 가문 안에서 시한폭탄처럼 째깍- 째깍- 작동하고 있었다.
“당장 내일부터 차압이 들어갈 수도 있다.” 루이나는 데큘레인을 노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 감정의 결여가 살떨릴듯 무서웠다.
“당신······. 아니 넌 정말······.” 그는, 자신을 놓아준 것이 아니었다. 용서 따위를 한 것이 아니었다.오히려, 격추할 시기를 기다렸던 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처절하게 추락하여 죽을 때까지 절망하도록.
“계속 말하라. 들어주지.” 그 순간 온몸의 힘이 탁 풀렸다.
지금은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저는 수석교수가 될 생각이 없어요. 아니, 없었다면 거짓이지만, 마탑의 교수들이 나를 추대하려—” “상관 않는다.” 루이나는 나름 절박하게 변명했으나, 데큘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루이나의 심장이 뛰었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그러면 도대체 뭘 원하지? 내가, 내가 죽길 바라나?” 루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이어진 그의 말은······.
기이했다.
“너는 수석교수가 되어라.” 아니, 기괴했다. 루이나는 그 뜻을 알지 못한 채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커진 눈에서 억울함으로 범벅된 물줄기가 흘렀다.
“나는 이사장이 될 테니.” 여태 탁했던 그의 동공이, 어느새 푸른 인광을 머금었다. 그 짙은 시선이 자신을 직시했다.
“네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나를 돕는다면, 내가 이사장이 된 그때. 맥퀸의 비전 반환은 물론 이 빚의 탕감도 고려하지. 수석교수의 자리 또한 너에게 주마.” 루이나는 그의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단, 너는 나에게 맹약을 해라.” 데큘레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러 내용을 만년필로 작성했다.
“첫 번째로, 오늘의 일을 절대 함구할 것.” “······.” 충성을 맹세하라- 따위의 불명확한 말은 효과적이지 않다. 그 내용이 구체적일수록 맹약 위반의 반작용은 더욱 거세지므로.
“두 번째로, 이 계약의 내용을 5 년간 지킬 것.” 데큘레인은 본인이 작성한 계약서를 내밀었다. 루이나는 경악했다.
거의 ‘주종’에 가까운 계약이었고, 데큘레인이 내건 제약은 ‘단전의 파괴’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군. 다음 대화는 사흘 뒤다.” “아니, 잠-!” 데큘레인의 눈짓 한 번에 그들은 루이의 눈과 입과 귀를 막았다.
다시 암흑으로 굴러떨어진 루이나를 남겨둔 채, 데큘레인은 뒤돌아섰다.
* * * ······작업을 마친 나는 말없이 지하 동굴을 둘러보았다.
“맹약을 거부하면 어찌하실 겁니까.” 남자가 물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죽여야지.”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협박이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루이나에게 죽게 될 테니.
“······한데,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살길 원하는 놈이다.” [ 악당의 운명 : 사망변수 처치 ] ◆ 보상 습득 :상점 화폐 +2 뒤늦게 알람이 떠올랐다.
극복도 아니고 회피도 아니고 ‘처치’지만, 아무튼 맹약할 마음을 먹었다는 거겠지.
“괜찮겠습니까?” “뭐가 말이냐.” “맥퀸 가문은, 전 당주님을 시해하는 데 일조한······.” 음. 그런 일이 있었구나.
맥퀸도, 유크라인에게 당하기만 했던 건 아니라는 말이지.
나는 몰랐던 사실이었기에, 그저 고개만 저었다.
“루이나가 한 짓이 아니지 않냐. 맥퀸의 지금 당주는 루이나이지만, 연좌제는 이 정도면 족하다. 그건 그렇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머무르기에는 너무 어둡고 축축하고 더러운 곳.
“너희는 이런 곳에서 머무르고 있었나.” “예.” “저희에게 돈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난데 없이, 여태 침묵하던 여자가 크게 외쳤다. 남자가 말리듯이 쏘아보았지만, 여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일을 마치면 돈을 주고, 저희를 놓아준다 하셨습니다!” “돈.” “예. 막대한 부를—” 짝─!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남자가 동생을 가격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 두 남매를 바라보았다. 동생은 훌쩍이며 고개를 숙였고, 남자는 그런 동생을 노려보았다.
“괜찮다. 일단, 너희는 내 저택으로 와라. 이곳은 너무 더럽구나.” 뛰어난 재능이다. 대부호 재력가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니, 능력을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를 긴히 쓰도록 하지. 약속했던 보수도 물론 줄 것이다.” 그러자 동생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단, 내가 오늘 이전에 내렸던 명령은 모두 폐기하도록.” “감사, 감사합니다!” 두 남매는 급히 무릎을 꿇었다.
“또한.” 나는 그들을 내려보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손을 자주 쓰지 마라. 품위가 떨어진다.” 일상. (1) 데큘레인의 마지막 명령은 1 월달, ‘대기’였다.
그 당시에는 수백의 정보원이 함께 있었다. 그들은 오클란을 거점으로 암흑가를 비롯한 음지를 횡행했다.
렌은 그 주축 중 한 명이었으나, 데큘레인의 명령 하달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그 어떤 지침도 지원도 없었다.
그들을 규합한 핵심─‘돈’이 없어지자 수백의 정보원은 한 달 만에 수십으로 줄어들었고, 두 달이 지나자 두명이 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곳으로 떠났다.
렌과 에넨에게는 달리 떠날 곳이 없었다.
남매는 이 더러운 동굴에 남아 혹시 모를 주인의 귀환을 기다렸다.
속물적인 이유도 있었다. 머릿수가 줄어들었으니, 약속했던 보수도 훨씬 증가하리라는 마음이었다······.
렌과 에넨은 옷을 갈아 입었다. 제도 근교의 정장점에서 데큘레인이 직접 사준 수트, 그들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고급 옷감이었다.
그 뒤 몸에 찌든 때를 깨끗이 닦아냈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정돈했다.
그들에게 최고의 변장은 치장이었다.
렌과 에넨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유크라인 대저택에 입성했다.
데큘레인은 그 둘을 ‘새로운 직속 시종’이라 소개했다. 동시에, 대저택 부지 안의 창고를 전용 숙소로 깔끔하게 개축했다.
“······허어.” 여동생, 에넨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저택의 풍광을 구경했다. 이처럼 맑고 화려하며 산뜻한 거주지는 난생 처음이었다.
“강아지 키워도 되겠다, 여기서.” 세상에 마상에, 저택 부지에 뒷동산과 정원이 딸려 있다니.정녕 대륙에 이런 공간이 존재했단 말인가?
“······너는 그랬으면 안 됐어.” 렌이 에넨에게 말했다. 에넨은 대답하지 않았다. 싸대기를 맞은 그 볼이 아직도 부어 있었다 “아프냐.” “안 아프겠어?” “······그래도, 섣불리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적어도 주인님 앞에서는.” 6 개월 동안 보수가 없었지만, 두 남매는 그 이전에 내렸던 명령들을 끈질기게 완수했다.
먹을 게 없다면 쥐라도 잡아먹었고, 사람 부릴 돈이 없어 저들끼리 모든 것을 해결했다.
“오빠는 아직도 주인님을 믿는 거야?” 에넨이 물었다. 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데큘레인은 지고한 귀족인 척 루이나에게 자비를 베풀었지만, 정작 유크라인의 전 당주가 죽었을 때.
당시 데큘레인이 보였던 얼굴을 렌은 아직도 잊지 못했다.
그 순간의 그는 분명히······ 기뻐하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희열로 얼굴이 일그러진 채,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이었다.
“아직 의심하고 있어. 또 언제 토사구팽하려 할지 모르니.” 아버지의 죽음을 행복으로 받아들인 사람.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위험한 존재.
“그래도, 주인님은 우리 일족에 적대적이지 않잖아. 약속도 지켰고.” 에넨의 대꾸였다. 렌은 제 품에 안긴 가방을 보며 침을 삼켰다.
데큘레인은 약속했던 금액을 갑절로 돌려주었다.
자그마치 500 만 엘네였다. 21 년 인생에 이런 거액의 현금은 처음이었다.
에넨이 말했다.
“······1 만 엘네는 우리가 쓰고, 나머지는 가족들 주자.” “1 만 엘네나 쓰겠다고?” “아 왜. 우리가 7 년 동안 고생해서 벌었잖아. 우리한테도 보상을 줘야지.
딱 1 만. 그 이상은 나도 욕심 안 낼게.” 렌은 입술을 깨문 채 고민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렌과 에넨에게는 많은 가족이 있었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을지라도, 그들 전부가 가족이었다. 그 가족의 존재가 ‘데큘레인’이라는 동앗줄을 놓지 않은 이유였다.
줄 자체가 썩었는지, 아니면 위에서 버렸는지.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때에도 기어코 줄을 붙잡고 있었던 그들은······.
“그렇게 하자.” 적궤였다.
* * *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교수님 덕분에 무사히 공국에 도착한 마호랍니다~ 앗, 갑작스런 편지에 놀라셨나요? 그래도 끝까지 읽어주세요!
요즘은 하루하루가 평안하고 온화하지만, 가끔씩 그때가 생각나서 마음이 철렁여요!
교수님 교수님, 그때 교수님이 없었더라면 저는 이미 유골이 되어 있었겠죠~?
앗! 유골이라니! 아악! 생각만해도 무서워요 무서워요~ 이렇게 편지도 못 쓰고, 말도 못 하고, 단 것도 못 먹는다는 거잖아요?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릴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아참! 샤를로트에게 말은 들었어요. 교수님은 이게 거래라고 하셨다면서요?
거래······ 거래라 하면 왠지 차갑지만, 저는 교수님의 따뜻한 마음을 느꼈어요!
교수님은 고작 거래 때문에 저를 도와주신 게 아닐 거라 믿지만, 그래도 언젠가 제가 교수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저도 통크게 도와드릴게요!
그날을 대비해 요즘은 검술과 마법을 배우고 있어요. 아직은 힘이 미천하기는 해도, 짐만 되기는 싫거든요 싫거든요~ 그리고, 저번에 이제 연기는 안해도 된다고 말하셨잖아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용.
얼마나 얼마나 놀랐냐면요, 정말 무척 많이 놀랐어요~ 그런데 말예요, (엄청 진지한 얼굴), 그때 제 마음까지 다 연기였던 건 아녜요. 그것만 알아주세요.
마지막으로······ 아 참.
이번에, 저희 유렌 공국에서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해요. 지역 재개발을 골자로한 정책인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주 좋은 전망이 기다릴 것 같아요.
왜냐면, 제가 직접 설계하거든요!
교수님도 원하신다면,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릴게요~ 못 믿으시면 그냥 무시하시면 돼요~ 절대 저희가 자금이 부족해서 투자를 부탁하는 게 아니에요!
아앗! 샤를로트가 왔어요!
새벽 두시에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아침 일곱시네요. 더 쓰고 싶은 말은 많지만, 오늘은 이만 줄일게요.
답장 부탁해요~ 편지는 다음에 또 보낼게요~ 유렌의 공주 마호가, 생명의 은인 데큘레인 교수님에게. ] 나는 서재에 앉아 마호의 편지를 읽었다. 제 말투를 똑닮은 문체였다.
지금 내 ‘업무’와는 달리 아주 이질적이고 귀여웠다.
“편지가 이리 시끄러울 수 있나.” 나는 피식 웃고 편지를 서랍에 넣었다.
다시, 렌이 내어준 장부를 들었다.
표정이 굳었다.
[ 레바이론의 영지민 착취 ] [ 베오라드 가문의 비리 송금 내역······ ] 데큘레인은 온갖 귀족들의 약점을 긁어 모으고 있었다. 또한 수십 가지의 악행을 명령했다.
당장 ‘오클란’ 지역의 슬럼을 가속화한 장본인도 데큘레인이었다. 그는 그 슬럼의 토지 권리를 싼값에 사들일 계획이었다.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대부호 재력가」가 발동할 정도니 근거는 확실했겠지.
“······.” 데큘레인이 이 이상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나는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한다.
암흑가에 뿌린 이 놈의 돈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렌과 에넨처럼 조력자에 가까운 인연이 있을 수도 있고, 서로 죽고 죽이려는 악연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데큘레인으로서, 그 전부를 그저 무마하거나 은닉하거나 모른체 할 수만은 없다. 씨앗처럼 뿌려둔 그것들은 언젠가 제멋대로 발아할 테니.
따라서.
“······이용하는 수 밖에.” 데큘레인의 업보를, 메인 퀘스트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비트는 것.
내가 행할 수 있는 최선이다.
똑똑— 그때 로이가 노크했다.
─주인님. 율리 공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리니 문 앞이었다. 몸이 먼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문턱 너머에 갑옷 차림의 율리가 서있었다. 풀어헤친 하얀 머리카락이 눈가루로 이뤄진 듯 가지런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율리는 그렇게 말하며 입가를 떨었다. 파르르─ 파르르르─ 억지로 지으려는 어색한 미소였다.
나는 작게 웃었다.
“들어오지.” “아뇨. 안에 들어갈만큼 거창한-” “들어오라면.” “······예.” 율리는 들어오려 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가로 막았다.
“?” “마음이 바뀌었다. 그냥 밖에서 말하지.” “?” 이 감정은 내 선에서 막을 필요도 있다는, 뒤늦은 생각이었다. 율리는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지.” “저에게 임무가 하나 내려졌습니다.” “임무?” “예······.” 율리는 두 손을 모으고 꼼지락거렸다.
“그것이······ 제가 예상치 못한 기회를 얻어 교습 기사가 되었잖습니까?” “그렇지. 폐하가 내린 임무인가?” “예. 크레토 대군께서 교수님의 사인을 원하신다기에······ 혹시 가능하시다면.” 율리가 나에게 책 한권을 내밀었다. 그 표지를 본 나는 잠시 얼굴이 화끈해졌다.
이전 데큘레인의 저술. 너무 부끄러운 내용이었다.
“안 되겠는데.” “아. 그렇습니까?” “······.” 율리는 너무나 쉽게 납득했고, 나는 책을 촤르르 훑었다.
이전 데큘레인에게는 미안하지만 불쏘시개로도 아까운 내용이다. 아마 본인도 그 이유를 알 것이다. 이론을 일부러 어렵게만 꼬아서 발간한 책이니.
“곧 개정안을 낼 것이다. 그때 새로운 책으로 돌려주지. 물론 사인도 동봉하여. 크레토 대군께는 그리 전달하지.” “······예. 감사합니다.” 율리는 기사의 예를 취했다. 오른손을 반대편 어깨에 얹고 몸을 비스듬이 숙이는 자세였다.
“그럼 이만.” 그녀는 말을 길게 늘이지 않고 떠났다. 그 뒷모습은 나도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 걸어가던 그녀의 다리가 어느 순간 멈췄다. 하얀 머리카락이 부스스 떠올랐다.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 듯했다.
저기······.
무어라 중얼거리는데 들리지가 않았다. 곧,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같이, 체스를 두지 않으시겠습니까?” 수줍게 묻는 율리의 두 볼은 발그레했다.
나는 그녀가 황제에게 어떤 일을 겼었는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좋다.” 나도 마침 연습을 할 필요가 있었다.
체스 관련 서적은 이미 몇 권이나 읽었고, 고수들이 경기한 기보도 다수 보았으나, 실전만큼 좋은 수련은 없을 것이었다.
“따라와라.” 나는 대저택의 정원, 나무 그늘 아래의 자리로 안내했다. 율리는 양지바른 의자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깜빡깜빡- 깜빡깜빡- 눈꺼풀이 깜빡거린다.체스판을 기다리는 듯했지만, 나는 직접 만들었다. 노면의 돌을 끌어 올려 체스판과 기물을 제작했고, 잎사귀와 잔디로 말끔하게 장식했다.
나름 내 정성을 쏟아부었다.
“오오. 신기합니다.” 아이처럼 감탄하는 얼굴이 귀여웠다.
“두지.” “예.” 율리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심호흡을 했다.
“시작하겠습니다.” 탁─! 쓸데 없이 비장한 얼굴로 기물을 내딛은 율리는, “체크메이트.” 15 분만에 패배했다.
소모한 마력은 고작 300 이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율리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체스판을 이리저리 살폈다. 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보아라. 여기서 너는 비숍을 움직였으면 안 되었다. 섣불렀지.” 나는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율리는 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대단하십니다. 확실히, 저는 상상도 못했던 수였습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한판만 더······.” “좋다.” “감사합니다!” 한 판은 두 판이 되었고, 두 판은 세 판이 되었다.
율리는 그렇게 네 판을 내리 도전했으나, 단 한 번도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패퇴했다.
“너는 참 못하는구나.” “······죄송합니다.” “네가 매번 이런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주면, 우리는 더 쉽게 멀어지겠어.” 나는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자 율리는 눈을 홱 들더니 나를 쏘아보았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그렇습니까······ 그래도 저희 기사단에서는 저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데요······.” “재능은 있어 보인다. 오늘은 이만하지. 나도, 너도 출근해야 하니.” “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리도 칭찬 한 마디에 금세 마음을 추스른 듯 힘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 체스판과 기물은 네가 가지는 게 좋겠다. 오늘 패배를 떠올리며 정진하도록.” “아, 예. 감사합니다~!” 율리의 대답은 해맑았다. 그녀는 물건의 가치 따위보다, 정성이 깃든 선물을 좋아하는 듯했다.
* * * 한편, 이프린은 동아리실의 소파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흐흐······.” 쩝쩝- 쩝쩝- 입맛을 다시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향긋한 냄새와 압도적인 육질이 입안 가득 퍼졌다.
“로아호크 이 녀석······ 이리와······ 흐흐······ 토실토실······.” 그 행복에 겨워 몸을 뒤척이다가 소파에서 추락했다.
“······컥!” 대리석 바닥에 꼬리뼈가 찍혔다. 이프린은 등허리를 만지작거리며 일어섰다.
“에휴. 무슨 꼴이니 이게.” 한숨이 푹푹 흘렀다. 사흘 전의 사태로 기숙 제 3 관이 붕괴되었기에, 거처가 없어진 그녀는 잠시 동아리실에 머무르고 있었다.
사실, 어제까지는 아예 제정신도 아니었다. 노트 필기는 가방 안에 두었기에 화를 면했지만, 아버지와 주고받은 편지 전체를 잃을 뻔했으니.
다행히, 마법 코팅을 잘해둔 덕에 무사히 발견했다.
“흐아아암~” 이프린은 하품을 하며 화장실로 갔다.
“어푸- 어푸-” 고양이 세수를 한 뒤 다시 동아리실로 돌아왔다. 이제 곧 시험기간이니 공부를 좀 하려고 노트를 펼쳤는데, 동아리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이피! 이거 봐봐!” 줄리아 뿐만 아니라 페릿, 론도를 비롯한 동아리 부원들이 다수 들어왔다.
“왜?” “봐봐!” 그들은 책상 위에 웬 커다란 사진을 펼쳤다.
깔끔하게 붕괴된 제 3 관. 잔해가 모두 치워진 그 부지를 수직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왜 하필 3 관을 습격했는지부터가 마음에 안들었거든? 근데 이거 봐봐! 여기 검은 자국들 있지?” 펜을 꺼낸 줄리아는 부지에 새겨진 자국을 따라 펜을 그었다. 그렇게, 어떤 술식이 완성되었다.
줄리아는 그 술식 그대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법이 발현되며 한 줄기 문장이 떠올랐다.
[ 재의 응징을 기대하라. 너희들의 유약과 나약을 시험할 순간이 도래할 것이다. ] “이거, 봐 이거! 이거, ‘그곳’에서 전쟁 선포한 거 아니야?” “······에이 설마.” 조금 섬뜩하기는 하다만, 아무리 그래도 조금 그렇다.
잿더미가 아무리 막장이어도 감히 대학마탑을 습격할 리가.
“설마는 무슨! 이거 봐봐. 술식 구조도, 마탑에서 배운 거랑 완전 다르잖아!” “······.” 맞는 말이기는 하다. 정석에서 아득히 벗어난 나선형의 술식. 듣기로는, 잿더미의 마법사들이 이런 비정상적인 술식을 곧잘 애용한다는데.
“교수님한테 말해야 되는 거 아니야?” “나도 좀 그렇기는 한데······ 우리 말을 믿겠니?” “그래도 알리긴 해야지! 이러다, 또 평민만 죽어나간다니까! 이번에도, 봐!
제 3 관만 무너졌잖아! 얘네도 엄청 비겁해. 왜 우리만 공격하냐구! 잘못은 귀족들이 더 많이 했는데.” 줄리아는 열변을 토했다. 이프린도 그녀의 말이 이해는 되었다. 이번 사건에서 교수들의 태도를 보고 확실히 깨달았다.우리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그들은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래. 말이라도 한 번 해보자. 그게 나쁜 일은 아니잖니?” * “썩 꺼져 인마! 어디 말도 안되는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씨! 안 그래도 신경 날카로워 죽겠는데! 단체로 벌점 주기 전에 썩 꺼져!” 쾅─!
렐린이 문을 닫았다. 그 돌풍이 부원들의 로브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줄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저 뚱땡이 교수 진짜······.” “거 보렴. 안 된다고 했지? 할 거면 우리끼리 해야돼. 나 요즘, 마법적으로 엄청 성장한 것 같거든? 그러니까-” “아니, 이피. 아직 한 군데 남았어. 그 교수님.” 줄리아가 말했다. 시아레부터 렐린까지, 중견 교수들은 죄다 문전박대였지만, 아직 그 교수가 남았다. 이프린도 ‘그’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 수석교수 데큘레인 ] ······손에 땀이 고인다. 그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가파라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쿵덕거린다.
“후우······” 이프린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등 뒤에서 부원들이 용기를 전달했다.
그녀는, 아니 그들은 다 함께, 그 문을 노크했다.
똑똑─ 문이 열렸다. 처음에는 데큘레인이 열어준 줄 알았는데, 스르륵─ 문이 스스로 벌어졌다. 애초부터 잠겨있지 않았던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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