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8
“······병신.”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일기장을 덮었다.
이 시절의 나는 왜 이렇게 나약했을까. 대체 뭐 때문에 이리 바보처럼 굴었을까.
한숨을 내쉰 예리엘은 책상 귀퉁이에 놓인 장갑을 보았다. 데큘레인이 선물이랍시고 준 명품이었다.
“선물은 지랄.” 예리엘은 욕설을 뇌까렸다.
사랑을 갈구하던 과거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당신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세상이 흔들리던 아이는 이미 죽고 없다.
그 전부가, 잊고 싶은 아픔일 뿐이다.
“안 속을 거거든, 병신아.” 장갑을 움켜쥔 예리엘은 곧바로 내팽개치려 했다.
“······씨.” 차마,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생일 축하 따위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 난생 처음의 선물이었다.
물론 그 놈은 그저 말 뿐이었겠지만······.
예리엘은 장갑을 서랍에 넣었다.
“어차피 안 쓰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밤 9 시.
호텔 [ 하데카인 로망스 ] 뒤편의 숲에는 많은 사람이 모였다. 2 박 3 일 MT 의 첫 번째 밤일정, 마법 폭죽을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크게 크게─!
환호성과 함께, 반짝이는 마법 줄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팡─ 펑─ 파바바방─!
마법은 공중에서 폭발하며 밤의 천장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우와아아······.
예쁘다······.
어둡지만 밝은 밤.
순수한 탄성이 가득 차올랐다. 폭죽을 구경하는 다수의 인파 속에는 다도해의 세 아이─칼로스, 레오, 유리아도 있었다.
“역시 실비아.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그리고, 마법학과 교수들은 각 마법사 팀의 폭죽마다 점수를 매겼다. 실비아 팀이 제작한 폭죽은 일곱 교수 전원에게 만점을 받았다.
“이피. 준비됐어?” “응.” 마지막 차례는 이프린의 팀이었다. 그들은 미리 술식을 새겨놓은 폭죽을 가지고 왔다. 팀장을 맡은 이프린이 크게 외쳤다.
“저희는 파괴 마법과 조화 마법을 통한-” “쏘기나 해라.” “······네.” 교수들은 심드렁했다. 시무룩해진 이프린은 팔찌에 마력을 모았다.
울컥이며 솟구친 마력이 폭죽 더미에 스며들었고, 이내 수직으로 치밀었다.휘이이이이잉─!
마법은 굉연한 소음과 함께 하늘에 닿아 폭발했다.
파아아아앙─!
이프린의 설명처럼, 파괴와 조화의 향연은 오로라처럼 아름다운 커텐을 만들었다.
나름 실비아 팀과 견줄 수 있을만한 결과물이었지만, 정작 교수들의 반응은 탐탁잖았다.
“예쁘긴 한데, 소리가 너무 크네. 귀아파. 난 6 점.” 파괴학과의 시아레 교수는 6 점.
“4 점이다.” 정령학과의 레트란은 4 점.
“아니, 왜요?!” 아무런 설명도 없자 줄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교수들은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다. 줄리아는 입술을 삐죽이고 물러났다.
“괜찮아.” 이프린이 줄리아를 위로했다.
어차피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교수들은 ‘평마탐동’이라는 평민 동아리 자체를 싫어했으니.
······그런데.
“10 점. 파괴 마법과 조화 마법의 비율이 균형을 이루었다.” 난데 없는 만점이었다.
낮게 깔리는 중저음과 군더더기 없는 심사평.
······데큘레인.
화들짝 놀란 줄리아가 되물었다.
“네?! 10 점이요?!” 데큘레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교수들은 슬슬 눈치를 봤다. 바로 다음 차례인 렐린이 칭찬하며 10 점을 주었고, 나머지 교수도 전부 10 점이었다.
6 점과 4 점을 줬던 시아레와 레트란만 식은땀을 흘렸다. 그들은 이게 데큘레인의 ‘신종 엿먹이기 수법’이라 오해했다.
“마법 폭죽 경연의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1 등은 70 점의 실비아 팀, 2 등은 60 점의 줄리아 팀, 3 등은 58 점의 벡크 팀······.” 그 덕에 이프린 팀은 2 등이 되었다. 부원들은 서로 좋다며 웃었지만, 이프린은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어딘가로 떠나갔다.
─진짜 뭐야 대체?
─아 어이가 없네.
─야야, 맞지? 데큘레인은 쟤만 편애한다니까? 드렌트 선배 논문은 화형시키더니.
─그니까. 학기 초에 그 사건도 원래는 징계 먹을 건데, 데큘레인 덕에 안 받은 거잖아. 개인 교습 해줬다는 소문도 있고.
─헐. 진짜 둘이 뭐 그런 거 있나?
─······설마. 예쁘장하긴 한데, 데큘레인 교수는 저런 취향 아닐텐데.
귀족 신분의 마법사 무리가 속삭이는, 전혀 귀족적이지 않은 뒷담화.
이프린은 화가 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피, 이거봐! 2 등 상품이야!” 때마침 줄리아가 2 등 상품을 가지고 왔다. 양주였다.이프린은 그 주둥이를 훽 낚아챘다. 뚜껑을 뾱- 따고 한 모금 벌컥 마셨다.
“헉! 이피 왜그래?” “잠깐만. 나 어디 좀 다녀올게.” 이프린은 줄리아에게 양주를 돌려주자마자 곧장 내달렸다. 전력질주였다.
그가 어떤 방향으로 떠나갔는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동안, 차마 묻지 못했던 의문이 수없이 많았다. 알고 싶었던 것들이 미치도록 많았다.
오늘은 그저 방아쇠일 뿐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그렇게 30 분 정도를 달렸을까.
이프린은 마침내, 어둑한 길가의 벤치에서, 데큘레인을 발견했다. 그의 곁에는 웬 말 한마리가 있었다.
꼴깍─ 침을 삼켰다.
그는 자신을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지만, 머뭇머뭇 다가가서 반대편 벤치에 앉았다.
“······교수님.” 데큘레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프린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실례인 걸 알지만, 논공회와 관련하여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제서야 데큘레인이 고개를 비스듬이 들었다.
“드렌트 말인가.” “예.” 이프린은 그 논공회에서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드렌트가 선보였던 「보호 화염구」와 그 술식.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짙어지는 의혹이었다.
“그 논문의 내용이······.” “네 과제와 비슷하지. 아니, 거의 동일하지. 너는 그걸 이제야 알았나.” 데큘레인은 한심하다는 듯 뇌까렸다.
“어······.” 이프린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하지만, 물론 이리 확실하게 단언할 줄은 몰랐지만,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내 슬픈 얼굴이 되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 아무 것도 모르는 귀족 놈들은 데큘레인이 나를 편애한다 하는데, 애정이라 하는데.
이런 것들을 정녕 편애라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왜?
도대체 왜?
“······왜.” 이프린은 노면에 나뒹구는 돌멩이들을 바라보았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로브를 훑었다. 와하하하하─ 멀지 않은 곳에서 마법사들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징계 때도 그렇고, 동아리도 그렇고, 이번 논문도 그렇고······” ······단 한 가지.
여태 그에게 묻지 못했던 가장 중요한 하나.
“제 아버지 때문입니까. 그 부채의식 때문입니까.” 이프린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리고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데큘레인.
가장 증오스러운 교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리는 푸른 눈······.
“스스로 알아내라.” “······.” “떼쓰지 마라. 넌 아이가 아니다.” 데큘레인은 차갑게 잘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긴장이 탁 풀렸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 공백에는 곧 분노가 차올랐다.
이프린은 주먹을 아득 쥐었다.
“······안 그래도 그럴 겁니다!” 그 외침으로 데큘레인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이프린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음 속 불길은 얼어붙지 않았다.
“전, 지원할 겁니다. 교수님 휘하에.” “······.”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힐 겁니다! 제 아버지는 왜 자살했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데큘레인은 그저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무표정에는 아주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또한, 교수님은 언젠가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옥석이라고.” 언젠가는 이 말을 후회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치기(稚氣) 뿐인 반푼이의 고함이었다.
“옥석이니 스스로의 재능을 낭비하지 말라고.” 부릅 뜬 눈에는 이미 눈물이 맺혔고, 앙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니, 저는 반드시 교수님을 뛰어넘을 겁니다. 당신이 지켜볼 수 있는 곳에서, 당신보다 위대해질 겁니다아아악─!” 해묵은 감정들을 모두 토해낸 이프린은 숨을 헐떡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흐른 눈물이 거슬려 로브 자락으로 확 닦았다.
“······.” 서서히 밀려드는 밤 공기가 그녀의 열기를 식혔다.
별이 총총한 아래, 데큘레인은 서있기만 했다. 그의 침묵에 이프린은 덜컥 겁이 났다.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뒤늦게 자각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좋은 마음가짐이다.” 자신의 의지를 꺾으려 하지 않았다.
업신여기지도 않았고, 조롱하지도 않았다.
“너는 끝없이 도전해라.” 오히려 존중하며,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 끝에 무엇이 있든, 네 월계관으로 삼을 수 있을 테니.” 데큘레인이 말에 올랐다.
이프린은 우두커니 서서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를 태운 적마는 금세 저만치 멀어졌다.
“······그래.” 이프린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의 말대로, 나는 끝없이 도전할 것이다.
그러니 당신도, 그 누구보다 고고한 자리에 있었으면 한다.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었으면 한다.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정점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에게 꺾여주었으면 한다.
그때까지 나는······.
“악!” 견갑골에 둔탁한 통증이 일었다.
이프린은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땅바닥을 보았다. 돌팔매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근처 나무를 올려다보니 웬 매 한 마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쟤가 던졌나? 따위의 말도 안되는 생각을 했는데, 말이 되는 생각이었다.
매의 발에 쥐어진 돌멩이가 훽- 하고 날아왔다.
저 매가 던진 게 맞았다.
“너 뭐니- 악, 그만 던져- 악, 아니 저 새가-” * * * 나는 크레바스 협곡의 입구에 도착했다. 적토마의 성능이 워낙 좋아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너에게 맞는 방독면이 없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다. 마굿간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정오에 다시 돌아와라.” 나는 적토마를 돌려보냈다. 명령을 들을지 안들을지는 모르겠지만, 히히히힝─! 거리는 몸짓에는 지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사망변수인가.” 가만히 서서 방금의 사건을 회상했다.
오늘 이프린의 선언은 물론 사망변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당황스러웠다.
이프린이 내 휘하로 들어온다니?
나쁘지는 않다. 다만 이게 목 밑에 들어온 칼이 될지, 아니면 허리춤에 찬 칼이 될지, 그게 모호하다.
그만큼 너무 갑작스러울 뿐더러, 나는 아직 데큘레인이 이프린의 아버지에게 ‘정확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른다.
정녕 죽어 마땅한 죄를 범했을 수도 있고, 적당히 혼날만한 짓이었을 수도 있다.
알고 싶지만, 아직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 독립 퀘스트 : 주파 ] ◆ 상점화폐 +4 ◆ 추가 달성 보상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저 멀리, 샤를로트 일행이 다가오고 있었다. 흙먼지 투성인 그들은 나를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런데 그들 일행은 마호, 샤를로트, 론 뿐이었다. 다른 한 명인 ‘게더’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셋 뿐인가.” 나는 샤를로트에게 물었다. 샤를로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게더는 오는 길에 죽었나.
아쉬웠다.
샤를로트의 등 뒤에서 마호가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안녕하세요~ 데큘레인 교수님. 교수님 맞으시죠? 저희를 도와주신다는 고마운 분. 샤를로트 경에게 이야기는 많이······” 마호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만나자마자 말을 쏟아붓는 그녀가 나는 반가웠다.
그 얼굴은 내가 디자인한 그대로였고, 성격도 게임에서 본 그대로였다.
“예. 반갑습니다. 저는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제국황실 대학마탑의 수석교수입니다.” “와아, 수석교수라니, 대단해요 대단해요. 마법을 얼마나 잘 다루시기에······.” 나는 미소로 화답하고 샤를로트를 보았다. 샤를로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받아라. 모험단에게 받은 쪽지다.” 샤를로트가 어떤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 대략 37 인의 살수와 ‘디아넌트’가 당신들을 뒤쫓고 있다. ] 디아넌트. 그 단어를 보자마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본능적인 역겨움이 치밀었다.
“레오크 왕실은 이만큼이나 타락했는가.” “······그러게 말이다.” 디아넌트는 유령과 악마가 반쯤 섞인 아종이다.
생김새는 인간과 흡사하며, 인간 수준의 지능을 지니고 인간처럼 말하지만, 그 속은 악마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디아넌트가 악마보다도 더 역겨운 이유는, 놈이 ‘계약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잿더미’의 흑마법사들이 부리는 「악마 소환」 계열의 마법.
사지가 멀쩡한 인체와 악마의 뿔 따위를 섞어야만 소환할 수 있는 놈은, 물리적으로도 마법적으로도 처치하기 힘들다.
“······괜찮겠나.” 샤를로트가 물었다.
“당연히 괜찮다.” 나에게 승산은 차고 넘친다.
애당초 크레바스에 진입하면 내 ‘마력의 질’은 [ 4등급 ]으로 격상될 것이고, 마력 회복 속도가 마력 소모량을 압도할 것이며, 모든 마법의 위력과 출력이 증폭될 것이다.
심지어 그 상대도 악마류 디아넌트이니, 철저하게 찢어발길 수 있다.
“마호 공주님.” “네? 네네?” 나는 노면에 서류 가방을 내려놓았다. 가방이 열리며 목강철 열 다섯 자루가 허공으로 부상했다.
마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부터 이 강철이 당신을 호위할 것입니다.” “우와아.” 샤를로트는 ‘호위에 딱맞는 마법이구만-’ 중얼거리며 광산용 방독면을 꺼냈다.
“너는 필요 없나? 마침 4 개가 있다만.” “필요 없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 * * 일행은 ‘크레바스 협곡’으로 진입했다.
협곡의 초입은 여타 산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소 비좁고 험악하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데큘레인 교수님은요, 정말 다정한 분이신 것 같아요.” “제가 말입니까.” 그러나 샤를로트는 그런 평화로움보다도, 지금 데큘레인이 보이는 의외의 태도가 놀라웠다.
“그럼요 그럼요~ 제국의 다른 귀족분들은 저를 싫어하는 것 같았어요. 만날 무시하구, 면박주구······ 그래서 서글프구 그랬는데, 교수님은 다르세요.” “그런 자들은 무시하십시오.” 그는 마호를 극존히 대했다. 말투 하나하나에 예의범절이 배었고, 행동에도 기품이 가득했다.
“원래 천한 것일수록 남을 무시하며 본인을 드높이려 하는 법입니다.” “네? 아······ 제가 천한가요?” “아니요. 제국의 어설픈 귀족들 말입니다. 마호 공주님은 물론 귀한 사람입니다만, 그 귀함은 핏줄만으로 체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주님은 그에 걸맞은 자질을 지니고 계십니다.” “와아······ 그런 말은 처음들어봐요······.” 뭔가 불편해진 샤를로트는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이. 적당히 하지.” 그러다 꼬시겠다.
“······.” 끄덕인 데큘레인은 말없이 걸었다.
협곡을 안내하는 그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일전에도 몇 번 오갔던 것인지 조금도 헤매지 않았다.
그렇게 내밀한 협곡으로 전진할수록 산림과 초목이 보랏빛을 띄었다.
공기가 따가웠지만, 미리 준비한 광산용 방독면 덕분에 호흡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데큘레인은 여전히 맨얼굴이었다.
저게 말로만 듣던 ‘퇴마도 유크라인’인가.
“—!” 어디선가 원숭이가 날아들었다. 론은 급히 검을 휘둘렀지만, 일행의 주위를 맴돌던 날붙이가 먼저 원숭이를 꿰뚫었다.
케레렉─!
데큘레인이 부리는 요상한 강철이었다.
“와아!” 마호가 감탄했다. 데큘레인은 여전히 전방만을 주시하며 말했다.
“반경은 철저히 보호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유렌의 국경까지는 대략 4 시간 쯤 걸으면 될 것이다.” 그러자 샤를로트는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4 시간은 너무 길다.” “어쩔 수 없다. 달리면 마기에 중독될 우려가 있어.” “디아넌트의 추격은?” “걱정할 것 없다. 놈은 내가 죽인다.” “······네가?” “그래.” 샤를로트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녀는 본인이 희생할 생각이었다.
“아니. 내가-” “닥쳐라.” “······뭐라?” 데큘레인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파르르르륵──!
돌연 박쥐떼가 출몰했다. 수백에 달하는 무리였지만, 데큘레인의 애장이 우아하게 움직이며 그 전부를 꿰뚫었다.
휘몰아치는 강철.
박쥐떼는 감히 그 영역 안으로 침범조차 못한 채 죽었다.
“대단해요 대단해요! 이건 어떤 마법일까요? 교수님 교수님, 저도-” 마호가 데큘레인의 등에 대고 말했다. 데큘레인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공주님.” “네네!” “잠시만, 그 입 좀 다무시지요.” “아, 네네.” 흠칫 놀란 마호는 제 입에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였다. 저 입 다물었어요~ 말 잘들었어요~ 휘── “······?!” 멀지 않은 거리에서 휘파람이 불었다. 샤를로트는 검을 쥐었다. 동시에, 표표한 악마의 기운이 그들의 등을 찌를 듯이 다가왔다.
데큘레인의 걸음이 멎었다. 샤를로트가 그를 바라보았다.
“······어이.” 그의 푸른 눈은 어느덧 인광(燐光)을 머금었다. 무섭도록 일그러진 얼굴은 그 분노를 가까스로 참는 듯했다.
샤를로트는 괜히 쫄았다.
휘이이── 휘이이── 휘파람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타다다다다다······.
지면을 밟으며 다가오는 가벼운 발걸음.
쏴아아아······.
나뭇가지가 인위적으로 흔들리는 소리.
샤를로트는 마호를 안고 호신강기를 둘렀다.
“미리 말하지.” 데큘레인은 담담하게 경고했다.
“다가오는 순간 사지가 분해될 것이다.” 저편의 무리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데큘레인을 비웃듯 다수의 모습을 드러냈고, 바로 그 순간.
───!
강철의 파열이 대기를 찢었다. 일초에도 수십번을 휘도는 그 「염동」의 속력을 인간은 인지할 수 없었다.
폭격이 내려앉은 것처럼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속도가 일으킨 파동만으로 협곡이 뒤집혔고, 수풀이 박살났으며, 온갖 잡것들이 붕 솟았다.
······여기서 잡것이란, 핏물과 살점과 장기를 뭉뚱그려 뜻했다.
하데카인. (3) 샤를로트는 문자 그대로 ‘갈려나가는’ 살수들을 보았다. 데큘레인의 강철은 초당 수십번 이상 회전하며 일대를 으스러트렸고, 인간이었던 것들의 피육이 나뒹굴어 참상을 이루었다.
샤를로트는 마호의 큰 눈을 손으로 가렸다. 마호가 손을 피해 고개를 기웃거렸기에, 아예 붙들어 매고 그 눈두덩이를 막았다.
“아 왜 이래요, 왜 이래요.” “보시면 안 됩니다, 공주님.” 상황은 여전히 급박하다.
살수 중 열댓은 무사히 사거리에서 벗어났을 뿐더러, 무엇보다 가장 위험한 ‘디아넌트’는 아직 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있다.
“······.” 샤를로트가 검을 들었다. 검을 쥐는 것만으로도 우측 어깨에 통증이 일었다.
공주 몰래 숨겼던 부상, 저주의 주박이었다.
“샤를로트.” 데큘레인이 말했다. 그는 지팡이를 움켜쥔 채 놈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공주와 함께 떠나라. 나는 곧 쫓으마. 이곳에 오래 머물면, 공주도 위험하다.” “······가능하겠나.” “떠나라.” 샤를로트는 머뭇거렸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하겠다며 고집을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호를 안아들었고, 두 사람 곁에 한 자루 강철이 따라붙었다.
아무래도 이 강철은 호위 전용인 듯했다.
론이 말했다.
“대장님. 제가 남아서 교수를 돕겠습니다.” “······알겠다.” 샤를로트가 마호와 함께 돌아선 그때.
악마의 기운이 선명하게 일었다. 멀지 않은 곳에 디아넌트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놈은 듣던 대로 인간의 형상이었지만, 그 실루엣은 석양처럼 희미했다.
악마와 유령이 뒤섞인 변종.
물체이면서 유체(流體)의 성질을 지닌 성가신 놈.
샤를로트는 디아넌트를 뒤로한 채 달렸다. 다만 속력은 적당히 조절했다.
너무 빠르면 공주가 마기에 중독될 우려가 있었다······.
······휘이이이.
디아넌트는 놀리듯 휘파람을 불었다.
“저 두 여인은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을까.” 데큘레인은 이성의 끈을 억지로 틀어쥐었다. 의식의 밑바닥에서부터 본능적인 증오와 경멸이 치밀었지만, 참을 만했다.
그러자 디아넌트는 웃었다.
“마력 하나 없는 강철로 이 몸을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놈의 음색은 목구멍 안에서 그을린 듯 눌어붙었다.
“물론, 마법으로도 이 몸을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놈의 말대로 평범한 강철은 디아넌트를 죽일 수 없다. 한 순간만 발현되는 마법 또한, 유체에 가까운 놈을 소멸시킬 수 없다.
공기를 자르거나 불태우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놈을 없애기 위해서는 마법의 격이 대단히 높아야 하는데, 이곳은 ‘크레바스 협곡’이므로, 거대한 마법은 마기에 의해 흩어지고 말 것이다.
놈은 그 사실을 지극히 잘 알고 있다.
“······.” 데큘레인은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의 마력적 증폭과 회복 속도를 감안하여 「목강철」의 경로를 구상했다. 놈을 찢어발길 과정을 설계했다. 지금부터 약 30 분 가량의 전황을 예측하고 가늠했다.
고오오오······.
「로켈록의 지팡이」가 그의 마력으로 달아 올랐다. 퇴마의 피가 섞인 지팡이는 주인과 더불어 분노했다.
이윽고 데큘레인은 눈을 떴다. 그의 눈이 푸르게 반들거렸다. 저편에는 여전히 디아넌트가 있었다.
그는 멀지 않은 노면에 가상의 선을 그었다.
디아넌트가 이 선을 넘는 순간─ 강철 무리는 데큘레인의 구상과 설계를 충실히 이행할 것이었다.
저벅.
디아넌트는 한 발자국을 걸었다.
기사 론의 손에 땀이 고였다.
저벅.
놈은 스스로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데큘레인은 디아넌트를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저벅.
놈이 한 발자국을 더 걸었다.
그것으로 놈은 ‘선’을 넘었다.
디아넌트의 우측에서 차가운 섬광이 번뜩였다.론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데큘레인조차 그 집행을 인지할 수 없었다.
목강철은 데큘레인의 의지가 아닌, 미리 구상된 설계에 따라 행동했다.
모두의 시간은 정체되어 있었고, 다만 강철만이 스스로 움직였다.
쐐애애애액─!
디어넌트는 자신의 목이 꿰뚫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단면에서는 피 한방울 흐르지 않았다.
첫 번째 목강철은 디아넌트의 목을 끊어낸 뒤 급속히 하강했다. 쇄골에서 사타구니까지를 정확히 갈라냈다.
두 번째 목강철이 횡으로 휘었다. 우하단의 치골에서 좌상단의 겨드랑이까지가 절삭되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목강철은 척추를 그 마디마다 잡아뜯었다.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목강철은 손목을 잘라냈다.
여덟 번째, 아홉 번째 목강철은 다리를 절단했다.
열 번째, 열 한 번 번째 목강철은 육체를 휘감듯이 나선으로 베었다 그것으로 디아넌트의 육체에는 다수의 실선이 새겨졌다. 그 단면에서 연기가 새었다.
머지 않아 디아넌트는 자신의 시야가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세계가 빙그르르 돌면서, 강철에 찢기는 자신의 몸이 보였다.
목이 달아난 신체.
열 두 번째 강철이 유유하게 도래했다. 강철은 안구를 꿰뚫었고, 뇌를 부쉈다.
열 세 번째 강철과 열 네 번째 강철은 디아넌트의 육신 안에서 날뛰었다.
“······.” 그러나 그 틈을 타서, 다수의 살수가 데큘레인을 넘어 샤를로트를 추격하려 했다. 데큘레인은 강철을 뻗어 놈들을 죽였다.
그들은 날렵하게 움직여 물러났다. 놈들이 느끼는 곤혹과 당황이 론의 눈에도 보였다.
“교수님! 저, 저곳에!” 론이 저쪽을 삿대질하며 크게 외쳤다. 디아넌트가 다시 흐물거리며 제 형상을 갖추려 하고 있었다.
데큘레인은 태연했다.
“요란 떨지 마라.” 그는 디아넌트를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간단했다.
“죽을 때 까지 쳐죽이면 그 뿐이다.” 십수자루의 목강철이 다시 치솟았다.
강철은 디아넌트를 붕괴시켰던 작금의 과정을 똑같이, 무한히 반복했고, 론은 그 파괴적인 위력을 실감하며 멍하니 감탄했다.
* * * 샤를로트는 마호와 함께 협곡을 무사히 돌파했다. 크레바스에서 빠져나와 들판을 내달렸다.
유렌의 국경선까지 멈추지 않았으나, 역시 끝까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적이었다.
살수들이 그림자를 흩뿌리며 달려들었다. 샤를로트는 한 손으로 검을 휘둘러 놈들을 죽였다.
오른팔을 주박한 저주의 통증이 온몸으로 치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 샤를로트가 내지른 검에서 검기가 일렁였다. 방출된 검기가 놈들의 살과 뼈를 짓이겼다.
늦지 않게, 어디선가 고함이 치밀었다.
“저곳이다!” 대공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제국의 국경으로 진입할 수는 없었지만, 샤를로트가 약속했던 유렌의 경로에 닿자 원군으로서 등장한 것이었다.
기사들은 민첩하게 달려들어 살수를 베었다.
전황은 곧바로 역전되었고, 샤를로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품 안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호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공주님.” “······네. 속이 좀 안 좋기는 한데 괜찮아요. 우, 우엑-” “마기 중독의 초기 증세입니다만, 그 정도라서 다행입니다. 곧 괜찮아 질겁니다.” 크아아아악─!
기사들은 단 한 명의 살수도 놓치지 않았고, 붙잡힌 살수는 자결을 택했다.
촤르르륵─!
검이 살갗을 가를수록 사방은 고요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내, 공국의 내무장관이자 마호의 숙조부(叔祖父) ‘기란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호.” “아! 작은 할아버지!” 마호는 크게 외치며 달려갔다. 기란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호를 사뭇 미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구나. 차마 이곳에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처지를 용서해다오.” “괜찮아요 괜찮아요~ 다 이해해요. 저는 오히려 고마운걸요. 와줘서 고마워요.” 마호는 여전히 밝았다. 기란드는 그런 마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샤를로트를 보았다. 샤를로트는 찌뿌둥한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샤를로트.” “예.” “수고했다. 생존자는, 자네 뿐인가.” “······아닙니다.” 샤를로트는 고개를 저었다.
데큘레인은 분명 자신들을 뒤쫓겠다 말하였으니, 론과 함께 올 것이었다.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기란드는 끄덕였다.
그들은 몸을 추스르고 시체를 파묻으며 곧 도래할 동료들을 기다렸다.
시간은 건조하게 흘렀다.
바람이 차가웠다.
그렇게 삼십 분, 더 지나 한 시간, 너무 늦은 두 시간.
“이만 돌아가지.” 기란드가 샤를로트의 어깨에 손을 얹은 그때였다.
“······아! 저기! 저기저기!” 마호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모두가 그곳을 바라보았다.
땅과 하늘의 구분이 모호한 무채색의 저녁.
그 아득한 지평선에서, 두 남자가 걸어 오고 있었다.
샤를로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하셨군요!” 마호가 먼저 달려가 그를 마중했다.
데큘레인은 아직 전투의 여운에 젖어 있었다. 표정이 딱딱했다. 그러나 곧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걱정 감사드립니다, 공주님.” “정말 다행이에요 다행이에요. 휴우. 고마워요, 교수님, 정말로-” “공주님.” 데큘레인은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었다. 그리고는 자그맣게 속삭였다.
─이제, 연기는 필요 없습니다.
마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는 마호의 진짜 성격을 알고 있었다.
물론, 이 동화 속 말괄량이 같은 모습이 거짓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백치미와 순진무구는 거짓이다.
그녀는 자신의 어떤 면모가 동정을 일으킬 수 있는지, 어떤 행동이 자신의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는지, 철저하게 알고 있다.
“······.” 마호는 커다란 눈으로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데큘레인은 말없이 낮은 미소를 지었다.
샤를로트가 다가왔다.
“어이. 너는······.” “이제 일은 끝났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이 론에게서 들어라. 론?” “예! 알겠습니다!” 데큘레인의 말에 론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당장 하루 전만해도 의심이 가득했던 론은 무슨 충신처럼 되어 있었다.
데큘레인을 보는 눈에 흠모와 존경이 가득했다.
샤를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이 은혜, 아니 ‘거래’는 결코 잊지 않겠다.” 데큘레인은 대답도 않고 돌아섰다.
조금의 휴식도 없었다. 피곤한 기색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그는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기품이 가득했다.
“샤를로트.” 기란드가 샤를로트를 불렀다. 기란드 또한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 “저 자가 호위조인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론이 말했다.
“예. 제국마탑의 데큘레인 수석교수님입니다. 홀로 수십의 살수를 죽였고, 디아넌트를 사살했습니다.” “······디아넌트를? 아니, 저 크레바스 협곡 안에서?” 론은 자랑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예.”“그게 가능한가?” “제 두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데큘레인 교수님의 마법은 평범한 마법사들과 그 궤와 격이 달랐습니다.” 감명이 가득한 얼굴로 론은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호도 같은 곳에 시선을 두었다.
“교수님은 마치 장난감 다루듯, 디아넌트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교수님에게는 어떤 공격도 통하질 않았습니다. 무적(無敵)에 가까운 기예(技藝), 과연 ‘전투 마법’의 정수였습니다······.” 론의 극찬에 기란드는 물론 대공의 기사들마저 새삼스러운 눈으로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지평선에, 유크라인의 혈족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 * * [ 독립 퀘스트 완료 ] ◆ 상점화폐 +4 ◆ 마력 +30 ······크레바스 협곡을 나오자, 명령했던 대로 적토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곧장 그 등에 올라 복귀하려던 나는 문득 협곡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저 내부에서의 마력 회복 속도는, 「목강철」 전부에 「미다스의 손」을 부여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실제로, 걸어 나오는 여섯 시간 동안 네 개의 「목강철」에 특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마기를 정화하여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몸에 부하를 주었고, 특히 심력의 소모가 극심했다. 성격의 전염이 더욱 강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전부를 감수하며 협곡에서 시간을 보내기는 싫었다.
“가자, 하데카인으로.” 적토마는 가파르게 내달렸다.
나는 안장에서 선잠을 청했다. 내 피로를 아는지 적토마도 속도와 진동을 줄여주었다.
그렇게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니─ 하데카인의 영주성이었다.
“······흠.” 이곳에 올 생각은 없었는데.
온 김에 데큘레인의 방이나 둘러봐야겠다.
“어이.” “······아! 당주님을 뵙습니다!” 나는 근처의 경비병에게 적토마를 맡겼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에서는 시종을 시켜 데큘레인의 방까지 닿았다.
“이곳이냐?” “그렇사옵니다.” “오랜만이라 헷갈리는군. 편히 쉬도록.” 나는 문을 열었다. 방 자체는 깔끔했고, 뭔가 특별한 것도 없었다. 다만 책장에 꽂힌 노트 한 권이 내 눈에 띄었다.
[ ─ ] 무제. 아무런 제목도 없는 공책. 서재 한 켠에 꽂힌 마법적인 아티팩트.
내용도 뭣도 없지만, 내 「육안」은 이 노트가 ‘특별하다’고 말한다. 「육안」 이 아니라면 이 노트를 볼 수도 없었을 것이라며.
나는 노트를 품에 넣고 나왔다.
“······.” 이번에는 영주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똑똑─ 노크를 한 번 한 뒤 문고리부터 쥐고 확 열었다.
“아 뭐야!” 문을 열자마자 카랑카랑한 소리가 울렸다. 예리엘이었다.
예리엘은 표정을 와락 구기고 나를 노려보았다.
“노크좀 해!” “했다.” “응답을 기다려야지!” 나는 예리엘에게 다가갔다. 예리엘은 책상에 연필과 노트를 둔 채 뭔가를 풀고 있었다.
“뭐하고 있었지.” “······이번 호 ‘위자드 아카데믹’.” ‘위자드 아카데믹’은 마법학술지다. 사실 ‘마법 문제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닌데, 저들끼리 마법 문제를 내면서 서로 즐기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 해결 과정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는 경우도 있기에 아예 헛짓거리는 아니라 한다. 무엇보다 ‘밀레니엄’이라 하여 과거의 대마법사들이 낸 마법문제도 기록되어 있으니.
나는 여태 풀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었다.
“보자. 뭘 풀고 있었지.” “······.” 예리엘은 말 없이 아카데믹을 주었다. 나는 「이해력」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참고로 해답이 있는 문제에 「이해력」 은 큰 위력을 발휘한다. 또한 그 분야가 한정적일수록, 응용이 아닌 직선적인 문제일수록 마력 소모도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 하나에 2,000 의 마력이 소모되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답안란에 마법의 해답을 적었다.
그때였다.
[ 미니 퀘스트 : 학술 문제 해결 ] ◆ 마력 +2 “······음?” “왜.” 예리엘이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별 일 아니다.” 마력이 ‘2’이나 올랐다.
별 일이 맞았지만, 나는 별 말없이 학술지를 돌려주었다. 받아 든 예리엘은 그 답안란에 정답이 적힌 것을 보자 눈을 부릅떴다.
“아! 이걸 적어놓으면 어떻게 해!” “오늘은 피곤하니 이만 자겠다.” “뭐? 야! 아니 두 시간 동안 풀고 있던 건데─!” “네가 두 시간 동안 풀지 못한 것을 나는 1 분만에 풀었구나.” “아 어쩌라고! 자랑하냐!” 나는 피식 웃고 집무실에서 나왔다. 와 나 진짜-! 왜 저래 미친-! 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지금 나에게는 고작 ‘2’의 마력도 너무나도 소중하니까······.
「마력 : 1,419 / 3,419 (+800)」 「마력 등급 : 5 」 * * * 유렌 공국은 명칭 상 공국(公國)이지만, 그 어떤 왕이나 황제의 간섭을 받지는 않는다.
유렌 공국 자체가 ‘이미 소멸한 왕국’의 공작위를 계승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남서로는 바다와 맞닿고, 북동으로는 산맥을 천험으로 삼는 그 지리조건 덕분에 공국은 독자적인 문화를 일구었다. 상업을 중요시 여겨 은행이 발달했고, 문학과 미술과 음악 등의 예술가를 양성하는 아카데미 ‘아트란’은 공국만의 독특한 산물이었다.
그러한 공국의 군주, 즉 대공(大公)이 머무는 ‘루칸젤 성’의 늦은 밤.
대공의 아우이자 내무장관인 ‘기란드’는 집무실로 샤를로트를 불러들였다.
“예, 장관님. 무슨 일이십니까.” “······마호는 어떤가?” 그렇게 묻는 기란드의 안색은 진중했다.
“방금 막 침소에 드셨습니다.” 샤를로트는 다소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기란드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앉게. 내 자네에게 할 말이 있으니.” 곤란한 듯 눈썹을 들썩거리며 의자를 가리켰다.
샤를로트는 내심 불안한 마음이 되어 자리에 앉았다.
"어떤 말씀이십니까?" 설마, 공국에서도 마호를 받지 않으려는 심산인가.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되물었다.
“너무 놀라지 말게.”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기란드가 내뱉은 말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종류였다.
“대공께서는, 마호가 본인의 뒤를 잇길 바라네.” “······예?” 샤를로트는 입을 헤벌렸다. 눈을 깜빡거리지도 못하고 기란드를 바라보았다.
워낙 피곤했던 탓에 이 상황 자체가 꿈인가 생각되었다.
“그게 무슨······?
“대공은 마호가 서한을 보내기 전부터 이런 마음을 가진 듯해. 아무래도, 손자가 영 미더우니 말이야.” “무, 아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곧······ 공주님이 차기 대공위를 계승하실 수 있다는······?” “그렇지.” 기란드가 쓰게 웃었다. 샤를로트는 기겁하여 되물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당연히 가능한 일이지. 마호는 대공의 직계 비속이야. 그것도 3 년 전에, 계승 서열 2 위가 되었지.” “하지만, 공주님은 왕관의 무게를 견디시지 못할 겁니다.” 샤를로트의 그 말에 기란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도 조금은 순진한 면이 있군.” “예?” “아무튼, 아직은 극비일세. 이 사실은 대공과 나, 그리고 자네만 알고 있어.” “아, 예. 그것은 당연합니다만······.” 샤를로트는 두통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오를듯 말듯 아른거렸다.
“왜 그러나?” 기란드가 되물었다.
그 찰나, 뇌리에서 스파크가 번뜩였다.
“······아!” “!” 난데 없는 외침에 기란드가 움찔 떨었다.
“설마.” 그녀는 데큘레인을 떠올렸다.
데큘레인은 마호가 유렌으로 가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이 협력을 ‘거래’라 말했다.
그 당시에는 레오크에 대한 원한을 믿고 받아들였지만, 사실 ‘거래’라는 표현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애당초 거래는 상호호혜를 전제로 성립되는 것.
그러나 왕국에게 버려진 공주인 마호는 그에게 그 무엇도 줄 수 없었다.
“왜 그러나.” 기란드가 말했다. 샤를로트의 내적 변화가 무척 궁금스러운 눈치였다 어느새 진지해진 샤를로트가 되물었다.
“장관님.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정녕 없습니까?” “당연히 없다. 대공도 오늘에서야 내게 말으니.” 샤를로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데큘레인이 했던 말이 귓속에 재생되었다.
─나는 무던히도 정치적인 사람이다. 또한 지능이든 통찰이든, 어느 무엇이든 너보다는 훨씬 뛰어날 테지.
그렇다면.
그는 이 모든 정세를 고려하고, 즉 대공과 마호의 관계를 추측하고, 왕국과 공국의 역학과 알력을 계산하고, 끝끝내 ‘마호가 공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결론을 예측함으로써 이런 거래를 행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괴물같은 놈.” 그 생각의 깊이는 도대체 어느정도인가. 사고와 지략은 과연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한 것인가······.
“뭐라. 내가 괴물이라고?” 샤를로트는 흠칫 정신을 차렸다. 기란드가 모로 좁힌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뇨, 아닙니다.” “마음 속 소리가 튀어나왔구만 그래. 미안하다. 마호를 살려낼 외교적인 노력은 하지도 않았으면서, 막상 도착하니 이런 무거운 문제부터 말하니 참 괴물처럼 끔찍하다 이말이구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됐다.” “아니─” “가보게.” “아닙니다. 제 말을 좀 들어 보십시오······.” 조별과제. (1) ······커다란 달이 엷은 안개를 흩뿌리고, 그 곁으로 별무리가 총총하게 떠오른 유렌 공국의 밤.
마호는 새우처럼 침대에 누운 채 골몰했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하여, 아니 오늘까지 이르렀던 자신의 삶에 대하여.
“살아남았네요, 언니 오빠, 당신들보다 더 오래······.” 마호는 어렸을 적부터 삶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레오크 왕실은 언제나 칼바람이 휘몰아치던 살얼음판. 국왕의 모든 아들딸에게 야망이 그득했고, 국왕은 그들의 재앙스러운 성품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겼다.
파국은 불보듯 뻔했다.
마호는 살기 위해 도피를 선택했다. 왕국을 벗어나 제도에 머물렀다.
죽음이라는 결말을 바꾸기 위해 돈을 모았고, 기사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을만한 행위를 간절하게 보였으며, 결국에는 살아남았다.
삶을 원했기에 살아남았다.
“그런데, 연기라니요······.” 연기는 이제 그만두라던 데큘레인의 그 말.
마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물론, 그들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게끔 의도한 것은 맞다. 무릇 인간이라면, 우물로 기어 들어가는 아이를 구하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으니.
아이인 척 연기한 것은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마호 본인이 느낀 감사와 고마움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샤를로트에게, 론에게, 게더에게, 또 오늘의 데큘레인에게 터럭만큼의 거짓도 없이 감사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렇지만, 궁금했다.
제국의 그 어느 누구도 그처럼 자신을 파악하지 못했다. 깊이 궤뚫어보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을 다만 왕국의 볼모로 제도에 사로잡힌, 불쌍하고 무가치한 왕족이라 여길 뿐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데큘레인 교수는 자신을 통찰했다. 내밀한 행동 원리를 파악했고, ‘연기’라는 알맞은 단어를 골랐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 제국마탑의 수석교수라는 것일까.
“신기해요, 신기해요.” 나름 십수년동안 이어온 가면이었는데, 한 순간에 들켜버렸다. 마치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휴우우······.” 마호는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는 귀퉁이에 놓인 종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는 편지.
교수님에게 그 정도는 보내도 괜찮겠지, 따위의 마음으로 연필을 쥐었다.
* * * 하데카인의 이른 오전.
가네샤는 세 아이와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와구와구- 와구와구- 방금 막 18 시간의 훈련이 끝났기에, 레오와 칼로스는 물론, 언제나 어른스러웠던 리아도 체통(?)을 잃고 음식에 열중했다. 굶주린 들짐승처럼 이것저것 손으로 집어 먹는 모습이 귀여웠다.
“푸우아······.” “다 먹었니?” “네. 아, 이제 살겠다······.” 리아는 무슨 어른처럼 한숨을 내쉬며 배를 만지작거렸다. 레오와 칼로스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가네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꽤 어려운 훈련이었단다? 그런데도 이 정도면, 당장 올해 모험가 시험을 봐도 되겠어.” “정말?!” 레오가 눈을 부릅떴다. 리아도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올해요?” “그럼~ 모험가는 나이 제한이 없어서 빨리 취득할 수록 좋거든. 모험가 시험은, 아마 이대로 성장하면 어렵지도 않을 거야.” 모험가 길드는 오직 능력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다섯 살이든 여덟 살이든 여든 살이든, 본인에게 시험을 치를 의지가 있고, 통과할만한 재능과 기량이 있다면, 누구에게든 ‘모험가 자격’을 내어준다.
오히려 자격을 취득한 이후부터가 중요하다.
모험가는 ‘전문 분야’를 설정하여 해당 방면에 매진할 수도 있고, ‘임무’에 치중하여 돈벌이에 집중할 수도 있다. 다만 무엇이든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적과 특색이 없는 모험가는, 3 년 주기로 총 세 번 행해지는 ‘연장 심사’를 통과하지 못할 테니.
“다 먹었으면 이제 갈까?” “응!” “네에~” 네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로스와 레오는 식당을 나오면서도 누가 더 빨리 먹었니, 더 많이 먹었니 투닥거렸고, 리아가 그 두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그들은 [ 하데카인 역 ]에 섰다.
“와······. 다 마법사들 뿐이야.” 레오가 감탄했다.
역에는 로브 차림 뿐이었다. MT 를 마치고 돌아가는 마탑의 데뷰탄들이었다.
“음?” 문득, 가네샤는 그 인파에 섞인 어떤 남자를 발견했다.
저 혼자 이기적인 길쭉한 장신과 보석처럼 찬란한 외모. 아주 작은 빈틈도 허락되지 않은 품위의 정장.
수석교수 데큘레인.
“얘들아, 이리오렴.” 가네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들을 제 등 뒤에 숨겼다.
그런데, 자꾸만 리아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 꽃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이 데큘레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리아?” “응? 왜요 가네샤?” “······아니야.” 가네샤는 피식 웃었다.
역시 저 얼굴에는 아이든 어른이든 다 속아버리는구나.
하긴, 저만큼 차가운 외모에 얹어지는 그 특유의 귀족적인 분위기는 대륙에서도 독보적이니.
세상에 미남은 많고 많지만, 데큘레인처럼 유니크한 개성은 몹시 드물다는 것이다. 전세계를 유랑한 모험가의 결론이니 믿어도 좋다.
그때였다.
가만히 서있던 데큘레인이 시선을 비틀었다. 그 방향은 곧장 자신이었다.
난데 없이 눈을 마주하게 된 가네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조금 더 내렸다. 가네샤는 영리하게 몸을 움직여 리아를 가렸다. 다만 리아가 먼저 얼굴을 삐죽였고, 오른쪽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턱-!
누군가가 가네샤의 등을 밀었다. 가네샤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웬 여자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술에서 덜 깬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가네샤는 그리 말하고 다시 앞을 보았으나, 데큘레인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저 혹시, 가네샤 모험가님 아니신가요?” 방금 부딪혔던 마법사가 물었다. 가네샤는 그녀를 스윽 훑어보았다.
그것만으로 재능의 일부를 판별할 수 있었다.
아주 괜찮은 기운이었다.
“네. 맞아요.” “아, 그렇죠? 저는, 그, 팬이에요. 가네샤 님이 쓴 책도 읽었어요.”“아 그래요? 고마워요.” “네, 그래서 그런데 혹시······ 사인,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이름이?” “이프린 루나라고, 마탑 데뷰탄입-.” “이프린 루나?” 돌연 리아가 끼어들었다.
리아는 크게 치뜬 눈으로 이프린을 바라보았다. 펜을 찾던 이프린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되물었다.
“으응. 날 아니?” “몰라요. 근데, 전 리아예요.” 리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프린은 얼떨결에 그 악수를 받아주었다.
“어, 응, 반가워.” “저는 가네샤 스승님 제자예요.” 가네샤는 그런 리아의 반응이 신기했다.
이렇게 먼저 말을 거는 아이가 아닌데. 다도해에는 마법사가 없어서 그런가?
“정말? 부럽네~ 어려 보이는데, 대단해.” “보기 만큼 어리지는 않아요. 참, 그리고 이 둘은 레오랑 칼로스예요.” “반가워 마법사 누나!” “응? 아, 응. 그래그래. 반가워. 그런데······.” “저는 칼로스라고 합니다.” “······응? 아, 으응. 그래······.” 마법사가 신기한 레오와 칼로스는 이프린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었고, 덕분에 이프린은 기차가 출발할때까지 가네샤의 사인을 받지 못했다.
* * * 나는 제도의 대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루틴부터 재개했다.
「초급 염동」 의 숙련도 수치를 「99%」까지 끌어 올렸고, 육체를 단련했다.
여기까지는 똑같은 일과였지만······ 나는 의자에 앉아 ‘위자드 아카데믹’을 펼쳤다.
다수의 마법 문제가 적힌 페이지를 노려보며 고심했다.
어느 문제를 고를까.
어떤 문제가 가장 많은 마력을 줄까.
대강 훑어보던 중 ‘밀레니엄(Millennium)’란이 눈에 띄었다.
“밀레니엄이라······.” 마법계에는 밀레니엄이라는 7개 난제가 있다.
현대의 7대 수학 난제가 그 모티브인데, 고작 4 천 언저리의 마력으로는 문제를 이해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터.
나는 밀레니엄 아랫단계로 눈을 돌렸다. ‘심포지엄(Symposium)’이라는 급간의 문제였다.
「 ······심포지엄에 도전하여 마법사로서의 명예를 쟁취하세요. 상금 뿐만 아니라,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서두르세요! 이미 부유섬의 수많은 마법사들이 문제를 풀고 있답니다. 」 심포지엄은 총 11 문항이지만, 매년 1~2 개의 문제가 풀리고, 풀린 문제의 공백은 새로운 문제로 채워지는 방식이다.
나름 인지도가 상당한 문제들이니, 해결한다면 다량의 마력을 기대할 수 있을 터.
도전할 만하다.
나는 심포지엄의 열 한 문제 중 6번 문제를 보았다.
[ 6. 어떤 고대 비문(碑文)에는 다음의 술식과 더불어 룬(Rune)이 새겨져 있다. 과거에는 룬어가 회로의 역할도 겸했다 하는데, 이 고대의 술식을 유추하시오. ] 고대의 비문.
처음에는 그저 바라보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심장이 크게 뛰었다.
갑작스레 떠오른 ‘어떤 생각’이 나를 흥분시켰다.
······나는, 이 룬어를 알고 있다.
게임 디자이너로서, 이 룬어의 폰트를 다듬은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룬어라는 문자가 품은 각각의 뜻도, 그 구조도 언뜻 들어 알고 있다.
물론 그 기억은 꽤 오래 전이지만, 「이해력」은 내 머릿속의 아주 작은 편린도 선명히 되살려낸다.
나는 특성의 눈으로 고대의 비문을 노려보았다.
뒷목에 송곳이 찔리는 통증이 일었다. 룬어는 인두로 지지듯 내 망막에 달라붙었다.
비문의 룬이 머릿속 기억과 융화되며 어떤 술식을 이루었다.
나는 펜을 쥐었다. 염동으로 종이를 꺼냈다.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펜도 제멋대로 움직였다.
내 개인의 생각은 없었다.
그저 모든 자아가 문제에 쏠렸다. 특성이 육신을 집어삼킨 듯했다.
문자 그대로의 무아지경(無我之境).
종이에, 나도 모를 술식이 가득히 기록되어 간다.
룬어가 새겨지고, 그 위에 마력이 깃든다.
마력의 소모는 예상만큼 극심하지 않다.
애당초 이 룬어는 내가 ‘이미 아는 것’이므로······.
······그렇게 열중하며, 얼마 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리니 책상 위에 종이가 가득했다. 다만 어질러지지는 않았다. 수십 페이지가 책상 구석에 정갈하게 쌓여 있었다.
마력은 어느새 고갈 직전이었다.
“······.” 나는 관자놀이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서야, 두 시간이 흘렀음을 알았다.
체감으로는 고작 3 분이었다.
“2 주면 풀 수 있겠군.” 잠깐 동안, 아인슈타인이 된 기분이었다.
* 토요일 정오, 나는 마탑에 출근했다.
한데 탑내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오가다 만난 교수들 사이에서도 미묘한 기류가 맴돌았다.
“알렌. 오너라.” 나는 수정구슬로 알렌을 불렀다. 알렌은 10 초도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네. 왔습니다!” “요즘 무슨 일이 있나? 뭔가 어수선하다만.” “아, 황실에서 공표를 해서 그런 것같습니다.” “공표?”“네. 황제 폐하님의 교습을 도울 기사, 마법사, 학자를 구한다는 공표였습니다.” 나는 단번에 이해했다.
황제 교습은 제국의 전통. ‘황제 즉위 후 1 년 동안은 외부 인력에게 세상을 배운다’는, 예로부터 계승되어 내려오는 불문율이다.
아무렴 교수라면 그 자리를 탐내지 않을 수 없겠지.
“교수님이 가장 유력한 후보라네요!” “내가 말이냐.” “아닌······ 가요?” 알렌이 흠칫 놀라 되물었다.
“신경 쓰지 않는다. 굳이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수업 준비가 먼저다, 알렌.” “아, 네, 네에. 역시 교수님이십니다.” “요 근래에 발생한 마력 재해의 기록을 찾아오도록. 영상으로 남았으면 좋다.” 오늘은 토요일이고, 다음 주 수요일 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 강의 준비와 심포지엄 풀이를 번갈아서 할 생각이다.
“마력 재해라면······.” “아무 것이나 괜찮다. ” 마력 재해는 현대의 쓰나미나 태풍과도 비슷한 현상이다. 그 원인이 ‘자연의 마력’일 뿐.
“네!” 밖으로 나간 알렌은, 10 분 만에 바구니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바구니에는 여러 개의 수정 구슬이 담겨 있었다.
“여깄습니다!” “수고했다.” 나는 구슬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그 즉시, 휘이이이잉───! 마력 폭풍이 휘몰아쳤다.
물론 환상이었다.
“앗!” 알렌은 몸을 웅크리고 파르르 떨었지만, 나는 치뜬 눈으로 현상을 주시했다.
폭풍 속에서 번뜩이는 전기. 바람의 결에서 분사(噴射)되는 화염. 특정한 형상을 이루며 퍼지는 물줄기.
그 전부가 ‘순수 원소’였다.
다른 말로, 노다지였다.
“······아름답군.” “네에?” 이번 수업은 마법 폭죽에서 영감을 얻었다.
하늘에 수놓아지는 마법의 폭죽처럼, 이 마력 재해도 결국 마법적인 술식으로 표현할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런 마음이었다.
다음 주 수요일부터는, 수강생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 * * 싱그러운 5 월.
실비아는 교정을 거닐었다. 여름의 나무와 꽃이 활기차게 피어올랐고, 대학의 풍경은 붓으로 그린 듯 선명했다.
오늘은 수요일.마탑으로 걷는 다리가 저도 모르게 총총총 움직였다.
꽤 오랜만의 수업이었다. 중간 고사가 끝나자마자 황제 서거, 계승식 등등이 겹친 터라 약 4 주 동안 강의가 없었으니.
실비아는 마탑에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3 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A Class 강의실의 문을 열었다.
“실비아 씨. 반갑습니다.”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귀족들은 반갑게 아는 체를 했고, 평민들은 감히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실비아는 또각또각 걸어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이프린이 들어왔다.
“이피~ 여기야 여기~” “아, 응.” 실비아는 눈을 좁히고 이프린을 노려보았다. MT 에서의 그 건방진 언행을 보았던 터라 영 고까웠다.
너처럼 멍청한 애가, 데큘레인 교수의 휘하에 지원?
웃기지도 않는다.
말귀도 못 알아먹다가 하루에도 수십번씩 털리고 울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텐데, 차라리 렐린이나 시아레 밑에서 배우지 그래.
······그러다 보니 시간이 되었다.
데큘레인 교수는 어김 없이 오후 3 시 정각에 등장했다. 조교수와 함께였다.
“반갑다.” 그의 첫인사도 변함이 없었다. 실비아는 노트와 펜을 정갈하게 정돈했다.
“우선, 시험과 과제의 채점 결과를 발표하겠다. 알렌?” “네.” 조교수 알렌이 작고 기다란 성적표를 각자의 자리에 놓아주었다. 마법사들은 긴장하며 기다렸고, 실비아도 내심 마음을 졸였지만, 곧 안도했다.
만점이었다.
“그리고 오늘 강의는 조별 수업이고, 조별 과제가 있다.” “······?” 데큘레인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사실 마탑에는 마법사 간 MT 도 있고, 술자리도 있어서 서로 잘 지낸다지만, 기본적으로 마법사는 ‘개인’이라는 자각이 강하다.
따라서 조별 과제는 몹시 드물 터인데.
“조를 이루는 이유는 간단하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분위기는 불길하게 가라앉았다. 실비아조차 등골이 서늘해졌다.
“오늘 수업의 주제는 ‘순수 원소와 마력 재해’다.” 딱-!
데큘레인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강의실이 암전되며, 어떤 폭풍의 환영이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키이이이이잉─!
칼날처럼 몰아치는 회오리. 화들짝 놀란 마법사들이 몸을 들썩였다.
“세상에는 이따금 마력 재해가 발생하지. 마력 폭풍, 화우(火雨), 흙안래, 서리 지진······ 그러나 생각해라. 그 재해들도 결국에는 순수 원소가 아닌지?” 데큘레인이 말했다. 그간 수업에 충실했던 마법사들은 그 뜻을 이해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마력 폭풍도 술식으로 형상화할 수 있다.” 딱-!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마력의 폭풍이 잦아들었다.
“······보아라.” 데큘레인이 마력을 방사했다. 그의 마력은 강의실 허공에 복잡한 술식을 그렸다.
수십의 원과 수백의 선. 그 전부가 회오리를 이루듯, 용처럼 기다랗게 고개를 뻗었다. 마력 폭풍이라는 ‘현상’이 순수 원소라는 ‘도식’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마력 폭풍도 이렇듯 술식화할 수 있다.” 더 없이 정교하며 웅대한, 데큘레인 본인도 닷새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서 완성한 마력재해의 술식.
그 교본을 보며 마법사들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마력 재해는 분명한 순수 원소의 결합이다. 마력이 자연적으로 뭉치고 잇닿고 연계하여 발생하는 확률의 산물이지. 나는 너희들은 그 핵심을 파악하길 원한다.” 그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했다.
“굳이 이 술식처럼 거대할 필요는 없어. 바라지도 않지. 아주 작은 마력 재해라도, 그 전부를 술식으로 치환할 수 있다면, 그게 가능함을 깨닫는다면 충분하다.” 아주 작은 깨달음.
데큘레인의 그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어려울 듯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지만.
그 술식의 장엄함은 마법사들을 끌어당기는 어떤 매력으로 가득했다.
“너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다. 이 마력적인 재해를 술식으로 이해하면, 세상을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믿어라.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마법이 곧 순수 원소다.” 말을 마친 데큘레인은 고전적인 제비 뽑기를 준비했다.
총 다섯 명이 한 조였고, 서른 조를 이룰 수 있었다.
“각자 나와서 제비를 뽑도록. 조가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150 명이 차례로 일어나 제비를 뽑았다.
귀족과 평민의 조합도 있었고, 평민과 평민의 조합도 있었다.
······그렇게 약 5 분 뒤.
마법사들은 각각 조끼리 뭉쳤다. 나름 분열이나 분란이 없게끔 잘 짜여진 듯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조만 제외하고.
“······.” “······.” 어떤 자리에는 침묵이 가득했다. 다섯 사람이 모였지만, 두 사람 탓에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실비아와 이프린.
그 둘이 한 팀이 되었다.
조별과제. (2) 나는 같은 자리의 이프린과 실비아를 보았다. 우연찮게 한 조가 된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실비아가 중얼거렸다.
“건방진 이프린.” “······뭐?” 흥미로운 광경이었지만, 신경을 끄고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아직 강의는 두 시간이나 남았다.
“이제 수정구슬을 분배하겠다. 알렌?” “네.” 알렌은 수정 구슬이 담긴 비단 주머니를 교탁에 올렸다. 나는 그 구슬들을 염동으로 띄워 각 조에게 지급했다.
마력 재해의 난이도는 구슬마다 다르다. 어려운 것도 있고, 비교적 쉬운 것도 있다.
그 분배 기준은 ‘조원들의 중간고사 성적 총합’.
자연스럽게, 실비아와 이프린 팀이 가장 어려운 구슬을 가지게 되었다.
마법사들은 구슬을 두고 도란도란 떠들었다.
“집중.” 그 말 한마디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되었다. 데뷰탄 150 명이 시선을 집중했다.
“지금부터는 너희가 세상을 보는 행위, 즉 ‘관측’에 대해 말하마.” 나는 그들의 눈을 보며 말했다. 목소리에 무의식적인 권위가 묻어났다.
“너희는 아마 세상을 그저 현상으로만 여길 것이다.” 과학자가 세상을 과학적으로 본다면, 마법사도 세상을 마법적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숙성과 숙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고작 공대 학부생이 세상을 과학적으로 볼 수는 없다. 능력도 부족하지만, 무엇보다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최소한 박사 이상은 되어야 언뜻 이해라도 가능한 이야기다.
마법사 또한 마찬가지다.
그간 데뷰탄들을 보며 짐작해보건데, 저들은 세상의 현상을 마법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보는 세상과 너희가 보는 세상은 다르다.”이는 거짓이 아니다. 자랑이나 허세도 아니다.
나에게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추상, 현상, 관념, 개념 등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힘─ 「육안」.
그 특성은 내 마법적인 지식이 쌓여감에 따라 걸맞게 진보하고 있다.
“지금부터, 내가 보는 세상을 너희에게 전달할 것이다.” 「육안」으로 행하는 관측은 일견 설명이 불가능하리라 착각하기 쉽지만, 전혀 아니다.
저들은 제국 최고 대학마탑의 데뷰탄이며,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엘리트 마법사다.
따라서 가르치는 방법도 사뭇 간단하다.
“내가 하는 말 한마디, 내가 그리는 술식 단 한 줄도 놓치지 마라. ” 내가 「육안」으로 세상을 보는 과정을 그대로 표현하면, 저들은 그 과정을 교본 삼아 스스로 공부할 터.
「육안」의 풍경을 바라보고 직접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효과는 이미 알렌에게 실험하여 증명되었다.
“시작하지.” 나는 첫 번째로, 작은 수정구슬에 담긴 마력 재해를 재현했다. ‘서리 안개’였다.
“서리 안개. 이 재해는 나에게 이렇게 보인다.” 안개는 곧 선과 원으로 치환되었다. 나는 그 과정을 느리고 선명하게 구현했다.
마법사들은 눈으로 보며 손으로 필기했다.
“불바다. 바다에서 배와 선원을 불태워 죽이는 이 마력 재해는 조금 특이하지. 바다 그 자체가 불길로 돌변한 것이기에 진화가 거의 불가능······.” 나는 여러 마력 현상을 ‘내가 보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육안」이 관측하는 세계을 그들에게 전달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하나, 둘, 셋, 넷······.
총 여덟 번을 시연한 뒤 시계를 보았다.
5 시 59 분 50 초.
“······오늘 내가 너희에게 보여준 세상을 잊지말아라.” 나는 소맷자락을 다듬었다. 정장에 잡힌 주름을 바로잡았다.
“평범한 사람은 그저 스쳐지날 모든 현상을, 마법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 마법사들의 시선은 멍했다. 그들의 노트는 술식으로 가득했다.
“그 마음가짐부터가 시작이다.” 6 시 정각.
“단, 욕심은 금물이다. 분수에 맞게 작은 것부터 체득하도록. ” 그 순간 수업은 끝났다.
나는 그들을 뒤로한 채 강의실을 나섰다.
“수고했다.” 마법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난 뒤.
이프린은 멍하니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페이지마다 온갖 기하학적인 무늬가 가득했다. 데큘레인이 보여준 ‘마력 재해 치환 과정’을 모조리 기록한 것이었다.
“아······ . 그러니까 이거 때문에 안개가 흙처럼 되는 거구나······ 아 머리 부숴질 것같아······ .” 어렵다. 너무 어렵다. 미칠 듯이 어렵지만, 할만하다.
처음에는 정녕 답이 없었는데, 서서히 감이 잡히고 있었다.
이프린은 데큘레인이 보여주었던 그 과정을 그대로 따라했다. 손아귀에 아주 작은 흙안개가 몽실몽실 떠올랐다.
이거다.
그래, 이거다.
이게 바로 흙안개라는 거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수업 같네요.” 같은 조원인 유로잔의 말이었다. 이프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니까요. 머리 아파 죽겠어요.” “교수님은 진짜 대단하시네요. 어떻게 저걸 다······.” “······그러게요.” 데큘레인은 마력 재해를 술식화하는 과정을 아주 자세히 서술해주었다. 그 물흐르는 듯한 부드러움에 이프린은 경탄했고, 동시에 어느 정도는 의심했다.
“저게, 진짜 데큘레인의 실력이라면요.” 오늘 데큘레인이 선보인 기량은 대단했다.
그러나, 이프린만큼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제 아버지를 대신할 ‘새로운 노예’를 구했을 가능성에 대하여.
물론 굳이 폭로나 의혹 제기를 할 생각은 없다.
먼 훗날이든, 가까운 미래든, 언젠가는 나 스스로 그 의심을 파헤칠 것이니.
“건방진 이프린.” 실비아가 이프린을 노려보며 뇌까렸다. 이프린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뭐래니. 아무튼, 조별과제 하려면 언제 한 번 모여야 할 것 같은데, 언제가 좋을까?” “······.” “······.” “······.”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이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비아 네 저택으로.” “누구 마음대로.” “네 집이 제일 넓잖니. 우리 다섯 명이 가려면 거기 밖에 없어.” “그래. 대신 너는 오지마.” “······유치하게 자꾸 그럴래?” * * * 한편, 유크라인의 영지는 ‘마릭 개방’에 대한 방비 작업이 한창이었다.
“진행 상황은?” 북서의 광산 지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지. 예리엘은 말에 오른 채 물었다. 데큘레인이 좋은 말이라며 추천한 적토마였다.
“장벽, 망루, 진지 전부 완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하로(地下路)는 아직 공사중이지만, 올 여름까지는 완성될 듯합니다” “좋다.” 예리엘은 자못 근엄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일대를 휘둘러보았다.
문득, 데큘레인의 편지 내용이 떠올랐다.
······마릭이 개방되면 우선 마수가 들끓을 것이다. 병력 배치를 효율적으로 해야 하니, 장벽과 망루와 진지를 북서의 요지에 건축해라. 장소는 내가 집어주마.
또한, 마릭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지상보다 지하에 내는 것이 좋다. 이를 지하도로라 하여 통행료를 받는다면 금세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여기에 진지를 지으면 다 보이기는 하네.” “예. 명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리를 판별하는 눈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예리엘 님.” 예리엘의 혼잣말에 책임자가 대답했다. 예리엘은 그를 흘겨보고는 품 속에서 편지를 꺼냈다.
총 네 장으로 이루어진 편지의 두 번째 장을 보았다.
······혹시라도 마릭 건으로 황실이나 관료들에게 뇌물을 보낼 생각은 하지도 말거라. 황제는 신하의 말을 무시하고 마릭을 개방했다. 그러니 신하의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오직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또한, 황제의 환심을 사려하지 마라. 황제는 거짓과 아첨을 극히 혐오한다.
다만 술을 좋아하니, 진상품을 보낼 것이라면 극상의 와인이면 충분하다.
“무슨 점쟁이냐······.” 마침 가신들이 뇌물을 고려하고 있는데, 어떻게 안 거야?
그때였다. 예리엘의 코에 차가운 결정이 내려앉았다. 예리엘은 눈을 크게 뜨고 보았다.
눈이었다.
“으응?” 갸웃거리며 손을 쫙 펼쳤다. 장갑 낀 손바닥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 크게 놀란 예리엘은 다급히 세 번째 편지를 펼쳤다.
······이따금 이상기후가 발생할 것이다. 당황할 필요는 없지만, 악마의 징후일 수도 있으니 한여름에 눈이 내릴 경우에는 방비를 특히 단단히 하도록.
“뭐 어떻게 된 건지······.” 예리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천재인 척 하는 줄 알았더니, 진짜 천재였어?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데큘레인이 어떻게 천재야.
“······생각해보면, 그때부터였지.” 예리엘은 올해 초를 떠올렸다.
데큘레인의 변화는 과거 일주일 간의 공백, 그 순간부터였다.
언제나 규칙적인 그가 모든 일정을 캔슬한 채 칩거했었던 일주일.
처음에는 율리에게 차인 것으로 생각했지만······ 다른 큰 일이 있었던 것일까.
“뭐, 굳이 알 필요 있나.” 뭐가 어떻든 데큘레인은 다시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동이라 불리던 그 시절 말이다.
나쁘기만 한 변화는 아니니,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다.
예리엘은 편지를 집어넣고 크게 소리쳤다.
“주목-!” 그 고운 외침에 진지의 모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상기후는 악마 출현의 징후일 수도 있으니, 태세를 강화하라! 사주경계를 단단히 하고 단독행동은 금하도록!” 예──!
명령에 답하는 병사들의 함성이 산맥을 울렸다.
“대답이 좋다. 나는 이만 가보마.” 예리엘은 자신의 근엄한 모습에 다분히 만족했고, 군왕처럼 고개를 주억이며 고삐를 쥐었다.
적토마는 눈이 내리는 산길도 쉽게 쉽게 걸었다.
* * * 이튿날, 오전 8 시.
아침 일과를 마친 나는 서재의 의자에 앉아 문서를 들었다.
[ 헤일레치 유크라인 경매 : 루초의 가위, 어둠바닥카펫, 고대의 안장······ ] 감정점을 인수하고 처음으로 여는 경매다.
판매 목록은 잠재력이 개화된 「루초의 가위」, 「어둠바닥카펫」 외 3 개. 척 보기에도 그 성능이 좋으니, 6 천만∼1 억 사이의 순수익을 기대하고 있다.
똑똑- 시간이 되었습니다- 때마침 집사가 노크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고, 집사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총 23 군데인가?” 집사에게 물었다.
오늘은 내가 직접 매듭지어야 할 외부 사업이 많았다. 정확히는, 돈벌이였다.
“예 그렇습니다.” “좋다. 함께 가지.” “예.”나는 준비된 차에 올랐다. 자동차는 곧장 제도의 도심으로 출발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철물점 ‘록칸의 부두’였다.
“아, 오셨슴까! 기디라고 있었슴다!” 주인장은 철물점을 운영하면서 이것저것을 발명하고 있었는데, 그 솜씨가 「 대부호 재력가」의 눈에 띄었다.
나는 그에게 투자증서를 작성했다. 총액 300 만 엘네. 그 대가로 30%의 지분을 얻었다.
“감사합니다요! 실망시키지 않겠슴다!” “기대하지.” 다음은 호텔 ‘로망스’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낡은 호텔이었으나, 이번에 새로이 인수한 주인이 투자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도 투자증서를 작성했다.
총액 400 만 엘네. 그 대가로 40%의 지분.
“흐으으윽······.” “울면 취소다.” “······흑!” 주인은 감동의 눈물을 멈췄다.
“리모델링이나 열심히 하도록. 유크라인의 이름을 대면 쉽게 자재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다음은 상점, 무역회사, 대장간, 용병단 등등······ 제도 전역을 「 대부호 재력가」의 눈으로 엄선하여 고르고 고른 23 군데의 업체.
그들에게 도합 8 천만 엘네를 투자했다. 차후 1 억 2 천까지 늘어나는 출자였다.
“수고했다, 로이. 이제 돌아가지.” “예.” 어느덧 석양이 질 무렵이 되어,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서서히 바스러지는 여명을 바라보며 나는 야트막한 숨을 내쉬었다.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오늘 투자한 현금은 곧 어마어마한 인적·물적 자산으로 불어나겠지······.
“아니?!” 그때 조수석의 로이가 눈을 크게 떴다. 나도 그쪽을 보았다.
웬 화려한 휘장과 다수의 사람이 대문에서 얼쩡이고 있었다.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휘장이었다.
“주인님.” 로이의 목소리가 흔치 않게 다급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황실의 사람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 중에는 네임드 기사도 한 명 보였다.
황제 직속 호위 기사 ‘케이론’이었다.
금발의 케이론이 나에게 다가왔다.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황실의 서한이오. 예를 취하며 받도록.” 나는 무릎을 꿇은 채 그 서한을 받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황실은 제국마탑의 수석교수이자 유크라인의 당주 데큘레인에게, 황제 폐하와 마법적인 식견을 나누며 대화하는 영예······ ‘교습 마법사’ 선별 대상에 포함되었음을 알리는 바······ 가문으로서도 마법사로서도 무한한 영광일 터이나, 먼저 궁중 마법사 게오르가 작성한 문제를 해결해야할 것이다. ] “도전할 것이오? 본인의 실력이 부족하다면 포기하여도 황실은 개의치 않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찮긴 하지만, 이런 이벤트를 거절할 수는 없다. 무릇 황실과 관련된 퀘스트에는 어마어마한 보상이 있으니.
“어찌 도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좋소.” 케이론이 마법 종이를 건넸다. B4 용지만한 종이에 술식이 가득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노려보았다.
시간이 흐르며 거의 4 천에 달하는 마력의 소모되었고, 정답은 가까스로 도출되었다.
문제의 논리가 어느 정도 익숙했다.
룬어였다.
나는 답안지에 해답의 술식을 그려 넣었다.
[ 축하한다. 나는 황실의 마법사 게오르다. 이 문제를 해결했다면······. ] 마력을 불어넣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떠나가려던 케이론과 황실의 무리들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케이론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되물었다.
“······벌써 풀, 풀었소?” “예.” “어찌? 게오르 공은 분명-” 답안지의 음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르면 하루 이틀, 늦어도 사흘은 걸렸을 것으로 생각하네만, 어떨지는 모르겠군. 풀었으니 알겠지만 이는 룬어를 활용한 문제일세. ]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제가 요즘 룬어를 연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지요. 운이 좋았군요.” “······.” [ 자랑은 아니지만 너무 어렵지는 않게, 다만 너무 쉽게 풀리지도 않게 꽤나 고심하여······. ] 목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케이론이 다가왔다. 그 얼굴의 미간과 주름이 당황으로 꿀렁거렸다.
“······유크라인 폰 데큘레인, 유크데, 아니.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케이론은 안주머니에서 황실의 인장이 찍힌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황실의 초대장이오. 자네는 시험에 선별되었소.” “감사합니다.” 나는 품위와 격조를 다하여 몸을 숙였다.
* * * ······제국에서도 가장 고고한 터에 건축된 황성은 그 전체가 작은 세계나 다름이 없다. 내성의 공간은 그만큼 마법적이다.
황성에는 언제나 사계절이 함께한다. 황궁을 중심으로 북동은 겨울이고, 북서는 여름이고, 남동은 봄이고, 남서는 가을이다.
따라서 황제는 언제나 사계절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제국민들은 그 기이한 현상을 ‘신의 축복’이라 부른다.
“그렇단 말이냐? 그럼 굳이 선별 시험을 따로 볼 필요가 있겠느냐? 그냥 데큘레인으로 하지.” 황궁의 내밀한 서재. 온갖 고서와 서책이 가득한 그 드넓은 공간에서, 소피엔은 케이론의 보고를 받았다.
“그래도 조금 더 지켜보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소피엔이 눈썹을 들썩였다.
“뭘 지켜 본다는 게냐. 하루도 아니고, 5 초만에 풀었다면서.” “5 분이었습니다.” “5 초와 5 분이 그리 큰 차이인가?” “······60 배입니다.” 그 소심한 대꾸에 소피엔은 껄껄 웃었다. 케이론은 괜히 창피하여 고개를 숙였다.
“너는, 데큘레인보다는 그 루이나라는 여자가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개인적인 호오(好惡)의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황궁에는 무결한 마법사가 더욱 적합하다는 생각입니다. 데큘레인 교수는 이런저런 소문이 많지요. 루이나도 문제는 빨리 풀었습니다.” “어디, 루이나는 3 분만에 풀었는가?” “······3 시간입니다.” “흥. 10 초와 5 분의 차이보다, 5 분과 3 시간의 차이가 더욱 크다. 또한, 짐에게 소문을 논하지 말라. 나는 내 눈으로 본 것만 믿느니라.” 소피엔은 그리 말하고 게오르의 시험지를 들었다.
“······.” 지이잉- 레이저같은 눈으로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째깍─ 째깍─ 째깍─ 초침이 정확히 300 번 움직인 순간, 소피엔의 어깨가 들썩였다.
“5 분이 지났군. 못 풀었다. 놈이 오면 물어봐야겠어. 어찌 5 분만에 풀었는지.” “······예.” 소피엔은 그 말로써 확정지었다.
황제의 교습 마법사는 데큘레인이 될 것이었다.
“한데, 기사 선별 시험은 아직 진행중인가?” “기사는 꽤 실전적인 시험이기에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길어질 듯합니다.” “정작 그 시험을 준비한 놈이 부상을 당하지 않았느냐?” 이사크 폰 데릭 루게덴.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인 그는 마릭 탐사에 나섰다 부상을 입었다.
아니, 어쩌면 자작극이었다. 이사크는 마릭 개방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니.
“하여 다른 적임자를 구하고 있습니다.” “적임자라····· 아.” 돌연 소피엔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좋은 생각이 났느니라.” 그 좋은 생각이 케이론은 불길했다. 그는 말없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리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잘 들어라. 어차피 선별관은······.” 웃음처럼 이어지는 황제의 제안에 케이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별. (1) “이제 제가 카드 뽑을 게요~”프렌하임 기사단의 휴게실에서는 게임이 한창이었다.
“두구두구두구······ 오! 나 바인딩 소드 뽑았다.” 총원 9명 중에 스펙터 2명, 기사 5명, 마법사 1명, 공작 1명을 선출한 뒤, 기사는 스펙터를 색출하고, 스펙터는 기사를 죽이는 심리·카드 게임.
요즘 유행하는 ‘스펙터 위드 나이트’였다.
“누구 심장에 바인딩 소드를 꽂을까······.” 부하 단원 신디가 원탁을 휘둘러보았다. 율리는 침착하게 가만히 있었다.
사실, 신디가 바인딩 소드를 뽑았을 때부터 심장이 철렁였다.
“단장님?” “왜 그러지.” “스펙터 맞으시죠?” 신디가 율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노골적인 의심이었다.
율리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맞는 것 같은데요. 이거봐. 단장님 거짓말 진짜 못하신다.” “뭐가 말이냐.” “전판에 저희가 표정 변화가 너무 티난다고 하니까, 억지로 아무 표정도 안 짓는 거잖아요.” 율리는 짐짓 삐진 척 볼을 부풀렸다.
“이번에는 억지 표정 짓고 계시네.” “······아니라니까.” “그럼, 저는 ‘바인딩 소드’를 율리 단장님에게 사용하겠습니다.” “후회할텐데. 나는 기사다.” “음······ 그렇게 말하시니 또 고민되네.” 신디는 고민하는 척했다.
율리는 저 고민이 진짜 고민인지 고민했지만, 역시 농락이었다.
“예. 감수하겠습니다.” “······.” 카드 ‘바인딩 소드’에 마력을 불어넣자 빛이 발했다. 파랗고 자그마한 칼이 떠올라 율리 앞에 놓인 카드를 콕 찍었다.
휘이이— 하며 유령이 빠져나왔다.
“이거봐. 단장님은 거짓말을 아예 못하신다니까.” “······어렵구나, 이 게임은.” 한숨을 내쉬는 율리에게 신디가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도, 재밌죠?” 본디 율리는 부하들의 게임에 눈치 없이 끼어드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원들이 같이 하자며 억지로 이끌었다.
그 속깊은 뜻을 알고 있었기에, 율리는 그저 옅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래.” “맞아요~ 가끔 이렇게 쉴 때도 있어야 해요. 단장님 요즘 너무 일만 해요.” “······.” “대신, 단장님이 스펙터 걸리면 그냥 다시 하죠? 단장님 카드 전략은 잘짜시는데 심리전이 영 좋지 않아요.” “······이제부터는 다를 거다.”율리는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게임 자체에는 그닥 재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승부욕에 발동이 걸렸다.
한판 더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음, 벌써 8 시네. 곧 마상 경기 시간인데.” “아 진짜?” “단장님! 그럼 저희는 이만 퇴근할게요. 조금 더 연습하세요~” 부하 기사들은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열 네 명이나 있었던 휴게실이 금세 텅 비어버렸다.
“······.” 혼자 남은 율리는 멀거니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손에 쥔 카드 뭉치를 내팽개쳤다.
촤르르르— 카드가 맥없이 흐트러지던 그때.
우르르르─ 기사들이 다시 돌아왔다.
율리는 신이 나서 카드를 정리했다.
단장을 골려주려고 일부러 도망가는 척한 건가. 괘씸하도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부하 기사들은 율리의 뒤에 기립했고, 곧이어 황실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율리 폰 데이아 프하이르덴.” 율리도 벌떡 일어나 경례부터 했다.
“황실의 서한이다. 예를 취하며 받도록.” “예.” 황실의 기사 루칸. 그의 말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루칸은 그녀에게 서한을 주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율리 폰 데이아 프하이르덴. 자네에게 황제의 교습 기사로서 선별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마. 첫 번째 시험은 목적지인 ‘론 패스트’까지 찾아오는 것이다. ] 요즘 기사계에서 가장 큰 화두. ‘황제 교습 기사’ 후보에 율리가 포함되었음을 알리는 서한이었다.
* * * ······대륙에는 여러 ‘마법적 공간’이 존재한다. 문자 그대로 마법처럼 기묘한 그곳들의 개성은 제각기 다르다.
어떤 곳은 사시사철 겨울이거나 여름이고, 어떤 곳은 항상 밤이며, 어떤 곳은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다.
‘멸지(滅地)’ 또는 ‘마수의 땅’이라 불리는 대륙의 변방도 넓게 보면 이 마법적 공간에 속한다.
율리는 그런 마법적 공간을 걷고 있었다. 계절은 여름이건만 온 사방에 만년설이 가득했다.
한나절이나 이어진 이 고역스러운 행군도 이제는 머지 않았다.
저편에 일렁이는 불빛이 그녀를 이끌었다.
목적지인 커다란 별장이었다.
율리는 그 문 앞에 서서 노크했다.
똑똑- “계십니까.” 반응이 없었다.
똑똑- ─들어오시게.
한 번 더 노크를 하자 안에서 말했다. 율리는 문을 열었다. 내부의 온기가 눈보라의 한기를 밀어냈다.
아늑한 별장의 거실에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시리오, 라펠, 그웬.
전부가 그녀의 대학 시절 선배들이었다.
“오랜만이다 율리?” 일레이드 기사단의 부단장, 시리오가 먼저 방긋 웃었다. 그의 인상과 이목구비는 여전히 시원스러웠다.
“예. 오랜만입니다.” “너일 줄 알았어. 앉아~ 편하게.” 거실에 놓인 5 개의 의자. 율리는 아직 공석인 두 의자 중 한 자리에 앉았다. 나머지 상석은 아마 선별관의 몫이겠지.
시리오가 말했다.
“시험은 어떨지 궁금하네~ 이리 모이니까 왠지 대학시절 그 조별임무같다.
맞지 그웬?” “몰라. 일단 난 안 봐줘. 율리, 너도 마찬가지니까 각오해.” 그웬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기사들을 훑었다.
“예.” 율리는 의연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라펠은 여전히 침묵한 가운데, 시리오가 말을 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아마 선별관 자리일 건데······ 이자크 부단장은 부상을 당했다며? 설마 게프리드 공이 오시려나?” 게프리드. 제국 수호기사의 이름에 율리는 긴장했다.
“흥. 설마.” 그웬이 피식 조소를 지었다.
“게프리드 공은 이제 은퇴야. 애당초, 수호기사는 황궁이 아니라 남부에 머물잖아.” “그렇긴 하지.” 시리오가 어깨를 으쓱인 그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었다. 바깥의 사람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쏴아아아아······.
문 밖에서 눈보라가 밀려들었다.
그는 코트를 입고 있었다. 중절모를 얹어서 그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키가 컸고 체격이 탄탄했다.
왜인지 율리는 그의 분위기가 익숙했다.
그 이유는, 그가 모자를 벗었을 때 알게 되었다.
“!” 율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다른 기사들도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그 황당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태연히 모자와 코트를 ‘허공’에 걸었다.
끼익- 끼익- 그가 걸을 때마다 나무판자가 삐걱거렸다. 그의 신발은 눈자국 따위 없이 청결했다.
“반갑소.” 이윽고, 그가 상석의 선별관 석에 앉았다.
“나는 대행 선별관, 데큘레인이라 하네.” ······적막이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어이가 없었다. 기사들은 우두커니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데큘레인?” 여태 과묵하던 라펠의 묵직한 음색이었다. 데큘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네가 선별관이라고?” “그렇지.” 라펠, 시리오, 그웬, 데큘레인은 서로 같은 해에 기사학과와 마법학과에 입단한 동기 사이였다.
“네가 검을 아나? 아니, 기사의 도리를 아나? 어딜 감히-” 2m 에 달하는 라펠이 벌떡 일어나 데큘레인을 노려보았다. 그 남자다운 이목구비가 제각각으로 일그러졌다.
“물론 나는 기사가 아닌 교수인지라, 메뉴얼에 따라 심사할 것이다.” “메뉴얼? 네가 검술에 대해-” “잘은 모른다. 다만, 폐하의 교습 기사에게 필요한 덕목이 검술만은 아니지.
또한 나는 이미 황궁의 교습 마법사로 선발되었으니 자격은 충분하다.” 시리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네가 선발되었다고? 루이나는? 이번에도 또 물먹였어?” “······루이나.” 데큘레인은 요즘 자주 들리는 그 이름에 대해 생각했다.
데큘레인의 필연적인 라이벌, 루이나 폰 슐로트 멕퀸.
이쯤 되면 모습을 드러낼 만한데, 부유섬 이후로는 영 감감 무소식이다.
“와 신기하네~ 아무튼 데큘레인이 선별관이면, 여기 동기만 네 명이야?” 시리오는 그리 재잘거렸지만, 정작 라펠과 그웬은 불만이 많은 듯했다.
율리는 불만보다는 불편스러웠다.
“근데, 이거 공평한 거 맞아? 누구만 편애하는 거 아니야?” 시리오가 실실 웃으며 그 요점을 짚었다.
데큘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선별은 내가 하지만, 최종 결정은 폐하께서 내릴 테니.” “음. 공평하다는 말은 안하네······ 뭐, 알겠어. 폐하께서 결정하신다니까 할말은 없다.” “됐고. 시험은 언제 시작이냐? ” 그웬이 말했다. 데큘레인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시선이 얽히자 그웬은 흠칫 놀랐다.
“첫 번째 시험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본격적인 시작은 내일부터이니, 오늘은 쉬어라.” * * * [ 독립 퀘스트 완료 : 교습 마법사 선발 ] ◆ 마력 + 100 ◆ 상점 화폐 +2◆ 황실의 훈장 밤 11 시 30 분.
나는 선별관의 방에서 기사들의 정보를 읽고 있다.
[ 시리오 │ 청풍의 기사 │ 33 세 ] [ 라펠 │ 위력의 기사 │ 34 세 ] [ 그웬 │ 성신의 기사 │ 31 세 ] [ 율리 │ 정련의 기사 │ 28 세 ] 인당 10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황실이 내어준 뜻밖의 고급 정보였다.
“······.” 사흘 전 황실은 나에게 ‘기사 선별관 대행’이라는 직함을 맡겼다.
아마 황제의 변덕이었겠지만, 나는 그 선별 기사의 목록을 보자마자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다.
율리 때문이었다.
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원래의 데큘레인이었다면, 율리는 선별조차 되지 않았을 터.” 데큘레인의 뒷공작은 율리를 이 시험 자체에서 배제시켰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럴 시간과 인맥이 부족했다.
챙─! 채앵─!
돌연 검과 마력이 격돌하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굽어보았다.
기사들이 검을 겨루고 있었다.
그웬과 시리오였다.
챙─ 챙─!
나는 그들의 검술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그웬은 「최상급 로델트라자」.
시리오는 「최상급 시리오 쾌검술」.
둘 다 최상급으로 어마어마한 경지이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고유의 검술을 창안한 시리오 쪽이 조금 더 낫다.
─······라펠 공, 한수 부탁드립니다.
─좋다.
이어서 율리와 라펠의 대련도 시작되었다.
쿵─! 파아앙──!
검은 날카롭게 섞이며 불씨를 일으켰다. 라펠의 묵직한 검은 마치 터지는 듯했고, 율리는 어렵잖게 받아쳤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나는 옅은 숨을 내쉬었다.
“······율리.” 황제의 교습기사.
그러나 수호기사와 교습기사는 전혀 다른 자리다. 서로 연관도 없다.
나는 율리가, 그 영광에서 배제되길 바란다.
부디 선별되지 않길 바란다.
애당초 기사를 선별하라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수락한 이유도 그것이다.
황궁의 지하에는 아직 ‘그 괴물’이 있다.
프하이르덴의 심연이며, 몰락의 단초가 될 비밀.
데큘레인의 사망 변수이자, 네가 만나서는 안 되는 그 ‘거울’.
내가, 혹은 다른 누군가가 그 빌어먹을 거울을 부수기 전까지, 나는 네가 황궁에 닿지 않길 바란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탈락시킬 것이다.” * * * 이튿날, 율리는 이른 새벽부터 깨어났다.
“······.” 기지개를 켠 뒤 스트레칭부터 시작했다. 몸을 정돈하고 정신을 맑게하는 요가였다.
유연한 동작으로 육체를 예열한 율리는 곧 밖으로 나왔다. 다른 기사들도 준비를 마친 듯 거실에 앉아 있었다.
“율리, 잘 잤니?” 그웬이 물었다. 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 근데 너 진짜 늘었더라. 방심하면 안 될 것 같아.” “······아닙니다.” 율리는 겸손했지만, 시리오와 그웬은 칭찬을 쏟아부었다. 검에 얼음이 깃들었니, 원소를 활용하는 마검사니 뭐니······.
고수들의 칭찬에 율리가 햄스터처럼 웃음을 참던 그때.
데큘레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 별장의 우측, 따로 분리된 선별관의 방에서 머물고 있었다.
“시험 시작인가요 선별관님~?” 시리오가 밝게 웃으며 물었다. 데큘레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앉았다.
“첫 번째 시험은 관찰력과 끈기를 평가하기 위한 항목이다.” 그리 말하면서 수정구슬에 마력을 불어넣었다.총 네 개의 아이템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 공간 ‘론 패스트’에는 얼음꽃, 라트란, 마결핵, 수정초 등 희귀한 마력의 산물이 많이 있다. 각자 찾아야 할 물건을 정해줄 테니 가지고 오면 된다.” 데큘레인은 각자에게 물건을 정해주었다.
시리오는 ‘라트란’, 그웬은 ‘마결핵’, 라펠은 ‘수정초’, 율리는 ‘얼음꽃’이었다.
“단, 온전한 물건이어야 한다. 조금도 손상이 있으면 안 된다. 또한 나는,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율리는 얼음꽃의 생김새를 눈에 새겼다. 설선고도의 단애절벽에만 자라나는 투명한 꽃. 하루에도 열 송이가 피고 진다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이의가 있다면 지금 말하지. 어느 정도 룰의 수정은 가능하다.” 데큘레인의 그 말에 율리를 포함한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좋다. 전원이 동의하였으니, 지금부터 24 시간이다. 시작.” 7 시 정각.
기사 전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들, 열심히 하자고~ 선의의 경쟁!” 시리오가 격려하듯 말했다.
그들은 별장에서 나오자마자 갈라졌다.
율리는 얼음꽃이 자라나는 고지대로 향했다.
‘론 패스트’는 면적이 상당한 마법적 공간이었기에, 멀지 않은 곳에 경사진 산맥이 있었다.
등산의 시작이었다.
“······하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젯밤 내내 눈보라가 내렸기에 눈이 깊었다. 걸을 때마다 다리가 푹푹 박혔고, 무릎을 튕기듯이 해야만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산을 올라 닿은 단애절벽.
조금 헛디디면 추락할 그 위태로운 경사에서, 얼음꽃을 발견했다. 맑고 투명한 꽃송이였다.
시계를 보니 고작 세 시간이 지난 차였다.
율리는 얼음꽃을 손에 올렸다. 그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끼이이익─ 별장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다.
데큘레인은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율리는 그에게 다가가 얼음꽃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 그는 율리가 내어준 꽃을 말없이 들더니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곳저곳을 살폈다.
율리는 잠자코 기다렸다.
이내 데큘레인이 말했다.
“불량이다.” “······예?” “나는 ‘조금의 손상도 없이 온전한 물건’이어야 한다고 말했지.” 데큘레인은 율리에게 얼음꽃을 돌려주었다. 그 꽃의 잎사귀에 티끌만한 손상이 있었다.
“아, 예. 알겠습니다.” 너무한 기준이었으나, 율리는 별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추위에 얼굴이 시뻘게진 채 산맥의 이곳저곳 넘나들었다.
가장 험악한 정상의 고지대를 뒤적였다 “!” 이윽고, 또 다른 한 송이가 눈에 띄었다. 율리는 후다닥 달려가서 꽃을 살폈다. 어딜 어떻게 보아도 손상된 부분은 없었다.
“좋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 율리는 별장으로 돌아왔다.
데큘레인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불량이다.” 똑같은 말이 돌아왔다.
놀란 율리가 다가가서 보니 확실히 밑면에 생채기가 있었다.
분명 처음 봤을 때에는 없었는데.
갈무리하던 중에 생긴 걸까.
“불량도 있어?” 시리오가 되물었다. 그는 이미 시험을 완수한 듯 밥을 먹고 있었다.
율리도 배가 고팠다. 아닌 게 아니라, 육체능력이 월등한 기사의 유일한 약점은 그 어마어마한 기초 대사량이었으니.
데큘레인이 말했다.
“식사는 목표 완수 이후, 혹은 포기한 이후에 주어진다.” “아, 그래? 미안 율리. 한 입 주려고 했는데.” 시리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습니다. 다시, 다녀오겠습니다.” 율리는 주린 배를 애써 무시한 채 바깥으로 나갔다.
세 번째 등산을 시작했다.
굶주린 탓에 마력 사용의 한계가 있었고, 그녀는 갑옷의 힘으로 한기를 견뎌냈다 “하아, 하아······.” 거의 6 시간 동안 일대를 돌아다녔다. 설상가상으로 다시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온몸에 눈이 달라붙었고, 머리카락은 이미 얼어붙었다.
······그 고생 끝에 발견한 얼음꽃 하나.
이미 녹초가 된 터라 기쁜 마음도 없었다. 그녀는 다시 별장으로 돌아왔다.
문 밖에서 그 상태를 확인한 뒤 곧장 데큘레인에게 주었다.
“······.” 데큘레인은 꽃을 들여다보았다. 율리는 추위로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고, 긴장에 목이 죄었다.
째깍, 째깍, 째깍.
30 분 같은 3 초.
데큘레인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불량이다.” “그럴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율리는 거의 울듯한 얼굴이 되었다.“네가 봐라.” 데큘레인이 꽃을 내밀었다. 율리는 받아서 보았다.
그런데 정말, 아주 조그마한 흉터가 있었다.
“아.” 어떻게 된 일이지.
율리는 제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고민했다.
분명 별장 바깥에서는 상처가 없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꾸 손상되는 것인지······.
타닥- 돌연, 벽난로의 모닥불에서 불씨가 튀었다.
그 순간 율리는 눈을 크게 떴다. 뇌리에 번뜩이는 깨달음이 일었다.
“포기인가?” 마침 데큘레인이 물었다.
“······다녀 오겠습니다.” 율리는 그리 대답하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미친 듯이 눈보라를 헤쳤다.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생살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다.
네 번째 얼음꽃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아······.” 그 혹독한 추위 속에서, 가장 찬란하게 피어오른 얼음꽃을 발견했다.
네 번째다.
율리는 비척비척 별장으로 되돌아갔다. 혹여나 꽃에 손상이 갈까 달리지도 않았고, 바람이 스치지 않도록 두 손으로 고이 모았다.
“······.” 별장의 문은 열려 있었다. 그웬과 라펠과 시리오. 시험을 통과한 세 사람이 보였다.
율리는 그 문 앞에서 크게 소리쳤다.
“여기 있습니다! 가지고 왔습니다!” 그녀는 별장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다만 혹한의 한복판에 서서 얼음꽃을 보여주었다.
“율리, 가지고 와라.” 데큘레인이 말했다. 율리는 고개를 저었다.
“나와주십시오.” 얼음꽃은 온도에 민감하다.
따라서 저 별장 안에 들어가 데큘레인이 앉은 의자의 뒤편, 그 벽난로에 조금이라도 죄이는 순간.
얼음꽃은 반드시 손상될 것이다.
“얼음꽃은 여기에 있습니다.” 율리는 이게 답이라 믿었다.
여태 너무 멍청했노라 자책했다.
그녀는 눈보라 속에서 얼음꽃을 내밀었다. 꽃은 온전한 형상을 유지했고, 율리의 숨결은 얼어붙었다.
······그런데.
“싫다.” 그의 대답은 훨씬 차가웠다.“······예?” 율리는 멍하니 되물었다.
차가운 세상의 저편.
온기가 넘실거리는 별장의 거실에서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냉랭한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때, 율리는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데큘레인은 처음부터 자신을 탈락시킬 생각이었노라고.
선별. (2) “나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은 네 탓이지.” 데큘레인은 말했다. 살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 율리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선배 기사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갖 감정들이 마음 속에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러나,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맞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녀는 마력의 방출을 각오했다. 적당한 노면에 얼음꽃을 내려놓은 뒤, 손아귀에 마력을 응집했다.
쿵─!
언젠가의 부상이 벌어지며 둔중한 통증이 일었다. 직접적인 마력의 방출은 여전히 무리인 듯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율리는 이를 악물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손바닥에 구(球)처럼 응집된 마력.
투척하듯 흩뿌렸다.
휘이이이이······.
그녀의 마력은 바람에 실려 별장을 감싸안았다. 벽난로의 온기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별장 전체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제, 되었을 겁니다.” 율리는 데큘레인을 보며 위풍하게 말했다. 그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틀린 방법이다. 꽃을 보아라.” 그 말에 율리는 자신이 노면에 놓아둔 얼음꽃을 보았다.
“······아.” 잎사귀에 흉터가 생겼다.
그 균열은 척 보기에도 선명했다.
“얼음꽃은 마력에도 영향을 받는다.” “······허.” 율리는 부서진 꽃을 손에 든 채 헛웃음을 내뱉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내리깔았다.
벽난로 위, 얼어붙은 시계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이내 7 시 정각이 되었다.
데큘레인은 선언했다.
“탈락이다, 율리.”* * * 율리는 잠시 별장에 머물렀다. 체온이 너무 낮아 곧바로 떠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식사를 마친 뒤 곤히 잠들었고, 거실에는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공평하지는 않네.” 시리오가 말했다.
나는 그 따위보다도 방금 율리의 마력이 신경 쓰였다.
“······.” 오늘, 나는 율리의 마력을 처음 보았다.
「육안」으로 관측한 그녀의 마력에는 결함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제약이었다.
「 상태이상 : 마력 손상 」 율리의 마력은 손상되었다.
마력 손상, 즉 단전의 상처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피해로는 안 되었다.
저주, 혹은 불구에 가까운 부상이었을 것이었다.
게임에서의 율리는 이런 상태이상을 안은 채로 기사의 정점에 올랐는가.
아니면 극복함으로써 정점이 되었는가.
나는 그 이유를 몰랐다.
“······율리만 난이도가 너무 어려웠잖아. 얼음꽃이랑 벽난로라니, 나도 처음에는 못 깨달았다고.” 시리오는 자꾸만 투덜거렸다. 그웬과 라펠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 깃든 시선이었다.
기사들은 공평하지 않았던 과정이 영 불만스러운 듯했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데큘레인은 물론 율리와도 인연이 있다.
그렇다면, 이 ‘마력 손상’의 이유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까.
“······언젠가 율리는 부상을 입었었지.” 나는 혼잣말처럼 은근한 투로 되뇌었다. 슬그머니 떠보려는 수작이었다.
그런데, 내부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부상? 그거 너 때문이었잖아. 예전에 우리랑 호위 임무 할때······ 아, 설마?” 나를 바라보는 시리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라펠도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그 여파가 아직도 남았다고?” 그러자 이번에는 그웬이 미간을 찌푸렸다.
“검기를 구사할 때는 멀쩡한 것 같았는데······ 라펠? 넌 어땠어?” “마력의 사용을 의식적으로 제한하는 것 같기는 했다. 검기는 구사하였으나, 한순간에 많은 마력을 폭발시키지는 않았지.” 내 폭검(爆劍)에 대항하려면 그 방법 밖에는 없었을 텐데 말이야. 라펠은 자랑하듯 덧붙이며 입술을 비틀었다.
시리오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만약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 있다면, 문제긴 하지. 폐하 곁에 있다가 괜히 책잡힐 수 있어. 특히 환관들 극성은 유명하니까.” 나는 알지도 못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게임이 시작하는 시점 이전의 설정들이었다.
“근데, 확실하긴 한 거야? 넌 그런 걸 어떻게 알았······ 아 뭐, 하긴.
당연히 너는 잘 알겠지. 워낙 사랑하니까.” 시리오가 능글맞게 웃었다.그때 그웬이 눈을 날카롭게 치뜨고 쏘아붙였다.
“됐고. 만약 그렇다 해도, 그게 네가 사람을 위하는 방식이냐? 그런 거 별로 안 멋있거든? 그리고, 그깟 부상 있어도 폐하는 충분히 가르칠 수 있어.
쓸데없는 과보호라고.” “그웬.”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왜.” “너도 탈락하고 싶나.” “······.” 그웬은 입을 다물었고, 나는 선별관으로서의 업무에 집중했다.
“각자 방으로 돌아가라. 두 번째 시험은 첫 번째 탈락자가 떠난 뒤 재개한다.” * * * 시간 상으로는 오후 3 시.
그러나 여전히 어두운 세상 밖에, 율리는 서 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에 보이는 겨울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단장님 힘내세요!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으셨으니까 마음껏 보여주고 돌아오세요~!
단원들의 응원이 떠올랐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합격하겠다고 각오했지만, 결과는 탈락이었다.
다만, 누구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원망해서도 안 되었다.
율리는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바스락거리며 어떤 인기척이 일었다.
······데큘레인.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율리.” “예.”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눈이 뽀드득거리며 밟혔다.
세 발자국이면 닿을 거리에서 그는 멈췄다. 잠시 말을 고르는 듯 가만히 생각했다.
“오늘은 유감이다.” “아니요.” 율리는 고개를 저었다.
“말씀하신 대로, 제 잘못이었습니다. 이해합니다. 그 자체가 시험이었습니다.” “······.” 데큘레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 잘못이라는 말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율리는 진심을 담아 말을 이었다.
“얼음꽃과 벽난로. 그 두 가지는 참 교묘했습니다. 과제를 받았을 때 반드시 체크했어야 했어요.” 데큘레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교묘하기는 무슨, 참 바보같이 우직한 녀석이다.
“······너를 떠나보내기 전에,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선발관으로서의 업무입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예. 괜찮습니다.” 그는 데큘레인이 아닌 김우진으로서. 아니, 데큘레인의 감정을 견디는 김우진으로서.
5 개월 전, 처음으로 율리를 만났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날 율리는 ‘약속’을 말하며 분노했으나, 자신은 그 약속이 무엇인지도 물어보지 못했다.
“일전에 내가 깨트렸던 약속이 있었지.” 율리는 말없이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데큘레인은 무감하게 말을 이었다.
“그 약속을 다시 말해다오.” 율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데큘레인은 그런 그녀에게 작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저, 다시 네 입으로 듣고 싶을 뿐이다.” 그녀는 그런 그가 의뭉스러웠다.
언젠가부터, 그는 이처럼 아리송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벌써 반년이 되었군요. 그때, 저는 그 ‘루나’라는 가문의 사람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휘하에서 스스로 생을 끊은 마법사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미 보여드렸잖습니까. 그간 당신이 저질렀던······ 악행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설명을 요구했고, 당신은 침묵했지요.” 그때 율리는 데큘레인에게 편지를 보여주었으나, 그는 짓눌린 시선으로 노려보다 편지를 불태웠다.
네가 알 필요 없는 내용이었다면서.
“그렇단 말이지.” 데큘레인은 마치 그런 적 없었다는 듯이 굴었다.
이번에도 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지금와서 왜 묻는 것입니까?” “······.” 그는 율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내 잘못이었기 때문이다.” “······예?” 놀란 율리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는 다시 말했다.
“그때는 나······ 데큘레인의 잘못이었다.” “······.” “다만 그 연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설계는 그가 했으나, 착공은 내가 하고 있다. 나는 지금 빈 부분을 스스로 채우고 있다. 당연히 함께 시작한 연구이니, 그는 이 연구의 공동 저자가 될 것이다.” 데큘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마법적 공간의 자연은 이토록 묘했다.
“수익이 있다면 분배할 것이고, 그의 가문이 다시 부흥하도록 도울 것이다.
이 연구가 발표되는 날, 그에게 사과 또한 할 수 있겠지.” 그의 얼굴이 서광에 젖어들었다.
봄볕을 받은 얼음처럼, 그는 차가웠지만 따뜻했다.
율리는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 그때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데큘레인이 율리에게로 눈을 두었다. 그 직선적인 시선을 율리는 피하지 않았다.
“글쎄. 내가 그리 말해도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일까.” “예?” “그때의 너는 나를 미워할 이유만 찾고 있었지.” 데큘레인이 율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율리가 데큘레인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해한다. 네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든, 감정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아닙니다. ” 그런데 정작 율리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당신을 좋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표정이 없던 데큘레인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놀라운 변화에 율리는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면······.” 율리와 데큘레인의 인연은 꽤 오래 되었다.
자그마치 16 년. 데큘레인은 아직 유크라인의 당주가 아니었고, 율리는 그저 기사를 꿈꾸는 어린아이였던 시절부터였다.
그간 숱한 실망과 많은 수모를 겪었으면서도, ‘데큘레인이라는 사람을 믿어보겠다’ 결정했던 이유도, 사실은 모두 율리의 마음 안에 있었다.
“그때는-” “묻어두기로 하지.” 데큘레인은 고개를 저으며 율리의 말을 잘라냈다.
“그 시절의 나는 내가 아니니까.” 입술을 달싹이던 율리도 곧 수줍게 끄덕였다. 데큘레인의 의지를 알았기에, 입 안에서 오물거리는 말들을 지워냈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는 말했다.
“율리.” “예?” “이제부터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하겠다.” 율리의 눈과 입이 동그랗게 되었다. 그토록 순수한 반응에 데큘레인은 맑게 웃었다.
그 미소가 그의 차가움을 깨트렸다. 언제나 근엄한 귀족이었던 그가, 한순간에 소년처럼 돌변했다.
그는 그렇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부담스러워 하는 듯하니, 여기서 더 멀어지려 노력하겠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서로의 길을 갈 수 있겠지.” “······.” 여태, 그가 품었던 마음을 율리에게도 들려주었다.
“나는 너를 위해 그리 하겠다.” 말을 마친 그는 돌아섰다.
“오늘은 수고했다. 조심히 가도록.”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율리는 바라보았다. 어느새 중천에 떠오른 해가 세상을 따뜻하게 비추었다.
곧, 그녀의 입가에 햇살처럼 작은 미소가 번졌다.
“······진심이시군요, 당신은.” 그녀는 오늘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는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 노력을, 자신은 여태 알지 못했다.
어쩌면,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기사로서 반성(反省), 자성(自省)하겠습니다.” 마음 한 켠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끼며 율리는 돌아섰다.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하겠다······.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를 위해 바뀌겠다는 그의 말이었다. 나를 위해 나를 사랑하지 않겠다는 자기 희생적인 말이었다.
분명히, 나를 위한 말이었다.
“······.” 문득, 그녀는 멈춰섰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득히 멀어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율리는 이내 자신의 길을 걸었다.
눈밭이 다리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가득히 떠오른 햇살은, 오히려 몸에 달라붙은 눈을 진창처럼 녹였다.
율리는 걸었다.
동시에, 그에게로 기우는 마음을 인정했다.
* * * ······선별 심사는 무사히 끝났다.
사흘 동안의 시험으로 라펠이 선별되었고, 나머지 세 기사는 탈락했다.
덕분에 3 일이나 소비했지만, 소득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나는 손꼽히는 기사들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보았고, 「이해력」으로 확실히 기억했다. 억만금을 주고도 얻기 힘든 경험이었다.
나는 마탑의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그때 보았던 기사들의 움직임을 종합하여 정리본을 작성했다. 총합 두 권으로 완성된 이 합본은 내 「철인」에 요긴히 쓰일 것이었다······.
“음.” 집무실의 책상 서랍에 이 ‘기록본’을 넣다가, 문득 노트 한 권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 노트를 꺼냈다.
[ ─ ] 하데카인, 데큘레인의 방에서 가지고 왔던 제목 없는 노트였다. 자세한 정보는 미해금 상태였지만, 마법적인 아티펙트임은 분명했다.
이런 마법 아티팩트의 사용법은 대개 간단하다. 마력을 불어넣는 것.
“······.” 내가 그 노트에 손을 얹은 순간.
똑똑— 노크였다. 나는 노트를 집어넣고 염동력으로 문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알렌이었다. 정수리에 꼬깔모자를 쓴 알렌은 두 손에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녀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교수님, 교습 마법사 선별을 축하드립니다!” 아무래도 황실의 발표가 난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단이 있나.”“여기 있습니다!” 알렌이 기다렸다는 듯 내밀었다.
나는 그 명단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 황궁 교습 마법사 목록 :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루이나 폰 슐로트 멕퀸. ] 교습 마법사는 두 명이었다. 그리 최악은 아니었다.
루이나는 언젠가 만날 사람이었으니.
그러나, 바로 다음 페이지는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듯했다.
[ 황실 교습 기사 목록 : 시리오 폰 렌야 시그룬, 라펠 켄트, 율리 폰 데이아 프하이르덴, 그웬 윕시 ] “뭐라?” 황제는 네 명 전원을 교습 기사로 선별했다.
자기도 머쓱했는지, 그 이유를 뒷면에 서술해놓았다.
─짐은 시리오에게 바람같은 쾌검을, 라펠에게 폭발적인 중검을, 그웬에게 경지에 이른 레이피어를, 율리에게 원소와 검의 합일을 습득하길 원한다.
그 순간.
[ 황궁 퀘스트 : 악마의 거울 ] ◆ 상점 화폐 + 10 ◆ ???
자그마치 상점 화폐 10 원 짜리의 거대한 퀘스트가 발생했다.
“······빵빠빵! 빠라빵빵! 빵빵!” 알렌은 눈치도 없이 팡파레를 터트렸다. 입으로 팡파레거리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나가라.” “아, 네!” 나는 손짓을 했고, 분위기를 감지한 알렌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 그 명단을 노려보며 고민했다.
그러나, 책상머리에서 고뇌한 들 바뀔 일이 아니었다. 이는 전부 황제의 제멋대로인 마음이었으니.
"빌어먹을······.” 나는 의자에 앉아 머리카락을 쓸었다.
똑똑— 웬 노크가 또 울렸다. 마침 나가려던 차였기에, 직접 다가가서 문을 열었다.
실비아였다.
실비아는 품에 거대한 두루마기를 안은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교수님. 질문이 있어요.” “질문?” “네. 저번 수업에서, 이번 과제는 어려울 것이라며,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라 하셨어요.” “맞긴 하다만, 혼자인가.” “네.” “팀원과 같이 오도록.” 나는 문을 닫았다.
똑똑- 실비아가 다시 노크했다. 문을 열지 않자 목소리만 넘어왔다.
─제 팀원은 도움이 되지 않아요.
“조별 과제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
그제서야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똑똑- 다시 노크했다.
“내가 분명히······.” 문을 열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네 명도 함께였다. 멀지 않은 곳에 같이 있었던 듯했다.
실비아는 네 명을 버리고 자기 혼자서만 질문을 할 생각이었나.
“다 같이 왔어요.” “······그래. 들어오도록.” 나는 집무실 안의 테이블로 병아리들을 안내했다. 이프린은 자리에 앉자마자 왠지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는 조별 과제를 이렇게 짰어요. 그래서 ” 실비아가 두루마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고개를 끄떡이고 그 두루마기를 펼쳤다.
사실 언제든 오라고 했지만, 정말 찾아올 줄은 몰랐다······.
‘흐흐.’ ······이프린은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 마력 재해의 술식이 기록된 두루마기는 온전한 것이 아니다.
실비아 몰래 일부러 틀린 부분을 작성했다. 이틀 밤낮을 고민한, 아주 교묘한 함정이었다.
그러니 당신도 그저 훑는 것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고?
이는 ‘촉매’가 기입된 함정이기 때문이다.
“어디가, 혹시 틀렸을까요?” 이프린은 데큘레인에게 겁먹은 척 조신하게 물었다. 긴장이 되어 입술을 핥았다.
데큘레인은 말없이 그 두루마기를 들여다보았다······ 황궁. (1) 쥐죽은 듯 고요한 수석교수의 집무실.
데큘레인은 아무 말없이 두루마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펼쳐진 두루마리에는 선과 원을 비롯한 온갖 술식이 가득했다.
“······.” 이프린은 침을 꿀꺽 삼키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잔뜩 긴장한 채 데큘레인을 지켜보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흘렀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마법진이 이어지는 매듭이 헐겁다.” 술식을 들여다보던 데큘레인의 등 뒤에서 만년필이 부웅- 떠올랐다.
“이 부분들.” 만년필은 총 여덟 군데를 체크했다.
“확실한 이음새와 헐거운 이음새의 차이를 직접 느껴보아라.” 실비아는 그가 체크한 곳과 체크하지 않은 곳을 눈으로 대조했다.
미세하지만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이프린도 이때만큼은 그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나머지 완성도는 나쁘지 않다.” 데큘레인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이프린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솟는 어떤 희열을 느꼈다.
나머지 완성도는 나쁘지 않다.
그말인 즉, 그는 자신의 함정을 캐치하지도 못한 것이다.
“······흐흠.”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당초 촉매 마법은 ‘그 술식을 촉매에 새기는 마법’이었으니.
술식의 70%를 촉매에 할애하고, 나머지 30%만 술자가 감당하는, 일종의 부담완화 테크닉. 다른 말로, 술식이 7 할이나 숨겨진 마법식.
“이대로 쭉 이어나가면 될 듯하다.” 데큘레인은 그 함정의 존재를 끝까지 파악하지 못했다. 이프린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항.” 그 웃음에 데큘레인이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프린은 싱글벙글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정말 속이 뻥 뚫린 느낌이에요.” “되었으면 이제 가라.” “네!” 이프린이 벌떡 일어났다. 거의 눈을 감은 듯한 눈웃음이 만면에 가득했다.
실비아는 그런 이프린을 가늘게 노려보았고, 곧 다섯 명이 함께 밖으로 나왔다.
“건방진 이프린.” “미안미안.” 실비아의 말에도 이프린은 그저 웃었다.
팀원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탑 저층부의 스터디 룸으로 내려왔다.
실비아라는 이름 덕분에 스터디룸 내부는 굉장히 넓었고 깔끔했다.
이프린은 커다란 테이블 위에 두루마리부터 펼쳤다.
“근데 교수님 진짜 대단하시긴 하네. 아직 절반도 완성 안 됐는데, 바로 보고 알아 어떻게?” “그러게. 이 이음새, 딱 지적하니까 그때 알겠더라.” 각각 유로잔과 데인의 말이었다.
“야 의외로 재밌다 이거. 처음에는 걍 어렵기만 할 줄 알았는데. 뭔가 진짜 세상을 마법적으로 보는 느낌?” 그들의 말에 실비아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뭔가 진짜 세상을 마법적으로 보는 느낌?
수준 차이가 너무 나서 귀여울 지경이다. 제 더듬이를 자랑하는 에벌레들을 지켜보는 독수리의 심정일까 “아니.” 그런데 돌연 이프린이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저었다.
“데큘레인, 그 사람은 이번에는 틀렸어.” “건방진 이프린.” 실비아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 눈썹이 적의로 꿈틀거렸다.
“실비아, 우리 내기 했었지?” 이프린은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마석을 꺼냈다.
유로잔이 물었다.
“내기? 무슨 내기?” “그런 게 있었어.”저번 주, 이프린과 실비아는 저택에서 말다툼을 하던 중 어떤 내기를 했다.
데큘레인의 기량과 관련된 내기였다.
“보렴.” 이프린은 예전 수업 때 데큘레인에게 보상으로 받은 마석을 꺼냈다.
사등분하여 요긴하게 쓰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에 회로를 새겼다.
“저번에 내가 말했잖니.” 이프린은 두루마리에 마석을 올린 뒤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 마석 촉매와, 두루마리의 어떤 교묘한 술식이 결합되며 반응을 일으켰다.
“그 사람은 내 함정—” 말을 이으려던 순간이었다.
푸우우우우─!
어떤 액체가 솟구쳐 이프린의 얼굴을 뒤덮었다.
“함정, 도, 모르, 고······.” 그 말이 천천히 끊겼다. 이프린은 엉거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조원들도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보았다.
끈적한 먹물이, 그녀의 치아와 잇몸을 비롯한 면상에 달라붙어 있었다.
“······아!” 뒤이어 매운 느낌이 알싸하게 올라왔다. 이프린은 거칠게 숨쉬며 허우적거렸고, 팀원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아······ 아악!” “크흐흐. 왜, 왜그래 이프, 크흐흐흐······.” “흐아, 흐아, 흐아······.” 오직 실비아만이 고개를 돌렸다. 웃기 싫어서 아무 것도 보지 않았지만, 자꾸만 콧구멍과 입술이 벌렁거렸다.
“그아아아, 매워─ 매워─!” 이프린은 땅바닥에 아무 그릇이나 놓고 물을 만들어서 얼굴을 넣었다.
보글보글— 한참동안 그렇게 있다가, 맵기가 가실 즈음에 고개를 들었다.
“아······ 아······ 나 죽어······.” 입술이 부르트고 눈두덩이가 붉어진 그녀를 보며, 실비아는 흥- 조소를 지었다.
“건방진 이프린. 여기나 봐.” 이프린은 가까스로 눈을 뜨고 실비아가 가르킨 방면을 보았다. 두루마리 위 허공에, 어떤 문장이 푸르게 떠올라 있었다.
[ 그 기발함을 손톱만큼은 칭찬할만하다. ] “아이런젠장할- 아, 또, 또 매워진다······.” 오만상을 찌푸린 이프린은 다시 물에 얼굴을 처박았고, 실비아는 수정 작업을 재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실비아도 작은 경계를 했다.
‘촉매술’은 그 일부만이 드러나는 비밀의 마법. 상대방이 어떤 회로를 새겼을지 예상해야 대처가 가능하다.
비단 마법적인 능력 뿐만 아니라, 천재적이고 수학적인 두뇌도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데큘레인 교수는 실비아의 예상보다 조금 더 천재적이었다······.
* * * 사흘 뒤.
나는 집사 로이에게 경매 결과를 보고 받았다.
[ 82,145,005 Ε ] 세금과 인건비를 제하고도 8 천만 이상의 순이익을 얻었다. 감정점을 인수한 뒤 개최한 경매라 수수료도 없었다.
이 중 2 천만 엘네를, 예리엘이 요긴히 쓰길 바라며 하데카인의 가문 계좌에 송금했다.
“넉넉잡아 10 억인가.” 아직 팔 물건은 많으니, 최소한 10 억은 더 벌 수 있을 듯하다. 「대부호 재력가」의 성능은 이만큼이나 확실한 것이다.
만족한 나는 서재의 의자에 앉아 다시 마법서를 보았다.
웬만한 책 서너 권을 합친 듯 크고 두꺼운 그 이름은── 「금속 강화」.
「염동」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내 노력 중 하나다.
이전의 나는 「금속 강화」라는 마법을 이해할 지식과 마력이 부족했다. 「 이해력」은 내 마법적 지식·기반에 따라 소모량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 수준의 지식으로 미적분을 해결하려면 어마어마한 마력이 소모되지만, 고등학생 수준의 지식이라면 어느 정도 ‘할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금속 강화」는 시전에 어마어마한 마력과 술식이 필요한 중규모(中規模) 마법. 안 그래도 「인첸트」 류의 마법인지라 대단히 무겁고 복잡한데, 「금속 강화」는 보통 거대한 성벽 따위에 사용된다.
사뭇 간단하게 느껴지는 네이밍과는 다르게 ‘대공성용 최종 병기’ 수준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마력을 모조리 쏟아부어도 이 마법의 핵심 회로를 「이해」 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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