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7
“예, 이사장님!” 그 긍정적인 축객령에 교수들은 환한 얼굴이 되어 집무실을 나섰다.
“흐으으으으으으음······.” 손에 턱을 괴고 고민하던 이사장은 대학마탑에서 올라온 서류들을 꺼냈다.
시험기간이라 문서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특히 시험 문제들이 많았다.
본디 이사장에게 시험 문제를 뒤적이는 취미는 없었지만······.
“이런 문제는 어떻게 만든 거래.” 그녀는 데큘레인이 제작한 시험을 보고 깜짝 놀라버렸다. 마지막 문제까지 풀다가 감동을 받아버렸다.
“다른 시험 다 모아도 이거 하나만 못하겠는데.” 빈말이 아니라, ‘솔다’ 승격 시험에 차용해도 될만큼 문제의 질이 좋았다.
하지만 이사장은, 이 문제들을 ‘데큘레인이 직접 만들었다’고 생각할만큼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흐응······ 이번에는 잘 숨기는 것 같은데······ 누굴까······.” 이프린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히쭉 웃었다.
“뭐 어때. 오히려 재밌지.” 시험 문제 관련 내용을 물어보면 대답못하고 쩔쩔매지 않을까? 데큘레인 교수가 그러면 꽤 귀여울 텐데.
“나중에 골려줘야겠다!” * * * 수요일.
5 학점 강의의 시험이 있는 날.
웬만한 시험을 2~3 개 쯤 합친만큼 중요한 시험이었기에, 이프린은 이른 아침부터 마탑으로 출발했다.
[ 30 층 ] 지정 장소는 마탑 30 층. 마탑의 한 층이 오직 하나의 시험을 위하여 통째로 대절된 것이었다.
[ 시험 대기실 ] 대기실이라는 명패가 붙은 문고리를 쥐고 열었다.
“옴마.” 이프린은 흠칫 놀랐다.
아직 오전 8 시인데, 벌써 100 명 이상이 모여 있었다.
“······.” “······.” 조용히 떠들던 그들의 수다가 멎었다. 요 근래 사건 탓인지 그 시선들이 모두 이프린에게 집중되었다.
참고로 요즘 이프린의 별명은 무개념 평민─평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이었다.
이프린은 줄리아를 비롯한 동아리 멤버들 근처에 앉았다.
“이피 방금 일어났어?” “아니. 안 잤어.” 커피를 몇 잔이나 빨았는지 모르겠다.
근데 어차피 시험은 원래 이렇다. 커피와 긴장 탓에 잠은 절대 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느때보다 말짱한 것이다.
“이피, 내 노트 볼래? 어제 나 깨달은거 적었는데.” 줄리아가 훗- 하고 웃었다.
“그러자. 나도 내거 보여줄게.” 두 사람은 서로 노트를 교환하며 공부했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전 11 시가 되었을 때.
조교수 알렌이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조교수 알렌입니다. [순수 원소 마법의 이해] 강의의 중간고사는 따로 출석은 부르지 않고 시작하겠습니다.” 알렌은 한 손에 쥔 종이를 읽었다.
“그 전에 앞서 시험의 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우선, 이 시험에 제한 시간은 없습니다.” “?” 마법사들은 잠시 당황했다. 알렌도 잘못 말했다는 듯 자기 입을 툭 건드리고 정정했다.
“아, 시험 시간은 마탑의 시험이 끝나는 주, 즉 다음 주 일요일 자정까지입니다.” 마법사들은 더 어이가 없었다.
오늘이 수요일 오전 11 시인데, 수업이 다음 주 일요일 자정까지면, 시험 하나를 무슨 10 일 동안 치른다고?
이프린이 눈만 깜빡거리던 와중, 알렌이 말을 이었다.
“물론 그 동안 다른 시험을 보고 와도 됩니다. 밖에서 밥을 먹고, 집에서 잠을 자고, 씻고, 스트레스를 풀 겸 놀다 와도 됩니다. 단, 시험지를 외부로 반출할 수는 없습니다.” 듣다 보니 세상 이상한, 아니 신기한 방식이었다.
“또한 시험장은 개인실입니다. 1 인 1 실이며, 안에서 잠을 자도 됩니다.
단, 베개나 이불은 각자 지참해야 합니다. 음식을 가지고 와 안에서 먹는 것도 괜찮습니다. 참고할만한 책이나 논문을 가지고 와서 읽는 것도 괜찮습니다. 시험은 오픈북입니다.” 그쯤 되자 이프린의 눈썹은 기괴하게 떨렸다.
오픈북? 오픈북에 시험 기간이 10 일이면, 얼마나 어렵다는 거야?
아니, 그런 난이도 조절이 가능하다고? 전부 다 빵점이거나, 전부 다 만점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은데?
“그런만큼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알렌은 헛기침을 험험 하더니 데큘레인을 성대모사했다.
“만약, 만점을 맞는 사람이 있을 경우, 수석교수의 이름으로 추천서를 써주겠다—” 추천서.
그 단어에 모든 마법사들이 눈을 크게 떴다.
모나크 등위의 마법사.
마법사의 위계인 ‘11 등위’ 중 4 등위에 속하는, 아니 1 등위가 대마법사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3 등위인 수석교수의 추천서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다.
조금 과장 보태어 말하면, 당장 솔다 승격 시험에서 면접까지만 가면 무조건 붙는다는 뜻이다.
“······.” 시험 방식에 대한 의아함도 잊은 채 마법사들은 전의를 불태웠다.
물론 실비아라는 압도적인 1 등이 있지만, 추천서 대상은 ‘한 명’이 아니라 ‘만점’이다.
후발주자의 반란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라는 것이다······.
“자 이제 각 분들에게 시험실을 배정하겠습니다. 앞줄부터 일어나서 따라와주세요.” 대기실 앞열의 15 명이 먼저 일어났다.
그렇게 총 10 번 반복 되었고, 실비아는 23 번방, 이프린을 비롯한 동아리 멤버들은 73~78 번방으로 배정을 받았다.
“······잘 봐 이피. 화이팅!” “응, 너네도.” 시간이 많다 하니 오히려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서로 응원을 주고받던 그때 알렌이 크게 외쳤다.
“자. 다들 들어가주세요!” 이프린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기숙관의 1 인실보다 조금 더 큰 넓이였다. 책상과 의자와 시계가 달랑 있었고, 책상 위에는 시험지가 놓였다.
이프린은 곧장 의자에 앉아 1 번을 보았다.
[ 1. 다음 술식의 회로를 연산하시오. ] 100% 이론 문제였다.
이프린은 연필을 꺼냈다. 동시에 손가락으로 마력을 방출했다.
연필로는 계산을 하며 마력으로는 회로를 구성하는, 직관을 이용하여 이론을 계산하는 방법이었다.
“······후.” 1 시간 쯤 지나자 해답이 나왔다. 이프린은 답안란에 그만큼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페이지를 넘겼다.
[ 2. 다음 술식의 핵심 회로를 추론하고, 그 마력의 흐름을 서술하시오. ] 2 번 문제도 조금 어렵지만 역시 이론이었기에, 3~4 시간의 고민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 3. 다음 회로는 특정 마법의 일부다. 아래 조건을 통하여 위 술식을 추론하고, 마법을 발현하여 시험지에 이식하시오. ] 이프린은 이리저리 생각해보았다.
처음에는 쉬울 줄 알았다.
그러나 풀릴듯 말듯 이 간지러운 문제는 아무리 시간을 쏟아부어도 풀리지 않았고······.
“졸려.” 이프린은 결국 펜을 내려놓고 바닥에 누웠다.
“······하아아암.” 조금만 쉴 겸 그 딱딱한 곳에서 눈을 감았다 떴는데, 어느새 하루가 지나 있었다.
* * * ‘순수 원소 마법의 이해’ 시험 시작 4 일 차.
토요일이 되어 실전 시험을 떠났던 기사 생도들이 돌아오고, 평범한 학부생들의 시험은 대부분 마무리로 접어드는 요즈음.
마탑은 여전히 뜨겁게 북적거린다.
당장 대학마탑 마법사들 뿐만 아니라, 외부 왕국 마탑과 언론 관계자, 기사 생도와 학부생들의 관심마저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역시, 원한다면 거의 2 주 동안이나 도전할 수 있는 데큘레인의 마라톤 시험.
사실 이런 마라톤 시험은 다른 교수도 전에 시도를 해봤으나, 대부분은 이사장이 거부하여 결렬되었다.
그러나 이번 시험은 오히려 이사장이 직접 밀어줬다나 뭐라나.
“네! 지금 아직도 30 층에서 시험이 치러지고 있습니다!” 그런 덕분에 취재도 많이 왔고, 이사장은 나서서 인터뷰에 응했다.
“난이도는 어느 수준인건가요?” “어렵긴 합니다만! 제가 풀었을때는 엄청 좋았습니다! 마법사들도 풀다보면 깨달을 거예요! 풀만합니다!” “추후에 시험 문제를 공개할 생각이신가요?” “그건 데큘레인 교수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부유섬’도 돈 주고 사고 싶어할 것 같은데요!” 마탑 근처는 온갖 사람이 많았다.
학부생과 기사들은 시험도 끝났겠다 놀러왔고, 당장 2 주 뒤부터는 축제와 MT 기간인지라 대학 부지 전체가 개방되었기 때문이었다.
“저, 혹시 인터뷰-” “데뷰탄이신가요? 저, 잠시만요-” 기자들은 마법사로 추정되는 자들을 붙잡고 인터뷰를 부탁했다. 대부분은 거절했으나, 이프린은 커피 네 잔과 빵 세 조각을 대가로 인터뷰에 응했다.
“그럼, 지금 시험을 포기한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건가요?” “네. 아마도요.” “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저는 잘.” 이프린은 대답 없이 커피를 마셨다.
사실, ‘포기하지 않는 그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시험은 수업의 연장선이다.
데큘레인의 일견 불친절하면서도 친절한 강의처럼, 이 시험은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성장하게끔 이끌고 있다.
문제를 풀면서 데큘레인에게 배웠던 모든 것들을 복습하고, 자의적으로 활용하고, 또한 그 응용법을 깨닫도록.
“근데, 마법사들끼리 서로 토의해서 답안을 작성할 위험은 없나요?” 기자의 그 순진한 물음에 이프린은 커피를 뱉을 뻔했다.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어요. 마법사는, 지극히 개인적인 족속이거든요. 그리고, 어차피 그래봤자 다 티 나요. 마법, 그리고 마력에도 ‘성격’이라는 게 있거든요. 지문처럼 남아요.” “아하······.
“그럼, 10 분 지났죠? 가볼게요 저는.” 약속했던 인터뷰 시간은 10 분.
이프린은 남은 커피 세 잔과 빵 두 조각을 그대로 싸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월요일 이른 아침, 시험실에서 일어난 실비아는 온열 마법으로 음식을 데웠다.
“냠냠-” 입으로는 아침을 먹으면서 눈으로는 시험지를 보았다.
[ 7. 위 핵심 회로를 품은 마법이 다음 네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때, 전체 술식을 유추하고 마법을 구현하시오. ] 7번 문제의 조건대로 마력을 이리저리 조작하며 고민했다.
“······으으.” 이미 어제 하루 종일 노력한 문제였지만 역시 오늘도 영 풀리지 않았고, 어느새 다른 시험을 치러야 할 시간이 되었다.
“······.” 시험실 밖으로 나온 실비아는 엘리베이터 앞의 조교수에게 다가갔다.
조교수가 물었다.
“포기인가요, 외출인가요?” “다른 시험 외출이에요.” “네~ 실비아 씨. 다녀오세요.” 이후, 실비아는 마탑 외부의 ‘테오관’에서 교양 시험을 치렀다.
* 2 시간 짜리 시험을 20 분만에 끝낸 실비아가 시험실로 오는 길. 마탑 근처에서 대기하던 저택의 시종들이 점심과 저녁 도시락을 챙겨주었다.
“힘내세요 주인님! 전부 풀 수 있을 거예요!” “차기 대마법사 화이팅!” 그들의 응원을 받으며 실비아는 마탑으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부담이었다. 입학시험때는 하나도 부담되지 않았는데.
못 풀 수도 있다─ 는 상상하기도 싫은 가능성이 마음 한 구석에서 점점 커지는 탓일까.
“조급하지말자.” 그러나 언젠가 교수가 해줬던 말을 되새기며 정신을 무장했다.
[ 23 번방 ─ 실비아 ] 실비아의 시험실은 완전한 자취방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법으로 침대를 만들었고, 이불과 베개는 물론, 참고할만한 여러 책과 논문까지 두었다.
문자 그대로 먹고, 자고, 풀고, 먹고, 자고, 푸는 캡슐이었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다시 7 번 문제에 도전했다.
1 시간.
2 시간.
3 시간.
4 시간······.
흐르는 시간만큼 무지막지한 심혈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은 비단 시험의 난이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험 문제는 물론 어려웠지만, 그저 어렵기만 했더라면 실비아는 오히려 아버지에게 일렀을 것이었다.
쓰레기같은 문제, 풀 가치도 없는데 열흘 동안 풀라는, 쓰레기같은 교수— 따위의 말로.
이 시험은 그렇지 않다.
각 문제마다 새로운 가능성과 방향을 제시하고, 예상치도 못한 변용을 유도하고, 활용과 응용에 커다란 충격을 주고, 문제 자체가 내재한 유연적 사고에 감탄하게 되고······.
특히, 난이도가 급격히 어려워지는 6 번 문제부터는 마법사로서 ‘극기훈련’이나 다름이 없었다.
만점을 맞는다면, 마법사의 격이 한 단계는 상승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추천서는 오히려 부수적이었다.
그렇게 10 시간.
11 시간. 오늘 12 시간, 어제 18 시간.
총합 30 시간의 씨름 끝에.
드디어 7 번이 풀렸다.
실비아가 이식한 회로가 마법으로써 발현되었다. 그 순수한 마법은 구체의 형상을 이루며 허공에 떠올랐다.
사방을 적시는 빛. 불과 땅과 바람과 물이 전부 뒤섞인, 이글이글 타오르는 별의 형상.
실비아는 그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잃었다.
그러나 곧, 시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오후 6 시 ] 또 다른 시험을 치르러 갈 시간이었다.
머리만 빗고 곧장 마탑 밖으로 나간 그녀는 길을 걸었다. 마탑 근처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기에, 뒷길을 택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와 마주치고 말았다.
“어, 실비아?” 건방진 이프린이었다.
“······시험보러가니?” 이프린은 그렇게 물었다. 실비아는 대답 않고 걸었다.
다만 어느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 물었다.
““너 몇번까지-”” 그 말이 겹치듯이 나왔다.
실비아는 입을 다물었고, 어깨를 으쓱인 이프린이 먼저 말했다.
“······나는 7 번 푸는 중.” 실비아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8 번.” “뭐? 벌써 다 풀었어?!” 이프린이 눈을 부릅떴다.
“푸는 중.” “······아. 빠르네. 난 7 번에서 꽉 막혔는데.” 이프린은 쓰게 웃으며 뒷목을 긁적였다. 실비아는 별 말 없이 이프린을 지나쳤다.
그런데 왜인지, 속이 꼬이는 듯했다.
벌써 7 번이라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다. 나랑 문제 하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니. 얘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느려진 걸까.
······실비아는 괜히 원망스러웠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진짜 시험’은 오직 하나 뿐인데, 다른 ‘가짜’들에 빼앗기는 시간이 너무 많은 것이다······.
* * * 한편, 실비아와 헤어진 이프린은 카페로 왔다. 시험 기간의 커피값만 해도 거의 천엘네는 쓴 것 같았다.
그녀는 눈으로 스윽- 카페 내부를 훑었다. 기자가 있나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기자 = 인터뷰 = 공짜 커피와 밥’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었다.
“······없네.” 쯧. 하는 수 없이 자기 돈으로 커피와 빵을 샀다.
카페 의자에 앉자 실비아의 말이 떠올랐다.
“8 번이라······ 나는 7 번에서 이틀 째 막혔는데.” 요 이틀 동안은 무슨 병에 걸린 것만 같았다.
화가 나서 관둘거다! 관둘거야! 부르짖었지만, 그렇게 발광을 하다가도 문득 문제의 힌트라도 얻으면 눈녹듯이 행복했다.
그 행복감은 어느 무엇에도 비할 바가 없었다.
“······에휴.” 이프린은 마력을 손끝에 키웠다. 7 번 문제를 고민하면서 꾸역꾸역 빵과 커피를 씹었다.
문득, 데큘레인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이렇게 미친 난이도의 문제를 내놓고, 그 교수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내가 오기로라도 꼭 푼다······.” 우걱우걱우걱─ 거의 씹어먹듯 배를 채운 이프린은 카페 밖으로 나왔다.
곧장 마탑으로 달려가면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있었다.
빛을 발하는 별이었다.
어두운 하늘, 달과 함께 마쉬멜로처럼 총총한 별이······ “······!” 이프린은 눈을 크게 떴다. 그 열린 동공에 별이 담겼다. 등골을 타고 번진 깨달음이 뇌리로 치밀었다.
그녀는 곧장 내달려 다시 자신의 시험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력을 분사하기 시작했다.
“된다, 된다, 된다, 이거다······.” 영감은 밤하늘의 별.
시험지에 기록된 조건 하에 연산하여 회로를 파악하고, 그 회로를 토대로 술식을 추정하고, 문제의 조건에 맞는 마법진을 구현한다······.
“풀렸다······?” 불과 바람과 땅과 물, 네 속성이 모여서 만들어진 「인공별」.
그 순수하고도 정순한 응집에 이프린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아 진짜······.” 이프린은 한참 동안 얼굴을 움켜쥔 채 있었다. 눈물도 몇방울 흘렀다.
그렇게 30 분 동안 여운에 젖어 있었을까.
“흡.” 이프린은 물기 가득한 눈썹을 닦고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 그렇게 마지막 8 번 문제를 본 순간.
페이지의 절반을 채운 마법의 회로와 조건들을 본 순간.
“아니 이 미친-” 기절할 뻔했다.
시험. (4) 시험 시작 일주일이 지나자 마법사들은 하나 둘 포기하기 시작했다. 그 수준에 따라 변별력은 극명하게 갈렸다.
하위권은 1~4 번 언저리에서 머물렀고, 중위권은 5 번에서 멈췄다.
상위권은 6 번을 완성했느냐, 혹은 7 번에 도전했느냐로 갈렸고, 최상위권은 7 번을 절반 이상 풀었느냐, 혹은 완전히 풀었느냐로 나뉘었다.
그 누구도 8 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강생 모두에게 ‘이 시험을 경험했다’는 것만큼은 훈장이 되었다.
신입 마법사 300 명 중 오직 150 명만이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었다.
선배 마법사들은 물론, 현역 교수마저도 시험에 대해 물었을 정도이니.
······그리고 오늘.
대학마탑의 모든 시험이 종료된 토요일의 정오.
실비아는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8번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충혈된 눈은 평소의 실비아와 전혀 이질적이었으나, 그녀는 마력의 폭주를 멈추지 않았다.
거의 닷새에 가까운 시간을 8번에 할애했다.
그 동안 그녀가 작성한 마법진의 숫자는 이미 일곱 개가 넘었다.
이 8번 문제에는 많고 다양한 마법이 복잡하게 작용하고 있었으므로, 그 마법의 연계를 하나 하나 떼어내어 답안지에 이식한 것이었다.
여태 총 일곱 개의 마법진을 그렸는데, 여기서 더 몇개가 남았는지는 모르겠다.
어쩐지 답안지가 유독 크고 많더라니.
“······!” 여덟 번째 마법진을 작성하던 때, 머리와 눈에 통증이 일었다. 실비아는 흘러내리려는 코피를 급히 막았다. 괜히 피가 번지면 답안지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녀는 곧장 시험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 떨어지는 핏물과, 마탑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추레했다.
초췌했고.
“······.”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쉬자.
실비아는 가벼운 클렌즈로 몸을 정돈했다.
마탑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열흘 동안 본 얼굴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기요.” “아, 으에우, 아, 네에. 시비아 씨, 외출, 외출인가요?” “네.” “네. 확인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탑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온 사방이 한산했고, 실비아는 근처의 공원을 걸었다. 그러다 아무 곳에나 놓인 벤치에 앉았다.
“······.” 바로 앞에 정원이 보인다.
대학 부지의 정원은 평범하다.
땅 위에 잔디와 꽃과 나무가 자라고, 더 위에는 태양과 하늘이 있다. 사실 잔디와 꽃과 나무가 자란 것도 태양과 하늘이 내어준 양분 덕이다.
정원은, 마치 8번 문제처럼, 독립적인 요소들이 하나로 이어진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니 거대마법(巨大魔法)도 결국에는 정원을 가꾸는 일과 별반 다름 없지 않을까.
언젠가 아버지가 한 말이 있다.
솔다 급 마법사는 천명 만명이 모여도 거대마법을 발현할 수 없고, 교수 급 마법사는 서른명이 모여야 거대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데, 대마법사는 지 혼자서 한다고.
그렇기에 근 60 년 간 대마법사는 오직 한명 ‘데마칸’ 뿐이었던 것이라고.
이제 백살이 넘었을 그는 8번 문제도 힐끗 보는 것만으로 헤치울 수 있겠지.
“······.” 실비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떴다.
해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그 아리송한 현상을 마법적으로 헤아리던 실비아는 곧 크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잠든 거였다.
“······!” 실비아는 급히 달려 마탑으로 돌아와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4 시.
일요일 자정까지 딱 31 시간 59 분 남았다.
실비아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마력과 마법사 전용 펜을 휘갈겼다.
십수(十數) 마법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시험 문제.
실비아는 그 연결을 차근차근 해체·독립한 뒤 분석했다.
이렇게 만든 마법진이 무엇으로 변할 지 전혀 모르는 채, 감히 예상도 하지 못한 채, 초고도로 집중하며 정진했다.
째깍째깍째깍── 자기 혼자 배속된 듯 움직이는 시계.
그 동안 실비아의 마력은, 물경 일만에 달하는 그 마력은 끊임없이 소모되며 답안지에 부착되었고, 드디어.
“······열 하나.” 완성된 답안지는 총 열 하나.
그녀는 그 답안지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순서와 결합의 구조도 유심히 살폈다.
마법 종이에 각인된 마법진 하나, 둘, 셋, 넷······ 그렇게 열 하나의 핵심이 완벽히 이어지고.
단 한 번의 심호흡.
그녀는 이 마법에, 150 시간에 달하는 노력에,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
답안지에 기록한 마법진과 자신의 영혼이 서로 공명했다.
고오오오오······.
심장을 뒤흔드는 듯한 떨림.
그 찰나에 8 할의 마력이 소모되었고, 시험실의 모습은 일변했다.
“······.” 그녀는 알지 못하는 어떤 풍경이 시험실을 뒤덮었다. 구현된 마법이 벽과 천장 너머로 뻗어나갔다.
이 공간은 순식간에, 세상과 분리되었다.
──지상에는 사이프러스 나무와 밀밭이 한데 모여 일렁이고, 하늘에는 휘감기는 듯 선명한 바람과 강렬한 별빛이 들끓는다. 도개교가 오가는 소탈한
12 시간······ “!”마을의 풍경에, 채소밭의 언덕과 풍차가 휘도는 정경에, 어디선가 보이는 해바라기의 자태가 아름답다.
이는 데큘레인의 손길로 구현된 공간. 총 열 한 장의 수식을 해결한 젊은 마법사에게 바치는 헌사.
“······.” 실비아가 보기에는······ 눈부신 색채를 품은 그림이었다. 물감이 번지듯 뜨겁게 반짝이는 유화였다.
시리도록 떨리는 예술이었다.
“실비아.” 어디선가, 목소리가 바람처럼 흘러들었다. 실비아는 눈을 크게 뜨고 그곳을 돌아보았다.
마법과 유화의 환상적인 조화, 그 한복판에 데큘레인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흐트러지지 않은 양복의 차림으로, 마법적인 존재인지 의심이 될만큼 완벽하게.
그는 실비아를 보며 말했다.
“축하한다.” ······김우진의 영혼은, 적어도 미술에만큼은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세태와 현실에 휩쓸리면서도 끝끝내 버리지 못한 욕심이었다. ‘그 녀석’이 간직하게 도와준 꿈이었다.
비록 재능이 부족하여 원하던 목적지에는 다다르지 못했고, 결국 구석진 그늘에서 머무르게 되었지만, 그 시절 김우진의 기억은 데큘레인의 특성 「 미적 감각」과 결합되었다.
그토록 바랐던 예술적 재능을 얻게 된 그는, 지구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자신의 머릿 속에 남은 시대의 명화들을 모작하는 데 이르렀다. 그가 간직한 고향의 예술을 마법이라는 환상으로 그려냈다.
별이 빛나는 밤, 사이프러스 나무와 별이 있는 길, 해바라기, 몽마르트 언덕의 채소밭······.
이 그림들의 작가는, 끝없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사람.
결국 그 삶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덧없는 이방인.
죽음과 광기 사이의 고뇌, 그 속에서 가장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피워낸, 빈센트(Vincent)라는 화가.
그의 생애가 남긴, 누구보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화폭은 얼마나 황홀하고 아름다운가.
“······.” 실비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장면은 사라지지 않았다. 열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웠다.
이 전부가 마법이었다.
모든 색이 원소였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들녘은 살아서 움직이는 듯하고, 유화의 한복판에 선 자신은 영혼의 떨림을 느낀다.
떨림은 곧 울림으로 번진다.
······그때.
“고맙다.” 데큘레인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 실비아는 데큘레인을 돌아보았다. 무엇이 고맙다는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지만, 데큘레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수고했다.”데큘레인 본인의 마력으로는 도저히 재현할 수 없었던, 그럼에도 꼭 한 번은 두 눈으로 보고 싶었던 풍경.
그렇기에 그는 실비아가 고마웠다.
그녀가 어떻게 이해할는지는 모르겠으나, 다행히 자기 나름대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실비아는 다시 돌아서서 마법의 풍경에 몸을 맡겼다. 오래도록 그 바람과 향기와 색감과 움직임과 빛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볼에 흐르는 열기를 느꼈다.
촉촉한 뜨거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잃어버렸던, 단 한 줄기의 눈물이었다.
“······.” 그 눈물을 닦아낸 실비아가 뒤돌아섰을 때.
데큘레인은 이미 떠나가고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돌려주고 싶었는데.
* * * 똑똑— 알렌은 노크와 함께 시험실의 문을 열었다.
커피 단내가 가득한 방에, 이프린은 앉아 있었다.
평범하게 어지러운 방이었다. 노면에 널브러진 그녀의 답안지에는 많은 마법진이 이식되어 있었다.
실비아와 비슷한 과정까지 접근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한 것이었다.
“데뷰탄 이프린.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 움찔 떤 이프린이 고개를 들어 알렌을 보았다.
“아······. 그런가요.”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쓰게 웃었다.
“아쉽네요.” 알렌도 그저 마주보며 웃어주었다. 이프린은 부끄러운 듯 아쉬운 듯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런데 말예요, 조교수님. 이 시험 문제는······.” “아, 네에. 드릴게요. 데큘레인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금고 마법과 함께 새로운 시험지로 보내주라고. 단, 피 한방울이 필요할 거예요.” 7 번까지 푼 사람은 총 4 명이었지만, 11 일을 꽉 채운 것은 오직 두 명 뿐이었다.
이프린은 그 중 한명이었으니 충분히 보상받을 만했다.
“휴우······ 감사합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어난 그녀는 체혈을 했다. 그리고는 필기구, 옷가지, 등등을 모두 챙겨서 시험실 밖으로 나왔다.
알렌은 마탑의 엘리베이터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이프린 씨, 수고 많았어요.” “······알렌 조교수님도, 정말 고마웠어요. 시험지도 감사드려요.” 이프린은 허리를 꾸벅 숙였다. 너무 깊이 숙여서 등에 멘 가방이 정수리 밑으로 흘렀다가 올라왔다.
“헤헤. 괜찮아요.” 30 층으로 다가오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알렌은 웃었다.
“시험지는 사흘이면 도착할 테니, 언제든 보면서 노력하세요. 마법 답안지도 열 장은 동봉해드릴게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다만, 매몰되지는 마세요.” 띵─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지금 배우지 못한 것은, 깨우치지 못한 것은 나중에 다~ 하면 되니까요.
언젠가는 다~ 풀릴 거예요. 하루하루 안 풀린다고 너무 힘들이지 마시고······ 적어도 일주일일주일?” 알렌은 자기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대강 이해는 되었기에, 이프린은 웃으며 끄덕였다.
그렇게 웃는 모습은 밝아 보였다.
“네. 일주일에 한 번 씩, 노력하면서 꼭 풀어볼게요.” “······네에.” 알렌은 왜인지 부러운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잘 있으세요~” 이프린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힐때까지 조교수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나.
띵─!
그 문이 닫혔을 때.
그녀의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어금니에서 피가 흘렀다. 하루 온종일 어금니를 깨물었더니 이가 빠질 지경이었다.
“······하.” 그녀는 엘리베이터 구석에 몸을 묻었다. 그렇게 어깨를 떨다가 엘리베이터의 벽을 주먹으로 때렸다.
띵─!
“흐어아!”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줄 알았다.
그런데 평범하게 문이 열린 거였고, 시간은 이미 자정이 다 되었건만, 25 층에서는 수많은 마법사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적어도 솔다 이상의, 교수 휘하 마법사들이었다. 아니, 노예들이었다.
띵─!
그 엘리베이터는 다시 21 층에서 멈췄고, 띵─!
또 다시 19 층에서 멈췄고, 띵─!
또 또 다시 12 층에서 멈췄고.
띵─!
또 또 또 다시 5 층에서 멈췄다.
엘리베이터는 대략 서른 명의 마법사로 가득차게 되었다.
“와 우리 잠은 언제 자냐 진짜.” “잠깐, 밀지, 마세요, 구석에 사람 있어요······.” “그러니까. 채점 미치겠네 씨.” “아윽······ 밀지마······.” “이거 다 하면 또 컴플레인 올거아냐.” “살려줘······” “어어. 컴플레인 받아들이면 교수가 또 자기 체면 생각 안하냐면서 개지랄할거고······.” 띵─ 이프린은 사람에 거의 찌부되다시피하면서 1 층에 도착했다.
“······흐어.” 튕겨나온 이프린은 빈혈에 가까운 어지러움을 느끼며 마탑을 나왔다.
터덜더덜, 비척비척. 힘 없이 걷던 그녀의 다리는, 그러나 마탑 출구의 문턱에서 굳었다.
그 이상 걸을 수 없었다.
가만히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어, 이피다!” 저 너머, 자신이 얼떨결에 창단했고, 얼떨결에 가입했던 동아리.
그 동아리의 멤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 그 순간을 이프린은 참을 수가 없었다.
볼이 호빵처럼 주욱 불어났다.
가까스로 참았던 둑이 툭- 하고 터진 느낌이었다.
“이피~ 울지 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우리 식당에, 로아호크 멧돼지 준비해뒀어. ” “로아호크······.” 망연히 선 그녀에게 친구들이 먼저 다가왔고, 그녀는 곧 하나의 무리가 되어 걸었다.
“대신 울면 안줘” “······안 울잖니. 내가 언제 울었니?” * * * ······사시사철 찬란했던 황실의 궁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신하들은 흑백의 의관으로 환복했고, 황성의 문은 굳게 닫혔다.
황궁의 드넓은 대전(大殿).
오직 황제만이 걸을 수 있는 중앙의 융단을 사이에 둔 채, 제국의 수호기사를 비롯한 장관, 대관, 관료는 무릎을 꿇고 도열했다.
제국의 황제 크레바임은 본인의 권좌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베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앉은 채 떠나길 원한다─ 는 그의 바람이었다.
대전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 속에서 크레바임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신하와 기사들은 간신히 눈물을 참았으나, 호흡이 끊기는 듯한 울음이 새었다.
황제는 오늘은 버티지 못할 것이고, 그 옥체는 유언대로 소박한 목관에 안치될 것이다.
이제 사흘 동안 황궁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고, 아흐레가 지나면 계승식이 거행될 것이며, 볼모로 잡힌 왕국의 아들 딸과 가문의 당주들은 그곳에 집결할 것이다······.
······황제의 죽음이 머지 않은 이 순간.
황위계승서열 제 1 위 ‘소피엔 예카테르 아우구스 폰 지프레인’은 본인의 내실에서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전하.” 소피엔의 기사 ‘케이론’이 말했다. 소피엔은 늘어진 시선을 그에게로 두었다. 가늘게 좁혀진 눈꺼풀 사이에서 진홍의 동공이 나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폐하라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 “아직 폐하께서는 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소피엔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이미 6 개월도 더 되었느니라.” “······.” 케이론은 말없이 품 속의 서류를 꺼냈다. 교육을 위한 자료였다.
“이번 달의 숙제입니다.” “두어라.” “숙제입니다.” “그대는 매번 짐만 가지고 와. 참 불만스럽게.” “풀어보시지요. 세간에서 유명한 문제입니다.” 황위계승이 확실한 소피엔은 모든 분야에 재능이 뚜렷했다.
검을 쥐면 발할라에 승천할만했고, 책을 쥐면 현자가 될만했고, 마법을 익히면 대마법사에 능히 도전할만했다.
문제는 본인의 게으름이었다.
이미 약관의 나이도 지났건만, 소피엔은 그 어떤 분야에도 정열이라는 것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의 빈틈은 없었다.
또한 정세에 밝았고, 듣는 귀를 지녔다. 섣불리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고, 그 어떤 감정에도 초연했다. 맺고 끊는 것이 확실했고, 사사로운 정을 주지 않았으며, 은원의 구분이 칼보다 날카로웠다.
현 황제인 크레바임보다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잠재력을 지닌─ 그야말로 제왕의 자질.
“흠.” 소피엔은 케이론이 건넨 서류 뭉치를 보았다.
“마법이구나.” “예.” 그리고는 그 마법 뭉탱이의 작성자를 보았다.
“데큘레인 그라한 폰 유크라인?” “아십니까.” “알지. 베르흐트에서 적궤를 옹호한 놈이지 않느냐. 그 때문에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 아니, 이 놈은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렸나? 왜 갑자기 적궤를 옹호하는 것이지.” “······애초부터 평판이 좋은 자는 아니었습니다만.” 케이론이 쓰게 웃었다. 소피엔은 말 없이 문서를 내팽개쳤다.
“그래도 읽어보시지요.” “왜.” “부유섬에서 경매가 붙었는데, 지금은 3 만 엘네입니다.” “왜.” “천장 한정 수량 판매이나, 황실 게오르 공이 소피에르 저하께서 읽으면 좋겠다고 직권으로-” “왜.” “······읽든 말든 맘대로 하십시오.” “왜.” “······.” 소피엔은 소리 없이 웃었다.
“나중에 읽어보마. 한데 왜 크레토에게 주지 않고?” “크레토 저하께서는 이미 직접 경매에 참여하셨습니다.” “하긴. 뭐든 쓸데없이 스스로 하려는 놈이니.” 계승순위 제 2위이자 소피엔의 동생인 크레토. 그는 마법에 애정을 지닌 ‘루미에르’ 등위의 마법사다.
“각설하고, 케이론. 그대는 내가 황위에 오르면 적궤를 어떻게 하길 바라나?
아, 이제 내가 아니라 짐(朕)인가?” 소피엔의 물음에 케이론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소피엔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대는 언제나 말하지. ‘기사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 “‘기사는 말을 아낀다’ 입니다.” “같은 뜻이다. 정치에 관련된 것에만 입을 다물잖나. 아니려면 평소에도 입을 열지 말았어야지. 제 목에 칼이 들어올때는 기가막히게 입을 열더구만.
한 놈도 빠짐 없이.” “······.” 케이론은 그런 소피엔을 바라보았다.
케이론이 생각하기에, 전하의 동공에는 언제나 이기를 초월한 눈빛이 있었다.
그 시선을 누군가는 타고난 위엄과 근엄이라 했으나, 저하가 열 셋이던 시절부터 함께한 케이론에게는 그저, 썩은 동태 눈깔이었다.
둥───── 그때 대전의 북이 울렸다.
케이론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전하, 이제 가셔야 합니다.” “그러지.” 소피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느 누구보다 당당하고 위풍하게 걸었다. 황족으로서 날때부터 지녔던 듯 자연스러운 위엄과 격식이었다.
기사 케이론은 정갈한 걸음으로 전하를 뒤따랐다.
황제. (1) ‘마법사의 부유섬’은 상공 1,500m 높이에서 영원히 부유하는 섬, 오직 마법과 마공학으로 이루어진 커뮤니티.
과장 보태어 “지상의 모든 마법은 부유섬에서 유통된다.”는 말이 있을만큼 선구적고 연구적이지만, 마법사 특유의 개인주의가 극한으로 발현된 독립지구(獨立地區)다.
이 부유섬은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오직 마법사만이 출입 가능하며, 그마저도─마법사의 등위가 모나크 미만일 경우─ 1 천 엘네에 달하는 입장권이 필수다.
그렇게 입장한 유동 인구의 절반 이상은 섬의 중앙에 핵처럼 자리한 ‘메지세이온’ 주변부에서 활동한다.
‘메지세이온’을 쉽게 표현하면, 대륙이 멸망하더라도 한 세기만에 재건이 가능할 정도의 방대한 마법과 지식이 저장된 방주다.
부유섬의 작자들은 어딘가 광적인 면이 있어서 세상 모든 마법을 기록하고 모으려 하는데, 그 기질이 가장 긍정적인 방향으로 응집된 기관.
난다 긴다 하는 마법사들이 바라는 최고의 영예 중 하나는, 그 ‘메지세이온’의 최고위층인 ‘셀’에 본인의 이름을 딴 마법 하나 새기는 것이라 하는데······.
지금, 그 메지세이온의 지상층 [ VIP 학술 경매실 ]에서는 경매가 한창이다.
“현재 총 1,205 명이 3 만 5 천 엘네에 응찰하였으므로, 3 만 6 천 엘네로 재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부유섬의 경매이니만큼, 판매 물품은 보물 따위가 아닌 문서, 그 중에서도 이번 제국마탑에서 치러진 중간고사 문제인 ‘순수 원소 마법의 이해, 1~8 번’.
“······3 만 7 천 엘네로 재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저작 경매에 참여한 마법사의 숫자는, 원격 포함 자그마치 1 만명.
그러나 마법사들의 경매는 지극히 고요하다. 수다, 고함, 정치 따위의 불필요한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펜이 속삭이는 듯한 소리만 울릴 뿐.
“예. 4 만 엘네에 정확히 1,000 명. 최종 경매 결과는 4 만 엘네입니다.” 데큘레인이 제작했다는 순수 원소 시험 문제는, 그 자체의 완성도와 난이도는 물론, 8 번까지 전부 해결할 경우에 주어진다는 그 예술적인 ‘보답’으로 부유섬 마법사들의 흥미를 이끌었다.
애당초 부유섬이 아니라면 팔리지도 않았을 시험이었다.
“1,000 명은 각자 채혈한 뒤 시험지를 배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채혈을 통하여, 이 시험지는 구매자 본인만 볼 수 있도록 제작된다.
기초적이면서도 삼엄한 보안이며, 아주 기본적인 마법권리 체계다.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마법사 커뮤니티에서는, 심지어 불법 마법사의 소굴인 ‘잿더미’에서도, 이 마법권리는 엄격히 지켜진다.
단, 그 기한은 마법의 등급에 따라 최소 1 개월에서 최대 15 년이다. 당연히 고급 마법·기록물일수록 보호 기간이 길다.
그런 점에서 데큘레인의 시험은, 자그마치 ‘3 년’이라는, 중간고사 기록물 치고는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제 경매를 종료하겠습니다.” 경매는 조용히 끝났다.
끝까지 자리에 남았던 황위계승서열 2 위 ‘크레토’는 만족스레 일어나 낙찰자들의 명단을 보았다.
“오호라. ‘중독자’들 이름도 몇몇 보이네? 이게 그렇게 유명한가?” 크레토는 제 곁의 기사 패스벤더에게 물었다. 그는 마법사가 아니지만 황족의 호위기사로서 부유섬에 입장할 수 있었다.
“요즘에는 그렇다 합니다. 아드린느 공의 발언도 있기도 했고······.” 에테르 등위의 이사장은 분명히 말했다.
‘술식 해석의 천재’라던 그 명성을 오랜만에 다시 보여준 데큘레인의 마지막 문제. 그 8 번 만으로도, 이 문제 그 자체가 예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고.
“또한 기록물의 가치를 판단할 겸 미리 풀어본 중독자 ‘로하스’도 극찬을 했다고 합니다.” 중독자는 메지세이온의 10 층 이상에서 거주하는, 문자 그대로 마법과 숫자에 중독된 자들을 뜻한다.
그들은 마법과 기록물의 가치를 평가하고, 전세계 마법사들의 실적을 조사·관리하며, 가장 중요한 ‘승격 시험’을 관활한다.
“그래? 그렇다면 참 재미있겠구나.” 크레토는 싱글벙글 웃으며 낙찰방으로 이동했다. 마법사 직원이 요구하는 채혈도 황족 특유의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근데, 이걸 내가 풀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저하의 마법적 재능은 훨씬 탁월하십니다.” “그래도, 중간고사 시험지잖아. 나는 데큘레인한테 순수 원소를 배우지 않았어.” “괜찮을 것입니다.” “150 명 중에 만점이 한 명이라는데······ 하긴, 풀든 못 풀든 상관은 없지.” 뭐가 되었든 좋다. 새로운 문제는 언제나 옳으니.
아무리 어려워도 푸는 재미가 있다면 괜찮고, 자신에게 마법적 깨달음을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나는 풀러 가야겠다. 패스벤더, 너는 답안지 좀 준비해줘.” “지금 바로, 말입니까?” 크레토의 말에 패스벤더는 잠시 머뭇거렸다. 크레토는 피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는 나도 알아. 상관없어. 그게 전통이잖아. 어차피 저번 달에 한 번 뵈었으니, 편지만 보내면 돼. 그래야 하고.” 때마침 시험지가 완성되었다. 크레토는 두툼한 문서 뭉치를 받아들고 그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는 언제 맡아도 좋단 말이지.” 그때였다.
복도의 저편에서 어떤 훤칠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명백히 크레토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패스벤더는 본능적으로 그 앞길을 가로막았다.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그런데 양복 태로 드러난 그의 육체는, 웬만한 기사보다 단련되어 있었다.
그가 크레토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족한 문제이나, 황자 저하께서 직접 구매해주시니 무척 영광입니다.
저하께서는 어렵지 않게 풀어보실 수 있을 터인데, 이 경험이 훗날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그 갑작스런 예법은 너무 완벽했고, 자신을 너무 낮추지 않되 황족을 극존하는 성심을 품었으며, 넘칠 듯 가득한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이렇듯 데큘레인의 성격은, 황자처럼 누구나 인정하는 고귀한 핏줄에게는 오히려 역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잠시 당황한 크레토는 고개를 저었다.
“부, 부유섬에서 신분은 없어.” “황족은 아닙니다.” 데큘레인은 나지막이 웃으며 그리 답했다. 크레토가 패스벤더를 바라보았다.
“그런가?” “예. 8 년 전인가, 협의가 되었습니다.” “아하. 그럼.” 험험. 크레토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내 잘 풀어보겠다. ” “예. 감사합니다.” 데큘레인은 그렇게 목례를 한 뒤 떠나갔다.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며 크레토가 중얼거렸다.
“소문보다는 꽤 괜찮은 교수인 것 같은데?” “······보이는 부분만 믿지는 마십시오.” 기사인 패스벤더는 율리와 데큘레인 사이의 그 과거를 알았기에 말을 아꼈다.
* * * 경매를 마치고 마탑으로 돌아온 나는 개인 집무실에 앉아 입금된 대금을 확인했다.
[ 40,000,000 ∃ ] 예상보다 훨씬 많은 4 천만 엘네의 수입.
물량을 많이 풀면 더 벌 수 있다는 건 착각이라는, 차라리 숫자를 한정하여 네이밍 프리미엄을 도모하라는, 예리엘의 조언 덕분이다.
참고로 마법사의 경매에는 세금도 수수료도 없다. 역시 「대부호 재력가」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만······.
마냥 좋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나는 집무실 한켠에 놓인 신문을 쥐었다.
제국 최대 규모의 언론사인 ‘더 저널’의 오늘자 긴급 속보.
한 장 뿐인 신문, 한 줄 뿐인 문장.
[ 제 18 대 황제 크레바임 베디오 유드라 폰 에거스 지프레인 서거 ] 본격적인 분기점이다.
이제 사흘 뒤면 황궁의 문이 열리고, 그때 나는 아마 황궁을 한 번 방문하게 될 것이고, 다시 아흐레가 지나면 계승식이 이어진다.
그 이후에는 수많은 격변이 발생한다.
스토리의 줄기에서 내가 반드시 살려야하는 네임드, 반드시 선점해야 하는 장소가 생겨나고, 여러 법률이 개정되며 크고 작은 사건들이 터진다.
장소와 법률은 내가 예리엘에게 맡겨두면 그 아이가 알아서 할 테니 차치하더라도, 가장 살려야 하는 네임드는······.
‘마호’.
메인 퀘스트에 준하는 독립 스토리를 가진 왕국의 공주.
그녀는 현재 유학이라는 핑계로 제도에 머무르고 있지만, 황제 즉위와 동시에 사망 이벤트가 발동한다. 내가 기사 플레이로 게임 테스트를 하던 시절에 안면(?)이 있는 터라 확실히 안다.
나는 그녀가 죽지 않길 원한다.
키보드와 마우스로 쌓은 사사로운 잔정, 또한 내가 직접 디자인하고 모델링한 캐릭터라는 이유도 물론 있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훗날 커다란 힘이 되어주는 선한 네임드다.
궁금하기도 하다.
그때 게임에서 함께 호위를 수행했던, ‘샤를로트’를 비롯한 기사 동료들과 공주는 현실에서도 그대로일지.
─똑똑 노크가 울렸다. 염동으로 문을 열어주자 역시 알렌이었다.
“교수님. 여기, 강연 섭외가 왔어요!” 알렌은 왜인지 흥분한 얼굴이었다. 고작 강연가지고 왜 저러나 싶었는데, ‘부유섬 강연’이었다.
“부유섬 강연?” “네, 네에! 일주일 쯤 뒤에 시험 문제 관련 강연을 해주셨으면 한대요!” 섭외비는 100 만 엘네, 한화 10 억에 달한다.
물론 4 천만에 비하면 껌값이긴 하나, 알렌의 얼굴이 벌게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부유섬에서의 강연은 마법사로서 어마어마한 명예다.
그 자체가 실적이기도 하고.
[ 이벤트 퀘스트 : 부유섬에서의 강연 ] ◆ 마력 + 30 데큘레인의 성격 탓에 심장이 쿵덕거리는데, 심지어 시스템까지 나를 충동질하네.
이렇듯 ‘이벤트 퀘스트’ 따위는 가끔 마력 스텟을 주기도 한다. 스텟 보상이라 하는데, 보통 장소에 그 종류가 따라 다르다.
부유섬은 마력, 기사단은 체력과 마력 반반, 모험단은 체력 뭐 이런 식이다.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겠다 일러라.” 고작 30 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네!” 알렌은 힘차게 대답했다.
* * * ······황제의 서거 후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사형 집행이 중단되었고, 단기간의 금주령이 시행되었으며, 교육기관 전체가 휴교했다.
축제나 파티 따위는 당연히 미뤄졌고, 도박판과 도둑 길드를 비롯한 음지의 세력도 잠시 몸을 사렸다.
쥐 죽은듯 적막한 제국.
그 중에도 특히나 처연한 황궁의 별채에서, 마호 공주의 호위기사 ‘샤를로트’는 고뇌하고 있었다.
“샤를~ 표정이 왜 그래요?” 공주가 말했다.
비취색의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소녀. 발코니에서 티타임을 즐기는 듯했던 그녀는 어느새 돌아와 샤를로트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공주님.” “그렇게 걱정할 거 없어요. 저도 상황은 다 알거든요~ 첫째 오빠가 지면, 첫째 오빠의 신하들은 다 저를 이용하려 하겠죠? 둘째 오빠가 지면, 둘째 오빠의 신하들이 그럴 거고요.” 마호의 핏줄은 특이했다.
공국계승서열 제 2 위이면서, 레오크 왕국의 계승서열 제 3 위인 왕족 사실 처음 제국으로 유학왔을 때에는 왕위계승서열 5 위였으나, 저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며 자연스레 상승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저 없이 둘이 사생결단으로 싸우자는, 그런 생각이겠죠. 알아요 저도~” 계승이 수월한 제국과 달리 레트란 왕국은 철혈이 도사린다.
마호가 볼모에 가까운 유학을 자청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실제로 제국은 마호 입장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사망한 지금, 타국의 왕죽은 제국에 머무를 수 없다. 당장 소피엔도 이 허울 뿐인 볼모 제도를 원치 않는다.
따라서 마호는 계승식에 얼굴을 비춘 뒤 곧바로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공국에 보냈던 서신의 답장이 도착했습니다” 샤를로트는 대답했다.
마호에게 고향은 사지였다. 레오크 왕국에 가자마자 죽임을 당할 것이 뻔했으니, 샤를로트는 마호를 공국에 위탁할 생각이었다.
“정말? 정말정말? 뭐래요 외할아버지는?” “당연히 가능하다는-” “아, 허락이에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의 습격은 필연적일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제국의 땅까지 군사를 끌고 온다거나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그 국경이 맞닿는 공백지에서는, 훨씬 더 무서운 살수들이 도사릴 테지.
“그럼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좋아요~” 마호는 헤실헤실 웃었다. 그 행복한 얼굴에 샤를로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최대한 호위를 알아보고는 있습니다. 기사나 모험가는 물론 마탑의 마법사들도 섭외하려는 생각입니다.” “저희 돈 없잖아용?” “괜찮습니다.” 마호의 호위기사 단 세 명 뿐이지만, 이런 날을 위하여 준비한 목돈이 있다.
“음······.” 그러자 마호는 고민하는 듯, 특유의 커다란 눈을 깜빡이더니 서랍을 뒤적였다.
“저도 돈이 조금 있어요~ 용돈 모아둔 것들이랑, 보석이랑 많아서-” “아니요. 괜찮습니다” “왜용? 이 여행이 온전한 여행이려면 돈이 많아야 하지 않아용?” “······.” 지극히 옳은 말이었다.
“자 받아요 샤를로트~” 말문이 막힌 샤를로트에게 마호는 자신이 모아두었던 전재산을 주었고, 샤를로트는 그 쌈짓돈을 받아든 채 밖으로 나왔다.
“커흐흐흑······.” 나오자마자 눈물부터 흘렀다. 샤를로트는 복도를 거닐며 문득 창밖을 보았다.
여름의 싱그러움이 온 세상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미 여름이 완연하건만, 왕국은 여전히 겨울이구나······.” 샤를로트는 별채를 나와 황궁 밖으로 난 길을 걸었다.
“어떤 모험단이 좋을지, 참.” 마호와 자신의 전재산을 합치면 천만 엘네 쯤 될 터인데, 그 정도면 모험단에게 호위 임무를 내걸 만하다.공주를 안심시키기 위해 기사단과 마탑도 언급하긴 했으나, 기사들은 정치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었다.
마탑은······ 말해 입아프고.
그렇게 고민하며 걷던 때였다.
저 멀리서, 언젠가 제국대학의 동기가 보였다.
유크라인의 당주 데큘레인.
그는 나흘 전 서거한 황제의 조문을 왔다.
물론 각 가문의 당주들은 황제가 안치된 목관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오직 계승서열 1 위인 소피엔과 그 황후만이 곁에 있을 수 있으나, 조문하는 것 자체가 예법이고 명분이다. 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한 번은 문전박대 당하여 황제에게 그간의 ‘충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오랜만이오.” 샤를로트는 그를 그저 지나치려 했건만, 데큘레인이 먼저 불러세웠다.
샤를로트는 조금 불편한 얼굴로 데큘레인을 보았다.
데큘레인은 왜인지 반가워하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때 모습 그대로다.” “······그때? 대학 시절을 말하는 건가?” “아, 그렇지. 우리 사이에 그런 인연이 있었지.” 데큘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로트는 피식- 입가를 비틀었다.
“자네도 그때 모습 그대로다. 요즘에는 시험 문제를 어렵게 냈다고 구설수에 올랐던데?” “반쯤 옳은 말이다. 구설수가 아니라 찬사를 받았지.
“뭐라?”“4 천만 엘네를 벌었다.” “······.” 샤를로트가 눈을 부릅떴다. 데큘레인은 평온한 투로 말했다.
“자네는 이제 공주와 함께 레오크 왕국으로 돌아가는 건가?” “······.” “아니면 유렌 공국인가.” 그 순간 샤를로트의 미간이 딱딱하게 굳었다.
공주의 처지를 조롱하는 것인가.
그녀는 이를 악문 채 답했다.
“슬픈 날에, 또 오랜만에 만난 사이에, 험한 말이 튀어나오게 하지는 말지.” “받아라.” 데큘레인은 주머니에서 작은 구슬을 꺼냈다. 통신이 가능한 수정구슬이었다.
샤를로트는 받지 않았다.
“······뭐냐.” “사지(死地)를 택한 동기에게 건네는 동앗줄.” “뭐라?” 샤를로트는 당연히 의심했다. 데큘레인은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보았다.
“샤를로트. 우리가 얼만큼 친했지.” “적어도 네가 나를 이름으로 부를 만큼 친하지는 않았다.” “레오크에게는 나도 악감정이 있다.” 데큘레인은 그렇게만 말했다. 미래를 알고 있다, 모니터에서 너를 본 적이 있다 따위의 말은 먹히지 않을 테니.
애당초 게임의 설정 상 레오크는 그리 좋은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구제불능에 가까웠다.
“그러니 그들을 엿먹일 겸 너에게도 동앗줄을 건네는 것 뿐이다.” “꺼져라.” 데큘레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이내 수정구슬을 아무렇게나 떨어트렸다.
“······아직 사람을 가릴만한 여유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고작 사람을 가리려 주군을 지키지 않는 것인지.” 흘러내린 수정구슬은 노면에 통통 튀며 굴렀다.
“네 알아서 해라.” 데큘레인은 샤를로트를 스쳐지났다.
공주의 기사는 그 뒷모습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만 세상 어느 누구보다 당당하게 걷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
그리고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흙바닥에서 나뒹구는 수정구슬.
* * * 그렇게 샤를로트와 안면을 텄다.
그녀가 수정구슬을 활용하든 안하든 어떻게든 살릴 방법은 있지만, 어차피 계승식 이후에 벌어질 일이다.
그러니, 일단 지금은······ “후우- 후우- 후우-” 부유섬의 강연 대기실 안. 내 옆자리의 알렌은 잔뜩 긴장한 채 심호흡을 하고 있다.
나는 그게 어이가 없었다. 강연은 알렌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인데.
“왜 네가 긴장하냐.” “네, 네에? 아······ 죄송합니다 제가······.” 똑똑─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로브 차림의 마법사가 나를 보며 말했다.
“데큘레인 교수님, 강연 준비해주세요.” “그러지.”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법사의 안내를 받아 메지세이온 2 층 강연실의 문 앞에 섰다. 명패가 붙어 있었다.
[ 모나크 등위의 데큘레인 : 순수 원소 마법의 이해 강연 (시험지 지참) ].
“저, 저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언제든, 언제든, 뭔가, 문제가 있다면 불러주세요.” 알렌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강단에 올라서서 이 강연에 참석한 면면을 보았다.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렐린 교수를 비롯한 교수와 부교수는 물론, 심지어 실비아를 비롯한 몇몇 데뷰탄까지, 마탑의 인물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얼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왜인지 불길하게 웃는 사람이 있었다.
이사장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강단에 올랐다.
“반갑습니다.” 황제. (2) “반갑습니다.” 나는 고요한 강단에 올랐다.
“제국황실 대학마탑의 수석교수이자, 원소를 관장하는 ‘모나크’ 등위(等位 )의 마법사 데큘레인입니다.” 언제나 그랬듯 강연의 서두는 내 소개였다.
“강연 주제는 저번 주 경매에 올랐던 순수 원소의 시험이며, 시간은 정확히 두 시간일 터인데.” 강연 내용과 그 구성은 이미 일주일 전부터 준비해두었다.
문제는, 강연이 내 뜻대로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시작하자마자 쿡쿡쿡- 거리며 웃는 이사장이 거슬렸다.
“먼저 문제를 보기 전에 ‘순수 원소’에 대한 간략한 설명부터 하겠습니다.” 강연은 문제 해설의 형식이었지만, 나는 우선 이전의 마탑 수업에서 말했던 내용들을 축약하여 설명했다.
「흐르는 불」, 「뇌운」, 「도깨비불」 등등의 순수 원소를 활용한 짧은 강의였다.
“······그러나 이 ‘순수 원소’들에 목적은 없습니다. 이 원소를 구현하는 마법사의 목적에 따라 그 계열이 나뉠 뿐입니다. 그것을 명확히 인지하여야 합니다.” ‘순수 원소’와 ‘마법의 계열’을 함께 생각하면 머리가 꼬인다.
쉽게 말하면, 양손으로 두 장의 그림을 동시에 그리는 것과 같다. 한 장 한 장 그리면 되는데.
“1~5 번은 제외하고, 6 번 문제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허공에 6 번 문제가 떠올랐다.
6 번은, 세 개의 순수 원소가 조화를 이룬 마법 「혹한의 안개」의 구현이었다.
다만 강연의 핵심은 7 번과 8 번이었기에 나는 적당히 요점만 설명했고, 그렇게 넘어가려 했다.
“질문이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번쩍 손을 들었다.
역시나 이사장이었다.
“질문이요! 질문이요!” 그녀는 무시도 못하게 벌떡 일어나서 꾀꼬리처럼 내질렀다. 나는 잠시 멈추고 이사장을 바라보았다.
“하시지요.” “네! 교수님께서는 ‘순수 원소’와 ‘계열’의 구분을 강조하셨잖아요?!” 이사장은 마력을 방사하여 허공에 마법의 술식을 그렸다.
“그러면 만약, 이 6 번 마법을, 최선의 파괴 계열로 조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이사장의 술식을 「이해력」으로 잠시 들여다보았다.
3 초면 충분했다.
그녀의 마법진에 핵심 회로를 추가했다. 28 획으로 이루어진 「폭발」의 직선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적을 얼리고 또 깨트릴 겁니다.” “······어라? 아······ 네. 그러네요. 오······ 감사.” 이사장은 눈을 깜빡이더니 그 마력을 거두어들이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7 번 문제를 보겠습니다.” 나는 7 번 문제를 띄웠다.
수풍지화의 모든 원소가 동원된 「인공별」.그 해설을 하던 중, 역시나 이사장이 일어났다.
“교수님! 질문이 있습니다!” “······.” “7 번에는 핵심 회로가 2 개나 되더라고요? 그런데 핵심 회로가 2 개 이상이면 마법이 꼬일 수 있지 않을까요?! 제 생각에는······.” 이사장은 마력을 방출하여 7 번 문제의 마법진을 그렸다.
다수의 마법이 결합된 「인공별」이었지만, 내 문제와는 다른 형상이었다.
“이렇게 핵심회로를 하나만 설정하면 더 쉬울 수 있는데, 왜 회로가 꼬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핵심 회로를 2 개로 설정했나요?!” 이사장은 그렇게 물었다. 아마, 본인은 알면서 물었을 것이었다.
나는 잠시 멀거니 이사장을 바라보았다.
히죽거리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나는 이사장이 그린 술식을 마력으로 따라서 그렸다.
“그러나 당신처럼 이 「인공별」에 핵심 회로를 하나만 둘 경우, 마력 소모가 극심합니다.” 이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오히려 핵심 회로가 두개면 마력이 더 심하게 소모될텐데요?! 제가 아는 상식은 그런데요! 하나로도 되는데, 두개를 쓴다? 그건 낭비 아닐까요!” 다른 마법사들도 그렇다- 는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이사장의 말이었으니.
나는 차근차근, 조곤조곤 반박했다.
“예. 일반적으로 맞는 말입니다만, 무조건 옳지는 않습니다. 마법의 특성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이 「인공별」이라는 마법에서, 두 개의 핵심 회로는 ‘술사의 마력’ 뿐만 아니라, ‘마법 자체의 에너지’를 이용하기 위함입니다.” 이사장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7 번 문제의 「인공별」에는 특수한 성질이 있습니다. 두 개의 핵심 회로 중 하나는 ‘순환’이고, 하나는 ‘응집’입니다. 네가지 순수 원소가 마법의 내부에서 순환하고 응집하며 스스로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따라서, 더 적은 마력으로 마법을 더욱 오래 지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 점에서 이사장님이 보여준 술식은 별이 아닙니다. 그저 마력을 방출할 뿐인, 마력 덩어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 이사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 싱글벙글하던 얼굴에 어느덧 그늘이 드리웠다.
“한데······.” 나는 시계를 보았다. 120 분을 약속했는데 벌써 110 분이 지났다.
“질문의 답변에 너무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군요. 8 번 문제에 대한 해설은 따로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모두가 이사장을 바라보았다. 이사장은 아무 말 없이 입술만 비죽거렸다.
“마지막으로, 몇 개의 질문만 받고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서늘한 음색이 울렸다.
“8 번 문제는 본인이 생각한 것이 맞습니까.” 노골적인 의혹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쪽을 보았다. 어떤 로브 차림 마법사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루이나’라는 마법사입니다.”루이나. 그 이름이 익숙하다.
대강 누구인지는 알 것 같았다.
“질문의 뜻을 구체적으로 부탁드립니다.” “문장 그대로입니다. 8 번 문제는 정녕 본인이 생각하였고, 본인이 작성하였는지. 저는 그것이 궁금합니다.” 루이나는 데큘레인의 대척점에서 퀘스트를 주는 마법사. 또한 아마, 데큘레인에 의해 마탑에서 축출되어 왕국으로 밀려난 인재.
데큘레인에 대한 원한은 차고 넘치는 네임드 캐릭터다.
“······아 설마! 누군가 데큘레인 교수 대신, 시험 문제를 작성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대필?!” 이사장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강연실에서 흔치 않은 수군거림이 발생했다.
루이나는 웃었고, 이사장은 말을 이었다.
“그럴리가요! 데큘레인 교수님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저 입을 좀 다물었으면 좋겠다.
“······.” 마법사들은 말없이 눈으로 말했다. 몇몇은 동조하는 듯했고, 몇몇은 의심하는 듯했고, 몇몇은 혹시나 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고민했다.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잖아요 데큘레인 교수님!” 이사장의 그 말에 나는 나지막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아닌 것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순간 숨멎는 듯한 소리가 다수 울렸다.
“······그러나.” 나는 마력을 방사했다. 꾸물거리며 떠오른 마력의 선이 허공에 어떤 술식을 그렸다.
“이 전체는 오롯이 나의 것입니다.” 눈을 감은 채 먼저 풍경을 떠올리고, 그 풍경을 술식으로 해석하며, 알맞은 순수 원소를 화폭처럼 배치한다.
그렇게 구상한 마법의 설계를 공중에, 바깥 세상에 마력으로 방사한다.
이는 「이해력」의 특징이다. 한번 이해한 내용이라면, 훨씬 더 적은 마력으로 재구현이 가능하다.
내가 8 번을 작성하는 데 소모한 마력은 5 만이 넘지만, 지금 비슷한 방식의 마법진을 떠올리는 데에는 3,000 이면 충분하다.
풍경의 술식은 정교하게 그려지며 허공에 떠올랐다. 강당의 모든 마법사가 내 술식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만년필로, 혹은 연필로 끄적이듯 사각거리며 완성된, 마법진 열 하나의 연계.
“즉석에서 제작하였기에 이 문제의 해답은 8 번과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그 답은 여러분들에게 맡기겠습니다. 제가 남기는 숙제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루이나를 보았다.
“대답이 되었나. 루이나 교수.” 아니, 루이나가 있던 자리를 보았다.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강연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나는 교탁에 서서 자료들을 정리했다. 소매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고, 이사장을 보았다.
이사장은 뭔가 뚱한 얼굴이었다.이윽고, 앞자리에 앉아있던 몇몇 젊은 마법사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마법사치고는 흔치 않게 사인을 요청했다.
* * * [ 이벤트 퀘스트 완료 ] ◆ 마력 +30 강연을 마친 나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주차장에 다른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예리엘의 것이었다.
본채에 들어가니 역시 예리엘이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스테이크를 썰던 녀석은 나를 보며 물었다.
“부유섬에서 강연했다면서?” “······.” “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무슨 일 없었어요? 부유섬 마법사들은 마탑 병아리들이랑 차원이 다를 텐데.” “걱정할 것 없다.” “아 쫌. 걱정, 뭐만하면 맨날 걱정한대. 뭐냐고. 그렇게 걱정받고싶나? 나 하나도 걱정 안하는데?” 나는 자연스레 녀석의 앞자리에 앉았다. 시종들이 급히 다가와 음식을 차려주었다.
갑작스런 합석에 예리엘은 당황한 듯했지만, 곧 화제를 돌렸다.
“······4 천만 엘네 벌었다면서요?” “그래. 현금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라. 빌려주마.” “그러면······ 아 잠깐. 빌려줘? 빌려준다고? 빌려준다니?” “그래.” “빌려주는 게 아니라 줘야지! 절반 내놔!” 나는 말없이 고기를 썰었다.
매번 생각하는 건데, 대저택의 요리 수준은 대단히 완벽하다.
하긴 재료가 완벽할 뿐더러, 요리사의 월급도 다른 대저택에 비해 아주 후한 수준이니.
“1 천만 엘네만 받는 걸로 하고······ 또, 저기요. 마탑에서 데뷰탄 MT 를 하데카인에서 하고 싶다네요?” 예리엘이 손가방에서 문서 한 장을 꺼냈다.
[ 제국황실대학마탑 마법학과 MT 계획서 ] 마법사들에게도 MT 는 있다. 평범한 대학생처럼 술을 먹거나 장기자랑을 할는지는 모르지만, 무슨 팀별로 나뉘어서 ‘마법 폭죽 제작’은 필수 코스라 한다.
“······하데카인이라.” 유크라인 영지의 주도, 하데카인.
나도 언젠가 그곳에 방문할 마음은 있었다.
하데카인은 지방 마탑과 지방 기사단을 동시에 보유했고, 워낙 기후가 좋아 현 시점에서도 제도 다음가는 도시였다.
애당초 모델로 삼은 도시부터가 미국의 LA, 그 안에서도 특히 살기 좋은 곳들만 엄선하여 참고했으니.
“예리엘 너는 어떻냐.” “뭐 나는 좋지. 데뷰탄 전부가 대학마탑에 천년 만년 남는 것도 아니고, 도시가 마음에 들어서 우리 마탑으로 올 수도 있잖아요?” 그리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네~” 예리엘은 문서를 손가방에 넣고는 다시 나이프를 들었다. 나는 그런 예리엘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가 말했다.
“나이프를 사용할 때는-” “아, 나 여기서 안먹어.” 거의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지적. 예리엘은 접시를 들고 자기 방으로 도망갔다.
나도 깔끔하게 식사를 마친 뒤 서재로 올라갔다.
“······.” 집무 의자에 앉자마자 증서 한 장을 꺼냈다. 마탑의 후원 증서였다.
후원 대상은 [ 이프린 루나 ].
이번 시험은 물론 내 오리지널리티였지만, 영감은 분명 이프린의 아버지가 주었다. ‘순수 원소로 그림을 그린다—’ 는 발상만큼은 오롯이 그의 것이었다.
따라서 4 천만 엘네 중 일부는 이프린과 루나 가문에 후원하는 것이 옳다.
“쥬할레의 루나.” ‘루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보 파악을 했다.
가엾고 불쌍한 역사였다.
아직 가문으로서 명맥은 이어지고 있었지만, 오래 전부터 살던 저택은 이미 13 년 전에 경매로 넘어갔고, 지금 구성원은 이프린과 그 조부모 뿐이었으니.
나는 그들 가문에게도 10 만 엘네를 동봉한 편지를 작성했다.
* * * ······오늘의 내 정복은 진청색으로 정갈했다. 지팡이도 그에 맞게 깔끔한 색을 갖추었다.
“준비됐어?” 예리엘이 말했다. 나는 그런 예리엘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예리엘은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치려했다.
“뭐. 뭐, 왜.” “가만히 서라.” “······으!” 손이 가까워지자 예리엘은 눈을 꾹 감았다.
나는 그런 예리엘의 옷깃과 소매 등등에 잡힌 주름들을 다잡아주었다.
혹시라도 옷에 붙은 먼지는 염동력으로 죄다 떼어냈다.
깨끗해진 예리엘은 질색하듯 말했다.
“······그거 진짜 병이야.” “따라 나와라.” 나는 밖으로 나갔다.
여름답게 맑고 푸른 날이었다. 주차장에 로이가 대기하고 있었고, 나는 예리엘과 함께 차에 탔다.
오늘, 계승식은 제도의 ‘지프레인 광장’에서 이루어질 것이었다.
“예리엘. 받아라.” 나는 옆자리의 예리엘에게 봉인 마법으로 밀봉된 문서를 건넸다. 예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뭔데?” “차기 황제의 성향을 비롯한 여러 조건들을 분석하여 얻어낸 내 예측이다.”내가 알고 있는 중요한 사건들을 정리한 문서다.
정확히 우리가 이득을 볼 수 있을만한, 또한 퀘스트의 난이도를 낮출 수 있을만한 사항만 적었다.
“허. 무슨 예언자세요?” “받기나 해라.” “어휴.” 예리엘은 한심하다는 듯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문서를 받았다.
“천재 놀이는 이제 좀 그만하지.” 어차피 예언은 처음에만 우스운 법이다. 하나 둘 맞아 떨어질 때부터 이거 뭐야? 하면서 눈을 크게 뜰 테지.
“주인님. 이제 전진할 수 없을 듯합니다.” 무지막지한 인파가 도로를 막았다.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유크라인 가문은 이쪽입니다.” 마침 대기하고 있던 황실의 기사가 우리를 안내해주었다. 우리는 따로 구분된 통로로 걸었다. 걸으면서 곧 계승식이 이루어질 광장을 보았다.
광장의 저편에 기다랗고 널찍한 융단이 깔려 있었다. 인파는 융단을 비워둔 채 서었었고, 융단의 끝에는 드높은 단이 있었다. 황제의 권좌는 그 단의 정상이었다.
“이곳입니다.” 근위병이 안내한 유크라인의 자리는 권좌와 가까운 곳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마호를 비롯한 여러 왕족과, 빌헬름, 길테온, 실비아, 에실린, 베탄, 라간 등등······ 내로라 하는 네임드가 넘칠 듯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나는 어떤 사람을 바라보았다.
율리.
내 시선을 느낀 그녀는 목례로 받아주었다. 그녀는 꽤 피곤한 얼굴이었다.
다크 서클이 너무 짙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으나, 누군가와 인사를 나눌 상황은 못 되었다.
둥─────!
북이 울렸다. 황제 계승의 서막을 알리는 나팔과 국악이 그 뒤를 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황실의 마차가 등장했고, 신민들의 환호가 천지를 흔들었다.
웅대하고 화려한 마차는 융단의 시작점에서 멈추었다.
서서히 잦아드는 환호와 국악.
그 속에서 마차의 문이 열렸다. 곱게 뻗은 다리가 먼저 지상을 내딛었다.
소피엔 예카테르 아우구스 폰 예거스 지프레인.
타오르는 듯한 붉은 장발과 칼날처럼 날카로운 제왕의 이목구비, 그러나 나른하게 가라앉은 두 눈.
그녀는 황제가 될 인물이었다.
소피엔은 황제만이 걸을 수 있는 그 길을 위풍하게 걸었다. 그녀가 걸을때마다 광장의 만민이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조아렸다.
이윽고, 소피엔은 스스로 단에 올랐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황제의 권좌는 서서히 가까워지고, 권좌의 곁에는 선황의 황후이자 그녀의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다.
소피엔은 권좌에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후는 눈물을 참으며 금관을 소피엔의 머리에 얹어주었다.
둥────!
둥────!
둥────!
북이 연달아 울렸다.
그렇게 소피엔은 황제가 되어 권좌에 앉았다.
만인을 굽어보는 자리에서, 그 누구보다 고귀한 지위에서, 소피엔은 세상을 훑어보았다. 만인지상의 황제는 왜인지 권태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황제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가 품은 권태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원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삶을 알고 있었다.
황제라는 인물의 설정은······.
황제가 시선을 비틀었다. 문득 나를 바라본 것이었다.
그 시선의 마주침은 찰나였고, 나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내리 꽂히는 듯한 그녀의 시선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황제는 아직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논공회. (1) 황제 계승식은─지극히 소피엔의 입장에서─ 심심하게 마무리 되었다.
사실 습격을 기대했었다. 폭격이나 거대마법 따위의.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없었고, 소피엔은 무사히 황제의 내실에 입성했다.
시체나 병자의 냄새가 배었을 줄 알았더니 의외로 깔끔하고 향기로웠다.
그러나 영 무료하여 곧장 집무실로 돌아와 체스판을 꺼냈다. 혼자서 이것 저것 하다 보니 대관과 대신들이 여러 문서를 가지고 왔다.
소피엔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돌아갈 때까지 체스만 두다가 말했다.
“일전에 네가 주었던 숙제의 주인을 보았다. 놈은 마치 나를 아는 듯했지.” “폐하를 모르는 분이 있겠습니까.” 대답은 케이론의 목소리였다.
물론, 이 대륙에 소피엔을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표면적인 뜻이 아니었다.
“놈의 에고는 짐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소피엔은 분명 데큘레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 속에 숨겨진 감정을 헤아릴 수 없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그렇습니까.” “그게 웃겼다. 오랜만에 동류를 만난 것 같아서.” 자신과는 다른 의미로 단단하고 굳건한 영혼. 목에 칼이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을 기개. 그야말로, 속세를 초월한 자아.
“숙제는 풀어보셨습니까.” 케이론은 화제를 전환했다.
“풀어보았느니라. 재미있더군. 왜 게오르가 나에게 내어주었는지 알겠다. 그 문제를 풀었던 하루는, 적어도 반나절은, 나름 새로웠느니라.” 소피엔은 케이론의 화술에 넘어가주었다.
그러나 곧바로 말했다.
“케이론. 나는 ‘마릭’의 제한을 풀 것이다.” “······.” 케이론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마릭’은 제국 북서부의 마석광산지대를 일컫는 지명이나, 그 내부에는 마기가 들끓고 악마와 마수가 다수 출몰하여 현재는 출입이 엄금된 상태다.
선황제(先皇帝) 크레바임의 명이었다.
“개방 초기에는 모험가, 혹은 허가 받은 마탑의 마법사와 그 호위기사만이 입장하도록 할 것이다.” “······.” “의논은 필요 없느니라. 빌어먹을 책상머리 놈들의 말은 지긋지긋하다.” “악마가 태동할 수도 있습니다.” “고작 광산 하나에 진입한다고 악마가 태동한다면, 그간 악마는 왜 잠자코 있었느냐. 또한 악마와 마수에 끝이 없겠느냐? 쳐죽이다보면 정화될 것이다.” 케이론은 말을 아꼈다. 소피엔은 여전히 체스판을 바라보며 물었다.
“크레토는 뭘 하고 있다더냐.” “······울고 계신다 합니다.” “울어?” “예. 폐하와 같은 문제를, 방금 풀었다 하십니다. 무엇을 깨달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소피엔은 픽 웃었다.
“병신같은 놈······ 아, 케이론 너는 그 문제의 답이 무엇인지 모르겠지.” “예.” 그제서야 소피엔의 시선이 케이론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짓궂게 웃었다.
“안 알려줄 것이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나조차도 조금은 놀랄만한 것이었느니라. 이리 말하니 궁금하지?” “······괜찮습니다. 궁금하지 않습니다.” “궁금하지 않다면서 눈썹이 꿈틀거리는구나. 내 눈은 속일수 없느니라. 너는 지금 무지 궁금해하고 있어.”케이론은 입을 다물었다.
바로 다음 순간, 분위기가 돌변했다. 소피엔은 눈을 날카롭게 치뜨더니 짓씹듯 말했다.
“케이론, 짐 앞에서 거짓을 말하지 말라. 아무리 너라도 나를 화나게 하는 짓은 용납하지 않아.” 제왕의 압박은 무시무시한 기세가 되어 어깨를 짓눌렀다. 케이론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되었다. 빌어먹을 체스나 두지. 혼자는 지겹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더라도 상대가 필요해.” * * * 한편, 하데카인의 인적이 드문 산.
가네샤는 암석에 앉은 채 다도해에서 건너온 세 아이를 바라보았다. 각각 리아, 레오, 칼로스라는 이름의 아이였다.
“······대륙의 사람 중 일부는 ‘마력적 재능’이라는 것을 타고난단다.
자격증을 취득한 대부분의 모험가들은 그러한 마력적 재능을 지니고 있지.” 한창 가르침을 떠들고 있었으나, 그 태도는 제각각이었다.
리아는 크게 뜬 눈으로 집중했고, 레오는 저 멀리서 움직이는 동물들을 보았으며, 칼로스는 졸았다.
“예를 들어서, 나는 이렇단다.” 가네샤는 잠도 깨울 겸 기다란 나뭇가지를 들었다. 부서질 듯 메마른 가지였다.
“보렴.” 가볍게 쥐고 휘둘렀다.
부웅- 떠오른 나뭇가지의 늘어지고 나약한 끄트머리가, 툭- 하고 노면에 닿았다.
─────!
지축을 진동시키는 굉음. 거대한 충격이 폭발하며 흙먼지가 휘몰아쳤다.
“우아!” “오.” 레오와 칼로스는 그제서야 집중했다.
“어때?” 가네샤가 두드린 노면에는 크레이터가 패여 있었다. 리아는 멍하니 감탄했다.
“대단해요 가네샤······.” “그렇게 감탄할 건 아니지만, 나는 이런 가벼운 나뭇가지도 내 사지의 연장처럼 쓸 수 있단다. 그러니까, ‘진짜 연장’이지. 지금 이 나무와 내 주먹의 강도는 같아.” 「만류귀종(萬流歸宗)」과 「금강불괴(金剛不壞)」의 조화.
그녀가 손에 쥔 모든─생명이 아닌─ 물체는 그녀의 육체와 동일한 강도를 지닌다.
“근데 어차피 이거 쓰면 재미 없어서 그냥 맨손으로 싸워. 그래도 대부분은 이기지만······ 아무튼. 마법사들은 이걸 무슨 ‘조화 마법’이라고 해석하고, 기사들은 ‘검기’라 하지만, 나는 마법이든 검술이든 한 줄기도 몰라.” “그럼, 그럼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단 거야?!” 레오의 말이었다. 푸른 머리카락의, 140cm 를 가까스로 넘긴 듯 귀여운 아이였다. 가네샤가 풋 웃고 말했다.
“지금부터 그걸 알아 볼 거란다?” “어떻게, 어떻게?!” “시끄러 너 좀. 왜 방방 뛰어.” 비슷한 체격의 칼로스가 레오의 뒤통수를 후렸다.
악! 비명을 지른 레오는 두 눈에 눈물이 고여서 칼로스를 노려보았다.
“조용조용! 너네는 왜 대륙에 와서도 변하질 않니?” 가네샤가 타일렀다. 리아도 나서서 두 사람을 떼어냈다. 씩씩거리던 레오는 한숨으로 화를 삭였다.
“각설하고. 너희의 마력적 재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훈련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말보다는 행동이지. 다들 나를 따라오렴.” 가네샤는 산 속으로 걸었다. 걷는 듯하던 가네샤는 어느새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오직 발자국만이 남았다.
세 아이는 눈만 깜빡거리다가 곧 그 뒤를 따랐다. 그러던 중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레오의 뱃고동이었다.
“······리아. 배고프지 않아?” “너는 멍청이라서 만날 배고프지.” 레오의 푸념에 칼로스가 타박했다. 레오가 발끈했다.
“아니거든?” “맞거든.” “······둘 다, 이상한 말 하지 말고 따라와.” 리아는 그들의 투닥거림을 중재했다. 레오가 말했다.
“칼로스가 먼저 시비걸었어. 방금도 나 먼저 때렸고.” “네가 멍청한말을 하잖아.” “언제! 내가 언제!” “은즈~ 느그은즈~” “따라하지마!” “아우, 참내 진짜!” 결국 참다 못한 리아가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는 두 친척 남동생의 귀를 붙잡았다.
“너네, 계속 싸우면 진짜 간식 안 줘. 밥도 안 줘. 아무 것도 안 줄거야.” “······.” “······.” 둘은 입을 다물었지만, 서로 눈빛으로 너 때문이잖아- 하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리아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보모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이래서 내가 혼자 오고 싶었어······.” 리아는 입술을 앙 다물고 두 아이를 놓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가네샤의 흔적을 쫓아 달렸다.
“아, 리아 미안! 미안해! 기다려!” “리아! 같이가! 유리아─!”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두 아이는 다급히 유리아를 뒤따랐다.
* * * 유크라인의 저택, 별채.
나는 한손으로 철봉을 쥐었다. 다른 한손은 허공에 머물렀고, 그 상태에서 몸 전체를 천장으로 세웠다.
물구나무 서듯이. 30 분 동안.
쿵─ 노면에 착지하자마자 두 번째 수련을 시작했다.[ 에르트랑의 무술서, 중급편 ] 주먹을 뻗으며 스텝을 밟는다. 에르트랑의 교본대로 경쾌하고 기민한 발놀림.
한 치의 버벅임도 없는 탄력적인 무브.
그렇게 한참 동안 난리 부르스를 떨다가, 이번에는 ‘봉’을 쥐었다.
요즘은 ‘봉술’도 대강은 배우고 있었다.
물론 성격 상 지팡이로 누군가를 가격하는 행위는 꺼려지지만, 아니 가능하다면 영원히 하고 싶지 않지만, 언젠가는 처절하고 급박한 상황이 오기 마련이다.
“······.” 그 순간을 대비한 봉술 훈련까지 마친 뒤.
마지막으로 금고 안의 「설화석」을 확인했다.
「 이해도 : 4% 」 꾸준히 「이해」를 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
설화석에 1,000 정도의 마력을 투자하고 몸을 씻었다.
─똑똑 마침 시간이 된 듯 로이가 노크했다.
나는 옷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갔다.
“로이.” “예.” “어떤 하녀의 어머니가 아프다고 들었다.” “······예. 루리입니다.” 본채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 들으라는 건지는 몰라도 자연스럽게 들렸다.
나는 수표를 끊어서 로이에게 주었다.
“이것으로 해결하라 일러라. 또한, 앞으로도 이런 경우가 생기면 네가 알아서 지원하도록.” 시종들에게는 기본 이상의 복지를 보장할 생각이었다. 로이는 의외인 듯했지만, 어떤 내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수표를 받았다.
“알겠습니다. 차량은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수고했다.” 나는 곧장 차에 올랐다.
오늘 마탑의 업무는 논문 공청회. 뒷좌석에서 관련 문서를 훑어보았다.
“논공회······.” 대충 아무렇게나 자리만 채우면 되겠지.
저번에 실비아가 소설책을 꺼냈다. 그렇게 책을 읽다 보니 금세 마탑에 도착했다.
황제 서거 이후로, 마탑은 물론 대학교 전체가 휴교했었기에 꽤 오랜만의 출근이었다.
“도착했습니다.” “편히 쉬어라.” “예!” 나는 차에서 내려 마탑으로 들어갔다. 곧장 교수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공청회는 마탑 7 층의 홀이었다.
띵─ 문이 열리자, 마침 엘리베이터 근처에 서있던 렐린이 먼저 다가왔다.
“어이쿠, 하하. 수석교수님, 오셨습니까.”나는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 반갑지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렐린의 불순한 움직임이 포착되었으니.
아마 틈이 나면 ‘루이나’에게로 갈아타려는 생각이었겠지.
“가시겠습니까?” “그러시오.” 나는 렐린의 안내를 받아 논공회장에 들어갔다.
“하하하.” 논공회장은 총 세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다.
심사를 하는 교수의 자리.
논문을 구현하는 마법사의 단상.
그 뒤의 관람석.
나는 교수의 자리에 앉았다. 직함이 수석교수인만큼 역시 상석이었다. 부담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렐린 교수, 오늘 유심히 볼 사람이 있소?” “아하하~ 여기 있습니다. 하하하.” 렐린은 아까부터 자꾸 웃고만 있었다.
나는 렐린이 건네준 명부를 보았다. 오늘 논공회의 심사 대상은 총 23 명이었다.
“이들이 작성한 논문은 따로 있소?” “아, 혹시 안 읽어 보셨습니까?” “미리 읽을 필요가 있나. 어차피 지금 읽어도 이해할 텐데.”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러려고 오늘 마법 훈련도 설렁설렁 했으니.
“하, 하하하하 그럼요! 수, 술식 해석의 천재 데큘레인 수석교수님이시니······” 렐린은 조교수를 시켜 논문을 가지고 왔다.
“여깄습니다.” 나는 그 논문 뭉탱이를 대충 뒤적였다.
어차피 논공회 참석명단에는 내가 가르친 녀석이 없으니, 대충 교수들의 발언에 동조하기만 할 생각······ 이었는데.
“······.” 어떤 논문이 내 시선을 잡아 끌었다.
아니,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 솔다 드렌트 : 자연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는 원소 마법과 계열 ] 마법에는 성격이 있다. 그렇기에 같은 마법일지라도 그 발현의 양상이 술자에 따라 천양지차로 다른 것이다.
이를 ‘기풍’이라고도 하는데, 이 기풍은 마치 술사의 지문처럼 남는다.
특유의 개성은 비단 마법의 구현 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논문 한 자락’에 새겨진 술식과 회로에도 깃든다.
물론 그 지문을 맨눈으로 구분하기는 힘들다. 내 「이해력」이 아니라면.
······그러나, 이 논문은 희미한 지문 이상이었다.
나는 논문에 서술된 아이디어를 이미 어딘가에서 보았다. 정확히는 내가 강의생들에게 내주었던 과제를 평가하면서 보았다.
확실했다.
이 아이디어는 이프린의 것이었다.
물론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그 전후사정은 모른다.
원래의 데큘레인이었다면 이프린의 과제 따위는 보지도 않았을 테고, 이프린은 자기 과제가 도둑질 당한 것도 모른 채 살아갔을 테지.
혹은, 더 억울하게, 자신이 도둑으로 몰렸을 수도.
이 드렌트라는 놈도 그 공백을 노렸을 것이다.
······뭐가 되었든.
지금부터 알아보면 될 일이다.
“드렌트라 했나.” 나는 「이해력」으로 논문을 정독했다.
논문의 표절이야 데큘레인도 엇비슷한 짓을 하긴 했지만, 어차피 이전의 데큘레인은 내가 아닐 뿐더러, 그따위 보다도 나는 감히 ‘내 수업의 과제’를 건드렸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번 보도록 하지······.” 그러므로 질문을 생각했다.
이 아이디어의 원작자라면, 당연히 대답할 수 있는 수많은 질문들을.
* * * ─곧 논공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착석하여 주십시오.
이프린은 논공회에 참석했다. 굳이 오지 않아도 되었지만, 과정이 어떤지는 한 번 보고 싶었다. 당장 줄리아가 같이 가자며 부탁하기도 했고.
“와. 넓다 진짜~” “그러게.” 논공회장은 넓었고 사람도 꽤 많았는데, 맨 앞자리에 어떤 노란 뒤통수가 보였다.
실비아였다.
“······쟤도 왔구나.”“누구?” “저기.” 실비아는 다소곳이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 그러게? 실비아도 여기 왔네? 근데 쟤는 여기서도 공부를 하고 있냐.
대단하다 대단해.” 때마침 데큘레인이 등장했다. 데큘레인은 상석에 앉자마자 렐린 교수에게 논문을 받았다. 실비아는 어느새 책을 덮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프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숙하여 주십시오. 첫 번째 순서는 3 년차 마법사, 솔다 드렌트입니다.
처음부터 드렌트였다.
줄리아는 눈을 빛냈고, 이프린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좋니?” “응? 조, 좋다니 무슨. 뭔 소리래. 그냥, 착한 선배니까 잘 됐으면 좋겠다~ 뭐 이런 거지.” 드렌트는 무대에 섰다. 그리고는 자신의 논문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더니 바로 마법을 발현했다.
“······자그마한 조정 만으로, 바다 속에서도 이 「화염구」가 발동하도록 하는 게 가능합니다. 일단은 「보호 화염구」입니다만.” 이프린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그 진행을 보려고 노력했으나, 워낙 자리가 좋지 않았던 터라 목소리만 들렸다.
나름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듯했다.
“드렌트. 이번 논문을 작성하면서 주제를 조금 바꿨다던데, 그 이유가 있었구나.” 레트란 교수의 말이었다. 그는 나지막이 웃으며 드렌트를 칭찬했다. 드렌트도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드렌트. 혹시, 어느 교수의 휘하에 들어갈지 결정은 했느냐.” “예? 아하하. 아직입니다만, 누구든지 저는 영광일 것입니다.” “교수끼리 경쟁하라 그말이냐? 건방지구나.” 다른 교수들도 훈훈한 말을 거들었다. 줄리아는 물개박수를 치면서 이프린의 어깨를 흔들었다.
“잘 됐나봐~” “그러게?” 그런데 이프린은 뭔가 위화감이 있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드렌트의 말을 얼핏 들었을 때는, 그 논문의 주제가 자신의 과제와 조금 비슷했던 것 같았다.
우연이겠지?
“헉. 데큘레인이다.” 순간 줄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이프린도 다시 시선을 집중했다.
마지막은, 수석교수 데큘레인이었다.
“솔다 드렌트.” “예!” “이 논문의 아이디어는 자네의 것인가.” 데큘레인은 가타부타 그렇게 물었다. 드렌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데큘레인은 가만히 드렌트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납처럼 무겁고 차가웠다.
“다시 묻지. 이건 어느 누구와의 의논, 참고도 없이 개발한 자네 고유의 아이디어인가.” “예. 확실합니다!” 드렌트는 힘차게 대답했다. 그는 지금, 데큘레인의 말을 찬사로 착각하고 있었다.
데큘레인이 말했다.
“내 평가를 바라나.” “예!” 그 순간 이프린은 등골에 오르는 오한을 느꼈지만······.
드렌트는 속으로 우습게 생각했다.
데큘레인 당신이 나를 어떻게 극찬한다 하여도, 내가 당신의 휘하로 들어갈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조교수가 한 명 밖에 없는 당신이 절박한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의 노예가 되는 것은 한사코 사양······.
“좋다. 지금부터 질문을 하겠다.” 데큘레인이 한 손에 쥔 논문을 들었다.
“드렌트 너는 자연과 지형에 따른 원소 마법의 변화를 말하면서, 마법이 일정할 수 있는 방법을 서술했지. 그렇다면.” 그리고는 마력으로 술식을 방사했다. 정상적인 구조는 아니었다. 마법진은 원이 아니라 타원에 가까웠다.
“자. 이 술식은 어떤 자연에서 발현되었기에 이리 찌그러지게 되었지?
정확히 술식의 13.7%가 손상되었다.” “예? 아······ 그것은······.” “13.7%다. 이 수치에서 뭔가 알 수 없겠나.”“······ “모르나? 모른다면, 이리 찌그러진 술식은 어찌 해야 발현할 수 있을까.
대략적인 방법이라도 말해다오.” 13.7%. 찌그러진 술식. 대략적인 방법.
드렌트로서는 머리가 꼬이는 듯한 파상공세였으나, 질문은 이 하나가 끝이 아니었다.
데큘레인의 질문은 대단히 연쇄적이었다.
논공회. (2) ······중간고사 1 주일 전.
줄리아의 과제를 도와주던 그때.
드렌트는 동아리실 책상에 놓인 이프린의 과제가 신경쓰였다.
애당초 줄리아의 과제를 도와준 것부터가 혹시 모를 영감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간 논문 구성에 슬럼프 수준의 난조를 겪고 있었으니.
그러나 줄리아의 논문은 그리 참고할만한 것이 못 되었고, 그녀가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프린의 과제를 보았다.
그 순간 뇌리에 번지는 충격을 느꼈다.
평민의 것으로 남기에는 너무 과분한 아이디어였다. 어차피 한낱 과제 따위로 낭비될 기록이었다.
드렌트는 결국, 이프린의 발상을 자신의 영감으로 삼았다.
······그러나.
“모르는 듯하니 넘어가겠다. 조금 더 쉬운 부분에서 묻지. 방금 자네가 발현한 마법, 「보호 화염구」······.” 데큘레인은 드렌트가 방금 발현한 「보호 화염구」를 구현했다. 단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자신보다 훨씬 농밀한 화염이었다.
“이 마법이 정말 바다 속에서, 어느 고도, 어느 지하에서도 뒤틀리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나.” “예, 예. 그렇습니다.” 드렌트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논문을 완벽히 체득할 시간은 부족했지만, 어느 정도의 지식은 있었으니······.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보호 화염구」의 술식이 이러할진데.” 드렌트가 논물에 서술했던 화염구의 술식이 허공에 떠올랐다. 데큘레인은 그 마법진의 핵심을 짚었다.
“이 술식의 어느 회로가 ‘보호’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어······ 그것은······.” 드렌트의 말문이 막혔다. 데큘레인은 그저 잠자코 드렌트를 응시했다. 그 적막은 칼바람처럼 일대를 휘몰았다.
“······.” 아무리 기다려도 드렌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윽고, 데큘레인의 서늘한 음색이 내려앉았다.
“나는 이 논문으로 파생되는 수백가지의 질문을 할 수 있다.” 한심하게 노려보는 시선. 경멸로 뒤틀린 입매.
데큘레인은 깔아뭉개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너는 그 중 몇 가지에도 대답하지 못하는구나. 그런 것을 네 논문이라 할 수 있겠나.” 드렌트는 이를 악물었다. 화가 울컥 치밀었다. 무어라 외치려던 드렌트의 입을, 데큘레인은 단 한 마디로 막았다.
“무엇보다도, 네가 범한 최악의 우는 남겨두겠다.” “······!” 데큘레인이 한 손으로 논문을 쥐었다.
“다시 도전해라. 스스로의 힘으로.” 화르륵······ 논문에 불이 붙었다. 두터웠던 논문은 곧 새카만 재로 사위어서 흩날렸다.
관객석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실비아조차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드렌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햇다.
그저 탄식처럼 헛웃음이 새었다.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데큘레인은, 알고 있었다.
그 전부를 알고 있었다.
드렌트는 뚜벅뚜벅 걸어서 무대 밖으로 나갔다.
마법사가 떠나간 홀은 침묵 뿐이었다.
“아니 미친, 저러면 누가 대답해.” 줄리아가 분개한 투로 속삭였다. 이프린도 비슷한 마음이었지만, 뭔가, 뭔가 기묘했다.
─두, 두 번째 마법사입니다.
사회자도 당황한 듯 말을 버벅였다.
공청회에는 아직 스물 두 명의 마법사가 남아 있었다.
─정숙하여 주십시오. 두 번째 순서는 4 년차 마법사, 솔다 말론입니다.
다음 마법사가 등장했다.
이미 겁먹은 그는 하얗게 질려서 몸을 떨었다. 가능만 하다면 다음으로 무르고 싶은 심정이겠지.
“소, 소, 솔다, 솔다 등위의 ‘말론’입니다······ 제, 제가 작성한 논문은······.” 마법사 말론은 곧 자신의 논문에 대해 설명했고, 이번에도 데큘레인은 경청한 뒤 질문을 했다.
논문의 핵심만 콕콕 짚는 말이었다.
“예. 제가, 그 마법을 조작 계열로 설정한 이유는······.” 말론은 더듬거리면서도 답변에 성공했다. 그러자 데큘레인은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되었다.” 직전의 논문이 불타버린 것을 가까이에서 보았던 그는, 천만다행인 심정이 되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 * * 논공회가 끝나자마자 나는 집무실로 올라왔다.
똑똑─.
알렌의 노크였다. 녀석은 한 손에 웬 문서를 움켜쥐고 들어왔다. 세상 해맑은 얼굴이었다.
“교수님! 이번에 제가 엄선을 해봤습니다.” “엄선?” “네에. 교수님 휘하에 오길 원하는 마법사들입니다.” “······놓고 돌아가라.” “네!” 알렌은 책상에 문서를 놓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 종이를 훑어보았다.
“클로엔······ 그로안······.” 특출난 자도 없었고, 이름난 자도 없었다. 죄다 내가 거두지 않으면 대학마탑에 남지 못할 녀석들 뿐이었다.
“노동자로 쓰라는 건가.” 명부를 내팽개친 그때였다.
우우웅─ 품 속에서 작은 진동이 일었다.
수정구슬이었다.
구슬에 마력을 불어넣자 통신이 연결되며 음성이 건너왔다.
─거기 있나.
“말해라, 동기.” ─······.
샤를로트는 침묵했다. 꽤 오랫동안 고민을 하는 듯했다.
─하······.
착잡한 숨결을 내신 뒤, 메마르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이제 떠나야 한다. 시간이 없다.
“알겠다.” 나는 곧바로 지도를 꺼냈다. 확실한 경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조사해두었다.
“내 뜻대로 따를 수 있겠나.” ─뜻이 무엇이지.
“크레바스 협곡을 건널 것이다.” ─······진심인가?
‘크레바스 협곡’은 마기가 들끓는 험지다. 또한 그 어느 나라의 소유도 아닌 버려진 길목이다.
극도로 험악하고 위험하며, 세간에는 공포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협곡이지만, 샤를로트의 활로는 그곳뿐이다.
“유렌 공국으로 향하는 지름길이지. 누구도 소유하고 있지 않아 레오크가 외교적인 분쟁을 일으킬 껀덕지도 없다.” ─알고는 있다. 나도 고려는 해보았으나- “내가 직접 안내한다.” ─······.
크레바스 협곡은 하데카인과 그리 멀지 않다. 말을 타고 3~4 시간이면 닿을 거리다.
마침 내가 마법사 MT 의 결정권자이기도 하니, 결행일과 MT 를 겹치게 설정하면, 시간 낭비 없이 무사히 주파할 수 있을 터.
─네가 직접?
“그렇다.” ─······내 레오크 왕국이 베르흐트에서 너를 습격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습격의 배후가 레오크 왕국이었나?
한데 샤를로트가 아는 정보를 내가 몰랐다니. 확실히, 정보망은 새로이 구축하여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그 습격이, 네가 직접 움직일만큼 가증스러웠던 것이냐.
“샤를로트.” ─뭐냐.
“나는 무척이나 정치적인 사람이다. 또한 지능이든 통찰이든, 어느 무엇이든 너보다는 훨씬 뛰어날 테지.” ─뭐라고? 자뻑이- “나는 너의 공주가 살아 내 가문과 영지의 이익이 되길 바란다.” ─······.
“호의가 아닌 거래다. 그 저울에 왜 사사로운 감정을 얹으려 하지. 너는 그리도 어리석은가.” 나는 샤를로트의 캐묻는 듯한 어조가 거슬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좋은 답변이었는지, 샤를로트는 조금 더 확신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다. 공주 님께서는 네가 임무를 수행한다면, 어떤 호의든 베푸실 것이다.
“거래 성립인가.” ─접선은, 크레바스의 입구에서?
“맞다. 그곳까지도 오지 못한다면 살아남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지.” ─알겠다. 나도 네 능력이 그 주둥이만큼 확실하길 바라지.
통신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시험할 기회인가.” 물론, 크레바스 협곡은 위험한 지역이기는 하다. 마굴, 혹은 던전에 가까울 정도로 마기가 진하고, 악마도 심심하면 출몰하니.
그러나.
내 혈통에 주어진 「유크라인」이라는 특성.
──「유크라인」──◆ 등급 :혈통 ◆ 설명 :마의 처단에 위력을 발하는 혈통.
:악마를 상대하거나, 대기 중에 마기가 농도가 짙을 경우, 일대의 마기를 본인의 마력으로 정화하여 사용할 수 있다.
:그렇게 정화된 마력은 그 질(質)이 [ 1 단계 ]만큼 상승한다.
────── 이 혈통은 악마의 기운, 즉 정제되지 않은 마기를 에너지원으로 역이용한다.
마기가 가득하여 본래의 인간이라면 숨 쉬는 것도 힘든 공간에서, 내 마력의 제약은 오히려 해제되는 것이다.
따라서 크레바스 따위의 마기가 넘치는 지형은, 유크라인 일족에게는 홈 그라운드나 다름 없다.
“······경로는 정확히 기억한다.” 그러므로 크레바스 협곡은 확실히 옳은 방법일 것이었다. 나도 게임에서 이렇게 클리어를 했으니.
아마, 샤를로트도 마음 한 구석에는 크레바스를 염두해두고 있었겠지.
똑똑─ 그때였다. 노크와 함께 곧바로 문이 열렸다.
문을 부술듯이 밀고 들어오는 그 거대한 몸은, 예상 밖의 자이트였다.
“데큘레인 교수!” “······자이트 공. 무슨 일이십니까?” “오늘, 저녁이나 같이 하지!” 자이트는 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세 시.
저녁을 먹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일 텐데.
“아~ 아무렴 한 달에 한 번은 식사를 주선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일세. 자네 요즘, 율리를 도통 만나지 않는다지? 우리는 미리 가서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 자네는 율리를 데리고 오면 되네!” 그렇게 뇌까리는 자이트의 시선과 목소리에는 어떤 ‘의심’이 서려 있었다.
체격은 곰같아서는, 여우같은 눈치였다.
* * * 오후 6 시.
율리는 저택에서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의 식사는 자이트가 강권했기에 어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오늘부터 매달 올라오며 네 진척을 감시할 것이다─ 던 자이트의 그 말.
율리는 한숨을 내쉬며 경갑과 망토를 입었다. 그리고 거울로 자신을 보았다.
“······.” 얼굴에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요즘 그녀는 베론 사건에 대한 조사는 물론, 황제 서거 이후의 격무도 겹치면서, 하루에 채 한 시간도 쉬지 않았다.
그런 나날이 자그마치 2 주가 넘었다.
뒷조사나 도둑 길드, 심지어 모험단 의뢰도 원하지 않는 그녀였기에, 혼자서 그 모든 부하(負荷)를 짊어진 것이었다.
똑똑─ 노크와 함께 시종이 말했다 ─주인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율리는 밖으로 나갔다.
말을 타고 가려 했는데, 웬걸.
저택의 저편에서 반짝이는 차 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늘게 좁힌 눈으로 보니 역시 데큘레인이었다.
율리가 다가가자 그 창문이 열렸다.
“타지.” “혹시 자이트 당주님께서 이리 하라-” “그가 너와 내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 “······.” “타라.” 율리는 우물쭈물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들에게 다녀오겠다 말한 뒤 차에 올랐다.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그 안에서 두 사람은 잠시 어색했다. 율리는 혹시 약속했던 한달이 벌써 지났나- 고민했고, 데큘레인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기나긴 고요를 깨트리는 어떤 말 한마디.
“······아직도 그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나.” “······.” 율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데큘레인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다. 네 몸 상하면서-” “괜찮습니다.”율리는 단호하게 잘라냈다. 명백한 거부였다.
데큘레인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고요했다.
고급 차량은 말끔하게 닦인 도로를 조용히 나아갔다.
평온했고, 편안했다.
“율리. 너는 참 답답하다.” 그러던 무렵, 데큘레인은 스치듯 한마디 말을 건넸다.
“······.”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은 없었다. 데큘레인은 고개를 비스듬이 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 율리는 눈을 감고 있었다.
허리는 올곧게 섰고, 두 손은 무릎 위에 다소곳이 놓였다.
그 바른 자세로, 그간의 피로를 이겨내지 못한 채, 그녀는 잠에 든 것이었다.
데큘레인은 피식 웃고 그 얼굴을 보았다.
규칙적으로 내뱉는 숨결이 고왔다. 흔들린 머리카락이 입가에 들어가려 하기에 손을 뻗어 걷어주었다.
뭔가 아쉬워 그 볼도 살짝 꼬집어보았다. 부드러웠다.
이리저리 흔들자 그녀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데큘레인은 서류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머릿속에는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지만 페이지만 넘겼다. 그렇게 있다가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도착하려면 반나절 쯤 걸릴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운전기사의 똑똑한 운전 덕분에 자동차는 같은 도로를 빙빙 돌았고, 8 시가 되었다.
이미 약속 시간인 7 시는 오래 전에 지났다.
편안히 책을 읽다가, 율리를 보다가, 책을 읽다가, 시계를 보니 벌써 9 시였다.
놀랄만한 속도였다.
오늘의 시간은 마치 토막이라도 난 듯 뚝뚝 끊겼다.
그러다 마침내, 오후 10 시가 되었을 때.
“······우음.” 율리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잠이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밖의 풍경에 화들짝 놀라 용수철처럼 흠칫 튀었다.
“······!” “일어났나.” “밤, 밤이······.” “이미 늦었다.” 창문에 달라붙은 그녀에게 데큘레인이 말했다. 그는 회중시계를 꺼냈고, 동시에 차가 멈췄다.
운전기사는 잠시 차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10 시 30 분. 식사는 이미 끝나도 오래 전에 끝났겠지. 약속을 어긴 적은 처음인데.” “왜, 왜 깨우지 않으시고······.” “어차피 어색한 식사보다는, 함께 자리를 비우는 것이, 의심을 지우는 용도로는 더 적합하니까.” “······.” 율리는 그게 무슨 말인지 헤아리다가 얼굴이 발그레 붉어지고 말았다.
데큘레인은 그런 율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사뭇 진지한 눈이었다.
“율리.” “······예.” “생각해보건데, 우리 계약에 기한이 생겨버린 듯하다.” 율리의 큰 눈이 사슴처럼 되었다.
“자이트가 의심하고 있으니, 아마 1 년을 넘기지는 못할 것이다. 너는 그 1 년 내에 수호 기사가 되어야 한다. 너는 내년에야 서른이니, 제국 역사상 최연소가 되어야 하지.” 데큘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자느라 흐트러진 율리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
율리는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 손길보다도, 목소리에 담긴 데큘레인의 감정이 진했다.
“그 기한 내에 수호기사가 되지 못한다면, 어거지로라도 결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 “그러니, 한 곳에 머물러있지 마라.” 율리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눈을 마주했다. 할 말이 있었지만 잠시 단어를 궁리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여태 자신이 의아했던 것들을 물었다.
“왜, 저에게 그런 감정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 “저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많습니다. 저처럼 검을 쥐어서 손이 못생기지 않고, 저처럼 답답하지 않고, 저처럼 고지식하지 않은 여인이 많을 것입니다.” 데큘레인은 말없이 시선을 창밖에 두었다. 그 푸른 눈에 달빛이 담겼다.
“······율리.” 그는 마치 웃듯이 말했다.
“신이 점지한 운명이라느니, 점성이라느니 하는 것들을 나는 지극히 혐오한다.” “······.” “하지만 가끔씩, 거스를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존재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리 말하는 데큘레인은 하늘의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게 너다.” 율리는 그의 뜻을 이해했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이었다.
예전의 데큘레인은 이러지 않았을 터인데.
“······그렇습니까.” 그는 어떤 일을 겪었기에 이리 달라진 것일까.
데큘레인은 다시 말했다.
“그러니 내가 예전의 나로 돌아가지 않도록, 나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는 것이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로울 것이다.” 데큘레인이 몸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뭔가를 하려는 줄 알았다. 흠칫 놀라 온몸이 굳었고, 저도 모르게 반격 자세를 취했다.
덜컥─ 데큘레인은 그저 문을 열어주었을 뿐이었다.“오늘은 편히 쉬어라. 식사에 불참하게 되었지만, 함께 있었다 하면 자이트도 좋아할 것이다.” “······.” 율리는 그런 데큘레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내려라.” “······예. 안녕히 가십시오.”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렸다.
맑은 바람이 불었다. 얼마만큼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어두웠고, 마음은 잔잔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의 저택이 보였다.
“아, 끝나셨습니까.” 데큘레인의 운전기사가 다시 차에 올랐다.
차는 곧 엔진음을 내며 출발했다. 율리는 자동차의 뒷유리에 비치는 그를 잠시 지켜보다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아, 주인님 오셨어요?!” 거실의 시종들이 그녀를 맞이했다. 율리는 시종에게 격을 두지 않았다.
하여, 작게 웃으며 말했다.
“배고프구나. 저녁을 좀 해다오.” “아, 네! 알겠습니다!” 시종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가 저택에서 식사를 요청한 것은 근 2 주 만에 처음이었으므로, 최선을 다해 요리를 했다.
그날 밤.
율리는 맛있는 밥을 먹었고, 단잠을 잤다. 오랜만에 업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웠다.
문득, 그의 말이 귓가에 떠올랐다.
‘하지만 가끔씩, 거스를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존재함을 느낄 때가 있다······.’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
“조금만 더 돌까요.” 운전기사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라.” “예.” 한숨이 흘렀다. 피식- 헛웃음도 새었다.
나는 오늘, 율리를 멀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녀의 모든 면을 사랑하게 될 것이었으므로.
물론, 그 멀어지는 과정이 힘들 것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율리는 반드시 수호기사가 되어야만 한다. 율리 본인이 직접 나에게서 멀어지도록······.
“도착했습니다.” “수고했다.” 나는 저택에서 내렸다.
정원을 걷는 길, 관목의 가지 위에.
어떤 매 한마리가 나를 보고 있었다.
하데카인. (1) 제국의 남측 외곽을 따라서 출렁이는 도툰 산맥.
그 울창한 수풀의 오르막에서, 샤를로트는 마호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다.
“······마나는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지만, 체내에 쌓이는 ‘마력의 질’과 ‘마력의 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 중에서 ‘마력의 질’은 이론적으로 정확히 10 등급으로 나뉩니다만.” 황궁에서 나온 공주는 궁금한 것이 많았기에, 샤를로트는 성의껏 설명해주었다.
“예를 들어, 평범한 사람은 9~10 등급이고, 거기서 조금 더 나으면 8 등급입니다. 7 등급 이상부터는 기사든 마법사든 도전할만합니다.
6 등급이라면, 본인의 배경과 노력 여하에 따라 마법 교수, 혹은 ‘대적(對敵 )의 기사’까지는 될 만하지요.” “아하~ 그렇구나! 신기해요 신기해요~ 그러면요, 그러면요 그 등급은 어떻게 측정해요? 저도 제 마력의 질을 알 수 있는 거예요?” 이틀 밤낮을 쉬지도 않고 걸었다. 그럼에도 생기를 잃지 않은 마호를 위하여, 샤를로트는 작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직 그 등급을 명확히 파악할 방법은 발명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고수 간의 직감으로, 그마저도 검을 섞어서 아는 것이지요. 다만 5 등급부터는 그 숫자가 극히 드물고, 4 등급과 3 등급은 이미 대륙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와 우와. 4 등급과 3 등급이 그 정도면, 1 등급은요?” “1 등급은 사실 구색입니다. 굳이 있다면 신(神)이겠지요. 2 등급도 제가 알기로는······.” 베르흐트의 ‘드제크단’과 제국의 수호기사 ‘게프리드’.
대마법사 ‘데마칸’과 제국마탑의 이사장 ‘아드린느’.
“이 네 명이 고작입니다.” “우와아······. 저도 다 아는 이름 뿐이네요오······ 참. 데큘레인 교수님은요?!” “글쎄요. 그 놈은 4~5 등급 쯤 되겠지요.” ──기실 데큘레인의 초기 ‘마력의 질’은 6 등급이었으나, 이제는 샤를로트의 말처럼 5 등급으로 성장했다.
“아무튼. 이제, 조금만 더 힘내십시오.” “네!” 험준한 산길을 공주는 열심히 뒤따랐다.
겉보기에는 인형처럼 작고 아름다워서 무지 걱정했었는데. 혼자서 몰래 운동이라도 열심히 하신 걸까.
샤를로트는 대견한 미소를 지었다.
“1 차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네. 샤를로트도 힘내요 힘!” 샤를로트와 마호는 그렇게 걸었으나, 그녀의 부하 기사 ‘론’과 ‘게더’는 다소 못미더운 얼굴이었다.
론은 공주가 듣지 못하도록 자그맣게 속삭였다.
─대장님. 아무리 그래도, 그 데큘레인을 믿고 크레바스를 택하는 것은······.
─이미 결정한 일이다. 달리 활로가 없어. 또한, 놈들도 크레바스는 생각도 못한 게 분명하다. 오는 길에 습격 한 번 없었잖냐.
─그렇긴 합니다만······.
론이 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때였다.
휘이이익─!
어디선가 단검이 날아들었다. 샤를로트는 공주부터 안아들고 강기를 방사했다.
검을 빼어든 론과 게더가 말했다.
“······대장! 먼저 가십시오! 뒤따르겠습니다!”“이쪽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알 수 없는 곳에서 비수가 솟구쳤으나, 산봉우리에서 쇄도한 다수의 화살이 그것들을 요격했다.
전재산으로 고용한 ‘모험단’의 지원이었다.
그들은 공주의 원거리 호위를 맡았다.
“믿겠다! 살아 돌아오도록! 명령이다!” ““예!”” 후방은 그들에게 맡긴 채, 샤를로트는 미호와 함께 전력으로 질주했다.
* * * 풍요로운 마음과 화려한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 하데카인.
사시사철 온화한 기후, 놀거리와 먹거리로 정평이 난 그 유크라인의 주도(州 都)가, 마법학과 데뷰탄들의 MT 장소로 확정되었다.
“도대체 역은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놨을까······.” 이동수단은 기차였지만, 이프린은 역에서부터 헤맸다.
기차를 탄 경험이 살면서 단 한 번. 일레이드의 쥬할레에서 제도로 상경하는 그 편도가 끝이었으니.
“이피, 여기!” “······휴. 길 잃을 뻔했네.” 다행히 동아리 멤버들이 먼저 이프린을 찾았다.
이프린은 그들과 함께 기차에 올랐다.
기차 하나를 통째로 빌린 듯, 내부는 온통 로브 차림 뿐이었다.
“와 근데 진짜 MT 로 하데카인을 다 가네.” “그니까. 방학 때나 한번 가보려고 했는데.” 줄리아를 비롯한 부원들은 무척 기대하는 눈치였다. 대륙지리에 문외한인 이프린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데카인이 그렇게 좋니?” “아 당연하지. 이피 한 번도 안 가봤어? 마탑 뿐만 아니라, 대학의 거의 모든 과에서 매년, 진짜 거의 매년 부탁했다고 들었거든? 근데 그 논문 방화범이 빠꾸놨대.” “왜?” 참고로 ‘논문 방화범’은 데큘레인의 별명이었다.
그 외에도 화형 집행자, 화귀(火鬼) 등등, 논공회 사건 덕에 온갖 무서운 이명은 다 붙었고, 데큘레인은 탑내 마법사들에게 공포 그 자체가 되었다.
정작 드렌트는 ‘오히려 나는 그 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다니지만.
“그건 모르지. 아무튼 하데카인은, 놀 거 많고 엄청 좋아.” “······아. 그래서 애들이 막 옷사러 간다 뭐한다 그랬던 거구나.” “그치. 하데카인은 선남선녀 뿐이래.” 하긴, 데큘레인도 외모만큼은 마탑에서도 견줄 사람이 없으니. 대학교 전체를 통틀어도 기사학과의 라웨인 말고는······.
이프린이 물었다.
“그럼, 데큘레인 교수도 같이 가는 거니?” “응. 안 갈 줄 알았는데, 같이 간다네? 그 논문 방화범, 이 기차에도 타고 있어······.” ······한편.
데큘레인은 VIP 칸에서 각 학과의 교수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보조학과 렐린, 정령학과 레트란, 파괴학과 시아레, 연성학과 카멜 등등······.
본디 데뷰탄 MT 에 이리 많은 교수가 참석하지는 않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다들 슬그머니 동행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모두 데큘레인의 눈치를 살폈다.
“자네들.” 잠자코 있던 데큘레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교수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했다.
“일전에, 마도회에 참석하였다 들었소.” “······.” 침묵 뿐이었다.
“대답 안하시오?” “예, 아. 하하하······ 예. 그, 그렇지만 뭐, 별 얘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별 얘기를 하지 않은 것 같지가 않다만.” 렐린이 어이구 어이구-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뒤흔들었다. 다른 교수들도 그저 웃음을 지었다.
“그럴리가요. 이번에, 그 환상적이었던 데큘레인 수석교수님의 중간고사에 대한 담론 뿐이었습니다.” “······하하. 그렇습니다.” “맞아요 맞아요.” 각각 렐린, 레트란, 시아레의 말이었다.
그들의 아양에도 데큘레인은 여전히 살벌했다.
“지금이야 그저 웃으며 넘어갈 수 있을 터이나.” 그 음색은 피부를 할퀴는 겨울바람처럼 삭막했다.
“언젠가 선택해야 할 시간이 올 것이오.” 루이나는 데큘레인에 비해 부드럽고, 기량도 탁월하다. 루이나의 가문과 그 뒷배도, 유크라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비빌 수는 있다.
그러므로 교수들은 당연히 루이나를 선호하지만······.
“······사실,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웃기는 착각이지. ” 데큘레인은 다른 교수들을 휘둘러보았다. 서슬이 담긴 시선은 이미 그 자체로 교수 몇 명을 찔러 죽였다.
“확실히 말하지. 당신들에게는, ‘선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이오.” 세상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교수들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을 느끼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치지지지직─ 기차는 출발했고, 데큘레인은 교수들을 얼어붙게 한 채 자기 혼자 책을 읽었다.
* * * 하데카인의 풍경은 맑았다.
여름임에도 그리 덥지 않았고, 바람의 냄새가 마음에 들었다.
거리에는 활기가 가득했고,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면면에 미소가 있었다.
척 보아도 ‘살기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도시.
MT 장소는 그 하데카인 근교의 [ 하데카인 로망스 ]라는 고급 호텔이었다.
근처에 냇가와 산림을 비롯한 자연이 있어서 알맞았다.
“······데뷰탄들은 4 인 1 실이다. 혼자가 좋다면 사비로 객실을 예약해도 무방하다. 과대?” 나는 호텔 로비에서 주의 사항을 설명한 뒤 과대를 불렀다. 제 1 마법학과와 제 2 마법학과의 과대 두 명이 부랴부랴 나왔다.
“이후로는 너희 재량에 맡긴다. 뒤편에 숲이 있다만, 무엇이든 할 때는 보조 마법을 확실히 한 뒤에 해라.” “예!” 술을 부어서 마시든. 마시다 죽든 상관하지 않는다. MT 의 묘미는 그것이니.
단, 인명 피해는 없어야 한다.
“짐부터 풀어라.” 데뷰탄들이 도란도란 떠들며 객실로 올라가는 가운데, 나는 호텔 밖으로 나왔다. 마침 차 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예리엘이었다.
“우리 마탑에 얼굴이라도 비췄다 가. 요즘 당신 인지도 높아졌더라.” 차에 오르자마자 예리엘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맞췄어?” “······.” “······어떻게 맞췄어요?” “뭘 말이냐.” 예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마릭’이 개방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잖아요.” “현 황제의 성정과 여러 제반, 정세를 총체적으로 고려한 예측이었다.” “······뭐래. 아무튼 그러면, 마릭이 우리에게 손해가 될 것도 알았겠네?” “아니.” 마릭 개방은 결과적으로 이득이 될 일이다.다만, 확실한 방비가 필요하다.
“그 대처법도 적어 놓았을 텐데.” “그러고 싶은데요~ 돈이 너무 많이 들거든요~ 누가 2 억이나 써버려서요~” 예리엘은 비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말했다.
“곧 골동품들을 하나씩 되팔 것이다. 어마어마한 이득이 될 테니, 2 억은 올해 안에 돌려줄 수 있어.” 사실, 이 세상을 TRPG 처럼 따지면 나에게는 마력이 ‘턴(Turn)’이다.
굳이 「미다스의 손」 작업에 매달리지 않는 것도 그 이유다.
「미다스의 손」에 4 천의 마력을 소모하면, 여타 마법 수련이나 메모라이즈를 할 수가 없으니.
단, 지금부터는 조금 다르다.
본격적으로 돈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그건 그렇고, 천만은 왜 안줘요?” 예리엘은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꿍얼거렸다.
“얼른 주라고 천만엘네.” “······저번에 갔던 유물 감정점을 기억하나” “꽃병 팔았던 곳?” “그 감정점을 곧 인수할 생각이다.” “아니, 무슨. 아오······.” 그러자 예리엘은 거의 질색하듯 온몸을 흔들었다.
“체통이 없다.” “됐거든요. 주먹이 운다 울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탑에 도착했다.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연스레 고개를 위로 꺾었다.
“······규모가 꽤 커졌군.” 전대륙에 단 9개소 뿐인 대학마탑.
그 최소 조건은 70 층일 터인데.
하데카인의 ‘유크라인 마탑’은 눈대중으로도 70 층을 넘길 듯하다.
“계속 발전했으니까 당연하지.” 나는 예리엘과 함께 마탑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에서부터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마탑장 디게릭입니다.” 디게릭은 젊은 남자였다.
「대부호 재력가」로 보았을 때에도 합격이었다.
“반갑다.” 나는 그와 악수를 한 뒤 마탑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대학마탑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 따라가려 노력한 듯 시설이 좋았다.
예리엘이 자랑하며 말했다.
“우리는 특화 마법 개발 연구도 지원해요. 지방 마탑 중에서는 아마 우리랑 일레이드 뿐일 걸?” 다른 8 계열과 구분되며, 제 9계열이라 불리는 특화 마법은 일명 ‘시그니처 마법’이다.
마법사 개인이 발명하면 그 마법사의 이름을 따고, 마탑 전체가 함께 개발하면 마탑의 이름이 붙는다.그런데 이 특화 마법의 연구에는 어마어마한 재원이 소모된다.
마법의 구상이나 아이디어 따위는 마법사의 두뇌만으로도 가능하지만, 그 증명과 실험에 어마어마한 마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계열이 가장 어울릴 지, 특정 상황에서 갑자기 술식이 폭발하지는 않을 지, 혹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술자에게 피해를 입히지는 않을 지, 그 전부를 마석으로 실험하는 것이다.
“예리엘.” “응?” “되었으니 마굿간으로 가지. 말이 필요하다.” “벌써? 아니, 뭐 상관은 없는데, 그 전에 그······ 당신이 작성한 중간고사 시험지를 마탑에 기부하면 안되나······요? 무상대여 식으로.” 예리엘은 몹시 바라는 듯 깜찍한 눈이 되었다. 나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없다. 다만 이 마탑의 마법사 중, 논문이나 연구 따위를 진행하고 있는 마법사가 있다면, 단 한 명만 첨삭을 해주마. 선물이다.” “그게 어떻게 선물이 돼?” 예리엘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렇게 되물었다.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 나는 여태 따라오던 마법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도 슬그머니 피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순간 화가 치밀었다.
나는 소속 마법사들 중에서 「대부호 재력가」의 눈에 특히 띄는 한 남자를 골랐다. 작고 귀여운, 알렌같은 녀석이었다.
“자네, 이름이 뭐지.” “네, 네? 2 등 마법사 파니엔입니다.” “작성 중인 마법 논문이 있나.” “네? 아, 네 있긴 있습-” “자네 논문을 첨삭해주지. 영광으로 생각하도록.” “아뇨, 아뇨 저는······.” 파니엔은 사양했지만 어거지로 뺏었다.
울려 하길래 울지 말라고 했다.
* * * 나는 유크라인 영주성 뒤편의 초원, 말목장에 왔다.
풀밭을 뛰노는 준마들이 많았다. 어느 정도 방목을 하는 형식인 듯했다.
“예전에는 말을 육성하는 게 큰 사업이었다는데, 요즘 자동차가 많이 발달해서······. 우리 종마 엄청 좋은데 말이야.” 예리엘이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낮게 웃었다.
“계속 노력해라. 말은 차와 다른 장점이 있으니.” 특정한 장비를 갖추기만 하면 던전과 광산에서도 활용이 가능한 말은, 머지 않아 다시 비상할 것이다.
“그럴 거예요. 난 이 녀석들 기르는 게 재밌으니까. 또 예전만큼만 아닌 거지, 아직 쏠쏠하기도 하고.” 턱턱─ 예리엘이 말의 등허리를 몇 번 두드리고 시계를 보았다.
“나는 이제 업무하러 갈 시간이니까, 당신은 아무 녀석이나 데리고 가세요~ ” “예리엘.” 그렇게 떠나가려는 예리엘을 붙잡았다. 예리엘은 정수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나는 품 안에서 고급스러운 상자를 꺼냈다.
“선물이다.” “······?” 명품 장갑이었다.
멍하니 눈만 끔뻑이던 예리엘은 얼굴을 다소 기괴하게 일그러트린 채 그 선물을 받았다.
“이게 무슨 물물교환······ 아, 물물교환? 응, 물물교환이네······.
하긴······. 뭐, 말이 훨씬 더 비싸긴 하겠지만, 알겠어요. 물물교환 성립.” 예리엘은 저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곧장 영주실 안으로 들어갔다. 왜인지 바쁜 발걸음이었다.
“······.” 그 후, 나는 초원을 거닐며 말을 물색했다.
너무 늙은 놈도 안 되고, 너무 어린 놈도 안 된다.
아직 성장 중이면서도 적당히 「대부호 재력가」의 눈에 띄는······ 저 놈.
갈기가 부드럽고 피부에 윤기가 흐르는 적마.
나는 곧바로 다가가 녀석의 등에 올랐다.
승마 경험은 단 한번도 없었거늘, 묘하게 익숙했다. 이 또한 「성격」의 영향이었다.
타그닥 타그닥─ 타그닥 타그닥─ 그렇게 한창 운전을 하다가, ‘이 놈이 맞다’는 생각이 들 즈음.
나는 「미다스의 손」을 준비했다.
물론, 말은 물건이 아닌 생명이다.
그러나 「미다스의 손」은 사용자의 마력을 소모하여 ‘대상’의 잠재력을 개화하는 특성이다. 그 대상은 생명일 수도 있고 무생물일 수도 있다.
당연히 인간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지만, 말은 게임 시스템 상으로도 아이템(펫) 취급이니, 아마도······ 나는 「미다스의 손」을 발동했다. 손끝에서 일어난 푸른 기운이 말에게로 스며들었다.
히히히힝─!
순간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앞발을 세웠다. 나는 놈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고 버텼다.
───「유크라인의 적마*」─── ◆ 정보 :좋은 것만 먹고 자란, 날때부터 타고난 상등마(上等馬).
:「미다스의 손」으로 인하여 전체적인 신체 능력이 격상되었고, 잠재력을 개화했다.
◆ 범주 :펫 ⊃ 탈것 ◆ 펫 특성 :질주 :호흡 *이름 설정이 가능하다.
[ 미다스의 손 : 4레벨 ] ──────── “······역시.”사실, 되는게 당연했다. 안 되는게 이상했고.
만족스레 끄덕인 나는 말의 이름을 ‘적토마(赤兎馬)’로 설정했다. 마침 피부도 적색이니 썩 어울렸다.
아무튼.
이것으로 준비는 되었다.
결행은 내일 새벽 3 시.
그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승마 연습이나 할 겸 나는 말을 몰았다.
이랴!
사극에서 보던 것처럼 외치며 고삐를 당기자, 말은 어마어마한 속도와 탄력으로 내달렸다. 순간 몸이 뒤로 쏠리며 떨어질 뻔했다.
히히히힝─!
적토마라는 위대한 네이밍에 걸맞은 마력(馬力)이었다.
하데카인. (2) ······영주 관저로 돌아온 예리엘은 어린 시절 자신의 일기장 꺼냈다.
낡은 서랍 속, 더러운 먼지에 휘감긴 오래 전 기억.
─오늘은 아침을 먹을 때 혼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오라버니가 말도 걸어주었다.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저녁을 먹다가 나이프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오라버니는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잘못이어서 슬펐다. 이제 오라버니가 혼내지 않아도 스스로 더 잘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어제 못했던 것들은 내일부터 잘할 수 있도록 할게요. 열심히 노력할게요.
─오라버니는 우는걸 싫어하는데, 울면 안되는데 울어버렸다. 왜 울음은 참아지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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