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6
“한데 왜 너는 독단을 벌였지.” “그 또한, 제가 망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놈이 처박은 단검에서 부스러기가 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질 지탱이었다.
“저는 압니다. 제 감정이 그분에게 폐가 된다는 것을. 제 정념의 존재만으로도, 그분에게 부담이 된다는 것을.” 단검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당신만은 반드시 죽여야 했습니다.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제 주군을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론은 확신을 담아 읊조렸다.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다.” 지극히 옳은 말이다.
데큘레인의 뒤틀린 사랑은, 율리로 하여금 그녀의 신념을 깨트리게 했으니.
율리 본인의 손으로 데큘레인을 죽이게 만들었으니.
“또한, 틀린 말이다.” 그러나 나는 데큘레인이 아니므로, 틀린 말이다.
데큘레인의 미래는 내가 바꿀 것이다. 나 스스로 바꿀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기에.
“······믿어라.”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율리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베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한 채 자신의 오른팔을 내밀었다.
마치, 잡아주라는 듯이.
“······.” 나는 그의 팔을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열기가 내 심장을 그을리고 있었다.
의식의 밑바닥에서 타오르는 잿불이었다.
“······베론.”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너를 이리 살린다 하여도······.” 베론. 그가 발하는 살의는 더욱 짙고, 흉포한 화마로 돌변하여 일렁이고 있었다.
“너는 나를 죽일 셈이구나.” 영원히 진화되지 않을 불길.
해소할 수 없고, 달래지지도 않는, 원천적인 증오.
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죽일 것이다.
“······예.” 베론은 솔직했다.
“어차피 저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손 없는 기사는, 그분에게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분의 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데큘레인의 업보이지만.
“저는 남은 손으로 당신을 죽이고 싶습니다.” 동시에, 베론의 어리석음이다 나는 분노를 참으며 읊조렸다.
“······이 아둔하고 우매한 것.” 내 손아귀로 목강철 애장이 날아왔다. 아득 움켜쥔 채 말을 이었다.
“잘 들어라.” 베론은 눈을 감았다.
“나는······ 율리를 사랑하기에.” 쿵─!
기차가 진동했다.
베론의 살의는 여전히, 나를 죽일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는 단검을 뒤흔들었다. 기차를 절벽으로 떨어트리기 위해.
“율리를 놓아줄 것이다.” 이 빌어먹을 놈은 기사가 아니다.
오직 단 한 명의 사람만을 섬기고 우러르는, 숭배하며 추앙하는, 뇌가 돌아버린 광신도.
미친 정신병자.
“그러나 오늘의 네 선택은······.” 뚝, 뚝, 뚝.
수리검을 움켜쥔 손에서 피가 흘렀다. 그 핏방울은 베론의 미간에 닿아 흩어졌다.
“평생토록 율리를 괴롭힐 것이다.” 내 마력은 이미 고갈되었기에, “너는······.” 나는 내 손으로 직접.
너를 죽일 것이었다.
“스스로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 개버러지다.” 손목과 팔의 힘으로 수리검을 투척했다. 화살처럼 격발된 그것이 베론의 목을 꿰뚫었다.
콰직─!
······.
이제, 고요 뿐이었다.
바람조차 잠시 멎었다.
세상의 소리가 소멸된 듯했다. 베론은 조용히, 단검 쥔 손을 놓았다.
그렇게······ 동공의 빛을 잃은 채, 까마득한 절벽으로 추락하여, 마침내.
그의 살의는 소멸되었다.
살의의 소멸이 곧 그의 죽음이었다.
베르흐트. (3) ······매의 시야가 한정적이었기에 그 전말을 모조리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데큘레인은 기사를 죽였고, 기사는 절벽으로 추락했다.
정확히는 호위 기사가 먼저 데큘레인을 죽이려 들었고, 데큘레인은 정당방위로써 그를 죽였다.
아니, 데큘레인은 분명 기사를 살리려 했으니, 기사가 스스로를 죽인 것이었다.
······그 모든 장면을 실비아는 눈에 담았다. 모든 대화를 귀에 담았다.
실비아는 눈을 감은 채 데큘레인이 선 곳을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단애절벽, 데큘레인은 그 아득한 낭떠러지에 홀로 서있었다. 추락하지 않은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이제, 반나절이면 회의가 시작하는데.
그는 저곳에서 베르흐트까지 올 수 있을까.
그때 데큘레인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흠칫 놀란 실비아는 급히 매를 불러들였다.
어차피 눈보라가 심해지면 이 이상의 관측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매가 다칠지도 모른다.
이 아이는 최초의 피조물이니 오랫동안 아끼면서 데리고 다닐 거다. 마석의 마력이 다하면 충전도 해줄 거다.
“돌아와.” 실비아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떴다.
다시, 베르흐트의 풍경이었다.
“어! 실비아 씨?” 후- 한숨을 내쉬고 돌아서자마자 누군가와 마주치고 말았다.
시리오가 말한 왕국의 사람들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올해의 신인 마법사. 실물로 보게 되니 정말 영광입니다!” “저는 레오크 왕국, ‘주드라’가문의······.” “······.” 그들의 요사스러운 반응이 실비아는 부담스러웠다.
* * * 한편, 특급열차의 선로에는 고위 관료 한 명이 플랫폼 직원들의 경례를 받고 있었다.
“영광입니다, 부국장님!” 치안국 부국장 ‘릴리아 프리미엔’.
그녀는 우연히 북부 산맥 캠핑을 하다가, 우연히 기차 테러 사건을 전해듣고, 치안 부국장으로서 해당 장소에 출동했다.
“폭발과 습격이 있었다?” “예. 베르흐트로 행하는 과정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보상은 뭐, 베르흐트에서 열배 이상 해주겠지요. 별 일은 아닙니다.” 책임자로 보이는 직원이 대답했다. 프리미엔은 절벽 밑을 힐끔거리고 되물었다.
“사망자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데큘레인 교수와 베론이라는 기사가 실종 상태입니다. 자세한 목격담은 저분이······.” 프리미엔은 직원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이름 모를 금발 콧수염 남자와 알렌이었다. 다만 알렌은 선로에 누워서 자는 듯했고, 남자만 떠들고 있었다.
“예. 마법사님과 기사님이 저를 구해주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이미 기차 전부가 아래로 추락해 있었습니다. 아마도 살수들이 2 차 습격을 가한 듯한데······.” 프리미엔은 그쪽으로 다가가 남자의 목에 걸린 카메라를 가리켰다.
“그거, 제가 봐도 되겠습니까.” “예? 아, 예. 그런데, 제가 이걸로 먹고 사는지라-” “금방 돌려드리겠습니다.” “아, 예.” 남자는 카메라의 필름을 즉석에서 현상했다. 그 몇장을 들여다보며 프리미엔은 잠시 말을 잃었다.
“······허어?” 헛웃음이었다.
마법 필름에는 사진을 찍는 순간의 전후 1~2 초가 영상처럼 담긴다.
그 사진 속의 열차는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술자는 당연히 데큘레인이었고, 이러한 마법의 정체는 프리미엔도 알았다.
염동력.
데큘레인은 염동으로 기차를 띄웠다.
아주 태연하게, 그저 책을 읽으며.
흡사 연필 따위를 부리는 듯한 여유로움이었다.
사진을 감상하던 프리미엔은 곧,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어떤 사실을 전달 받았다.
마력 신호가 등허리를 콕콕 찔렀다.
프리미엔은 가만히 서서 그 신호를 해석했다.
[ 기사 베론은 죽었다. ] [ 베론은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은 듯 데큘레인을 죽이려 했지만. ] [ 데큘레인 수석교수는 살아 남았다. ] “······흠.” 프리미엔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기사 베론을 알고 있었다.
그 또한 같은 일족, ‘적궤’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나사가 많이 빠진 놈이었으나, 나름 대견하다 할만했거늘.
씁쓸했다.
동시에 후련했다.
그는 록하크처럼, 언젠가는 반드시 문제를 일으킬 시한폭탄이었으니.
“그 사진 어떻습니까? 참, 제가 찍었지만 대단한 광경이었습니다. 제가 마법 분석가이기도 한데, 감히 제가 데큘레인 교수의 기량을 평가해보자면-” “됐습니다.” 프리미엔이 남자에게 사진을 돌려준 그때였다.
“······어, 어! 귀신이다!” 직원 한 명이 비명을 내질렀다. 프리미엔은 그곳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는 없던 누군가가 선로 위에 올라와 있었다.
한 눈에 알았다.
수석교수, 데큘레인.
그가 올라오는 과정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는 다만 혼자 그곳에 서 있었다. 아무 말없이, 자신이 올라온 절벽을 내려보았다.
······그는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죽어라 익힌 염동력이었건만, 기사의 강기 하나 뚫어내지 못했다.
마력이 부족한 마법사는 이리도 무력하다.
선택과 집중, 그 따위 반푼이의 노력은 타고난 고수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선명한 벽을 느끼고 말았다.
허탈함이 일었다.
그 정체불명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절벽 밑에 처박힐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수석교수님.” 프리미엔은 그런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조교수는 저곳에 무사합니다.” 데큘레인은 선로 위의 알렌을 보았다.
“아무 이상 없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그는 프리미엔을 돌아보았다.
프리미엔은 새삼, 그 얼굴이 빌어먹게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지금이 몇 시인가.” “3 시 30 분입니다.” “······6 시간 남았나.” 그는 회의 참석 가능성을 따지는 듯했다.
그러나 기차 없이 이 절벽을 오르려면, 마법사의 저질 체력을 감안하여 최소한 하루는 걸린다.
“수석교수님. 형식적으로 여쭙는 것입니다만, 함께 있던 호위 기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다.” “습격 때문이었습니까.” 교수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교수님. 혹시, 이 선로를 정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데큘레인은 고개를 비틀어 프리미엔을 내려보았다.
마치 아랫것을 대하는 듯, 귀족 특유의 오만한 시선.
프리미엔은 순간 뭔가가 팍 치밀었지만 억지로 삭였다.
“선로만 정리해주신다면 직권으로 기차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눈보라가 더 심해지기 전에 선로를 정리하면, 정차한 기차를 불러 어떻게든 회의 참석 가능성을 높일 수는 있다.
그말인 즉─ 교수 너에게 이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근데 왜 그딴 눈깔로 나를 노려보는 것이냐. 뽑아 버리고 싶게······.
“걸어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싫다.” 프리미엔은 입을 다물고 혀를 굴렸다.
아무렴, 사람 짜증나게 하는 재주는 타고 난 모양이었다.
“······비켜라.” 그러나 기실, 데큘레인은 이미 온몸이 탈진한 상태였다. 더 이상 마법을 구사할 여력이 없었다.
그 걸레짝이 된 내면에 비해 그 외면의 상태가 너무 완벽했기에, 프리미엔은 착각한 것이었다.
“······예.” 프리미엔은 고개를 작게 숙였다. 그리고 데큘레인 곁에서 벗어나 직원 한 명을 붙잡았다.
“어이. 안 도와주신다니까, 눈이 더 오기 전에 선로나 치워놓아라.” “예. 알겠습니다.” “······한가지만 더 묻지. 베르흐트로 가는 길은 이 열차 뿐인가?” “아뇨. 조금 멀긴 하지만, 반대편에 육로와 해로도 있습니다.” “흠······?”그렇게 직원과 떠들던 프리미엔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없었다.
데큘레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신속화’인가.” 선로를 치우는 것보다, 보조 마법으로 절벽을 달려서 올라가는 것이 낫다는 생각인 듯하다.
하긴, 이 주변에는 바람이 어마어마하니, 원소의 힘을 빌린다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터이나······.
“저 놈은 도대체 마력이 얼마만큼 많은 거냐.” 기량이 상상 이상이다.
아니, ‘보고’와는 전혀 다르다.
염동으로 기차의 탈선을 막고, 수십명의 살수를 격퇴하고, 베론을 상대하여 무찌르고, 절벽에서 무사히 올라오고, 고급 마법에 속하는 ‘신속화’까지······ 마력 용적이 무슨 대양(大洋)인가?
프리미엔은 혀를 찼다.
“끄으응······” 뒤늦게 조교수가 깨어났다. 프리미엔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는 조교수에게 물었다.
“자네, 이름.” “네? 아, 저, 여기는······.” “자네 교수는 이미 떠났다.” “······.” 그러자 알렌은 눈물을 글썽였다. 프리미엔은 미간을 찌푸리고 덧붙였다.
“저승으로 간 게 아니라, 베르흐트 회의로. 그러니, 이름.” “아, 네! 휴우. 네에, 저는, 그 알렌입니다.” 프리미엔은 익숙하게 이름의 철자를 적었다.
그리고, 그 수첩을 보여주었다.
“스펠링은 이게 맞나?”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나이.” “스물 네 살입니다. 그런데 제가 조수라서 얼른 가봐야······.” “넌 어차피 지각이니, 다음 열차를 기다려라.” * * * 현재 시각 오후 9 시 30 분.
베르흐트 회의는 ‘별이 모이는 시간’이라 하는 9 시 53 분에 이루어지므로, 시작까지 고작 23 분이 남은 시점.
실비아는 베르흐트 제 4 관의 길목을 거닐고 있었다.
“······.” 제 4 관의 길은 소문대로 복잡했다. 그 통로가 우측과 좌측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길테온을 비롯한 당주들은 우측으로, 조수들은 좌측으로 이동했다.
혈연일 경우에 발생할 ‘혈액 응집’ 문제 때문이었다.
“실비아 씨, 대학마탑 생활은 어떠세요?” “미팅도 한 번 해보시는게 좋아요. 나름 그것도 견문이거든요.” 그렇게 걷는데, 자꾸만 옆에서 말을 걸었다.실비아는 대강 대답했다.
“네.” 찬란한 불빛에 나방이 모여들듯, 이런 고충은 필연적이고 또 익숙하다.
전도유망을 초월한 ‘대마법사의 자질’이기에 모두가 이리 귀찮게 구는 것이다.
“아 참. 근데 유크라인의 당주는 아직도 안왔다네요.” 실비아가 귀를 쫑긋 세웠다. 왕국의 마도가문 ‘빌리온’의 조수 ‘펜하’였다.
“설마, 만약 그 유크라인이 탈락이라면······ 그 또한 대사건이겠군요.” “대사건이요? 저는 어느 정도 예견되었다고 봐요. 현 당주의 역량이 선조에 비해서 많이 부족하긴 하잖아요. 실적도 3 년 전에 멈췄고. 재능이 별볼일 없다는 소문도 파다하던데요.” 이번에는 왕국이 아니라, 제국 ‘리와인드’ 가문의 조수 ‘제일런’의 말이었다.
실비아는 입술이 근질거렸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범재는 천재를 질투하고,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 데큘레인의 재능은 나에 비해 모자랄 뿐, 너희들에게 무시당할 정도가 아닌데.
“아, 저곳이네요.” 그렇게 떠들며 걷던 그들은 마침내 장로관의 문 앞에 섰다.
장로관은 웅대한 신전이었다. 산봉우리를 통째로 깎아서 건축되었기에, 흡사 고대의 거인(巨人)이 머물렀다는 거처 같기도 했다.
끼이이이익── 그들이 다가서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열 아홉의 조수는 저마다 긴장한 채 그 안으로 입장했다.
드넓은 회의실.
40 명은 커녕, 그 10 배인 400 명이 배석해도 여유로울 그 광활한 원탁에, 열 아홉의 당주는 이미 앉아 있었다.
공석은 오직 하나─ 유크라인의 좌석 뿐.
실비아는 자신을 보며 웃는 길테온의 옆자리에 섰다. 그녀를 귀찮게하던 조수들도 각자 가문의 자리에 섰다.
둥─── 둥─── 둥─── 둥─── 둥─── 그 다섯 번의 진동이 시간을 알렸다.
오후 9 시 50 분.
남은 시간은 3 분.
실비아는 어떤 씁쓸함을 느꼈다.
역시, 안 되는구나.
못 오는구나.
─······회의 시작에 앞서.
돌연 어마어마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뒤흔들었다. 그 응축된 마력, 웅혼한 울림에 실비아의 심장이 철렁였다.
─소집에 응한 그대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상석의 드제크단.
대마법사에 가장 유력한 후보였으나, 스스로 속세를 떠난 전설.
그는 대장로의 권좌에 앉아 있었다. 원탁과 비껴난 장소에 독립되어 존재하는 그 권좌는, 특이하게도 베일에 가려 어두웠다.
드제크단은 가문의 원탁을 볼 수 없었고, 가문의 당주들도 드제크단을 볼 수 없었다.
실비아는 그를 보며 대단한 압박을 느꼈다.
대마법사란, 저런 경지에 이르러야 도전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일까.
······할만하다.
─호명을 시작하겠다.
드제크단의 목소리가 내부를 울린다. 마치 장엄한 북소리처럼, 온몸을 저릿하게 두드리며 번진다.
─일레이드의 길테온.
“베르흐트의 부름을 받은 길테온, 일레이드의 당주가 영광스레 응답합니다.” 길테온은 여유로이 말했다. 아버지의 그 기백이 실비아는 자랑스러웠다.
─베오라드의 베탄.
“베탄, 베오라드의 여섯 번째 당주가 대장로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드제크단은 여러 가문을 호명했고, 주드라, 리와인드, 빌리온 등의 마도가는 각자 가문의 개성을 살린 표어(標語)로써 그의 부름에 응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유크라인의 데큘레인.
드제크단이 그의 이름이 불렸을 때.
장로관에는 유일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데큘레인은 아직 오지 않았나.
어둠 속에서 드제크단은 말했다.
모두, 대답 없이 침을 삼켰다. 알 수 없는 긴장이 그들 의식의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고 있었다.
유크라인의 탈락.
분명 예상 외였지만, 오히려 기대할만한 것이었다.
그간 데큘레인이 다른 가문에 보였던 안하무인의 행위들, 마도가의 명성을 믿고 재수없게 뻗대던 나날들을 생각하면.
데큘레인의 몰락은 이 자리에 모인 거의 모두가 원하는 바였다.
─유크라인의 당주 데큘레인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하니, 세 번 호명할 때까지 도착하지 않는다면, 그는 소집에 불응한 것으로 간주.
원탁을 짓누르는 듯한 드제크단의 엄숙한 위엄.
리와인드의 당주 이헬름은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데큘레인의 친우였던 그는, 이제 그에게 ‘썩은 치즈’라 불리는 원수가 되었다.
─유크라인은 전통의 12 마도가에서 탈락시키도록 하겠다.
그 마력적인 음성이 고고하게 울리며 원탁을 진동했다.
실비아는 장로관의 천장에 놓인 거대한 시계를 보았다.
53 분은 이미 지났다.
─유크라인의 당주 데큘레인.
만약, 이 세 번의 호명이 끝날 때까지 데큘레인이 참석하지 못한다면.
베르흐트 발족 이후, 단 한 번도 전통의 12 가문에서 누락되지 않았던 유크라인은.
200 여년 만에 탈락하게 된다.
마도 명문으로서 이 얼마나 큰 추태인가.
─유크라인의 당주 데큘레인.
실비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몇은 웃음을 참았고, 몇몇은 대놓고 웃었고, 아버지는 무표정이었다.
아무도 걱정해주는 이가 없었다.
실비아가 생각하기에, 데큘레인은 그간 참 인생을 잘못 산 것 같았다.
그게, 안쓰러웠다.
─유크라인의 당주······.
마지막 세 번째 부름이 맺어지려던 바로 그 순간.
끼기기기기긱······.
돌 긁히는 소리가 유독 거칠게 일었다. 크게 놀란 실비아는 그곳을 보았다.
회의실의 대문이 비스듬이 열렸고, 그 틈 사이로 눈보라가 밀려들었다.
─······.
드제크단의 입이 멈추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뒤늦게 입장한 그는 온몸이 눈투성이였다.
양복은 이곳 저곳이 할퀴어졌고,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흡사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괴물처럼. 언제나 깔끔했던 그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야성.
실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대단히 인상적인 등장. 그런 그를 바라보며, 그 누구도 그 어떤 말을 하지 않았다.
─데큘레인, 자네인가.
드제크단이 물었다. 데큘레인은 침묵한 채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그의 푸른눈이 원탁을 응시했다.
웃던 자들은 웃음을 멈추었고, 탈락을 바라던 자들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데큘레인. 대답을 요한다.
드제크단이 재차 말했다.
데큘레인은 뒤늦게 옷을 가다듬었다. 찢어진 수트를 바로잡았고, 눈보라에 젖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넘겼다.
그것만으로 그는 다시, 본래의 데큘레인이 되었다.
“······예.” 데큘레인은 말했다.
“저, 데큘레인.”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회의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오늘 따라 유독 불손하고, 껄렁한 걸음걸이.
“······폰 그라한 유크라인.” 원탁의 시선이 그를 좇았다.
오직 길테온만이,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웃었다.
“유크라인의 당주가 이곳에 왔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것도 아니고, 부름에 답한 것도 아니고, 오직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이라는.
지극히 거만한 표어.
몇몇 당주는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꾸기거나 혀를 찼다. 몇몇 철없는 조수는 다만 그의 외모와 자아에 홀린 듯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른 시간에 오지 못하여 송구스럽습니다만. 사건이 발생하여 추스르느라 이리 늦었습니다.” ─늦지 않았다. 자리에 앉도록.
그는 그렇게 걸어 유크라인의 좌석에 앉았다.
실비아는 신기한 감각을 느꼈다.
분명 상석이 없는 원탁이건만.
그가 등장한 순간부터, 모든 무게추가 그에게로 쏠리는 듯했다.
─단, 데큘레인 자네의 조수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중간 휴정 전까지 자네의 발언권은 3 회로 제한될 걸세.
그는 자신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았다. 작금의 사태를 벌어지게 한 원인을 찾는 듯, 그 분노는 선연했다.
“······인정합니다.” 데큘레인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비스듬이 숙였다.
그에게는, 무슨 말을 할 여력조차 부족했다. 마력은 이미 고갈되었고, 이 미친 듯한 질주로 체력도 소모되었다.
「철인」의 한계조차 이미 뛰어 넘었다.
지금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그 특유의 「성격」 뿐.
─데큘레인은 진정하도록.
무겁게 가라앉은 그의 분위기를, 회의실의 모두는 격노라 오해했다.
만날때마다 이죽거리던 이헬름도 슬그머니 자세를 바로 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대륙 최고의 마도가 유크라인이다. 사교계에서의 비아냥이라면 몰라도, 이런 사건에서 괜한 의심을 받을 필요는 없다.
─전통의 12 가문과 신진 8 가문이 모두 도착하였으므로, 베르흐트의 소집 회의를 시작하겠다.
회의는 그 적막 속에서 시작되었다.
휴식. (1) 베르흐트 회의의 첫 번째 안건은 악마 출몰, 즉 내가 마탑 부지에서 죽인 악마에 관한 것이었다. 드제크단은 우선 나의 증언을 요구했다.
“어둠의 산은 예로부터 정화가 덜 된 지역. 그 안에 무엇이든 충분히 있을 만했으나, 그 날에는 악마가 있었기에 죽였습니다.” 나는 그렇게만 말하고 숨을 골랐다. 내 모호한 설명을, 브란 가문의 젊은 당주 ‘에센실’이 덧붙였다.
“악마가 제도에 출몰했다는 것은 보다 심각한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 북부의 변경, 즉 멸지에서 마수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각 학파에 지령을 내리거나 성당과 협력하여, 의심 지역에 마법사 파견이 필요할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신비로운 녹색빛인 그녀는 네임드 캐릭터로, 믿을 만한 가문의 신념 있는 당주다.
지금 나에게는 누군가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판단할 힘이 없었으니, 그 메신저에게 동의하기로 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자 에센실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긴, 데큘레인은 일단 옳은 말이라도 지적부터 하는 스타일이었으니.
그 외 다른 마법사들도 이 안건에는 굳이 비판하지 않았다.
─우선 성당이 의심 지역을 선정하면, 각 마도학파의 마법사들을 선별하여 파견하도록 한다.
첫 번째로 통과된 안건이었다.
“파괴마법을 따르는 ‘린넬 학파’가 악마의 처단에 가장 열의를 보였으니······.” 안건은 꽤 많았다.
어떤 학파를 파견할 것이니, 마수가 출몰한 광산은 어떻게 할 것이니, 던전과 악마 사냥에 관한 마도 율법은 어떻게 개정할 것이니 등등······ 거의 네 시간 동안 원탁은 끊임 없이 떠들었다.
그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번의 발원권을 그대로 남겼다.
─잠시 휴정하도록 하겠다.
자그마치 5 시간 만에 나는 원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정신이라도 차릴 겸 밖으로 나왔는데, 그 출구 쪽에 작고 아담한 갈색머리가 장로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알렌이었다.
“······아, 교수님!” 알렌은 크게 외치더니 달려왔다.
“괜찮, 괜찮으십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회의 도중에는 참여를 못, 못 한다고 하여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허둥대는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사실 괜찮지 않았다. 오늘 마력 탈진만 몇 번 경험했는지 모르겠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열병을 앓았거나 벌써 죽었겠지.
당장 탈진의 부작용이 아직도 남아, 5 시간의 회의 동안 고작 「300」의 마력밖에 회복되지 않았다.
“저, 저 교수님이. 저를 구해주셨다는······.” “울지 말라고 말했다.” 알렌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숙였다.
“······끅!” ──그러나 나는.
이제 더 이상 이 아이를 순수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그 천연덕스러운 얼굴이, 오히려 낯설었다.
“너는 앞으로 가만히, 내 옆에 서있기만 해라.” “네? 아······ 네, 네에······.” 그렇다고 여기서 폭로를 할 수는 없었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나는 오히려 이 아이를 가까이 두어야만 했다.
그 어떤 내색도 해서는 안 되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
* * * 30 분 간의 휴식.
당주들은 각자의 대기실로 돌아갔다. 그들은 서로 의견을 교환했고, 필요하다면 거래도 하려는 듯했지만, 나는 그저 알렌과 함께 있었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휴식이 끝난 뒤.
원탁에 돌아와 알렌을 곁에 두고 앉았을 때.
드제크단이 다음 안건을 말했다.
─적궤에 대한 마도의 입장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순간 원탁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누가 발언권을 지정한 것도 아니었는데, 시작부터 격한 토론이 오고갔다.
적궤는 과연 마도의 ‘아킬레스 건’이라 할만했다.
“적궤는 바퀴벌레같은 족속입니다. 저들끼리 알을 까고 끊임없이 번식하며 사회를 좀먹고 있습니다.” 베오라드의 ‘베탄’이 원색적인 비난을 뇌까렸다.
에센실이 조금 불편한 투로 대꾸했다.
“그러나, 적궤와 다른 인종을 구분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발명하면 됩니다. 그 힌트는 혈마(血磨)에 있을 것입니다. 제국의 대학마탑이 모인다면,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베탄은 격렬했다. 그 눈치를 살피던 이헬름이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베탄은 곧장 다음을 이었다.
“또한, 적궤는 어쩐 일인지 저들끼리 알아보고 모입니다. 적궤에게는 그들을 규합하는 ‘지도자’가 있는 것입니다.” 적궤는 특별한 일족이다. 그 개체는 적지만, 스스로 재능을 개발한 자가 많다.
그러한 재능들 중에는, 안전한 지역에서 적궤를 규합하고 통솔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베탄은 그 핵심을 꿰뚫고 있었지만······.
적궤의 지도자는 결코 죽어서는 안 된다.
그는, 설정상 부처나 예수에 가까운 성인(聖人)이니.
“그 지도자는 지하에 숨어서 적궤를 모으고, 부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 놈들이 지하에서 어떤 일을 도모하고 있을지 역겹지도 않습니까! 그 자체가 반역일 것입니다!” “베탄, 억측일 뿐입니다.” “60 년 전에도 그리 대하였기에 수많은 마법사가 죽은 것입니다!” 에센실의 반론에 베탄은 거의 피토하듯 내질렀다. 에센실도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들끓었던 원탁이 잠시 진정되려는 순간.
아까부터 나를 지켜보던 길테온이 마침내 말했다.
“유크라인의 데큘레인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유크라인.
예로부터, 악마 처단의 일선에 섰던 퇴마의 대가.
충분히, 영향력과 책임감이 넘치는 지위다.
“······.” 나는 현대인으로서 이러한 사건들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지식들을 차치하더라도, 적궤 탄압은 최대한 미루는 것이 옳다.
그래야만, 이 세계의 ‘공동의 적’은 적궤가 아니기에, 차후 메인 퀘스트의 난이도가 훨씬 쉬워진다.
“옛적, 적궤는 적이었소.” 나는 잔잔히 말을 이었다.
“허나 문헌을 하나하나 따져 본다면······. 전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소.” “오해요?” 베탄이 끼어들었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오해였지. 237 년 전의 ‘로드란 마녀’ 사건에서 마녀로 몰린 로드란은 사실 무죄였으니.” 나는 구체적인 사건을 거론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고, 적궤는 피를 흘렸지. 당연히 적궤는 저항했고, 그 저항 또한 피를 불렀고, 피가 피를 부르며 잠시 휴전이 되었지만.” 설정 시트에서 보았다. 그와 비슷한 내용의 문헌도 읽었다.
큰 줄기는 이미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었다.
“자네가 말한 60 년 전. 그 즈음부터는 정치였지. 적궤의 땅에 마석 광산이 발견되었으니.” 이 세계의 마석 광산은 현대의 석유·천연가스를 합친 것보다도 훨씬 중요한 위상이다.
“허, 정치?! 정치라니요!”베탄이 원탁을 두드렸다.
중후반을 관통하는 스토리인지라 아는 것은 많았으나, 역시 설득은 다른 문제였다.
“그들은 명백히 마의 기운을 타고난 핏줄입니다! 마를 처단하는 유크라인이라면 알지 않습니까!” 베탄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유크라인의 전통은 악마를 사냥하는 것이지, 적궤를 죽이는 것이 아니오.” “적궤가 바로 악마입니다!” 원탁을 울리는 그 외침.
언젠가는 대학살로 이어질 그 비약.
“······.” 베탄의 부르짖음 이후, 원탁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온갖 말과 침이 튀기던 공간의 유난히 긴 침묵.
고요 속에서 긴장은 오히려 증폭되어 가고······.
나는 베탄을 보며 말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소.” 인종을 악마로 모는 것은 곧, 그 인종을 전 인류의 적으로 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베탄은 물론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함부로, 인간을 악마라 단정짓지 마시오. 그리 말하는 인간이 악마가 될 수도 있으니.” 나는 그렇게 발언을 매듭지었다.
가문의 당주들은 사뭇 의외라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윽고, 드제크단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베탄은 발언의 수위를 낮추도록. 이대로라면 결론이 나지 않을 듯하니, 오늘의 회의는 이만하도록 하겠다.
* * * 1 차 회의는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끝났다.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올때부터 3 박 4 일은 각오했으니.
실비아는 제 4 관의 ‘묵주 숙소’로 내려왔다. 이미 밤은 어두웠고, 4 관의 객실에는 실비아 혼자였다.
이 숙소는 1 인 1 실이 관례였다.
“······.” 실비아는 숙소의 장로에게 받은 종이를 보았다.
──[ 베르흐트 4 관 묵주 호텔의 야간 수칙 ]── 이 모든 수칙은 야간에만 적용됩니다.
1. 복도를 돌아다니다 열린 문을 발견했다면 절대 방 안에 들어가거나 내부를 들여다보아서는 안 됩니다.
2. 객실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면 절대 응답하지 마십시오. 어떤 대답도 해서는 안 됩니다.
3. 가끔 화장실에서 시체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황하지 말고 문을 닫으면 됩니다.
4. 묵주 호텔은 1 층 건물입니다. 계단이 생겨도 내려가거나 올라가서는 안 됩니다.
5. 침대에서 한 번 누웠다면 그 이후 아침이 될 때까지 걷는 행위는 자제해주십시오. 어느 순간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6. 복도에서는 절대로 떠들지 마십시오. 마법을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다 읽은 실비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괜히 무서운 수칙이었지만, 이미 주의사항은 아버지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애당초 자신은 굳이 탐험 따위를 할 치기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너무 피곤해서 바로 잘 생각이었다.
실비아는 침대에 누웠다. 매 ‘날쌘돌이’도 제 침대맡에 섰다.
“잘자.” 실비아는 날쌘돌이에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금세, 고요한 잠에 빠져들었다······.
······.
······목이 말라서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3 시간 쯤 잔듯했다. 침대에서 뒤척이는 그녀를 날쌘돌이가 바라보고 있었다.
안심이 되었다.
“편히 자고 있어.” 그러자 날쌘돌이는 눈을 감았다. 실비아는 흐뭇하게 일어나 선반의 물과 물컵을 쥐었다.
그렇게 물 한잔을 마시고 돌아선 순간.
복도였다.
객실이 아닌,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
“······.” 소름이 올랐다. 등허리가 쭈뼛거리며 목 언저리에 서늘함이 일었다.
뒤늦게, 야간 수칙의 5 항이 떠올랐다.
[ 5. 침대에서 한 번 누웠다면 그 이후 아침이 될 때까지 걷는 행위는 자제해주십시오. 어느 순간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실비아는 자신의 발을 보았다.
맨발이었다.
바닥이 차가웠다.
휘이이이잉······.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실비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계단이 있었다.
그러나, 계단을 이용해서는 안 되었다.
[ 4. 묵주 호텔은 1 층 건물입니다. 계단이 생겨도 내려가거나 올라가서는 안 됩니다. ] 침착하자.
아직은 바람만 조금 불 뿐이다. 별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뚜벅뚜벅 걷다 보니 문 열린 객실이 나타났다. 실비아는 멈칫했다.
[ 1. 복도를 돌아다니다가 열린 문을 발견했다면 절대 방 안에 들어가거나 내부를 들여다보아서는 안 됩니다. ] 실비아는 눈길도 주지 않고 계속 걸었다.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 속에서 걸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가.
닫힌 문 앞에 섰다.
똑똑— 문을 노크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열리지 않았다.
휘이이이이잉······ 다시,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실비아는 조금 더 걸어 다른 문 앞에 섰다.
똑똑— 문을 노크했다.
열어주지 않았다.
문고리를 쥐고 뒤흔들었지만 열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음 문.
똑똑— 또 다음 문.
똑똑— 실비아는 바쁘게 움직이며 문을 두드렸다.
어쩌면, 이 방 안의 사람들은 자신을 귀신이라 생각할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키에에에이에으에······.
복도에서 맴돌던 바람이 서서히 어떤 끔찍한 비명, 혹은 찢어지는 듯한 괴성으로 돌변하고 있었다.
실비아는 무서운 게 싫었다. 자연히 문을 노크하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똑똑─! 똑똑─!
그러나, 그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크으으으으으으으으······ 서서히, 그 소리가 더욱 선명해지고.
똑똑─!
마지막 노크였다.
카아아아아아······.
귓가에 차가운 숨결이 흘러든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귀가 어는 듯하던 그 기괴한 감각도 곧바로 소멸되었다.
털썩.
온몸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다.
“······.” 방안의 온기가 자신을 비추었다. 실비아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실비아.”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데큘레인이었다.
“길을 잃었나.” 그는 별 일 아닌 것처럼 자신을 흘겨보더니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들어와라.” “······.” 실비아는 고민했다.
휘이이이잉─ 복도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고마워요.”실비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둘러보았다. 역시 당주의 방은 넓고 아늑했다.
“앉아라.” 데큘레인은 벽난로 근처의 흔들의자에 앉았고, 실비아는 침대 곁의 작은 의자에 앉았다.
“죄송해요.” “괜찮다.” “침대에서 일어났더니 갑자기 복도였어요.” 데큘레인이 탁자 위의 책을 들었다. 눈은 페이지에 둔 채, 말은 실비아에게 했다.
“베르흐트의 공기 중 마나 농도는 평지의 수십배에서 수백배까지 치솟는다.
그 탓에 자연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항상 발생하고, 마력이 형상과 자아를 이루지. 유령이라 불리는 것들인데, 이 호텔에는 그런 놈들이 아주 많다. 너는 ‘수칙’을 잘 봐야 했어.” 오직 데큘레인만이 문을 열어줄 수 있었던, 그리고 열어주었던 이유였다.
그는 거의 모든 정신 간섭에 면역을 지니고 있었으니.
“아.”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지막지하게 눈치가 보였다.
입술을 오물거리던 실비아가 물었다.
“오늘 왜 늦으셨나요.” 데큘레인은 책을 읽으며 답했다.
“알 필요 없다.” “······.” 손가락을 꾸물거리던 실비아가 물었다.
“책을 좋아하세요.” 데큘레인은 책을 읽으며 답했다.
“차선책이지.” 책을 좋아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데큘레인의 성격 상, 책을 읽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한 취미였다. ‘굳이 극복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성격’이라 할 수 있겠다.
“······.” 실비아는 다시 가만히 있었다. 벽난로의 모닥불만 바라보다가, 문득 손바닥을 비비적거리더니 마법을 발현했다.
“「그을리는 불」이에요.” 데큘레인에게 자랑하듯 보여주었다. 소리도 색도 없는 「그을리는 불」은 벽난로에 달라붙어 그 불씨를 키웠다.
데큘레인은 그 마법을 곁눈질하더니 말했다.
“잘 구현했다.” “저는 색도 입힐 수 있어요.” 두 가닥의 선을 추가하자 「그을리는 불」이 푸르게 일변했다. 데큘레인은 만족스레 끄덕였다.
“더 잘했다.” 그 얼굴을 힐끗거린 실비아는 다른 마법을 발현했다. 이번에는 구름이었다.
“「뇌운」이에요.” “잘 구현했다.” “저는 더 크게 만들 수도 있어요.” 뇌운이 천장의 절반을 뒤덮을 만큼 부풀었다.
데큘레인은 대답했다.
“더 잘했다.” “······.” 실비아는 또 다른 마법을 발현했다. 칼날처럼 돋아나는 나뭇잎이었다.
“「금속 녹음」이에요.” “잘 구현했다.” “파괴 마법과 배합하면 나뭇잎이 날아가며 적을 공격해요.” “잘 배웠군.” 실비아는 데큘레인의 수업에서 익힌 이것저것을 선보였다.
데큘레인이 칭찬만 해주었기에, 처음에는 대충 대답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실비아가 아직은 미숙한 마법들을 보여줬더니.
“회로의 흐름이 이상하다. 너는 어느 한 군데를 잘못 알고 있어. 다시, 회로를 펼쳐봐라.” “속성의 조화가 원활하지 않다. 불과 물이 조화를 이루려면, 어느 한 쪽이 우세해서는 안 된다. 오직 백중세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성의껏 교정해주었다. 그 조언으로 실비아는 몇몇 마법을 확실히 다잡을 수 있었지만······ 문득 욕심이 생겼다.
“그러면 제 약점은 뭘까요.” “네가 스스로 알아야 한다.” 실비아는 입술을 삐죽였다.
“이프린은 가르쳐줬잖아요.” 데큘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프린은 스스로 배웠지.” 실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데큘레인은 여전히 책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 동공이 잠시 멈추었다.
“조급하지마라.” 실비아가 어깨를 떨었다.
“실비아, 너에게는 시간이 있다. 시간은 너의 편이고, 성장은 네가 노력하는 대로 이루어질 테지.” 마력의 향상. 마법의 발전.
실비아는 시스템의 도움이 없어도, 오직 스스로의 재능만으로,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완벽한 마법사가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너는 세 손가락에 꼽힐 재능이다.” 데큘레인은 시스템을 토대로 말했다. 이것만큼은 거의 ‘운명’에 가까운 미래였다.
그 말이 너무 확신에 가득 차 있었기에, 실비아는 조금 멍한 얼굴이 되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였다.
“쉿.” 데큘레인이 갑자기 손가락을 들었다.
“가만히 있어라.” 침대맡에 놓여있던 날카로운 철이 움직였다. 거의 동시에─ 어떤 기괴한 형상이 천장을 뚫고 나타났다.
유령이었다.
잔혹하고 징그럽게 일그러진 마력의 얼굴. 실비아는 그 순간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꼈으나, 찰나에 불과했다.
데큘레인의 마법이 유령을 사방팔방으로 찢어발기며 꿰뚫은 것이었다.
곧바로 상황을 끝낸 그는 태연히 중얼거렸다.
“내가 문을 열어서 찾아왔나보군.” “······.” 실비아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데큘레인의 탁자 위에 놓인 철조각을 보았다.
“그걸로 귀신을 죽인 건 가요.” “그래.” “대단해요.” 실비아의 순수한 감탄에 데큘레인은 웃어버리고 말았다.
“놀랄 것 없다. 살상에만 특화된 무기이고 마법이니.” 「메인 퀘스트」는 골고루 성장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데큘레인의 마법은 속성적이었다. 지극히 전투에 초점을 맞추었고, 살상력에만 집중했다.
그리 하였음에도 베론에게 패배했지만 말이다.
“이 세상에 유용한 건, 실비아. 너같은 마법사의 재능이다. 마법은, 사람을 죽이려 만들어진 것이 아니지 않냐.” “······.” 그제서야 실비아는, 오늘 원탁에서의 데큘레인을 이해했다. 그가 왜 적궤를 몰아세우지 않았는지, 지금 그의 말로 확실하게 알았다.
“이제 더 이상 묻지 말고 자라.” 실비아는 큰 눈으로 데큘레인을 보며 되물었다.
“교대로 불침번을 할까요?” “쓸데없다. 시간의 흐름이 묘할 것이다.” “알아요. 마력 현상은-” “고지대의 밤은 길다. 최소한 10 시간은 될 터인데, 그 10 시간이 2 시간이 될지, 12 시간이 될지, 아니면 24 시간이 될지, 그 누구도 모른다. 그날의 마력에 따라 다른 것이니, 더 말하게 하지 말고 자라.” “······.” 데큘레인의 음색은 단호했지만 상냥했다.
지금 그는 자신을 일레이드의 조수로 대하는 것일까, 아니면 마탑 강의의 수강자로 대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수칙도 못 지킨 바보로 대하는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침대에 누웠다 사그락······. 사그락······ 거리며 책을 넘기는 소리와.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의 온기.
듣고 있자니 잠이 솔솔 내려왔다. 편안했다.
실비아는 몽롱한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별똥별이 흐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휴식. (2) 실비아가 잠든 뒤, 나는 숙소 밖으로 나왔다. 창밖에서 내리쳤던 한 줄기 벼락이 나를 이끌었다. 「대부호 재력가」의 직감이었다.
일부러 수칙을 어겼기에 몇몇 초자연적인 현상이 발생하긴 했으나, 그리 큰 위협은 아니었다. 오히려 귀신의 방보다 허접하게 느껴졌다.
“벼락은 어디 쯤이었나······.” 4 관에서 장로관으로 이어지는 산길.
베르흐트의 정산에 근접한 이곳은, 사실 플레이어라면 중후반에나 닿을 수 있는 고급 지역이다. 베르흐트 회의 없이는 장로, 또는 귀의(歸依)한 수제자가 아니라면 입장조차 허락되지 않으니, 레어 아이템을 습득할 확률이 상당히 높을 테지.
하여 나는 베르흐트의 어두운 봉우리에서 산맥을 굽어보았다.
온갖 귀신과 유령이 달라붙었지만, 아무리 지랄해도 놀라지 않자 그들의 위협은 이제 흥미로 뒤바뀌었다.
─쉬이시나신라이 로덴나이.
─부르라칸 투르니마.
대충 얘는 왜 안 놀라냐- 신기한 놈이네- 뭐 이런 식의 말이 아닐까.
나는 유령들을 데리고 베르흐트의 산맥을 탐험했다. 두 눈에 「대부호 재력가 」를 켠 채로 한참을 배회했다.
그 동안 집채만한 호랑이도 목격했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눈송이─ 즉 ‘눈의 정령’도 보았고, 눈알이 스무 개 달린 삵도 만났다.
가능하다면 쳐죽여서 재료로 삼고 싶었으나, 먼저 싸움을 걸만한 기량이 못 되어서 아쉽게 참았다.
그렇게 천천히 어둠의 산을 헤치던 중.
“······!” 언뜻 황금색의 기류가 눈에 띄었다.
온통 새하얀 침엽수림 속, 어느 그을린 대지였다.
─부르탄 카일리쉬니마.
─라타라타 크라시뉘마.
유령들이 뭐라 말을 했다.
무시하고 다가가니 웬 일대가 새카맣게 눌어붙어 있었다. 역시 벼락을 맞은 듯했는데, 황금 기류의 발원지는 그 한복판에 저 홀로 타다만 나무 조각이었다.
───「정화된 마목 조각」─── ◆ 정보 :벼락을 맞아 쪼개진 마목의 조각.
:원체 많은 마력을 품은 나무가 벼락으로 정화되었다. 대단히 좋은 재료로 쓰일 만하다.
◆ 범주 :잡화 ⊃ 특수 목재 ──────── 마목(魔木). 쉽게 마나를 양분으로 자라는 나무.
대부분의 나무는 수분이나 공기 중의 마나를 흡수하지 못하지만, 가끔가다 발생하는 돌연변이 나무는 마나를 빨아들여 마력으로 체화한다.
그렇기에 마목은 인간을 위협하는 식인괴식물이 되거나, 마법사 한정 최고급 지팡이 재료가 되거나 하는데, 베르흐트의 정상에서 자란 마목이 벼락까지 맞았다?
그말인 즉 베르흐트에서 자랐으니 마목의 질이 완벽하고, 벼락을 맞았으니 정화는 물론 숙성까지 자연적으로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좋다.” 단순히 좋은 정도가 아니라, 입가에 미소가 들썩일락 말락한다.
스태프로 만들든, 완드로 만들든, 마법사로서의 기량을 반 단계는 상승시켜 줄만한 귀품이니.
나는 마목 조각을 품에 안았다.
이 성과에 고무되어 다시 바쁘게 걸음을 움직였다. 혹시 몰라 유령에게 말도 걸어봤다.
“좋은 물건이 있으면 안내해라.” ─크루푸쉬리시키!
─크푸르르르르!
놈들은 마나로 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깔깔대며 웃었다.
“······도움 안 되는 것들” 무시하고 걸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 눈에 불을 켜고 탐색했으나, 역시 이 이상은 욕심인 듯했다.
나는 말없이 서서 동녘을 보았다. 삐죽거리던 아침해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능선을 적시는 서광에 유령과 귀신들은 그 형체를 잃었다.
다시, 회의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 * * 실비아는 아침해와 함께 눈을 떴다. 까치집이 된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주변을 둘러보니, 데큘레인은 이미 없었다.
“······.” 눈을 비비적거리던 실비아는 곧 매무새를 정돈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맡의 날쌘돌이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똑똑. 아침 식사입니다.
오전 10 시가 될때까지 기다렸다가 식사를 받아서 먹었다. 그리고 1 시간 뒤, 스무 명의 조수와 함께 장로관으로 걸었다.
그런데 그 길목에서 만난 알렌이 약간 안쓰러웠다. 저 혼자서 기량이 너무 딸리다 보니 왕따 취급을 받고 있었다.
아무튼.
어제 못 다한 안건을 끝내기 위해서인지 회의는 정오에 시작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적궤에 대한 안건이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자는 이번에도 베탄이었다.
“유크라인의 말대로 적궤가 악마라는 확증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피에 마(魔)가 흐르는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인간 중에 마를 타고난 혈족이 있습니까?” 인간의 피에 마기가 흐른다는 사실. 그것으로 파생되는 악마와 적궤의 모호한 관계.
그 간극에서 마법사들의 의심은 피어올랐다 “몸에 내재된 마기가 언제 어디서 발작할지 모릅니다. 순식간에 악마로 돌변할 가능성이 차고 넘친다는 것입니다!” “그런 걸 억측이라고 하지요.” “억측?! 무엇이 말입니까!” 절반 이상의 마도가는 적궤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합심하여 데큘레인을 설득하려 했다.
“당신은 벌써 적궤를 ‘악’이라 단정 짓고 있잖습니까. 그들이 정말로 발작한다면 마의 탓이니 일족 전체를 탄압해야 하고, 발작하지 않는다면 못 본 척 상관하지도 않는다? 인간이 지닌 수천 가지의 가능성 중 오직 하나에만 치중하여, 그것을 핑계로 인종 전체를 몰아세우는······.” 그러나 데큘레인은 완고했다.
“애당초, 희미한 마기가 흐른다고 인간이 아닌 악마라니? 물 한컵에 소금 한 톨이 섞였다 하여 그것을 물이 아닌 소금이라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원탁의 모두가, 그리고 실비아도 어젯밤 데큘레인과 대화를 나누기 전에는 예상하지 못했고, 이해조차 할 수 없었던 전개였다.당장 데큘레인이 ‘정치’라 폄하했던 60 년 전의 그 전쟁은 유크라인의 선조도 참여했었다. 오히려 유크라인의 선조는 그 누구보다 혁혁한 공을 세웠고, 즉 수많은 적궤를 죽였고, 공훈으로써 마석 광산의 권리를 일부 얻어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종교조차도 우리와 이질적입니다!” “지금 우리가 종교를 논하러 왔습니까? 아니면 베르흐트가 종교의 원탁인가?
그런 말은 성당에나 가서 하시오.” 베탄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유크라인이 이토록 완고해서는,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베르흐트 원탁은 일견 평등한 듯 보이지만 특정 안건에 대해서는 어느 한 가문의 권한이 더욱 크다.
이곳에 모인 스물 가문 중, 전통과 근본의 마도역사(魔道歷史)로 유크라인을 ‘뚜렷히 앞선다’ 할만한 가문도 없는데, 심지어 ‘마의 처단’이라는 분야에서라면, 유크라인은 정말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권위인 것이다.
당장 400 년 전의 고서(古書)에도 유크라인의 선조라 추정되는 악마 사냥꾼이 발견될 정도이니.
그런 핏줄의 직계후손이 ‘적궤는 악마와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면······ ─이대로라면 결론이 나지 않을 듯하니, 적궤에 대한 안건은 차후 회의까지 불문에 붙이도록 하겠다.
쿵──!
원탁을 내리친 베탄은 시뻘게진 눈으로 데큘레인을 노려보았으나, 데큘레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잠시 휴정 후, 다음 안건부터 시작하도록 하겠네.
마도가는 각자의 대기실로 돌아갔다. 베탄은 의자를 박차며 일어섰고, 실비아는 길테온의 뒤를 따랐다.
“······하하하하하!” “?” 길테온은 대기실에 앉자마자 광소를 터트렸다.
“아빠.” “재미있구만. 재미있어. 하긴, 그간 내가 너무 우습게 여겼다······.” 지금 길테온의 모습은, 여태 그가 아버지로서 보였던 면모와는 전혀 이질적이었다. 그는 끌끌 웃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데큘레인이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이러는지를 추론하는 것이겠지.
“······.” 그러나 실비아는, 길테온이 영영 그 해답에 다다르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사실 너무 간단한 이야기였지만, 너무 간단하기에 아버지는 깨닫지 못할 것이었다.
“······놈은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 길테온은 관자놀이가 꿀렁일만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지만.
정녕 데큘레인이 바뀐 이유, 또한 선조의 마음을 내려놓은 이유, 그 의문의 해답은 결국······.
─마법은 사람을 죽이려 만들어진 것이 아니지 않나.
어젯밤 데큘레인의 그 말 한마디였다.
* * * 적궤 이후의 안건은 일사천리였다. 나는 적궤 건으로 논쟁했던 가문들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 어떤 안건이든 좋은 말을 해주었다.
내 따스한(?) 말에 화가 누그러진 가문도 있었으나, 역시 오늘 일로 척을 지게 된 가문이 더 많았다.
「악당의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었건만, 적궤를 옹호하는 쪽이 지금으로서는 그들에게 악당 취급을 받는 것이었다.
하긴.
게임 스토리 상, 첫 번째 베르흐트 회의에서의 ‘마도학파의 적궤 탄압’은 거의 확정적인 사건이었으니.
아무튼 그렇게 9 시간에 걸친 회의가 끝나고.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원합니까? 정녕 적궤 하나를 몰래 키우고 있기라도 합니까?” 베탄은 장로관에서 나오자마자 나를 붙잡았다. 증오로 가득한 그의 눈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분노를 줄이는 게 좋을 듯하오.” “분노······. 하긴. 제 뿌리의 뜻을 거부한 당신은 분노조차 느낄 수 없겠지. 적궤를 누구보다 악마라 여겼던 게 당신의 선조였어. 우리 가문은 당신 선조를 따라 참전했다 몰살을 당했고.” 베탄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베탄은 키가 작았지만, 그의 단단한 몸에는 마력과 체력이 공존하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그렇다고 일족 전체를 악마로 돌리지는 말도록 합시다. 마법사의 이성은 분노에서 독립되어야 하니.” “······.” 베탄은 이를 악물었다. 그 비틀린 잇새로 조소가 흘렀다.
“이 회의가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해는 마시게. 나는 베오라드를 미워하지 않아.” “이제부터 베오라드는 당신을 혐오할 것이오.” 베탄은 나를 밀치듯 지나갔다.
“······쯧.” 기실, 베탄의 분노도 이해는 갔다.
베오라드 가문은 당장 60 년 전의 전쟁에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임했지만, 어이 없이 패배하여 당주를 포함한 거의 전부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이 적었다는 이유로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베오라드는 순전히, 베탄과 그 아버지의 피나는 노력으로 재기한 가문이었다.
이어서 에센실이 다가왔다.
“적궤에 대해 갑자기 생각이 바뀌신 것이 의아합니다만, 저도 유크라인 공의 의견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적궤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더 낮은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저희로서도 더욱 좋을 테니까요.” 에센실은 그렇게 말했지만, 대다수의 마도가는 나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그들 중 호의적인 시선은 많지 않았다. 내 발언 자체도 마음에 안들었겠지만, 그간 데큘레인이 보였던 악성 행실이 주효했겠지.
“······.”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 또한 희생이라 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값진 희생이다. 다음 베르흐트 소집부터는 극히 주기가 짧아지며 1~2 년에 불과할 테지만, 그 귀중한 시간을 번 셈이니.
만약 플레이어라면, 이렇게 얻은 1~2 년 동안 가파르게 성장하겠지만······ 플레이어가 없는 세상에서, 적어도 없는 것으로 추정되는 세상에서.
나는 그저 바랄 뿐이다.
이 남은 시간 동안, 나보다 선한 네임드가 가능한 빠르게 성장하길.
* * * 이튿날 아침이 되어, 나는 베르흐트를 떠나기 전 ‘제 1 관’으로 내려왔다.
“봐도 봐도 신기한 마을이네요······.” 고지대에 건설된 불가사의한 마을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베르흐트의 모티브는 마추픽추다. 그런 만큼 풍경이 참 신묘하고 감탄스럽지만, 나는 관광 따위를 하러 온 게 아니다.
지팡이를 제작할 수 있는 핵심 재료인 「마목」을 얻었다.
한데 이 베르흐트에는 유명한 장인이 있으니, 마법 상점에서 부수 재료를 매입한 뒤 지팡이를 발주할 생각이다.
그렇게 걷던 순간이었다.
“······이리 비쌉니까 이게?” 어떤 노점상 근처에서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했다.
“당연히 비싸지. 이게 얼마나 귀한 재질인데.” “그럼 더 싼 것을 보여주시지요.” “음? 아니 안 돼. 캠핑을 한다고 했잖나.” “그런데요.” “베르흐트에서 캠핑을 하려면, 싼 걸 사면 안돼. 파는 것도 못할 짓이야 못할 짓. 사람 죽을 게 뻔한데 왜 팔어?” “괜찮습니다.” 베르흐트로 오는 길에 마주했던, 제국 치안국 부국장. 핵심 네임드에 속하는 ‘릴리아 프리미엔’이었다.
알렌이 눈을 크게 뜨더니 손가락을 뻗었다.
“앗!” “왜 그러냐.” “저분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은인이에요!” “그렇군.”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그 대화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어이. 그냥 다른 싼 걸 보여주시지.” “어허. 베르흐트에서 캠핑을 하려면 이런 거 아니면 안 된다니까?” “더 싼 게 없냐고 물었는데, 왜 이런 게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하시지. 더 싼게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 그것만 대답하면 될 텐데.” “아니 더 싼 게 있긴 한데, 그런 걸로 캠핑을 하면 유령에 잡혀가.” “아니 됐으니까. 싼 게 있으면 그걸 내놓으라고-” 흥정인지 말싸움인지.
나는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서로 목에 핏대를 세우던 프리미엔과 상점주인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그 침낭, 얼마지.” “아 1 만 엘네입니다. 이게 뭐냐면, 왜 사람이 잘때 환혹 마법에 가장 취약해지잖습-” “사겠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수표를 끊어주었다. 주인장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희는 수표는 받지 않습니다. 오직 현금-” “가문을 보아라.” “······?” 주인이 그 수표를 들여다보았다.
유크라인 가문의 문양과 데큘레인의 사인.
주인은 수표와 내 얼굴을 번갈아보다가 히죽- 웃었다.
“하하하. 유크라인의 당주시라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자~ 가져가십시오.” 나는 그렇게 침낭을 샀고, 옆에서 무표정한 프리미엔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가지시오.” “······뭐라? 이걸 왜 저에게 주시는지?” 프리미엔은 그리 의심스럽게 말하면서 침낭은 품에 안았다.
“자네 덕분에 알렌이 무사히 왔다하니, 그 보답일세.” “······.” 그러자 내 옆의 알렌을 보았다. 알렌은 헤헤- 빙구처럼 웃으며 뒷목을 긁적였다.
“······흠.” 프리미엔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지만 침낭을 챙겼고, 나는 그대로 시장을 돌아다녔다.
베르흐트는 명성대로 마재료의 천국이었으므로 지팡이의 재료는 금세 구할 수 있었다.
「검치백호의 검치」, 「서리 백조의 깃털」, 「마석 케인델」등등······ 고작 여덟 개 사는 데 400 만 엘네를 지출했다.
물론 내 개인 계좌에는 잔액이 없지만, 어차피 가문 수표이니 나중에 예리엘이 지불할 것이다.
그게 아니어도 꽃병 판 돈으로 해결하면 되니 뭐.
“와, 와······.” 알렌은 내 씀씀이에 이를 덜덜 떨었다.
“음?” 그렇게 걷던 중 식당이 눈에 띄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흔치 않게 외양부터 인테리어까지 대단히 고급이었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아, 어서오세요. 유크라인 백작님.” 직원은 내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나같은 손님만 상대하는 식당인 듯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능글맞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어어? 이거 이거, 뭐야~ 우리 고귀하신 유크라인 백작 아니신가~?” 저렴한 금발이 먼저 눈에 띄었다.
리와인드의 당주, 이헬름이었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뭐라 말하려던 그는 내 등 뒤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음? 프리미엔 부국장도 있었나. 캠핑이 취미라더니, 베르흐트까지 오셨구만?” 이헬름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나는 프리미엔이 아직도 붙어있음을 알았다.
“예. 휴가 차.” 프리미엔은 무슨 처음부터 일행이었던 척 말한다. 옆구리에 침낭을 낀 채로.
내가 모르는 사이 동료 영입 퀘스트라도 클리어 한 건가. 그 대가가 침낭이라면 아주 싸긴 한데.
나는 종업원이 안내한 자리에 앉았으나, 이헬름은 여전히 내게 말을 걸었다.
와인을 꽤 많이 마신 듯 이미 얼굴이 불콰했다.
“어이 데큘레인. 내 참 궁금하네. 자네, 왜 갑자기 입장이 바뀐 거야?” 나는 대답없이 요리를 주문했다. 알렌은 그렇다 치고, 이상하게 프리미엔도 떠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3 인분이었다.
“자네, 언제는 적궤를 쳐죽이고 싶다 하지 않았었나? 아니, 쳐죽이는 것을 넘어, 이 대륙에 발붙어 살 가치가 없는 비열하고 하등한 족속이라고 뇌까렸을 텐데······ 자네가 쓴 적궤 비난 논문이 아직도 대학에 남아 있다고?” 이헬름은 먼 옛적을 떠올리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반쯤 알코올에 먹힌 동공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혹시, 노예로 적궤 한 명을 구했나? 네 연구를 대신 시킬 천재가 적궤 중에 있었나?” “아닙니다!” 난데없이 알렌이 크게 외치며 일어섰다.
“우리 데큘레인 수석교수님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모욕하지 마십시오!” 알렌의 그 용기를, 이헬름은 본 체도 않고 피식거렸다.
“아니, 그게 아니면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돼서 말이지. 네가 왜, 그딴 같잖은 마도가 녀석들 눈치를 보면서까지 적궤를 옹호하는지.” “······.” “왜? 썩은 치즈가 이 정도 말도 하면 안 되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썩었기에 이해한다. 뇌수부터가 썩어문드러진 치즈니까 그딴 생각밖에 못하지.” “······그래.” 이헬름은 눈으로는 나를 노려보며, 입으로는 웃었다. 그 미소가 괴이했다.
“연구 발표까지 6 개월이라 들었다. 아니 3 개월인가? 언제까지, 네 비열한 짓거리가 탄로나지 않을까 보자고~ 어디 잘 보겠어~” 이헬름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까지 껄렁이는 투와 그 노려보는 꼴이 상당히 거슬렸다.
그렇게 이헬름이 떠나자.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에는 프리미엔이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꽤 문제가 될 것입니다만.” “아니라니까요!” 알렌이 빼액 소리질렀다. 프리미엔은 알렌을 힐끗거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노예제는 오래 전에 철폐되었습니다. 그 대상이 적궤라 하여도, 중범죄가 됩니다.” “······.” “물론, 사실일 경우에는 말입니다.” “그리 떠들거면 침낭을 내놓으시지.” “······.” “밥값도 자네가 계산하고.” 프리미엔은 무표정한 얼굴로 훗-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 이후로 밥을 먹는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휴식. (3)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함께 움직였다.
말 그대로 ‘우리’였다. 프리미엔은 무슨 게임 NPC 처럼 침낭을 받았으니 호위라도 해줘야겠다─ 이런 생각이었던 듯, 실제로 내 주머니를 털려는 소매치기 모험가를 붙잡아줬다.
그렇게 걷다가 어떤 허름한 목조 건물 앞에서 멈췄다.
“자네는 이제 좀 가라.” “그럼 이만. 이 침낭은 길가다 주운 것으로 하겠습니다.” “알렌 너도,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네에!” 프리미엔은 떠났고, 따라 들어오려는 알렌도 밖에 두었다.
똑똑- 나는 그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우선 케케묵은 책방처럼 낡은 냄새가 났다. 이곳저곳 부서진 목조의 흉터 사이로 쉰 바람이 흘렀다.
“······있으십니까.” 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이런 낡은 곳에서 존댓말을 하자니 어딘가 뒤틀리는 기분이었지만, 이곳의 주인은 극존칭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충분히 극복 가능한 성격이었다.
“크으으음······. 누구신가······?” 가래가 잔뜩 낀, 쉰 목소리가 위에서 내려왔다. 시야의 사각에 2 층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끼익- 끼익- 끼익- 나무 계단을 밟을 때마다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이윽고, 늙었지만 강렬한 인상의 노인이 내려왔다.
“지팡이를 발주하러 왔습니다.” “지팡이?” 길고 성성한 백발이 과연 마법사라는 인상을 주는 노인은, 아무 곳에나 놓인 안경을 털썩 쓰고 나를 보았다.
“아, 자네는 데큘레인이 아닌가.” “······.” 나는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흠······? 으음······ 자네, 많이 바뀌었구만? 아니지. 이건······.” 노인이 눈썹을 들썩였다. 얼굴의 주름도 따라서 움직였다.
“영혼이 뒤바뀌었나? 상당히 큰 일을 겪은 모양이구먼. 마음과 혈액의 파동 자체가 예전보다 훨씬 정순하게 되었어 그려. 말투도 그렇고.” 순간 심장이 철렁였지만 내색 않고 말했다.
“지팡이를 발주하고자 왔습니다.” 노인은 히죽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는 해주지. 어떤 지팡이를 원하나?”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예전의 데큘레인도 이곳을 찾아왔던 듯했다.
하긴, 마법사 플레이어가 아닌 나도 장인 ‘로켈록’은 알 정도이니.
“······그냥 지팡이로 해주십시오.” “지팡이도 종류가 많지 않나. 완드도 있고, 스태프도 있고, 그냥 지팡이도 있고.” “이걸 다 쓸 수 있는 것이라면 좋습니다.” 나는 품 안에 숨겨두었던 마목 조각을 꺼냈다. 노인의 눈이 번뜩였다.
“오호라. 마목이구만. 이거면 가능하지.” “뿐만 아닙니다.” 상점에서 구매한 다른 재료들도 전부 늘어놓았다. 「대부호 재력가」의 눈으로 보아 최상급 품질인 것들 뿐이었다.
노인이 입을 헤 벌렸다.
“······오호호. 마목에 더해서 이 정도라니. 자네, 지상 최고의 지팡이라도 원하는 겐가?” “역사에 남을 수 있다면 좋습니다.” “흠. 그렇다면, 자네 피도 추가하지 그래?” 그 제안에는 잠시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유크라인의 피는 충분히 재료로 쓰일만 하다네. 워낙 유서가 깊은 마도가문이 아닌가?” “······예.” 데큘레인의 재능이 영 좋지 않다보니 걱정은 된다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 같다면 노익장이 알아서 거를 테지.
“잘 걸러서 쓰십시오.” 내가 팔을 걷자 노인이 검지를 휙- 사선으로 그었다. 팔뚝에 통증 없이 상처가 생기며 피가 솟았다. 노인은 흐르는 피를 그대로 조종하여 비커에 담았다.
정점에 달한 혈마(血魔)였다.
“본디 내가 지팡이를 제작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네만, 이 정도라면 내가 심혈을 기울일 만해. 열흘만 기다리게. 내 소포로 보내주지.” 소포는 조금 못미더운데- 따위의 마음을 읽었는지 노익장은 덧붙였다.
“자네 혈액으로 금고 마법을 형성하면, 자네 본인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열거나 파손할 수 없을 걸세.” “······값은 얼마입니까.” “400 만 엘네. 금고 마법과 배송 비용 포함.” 재료값을 제하고 400 만이라면 예상보다 훨씬 비쌌다. 머릿속에 예리엘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도, 당장 꽃병으로 1,000 만 엘네는 벌 수 있을 테니.
“가문수표도 받습니까.” “자네는 유크라인이잖나.” 끄덕인 나는 수표를 끊어주었다. 노인이 히죽 웃었다.
“수고했네. 길어도 2 주면 받아볼 수 있을 게야.” “예. 가보겠습니다.” “좋아. 껄껄껄껄.” 노인의 미소에 고개를 숙였을 때.
다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서브 퀘스트 완료 : 로켈록의 지팡이 ] 제 1 조건. 충분한 명성 혹은 악명 제 2 조건. 마음이 고운 선인 혹은 개과천선 제 3 조건. 로켈록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최고급 재료조건 제 4 조건. 2 회 이상의 방문.
◆ 상점 화폐 +1 ◆ 로켈록이 제작한 지팡이 “······.” 난데 없이 퀘스트가 클리어되었다.
아무렴, 언제인지는 몰라도 전에 한번 들렀던 데큘레인 덕분이겠지.
고맙다.
나는 만족스럽게 가게를 나섰다.
* * * 한편, 제도 근교 프렌하임 기사단의 단장실.
율리는 오랜만에 찾아온 친척 레일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짜 요즘 바쁘기만 하고 돈도 별로 못 번다니까요? 모험가 진짜 할 게 못돼요. 온통 다 돈 나갈 구멍 뿐이고. 솔직히 신분증, 그거 하나 때문에 하는 거라니까요? 해외 여행은 무제한으로 할 수 있거든요.” “그건 부럽긴 하다.” 율리는 레일리의 푸념에 적당히 대꾸하며 웃었다.
“기사님, 예전에 모험가 안 한 게 진짜 옳은 선택이었다니까요~” “하하.” 모험가는 언젠가 율리도 고려했던 선택지였다. 아니, 데큘레인의 압박으로 그 길 밖에 남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모든 제반을 버리고 훨훨 떠날까─ 따위의 생각도 했더랬지, 예전에는.
“그런데 말이다. 레일리.” 레일리의 말이 끝나자 율리는 슬그머니 화제를 전환했다.
“네?” “너는 혹시······. 그, 데큘레인의 약혼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물어보면서도 온몸에 알러지가 오르는 것 같았다. 율리는 제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쓸어 넘겼다.
“네? 그게 왜요. 말투도 갑자기 왜 그래요.” “음? 아니, 별 건 아니고. 그저······.” 율리는 언젠가 보았던 데큘레인을 떠올렸다.
사별한 약혼자의 묘비, 그곳에서 그녀는 우연히 데큘레인을 발견했다.
엿보려던 의도는 아니었지만, 차마 떠날 수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분명히, 눈물로 약혼자를 기리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아무 것도.” “뭐······ 글쎄요.” 레일리는 마탑 출신 모험가, 즉 데큘레인의 2 년 후배였다. 데큘레인이 아직 약혼자와 사별하지 않았던 시절에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저는 모르겠네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냥 귀족 영애였어요. 밝혀진 것도 별로 없고,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처음에는 둘이 약혼한 것도 몰랐을 정도니까요.” “몰랐다니?” “네. 병약했던 것만 알아요. 집에만 있었고······ 근데 왜 묻냐니까요?” 레일리는 뒤늦게 수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율리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니다. 아무 것도.” “사별한 건 이미 알고 있었잖아요 기사님도.” “······그렇긴 하다만.” “그걸 핑계로 파혼은 못할 걸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율리는 괜히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궁금하기도 했다.
얼만큼 사랑했기에, 그 차가운 사람이 아직도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그만큼 잊기 힘들어하면서, 왜 자신에게 그토록 적나라한 감정을 표현한 것인지.
아직도 옛사랑을 잊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그, 뭐, 한 달에 한 번의, 그 미소를 부탁한 것인지.
혹시, 그가 변하겠다 다짐한 이유도 그녀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내가······ 그 약혼자와 닮기라도 한 것인지.
“······되었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었어.” “흐음. 그래요?” 그때였다.
똑똑─ 노크와 함께 부단장 록펠이 들어왔다. 그는 이상하게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단장님.” “예. 무슨 일입니까.” 율리의 말에 록펠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한참 동안을 그렇게 있다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마침내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말을 듣는 율리와 레일리의 표정 또한 싸늘하게 굳었다.
* * * 같은 시각.
유크라인 영지의 주도 하데카인, 영주 집무실.
“하여튼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예리엘은 창밖을 노려보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한때 머리 끝까지 쌓였던 화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왜 내가 아니냐고. 아 짜증나네. 아무리 내가 마법을 중간에 그만뒀기로소니 알렌인지 알랄인지보다는······.” 보니까 별 것 없는 놈 같았다. 왜 조교수로 뽑았는지 영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놈을 데리고 갈 바에야 차라리 나를······.
“쯧. 하긴.” 그래도 이미 사흘이나 지나버린 지금은 대충 납득이 되었다.
“오빠 동생 거린지는 10 년도 더 됐으니까.” 이제와서 함께 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역시, 지금처럼 서로 싫어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데큘레인은 나를 좋아하지 않고, 나도 데큘레인을 싫어한다.그는 반면교사로 삼기에 적합한 인물일 뿐이니, 나는 데큘레인을 싫어한다.
싫어한다. 싫어한다······.
짹짹─ 짹짹─ 남몰래 거의 어거지로 증오를 키우던 그때, 창밖의 틀에 웬 참새가 사뿐히 착지했다.
예리엘은 창문에 팔을 괸 채 녀석을 보았다. 슬그머니 문을 열었는데도 참새는 도망가지 않았다.
“야. 너 일로와바.” 손가락을 뻗자 참새가 그 위에 올라왔다. 손가락에서 째째짹— 째째짹— 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풋.” 이상하게, 동물들은 자신을 좋아한다. 그리 사근사근하게 대해주지도 않는데.
“귀엽네. 이제 날아가.” 참새는 말을 들은 듯 비상했다.
훨훨 날아가는 참새의 아래에는······ 하데카인.
그 찬란한 대도시의 풍경이 아득히 펼쳐지고 있었다.
“후아~” 예리엘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동시에 커다란 감정이 벅차올랐다.
이제, 이 영지는 자신의 것이 된다.
자신은 대리 영주가 아니라, 진짜 영주가 된다.
그 사실만으로 하루하루가 기쁘고, 매일의 아침이 새로우며, 이 공기는 물론 하데카인의 모든 자연이 사랑스럽다.
─똑똑 “······예리엘 님.” 그때 집사가 들어왔다.
“응. 왜?” “가문으로 수표가 날아왔습니다.” “뭔데? 그때 그 무역 대금인가?” 예리엘은 기분 좋은 마음으로 수표를 받아 들었다.
바로 다음 순간, 손가락이 움찍 떨었다.
잘못 봤나? 싶어서 그 윗면과 아랫면을 번갈아서 보았다.
변함 없었다.
“······802 만 엘네?” “예.” “누가? 이건 또 무슨 지출이야?” “당주님이 베르흐트에서 이것저것을 매입한 듯합니다.” 멍하니 입을 벌린 예리엘은 곧 제 이마에 손을 빡- 얹으며 뇌까렸다.
“아 이런 씨바색-” * * * [ 메인 퀘스트 완료 : 베르흐트 참석 ] ◆ 상점 화폐 +3 덜컹─ 덜컹─ “······.” 덜컹─ 덜컹─ “······.” 시속 70km 는 될까 싶은 느린 기차의 떨림이 어색했다.
내 옆에 앉은 사람 때문이었다.
“······.” 베탄.
우연찮게 같은 특급열차의 VIP 량, 그것도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게 되었으나, 둘 다 자존심 때문에 두 시간 째 이러고 있었다.
“······.” 그렇게 서로 곁눈질을 하다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베탄이 말했다.
“아마 15 년 전이었다면 결투를 신청했을 것입니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베탄이 내게 결투를 신청하지 않길 바란다.
베탄의 배리어를 뚫어낼 기량이 아직 부족하니.
그러나 이런 경우의 도발에는, 거의 무조건 반사처럼 몸이 먼저 반응한다.
“나는 자네가 죽지 않기를 바라네.” 아닌 게 아니라, 같은 공간에 세 명의 당주와 네 명의 조수가 더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체면의 문제다.
데큘레인 특유의 성격은 누가 보느냐,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서 훨씬 강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다음 정거장에서 결투를-” “마법적 자연사를 택하지 말게.” 베탄의 곁에서 마력이 피어 올랐다. 나는 그 표표한 기운을 그저 태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에헤이. 다들!”짝짝짝─ 시끄러운 박수 소리가 집중을 흐트러트렸다. 보니 길테온이었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길테온은 히죽거리며 다가와 베탄과 내 어깨를 번갈아 주물러주었다.
“베탄. 진정 좀 해. 그리고 베탄 자네, 15 년 전은 경험도 못해봤잖나.
그때는, 베르흐트에 오던 길에 세 명이 죽었고, 회의를 하던 중 여섯 명이 죽었고, 회의가 끝나고 두 명이 죽었어. 열 한 명 중 일곱은 조수였지만, 당주도 네 명이나 죽었다니까?” 길테온은 그리 말하며 베탄의 귓가에 입을 대었다.
“아니면, 자네가 정녕 데큘레인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겐가.” “······뭐라고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알아서 수그릴 줄도 알아야지.” 그 속삭이는 목소리에 베탄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상대가 길테온이기에 별 대꾸는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탁탁- 길테온이 베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물론 언제나 도전하는 베탄 자네의 잠재력은 높이 사네! 도전이야 말로 베오라드의 뜻이 아닌가!” 길테온은 그렇게 웃었고, 나는 그런 그의 과대평가가 부담스러웠다.
“근데 데큘레인, 자네는 참 신기해.” 어느새 순진무구해진 얼굴의 길테온이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별 것 아닌 걸로 마법사들을 면박주더니, 이번에는 대수로운 일로 싸움을 긁어 모은단 말이지. 안 그런가?” “말이 참 많으시오.” “······하하. 내 늙어서 말이지. 15 년 전에는 자네도 어렸는데. 어느새 이리 컸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길테온의 어깨 너머에서는 실비아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길테온이 내 옆의 알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알렌이라 했나? 반가웠어. 내 이런 인연은 처음이네. 대학마탑의 조교수를 베르흐트에서 만나다니.” “아, 네, 네에. 영광입니다.” “그래. 자네도 수고 하게. 하하하.” 능글맞게 웃은 길테온은 다시 실비아 옆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 큰 사건은 없었다.
서로 아무런 대화도 없이, 위협도 없이.
우리 모두는 그저 고요하게, 무사히 테르흐 플렛폼에 도착했다.
“끄아아아앙~” 기차에서 내린 알렌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런데, 풍경의 분위기가 처음 왔던 때보다 무거웠다.
나는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테르흐의 승강장에는 함박눈이 내렸고, 그 눈송이를 맞으며 어떤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율리였다. 그녀는 하얀 경갑에 검은 망토를 걸친 차림이었다. 또한 그녀의 기사단과 함께였다. 기사들도 그녀와 동일한 복색이었다.
율리는 나를 보았고,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벅, 저벅,눈밭이 되어가는 승강장을 나는 걸었다. 율리의 흔들리는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노면에 내 발자국이 새겨졌다.
그렇게 서로 손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율리가 먼저 말했다.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평소 같았다.
조금의 떨림도 없는 그 목소리가, 오히려 애잔했다.
“그런가.” 나는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할지 고민했다.
사실, 생각은 이미 정리했었다.
베론이라는 기사가 나를 죽이려 했다고, 서로 싸우다 이리 되었다고, 적어도 율리에게만큼은 말하려했다.
“······습격을 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을 보자 내 마음은 기묘하게 젖어들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내 것이 아닌 게 분명한데, 내 것이라 착각하게 되는 마음.
아니, 정말 내 것 같은 마음.
정념(情念).
“그랬지.” 나는 그녀의 성품을 알고 있었다. 신념을 알고 있었다.
율리의 외면은 단단했지만, 그 내면은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율리는 그렇게 말했다. 그 음색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
“기사로 읽었습니다. 생존자를 구하기 위해, 그 녀석과 함께 노력을 했다고요.” 나는 그저 가만히 서있었다. 그녀가 어떤 기사를 읽었는지, 무슨 말을 전해들었는지 알지 못하기에, 함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하나 묻고 싶습니다.” 그때 저 반대편에서 열차가 도착했다.
“녀석은 어땠습니까.” “······.” 나는 말을 골랐다. 율리의 눈을 보며 깊이 생각했다.
“글쎄다······.” 나는 그녀에게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감정적인 녀석이었다.” 그렇게만 말했다.
율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저희는 이만 녀석에게 가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돌아서서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나는 지켜보았다. 그 가냘픈 어깨에는 어느새 눈송이가 가득 쌓여 있었다.
율리의 뒤를 따르던 수많은 기사 중 한 명이 나에게 말했다.
“같이 가시렵니까.” 동시에, 많은 다른 기사들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전부 율리의 부하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눈이 나는 거슬렸다.
“······.” 나는 율리를 위해 이 사실을 묻어둘 수는 있겠다.
베론이 나를 죽이려 했다는 것은, 율리는 물론 그 기사단 전체를 몰락으로 밀어넣을 테니. 율리의 성품은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하여, 부하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이라 착각하고 미친 듯이 괴로워할 테니.
다만, 율리를 위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나를 죽이려 한 자를 내가 조문한다는, 그 빌어먹을 짓거리만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데큘레인의 자아든, 김우진의 마음이든, 결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아닙니다. 저희만 가겠습니다.” 내가 말이 없자 그들은 함께 기차에 올랐다. 혀를 차는 듯한 소리가 심기를 건드렸다 “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렀다.
저렇게 떠나가는 놈들의 눈초리가.
아무 것도 모르는 저 썩어 빠진 생각들이.
이가 갈릴만큼 역겨워서······.
“저, 교수님-” 그때 알렌이 입을 열었다. 나는 알렌을 노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알렌.” “네, 네에.” “아무말도 하지 말아라.” 화가 나고 있었다. 율리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참 귀신 같이 화가 나고 있었다. 화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닐 것이었다.
“교수님.” 또 다른 청아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그곳을 돌아보았다.
실비아였다.
그녀의 정수리와 어깨에 함박눈이 쌓여 있었다.
“왜 참았나요.” 실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목소리의 고저가 항상 일정한 이 아이는 언제나 조금 묘했다.
“무엇을 참는다는 말이냐.” “······.” 실비아는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뒤적였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보답.” 한 권의 책.
나는 그저 바라보았다.
“아, 제가 대신······.” 알렌이 대신 받으려 했지만, 실비아는 알렌에게 주지 않았다. 서로 힘겨루기를 하다가 실비아가 알렌을 밀어냈다.
그리고는 다시 나에게 내미는 그 책을 어쩔 수 없이 받았다.“갈게요.” 고개 숙인 실비아는 종종 걸음으로 떠났다.
그때 마침 기차가 떠나려 하고 있었다. 요란하게 울부짖는 그 시커먼 차체를 나는 바라보았다.
창가에 앉은 율리와 시선이 닿았다.
이윽고, 내 눈이 크게 뜨였다.
율리는 나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런 힘도 없이, 미소라 하기에도 너무 희미한, 그저 가볍게 입꼬리를 올릴 뿐인 쓴웃음이었지만······.
······한 달에 한 번.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그것으로 내 마음은 신기하게 정화되었다.
“참······.”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심각한 감정이었다.
“알렌.” “네, 네에!” “돌아가자. 쉬고 싶구나.” 나는 알렌과 함께 돌아섰다.
시험. (1) 율리와 기사단은 사건 장소에 도착했다.
네 번째 정거장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위치. 베르흐트까지는 1 시간도 채 남지 않은 거리.
“······1 차 습격 때는 데큘레인 교수가 기차를 무사히 수습했고, 베론 기사와 함께 생존자를 구출했습니다만.” 치안국에서 파견된 실무관이 마력을 방사하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 뒤 2 차 습격으로 차체 전체가 절벽으로 거꾸러졌고, 그 과정에서 베론 기사는 절벽으로 추락한 것으로 보입니다. 단, 데큘레인 교수가 타고 있던 VIP 량은 기적적으로 저 절벽 밑에서 걸렸고요.” “그렇군요.” 율리와 기사단은 확실히 이해했다. 실무관은 로엔에게서 복사한 사진도 보여주었다.
“물론 이곳이 너무 외지라 믿을 게 당사자 목격담 뿐이긴 한데, 혹시 그 기사는 보셨습니까?” “예.” 율리는 이미 기사를 읽었다. 허공에 붙들린 열차와, 그 속에서 태연한 데큘레인이 담긴 사진 또한 당연히 보았다.
“아마 몇 장은 안 풀렸을 겁니다만, 보시지요.” 실무관이 한 장을 더 보여주었다. 열차를 습격했던 살수들의 시체였다.
“아마 수석교수님이 제압한 것 같은데, 참. 수석교수가 될 정도의 마법사는 역시 일인군단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하.” 실무관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나 기사들은 웃지 않았다. 분위기를 감지한 실무관이 다시 진중하게 말했다.
“종합하자면 두 분다 사태를 수습하려 노력했고, 베론 기사는 2 차 습격에 변을 당한 듯보입니다.” “······감사합니다.” “예.” 율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 세상이 새하얬고 끝이 없었다.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록펠은 선로에 주저 앉아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바보같은 놈. 그리 열심히 살던 놈이 고작 기차 호위하다 골로가냐.” 록펠의 그 말이 율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귀가 멍했다.
동료의 상실은 익숙한 줄 알았으나, 그 가엾은 인생은 자꾸만 떠올랐다.
정말 아무 것도 없었던 아이였다. 밑바닥에서 일어나 오로지 꿈만 좇았고, 수없는 노력 끝에 겨우 빛을 보게 되었거늘······.
율리는 실무관에게 물었다.
“혹시, 유품이 될만한 것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습격의 배후는······.” “그게 참 애매합니다. 베르흐트로의 여정은 서로 죄를 묻지 않기로 되어 있으나, 하필이면 희생자가 또 기사님 뿐인지라, 수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해할만한 고민이었다.
그런데, 율리가 고개를 끄덕인 바로 그 순간.
─내 동생~ 어디선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크게 놀란 율리는 주머니 속의 지갑을 꺼냈다. 그 안에 웬, 자신도 모르는 수정 구슬이 있었다.
율리는 급히 자리를 피하고 말했다.
“뭐, 뭡니까!” ─응~ 사건 들었어. 그래서 연락했어.
“이 구슬은 언제 넣은 겁니까!” ─네가 모르는 사이에 넣었지~ 쿡쿡- 유세핀이 웃었다.
─것보다, 부하가 습격당했다면서? 전말이 궁금하지 않아?
“······전말을 언니가 아신단 말입니까?” ─그럼. 내가 사교계의 퀸이잖니. 내가 부탁만 하면 무엇이든 구해다줄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긴, 유세핀은 어쩐 일인지 정보에 관해서는 막대한 자산을 움켜쥐고 있었다. 사교계의 거의 모든 소문이 그녀에게로 흡수되는 것이었다.
“······.” ─내가 주워 들은 정보들 좀 알려줘?
그게 수상하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대외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유세핀의 평판은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불법적인 것이라면-” ─그런 거 아니니까 잘 들어봐. 우선 습격의 배후는 레오크 왕국의 마도가문이 유력해. 15 년 전 회의 때 레오크 왕국의 당주가 두 명이나 죽었거든. 그때의 복수를 하고 싶었나봐. 사실 데큘레인을 특정한 건 아니고, 그냥 제국 당주 아무나 노리려 했던 거야. 그 덫에 데큘레인이 걸린 거지. 마법계에서는 이미 소문이 파다해.
“······.” 율리는 어이가 없었다. 그말인 즉, 베론은 눈 먼 검에 맞아 절명했다는 뜻이었으니.
─근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묘~한 게 하나 걸려. 테르흐에게 베론을 지명하도록 부탁한 사람이 라온이라는 게 말이야.
“······라온?” ─응. 갈락이라고 있는데, 그 갈락의 많은 심복 중 한 명이야. 로트의 동생이지. 참, 로트는 내 인맥이야. 사업가지.
갈락. 라온. 로트.
도통 모르는 두 글자의 향연에 율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모르겠어? 율리 네가 알만한 이름은······ 그래.
그 말을 듣기 전에 율리는 주변의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저마다 착잡한 얼굴로 선로를 배회하고 있었다.
─길테온. 그의 친동생이 갈락이야.
“······!” 율리의 눈이 크게 뜨였다.
─길테온은 알지? 근데 갈락은 모를 거야. 표면적으로는 둘이 의절한지 30 년도 더 됐거든. 근데 내 눈은 못 속인단다. 길테온과 갈락이 그때 진짜로 싸웠는지, 아니면 가짜로 싸웠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야. 길테온이 하기 모호하고 더러운 짓거리들을 갈락이 대신하는 거지.
“길테온이 이 습격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 ─글쎄. 아직은 모르겠어. 나는 그냥 갈락이, 왜 굳이 베론을 ‘지명’하여 열차 호위를 부탁했는지. 그게 마음에 걸린다는 거지. 내가 들은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 ─대가는 알지? 언제 밥 한번 먹어줘야해.
“······예.” ─응. 이제 갈게.
유세핀이 통신을 끊었다.
“길테온······.” 율리는 길테온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의 악명은, 자이트에게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개과천선은 이미 10 년도 지났고, 지금이 상황에서는 그저 우연에 가까울 것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율리는 절벽 밑을 바라보았다. 돌부스러기들이 발꿈치에 밀려서 흘러내렸다.
까마득한 안개에 뒤덮인 세상의 끝.
동료의 유해는 저 밑바닥에 있었다.
* * * [ 순수 원소 마법의 이해 ]의 5 주차 강의는 베르흐트 이슈로 자연스레 휴강이었으나, 나는 대신 숙제를 하나 냈다.
─한 가지의 순수 원소 마법을 논문 형식으로 작성하라.
당연히 싫어할 것 같았기에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는 단서까지 덧붙였다.
대신 감점 처리.
그 이후로 나는 저택에서 시험 문제 제작에 열중했다.
이번에는 내 오리지널리티였다.
물론 이전의 시험 문제에서 영감을 얻었으나, 그 문제 풀이의 과정과 결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었다.
또한, 문제 뿐만 아니라 마법에도 정진하여, 내 「초급 염동」에 「기초 화력 통제」의 술식을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염동으로 ‘원격 화력 통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다음 술식 이식 목표는 「기초 지반 조작」.
그렇게 약 일주일 동안 훈련과 단련과 연구만 반복하며 지내다, 마침내.
오늘.
“······.” 내가 제작한 문제들을 이 육안으로 보았을 때.
나는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좋다.” 시험지에서 순금의 기류가 일렁이고 있었다. 고작 시험지에 「대부호 재력가」 가 반응하는 것이었다.
시험 문제는 총 8항.
1~2번은 이론에 집중했으나, 나머지는 최대한 응용과 활용에 초점을 두었다.
그 중 7번과 8번의 난이도는 최소한 데뷰탄 이상. 대강 1~6번이 일변수함수라면, 7번과 8번은 다변수함수라고 생각하면 옳다.
열심히 풀고, 또 노력한다면 얻어가는 것이 많을 테지.
수험생이든 마법사든,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며 깨닫는 통찰이 곧 성장인 법이니.
나는 기분 좋게 별채에서 나왔다. 본채로 가는 길에 로이를 만났다.
“아, 주인님. 경매 결과입니다.” 로이가 종이를 건네주었다. 「동방의 장인 에게한의 꽃병」의 경매 결과와 대금 입금 내역이 기록된 수표였다.
“······꽤 비싸게 팔렸군?” 가격은 자그마치 2,100 만. 물론 수수료니 세금이니 뭐니를 제하면 1,300~1,500 만 정도겠지만, 예상의 2 배 이상이었다.
“예. 꽃잎의 성분을 마탑에 분석 의뢰 하였는데, 피로 회복은 물론 피부 효능에도 좋다는 결과를 받았습니다. 그 덕에 귀부인은 물론 다수의 모험가 분들이 경매에 참여했고-”“무슨 말인지 알겠다. 대저택의 재정으로는 충분하겠지?” “예. 그렇습니다.” “예리엘에게 다른 연락은 없었나?” “예.” 베르흐트에서 쓴 돈이 900 만 엘네 쯤 됐을 텐데.
일주일 동안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봐주기로 한 건가.
“택배, 소포 입니다!” 그때 저택의 대문에서 외침이 울렸다.
“유크라인 백작님! 베르흐트에서 왔습니다!” 그렇게 소리치는 남자는 심상찮은 아우라를 품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웬 신분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모험가 신분증이었다.
“사인 먼저 부탁드립니다!” “······모험가가 배달도 하나?” 다가간 나는 사인을 하며 물었다.
“하하. 돈만 주면 뭐든 합니다. 그럼 이만!” 남자가 내어준 상자는 묵직했다.
체통에 맞지 않게 심장이 쿵덕거리고 있었다.
“로이, 편히 쉬어라.” “예.” 나는 별 일 아닌 척 본채의 내 방으로 올라왔다.
금고 마법에 생체 정보를 인증한 뒤 그 상자를 열었다.
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고작 일주일이라니. 이 영감이 대충 만든 거 아닌가, 아니면 데큘레인의 피가 너무 구려서 그런가.
그 따위 걱정으로 소포를 열었을 때.
나는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록켈록의 유크라인 지팡이」─── ◆ 정보 :명인 로켈록이 제작하여 유크라인에게 헌정한 지팡이.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전용.
◆ 범주 :장비 ⊃ 지팡이 ◆ 특수 효과 :「500」 만큼의 마력을 보관한다.
:이 지팡이는 자체가 보충 회로로 기능한다. 따라서 술자가 행사하는 마법의 성능이 자연스럽게 향상된다.
◆ 물품 특성 ──────── 생김새는 스태프도, 완드도 아니었다. 다만 중세의 귀족들이 지팡이처럼 쓰는 지팡이였다.
유물에 준하는 아름다움과 성능이었건만, 심지어 ‘물품 특성’도 있었다.
──「철목」── ◆ 설명 :타고난 목재의 능력과 성질.
:물질적인 잠재력은 과연 목재 중에서 최고라 할만하다.
────── ──「자가 학습」── ◆설명 :술자가 행하는 마법을 자체적으로 이해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 ──「미적인 물건」── ◆설명 :디자인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착용자의 옷차림에 반응하여 가장 어울리는 색감을 취한다.
────── ──「유크라인의 핏줄」── ◆설명 :퇴마(退魔) 혹은 구마(驅魔) 과정에 탁월한 위력을 발한다.
────── 내 특성을 고대로 빼다박은 녀석이었다. 다행히 좋은 부분만 취했고, 나머지는 걸러진 듯했다.
“이게 고작 900 만 엘네······.” 어마어마한 할인이었다.
나는 지팡이의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렸다. 거의 어린 시절, 스마트 폰을 처음 샀을 때의 기분이었다.
“······큼.” 고작 지팡이에 들뜨는 것도 유치하다. 이제 사흘 뒤가 수업이니, 강의나 준비하자.
물론 그 포멧은 이미 정해두었다. 강의실을 빌리기 위한 계획서도 작성했다.
중간 고사 전 마지막 수업은, 일명 [ 실전으로 배우는 종합정리 ].
* * * 수요일, 중간고사 전 마지막 강의.
이프린은 마탑 5 층에 도착했다. 오늘 수업은 3 층의 A Class 가 아니라 5 층의 ‘목적성 플로어’였다.
“또 뭘하려고······.” 이 5 층에는 강의실이 딱 3 개 뿐이었는데, 이프린은 그 중 하나의 문고리를 쥐고 열었다.
“······.” 동시에 입을 떡 벌렸다.
두 눈으로 채 담을 수도 없는 광활한 넓이, 반구형으로 드높은 천장, 중앙의 직사각형 무대, 그 테두리의 관객석까지······ 한마디로 형용하자면 무슨 경기장 같은 공간이었다.
이미 많은 마법사들이 모여서 웅성이고 있었다.
“어, 이피!” 줄리아와 페릿을 비롯한 동아리 멤버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프린은 자연스럽게 평민의 무리를 이루었고, 그 대척점은 실비아였다.
베르흐트 회의. 그 어마어마한 곳에 다녀왔다는 실비아는 귀족들에게 쌓여 있었다.
이프린은 실비아를 힐끗거렸고, 실비아는 이프린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 정확히 3 시 정각이 되었을 때.입구에서 데큘레인이 등장했다. 그의 등장으로 시끄러웠던 수다는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정갈하고 귀족스러운 걸음걸이였지만,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무지하게 고급스러워보이는 물건이었다.
베르흐트에 갔다더니, 거기서 샀나.
“반갑다.” 데큘레인은 그리 말하고 중앙의 무대에 올랐다. 그는 마법사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수업은, 마도 전투 실습이다.” 마도 전투. 마법사라면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그 단어.
데뷰탄들은 긴장했다.
“또한.” 딱─ 데큘레인이 손가락을 튕겼다. 경기장 테두리의 베일이 걷혔다.
“허.” “뭐, 뭐야.” 이프린과 마법사들은 크게 놀랐다. 수백명은 족히 넘길 듯한 인파가 이미 입장하여 있었으니.
“공개 실습이다.” 마법사들은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잠시 소란스러워졌으나, 데큘레인은 단단한 목소리로 ‘강의의 진행 과정과 목표’를 쑤셔넣듯이 말했다.
“어떤 마법이든 구현하며 서로 전투하되, 적어도 순수 원소 마법은 세 개 이상 동원해야 한다. 승패 상관 없이 오직 과정에만 집중할 것이고, 내가 너희들의 장단점을 관찰하여 작성할 것이다. 나는 너희가 그것을 토대로 발전하길 바란다. 렐린 교수?” “예. 접니다.” 그 말과 동시에, 렐린이 나타났다. 보조학과 교수인 그는 마법사와 관중들의 시선을 즐기며 손을 흔들었다.
“렐린 교수가 인명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잘 조절할 터이니, 손속에 제한을 두지 않아도 좋다.” “하하하. 다들 나만 믿-” “수업을 시작하겠다. 우선, 첫 번째로. 유로잔.” “······예, 예!” 멍하니 있던 유로잔이 손을 번쩍 들고 경기장 위로 올랐다.
“상대를 정하라. 이곳의 누구든 선택하면 된다.” “어······.” 유로잔은 쭈뼛쭈뼛거리다가 자기 친구 중 한 명을 선택했다. 로톤이라는 남자였다.
곧 둘이 서로 마주보며 섰다.
“시작. 제한시간은 3 분이다.” 데큘레인의 그 말에, 처음에는 어색하게 마법을 주고받았다.
유로잔이 발한 불이 장막처럼 엷게 번지며 로톤을 감쌌다. 로톤은 그 불의 장막에 마력으로 간섭했다.
치지지직─!
불길을 증발하며 수증기가 발생했다. 로톤은 그 수증기를 얼렸다. 빙결된 증기가 금속성을 띄며 유로잔에게 쇄도했다.
채앵─!
유로잔은 배리어로 방어했다.
“······.” 그 첫 공방이 오간 뒤.
어색함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진지함만이 자리한다.
그들은 서로 마법을 구현하고, 파훼하고, 방어하길 반복했으나······ 대련은 채 1 분을 넘기지 못했다.
“끄윽!” 신음이 대련의 끝을 알렸다. 먼저 마력이 다한 마법사는 로톤이었다.
“승리는 유로잔이지만, 점수는 과정에 따라 다를 것이다.” 데큘레인은 그 전부를 관찰하며 필기하고 있었다. 아니, 허공의 만년필이 제 스스로 움직이며 필기했다.
“다음, 벡크.” 벡크. 이프린 입장에서 꽤 악질적인 귀족인 그는 피식 웃더니 페릿을 골랐다. 페릿은 두려워하며 대련장에 올랐다.
“시작.” 두 사람은 순수 원소 마법으로 공방을 나누었으나, 격의 차이는 확연했다.
페릿의 보조마법은 벡크의 파괴마법을 30 초도 막아내지 못했다.
“벡크 승. 다음, 론도.” ······대련은 시시각각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프린은, 데뷰탄 마법사들의 전투에 집중하면서도,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데큘레인의 말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이곳의 누구든 선택하면 된다.’그러는 사이에도 마법사 간의 전투는 이어지고 있었다.
전류가 튀겼고, 지각이 진동했다. 타일이 솟았고, 불길에서 금속이 치밀었다. 바람과 전류를 결합한 「전자기 돌풍」에는 이프린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마법의 전투들이, 이프린의 마음에 내재한 어떤 욕망을 일깨우고 있었다.
“다음······ 이프린.” 이프린은 마침내 자신의 이름이 불렸음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누군가를 지목하지 않고 혼자서 경기장에 올랐다.
모든 마법사들이 의아해하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데큘레인에게 물었다.
“정말, 누구나 지목하여도 괜찮은 겁니까?” “그래. 누구나 지목해도 좋다.” 이프린은 잠시 눈을 떨구었다.
이것으로 확답을 얻었다.
누구나 지목해도 좋다.
누구나.
누구든지.
지목해도 된다.
“이프린. 꾸물거리지 마라.” 데큘레인이 재촉했다.
······뭔가 고막이 멍했고, 속은 뜨겁게 들끓었다. 온몸의 혈관에 마력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이프린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저는.” 느리게 손가락을 뻗었다.
상처 투성이의 손가락. 온갖 일들을 하느라 새겨진 굳은살.
그 투박한 검지가 가리키는 곳에는······.
그가 있었다.
“데큘레인 수석교수님.” 나는 언젠가 반드시, 나의 기량으로 당신을 짓누르길 원한다.
물론 지금 현재로서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그렇기에, 지금 당신과 나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 싶다. 한 번 쯤은 진심으로 겨루어보고 싶다.
그 시기가 너무 이르다 하여도 상관없다.
결과가 패망이어도 개의치 않는다.
그저,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경기장의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정신 나간 광년을 대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이프린도, 잠깐 자기가 돌아버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뭐, 뭣! 저 미친년보게! 인마! 내려와!” 렐린 교수가 기함하며 달려왔으나, 이프린은 손가락을 거두지 않았다. 오직 데큘레인만을 바라보았다. 그 올곧은 시선을 데큘레인은 피하지 않았다.
“저는.” 이프린은 다시 4 개월 전의 겨울로 되돌아가, 데큘레인을 처음 보았던 그 순간의 감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교수님을 지목합니다.” 이프린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분명히 보았다.
데큘레인의 입가에, 뒤틀리듯 희미하게 떠오르는 미소를.
시험. (2) “내려와!” 렐린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데큘레인보다 더 발악하고 있었다.
시뻘게진 얼굴은 거의 터지기 직전이었다.
“렐린 교수. 진정하게.” “예? 아······ 하지만 그······.” 보다 못한 데큘레인이 직접 렐린을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서 이프린과 마주보는 자리에 섰다.
“······되는 겁니까?” 막상 이성을 잃고 지르긴 했지만, 이프린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나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든 지목해도 된다고 했다. 그 대상을 제한하지는 않았지.” 데큘레인은 그렇게 말하고 지팡이를 노면에 찍었다. 쿵─! 그 굉연한 울림과 파동이 이프린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다만, 적당히 불리한 조건은 필요하겠지. 나는 너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고, 이 지팡이가 땅에서 떨어지면 네 승리일 것이다.” “······예.” 끄덕인 이프린은 주먹을 쥐었다.
저편의 데큘레인과, 그의 앞에 선 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만큼, 바라마지않던 순간이었다.
언젠가 꿈처럼 꾸었던 일이었다.
후우우우······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우선 팔찌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시작해라.” 데큘레인의 그 말과 동시에 바람의 기류가 온몸을 감쌌다.
고속화. 바람의 원소를 체화하여 받아들이는, 이 또한 순수 원소 마법의 활용이다.
첨언하자면, 착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고속화는 육체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마법의 속도에도 작용한다. 마법 사출 사이사이의 간극, 그 연사가 보다 경쾌해지는 것이다.
“······.” 예열을 완료한 이프린은 팔찌에 마력을 모았다.
보통 마법사 간 전투는 속성(屬性)전의 양상을 띈다. 각자 본인에게 알맞은 원소로 전투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프린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이프린의 속성은 원소가 아닌 기물이기 때문이다.
즉, ‘팔찌’가 곧 그녀의 속성인 것이다.
그녀의 팔찌는 마법 구사의 ‘촉매’가 되어, 4 대 원소의 모든 속성을, 어떤 성능의 감쇄나 패널티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흡!” 이프린은 화염을 방사했다. 중급에 속하는 순수 원소 마법 「불바람」이었다.
「불바람」은 거칠게 번지며 데큘레인을 휘감았다.
데큘레인은 고열의 바람에 갇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프린은 그 불꽃에 흙의 속성을 추가했다. 정확히는 불길을 증폭시키는 석탄 따위의 입자를 투하했고, 그 안에 고농도의 산소를 발생시켰다.
화르르르륵──!
경기장 가득한 불길.
그 화마는 마법의 가연성 분진과 산소에 맞닿으며 연쇄적인 산화·연소를 일으켰고, 그 결과.
분진폭발(粉塵爆發).
─────!
가공할 폭발이 일었다. 한 번 솟구친 폭발은 공기 중의 분진을 타고 수십번이나 계속되었다.
쿵─! 쾅─! 파아아아앙─!
교수 렐린조차도 당황한 괴멸적인 풍경. 그 폭발의 강도와 지수는 겉보기에도 어마어마했다.
쿠우우우우웅──!
이프린이 익힌 필살의 비기였다.
세 가지의 속성을 조합하여, 가장 파괴적인 원소인 ‘불’의 위력을 극대화하는 폭격 마법.
“······하아.” 마력을 소모한 이프린은 한숨을 몰아쉬며 그곳을 보았다.
경기장의 거의 전체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헤치웠나- 따위의 방심은 하지 않았다. 죽은 거 아닌가- 따위의 걱정도 당연히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찬바람이 불어 안개가 걷혔다.
그 너머에는, 불의 구가 있었다.
마치 알에 싸인 듯 단단한 불꽃의 껍질.
타닥타닥─ 타닥타닥─ 아지랑이처럼 타오르는 그 균열 사이로, 데큘레인이 보였다.
화염 속에서 데큘레인의 푸른 눈은 찬연했다. 그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큘레인은 조금도 그을리지 않았다.
기대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쉬이이익─!
그때 온 사방을 그을리던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삽시간에 모든 화력이 소실되었고, 이프린은 그 이유조차도 알 수 없었다.
“······.”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마법을 난사했다. 유탄 형상의 마력을 쏟아붓는 「유탄 박격」이었다.
투두두두두─!
단순하게 사출된 마법의 탄환들은 그러나, 데큘레인의 범위에 닿자 정지했다.
소유권이 탈취당한 것이었다.
데큘레인은 그 유탄들을 사용하지도 않고 전부 소멸시켰다.
공격을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아으······.” 데큘레인은 그저 보기만 하고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와 놀아주듯이. 덜떨어진 학생을 가르치듯이.
그렇다면······.
이프린은 마법을 응집했다.
치지직─ 그러나 그 마법의 구현 과정에서 에러가 있었다. 이프린이 구현하려던 마법이 고작 스파크를 튀기며 해체되었다.
이프린은 금세 그 이유를 깨달았다. 데큘레인의 ‘마력 간섭’이었다.
뒤늦게, 데큘레인이 말했다.
“네 마법에는 버릇이 있다.” 그는 「육안」으로 마법을 보는게 가능하다.
그러나 직접 본 마법을 아주 짧은 시간에 「이해력」으로 해석하고 해체하는 것은, 마력 소모가 극심하여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동작이 큰 마법일수록, 그 버릇이 더욱 도드라지지.” 단, 이미 술사의 마법을 몇 번 경험한 뒤라면.
또한 그 술사에게 어떤 ‘버릇’이 확실한다면.
마력 소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즉─ 「이해력」은 현재 이프린의 마법을 학습했고, 그로 인해 데큘레인은 그녀가 행사하려는 마법의 ‘핵심 회로’를 순식간에 파악한 것이었다.
“고등위의 마법사는 버릇을 숨긴다. 아니, 버릇조차 존재하지 않지.” 데큘레인은 말했다. 실패한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어조였다.
이프린은 계속 마법을 형성하려 했다. 메모라이즈했던 마법들을 끌어 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발현되지 않았다.그저 치지직─ 치지직─ 거리며 뭔가 타는 소리만 반복될 뿐.
“너는 내 앞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 이프린은 이를 악물었다. 마법의 구현은 포기했지만, 전투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마지막 방법이 남아 있었다.
그에게 거리, 즉 시간을 안 주면 된다.
만약 내가 한점으로 돌파하여 거리를 좁힌다면? 데큘레인의 코앞에서 마력을 방출한다면?
그는 내 마법을 해체하거나 간섭할 시간조차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은 있다.
이프린은 아카데미 출신 마법사가 아니므로 몸을 허약하게 놔두지 않았다.
체력 훈련과 단련을 비롯한 맨몸 운동은 이프린의 취미 중 하나였다.
“흐아압!” 그렇기에, 이프린은 돌격했다. 고속화로 빨라진 몸은 금세 데큘레인의 코 앞에 닿았고, 마법을 발사하려던 찰나── 이프린은 어떤 손가락을 보았다.
동그랗게 오므려진 중지.
마치, 딱밤을 쏘듯이······ 따악──!
통증은 거대했다.
돌진하던 이프린은 마빡을 부여잡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게 비틀거리다가 노면에 주저앉았다.
“······허나.” 그때 데큘레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큘레인은 저편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프린은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그 이전보다 너무나도 선명하고, 그 언제보다 만족한 것처럼 보이는 눈빛.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종류의 미소.
“나쁘지 않았다.” 극찬이었다.
데큘레인은 그만큼······ 지팡이가 마음에 들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이프린은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털썩- 대자로 드러누웠다.
나, 인정 받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기절한 그녀를, 친구들이 달려와 경기장에서 내려주었다.
“다음.” “저, 교수님. 잠시 경기장이-” 렐린은 말하려 했다. 경기장이 망가지게 되어서 조금 쉬는 시간을 갖는 것이─ 데큘레인은 경기장을 복구했다. 「염동」으로 흙을 일으켰고, 「연성」과 「 변환」으로 타일을 제조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타일은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깨끗했다.
어려운 마법은 아니었지만, 그 속도와 격조 있는 발현이 놀라웠다.
문자 그대로, 귀족의 마법이었다.
“다음. 루시아.” 수업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마법사들의 머릿속에는 방금의 대전이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프린을 다시보게 되었고, 그보다 더 데큘레인이라는 마법사를, 염동으로 기차를 멈췄다는 수석교수의 위명과 위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프린이 지렁이였다면, 데큘레인은 호랑이였다.
두 마법사의 기량에는 그만한 격차가 있었다.
* * * 다음주 월요일.
중간 고사 첫 번째 날.
······으음~ 그러면 이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응. 그렇지.
첫 시험을 끝내고 동아리실에서 낮잠을 자던 이프린은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눈을 떴다. 누룽지처럼 소파에 눌러붙은 채로 고개만 빼꼼 올렸다.
“아 이거 완전 헷갈리던 거였는데. 고마워요 진짜.” “고맙긴. 언제든 부탁해.” 줄리아였다. 줄리아는 어떤 남자와 함께 있었다. 서글서글하니 잘생긴 선배였다.
연애라도 하는 건가.
이프린은 흘린 침을 클린즈로 닦고 부스스 일어났다.
“어, 이피. 깼어? 선배도 이피 알죠?” 줄리아가 말을 걸자 선배도 돌아보았다.
“당연하지. 어떻게 몰라. 데큘레인 교수한테 싸움걸었잖아.” 작년에 승격 시험을 통과한 ‘솔다’ 등위의 선배 드렌트였다. 그 수려한 외모와 능력, 유명 마도가의 자제이면서 신분을 차별하지 않는 그 성품은 평민 마법사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다.
“네가 걔 맞지?” “······아, 네.” “이피. 나 지금 선배한테 데큘레인 과제 봐달라 하고 있었어. 기한까지 5 일 남았나?” “어? 어. 딱 5 일······?” 정수리를 긁적이던 이프린은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과제 뭉치를 보았다.
저걸 작성하다가 깜빡 잠들었던 건데, 설마?
훔쳐봤나?
그 시선을 살핀 드렌트가 웃으며 말했다.
“안 읽었어. 예의가 아니잖아?” “······네? 아, 하하, 하하하······. 뭐, 별로 그런 건 아닌데.” 이프린은 과제를 제 가방에 넣었다.
이런 거 흘리고 다니면 안 되는데. 근 2 주 동안 하루 3~4 시간만 자다 보니 정신이 조금 이상하다.
드렌트가 피식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이프린, 네 것도 한번 검수해줄까?” “네?” “줘봐. 검수해줄게.” 드렌트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다. 6 계열의 마법을 균등하게 익힌 육각형 마법사.
그러나 이프린은 쓴웃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저는.” “응? 아니야, 괜찮아. 방금도 줄리아 과제 검수해주고 있었던 건데.” “아뇨아뇨. 누구 보여줄 만큼 잘 쓰지도 못해서요.” 그런 두 사람을 조금 불편하게 지켜보던 줄리아가 시간을 핑계로 벌떡 일어났다.
“어! 곧 4 시다! 그럼 우리는 다음 시험이 있어서, 가볼게요! 고마워요 선배!” “응? 아······ 그래. 잘 다녀와~” 두 사람은 동아리실에서 나왔다.
복도를 걷던 줄리아는 “드렌트 선배 잘생겼지?” 따위의 말로 떠보았지만, 이프린은 고개를 저었다.
“난 별로.” “왜? 뭐가 별로인데?” “아무 여자한테나 친절할 것 같잖니.” “아항~ 그렇긴 하지. 근데 드렌트 선배, 이번에 공청회도 참석한대.” “논공회?” “응. 그거.” 중간 고사가 끝나고 1 주일 쯤 지나면, 논문 공청회가 열린다. 데뷰탄에서 솔다로 승격한 선배들이 본인의 마법 논문을 공개하고 마탑 교수들의 평가를 받는 자리.
대학마탑의 마법사로 남으려면, 언젠가 이프린와 줄리아도 반드시 밟아야 하는 과정이다.
이프린은 중얼거렸다.
“부럽네. 우리는 빨라야 1 년이지?” “그렇지. 아, 실비아는 반년 안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왜?” “수업을 엄청 많이 듣잖아 걔는. 쉬는날이 일요일 밖에 없을 걸? 완전 마법에 미쳤어 그냥.” 그러는 사이 마탑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두 사람은 각각 시험을 보는 층을 눌렀다. 줄리아는 4 층, 이프린은 11 층.
띵─ 4 층에 먼저 닿았고, 줄리아는 손을 흔들며 내렸다.
“난 갈게! 이피 시험 잘봐!” “응. 너도. 잘보렴.” 후아아아아암······.
하품을 내뿜던 그때, 띵─ 6 층에서 문이 열렸다.
이프린은 그 앞에 선 금발의 마법사를 보곤 흠칫 놀랐다.
실비아였다.
“······.” 실비아는 아무런 내색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섰다.
“······.” 우물쭈물거리던 이프린이 먼저 물었다.
“시험, 그, 잘봤니?” “······.”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잘봤다니 뭐.
이프린은 괜히 어색해서 각 층의 이름이나 살펴보았다.
문득, [ 77 층 : 수석교수 데큘레인 집무실 / 데큘레인 연구실 ]이 눈에 띄었다.
띵─ 하고 다시 문이 열렸다.
10 층이었다.
이프린은 손을 흔들어 인사하려했지만, 실비아는 엘리베이터를 나가면서 선명하게 뇌까렸다.
“다음부터는 교수님한테 까불지마. 그날 넌 안 죽은게 다행이었어.” “······?” 그 나른하면서도 서늘한 목소리가 잔향처럼 남았다.
띵─ 엘리베이터는 닫혔고, 이프린은 멍하니 문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뭐야 쟤?” * * * 77 층, 수석교수 데큘레인의 연구실.
나는 연구 논문을 분석하고 있다.
시험 문제도 제출했으니, 마탑에서의 남은 업무는 이것 뿐이었다.
“이 정도면······.”어렴풋하고 아득하기만 했던 논문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논문 자체의 아이디어는 탁월했다.
처음에는 자꾸 나무와 불, 숯, 연필, 다이아몬드 따위의 이야기만 나오기에 아리송했지만, 장시간의 「이해」 끝에 알게 되었다.
이 발상은 ‘탄소(炭素)’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탄소라는 원소의 잠재력은 거대하므로, 정립(定立)에만 성공한다면 대강 ‘탄소류’따위의 신학파를 창단할 수 있을만하다.
물론 탄소라는 원소 그 자체를 활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탄소 특유의 속성과 성질, 즉 동소체(同素體)와 거의 무한에 가까운 결합 방식을 접목하여, 마법에 어마어마한 유연성과 가능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익히기에는 힘들다.
이 논문을 토대로 창안한 마법의 ‘메모라이즈’와 ‘구현’을 위해서는 거의 모든 속성에 대한 재능이 필요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마력 소모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마법 개발’과 그 ‘실전적인 습득’의 구분은 흔한 이야기다.
현대 과학으로 비유하자면 ‘이론물리학자’와 ‘실험물리학자’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 것과 같다.
이 세계에서 마도학파의 큰 줄기를 차지하는 네임드 ‘린넬’ 또한─물론 어느 정도의 실전력은 지니고 있지만─ 본인이 창안한 파괴계열의 마도를 정작 그 제자들 만큼 잘 다루지는 못하니.
다만 그 누구도 아인슈타인에게 ‘직접 실험하지 않는다’며 욕할 수는 없는 것이다.
“통찰은 대단하긴 하나······.” 과학이 부족한 세상에서 이프린의 아버지는 숯, 연필, 다이아몬드가 사실은 같은 원소라는 것을 발견했고, 그 속성을 마법으로 활용할 생각을 품었다.
“연구 초기에 그만둔 것인가.” 정작 그 과정은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틀리고 빈 부분이 많았으며, 또한 직관이 대다수였다.
물론 마법사의 논문은 보통 7~8 할이 직관이고 2~3 할이 이론이기는 하다.
그 정도만 되어도 논문을 이해하고 마법을 구사하기에는 무리가 없으니.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되돌아와, 이 마법과 어울리는 마법사는 바로 한 명이 떠오른다.
“······이프린.” 저번 수업에서의 어떤 당돌한 마법사. 팔찌를 촉매로 4 대 원소를 모두 다루던 재능.
이프린.
“······.” 다만 그럴수록, 이프린의 아버지에 대한 의문은 조금씩 커져간다.
나는 연구실 서랍의 구석에 넣어두었던 펜던트를 꺼냈다.
어릴 적 이프린의 모습이 담긴 팬던트.
한데, 이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은 왜 잘려있는가.
그저 ‘사진이 이렇다’고만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오묘하지 않은가.
“······.” 한참 동안 팬던트를 들여다보던 나는 곧 연구실을 나왔다. 그리고 집무실로 돌아와서 한 권의 책을 꺼냈다.
그때.
어떤 시선이 내 의식에 꽂혔다. 나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 매였다.
마탑의 창틀에 어떤 매가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놈을 바라보았다. 놈은 뭘 쳐다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의아함에 고개를 약간 비틀었다.
그러자 매는, 파르르─ 푸드득 푸드득─ 누군가에게 혼난 것처럼 몸을 떨더니 황급히 날아갔다.
“주인이 있는 매인가.” 털 관리도 그렇고, 괜히 귀엽게 생긴 것도 그렇고.
나는 창문의 커텐을 쳤다.
* * * ······제국의 서쪽, 유크라인 영지의 해안 도시 ‘루칸’.
사시사철 맑고 따뜻하여 제국의 휴양지로 유명한 그곳의 항구에서, ‘붉은 가넷 모험단’은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배인가?” 오늘은 다도해에서 아이가 도착하는 날.
가네샤는 손차양을 한 채 저편에 보이는 배를 가리켰다.
“예. 그렇습니다.” 우선은 여자 아이 한 명 뿐이었다. 아이의 친척 두 명은 아직 다도해에 남았다.
“배가 참 느리네.” “단장님 성격이 급한게 아니고요?” “너 요즘 시비를 자주 건다?” “시비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렇게 투닥거리는 사이에 배가 도착했고, 드디어 아이가 내렸다.
그 귀여운 모습을 보자마자 가네샤는 손과 머리카락을 동시에 흔들었다.
“여기. 여기야.” 펄럭펄럭- 날개처럼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보며 아이는 환하게 웃었다.
“가네샤, 오랜만이에요.” 다도해에서 만난 아이는 많았고, 그 중 대단히 특별한 재능은 세 명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네샤의 마음에 특히 드는 아이.
전부다 소중하지만, 특히 아픈 손가락.
“리아~ 안 보고 싶었어?” 리아는 어른스러운 녀석이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갈색 눈의 아이.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하지만, 원대한 재능을 품은 아이. 심지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안다.
다만 그 너무한 어른스러움 탓에 어리광도 부리지 않는데, 그게 더 가엾은 아이.
“그렇게 보고 싶지는- 가극!” 그런 리아를 가네샤는 꽉 껴안았다.
“리아, 보고 싶었어!” “아, 아파요. 아파. 이런 거 아동학대라니까요, 아 정말······.” 품 안에서 삐죽 튀어나온 그 호빵같은 얼굴이 귀여워서 미칠 것 같았다.
“너는 생일이 지나서 제국법적으로 아동이 아니란다~” “아니 그게 뭐 어쨌다구······ 아, 아프다니까, 놔, 놔라구 이 바보야······!” 너무 어른스러워서 너무 귀여운 아이.
“단장. 좀 놔요. 아프대잖아요.” “놓으라구······ 놓아······. ” “아, 미안.” 가네샤는 그제서야 풀어주었고, 리아는 짐짓 표독스런 눈으로 노려보았다.
“진짜······. 완전 바보세요?” “미안미안. 갈까? 맛있는거 사줄게.” “······뭐 사줄 건데요.” 이 아이가 얼마만큼, 또 어디까지 성장할지 지켜보는 건.
앞으로도 꽤 사랑스러운 취미가 될 듯하다.
시험. (3) ······황실대학마탑의 이사장은 개인 집무실에서 흥미로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베르흐트에서 내려온 지령이었다. 그 중에서도 ‘적궤에 대한 안건은 차후 회의까지 불문에 붙인다’라는 항목이었다.
도박을 한다면 ‘적궤 탄압’에 천만이든 1 억이든 걸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결과는 이렇게 되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데큘레인의 극렬한 반대 때문이었단다.
“뭘까······.” “그러게 말입니다. 참.” 이사장의 집무실에는 렐린과 레트린을 비롯한 열 세 명의 교수진이 있었다.
이렇듯 교수들은 보통 달에 한 번 씩 이사장을 배알(?)하러 오는데, 여태 단 한 번도 들르지 않는 사람은 데큘레인 뿐이다.
“근데 오늘은 왜 오셨어요들? 마도회에서 누구 만났나봐요?” 이사장의 물음에 교수들은 그저 웃었다.
이 마법계에도 파벌은 엄연히 존재한다. 또한 ‘학파(學派)’라 하여 그 갈래가 꽤 많고, 그 학파에 소속된 교수들은 ‘마도회’라는 정기적인 교수 모임에 소속되어 있다.
그러나 역시 데큘레인만은 학파에 얽매이지 않는다. 유크라인이라는 가문 자체가 마법계의 대부나 다름이 없으므로.
“이번 마도회에 ‘루이나’ 공이 참석하셨습니다. 그 분과 얘기를 좀 해봤는데 말입니다······.” 교수 한 명이 용기내어 꺼낸 말에 이사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루이나는 과거 데큘레인의 수석교수 경쟁자였다.
다만 불의의 사건─혹은 데큘레인의 계락─으로 자진사퇴했고, 현재는 왕국 대학마탑에서 수석교수로 역임 중이었다.
“제국으로 돌아온대요?” “아하하. 뭐, 자리만 보장된다면, 당연히 오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 마탑으로서도 어마어마한, 그, 이득이겠지요. 루이나 공이 왕국에서 이룬 성과가 워낙 대단했지 않습니까?” “······.” “반면 데큘레인 교수는 요즘 좀······ 좀 이상하고요. 세상에, 적궤를 두둔하다니요. 베르흐트에서 그런 언행을, 데큘레인 교수가 보일 줄은······.” 그 뜻이 뚜렷한 어느 교수의 말이었다. 이사장은 피식 웃고 손짓했다.
“알았어요. 만약 루이나가 돌아 온다고 하면! 고려할 수는 있어요. 근데 뭐, 지금은 일단 이만 가봐요. 오늘은 나 할 일 있어요.”
Comentários
Postar um comentár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