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5

미친 듯이 두뇌를 회전하고, 어디 뭔가 없나 눈을 굴리다가, 마침내. 
 “이, 이, 이 공간이 너무 협소하지 않습니까?!”  동아리실 안을 삿대질하며 외쳤다. 
 “우리, 엄연히 제국 황실대학마탑의 마법사들이, 비품이 이게, 이게 뭐야! 
너무 좁지 않나! 가구도 이게 뭐야! ······약간 이런 식으로, 분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 하 하.”  말을 마친 렐린이 숨을 몰아내쉬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책임지고 더 좋은 것으로 바꾸어 놓겠습니다.”  “역시 렐린 교수. 아주 상냥하오.”  데큘레인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렐린은 하하하- 제가 상냥하다니요- 따위의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수업이 있어서······ 하하하하!.”  렐린은 너털 웃음을 지으며 떠났고, 그때까지도 마탑 복도에는 마법사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데큘레인은 그들, 정확히는 렐린을 충동질한 무리를 쏘아보았다. 이름도 알고 있었다. 벡크, 이시아, 주페른. 
 “바퀴벌레 같은 것들은, 항상 바퀴벌레 같은 행동을 하기 마련이지.”  서늘하고 직설적인 경고. 움찔 떤 그들은 정녕 바퀴벌레처럼 빠르게 숨어들었다. 
 이후, 데큘레인은 평마탐동의 부원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이내 동아리실 내부로 넘어갔다. 
 “싸구려 같긴 하군.”  그게 끝이었다. 
 데큘레인은 어딘가의 화보처럼 걸어서 복도를 떠났다. 
 “······우와.”  페릿은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에 주저앉고 말았다. 방금 그들은 오한을 느꼈다. 
 과연, 저게 마탑의 교수란 말인가. 요 근래 데큘레인의 실적이 없는 것을 두고 위기다 위기다 떠들던데, 그건 다 모르는 놈들이 하는 말이다. 
 한 번만 직접 마주하면, 저 위압을 느껴보면, 그딴 위기설이 다 개소리인 걸 알 수 있을 테니. 
 “오늘, 교수님 기분 안 좋으신가? 평소보다 훨씬 더 무서워······.”  “쉿.”  페릿의 말에 줄리아가 입술에 검지를 대었다. 그리고는 아주 자그맣게 속삭였다. 
 “오늘, 기일이잖아.”  “기일?”  페릿이 놀라서 되물었다. 이프린도 말없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어. 근데, 데큘레인 교수 님한테는 절대 하면 안돼. 만약 실수로라도 언급하면, 두 번 다시는 눈을 뜰 수 없대. 말하자면 금기지.”  줄리아가 짐짓 무섭게 말했다. 
 “······풋.”  아 나는 이것도 웃기네. 
 두 번 다시 눈을 뜰 수 없긴 무슨. 말 하나 잘못하면 사람을 죽인다는거야 뭐야. 
 헛웃음을 짓던 이프린은 표정을 다잡았다. 
 “그런데 기일이면······. 신기하네. 저 교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응?”  줄리아는 갸웃거렸다. 데큘레인의 사별은 모를 만하지만, 데큘레인의 현 약혼자, 율리와의 관계는 워낙 유명할 텐데. 
 “누구를 좋아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구나.”  냉소인지 탄식인지 모를 그 목소리를 읊조리던 그때. 
 “야 미쳤다. 미쳤어 이거.”  위자보드를 들여다보던 론도가 경악한 듯 눈을 크게 뜨고 머리털을 움켜쥐었다. 이프린과 줄리아도 그를 보았다. 
 “왜?”  “데큘레인 교수, 방금 과제폭탄 퍼부었어.”  “뭐? 어디!”  줄리아와 이프린과 론도. 세 사람은 데큘레인 강의를 신청했기에, 옹기종기 모여서 위자보드를 보았다. 
 위자보드에 기록된 데큘레인의 과제, 그 내용은······  [ 세 가지 이상의 속성이 결합된 순수 원소의 마법식 연구, 서술 ]  [ 마력의 밀도와 농도에 따른 이론과 원소의 흔들림 연구, 서술 ]  [ ‘마력의 질’에 대한 연구, 서술 ]  “아 잠깐 이게 뭐야······.”  이프린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충격을 느꼈다. 
 흔적. (4)  대륙의 기사단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로, 황실이나 왕실에서 운영하는 국립 기사단. 
 국립 기사단은 그 규모가 아주 크다. 기사 뿐만 아니라 대학 출신 마수·던전 연구원도 다수 근무하며, 소속 기사들은 유사시에 해당 국가의 간부로 소집된다. 
 기사학과 생도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재능만이 이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가문에서 운영하는 기사단. 
 당연한 말이지만, 웬만한 대영지가 아니면 기사단을 운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영지가 넓고, 마수 출몰이 잦고, 다발적인 던전 생성 가능성이 높은 가문만이 기사단을 거느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유크라인의 ‘하데카인 기사단’은 탁월한 입지조건과 대도시라는 이점으로 인하여, 기사학과 생도들이 선호하는 기사단으로 손꼽힌다. 
 세 번째로, 사립 기사단. 
 제국 전역의 108 기사단 중 절반 이상은 이 사립 기사단이다. 
 국립 기사단과 가문 기사단은 지역 자체에 연고를 두는 경우가 많으나, 사립 기사단은 보통 대도시에만 거점을 두며, 한달에 2~3 회의 원정을 떠난다. 
 그들은 지방의 마수 토벌, 부락 궤멸, 던전 공략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그 전리품과 후원금을 기사단의 수입으로 한다. 
 다만 기사단 설립의 조건이 몹시 엄격하고 까다롭기에, 기사단 창설은 1 년에도 고작 한두 번 뿐이다. 
 “······다행이다.”  그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신생 기사단 ‘프레하임’의 본관. 
 율리는 회계부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상반기는 여유롭게 흑자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수 부락 토벌도 그렇고, 던전 공략도 그렇고, 올해는 여러모로 운이 따라주려는 듯하다. 
 “그래, 앞으로도 이렇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다······.”  율리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나른한 기쁨을 만끽했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왔다. 
 “율리 기사단장님.”  율리의 선배 기사이자 현 프레하임의 부단장 ‘록펠’이었다. 
 “예. 록펠 경. 무슨 일입니까?”  “테르흐 사(社)에서 특급열차 호위를 부탁했습니다.”  록펠이 까글까글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서류를 내밀었다. 
 “베르흐트 회의 말씀이십니까.”  “예.”  사립 기사단은 가끔 모험단처럼 임무를 받기도 한다. 
 다만 그 피차 간에 요구되는 신뢰도는 모험단과 격이 다르다. 기사단은 검증된 기관 혹은 국가의, 공익적인 성격이 짙은 임무만을 수락한다. 
 “베르흐트 소집이 15 년 만인데, 저희한테도 하나 왔네요.”  테르흐 특급열차. 낭떠러지 산맥의 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마공학 열차로, 베르흐트 산맥과 가장 가까운 고도까지 이어지는 유일한 이동수단이다. 
 “이게 왜 갑자기 우리한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록펠은 질색하듯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베르흐트 소집 회의에는 데큘레인도 참석할 텐데, 율리의 기사들은 데큘레인이라면 치를 떠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굳이 수임을 말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록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인지 정작 율리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습니까? 베론이 하고 싶다고 하기는 했습니다만.”  “베론이 말입니까.”  그 말에 율리는 엄중히 되물었다. 공적인 자리에서 그녀는 언제나 딱딱하고 고지식한 상관이었다. 
 “예. 사실 그 임무 자체가 베론을 지명하여 들어온 겁니다. 요즘 녀석이 요인 호위에 두각을 드러냈잖습니까.”  베론. 대학도 나오지 못한 평민이지만, 특유의 기사 정신과 어마어마한 노력으로 동나이대의 황실 기사와 비등한 기량을 갖춘 인재. 
 가끔씩 혼자 사색에 잠기는 기질이 있긴 하나, 그라크넨 던전에서 보였던 그 용맹과 동료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율리도 직접 눈으로 보아서 안다. 
 “잘되었군요. 베론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허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종합하자면, 베론은 율리를 포함한 프렌하임 기사단 전원이 가장 신뢰하는 기사였다. 
 심지어 그 깐깐한 자이트조차 ‘요즘은 아주 드문 올드 스쿨의 향이 난다’며 크게 칭찬했을 정도이니. 
 “근데······ 정말 괜찮으십니까?”  “예. 정말 괜찮습니다.”  “정말입니까? 베론은, 저희가 솔직히 업어 키운 거나 다름이 없는데 말입니다”  “······록펠 경. 그 이상 의심하시면, 저도 화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율리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자꾸만 괜찮냐 괜찮냐 물으니 오히려 안 괜찮아지려는 것 같았다. 
 정말 괜찮은데. 
 “또한, 록펠 경도 아시지 않습니까. 특급열차 호위는 큰 임무입니다. 베론이 잘 수행한다면, 저희 기사단의 평판은 물론 본인의 커리어에도 아주 이로울 것입니다.”  “예. 그렇긴 하지만······.”  록펠은 가만히 생각했다. 
 설마, 데큘레인과 화해를 한 것인가? 
 어제인가 회담이 있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아니, 아니지! 
 자이트 공이 뚜들겨 패셨구나! 그게 아닌 이상은······. 
 “이상한 생각은 하지도 마십시오.”  그 속을 꿰뚫어본 율리가 단호하게 잘라냈다. 
 “아, 예. 크흠. 저 근데, 기사단장님. 오늘은 뭘 하십니까?”  “오늘은 들를 곳이 있습니다.”  “흠. 회식을 생각했었는데, 일이 있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록펠은 뒷목을 긁적이며 나갔다. 
 “······쓰읍.”  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책상 밑을 힐끔 보았다. 그녀의 발치에는, 오늘 누군가에게 선물할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도의적으로 한 번 정도는 얼굴을 비추는 게 옳을 듯하여서, 이렇게 꽃을 샀다. 
 “아직 믿을 수는 없다만······”  물론 데큘레인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정말 그가 스스로의 말을 관철하고 지켜나간다면, 그렇게 바뀌어가며 언젠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과할만큼 달라진다면······. 
 율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울, 이라 할만한 것은 없었다. 
 여태 얼굴 치장 따위에는 영 신경도 쓰지 않았던 터라. 
 하는 수 없이, 책상 위의 명패를 들었다. 
 어느 정도 거울처럼 반사가 되었다. 
 율리는 볼을 한 번 부풀리고 미소를 지어보았다. 입꼬리를 쭈욱─ 땡기자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색했다. 
 하긴, 근 3 년 간은 제대로 웃어본 적도 없었으니. 
 “아 참! 저, 기사단장님······?”  그때 다시 록펠이 들어왔다. 
 제 얼굴에 기다란 명패를 대고 기괴하게 웃는 율리를, 록펠은 보았다. 
 “······.”  “······.”  서로 눈만 끔뻑거리다가 록펠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율리는 슬며시 명패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방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생각했다. 
 특급열차 호위. 열차 호위라면, 기회라 할 수 있다. 베론이라면 그들을 잘 지켜줄 테고, 스스로의 과소평과된 능력도 세간에 알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황실 기사단에서 스카우트가 온다면 대견히 놓아줄 의향도······. 
 똑똑─  이번에는 제대로 된 노크와 함께, 다시 록펠이 들어왔다. 
 “기사단장님. 보고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예. 무엇입니까. 어서 말하시지요.”  록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고, 율리도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지만, 왜인지 두 사람의 얼굴은 자꾸만 화끈해지고 있었다. 
 * * *  묘지라는 장소는 그 분위기만으로도 새삼스러운 정념을 일으킨다. 
 그저 다수의 비석이 놓인 풀밭일 뿐인데. 
 불어오는 바람은 누군가의 손인 듯하고, 풀벌레 울음은 어딘가 먼 세상의 말소리인 듯하다. 
 그런 곳에 홀로 온 내가 느끼는 소회는, 고독. 
 ······오직 고독 뿐이다. 
 나는 길을 걸으며 누군가를 찾았다. 
 데큘레인의 사별한 약혼자. 이름은 물론 얼굴도 모르겠지만, 그 녀석의 성격이라면 눈에 띄도록 해놓았을 것 같았다. 
 일대를 훑어보며 풀을 밟았다. 
 화려한 무덤, 소박한 동판, 잘 가꾸어진 묘비, 잡초에 파묻힌 비석······ 내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망자의 사연이 있었다. 
 “음?”  해질녘 노을의 빛이 내려앉고, 분홍색 물감처럼 번지는 그 하늘 아래에서 문득. 
 “······역시. 예리엘이 왔다갔나.”  방금 놓인 듯 생생한 꽃다발이 눈에 띄었다. 망울진 봉우리에서 오늘 아침 맡았던 좋은 냄새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예리엘의 향수였다. 
 나는 쓰게 웃으며 그 꽃다발을 품은 묘비 앞에 섰다. 늦은 오후에 소나기가 내린 탓인지 표면에 물방울이 서려 있었다. 
 “······.”  그 작고 아담한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나는 그저 바라보았다. 
 오래도록 보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참 너는······.”  기발하다고 해야할지, 너무하다고 해야할지. 
 나는 다만 얄궂다고 생각했다. 
 고작 글자에 불과한 이름. 그 이름이 나에게, 어떤 슬픔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으니. 
 “······왜.”  이는 데큘레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심장에서 촉발된 감정이 온몸을 건드렸다. 
 애써 잊고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이 떠올랐다. 
 살을 도려내는 듯 아팠다. 목이 죄이는 듯 숨쉬기가 힘들었다. 
 전부, 이 비석에 새겨진 이름 때문이었다. 
 [ 유아라 폰 페어기스 마인니히트 ]  [ Yuara von Vergiss meinnicht ]  [ 항상 너를 고마워하던 사람 ]  아마도, 이스터 에그. 
 데큘레인의 모델이 김우진이었던 것처럼. 
 그 녀석이 남몰래 넣었을 자신의 이름.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상했고, 화가 났고, 궁금했다. 
 너는 도대체 왜. 
 데큘레인의 사별한 약혼자에게,  너의 이름을 주었는지. 
 그리고 도대체 왜. 
 네가 나를 고마워하는 건지. 
 “······고맙기는. 헤어지기 전이었냐 이거?”  장난스레 중얼거려보지만, 파문처럼 번지는 울림은 멈추지 않는다. 
 떨림이 멎질 않는다. 
 귓가에 속삭여지는 듯한 네 목소리가, 그 옛날의 기억들을 끝없이 끄집어내고 있다. 
 눈을 감으니,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언젠가 수줍게 웃으며 내 그림을 칭찬해주었던, 겨울 밤 파랗게 질린 나에게 외투를 벗어주었던, 사랑한다 말하며 내 품에 안겼던, 무너진 나를 일으켜세워주었던, 울면서도, 화내면서도, 7 년의 세월을 항상 내 곁에 있어주었던, 변함없이 함께 웃어주었던, 가족을 잃은 나에게 오직 한 명 뿐이었던,  지금 생각해도 가슴 떨리는 네가,  뒤늦게 내리는 눈처럼······  아니, 너는 이미 오래 전부터 쌓여버린 눈처럼,  내 마음을 뒤덮고 있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장갑을 벗고 묘비의 물기를 닦았다. 
 너의 그 이름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너는 모르겠지. 
 그저, 너의 이름이. 
 너는 장난처럼 새긴 이 이름이. 
 그게 너무,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 과한 무게가 되어 다가오고 있음을. 
 “······.”  숨이 가빴다. 눈 앞이 흐려졌다. 
 단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었다. 
 나는 지금, 데큘레인이 아닌 김우진으로서······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바스락. 
 그때 날카롭게 발생한 나뭇잎 밟는 소리. 뇌리에 서슬이 일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몸을 일으켰다. 맺혔던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눈가를 찔렀다. 
 그런 나를,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었다. 
 “······너.”  나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말 없이 서있기만 했다. 그 얼굴에는 흔치 않은 놀람이 서려 있었다.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온 나는 어느 무엇보다도 쪽팔림을 느꼈다. 
 흔적. (5) ───[ 유료 시작분 ]────  ······2 시간 전. 
 실비아는 오후 7 시에 차를 타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노트와 꽃, 펜이 들려 있었고,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그녀는 뒷좌석에 고요히 앉아서 속으로 꿍얼거렸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과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어주었는지. ‘셋 중 둘 만 해도 된다, 너무 높은 수준을 요하지 않는다’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아무리 5 학점 짜리라도 이건 너무한 불합리······. 
 “도착했습니다.”  과제를 고민하는 사이 목적지에 닿았다. 
 실비아는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저녁의 공기는 서늘했다. 서쪽의 땅끝으로 떨어지는 태양이 노을을 흩뿌렸고, 그 빛무리는 하늘과 난반사하며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장소와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실비아는 한 손에 꽃을 든 채 걸었다. 가장 깔끔하게 닦인 길 위로 단아한 구두가 또각였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온통 꽃으로 치장된 묘비였다. 
 [ 시엘리아 폰 엘레민 일레이드 ]  [ 자랑스러운 마법사 길테온의 아내이자, 사랑스러운 딸 실비아의 어머니. ]  어머니가 영원히 잠든 자리. 
 어머니는 자신의 고향에 묻히길 원했고, 실비아는 그녀를 따라 제도로 왔다. 
 “나 왔어.”  실비아는 무릎을 꿇고 앉아 꽃을 놓았다. 
 “오늘 영지에서는 동생이 적성 검사를 했대.”  재혼은 벌써 5 년 전의 일이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남동생은 어느새 4 살이나 되었다. 
 “동생은 마법에 재능이 없대. 생긴 것도 감자 같아. 통감자. 아직 발달이 덜 된 것 같아. 아니면 어디 모자라게 태어난 걸까.”  오늘의 넋두리는 나긋하게 이어졌다. 
 “데큘레인 교수는 나쁜 사람이야. 내가 자기 수업만 듣는 줄 알아.”  어머니의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는다. 슬픔도 이제는 희미하다. 
 그럼에도 달에 한 번, 말이 없는 그녀가 이야기를 하러 오는 불규칙적인 날. 
 오늘의 핑계는 데큘레인의 과제 폭탄이었지만, 그게 무엇이든 간에, 이곳에서 털어놓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그럼 갈게. 잘 지내.”  실비아는 무릎이 아파올 즈음 일어나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그렇게 공동묘지를 나가려 했는데, 뭘까.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의 드문드문한 달빛 아래. 
 이런 곳에서 마주치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한 사람이, 오늘 그녀의 기분을 좋지 않게 만든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있었다. 
 데큘레인.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어떤 묘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눈에 띄었다. 
 어둠을 머금은 새하얀 머리카락과 경갑 차림의 아름다운 기사. 
 둘이 함께 왔나 싶었지만, 아닌 듯했다. 여인은 조금 먼 곳에서 데큘레인의 등을 지켜보고 있었고, 데큘레인은 여인을 볼 수 없는 위치였다. 
 “······.”  데큘레인은 마냥 묘비를 바라보기만 했다. 
 꽤 오랫동안, 그 이름을 가만히 헤아리는 듯했다. 
 그 속의 기억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그러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맨손으로 묘비를 부드럽게 쓸었다. 
 비석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곧 텅 비어버렸다. 공허한 동공에 달빛이 담겼다. 
 눈물이었다. 
 “······!”  올해 들어 가장 크게 놀란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숨소리를 내버렸다. 
바스락- 나뭇잎이 밟혔고, 그렇게 들켜버렸다. 
 흠칫 떤 데큘레인이 벌떡 일어났다. 
 “······너.”  그리고는 붉게 물든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다. 
 “엿보려 한 건 아니에요.”  실비아는 언제나처럼 담백하게 말했다. 무의식적으로 백발의 기사가 서있었던 곳을 보았으나, 기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데큘레인이 실비아의 시선을 따라갔다. 
 “누가 또 있었나.”  실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입이 무거운 편이었다. 
 “아니요.”  그러자 데큘레인은 눈을 감고 큰 숨결을 내쉬었다. 
 “하아······.”  실비아는 혼날까 걱정했지만, 데큘레인으로서는 오히려 고마웠다. 
 덕분에, 감정의 해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격랑이었다. 
 정말 난데없이, 순식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더 깊이 붙잡혔더라면, 분명히 표류했을 것이었다. 
 “되었다. 돌아가지.”  데큘레인은 어딘가로 걸었다. 입구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실비아는 저 사람이 어딜 가나 머뭇거렸지만, 일단은 따라서 걸었다. 
 “혼내지 마세요.”  조바심에 그렇게 말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데큘레인은 계속 걸었다. 
 더 깊이, 깊이, 깊이 들어가자 실비아는 조금 불안하게 되었다. 
 “오늘 본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여전히 침묵이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근데 징계를 준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사적인 일로 징계를 줄 수 있을까. 아니, 저번의 사건을 핑계로 뒤늦게 징계를 줄 수 있어. 
 “실비아.”  마침내 멈춘 데큘레인이 말했다. 
 “네.”  그는 주변의 땅과 하늘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실비아는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데큘레인은, 아무래도 정신이 조금 나간 것 같았다. 
 눈물이 발각되었으니 그럴 만도 할까. 
 “출구는 반대편이에요.”  “······그렇군. 안내해라.”  그렇게 돌아선 그들은,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했다. 
 깊숙한 묘지의 길목. 
 출구로 이어지는 그 비좁은 숲길에, 어떤 후드 차림의 괴한이 서있었다. 
방금 까지만해도 없었던 그는 척 보기에도 살의를 품었고, 명백히 길을 가로막은 꼴이었다. 
 데큘레인은 피곤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누구냐.”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데큘레인은 염동을 부려 놈의 후드를 걷었다. 
 그 맨살이 드러나자 실비아는 긴장했다. 
 긴 머리카락과 눈가에 새겨진 흉터. 맹금의 눈동자와 갸름한 턱선. 
 저 관상은, 초면이지만 익숙하다. 
 몽타주로만 보았던 위자드 킬러─ 록하크. 
 “실비아.”  “네.”  데큘레인은 「악당의 운명」으로 그를 보았다. 무시무시한 살의가 짙은 적색으로 안개를 이루고 있었다. 
 “너는 도망가거라. 뒤로 가더라도 나갈 수는 있겠지.”  데큘레인은 한 발자국 나아가 실비아를 등 뒤에 두었다. 실비아는 자그맣게 되물었다. 
 “정말요.”  “그래. 너는 저 놈을 상대할 수 없다.”  데큘레인은 알고 있다. 정상적인 마법사는 록하크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놈이 지닌 특성은, 어느 게임에서나 사기라 불릴 만한 「마법 무효화」. 
 심지어 그 손에 닿아야 하는 것도, 몸에 닿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놈 근처의 반경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놈의 영역 밖에서 사출된 마법도 범위 안으로 들어오면 소멸되어버린다. 
 이 압도적인 성능의 대가는, 자신의 마력을 포기하는 것. 
 “실비아. 어서 떠나라.”  그 말에 실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데큘레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집 부리지 말고 가거라.”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데큘레인은 이를 악물었다. 
 “실비아. 너는 있어봤자 방해다. 어리석은 짓 하지······?”  뒤돌아서 소리치려던 데큘레인은 잠시 뻘하게 멈췄다. 
 실비아가 없었다. 
 아니, 저 멀리에 있었다. 
 타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타-  굉장히 역동적인 구두의 질주였다. 
 “······.”  그래, 얼쩡거리면서 방해할 바에야 오히려 저게 낫지. 
 데큘레인은 헛웃음을 짓고 록하크를 마주했다. 록하크는 실비아를 보낼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기에, 빠른 처리가 필요했다. 
 놈은 한 손에 단검을 들고 있었다. 섬뜩한 예기와 아우라가 일렁이는, 레어 이상의 무기였다. 
 데큘레인은 그저 선 채로 장갑을 꼈다. 옷깃을 가다듬었고, 양복의 주름을 세웠다. 
 “······내 앞에서 마법을 사용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록하크를, 데큘레인은 태연히 바라보았다. 
 “오냐. 마법 없이 맞이하마.”  록하크의 관자놀이가 꿀렁였다. 놈은 곧 입가를 비틀었고, 움켜쥔 단검을 뒤로 늘어뜨린 채 달려들었다. 
 데큘레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네가 품 안으로 들어오길 기대하듯. 
 어떤 방어도, 준비도 없이. 
 그토록 교만한 귀족을 노려보며······ 록하크는 생각한다. 
 마법사란 족속은 언제나 저 따위의 거만하고 오만한 짐승이다. 
 마법이라는 잡기에 의존하며, 스스로의 나약을 그저 잊어버린 채 본인이 월등하다 착각하고, 인간의 우열과 귀천을 구분 짓는 가엾은 존재. 
 그렇기에 그들은, 나의 영역에서 ‘마법이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달은 순간 절망한다. 그 잘난 자신감과 자존심도 상실한 채 울고 불며 삶을 구걸한다. 
 저 빌어먹을 교수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저 교수야말로 마법사의 전형. 그 비루한 일생의 끝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처럼 당연히······ 죽어 마땅하다. 
 데큘레인에게 근접한 록하크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휘둘렀다. 
 “······크억!”  그리고, 튕겨나갔다. 알 수 없는 충격이 복부를 강타했다. 
 록하크는 그대로 노면에 나뒹굴었으나, 다시 일어나 데큘레인을 노려보았다. 
데큘레인은 그저 똑같은 자리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서있었다. 
 쿨럭─! 
 기침에 피가 섞였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과연, 주머니에 둔기를 숨기고 있었는가. 
 “흡!”  록하크는 가파르게 내달려서 단검을 찌르는 척 팔을 뻗었다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무기의 종류를 파악하기 위한 페이크였지만─  긴 다리가 날아와 그의 콧볼을 내리찍었다. 
 “──!”  록하크는 코를 움켜쥔 채 뒤로 물러났다. 
 “······록하크여.”  그런 그를 바라보는 데큘레인의 눈은 무던하리만치 자약했다. 그 안온한 시선이 오히려 서늘했다. 
 “내 손발은 어느 정도로 아픈가.”  데큘레인은 물었다. 그는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마력의 질’이라는 것은 단순히 마법에 국한되지 않는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인간의 질’이라 하여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마력의 질은, 마력이 관여하는 모든 것, 즉 「특성」에도 적용이 된다. 
 하여 육체를 보다 효율적으로, 또한 파괴적으로 사용하도록 도와주는 「철인」 또한, 한 단계는 상승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데큘레인은 궁금했다. 
 “두 번 묻게 하지 말아라.”  록하크는 흐르는 피를 막으며 데큘레인을 노려보았다. 
 “내 손발은 어느 정도로 아픈가.”  데큘레인은 먼 곳에서 그를 내려보았다. 도도하게, 마치 아랫 것을 대하는 그 시선이 록하크는 울컥했다. 
 “대답해라.”  록하크는 뒤로 돌아 달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리가 부웅 떠오르더니— 뒤통수부터 노면에 내리꽂혔다. 
 쿵──! 
 어마어마한 충격과 동시에 시야가 거꾸러지고, 하늘처럼 내려앉은 누군가의 안광을 마주한다. 
 푸른 눈. 
 어둠 속에서 저 홀로, 악마처럼 반짝이는 푸른 수정. 
 ······유크라인의 눈. 
 “대답해라.”  록하크는 그 상태에서 다리를 위로 뻗었다. 발 밑창에서 단검이 솟아나 데큘레인의 목으로 치밀었다. 데큘레인은 그저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으로 회피했다. 
 왈츠를 추듯 우아한 몸짓이었다. 
 급히 일어선 록하크는 비틀거렸다. 
 “······인정하지.”너는 강하다. 여태 상대했던 마법사와는 그 결 자체가 다른 놈이다. 그러나, 너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확실하다. 
 록하크의 영역 안에서는 그 어떤 마법도 구현될 수 없다. 그 원리는 마법적으로 서명할 수 없다. 굳이 표현하자면 증오의 원리다. 
 그러나, 그 안에서 오직 자신만큼은. 
 너보다 ‘한 발자국’을 더 내딛을 수 있다. 
 록하크는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그 몸은 빈틈 투성이지만 속아서는 안 된다. 저것 자체가 함정임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함정은 함정으로 되갚아주는 법. 
 록하크는 다시 달렸다. 안전거리는 금세 파손되었고, 몸을 숙인 록하크에게 데큘레인은 주먹을 뻗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파악했다. 
 둔기 따위가 아닌 주먹. 
 그 순간, 록하크의 다리가 한 번 더 움직였다. 
 고작 한 발자국에 불과한 거리. 
 그러나 그 차이는, 사선을 가르기에 충분하다. 
 콰직─  단검이 살갗을 파먹는 소리. 
 되었다! 
 록하크는 비웃으며 놈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 미소는······ 곧 흐릿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너는 참 신기한 수를 쓰는구나.”  옆구리에 단검이 처박힌 데큘레인은, 아주 태연히 록하크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오히려 뭔가를 계산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록하크가 단검을 옆으로 비틀었다. 
데큘레인의 눈썹에 희미한 떨림이 일었지만, 이내 태연하게 가라앉았다. 
 “충분히 견딜만하다.”  그리고는 제 옆구리에 도사린 록하크의 미간을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콰득─! 
그 직후, 반대편 주먹으로 턱을 강타했다. 
 ──! 
 마치 맨주먹으로 수박을 부수는 듯한 파열음. 
 튕겨나간 록하크는 노면에 처박혔다. 
 “······록하크여.”  뚜벅뚜벅. 데큘레인은 대자로 누운 놈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내 마지막으로 묻겠다. 어느 정도로-”  “······이 미친 새끼가. 망치로 쳐맞은 것 같다. 됐냐!”  끄덕인 데큘레인은 록하크를 굽어보며 물었다. 
 “하나 더, 너는 왜 마법사들을 살해했지.”  궁금했다. 메인 스토리와 관련이 없는 놈일지라도, 알고 싶었다. 
 “마법사는 저주의 족속이니까! 신을 배신한 배교들이니까!”  놈은 피토하듯 소리를 질렀다. 
 “부유섬도, 베르흐트도, 마탑도, 모두 썩어 빠진 놈들 뿐이다. 마법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개버러지들. 학살을 즐기는 미치광이들.”  “······.”  “한데 너는······ 너는······.!”록하크는 온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그러나 목 밑으로 감각이 없었다. 
 “씨발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데큘레인은 그를 죽일까 고민했다. 
 하지만 패배를 인정한 놈에게 살기는 없었다. 「악당의 운명」은 손쉽게 극복되었다. 
 무엇보다, 놈의 말로 한 가지를 알았다. 
 “알겠다. 너는, 적궤족이구나.”  순간 록하크가 눈을 부릅 떴다. 충혈된 눈동자가 데큘레인을 비추었다. 
 “어떻게 알았지. 유크라인은 아직도 적궤를 기억하고 있나?”  “적어도 나는 기억한다.”  태어날때 온몸이 붉은 궤에 쌓인 채 태어난다 하여, 적궤(赤櫃)족. 예로부터 마의 피를 타고난 것으로 알려진 혈족이다. 
 그러나 마도는 악마를 처단하기 위한 발명품이므로, 마법사와 적궤족은 서로 상극이 될 수 밖에 없다. 
 그 폭발할 듯 맞물리는 갈등이야말로 게임 스토리의 큰 줄기 중 하나인 것이다. 
 “너희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 탄압과 억압의 세월을 가엾이 여기고 있다.”  “······.”  적궤족은 대륙의 어딘가에 숨어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명운은 위태롭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든 단죄라는 이름으로 내려질 마법을 두려워한다. 
 멀지 않은 미래에 황제가 뒤바뀌면, 본격적인 학살이 거행될지도 모른다. 
적궤는 곧 악마나 다름이 없다는 그 이유로. 
 아니, 현재에도 그 ‘청소’는 알게 모르게 진행되고 있다. 
 “다만 아무런 죄 없는 마법사를 죽여서는, 너도 똑같은 괴물일 뿐이다.”  “······죽이기나 해라.”  그리 말하는 록하크는 이상하게 체념한 눈치였다. 
 “죽이지 않는다. 너 따위를 죽여봤자 내 체면만 깎이지.”  그때였다. 저 멀리 소음이 일었다. 다수의 원군이 다가오고 있었다. 
실비아가 성공적으로 도움을 요청한 모양이었다. 
 “말이 많다! 죽여! 어서!”  데큘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다. 적궤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는 것을.”  “······뭐라? 마법사인 너 따위가 뭘 안다고─!”  록하크는 격노했다. 발작하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먼 곳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유크라인의 데큘레인이다.”  데큘레인은 그리 말하며 구겨진 소매를 다잡았고, 헐거워진 넥타이를 조였다. 
옷깃을 정돈했고, 셔츠와 자켓의 매무새를 수습했다.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마도의 원류이자, 악마에 발작하는 사냥꾼의 혈족이다.”  록하크는 그저 노면에 누운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록하크여.”  찬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내가 너를 상대하며 품위를 잃었는가?”  그렇게 읊조리는 그의 기품을 보며. 
 “아니면, 너 따위의 도발에 흔들렸는가?”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는 위풍을 보며. 
 “내 말은 믿어도 좋다.”  록하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 하나의 단어가 있었다. 
 “너희는, 악마가 아닌 인간이다.”  귀족. 
 세상 어느 가짜와도 다른, 진짜의 품격. 
 “······.”  록하크의 눈동자에 타올랐던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텅 비어버린 자리에는 이유 모를 슬픔이 들어섰다. 
 그 서정적인 감정이 거슬려서 데큘레인은 발로 미간을 찍었다. 
 “컥!”  얻어맞은 록하크는 곧장 혼절했고, 뒤이어 경찰 부대가 밀려들었다. 
 준비. (1)  “역시 데큘레인 수석교수님!”  경찰 무리 중 가장 지위가 높아보이는 사람이 다가왔다. 삐까번쩍한 정복을 걸친 그는 나를 보자마자 경례했다. 
 “아, 저는 로파 경감입니다! 크아~ 근데 방금 발로 내리 찍는 모습이 아주 그냥 화보셨습니다! 이, 이 빌어먹을 살인자 놈! 제가 더 쳐드릴까요?!”  “아니. 가만히 둬라.”  “아, 옙!”  놈이 기절한 순간 특성은 해제되었다. 
 나는 염동으로 노면의 흙을 퍼올렸다. 그 위에 불을 피워 두 원소를 섞었다. 
물렁한 흙은 순식간에 금속의 성질을 띄며 가느다랗게 늘어났다. 
 일전에 메모라이즈한 「기초 연성」의 작용이었다. 그것으로 록하크의 손목과 발목을 묶었다. 
 경찰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오오오······ 제가 많고 많은 마법을 봤지만, 이리 우아한 발현은 처음 봅니다. 방금 막 저 줄이 춤을 췄습니다.”  “연행이나 하도록.”  “아, 예! 충성! 수고하셨습니다!”  경감은 허리춤에서 마갑(魔匣)을 꺼냈다. 착용자의 마력을 어느 정도는 억제하는 구속구였다. 
 “마갑은 무용지물이다. 어차피 마법을 무효화하는 놈이니, 저 강선이나 그대로 두거라.”  “아니?! 그렇습니까? 세상에 그런 놈이었다니! 어쩐지 탈옥도 곧잘 하고, 마공학 레이더에도 안 걸리더니!”  키야~ 그런데, 그걸 어찌 그리 간단히 간파하셨습니까. 아니, 마법을 무효화하는 이 놈을 또 어찌 이기셨습니까? 
 경감은 쉴세 없이 떠들었다. 
 “가겠다.”  “아, 예! 어이! 뭘 그리 멍하니 뻗대고 있어! 다들, 수석교수님께 경례!”  충성—! 묘지 한복판에 모인 경찰 수십명이 나에게 경례했다.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실전 검증 : 특성 연동 ]  [ ‘마력의 질 강화 (1 단계)’ 로 인하여, 일부 특성의 한계가 상향됩니다. 
]  이 시스템은 나도 알고 있다. 쉽게 ‘특성의 한계가 뚫리다─’ 라고 표현되며, 더 원천적으로는 씰링(Celling)의 상승을 뜻한다. 
 즉 원래 엔진의 성능이 100 이지만, 여태 기름이 좋지 않아 50 까지의 출력밖에 낼 수 없었던 것이라면, 기름의 질이 개선되어 출력이 60 까지 상승한 것이다. 
 다만 엔진이 너무 오랫동안 50 짜리 기름에 익숙했던 터라 ‘깨우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방금의 실전이었다. 
 역시, 백번의 연습보다는 한 번의 실전이다. 
 “교수님.”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율리였다. 그녀는 급하게 달려온 듯 머리카락 몇 올을 입에 머금은 채로 목례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나는 그저 끄덕이고 그녀를 스쳐지났다. 
 그렇게 걸으며 하늘을 보았다. 
 길게 자란 잡목 사이로 초승달이 드러났다. 
 바스락- 바스락-  나뭇잎이 처연하게 짓밟히는 이 길이, 너와 함께 걸었던 그 길인 것만 같았다. 
 수풀이 우거지고, 어둡고 무서운, 무덤으로 향하는 길. 
 허무하게 내 동생을 잃었던 그 날. 
 너는 나와 함께 걷고, 함께 울며, 그 아이를 묻어주었다. 
 그렇기에 더욱, 눈을 감으면 아른거리듯 떠오르는 네 얼굴. 
 오늘만 기억하고, 내일부터는 잊을 것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네 흔적이 있는 곳에서,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 * *  늦은 밤, 제도의 금싸라기 땅 ‘헤일레치’에 위치한 실비아의 저택  “······그랬단 말이지.”  길테온은 보고를 받자마자 제도로 올라왔다. 실비아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했지만, 길테온은 록하크를 산채로 불태워 죽이고 싶었다. 
 “그렇다면, 아가야. 데큘레인이 너를 구한 것이로구나.”  길테온이 은근한 투로 실비아에게 물었다. 실비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떠보는거지.”  “어헉? 아니, 아니다 아가야. 절대 아니야. 이 애비 입에 가신을 대하는 말투가 달라붙었구나. 하하하. 떠보다니! 절대 아니란다.”  “됐어.”  온갖 진수성찬이 가득한 식탁머리에서, 실비아는 짐짓 삐졌다는 티를 팍팍 내며 입술을 삐죽였다. 
 “아가야. 아니라니까······.”  그 꼬투리로 길테온을 안절부절하게 만든 다음, 실비아는 새초롬하게 말했다. 
 “그럼 아빠. 나도 베르흐트 회의 가는거지.”  “······.”  베르흐트 회의. 
 마법사로서는 참석 자체가 영광이라 할 수 있는 그 회의에 길테온은 일레이드의 당주로서 소집되었고, 동행인과 호위 기사를 각각 한 명씩 대동할 수 있었다. 
 “······크흠.”  길테온은 실비아의 시선을 피했다. 베르흐트는 너무나 위험한 산맥. 웬만하면 그때까지 실비아와 마주치지도 않으려 했건만······. 
 “갈 거야.”  “어휴.”  길테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 또한 경험이며, 특별히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애당초 전통의 12 가문에게는 베르흐트의 동행으로 차기 계승자, 혹은 제 1 수제자와 함께한다는 불문율이 있을 뿐더러, 15 년 전처럼 가문 간의 사이가 최악이지도 않으니. 
 이번에도 또 위험하다는 이유로 실비아를 데려가지 않으면, 딸바보를 넘어 딸병신이라고 놀림받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래. 내 동행은 당연히 우리 아가지, 누구겠느냐.”  “오호 아가씨. 그렇다면 호위 기사는 바로바로~ 접니다~!”  같은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던 남자가 요란하게 일어섰다. 일레이드 산하 기사단의 부단장, ‘시리오’였다. 
 실비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리오는 시끄러워서 싫은데.”  “에이. 왜요. 제이런, 그 놈보다는 낫죠.”  “하하. 그렇지. 제이런은 매사에 진지하니. 나도 제이런은 불편하다.”  길테온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시리오는 베르흐트 제 3 관에 머무를 것이다. 우리가 머물 제 4 관까지는 올 수 없어.”  “아쉽군요. 참 아가씨, 제 4 관은 같은 핏줄끼리는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어서 개인 행동이 원칙입니다. 피가 진하게 닮은 자들 끼리, 즉 길테온 당주님과 너무 붙어 있으시면, 서로 피가 엉겨붙어버린답니다~”  “나도 알아. 조용히해.”  시리오의 촐싹거리는 말투가 실비아는 거슬렸다. 
 길테온이 생선을 썰며 말했다. 
 “한데, 아가야. 우리는 조금 일찍 출발할 거란다. 바로 이틀 뒤 목요일인데, 괜찮으냐?”  “나흘이나 일찍이잖아.”  실비아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첩보가 들어왔다.”  “첩보.”  “그래. 값비싼 정보였단다.”  아마 지금으로서는 12 가문 중 길테온만이 입수했을 첩보였다. 원래라면 데큘레인이 가장 먼저 알았을 테지만, 뭔 일인지 그는 암흑가와의 연을 싹 끊어버렸다. 
 길테온은 그 연유가 아직도 의문이었다. 본인 안위만큼은 편집증에 가깝게 방비했던 사내였거늘.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붙은 건지, 아니면 조교수로 뽑았다는 놈이 믿음직스러운 건지. 
 “대신, 저녁 6 시 넘어서 가.”  “음. 상관은 없다만, 왜 그러냐?”  “수요일이 5 학점 짜리 수업이라, 그 다음날에는 복습해야돼.”  길테온도 고개를 끄덕였다. 
 “데큘레인의 수업 말이냐. 알겠다. 근데 그 수업은 어떻더냐, 아가? 잘 가르치디?”  “응. 좋아.”  “······좋아?”  “응. 아마, 다음 학기부터는 수강 신청도 힘들어질 것 같아.”  위자보드에서 데큘레인 강의의 인기는 폭발적이다. 
 물론 교수의 인성이 별로 좋지 않고, 과제가 폭탄 수준으로 많다 하여도, 마탑 마법사의 본분은 배우는 것. 
 그 배움만큼은 충실하게 채워주는 교수이니, 다음 학기부터는 어마어마하게 몰릴 터. 
 “그렇구만······ 하. 그렇단 말이지.”  길테온은 뭔가 삐진 듯 코웃음을 쳤다. 
 그 이후로는 평범한 대화, 평범한 식사였다. 
 “······냠냠.”  실비아는 꼭꼭 씹어 먹으면서 오늘의 데큘레인을 떠올렸다. 
 그에게도, 누군가를 상실한 기억이 있었다. 
 그만큼 아픈 과거가 있었다. 
 그저 잘난 척, 멋진 척만 하는 재없교—요즘 마탑의 유행어, 재수 없는 교수의 줄임말—인 줄 알았는데.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유성같던 눈물이, 자꾸만 떠올랐다. 
 * * *  원소 속성의 이해─ 수업 4 주차. 
 차를 타고 마탑에 도착한 나는 순간 길을 잘못 들었나 착각했다. 
 “기자들인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웬 취재진이 마탑 입구에 늘어서 있었다. 창밖으로 힐끔 봤는데, 그 중심에는 이사장이 있었다. 
 뭔가 격렬한 제스처를 하기에 처음에는 쫓아내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창문을 살짝 열고 들으니,  “데큘레인 수석교수는 애초부터 새내기 마법사를 정말!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수석교수로서! 위자드 킬러를 예전부터 추적하며 다녔고!”  저 혼자 세상 열심히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그 노력이 결실을 거둔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 네! 데큘레인 수석교수의 전투적인 재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저보다는 아니지만요! 질문 더 없나요?! 아, 위자드 킬러를 제압한 방법이요?! 저도 모르는데요!”  나는 운전기사를 시켜 뒷문으로 돌았다. 
 “수고했다.”  “예. 감사합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마탑으로 들어가 3 층의 A Class 앞에 섰다. 양복 자켓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신나게 떠들던 데뷰탄들의 수다가 뚝 멎었다. 
 그렇게 나는 교탁에 섰다. 
 “반갑다.”  강의실 풍경은 여느때처럼 평범했다. 
 어젯밤의 일은 그저 꿈이었다는 듯이. 
 이 세계가 원래 나의 세계고. 
 그 기억은 다만 옛것에 불과하다는 듯이. 
 “4 주차 수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저번 주 쪽지 시험의 1 등과 꼴등을 공개하겠다. 1 등은 실비아 100 점, 꼴등은 이프린 0 점이다.”  “아악!”  어디서 이상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늘 4 주차 강의에 활용할 주원소는 ‘흙’이다. 땅과 관련된 모든 것, 모래를 비롯한 광석 따위가 이 흙에 속한다. 불과 섞이면 금속이 되고, 물과 섞이면 뻘, 진흙 따위가 되며······.”  곧바로 수업을 시작하자 마법사들은 실망한 눈치였다. 아마 ‘위자드 킬러’를 체포한 무용담을 기대했던 거겠지. 
 어림도 없다. 
 “······자. 가장 기초적인 수업을 시작하기 전, 몸풀기 실습이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알렌이 들어왔다. 알렌은 어떤 가방을 품에 안고 있었는데, 나는 그 안의 내용물을 죄다 염동으로 띄웠다. 
 마법사들은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보았다. 총 150 개의 푸른 돌맹이가 동시다발적으로 비상했다. 
 “이것들은 개당 3 천 엘네는 할 마석이다.”  나는 내 「기·초급 염동」으로 마석을 붙들었다. 
 참고로 기초와 초급이 반반 섞였다 하여 기·초급이다. 
 “이 상태에서 가만히 두겠다. 내 염동에 간섭하여 가져가보도록. 가져갈 수 있다면, 너희들에게 주마.”  마석은 마법사들에게 아주 중요한 재료다. 마법 연구, 마법 제작, 마법 촉매는 물론, 손에 지닌 채 마법을 발현하면 임시 증폭제로서 마법 자체의 출력도 소폭 강화된다. 
 그야말로 ‘마법사 한정 팔방미인’인 것이다. 
 그 마석을 보며 이프린은 특히 눈을 빛냈다. 
 “오늘 강의의 주원소가 흙이라면, 강의의 첫 번째 주제는 ‘순수 원소와 마법 간섭’이다.”  마법 간섭.즉 어느 마법사가 구현한 마법을, 다른 마법사가 간섭하여 그 행사를 방해하는 행위. 
 “술자는 간섭을 하는 것 못지 않게, 막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방어하는 쪽이 훨씬 유리하긴 하다만, 한 번 노력해보도록.”  사실, 이건 나도 궁금하다. 내 「기·초급 염동」이 데뷰탄들에게 어느 정도까지 저항할 수 있을지. 
 참고로 염동은 조작 계열 중에는 기초 중의 기초. 입탑 시험의 수많은 과목 중 하나이며, 이론책을 보지도 않고 직관으로만 고급까지 익히는 마법사도 더러 있다. 
 아무리 데뷰탄이라도 중급 염동 이상은 익혀두었을 테니, 「기·초급 염동」의 출력은 어느 정도 강하게 설정하자. 
 내가 「조작」과 「흙」에 특화되었다 한들, 이 데뷰탄들은 대륙 최고의 재능이므로, 방심하면 쪽팔리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시작하도록.”  나는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처음에는 3 분 정도를 예상했다. 
 나는 150 개를 동시에 틀어쥐었고, 마법사들은 그 중 하나만 가지고 가면 되었으니. 
 “······.”  그런데 3 분이 지나고,  5 분이 지나고,  10 분이 지나고,  계속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내 염동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  나는 시계만 보았다. 마력이 찔끔찔끔 소모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여유로웠다. 
 “흠.”  혹시 아무 노력도 안 하는 것인가. 
 그게 의심 되어서 나는 「육안」을 켰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150 명의 마법사가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모든 마력이 전부 내 염동을 건드리고 있었다. 
 막대한 마력의 흐름이 어지러워서 곧바로 육안을 껐다. 
 “분발하도록.”  그렇게 5 분 정도가 더 흐르자 마법사들은 끄으으응- 거리며 똥 싸는 듯한 소리를 내고, 집중하다 못해 침을 흘리고, 코피가 터지고, 두 눈이 충혈될만큼 응시하는데도······  내 「염동」은 그 모든 간섭을 튕겨냈다. 
 그때였다. 
 파르르르······. 우측 3 열에 있던 마석에 떨림이 발생했다. 선명한 들썩임이었다. 
 나는 그 마석과 이어진 마력을 보았다. 
 역시, 실비아였다. 간섭을 끝낸 실비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실비아, 수고했다. 1 등이다.”  실비아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약 3 분 뒤. 
 두 번째 마석이 들썩였다. 
 “다음, 이프린.”  당장 저번 주의 1 등과 꼴등이, 1 등과 2 등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다른 마법사들은 크게 놀라서 이프린을 바라보았다. 
 “후!”  얼굴이 시뻘게진 이프린은 호흡을 크게 하고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쌍코피를 흘리며 자신만만하게 웃는 이프린을, 실비아는 애써 무시했다. 
 “이외에는 없는 듯하군.”  당혹스러웠다. 아무렴 이렇게 어려워할 줄은 몰랐는데. 
 아니, 고작 어려운 정도가 아니었다. 
 진짜 피가 나도록 노력하던 마법사들이 하나, 둘, 신음을 흘리며 책상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얼굴과 혈색을 보니 거의 탈진 직전의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만하도록.”  내가 틀렸다. 
 아무리 마법사라도 데뷰탄이다. 나보다 아는 마법은 많아도, 오직 「염동」에 몰빵한 나를 이겨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만. 다들 멈춰라.”  난이도를 잘못 설정해버렸다. 실수를 인정한 나는 곧바로 염동을 거두었으나, 깊게 골몰해버린 마법사들은 좀비처럼 신음을 흘리며 탈진했다. 
 “······.”  나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강의실의 풍경이 가관이었다. 
 온 사방에 침과 코피가 덕지덕지에 이상한 꾸린내도 슬그머니 풍긴다. 
 순간 머리가 조금 어질하게 되었고, 이성을 잃었다. 
 “한심한 것들······.”  나도 모르게 조금 심한 말이 튀어나왔다. 안 그래도 무겁던 분위기가 더욱 처졌다. 
 뭐가 어떻든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있기 싫었다. 
 “······휴식이다. 너희들이 흘린 것은 너희들이 깨끗하게 치워놓아라.”  준비. (2)  “한심한 것들······.”  데큘레인은 경멸하듯 말하며 수업을 중단했다. 수석교수의 노골적인 실망에 강의실은 잠시 침묵했다. 
 한숨만 푹푹 흘렀다. 
 부푼 꿈을 안고 입탑했던 데뷰탄 마법사들은 오늘, 선명한 벽을 느끼고 말았다. 
 데큘레인의 마법은 그만큼 단단했다. 철옹성처럼 견고한 「염동」은, 고작 “「 염동」이 어떻게 이따위─” 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보편적인 지식으로 「염동」은 배우기도 쉽고 익히기도 쉬우나, 적성에 맞지 않으면 출력이 영 애매하여 마이너 취급을 받는 마법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겨우 「염동」도 이리 마스터피스인데, 데큘레인의 다른 마법은 도대체 어떻다는 건지. 그 마력의 정순함은 어떤 수준인 건지. 
 과연 수석교수 다운 기량이었으나, 흡사 오물 대하는 듯하던 그의 시선을 떠올리며, 마법사들은 자괴감에 빠지지 않았다. 
 시무룩한 적막도 3 분이 끝이었다. 
 “아 완전 재수없어 진짜.”  “내가 그걸 할줄 알았으면 데뷰탄 아니었겠지.”  “수석교수가 데뷰탄 놀리면서 신내는거야 뭐야.”  “와 근데 어떻게 마석을 150 개나 샀냐. 진짜 돈은 오질라게 많나보다.”“돈지랄로 유명해 저 교수, 경매장에서는 2 억썼대. 하루에 2 억.”  “2 억?!”  따위의 뒷담화로 강의실은 신나게 부풀었다. 
 “와······ 죽겠다. 근데 이피 너는 어떻게 했어? 나 죽을것 같아 지금.”  잠시 기절해 있던 줄리아가 이프린에게 물었다. 이프린은 옆자리의 줄리아를 힐끗거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게서. 혀가 아우지겨.”  물론 해냈을 때는 기뻐서 죽을 것 같았다. 
 조금 과장하자면, 마탑 입학 시험에 합격했던 그때와 비슷한 성취감이었다. 
 대상이 데큘레인의 마법이기도 했고, 그 30 분 동안 진짜 미친 듯이 노력했어서. 
 “어떤 느낌이었는지만 말해줘.”  “맨소느로 여차 미느 거가타서.”  “맨손으로 열차 미는 것 같았다구?”  이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큘레인의 마법은 거의 로아호크 멧돼지였다. 어떤 다른 돼지와도 차별되는 그 맛처럼, 마탑의 어느 교수와도 선명히 구별되는 그 격. 
 “후우우······.”  아무튼 그 집중의 시간이 끝나자 이프린은 탈진했다. 
 “아니 근데 너무 어려운 거 아니야? 그냥 우리 엿먹인 것 같은데.”  줄리아가 투덜거렸다. 이프린은 찬물을 마셨다. 
 “······나는 좀 알거가타. 아, 이제 좀 혀 풀리네.”  “응? 알 것 같다고?”  “뭔가 깨달음이 있었어.”  그 말에 줄리아 뿐만 아니라, 주변에 다수의 귀가 쫑긋거렸다. 앞자리의 페릿과 론도는 아예 뒤돌아서 앉았다. 
 “깨달음?!”  “응. 나, 솔직히 염동은 초급 밖에 모르거든? 근데 데큘레인의 마법을 뚫으려다보니까······ 그러니까, 뭐랄까······ 뭔가가 뚫고 나간 느낌이랄까.”  본능적인 깨달음. 
 데큘레인의 마법을 상대하려면, 분명 초급 염동으로는 택도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다 보니······. 
 “회로가 자동으로 뚫린 것 같은 깨달음? 통찰?”  즉, 회로가 ‘뚫렸다’. 
 염동의 마법진에 자기 멋대로 선이 생겨났고, 원이 늘어났으며, 그 술식이 데큘레인의 마법에 간섭했다. 
 직관을 초월한 깨달음. 
 그것으로, 고작 마석을 들썩이는 정도였으나, 이프린은 성공했다. 실비아와 얼마 차이 나지도 않았으니, 자부심을 느껴도 될 성공이었다. 
 그 훈장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3 천 엘네 짜리 마석. 
 “와. 진짜? 신기하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그랬어.”  어느새 주변의 눈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마법사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1 위가 깨달음, 2 위가 통찰이라 하는데, 그 전부를 언급했으니 어련할까. 
 꼴찌도 했는데, 나라고 못하겠어? 따위였다. 
 “아무튼, 옳은 방법인 것 같아. 왜, 체스같은 것도 고수랑 해야 늘잖니? 
초보들이랑만 하면 그냥 그 언저리에서 엎치락뒤치기 되는데.”  “엎치락뒤치락.”  “아, 응. 혀가 덜풀렸네.”  이프린은 확신했다. 
 데큘레인이 제시하는 길은 틀리지 않다. 
 마법사로서의 소양, 지식, 기량을 향상시키고 싶다면, 그의 길을 따르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같은 강의실의 다른 마법사들, 정확히 귀족 출신의 마법사들은 그런 이프린이 같잖았다. 
 흔치 않게 실비아조차 아주 신경 쓰이는 눈으로 이프린을 힐끗거렸다. 
 실비아는 언젠가 기이한 소문을 들었다. 
 저번 수업에서 꼴찌를 한 이프린이, 늦은 밤까지 데큘레인에게 개인 지도를 받았다는 소문이었다. 데큘레인의 뒤늦은 퇴근을 직접 목격한 교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그 소문이 아니라면 지금의 이 비약은 설명되지 않는다. 이프린은 데큘레인의 개인 교습을 받았기에 이리 갑작스레 성장한 것이다······. 
 실비아는 불만을 참지 못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왜 1 등에게나 줄 보상을 꼴등에게 주었는지. 속에서 알 수 없는 기포가 부글부글 끓었다. 
 “야! 근데 너네 청소 왜 안하냐?!”  그때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실비아 근처에 앉아있던 남자 마법사, 데큘레인의 스타일을 어줍잖게 따라한 ‘벡크’였다. 
 여태 실비아의 표정을 살피던 그는 돌연 이프린을 포함한 평민 무리를 공격했다. 
 “우리는 우리 자리 청소 했는데?”  줄리아가 대꾸했다. 
 “뭐? 저 뒤에 쓰레기통도 다 비워야지! 데큘레인 교수 저런거 극혐하는거 모르냐?”  원칙적으로 마탑에서는 신분의 구분이 없지만, 이렇듯 귀족은 은연 중에 평민을 무시하고는 한다. 
 미간을 찌푸린 이프린이 말했다. 
 “어차피 뚜껑 닫으면 보이지도 않잖니. 그렇게 신경 쓰이면 너네가 하던가? 
”  “뭐? 허. 저, 씨. 사회에서 보면 눈-”  그때 강의실의 문이 열렸다. 벡크는 급히 자리에 앉았다. 
 데큘레인은 걷다 말고 방금 떠들었던 벡크를 바라보았다. 
 “······.”  정확히는 벡크의 코, 아직 코피가 채 닦이지 않은 콧구멍을 보았다. 심지어 코털까지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죄송, 죄송합니다!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 시선에 지레 겁먹은 벡크가 급히 허리를 숙였다. 
 “뒤로 가 앉아라. 거슬린다.”  “예!”  벡크는 곧장 격리당했고, 평민들은 내심 통쾌했다. 뒷자리에서 부들거리는 벡크의 기척은 가볍게 무시했다. 
 “봐봐~ 진짜로, 귀족이든 평민이든 상관 없이 다 갈군다니까?”줄리아가 이프린을 툭툭 건드렸다. 이프린은 미간을 찌푸리고 절레절레 저었다. 
 “참, 그거 좋은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난 별로야.”  교탁에 선 데큘레인은 다시 수업을 재개했다. 
 “방금, 너희가 마법 간섭을 해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방어하는 쪽이 유리하기 때문이에요.”  예상치 못한 딴지였다. 심지어, 그 장본인이 실비아였다. 
 그녀는 지금 현재, 데큘레인이 굉장히 불만스러웠다. 그 눈은 이미 불독이었다. 
 이프린은 오~ 하며 눈썹을 들썩였다. 
 실비아가 말했다. 
 “교수님도 시범을 보여주세요.”  애당초 공수 중에 수비가 훨씬 유리한 게임. 
 최소한 3 분, 어쩌면 5 분 정도를, 실비아는 쉽게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분 단위의 시간 동안 데큘레인이 부르르 떨면 만족할 것 같았다. 
 “맞습니다. 방어가 훨씬 유리한 건 상식이잖습니까.”  이프린도 거들었다. 실비아는 이프린의 그 말에 더 화났다. 
 “그러지.”  데큘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자신감은 충분했다. 이 「염동력」만큼은 데뷰탄을 훨씬 초월하고 있다, 아니 대학의 그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따위의 자신이었다. 
 “해보도록.”  실비아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염동을 최고조로 가동했다. 마석은 실비아의 마력에 붙들리며 두둥실- 떠올랐고,  휘이이익─! 
 곧바로 데큘레인에게 탈취당했다. 
 “어라.”  실비아는 당황했다. 
 너무 순식간이어서, 방금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조차 인지할 수 없었다. 
 왜 빼앗겼는지 알지도 못한 채 빼앗겨버렸다. 
 그 시간은 1 초······ 아니, 그 이하. 
 “이프린. 너도 할테냐.”  이번에는 이프린이었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이프린은 다급히 책상 위, 책 안, 필통 안, 노트 안을 뒤적였다. 그리고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석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짧은 사이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돌려줄 것이다.”  “······아, 주머니에 뒀었구나. 죄송합니다. 해보겠습니다.”  이프린은 마석을 꺼내 염동력으로 띄웠다. 그녀 또한 코피를 흘리겠다는 기세로 집중했으나, 데큘레인은 그마저도 황망히 빼앗아가버렸다. 
 실비아와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 
 “뭐지.”  이프린은 무슨 기차에 치인 듯한 느낌이었다. 거의 추돌사고에 가까웠다. 
 데큘레인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마법적인 기량 차이가 이리 심하다면, 간섭이 아니다. 일방적인 폭력이지.”  이프린과 실비아는 동시에 심통이 나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 너희들은 분수를 알아야 한다. 따라서 너희는 ‘마법 간섭’과는 다른, ‘마력 간섭’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데큘레인이 손가락을 튕겨 강의실을 소등했다. 그러자 허공에 「염동」의 마법진 세 개나 떠올랐다. 각각 초급, 중급, 고급이었다. 
 “굳이 마법을 해체할 필요도 없다. 같은 마법으로 맞대응할 필요도 없다.”  데큘레인이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기자, 마법진의 핵심이 되는 회로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그저 ‘마력’을 사출하여, 마법진의 중심이 되는 회로─ 즉 ‘핵심 회로’만 흐트러트린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되는 것이다.”  이는 ‘마력 간섭’이라 하여 사실 꽤 유명한 방법이다. 대다수의 마법사들이 마탑 생활을 하면서 습득하는 테크닉. 
 그러나 범용적이지는 않다. 
 자신이 아는 마법만 간섭할 수 있기에, 또한 실전에서는 시간이 촉박하기에, 대부분은 배리어로 방어하거나 같은 마법으로 맞상대하는 쪽을 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롭지 않으면 성장도 없다. 
 “‘마력 간섭’이라 불리는 이 테크닉의 요체는, 마법진의 ‘핵심 회로’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제 다수의 마법진을 토대로, 핵심 회로를 파악하는 방법을 보여주도록 하지.”  데큘레인은 마력 간섭의 방법을 구체화하면서도 쉽게 서술했고, 마법진의 핵심 회로를 선별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난생 처음 마주하는 마법일지라도, 당황하지 말고 마법사의 눈으로 보아라. 
그 계열이 파괴인지, 보조인지, 또 어떤 원소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반드시 형성되는 ‘핵심 회로’가 있기 마련이다. 그 핵심 회로의 위치를 예상하고 공격하여 흐트러트리면 되는 것이다.”  마법서 뿐만 아니라 마법 교육서를 정독하고,  웬만한 귀족 마법사도 구할 수도, 읽을 수도 없는 희귀한 고대 서적들을 독파하고,  게임 속의 시스템과 설정을 참고하고,  「이해력」으로 수십, 수백 마법의 술식을 비교·대조하며 깨달은,  데큘레인만의 족보. 
 “이러한 ‘마력 간섭’이 익숙해지면, ‘마법 간섭’ 또한 훨신 쉬워질 것이다. 
자, 이제 다시 이 「질풍칼날송곳」이라는 마법진을 보아라.”  그 직업적인 성격 상 대부분의 마법사는, 아니 거의 모든 마법사라면 기업비밀이라며 꽁꽁 숨겼을 비법을, 데큘레인은 아낌 없이 그들에게 전달했다. 
 “파괴 계열의 마법은 항상 폭발하듯 안에서 밖으로 퍼지는 회로이므로, 그것을 염두한 채······.”  마법사들은 다시 필기할 시간이었다. 
 그들은 데큘레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다. 그의 발음,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꽂혔다. 
 언제 경험해도 신기한 데큘레인 특유의 흡인력. 
 「위압과 기품」이라는 특성의 긍정적인 발현. 
 그렇게, 순식간에 시간이 흐르고. 
 오후 6 시. 
 그 정각이 되자마자 데큘레인은 강의를 멈췄다. 
 “끝이다.”  “······?”  그런데 정작 마법사들은 크게 당황했다. 데큘레인의 강의는 아직 미완성이었다. 
 그러나 시간 개념이 철저한, 아니 강박에 가까운 데큘레인은 지각하지도 않고 일찍오지도 않는다. 
 정확히 3 시 00 분에 와서, 정확히 6 시 00 분에 떠난다. 
 따라서 수업을 더 하거나 덜 하지도 않는다. 
 “······아직 조금 더 남았고, ‘순수 원소’의 간섭을 더 쉽게 하는 방법까지 설명해주고 싶었다만.”  데큘레인은 그들을 훑어보았다. 그 시선은 아직도 데뷰탄들을 한심해하는 듯했다. 
 “시간 낭비는 너희들이 했으니 불만은 없겠지. 나머지는 너희들 알아서 상상하며 깨닫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 말하며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데뷰탄 마법사들 모두가 멍하니 바라보는 가운데, 수석교수는 강의실을 나갔다. 
 ······보통 수업이 끝나면 모두가 일어나 나가기 마련인데. 
 오늘은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  누군가가 탄식했다. 아마 이프린이었다. 
 실비아는 연필을 쥔 채 눈을 깜빡거렸다. 중간에 끊긴 문장이 거슬렸다. 
거슬리고 또 거슬렸다. 
 “아 뭐야. 뭐, 우리가 뭘 상상 어떻게 하라고.”  이름 모를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강의실의 전원이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들은 강의실에서 떠날 생각도 않고 데큘레인을 뒷담화했지만, 이내 그가 영영 돌아오지 않음을 깨닫게 되자, 세상 그 자체를 원망하고 말았다. 
 * * *  제국의 황제 직할령 ‘임퓨리움(Impurium)’은 남쪽으로는 제도와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험산 키데아의 비호를 받는 제국 행정의 중추다. 
 외교국, 법무국, 내무국 등, 제국 여러 기관이 거점을 둔 그 도시의 지하에는, 치안국 직속 범죄자 심문실이 존재한다. 
 ······록하크는 그 지하에 구속되어 있다. 
 “너는 레코르닥으로 가게 될 것이다.”  심문자는 릴리아 프리미엔. 임퓨리움에서도 단연 유명한 치안국 부국장이었다.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1 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록하크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프리미엔은 진푸른 장발을 말총처럼 묶어내린 여인이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한 벽안, 그 속에서 강자 특유의 아우라가 너울거리고 있었다. 
 “······이의 없나.”  프리미엔이 말했다. 어조는 딱딱했지만 음색은 부드러웠다. 
 역시, 인상에 비해 목소리가 사근사근한 타입이었다. 
 “이의 없냐고 물었다.”  록하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프리미엔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튀었다. 
 “켜라.”  “······무엇을.”  “네 능력을.”  록하크는 피식 웃더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일대의 마법이 전부 차단되었다. 목적은 심문실을 감시하는 수정구슬. 먹통이 되었음을 확인하자마자 프리미엔은 쏘아붙였다. 
 “이 씨발 머저리 새끼야.”  “······.”  “분명 말했을 터인데, 왜 일족에 해악이 되는 짓을 했지.”  록하크는 말없이 프리미엔을 바라보았다. 프리미엔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을 이었다. 
 “나는 너를 죽이려 했다. 네가 일족인 것이 탄로나면 탄압 여론에 힘이 실릴 테니. 네가 죽지 않은 이유는 순전한 연구 용도다. 그러니, 그 아가리에서 적궤라는 단어는 꺼내지도 말아라. ”  “······그런다고 우리가 이 제국에 빌붙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드러내지만 않으면 가능하다. 적궤는, 출생의 그 순간만 아니라면 평범한 인간과 다르지 않다.”  “아니. 악마 같은 재능을 타고나지. 그들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씨발아. 적궤가 아니어도 재능은 많고 많다.”  그렇게 뇌까리는 프리미엔은 화난 듯했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히 무심했다. 
 “또 하나, 너는 왜 데큘레인을 건드렸지. 유크라인은 우리가 이미 눈여겨 보고 있었다.”  “······일족은 그를 죽일 셈인가?”  록하크가 물었다. 프리미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만, 그 망나니가 계속 망나니 짓을 한다면, 죽이지 못할 것도 없지.”  “죽이지 않아도 된다. 그는 가짜가 아닌, ‘진짜’ 귀족이다.”  “진짜 귀족······ 지랄이다 이 병신아. 내가 수집한 그 놈의 죄만 한바가지다.”  록하크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일전에 보았던 데큘레인을 떠올렸다. 
 적궤는 악마가 아닌 인간이라 확언하던 그 기품. 의심 없이 오직 옳음만을 꿰뚫어보던 그 눈동자. 
 그같은 귀족이 과거에도 있었더라면, 아니 많았더라면. 
 적궤도 충분히 세상과 어우러지며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내가 적궤인 것을 알면서도 죽이지 않았다.”  “······.”  프리미엔의 눈이 커졌다. 오늘 그녀가 내보인 유일한 놀람이었다. 
 그러나 곧 다시 평정을 되찾은 채 말했다. 
 “······유크라인의 선조가 적궤 학살과 탄압에 앞장섰다는 걸 모르나?”  “몰랐다. 하지만, 선조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였다고 그 자식도 같은 취급을 한다면, 우리가 악마라는 그들의 말에도 동의하는 셈이다.”  “이 씨발롬이 한마디를 안 지려고.”  프리미엔이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록하크는 피식 웃었다. 
 “너는, 언제까지 들키지 않고 그렇게 요직에 앉아 있을 줄 아나?”  “영원토록. 외면이나 피 따위로 적궤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일족이 먹지 못하는 음식은 있지.”  “안 먹으면 그 뿐이다.”  “만약 다른 방법이 발명된다면? 너도 그게 두려워서 이곳저곳에 눈을 붙인 것 아니냐.”  “그렇지 않다 이 좆병신아.”  프리미엔의 시선에 예기가 깃들었다. 
 “황제의 상태가 나쁘다. 곧, 죽을지도 모르지.”  적궤에 대한 현 황제의 방침은 철저한 무시였다. 탄압을 추진하자는 그 빌어먹을 놈들의 탄원에도, 황제는 일언반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을 계승자가 어떤 짓을 저지를지는─ 오직 하늘만이 알 일이었다. 
 “너는 레코르닥에 처박혀 있어라.”  레코르닥. 
 지상 최악의 교도소라 불리는, 혹한의 지옥. 
 “일족의 본격적인 방침은, 현 황제의 승하 이후에 정해진다. 그때까지 네가 레코르닥에서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때였다. 
 쿵쿵쿵─! 쿵쿵쿵─! 
 마법적 감시가 소멸되자, 심상찮음을 감지한 치안국 직원들이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 
 “능력을 꺼라. 그리고, 이 꽉 깨물어라.”  “일족에게 얻어맞는 주먹이라면, 언제든지.”  록하크는 웃었고, 프리미엔은 록하크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쾅─! 
책상에 내리 찍었다. 
 타이밍 좋게 문이 열렸다. 
 “어, 어어! 어어 부국장님! 안 됩니다! 안 됩니다! 그만, 그만!”  “씨발롬아. 회쳐먹을롬아. 대가리를 깨트려주마.”  쾅─! 쾅─! 
 록하크를 절구처럼 책상에 빻아대는 프리미엔에게, 수많은 장정이 달려들었다. 
 “부, 부국장님! 부국장님! 진정하세요!”  “비켜라. 이 개좆같은 새끼의 내장을 끄집어내서 목을 졸라야겠다.”  “안, 안됩니다! 뭐해 다들 말려! 말려어어어──!”  준비. (3)  도서관 옥상에서의 늦은 밤. 
 이프린은 난간에 기대어 대학교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위로는 마탑이 저 꼭대기까지 푸르게 빛나고, 아래로는 여러 건물의 불 켜진 강의실과 노상, 음식점이 별처럼 총총하다. 
 시험기간이라는 이유로, 대학교에 밤은 사라지고 없다. 
 “······.”  이프린은 품에 넣어두었던 위자보드를 꺼냈다. 
 테두리는 새카맣고 바탕은 새하얀, 마카보드의 축소판처럼 생긴 이것은 마탑 마법사들의 소통 창구다. 
 정식 명칭은 ‘다중 소통이 가능한 전방위적인 전서판(傳書版)’. 
 쉽게 ‘위자보드’라 불리는 이 마도구에는 마탑 마법사들이 이용 가능한 원격 게시판이 존재하며, 그 게시판을 통하여 마법사들 간의 소통이 가능하다. 
 다만 그 수명이 7~8 년이라는 합법적인 이유로 교수는 없다. 
 [ 데큘레인 강의 노트 완벽 정리(현 4 주차) 경매 붙이면 얼마 정도 될까요. 
1 페이지 샘플 살짝 있음. ]  이프린은 「마탑 비밀 게시판」에 게시글을 작성했다. 후원금인 10 만 엘네 중 50%를 벌써 필기구와 마법서 값으로 소모한 탓이었다. 
 ─5 백 엘네  ─난 1 천  ─2 천. 
 ─4 천. 
 ─5 천. 
 ─6 천. 상태에 따라 더 줄 수도 있음. 
 “헐.”  미친 듯 치솟는 가격이 무서워서 지워버렸다. 
 “······하긴. 나같아도 돈 많으면 샀겠다.”  그런 고로─ 데큘레인은 참 이상하다. 
 그는 왜, 이토록 효율적인 테크닉과 팁들을 숨기지 않고 공개한 걸까. 
 대부분의 교수는 거액을 받고 남몰래 개인 교습을 하거나, 자기 휘하에 들어오는 조건으로, 그마저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계약 하에 알려준다 하던데. 
 마법사란 제 아무리 돈이 많아도 언제나 후진을 경계하고, 치고 올라오는 후배를 질투하는 족속이라 하던데. 
 올해부터 달라진 데큘레인은 그 모든 점이 수상하다. 
 “뭐 어때.”  홀랑 털어낸 이프린은 난간에 기대어 크게 심호흡을 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아빠도, 나처럼 이 난간에서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풀리지 않는 마법,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인생의 해답 따위를, 이곳에서 밤바람을 맞으며. 
 “······걱정마.”  이프린은 나지막이 읊조리며 품 속의 편지를 꺼냈다. 
 매주마다 아버지와 주고 받았던 편지. 아버지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었던 목소리 편지와 영상 편지는 이미 수명이 다했지만, 아직 그 시절의 필체와 흔적은 소멸되지 않고 남았다. 
 딸아. 나는 지금, 너에게 줄 선물을 만들고 있단다······ 읽기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첫 문장. 
 “아빠가 하던 연구는 내가 반드시 완성할거고.”  아버지의 연구 중 일부는 자신이 보관한 편지에 있고, 나머지는 이 마탑의 어딘가에 있다. 이프린은 그 어딘가가 어디인지 알고 있다. 
 “나는 반드시, 데큘레인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가 될 테니까. 그 원수보다-”  “불가능해.”  그때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크게 놀란 이프린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는 목을 거의 꺾듯이 돌아보았다. 
 실비아였다. 
 이프린은 미간을 가늘게 좁히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시비걸러 왔으면, 안 통하니까 가렴.”  흥. 실비아는 심통이 가득한 얼굴로 비웃음을 흘렸다. 
 “데큘레인이 네 원수면, 너는 원수한테 개인 교습을 받은 거네.”  “뭔 소리니 그건 또? 어디서 이상한 소문 듣고 그걸 또 믿었니? 그게 귀족이니?”  태연한 대꾸에 실비아의 볼이 부풀었다. 이프린은 어떤 도발도 쉽게 흘릴 수 있는 마음을 얻었다. 
 “너, 그거 알아.”  불만스레 오물거리던 실비아는 곧 피식- 입가를 비틀었다. 
 “데큘레인은, 근 3 년 동안 연구실에는 가지도 않았어. 네 아버지가 죽은 이래로, 단 한 번도.”  “풋. 당연하지. 우리 아빠가 얼마나 천재였는데. 우리 아빠 없이는, 아무것도 못했던 거야 그 사람은.”  이프린은 오히려 웃었다. 예상 밖의 극찬이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  그러나 실비아는 아직 할 말이 남았다. 
 “3 개월 전부터, 데큘레인이 매일 연구실에 가기 시작했어. 연구실도 청소했고, 조교수도 뽑았고, 새로운 마도구들도 이것 저것 들여놓았지.”  그 순간─ 이프린의 미소가 굳었다. 
 “그게 무슨뜻일까.”  실비아는 그 반응이 만족스러워서 피식 웃고 빙글 돌아섰다. 
 그녀의 간지러운 음색이 흘러들었다. 
 “나는 모르겠네.”  또각 또각-  그런 말을 남긴 채 떠나가는 실비아를, 이프린은 붙잡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서서 생각했다. 
 “······설마.”  언젠가,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었다. 
 데큘레인이 자신의 편지를 감시하고 있다고. 자신의 모든 것을 감시하며, 연구를 노리고 있다고. 
 따라서, 그것을 숨길 장소가 마땅치 않다고. 
 “설마.”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연구는 그가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곳에 있다고. 
결계 마법은 시간이 흐르면 흩어지지만, 데큘레인의 욕심은 결코 그 장소를 볼 수 없다고. 
 예전에 우리가 했었던 암호 놀이를 기억하라며, 오직 나만을 위해 남겨둔······. 
 “설마······.”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다. 
 아버지는 천재적인 사람이다. 틀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니, 데큘레인이 재개한 연구는 아버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뇌이고 또 되뇌어도······  “설마아아아악!”  실비아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전에 맴돌았다. 
 * * *  베르흐트 회의까지 사흘이 남은 시점. 
 드디어, 마침내. 
 늦지 않게 「초급 염동」을 완성했다. 
 “다행히······.”  어떻게든 시간을 맞췄다. 만족한 나는 별채의 샤워실─본채까지 가는 것이 귀찮아서 따로 만들었다─ 에서 몸을 씻었다. 
 똑똑-  가운을 입고 나오자마자 노크가 울렸다. 
 “누구냐.”  ─로이입니다. 
 “무슨 일이냐. 말하라.”  ─예 주인님. 재정이 위태롭습니다. 
 저절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재정이?”  ─예. 이대로라면 2 개월 뒤에 바닥이 날듯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요즘은 강연도 하지 않아서 교수 월급 말고는 돈 들어올 구멍이 없었지. 반면 지출은 마석 150 개, 여러 마법서, 고대 서적 등등 끊임이 없었고. 
 “기다려보도록.”  나는 별채의 바닥 밑에 숨겨놓았던 금고를 염동으로 띄웠다. 오직 내 마력에만 반응하는 귀여운 금고. 
 그 뚜껑을 열었다. 
 “어디 보자······.”  대충 손에 잡히는 아무 거나 꺼내고 보니 도자기였다. 
 경매장에서 250 만 엘네에 구매한 ‘동방의 꽃병’. 
 곧바로 「미다스의 손」을 사용하려던 나는 멈칫했다. 
 남은 마력은 「1,635」. 
 제대로 팔려면, 3 천을 전부 사용하는 게 맞겠지. 
 “세 시간 뒤에 다시 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로이는 물러났고, 나는 마력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대부호 재력가」로 아이템을 확인해보았다. 그 빛은 여전히 찬란했다. 
 참고로, 「미다스의 손」은 잠재력이 이미 개화된 ‘보물’에는 그리 큰 효능이 없다. 비유하자면 30,000 짜리 출력을 고작 30,300 으로 향상시켜줄 뿐이다. 
 하지만, 이 ‘동방의 꽃병’은 명백히 미개화 아이템일 것이므로······  “한번 볼까.”  150 분의 기다림 끝에 차오른 마력. 
 그 전부를 모아, 동방의 꽃병에 「미다스의 손」을 불어 넣었다. 
 스으으으으─  손끝에서 흐른 푸른 연기가 꽃병으로 스며들었다. 꽃병의 표면이 위잉- 하며 반짝였다. 
 그리고. 
 ───「동방의 장인 에게한의 꽃병」───  ◆ 정보  :장인의 심혈이 마력적인 재능으로 발현된 꽃병  :「미다스의 손」으로 인하여 잠재력이 개화되었다. 
 ◆ 범주  :도기 ⊃ 꽃병  ◆ 특수 효과  :이 꽃병에 꽂힌 꽃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다. 
 :또한 꽃병의 꽃은 서서히 탈피한 뒤 새로운 꽃으로 개화하며, 각 꽃잎마다 최소한 「중급 피로 회복 효과」~ 「중상급 피로 회복 효과」를 지닌 묘약으로 자라난다. 
 ────────  250 만 엘네 짜리 꽃병이, 팔기 싫을 정도로 좋은 물건이 되었다. 
 “흠······.”  도자기의 가치는 그 디자인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심지어 화수분같은 효과까지 품었다. 
 “파는 게 낫겠지.”  그러나 ‘피로 회복’이라는 점에서 나에게는 영 쓸모가 없다. 나는 피로가 없는 몸이니. 
 뿐만 아니라, 꽃을 키우고 팔고 키우고 팔고 하는 식으로는 목돈을 만들지 못한다. 
 똑똑─  정확히 3 시간이 되자마자 돌아온 로이가 노크했다. 나는 문을 열고 로이에게 꽃병을 건넸다. 
 “이것을 재감정 받고 살 사람을 물색하라. 5 년, 아니 10 년 재정은 너끈히 나올 것이다.”  “예? 저, 주인님. 이것은 그때 구매했던-”  로이는 당황스러운 듯했지만, 나도 비슷하게 당황스러웠다. 
 로이의 어깨 너머에서 예리엘이 일수꾼처럼 종종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기요~ 돈 필요하대서 왔는데요~”  하루 머문다던 애가, 어느새 사흘 째다. 
 사실 저택이 너무 넓어서 있는 줄도 몰랐다. 
 “하여튼, 당신은 이럴 줄 알았거든요. 차용증만 쓰면 빌려줄 수 있-”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다. 이 물건의 감정을 받고, 재경매를 붙일 것이다. 로이, 이걸 가지고 감정사에게 가라.”  “므에? 미쳤어?”  예리엘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정정했다. 
 “아니다. 나도 마침 시간이 남으니, 같이 가면 되겠구나.”  이런 물건은 누구에게 감정을 받느냐도 중요하다. 
 강점사, 혹은 귀중품점에서도 무릇 사기꾼은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나는 특성으로 그 전부를 구분할 수 있을 테니. 
 “뭐? 아니, 이거 산 지 얼마됐다고 되팔아. 그냥 내가 빌려줄테니까-”  “시끄럽다, 예리엘.”  “아 뭐가 시끄러! 지금 당신이 생돈을 또 날리게 생겼잖아! 절반 값도 못 받을 텐데! 이거 얼마 주고 샀어!”  “250 만.”  “그럼 100 만 쯤에 팔리겠네! 골동품 투자한답시고 산 거면서, 2 개월도 안 묵히고 파는 병신이 어딨어!”  나의 확신을, 예리엘은 물론 로이마저 의심하고 있다. 
 하긴, 이해할만한 걱정이다. 
 “그리 걱정되면 따라와라.”  “아니! 걱정이 아니라 이런 개똥같은! 야!”  “‘야’?”  바락 소리지르던 예리엘이 내 말 한마디에 멈췄다. 그리고는 한결 작아진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니이, 걱정이 아니라······ 너무 말이 안 되는 짓을 하려 하니까요······ 이럴 줄 알았냐! 그따구로 돈 낭비 할거면─”  “돈 낭비가 아니다. 보여줄 테니 따라오기나 해라.”  “와 나 진짜 고집은······.”  예리엘의 얼굴에는 분노와 답답함이 가득했지만, 나는 한 번 웃어주고 밖으로 나갔다. 
 예리엘은 ‘그래 어디 끝장을 보자─’ 며 따라붙었다······. 
 * * *  1 시간 뒤. 
 예리엘은 데큘레인과 함께 감정관에 도착했다. 
 “허어······.”  그녀는 요즘 데큘레인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율리 그 여자도 영 만나주지 않고, 와중에 베르흐트 회의도 겹쳐서 신경 과민이 온 것이라고. 
 “이건······”  사실 데큘레인은 가끔 이렇게 과열될 때마다 인간이 아닌 짓거리들을 해왔기에, 이번에도 각오를 했었는데······. 
 “어마어마한 물건입니다.”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감정사가, 당장 두달 전 구매한 도자기를 들여다보며 세상 감복한 얼굴로 경탄했을 때. 
 예리엘의 머릿속은 잠깐 백지가 되어버렸다. 
 데큘레인이 되물었다. 
 “어마어마하다면?”  “예. 미학적인 가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제가 확인할 수 없는······”  “확인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예? 아닙니다. 그저—”“이 화병(花甁)에 꽃을 기르면 시들지 않는다. 그 꽃잎을 먹으면 피로 회복의 묘약이 될 것이다.”  눈을 크게 뜬 감정사가 급히 허리를 숙였다. 
 예리엘도 흠칫 떨었다. 피로 회복의 묘약? 
 “과, 과연. 그렇군요! 저는 잘 몰랐습니다만, 맞다면 대단한 효능입니다!”  “그래.”  데큘레인은 감정관 내부를 휘둘러보더니 장식으로 놓인 생화 하나를 꽃병에 꽂았다. 
 “루텐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이 꽃을 길러 효과를 증명한 뒤, 헤일레치에서 소규모 경매를 열면 될 것이다.”  그러더니 감정사에게 유크라인의 만년필을 주었다. 
 “유크라인의 문양이라면 사람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너에게는 수수료를 주지.”  “아, 예!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최소 천만, 경쟁이 더 붙는다면 천오백만은 너끈히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250 만이 최소 1000 만으로 불어나는 순간이었다. 
 예리엘과 로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좋다. 입소문은 당신에게 부탁하지. 로이, 대관은 너에게 맡기마.”  “예?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데큘레인이 먼저 밖으로 나갔고, 예리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를 뒤따랐다. 
 “······운이 좋았네. 축하해······ 요.”  길가에서, 예리엘이 데큘레인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데큘레인은 그 두 사람에게 말했다. 
 “예리엘. 로이. 너희는 이 꽃병을 가지고 저택으로 돌아가라.”  “응? 어딜 가려고?”  “마탑에서 할 일이 있다.”  “······왜 갑자기 그렇게 마탑에 자주 가실까요 요즘은?”  예리엘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예리엘 너는 알 필요 없다.”  “만약에 새로운 애인 생겼으면 오래오래 가세요~ 그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여자는 버리시구요.”  “시끄럽다.”  데큘레인은 별 설명도 없이 혼자 차를 탔고, 부우웅─ 곧바로 떠났다. 
 “어휴. 진짜 지멋대로.”  예리엘과 로이는 길 한복판에서 뚜벅이 신세가 되었다. 
 불만은 없었다. 오래만에 제도에 왔으니, 한 번 쯤은 명품 거리 구경도 해봐야겠지. 
 “로이? 요즘 고생했으니까 갖고 싶은거 있으면 하나 골라. 아무거나 사줄게.”  “예? 아닙니다. 괜찮-”  “준다고 할때 받아. 안 그래도 요즘 고생하는거 눈에 보이는데······”  두 사람은 함께 명품관을 거닐었다. 
 그 날 예리엘은 로이에게 5 천 엘네짜리 명품을 사주었고, 본인은 300 엘네 짜리 지갑을 하나 샀다. 
 * * *  이번 주 마지막으로 마탑에 출근한 나는 시험 문제를 뒤적였다. 
 중간 고사를 구상하기 위하여, 3 년 전. 
 즉 일전의 데큘레인이 냈었던 시험을 참고할 생각이었다. 
 “······어렵다.”  척 보기에도 어려운 시험이었다. 
 말하자면 문제를 위한 문제. 쓸데 없이 어렵기만 한 문제들 뿐. 
 시험의 난이도가 곧 자신의 우월이라 착각했기에, 이리 말도 안되는 시험이 탄생한 것이겠지. 
 “알렌. 거기 있나.”  나는 수정구슬로 알렌을 불렀다. 알렌은 30 초만에 달려왔다. 
 “네에. 왔습니다!”  심사에 통과한 알렌은 조교수 명찰을 자랑스레 달고 있었다. 나는 3 년 전의 시험지를 툭툭 두드렸다. 
 “혹시, 이 문제의 원본이 있나?”  “원본 말입니까?”  “그래. 이 시험은 아마 내가 자의적으로 수정을 거친 결과본일 것이다. 
최근은 말고, 3 년 전부터 5 년 전까지를 훑어서, 자료가 남았다면 구해오도록.”  “아, 네! 찾아보겠습니다!”  알렌은 그렇게 나갔다가 금세 다시 돌아왔다. 
 품 안에 서류가 한가득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래.”나는 「이해력」의 눈으로 종이를 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알았다. 
 ······역시. 
 진짜 참고할만한 작품은 이것이었다. 
 나도 공부를 어느 정도는 해 본 사람이니 알고 있다. 
 좋은 문제란, 풀면서는 쌍욕이 나와도, 풀었을때는 자연스레 감탄하게 된다는 것을. 
 그 성취감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때로는 기분이 좋아서 비실비실 웃음도 나오게 된다는 것을. 
 데큘레인의 시험이 그저 어렵기만 했다면, 이 문제는 아니다. 
 무척이나 어렵지만, 오히려 대단한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알렌. 이건 마법 시험용 종이가 맞겠지.”  물론 마법은 수학이 아니다. 
 그렇기에, 고작 종이에 적힌 시험일지라도 조금은 특별한 부분이 있다. 
 “아 네! 물론입니다!”  “좋다. 돌아가보도록.”  “네!”  나는 「이해력」으로 그 시험을 들여다보았다. 
 [ ‘순수 원소 마법의 이해’ 예시 문제]  종이에 적힌 7 번 문제의 술식을 계산하고, 회로의 힌트를 분석하고, 올바르게 조합하고, 그렇게 유추한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 넣는다. 
 그러자 시험 문제의 정답─ 즉 마법이 발현되었다. 
 ‘그림’이었다. 
 한 폭의 그림이 마치 허공에 피어나듯, 그 어떤 자연보다 선명하고 뚜렷하게 구현되었다. 
 수채화처럼 번지는, 어떤 여인의 화폭이었다. 
 그 색감은 하나 하나가 원소였다. 새하얀 원피스는 바람이었고, 하늘은 물이었고, 번지는 구름은 안개였고, 그 아름다운 눈코입은 여러 원소의 ‘조화’ 그 자체였다······. 
 ‘순수 원소 마법의 이해’ 라는 과목명에 걸맞은. 
 가장 완벽한 문제. 
 “······.”  나는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온몸의 솜털이 돋았다. 데큘레인 특유의 「미적 감각」이 전신을 자극했다. 
 이 그림은 시험을 치르느라 고생한 마법사들을 위로하는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희미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다만 그 분노가 오히려 장식이 되었고, 빵 속의 건포도처럼 그림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었다. 
 “······하.”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알 수 없는 질투가 일었다. 욕망에 가까운 심정이었다. 
 예전의 데큘레인은 이 문제를 그대로 낼 수 없었다.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은 생각지도 못한 이 아름다움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너무 쉽다고 비하하며, 저 혼자 멋대로 수정했겠지. 
 나는 아니다. 
 이 시험은 그 무엇보다 완벽하고, 강의와도 어울린다. 과연 ‘수석 교수의 시험’이라 하기에 알맞은 것이다······  “한데.”  난 허공에 일렁이는 그림 속 여인을 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프린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디서 본 것 같지도 않았다. 
 이 여인은 도대체 누구지? 
 똑똑-  그때, 다시 노크가 울렸다. 나는 그림을 흐트러트리고 문을 열었다. 
 알렌이었다. 
 “교수님! 몇 개 더 있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이제 가보겠습니다!”  “마침 잘 됐다, 알렌.”  나는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돌아가려던 알렌을 붙잡았다. 
 “네에?”  알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말했다. 
 “준비해라.”  “네? 아, 네! 어떤 준비를 할까요?!”  알렌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빠릿빠릿했다. 되묻지 않는 저 모습이 언제나 마음에 들었다. 
 “베르흐트에 갈 준비 말이다.”  “······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알렌도 티 없이 맑은 얼굴로 되물었다. 방금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나는 태연히 말했다. 
 “나는 베르흐트에 동행할 조수로, 너를 선택할 것이다.”  알렌은 먼저 눈을 깜빡거렸다. 뒤이어 그 눈코입이 서서히, 저속재생처럼 느릿느릿 커지고, 특히 입은 주먹을 넣어도 될만큼 거대하게 되어서는. 
 “네에에에에에에에엑—”  “입닫아라.”  “······.”  입을 닫으니 눈이 부풀었다. 저러다 터질 것 같아서 말을 덧붙였다. 
 “물론 거부권은 있다. 베르흐트는 위험할 수 있으니—”  “아, 괜, 아, 아뇨! 이, 아닙니다! 갈수 있습니다!”  “그러냐.”  베르흐트의 규율 상, 호위 기사는 없어도 동행 조수는 필수인데, 나는 영 데리고 갈 사람이 없다. 
 예리엘은 절대로 안 되고, 그렇다고 렐린이라는 뚱땡이, 혹은 교수 중 한 명을 데리고 가기는 싫다. 
 물론 알렌은 못미더운 마법사지만, 최소한 내 위협은 아닐 테니. 
 “일요일이니, 준비를 잘 해두거라.”  “네, 네에! 철저히 준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알렌은 연신 허리를 숙여댔다. 마냥 부담스러워할 줄 알았는데. 
 이 녀석도 나름 야망은 있었구나. 
 “그, 그렇다면 제, 제가 전부 준비하겠습니다! 먹을 것들이랑, 마법, 그 마도구들이랑, 그리고,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 하나 꼽아가며 준비하는 모습을 보자니 마냥 귀여웠다. 
 혹시 모르니, 방호 기능이 있는 로브 코트라도 한 벌 사줘야겠다. 
 베르흐트. (1)  ······제국의 북부는 크게 북서부, 북부, 북동부으로 나뉘며, 세 명의 변경백이 각 영토를 다스린다. 
 그들의 주된 임무는 멸지에서 밀려드는 외적의 방어. 따라서 세간에는 전사의 성지인 ‘프하이르덴’이 가장 유명하나, 북부의 ‘드하만’ 가문도 그에 뒤떨어지지 않는 지명도를 자랑한다. 
 “충성! 베르흐트 회의가 무사히 진행되길 바라겠습니다!”  그런 드하만의 주도 ‘하알란’의 플랫폼에서, 백작 근위병들이 길테온에게 경례했다. 길테온은 웃으며 끄덕였다. 
 “고맙네. 드하만 백작에게는 물건을 잘 전해주시게.”  “예!”  북부의 하알란에서 더욱 북으로 나아가는 기차역. 실비아는 자신의 콧볼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바라보았다. 
 “4 월에 눈이 오고 있어.”  길테온은 그런 실비아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북부이지 않느냐. 어서 타자꾸나.”  “응.”  “아가씨, 늦으면 두고 갑니다~”  “시끄러.”  그들 일행은 함께 열차에 올랐다. 
 일레이드가 통째로 예약한 VVIP 전용 객실은 한 량(輛)의 절반이 할애된 넓이였고, 침대는 물론 소파, 카페트, 책상과 의자까지 비치되어 아늑했다. 
 “아빠. 어느 정도 걸릴까.”  “하알란에서는 6 시간, ‘플랫폼’의 특급 열차에서부터는 3 시간이란다.”  길테온은 소파에 앉아서 말했다.테르흐 특급열차가 위치한 ‘플랫폼’은 그저 ‘플랫폼’이라 불린다. 주변에 어떤 마을이나 인적도 전혀 없이 오직 플랫폼만 덩그러니 놓여 있기에. 
 플랫폼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곧장 베르흐트로 향할 것이다. 
 “근데, 어떤 첩보였어.”  실비아는 그렇게 물어보며 필기구와 노트를 책상에 올렸다. 
 “습격이었다.”  실비아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그녀는 책상에 앉은 채로 되물었다. 
 “알려야 되는 거잖아.”  “알린다고 습격을 안할 놈들이 아니다. 폭로하면 다른 계획을 짤 텐데, 급하게 짠 계획은 불필요한 살상이 반드시 동반되지. 마법사 간의 일은 마법사끼리 끝내는 것이 옳단다.”  실비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길테온은 웃으며 부연을 덧붙였다. 
 “베르흐트는 이런 곳이란다, 아가야. 15 년 전에는 이보다 훨씬 격했어. 
회의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전쟁이었지.”  “왜.”  “베르흐트는······ 말하자면 명문(名門)의 증표이기 때문이란다. 전통의 열두 가문은 물론, 신진 여덟 가문도 선정만 된다면, 그리고 ‘참석만 한다면’ 역사에 이름이 새겨지지.”  15 년, 20 년, 17 년. 
 그 주기가 너무 긴 탓에 시간이 흐를수록 베르흐트의 권위는 하늘에 닿았고, 그 참석은 ‘마도 명문’이라는 확실한 증표이자 휘광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다만 베르흐트에는 특별한 규칙이 있단다.”  ─소집되었음에도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가문은 두 번 다시 소집되지 않는다. 
또한 회의에 결손이 발생할 경우, 새로운 가문을 소집한 뒤 진행한다. 
결손이 전통의 12 가문일 경우, 신진 가문 중 하나를 새로운 전통으로 선정한다. 
 “아가야. 네가 생각하기에, 전통의 12 가문을 끌어내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 것같니.”  “······.”  실비아는 단번에 이해했다. 
 “그러면 벌을 받을 텐데.”  “하하하.”  길테온은 소리 내어 웃었다. 이럴 때면 가끔 후회도 되었다. 여태 제 딸아이를 너무 과보호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몸으로 배울 잔혹한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아가야. 전통의 12 가문 중, 어느 가문이 처음부터 전통이었겠니.”  “······아.”  “그렇지.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 대상은 모든 마도가일 테니, 그럴 바에야 아무도 벌을 받지 않도록 한다. 그렇기에 베르흐트로 향하는 과정에서의 죽음은 마법적인 자연사인 게야.”  이른바, 합법적으로 서로를 노릴 수 있는 기회. ‘당하는 놈이 병신’이라는 궤변이 올바른 논리로 둔갑하는 순간. 
 이 현상은 과거에 더욱 심했다. 
 당장 베르흐트에 소집되기 위해 멀쩡한 가문을 폐쇄하고,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난 경우도 꽤 많을 정도이니. 
 현재는 이헬름이 당주로 있는 ‘리와인드’가 그런 케이스다.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태평성대인 거란다. 물론 지금도 베르흐트의 권위는 절대적이지만, 새로운 대장로 드제크단이 분쟁을 싫어하기도 하고, 그때에 비해 가문의 명성을 드높일 수 있는 방법이 많거든. 굳이 소집에 목메지 않아도 되지.”  “······.”  “물론, 여전히 방해자들은 많겠지만 말이야.”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테온은 말 없이 웃었다. 그 옆의 시리오도 피식거리며 창밖을 보았다. 
 치치치치치칙─  마석이 연소하는 소리. 타오르는 마나 에너지가 열차를 움직였다. 
 그 소음을 친구 삼아, 실비아는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데큘레인 수업의 복습이었다. 
 그가 했던 말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되새기며, 머리로는 이해하고, 몸으로는 마력을 운용하던 그녀는, 그러나 곧 다른 노트를 꺼냈다. 
 미술 노트였다. 
 그녀는 연필을 끄적이며 무엇인가를 그렸다. 
 그녀의 그림은, 그녀도 모르는 사이, 어떤 눈동자가 되어 있었다. 
 한 줄기 눈물을 흘리는 푸른 눈. 
 * * *  나는 저택의 별채에서 아이템 작업을 하고 있다. 
 「게오르크 정장 외투」  「게오르크 정장 조끼」  「게오르크 정장 와이셔츠」  게오르크는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맞춤 양복점인데, 그 파츠(?)들에 「 미다스의 손」을 부여하는 것이다. 
 베르흐트를 대비한 중무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세계관에서 마법사가 걸칠 수 있는 방어 장비는 아주 한정적이다. 인위적으로 제작한 아티펙트에는 엄연한 수명이 존재할 뿐더러, 그 마법적 성격을 갑옷이 아닌 직물(織物)에 부여하는 행위는 아주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도 명문 유크라인에도 마법서는 많지만, 입는 아티펙트는 별로 없다. 
 그 대신 갑옷을 입는다면? 
 갑옷에 내재한 마력이 마법 행사를 방해할지도 모른다. 
 내가 굳이 양복에 「미다스의 손」을 덧칠하는 이유다. 
 ───「게오르크 정장 자켓」───  ◆ 정보  :대륙 최고의 양복점 게오르크에서 제작한 맞춤 외투  :「미다스의 손」으로 인하여 강도가 비약적으로 상승되었다. 
 ◆ 범주  :의류 ⊃ 정장  ◆ 특수 효과  :중하급 물리 저항. 
 :하급 마법 저항. 
 [ 미다스의 손 : 3 레벨 ]  ────────  여기서 중하급 물리 저항은 웬만한 ‘강철 중갑’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검에 맞아도 안 찢긴다. 
 “이쯤이면······.”  이틀 동안 장비 강화에만 약 2 만 4 천의 마력을 쏟아부었으니, 어느 정도 방비는 확실하겠지. 
 똑똑—  “누구냐.”  ─난데. 
 예리엘이었다. 예리엘은 곧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렇게 가려고? 이건 안 입고?”  예리엘은 짐짓 퉁명스레 로브 코트 하나를 내놓았다. 「고대 유크라인의 로브 코트」라는 이름의, 아티펙트를 초월한 ‘보물’이었다. 
 “이럴 때 입으려고 아껴둔 거 아니었어?”  이 아이가 나를 걱정하고 있었나. 
 따위의 생각을 하자마자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착각은 마. 당신이 가다가 죽거나 하면 계승이 어려워지는 것 때문에 이러는 거니까.”  “걱정마라. 안 죽는다.”  “아니 걱정 아니라고 말했잖아 방금. 괜히 갔다가 죽으면, 베르흐트 회의 자리도 박탈당하고, 계승도 어려워지고······”  예리엘은 말을 끊더니 입술을 샐쭉이며 되물었다. 
 “것보다, 뭐 할 말 없어요?”  “없다.”  “······진짜?”  “로브 고맙다.”  “어? 아니.”  예리엘은 흠칫 떨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말고. 베르흐트에······ 아, 됐어. 나 갈테니까요, 베르흐트 회의고 뭐고 알아서 하든가 말든가요.”  퉁명스레 돌아선 예리엘이 별채의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이미 로이가 서있었다. 로이는 손님 한 명과 함께였다. 
 “주인님. 알렌 님이 도착했습니다.”  알렌은 로이 옆에서 쭈뼛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예리엘은 그런 알렌을 쏘아보았다. 
 “당신은 또 누구예요?”  “아, 데큘레인 수석교수님의 조교수 알렌입니다!”  “······아~ 당신이었어요? 참 내.”  예리엘은 뭔가 불만스러운 듯 이죽이더니 알렌과 나를 번갈아서 보았다. 
 “예. 수고해요. 저 사람이랑 여행하려면 무척 피곤할텐데, 멘탈 관리 잘 하시고요.”  그렇게 예리엘은 밖으로 나갔고, 알렌은 예리엘의 등에 대고 허리를 숙이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저, 교수님. 저는 뭘 하고 있을까요······?”  “출발은 내일 오후일 테니, 편히 쉬고 있어라.”  “네, 네에. 편히 쉬고 있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알렌은 영 편한 얼굴이 아니었다. 벌써부터 다크서클이 대단했다. 아무렴 어젯밤부터 한 숨도 못 잤겠지. 
 “알렌.”  “네에.”  “받아라.”  나는 어젯밤 구매한 「방호 로브」를 염동으로 건넸다. 
 방검은 물론 방마에도 탁월한 성능의 아티펙트다. 수명은 고작 2 주일이지만, 그 가격은 자그마치 3 만 엘네나 한다. 
 “이, 이런 걸 제가 받아도-”  그걸 아는지 알렌도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다. 
 “울먹이지 말아라. 내 앞에서 울면 화낼지도 모른다.”  “아, 네, 네에!”  결벽증은 눈물조차도 허락하지 않는다. 콧물은 혐오 대상이고. 
 알렌은 급히 눈물을 삼켰고, 조심스럽게 로브를 입었다. 그 착용감에 아주아주 감동한 듯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방에서 쉬고 있어라.”  “네, 네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비단 예리엘이 내어준 「고대 유크라인의 로브 코트」뿐만 아니라, 최소한 5 개 이상의 목강철 애장도 「미다스의 손」의 강화를 기다리고 있으니. 
 “마력이 회복될때까지······.”  나는 책 한 권을 꺼냈다. 
 「에르트랑 무술서, 중급편」  지금 시점에서는 일선에서 물러난 격투가의 전설 ‘에르트랑’이 직접 작성한 책. 
 중급편을 구하는 데 들인 비용만 해도 거의 50 만 엘네다. 
 대강 팔괘장인지 절권도인지 벽괘장인지, 온갖 무술의 장점만을 흡수한 극강의 무도라 하는데······  나는 그 내용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알렌과 나는 토요일 오후 2 시에 길을 떠났다. 로이와 시종들이 배웅을 해주었고, 예리엘은 이미 본가로 돌아갔다. 
 그 이후 제도의 ‘기든’ 역에서 고속 열차를 타고 드라만의 하알란까지 7 시간. 
 하알란에서 식사를 하고, 「대부호 재력가」의 눈에 띄는 책도 몇 권 산 뒤, 다시 기차를 타고 북녘으로 6 시간. 
 그렇게 일요일 새벽이 되어서야, 테르흐 플랫폼에 도착했다. 
 “우와······.”  알렌은 멍하니 감탄했다. 나도 이런 공간은 처음이었다. 
 역 밖은 온 사방이 눈이었지만, 역 안은 오히려 풍성했다. 
 플랫폼 자체가 작은 마을이라고나 할까. 
 음식점도 하나가 아니라 다섯 군데나 되었고, 그 안에 사람도 은근 많았으며, 호텔은 물론 간이 병원과 마법 용품점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때마침 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도드라진 문양을 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프렌하임의 기사인가.”  “예. 베론이라고 합니다. 기차 전체의 호위를 맡게 되었습니다.”  “자네 뿐인가?”  “예. 각 열차마다 호위 기사는 한 명 뿐입니다. 보통 마법사 분들은 호위 기사를 대동하시기에······”  나는 혹시 모를 마음에 「악당의 운명」을 켜보았다. 
 베론에게서는 어떠한 낌새도 없었다. 「대부호 재력가」에도, 「악당의 운명」 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무색무취. 
 “오늘은 손님이 많군.”  “하루 300 명은 오가는 역이라 그렇습니다만, 베르흐트까지 가는 손님은 얼마 없을 것입니다.”  하긴, 이 근처는 유명한 사냥터다. 약초지이기도 하고. 
 레벨업이나 파밍이 목적이라면 꽤 좋은 장소다. 
 “알렌, 식사는 하지 않아도 되겠나?”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차피 싸온 도시락이 많습니다. 교수님도 하나 데워서 드릴까요?”  “괜찮다.”  그렇게 15 분 쯤 기다리자, 저 선로의 끝에서 열차의 앞머리가 희끄무레 나타났다. 플랫폼의 직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의 첫 번째 열차입니다! 내일이 베르흐트 회의인 관계로, 오늘은 열차가 5 번이나 오고갑니다! 참고하십쇼! 늑장 부려도 된단 뜻입니다!”  “저는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베론이 먼저 선로로 다가갔고, 나도 알렌과 함께 VIP 통로에 섰다. 직원이 다가와서 티켓을 확인했다. 
 “예. 데큘레인 수석교수님. VIP 석의 아무 곳에나 앉으시면 됩니다. 하하. 
직접 보니 오질라게 잘생기셨구만유.”  나는 열차에 올라 중절모를 벗었다. 
 총 7 량의 특급열차에는 VIP 칸과 일반 칸이 구분되어 있긴 했으나, VIP 칸은 그저 공간이 넓고 의자가 조금 더 고급스러울 뿐이었다. 
 “어? 데큘레인 교수님 아니십니까!”  알렌과 함께 자리에 앉자 이름 모를 사람이 말을 걸었다. 얼핏 보기에는 귀족이었는데, 품에 웬 카메라를 안고 있었다. 
 “하하. 저는 마법 분석가 겸 기자 로엔입니다. 이것 참, 데큘레인 교수님과 같은 기차에 타다니. 어마어마한 영광이군요······.”  나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정확히는 안면 주름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과, 입꼬리가 떨리는 듯한 미소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취이이이이익─  로엔은 창밖을 보더니 의자에 앉았다. 
 “어이구, 이제 가네요.”  열차가 출발했다. 
 치지직─ 치지직─  특급열차는 무궁화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속도로 나아갔다. 
 “와······.”  알렌이 창밖을 보며 감탄했다. 열차 너머의 풍경에는 나도 잠시 말을 잃었다. 
 느린 속력이 십분 이해되는 절경이었다. 
 “시작부터 절벽이네요······.”  손 뻗으면 닿을 옆에, 깎아내지른 듯한 절벽이 폭포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단애절벽. 그 끝은 안개에 가려 무한했다. 
 “저 밑이 까마득해요······.”  “세 시간 동안 그럴 것이다.”“우와······.”  알렌의 말투가 늘어졌다. 긴장이 풀린 듯 눈도 게슴츠레 놓였다. 
 나는 녀석을 보며 말했다. 
 “피곤하면 자 둬라.”  특급 열차는 산맥에 달라붙은 채 전진하는 기차다. 이것을 타고도 3 시간 정도는 더 올라야 베르흐트의 1 관에 닿을 수 있다. 
 “에? 아, 네에······. 그러면 저는 조금만······.”  알렌은 눈을 감았고, 나는 기차 바닥에 서류 가방을 내려놓았다. 
 VIP 석의 손님은 총 11 명. 
 한 명은 방금의 로엔, 다른 여덟 명은 국적 불문 신분 불문의 아무개. 
 나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고요히 서류 가방을 열었다. 그 안의 애장은 슬그머니 빠져나와 열차의 바닥을 기었고, VIP 량의 각 여덟 모서리에 위치했다. 
 툭-  그때 내 어깨에 뭔가가 닿았다. 
 알렌이었다. 알렌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코오오- 아기새같은 숨결을 내쉬고 있었다. 
 순간 혐오 수치가 팍 솟았으나, 침만 흘리지 않으면 괜찮을 것이었다. 
 그대로 두었다. 
 나는 품 속에서 책을 꺼냈다. 
 [ 에르트랑 무술서 -중급편- ]  아직까지는 의심스러울 뿐이지만, 방비는 확실하게 해두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벌어질 때까지 이 책이나 좀 읽어두도록 하자······. 
 * * *  째깍- 째깍-  시간이 흐른다. 
 로엔은 허리춤의 회중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30 분. 
 특급열차는 첫 번째 역에 도착했고, 세 명의 손님이 내렸다. 
 로엔은 데큘레인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로엔은 태연히 신문을 펼쳤다. 
 째깍 째깍-  다시 시간이 흐른다. 
 그 흐름은 대충 느낌으로 알았다. 
 한 시간. 
 두 번째 역에 도착했고, 두 명의 손님이 내렸다. 
 데큘레인은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로엔은 찬물을 마시며 심장의 박동을 가라앉혔다. 
 걱정할 것 없다. 
 일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다. 
 나에게 돌아오는 해악은 조금도 없을 터. 
 아니, 애당초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고 있지 않다. 
 내 임무는 그저, 단순히 네 번째 역에서 내리는 것 뿐. 
 세 번째 역에 도착했고, 다시 두 명의 손님이 내렸다. 
 이제 데큘레인과 그 조수를 제외하고 오직 두 명만 남았다. 
 아직도 데큘레인은 책을 읽고 있었다. 조수는 여전히 그의 어깨에 기대었고, 데큘레인의 귀족적인 자세에는 어떠한 흐트러짐도 없었다. 
 화보처럼 완벽하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째깍-  째깍-  회중시계에서 울리는 진동이 거슬린다. 
 정녕,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적막. 
 그 느린 지옥 속에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두 시간이 지나. 
 네 번째 역에 도착했다. 
 “후-”  로엔은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큘레인과 그 조수를 제외한 나머지 손님은 모두, 이 네번째 역에서 내린다. 
 “하하. 데큘레인 교수님. 잠시 뿐이지만 같은 공간에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꾸만 발이 헛돌았다. 수십발자국을 내딛어도 계속 같은 자리였다. 
 한참동안 낑낑거리던 로엔은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  데큘레인은 아무 말 없이 책을 읽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몸은 뭔가에 붙잡힌 듯 움직이지 않는다. 
 “이게, 이게 왜. 얼른 내려야- 하는데- ”  다급히 원인을 찾던 중, 발견했다. 
 회중시계였다. 
 자신의 회중시계가 허공에 붙박였고, 그 줄이 허리를 잡아 당기고 있었다. 
 이 기이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술사는, 당연히 데큘레인 뿐이다. 
 “데큘, 데큘레인 교수님? 왜, 왜이러시는 겁니까?”  “떠나기 전에 한 번의 생각을 더 해보아라.”  “예? 무슨 생각을 말입니까?”  설마, 눈치 챘을리가 없다. 
 아니, 눈치를 챘더라면 이 기차에 타지를 않았겠지! 
 최소한 이 VIP 량에 앉아 있질 않았겠지! 
 이 씨발 이것좀 놔줘! 
 “내 자네에게 기회를 주지.”  “아니, 그게 아니라-”  “5”  그리고는 난데 없이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4.”  치이이이이익─! 
 열차가 다시 출발했다. 그 속력은 금세 궤도에 접어들었고, 로엔의 안색은 보랏빛으로 질렸다. 
 “3.”  “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2.”  “아니, 아 그냥. 그냥! 네 번째 시간이 되면 자리를 비켜달라는, 돈, 3 만 엘네짜리! 아, 아이 씨발! 얼른, 나가야, 놔! 터진다고─!”  “······.”  그제서야 염동이 해체되었다. 로엔은 앞으로 튕겨나가 바닥에 굴렀다. 
 그렇게 기어서라도 밖으로 나가려 했는데. 
 “늦었다.”  우선, 둥──  둥──  하며 심상찮은 진동이 일었다. 
 그 직후. 
 ───! 
 기차의 밑바닥에서 거대한 충격이 치밀었다. 
 폭발이었다. 
 “끄아아악─!”  로엔은 비명을 내질렀다. 
 쿵───! 
 고막을 찢어발기는 듯한 굉음. 
 직후 시야가 어지럽게 뒤집혔다. 
 예상하기로는 밑면의 폭탄이 터진 것이다. 
 이제 기차가 위로 솟구치고, 그 상태에서 절벽 밑으로 데구르르 굴러 낙하하며, 뼈도 못 추린 채 죽을 것이다······. 
 죽었다! 죽었어! 
 나는 저 데큘레인 때문에 죽었다고! 
 ······그러나. 
 그 예상은 첫 번째만 옳았다. 
 기차가 위로 솟구치는 것까지만. 
 “꺽!”  로엔은 한 번 하늘로 떠올랐다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얼굴과 온몸이 아팠다. 
 “끄으으······.”  로엔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흠칫 당황했다. 
 기차는 멀쩡했다. 
 폭발이 없었나? 
 아니, 폭발은 확실히 있었다. 기차 밑바닥의 일부가 고철처럼 우그러진 채였으니. 
 로엔은 뒤통수를 부여쥐고 창밖을 보았다. 
 잠시, 머리가 멍하니 비었다. 
 “······아니 이게······ 뭐시당가······?”  떠 있었다. 
 기차의 량 전체가, 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VIP 량 말고도, 폭발에 휘말린 다른 모든 기차의 량들이. 
 그 자리에, 그 시간에 멈춘 듯 정박되어 있었다. 
 참 절묘하고도 참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마치, 마법이 그 자체로 자연과 동화된 것 같았다. 
 “이게······.”  로엔은 본능적으로 품 속의 카메라를 꺼냈다. 용케도 부서지지 않은 카메라는 그 풍경을 확실하게 담았다. 
 찰칵- 찰칵- 찰칵-  부웅 허공에 떠오른 기차, 한 순간에서 정지한 폭발, 그리고······. 
 “무엇을 그리 찍나.”  데큘레인. 
 그의 서늘한 목소리가, 심장을 찢어발기는 듯한 음색이 흘러들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옆의 조수도 여전히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지극히 평온했다. 
 그 이기적인 상황을 로엔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폭발에 휘말린 것은 다 함께였을 텐데. 
 “너는 그저 말하면 된다.”  사그락- 거리며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그때 로엔은 감지했다. 
 어딘가, 멀리에서 다가오는 발소리. 산맥을 뛰어서 내려오는 그들의 민첩한 소리. 
 어두운 그림자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의 사주인지.”  그보다 먼저 데큘레인의 푸른 눈이 번뜩였다. 섬뜩한 예기를 품은 눈이, 마침내 페이지에서 벗어나 그 바깥의 그림자들에게로 향했다. 
 “어느 빌어먹을 것들이 이런 짓을 도모했는지.”  동시에─ 수십의 살수가 창문을 뚫고 날아들었다. 
 “그것만 말하면 된다.”  이 순간을 대비하여, 데큘레인이 기차의 각 모서리에 고정시켜두었던 애장. 
 그 여덟 자루의 수리검이 대인지뢰 클레이모어(Claymore)처럼 치솟았다. 
 베르흐트. (2)  베르흐트를 가능한 쉽게 표현하면, 설산고도(雪線高度)의 능선에 건축된 마을. 
 또는 만년설의 한복판에 들어선, 인구 1,000 여명의 국경 없는 독립 국가. 
 베르흐트는 관문의 형식으로 제 1 관, 제 2 관, 제 3 관, 제 4 관과 마지막 장로관으로 나뉘며, 각 관마다 입장 제한과 주거 제한이 존재한다. 
 제 1 관은 기사와 모험가를 포함한 민간인도 드나들 수 있지만, 제 2 관부터는 오직 마법사만이 출입 가능하다. 
 실비아는 그 2 관의 호텔에서 벌써 이틀 밤을 보냈다. 
 “······.”  지루했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따금씩 발생하는 신기한 마력 현상 말고는 볼거리가 영 없었다. 
 베르흐트 회의도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할 일이라고는 공부 뿐이었다. 
 “······첩보.”  그런데 자꾸만 아버지의 그 말이 신경이 쓰였다. 
 열차를 습격하리라는 첩보. 
 그건 정말 첩보가 맞았을까. 
 첩보가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혹시 사주(使嗾)가 아니었을까. 
 “아가씨. 벌써 열네 가문이나 도착했다네요.”  그때 시리오가 객실로 들어왔다. 그는 베르흐트의 특산품인 만년설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었다. 
 “12 가문 중에는 누가 왔어.”  “음? 아, 유크라인과 리와인드 말고는 전부 도착했답니다. 참, 동행 조수 중에는 아가씨 또래도 꽤 있다더라고요. 물론 아가씨보다 세 네살은 더 많겠지만, 만나러 가보실래요? 왕국 사람도 있습니다. 견문을 넓힐 기회라고요~?”  유크라인. 
 다른 무엇보다 그 가문이 신경 쓰였다. 
 “필요 없어.”  실비아는 대수롭지 않은 척 고개를 저었다.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예? 아, 예. 참고로 그 조수 분들은 ‘눈과 비’라는 카페에서 티타임을 즐기고 계시답니다~”  실비아는 시리오의 말을 듣지도 않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총총총 걸어 나온 그녀는 인적이 드문 곳에 숨어서 주머니를 뒤적였다. 푸른 돌멩이가 손에 잡혔다. 
 데큘레인이 시험 통과의 보상으로 준 마석이었다. 
 “······이걸로.”  그녀는 눈을 감고 마력을 방출했다. 
 그 응집의 매개는 마석. 
 마력은 마석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특정한 테두리를 이루었다. 언뜻 보기에는 알기 힘든 실루엣이었다. 
 실비아는 그 텅 빈 선에 색을 부여했다. 다색의 연기처럼 번지는 그녀의 ‘적·청·녹’─ 즉 원본의 색은 곧 숨결이 되어 완벽한 생명체를 일으켰다. 
 매였다. 
 난생 처음으로 완성한 창조적 재능. 실비아는 잠시 현기증에 비틀거렸지만, 곧 그 완성도에 감탄했다. 
 역시 난 천재야. 
 “······.”  다만 방심은 안 된다. 
 매는 날개도 퍼덕이고, 눈도 깜빡이고, 제 멋대로 움직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기능이다. 
 실비아는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분명 눈꺼풀에 가려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서서히 어둠이 개이며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매의 시야가 자신에게로 전이된 것이었다. 
 실비아는 만족스레 눈을 떴다. 
 “날아가. 날아가서, 네가 보는 것을 보여줘.”  그러자 매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열차의 선로를 뒤따라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보여줘.”  끼에에에에엑─! 
 매는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 
 흩날리는 진눈깨비를 뚫고 나아가는 그 자태를, 실비아는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 * *  ······30 분 뒤. 
 특급열차가 네 번째 역을 지나고 얼마 흐르지 않은 시점. 
 산맥에 걸터 앉아 지상을 관망하던 그들은, 기차의 밑부분에 접착해둔 폭탄을 점화했다. 
 약속된 시간, 약속된 지점이었다. 
 쿵──! 
 폭발은 기차의 뼈대부터 부수며 치솟았다. 
 작약의 충격에 차체는 크게 떠올라 탈선되었고, 절벽으로 굴러서 형체도 없이 으스러질 것이었다. 
 그랬어야 했다. 
 “······!”  그러나, 기차는 허공에 머물렀다. 
 총 세 개의 량이 붕 떠오른 상태에서 편안히 멈추었다. 
 ──예상했던 바다. 
 그 상상을 초월한 역량에 잠시 놀라긴 했다만, 데큘레인의 마법적 재능에 방심하지는 않았다. 그 대처를 위하여 이리 모인 것 아니었던가. 
 죽일 필요도 없다. 
 베르흐트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붙잡을 뿐이다. 
 살수는 수신호로 돌진을 명령했다. 
 그들 수십명이 공중의 기차로 달려들었다. 우선 창문을 박살냈고, 그 내부로 기민하게 진입했다. 
 바로 그 순간. 
 알 수 없는 금속이 치달았다. 
 팅팅팅팅팅─! 
 마치 덫을 밟은 것처럼, 파편 같은 송곳이 온 사방을 튕기며 급소를 꿰뚫었다. 강철의 직선은 너무도 쉽게 살갗을 파고들었다. 
 수십이었던 그들은 순식간에 다섯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남은 다섯이 핵심일 것이었다. 
 “······.”  데큘레인은 태평하게 앉아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귀품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고, 살수들은 섣불리 다가설 수 없었다. 
 일견 빈틈 투성이지만, 속아서는 안 된다. 언제 또 예의 금속이 발작할지 모른다. 
 “흐아아암······?”  그때 알렌이 눈을 떴다. 알렌은 잠이 가득한 눈으로 데큘레인을 보았다. 
 데큘레인은 무술서로 배운 바를 실천했다. 
 즉, 목 언저리의 혈을 짚어 알렌을 기절시킨 것이었다. 알렌은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다시 잠들었다. 
 “······?”  그때 데큘레인은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너무 이질적이어서 상황도 잊어버린 채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끝의 감각이······ 너무 부드러웠다. 말랑했다. 철인의 예민한 오감은 그 희미한 살결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었다. 
 알렌. 
 그의 한 가지 비밀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으나, 다른 하나는─  “······.”  데큘레인은 기절한 알렌을 보았고, 다시 열차 밖을 보았다. 저 멀리에서 베론이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은 어느 정도 마무리 된듯했다. 
 “끝났군.”  데큘레인의 그 말에 살수들은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 다시 창문 밖으로 도망갔다. 붙잡길 원했으나 마력이 모자랐다. 
 “······.”  데큘레인은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이 열차에서 내릴 차례였다. 
 “로엔이라 했나.”  “······!”  기어서 나가려던 로엔이 흠칫 놀랐다. 끼기긱- 땀을 뻘뻘 흘리며 데큘레인을 돌아보았다. 
 “예, 예. 그······.”  “이 아이도 데리고 나가라.”  “아, 예, 예!”  급히 일어난 로엔은 키작은 알렌을 업고 기차 밖으로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허공에 떠오른 기차와 지상 선로의 간극이 너무 멀었다. 
 “저······ 기차의 높이를 조금만 낮춰주시면······.”  데큘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 열차는 자신의 속성인 ‘금속’이었으므로, 그 어마어마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정지’는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움직임은 불가능했다. 
 “알아서 내려라.”  때마침 베론이 열차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아, 기사님!”  로엔은 반색했고, 베론은 알렌을 업은 로엔을 물건처럼 들었다. 
 “뛰어내리겠습니다.”  “예? 아니, 기사님! 아직 마음의 준비가-”  “괜찮습니다.”  베론은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끄아아아아—”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던 로엔은 지상에 착지하지마자 혼절했다. 
 베론은 로엔과 알렌을 선로에 내려놓은 뒤 다시 열차 안으로 뛰어왔다. 
 “······.”  그리고는 가만히 서서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데큘레인은 그가 자신을 데리러 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곧, 아주 중요한 사실을 떠올리고 말았다. 
 베론은 여기까지. 
 ‘걸어서’ 왔다. 
 데큘레인은 침착하게 자신의 애장을 불러들였다. 베론은 공중에 뜬 열차 내부를 둘러보았다. 
 “······열차의 앞머리는 이미 베르흐트로 출발했습니다. 후속 조치는, 곧 이루어지겠지요.”  베론이 말했다. 
 데큘레인은 대답했다. 
 “그런가.”  “예. 이제, 저희 둘 뿐입니다.”  데큘레인은 베론을 노려보았다. 그의 곁에서, 여태 갈무리되었던 살기가 피어올랐다. 
 방심이었나. 
 아니면 베론이 너무 완벽했나. 
 뭐가 되었든 참으로 기가 막히게, 특성의 눈을 속인 것이었다. 
 “베론.”  “나머지 승객은 다 구했습니다.”  베론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그러니, 이제 당신이 죽을 차례입니다.”  그 논리의 괴이한 흐름에 데큘레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깊이 생각해라.”  “수백번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죽어야 합니다.”  이유를 물을 세도 없었다. 베론은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늦지 않게 도달한 애장이 그의 앞길을 막았으나, 놈은 찰나에 발검하여 180 도로 휘둘렀다. 
 챙─! 
 그 한 줄기 곡선에 열 자루의 애장이 나뒹굴었다. 
 튕겨나간 수리검은 다시 떠올라 베론 주위를 맴돌며 연이어 공격했다. 
 챙─! 챙─! 
 날카로운 금속의 마찰음. 격렬하게 튀기는 불씨. 
 베론의 유려한 검술에는 아주 작은 빈틈도 없었다. 그 방어는 이미 어떤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  격의 차이가 확실하게 보였다. 
 이대로라면, 자신의 마력이 고갈되는 순간 명백히 패배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데큘레인은 애장을 거두어들였다. 경계 태세였던 베론은 다시 공격 일변도로 덤벼들었다. 그 드센 돌격에도 데큘레인은 눈을 감지 않았다. 
 다만, 염동을 해제할 뿐이었다. 
 저 놈의 칼에 맞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윽!”  쿠우우우우웅──! 
 염동으로 유보된 추락이, 멈춰진 시간이 다시금 이어진다. 
 선로에서 이탈한 기차는 중력에 휩쓸리며 하강했다. 
 * * *  ······절벽의 끝까지 떨어지지는 않았다. 
 다행히, 절벽의 날카로운 면에 기차가 걸렸다. VIP 량 하나만 꼬챙이에 꿰인 모양새였다. 
 “······늑골.”  고공 낙하의 충격은 뼈를 몇마디 부러트렸으나 그 뿐이었다. 
 양복의 방어력이 더해진 「철인」의 몸이다. 골절 따위는 금세 회복될 터······. 
 살기가 의식을 일깨웠다. 
 한 줄기 섬전이 치밀었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굴렀다. 동시에 내 애장을 불러들였다. 어딘가에 방치되어있던 애장이 급히 떠올라 기사의 어깨를 가격했다. 
 퉁─! 
 호신강기에 막혀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끈질기십니다.”  베론이 뇌까리며 검을 쳐올렸다. 나는 그의 검에 염동을 가했으나, 검기는 내 간섭을 튕겨냈다. 
 하는 수 없이 백덤블링으로 거리를 벌렸다. 놈은 틈을 주지 않고 쇄도했다. 
내 어깨를 베어내려는 검을, 허리를 비틀어 회피하고 놈의 목으로 주먹을 뻗었다. 
 놈이 조금 더 빨랐다. 
 놈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가격했다. 그 충격은 몸이 튕겨나갈 정도였고, 열차의 경사진 면으로 미끄러지는 나에게 검풍이 사출되었다. 
 “······!”  진검에 준하는 바람이 쇄골에서 장골까지를 두드렸다. 입에서 피가 흘렀다. 
놈이 가하는 데미지가 회복 속도를 아득히 능가하고 있었다. 
 좌석을 붙잡은 채 일어서려던 나는 문득 뒤를 보았다.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질기십니다.”  놈은 똑바로 걸어서 나에게 다가왔다.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베론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강하다. 
 서로 만전인 상태에서 싸워도 밀릴 상대인 것을. 
 나는 기차를 붙드느라 너무 많은 마력을 소모해버렸다. 
 “······율리를 배신하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몸과 입은 여전히 활기가 넘친다. 
 「성격」뿐만 아니라, 「특성」의 작용. 
 ──「부러질지언정」──  ◆ 등급  :레어  ◆ 설명  :부러질지언정 결단코 굽히지 않는다. 
 :전투시 발동하며,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정신력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거의 모든 정신간섭 류 마법이 통용되지 않는다. 
 ──────  내가 추가하지 않은, 데큘레인의 기본 특성 중 하나. 
 죽음을 앞두고서 조금의 긴장도 없다. 
 사선(死線)에 선 것이나 다름 없는 위기이지만, 데큘레인의 심장은 여전히 일정하게 뛰고 있다. 
 “당신이 죽어야, 제 주군이 삽니다.”  베론이 말했다. 나는 무의식적인 조소를 흘렸다. 
 “지금 내가 죽어있나. 아니면, 네 주군이 죽어 있나. 누가 죽지 않아도, 그 누구도 죽지 않는다.”  놈은 대답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나는 목강철을 일렬로 세웠다. 목강철은 방패가 되어 놈의 경로를 가로막았다. 
 “······흡!”  놈은 단순한 횡베기로 방패를 파괴했다. 
 파편처럼 흩어지는 목강철을 뚫고— 한 마리 귀신이 쇄도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저 놈은, 살의 그 자체다. 
 베론이 검을 치켜들었다. 
 잠시, 시간이 느려진 듯했다. 흐트러지는 검광을 보며 단순한 생각이 들었다. 
 이 검에 베이면, 게임이 끝나는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다시 사무실에서 눈을 뜨게 되는 것일까. 
 그게 아니면······. 
 ······그런데. 
 기이한 현상이었다. 
 검을 내리치려는 놈의 손목에 뒤틀림이 발생했다. 아지랑이가 일듯, 그 공간 전체가 난잡하게 출렁였다. 
 베론도 의아한 눈으로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콰직—! 
 돌연 그의 손목이 어그러지며 핏물이 튀었다. 손목은 깔끔하게 절삭되었고, 주인을 잃은 검이 나뒹굴었다. 
 “───!”  베론은 고통에 눈을 부릅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비틀거리는 그의 발목으로 수리검이 쇄도했다. 
 “크악!”  균형을 잃은 베론은 열차 밖으로 미끄러졌다. 몸 전체가 돌풍에 떠밀렸다. 
 “······.”  드디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고요. 
 그러나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놈의 살기가, 여전히 흘러 넘치고 있었다. 
 나는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일어났다. 좌석을 짚으며 걸어가 열차의 밑을 보았다. 
 휘이이이잉──! 
 휘몰아치는 바람. 그 속에서 놈은, 아직 남은 왼손으로 열차의 밑바닥에 단검을 꽂았다. 그렇게 버티고 있었다. 
 “······비수를 숨겨두고 계셨군요.”  베론은 태연히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속에서 화가 울컥 솟았다. 격정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지극히 평온했다. 
 “베론. 너는 지금 이 상황이 올바르다 생각하는가.”  “······.”  베론은 삭풍에 흔들리며 고개를 저었다. 손에 힘이 풀리면 절명할 사람치고는, 비정상적으로 자약한 모습이었다. 
 “당연히 올바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제 주군에게 했던 모든 악행들을.”  베론의 목소리에 독기가 서렸다.“우와······.”  알렌의 말투가 늘어졌다. 긴장이 풀린 듯 눈도 게슴츠레 놓였다. 
 나는 녀석을 보며 말했다. 
 “피곤하면 자 둬라.”  특급 열차는 산맥에 달라붙은 채 전진하는 기차다. 이것을 타고도 3 시간 정도는 더 올라야 베르흐트의 1 관에 닿을 수 있다. 
 “에? 아, 네에······. 그러면 저는 조금만······.”  알렌은 눈을 감았고, 나는 기차 바닥에 서류 가방을 내려놓았다. 
 VIP 석의 손님은 총 11 명. 
 한 명은 방금의 로엔, 다른 여덟 명은 국적 불문 신분 불문의 아무개. 
 나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고요히 서류 가방을 열었다. 그 안의 애장은 슬그머니 빠져나와 열차의 바닥을 기었고, VIP 량의 각 여덟 모서리에 위치했다. 
 툭-  그때 내 어깨에 뭔가가 닿았다. 
 알렌이었다. 알렌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코오오- 아기새같은 숨결을 내쉬고 있었다. 
 순간 혐오 수치가 팍 솟았으나, 침만 흘리지 않으면 괜찮을 것이었다. 
 그대로 두었다. 
 나는 품 속에서 책을 꺼냈다. 
 [ 에르트랑 무술서 -중급편- ]  아직까지는 의심스러울 뿐이지만, 방비는 확실하게 해두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벌어질 때까지 이 책이나 좀 읽어두도록 하자······. 
 * * *  째깍- 째깍-  시간이 흐른다. 
 로엔은 허리춤의 회중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30 분. 
 특급열차는 첫 번째 역에 도착했고, 세 명의 손님이 내렸다. 
 로엔은 데큘레인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로엔은 태연히 신문을 펼쳤다. 
 째깍 째깍-  다시 시간이 흐른다. 
 그 흐름은 대충 느낌으로 알았다. 
 한 시간. 
 두 번째 역에 도착했고, 두 명의 손님이 내렸다. 
 데큘레인은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로엔은 찬물을 마시며 심장의 박동을 가라앉혔다. 
 걱정할 것 없다. 
 일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다. 
 나에게 돌아오는 해악은 조금도 없을 터. 
 아니, 애당초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고 있지 않다. 
 내 임무는 그저, 단순히 네 번째 역에서 내리는 것 뿐. 
 세 번째 역에 도착했고, 다시 두 명의 손님이 내렸다. 
 이제 데큘레인과 그 조수를 제외하고 오직 두 명만 남았다. 
 아직도 데큘레인은 책을 읽고 있었다. 조수는 여전히 그의 어깨에 기대었고, 데큘레인의 귀족적인 자세에는 어떠한 흐트러짐도 없었다. 
 화보처럼 완벽하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째깍-  째깍-  회중시계에서 울리는 진동이 거슬린다. 
 정녕,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적막. 
 그 느린 지옥 속에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두 시간이 지나. 
 네 번째 역에 도착했다. 
 “후-”  로엔은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큘레인과 그 조수를 제외한 나머지 손님은 모두, 이 네번째 역에서 내린다. 
 “하하. 데큘레인 교수님. 잠시 뿐이지만 같은 공간에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꾸만 발이 헛돌았다. 수십발자국을 내딛어도 계속 같은 자리였다. 
 한참동안 낑낑거리던 로엔은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  데큘레인은 아무 말 없이 책을 읽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몸은 뭔가에 붙잡힌 듯 움직이지 않는다. 
 “이게, 이게 왜. 얼른 내려야- 하는데- ”  다급히 원인을 찾던 중, 발견했다. 
 회중시계였다. 
 자신의 회중시계가 허공에 붙박였고, 그 줄이 허리를 잡아 당기고 있었다. 
 이 기이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술사는, 당연히 데큘레인 뿐이다. 
 “데큘, 데큘레인 교수님? 왜, 왜이러시는 겁니까?”  “떠나기 전에 한 번의 생각을 더 해보아라.”  “예? 무슨 생각을 말입니까?”  설마, 눈치 챘을리가 없다. 
 아니, 눈치를 챘더라면 이 기차에 타지를 않았겠지! 
 최소한 이 VIP 량에 앉아 있질 않았겠지! 
 이 씨발 이것좀 놔줘! 
 “내 자네에게 기회를 주지.”  “아니, 그게 아니라-”  “5”  그리고는 난데 없이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4.”  치이이이이익─! 
 열차가 다시 출발했다. 그 속력은 금세 궤도에 접어들었고, 로엔의 안색은 보랏빛으로 질렸다. 
 “3.”  “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2.”  “아니, 아 그냥. 그냥! 네 번째 시간이 되면 자리를 비켜달라는, 돈, 3 만 엘네짜리! 아, 아이 씨발! 얼른, 나가야, 놔! 터진다고─!”  “······.”  그제서야 염동이 해체되었다. 로엔은 앞으로 튕겨나가 바닥에 굴렀다. 
 그렇게 기어서라도 밖으로 나가려 했는데. 
 “늦었다.”  우선, 둥──  둥──  하며 심상찮은 진동이 일었다. 
 그 직후. 
 ───! 
 기차의 밑바닥에서 거대한 충격이 치밀었다. 
 폭발이었다. 
 “끄아아악─!”  로엔은 비명을 내질렀다. 
 쿵───! 
 고막을 찢어발기는 듯한 굉음. 
 직후 시야가 어지럽게 뒤집혔다. 
 예상하기로는 밑면의 폭탄이 터진 것이다. 
 이제 기차가 위로 솟구치고, 그 상태에서 절벽 밑으로 데구르르 굴러 낙하하며, 뼈도 못 추린 채 죽을 것이다······. 
 죽었다! 죽었어! 
 나는 저 데큘레인 때문에 죽었다고! 
 ······그러나. 
 그 예상은 첫 번째만 옳았다. 
 기차가 위로 솟구치는 것까지만. 
 “꺽!”  로엔은 한 번 하늘로 떠올랐다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얼굴과 온몸이 아팠다. 
 “끄으으······.”  로엔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흠칫 당황했다. 
 기차는 멀쩡했다. 
 폭발이 없었나? 
 아니, 폭발은 확실히 있었다. 기차 밑바닥의 일부가 고철처럼 우그러진 채였으니. 
 로엔은 뒤통수를 부여쥐고 창밖을 보았다. 
 잠시, 머리가 멍하니 비었다. 
 “······아니 이게······ 뭐시당가······?”  떠 있었다. 
 기차의 량 전체가, 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VIP 량 말고도, 폭발에 휘말린 다른 모든 기차의 량들이. 
 그 자리에, 그 시간에 멈춘 듯 정박되어 있었다. 
 참 절묘하고도 참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마치, 마법이 그 자체로 자연과 동화된 것 같았다. 
 “이게······.”  로엔은 본능적으로 품 속의 카메라를 꺼냈다. 용케도 부서지지 않은 카메라는 그 풍경을 확실하게 담았다. 
 찰칵- 찰칵- 찰칵-  부웅 허공에 떠오른 기차, 한 순간에서 정지한 폭발, 그리고······. 
 “무엇을 그리 찍나.”  데큘레인. 
 그의 서늘한 목소리가, 심장을 찢어발기는 듯한 음색이 흘러들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옆의 조수도 여전히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지극히 평온했다. 
 그 이기적인 상황을 로엔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폭발에 휘말린 것은 다 함께였을 텐데. 
 “너는 그저 말하면 된다.”  사그락- 거리며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그때 로엔은 감지했다. 
 어딘가, 멀리에서 다가오는 발소리. 산맥을 뛰어서 내려오는 그들의 민첩한 소리. 
 어두운 그림자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의 사주인지.”  그보다 먼저 데큘레인의 푸른 눈이 번뜩였다. 섬뜩한 예기를 품은 눈이, 마침내 페이지에서 벗어나 그 바깥의 그림자들에게로 향했다. 
 “어느 빌어먹을 것들이 이런 짓을 도모했는지.”  동시에─ 수십의 살수가 창문을 뚫고 날아들었다. 
 “그것만 말하면 된다.”  이 순간을 대비하여, 데큘레인이 기차의 각 모서리에 고정시켜두었던 애장. 
 그 여덟 자루의 수리검이 대인지뢰 클레이모어(Claymore)처럼 치솟았다. 
 베르흐트. (2)  베르흐트를 가능한 쉽게 표현하면, 설산고도(雪線高度)의 능선에 건축된 마을. 
 또는 만년설의 한복판에 들어선, 인구 1,000 여명의 국경 없는 독립 국가. 
 베르흐트는 관문의 형식으로 제 1 관, 제 2 관, 제 3 관, 제 4 관과 마지막 장로관으로 나뉘며, 각 관마다 입장 제한과 주거 제한이 존재한다. 
 제 1 관은 기사와 모험가를 포함한 민간인도 드나들 수 있지만, 제 2 관부터는 오직 마법사만이 출입 가능하다. 
 실비아는 그 2 관의 호텔에서 벌써 이틀 밤을 보냈다. 
 “······.”  지루했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따금씩 발생하는 신기한 마력 현상 말고는 볼거리가 영 없었다. 
 베르흐트 회의도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할 일이라고는 공부 뿐이었다. 
 “······첩보.”  그런데 자꾸만 아버지의 그 말이 신경이 쓰였다. 
 열차를 습격하리라는 첩보. 
 그건 정말 첩보가 맞았을까. 
 첩보가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혹시 사주(使嗾)가 아니었을까. 
 “아가씨. 벌써 열네 가문이나 도착했다네요.”  그때 시리오가 객실로 들어왔다. 그는 베르흐트의 특산품인 만년설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었다. 
 “12 가문 중에는 누가 왔어.”  “음? 아, 유크라인과 리와인드 말고는 전부 도착했답니다. 참, 동행 조수 중에는 아가씨 또래도 꽤 있다더라고요. 물론 아가씨보다 세 네살은 더 많겠지만, 만나러 가보실래요? 왕국 사람도 있습니다. 견문을 넓힐 기회라고요~?”  유크라인. 
 다른 무엇보다 그 가문이 신경 쓰였다. 
 “필요 없어.”  실비아는 대수롭지 않은 척 고개를 저었다.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예? 아, 예. 참고로 그 조수 분들은 ‘눈과 비’라는 카페에서 티타임을 즐기고 계시답니다~”  실비아는 시리오의 말을 듣지도 않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총총총 걸어 나온 그녀는 인적이 드문 곳에 숨어서 주머니를 뒤적였다. 푸른 돌멩이가 손에 잡혔다. 
 데큘레인이 시험 통과의 보상으로 준 마석이었다. 
 “······이걸로.”  그녀는 눈을 감고 마력을 방출했다. 
 그 응집의 매개는 마석. 
 마력은 마석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특정한 테두리를 이루었다. 언뜻 보기에는 알기 힘든 실루엣이었다. 
 실비아는 그 텅 빈 선에 색을 부여했다. 다색의 연기처럼 번지는 그녀의 ‘적·청·녹’─ 즉 원본의 색은 곧 숨결이 되어 완벽한 생명체를 일으켰다. 
 매였다. 
 난생 처음으로 완성한 창조적 재능. 실비아는 잠시 현기증에 비틀거렸지만, 곧 그 완성도에 감탄했다. 
 역시 난 천재야. 
 “······.”  다만 방심은 안 된다. 
 매는 날개도 퍼덕이고, 눈도 깜빡이고, 제 멋대로 움직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기능이다. 
 실비아는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분명 눈꺼풀에 가려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서서히 어둠이 개이며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매의 시야가 자신에게로 전이된 것이었다. 
 실비아는 만족스레 눈을 떴다. 
 “날아가. 날아가서, 네가 보는 것을 보여줘.”  그러자 매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열차의 선로를 뒤따라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보여줘.”  끼에에에에엑─! 
 매는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 
 흩날리는 진눈깨비를 뚫고 나아가는 그 자태를, 실비아는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 * *  ······30 분 뒤. 
 특급열차가 네 번째 역을 지나고 얼마 흐르지 않은 시점. 
 산맥에 걸터 앉아 지상을 관망하던 그들은, 기차의 밑부분에 접착해둔 폭탄을 점화했다. 
 약속된 시간, 약속된 지점이었다. 
 쿵──! 
 폭발은 기차의 뼈대부터 부수며 치솟았다. 
 작약의 충격에 차체는 크게 떠올라 탈선되었고, 절벽으로 굴러서 형체도 없이 으스러질 것이었다. 
 그랬어야 했다. 
 “······!”  그러나, 기차는 허공에 머물렀다. 
 총 세 개의 량이 붕 떠오른 상태에서 편안히 멈추었다. 
 ──예상했던 바다. 
 그 상상을 초월한 역량에 잠시 놀라긴 했다만, 데큘레인의 마법적 재능에 방심하지는 않았다. 그 대처를 위하여 이리 모인 것 아니었던가. 
 죽일 필요도 없다. 
 베르흐트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붙잡을 뿐이다. 
 살수는 수신호로 돌진을 명령했다. 
 그들 수십명이 공중의 기차로 달려들었다. 우선 창문을 박살냈고, 그 내부로 기민하게 진입했다. 
 바로 그 순간. 
 알 수 없는 금속이 치달았다. 
 팅팅팅팅팅─! 
 마치 덫을 밟은 것처럼, 파편 같은 송곳이 온 사방을 튕기며 급소를 꿰뚫었다. 강철의 직선은 너무도 쉽게 살갗을 파고들었다. 
 수십이었던 그들은 순식간에 다섯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남은 다섯이 핵심일 것이었다. 
 “······.”  데큘레인은 태평하게 앉아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귀품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고, 살수들은 섣불리 다가설 수 없었다. 
 일견 빈틈 투성이지만, 속아서는 안 된다. 언제 또 예의 금속이 발작할지 모른다. 
 “흐아아암······?”  그때 알렌이 눈을 떴다. 알렌은 잠이 가득한 눈으로 데큘레인을 보았다. 
 데큘레인은 무술서로 배운 바를 실천했다. 
 즉, 목 언저리의 혈을 짚어 알렌을 기절시킨 것이었다. 알렌은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다시 잠들었다. 
 “······?”  그때 데큘레인은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너무 이질적이어서 상황도 잊어버린 채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끝의 감각이······ 너무 부드러웠다. 말랑했다. 철인의 예민한 오감은 그 희미한 살결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었다. 
 알렌. 
 그의 한 가지 비밀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으나, 다른 하나는─  “······.”  데큘레인은 기절한 알렌을 보았고, 다시 열차 밖을 보았다. 저 멀리에서 베론이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은 어느 정도 마무리 된듯했다. 
 “끝났군.”  데큘레인의 그 말에 살수들은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 다시 창문 밖으로 도망갔다. 붙잡길 원했으나 마력이 모자랐다. 
 “······.”  데큘레인은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이 열차에서 내릴 차례였다. 
 “로엔이라 했나.”  “······!”  기어서 나가려던 로엔이 흠칫 놀랐다. 끼기긱- 땀을 뻘뻘 흘리며 데큘레인을 돌아보았다. 
 “예, 예. 그······.”  “이 아이도 데리고 나가라.”  “아, 예, 예!”  급히 일어난 로엔은 키작은 알렌을 업고 기차 밖으로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허공에 떠오른 기차와 지상 선로의 간극이 너무 멀었다. 
 “저······ 기차의 높이를 조금만 낮춰주시면······.”  데큘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 열차는 자신의 속성인 ‘금속’이었으므로, 그 어마어마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정지’는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움직임은 불가능했다. 
 “알아서 내려라.”  때마침 베론이 열차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아, 기사님!”  로엔은 반색했고, 베론은 알렌을 업은 로엔을 물건처럼 들었다. 
 “뛰어내리겠습니다.”  “예? 아니, 기사님! 아직 마음의 준비가-”  “괜찮습니다.”  베론은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끄아아아아—”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던 로엔은 지상에 착지하지마자 혼절했다. 
 베론은 로엔과 알렌을 선로에 내려놓은 뒤 다시 열차 안으로 뛰어왔다. 
 “······.”  그리고는 가만히 서서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데큘레인은 그가 자신을 데리러 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곧, 아주 중요한 사실을 떠올리고 말았다. 
 베론은 여기까지. 
 ‘걸어서’ 왔다. 
 데큘레인은 침착하게 자신의 애장을 불러들였다. 베론은 공중에 뜬 열차 내부를 둘러보았다. 
 “······열차의 앞머리는 이미 베르흐트로 출발했습니다. 후속 조치는, 곧 이루어지겠지요.”  베론이 말했다. 
 데큘레인은 대답했다. 
 “그런가.”  “예. 이제, 저희 둘 뿐입니다.”  데큘레인은 베론을 노려보았다. 그의 곁에서, 여태 갈무리되었던 살기가 피어올랐다. 
 방심이었나. 
 아니면 베론이 너무 완벽했나. 
 뭐가 되었든 참으로 기가 막히게, 특성의 눈을 속인 것이었다. 
 “베론.”  “나머지 승객은 다 구했습니다.”  베론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그러니, 이제 당신이 죽을 차례입니다.”  그 논리의 괴이한 흐름에 데큘레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깊이 생각해라.”  “수백번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죽어야 합니다.”  이유를 물을 세도 없었다. 베론은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늦지 않게 도달한 애장이 그의 앞길을 막았으나, 놈은 찰나에 발검하여 180 도로 휘둘렀다. 
 챙─! 
 그 한 줄기 곡선에 열 자루의 애장이 나뒹굴었다. 
 튕겨나간 수리검은 다시 떠올라 베론 주위를 맴돌며 연이어 공격했다. 
 챙─! 챙─! 
 날카로운 금속의 마찰음. 격렬하게 튀기는 불씨. 
 베론의 유려한 검술에는 아주 작은 빈틈도 없었다. 그 방어는 이미 어떤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  격의 차이가 확실하게 보였다. 
 이대로라면, 자신의 마력이 고갈되는 순간 명백히 패배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데큘레인은 애장을 거두어들였다. 경계 태세였던 베론은 다시 공격 일변도로 덤벼들었다. 그 드센 돌격에도 데큘레인은 눈을 감지 않았다. 
 다만, 염동을 해제할 뿐이었다. 
 저 놈의 칼에 맞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윽!”  쿠우우우우웅──! 
 염동으로 유보된 추락이, 멈춰진 시간이 다시금 이어진다. 
 선로에서 이탈한 기차는 중력에 휩쓸리며 하강했다. 
 * * *  ······절벽의 끝까지 떨어지지는 않았다. 
 다행히, 절벽의 날카로운 면에 기차가 걸렸다. VIP 량 하나만 꼬챙이에 꿰인 모양새였다. 
 “······늑골.”  고공 낙하의 충격은 뼈를 몇마디 부러트렸으나 그 뿐이었다. 
 양복의 방어력이 더해진 「철인」의 몸이다. 골절 따위는 금세 회복될 터······. 
 살기가 의식을 일깨웠다. 
 한 줄기 섬전이 치밀었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굴렀다. 동시에 내 애장을 불러들였다. 어딘가에 방치되어있던 애장이 급히 떠올라 기사의 어깨를 가격했다. 
 퉁─! 
 호신강기에 막혀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끈질기십니다.”  베론이 뇌까리며 검을 쳐올렸다. 나는 그의 검에 염동을 가했으나, 검기는 내 간섭을 튕겨냈다. 
 하는 수 없이 백덤블링으로 거리를 벌렸다. 놈은 틈을 주지 않고 쇄도했다. 
내 어깨를 베어내려는 검을, 허리를 비틀어 회피하고 놈의 목으로 주먹을 뻗었다. 
 놈이 조금 더 빨랐다. 
 놈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가격했다. 그 충격은 몸이 튕겨나갈 정도였고, 열차의 경사진 면으로 미끄러지는 나에게 검풍이 사출되었다. 
 “······!”  진검에 준하는 바람이 쇄골에서 장골까지를 두드렸다. 입에서 피가 흘렀다. 
놈이 가하는 데미지가 회복 속도를 아득히 능가하고 있었다. 
 좌석을 붙잡은 채 일어서려던 나는 문득 뒤를 보았다.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질기십니다.”  놈은 똑바로 걸어서 나에게 다가왔다.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베론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강하다. 
 서로 만전인 상태에서 싸워도 밀릴 상대인 것을. 
 나는 기차를 붙드느라 너무 많은 마력을 소모해버렸다. 
 “······율리를 배신하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몸과 입은 여전히 활기가 넘친다. 
 「성격」뿐만 아니라, 「특성」의 작용. 
 ──「부러질지언정」──  ◆ 등급  :레어  ◆ 설명  :부러질지언정 결단코 굽히지 않는다. 
 :전투시 발동하며,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정신력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거의 모든 정신간섭 류 마법이 통용되지 않는다. 
 ──────  내가 추가하지 않은, 데큘레인의 기본 특성 중 하나. 
 죽음을 앞두고서 조금의 긴장도 없다. 
 사선(死線)에 선 것이나 다름 없는 위기이지만, 데큘레인의 심장은 여전히 일정하게 뛰고 있다. 
 “당신이 죽어야, 제 주군이 삽니다.”  베론이 말했다. 나는 무의식적인 조소를 흘렸다. 
 “지금 내가 죽어있나. 아니면, 네 주군이 죽어 있나. 누가 죽지 않아도, 그 누구도 죽지 않는다.”  놈은 대답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나는 목강철을 일렬로 세웠다. 목강철은 방패가 되어 놈의 경로를 가로막았다. 
 “······흡!”  놈은 단순한 횡베기로 방패를 파괴했다. 
 파편처럼 흩어지는 목강철을 뚫고— 한 마리 귀신이 쇄도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저 놈은, 살의 그 자체다. 
 베론이 검을 치켜들었다. 
 잠시, 시간이 느려진 듯했다. 흐트러지는 검광을 보며 단순한 생각이 들었다. 
 이 검에 베이면, 게임이 끝나는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다시 사무실에서 눈을 뜨게 되는 것일까. 
 그게 아니면······. 
 ······그런데. 
 기이한 현상이었다. 
 검을 내리치려는 놈의 손목에 뒤틀림이 발생했다. 아지랑이가 일듯, 그 공간 전체가 난잡하게 출렁였다. 
 베론도 의아한 눈으로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콰직—! 
 돌연 그의 손목이 어그러지며 핏물이 튀었다. 손목은 깔끔하게 절삭되었고, 주인을 잃은 검이 나뒹굴었다. 
 “───!”  베론은 고통에 눈을 부릅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비틀거리는 그의 발목으로 수리검이 쇄도했다. 
 “크악!”  균형을 잃은 베론은 열차 밖으로 미끄러졌다. 몸 전체가 돌풍에 떠밀렸다. 
 “······.”  드디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고요. 
 그러나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놈의 살기가, 여전히 흘러 넘치고 있었다. 
 나는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일어났다. 좌석을 짚으며 걸어가 열차의 밑을 보았다. 
 휘이이이잉──! 
 휘몰아치는 바람. 그 속에서 놈은, 아직 남은 왼손으로 열차의 밑바닥에 단검을 꽂았다. 그렇게 버티고 있었다. 
 “······비수를 숨겨두고 계셨군요.”  베론은 태연히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속에서 화가 울컥 솟았다. 격정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지극히 평온했다. 
 “베론. 너는 지금 이 상황이 올바르다 생각하는가.”  “······.”  베론은 삭풍에 흔들리며 고개를 저었다. 손에 힘이 풀리면 절명할 사람치고는, 비정상적으로 자약한 모습이었다. 
 “당연히 올바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제 주군에게 했던 모든 악행들을.”  베론의 목소리에 독기가 서렸다.“당신은 모르시겠지만.”  “······아니. 알고 있다.”  나는 알고 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 사망 변수는 데큘레인이 자처한 수많은 악행의 반작용. 데큘레인이 과거에 저질렀던 짓들은, 그 어떤 보물로도 보상될 수 없다. 
 ······그렇다 하여도. 
 “베론, 너는 환자다.”  짓씹듯 뇌까린 말에 베론은 웃었다. 
 “······맞습니다만, 아닙니다. 환자는 회복될 수 있지만, 저는 회복되지 않기에 환자가 아닌 망자입니다.”  베론은 눈을 감았다. 그는 마음 한구석의 어느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아니, 그의 마음 전체가 그 하나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듯했다. 
 “저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몸입니다.”  나는 그가 회상하는 장면을 볼 수 없었다. 
 “그저 말발굽에 짓밟혀 죽을 운명이었던, 쓰레기나 다름이 없었던 저를 구원해주었던 그날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 분의 미소를 기억합니다. 그날의 전부를 기억합니다. 그분의 손을 잡고 일어선 순간 저는 죽었고, 다시 태어났습니다.”  절벽의 거친 기류가 일었다. 베론은 서서히 눈을 뜨고 웃었다. 
 그는 아직도, 그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제 목숨은 오롯이 그분의 것입니다.”  나는 허탈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율리에게 의향이라도 물어보지 그랬나.”  “주군은 당연히 거부하셨을 것입니다.”

Comentários

Postagens mais visitadas deste blog

apocalipse 9

magia 10

magia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