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4
“······에휴. 덩치는 산적같아서는.” 한숨을 내쉰 가네샤는 지붕에 누워 어둡고 밝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커다란 달. 맑고 서늘한 바람. 금세 사라질 듯 아스라한 풍경.
그녀가 굳이 데큘레인을 찾아온 것은, 아니 여태 감시하고 있었던 것은.
혹시 그가 아직도 ‘다도해의 재능’ 에 미련을 가지고 있나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정작 본인에게 ‘여전히 마법 노예를 구하고 있느냐’ 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 대답 여하에 따라, 자신은 데큘레인을 적으로 돌려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데큘레인은 여러모로 바뀌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그 심정의 변화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썩 나쁜 일은 아니었다. “레일리는 뭐래? 애들이랑 머물 거처는 잡아 놨대?” 이제 곧, 그 아이들이 배를 타고 올 것이다. 가네샤는 그 순간이 기대되면서도 걱정스럽다.
‘그놈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재능이 필요하지만, 아이들을 수련시키는 목적이 결국 ‘전쟁’이라면, 이는 옳은 선택일까. 지극히 도덕적인 관점에서는 옳지 않다. 아직 어린 아이니까. 그러나 만약, 그 아이들이 자라서 수십·수백·수천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명백히 옳은 대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 그래서 돈이 없습니다.” 로한은 말했다. 순간 가네샤의 관자놀이 혈관이 툭- 튀었다.
“뭐? 아 지랄마라.” “정말입니다.” “아니, 도대체 왜 임무를 해도 해도 적자만 나는 거냐고? 너 횡령했니?
똑바로 말해.” “데큘레인 임무. 그거 저희가 취소하고 배상금으로 어마어마하게 지불했잖습니까” “아 참.” 쯧. 가네샤는 혀를 차고 절레절레 저었다.
“에휴······ 그럼, 얘들아. 이제 돌아가자.” “예. 얘들아 붙어라.” 로한이 멧돼지와 도즈무를 불렀다. 그들은 주먹밥처럼 한 곳에 옹기종기 모였고, 로한이 뭔가를 뚱땅뚱땅 두드리더니, 곧 네 명은 푸른 입자가 되어 어딘가로 ‘전송’되었다.
대학. (1) 이튿날.
나는 마법서 한 권을 들고 저택 부지의 뒷산을 찾았다.
「기초 염동」은 이미 완벽하게 숙달했다. 「육안」으로 보이는 숙련도는 100%. 수리검 일곱 자루를 수족처럼 다룰 수 있게 되었으나, 그 이상은 마법 자체의 출력 문제로 힘들었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별채보다도 공기가 맑고 마나의 질이 좋은 곳. 뒷산 초목의 한가운데에서 가부좌를 틀고 「초급 염동」을 익히려, 했는데 땅바닥에 앉을 수가 없었다. 견디기 힘든 결벽증 탓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저택에서 의자만 가지고 왔다.
나무와 풀로 뒤덮인 기슭에 엔티크 의자라니. 참 어울리지 않지만, 의자에 등허리를 붙인 채 마법서를 펼쳤다.
──「초급 염동 」── :기초 염동을 배웠으니 이제 초급 염동이다. 초급 염동은 기초 염동에 비해 18 개의 직선, 하나의 원이 추가되었다. 회로의 움직임 또한 배로 복잡해졌고······.
───── 나는 「이해력」을 발동했다. 머릿속에, 그리고 눈 앞에, 「초급 염동」과 더불어 「기초 염동」 술식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 그 두 마법진을, 흡사 컴퓨터로 도형을 포개듯 겹친다. 그것으로 두 마법의 핵심적인 차이가 명확히 부각되고, 나는 그 차이를 온몸에 덧대어 이식한다. 「기초 염동」의 심심한 술식 위로 한 줄 한 줄, 보다 구체적인 「초급 염동 」의 회로가 새겨진다. 깃털처럼 가벼운 술식에 보다 무거운 선과 원이 더해진다. 너무 단순하여 허전하다는 느낌마저 들던 「기초 염동」이, 이제야 비로소 어느 매체에서나 보던 ‘마법진’의 형상을 갖춰간다.
“하아······.” 물론 나는 죽을 맛이었다. 새로운 회로가 형성될때마다 끌칼로 뼈마디를 긁어내는 듯한 열통이 치밀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근육을 침범하는 마력이 신경을 갉았다.
짧고 굵은 통증이라면 오히려 좋으나, 이 인고의 시간은 무던히도 길다.
온몸에 뿌리처럼 내려앉는 마법의 술식이 나를 미치도록 괴롭히는 것이다······.
그렇게 마력이 고갈되어갈 즈음. 탈력과 나른이 뒤섞인 그 애매모호한 감각 속에서.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예리엘. 그러나 굳이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그저, 그 비밀이 누설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나는 금세 잡념을 죽이고 눈을 떴다. 마력은 1 할도 채 남지 않았으나, 아직 체력은 팔팔했다. 따라서 이제는 단련의 시간이다. 나는 별채로 돌아왔다. 명색이 단련장이지만, 그 풍경은 현대의 헬스장에 비해 뭔가 기묘하다. 일단 일렬로 나란히 늘어선 철봉들이 너무 높게 이어지고, 아령으로 쓰이는 금속들의 무게도 상상 이상인 것이다.
나는 옷을 벗어 개어놓았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신체는 내가 보기에도 썩 흐뭇했다. “······.” 나는 철봉에 손을 얹었다. 그 상태에서 염동력으로 금속띠를 불러들였다.
허리, 발목, 손목에 총합 100kg 는 거뜬할 구속구가 장착되었다. 나는 첫 번째 철봉에서 턱걸이 10 회를 한 뒤, 보다 높은 두 번째 철봉으로 뛰어 올랐다. 똑같이 10 회를 한 뒤, 더 높은 세 번째 철봉으로 뛰어 올랐다. 그렇게 지붕에 닿을 때까지 반복하다가, 지붕에 닿으면 그대로 착지한다. 쿵─!
막대한 충격이 온몸으로 번지지만,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세트를 끝냈으니 이제 다음 운동은─ 클라이밍 로프(Climbing Rope).
나는 지붕까지 이어진 로프를 아득 움켜쥔 채 올라갔다. 그 정상에 도달한 뒤에 또 다시 뛰어내렸다.
······보면 알 수 있듯, 평범한 인간이라면 결코 시도조차 하지 않을 무식한 방법이다. 관절이니 인대니 무릎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확실히’ 고려하지 않은 혹사다. 그러나 「특성」이 작용하는 한, 나는 어떤 개짓거리를 하여도 뼈가 부러지지 않고, 인대가 늘어나지 않는다. 물론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데큘레인의 성격적인 장점, 즉 지대한 「승부욕」과 강박에 가까운 루틴으로, 오직 내 육체의 향상에만 철저히 집중할 뿐.
“후우.” 이렇게 무식한 운동을 끝내고 나면?
어느새 마력이 4 할까지는 회복되어 있다. 그러면 다시, 마법에 몰두한다. 이러한 루틴으로 「초급 염동」의 메모라이즈 예상 소요 시일은, 최대 3 주. 또한 「철인」으로 발달한 내 근력·순발력·지구력을 비롯한 육체 능력과, 협응성·민첩성·유연성 따위의 육체 성질은, 이제 웬만한 아성체 고릴라를 능가할지도 모른다.
물론 전투력으로 유명한 여러 네임드, 혹은 빌런들을 따라잡으려면, 아직도 멀었다.
* * * 마탑에 출근한 나는 집무 의자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았다. [ Lv.1 시스템 상점 ] 시스템 상점은 습득한 ‘상점 화폐’로 캐릭터를 강화할 수 있게 해준다.
게임이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플레이어 뿐만 아니라 네임드 캐릭터도 이 상점으로 강화된다. 그러나 시스템 상점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는 아주 한정적인데, 게임 극후반부까지 많아야 여섯 번이 고작이다. 왜냐하면 [ Lv.1 상점 ]은 강화 품목 당 가격대가 5~10 원, [ Lv.2 상점 ]은 10~20 원, [ Lv.3 상점]은 20~40 원······ 2 배씩 불어나고, 각 상점은 레벨 별로 무조건 한 번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강화가 베스트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 ──[ Lv. 1 시스템 상점 ]── ■ 1. 대장장이의 행운······ ······ ■ 5. 마력의 질적 강화 (1 단계) :캐릭터 본연의 마력이 질적으로 강화된다. :마력의 출력과 효율 소폭 상승.
:10 원 ──────────── 마력의 질적 강화. 다른 건 볼 필요도 없다. 나머지는 컨셉 플레이를 할 때나 좋고, 정석은 오직 이것 뿐이다. 그러니 4 원만 더 모으자.
똑똑─그때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알렌이 쭈뼛쭈뼛 걸어 들어왔다. “알렌.” “네, 네에. 부르셨기에 왔습니다.” 알렌은 잠자코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보통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라는 한 마디는 할 법한데, 그저 순하다.
순하기만 하다. 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네 조수 마법사를 뽑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 “······네?” 알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저번 주에 내려온 공문을 염동으로 띄웠다.
“조교수 심사다.” 조교수로 추천하고 싶은 마법사가 있다면 심사에 올리라는 공문.
“······!” 내 뜻을 알았는지 알렌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네, 네에, 네에?!” “그렇다. 내 너를 조교수로 추천할-” “네에──?!” “생각이다.” 말을 끝맺자 알렌은 이미 그렁그렁하게 되어 있었다. 톡- 건드리면 툭- 터질 듯한 눈물 방울들. 알렌은 울먹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교수님은 저, 저에게 재능이 없다고······.” 물론 알렌은 재능이 부족하다. 「대부호 재력가」의 눈에도, 하물며 「악당의 운명」의 눈에도 티나지 않는 무색무취. 그 두 특성이 만능은 아니지만, 알렌의 재능은 확실히 모자라다.
어쩌면 그렇기에 여태 떠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불러주지 않으니,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처지.
“그동안은 시험이었다. 오직 너 하나만이, 너의 성실함이 내 시험을 통과했다.” 데큘레인은 권위적이며 칭찬을 싫어한다. 하지만 이 정도 성격은 적잖이 극복이 가능하다. 「성격」 중에서도 그 위계 서열이 있기에.
참고로 가장 극복하기 힘든 건 「결벽증」과 「존귀한 예법」. 이제는 진짜 더러운 게 죽도록 싫다. “네, 네에?!” “그 이상은 묻지 말아라. 그리고, 받아라.” 나는 알렌에게 선물을 주었다. 별 것은 아니고, 팔찌였다. 근처 보석상에 주문하여 ‘유크라인’의 문양을 새기라 일렀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도록.” 놓아주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알렌의 잡일·잡무와 문서를 정리하고 취합하는 능력, 재빠른 눈치는 나에게도 필요한 유용함이었으니.
알렌은 놀란 얼굴로 있다가 두 손을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그러면, 그러면. 저는 공식적으로 수제자가 된 것인가요······?” “······.”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는데. 나는 대충 지어냈다. “아직, 두 단계 더 남았으니 열심히 하라.” 그러자 알렌은 힘차게 허리를 숙였다. 세 번 연속으로 붕 붕 붕.
“아, 앗. 네, 네에! 알겠습니다!” “이제는 조교수이니, 이틀 뒤인 내 수업에도 참관해야 한다.” “차, 참관, 참관이라니요?! 참관이라니요?! 참관이라니요?!” 알렌은 세 번이나 되물었다. 녀석의 눈에 모인 실핏줄이 터지게 생겼다.
조금 거슬렸다. “반응을 너무 요란하게 하지 말아라. 마음에 들지 않아.”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좁히고 쏘아붙이고 말았다. “······아, 네, 네에. 죄송합니다······.” “그래.” 나는 별 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알렌은 크게 놀라더니 몸을 웅크리고 파르르 떨었다. 두 팔로 자신을 방어하는 꼴이었다. “괜찮다. 때리지 않는다.” “네? 아······ 죄송합니다, 그, 어딜, 어딜 가시나요······?” “도서관.” 루나의 논문. 그 암호 해석은 100% 완료되었다. 그러나 정작 논문의 구성이 애매했다. 일단 주제는 순수 원소의 창안이 맞다. 다만 이곳 저곳에 빈 부분이 너무 많고, 아예 틀린 내용도 꽤 있다. 하여 도서관에서 서적을 좀 뒤적일 생각이다. 아무리 「이해력」이라는 특성이 있다 한들, 교수로서 마법에 대한 공부는 필수이니. 쓸만한 조작 마법서가 있으면 그것도 익힐 겸.
“네, 네! 아, 아 참! 이거! 교수님!” 알렌이 품안에서 어떤 종이 한 장을 주섬주섬 내밀었다.
“조심하세요!” [ 현상수배 : 위자드 킬러 ‘록하크’ ] [ 제도의 변두리에서 위자드 킬러 록하크 목격담이 있었습니다. 데뷰탄 마법사들은 되도록 야밤 외출을 자제하여 주십시오. ] 위자드 킬러. 이 녀석은 나도 알고 있다. 마법사 플레이어 한정, 초중반의 가장 큰 위협. 원래의 데큘레인이었다면, 음지의 녀석들을 부리거나 하여 이놈의 신변을 금세 포착할 수 있었겠지. 그러나 데큘레인을 강하게 만드는 그 음지의 인맥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먼저 끊어버렸다.
“요즘 이 위자드 킬러가 정말 무섭습니다. 능력있는 마법사만 집중적으로 노린다고 하는데요······” “알렌.” “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나는 나지막이 웃었다. “······네에?”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위자드 킬러. 이놈은 ‘마법사 한정’ 중간 보스 급 빌런이라 할만하나─물론 데큘레인보다는 그 격이 떨어지지만─ 나에게는 자신감이 있다. “아! 모든 원소를 종처럼 부리는 모나크 등위의 고위 마법사이자 영광스러운 제국황실대학교의 최연소 수석교수 데큘레인 님이십니다!”너무 줄줄이 나와서 당황스럽다. “······그래.” 아무튼 이 ‘마법사 연쇄살인범’은 나와 상성이 영 맞지 않는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천적 관계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알렌 너나 조심하거라.” 물론 변수가 있기는 하다. 내 부족한 실전 경험. 그러나 이 「성격」은 실전과 연습에 차이가 없는 냉혈한이므로, 나는 오히려 마주치길 바란다. 놈이 내 상점 화폐가 되어주길 바란다······.
* * * 놀랍게도 실비아에게는 마법 이외의 취미가 있었다. 문헌과 언어 수집이었다. 단지 ‘평범하게 즐긴다’는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법 수련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시간을 할애하는 콜렉터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여 실비아가 황실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가장 먼저 방문한 곳도 도서관이었다. 물론, 실망 뿐이었다. 마탑 도서관에는 나름 희귀한 책들이 있었지만, 실비아에게 ‘컬렉션’이라 할만한 것은 극히 드물었기에.
──그리하여 오늘. 실비아는 큰 결단을 내렸다.
“아, 그러시군요. 하긴······ 이미, 실비아 씨는 데뷰탄 수준이 아니시니.” “가능할까요.” “으음······ 여기는 임원분들 전용 열람실이긴 한데······ 잠시만요.
연락을 좀 해봐야 될 것 같아요.” 마탑의 임원, 즉 교수 전용 열람실에 발을 들인 것이었다. “네. 기다릴게요.” 그러나 쥐처럼 숨어들지는 않았다. 정정당당하게 정문을 공략했다. “······아, 네네. 네 교수님. 지금 여기 실비아 씨가 공부할 것을 찾고 있다 하셔서요······ 음~ 네네. 알겠습니다.” 수정구로 누군가와 연락을 하던 사서는 곧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된답니다. 들어가세요, 올해의 신인 마법사님. 예외 조항이 있다고 하네요.
예외 출입증이 필요하긴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고마워요.” 학생 신분인 실비아는 의기양양하게 열람실 안으로 무혈입성했다. 아무렴 그녀는 일레이드의 계승자이자, 올해의 신인 마법사다. 임원 전용 열람실이라 하여도, 훗날의 교수가 될 것이 확실한 실비아에게 태클을 걸 교수는 거의 없다. 당장 일레이드가 대학마탑에 기부한 금액만 열 손가락에 꼽히는 것을. 그저 순서만 조금 바뀌었을 뿐이다. “······.” 실비아는 오랜만에 들뜬 마음이 되어 열람실 내부를 살폈다. 총총총. 총총총.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발걸음이 토끼처럼 가벼웠다. “아.” 그리 큰 눈으로 서고를 빨아들이다시피 검색하던 실비아는 마침내 발견했다. 그녀의 취미인 ‘문헌’과 ‘언어’, 그 두 가지 범주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컬렉션.에티넬─ 즉 요정의 언어로 이루어진 소설을.
“······.” 실비아는 조심스레 그 책을 꺼내들었다.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Witrospy ba Mitrogy, Stirio lagio pe bardio.] 요정이 속세에서 모습을 감춘지는 이미 오래 되었지만, 그들이 작성한 소설은 여전히 대륙에 남았다. 그렇기에 이따금 발견되는 에티넬 소설은 무궁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 극악의 난이도.
요정들의 언어체계가 아주 일관성이 없기에, 습득과 번역이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것이다.
일단 제목에서도 Witrospy 가 ‘남자’인 것은 안다. 그러나 바로 첫 페이지에 나오는 Omesip 도 ‘남자’를 뜻하는 단어다. 그 뒤의 Radeoman 도 ‘남자’다. 이처럼 근본도 없고 기준도 없는 언어로 어떻게 소통을 했는지.
물론 실비아는 나름대로 에티넬을 익혀두었으니 어느 정도는 해석할 수 있었다. 내용을 스윽 훑어보니 연애 소설이었다. 그러면 더 좋아. 얼른 집에가서 읽어야지. 실비아가 그 책을 품에 안고 돌아섰을 때.
“······!” 누군가와 마주치고 말았다. “으음?” 정령학과의 레트란 교수였다. 그는 당연히 실비아를 알아보았지만, 지그시 미소를 짓고는 스쳐지날 뿐이었다.
실비아는 새삼 우쭐하여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이렇다는 것이다. 이 넓은 대학교에, 고작 임원 도서관에 출입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엄벌할 간 큰 교수는 없다.
······아마도,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물론 그 사람이 도서관에 방문하지 않음은 이미 알고 있다. 5 년 간 0 회.
담을 쌓은 수준이다.
돌아가려던 실비아는 괜시리 자신감이 부풀어서 어디 또 다른 책이 있을까, 에티넬 사전이라도 있으면 금상첨화일 텐데, 따위의 철부지 소녀같은 마음이 되어 어떤 서고의 귀퉁이를 돌았다.
그리고.
“······.” 또 다른 사람을 맞딱뜨리게 되었다.
실비아의 나른한 눈이 먼저 그 기다란 몸을 훑었다. 맞춤제작된 듯 조화로운 정장 자켓과, 그 안의 새하얀 와이셔츠를 감싼 정장 조끼. 날카롭게 얹어진 독서 안경과, 장갑 낀 손으로 쥔 고풍스런 양장본. 이지적인 미남, 수석교수 데큘레인.
······예상 밖의 대면이었다.
그 급박한 찰나에도 실비아는 왜인지 희귀해보이는 양장본이 탐나서 살폈다.
그러다 느껴지는 시선에 힐끗 눈을 올렸다. 안경 안의 진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아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상황의 심각성이 인지되었다. 실비아는 가만히 서서 눈만 깜빡거렸다. “······.” 그렇게 1 초, 2 초, 3 초. “······.” 시선이 얽히며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 서로 아무 말 없는 그 공백. 그 속에서 마침내. 턱─ 하고, 그가 먼저 책을 덮었다.
그 순간 실비아는 돌아섰다. 또각또각또각또각또각또각또각─ 구두 단화는 유난히 빠르고 필사적으로 움직였지만, 곧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멈추지 않으면 징계다.” 그의 한마디에 실비아는 멈췄다. 굳은 듯 딱딱하게 서있기만 했다.
뚜벅······ 뚜벅······ 뚜벅······. 그러는 사이, 목각귀신처럼 등 뒤에서 서서히 가까워지는 발소리. 넘실거리며 흘러드는 불길하고 서늘한 공기.
마침내 그 발걸음이 멈췄을 때, 실비아는 긴장감에 침을 삼키고 말았다.
대학. (2) “돌아서도록.” 그 한 마디에 실비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뒷짐 진 데큘레인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데뷰탄 실비아.” “네.” “내가 알기로, 이곳은 임원 전용 도서관이다. 기밀에 가까운 문서도 많아 교수진 외에는 출입 엄금, 출입시 엄벌일 터인데.” “아, 그렇군요. 몰랐어요. 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실비아의 변명에 데큘레인은 고개를 끄떡였다. “길을 잘못 든 너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군. 너 포함 이 열람실 사서들의 탓이다. 그들 전부를-” “제가 상황을 모면하고자 거짓말을 하고 말았어요. 예외 조항을 이용했어요.” “예외 조항은 없다.” “죄송해요. 찾고 싶은 책이 있었어요.” 실비아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쥐어진 책이 두둥실 떠올랐다. “어-” 손을 뻗어서 그 책을 잡으려다가 헛디디고 말았다. “에구.” 그녀는 균형을 잃고 주저앉았다. 엉덩이가 차가웠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아무런 내색 없이 일어나 툭툭 털었다. 그리고 데큘레인을 보았다.
“······.” 데큘레인은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실비아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우스웠다.
저건 에티넬 소설인데. 취미라고는 사교 밖에 없는 당신은, 어차피 읽어도 모를 미지의 세계일 텐데. 헛수고 하지 말고 어서 그 책을 나에게 돌려줘.
“어젯밤에 나는 그와 함께 있었다.” “?” 그런데······ 기이한 일이었다. “그에게로 향하는 길목마다 붉은 꽃이 피어 있었다.” 데큘레인 교수가 돌연, 이상한 문장을 읊조리는 것이었다. 마치 책의 내용을 낭독하듯이. 강의를 하던 음색과는 썩 다른 부드러움으로.
“내 감정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차근차근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를, 실비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만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읽고 있다. 아니, 정말 읽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되는대로 지껄이는 것일까. “나는 그녀의 옷을······.” 교수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책을 덮었다. “네가 외······ 연애 소설을 좋아하다니, 별일이다.” “?” 실비아는 눈으로 물음표를 그렸다. 말 없이 입술만 오물거리던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저는 연애 소설을-” “되었다. 가지고 가라. 이번 한 번만 용서하지.” “연애 소설을-” 다시 두둥실 떠오른 책이 실비아의 품에 안겼다.
“단, 앞으로 이 열람실에 네 멋대로 들어온다면 그때는 징계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가문의 위세라도 과시하려 직접 왔나? 앞으로는 굳이 네가 들어올 필요 없이, 너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시켜 빌리면 될 뿐이다.” 내 말은 듣지도 않는다. 실비아는 난생 처음 겪는 수치와 굴욕에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언제나 무심했던 그 새하얀 얼굴에 불그스름한 노기가 올랐다.
나는 연애소설을 읽으려 한 게 아니라, 그저 에티넬 소설로 요정의 풍습을 배우려던 건데.
“또한, 그런 것들을 글로 배운들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 일반적이지 않은 이야기야.” 그게 치명타였다. 실비아는 잠시 선 채로 정신을 잃었다. 후두부가 아득해지는 충격이었다. “······.” 망연해진 실비아가 잠시 눈을 감았다 가까스로 떴을 때.
“······.” 그는 이미 떠나가고 없었다.
“······.” 실비아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책을 보았다. 빼앗기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나쁜.” 그런 이상한 소리를 제멋대로 뇌까리다니. 역시, 견제가 분명하다. 데큘레인은 일레이드를 대단히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실비아는 임원 열람실을 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저택으로 돌아와 책을 펼쳤다.
“주인님, 일찍 오셨네요?” “응. 밥은 됐어.” 데큘레인의 해석이 정말인지 확인할 겸. 오랜만에 에티넬 공부도 할 겸.
에티넬 단어장을 옆에 두고.
“······.” 그렇게 글을 읽을수록, 실비아는 데큘레인의 해석이 의외로 정확해서 놀랐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모르는 단어조차도 알고 있었다. 단지 문맥으로 유추한 것일까. 그런 것 치고는 문장이 너무 자연스럽고 유려한데. “!” 그러나 그 따위 의문들은 곧, 실비아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녀는 이것이 연애 소설이 아님을 알았다. [ 그녀의 옷을 벗긴 나는 그의 몸에 포개듯이······ 그녀의 ■■와 나의 ■■와 그의 ■■는 ■■■■■■······. ] 외설이었다 “어떻게이런—” * * * ······그토록 기묘한 소설책을 실비아에게 돌려준 뒤.
나는 교수진과 함께 산으로 나왔다. 말 그대로 산(山)이었다.
“하하. 설마 자율 실습에 50 명이나 신청할 줄은 몰랐습니다.” 보조학과의 뚱보 교수 렐린이 너털 웃음을 지었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게 말이오.” 마탑의 부지에는 특별한 산이 있다. ‘어둠의 산’이라는, 어떤 마법학교의 유명한 숲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인데, 그보다는 훨씬 살벌하고 심각하다. 다만 그 산 자체가 대학 부지와 동떨어진 구석에 위치하고, 사방 팔방으로 결계·방호막이 건재하기에 일반 학부생들은 그 존재조차 모른 채 학교 생활을 영위한다.
하지만 어둠의 산을 직접 관리하는, 그리고 안전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짊어진 마탑에게는 꽤나 엄중하면서도 소중한 장소다.
이 산이 없다면 실전을 경험하러 매번 머나먼 여행을 반복해야 할 뿐더러, 숲에서 나는 여러 마법 재료들─도롱 지렁이, 수풀재, 식인덩쿨, 그라텐드리제의 기름 등등─도 쏠쏠한 재정 수입이기에.
“참 대견하지 않습니까?” 오늘, 나를 포함한 마탑의 교수진은 데뷰탄 마법사 50 명과 함께 어둠의 산 실습을 나왔다. 말만 어둠이지 낮이라서 밝았다.
“다들 엘리트 출신이라 아주 의연합니다. 역시 황실대학의 수준이라 할까요.” 렐린 교수는 정오의 산에서 이것 저것 마법 연구를 하고, 또 이따금씩 출몰하는 마수들을 처리하는 새내기들을 보며 장하다는 듯 말했다. “어둠의 산을 두려워 할만도 한데······” 여름은 아직 멀었건만. 왜인지 렐린은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아 참. 이번 주 당직 교수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순번이 다 돌아 새로운 결정을 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이럴 땐 역시 수석교수님의 의견이······.” 아마 이 당직 때문인 듯하다.
마탑의 정교수는 대략 50 명. 부교수와 조교수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을 테지만, 어둠의 산 당직은 정교수가 돌아가며 하는 것이 마탑의 규율이라 한다.
물론, 렐린의 반응을 보면 첫 순번이 꽤 위험하리라는 건 자명하다.
“내가 하겠소.” 나는 굳이 직접 나섰다.
“오! 아, 흠. 그러시군요. 역시 데큘레인 수석교수님. 솔선수범의 귀감······.” 이는 솔선수범 따위가 아니라, 퀘스트다.
[ 사이드 퀘스트 : 마탑의 어둠 ] ◆ 상점 화폐 +1 ◆ 추가 달성 보상 저 안에는 무엇인가가 있다. 안에서······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 마치 유혹하듯이.
그러니 사이드 퀘스트가 발동하는 것일 터.
“그럼, 데큘레인 수석교수님. 오늘부터 일요일까지만 부탁드립니다. 다음 주부터는 제가 나서서 할 테니······.” 렐린은 마냥 좋아하며 그 뱃살을 떨었다. “알겠소.” 교수의 능력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심약한 사람은 이 산에서 쉽게 버틸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당장 이 어둠의 산에서의 밤은 장르 자체가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점프 스케어(Jump Scare), 즉 갑툭튀가 도사리는 공포게임으로······.
* * * ······오전 12 시 05 분. 늦은 밤.
아직 서늘한 4 월의 공기가 옷속을 파고들지만, 나 이프린은 전혀 춥지 않다. 그 이유는 무얼까.
로브의 방한? 혹은 발열 마법? 아니다. 그딴 것들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혈관을 맴도는 앨-코올? 음, 합리적인 답변이지만 아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무엇이냐—! 내가 춥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면— 주머니가 두둑하기에 춥지 않은 거다!
“아 괜찮아 괜찮아. 이거, 내가 사 내가. 내가 산다고~” 이프린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호기롭게 외쳤다. 적당하게 오른 술기운이 알딸딸했다. “진짜······? 이피 너 무리하는 거 아냐?” 평민 페릿이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에이. 뭔 소리래. 내 지갑 두툼해 두툼해~” 어느새 평민 그룹의 리더가 되어서 회식까지 마친 이프린은, 줄리아를 비롯한 동아리 멤버들과 함께 야간 식당의 노상에 앉아 있었다. 줄리아가 히쭉이며 말했다. “동아리 창설 계획서는 어제 접수 했으니까, 곧 될 것 같아.” “그래? 그렇구나 그렇구나~” “응. 근데 정작 평민 애들이 가입을 안하려그래. 눈치보이나봐. 바보같이.” 후루룩─ 이프린은 국수 요리를 순식간에 데워서 먹었다. “마시따.” “흐흐. 이피, 많이 취했나보다?” “취하긴. 절대. 내가 무슨.” 짐짓 정색·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원샷을 몇 번이나 했더라. 기억은 나지 않지만, 취한 건 아니다······.
꺄아아아악─!
“!” 그때 웬 비명이 울렸다. 이프린과 마법사들은 흠칫 놀랐다. 처음에는 환청인 줄 알았다.
꺄아아아아악─!
“뭐야! 방금, 들었어?” “어 나도! 너도?” “가자 가자!” 페릿과 론도, 줄리아와 이프린. 엘리트 마법사로서의 정의감은 혈기 왕성한 새내기들로 하여금 벌떡 일어나 달려가게 만들었다. “어디였지?!” 살려, 살려주세요─!
“저기! 저기!” 우측의 골목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살려주세요─!
마법사들은 그 비명을 쫓아, 어두운 길을 지나 으슥한 구석에 들어섰다. 여기예요 여기─! 제발─!
──그런데.
그렇게 달리고 있는데. 바삭바삭- 거리며 웬 나뭇잎들이 밟혔다. 우리는 분명 벽돌길을 달리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산길처럼 이파리들이?
“얘들아. 이거 뭔가 이상하지않······” 이프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니?” 아무도 없었다. 온 사방이, 황량한 나무와 풀 뿐이었다. “어······.” 술기운이 달아났다. 뻣뻣해진 뒷목에 오한이 올랐다. ─살려주세요! 다시 괴성이 울렸다. 그 찰나, 이프린의 공포가 사그라들었다.
정의감 따위는 아니었다. 그녀 본인은 인지할 수 없는 마력의 작용이었다. “어디, 어디세요!” 아카데미를 거치지 않은 이프린에게는 큰 약점이 두 가지 있었다.
마법에 대한 ‘저항력’과, 마법사로서의 ‘멘탈’.
모두, 대학 이전의 아카데미에서부터 길러지는 기본기였다. “어디야!” 빠르게 내달리던 이프린은 마침내 발견했다.
“여기, 여기요! 여기예요! 저 여기 있어요!” 옷이 찢겨진 여자가 자신에게 손을 뻗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프린은 곧장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그때.
탕─!
무엇인가가 이프린의 다리를 가격했다. “──!” 이프린은 나뒹굴었다. 일어서려 했지만 종아리가 아릿하게 저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땅바닥에 엎어진 채 고개만 들었다. “조심!” 멍하니 있는 여인에게, 이프린은 다급히 외쳤다. 이미 늦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섬광. 그것이 여인의 어깨를 관통했다.
“꺄아아아악—!” “아!” 그 처절한 비명에 이프린은 억지로 일어나 팔찌에 마력을 모았다. 그리고 저 괴이한 공격이 날아온 방면으로 마력을 사출하려 했으나······. 막상 그곳에 선 사람을 보자 크게 놀라고 말았다. 수풀의 그늘 아래에 선 그는, 수석교수 데큘레인. 그가 뿜어대는 무시무시한 살의에 이프린은 기겁했다. “교, 교수! 지금 무슨 짓을—!” “데뷰탄 이프린.” 데큘레인이 자신을 호명했다. 그러는 사이 여인은 이쪽으로 기어오려 했고, 또 다시 데큘레인이 쏘아낸 물체가 그녀의 발목을 꿰뚫었다.
꺄으으으으윽─!
“아니, 교수! 지금 무슨—” “눈을 크게 뜨고 봐라. 저건 사람이 아니다.” “무에?!” “취했구나. 가만히 있어라.” “아니, 그래도.” “움직이지 마─!” 데큘레인이 윽박을 내질렀다. “······.” 산의 천지를 뒤흔드는 고함. 나뭇가지가 바르르 떨었고, 메아리가 공허히 울렸다. 그 기백에 압도되어 나자빠진 이프린은 온몸이 굳어서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팽팽하게 조여진 안면과 맹금처럼 사나운 안광.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두려운 모습이었다.
찬 바람이 이프린의 볼때기를 할퀴었다. 그제서야, 혼탁했던 정신이 서서히 맑아지고 있었다. “······환혹이다. 악마들의 특기지.” 데큘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이프린의 뒷목을 끌어올렸다.그는 그저 서 있을 뿐이었고, 이프린 혼자 허공에 붕 떠올랐다.
“저, 잠깐. 저 발이 땅에 안 닿습니다······.” “네 로브에 내 금속을 심어두었다.” “······?” 이프린은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며 데큘레인을 보았다. 바로 그 순간.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것은 마치······ 존재 자체를 업신여기는 듯한 시선. 지극히 천한 것을 대하는 경멸의 행태. 데큘레인은 그런 눈으로 이프린을 직시하고 있었다.
“인체는 어렵지만, 금속은 쉽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니, 애당초 교수가 맞나? 이 사람이 악마의 환각인 건 아닐까? “대체 무슨 말-” “방해하지말고 썩 꺼지라는 말이다. 이 빌어먹을 반푼아.” “······.” 비수처럼 찔러드는 험한 말. 그 어느 때보다 냉혹하고, 무서운 표정. 평소의 데큘레인과는 그 결 자체가 다르다. ······아니. 아니다.
이 모습은 오히려······ 자신이 기대했던 그대로의 데큘레인.
데큘레인은 그리 매섭게 쏘아붙이고, 이프린을 쭉 잡아당겼다.
그저 잡아당기는 수준이 아니었다. “으에에에에─” 쭈우우우우우욱── 이프린은 청소기에 빨린 먼지처럼 끌려나갔고, 순식간에 산 밖에 내팽개쳐져서는 그대로 기절했다.
* * * 크르르르······.
여자는 기이한 생명체로 돌변했다. 머리카락과 옷이 녹아내렸고, 양 옆의 관자놀이에 뿔이 솟았다. 그 눈은 커다랬지만 눈꺼풀이 없었고, 피부는 시뻘겠으며, 양안은 기괴하게 반들거리고 있었다.
“간교한 놈.” 미간에 보석 비스무리한 핵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환혹’이 주 계열인 듯하나, 이 육신에 환혹은 통하지 않는다. 데큘레인 성격의 몇 없는 이점으로, ‘환혹 마법’에 한해서는 거의 완벽한 면역력을 자랑하기에.
분명 그럴 터인데. 지금 내 감정은 이상하리만치 들끓고 있다. 데큘레인 본연의 「성격」이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다. ······「혈통」.
「성격」이나 「특성」과 유사한, 유크라인이라는 가문 자체의 특색. 유크라인은 ‘악마에 대한 적의’가 그 핏줄에 내재된 혈족이다. 그렇기에 나는 악마를 느낀 순간, 이성이 뒤틀릴만큼 본능적인 혐오가 치밀었다. 고대의 선조부터 악마를 사냥하는 마법사였다던 그 명성이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이는 게임 작가로부터 설계된 데큘레인의 운명. 플레이어가 악(惡)성향의 악마 플레이를 하든, 선(善)성향의 기사 마법사 모험가 플레이를 하든, 그 무슨 일이 있어도 데큘레인을 동료로 삼을 수 없도록······.
“지하에 처박혀야 마땅한 것이.” 덕분에 드물게 화가 나고 있었다. 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크라라라라라—!” 놈은 괴성으로 화답했다. 파동을 내뿜어 정신을 공격하려는 듯했다. 지이이잉─ 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지만 그 뿐. 나는 아무렇지 않았고, 허공에 도사린 다섯 자루의 애장으로 악마를 겨냥했다. 흥분이 되었다. 문자 그대로 피나도록 익힌 애장의 성능을 시험한다는 것도 있었지만, 데큘레인의 본성이 크게 끓어 오르고 있었다.
휘리릭── 네 자루의 수리검이 각각 두 자루 씩, 우와 좌로 나뉘어 뻗었다. 놈은 양측을 번갈아보며 이를 갈았다. “캬아아아!” 그 네개의 궤적을 악마는 백덤블링으로 피하려했지만, 남은 하나의 수리검이 직선으로 치달아 공중에 뜬 놈의 심장을 노렸다.
우드드득─ 악마의 관절이 기괴하게 꺾였다. 자신의 몸 자체를 변형시켜 수리검을 회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 공격에는 끝이 없다. 놈의 뒤를 돌았던 네 자루의 애장이, 다시 놈에게로 쇄도하고 있으니. 다섯 자루의 수리검으로 끝없이 행하는 연격. 피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피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없이 내몰리며 서서히 죽어갈 뿐. 따라서, 놈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직진.
놈은 노면을 크게 박차고 수리검을 역행했다. 그 속력은 과연 빨랐고, 나름 빈 공간을 파고들었으나, 이미 예상했던 바. 촤아아아악─!
놈이 손톱을 뻗었다. 그러나 그 날카로운 끝은 다만, 터럭만큼의 거리를 두고 닿지 못했다. 이프린을 산 밖으로 추방시켰던 여섯 번째 수리검이 되돌아오며, 놈의 미간을 꿰뚫은 것이었다. “······더러운 것. 죽는 순간에도 오물을 튀기나.” 얼굴에 핏물이 묻었다. 알 수 없는 혐오감이 구역질처럼 지독하게 치밀었다. 나조차도 당황스러운 모멸, 경멸, 증오, 살의. 그 전부를 참을 수가 없다. 도저히 감출 수가 없다. [ 사이드 퀘스트 클리어 : 마탑의 어둠 ] ◆ 상점 화폐 +1 [ 추가 달성 : 첫번째 악마 처치 ] ◆ 상점 화폐 +1 [ 가문의 혈통 : 유크라인 ] ◆ 특성 「유크라인」 개화 보상 습득의 알림이 연이어 떠올랐으나, 그리 기쁘지 않았다.
악마의 출현.
이것은 결국, 어떤 신호나 다름이 없으므로. 플레이어가 없는 게임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
“······” 나는 그저 선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고 어두컴컴한 새벽. 망양한 천장에는 별 한 점 떠오르지 않고, 구름에 파먹힌 달은 그저 창백하기만 하다······.
대학. (3) “어딥니까! 어딘가요?!” 상황은 종료되었는데, 뒤늦게 앳된 목소리가 숲 멀리에서 들려왔다. 나는 여섯 자루의 애장을 서류 가방에 넣었다. “어디야!” 이사장. 그녀는 본인의 애장인 지팡이를 타고 붕붕 날아왔다. “어라!” 미간이 꿰뚫린 악마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이미 끝내놓으셨네요!” “······.” 나는 클린즈로 얼굴에 튄 핏물을 떼어내려 했다. 그런데 마력을 머금은 피가 내 마법에 저항했다. 하는 수 없이 행거칩으로 닦고 버렸다.
“역시 유크라인의 마법사! 악마를 아주 그냥 죽여놓으셨네요! 어떤 마법을 쓰셨어요? 앗! 금속에 꿰뚫린 것 같은 이 단면은······ 혹시 제가 창안한 「질풍칼날송곳」이었나요?!” “이름이 유치하군요.” 무의식적으로 목소리에 날이 섰다. 이사장은 화들짝 고개를 뒤로 젖혔다.
“뭐, 뭐라고요? 다들 좋다고 했는데요?!” “누군들 이사장 님에게 쓴소리를 하겠습니까.” 나는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섰다. 등 뒤에서 자그마한 중얼거림이 넘어왔다. “지, 진짜요? 진짜 별로예요?” “예.” “아······.” 그러자 이사장은 시무룩하게 되었다. 저 ‘철 없는 척’이 나는 불편했지만, 그 다음은 가식 없이 살벌했다. 이사장은 악마의 시체를 들어서 투척했다. 콰아아앙─! 가히 포환처럼 내 어깨를 스치며 지면에 꽂혔다. 산산조각난 살점과 핏물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질풍칼날송곳」이 별로였다니······.” 이사장은 무기력하게 중얼거렸고, 나는 태연히 피보라의 한복판을 걸었다.
염동 덕에 아주 작은 방울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산을 내려오니 이미 마탑의 마법사들이 한가득이었다. 나는 이프린이 생각났다. 본의 아니게 너무 난폭하게 대하고 말았다. 구경 중인 마법사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어이. 데뷰탄 마법사가 한 명 있었을 것-” “데큘레인 수석교수님.” 한데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는 그곳을 돌아보았다.“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나긋한 음색의 미남. 찬연한 금발과 신부복을 보자마자 그 정체를 알았다. 성당 소속의 네임드이자, 그 누구보다 신실하며 독실한 사제.
‘테르페’.
“마법사들은 구해내었습니다. 허나 데큘레인 수석교수님에게 따로 내부 상황을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테르페는 마음이 아름다운 선인(善人)이지만, 데큘레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껄끄럽다. 말하자면 그는 데큘레인에게 원한을 진 자들을 돕는 조력자에 가깝다.
“저 안에 있는 이사장과 대화를 나누시오.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시체를 터트려버렸으니.” “아하. 그렇군요.” 끄덕인 테르페는 자신이 구해낸 마법사들을 미소로 배웅한 뒤 산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뒤에 남겨진 마법사들은 두려워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줄리아, 페릿, 론도.” “······네, 네.” 줄리아가 잔뜩 쫀 얼굴로 대답했다. “남은 한 명은 괜찮은가.” “네? 아, 네! 지금 이프린은 대학병원-” “그렇다면 되었다.” 나는 다 듣지도 않고 돌아섰다. 정신적인 피로가 꽤 심했다. 이만큼 집이 고팠던 적은 없었거늘······ 저 멀리서 교수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수석교수님! 괜찮으십니까?!” 사후 처리와 황실 보고, 서류 작업과 성당 협력 등등. 이 야밤에 쏟아질 수많은 일거리들을 떠올리자, 나는 어쩐지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 * * 짹짹짹─ 짹짹짹─ 짹짹짹─ 창 밖에서 스며드는 햇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이프린은 눈을 떴다. “······.”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하얀 천장. 둘러보니 대학병원이었다.
“깨어나셨군요.” 햇살처럼 상냥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화들짝 놀란 이프린은 상반신부터 일으켰다. “반갑습니다.” 웬 신부님이었다. 미남을 경계하라는 말처럼, 이프린은 우선 담요로 제 몸부터 가렸다. “뭐, 뭐예요.” “저는 유레프 성당의 사제 테르페입니다.” “······파르페요?” 그런 이프린을 미소로 바라보며 테르페가 말했다. “이프린 루나. 정말 많이 자라셨군요.” “······저를 아세요?” 이프린은 여전히 의심스런 투로 미간을 세웠다.
“루나 씨의 아버님과 아는 사이였습니다. 루나 씨는 사진으로 많이 보았죠.” “······그래서요.”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자연히 방어적인 태세가 되었다. “오늘은 어둠의 산, 그곳에서의 일을 묻기 위해 왔습니다······ 만.” 테르페는 은은하게 웃었다.
“루나 씨는 아직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신 듯하군요.” “······네. 부끄럽게도 환혹마법에 당해버려서-” “데큘레인 수석교수께서 당신을 구했습니다.” “아······ 네.” “루나 씨를 홀린 것은 마의 존재였습니다. 어둠의 산은 잠시 폐쇄조치 되었고, 지금은 저희 성당이 마탑과 함께 내부를 수색 중입니다.” 이프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역시, 그 기억은 꿈이 아니었다. 데큘레인에게 도움을 받아버렸다. ─이 빌어먹을 반푼아. 그 차가웠던 음성도 아직 귓가에 선연했다. “그러나 저는 그 사건과는 별개로, 오랜 친우의 딸인 루나 씨에게-” “잠깐만. 친구요? 제 아버지의?” “예. 어쩌면 저 혼자 일방적으로 생각했는지는 모릅니다만,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혹시, 루나 씨께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아뇨.” 이프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정색에 가까웠다. 테르페는 살짝 놀랐다.
“그건 괜찮아요.” 자신과 데큘레인. 데큘레인과 루나. 그 매듭은 스스로가 지어야하는 일. 누군가의 도움 따위, 있어서는 안 되고 끼어들 여지도 없다.
적어도 아버지의 죽음에 한해서는, 오직 자신만이 데큘레인을 단죄할 수 있다.
“아니, 싫어요. 테페페님은 끼어들지마세요.” 그 단호함에 테르페는 조용히 웃었다.
“그렇다면······ 계속 쉬시겠습니까?” “네?” “오늘은 수요일입니다. 그리고, 오후 2 시 45 분이네요. 정확히 36 시간이 지났군요.” 화요일 자정에서 어느새 수요일 오후가 되었다. 이프린은 멍하니 생각했다. 뭔가를 까먹은 것 같았다.
테르페가 대신 알려주었다.
“예. 데큘레인 수석교수님의 강의입니다. 물론 쉬어도 누가 뭐라하지는 않을 겁니다만, 과연 그 자존심 센 교수님이 출석인정을 해줄지······.” “······아!” 이프린이 벌떡 일어났다.“루나 씨. 공부도 좋습니다만, 지금은 정신력이 쇠약한 상태이니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아 네! 테포로 님도 조심히 돌아가세요!” “음? 아하하. 예.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오늘 저에게 많은 이름을 지어주시는군요.” 이프린은 곧장 대학병원을 나왔다. 약, 약 받아가세요─! 라는 외침도 무시하고 뜀박질을 했다.
대학병원에서 마탑까지는 전력질주로도 15 분은 더 걸릴 테니.
후하─! 후하─!
필사적으로 달려 2 시 55 분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숨을 헐떡이며 3 층 A Class 의 문을 열고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당황했다. “어?” 저번 수업과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보다 넓어진 강의실,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기다란 마법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었고, 그 테이블에는 흙과 모래, 나무 조각과 물 등의 원소가 놓여 있었다.
“이피! 여기!” 줄리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프린은 줄리아의 옆자리에 섰다. “괜찮아? 병문안 갔었는데, 네가 깨어나질 않아가지고. 큰 병 아니야?” “아니, 괜찮아. 오랜만에 푹 자서 쌩쌩해.” 아버지가 자살한 이후로 생긴 불면증. 3 년 동안 하루 4 시간 이상 잔 적이 없었는데, 여태 못잤던 잠을 다 헤치운 듯 오히려 상쾌했다. “컨디션은 최상이란 거지.” “다행이네······.” 그때 앞문이 열리며 수석교수 데큘레인이 들어왔다. 그는 웬 키작은 마법사와 함께였다.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마법사였다. “반갑다. 이쪽은 조교수 알렌이다.” “?!” 난데없는 선언에 모두가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이프린은 특히 큰 충격을 받았다.
보통 조교수가 되면 그 이후부터는 자체적으로 부·정교수 심사를 보기에, 데큘레인의 동의가 없어도 실적만 쌓으면 언제든지 날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데큘레인은 조교수를 두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도 서른 살의 나이가 되도록, 그저 ‘솔다’ 등위에 머무른 채, 데큘레인의 밑에서 노예처럼 일했다. 그 시절의 아버지를 상상하면 아직도 뒷목이 땡기는데, 이제와서 조교수라니. 평생 두지 않던 조교수를 왜 지금에서야······?
“저번 주에도 말했다시피 오늘은 ‘체득(體得)’의 시간이다.” 이프린은 잠시 머리가 깨질 듯한 현기증이 일었지만, 허벅지를 꼬집으며 털어냈다. “강의 내용을 활용할 수 있는 다섯 가지 과제를 주겠다. 결과는 성적에 반영되니 진지하게 임하도록.” 그러자 조교수 알렌이 바쁘게 움직이며 각자의 마법 테이블에 시계를 올렸다. “너희들이 수행할 과제는 다음과 같다.” 딱─!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 과제들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도깨비불」.
두 번째는 「집어삼키는 연기」 세 번째는 「피어오르는 금속」······.
“지금부터 세 시간이다. 시작.” 마법사들은 그 즉시 마력을 예열했다. 이프린도 서둘러 테이블의 원소들에 손을 올렸다. 우선은, 「도깨비불」.
감은 금세 잡혔다. 순수 원소인 불과 바람의 조합이겠지. 불의 술식과 바람의 성질을 결합하면 그 뿐일 터. 이프린은 머릿속으로 술식을 구성하고, 그 회로를 따라 마력을 불어 넣어······. 아니 마력을 조금 제대로······. 아니지 마력보다는 술식을······.
그때 조교수 알렌이 이프린의 옆을 지나갔다. 이프린은 본인도 모를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쨍─!
그 순간 회로가 끊기며 마법이 파손되었다. 손목의 통증에 이프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 기물인 팔찌에 열이 올랐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뜻이었다.
“아 잠깐만.” ······잘못되었음은 알겠는데, 돌연 술식이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가 아팠다. 안절부절하던 그녀는 진정하기 위해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도깨비불」 확인. 4 분 01 초.” 벌써?! 이프린은 경악한 눈으로 그곳을 보았다. 역시 실비아였다. 테이블에 「도깨비불」을 박제한 실비아는 두 번째 과제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프린도 다급히 술식 구성을 재개했지만, 집중이 쉽지 않았다. “······읏!” 너무 이상한 일이다. 마력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뱃속은 공복으로 요동친다.
애써 모아놓은 마력이 흩어지고, 술식이 잘못되고, 회로가 파괴된다.
열심히 복습했던 것들이, 정말 열심히 되뇌었던 것들이 단 하나도 제대로 되지 않고, 그렇게 마법이 무너질수록 자신감은 더욱 낮아지고, 그럴수록 마법은 더 어려워진다. 그 악순환 속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
······이 빌어먹을 반푼아, 이 빌어먹을 반푼아, 이 빌어먹을 반푼아, 이 빌어먹을 반푼아, 이 빌어먹을 반푼아, 이 빌어먹을 반푼아, 이 빌어먹을 반푼아, 이 빌어먹을 반푼아······.
신경쓰지 않아야 하는데. 신경 쓸 이유가 없는데.
그럴 수가 없다.“내가 왜 반푼이······ 대체 왜 반푼이인건데······.” 호흡이 가빠지던 이프린은 두통과 환청 속에서 울것만 같은 얼굴이 되었고······ 그런 이프린의 붕괴를, 실비아는 곁눈질로 보았다. “······.” 흥.
그 무심한 입술 사이로 작은 바람이 새었다. 마법사인 주제에 냉정하지 않고, 침착하지 않고, 단단하지도 않아. 너무 유약하고, 부서지기 쉽고, 자기 감정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하는, 단점 투성이 찌질이. 마법 기풍으로 따지자면 ‘기복’ 혹은 ‘취약’. 이프린, 너는 정말 레이스에서 탈락했구나. 실비아는 낮은 한숨을 내쉬고 관심을 거두었다.
“······데뷰탄 실비아. 25 분 15 초. 과제 완료입니다.” 다섯 개의 과제를 고작 25 분만에 해냈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깔끔히 조합된 순수 원소가 마법으로 박제되어 있었다. “교수님.” 조교수의 부름에 데큘레인이 다가왔다.
데큘레인은 실비아가 수행한 결과물을 보았다. 실비아는 작은 긴장을 느꼈다.
저번의 외설 해프닝(?) 탓인지 희미한 부끄러움도 있었다.
“실비아.” 데큘레인이 말했다. “네.” 실비아는 어떤 꼬투리든 각오하고 있었다. 그의 견제를 받아낼 깜냥이 없었다면, 애당초 이 강의를 신청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흠결 없이 완벽하다. 가도 좋다.” 결과는 예상도 못한 찬사였다. 실비아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서 이프린의 시선이 느껴졌다. 실비아는 일부러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프린은 손을 떨더니 다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까지도, 이프린의 과제는 정체되어 있었다. “······.” 너는 부러워 할 필요 없어. 나를 신경 쓸 필요도 없어. 너는 영원히 닿지 못할 경지니까. 그저 지켜보기만 하렴.
“감사합니다.” 실비아는 데큘레인에게 목례를 하고 강의실을 걸어 나갔다. 이프린 옆을 지나갈때는 보란 듯이 또각- 소리를 크게 냈다. 이프린은 움찔- 겁먹은 펭귄처럼 떨었다. 그제야 비로소, 실비아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깨달았다.
통쾌. 저 반푼이가 무너지는 모습이, 너무 통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 * * “줄리아. 가도 좋다.” “레힌. 가도 좋다.”“에하론. 가도 좋다.” 강의실의 마법사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150 명에서 100 명이 되었고, 100 명에서 50 명이 되었고, 50 명에서 25 명이 되었으나······ 그때까지 이프린은 고작 하나의 과제만 완수했을 뿐이었다.
압도적인 꼴찌였다.
“······.” 이미 머릿속은 새하얗게 되었다. 그럼에도 포기만큼은 하지 않았다. 억지로, 억지로 마력을 쥐어짜냈다. 팔찌와 마력이 치열하게 공명했으나, 이 지랄맞은 「집어삼키는 안개」는 구현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뚝- 뚝- 뚝- 마력을 짜내다 짜내다, 견디지 못하고 터진 코피. 방울 방울 흘러서 테이블의 흙 위에 새겨지는 검붉은 반점.
“드렌트. 가도 좋다.” 그러는 와중에도, 자신의 목을 조르는 듯한 음성은 이어지고 있다. “로톤. 가도 좋다.” 한 명 한 명 떠날 때마다 손이 흔들리고 무릎이 저린다. “케인. 가도 좋다.” 이 순간이 꿈처럼 끔찍하다. 동시에 꿈이 아니라는 것이 절망스럽다. “도이안. 가도 좋다.” 그리고, 마침내.
“유로잔. 가도 좋다.” “네!” 유로잔. 이프린과 더불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그가 합격함으로써.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 포기하기 싫었지만, 포기하기 전에 끝났다. 이프린은 팔을 축 늘어뜨렸다. 쿵!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았다. 코피 섞인 흙먼지가 얼굴에 덕지덕지 묻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째깍─ 째깍─ 째깍─ 그저, 온 사방이 멍했다. 째깍─ 째깍─ 째깍─ 수석교수님. 세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알렌이라는 조교수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흐릿했다. 퇴근하도록 하지.
네. 그러면 제가 남아서······ 그 두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어쩌면 흙이 귀를 막았는지도. 쿵, 쿵. 이프린은 이마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자괴감이었다.고작 이런 것도 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아버지의 복수를 해내겠다며 호기로이 외쳐놓고, 그전까지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집을 떠나놓고, 이딴 곳에서 아둥바둥거리는게 한심스러워서, 흙에 코를 처박고 울었다.
째깍─ 째깍─ 째깍─ 소리가 사라진 세상에서 유일한 것은 오직, 초침의 소리.
자신을 비웃듯 째깍이며 흐르는 시간.
째깍─ 째깍─ 째깍─ 그렇게, 얼마 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떤 시간을 혼자서 지새웠을까. 째깍─ 째깍─ 째깍─ 이프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창밖은 밤이었고, 강의실은 어두컴컴하게 소등되어 있었다. “······흡.” 코를 헹 풀고 눈가를 닦았다. 얼굴에 온갖 잡것들이 달라붙었다.
닦아내려했지만 소매로 비빌수록 오히려 진흙처럼 뭉개졌다. 엉망진창이었다. 나처럼. “하아······.” 자포자기에 가까운 한숨. 이제, 강의가 끝났다. 아니, 오래전에 끝났다. 정확히는 망했다.
“······후.” 회의감과 패배감에 젖어, 물먹은 스펀지처럼 불어터질 것같다. 온몸이 무거워서,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 비척비척, 이프린이 기숙사로 돌아가려는 한 발자국을 내딛은 그 순간이었다. “!” 무심코 단상을 바라본 이프린의 눈이 커졌다. 모래알갱이로 범벅된 작은 입술이 벌어졌다. 텅 비어서 아득하리만치 넓게 느껴지는 강의실. “아······?” 그 교탁에는, 여전히 그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올곧은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기다림을 자신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말소리가 밀려들었다. “······5 시간 47 분.” 어둠 속에서 그의 푸른 눈은 유일한 빛이었고, 그 안에 비치는 자신은 너무 한심하고 나약한 꼴이었다. “이프린 루나.” 여전히 차갑지만, 저번 밤과는 전혀 다른 투명한 음색. 일말의 따스함마저 느껴지는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지겹도록 째깍이던 초침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너는 나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그저······ 이 공간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토록 묘한 순간이었다.
대학. (4) 데큘레인의 시선에는 언제나 거침이 없다. 항상 정답만을 꿰뚫는 직선적인 눈. 자신이 바라보는 방향이 곧 길이라는 듯.
망설임, 의심, 두려움, 후회, 그 모든 부정적인 것들이 데큘레인에게는 없다.
오직 확신 뿐인 자아. 스스로의 옳음을 믿는 독선. 그러나 그 거만과 오만도, 결국에는 품위가 되어버린다.
······그는 뒤틀림마저도 귀족적인 것이다.
데큘레인의 휘하에서 자살한 아버지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모래 바람에 흩어진 신기루처럼 소멸되었다. 데큘레인에게는 어떠한 흠결도 남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직 이프린만이 진실을 알며, 분명 그의 전체를 증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와 자신 사이에 너무 큰 벽이, 절대 넘볼 수 없는 한계가, 장막처럼 내려앉은 듯했다.
마법사란 흔들림 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자. 그 어떤 변수에도 침착하게, 요동치지 않고, 일정한 맥박을 유지하며 본인의 해답을 도출하는 차가운 피의 족속.
스스로를 의심하여서는, 누군가에게 의지하여서는, 압박에 취약하여서는, 옳은 마법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데큘레인은 어쩌면, 죽도록 인정하기 싫지만, 정말 타고난 마법사인지도 모른다.그 동안 나는, 어떤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도가 유크라인의 핏줄을, 너무 과소평가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이프린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처음부터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교수인 그와, 아카데미조차 거치지 않은 나. 그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세월과, 경험과, 지식과, 기량의 간극이 있다. 그러한 누적의 차이를 그저 재능만으로 순식간에 메우고 초월한다는 개소리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의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이프린은 갈라진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다. 대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겁을 먹어버렸다. 그러니, 이제 패배를 인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한심하다.” 데큘레인이 말했다. 이프린의 어깨가 떨렸다. 소심하게 올려다 본 그의 눈에는, 한 조각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 “냉정은 마법사의 기본적인 소양인 것을.” 그 말이 칼날처럼 가슴을 베었다. “고작 이런 과제에도 본인의 평정을 다잡지 못해서는.” 듣고 싶지 않았다. 정신이 난도질 당하는 것 같았다.
“너는 평생토록 반푼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도망치고 싶었다. 이 진창같은 강의실에서 질식할 것 같았다. “······무릇 마법사란, 누군가 너를 도발한다 하더라도.” 그런데.
“수없이 반복하여 실패한다 하더라도, 압박감에 숨이 옥죄인다 하더라도.” 그런데······.
“설령.” 그 순간. “네 적이 눈 앞에 있다 하더라도.” “!” 이프린은 온몸을 떨었다. 등허리에 전율이 올랐다. 커질대로 커진 눈이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데큘레인은 여전히 자약한 얼굴이었다.
“항상 차가워야 하는 존재다.” 그의 말, 그의 뜻을 이프린은 이해했다.
“그리 한심해서는, 너는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동시에, 가슴 밑바닥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열기를 느꼈다. 이 또한 ‘열정’의 한 종류였다. “내 발끝에도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이프린은 그의 질책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받아들였다.
“너에게 징계가 내려지지 않은 이유를 헤아려보아라” 호기롭게 입탑한 나는 여태 무엇을 이루었나. 첫 번째 수업부터 분노를 참지 못했고, 그 결과 퇴학을 당할 뻔했다. “나는 고작 너 따위의 사과를 바라지 않는다.” 어리석었다. 멍청했다.
푼수, 천치, 바보 같았다. 아직도, 나는 철이 없었다. “실망이다, 이프린.” 데큘레인은 교탁에 시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소매와 옷깃을 정리했다.
강의를 마칠 때면 언제나 하던 습관이었다. 돌아선 그가 강의실의 문을 열었다. “나는 네가 옥석인 줄 알았다.” ······그 마지막 말을 남긴 채. 그는 떠났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허공에 남아 뚜렷하게 맴돌았다. 무엇을 기대하였기에 무엇을 실망했는지. 그는 알려주지 않았다. “······.” 이프린은 표정 없이 서서 그의 말을 되뇌었다. 온몸에 번지던 무력감은 이미 재가 되어 날아갔다.
터벅 터벅, 이프린은 단상에 올랐다. 언제나 데큘레인이 섰던 그곳에서, 그가 놓고 간 시계를 보았다. [5:57:17] [5:57:18] [5:57:19]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 이프린은 그 시계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네가 실망하면 어쩔건데요.” 씹어뱉듯 읊조리고 시계를 움켜쥐었다.
걸음을 돌려 자신의 테이블에 섰다.
“······할 수 있거든요.” 이프린은 소매를 걷었다. 술식을 떠올리며 마력을 예열했다. 다시, 원소들에 손을 얹었다.
“할 수 있거든요. 너 따위가 실망 안해도.” 오늘 되지 않는다면, 이 밤이 다 새도록. 밤을 새어도 되지 않는다면, 내일이 되도록.
······죽을 때까지. 죽어도 포기하지 않을 거다. 내 머릿속에 포기라는 단어는 이미 지워지고 없다.
아니, 데큘레인이 지워버렸다.
“나도 할 수 있거든요······.”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신기하게도, 참아지고 있었다.
눈물, 그딴 물방울 흘릴 힘으로 마력을 자아냈다. 북받치는 감정들을 연료로 불태웠다. 뚝- 뚝- 코피가 흘렀다.
“할 수 있다고······.” 그 핏방울들은 이내 금속의 장미가 되어 피어올랐다.
* * * 나는 강의실 밖의 벽에 기댄 채 생각했다. 한 사람에게 거의 일곱시간이나 할애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뚜렷하지 않았다.
오늘, 이프린에게는 사망 변수가······. 발생하지 않았다. 사망 변수 따위는 없었다.
이프린은 그저 나약하게 있었고, 나는 그 무너진 꼴을 보기 싫었다. 이프린은 착한 아이다. 명백히 선한 네임드다. 개발자이자 플레이어 시절, 즉 키보드 마우스 유저였던 시절의 나는 마법과는 연이 먼 기사였지만, ‘루나’라는 가문만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이 세계의 주축이 될만한 마법사로 성장할 것이었다. 메인 퀘스트에 선한 영향을 끼치는 마법사로.
그런 그녀에게 모자란 것은 정신력·멘탈·마법사로서의 의식 등 많지만, 그 극복에는 그리 많은 재료가 필요하지 않다. 루나라는 불씨는 장작만 하나 넣어주면, 혹은 기름만 부어주면, 혼자서 활활 타오를 테니.
물론, 그렇게 자란 불길에 나까지 휩쓸릴 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 게임에도, 이 세상에도 정해진 미래는 없다. 운명은 노력하지 않는 자의 신앙에 불과하므로, 내가 믿는 것은 오직 나 자신 뿐이다.
그러므로, 이프린은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녀석이 나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추격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라이벌리는 나쁘지 않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데큘레인의 성격은 이런 식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고작 데뷰탄 따위에게 따라잡힐 수는 없지.
─할 수 이써어!
우렁찬 외침이 강의실 밖으로 새었다. 나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교수인지, 선생인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 사이드 퀘스트 완료 : 당신의 길 ] ◆ 상점 화폐 +1 “······음?” 난데없이 웬 퀘스트의 보상이 떠올랐다. 마치 저 먼 하늘의 누군가가, 오늘의 내 선택을 칭찬하는 듯. 드르르륵— 돌연 강의실의 문이 열리더니 이프린이 튀어나왔다. 녀석은 벽 뒤의 나를 발견하지 못한 채 계단을 내려갔다. 몸에 부하가 걸렸는지 펭귄처럼 뒤뚱뒤뚱. 나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흠.” ······밤의 강의실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이프린의 테이블에, 모든 마법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박제되어 있었다. 「도깨비불」은 진짜 귀신이 부린 듯 다수의 불덩이가 허공을 떠다녔고, 「 집어삼키는 안개」는 뇌운(雷雲)처럼 푸르게 번쩍였으며, 「피어오르는 금속」 은 장미의 형상을 이루었다.
나는 그 테이블 위에 놓인 시계를 보았다. [ 6:25:05 ] 6 시간 25 분.
고작 28 분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스멀스멀 질투가 일었다. 괜한 짜증도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세게 쏘아붙일 걸. “참.” 이렇듯, 데큘레인의 자아는 마냥 상냥한 사람이 되기를 거부한다. 내가 상냥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한정적이라며, 내 미소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며······ 빌어먹게도 비싼 몸값이다.
이런 게 「선민의식」이라는 것인지. 아주 그냥 더럽다.
나는 기록지를 꺼내어 적었다.
[ 데뷰탄 이프린 │ 소요 시간 6 시간 25 분 5 초 ] [ 비(非) 아카데미 출신의 고질적인 단점들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나, 결과물의 질은 1 등을 다툴만하다. ] [ 점수 : 0 ] [ 사유 : 제한 시간 초과 (6 시간 25 분) ] * 테이블에 박제된 마법들을 해체한 뒤 마탑의 주차장으로 나왔다. 그렇게 평소처럼 차를 타고 퇴근하려 했는데.
“······?” 찬바람이 맴도는 늦은 밤. 넓디 넓은 주차장의 마법 가로등 아래. 그곳에서 나는, 의외의 인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성인 남성 두 명 분의 외투를 걸친 남자였다. 흡사 백호 한 마리를 통째로 뒤집어 쓴 꼴이었고, 떡 벌어진 어깨와 다부진 체격은 그야말로 전사의 육신이었으나, 얼굴은 그 거구와 이질적일 정도로 잘생겼다.
나는 그를 알고 있다.
‘자이트 폰 브루강 프하이르덴’.
성(姓)에서 알 수 있듯, 율리의 12 살차이 오라버니이자 프하이르덴의 현 당주. 깔끔한 포마드 스타일의 백발이 잘 어울리는 미중년. 나는 크게 긴장했다. 자이트는 그 어마어마한 전투력으로 정평이 난 네임드다. 실제 초기 전투력도 3 위였고, 특히 나는 그 위명을 모니터로 간접 체험까지 해봤다. 그런 자이트를 실물로 보니······ 몸의 크기가 무슨 르브론 제임스 훨씬 이상이다.
“데큘레인 수석교수.”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율리의 설화석 때문인가, 그렇다면 이 상황 또한 사망변수인가, 저 괴물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없을 텐데.
나는 그리 고민하며 다가가 자이트의 옆에 섰으나, 그는 돌연 방긋-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반갑소. 이곳에서 보니 감회가 남다르구려.” 당혹스러웠지만 이내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래. 내 뭐 별 일은 아니고, 요즘 그대와 율리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또 마침 황실에도 들를 일이 있어 찾아왔소. 수업 중이라기에 여기서 기다렸지.” 아무래도 자이트는 데큘레인과 율리의 혼인을 찬성하는 입장인 듯했다. ‘아직까지’는.
“그렇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게. 적어도 올해 안에는 식을 올릴 수 있게 할 테니. 이번 주 안에, 내가 식사 자리를 주선하겠어.” 자이트의 성향은 절대 악이 아니다. 그러나 본인의 가문만을 최우선으로 여기기에 마냥 선이라기에도 조금 그렇다.
지금은 이리 서글서글하지만, 만약 데큘레인이 율리에게 해악이 되는 것을 넘어, 가문에까지 악영향을 끼친다면 망설임 없이 잘라낼 터.
“식사 자리는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이 혼약은 내가 주선한 것인데, 내가 책임을 져야지.” 그가 내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자이트는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먼저 손을 거두었다. “하하하! 내 이래서 그대가 마음에 든단 말이지. 요즘 놈들은 아양과 아부 밖에 할 줄 모르는 것을. 역시 그대는 남자 다워서 좋소.” “······그렇습니까.” “마법사라도 기백이 드세면 약골이 아닌 법이지.” 자이트는 껄껄 웃었다. “그대는 몸만 오면 되오. 그대가 아~주 좋아할 레스토랑을 골랐으니 걱정은 마시게.” 그렇게 말하며 나를 응시하는 시선이 무거웠다. 어찌 거절할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오늘은 밤이 늦었고 내 할 일도 따로 있으니 이만 돌아가겠소. 그건 그렇고, 그대 차량은 역시 좋구만. 다음에는 태워주시오. 하하.” 거절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자이트는 떠나갔다. 쿵쾅쿵쾅 걸어가는 등은, 보고 또 봐도 인간답지 않게 넓었다.
“······혼수로 차를 사달라는 건가.” 나는 갸웃거리며 차에 올랐다. 자고 있던 운전기사가 화들짝 놀라 핸들을 움켜쥐었다. “오셨습니까!” “알렌은 데려다 주었나?” “아,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그 분이 괜찮으시다면서 먼저 떠났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지.” “예! 모시겠습니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제도 근교, 율리가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마련한 3 층 저택. “싫습니다!” “왜 그리 싫다는 것이냐.” 그 마당의 연무장에서는 다툼이 한창이었다. 칼이 아닌 말로 이루어지는 싸움이었다.
“서로 싸웠습니다. 또한, 기사들을 가르치느라 바쁩니다. 그를 볼 시간이 없습니다.” “고작 설화석 하나 빼앗겼다고 이리 토라진 것이냐?” “토라지다니요!” 율리는 버럭버럭 대들었다. 자이트는 고작 식사 자리에 열을 뻗대는 율리가 이상했고, 율리는 이해하려 들지 않는 오라버니가 답답했다. “율리. 생각해라. 그가 왜 설화석을 구매했는지. 설화석은 무기로밖에 만들 수 없는 금속이다. 오히려 그는 너를 위해-” “만약 정말 그가 저에게 검을 만들어 선물하려 한다면, 그 순간에 저는 파혼을 알릴 것입니다.” 수백번 고뇌했지만 입밖으로는 단 한 번도 내지 않았던 단어. 파혼.
“······.” 일대의 공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자이트는 말없이 율리를 굽어보았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율리는 압도되었다. 맨발 신장 2m 10cm 의 위압, 아니 그보다 더한 가문의 높이가 그녀를 짓눌렀다. 상대가 누구든 당당했던 그녀조차도 결국, 시선을 내리깔 수 밖에 없었다.
“일전에도 말했다. 파혼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데큘레인의 실적이 잠시 주춤하고 있다 하나, 유크라인은 여전히 우리의 맹우란 말이다.” 자이트는 율리와 데큘레인의 혼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장본인이었다. 약 3 년 전, 데큘레인과 술자리를 가졌던 그날부터가 시작이었다.
“또한 내가 알기로, 데큘레인만큼 너를 사랑하는 남자는 없다. 아니면, 따로 마음을 둔 놈이 있는 것이냐.” “······그런 사람 따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망설이지. 가문 간의 정략에 감정 따위는 필요 없다고 했던 건, 오히려 너였다 율리. 데큘레인의 부실한 실적이 그리도 신경 쓰이는 것이냐?
마법사가 잠시 주춤할 수도 있는-” “실적 따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율리는 기사였다. 아이로 태어나 기사가 되었고, 종국에는 기사로 죽을 것이었다. 그 신념 위에 바로 누울 것이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이냔 말이다.” ······그러나 기사란 무릇,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동물이다. 주군이 없는 기사는 그저 무사일 뿐, 주군이 그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비로소 기사가 되는 것이다.
“약혼이 성사된 지 1 년이 넘었다. 너는 언제까지 혼인을 미룰 생각이냐.” 자신의 주군은 곧, 자신의 가문 프하이르덴. 그렇기에, 이 혼약을 받아들인 것 또한 나 자신이다. “이번 주에 식사를 주선하겠다. 데큘레인도 오기로 했으니, 그날 화해하도록.” 자이트는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갔다. “······.” 우두커니 서있던 율리는 곧 연무장의 검을 움켜쥐었다. 검에 스민 마력이 차갑게 일어섰다. 마력은 결정의 형체를 이루어 검신을 감쌌다. 그 상태에서 검을 휘두르자, 반월형의 검격이 쏘아지며 일대를 얼렸다. ──!
얼음이 깨어지기도 전에, 빈틈없는 연격이 잇달았다. 유려한 검술이 허공에 격자 무늬를 새겼다.
이렇듯, 율리의 격노는 언제나 검으로 표출되었다. 오직 자신의 의지로 휘두르고 또 휘두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베어내고 또 베어내며, 속세와 분리된 검의 세상에서 자신의 감정을 승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참을 수 없는 것 또한 참아지기 마련이었다······.
······그런 주군을 먼 곳에서 지켜보며.
부하 기사, 베론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씹었다.
흔적. (1) ······제국에도, 왕국에도 속하지 않는 대륙의 북녘에는 ‘베르흐트’라는 산맥이 있다. 해발고도는 3500m. 대략 1,000 여명의 인구가 상주하는 그곳은 ‘장로(長老 )’라 불리는 마법사들의 거처다. 베르흐트는 대륙에 퍼진 마도학파의 총체, 혹은 총의를 모으는 기관이며, 학파의 집단 행동을 가결하고 결의한다. 베르흐트가 채택한 안건은 ‘마법사의 부유섬’도 따를 수 밖에 없는 권위를 지니고 있으나, ‘소집 회의’는 매우 드물어 수십년 주기로 한 번에 불과하다.
─······소집이라.
4 월의 어느 날, 그 소집이 다가오고 있음을 장로들은 피부로 느껴 알았다.─그리 해야 합니다. 기다란 어둠에 파묻힌 베르흐트의 최정상, 장로관에서는 회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장 어둠의 산에서 악마가 출몰하였으니······.
마도는 그 태초부터 마(魔)를 처단하기 위한 비술로써 발명되었다. 그렇기에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베르흐트도, 악마에 한해서는 엄중한 예외를 두는 것이다. ─명단은 작성 되었는가.
─신진 마도가는 고심해야 할듯합니다만, 12 가문의 참석은 확실합니다. 소집 대상은 일레이드, 유크라인, 브란, 베오라드, 리와인드 등 전통의 열두 마도가와, 10 년 간 누적된 성과에 따라 결정되는 여덟의 신진 마도가. 참석 자체가 가문의 영광이라는 베르흐트의 회의이기에, 소집에 거부하는 가문은 없을 것이다. ─일레이드와 유크라인, 두 가문은 서로 크게 싸운 바가 있다.
베르흐트의 가장 큰 결정권자, 대장로 ‘드제크단’의 우려였다.
─옛적의 일입니다. 이미 서로 모종의 합의를 거친 뒤입니다.
─표면적인 합의에 불과한 것을······.
드제크단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길테온은 확실히 유해졌습니다. ─해협에서 조류가 잔잔하길 바라는 것일세. 일레이드의 길테온은 한때 겉잡을 수 없는 화마였다. 영원히 타오르길 원하던 야망의 횃불. 그 망집을 놓지 않으려던 길테온의 행태를, 드제크단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길테온에게는 자신보다 뛰어난 자식이 있습니다. 그의 대망은 이제 그 아이의 몫입니다. 아이에게 해가 갈만한 행위는,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또한 옳은 말이었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하던 그 불씨도 결국에는 사위었고, 그는 자신보다 찬란한 광채를 낳았다. 길테온은 불이었고, 실비아는 빛이었다.
─······그리 하도록. 신진 마도가는 부유섬의 중독자들에게 물어보시게.
드제크단의 말에 12 명의 장로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예. 부유섬이 여덟 가문을 추려내면, 전서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날이 오면 전국의 마탑과 마도가문에 베르흐트의 의사가 전송될 것이었다.
동시에 전 대륙의 고위급 마법사가 길을 떠나는 진풍경이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내는 전서의 추신에는 항상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 베르흐트는 마법사 본인의 안위를 책임지지 않는다. 베르흐트의 법은 오직 마법 뿐이다. 베르흐트에서의 죽음은 곧 마법적인 자연사일 것이다. 명심하길 바란다. ] 그 이유는, 곧 알게 될 것이다.
* * * 열흘 쯤 지나자 루텐에서 낙찰받은 물품들이 밀려들었다. 나는 가네샤의 조언대로 최고급 마공학 금고를 두 개 샀고, 각각 본채와 별채에 나누어서 보관했다. 뿐만 아니라 대학마탑의 렐린 교수와 그 휘하 보조학과의 마법사들을 불러 대저택의 방비를 새로 했다. 이것으로 도둑맞을 일은 없겠지.
“직접 쓸만한 건······.” 다수의 물품 중, 금고에 들어가지 않고 내 손에 쥐어진 아티팩트 두 개. 둘 다 유물 급으로 마법사라면 누구든지 탐낼만하다. ───「루페린의 반지」─── ◆ 등급 :명품 ◆ 정보 :시대에 손꼽히는 아티팩트 장인 ‘루페린’이 제작한 장비. 그의 피와 땀과 숨결이 깃들어 있다. ◆ 범주 :장비 ⊃ 아티팩트 ⊃ 악세사리 ◆ 착용 효과 :혈액 순환이 원활해진다. :마력 회복 속도가 상승하고, 모든 마법의 위력이 극히 일부 증폭된다. ──────── 혈액 순환과 마력 회복에 도움을 주는 반지.
모든 마법의 위력 극히 일부—이런 설명의 경우에는 대개 1%~3%다— 증폭이라는 깨알같은 효과도 있다.
───「고대 유물 목걸이」─── ◆ 등급 :유물 ◆ 정보 :고대의 룬어가 새겨진 유물 목걸이 ◆ 범주 :장비 ⊃ 아티팩트 ⊃ 악세사리 ◆ 착용 효과 :「300」 만큼의 마력을 보관한다.
──────── 마력을 담을 수 있게 설계된 목걸이. 일차원적인 성능을 비유하자면 ‘보조 배터리’다. 목걸이는 내 몸의 마력을 「300」만큼 흡수하고, 보조 마력원처럼 기능한다. 말만 「300」이지 게임 시스템 상, ‘마력 용적’은 너무나도, 정말 너무나도 중요한 스텟이라 이런 아이템도 별로 없다. 당장 내가 「철인」이면서 기사 전향은 꿈도 못꾸는 것이 마력량의 한계 때문이니. 이 두 귀중품은 오늘부터 내 장비로 쓰일 것이다. 「미적 감각」으로 보기에 디자인도 썩 고급스러우니.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물건이······. 나는 한숨을 삼키며 문제의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영롱한 겨울의 색, 하얗고 푸른 광채가 신비로운 금속. 아직 정련이 되지 않아 못난 모양이지만, 존재 자체가 마법이나 다름 없는 ‘설화석’.
“움직이지가 않는군.” 자그마치 4 천만 엘네 짜리인데, 염동력을 아무리 쏟아 부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정련이 안 되어서? 너무 커서? 마법의 격이 부족하여? 따위의 문제는 아니다.
그저 이 금속 안의 마력이 내 마법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 상태라면 정련, 제련, 단조 따위를 거친다 해도 평생토록 조종할 수 없다. “어찌 해야······.” 게임에서도 너무 비싸 언뜻 구경만 한 아이템이라 도통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가만히 노려보며 그저 고민만 하던 그때. 문득, 도서관의 어떤 책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났다. ─명검은 길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기사는 검을 길들이기 위하여 검을 휘두른다. 그 과정을 교감이라 한다. 교감. 나는 마법사인지라 검을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그 ‘길들인다’는 것이 혹시 검 ‘그 자체’를 이해한다는 뜻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이해력」의 눈으로 설화석을 응시했다. 시선만으로는 부족한 듯하여 손을 얹었다. 감촉은 차가운 열감. 상식적으로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두 성질이 손바닥을 간지럽힌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이 모순적인 내부의 성질, 원자의 구조, 물질적인 가치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본질적이며 물질을 초월한 이해. 이성을 초월한 통찰력으로써 이루는 무아지경의 교감······. “······!” 안구에 전기가 튄 듯한 작열통이 일었다. 치지지직─ 설화석에 얹은 손이 그을렸다. 나는 한쪽 눈두덩이를 움켜쥔 채 설화석을 들여다보았다. 설화석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육안」으로 확인하니 더욱 확실했다.
「 이해도 : 0.1% 」 「 마력 : 1,357 / 3,357 (+300) 」 2 천을 소모하여 0.1%. 회복 속도를 감안한 하루 가용 마력량이 약 1 만 이상임을 감안하면, 이 금속을 전부 이해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1 년. 굳이 100%가 아니어도 50%, 하다 못해 40%쯤만 되어도 훨씬 쉽게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전까지는 목강철이 최선이다. ······루틴이 하나 늘은 셈인가.
나는 쓰게 웃으며 설화석을 금고에 넣었다. 이후 수페르의 반지를 꼈고, 고대 유물 목걸이를 걸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었다. “음?” 내 몸에 닿은 악세사리의 분위기와 색감이, 더욱 고풍스럽게 일변한 것이었다. ─「미적감각」─ ◆ 등급 :유니크 ◆ 설명 :미추(美醜)를 구분하는 천재적인 감각. :모든 미술적인 조예에 통달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으며, 격이 높은 예술품과 감응한다.
───── ‘격이 높은 예술품과 감응한다’ 는 효과의 발현인가. 「신동」 다음으로 쓸모가 없는 특성인 줄 알았는데.
실용적이지는 않지만 나쁘지도 않다. 나는 자켓을 걸치고 출근을 준비했다. * * * 교수로서의 내 일과는 몹시 성실하다. 우선 출근하자마자 아침 훈련의 여파를 그대로 품은 채 연구실에서 논문을 분석하고, 정오가 되면 차를 타고 나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마탑으로 돌아와서 4 주차 수업을 준비한다. 알렌의 강의 정리본과 여러 서적을 번갈아보며 가르칠 것을 궁리하고, 그 방법을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오후 5 시다. “······중간고사는 이론으로 하고.” 나는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시험의 큰 틀과 구성은 물론, 과제와 레포트의 주제도 확정지었다. 시험 난이도는 아마, 극악일 것이었다. “흐흠.” 재미있다.
너무 재미있다.
학생들을 괴롭히는 게.
문제에 괴로워 할 마법사들을 상상하며 괜히 흐뭇하게 있는데, 집무 책상 위의 수첩을 보자 다시 기분이 조금 이상하게 되었다. [ 일정 수첩 ] 데큘레인의 일정표, 즉 스케쥴. 나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 주부터, 자꾸만 나를 신경쓰이게 하는 이벤트가 있었다. [ 4 월 9 일 ] [ 기일 ] 기일(忌日). 데큘레인 부모의 기일은 아니다. 이는 데큘레인의 약혼자, 즉 율리 이전 약혼자의 기일이다.
예전부터 알고 있던 설정이라 당황스럽지는 않다. 언젠가, 사교 파티 ‘새해의 꽃’에서 가네샤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녀도 분명히 말했었다. ······새로 약혼을 해서 그런가, 라며.
데큘레인에게는 율리 이전의 약혼자가 있고, 나는 그 ‘게임 외적’인 전말을 너무나 잘 안다.
언젠가, 이제는 너무 멀어진 어떤 세상의 늦은 밤, 회사 직원 거의 전부가 크런치(Crunch)를 당하던 그날의 휴식 시간에, 이스터 에그를 의논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유아라는, 기발한 이스터 에그가 떠올랐다며 데큘레인에게 작은 설정을 추가했다. 그게 바로, 데큘레인의 첫 번째 약혼자.
“사흘 뒤라······.” 아마도, 내가 이 세상에서 그녀를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흔적. 너는 어떤 짓궂은 장난을 이스터 에그로 남겼는지. 어떤 것이었기에 그리도 해맑게 웃었는지. 나는 나의 기억을 되살리러, 또한 너를 추억하러, 그곳에 가려 한다. 똑똑─ 노크가 울렸다. 나는 염동력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알렌이었다.
“교수님. 프하이르덴 백작님께서 오셨습니- 억.” 소개하려던 알렌은 그 뒤에 들어온 어떤 거한에 밀려나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미안하네. 내 몸이 너무 커서. 괜찮은가?” “아, 네, 네에. 괜찮습니다······.” 알렌은 허리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자이트는 그런 알렌을 지그시 바라보다 눈썹을 들썩였다. “저 자는 자네 부하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교수입니다.” “흠. 그러한가? 뭔가 애매한 사람이구려.” 자이트는 팔짱을 낀채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5 시 15 분. 약속 시간인 7 시까지는 아직 멀었다. “아직 약속 시간은 좀 되었습니다만.” 그러자 자이트가 생긋 웃었다. “아~ 우리가 갈 곳이 워낙 유명한지라, 참을 수 없어서 말이지. 자네 차도 좀 얻어 탈 겸.” 역시, 이 남자는 혼수로 자동차를 원하고 있다. * * * 제국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레스토랑, ‘폰 메슐’. 그 명성은 황제에게 음식을 진상할 정도라 하여, 웬만한 고위 귀족도 저녁 시간대는 예약하기 힘들다 하는데······. 그런 그곳의, 심지어 2 층의 프라이빗 룸에서. “아- 으-” 율리는 자꾸만 몸을 꾸물거리고 있다. 애기가 옹알이하듯 이따금씩 응애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부으-” 갑옷만 입어왔던 그녀에게 드레스는 수갑보다도 거슬리는 족쇄였다.
악세사리는 자꾸만 몸을 긁었고, 옷은 너무 근육을 조였다.
“······괜찮니?”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율리를 귀엽다는 듯 지켜보던 유세핀이 물었다. “예. 괜찮습니다.” 율리는 쓰게 웃었다.
“안 괜찮은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턱에 손을 괸 유세핀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리고는 눈썹을 들썩이며 되물었다. “······거짓말.” “견딜 만합니다.” “그 복장 말고, 이 자리. 그리고 결혼.”“예?” “결혼, 하기 싫잖니.” 그 직설적인 물음에 율리는 말문이 막혔다. “······괜찮습니다.” 그늘 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씨익- 유세핀이 개구장이처럼 웃었다. “그렇게 싫으면, 언니가 방법을 하나 알려줄까?” “방법 말입니까?” 순진하게 갸웃거리는 율리의 귓전에 유세핀은 입을 대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결혼하고 죽이면 되지 않니? 그러면, 유크라인 그 가문도 네 것이 되는 거잖니.
뱀의 혀가 귀를 핥는 듯. 전신에 소름이 올랐다. 율리는 경악하여 눈을 크게 떴다. 땡땡하게 늘어난 얼굴이 유세핀을 노려보았다. 율리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망발이었다.
“어, 언니! 어찌 그런 말을-” “농담이야 농담.” 유세핀이 쿡쿡 웃으며 율리의 어깨를 건드렸다. “농담도 말같은 것으로 좀 하십시오!” 율리는 그 손을 밀어냈다. 그걸로도 모자라 유세핀을 주먹도끼로 때리려 했다. 차마 가격하지는 못하고 허우적거렸지만.
“내 소중한 동생이 그런 남자에게 인생을 허비하는 게 아까워서 장난 좀 쳐 본 거야. 너무 화내지 마렴.” “시끄럽습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그런 장난을 친단 말입니까! 그건 장난이 아니라 모독입니다 모독!” “음~ 방금 내가 그랬지?” “이, 이 진짜! 장난인 줄 아십니까!” 쾅쾅. 격노한 율리가 시뻘게진 얼굴로 애꿎은 식탁을 두드리고, 유세핀은 미안해 미안해를 반복하던 그때.
프라이빗 룸의 문이 열렸다. 먼저, 깨끗한 향기가 밀려들었다. 한순간에 분위기를 바꾸는 세련된 공기였다. 그 뒤를 이어, 문제의 남자가 등장했다.
유세핀은 그를 보자 호오~ 하며 무심코 감탄하고 말았다. 그의 외모와 스타일은 오늘따라 유독 간드러졌다. “오실 때, 1 층의 시선을 꽤 끄셨겠어요.” 유세핀은 방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는 별 대답이 없었다. 그저 무심한 듯 둘을 훑어보며 목례하고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다음으로 자이트가 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혼자서 두 명 분을 차지한 자이트는 유세핀을 보더니 갸웃거렸다. “음. 유세핀, 너도 있었나?” “동생 스타일도 꾸며줄 겸 같이 왔어요. 어때요 오라버니?” 자이트는 율리의 드레스 차림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죽어도 갑옷만 사랑하던 그녀였는데, 근 십수년만에 드레스를 입었다.“아~ 어쩐지 화사하더라니. 그대. 그림이 참 좋지 않소?” 자이트는 데큘레인을 보며 씨익, 자랑스레 웃었다. 그 말대로 유세핀이 작정하고 꾸민 율리는 한 차원이 다른 외모였다. “율리는 내 동생이지만 참 아름답고, 그대는 같은 남자이지만 참 멋있단 말이지.” 데큘레인은 아무 말 않고 율리만 바라보았다. 율리도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자존심 싸움이라도 하는 것인지, 둘 중 어느 누구도 먼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 시선의 마주침 속에서, 자이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남몰래 웃었다.
흔적. (2) 폰 메슐.
나도 곧잘 방문했던 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율리는 당연히 있을 줄 알았다. 다만 그녀 옆에서 생긋 웃는 사람은 예상 밖이었다.
유세핀.
데큘레인 입장에서는 그 어느 누구보다 고위험군에 속하는 네임드. 직접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모니터로는 몇 번 본 적이 있고 그 설정에도 빠삭하다.
“오실 때 1 층의 시선을 꽤 끄셨겠어요.” 앉아야하나 말아야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대로 나갈 수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지금 만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유세핀은 언제든지 한 번은 흉수를 던질 네임드.
결정적인 순간에 치명타를 얻어맞는 것보다, 예상치 못한 일상에서 한 번 걸려 넘어지는 것이 보다 안전할 테니.
나는 자리에 앉아 율리를 바라보았다. 율리도 나를 보았다. 그 시선은 사뭇 당황스러운 듯했고, 뭔가 미안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율리가 데큘레인에게 미안할 것은 조금도 없는데.
“율리는 내 동생이지만 참 아름답고, 그대는 같은 남자이지만 참 멋있단 말이지.” 뒤이어 입장한 자이트가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오직 율리만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오늘 율리는?” 문득 유세핀이 물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답군요.” 잠시, 시선이 팔리고 말았다.
평소 화장 없는 갑옷 차림이어도 그 절색이 도드라지는 그녀인데.
오늘은, 내가 이 세상에서 마주한 그 어느 누구보다도 아름답다.
이게 그 ‘낯설게 하기’의 효과인가.
“하하하! 그렇지. 누구 동생인데!” 자이트가 껄껄 웃었다.
“참. 이제 약혼한지 햇수로는 3 년이 다 되었는데, 식은 언제가 좋겠소?” 그리고는 아직 에피타이저도 나오지 않았건만, 나이프와 포크를 들며 말했다.
책상이라도 썰어 먹을 기세였다.
참 성격이 급한 양반이다.
“저, 당주님-” “집안 어른 간의 이야기다.” 놀란 율리가 무어라 말하려했지만, 자이트의 솥뚜껑같은 손바닥이 제지했다.
“율리 너는 조용히 있도록.” “······.” 율리가 말없이 입술만 삐죽인 그때.
희미하게 번지는 붉은 기류가 내 눈에 띄었다.
「악당의 운명」.
처음에는 율리에게서 발현된 것인 줄 알았으나, 역시 그럴 리가 없었다.
그 옆에서, 나에게 사근사근한 미소를 짓는 여인, 유세핀의 것이었다.
“데큘레인, 그대는 언제가 좋소?” 자이트의 그 말에 유세핀도 거들었다.
“네. 말해보세요. 저희는 데큘레인 교수님의 의견을 따를 것이에요.” 유세핀은 과연 표리부동의 전형. 흉중의 살의 따위는 터럭만큼도 드러내지 않은 채, 저리 상냥하게 말한다.
「악당의 운명」의 발현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먼지에 불과할 뿐이다.
아니, 그 기류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특성의 눈마저 속이는 가면인 것이다.
“Bitro Sygien. Grucious, Kigirln” 문이 열리고 주방장이 들어왔다. 그는 웬 외계어를 지껄이며 에피타이저를 서빙했다.
자이트는 포크로 찍어서 한입에 먹었다. 과식이었지만, 품격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한 조각도 흘리지 않는 모습에는 오히려 무인 특유의 기품이 있었다.
“······저는 전적으로 율리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맡긴다는 말은?” 다 삼킨 자이트가 물었다.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러면서도 오감은 오롯이 유세핀에게 집중했다.
나는 유세핀의 이면을 알고 있다.
어쩌면,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저 아름다운 거죽 속에는 악마조차 집어삼키는 괴물이 존재한다.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하고 잔혹한 소시오패스. 사람의 탈을 쓴 뱀이자, 자이트에 준하는 최강자.
그러나 그녀는 이 세상에 단 한 명─ 자신의 동생 율리만큼은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데큘레인의 적이다. 그를 죽일 능력도 충분하다. 제국을 넘어, 온 대륙의 음지에 거미줄처럼 뻗친 집단 ‘그림자’는 전부 그녀의 것이니.
이는 비유따위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전부 그녀의 ‘것’이다.
그런 유세핀이 왜 여태 데큘레인을 죽이지 않고 내버려두었는지는······ 모른다. 유세핀 본인, 또는 작가만이 알겠지.
“데큘레인. 뭘 그리 생각하시오?” “······잠시 고민을 좀 했습니다.” 이번 사망 변수는 특히 위협적이다. 자신을 숨기는 데 익숙한 유세핀이 순간 참지 못하고 흘린 살의이므로.
이 사망 변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나도 알지 못한다. 유세핀은 변화무쌍하고 예측불가한, 진정으로 그림자같은 존재이니.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이제 더 이상 유세핀 당신이 사랑하는 율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그 진심을, 데큘레인이 아닌 나 김우진의 진심을 보일 뿐이다.
“알고 있다니? 무엇을?” 자이트가 되물었다.
“율리 기사가 이 혼약에 확신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율리 기사가 원하지 않는다면, 혼인을 강행할 생각이 없습니다.” “······강행할 생각이 없다는 말은?” 자이트의 미간에 주름이 새겨졌다.
“세간의 저는 루텐에서 하룻밤 동안 2 억을 탕진한 파락호. 지금이라면, 파혼을 한다 하여도 누구나 제 탓을 하겠지요.” “아니 그럼, 일부러 그 경매에서 돈을 뿌렸단 말이오? 율리를 위하여?” “그런 건 아닙니다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은 마십시오. 율리 기사가 만약 파혼을 원한다 하여도, 유크라인과 프하이르덴의 사이는 공고할 것입니다.” 율리는 고개를 숙였다. 감동······ 한 줄 알았는데 그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오히려 필사적으로 분노를 삭이는 꼴이었다.
유세핀의 곁에서도 「악당의 운명」의 붉은 기류, 아니 희미한 먼지가 다시 발생했다가 사그라들었다.
오답이었다.
나는 바싹 마른 입안을 냉수로 축였다.
“어허. 안 되지, 안 돼. 어찌 파혼이란 말을 그리 쉽게 하는가.” “어머. 그런 사려 깊은 생각을 하시다니. 데큘레인 교수님, 멋진 분이셨네요~” 자이트가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저었다.
유세핀은 웃고 있었으나, 내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파혼이라니, 가문의 장로 님들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걸세. 오히려 자네가 그런 마음을 보여주니, 우리는 더 함께 하고 싶을 뿐이야.” “······.”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확실히, 귀족 간의 파혼은 서로 제약이 너무 많다. 특히 관계자가 수천 수만을 넘어 수백만에 달하는 대가문일 경우에는.
데큘레인이 사전에 구워삶은 프하이르덴의 장로들은 당황스러워할 것이고, 당장 예리엘도, “언제는 약혼하고 싶다고 지랄 염병이더니, 파혼? 하던가. 대신 당신이 다 책임져. ······뭐? 파혼해도 협력하라고? 싫은데? 그 변경백을 우리가 왜 도와줘야 하는건데? 파혼하면 남남인거 몰라? 2 억이나 내놔!” 따위의 말을 하지 않을까.
괜히 상상이 간다.
“······당주 님.” 그때, 율리가 말했다.
마침 메인 디쉬인 스테이크가 나온 참이었다.
“저희 둘이 있게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율리는 투명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진지함을 감지한 자이트가 말했다.
“데큘레인 그대가 허락한다면.” “괜찮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지. 유세핀.” “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니 나갔다가, 유세핀 혼자만 문턱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좋은 대화 나누어요~” 그렇게 유세핀은 떠났다.
아니, 떠나는 척했다.
나는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다. 당연히, 도청을 위한 술수를 부려두었을 터.
그러나 참 다행스럽게도, 유세핀은 모르고 있다. 내가 그녀의 성격을 꿰고 있음을.
“······좀 더 지능적으로 변하셨군요.” 율리가 먼저 씨부렁거렸다. 이를 꽉 깨물어서 입술이 댓발 튀어나왔다.
“지능적이라.”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하기야, 이전에는 영 지능적이지 않았다.
나는 데큘레인의 일차원적인 악행들을 알고 있다. 게임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서 들려오는 소문들을 전부 취합한 그 내용은······.
정식 약혼 전부터 가문의 연줄을 동원하여 약혼을 종용하고, 온갖 이권을 프하이르덴에 약속하며 가신과 장로들을 설득하고, 그들이 율리를 계속해서 압박하게끔 하고, ‘전투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전선에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배제하고, 율리의 동기 기사들을 질투하여 결국에는 축출시키고, 율리를 타박한 상관을 가문의 권위로 협박하고, 그것으로 율리는 황실 기사단에서 고립되고, 결국에는 율리 스스로가 황실 기사단을 그만두고, 커리어에 심각한 손상이 발생하고, 그래놓고는 뻔뻔하게 유크라인 소유의 하데카인 기사단장 자리를 약속하고, 율리가 거절하자 온갖 괴소문을 사교계에 퍼트리고, 그럼에도 율리가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의 재능으로 일어서자, 이번에는 다른 기사단에 입단하지 못하도록 술수를 부리고, 그녀가 하려는 모든 것들을 방해하고, 율리가 유세핀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까지 그렇게 괴롭히고, 울리고, 화나게 하고, 또 괴롭히고, 또 울리고, 또 화나게 하고, 애정이라는 감정을 ‘오직 자신의 곁에만 두겠다’ 는 저주스러운 마음으로 착각하여, 오직 자신에게만 기댈 수 있게끔 율리의 주변을 모두 무너뜨리려던, 악마에 가까운 그 행각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율리의 혐오를 이해한다.
그녀는, 내가 아닌 데큘레인을 혐오하는 것이다.
나는 스테이크를 썰으며 대수롭잖게 물었다.
“보아하니 네 멋대로 파혼은 못하는 듯하더군. 아니, 이제부터는 우리 멋대로 뭘 할 수가 없지.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어.” “······.” “그러게 처음부터 거절하지 그랬나.” 율리가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분노 짙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제, 드디어 다시, 시작하시려는 겁니까?” 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간 어찌나 시달렸는지, 울먹이는 것같기도 했다.
“뭐를 말이지. 네 새로운 기사단을 압박하라는 말인가? 요즘 잘나가고 있다고 들었다만.” 율리 본인이 동료와 함께 설립한 기사단 ‘프레하임’. 이제 고작 1 년 차지만, 율리의 성품에 감복한 여러 기사와 함께 나름 성공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아, 정말!” 율리는 포크를 역수로 틀어쥐더니 스테이크를 콱 찍었다.
“정말 당신은, 이런 자리까지 억지로!” 와구와구— 그리고는 통째로 뜯어서 입에 쑤셔 넣었다.
입술과 드레스, 식탁에 소스가 튀었다.
“이 식사는 내가 억지로 주선한 게 아니다. 자이트가-” “억지로 만드셔놓고!” 와구와구─ 율리는 지금, 일부러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세상에 이런 소심한 복수가.
와구와구─ 그런데 놀랍게도, 조금씩 통하고 있다. 이리저리 비산하는 소스가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있다. 멘탈을 가격하고 있다.
“그만-” “저는 원래 이렇게 먹습니다!” “······.” “아 맛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와구와구- 쩝쩝- 그 소리만으로도 미간이 꿈틀거렸지만, 평정을 되찾고 눈을 떴다.
“율리, 이제 더 이상 그러지 않겠다.” “안 속습니다!” “여태 내가 너를 옭아매었고, 네 가문도 너를 옭아매고 있는 것을 안다. ” “······뭐라고요? ” 난폭한 포크질이 그제서야 멈추었다. 율리는 입가에 소스와 기름을 묻힌 채로 나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그간 내가 참 그릇된 짓을 했다는 말이다.” 나는 냅킨을 들었다. 율리의 얼굴이 요상하게 일그러졌다.
“한데 나 뿐만 아니라 네 누이도, 오라버니도 극성이지.” 율리가 이를 악물었다.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이 극성이 아니라 할 것이라면, 네 파혼을 막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에게는 이미 빠삭한 설정이다. 프하이르덴이라는 가문 자체는, 실로 율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율리는, 항상 가문을 위해 희생만하는 여자다.
“당연히, 당신이 결혼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네 의사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이 또한 거짓으로 느껴지는 건가?” “······.” 율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속을 꿰뚫어보려는 듯.
“그래. 나는 정직하지 않다.” “······?” “신의가 있지도 않고, 신념이 단단하지도 않다.” 율리는 놀람과 의아가 뒤섞인 얼굴이었다. 저 동글동글한 눈과 볼이 귀여웠다.
“네가 바라는 그 고지식한 인간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법사의 전형이지.” 데큘레인의 에고는 그 동안 자신을 훼손시키는 말이라면 전면으로 배격했을 것이었다.
자신의 입으로는 죽어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데큘레인이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율리, 너는 ‘수호기사’의 자리를 원하지 않느냐.” “!” 율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떻게 알았지?! 따위의, 무지막지하게 경악하고 기겁한 얼굴이었다.
이 소망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그저 혼자서 품은 비원일 테니.
“그것을 어찌······.” “수호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가문의 동의가 있어야 하지만, 네 가문은 아마 방해할 것이다.” “아니,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가문은-” “수호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너는 가문을 떠나야 한다. 너도 그것을 알기에, 여태 숨긴 것이지 않나.” “······.” 수호기사는 기사의 정점이자, 기사가 거머쥘 수 있는 최고의 영예. 즉 제국제일검.
그러나 수호기사에게 가문은 없다.
결혼은 할 수 있지만, 어떤 가문에 소속될 수는 없다. 오직 ‘제국’만을 수호하는 기사이기에.
문제는, 본인에게는 영광이어도, 가문 입장에서는 영 실속이 없는 명예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제국 전체의 수호는 곧, 가문과 영지 간의 분쟁에는 전혀 관여하지 못함을 뜻하니. 심지어 정치적인 발언권도 전무하다.
중앙 정계에 강한 야욕을 지닌 프하이르덴 가문과는 대척된다.
“그래, 이게 좋겠다.” 나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작은 미소를 지었다.
“약혼은 유지하되, 결혼은 하지 말도록 하지. 내 너를 진심으로 놓아주고 싶지만,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형편 상 그럴 수 없으니, 너는 원할 때까지 내 이름을 방패로 써라.” “······?” “네가 나와 함께하고 있다면, 또한 그 관계가 원만한 듯보인다면, 그들도 굳이 네 앞길을 막으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 “그때까지, 나도 약혼을 유지하며 기다려주마. 어차피 마땅한 배필도 없으니.” 장난처럼 짓궂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또 혹시 알까. 시간이 흘러 네 마음이 바뀔 지도 모르지.” 율리는 그제서야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당신은 대체 무슨 꿍꿍이인 겁니까? 왜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꿍꿍이가 아니다. 네가 원한다면 맹약을 할 수도 있다.” 내가 맹약을 거론하자 율리는 한 번 더 경악했다.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저는, 믿음에 뭔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이 원하는 바가 궁금한 겁니다. 혹시 또 제, 제 몸, 아니, 만약 그런 것이라면! 절대!” 율리의 볼에 작은 홍조가 올랐다.
어떤 염려인지는 아주 잘 알겠다.
“······원하는 것이라.” 원하는 것은 없다.
나는 다만, 너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파혼하는 것을 원한다.
너로 하여금 나를 죽이게, 혹은 네 주변인들이 나를 죽이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굳이, 내 진심을 의심하고 싶다면.
그에 걸맞는 답을 들려주는 것이 옳다.
“글쎄다.” 나는 율리를 바라보았다. 율리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뒤늦게, 이 레스토랑은 참 조용하구나 싶었다.
어떤 소음도, 어떤 방해도 없다.
그저 율리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
그리고 어딘가에 숨어서 이곳의 대화를 전달하는, 희미한 그림자의 기척.
“글쎄······.” 멀지 않은 곳에서 듣고 있을 유세핀을 위하여, 나는 대사를 준비했다.
“그래. 이게 좋겠다.” 다만, 착각하지 말도록 하자.
이는 유세핀의 환심을 사기 위한 연극, 그 사망 변수를 제거하기 위한 방편.
고작 그 따위에 불과하다.
“하루에 한 번.” ······분명 그럴 터인데.
내 목소리에는 이상하게 진지함이 배었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그 이유를 고민했다.
“아니, 일주일에 한 번.” 신기하게도, 율리 앞에서 나는 어떤 행동이든 쉽게 할 수 있다.
웃을 수 있고, 편안할 수 있고, 조금이나마 흐트러질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얼까.
간단한 이야기다.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는다면, 일년에 한 번은 너무하니, 달에 한 번만이라도······.” 데큘레인은, 정말로 이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 애정조차 성격의 일부로 남을 만큼.
“······나에게 미소를 지어다오. 내가 바라는 것은 그 뿐이다.” 나는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적막이었다.
“······.” 율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있다가, 순진하게 되물었다.
“그, 무, 에? 미쇼요?” 되묻는 것도 아니었다. 바보처럼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흐르는 토막난 단어들이, 마지막의 삑사리가 귀여웠다.
“아니 무슨······.” 율리는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어디서 정전기가 일어난 듯, 그녀의 머리카락이 부스스 떠올랐다.
놀란 동물처럼 솔직한 반응이 귀여웠다.
“······.” 다만, 그 침묵 속에 동의는 없었다. 애정도 없었다.
차가운 부담이었고, 냉막한 적막이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무의식적인 한숨이 흘렀다.
내 한숨에 율리는 요란히 반응했다. 푹 숙인 정수리가 움찔 떨렸다. 새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예쁜 가마가 토마토처럼 달아 올랐다.
나는 그녀에게 냅킨을 주었다. 율리는 힐끔 눈을 들더니, 조용히 냅킨으로 입가에 묻은 것들을 닦았다.
“하하.” 나는 그저 웃었다. 율리는 살짝 미간을 치뜨더니 투덜거렸다.
“뭘, 뭘 웃으시는 겁니까. 안 속을 겁니다!” “그래. 믿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라. 나는 너에게 말한 대로 할 테니.” 그리 말하셔도 안 속을 겁니다. 안 속을 거라고요. 절대로······ 율리는 자기 혼자서 중얼거렸다.
달그락, 달그락.
그 이후로는 식기 움직이는 소리 뿐이었다.
아니, 하나 더.
[ 악당의 운명 : 사망변수 극복 ] ◆ 보상 습득 :상점 화폐 +2 드디어, 화폐잔액이 10 원을 넘었다.
흔적. (3) “······흐응.” 유세핀은 턱에 괸 손가락으로 볼을 두드리며 저 안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 양상은 흥미진진했고, ‘언니가 극성이다—’ 는 말에는 삐질 뻔도 했지만, 마지막에는 조금 웃어버리고 말았다.
대귀족 유크라인의 당주를 이용하는 대가는 고작, 달에 한 번의 미소.
손발이 오글거렸지만 오히려 솔직해서 나쁘지 않았는데, 정작 율리는 그마저도 대답하지 못했으니, 유세핀은 영 답답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였다면 벌써 광산 몇개는 뜯었을 텐데.
“조금만 더 두고볼까······.” 죽이려 했었다.
그 방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율리가 남몰래 울던 그날부터 골몰하여, 수백 수천에 달하는 계책과 모략을 생각해두었다.
여태까지는 율리가 직접 말해주길 기다렸지만, 율리는 그런 말은 상상도 못하는 너무 착한 아이라서,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었다.
“그러지 뭐.” 하지만, 오늘 데큘레인의 진심은 들어줄 만했다.
그 목소리의 색깔을 유세핀은 구별할 수 있었다. 율리와의 결혼하지 않겠다던 그 말만큼은 분명 진실이었다.
그러니, 이번 한 번은 넘어가주자.
잠시만 유보해두자.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데큘레인을 어떻게 생각해요?” 유세핀은 1 층 테이블에서 하품을 하던 자이트에게 물었다.
자이트는 눈썹을 들썩이고 되물었다.
“그러는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모르겠어요 오라버니~ 저는 율리 뜻만 따르거든요. 오라버니는요?” “······.” 그러자 자이트의 표정은 애매하게 굳었다. 그는 관자놀이를 몇 번 문지르더니 머리를 쓸어넘겼다.
“유세핀. 체스에서 킹을 퀸처럼 움직일 수는 없다. 킹을 나이트처럼 움직일 수도 없고, 나이트를 폰처럼 움직일 수도 없지. 퀸인 줄 알았던 것이 갑자기 나이트로 탄로났다면, 참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자이트도 처음부터 데큘레인과의 혼인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데큘레인은 기물이 따위가 아니다. 데큘레인은 체스판이다. 체스판에 흠집이 조금 있다 한들, 그 위에 기물이 설 수 없는 것은 아니지.” “그래서요?” 자이트는 레스토랑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동공에는 언젠가 타올랐던 전란의 불씨가 아직도 휘몰아치고 있었다.
“유세핀,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한다.” 자이트가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피어오른 무시무시한 기세가 일대를 짓눌렀다. 레스토랑의 귀족들은 이유도 모를 사례에 걸려 기침을 했다.
“아버지는, 중앙의 그 빌어먹을 책상대가리들 전부를 합친 것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놈들은, 기사의 명예를 한낱 마력 돌멩이만도 못하게 취급했지.”유세핀은 그저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이럴 때의 자이트는, 아무리 유세핀이라도 무섭다.
“중앙이다, 유세핀. 중앙인 것이다. 변방에 있어서는 경기에 참여할 체스판도 없는 신세야.” 변경백 프하이르덴.
멸지(滅地)로 이어지는 제국의 북서를 방비하는 유서 깊은 백작가문.
그들은, 언젠가의 패전으로 당주를 잃었다.
“나는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마음은 율리도 알 것이다.” “응. 이해해, 나도.” 사실 유세핀은 아버지가 죽었을때 그러려니 했었다.
어차피 차기 계승은 자이트가 확실했고, 자신으로서는 자이트를 죽일 방법이 도저히 없었으니, 당주의 자리는 멀찍이 포기했다.
유세핀은 가질 수 없는 것에는 금세 관심을 버리는 편이었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것들. 내 언젠가 반드시 그 사지를 뜯고, 잘근잘근 잘라서 개먹이로 주리다······.” 유세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같은 가족이지만, 자이트는 참 살벌하다.
그래서 걱정도 된다.
자이트가 이러는데, 만약 율리 네가 훨훨 날아가버린다고 하면······.
그러면 율리야, 이 언니는 바라고 있을게.
만약 그날이 오면, 네가 자이트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길.
무력으로 자이트를 무찌르고, 누구보다 찬란히 비상할 수 있길.
때마침 율리가 1 층으로 내려왔다. 그녀의 옆에는 데큘레인이 있었다.
“오호~ 데큘레인 교수. 대화는 끝내셨소?” 자이트는 데큘레인을 보자마자 표정을 싹 바꾸었다.
율리와 데큘레인의 분위기는 뭔가 어색했다. 그러나, 이전만큼 험악하지는 않았다.
“하하. 흠. 뭐, 이야기가 어느정도 잘 된 듯 하구려?” “예.” 데큘레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정도로 되었다. 자이트는 만족스레 율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이만 갑시다! 술이나 한 잔 하러.” 그들 네 사람은 함께 레스토랑 밖으로 나왔다.
데큘레인은 일부러 느리게 걸었고, 자연히 프하이르덴의 세 사람이 앞장을 서게 되었다.
─음식은 맛있었지 율리야? 우리도 밖에서 먹었거든~ 고기 맛있더라구.
─모릅니다. 그리고, 언니는 앞으로 저한테 말을 걸지 마십시오.
─앙? 왜? 왜~? 언니 슬프게 그러지마렴.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왜. 언제 또 싸운 게냐? 드레스 고를때 의견 충돌이 있었나본가?
멀리서 지켜보면, 그저 서로 투닥거릴 뿐인 화목한 가족.
그러나,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역시 찰리 채플린의 격언은 언제나 옳다.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마탑의 일이 있습니다.” 길목에서 멈춰 선 데큘레인은 격조 있게 목례했다.
“음? 아니 왜 벌써. 술이라도 한잔 하지.” 자이트는 그리 말했으나, 유세핀이 제지했다. 그녀가 자이트에게 속삭이는 목소리 속에는 ‘기일’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그 말을 엿들은 율리도 조금 묘한 눈으로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아. 그렇군. 잘 가시게. 언제 또, 이런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군.”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이윽고, 데큘레인은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돌아섰다.
* * * 이튿날의 이른 아침.
쾅─!
가볍게 띄워 올리려던 의자가 요란하게 치솟았다. 지붕에 처박힐 기세였으나, 염동을 조절하자 곧 바람에 살랑이듯 부드럽게 안착했다.
“······적응이 안되네.” [ ‘마력의 질적 강화 (1 단계)’가 적용됩니다. ] [ 이제 마력을 보다 정순하게 품을 수 있습니다. ] 마력의 질적인 강화.
그 뜻은 체내의 마력이 보다 순수하게 정제되었다는 것. 마력의 순환이 보다 원활하게 되었다는 것. 동일한 마력량으로 보다 우월한 출력을 뿜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런 점에서, 온몸에 마법진을 메모라이즈한 내 염동력의 위력은 최소 25% 이상 증폭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다시 처음부터 적응을 해야하는 게 불편했다.
“······다음 루틴.” 아무튼. 이제 다시 「초급 염동」을 메모라이즈할 시간이다.
지금 내 염동은 기초와 초급이 반반씩 뒤섞였으나, 1 주일만 더 노력하면 오롯이 「초급」으로서 그 드라마틱한 성능 향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때였다.
훽─ 돌연 별채의 문이 열렸다.
“뭐냐.” 아니, 내 분명 허락 없이는 들어오지 말라했거늘, 누가 감히─ “뭐긴 뭐야. 나지.” 예리엘이었다.
예리엘은 나를 보자마자 동태 눈깔이 되어서는 어이없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아니······ 옷은 좀 입지 그래? 요즘 운동 좀 한다더니, 노출증 걸리셨나봐요? 왜 웃통을 벗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예리엘의 손에는 웬 양피지가 있었다.
그 생김새부터가 심상찮았고, 당장 시스템이 반응했다.
[ 메인 퀘스트 : 베르흐트의 소집 ] “받아. 베르흐트에서 소집 회의를 열었어. 15 년 만에.” 나는 염동력으로 가지고 와서 읽었다.
내용은 별 것 없었다. 그저 유크라인 가문이 소집되었다는 말과 함께, 본인 안위는 스스로 지키라는 추신 뿐.
“아니 그것보다, 무슨 고문이라도 당했어? 죽을 병이라도 걸렸나? 상태가 왜 그래? 되게 더럽거든요?” 예리엘은 찌푸린 얼굴로 나를 훑었다. 그 말대로 온몸이 상처 투성이였고, 이곳 저곳에 핏자국이 번졌다.
“별 일 아니다.” 나는 클린즈로 몸을 닦아내고 물었다.
“이 양피지를 전해주러 직접 온 거냐.” “겸사겸사? 나도 할 일 있어서, 내일까지는 있을거야.” 예리엘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투덜거리듯 답했다. 괜히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아, 맞다. 나 대학 입학했을 때 썼던 방 있지? 나 거기서 잘거니까, 들어올 생각은 하지도 마.” “말이 짧다.” “······마요. 거 참 말투는 오질라게 신경쓰네. 아니, 신경 쓰시네요~ 으유 으유~” 그렇게 야유하고 예리엘은 밖으로 나갔다.
─나 밥줘!
곧바로 시종에게 외치는 예리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일이라.” 예리엘은 오늘와서 내일까지 있겠다 하는데······.
오늘은 전 약혼자의 기일이다.
아무렴, 그저 우연이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 * * [ 평마탐동 : 평범한 마법 탐구 동아리 ] 이프린은 동아리실에 걸린 문패를 보며 피식 웃었다. 평마탐동에서 ‘평’은 ‘평범한’과 ‘평민’의 언어유희였다.“아, 나 이런거 왜 웃겨하냐, 푸흡.” 비실비실 세어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데,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야!” “아 이피! 왔어?! 들어와!” 줄리아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안으로 끌었다.
“어 이프린 왔네. 하이.” “카드게임 할래?” 동아리의 총원은 예상보다 훨씬 적은 7 명 뿐이었지만, 이프린은 이 소수 정예가 나름 끈끈하고 좋았다.
“이피, 어때? 넓지!” 줄리아가 동아리실 한복판에서 빙글 돌며 말했다.
“응. 그러게.”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오히려 전에 살았던 집과 비슷한 크기였다.
“소파도 있네······.” 이프린은 터벅터벅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푹신했다.
엉덩이로 꾹꾹 눌러보았다.
금세 원상복구가 되었다.
“오옹.” 다시 꾹꾹 눌렀다. 이번에도 복원이 되었다.
조금 더 세게 짓눌러보았다. 문제 따위 없었다.
과연, 여태 앉았던 소파 중에서 최고급.
애들 눈치를 살핀 이프린은 소파에 슬그머니 가로로 누웠다.
흐아아암- 그리고는 하품을 하면서 물었다.
“근데, 줄리아. 동아리 목적은 뭐라고 적었니?” “음? 아~ ‘마법의 실전적 이해와 탐구’. 이걸로 잘만 하면, 부유섬 견학도 갈 수 있을 걸?” 마법사의 부유섬.
입장권의 가격만 자그마치 1 만 엘네이지만, 마법사라면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섬이다. 당장 ‘승격 시험’부터가 그곳에서 치러지니.
“입장료 없이?” 이프린은 돈부터 물었다. 돈, 돈, 돈 돈 돈. 10 만 엘네의 후원은 금세 줄어들고 있었다. 필기구는 물론 마법서의 가격이 진심 장난이 아니었다.
괜히 저번 주에 로아호크 멧돼지를 먹어버려서······. 딸 친구 할인 해줄 줄 알았는데 왜 그리 냉정하게······.
“당연히 공짜지.” “오옹! 아니, 음. 그렇구나.” 그렇구나.
그렇다면, 동아리 활동도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다.
페릿이 말했다.
“근데, 그러려면 지도 교수 허락도 있어야 되지 않아?” 이프린은 아닌 척 귀를 기울였다. 줄리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음······ 이프린이 부탁하면 해주지 않을까?” “뭐?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데큘레인 교수님, 너는 나쁘지 않게 생각하잖아. 요즘 소문 파다하던데.
데큘레인이 이프린만 편애한다고.” 편애? 이프린의 얼굴이 와락 꾸겨졌다.
세상에 마상에, 그런 더러운 소문이 있었다니.
“미친 거 아녀? 어떤 놈들이 그래? 시험 공부하다가 머리 돌아버린 거 아녀?” “그럼 뭔데? 이 동아리도, 솔직히 네가 부탁한 거였잖아.” “······.” 이프린은 말 없이 입을 쩝쩝거렸다.
데큘레인이 자신에게 왜 이리도 잘해주는지.
왜 실망할만큼 기대하는지.
나름 자세히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너무 어려운 문제였고, 그저 ‘불쌍해서’라는 조금 단편적인 이유밖에는 도출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무슨 관계냐구~” “아 씨. 관계는 무슨 관계. 그냥······.” 이프린은 뒷목을 긁적였다.
자신에게 데큘레인은, 반드시 뛰어넘고 싶은 벽이다. 내가 마법사가 된 이유이자, 최우선의 목표다. 항상 겸손하고 겸허하게, 그를 추월하려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뭔가 모냥이 빠진다. 그러니까······.
“라이벌이지.” 푸흡-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산개했다. 줄리아는 마시던 물을 뿜었다.
“허, 이 건방진 놈 보게. 어디 교수한테 눈을 또랑또랑 뜨고······ 인마!
눈 깔아!” 렐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올랐고, 열린 문 너머의 복도에는 귀족 출신의 동기들이 쿡쿡 웃고 있었다.
저 녀석들이 일러바쳤구나.
“그래, 그리 당당하다면, 말하라! 동아리 창설에는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지도교수의 허락이 필요할 터. 그 지도교수의 이름을 말해!” “······.” “말 하란 말이다!” 그 윽박에는 이프린도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동아리를 창설할 때, 분명 귀찮게 하지 않겠다 말했었는데.
“하! 설마 조작을 했나? 만약 조작을 했다면 반드시 퇴학일 것이고, 조작이 아니더라도 너는 분명 나에게 대들었다. 이 동아리 창설을 허락한 교수의 면전에 대고 내가 그리 말할 것이다!” 렐린은 당연히, 연차가 얼마 되지 않은 교수가 물정도 모르고 이딴 짓을 저질렀으리라 단정했다. 그렇기에 자신만만하게 되물었다.
“자 말해라! 누구냐!” “그······.” “말해! 말 하라고!” 이프린이 우물쭈물거릴수록 렐린은 보다 사나워지고, 복도에는 ‘평민 동아리를 창설한 평민’들을 우스운 눈으로 지켜보는 귀족이 점점 모여든다.
그때.
“말해라! 내가 직접 찾아가서 캐묻기 전에-” “나다.” “뭐?! 어디, 어떤 놈이······.” 그렇게 돌아선 순간, 렐린의 몸이 굳었다.
“······?” 석화에 걸린 사람처럼, 렐린은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고개만 갸웃거렸다.
왜인지 순진무구한 표정이었다.
“렐린 교수. 자네가 부르기에 이리 왔소.” 데큘레인.
왜, 왜 이 수석교수가······?
“어······ 예?” “말하시오, 렐린 교수.” 데큘레인은 렐린에게 바싹 다가가 그를 내려보았다.
키의 차이가 이상적이었다. 렐린이 여자였고, 데큘레인이 남자였다면.
“어서 말하시오.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아. 데큘레인, 그 수석교수님이, 이 동아리를······.” “그래. 내가 허가했지.” “아, 그, 그러시군요······ 왜, 왜.” “내가 하겠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자네 허락을 받았어야 했나.” 렐린의 눈동자가 상하좌우로 팽이처럼 굴렀다. 데큘레인이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하던 말이나 계속 하시오.” “그, 그게······.” 렐린은 거칠게 호흡하며 필사적으로 활로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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