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3
오직 마법계 정점만이 오를 수 있다는 영원불멸, ‘이터널’의 등위. 그 경지에 오른 자의 이름은 대마법사라 하여 대륙의 역사에 새겨진다. 또한 ‘부유섬’의 최상층, 황제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다는 그 천외천에서, 누구보다 고고하게 만마(輓魔)를 굽어볼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도 아니고, 자신의 가문도 아니고, 오직 자신이 원하는 자리. 아니, 이미 반쯤 손에 쥐어진 권좌. 그러니 나는 반드시 이뤄낼 것이다. 일레이드의 실비아가 아니라, 오직 순수하게 ‘실비아’라는 개인으로서.
반드시.
실비아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책 책 책. 책을 읽어야 한다. 오늘의 굴욕을 복수하고 싶다면, 실력으로 되갚아주고 싶다면,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배워야 한다. 다시 한 번 되새기자.
데큘레인은 결코, 만만한 교수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일레이드의 적수로서 차고 넘치는 상대인 것이다. 그리고 이프린은······. 경계 대상도 아니다. 인정하기도 싫다.
아버지의 말처럼, 그 녀석은 이미 레이스에서 탈락했으니.
* * * 데큘레인이 된 이후로, 나는 매일 이른 새벽에 깨어났다. 내게 아침은 언제나 상쾌했고 항상 회복되어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근육통이 있었다. 어제 폭주에 가까운 마법을 사용한 탓이었다.
그러나 데큘레인의 성격을 역이용하여 설정한 루틴, 그 성실함이 내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마법 훈련을 시작했다. 휭─ 휭─ 휭─ 방 안의 모든 금속 쪼가리가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당장 이틀 전보다도 확연히 나아진 테크닉. 어젯밤에 3,375 의 마력을 한순간에, 심지어 실전적으로 사용한 덕에 숙련도가 급상승한 것이다.
참고로 내 특성 「육안」은 이런 추상적인 숙련도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수치는 정확히 「85%」.
100%를 채운 뒤에 초급 염동을 새길 예정이다. 그때는 또 얼마나 아플지······.
휭─ 휭─ 휭─ 다수의 금속을 서로 스칠듯 스치지 않게 통제하다가, 마력이 절반 쯤 남았을 때 그만두었다.
이 다음 루틴은 마법 습득. 오늘의 마법은 「기초 화력 통제」라는 것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마법이라 대강 머리에만 기억해 둘 생각······?
“······잠깐만.” 화속성 조작 계열 마법, 「기초 화력 통제」의 술식을 들여다보던 내 뇌리에 어떤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염동력을 온몸에 메모라이즈하는 것’ 에 준할 만큼 무식한 생각이었다. “굳이 「화력 통제」를 습득할 필요 없이, 그 핵심 기능만 「염동」에 추가한다면······” 마법의 특정한 ‘획(劃)’, 즉 화력 통제의 중추가 되는 그 획만 떼어내어 「 염동력」에 이식한다면?
일명 마법 짜깁기, 아니 마법 업그레이드라는 것이다.
애당초 염동력과 화력 통제는 서로 같은 계열[조작]에, 구조도 어느 정도는 비슷하다.
염동은 물체에 중점을 두었고, 화력 통제는 화력과 불에 중점을 두었을 뿐. 그런 만큼 겹치는 선(線)도 꽤 많다. 화력 통제의 22 획 중 8 획이 염동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마치 논문을 짜깁기 하듯이, 혹은 유전자를 조작하듯이 마법을 교차편집하는 것도 가능하지는 않을까······. 나는 「이해력」의 스위치를 켰다. 그리고 「화력 통제」의 술식 형태를 완전히 암기한 뒤 눈을 감았다. 이후 내 심상에 기억된 「화력 통제」의 골수(骨髓)를 들어내어, 그대로 내 온몸의 「염동력」에 덧대어 이식한다······. “──!” 순간 거대한 통증이 일었다. 거대하다고 밖에 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이었다.
입에서 핏물이 주륵 흘렀다.
“······.” 심장을 부여잡은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방금, 확실하게 느꼈다. 평범한 마법사였다면 이미 ‘한 번’은 죽었다.
“성공하기는 했다만······.” 다행히 마법은 확실히 조합되었다. 나는 내 몸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확히 어깨 부근의 마법진에, 본래의 염동과는 다른 「화력 통제」의 식이 추가되었다.
“······앞으로는 루틴 하나가 더 필요하겠군.” 「염동력」의 인위적인 업그레이드. 이는 참신하고 확실한 강화의 방법이다. 그러나 무지막지하게 위험하고, 하면 할수록 육체에 걸리는 부하가 심해질 듯하므로, 「철인」이라는 특성의 단련. 즉 운동이 필요할 것이다. 그때였다.
똑똑─ ─로이입니다. 사교계 참석 준비는 되셨습니까?
노크와 함께 집사가 말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오후 한 시가 되어 있었다. “곧 내려가마.” ─예.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나는 겉옷을 걸치면서 집사에게 말했다.
“로이. 앞으로는 어떤 사교 일정도 잡지 말아라. 아주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사교계 따위 웬만하면 캔슬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새해의 꽃’이라는 중요한 일정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굳이 오늘 사교계에 참석하는 이유는, 혹시 모를 네임드 캐릭터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함도 물론 있지만, 무엇보다.
[ 사이드 퀘스트 : 사교 ‘새해의 꽃’ 참석] ◆ 상점 화폐 +0.5 이게 결정적이었다.
상점 화폐. 최소 5 원 이상을 모아야 상점에 접속할 수 있지만 아직 내게는 2.5 원 밖에 없고, 원하는 것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
나는 방문을 열었다. 집사는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되었다.” “예. 그리고 이것은 저번에 말씀하신, 대장간 목록입니다.” “그래.” 저번 주, 나는 집사에게 실력있는 대장간의 수배를 부탁했다. “‘빛나는 금철이’ 라······.” 집사가 건네준 약 마흔 다섯 군데의 대장간 목록 중에서, 가장 빛나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대부호 재력가」의 레이더에 포착된 그곳을 나는 선택했다.
“이름이 특이하군. 이 설계도를 가지고 금철이로 가거라. ” 나는 집사에게 설계도를 내밀었다. 이는 내 ‘애장(愛備)’이 될 물건이다. 보통 마법사에게 애장은 지팡이나 완드고, 애장이 극도로 발달하면 그 또한 ‘기물’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내 애장은 그런 작대기 따위에 비해서는 아주 이질적일 것이다.
오직 염동력만을 위한 무기이니 기대해도 좋다.
“예. 알겠습니다.” 집사는 설계도를 펼치거나 궁금해하지 않고 고이 넣었다. 과연 갸륵한 집사의 자세였다.
“가시지요. 차량은 준비해두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예? 예. 감사합니다.” 집사와 함께 저택 밖으로 나왔다. “날씨가 좋구나.” “······예? 예. 그렇습니다.” 초봄의 날씨는 맑고 오붓했다. 집사는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당황하는 듯했지만, 나는 산뜻한 내음을 느끼며 차에 올랐다. “출발하거라.” “예.” 차량은 부드럽게 나아갔다. 사뭇 도도한 자태로 뒷좌석에 앉아 있노라니, 갑자기 「미다스의 손」이 생각났다. 이 차에도 한번 써볼까. 남은 마나가 1,300 이라서 1,000 정도는 부여할 수 있는데.
그런 호기심으로 특성을 사용하자, 부웅─!
자동차가 급가속했다. 운전하던 기사는 화들짝 놀라 핸들에 머리를 박고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다. 가라.” “예, 예. 죄송합니다!” 제 머리를 두들기며 자책하던 운전기사는 금세 능숙해졌고, 차 뒷자리는 오히려 편안해졌다. 안 그래도 드물었던 진동과 소음이 거의 소멸된 것이었다. 승차감 강화, 뭐 이런 식인가.
나쁘지 않다.
* * *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장소는 제도에서도 가장 화려하다는 도심 ‘헤일리치’의 고성. 시가지 한복판의 성 한 채가 통째로 귀족들의 사교 공간인 모양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먼저 차에서 내린 운전기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동시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 차량이 이 세계에서는 어마어마한 고급품인 까닭이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데큘레인 수석교수님.” 잘 교육된 수행원들이 먼저 나를 맞이했다. 나는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레드 카펫을 걸었다. 고성 밖 취재 라인에 늘어선 기자들이 어지러운 플래쉬를 터트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성 안으로 들어갔다. ─유서 깊은 마도의 대가, 유크라인 가문의 당주. 제국황실대학마탑의 최연소 수석교수,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현관에 들어서자 돌연 확성음이 터지길래 놀랄 뻔했다. 내가 입장했음을 알리는 소개문이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홀에 입성했다. 별처럼 일렁이는 불빛, 그 널찍하고 화려한 내부에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들의 면면을 보고 있노라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익숙한 네임드가 많았다. 유츠린, 페이지, 시리오, 라펠 등등······.
“······?” 한데 그 화려한 인파 속에서도, 유독 도드라지는 존재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율리. 사교계를 싫어하는 율리도 이 이벤트는 참석할 수 밖에 없었던 듯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혼자서 갑옷차림이었다. “······.” 율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떤 인사도 않고 시선을 돌렸다. 나도 굳이 그녀에게 다가가지는 않았다.
─발렌타 공은 오늘따라 유독 아름다우십니다~ ─루차 소공녀님, 오늘은 어떤······.
─전년 모험가 시험의 결과가 참 흥미롭더군요.
이 게임에서 특히 대접을 받는 신분은 귀족, 마법사, 기사, 모험가 등이 있다. 참고로 ‘모험가’ 는 아주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직업인지라 시험에 통과해야만 그 자격을 취득할 수 있고, 자격 없이 모험하는 놈들은 부랑자 혹은 방랑자 따위로 불리며 법의 처벌을 받는다.
─가네샤 공! 이번 컨티넨탈 저널에서 당신의 활약을 읽었다오. 아무튼 그러한 모험가들 중에서도, 게임 스토리의 중요 분기점이라 할만한 핵심 네임드. ‘그녀’를 나는 발견했다.
─내 항해가 취미인 자로서, 다도해를 탐험했다는 당신의······.
붉은 장발을 양갈래로 묶어 내린, 다소 신경질적이고 날이 선 인상의 여인.
정작 본인은 사교계 자체가 귀찮은 듯 찌푸린 얼굴이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그녀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그녀는 초기 전투력이 전체 5 위로 설정된 개사기 모험가─ ‘가네샤’. 나도,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소문. (2) ······용기를 내어 가네샤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아니! 이거 이거~ 데큘레인 교수님 아니십니까~?” 느끼한 음색과 자욱한 향수 덩어리가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반갑습니다. 오랜만이군요.” 금발 벽안, 수려한 외모의 남자였다. 나보다 키는 작았지만 느껴지는 마력은 강건했다. 나는 이 놈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내가 직접 모델링한 놈이었다. “······이헬름?” 이헬름 폰 제리안 리와인드. 데큘레인의 앙숙······ 이라 하기에는 너무 격이 떨어지고, 아마 수석교수 자리를 빼앗겨서 질투하는 네임드일 것이다. “예~ 데큘레인 교수님. 요즘 대학 생활은 어떠십니까? 첫 수업부터 사건이 발생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잘 해결 되었다.” “하하. 하긴 그렇겠지요. 그것보다 저는 요즘, 어떤 무뢰배들이 교수님의 명성을 의심하고 있다는 듯하여 걱정이 됩니다.” 이헬름은 호들갑을 떨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이헬름의 말대로 데큘레인의 허위와 기만은 서서히 누출되고 있었다. “물론 저는, 데큘레인 교수님의 대단한 마법 연구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커다란 실적을 위해 장고하고 계신 거겠지요? 그 장고가 너무 길어, 거의 3 년이 다 되어가긴 하나······.” 나는 이헬름을 보았다. 그 표정과 주름의 생생한 움직임이 느끼했다. 치즈가 살아서 움직인다면 이러할까. 인간치즈.
“······만약 그 대연구가 너무 복잡하여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비아냥거리는 도발이었다. 원래의 데큘레인이었다면 놈에게 비언어적인 표현이라도 보여줬겠지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사실 이해는 합니다. 수석교수라는 직함이 부담스러우실 테니까요. 아무렴 대학마탑 마법사의 영예라 하나······ 듣고 계십니까?” 한참을 저 혼자 떠들던 이헬름은 마침내 지쳤는지 콧잔등을 일그러뜨리고 미간을 잡았다.
“안 들었다.” “쯧······ 바쁘신 듯하니, 그럼 제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겠습니다.” 나는 놈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려 가네샤를 찾았다. 없었다. 우측, 좌측, 문가, 창가, 그 어디에도. 중요한 네임드가 사라져버렸다.
“그리 혼자 고귀한 척, 잘난 척 해서는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아십니까? 귀족계에서 추락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라는 걸. 말도 안되는 ‘순수 원소 창안’ 연구는 이제 그만 두시고······” 순간 뒷목에 열이 확 올랐다. 이 놈 때문에 가네샤를 놓쳤는데, 정작 이 마요네즈 새끼는 안 꺼지고 계속 씨부리기만 한다.
“그래요, 데큘레인 교수. 곧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지금이라도 많이 웃어두시지요. 또한······.” 한마디가 벌써 수십 마디로 늘어지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늙어 뒤질때까지 훈수둘 것 같았기에, 나는 놈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나도 한 마디 하지.” “제 충고를 귀담아 들으······?” 노랗고 하얀 면상을 내려다보며, 귓가에 입을 대었다. 그리고 자그맣게 속삭였다. ······오지랖 그만 부리고 꺼지거라. 이 썩은 치즈같은 놈아.
사망 변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후련했다.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렴, 이헬름은 원래의 데큘레인도 혐오했던 놈이었으니.
“이, 이, 뭐라고? 치즈, 치즈가 썩어? 당신, 당신 방금—” “가겠다.” 나는 어버버버 거리는 놈을 내버려둔 채 성큼성큼 떠났다. 겨우 이헬름에게서 벗어났는데, 데큘레인을 찾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숱한 귀족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이번 그 사건을 들었습니다. 일레이드의 자제가 어떤 부작위 귀족의 자식에게 시비가 걸렸다지요? ─근데 그때, 데큘레인 수석교수께서 영웅처럼 등장하셨다고. 제 아들이 다 말했습니다. 허허허. 말로만 들어도 이리 흥분 되는데, 제 아들 놈은 그때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아, 제 아들 이름은 말입니다······.
─데큘레인 수석교수님. 혹시 오늘 밤에 시간이 되시는지요?
그들은 나에게 여러가지를 말했다. 청탁도 있었고, 그저 고민거리도 있었고, 웬 유혹에 가까운 것도 있었다. 이쯤 되니 머리가 아팠다. 달짝지근한 디저트와 지독한 향수 냄새가 오감을 짓누르는 듯했다. 특성 「철인」 이 내 후각을 비롯한 감관을 쓸데없이 강화시킨 탓이었다. 그저 싫증난다는 심정이 되어서 나는 사람 없는 곳을 찾았다. 그렇게 인적이 드문 3 층까지 올라와, 복도의 창틀에 기대어 숨을 고르던 그때. “······데큘레인 교수님?”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쪽을 돌아본 나는 크게 놀랐다.
여태 찾고 있던 네임드, 가네샤였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그녀는 동그랗게 키운 눈으로 나를 보며 다가왔다. 본래 데큘레인과 가네샤는 서로 아는 사이였었나. 전혀 몰랐다.
나는 내색 없이 대꾸했다.
“······길을 잃었다.” “어머. 이제 농담도 하네요? 저 기다린거 아녜요?” 하기야, 데큘레인이라면 충분히 가네샤와 인연이 있을 법도 하지.
“······.” 나는 내 옆에 다가와 선 그녀를 곁눈질로 보았다. 그 시선을 노려본다고 착각한 듯, 가네샤는 눈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모았다.
“그때 그 임무는 미안하게 됐어요. 그래도 선수금이랑 위약금까지 돌려줬잖아요. 한번만 봐줄래요?” “······.” 내가 가만히 있자, 가네샤는 입술을 샐쭉이더니 볼을 부풀렸다. 그녀의 양갈래 머리가 좌우로 휘적였다.
“그래요 뭐······ 다도해에서, 교수님이 원하던 거대한 재능을 지닌 아이를 보고 왔어요. 굳이 마법적 재능이라 단언 할 수는 없겠지만······ 여자애였어요. ” 나는 말없이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밤이 되었고, 푸르게 내려앉은 달빛이 창틀을 비추었다.
가네샤는 내 시선을 좇으며 말을 이었다.
“못 데려온 건 미안해요. 아니, 안 데려와서 미안해요. 정이 들어버렸어요.
교수님한테 줄 수 없었어요.” 굳이 이해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전말은 이해가 되었다. 본인의 마법적 결핍을 알고 있는 데큘레인은 자기 대신 연구 실적을 쌓아 줄, 다루기 쉽고 재능이 큰 아이를 노예처럼 부릴 작정이었겠지. 그 임무를 가네샤에게 부탁했고.
“근데, 교수님은 언제까지 그렇게 살 생각이에요?” 나는 여전히 창 밖의 달을 바라보았다. 대답이 없자 그녀는 주머니에서 연초를 꺼내 물었다. “이바여. 저 블 점 븥여즐 스 있어여?” “싫다.” “······.” 싫은 게 아니라 못한다. 아직 「점화」는 배우지 않았다. 가네샤는 짐짓 삐친 체했고, 나는 말했다. “이제는 다르게 살아갈 생각이다.” “······엉? 정말요?” 가네샤가 입에 문 담배를 손으로 옮겼다. 나는 그녀를 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예상 밖이네요. 저는 당신이 저를 죽이려 할 줄 알았어요. 사실, 여기도 당신 보러 온 거예요. 신기해서.” “······무엇이 그리도 신기했나.” “말 없이 도망갔는데, 살수같은 거 안 보냈잖아요.” 가네샤의 양갈래 머리카락이 펄럭였다. 펄럭펄럭- 펄럭펄럭- 본인 딴에는 놀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거슬렸다 “과한 걱정이다.” 가네샤는 전투력으로는 손에 꼽히는 네임드다. 머리카락조차 제 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육체의 정점에 도달한 격투가.
보유 특성으로만 「만류귀종(萬流歸宗)」 은 물론 그 유명한 「금강불괴(金剛 不壞)」 까지······ 문자 그대로 ‘머리카락 한 올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네임드다. 그런 괴물에게 살수를 보낸다고? 그게 진짜배기 미친놈이지. “정말 괜찮아요, 데큘레인 교수님?”가네샤가 되물었다. 오른쪽 갈래의 머리카락이 내 어깨를 찰싹 찰싹 때리고 있었다. “나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면, 이만 돌아가라.” 나는 발바닥을 떼고 계단으로 움직였다. 인맥을 쌓으러 왔지만 이미 인맥이 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이 사교장에 오래 있을 필요가 없다.
등 뒤의 가네샤가 말했다.
“아, 그래도 될까요. 믿을 수가 있어야죠. 저희 척살이나 제명같은 거, 정말 안 할 거예요?” 물론, 유크라인 대가문의 위세라면 충분히 모험가 길드를 압박할 수도 있었다. 가네샤는 모험가 길드의 신의를 어기고 무단으로 임무를 거부했으니.
“······격 떨어지는 짓이다.” 물론 그 또한 미친 짓이므로, 나는 그렇게 잘라내고 걸었다. 뒤통수를 바라보는 가네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 음······ 뭘 잘못 먹었나? 병에 걸린 건가? 아니면, 새로 약혼을 해서 그런가? 왜 저러지······.
꽤 멀어졌음에도 그 중얼거림이 들렸다. 뒤늦게 연초에 불을 붙인 듯, 짙고 매캐한 타르향이 흘러들었다.
그때였다.
[ 악당의 운명 : 사망변수 회피 ] ◆ 보상 습득 :상점 화폐 +1 “······뭐? 이게?” 악당의 운명이 발동했다. 일전에는 ‘극복’, 지금은 ‘회피’. 방금 가네샤와 나누었던 대담도, 어엿한 ‘사망 변수’였다는 뜻이었다······.
* * * “오······. 초콜렛이 분수처럼 흐르는구나.” 율리는 요즘 신문물이자 사교계의 ‘잇템’ 초콜렛 분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일리. 이 놈을 봐라. 신기하다.” 그러자 곁에 있던 친척, 레일리가 그녀의 팔을 잡아 끌었다. “아, 진짜. 그만하고 이리 오세요 정말······.” “······너는 왜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그러냐.” “안 그러고 싶어도, 너무 촌스럽다고요. 율리 기사님 체면도 있으신데! 놀란 척 하지 말고, 태연히 보세요. 태연히.” “난 원래 여기 오기 싫었다.” 율리는 레일리를 퉁명스레 흘겨보고는 다시 초콜렛 분수에 시선을 집중했다. 콸콸콸콸—— 숫제 초콜렛이 솟는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보다는 저 초콜렛 자체를 먹고 싶었다. 진한 초콜렛. 절로 입맛을 다시게 하는 단것······.
“음? 이헬름은 왜 저러고 있지?” 한데 그 초콜렛 분수의 옆구리. 율리의 시야 구석진 곳에, 저 혼자 씩씩대는 이헬름이 포착되었다.
“그러게요. 방금 전까지 데큘레인 교수랑 무슨 말하고 있더니. 왜 갑자기 저러고 있지.” “······.” 데큘레인, 이헬름, 시리오, 라펠, 게오르그 등등······ 대륙에서도 황금 세대라 불리는 이 동갑내기들은 율리의 제국황실대학 선배였다. 데큘레인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고, 이헬름은 그런 데큘레인의 옆에서 붙어먹던 파벌이었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사이가 틀어져버렸지만.
“근데 말예요, 요즘은 어떠세요?” 레일리가 넌지시 물었다. “뭐가 말이냐.” “데큘레인 교수랑요. 요즘, 소문이 많이 돌더라고요.” 사교계에서는 모든 소문이 금세금세 퍼진다. 오늘 아침 한 말이 저녁에는 귀족이 기르는 개도 알게 될 정도. 레일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대놓고 물었다. 그녀도, 율리가 그러는 만큼이나 데큘레인을 싫어했으니.
“······절대 좋지 않다.” 크진 않지만 뚜렷한 목소리. 아마, 그 음성을 들으려 사교계의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을 터. ──한데 이 또한 사교신이 점지한 운명의 장난이라는 것일까.
잠시 자리를 비웠던 데큘레인이 2 층의 계단에서 나타났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고, 절묘한 등장이었다.
“저 사람······ 외모는 여전하네요. 이제 서른 셋이라던데 왜 안 늙을까요?” 데큘레인은 언제 어떤 사교계에서나 어울리는, 또 환영받는 외모와 스타일의 귀족이었다. 데큘레인을 싫어하는 자들도 그것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패션은 귀족 남성의 교과서였고, 본인 또한 그런 자신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렇기에 항상 사교계의 마지막까지 남아서 제 품격을 뽐냈던 데큘레인이었건만······. 오늘은 이상했다. 그가 출구를 향해서 걷고 있었다. 심지어, 이미 겉옷까지 걸친 채로. 데큘레인의 그 기이한 경로를 귀족들은 멍하니 지켜보았다. 뚜벅, 뚜벅. 도도하게 울리는 발소리가 화려한 회장에 자욱이 가라앉았다. 귀족의 인파는 데큘레인이 가는 길을 비켜주었다.
적막한 공간, 모두의 마음 속에 여러 줄기의 의문이 피어올랐다. 데큘레인이 뭘 하는 거지?
설마 돌아가려는 건가?
벌써? 벌써 사교를 그만두고 떠난다고? 아직 해가 저물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왜? 아, 율리 때문에?
이토록 이질적인 사태에 그들이 눈만 깜빡이던 찰나. 데큘레인은 문 밖으로 나갔고, 그 소음의 공백에는 오직 초콜렛 분수 소리 뿐이었고, 고요 속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데큘레인의 갑작스러운 퇴장은 이윽고, 방금 율리의 발언과 맞물렸다. 파티는 그 가십을 장작 삼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 * [사이드 퀘스트 완료 : 사교 ‘새해의 꽃’ 참석] ◆ 상점 화폐 +0.5 ◆ 현재 상점 화폐 보유고 : 4.5 원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온 나를 시종들은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예상보다 훨씬 일찍 귀가한 모양이었다. 나는 시종들에게 넓지만 가구가 없는 공간, 예를 들어 창고같은 곳이 있느냐 물었고, 중년의 하녀장이 머뭇거리면서 안내했다. 이 대저택의 광활한 부지에는 내가 머무르는 본채는 물론 뒷산과 관상용 숲, 정원과 시종의 숙소 뿐만 아니라, 일전에는 창고로 썼다던 폐건물도 있었다.
“······더럽군.” 창고는 무슨 축구장의 절반만한 넓이였으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 온사방에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했다.
나는 그 더러움을 굳이 행동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먼지를 들이마실까 손으로 가린다거나, 기침을 한다거나 하는 행위 자체가 기품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밖에 있나.” 나는 자리에 서서 목소리만 밖으로 보냈다. 시종들은 금세 달려왔다.
“깨끗하게 치워라. 또, 금속 주괴를 가지고오도록.” “예.” 나는 뒷짐 진 채 청소를 지켜보았다. 과연 데큘레인의 시종들은 청소 실력이 뛰어났고, 이 거대한 공간도 고작 15 분 만에 광이 나도록 닦았다. “강철 주괴입니다. 원하시는 가구가 있으시다면—” 또한 금속도 금세 가지고 왔다. 대장간에서 공수했는지 인장이 찍혀 있었다. “됐다. 이제 가 쉬어라. 다만 앞으로는 내가 부르지 않는다면, 또한 내 허락이 없다면, 이곳에 무단으로 들어오지 말도록.” “예 알겠습니다.” 시종들은 등이 보이지 않게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완전히 확인한 뒤, 옷을 벗어 차곡차곡 허공에 개어두었다. 염동력 옷걸이였다.
나는 강철 주괴를 바닥에 떨궜다. 그리고 일전에 배운 「기초 금속 연성」을 사용했다. 내 마력에 닿은 강철은 기다랗게 솟았고, 곧 나에게도 아주 익숙한 기구, ‘철봉’ 이 되었다. 그 봉을 쥐고 운동을 시작하려던 찰나. “······.” 혹시 하는 마음에 「미다스의 손」을 철봉에 사용했다. 천(千) 단위 중 최다인 3,000 의 마력을 쏟아부었다. ──「 철봉 」── ◆ 정보 :연성 마법으로 만들어진 철봉.
:「미다스의 손」으로 인하여 지지력이 향상되었다. ◆ 범주 :기구 ⊃ 건강 ◆ 특수 효과 :이 기구로 운동하면 보다 좋은 효율을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 [ 미다스의 손 : 3 레벨 ] ──────── 운동의 효율 상승. 과연 ‘건강’이라는 범주에 알맞는 특수 효과다.
“······아주 다재다능한 특성이군.” 나는 만족스레 양 손을 뻗어 철봉을 쥐었다. 자세를 유지한 채 팔을 쫙 펴고 몸을 들어올렸다. 하나, 둘, 셋······.
팔이 후들거리며 미끄러졌다. 턱걸이는 세 번이 끝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원래도 다섯 번은 했었거늘······ 아니. 했었는데. 운동을 아예 안한 몸이라서 그런가.” 하긴 「철인」이라는 특성을 가지고도 마법에만 몰두했으니. 그 동안 너무 멍청했다. 다행히 근육은 금세 회복되었고, 나는 다시 봉을 쥐었다.
이제 두 번째 시도.
하나, 둘, 셋······ . 셋을 넘어 넷, 다섯, 여섯······ .
총 6 회.
그 횟수가 드라마틱하게 불어났다. 고작 한 번의 세트로, 육체 능력이 눈에 띄게 신장한 것이었다. 이게 바로 「철인」 의 성능.단 2 세트 만에, 데큘레인의 운동능력은 김우진의 그것을 초월했다. “요거 난감하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나는 그래도 웃으며 다시 철봉을 쥐었다.
소문. (3) 이튿날, 나는 이른 아침부터 대학마탑에 출근했다.
“ 「그을리는 불」 ······.” 집무실 의자에 앉아 알렌의 강의 정리본과 여러 마법서를 번갈아서 정독하고 있다.
대충 ‘원소 속성 마법’에 대한 강의를 어떤 식으로 해야할지, 그 방향성을 정립하는 중이다.
“이걸로 ‘순수 원소’를 설명하면 될듯하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마법의 한 분야─ ‘순수 원소’.
현대 학문으로 따지자면 순수수학의 해석학, 그 중에서도 미적분학만 극한으로 파고드는 심화과정인 셈인데, 「그을리는 불」 은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순수 원소 마법’의 한 종류다.
최소한 데뷰탄 수준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그을리는 불」의 구조를 의외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응용이 아닌 순수, 즉 한 분야만 파고드는 직선적인 과정에서는 「이해력」이 보다 최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해가 곧 습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을리는 불」을 최대한 쉽게 다듬은 뒤, ‘순수 원소’를 이해시키는 교본으로 활용할 생각이다.
“······수업 준비는 이쯤이면 되었고.” 스크립트를 작성한 뒤 강의 정리본을 덮었다. 그리고 수정구슬로 알렌을 불렀다.
“알렌. 잠시 오너라.” 한 5 초 뒤, 문이 열리며 알렌이 등장했다.
“네, 네 교수님.” 알렌은 빠릿빠릿하게 왔지만, 무척 피곤한 얼굴이었다. 다크서클이 무슨 판다처럼 되어 있었다.
“저번에 내가 부탁했던 건 알아 왔느냐?” “네에. 여기 있습니다.” 알렌은 로브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어떤 책자를 꺼냈다. 경매 카탈로그였다.
“다음 주 수요일, ‘루텐’의 경매장에서 설화석(雪花石)이 목록에 들었다고 합니다.” 나는 알렌에게 희귀 광석이 물품으로 올라온 경매가 있는지 찾아보라 일렀다.
카탈로그를 스윽 훑어보니 과연, 그 하단에 ‘설화석’이라는 금속이 있었다. 이는 나조차도 아는 설정, 세계 열 손가락에 꼽히는 금속이었다.
이 위에는 용의 뼈·용의 뿔 등등 거의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것들 뿐이니, 설화석은 ‘이론상 얻을 수 있는 최강’이라 하겠다.
“수고했다. 내 경매에 참여하겠다 일러라.” “네, 네에. 알겠습니다.” 알렌은 허리를 숙이고 돌아갔다.
참고로 내 개인 계좌의 보유 금액은 이미 확인해두었다. 이 세계에도 계좌와 카드 시스템은 발명되어 있었으니.
[205,238,039 ∃] 계좌의 잔액은 자그마치 2 억 엘네.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넘친다.
개인계좌이니 죄다 써도 별 탈이 없을 테고, 애당초 유크라인 가문은 영지가 사기라서 돈은 무지하게 많다는 설정이다.
왜 스포츠에서도 연고지가 좋으면 빅마켓이라 하여 성적이 안 좋아도 돈은 엄청 벌지 않는가.
“······생각해보면, 알렌은 고작 대학원생일 터인데.”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알렌은 평범한 대학교로 따지면 대학원생이다. 그리고 방금 내가 시킨 것들은, 지극히 사적인 일이고.
설상가상으로 지금 알렌의 다크서클이 나날이 짙어지는 이유는, 작년까지 업무를 분담하던 마법사들이 다 그만두었기 때문.
데큘레인의 인성이 탄로난 탓에, 웬만큼 하는 마탑 마법사들은 절대 내 휘하에 자원하지 않는다.
즉, 현대로 따지면 대학원생 전원의 업무는 물론, 교수의 사적인 일까지 알렌 혼자서 담당하고 있다는 거다.
“그렇게 비유하니 심각하다.” 계속 저렇게 놔두다가는 내가 칼맞아 죽거나, 알렌이 과로로 죽거나 둘 중 하나일 터.
앞으로는 알렌에게 더 잘 대해줘야 할듯하다. 사람도 좀 뽑고.
“저, 교수님.” 그렇게 생각하는데 알렌이 다시 들어왔다. 알렌은 두 손에 어떤 봉투를 쥐고 내밀었다.
“방금 마탑에서 공문이 왔습니다.” “그래. 이제 퇴근해서 편히 쉬거라.” “네, 네에.” 나는 쓸데없이 고풍스러운 그 봉투를 뜯었다. 공문 한 장이 있었다.
[ ······데큘레인 수석교수님께서 진행 중이신 ‘순수 원소의 창안과 그것을 토대로 한 사계열 마법’ 연구 진척을 감사하기 위한 청문회가 6 개월 뒤에 열립니다. 그때까지 관련 자료를 준비해주시길 바랍니다. ] “아.” 삐끗하면 교수 자리에서 짤릴 수 있는 분기였다.
이는 꽤 중요한 사건일 터인데, 데큘레인은 과연 그 동안 마법 연구를 했는가?
했다면 그 연구의 과정은 어디에 있는가.
······연구실.
* * * 데큘레인의 개인 연구실은 더러웠다. 아무렴 내가 데큘레인이 되기 훨씬 전부터 들어오지 않은 듯했다.
“······뭔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만.” 속는 셈 치고 연구실을 수색했다.
염동력으로 천장부터 구석까지. 정말 웬만한 곳들은 죄다 헤집었다.
온갖 물건과 먼지가 미친 듯이 날아다녔지만, 그렇게 아무리 찾아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다 불태운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연구를 한 적이 없는지.
나는 염동력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내부를 휘둘러보았다.
쓸데없이 넓은 공간, 천장의 거미줄, 정체 모를 액체가 부패 중인 시약병, 널브러진 연필, 마력 추출기······.그 모든 난장판 속 어느 한 지점.
연구실 바닥의 특정 타일에서 황금색 기포가 뻐끔거리며 올라왔다.
저곳이다.
나는 손 하나 까딱 않고 타일을 뒤집었다. 터덕거리며 뒤집힌 그 안에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대변 덩어리가 뚜껑처럼 덮혀 있었다.
데큘레인을 막기 위한 최고의 방어 기제였다.
물론 나에게도 성격이 옮았기에 잠깐 아찔했지만, 염동력으로 오물을 걷어냈다.
그 밑바닥에는, 낡고 헤진 서류 가방이 똥먼지와 뒤섞인 채 파묻혀 있었다.
데큘레인의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아마도, 데큘레인 대신 연구를 하던 마법사의 것이겠지.
나는 서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열었다. 똥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 잠시 머리가 아팠지만, 견뎌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역시 문서 다발이 있었다. 나는 염동력으로 가지고 와 손에 쥐었다.
똥냄새가 은은했다. 장갑을 끼고 있어서 다행이다.
“······암호인가.” 대략 70 장 분량의 문서에는 언뜻 ‘술식’ 보였다.
그것으로 마법과 관련된 내용임은 알았지만, 그 내용들이 전부 암호화되어 있었다.
“안 통하지.” 나는 「이해력」으로 암호를 해석했다.
마력이 뭉텅이로 소모되며 첫페이지부터 한줄 한줄 그 뜻이 드러났고, 그렇게 마법의 문서가 공개될수록, 나는 눈을 감아야만 했다.
눈이 부실 정도의 황금빛.
이 문서는 연구실 전체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랄 광채를 품고 있었다.
“······대단한 연구였나.” 다만, 완성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찢겨진 부분도 있었고, 텅 빈 단락도 있었으며, 아예 틀린 논리도 있었다.
나는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서류를 갈무리했다.
그러다 문득, 서류 가방의 구석에서 찰랑이는 어떤 악세사리를 발견했다.
펜던트였다.
이미 귀퉁이가 닳아버린 펜던트는 빛 바랜 사진 한 장을 간직하고 있었다.
“······.” 부녀의 사진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깨졌지만, 아이는 개구장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린 브이- 표시가 천진했다.
이 아이의 얼굴을 나는 알고 있다. 지금보다 너무 어리고, 귀엽고 앳된 얼굴이지만, 확실하다.
이프린 루나.
아마 이것이······ ‘루나’라는 마법사가 데큘레인에게 지닌 원한.
“······걱정 말아라. ”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 되어, 나는 중얼거렸다.
내 이해력이라면 너의 연구 전체를 정리하고, 해석하고, 흩어진 가닥을 규합하고, 또 네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발견하고, 계산하고, 통찰하여 보다 완벽하게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이 연구 논문을 완성하게 되면.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려주마.” 아쉽게도, 네 이름으로만 올릴 수는 없다. 나도 실적이 필요하니.
나는 문서들과 펜던트를 내 가방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 * * ······같은 시각. 새내기 마법사들은 대학 부지의 카페 ‘빛과 커피’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 평민끼리 뭉쳐야해. 동아리를 만들어야 된다는 거지.” 로브 차림의 그들은 저마다 고급 커피와 디저트를 자리에 두었으나, 오직 한 명.
이프린은 맹물이 고작이었다.
단것과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케이크를 먹는 동기들의 입만 구경하고 있었다.
“이번 기수에 평민 출신은 서른 명 밖에 안 되잖아? 뭉치지 않으면, 언젠가 억울한 일을 당할지도 몰라.” 동기 마법사 줄리아의 말이었다. 주황 머리의 부르주아 평민.
“이프린. 너도 가입할 거지?” “······응?” 맹물을 홀짝이던 이프린은 난데없는 제안에 당황했다.
“아니. 나는-” “이프린 너는 꼭 있어야 돼.” 줄리아가 커핏잔을 탁 내려놓고 말했다.
“너는, 그 실비아 한테도 대항했잖아? 나 소문 듣고 엄청 통쾌했어. 걔는 완전, 지가 무슨 공주인 줄 알잖아.” 이프린은 쓰게 웃었다.
그날 크게 다툰 이후로 무슨 실비아는 귀족 대표, 자신은 평민 대표, 이런 식으로 번지고 있었다.
자신도 어엿한 귀족인데 말이지. 부작위에 무영지이긴 하지만.
“그런데······. 그러려면 지도 교수님 허락이 필요하잖아······. 그분들은 우리가 모이는거 안 좋아하실 텐데······.” 소심한 인상의 귀여운 남자, ‘페릿’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줄리아도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그게 제일 큰 문제야.” 오직 평민으로만 이루어진 동아리.
서로 으쌰으쌰 하겠다는 취지는 좋다만, 교수의 허락을 받기가 힘들다.
동아리 창설을 위해서는 지도 교수 한 명이 꼭 필요한데, 교수 대부분이 귀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물론 평민 출신 교수도 있긴 있지만, 교수 임명을 받으면 ‘명예 귀족’ 이 되기에 진짜 귀족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렐린 교수님 어때?” 페릿이 좋은 생각 아니냐는 듯 눈을 번쩍 떴다.
줄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 뚱땡이 교수 소문 몰라? 귀족한테만 잘해주기로 유명하잖아. 선배들한테 들었는데, 평민이 이의제기하러 가면 받아주지도 않는대.” “아 그래? 착한 분인줄 알았는데······.” “그치?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딴 식이냐고.” 그들은 어떤 교수가 좋을지 토의했다.
그러나 같은 귀족 교수의 눈치를 보면서까지 평민 동아리 창설을 지도해줄 간 큰 작자는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
“······데큘레인 교수는 당연히 안 될 거고.” 론도라는 남자가 스치듯 중얼거렸다. 이프린은 흠칫 몸을 떨었다.
“아 맞아 그 교수!” 그러자 줄리아가 돌연 눈을 크게 뜨고 손가락을 튕겼다.
“적어도 그 사람은 귀족 평민 둘 다 똑같이 무시하잖아! 공평하지 않아?” 대체 그게 뭐가 공평하다는 건지. 이프린은 슬슬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탁자 위 가득한 커피와 디저트. 먹어야 한다.
애당초 나는 저 전리품(?)들을 노리고 무리에 끼어든 것이다.
얘네는 돈 많은 부르주아의 자식들이라서 분명 남길 텐데, 나는 이걸 먹지 않으면 오늘 통째로 굶어야 한단 말이다······.
“이프린! 네가 물어봐주라!” “······.” 그러다 불똥이 튀었다. 잠자코 케이크만 노리던 이프린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줄리아가 말했다.
“이프린 너, 소문 있던데? 데큘레인 교수 덕분에 징계 안 받았다면서.” “어? 아니. 아니야. 그 교수가 뭐, 그럴 사람이니? 그냥, 둘 다 좋게 좋게 끝난 거야.” “그래? 그러면······ 아 머리 아파. 누구한테 부탁할지는 나중에 결정하고, 이거나 쓰러 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줄리아가 ‘동아리 창설 계획서’를 펄럭였다.
바로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프린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미안. 나는 시간이 없어서, 너희 먼저-” “오늘 야식은 내가 쏠게 얘들아.” “······.” “응? 이피, 뭐라고 말 했어?” 야식.
얘네는 분별이 없으니 아마 이것저것 마구마구 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케이크 보다는 야식이 훨씬 더 큰 실리다.
애당초 맛 따지면서 먹는 처지도 아니라 배만 채우면 되고, 음식이 남으면 기숙사에 가지고 갈 수도 있으니까.
“······계획서 쓰는 거만 도와준다구.” 이프린은 입맛을 다시며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들 무리는 카페에서 나와 마탑으로 향했다. 줄리아는 계속 종이만 들여다보며 웅얼거렸다.
“우선 평민을 위한 동아리가 아닌 것처럼······ 그럼 속인다고 생각하려나······ 아 이거 복잡하네······. 어?” 머리를 긁적이던 줄리아는, 어딘가를 보았다가 눈을 크게 뜨고 굳었다. 줄리아 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야식은 뭘 먹을지, 오직 그것만 생각하던 이프린을 제외한 모두가 멈췄다. 그들은 그 자리에 나무처럼 선 채 숨만 가까스로 쉬었다.
저 멀리, 마침 이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언제 어디서 보아도 눈에 띄는 사람. 너무나도 완벽한 걸음걸이로, 세상의 어느 귀족보다도 더 귀족다운 몸짓으로······ ‘그’ 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 이프린! 부탁해!” “응? 뭘? 야식 메뉴?” 줄리아가 돌연 이프린의 손에 계획서를 넘겼다. “뭐야. 이걸 왜 날 줘?” 그리고, 어리둥절한 이프린의 등을 세게 떠밀었다. “─응!” 이유도 모른 채 튕겨나간 이프린은 곧, 누군가의 앞에 서게 되었다. 워낙 키가 큰 사람이라 처음에는 가슴팍밖에 보이지 않았다.
찰나, 이곳이 숲인 듯 산뜻한 바람이 불었다. 이내 풍겨오는 맑고 깨끗한 향기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프린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꿀꺽- 울대가 꿀렁였다. 맵시가 완벽한 양복의 앞섶, 귀족적인 넥타이와 그 직함을 알리는 순금의 휘장, 정갈한 옷깃과 날렵한 턱선, 그리고······.
마침내 그의 얼굴.
“······.”데큘레인.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어붙은 보석처럼 싸늘하게 빛나는 그 시선에, 이프린은 까무라칠 듯 놀랐다.
소문. (4) “아······. 그······.”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멘탈은 우주로 가버렸다. 빌어먹을 동기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프린도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려했다.
“비키거라.” 그런데, 딱 그 말에 오기가 생겨버렸다. 지가 비켜가지 왜 나한테 비키라 그래?
이프린은 입술을 꾹 깨물고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손에 쥔 종이를 일자로 들었다. “······저!” 한 손으로 하려고 그랬는데 세상 공손하게 두 손을 올려버렸다. 낭패였다.
“저······.” 데큘레인은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프린은 심호흡으로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동시에 다짐했다. 저 오만한 시선을,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내 힘으로 꺾어내겠노라고······.
“동아리를 창설하려 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 교수 한 분의 서명이 필요합니다.” 무안할만큼 반응이 없었지만, 이프린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절대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다른 교수 분들은 평민의 동아리를 탐탁잖아 하시기에, 서명만······.” 이프린은 거기까지 말하는 것으로 에너지를 전부 소모했다. 쭉 뻗은 양팔이 후들거렸다. 데큘레인의 알 수 없는 위압이 자신을 짓뭉개는 듯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데큘레인이 이프린이 내민 종이를 건네받았다. 무슨 말도 없이 그저 손만 뻗어서 홀랑 가져간 것이었다. “······헛.” 이프린은 숨 멎는 소리를 냈다. 데큘레인이 계획서를 읽고 있었다. 조마조마했다. 혹시 ‘어딜 감히 나에게 기어 오르는 것이냐─’ 며 저 종이를 찢어버릴까봐. 쫘아아악— 하는 환청도 들렸다.
그런데, 데큘레인은 품 속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조마조마했다. 혹시 ‘기대했나? 감히 평민들이─’라며 만년필로 종이를 찢어버릴까봐. 그런데, 데큘레인은 그 만년필로 서명을 했다. 조마조마했다. 혹시 ‘내가 이럴 줄 알았냐─’며 의기양양하게 사인한 종이를 찢어버릴까봐.
그런데, 데큘레인은 그러지 않았다. 다만 온전히, 자신의 손에 돌려줄 뿐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차후에 모두 집필하여 내 집무실로 전송하도록.” “······예?” 그리고는 자신을 지나치며 걸어갔다. 멍하니 있는 사이, 그의 향기는 서서히 옅어져갔다.
“······.” 이프린은 넋 나간 듯 서서 ‘동아리 창설 계획서’를 바라보았다. 서명이 있었다.
데큘레인의 서명.
······방심하지 말자. 혹시 시간이 흐르면 찢어지는 마법을 걸어뒀을 수도 있으니.
그러나 데큘레인이 멀어지고, 더 멀어지고, 이내 점처럼 보이지 않게 되어도, 종이는 온전했다. “와, 우와, 우와 우와 우와! 와! 대박!” 얄밉게 숨어 있었던 동기 놈들은 그제서야 나타났다.
“와 진짜 서명 받았어······ 이프린 너 간때기 진짜 크다.” “봐봐! 내 말이 맞지? 저 교수한테는 귀족도 평민이고, 평민도 귀족이라니까?! 다 똑같이 무시한다고!” 다들 웃으면서 난리였지만, 정작 이프린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최악이었다.
다시 한 번─물론 본의는 아니었으나─ 동정을 갈구하고 말았으니.
화가 치밀었다. 온몸에 열기가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데큘레인에게 묻고 싶었다. 왜 자꾸 나에게만 이리 너그러운 것이냐고. 당신이 나에게 느끼는 그 알량한 동정과 연민 따위는 전혀 필요 없다고.
오히려 우스울 뿐이라고. 그깟 사사로운 정념들, 당신 스스로 물리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아니, 정말 진심으로 미안하다면, 당신의 잘못을 온 세상에 고백하고, 내 아버지에게 사죄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이피, 너도 가입 할 거지?” 줄리아가 눈치 없이 물었다. 이프린은 주먹을 아득 쥐고 돌아서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안 해. 그리고 너, 한 번만 더 그딴식으로 밀어봐. 진짜 크게 혼날 줄 알아.” 싸늘하게 밀어냈지만, 줄리아의 신경은 이미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아~ 아니지. 가입이 뭐야. 이피, 네 덕분에 창설하는 건데, 네가 부장해라!” “이런 미친.” 얘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이프린은 기가 차서 어깨를 떨었다. “야. 나 안 한다고 했어 분명히-” 그러나.
“맞다. 오늘은 경사니까, 내가 더 크게 쏠게! 우리 가게 갈래? 아빠가 로아호크 멧돼지 공수해왔는데.” “······.” 로아호크 멧돼지. 그 돼지를 이프린은 여태 먹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이프린이 아니어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었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등급의 고급 돼지. 유프란 깻잎만 먹고 자란, 나보다도 팔자가 좋은 놈들. 고기를 씹자마자 육즙이 팍 튀고, 그 육질은 세상 어느 고기보다 부드럽다는······.“······이피! 너도 갈 거지?!” “싫어. 안 가.” 이프린은 자존심을 부렸다. 입술을 삐죽이며 짐짓 화난 체하니, 줄리아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아 미안해 미안해. 깜짝 놀랐지? 나도 너무 당황해서 그랬어. 그러지 말구, 한 번만 같이 가자.” 그 되물음이 이프린은 고마웠다. “······그럼 가던가. 대신 다음부터 이런 짓거리는 하지마.” “아 당연하지~ 가자 가자~” “너네 취지가 좋은 것 같아서 내가 일부러-” “알지 알지. 가자 가자~” 줄리아는 이프린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그렇게, 못내 끌려온 척 도착한 줄리아의 식당 [돼지의 꽃].
간판은 물론 내부도 고급스러운 티가 팍팍 나는 그 식당은 맛있었고, 맛잇었으며, 맛있었다. 특히 로아호크 멧돼지의 그 황홀한 맛은······ 일평생 동안 입안에 간직하고 싶을 정도였다.
* * * 3 월의 마지막 목요일, 유크라인 대저택의 별채. 운동장과 단련실로 완전히 개축되어 볕도 들지 않는 그곳에서, 나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격한 운동으로 거울에 비치는 전신은 땀 범벅인지 오래. 원래의 나였다면 신경 쓰지도 않았겠지만, 바뀐 성격 탓에 벌레가 온몸을 기어가는 듯했다. 딱─!
나는 공통 계열의 기초 마법을 사용했다. 3 획의 마법인지라 손가락 튕기는 것만으로도 발현할 수 있었다.
이름 하야 ‘클린즈’. 온몸의 땀과 먼지를 허공에 끌어모아서 떼어내는, 샤워 전의 임시 방편이다. 그것으로 대충 몸을 닦고 시계를 보았다.
오전 6 시.
새벽 4 시에 기상했으니 두 시간 가량 지났다. 매일같이 새벽 운동을 시작한 지는 약 5 일 정도가 되었고. 나는 전신 거울로 내 몸을 보았다. 운동의 효과가 선명했다. 온몸의 근육이 실전적이고도 완벽하게, 다만 너무 크거나 둔하지는 않게, 조각상의 그것과도 별반 다르지 않게 조각되었다. 단연 「철인」 덕분이었다. 어떤 운동이든 어렵지 않았고, 근육통이 있어도 금세 회복 되었으니. 이렇게 한 두어달만 꾸준히 노력하면, 순수 운동능력으로 그 대단하다는 NFL·NBA 선수들도 쉬이 뛰어넘을 수 있을 듯하다.
“이제 다음 루틴은······.” ‘이기어검’.
나는 일전에 대장간에 의뢰했던 애장을 꺼냈다. 다만 그 숫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꽤 많았다. 정확히 스무 자루.
재료는 목강철(木鋼鐵). 나무의 색감과 중량을 계승했지만, 그런 주제에 강철보다 단단한 최고급 금속. 그것으로 제작한 무장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날카로운 팔면체’다. 내 팔뚝의 절반만한 크기에 수리검과 흡사하지만 손잡이가 없고 양측이 모두 검날, 즉 좌우대칭인 형상이라 하면 옳다.이 무기는 모든 면이 날카롭고, 모든 점이 뾰족하여 염동력으로 다루기에는 아주 효율적이다.
찌르기, 베기, 관통, 사출, 모든 공격에 용이할 뿐더러, 유사시에는 방패로 만들어 수비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으니.
아무튼, 대충 수리검인데 설화석을 사기 전까지만 쓸 애장이다. 설화석도 물론 이것처럼 가공할 생각이고. “떠올라라.” 그 한마디에 수리검 스무 자루가 떠올랐다.
고오오오오······.
다수의 수리검은 금세 비행하였으나, 서로 충돌하고 지랄하고 난리 부르스를 떨었다. 캥─ 챙─! 탱─! 창─! 콰직─!
지붕과 기둥이 박살났다. 나는 황급히 그 개수를 열로 줄였다. 역시 아직은 익숙하지 않다. 목강철이라는 금속 자체가 너무 고급인 것도 있고. 열의 수리검 중 다섯은 우측 사선으로, 나머지는 좌측 사선으로 띄웠다. 열 자루의 수리검은 마치 성냥탑 쌓듯이 허공을 횡단했다. 숫자를 줄이니 좀 정교하게 움직이는가······ 싶었는데. 속도를 올리자 팅─! 두 자루가 서로 부딪히며 튕겨나갔다.
“······!” 한 자루에 어깨를 베였다. 씨발. 입으로 웅얼거리다가 참았다. 그러나 뒤이어 다른 자루가 똑같이 솟구치더니 허벅지를 찔렀다.
“······좆같이 아프다.” 이번 건 너무 아파서 참을 수 없었다. 수리검 열 자루의 속도가 각각 달라서 발생한 참사였다. 덕분에 파괴력은 알았다. 이것으로 사람 한 명은 우습게 죽일 수 있다. “······흡!” 크게 호흡하며 허벅지에 꽂힌 수리검을 뺐다. 피가 철철 흐르지만, 치료는 필요 없다. 나는 철인이다. 마력이든 체력이든, 회복 속도는 인간 이상이라는 것이다.
“한 번 더.” 허벅지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수리검 열 자루를 다시 염동으로 떠올렸다. 채앵─! 그 중 하나가 갑자기 나뒹굴며 내 어깨를 찔렀다. “······!” 뒤지게 아프다. 하지만 이를 악문다거나, 괴성을 내지른다거나, 눈을 부릅 뜬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다. 아니, 못한다. 악악 부르짖고 싶어도 나오지가 않는다. “제깟 수리검 따위가······.” 오히려 분노할 뿐이다. 감히 수리검, 한낱 무기에 불과한 놈이 내 통제를 따르지 않으려 하다니. 너희는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다. 나는 내가 이길 때까지, 단언컨데 이길 때까지 할 것이다······. 성격 「승부욕」에 발동이 걸렸다. 왜 몸으로 배운다, 는 유명한 격언도 있지 않은가. 내 몸이 아플수록 숙련도는 가파르게 오를 테니, 손해볼 것은 없다. ······그 날.
나는 정확히 108 번 베이고 13 번 찔린 뒤 훈련을 끝냈다. 물론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고 내 여력도 남았으나, 당장 오후 3 시부터 강의이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 * * 오후 3 시, 마탑의 A Class 강의실. 이전 수업과는 달리 평범하게 넓은 그곳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긴장감이 팽팽했다. 그 원인은 역시 실비아와 이프린. 두 사람이 치고 박고 싸운 뒤의 첫 강의이기에.
“······큼. 큼큼.” 이프린은 실비아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자꾸 눈이 그쪽으로 흘렀고, 실비아는 이프린에게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파벌은 갈렸다. 평민 출신은 이프린의 곁에 앉아서 그녀를 지지하는 눈치였고, 귀족들은 실비아 쪽에서 이프린을 괄시하는 느낌이었다. 그 목죄일 듯한 분위기에 저마다 불편함을 느끼던 와중, 드르르륵─ 강의실의 문이 열리고 수석교수 데큘레인이 등장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완벽한 옷차림이었다.
이프린은 저도 모르게 펜을 꽉 쥐었다. 당장 어젯밤 아버지의 편지를 읽으며 분노를 충전(?)하였기에,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데큘레인이 드넓은 강의실의 교단에 올랐다. 그는 습관처럼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교탁에 자료를 내려놓았다 . “반갑다.” 그 시크한 어조에 모두가 반사적으로 인사했다. “오늘은 ‘순수 원소’의 이해와 직결된 강의를 진행할 것이다.” 마법사들은 원서를 펼쳤다. 오늘은 평범한 실내 강의라기에, 저마다 데큘레인이 집필한 [원소의 이해]라는 저술을 들고온 것이었다. 참고로 이프린은 돈이 없어서 못샀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원소’는 거의 모든 마법의 기본이나 다름 없는 속성이다. 허나, 아직도 ‘계열 마법’과 ‘순수 원소’의 차이를 헷갈려하는 마법사들이 많다.” 일례로 ‘속성’이 먼저고, ‘계열’이 다음이다. 예를 들어 불을 만드는 행위. 그 자체는 ‘순수 원소’다. 그렇게 만든 불을 뿜어내는 행위. 그것이 ‘파괴 계열’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너희에게 이 마법을 가르치고자 한다.” 마법사들의 손이 분주해졌다.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원서를 이리저리 뒤적였다. 그의 저술 어디에도 오늘 강의와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강의실이 소등되었다. 어두운 허공에 어떤 마법의 술식과 그 이름이 떠올랐다 「그을리는 불」 “어?” “응?” 모두가 놀랐다. 「그을리는 불」은 ‘순수 원소’ 중에서도 그 난이도가 극악인 축에 속했기에.
“놀랄 것 없다. 이 마법을 익히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마법에 비하면 자네들의 기량이 부족하지. 「그을리는 불」은 다만 교본일 뿐이다.” 데큘레인은 태연히 강의를 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평범한 발화를 위해서는 여덟 개의 선이면 충분하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공중에 불이 솟았다. 데큘레인의 마법이었다. 그의 불꽃은 쓸데없이 우아하게 일렁였다. “그러나 이 「그을리는 불」에는 88 개의 선이 필요하지.”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는 불.
대량 학살과 방화에 이용되는 이 중상급 마법은, 순수하게 ‘점화’에만 88 획이 필요하다. 공격적으로 이용하고자 한다면 거기에 60 획이 더 추가되고. “왜 그런지 의문을 가져본 사람은 없나? 그저 신기한 불이기 때문에? 아니면 말만 ‘순수 원소’지 조작이나 환혹의 계열이 뒤섞인 듯하기에?” 모두 눈만 깜빡거렸다. “한데 왜 계열이 섞였으면서도 계열이 아닌 ‘순수 원소’로 분류된 것이지?
이 순수 원소는 대체 무엇이기에 이리 의문 투성이인가?” 그의 강의에는 요상한 흡인력이 있었다. “자네들은 그런 의문도 없이 살아왔겠지. 이론은 재료일 뿐이고, 오롯이 자신의 직관으로 마법을 익혔을 테니.” 그때 천장에 불이 번졌다. 붉은 불이었다. 그러나 곧 푸른 불이 되었고, 이내 검은 불이 되었다. 마법사 백오십 명의 눈이 멍하니 깜빡였다. “너희는, ‘불’이라는 순수한 원소의 술식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윽고, 훨씬 단순한 술식이 영사되었다.
여덟 선의 「불」이었다.
그 시점부터─ 강의를 보고 듣기만 하던 이프린을 포함한 다수의 마법사들은 자연스레 필기구를 꺼냈다. 반면 실비아는 고집을 부렸다. 내 너에게 배울 것은 없다. 이론이든 직관이든, 너는 나에게 그 무엇도 가르칠 수 없다······. 아직도 삐친 탓이었다. “잘 보아라. 「불」의 술식에 이 가느다란 선 두 가닥을 추가하면, 색을 바꿀 수 있다. 이 두 선이 바로 색을 다루는 것이다.” 붉은 것을 푸르게, 두 개의 선.
“네 개의 선을 추가하면 보다 큰 불을 피울 수 있지.” 불을 더욱 파괴적이게, 네 개의 선.
“그런데, 여기서 일곱개의 선을 추가한 불은. 갑자기 ‘흐른다’.” 환상처럼 불꽃이 아래로 흘렀다. 마그마 따위가 아니었다. 정말로 불이 ‘흐르고’ 있었다.
“······.” 그쯤 되니, 애써 무시하려던 실비아도 조금씩 조바심이 났다. 예상 외의 내용에 손이 근질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데큘레인의 강의는 지극히 ‘이론적’이었다.
보통 엘리트, 즉 천재라 하는 마법사들은 자신의 직관으로 마법을 구사한다.
이론으로는 큰 틀만 잡을 뿐이고, 그 디테일은 오직 자신의 감으로 구현하는 것이다.만약 마법사들이 죄다 이론적이었다면 모든 마법이 복사 붙여넣기를 한듯 틀에 박혔을 테지.
실비아도 그런 천재의 부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애당초 그녀의 속성은 원소가 아닌 기원(起源)이었으니. 복잡하기만 한 순수 원소의 이론 따위, 알 턱이 없었다.
또한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론에 너무 치우치면 마법을 배울 시간이 부족하다. 선 하나 하나에 마력은 이만큼 이만큼. 이 회로는 어떤 기능, 저 회로는 어떤 기능. 그딴 것들을 전부 이론으로 이해하려면 마법 하나 ‘메모라이즈’하는 데에도 한 세월일 뿐더러, 실전적인 수련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이 일곱개의 선을 다시 보아라.” 이른바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는 직관이 뛰어나야 한다. 그러나 엘리트들은 자신의 직관을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이론이 뛰어나야 한다. 그러나 정작 이론이 뛰어난 자들은 이론에 매몰되어, 혹은 직관이 부족하여 중급 이상의 마법을 구현하지 못하기에, 엘리트가 아니다. 그렇기에 교수들은 어쩌면 반쪽 짜리다. 이론적인 틀만 잡아주면 어린 마법사들은 감을 잡을 수 있을 텐데, 그들도 이론 없이 직관으로만 설명할 뿐이니.
데큘레인은 아니다.
“이 일곱 개의 선, 즉 술식이 ‘불을 흐르게’ 만들었다. 한데 이 술식은 어디서 본 적 있는 형태일 것이다.” 그녀는 데큘레인의 다음 말을 알 것 같았다. 물[水].
물이라는 원소의 성질을 마법적으로 분리하여 불에 부여했기에, 불이 물의 성질처럼 ‘흐르는’ 것이었다. 이것이, 순수 원소의 조합. “그렇다. 이 술식은 물의 속성이다. 불과 물. 이러한 순수 원소의 조합은 실행하기 아주 어렵지만, 원리만 알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순간─ 실비아는 제 등허리에 오르는 소름을 느꼈다.
예상치 못한 대상이라 너무 기이하고, 너무 오랜만이라서 낯설어진 경험.
지금 나는─ 배우고 있다.
데큘레인에게서, 배움을 느끼고 있다.
다만 유일한 문제는, 실비아 자신이 필기구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점.
공부가 되지도 않을 것이라며 일부러 고집을 부린 탓이었다. 아닌 말로, 재능 좋은 신입 마법사들을 질투한다는 데큘레인이 이런 강의를 준비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도 질투만 당할 줄 알았는데.
“······.” A Class 강의실의 모두는 이미 홀린 듯 데큘레인에게 집중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필기를 하고 있는데, 나만 안 하고 있다. 조바심이 났다.
이 강의는 너희 따위보다 내가 훨씬 더 잘 적용할 수 있는데. 훨씬 더 깊이 배울 수 있는데. 왜 너희만 공부하는 거야.
안절부절하던 실비아는 조심스레 손가락을 뻗었다. 옆자리에 어떤 여자 마법사가 필통을 내팽개쳐두고 있었으니, 거미가 먹이를 노리듯 천천히. 그러던 찰나─ 눈이 살짝 마주쳤다. 여인은 금세 수업에 집중했지만, 실비아는 제 행동이 들켰다는 수치심에 어쩔 줄을 몰랐다. “······.” 이를 악물며 고뇌하던 실비아는 하는 수 없이 마력을 발현했다. 마력의 파동이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녀의 단전에서 기원(起源)한 마력은 혈관을 타고 말초까지 솟아 손가락으로 빠져나왔다. 그저 푸르기만 했던 그것은 곧 다채로운 색을 머금더니, 길고 뭉툭한 어떤 필기구의 형상을 이루었다. 연필이었다. “그러므로, 이 「그을린 불」 의 속성은 아주 복합적이라 할 수 있다.” 소리 없이 흔들거리는 것은 바람. 형체 없이 피어오르는 것은 연기(煙氣), 즉 불과 물.
세 속성이 결합되어 「그을리는 불」.
“불과 물과 바람의 세 원소가 순수하게 결합되었기에 순수 원소 마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그을리는 불」을 간소화해보도록 하겠다. 구현을 위해서는 어떤 계산이 필요한가 보도록 하지.” 실비아는 수업에 열중했다. 오랜만에 ‘선생’이라 부를만한 교수의 얼굴과 목소리와 그 가르침에, 온 정신을 쏟아부었다. 언젠가, 아주 어렸을 적에 잃었던 그 순수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되찾은 채로······.
경매. (1) “끝이다. 나머지 이해는 스스로 구하도록.” 강의가 끝났다. 세 시간의 수업을 마친 데큘레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실비아는 그 등을 따라가려다가 멈칫했다. 질문할 부분이 있었으나, 자존심이 거기까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 실비아는 그저 자리에 앉아 명상과 천착을 시작했다. 이론과 직관. 둘 다 겸비한 교수는 흔치 않지만, 고작 그것만으로 데큘레인에게 매달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론은 ‘틀’일 뿐이다. 그마저도 ‘흔들리는’ 규격에 불과하다.
마법은 마력에 의한 변화무쌍한 흐름이기에, 태생부터가 이론에 얽매일 수 없는 것이다.
가정해보라. 만약 던전이나 결계 내부에서 마력의 질이 돌변한다면? 이론은 흔들릴 수 밖에 없다. 마법의 술식을 통째로 뒤트는 마력 폭풍이 발생하면? 휘몰아치는 마력 재해 앞에서는? 마력 폭발이 일어난 직후의 불완전한 대기 속에서는?
그 급전직하(急轉直下)의 한복판에서도 이론은 과연 일정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마법사에게 이론은 다만 불완전한 것이다. 언제나 옳았던 이론이 한순간 틀리게 될 수 있고, 해발고도에 따라서 아예 새로운 이론을 짜맞춰야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마법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오직, 스스로의 완벽한 ‘직관’ 뿐.
정점에 달한 감각은 곧 그 자체가 법칙으로 군림할 테니.
“······.” 실비아는 한동안 앉아서 자신의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그녀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이론조차도 자신의 직관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 문제의 해답은 누군가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이. “······.” 작은 삼각형. 그것을 감싸는 큰 역삼각형. 그 두 도형을 더욱 커다랗게 품는 원. 총 여섯의 직선과 하나의 곡선으로 이루어진 순수 원소, 물. 그 물과 불의 조합.
데큘레인의 설명을 귓속에 재생하며 치열하게 사고한다. 그가 제시한 이론의 틀을, 자신은 삼원색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 원소의 조합을 그림처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론은 그저 ‘길’ 에 불과하다. 걷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므로······.
“······.” ······낭패다.
마법사 전용 노트가 필요하다. 역시, 평범한 미술 노트로는 한계가 있다. 마법진의 술식과 회로의 흐름을 어느 정도는 자동으로 출력해주는 마법사 전용 노트. 그것에 자신의 필기를 옮겨 적어야 한다.
“······.”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삼원색은 이 현상계(現象界)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는 것. 물론 연필은 제 손에 쥐어진 한 영원히 유지된다. 하지만 노트에 달라붙어 글씨를 이룬 연필의 흑연은, 1 시간이면 흩어지고 만다.
“······.” 반면 강의의 분량은 자그마치 60 페이지. 지금 당장 마법 노트를 구한다 하더라도, 베껴쓰는 와중에 모조리 휘발되고 말 것이었다.“······.” 실비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데큘레인의 강의가 그들에게 어떤 학습욕을 복돋아주었나. “······.” 깜빡이는 눈으로 노트와 연필을 번갈아보며 고뇌해봤지만, 도저히 답이 없었다. 실비아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쩌지.” 이대로 가면 노트 필기가 사라진다. 마법사 노트에 옮겨 적는다 하여도 내용의 손실은 필연적이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 떠오르는 타개책은······ 교수에게 직접 질문을 하거나, 노트 필기를 ‘열심히‘, ‘잘‘ 한 사람을 구하는 것 뿐. * * * 마탑 도서관 A 열의 3 석. 이프린은 세 시간에 걸친 복습을 끝냈다. 몽롱한 눈으로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이 넘었다.
“······내가 이런 걸 만들 줄이야.” 멍하니 중얼거리며 제 노트를 보았다.
[데큘레인 강의 노트 정리] 오늘 먹을 빵 대신 노트를 사서 강의를 기록한 것이었다. “뭘까, 원래는 안 이랬다던데.” 의자에 늘어진 채 한숨처럼 읊조렸다. 아닌 말로, 데큘레인의 강의는 예로부터 악명이 자자했다.
언뜻 설명을 잘 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자기자랑이고, 자기가 집필한 책을 안 사면─5 천 엘네나 한다!─ 눈치를 주고, 그러는 주제에 시험·과제는 드럽게 어렵고······ 수석교수의 강의인데도 수강신청이 비교적 널널했던 이유다.
한데 오늘 데큘레인의 강의는 그렇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깎아내리고 싶었지만, 다른 교수와 비교해도 그 질적 차원이 달랐다. 정말로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이프린은 순수 원소 마법이 왜 ‘순수 원소’인지 명쾌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카데미 출신이 아닌 그녀는 마법 이론서 하나 안 보고 제멋대로 사용해왔기에.
이프린 본인이 가장 간지러워하고 있던, 속된 말로 그 ‘무식한 공백’을, 데큘레인이 채워준 것이다.
“자존심 상하게······.” 아니지, 자존심 상할 게 없지. 네 지식을 흡수하여 너보다 강해지면 그건 너한테도 굴욕일 걸? “맞네. 그게 맞네. 흐으으앙~” 저 혼자 납득한 이프린은 크게 기지개를 켜고 밖으로 나왔다. 기숙관으로 돌아가는 길, 노상에서 핫도그를 먹는 학부생들이 보였다. ······맛있겠다.
이프린은 주머니를 뒤적였다. 땡전 한 푼 없었다. 밥 먹을 돈으로 공책을 산 탓이었다. 대학 마법사는 ‘마법 노트’라는 특별한 노트를 쓰는지라 필기구 값도 어마어마했으니.
“어! 이피다! 이피!”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괴상한 이름을 불렀다. “이피!” 저 이피는 분명 나다. 아니 근데 왜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줄여서 부르냐고. 이프린은 퉁명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다비라는 이름의 연분홍 머리 여자, 제 1마법학과의 데뷰탄 과대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이피, 이피! 너 데큘레인 교수 수업 듣지?” “응. 그런데.” 얘는 친하지도 않은데 왜 저딴 별명으로 날 부르지? 심기가 불편했지만, 정작 다비는 능글맞게 웃으며 단도진입적으로 물었다. “그거, 필기한 거 있어?” “······응?” 이프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오늘 위자보드에 올라왔거든. 데큘레인 수석교수 강의가 엄청 좋았다고. 그래서 지금 찾아다니고 있는데, 필기한 거 있으면 내가 살게.
복사만 해주라.” 산다. 돈. 필기. 복사. 내 노트를 돈 주고 산다. 오늘 자신을 밥 먹게 해줄 수도 있는 그 단어들이 이프린의 흥미를 끌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은데······ 나 알잖아. 징계위 얼마 안 지난거. 심약해서 수업 제대로 듣지도 못했어.” 교수 데큘레인의 강의를 그토록 열심히 복습했다는, 그 사실 자체를 들키기 싫었다. “아 그래? 그러면······ 뭐. 어쩔 수 없지.” 다비가 코끝을 찌푸렸다. 이프린은 쓰게 웃었다. “미안.” “다른 평민애한테 가봐야겠네. 잘 있어~” 그러더니 금세 떠나갔다. 떠나면서 ‘저런 애들은 진짜 굴러 들어온 행운도 못 잡네~’ 라고 중얼거리는 꼴이 가여웠다.
아니 다른 평민애한테 간다는 걸 보니, 돈 없는 녀석만 골라 찾아가는가보지? 근데 난 평민이 아니라 귀족이라니까?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한 번만 더 제안했으면 넘어갔을 텐데.
꼬르륵─ 이프린은 주린 배를 움켜쥔 채 걸었다. 그렇게 비척비척 걸어가다가, 웬걸.
길목에서 또 다른 사람과 맞딱뜨렸다.
“······어?” 그 로브부터가 최고급 벨벳으로 이루어진 금발의 마법사. 누가 봐도 귀족스러운 대가문의 여식. 실비아였다. “······.” 그녀는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길의 한 가운데에 가만히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머뭇머뭇 걸어가던 이프린은 어떤 싸늘함을 느꼈다. 하여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멈춰섰다. “너 여기서 뭐하세요?” 이프린이 물었다. 실비아는 대답 없이, 이프린의 손에 쥐어진 노트를 응시했다. “······.” “저기요?” 지이이이잉── 레이저처럼 시선을 보내다가, 홱! 난데없이 손을 뻗었다. 이프린은 순간 놀라서 노트를 등 뒤로 숨겼다.
“뭐, 뭐야 너─ 응!” 실비아는 한 번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노트를 낚아채려는 갈퀴처럼, 손아귀를 세 번 정도 격하게 휘젓고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이프린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너, 뭐야? 진짜 뭐하세요? 깡패로 전직했냐?” “······.” 실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더니 빙글- 돌아서서 또각 또각 떠나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 형상은 가히 귀신이었다. “와 소름돋네. 쟤 뭐야······.” 싸이코패스도 아니고. 혹시라도 또 습격해올까, 이프린은 노트를 품에 안은 채 조심스레 기숙관으로 돌아왔다. 꼬르륵─ 꼬르르르륵─ 뱃고동이 기숙관 복도에서 요동쳤다.
“어후······ 진짜 마법사 최초로 아사하겠다 아사. 밥 좀 공짜로 주면 뭐 덧나나 돈도 많이 벌면서.” 학비랑 기숙사가 공짜인 게 그나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어도 오래전에 죽었어. 터덜터덜, 투덜거리며 복도를 걸어 제 방문 앞에 섰는데. “······와. 진짜 유치하다.” 이프린은 질린 투로 중얼거렸다. 문에 붉은 낙서가 가득했다. [ 네가 뭔데? 감히 까불어? ] [ 아카데미 출신도 아닌게! 이 천한 것아! ] [ 마탑에서 꺼져! 병신! ] 따위의, 실비아의 팬으로 추정되는 자들이 마커로 지껄여놓은 것이었다.
“찌질한 것들아, 진짜 찌질하다.” 쯧. 마법으로 금세 지워내고 문을 열었는데, 방바닥에 웬 편지 봉투가 있었다. 힐끗 보니 대학마탑의 [후원 증서]였다.
“······이건 좀 지능적이었어.” 순간 심장이 덜컹였다가 가라앉았다. 후원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일레이드랑 데큘레인 양가에 찍힌 나를 어떤 미친 놈이 후원해. 지능적이지만 조금 더 똑똑했으면 좋았을 걸. 거지라는 소문이 벌써 파다하다는 건 마음 아프긴 하네.
[마탑후원증서]■ 대상 : 데뷰탄 이프린 루나 ■ 금액 : 100,000 ∃ “십만 엘네? 이거 완전 미친놈아냐?” 어차피 후원이 없을 것을 알고 후원 최대치인 1 천만 엘네까지 설정했다. 그런데 10 만 엘네 후원이라니. 할 거면 제대로 하던······가······ 으음······ 위조치고는 정교하긴 한데······.
뭐야, 이 미친 녀석 인장까지 위조했네? 이건 바로 신고감이다.
“현상금은 받겠네.” 고맙다 아가야. 너는 죽었다. 입가를 뒤튼 이프린은 곧바로 기숙관 근처의 마법행정관으로 향했다. “저기, 근데요. 저 이거 신고 좀 하려고 왔는데요.” “신고요?” 카운터의 직원은 타자기를 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누가 이걸 위조해서 저한테 넣었어요.” “위조요?” “네. 인장까지 위조했어요. 저를 놀리려고 그랬나봐요.” “······네? 아, 네. 한 번 확인해보겠습니다.” “그거 현상금 같은거 있죠?” “아뇨 없는데요.” “아······” 이프린은 뒷목을 긁적이면서 기다렸다. 그렇게······. 3 분 뒤.
“······.” 이프린은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이 되어 털레털레 행정관 밖으로 나왔다. 그 손에는 후원 증서 한 장이 덜렁 쥐어져 있었다.
“이······.” 두 손으로 후원 증서를 쥐고 들여다보았다.
“이거······ 이거 꿈인가?” 10 만 엘네. 제 뺨을 때렸다. 10 만 엘네. 무지하게 아팠다. 10 만 엘네.
진짜 10 만 엘네다.
흠칫─ 스치는 바람에 몸을 떤 이프린은 주변 눈치를 살피며 증서를 품 안에 넣었다.
누가 봤을 수도 있다. 내가 10 만 엘네를 가지고 있다는 걸. 도둑이 찾아올 수도 있다. 내 10 만 엘네를 훔쳐가하려고.
어서, 은행으로 가야 한다. 온 사방을 경계하며 살금살금 걷던 이프린은 이내, 더 움직일 수가 없어 길가에 쪼그려 앉고 말았다. 뭔가, 심장 안에서 울컥거리는 것들이 자신의 운신을 방해하고 있었다. “······끄.” 이프린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상태로 이를 악물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참으려했는데 참아지지 않았다. “끅.”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마도가의 견제조차 무시하고, 내 재능을 알아준 사람이 있었나. 근데 어떻게 알았지.
몰라 나도.
“끄으윽······ 끄으읏······.” 우는 건지 그르렁거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짐승의 소리. 길바닥에 흐르는 괴이한 울음 이프린은 한동안 그렇게, 견디기 힘든 눈물을 억지로 삭여내며 울었다. * * * ······싱그러운 4 월의 첫번째 주말. 참석을 약속했던 경매, 즉 설화석을 구매하는 당일이 되어, 나는 차를 타고 경매장이 위치한 도시 ‘루텐’에 도착했다. “루텐에 진입했습니다. 샤츠인젤까지는 5 분이면 도착할 듯합니다.” 운전기사가 말했다. “그래. 수고했다. 도착하면 편히 쉬며 기다리도록.” “예? 아, 예! 감사합니다!”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상업 도시 중 하나라는 ‘루텐’의 거리는 과연 삐까번쩍했다. 현대만큼은 아니었지만 고층 건물이 많았고, 어떤 길목은 통째로 명품관과 보석상 뿐이었다.
우리는 그 화려한 거리를 지나 목적지, 연안가에 건축된 경매장으로 향했다. [루텐 샤츠인젤] 간판에 새겨진 그 언어를 나는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었다. 과연 모티브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였던만큼, 샤츠인젤의 위세는 대단했다.
나는 경매장의 입구, 즉 바다로 이어지는 지상에서 수행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렸다. 온몸이 상처 투성인지라 거동이 조금 힘들었다. 대저택에서 한창 수리검을 다루다 왔기에. “이곳입니다, 데큘레인 수석교수 님.” VVIP 전용 통로로 진입하여 대기실에 도착했다. “시간이 되면 따로 안내해드릴 테니, 편히 쉬고 계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의자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예상 밖의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언제 어디서 보더라도 눈에 띄는, 신비로운 색감의 애쉬 그레이 머리카락.
또한 하얀 경갑 차림의 기사. 왜 파티장에서도 모자라 경매장에서까지 갑옷 차림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율리였다.
설마 경매장에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지.
그녀는 대기실 한복판에 서있다가 나를 보더니 터벅터벅 다가왔다. 과연 기사의 걸음걸이였다. 나는 눈인사로 그녀를 맞이했다.
“이번에, 마법사 두 명을 징계 위원회에 회부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율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런 율리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무슨 참견을 하러 온듯했다. “자네는 귀가 느리군. 그걸 이제야 들은 건가.” “느리다니요. 어제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그렇다. 그 또한 내 잘못이라 할 셈인가?” “······.” 율리는 말문이 막힌 기색이었다. 상황을 잘 모르니 무슨 말을 하기 애매한 것이겠지. 그녀는 다만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데뷰탄입니다. 이제 막 마탑에 입학하여, 꿈과 희망에 젖어 있을 새내기들입니다. 그들에게 절망이 되지 마십시오. 과거를 되풀이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업보로써 되돌아올 것입니다. 이건, 제가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충고입니다.” 마지막. 그 단어는 어떤 종지부와 다름이 없었다. 율리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이었다.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율리가 아무리 멋지고 아름다운 기사라 한들, 고작 그런 이유로 현생에서도 못해본 결혼을 하기는 싫었으니.
······또, 농담이 아니라 결혼식장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녀 주변에는 사망 변수가 그득그득하니. 특히 율리보다도 그 언니라는 사람이 극성이다.
“그러도록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하겠다는 의미였고, 대화를 끝내겠다는 의미였다.
율리도 묵례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한 가지 호기심이 일었다. “한데, 이 경매장은 나를 찾아 온 건가?” “······뭔. 뭐라고요? 착각도 유분수입니다!” 율리는 급히 뒤돌아서더니 요란하게 반응했다. 그렇다면 되었다. 나는 잠자코 책이나 읽으려 했는데, 율리는 내 옆으로 샤샤샥 다가와서 한 마디 덧붙였다.
“착각도 유분수라는 건, 제가 당신을 찾아온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당신이, 제가 당신을 찾아왔다고 생각하는게 착각이라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는 미심쩍은 듯 나를 노려보면서 물러났지만, 주변을 서성이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선명하게 중얼거렸다.
“정말입니다. 저도 이곳에서 나름대로 할 일이-” “알았다. 한 번만 말해도 이해한다.” 이해력이라는 특성도 있는 사람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내가 단호하게 잘라내자, 율리는 입술을 삐죽이고 떠나갔다.
······자기가 먼저 잘못 이해해놓고서.
나지막이 흘러드는 그 투덜거림이 괜히 귀여웠다. 마냥 웃음을 짓던 나는 흠칫 놀랐다. 설마, 율리를 좋아한다는 데큘레인의 감정까지도 옮은 건 아니겠지. 물론 저 여자를 보면 심장이 철렁인다거나 눈앞이 아찔해진다거나 하는 건 결단코 없지만······.
그때.
─샤츠인젤에 방문해주신 귀빈님들께 알립니다. 이제 경매가 시작될 예정이니, 수행원들의 안내에 따라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확성음이 경매의 시작을 알렸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매장으로 입장하는 내 등에 자그마한 뒤통수가 따라붙더니 말했다.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말하-” “이해했다.” “저번에도 그러셨잖습니까. 이번에도 또 사교계에서 쓸데없는 소문 퍼트리시려는 생각-” “안 퍼트린다. 믿어라.” “당신 보러 온 게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알았다니까······.” 사이 좋게(?) 옥션 스테이지에 입장한 우리는 곧, 서로의 좌석으로 떨어져서 앉았다.
경매. (2) 한편, 유크라인 영지의 주도(主都) ‘하데카인’에는 데큘레인의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달되었다.
“뭐? 지금? 경매장에?” 예리엘은 미간부터 찌푸렸다. 작년에도 영지 재정으로 1 천만 엘네를 태우더니, 이번에도 또? 설마, 그때 그렇게 싸워놓고 또 또 그 지랄을 할 리가. “예. 이미 경매가 진행중이라는 듯합니다.” “아······.” 집사의 확언에 예리엘은 현기증을 느꼈다. 하데카인의 영주성에서 실질적인 영주 노릇을 수행하며, 지출란의 숫자를 한 자리라도 줄이려 노력하는 예리엘으로서는, 대저 이해조차 불가능한 작태였다.“······알겠어. 가봐.” “예.” 쾅─!
“씨발!” 집사가 떠나자마자 예리엘은 책상을 내리쳤다. 위스키 뚜껑을 거칠게 따고 유리잔에 쏟아부었다. 독주가 차오르는만큼 부아도 치밀었다. “설마 그때, 광산 인수 대금을 지한테 달라고 했던 이유가······ 그 미친놈이 진짜?” 꿀꺽. 잔 가득 찰랑이는 위스키를 통째로 삼켰다. 속이 타는 듯했지만 머리가 터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오─! 아오오─!” 예리엘은 답답함에 부르짖었다.
“이런 씨이발 진짜 내가.” 마법적 재능, 실무 감각과 행정가로서의 면모, 영지의 풍습과 산업에 대한 이해, 예법을 제외한 모든 도덕적인 인품. 그 모든 점에서 예리엘은 자신이 데큘레인보다 뛰어나다 자부했다. 그러나······. 유크라인의 당주는 이미 데큘레인이다. 아마도, 영원토록.
“도대체 왜······.” 부모님께서 데큘레인의 재능을 너무 섣불리 확신했기에, 너무 이른 시기에 계승을 결정한 것이었다. 물론 어렸을 적의 데큘레인은 신동이었다. 고작 열 살의 나이로 대학마탑 수준의 마법을 이해했으니.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어쩌면 자신의 신장과도 비슷한 이야기.
열 살때 이미 160cm 를 넘겨서 데큘레인처럼 키 크고 세련된 사람이 될 줄 알았거늘, 열 살 키가 끝이었다. 몸 전체가 열 살 이후로 발달하지 않았다. 즉, 천재 따위가 아닌 조숙(早熟). 데큘레인은 그저 조숙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부모님도 언젠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이겠지.
후회한다고. 그 결정을 후회한다고.
“데큘레인이 아닌, 네가 당주가 되었어야 했다고.” ······마지막 말은 상상이지만 어쨌든. “씨이발,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거든요······.” 너무 늦은 후회다. 돌이킬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 당신들은 하늘의 별이 되었으니, 유크라인의 주인은 영원히 데큘레인일 터였다. 그 사실이 억울하면서도, 예리엘은 이미 알고 있었다.
데큘레인은 아버지를 닮았고, 자신은 어머니를 닮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본처를 여읜 뒤 얻은 후처였으므로, 본처의 아들인 데큘레인이 당주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참 좆같이도 지당한 일이었다.
알고 있지만, 억울한 것이다. 내가 더 잘 할 자신이 있는데.제도에서 사치만 부리는 그 개새끼보다 훨씬, 정말 훨씬 더. “아······ 보고 싶다······” 금세 한 병을 비워버린 탓에 취기가 벌써 정수리까지 올랐다. 예리엘은 책상에 얼굴을 박고 멍하니 읊조렸다. “왜 일찍 죽은 거야.” 두 분이 작고한 지는 어느덧 7 년이 지났다. 그 7 년 동안, 그들의 품에 안기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거의 매일 그랬고, 거의 매일 울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은 영주를 대리하는 스물 여섯 살이 되었고, 치기 어린 눈물은 먼 옛날의 일로 밀쳐냈으며, 다만 유크라인의 혈족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할 뿐이었지만······ “······그 개새끼 진짜 개짜증나네.” 쿵—! 쿵—! 쿵—!
예리엘은 눈물 대신 침을 흘리며 책상을 두드렸다. 몇 번 그렇게 때리다가 체념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얼마 쓰지는 않겠지······.” 과도한 물욕도 체통에 어긋난다며 싫어하는 놈이니.
그 놈의 체통이 뭔지, 예법이 뭔지, 씨발 이제와서는 그냥 다 때려부수고 싶은 심정이지만 뭐.
“병신가튼새키······.” 언젠가, 그 빌어먹을 놈의 사랑을 갈구했던 적도 있었다. 그 놈의 존재 자체가 자랑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자신에게 차가웠고, 고압적이었고, 맞지도 않는 예법을 강요했다. 물론 그때는 노력했었다. 태어날 때부터 예의를 익힌 듯한 그놈처럼은 못했지만,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불편한 드레스를 입었고, 작디 작은 손에 예법책을 쥐었고, 언제나 그 뒤를 쫄쫄쫄 따라다녔다.
놈은 무시했고, 밀어냈고, 윽박도 질렀지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후처의 자식이니까. 나는 품위도 못 갖추고, 머리도 멍청하고, 격식도 떨어지고, 귀족 같지도 않은 반푼이니까······.
그런데 이게 웬걸.
시간이 흐르고 보니.
가장 귀족같지 않은 건 그놈이었다. “······개새키.” 사랑 받기를 포기한 예리엘은 강해졌다. 그놈이 없는 장소에서 뿐만 아니라, 그놈의 면전에서도 욕설을 지껄일 수 있을만큼. 강해진 것인지 망가진 것인지 그녀 스스로는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이제는 혼자서도 능히, 유크라인의 대영지를 이끌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그것에 만족했고, 7 년의 세월 동안 유크라인은 그녀의 영지로 성장했다. 이제 영지의 모든 가신이, 그녀를 영주로 인정하고 있었다.
“하아아아······.” 예리엘이 자신의 마음 한 켠에 자랑스레, 또한 소중하게 품고 사는 위안이었다. * * * 루텐 샤츠인젤의 ‘옥션 스테이지’ 는 대단히 화려했다. 좌석은 귀족들이 좋아하는 붉은 벨벳에 금빛 공예가 테두리를 둘렀고, 저편의 경매 단상은 오직 황금으로 이루어진 듯 찬란했다. 그야말로 적색과 금색의 향연. 은은한 향기와 귀족들의 웃음 소리가 너울거리는 그곳에서, 나는 VVIP 전용석의 팔걸이에 놓인 경매 카탈로그를 보았다.
“목록이 많군.” 도자기, 목걸이, 가위, 반지, 유물, 유적지 발굴품, 그리고 ‘설화석’. 품목에는 설화석 외에도 마법사가 쓸만한 아티팩트들이 많았다. 참고로 설화석의 시세는 내가 발품을 팔아서 언뜻 확인했다. 최소 1 천만에서 최대 3 천만 사이. 충분한 가격이었다. ─이 루텐 슈나이첼의 옥션에 참석해주신, 고귀한 여러분들에게 먼저 한 마디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그때 경매사의 음성이 넓게 울렸고, 사방이 소등되었다. 장내의 수다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영영 녹지 않을 것 같았던 얼음도 결국에는 녹고, 청록을 머금은 씨앗이 새싹으로 발아하는 요즈음.
경매사는 서두를 먼저 말했다. 단상 위로는 이미 어떤 물건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이제 새 봄이 시작되고, 그 봄의 경매를 알리는 첫 번째 물품입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도자기였다.
─이 유려한 곡선의 자태 보십시오. 먼 동방 다도해의 장인이 제작했다는 ‘동방의 꽃병’입니다. 도기 협회의 장인들이 최고급품이라 인정한 인증서가 동봉되어 있습니다. 경매 시작가는 50 만 엘네. 호가는 5 만 엘네입니다.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무심코 그 도자기를 보았을 때.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저건······.” 도자기에서 빛이 흐르고 있었다. 의아할 것도 없었다. 「대부호 재력가」의 직감이었다. ─37 번, 55 만 엘네! 아, 곧바로 693 번. 60 만 엘네!
첫 경매는 나름 치열하게 진행되었으나, 나는 오직 그 빛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자세히 볼수록 광채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다시 37 번이 65 만 엘네! 아, 이제는 993 번 귀객께서!
37 번 65 만, 993 번 70 만, 1038 번 75 만······ 그렇게 이어지던 입찰이 130 만 엘네에서 멈추었다.
─자 1413 번 130 만 엘네, 이 이상 없습니까? 그렇다면 세 번 호가하겠습니다. 130 만 엘네. 130 만 엘네? 130 만- 물건의 금액은 130 만 엘네.
내 계좌의 잔액은 2 억 엘네.
더 생각할 필요가 없다.
껌값이잖아.
나는 좌석의 손잡이에 놓인 작은 수정구슬을 툭 터치했다. ─아! 이때 등장한 777 번 귀객, 140 만 엘네입니다!
내 입찰 의사를 경매사가 받았다. ─1413 번, 다시 150 만 엘네!
130 만을 불렀던 1413 번이 반격했다. 나는 지체 없이 수정구를 눌렀다. ─777 번, 160 만!
─1413 번, 170 만!
180 만, 190 만, 200 만······ 가격이 올라가도 도자기의 빛은 여전했다. ─777 번 250 만 엘네. 이상 없습니까?!
확실하다. 저 도자기는 경매 가격 이상의 가치를 품고 있다. 나는 그것을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본능처럼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대부호 재력가」라는 특성. 이른바- 갑부가 될 운명.
─이상 없다면, 250 만 엘네. 세 번 호가하겠습니다.
아까부터 개나대던 1413 번도 잠잠하다. 그래, 총알이 2 억인 사람에게 어딜 감히 덤빈단 말이냐. 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금력. 이게 바로 돈의 권위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대단히 권위적인 사람이다······.
─250 만. 250 만? 250 만! 777 번, 낙찰입니다!
도자기를 낙찰 받았다. 짝짝짝짝─ 귀빈들의 박수 소리에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호응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족의 몸짓이었다.
─자, 다음 물건입니다······ 한데, 그 다음도 내가 살 수 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이 경매만 특히 이러한가? 아니면, 원래 경매는 이러한가. 그것도 아니면, 내 특성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다.
내 특성만큼은 확실하다. 이 특성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에게 돈을 벌어다 줄 것이다. ─착용자의 혈액과 마력 순환에 도움을 준다는, 장인 ‘루페린’이 제작한 ‘루페린의 반지’입니다. 경매 시작가는 80 만. 호가는 5 만입니다!
나는 잠시 경매의 진행을 지켜보며 고민했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603 번 150 만 엘네! 이제부터 호가는 10 만입니다! 아! 이때 777 번이!
결단은 확신에 가까웠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2 억은 내 계좌의 돈이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개인 계좌.
그러니, 설화석을 살 수 있을 만큼만 남기고 투자하도록 하자. ─또 다시 777 번! 루페린의 반지, 300 만 엘네입니다! 나는 특성의 감각을 믿으므로, 이는 성공이 예정된 투자다. 심지어 나에게는 「미다스의 손」 도 있지 않은가. 진정한 의미의 「대부호 재력가」 가 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루페린의 반지, 777 번 300 만 엘네 낙찰!
두 번째 물품으로 ‘루페린의 반지‘를 낙찰받았다.
그 이후로도 물론 경매는 계속되었다.
─210 만 엘네. 이 이상 없습니까? 루초의 가위, 777 번 210 만 엘네 낙찰!
단, 경매사의 대사는. ─430 만 엘네. 이 이상 없습니까? 고대 룬어 목걸이, 777 번 430 만 엘네 낙찰!
가격과 품목만 바뀐 채 똑같았다. ─550 만 엘네. 이 이상 없습니까? 어둠바닥카펫, 777 번 550 만 엘네 낙찰······ 777 번.
즉, 데큘레인의 것이다.
* * * ······사실 율리는 경매 따위,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검소와 절약이 몸에 벤 그녀는 털코트를 하나 사는 데에도 고뇌와 번민에 빠지곤 했으니. 10 년 전 졸업 선물로 받은 외투를 아직까지도 애용하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그런데······.
─777 번, 430 만 엘네. 이 이상 없습니까?
역시 데큘레인은 근검절약 따위에는 영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고대 룬어 목걸이, 777 번 430 만 엘네 낙찰!
그는 경매가 시작하자마자 열 물품 중 일곱개나 낙찰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 광포한 기세는 옥션 스테이지 전체를 짓눌렀다.
“참······.” 율리는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는 멋지다거나 부럽다고 생각할 지 몰라도, 율리에게 그의 사치는 그저 한심할 뿐이었다. 이렇듯, 데큘레인과 자신은 모든 점에서 다르다. 서로의 이상(理想)이 서로에게 너무나 이질적이다.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물론 율리도 처음에는 노력을 했었다. 기사된 자의 도리로서, 가문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면 그 배우자를 사랑할 수 있도록. 그러나 데큘레인은 자신의 환심을 ‘살 수 있는 것’이라 착각했고, 가장 경멸스러운 방식으로 자신을 대했다. 한없이 잘못되었던 약혼의 날. 자신과 그는 그 첫단추부터 어긋나버렸다.
“애장을 구하러 오셨나봅니다.” 그때, 옆의 귀족 남자가 은은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내심 기다리던 질문에 율리의 어깨가 들썩였다.
“······예.” 설화석. 다른 말로, 겨울의 불. 그 이름처럼 한기와 열기를 동시에 품은, 모순적이고도 희귀한 금속이다.
존재 자체가 마법이라 여겨지는만큼 무척이나 다루기 힘들고, 웬만한 대장장이가 아니라면 제련과 정련조차 불가능하다나 뭐라나. “저도 이제 애장을 마련해야 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기실 그녀도 검에 대한 욕심은 지니고 있었다. 아니, 기사가 검에 돈을 쓰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낭비라는 지론이었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검이란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즉 사람의 마력에 길들여질수록 그 가치가 더욱 상승하는 법이니. 그 과정을 이른바 ‘교감’이라 하고. 그런 점에서, 자신은 오직 설화석에만 맹공할 테니 결코 사치가 아니다. 또한 자신에게 애장(愛裝)이 없음은 대중적으로도 유명한 사실이니, 사람들도 ‘드디어 율리 기사가 자신만의 무장을 마련하려 하는구나—’ 하고 이해할 터. 지금 제 옆에 앉은 귀족처럼 말이다.
“하긴. 프하이르덴 기사님의 기량은 제국에서도 유명하시지요. 저번 호 나이트 저널과의 인터뷰는, 정말 읽으면서 감탄만 거듭했습니다.” “······그저, 제 소신과 신념을 말했을 뿐입니다.” 율리는 단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발린 말이라도 인터뷰를 읽었다는 그 말이 으쓱했으나, 겉으로 내색해서는 안 되었다. “역시. 지금 부군께서도-” “부군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율리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혀졌고, 귀족은 허허허- 멋쩍게 웃더니 슬그머니 물러났다. ─550 만 엘네. 이 이상 없습니까? 어둠바닥카펫, 777 번 550 만 엘네 낙찰······ 와중에도 데큘레인의 돈지랄은 끊임이 없었다. 그 기백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데큘레인에게 쏠렸던 관심들이 자신에게도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아무렴 공식적으로는 약혼자였으니.
율리는 조금씩 화끈해지는 얼굴을 느꼈지만 꾹 참았다. 그녀의 목표는 오직 설화석. 태어난 날부터 계좌에 저금해두었던 용돈과 월급의 총합은 이미 확인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으니, 설화석은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확신하며, 또 연이어 울려퍼지는 777 번이라는 숫자를 애써 무시하며, 율리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른. (1) “······오늘, 정말 많이 쓰쓰, 쓰시는, 쓰시는군요.” 옆에서 이름 모를 귀족이 물었다. 오늘 처음 본 그는 온몸을 달달달달달 떨고 있었다. 그 여진이 내 손까지 흔들었다. “그만큼 가치가 있는 물건이니 쓰는 것이오.” 「대부호 재력가」. 금전적인 명사가 두 개나 결합된 이 특성은 ‘가치(價値)’ 에 관해서는 어마어마한 직감을 발한다. 물건 자체의 잠재력 계측은 물론, 그 귀천에 대한 판단도 거의 동물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그 특성을 토대로 경매에 열중했고, 중반까지 진행된 총 24 개의 물품 중 11 개를 낙찰 받았다. ─다음 물품은 ‘트렌퀼리티’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다. 방금 전의 ‘고대 유물 목걸이’ 이후로는 물건의 상태가 영 시원찮을 뿐더러, 설화석의 최대 추정 가격은 3 천만이다. 그 3 배인 9 천만 정도는 지니고 있어야 안정적일 테지.
─로컨의 뿔······.
이어지는 경매는 가격을 올리는 내가 없어서 평온했다. 눈치를 살피던 다른 평범한 귀족들도 슬그머니 경매에 끼어들었다. 그 잔잔한 평화 속에서, 마침내. 내가 바라던 물품이 등장했다. ─제국 명검의 역사에서도 대단한 활약을 한 광석입니다. 이른바 자연의 마법, 겨울의 불. 설화석입니다. 시작가는 500 만 엘네. 호가는 20 만 엘네입니다.
설화석.
그 광석이 등장하자마자 불려진 첫 번째 입찰은, 1089 번.
─1089 번, 500 만 엘네입니다.
나는 호기로이 출현한 1089 번 좌석을 보았다.
익숙한 뒤통수였다. 윤기나는 머리카락은 어느새 사과처럼 틀어서 올렸고,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듯 옷차림은 하얀 경갑이었다. ······율리.
그녀의 눈빛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려 있었다. * * * 율리는 열정적으로 경매에 임했다. 어떤 요령도 없이 입찰했고, 단 한 숨도 쉬지 않았다. 그러나 물건이 물건인지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격은 금세 1 천만, 1 천 3 백만, 1 천 7 백만, 1 천 9 백만······ 천정부지로 솟았다. ─1089 번, 3000 만 엘네! 이상 없습니까?! 다행히, 예측했던 최고가인 3 천만이 되었을 때 대다수가 포기했다. 이쯤이면 생각보다 싸게 사겠구나, 율리는 낙관하며 만족했다.
“휴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상상도 못한 경쟁자가 등장한 것은.
─777 번, 3 천 1 백만 엘네! “······!” 율리는 눈을 크게 뜨고 777 번을 찾았다.
자신과 멀지 않은 VVIP 석. 그곳에서 도도한 기품을 풍기며 앉아있는 사내.
데큘레인. 시선을 느낀 그가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는 평소처럼 냉연하게, 매사에 무관심하다는 듯이 있었지만, 율리는 왜인지 그 속내를 알 것 같았다.
─1098 번, 3 천 2 백만 엘네.
율리는 주먹을 쥐고 조용히 응찰했다. 물러날 생각 따위, 그녀에게는 없었다. 데큘레인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777 번, 3 천 3 백만입니다!
이후로는 그들 둘만의 경합이었다. 데큘레인이 가격을 올리면, 율리가 받는다. 경매사의 호가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스테이지의 전원이 두 사람을 지켜보는 가운데, 탄성과 환호가 배경음처럼 울린다.
장내가 이리 흥미진진한 이유는, 아마 금전적인 박투보다도 서로 싸우는 대상이 그 데큘레인과 율리이기에.
─777 번, 3 천 7 백만 엘네!
3 천 7 백만까지도 데큘레인은 편안했지만, 율리의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잔고가 서서히 바닥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기 싫었다. ─1089 번, 3 천 8 백만.
율리가 필사적으로 올린 금액, 3 천 8 백만.
데큘레인은 곧바로, 아주 조금의 지체도 없이 묵살했다.
─777 번, 3 천 9 백만. 율리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잠시 공간의 소음이 멎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율리를 바라보았다.
율리는, 몇 초간 숨을 고른 뒤, 포기를 포기했다. 제도의 저택마저 팔아치울 각오로 응찰한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1089 번 4 천만.
두 번째 적막이 내려앉았다.
데큘레인은 꽤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율리는 나름대로 설화석에 필사적인 듯한데, 만약 내가 이 설화석을 가진다면. 율리에게 원한을 사게 되지는 않을까. 혹여나, 사망 변수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그럴 리가 없다.
데큘레인은, 아니 김우진은 율리의 인품을 믿는다. 무엇보다, 이 설화석에는 율리 못지 않게 자신도 필사적인 것이다. “후우······ 후······.” 그러는 사이, 잔뜩 긴장한 율리의 정수리가 부스스 떠올랐다. 가쁜 호흡을 가누지 못하고 자꾸만 어깨를 들썩거렸다. 율리는 제 감정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타입이었다.
─설화석의 주인이 1089 번으로 정해지려는 듯합니다만······. 30 초가 흘렀다. 율리는 그제서야 안심한 듯 두 손을 무릎 위에 고이 얹었다. 평온하고 안온하게, 승리를 즐기려는 모습이었다.
그때.
─777 번, 4 천 2 백만 엘네! “아!” 율리는 눈을 부릅뜨고 비명을 질렀다. 다만 이미 경매장 전체가 고조되었기에, 그 교양 없는 비명이 티나지는 않았다. “읏······.” 이를 악문 율리는 손을 덜덜 떨었지만, 결국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아랫 입술과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했다. 패배를 인정하기 싫은, 그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무력감. 그 기분 나쁜 감정이 말초까지 번진다.
이제 돈이 없다.
─마지막으로 세 번 호가하겠습니다. 4 천 2 백만 엘네, 4 천 2 백만 엘네, 4 천 2 백만 엘네! 마법의 금속, 설화석의 주인은 777 번 귀객입니다!
그렇게 승패는 결정되었고, 데큘레인은 승리에 대해서도 평온했다. 짝짝짝─ 경매장의 귀빈들이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는 품격 있게 그저 눈짓으로 응답했다. ─이 열기를 간직한 채, 다음 물품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후로도 경매는 계속되었지만, 율리에게도 데큘레인에게도 별로 눈에 띄는 물건은 없었다. 데큘레인의 특성으로 보자면, 경매 후반부는 죄다 가격 대비 거품 낀 물건들 뿐이었다.
하여, 데큘레인은 최대한의 품위를 지키며 경매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정수리가 벌게진 채 부들부들거리는 율리의 뒷모습이, 그 나름대로는 걱정스러웠다.
* * * 경매가 끝났다. 율리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경매장을 나가려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앞길을 막았다. 데큘레인. 그 푸른 수정같은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율리는 어떤 말도 하기 싫었고, 그 어떤 말도 듣기 싫었다. 그러나 데큘레인은, 어김없이 말했다. “너도 가지고 싶었나, 설화석을.” “······하.” 순간, 심장이 삐걱거렸다. 감정 밑바닥의 격류가 꿈틀- 박동했다. 율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약혼의 날, 그 최악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네가 원한다면, 이것들을 너에게 줄 수도 있다. 네가 바란다면, 나는 너에게 그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언젠가 자신이 원했던 ‘모든 것’들을 방 안에 늘어놓은 채로. 그곳에서 율리가 느낀 감정은 행복이나 황홀 따위가 아니었다. 오직 모욕 뿐이었다.
그러나, ‘진짜 수모’는 그 다음부터였다. 율리가 데큘레인을 박차고 나간 그날 이후로, 여러 괴소문들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토록 고고했던 꽃이 드디어 데큘레인에게 꺾였다─ 율리는 데큘레인에게 하데카인의 기사단을 약속받았다─ 이 약혼을 먼저 바란 쪽은 오히려 율리였다─ 따위의, 자신의 신념을 더럽히는 말들이었다.
그리하면 내가 자신에게 돌아갈 줄 알았던 것일까.
참 어리석은 사람. 아무리 노력하여도,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는 사람.
그는 이번에도 역시······ “미안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예?” 데큘레인은 빙글 돌아섰다. 미안하다는, 연유 모를 한 마디가 끝이었다. 데큘레인은 곧장 떠나갔고, 율리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 으음.” 사뭇 당황스러웠지만, 곧 다행이라 생각하며 율리는 로비로 나왔다. 적어도 1 년 전의 반복만 아니라면 되었다. “······하아.” 분명 그거면 되었을 터인데, 짙은 한숨이 흘렀다. 설화석. 2 년만의 매물이었고, 3 년만의 경매였다. 그만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빼앗겨버렸다. 그것도 가장 지기 싫은 사람에게.─······데큘레인 교수는 왜 설화석을 샀을까요?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가 율리의 귓전에 아른거렸다. ─글쎄요. 뭐, 당연히······.
저들은, 귀족들은, 언제나 떠든다.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 저들의 소명이라도 되는 양. 아니 저들 뿐만 아니라, 대기실의 모두가 오늘의 일을 떠들고 있다. 1 년 전의 그때처럼. 듣기 싫은 말들을 귓구멍에 쏟아붓듯이. ─약혼자에게 선물하기 위함이겠죠?
율리는 이를 악물었다. ─호호호. 역시 그렇겠지요? 그런데, 그러면 그냥 양보를 해줬으면 안 됐을까요?
─데큘레인 교수 성격 알잖아요. 본인이 직접, 검으로 만들어 주고 싶어서 그리 무리를 한 것 같아요.
본디 들려오는 말만 듣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전례가 너무 확실할 뿐더러······ .
애당초 설화석은, 마법적으로 활용할 수 없는 금속이다. 내부의 마력이 너무 땅땅하여 오직 검으로만 쓰이는 것이다.
수천 수만번 휘두르며 어느 정도 교감을 나누어야 그나마, 검강이라도 두를 수 있게 허락하는 까다로운 금속인데. 데큘레인은 도대체 왜 마법사이면서 그것을 구매했는가. “······.” 율리는 단전 깊은 곳에서 치미는 한숨을 삼켜냈다. ─약혼자 분은 참 부럽네요. 4 천만 엘네의 선물이라니. 저는 4 만 엘네 짜리 목걸이만 받아도 영광일 텐데요.
─그러니까요. 그런데 그 프하이르덴 공은 괜히 쓸모도 없는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네요. 이미 볼장도 다 봤으면서······ 이런 억측과 추측의 가십 속에 있다가는 미칠 것만 같았다. 율리는 다수의 인파를 밀어내며 당장 샤츠인젤 밖으로 뛰쳐나갔다.
바닷바람이 사무치는 길목. 차디찬 한기 속에 율리는 웅크렸다. 호흡을 고르며 너울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괜찮다. 별 것 아닌 일이다.
사실도 아닌 말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 이런 경험은 이제 질리도록 익숙하니, 더 이상 흔들리지 말자······. 그런 그녀의 곁으로 차 한대가 다가왔다. 고요하게, 그 뒷좌석의 문이 먼저 열렸다. “율리야.” 익숙한 얼굴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예상치 못한 음색에 율리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언니?” 율리를 보며 미소 짓는 여인은, 프하이르덴 가문의 장녀이자 그녀의 누이인 ‘유세핀’.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얼른 타렴.” 유세핀은 율리와 다른 의미의 미인이었다. 율리가 생각하기에는 ‘차원이 다른 매력’이었다. 어깨 곁의 단발은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고, 화사하며 고아한 이목구비는 언제나 율리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뭐하니? 얼른 타지 않고.” “······.” 율리는 자신과 너무나도 다른 언니가 여러 의미로 불편했지만, 오늘은 별 말 없이 차에 올랐다. 데큘레인만큼, 아니 어쩌면 데큘레인보다도 사교계의 권위가 높은 유세핀은,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 * * ······확실히, 율리는 착한 사람이다. 그녀는, 적어도 그녀 ‘본인’ 만큼은, 「악당의 운명」에서 한참이나 비껴간 존재다. 어떤 사망 변수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나는 경매장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육안」으로 확신한 직감이었다. 고작 설화석을 빼앗은 것으로 보복을 걱정하던 내가 한심하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런데, 정녕 얼마나 시달렸으면. 저리 착한 율리가 제 손으로 데큘레인을 죽였을까. 나는 내가 플레이했던 게임의 데큘레인을 새삼 다시 보았다. 도대체 어느 정도로 돌아버린 놈이었던거냐, 너는.
“도착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대저택에 도착했다. “······수고했다.” “예. 편히 쉬십시오!” 시계를 확인하니 자정이 훨씬 지나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본채로 이어지는 정원을 걸었다.
“······?” 한데, 무슨 일인지. 저택의 현관에 시종들이 모여 안절부절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저, 주인님. 주인님. 예리엘 아가씨께서-” “알겠다.” 나는 상황을 묻지도 않고 위로 올라갔다. 따라오려는 시종들에게 축객령을 내린 채 계단을 올라 방문을 열었다.
“······.” 달빛이 스며드는 거실의 한복판에, 어두운 실루엣이 서있었다. 그 음산한 그림자는 문이 열리자마자 뒤를 돌아보았다. 그늘이 얼굴을 가렸지만, 알 수 있었다. 예리엘이었다. 나는 무슨 일로 왔느냐 물으려 했다. 그런데 예리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메마르고 갈라진 음색이었다. “······제런 광산 인수에 지불할 대금이었어. 잠깐 맡아두겠다더니, 이러려고 그랬던 거야?” 그렇게 말하는 예리엘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는 뜨끔했지만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 어쩐지. 개인 계좌에 돈이 과하게 많다 싶더라니. 워낙 돈이 많은 캐릭터이니 2 억도 당연하다 생각하고 말았다. 명백한 부주의였다.
“걱정 말아라. 확실히 이득을 볼 물건만 샀으니.” 다만, 이는 거짓 없는 진실이다.
경매장에서도 제값보다 훨씬 가치가 상승할 물품만 구매했고, 훗날 「 미다스의 손」으로 그 잠재력을 개화한 뒤에 판매할 것이었다. 산 가격의 두 세배는 우습게······. “너는──!” 그러나 지금, 내 어떤 말도 이 아이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찢어지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한 번 크게 내지른 예리엘은 짐승이 그르렁거리듯 숨을 골랐다. “나를······ 쓰레기통 취급하고 있어.” 나는 예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녀 목소리의 떨림이 온몸으로 번지고 있었다.
“내가, 네 옆에서 똥치워주는 사람인 줄 알아?” 당황스러웠다. 내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도,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크기의 분노였다.
“요즘 가뜩이나 법령도 바뀌어서 가신들은 잠도 못자고 하루 종일 일만 하는데, 너는 그렇게 모은 재산을 홀랑 다 탕진해버려? 이 미친놈아! 이득은 뭔 개똥같은 이득이야! 너 영지 돈으로 도박하냐?!” 예리엘의 전신에서 붉고 짙은 기운이 펑펑 터지고 있었다. 「악당의 운명」의 발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황금의 빛 또한 찬란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대부호 재력가」 의 발현이었다.
“너는, 너는, 너는······.” 이 모순의 뜻은 간단하다. 상황을 무마하지 못하면 예리엘은 내 사망 변수가 되는 것이고, 무사히 넘어간다면 어마어마한 돈줄이 되리라는 것.
이토록 복잡한 문제의 해답을, 왜인지 나는 알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개소리하지마! 이건 걱정이 아니야 이 병신아! 너는, 이 똥같은 새끼야 너는, 너는 맨날 우리한테 똥만 끼얹는다고!” 예리엘은 발작하듯 내질렀다. 눈물과 뒤섞인 침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내가 평생 이러고 살 줄 알아? 난 너 때문에 대학도 그만뒀어! 씨이발 그 흔한 연애도 한 번 안해봤어!” “그러지 않아도 된다.” “뭘 안해도 돼! 너는, 너는 부모님 돌아가시고, 네가 가문을 위해서 한 게 뭐야! 맨날 놀러만 다니고, 돈만 쳐 쓰고. 와, 나 세상에 하루만에 1 억 5 천을 탕진하는 개똥같은—” “당주의 자리를 네게 주겠다.” “이 똥떵어리! 아니 똥떵어리도 아까워. 쇠똥구리! 똥만······ 똥만 굴리다 뒤져버······려라······?” 예리엘의 폭언이 멎었다.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가, 머릿속으로 되뇌이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도통 이해를 못하겠는지 눈을 동그랗게 키우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 뭐라고 했어 방금?” 데큘레인은 유크라인 가문의 당주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당주’ 데큘레인의 결말이 무엇인지.
“방금, 방금 뭐라고 말했냐니까······?” 만약 데큘레인이 영지로 돌아가 영주 노릇을 한다면, 그나마 최선의 최후가 독살이다.
애당초 게임에서도 데큘레인은 교수였지 영주가 아니었다. 그러니 억지로 당주 자리를 틀어쥔다 하여도, 사망 변수밖에 되지 않을 터. 만에 하나 사망 변수가 아니게 되더라도, 나는 심시티 따위를 할 생각이 없다. “······잘 들어라. 한 번만 말하겠다.” 하물며, 원래 당주는 예리엘의 몫이었다. 게임에서 데큘레인은 ‘데큘레인 교수’였지만 후반부, 즉 데큘레인 사후의 ‘유크라인 백작’은 언제나 예리엘이었으니.
그러므로······. 간단한 이야기다.
“당주의 자리를.” 나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그것을. 오히려 사망 변수에 지나지 않는 그것을. 지금 주지 않아도 훗날 네가 찬탈할 그것을.
원래 너의 몫인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 나는 너에게, 내 동생인 너에게.
선심 쓰듯이 주도록 하마.
“······으웅?” 예리엘은 깜찍하게 되물었다.
어른. (2) “가주의 자리를 너에게 주겠다.” 예리엘의 말문이 막혔다. 오라버니의 면전에서 욕설을 뇌까리던 그 당돌한 입술이 멈췄다. 눈이 깜빡거리고, 입이 뻐끔거리고, 무슨 말을 하려다 자꾸만 삼키는 숨소리가 귀여웠다. “구라, 구라치고 있네!” 예리엘은 마침내 짓씹듯이 내뱉었다.
“그런 말버릇은 교양이 없다.” “······거짓말 치네!” “조금 낫다.” “······봐봐 거짓말이네!” 영 믿으려하지 않는 예리엘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 그제서야 아이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주변을 휘둘러보며 무언가를 찾는 눈치였다. “펜, 펜이랑 종이 어딨어. 각서, 각서 써 얼른.” “체통이 없다.” “거봐.” 거짓말이네!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그 말을 하기 전에 부드럽게 잘라냈다.
“차라리 맹약을 맺지.” “······.” 맹약. 마법사에게 맹약은 조금 특별하다. 쉽게 말해, 마법을 메모라이즈하듯 어떤 맹세를 심장이나 대가리에 박아 넣는 것이다. 어긴다면 죽거나 마력을 잃는다.
“정말, 정말이야?” “그래.” “아니 말이 안 되잖아. 왜? 왜 갑자기?” 네 격노를 무마하고, 지금 현재는 물론 훗날의 ‘사망 변수’를 제거하기 위하여, 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니 예리엘의 입장에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급작스러울 터.
하지만 언젠가는 넘길 자리였으니, 이유는 그저 만들어서 붙이면 될 뿐이다. “나는 이제부터 마탑과 마법 연구에 열중할 생각이다. 당주 노릇을 할 시간이 없을 테고, 너는 이미 영주로서 어느 정도 숙달되었겠지.” “그걸 지금 알았다구?”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너를 시험하고 있었을 뿐.” 그러자 예리엘은 진짠가? 생각한 듯 움찔거렸지만, 곧 고개를 휘젓고 바락 소리질렀다.
“시험같은 소리하네! 내가 당신을 시험하고 있었어!”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않아도 된다.” “······.” 예리엘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리고는, 여전히 의심이 짙은 투로 천천히 물었다. “그럼······ 승계식은······ 언제 할 건데······요?”마지막에 못내 혀를 삐쭉 내빼는 모습이 귀여웠다. 진짜 여동생 같았다. 물론 승계식은 당연히, 생각해두지 않았다. 그저 둘러대듯 답했다. “알맞은 때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터.” 다행히 예리엘은 어딘가 짚이는 바가 있는 듯 심각하게 끄덕였다.
“삼년 뒤. 예외의 날.” “······.”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만 저래 진지하니 일단 동조해주자.
“그렇다면······.” 예리엘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가지고 왔던 것들을 챙겼다. 침대에 칼과 권총이 있었다. 오늘 너 죽이고 지옥갑니다- 하려했던 모양이었다. “바로 돌아갈 생각이냐.” “그럼 당연하지! 누가 경매장에서 2 억을 태웠는데, 얼른 수습하러가야 돼.” 여전히 버럭 내지르고 있었으나, 그 목소리에서 튀기던 불씨는 이미 사그라들었다. 하기야 유크라인 당주의 자리는 2 억 따위를 훨씬 초월할 테니. 유크라인의 영지는 지역 전체가 ‘하케디아’라 불리며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옥토다. 그 입지는 배산임수의 정석으로 제도 다음가는 금싸라기 노른자라 하기에 알맞고, 정치적인 위치도 말이 안 되게 좋다. 제도와 너무 가깝지는 않아 황실의 견제가 미처 닿지 못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아 서로 교류하기에 무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이점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지방마탑과 지방기사단을 동시에 유치한 몇 없는 대영지. 그나마 비빌만한 가문은 일레이드와 레바이론 쯤 될 터이나, 일레이드는 면적이 조금 아쉽고, 레바이론은 제도와 너무 멀다.
그러한 유크라인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곧.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설 수 있다는 것. “아 맞다 당신.” 얼른 떠나가려던 예리엘이 문 앞에 서서 말했다.
“나중에 번복할 생각마.” “‘당신’?” “······내가 굳이 맹약을 안 받는 건, 최소한의 믿음 때문이니까······ 요.” 예리엘은 그렇게 말을 끝맺고 문 밖으로 나갔다. 아니, 나가려다가 멈췄다. “만약 이게 거짓말이라면, 그땐 나도 어떻게 될 지 몰라······요.” 뒤의 ‘요’는 거의 묵음 수준이다. “이판사판이야. 알아? 이미 우리 영지 사람들은 전부 나를 영주로 여기고 있어.” 안다. 너무나도 잘 안다.
예리엘을 과하게 좋아한 나머지 제 스스로, 혹은 예리엘의 사주로, 음식이나 음료에 독을 흘려넣을 가신들이니.
“믿어라. 결코 거짓이 아니다.” “······흥.” 예리엘은 주섬주섬 단검과 총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려다 멈칫 뒤를 돌아보았다. “······.” 말 없이 나를 응시한다. 나도 피하지 않고 그 시선을 마주한다. 한참 눈싸움을 하던 예리엘이 문고리를 쥐었다. 그렇게 떠나가려는 듯했으나, 또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믿는 거 아니구, 여전히 의심하고 있어. 그러니까-” “당장 맹약을 맺도록 하지.” “······필요 없거든요.” 예리엘은 명백히 웃음을 참는 얼굴로 문을 열었다. 그렇게 삐쭉대며, 이번에야 말로 떠나려하던 예리엘이었지만······. “예리엘.” 내가 그녀를 붙잡았다. 예리엘은 계단 앞에 멈춰서 나를 돌아보았다. 왜 부르냐는 얼굴이었다.
혹시나 번복할까 두려운 얼굴이기도 했다.
“······왜?” 여기서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애당초 너무 충동적으로 불러세운 감도 없잖았다.
하지만, 나는 고작 ‘사망 변수’를 제거한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고 싶다. 나는 시스템적인 「성격」 을 핑계로 데큘레인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 성격」 은 분명 나를 옭아매고 있지만, 극복조차도 불가능한 족쇄는 아니므로.
그러니, 적어도 이 세계의 끝까지 닿기 위해서는. 내가 데큘레인이 아닌 김우진으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이미 데큘레인이 어그러트린 관계들을, ‘스스로’ 바꿔나가야하는 것이다······. “오가느라 배고플 텐데, 밥이라도 먹고 가거라.” ······말하면서도 등허리에 소름이 올랐다. 성격 자체의 거부작용이었다.
그것은 예리엘도 마찬가지인 듯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 커다란 동공이 귀신이라도 본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름 용기내어 최대한 다정하게 한 말인데.
“돼, 됐거든! 됐거든요! 갑자기 이상한 소리 하지마! 얼른 가야된다니까 뭐래는거야······.” 예리엘은 빼액 소리지르더니 퉁탕퉁탕—! 웬 초등학생이 달려가듯 성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나 갈거야! 차 준비해!
어느새 1 층에서 예리엘의 외침이 울렸다.
“흠.” [ 악당의 운명 : 사망변수 극복 ] 그리고 나는, 사망 변수를 극복한 보상으로 상점 화폐를 얻었다. 이제 상점 화폐의 총액은 6 원. ‘시스템 상점’ 에 접속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난리군.” 그럴 정신머리가 없다. 시간으로 따지면 고작 15 분 쯤이었을 텐데. 무슨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나. 나는 훤히 열린 문을 닫고 허공에 팔을 뻗었다. 휘이잉─ 염동력으로 날아온 와인과 글라스를 손에 쥔 채 의자에 앉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신기하네요.”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속으로는 아무리 놀라도 이 몸의 겉은 절대 놀란 내색을 않는다. 신기하면서도 꽤 효율적인 기질이다. “······그냥 와본건데 말이에요.” 가느다랗게 이어지는 음색. 이윽고, 달빛이 비추는 창틀에서 향기가 흘러들었다. 나는 그곳에 시선을 두었다.
“이런 일이 있었네요.” 붉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미녀, 가네샤.
그녀는 장난스레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말했다.
“불청객이다, 가네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한데······ 교수님이 당주 자리를 넘긴다니요? 정말, 정말로 달라지려는 건가요?” 이 모험가는 왜이리 남의 집안 일에 관심을 두는 것이냐. 아 물론 유크라인이 내 집안은 아니지만.
나는 태연히 대꾸했다.
“나보다 저 녀석이 더 잘 할 것 같았을 뿐이다.” “그래요? 아니 그래도······ 그래도 있잖아요.” 여전히 의문에 잠긴 채, 가네샤는 중얼거렸다. “친동생이 아니잖아요.” “······.” 친동생이 아니다. 잠시 당황했지만, 예리엘은 설정 상 이복동생이니 어찌 보면 맞는 말이다. “저 아이는, 유크라인 가문의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였잖아요.” “······.” 유크라인 가문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뭐지.
이런 설정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언제 추가되었지? 아니면, 혹시 이게 작가님이 말했던 소소한 반전이었나? “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 ” 이럴 때는 데큘레인의 성격이 참 다행이다. 아무리 충격적인 말을 들어도, 심지어 누군가가 목젖에 칼을 바싹 대어도, 그 흔한 식은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니.
“교수님이 먼저 저희한테 의뢰했었잖아요. 당신과 당신 동생의······ 생물학적인 구분을.” 그런 내막이었나. 나는 말 없이 가네샤를 보았다. 가네샤는 천진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제가 3 개월전에 부하를 시켜 알려주지 않았던가요?” 나는 머릿속으로 말을 골랐다. 여러 단어가 서로 문장을 이루고 해체되길 반복했다. 붕— 붕— 붕— 글자들이 좌뇌와 우뇌 사이를 날아다녔다. ······사실, 무슨 말을 할 의무는 없었다. 나는 가네샤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고작 이런 일로 당주 예리엘을 잃기 싫었다. 그러니, 가네샤의 입을 막아야만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목적으로 어떻게든, 아무렇게나 자아낸 말. “······예리엘은 여전히 예리엘이다.” 이유 따위 없다는 그 이유.
“······.”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숨 멎는 소리가 들렸다. 가네샤가 낸 탄성이었다. 그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와.” 가네샤가 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녀의 손등에 닭살이 올라 있었다.
“교수님이 이럴 줄은 몰랐는데······.”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다. 전혀 몰랐던 설정이었으니. “알았어요. 저, 꼭 비밀 지킬게요!” 내가 붕 뜬 사이 가네샤는 입을 앙 다물고 두 손을 꽉 쥐었다. 맞지 않게 앙증맞았다.“아 그리고, 이것도 알려드릴게요. 있잖아요, 교수님. 교수님한테 시선이 끌려버렸어요. 육사두, 아시죠?” 육사두, 여섯 뱀의 머리. 대륙에서도 그 악명이 자자한 범죄 집단의 우두머리들을 뜻한다. 그들 머리 하나 하나에 수천만에 가까운 현상금이 걸려 있다. “놈들이 경매장에서 산 물건들을 노리고 있어요. 배달은 물론 루텐 측에서 잘 해주겠지요. 그쪽도 경매 물품을 빼앗기면 개쪽일 테니까요. 근데, 그 물건들이 저택에 도착했을때 조심하세요.” 가네샤가 검지를 세웠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교수님이 마법적 방비를 너무 안하는 것 같거든요.
너무 허술해요. 금고도 좋은 걸로 바꾸고, 저택의 마법 방범 시스템도 예전처럼 다시 굳건하게 구축하면 될 거예요.” “······알겠다.” 거기까지 말한 가네샤는 짝- 소리가 나게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오늘은, 미안해요. 엿들으려고 엿들은 건 아닌데······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가네샤.” 나는 그런 가네샤의 이름을 불렀다.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왜요?” “만에 하나, 예리엘을 노리는 자가 있다면 말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다. 만약 3 개월 전의 데큘레인이 예리엘에게 무슨 짓을 하려 했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흉심(凶心)을 품었더라면. 그것을 무마할 의뢰를 가네샤에게 부탁해야만 했다.
“아~” 그러자 가네샤는, 어쩐지 달빛을 닮아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 신비로움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걱정 말아요. 그런 일은 없을 테니.” 휘이이이잉─ 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흩날리며, 가네샤가 기대어 앉아 있던 창틀을 가렸다. 곧 바람이 멎었다. 가네샤는 사라지고 없었다. “······하.” 직후, 올곧았던 자세가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나는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넘겼다. 예리엘. 이복동생인 줄 알았는데, 혈족도 아니었다니. 나는 두 손으로 뒷목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굳이······ 알 필요 없는 사실이었다.” 정녕 알 필요가 없었다. 알아도 변할 것이 없을 테니.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반전이라 할 것도 없다. 아니 반전이긴 하지만, 그리 ‘큰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애당초 나는 데큘레인이 아니므로, 예리엘이 데큘레인의 친동생이든 아니든, 그 따위 사실로 내 태도가 변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숨기도록 하자.나에게 예리엘은 여전히 데큘레인의 여동생이다. 왜인지 정감이 가는 동생. 귀여운 아이.
가네샤는 입이 무거울 테니, 이 비밀은 오래도록 지켜질 것이다······.
* * * 한편, 제도 근교 주택단지의 지붕 위. “교수님······ 뭔가 많이 바뀌었네. 사람이 달라진 걸까? 아니면······ 누가 교수의 탈을 쓰고 있는 걸까.” 가네샤는 경사진 붉은 벽돌에 아무렇게나 앉아 방금의 장면을 회상했다. 아마 꽤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지극히 인상적인 드라마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 교수도 인간다운 면이 있기는 하네요. ” 그녀의 부하 로한이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야. 이래서 나쁜남자 나쁜남자 하는가봐. 평생 개같은 짓만 하던 사람이, 예쁜 말 한 번 하니까 되게 멋져보이네.” “······그냥 잘생겨서 그런 겁니다. 단장님 어마어마한 얼빠인거 온 세상이 다 압니다. 처음 임무 받을 때도 얼굴보고 받으셨잖아요.” “너는 못생겼으니까 얼굴 찢어버린다? 그때는 돈이 부족했거든? 빚쟁이가 받으래는데 어떻게 해.” 지금 가네샤는 제 모험단과 함께 있었다. 총원 5 명의 ‘붉은 가넷 모험단’은 남자 셋 여자 둘이었으나, 여자 한 명은 거처를 예약하러 먼 길을 떠났다. “아 참. 너희 이거 절대 비밀인 거 알지? 이런 류의 비밀은, 죽을 때까지 함구해야 하는 거야. 발설은 곧 모험가의 신의를 배신하는 것. 더 이상 내 동료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거니까,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죽일 거야.” “아 당연합니다. 저희도 사람인데요. 발설하면 개죠 개.” “도즈무? 너도 대답해.” 도즈무라 불린 후드 차림의 남자는 하품을 뿜어내며 끄덕였다.
“하여간······.” 그 건방진 부하를 가늘게 흘겨본 가네샤는 이내, 저 머나먼 유크라인의 대저택에 눈을 두었다. 이미 온 창문이 커튼으로 막혔지만, 저곳에서 데큘레인이 보였던 면모는 참 매력적이었다.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예리엘은 여전히 예리엘이라며, 마치 시처럼 읊조리던······. ······예전같았으면 당연히 웃기는 연극이라고 치부했겠지. 하지만 데큘레인은 자그마치 ‘당주’의 자리를 예리엘에게 약속했다. 아무리 그래도 유크라인의 혈족과는 아예 상관이 없는 아이에게 당주라니. 진보적이라 자부하는 자신조차도 못할 결정이었다. “······아무튼 이제, 데큘레인은 경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아이들’에 집착하는 것 같지도 않고.”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슬슬······ 쟤는 아까부터 뭐 하고 있는 거야?” 가네샤는 지붕위의 굴뚝을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우는 멧돼지 한 마리를 보았다. 로한이 대답했다.
“울고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아는데. 지금 같은 장면을 보고 있잖니?” “감동적이라면서 울고 있습니다.”
Comentários
Postar um comentár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