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20

폐와 심장의 기능은 이미 반절 이상 정지했고, 마기에 침식당한 혈관은 신경을 짓누르며 참기 힘든 격통을 매순간마다 일으켰다. 
 “저와 신호를 하나 만드시지요.”  그렇기에, 체력을 아껴야만 한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분배할 필요가 있다. 
 —신호? 
 “예. 저를 부르는 신호입니다.”  똑똑— 나는 그녀의 전신 거울을 두어번 두드렸다. 
 “이렇게 전신 거울을 두 번 두드리신다면, 저는 깨어나도록 하겠습니다.”  —왜 굳이? 
 “저도 잘 시간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흥. 나는 아파서 잠도 안 오는데, 너는 잠을 잔다라. 
 지금의 소피엔은 여전히 어린 아이였다. 아이다운 투정이었다. 
 “대신, 제가 깨어 있는 시간은 모두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나는 운신 자체가 힘들었으니. 애당초 하반신부터 마비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몸은 이미 마기에 잠식당했음을. 
 —대신 나도 내일 자살할 거다. 
 소피엔이 불만스레 뇌까렸다. 
 실제로 그녀는 그 다음 날 자살했고, 물론 세상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도 수없이 이어지는 회귀를, 나는 내 나름의 고통 속에서 지켜보았다. 
 삶이 반복되고, 죽음이 반복되고, 절망이 메아리치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고, 다시 없어지고, 또 다시 시작되고, 또 다시 없어지고······  질병과 고통, 인간과 만물, 세계와 인과, 마음과 몸, 시간과 공간, 악과 선, 빛과 어둠······  그 모든 삼라만상을 그저 허무로 여기며, 하잘 것없고 보잘 것없는 무의미한 세월을 부유(浮遊)하던 어느 순간──  ───드디어. 
 「140 회차」  그때가 도래했음을 나는 깨달았다. 
 * * *  겨울이 한창인 12 월. 
 모질고 차가운 칼바람이 대륙을 휩쓸고, 겨울 괴수들이 이곳저곳의 민생을 짓밟는데, 황궁의 정원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꽃가루가 흩날린다. 자애로우며 따스한 온기가 궁전을 감싸 안는다. 
 “콜록, 콜록, 꺼지라는 말 못 들었느냐.”  그 평화와는 썩 이질적인 음색. 나른하게 늘어지는, 부패한 생선같은 목소리. 
 “허나 전하. 아직 약을 다 드시지-”  “소용 없으니 안 먹을 것이다. 알아서 꺼지라는 말이다. 어이 케이론! 다 내보내!”  침대에 누운 소피엔은 신하들을 모두 물렸다. 그 뒤, 몸을 일으켜 거울에 두어 번 노크했다. 
 “똑똑— 교수. 거기 있느냐.”  —예. 이곳에 있습니다. 
 “······그래. 요즘, 이상하게 오래 버텨지는구나?”  소피엔은 이번 생이 의외다. 몸은 여전히 아프지만, 이번 회귀는 의외로 오래 버티고 있기에. 
 아니, ‘버텨지고’ 있기에. 
 굳이 살 마음 따위는 없건만, 억지로 ‘살아지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몇 번을 죽었지.”  —139 번입니다. 
 “음······ 오늘이 12 월 31 일이니, 내일이면 1 월 1 일인가.”  —예. 내일까지만 버티면 다 나은 것이라 생각하시지요. 
 “흥. 무얼.”  소피엔은 입술을 꾸겼다. 기대 따위는 터럭만큼도 안 되었다. 이미 멘탈은 수십번 부서졌다가 재조립되었고, 삶에도 이 이상의 흥미는 없었다. 
 그래도 곁에 딱 한 놈, 저 교수가 자신의 회귀를 함께한다는 것만이 위안이다. 저놈이 내 머리가 만든 환상일지라도 이제는 상관이 없다. 
 —전하. 
 교수가 말했다. 소피엔은 순박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는 어디에서나 전하를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갑자기?”  그녀는 거울 속 교수를 노려보았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갑자기가 아닙니다. 
 “······.”  —만약 제가 잠시 보이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그 말을 듣자 돌연 마음 한구석이 불길해졌다. 소피엔은 괜히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았다. 
 —저는 항상 전하의 과정에 있을 것입니다. 
 “너는 지금, 떠날 것처럼 떠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인가?”  —······전하. 한 가지 약속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언젠가, 제가 폐하의 약속을 지켰던 것처럼. 
 소피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교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나긋하게 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는’ 목숨을 끊지 마십시오. 
 “······.”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난데없는 부탁에 소피엔은 괜히 입을 삐죽였다. 
 “뭔 개소리지.”  —전하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어디 따로 갈 곳이라도 있느냐?”  —아닙니다. 
 거울 속 교수가 미소를 지었다. 나긋하고, 힘없는 웃음. 그러나 소피엔으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미소였다. 그래서 잠시 멍하니 있었다. 
 —폐하. 이제 밤이 늦었습니다. 편히 쉬시지요. 
 “······.”  코를 훌쩍인 소피엔은 시계를 보았다. 저녁 8 시 30 분. 잘 시간이기는 했다. 
 하루 14 시간 이상 자지 않으면 개복치처럼 뒈져버리는 몸이니. 
 —저는 먼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안 잘 거다.”  슬슬 잠이 올 듯했지만, 그녀는 억지로 눈을 크게 치떴다. 오늘 밤을 지새워 거울을 지켜볼 작정이었다. 
 “안 잘 거다······.”  소피엔은 침대에 누워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다행히 교수는 떠날 생각이 아닌 듯 거울을 볼때마다 있었다. 
 하긴, 떠날 작정이어도 저 거울 속에 있는 놈을 어찌 붙잡는단 말인가. 
 어느 정도 체념하고 안심한 그녀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어. 
 짹짹짹— 짹짹짹-  지저귀는 새소리에 눈을 떴을 때. 
 “······?”  소피엔은 어떤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유 모를 상쾌함이었다. 
 “으응?”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상반신을 일으킨다. 너무 오랫동안 시달린 터라, 너무 오랫동안 익숙한 그 감각이 있질 않아서, 잠시 여기가 저승인가- 생각도 한번 해본 뒤, 몸 이곳저곳을 더듬는다. 
 그런데, 없었다. 
 통증이라는 게, 정말 조금도 없었다. 
 “······여, 여봐라! 케이론!”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이지!”  —23 년 1 월 1 일입니다. 
 23 년은 황제 크레바임의 재위 기간. 
 만약 내가 죽어 회귀를 했다면, 22 년 1 월 1 일이었어야 했다. 
 “23 년? 23 년이 확실한가!”  —예. 그렇습니다. 
 정녕 오늘이 23 년 1 월 1 일이라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소피엔은 흥분에 몸을 떨며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나았다는······?”  그때 퍼뜩,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예. 내일까지만 버티면 다 나은 것이라 생각하시지요. 
 내일이 되면 나은 것이라 생각하라던 그의 말. 소피엔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크게 외쳤다. 
 “교수!”  대답은 없었지만, 얼른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교수!”  그리고는 약속했던 신호를 보냈다. 전신 거울을 똑똑— 두 번 두드린 것이었다. 
 노크하면서 말했다  “교수! 나은 것 같다! 네 말대로!”  그러나, 반응이 없었다. 
 “······.”  눈을 끔벅이며 잠자코 기다려도, 이 거울을 아무리 깊이 들여다보아도. 
 “교수?”  언제나처럼, 함께한 수십 년의 세월처럼, 평소처럼 냉랭하면서도 자약한 목소리로 ‘그렇습니까’라고 답해야 할 그 교수가, 나타나지 않는다. 
 짹짹짹-  빌어먹을 새소리만 흘러드는 정적. 
 “······교수?”  소피엔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허나 이 거울에도, 아니 세상 그 어느 거울에도. 
 그는 두 번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소피엔. (3)  심장이 뛰지 않는다. 폐가 작동하지 않는다. 뇌를 제외한 핵심 생명유지기관의 정지로 체온이 하강하고, 손가락과 발가락을 비롯한 말초신경이 경직되어간다. 
 내 몸은 이미 죽었다. 
 그러나 「철인」의 육체는 죽음을 유예한다. 심장과 폐 대신 혈관이, 인위적으로 수축·이완을 반복하며 혈액과 산소를 운반하는 것이다. 
 아주 작은 시간을 벌 미봉책에 불과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내 죽음이 이 세계의 소피엔에게 발각되지 않고, 그리하여 그녀의 다음 기억이 정상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나는 황궁의 지하, 그 나무문에 도달했다.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  나는 지하 저편에 발걸음을 내디뎠다. 느린 보폭으로 어둠의 한복판에 닿았다. 
 “이렇게 될 걸 알았잖아.”  그 순간 들리는 목소리. 나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소피엔의 모습을 한 「악마의 거울」이었다. 
 놈이 말했다. 
 “다 끝났어. 넌 죽었고.”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6 만에 달하는 마력을 한순간에 소모했고, 막대한 마기를 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 시점부터 살아날 가능성은 없었다. 
 “알고 있다.”  “아는데 왜 그랬어. 궁금해.”  놈이 물었다. 나는 그저 눈을 감았다. 
 꽤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중에는 데큘레인의 것도 있었고, 김우진의 것도 있었다. 
 그러나 놈의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었다. 
 “약속이었고, 지기 싫었다.”  이미 무너진 몸. 뇌마저 서서히 죽어가는데, 기이하게도 미소가 흐른다. 그 상태로 눈을 뜨고 놈을 응시한다. 
 “너 따위 비루한 악마에게 이 세상을, 소피엔을 넘기기 싫었다.”  “······.”  악마의 얼굴이 굳었다. 놈은 입술을 오물거리다 끄덕였다. 
 “그럼 축하해. 네가 이겼네.”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먼저 시력을 상실했고, 귀가 멀었다. 어두워진 세상이 고요하게 물들었다. 
 적막. 침묵. 정적. 
 텅 비어버린 그 속에서, 나는 선명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시리도록 차가운 감촉이었다. 
 * * *  “······.”  소피엔은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어느 정도는 혼탁했다. 기억이 뒤섞인 탓이었으나, 그 분별은 확실했다. 
 데큘레인이 자신과 한 맹세를 지킨 것이었다. 
 “······독한 놈.”  소피엔은 웃으며 뇌까렸다. 놈은 정녕 자신의 모든 죽음을 지켜본 것이었다. 
 물론 병사가 아닌 세 번의 암살은 논외였는지, 병이 낫자마자 떠나갔지만. 
 “한데······.”  소피엔은 자신의 침소를 둘러보았다. 
 티테이블에 놓인 두 찻잔과 다 식은 커피. 데큘레인을 떠나보냈던 그때 그대로였다. 
 “마주보겠다더니.”  미간을 찌푸린 소피엔이 찻잔을 쥐었다. 그녀의 마력이 커피에 온기를 가했다. 
 홀짝- 한 모금 들이켰다. 
 톡톡-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기다렸다. 
 지하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생각하면서. 
 “······.”  소피엔은 시계를 보았다. 
 째깍- 째깍- 째깍-  초침은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데큘레인은 돌아오지 않는다. 
 황궁이 아무리 넓어도 10 분 이상 걸릴 거리는 아닐 텐데. 내 나태가 녀석에게 옮기라도 한 것인가. 
 괜히 심통이 난 소피엔이 팔짱을 끼고 입술을 꾸물거리던 그때. 
 —폐하! 
 침소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외침이 울렸다. 소피엔은 「염동」으로 문을 열었다. 
 “뭔 요란이냐.”  “큰일입니다! 황궁의 지하에······.”  다급히 이어지는 그 말에 소피엔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마음보다 먼저 다리가 움직였고, 수십의 신하와 기사가 그 뒤를 따랐다. 
 “폐하! 여기, 이유 모를-”  소피엔이 급박하게 도착한 곳은 황궁의 지하였다. 
 그 밑바닥으로 이어지는 나무문 곁에 한 사람이 있었다. 
 “······.”  소피엔은 멍하니 걸어갔다. 걸음걸음마다 세상이 조금 어지러웠다. 발자국이 비틀거렸다. 
 “허······.”  이윽고 그에게 닿았을 때, 어이없는 헛웃음이 새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 과정의 끝에서 마주보겠다더니.”  데큘레인. 
 온몸이 마기에 침식당한 그가 지하의 벽에 기대듯 서 있었다. 이미 모든 생체 기능이 정지했고, 혈관이 거멓게 달아올랐다. 
 누가 보더라도 시체인 꼴이었다. 
 “이딴 몰골로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느냐.”  소피엔은 차가운 두통이 느꼈다. 불현듯 수많은 인생의 순간이 되감겼다. 
 “······.”  자신의 기나긴 기억과 함께 있어준, 회귀의 이력에 모조리 남은 흔적과도 같은 놈. 
 “폐, 폐하. 아니 되옵니다. 마기가 옮을-”  “아가리 닥쳐라.”  신하의 만류를 무시하고 놈의 목전에 닿았다. 눈 감은 그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저는 어디에서나 전하를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놈이 떠나갈 때 했던 말이 재생되었다. 
 —만약 제가 잠시 보이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저는 항상 전하의 과정에 있을 것입니다. 
 소피엔은 제 허리춤의 검을 보았다. 제국 황제에게 대대로 계승되는 보도(寶 刀)였다. 
 —······한 가지 약속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만약 지금. 
 내가 자살한다면 너는 되살아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는 목숨을 끊지 마십시오. 
 너는 이를 알고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전하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내가 너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는 거만한 확신을 한 것인지. 
 이 빌어먹을 놈이. 
 죽으면 죽는다고 말을 하면 되었을 텐데. 
 “······.”  제 자신도 알지 못할 감정. 흐르는 듯한 격류를 느끼던 소피엔은 문득, 그의 정장 안주머니에서 삐죽 튀어나온 종이를 발견했다. 손가락을 뻗어 그 쪼가리를 회수했다. 
 “폐하.”  그때 환관 졸랑이 소피엔을 불렀다. 소피엔은 그를 돌아보았다가 싸늘하게 굳었다. 
 무표정한 졸랑의 얼굴에, 왜인지 웃음을 참는 듯한 기색이 있었다. 
 “두 기사가 현재 황궁 감옥에 구금되었습니다.”  “기사?”  “예. 감히 황궁에서 무허가 결투를 벌인 율리와 케이론입니다.”  “······참.”  소피엔은 헛웃음을 지었다. 
 “짐이 자는 동안 개지랄이 났었구나.”  * * *  황제 소피엔은 몸소 황궁의 감옥에 방문했다. 율리와 케이론이 각자 다른 철창에 격리되어 있었다. 
 소피엔은 두 기사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누가 이겼느냐.”  대답은 없었다. 두 놈 다 입을 다물었다. 
 “짐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냐. 아니면, 결투가 아닌 쌈박질이었단 말이냐.”  결투와 싸움은 그 결이 다르다. 
 기사 간의 ‘결투’는 다소 신성하게 취급되어 정상참작이 가능하지만, ‘싸움’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황궁에서의 쌈박질은 심할 경우 사형까지도 가능하다. 
 “······제가 패배했습니다.”  율리의 답이었다. 소피엔은 피식 웃었다. 
 “그래. 네가 이기면 이상하지.”  “폐하.”  그러자 율리는 조금 두려운 얼굴로 물었다. 
 “혹시, 데큘레인 교수는······.”  “죽었다.”  “······!”  율리가 고개를 훽 들었다. 그 경악한 얼굴을 보면서 소피엔은 혀를 쯧 찼다. 
 “보아하니, 너도 곧 따라갈 것 같은 몰골이구나.”  “······.”  율리는 말없이 얼굴을 숙였다. 소피엔은 다음으로 케이론을 돌아보았다. 
케이론은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케이론.”  “예.”  “할 말 없나.”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폐하.”  “······.”  소피엔은 대답없이 곁의 신하에게 말했다. 굳이 여기서 드잡이질을 하기는 싫었다. 
 “둘 다 풀어주거라. 기사 간 결투였단다.”  “예 폐하. 간수!”  간수가 얼른 달려와 철창의 문을 열었다. 율리는 충격에 허덕이는 듯 쉽게 일어나지 못했지만, 케이론은 언제나처럼 소피엔의 배후에 기립했다. 
 소피엔은 율리를 흘겨본 뒤 감옥 밖으로 나왔다. 
 “되었다. 이제 다 돌아가거라.”  “““예,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하들을 모두 물리고, 황궁의 복도를 걷는다. 
 뚜벅뚜벅—  케이론과 소피엔의 발소리는 서로 겹치며 울린다. 황제와 보폭을 맞추는 것은 호위 기사의 기본이기에. 
 “······케이론.”  “예.”  “데큘레인의 안주머니에 「전서지」가 있었느니라.”  소피엔이 두 손가락으로 쥔 종이를 케이론에게 내밀었다. 케이론은 말없이 받았다. 
 “그 내용을 보면, 네가 네시우스 한 마리를 미행하고 있다더군.”  “예.”  “지금도 마찬가지인가.”  “예.”  케이론의 대답에 소피엔은 낮은 미소를 지었다. 
 데큘레인 그 영악한 놈이 이것을 의도했는지, 아니면 우연히 이리되었는지, 그조차 아니면. 
 놈을 생각하는 내 마음이 이렇게 움직이는 것인지. 
 “그 소악마가 탈취한 힘은 원래 짐의 것이었으니라.”  “예. 그렇습니다.”  소피엔이 걸음을 멈추고 케이론을 돌아보았다. 케이론은 그 즉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피엔은 몸을 숙인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묻겠느니라. 감히 황제의 것을 도둑질한 도적의 형벌은?”  케이론이 대답했다. 
 “사형입니다.”  * * *  이튿날, 소피엔은 새벽녘에 행차했다. 아주 오랜만에 황궁을 나선 것이었다. 
 케이론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마차도 일부러 수십 대를 출발시켰으나, 황궁의 눈과 귀는 그 소식을 이곳저곳에 전달했다. 
 여러 대가문은 ‘혹여나 황제가 자신들을 방문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기대를 품었고, 임퓨리엄의 관료들은 ‘이 행차가 실은 사찰이 아닌가—’ 하며 긴장했다. 
 그러나 소피엔의 목적지는 그들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녀는 사흘간의 여정 끝에, 케이론이 추적하던 네시우스를 붙잡았다. 
 “······이게 짐이 두려워하는 형상이란 말이냐?”  소피엔에게 네시우스는 고작 해골이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해골.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케이론이 말했다. 
 “베어내시지요.”  “흥. 너는 보고 있기 괴로운가 보구나. 겁쟁이 같은 놈.”  “······.”  스르르릉—! 
 소피엔이 제 허리춤의 보검을 꺼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끝이 네시우스를 겨냥했다. 
 “······.”  그러나 소피엔은 그 검을 놈의 목에 밀어넣지 않았다. 
 조금, 망설여지고 있었다. 
 물론 이대로 회귀한다면 데큘레인은 되살아날 것이다. 
 이 소악마가 탈취한 ‘회귀의 힘’은 본디 자신의 권능이고, 그 회귀의 중심 또한 자신— ‘소피엔 예카테르 아우구스 폰 지프레인’이기에. 
 그럼에도, 그녀가 이리 저어하는 이유는······. 
 “케이론. 놈은 그 기억을 잊겠지?”  소피엔은 데큘레인을 기억할 테지만, 데큘레인은 그녀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소피엔의 기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와 함께한 수많은 회차가 사라지고, 이 세상에 자신을 이해하는 자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겠지요.”  케이론이 대답했다. 그러자 소피엔은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폐하.”  케이론이 재촉하듯 말했다. 그를 힐끗거린 그녀는 한숨처럼 대답했다. 
 “······벨 필요도 없느니라.”  그리고는 네시우스에게 손을 뻗었다. 그 해골 대가리의 미간에 고작 검지를 얹는 것으로, 놈이 훔쳐간 ‘회귀의 정기’를 회수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소피엔은 그 정기의 크기로 회귀의 시일을 예측했다. 케이론이 되물었다. 
 “일시가 어긋나면 큰일입니다만, 괜찮습니까?”  “내 힘이다. 보면 안다.”  소피엔은 사뭇 씁쓸한 눈으로 회귀의 정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론.”  “예.”  “······아니다. 어차피 돌아가면, 네 죄도 없어진다.”  “······.”  케이론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소피엔은 피식 웃고 제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시 보자, 케이론.”  “예. 폐하.”  ──그 순간. 
 소피엔이 발현한 ‘회귀의 정기’가 사뭇 극적으로 발현되었다. 움켜쥔 손아귀에서 눈부신 광선이 발했고, 세상 전체를 태양처럼 물들였다. 
 소피엔은 잠시 눈을 감았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초침이 똑딱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 
 “······?”  그녀는 티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의 커피 두 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었다. 조금 더 시선을 올리자 사람 한 명이 보였다. 
 감히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는 놈이었다. 
 “······.”  “······.”  소피엔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자신을 바라보았다. 
 둘 다, 아무 말없이 멀뚱멀뚱. 
 먼저 입을 연 쪽은 소피엔이었다. 
 “······데큘레인.”  “예.”  “······짐이 너를 호출했는가?”  “그렇습니다.”  “너는 도서관에 있다 끌려왔고?”  “예. 무슨 일이십니까.”  소피엔은 설핏 미소를 지었다. 타이밍이 아슬아슬했다. 
 30 분만 더 늦었어도, 데큘레인은 이미 황궁의 지하로 들어갔겠지. 
 “······.”  그러나 그 웃음도 잠시. 얼굴을 굳힌 소피엔이 데큘레인에게 물었다. 
 “데큘레인. 혹, 기억나는가.”  “······.”  데큘레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소피엔은 재차 물었다. 너무 많이 기대한 건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기억나는가?”  그 백 년에 가까운 세월과 백수십 번의 죽음. 
 너는 아직, 나를 기억하는가. 
 너라면, 나를 잊지 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무엇을 말입니까.”  허나 데큘레인은 그저 그렇게 되물을 뿐이었다. 
 소피엔은 내색 없이 이를 악물었다. 아무 일도 아닌 척 말을 바꾸었다. 
 “제단 놈들 말이다.”  “물론입니다. 그걸 왜 잊겠습니까.”  “······.”  왜 잊겠습니까. 
 소피엔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한다. 
 “짐은 말이다······.”  네가 함께라 버틸 만했다. 
 “그놈들을 직접 깨부술 생각이니라.”  그러니, 너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백번 이상의 죽음. 백번 이상의 회귀. 
 그 지옥 같은 반복을 네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 
 네 희생과 헌신의 가치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너는 여전히,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소피엔은 언젠가 데큘레인이 건넨 말을 떠올린다. 자신에게 체스를 권유하던 그때. 
 “체스나 두도록 하지.”  데큘레인의 미간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소피엔은 그 미세한 반응으로 그의 감정을 파악했다. 아니, 데큘레인이 직접 입으로 말했다. 
 “고작 체스로 이 아침이 되자마자 호출하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거절이란 말이냐?”  “······아닙니다.”  “그래.”  소피엔은 「염동」으로 체스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녀는 백을 택했고, 데큘레인에게 흑을 주었다. 
 “바로 시작할까.”  “그러시지요.”  데큘레인은 자신감이 넘쳤다. 
 하긴 그렇겠지. 
 그 모든 기억에서, 저 빌어먹을 놈은 단 한 번도 져주질 않았으니. 
 탁-  소피엔이 흑색 폰을 한 칸 움직인다. 
 상대의 백색 폰도 그에 따라 이동한다. 
 탁-  데큘레인은 오프닝부터 저돌적이었고, 소피엔은 여유롭게 받아쳤다. 
 그녀는 체스판에 눈을 집중한 채 말했다. 
 “데큘레인.”  “예.”  “아느냐? 아무리 회귀가 반복되어도, 사라지지 않는 기술이 있느니라.”  “그게 무엇입니까.”  “체스다.”  가만히 듣던 데큘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마법은 배워놓아도 마땅한 회로를 다시 뚫지 않으면 사라지고, 검술도 육체를 단련하지 않으면 무리가 많으니. 다만 그것은 비단 체스 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지식도-”  “되었느니라. 누가 그리 분석하라 그랬나.”  소피엔은 나이트를 거칠게 움직이며 데큘레인을 노려보았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니라.”  “······예.”  데큘레인은 조금 의아한 얼굴로 기물을 전개했다. 
 이후의 체스는 조용했다. 거의 장군 멍군 수준이었다. 
 데큘레인이 수를 내면, 소피엔이 받아치고. 
 소피엔이 수를 내면, 데큘레인이 받아내고. 
 그 결과는 간결했다. 
 “빌어먹을. 무승부구나.”  “예. 체스는 이론상, 서로 실수 없이 완벽하게 둔 경우 높은 확률로 무승부가 발생합니다.”  “······.”  소피엔은 데큘레인을 보았다. 데큘레인은 체스판의 수를 분석하고 있었다. 
 ─저는 체스를 곧잘 둡니다. 폐하가 평생을 투자하여도 이기지 못할 만큼. 
 거울 속의 그가 했던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그러니 저를 이길 적에는 다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다.”  다 나은 지금도 고작 무승부에 불과하니. 
 네 말은 틀린 것이다. 
 “이론상 그렇다는 말입니다만, 폐하.”  데큘레인이 말했다. 놈의 귀족적인 면상이 오늘따라 얄궂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소피엔은 이내 턱짓으로 저 문을 가리켰다. 
 “됐다. 이제 돌아가거라. 아마 네 약혼자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라.”  “약혼자라면······ 율리 말입니까?”  “그래. 오늘은 한 판이면 충분하니라.”  “······예. 알겠습니다.”  데큘레인은 소피엔에게 예를 취한 뒤 몸을 일으켰다. 
 소피엔은 아무런 관심이 없는 척 손에 턱을 괴었다. 그리고,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끼이이익······. 
 저벅저벅 걸어가 문을 닫는 놈. 그 틈새로 보이는 넓은 등을 놓치지 않았다. 
 “······.”  쿵─!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소피엔은 괜히 제 체스판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허리춤을 뒤적여 어떤 물건을 꺼냈다. 
 손거울이었다. 
 “······어이.”  그 거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게 있느냐.”  허나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피엔은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없다면 되었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마신 그녀는 서랍을 열어 손거울을 넣었다. 
그리고는 커튼을 걷었다. 
 창문 너머에서 꽃잎처럼 흐드러지는 햇볕. 그 광원을 올려다보며 제 몸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렴, 여태 정신을 좀먹던 권태가 어느 정도는 사라진 듯했으니······. 
 “케이론!”  케이론을 불렀다. 저 문 밖에서 케이론이 대답했다. 
 ─예 폐하. 
 “오랜만에 운동이나 하겠다!”  ─······? 
 당황한 놈은 잠시 말을 잃은 듯했지만, 소피엔은 그보다 먼저 문을 열었다. 
 어벙한 얼굴의 케이론이 어거그- 거리면서 기괴한 숨소리를 냈다. 
 “뭘 그리 병신처럼 있느냐.”  “아 저 그······.”  소피엔은 놈의 어깨를 팍-! 주먹으로 때렸다. 
 “따라오거라.”  그리고는 위풍하게 걸었다. 또각거리는 걸음걸이에 기품이 묻어났고, 망설임이나 나태 따위는 터럭만큼도 없었다. 
 이제 비로소, 황제가 세상에 나갈 시간이었다. 
 이야기. (1)  뚜벅—  구두 소리가 울림처럼 끊겼다. 
 나는 황궁의 복도에 멈춰섰다. 망막에 떠오르는 상태창 탓이었다. 
 [퀘스트 완료 : 악마의 거울]  ◆ 상점 화폐 + 10  ◆ 재능 습득 : 기원(起源) ─ 거울  “······.”  악마의 거울, 퀘스트 완료. 
 상점 화폐와 재능 습득. 
 이해가 안 되었던 나는 잠시 머릿속 시간을 되돌렸다. 
 마탑 도서관에서 「거울 마법」과 「유리 마법」을 공부하던 중, 소피엔의 호출을 받고 황궁으로 오자마자 체스 한판을 두고······. 
 아무리 생각해도 별 게 없었다. 반면 그 보상은 어마어마했다. 
 어쩌면 특성 만큼이나 중요한 마법사의 세 가지 재능, 속성(屬性)·기원(起源 )·기물(奇物). 
 나는 그중 ‘기원’을 습득했다. 
 “기원이라.”  본디 데큘레인의 마법 재능은 원소 ‘속성’이고, 구체적으로는 흙과 불이다. 
 물론 흙과 불은 넓게 거울을 포함하는 원소이지만, 이 ‘기원’은 그 함의가 다르다. 
 쉽게 말해, 나는 ‘기원—거울’과 ‘속성—흙·불’의 복합 재능을 지니게 된 것이다. 
 “한데.”  다만 그 이유를 모르겠다. 
 갑작스레 퀘스트가 해결된 것도, 굳이 ‘거울’이라는 기원을 습득한 것도. 
 ─어서 나와라! 
 그때 돌연 복도가 소란스러워졌다. 아니, 황궁 전체에 활기가 들끓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황궁의 기사들이 홀을 내달렸고, 시종들도 급히 움직였다. 
 ─어서! 다들 이리로······. 
 나는 그들을 천천히 뒤쫓았다. 그렇게 걸어갈수록 사람이 많아졌다. 
 무수한 신하와 기사가 1 층 창가에 달라붙어 운동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 유크라인 공! 저 아름다운 장면을 보십시오!”  그 이유를 몰랐던 나를 누군가가 잡아끌었다. 
 바로 다음 순간, 곧바로 납득하게 되었다. 
 “근 15 년 만입니다. 폐하께서 이 아침에 나와 운동을 하시다니······.”  황제 소피엔이 케이론과 검술을 겨루고 있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조금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계가 바뀌었나.”  그저 중얼거린 말. 그러나 그 문장은 다시 내 귓가로 스며든다. 연못가에 던진 돌멩이처럼,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어떤 생각으로 이어진다. 
 아침부터 운동하는 소피엔의 돌발행동. 
 결코 평범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 멸망의 전조라기에 알맞은 그 기벽에, ‘퀘스트 완료’라는 사실이 더해진다면. 
 “······.”  나는 말없이 물러섰다. 신하와 기사들을 뒤로하고 다시 복도를 걸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인적이 드문 어느 공간에 닿았다. 
 황궁의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 
 그 허전한 나무문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다가가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덜컥—  삐걱일 뿐 열리지 않았다. 
 “······.”  나는 그 문에 손을 얹었다. 정체 모를 감각이 서늘하게 흘러들었다. 
 “······여기인가.”  마치 직감이 말하는 듯하다. 의식이 전하는 듯하다. 이 안에 내가 모르는, 혹은 내가 잊은 기억이 잠겨 있노라고. 
 다만 아직, 알맞은 시간이 아닐 뿐이라고. 
 “그러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문득 ‘후오아우아—!’ 거리는 환호가 울렸다. 
 황궁 전체가 소피엔의 검술을 지켜보면서 요란피우는 것이었다. 
 나도 구경이나 할까, 아니면 율리나 데리고 갈까, 그조차 아니면. 
 “율리.”  “······!”  지하의 복도에 기사 동상인 척 숨은 율리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같이 폐하 구경이나 하지. 너도 명색이 교습기사이니, 다음 교습에 도움이 되도록.”  “······예.”  율리는 판금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그녀와 함께 걸었다. 
 이제, 우리의 이별은 머지않았지만······. 
 오늘처럼 괴기스러운 날만큼은 함께해도 되겠지. 
 * * *  ······이피! 이피! 
 몽롱한 의식에 스며드는 목소리. 몸을 뒤흔드는 손길. 
 숙면 중이던 이프린의 눈이 좀비처럼 뜨인다. 꽉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 사이로, 친구 줄리아가 말한다. 
 “그거 들었어?”  “머를······.”  “실비아!”  “······실비아?”  흐아암— 이프린은 하품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줄리가 소란스럽게 말했다. 
 “어엉! 걔, 걔 벌써 ‘모나크’ 됐대!”  “······.”  이프린은 여전히 정신이 몽롱했다. 
 크아아— 공룡처럼 두 번째 하품을 한 뒤 되물었다. 
 “모나크?”  “응! 모나크!”  “······마법사 등위 말하는 거니?”  그리고는 크아아앙— 세 번째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켰다. 
 “그렇다니까! 모나크 등위!”  “······걘 뭐 그럴 만하잖니.”  “뭐가 그럴 만해! 이피, 걔가 갑자기 우리 교수로 올 수도 있다니까?”  “설마~”  이프린은 칠판을 보았다. 전공 필수 「 괴수 대비 광역 마법 : 화속성 파괴 계열 」 강의는 이미 끝나 있었다. 
 “그래도 벌써 모나크면······ 부럽긴 하다.”  솔직히, 이프린으로서는 어느 정도 시간을 낭비하는 감이 없지 않았다. 솔다 등위의 강의는 대부분 너무 쉬웠고, 또 이미 아는 내용이었으니. 
 “부럽긴! 그냥 가문 빽으로 된 거지! 걔가 평민이었으면 절대 모나크 못 됐어. 무슨 솔다 딱지 달자마자 6 개월도 안 지났는데 모나크야!”  “······그러게.”  분기탱천하는 줄리아에게 대강 동조하면서 몸을 일으킨다. 
 “근데 이피, 요즘은 왜 우리 가게 안 와?”  줄리가 사뭇 섭섭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값비싼 귀걸이 아티팩트가 찰랑였다. 
 이프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나도 가고 싶단다. 근데, 공부할 게 너무 많아.”  밥 먹을 시간도 없다. 정확히는 마탑에서 멀리 벗어날 시간이 없다. 
 당장 한 달 동안, 물론 100% 이해는 불가능이지만 그래도, 데큘레인이 내어준 논문을 ‘어느 정도’는 이해해야 하거든. 
 “우리 최근에 배달 서비스도 시작했는데.”  “······진짜?”  그 말에는 귀가 솔깃했다. 줄리가 생긋 웃었다. 
 “응. 원래 가격 좀 더 붙는데, 이피는 단골이니까 배달비는 무료지.”  “······그래에?”  이프린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스읍-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럼 오늘-”  *  로아호크 배달을 예약한 이프린은 기분 좋게 77 층으로 올라왔다. 
 [수석 교수 : 데큘레인]  데큘레인 교수에게 건넬 서류를 만지작거리며 집무실 문에 노크했다. 
 똑똑—  반응이 없었다. 
 “오늘도 없나?”  이프린은 중얼거리며 문고리를 밀었다. 스르륵- 문이 자연스레 열렸다. 근데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 단속을 안 하는 건지, 아니면 잠시 자리를 비운 건지. 
 이프린은 터벅터벅 걸어가 데큘레인의 집무책상에 서류를 올렸다. 
 “······음~ 흐음음~”  그대로 돌아가려다, 슬그머니 주변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는 그의 책상 서랍에 손을 뻗-  —뭘 하려는 거냐. 
 “흐걱!”  흠칫 놀란 이프린이 그쪽으로 목을 꺾었다. 
 벽면에 걸린 기다란 거울. 그 안에 데큘레인 교수가 있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거울 반대편을 보았다. 
 데큘레인 교수가 없었다. 
 “?”  다시 거울을 보았다. 
 그 안에 데큘레인 교수가 있었다. 
 “······뭐야? 왜 거울에는 있고······.”  거울 밖에는 없지. 
 인간의 지각·인지 능력을 부정하는 상황. 이프린이 멍하니 입을 벌린 사이, 거울에서 데큘레인이 수욱— 하고 튀어나온다. 
 “어어?!”  “······.”  데큘레인은 태연히 다가와 집무 의자에 앉았다. 겁먹은 이프린은 그에게 닿지 않으려 뒷걸음질을 쳤다. 
 데큘레인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마법사가 뭔 마법을 보고 그리 놀라지.”  “무슨······ 마법이에요 그게?”  “거울 마법이다.”  이프린은 방금 데큘레인이 들어갔었던 거울을 보았다. 특별한 아티팩트 같지는 않았다. 
 “이프린. 요즘 허락도 없이 자주 드나드는군.”  “아 문이 열려 있어서······ 그 서류도 중요한 서류라고 해서요.”  “벌점 3 점이다.”  “······문을 잠궈놓으시지.”  데큘레인이 책상 위의 서류를 뜯었다. 그리고는 그 문서에 만년필로 사인했다. 
 그 직후. 
 —자! 
 집무실 내부에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앳되고 카랑카랑한 아드린느의 음색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사장 아드린느입니다! 
 “뭐지.”  이프린은 데큘레인이 사인한 문서를 힐끗거렸다. 그 제목은 [ 차기 이사장 입후보 확인서 ]였다. 
 —제 임기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바! 드디어 오늘! 차기 이사장 후보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프린. 시간이 남아도나.”  “아, 아뇨. 갈게요.”  데큘레인의 핀잔에 이프린은 얼른 집무실을 나갔다. 
 아드린느의 목소리는 77 층 복도에서도 커다랗게 진동했다. 
 —기호1번 후보! 수석교수 데큘레인! 기호2번 후보! ‘두칸학파’의 수장, 황실이 인정한 고위 마법사 이헬름! 
 이프린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이제 곧 로아호크가 배달 올 시간이었다. 
 —이사장인 저의 평가 기준은 오직 실적이고요! 그 외 익명의 심사위원도 평가할 예정입니다! 후임자 발표는 이번 겨울, 아니면 봄에 할 거고요! 얼마 안 남았죵?! 
 띵—! 
 엘리베이터가 77 층에 도착했다. 이프린은 그 안의 사람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키 큰 금발 느끼남. 
 “어~?”  기호 2 번 이헬름. 이프린의 데퉁스런 얼굴과는 달리, 그는 반가워하며 미소를 짓는다. 
 “이야~ 이파리.”  “······.”  “안타고 뭐해?”  이헬름은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에 발을 들이밀었다. 콱! 하고 문이 다시 열렸다. 
 쯧- 이프린은 혀를 차면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뭐가 그리 불만이야 이파리. 내가 뭐 잘못했나?”  “제가 분명 이프린이라고 말했죠?”  “그 이름은 너무 사막틱해. 이파리가 더 정감 가고 좋지 않아?”  “······.”  이프린은 아예 입을 다물었다. 
 우우우웅— 가파르게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그 고요 속에서 이헬름이 말했다. 
밀담하듯 낮은 목소리였다. 
 “이파리. 너는 데큘레인이 이사장이 되도록 둘 거야?”  “······.”  “그럼 네 애비는 영원히 파묻힐 텐데. 절대 인정받지 못할 텐데.”  “······아 진짜.”  또 애비, 애비, 이 지랄하네. 
 이를 아득 깨문 이프린이 이헬름을 노려보았다. 그는 피식 웃고 말을 이었다. 
 “데큘레인의 논문 발표가 머지않았는데, 설마 그놈이 그 논문의 원안이자 주인인 네 애비를 생각이라도 할까? 오히려 그놈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릴걸.”  “아 진짜! 왜 자꾸 그딴-!”  이프린이 빼액 소리를 내질렀다. 이헬름은 그녀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받아.”  “뭔데요.”  “참고인 신청서.”  “······뭐라고요?”  “난 곧 있을 ‘청문회’에 너를 참고인으로 세울 생각이야.”  이프린은 그 종이를 보았다. [ 본 마탑의 이사장 후보자 ‘이헬름’은 청문회의 참고인으로 솔다 ‘이프린’을······ ] 따위의 내용이었다. 
 “됐-”  “거절하겠다면 상관없는데, 알아는 둬. 내가 데큘레인을 역전할 수 있는 카드는 너뿐이야.”  “······그래서 어쩌란 말인지.”  퉁명스레 대꾸한 이프린은 그 종이를 찢으려 움켜쥐었다. 
 “다른 말로, 네가 나서지 않으면 데큘레인은 반드시 이사장이 돼. 그러면 놈은 반드시 네 애비를 묻어버리겠지.”  그녀의 두 손이 멈칫했다. 
 띵—!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이파리. 데큘레인 놈이 왜 너를 곁에 두고 있겠냐?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  “생각을 하라고, 생각을.”  이헬름은 훤히 열린 엘리베이터의 정면을 보면서 말했다. 
 “제 밑에 뒀다가 자살한 부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 녀석의 딸인 네가 안쓰러워서? 그깟 알량한 동정심 때문에? 아니. 절대 아니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요.”  그렇게 묻자, 고개를 비스듬히 내려 자신을 바라본다. 부드러운 금발이 물결처럼 흐르고, 진홍의 눈동자가 짙은 호선을 그린다. 
 “네가 데큘레인의 ‘아킬레스건’이라는 거지.”  “······뭐래.”  “제 가슴에 비수를 안 맞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뭐겠어. 그 비수를 남에게 주지 않는 거거든. 지가 갖고 있는 거거든.”  “······.”  이프린은 말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등 뒤에서 이헬름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래서 너를 데리고 있는 거야. 네가 이상한 생각 못 하도록. 만약 이상한 생각을 한다면 가능한 빨리 알아채도록.”  저 마탑 입구에 배달기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프린은 얼른 그에게 달려갔다. 
 “로아호크 배달 맞죠? 그거 저예요. 얼마예요?”  “300 엘네입니다.”  지갑을 뒤적거리는 이프린 사이로 이헬름이 끼어들었다. 
 “내가 사줄까.”  “아 씨 진짜. 됐으니까 가요.”  “그래? 뭐, 그래도 내가 한 말은 잊지 말고. 참고인 신청서. 그거 꼭 가지고 있어. 네가 네 손으로 애비 원수 발목 자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이헬름은 이프린의 어깨를 탁 두드리고 떠나갔다. 
 “······자요. 300 엘네.”  이프린은 지갑에서 300 엘네를 꺼내주었다. 
 “예. 맛있게 드십쇼~”  그리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는데. 
 —그래서 너를 데리고 있는 거야. 네가 이상한 생각 못하도록. 만약 이상한 생각을 한다면 가능한 빨리 알아채도록. 
 귓가에 아른거리는 이헬름의 목소리. 
 이프린은 가슴에서 치미는 한숨을 삼켰다. 
 —데큘레인이 이사장이 되면, 네 애비는 영원히 파묻힐 텐데. 절대 인정받지 못할 텐데. 
 제 손에 쥐어진 [ 참고인 신청서 ]를 보았다. 
 이미 걸레짝처럼 꾸겨졌지만······. 
 —참고인 신청서. 그거 꼭 가지고 있어. 네가 네 손으로 애비 원수 발목 자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차마 찢지는 못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 * *  「기원 : 거울」은 예상보다 더 아름다운 보상이었다. 
 ‘무지개 반사’ 따위의 무적 기술은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거울의 ‘굴절’이나 ‘반사’ 같은 현상 자체를 재능으로 지니게 된 것이니. 
 덕분에 거울을 포탈처럼 들어갔다가 나갔다 하는 등, 기예(技藝)에 가까운 마법 운용도 가능하다. 
 물론 어제 막 얻은 재능이라 아직 자세한 파악은 덜 되었—  똑똑. 
 누군가가 집무실를 노크했다. 나는 「염동」으로 문을 열었다. 
 “교수님.”  프리미엔이었다. 그녀는 옆구리에 상자를 끼고 있었다. 
 “시엘리아와 관련된 모든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턱—! 프리미엔이 집무 책상에 상자를 얹었다. 그 안에는 보고서가 가득했다. 
 프리미엔은 그중 한 서류만 골라냈다. 
 “이건 모나크 실비아 관련 파일입니다.”  “······모나크.”  “예. 이제 실비아는 교수님과 같은 등위입니다. 부유섬의 궤도에 인공섬을 창조했다는 업적입니다.”  모나크 실비아.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질투 따위의 감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읽어보시지요. 위에부터 순서대로.”  프리미엔이 의자에 앉았다. 나는 「염동」으로 파일을 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 놓치지 않고 자세히 읽었다. 
 “······.”  턱— 파일을 덮었다. 프리미엔이 딱딱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물었다. 
 “이게 사실인가.”  “저는 추론입니다만. ‘사실’은 교수님께서 더욱 잘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  나는 다시 파일을 보았다. 그 두툼한 문서들 사이, 불에 그을려진 편지 한 장이 있었다. 
 그 편지는 송곳처럼 내 관자놀이를 찔렀다. 나도 모르는 기억의 파편을 되살렸다. 
 —너만 죽으면 될 줄 알았나. 이렇게 떠나면 끝이라 생각했나. 
 ······장갑 낀 두 손이 누군가의 목을 조르고. 
 —이는 고작 거래 따위가 아니다. 너 같은 빌어먹을 년의 목숨은 아무런 가치도 없어. 
 데큘레인은 미친 사람처럼 격노한다. 핏줄이 돋아난 그의 얼굴은 악마라기에 부족하지 않다. 
 —네 남편 길테온도,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딸년도, 전부 내가 죽일 것이다. 
 그는 마치 절규하듯 부르짖는다. 
 제 모든 본연의 악을 담아, 저주하듯 울부짖는다. 
 3—모조리 씹어 처먹을 것이다! 
 “······교수님?”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런 두통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괜찮으십니까?”  프리미엔이 의심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손을 훠이 저었다. 
 “괜찮다. 이제 돌아가라.”  “아니요. 오늘은 [ 실비아 감시팀 ]의 회의가 있는 날입니다.”  “······그래서?”  “참석을 부탁드립니다.”  프리미엔이 제가 가지고 온 상자에 손을 얹었다. 
 “저도 부탁을 들어드렸습니다. 그러니, 이제 교수님의 차례입니다.”  이야기. (2)  “······감시 대상 실비아는 현재 본인이 창조한 무명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정보국이 개설하고, 치안국과 공조하는 [ 실비아 감시팀 ]의 거점은 평범한 주택이다. 
 임퓨리엄 관료들이 거주하는 ‘베이진’ 거리의 붉은 벽돌 단지 중 하나. 그 내부 인테리어와 가구 배치도 지극히 일상적이다. 
 “부유섬에 본인 가문 명의의 저택이 있긴 하나 자주 방문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감시팀의 면면을 훑었다. 
 치안 부국장 ‘릴리아 프리미엔’. 정보국 네임드 ‘루크할’. 이 두 명 외에도 나름 능력이 특출하다는 요원 여섯 명이 한 팀이다. 
 프리미엔이 말했다. 
 “실비아의 무의식이 창조했다는 괴물은?”  “종적을 감춘 상태입니다만,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생김새는 이러합니다.”  새하얗고 키 큰 여인. 상어처럼 커다랗고 이빨이 득시글거리는 아가리. 
 프리미엔이 되물었다. 
 “빌어먹게 생겼다. 갖다 치우고. 모나크 승격 업적인 ‘무명도’라는 곳은?”  그러자 정보국의 요원이 수정구슬에 마력을 주입했다. 구슬은 무명도의 풍경을 영사했다. 
 “흠······.”  프리미엔은 잠시 말없이 팔짱을 꼈다. 나도 그저 지켜보았다. 
 붉은 머리의 요원 ‘루크할’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프리미엔 부국장.”  “······저 녀석이 왜 3 개월 만에 모나크가 됐는지 알겠다.”  다른 요원들도 프리미엔처럼 감탄하며 끄덕였지만, 나에게 무명도의 정취는 익숙했다. 
 마치 유화처럼 선명히 흔들거리는 이삭과 낙엽. 이글거리듯 강렬하게 내려앉는 햇볕. 
 언젠가, 내가 출제했던 시험의 기교였다. 실비아는 고흐의 화폭을 저 섬에 이식한 것이었다. 
 “······잘 배웠군.”  프리미엔과 요원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미묘한 얼굴들이었다. 
 프리미엔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가르친 척입니까, 아니면 가르친 것입니까.”  “궁금하다면 내 시험지를 사서 봐라. 부유섬에 이따금 재경매가 올라오고 있으니.”  “······경매?”  프리미엔이 루크할을 힐끗거렸다. 루크할은 다른 요원에게 눈짓했다. 그 요원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아마 부유섬에 올라가려는 거겠지. 
 “데큘레인 교수님.”  붉은 머리의 루크할이 말했다.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감시 등급은 어느 수준으로 배정하는 게 좋을지.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감시 등급. 쉽게 말해 대상의 ‘위험도’를 판단하는 것이고, 그 순서는 위에서부터 흑(黑)—적(赤)—청(靑)—녹(綠)이다. 
 “저희는 적(赤)색 등급을 생각 중입니다만.”  루크할의 말에 프리미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비아가 창조한 괴물에 희생당한 사람이 다섯 명입니다. 적색 등급이면 충분할 겁니다.”  적색의 정의는 ‘대상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근거리의 무장 감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 할 필요 없다. 녹(綠)이면 충분해.”  “뭐라고요?”  반면 녹색은 그저 ‘원거리 감시’를 뜻한다. 
 프리미엔과 루크할 둘 다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루크할이 먼저 물었다. 
 “근거가 있습니까?”  “섬 하나를 창조한 녀석이, 제 근처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지. 청색 감시 이상은 구태여 스트레스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허나-”  “그리고.”  나는 루크할의 말을 끊었다.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착한 아이다.”  “······.”  이번에는 모든 요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뭇 괴괴한 눈빛들이었다. 
 “우리는 그저 멀리서 지켜보면 될 뿐이다. 실비아가 얼마만큼 성장할지, 어디까지 올라갈지.”  “······예?”  “괴물도 아닌 아이를 괴물처럼 대할 필요는 없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크할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끄덕였다. 
 “뭐, 전문가의 고견이니 그리 하지요. 일단은, 녹색 등급을 배정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지.”  나는 태연히 주택 밖으로 나갔다. 부국장 프리미엔이 그런 내 뒤를 따랐다. 
 “······그 아이에게 죄책감이라도 품으신 것입니까.”  프리미엔 특유의 무미건조한 목소리. 나는 도보를 거닐며 한 번 생각해본다. 
 실비아. 
 내가 그 녀석에게 나도 모를 애착을 가지게 된 것일까. 우리의 과거에 유감을 품게 된 것일까. 
 아니면······. 
 “불쌍한 녀석이다.”  연민은 좋은 감정이 아니다. 그마저도 데큘레인으로서의 나는 거의 느끼지 못하는 마음이다. 
 다만, 그저 사실이 그러할 뿐이다. 
 실비아의 과거는 결코 평탄하지 않다. 
 너무 많은 상처를, 너무 짧은 순간에 겪은 아이다. 메마르고 건조하게 자라, 그 많은 날 동안 자신을 죽여온 녀석이다. 
 “이 이상 괴롭힐 필요는 없어.”  “······.”  프리미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란히 걷다가 어느 순간 떠났다. 
 ······. 
 한편, 실비아가 발명한 바람은 저 머나먼 지상에 닿는다. 
 이름도 정하지 않은 마법. 그저 ‘바람’일 뿐인 그것은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장애물도 개의치 않고, 그녀의 마력만을 매개로 세상의 소리를 전달한다. 
 —······착한 아이다. 
 그 바람이 자신에게 전달하는 울림. 
 —우리는 그저 멀리서 지켜보면 될 뿐이다. 실비아가 얼마만큼 성장할지, 어디까지 올라갈지. 
 시간이 흘러도 영원할 것만 같은 데큘레인의 음색. 
 —괴물도 아닌 아이를 괴물처럼 대할 필요는 없다. 
 실비아는 그 전부를 도청했다. 수천 미터의 상공에서 머나먼 제도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 아이에게 죄책감이라도 품으신 것입니까. 
 데큘레인이 아닌 또 다른 인물의 질문. 
 데큘레인은 한 번의 쉼을 둔 뒤 대답한다. 
 —······불쌍한 녀석이다.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슴이 크게 뛰었다. 
 이딴 연민. 단 한 번도 바란 적 없었는데. 
 나는 그저······. 
 —이 이상 괴롭힐 필요는 없어.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을 파고들었다. 
 실비아는 이를 악물었다. 부서질 듯 짓씹은 잇새로 자그마한 욕설이 흘렀다. 
 “······나쁜 새끼.”  “?”  근처 티 테이블에서 차를 타던 이드닉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실비아의 초췌한 눈가에 물기가 촉촉했다. 
 이드닉은 쯧- 혀를 차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실비아여. 미움을 노력하고 있나?”  홱-! 실비아가 고개를 꺾듯이 노려보았다. 
 피식거린 이드닉이 차를 건넸다. 그리고는 그녀 곁에 앉아 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한 폭의 유화처럼 아름다웠다. 
 저 이삭 너머를 비행하는 날쌘돌이와 밀밭을 뛰노는 곰탱팬더가 평화로웠다. 
 그중에서 오직 한 명, 일그러진 얼굴의 실비아. 이드닉은 찻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얼굴 좀 펴라.”  “······신경 쓰지 마요.”  “신경이라니. 실비아. 이 세상에는 관상이라는 게 있다.”  “그런 거 안 믿어.”  “믿음이 아니라 현상이다.”  이드닉이 눈을 기울여 실비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실비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밀어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표정이라는 걸 짓는데, 표정은 마음에서 비롯되지. 
마음이 썩으면 표정도 썩어가.”  “······.”  “표정이 오랫동안 썩으면 얼굴에 그 썩은 무늬가 새겨져. 그게 관상이야. 넌 지금 그 관상을 새기고 있고.”  실비아는 말없이 일어나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직접 만든 유화 저택이었다. 
 이드닉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편히 쉬어라.”  * * *  그믐달이 크루아상처럼 떠오른 밤. 
 이프린은 오랜만에 기숙관으로 돌아왔다. 괜히 빵처럼 생긴 달 때문에 빵도 세 조각 샀다. 
 “하아······.”  작은 한숨을 내쉬면서 백팩과 빵 봉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침대 밑에 손을 뻗었다. 
 뻑뻑하게 딸려 나오는 낡은 여행 가방. 몇 번 만지작거리자 털컥- 하고 열린다. 
 “······.”  그 안에 놓인 아버지의 편지들. 이프린은 이 수많은 종이들을 즐겁게, 혹은 분개하면서 읽던 과거를 떠올린다.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함께 행복할 수 있겠지, 따위의 헛된 바람을 품었던 유년 시절. 
 “······아킬레스건.”  이헬름은 자신이 데큘레인의 아킬레스건이라 말했다. 데큘레인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도 ‘회유’에 불과하다며. 
 그러나 로크랄렌에서 만난 미래의 자신은—이제는 그 기억도 희미하지만— 적어도 데큘레인을 원수처럼 대하지는 않았다. 
 “모르겠다······.”  푸우- 한숨이 앞머리를 밀어 올린다. 괜히 꾸물거리던 이프린은 문득, 제 서랍에서 후원 증서를 꺼냈다. 
 데큘레인이 자신을 후원했다는 증거. 그 옆에 이헬름의 [참고인 요청서]를 두었다. 
 “······아빠. 나는 모르겠어.”  이프린은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대체······.”  허나, 아무리 고민해도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데큘레인의 진의를, 아버지와 그들의 과거를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 
 [참고인 요청서]를 쥐고 창밖의 달을 보았다. 
 “······.”  빵처럼 생긴 그믐달. 이프린은 종이 봉지를 뜯어 크루아상을 한 입 베어 물었다. 
 * * *  ······이튿날. 
 나는 제도의 장인들에게 거울을 수주했고, 유크라인 저택 뒤뜰에 ‘거울 탑’을 세웠다. 
 본격적으로 「재능」을 수련하기 위함이었다. 
 “주인님. 혹시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집사 렌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 안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고.”  “예.”  렌이 허리를 숙이자마자 거울 탑의 문을 열었다. 
 수많은 거울이 내부를 비추는 공간. 그 한복판에 선 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몸과 마력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다. 
 「기원」이 거울이라는 뜻은 곧 거울의 성질·속성·특색이 모두 나의 재능이라는 것이기에, 이렇듯 거울에 둘러싸인 공간에서는 물 만난 물고기가 된다. 
 아주 일차원적인 동질감이라 할 수 있다. 
 “······.”  나는 품 안에서 목강철을 꺼냈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목강철은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동시에 우측으로 굴절했다. 
 하나의 목강철이 두 자루처럼 움직인 것이었다. 
 “여기에 마력을 더 가미하면.”  직선으로 나아가던 목강철이 어느 순간 수십의 궤적으로 불어난다. 그 검광도 무수히 번뜩인다. 
 이번에는 ‘반사’ 작용이다. 
 “살상력은 뛰어나다.”  인간 혹은 괴수를 상대할 때에는 대단히 요긴한 기능. 
 아직은 거울이라는 매개가 필수이지만, 조금 더 연마하면 거울이 없는 곳에서, 즉 ‘목강철의 표면’ 자체를 거울 삼아 이런 반사·굴절이 가능할 테지. 
 “흠.”  다만 이마저도 징검다리에 불과할 뿐이다. 
 최종 목표는 이 「기원」을 「설화석」에 적용하는 것. 그 맑고 투명한 금속은 자체적으로 ‘거울’의 성질을 내재하고 있으니, 불가능은 아니다. 
 “······다시.”  나는 훈련을 재개했다. 
 챙─! 챙챙챙─! 
 거울의 탑에서 목강철은 굴절과 반사를 반복했고, 「염동」의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그렇게 9 할의 마력을 소진한 뒤 훈련을 끝냈다. 
 ◆ 메모라이즈 현황  : 초·중급 염동 (96%)  ┏초·중급 화력 통제 (72%)  ┣초·중급 유체 조작 (71%)  ┗금속 강화 (95%)  “이 정도면······.”  「중급 염동」뿐만 아니라 「금속 강화」의 완성이 머지않았다. 겨울의 ‘괴수 웨이브’ 전까지는 여유롭겠지. 
 나는 온몸에 맺힌 땀방울을 「클린즈」로 털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밤이었다. 
 “어머. 이제 나오시네요?”  한데 예상외의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워요~”  티 테이블에 앉은 유세핀. 그녀는 커피를 홀짝이며 손을 흔들었다. 
 “언제 오실지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즐거운 얼굴이군.”  나는 넥타이를 비롯한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왔지.”  유세핀이 생긋 웃었다. 
 “‘베론의 시체를 수습했다’는 말을 율리에게 전달할 거예요. 그러면 그 아이는 장례를 다시 치를 거예요.”  “······.”  “그 장례식에 프렌하임 기사단원 모두가 참석할 거예요. 저는 그곳에서 당신이 원하는 일을 벌일 거예요.”  말없이 듣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세핀이 짐짓 투정부리듯 입술을 삐죽였다. 
 “근데 정말 옳은 방법 맞을까요? 율리가 충격받아서 확 죽기라도 하면-”  “지극히 옳은 방법이다.”  영원한 겨울. 그 특성은 율리 본인보다도 내가 더 잘 안다. 
 “······그래요~”  유세핀은 티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그리며 말했다. 
 “사실, 저도 당신을 믿는 수밖에 없어요. 알았거든요. 율리의 저주에 치유법은 없다는 걸.”  그녀의 손가락은 단어 하나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주. 저주. 저주. 저주. 
저주······. 
 그러다 눈을 들어 나를 지그시 응시한다. 
 “하긴 너를 지키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네가 책임져야지.”  읊조리는 목소리가 서늘하다. 나를 주시하는 눈은 텅 비어버린 얼음처럼 투명하다. 감정 따위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심연. 
 나는 말했다. 
 “믿어라. 율리는 반드시 낫는다.”  “네. 믿고 있을게요. 근데······ 낫지 않으면. 제가 어떻게 변할지는 나도 몰라요.”  그러자 유세핀은 거짓말처럼 다시, 싱그럽고 청초한 미소를 짓는다. 의자에서 일어난 그녀는 몇 발자국 걷지도 않고, 한낱 그림자가 되어 사라진다. 
 “······미친년.”  이 세계관에서 가장 위험한 광인 네임드, 유세핀. 
 진심을 담아 중얼거린 나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 집사 렌이 말했다. 
 “교수님. 알렌 조교수가 방문했습니다.”  “알렌이?”  “예.”  렌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거실 응접실 소파에 알렌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알렌.”  “······!”  내가 부르자 눈을 확 뜨고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강아지처럼 배시시 웃는다. 
 “교수니임~”  “무슨 일이지.”  “앗! 이럴 때가, 수업 준비요! 수업 준비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제 곧 두 번째 수업인데요!”  수업 준비. 
 나는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미리 결정한 스케줄이 있었기에. 
 “쪽지 시험을 볼 생각이다.”  “쪽지 시험이요? 저희 수업, 고작 한 번 하지 않았나요?”  “그 첫 수업을 이해하지 못한 녀석들은 다음 수업을 들을 가치가 없지. 
따라와라.”  “네에!”  나는 알렌과 함께 걸었다. 목적지는 3 층 서재. 주뼛쭈뼛거리는 알렌을 세워둔 채,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풀어봐라. 내가 직접 구상한 문제다.”  “네, 네에.”  알렌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문제를 받았다. 그리고······  * * *  데큘레인의 격주 강의가 있는 수요일. 
 이프린은 마탑 80 층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크레토 곁의 고양이가 눈에 띄었다. 
 “대군께서 키우는 고양이신가 봐요? 얘 엄청 귀여워요.”  “아. 내가 키우는 건 아니고, 페하께서 맡기신 고양이다.”  “······네?”  흠칫 놀란 이프린은 고양이의 턱을 간질이던 손을 얼른 거두었다. 
 붉은털 먼치킨 고양이가 픙! 코를 풀고는 어딜 감히- 하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미안.”  슬그머니 물러나 앉았다. 
 그러는 사이 강의 수강생 전부가 도착했고, 정오. 
 딱 12 시 00 분 00 초. 
 데큘레인 교수는 1 초의 오차도 없이 등장했다. 
 “반갑다.”  “아, 저 교수님! 저번 수업에 저 고양이가 트롤짓했다 아입니까!”  그 즉시 로제리오가 붉은 고양이를 삿대질했다. 다른 마법사도 꽤 험악한 눈길로 붉은털 먼치킨을 노려보았다. 허나 고양이는 헹— 비웃듯 꼬리만 흔들 뿐이었다. 
 “와 저거 보소. 무지 얄밉-”  “조용. 앉아라.”  데큘레인이 손짓으로 제지했다. 로제리오는 입술을 삐죽이며 자리에 앉았다. 
 “수업을 시작하겠다.”  그러자 조교수 알렌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그의 안색은 다소 초췌했다. 잠을 못 잔 듯 다크서클이 짙었고, 그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왜인지 불길한 얼굴······ 데큘레인이 말했다. 
 “오늘은 쪽지 시험이다.”  “쪽지 시험?”  두 번째 수업부터 쪽지 시험이라니. 
 갸웃거린 이프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수강생들도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뭐. 
 데큘레인 수업이 특별하고 자기 맘대로인 건 누구나 다 아니까. 
 “알렌.”  “네, 네에······.”  알렌이 후들거리는 손으로 시험지를 뒤집어 배부했다. 이프린은 그 종이를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별다른 마법적 처리는 없는 듯했다. 
 “다 배부했습니다.”  알렌의 말에 데큘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타이머를 쥔 채 강의실 한복판에 섰다. 
 “물을 것 없다. 바로 시작하도록.”  탁—  타이머 눌리는 소리. 이프린은 얼른 시험지를 뒤집었다. 
 “······이게 뭔······ 외계어?.”  쪽지 시험의 문제는 단 두 개뿐. 
 허나 그 내용이 말도 안 되게 난해했다. 어느 정도냐면, 일단 첫 문제에는 제국 공용어가 단 한 글자도 없었다. 오직 수식과 연산 뿐. 
 입을 떡 벌린 그들에게 데큘레인은 덧붙였다. 
 “오픈북은 물론이고 서로 상의도 가능하다. 단, 전처럼 다툼이 벌어질 경우 전부 탈락이다.”  “······.”  그러자 이프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주변의 분위기를 탐색했다. 
 자신처럼, 동료(?)를 구하는 눈빛이 무지막지하게 많았다. 
 이야기. (3)  돌발 쪽지 시험. 
 이프린은 우선 제 실력만으로 덤벼들었다. 
 그러나 첫 번째 문제의 첫 문장, 여러 숫자와 회로가 혼합된 그 계산의 길이부터가 거의 무한이었다. 
 “으으······.”  이프린은 머릿속으로 마력진을 구상했다. 근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화르륵—! 
허공에 불길이 타올랐다. 
 그때 마침 대군 크레토가 손을 들었다. 
 “교수님. 상의를 해도 된다는 말씀은?”  데큘레인은 짧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다. 단, 내용을 이해했는지 질문할 것이다.”  그러자 크레토는 슬그머니 로제리오를 바라보았다. 허나 로제리오는 이미 무아지경이었다. 
 그녀의 눈에 일렁이는 철(鐵)색 마력. 
 에테르 정도의 경지에 이르면 마력도 특별하다더니. 연성의 귀재 로제리오답게, 번지는 아우라마저 금속빛이다. 
 “······아.”  그 모습에 잠시 넋을 잃었지만, 이프린은 다시 시험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본격적인 연산과 계산을 시작했다. 복잡 다난한 수식을 마법용 답안지에 적어 내렸다. 
 “이프린······?”  문득, 드렌트가 은근한 투로 불렀다. 이프린은 그를 돌아보았다. 
 “이거 어때?”  드렌트는 큼- 헛기침을 한번 하고 제 답안을 보였다. 첫 문제의 시작은 이프린과 엇비슷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에러가 조금 많았다. 
 이프린이 말했다. 
 “응. 여기 있잖아. 나는 이 두 부분을 따로 계산한 다음 접합했거든요?”  “아 그래? 나는 한꺼번에 했는데.”  “그럼 너무 어렵잖아. 쉽게 쉽게 하는 게 낫지 않아요?”  “······나는 나눠서 하는 게 더 어려운데?”  “내가 해줄게요. 봐봐”  “그래.”  이프린의 말에 드렌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상의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때. 
 벌떡—! 
 돌연 로제리오가 일어나 데큘레인에게 다가갔다. 
 “여기.”  그리고는 답안지를 건넨다. 
 데큘레인은 스윽 훑어보더니 무감하게 끄덕인다. 
 “합격이다. 들어가라.”  데큘레인이 손짓한 곳에 다른 통로가 생겼다. 로제리오는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의 뒤를 붉은털 먼치킨이 뒤따랐다. 
 “저도 되었습니다.”  “저도요~”  다음은 중독자 아스탈, 루이나 교수, 렐린 교수, 등등······. 
 고작 솔다에 불과한 이프린과 드렌트에게는 확실히 어려웠다. 
 “······딱 반 남았네.”  이프린은 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90 분이 지났다. 곁에는 드렌트뿐만 아니라 크레토도 함께였다. 
 “이 부분. 여기가 마력을 정순하게 만드는 핵심 회로라고 생각되는데. 
자네들은?”  “네. 그런 것 같아요. 드렌트 선배. 계산 맡긴 건요?”  “아 거의 다 됐어.”  이렇듯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서, 분업하면서 노력하길 세 시간. 
 탈칵-  데큘레인의 타이머가 울렸다. 
 “제한 시간이다. 제출하도록.”  “아, 네!”  세 사람은 함께 일어나 답안을 제출했다. 
 “······.”  그가 답안을 훑는 그 짧은 시간. 긴장이 올가미처럼 목을 죄이는 듯하고, 손바닥에 땀이 맺힌다. 
 “이프린.”  답안을 내린 데큘레인이 이프린을 바라보았다. 
 “네.”  이프린은 얼른 대답했다. 그러자 데큘레인은 답안지의 어느 부분을 가리켰다. 
 “이 술식의 분절과 접합 아이디어는 누구의 생각인가.”  분절과 접합. 
 술식을 일단 분리하고 계산한 뒤, 정교하게 접합하는 것. 
 말이 쉽지 그 난이도는 신체 이식과도 비슷하다. 
 성공하면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지만, 실패하면 더 빨리 죽이거나, 사람 몸에 원숭이 팔이 달린 키메라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 제가······ 제 아이디어예요. 이 두 분은 계산과 술식 해체를 도와주셨고······ 접합은 제가······.”  이프린은 조금 주눅 들어 말했다. 데큘레인은 그녀를 냉랭히 내려다보았다. 
 틀렸구나. 그 반응으로 미리 짐작한 드렌트와 크레토는 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음 이어지는 데큘레인의 말은. 
 “훌륭하다.”  예상도 못한 찬사였다. 
 “······?!”  질책을 예상하고 고개를 푹 숙였던 이프린은, 눈을 크게 뜨고 데큘레인을 보았다. 
 그가 말했다. 언제나처럼 건조한 음색이었다. 
 “이 기술은 훗날 큰 도움이 될 테니 갈고닦도록. 합격이다.”  “나이스!”  “휴······.”  드렌트는 본능적으로 쾌재를 내질렀고, 크레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며, 이프린은 그저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  혼란스러웠다. 
 일평생, 훌륭하다는 말을 오늘 처음 들었다. 빈말이나 과장이 아니라 정말 그 누구에게도, ‘훌륭하다’는 문장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난생 처음의 칭찬을, 그것도 데큘레인에게 받았는데. 
 혹시 이마저도 ‘회유’에 불과한 것인지······. 
 “이프린! 가자!”  “······어? 어, 어응······.”  드렌트가 이프린을 잡아당겼다. 넋 나간 그녀는 종이인형처럼 그에게 이끌렸다. 
 * * *  합격자들만 모인 두 번째 강의실. 노면은 땅이고, 저편에 시냇물이 흐르고, 녹음이 자라나고, 웬 불덩이가 둥둥 떠다니는 공간. 
 “합격 100 명. 탈락 50 명.”  서로 상의도 가능한 오픈북 시험이었지만, 답안 작성은 물론 조금의 이해도 못한 50 명이 탈락. 세 시간 만에 수강생의 1/3 이 삭제되었다. 
 “남은 100 명은 ‘기본적인 내용’을 이해했다고 판단. 과제를 내겠다.”  과제. 그렇게 말하며 데큘레인은 노면의 흙을 송곳 형상으로 응집했다. 
 「흙의 틀」이라는 마법이었다. 
 “이는 흙[土] 속성 마법 「흙의 틀」의 지극히 단순한 활용이다. 롱소드도 아니고, 단검도 아니고, 도끼도 아닌, 그저 9 획의 송곳이지.”  「흙의 틀」은 흙을 무기처럼 성형하는 마법이고, 보통 「염동」과 연계하거나 손으로 직접 휘두른다. 
 “그려. 「흙의 틀」은 최소 20 획은 되어야 쓸만한 무기가 되제.”  그때 로제리오가 끼어들었다. 자기 전문이라서 사뭇 신난 얼굴이었다. 
 “9 획의 「흙의 틀」은 고작 송곳. 20 획부터 단검. 30 획쯤 되면 웬만한 대장장이가 단조한 도검보다 더 날카로운 물체를 만들 수 있제.”  “그렇다.”  로제리오의 부연에 데큘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정순한 활용’의 요체는 ‘기초의 극한’에 있다. 알렌?”  “네에.”  곁에 서 있던 알렌이 마력합금을 건넸다. 그리고 데큘레인은 「흙의 틀」로 만든 송곳을 움켜쥐었다. 
 “마법을 정순히 활용한다면 ‘아주 기초적인 마법’의 출력도, 술자의 역량에 따라 무한히 급증한다. 그 예로.”  고작 9 획의 마법으로 직조한 송곳. 그 날카로운 날이 마력합금을 콕 찌른다. 
 콰직—! 
 순간 로제리오가 눈을 부릅떴다. 
 “이깟 송곳이 5 천 엘네는 호가할 마력합금을 꿰뚫었다.”  합금에 구멍이 뚫렸다. 크게 놀란 로제리오가 손을 뻗었다. 
 “거, 거 줘봐요!”  데큘레인이 휙- 마력합금을 던졌다. 로제리오는 그 즉시 「흙의 틀」로 송곳을 만들었고, 똑같이 합금을 찔렀다. 
 탱— 맑은 소리를 내며 튕길 뿐이었다. 
 “아니, 이게. 어찌 한거고?”  “나는 「흙의 틀」을 사용했지만, 어떤 마법이든 상관없다.”  데큘레인은 로제리오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14 획 이하의 마법으로 이 합금을 뚫거나, 부수거나, 녹여낸다면 과제 완수.”  이프린을 비롯한 수강생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9 획보다는 낫지만, 14 획도 기초에 속한다. 
 반면 저 마력 합금은······ 척 보기에도 기사용이다. 5 천 엘네를 호가한다면 나름 중급 이상일 테지. 
 “못한다면 탈락이다. 기한은 다음 수업까지. 그럼 이제······.”  데큘레인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남은 100 명의 수강생들은 살짝 당황했다.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이론을 시작하지”  아직 이론이 남아 있었다. 
 * * *  마탑 99 층. 운동장만한 원형 집무실에는 이사장과 그녀의 강아지가 함께 있었다. 
 “데큘레인 교수! 무슨 일인가용?!”  강의가 끝나자마자 올라온 나는, 그녀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오옷! 이게 바로 데큘레인 교수가 연구 중이라던! 바로 그! 논문······ 인가······ 요······?”  신나게 말하던 이사장은 흠칫 멈추더니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건넨 서류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서류를 보았다. 
 그 단순한 행위만 수십 번 반복하다 손바닥으로 책상을 팍! 쳤다. 
 “아하~! 꿈이구나!”  “아닙니다.”  “뭐라고요?!”  이사장은 뜨억 벌린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나 무지하게 놀랐다- 는 얼굴이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면······ 데큘레인 교수! 그 살가죽이 가짜인가요?!”  나는 말없이 이사장을 바라보았다.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이 논문을 받자마자 옹알종알 웃을 줄 알았는데. 
 빼액- 이사장이 소리질렀다. 
 “대답 안 한다! 가짜 맞네! 맞아!”  “아닙니다.”  “아닌데 왜······.”  호사가로서, 대단히 반길만한 일임에도 그리 즐거워 보이지가 않는다. 오히려 미간 사이에 흔치 않은 주름을 세우는 것이, 자못 혼란스럽고 불만스러운 듯하다. 
 “······데큘레인 교수! 데큘레인 교수! 데큘레인 교수!”  “왜 세 번이나 부르십니까.”  “진짜 이대로 제출할 건가요?!”  아드린느가 논문의 어느 단락을 가리켰다. 
 가장 첫 페이지. 
 [ 제 1 저자 ]의 이름을 소개하는 부분.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사장은 다시 논문을 보았다. 이번에는 거의 눈을 종이에 들이밀었다. 
 “후욱······.”  숨이 멎는 듯한 깊은 호흡. 
 이게 진짜라고?! 외친 이사장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데큘레인 교수! 이거 정말 이대로 제출하나요?! 제가 수리하면 이거 수정 안 되는데요!”  “압니다.”  “아니! 진짜 데큘레인 아닌 거 아냐?!”  이사장이 손가락을 촥 뻗었다. 순간 질풍이 치솟아 내 온몸을 휘감았다. 
 휘이이이잉—! 
 대상에게 걸린 마법적·마력적 처치를 모조리 파괴하는 최고급 술식, 「풍화」. 
그 폭풍 비스무리한 바람이 얼굴과 옷자락을 휩쓸었다. 
 “······뭐 하시는 짓입니까.”  5 초간의 돌풍이 물러난 뒤. 
 나는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옷을 가다듬으며 이사장을 노려보았다. 이사장의 눈이 조롱박만 해졌다. 
 “······진짜 데큘레인 교수네요?!”  “쓸데없는 의심입니다.”  그녀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럼. 저도 이걸 믿어야 한다는 건데 말이에요······ 믿을까요?!”  이 사람이 왜 자꾸 이렇게 되묻는지, 이해는 간다. 
 원래의 데큘레인이라면 상상도 못할, 세계가 두 쪽이 나도 벌이지 않을 대사건이 바로 이 논문에 있으니.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사장도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제 1 저자가!”  [ 제 1 저자 ]는 쉽게 말해 ‘논문의 주인’을 뜻한다. 
 논문의 가장 첫 페이지에, 가장 영광스러운 지면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름. 
 “두 명이라니!”  내 논문의 그 단락에는 ‘모나크 데큘레인’이라는 이름. 
 그리고 그 옆에, 동일한 간격으로 오른 ‘솔다 케이건’. 
 “데큘레인 교수 성격에 이게 말이나 되는······ 음?”  그때 이사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이거 아직 증명 실험은 안 됐는데요?”  “예.”  정확히는, 실험을 못했다. 
 내 논문은 아직 이론뿐이다. 확실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실전적인 실험, 즉 ‘마법 적용’이 중요하나, 그럴 재능이 내게는 없으니. 
 “지금은 그저 이론입니다만, 머지 않아 마법 적용이 가능할 것입니다.”  내 밑에는 이프린이 있다. 녀석은 길어도 반년이면 이 논문을 이해할 만큼 성장할 테지. 
 마법 적용과 실현은 녀석의 몫이다. 
 “하긴. 이론이 먼저 나오고, 뒤늦게 실험에 성공하는 일도 있긴 하니까!”  그러자 이사장은 훔훔- 후엄- 후으음- 기묘한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끄덕였다. 
 “그리고 뭐! 새로운 순수 원소 창안이라 했잖아요! 그 내용만 좋으면, 이론만으로도 충분히 인정은 받을 수 있겠죠! 그럼 데큘레인 교수! 이만 가보세요! 논문 좀 읽어보게요!”  이사장은 책상 서랍에서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을 꺼내 콧잔등에 얹었다. 
얼굴보다 안경이 더 거대했다. 
 “저 공부할 때 누가 옆에 있는 거 싫어하거든여! 훠이! 훠이!”  이사장이 손을 저었다. 
 “예.”  나는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라 1 층으로 내려왔다. 
 * * *  어느새 별이 총총한 밤하늘. 마탑의 주차장으로 가려는데, 웬 느끼한 금발이 벽에 기대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왔냐.”  이헬름. 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이. 내가 어디서 신기한 소문 들었는데. 너, 네 논문을 그놈 딸한테 줬다면서? 뭐, 한 달 만에 이해하면 돌려준다고?”  “······.”  “왜 그랬어? 그러다 진짜 이해하면 어떻게 하려고.”  “어차피 못 할 테니.”  “아하~ 역시. 그럼 그냥 놀리는 거구나? 어차피 안 될 거, 구경이나 하라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놈이 말하는 꼬라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껄렁껄렁하고, 흐르는 버터 같은 음색이 특히. 
 “너도 변했어. 예전에는 그런 짓 안 했잖아.”  나는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이헬름도 나란히 따라붙었다. 
 “어이 데큘레인. 이렇게 걸으니까 옛날 생각나지 않냐.”  “안 난다.”  “그래도 옛날, 어 잠깐. 어, 너무 빠르다!”  나는 보폭을 넓게 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뻗어 나가는 걸음을, 이헬름은 따라오지 못했다. 
 ······. 
 이헬름은 쯧- 혀를 찼다. 
 “에이 씨. 저따구로 빨리 걸어.”  데큘레인 저놈은 금세 멀어진다. 달리는 것도 아니고 경보도 아닌데, 무슨 마법 수준의 속력이다. 
 “그래도 뭐.”  굳이 쫓아갈 필요는 없지. 
 할 말은 다 한 것 같고, 들을 말도 다 들은 것 같으니. 
 “어이. 들었냐?”  이헬름은 마탑 근처의 아름드리나무를 바라보았다. 그 뒤에 몸을 숨겼던 이프린이 움찔 떨었다. 
 “들었지? 너한테 논문 준 것도, 네가 이해 못 할 거 알고 줬다는 거.”  “······그 정도는 옛 저녁에 알고 있었거든요?”  모습을 드러낸 이프린은 퉁명스레 팔짱부터 꼈다. 괜시리 새초롬한 모습에 이헬름은 입가를 비틀었다. 
 “알면서 왜 거기 숨었어? 나는 네가 모르는 줄 알고 일부러 너 들으라고 물어본 건데.”  “질문할 게 있어서요. 당신한테.”  “뭘.”  “셋이 무슨 관계였어요.”  “······뭐?”  이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 솔직한 반응이었다. 
 이프린은 코웃음을 치면서 재차 말했다. 
 “아빠, 데큘레인, 그리고 당신의 관계. 그거 말 안 해주면 저도 참고인 안 해요.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지.”  “······.”  “안 그래요?”  이헬름은 기가 찬 듯 입을 반쯤 벌렸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끌끌 웃었다. 
 “그래. 친구였지. 나랑 데큘레인은.”  “······친구?”  이프린이 되묻자, 다시 말을 정정한다. 마치 의문처럼 되뇌인다. 
 “친구였나?”  “뭐야 그게. 제 아버지는요?”  “따까리.”  “······이런 씨-”  “아, 농담 농담. 하하하!”  악귀처럼 일그러지는 이프린의 얼굴을 보며 이헬름은 홍소했다. 
 배를 움켜쥐고, 눈가에 눈물마저 살짝 고인다. 
 이프린이 뒤꿈치로 노면을 콰득 짓밟았다  “아 웃지 말라고요!”  “미안미안. 그래.”  후! 이헬름은 숨을 푹 쉬고 다음을 이었다. 
 “우리, 나름 동등했어. 네 애비는 유크라인의 치마폭에 있었지.”  “치마폭?”  “그래. 머리.”  이헬름이 제 관자놀이를 툭 두드렸다. 
 “네 애비는 이 머리 하나로 유크라인을 사로잡은 거야.”  그 말에 이프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크라인을 사로잡았다······ 조금 애매모호한 문장이었다. 
 “만약 제 아빠의 이론에 데큘레인이 매료되었다면-”  “어이. 유크라인에 데큘레인만 있나?”  “네?”  어리둥절한 이프린에게, 이헬름은 씨익- 짓궃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저~ 하데카인에 예리엘이라는 애도 유크라인이고, 옛 저녁에 죽은 에테르 마법사 디카일렌도 유크라인이고, 그 디카일렌이랑 결혼한 여자 두 명도 유크라인인데.”  “아······ 그러면-”  “아니. 쉿.”  이헬름이 돌연 입가에 손을 얹었다. 
 “이 정도 들었으면 돼. 이 이상은 네 목이 위험해. 유크라인은 대가문이거든. 더 알면, 널 죽일지도 몰라.”  “······데큘레인 교수가 저를요?”  “유크라인이라는 가문이.”  이프린은 눈을 똑바로 뜨고 이헬름을 보았다. 이헬름도 그 시선을 맞받아치며 말했다. 
 “그러니, 너는 꼭 내 참고인이 돼. 증거가 있다면 반드시 제시해. 뭐 증거가 있다면 하는 말이지만.”  “증거 있어요.”  순간 이헬름의 표정이 굳었다. 뱀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있다고?”  “네.”  “뭔데.”  “······내용은 비밀이에요.”  “비밀?”  그 오만상이 일그러진다. 무슨 만두 주름처럼. 
 “너 장난해 나랑? 그게 뭔지 알아야 나도 너랑 입을 맞추든가-”  “아버지랑 나눈 편지예요. 그날 청문회에 가지고 갈게요. 그리고, 당신이랑 입 맞출 건 하나도 없고요. 거기, 당신 이름은 하나도 없거든요.”  이프린의 당돌한 말에 이헬름은 잠시 말을 잃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쯔읍- 쓴소리를 냈다. 
 “······그래. 그 새끼도 나를 무시했다는 거지.”  이헬름이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끄덕였다. 
 “아무튼 알았다. 편지. 그거 좋은 증거니까 확실히 하라고. 내가 너 밀어줄테니까 바로 들이박아. 리와인드도 유크라인에 그렇게 꿀리는 가문은 아니거든.”  이헬름은 빙글 돌아서서 걸어갔다. 
 술 취한 듯, 달빛에 흔들리는 뒷모습. 그를 보며 이프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게 바른 길인지, 정녕 옳은 방법인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어쩌면 틀린 방법일 수도 있다. 그것도 완벽하게. 
 ──그러나. 
 이렇게라도 아빠의 이름이 마법계에 기억될 수 있다면. 잊히지 않을 수 있다면. 아빠가 마탑에서 겪은 수모를 돌이킬 수 있다면. 
 내가 아빠의 딸임을 자랑스럽게 알릴 수 있다면. 
 “······아빠.”  이프린은 품 안에서 논문을 꺼냈다. 
 데큘레인은 ‘한 달 만에 이해하면 너에게 돌려주겠다’고 말했지만,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돌려줄 마음이 없었던 것이었다. 
 “이상하지?”  그렇기에, 만약 이헬름의 말대로 내가 데큘레인의 아킬레스건이라면. 
 내가 그를 파멸시킬 수 있다면. 정말 그의 발목을 자를 수 있다면. 
 “기뻐야 하는데. 기뻐서 팔짝팔짝 뛰어야 하는데 말야······ .”  이프린은 속에서 치미는 안개 같은 심정을 느꼈다. 
 이상하리만치 씁쓸한 마음이었다. 
 “······.”  언젠가 만난 미래의 자신 때문일까?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후련하지도 않고, 다만 입안이 쓰다. 
 구내염이야 뭐야. 
 “······마음 굳게 먹자.”  이프린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음 굳게 먹자······.”  밤하늘에 떠오른 목소리. 
 그녀의 자신감 없는 다짐은, 입김처럼 허공을 맴돌다 흩어진다. 찬 바람에 휘말려 부서진다. 
 청문회. (1)  밤의 어둠은 녹기 직전의 얼음처럼 깨어지고, 그 사이로 푸른 서광이 스며드는 이른 오전. 
 이사장 아드린느는 엷은 한숨을 내쉰다. 
 “에효······.”  그녀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는 데큘레인의 논문, 그리고 마법계 ‘네 주축’의 합의서.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 문서를 들었다. 
 [ 마법계의 균형을 이루는 베르흐트, 부유섬, 화산, 원탁은 ‘데마칸’ 이후 대단히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공동의 합의를 도출하게 되었다. ]  참고로 화산은 잿더미의 존칭이다. 아무리 잿더미- 잿더미- 거리며 비하해도 그 세력이 마법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건 사실이기에, ‘이런 대사건’에 만큼은 마법계의 유권자 중 하나로 그 의견을 인정받고 있다. 
 [ ······그간 ‘아드린느 세젤리안’이 보인 마법의 진보. 진리의 추구. 
구도(求道)를 걷는 극기(克己)의 인내. 그 지난한 정진으로 이룩한 마법적 성취를 존중하고 경애하며······. ]  온갖 미사여구로 점철된 부분은 그저 훑듯이 넘기고, 마지막 단락을 읽는다. 
 아드린느라는 마법사에 대해, 마법계 전체가 도달한 결론. 
 [ 아드린느 세젤리안을 이 마법계를 초월한, 대륙 역사에 영원 불멸히 남을 현존 ‘제 2 의 대마법사’로 인정하는 바이다. 등위식은 내해 봄······ ]  이터널 등위의 대마법사. 
 데마칸의 뒤를 잇는, 두 번째 아크 메이지(Arch-Mage). 
 그 정점의 등극을 알리는 합의문. 
 “······아드린느 2 세?”  아드린느는 제 곁의 강아지를 불렀다. 
 —앙! 앙! 
 얼른 달려온 녀석을 품에 안았다. 보들보들한 등허리를 만지작거리며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나는 공식적으로 ‘인간’이 아니게 된 거네.”  아드린느는 베르흐트와 부유섬뿐만 아니라, 잿더미나 원탁 같은 지극히 폐쇄적인 집단에게도 인정을 받아, 즉 순수한 마법적 재능과 그 성취, 위력만으로 ‘마법계 전체의 공동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영원불명의 대마법사란 본디 그토록 어마무시한 존재인 것이다. 
 “이제 곧 사람들이 오겠지? 막 나한테 질문을 퍼부을 거야.”  —앙! 앙! 
 “······그럼 곧 떠나야겠지. 오래 못 머무르겠지.”  너무나도 재미있었던 속세. 
 데큘레인. 율리. 디카일렌. 루이나. 길테온. 시엘리아. 신시아. 이드닉. 
로하칸. 자이트. 이헬름. 크레토. 가네샤 등등······  언젠가 자신을 즐겁게 했던 수많은 이름과 얼굴들이 떠오른다. 
 “······.”  아드린느는 창틀에 다가가 마탑의 지상을 굽어보았다. 
 아직 아침 6 시도 안 되었는데, 어느새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럼!”  그녀는 제 품 안의 아드린느 2 세에게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갔다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앙! 앙! 
 녀석은 해맑게 대답했다. 
 * * *  이른 오전. 
 대륙의 무수한 인파가 마탑에 모였다. 온갖 언론의 기자뿐만 아니라 제국 대학의 학부생, 마법사, 기사들도 모두 근처에서, 혹은 멀리에서 그 진풍경을 지켜보았다. 
 —이사장의 임기는 올해로 끝인 겁니까?! 
 “네! 겨울 또는 봄에 끝내고 인수인계도 할 것 같네요!”  수많은 카메라에 담기는 대상은 오직, 이사장 아드린느. 공식적으로 ‘이터널’이라는 등위에 오른 그녀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파묻혀 있다. 
 물론 대륙의 어느 누구나 다 예상한 수순이지만, 그 역사적인 순간을 두 눈으로 목도하는 경험은 결코 흔치 않기에. 
 —차기 이사장 후보는 두 명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과정은요? 
 “뭐가 있겠어요! 그냥 진행되고 있어요! 둘 중 더 적합한 사람을 뽑을 거고요!”  솔다 이프린 또한 마탑의 3 층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미 인산인해(人 山人海)인 밖보다는 이 안이 더 잘 보였고, 인터뷰 내용도 선명하게 들렸다. 
 —이헬름 마법사가 최근에 발표한 논문 「보조 마법의 고요한 탐구와 그 개혁의 길」이 마법계에 연일 화제인데요. 그런 개인의 업적도 차기 후보 선정에 반영이 될까요? 
 “아! 네 그럼요! 이헬름의 그 논문은 저도 읽어봤어요! 엄청 좋더라고요!”  ‘그 논문은 나도 읽었다-’, ‘엄청 좋았다-’. 
 그녀가 한마디를 할 때마다 기자들은 바쁘게 글을 적었다. 
 —데큘레인 교수도 이제 곧 논문 발표가 머지않았다는데요! 
 “아~ 네! 그거요?! 데큘레인 교수는 이미 제출했어요!”  “······!”  그 순간 이프린은 귀를 쫑긋 세웠다. 다 마신 종이컵을 와그작 움켜쥐었다. 
 “저자 등록도 확실히 했고요!”  아드린느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음을 참았다. 제 딴에는 ‘복선’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저자 등록도 확실히 했다’는 복선. 
 기자들이 커다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땠습니까? 
 “음! 저도 아직 이해는 다 못했어요! 분량이 어마어마했고! 
이론뿐이거든요!”  —별로라는 건지······. 
 “아뇨! 그건 절대 아녜요! 이헬름은 확실한 결과물을 냈고, 데큘레인은······.”  아드린느는 단어를 고르는 듯 잠시 고민하다 끄덕였다. 
 “아, 대단한 가능성이에요! 아직은 이론뿐이지만 만약 이 이론이 진짜라면! 
진짜 마법 적용이 가능하다면!”  찰칵찰칵—! 찰칵찰칵—! 
 끊이지 않고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 아드린느의 입에 온 신경을 집중한 이프린에게, 그 수많은 소리들은 그저 거슬릴 뿐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아드린느가 손날을 세웠다. 
 그 찰나, 시간이 멎은 듯했다. 
 수천수만의 눈과 코와 입. 이 공간의 모두가 그녀에게 집중했다. 
 그토록 무수한 시선을 즐기면서, 아드린느는 말했다. 
 “데큘레인 교수는 아마 ‘장로(長老)’가 되지 않을까요?”  “?!”  장로. 
 그 단어에 이프린은 눈을 크게 떴다. 
 함께 인터뷰를 구경하던 마탑의 마법사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장로라면, 마법계의 장로란 말씀이십니까. 
 “네!”  마법계에서 ‘장로’란 굳이 베르흐트뿐만 아니라, 신학파(新學派)의 원류─ 즉 ‘새로운 마법학파를 창조한 자’의 은유다. 
 예를 들어 두칸학파의 수장은 이헬름이지만, 그 장로는 50 년 전에 작고한 ‘두칸’인 것처럼. 
 —데큘레인 교수가 학파의 시조(始祖)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다~ 는 거예요! 근데 논문이 아직 너무나 어려워서용! 
저도 아직 이해 못 했거든요! 공부하러 가야 돼요!”  “······.”  지켜보던 이프린은 이를 까득 깨물었다. 
 ······장로? 방금 들었어? 데큘레인이 장로라고? 
 와 그러면 이사장 확정 아닌가? 무슨 논문이길래? 이사장님도 어려워할 정도면······. 
 마탑 안에서 출렁거리는 그 모든 목소리가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피식거리는 웃음과 저들끼리 떠드는 수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장로······.”  이프린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사념에 젖었다. 
 만약 데큘레인이 장로가 된다면. 
 내 아빠의 업적으로 찬란히 비상하면서, 정작 아빠의 이름은 저 밑바닥에 파묻는다면.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틀린다. 내장이 꼬이는 것처럼. 
 “······.”  이프린은 품 안의 편지 한 장을 꺼냈다. 
 ‘너를 위해 준비한 연구가 있다-’는 아버지의 필체. 
 그 문장을 다시 읽고, 텅 비어버린 눈으로 저편을 응시한다. 
 “네! 그 논문에 정말 특별한 점이 있거든요! 일단 제가 1 차 검수를 하고 부유섬에 제출을 할 건데~!”  여전히 진행 중인 인터뷰. 
 아버지가 내게 맡긴다던 ‘그 연구’는, 그러나 내 손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있다. 
 * * *  ······오늘, 나는 출근하는 자동차에서부터 기자들에게 시달렸다. 
아드린느가 사전에 공개한 ‘논문 제출’ 루머 때문이었다. 
 —교수님은 장로가 될 생각이십니까! 
 —학파의 이름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유력한 이사장 후보로서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원탁이 두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이따위 맥락도 없는 질문들이 차창 밖에서 날아들고, 무개념 카메라가 쇄도하는 길목에서 겨우 벗어나, 힘겹게 도착한 마탑의 77 층. 
 “교수님!”  복도에서 마주친 알렌이 퍼뜩 달려왔다. 
 나는 말없이 집무실로 들어갔다. 알렌은 어떤 종이 뭉치를 품에 안은 채 따라왔다. 
 “교수님!”  “······왜.”  「염동」으로 외투를 벗으며 묻자, 웬 헛기침을 험험- 한다. 그리고는 짙게 내리깐 목소리로 묻는다. 
 “이사장이 되려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  나는 가만히 노려보았다. 알렌은 품 안의 종이를 힐끗거리더니 다시 말했다. 
 “대답이 늦군요.”  “······뭐 하냐.”  “청문회의 예상 질문입니다. 제가 한번 작성해 봤는데-”  “됐다.”  “네에······? 저희도 이런 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헬름 마법사님은 황실에서 합숙도 하면서 준비하고 있다는데요.”  “그럴 필요 없다.”  아마 원래의 데큘레인이었다면. 
 이딴 준비보다도 이헬름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는 공사에 몰두했겠지. 
 “그래도······.”  “되었다.”  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교수님. 오셨네요.”  이프린이었다. 
 녀석은 사뭇 가라앉은 모습으로 다가와 내 책상에 서류를 올려놓았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다시 돌아가는 꼴이 평소와는 다르다. 물을 잔뜩 먹은 스펀지처럼 축축 늘어지고, 걸음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듯하다. 
 “······.”  다만 그 이유를 묻기에, 나는 너무 무신경하다. 사실 어느 정도는 관심도 없다. 
 성격적인 결함인 것이다. 
 “이프린 씨.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반면 알렌은 조금 다르다. 
 “알렌.”  “아, 네에?”  녀석은 ‘걱정하는 척’하는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이제 나가라. 할 일이 있으니.”  “앗, 네에. 그······ 예상 문답은.”  “시간 날 때 확인하지.”  “네엡! 화이팅입니다 교수님!”  * * *  아드린느는 마탑의 이사장이다. 
 즉, 이사(理事)들의 장(長)이다. 
 따라서 마탑에는 이사들이 존재한다. 명칭이 제국황실대학마탑인 만큼, 대학의 학장과 황실의 연줄 등 총원 열세 명이 마탑의 이사직을 돌아가며 맡는다. 
 “······축하드립니다, 이사장님.”  그들은 이사장에게 극존한 예를 취한다. 대마법사 승격이 머지않은 아드린느에게는, 이제 황제의 권위조차 닿지 못하므로. 
 적어도 이 마탑을 떠날 때까지는 언터처블의 존재인 것이다. 
 “고맙네요! 앉으세요!”  아드린느는 픽 웃고는 이사들을 앉혔다. 
 마탑의 100 층, 특수 회의실은 오늘 ‘후임 이사장’이라는 주제로 소집되었다. 
 “이헬름과 데큘레인. 둘 다 충분히 어울리는 인재입니만 유력한 것은 역시, 마탑에서 근 10 년 근속한 데큘레인입니다.”  열세 이사 중 한 명, ‘드루먼’이 발제자로 나섰다. 
 아드린느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그렇겠죠! 근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니까요! 일단 후보 평가는 청문회부터 끝내고 해야죠!”  “옳은 말씀이십니다. 청문회 일정은 2 주 뒤 월요일로 생각 중입니다.”  “음~ 빨리하는 게 좋긴 해요! 뭐 구린 거 있으면 얼른 밝혀내고! 소명하고! 
투표나 최종 회의는 그다음에 해야 되니까!”  그러자 모두 동의한다는 얼굴이 되었다. 이사장은 만족스레 다음을 안건을 꺼냈다. 
 “근데 두 후보자, 청문회 ‘참고인 신청’은 했나요?!”  “예. 이헬름 마법사는 총 세 명의 참고인을 신청했고, 데큘레인 교수는 없습니다.”  “없어요?!”  아드린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다만 한 명 이상이 필수이니, 아마 루이나 교수나 렐린 교수가 참고인으로 나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 그 참고인 명부 줘봐요.”  “이것입니다”  이사 드루먼이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대외비였기에, 마법으로 밀봉된 물건이었다. 
 확—! 뜯어버리며 아드린느가 물었다. 
 “서로 누가 누구를 참고인으로 신청했는지는 비공개 맞죠?!”  “예. 당일 공개가 원칙입니다.”  “그래요.”  대강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그 [ 참고인 신청서 ]를 보았다. 명단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으응?”  잘못 봤나? 눈을 부비적거리고 다시 보았다. 
 그대로였다. 
 “이거······.”  아드린느가 손가락으로 어떤 단락을 가리키며 이사들을 돌아보았다. 
 “예. 저희도 꽤 놀랐습니다. 설마 입탑한 지 1 년도 안 된 새내기를 참고인으로 신청할 줄이야.”  그들의 말에 아드린느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붕어처럼 우두커니 끔뻑- 끔뻑- 거리다, 문득. 
 “······푸히힛!”  목구멍에서 웬 간지럼이 훅! 하고 튀어 올랐다.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미소였다. 
 “히힛! 우하핫! 아 이게······ 푸흐흐흡!”  행복한 아이처럼, 혹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아드린느는 마냥 웃으면서 [참고인 신청서]를 바라보았다. 
 “아하하하항······!”  * * *  제국마탑의 청문회 일정은 황궁에도 공지되었다. 
 “이사장 후보란 말인가······.”  소피엔은 침대에서 뒹굴며 그 문서를 보았다. 
 제국마탑의 차기 이사장 후보, 데큘레인과 이헬름의 청문회. 
 케이론이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흐음······.”  황제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흠.”  과연 어떤 정치와 술수가 벌어질 것인가. 서로 무슨 공격을 주고받을 것인가. 얼마나 질척거리는 진흙탕이 되어버릴 것인가. 
 생각만으로도 심히 흥미로운 일전이었다. 
 “좋다. 짐도 가겠니라.”  “······예?”  케이론이 되물었다. 소피엔은 피식 웃었다. 
 “짐도 참석하겠다는 말이다.”  “아. 고양이로 말입니까.”  “아니. 직접. 몸소.”  “······.”  케이론으로서는 요즘 외부 활동을 시작한 소피엔이 영 적응되지 않았다. 
 “차기 이사장 청문회라면, 충분히 짐도 참석할만 하니라. 애당초 그 마탑이 짐의 것 아닌가?”  “······폐하께서 참석하시는 것만으로도 무게추가 기울 수 있습니다.”  케이론은 완곡한 반대 의사를 전했다. 소피엔은 가늘게 좁힌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왜지.”  “당연히 데큘레인이 폐하의 교습 마법사이기 때문입니다.”  “허. 그래. 데큘레인은 짐의 교습 마법사이나, 이헬름도 짐이 황궁을 오가다 수십번이나 만난 황실 직속 마법사다. 무슨 문제가 된다는 것이냐? 하물며, 짐의 의견이 반영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또 무엇이냐?”  “······.”  “그 마탑은 짐의 것인데.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짐의 것인데. 어? 짐의 것이라고.”  “······.”  “짐의 것을 대신 다스릴 놈을 구하는 것인데. 짐이 참석하면 안 된다고?”  “······아닙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케이론은 한숨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게으른 황제는, 오히려 게으르기에 한번 내린 결정은 철회하지 않는다. 
 “흥!”  소피엔은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 * *  ······요 열흘 동안. 
 마탑의 화두는 온통 ‘청문회’였다. 
 아드린느의 대마법사 등극은 어차피 당연한 일이었기에, 조금 더 불확실한 이헬름과 데큘레인의 청문회가 이목을 끈 것이었다. 
 “굴러들어온 이헬름이냐, 수석교수 데큘레인이냐. 지금은 8:2 로 데큘레인이 유리하다네.”  줄리가 위자보드를 보면서 말했다. 지금 위자보드에는 마탑 마법사들의 여론이 작성되고 있었다. 
 “근데 이헬름이 유난히 자신감이 넘친대. 참고인도 서너 명이나 신청했고. 
황실이랑 가문 연줄을 다 동원했나?”  이프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데큘레인은 벌써 확정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참고인도 한 명뿐이고, 가문 사람이랑 별 대화도 안 나누는 것 같대.”  “······”  “그래서, 데큘레인이 진다면 방심 때문일 거래. 아~ 내일 뭐가 있을까. 
궁금하다.”  이프린은 끄적이던 펜을 툭 내려놓고 줄리를 노려보았다. 
 “줄리.”  “응?”  “관심 없어.”  “······어, 어 응.”  답지 않게 냉랭하고 쌀쌀맞은 모습. 줄리는 흠칫 놀라 위자보드를 내려놓았다. 
 “······.”  이프린은 시계를 보았다. 
 오후 7 시. 
 본격적인 청문회는 내일이지만, 또 몇박 며칠 일정인지도 모르지만, 그 준비는 오늘부터다. 
 “나 갈게.”  “으, 응. 내일 봐~”  줄리가 눈치 보면서 손을 흔들었고, 이프린은 마탑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띡-  이헬름에게 받은 카드를 엘리베이터에 대자, ‘특수층’이 활성화된다. 
목적지는 1 층도, 77 층도 아닌 곳. 
 우우우우웅—  가파르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순간적인 기압 차이로 귀가 막히고, 침을 삼켜 뚫어낸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서서히 열리는 문 너머에는 이헬름이 있었다. 
 “어 왔네.”  “······.”  “아~ 아쉬워. 이 청문회. 공개 청문회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안 그래?”  “착각 마요.”  이프린은 그를 노려보았다. 요 근래 아무 것도 먹지 않은 터라 시선에 독기가 가득했다. 
 “나 당신 편 아니니까. 그쪽도 공격할 수 있어요.”  “······그래. 나도 알아.”  이헬름은 어깨를 우쭐거리며 대답했다. 
 “네 처지와 입장이 나한테 유리할 뿐이지. 그 이상은 나도 안 바래.”  “······.”  “알았으면 가서 기다리고 있어라. [ 참고인 대기실 ]이라고 따로 있거든. 
5 성급 호텔보다 좋아. 때 되면 부를 테니까 편히 쉬고 있으라고.”  “솔다 이프린. 저를 따라오시지요.”  이헬름의 집사인지 비서인지, 아무튼 심복이 이프린에게 다가왔다. 
 이프린은 이헬름을 흘겨보고는 그 심복을 따라 걸었다. 
 “이곳입니다. 기다리고 계시지요. 자세한 일정은 추후 공지될 예정입니다.”  그가 안내한 방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째각- 째깍-  공허하게 울리는 초침 소리. 
 째깍- 째깍-  온몸으로 번지는 듯한 울림. 
 “······숨막혀.”  이 고요를 참을 수 없었던 이프린은, 낡고 헤진 여행가방을 꺼냈다. 
 그 안에 가득한 아버지의 편지들 중 아무 거나 골라 집었다. 
 “아빠······.”  종이에 담긴 문장. 
 한 글자 한 글자를 곱씹듯 읽어가며, 천천히 마음을 다스린다. 
 “······이게 옳은 걸까.”  청문회. (2)  ······나는 눈을 뜬다. 
 서서히 개이는 시야, 그 저편은 암적색 안개에 휘감긴 듯 불투명하다. 
하늘과 땅의 구분이 모호하다. 
 어둠 속에 홀로 선 감각. 
 그러나 혼자는 아니다. 멀지 않은 곳에, 내 이름을 부르는 자가 있다. 
 —데큘레인. 
 그의 음색은 독기처럼 짙게 깔리고, 심장을 압박한다. 흔치 않은 감정이 가슴의 밑바닥에서 피어오른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공포’라는 것이다. 
 —아들아. 
 데큘레인이 유일하게 두려워한 남자이자, 직계존속인 아버지이며, 유크라인을 영광으로 이끈 선대 당주, 디카일렌. 
 그는 검붉은 눈으로 데큘레인을 굽어보며 고한다. 
 —알맞은 그릇을 찾았다. 
 디카일렌의 목소리, 손짓, 동공, 분위기······ 그 모든 것으로부터 데큘레인이 느끼는 감정이 선명하게 흘러든다. 
 뒷목이 경직되고 닭살이 오른다. 영혼이 통째로 떨리는 듯하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하다. 
 데큘레인에게 이런 ‘체계’가 있었던가. 대저 공포 따위를 받아들이는 기관이 존재하기는 했던가. 
 데큘레인은, 뇌의 일부가 어느 정도는 망가진 인간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나는 의심한다. 
 이 감정은 디카일렌이 불러 일으킨 것이 아닌, 그저 ‘작용’의 결과물일 것이라고. 
 마법적인 세뇌, 즉 세기의 예술마법사(藝術魔法師)라 불린 디카일렌의 인위적인 잠식일 것이라고. 
 “······.”  나는 디카일렌을 바라본다. 그의 모습을 가리는 안개를 걷어낸다. 데큘레인의 무의식에 파묻힌 디카일렌의 외면을 똑바로 응시한다. 
 —데큘레인. 내 아들아. 
 데큘레인을 닮은, 아니, 그보다 더 차갑고 날카로운 남자. 
 ‘악마를 두려워하라’는 유크라인의 가언에 지극히 어울리는 인간상. 
 —나에게 가지고 오거라. 
 데큘레인은 그를 두려워하고, 그 감정은 나에게도 옮아오지만······. 
 “나는 데큘레인이 아니다.”  극복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과거 데큘레인의 몸에 어떤 세뇌가 각인되었든, 「철인」의 육체를 지니게 된 나로서는 우스운 술수에 불과했으니. 
 —아들아.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저 위풍하게 다가가, 두 손으로 놈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기억이 흘러들었다. 스위치가 켜지듯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디카일렌.”  디카일렌은 데큘레인에게도, 예리엘에게도 만족하지 못한 유크라인의 당주. 
 그 욕망의 화신이 원한 것은······  ‘그릇’. 
 “너는 새로운 당주를 원했나.”  또한, 뇌리에 스치는 어떤 생각. 
 “아니면······.”  [ 독립 퀘스트 : 가문 ]  그날. 나는 분명 예리엘과 함께 디카일렌의 인격을 사살했으나, 퀘스트 완료를 알리는 메시지는 없었다. 
 그 말인즉. 
 아직, 디카일렌의 시험은——  ——취이이익! 
 선연한 기계음이 의식을 일깨운다. 
 환영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현실이 채운다. 
 “다 끝났어요!”  그렇게 알리는 사람은 아드린느였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금까지 누워 있었던 원통형의 기계를 바라보았다. 
 “뭐 별건 없네요!”  정식 명칭은 [ 마공학 뇌파 탐험기 ]. 부유섬에서 개발한, 대상의 무의식을 파고드는 기계였다. 
 아드린느는 ‘개인 검증’이라는 명목으로 이 테스트를 명했다. 
 “필요한 과정이었습니까.”  “그럼요!”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혹시 후보자가 타국의 스파이거나, 잿더미와 결탁, 혹은 원탁의 극성 지지자면 곤란하니까요!”  “그걸로 구분이 가능합니까.”  “그럼요! 이걸로 걸러낸 스파이만 수천 명이에요! 이게 또 누구의 마력으로 작동시키냐에 따라 성능이 달라지기도 하고!”  “······.”  “제 마력을 썼잖아요!”  나는 조금 껄끄러운 얼굴로 아드린느를 바라보았다. 혹시, 방금의 무의식이 이사장에게도 전달되었다면······. 
 내 우려가 옳았는지 그녀는 방긋- 웃었다. 
 “걱정 마요! 저는 입 무거워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취이이이익—! 
 그때 다시 기계음이 울렸다. 두 번째 후보자, 이헬름의 것이었다. 
 “아 이헬름도 끝났네요!”  “허······ 허······.”  땀 범벅인 놈은 거친 호흡을 반복했다. 악몽이라도 꿨나. 
 “앉으세요!”  아드린느가 고갯짓을 했고, 우리 둘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첫 번째 개인 검증은 끝났고요! 둘 다 합격이에요!”  “감사합니다.”  어느새 「클렌즈」로 말끔해진 이헬름의 말이었다. 아드린느는 ‘뇌파 탐험 결과지’를 제 품에 넣고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데큘레인 교수?”  “예.”  “제가 드디어 데큘레인 교수의 논문을 어느 정도 이해했어요!”  아드린느가 새삼 대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헬름은 나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그렇습니까? 어땠습니까, 우리 데큘레인 교수님의 논문은?”  “과연! 좋았어요! 이 정도면, 이론뿐이라도 부유섬이 극찬을 할 거예요!”  이사장이 엄지를 세웠다. 이헬름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또, 청문회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청문회 일정은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어요! 두 분이 섭외한 참고인 외에, 저희 이사진이 초대한 ‘공통 참고인’도 있고요! 두 분의 마법계 위상과 업적을 재점검할 생각이에요!”  “당연한 일입니다. 
 이헬름은 여유롭게 답했고, 나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린느가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두 시간 정도 시간을 더 드릴 테니 각자 개인 정비를 하고 오세요!”  * * *  “우선 전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헬름은 돌아오자마자 청문회를 준비했다. 제 휘하의 교수, 마법사, 가문의 일원 등 수십 명과 함께. 
 “데큘레인의 빈약한 논문 실적이 첫 번째입니다. 근 4 년간 데큘레인이 제출한 논문은 최근 하나뿐이고, 그마저도 아드린느의 인터뷰로 확인된바, 실험으로 증명되지 않은 이론입니다.”  업적 자랑이나 공약은 유효한 공격이 되지 못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데큘레인이라는 인물 자체에 흠집을 내는 것이다. 
 “따라서 논문의 불확실성을 공격하고, 과거 데큘레인 휘하였던 자들의 평판을 곁들일 것입니다.”  이헬름은 그저 여유롭게 들었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한 휘하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기실 이 모두는 그저 부산물에 불과하다. 
 진정한 덫은 이들도 모르고 있다. 
 “데큘레인이 수석교수이면서도 휘하에 단 세 명 밖에 없는 이유. 그 인격적인 결함을······.”  데큘레인이 이미 제출했다는 논문, 「순수 원소의 창안과 그것을 토대로 한 사계열 마법」. 
 그 아이디어가 진정 누구의 것인지, 이헬름은 이미 안다. 
 애당초 그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데큘레인의 과거 논문 전부가, 모조리 ‘그놈’의 것이다. 
 “······따라서 참고인들에게 데큘레인의 인성을 중점적으로 물어볼 것입니다.”  데큘레인은 이 술수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오만에 가까운 자존이 하늘을 뚫고, 누군가가 자신을 훼손하는 짓거리를 그 누구보다 싫어하는 데큘레인이라면. 
 내가 아는 그 고고한 데큘레인이라면. 
 반드시, 이 덫에 아킬레스건을 들이밀 것이다······. 
 * * *  소피엔은 마탑에 행차했다. 그러나 굳이 외부에 알리지는 않았다. 
 황궁에는 마법 인형을 두었고, 본인은 로브 행색의 ‘공통 참고인’으로 위장했다. 이러는 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  소피엔은 청문회를 둘러보았다. 공간 자체는 총 네 구획이었다. 
 우측은 데큘레인의 진영, 좌측은 이헬름의 진영, 전방은 이사들의 판정석, 후방은 공통 참고인의 좌석. 
 소피엔은 그중 공통 참고인석에 앉았다. 참고로 케이론은 청문회장의 벽면에— 어제부터— 동상인 척하고 있었다. 
 또 이 밖에는 율리가 서성이는 중이다. 제 남편 될 놈의 일생일대 기회라 애간장이 타는 건지. 
 “자! 자! 자! 다들 착석해 주세요!”  그때,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아드린느가 나타났다. 소피엔은 그녀를 눈여겨보았다. 
 “이제 곧 1 차 청문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대마법사 아드린느. 확실히 인간과는 그 결이 다른 기감이 느껴진다. 
 “으음!”  아드린느와 이사들이 먼저 판정석에 앉았다. 소피엔은 가만히 관람했다. 
 “데큘레인과 이헬름! 두 후보자 진영은 들어와 주세요!”  그러자 문이 열리고, 데큘레인과 이헬름이 등장한다. 
 이헬름은 웬 사람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지만, 데큘레인은 조교수 한 명뿐이다. 
 “놈 성격에 저럴 줄 알았지.”  소피엔은 피식 웃었다. 
 믿고 등을 맡길 만한 친구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가엾은 놈. 그저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려는 과중하고 거만한 놈. 
 그게 데큘레인이니. 
 “첫 순서는 공통 참고인 대질 문답입니다!”  청문회는 목차 그대로 진행되었다. 우선 아드린느가 섭외한 공통 참고인이 중앙의 증인석에 앉았다.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부유섬의 아스탈입니다. 
 데큘레인의 고급 강의 수강자이자, 부유섬 중독자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참석한 아스탈. 
 “중독자 아스탈. 데큘레인 교수의 논문은 거의 본인이 검토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헬름 진영은 그에게 데큘레인의 논문과 관련된 사안을 물었다. 
 —예. 데큘레인 교수가 근 10 년간 제출한 논문은 모두 제가 검토했습니다. 
 “교수가 최근에 집필한 「순수 원소의 창안과 그것을 토대로 한 사계열 마법」 은 아직인가요?”  —논문의 ‘개요’는 보았습니다만, 그 이상은 아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대 중입니다. 
 “그렇군요.”  소피엔은 데큘레인을 보았다. 
 이헬름 진영은 저토록 열심인데, 데큘레인 저놈은 대단히 여유롭다. 
평화롭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체스를 두는 것처럼. 
 “개요만 보았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처음에는 허무맹랑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허무맹랑이요?”  걸렸구나! 이헬름 진영의 누군가가 미소를 지었다. 
 —예. 허나, 아드린느 이사장님의 강력한 보증이 있었습니다. 
 “네 맞아요! 
 이사장이 끼어들었다. 
 “그 논문은 전혀 허무맹랑하지 않아요! 제가 보증할 수 있어요! 또 어차피, 이번 달 내에 제가 검수한 원본이 부유섬으로 올라갈 거예요!”  —아! 
 그러자 아스탈의 눈에 별빛이 깃들었다. 그는 진심으로 행복한 듯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흠.”  이헬름 진영은 별말 없이 앉았다. 
 아드린느는 데큘레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너도 뭐 묻고 싶은 게 있다면 물으라는 것이었지만, 데큘레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곁의 조교수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할 뿐. 
 “뭐 없으면! 다음 참고인이요!”  그 이후의 문답은 공통 참고인을 한 명 한 명 바꿔가며 진행되었다.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지루한 과정이었다. 
 참다 못한 소피엔은 하품을 내뿜었다. 
 “······흐아암.”  재미가 없다. 
 귀찮다. 
 나태를 아예 극복한 것도 아니고, 또 관성이라는 것이 있기에, 여기서 이 지랄로 있다가는 다시 권태가 도질 것 같다. 
 “잠시 쉬었다 할게요!”  그러는 사이 휴식 시간이 되었다. 어느덧 4 시간이나 지난 것이었다. 
 사실, 중간에 잤다. 
 “그냥 가지. 개좆도 재미가 없다.”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케이론에게 중얼거린 뒤, 의자에서 일어난다. 
 뚜벅뚜벅-  청문회장을 나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는데. 
 “가시게요?!”  “······.”  누군가가 그녀를 붙잡았다. 
 키작은 꼬마, 아니. 
 이사장 아드린느였다. 
 “에이. 조금 더 기다리시지. 이제 재미있을 건데요!”  “······알고 있었는가.”  “뭘요~?”  아드린느가 천연덕스레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피엔의 미간에 주름이 세워졌다. 
 “건방지구나.”  “히히! 그래도 조금 더 머무르세요! 실망 안 하실 거예요! 하이라이트는 지금부터인데!”  “······.”  “정말 강추드려요!”  황제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이사장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고,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을 때. 
 소피엔은 다시 청문회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 * *  “아······.”  이프린은 퀭한 눈으로 청문회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헬름 측에서 제공한 수정구슬이 그 진행을 영사했다. 
 —다들 편히 쉬셨나용?! 이제 각자 진영에서 참고인을 신청하도록 하겠습니다! 
 데큘레인의 참고인은 루이나였다. 
 그녀는, 기조실장으로서 데큘레인의 공명정대, 또한 마탑이 얻은 수익을 중점적으로 설명했다. 정성스레 자료까지 첨부했다. 
 —······데큘레인 교수가 그 과정에서 어떤 희생이나 억압 등을-  —됐다. 
 이헬름은 굳이 루이나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다만, 자리에서 일어나 아드린느에게 말할 뿐이었다. 
 —기조실장으로서 데큘레인의 유능을 인정합니다. 그러니, 이제 저희 측에서도 참고인을 신청하겠습니다. 
 이헬름이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이헬름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어렸으나, 데큘레인은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똑똑—  그 순간 울리는 노크. 
 때가 되었다. 
 이프린은 편지들을 품에 넣고 문을 열었다. 밖에서 대기하던 이헬름의 시종이 말했다. 
 “따라오시지요.”  “······.”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뚜벅— 뚜벅—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 그 메아리.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심장이 뛰었고, 욕지기가 치밀었다. 
 뚜벅─ 뚜벅─  걸음이 멎었다. 
 “······이곳입니다.”  기어코 도달한 청문회장의 대문. 
 이프린은 그 목전에서 심호흡을 했다. 
 “하아······.”  “열겠습니다.”  “······네.”  이프린은 결연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헬름의 시종이 문고리를 움켜쥐었고, 끼이이이익——  “······아. 저기 오는군요.”  서서히 열리는 문틈, 그 사이로 보이는 이헬름. 자신을 힐끗거린 그는 우아하게 웃으며 소개한다. 
 “첫 번째 참고인. 솔다 이프린입니다.”  청문회장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  이프린은 일직선으로 걸었다. 조금도 휘청거리지 않았다. 
 그렇게, 참고인석에 앉았다. 
 “······자기 소개 부탁드려요!”  “저는······ 그, 저는······ 솔다 이프린입니다. 데큘레인 교수님 휘하의 조교이며······.”  데큘레인의 눈을 보았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무슨 연유에선지 심장이 아렸지만, 또 슬펐지만, 이프린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드린느가 방긋 웃었다. 
 “그리고?”  “······과거 데큘레인 교수님의 조교였던, ‘솔다 케이건’의 딸입니다.”  “오홍!”  아드린느의 짓궃은 미소. 그 뒤편에서 이헬름이 다가온다. 
 “솔다 이프린. 당신의 아버지는 4 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프린이 이를 악물었다. 아드린느는 즐겁게 지켜보았고,이헬름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그 이유를 저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당신이 왜 이 자리에 왔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황제 소피엔은 금세 전말을 추측했다. 실망 안 할 거라던 아드린느의 말,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았다. 
 “데큘레인이 교수가 이사장님에게 제출한 논문. 만약 그 논문의 아이디어가 본인의 것이 아니라면?”  이사들이 눈을 크게 떴다. 
 공통 참고인석은 물론, 이헬름의 진영에서도 소란이 일었다. 
 “그리고 그 행위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면.”  이헬름은 작게 웃으며 이사들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들은 서로 상의하려는 듯 몸을 숙였다. 아스탈과 루이나를 비롯한 참고인들은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이사 드루먼이 물었다. 
 “그렇다면. 데큘레인 교수가 제출한 논문이, 교수 본인의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이헬름이 대답했다. 
 “예. 그 발상과 시작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증인. 저 말을 뒷받침할 증거가 있습니까.”  그 질문에 이프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품 안의 편지를 꺼냈다. 
 “제 아버지와 나눈 편지가 있습니다.”  그때까지도 데큘레인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변명도 없었고, 그저 눈을 감았다. 
 드루먼이 재차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가 데큘레인 교수에게 악의를 품고 일부러 조작했을 수도 있잖습니까.”  “아버지께서는······ 논문의 발상. 즉 회로가 이어지는 어떤 부분에, 자신의 피와 연결되는 ‘마법 표식’을 숨겨놓았다고 말했습니다.”  오호라- 이헬름이 손뼉을 짝! 쳤다. 
 하긴 그놈도 당하기만 할 위인은 아니었지. 놈은 언젠가, 반드시 데큘레인을 파멸시킬 단초를 준비한 것이었다. 
 “마법 표식이라! 그것참 좋은-”  “청문회는 하루 일정이 아닌 걸로 압니다.”  이프린은 이헬름의 말을 바로 끊었다. 
 “청문회는 하루 일정이 아닌 걸로 압니다. 공정하게 조사하여 밝혀낸다면······ 될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를 믿지만······.”  “음! 그렇군요!”  아드린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상황을 정돈했다. 장내의 웅성거림이 이제는 거슬릴 정도였다. 
 “데큘레인 교수. 할 말 없나요?!”  이프린,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데큘레인에게로 닿는다. 
 그는 말없이 아드린느를 올려다보았다. 사뭇 원망스러워하는 눈이었다. 
 “할 말이~ 없나요~?”  “······.”  그 시선을 피하면서 말꼬리를 늘리던 아드린느는, 결국. 
 “푸흡!”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프린은 허벅지에 올린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왜 웃으시는······?”  이헬름은 잠시 당황했다. 갑작스러운 스캔들에 혼란스러워하던 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네, 뭐.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거였으니까!”  이프린은 아드린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험험-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럼 공개할게요.”  분명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유쾌하게 구는 그녀의 태도가, 이프린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혹시, 이미 다 말을 맞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무언가 크게 잘못한 것인지. 
 “데큘레인 교수는 해당 논문을 열흘 전에 저에게 제출했고, 저는 검수를 마친 뒤 이미 부유섬에 전달했어요.”  한편, 소피엔은 팔짱을 꼈다. 데큘레인과 이프린과 이헬름과 아드린느. 네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피식- 미소를 지었다. 
 중간에 안 가길 잘했다. 
 “그 논문의 제 1 저자는 데큘레인이 맞아요.”  이헬름은 미소를 지었고, 이프린은 제 허벅지를 꼬집었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근데! 한 명 더 있어요. 말하자면 공동 저자인 거죠”  갑작스레, 부드럽게 내려앉은 아드린느의 목소리. 
 그 문장이 품은 뜻이 너무 기이하여, 이프린은 잠시 멍하니 바라본다. 
 “뭐, 뭐라고. 방금. 공, 공동 뭐?”  이헬름은 말을 더듬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아는 데큘레인이라면 절대 저지르지 못할, 아니, 절대 저지르지 않을 짓이었기에. 
 차라리 논문을 품에 안고 죽으면 죽었지. 데큘레인은 결코, 공동 저자 따위의 자존심 상하는—  “그 이름은······.”  청문회장의 모두가 아드린느에게 집중했다. 
 아드린느는 그 관심, 그리고 이 다음 순간 벌어질 난장판, 혹은 수라장에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행복에 겨워하며······. 
 손가락으로 이프린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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