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2
원래의 데큘레인이라면 결단코 하지 않았을, 그런 선택을.
그러나······.
“알렌, 이들 중 거의 절반은 내 돈을 받는 것도 싫어하겠지.” 나는 그렇게 묻고 알렌의 반응을 살폈다. 알렌은 흠칫 떨더니, 무슨 진동이라도 난 듯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행동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는 말이었다.
“······받기 싫어도 주겠다. 감히 내 후원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야.” 고민하던 나는 이내 가소로운 심정이 되어 다수의 이름에 체크를 했다. 다만 [후원자] 란만큼은 익명으로 두었다. 괜히 본명을 남겼다가 발각되면 역효과 날 것이 분명하니.
“알렌. 이제 나가서 네 일을 해라.” “네, 네에!” 알렌은 빠릿하게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 어느때보다 힘찬 외침이었다. 혼자가 된 나는 의자를 뒤로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탑 최상층의 경치는 썩 볼만했다. 햇볕의 줄기들이 하늘 가득 맺혔고, 구름 가까이 철새들이 떼를 이루어 비상했다. 빛의 입자 사이로 넘나드는 수많은 날개는 그 어느 무엇보다 자유로운 듯보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 돈이 많아야 한다.”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내 수명을 위해서라도 모아두어야 한다. 이 놈의 숱한 악연 중에서도 몇몇은 돈으로 해결이 가능할 테니. 다행히, 특성 덕분에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당장 될성부른 마법사에게 투자만 해도 몇십배의 이득은 확실하므로.
“그럼에도 계속 시간이 흐른다면, 나는 어찌 행동해야 하는가. 내 존재는 어느 곳으로 향해야 하는가······.” 돈을 번다면, 그 다음은?
이 세계에 나를 증오하는 네임드 캐릭터는 끊임이 없을 것이고,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죽음을 몰고 올 것이다. 그런 그들에 대항하여 살아남기 위한 활로는······ “‘나의 강함’을 지녀야 한다.” 나의 강함.
그 강함은 물론 재력과도 연관이 있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본질적인 힘이 필요하다. 바로─ 일신의 무력(武力).
다행히 나는 이 몸의 재능을 알고 있다. 범재이긴 하지만, 확실하게 ‘원소’ 속성과 ‘조작’ 계열의 재능을 지니고 있다. 데큘레인의 허언처럼 모든 원소는 아니고, 단 두 가지 흙[土]과 불[火]에만.
또한, 이 몸에는 내가 추가한 여러 특성이 많다. 그 중에서도 이 「미다스의 손」.
──「미다스의 손」── ◆ 등급 :유니크 ◆ 설명 :사용자의 마력을 소모하여 대상의 잠재력을 개화한다.
:소모한 마력만큼 대상의 성능을 강화시키며, 대상에 잠재력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대상의 카테고리에 알맞은 특수 효과를 부여한다. :단, 마력은 천(千)단위로만 부여가 가능하며 중복 사용은 불가하다.
─── 「대부호와 재력가」보다도 등급이 높은 특성.
시범하기 위해 책상 위의 만년필을 쥐었다. 「마력 : 1,315 / 3,375」 마력도 충분히 회복되었으니, 특성의 발동은 내 마음 속 염의(念意)면 되었다.
“······!” 뒷목과 관자놀이가 땡기며 마력이 소모되었다.
그게 끝이었다.
특성이 부여된 만년필의 외향에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변화는 확실히 일어났다. 시스템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 변화였다.
──「유크라인 만년필」── ◆ 등급 :고급 ◆ 범주 :기타 ⊃ 필기구 :장비 ⊃ 무기 ◆ 설명 :가문의 문양이 순금으로 초각된 만년필. 「미다스의 손」으로 인하여 강도가 상승되었다.
◆ 특수 효과 :착용 시, 필기 실력이 향상될 듯하다.
───── 종이를 펼치고 글을 써보았다.
한석봉이었다.
“······그렇다면.” 만년필을 내려놓은 뒤, 나는 특성과 재능을 어떤 방식으로 조합해야 좋을지 생각했다. 육안. 미다스의 손. 이해력. 조작 계열. 원소. 불과 흙.
내 특성과 재능을 능동적으로 비교하던 찰나, 나도 모르는 사이 「이해력」이 발동되었다. 파지직─ 뇌에서 발원한 전류가 온몸을 달궜다. 순간적으로 머리털이 곤두섰고, 섬광이 번쩍이듯 어떤 비술이 떠올랐다. 흙과 불.
이 두 속성이 조화를 이루어 창조되는 것은, 금속[金].
또한, 그 금속을 강화할 수 있는 특성인 「미다스의 손」.
마법사 된 자로서, 그러한 금속을 다룰 수 있는 조작 계열의 마법.
──이기어검(以氣馭劍).
거창하게 이기어검이지 결국 ‘염동력’이지만, 주력으로 삼기에는 이론 상 완벽하다. 데큘레인의 단점인 부족한 재능도 금속의 질로써 보강이 가능하니.
이 세상에는 강철 합금이 전부가 아니다. 환상 속 미스릴에 준하는 사기 금속도 있으니, 넘치는 돈으로 지르면 그만인 것이다······. 생각을 마친 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주억였다.
“만약 게임의 클리어가 정녕 해답이라면, 이 몸은 끝까지 살아남아······.
아, 말투 왜이래.” 입술을 툭 쳤다. 내가 앉은 자세도 뒤늦게 확인했다.
곧은 허리는 의자 등받이에 똑바로 기대었고, 목은 목받침에 정갈하게 얹혔고, 팔걸이에 올린 두 팔은 특유의 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격식도 지금의 내게는 무의식에 불과할 뿐. 그 자연스러움이 가히 무서울 지경이다. “······알렌, 거기 있나.” 나는 수정구슬로 알렌을 불렀다.
─네! 가겠습니다!
투당당당- 발구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알렌이 나타났다.
“네! 왔습니다!” 알렌을 보고 있자니 안쓰럽다. 지구의 대학원생들이 이런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말고.
“오늘은 이만 퇴근하도록 하겠다. 자네도 내가 적어주는 책 몇권을 빌려온 뒤 퇴근하도록.” “아······ 네, 네에! 알겠습니다!” 왜인지 퇴근을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종이에 책 몇 권의 이름을 적어주었다.첫 번째는 금속 속성의 마법이었고, 두 번째는 조작 계열의 마법이었다. 두 책의 레벨이 전부 ‘기초’였기에 알렌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곧 허리를 90 도로 숙이고 떠나갔다.
데큘레인. (5) “당주 님을 뵙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저택의 정원에는 이미 시종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식사를 준비할까요?” 차에서 내린 나는 잠시 말없이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질녘. 사위어가는 노을빛 속에 드러난 달과, 그 달을 공전하는 위성.
물감이 뒤섞인 팔레트처럼 번지는 구름. 과연 판타지라 할만한 풍경이었다. “당주 님······?” 내 겉옷을 받기 위해 팔을 내밀고 있던 집사의 말이었다. “······그래.” “예. 식사는 어떻-” “거르겠다.” 나는 저택에 들어가자마자 계단을 올라 방으로 향했다. 피곤하다거나 힘들다거나 하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철인」── ◆ 등급 :유니크 ◆ 설명 :타고난 육체 능력과 성질. :신체적인 잠재력은 과연 지고의 계열이라 할만하다. ────── 내가 재미 삼아 추가했던 여러 특성 중 하나, 「철인」. 이 덕분에 육체적인 피로는 희미했고, 마력 회복 속도 또한 빨랐다. 다만 심리적 피로는 어느 정도 있는 듯했기에, 나는 욕실에서 샤워부터 했다. 「결벽증」인지라 씻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고 회복이었으니. 말끔하게 샤워를 마친 뒤, 나는 서재의 독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알렌을 시켜 빌렸던 마법책 한 권을 꺼냈다. 「기초 조작 마법」 오늘 나는, 이기어검과 가장 직관적인 관계가 있는 조작 계열의 마법, ‘염동력’을 배울 생각이다.
물론 내가 애초부터 데큘레인이 아닌지라, 이전에 이 놈이 쌓아두었을 마법적 성취는 조금도 없다. 따라서 마법사로서의 저변은 황무지에 가깝다. 그럼에도 넘치는 듯한 자신감의 근거는 역시, 「이해력」이라는 특성.
“······.” 나는 흔들림 없는 자세로 책을 펼쳤다. [ 서두 : 조작 마법의 가치와 의의 ] 두꺼운 책의 목차는 단 네 개 뿐이었다. 각각 기초 풍향 조작, 기초 우산 조작, 기초 위장, 기초 염동. 당연히 기초 염동으로 건너 뛰었다. [ 4. 기초 염동 : 염동(念動)의 이해 ] :염동력은 굳이 따지자면 비주류 마법에 속한다. 물론 조작 계열 자체가 팔(八)계열 중에서는 마이너 취급을 받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사의 역량을 상승시키기 위한 징검다리로써 충분히 익힐만하다. 자, 다음의 술식을 보라······.
······그 내용에 잠시 말을 잃었다. 내가 보기에는 아득한 외계의 기록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책의 페이지마다 ‘염동’이라는 마법의 술식이 획(劃) 별로 해체·분석되어 있었다. 비유하자면 복잡한 한자가 한 획 한 획 씩 따로따로 놓인 모양이었다. 심지어 ‘하나의 선에 필요한 마력량’과 ‘다음 선으로 이어지는 마력 흐름’에 대한 설명과 계산이 한 획당 열 줄 이상이었으며, 그 전체 분량은 자그마치 60 페이지에 달했다.
“······과연.” 내 「이해력」이 과연 마법에도 적용이 될까. 이토록 복잡한 이능(異能)의 작동을 이해할 수 있을까.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내 심상 속의 어떤 ‘스위치’를 켠 뒤, 눈을 떴다. 시야가 푸르게 물들었다. 방 안의 조명이 별처럼 흐물거리며 일렁였다. 온 세상이 인상파의 화폭처럼 번지는 그 속에서, 내 초점은 마법책으로 향했다. 두 눈은 오직 서술된 술식만을 바라보았고, 「이해력」은 그 순간 작동되었다. 뇌리가 뜨겁게 들끓었다. 강제적인 고양(高揚)이 정수리 끝까지 치밀었다. 그리하여 내 의식은 다만 보고 듣는 것을 넘어, 보다 고차원적인 지평으로 비상했다. ──염동력. 그 마법의 술식이 책에서 벗어나 허공으로 떠오른다.
곡선과 직선이 이리저리 얽힌, 흡사 부적과도 같은 요탕한 형체. 그 복잡미묘한 선을 따라, 내 마력이 푸르고 영롱하게 흐른다. 한 점에서 시작된 마력의 빛줄기가 선을 이루고, 면을 채우고, 이내 마법을 발현한다.
이는 내 「이해력」으로 구성된 마법의 표상. 심상 속의 이미지. 「염동」이라는 마법진이 저택의 공중에서 찬란한 빛으로 형성되고, 이내 머릿속으로 스며든다. ──물체의 내부에 마력을 주입하고, 그 마력을 핵처럼 응집하여, 술사의 의지가 물체를 조종하도록 한다.
즉, 술사는 물체가 아닌 그 내부의 ‘마력핵’을 통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마법의 핵심은 핵의 크기를 최대한 압축하여, 물체를 붙드는 술식의 회로를 단단하게 하는 것.
그러한 염동의 묘리를 나는 이해했고, 마법은 나의 뇌에 ‘기억’되었다. “······하아.” 「이해력」의 통제에서 벗어나자마자 참았던 숨을 토했다. 관자놀이가 아팠고, 눈이 터질 듯 부었다. 나는 안주머니의 만년필을 꺼내어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력은 만년필의 내부로 스며들었고, 그 기다란 펜대는 내 의지만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되었군.” 당장 1 분 전에는 터럭만큼도 이해한 바가 없었던 「기초 염동」이, 이제는 구태여 술식을 떠올리거나 복잡하게 마력을 조절할 필요도 없이 구현되었다. 내 뇌에 그 마법 전체가 ‘기억’ 되었다는 증거였다. ─완전히 이해한 마법은 뇌에 기억되며, 그렇게 기억한 마법은 원하는 때, 술식의 전개 없이도 사용할 수 있다. 아니, 뇌가 ‘무의식적으로’ 술식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를 ‘메모라이즈’라 한다.
언젠가 설정으로만 읽었던 그 내용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좋다만······.” 여전히 만년필은 내 의지에 따라 둥실둥실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기초 염동이 고작 이 수준이라면, 고급 염동을 익히더라도 내가 상상하는 이기어검의 경지에는 이를 수 없다.
“괜히 비주류 마법이 아니라는 것인가.” 어떻게든 이 성능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물론 이 놈의 한정된 재능으로는 뭘 하든 힘들긴 할 터인데······.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중, 돌연 한 줄기 묘수(妙手)가 떠올랐다. “몸 전체에 마법진을 새긴다면.” 이 세계관의 마법에는 대전제가 여럿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마법진이 클수록 위력이 강하다’.
“그렇다면.” 특성 「이해력」으로써 내 몸 전체를 이해하고, 나의 뇌 뿐만이 아니라, 심장 뿐만 아니라, 단전 뿐만 아니라─ 이 몸 전체에 마법진을 새길 수 있다면. “······해 볼만한 일이다.” 물론 육체에 부하가 걸릴 것은 자명하다.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생각을 한 번만 더 해보자.
이 몸은, 「철인」이 아닌가?
애당초 전신에 마법을 ‘기억하게 한다’는 미친 짓은, 오직 「철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스읍······ 후우.” 되겠다, 싶은 마음에 흥분이 일었지만 심호흡을 하면서 진정했다. 마력의 잔량은 800. 어차피 간만 살짝 볼 테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이해력」을 동원하여 온몸으로 마력을 흘려보냈다.
“······!” 가공할 통증이 치밀었다. 망치로 전신의 뼈와 근육을 짓이기는 듯, 혹은 온몸의 근육이 서로 꼬이고 찢어지는 듯, 그 무엇과도 비교가 불가능한 격통. 까드드득······! 크드드득······!
이 전부가 몸에서 나는 소리. 관절이 뒤틀리고, 심장이 부서진다. 갈비뼈가 동강나고, 뼛조각이 폐를 쑤신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 미친 듯한 통각의 세례에도 이 몸은 신음을 흘리지 않는다. 입술을 깨물지 않는다. 흐르는 땀을 억제할 수는 없어도, 허리만큼은 결단코 숙이지 않는다. 고고하리만치 일정한 자세. 집요한 부동심. 기품(氣品).
그 광기에 가까운 허세와 귀족적인 자아로 행하는─ 가장 원초적인 이해.
몸 안의 마력을 철저히 통제하여 혈관을 질주하게 한다. 그 마력의 흐름으로, 육체의 모든 부분에 나의 의지를 부여한다. 심장 뿐만 아니라 근육, 뼈, 내장. 내 살갗 안에 염동의 술식을 새기는 것이다······. 툭─!
무엇인가가 끊어지는 청음과 동시에, 탈력감이 일었다. 실패였다.
마력이 탈진되었고, 이해의 시간은 끝났다. 나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온몸이 발진과 발적과 소양감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물론, 긁지는 않았다. 품위에 어긋나는 짓이기에.
“······나머지는 나중에.” 「마력 : 1 / 3,375 」 마력이 부족해 실패했다. 고작 어깨 부근에 조금 새긴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는 실패시 처음으로 돌아가야하는 과정이 아니다. 즉,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이해다.
게임 따위로 비유하자면, 이미 1 스테이지를 클리어했으므로 2 스테이지에서 패배한다 하더라도, 1 스테이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2 스테이지에서 재출발하는 식.
“2 주.”목, 어깨, 팔, 손, 배, 허벅지, 종아리, 발. 대강 8 부위의 소요 기간을 나는 몸으로 이해했다.
「기초 염동」에는 2 주. 보다 더 높은 경지, 가령 「초급 염동」이나 「중급 염동」, 그 따위를 위해서라면 훨씬 이상.
“······.” 거끼까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기에 샤워부터 했다. 천연 바디 워시로 몸을 닦았고, 가운을 걸친 채로 침대에 누웠다.
“잠옷······.” 이대로 기절할 것 같지만, 내 몸이 잠옷을 바라고 있다. 가운 차림으로 자는 꼴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며. “좆까······.” 억지로 입지 않았다. 나는 데큘레인이 아닌 김우진이므로, 그깟 코드로 이루어진 성격에 조종당하지 않을 것이다······.
교수. (1) ······나는 마법과 육체의 이해에 몰두하며 2 주일을 지새웠다. 그 결과 내 ‘전신’ 은 「기초 염동」이라는 마법을 확실히 기억하게 되었다.
거대한 염동의 마법진을 내 살갗 속에, 보이지 않는 문신처럼 새긴 것이었다. 고오오오── 드넓은 거실에 만년필 세 자루가 종이 비행기처럼 떠다니고 있다. 내 염동력의 한계는 만년필 기준 열 자루. ‘순수’ 금속 기준 300kg.
마법서에 서술된 기초 염동의 스펙이, ‘기초 염동의 한계는 마법사 본인의 속성과 잘 맞을 경우, 또 단순한 밀거나 당기는 작업일 경우에나 30kg······.’ 였음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출력이다.
“2 주일에 이 정도라면, 부족하지만 만족할 만하다.” 물론 위력만 증폭되었다 뿐이지 숙달은 아직 멀었다. 오히려 성능이 월등한만큼 숙달이 힘들 것이었다.
「이해력」의 도움으로 최대한 효율적인 훈련을 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만년필로 필기 하는 것도 힘들다. 최소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경지는 되어야 만족할 터인데.
“기초는 끝냈으니.” 나는 책상 위의 「초급 조작 마법 제1권」 를 들었다. 여기서 「기초 염동」과 「초급 염동」의 차이는, 단순히 선의 숫자로만 자그마치 18 획.
기초 염동은 20 획의 ‘선’과 두개의 ‘원’으로 이루어진 마법이었으나, 초급 염동은 38 획의 ‘선’과 세 개의 ‘원’이었다. 물론 초급은 기초를 베이스로 곁가지가 뻗어나가는 형식이니 38 획이 아닌 18 획만 더 기억하면 된다만, 이번에는 또 선의 굵기가 문제인지라······. “이건 나중이다.” 몸이 회복될 시간도 필요하고, 기초 염동도 숙달하지 못한 채 초급으로 넘어가면 제어할 수 없을 게 뻔하다. 따라서, 다음 목표는 이것들이다.
「기초 금(金)속성 마법 제1권」 「기초 화(火)속성 마법 제1권」 「기초 토(土)속성 마법 제1권」 세가지 속성의 마법책. 이 중에서도, 나는 웬만하면 조작 계열의 마법만 익힐 수 있다.
이건 예상치 못했던 부작용인데, 몸 전체에 ‘조작’ 계열의 염동력을 새긴 터라, 조작과 완전히 대비되는 마법을 익히면 몸에 부하가 걸린다. 예를 들어 소환·정령은 조작과 상충하는 계열이니 습득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나마 조작 마법과 형태가 비슷한 연성 >> 보조 > 파괴 순으로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뭐, 별 상관은 없다. 어차피 조작 계열에만 재능이 있었던 놈이니.
선택과 집중인 셈치면 그 뿐.
똑똑— 책을 펼치려던 그때, 누군가가 문을 노크했다. 둥둥 떠다니는 만년필을 회수하고 대답했다.
“무슨 일이냐.” ─로이입니다. 알렌 마법사께서 강의 자료를 가지고 왔다며······ 알렌이 찾아왔다는 말이었다. 하긴. 개강 후 첫 수업은 이제 막바로 열흘 뒤, 다음주 목요일이니.
“곧 나가겠다.” 나는 염동력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아니, 입으려 했지만 자꾸 바지가 상체로 와서 직접 입었다. 그렇게 1 층으로 내려가니, 알렌이 시종들과 함께 커다란 상자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있었다. “······이게 내 강의 내용이냐?” “네! 여기까지가 1 학기 수업 정리본입니다! 매년 하던것처럼 해왔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알렌의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나는 그 다크서클보다도, 일을 끝냈답시고 좋아하는 해맑음이 안쓰러웠다. “수고했다.” 마탑의 다른 교수들은 그 휘하에 많게는 20 명, 적어도 5 명을 두고 있는데, 나는 알렌 한 명 뿐. 전적으로 데큘레인의 부덕 탓이다. “네. 그러면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렇게 돌아가려는 알렌의 로브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악.” “밤이 늦었다. 저녁이라도 하고 가거라.” “네? 아뇨. 저-” “먹고 가라.” 나는 시종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시종들이 빠릿하게 움직여 알렌을 식당으로 이끌었다. “어, 저, 저는 정말 괜찮······” “괜찮으니 앉아라.” 식당조차도 화려하여 주눅이 들었는지, 알렌은 쭈뼛쭈뼛 서있기만 했다.
“앉아라.” “······네에.” “식사입니다.” 식사는 금세 준비 되었다. 내가 보기에도 진수성찬이었다. 알렌은 잠시 넋을 잃었고, 나는 능숙하게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들었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자고 가거라.” “네? 아뇨 저······.” “거절은 거절할 것이다.” “아. 네, 네에······.” 알렌은 수줍은 듯 불편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새벽 한 시. 시계의 초침만 째깍이는 적막한 서재에서, 나는 강의 준비를 하고 있다. [ 강의 정리본 : 데큘레인 ‘원소 속성 마법의 이해’ ] 알렌이 만들어준 강의 정리본 덕에 준비 자체는 순탄했다. 다만 1 강, 즉 첫 번째 수업 내용의 ‘절반’을 이해하는데 소모된 마력만 자그마치 3 천 5 백. 일주일 꼬박 1,000 씩 투자해야 강의 하나를 원활히 진행할 수 있다는 뜻인데, 「이해력」으로 이해한 내용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쓸모 없는 부분은 빼는 게 나을 듯하다.” 나는 내 나름의 가위질을 했다. 알렌의 정리본에서 핵심적인 내용만 간추렸고, 너무 기초적이거나 쓸모없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과감히 배제했다. 어차피 나는 아는 것이 부족하니, 최대한 참여 중심의 강의를 꾸릴 생각이다. 원래의 데큘레인이라면 제 잘난 맛에 신인 마법사들을 깎아내렸겠지만, 나는 데큘레인이 아니다. 웬만하면 마법사들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동시에 ‘내 텅 빈 머리가 들키지 않을 수준’으로 강의를 구성하고 싶다.이 쓸데없이 고운 마음은 사실, 데큘레인의 성격이 쓸데없이 성실한 탓도 조금은 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계획서를 작성한 뒤 일정을 확인했다.
“이제 아흐레인가.” 자정이 지났으니 개강은 9 일이 남았다.
그때까지, 나는 교수 데큘레인으로서 마법 소양을 조금이나마 길러둬야 한다. 팔자에도 없던 교수 노릇이라 조금 긴장이 되긴 하지만, 시스템적인 「성격」 덕에 그 부담은 아주 조금에 불과하다. 또 나에게는 「위압과 기품」이라는 특성이 있지 않은가. 그 특성으로 청자들은 내 말에 더욱 집중하고, 말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이해할 것이다.
물론 교수직을 그만두는 방법도 있긴 있다. 그러면 마음이야 편하겠지. 그러나 게임 속에서 데큘레인은 언제나 ‘교수’라 불렸다. 즉, 사이드 퀘스트와 메인 퀘스트의 전제 조건이 ‘교수’라는 직함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귀환의 힌트가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그 명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나는 손으로 필기한 강의 계획서를 고이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참고로 데큘레인의 강의는 정원 150 명에 150 명 가득이었다. 대학마탑에 얼마 되지도 않는 ‘수석 교수’의 강의인지라 인기가 많았다─ 따위의 일차원적인 이해는 그리 정확하지 않다. 이 현상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대학마탑의 마법사들은 입탑하자마자 ‘데뷰탄’이라는 말단 등위에 배석되고, 데뷰탄에서 ‘솔다’로 승격해야만 진로 선택이 가능한데, 승격을 위해서는 대학마탑에서 ‘필수 마법학점’을 채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데큘레인의 강의에 부여된 마법학점은 자그마치 5 점. 웬만한 강의를 세 개나 합친 수준이라, 교수가 좆같아도 인기 없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똑똑. 새벽 3 시가 되어, 이번 주 위자드 저널이 배송되었습니다. 놓고 가겠습니다.
그때, 집사가 노크와 함께 문 밑으로 저널을 밀어 넣었다. 나는 염동력으로 가지고 와 읽었다.
[WIZARD JOURNAL ─ 새해 특별편] 마법계에서 가장 권위가 높다는 언론, 위자드 저널. 그 표지를 보고 있자니 어떤 녀석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플레이어가 실적을 쌓으면 이 저널에 수록돼. 이런 사소한 게 은근 게임의 재미 요소거든. 우진이 너도, 마법사로 시작하면 네 업적을 읽으면서 혼자서 뿌듯해할 수 있을 걸?
왜인지 감상에 젖게 만드는 기억. 너로 인해, 나는 내가 여전히 김우진임을 알 수 있다.
“정말 그럴 수 있는지 확인해보겠다.” 나는 피식 웃고 저널을 펼쳤다. 「올해의 신인 마법사」 가장 먼저 올해의 신인 마법사가 눈에 띄었다. 올해의 게임(GOTY)을 노리는 회사에서 노골적으로 넣은 설정이었다. ─────── 「올해의 신인 마법사」 수상: 실비아 폰 유세핀 일레이드속성:기원. 주계열:특화. 17 세의 나이로 일레이드의 계승식을 치른 실비아는 심장에 근원의 세 색상을 품고 있다. 적(赤), 청(靑), 녹(綠). 이른바 구현의 이적(異蹟)이라 불리는 삼원색(三原色). 서로 모여 만물을 이룰 수 있는 원본의 색을 타고난 것이다. 그러므로, 실비아는 자신의 마력이 닿는 한 삼라만상을 창조할 수 있다.
날때부터 고귀했다던 그녀의 명성은 결코 허풍이 아닌······. ─────── 이 네임드는 나도 알고 있다. 「경국지색」이라는 특성을 지닌 금발의 미녀이자, 유크라인과 쌍벽을 이루는 일레이드의 계승자.
아직까지는 유크라인의 위상이 미묘하게 높지만, 실비아라는 이 개사기 네임드 탓에 그 차이는 서서히 벌어질 터. 나는 페이지를 넘겨가며 데큘레인을 찾기 시작했다. 데큘레인, 데큘레인, 데큘레인······ 더듬다보니 내 이름에 꽤 큰 분량이 할애되어 있었다. ───── 「제국 황실대학의 수석교수 : 데큘레인 폰 유크라인」 어렸을 적부터 원소 마법에 두각을 보였고,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래 술식 해석의 천재라 불리며 제국 황실대학마탑의 최연소 수석교수가 되었다······.
······.
그러나, 정작 서른 중반에 접어드는 요즈음에는 뚜렷한 실적이 없다. 그는 다만 3 년 전에 선언했던 마법 연구에 아직까지도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슬슬, 실적은 물론 본인의 가치에 대한 증명도 필요한 때.
───── 원래의 데큘레인이었다면 저널을 와락 꾸기고 바로 연락을 넣었겠지. 이 기자 새끼들이 뭔 개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냐고. “······맞는 말을 하는군.” 하지만 마법사 저널은 돈이나 가문의 위세가 통하는 곳이 아니며, 데큘레인의 성격이 일부 옮아왔다 한들 나는 여전히 김우진이다.
마법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태평하다. 실적 압박 따위는 없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도 없다. 본디 사람은 제 분수 이상을 탐하면 화를 입는 법이므로. 나는 그저, 오래도록 살아남아 이 게임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싶을 뿐······.
“벌써 네시인가.” 시계를 보니 새벽 네시였고, 나는 침소로 향했다. 그렇게 침대에 누웠다가 다시 눈을 뜨니─ 새벽 여섯시였다.
“······.” 「철인」의 회복력은 과연 놀라울 지경이었지만, 하루가 길다는 것이 마냥 좋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여섯 시간 정도는 자고 싶은데 말이다······.” 깨어나면 항상 이른 새벽. 태양의 머리채만 삐죽거리고, 광채는 느적지근 흘러든다. 그 나른한 풍경은 수마 그 자체이지만, 나는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다. 온 정신이 말짱하기에. 피곤이나 노곤 따위는 그저 몇 시간의 수면으로 깨끗이 녹아내리기에.
게임 속에 갇혀 매일을 보내는 나에게, 하루 22 시간은 너무나도 길다.
* * * 강의는 이번 주 목요일부터였지만, 나는 월요일이 되자마자 마탑에 출근했다.
마탑의 ‘임직원 전용 마법 훈련실’을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 수석교수 데큘레인의 입장을 허가합니다. ] 훈련의 방법은 간단했다. 사방이 차폐된 훈련실에서 ‘미니 게임’처럼 주어지는 스테이지를 마법으로 해결하면 그 뿐.
플레이어는 마지막 스테이지까지 클리어하면 보너스 특성을 받게 되지만, 그 시스템이 나에게도 적용될지는 모른다. 또한 이곳에서 사용하는 마법은 실전 비스무리하게 취급되니, 마법의 ‘기풍( 氣風)’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다. 데큘레인.” 나는 훈련실 중앙의 마법 수정구에 손을 얹었다. 구슬은 푸르게 명멸하며 문자를 뿜어냈다. [ 확인되었습니다. 훈련하고자 하는 마법의 계열을 선택해주세요. ] 나는 조작계열의 ‘염동 마법’을 선택했다. 그러자 허공에 여러 개의 점이 떠올랐다. 점들은 서로 얽히며 복잡하게 움직였다.
[ 레벨 1 : 염동으로 물체를 조종하여 점을 꿰뚫으시오. ] 이 정도면 쉽다. 나는 염동력으로 안주머니의 단검을 띄워 올렸다. 단검은 미려하게 유영하며 허공의 점들을 꿰뚫었고, 레벨 1 은 2 분만에 끝냈다. 레벨 2 는 점의 갯수가 두 배로 늘어났고, 5 분. 레벨 3 은 점이 아닌 환영 나비가 나타났고, 15 분. 레벨 4 는 환영 벌떼가 나타나서 온 사방을 쏘다녔고, 40 분······ 이후 한 시간 동안, 레벨 5 에서 웬 개미만한 날벌레떼와 씨름하다가 그만두었다. “꽤 어렵군. 이래야 맛이긴 하다만.” 소모한 마력은 2,500. 이쯤 했으니 기풍 정도는 파악되었겠지. [ 마법 기풍 확인 :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 모든 마법사의 마법에는 기풍, 쉽게 말해 성격이 있다. 예로 격렬, 도발, 폭발, 침착, 기복, 간교, 교활, 은은, 평정, 자약 등등······ 이 기풍은 보통 마법사의 성격을 닮는데, 별 것 아닌 듯보이지만 의외로 중요한 설정이다. 왜 ‘적성’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격렬·도발·폭발의 기풍은 파괴 마법의 힘을 강화하고, 간교·교활의 기풍은 환혹 또는 보조 마법의 성능을 증폭하는 식이다.
그런 점에서 내 마법의 기풍은······ 어디보자······. [ 고아(高雅)한 기풍 ] “어······.” ■ 고아하다 : 뜻이나 품격 따위가 높고 우아하다.
쉽게 말해, 마법의 구사 자체에 품위와 격조가 깃든다는 뜻.
“······참 잘도 어울리는구나.” 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여러모로, 데큘레인과는 아주 어울리는 기풍이었다.
교수. (2) 제국력 931 년, 3 월 20 일 목요일.
[ 레벨 9 클리어. 축하드립니다. 이 이상 레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고맙다.” 강의 당일까지도 훈련에 열중한 결과. 나는 고작 「기초 염동」으로 스테이지를 클리어했고, 그 보상으로 보너스 특성을 얻었다.
──「염동력 장인」── ◆ 등급 :평범 ◆ 설명 :맹훈련의 결실. 염동력의 성능이 11% 향상되고, 소모 마력이 11% 감소한다. ────── 설명은 단순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무엇보다 감사하다. 특히 저 ‘11%’가 마음에 든다. 내가 성장할수록 특성의 가치도 증폭되는 것이니.
나는 집무 의자에 앉아 시계를 보았다.
오전 10 시.
강의 시작은 오후 3 시. 아주 널널하다만, 오늘 강의에 내가 일찍 갈 필요는 없다. 적당히 3 시 30 분까지 기다렸다가 알렌이 신호를 줄 때 등장하면 그 뿐. 야심차게 준비한, 이른바 ‘1 강은 자습’이었다. * * * 대학마탑의 3 층. 이프린은 A Class 강의실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 안에는 데큘레인이 있다. 그리고 나는 데큘레인과 같은 공간에서, 데큘레인의 강의를 듣게 된다. 그 자체로도 괴롭긴 하지만······ 데큘레인은 한달 전 강연에서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 그보다도 먼저, 내 성을 잊지 않고 있을까.
루나.
그가 죽인 마법사의 성. 정작 복수의 대상이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러면 더 화가 날 것 같은데, 미친 듯이 분노할 것 같은데.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놈이 알지도 못하는 악행을 깨우치게 하는 수고까지 들여야 하나······ 그 따위 긴장들이 목을 죄었다.
“이프린, 여기 서서 뭐해?” 누군가의 말에 이프린은 흠칫 상념에서 깨어났다. 로브 차림의 여자 동기가 갸웃거리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 긴장이 조금 돼서. 먼저 들어가.” “하긴. 나도 그런데. 위자 보드에 데큘레인 검색해봤는데, 엄청 빡빡하다더라. 그래도 얼굴은 잘생겨서······.” 중얼거리며 걸어 들어가는 동기의 옆에 마냥 서있던 이프린은, 복도 쪽에서 다가오는 또 다른 여인을 발견했다.
그리고 잠시 말을 잃었다.
“······아.” 그녀는, 걸을때마다 잘 관리된 금발이 냇물처럼 찰랑였다. 도도한 몸짓에서 장미의 향이 떠올랐고, 부드러운 세련됨은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자연스레 흘렀다. 그녀는 핏줄 자체가 기품(氣品)으로서 인정받는 사람의 부류─ ‘귀족’이라는 피라미드에서도 특히 고결한 계층의 존재.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핏줄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일레이드 가문의 여식.
실비아. 실비아 폰 유세핀 일레이드.
“······.” 저 고상한 영애가 동기임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프린은 적극적인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녀를 가늘게 노려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이프린은 실비아가 싫었다. 열등감 따위의 간단한 감정은 아니었다. 너무나 길고 질긴 악연이었다. 루나의 집안은 예로부터 일레이드의 영지 ‘쥬할레’의 토호(土豪)였다.
오래전에는 친척이었다고 했던 것도 같았다. ─그러나, 10 년 전. 자신이 아직 여덟 살도 되기 전에. 일레이드의 당주 길테온이 자신을 노려보던 그 눈빛을 기억한다. 영지병력을 대동하여 저택을 포위하고, 처치 곤란한 쓰레기 다루는 듯하던 그 행패를 기억한다. 천한 것이라 뇌까리던 그 목소리를 기억한다 모두 저 가문 놈들이 내 재능을, 그리고 아버지의 재능을 두려워한 까닭이다. 하지만 이곳은 놈들의 영지가 아닌 마탑이고, 나는 더 이상 어리지 않다.
세상 고결한 척 걷는 저 녀석에게, 재능만 따지면 나도 결코 밀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성이나 가문의 이름은 없다. 오직 본인의 이름과 재능으로만 불릴 뿐. 그러므로······.
“······?” 정작 실비아는 이프린을 힐끗거리고는 곧장 안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그 얼굴에는 조금의 내색도 없었다. 감정도 없었고, 그 자체로 자연스러웠다. 마치 ‘이프린’이라는 사람 자체를 전혀 모른다는 듯이. 아뵤- 혼자 쿵후를 자세를 취하던 이프린은 머쓱하게 뒷목을 긁적이고 따라서 들어갔다. “······어라?” 그리고, 당황했다. 교실이 아니라 무슨 널찍한 체육관같은 공간이었다. 천장은 무지하게 높았고, 지면에는 우물, 나무, 흙, 모래, 자갈과 쇳더미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와. 이거, 데큘레인 교수 수업은 원래 안 이렇지 않나? 신기하네.” “그러게. 위자 보드에는 이런 내용 없었는데. 첫 번째 수업이라 그런가.” 당황 뿐인 이프린과는 달리, 다른 마법사들은 놀람 반 재미 반의 얼굴이었다.
“아, 얘들아. 이거 봐봐.” 그들 중 한 명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공간의 중앙에 팻말이 꽂혀 있었다.
[본 교수는 첫 번째 수업으로 너희의 실력을 측정하고자 한다.] [이곳에는 원소가 가득하다. 너희들은 무엇이든 자력으로 하면 될 것이다.] “엥······?” 다가가서 내용을 확인한 이프린은 미간부터 찌푸렸다.“이게 뭐야?” 여기서 뭘 어쩌라고? 무엇이든 자력으로 뭘 어떻게 하라고? 근데 다른 마법사들은 이 괴이한 상황이 나름 익숙한 눈치다. 아카데미에서는 이런 수업을 많이 받았나보지? 독학으로 입탑한 나는 모르겠는데.
“······아 설마?” 문득 옆 사람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힐끗 보니 게하론이었다.
나름 유명한 마도가의 아들. 이프린은 슬그머니 그쪽에 붙었다. “왜~? 뭐 알 것 같니?” “어? 어어. 이런 것 같은데?” 게하론이 노면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그의 손을 중심으로 물과 흙이 엉기더니, 어떤 형체를 이루며 길고 가느다랗게 솟아올랐다. 진흙 탑이었다. “무엇이든 해보라고 했잖아. 그리고 이 수업은 ‘원소 속성 마법의 이해’고.
그러니까, 여기 있는 원소들로 뭔가를 만들어 보라는 거 아닐까? ‘순수 원소 다루기’인 거지.” “아~ 그럴 수도 있겠네.” 게하론의 말에 이프린을 포함한 대다수의 마법사가 동조했다. 애당초 강의명도 [ 원소 속성 마법의 이해 ] 였으므로.
“쉽겠네 그럼.” 이프린은 팔을 붕붕 돌리며 웃었다. 나는 조각상을 만들까? 아니면 탑을 만들까. 크기를 키울까? 아니면 최대한 정교하게 할까.
뭐든 하면 되겠지. 이프린은 습관적으로 손목의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언젠가 아버지가 직접 선물해준 아티팩트. 이제 그것이 이프린이라는 마법사의 ‘속성’이 되었다.
이른바─ 기물(奇物).
가장 제한적이면서도 가장 다채로운 속성. 팔찌가 곁에 있는 한, 그녀는 ‘모든 원소’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너로 정했다.” 어떤 원소를 고를까 고민하던 이프린은 곧 금속 더미 근처에 앉았다.
쪼그려서 마법을 준비하는데, 누군가가 등을 툭 치고 지나쳤다. “앙, 아 뭐야.” 넘어질 뻔한 걸 엉거주춤 금속에 손을 짚고 돌아보니, 실비아였다. 그녀는 길가의 아무 쓰레기나 보듯 이프린을 흘기고 가던 길을 갔다. “······어이없네. 왜 치고 갈까. 눈이 없나, 발이 크나.” 이프린은 혼자 입술을 삐죽이고 투덜거렸다. 그러다 낑낑거리며 금속 더미를 들어 한 곳에 모았다. “아고 무거워라.” 손을 탁탁 털고 그 위에 손을 얹었다. 후우······ 몸을 준비시키는 호흡 한 번. 이후 눈을 감은 채, 마력을 발현했다. 츠즈즈즈즛─!
스파크처럼 튀기는 마력. 손보다도 먼저 그녀의 팔찌가 푸른 빛을 발하고, 쿠과과과광─!작고 못생긴 탑이 솟아 올랐다. “흐음.” 마법을 다시 시작한지 고작 3 년인 터라, 아직은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
그래도 시범으로 이 정도면 만족할만하지. 감 잡았으니 최대한 크게 하자 크게.
“······응?” 그러던 순간이었다. 돌연 자기가 세웠던 탑의 크기가 스르르륵─ 줄어들더니 어딘가로 빨려들어갔다. “어, 어디가.” 손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프린은 그저 망연히, 제 탑의 잔해가 흘러가는 방향을 좇았다. “······허어?” 실비아. 그녀가 자신의 탑을 재료로 흡수하여 웬 조각상을 만들고 있었다.
순간 헛웃음이 비식 새었다. 어차피 해체할 거긴 했지만, 쟤 왜 저래?
“저기요. 뭐하실까요, 지금? 그거 제가 만든건데요?” 그쪽으로 성큼 다가간 이프린이 말했다. 실비아는 그녀를 보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리고는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실수. 너무 작아서 고철인 줄 알았어.” “······뭐라고요?” 이프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얘가 뭘 잘못 처먹었나. 아니 아무리 내 탑이 고철같이 생겼기로서니······ 아니지. 잠깐만.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스친 그녀는 곧, 알겠다는 듯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아~ 실비아 씨. 당신, 저 알죠?” 실비아는 대꾸도 않고 저가 만든 탑만 올려다보았다.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이프린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똑똑. 저기요? 저 알잖아요. 왜 모르는 척 할까요?” “······.” 그제서야, 실비아의 시선이 이프린에게로 옮겨갔다. 그 눈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아니, 없음을 가장하고 있었다. 이프린은 푸흡- 한 손으로 제 입가를 가리고 과장스레 웃었다. 휘어진 눈매가 여우처럼 얄미웠다.
“아하~ 이제 알겠다~ 따라잡힐까봐 무서운 건가요~? 나는 그래도 7 년을 놓고 있다가, 이제 3 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 동안 당신은 고위 마법사들한테 엘리트 교육이란 교육은 죄다 받아놓고, 이제와서 겁이 나는 건가요?” 실비아는 말없이 이프린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한층 더 무겁고 적막하게 내려앉았다.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어두워진 눈이 이프린을 비추었다. 실비아의 촉촉한 입술이 비틀리며, 무감정한 목소리가 흘렀다. “나는 너를 몰라.” “모른다니. 아니 왜 거짓말을 할까? 아까부터 반말도 하고. 모른다면서 반말은 왜한담?” “너는 모르지만, 네 애비는 알아.” “······뭐?” 이프린은 잠시 잘못 들었나 싶었다. 네 애비? 방금 네 애비라고 했나?
“그 건방졌던 사람. 부작위 귀족.” “······.” “죽었더라.” 죽었더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고저도 억양도 없었다. 마치 무생물을 대하듯, 애초부터 살아 있지 않았던 사람을 대하듯, 시체처럼 늘어진 목소리. 모멸이나 경멸보다 더한, 무시(無視).
머릿속의 무엇인가가 툭 끊어졌다. 실비아는 그대로 돌아섰으나, 이프린의 팔찌에는 이미 마력이 고였다. 격노한 이프린이 실비아에게 손을 뻗었을 때─ 마력은 고리의 형상을 이루며 쇄도했다. “어, 어! 뒤!” 누군가의 외침에 실비아는 고개만 힐끔 돌렸다. 마력의 격류가 치밀고 있었다. 실비아는 그러나 간단히, 마력을 방출하여 막았다. 두 마력은 서로 충돌하다가 사그라들었다.
“······퉤! 야. 야 이 년아. 너 방금 뭐라고 말했니? 다시 한 번 말해볼래?” 이프린은 입에 고인 모래와 침을 뱉고 뇌까렸다. 세상 불량한 투와 껄렁껄렁한 몸짓. 익숙하게 로브 소맷자락을 걷어붙이는 그 모습을, 실비아는 네가 그럼 그렇지- 따위의 얼굴로 지켜보았다.
“불손해.” “불손? 마탑에서는 신분 안 따지는거 몰라? 아니, 더 불손한 거 보여줄까?”그 다음 행동은 아마 실비아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프린은 한순간에 내달려 실비아의 머리채를 쥐었다. 와득!
두 손에 붙잡힌 자신의 머리를 보며······ 실비아는 무감하게 말했다.
“손목 자르기 전에 놓아.” “잘라봐.” “······.” “야이년아.” 그들의 대화는 대단히 살벌했으나, 이상하게도 주변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야, 야, 야! 저거 저거!” 오히려 더한 난리와 소동을 부리고 있었다 꺄, 꺄악─! 으아악─!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비명과 뜀박질. 실비아와 이프린은 그제서야 그쪽을 돌아보았다. “헉?” 두 사람의 마력이 충돌했던 지점에 ‘공극(孔隙)’이 발생했다. 마력과 마력이 얽힌 구멍. 그것은 마치 소실점처럼 기능하며, 사방에 널린 흙과 나무, 우물과 돌덩이와 금속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저게 뭐야?” 비좁은 구멍 안에서 온갖 것들이 아그작아그작거리며 갈렸다. 나무와 돌과 물과 흙은 그 마찰열에 승화(昇華)하였으나, 금속만큼은 제 형태를 유지하며 벌겋게 달아 올랐다. “터진, 터진다. 야 저거 터진다!
“도망, 도망가——!” 한 점으로 압축되고 수축하는 마력은 어느 순간 폭발하며 금속마저 찢어 발기게 마련. 저 공극이 터지면, 금속은 총탄처럼 격발되어 공간 전체를 꿰뚫을 것이다. 그 참상을 예지한 마법사들은 급히 배리어를 구축했다. 트드드드드득······.
무엇인가가 뜯겨지는 듯 불길한 소리. 으스러지는 철의 울음. 이윽고, 거대한 폭발이 휘몰아쳤다. ──!
“응!” 이프린은 눈을 꾹 감았다. 팔찌에서 사출된 배리어가 그녀의 온몸을 감싸 안았다. 그렇게 펭귄처럼 떨며 기도하길 1 초, 2 초, 3 초, 4 초.
휘이이이잉······.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바람이 멎었다.
그 뿐이었다.
“······?” 아무리 기다려도 각오했던 충격은 없었다. 파르르 떨던 이프린은 그게 이상하여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으!” 화들짝 놀라 온몸이 굳었다. 그녀의 망막 바로 앞에 뾰족한 금속이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것은 어떠한 움직임도 없이 허공에 서있기만 했다. “이게······ 뭐야?” 이쪽 뿐만이 아니었다. 온 사방이 똑같았다. 찢겨진 금속들은 마치 중력이 소멸된 듯, 우주에 떠다니는 돌맹이처럼, 공간의 주박에 붙들린 채 마냥 부유할 뿐이었다.
······.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에 뒤늦은 진정이 스며들고, 맥을 잃었던 마법사들은 그저 굳은 채 일대를 둘러본다.
아무런 말도 없고.
아무런 소리도 없는 적막.
마력폭발로 솟구쳤던 금속의 파편들이 구름처럼 둥실거리는 세상.
말로써는 설명이 불가해한 이 기적은, 아니 이 기적이야 말로 마법적(魔法的 )인 것이다······.
“······네가 한 거야?” 이프린이 실비아에게 물었다. 그러나 실비아도 이번에는 처음으로 표정을 보였다.
의문, 의아, 그리고 놀람. “염동인가?” “아니지. 염동으로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멈춰?” “그치? 그냥 말해봤어.” 이토록 신이한 광경이기에, 마법사들은 막바로 흥미를 느꼈다. 그들은 직전의 험악한 사태도 금세 잊어버린 채 분석에 몰두했다. 금속을 들여다보고, 툭툭 건드리고, 마력이라도 불어넣어보려던 그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라. 아무도.
어떤 서릿발같은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렸다. 베일 듯 날카로운 음색이 마법사들의 온몸을 휘어잡았다. 뚜벅─ 뚜벅─ 위압적으로 번지는 발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꿀꺽.
돌연히 등장한, 공간을 억누르는 존재감에 마법사들은 침을 삼켰다. 등허리에 식은땀이 고였다. 나무 뿌리가 하반신 전체를 속박한 것처럼······.
“주목.” 백 오십명의 마법사를 일제히 통제하는 단 한마디. 그들 전원이 쭈뼛쭈뼛 돌아보는 그곳에── 이 강의의 책임자이자, 방금의 사태를 찰나의 마법으로 진압한 교수. 데큘레인이 있었다. “······어리석은 짓들을 벌였구나.” 언제나처럼 각잡힌 양복 차림의 그는 맹금같은 눈으로 마법사들을 훑어보았다. 그 서슬 퍼런 시선은 새내기들의 심장을 움켜쥐는 듯했다.
그때였다.여태까지 허공에 머물러 있던 금속들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르르르륵······.
무수한 금속 파편들이 짝과 줄을 이루어 마치 살아 숨쉬듯, 발레를 추듯 저들끼리 아름답게 떠돌다 교수의 뒤편에 차곡차곡 내려앉는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데큘레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와.” “우와.” 이곳 저곳에서 본능적인 탄성이 터졌다. 심지어 데큘레인이라면 학을 떼는 이프린도, 이번에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마법은 우아했다. 우아한 것을 넘어, 예술적이었다. 일반인들은 그저 ‘조금 예쁜 마법’ 따위로 생각할지 몰라도, 배운만큼 보인다고 했다. 배울대로 배운 마법사들은 느낄 수 있었다. 소름 돋도록 진지하게, 시리도록 아름다운 조작 마법이었다.
언젠가 나도 저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따위의 벅찬 마음이 살을 엘만큼.
“강의는 중단하겠다. 소동을 일으킨 자만 남고, 나머지는 나가라.” 그 고양감(高揚感)은 금세 가라앉았다. 데큘레인의 분노 섞인 위엄에 모두가 얼굴을 숙였다. 이프린도 머뭇거리며 따르던 중, 키 큰 데큘레인 뒤에서 꼬깔모자를 쓴 누군가가 등장했다.
“무슨! 무슨일이래요?! 엄청 마법 기운이 느껴지던데!” 이사장이었다. 이사장은 방방 뛰면서 강의실 내부를 살폈고, 이프린은 자신이 좆되었음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교수. (3) 마탑의 지하. 싸늘한 공기가 살을 갉아먹는 듯한 징계위원회의 심문실. 대학마탑의 규율을 행사하는 이곳에서는 총 일곱 좌(座)의 위원이 마법사의 징계를 관장하고, 징계 대상은 ‘보이지 않는 유리’의 저편에 앉아 처벌을 기다린다. “쟤네 둘은 왜 싸웠대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제 1 의 좌, 즉 상석은 이사장의 차지였고, 나는 그 바로 옆인 제 2 의 좌에서 유리 너머의 두 사람을 보았다. “왜 몰라용?” “······안 물었으니 알 수 없습니다.” “아 맞다.” 징계위에 회부된 이프린은 고개를 숙인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지만, 그 옆의 실비아는 자약하고 평온하다.
전적으로 둘의 다툼에서 비롯된 사태. 그러나 실비아는 일레이드의 계승자이고, 이프린은 영지조차 없는 이름 뿐인 귀족이니, 징계위의 결과가 어떨지는 자못 훤할 터.
“아~ 이사장 님, 데큘레인 수석교수 님. 이미 와계셨군요.” 문이 열리며 징계위원들이 속속 도착했다. 능글맞게 웃는 뚱뚱한 남자 교수는 보조학과의 렐린. “······첫 수업부터 이런 일이라니. 정말 유감입니다, 데큘레인 수석교수 님.” 고개부터 숙이는 삐쩍마른 남자는 정령학과의 레트란 교수, 또 아무 말 없는 로브 차림의 누군가는 아마도 기숙관을 담당하는 페즐리 교수, 외 나머지. 그렇게 총원 7 명이 모였다. “어허, 참. 어떤 이상한 놈이 감히 ‘올해의 신인 마법사’를 건드렸어?” 렐린은 의자에 앉자마자 이프린부터 노려보았다. 레트란도 비슷한 눈치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보아 하니, 아카데미도 거치지 않은 천것인 듯하던데요.” 다행히 이 말들이 이프린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프린을 볼 수 있으나, 이프린은 우리를 볼 수 없으니.
“그래도, 데큘레인 수석교수님께서 수습을 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렐린이 은근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부성이 짙은 그 말에 어떻게 응답할 여력이 나에게는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탈진 상태다. 지금도 정신력으로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것이다. 내 마력 전부를 소모하여, 아니 그 이상을 쥐어짜내어 사태를 막았다. 혹시 잘못되어 누군가 다친다면 담당 교수로서 곤란할 터였으니.
“그니까요~ 제가, 데큘레인 교수를 조금 과소평가 했었던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우리 데큘레인 교수는 모나크 등위의 마법사! 데뷰탄 따위는 수백 명이 덤벼도 못 이기는 사람인데!” “대단히 옳은 말씀이십니다!” 이사장과 렐린은 둘이서 떠들었다. 나는 별 말 없이 이프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연히,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다 하여도 데큘레인 수석교수 님. 너무 화내지는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렐린은 내 표정을 분노라 오해한 듯했으나, 나는 아니었다.
온몸을 움츠린 이프린에게서 떠오르는 기이한 기류. 붉고 검은, 마치 수증기처럼 퍼지는 불길한 기체.
나는 그 괴현상을 자세히 보기 위해 미간을 찌푸린 것이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저것은 특성 「육안」으로써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또 다른 특성 「악당의 운명」의 발현.
──「악당의 운명」── ◆ 등급 :??? ◆ 설명 :악당의 운명. 온 세상이 그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인간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법······.
───── 온 세상이 나의 죽음을 바란다. 그 예정된 살의, 즉 이프린이 언젠가 나를 죽일 것이라는 ‘사망 변수’가 지금, 「육안」에 의해 또렷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 다 모였으니. 데뷰탄 마법사 이프린과 실비아의 징계위원회를 시작하겠습니다!” * * * ─아니, 어딜 감히 강의실에서 쌈박질을 한단 말이냐? 그것도 마법으로?!
데큘레인 수석교수가 아니었다면 사람이 다칠뻔 했다 이 무식한 것아!
징계위는 처음부터 격렬했다. 유리 너머는 실루엣으로만 보였지만, 이프린은 그 풍채와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렐린 교수. 당장 어제 수업에서는 무지 인자한 교수님인 것 같았는데, 화나면 저렇게 무서워지는구나.
─그래서, 싸운 이유는 무엇이냐.
렐린이 물었다. 이프린은 옆의 실비아를 곁눈질했다. 저 자식이 우리 아버지를 욕했다. 아니, 욕했나? 교묘하게 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뭐가 되었든, 렐린 옆의 데큘레인 탓에 어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가 없었더라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다. 징계를 모면하기 위한 핑계 따위로는 더더욱.
“말할 수 없습니다.” ─뭐?!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렐린 교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닙니다. 그저-” ─그럼 말을 하란 말이다, 왜 싸웠는지! 열등감 때문이냐!
이프린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씨근덕거리던 렐린은 곧 옆의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실비아. 그렇다면 자네가 말하라.
“수업 도중, 제가 실수로 저 아이의 결과물을 파손해버렸어요. 그게 말싸움으로 이어졌어요.” ─무어라? 고작 그딴 이유로 이런 사태를 만들어? 전적으로 저 무식한 놈 잘못이구만. 어이 너, 분노조절장애라도 있는 게냐? 어디 이름도 모를 잡것이······.
이프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입안에서 피맛이 났다. 입술이든 혀든, 너무 세게 깨물은 모양이었다. ─이사장 님, 이건 더 볼 것도 없습니다. 마법사가 마법사를 선제 공격.
퇴학감입니다, 퇴학! 그 ‘잿더미’에 있는 녀석들의 인성도 이렇지는 않습니다!
반(叛)마법사의 소굴을 지칭하는 단어이자, 마법계에서 가장 유명한 모욕. ‘잿더미’. 이프린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아, 여기서 퇴학당하면 차라리 거기로 가버릴까. ─후움······ 그러게요? 뭐, 거의 결정된 것 같긴 한데. 데큘레인 교수?
당신은 할 말 없어요~? 본인 수업이었잖아요.
이사장은 가장 싫은 사람의 이름, 데큘레인을 불렀다. 데큘레인의 시선은 유리 너머에서 끼쳐왔고, 이프린의 심장은 무겁게 박동했다.
그가 자신을 알고 있든, 알지 못하든, 이제 체념 밖에 할 길이 없다. ─나 데큘레인은 본탑의 수석교수이자 징계위원으로서.
마치 몸 전체가 깊고 어두운 우물 속으로 추락하는 기분. 산 채로 익사하는 듯한 괴로움······. ─너 실비아에게 묻겠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인지, 그 심문의 대상은 내가 아니라 실비아인 것 같다.
─이 사태에 네 잘못은 없는가.
“······?” 밑바닥으로 침전하던 이프린은 황급히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거렸다. 당황한 실비아가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그저 묻는 것이다. 이 사태에, 네 잘못은 정녕 없느냐는 말이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이프린의 머릿속에 다수의 물음표가 부풀었다.
데큘레인도 나를 공격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왜 실비아에게?
아 설마? 그는 데큘레인이 아닌 유크라인으로서, 일레이드의 계승자를 견제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데 왜? 누가 봐도 내 잘못이 확실한데, 이리 억지로? ─실비아. 너라면 분명 그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데큘레인 특유의, 서늘하고 직선적인 목소리.
─허나 너는 그러지 않았다. 너는 마력이 폭발하여, 사람이 다치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인가. 실비아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첫만남부터 두꺼운 빙판같았던 그 가면이······ 서서히 깨어지고 있었다. ─아니면, 모두가 기대하던 네 기량이 고작 그 정도였나. 한 번 발생한 균열은 금세 붕괴를 일으켰다. 그녀는 살짝 깨문 입술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막을 수 있었지만, 막지 않았습니다. 이프린 마법사의 잘못이 더 커지길 바라는 못된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순순히 제 잘못을 인정했다. “예?”멍청한 소리가 이프린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가까스로 납득해가던 상황이 다시 오리무중이 되었다. 쟤는 또 왜저래? 막을 수 있었는데 안 막았다고? ─그, 그래도 데큘레인 수석교수. 공격을 방어한 쪽이 잘못은 아니잖습니까?
먼저 공격을 한 쪽이 잘못이지.
렐린 교수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그러자 데큘레인은 고개를 비스듬이 틀어 렐린을 노려보았다.
─그리 전후관계를 따지고 싶다면, 애당초 이 상황은 전적으로 강의를 구성한 내 잘못이 되오. 렐린 교수, 자네는 나를 탓하고 싶은 거요?
─예? 아, 아니. 아닙니다. 저는 그런, 그게.
─똑바로 말하시오.
그 단단하고 웅혼한 목소리가 심문실 가득 일렁였다. 이프린과 실비아는 저들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딱, 딱, 기백에 질린 렐린은 이를 몇번 부딪히다가 더듬더듬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저는 그냥 불미스러운- ─나는 강의의 목적으로 그 환경을 설정했소. 또한 그 안에서 무엇을 하라는 목적을 두지 않았지. 그러니 다툼이 있었다 하더라도, 내 수업의 일환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었어.
궤변이었다. 그러나 데큘레인의 위세에 짓눌린 교수진은 감히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대항이 가능한 이사장은 그저 즐겁다는 듯 지켜볼 뿐이었고.
─하여 불미스럽다는 말은 내 수업에 대한 모독일 것이나,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지고 말았다는 것만은 인정할 수 밖에 없소.
이쯤 되면. 제 아무리 열심히 생각하여도, 최대한 부정하고 싶어도, 그 저의를 이해할 수 없어도.
이프린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큘레인은.
아니, 그 데큘레인이······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허나 마법에 위험을 축출한다면 대저 무엇이 남을지 우리는 모르고, 저들은 이제 갓 마탑에 들어선 ‘데뷰탄’에 불과하오.
데큘레인이 내 아버지를 알든 모르든, 나는 분명 퇴학을 각오했을 터인데. 내가 아는 데큘레인은 분명 그리했을 터인데.
이프린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의미도 없는 잘못과 잘잘못을 가리며, 윽박을 지르며 기를 죽이기보다.
오히려 마탑 내에서 이런 상황을 겪게하고, 외부에서는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경험의 깊이’를 가르치는 것이, 큰 마법사의 의무라 생각하오.
어떻습니까, 렐린 교수?
─······아이,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당연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역시, 역시 데큘레인 수석교수님! 아주 그냥, 저조차도 단번에 설득당해버렸습니다 그려~ ─맞는 말씀이십니다. 교수들이 찬동했다. 데큘레인이 저리 적극적이라면 누구나가 동조할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데큘레인은 교수가 아니어도 그 지체 높은 ‘유크라인 백작’이지만, 저들은 교수가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니니.
짝짝짝- 상황에 안 어울리는 박수 소리가 심문실을 가득 메웠다. 누가 보면 콘서트장인 줄 알겠네.
─후움~ 듣고 보니 그렇네요. 저도, 옛날 생각 나네. 옛날에 어떤 교수 하나 때문에 정학 먹을 뻔했는데요. 이사장도 심드렁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면······ 너네는 뭐하세요? 안 돌아가고. “······예?” 넋 나간 이프린은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되물었다. ─예라니~ 다 들었잖아요. 징계는 없어요. 너희 같은 애들은 뭐, 싸우면서 크는 거지요~! 그래도 다음번에는 안 봐줄 거예요!
그 말에 실비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하지만 이프린은 아니었다. 그녀는 유리창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 우리도 이제 갑시다! 시간 아까운 짓인 줄 알았는데, 저는 데큘레인 교수가 신입 마법사를 아끼는 그 마음을 알아서 좋았어요!
얼어붙은 이프린보다 먼저, 징계위원회의 교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하나 둘 씩 떠나갔다. 망연히 앉아서 지켜보기만 하던 이프린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크게 외쳤다. “······저!” 다른 교수들은 힐끗거릴 뿐 상대해주지 않았으나, 오직 하나의 실루엣. 데큘레인이라 추정되는 사람만이 자신을 돌아봐주었다.
이프린은 그에게 말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
들릴 듯 말 듯 희미하게 흐르는 웃음. 지극히 매력적이지만, 매력적이라 느껴선 안 된다.─그때, 그 강연장에서도 너였구나.
그 말에 이프린은 흠칫 떨었다. 순식간에 겁이 확 났다.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주눅들지 않고 다음을 이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이프린은 묻고 싶었다.
당신이 루나라는 성을 기억하는지. 제 아버지를 알고 있는지. 당신 휘하에서 평생 고생만하다가 3 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끓어버린 그 자를 아는지.
“그······.” 하지만······ 만약 내가 그것을 묻는다면······ 그는 다시 나를······ ······그리 머뭇거리는 이프린에게.
데큘레인은 다만 이렇게 잘라낼 뿐이었다. ─물을 필요 없다. 그 순간 이프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수리에 고드름이 내리꽂히는 듯한 시림이었다.
─너는 옥석(玉石)이니, 네 재능을 스스로 낭비하려 들지 말거라. 그는 그 말을 남긴 채 떠났다. 이번에는 붙잡을 수 없었다.
“······.” 그저 텅 빈 심문실. 홀로 남은 공간에서, 데큘레인의 말을 곱씹던 이프린은 확신했다.
그는 알고 있다. 나를 알고 있다. 내 아버지를 알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동정에 불과한 것이다. 아주 조금의 연민에 불과한 것이다. 그가 제 아버지의 죽음에 자그마한 책임을 느끼기에······ 이리 자신을 도운 것이다.
“아······.” 이프린은 그것에 더 없이 분노하고 뒤틀리는 마음을 느끼면서도, 그 동정을 거절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슬퍼하고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결국에는 안도했다. “알고 있구나.” 그거면 되었다. 알고 있다면, 잊지 않았다면, 지금은 그걸로 되었다.
“흡!” 어느새 눈가를 적신 물기를 훔치고, 붉어진 코끝을 힘차게 닦아낸 뒤, 이프린은 심문실을 나섰다. ······한편. 돌아선 데큘레인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 악당의 운명 : 사망변수 극복 ] ◆ 상점 화폐 +2 사망변수를 성공적으로 제거했고, 상점 화폐도 얻었다.역시, 이프린의 편을 든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물론 본의 아니게 살짝 꼬인 것은 있다. 이 사건으로 실비아가 자신에게 원한을 품을 수도 있으니. 너도 잘못이고 쟤도 잘못이지만, 넓게 보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라는 도덕 교과서적인 말로 무마할 생각이었는데, 실비아가 그리 쉽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당장 발등에 붙은 불부터 꺼야지. 덕분에 둘 다 징계 없이 무탈하게 끝났으니 어느 정도는 괜찮다 할 수 있을 터. “조금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아쉬움은 여전하다. 데큘레인의 쓸데없이 결벽적인 성격 탓이기도 하고, 이해력이 인간관계에는 적용되지 않는지라. 그러나 데큘레인은 곧 김우진의 마음가짐이 되어 훌렁 털어버리고 심문실을 떠났다. * * * ······실비아는 학교 교정의 벤치에 앉아 생각하고 있었다. 고요히 눈 감은 채, 세 시간 전의 사건을 머릿속에서 되감았다. 그때 그녀는 자신을 공격했던 이프린의 마력을 ‘분명히’ 소멸시켰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자신의 함정 마법을 심었다.
교묘하게 조작한 마법은 마치 이프린과 자신의 마력이 충돌하여 발생한 것처럼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실제로, 이프린의 마력에만 반응하도록 설계를 해두었다.
물론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준은 아니었고, 만약 그랬다면 일레이드의 재력으로 도울 생각이었다.
따라서 피해자는 오직 한 명. 이프린 루나 뿐이었을 텐데······.
“알고 있었어.” 데큘레인은, 명백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술수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 마법은 실비아 네 소행이었다’는 진실 대신, ‘실비아 네가 막지 않았다’고 뒤틀었다. 그 찰나의 순간, 데큘레인은 자신에게 순응을 요구한 것이었다.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협박이었다. “어떻게······.” 실비아의 의문은 다만 ‘어떻게’ 였다. 해당 강의실에 마법적인 관측은 없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이미 그 전부를 파악한 뒤 치밀하게 조작한 것이니. 그렇다면, 데큘레인은 그저 본인의 통찰과 지능만으로 모든 전말을 꿰뚫었다는 말도 안 되는······.
빵빵─!
경적이 그녀의 추론을 끊었다. 실비아는 그곳을 보았다. 길가에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 창문이 내려가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아가, 여기 있었구나.” 그는 실비아를 닮은 금발과 금안. 명문 마도가 일레이드의 핏줄을 그 누구보다 선명하게 이은 당주이자, ‘에스프리’ 등위의 고위 마법사이며, 자랑스러운 실비아의 아버지.
길테온 폰 루드비히 일레이드. “이야기는 다 들었다. 타거라.” “······응.”실비아는 뚜벅뚜벅 걸어 아버지의 차에 올랐다.
소문. (1) “그런 일이 있었구나.” 지상에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은 저녁. 실비아는 길테온과 함께 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핸들은 운전을 즐기는 아버지가 직접 쥐었고, 그녀는 조수석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가야, 그럼 너는 일부러 그리했니.” 아버지의 물음에 실비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떡였다. “그 아이가 미웠니.” “미울 것도 없어.” “······그래. 재능이야 좋은 아이지만, 이미 시기가 너무 늦었다.” 그렇게 조언하던 길테온은 문득 오래 전의 일을 떠올랐다. 10 년 전, 아카데미 입학 시험 당일. 일레이드 영지의 ‘적성 검사’에서 대마법사의 재목이 둘이나 발견되었던 그 날. 영지민이라면 누구나 경사를 외칠 일이었으나, 문제는 그 중 하나가 실비아였고, 다른 하나는 루나였다는 것이었다. 루나. 일레이드의 오랜 방계이지만, 이제는 너무 시간이 흘러 서로가 낯설어진 가문.
또한 넘치는 재능이 둘 이상일 경우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 경쟁.
“이미 레이스에서 뒤처진 아이이니,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무시하면 그 뿐이야.” ······대륙의 마법계에는 유구한 전통이 있다. 계열이 어떠하든, 속성이 어떠하든, ‘대마법사’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자는 오직 동시대에 3 명 뿐이라는 것.
그 기준이 워낙 위대하기에 근 30 년 간 두 자리가 공석이지만, 한 자리는 단연 이사장의 차지일 테니, 실비아가 남은 자리에 오르면 루나가 될 수 없고, 그 역이라면 실비아가 탈락하게 된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가문 간의 갈등이 첨예했고 또 여러 사건이 많았으나, 길테온이 루나의 마법적 재능을 배격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길테온은 나지막이 말했다. “다만, 아가야. 데큘레인을 경계하거라. 데큘레인은 그리 녹록한 인물이 아니야. 어렸을 적에는 신동이라 불린 작자다. 지금은 주춤하고 있다 하나, 언제든 비상할 수 있어. 웬 여자에 팔려서 제 스스로 재능의 크기를 줄이고 있을 뿐.” “나도 알아. 이미 그 교수에게 다 들켜버렸어. 약점이 잡힌 거야.” “······하하. 역시 범의 자식이란 말이지. ” 길테온은 웃었지만, 실비아는 무릎의 로브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녀로서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가능만 하다면 본인에게 직접 묻고 싶었다. 길테온은 딸아이의 안색을 살피고 차를 멈추었다. “······에잉. 벌써 도착해버렸구나. 격무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딸아이를 데려다주는 길인데, 영 짧아서 불만스러워. 아가, 어떠냐. 이 애비랑 같이 시내를─” “갈게.” “뭐라?!” 실비아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야속하다며 우는 척하던 길테온은, 그녀가 지면에 발을 딛자마자 말했다.“아가.” 그의 입은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진지하게 굳어 있었다. “네 등 뒤에는 일레이드가 있다.” 실비아는 길테온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똑닮은 금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아버지에게서, 실비아는 자신과 똑같은 자신을 보았다. “고작 이런 일로 자신감을 잃지 말거라. 누군가 너를 적으로 돌린다면, 이 아비는 그게 누구든 목을 베어낼 것이니······.” “얼른 영지로 돌아가. 어머니 기다려.” “······커허허험. 거 참 야속하구만. 알겠다.” 길테온은 멋쩍은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떠나갔고, 실비아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님,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소문을 들었어요!” 한달음에 달려온 유모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괜찮아. 다 해결됐어. 저녁은 조금 이따가 먹을게.” “아 정말 다행이네요. 그럼 원하시는 때 식사를 올려보내겠습니다.” “응.” 터덜터덜 제 방에 들어온 실비아는 잠옷으로 갈아 입고 침대에 누웠다. 풀썩— 부드러운 금발이 침대보 위로 부채처럼 펼쳐졌다.
“······데큘레인.” 잔뜩 흐트러진 채, 실비아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오늘 데큘레인 교수는 정말 다시 보았다. 그의 마법적 통찰과 식견은 결코 우습게 여길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재수가 없었다. 하기야 정말 재능이 별볼일 없었다면 수석교수가 되지도 못했겠지. 이건 명백히 나의 불찰. “불찰.” 불찰.
그래, 불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일은 실비아에게 의문 투성이었다. 타인이 아니라, 본인에 대한 의심이었다.
실비아는 누군가에게 감정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지도 않았고, 받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오늘의 사태는, 실비아로서도 명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왜.” 그 아이를 미워하고 있을까.
이프린 루나를. 그리고 그의 아버지를.
“왜 미워하지.” 가지지 못한 것이 없고, 원하는 것을 못 가져본 적도 없으며, 그 재능마저도 일레이드 500 년 역사의 으뜸이라 여겨지는 순혈의 귀족. 일레이드라는 지고(至高)의 명문이 세계에 내놓은 가장 완벽한 작품인 그녀가······ 제 마음 속 의문을 속삭이던 그때였다.
“방심하면 안 되기 때문이야.” 그녀의 눈에 마력이 깃들었다. 순금색 홍채가 태양처럼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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