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19
액자로 본 그 순간을 떠올리자, 한숨이 푹 흐른다.
예리엘은 제 무릎을 끌어안았다.
정작 모험단과 마주하니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이미 다 해결되기도 했고.
“······아 참. 그런데요. 그 ‘리아’라는 아이는 어디에서 온 거예요?” 입술을 삐죽이며 화제를 바꿨다. 가네샤는 흠칫 몸을 떨었지만, 이내 태연히 대답했다.
“리아는 다도해에서 만난 인연이에요. 재능이 확실한 원석이고, 이제는 저희 가족이지요.” “······그래요?” “근데 왜 관심을 가지실까?” 가네샤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예리엘이 자그맣게 대답했다.
“······신기해서요.” “신기해요? 뭐가요?” 가네샤가 귀를 쫑긋 세운다. 그리고 예리엘은 먼 하늘을 응시한다. 그 바람 사이에 떠도는 어떤 기억을 붙잡으려는 듯.
“······닮았거든요.” “닮다니요?” “······.” 예리엘이 가네샤를 돌아보았다. 가네샤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양갈래 머리를 펄럭였다.
펄럭펄럭— 펄럭펄럭— 예리엘이 피식 웃었다.
“그 머리는 살아서 움직여요?” “네. 이걸로 사람도 때려요. 아무튼, 누굴 닮았는데요?” “음······ 데큘레인, 제 오빠의 첫번째 약혼자요.” “······.” 그 순간 가네샤의 숨이 잠시 멎었다. 등허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예리엘은 옥상 바닥에 손가락으로 끄적였다.
“리아라는 아이는 그 약혼자를 닮았어요. 그것도, 무척이나.” “첫 번째······ 약혼자를요?” “네. 율리 그 여자도 언뜻 닮은 면이 있긴 한데, 그 아이는 정말 판박이예요.” “그래도 리아는 아직 어린데요?” “눈 색도, 머리카락 색도 다르지만, 아마 자라면 자랄수록 더 닮아갈 거예요. 제가 사람 얼굴은 잘 보거든요.” “오, 오호라······.” 이때, 가네샤는 어떤 운명의 장난을 느낀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리아는 데큘레인에게 갔을 것이었고, 혹시 그 약혼자를 닮은 외모 덕분에,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했을 수도 있었다······.
가네샤가 은근한 투로 물었다.
“그 약혼자 분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저도 간략하게만 알아요. 왜, 설정만 아는 수준? 언약식할때나 확실히 봤지.” “으음······ 그래요? 교수님은 그 언약식날 어땠는데요?” 피식- 예리엘은 저도 모르게 비웃음을 지었다. 그날의 데큘레인을 떠올리니 왜인지 그랬다.
“그렇게 웃는 얼굴을 난생 처음 봤어요.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는 얼굴이었어요.” 예리엘은 그때 처음 알았다.
데큘레인에게도, 그토록 부드러운 미소와 음색이 존재한다는 것을.
“······후훗. 교수님도 은근 순정적인 면이 있네요. 혹시, 리아를 보면서 그녀를 떠올리진 않겠죠?” 가네샤의 말에 예리엘이 미간을 콰득 찌푸렸다.
“당신 미쳤어요? 나이 차이가 몇살인데요. 우리 오빠 그렇게 비정상적인 인간아니에요······.” ······우리 오빠 그렇게 비정상적인 인간 아니에요.
옥상의 바로 밑층.
청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강화하여, 그 말을 엿듣던 누군가의 씁쓸한 읊조림.
“······미안.” 이는 아마, 자신이 괜히 추가한 설정 탓일 것이다.
데큘레인의 모델이 우진이라는 걸 알고, 이상하게 셈이 나서 우겨넣은 이스터에그.
“내가 너무······.” 데큘레인이 정말로 사랑했던 여인이 사실은 ‘유아라’였다는 설정.
녀석이 그걸 발견하고 잡아주길 바란, 내 말도 안 되게 구질구질한 행태.
“······찌질했네.” 리아는 애써 웃으며 콧물을 훌쩍였다.
고작 이스터에그가 이런 나비효과로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아 정말······ 나 너무 병신같아······.” 땅바닥에 엉덩이를 박고 얼굴을 감싸쥐었다.
이래서······ 고향 생각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 * * 두 시간의 수업 후, 10 분 간의 휴식.
이프린은 멍하니 헤롱거리고 있다.
“······괜찮니?” 옆에서 루이나 교수가 물었다. 끄덕인 이프린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네. 그런데······ 다 공부 중이네요.” 뒷자리의 이프린은 이 강의실의 진풍경이 한 눈에 보인다.
켄들·레겔로·브라함 등위의 마탑 마법사는 물론, 크레토 대군, 중독자 아스탈, 황궁 마법사, 렐린 교수, 로제리오까지 전부······.
수험생처럼 공부 중이다.
“아 나 치사하구로. 노트 한 권, 펜 하나, 지우개 하나 빌려주면 덧나나!
부유섬에서 열배로 갚아준다이까!” 로제리오는 아예 다투고 있었다. 한낱 필기마도구 때문이었다.
“어이 로르한. 니 나 모르나?” “아 말걸지 마요 좀! 잊어버리니까!” “뭐?!” 로제리오가 어떤 마법사의 로브를 붙잡자, 거칠게 털어버린다.
세상에, 에테르 등위의 마법사를 저렇게 막 대하다니.
“······어이? 루미에르 로르한? 나 에테르 로제리오-” “아 거 참 조용 좀 합시다!” 버럭-! 누군가 소리를 내질렀다. 대군 크레토였다. 로제리오는 그를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크레토 당신까지-” “에테르 로제리오. 면학 분위기를 헤치지 마십시오.” 중독자 아스탈이 근엄하게 제지했다. 그 곁에 나란히 앉은 다른 중독자 일곱명의 시선도 찌릿거렸다.
“아 나도 미안한데. 나 필기구가 없는데 어쩌란 말여?” “당신 잘못입니다. 그러게 누가 맨몸으로 오랍니까?” “······몰랐징.” “이제 조용히 하십시오. 에테르 로제리오, 부유섬이 직접 전하는 경고입니다.” 로제리오는 거의 다굴을 맞고 있었다. 필기구를 가지고 오지 못한 다른 여러 마법사도 입장은 비슷했다.
“왜 저렇게 예민해요 다들?” “······부유섬의 마법사잖니. 새로운 지식이 눈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당연히 저러지. 미친 작자들. 제대로 수틀리면 살인이라도 저지를 걸?” 루이나의 말에 이프린은 그녀를 힐끗거렸다.
“으음······ 루이나 교수님은 필기 안하세요?” “나는 다 했어. 손이 빠르거든.” “아······.” 이프린은 아직도 공중에 아른거리는 데큘레인의 이론을 보았다.
“근데, 데큘레인 교수는 저걸 어떻게 깨달았을까요?” “······글쎄. 죽을 날이 머지 않아서일까?” 루이나는 농담처럼 답했다. 그러자 이프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왜 그러니?” “어디서 비슷한 말을 들은 적 있어서요.” 루이나가 슬그머니 몸을 기울였다.
“무슨 말?” “······‘마법사는 하늘에 가까워질수록 진리를 터득한다-’.” 언젠가, 자신을 납치한 로하칸이 했던 말.
루이나는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 그러니? 우연, 우연이구나. 나나, 나, 나는, 노, 농담이었는데.” 그녀가 식은땀을 흘리던 그때였다.
“──!” 웬 버럭거리는 외침이 울리더니, 우당탕탕— 책상과 의자가 뒤집어지며 마력이 휘몰아친다.
이프린과 루이나는 크게 놀라 그쪽을 보았다.
“왜, 왜저래 저 사람들?” 네다섯명의 마법사가 서로 다투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니, 어렴풋이는 알 것 같았다.
“아 이 미친 도둑놈이—!” 어느 한 명이 욕설을 뇌까리며 파괴 마법을 발현한 그 순간.
“멈춰라.” 서늘하게 스며드는 목소리.
뚝- 모든 상황이 한순간에 토막난다.
“참······.” 휴식 시간, 정확히 10 분이 다하자 도착한 데큘레인. 그는 실타래처럼 뒤엉킨 마법사들을 한심하다는 듯 노려보았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미야아아아옹~ 그때, 붉은털 먼치킨이 돌연 크레토의 품에서 벗어났다. 빙의가 해제된 것이었다.
다만 장내의 시선은 오직 데큘레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머리가 크나 적으나, 나이를 먹으나 덜 먹으나······ 등신같이 욕심만 많아서는, 품격이라고는 조금도 없지.” 데큘레인은 제 품 안에 끄적여지는 전서지의 진동을 느꼈다.
케이론에게서 연통이 온 것이었다.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이다. 명심해라. 내 강의에서, 추악하거나 더럽거나 저열한 짓거리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는 곧바로 강의실을 나갔다.
때마침 좋은 핑계거리를 얻은 덕에 반발도 별로 없었다.
쿵──!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80 층은 적막으로 젖어든다.
다만 그 당황도 잠시 뿐, 곧 연필 소리가 이어진다.
데큘레인이 떠난 건 떠난 것이지만, 아직 그의 필기는 온전하기에.
“······.” 이프린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고, 루이나는 쓰게 웃었다.
“데큘레인 그 성격은 여전하네. 좀 죽인 줄 알았더니. 근데 저열한 짓거리는, 예전에는 지가 제일 많이 했으면서. 좀 바뀌었다 이건가?” “허, 허허허. 루이나 교수······?” 그때 렐린이 다가왔다. 그는 슬며시 제 노트를 책상에 얹었다.
“우리, 스터디 그룹이나 함께 해볼까? 공유하면서?” “······혼자는 이해 못 하시겠어요?” 루이나가 되물었다. 렐린은 어허- 어허- 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다만······ 중년이 되고 오랜만에, 학구열을 불태울만한 강의를 만났다고 할지······ 역시 데큘레인 교수님이시다, 라는 거지. 우리가 이 강의를 함께 이해하면, 교수님에게 점수도 딸 수 있을 걸세.” “됐어요. 사실 저도 이해 못했거든요. 필기만 다 했지.” 이프린은 일단 노트 필기를 계속했다.
그때, 중독자 아스탈이 수정구슬을 들고 어딘가와 통신을 시작했다.
“예. 아스탈입니다.” 이프린은 필기하면서 귀를 쫑긋 세웠다.
“마법의 새로운 ‘요소’가 될만한 가능성입니다. 아직 저도 이해가 필요할 듯합니다만, 대단히 특별합니다.” 칭찬에 인색한 중독자가 ‘대단히 특별하다’ 는 말을 하다니.
이프린은 괜한 질투와, 혹시 이 강의도 아버지와 연관된 것은 아닐까- 따위의 헛된 의심과 기대를, 아주 잠깐 품— 툭─!
돌연,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스위치 소리.
그 순간 강의실의 마력이 해체되었고, 데큘레인의 모든 필기가 사라졌다.
“이엥?” “이 뭔, 누꼬!” “어 잠깐만요?” “뭐지. 뭘까. 뭐지.” “누가 껐을까······. 감히 어떤······.” “다시, 다시! 얼른 다시! 나 아직 다 안 적었-” 마법사들은 당황했다.
아니, 그 이상의 패닉이었다.
회귀의 이력. (4) 섬과 섬 사이를 잇는 궤도의 빈틈.
마법의 먼지가 허무하게 떠도는 공백지.
“······.” 실비아는 그 어두운 공터의 돌무더기에 앉아 허공을 응시한다.
부유섬의 중력에 붙들려 우주처럼 공전하는, 암석과 마력의 흐름이 그녀의 동공에 담긴다.
“생각은 다 정리했나.” 바스락- 한 발자국 다가온 이드닉이 물었다. 실비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어깨에 매 한마리가 내려앉았다.
보다 날카롭고 매서워진 날쌘돌이. 곰탱팬더는 허벅지에 누워 졸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할 테냐.” “······.” 실비아는 상공에 일렁이는 무수한 파편을 바라본다.
섬을 이루지 못하고 부서진 물질들이, 누군가의 형상을 이룬다. 자신의 기억을 조각한다.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그가 나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저 죄책, 연민, 동정에 불과한 걸까.
근데 어떻게 내 엄마를 죽여놓고도, 나를 위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실비아는 그의 푸른 눈을 떠올린다.
수정처럼 눈부시지만, 한없이 차갑고 냉정한 눈.
······그 아름다운 얼굴에 번지는 핏줄기.
그를 물들이는 붉은색.
엄마의 피.
“죽도록 싫어할 거예요. 이 세상 끝까지, 아주 열심히.” “······.” 이드닉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실비아가 일으키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마력의 격류를 지켜보았다.
쏴아아아아아······.
허공을 방랑하던 암석 파편, 모래 부스러기, 죽어가는 이끼가, 이 작은 면적의 대지에 달라붙는다. 서서히 그 크기를 키워간다.
섬이 되지 못하고 탈락한 것들이, 다시 섬을 구성한다.
──이드닉.
그때, 이드닉을 부르는 목소리.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듯 신비하게 울리는 음색.
이드닉과 실비아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푸른 존재가 있었다. 몸 전체가 마력으로 이루어진, 환영처럼 일렁이는 형상.
완벽하게 조각된 남성의 육체는 오직 상반신 뿐이었으나, 그 체고(體高)는 2m 에 달했다.
이드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드란.” 신병(神兵) 로드란.
마법계의 초월적 존재인 동시에 부유섬 최악의 수배자.
‘신의 병사’라는 칭호는, 순전히 저 기이한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목소리’가 다가오고 있다.
“안다. 내가 부탁한 것은?” 그러자 로드란이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실비아는 무미건조하게 앉아 그의 눈을 마주했다.
그가 말했다.
──네가 죽인 것이 맞다.
“······.” 실비아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칼날로 심장을 긋는 통증이었다.
──네 마력이 무의식적으로 발현한 피조물이 ‘네시우스’라는 악마를 집어삼켰다. 피조물과 악마가 뒤엉키며 변종이 되었다.
“악마의 탓도 어느 정도 있다는 건가.” 이드닉의 말에 실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변호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럼 저도 살인자인 거예요. 제가 죽인 사람에게도 가족은 있을 테니······ 그 교수와 별반 다르지 않아.” 이드닉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레이드의 핏줄을 타고난, 시엘리아의 딸.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조합이 아니다.
“그런데.” 실비아가 이드닉을 돌아보았다.
“‘목소리’는 뭐예요.” “······악마다.” “악마.” “그렇다. 그저 ‘목소리’라 불리는 고대의 악마. 인간의 형상이든, 괴물의 형상이든, 실재하는 악마는 그나마 상대하기 쉽다. 죽이면 되니. 그러나, 이 ‘목소리’처럼 ‘현상’이거나 ‘개념’인 놈들은 대단히 까다롭지.” 벌떡- 실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다가가 로드란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그 악마는 유크라인이 상대하나요. 데큘레인이 그에게 가나요.” 로드란은 말없이 그녀의 눈을 직시했다.
건조하고 메마른 금색의 보석. 그 안에 출렁이는 마력의 대해(大海).
──너는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자질이다.
이윽고, 로드란은 그 한마디를 남긴 뒤 떠났다.
마법계의 역사적 인물이 건넨 찬사였다.
그러나 실비아는 아주 작은 감흥도 내비치지 않았다. 다만, 텅 빈 상공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부유섬에는, 섬을 발견하는 사람이 임자라는 불문율이 있어요.” 그녀가 손을 뻗었다. 그 가녀린 몸에서 마력이 화산처럼 분출했다.
콰아아아아──!
용솟는 마력이 일대의 파편을 끌어모았고, 물질 하나하나에 색(色)을 부여했다.
이 전체를 어엿한 ‘섬’으로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섬은 제 거예요.” “흠.” 이드닉이 팔짱을 꼈다. 바로 곁에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기에, 몸을 비스듬이 기대었다.
“그렇다면, 섬 이름은? 주인 신고를 하려면 이름도 필요하다.” 실비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명도(無名島)면 충분해요.” * * * 나는 황궁에 도착했다.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복도를 걸었다.
케이론의 말은 전서지에 작성되고 있었다.
[ 지하의 문이 열렸다. ] “케이론 경.” 황궁의 지하로 이어지는 나무문에 닿았다. 케이론은 그 곁에 동상처럼 서있었다.
“폐하는 어떻습니까.” “침소에 드셨다.” 나는 확신했다. 지하의 문은 역시, 소피엔이 ‘나태에 잠식당한 순간’에만 열리는 것이었다.
케이론이 물었다.
“들어갈 셈인가.” “당신은?” 케이론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검에 손을 얹었다. 호위하겠다는 뜻이었다.
“예. 혹 이 문 밖으로 네시우스가 나온다면, 그때는 사살이 아닌 미행을 부탁드립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문고리를 밀었다.
“그러도록 하지.” 끼이이이익— 뻑뻑하게 열리는 문 너머에는 퀘스트 재개를 알리는 문장이 있었다.
「 황궁의 어둠 · 악마의 거울 : 2 회차 」 * * * ······황궁의 정원.
소피엔은 호숫가를 걸으며 통증을 추스르고 있었다. 아무튼 되살아나긴 했으나, 도끼로 온몸을 짓이기는 듯한 고통은 여전했다.
짹짹─ 짹짹─ 새 지저귀는 소리가 거슬린다.
소피엔은 곁의 신하에게 물었다.
“오늘이 몇월 며칠이지.” “6 월 3 일입니다.” “······.” 내 정녕 회귀한 것인가.
죽고 반년이나 흐른 지금은 그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빌어먹을.
물론 처음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뒤늦게 더욱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시간만 되감겼을 뿐 질병은 그대로였으니.
“하아······.” 한숨을 내쉬면서, 비척비척 걷던 소피엔은 문득 호숫가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그 깨끗한 표면을 바라보았다.
“······!” 휘둥그레진 그녀의 눈에 경악이 깃들었다.
한발자국, 두발자국 물러나다가 노면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우으!” “전하! 괜찮으십니까?” “전하—!” 신하들이 세상 요란하게 달려들었다. 부축을 받아 일어난 소피엔은 우선 그들을 밀어냈다.
“괜찮으십-” “괜찮다. 괜찮으니 가, 가라. 저리 가 있어라.” 신하들이 꾸물꾸물 물러나고, 소피엔은 침을 삼킨다.
꿀꺽— 정원의 맑은 호수.
마치 거울처럼 반짝이는 그 수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너.” 그곳에는, 남자가 있었다.
과거 자신을 교수라 소개한 놈.
회귀 전의 질병이 일으킨 환상.
그가 말했다.
─또 뵙습니다, 전하.
소피엔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선 자리에 그는 없었다.
다시 호수에 얼굴을 처박고 말했다.
“교수?” ─예. 맞습니다.
“······네가 어떻게?” 소피엔은 자신이 회귀했음을 깨닫자마자 교수의 몽타주를 작성했고, 수색을 명했다.
그러나 이 대륙의 어디에도 제 기억처럼 생긴 교수는 없었다.
역시 한낱 정신병인줄 알았는데······.
─말씀드렸잖습니까.
지금 다시 나타난 교수는, 언제나처럼 오만하고 잘생긴 얼굴로 말한다.
─저는 전하의 과정에 항상 함께할 것입니다.
“······.” 소피엔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즉 호숫가에 손을 얹었다.
툭- 하고 물이 출렁였다.
“어억! 전하! 그만두십시오!” “안 됩니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스스로 목숨을······.” 그 행동을 오해한 신하들이 득달같이 쇄도했고, 끌려나온 소피엔은 제 방에 거의 유폐되었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정신은 어벙했다.
─괜찮으십니까.
“······.” 사라지지 않는 교수.
거울 속 환상.
제 정신병.
자신이 미동도 하지 않자, 저 교수는 한숨처럼 뇌까린다.
─저는 실존합니다. 그리 믿기 어려우시다면, 입이 무겁고 신뢰할만한 인물을 데리고 오시지요. 그에게도 제 모습을 보이도록 하겠습- “아니, 됐다.” 소피엔은 결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믿겠다, 교수. 내 저번 생과 연결된 존재는 오직 너 뿐이니······.” * * * ······그 후 2 개월 동안.
나는 2 회차의 소피엔과 시간을 보냈다. 당장은 ‘퀘스트 목표’조차 모호했기에, 일단은 머무는 수 밖에 없었다.
쉽게 말하면 ‘탐색’이었다.
물론 과거의 소피엔과 함께할만한 것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소피엔은 병약한 몸이었기에 외출이 불가했고, 대부분의 시간은 정원과 황궁 안에만 있었다.
이 거울 속에서, 내 역할은 오직 대화 상대 뿐이었다.
그간 소피엔은 나에게 여러 가지를 털어놓았다.
그녀의 삶은 수술과 치유의 역사였다. 헛된 바람과 희망 고문의 연속이었다.
고작 9 년의 인생이었지만, 그 세월의 무게는 어느 누구보다 무거웠다.
소피엔은 그 전부를 무덤덤한 어조로 전했다.
─야속하구나.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늘.
─나는 여전히 죽어가고 있다.
소피엔이 말했다. 침대에 누운 그녀의 죽음은 이제 머지않았다.
─회귀라는 기적마저 겪었건만······ 교수.
“예.” 소피엔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다.
─만일 내가······ 또 다시 살아나면······ 으읏.
격통이 그녀의 온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때에도 너를 볼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나는 즉시 대답했다. 소피엔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행이구나······.
“무엇이 다행입니까.” ─너는 잘생겼잖아. 네가 여러 환관들처럼 생겼다면······ 처음 만난 그때 거울을 부쉈을 테지.
대단히 현실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2 개월 동안.
나는 이 아이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도했다.
물론 그 연민 따위가 나를 괴롭게 만들지는 못하나, 웃지 않는 건 내가 익힌 예의이며, 격조이고 기품이다.
─교수. 나는 죽음이 아니라 아픔이 두렵다······.
그 순간이었다.
그녀 곁에서 ‘네시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보는 놈들은 평범한 해골의 형상이었다.
낫을 든 해골.
저승사자.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전하.” 나에게 공포가 없다는 방증이었으나, 이제 곧 소피엔은 죽을 것이었다.
“다음에도 또, 제가 곁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 안심이 되는구나······.
나는 저 악마 놈들을 죽일 수 없다.
이 거울 속에 있어서는, 저편의 소피엔에게 그 어떤 도움의 손길도 건넬 수 없다.
─또 다시······ 너를 볼 수 있길······ 나도 바란다······.
침대의 소피엔이 고요히 눈을 감는다.
네시우스는 잠든 그녀에게 손을 뻗고, 회귀의 정기를 채취한다.
정말 꿀벌처럼.
「 2 회차 」 뒤이어, 내 눈 앞에 시스템이 떠오른다.
치지지직— ‘2’ 라는 숫자가 흔들리고, 새로이 새겨지는 숫자는······ 「······ 7 회차 」 그 순간 나는 눈을 떴다.
동시에 케이론이 말했다.
“데큘레인.” “······.”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들어 주변을 훑었다.
황궁의 풍경이다.
소피엔과 함께한 2 개월이 꿈결처럼 흩어지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데큘레인?” 지금 내 머릿속에는 의문이 가득하다.
왜, 2 회차에서 곧장 7 회차로 건너뛴 것인지.
회귀의 회차가 이어지지 않아서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 터인데.
“데큘레인. 괜찮나.” 성격적 강박 탓인지 관자놀이에 혈관이 돋았다. 화가 치밀었다.
나는 케이론을 돌아보았다.
“······괜찮습니다. 며칠이 흘렀습니까.”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알아낸 건 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목적조차 모르겠습니다.” 똑똑— 지하의 나무문에 노크를 했다. 회신은 당연히 없었다.
케이론이 말했다.
“목적조차 모른다고?” “······이 세상에는 ‘실존’하는 악마가 있고, ‘현상’인 악마가 있으며, ‘개념’인 악마가 있습니다. 네시우스는 ‘실존’하는 삼류 악마이지요. 반면-” “이 지하의 악마는 현상이란 뜻인가.” “예. ‘현상’이자 ‘개념’입니다.” ······이 지하 속 과거는 소피엔의 세계다.
회귀 이전, 즉 소피엔이 죽으면서 버려진 세계.
「악마의 거울」은 그녀의 과거를 재현한 것이 아니다.
소피엔이 회귀하며 버려진 세계들을 ‘보관’한 것이다.
따라서, 이 지하의 세계는 거짓이 아닌 진짜다.
아직은 가설이지만, 아마 현재 소피엔의 기억과도 이어질 것이다.
“데큘레인. 나는 지금 네시우스를 미행하고 있네.” “다행이군요.” 이곳에 서있는 케이론과, 네시우스를 미행하는 케이론은, 같은 영혼이지만 다른 몸이다.
그것이 케이론의 ‘마력적 재능’.
“놈이 목적지에 닿으면 알려주십시오.” 나는 황궁의 복도를 걸었다.
다만 어느 순간, 그 자리에서 케이론을 돌아보았다.
“네시우스는 분명 폐하의 정기를 어딘가에 보관하고 있을 것입니다만······ 케이론.” 케이론은 말없이 나를 마주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폐하를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습니까.” “전부.” 케이론의 대답이었다.
* * * “······.” 소피엔은 눈을 떴다.
묘하게 슬프고 우울한 기분이었다. 이 생에는 거의 못느꼈던 감정이었다.
어디선가, 케이론이 말했다.
“깨어나셨습니까.” 소피엔은 그곳을 보았다.
정말 메트로놈처럼, 기사 한 놈이 현실을 알리듯 서 있었다.
“보면 모르나.”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데큘레인의 수업은 어찌 됐느냐?” 소피엔은 괜히 그것부터 물었다. 두어시간 듣다가 잠들어버렸으니.
“수업은 마무리 되었으나, 고양이가 80 층의 결계를 건드려 필기가 통째로 날아갔답니다.” “······그래. 고양이는 무사하고?” “예. 몇몇 마법사가 이성을 잃었지만, 이사장이 말렸다고 합니다. 지금은-” 미야옹~ 케이론의 정수리에 올라탄 붉은털 먼치킨이 울었다.
“그렇군.” 끄덕인 소피엔은 몸을 일으켜 창가에 기대었다.
저편에 가득한 황궁의 정원.
봄의 경치를 바라보며, 풍성한 정취를 느끼며, 자그맣게 읊조린다.
“······케이론.” “예.” “짐이 어릴 적에 말이다.” 소피엔은 언젠가의 일을, 아니 이미 사라진 날의 어렴풋한 기억을, 조심스레 헤아린다.
“말씀하십시오.”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슬프게 가라앉은 과거.
희미한 음색이 귓가에서 바스라진다.
─다음에도 또, 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는 오지 않았다.
약속을 어겼다.
그런데······.
‘그’가 누구였지.
“괴이한 꿈을 꿨다.” 소피엔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창 밖, 부드러이 밀려든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향기로운 꽃잎이 새하얀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렇군요.” 케이론이 말했다. 소피엔은 그를 바라보았다.
“······케이론, 너였나?”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아니다. 됐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황제는, 익숙하지 않은 기억을 저 깊숙이 묻어둔 채, 평소처럼 하품을 한다.
“하아아암······ 오늘은 뭐 할 일이 따로 있느냐?” “제단에게 마석을 공여 받은 상단들의 재판이 있습니다.” “아, 그 병신같은 놈들 목을 내가 직접 칠까.” “금물입니다. 아직 재판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또 졸리기 전에 무엇이든 하지. 오늘은 내가 체력적으로 여유가······.” ······그렇게 의욕적으로 소매를 걷어붙이다가, 다시 오징어처럼 늘어지는 그녀를.
“······.” 데큘레인은 먼 곳에서 바라보았다.
마탑 학사. (1) 황제직속령 임퓨리움의 치안국 본청, [ 이퀼리엄 ].
부국장 프리미엔의 하루하루는 바람 잘 날이 없다.
하루에도 수십 명 이상의 ‘미신고 적궤’가 포획당하고, 베탄은 적궤 구분을 위한 혈마법 발명에 열중하는데, 사막의 대장로는 그저 ‘몸조심하라’는 안부만 전달하니.
“······이놈은.” 그 지루하고도 무료한 살얼음판 위에서, 오늘 같은 날은 유독 송곳처럼 날카롭다.
프리미엔은 손가락을 베인 듯한 얼굴로 「정보국」의 직원에게 묻는다.
“왜 이 이름이 명단에 있지?” “상부가 작성한 감시·관찰 명단입니다.” “······.” 수트 차림, 제국 정보국의 요원은 형식적으로 대답한다.
이 빌어먹을 놈들은 언제나 이렇다. 병신들만 모은 것인지, 아니면 육성하면서 감정을 거세하는 것인지.
다만 평소처럼 넘어가기에는 이 이름이 너무 특별하다.
[ 유의할 감시자 목록 ] :실비아 폰 유세핀 일레이드: “일레이드가 폐하에게 밉보인 것이라면 너희가 직접 움직였을 텐데. 이리 짬처리 하려는 꼴을 보니······ 환관들이 부탁했나.” 일레이드라는 가문은 아무리 정보국이라도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
정보국은 자신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기에, 황제의 명이 아닌 이상 대가문을 조사하는 짓은 삼가는 것이다.
“정보국에서 자체적으로 감시와 수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또한 짬처리가 아닌 협조 요청입니다. 협조를 하겠다면 관련 자료를 넘겨드리겠습니다.” 요원의 말에 프리미엔은 명부를 톡톡- 건드렸다. 동의의 뜻이었다.
그러자 놈이 서류를 내밀었다.
[ 제국마법관련법 제 3 항 3 조 위반 의심 : 2 급 마법 살인 ] [ 제국마법관련법 제 8 항 1 조 위반 의심 : 고등급 위험 마법 발명 ] [ 제국정보법 제 1 항 8 조 저촉 의심 : 로하칸의 옛 동료 ‘이드닉’과 동행 중 ] [ 종합 : 면밀한 관찰이 필요한 고위험군 ] “이 실비아가 사람을 죽인 건가.” “정확히는, 술자가 창조한 마법이 사람을 잡아먹었습니다. 부유섬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으나, 면책에 준하는 ‘보석권’으로 해결되었습니다.” “한데?” “부유섬의 일만 해결되었을 뿐, 제국 내의 살인 사건은 제국의 관할입니다.
아직 수사가 진행-” “누굴 병신으로 아나.” 프리미엔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정보국 요원 두 명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사람 몇 죽여도, 이 정도 재능이면 그 누구도 처벌 못 해. 괜히 쪼아대다 타국으로 망명하면 제국만 손해니까. 너희가 그토록 바라는 ‘위대한 제국’에 도움되는 인재상이잖아.” 현실적으로, 실비아 수준 마법사의 처벌이 가능한 것은 부유섬과 베르흐트, 혹은 황제 본인뿐이다.
“그럼에도 감시 대상인 이유는, 이 로하칸과 이드닉 때문인가.” “부국장 프리미엔. 이제 당신의 일이기도 합니다.” 프리미엔은 피식, 입으로만 비웃었다. 그녀의 눈은 언제나 무심했다.
“내 일이어도 내가 직접 하면 비효율적이다. 마법사의 생리는 오직 마법사만 이해하는 법이니까. 동류, 즉 마법사의 자문이 필요하다.” “마땅한 인재가 있습니까.” 그 질문에 프리미엔은 누군가를 떠올린다.
설득이든 포획이든 심문이든,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만한 인물.
또한, 프리미엔 본인이 가장 유의하여 주시하고 있는 위험요소.
다만 섭외할 경우, 상전 모시듯 조아려야 하는 사람.
“데큘레인.” ······.
마탑의 77 층.
프리미엔은 결벽적으로 닦인 집무실을 휘둘러보았다. 냄새도 킁킁 맡았다.
놀랍게도, 은은한 비누 향이었다.
사락— 사락— 데큘레인은 50 페이지 분량의 협조 요청서를 들여다보고 있다. 차가운 표정으로, 그저 소설이나 읽듯.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닙니다. 저희가 자체적으로 감시·관찰팀을 꾸릴 것인데, 작은 도움만 주시면 됩니다.” 데큘레인이 눈을 들었다. 프리미엔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범죄에 휘말린 건지. 아니면 친구를 잘못 만나 범죄자가 되어가는 건지.
지켜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 “감옥에 가둔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더 엇나가기 전에 교화가 필요할 뿐.
실비아라는 마법사의 재능은, 국가적인 관리와 관찰이 필요합니다.” 데큘레인이 펜을 들었다. 프리미엔은 그의 손을 주시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문서에 서명했다.
“역시 한때의 스승이시군요.” 데큘레인이라면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확신은 틀리지 않았다.
“······프리미엔 부국장.” 그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예.” “나대지 말지.” “······예.” 프리미엔은 수정구슬을 건넸다.
치안국이 비밀리에 신설한, 일명 ‘실비아 전담팀’과 직통으로 이어지는 구슬이다.
“통신은 이것으로 합니다. 주기로 팀적인 회의도 있을 것이며, 관련 자료는-” “조건이 있다.” “서명은 이미 하셨습니다.” ······갑자기 번복할 생각은 아니겠지.
프리미엔은 데큘레인이 서명한 문서에 손을 뻗었다.
그가 말했다.
“한 사람만 더 조사하지. 실비아의 어머니, 시엘리아.” 꿈틀거리며 나아가던 그녀의 손이 우뚝 굳었다. 프리미엔은 건조하게 데큘레인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 어두운 안색이 의외였다.
“그녀의 일생, 그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대학마탑의 수석교수이자, 유크라인의 당주 데큘레인.
그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냉혈한이 아닌가.
그렇게, 적궤를 탄압하고 있는 것 아닌가.
“파악해서 내게 건네도록.” 그런데 지금, 데큘레인 이 남자는 왜······.
실비아를 걱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가.
“······그걸 알면 일에 도움이 됩니까.” 프리미엔이 되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프리미엔은 그 이상 나대지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나름 말은 잘 듣는 편이었다.
······.
“······지금 속세에는 그런 말들이 있다. 그런 말이 없어도, 정보국이 너를 감시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이드닉은 제 수첩에 적히는 글들을 실비아에게 전했다.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 아드린느도 나도, 다 예전에 거쳤던 과정이니.” 정보국, 치안국에서 그녀를 감시하리라는 소식. 그렇게 꾸려지는 팀에 데큘레인이 합류하리라는 사실.
“······.” 실비아는 말없이 눈을 떴다. 그녀 주변의 풍경은 섬이었다.
넓고 단단한 대지. 녹음 사이로 흐르는 개울.
삼원색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무명도’.
“너는 어쩔래?” 사흘 밤낮 동안, 그녀는 섬을 만들었다.
고작 그 사흘 만에, 부유섬의 궤도에 새로운 섬이 탄생한 것이었다.
“······.” 실비아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드닉을 바라보았다. 이드닉도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생각 중.” 그렇게 읊조린 실비아의 안색은, 그 얼굴은, 아니 온몸은,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괴로움을 모르는 탓이다.
“······떠올랐다.” 스무 해도 안 되는 인생, 그 절반 이상을 슬픔으로 지새운 아이.
통증에 절여지고, 고통에 익숙해진 감정이 녀석의 ‘평소’이기에.
“마법을 발명할 거예요.” 아픈 것이 일상이라 아프다는 것을 모른다. 새로이 젖어 든 어둠에도 금세 적응한다. 본래 제 것인 양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를 감시할 마법을.” 그러자 이드닉의 시선은 자연스레 ‘날쌘돌이’에 닿았다.
“데큘레인 곁에는 호위 기사가 있다. 강한 기사다. 물론 날쌘돌이는 아주 잘 만든 피조물이지만-” “알아요.” 그때 인위적인 바람이 일었다. 실비아의 발 언저리에서 상승하는 기류였다.
“바람에 마법을 담을 거예요.” “······바람에?” “바람이 내 귀가 되어줄 거예요. 그러면 데큘레인은 피할 수 없어. 자기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겠지.” 구름이 뭉실거리는 하늘.
그 어느 날보다 커다란 보름달이, 흘러내리는 달빛이 실비아를 적신다.
“내 무의식이 창조했다는 괴물도 색출할 수 있겠지.” ······그때, 이드닉은 자신의 과소평가를 인정했다.
저 녀석의 마음속, ‘데큘레인’이라는 장작은 고작 모닥불 따위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단순히 타오르는 불길도 아니다.
그는 마치 광막(廣漠)한 산불처럼, 천지를 잠식하는 화염이 되어가는 것이다······.
* * * ······늦은 밤, 조교 연구실.
유리창 너머에는 짙은 어둠이 가득하지만, [ 조교 연구실 ]의 전등은 백열처럼 환하다. 이프린과 드렌트는 물론, 알렌마저 복습에 몰두하는 중이라.
“이 이론을 이해하면, 내 마법에도 이 ‘특질’이라는 걸 심을 수 있다는 뜻인가?” 드렌트가 펜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이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것 같아요.” “······너는 벌써 이해했어?” 드렌트가 이프린의 필기를 곁눈질로 힐끗 보았다. 설핏 웃은 이프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질투 좀 하지 마요. 또 내 거 훔치려고?” “아니, 질투가 아니라······.” “솔직하게 물어보면 당연히 알려줘요. 설마 안 알려줄까. 내가 그렇게 치사할까.” “······아 음. 그러면······ 나중에 노트 필기만 빌려줄래?” 드렌트는 쑥스러운 듯 제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대신 커피 사요. 아, 바람도 쐴 겸 내가 사 올게.” “어? 어어, 응. 그래. 여기. 잔돈은 됐고.” 드렌트의 지갑에서 1 백 엘네 지폐가 스윽 나온다.
이프린은 일단 받았지만, 괜한 쓴웃음이 흘렀다.
“요즘 커피는 네 잔에 1 백 엘네나 하나 보네. 아무튼, 갔다 올게요.” “어, 어응. 다녀와~” “다녀오세요 이프린 씨~” 이프린은 조교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1 층 로비를 지나, 마탑 밖 ‘블라인드’라는 24 시간 카페에 들어가려던 찰나.
“?” 그 유리창 너머에서 익숙한 사람 두 명을 발견했다.
텅 빈 카페, 재즈풍의 음악이 흐르는 내부.
데큘레인과 아드린느가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이프린은 거의 본능적으로 눈에 마력을 모았다.
바람[風]의 원소를 눈과 귀에 응집하여, 시청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돋우는 술식, 「풍운」이다.
—······3 년, 아니 거의 4 년이 다 되어가는 그 연구는 언제 발표하실 건가요?! 이제 청문회가 머지않았는데요!
카페 안 아드린느의 힘찬 목소리. 데큘레인은 커피를 홀짝이며 답한다.
—곧 합니다.
—순수 원소의 창안, 그것을 토대로 한 사계열 마법! 듣기에는 거창한데 말이에요.
순수 원소의 창안.
이프린은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인다.
—예.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음~ 다행이네요. 근데 그거, 정말 데큘레인 교수님이 작성한 거 맞아요?!
다른사람 거 훔친 거 아녜요?!
그 순간 이프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혹시, 저 연구가 아버지가 편지에 언급한 ‘그것’은 아닐까.
—아 참, 그런데 말이에요! 제가 이제 이사장 임기가 얼마 안 남았잖아요?!
이번 겨울, 혹은 내년 봄까지일 텐데!
—그렇습니까.
—이사장 후보가 한 명 더 올 거예요! 물론 제 후임은 데큘레인 교수가 가장 유력하긴 하지만요!
이사장 임기가 곧 끝난다.
말인즉, 아드린느의 대마법사 등극이 머지않은 것이다.
—별 뜻은 없어요! 그냥 후보가 한 명뿐이면 너무 곤궁하고 부실해 보이잖아요! 명색이 대륙 최고의 마탑인데!
—누구입니까.
—당신도 아는 사람이에요! 리와인드 가문의, 모나크 이헬름! 나름 황실 전속 고위 마법사에, ‘두칸학파’의 수장(首長)이라, 스펙도 짱짱해서 경쟁자로 둘 만해요! 또, 옛 친구이니 알아서 비켜주겠죠! 너무 걱정은 말아요!
바로 그 순간.
“뭘 그리 보나.” “!” 이프린은 감전된 것처럼 푸르르르 떨었다. 화들짝 제 뒤를 돌아보았다.
“어. 데큘레인을 보고 있었나.” 그렇게 말하는 이 남자는, 방금 저 대화의 주제 ‘이헬름’.
“아 깜짝이야······.” “놀라긴.” 밝은 금발은 방금 감은 듯 물기가 흐르고, 붉은 눈은 나른하게 반짝인다.
이헬름 폰 제리안 리와인드.
이미 위자드 저널 등으로 보아, 이프린에게도 익숙한 얼굴이다.
“뭐, 뭐예요. 저 아세요?” “알지.” 이헬름은 이프린의 눈에 깃든 마력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그녀의 마법을 파악했다.
“넌 그저 보는 게 아니라 엿들었어. 그 애비에 그 딸이라는 건가.” “뭐요?” 순간 이프린이 이를 아득 갈았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칭찬이야. 눈깔아.” “······칭찬은 듣기 좋은 게 칭찬이고요.” “······.” 이헬름은 이프린을 내려보았다. 이프린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날카롭게 삐죽거리는 진홍의 눈.
이쪽이고 저쪽이고, 재수탱이들은 왜 다 키가 큰 건지. 목 아프게.
눈매를 늘어뜨린 그가 물었다.
“루나의 딸. 네 애비가 뭐라디. 아니 그보다. 너는 데큘레인을 죽이려고 밑에 있는 거냐, 아니면 섬기려고 밑에 있는 거냐?” “······참고 있으니까, 그 이상 제 아빠 들먹이지 말죠?” “그래? 그래도 한마디만 하자. 데큘레인이 지금 발표하려는 연구, 원래 네 애비 거다.” 이헬름은 그 말을 남기고 이프린을 스쳐 지났다. 외투인지 가운인지, 그가 입은 하얀 천쪼가리가 펄럭였다.
“아니 저 노란 대가리는 또 뭔······!” 이프린은 애꿎은 노면만 쾅쾅 짓밟았다. 그리고는 무심코 카페 유리창을 돌아보았다.
“······엇.” 데큘레인과 이사장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데큘레인은 무표정이었고, 이사장은 므흣므흣- 히쭉히쭉- 대단히 짓궂은 얼굴이었다.
* 몽연한 달빛이 조각조각 흩뿌려지는 거리. 카페에서 나와 마탑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안 궁금하시나. 그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는지.” 터벅 터벅- 데큘레인과 나란히 걸으며, 이프린은 괜히 중얼거린다.
“······.” 데큘레인은 대답이 없다. 이프린으로서는 그의 커다란 보폭을 좇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조금만 방심하면, 어느새 저 멀리에 있다는 거다.
“교수님 연구가 저희 아버지 거라고 했어요.” 이프린은 그를 따라붙으면서 말했다. 데큘레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멈추지도 않았다.
심통난 이프린이 볼을 부풀렸다.
“무슨 말 안 하시나?” “네 아버지는 혼자서 그 연구를 완성시킬 수 없었다. 그럴 재능이 못 되었지.” “므, 뭬?!” 데큘레인의 그 말에 화가 팍 났다.
타타타타— 얼른 네 걸음을 더 달려 데큘레인의 두 걸음을 따라잡았다.
“그러면 교수님은요. 교수님은 혼자서 완성할 수 있어요?” “연구 발표는 다음 달이다. 그때 네가 직접 보도록.” 슬슬 머리에 열기가 오른다. 등허리가 뜨겁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하지만, 안 된다.
화내면 지는 거다.
“그래요? 그럼 저는 신고할 거예요. 교수님, 도둑이라고. 그럼 이사장도 못 되겠지.” 이프린이 이죽였다. 데큘레인은 여전히, 이프린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걸었다.
이프린은 꾸득꾸득 따라붙었다.
“진짜 신고할 거예요.” “네 말을 믿을 사람은.” “없긴 왜 없어요. 있잖아요, 방금 만난 사람. 이헬름인지 뭔지.” 이헬름. 데큘레인의 치부를 알고, 내 아버지를 아는 사람.
물론 그 사람도 별로에 밥맛 같다만, 데큘레인이 자꾸 이렇게 무성의하게 나온다면, 차악을 택할 수도 있다.
“저도 그쪽에 붙기는 싫어요. 그러니까-” 뚝— 데큘레인의 발걸음이 멎었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이프린의 얼굴을 보았다.
“이프린.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해라.” “······.” 그게 끝이었다.
데큘레인은 다시 성큼성큼 걸어갔고, 말문이 막힌 이프린은 그의 등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교수님!” 그러면 나한테 후원은 도대체 왜-! 라고 외치려던 그때.
어디선가 흘러오는 목소리.
“내가 네 말을 왜 믿어.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이프린이 고개를 홱 돌렸다. 오르막길 우측의 관목림, 이헬름과 아드린느가 함께 서 있었다.
이프린은 입술을 삐죽였다.
“믿든 말든.” “음~ 근데 신기하네요! 데큘레인과 이헬름. 둘이 엄청 친했잖아요!” 이사장의 말에 이헬름이 어깨를 으쓱였다.
“인간이 항상 똑같습니까? 항상 똑같은 인물은 괴물입니다. ······어이, 너. 루나의 딸. 이름이?” 그가 이프린에게 턱짓했다. 이프린은 딱딱한 투로 답했다.
“······이프린.” “이파리?” “이프린.” “그래. 앞으로는 입장 똑바로 정해 이파리.” “이프린!” 이헬름이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했다.
“애매하게 행동하면 아무것도 안 변해. 아무것도 못 해. 나처럼.” “뭘 못 하는데요.”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아나? 이사장 자리, 가망 없는 거 나도 알아. 구색 맞추기인 것도 알아.” “······그럼 왜 왔는데요?” “싸워보려고 온 거야.” 이프린의 눈이 의문으로 가늘어졌다.
이헬름은 한숨 쉬듯 피식거렸다.
“예전처럼, 옛날처럼. 한 번도 안 싸우고 병신같이 밀려나기는 싫거든.” 자조 섞인 목소리로 읊조린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있을수록, 저 빌어먹을 놈은 높이 올라가기만 하니까.
제 분수도 모르고 나대다가 고꾸라질 줄 알았는데. 제풀에 지쳐 꺾일 줄 알았는데. 그러기는 커녕 추락할 기미조차 안 보이니까······.” 이프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 정도 공감은 가는 말이었다.
“······싸우다 뒤질 생각이야.” 반드시 따라잡겠다 다짐했건만, 데큘레인의 보폭은 자신보다 훨씬 넓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그는 하루가 지날수록 더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너도 원한이 있다면 제대로 해결해. 가만히 멈춰 있으면, 나처럼 식물된다.” 이헬름은 한쪽 입가를 비틀고 떠났다.
반대로, 이사장은 뚜벅뚜벅 다가와 자신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헬름 저 사람. 예전에는 데큘레인이랑 친했는데, 파벌 싸움에서 밀렸대요. 연구도 뺏기고, 업적도 뺏기고. 그리고, 저 사람도 율리 기사를 좋아했대요. 지금은 뭐, 따로 약혼자도 있다지만.
이프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 왜 저 사람을 후보로 선정하신 거예요?” 아드린느가 두 팔을 벌리고 해맑게 웃었다.
“재미있잖아요!” “······곧 대마법사도 되실 분이.” “그러니까 이러는 거예요~” 그렇게 답하는 이사장은, 왜인지 씁쓸한 얼굴이었다.
“대마법사가 되면, 대륙을 떠나.” “······왜요?” “대마법사는 적을 붙일 수 없거든요! 물론 가끔 제국에, 마탑에 방문은 할 수 있겠지만, 오래 머물면 눈치도 보이고!” 휘이이이── 여름의 밤바람이 나뭇가지를 휘감는다.
사락사락, 잎사귀가 서늘하게 흔들린다.
이프린은 괜히, 저 먼 하늘의 달을 바라본다.
“······차라리 안 되지 그래요? 대마법사.” 문득, 커다란 달덩이 위에 비치는 미래의 그 날.
먼 훗날의 이프린.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나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강한 마법사였던 것 같은데.
그 이프린은 왜인지 슬퍼하는 듯했다.
“그건 직무 유기예요.” 아드린느가 말했다. 이프린은 다시 그녀를 보았다.
키 작은 이사장은 데큘레인과 달리 마주하기 편했다.
“이프린 씨도, 재능에 걸맞은 책임감을 지니도록 해요. 후후후!” 빵긋 웃은 아드린느는 빙글 돌아섰다.
그렇게 총총총총- 날아가듯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이프린은 조금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 * 이튿날, 수석교수 집무실.
이프린은 이른 아침부터 데큘레인에게 호출을 받았다.
“······.” 조금 긴장, 아니, 많이 긴장한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바로 달려온 터라.
꿀꺽─ 이프린은 제 목전, 집무 의자에 앉은 데큘레인을 떨리는 마음으로 응시한다.
당장 어젯밤 저지른 짓이 있기에.
“받아라.” 쾅─!
무거운 문서 뭉치, 100 페이지쯤 될만한 묶음이 그의 책상에 내려앉았다.
데큘레인이 말했다.
“저번에 말한 연구다. 그래, 네 아버지의 아이디어. 그 일부가 여기에 있지.” “······아! 그, 그런데요?” “청문회인 10 월까지 네가 이걸 이해할 수 있다면, 완전히 체화할 수 있다면, 나는 이 논문을 발표하지 않겠다. 너에게 돌려주지.” “······!” 이프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큘레인은 무심히 물었다.
“도전하겠나.” “아, 그!” 그렇다면 더 물을 게 없다. 아버지는 딸인 자신이 연구를 이어가길 원했으니.
이프린은 얼른 다가가 그 종이 묶음을 가방에 넣었다.
“네에엑! 바라던 바예요─!” “나가라.” 그렇게 외치고 문을 열었는데, 밖에 다른 사람 한 명이 더 있었다.
어제 만난 이헬름이었다.
그가 눈썹을 들썩였다.
“아. 이파리가 먼저 있었네.” “이프린이라니까!” 퍽— 그 어깨를 밀치고 쿵쾅쿵쾅 걸어간다.
“뭐 저런······.” 이헬름은 그런 그녀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 다시 수 석교수 집무실을 응시한다.
그 저편에는 데큘레인이 앉아 있다. 빈틈 없이, 귀족적인 자태로.
“······데큘레인 교수. 같은 이사장 후보자끼리, 대질심문 예행연습이나 할까.” 마탑 학사. (2) “······.” 나는 이헬름을 바라보았다. 베르흐트에서 만났던 때보다 그 외모가 꽤 바뀌었다. 야위었고, 핼쑥해졌다.
“다이어트를 했나.” “왜 사돈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데, 네가 잘나가니까 퍽 살기 싫더라고.
세상이 텁텁해. 숨 쉴때마다 나방을 처먹는 느낌이야.” 이헬름이 썩은 미소를 지으며 이죽였다. 나는 놈의 곁에 일렁이는 마력을 「 육안」으로 보았다.
“그런 것 치고는 꽤 성장했구나.” “······아는 척 마라. 네가 뭘 안다고.” 내가 아는 이헬름은 그리 특출난 네임드가 아니다.
물론 순수한 마법적 재능은 데큘레인보다 뛰어나지만, 여러 강대한 네임드에 비해서는 많이 부족할 터인데.
지금 그의 마력적 순도(純度)는 내 예상 밖이다.
“흥. 신기하긴하다.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데킬라, 또 다도해에서 들여온 별에별 술은 다 달고 살았는데, 마법적 통찰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해.” 이헬름이 고개를 비스듬이 내렸다. 그 붉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것도 네 덕분인가? 데큘레인, 수석교수님.” “그렇겠지. 아무렴 내게는 타인의 마법적 재능을 개화시키는 재능이 있는 듯해.” “······허.” 이헬름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 얼굴을 포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데큘레인. 난 아직도 네 뱀같은 흉중이 이해가지 않아. 루나의 딸을 데리고 대체 뭘 할 생각이냐.” “······.” “마탑에서 쫓아내기는 커녕 조교로 받아들여? 퇴학 시킬 기회도 있었는데?” 나는 말없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반대로 이헬름은 내게 상반신을 들이밀었다.
“많이 생각해봤다. 네가 디카일렌을 닮았다면, 루나의 딸을 받아들인 용도도 추측할 수 있었겠지. 한데 넌 디카일렌을 닮지 않았어.” ──그때.
의식이 경종을 울리듯.
뇌리에 어떤 음색이 치밀었다.
이드닉의 목소리였다.
······나는 네가 저 아이를 죽일 줄 알았다. 저 아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디카일렌이니까.
하-! 이헬름의 비웃는 소리.
“왜. 보다 보니 동정심이라도 생겼냐?” 한 귀로 흘리고, 내 상념을 이어간다.
일기장에서 마주한 디카일렌의 인격을 떠올린다.
놈이 뇌까리던 말을 되감는다.
······나는 디카일렌 주인님의 학습지성이다. 주인님은 나에게 최우선 목표로 [ 가문 계승의 적격심사 ]를 맡기셨다.
유크라인의 전 당주 디카일렌은, 예리엘에게도 데큘레인에게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둘 다 탈락’이다.
그렇다면.
디카일렌은 혹, 새로운 당주를 찾고 있었나.
데큘레인도 아니고 예리엘도 아닌, 유크라인이라는 가문을 찬란하게 이어갈 또 다른 재능을 원했나.
그 후보가 이프린이었나.
“제 애비한테 사랑받는 척 당한 그 루나의 딸이 안쓰러웠나? 저 병신같은 애를 보다가 보다가, 난데없이 가엾고 딱해져서, 빌어먹을 애비 노릇이라도 대신 해주고 싶었냐? 아니면, 그 싱싱한 몸에 혹했나?” 나는 이헬름을 보았다. 저 면상을 짓이겨버릴까, 따위의 생각을 잠깐 했다.
“······흥.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사장 후임 발표는 아마 이번주 내로 날 텐데.” 입가를 비튼 이헬름이 협박하듯 말했다.
“너와 나, 우리의 과거. 저 루나의 딸, 그리고 루나와 유크라인 간의 거래.
그 전부를, 공청회 대질심문에서 다 공개할 거다.”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 그 과거가 어떠했는지. 이헬름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말을 씨부리며 웃었다.
“우리, 같이 죽어 보자고.” 놈은 자리에서 일어나려했다. 나는 「염동」을 발현했다. 철제 손잡이에 맞닿은 놈의 손이 콰득 붙잡혔다.
“놔라.” 이헬름은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내 「염동」이 고작 저딴 놈에게 파훼당할 리 없다.
우당탕- 쿠당탕- 놈은 애꿏은 의자만 흔들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헬름. 그러다 공청회 전에 죽는다.” “풋. 그래?” 피식- 비웃듯 말을 잇는다.
“모르나본데, 나는 이미 죽었어. 네가 내 전부를 빼앗아간 그날.” “그럼 한번 더 죽지.” “죽여봐.” 이헬름은 먼저 다리를 일으켰다. 의자에 붙들린 채 나가려는 꼴이 퍽 우스웠기에, 「염동」을 해제해주었다.
의자를 내팽개친 놈은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떠나갔다.
쾅─!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
적막한 집무실.
“······.” 홀로 남게 된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파편들을 정리한다.
이프린. 루나. 유크라인. 디카일렌. 이헬름.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과거들.
그 관계들을 헤아리다 문득 창문을 보니, 어두운 유리 너머에 비치는 내 모습이 어색하다.
조금은, 화가 난 얼굴이다.
“내가 이프린을 거둔 이유.” 이헬름의 의문을, 나는 다시 나에게 묻는다.
그 이유는, 두 번 생각 할 것 없이 확실하다.
······지금 현재든, 먼 훗날의 미래든.
그 녀석이 내 제자이기 때문이다.
* * * 쿵─!
조교 연구실로 돌아온 이프린은 책상에 문서 뭉치를 얹었다.
고작 백 장인데 못할 것 없지!
속으로 화이팅을 외치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띠링—!
위자보드에서 알람이 울렸다. 흠칫 놀란 이프린은 일단 그 화면부터 보았다.
“아!” [ 게시글 ‘혹시 10 년~15 년 전 마탑 역사 아시는 분 있나요’ 이 삭제되었습니다 ] [ 사유 : 기간 초과 ] 10 년~15 년 전, 데큘레인과 아버지가 함께 마탑을 다니던 시절의 역사.
현상금도 걸었건만······.
이프린은 제 나름대로, 데큘레인과 아버지의 과거를 파헤치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100 엘네는 너무 적나.” 하긴. 웬만한 수업 필기도 적정가가 500 엘네 이상인데.
이프린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격을 수정하고, 다시 게시글을 작성한다.
——[ 혹시 10~15 년 전 마탑 역사 아시는 분 있나요? 보상금 有 ]—— :10~15 년 전 마탑 역사 아시는 분. 혹은 그 역사 아는 사람을 아시는 분.
정보 주시면 600 엘네 드려요.
————— “600 엘네면 되겠지.”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공부 시작!
“자······ 어디볼까.” 첫 장. 첫 페이지는 서론이다. 새로운 순수원소 창안의 가치, 그것을 토대로 정립이 가능한 사계열 마법의 개요······.
대충 읽고 다음 페이지로 넘긴다.
“응?” 내용이 안 이어진다. 첫 페이지와, 두 번째 페이지가 서로 다르다.
두 번째 페이지부터 갑자기 웬 술식이 잔뜩이다. 중간에 누락이라도 된 것처럼.
“그 교수가 잘못 준건가?” 이프린은 무심코 첫 번째 종이에 손가락을 얹고 스윽 움직였다.
그러자, 페이지가 휙- 하고 넘어갔다.
“······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이 한 장 한 장은 평범한 종이가 아니다.
‘최첨단 마법 종이’다.
따라서 한 장의 분량은······ 300 페이지.
즉, 300 페이지의 마법 종이가 100 장이니······.
“······3 만 페이지.” 남은 시간은 한 달 남짓.
근데 공부할 내용은 3 만 페이지.
“아······.” 이프린은 순간 뒤통수가 뻐근해졌다.
퍽-! 하고 망치로 전두엽을 후들겨맞은 통증. 온 세상이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 * * 한편, 정보국의 지하.
“······흠.” 수억장의 종이와 서류, 박제·밀봉된 괴생명체, 잿더미에서 저술한 불법 마법서 등등······.
온갖 것들이 가득한 [ 정보국 기록·증거물 보관실 ]. 벽지가 보라색이라 일명 ‘퍼플 룸’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프리미엔은 시엘리아와 관련된 정보를 뒤적이고 있다.
“시발.” 한 인간의 일생을 조사하는 짓거리는 대단히 귀찮다.
그 인물의 ‘정확한 삶의 궤적’을, 정작 본인에게서는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라이 시발 이것도 아니다.” 인간의 삶은 자신이 아닌 주변에서 나온다.
인간이 왜 인간인가.
인간과 함께 살기에, 인간[人] 사이[間]에서 살기에 인간[人間]인 것 아닌가.
이 세상에 인간이 오직 한 명 뿐이라면, 그는 인간이 아닐 것이다.
“이 십창.” 따라서 프리미엔은 시엘리아의 주변 인물을 모조리 탐색하고 있다.
이렇듯 한 사람의 타임라인을 구성하는 일은, 프리미엔이 말단 시절부터, 아니 말단 시절에나 하던 노가다 수준의 잡무······.
“이게 다 그 십새 때문이다.”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린 프리미엔은 증거 목록 중 ‘불에 탄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이건 또 무슨 편지인가.” 혼잣말처럼 누군가에게 건넨 물음.
정보국의 복장을 한 요원이 대답했다.
“아, 그거요? 정식 명칭은 ‘행운의 편지’예요.” 프리미엔은 눈을 슥 내려 그 내용을 읽었다.
[ 이 편지를 읽는 사람은 사흘 내로 저주에 걸립니다. 치유할 방법은 오직 하나, 세 명 이상의 사람에게 이 편지의 내용을 정확히 옮겨 전달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편지를 다섯 명 이상에게 퍼트릴 경우, 당신의 다음날은 행운으로 가득할······. ] “병신같군.” “그 편지를 받은 사람들, 정말 저주에 걸려서 죽었어요. 수백명을 죽인 편지예요.” “아.” 휙! 프리미엔은 그 편지를 얼른 내팽개쳤다. 부정 탈라 손도 툭툭 털었다.
“마법계에서도 조용히 묻은 사건이래요. 10 년도 더 된 일이라 부국장님은 모를만 하세요.” “······마법은 신묘하군. 지랄맞고.” “그 편지는 마법이 아니에요. 악마죠.” “악마라고. 고작 이게?” “네에~ 악마의 종류는 ‘실존’, ‘현상’, ‘개념’ 인데, 이 편지는 ‘현상’이었어요.” 요원의 말에 프리미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 십새, 가 아니라 교수 밑에 있더니 잘 배웠군.” “네에. 자연스레 알게 되더라고요. 교수님 서재의 서적이 다 그런 거라서.” 프리미엔은 자신과 함께 ‘퍼플 룸’을 뒤적이는 요원을 돌아보았다.
“여기 시엘리아와 실비아의 병원 진료 기록도 있네요? 어렸을 때 병원을 꽤 자주 들락날락했나봐요.” 이 ‘퍼플 룸’은 도청이나 감시가 불가능한 장소. 물론 천장에 수정 구슬이 있긴 하나, 영상 녹화 전용이라 목소리를 담지 못한다.
따라서, 비밀 만남을 도모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10 여년 전 358 명의 생명을 앗아간 편지······ 그 불식은 유크라인의 당주 디카일렌.” 프리미엔은 ‘행운의 편지’와 관련된 기록을 보았다.
“많이도 죽었군.” “네에.” “만약 시엘리아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 358 명을 모조리 다 뒤져야 할테고.” “그렇겠네요.” “시발 내가 말단도 아닌데 말이다.” 무표정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요원은 남몰래 웃음을 삼킨다.
“주식도 하락장인데 말단때 하던 걸 또 쳐하고 앉았어. 아무래도 그 씹교수를 괜히 섭외한 것 같다. 이 시발 세계가 내일 당장 멸망하길 바라야 하나.” “에이 그래도요~ 실비아 그 친구는 데큘레인 교수 님이 잘 달래줄 수 있을 거예요.” 그러자 프리미엔은 말없이, 요원으로 위장한 녀석을 바라본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너는 동족을 학살하는 놈을 되게 좋아라 하는구나.” “아직 학살은 아니에요. 그리고, 혹시나 그럴 사태를 막으려고 곁에 있는 거예요.” 알렌, 아니 엘리의 대답이었다.
쯧- 혀를 찬 프리미엔은, 문득 어떤 기억이 생각났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엘리.” “네에?” 언젠가 하데카인의 레스토랑에서, 베탄이 ‘로타일리’라는 수프를 권했던 때.
그저 ‘버섯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로타일리를 먹지 않은 자신에게, 데큘레인이 했던 말이 있었다.
—프리미엔. 혹시 알고 있나.
─무엇을 말입니까.
─우리가 베르흐트에서 만났던 적이 있었지. 베르흐트의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했었어.
“우리, 예전에 베르흐트에서 만났었지.” 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부국장님이 휴가 날에 베르흐트 왔었잖아요. 그때 데큘레인 교수님이랑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했었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엘리의 기억력은 믿을만하다. 공간과 관련된 사건은 하나도 잊지 않는, 공간 그 자체나 다름 없는 놈이니.
“그날 메뉴가 뭐였나.” 프리미엔이 엘리에게 물었다. 아무 일도 아닌 척, 평소처럼 차갑고 태연하게.
엘리는 대답했다.
“송이버섯 스테이크였어요.” —그때 메뉴가 버섯을 곁들인 스테이크였다.
찰나, 엘리와 데큘레인의 목소리가 겹치듯 울린다.
서류를 뒤적이던 프리미엔의 손이 뚝 멎었다.
“······그랬나.” 그날, 데큘레인이 자신을 보내며 말했던 한마디가 뒤늦게 메아리친다.
—하하. 농담이다. 그 오래전에 뭘 먹었는지······ 기억 날 리가 있나.
“······.” 프리미엔은 시엘리아 관련 기록들을 전부 상자에 담았다.
쿵! 쿵! 쿵! 도움 될만한 것들은 모조리 처넣으면서 말했다.
“엘리. 언제까지고 그 교수 곁에는 머무를 수 없다. 더 버티다간, ‘제단’에게 발각당할 가능성이 커진다.” “네에. 그걸 제가 모를까요. 명색이 이중 스파이인데요.” “알면 좀 떠나라.” “네에! 갈게요! 릴리아 프리미엔, 안녕~” 알렌은 방긋 웃고 모자를 푹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퍼플 룸’의 정문을 열고 나갔다.
“······대상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 자그맣게 중얼거린 프리미엔은 상자들을 내려놓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빌어먹을 주식······.” 관자놀이가 뚫릴 듯 괴롭다. 젠장맞을 주식의 하락장이 떠오르고, 귓가에는 그의 목소리가 아른거린다.
—자네가 버섯을 싫어하는 줄은 몰랐군.
“······.” ─······그때 메뉴가 버섯을 곁들인 스테이크였다.
“······.” ─하하. 농담이다. 그 오래전에 뭘 먹었는지······ 기억 날 리가 있나.
무표정한 그녀는, 바닥에 놓아둔 상자를 발로 툭 까며 중얼거렸다.
“개좆같은 버섯.” * * * 오늘, 나는 교습 마법사로서 소피엔을 찾았다. 다만 장소는 평소와 달랐다.
‘배움의 장’이 아닌, 황궁의 정원이었다.
“데큘레인. 여기다.” 북동(北東)의 정원. 그 풍경은 영원한 겨울.
헐벗은 나무가 가시처럼 촘촘하고, 노면을 하얗게 물들이는 만년설이 끝없는, 설원(雪原).
그 저편, 덩그러니 놓인 통나무 오두막 곁에 소피엔은 있었다.
“여기다 여기.” 모피 코트와 털모자 차림의 황제. 그녀가 격조 있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의 소피엔은 꽤 나아진 얼굴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뽀드득— 뽀드득— 눈밭을 밟으면서, 「2 회차」와 「7 회차」의 간극을 생각했다. 그녀와 지키지 못한 약속을 되새겼다.
“어서 오너라.” “반갑습니다, 폐하. 오늘은 괜찮으신 듯하군요.” “그렇다.” 소피엔이 피식 웃었다.
“한데, 오늘은 네가 아는 사람과 함께이니라.” 그녀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러자 오두막 안에서 율리가 걸어나왔다.
오늘 나를 황궁까지 호위했던 그녀는, 어쩐 일인지 나보다도 먼저 이 정원에 도착한 것이었다.
“요즘 짐이 자주 졸리고, 게을러지고, 교습을 받을 시간도 없고 하여, 검술과 마법 교습을 동시에 받기로 했느니라.” “미리 말씀 못 드려 죄송합니다. 저도 돌아가는 길에 붙잡혀왔습니다.” “······.” 호위 기사가 아닌 교습 기사로서, 율리는 다소 딱딱한 얼굴이었다. 사뭇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가 먼저 말했다.
“폐하. 우선 검부터 다루시겠습니까.” “아니. 일단 앉지.” 소피엔은 오두막 근처의 티테이블로 안내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와 식탁이었다. 그녀가 그 위에 찻잔을 놓았다.
“요즘 짐의 권태와 나태가 도를 넘고 있느니라······. 짐은 아무래도 그 원인이 내면이 아닌 외부에 있다 생각하는데. ” 그렇게 말하며, 오두막 곁에 선 케이론을 힐끗거린다.
“케이론 저 기사 놈은 아무런 말도 없단 말이지······ 데큘레인 교수.
어디, 너는 알 것 같은가?” 소피엔이 품 안의 거울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나는 아무런 말도 전하지 않았다. 모른다고 답하면 거짓이기에.
“데큘레인, 말하라. 너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소피엔이 제 미간을 다소 험악하게 좁힌다. 나는 그녀의 가시돋친 시선을 마주하고, 율리는 우리 둘의 눈치를 살피던 그때.
“······!” 돌연 율리가 눈을 부릅떴다. 몸도 크게 들썩였다.
퉁─!
테이블 위의 찻잔이 노면에 쏟아졌다.
“······교수님? 폐하?” 그 직후. 율리는 멍한 얼굴로 소피엔과 나를 번갈아본다.
난데없는 돌발행동이었지만, 왜인지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율리.” “······예?” “무엇을 보았지.” 율리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대단히 혼란스러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이 부스스 떠올랐다. 파지직- 실제로 정전기가 튀었다.
“아 그것이······ 꿈을 꾼 것······ 같습니다. 꿈이어서 다행-” 나를 바라보는 율리의 눈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아니다. 율리. 이 자리에서 꿈은 꿀 수 없다. 너는 한순간도 잠들지 않았다.” 소피엔은 율리와 나를 흥미로운 눈으로 보았다. 그러다 입이 심심했는지 땅에 떨어진 찻잔을 들어 홀짝였다.
“말해라 율리. 너는 뭘 보고, 뭘 한 뒤, 이곳으로 돌아왔지. 아니, 무슨 꿈을 꾸었지.” “그······ 교수님이······.” 내 심각한 말에 율리는 잠시 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허벅지의 경갑을 꽉 움켜쥔 채 말했다.
“죽는 꿈이었습니다.” 그러자 소피엔 입가의 미소가 짙어진다. 율리는 제 가슴에 손을 얹고 심장의 맥박을 점검한다. 이게 현실인가 아닌가, 구분하려는 듯이.
“정말 다행입니다······.” 율리가 내쉬는 안도의 한숨이 고마웠다.
나는 그러나 고개를 젓고 말했다.
“아니. 다행이 아니다. 그건 꿈이 아니니까.” “예?” 지금, 율리는 회귀한 것이었다.
어떤 미래에서, 정확히는 내가 죽는 미래에서, ‘네시우스’를 베어낸 것이었다.
“네가 설명하지 않으면, 나는 또 그렇게 죽을 것이다.” 마탑 학사. (3) ······사라진 시간 속, 희미한 공간.
어둑어둑한 저편에 금속광이 번뜩인다.
“교수님!” 율리는 그에게로 달려간다. 자신 또한 온몸에 상처가 가득하지만 망설임은 없다.
그는 어느 벽면에 기대어 있다. 그답게 눕거나 넘어지지 않고, 굳건히 서 있다.
“상처가 깊습니다!” 그의 온몸에서 피가 울컥거린다.
기사로서, 율리의 몸과 머리는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상처 확인부터 출혈 제어를 비롯한 응급처치. 20 년간 훈련된 습관이다.
“침착하구나, 율리.” “말하지 마십시오.” 심장이 쿵쾅거리지만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다.
부상 부위를 확실히 파악하고, 우선 마력적인 치유부터 시작하려던 그때.
콱─!
데큘레인이 제 손을 움켜쥐었다. 율리는 의문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괜찮다.” “절대! 절대 괜찮지 않습니다!” “괜찮지 않다면······.” 그가 율리의 볼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죽어가고 있나.” “······.” 율리는 그의 상처를 면밀히 점검했다. 복강, 장골, 비중 등, 가장 치명적인 급소들이 모조리 꿰뚫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죽어가고 계십니다.” 그 떨리는 목소리는, 데큘레인에게 언젠가 김우진으로서의 기억을 되살린다.
꽤 옛적. 모니터 속 그녀가 데큘레인의 숨통을 끊던 모습과, 죽어가는 데큘레인의 유언.
‘빌어먹을 년-’.
“「철인」도 죽긴 하는군······. 율리. 나는 내가 죽는 상황을 본 적 있다.” “그만, 그만 말하십시오!” 율리는 그의 입을 막고 싶었다. 말할수록 핏물이 출렁였지만, 데큘레인은 고집스레 다음을 이었다.
“이상하지. 아마 그 미래가, 너에게는 가장 이로운 미래일 텐데.” “교수님, 제발······.” “나도 안다, 율리. 이게 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대로 자신이 죽는다면, 율리 또한 본연의 모습을 구할 수 없다.
데큘레인이 죽는다면, 반드시 율리의 손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너를 위해서라도, 나를 위해서라도.”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를 죽이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교수님.” “명심해라.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를 죽이면, 다시 만날 수 있어.” “그게 무슨······.” “······.” 데큘레인의 말은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눈을 감았다.
“교수님! 교수님──!” 그는 단 한 순간도 몸을 굽히지 않았고, 다만 한순간에 꺾인 것이었다······.
* * * ······현재로 되돌아온 율리는 소피엔과 데큘레인을 번갈아 보았다.
“율리. 네가 갑자기 정신이 나간 게 아니라면.” 소피엔이 말했다. 그녀는 팔짱 낀 손가락으로 상박을 두드렸다.
“회귀했다는 말인가.” “예. 오늘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였었습니다.” 율리는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상황 판단과 정리, 이해가 대단히 빨랐다. 아마 방금 전을 꿈이라 치부하기에는 기억이 워낙 선명했던 탓이겠지.
“신기하구나. 데큘레인이 죽기 전의 경위는?” “황궁의 지하에 악마가 출몰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율리는 잠시 고개를 돌리고 기침했다. 콜록-! 콜록-!
“그래서 저희는, 함께 황궁에······.” 그녀의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율리는 아무 일도 아닌 척 닦아내고 말을 이었다.
“교수님은 저에게, 지하의 입구를, 맡겼습니다. 교수님 홀로 지하-” “그곳에서 내가 죽었다?” “······예.” 율리는 한 마디 한 마디가 힘든 듯했다. 이마에는 이미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또한······ 후.” 정신이 어지러운지, 고개를 한 번 털어낸다.
그녀는 책상을 아득 부여잡고 말했다.
“그때 폐하께서는, 잠들어 계셨습니다. 가신들이 노력했지만, 기침(起枕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 소피엔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예. 쿨럭-!” 율리가 기침했다. 그녀의 입에서 핏덩이가 튀었다. 한순간 토해낸 혈액이 눈밭을 붉게 물들었고, 쿵! 이내 몸 전체가 그 위로 추락했다.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율리를 안아 들었다.
“무슨 일이냐.” 소피엔이 물었다. 나는 율리의 온몸에 들끓는 고열을 느꼈다. 눈을 감고 그녀의 부상을 「이해」했다.
“······부상이 큽니다. 회귀의 부작용입니다. 율리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회귀는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따라서 온몸의 마력이 최소한 한 번 이상은 크게 격동한다.
물론 몸이 강인하고 회로가 단단하다면 금세 적응할 테지만, 율리의 신체와 회로는 그렇지 않다. 심장에 달라붙은 저주 탓이다.
율리는 그런 몸으로 하루나 이틀도 아닌 일주일을 회귀했다.
미래의 나를 되살린 대가인 것이었다.
“데큘레인. 지금 네 얼굴이 신이하다.” 호오~ 소피엔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얼굴이니라.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이냐?” 나는 말없이 율리의 의식과 맥박을 확인했다. 그녀는 어렴풋이 깨어 있었다.
“······아니요.” 그렇기에, 내 말은 그녀의 기억에 아른거리듯 남을 것이었다.
“단 한 번도, 그만큼 사랑한 적 없습니다. 다만 가지고 싶을 뿐. 한데 요즘은 유독 잔병치레가 많아 꽤 귀찮습니다.” “······.” 나를 보는 소피엔의 입가가 냉소적으로 뒤틀린다.
이윽고 황궁 전속 의원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율리를 들것에 실었고, 나는 멀어지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소피엔이 말했다.
“데큘레인.” “예. 폐하” “짐은 모든 것에, 정말 모든 것에 쉽게 능숙하고 익숙해진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네 감정을 파악하는 게 힘들었다만. 그조차도 이제는 쉽다.” “그렇습니까.” “데큘레인 너는 짐에게 거짓을 말했느니라.” 소피엔이 엄하게 말했다.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단히 실망이니라. 지금 당장 그 목을 베고 싶을 만큼.” “······송구하옵니다. 허나 저는 아마 ‘폐하가 생각하는 만큼’ 율리를 사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율리가 데큘레인으로 인하여 완성되듯, 데큘레인도 율리로 말미암아 완성된다.
나는 그 정해진 스토리를 거역할 수 없다.
“아마 그 훨씬 이상일 것입니다.” 하지 못하기에 할 수 없는 것이 아닌, 하기 싫기에 할 수 없다.
데큘레인 특유의 에고. 가장 단단한 성격과 고집이 율리를 바라는 것이다.
“······흥. 되었다.” 내 말의 뜻을 알았는지, 소피엔은 비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돌연 나무 책상에 눌어붙었다.
“참······ 또 갑자기, 귀찮고······ 졸리니라. 내게 거짓을 말한 너를 책망한 뒤······ 룬어를 좀······ 배우려 했건만······.” 느릿느릿한 소피엔의 말꼬리가 멎었다. 나는 케이론을 바라보았다.
케이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지하의 문이 열린 것이었다.
* * * 「7 회차」 나는 지하의 과거에 진입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풍경은 황궁의 정원이었다.
봄의 호수. 그 표면이 소피엔을 비춘다.
그녀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벌써 늦어버린 듯했다.
그녀는 눈과 귀가 멀어 있었다. 또한, 삶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왔음을 알릴 수 없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노라 전할 수 없었다.
전하───!
그녀 곁에 모인 신하들이 울면서 소피엔을 불렀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바스락- 잔디가 밟히며 흙이 튀었다. 죽어가던 소피엔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내 곁에······ 누가 있는가.
이미 귀가 먹어, 대답조차 듣지 못할 물음.
“예. 제가 곁에 있습니다.” 내가 소피엔의 말에 대답한 순간.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그녀가 읊조린 순간.
세상이 일변했다.
쿠구구구구구궁──!
천지를 뒤흔드는 진동.
이윽고 공간 전체가 무너지고, 다시 새롭게 뒤집힌다.
급속도로 ‘회귀’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13 회차」 다시 세워진 황궁의 풍경.
13 회차의 소피엔.
그녀는 병마의 고통이 더 심해지기 전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그리고, 또 다시 세상이 바뀌었다.
「······16 회차」 16 회차의 소피엔.
그녀는 다도해에서 찾아온 사이비의 민간 요법을 받다가 죽었다.
「······21 회차」 21 회차의 소피엔.
회귀에 지친 그녀는 울고 울다가 암석에 이마를 처박고 죽었다.
「······29 회차」 29 회차의 소피엔은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그렇게 33 회차, 37 회차, 40 회차, 43 회차, 48 회차, 53 회차······.
나는 그녀가 죽는 모든 순간을 거울 너머에서 지켜보았다. 「악마의 거울」은 나에게 의도적으로 소피엔의 죽음을 보여주었다.
그 틈 사이사이 네시우스가 날뛰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 그녀의 온갖 죽음을 관측하고 받아들이면서.
나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거울. 이제 알 것 같다.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 「악마의 거울」이 왜 버려진 세계들을 보관하고 있는지.
왜 이토록 소피엔의 죽음에 집착하는지.
또 왜, ‘거울’이라는 매개로 존재하고 있는지.
“‘세상’.”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 세상. 그게 네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자, 허공에 문이 생겨났다.
내 답안이 옳았음을 알리는 평범하고 소박한 나무문. 그것은 눈가루가 내려앉듯 고요히 노면에 닿았다.
나는 그 문을 열었다.
* * * “그 안에서 무엇을 보았지.” 황궁으로 돌아온 나는 케이론과 함께 황궁의 1 층 복도를 거닐었다. 좌우로 플레이트 아머의 기사 동상이 주르륵 도열한, 일명 ‘기사의 숲’이었다.
“깨달았습니다.” 이 기사 동상은 특정한 마력적 공명을 머금고 있기에, 도청이나 감시가 불가능하다.
“무엇을.” 케이론이 물었다.
“우선, ‘회귀’는 오직 폐하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만큼은 거의 확신과도 같습니다.” 사실은 그 이상이다.
아마 이 세계 전체가, 소피엔을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악마의 거울」은 ‘세계’를 원합니다.” “······세계?” “예. 이 지하의 놈은 인세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악마입니다.” 이 악마에게는 뜻이 있다. 지성이 있다. 욕망이 있다.
소피엔이 회귀하며 버려진 수많은 세계. 추측하건데, 그것들과 함께 자라고 성장한 놈은,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나도 저 세계처럼 되고 싶다.’ ‘나의 세상에도 사람이 살아가고, 하루하루가 이어지길 바란다.’ ‘나는 거울이 아닌, 현실이 되고 싶다······.’ 따라서 지금, 「악마의 거울」은 원한다.
이 세계를 세계로 만드는 존재. 이 ‘세계의 증거’인 소피엔을.
“신이 되려는 놈인가.” “그 이상입니다.” “해결할 방법은?” “······.” 나는 케이론을 바라보았다. 케이론은 여전히 굳건한 얼굴이었다.
“케이론. 네시우스 미행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계속 쫓고 있지만 특정할 만한 장소가 나오지 않는다. 나를 놀리듯 뱅뱅이를 돌고 있지.” “예. 놈은 아마 눈속임일 겁니다.” 「악마의 거울」은 자신이 스스로 세계가 되고자 한다. 거울 따위가 아닌 진정한 세계로서, 이 현상계에 존재하길 바란다.
그 소원을 마냥 들어주는 것은 차선책이다.
“눈속임으로 몇몇 네시우스를 대륙 곳곳에 퍼트렸겠지요. 한데 저는 어쩐지, ‘제단’ 놈들이 폐하의 회귀를 어디에 모으고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어디지.” 케이론이 내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화마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이었다.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나는 말했다.
“율리가 힌트를 주었습니다.” “힌트라 하면······.” “황궁의 지하. 그곳에 악마가 출몰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뭐라고?” 케이론이 미간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나는 그에게 어떤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도 이미 아는 정보였다.
“지하로 향하는 문이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지하의 문은 하나가 아니다. 「악마의 거울」과 연결된 통로는 뒷문이지만, 정문은 따로 있다.
“등잔 밑이 어둡습니다 케이론.” 과거, 졸랑이 나를 지하로 안내하려다 실패한 정문. 여태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은 그 문.
케이론의 입가에 어이없는 미소가 깃들었다.
“허 참.” “‘제단’ 놈들이 모은 회귀가 몇백 년일지, 몇천 년일지는 아직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먼저 그것을 이용해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한데, 그날 회귀한 게 율리 한 명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적들도 회귀를-”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합리적인 의심이었지만, 네시우스라는 악마의 특성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네시우스는 단순한 악마라 채취와 운반밖에는 못 합니다. 채취한 정기를 인위적으로 사용하려면 놈을 죽여야 하는데, 죽인다면 계약 위반이겠지요.” “계약 위반?” “예. 네시우스 같은 소악마는 대개 계약의 산물입니다. 지성이 있고, 감정도 있어, 계약 사항을 준수하지 않으면 토라집니다. 동족을 죽인 집단 밑에서는, 어떤 일도 수행하지 않으려 들 겁니다.” “토라진다라······ 허.” 케이론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케이론, 결행은 닷새 뒤로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최대한 평소처럼 지내십시오.” “그러지.” 나는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케이론이 붙잡았다.
“바로 떠날 생각인가. 곧 율리 그 기사가 곧 깨어날 텐데. 함께 가지 않고.” “······.” 두 다리가 우뚝 굳었다. 나는 병실에 누운 율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필요 없습니다.” 회귀의 격동은 율리에게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다시 나와 만나기 위해, 그녀가 소모한 생명력이 얼만큼일지는 헤아릴 수도 없다.
오히려 그렇기에, 그 곁에 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녀의 긍정이 될 수 없고, 한낱 악화 요인일 뿐이니.
“이제 율리의 호위는 필요 없습니다. 폐하께도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몸이 안 좋은 기사는, 호위가 아닌 짐덩이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슬프게 직감한다.
이제 머지않은 결별을.
낙화하듯 스러지고, 짓밟힌 채 사라질, 우리의 관계를.
* * * “······흐음.” 한편, 프리미엔은 한숨과 함께 편지를 내려놓았다.
정보 취합을 통한 사건 유추는 프리미엔의 마력적 특성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기에, 고작 28 시간 만에 어렴풋한 윤곽을 잡는 데에 성공했다.
끄드드득─!
그녀는 자신이 구성한 타임라인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낸’ 뒤 ‘마력의 통’에 넣었다.
여기서 마력의 통이란, 문자 그대로 마력으로 구성한 사각형의 틀이다. 이 안에 자신의 기억을 넣으면, 이 통이 알아서 논리적인 추론을 이어갈 것이다.
일명 ‘생각과 기억의 실체화’.
프리미엔이 최연소 치안 부국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마치 스캔하듯 번쩍이는 기억과 생각. 그 과정이 어느 정도 진행되자, 프리미엔은 제 기억을 도로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그렇게 편견 없는 논리적인 추론을 받아들인 뒤, 고개를 돌린다.
“엘리.” “네에?” ‘퍼플 룸’의 서랍을 뒤적이던 엘리가 대답했다. 프리미엔은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데큘레인 교수가 기일을 챙긴다고 그랬지.” “기일이요?” “약혼자 기일 말이다.” “아, 네에! 매년 단 한 번도 안 거르셨어요.” 그러자 프리미엔의 한쪽 입꼬리가 삐죽 솟았다.
“그렇다면, 이제 알겠다. 그 교수가 왜 시엘리아 조사를 요청했는지.” “정말요?!” “그래. 아직은 의심 수준이지만 거의 확실해.” “아 네에! 그럼, 보고서를 작성해서 교수님한테 보내주세요.” 엘리의 그 말에 프리미엔이 뚜둑 굳었다. 그리고는 가늘게 좁힌 눈으로 노려보았다.
“······보고서라고?” “네에. 교수님은 보고서를 좋아하시거든요. 웬만한 것들도 다 보고서로 전달해드려야 좋아하세요. 대면은 말도 많고, 침도 튀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면서 “으음. 참 예민한 십새구나.” 가만히 관자놀이를 짚는다. 이 어마어마한 내용을 보고서로 정리하는 짓거리는······ 누굴 진짜 말단으로 아는 건지.
뭔발저발시발개발, 프리미엔은 온갖 욕설을 꿍얼거리며 말했다.
“알겠다. 대신 보고서에 침을 뱉어 놓을 테니 그리 알아라.” “안 돼~ 안 돼요 그러면!” “내 마음이야.” 프리미엔은 책상에 종이를 올리고 펜을 들었다. 동시에, 자신의 기억을 점검했다.
데큘레인이 부탁한 시엘리아 조사.
그 결과, 프리미엔은 데큘레인 본인이 시엘리아를 죽였음을 알게 되었다.
건조하게 표현하면 ‘데큘레인이 시엘리아를 살인했다’. 그의 동기는 아마도 복수였고, 사주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마 정보국만 알고 있었을 또 다른 내막은······ 아직 모른다.
“엘리. 정보국 놈한테 부탁하지. 이 서류.” “네에~ 한 번 물어는 볼게요.” 1~2 급 기밀로, 퍼플 룸에서도 개봉이 불가능한 서류.
이 하나만 뜯으면, 모든 전모를 알 수 있을 듯하다.
“보고서라. 그 교수는 사람 참 귀찮게 한다······.” 이후 프리미엔은 우선, 자신이 이해한 타임라인부터 보고서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소피엔. (1) 율리는 황궁의 병상에서 눈을 떴다.
제 곁에 황제 소피엔이 있었다. 등 뒤에는 언제나처럼 케이론도 함께였다.
“······.” 율리는 잠시 당황스러웠다. 너무 예상외의 간호라 눈꺼풀이 절로 깜빡거렸다.
“······단순 부상이 아닌 저주구나. 그것도 대단히 악질이로세.” 소피엔이 말했다. 사막의 모래처럼 건조한 음색이었다. 급히 상반신을 일으키려던 율리는 통증에 멈칫했다.
“읏!” “괜찮다. 누워 있거라.” “아닙니다. 저-” “이 저주. 데큘레인을 호위하다가 얻은 것이라 들었느니라.” “······.” 율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소피엔은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짐도 한때 지독한 병마에 시달렸던 적이 있었지. 괴로운 삶이었다.
괴로움마저 무디게 느낄만큼 괴로웠느니라······. 기사여, 짐의 눈을 보거라.” “······.” 율리는 감히 황제의 눈을 바라보았다. 다만 소피엔의 동공에는 생기가 없었다. 활력이 없었다. 놀라울 만큼 공허한 빛이었다.
소피엔이 피식 웃었다.
“너에게도 보이겠지. 한때의 병마는 극복했지만, 또 다른 질병이 아직도 짐을 좀 먹고 있느니라. 그 병명은 권태, 또는 나태라 하지.” 그렇게 말하며 율리의 이마에 손을 얹는다.
그 순간, 율리는 제 몸 안에 스며드는 어떤 상쾌함을 느낀다.
“폐하. 이것은······.” “데큘레인에게 배운 룬어이니라. 치유의 언어이나, 저주는 치유가 가능한 종류가 아니지. 일시적인 증상 완화, 대증 요법에 불과하니라.” “아!” 율리는 어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서둘러 기사의 예를 갖추는 그녀를 보며 소피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이상 몸을 일으키면 예의가 아닌 몰상식이니라. 가만히 있거라.” “예.” “또한, 완전히 치유한 것이 아니다. 그 저주는 언젠가 너를 죽일 것이니라.” “······예. 알고 있습니다.” 서서히 덧나고, 격화되어 가는 저주.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은 이제 아침 일과가 되었다.
“너를 보니 옛날의 내가 떠오른다.” 그 고통을 이해한다는 듯, 소피엔은 창 밖의 달을 보며 읊조린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어쩌면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무엇도 모르는 채로. 내 기억 전부를 잊은 채로······. 이번 생은 망했다.” 감상에 젖은 푸념. 율리가 흠칫 놀라 대꾸했다.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망하다니요, 폐하.” 소피엔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닿았다.
“너의 그 저주는 치유가 불가능하니라. 넓게 보면 옛날의 짐과 비슷한 처지라는 것인데, 너는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은 것이냐? 그때 데큘레인을 호위하지 않았더라면,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냐?” “······.” 율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엔은 진지하게 되물었다.
“왜지.” “그 선택 또한 저의 몫이고, 저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 참으로 기사다운 답변.
병실에 자그마한 침묵이 흐른다.
“······그런가.” 두어 번 작게 고갯짓을 한 소피엔은, 이내 작디작은 미소를 흘렸다.
“너는 데큘레인과 다르다.” “······그렇습니까?” 율리는 데큘레인을 떠올리며 얼마간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황제의 품이 넓은 케이프 코트가 율리의 손가락에 닿았다.
“그래. 정말 많이 다르다. 데큘레인은 자신의 인생에 오답이 없다는 듯이 살아간다. 오답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길이 정답이라는 듯이.” “······맞는 말씀이십니다. 교수님은 정말 그러합니다.” “한데 너처럼 오답조차 네 몫으로 받아들여서는, 그 오답이 많을수록 상처투성이가 되는 수밖에 없느니라. 그러다 죽겠지.” 소피엔은 냉소적으로 비꼬았다. 그러나 율리의 대답은, 그저 따스한 미소였다.
“폐하. 상처투성이라 할지라도 기사는 살아갑니다. 그리고 저는 기사입니다.” “······.” 소피엔은 율리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맞는 말 같아서 괜히 불만스러웠다.
“맞다. 너는 진정한 기사이지만, 너 같은 기사는 많이 없지.” “칭찬 감사드립니다.” “칭찬 아니다. 편히 쉬다 떠나가거라.” 소피엔이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리는 기어코 기립하여 그녀의 등에 예법을 취했고, 케이론이 병실의 문을 닫았다.
쿵—!
이후, 정적 속에 복도를 걷는다.
뚜벅─ 뚜벅─ 소피엔의 위풍한 발소리.
그 위로 케이론의 음색이 얹어진다.
“······폐하. 정말 그것을 바라십니까.” 소피엔이 우뚝 멎었다. 케이론은 그녀의 등에 말했다.
“새로 시작하는 것을 바라신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 “제가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결국 소피엔은 케이론을 돌아보았다. 고개 숙인 케이론이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행복하실 자격이 있습니다.” “······흥. 누가 그러더냐.” “어느 누구라도 이리 말할 것입니다. 수십 번을 죽고 수십 년을 고통스러워하고 수십 번을 자살한 폐하를 안다면. 누구나 그리 말할 것입니다.” “뭐라?” 소피엔은 사뭇 당황스러웠다.
케이론은 본디 동상 같은 놈이었다. 심지어 황실에서 명명한 그 재능의 이름도 「동상」이었다.
실제로 케이론이 몸의 개수를 불리는 매개도 ‘동상’이고.
“케이론. 너는 짐을 모른다.” “조금이나마 알고 있습니다.” 소피엔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 딴에는 그렇다 하더라도, 너는 지금 불가능한 이야기를 너무 감정적으로 늘어놓고 있느니라.”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폐하, 이 황궁의 지하에 ‘제단’이 있습니다.” 케이론이 고개를 들었다. 그 안광이 기사의 의지로 번뜩였다.
“놈들은 폐하의 권능을 모아 이용하려 합니다. 그걸 우리가 역이용한다면 돌아갈 수 있습니다.” “돌아간다고?” “예. 폐하께서도 행복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세상에서 새롭게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악마의 거울」은 소피엔을 원한다.
「제단」은 그 거울 속 세계에서 소피엔의 ‘권능[회귀]’을 채취하고 있다.
겉보기에 공생 관계처럼 보이는 위 두 놈들을 역이용한다면, ‘새로운 세계’, 즉 ‘완전히 다른 과거’를 구축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케이론은 떠올렸다.
「악마의 거울」이 ‘세계’가 되길 원한다는 데큘레인의 말에서 착안한, 그러나 데큘레인과는 전혀 다른 생각이었다.
케이론의 구상에서는 「악마의 거울」이 새로운 세계가 될 것이었고, 그 세계의 소피엔은 이번 생의 기억을 모두 잊은 채, 새로이 회귀하게 될 것이었다.
이번 생이 망했다면, 정말로 다음 생을 도모하자는 말이었다.
“같은 역사가 반복될 뿐이라면?” 소피엔이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러지 않게 하겠습니다.” “······.” ······이어지지 않는 대화.
멈춘 듯한 시간.
숨막힐 듯 정체된 공기.
그 적막 속에서 소피엔은 다시 돌아선다.
뚜벅뚜벅.
그녀는 말없이 축객령을 내린 것이었고, 그 뜻을 이해한 케이론은 복도의 한복판에 동상처럼 굳었다.
* * * 어두운 밤.
마탑의 집무실로 돌아온 나는 몰두하고 있다. 침잠하듯 생각하고 있다.
“······「악마의 거울」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집무 탁자 위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 단순한 거울에 「이해력」을 발동했다.
거울의 성질과 속성은 금세 이해되었다.
모래를 고열로 달구면─물론 그 사이에 여러 공정이 있긴 하다만─ 만들어지는 게 유리이고, 공교롭게도 흙과 불은 나의 속성이니.
“조금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유리 또는 거울과 관련된 마법 서적이 마탑 도서관에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복도로 나오자마자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는데.
“흐어!” 웬 작은 녀석이 기묘한 숨소리를 내뱉었다.
“······.” 이프린.
세상 초췌하고 피폐한 얼굴로, 한 손에는 커피를 쥐고 있다.
녀석은 인사도 없이 슬금슬금-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친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나는 이프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모양이군.” “······아, 아니에요. 실마리만 잡으면······ 되는데요.” “······.” “되는데, 그, 돼요 아무튼.” 꿍얼거리는 녀석. 가만히 바라보자니, 문득 이헬름이 한 말이 귓가에 아른거린다.
—제 애비한테 사랑받는 척 당한 그 루나의 딸이 안쓰러웠냐?
아마······ 그 말이 옳을 것이다.
이프린.
저 녀석이 나는 이상하게 가엾다. 데큘레인에게는 연민이라는 감정이 거의 없기에, 이는 아마 김우진의 조각일 것이다.
“왜, 왜요.” 이렇듯, 이 세상에는 내게 김우진의 편린을 느끼게 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 있다.
아직까지는 실비아와 이프린과 예리엘, 이 세 명뿐이며, 율리는 정반대다.
율리는, 데큘레인으로서의 나를 가장 강하게 증거한다. 그녀는 내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굴레이자 감정이니.
“확신과 정진. 너에게 어울리는 건 그 두 가지 덕목이다.” “······네?” “끝없이 노력해라. 그리고, 미래의 너를 믿어라.” “······.” 이프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띵—!
그렇게 1 층에서 내렸는데, 이번에는 율리가 있었다.
“교수님.” “······.” 율리는 자못 어색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여전히 경갑 차림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율리. 이제 호위는 그만둬라.” “아닙니다.” “뭐가 아니라는-” “죄송합니다.” “······.” 미안하다는 그 목소리가 내 입을 막았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가 요즘 잔병치레가 많아, 교수님 호위에 해가 되는 것을 압니다.” “······.” “죄송합니다.” 나는 잠시 정신이 멍했다. 그러나 곧 그녀의 말뜻이 이해되었고,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또한 저는 멀지 않은 미래에, 교수님을 지키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수많은 단어가 입안에서 헛돌았다. 가슴 밑바닥에서 어떤 울분이 들끓었다.
“이 눈에는 아직도 죽어가는 교수님이 선연합니다. 교수님의 몸을 꿰뚫은 검상이······.” 율리가 고개를 숙였다. 그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든 듯 촉촉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교수님. 교수님이 저에게 실망하시는 것을 이해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 여자는 왜, 도대체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것인지.
“제 잘못을 모두 인정합니다.” 나는 말하고 싶다.
너에게 잘못은 없다고.
우리는 그저, 함께 있어서는 안 될 뿐이라고.
“다만, 이 호위 임무만큼은 마치게 해주십시오.” 율리가 결연하게 말했다. 그녀는 제 허리춤의 검을 아득 움켜쥐었다.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몸이 부서지더라도 지켜내도록 하겠습니다. 지치지 않도록 하겠습-” “율리.” 나는 그 말을 더 듣기 싫었다.
“필요 없다.” “!” 율리의 숨소리가 크게 튀었다. 그녀는 슬픈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숙였다.
“이제 가라. 오늘은 마탑 도서관에서 할 일이 있으니.” 이렇게 푼수 같은 여자를, 나는 사랑한다.
이 미칠 듯한 감정을, 거부하기가 싫다.
“기다리고 있겠-” “가라.” “······죄송합니다.” 그렇게, 율리는 떠나간다.
마탑의 문을 열고, 저 기다란 길목을 내려간다.
아직 낫지 않아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 그녀를 지켜보던 나는 벽에 몸을 기대었다. 심장에 손을 얹었다.
데큘레인의 울림이 전신으로 번지고 있었다.
“왜 그러시지.”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
돌아보니 이프린이었다. 어느새 1 층으로 내려온 녀석은 괜히 꾸물거리다가 툭 내뱉었다.
“······도와드릴게요.” “······.” “무슨 조사 하러 오신 거 아녜요?” “······.” “저 이프린, 조교잖아요.” 방금 만남은 못 본 건지.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건지.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남아 도나.” “아 그게······ 솔직히! ······못 하겠어요. 3 만 페이지를 어떻게 한 달 만에 다 이해해요. 불가능해요.” “······.” “그거 아니까 준 거 아니셨나?” 나는 말없이 지하의 도서관으로 걸었다. 그러자 이프린은 얼른 따라붙었다.
타타타타- 그 종종걸음을 굳이 제지하지는 않았다.
자꾸만 이쪽을 힐끗거리는 곁눈질도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세 시간 뒤.
“교수님이 말씀하신 게 이것들 맞나?” 이프린은 적당한 도움이 되었다.
수십만 권의 책이 산재한 마탑 도서관에서, 원하는 책 찾는 것만큼 귀찮은 일도 없으니.
“맞다.” 나는 「거울 마법」과 관련된 전부를 주문했다.
「악마의 거울」도 결국은 거울이다. 따라서 거울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뭐 가져올 거 없나요?” “이번에는 유리다. 유리와 관련된 게 있다면 모조리.” “네네~” 유리, 유리, 유리, 유리. 이프린은 중얼거리며 책을 찾아 나서고, 나는 다시 서적에 집중한다.
······그렇게 또 세 시간이 흘러.
아침이 되었을 때.
“데큘레인 교수.” 난데없이 도서관에 나타난 황실의 기사가 엄숙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마법서를 읽었다.
“데큘레인 교수.” “-브에?!” 조금 더 큰 목소리의 두 번째 부름. 엎드려 자던 이프린이 화들짝 놀라 침 흘리며 깨어났다.
그제서야 나도 그들을 돌아보았다.
기사가 말했다.
“황제 폐하의 호출이시다.” * * * ······소피엔은 모든 것에 쉽게 익숙해진다. 쉽게 배우고, 쉽게 터득한다.
이 ‘세상’이라는 것도, ‘이치’라는 것도 별반 어렵지 않아서, 사실 어느 정도 곁눈질만으로도 대다수를 파악할 수 있다.
그 탓에 그녀에게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귀찮아지고, 귀찮은만큼 쉬워지기 때문이다.
“······.” 그러나 오늘. 아주 오랜만에 그 ‘생각’을 조금 길게 한 그녀는, 손거울을 툭툭 건드리고 있다.
어느덧 되어버린 아침.
이제 곧 도착할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똑똑— 황제의 침소. 그 노크가 울리자마자 소피엔은 「염동」으로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데큘레인이 서 있었다.
“왔군. 들어오거라.” “예.” 데큘레인은 침소에 한 발자국 내딛었고, 신하들이 문을 닫았다.
“앉아라.” 소피엔이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다. 데큘레인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앉았다.
“······.” “······.” 소피엔은 찻잔에 커피를 따랐고, 데큘레인은 반듯하게 정좌했다.
‘예의범절’을 그대로 의인화한 것같은 모습이었다.
소피엔이 먼저 운을 띄웠다.
“데큘레인.” “예.” “오늘은 짐이 ‘생각’이라는 것을 좀 해봤느니라.” 케이론 때문이었다. 케이론 그 빌어먹을 놈의 말이, 자신에게 ‘고민’이라는 못된 것을 하도록 만들었다.
“생각하면서, 언젠가 거울 속의 기억을 발견했느니라. 굳이 비유하자면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발견한 격이니라.” 소피엔은 커피를 마시면서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짐의 머나먼 기억. 짐에게 자신을 ‘교수’라 소개한 건방진 놈이 있었느니라.” 데큘레인의 눈은 언제나처럼 올곧았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숙이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다만 솔직한 자기 자신을 보이는 놈.
“그놈은 짐의 과정과 마지막을 함께하겠다고 했지만,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느니라.” 소피엔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웃음과도 엇비슷한 숨결이었다.
“만약 그놈이 있었다면. 약속대로 찾아왔더라면.” “······.” “버틸 만했을 것이니라.” 데큘레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반응으로 충분했다.
“케이론은 짐에게 이 세상을 다시 만들자고 말했다.” “······그랬습니까.” “그렇다. 그 세계에서는 짐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더구나. 여태 겪은 모든 고통을 잊고 말이다.” “······.” “대단히 구미가 동하는 제안이었다.” 데큘레인은 가만히 들었다.
“······케이론의 뜻은 가상하다. 짐을 생각하는 마음이 감동적이니라.
그러나······ 짐이 정녕 그렇게 한다면.” 그는 왜인지, 소피엔의 다음 말을 알 것 같았다.
“악마에게 지는 것 아닌가.” 소피엔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차가운 조소가 새었다.
“짐은 지기 싫다. 그 누구에게도.” 그리고는 찻잔의 커피를 바라보았다. 그 잔잔한 표면이 소피엔을 비추었다.
“네 약혼자인 율리는 오답조차도 자신의 인생이라 말했고, 너는 네가 항상 정답인 것처럼 산다. 이 세상에는 너희 둘 말고도 자신만의 답을 새겨넣는 수없이 많은 녀석이 있지만.” 소피엔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미 제출한 정답을 바꿔 쓴다는 녀석은 없었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렇지······ 데큘레인. 짐은 이제 슬슬 졸리니라.” 느지막이 눈이 감기고 있었다. 무척 오랜만에 고민과 생각에 몰두한 대가였다.
“이제 짐이 잠들면 지하의 문이 열릴 터인데······.” 소피엔이 눈을 반쯤 감았다. 그 사이로 데큘레인의 얼굴이 보였다.
잠이라고는 조금도 없을 것 같은 냉정한 면상.
“부탁하지. 아무도 지켜봐주는 자가 없어 짐은 괴로웠느니라.”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 지하에서, 짐의 모습을, 그 수많은 죽음을······ 지켜봐 줄 수 있겠나.
내 기억에 남아줄 수 있겠나······.” 데큘레인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꼭 그러겠노라고.
그러나 소피엔에게 그의 음색은 이미 어렴풋했다.
서서히, 의식이 잠기고 있었다.
“수십 년일 수도, 백 년일 수도 있을 것이니라······. 짐도 짐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느니라. 그래도 괜찮겠느냐······.” 데큘레인의 목소리가 귓전에 스며들었다.
─예. 저번에 약속했던 것처럼, 저는 폐하의 모든 과정에 함께할 것입니다.
반드시.
물에 잠긴 듯 번잡하게 퍼지는 음성.
─그리고 그 과정의 끝에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다만, 확신처럼 이어지는 말.
─폐하를 마주보도록 하겠습니다.
흐아아아암······.
소피엔은 하품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잠든 그녀를, 데큘레인은 고요히 지켜보다 몸을 일으켰다.
이제, 진정으로 약속을 지키러 갈 시간이었다.
소피엔. (2) 나는 소피엔의 침소에서 나오자마자 움직였다.
목적지는 황궁의 지하. 한달음에 달려왔으나, 그 저편에는 동상이 있었다.
“케이론.” 케이론이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두 손으로 쥔 검의 날이 노면에 닿아 있었다.
“······.” 케이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어제, 율리는 내 상처가 ‘검상(劍 傷)’이었노라 전했다.
그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애당초 「철인」의 급소를 순식간에 꿰뚫을 강자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
“깊은 고민을 했다.” 케이론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검날이 땅바닥을 뜨그극 긁으며 상승했다.
나는 물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내가 폐하의 기사라는 것이었다. 세상이 뒤바뀌든 악마의 뜻대로 되든 나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케이론은 오직 황제만을 위한 기사. 그렇기에, 오직 소피엔의 행복과 수호만을 바란다.
어쩌면 율리만큼이나 고지식한 기사. 아니, 율리보다도 더한 외골수.
“거울은 내게 맹세했다. 새로운 세계를 약속했다.” “······악마를 믿는 것보다 더 멍청한 짓은 없습니다, 케이론.” 「악마의 거울」이 케이론에게 약속한 새로운 세계. 나는 그 세상이 어떠할지 상상이 간다.
아마, 소피엔이 병에 걸린 적 없는 세계일 것이다. 평화롭게 자라난 그녀가 제국을 통치하는 세계일 것이다.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의 비율이 반전된, 거울의 세계일 것이다.
동시에, 게임 오버(Game Over)가 되어버린 세계일 것이다.
“그리되어서는 종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악마는 악마이기에 악마인 것입니다, 케이론.” “아니다. 종말이 아닌 재시작이다. 이 세계에서 폐하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다. 세계의 주인이 있다면 폐하일 것이고. 폐하가 있는 곳이 곧 진짜 세계일 것이다.” 어느 정도는 옳은 말이다.
이 세계관의 주인공을 따로 특정할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인물을 주인공이라 한다면, 당연히 ‘소피엔’일 테니.
그녀가 죽는 순간, 플레이어의 게임도 함께 끝날 테니.
“이 세계에 태양이 있다면 그분이다. 기적의 산증인-” 쿵──!
그때, 허공에서 웬 철퇴가 솟구치더니 케이론의 옆구리를 후려갈겼다.
콰아아앙──!
급작스러운 기습에 케이론은 그대로 튕겨 나갔고, 나는 본능처럼 그쪽을 돌아보았다.
풀-플레이트-메일 차림의 기사가 있었다.
“어서 가십시오!” 몸은 물론 얼굴마저 가린 중무장이었지만, 나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체를 알았다.
율리.
“······.” 케이론이 울컥 흘린 피를 닦으며 일어났다. 움직이려는 그의 발바닥이 얼어붙었다.
“교수님, 어서!” 율리는 제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외쳤다. 케이론은 마력을 방출하여 율리의 얼음을 불사질렀다.
“가십시오!” 걱정이랍시고 가만히 있어서는, 율리의 무리만 심화시키는 꼴이 될 테지.
“······그래.” 고개를 끄덕인 나는 지하의 문으로 달려갔다.
챙──! 검과 검이 맞닿으며 불씨가 타올랐다. 내게 달려드는 케이론을 율리가 가로막은 것이었다.
황궁의 지하로 이어지는 나무문. 나는 가파르게 질주하여 그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쏴아아아······.
눈부신 빛이 망막을 가득 물들였다.
* * * ······「악마의 거울」에 진입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 사방이 거울인 공간, 그 안에 덩그러니 놓인 내 모습이 무한히 반사되고 있었다.
“안녕.” 등 뒤에서 흘러드는 목소리. 나는 거울에 맺힌 그녀를 보았다.
소피엔이었다. 정확히는, 소피엔의 외면을 취한 「악마의 거울」이었다.
“말하기 편하게 이 모습을 좀 빌렸어.” “말 안 해도 안다.”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그 모습으로 케이론을 설득했나.” “응. 그 친구는 기사거든. 오직 황제만을 위한 기사. 내 진심을 보여줬더니, 소피엔이 행복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냈어.” 거울이 방긋 웃었다. 소피엔의 외모로 짓는 미소가 이질적이었다.
“‘제단’도 네가 끌어들인 것인가.” “응.” “처음부터 그들의 신을 되살려 줄 생각은 없었군.” “응. 이용만 하고 버리려고 했어. 나는 악마잖아.” 하긴, 제단이 주도하는 「신의 부활」은 메인 퀘스트 중에서도 후반에 속하는 이벤트다. 악마의 힘으로는 어떻게 앞당길 수 없고, 막을 수도 없다.
“이제 어쩔 테지.” “어쩌긴? 데큘레인. 너희 세상은 이미 많이 오염되었어. 소피엔이 정확히 143 번 회귀하면서 그만한 균열이 발생했지.” “균열.” “응. 소피엔 말고도 회귀한 사람이 있잖아. 그것도 그 균열 때문이야.
소악마가 고작 회귀의 정기 몇 방울 흘렸다고 인간이 회귀를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이대로라면 소피엔이 몇 번 더 죽는 순간, 세계 전체가 분해될지도 몰라.” 나는 소피엔의 모습을 취한 거울을 바라보았다. 놈은 나를 올려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근데 내가 세상이 되면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안전하게. 아무런 위험 부담 없이.” “······.” 유크라인의 핏줄에 내재한 악마혐오가 목구멍으로 치솟았다. 당장에라도 놈의 목을 조르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놈이 퉁명스레 되물었다.
“싫어?” “나는 약속을 지키러 온 것 뿐이다.” “······약속? 그래, 뭐든 해봐. 근데 어떻게 하게? 나는 너한테 절대 문을 안 열어줄 건데. 너는 여기 평생 갇힐 거야.” 놈이 팔짱을 꼈다. 나는 놈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이 공간의 ‘거울’을 보았다. 그 유리 표면에 손을 얹었다.
“네 의지는 필요 없다.” “왜? 여긴 내 세상인데?” “네가 악마이기 때문이다.” 「악마의 거울」. 놈은 악마이고, 악마와 마기는 서로 필수 불가결하다.
따라서, 악마의 거울은 마기를 품고 있다. 아니, 이 공간 전체에 마기가 떠다니고 있다.
그 말인즉— 이놈의 세계에서 나는 「이해력」을 무한히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경우, 내게 가해질 부하(負荷)는 어마어마할 테지. 데큘레인의 성격이 옮을 가능성을 차치하고도, 생명 자체가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
“······.” 그럼에도, 나는 거울에 손을 얹었다. 망설임 없이 「이해력」을 가동했다.
────!
한순간에 일천의 마력이 뭉탱이로 소모되었다. 그 다음은 구백, 팔백, 칠백······ 온몸의 혈관에서 마력이 새었다.
초마다 사라지는 마력량은 무지막지했지만, 그만큼의 마기를 다시 마력으로 전환했다.
“······뭘 하는 거야?” 놈이 의문스레 묻는다. 그러나 눈 감은 내게 놈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잠깐, 잠깐만.” 다만 목소리로도 충분하다.
이런 ‘경험’이 없는 악마는, 내 행위에 당황하고 있다.
“이게 어떻게······ 아, 안 돼!” 놈의 반응이 기묘하게 변해간다. 목소리가 떨리고, 손아귀가 내 허리춤을 와락 붙잡는다.
하나 놈의 물리력은 전무하다. 고작 거울 따위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다.
“그만둬!” 내가 더 깊이 들여다보고, 더 깊이 「이해」할수록.
놈의 반응은 더욱 절박하게 돌변한다.
“그만두라니까—!” 「이해」가 진행되는만큼 마기가 내 몸을 잠식하고, 혈관은 터질 듯 폭주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하지,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두근—!
어느 순간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아무렴 혈관 다발이 폭발한 듯했다.
입에서 피가 역류했다.
“너도 죽게 된다고! 너도 알잖아—!” 놈의 말대로 죽을 수도 있겠으나, 두렵지 않다. 내 자아는 그따위에 꺾일 만큼 나약하지 않다.
“나를, 나를, 들여다보지 마——!” 찢어질 듯한 절규. 나는 다시 눈을 떴다. 거울에 비치는 내 동공은 이미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목 언저리의 혈관이 뿌리처럼 시커멨다.
“······.” 나는 놈을 돌아보았다. 머리를 감싸 쥔 놈은 가까스로 거친 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만. 그만······.” “······내게 약속이란 이런 것이다.” 한번 내뱉은 말은 결단코 주워 담지 않는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킨다.
편집증에 가까운 강박, 그 정신병적인 의지.
데큘레인에게 그 이상의 감정은 없다.
나는 끝의 끝까지 「이해력」을 동원하여, 이 「거울」의 밑바닥을 파고들 것이다······.
“그마아아아아아안————!” * * * 「3 회차」 눈을 떴을 때에는 3 회차. 소피엔의 방이었다. 나는 넓고 텅 빈 거실 한복판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1 월 1 일.
소피엔의 회귀 기점이었다.
나는 악마의 거울을 「이해」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었다.
“······하아.” 허나 입에서 흐른 숨결이 보라색이었다. 뿐만 아니라, 몸 전체의 혈관이 푸르고 보랗게 명멸하고 있었다.
[ 상태 이상 : 급성 마기 중독 중증 ] [ 상태 이상 : 마력 폭주 ] [ 상태 이상 : 주화입마(走火入魔) ] 「철인」 의 몸으로도 회복이 불확실한 부상들이지만, 상관 없다.
나는 소피엔의 방에 놓인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 표면이 소피엔을 비추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전하.” —······!
소피엔이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다시 찾아왔습니다.” —어······.
소피엔은 미소 지으려던 입가를 애써 눌렀다. 나는 그녀 곁의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짐짓 엄하게 나를 불렀다.
—크음. 교수.
“예.” 다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래. 반갑다. 약속을 지켰구나.
약속.
어쩐지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단어였다.
* * * ······호기롭게 도착하긴 했지만.
거울 속 사람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배워두었던 「거울 마법」과 「유리 마법」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저 소피엔이 가지고 온 책을 읽거나, 그녀와 대화를 나누거나, 들숨과 날숨을 반복할 뿐.
다만 그 호흡의 순간마다 통증이 있었다. 거의 6 만에 달하는 마력을 한순간에 소모한 부작용이었다.
아마 심장 또는 폐의 일부가 괴사했을 것이었다.
짹짹짹— 짹짹짹— 여하간, 이곳은 새가 지저귀는 황궁의 정원.
잔디밭에 누운 소피엔이 말한다.
—교수.
“예.” —요즘, 다시 몸이 슬슬 아파지고 있느니라.
“그렇습니까.” —······참 답답하구나. 언제까지 이 고통 속에서 살아갈까.
나는 「악마의 거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놈은 소피엔이 정확히 143 번 회귀했노라 말했다.
“전하.” 그 끝을 알면 더 괴로울까. 아니면 더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음. 왜 부르느냐.
소피엔의 조기 구제는 불가능하다. 소피엔의 치유는 이미 ‘정해진 일’이라는 설정이기에.
백 번 이상을 죽고 죽으면서, 소피엔의 몸을 헤집는 그 독성이 먼저, ‘세계의 억지력’에 의하여 소멸한 것이다.
반복된 회귀가 일으킨 ‘우연의 기적’인 것이다.
“체스라도 두시겠습니까.” —······체스?
“예.” —체스라······ 갑자기 왜?
“저는 체스를 곧잘 둡니다. 폐하가 평생을 투자하여도 이기지 못할 만큼.
그러니, 저를 이길 적에는 다 낫지 않겠습니까.” 체스는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배워두었다. 굳이 특성 「이해력」이 없어도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는 되겠지.
—흠. 건방지구나. 괜찮겠느냐. 나는 뭐든 쉽게 배울 텐데.
“예.” —좋다. 체스판을 가져오도록 하지!
힘차게 외친 소피엔이 잔디밭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이! 게 없느냐! 체스판을 가져오도록 하라!
* * * ······황실의 제 1 후계자 소피엔은 항상 거울과 함께였다.
허리춤에 매단 손거울은 황궁 신하들에게 그녀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었고, 그녀가 이따금씩 말하는 ‘교수’에 대한 이야기는 걱정과 동시에 안도였다.
그녀가 미쳐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혹은 그 ‘교수’라는 상상 덕분에 조금이나마 아픔을 잊을 수 있는 걸까 하는 안도.
“소피.” “예, 아바마마.” 황제이자 친부인 크레바임을 알현하는 날에도 소피엔은 손거울을 지니고 있었다.
크레바임은 지그시 웃으며 물었다.
“그 거울 속 친구는 괜찮느냐.” “······.” 그녀는 잠시 대답없이 입술만 꾸물거렸다.
황궁의 그 어떤 사람도 제 말을 믿으려 들지 않는다. 교수 그놈이 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탓도 있긴 하지만.
“예. 괜찮습니다.” “그래. 네가 그 친구와 건강하다면 나도 좋다.” “······예.” 크레바임은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새로운 손거울을 선물로 내밀었다.
소피엔은 그 거울을 공손히 받고 알현을 끝냈다.
굳이 기쁘지는 않았다. 어차피, 한 번 더 죽고 한 번 더 회귀하면 사라질 물건이었으니.
“······.” 밖으로 나오자마자 제 방에 돌아가려던 소피엔은, 문득 동생 크레토의 거처가 눈에 띄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이내 그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새근- 새근- 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소피엔은 그 녀석을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어떠냐.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인데, 귀엽지.” 손거울에게 말하니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군요.
동생 크레토는 세살배기 핏덩이였다. 피는 반만 섞였지만, 볼 때마다 귀여웠다. 이 삶에서 자신을 미소 짓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이 녀석은 나처럼 괴롭게 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소피엔은 그 토실한 볼을 만지작거렸다. 꾸우웅- 미간을 찌푸린 크레토가 돌아 누웠다.
“이제 돌아가지. 괜히 들키면 낯깎인다.” 꾹꾹- 소피엔은 손가락으로 그 얼굴을 몇 번 눌러대다가 밖으로 나왔다.
또각또각 걸어 제 방으로 돌아왔다.
* ······일상은 거기까지였다.
소피엔은 크레토의 얼굴을 만지고 온 날 밤, 패혈증을 앓았다. 고작 세 살 아기의 병균도 버텨내지 못한 것이었다.
전하───!
배경음처럼 울리는 신하들의 절망 어린 외침.
그녀는 그날 죽었고, 그렇게 4 회차가 되었고, 또 5 회차, 6 회차, 7 회차, 8 회차, 9 회차, 10 회차······ 회귀는 순서대로, 순리대로 흘러갔다.
그동안 소피엔은 내 존재를 이유로 더 쉽게 버티거나, 더 굳게 살아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녀의 정신은 몇 번이나 부서졌다. 자살도 많이 했다. 미치기 직전까지도 갔다.
—어차피. 다시 시작할 텐데. 어차피, 어차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텐데!
이 빌어먹을 삶이 도대체 무슨 의미라는 것이냐······.
정확히 65 회차까지만 그러했다.
그 이후부터는 체념이었다.
예순다섯 번의 죽음을 맞이한 소피엔은 침대에만 누워 하루하루를 보냈다.
“전하.” —······.
「66 회차」.
그 폐인처럼 늘어진 얼굴이 나를 돌아보았다. 여덟 살의 몰골이라기에는 너무 처참했다.
“아무리 회차가 반복되어도, 다시 시작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기술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체스입니다. 체스 실력은 회귀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굳이 ‘체스’를 권한 이유였다. 소피엔은 꾸준히 체스를 연마했지만, 아직 나를 이길 실력은 되지 못했다.
—······그래. 잘 둬서 좋겠다.
소피엔이 흥- 코웃음을 치며 돌아누웠다.
아무래도, 잘 안먹힌 것 같았다.
“······.”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곰곰이 생각한다.
앞으로 내가 얼마만큼의 회차를 버틸 수 있을지.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지.
“전하.” ─또 왜.
나는 죽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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