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18
대화는 금세 멎는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익숙하게 끼어든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친하지도 않은 남매인데, 함께 떠들 소재거리 따위, 그렇게 많을 리 없으니.
그저······ 뚜벅 뚜벅.
또각 또각.
복도에 울리는 서로 다른 발소리.
구두와 단화.
데큘레인과 예리엘.
두 사람은, 여전히 예전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걸어가고 있다.
* * * 제국대학의 마탑, 77 층.
“······?” 일기장에서 복귀한 나는 책상 위의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이프린에게 남겼던 쪽지. ‘외부인에게는 연구 중이라 설명하되, 사흘 내로 돌아오지 않으면 지원군을 요청하라. 혹시 모르니 이 종이는 지니고 있어라.’는 내용의 「전서지」였다.
──「 종이 」── ◆ 정보 :평범한 종이였지만, 「미다스의 손」으로 인하여 특수한 전달 기능이 부가되었다.
◆ 범주 :종이 ◆ 특수 효과 :중급 전서지(傳書紙) 기능.
[ 미다스의 손 : 3 레벨 ] ──────── 이 전서지를 다른 종이와 마력으로 연결하고, 전서지에 어떤 내용을 작성하면, 다른 종이에도 똑같은 내용이 옮겨 적힌다.
그래서 「전서지」인데······.
“이 멍청한 놈은 이걸 책상 위에 두고 갔나.” 이프린의 띨빵한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책상 위의 일기장을 안주머니에 넣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띵—!
때마침 복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어? 돌아오셨다?” 그 안에는 이프린이 웬 스무디를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드렌트와 알렌도 함께였다. 각자의 품에 먹거리들이 가득했다.
“교수님 반갑습니다! 돌아오셨네요!” “······.” “교수님, 아직 시간 안 되지 않았어요?” 이프린이 복도의 시계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52 시간 정도 지났네, 중얼거리면서 다시 나를 올려다보았다.
“20 시간 정도 더 지나면 연락하려고 그랬어요. 율리 기사님한테는 말해놨고요. 연구실에서 연구에 열중하고 있다~ 이 정도로.” “······.” 나름 시킨 건 열심히 이행한 듯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머뭇머뭇 스무디를 건넨다.
“······드실래요? 우유로 만들었다는데, 신기한 맛이에요.” “됐다.” “네~ 그럼 이만. 저도 연구할 게 많아서.” 이프린은 [ 조교 연구실 ]로 어슬렁어슬렁 돌아갔다. 쪽쪽— 스무디를 빨면서.
“교수님~ 그런데 어디 갔다 오셨나요? 오늘부터 이제 개강 축제예요!” “유명인들이 많이 왔답니다.” 알렌의 말을 드렌트가 거들었다.
“개강 축제?” “네! 볼거리들이 엄청 많아요~” 나는 마탑의 유리창 밖을 보았다. 확실히, 축제가 한창인 모양이었다. 웬 풍선이 비행선처럼 날아다니고 있었으니.
“아 참, 교수님!” 알렌이 핫도그를 입에 물고 서류철에서 문서를 꺼냈다.
“어기어(여기요).” 받아서 보니 ‘수강 신청자 목록’이었다.
“이번 고급 강의에 신청자가 엄청 많이 몰렸어요!” “그런가.” “네에!” 문서부터가 부유섬에서 제작한 특수 종이였다. 태블릿 PC 처럼, 종이 하나에 수백장 분량이 담긴 첨단 기술.
“······흠?” 나는 그 면면을 훑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대군 크레토는 알겠다.
그런데······ “웬 고양이 한 마리가 있구나.” 붉은털 먼치킨. 진짜로 종이에 붉은털 먼치킨의 사진과, 그 나이와 이력이 기록되어 있다.
문자 그대로 고양이 이력서다.
“아 그거 저도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황실에서 부탁한 거예요.
고양이가 마법도 배운다네요?” “고양이가 말입니까?” “네. 신기하죠?” “오······.” “······.” 알렌과 드렌트의 만담을 한 귀로 흘리며, 명단을 휙휙 넘긴다. 부유섬이 직접 선별한 마법사, 마탑 소속 마법사는 물론 마탑의 교수 등등······.
나는 일단 문서를 서류 가방에 넣었다.
“율리는 어딨나.” 사흘 정도 자리를 비웠으니, 나름 걱정하고 있겠지.
알렌과 드렌트는 히죽 웃더니 말했다.
“아마, 기사대전 관람 중이실 거예요~” “기사 대전.” “네~ 대학 중앙의 지프레임 홀이에요!” * * * 기사대전(騎士大戰).
문자 그대로 기사 간의 대전이다.
제국 뿐만 아니라 대륙에서 가장 유명하고 유망하고 뜨거운 스포츠 중 하나로, 현재는 ‘제국 로이테르 리그’라는 기사대전의 위상이 가장 거대하다.
“오오······.” 율리는 기사석에 앉아 그 기사대전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개강 축제의 기사대전은 ‘로이테르 리그’의 이벤트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만큼, 참여한 기사들의 면면이 화려했다.
“어! 율리~ 오랜만이다?” “아, 고헤르. 반갑습니다.” 동창인 친구들이 하나 둘 다가왔다. 무사 고헤르, 기사 팔레인, 궁사 세이미, 선배 그웬 등등······.
여전히 황실 기사단에서, 혹은 제국의 다른 기사단에서 활약 중인 그들과 율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웬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율리 요즘 혈색 좋네~” “아, 그렇습니까?” “데큘레인이 연구에 매진 중이라 그런가? 요즘 집에도 안 들어 간다면서.” “예 뭐······.” 율리가 그렇게 대답한 순간.
“내가 없어서 좋았다, 이건가.” 어디선가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율리와 기사들은 흠칫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데큘레인이었다.
정장 차림의 그는 고개를 비스듬이 기울여 율리의 동창들을 훑었다. 율리 옆의 기사가 눈치껏 자리를 비켰고, 데큘레인은 그 좌석에 앉았다.
율리는 얼른 방금의 말을 정정했다.
“저, 아닙니다. 없어서 좋았다는 게 아니라, 호위 자체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어서-” “됐다.” “아니-” “오호라—!” 그때 홀 전체를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 기사석의 기사들은 물론, 일반인도 그 웅대한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본다.
“데큘레인과 율리가 함께 앉아있구만?” 자이트 폰 브루강 프하이르덴.
그는, 오늘 이벤트전에 참여했는지 갑옷 차림이었다.
─자이트 공을 뵙습니다!
그순간 거의 모든 기사들이 벌떡 일어나 예의를 보였다. 목을 비스듬이 숙인 채 가슴에 손을 얹는 기사 특유의 예법.
자이트는 껄껄 웃으며 앉으라 손짓했고, 기사들은 그제서야 착석했다.
자이트라는 이름이 품은 위상의 단편이었다.
“데큘레인, 자네가 기사대전에 흥미가 있는 줄은 몰랐다만······.” 자이트가 몸의 근육을 풀면서 말했다.
해하처럼 넓은 어깨, 두꺼운 목, 코어 근육으로 가득한 허리.
2m 10cm 에 달하는 저 기사의 몸에는, 족히 성인 남성 세 명은 들어갈 만하다.
“크허허허. 온 김에 잘 봐두라고.” 자이트가 크게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평소와 무척 달랐다.
곧 도래할 전투의 흥분으로 날카롭게 벌어진 눈. 무의식적으로 흐르는, 공간 자체를 압도하는 기세.
“자네 매형 될 사람이······ 대저 어떤 기사인지 말이다.” 그가 바로, 변경백인 주제에 ‘왕’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은 최강의 기사.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무인.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 겨울의 왕 자이트.
“······예.” 나는 그저 율리를 찾아온 것이었는데.
“잘 지켜보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기대하라고.” 나름 좋은 구경거리에 끼어든 듯했다.
귀신. (1) ······부유섬의 주변섬, ‘객잔(客棧)’.
이쯤 되니 부유섬의 궤도에 얼마나 많은 섬이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지만, 아무튼 주변섬.
“정녕 통과할 줄은 몰랐다.” “······.” 백 명 정원의 객잔에서,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피곤에 찌든 얼굴의 실비아는, 제 앞자리에 앉은 여인을 바라본다.
“인정하지. 너는 일레이드의 피를 타고난······.” 자신을 인정한다는 그 말을 그저 가만히 듣는다.
사실, 한귀로 흘리며 창밖을 곁눈질한다.
유리 너머는 구름과 하늘 뿐.
이 ‘객잔’은 곧 섬이다.
즉, 섬 전체가 ‘객잔’이다.
그만큼 아주 작은 섬이고, 섬과 섬 사이를 여행하는 마법사들을 위한 쉼터다.
“······어이. 듣고 있나?” “네.” “여하간. 네가 진심으로 대마법사에 도전하고자 한다면, 현재 가장 유력한 대마법사는 누구냐.” “이사장 아드린느.” “그렇다. 녀석은 녀석은 ‘파괴’ 계열의 대가다.” 여인이 연초를 꼬나물었다. 치지직— 허공의 불이 필터에 옮겨 붙었다.
“아마, 아드린느 그 녀석이 진심으로 화나면 대륙이 무너지겠지. 막을 놈은 얼마 없을 거다.” “그만큼 강한가요.” “강할 뿐더러, 파괴 계열의 대마법사란 여간 다루기 힘든 게 아니다.” 이 세상에는 규격 외의 마법사가 존재한다. 유일한 대마법사 데마칸, 그의 동생인 무르칸, 흑수(黑獸) 로하칸, 베르흐트 대장로 드제크단, 이사장 아드린느······.
“그리고 나.” 여인은 제 가슴팍을 가리키며 담배 연기를 뿜었다. 후욱─ 퍼진 연기가 실비아의 얼굴에 닿았다. 실비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술을 깨물었다.
“······.” 행동은 양아치나 다름이 없지만, 실비아는 그녀의 명성을 익히 안다.
장사꾼 ‘이드닉’.
장사꾼이라는 이명이 거슬리긴 하나, 그녀는 세상에 단 세 명 뿐인 데마칸의 수제자이며, 어머니 시엘리아의 절친한 벗이다.
“후우······ 숨 참고 있지 너.” “앙 창고 잉어요.” 코막힌 맹맹 목소리로 대답한다. 여인은 피식 웃고 말을 잇는다.
“너도 힘들 때 하나씩 피워라. 잘 정제한 연초는, 마법사에게 좋으면 좋지 나쁜 물건이 아니다. 너는 돈도 많으니 ‘듀크렉’을 피우면 될 거다.” “······.” “사서 나도 한대 씩 주고. 한 갑에 500 엘네 쯤 하지. 비싼 값어치는 한다.” “······.” 하아아─ 연기를 한 번 더 뿜어낸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아드린느처럼 파괴 계열을 극도로 단련한 녀석은 위험하다.
어느 순간, 수가 틀리면 대륙 전체를 깨부술 재앙으로 돌변할 수 있으니.
그래서 대마법사에 가장 유력한 거다. 지상보다 하늘, 천외천으로 올려보내야 아무 탈 없는 놈이니.” “아드린느가 화나면 아무도 못 막는 건가요.” “대륙은 못막는다. 단, 사람이 막을 수 있다. 아드린느를 단신으로 상대할만한 놈은······ ‘자이트’ 쯤 되려나. 그 북방의 병기(兵器) 말고는, 심지어 로하칸도 아드린느를 상대할 순 없어.” 치지직······ 연초를 잿덜이에 비벼 끈 이드닉이 묻는다.
네가 이 아드린느처럼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실비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포부는 충분하군.” 이드닉이 품 안에서 수첩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는 곧바로 말했다.
“시엘리아는 데큘레인이 죽인 것이 맞다.” 그 순간 실비아의 심장이 꿈틀거렸다.
이는, 실비아가 굳이 이드닉을 찾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녀는 제 어머니 시엘리아와 어린 시절을 함께한 죽마고우였으니.
“네가 나를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일 테고.” “······.” “우선 받아라.” 이드닉이 로브와 옷핀을 내밀었다. 실비아가 8 등위 ‘레겔로’에 등극했음을 알리는 증표였다.
“초고속 승급이구나.” “······.” 실비아는 말없이 제 솔다 로브를 벗었다. 닳고 헤지고 찢어진 남색 로브 대신, 붉은색 로브를 입었다.
“아마, 너 정도면 3 개월 안에 모나크 등위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데큘레인 그놈과 같은 등위지. 반년 안에 추월할 수도······” 이드닉의 칭찬에도 실비아는 답하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재능이 부유섬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것인데······.
─시엘리아는 데큘레인이 죽인 것이 맞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가슴과 마음은,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 * * 자이트는 기사대전의 오프닝이었다. 보통 메인이라면 피날레를 장식하겠지만, 자이트는 메인이 아니었다.
아니, 메인이 못 되었다.
자이트의 대전은 다만 특별했다. 그 상대부터가 11 명이었으니.
열하나의 기사가 오직 자이트 한 명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언뜻 기사도에 어긋날만큼 불합리한 결투. 자이트는 검조차 쥐지 않은 맨손이었으나, 그를 상대하는 기사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긴장한 얼굴이었다.
둥─ 둥─ 둥─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 그 즉시 열한 기사가 노면을 박차며 쇄도하고, 자이트는 주먹을 내지른다.
다만 그 정권의 대상은 기사가 아니다.
‘공간’이다.
────!
공간 전체를 울리는 타격. 자이트의 주먹에서 발생한 파공이 일대를 뒤흔들고, 프하이르덴의 상징인 새하얀 장발이 나찰의 귀기(鬼氣)처럼 출렁인다.
일견 공간 자체를 깨부수는 공격이라 생각할지 모르나, 내 눈에는 보인다.
자이트의 강타는 ‘파동(波動)’이다.
즉, 소리처럼 매질(媒質)을 타고 흐르지만, 그렇게 전달하는 위력이 실물과 거의 동일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왜 검을 휘두를 때에도 ‘바람’이 발생하지 않는가. 이를 검풍( 劍風)이라 하고, 실제 검에 비하면 그 위력이 현저히 낮다.
그토록 당연한 자연법칙이 자이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자이트가 구사하는 검과 검풍의 세기는 동일하다. 검 자체에 베이든, 검의 바람에 베이든, 똑같이 두동강이 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내지른 정권의 ‘파동’ 또한.
아무런 피해의 감쇄 없이 쇄도한다.
쿠구구궁────!
당장 한 번의 공격이 매질을 타고 뒤통수를 후리거나, 옆구리를 찌르거나 하는 등, 수십번의 타격으로 불어난다.
마치 ‘메아리’처럼 작용하는 이 「특성」의 위력은 압도적이다.
일반 정권의 사거리가 수십배로 증가하는데, 눈으로 관측할 수 없어 회피도 불가능하니.
──그 결과.
단 한 번의 주먹질에 경기장이 박살났다. 자이트에게 달려들었던 열하나의 기사는 이미 넉다운되었고, 자이트의 마력 섞인 파동은 일대를 휘돌다 사그라들었다.
“하하하하——!” 고작 1 분만에 종결난 대전. 호탕한 웃음소리가 가득 메우고, 뒤이어 환호와 박수가 우레처럼 울려퍼진다.
그 속에서 자이트는 정확히 나를 바라본다.
“보았는가. 데큘레인?” 일대다(一對多), 그는 단신으로 수천·수만의 적을 도륙할 수 있고.
일대일(一對一), 일기토로서 그의 변칙적인 파괴를 감당할 기사는 대륙 ‘역사’에도 손꼽힌다.
그렇기에, 이 세계에서 가장 파멸적인 기사.
“율리.” 나는 율리를 돌아보았다.
“예?” “먼 훗날에라도, 이길 수 있겠나.” 자이트는 언젠가, 율리에게 천명했을 것이었다.
‘네가 나를 이긴다면, 네 인생을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메인 퀘스트와도 관련이 큰 정식 스토리 라인이다.
어찌 보면, 율리는 자이트의 유일한 상성이므로.
“예.” 자이트의 공세는 공간과 바람을 타고 무한하게 밀려들지만, 율리는 그 전부를 얼어붙게 할 수 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태로는 억만년이 지나도 불가능하다.
율리의 성장은 오래전부터, 더 정확히는 나와 화해한 그 순간부터.
정체되어 있다.
“저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율리의 대답은 기사의 귀감과도 같지만, 나는 직감한다.
이제, 서서히.
그녀를 놓아줘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 * * 이틀 뒤, 수석교수 연구실.
나는 부유섬에 발주했던 신문물 「성분 분석기」를 연구실에 설치했다.
외견은 전자레인지 크기의 유리 십이면체이지만, 저 유리 전체가 ‘마법수정’으로, 이 안에 넣은 물체의 성분을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최첨단 마공학 기계다.
배송에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줄 알았거늘, 의외로 일처리가 빨랐다.
······그런데.
“와. 이거 신기하네요~” “그러게요······ 막 반짝이네.” “허허허······. 역시 데큘레인 교수님 답습니다. 부유섬에서도 인정한 시대의 지성······ 한데, 교수님. 이 물건은 사용해보셨습니까? ” 각각 알렌, 루이나, 렐린의 말.
그들 뿐만 아니라 여타 신진 교수들도 ‘우연찮게’ 내 연구실에 방문했다.
그리고는 「성분 분석기」를 보면서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다.
“데큘레인 교수님은 부럽네요. 보통 이런 신기술은 부유섬에서 잘 안주려고 하는데, 고급 강의 덕분인가봐요?” 루이나는 「성분 분석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나는 대답했다.
“나가라.” “저, 교수님. 이거 혹시라도 다 사용하시면 저희도, 나중에 순번-” “가라.” “에이. 치사하게 그러지 마시고. 일단 순번은 적어놓고 갈게요. 평생 사용하실 건 아닐 거잖아요. 딱 일주일, 아니 사흘만-” “쓸 일 많다.” “그래도······ 아앗.” 전부 쫓아냈지만, 그들은 밖으로 나가면서도 제멋대로 순번을 정했다.
“소문을 제일 먼저 들은 건 저잖아요. 그러니까 1 번은 저, 루이나예요.” “어허. 이럴 때는 그래도 서열로 따지는 게 맞지. 나 렐린이 먼저다.” “저, 저도 연구에 필요한데······ 저는 데큘레인 교수님 조교수······.” 쿵──!
염동으로 문을 닫은 뒤.
나는 「성분 분석기」에 「인공핵」을 집어넣고 전원을 켰다.
우우우웅······.
그렇게 전자레인지처럼 분석하던 중, 핵 안의 마기가 누출되어 콧속을 찌른다.
심장이 뛰고, 화가 솟는다. 유크라인의 핏줄이 난폭하게 감응하는 것이다.
똑똑— 그때 울리는 노크.
나는 염동으로 문을 열었다.
“교수님. 연구 보고서 가지고 왔습니다.” 이프린. 녀석은 여태 공부했던 내용을 보고서로 엮어왔다.
“우선은 「사대 원소의 조화」 보고서입니다.” “······.” 나는 말없이 받았다.
마법서 한 권을 연구한, 약 43 페이지 분량의 보고서. 가만히 훑다가 이프린을 노려보았다.
“한없이 진부하다.” “······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부족한’ 수준이 아니었다.
내 입장에서 보기에는, 또 이프린의 재능을 생각하면,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읊는게 네 최선인가?” “아 저-” “네가 깨달은 바를 적어라. 이해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라. 통찰해라.
이따위로는, 첨삭할 가치도 없는 폐기물에 불과할 뿐이다.” 촤아아악─!
나는 보고서를 반으로 찢었다.
“아, 아!” 크게 놀란 이프린이 눈을 동그랗게 치뜬다. 이미 찢겨진 보고서를 보면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이내 입술을 앙 깨문다.
“다시 해오도록.” “······예.” 녀석은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갔다.
그 직후, 「성분 분석기」가 분석을 완료했다.
[ 돌란의 우심장, 데크리온 포자, 인간의 혈관······. ] 분석기는 인공핵의 재료들을 철저히 분석했고, ‘채집 시기’는 물론 ‘조립 날짜’마저 표시했다.
10 년 전 겨울.
“확실히 좋은 물건이군.” 이 정보를 토대로 조사에 착수하면, 디카일렌은 물론 제단과 관련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인공핵」을 「암호화」하여 내 머릿속에 보관했다.
이는 고급 특성, 「암호화」 버라이어티한 용례 중 하나다.
* * * 조교 연구실의 늦은 밤.
“······찢을 필요는 없지 않나. 어이가 없네.” 이프린은 보고서를 통째로 다시 쓰며 투덜거리고 있다.
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 건지.
‘이해를 뛰어넘은 통찰’이 도대체 뭔데?
「사대 원소의 조화」같은 고급 이론서는, 이해만으로도 대단한 거 아닌가?
“에휴······ 실비아 걔는 뭐 하고 있으려나.” 돈도 많으니 알아서 잘 살고 있겠지.
나도 부유섬이나 갈 껄 그랬나.
“······쯧.” 이프린은 다시 연필을 움직였다. 그녀의 책상 곁에는, 오늘 받은 후원자님의 편지가 있었다.
이번에도 또 10 만 엘네를 입금해주신 것이었다!
아무튼.
사그락 사그락- 한 줄 한 줄 자신이 이해한 바를 모조리 적고, 깨달음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아침 햇살이 흘러든다.
“이 정도면······.” 보고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오전 8 시로, 딱 데큘레인이 출근하는 시간이었다.
이프린은 종이 뭉치와 함께 데큘레인을 찾아갔다.
“교수님. 여기 있습니다. 전면 수정을 완료했습니다.” 자신있게 건넨 서류. 데큘레인은 방금 도착한 듯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그가 자신을 훑으며 물었다.
“밤을 샜나.” “예.” 누구 때문에요.
이프린은 입술을 꾸기며 뒷말을 삼켰다.
끄덕인 데큘레인은 외투를 옷걸이에 건 뒤 보고서를 읽었다. 그 날카로운 눈이 위 아래로 슝슝 움직인다.
마치 난도질하듯.
“······꿀꺽.” 긴장으로 침을 삼키는 이프린에게, 이윽고 그가 건네는 말은.
“부족하다. 돌아가라.” “······예?” “부족하다고 말했다.” “아, 저. 어떤 부분이 부족-” “스스로 깨달아라.” “······.” 데큘레인이 보고서를 되돌려준다. 참, 세상 냉랭한 얼굴이다.
“······예.” 찢기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이프린은 비척비척 조교 연구실로 돌아온다.
그 사이 도착한 알렌과 드렌트는 본인들 자리에 가방을 풀고 있었다.
“어? 이프린 씨. 오늘 집에 안 들어 가셨어요?” “네······ 아침이나 먹으러 가요 우리.” 이프린은 그들 두 사람과 아침밥을─데큘레인 뒷담화를 하면서─ 먹은 뒤, 다시 여섯 시간 동안 수정 작업을 시작한다.
“후! 점점 나이지긴 하네.” 직접 작성한 보고서를 보면서 스스로 만족한다.
이번에는 패스받을 만하다. 아직 보고서 작성이 12 번이나 남은 게 흠이긴 하지만······.
그렇게 5 분 뒤.
이프린은 수석교수 집무실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세 번째 보고서를 점검한 데큘레인의 대답은 썩 간결하다.
“너는 말귀를 못 알아 듣나?” “······예?” “나는 너에게 형식적인 보고서를 바라지 않는다. 이 마법서의 내용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아. 그딴 걸 서술하지 말고, 네가 깨달은 바를 전달하라는 말이다.” 화난 듯 보고서를 내팽개치는 그를, 이프린은 멍하니 바라본다.
“서른 페이지의 보고서보다, 한 획의 번뜩임에 훨씬 더 가치 있는 법이다.” “그, 그치만!” “썩 나가라.” 쿵──!
쫓겨나듯 문이 닫히고, 세 번째 실패.
“아 나 진짜······.” 약이 바싹 오른 이프린은 직접 작성한 보고서를 두 손으로 찢어 발긴다.
우드득- 우드드득- 종이 뭉치를 뜯어버리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 데큘레인의 말대로.
‘한 획의 번뜩임’을 찾아 헤맨다.
그렇게 다시, 여섯 시간 뒤.
네 번째 시도.
“이게 최선인가? 아니면, 네가 너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나.” 스스로의 생각을 서술한 보고서 세 장을 제출해보지만, 데큘레인의 반응은 이번에도 석연찮다.
“이프린 네가 직접 대답해라.” “······아닙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다시 조교 연구실로 돌아온 이프린은 또 다시 보고서 작성을 준비한다.
그렇게 하루 종일 노력하여, 이튿날 아침.
데큘레인이 출근한 시간에 맞춰 다섯 번째 시도.
“······너는 바보인가?” 역시나 바보, 아니 실패······.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사흘 동안, 총 다섯 번 까인 현재.
새벽 세 시의 규칙적인 초침 소리.
이프린은 멍하니 [ 조교 연구실 ] 의자에 앉아 고개를 꾸벅거린다.
슬슬 정신이 나갈 것만 같다.
데큘레인은 이러려고, 나를 괴롭히려고 조교로 받아들인 것인가.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나······ 이러다 살인 저지를지도 몰라······.” 우두커니 중얼거리다, 여섯 번째 보고서를 들고 부시럭 부시럭 움직인다.
“······아직 있나?” 데큘레인의 집무실, 그 문이 열려있다.
이프린은 비틀비틀 걸어가 안을 힐끗거린다.
휑── 암흑만이 가득한 내부에 데큘레인은 없다.
자리를 비운 것인지, 아니면 문단속을 안 한 것인지.
“서랍에 놓고 가야지······.” 이프린은 일곱 번째 보고서를 데큘레인의 책상에 내려놓는다.
“······?” 그러다 문득, 그 책상 위에서 익숙한 종이를 발견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만지작거리니 왜인지 익숙한 재질이었다.
“이거 어디서······.” 편지지로 쓸만한 고급 종이.
그 곁에 놓인 잉크 먹은 깃털펜.
미간을 찌푸린 이프린이, 의문으로 갸웃거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
“······.” 눈 앞에 키 큰 사람이 있다.
아니, 하얀 얼굴이 있다.
족히 3m 는 될법한 신장에, 세로 길이가 40cm 는 될법한 커다란 면상.
흰자는 없고, 오직 새빨간 동공이 자신을 노려본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이프린의 얼굴에 흐른다.
그의 커다란 입이 미소를 그린다.마치 찢어지는 듯, 입꼬리가 귓가에 걸린다.
입이라기보다는 아가리에 가까운 그 안에, 누렇고 뾰족한 이빨 수백개가 제멋대로 움직인다.
어깨와 등허리에 소름이 오른다.
그 정체는 아무리 보아도······.
귀신.
“으아아아악─────!” 이프린은 비명을 내지르며 마법을 응집했다. 마법의 종류는 모르겠다. 다만 아무렇게나 흩뿌리며 도망치다가, 책장에 미간을 박았다.
“끄억!” 이프린은 땅바닥에 기절했다. 그러나 시전한 마법 덕분에 경보가 울렸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귀신은 기절한 이프린과 천장과 번갈아본다.
그리고는, 스으으으으······.
바람에 흩어지듯 모습을 감춘다.
* * * 다음날 아침.
나는 대학병원에 기절했다는 이프린의 병실을 찾아왔다.
“귀신이라고.” “네······.” 알렌이 걱정스런 얼굴로 대답했다. 이프린은 고운 숨을 쉬고 있었지만,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고, 미간의 상처가 짙었다.
“방금 깨어났었는데, 귀신을 봤다면서 중얼거리다가 다시 잠들었대요.” “어떤 귀신 말이냐. ” “그건 자세히 못 들었어요. 의사 선생님은 헛것을 봤을 거라고······.” “······.” 귀신. 물론 귀신과 관련된 퀘스트도 있긴 하지. 모든 학교가 그렇듯, 마탑에도 ‘마탑 전설’이라는 귀신 이야기가 떠돌기도 하고.
다만, 내가 모든 퀘스트를 다 아는 게 아닌지라 어렵다.
“그 외 다른 문제는 없나.” “네.” 나는 장갑을 벗었다. 티나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언젠가, 극복이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내 손을 이프린의 이마에 얹었다. 알렌이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와중, 「이해력」 을 동원했다.
“······.” 이해력의 활용 방법 중 하나다.
이렇게 하면, 이 녀석의 상태이상이 「이해」되면서 「육안」에 떠오른다. 만약 정녕 귀신에게 당한 것이라면, ‘상태이상’의 종류로 그 범위를 좁힐 수 있다.
[ 상태이상 : 겁먹음 ] 별 문제는 아니었다. 손을 떼자 녀석의 땀이 조금 묻어났다. 손수건으로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깨어나면 연락해라.” “네, 네에.” 벌컥─!
때마침 병실 문이 열리고 드렌트가 들어왔다.
“아, 교수님!” “들어가라.” 나는 녀석과 교대하듯 자리를 바꿨다.
······데큘레인이 떠나고 5 분 뒤.
이프린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어? 이프린 씨. 깨어나셨어요?” “괜찮아?” 알렌과 드렌트가 놀라서 되물었다. 이프린은 쓰게 웃으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처음부터 깨 있었어요.” “처음부터요~?” “네.” 이프린은 방금 상황을 떠올리면서 뒷목을 긁적였다.
자신의 이마에, 부드럽게 손을 얹은 데큘레인. 귀신보다 더 소름이 돋지만, 아무튼.
“어떻게 된 거야?” 드렌트가 물었다. 이프린은 다시 오르는 오한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게······ 아.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그러는데. 일단,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차근차근,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귀신. (2) 부유섬의 외곽. 중심부로 나아가는 도로에서 차를 운전하던 어떤 마법사는, 백미러에 비치는 기이한 인물을 발견한다.
키가 몹시 큰······ 여인.
조금 서늘하긴 하나, 부유섬에서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워낙 마법적인 사건이 다수 발생하는 장소이니.
마법사는 별 생각 없이 계속 차를 운전한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무심코 백미러를 들여다본다.
“······?” 키가 몹시 큰 여인은 그때에도, 백미러의 구석진 위치에 서있다.
아니, 차는 계속 나아가는데.
저 여자는 멀어지지가 않는다.
“무슨······.” 뒤늦게 이상함을 눈치챈 마법사가 엑셀을 밟는다.
부우우웅— 차량은 여인으로부터 벗어나려 질주하지만.
“!” 어느 순간, 눈 바로 앞에 나타난 여자.
끼이이이익——!
마법사는 급히 핸들을 꺾고, 차량은 부유섬의 수풀에 처박힌다.
“하아, 하아, 하아······.” 늦지 않게 보조 마법을 발현한 덕에 차는 무사했다. 마법사는 숨을 몰아쉬며 전방을 보았다.
여인은 없었다.
앞에도, 우측에도, 좌측에도 보이지 않았다.
“후······.” 헛것이라도 본 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지만······.
부스럭─ 부스럭─ 뒷좌석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순간 마법사의 등허리가 뻣뻣하게 굳는다.
그는, 실핏줄로 가득한 눈을 크게 뜨고, 천천히 백미러를 바라본다.
그곳에는.
“······.” 거대한 몸을 반쯤 꾸긴 채 앉아, 기괴하게 웃으며 새빨간 동공을 부라리는 귀신.
“으아아아악───!” * * * 이프린은 곧장 퇴원했다. 귀신에 대해 열심히 떠들어봤자, 알렌과 드렌트는 물론 의사 선생님도 안 믿는 눈치였으니.
“아~ 이제 내일이 개강이네~” 마탑으로 돌아가는 길, 우연히 만난 줄리의 말이었다.
이프린은 그녀 손목의 팔찌를 유심히 보았다. 전에는 못봤던 악세사리가 또 있었다.
저러다 몸 전체가 아티팩트로 변하겠네.
“근데, 이피. 정말 귀신이었어? 헛것 아냐? 여태 데큘레인한테 시달렸다면서.” “진짜 봤어.” 그 끔찍한 생김새는 거짓이 아니다. 환각도 아니다.
물론 그때 피곤한 상태이긴 했지만······.
“그럼 이피, 오늘은 쉬지 그래? 또 귀신 보면 어떻게 해.” “······아니.” 이프린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은 결연한 태도였다.
“확인할 게 있어.” 당장 귀신을 보기 직전, 데큘레인의 집무실에서 발견한 편지지. 왜인지 익숙한 재질. 그 감각이 이프린의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이피 완전 공부벌레······ 헉! 이피! 저기저기! 저기봐!” 돌연 줄리가 난리를 피우면서 파닥거렸다. 이프린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면을 보았다.
헛둘— 헛둘— 금발의 기사가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다.
대륙에서도 그 외모로 유명한 미남, 가웨인이었다.
“가웨인이다!” “······그러게. 잘생기긴 했네.” 이프린도 끄덕였다.
기사단의 가웨인, 마탑의 데큘레인. 이렇게 두 명이 대학 최고의 미남이라더니.
저 기사도 데큘레인 교수처럼 얼굴값 하려나?
“와······ 달리는 거 봐. 조각인가······” 속력을 유지해라—!
가웨인은 기사학과의 교관으로서 생도들을 이끌었다. 줄리는 마냥 몽롱한 얼굴로 바라보았고, 이프린은 피식 웃으며 절레절레 저었다.
“난 먼저 갈게. 넌 구경하던가.” “응······. 난 구경 할래······.” 그렇게, 줄리를 두고 먼저 도착한 마탑의 입구.
이프린은 1 층 로비에서 알렌을 만났다.
“어? 알렌 조교수님. 언제 오셨어요?” 이프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알렌보다 자신이 더 빠른 길로 온 것 같았는데.
알렌이 생긋 웃었다.
“제가 걸음이 좀 빨라서요~ 그런데 그건 뭐예요~?” “아.” 이프린은 손에 든 편지를 등 뒤로 숨겼다.
“후원자님한테 보낼 편지인데······.” “아 그렇군요~ 오늘 후원 우체통이 열렸군요. 또 후원 받으셨나봐요, 축하드려요 이프린 씨.” “아하하······ 저야 뭐 감사할 따름이죠.” 이프린은 터벅터벅 걸어 ‘후원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다.
그 사이, 알렌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걸음 진짜 빠르시네······ 그건 그렇고, 설마 진짜 그럴 리는 없겠지······?” 이프린은 우체통을 보면서 조금 이상한 생각을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만에 하나라도.
설마, 데큘레인이 자신에게 그럴 리가.
“보고서나 준비하자······.” 이제 다시 보고서에 열중할 시간이었다.
* * * ······인게임에서 「암호화」라는 특성의 사용법은 아마 간단할 것이다.
아이템의 잠금과 보관.
그러나, 게임과 달리 자유도가 무한한 이 세계에서는, 또한 데큘레인 특유의 정신력 하에서는, 그 범용성이 증폭된다.
첫 번째는 ‘디지털화’.
물론 이는 내가 갖다 붙인 네이밍일 뿐이고, 더 정확히는 유형의 ‘물체’를 무형의 ‘마력 코드’로 변환하는 것이다.
이 코드는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일종의 인벤토리처럼 기능한다.
부피가 큰 목강철도 이 ‘디지털화’로 간단히 보관할 수 있다. 코드만 역산할 수 있다면.
두 번째는 ‘마법의 잠금’.
문자 그대로 마법의 회로, 혹은 술식에 잠금 암호를 도입하여, 내가 허락한 사람만 이용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위 두 방법을 조합하여, 어떤 마법을 코드화한 뒤 순식간에 방출하는 활용도 가능하다.
단, 특성 설명에 대놓고 ‘정신력’이라는 단락이 붙어있는 만큼, 마력 소모는 물론 두통이 극심하다.
「철인」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고통이라면, 확실히 ‘게임의 용례와는 아득히 벗어나는 활용방안’인 것이다······.
똑똑— 특성 「암호화」을 다각도로 분석하던 그때, 돌연 울리는 노크.
나는 본능적으로 집무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똑똑— 그러나 문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창문이었다.
똑똑— 물론, 문제될 것은 없다.
이 장소가 마탑의 77 층만 아니라면.
나는 창문을 돌아보았다.
똑똑— ······귀신 따위는 아니었다.
로브 행색, 정체불명의 마법사였다.
놈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움직였다.
─들어가도 되겠나.
딱히 사망 변수는 없었고, 적의도 없었다.
아니, 내가 허락할 것도 없었다. 마법사는 곧장 유리를 통과했다.
마탑의 유리는 마공학의 산물일 터인데, 무척이나 쉽게.
“데큘레인. 안 반갑지만, 오랜만이다.” 불청객은 로브 후드도 벗지 않고 말했다.
여성의 음색이었지만, 영 누군지 모르겠다.
“나다. 이드닉.” 장사꾼 이드닉. 다행히 그 이름은 안다.
로하칸의 동료이자, 메인 퀘스트와 연관된 인물 중 하나.
그녀는 한 손에 웬 ‘천에 쌓인 새장’같은 물건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함께다. 제자여.
어디서 또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헬륨가스를 삼킨 듯한 목소리였다.
“이거다, 데큘레인.” 이드닉이 새장을 내 책상에 올렸다. 새장을 휘감은 어두운 베일 안에서 목소리가 새었다.
─이 베일을 걷어라.
나는 그 말대로 걷었다.
“······?” 드러난 물체는 작은 오두막이었다.
정원이 딸린 오두막.
미니어처, 혹은 레고의 집 크기인 그 안에는, 마찬가지로 작아진 ‘로하칸’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제자야.
“······로하칸?” ─그려. 허허허.
로하칸이 껄껄 웃었다. 나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뭐하고 계십니까 거기서.” ─들키지 않으려는 방편이지. 알다시피 나는 흑수잖냐? 오두막을 실물로 이 안에 들일 순 없으니, 크기를 좀 줄였다.
나는 이드닉을 바라보았다. 이드닉은 여전히 로브 후드 차림이었다.
“······부하도 데리고 오셨군요.” “부하가 아닌 동료다.” ─껄껄!
이드닉이 정정했고, 로하칸은 미소를 지었다.
─데큘레인. 내가 준 멸지 탐방록은 읽어 보았는가?
“예. 읽었습니다.” 대부분 아는 내용이었다. 나는 비록 디자이너였지만 게임 테스트도 했었고, 이런저런 설정들도 팀원과 유아라에게 주워들었으니.
─그래. 여기 내 부하도 나도, 너에게 할 말이 있어서- “부하라니. 동료라고.” ─머리가 좀 많이 컸군. 이 녀석이.
“하. 나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주제에.” ─허. 그려?
그러자 로하칸이 이드닉에게 검지를 뻗었다. 지이이이잉······ 그의 손가락에서 방출된 마력이 이드닉을 미니어처 오두막으로 끌어들였다.
이드닉 또한 작아진 것이었다.
─······로하칸. 경고하지. 다시 돌려놓아라.
─네가 알아서 돌아가던가? 너 없이 아무것도 못하는 나라믄서?
이드닉이 이를 악물었다. 로하칸은 어깨를 으쓱이며 딴청피웠다.
─······셋 세지. 나는 따로 데큘레인에게 할 말이 있다.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아라.
─셋 세라. 내가 죽으면, 너는 어차피 영원히 작은 상태일 테니.
이드닉과 로하칸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노려본다.
보다 보니 귀엽다.
미니어처와 미니어처, 피규어와 피규어 간의 기싸움.
─로하칸, 돌려놓으라고.
─이드닉, 네가 내 부하라는 걸 인정한다면.
─내 스승은 데마칸 뿐이다.
─그 데마칸에게 널 소개한 게 나다.
똑똑— 그때 울린 노크.
이번에는 정상적인 출입구, ‘문’이었다. 나는 로하칸의 작은 오두막을 천으로 덮었다.
─이프린입니다.
「염동」으로 문을 열었다.
뚜벅뚜벅 걸어온 이프린이 보고서를 내밀었다.
“연구 보고서입니다.” 나는 그 내용을 읽었지만, 첫 세줄부터 한숨이 흘렀다.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프린이 물었다.
“······또 아닌가요?” “그래.” “······.” 그러자 이프린은 다른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복잡한 술식과 수식, 연산으로 가득한 마법 문제였다.
“「사대 원소의 조화」의 저자인 ‘텔겐드’가 위자드 아카데믹 이번 호에 제시한 학술 문제입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문제?” “예.” 이프린의 생각은 알 것 같았다.
디자이너 시절의 나도 겪었던 감정이었으니.
계속 까이다보면, ‘저 상사는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나를 괴롭히려는 건가-’ 따위의 심정이 스물스물 솟는 것이다.
“······.” 나는 텔겐드의 문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동시에 이해력을 가동했다.
“후후.” ······이프린의 건방진 웃음을 들으면서.
출제자가 제시한 사대원소의 비율을 계산하고, 원소가 조화를 이루는 뼈대를 상정하고, 그 가설을 토대로 회로를 예측하고, 이 학술의 총체를 이루는 ‘해답’을 제시한다.
“22.1935%, 23.1105%, 27.8505%, 26.8455%.” “······예?” 이프린의 얼굴이 멍해졌다. 녀석은 잘못들었다는 듯 귀를 앞으로 기울였다.
“다, 다시.” “22.1935%, 23.1105%, 27.8505%, 26.8455%.” “어······.” “사대원소의 조화에 필요한 황금 비율을 드러내는 문제다. 너는 못 풀었나?” “아, 아뇨. 풀긴 했는데······.” 녀석이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전에 이미 푼 문제인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풀지, 아닌데, 당장 나흘 전 문제인데······.
“이프린.” 나는 이 건방진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예, 예.” “네가 아는 건 나도 안다.” “······.” “네가 모르는 것도, 내가 안다.” 적어도 이론으로, 나를 논파할 수준은 못 될 것이다. 아마 영원히.
이프린은 풀죽은 얼굴로 뒷목을 긁적였다.
“겸손하게 정진해라. 그따위로 의심하다간, 닿을 경지에도 이르지 못하게 될 테니.” “······예. 죄송합니다.” 이프린은 털레털레 밖으로 나갔다.
끼이이익─ 집무실의 문이 닫히자 나는 다시 천을 걷었고, 로하칸이 말했다.
─방금 목소리는, 이프린이었나?
“예.” ─호오······.
로하칸과 이드닉은 어느새 화해한듯, 정원의 테이블에 앉아 서로 차를 홀짝이고 있다.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그 오두막에 저도 들어갈 수 있습니까.” ─아니. 이드닉과 나는 서로 계약을 한 상태라 가능하다. 물론 일반인은 억지로 끌어당길 수 있지만, 너처럼 저항력이 강인한 녀석은 못 하지.
“그렇다면, 저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때 분명히, 놓아드리는 건 마지막이라 말했을 텐데요.” 로하칸과 처음 만났던 그때.
나는 그에게 경고를 했었다.
말이 경고였고, 사실은 ‘걱정’이었지만.
나대다가 죽지 말라는 걱정.
─······누가 누굴 놓아줘? 데큘레인 네가. 로하칸 이 영감을?
아드닉이 의문스레 중얼거리고, 로하칸은 진중하게 말을 잇는다.
─안다. 그러나 꼭 전할 말이 있다.
“무엇입니까.” ─제단이 움직이고 있다. 제국에 거대한 위협이 들이닥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겨울. 몬스터 웨이브가 들이닥칠 시기.
겨울, 그리고 메인 퀘스트.
기실 로하칸을 보자마자 예상은 했다.
로하칸은 존재 자체가 퀘스트나 다름이 없는 인물이니.
─하여, 나는 너에게 부탁을 하나 하려 한다.
“부탁을 말입니까.” ─그려. 몬스터 웨이브가 다가오는 겨울에 만나자. 자세한 내용은 그때, 멸지에 만나서 알려주지.
“제가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물었다.
로하칸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삶이다. 너 뿐만 아니라, 이 대륙 모두의.
그 말과 동시에 떠오른 메인 퀘스트.
[ 메인 퀘스트 : 삶 ] ◆ 레어 특성 카탈로그 ◆ 상점 화폐 +5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은 해보겠습니다.” ─긍정적인 선택을 기대하지.
그렇게 답한 로하칸은 오두막에서 이드닉을 방출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이드닉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드닉은 너와 둘이 할 말이 있다 하니, 나는 이만 가겠다.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라 제자여.
로하칸은 방긋 웃었다.
그 직후, 그의 오두막이 하늘로 부웅 떠오르더니 뿅─ 하고 사라졌다.
“한데 데큘레인. 너는 손님 대접이 원래 이리 부실한가?” 이드닉이 말했다. 그녀는 담배를 꺼내면서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불청객은 대접이 아닌 괄시를 받는게 정상이다.” “······.” “전달할 말이나 하도록.” 나는 이드닉의 담배를 「염동」으로 빼앗았다. 이드닉은 쯧- 혀를 차고 한 마디를 했다.
“실비아가 위험하다.” “······.” 잠자코 이드닉을 바라보았다. 이드닉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데큘레인. 그때 한 약속이 있었다.” “그때?” “네가 시엘리아를 죽였을 때. 나는 네 약속을 받고 너를 죽이지 않았다.” “······.” 그 말에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모르는 데큘레인의 과거였기에.
“설마, 지키지 않을 셈인가?” “······.”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드닉의 표정도 한결 나아졌다.
“좋다. ······그런데, 너는 ‘그 아이’를 아직도 데리고 있구나?” “‘그 아이’. 이프린 말인가.” “그래.” “데리고 있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없지.” 이드닉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그 시선에는 예기가 깃들었다.
“다만, 나는 네가 저 아이를 죽일 줄 알았다.” 갑작스런 말에 눈썹이 움직였다. 나는 일단 평정을 유지하며 되물었다.
“이유는.” “저 아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디카일렌이니까.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지. 실비아가 위험하다.” 이드닉은 품 안에서 습관적으로 연초를 꺼냈다. 나는 그 연초 역시 「염동」 으로 빼앗았다.
“이런 빌어쳐먹을-” “내 집무실에서, 입은 오직 말할때만 쓰인다. 말이나 계속하지.” “······건방진 놈. 그래, 부유섬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덜덜덜덜— 이드닉이 다리를 떨었다. 금단 현상인 듯했다.
“그 유력 용의자 중 한 명이, 레길로 등위의 실비아다.” “······.” 나는 그저 눈을 깜빡였다.
확실히, 새로운 사건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부유섬에서 한다. 일단 빌어먹을 내 담배부터 내놓고······.” * * * 늦은 밤, 조교 연구실.
“하아아암——” 이프린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 깜빡 잠에 든 모양이었다.
“아······ 벌써 밤이네······. 아 근데 진짜······ 어떻게 풀었지······?” 대단히 충격적이었던 방금의 사건을 떠올린다.
자신은 거진 24 시간 동안 고민한 문제를, 고작 30 초만에 풀어버린 데큘레인.
“내가 꿈 꾼 건가.” “꿈이요?” 눈을 부비적거리는 이프린의 혼잣말에 알렌이 대답했다. 흠칫 놀란 이프린은 곧 배시시 웃었다.
“하핫. 아뇨, 뭐······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네에. 다녀오세요.” 언제나 기분 좋아지는 알렌의 미소.
이프린은 조교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어?” 그런데, 저 복도 끝.
[ 수석교수 집무실 ]의 문이 또 열려 있었다.
“······.” 이프린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고민했다.
정말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슬쩍 한 번만 보고 올까.
아니 물론, 절대 그럴 리 없긴 하지만, 괜히 찝찝해갖고 말이지······.
그래.
가자.
어차피 아닐 테니까.
가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자.
······아 잠깐.
그러다 또 귀신이 나타나면?
“뭐 어때.” 연구실에 알렌 조교수님도 있잖아.
괜찮겠지.
이프린은 살금살금 수석교수 집무실로 다가갔다. 비스듬이 열린 문틈 사이를 힐끗 들여다보았다.
달빛도 스며들지 않는 어둠. 데큘레인은 자리를 비우고 없다.
후······.
심호흡을 한 이프린은 마력을 후레쉬처럼 비추며, 발소리도 내지 않고, 숨죽인 채 집무실을 걸어간다.
후우······. 후우······.
그렇게 식은땀 범벅이 되어, 가까스로 닿은 데큘레인의 집무책상.
우선 의자 밑에 몸부터 꾸겨 넣는다.
“내가 그걸 어디서 봤더라······.” 데큘레인의 종이. 너무 고급이라 오히려 한 번 경험하면 잊기 힘든 재질.
그 감각을 찾아, 이프린은 책상의 서랍을 연다.
“······.” 굳이 이곳 저곳을 뒤적일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 첫 번째 서랍 안에 고이 놓인 무엇인가를 발견한 순간.
이프린의 심장이 크게 내려앉았다.
“······잠깐만.” 가슴 안에서 돌덩이가 철렁이는 소리.
이프린은 멍하니 중얼거리며 바라본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뻗어, 깔끔하게 접힌 편지 한 장을 집어 든다.
“이거 설마······.” 제 망막에 맺히는, [ 후원자님! 이번에도 이프린이에요— ] 따위의 첫 문장은.
당장 오늘.
자신이 ‘우체통’으로 익명의 후원자님에게 편지.
“······흐어어어!” 귀신이라도 본 듯 화들짝 놀란 이프린은 두 손을 털어 그 편지를 내팽개친다.
온몸이 덜덜덜덜 떨린다. 독감에 걸린 것처럼 머리가 어지럽다.
“내 후원자가······.” 후들거리는 손으로 두 입을 틀어막고, 세상 경악한 투로 중얼거린다.
“······어째서요?” 귀신. (3) 이프린은 멍하니 서랍 속 종이를 바라보았다.
불현듯, 후원자님에게 보냈던 수많은 편지들이 떠올랐다. 제 품 안에 항상 넣고 다녔던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이게 도대체?” 그 혼란의 순간, 스으으으으······.
등허리에서 일어난 한기가 뒷목을 뻣뻣하게 만든다.
“!” 눈을 부릅뜬 이프린은 온 신경을 뒤편에 집중했다.
저번과 비슷한 귀기.
그러나, 한 번은 당해도 두 번은 안 당한다.
고오오오오── 이프린은 손아귀에 마력을 모으고, 파괴 마법을 구현한 뒤, 놈을 돌아본다!
“이프린 씨. 괜찮으세요?” “어!” 알렌이었다. 이프린은 급히 마법을 거두었다.
“저, 조교수님. 방금 귀신······.” “네. 저도 봤어요.” “보셨어요?!” 알렌은 조금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이프린의 손에 쥐어진 편지를 발견했다.
“앗.” 그가 낭패 어린 단말마를 내뱉었다. 이프린은 그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알렌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했다.
“······이프린 씨.” 얼굴을 딱딱히 굳힌 알렌이 다소 화난 투로 말했다.
“교수님 집무실 무단출입은 안 돼요. 함부로 뒤적이는 건 징계감이고요.” “네······ 죄송합니다······.” “정말 말썽꾸러기시네요.” 이프린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당연히 잘못한 게 맞지만, 이 편지가 왜 데큘레인에게 있는지, 정녕 자신의 후원자가 데큘레인이 맞는 것인지······.
알렌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이제 알게 되셨죠? 이프린 씨. 교수님은, 나쁘기만 한 분이 아니에요.” 그 말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이프린은 입술을 깨물고 중얼거렸다.
“근데 왜 익명으로······.” “본명이라면 거부할거라는 말씀이 있었어요.” “······.” 이프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너무 옳은 말이었기에.
그때의 자신도, 또 지금의 자신도.
능력에 비해 너무 커다란 자존심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런데. 일단 지금은 도망치는 게 나을거 같아요.” “네?” 알렌의 말에 이프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렌은 생긋 웃으며 창밖을 가리켰다.
“귀신이 아직도 있거든요. 저기에.” 예의, 시뻘건 눈탱이를 부라리는 귀신이 유리창에 달라붙어 있었다.
* * * ······부유섬의 메지세이온에는 자치적 수사기관 [ 마법 수사부 ]가 존재한다. 부유섬은 본디 어떤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치외법권·독립지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유섬에서 범죄 사건이 발생할 경우, 일명 ‘마수부’는 독자적인 수사를 전개한다.
마법사들의 마법 수사이니만큼 그 검거율은 95%에 달하며, 나머지 5%도 범인 확정에는 성공하였으나, 그 대상을 잡아들일 역량이 부족하여─흑수 로하칸, 권위자 칼라, 신병 로드란 등등─ 무기한 수배 상태인 경우다.
그러한 [ 마법 수사부 ]가, 이번 사건에는 실비아를 유력 용의자로 선정했다.
이드닉은 부유섬에 오르자마자 그 개요를 간단히 설명했다.
“귀신?” “그렇다. 실비아의 무의식이 끔찍한 귀신을 창조했고, 그 귀신이 살인을 저질렀다. 따라서 2 급 마법 살인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드닉이 말을 이었다.
“물론 이는 수사 과정일 뿐이다. 사건 현장에서 실비아의 마력이 검출되었으나, 그 귀신이 실비아의 창조물이라는 근거는 아직 부족하다.” 그렇게 걷다 보니 [ 마법 수사부 ]의 본부에 닿았다. 큐브 같은 상자가 어긋나게 쌓인 듯 기하학적인 건축물이었다.
“나를 부른 이유는.” “데큘레인. 너에게는 ‘부유섬 보석권’이 있다.” 나한테?
이드닉은 내가 모르는 것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살인이 진실이든 아니든, 실비아의 순수한 재능은 아드린느에 준한다. 지금 실비아는 저런 폐쇄된 공간에 갇혀 있어서는 안 돼.” “상태가 안좋나.” “많이. 갇힐 때부터 피폐했다. 이러다 스트레스가 터지면 재앙이다. 마법이 폭주할 것이고, 단전이 상할지도 몰라.” 나는 문득 원론적인 의문을 느낀다.
제 자식이 이런 사건에 휘말린다면, 가장 먼저 ‘부모 된 자’가 오는 것이 정상 아닌가.
“길테온은 뭘 하고 있지.” “그놈은 그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을 ‘마법적 진보’의 적기라 여길 테지. 와도 하등 도움이 안 된다. 놈에게는 ‘보석권’이 없으니.” “이드닉.” 나는 이드닉을 불렀다. 이드닉은 본부 건물의 문고리를 움켜쥔 채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왜 시엘리아를 죽였지. 무슨 약속이었지.” 이것만큼은 물어야만 했다.
의심을 사게 되더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 이드닉은 이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긴. 너는 시엘이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궁금하겠지. 시엘은 그 사실을 나한테도 알리지 않았으니.” 이드닉의 의심은 금세 자신만의 이유를 찾는다.
정보의 불균형은 이래서 편리하다.
애당초, ‘데큘레인의 껍데기에는 김우진이 있다-’는 가설을 추론할 마법사는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으니.
“시엘은 시한부였다. 다만 실비아가 보는 앞에서 병들어 죽는 것만큼은 극도로 싫어했다. 실비아의 쉼터가 자신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 “시엘의 뜻을 자세히는 모른다. 병사가 아닌 살인이라면, 자신이 죽는다 하더라도 그 복수심으로 실비아가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이 천천히 죽어가는 모습을 딸에게 보이기 싫었던 것인지.” 나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관자놀이에 찌르르르한 통증이 일었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두운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데큘레인. 시엘을 죽인 건 너다. 그건 변하지 않아. 시엘은 네가 자신을 죽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그 대가로, 너는 네가 원하는 전부를 얻었다.” 내가 원하는 전부.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마, 디카일렌의 죽음.
데큘레인에게도, 예리엘에게도 만족하지 못한 그 빌어먹을 망령의 살해.
“그러니 이제 와 도망칠 생각은 말아라.” “······.” ······작금에 이르러, 나는 가까스로 이해한다.
데큘레인의 악행과 자취는 어디에든 존재함을.
「악당의 운명」은 나도 모르는 곳에서, 언제든지 손길을 뻗어올 것임을.
어쩌면 당연한 순리인지도 모른다.
유크라인과 일레이드.
그리고,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그는 애당초 ‘살아갈 수 없도록 설계된’ 캐릭터이니.
“하.” 다만, 내 입가에는 미소가 흐른다.
이미 운명에 대항하기로 결정한 바, 한낱 ‘설정’ 따위에 상심할 이유는 없다.
“······뭐가 그리 웃기지?” 데큘레인의 삶은 이러한 것이다.
하루하루가 순탄할 리 없다면, 온 세상이 나를 악당으로 조립하려 한다면, 결국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면.
“새삼 느끼고 있다. 심심하지 않은 세상이라는 것을.” 나는 기꺼이 그 도전을 받아들이겠다.
또한 반드시, 극복하겠다.
나의 에고는 그 어떤 세태의 파도에도 무너지지 않을 테니.
가장 파괴적인 재해가 모든 것을 부수고 휘몰아치더라도, 언젠가 이 빌어먹을 세상은, 그 한복판에 홀로 고고하게 선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실비아에게 보석권을 사용하겠다. 그리고 나머지는 네게 맡기지.” “······이리 쉽게?” 본인이 부탁했으면서, 이드닉은 의외로 놀란 기색이었다.
“아 물론, 보석권을 사용했는데 수사 결과 무죄로 판명난다면, 경우에 따라 보석권은 그대로 유지되기도 한다.” “뭐가 되었든, 시엘리아와의 약속 또한 네가 이행해라. 나는, 실비아가 오래 살아 대마법사가 되길 바란다.” “뭐?” 이드닉의 오만상이 일그러진다. 의문이 가득한 그 얼굴을 굳이 오래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나는 곧장 마법 수사 본부의 문을 열었다.
* * * ······심문실의 마법 수사관은 말했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발현한 ‘삼원색’이 괴물을 창조했고, 그 괴물이 마법사를 죽였노라고.
그 ‘폭주’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고.
하여, 최근에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일이 있었느냐고.
“······.” 실비아는 멍하니 고개를 숙인 채 고민했다.
정말 자신이 죽였는지.
혼자 생각하면서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자꾸 말을 안 하면 환혹술사를 부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수사관 루미에르 러셀의 말이었다.
물론, 실비아에게 스트레스가 될 만한 일은 있었다. 하지만······.
지이잉— “음. 레길로 실비아. 잠시, 기다리고 계십시오.” 호출이었다. 러셀은 부하에게 실비아를 감시하라 이른 뒤 밖으로 나왔다.
“······으음? 모나크 데큘레인?” 심문실 외부, 수사본부의 개인 면담실에는 데큘레인이 서 있었다. 그는 부유섬에서도 로브가 아닌 정장을 즐기는 유명인이었다.
러셀이 다가오자 그가 말했다.
“실비아가 여기에 있다지.” 그는 또한, 신분제가 아닌 부유섬에서 거리낌 없이 반말을 애용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예. 그렇습니다만.” “석방해라.” “······허 참. 모나크 데큘레인. 이곳은 부유섬입니다. 제국이 아닌-” “보석권을 사용하겠다.” “······예?” 러셀은 크게 놀랐다.
잠시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부유섬에서 7 년간 수사관 생활을 해온 러셀도 이 ‘보석권’은 처음이었으니.
“보석권 말이다.” “그 특권을······ 레길로 실비아에게?” 하물며, 이 특혜를 타인에게 사용하다니?
심지어, 유크라인이 일레이드에게?
“그렇다.” “······.” 부유섬에서 보석권은 대단히 특별한 혜택이다.
애당초 돈이 썩어나는 부유섬에서, 돈 따위로 보석이 가능할 리 없다.
다만 이 보석권은 부유섬에서 ‘마일스톤(Milestone)’ 등급의 업적을 이룬 자에게만 주어지고, 그 사후에는 정식 후계자에게 세습된다.
데큘레인의 보석권은 아마 디카일렌의 것.
그리고 부유섬의 보석권은 단어 그 자체의 뜻 이상으로, 살인을 저지른 마법사라도 면책이 되도록 한다.
부유섬이라는 냉혹한 사회이기에, 목숨보다도 마법과 지식이 더욱 중요하기에 가능한 특권인 것이다.
“다만, 익명으로 전하겠다.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예.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모나크 데큘레인은 사무실을 나섰다.
그게 끝이었다.
부유섬에서 가장 값비싼 권리 중 하나를, 무슨 식권 지불하듯······.
“아니······ 데큘레인이 도대체 왜?” 러셀은 제 로브 가슴팍의 수사관 배지를 멍하니 만지작거렸다.
······.
실비아는 무사 석방되었다. 러셀은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를 둘러대었고, 본부 밖에는 이드닉이 기다리고 있었다.
“받아라. 두부 한 모다.” 실비아가 두부를 바라보았다. 그 텅 빈 동공이 건조했다. 썩은 생선의 눈깔이었다.
이드닉이 말했다.
“그렇게 병신같이 있을 셈인가. 제자로 받아달라며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하늘로 도약할 땐 언제고.” “정말 제가 죽인 걸까요.” 실비아가 대답했다. 메마른 목소리였다. 이드닉은 혀를 찼다.
“조사 중이다. 또한, 증거 불충분이라잖냐. 네 잘못이 아닐 것이다.” “······.” 실비아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데큘레인을 믿겠다는 마음과, 주변인이 전하는 ‘진실’이 거칠게 충돌하는 탓이었다.
그녀의 가슴은 서서히 마모되고 있었다.
데큘레인과 시엘리아. 어느 한쪽을 버리지 않는 이상, 이 마멸은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답답한 놈.” 그녀를 바라보며, 이드닉은 데큘레인의 말을 되새긴다.
─나는 실비아가 오래 살아 대마법사가 되길 원한다.
데큘레인, 그놈은 어쩌면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실비아에게 필요한 건 삶의 동력. 더 정확히는 ‘불길’이라는 것을.
“······실비아. ‘그날’의 기억을 보겠나.” 그러자 실비아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 맥아리 없는 눈동자가 거슬렸다.
“기억이요.” “그렇다. 시엘이 죽던 날.” 이드닉이 제 눈을 톡톡 건드렸다.
“이 왼쪽 눈은 의안이다. 내가 직접 보는 모든 것이 기록되는 눈. 나는 이 눈으로, 시엘이 죽던 그날을 목격했지.” “아.” “너에게, 이 기억을 나눠주마.” 그 순간.
실비아의 눈에 작은 불씨가 타올랐다.
* * * 부유섬에서 내려오자마자 나는 황궁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교습 마법사 노릇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폐하.” 나는 황제를 바라보고 있다.
황제도 나를 마주하고 있다.
아니, 마주하고 있는 건지.
바닥에 누운 소피엔은 꾸벅꾸벅 존다. 눈을 뜨려다가 다시 감고, 뜨려다가 또 다시 감고.
“폐하. 뭐하시는 겁니까.” “······음? ······아. 음······ 요즘은······.” 늘어지는 목소리. 흐릿하게 깜빡이는 눈.
“귀찮은 게······ 좀 많느니라······.” “그렇습니까.
“그렇다······. 자살이라도 할까······ 생각 중이다······.” 그 말에 나는 허리를 바로 세웠다.
소피엔이 자살을 언급할 정도라면, 상황이 조금 심각하다. 물론 이렇게 권태로운 꼴부터가 심상찮긴 하지만.
“폐하. 옥체가 강녕하셔야 대업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대업······ 음······ 좆같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의 머릿속을 한번 들어가보고 싶군요.” 실제로 「황궁의 어둠」 퀘스트가 ‘황제의 과거 탐험’이었기에, 운을 띄울 겸 말했다.
눈을 뜬 황제가 나를 바라보았다.
“버티지 못할 텐데······.” “제가 버티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감히······ 그래. 짐을 화나게 하려 한 거라면······ 성공이다.” 소피엔이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에구구구구— 굴러떨어지듯 다시 바닥에 누웠다.
“······실패로 정정하지. 너는 짐을······ 화나게 하지 못했다······.” “······.” 황제의 상태가 대단히 심각하다.
나태가 상상 그 이상이다.
“폐하. 나무늘보라고 아십니까.” “짐의 이 나태를······ 너 따위는 이해 못 하느니라······.” 황궁에 무슨 나무늘보 한 마리가 빈둥거리고 있으니 원.
“폐하. 제 강의도 신청하셨잖습니까.” “아······ 그거······ 짐이 아니라······ 고양이가 신청한 것이다······.” “당장 내주 수요일입니다. 격주 강의.” “······.” 소피엔은 아예 입을 다물었다.
나는 케이론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 아무 말 없이, 황제의 그림자처럼 서 있다.
“케이론 경. 오늘 폐하는, 아무래도 수업을 진행할 상태가 아니신 듯합니다만. 이유를 압니까.” 케이론에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한 발자국 움직였다.
그런데, 황제의 뒤에 선 케이론은 그대로였다.
말인즉, 케이론이 두 명으로 불어난 것이었다.
“나오게.” 한 명은 황제의 뒤편에 선 채고, 다른 한 명은 뚜벅뚜벅 걸어와 문을 연다.
“······그러지요.” 나는 일단 나무늘보, 아니, 소피엔을 두고 밖으로 나왔다.
케이론이 앞서 걸으며 말했다.
“서서히 심해지시더니, 근래에는 숨 쉬는 것조차 귀찮아하신다. 그 이유는 아마 황궁의 지하에 있겠지. 너도 졸랑에게 듣기는 했을 터.” “그렇습니다.” “한데, 자네같은 마법사도 내 ‘마력적 재능’이 신기한 눈치로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갑자기 두 명으로 불어났으니, 신기하지 않을 수 있나.
“내가 고작 열 살의 나이에 호위기사로 황궁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다.
몸이 많아지면 호위에도 유리하지.” “그렇군요.” 케이론 또한 세계관에서는 손꼽히는 강자다.
다만 언제나 황제 곁에만 붙어있는 터라 자주 볼 기회는 없는데, 꽤 신이한 특성의 소유자인 듯하다.
“여기다.” 케이론이 인도한 지하의 문은, 이전에 졸랑이 안내한 그곳이 아니었다.
내 의아한 시선을 느낀 케이론이 말했다.
“지하의 문은 두 곳이다.” “예. 졸랑의 문과 다르군요. 혹, 여태 졸랑을 지켜보고 있었습니까.” “호위는 외적인 무력뿐만 아니라, 내적인 정치에도 비롯된다. 검을 쥐고 있지 않을 때에는,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법.” “······그렇군요.” 나는 지하의 문을 바라보았다.
소박한 나무문.
그 위에 손을 얹자, 치직─!
스파크가 튀기며 알 수 없는 음색이 흘러들었다.
[······소피엔의 죽음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수십 번, 수백 번을 죽으면서, 반복하면서, 회귀하면서, 이 세계가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 이 세계선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을 리 없다.
소피엔은 이 세계의 증거와도 같은 인물이니.
이 세상의 기적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니.
그 영겁의 죽음에서 파생한 원한과 슬픔과 고통과 분노와 증오는 진물처럼 흘러내려 황궁의 지하에 쌓였다. 새카맣고 매캐하고 어두운 진흙을 이루었다.
따라서, 그 지옥같은 죽음을 탐방하는 것.
그녀의 죽음은 플레이어에게 커다란 과제와도 같다······. ] 「독립 퀘스트」의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이었다.
나는 케이론을 돌아보았다.
“케이론. 함께 가겠습니까.” 케이론은 작은 검 한 자루를 내밀었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나는 오직 폐하를 지키는 기사다. 폐하가 아니라면 그 누구와도 함께하지 않는다. 단, 네가 위험할 때 이 검을 뽑아라. 얼마간 ‘현현(顯現)’이 가능할 것이다.” 케이론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묵직했다.
굳이 신뢰할 마음이 없어도, 자연스레 믿게 되는 목소리. 율리와도 비슷한 기사의 귀감이었다.
“알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론은 지하의 문에 도열하듯 선다.
두 명으로 나뉜 케이론은 각각 황제 본인과, 황제의 안위에 직결되는 문을 호위하는 것이다.
“오래 걸리나.” “처음은 아마 금방 끝날 겁니다.” “처음?” “예.” 이번 퀘스트는 쉽게 말해, 소피엔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회귀를 체험하는 것이다.
물론 진짜 머릿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은 아니지만, 아무튼.
소피엔이 죽은 횟수만큼 재시도가 가능하다.
얼추 듣기로는 백번 이상인 것으로 안다.
따라서 오늘은, ‘룬어 교습’ 대신이라고 치면 될 터.
“······알겠다. 외부는 내가 경계하지.” “예.” 말을 마친 케이론은 다시 동상처럼 변했고, 나는 지하의 문을 열었다.
회귀의 이력. (1) 나는 지하의 문을 열고 발을 내딛었다.
아니,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발판이 없었다.
한순간에 온몸이 추락했고, 그 끝은 없었다. 줄없는 번지점프. 혹은 낙하산없는 스카이 다이빙이 이러할까.
────!
펄럭이는 옷깃. 전신을 짓누르는 공기의 저항.
나는 눈감은 채 이 기류를 느낀다.
가만히, 중력의 무게를 감내한다.
──────.
강하는 오래도록 이어지고.
뒤늦게 적응이 되었을 때.
쿵──!
도착했다.
일자로 늘어진 몸이 땅바닥에 맞닿은 것이었다.
“······.” 나는 가만히 누워 등허리의 통증을 다스린다.
꼬리뼈인지 늑골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확실한 골절이지만, 「철인」의 몸은 금세 회복되어간다.
그 동안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맑고 푸른 날씨, 그 위로 상태창의 문장이 아른거린다.
「 황궁의 어둠 · 악마의 거울 : 1회차 」 ◆ 퀘스트 개요 : 소피엔의 회귀 속, 악마의 거울 탐색 1 회차.
즉 소피엔의 원년(元年)이자, ‘단 한 번도 회귀하지 않은’ 회차.
“······흠.” 이 주변은 황궁의 정원인 듯하나,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지극히 휑한 세상.
다만 일대의 노면을 자세히 살피면······ 사그락— 사그락— 빗질 소리와 함께, 흐트러진 낙엽들이 깔끔하게 정리된다.
타각— 타각— 또한 정원 관목림(灌木林)의 가지치기가 진행 중이다. 잘린 가지들이 허공에 둥실 떠올라 자루에 담긴다.
사람이 할 일이, 제 알아서 벌어지는 것이다.
“······.” 나는 문득 바닥에 떨어진 유리조각을 발견했다. 그 조각을 「염동」으로 들고 허공을 비추었다.
······분명.
나의 세상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레텔. 거 가지치기 끝났나?
이 유리, 즉 ‘거울 저편의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모든 소리도, 이 유리에서 흘러나온다.
─끝났네. 폐하께서는 정갈한 꼴을 좋아하시니, 이렇게 정사각형처럼 만들어놓으면 될 테지?
─그런감? 너무 네모낳지 않아?
황궁의 정원사들이 서로 의논하며 정원을 가다듬고 있다.
찰나, 그 중 한 명이 내 유리조각을 발견한다.
─어? 뭐야. 저기 유리가 둥둥 떠다니잖아?
「염동」으로 움직이는 유리를 가리키며 놀라고, 나는 마법을 해제한다.
“······알겠군.” 나는 쉽게 깨달았다.
이 퀘스트의 매개, 「악마의 거울」은 ‘이 전체’였다.
즉, 나는 「거울 속 세상」에 진입한 것이었다.
따라서 저들의 입장에서 나는 보이지 않고, 내가 뭔가를 움직이면 유령의 소행 따위로 여길 수 밖에 없을 테지.
지금의 나는 이면세계(裏面世界)─ ‘거울 속 존재’에 불과하니.
“그렇다면. 이 안에 악마가 있다.” 그 가정만으로도 심장에 불덩어리가 내려앉은 듯하다.
하아······.
깊은 날숨으로 열기를 뱉어낸 뒤, 나는 정원을 지나 황궁으로 걷는다.
터벅— 터벅— 가로막는 자는 없다. 이 「 1 회차 」 속의 어느 누구도 거울 없이는 나를 볼 수 없고, 나도 그들을 볼 수 없으니.
두 발로 입성한 황궁의 풍경은 미래와 별반 다르지 않다.
바닥의 대리석 타일. 벽면에 일렬로 이어지는 마석 전등. 천장을 가득 수놓은 황실의 상징, 금사자.
나는 천천히 소피엔을 찾아 나선다.
이 퀘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소피엔인데, 그 사실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악마에게도 동일할 테니.
“이곳인가.” 지금 소피엔은 황제가 아닌 ‘전하’일 것이었고, 후계자의 방은 황제의 내밀한 침실과 그리 멀지 않았다.
온갖 보석이 장식처럼 박힌 호화로운 문이었다.
벌컥─ 나는 정직하게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보이지 않았다.
나는 넓은 방의 우측에 놓인 전신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 소피엔이 보였다.
─누가 문을 열었느냐?
그녀는 서늘하게 물었다. 그 대상은 내가 아닌 호위 기사들이었다. 아무렴, 소피엔의 방문을 지키고 있었던 듯했다.
─저희는 전하께서 여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내가?
─예. 죄송합니다. 다만 저희 둘 중 어느 누구도 문을 열지는 않았습니다.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미간을 찌푸린 여덟 살의 소피엔. 그녀는 호위 기사 두 명을 노려보다 문을 닫는다. 그리고는 돌아서면서, 우측의 거울을 바라본다.
그 속에는 내가 있다.
─······!
소피엔의 가녀리고 병악한 몸이 우뚝 굳는다. 아무 말없이 꿀꺽- 침을 삼킨다.
파르르 몸을 떨던 그녀가 가까스로 묻는다.
─······누구냐. 암살자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소피엔이 빽-! 소리 질렀다.
─호위!
기사들을 호출하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거울의 사각으로 물러났다.
─예! 왔습니다!
─여기 불침자가 있었······?
─어디 말씀이십니까?!
그들의 목소리로 상황을 예측한다.
─저 거울······.
─거울 말입니까?
호위기사는 물론 소피엔의 눈에도 침입자 따위는 보이지 않고, 소피엔은 당황한다.
─······거울에 분명 있었는데.
─거울을 부수겠습니다.
─뭐라? ······아니. 됐다. 가라.
─예. 알겠습니다.
두 명의 기사가 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도 소피엔은 멍하니 거울을 응시했다.
나는 다시 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너.
이번에는 소피엔도 호위를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침착하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어딜!
홱─! 소피엔은 내가 답하기도 전에 고개를 꺾었다. 정확히는, 내가 선 위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볼 수 없었고,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뭐지. 너는 어째서 거울 속에만 있는 것이냐?
“······.” ─빌어먹을. 내 두통이 만들어낸 환상인가?
“저는 환상이 아닙니다.”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소피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데 아쉽겠군요. 이래서는, 영원히 서로를 마주볼 수 없으니.” ─아쉬움? 감히 너 따위가 나를 마주볼, 콜록. 콜록. 콜록!
소피엔이 마른 기침을 했다. 그녀가 몸을 추스르는 동안, 나는 넓은 방을 둘러보았다.
전하(殿下)의 내실은 전부가 장려했다. 그 어느 하나도 초라한 것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창밖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 세상의 모든 봄이 있었다.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적 공간이라는 ‘황궁의 정원’.
동서남북으로 사계절이 공존하지만, 그 중에서도 남동(南東)의 정원은 오직 봄[春]만이 영원하다.
흩날리는 꽃가루, 찬연하게 피어오른 봉우리, 노다니는 나비와 벌, 내려앉는 햇볕, 정원 전체를 풍성하게 돋구는 선명한 색감.
─······.
그토록 아름다운 정원과 가장 가까운 소피엔은, 어느새 기침을 멈추고 제 손을 바라본다.
피가 잔뜩 묻어 있다.
각혈을 한 것이다.
─······흐윽.
머지않은 자신의 죽음을 보며 소피엔은 눈물을 글썽인다.
지금의 소피엔은 1 회차, 단 한번도 회귀하지 않은 소피엔이기에, 자신이 회귀하리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따라서, 이번 죽음이 정녕 최후인줄 아는 것이다.
“······반갑습니다 전하. 저는 교수입니다.” ─교수?
“예.” 소피엔이 나를 바라본다. 눈가에 묻은 눈물과,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
─대학이나 마탑의 교수를 말하는 것이냐?
그런 그녀에게······ 나는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말했다.
“예. 마탑의 교수입니다. 앞으로는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요.” * * * 한편, 유크라인 영지의 로할락.
붉은 가넷 모험단은 겸사겸사 로할락 수용소에 방문했다. ‘할락 전갈’의 독을 자그마치 50ml 나 구해달라는 의뢰 때문이었다.
“수용소가 굉장히 넓네요······.” 리아는 수용소의 거대한 면적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원래 스토리에도 저만큼 넓었을까. 정확하게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게. 교수님이 ‘그 테러 사건’ 때문에 작정했나보네~?” 가네샤의 말에 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데큘레인 교수.
아무런 견제 없이 성장한 그의 위용은, 리아도 다수의 언론매체로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다만, 수용소가 로할락에 건립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로할락은 그렇게 지옥같기만한 땅이 아니거든.
충분히 개간이 가능하고, 오히려······.
“붉은 가넷 모험단.” 그때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이제야 보네요?” “엇.” 그쪽을 돌아본 리아는 흠칫 놀랐다.
예리엘. 데큘레인의 현 동생이지만, 혈연이 아닌 남매.
훗날 그 사실을 빌미로 데큘레인에게 협박당하다, 결국에는 데큘레인을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둘 중 하나인 네임드.
그녀가 세상 뾰루퉁한 얼굴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예리엘 씨?” 가네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리엘은 팔짱을 끼고 되물었다.
“제 연락은 왜 안 받는 건데요? 자체적으로 블랙리스트라도 개설한 거예요 뭐예요?” “아~ 그게 말이에요~ 뭐냐면~” 가네샤는 어떻게 말할지 고민했다.
아무렴 네가 데큘레인의 친동생이 아니라 씹었다— 고 말할 수는 없고.
“······어라?” 그때, 칼로스가 의문스런 소리를 내뱉었다.
이때다! 가네샤는 다급히 칼로스의 말에 반응했다.
“왜? 왜 그러니 칼로스?” “방금 저기······.” 칼로스가 하늘을 가리켰다. 붉은 가넷 모험단은 물론, 예리엘과 그녀의 가신들마저 그곳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것도 없단다?” “아냐!” 가네샤의 말에 칼로스가 얼른 대꾸했다. 자신의 말이 부정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열한 살이었다.
“웬······ 이상한 거 한 마리가 날아다녔어.” “새를 잘못본 거 아니니?” “새라기에는 너무 컸는데······.” 칼로스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예리엘은 다시 가네샤를 쏘아붙였다.
“됐고. 할 말이 있는데, 영주성으로 오시지요?” “아, 아하하하. 저희도 그러고 싶지만 임무가 있어서요······.” 가네샤가 쓴웃음을 지었다.
──바로 직후.
“······응? 뭐지?” 가네샤가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레오? 리아? 로스? 너희 뭐니, 왜 여깄니? 나도 왜 여깄지?” 가네샤의 그 아리송한 말에는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예리엘은 다시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상한 소리 말고요. 얼른 따라와요.” “어? 아 그······.” “얼른!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예리엘과 그녀의 가신들은, 붉은 가넷 모험단을 거의 연행하다시피 끌고갔다.
* * * 「 황궁의 어둠 · 악마의 거울 : 1회차 」 ······이곳, ‘거울 속 세계’의 법칙은 꽤나 일반적이다.
기본적으로 시간의 흐름도 동일하다.
거울 저편의 소피엔과, 거울 속의 나.
우리는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다.
어느 누가 더 빠르다거나, 더 느리다거나 하지는 않다.
그렇기에, 이 지하에 들어온지 이틀째 되는 오늘.
─나는 죽어가고 있다.
소피엔이 말했다. 고작 여덟 살 아이의 처연한 고백이었다.
─불치병이다. 대신들은 모두 다 알지. 놈들은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는데······ 예전에는 그 빌어먹을 눈들이 역겨웠지.
거울 속 내 눈을 바라보는 소피엔의 시선을, 나는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전하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네 눈에는 그런 감정이 하나도 없어서 나쁘지 않다. ······허나, 요즘에는 그보다 더 짜증나는 것들이 많아.
“무엇입니까.” ─밤이면 밤마다 웬 모기같은 것들이 꿈 속에 나타나······.
“생김새를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소피엔이 한숨을 내쉬었다.
─박쥐처럼 생겼다. 막 날아다니지. 그런데 또 어떤 때는 파리처럼 생겼고, 또 어떤 때는 괴물처럼 생겼다. 날아다니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대답했다.
“놈들은 악마입니다.” ─악마?
“예.” 날아다니지만, 특정한 형체가 없는 악마.
나는 이 놈의 설정을 너무나도 잘 안다. 김우진의 기억으로도, 유크라인의 혈통적인 본능으로도.
악마─ ‘네시우스(néscĭus)’ 유령처럼 비행하는 놈. ‘대상이 가장 무서워하는 모습’을 취하기에, 정해진 외면이 따로 없어 상대하기 까다롭다.
─악마라······.
놈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이 악마가 ‘제단’과 관련되어 있음은 확실하다. 애당초 이 네시우스는, 스토리 상 제단이 직접 소환한 악마이니.
─흠, 콜록- 콜록-!
소피엔이 기침을 했다. 그 손바닥에 피가 묻었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착잡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그런 걸 어떻게 잘 알지. 하긴 교수라니······ 뭐, 아무튼. 저번 주에는 내 직속 호위 기사를 뽑았다.
나는 소피엔을 바라보았다. 고작 여덟 살에 불과한 그녀는, 지금의 황제 소피엔보다 더 어른 같았다.
─케이론이라는 놈인데······ 아마 그리 오래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나는 이제 곧 죽거든.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지.
소피엔이 검지를 뻗어 나를 가리켰다. 더 정확히는, 거울을 콕 찔렀다.
─아마 네놈과도 이별일 테야. 이 거울에 달라붙은, 신기하고 건방진 교수.
이상하게 말이 통하는 놈. 그 눈빛이 마음에 드는 놈.
그렇게 말하면서 소피엔은 웃었다. 그 입꼬리에서 핏물이 흘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뭐가?
“이별이 아닙니다.” ─뭐?
“전하의 과정에는 항상 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의 마지막에도, 제가 있을 것입니다.” ─······.
소피엔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길 바라지만, 아닐 것이다. 너는 내 빌어먹을 질병이 만들어낸 머리 속 환상이니까. 하하핫.
소피엔이 웃었다.
웃으면서, 각혈했다.
크허어억─!
고통스런 신음이 방 안에 가득찼고, 고작 여덟의 아이가 토해낸 핏물이 거울을 뒤덮었다.
으아아앙······.
어른처럼 행세하던 아이의, 마지막 아이다운 울음.
──그 순간.
이 세상 전체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허공에 떠오르는 상태창을 보았다.
「 1 회차 」 치지직— 거리며 ‘1’이라는 숫자가 흔들리고.
다시 새로운 숫자로 뒤바뀐다.
「 2 회차 」 방금, 소피엔이 죽은 것이었다.
“······폐하.” 순식간에 암전된 세상. 그 전체가 소피엔의 회귀와 동시에 서서히 깨어진다.
마치 거울이 부수어지듯, 쩌저저저적······.
“우리는 다시 만날 것입니다.” 쿵──!
지하실의 문이 닫혔다.
* * * “데큘레인.” 케이론의 목소리가 내 정신을 뒤흔들었다. 눈을 크게 뜬 나는 어서 상황을 파악했다.
지금 이곳은 황궁.
‘진짜 황궁’.
나는 소피엔의 1 회차가 끝난 직후 추방된 것이었다.
“케이론. 며칠의 시간이 흘렀습니까?” 확실히 이해한 나는 되물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만.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듣게.” 그런데, 정작 케이론이 흔치않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혼란이라는 감정마저 일부 존재했다.
“나는 이튿날, 즉 내일에서 돌아왔네.” “······.” 나는 케이론을 바라보았다. 케이론은 본인 스스로도 멋쩍은 얼굴이었다.
“회귀 말씀이십니까.” “······아! 그래. 딱 그 단어가 알맞군. 여태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지 찾고 있었지만, 그 단어가 있었어. 그래. 나는 회귀했네. 단 하루.” 나는 말없이 황궁 지하의 문에 눈을 두었다.
소박한 나무문.
똑똑- 노크하고, 문고리를 뒤흔들어본다.
아무런 변화가 없고, 문도 열리지 않는다.
아직 「 2 회차 」를 시작할 때가 아니라는 거겠지.
“데큘레인. 믿기 힘들겠지만 내 말을 믿어야 하네. 나는 내일 회귀해서 오늘로-” “예. 믿습니다. 아무래도 ‘네시우스’가 이 지하에서 탈출한 듯하군요.” “······네시우스?” “악마의 일종입니다만, 생김새는 각양각색입니다. 혹시, 정체불명의 존재를 베어낸 적 있습니까.” 그러자 케이론이 눈을 부릅떴다.
“그래. 내일 밤에, 내일 밤 하니 이상하지만, 이 지하의 복도에서 뭔가가 튀어나오길래 베었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아마 맞을 겁니다. 놈은 ‘회귀’를 운반하고 있는 중이었을 겁니다.” “회귀를 운반?” “예. 꿀벌이 꽃에서 꿀을 채집하여 벌집에 배달하듯.”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 퀘스트의 진정한 전말(顚末)이 무엇인지.
왜 악마가 소피엔의 기억을 건드리는지. 왜 ‘제단’이 소피엔의 권능을 탐내는지.
“자세히 설명해주게.” 케이론이 물었다. 나는 케이론을 바라보았다.
케이론은, 적어도 이 순간에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인물이었다.
“이것이, 신을 부활시킬 가장 올바른 방법이니까.” “신?” “예. 놈들은 ‘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영(靈 )’이겠지요.” 제단은 분명 알 로스에게 육체를 의뢰했다.
알 로스가 만들었든, 아니면 다른 누구에게 얻었든, 일단 육신을 얻었다면 그 다음은 영혼이다.
나는 말했다.
“평범한 인간은 몸과 영혼이 서로 하나이기에, 영혼이 회귀한다면 몸과 함께 과거로 돌아갑니다. 케이론, 당신처럼요.” 내일의 케이론은 오늘로 회귀했다. 몸과 영혼이 동일한, ‘산 자’이기에.
케이론이 되물었다.
“평범하지 않다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면, 즉 ‘이미 죽은 자’라면, 몸과 영혼이 따로일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위적으로 제작한 육신은 현재에 고정시킨 채, 영혼만을 회귀시킨다면.” 만약 소피엔의 권능(회귀)을 수십, 혹은 수백, 아니 수천년을 모아, 이미 죽은 어떤 ‘영혼’에 주입한다면?
육체를 현재에 고정한 채, ‘영혼’만을 ‘살아있던 시절’로 회귀시킨다면?
“그는 분명히 되살아날 것입니다.” 메인 퀘스트의 가장 중요한 파트.
「신의 부활」 이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데 나는 왜 회귀한 것인가? 폐하의 힘이 밖으로 세어나간 것인가?” 그 말을 들어보니, 케이론 역시 소피엔의 회귀를 알고 있었던 듯했다.
“아니요. 당신이 내일 밤의 ‘네시우스’를 베어낸 탓입니다. 놈이 운반하던 ‘회귀’가 당신에게로 흘러든 것이지요. 말씀드렸다시피, 놈은 꿀벌에 불과합니다. 죽은 꿀벌이 흘린 꿀의 일부를 당신이 뒤집어 쓴 것입니다.” “아하.” 케이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30 대 후반의 기사치고는 꽤 깜찍한 반응이었다.
나는 지하실의 나무문을 바라보았다.
“케이론. 이제부터는 급박합니다. 이 문이 다시 열리면, 저에게 한시라도 빨리 연락을 주십시오. 또한, 네시우스를 마주친다면, 지금처럼 계속 베어내면 됩니다. 연락은 이것으로.” 나는 그에게 「전서지」를 내밀었다.
“그러도록 하지.” 케이론은 결연한 얼굴로 끄덕였다.
회귀의 이력. (2) “······.” 소피엔은 느릿느릿 눈을 떴다.
몸은 여전히 나른했지만, 조금 더 기묘한 감각이 뇌리를 휘감았다.
꽤 오래전의 꿈을······ 꽤 오랫동안 꾼 것 같았다.
“폐하.” “흠······?” 황제는 눈을 들어 자신을 부르는 기사를 보았다. 케이론이 석상처럼 서 있었다.
“깨어나셨습니까.” “······그래. 왠지 긴 꿈을 꾼 듯한 기분이니라.” “그렇습니까.” “그 건방진 교수는.” “돌아갔습니다.” 간결히 답한 케이론은 데큘레인에 대해 생각했다.
황제의 가장 중대한 비밀, ‘회귀’.
데큘레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돌아갔다?” “예. 교습이 끝났으니 돌아갔습니다.” 이튿날, 즉 내일의 데큘레인은 말했다. 지하 「악마의 거울」에 소피엔의 ‘회귀 이력’이 있었노라고.
케이론은 그 말을 들은 뒤 악마─네시우스를 베어냈고, 오늘로 회귀했다.
“나른함은 좀 괜찮으십니까.” 다만 아직 소피엔에게는 비밀이었다. 데큘레인의 부탁이었다.
소피엔을 위한 일이었기에, 케이론은 받아들였다.
“좀 낫다만······ 여전하다. 잠에 들 때마다······ 긴 꿈을 꾼다. 왜인지 옛날로 돌아가는 느낌이지.” 소피엔은 감상에 젖은 듯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꿈속의 생각을, 기억을 되살리려.
그러나 그 어렴풋한 장면은 더듬으려 할수록 더욱 깊이 가라앉는다. 마치 호숫가에 빠뜨린 작은 조약돌처럼······.
이윽고, 그녀의 고즈넉한 눈이 케이론에게 옮겨간다.
“케이론.” “예.” “너는······.” 불현듯 일어난 제 희한한 마음을 자문하듯, 소피엔은 기사에게 묻는다.
“······네 일생이 만족스러운가?” 기사 케이론.
그는 열 살의 어린 나이에 황실의 간택을 받았다.
말이 간택이었지, 그 삶적인 측면으로는 황궁의 가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륙 각지에서 선별된 100 여 명의 어린 재능. 그들은 황궁에서 자라나며, 아니 세뇌되며, 오직 황족만을 위한 기사로 길러진 것이다.
“네 외모와 실력이라면, 지금의 허울뿐인 명예 따위보다, 훨씬 더 화려한 삶을 취할 수 있었을 텐데.” 5 대 5 가르마는 조금 거슬리긴 하나, 케이론의 외모는 대단히 출중하다.
황궁 시녀는 물론 환관에게도 연모와 흠모의 대상일 정도로.
“그저, 조금 모자란 척했으면 황실이 알아서 내쫓았을 것이다.” “······.” 케이론은 잠자코 소피엔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에게는 적잖은 인내가 필요했다.
제 일생의 전부이자 지상과제(至上課題)인 황제 본인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평소보다도 무척 배려가 부족한 말이었으니.
“······폐하. 동태 눈깔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저 케이론은 언제나 폐하의 눈이 그 썩은 생선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짐이 직접 네 눈깔을 파줄까.” “다만, 폐하께서는 언젠가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죽어도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케이론에게는 말의 행간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까탈스럽고 예민한 소피엔을 섬기며 길러낸 눈치였다.
소피엔이 입술을 비틀었다.
“흥. 그저 네 의욕을 돋우려는 말이었다.” “아닌 것을 압니다.” 소피엔의 그 말은 일견 평범하지만, 그녀의 기적적인 생애와 연관을 지으면, 확실한 뜻으로 탈바꿈한다.
“언젠가, 제가 폐하의 호위에 실패했을 것입니다. 그 빈도는 아마 한 번이 아닐 것입니다.” “······.” “폐하. 저는 일관적인 기사이길 바랍니다. 제 자신이 곧 신념이길 바랍니다.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과거에도, 불확실한 미래에도, 저는 기사로서 맹세할 것입니다.” 소피엔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폐하의 시간이 바뀌어도 저는 항상 일정할 것입니다. 일개 메트로놈이 그러하듯이.” 황제의 기사는 주군의 나태가 어서 멎길 바란다.
숨 쉬는 것이 귀찮아서, 정말로 귀찮아서 질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에.
“무능한 기사는 폐하보다 먼저 죽길 원합니다.” “······흥. 머저리구나. 짐보다 먼저 죽는 건 네 임무가 아니느니라.” 소피엔은 짐짓 비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한 듯 비척비척 황궁의 복도를 거닐었다. 케이론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곧, 기사의 동상이 일렬로 기립한 황궁의 홀에 닿았다.
“폐하. 어디를 가십니까.” “데큘레인의 강의를 듣겠느니라.” “강의는 아직 이틀이나 남았습니다.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설마 내가 그러겠느냐.” 우뚝 멈춘 소피엔이 케이론을 돌아보았다.
“고양이를 찾으러 가는 것이니라. 그 붉은 녀석이 내 외출용 빙의체인데, 가끔 보이지 않으면 이 기사 동상에 있더구나.” 말하기 무섭게, 미야옹—!
어떤 동상의 어깨에서 붉은털 고양이가 울었다. 녀석은 폴짝 뛰어올라 케이론의 머리 위에 앉았다.
미야옹—!
그 부르짖음에 대답하듯 케이론이 말했다.
“고양이는 본능적으로 가장 안전한 장소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게 네 대갈통이구나.” “······.” * * * 유크라인 저택의 별채.
늦은 밤.
어쩌면 새벽.
아니, 또 어쩌면 이른 아침.
사그락- 사그락- 나는 강의를 작성하고 있다.
무아지경이라는 것인지, 시간의 흐름은 이미 머릿속에 없다.
사그락- 사그락- 벽면에, 허공에 끊임없이 기록되어가는 만년필의 자취. 선과 선이 이루는 복잡미묘한 도형.
중앙에서 외곽으로, 그 외곽에서도 가히 무한하게 번지는, 기하학적인 법진과 술식.
나는 「염동」으로 펜대를 움직이고 있다.
[ 흙과 불의 정순한 활용 : 조작 계열 ] 격주마다 1 회, 한 학기에 고작 4 회뿐인 강의. 그러나 나는 이 전체의 완성도가 적어도 ‘마일스톤(Milestone)’ 등급에는 도달하도록 저술할 것이다.
사그락- 사그락- ‘마일스톤’이란 단어 그대로 ‘이정표’다.
부유섬이 평가하길 ‘세기의 발견, 혹은 지식’에만 주어지는 영예.
고작 강의 하나가 마일스톤으로 인정받을는지는 모르나, 도전할 만한 일이다.
이 또한 퀘스트 업적으로 취급될 테니.
사그락- 사그락- 물론 이 세계관이 천 년간 쌓아 올린 마법의 역사는, 고작 1 년 차인 내가 이끌 만큼 만만하지 않다.
그렇기에, 준비한 것이 있다.
“······충분히 가능하다.” 「특성」의 마법화.
풀어 말하면, 내 「이해력」으로 해석한 「특성」을 ‘마법술식화’하는 것.
즉, 「특성」의 전체 혹은 일부를 마법적으로 관측한 뒤, 기존의 마법 술식과 결합하여 숫제 새로운 마법으로 변용하는 것.
따라서 지금 나는, 마법에 「철인」의 속성을 일부 융합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마법이 얻게 될 성질은, ‘지치지 않는다’.
내 이론으로 구성한 마법의 불은 스러지지 않을 것이고, 흙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흙과 불의 ‘정순한’ 활용인 것이다.
끄드드드득······.
다만 저작의 과정은 대단히 고통스럽다. 마치 골수를 추출하듯, 내 몸속 「 철인」의 일부를 통째로 뜯어내는 듯하다.
위이이이잉── 고막에 이명이 울리고 골이 뒤흔들리지만, 엄살 부릴 시간은 없다.
“······.” 미래에서 온 이프린 덕분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황제 소피엔에게 악마와 제단이 달라붙고, 본격적인 메인 퀘스트로 나아가는 요즈음.
나 혼자 강해지는 것만으로는 그들을 막을 수 없음을.
“······이제.” 그렇기에, 나는 지금처럼 「이해력」을 활용할 것이다.
이 「특성」을 가르치는 데 할애할 것이다.
데큘레인에게는 한계가 확실하지만, 내가 ‘키울 수 있는’ 선한 재능은 대륙에 산적하다. 고작 한 마디의 조언으로도 성장할 네임드가 많다.
비록 악당의 운명을 타고난지라 주인공으로 바로 설 수는 없으나, 어두운 조력자 따위는 되어줄 수 있을 터······.
툭─!
그때 만년필이 부러졌다.
한 자루가 더, 필요하지는 않았다.
“······.” 나는 말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부족했다.
두 걸음 물러섰다.
여전히 부족했다.
그렇게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
“······되었다.” 별채의 정중앙에 서자 비로소 보이는 결과물.
공간 전체에 가득한 나의 마법진.
커다란 칠판에서 발원한 기록이, 건물의 내벽을 타고도 모자라, 허공으로 번지며 외계의 천체처럼 수놓아진다.
그 한복판에서,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내쉰다.
“······.” 내 이론이, 살아서 움직인다.
내 마법이, 자신의 가치를 주장한다.
아주 미약할지라도, 세계의 진리에 한 발자국 다가선 듯한 충일(充溢).
······묘한 기분이다.
나는 눈을 떴다.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마력은 거의 다 소모되었으나, 부유섬에 계획서를 제출하면서부터 준비했던 ‘강의’를, 근 한 달 만에 완성했다 “초고와 최종본의 차이인가.” 나만 아는 이론을 타인에게 전달하기란 힘들다.
그렇기에, 기울인 노력과 마력은 초고의 수십 배.
“······너무 거대하긴 하군.” 문득 헛웃음이 흐른다. 별채를 끝없이 뒤덮은 술식. 이 막대한 크기는 내 머릿속에도 담기 힘들다만, 어차피 뭐.
강사의 몫은 수업 전달이다.
나머지 이해는 학생들 몫이고.
이 전부를 아주 조금도 이해 못할 재능이라면······ 냉정하게 버리도록 하지. 퀘스트에 도움이 될 녀석이 아니라는 뜻이니.
“남은 건······.” 나는 「육안」으로 메모라이즈 현황을 보았다.
◆ 메모라이즈 현황 : 초·중급 염동 (79%) ┏초·중급 화력 통제 (53%) ┣초·중급 유체 조작 (48%) ┗금속 강화 (89%) 아직도, 빌어먹을 초·중급이다. 중급이 얼마나 어려운 경지이기에 이따위인지.
「염동」의 메모라이즈가 대단히 더디다.
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아침을 알리는 목소리.
─아침 커피입니다.
율리였다.
나는 잠자코 그 문을 바라보았다.
“흠······.” 조금 뒤늦게, 좋은 훈련 방법이 떠올랐다.
─교수님. 커피입니다. 똑똑.
남은 마력은 「300」 정도.
그러나 「염동」에 소모되는 마력은 극히 적으니,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나는 문을 열었다.
* 챙챙챙챙─ 격렬한 마찰음과 피어오르는 불씨.
검이 움직이며 목강철을 튕겨낸다. 강철은 검사의 빈틈을 파고들지만, 유려한 검술은 접근조차 허용치 않는다.
쾌속의 칼날은 꽃잎을 잘라내듯 부드럽게 춤춘다.
그 검로에 닿은 목강철이 휘어진다. 궤도를 잃고 추락한다. 스무 자루의 강철 중, 어느 무엇 하나 그녀에게 생채기조차 입히지 못한다.
챙챙─ 율리는 마력만 무리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아직은’ 괜찮은 몸이었기에, 썩 좋은 실전 상대였다.
「염동」의 힘을 조절할 필요도 없었다. 아직 내 마법은 율리를 파훼할 기술을 갖추지 못했으니.
챙───!
마지막, 날카로운 금속음. 목강철 한 자루가 두 동강 났고, 나는 마력이 정확히 ‘1’ 남았을 때 대련을 끊었다.
「염동」의 숙련도도 정확히 1%가 올랐다.
“율리.” “예.” “실력이 좋군.” 그러자 율리는 씩 웃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이제 겨울이 머지않았잖습니까. 겨울은 프하이르덴의 계절입니다.” “아직 9 월이다.” “······교수님도 강해지셨습니다.” “그래. 이제 호위 따위는 필요 없지.” 율리는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아, 참.” 그리고는 품 안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모험가 소포가 교수님에게 왔습니다.” 나는 그 편지를 받았다. 봉투를 뜯자마자 보이는 내용은 간결했다.
[ 알 로스다. 제단이 육체를 구했다. 내가 만든 것은 아니다. ] 그 한 줄, 읽자마자 불에 타올랐다.
화르르륵──!
율리가 물었다.
“무엇입니까?” “알 필요 없다.” 「신의 영혼」은 실존한다. 제단 놈들은 그 영혼으로 신의 부활을 도모하고 있다.
피할 수 없는 「메인 퀘스트」이므로 그 진행 자체를 막지는 못할 터이나, 지금 시기는 일러도 너무 이르다.
이 추세라면 고작 반년.
퀘스트의 속도를 최대한 지연시키려면, 무엇보다 ‘네시우스’ 추살이 최우선이다.
“그렇습니까.” “······나중에 알려주지.” “개인적인 일이라면 괜찮습니다.” 다행히 소악마에 불과한 네시우스는 무력이 강한 타입이 아니니, 웬만한 수준의 네임드라면 쉽게 처치할 만하다.
그러나 하늘을 날아다니고, 그 형체가 사람마다 각자 다르게 보이는 특성 탓에······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입으로 소리를 냈다.
우리는 동시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안녕 율리~?” 유세핀이었다.
“······.” 돌연 등장한 그녀의 얼굴을, 나는 지그시 바라보았다.
유세핀.
그녀는 이 세상의 모든 음지에 ‘그림자’를 퍼뜨릴 수 있는 인간이다. 그 그림자는 전부가 유세핀 ‘한 명’이며, 따라서 그녀의 ‘그림자’에게 네시우스의 외면은 일정하다.
더불어, 네시우스의 방어기제는 해당 인간이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모습’을 껍데기로 취하는 것이나, 그녀에게 공포 따위의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마보다 더 괴이(怪異)한 소시오패스이기에.
종합하자면, 그녀는 네시우스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네임드인 것이다······.
“어머나~ 뭘 그렇게 바라보시나요?” 유세핀이 방긋 웃었다. 율리가 입술을 꾸겼다.
나는 말했다.
“율리. 잠시 자리를 비키지.” “······예.” 율리는 별말 없이 물러났다. 율리가 충분히 멀어지자마자 나는 유세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내가 먼저 닿기도 전에, 성큼 걸어온 그녀가 내 귓가에 속삭인다.
─데큘레인. 당신이 베론을 죽였어요.
그 단정적인 말과 동시에 바람이 불었다.
휘이이이잉······.
유세핀의 머리카락이 목 언저리를 간질였다. 서늘한 기운이 뒷목을 훑었다.
나는 유세핀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미소 짓듯 말을 이었다.
─베론이 누구인지 벌써 잊지는 않았겠지요? 제 동생이 아끼던 기사 말예요.
* * * “······!” 이프린은 급히 눈을 떴다.
어느새 아침이었고, 자신은 조교 연구실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 멍하니 갸웃거렸다.
눈꺼풀만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꿈인가?” 이상한 일이다.
되게 기묘하고 기이하다.
분명 하루 온종일 귀신에게 쫓기다가······ 잠깐 눈을 뜨니까······ 책상 위라고?
“······진짜 꿈꿨나?” 이프린은 중얼거리면서 시계를 보았다.
수요일 오전 11 시 55 분.
“어?!” 몸이 스프링처럼 들썩였다.
뭔진 모르겠지만, 오늘은 데큘레인의 강의가 있는 날.
늦으면 죽음이다!
“후우, 후우.” 이프린은 얼른 가방부터 메고 연구실을 나선다.
데큘레인의 ‘고급’ 강의는 마탑의 80 층, 즉 특수층에서 진행된다.
띵─!
“잠까마뇨! 저도 타요!” 가까스로 엘리베이터에 오른 이프린은 거울로 용모를 점검한다.
“고급 강의라······ 물론 도중에 고급 딱지가 떼일 수도 있겠지만······.” 통통 부은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피식거린다. 당장 강의 내용이 별로라 판명되면 고급에서 중급으로 내려갈 것이고, 80 층 자리도 박탈이다.
부유섬에서도 ‘고급’ 등급은 유지가 엄청 힘들다던데.
이프린은 궁금하다. 데큘레인 교수가 언제까지 고급을 유지할지.
띵─!
그때 도착한 80 층.
이프린은 무심코 내렸다가 크게 놀랐다.
마탑의 특수층답게 풍경이 웬 스타디움이었다.
공간은 넓었고, 층고가 어마어마했다. 천장이 끝도 없었다.
“와······.” 사람도 많았다. 그중에서 솔다 등위는 자신과 드렌트, 그리고 ‘레올’이라는 선배뿐인 것 같았다.
이외의 면면은 크레토 대군, 고양이, 황궁 마법사, 중독자 아스탈, 교수 루이나, 렐린, 심지어 이 수업 때문에 잠시 복학한 로제리오······.
무수한 유명인이 강의실의 좌석에 앉아 있었다.
“이프린. 여, 여기.” 드렌트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 그는 사뭇 위세에 눌린 듯했다. 이프린도 로브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자리에 앉았다.
바로 옆자리가 루이나였다.
“솔다 이프린. 반가워요?” “네, 네 교수님······.” 그때, 정오가 되었다.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데큘레인이 80 층에 도착하는 순간이 정오였다.
뚜벅─ 뚜벅─ 1 초의 오차도 없이 등장한 그가, 규칙적인 보폭으로 걷는다.
뚜벅─ 뚜벅─ 고등위의 마법사들에게도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세상 그 누구보다 위풍당당한 자태. 무결점의 정장 차림.
이윽고, 교탁에 선 그는 평범한 학생 대하듯 말했다.
“반갑다.” 이프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순간 공간의 분위기가 돌변한 탓이었다.
“우선, 강의에 관한 사전 공지를 하겠다. 이곳은 마탑이고 내 강의이며, 따라서 너희의 신분은 모두 수강생이다. 인지하도록.” 무조건 반말을 사용하겠다는 뜻이었다.
“또한 수업 시간은 2 주에 1 회 4 시간이나, 수업은 내가 언제든 조기에 종료할 수 있다.” 데큘레인은 품 안의 전서지─ 즉 케이론에게 연통이 오면 곧바로 수업을 끊고 달려갈 작정이었다.
“여기까지, 불만 있나.” “있습니다.” “여기도요.”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었다. 총 네 명이었다.
각각 에테르 ‘로제리오’, 중독자 ‘아스탈’, 이프린의 선배 ‘로엘’, 대군 ‘크레토’.
먼저 로제리오가 말했다.
“반말은 상관없다만, 수업을 도중에 끊을 수도 있다는 건 조금 아니지 않나~” 부유섬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이자 마법 저널리스트, 아스탈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부유섬에서 파견온 저희는 수업을 올바르게 판단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프린은 그를 보자마자 숨을 들이켰다. 중독자 아스탈의 위상과 명성만 듣고 마냥 노인일 줄 알았는데, 무지 잘생긴 미청년이었다.
“허나 수업이 도중에 끊겨서는 그 판단이 어렵습니다. 그 점은 재고 부탁드립니다.” 이프린은 새삼 놀랐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다 괜찮은데, 수업이 중간에 끊기는 게 싫다는 말이지.
역시 대단한 학구열이다.
“그렇다면.” 그러자 데큘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그럴 수 있다는 듯이······ 부드럽게 손짓했다.
“나가라.”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손을 든 네 명의 의자가 드르륵 움직였다. 「염동」 의 에스코트였다.
“불만이라면, 저 문으로 나가면 된다.” “······.” “······.” “안 나가나?” 넷 중 그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데큘레인은 흥- 비웃듯 끄덕였다 “좋다. 불만이 없다면, 강의 시작 전에 몇 마디를 하지.” 그가 교탁에 서류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안경을 착용했다.
“우선, 강의명은 [ 흙과 불의 정순한 활용 : 조작 계열 ]이다.” 수강생들 일부는 마법 노트를 꺼냈고, 일부는 제 머리를 신뢰하는 듯 팔짱만 꼈다.
데큘레인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첫 세 번의 수업 동안, 나는 이 ‘정순한 활용’의 의미를 가르칠 것이다.” 정순한 활용. 이프린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아리송하긴 했었다.
활용이면 활용이지 정순한 활용은 또 뭐야.
“정순한 활용이 대저 무엇인지. 평범한 활용과 무엇이 다른지. 너희는 그 사실을 깨닫거나,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프린은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나 나는 보모가 아니다. 따라올 수 없다면, 알아서 포기하도록.” 그리고는 생각하는 것이다.
보모가 아니라니.
따라올 수 없으면 포기하라니.
이 자리에는 마탑의 학생뿐만 아니라 황궁 마법사, 부유섬에서 온 중독자도 있는데, 너무 오만한 말이 아닌가······.
“지금부터 시작하겠다.” 딱─!
데큘레인이 손가락을 튕겼다.
회귀의 이력. (3) 딱─!
데큘레인이 손가락을 튕겼다. 강의실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리고 이프린은 왜 이 장소가 ‘특수층’인지 알게 되었다.
“와.” 천장이 밤하늘로 변한 것이다. 별이 총총한 도화지처럼, 맑은 검정색.
“진실로 정순한 마법은······.” 데큘레인은 강의실의 면면을 훑으며 말했다.
“결코 불순물이 뒤섞이지 않고 순수하다. 같은 마법이라도, 격이 다른 마법처럼 단단하고 선명하지. 「철인」의 몸처럼.” 풋- 그때 어떤 사람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프린은 그를 보았다. 황궁 출신 마법사였다.
“너.” 역시 놓칠 리 없지.
데큘레인이 그를 가리켰다. 그는 약간 비스듬한 자세로 데큘레인을 마주했다.
“이름이.” “······론입니다.” “불을 일으키도록.” 황궁 마법사 ‘론’이 불을 만들었다. 그저 평범한 불, 「점화」였다.
“작은 불이다. 한없이 범상하지.” “······.” 론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데큘레인은 그의 불을 「육안」으로 보았다.
“정제되지 않은 불이기에, 고작 뜨거울 뿐이다. 일개 모닥불에 불과하지.
정순하기는 커녕 더럽다.” 신비할 것도 없고, 특이할 것도 없는 고작 4 획에 불과한 마법진.
“······그러나.” 데큘레인은 그 ‘4 획’의 술식에 간섭했다.
자신의 지식, 즉 「철인」의 성질을 일부 부여한 것이었다.
화륵───!
론의 손아귀에서 타닥거리던 불이 화염으로 타올랐다. 그 온기가 순식간에 강의실을 잠식했다.
“······.” 이프린을 비롯한 모두는 멍하니 그 불길을 보았다. 정확히는 ‘색(色)’을 관찰했다.
한낱 불덩이 따위가 아니었다. 화마의 결이 찬란했고, 대단히 농밀한 열기였다.
“정순하게 타오르는 불이다.” 마법의 출력은 투입에 의하여 결정된다. 투입이 클수록 출력이 증대하고, 투입이 멎으면 마법 자체가 스러진다.
그러나 이 초고열의 화염은, 마치 백적(白赤)색 보석처럼, 그 어떤 투입 없이도 실재하고 있다······.
“론.” “예, 예.” 데큘레인이 황궁 마법사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그는 놀란 듯 허리를 바로 세웠다.
“「불」이라는 평범한 원소가, 술자가 부여한 어떤 성질에 의하여 성장하는 것. 고도의 순결을 품어내는 것. 그게 바로 ‘정순한 활용’의 뜻이다.” 론은 자신의 불씨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딱—!
데큘레인이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 다수의 별빛이 생겨났다.
“원소의 정수(精髓). 순수한 내력(內力). 내가 이 강의에서 가르칠 요체다.
잘 보도록.” 말을 마친 그가 필기를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천체와 공명하는 80 층의 별빛. 그 섬광이 술식과 연산과 법진을 허공에 수놓았다.
이프린은 얼른 노트에 끄적였다.
그런데, 작은 종이에 담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어마어마했다.
아니, 규모는 그렇다치더라도······.
“교수님. 이게 마법 술식이 맞나요?” 이프린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만큼, 데큘레인의 술식은 평생 처음보는 형태였다.
그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니다. 회로라기에도 모호하고, 법진이라기에도 기묘하지. 이전에는 없던, 마법을 구성하는 새로운 요소다. 나는 이 근원을 ‘특질(特質)’이라 명명하려한다.” 그쯤 되자 로제리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 뿐만 아니라, 제 두뇌를 믿고 필기구를 지참하지 않은 마법사들 전부가 분주했다.
“이 ‘특질’은, 적당히 조정만 한다면 그 어떤 마법에도 적용이 가능하지. ” 마치 게임의 「특성」이 그러하듯.
딱—!
데큘레인이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 흙이 구(球)의 형상으로 응집되었다.
그 고운 입자가 행성처럼 부유했다. 표면에 푸른 바다가 생겨났고, 갈색 대륙이 떠올랐다.
지구(地球)였다.
“우와······.” 넉 놓고 감탄하는 이프린. 그러나 데큘레인이 손아귀를 확 움켜쥐자, 그 마법은 신기루처럼 흩어진다.
“이또한 일부에 불과하다. 내 ‘특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론이 필요하지.
그리고 원론은, 이론이다.” 데큘레인이 「염동」으로 별빛을 움직였다.
“이제부터가 본론인 것이다.” 어둠 속에서, 한 줄 한 줄.
그가 발명한 ‘새로운 마법’이 작성되어간다.
* * * ······한편, 유세핀은 오늘 아침의 일을 회상한다.
—당신이 베론을 죽였어요.
유세핀은 율리가 슬퍼한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광기 어린 집착과 집념으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새로이 ‘각성’한 것이었다.
—다 알아요, 저는.
그녀는 제 그림자를 단애절벽의 밑바닥에 뻗었다.
수천 미터의 고도, 수만 헥타르의 면적을 수색했고, 베론의 시체를 수습했다. 그의 가슴을 꿰뚫은 강철의 형태를 파악했다.
─그래서 궁금해요.
데큘레인이 왜 굳이 베론을 죽였을까?
그 동기가 뭐였을까?
—율리에게 고작 미소만을 원하던 당신의 모습은 거짓이 아니었어요.
율리가 아끼던 부하인 베론이 거슬려서?
아니면, 율리와 베론이 그렇고 그런 사이여서?
미칠 듯 질투가 나서?
에이~ 설마.
유세핀은 바보 천치가 아니다.
—베론이 당신을 죽이려 했겠죠? 당신은 율리가 상처받을까 그 사실을 숨겼겠죠?
당연히, 사랑에 눈이 먼 베론이 먼저 살심을 품었고, 데큘레인은 정당방위한 것이겠지.
—······.
─교수님?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게 어때요?
그때까지도 데큘레인의 안색에는 변화가 없었다. 교수는 귀족의 기품을 유지했다.
—······유세핀.
—응~?
유세핀이 방긋 웃었다. 데큘레인은 그녀를 굽어보며 말을 이었다.
—부탁이 있다.
—에이. 이 사실은 당연히 율리에게 알리지 않을 거예- —나는 프렌하임 기사단을 무너트릴 것이다.
—······?
유세핀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만큼, 예상을 아득히 초월한 말이었다.
—방법은 많다. 율리는 청렴하지만, 그 소속 기사 중 몇몇은 지극히 소시민적이니. 암흑가의 돈을 세탁하여 쥐어준다거나, 뇌물을 준다거나······.
—그게 어떻게 부탁이 돼요? 제가 두고 볼 것 같나요?
데큘레인은 말없이 유세핀을 응시했다. 유세핀은 그의 시선에 담긴 감정을 단번에 파악했다.
—기사단이 무너진다면······ 율리는 나를 미워할 테지.
그렇기에, 오히려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직 ‘애정’ 뿐이었으니.
—······그럼요. 아마도 죽일 만큼. 하지만 죽이지는 못할 거예요. 그런 아이니까.
유세핀의 그 말. 그러나 이어지는 데큘레인의 대답은 이상했다.
—아니.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
—유세핀, 네가 도와라. 율리가 나를 ‘죽일 수 있을 만큼’ 미워하도록.
유세핀은 입을 헤 벌린다.
이토록 경우 없는 경우는 처음인지라.
이 사람은 혹시 자살을 원하는 건지.
—왜?
유세핀은 결국 순진무구한 의문을 토했다. 그러자 데큘레인은 제 확신으로 답했다.
단 한 마디의 문장이었다.
—내가 율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
—나는 베론을 질투하여 살해했고, 율리를 독점하기 위해 기사단을 무너뜨리려 했으며, 여태 바뀐 것처럼 보인 모습은 모두 연기였다······ ······시나리오는 그 쯤이면 될 것이다. 시기는 추후 공지하지.
귓가에는 그의 목소리가 여전하지만, 유세핀은 가만히 눈을 뜬다.
다시 현재로 돌아온 지금은, 마탑 근처의 카페.
“후음······.” 유세핀은 턱에 손을 괸 채 율리를 본다. 율리는 그 시선이 조금 불편한 듯 입술을 꾸물거리며 찻잔을 홀짝인다.
유세핀이 물었다.
“우리 율리~ 안 궁금하니?”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데큘레인 교수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 율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었다.
“아직은 비밀이지만, 율리. 이거 한 마디만 할게. 그 교수를 너무 믿지는 마렴.” 유세핀은 일단은 데큘레인의 시나리오에 동참하기로 했다.
율리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지금 제 혈관에는 ‘호기심’이라는 장난기가 미친 듯 질주하고 있으니.
“데큘레인 교수는 가면을 쓰고 있-” “이간질은 그만두십시오.” 율리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유세핀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렴~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텐데. 그때 후회하면 되지, 난 이만~” “어딜 가십니까.” “음~ 그 교수님한테 부탁받은게 꽤 많거든. 앞으로 바쁠지도 몰라.” 네시우스인지 뭔지하는 악마의 색출.
데큘레인은 유세핀에게 그 연합 또한 요청했고, 유세핀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뭐가 되었든, 재미있을 것 같았거든.
“언니는 이제 갈게요~ 잘 있어, 우리 율리~” * * * 휘이이이잉······ 열풍이 밀려드는 유크라인 영주성의 옥상.
예리엘은 가네샤와 함께 그 난간에 걸터앉았다.
후덥진 바람도 불쾌하지 않았고, 오히려 온화했다.
“끄으으응~ 한여름에도 이런 날씨라니. 하데카인은 역시 터가 좋네요.
나중에 은퇴하면 여기서 살래요.” 가네샤가 기지개를 켜면서 감탄했다. 예리엘은 그녀를 흘겨보았다.
“됐고요. 아무튼 오늘, 이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거대쥐를 잡았다고요?” “네네~ 저도 모르게요. 제가 세상에서 쥐를 가장 싫어하거든요? 그런데 그 쥐가 몹시 거대한 데다가, 날아다닌다? 우 쒜엣······ 그래서 영주성의 첨탑이랑 같이 박살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이틀 전으로 회귀한 거예요.” 가네샤가 생긋 웃었다. 그녀의 아리송한 말에 예리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뭔 소린지······ 어쨌든. 저, 이제 다 알았어요.” “후훗.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 에휴. 됐다. 말해 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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