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17
각각 알렌과 드렌트의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객실 문을 열었다.
나로서는 추후 생각할 것들이 많았다. 당장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고급 특성 카탈로그」부터······.
“교수님. 오늘 기억은 로크랄렌 밖으로 나가면 잊어버리나요?”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이프린이 물었다.
“정신력에 따라 다르지만, 너에게는 아마 잔상처럼 남을 것이다. 완전히 잊진 않아도, 세세히 떠올릴 수는 없을 테지.” “······.” 이프린은 조금 섭섭한 얼굴로 끄덕였다.
띵— 엘리베이터가 1 층에 닿았다.
호텔 로비에는 오늘 로크랄렌을 떠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나에게 인사했지만, 굳이 대꾸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우리는 곧장 호텔 밖으로 나와 길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조교수님. 무겁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같은 팀인데요.” 몸이 불편한 드렌트와, 그를 부축하는 알렌의 대화 소리.
“제가 바보같이 기절을 해버려서······ 고작 한 마디 한 걸로 기절할 줄은.” “그러게요? 그건 좀 신기했어요.” 문득, 그들의 말이 내 생각을 자극한다.
뇌에서 발원한 어떤 불씨의 흐름을 느낀다.
“교수님! 교수님──!” 뒤편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학회장 로크랄렌이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프린은 그를 보자마자 볼을 부풀리고 팔짱을 꼈다. 나도 가만히 노려보았다.
“하하하하, 벌써 가십니까? 만찬이라도 하고 가시지요. 곧 준비가 됩니다만.” 로크랄렌은 자신이 카이데자이트의 숙주였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필요없다.” “아~ 예. 그래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드리려 왔습니다. 덕분에 학회가 온전하게 되었으니.” “쳇. 온전하긴 무슨.” 이프린이 투덜거렸다. 그 퉁명스런 얼굴을 힐끔거린 로크랄렌은, 이내 뒤에 선 드렌트를 가리켰다.
“하하. 이쪽은 처음 보는군요?” “전에 말했던, 한 마디 건넨 걸로 기절한 마법사다.” “아~ 아쉽게 됐습니다. 그런데, 정말 많이 피곤하셨나봅니다? 한마디로 기절하다니.” “······죄송합니다.” 드렌트가 고개를 푹 숙이고, 로크랄렌은 쓰게 웃던 순간.
“······잠깐.” 내 머릿속의 불씨가 점화되었다. 자그맣게 피어오른 그 화기는, 순식간에 섬광으로 타올랐다.
“로크랄렌.” “예?” “너는 말했었지. 고작 한 마디 나눈 것으로 기절할 리가 없다고.” “예. 사례로는 그렇습니다만. 아무리 정신력이 낮다 하더라도 한 마디로는······.” “허나 이 놈은 기절했다.” 나는 드렌트를 가리켰다. 드렌트가 죄스러운 듯 제 얼굴을 감싸쥐었다.
“음. 당시에 피곤했-” “다른 조건을 말해라.” “예? 조건 말입니까?” “정녕 이 놈이 기절했다면, 본인보다는 그 ‘상대 마법사’에게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글쎄요.” 로크랄렌은 턱을 만지며 고민하다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마력보다는 역시······ 정신력의 차이겠지요? 정신력이 무지막지하게 강한 미래의 마법사와 대화를 나눴거나······ 그런데 아마 본인의 피곤함이 더욱 컸을 겁니다.” 그것으로 되었다.
“그렇군.” 나는 내가, 아니 우리가 로크랄렌에 처음 들어왔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날.
행인처럼 우리 곁을 지나간 로브 차림의 마법사.
드렌트가 무의식적으로 인사를 건넨 그 사람.
그리고······.
[ 그래서, 끝맺지도 못할 정보 한 줄, 고작 사실 따위를 전달할 바에야, 단 한 마디.
제가 교수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 부자연스럽게 끊긴 이프린의 편지.
“교수님? 왜 그러십니까?” 나는 편지를 쓰는 이프린을 상상한다.
자그마한 쪽지에 한 줄 한 줄, 자신의 마음을 꾹꾹 눌러담는 녀석.
문장을 궁리하고, 자신의 시간을 고민한던 그 어느 순간.
녀석이 크게 놀랄만한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
너무나도 놀란 탓에, 차마 편지를 끝맺지 못한다.
아니, 끝맺을 필요 자체가 없다.
왜냐하면······.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이지.” “예?” 모두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 건방진 녀석이······.” “누가요?” 이프린이 되물었다. 나는 알렌에게 턱짓으로 이프린을 가리켰다. 눈치 빠른 알렌은 이프린을 억지로 끌고 갔다.
“이프린 씨~ 저희는 먼저 가 있을게요~” “네? 왜, 왜요? 아 잠깐······.” 멀어지는 이프린을 뒤로한 채.
나는 로크랄렌에게 말했다.
“로크랄렌. 멀지 않은 미래에 나를 불러라.” 그러자 로크랄렌은 환하게 웃었다.
“아~ 그럼요. 당연한 일입니다. 원래 한 사람 중복 초대는 안 되지만, 학회는 12 월에도 있으니—” “아니.” 나는 로크랄렌의 그 말을 끊었다. 그리고 시선을 날카롭게 벼렸다.
“초대 명부에 적지 말아라.” “······예?” “몰래 부르라는 뜻이다.” 명부에 내 이름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녀석의 눈을 속일 수 있을 테니.
“아 그건 조금 그렇습니다. 로크랄렌의 규율 상-” “규율 따위가 지금 상관 있나. 너희 때문에, 우리는 거의 죽을 뻔했는데.” 나는 로크랄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당황한 그는 움찔움찔 고개를 저었다.
“크, 큰 위험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교수님을 위한 일입니다. 명부에 적히지 않으면 나중에 출입 관리를 할 때-” “알고 있다. 오히려 그렇기에 말하는 것이다.” 로크랄렌의 눈을 노려보았다. 내 시선을 피해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동공.
꿀꺽- 이윽고, 침을 삼킨 로크랄렌은 식은땀이 오른 뒷목을 쓰다듬었다.
“어, 언제 말입니까?” “언제가 됐든 상관 없다.” 나는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이프린을 보았다. 걸어가면서도 자꾸만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내가 준비되었을 때, 알아서 찾아갈 테니.” 마침 로크랄렌의 돔유리에서 햇살이 내려앉았다. 바람처럼 부드럽게 휘어드는 광원이었다.
“너는 문만 열어놓으면 된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유 따위는 물을 필요 없다.” 드렌트가 만났던 로브 차림의 행인.
고작 한 마디로 그를 기절시킬 정신력을 품은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단 한 명 밖에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는······ “이렇게 될 일이었으니.”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
* * * ······어젯밤, 데큘레인이 박제당한 이프린의 시간.
“됐다!” 이프린은 카이데자이트를 성공적으로 해체했다. 카이데자이트는 어마어마한 ‘시간 에너지’를 로크랄렌 전체에 방출하며 소멸했다.
“휴우······.” 이제 그녀가 할 일은 간단했다.
이 한정된 공간에서 385 년의 세월, 즉 140,525 일의 하루, 또는 3,372,600 시간을 견디기만 하면 그 뿐이었다.
“······그래도 구경할 건 있어서 다행이네.” 이프린은 박제된 데큘레인을 보았다.
그의 외면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늙지 않았다. 흔들리는 시간,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도, 이 편집증적인 청결과 정갈은 영원할 것이었다.
“조금 이따 올게요.” 그를 구경하던 이프린은 총총걸음으로 지하 계단을 올랐다.
[ 지하 기록물 보관실 ]의 로제리오, 그리고 곤히 잠든 이프린을 지나, 1 층 로비에 도착.
“······휴.” 박제당한 면면을 확인하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한 명도 안 빠뜨렸다.
“아 참.” 2 층과 3 층도 마저 체크하려던 이프린은, 그러나 다시 몸을 돌려 지하로 내려갔다.
“편지 잊을 뻔했네. 그나마 팔팔할때 써야지.” 훨훨- 날아가듯 돌아온 지하. 그 한복판에 꼿꼿이 박제 당한 데큘레인.
이프린은 그를 보며 텅 빈 쪽지 한 장을 꺼냈다.
“어디보자······.” [ 데큘레인 교수님에게.
안녕하세요, 이프린이에요. ] 그녀는 펜이 아닌 마력으로 글을 썼다. 그가 발명한 탄소 마법으로, 쪽지에 ‘흑연’을 붙이는 것이었다.
[ 미안해요 교수님. 하지만, 이건 저만의 몫이에요. 그리고 이 시간은 정말 ‘시간’에 불과하답니다.
마력도, 공기도, 한 곳에 정체되어 있어요. 따라서 마법 공부, 수련 따위를 하는 건 불가능해요. ] “풋.” 글을 잇자니 미소도 툭 흐르고, 속에서 무엇인가가 왈칵 솟기도 한다.
이게 바로 ‘마음을 전한다’는 뜻일까.
이프린은 그렇게 글자 하나 하나 꾹꾹 눌러 담았다.
[ ······그래서, 끝맺지도 못할 정보 한 줄, 고작 사실 따위를 전달할 바에야, 단 한 마디.
제가 교수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 ──그런데.
뚜벅.
어느 순간, 이프린의 귀가 예민하게 쫑긋거렸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뚜벅.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어떤 발소리였다.
“······.” 이프린의 손이 우뚝 멎었다.
설마, 아직 박제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나?
출입기록 그대로, 드렌트마저 확실히 박제해뒀을 텐데?
등골에 소름이 오른 그녀가 저편을 응시하던 그때.
“가소롭다.” “······!” 귓가를 후벼파는 그 목소리.
너무 익숙하지만, 불가능한 음색.
“이리 허술해서는······.” 자신의 놀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말은 비웃듯 이어지고, 어둠 속에서 검은 로브 행색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디가서 내 제자라 말하고 다닐 수 있겠나.” 자신을 질책하는 그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고였고, 목이 콱 막혀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너는 여전히 멍청하다.” 대마법사인 자신을 멍청하다 매도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유일한 사람.
스스로 로브를 벗어넘기는 그를 보며, 이프린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 데큘레인이었다. 더 정확히는 미래의 데큘레인.
그는, 지금의 데큘레인보다 조금 더 따뜻한 미소를 품고 있었다.
“더 철저했어야지. 안 그런가?” 그러자 이프린의 눈이 엷은 미소를 그린다.
그 웃음의 순간, 투명한 눈물이 무지개처럼 흐른다.
“그러게요.” 이프린은 로브의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제가 너무······ 멍청했네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데큘레인 교수는 우는 사람을 싫어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쩔 수 없다. 미친 듯 쿵쾅거리는 심장과 감정은 이제 통제가 불가능하다.
“조금 더, 철저했어야 했는데······.” ······그런 그녀의 뒤로.
자그마한 쪽지 한 장이 팔랑이며 내려앉는다.
‘데큘레인 교수님에게─’ 따위의 수줍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쪽지.
“제가 참 멍청하게······.” 이프린은 그 문장을 끝맺지 않는다.
저편에 그 사람이 있으니, 자신에게 와주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미안해요, 교수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 이프린은 어떤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고마워요.” 혼자 감당하겠노라 각오했던 세월이.
너무 한없이 만족스러울 것 같았기에······.
가문. (1) 제국마탑 77 층.
예리엘은 데큘레인이 출장 나간 틈을 타 [ 수석교수 집무실 ]에 방문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탓인지 내부에는 보안 마법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으나, 딱—! 누군가가 손가락을 튕기자 모두 작동이 중지되었다.
“뭘 부탁 받았는데요?!” 이사장 아드린느. 몰래 잠입하려던 예리엘은 우연히 그녀에게 들켜버렸고, 하는 수 없이 도움을 받았다. 오히려 나은 일이었다.
“그것까지 말씀 드릴 수는 없어요. 업무와 관련된 일이니.” “······흠! 그럼 데큘레인 교수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겠네요!” “네. 그러세요.” 태연히 대꾸한 예리엘은 핸드백 안의 서류를 집무 책상에 두었다. 핑계, 또는 구실로 가지고 온 마릭과 로할락 수용소 관련 문서. 데큘레인의 지문과 홍채를 인식하는 마법 보안 기제로 밀봉된 기밀이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이쪽을 주시하던 이사장에게 말했다.
“이제 가주시면 안될까요?” “······수상하네요!” 이사장은 호사가 더듬이를 삐죽 세웠다. 뭔가 직감이 반응한 모양이다.
사마귀처럼 응시하는 꼴이 썩 웃겼지만, 예리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업무 관련 일이라 별 재밌는 것도 없을 거예요.” “······흥, 그래요! 일단은 갈게요!” 입술을 샐쭉인 이사장이 바깥으로 나갔다.
그제서야, 예리엘의 본격적인 행동이 개시되었다. 그녀에게는 찾고자 하는 것이 있었다.
“······이 성격이 이럴 땐 좋네.” ‘그 물건’은 금세 발견했다.
데큘레인의 워낙 깔끔한 정리정돈 덕분에, 서랍을 열자마자 곧장 눈에 띈 것이다.
[ ] 이 무제 노트. 겉보기에는 문방구에서 3 엘네 쯤 주면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단코 평범한 노트가 아니다.
이는 전 당주 ‘디카일렌’이 생전에 내어준 여러 과제 중 하나이며, 예리엘도 물론 이 무제 노트, 즉 과제 노트를 지니고 있다.
“역시. 여기 있었네.” 저택을 아무리 뒤적여도 없었는데, 마지막으로 와본 마탑이 옳은 선택이었다.
예리엘은 이걸로 데큘레인의 의중을 파악할 작정이었다.
“······이걸로.” 대략 1 년 전의 일로 파국을 도모하기에 아직 그녀의 마음은 나약했고, 또 신중했으며, 현실적인 문제도 산적했다.
따라서, 그녀는 확실한 방법으로 이 ‘일기’를 선택했다.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데큘레인의 마지막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것이었다.
“흠흠······.” 눈치를 살핀 예리엘은, 그 빈 자리에 자신의 일기를 채워 넣는다.
둘 다 아버지가 직접 제작한 마법 아티펙트인지라 외면에 아무런 차이가 없고, 두 노트 다 정확히 동일한 기능이지만, 무엇보다 예리엘에게는 데큘레인이 이 일기를 들여다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다.
데큘레인이, 그 사람이 두려워하는 유일한 존재.
그 ‘아버지’가 이 일기장 안에 도사릴 테니.
“이제······.” 그렇게, 집무실 밖으로 나온 순간.
“!” 예리엘은 껄끄러운 인물과 마주치고 말았다.
다가오던 사람도 예리엘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솔다 예리엘?” 루이나였다. 루이나는 제자 몇 명과 함께 수석교수 집무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 예리엘은 루이나에 대해 생각했다.
정황상 데큘레인에게 납치당했었던 그녀는, 이상하게 요즘 잠잠했다. 오히려 데큘레인의 심복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예리엘은 그 기묘한 스토리의 내막이 궁금했다.
“······루이나 교수님은, 77 층에는 무슨 일이에요? 제 오라버······ 어음. 데큘레인 당주 님의 플로어인데요.” “보안 마법이 작동 중지했길래 교수님이 돌아오신 줄 알았어요. 다시 결재받을 서류가 있거든요.” “─아앗! 저 돈 먹는 하마!” 그때, 벽 뒤에서 이사장이 눈을 부라리며 나타났다. 루이나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고, 예리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사람은 뭘 또 엿들으려고 숨어 있었대.
참, 총체적 난국이다.
“루이나 교수! 당신이 여태까지 얼마를 쓴 줄 알아요?! 그런데도 더 결재를 바라요?! 이번에도 결제하려는 결재겠지요?! 돈 쓰려는 결재!” “돈이 많이 드는 걸 어떻게 해요 이사장님. 그리고, 이건 어차피 기조실장님 담당이잖아요? 이사장님은 편안~히 맡기시면 돼요.” “······기획조정실 괜히 만들었어요!” “에이~ 제 프로젝트와는 별개로, 기조실 덕에 수익은 많이 나던데요?
교수님이 엄선한 프로젝트는 다 성공적이었던데.” “그 수익을 루이나 당신이 다 잡아먹고 있다고요!” “에이~ 그렇게 많이는 아닐 텐데~” “이 사람이 지금! 그렇게 많이가 맞아요! 이러다 1 억 엘네가 넘어가게 생겼는데!” “어머. 아직 1 억 엘네도 안 됐담? 예상보다 적네요?” “뭐라고!!!” 그들의 쓰잘데기없는 만담을, 그래도 마탑의 생리이니 자세히 들으면서, 예리엘은 슬그머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 *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여름 오후.
로크랄렌의 출입 수속─반출 물건 검색 및 검문 등─을 마친 뒤, 우리는 열차를 타고 제도의 [ 헤일레치 역 ]에 도착했다.
“후아! 드디어 돌아왔네요!” 맑게 외치며 기지개를 켜는 알렌. 나는 잠시 차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저 평범한 출장이 끝난 것일 뿐인데, 왜인지 머나먼 여정을 마친 듯하다.
“······일기장도 뺏어갈 줄은 몰랐는데.” 이프린의 퉁명스런 혼잣말을 알렌이 받았다.
“괜히 기억에 문제가 생길 까봐 그러는 거래요~” “네 이해는 하는데······ 그리구, 다행히 조금 기억은 나요. 확실히 제 정신력이 나쁘지는 않나봐요.” “그러게요~ 강의 들은 건 기억나는 게 얼마 없지만,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일상적인 부분은 괜찮은 것 같아요.” “······전 기절한 것 밖에 기억이 안 납니다.” 도란도란 떠들며 플랫폼에 내렸다. 마침 같은 열차에 탔었던 로제리오와 크레토가 다가왔다.
크레토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데큘레인 교수. 이번에도 또 도움을 받았군.” “그러게 말임다. 어이 데큘레인 교수, 능력 참 좋구마잉. 왜 아직도 모나크인거여?” “크레토 대군. 수고하셨습니다. 로제리오, 당신도.” 나는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알렌, 이프린, 드렌트도 그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이후 우리는 두 갈래로 나뉘어 대로를 걸었다.
“어머나?!” 헤일레치의 한복판. 이프린이 돌연 어딘가를 가리켰다.
「돼지의 꽃」.
제국대학 근처의 돼지의 꽃 본점과는 조금 달랐다. 제국 최대 부촌인 헤일레치의 스타일, 컨셉에 맞게 훨씬 고급스럽게 단장한, 지극히 고급 레스토랑스러운 분점이었다.
이프린은 그 외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습. 저. 스읍. 스읍. 아. 왜 침이 안 멈추지. 줄리가 이번에 새로 분점을 낸다고 했는데 설마 헤일레치일 줄은······.” “저곳이 그렇게 맛있나요?” 알렌의 물음에 이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두 번이 아니라 세 번, 네 번, 다섯 번······.
나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알렌.” “네?” “네가 먹이고 보내라.” 1 만 엘네의 수표를 건네자 알렌은 화들짝 놀랐다 “너무 많습-“ “먹다보면 다 쓰게 될 것이다. 헤일레치의 물가는 상상을 초월해.” “아······ 네, 네에. 감사합니다 교수님!” 알렌이 떨리는 손으로 수표를 받았다. 이쪽을 힐끗거리던 이프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씰룩였다.
“먼저 가겠다.” “네에!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교수님!” “안녕히 가십시오 교수님.” “잘 가세요~” 각각 알렌, 드렌트, 이프린의 인사.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미리 준비된 차에 올랐다. 창 밖, 알렌은 조교 둘을 인솔하면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가요 가요~ 얼른 가요~ 이프린의 발걸음은 어깨춤을 추듯 가볍고, 해맑은 미소가 만면에 가득하다.
“······저 이프린이.” 미래에는 대마법사가 된다는 말인가.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교수님. 출장은 괜찮으셨습니까?” 내 옆자리, 있는 듯 없는 듯하던 율리의 말이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았다.” 율리는 방긋 웃었고, 나는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마탑으로 가지.” * * * 마탑의 집무실에 도착한 나는 먼저 「고급 특성 카탈로그」를 꺼냈다.
“······좋은 보상이지만.” 「특성 카탈로그」는 「아이템 카탈로그」와 다르게 대단히 중요한 아이템이다.
게임에서도 얻을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다.
다만 「고급」은 조금 애매하다.
특성의 서열은 [ 평범 〃 하급 〃 중급 〃 고급 〃 레어 〃 유니크 〃 고유 ] 순.
여기서 평범과 하급은 「염동력 장인」처럼 특성이라하기에도 애매한 그저 보너스에 불과하고, 중급과 고급부터가 그나마 특성이라 할만한데······.
[ 1. 일반 면허 ] [ 2. 호랑이의 목청 ] [ 3. 저돌적인 공격태세 ] 스크롤을 아무리 훑어도 쓸만한 게 보이지 않는다. 동공을 계속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내려도······?
“이건 또 뭐지.” 이름도 생소한 특성 하나를 발견했다.
──「암호화」── ◆ 등급 :고급 ◆ 설명 :마력을 소모하여 대상을 암호화하는 능력. (단, 생명체는 암호화가 불가능하다) :특성의 출력은 소유자의 ‘정신력’에 영향을 받는다.
──── 「암호화」.
설명은 상당히 모호하지만, 특성이 ‘정신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정신력은 데큘레인의 유일한 장점이라 할 수 있으니.
“······?” 그런데, 돌연.
나는 책상 위에서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방금까지는 없었던 쪽지였다.
“······어떻게 생겨난 거지.” 의문스러웠지만, 그 쪽지의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품 안에 넣었다.
똑똑— 때마침 노크가 울렸다.
“교수님!” 「염동」으로 문을 열어주자 알렌이 세상 신난 얼굴로 들어왔다.
“교수님! 부유섬에서 등급 판단을 완료했답니다! 고급 강의예요!” 그 뒤에는 이프린과 드렌트도 있었다. 드렌트는 허리를 꾸벅 숙였고, 이프린도 쭈뼛쭈뼛거리며 따라했다.
“대단하십니다 교수님~” 알랑방구, 요란을 부리는 알렌에게 말했다.
“좋다. 그럼 본격적인 수업 준비를 시작하지. ” “네에!” “조교 둘은 나가라.” “······네에?” 조교에게 나가라고 말했는데, 알렌이 의문으로 갸웃거렸다.
“저······ 조교는 왜······” “드렌트, 이프린. 둘 다 내 강의에 신청했더군.” “아. 맞다. 그렇습니다.” “맞아요 저도.” 나와 눈이 마주친 드렌트, 이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알렌을 보았다.
“그러니, 수업 준비는 너와 내 몫이다.” “······아.” 알렌은 몹시 섭섭한 얼굴이었다.
아무렴, 이제 수업 준비를 비롯한 잡일은 신입들에게 떠넘기려는 생각이었겠지.
“네에. 저, 저 그러면······ 앗.” 알렌이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조교 두명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네.” 체념한 듯 다시 맑게 웃는 녀석. 나는 그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걱정마라. 이번 강의의 지도 교수에는 네 이름도 올라갈 테니.” “네에에에엣?!” 그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렇게 되었다.
“고, 고급 강의, 고급강의인데요······?” “그래.” “허, 허, 아, 저, 그, 그게, 이런, 아······.”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알렌을 보면서, 나는 가만히 생각한다.
“부지도 교수라니······ 제가 어떻게 감히······ 우읏.” ······연기 하나는 타고난 녀석이구나.
* ······부유섬의 상층부는 어떤 마법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이다.
더 정확히는, 이 세상 모두의 상식에 어긋난다.
메지세이온은 부유섬의 핵심이자 엔진. 하늘 위의 하늘, 즉 천외천으로 끝없이 뻗어오르는 건축물이다.
그러나 각 층은 상부로 올라갈수록 ‘내부’가 아닌 ‘지형’, 또는 ‘세계’의 양상을 보인다.
부유섬의 어떤 층은 수만명이 살아갈 수 있을만큼 넓고, 또 어떤 층은 오직 망망대해 뿐이며, 또 어떤 층은······.
“모나크 등위의 데큘레인 교수가 심사 신청한 강의, 「흙과 불의 정순한 활용 : 조작 계열」.” 오직 판정만을 내리는 비좁은 회의실이다.
“해당 강의의 ‘제한 없는 고급’ 판정을 허가한다.” 다수의 중독자와 부유섬의 중역이 자리한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강의 등급 판정.
이제 데큘레인의 강의 「흙과 불의 정순한 활용 : 조작 계열」는 ‘모든 등위의 마법사’에게 고급 강의로 여겨질 것이며, 수강 자체가 커리어로 기록될 것이다.
“단, 해당 강의에는 부유섬이 파견한 기록원이 동석하고, 강의 정보는 부유섬의 자료보관실에 저장된다.” 후후- 그 자리의 긴달프가 소리 죽여 웃으며 턱을 쓰다듬는다.
동석한 아드린느도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해당 강의는 데큘레인의 저작으로 인정을 받을 것이고, 보호 기간은 최소 10 년이다. 또한 강의 수강생은 부유섬에서 선별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데큘레인이 본인이 직접 결정할 것이다.” 데큘레인 저작의 보호 기간은 ‘최소’ 10 년으로 설정되었다. 최대가 15 년임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고평가였다.
“부유섬은 데큘레인의 강의를 저장하는 대신, 데큘레인이 원하는 장소를 제공하고 비용을 지원하는 등의 편의를 약속······.” ······그날.
부유섬에서 내린 ‘고급 강의 판정’은 부유섬으로 직하했다.
로제리오와 크레토, 베탄과 이헬름 등 유명 마법사들은 감탄과 질투와 불신 등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고, 일대에 자그마한 파란이 일었지만.
정작 그 소식조차 듣지 못하는 마법사가 있었으니.
휘이이이이잉──!
이곳은 날카로운 돌풍이 휘몰아치는 ‘칼날 궤도’.
부유섬의 주변섬 중 하나로, 허공에 여러 작은 섬이 드문드문 이어지는 위험한 지역이다.
탁—!
그 여러 섬 중 하나, 깎아내지른 듯한 절벽에 고사리같은 손아귀가 올라온다.
콰득─!
흙과 돌멩이를 움켜쥔다. 희고 고운 손은 상처 투성이에, 다 빠진 손톱에서는 피가 철철 흐른다. 아프지 않을리 없지만, 오직 추락하지 않겠다는 일념 뿐이다.
쏴아아아아아──!
“······읏.” 이 손의 주인은 실비아. 그녀는 칼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꽉 붙든 노면을 놓치지 않는다.
“용케 살았군.” 그때, 검은 하이힐이 철퍽이며 그녀에게 다가온다.
또각이는 구둣굽에 밀려, 푸스스스······ 모래알이 안개처럼 떨어진다.
“······.” 실비아는 제 눈 앞에 선 여인을 바라보았다. 로브 차림의 그녀는 립밤을 바르며 자신을 굽어보았다.
“포기해라. 너 그러다 병신된다.” 그 험한 말에도 실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포기 안 해요.” “······확실히 뭔가를 배울 열의는 있군. 로하칸 그 영감탱이가 나한테 널 맡길만해.” 여인이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보마.” 여자 치고는 무겁고 허스키한 목소리.
그녀는, 노면에 지탱한 실비아의 손을 하이힐 굽으로 짓밟았다.
“!” 뚜두둑- 손가락 뼈마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실비아는 다시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네가 정녕 일레이드의 사자인지, 아니면 망가진 이리인지.” 여인은 그리 뇌까리며 연초를 꼬나물었다.
치지직—!
불은 마법으로 붙였지만, 뿜어낸 연기는 돌풍에 휘말려 금세 사그라들었다.
* * * 유크라인의 영주성.
예리엘은 충실한 가신들과 함께 있다. 집사 로엘, 기사 데이비드, 마법사 레길론, 하녀장 라헬······ 그들의 무거운 숨소리가 안개처럼 가라앉고, 팽팽하게 조여진 긴장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날카롭다.
“이 공책은 아버지가 내어준 과제였어.” 예리엘은 집무 책상에 놓인 「데큘레인의 일기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일기장에는 하루하루의 혼과 마력이 스며들지. 아니, 애당초 이 일기장의 재료 자체가······ 우리 피부야.” 가신들의 숨이 잠시 멎었다. 예리엘도 먼 옛날의 일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문자 그대로 생살이 뜯어지는 고통. 마취도 소용이 없었고, 미친 듯이 울었지만, 예리엘은 유크라인이라는 이유로 그 극기를 감내했다.
“피부, 말입니까.” 집사 로엘이 조금 놀란 투로 되물었다.
“······그래. 우리 피부로 만들어서 회로의 일부가 담겨 있지. ‘원격 회로’라는 어마어마한 작품인데, 아버지도 참 대단하지?” 아버지 디카일렌은 자식들에게 무수한 과제를 내렸다. 생전에는 물론, 사후의 유서로도.
그 무수한 시험들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굳이 일기를 쓰지 않아도, 일기를 먼 곳에 두어도, 심지어 버리고 찢어도······ 우리의 나날과 행적이 특정하게 기록돼.” 아버지는 ‘너희 스스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아티펙트’라 했지만······.
예리엘은 바보가 아니다.
당연히 알고 있다.
이 일기장의 진짜 목적은, 자신들을 감시하고 평가하기 위함이었음을.
“물론 기록된 기억은 선별적이고 무의식적이지만, 적어도 가짜일 수는 없지.
아티펙트 제작만큼은 이터널─대마법사 수준이라던 아버지의 작품이거든.” 아티펙트 그 자체를 「특화 마법」으로 승화시킨, 세기의 예술마법사(藝術魔法 師) 디카일렌.
비록 그가 제작한 여러 아티펙트는 사후 긴 시간이 흐르며 마법적으로 풍화되었지만, 이렇듯 ‘피부’라는 매개로 자식에게 남긴 것들은 여전했다.
“이 열쇠는 그 통로를 여는 용도지.” 예리엘은 품 안에서 디카일렌의 열쇠를 꺼냈다. 유크라인 영주성 지하 금고에서 가지고 온 보물이었다.
“위험하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이 방법 밖에는 없어.” 쉽게 말해, 예리엘은 데큘레인의 일기장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하지만 어떤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볼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모를 테지.
“그 사람이 그 1 년 전과 그대로일까. 정말 우리를 토사구팽하려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정말 어떤 일로 사람이 변해버린 걸까.” 예리엘이 데큘레인의 일기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그걸 알려고 해. 따라와주겠어?” 가신들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깊게 숨을 내쉰 예리엘은 이윽고 일기장에 열쇠를 꽂았다. 일기장의 겉표지는 분명 고체였지만, 열쇠는 마치 물길에 스며들듯 찰랑이며 내려앉았다.
쏴아아─!
그 순간 마력이 일었고, 예리엘이 열쇠를 완전히 돌리자.
────!
일기장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가문. (2) 예리엘은 눈을 떴다.
어두운 하늘에서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그락······ 사그락······.
고요히 다가온 눈이 얼굴에 닿았다.
예리엘은 눈을 감았다. 촉촉하게 묻은 눈을 닦고 다시 눈을 떴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온통 눈뿐이었다. 하늘과 땅과 지평선이, 전부 눈이었다.
“······.” 천천히 일어난 예리엘은 저 멀리, 커튼처럼 흔들거리는 눈안개 너머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세상에 고택(古宅)이 있었다. 지붕과 창틀이 눈에 뒤덮인 저택이었다.
예리엘은 눈의 세상에서 눈을 깜빡였다.
“가신들은 어디갔지.” 가장 먼저 든 의문이었다. 함께 온 네 명의 가신이 곁에 없었다.
고민하던 예리엘은 우선 유일하게 눈이 아닌 장소로 다가갔다.
바스락 바스락······.
눈밭을 밟는다.
순결한 눈에 그녀의 발자국이 새겨진다.
“······다들! 거기 있어?!” 저택의 문에 당도한 그녀는 우선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문고리를 흔들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 눈치챈 예리엘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잠긴 문에 아무렇게나 박아넣었다. 열쇠 구멍 따위는 필요도 없었다.
그저 꽂고 비트니 끼이이익— 문이 열렸다.
“다들······ 있니?” 내부는 평범했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고택의 풍경이었다.
타닥— 타닥— 벽난로에서 모닥불 튀는 소리. 고소한 차의 냄새. 예리엘은 홀린 듯 그쪽으로 걸었다.
“······?!” 거실에 닿자마자 멈칫했다.
벽난로 근처, 흔들의자에 익숙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데큘레인?” 그가 자신을 돌아보았다. 한 손에는 찻잔을 쥐고, 다른 손은 의자 팔걸이에 얹은 채 말했다.
“예리엘.” “······.” 예리엘은 긴장했다.
데큘레인이 이곳에 있다면, 이유는 하나 뿐이니.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진지한 물음이었건만, 대답이 기괴했다.
“나는 데큘레인이 아니다.” “무슨 소리야 그건 또?” “나는 너희 일기장이다.” “······뭐?” 뚱단지같은 소리에 예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데큘레인은, 아니 데큘레인을 닮은 일기장은 설명했다.
“이곳에 출입한 ‘인물’을 맞이하기 위한 안내자이자, 마법으로 설계된 학습지성이며, 아티팩트가 형상화한 존재.” 턱- 그가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게 나다.” “······어?” 예리엘은 잠시 멍했지만, 있음직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아버지 디카일렌의 아티팩트이니.
대마법사 수준—물론 디카일렌은 [ 아티팩트 ]라는 영역에 한하지만—의 마법은······ 평범한 마법사의 머리로는 감히 이해조차 불가능한 경지인 것이다.
“그럼 내 가신들은?” “열쇠가 없는 그들은 보안기제에 의하여 잠시 ‘기록’되었지.” “······기록?” 일기장이 어떤 노트 네 권을 내밀었다. 예리엘은 머뭇머뭇 다가가 그 노트를 받았다.
“이건······.” 평범한 노트의 겉표지에 「로엘」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제 가신, 오래전부터 함께했던 집사의 이름이었다.
“읽어보면 알 것이다.” “······.” 예리엘은 첫 페이지를 펼쳤다.
사그락 사그락— 노트에는 어떤 문장들이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눈을 뜨니 이 세상이었다······ 아니 세상이 맞긴 한가? ] 페이지를 읽어가는 예리엘의 눈에 경악이 깃들었다.
[ ······무엇보다 예리엘 아가씨가 걱정 된다. 만약 이 공간이 일기장 안이라면, 일단 아가씨를 찾는 수 밖에 없다. ] 예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데큘레인의 모습을 한 ‘아티팩트’는 침착하게 찻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들은 보안기제에 의하여 기억 속에 ‘기록’ 되었다. 너는 열쇠를 소유했으니 보안기제로부터 오히려 보호를 받지.” “이 문장들이, 이들의 생각이라는 거야?” “그렇다. 그들 전체가 ‘기록화’된 것이지.” “······.” “놀란 얼굴이군.” 예리엘은 다른 노트, 호위 기사 「데이비드」의 것을 읽었다.
[ 한시 바삐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어서 제반을 갖추고 나아가야만 아가씨에게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다른 노트는 하녀장 「라헬」, 또 다른 노트는 마법사 「레길론」······.
그들의 생각이, 한낱 글씨 따위로 이어지고 있다.
“······.” 예리엘은 뒷목에 손을 얹었다. 목이 뻐근했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일기장이 말했다.
“마법은 어느 경지에 이르면 참된 마법으로 기능한다. 「염동」, 「화염구」 따위와는 그 차원이 다르지. 나는 진리라 할만한 경지에 근접한 것이다.”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있다. 죽은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라. 보안기제에 걸린 것에 불과해.” 예리엘은 마음을 다잡고 의연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데큘레인의 기억을 보려고 해.” “얼마든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리엘은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거실 밖, ‘우측’ 복도를 걸었다.
기다란 복도의 벽면에는 무수한 액자가 걸려 있었다.
“이 전체가 데큘레인의 기억이다. 아무 것이나 들여다보면 된다.” “······그래?” “단, 마력을 소모로 한다.” 예리엘은 어떤 액자 앞에 섰다.
익숙하지만 어색한 ‘서재’가 담긴 액자였다. 유크라인의 영주성이었기에 익숙했고, 가구 배치가 달랐기에 어색했다.
“그냥 눈을 갖다 대면 돼?” “그렇다.” “······응.” 예리엘은 액자에 눈을 들이밀었다.
─성적은 좋구나.
그 순간 목소리가 울렸다. 예리엘은 그쪽을 보았다.
“아.” 무심코 신음이 흘렀다.
서재에 아버지 디카일렌과 데큘레인이 함께 있었다.
─단, 성적만 좋다. 마탑 외의 학술 성적은 개차반이지.
아버지는 의자에 앉아 데큘레인을 훈계했고, 데큘레인은 고개를 숙인 채 들었다.
─어렸을 적에는 네가 신동인 줄 알았다.
데큘레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죄인처럼 가만히만 있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예리엘을- ─안 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언급하자마자 데큘레인이 퍼뜩 눈을 들었다.
예리엘은 멍하니 있었고, 아버지는 비웃음을 지었다.
─알고 있다면, 더 좋은 모습을 보이면 될 것이다.
─그러겠습니다. 맹세하겠습니다.
─맹세따위는 필요 없다. 받아라.
아버지가 데큘레인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데큘레인, 그건 네 선택이다. 심장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일 터이나, 고작 그딴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겠지?
─······예. 당연합니다.
첫 번째 액자의 기억은 이게 끝이었다.
예리엘은 눈을 떼고 바로 옆의 액자를 보았다.
─······.
이번에는 유크라인 영주성의 서재가 아닌 복도. 데큘레인은 창가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그 시선이 닿는 햇살 아래에는, 어린 예리엘.
즉 자신이 있다.
“왜 날 보고 있냐?” 예리엘은 퉁명스레 물었다. 그러자 데큘레인이 돌아보았다.
“요?”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화들짝 놀란 예리엘은 저도 모르게 말투를 교정했다.
─······데큘레인 도련님.
“!” 그때, 그리운 음색이 자그맣게 일었다. 크게 놀란 예리엘은 고개를 꺾다시피 그쪽을 보았다.
아델.
데큘레인의 새엄마이자, 자신의 친엄마. 예리엘은 울컥이는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괜찮아요?
아델이 물었다. 데큘레인은 아무런 대답도 않았다. 쓰게 웃은 아델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만약 예리엘이 도련님에게 상처가 된다면- ─가시지요.
데큘레인은 듣기도 싫다는 듯 등을 돌렸다.
두 번째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읏······ 하아. 최근 기억을 봐야 되는데······” 관측한 기록은 고작 두 개 뿐이건만, 예리엘은 잠시 복도에 기대어 숨을 고른다.
정신적인 피로감과 마력적인 탈력감이 온몸에 가득하다.
“나는 언젠가 너희 둘이 나를 방문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복도의 끝에서 흘러드는 목소리.
예리엘은 그쪽을 보았다.
“알고 있었다고?” 그러자 예의 ‘일기장’이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는 혼자 거실에 서있었다.
예리엘이 미간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잠깐, ‘너희 둘’이라니?” 고개를 끄덕인 그는 예리엘에게 어떤 노트 한 권을 건넸다.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 * ······한 시간 전.
마탑의 늦은 새벽.
수업 준비, 교수들이 제시한 각종 프로젝트 심사 등등, 일과를 마친 나는 조금 뒤늦게 서랍 속의 일기장을 꺼냈다.
[ ] 기억이 담긴 무제 노트.
그러나 이것은 내 일기장이 아니다. 「육안」에 비치는 정보부터가 「예리엘의 일기장」이니.
그 녀석이 내 일기장을 훔친 연유는 아직 모르지만, 일단 겉표지가 이상하다.
찰랑찰랑— 종이가 액체처럼 흔들린다. 마치 잔물결치듯, 내 손가락에 입자의 일부가 묻어나는 것이다.
“······평범한 아티팩트가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이해력」 의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일기장 자체에 인간의 마력 회로는 물론 혼(魂)마저 일부 깃들었고, 그 회로와 혼이 함께 공명하고 있었다.
아마 예리엘의 짓이겠지.
“짝을 이룬 아티팩트였나.” 내 일기장과 예리엘의 일기장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거의 동일한 구조와 작동으로 미루어, 처음부터 ‘한 쌍’으로 제작된 아티팩트인 것이다.
“기능 자체는 포탈과 비슷하나······.” 「이해력」의 스위치를 껐다. 짧게 분석한 것만으로 「2,000」에 달하는 마력이 소모되었다.
“혼자 진입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다.” 결론을 내린 나는 우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복도에 문득, [ 조교 연구실 ]이 띄었다. 그 유리 너머에는 아직도 불빛이 있었다.
“······.”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넓은 연구실에는 이프린 한 명 뿐이었다. 녀석의 책상에는 마법 이론서가 가득했지만, 정작 그 주인은 서적들에 파묻힌 채 엎드려 잠들었다.
나는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휘유······ 휴우······” 색색거리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 품 안의 펜던트를 꺼냈다.
“휘이이이······ 휴우우우······” 해맑게 웃는 어린 이프린과 딱딱한 얼굴의 남자.
아직도 선명한 로크랄렌의 기억 속, 미래의 대마법사는 분명 이프린이었다.
“휘이······ 휴우······” 나라는 존재로 세계선이 뒤바뀌었기에 대마법사가 되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원래 스토리 라인이 대마법사가 될 미래였던 걸까.
나는 내가 ‘플레이어’로서 만났던 대마법사 두 명을 떠올린다.
창조자 실비아, 그리고 최후의 요정 아드린느.
한 시대에 존재할 수 있는 대마법사는 오직 세명뿐일진데.
“너는······.” 나는 이프린을 보았다.
녀석은 더웠는지 로브를 벗었다. 그러나 마탑 77 층의 특성 상, 밤이 되면 추워질 것이었다.
“여전히 의문 투성이구나.”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로브를 손으로 들었다. 그걸 녀석의 등허리에 덮어주었다.
그때.
“······.” 좋은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이라면, 어느 정도 도움은 되지 않을까.
나는 한 손에 쥔 일기장과 이프린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딱—!
손가락을 튕겨 불을 껐다.
어두워진 연구실. 스탠드의 조명 아래에 「미다스의 손」을 적용한 쪽지 한 장을 놓은 뒤, 다시 [ 수석교수 집무실 ]로 돌아왔다.
그리고······ ······10 분 뒤.
“······.” 책상에 억지로 이마를 처박고 있던 이프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조심스레 눈치를 살핀 뒤 살살 고개를 들었다.
“······뭐지.” 그녀는 사실, 데큘레인이 문을 열자마자 깨어났다. 데큘레인 특유의 위압적인 기운 탓이었다.
“뭐야 대체. 로브도 덮어주고······ 으으으으으.” 소름이 돋아 온몸을 떨었다. 이프린은 등허리를 마구 긁적이면서 그가 한 말을 떠올렸다.
─너는······ 여전히 의문투성이구나.
“으으으으으.” 더한 소름, 아니 오한이 올라 이번에는 온몸을 긁었다. 의문 투성이라니.
심지어 그렇게 말하는 음색도 나긋했다.
“저 교수는 진짜 왜 이러는······ 뭐야 이건 또?” 이프린은 제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이상한 종이 쪼가리. 갸웃거린 그녀는 살금살금 연구실을 나갔다.
[ 수석교수 집무실 ]에 불이 환했다.
“커흠.” 이프린은 방금 깨어난 척 얼굴을 비몽사몽하게 바꾸고, 쪽지 한 장만 손에 쥔 채 데큘레인 집무실의 문고리를 쥔다.
“하아아아암~” 억지 하품 한 번, 눈물도 반 쯤 고이게 둔 채 비척비척 문을 열면서······.
“저 교수님. 저 방금, 저 한 3 분 전에 일어났는데요. 이 쪽지는 무슨······?” 안을 들여다보는데.
집무실에 데큘레인은 없고, 책상에 웬 노트 한 권만 놓여있을 뿐이다.
“뭐지?” 이프린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만 깜빡거렸다.
* * * [ 일기장 ] 내부는 온통 눈 뿐인 세상이었다. 새하얀 눈과 저편의 고택 외에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저 낡은 건축물로 다가가는 것은 어쩌면 본능이었다.
“······예리엘이 열었나.”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들어갔다.
텅 빈 거실에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뚜벅— 그때 울리는 발소리. 나는 그곳을 돌아보았다.
“너는······ 나를 닮았군.” 나를 닮은 남자가 서있었다.
무표정하게 끄덕인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일기장이다.” “······누구의 일기장이지.” “너희의 일기장이다. 너희의 기억이 나에게 기록되어 있지.”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 놈에게 물었다.
“예리엘은 어디 있지.” “네 기억을 구경하고 있다.” 놈이 우측 복도를 가리켰다.
“무사한가.” “예리엘에게는 열쇠가 있다.” 열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강 무사하다는 뜻인 듯했다.
나는 좌측을 바라보았다.
“우측이 나라면, 좌측은 예리엘의 기억인가.” “그렇다.” 그때, 치이이익─! 모닥불이 사위었다. 눈보라와 어둠이 밀려들었다.
분명 창문은 닫혀 있는데 말이지.
그 기이한 환경에서, 나는 자신을 ‘일기장’이라 소개한 미친놈을 바라보았다.
“너에게는 사망 변수가 가득하다.” “······.” 그가 말한다.
“숨어라.” 나는 답한다.
“알고 있나? 내 곁에는 죽음이 가득하지. 입자 하나 하나가 내 눈에는 보여.
그런데 너에게서는······.” 일기장이라는 놈의 얼굴, 목소리, 분위기.
그 하나하나에서 사망 변수가 기포처럼 부글거린다.
“살의가 가득하다.” 일기장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다만 태연히 고개를 끄덕일 뿐.
“그럴지도 모르겠지.” 나는 작게 웃었다.
이 녀석은 나를 닮았지만 내가 아니다.
더 정확히, 모델조차도 내가 아니다.
저 녀석의 원본은 나를 닮은, 아니 ‘데큘레인이 닮은’ 그 누군가.
“네 모델은, 내가 아닌 디카일렌이구나.” “······.” 일기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디카일렌의 작품이니 당연하겠지만.” 말없이 듣던 일기장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는 주인님의 작품이다. 계승을 위하여 만들어진 마법적 인격이지.” “유크라인의 계승 말인가.” “그래. 주인님은 계승 문제를 그리 쉽게 결정할 생각이 없었다. 주인님은 너를 안 믿었으니까.” “······안 믿었다라.” “그래.” “슬픈 말이군.” 그 순간, 망막에 퀘스트가 떠올랐다.
[ 독립 퀘스트 : 가문 ] 퀘스트 개요를 읽는 내게 일기장이 말했다. 살기가 철철 흐르는 얼굴로.
“숨어라.”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휘이이익—!
어둠과 눈보라가 뒤엉키며 형체를 이루었다. 일기장이 다시 말했다.
“숨어라.” “나는 숨지 않는다.” 놈의 안색이 바뀌었다.
“······숨어라. 보안기제가 다가오고 있다.” “굳이.” 놈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렇다고 나에게 특별한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고택 전체가 사망변수였다.
“그렇다면. 너도 기록이 되는 수 밖에.” 일기장의 입가가 뒤틀렸다.
나는 놈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휘이이이이잉──!
어두운 눈보라가 돌풍처럼 일었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바람이 내 몸을 집어삼켰다.
* ······눈보라가 사그라들고, 고요하게 잦아든 거실.
‘일기장’은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닥에 놓인 노트 한 권을 응시한다.
“나는 언젠가 너희가 나를 방문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읊조린 그때.
“알고 있었다고?” 두 개의 액자를 관측한 예리엘이 밖으로 나왔다.
마력을 소모한 그녀는 탈력감에 한숨을 내쉬다가도, 문득 말꼬리를 잡았다.
“잠깐, ‘너희 둘’ 이라니? 나 말고 또 누구?” 그렇게 답한 일기장은 예리엘에게 노트 한 권을 건넸다. 예리엘은 그 노트에 적힌 이름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데큘레인」 “······당연히 데큘레인이지.” 데큘레인이 노트가 되어 있었다.
가문. (3) ······먼 옛날의 꿈을 꾸었다. 비좁은 방에서 가족과 함께 살던 꿈이었다.
그 기억은 부서지는 노을처럼 찰나였고, 단 한순간도 완전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아름다웠다.
나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 눈을 떴다. 쨍쨍한 태양이 햇볕을 내리쬐고 있었다. 눈이 부셔 손차양을 했다.
주변은 풀밭이었다. 부드러운 바람에 잔디가 휩쓸렸고, 풀벌레가 찌르르르 울었다. 나무가 몸을 흔들며 잎사귀를 뱉어냈다.
타다다다— 타다다다─ 풍경을 탐색하는데, 어디선가 앙증맞은 발소리가 우다다 다가온다.
“오라버니~” 앳되고 귀여운 외침.
나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오라버니~ 어디 계세여~?” 여섯 살 쯤 되었을까. 아직 혀가 덜 자란 아이였지만, 누구인지는 단번에 알았다.
자연스럽게 미소가 흘렀다.
“오라버니이~” 예리엘이었다. 녀석은 제 오라버니를 찾아 숲 한복판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예리엘의 기억인가.” 일기장의 ‘보안기제’인지 뭔지가 나를 이 기억에 집어 넣은 듯하다.
“오라버니이······.” 한참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예리엘은, 입에 손가락을 얹고 슬프게 얼굴을 숙인다.
그리고는.
“······못차께따!” 힘차게 소리를 내지른다. 그 돌발 행동에 터질 뻔한 웃음을 나는 가까스로 참는다.
“못차께따 깨꼬리! 깨꼬리!” 돌아오는 대답은 물론 없다. 예리엘의 외침만 외로운 메아리로 울릴 뿐.
“역시 울 오라버니예여~ 못 찾께써여~” 예리엘은 오라버니를 극찬했다.
그 오라비가 누구인지, 참 부러운 녀석이었다.
“못차께따!” “······.” “못차께따아~!” 예리엘은 혼자 이곳 저곳을 왔다갔다 하면서 ‘못찾겠다’는 외침만 반복했다.
“오라버니······?” 그렇게, 계속 걸어간다. 작은 보폭으로 저벅저벅- 저벅저벅-, 그러나 숲이 깊어지자 문득 뒤를 돌아본다.
“······.” 이곳은 그저 숲이다. 너무 멀리 와버려 돌아갈 길마저 보이지 않는다.
“······우으.” 예리엘은 두려움에 뒷걸음질을 친다. 눈에 눈물이 고이고,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으앙······.” “쯧.” 울음 폭탄이 터지기 직전.
나는 땅바닥에서 일어나 녀석에게 다가갔다.
“앗, 오라버니······?” 인기척을 느낀 예리엘은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다가도, 나를 보자 흠칫 물러난다. 고슴도치처럼 가시 돋친 경계 태세.
“······누구세여.” 나는 예리엘의 작은 머리통에 손을 얹었다.
“잡았다.” “······녜?” 예리엘은 커다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갸웃거렸다.
그 무구한 반응에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아 참. 네가 잡는 거였구나. 내가 숨는 거고.” 갑자기 오게 된 터라 정신이 조금 멍했다. 머리도 아팠고.
“머하세여? 이거 놔여! 오라버니 찾아야 한 단 말예여!” 녀석은 몸을 뒤흔들어 뿌리쳤다. 나는 뒷목을 긁적이면서 말했다.
“아마 없을 걸.” “녜? 왜여?” “······네 오빠는 네가 귀찮아서 숨바꼭질을 하자고 한 거니까.” 데큘레인과 예리엘의 숨바꼭질.
나는 데큘레인이 아니지만, 어쩐지 그 내막을 알 것 같다.
“너만 혼자 찾게 놔두고, 자기는 아마 밖으로 놀러 나갔을 걸.” “······” 그 순간 예리엘은 충격받은 표정이 되었다. 세상에게 배신당한 여섯 살배기는, 그러나 이내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아, 아녜여! 그럴 리 없어여!” “······.” “그럴 리 없어! 오라버니! 오라버니~! 여기 이상한 사람이 있어여!” 짧은 다리를 휘적이며 도망간다.
나는 녀석의 뒤를 따라가면서 일대의 ‘마력 농도’를 계산했다.
“아앙! 따라온다! 따라오지마아!” “그냥 걷는 거다. ” 대관절 어떤 마법적 현상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웠다.
* * * [ 예리엘이 짧은 다리를 휘적이며 도망간다.
나는 녀석의 뒤를 따라가면서 일대의 ‘마력 농도’를 계산했다.
대관절 어떤 마법적 현상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웠다. ] “이게 무슨······.” 예리엘은 「데큘레인」이라는 노트에 기록되는 문장을 읽었다.
이말인 즉, 데큘레인이 다른 가신처럼 노트가 되어버렸다는 뜻이었다.
“······방금 데큘레인이 왔던 거야?” “그렇다.” 데큘레인을 닮은 일기장이 대답했다. 미간을 찌푸린 예리엘은 노트를 번쩍 들었다.
“그런데, 여기 왜 내 이야기가 있지? 데큘레인이 왜 ‘어린 예리엘’을 만난 거냐고.” “이 아티팩트 속 세상은 ‘자체적인 마법 법칙’을 따른다.” “아 씨벌 자세히 말해! 그딴 식으로 말하면 누가 알아처-” “데큘레인은 너, 즉 예리엘의 일기장으로 출입했고, 보안기제에 의하여 기록화되었다. 따라서 ‘예리엘의 기억’에 기록된 것이다.” 그가 대답했다.
예리엘은 정신이 잠시 멍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럼 데큘레인은 어떻게 들어온 거지? 열쇠도 없었는데.” “일기장은 쌍으로 제작되었다. 한쪽 일기의 문을 열었으면, 다른 쪽 일기의 문도 열리지.” “······.” 예리엘이 입을 떡 벌렸다. 한 번도 열어본 적 없었기에, 꿈에도 몰랐던 메커니즘이었다.
“그럼, 이 기록화는 어떻게 풀어?” “풀 필요가 있나.” “······뭐?” 예리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놈은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예리엘 너는 계승을 원하는 것 아닌가. 데큘레인을 이대로 두면 당주는 네 차지일 텐데.” “······.” 예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인간 형체의 아티팩트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판단이 힘들다면 네가 직접 데큘레인을 보아라.” “내가?” “기록화된 존재는 본인의 생각과 욕망을 더욱 솔직하게 드러내지.
‘내면화’라는 것이다.” “······.” “데큘레인의 기록을 보아라. 껍질 없는 욕망이 그곳에 있으니.” 예리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내 손에 쥐어진 데큘레인의 노트를 들었다.
[ ······어린 예리엘이 마법으로 흙의 성을 만들었다. 어린 예리엘은 짜잔~ 거리면서 자랑했다. 나는 웃었다. ] 두 사람은 어느새 친해진 듯했다. 미간을 찌푸린 예리엘은 기록을 읽었다.
[ 내가 칭찬하자 어린 예리엘이 말했다. “훗! 제 오라버니는 저보다 훨~씬 대단해여! 벌써 대학 마법을 배우고 있는걸!” ] “······.” 기록, 즉 문자가 되어버린 데큘레인.
자세히 들여다보던 예리엘은 문득, 이상한 단어를 발견했다.
[ 녀석과 함께 있으면서, 나는 내가 ■■■이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 “이건 뭔데? 단어 하나가 깨져있는데?” “그럴리가 없다. 네가 잘못 본 거겠지.” “아니······.” 그러는 사이에 페이지가 훌렁 넘어갔고, 생각은 빠르게 쓰여지며 그 이전 부분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아 됐어. 도움 존나 안 되네.” “네 눈이 문제다.” 질문을 포기한 예리엘은 다시 기록을 읽었다.
[ 혼자서 숨바꼭질을 시킬 바에, 내가 조금이나마 놀아주는 게 낫겠지. ] 그 단락에 이르자,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숨바꼭질······. 나 이거 했었어.” 예리엘은 이 기억을 알고 있었다.
나 홀로 숨바꼭질.
예리엘의 수많은 기억 중에서도 특히 커다란 상처로 남은 과거.
그날 데큘레인은 숨바꼭질을 명목으로 자신을 내팽개쳤고, 자신은 길을 잃어 이틀 동안이나 숲을 헤맸다.
너무 아픈 기억이었다.
예리엘은 일기장에게 물었다.
“내 기억은 어디에 있지? 이 일기장이 쌍이라면, 데큘레인 거 말고 내 기억도 있을 거 아냐.” “반대편 복도에 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왼쪽의 복도를 걸었다.
그의 말대로, 복도 벽면에 자신의 기억이 담긴 액자가 가득했다. 각 액자 밑에는 웬 제목도 있었다.
[ 처음 예법을 배우던 날 ] [ 나 회초리 맞았어 ] [ 오빠에게 처음 선보인 마법······. ] 유년기는 거의 다 데큘레인과 관련되어 있었다. 어렸을 적 자신은 데큘레인에게 참 의지했고, 그 탓에 웃기는 제목들이 많았다.
“······아.” 그러다 발견했다.
“이거구나.” [ 나 혼자 슬픈 숨바꼭질 ] 기억의 액자 속 풍경은, 자신이 길을 잃었던 숲 한복판.
무심코 그 안을 들여다본 예리엘은 눈을 크게 떴다.
“······!” 분명 혼자서 길을 헤멨던 날인데, 그만큼이나 아픈 기억인데.
─저는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여!
─오. 신기하네.
어린 자신의 곁에 데큘레인이 있었다.
“혹시······.” 멍하니 지켜보던 예리엘은 품 안에서 「유크라인의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액자에 집어 넣었다.
턱─!
열쇠가 액자의 어딘가에 걸렸다.
역시, 이 일기장의 세상에서는 이 「유크라인의 열쇠」가 만능키인 것이었다.
철컥─!
예리엘은 액자에 꽂힌 열쇠를 문 열듯 비틀었고, 바로 그 순간.
몸 전체가 액자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어엥!” 쉬우우우우웅──!
마치 혼이 이동하는 듯한 공간감. 동서남북, 상하좌우가 고무줄처럼 늘어나고 줄어드는 기괴한 감각.
온사방이 메스껍게 뒤흔들리는 느낌에 멀미가 치민다.
“끄읏······.” 그 모든 어지러움을 참아내고 눈을 떴을 때.
“······?” 예리엘은, 키가 작아진 자신을 발견했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에는 액자로 보았던 맑은 태양이 있었고, 땅바닥에는 어린 예리엘이 마법으로 만든 흙의 성이 있었고, 제 눈 앞에는.
“너는 집에 안 들어가도 되니?” 자상한 얼굴의 데큘레인이 있었다.
일평생, 자신에게 내보인 적 없었던 얼굴이었다.
예리엘은 잠시 심장이 철렁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직 시간 많아여. 아저씨는······ 여?” * “아, 아직 시간 많아여. 아저씨는······ 여?” 나는 예리엘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예리엘은 겁먹은 듯 흠칫 물러났다.
“······아저씨?” “녜? 녜, 녜, 녜녜······.” 혀 짧은 목소리가 귀여워 나는 피식 웃었다.
이 녀석 입장에서는 아저씨가 맞기도 하고.
“글쎄. 나는 언제 갈지 모르겠구나. 사실,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거든.” “아항······.” 나는 예리엘을 보았다. 방금까지 마법을 자랑하던 녀석이 철푸덕, 땅바닥에 앉았다.
“그런데······ 아저씨도 동생이 있어여?” 그리고는 갑자기 주제를 바꾸었다. 조금은 부담스러운 내용이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하······ 그러면요······. 혹시 아저씨도 동생을 싫어하나여?” 그렇게 묻는 예리엘의 목소리는 낮고 무겁다. 돌연 우울해진 듯하다.
하긴, 원래 이 나이에는 감정 기복이 심할 테니. 기억의 재현이 쓸데없이 리얼하다.
“······글쎄.” 나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왜인지 마음이 편했다.
그러고 보니, 여태 풀밭에 앉아 있었지? 옷매무새도 잔뜩 흐트러진 채로 놔뒀지만,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고.
어쩐지······ 김우진으로 돌아온 것만 같다.
“응. 맞아.” 나는 대답했다. 어린 예리엘은 애꿏은 잔디를 쥐어 뜯었다. 녀석을 힐끗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 예리엘이 나를 돌아보았다.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이었다.
“예전에는 많이 싫어했어. 거의 증오했지. 그런데······.” 나는 녀석을 떠올린다.
내 동생을 생각한다.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이른 시기에 세상을 떠난 아이.
늙어가는 나와 달리, 영원히 어리게 되어버린 그 녀석.
“이제는 아니야.” “······에?” 예리엘은 왜인지 당황한 듯했다.
나는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과격한 행위. 내친 김에 풀썩— 풀밭에 드러누웠다.
저 푸른 하늘이 이불처럼 내려앉을 듯하다.
“그러, 그러면, 이제는 좋아해여?” 예리엘이 다시 물었다. 녀석은 두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대답했다.
“······응.” “얼마만큼······?” 아이답게 유치한 것을 묻는다.
“풋.” 내가 피식거리자, 눈을 가늘게 좁히고 홱 쏘아붙인다.
“웃지 말고여!” “······글쎄. 얼마만큼일까.” 나는 말을 잠시 멈췄다. 어린 예리엘도 잠시 숨을 죽였다. 그 반응이 괜히 귀여웠다.
“그 녀석을 위해 내 꿈도 포기할만큼?” ‘화가’라는 꿈에 계속 도전했다가는 녀석을 굶어 죽였겠지.
내 꿈보다는, 녀석의 꿈이 더 중요했다.
“······.” 정작 대답은 없었다. 예리엘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쏴아아아아······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옷깃에 스며들었다.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시원했다.
이윽고 예리엘이 입을 열었다. 흩어질 듯 가느다랗고 작은 목소리였다.
“······그렇구나.” “그렇지.” “그런데······ 왜 미워했어여?” “······.” 이것만큼은 내 역린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운, 너무 아픈 기억이기에.
하지만······.
“이유가······ 뭐였는데여? 왜냐면, 제 오라버니도······ 저를 시러하니까······.” 그 슬픈 말이 괜히 내 마음을 건드렸다. 나는 어린 예리엘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이 작은 녀석은 기억의 재현에 불과할 것이었다.
“······그 녀석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갔다고 생각했거든.
그때에는.” “사랑한 사람을여?” “그래.” 어머니는 동생을 낳으면서 죽었다. 아버지는 슬픔에 시달리다 5 년 뒤 암으로 죽었다.
고아가 된 나에게 남은 것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여섯 살 배기.
짐덩이.
그렇기에, 내 모든 것을 앗아간 녀석.
그러나, 결국에는 내 전부가 되어버린 아이.
그 전부를 깨닫고 머지않아,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내 동생.
“참 어리석었지. 그래서 후회도 많이 했고.” “······.” 어쩌면, 내가 예리엘이 밉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물론 예리엘은 내 진짜 여동생이 아니고, 절대 녀석을 대신할 수 없지만, 대신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예리엘을 보았다. 녀석은 거의 울듯한 얼굴이었다. 내 말에서 자기 과거를 떠올린 걸까.
“그러니, 걱정마렴.” 그 작은 머리통에 손을 얹었다. 예리엘의 몸이 흠칫 떨렸다. 겁먹은 강아지처럼 귀가 축 늘어졌다.
“언젠가, 네 오빠도 너를 좋아해줄 날이 올 거야.” “······.” 예리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어딘가로 달려나갈 뿐이었다.
나는 녀석을 붙잡으려했지만, 뿅! 예리엘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여기까지만 기록된 건가.” 하긴 일기장 속 기억이니, 영원히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그때, 갑자기 비가 내렸다.
우수수수······.
맑은 하늘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손에 모아 살짝 핥았다.
“뭐고 이거?” 짠 맛이었다.
빗물이 어떻게 짜지?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동시에 웃음이 흘렀다.
“풋.” 나는 큰 숨결을 내쉬었다.
“하아아아아······.” 마음이 편안했다. 여태 온몸을 짓눌렀던, 데큘레인으로서의 압박감이 사라진 기분은 상쾌했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오롯이 김우진으로 바로 선 것이었다.
“근데······. 그건 그거고.” 나는 뒷목을 긁적였다.
“여기서 어떻게 나가냐.” 탈출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 * * 예리엘은 자신의 기억에서 도망쳤다. 벽면에 기대어 심장을 움켜쥐었다.
“말도 안 돼······.” 데큘레인의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아직도 귓가에 아른거린다. 자꾸만 속삭이는 것처럼, 떠나가지 않는다.
“어떻게······.” 예리엘은 떨리는 손으로 제 품 안의 노트, 「데큘레인」을 다시 읽었다.
일기는 중간부터 기록되고 있었다.
[ 예리엘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하긴 일기장 속 기억이니, 영원히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 툭─ 노트에 물방울이 흘렀다. 페이지에 닿아 번졌다. 자신도 모르게 떨어진 눈물이었다.
예리엘은 흠칫 놀라 얼굴을 들었다.
“······어라.” 일기장에는 이 내용도 기록되고 있었다.
[ 갑자기 비가 내린다. 맑은 하늘에 비가 내리고 있다. 손에 모아 핥으니 살짝 짠 맛이 난다. ] “먹지마 바보······ 내 눈물이라고. 어이가 없네. 더러운거 싫어하는 사람이.” 예리엘은 비실비실 웃었다. 데큘레인의 생각을 읽다 보니 눈물은 금세 멎었다.
[ 마음이 편안하다. 여태 온몸을 짓누르던, 데큘레인으로서의 압박감이 잠시나마 사라진 기분은 상쾌하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오롯이 ■■■으로 바로 선 것이다. ] 데큘레인으로서의 압박감. 예리엘은 그 대목에 공감하다가도, 이어지는 암호 ■■■에 미간을 찌푸린다.
이 세 글자는 뭔데 자꾸 암호로 되어 있지.
“예리엘.” 그때 일기장이라는 놈이 다가왔다.
놈은, 아무리 생각해도 일기장같지 않았지만, 말했다.
“결정은 했나.” “응.” 예리엘은 단호하게 끄덕였다. 놈이 말했다.
“그래. 말해라.” “돌아가겠어. 데큘레인, 내 오빠랑, 그리고 모두랑.” “······돌아간다고?” 놈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계승을 원하지 않나?” “······글쎄.” 데큘레인은 이렇게 말했다.
─녀석을 위해 내 꿈도 포기할만큼?
그 꿈이 무엇인지 자세히는 모른다.
그러나 예리엘은 이미 확실하게 알았다. 여태, 자신이 아주 잘못된 착각을 했음을.
“지금 그런 건 상관 없어. 돌아간 다음 대화하면 되니까.” 물론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은 많다. 가네샤의 의뢰가 무엇인지, 무엇을 부탁한 것인지.
나머지는 나머지에 불과하다.
직접, 본인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다.
“후회할텐데.” “······뭐?” 정작 일기장이란 놈이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 미간을 찌푸린 예리엘은 무심코 데큘레인의 노트를 보았다.
[ ······생각한 바, 일기장 속 그놈은 ‘일기장’ 따위가 아니다. 위험한 놈이다. ] 예리엘은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일기장’은 어느새 흉흉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후회할 것이다.” 예리엘은 품 안의 열쇠를 움켜쥔 채 고개를 저었다.
“후회 안 한다.” “아니. 후회 할 것이다.” “······너, 일기장 맞아? 뭔 일기장이 주인 말을 거역해? 뒤질래?” “······.” 그러자, 놈의 시선이 붉게 물들었다. 예리엘은 흠칫 놀라 물러섰다.
“나는 디카일렌 주인님의 학습지성이다. 주인님은 나에게 최우선 목표로 ‘계승의 적격심사’를 맡기셨다.” “뭐?” “그 결과는 둘 다 탈락이다.” 놈에게서 마력이 일렁였다. 아니, 마력과는 성질이 다른 힘이었다.
‘마기’였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물러나며 예리엘은 물었다.
“······둘다 탈락이면 어떻게 되는데?” “학습 지성인 내가 너희 인격을 대신한다. 나는 주인님을 가장 닮은 존재이니, 하나 이상의 중대한 결핍이 존재하는 너희 따위보다는 더욱 어울리는 계승자인 것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흠칫 놀랐지만, 곧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지랄하네 병신새끼가!” “나는 네 몸을 탈취할 것이다.” “마법 따위로 만들어진 새끼가 어딜 넘봐!” “계승에 욕심이 없는 너보다는 수백배 우월하다.” 놈의 등 뒤에서 촉수가 생겨났다. 예리엘은 이를 깨물었다.
막상 큰소리를 치긴 했으나, 놈이 품은 마기의 격은 정도 이상이었다.
“네 몸을 내놓아라.” 콰아아아악──!
촉수가 뻗었다. 예리엘은 뒤로 돌아 복도를 내달렸다. 동시에 데큘레인의 노트를 꺼냈다. 이 상황의 해답을, 그는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쿠구구구구구구구───!
촉수가 온 사방을 개박살내며 미친듯 따라붙는다. 노트에는 여러 글자가 쓰이지만, 달리면서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내용이다.
쿠우우우우웅───!
벽을 뚫고 튀어나온 촉수가 길을 막았다.
하는 수 없이 예리엘은 아무 기억의 액자에나 열쇠를 꽂았다.
그 액자 너머로, 크게 외치며 다이빙했다.
“오빠──!” 가문. (4) 나는 멍하니 풀바닥에 앉았다.
어린 예리엘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인데 기억은 여전하고, 바람과 햇살이 규칙적으로 살랑인다.
“모르겠네······.” 나는 이 세상을 「이해력」으로 들여다보았고, 마력 농도를 계산했다. 그런데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문제는 이 기억이 아닌 나에게 있었다.
「특성」 중 몇 개가 사라진 느낌이었고, 몸에 각인한 「염동」 도 느껴지지 않았다.
“흐음······.” 나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곰곰이 고민했다.
“아!” 문득 떠오른 생각에 검지를 치켜세웠다.
“영혼만 딸려온 거라면?” ‘보안 기제’가 내 육체를 어딘가에 보관했고, 그 탓에 영혼─즉 ‘의식’만이 이 기록으로 흘러들었다.
“내가 이렇게 자유로운 것도, ‘몸’에 각인한 「염동」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 가설이라면 확실히 아귀가 맞는다.
다만, 그럴 경우 문제는 ‘육체가 어디에 있는지’인데. 예리엘의 기억에 갇혀서는 아무 것도 할 수······.
그때.
쉬우우우웅— 바람이 일어나더니 수풀 한복판에 마력이 응집되었다.
나는 멍하니 지켜보었다.
“뭐고.” 마력은 제멋대로 출렁이며 웬 문으로 바뀌었다. 문자 그대로 ‘문’이었다.
“······통로인가?” 왜, 지구에 유명한 고양이 로봇의 ‘어디로든 문’처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 * * ······30 분 전.
액자에 다이빙한 예리엘은 몸 전체가 줄어드는 감각을 느꼈다. 동시에 정신이 몽롱하게 되었다.
잠시 졸도할 뻔했지만, 제 눈으로 기괴한 광경을 목도하자 눈이 부릅뜨였다.
뒷목에 전기가 찌르르 치솟았다.
“아니이······?” 내 손.
그 손바닥은 물론, 손가락 마디마디가.
작다.
너무, 너무나도 작다.
“이게 어케댄 이랴!” 그렇게 외친 순간.
예리엘은 자신의 혀와 목소리도 정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러슈갸······.”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호빵처럼 빵빵했다. 토실토실했고.
“······애이래? 머야, 이게 대테 무션 이랴!” 갑작스런 퇴화에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어디선가 차가운 시선이 내리꽂힌다.
“너. 시끄럽다.” ······데큘레인이었다.
정확히는 어린 데큘레인. 하지만 그 정갈한 모습과 차가운 태도는 여전하다.
귀족적인 자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정신이 나갔나.” “······.” 저 데큘레인이 열한 살 쯤 되어 보이니, 자신은 네 살 몸인가.
예리엘은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크라인 영주성의 다과실이었다. 자신은 데큘레인과 함께였고, 저 유리창에 비치는 얼굴은······.
“보르가 애이래!” “······보리?” 데큘레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보르! 보르떼기 하때 보르.” 볼 말이다 볼. 볼떼기 할때 볼.
데큘레인은 못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 가지가지 하는구나. 시간이 없다니까 기어코 불러서는.” “······아나 정시나가게댜.” 정신나가겠다.
예리엘은 일단 소지품을 확인했다. 다행히 「유크라인 열쇠」는 놓치지 않았지만, 「데큘레인의 노트」가 없었다.
오는 길에 흘린 것일까, 아니면 이 기록에 들어오면서 녹아 없어진 것일까.
고민하던 중, 다과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온다.
“자~ 도련님?” 예리엘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직접 만든 다과예요.” 자신의 어머니, 아델이었다.
“예리엘도 조금 거들었는데······” 아. 이 기억.
생각 난다.
자신은 엄마와 함께 데큘레인에게 줄 과자를 직접 만들었다. 물론 95%는 엄마가 만들었고, 나머지 5%, 초콜렛 얹는 것만 자신이 했었지.
당연히 데큘레인은 입도 대지 않았다.
그저 지금처럼, 귀찮다는 듯 일어서서 바깥으로······.
“가디마.” “······.” 예리엘은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상상도 못했는지 데큘레인의 움직임이 멎었다.
“머그때는 가치 이써야 대다 그래써여.” “······.” 차가운 눈으로 내려본다. 꽤 오래전 일이고, 지금에 비해서는 무척이나 어린데도, 여전히 심장을 철렁이게 하는 눈이다.
“그게 예이래써여.” “안 먹는다.” “머거여.” “······어제 벼락이라도 맞았나.” 데큘레인의 눈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분위기를 살피던 아델이 얼른 나서서 자신을 품에 안았다.
“미, 미안하구나. 얘가 오늘 왜 이러지.” 어린 데큘레인은 기가 차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아델은 안절부절 못했지만, 예리엘은 왜인지 이 상황이 웃겼다.
“됐습니다. 애 관리나 잘하세요.” 데큘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다과실 밖으로 나갔고, 아델은 예리엘을 꼬옥 안아준 다음, ‘금방 돌아올게-’ 나긋하게 말한 뒤 데큘레인을 뒤따랐다.
“······가디마.” 엄마를 붙잡으려던 예리엘은, 문득 어떤 말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갔다’던 데큘레인의 그 말······.
고오오오오── “?” 웬, 유리창 너머가 갑자기 어둠으로 물들었다. 예리엘은 미간을 찌푸리고 지그시 바라보았다.
끄드드드드득······ 허공에 거미줄처럼 번지는 균열, 그 안에서 디카일렌의 붉은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쁘에!” 예리엘은 화들짝 놀랐다. 어린 몸으로도 이만한 목청이었다.
─너는 나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뇌까리는 놈의 모습에 기겁했다.
어떻게 쫓아온 거지.
도망, 도망을······ 아니 근데 이 몸으로 어떻게 도망을, 다리가 너무 짧잖아!
“······아니디.” 잠깐만.
이 세상은 어차피 나의 기록, 기억이잖아.
그렇다면······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거 아닌가?
“······.” 해볼만하다.
아니, 안 하는 것 보다는 낫다.
“후우.” 한숨 쉰 예리엘은, 제 두 손에 유크라인의 황금 열쇠를 꼭 쥔 채, 눈을 부릅뜨고 다과실의 한 곳을 노려본다.
동시에, 자신의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를 떠올린다.
“부으으으으······.” 쩌저저저적──!
디카일렌이 균열을 벌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리고, 어린 몸이 부들부들 떨릴만큼 정신을 집중한 결과.
정말로, 자신의 생각한 대로.
자신이 응시한 위치에 ‘문’이 생겨났다.
“대따!” 앙증맞은 주먹을 움켜쥔 예리엘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이 문이 이어질 장소를 설정하는 것이었다.
“쿠으으······.” 콰아아아앙──!
허공의 균열이 완전히 벌어지며 디카일렌이 등장했다. 놈은 유리창과 벽을 동시에 박살냈지만, 타이밍 좋게 자신이 만들었던 문도 벌컥 열렸다.
“······데큐레인!” “엉?” 데큘레인이었다.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었던 그는 혼란스러운 내부를 보고는 갸웃거렸다.
“나야 나! 나! 더아저! 지짜 에리에리야!” 어린 예리엘의 외침. 금세 상황을 파악한 데큘레인은 한달음에 건너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예리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휴가 아니라, 다시 도망가야 할 것 같은데?” “에?” 데큘레인은 저편에서 미칠 듯한 살기를 발하는 디카일렌을 보았다.
촤아아아악─! 디카일렌이 촉수를 뻗었다.
데큘레인은 몸을 굴러 피했지만, ‘문’이 파괴되었다.
“저 문, 하나 더 못 만들어?”” 고개를 끄덕인 예리엘은 다시 눈을 감고 부르르 떨었다. 한 번이 어려웠지,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예리엘은 금세 ‘문’ 하나를 만들었다.
“저 뭉으로 가!” “그래.” ─도망칠 수 없다······.
디카일렌이 위협적으로 뇌까리며 촉수를 뻗었으나, 데큘레인은 그보다 먼저 문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슈우우우웅──!
그 순간 세상이 뒤바뀌었다. 마치 액자의 사진을 갈아끼우듯.
예리엘의 몸도 ‘기억’에 맞게 바뀌었다.
“······정원?” 풍경은 유크라인의 정원.
이제 목소리가 곧잘 나온다. 발음도 안 흐르고.
휴우.
예리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정원이네.” 데큘레인이 말했다. 그는 꽃으로 가득한 정원을 둘러보고 있었다.
예리엘은 괜히 입술을 샐쭉이며 물었다.
“······이 일기장에는 왜 들어왔어요?” “네가 위험할 것 같아서.” “거짓말.” “네가 허튼 짓 할까봐.” “그게 맞지.” 데큘레인이 작게 웃었다.
꾸르르르륵── 예리엘의 배가 요란하게 울었다. 예리엘은 흠칫 놀라 얼굴을 붉혔고, 데큘레인은 갸웃거리며 물었다.
“배고파?” “으, 으응.” “나는 안 배고파.” “······누구 놀려요? 안 배고파서 부럽네.” “······.” “······왜요?” 놀리는 건 줄 알았지만, 데큘레인의 얼굴은 진지했다. 데큘레인은 예리엘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예리엘은 괜히 팔짱을 꼈다.
“그런데 예리엘, 너는······ 기록에 따라 몸이 바뀌었어. 방금 전에는 애기였지?” “······.” 예리엘은 말없이 끄덕였다. 살짜 쪽팔렸다.
“그런데, 나는 그대로야. 기록이 바뀌어도.” “네. 그렇네요.” “배고프지도 않고.” “그래서요.” “내가 ‘영혼’이라는 뜻이지.” 데큘레인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예리엘은 새초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영혼?” “그래.” 그렇게 눈을 마주하는데, 돌연 그가 웃어버렸다.
“푸흐흐. 아 신기하네.” 그 헤픈 미소가 예리엘은 당황스러웠다.
솔직한 데큘레인.
겉 껍데기가 사라진 그는, 원래 이런 사람인 걸까?
······나쁘지는 않네.
예리엘이 조용히 미소를 숨긴 그때.
쩌저저저적──!
정원의 허공에 다시 균열이 생겼다. 이번에도 디카일렌이었다.
데큘레인이 혀를 찼다.
“끈질긴 놈이구만.” “어떻게 할까요?” “어쩌긴.” 데큘레인이라면 어떤 해답이 있을 터.
예리엘은 그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다시 문 열어야지.” “······엥?” “뭐. 왜. 생각이 날때까지 도망가는 수 밖에 없잖아.” 아직은 방도가 없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하다니······. 예리엘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얼른. 쟤 오겠다.” 쾅─! 쾅─! 촉수가 균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 응.” 예리엘은 눈을 감고 문을 상상했다. 문은 금세 나타났다.
“목적지는?” “굳이 안 정했어요.” “돌발도 나쁘지는 않지.” 데큘레인은, 데큘레인 답지 않은 말을 하며, 심지어 웃으면서 문고리를 쥐었다. 그리고는 예리엘을 바라보았다.
“같이 열자?” “네? 아······. 네.” 예리엘은 데큘레인의 손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문을 열었고, 그 너머로 함께 발을 내딛었다.
* * * ······그 이후로는 도망의 반복이었다. 디카일렌의 학습지성은 꾸준히 자신들을 뒤쫓았고, 예리엘은 꾸준히 문을 상상하며 도망갔다.
그렇게 열살이 되었다가, 네 살이 되었다가, 스무 살이 되었다가······.
유크라인 영주성에 있었다가, 마탑에 있었다가, 아카데미에 있었다가······.
하루 24 시간 동안의 정신없는 도피였지만, 예리엘의 기분은 그닥 구리지 않았다.
오히려, 데큘레인의 새로운 모습. 그의 솔직한 속마음과 함께라서 좋았다.
“······나 또 어려져써.” 이럴 때는 말고.
예리엘은 뚱한 얼굴로 거울을 보았다. 네살~다섯살 사이의 외관이었다.
“그러게. 또 어려졌네.” 데큘레인은 작은 예리엘을 번쩍 들어 옆구리에 끼웠다. 예리엘은 괜히 투덜거렸다.
“무거이주아라.” “물건인 줄아냐고?” “구데.” “이게 편하잖아. 그것보다, 여긴 어떤 기억인데?” “모라.” 다시 애가 되어버린 지금, 예리엘에게 기억 따위는 상관이 없다.
도대체 언제까지 도망치는 건지.
문을 만들려면 마력이 필요한데, 이제 남은 마력도 얼마 없······.
쭈우욱─ 데큘레인이 예리엘의 토실한 볼을 만지작거렸다.
쭈욱── 쭈우욱── “지짜. 보르 마지지마.” “아, 나도 모르게.” 호빵처럼 주욱 늘리다가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놓는다.
예리엘은 괜히 입술을 비틀었다.
“······이제어떠케해여. 더망더 하두버바게모태.” 도망도 한두번 밖에 못한다는 뜻. 제대로 알아들은 데큘레인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글쎄다. 어느 정도 알 것 같기는 한데······.” “멍데.” “네 열쇠. 다시 꺼내봐.” 예리엘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데큘레인은 그 열쇠로 손가락을 뻗었다.
“어?” 예리엘의 눈이 휘둥그렇게 되었다. 데큘레인의 손가락이 열쇠를 그대로 통과한 탓이었다.
왜, 유령이 물체를 만질 때처럼.
“나는 그 열쇠를 못 쥐고, 몸도 너만 변해.” “애그러거데?” “왜 그런 거냐고?” “으응.” 사실, 감은 이미 잡았다. 디카일렌이라는 놈을 어떻게 상대할 지, 원래대로 돌아가는 방법은 무엇인지.
다만 나는 김우진으로서, 이 독립적인 기분을 조금이나마 오래 만끽하고 싶었다.
“왜 그런 거냐면······.” 쩌저저저적──!
또 다시, 균열이 일었다. 유리처럼 깨어지는 허공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놈은 어째 저리 빨리 쫓아오냐.” 레이더라도 작동하는 건지.
거머리마냥 끈질기게 쫓아오는 꼴이 호러 그 자체다.
“······어케해.” “가자. 다른 기록으로.” “떠?” 예리엘이 볼을 부풀렸다. 호빵같았던 두 볼이 이제는 풍선이 되었다.
“걱정마. 이게 마지막이니까.” “······아게떠.” 예리엘은 눈을 감았다. 정말 마지막이 되길 바라며 문을 만들었다.
“푸아! 대써.” 이제 익숙하게 문이 나타났다. 데큘레인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다가갔다.
예리엘의 작은 손이 그 문을 열었다.
쿠구구구구궁──!
─이제 소용 없음을 알 텐데······ 균열이 열리고, 디카일렌의 늘어붙은 음색이 흘러든다.
“무시해.” 데큘레인은 바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슈우우우우웅······.
다시 몸이 늘려지는 듯한 감각.
눈을 뜬 예리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른이다.” “그리고 공터네.” 데큘레인이 태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 알맞게, 아무 것도 없는 공터였다.
예리엘은 짐짓 그를 흘겨보았다.
“설명해봐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아~ 그러니까-” 그런데.
크드드드드득─── 디카일렌의 추적 속도가 기하급수적이었다. 우리가 도망에 익숙해진 것처럼, 저 놈도 추적이 능숙해진 듯하다.
예리엘은 데큘레인을 보았다.
“또, 또 도망가?” “아니. 이제 도망갈 필요가 없어.” 데큘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해답을 찾은 듯 믿음직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면?” “처음에, 저 놈이 ‘보안기제’를 들먹였지?” 그렇게 말하면서 데큘레인은 기지개를 켰다. 뭔가를 준비하는 자세였다.
예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안기제는 그 열쇠였어.” “······?” 어리둥절하는 예리엘에게, 그는 「유크라인의 열쇠」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내 몸은 그 열쇠 안에 있다는 거지.” “몸?” 예리엘이 되물었다. 데큘레인은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응. 예리엘 너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챘잖아? 나는 영혼, 말하자면 무의식이라는 거.” “······.” 순간 뜨끔했다. 예리엘은 입술을 입 안으로 오므렸다. 그리고는 삐뚜룸히 끄덕였다.
쩌저저저적──!
그러는 사이에도 균열이 벌어지고 있었다. 데큘레인은 그쪽을 힐끗 보았다.
“저 놈은, 어디서 마기를 얻었는지는 몰라도, ‘마기’로 이루어진 놈이지.” 물론 악마는 아니다.
악마만 마기를 다룰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니. 그러나 놈의 주 연료가 마기인 이상, 또한 예리엘과 함께라면, 데큘레인이 질 이유는 없다.
“내 몸을 되찾으면 돼. 그러면 이길 수 있어.” 다만, 데큘레인 「특성」의 대부분은 육체에 있다. 특히 마기를 상대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유크라인」이라는 「핏줄」이 필요하다.
지금의 데큘레인은 김우진의 영혼에 불과할 뿐이니.
“몸을? 어떻게 되찾는데?” 예리엘이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으나, 그 방법은 사뭇 간단했다. 사실 처음부터 예리엘의 손에 있었다.
데큘레인이 말했다.
“그 열쇠를 내 심장에 꽂아.” 물론, 몸을 되찾으면 이 무의식도 끝이다. 즉, 다시 데큘레인으로 되돌아간다.
조금은 섭섭하고, 약간은 망설여지고, 괜히 무섭고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이 상태로 머무를 수는 없다.
일탈은 이 쯤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나에게 맡겨.” 데큘레인은 자신감이 가득한 미소를 보였다.
그런데, 정작 예리엘이 이상했다. 예리엘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 “왜?” 그녀는 우물쭈물 데큘레인을 올려다보았다. 무엇인가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얘가 왜 이러지- 잠시 미간을 찌푸린 데큘레인은 곧 깨달았다. 왜인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자신과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아하~” 쩌저저저저적─!
중요한 순간인데.
디카일렌은 눈치도 없이 균열을 열었고, 먼저 시커먼 촉수가 흘러들었다.
쿠드드드드득─!
예리엘은 그 귀기 어린 장면과 데큘레인을 번갈아 보았다. 시커멓게 벌어지는 균열에서 디카일렌이 머리를 들이밀었고, 데큘레인은 나지막이 웃었다.
“······.” 예리엘은 열쇠를 품에 안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조금 두려웠다.
이 열쇠를 사용하면, 지금의 그가 떠날 것 같아서. 완전히 사라질 것만 같아서. 이날의 기억들을 전부 잊을 것 같아서.
나는 이 데큘레인이 좋은데, 원래대로 돌아가게 되면.
그는 두 번 다시,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주지 않을 테지.
“괜찮아.” “!” 그 마음을 들킨 걸까. 데큘레인이 따스한 음색으로 자신을 불렀다. 머리에 손을 얹었다.
예리엘은 시선을 들었다. 그는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가 여전히 예리엘인 것처럼······.” 어둡고 텅 빈 공터.
예리엘은 멍하니 그를 바라본다.
그의 표정, 미소, 목소리 전부, 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내보인 적 없던 모습이다.
“나는 여전히 나니까.” “······.” 예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눈물을 참았다.
쉬운 일이었다. 포커 페이스, 감정을 숨기는 것은 협상의 기본이나 다름 없었으니.
물론 지금이 협상, 거래, 뭐 상인과의 단판, 가문 간 회의, 그런 자리는 아니지만······ 아무튼 횡설수설하는 것 같지만······.
결연하게 끄덕인 예리엘은 두 손으로 열쇠를 쥐었다.
“응. 나도 알아.” 그 열쇠를, 데큘레인의 가슴팍에 밀어넣었다. 열쇠는 그에게로 부드러이 스며들었고, 철컥— 뭔가에 걸리는 듯한 감각과 함께 멈췄다.
그때, 데큘레인이 그녀의 손을 감싸주었다. 예리엘은 그를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손과 마음에, 따뜻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잘가요.” 철컥─!
열쇠를 비틀었다.
쏴아아아아······ 그 순간 ‘현상’이 발생했다.
열쇠에서 황금색 기류와 마력이 일었고, 눈 감은 데큘레인에게 그 입자가 스며들었다.
쩌저저저적──!
거의 동시에 디카일렌의 균열이 완전히 열렸다.
그러나, 이상하게 고요했다.
쉬익─ 쉬익─ 놈은 촉수를 날름거리며 데큘레인을 응시했다. 그의 변화를 감지했는지, 기묘한 탐색 태세였다.
“······.” 침묵과 적막.
예리엘은 제 곁에 선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직전과는 무척 달랐다. 이미 뒤바뀌었다.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날붙이처럼 벼려진 눈. 귀족으로서의 기품, 오만에 가까운 자기확신으로 가득찬 얼굴.
예전에 보았던, 아니 오래전부터 자신의 기억에 있었던, 데큘레인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 그는 말없이 일대를 휘둘러보았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위로 깔끔히 쓸어넘겼다. 소매의 흐트러진 단추를 잠궜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한 가닥도 남지 않은 주름. 병적으로 씻겨나간 먼지. 고고하게 굽어보는 시선.
아주 작은 빈틈조차 내보이지 않는 그.
예리엘은 조금은 슬픈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데큘레인.” 디카일렌의 인격이 말했다.
그리고 데큘레인은, 다시 데큘레인으로서 디카일렌의 인격을 마주했다.
“······.” 침묵한 데큘레인은 자신의 내면을 느낀다.
만들어진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타락한 꼴. 저 부패한 쓰레기, 빌어먹을 오물을 보자니······ 김우진에게는 없던 혐오, 모멸, 분노, 역겨움을 비롯한 모든 감정이 울컥 치솟는다.
데큘레인은 그 부정의 총체를 한마디로 표현했다.
“······구데기 같은 놈. 어디 감히 내 이름을 네 입에 올리나.” 스포일러. (1) “나는 구더기가 아니다. 너희보다 우월한 존재다.” 디카일렌의 인격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쓰레기처럼 버려진 놈이, 제 주제도 모르구나.” 나는 비웃으며 정장의 안주머니를 확인했다.
목강철은 부피가 꽤 큰 탓에 가지고 오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이해」에 성공한 「설화석」의 귀퉁이가 있었다.
“나도 도울게.” 예리엘이 곁에 다가오면서 말했다. 나는 녀석을 「염동」으로 밀었다.
“넌 나가 있어라.” “왜? 나 아직 괜찮아요.” 예리엘은 자신에 찬 얼굴이었다. 그러나, 녀석의 안색은 이미 바뀌었다.
마기 중독의 전조 증상이었다.
“마법 하나 쓸 마력 정도는—” “시끄럽다.” “······.” “방해 말고 꺼지라는 말이다.” 예리엘이 입을 꾹 다문다.
분통인지 심통인지, 아주 불만스런 얼굴이지만 어쩔 수 없다.
예리엘은 이 상황에 있어서는 안 된다.
촤아아아악──!
그때 디카일렌이 촉수를 분출했다. 촉수의 테두리에 검붉은 기운이 일렁였고, 일대의 공기는 이미 마기로 물들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녀석의 마기를 나의 마력으로 전환한다.
「혈통」에 의하여 정화된 마력은 ‘한 단계’만큼 격이 상승하고, 그 순간적인 증폭은 나로서도 쉽게 감당하기 힘든 격류다.
나는 터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설화석」을 가동한다.
탁구공만한 금속 덩어리. 그 하얗고 푸른 결정이 그물처럼 펼쳐진다.
촤르르르르륵─ 얇고 가느다란 선이 서로 교차하며 격자를 이룬다.
고작 1mm 두께에 불과한 위태로운 방호.
그러나 디카일렌의 촉수는 「설화석」에 닿은 순간 얼어붙고, 타오른다.
이토록 모순적인 현상이야말로, 신비의 금속 「설화석」의 위명이다.
────────!
놈은 촉수를 휘둘렀다. 촉수는 진득한 마기를 방출했다. 그 농도 자체는 꽤 위험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물리적인 타격을 허용하는 순간 염산에 젖은 듯 녹아내리겠지.
다만 나는 그 전부를 여유롭게 받아치며, 아직 프로토타입(Prototype)에 불과한 「설화석」의 소모값을 계산했다.
마력 소모는 평범한 강철의 열배 이상.
「염동」의 조작이 복잡할 경우 다섯 배 가까이 곱연산으로 증폭.
따라서 총 마력 소모량은 목강철의 ‘최소’ 열 배에서 최대 오십 배.
현재의 「설화석」은, 마기가 충만한 공간이 아닌 이상 무턱대고 활용하기에는 부담스럽다.
아직은 미완의 필살기인 것이다.
“요상한 물건을 부리는군.” 디카일렌의 공격이 멎었다. 놈은 자신이 「설화석」을 뚫어낼 수 없음을, 아니 승산 자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했다.
놈을 그저 지켜보던 나는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너는 정말 디카일렌이 만들었나?”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녀석의 연료는 마기.
아무렴, 악마를 혐오하는 유크라인의 마법사가 제작했다기에는 너무 과격한 놈이 아닌가.
“나는 디카일렌 주인님의 학습 지성이다. 너희를 대신하기 위하여 탄생했다” 놈은 그렇게만 대답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붉은 포물선이 치솟았다. 나는 그곳을 돌아보았다.
예리엘이었다.
“하앗!” 녀석이 마법을 발현한 것이었다.
그 종류는, 파괴마법 「화연선(火連線)」.
불[火]이라는 원소와 공간[空間]이라는 개념이 조화를 이룬 고급 마법.
가느다란 선(線)에 초고열의 화마를 응축하여, 대상이 ‘피할 수 없게’ 기폭하는, 꽤 어려운 테크닉.
예리엘이 시전한 「화연선」이 녀석의 면상에 닿았고, 콰아아아아──!
놈의 미간에서부터 불길이 폭발했다.
“······나도 도울 수 있어.” 콜록—! 콜록—!
예리엘은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제 딴에는 ‘잘했지?’ 따위의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는 화가 치밀었다.
“어때요? 나—” “꺼지라는 말 못 들었나.” 예리엘의 표정이 굳었다.
꿀꺽, 침을 삼킨 녀석의 턱이 꽉 깨물렸다. 거친 숨을 내쉬며 가슴을 들썩였다.
“······나 진짜. 안 그래도 이제 갈 거거든!” 그렇게 외친 예리엘이 뒤로 돌았다.
“부를 생각도 하지마!” 쿵쾅거리면서 걸어가더니, 마지막 남은 마력으로 문을 열고, 열쇠와 함께 이 공간에서 사라진다.
화르르르륵──!
나는 뒤늦게 전방을 보았다.
디카일렌이 마법의 불에 타오르고 있었다.
하긴, 「화연선」은 꽤 치명적인 파괴 마법이니.
예리엘 녀석은 여태, 나름 열심히 마법을 연마한 듯하다. 나에게는 비밀로 한 채.
“······나쁘지는 않군.” 나는 「설화석」을 다른 형상으로 가다듬었다.
촤라락──!
그물 형상이던 설화석이,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수십 조각으로 잘게 나뉘었다.
그 입자들은 디카일렌에게 쇄도했다. 예리엘이 일으킨 불길 속에서, 디카일렌의 몸을 잘게 베었다.
마치 저며내듯이.
놈의 몸에 상처를 내고, 얼리고, 불태우길 반복한다.
“······.” 그럼에도 디카일렌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저 발악하듯 온 사방으로 촉수만 뻗었다.
놈에게는, 통각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감각이 없구나. 그렇다면, 너는 실패작이다.” “아니······ 나는······ 디카일렌 주인님의 학습 지성이다······.” 놈은 아까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희를 대신하기 위하여 탄생했다······.” 놈의 내부에서 마기가 뭉탱이로 흐른다.
육체 이곳 저곳이 분해되며, 그 안의 연료가 누출되는 것이다.
“나는······.” 쉽게 말해, 죽어가고 있다.
“디······카일······. 렌······ 주인님의······.” 늘어지던 목소리가, 어느 순간 뚝 끊긴다.
인간의 형상을 지닌 채 인간처럼 행세하던 놈이, 한낱 재로 사그라든 것이다.
“쓰레기, 너에게 알맞은 꼴이다.” 나는 녀석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놈은 잿더미가 되었지만, 그 안에 파묻힌 무엇인가가 있었다. 심장처럼 박동하는 기괴한 물체였다.
「육안」으로 보았다.
───「인공핵」─── ◆ 정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핵.
:마기로 이루어진 유기 화합물이다.
:미완성품이다.
──────── “······「인공핵」?”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해력」으로 인공핵의 구조를 확인했다. 마기는 물론, ‘각종 생명체의 회로’가 이 안에 집적되어 있었다.
마법으로 이루어진 고어(Gore)였다.
“디카일렌······.” 인공핵을 노려보며, 그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그는 왜, 아티팩트로 이런 물건을 제작했을까.
유크라인의 마법사이면서 ‘마기’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짓을 할만할 놈들은······.
“······제단.” 제단 뿐인데.
설마, 유크라인 가문이 제단과 관련되었나?
아니면, 디카일렌의 독단이었나.
“아직은 모른다.” 나는 「염동」으로 「인공핵」을 들었다.
생김새가 역하고 더럽긴 하지만, 연구할 필요성은 충분하다.
* * * 한편, 먼저 나온 예리엘은 데큘레인을 기다리며 투덜거렸다.
“진짜 어이가 없네.” 칭찬 한 마디하면 혓바늘이 돋나. 이미 다 아는데, 조금 솔직하게······ 대하면 더 이상할 것 같기도 하다.
데큘레인은 그래도 데큘레인 다운 게 맞지.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 그랬다.
“콜록, 켈록. 아, 목 아파.” 예리엘은 잠시 벽에 기대어 몸을 점검했다. 마력도 거의 다 닳았고, 마기 중독 증세가 조금 있었다.
“잠깐만.” 목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다 미간을 찌푸렸다.
유크라인의 핏줄은 예로부터 마기를 이용해왔다, 고 가신들은 항상 말했는데.
“왜 나는······.” 마기 때문에 기침을 하는 거지. 머리도 어지러운 것 같고.
“피곤해서 그런가?” 예리엘은 갸웃거리면서 「유크라인의 열쇠」를 꺼냈다.
이제 가신들을 구할 시간이었다.
데큘레인은 뭐, 문을 열어두었으니 알아서 해결하고 알아서 나오겠지.
“······설마 지지는 않겠지.” 예리엘은 저도 모르게 걱정해버렸지만, 이내 방금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던 데큘레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긴. 지기만 해봐.” 그렇게 자신 넘치게 ‘꺼지라는 말 못들었나─’ 라고 질책할 정도니.
당연히 이기고 돌아오겠지.
가문 쪽팔리니, 지면 장례식도 안 해줄 거라고.
“어디보자······.” 또각─ 또각─ 예리엘은 단화를 또각이며 일기장 속의 복도를 걸었다. 총총걸음으로 데큘레인의 기억들을 힐끗거렸다.
데큘레인의 기억이 담긴 액자에는 제목이 없었다. 데큘레인답게, 전부 무제( 無題) 뿐이었다.
“가신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러다 문득.
“응?” 예리엘은 어떤 날의 기억을 발견했다.
데큘레인의 기억 중, 비교적 최근의 것이었다.
“아~ 이때······.” 이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리엘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쓰게 웃으며 다가갔다.
그 기억의 액자에 눈을 대자마자, 카랑카랑한 음색이 스며들었다.
─나를······ 쓰레기통 취급하고 있어.
서늘하고, 살기 등등한 목소리.
시간은 어두운 밤.
공간은 유크라인의 저택.
상황은 2 억 엘네를 탕진한 데큘레인을 찾아간 자신.
저때는, 칼이며 총이며 다 챙겼었지.
진짜 그만큼 화났었는데.
─내가, 네 옆에서 똥치워주는 사람인 줄 알아?” 자신은 분노에 가득 차 울먹이며 뇌까리지만, 데큘레인은 태연하다.
뭔 개가 짖나- 따위의 얼굴로 응시한다.
─내가 평생 이러고 살 줄 알아? 난 너 때문에 대학도 그만뒀어! 씨이발 그 흔한 연애도 한 번 안해봤어!
그 모습이 자신을 더 화나게 만들지만······.
이윽고 데큘레인은 말한다.
─가주의 자리를 너에게 주겠다.
─······구라, 구라치고 있네!
“푸하.” 예리엘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기억은 여전히 이어진다.
─아니 말이 안 되잖아. 왜? 왜 갑자기?
─나는 이제부터 마탑과 마법 연구에 열중할 생각이다. 당주 노릇을 할 시간이 없을 테고, 너는 이미 영주로서 어느 정도 숙달되었겠지.
이때는 정말 이럴 줄 몰랐지.
예리엘은 연극을 관람하듯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그럼······ 승계식은······ 언제 할 건데······요?
─알맞은 때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터.
─삼년 뒤. 예외의 날.
영주를 내어준다니 갑자기 태세전환하는 꼴.
당시에는 진짜 당황스러웠는데, 지금 보니 부끄럽다.
너무 속 보이는 반응이라서.
“으. 으으으······” 지금의 예리엘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저날의 예리엘은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 이게 거짓말이라면, 그땐 나도 어떻게 될 지 몰라······ 이판사판이야. 알아? 이미 우리 영지 사람들은 전부 나를 영주로 여기고 있어.
─믿어라. 결코 거짓이 아니다.
─······흥!
그 대담 직후, 예리엘은 단검과 총을 주섬주섬 가방에 넣었다.
“와. 나 총까지 챙겨갔었네?” 자그마한 엽총이지만, 무턱대고 아무 흉기나 가지고 간 것이다.
“어쩌려고 저랬을까.” 아무튼, 그렇게 가까스로 분노를 참고 떠나가려는 자신을.
─예리엘.
데큘레인이 붙잡는다.
그 순간을 지켜보던 예리엘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오가느라 배고플 텐데, 밥이라도 먹고 가거라.
“아 못 보겠다.” 오글거린다.
미칠 것 같다.
─돼, 됐거든! 됐거든요! 갑자기 이상한 소리 하지마! 얼른 가야된다니까 뭐래는거야······.
저때의 데큘레인은 왜 저런 말을 했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예리엘은 이 기억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데큘레인의 기억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흠.
예리엘이 떠나고 텅 빈 저택.
데큘레인은 작은 숨결을 내쉰 뒤, 와인 한잔과 함께 의자에 앉는다.
바로 그 순간.
휘이잉······.
신비하게 휘몰아드는 바람.
동시에, 자그맣게 흘러드는 낯선 목소리.
─신기하네요.
“······?!” 자신은 몰랐던 기억.
예리엘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냥 와본건데 말이에요.
달콤하게 속삭이는 매혹적인 목소리.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
어느새 나타나 창틀에 앉아 다리를 흔드는 저 여인은······ ─이런 일이 있었네요.
······여태 예리엘이 찾던, 붉은 가넷 모험단의 수장─ 가네샤.
─후훗.
그녀는 웃으면서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데큘레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불청객이다, 가네샤.
─아~ 미안해요. 정말 미안한데·····.
예리엘은 그들의 대화를 멍하니 응시한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바싹 마르는 입안. 관자놀이가 뜨겁고, 식은땀이 등허리를 적신다.
─교수님이 당주 자리를 넘긴다니요? 정말, 정말로 달라지려는 건가요?
분명, 데큘레인은 가네샤에게 어떤 의뢰를 맡겼다.
그 의뢰는 자신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 실마리가 이 기억에 있을지도 모른다.
─······나보다 저 녀석이 더 잘 할 것 같았을 뿐이다.
저편의 데큘레인이 말했다.
그의 마음은 정직했다. 당주를 내어주겠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후훗. 그래요? 아니 그래도······ 그래도 있잖아요.
가네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대단히 띠꺼운 얼굴이었다.
“저 년이······.” 미간을 찌푸린 예리엘이 뇌까린다.
감히 이 중요한 대화를 엿듣다니.
금방이라도 욕설을 뿜어낼 기세로 가네샤를 노려보던 예리엘은,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친동생이 아니잖아요.
“?” 순박하게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슨 말인지 이해 자체가 되지 않아서, 표정조차 아직 찌푸린 채다.
그러나 되감는 기능 따위 이 액자에 존재할 리 없고······ 가네샤의 말은 천천히 이어진다.
─저 아이는, 유크라인 가문의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였잖아요······?
스포일러. (2) ‘너희는 임무만 확실히 이행해라.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예리엘은 계속 영지에 처박아두면 되니.’ ······예리엘은 언젠가 자신이 보았던, 아니 환관 졸랑이 건넸던 아티팩트에 기록된 영상을 떠올린다.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하찮으니 아마 확실할 것이나, 임무 목록에 감시도 추가하지.’ 제도의 저택, 와인잔을 쥔 채 임무를 말하는 데큘레인. 그 시야 귀퉁이에서 흔들리는 가네샤의 붉은 머리카락.
그들이 서로 나누는 내용은 아마······.
─저 아이는, 유크라인 가문의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였잖아요······?
예리엘은 그 시간을 바라본다. 어두운 장면을 응시한다.
가네샤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말을 지껄이고, 데큘레인은 그녀를 외면하듯 말없이 앉아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
액자의 창밖, 밤하늘에서 바람이 흘러든다. 커튼이 부드럽게 팔랑이고, 은은한 달빛이 데큘레인을 비춘다.
그늘진 그에게는 표정이 없다.
여전히, 조금의 속내도 드러내지 않는 얼굴이다.
─교수님이 먼저 저희한테 의뢰했었잖아요. 당신과 당신 동생의······ 생물학적인 구분을.
잠시 멎었던 예리엘의 심장이, 그때 다시 박동한다. 그 맥박은 온몸을 쥐어짜내는 듯이 번진다.
그들의 대화가, 이 액자 안의 상황이, 서서히 고통스럽게 이해되어간다.
─······.
데큘레인은 여전히 말이 없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저 가만히만 있다. 곰곰이, 어떤 고민에 잠긴 듯.
“아······.” 그러나 예리엘은 도저히, 데큘레인처럼 평온할 수 없다. 머릿속 생각이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토막난 듯 자꾸만 끊긴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는 쥐가난 것처럼 저리다.
─제가 3 개월전에 부하를 시켜 알려주지 않았던가요?
예리엘의 시야가 흐릿하게 물든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 안에서 휘몰아친다.
알기도 싫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소용돌이. 그 안에 어릴적 자신의 모든 모습이, 어머니의 얼굴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뒤섞인다.
“생물학적인 구분.” 예리엘은 멍하니 중얼거린다. 자신의 과거를, 유크라인으로서의 자신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말.
얼이 빠질 듯 혼란스럽지만, 그녀의 논리는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자신에게 마기가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이유는, 그러니까 아직도 목이 따끔하고, 폐가 뜨거운 원인은······ 내가 유크라인이 아니기 때문에.
“······.” 예리엘은 이 세계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귀가 멍해지고, 딛고 선 노면이 흔들린다.
위태로운 발밑은 금방이라도 내려앉아 자신을 집어삼킬 듯하다.
그때.
─······그래.
데큘레인이 입을 연다.
예리엘은 한순간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떨리는 숨결을 내뱉으며 그를 주시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때까지도, 예리엘을 버틸 수 있었다.
그녀의 독기가, 자기자신을 버리고 오직 가문과 영지만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살아온 나날들이, 바로 설 수 있도록 지탱했다.
······하지만.
─예리엘은 여전히 예리엘이다.
데큘레인의 그 말. 바스라질 듯 건조하지만,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
이유 따위 없다는 이유.
“어······?” 고작 그 한 마디의 울림은, 누군가의 마음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감정의 둑을 터트리기에 차고 넘친다.
“······이게.” 예리엘은 천천히, 자신의 몸이 기우는 것을 느낀다.
가누기 힘들어진 손발이 제멋대로 흘러내린다.
‘예리엘은 여전히 예리엘이다.’ 데큘레인의 메마른 목소리.
그 위에 덧대어지는, 또 다른 따스한 목소리.
‘네가 여전히 예리엘인 것처럼······ 나도 여전히 나니까.’ 데큘레인의 무의식이, 자신에게 솔직히 전한 말.
그 전부는 호수에 일어난 파문처럼.
예리엘의 가슴 속에서 어떤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제국 서부 하데카인 근처의 드팔렘 숲.
성당이 부탁한 ‘마기 정화 임무’에 동행했던 그날.
‘왜! 왜 나는 안 된다는 건데?!’ 돌아가는 차 안에서 버럭거리며 외치는 나.
‘시끄럽다.’ 여느 때처럼 냉랭하게 질책하는 데큘레인.
‘어차피 끝까지 가지도 않았다면서! 위험하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너는 방해다.’ 예리엘은 차근차근 그 상황을 떠올린다.
따지듯 쏘아붙였던 말들을 되새긴다.
‘나도 유크라인이거든? 악마가 적이라면 충분히 활약할 수 있어!’ ‘멍청하게 굴지 마라. 책임자는 앞선에 나서지 않아.’ 나도 유크라인이라고 자랑스레 떠드는 자신에게······.
‘또한 앞으로도, 혹시나 네가 전장에 참여한다거나 하면, 약속은 없었던 걸로 할 테니 그리 알아라.’ 데큘레인은 그렇게 협박했다.
‘너는 언제까지 어리게 굴 생각이냐. 네 지위에 맞게 행동해라.’ 아니, 협박이 아니었다.
‘마땅한 기품과 격조를 보여라.’ 유크라인의 핏줄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려는 것이었다······.
예리엘의 기억은 한 번 더 이동한다.
귓전에, 데큘레인의 목소리가 아른거린다.
졸랑의 아티팩트에서 데큘레인이 한 말이다.
‘녀석이 혹여나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려거든······ 너희가 뭘 해야할지는 굳이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 터.’ 유크라인이 아니라는 것을,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혹시라도 알게 된 내가 저지를 ‘어리석은 짓’.
데큘레인의 그 뜻을······ 예리엘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굳이······.
그때 들려오는 음성. 예리엘은 멍하니 일어나 다시 액자를 보았다.
어느새 가네샤가 떠나고, 왜인지 슬픈 얼굴의 데큘레인.
그는 와인잔을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다.
─알 필요 없는 사실이었다.
예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터지려는 울음을 억지로 짓눌렀다.
“······왜.” 다만 중얼거리며 액자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게 알 필요 없는 사실인데······?” 예리엘은 여전히 예리엘이라는 그의 말.
혈통이나 핏줄 따위는, 애초부터 그에게는 조금도 상관이 없었던 것일까.
예리엘은 고개를 숙였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렸다.
“왜······.” 이유가 무엇일까.
데큘레인이라는 사람은 언제부터, 얼마만큼······.
피도 섞이지 않은 나를, 고작 동생이라는 이유로······ 뚜벅─ 그 순간 인기척이 일었다.
‘진짜’ 데큘레인이 돌아온 것이었다.
“······!” 예리엘은 다급히 액자에 열쇠를 꽂았다. 이 기억을 데큘레인에게 보여서는 안 되었다.
카드드드득!
미친 듯 떨리는 손을 억지로 부여잡고 어떻게든 간절히 비틀자─ 액자 전체가 사그라들었다.
뚜벅 뚜벅.
직후, 예리엘은 복도 한복판에 우뚝 굳었다.
뚜벅 뚜벅.
저 너머의 어둠에서 데큘레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예리엘.” 그가 이름을 불렀다.
어느 정도는 화가 난 듯하고, 한없이 서늘한 음색.
“내 일기장을 훔친 연유는 나중에 묻기로 하겠다.” 그러나 예리엘은 두렵지 않았다.
이제, 그의 마음을 알았으니.
정말 수십·수백번 혼날만한 짓을 저질렀으니.
“우선 지금은······?” 툭- 가까이 다가온 데큘레인. 예리엘은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박았다.
툭- 툭- 툭- 딱따구리처럼 서너번 정도 그렇게 두드렸다.
미간을 찌푸린 데큘레인이 말했다.
“뭐하는 짓이지.” “······.” 예리엘은 고개를 비스듬이 올려 그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오해한 듯, 데큘레인은 엄한 목소리로 꾸중했다.
“눈 내려라.”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이 사람은 여전히 모르는 척 한다.
아마 일평생을 이렇게 비밀로 남길 생각일까.
“······.” 그는 ‘알 필요 없는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읊조리던 그의 마음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아마 오랫동안 모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보다 마음이 중요한 어떤 순간이 있다.
생각하기에, 그 순간은 바로 지금이니······ 나도 모르는 척 행세하는 게 맞을 테지.
예리엘은 떨리는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였다.
“······가신들 찾으러 가야돼.” “받아라.” 그가 기다렸다는 듯 노트 세 권을 건넸다. 각각 가신들의 이름이 적힌 노트였다.
“보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응.” 예리엘은 노트를 읽으며 그들의 기억을 분간했다. 복도를 거니는 자신의 등 뒤에 데큘레인이 따라붙었다.
“왜 쫓아다녀? 뭐 숨기고 싶은 기억이라도 있나봐?” “말이 짧다.” “······흥.” 입술을 삐죽인 예리엘은 데큘레인과 함께 가신들을 찾아 나선다.
가슴이 터질 듯 아프지만,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만, 머리에 독안개가 낀 듯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데큘레인을 바라본다.
“······.” 그와 나란히 걸으며,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예리엘은 생각한다.
물론 막 날아갈듯한 기분~ 은 절대 아니다. 데큘레인도, 나도, 한순간에 벽을 부수고 살갑게 굴만큼 좋은 성격은 못 되니.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알아야 할 것이 많고, 노력해야 할 것도 많다.
데큘레인.
그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대로,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 것처럼······.
나도, 그 마음에 걸맞은 존재가 될 필요가 있다.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돌연 예리엘이 말했다.
“야.” “······.” 순간 데큘레인이 우뚝 멎었다. 그는 거의 죽일 듯 노려보았지만, 곧 다음 이어진 말에는······.
“데큘레인 오빠.” 어느 정도 당황한 눈치였다. 그는 눈썹을 좌우로 찌푸리며 대꾸했다.
“······벼락이라도 맞았나.” “푸하하.” 예리엘은 억지 웃음을 지었고, 데큘레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자. 얼른 찾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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