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16
데큘레인이 어딘가를 바라본다. 그 방면에는 누가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아주 살짝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띈다.
─너희가 뭘 해야할지는 굳이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것으로 영상은 끝났다. 짧은 기록이었으나, 연원일시마저 기록되어 있었다.
작년의 일이었다.
졸랑이 방긋 웃었다.
“그 아티팩트의 진위는 마법사이신 예리엘 씨가 가장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보십시오.” 그러면서 어떤 밀봉된 종이의 일부를 내밀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흔한 것이 아닌지라, 제가 자세히 조사한 결과······.” 졸랑은 모험길드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어떤 문서를 복원했다. 신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모험길드조차도 뚫어낸 환관의 저력이었다.
“이 대상이 보이십니까.” 가네샤-데큘레인 계약서의 일부. 예리엘은 졸랑이 가리킨 단락을 보았다.
──[ 길드 제출용 계약서 ]── ◆ 개요 : 데큘레인 폰 그라한 유크라인이 전한 임무를 붉은 가넷 모험단은 충실히 이행한다.
◆ 대상 : 예리엘 폰 델룬 유크라인.
◆ 내용 : 보안을 위하여 구두로 전달한다. (*1 급 기밀 비용 지불. 길드 제출용 계약서에 작성 불가.) ◆ 인장 / ────/ “당신이 대상입니다. 어떤 임무일지는, 뭐 모르겠습니다만. 뻔하-” “병신.” “······예?” 그런데, 졸랑이 예상도 못했던 말이 되돌아왔다. 예리엘은 졸랑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니, 우리 사이 안 좋은 걸 지금 알았나 싶어서요.” “······하하. 그렇습니까?” “누가 보면 그동안 내가 데큘레인을 아~주 좋아해서 영지 일에 열중했는지 알겠어. 됐고, 용건 끝났으면 꺼져요 얼른.” 졸랑 또한 예리엘처럼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졸랑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말이 더욱 잘 통하시겠군요.” “말이 통하긴. 진짜 병신인가? 꺼지란 말도 못 알아쳐먹었으면서.” 그 폭언에도 방긋 미소를 지었으나, 바로 다음 말에는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좆도 없는 고자 새끼가.” “······.” 순간, 책상 밑에 숨긴 주먹을 움켜쥐었다. 굴욕과 수치로 눈가에 실핏줄이 일었다. 졸랑은 온몸을 떨었고, 예리엘은 그저 입술을 비틀었다.
“뭘 꼬라봐. 꺼지라니까?” “······언젠가는 이 일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남긴 졸랑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
황궁의 기사와 함께 꺼지는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예리엘은, 이내 책상 위의 목걸이와 계약서로 시선을 옮긴다.
“아가씨.
때마침 집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예리엘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통로에서는 분노한 졸랑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어느덧 고요하게 가라앉은 밤.
총총총. 별이 가득한 하늘.
“있잖아.” 그녀는 자신의 집사에게 쓸쓸히 중얼거렸다.
“예.” “데큘레인은 처음부터 약속을 안 지킬 생각이었나봐. ” 계약서와 목걸이에 손가락을 얹었다.
예리엘은 그간 자신이 데큘레인에게 놀아나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데큘레인은 맹약 운운하며 자신을 안심시키면서, 물밑에서는 이런 더러운 작업들을 자행한 것이다. 안심시키고, 또 안심시키다가, 어느 순간 토사구팽할 작정으로.
“그렇습니까.” 데큘레인은 아가리로만 약속했다. 자신은 그 말을 믿고 아무 것도 받지 않았다. 가족의 정이 아직 남은 자신이 맹약을 거부하리라는 것을, 데큘레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놈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나 당연히, 이 전부를 데큘레인에게 알려서는 안 되었다. 조금의 기색조차 드러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졸랑이 먼저 데큘레인에게 발설할 우려는 장담컨데 없다. 데큘레인에게 필요 이상의 권력이 실리는 것이 싫어 나를 찾아온 놈이니.
집사가 말했다.
“······저희는, 아니 이 영지는 오래전부터 예리엘 아가씨의 편이었습니다.” 그 말은 안심이었지만, 예리엘은 자신도 모를 슬픔을 느꼈다.
가슴 한 구석에, 오빠라 부르던 작자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있었던 것일까.
“그래. 고마워. 돌아가봐.” “예. 편히 쉬십시오.” 집사가 돌아간 영주의 집무실.
예리엘은 전등을 모두 껐다. 창밖의 밤하늘이 안으로 쏟아져내렸다. 그 어둠 속에서, 다시 목걸이의 영상을 틀었다.
“······.” 데큘레인의 냉정한 말을 들으면서, 보다 더 확실한 계약서를 보면서, 예리엘은 남몰래 눈물을 닦았다.
* * * ······하나 둘 캐리어와 함께 돌아오는 학생들, 이따금 울려퍼지는 기사생도 간의 대련과 기합 소리, 평상시의 활기를 찾은 기숙관과 상점 거리.
이렇듯, 제국대학의 개강이 머지 않았음은 교정의 풍경으로 알 수 있다.
“수석교수님!” 고향에서, 혹은 타지에서 대학으로 돌아온 학생들은 개강을 기다리며 안온한 휴식을 즐기지만, 교수의 입장은 썩 다르다.
학부 교수는 물론, 마법 교수들도 수업 설계와 준비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여기, 찾았습니다.” 나는 문서를 뒤적이며 다가오는 알렌을 보았다. 저번 학기말에 떠날 듯했던 알렌은, 아무래도 잠시 동안 더 머물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전에 말씀하신 예전 계획서들입니다.” 알렌이 문서 더미를 내밀었다. 이프린의 아버지, 아직은 베일에 쌓인 그 친구가 예전에 작성한 수업 계획 제안서였다.
2 학기 수업에는 이것을 참고할 생각이었다.
“······흠.” 나는 [ 강의 계획 제안서 ]를 읽었다.
「 강의명 : 사대원소의 정순한 활용 」 이 강의 제안서의 골자는 ‘원소를 보다 정순하게 다루는 것’이었으나, 데큘레인이 왜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는 뻔했다.
학부생 수준을 넘어선, 현대로 따지면 석박사들을 위한 고급 이론 강의였다.
“꽤 고급 강의가 될 것 같군.” “아앗! 고급 강의요?!” 알렌이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알렌은 감탄한 얼굴이 되었다.
대신 이 ‘강의명’은 적당히 바꿀 생각이었다.
「사대원소의 정순한 활용 : ‘조작’계열」, 혹은 「‘흙과 불’의 정순한 활용」 , 뭐 이런 식으로 적당히 내 적성에 맞게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데큘레인의 재능은 조작 계열, 속성은 흙과 불의 두 원소이니.
“그래. 수고했다. 돌아가도록.” “아 저, 이것도 있어요! 우체통에 편지가 도착했어요.” 알렌이 후원 우체통을 통째로 건넸다. 아마, 이프린의 편지 한 장 뿐이겠지.
“그럼 가보겠습니다~” 나는 알렌이 나가자마자 편지를 뜯었다.
[ 후원자님에게.
저 솔다 이프린이에요.
그래요, 이제 ‘솔다’가 되었답니다.
데뷰탄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인지 데뷰탄이던 적보다 지금이 더 불행하네요.
이유는, 데큘레인이라는 악덕 교수의 휘하에 자원한 탓입니다. 물론 제 선택이라 후회할 것도 못 되지만, 그 파란 달팽이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악덕한······ (중략) ······후원자님의 후원해주신 소중한 후원금도 한순간에 날아가버렸어요.
지식저작권인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마치 달팽이가 나뭇잂을 갉아먹듯이 사라졌지요.
하지만, 후원자님. 저 솔다 이프린은 약속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그 파란 달팽이를 뛰어넘을게요. 더 대단한 마법사가 돼서, 후원자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할게요.
그때까지, 글을 줄입니다.
이만.
솔다 이프린. ] “파란 달팽이라······” 나는 고이 접어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 조교 연구실 ] 내부를 비추는 수정구슬을 틀었다.
우우웅─ 홀로그램처럼 떠오른 조교 연구실에는 드렌트와 이프린이 있었다.
이프린은 공부 중이었고, 드렌트는 연구 중이었다.
“허전하긴 하군.” 조교 연구실에는 온갖 최고급 비품이 많다. 저 책상과 의자는 물론, 공기 청정기, 온도 조절기 등 전부가 최고급에, 수십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은데.
정작 두 명 뿐이라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만약 저 자리에 실비아가 있었다면······.
역시, 어느 정도 빈 자리가 느껴지기는 한다. 수업 태도, 이해력, 재능, 전부 완벽한 녀석이니.
“······부유섬에서 잘 하고 있겠지.” 어차피 유크라인과 일레이드는 철천지 원수지간이라 지금 이 상태가 올바르다. 이보다 더 오래 함께하다간, 길테온이 어떤 미친 짓을 벌일지 모른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오늘 업무는 기조실장으로서의 사찰. 첫 번째 목적지는, 요즘 현재 가장 돈을 많이 잡아먹는 43 층. 루이나 집무실이다.
띵—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복도부터 웬 마법사가 무지막지하게 많았다.
그들을 통솔하던 루이나가 나를 발견했다.
“아, 오셨네요. 기조실장님.” 나는 괜히 입술을 비틀었다.
“······조교가 꽤 많군?” “아~ 지금은 인턴 기간이에요.” “인턴?” “예.” “인턴이 몇명이지.” “100 명이요. 너무 많아서 일단 100 명까지만 추렸어요.” 루이나는 대수롭지않게 말했다.
실제로도, 전혀 대수롭지 않았다.
저 백명 중 열 명을 합쳐도 드렌트만 못하고, 백명 전부를 합쳐도 이프린만 못할 테니. “바퀴벌레가 득시글거리는 것 같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
그때 북적이던 복도에 말소리가 뚝- 끊겼다. 루이나의 조교 인턴 100 명은 거의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으나,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급히 자신의 업무에 열중했다.
루이나가 팔짱을 꼈다.
“아무리 그래도 바퀴벌레라니요. 말을 너무 심하게 하시네요.” “······보고서나 내놓지.” “여기요. 다 정리해놨어요.” 기다렸다는 듯 보고서를 제출한다.
나는 대강 눈으로 훑고 서류 가방에 넣었다.
“참. 기조실장님. 루나 가문의 아이를 당신 휘하로 받아들였다면서요?” “그래.” “그 아이를 거둬서 어쩔 셈이에요? 재능은 물론 있어 보인다만.” 나는 말없이 루이나를 보았다. 루이나도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동문이었다.
데큘레인과 이프린의 아버지, 그 관계를 조금이라도 알만한 사람.
눈을 깜빡이던 루이나가 말했다.
“뭐, 그건 기조실장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니까. 아무튼, 여기요. 학회 초대장이에요. 로크랄렌 티켓이랑.” [ 로크랄렌 학회에서 데큘레인 수석교수님을 초대합니다! 어서오세요! ] 로크랄렌 학회. 그 문장 위로 퀘스트가 떠올랐다.
[ 메인 퀘스트 : 기괴한 학회 로크랄렌 ] ◆ 상점 화폐 + 1 ◆ 마력 + 50 로크랄렌. 마법사 플레이어의 메인 퀘스트 중 하나로 여겨지는 장소.
나는 근엄하게 그 초대장을 받았다.
“자네도 오나.” “예? 아, 저는 일이 바빠서요. 그 로크랄렌 티켓, 세 명 동행 가능하니까 아무나 데려가시면 될 거예요.” * * * “어, 실비아 왔나~” 부유섬으로 올라온 실비아는 로제리오를 만났다.
오늘의 약속 장소는 부유섬에서 가장 유명하고 광활한 도서관, 메지세이온 10 층 ‘펜타몰’. 실비아가 오래 전부터 입장을 원하던 ‘세상 모든 서적의 집결지’다.
“자 받아라. 일일 출입증이데이.” 5 등위인 ‘루미에르’ 이상만 출입이 가능하고, 출입 권한 부여는 2 등위 ‘에테르’ 이상만 가능한데, 실비아는 로제리오에게 일일 출입 권한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려. 이제 드가자잉~” 로제리오가 익숙하게 문을 열었다.
메지세이온의 10 층, 즉 플로어 전체를 도서관으로 활용한 공간. 그 막대한 넓이와 가득한 책 냄새에 실비아는 멍하니 감탄했다.
“넓네요.” “그려. 이 도서관은 대마법사의 결계 마법으로 넓이 자체가 뻥튀기 돼있제.
아마 제도보다도 넓을걸? 그만큼,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책이 있어. 마법서 뿐만이 아이고, 일반 서책도.” “아무거나 다 빌릴 수 있나요.” “세 권 만. 저작이 붙어 있는 건, 지식저작건 비용만 내면 돼." “지식저작권.” “어. 지직저작건.”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리오는 복잡한 발음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여가 센터인데. 원하는 물건 있으면, 저 얼라한테 물으면 된다. ‘도서관 중독자’거덩.” 도서관의 인포 데스크에 도착한 로제리오가 로브 차림의 마법사를 가리켰다.
실바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서관 중독자.” “어잉. 부유섬에는 여러 중독자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쓸모 많은 놈이데이. 이 도서관에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지, 전부 알고 있지. 머리가 통째로 도서관이 되어버린 놈이야.” 끄덕인 실비아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혹시 데큘레인의 저서도 있나요.” “데큘레인의 저서는 총 열 권이 존재합니다만, 그 중 두 개는 보호 저작이 걸려 있습니다.” 로제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큘레인 걸 왜 찾나? 고놈 업적은 거의 다 쓰레기데이. 요 세 개 말고는.” 로제리오가 도서관 한복판에서 손을 휘 젓더니 세 개의 논문을 꺼냈다. 각각 [ 순수 원소의 집결 ], [ 사대원소의 복합 ], [ 원소 창안법 ]이었다.
“이 세 개 이후로 데큘레인은 총기를 잃었어. 물론 지금은 다시 부활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세 가지가, 데큘레인이 수석교수에 이를 수 있게끔 가장 큰 도움을 준 업적이지. 이때 내가 10 대 중반이었나 그랬을 기다.” “끌끌. 나는 아직도, 데큘레인이 그걸 썼다고 믿지 않아. 데큘레인이 대성한 지금도, 저 세 논문이 대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네.”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실비아는 그곳을 돌아보았다. 긴달프가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로제리오가 입술을 삐죽였다.
“할아범이 여긴 웬일이고. 왜 갑자기 와서 내 설명 가로채는데.” “머지 않아 우리와 동등위가 될 실비아 아니냐. 만나러 왔지.” 긴달프는 인자하게 웃으며 실비아는 바라보았다.
“실비아. 부유섬에 온 건 잘한 선택이라네. 마탑에서 자네가 뭘 배우겠나?” “아 참. 실비아, 니도 아나? 저 할아범, 일레이드 때문에 유크라인이랑 싸웠었다.” “아하하하. 그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네만.” 긴달프는 과거 일레이드와 유크라인 간의 가문 전쟁 당시, 일레이드의 편에 섰다.
일레이드의 후원을 받고 자란 덕도 있지만, 당장 유크라인의 전 당주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고마워요.” 그렇게만 대답한 실비아는 다시 인포 데스크의 중독자를 바라보았다.
“데큘레인의 서적 중 가장 최근에 나온 게 뭔가요.” “이것입니다. [ 순수 원소의 이해 : 유크라인 개정본 ].” 중독자가 손을 뻗자 서적 한 권이 두둥실 떠올랐다. 로제리오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실비아. 그건 대여 불가다.” “왜요.” “데큘레인이 한정 판매, 즉 대상 판매를 한 탓이지. 맞지?” “예. 이 서적은 데큘레인이 총 17 인에게만 증정하였고, 그 평은 무척이나 좋습니다. 저도 읽지는 못했지만, ‘순수 원소의 기본부터 심화과정까지 집약한 최고의 교과서’라는, 루미에르 크레토의 극찬이 있었습니다.” “크레토가?” “예. 또한 이 책의 심사를 맡은 중독자 아스탈께서는 ‘부유섬이 필히 보관해야 하는 이론서 100 선’에 이 책을 포함시켰고, 동시에 ‘순수 원소라는 모호한 개념을 확실하게 정립할 시대의 가능성’이라며 데큘레인 교수님을 극찬하셨습니다.” 로제리오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입술을 삐죽였다.
“신기하단 말이지. 저렇게 잘 섰으면서, 왜 안 파는건지. 안 팔아서 내용이 얼마나 신박한지 아무도 모르잖아. 내용이 어떤가 나도 읽고 싶은데.” “그럼 못 빌리나요.” 실비아가 다시 물었다.
“어. 못 빌리-” “가능합니다. 솔다 실비아는.” 로제리오의 말을 반박하듯 중독자가 말했다. 로제리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엥? 왜? 내도 못 빌리는데, 이 얼라는 왜?” 중독자는 기계처럼 끼리릭- 목을 돌려 로제리오를 바라보았다.
“모나크 데큘레인이 허가한 대상 목록에 솔다 실비아가 존재합니다.” “······얘가? 실비아가?” “예.” 로제리오가 실비아를 보았다. 실비아는 멍한 얼굴이었다. 그 뒤편의 긴달프는 호오- 흥미롭다는 듯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니 알고 있었나.” “아니요.” 실비아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그때 중독자가 다시 물었다.
“빌려가시겠습니까.” “네, 네. 빌려요.” 더듬더듬 대답하자, 그 작은 손에 [ 순수 원소의 이해 : 유크라인 개정본 ]이 내려앉았다. 실비아는 부드러운 표지를 만지작거리면서 가만히 있었다.
로제리오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실비아. 그거 나도 좀 봐도 되겠나. 아니, 나중에 내용이라도 좀 알려주라.
궁금- 어이! 어디가! 비겁하게!” 타다다다다닥── 더 듣기 싫었던 실비아는 그대로 뒤로 돌아 도망갔다.
* * * ······늦은 밤. 마탑 77 층의 [ 조교 연구실 ].
“아 못해먹겠네 진짜! 이걸 어떻게 개강 전까지 다해!” 이프린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세 번째 책, 「사대 원소의 조화」를 절반 정도 독파한 상황이었다.
“괜찮아?” 곁에서 실험을 하던 드렌트가 걱정스레 물었다. 드렌트는 마석으로 술식 감응 실험을 하고 있었다.
이프린은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선배. 선배는 왜 데큘레인 조교 지원 했어요? 협박받았다는 소문 파다하던데.” 앞날이 창창한 드렌트가 데큘레인을 선택한 것을 두고 여러 가십이 많다.
아니, ‘데큘레인에게 협박을 당했다는’게 거의 정설이다.
“협박은 무슨.” 드렌트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 잘못을 바로잡아주셨으니까 온 거지. 너한테는 아직도 미안해. 그때 내가 실적에 미쳤어서 어떻게 돌았나봐.” “······괜찮아요, 뭐. 제 아이디어가 그만큼 매력적이었단 거잖아요.” “하하. 그랬지. 미안.” “휴우······ 근데.” 이프린은 제 책상에 쌓인 책더미들을 바라보았다.
총 13 권이지만, 평범한 책이랑 비교하면 60 권 수준이다. 한 권 한 권이 거의 700~800 페이지이니 원.
“이게 말이 돼요? 고난도 서적만 13 권이에요.” 지식재산권인지 저작권인지 뭔지. 그것 때문에 후원도 다 털렸다. 이제 평생 로아호크 못먹게 생겼다.
드렌트가 쓰게 웃었다.
“내가 뭐 도와줄 거 있어?” “아뇨······ 그 교수는 퇴근했죠?” “응. 두 시간 전에?” “아~ 그러면 저도 퇴근할게요. 쉬어야겠어요.” “응. 잘가.” 드렌트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은 듯했고, 이프린은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타려던 그녀는 문득.
저 복도 끝의 대문을 바라보았다.
[ 수석교수 연구실 ].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언젠가, 아버지는 말했다. 데큘레인의 연구실에 자신의 연구 기록을 숨겼노라고.
데큘레인이 자신의 연구를 반출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한 탓에, 어쩔 수 없이 저 안에. 가장 어두운 등잔 밑에 자신의 연구를······.
“두 시간 전에 퇴근했다고 했지.” 이프린은 77 층를 휘둘러보았다.
온통 어두웠다.
애당초, 누군가 여기 있을 리가 없다.
이프린은 수석교수 연구실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살금- 살금- 뒤꿈치를 세워서, 살금- 살금- 30 초면 닿을 거리를 3 분 만에 도착.
이프린은 식은땀을 흘리며 문고리를 쥐었다. 작게 밀었더니 문이 열렸다.
“!!” 이프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잠긴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 혹은 잠겨 있었지만, 이프린의 손이 닿는 순간 열렸다.
설마, 아버지가 여기까지 안배해둔 걸까?
“······.” 연구실 내부는 어둠 뿐. 여길 보고, 저길 봐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텅 빈 암흑.
이프린은 소리 죽여 포복했다.
굼벵이처럼 기어가며 타일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아버지는 이 타일 어딘가에, ‘네가 만지면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으니.
어디지. 어디 타일이지.
여긴가. 아닌데.
어디지. 어디지.
영 보이지 않아 손바닥에 마력을 모았다. 그 마력을 불빛 삼아 더듬더듬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녀의 손에 뭔가 딱딱한 물체가 닿았다. 발견했다! 이프린은 그 뾰족한 부분을 아득 움켜쥐었다. 그런데, 아무리 흔들어도 미동이 없었다.
“······?” 자세히 보니, 웬 구두 같았다.
이건 또 뭐지.
이프린은 의아함에 시선을 올렸다.
“아······.” 찰나, 뇌가 정지했다.
타일을 움켜쥔 자세 그대로 굳었다.
“······.” 요괴스러운 푸른 눈이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형형한 안광이 직선으로 내리 꽂혔다.
이프린은 뒤늦게 깨달았다.
이 연구실에는 안배 따위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저······ “뭘 찾고 있나.” 데큘레인.
연구실의 주인이 아직 안 나갔던 것 뿐이었다.
2 학기. (3) “뭘 찾고 있나.” 어두운 연구실에서 데큘레인이 물었다. 이프린은 움켜쥔 구두를 슬그머니 놓았다. 그리고는, 헤엄치듯 로브 소매로 바닥을 허우적거렸다.
“이렇게 바닥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나.” “······닦이긴 합니- 죄송합니다.” 쭈뼛쭈뼛 일어난 이프린은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문이 열려 있는 줄 알아서 단속을 대신······ 부, 불을 끄셨길래······.” “이따금 소등이 필요한 때가 있지.” 딱—!
데큘레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연구실에 불이 켜졌다. 그렇게 내부의 어둠이 드러나고, 이프린은 경악으로 입을 벌렸다.
“허······.” 연구실의 허공. 술식과 마법진이 그려진 마법 종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 숫자는 족히 수천 이상이었고, 저 어마어마한 연산의 집합이 어떤 결과를 이룰지는, 아직 실력이 부족한 이프린으로서는 헤아릴 길이 없었다.
딱—!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기자, 그 모든 마법 종이들이 데큘레인의 서류 가방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저 서류 가방 자체도 마법 아이템인가. 이프린은 감탄하며 데큘레인을 보았다.
“혹시 교수님 개인 연구인가요?” “아니. 수업 준비다.” “네? 수업이요?” “돌아가도록.” 데큘레인은 그 뿐이었다. 어떤 질책이나 비난, 벌점 따위도 없이 뚜벅 뚜벅, 밖으로 걸어나갔다.
안 혼내나?
데큘레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프린은 슬그머니 쪼그려앉았다.
타닥- 타닥- 소심하게 타일 두어개만 재빨리 뒤집어본 다음 연구실을 나섰다.
“······엇.” “타라.” 데큘레인이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프린은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기, 기다리셨네요.” 데큘레인은 아무 말도 않았다. 이프린이 오르니 닫힘 버튼만 누를 뿐.
지이이이잉── 엘리베이터가 내려간다.
“······.” “······.” 이프린에게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
그녀는 데큘레인을 힐끔거리며, 언젠가 긴달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실은 데큘레인이 자신을 소중하게 여긴다던 말도 안 되는 말.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이 교수의 행동 하나하나가 묘하게 다르게 느껴진다.
물론 여전히, 분명히 아버지의 원수이고, 또 무지하게 재수가 없고, 불가능한 연구 과제를 내어주는 악덕 교수이긴 하지만······.
“데큘레인 교수님.” 띵─ 그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한 발자국 내딛은 데큘레인이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프린은 허둥지둥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 그러자 그는 돌발 행동을 보였다. 안주머니에서 웬 티켓 한 장을 꺼낸 것이었다.
“받아라.” 이프린은 그 티켓을 보았다.
[ 로크랄렌 학회 초대장 ] 로크랄렌. 이프린도 언제 한 번은 들어본 적 있었던 지명이었다.
“너는 나랑 함께 간다.” 데큘레인은 그 말을 남기고 성큼성큼 떠났다. 다리가 긴 탓인지 보폭도 넓었다. 이프린은 금세 멀어지는 그의 등과, 제 손에 쥐어진 티켓을 번갈아서 보았다.
“······나 도통 모르겠네. 왜 저럴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마탑의 최고위층.
“음!” 이사장은 내 강의 계획서와 첫 번째 수업 자료를 받아들었다.
──[ 흙과 불의 정순한 활용 : 조작 계열 ]── ◆ 개요 : 흙과 불, 두 원소의 심화 활용. 속성을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한 고급 수업.
◆ 등급 : 고급.
◆ 서술······ ────────── “취지는 좋은데요! ‘고급’이상의 등급 판정은 제가 아니라 부유섬에서 내리는 거라서요! 중급으로 내려갈 수도 있어요!” “괜찮습니다.” 이사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고급’ 등급의 수업은 이 제국 마탑에서도 드물었으니.
“관련 자료는요?!” “여기 있습니다.” 나는 「이해력」을 총동원하여 작성한, 수업의 골자가 될 자료를 제출했다.
흙과 불, 그리고 조작계열만에 집중하였으니, 거의 논문에 가까울 것이었다.
“저도 고급 등급 판정을 받았으면 좋겠네요! 저희 마탑 위상이 더 올라가는 거잖아요!” 쿵─!
그렇게 말하면서 이사장은 강의 계획서에 도장을 찍었다.
“예.” “그럼 이제 가보세요! 전 졸리거든요!” 고사리같은 손을 움직이며 주섬주섬 이부자리를 펼친다. 그 장소는 집무 책상 위.
“아드린느 2 세! 이리온!” ─앙! 앙!
아드린느 2 세가 책상 위로 점프했다. 이사장은 그 작은 강아지와 함께 그대로 잠들었고, 나는 자리를 비켰다.
······여섯 시간 뒤.
부유섬에서는 소문이 가파르게 퍼진다.
단, 마법학술적인 주제일 경우에만 한한다.
일반적인 가십, 즉 제국에 어떤 사건이 있었녜, 누가 누구랑 바람을 피웠녜,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나, 기가막힌 마법적 발견이나 이론 논문이 등장한 경우에는, 부유섬 전체로 번지기에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고급 강의라요?” 데큘레인의 고급 강의 소식도, 비슷한 논리로 어느새 로제리오에게 전달이 되었다. 우연히 만난 대군 ‘크레토’의 말이었다.
“그렇다는군.” “그게 판정이 나려나? 부유섬도 아니고 마탑인데.” 마탑의 강의는 대개 초급~중급 선에서 멈춘다. 물론 초급이라고 다 같은 초급이 아니고, 중급이라고 다 같은 중급이 아니라서, 같은 등급의 안에서도 난이도가 천차만별이지만, 고급은 그 차원이 조금 다르다.
마법계에서 고급의 정의를 따지자면, ‘세대의 질적 발전을 이룩하거나, 새로운 가치를 창안할만한 등급’이다.
그런 점에서 부유섬은 등급 배정에 몹시 엄격했고, 고급 이상의 수업은 근 20 년 간 부유섬에만 있었다.
부유섬은 천외천의 학술, 마탑은 속세의 연구, 라는 고정관념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당초 고급 등급 강의는 부유섬에도 몇 없다.
당장 누군가를 가르칠만큼 여유롭고, 설명도 잘하는 고위 마법사가 드물 뿐더러, 있다 하더라도 자기 꼴릴때만 수업을 여는 터라.
“모르지. 데큘레인 그 분이라면, 판정이 날 수도.” “허어? 대군께서 그 분이라고 하면 어캅니까. 황실 사람은 누구를 존경하면 안되는디요.” “내가 팬이거든. 하하하.” 크레토가 웃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의 옷차림도 사뭇 이상했다.
“이제 보니 뭐, 옷차림도 데큘레인처럼 입으셨구만?” “요즘 제도에 데큘레인의 유행을 안 쫓는 사람이 없어.” “아무튼. 고급으로 판정 나면 신기하겠구만요. 회의적이지만.” 로제리오는 스파게티를 후루루룩 빨았다. 그때 옆자리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데큘레인이 고급 강의를 준비하고 있다─ 는 말이었다.
“한데, 자네는 가서 들을 수도 있지 않나? 나야 졸업한지 한 참 됐지만, 자네는 명목상 휴학이잖아.” “글킨 하지만서도, 뭐. 참말로 ‘고급 강의 판명’이 나면, 애당초 부유섬에서 먼저 안달이 날 겁니다. 그럼 홀로그램 강의든, 강의 녹취록이든 뭐든, 구할 수 있겠지요. 안 그래요?” 부유섬은 이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섬. 또한 저 상부에는 학술에 미친 놈들 뿐이라, ‘안 팔면 빼앗는다’가 기본 스텐스다.
돈은 얼마를 원하든 줄 수 있지만, 아예 안 주면 너는 우리 적이다. 뭐 이런 말이지.
“그렇긴 하겠지.” “참. 또, 로크랄렌에서 학회를 연다카던데. 대군은 안가요?” “초대도 못 받았네. 요즘 연구를 조금 소홀히 했거든.” “······음. 그러쇼?” 로제리오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자신의 품 안에서 로크랄렌 초대장을 꺼냈다.
“한 장 드릴까?” * * * 개강 2 주일 전.
솔다 이프린은 평마탐동 부실에서 위자보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솔다부터는 계열이 제일 중요합니다. 속성이 몹시 특이하지 않은 이상, 차이는 계열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업은 무조건 계열에 초점을 맞춰서······.
선배 마법사의 조언이었다.
“······계열 정립이 중요하구나.” 이프린은 팔짱을 끼고 자신의 계열에 대해 생각했다.
마법사의 기본적인 계열은 총 여덟 범주, ‘소환과 정령’, ‘파괴와 보조’, ‘조작과 연성,’ ‘환혹과 조화’인데, 솔다부터는 그 구분이 보다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듯하다.
─절반의 마탑 마법사는 하나의 계열만을 선택합니다. 이를 ‘계열 심화’라 하지요. 나머지 절반은 두 계열 이상을 동등하게 익히는 ‘복수 계열’, 또는 하나의 계열을 중심으로, 다른 계열을 하위로 두는 ‘주계열과 부계열’로 나뉩니다.
이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계열을 두 개 이하만 선택한다.
물론 미친 척하고 세 개 이상의 계열을 동시에 도전할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얼마나 많은 수업을 들어야 하는지는 말해 입아프다.
“······데큘레인 교수 계열은 뭐였더라.” “데큘레인? 그 교수는 조작과 연성. 파괴와 보조. 네 계열이라던데?” 옆에서 줄리가 말했다. 이프린은 그녀를 힐끗거렸다. 그 목 언저리에 못보던 귀중품, 즉 아티팩트 목걸이가 있었다.
요즘 ‘돼지의 꽃’이 무지막지하게 떡상했다더니. 저런 비싼 아이템도 샀구나.
부럽다.
“그럼 데큘레인은 사계열인 거니?” “응.” “······그럼 나도.” 이프린은 결정했다.
파괴와 보조, 조작과 연성.
데큘레인이 한다면, 나도 한다!
“헤엑. 미쳤어 이피? 수업 몇 개를 들어야 되는데.” “흥. 괜찮단다. 내가 요즘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아니?” 데큘레인 교수가 내어준 고급 서적 열 세권.
이해가 안 되면 논문을 뒤적이고, 그 논문도 이해가 안 되면 하위 논문을 뒤적이고, 하위 논문도 이해가 안 되면 켈로그를 비롯한 신진 교수들을 방문하면서까지.
“하긴······ 이피, 요즘은 아예 부실에서 자잖아.” “응.” 베개, 담요, 이불, 치약 칫솔 등등. 부실에는 이프린의 냄새가 가득 묻어 있다.
줄리가 말했다.
“그럼 수강 신청은? 사계열 하려면, 한학기에 수업 12 개는 들어야 할걸?
전부 계열필수로.” “······크흠.” 헛기침을 한 이프린은 위자보드로 수강 신청 목록을 보았다.
“······어? 이 교수 이제 데뷰탄 안 가르치네?” 문득, 데큘레인의 강의가 눈에 띄었다.
──[ 흙과 불의 정순한 활용 : 조작 계열 ]── ◆ 담당 교수 : 수석교수 데큘레인.
◆ 개요 : 흙과 불, 두 원소의 심화 활용. 속성을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한 고급 수업.
◆ 주교재 : 수석교수 데큘레인의 개인 저술.
◆ 학점 : 6 학점, 격주마다 3 시간.
◆ 수강 신청 방법 : 신청자 중 데큘레인의 선별.
◆ 강의 등급 : 추후 확정시 공지.
────────── “우와. 6 학점 짜리 강의네?” 줄리가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그 단락을 본 이프린도 뜨억- 입을 벌렸다.
“매주도 아니고 격주인데 어떻게 6 학점이지? 수석교수라 그런가?” “그러게~? 이피. 이건 듣지 마. 엄청 어려울 걸.” “······흐음. 조작 계열에 6 학점이면, 이거랑 1~2 학점짜리 기본 강의만 하나 더 들으면 조작 계열은 할당량 끝나잖아.” “그렇긴 한데, 격주에 6 학점이잖아. 엄청 어려울 것 같은데? 한 번 삐끗하면 복구 힘들어. 선별인 거 보니까, 신청 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닌 것 같구.” “괜찮아.” 이프린은 요즘 자신이 넘치고 있었다. 고급 마법서를 총 두 권 독파했고, 한 권을 진행 중인 탓이었다.
물론 고급 마법서랑 고급 강의는 그 차원이 다르겠지만······.
“할 수 있어. 내가 누구 딸인데.” 이프린은 주먹을 움켜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 * * 황궁, 배움의 장.
“로할락 수용소가 거의 완공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느니라.” 소피엔이 말했다. 나는 조금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보았다. 교습이 진행될수록 자세가 편해지던 소피엔은, 오늘 결국 완전히 누워버렸으니.
“······예.”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만, 지금 시중에 마릭의 마석도 원활히 유통되고 있느니라. 그간 단합으로 시세를 뒤흔들던 상단 놈들은 막대한 손해를 보는 것이 정상이지” “예.” 소피엔이 피식 웃었다.
“그럼에도 손해를 전혀 안 본 듯한 상단이 꽤많다. 당연히, 마석을 캐는데 어떤 비용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허공에 손가락을 그으며 말을 잇는다.
“마석을 캐는데 어떤 비용도 들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당연히, 멸지에서 제단 놈들이 캔 마석을 염가에, 혹은 공짜로 받았기 때문이겠지.” “예.” “고작 마릭 개방 하나로, 꽤 다수의 상단을 거를 수 있었다.” 소피엔은 허허 미소를 짓다가도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데큘레인.” “예.” “자. 받아라. 제단의 돈을 받아먹은 상단 목록이다.” 총 열 세 군데의 상단이었다. 소피엔은 서늘하게 읊조렸다.
“적궤로 몰든, 범죄자로 몰든, 네가 알아서 죽이면 될 것이다.” “예. 그리 궤멸한 상단은 전부 황실이 몰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소피엔이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비틀었다.
“네가 먹어도 상관은 않는다만.” “탈이 날 재물은 가지지 않는게 낫습니다.” 유크라인에 필요 이상으로 권력이 쏠리는 것도 경계할 일이다. 소피엔은 알면서도 제안한 것인지 영 불만스런 얼굴이지만.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허나, 짐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적궤 수용을 진행할 것이니라.” “예.” “너도 적궤를 잡아야 할 것이다.” “이미 조사를 끝냈습니다. 머지않아 좋은 소식을 전달해드릴 수 있겠지요.” “호오. 그런가?” 내 말에 소피엔이 눈썹을 들썩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 머지 않아 카릭셀과 약속한 날이다. 나는 카릭셀을 체포하고, 그를 로할락에 수용할 것이다.
“예. 작전이 성공한다면 본보기로 로할락에 수용하지요. 허나, 그 전에.” 나는 말없이 소피엔을 바라보았다. 그 뜻을 눈치챈 소피엔은 피식 웃더니 한 마디를 읊조렸다.
───.
뇌를 울리는 룬어.
진동이라는 뜻의 ‘ .다였’ר ֶט ֶט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피엔은 누운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데큘레인.” “예.” “너는 항상 짐에게 귀찮은 일을 시킨다······. 아니, 너만 나를 귀찮게 하지.” 흐트러진 머리카락, 어느새 귀찮아진 듯 나른하게 풀린 동공. 황제는 오늘 따라 유독 권태에 시달리는 듯한 모습이다.
“데큘레인.” 그런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예.” “너는 내가 두렵지 않느냐?” 제국의 신민이라면 무릇 심장을 철렁이는게 당연한, 황제의 의미심장한 말.
그러나 나는 그 함의를 고민하지 않았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두렵지않습니다.” “건방지구나······. 왜지?” “글쎄요. 참 이상합니다만.” 소피엔의 눈을 마주하며 나는 말했다.
“저는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는 거짓이 아니다.
먼 훗날 도래할 죽음이라는 현상도, 언젠가 김우진이라는 자아를 잃게 되리라는 막연한 마음도, 율리가 나를 떠나리라는 가능성도, 나는 그저 싫을 뿐이다.
두려움보다도 ‘혐오’라는 감정을 먼저 느끼는, 어쩌면 지극히 데큘레인 다운 자아의 발로(發露).
“가보겠습니다.” 오늘 교습도 고작 한 마디로 끝이었다.
“그래. 썩 꺼져라. 이 건방진 것아. 대신, 다음에 올때는 적궤를 잡아오도록.” 그렇게 말하며 소피엔은 웃었다.
* * * ······8 월 말.
대륙 동부의 어느 도로.
카릭셀은 마차의 짐칸에 숨어 움직이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세 아이는 아내와 동생에게 잘 안배했고, 「나무의 요람」의 업무와 직위는 ‘엘레솔’에게 맡겼다.
이제, 나머지는 자신의 몫이다.
“······대장님. 정말 그 교수를 믿는 것입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함께 수용소에 동행할 일족 ‘드할’의 말이었다. 카릭셀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믿기로 결정한 사람이다. 굳이 흠집내려 하지 마라. 아니, 믿을 것도 없이 단순한 거래일 뿐이다. 드할, 이 사실은 누구에게도 안 알렸겠지?” 세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는 것이 옳다. 비밀결사 「나무의 요람」의 어느 누구에게도, 아내와 아이에게도, 이 사실은 알리지 않은 것은 그 이유다.
분명, 어디선가 정보가 세어나갈 테니.
“예. 당연합니다. 오직 저희 둘만······!” 쿵!
그때, 마차가 멈췄다.
카릭셀과 드할은 침을 삼켰다.
저벅, 저벅, 저벅.
정확히 세 번의 발소리.
마부가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는가 싶더니, ────!
돌연 마차 전체가 박살나며 하늘로 치솟았다.
시간이 늘어지듯, 마차의 잔해와 함께 온몸이 붕 떠오르는 찰나.
카릭셀은 지상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어느 눈동자를 보았다.
데큘레인.
쿠구구구궁─!
온갖 나무 조각과 함께 노면에 추락한 카릭셀은 등허리를 붙잡았다.
“자네는 이게 평범한 짐으로 보이나.” “아, 저 그게······.” “교수님! 이, 이 놈 낯짝을 보십시오!” 기사 한 명이 타이밍 좋게 카릭셀을 가리켰다. 그는 데큘레인이 미리 건넨 몽타주를 쥐고 있었다.
카릭셀 또한, 그 얼굴과 비슷하도록 수염과 머리카락을 길렀다.
“적궤 결사의 간부 브롤린입니다!” “······.” 데큘레인은 말없이 입가를 비틀었다. 그 경멸과 모멸이 가득한 연기에 카릭셀은 감탄했다.
······어쩌면, 연기가 아닐 수도.
“그러게. 입단속은 잘 했어야지.” 약속했던 신호에 카릭셀은 벌떡 일어나 난동을 부렸으나,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카릭셀을 몸으로 짓눌렀다. 카릭셀은 필사적으로 발악했고, 그러는 동안 데큘레인이 카릭셀의 가방을 들었다.
“이 가방 외에는 없나?” “마석이 다수 있습니다.” 데큘레인은 가방을 탈탈 털어 노면에 떨어뜨렸다. 전부, 평범한 장비와 식기들 뿐이었다.
“어디 살림이라도 차리려 했나.” “교, 교수님. 이 마석은 어떻게 할까요······ 꽤 많습니다만?” 기사들이 물었다. 기대와 군침이 뚝뚝 흐르는 목소리였다. 저들의 탐욕은, 카릭셀이 굳이 마석을 마련한 이유였다. 시선 팔기 용.
「염동」으로 물건들을 가방에 넣으며 데큘레인이 말했다.
“그것도 이것도 증거물이다만, 마석은 전달할 만큼만 남기고 알아서 처리해라.” “아, 예! 감사합니다!” 기사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허리를 숙였다.
카릭셀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저 가방 안의 내용물만 수용소로 들어오면, 자신은 일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이었다······.
“이 버러지 같은 새끼!” 그때, 어느 기사가 카릭셀의 미간을 발끝으로 가격했다. 그는 그 즉시 기절했다.
* * * 사흘 뒤, 황궁. 황제의 휴게실.
“그 건방진 놈이 시키는 건 참 잘하는구나······. 아이스크림 사오듯 적궤를 잡았어.” 소피엔은 헤오드란 영지의 진상품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입니다. 참 유능한 교수입니다.” 케이론은 붕대로 오른 손목을 감으며 대답했다.
“그 브롤란인가 하는 놈은 곧장 로할락으로 보낸다지······?” “예. 결사를 조직한 죄는 있습니다만, 그 외의 범죄를 저지른 이력은 없어서 사형은 면한 듯합니다. 아니, 사형보다 로할락이 더 힘들겠지요.” 소피엔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다시 침대에 누웠다. 반절이나 남은 아이스크림도 그대로 내팽개쳤다.
“한데 참······ 요즘은 뭘 먹는 것도 지겹느니라······ 근데 넌 어디 다쳤느냐······? 붕대를 쳐감고 지랄이구나······.” 하품하듯 늘어지게 중얼거린다.
케이론은 퉁퉁 부은 오른손을 만지작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제도에 자이트가 왔더군요. 대련을 좀 했습니다.” “자네가 졌나?” “이 대륙에 자이트를 이길 기사가 있겠습니까. 자이트는 제 아버지보다 더한 괴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케이론의 말에 소피엔이 피식 웃었다.
“황제의 기사라는 놈이 병신같이 발리고 다니는구나······ 짐이 좀 열심히 배우면 자이트 그놈도 이길텐데 말이다.” “좀 배우시지 그러셨습니까.” “한데, 왜 자이트가 왜 온 것이냐?” “예식장을 알아보고 있답니다.” “······.” 소피엔은 말없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예식장이라면, 역시 데큘레인과 그 율리라는 기사겠지.
“그러냐.” 그놈이 결혼을 한단 말인가.
두려운 게 없다더니, 평생 제 인생을 옭아맬 결혼도 두렵지 않나보군.
소피엔은 별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케이론은 아닌 척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로크랄렌. (1) 적궤 수배자 브롤란. 본명 ‘카릭셀’은 마찬가지로 수배자인 ‘드할’과 함께 포획되었다.
졸랑을 비롯한 환관들은 데큘레인의 그 전공을 듣자마자 분통을 터트렸지만, 재판은 착실히 진행되었다.
카릭셀과 드할을 포함한 1,000 여 적궤의 형벌은 ‘로할락 수용’.
치안 부국장 릴리아 프리미엔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빨리 빨리 좀 움직여라, 이 바퀴벌레같은 것들아!
─움직이라고! 어이! 거기 앞에 늙은이! 죽고 싶어!
······자그마치 45 도의 폭염에 휩싸인 로할락.
온도 조절 장치로 시원한 바람이 감도는 자동차 안에서, 예리엘은 포승줄에 엮인 채 수감되는 천명의 적궤를 바라보았다.
“붉은 가넷 모험단과는 아직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 모든 상황이 예리엘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고뇌 뿐이었다.
“다만······ 물건은 준비되었습니다, 아가씨.” 집사를 비롯한 가신들은 그녀보다 착실히 움직였다. 예리엘의 충신들은, 이 상황을 타파하는 가장 극단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서로 죽고 죽일 수 밖에 없다면, 기습적인 선제 공격이 가장 효율적일 테니.
“나는 그 사람에게 분명히 말했어. 그 약속을 어긴다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예리엘은 서늘하게 읊조렸다. 운전석의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예. 맞습니다.” “하지만······ 아직이야. 계속, 계속 찾아봐. 암흑가도 뒤적여보고. 확실한 정보가 필요하니까. 가네샤와는 무조건 연락이 닿아야 해.” “예. 지하 길드를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유크라인을 견제하려는 여러 귀족들에 대항하여, 예리엘이 직접 조직한 지하 길드. 그 길드가 아이러니하게도 유크라인의 당주 데큘레인을 파고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 단, 그 빌어먹을 환관들 귀에 들어가지 않게.” “물론입니다.” “그래. 고마워.” 예리엘은 힘없이 답하고 창밖을 보았다.
─엄살부리지마! 이 미친 악마 새끼들아!
─움직이라고!
─병신같은 바퀴벌레 새끼들······.
단전이 철폐당하고, 머리털이 싸그리 밀린 폐인같은 몰골의 천여명. 저 적궤들은 황무지의 열풍을 맨몸으로 받으며, 삭막하고 무더운 철창 안에 수용된다.
“······.” 만약 데큘레인의 그 말 전부가 사실이라면, 정녕 데큘레인이 나를 토사구팽할 작정이라면, 나는 최소한 저들처럼 무기력하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리엘은 그렇게 다짐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보름달이 안개처럼 희끄무레 번지는 제도의 밤.
왜인지 처연하고 차가운, 얼음같은 시간.
나는 저택의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다.
「 저주와 약학 」, 「 면역에 관하여 」, 「 약초 집대성 」, 「 즐렌의 의학 사전 」, 「 고급 약재 조합법 」······.
루틴 중 하나가 되어버린 약학 공부.
나는 율리를 치유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서적과 논문을 구했고, 모조리 독파했다.
그 결과.
[ 약학 지식 등급 : 고급( 37% ) ] 「육안」으로 확인한 내 지식의 등급이다.
······참 신기한 일이다.
죽어라 노력 중인 「염동」은 반년 이상 노력해도 중급을 뚫을락말락인데, 약학은 두어달 공부한 것으로 벌써 고급이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건지······.” 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지식을 쌓으면 쌓을수록, 약학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내 무력함에 분노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율리가 품은 부상은, 데큘레인이 입힌 흉터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해독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 그러나 나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을 알고 있다.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게임의 ‘트리거’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율리. 네가 나를 미워하게 된다면.” 내가 그녀를 밀어내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내가 그녀에게 ‘악당’이 되는 것이다.
율리는 데큘레인이라는 시련을 극복하며 피어나는 꽃. 데큘레인을 적으로 둔 그녀는, 그 어떤 상흔도 이겨내며 찬란하게 비상할 테지.
“······그렇게 하는 것으로.” 나는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악당의 운명」이라는 특성은 어쩌면, 데큘레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네이밍이다.
데큘레인은 율리를 사랑할 수 밖에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녀에게 미움을 받아야 하므로.
“너를 살릴 수 있다면.” 가슴, 심장 한 켠에 손을 얹는다.
이상한 감각이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또 아프다. 데큘레인이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통증이다.
이 자체가 그저 프로그래밍, 혹은 캐릭터 설정의 결과물인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율리라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어버린 건지.
“······.” 나는 서적을 내려놓고 별채의 비밀문을 열었다.
알싸한 냄새와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휘감는 이곳은, 내 「연성」마법으로 개축한 약초방.
온도 조절 결계를 포함한 온갖 마공학 기술이 적용된, 이 세상 거의 모든 약초를 마련한 장소다.
이 중 그 무엇도, 율리를 치유할 수 없다.
똑똑— 그때 울리는 노크.
─교수님. 훈련 시간입니다.
어느새 새벽이 되어버린 듯하다.
나는 별채 밖으로 나갔다. 율리가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여기, 목검입니다.” “그래.” 나는 목검을 쥐었다. 새벽 훈련은 검을 섞는 대련이었다.
“직선으로 검을 뻗으면 반드시 빈틈이 생깁니다. 그러니, 검로는 반드시 곡선을 유지하십시오.” 율리가 시키는 대로 검을 휘둘렀고, 탁─! 탁─! 목검과 목검이 닿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좋습니다. 역시, 교수님은 스펀지 같습니다!” “이미 너보다도 잘하는 것같다만.” “어허! 겸손을 유지하십시오!” 몸짓이 상쾌했다. 스텝은 경쾌했다. 흐르는 땀이 기분 좋았다.
짝짝짝— 그런데,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검을 멎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날이 밝았고, 두 손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하하. 대단하구만! 데큘레인. 자네의 몸, 웬만한 기사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어!” 자이트였다. 자이트는 껄껄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왔고, 그 어깨 너머에는 유세핀도 함께였다.
“율리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구만! 아 참, 내가 예식장을 몇곳 알아봤는데. 그 중 한 군데가 아주 어마어마하더군. 함께 가볼까 하는데······.” 유세핀.
어쩌면 나에게 도움이 될 저 여자를, 나는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한 그녀는 생긋 웃었지만, 율리가 그 사이를 가로막았다.
“어딜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입술이 툭 튀어나온 표정이었다.
* * * 개강 열흘 전.
이프린과 알렌, 드렌트는 조교 연구실에서 여행 가방을 점검하고 있다.
“수건. 칫솔. 옷. 비상 식량. 다 챙겼나요?” “네.” “예.” 위 세 명은 데큘레인 교수의 동행자로서 로크랄렌 학회에 초대받았다.
“흐아아아아암—” 어제도 오늘도 밤을 지새웠던 이프린은 하품을 하면서 물었다.
“근데, 알렌 조교수님. 로크랄렌은 뭐가 특이해요?” 로크랄렌이 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참석 자체가 마법사 커리어에 어마어마한 이득이라는 소문은 자자했다.
알렌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 ‘로크랄렌’은 시간선이 뒤얽히는 장소예요.” “시간선이요?” “네에~” 알렌은 로브 안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여행 책자를 꺼냈다.
“로크랄렌은 약 10 년 전, 운석 충돌과 어마어마한 마력이 팡! 폭발하면서 자연 발생한 ‘마법적 공간’인데요, 아 참. 마법적 공간 개념은 이미 아시죠?” “그럼요. 저 솔단데요. 황궁의 정원도 마법적 공간이잖아요.” 가장 유명한 마법적 공간은 역시 황궁의 정원이다. 사계절이 공존하는 신비의 증거.
“네에~ 아무튼 로크랄렌도 마법적 공간인데, 그 장소에는 과거와 미래가 뒤섞여요. 확인된 과거 3 년, 미래는 10 년? 정도일 거예요. 자세히는 누구도 모른다네요.” “와. 신기하네요?” “네. 그런데, 조심하세요!” 알렌이 근엄하게 검지를 쭉 세웠다. ‘경고!’라는 제스처였다.
“그런 어마어마한 마법적장소이니만큼, 괴물도 엄청 많고, 괴물이 된 사람도 엄청나게 많아요. 무려 주홍 등급의 위험지역이에요.” 주홍 등급. 이프린은 덜컥 겁이났다. 위험 등급은 흑색─적색─주홍 순이었으니.
“······왜 그런데서 학회를 열어요?” “학회를 연지는 얼마 안 됐어요. 3 년 됐나? 마법사들이 활용 방안을 찾아낸 것이지요.” 로크랄렌은 비교적 최근에 발생한 마법적 공간이기에, 그 신비가 아직도 선명하다.
“1 년에 딱 한 번 학회만 열기로 했어요. 그렇게 하면, 미래의 지식과도 어느 정도 접촉할 수 있잖아요?” “······아!” 그러자 이프린과 드렌트도 깨달았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맞아요~ 괴물도 많고 위험하지만, 무릅쓰고 학회를 열만한 가치가 있는 거죠. 대신 그 자료들을 로크랄렌 밖으로 가져가면 안 돼요. 괴물이 돼버리거든요.” “괴물이 된다니요?” “어······.” 잠시 말을 멈춘 알렌은 다시 여행 책자를 뒤적였다.
촤르르르─ 급히 페이지를 넘기다, 발견했는지 방긋 웃었다.
“로크랄렌의 물건을 반출하면 ‘시간선이 뒤틀린 마력 그 자체’에 감염이 되어버려요. 세계의 억지력이라는 게 작용하는 것이지요. 어떤 괴물이 될지는 그 누구도 몰라요!” “음~ 알겠어요. 다 이해했어요.” “좋아요. 그럼. 갑시다!” 알렌은 이프린, 드렌트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때 마침 데큘레인도 집무실에서 나왔다.
알렌은 데큘레인을 보자마자 한걸음에 달려가 말했다.
“오늘도 정말 멋지십니다 교수님~!” 실제로 데큘레인의 옷차림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했다. 「미다스의 손」으로 완전무장한 장비들이었다.
“출발하지.” 이 무장들로 미루어 알 수 있듯, 데큘레인도 어느 정도는 긴장을 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메인 퀘스트 [ 로크랄렌 학회 ]에서는······ ‘대마법사’라는 천외천의 존재가, 드디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 * * 덜컹 덜컹─ 덜컹 덜컹─ 부드럽게 흔들리는 기차의 VIP 룸.
[ 로크랄렌은 운석 충돌의 여파로 발생한 마법적공간이다. 위치는 대륙의 동남부, 레오크 왕국의 귀퉁이.
시작은 물론 레오크 왕실의 소유였지만, 부유섬에서 로크랄렌의 권리를 ‘일시불 10 억 엘네’로 구매했고, 로크랄렌 지부를 따로 꾸려 조사를 마친 뒤, 대륙력 955 년에 ‘로크랄렌 학회’를 설립했다 ] “······으음.” 드렌트는 책자를 읽으며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이프린은 소파에 누워서 숙면하고, 알렌은 뜨게질에 열중하는 평화로운 시간.
나는 퀘스트의 진행에 대해 고민했다.
물론 율리 일도 그렇고 여러 다른 복잡한 사안이 많지만, 일단은 코앞의 메인퀘스트에 집중하는 것이 옳으니.
[ 메인 퀘스트 : 기괴한 학회 로크랄렌 ] ◆ 상점 화폐 + 1 ◆ 마력 + 50 이 학회에 어떤 대마법사가 등장할지는 모른다. 회사 사람들의 말과 시나리오 라인으로만 얼핏 보고 들었을 뿐이니.
끼이이이익─ 도착이 머지않은 듯 기차 속력이 줄어들었다.
나는 짐을 정리했다. 알렌은 뜨게질 장비를 로브 안주머니에 넣었고, 드렌트는 이프린을 깨웠다.
“이프린. 도착했어.” “아, 네, 네. 가요.” 덜컹─!
기차가 멈췄다.
우리 넷은 함께 내렸다. 플랫폼에 발을 내딛자마자 로크랄렌의 사람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데큘레인 교수님을 환영합니다. 로크랄렌까지는 말을 타고 가시는 게 편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말 네 마리를 권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프린과 알렌은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말을 못타는 거겠지.
“네 명이서 두 마리를 나눠 타지. 드렌트.” “예.” 드렌트가 먼저 말에 올랐다. 귀족가의 자제인 그는 승마가 능숙했다.
알렌이 쭈뼛쭈뼛 다가가 드렌트 뒤에 앉았고, 이프린은 뜨악한 얼굴이 되었다.
“그, 그럼 저는 설마?” 다음으로 내가 말에 올랐다.
“아, 알렌 조교수님. 저랑 자리 바꾸시면-” 머뭇거리는 이프린을 「염동」으로 억지로 태웠다.
“으앙!” “가겠다.” “예. 이랴!”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말은 비포장 도로를 쾌속으로 달렸고, 이프린은 으어어어- 거리며 흔들리다가 결국에는 내 등허리에 딱 달라붙었다.
“우어, 우어, 우어어.” “조용해라.” “우아아앙······.” ······그렇게 한 시간 쯤 달려 로크랄렌의 입구에 도착했다.
“아 멀미난다······. 알렌 조교수님 괜찮으세요······?” “아뇨, 아뇨오······. 저도, 말은 난생 처음이라서······.” 골골거리는 알렌과 이프린을 뒤로하고, 나는 로크랄렌을 올려다보았다.
로크랄렌은 공간이라기보다는 장소였다. 겉보기에는 무척이나 거대한 돔구장이었으니.
“초대장을 받겠습니다.” 로브 차림의 마법사 두 명이 입구를 가로막았다.
나는 초대장을 제시했다.
“확인했습니다. 말은 두고 가시면 됩니다.” “그러지.” 우리는 그들이 열어준 문,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음?” 로크랄렌 내부의 풍경은 꽤 특이했다. 돔 천장이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진 듯 외부의 풍경, 즉 햇볕과 하늘이 안에서도 보였다.
“의외로 정상적이네요?” 휘둘러보던 드렌트가 감탄했다. 그 말대로 로크랄렌에는 중앙의 학회 건물, 호텔, 매점, 마법 물품점, 주택 등등, 사람 사는 곳처럼 되어 있었다.
“오······.” 멍하니 걸어가던 드렌트가 어떤 행인 한 명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저, 안녕하십끄어어어얽-!” 그 즉시 기절했다.
나는 걷다 말고 드렌트를 보았다. 이프린과 알렌도 화들짝 놀라 드렌트를 뒤흔들었다.
“선배!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선배!” “드렌트 씨, 왜, 왜 갑자기? 어떻게 된 걸까요 교수님?!” 두 사람이 나를 동시에 돌아보았다. 나는 피식, 작은 미소를 지었다.
시스템이 듣던 것과 똑같아서 웃겼다.
“저 녀석이 미래, 혹은 과거의 사람에게 말을 건 탓이다.” “······네?” “미래, 그리고 과거의 사람과 소통을 하려면 어마어마한 마력이 필요하지.
그 마력이 부족하면 저렇게 되는 거고.” 실제 게임에서도 이 ‘로크랄렌’의 인물과 대화를 나누면 마력이 뭉텅이로 빠진다나 뭐라나.
“가지. 업어라, 이프린.” “네? 제가요?” “내가 업으리.” “······.” 이프린은 주섬주섬 드렌트를 업었고, 그렇게 짐덩이 하나를 메단 채 학회 전용 호텔 ‘로크룬’으로 걸었다.
“아윽······. 왤캐 무거워어억······. 으어어어억······.” 장신 드렌트를 업은 이프린이 끙끙 앓는 사이, 호텔의 인포 데스크에 도착했다.
데스크에는 우선 여러 장의 명찰이 놓여 있었다. 이름이 아닌 숫자가 적힌 명찰이었다.
[ 958 ] 알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수님, 이게 뭘까요?” “대륙력 958 년이라는 뜻이다. 명찰에 달도록.” “아하~ 그러면 명찰이 958 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되겠네요 교수님?” 알렌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모른다. 958 을 달아놓은 과거, 혹은 미래인이 있을 수도.” “아······ 하긴. 그런 짓궃은 사람도 있겠네요!” 명찰을 가슴에 달자, 호텔 직원은 아는 체도 않고 열쇠를 카운터에 내놓았다. 저 사람은 958 년도 사람이 아닌 거겠지.
나는 염동으로 열쇠를 받아들었다. 801 호였다.
“가지.” “네에.” “저, 저 너무 무거운데요······.” “참아라.” 여전히 드렌트를 업은 이프린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도착한 801 호는 플로어의 절반을 차지하는 넓은 층이었고, 이프린은 얼른 드렌트부터 내려놓았다.
“후아. 어깨 빠지는 줄······.” ─아아. 안내말씀 드립니다. 958 년 학회는 오늘 오후 6 시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958 년 참석자 분들께서는 어서 학회 건물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안내 방송이었다. 나는 손목 시계를 보았다. 이프린도 내 시계를 힐끗거렸다.
오후 5 시였다.
“한 시간도 안 남았네요?” “준비해라.” * * * 기절한 드렌트를 제외한 일행은 로크랄렌 학회의 중심 건물에 도착했다.
“데큘레인 교수님.” 가슴팍에 [ 958 ]명찰을 착용한 마법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데큘레인 교수님에게는 따로 학회 시작 전 안내 사항이 있으니 이쪽으로 오시고, 나머지 두 분은 잠시 기다리고 계시면 됩니다.” 그는 데큘레인을 먼저 안내했다. 이프린은 알렌과 멀뚱멀뚱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알렌 조교수님. 우린 어떻게 할까요?” “글쎄요······ 저는 여기서 교수님 기다릴게요!” 알렌은 얌전한 성격인 듯했지만, 이프린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주변을 휘둘러보던 이프린은 ‘지하 기록물 보관실’ 팻말을 발견했다.
“저는 잠시 기록물 보관실에 가도 되겠죠?” “네~ 뭐. 아, 참! 누구한테 말만 걸지 마세요! 물건도 반출하지 마시고요!” “당연하죠~” 방긋 웃은 이프린은 기록물 보관실으로 내려갔다.
지하 기록물 보관실은 출입을 막는 사람은 없었고, 그녀는 곧장 이곳 저곳을 뒤적였다.
“와. 진짜네. 내년 것도 있잖아?” 책장에는 책보다 논문이 많았지만, 정말 959 년, 960 년 등, 미래의 것들이 있었다. 이프린은 경탄하면서 그 내용을 눈으로 훑었다.
“······으어어어.” 고작 몇 줄 읽었을 뿐인데, 온몸의 마력이 쑤우우우욱─ 빠져나간다.
정줄을 놓을 듯 거대한 탈력감.
이프린은 책장을 붙잡고 겨우겨우 바로 섰다.
“와 뭐지······.” “미래의 지식을 습득하려면 평범한 마력으로는 불가능하단다. 아니, 대마법사도 힘들 걸?” 그때, 어떤 목소리가 그녀에게 말했다. 이프린은 흠칫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웬 로브 차림의 여인이었다.
단, 그녀에게는 명찰이 없었다.
이프린은 모르는 척, 안 본 척 논문을 책장에 꽂았다.
“으응~ 모르는 척 하려 그러니~?” 그 여인은 총총걸음으로 마치 날아오듯 다가왔다. 마력을 발끝에 살짝 모아 튕기는 대단한 테크닉이었다.
이프린은 감탄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혼잣말하듯 물었다.
“학회 참석자가 몇명일까~?” “매년 33 명 뿐이란다. 그 33 명이 동행 3 명을 데려올 수 있으니, 132 명이지. 시간과 관련된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 많진 않아. 물론, ‘로크랄렌의 중독자’라고, 로크랄렌에만 거주하는 중독자 500 명은 제외.” “음······ 132 명 중 한명이 내 곁에 있는 걸까~?” “그건 글쎄다?” 그런데, 잠깐.
이 사람은 나한테 말을 걸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잖아? 그러면, 958 년 사람이라는 거 아닌가?
이프린은 눈을 크게 뜨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까무라칠듯 놀랐다.
거의 심장이 멎어버렸다.
이 여자.
로브 아래 드러난 저 눈동자가······.
내 눈과 똑같다.
“안녕, 이프린?” 그녀의 맑은 눈꼬리가 짙고 매력적인 호선을 그린다.
“나도 이프린이란다. 반가워.”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미는데······ 이프린은 넋이 나갔다.
“너, 너-” “괜찮아. 네가 나에게 말을 거는데 필요한 마력은 전부 내가 부담하고 있단다? 마음껏 말하렴.” 이프린은 멍하니 이프린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 이프린은 너무나 어른스러웠고, 굉장히 아름다웠다. 심지어 키도 지금 자신보다 5cm 정도 더 큰 것 같았다.
“너는 몇년 뒤의 나야?” “으음······ 그건 가성비가 좋지 않은 질문이란다. 그걸 알려주면, 나머지 천마디를 못하게 되는데 괜찮겠니?” “아······ 마력이 많이 드는구나 그걸 알려주려면.” “응~ 그렇지.” 어른 이프린이 방긋 웃으며 로브를 벗었다. 윤기나는 장발이 찰랑이며 쏟아져내렸다.
이프린은 입을 떡 벌렸다.
자신도 모를, 아니 모르고 있었던 미모였다.
“958 년이면······ 데큘레인 교수님이랑 함께 왔겠네?” 어른 이프린이 물었다.
“어, 응. 왜? 아, 너 혹시 그 교수 때리고 싶니?!” 그러자 어른 이프린은 쿡쿡 웃었다. 정말 어른스러운 미소였다.
그러나 다음 이어진 말은, 아득히 이프린의 예상을 밖이었다.
“그 사람을 너무 미워하지 마렴.” “······엥? 왜?” “하핫. 그 이상은 못 알려준단다. 그리고, 내가 하는 말도 너무 믿지는 마.
내가 전부 네 미래인 것도 아니거든. 오히려, 아주 많이 다를 거야. 이 로크랄렌은 시간선이 무지막지하게 뒤얽힌 장소이니까.” “어······.” 이프린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 그때였다.
“이프린.” 어디선가, 등 뒤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이프린 두 명은 그곳을 돌아보았다.
데큘레인.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이프린과 어른 이프린을 번갈아보았다.
먼저 어른 이프린에게 말했다.
“······너도 이프린인가.” 어른 이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역시 당황 안하시네요. 교수님은 왜 뭐든 다 알아요?” 그는 단 한 마디로 대답했다.
“신기하군.” 이프린은, 어른 이프린과 데큘레인을 번갈아 보았다.
어른 이프린은 방긋 웃고 있었지만, 왜인지 그 눈꼬리에 물기가 글썽이는 것같았다.
“······뭐지.” 심지어, 데큘레인을 올려다보는 그 시선은······ 무슨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아련하다.
이프린은 다급히 외쳤다.
“얘! 너 그 사람 보는 눈이 뭐 그러니!” “······응? 아하하.” 이프린의 말에 어른 이프린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어린 이프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바로 그때.
“쉿.” 어른 이프린이 입가에 손을 얹었다. 데큘레인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프린이 물었다.
“왜?” “오늘은 학회 폐지날이란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학회 폐지? 왜?” “여러 문제가 생겼거든. 그건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옛날 이피야, 잠깐 눈좀 감아주지 않을래?” 어른 이프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으, 으응.” 이프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생긋 웃은 어른 이프린은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데큘레인 교수님.” “······.” 데큘레인은 그녀의 어른스러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조금 어이 없다는 미소가 떠올랐다.
“네가 진짜 이프린인가.” “그럼요.” 어른 이프린이 생긋 웃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성숙한 모습이었다. 최소한 10 년 쯤은 더 나이를 먹지 않았을까.
“오랜만이에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다려?” “네.” 그렇게 고백한 그녀는, 데큘레인의 목전으로 성큼 다가왔고······.
망설임 없이 껴안았다.
“······.” 데큘레인은 흔치 않게 당황했다.
다만 어른 이프린은 전혀 그렇지 않은 듯, 오히려 그의 가슴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한술 더 떠 두어번 부비적거렸다.
“헤휴······.” 적잖은 시간.
데큘레인의 품에 안겨 있던 그녀는, 이내 몇 발자국 물러나 쓰게 웃었다.
“······한 번 쯤은 안아보고 싶었어요.” “뭐, 뭐라고?!” 눈을 감고 있던 이프린이 경악하여 눈을 떴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쉿.” 아니, 새로운 상황의 시작이었다.
어른 이프린이 도서관의 저편을 가리키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더 떠들면, 우리 다 죽을지도 몰라요.
로크랄렌. (2) 이프린은 어른 이프린이 가리킨 방면을 바라보았다. 어두컴컴한 복도에는 그 무엇도 없었다.
적어도, 없는 것 같았다.
이프린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죽는다니? 왜?
─심각한 위험이 있거든. 그 탓에 964 년에는 로크랄렌 지역 전체 폐기가 결정되었단다. 지금은 미루고 미뤄진 그 폐기 과정이고.
─심각한 위험?
─응. 로크랄렌을 발생시킨게 운석인 건 아니?
─그럼! 방금 보고왔는데.
─그 운석에 포함된 미생물이 마력을 흡수하며 성장을 반복, 시간선을 집어삼키는 어마어마한 괴물이 되어버렸어. 이 괴물이 로크랄렌 밖, 즉 세상으로 나가면, 대륙은 멸망할 거란다.
미래의 이프린이 진지하게 얼굴을 굳혔다. 세계의 멸망이란 말에 이프린도 경악했다.
─정확한 학술명은 ‘카이데자이트’. 놈들에게 집어삼켜지면,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한 시간대에 박제돼. 나는 ‘구간 반복’이라고 하지.
그 말을 듣던 이프린은 어느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어른 이프린이 그녀를 부축하며 미안하다는 듯 볼을 부풀렸다.
─미안해. 너무 먼 미래의 지식이라, 받아들이는 데에 정신력이 꽤많이 소모됐을 거야. 마력은 내가 부담하지만, 정신력은 아니거든.
─어, 어응······.
이프린은 관자놀이를 만지작거리며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역시, 아무렇지도 않았다.
─······데큘레인 저 교수는 왜 멀쩡해?
“저 교수라.” 데큘레인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 죄송. 교수님은 왜 멀쩡해요?
─정신력이지. 쉽게 말해, 정신력이 50 인사람은 미래의 지식을 들을 때 마력 소모가 50%만큼 줄어든단다. 정신력이 10 인 사람은 마력 소모가 10%만큼 줄어들고. 데큘레인 교수님의 정신력은 99 쯤 되겠지?
─에이 99 는 무슨······. 일단 여긴 위험하다는 거잖아? 밖으로 나가자.
어른 이프린이 고개를 저었다.
─안돼. 나는 여기 남아서 녀석들을 막아야 한단다.
─혼자서?
─응.
─······너 엄청 세구나.
멍하니 감탄하던 이프린은 금세 어깨를 으쓱였다.
얘가 곧 나라는 말이지. 대단한 미래구나. 역시 나는 엄청난 놈이었어······.
그 속을 읽었다는 듯 어른 이프린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데큘레인을 보았다. 데큘레인은 복도의 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교수님은 보이시나요?” 어른 이프린이 물었다. 데큘레인은 작게 끄덕였다.
그의 「육안」에는 선명히 보였다.
‘카이데자이트’라는 시간의 괴물이 이프린과 멀지 않은 곳에서, 그러나 차마 달려들지는 못하고, 왜인지 친숙하게 머뭇거리는 모습이.
충분히 위협적이다만, 아직 사망변수는 없다.
“이프린.” ─······네?
“이제 그만 가지. 학회 시간이다.” ─아, 저는 조금 더 “나와라.” 어른 이프린이 이프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단다. 내일 또 볼 수 있으니까. 학회 일정은 3 박 4 일이잖니?” “이제 크게 말해도 돼?” “응. 두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왔는데, 내가 있어서 돌아갔나봐. 나를 무서워하거든.” “와. 진짜?” “그럼~ 네가 얼마나 대단한데······ 그런데, 부탁이 있어. 이프린 너에게도, 교수님에게도.” 데큘레인과 이프린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 로크랄렌 학회 : 대마법사의 부탁 ] ◆ 고급 특성 카탈로그 1 장 “······.” 데큘레인은 그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고급 특성 카탈로그라는 그 진귀한 보상보다도, 퀘스트의 네이밍 때문에.
그러나 이내 태연한 얼굴로 어른 이프린을 바라보았다.
“무슨 부탁?” 이프린이 얼른 물었다. 미래의 자신에게 엄청난 감명을 받은 저 녀석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기록물 보관실보다 더 깊은 지하에는 아직 ‘운석’이 있단다?
카이데자이트의 본체나 마찬가지지. 그런데, 그 문이 시간의 틈으로 막혀 있어. 아마, 카이데자이트에게 잡아먹힌 숙주가 그 열쇠를 가지고 있을 거야.” “숙주?!” “응. 놈은 로크랄렌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고 있단다. 그 동안은 나한테 막혔는데, 숙주를 얻은 모양이야. 내가 몸이 하나 뿐이라, 일단 더 위험한 이곳만 막고 있었지만······.” 어른 이프린이 짓궃은 눈으로 이프린을 바라보았다.
“아이코. 몸이 두개가 되어버렸네~?” 이프린은 흠칫 놀랐다.
“뭐, 뭐니 그게! 소름 돋게!” “하핫. 그래서 말인데······ 친애하는 교수님. 혹시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이프린의 물음에 데큘레인은 손목 시계를 보았다.
오후 6 시.
“그러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급 특성 카탈로그」.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치면 안 되는 보상이다.
* * * “데큘레인! 거 있었소?” 기록실에서 나오자마자 분홍 머리의 여인이 나를 맞이했다. 로제리오였다.
“요즘 자주 뵙는구만?” 에테르 등위인 그녀의 동행인 크레토였다. 둘 다 958 년, 즉 올해의 사람이었다.
“반갑습니다, 크레토 대군.” “하하. 나도 반갑네. 데큘레인 교수. 유크라인 개정본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 나는 크레토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크레토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나는 안 보이나.” 로제리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오 데큘레인 교수! 나라네! 델펜.” “교수님! 접니다 렐린!” 그 외에도 나를 아는 인물이 꽤많았다. 우선 958 년 렐린, 아직 모르는 960 년 델펜, 베르흐트 회의 참석자인 958 년 에센실······.
─곧 학회가 시작합니다. 2 층의 컨퍼런스 플로어로 올라와주십시오.
그때 마침 공지 사항이 내려왔다.
“가시지요.” “그럽세.” 나는 크레토와 함께 걸었고, 알렌, 로제리오, 이프린, 렐린 등등이 뒤를 따랐다.
“다들 오셨군요!” 그렇게 올라온 2 층의 컨퍼런스 홀. 정장 차림의 금발 중년인이 우리를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로크랄렌 학회장 ‘로크랄렌’입니다! 본명이 로크랄렌은 아니지만, 로크랄렌에 반하여 로크랄렌으로 개명을 하였지요! 예, 그렇습니다! 저 또한 ‘중독자’입니다만, 사교성이 넘치는 중독자입니다!” 활기차게 떠드는 로크랄렌. 나는 일단 주변을 둘러보았다. 로비의 복도에 여러 컨퍼런스 룸이 있었다.
“이곳에는 각각 주제가 다른 강의가 가득합니다. 자, 티켓을 받으세요!” 로크랄렌은 이곳에 모인 모두에게 티켓을 배부했다. 학회 참석자는 고작 300 명 정도 뿐이었다.
최대 인원수에 비하여 아주 적었는데, 아무래도 마법사 특성 상 동행을 데리고 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인 듯했다.
“이 티켓은 컨퍼런스 룸 입장권입니다. 어느 누구든 강연을 하실 수 있으며, 어떤 강의든 최대 3 개를 들을 수 있습니다! 미래의 강연도 있고, 과거의 강연도 있지요. 하하하.” 로크랄렌은 컨퍼런스 강의 목록을 소개했다.
다소 중구남방이었다. 어떤 방은 958 년도의 [ 루피겔의 원소 ]였고, 어떤 방은 960 년의 [ 갈레이의 대륙 광산 탐방 ]이었고, 또 어떤 방은 963 년의 [ 데란의 신비한 약초학 ]이었다.
“질문이요.” 그때 이프린이 당돌하게 손을 들었다. 무엇인가요~ 밝게 대꾸하려던 로크랄렌은 이프린을 보자 표정이 작게 썩었다.
“미래인이랑 한마디만 해도 기절한 사람도 있는데, 강의는 어떻게 듣나요?” “······자네는 누구의 동행이지?” 눈을 가늘게 좁힌 로크랄렌이 심드렁한 투로 되물었다. 이프린은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로크랄렌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진다.
“아~ 하하하하하! 데큘레인 교수님 동행이었군! 어쩐지, 브라이트한 호기심이 찬란하더라니~!” “······그런가요?” “그럼! 이 학회 건물 안에서는 어느 정도 괜찮단다. 또한, 이 컨퍼런스 룸의 화자들은 ‘일방적인 말하기’를 하는 거거든? 그걸 ‘엿듣는’ 식의 편법이라, 물론 마력과 정신력은 소모하겠지만, 강의 하나 정도는 충분히 들을 수 있을 게다.” “아하.” “그리고, 고작 한 마디 나눈 걸로 기절할 리가! 그냥 그 마법사가 피곤했겠지.” 으음~ 이프린은 납득한 듯했지만, 다시 물었다.
“그 미래의 지식을 저희가 훔치면 어떻게 하나요?” “하하하하~” 로크랄렌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소를 지었다. 세상 느끼한 웃음이었다.
“로크랄렌 안에서 터득한 기억은, 로크랄렌 밖으로 나가면 아마 기억도 잘 하지 못할 거야. 그저 잔상처럼 무의식 저편에 내려앉지.” “그럼 뭐하러 강의를······.” “잔물결이란다. 무의식에 기억을 담아도, 어느 순간, 갑자기 물길이 다가와 팍— 하고 발상과 영감이 치미는 것이지. 그 잔물결은 절대 진짜와 똑같지는 않지만, 또 다른 발전으로 이어지기에는 충분하지. 이해가 됐니?” 이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크랄렌은 친히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주기까지 했다. 이프린 본인은 기겁했지만.
“자! 그럼 이제는 학회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각자, 원하시는 강의를 들어주시는데, 데큘레인 교수님?” 나는 말없이 로크랄렌을 바라보았다.
“혹시, 내일은 교수님께 강의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 로크랄렌 강의 : 수상한 미래 ] ◆ 마력 +15 “그러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감사드립니다! 자, 다들 이제 움직여주세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짝짝짝─ 로크랄렌의 박수에 사람들이 움직였다.
학회의 진행은 간단했다. 그저 원하는 강의를 골라서 듣는 것 뿐이었다.
“이프린. 너는 네가 원하는 걸 들어라. 알렌 너도 마찬가지다.” “옙!” 이프린은 얼른 어딘가로 달려갔다. 보니 네임드 마법사 ‘비제탄’의 사(四 )계열 강의였다.
“네에~ 저는 교수님과 같은 강의를 들을 게요~” 나는 많은 주제 중에서 ‘약’과 관련된 것에만 집중했다.
우선 [ 브라한의 약학 강의 ], 다음으로 [ 몰란의 963 년에 새로이 발견한 약초 ], 마지막으로 [ 의학과 마법의 교집합 ] 따위의 강의를 들었고, 대략 다섯 시간 동안 알렌은 내곁을 졸면서 따라다녔다.
[ 약학 지식 등급 : 고급( 77% ) ] 미래 지식 공부 덕분인지 약학 지식이 40%나 급증했다.
물론 로크랄렌을 떠나도 유지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제조한 비약을 테스트할 방도는 그리 많지 않았다.” 마지막 세 번째인 [ 의학과 마법의 교집합 ] 강의. 담당자인 크제콘은 독백처럼 말했다.
확실히 이렇게 들으니 마력 소모가 덜했다.
“임상 실험도 불가능했고, 무엇도 불가능했다. 사람에게 먹일 수도 없었고, 동물에게 먹인 것이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지는······.” 바로 그 순간.
꺄아아아아아악──!
어떤 비명이 컨퍼런스 룸은 물론, 로비 전체를 가득 메웠다.
강의를 하던 교수가 말을 멈추고, 꾸벅꾸벅 졸던 알렌이 흠칫 놀라 깨어난다.
“교, 교수님? 무슨 일인가요?” “나가지.” “네!” 나는 밖으로 나갔다.
꺄아아아아아악──!
2 층의 로비.
웬 여인이 제 볼에 손을 얹은 채 괴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아악──!
그 비명은 끊기지 않았고, 어느새 몰려든 마법사들은 귀부터 막았다.
“무슨 일인가?!” 학회장 로크랄렌이 헐레벌떡 나타났다. 그는 복도에 선 여자 마법사, 그 비명을 들으면서 미간부터 찌푸렸다.
“어이 당신!
꺄아아아아아악──!
“아으 시끄러. 알았으니 멈춰! 사람들이 시끄러워하잖아!” 꺄아아아아아악──!
비명은 끊임이 없었고, 로크랄렌은 한숨을 내쉬며 다가갔다.
“알았어. 알았으니 뭘 봤는지 말하게. 뭐 때문에-” 꺄아아아아아악──!
여자는 로크랄렌을 본체도 않고 비명만 내질렀다.
“이보게! 뭘 봤는지 말하라니-” 학회장 로크랄렌이 뻗으려는 손을 내가 움켜쥐었다. 뿌려치려던 로크랄렌은 내 얼굴을 확인하곤 순박하게 갸웃거렸다.
“어, 교수님?” “손 대지 마라.” “예? 왜······.” 나는 가만히 서서 여인을 바라보았다.
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끊어지지 않는 비명.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여인.
강의는 어느새 중단되었고, 지켜보는 마법사들은 어떤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로크랄렌. (3) 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끊어지지 않는 비명.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여인.
강의는 어느새 중단되었고, 지켜보는 마법사들은 어떤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저, 저년 왜 저러노?” 로제리오는 닭살이 올랐는지 팔을 쓰다듬었다.
“박제당한 것이다.” 나는 로브 후드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절규하는 얼굴, 경악한 눈, 솟구치는 비명.
괴성의 음률, 동공의 움직임, 안면 주름의 접힘, 전부가 일정한 구간으로 반복되고 있다.
명찰은 963 년.
로크랄렌 폐지 1 년 전의 사람이다.
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로제리오. 이 소리를 좀 막을 수 있나.” “아 참. 당연히 가능하제.” 로제리오가 「사일런스」를 막처럼 둘렀다. 그렇게 소리는 멎었지만, 끔찍한 표정과 동상처럼 굳은 자세는 여전했다.
“오래 유지하려면 마석이 필요한디. 마석 있는 사람 있나?” 그러자 크레토가 안주머니에서 수정구슬 하나를 건넸다.
“이거면 되겠나.” “아, 예.” 로제리오는 「사일런스」의 매개를 수정구슬로 고정한 뒤, 여유 마력을 조금 더 불어넣었다.
“이걸로 됐소. 뭐, 데큘레인. 만지면 안된다 그랬제? 왜 만지면 안되는디?” “똑같이 박제될 가능성이 크다.” “······.” 내 말에 모두는 크게 놀란 얼굴이 되었다.
헛기침을 한 로크랄렌은 장내의 마법사들에게 외쳤다.
“다들 죄송합니다! 오늘 학회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하여 잠시 휴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호텔로 돌아가주십시오! 호텔로 돌아—” “아니.”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품 안의 목강철을 꺼내 1 층의 출구로 내려보냈다.
동시에 ‘그 누구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 안 된다니요.” 로크랄렌의 미간에 주름이 패였다. 나는 태연히 걸어 그들 앞에 섰다.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이 학회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데큘레인 교수님. 아무리 교수님이라도 학회장은 접니다. 그러니-” “이 안에 숙주가 있다.” “숙주?” 나는 이 안에 모인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로브를 벗고 맨얼굴을 보이시오.” 반응은 꽤 격했다.
렐린을 비롯한 아래 사람들은 급히 로브 후드를 벗었지만, 그 외 명망이 높은 가문 출신의 당주, 혹은 나이가 지긋한 고위 마법사들은 의심을 받는 다는 사실 자체에 분개했다.
“데큘레인 교수. 지금 무슨 소리를—” “데큘레인 자네! 나 모르나? 나 가엘론일세 가엘론!” “이 중에 숙주가 있다 해도, 나는 아닐세!” “뭐가 되었든 상관 없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마력이 뭉탱이로 소모되었으나, 할 말은 끝맺었다.
“숙주로 몰려 죽기 싫으면 내 말에 따르시지.” 그때.
─으아악!
1 층에서도 비슷한 괴성이 울렸다. 나는 그쪽으로 내려갔다.
“······오매.” 완전히 1 층으로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로제리오가 흠칫 놀랐다.
1 층과 2 층 사이의 계단, 그 계단을 무한히 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아래칸에서 한 칸 위로 오르다가 으아악─!
다시 아래칸에서 한 칸을 오르다가 으아악─!
“이 좀······ 심각한 것 같은데?” 으아악─! 으아악─!
명찰은 이전 피해자와 똑같이 963 년이다.
로제리오가 물었다.
“어으 소름돋노. 데큘레인. 어찌 저런 식으로 당하는 거요?” “그건 모르지. 일단.” 나는 뒤늦게 내려오는 인물들을 보았다. 로크랄렌, 알렌, 이프린, 크레토, 델펜, 렐린, 비제탄, 가엘론 등등······.
“로제리오. 입구를 틀어 막아라. 그 누구도, 나가지 못하도록.” “아니, 교수님! 그러다 우리 다 저렇게 박제되면-” “오야.” 로크랄렌의 저항은 로제리오가 가볍게 제지했다. 1 층에 닿은 로제리오는 출구로 이어지는 문을 전부, 「연성」으로 틀어막았다.
* * * ······로크랄렌에서 12 시간 째.
이프린은 학회 1 층 구석의 식당에 도착했다. 다행히 식재료는 아사 걱정을 안해도 될만큼 많았다.
“알렌 조교수님. 배고프시죠?” “아뇨~ 참을만해요.” 이프린이 뒤따라온 알렌에게 물었다. 알렌은 고개를 저었지만, 이프린의 배에서는 자꾸만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에이. 거짓말. 저랑 같이 요리해요.” “할 줄 아세요?” “그럼요.” 이프린은 마법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쉭쉭쉭쉭── 식재료들이 하늘로 솟아 저절로 잘리고, 마법의 불에 구워지는 등······.
“접시만 부탁드려요!” 우와- 감탄하던 알렌은 이프린의 말에 접시를 대령했다.
그렇게 30 분만에 요리를 완성한 그들은, 데큘레인과 로제리오 등 교수들이 토론을 나누는 3 층 ‘원탁 회의실’에 도착했다.
“저 여기. 먹을것들부터 가지고 왔어요.” “얌마! 넌 우리 진지하게 얘기하는 거 안 보여?!” 렐린이 그 돌연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흔들었다. 로제리오가 그 손을 탁 쳤다.
“마칩 배고팠어서 고맙기만 한데 뭘.” “아, 그렇습니까?” “고맙다잉. 놓고 가.” “네.” 알렌이 각각 교수들에게 요리를 서빙했고, 이프린은 은근슬쩍 원탁 뒤편에 서서 그들의 토론을 엿들었다.
“······흠. 그카믄, 일단 미래 사람들만 당한다 이거가?” 로제리오가 밥을 먹으며 물었다.
“놈이 가장 강력한 시기가 10 년 뒤이니, 우선 그 부근의 사람들부터 당하는 것일 테지.” 데큘레인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책을 읽고 있었다. 로제리오는 표지를 힐끔거렸다.
“책에 뭐 있나? ······잠깐. 그 963 년도 책 아닌교?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읽나?” “나는 읽어지는군.” 마력의 절대량은 로크랄렌에서도 명백히 하위권이지만, 데큘레인 특유의 정신력이 마력 소모 %를 절대적으로 줄여주는 덕이다.
“그런데, 교수님. 지하 기록실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돌연 렐린이 물었다. 이프린이 흠칫 떨었다.
데큘레인은 대답 없이 로제리오를 보았다.
“로제리오. 지하는 몇 층이지?” “글쎄. 꽤 깊다고는 들었다만.” “흠······ 왜 하필 지하에 기록 보관실을 만들었을까.” 데큘레인이 책을 읽으며 중얼거렸다. 자세히 보니 ‘963 년의 로크랄렌 건축물 조사’였다.
로제리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걸 내가 우째아노.” “······로제리오.” 그러다 문득, 데큘레인이 시선을 들어 로제리오를 노려보았다. 로제리오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와?” “너는 몇살이지.” “······지금 그걸 와 따지는데?” “네가 자꾸 반말을 하니 따지는 수 밖에 없지.” “등위는 내가 더 높은디?” 로제리오가 팔짱을 끼고 피식거렸다. 그러자 데큘레인이, 탁—! 하고 책을 덮었다. 로제리오는 흠칫 떨었다.
그가 서늘하게 노려보며 읊조린다.
“······로제리오.” “와.” “로제리오.” “······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지.” “······.” 데큘레인의 가히 찔러 죽이는 시선이 로제리오를 노려본다. 그 위압은 이 공간 전체를 질식시키는 듯하다.
“······아 알았다고. 그러면 반존대 쓰면 되잖나. 됐지요?” 등위는 로제리오가 더 높고, 나이를 비롯한 지위는 데큘레인이 더 높다.
반존대는 받아들일만하다.
데큘레인이 고개를 끄덕인 그때.
쿵──!
회의실의 문이 박살나듯 열렸다.
“데큘레인 교수! 로제리오 마법사! 여기서, 당신들끼리만 쑥덕쑥덕, 뭐, 밥도 먹고 있어!” 가문의 ‘델펜’이라는 마법사였다. 명찰은 960 년. 2 년 뒤의 미래 사람인 그는, 마력을 소모하며 격노하고 있다.
“벌써 40 명이 더 박제 당했네! 미래인 과거인 포함해서 여기 몇명이나 있는지 알아?!” “······.” “괴물, 숙주가 여기 있는 상황에서 문을 닫아서 어쩌라는 말이야! 꼼짝 말고 박제당하라는 건가! 우리는 밖으로 나가겠어! 그렇게 알라고!” 말을 토해낸 델펜은 돌아섰다. 그의 뒤를 꽤많은 사람이 따랐다.
데큘레인은 자리에 앉은 채로 말했다.
“······960 년의 델펜.” 델펜이 다리를 멈췄다.
“나는 958 년의 데큘레인이다.” 그 목소리에 실린 무게와 뜻은 델펜을 비롯한 모두의 어깨를 짓누른다.
그는 그들을 노려보며 말을 잇는다.
“제국대학의 교수이자, 유크라인의 당주이며, 황제의 친위대이지.” 대학의 교수, 유크라인의 당주, 황제의 친위대. 그 장식이 하나 둘 붙어갈수록 데큘레인의 이름은 더없이 무거워진다.
“960 년 델펜.” “······.” 침을 꿀꺽 삼킨 델펜은 데큘레인을 돌아보았다.
“네 의견을 묻지.” 그는 여전히 다리를 꼰 채다. 일어나지도 않고, 도 이상의 분노를 표하지도 않는다. 그저 안부를 묻듯 제안한다.
“네가 네 해에 존재하지 않게 해줄까.” 그 경고는 델펜 뿐만 아닌 모두에게 전하는 것이다.
“아마, 로할락으로 가게 될 터인데.” 델펜의 곁에 서있던 자들은 그 격이 다른 위협에 몸을 떨다가, 머지않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너무 패닉하여 어떻게 되었나봅니다. 데큘레인 교수님. 죄송합니다!” 허리를 숙임으로써 백기를 들었다.
* * * ······한편, 학회장 로크랄렌은 [ 지하 기록물 보관실 ]로 내려왔다.
“이런 빌어먹을. 어떻게 된 거지. 도대체 어떻게, 왜 이런 일이, 이럴 수가 없는데. 이런 일을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 지하 기록물 보관실 ]을 달렸다.
외곽을 따라 걸으면 안전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렇게 보관실의 한 구석에 닿았다.
“후우, 후우······.” 주변 눈치를 살피며 그 벽에 손을 얹자, 지문을 인식한 비밀문이 스르륵 열린다.
“어흐. 어흐.” 일단 내부로 들어온 그는 거친 호흡을 진정시켰다.
비밀의 방은 9 평 남짓한 서재였다.
“휴······.” 그는 땀을 닦으며 걸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일기장, 즉 기록을 보았다.
[ 3 월 8 일 : 로크랄렌 이곳은 내가 영원히 있을 곳이다. 그러니······ ] 이곳은 로크랄렌의 학회장 로크랄렌이 자신의 일기를 이어가는 장소.
다만 로크랄렌 자체가 시간선이 뒤얽힌 곳이기에, 이 일기에는 ‘미래의 로크랄렌’이 작성한 것도 있다.
따라서, 이런 특수 사건이 발생할 경우, 로크랄렌이 모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박제, 박제, 박제라는 단어를 썼을 것이다. 그리고 데큘레인도······.” 로크랄렌은 미친 듯이 일기를 뒤적였다. 차륵─! 종이에 손가락이 베였고, 뚝뚝─! 식은땀이 흘렀다.
그 절박한 노력 끝에,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기록을 발견했다.
[ 9 월 5 일 : 데큘레인이 말한 박제가 누구의 짓인지 밝혀졌다. 빌어먹을 마녀의 짓이다. 그것은······. ] 9 월 5 일.
미래의 자신이 현재에게 전달한,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글씨.
로크랄렌은 그 내용을 파악하자마자 경악했다.
“이럴수가. 어떻게······.” [ 어서 데큘레인에게 알려야 한다! ] 일기를 접어 넣은 그는 곧장 지상으로 올려갔다. 땀을 흘리며 계단을 올라 로비에 닿았다.
“데큘레인 교수! 데큘레인 교수!” 로제리오의 마법으로 틀어 막힌 1 층에는 인포 데스크 직원 뿐이었다.
그런데, 졸고 있었다.
저 미친 놈이 지금 잠이 오나!
로크랄렌은 그에게 달려갔다.
“어이! 지금이 졸 때인가!” “아! 아닙니다, 예!” 흠칫 놀라 깨어난 그가 로크랄렌을 바라보았다.
“데큘레인 교수는 어딨나!” “아~ 그 교수님은 지금 아마 3 층의 원탁 회의실에······ 계시지 않을까요?
세 시간 전 까지는.” “3 층?!” 로크랄렌이 되물었다. 그러자 직원이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뭐? 아니라고?” “예!” “그럼 어디-” “아~ 그 교수님은 지금 아마 3 층 원탁의 회의실에······. 계시지 않을까요? 세 시간 전까지는.” “······뭐라?” 그 순간, 로크랄렌의 등허리에 전율이 올랐다.
직원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 아닙니다, 예! 아~ 그 교수님은 아마 3 층의 원탁 회의실에······.” “······.” 꿀꺽- 침을 삼킨 로크랄렌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친다.
동시에, 그는 직감한다.
자신이 바로 보는 눈 앞에서 저렇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숙주라는 놈은.
“계시지 않을까요? 세 시간 전까지는.” 근처에 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로크랄렌은 비틀거리며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아! 아닙니다, 예! 아~ 그 교수님은 아마 3 층의 원탁 회의실에······.” 데스크의 직원은 여전히 그 말만 반복하는 중.
“이런 씨!” “계시지 않을까요? 세 시간 전 까지는.” 로클랄렌은 황급히 뒤로 돌아서 달려갔다. 통로의 문을 열고 계단을 올랐다.
─아! 아닙니다, 예! 아~ 그 교수님은 아마 3 층의 원탁 회의실에······.
반복되는 말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계단을 오른다.
1 층에서 2 층으로, 2 층에서 3 층으로······ “후우욱, 데큘레인 교······!” 그렇게 3 층의 문을 열었을 때.
바로 그 순간.
로크랄렌의 뇌리에 어떤 장면이 스친다.
[ 어서 데큘레인에게 알려야 한다! ] 불현듯 떠오른 자신의 일기장.
아무 의심 없이 읽어내린 마지막 문장.
그러나······ 필체.
그 문장은, 자신이 쓴 것이 아니다.
“아······.” 3 층의 문에서 자신을 가로막은 누군가를 바라보며, 로크랄렌은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주마등에 가까울 것이었다.
“안녕. 로크랄렌.” 자신을 완벽히 간파한 그녀에게, 로크랄렌은 숨이 멎을 듯한 심정을 느끼며 대답한다······.
“너. 어떻게 알았지?” ······그리고.
남은 건 반복이다.
“후우욱, 데큘레인 교······.” 그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3 층의 문을 연다.
그렇게 또 다시 그녀를 마주하고, 가장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너. 어떻게 알았지.” 그의 마지막 말이 끝맺어지면, 또 다시.
과거로 돌아가 3 층의 문을 연다.
“후우욱, 데큘레인 교······.” 로크랄렌이 목도한 인물은 이미 자리에서 떠난지 오래이나, 그의 표정과 기억과 시간은 생생하다.
“너. 어떻게 알았지.” 로크랄렌은 박제당했다.
로크랄렌. (4) ······1 시간 전, 어두운 새벽.
학회 건물은 로제리오의 「사일런스」 덕분에 쥐죽은 듯 조용하고, 2 층의 컨퍼런스 룸에서 알렌과 함께 있던 이프린은 슬그머니 눈치를 살핀다.
“조교수님. 자세요?” 알렌은 담요를 덮은 채 코오오······ 작은 숨소리를 반복한다.
다행히, 불규칙적이다. 박제 상태가 아니라는 증거다.
“······.” 이프린은 가방을 메고 조심스레 일어났다. 두툼한 백팩 안에는 음식을 가득 채워 넣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박제의 두려움보다, 역시 미래의 자신에 대한 생각이 더 크다.
나처럼 배고프겠지.
“아 참.” 잊어버리고 갈뻔했다. 이프린은 또 다른 장비, ‘키높이 구두’를 착용한 뒤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카이데자이트가 자신을 미래의 이프린과 헷갈리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 복도의 한복판, 자경단을 자처한─데큘레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렐린 교수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이······. 이······. 이······.” 이프린은 화들짝 놀랐지만, 렐린은 놀란 얼굴로 어떤 한 음절만, 규칙적으로 반복할 뿐이다.
박제당한 것이었다.
“이······.” 이프린은 그를 올려다보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렐린 교수님.” 렐린에게는 당하기도 많이 당했고, 뒷담화도 많이 했지만, 막상 이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이프린은 짧게나마 목례를 한 뒤 계단을 내려갔다.
“자고 있네?” 1 층 인포 데스크의 직원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프린은 곧장 [ 지하 기록물 보관실 ]로 내려갔다.
─이프린. 이프린!
지하에 닿자마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본인이 본인을 부른다는 게 조금 우스웠지만.
─이프린! 어딨니, 이프린!
어른 이프린은 어디로 갔는지 나타나지 않았고, 이프린은 우선 책장 뒤에 숨었다.
그때.
“이럴 리가 없다!” ─!
흠칫 놀란 이프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후다다닥─ 학회장 로크랄렌이 세상 다급한 모습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왜 저러시지.
이프린은 별 생각 없이 도시락을 꺼냈다.
한 입, 한 입, 먹으면서 어른 이프린이 했던 말을 되뇌었다.
─······미워하지 말라고 했지.
그녀는 데큘레인을 미워하지 말라 말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긴달프도 그렇고, 미래의 자신도 그렇고, 도대체 왜······.
“이프린!” 돌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크게 놀란 이프린은 목을 위로 꺾었다.
기다란 책장 위, 어른 이프린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까, 깜짝 놀랬잖니!” “후훗. 덕분에 잘 끝내고 왔어.” “뭘 끝내?” “숙주를 잡았단다.” “정말?!” 이프린의 눈코입이 벌렁벌렁— 커다랗게 되었다. 어른 이프린은 방긋 웃고는 그녀 곁에 사뿐히 착지했다.
“그럼. 네 덕분이야.” “내 덕분이라고? 왜?” “네 구두! 우리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이니, 로브를 뒤집어 쓰고 키도 똑같으면 카이데자이트는 헷갈리는게 당연하지. 그래서 카이데자이트가 너한테 집중하는 동안, 나는 밖으로 나가서 그 녀석을 잡았단다.” “아. 그렇구나! 하핫. 사실 나도 그걸 노렸지.” 이프린은 자신의 발밑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어른 이프린도 쿡쿡 웃었다.
“그래. 역시 나구나. 똑똑해 똑똑해.” 듣기 좋은 찬사였다. 이프린은 으쓱거리며 백팩을 풀었다.
“잠깐. 내가 가지고 온 게 또 있다구.” 지잉- 지퍼를 풀고 도시락을 내밀었다.
어른 이프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호~” “아쉽게도 로아호크는 없어.” “아 로아호크······ 겨우 잊고 있었는데.” 그러자 역시, 어른 이프린도 입맛을 다신다.
이프린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로아호크는 미래에도 있지?” “그럼. 진미로 유명해진단다. 나는, 개인적으로 교수님이랑 같이 먹었을 때가 가장 맛있었어.” 그 말에 이프린의 얼굴이 굳었다.
“데큘레인 교수랑?” “응. 그런데, 겸상하려면 무척이나 오래 걸릴 거란다? 그 교수님, 깔끔하지 않은 음식은 병적으로 싫어하잖니.” “······하긴.” 데큘레인이 손으로 쥐고 로아호크를 뜯는 모습을 상상······ 상상 자체가 안 된다.
아니, 그것보다도.
“그런데 그 교수랑 너, 아니 나, 아니 우리, 원수 아니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힌트라도 좀 줄 수 있어?” 이프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른 이프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신중하게, 또 의연하게 말을 고르는 얼굴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쓰게 웃었다.
“응. 맞아. 원수지.” “그치.” “그런데······ 내 세상에 교수님은 없어. 그러니, 너무 미워하지는 마렴.
그리고 가능하다면, 네 세상에는 교수님이 오랫동안 계시도록 부탁할게.” “······!” 그 말이 송곳처럼 뒤통수를 찔렀다. 커다란 현기증이 일었다.
어른 이프린이 그녀를 부축했다.
“더 자세한 지식은 네가 받아들이지 못할 거란다······ 지금도 어지럽지?” “응, 으응······ 왠지 졸리네.” “그럼 편히 자. 이 도시락은 잘 먹을게.” “아······ 응.” 이프린은 몽롱한 눈을 부비적거리며 말했다.
“잘 자렴.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거란다.” “응······ 근데 뭐가 끝나······?” 그 물음에 어른 이프린은 쓰게 웃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프린은 그저,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 * * [ 953 년, 운석을 관측한 목격자의 말로는, 마치 두 갈래의 섬광이 지상에 내리 꽂히는 것처럼 찬연하고······ 근방의 지명은 운석의 학명을 따 로크랄렌으로 결정되었다. ] [ 부유섬은 10 억 엘네로 로크랄렌의 권리를 매입했다. 그 어마어마한 거래를 두고 학계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로크랄렌은 하늘이 아닌 지상에 있는 땅인데, 부유섬의 연구 도중 사고가 발생하면······ 특히, 제국의 언론 '더 저널'은 이를 두고 ‘마법계의 어두운 욕망’이라 매도했다. ] [ 학회장 제센이 이름을 로크랄렌으로 개명하였다. ] 데큘레인은 하루종일 조사에 몰두했다. 함께였던 로제리오와 크레토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이미 자러갔지만, 그에게 휴식이나 수면 따위는 없었다.
「철인」의 몸에 긴장과 집중이 더해진 그는, 로크랄렌 전체를 파헤칠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러다 문득.
“······어이, 너.” 그는 3 층 토론실의 구석에 잠자코 선 ‘중독자’를 바라보았다. 중독자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 말입니까?” “그래. 너. 로크랄렌의 중독자는 500 명이라 그랬지.” “예 맞습니다.” “그들은 다 어디에 있지.” “학회날에는 전부 이 안에 있습니다.” “한명도 빠짐 없이?” “물론입니다. 저희는 ‘로크랄렌의 중독자’인걸요. 호텔에서, 매점에서, 직원으로 일을 하다가도 학회날이 되면 전부 이곳으로 옵니다.” 데큘레인은 말없이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 이 학회 건물 밖에는 아무도 없겠군.” 호텔 안에서 기절한 드렌트를 제외하고는.
“예. 그럴 겁니다.” 중독자의 대답에, 데큘레인의 뇌리에는 어떤 생각이 스친다.
찰나에 불과한 스파크.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충분히 힌트로 기능할만한······.
“데큘레인 교수님!” 문이 벌컥 열리며 중독자 한 명이 들어왔다.
“학회장님도 당했습니다!” 다급한 외침. 그럼에도 데큘레인의 평정과 여유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옷깃과 소매, 넥타이를 말끔히 정리한 뒤 일어났다.
“가지.” “예, 예.” 오래 걸을 필요는 없었다.
로크랄렌은 당장 3 층의 계단에 박제되어 있었으니.
“후우욱, 데큘레인······!” 데큘레인은 자신을 부르는 로크랄렌을 바라보았다.
“너. 어떻게 알았지. 후우욱, 데큘레인······! 너. 어떻게 알았지.
후우욱, 데큘레인······! 너. 어떻게 알았지.” 로크랄렌의 박제는 꽤나 기괴했다.
데큘레인이 물었다.
“언제부터 이랬지.” “오늘 아침에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뒤편에서 또 다른 외침이 울렸다.
이번에는 로제리오였다.
“데큘레인! 큰일났데이! 크레토, 크레토 대군도 박제당했다!” “······.” 로제리오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녀를 힐끗거린 데큘레인은 다시 로크랄렌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상하군.” 그는 여전히, 어떤 위화감을 느낀다.
이 ‘박제’에는 분명 전염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정녕 전염성이 있다면, [ 사망변수 ]가 표출되는 것이 정상일 터인데.
이 박제가 죽음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인가?
그런데 박제가 영원하다면, 죽음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데큘레인은 로크랄렌을 샅샅이 훑었다.
“후우욱, 데큘레인······.!” 그렇게 외치며 달려드는 로크랄렌.
놈의 쇄골 언저리에는 목걸이가 있다.
그러나, ‘줄’ 뿐이다.
목걸이의 알맹이는 누군가가 떼어낸 듯······.
바로 그 순간.
데큘레인의 망막에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 퀘스트 완료 ]를 알리는 시스템 문장이었다.
그의 눈이 놀람으로 확장되었고, 동시에 오늘 읽었던 문장이 정전기처럼 튀었다.
[ 운석을 관측한 목격자의 말로는, 마치 두 갈래의 섬광이 지상에 내리 꽂히는 것처럼 찬연하고······ ] 두 갈래의 섬광.
“······로제리오. 로크랄렌의 운석은 하나가 아니었다. 카이데자이트도 하나가 아니었다.” “뭐? 뭔 소리여?” “따라와라.” 그 깨달음의 순간에도 데큘레인은 지극히 태연자약했고, 별말 없이 1 층으로 내려갔다. 로제리오도 고등위 마법사답게 금세 평정을 되찾은 채 뒤따랐다.
“나가야 하오! 언제까지고 데큘레인 교수만 믿을 순 없어! 우리 스스로의 지성을 신뢰-” “마법을 준비!” “파괴 마법부터······.” “나가야 하오! 언제까지고 데큘레인 교수만 믿을 순 없어! 우리 스스로의 지성을 신뢰-” “마법을 준비!” “파괴 마법부터······.” 1 층의 출구 쪽은 어느새 개난장판. 순식간에 박제 당한 열댓명의 마법사가 마법 구현을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도 곧 저래 되겠구만.” “교수니임!” 로제리오가 냉소적으로 읊조리고, 조교수 알렌이 2 층 계단에서 헐떡이며 내려온다.
“큰일났어요! 이프린 조교가 사라졌어요!” “······뭐? 데큘레인. 이프린은 당신 제자 아닌가?” 로제리오가 데큘레인을 휙 돌아보았다. 정작 데큘레인은 별 관심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하 기록물 보관실 ]로 발길을 옮길 뿐이었다.
“교수니임! 저도 같이 가요오, 앗!” 달려오던 알렌이 바닥에 나뒹군다. 데큘레인은 역시 눈길도 주지 않지만, 뒤늦게 달려간 로제리오가 그의 어깨를 붙잡는다.
“······데큘레인! 저 뒤를 봐라!” 데큘레인은 그제서야 그곳을 힐끗거린다.
“교수니임~! 같이 가요오, 앗!” 알렌은 그에게 손을 뻗지만, 닿지 못하고 넘어진다.
그리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 데큘레인에게 손을 뻗는다.
“교수니임~!” “저 얼라도 저렇게 됐다.” 어느새, 박제당한 것이었다.
“같이 가요오, 앗!” 영원히 닿지 못할 반복. 사뭇 애처로운 그 모습에도 데큘레인은 태연하다.
오히려, 저 박제가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뇌까린다.
“어쩌란 말이지.” “뭐? 데큘레인 당신-” “따라오기나 해라.” 데큘레인은 거침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 지하 기록물 보관실 ]에 도달한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복도의 한복판을 전진했다.
“데큘레인! 저기, 당신 제자가 있다!” 로제리오가 책장 한 켠을 가리켰다. 이프린이 잠에 든듯 박제되어 있었다.
“그렇군.” “뭐? 당신 반응이 무슨. 냉혈한이구마?” 로제리오는 기겁했지만, 고개만 끄덕인 데큘레인은 다시 걸었다. 그 걸음걸이에 망설임이나 거리낌 따위는 없었다.
“······여긴가.” 그렇게, 두 사람은 더 낮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에 닿았다. 데큘레인은 로제리오를 휙 돌아보았다.
“로제리오.” “와. 한데 당신, 앞으로 내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앞에 에테르 붙여라.
에테르 로제리오 마법사. 따라해봐.” 로제리오는 데큘레인의 밑바닥을 오늘 완전히 확인했고, 오늘부로 손절할 생각이었다. 대단히 퉁명스러운 그녀에게 데큘레인은 말했다.
“에테르 로제리오 마법사.” “허. 하란다고 하네 또?” “자네는 거기 서 있어라.” 로제리오는 미간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왜?” “네 뒤에 카이데자이트가 있다.” “뭐? 그러면-” “순순히 박제당하면 될 것이다.” “너, 이 미친 놈이 설마-” 로제리오는 경악한 듯 손아귀에 마력을 모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너, 이 미친 놈이 설마- 너, 이 미친 놈이 설마- 너, 이 미친 놈이 설마-” 그녀는 그대로 박제당했다.
너 이 미친 놈이 설마- 너 이 미친 놈이 설마- 그 욕설을 들으며 데큘레인은 계단을 내려갔다.
뚜벅─ 뚜벅─ 이제는 조금 여유로워도 될 터.
데큘레인은 소매의 단추, 흐트러진 옷깃과 넥타이, 몸에 묻은 먼지 등등을 정리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나선의 계단을 내려간다.
아마 이 끝에는, 그 녀석이 기다리고 있겠지.
탁─.
계단과는 다른 이질적인 소리.
구둣굽이 닿은 지면은 돌처럼 딱딱하다.
“······.” 로크랄렌의 마지막 지하에 도달한 데큘레인은 저편을 보았다.
이프린이 말하길, ‘시간의 틈’으로 막혔다던 거대한 문. 그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데큘레인은 여전히 올곧은 자세로 걸어 들어갔다.
“······너.” 서늘하게 젖은 지하의 공기, 차갑게 휘몰아치는 공동의 바람, 노면에 처박힌 두 개의 운석 조각, 그 저편에 도사리는 시간의 괴물······ 그리고.
그 사이에 굳건히 선 미래의 대마법사.
“여기 있었구나.” ‘이프린 루나’가 그에게 말했다.
“네. 반가워요, 교수님.” * * * [ 퀘스트 완료 : 대마법사의 부탁 ] ◆ 고급 특성 카탈로그 1 장 습득 로크랄렌, 카이데자이트의 숙주는 로크랄렌이었다. 힌트는 그 이름 자체였다.
이름이 로크랄렌인데 당연히 로크랄렌의 숙주겠지.
문제는, 카이데자이트가 ‘한 마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카이데자이트가 두마리였구나.” 나는 이프린을 마주하며 말했다.
“네. 한 마리는 로크랄렌에게 갔고, 다른 한 마리는 저에게 왔어요.
로크랄렌이 도망을 잘 치는 녀석이라 그동안 조금 애를 먹었는데, 덕분에 성공했군요.” 생긋 웃은 이프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미래와 과거를 어찌나 왔다갔다 하던지······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노렸어요.” “······.” 이제, 나는 알 것 같았다.
‘로크랄렌 폐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 당돌한 녀석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뚜벅─ 나는 한 발자국 다가갔다. 표정을 굳힌 이프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 이상 다가오지 마세요.” 무시하고 걸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투명한 막이 진입을 막았다.
“탄소 방어막. 교수님이 발명하고, 제가 연마한 마법이에요. 그 누구도 뚫지 못해요.” 이프린은 탄소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공간을 분할했다.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멈춰서 녀석을 응시했다.
“이프린.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카이데자이트와 로크랄렌을 잡았으니 방출할 겁니다. 그럼 이 놈들은 로크랄렌 전체에 퍼지면서 자신의 생명력, 즉 ‘시간’을 원없이 소모하겠지요. 평화로운 해결이에요.” “······그래서 모두를 박제한 것이냐.” 이프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네. 맞아요.” 이 박제에 사망 변수, 「악당의 운명」이 발동하지 않았던 이유.
그 이유는, 박제가 사망이 아닌 구원이기 때문이었다.
“로크랄렌의 폐기는 이렇게 결정되었어요.” 로크랄렌은 특성 상, 과거와 미래가 항상 공존하기에, 내부의 인원을 전부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담당은 저, 대마법사 이프린.” 이 장소는 애당초 학회 따위가 열려서는 안 되었던, 인간이 출입해서는 안 되었던 곳이다.
문자 그대로, 마법계의 욕심과 욕망이 일으킨 대재앙.
“허나 놈들을 풀어헤치면, 로크랄렌 전체에 시간이 넘쳐 흐를 터인데?” 카이데자이트는 시간을 집어삼킨 괴물이다.
따라서 그 놈을 놓아준다면, 그 결과는 쉽게 예상이 가능하다.
엉키고, 아니 그저 엉킨 것을 넘어 압축되었던 실타래를 한순간에 풀어헤치면, 그 실은 온 사방으로 퍼지듯 팽창할 테지.
시간도 마찬가지다.
“맞아요. 로크랄렌 내부가 시간으로 가득차겠지요.” “그 시간은 백년일수도, 이백년일수도, 삼백년일 수도 있다.” 이프린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385 년으로 계산했어요. 로크랄렌 안에서만, 385 년이 흐르게 돼요.
바깥 세상에서의 10 초가, 로크랄렌 안에서의 385 년으로 돌변하는 것이지요.” “너 혼자, 그 시간을 감당하겠다는 것이냐.” “네.” 즉답이었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시간은 흐르지만, 노화는 없으니. 카이데자이트는 오직 ‘시간’으로만 이루어진 괴물이거든요. 이곳에서 385 년이 흐른다고 해도, 바깥세상에서는 고작 10 초이기도 하고요.” 카이데자이트가 로크랄렌 밖으로 나가면, 세계는 멸망한다.
희생자는 대륙 전체.
그렇다고 로크랄렌 안에 풀어헤치면, 이 공간의 시간 자체가 수백년으로 늘어진다.
희생자는 로크랄렌 내부의 모두.
아무도, 그 누구도 희생시키기 싫었던 이프린은, 나름대로 자신만의 방법을 발견한 것이었다.
“과거에 박제당한 사람만이, 그 영겁의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지.” 이프린은 쓸쓸히 끄덕였다.
“네. 박제는 순간이거든요. 제가 385 년만 견디면, 모두는 무사해요.
그들에게는 아주 찰나에 불과할 거예요. 자신이 박제당했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할 거랍니다?” ─자신이 박제당했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할 거랍니다?
그게 핵심이었다.
그녀는 이 로크랄렌의 모두.
즉 자신을 제외한 전원을 박제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 박제의 시간 동안, 그들은 385 년의 세월을 자각하지 못할 테니.
“그러려면 모든 사람이 이 학회장 안에 있어야만 했어요. ‘박제’는 꽤 큰 시간 에너지를 소요하는 기술이라, 카이데자이트의 운석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야 하거든요. ‘본의로’~ 데큘레인 교수님을 이용한 거예요. 성격 잘 아니까~?” 답지 않게 윙크까지 하는 녀석.
나는 기가막히다는 듯 노려보았다.
“······드렌트는.” “후훗. 그 선배는 이미 처리 했어요. 정신력이 워낙 약한 사람이라서요.” 고개를 끄덕인 뒤 손아귀에 마력을 모았다. 그리고, 이프린의 탄소 방어막을 긁었다.
이프린은 그저 웃었다.
“안 될 거예요. 말했잖아요. 교수님이 발명하고, 제가 발전한 마법-” 출렁- 순간, 방어막이 흔들렸다. 이프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건방지구나. 내가 발명했으니, 「이해」도 훨씬 빠르겠지.” 나는 자신감이 넘쳤으나, 바로 다음 순간.
우우우우웅──!
이프린이 마력을 쏟아부었다. 그 탓에 방어막은 이전보다 열 곱절은 더 단단해졌다.
“제 등위는 이터널이에요, 교수님.” “······.” 이래서는 방도가 없다.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
“수백년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 말지. 너 홀로, 인간의 평생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보내게 될 텐데.” 이프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신의 붕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마모되고, 휩쓸리고, 모래처럼 닳아서 바스라지겠지.” “저도 알아요.” 이프린이 볼을 부풀렸다. 짐짓 삐졌다는 듯이.
“그런데, 누가 그 많은 시간을 쉽게 감당하겠어요?” “네 눈 앞에 있다.” 나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장난스럽게 눈을 좁혔던 이프린은, 서서히 멍한 얼굴이 되었다.
“어라······.” “내가 대신하지.” “······.” 이프린은 입술만 뻐끔거렸다.
385 년.
그 긴 세월 동안 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두려움 따위는 한톨만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어마어마한 시간도, 내 자아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을 테지.
따라서, 이프린보다는 나에게 더욱 어울리는 시간이다. 나는 혼자서 「염동」 을 연마하면 그 뿐이니.
“마침 생각과 성장의 시간도 필요했고.” “······생각을, 300 년동안이나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으응······ 저에게 이런 일이 있었군요?” 그 눈꼬리에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 녀석은 어느새 붉어진 코끝을 훌쩍였고, 로브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고작 이런 일로 우는 녀석이 385 년을 감당할 수 있겠나.” “······아니요. 고작 이런 일이 아니에요, 저한테는.” 그렇게 말하며, 이프린은 방어막을 해체했다.
나는 그 뜻을 받아들였다.
“교대하지.” “······네, 교수님.” 이프린은 성큼 다가와 내 품에 안겼다. 저번처럼 기습적인 포옹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하려했다.
하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고마워요.” ······나는.
“그런데, 괜찮아요.” 이 접근을 허용하지 말았어야 했다.
“잘 있어요, 나의 교수님.” 로크랄렌. (5) ······안녕. 나의 교수님.
언젠가, 먼 미래에서 다가온 아이의 떨리는 목소리. 그 신비한 음색은 마치 메아리처럼 귓가에 맴돌다 흩어진다. 내 눈 앞에서 생겨나, 온몸으로 번지는 잔향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세상은 그 찰나, 아주 작은 순간을 기점으로 이미 뒤바뀌었다.
“······.” 녀석이 있었던 지하에 녀석은 없었고, 풍경만이 남아 고요했다.
제자리에서 바람이 헛돌았고, 차가운 습기가 피부에 와닿았다.
오직 정적 뿐인 지하.
그 무엇도 변하지 않은 공간에서, 나의 시간은 단 한번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러나 이 시간과 시간의 사이에, 385 년이라는 세월이 존재했을 것이다.
“······건방지다.” 나는 작은 분노와 모멸을 느꼈다. 어쩔 수 없는 성격의 작용이었다.
팔랑— 문득, 종이 한 장이 눈에 띄였다. 발밑에 종이 쪽지가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염동」으로 들었다.
[ 데큘레인 교수님에게.
안녕하세요, 이프린이에요.
지금 쯤, 제가 아는 교수님은 아마 화나셨을거예요. ‘건방지다’라며 중얼거리시지 않았을까요? ] “······.”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기척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문장을 읽었다. 꾹꾹 눌러 쓴 필체였다.
[ 미안해요 교수님. 하지만, 이건 저만의 몫이에요.
그리고 이 시간은 정말 ‘시간’에 불과하답니다. 마력도, 공기도, 한 곳에 정체되어 있어요. 따라서 수련이라는 건 불가능해요.
생각만이 가능한, 무의미한 시간이에요.
해변에 몰려오는 파도처럼 다만 휩쓸고 돌아갈 뿐인, 그렇게 반복하는 시간이에요.
후훗.
음, 저 이프린······ 사실 교수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요.
미래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미래가 어떻게 되었는지.
하지만 미래의 지식을 현재에 전달하는 것에는 무리가 많았어요. 특히 교수님의 미래는 제 마력을 모두 털어넣어도 불가능했죠.
그래서, 끝맺지도 못할 정보 한 줄, 고작 사실 따위를 전달할 바에야, 단 한 마디.
제가 교수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 “······?” 편지는 이게 끝이었다. 뒷장을 보았지만 허여멀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용이 뚝 끊어진 것이었다.
그때.
“교수님!” 문이 벌컥 열리며, 조금 더 앳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내 뒤통수를 울렸다. 나는 쪽지를 안주머니에 넣고 녀석을 돌아보았다.
“성공, 성공 한 건가요?! 로크랄렌 폐기는?!” 이프린.
주먹을 앙 쥔 녀석이 다급히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단, 이 로크랄렌 전체 폐기는 미래의 일이다. 카이데자이트는 해체했지만, 미래의 그날까지 이 로크랄렌의 시간선은 유지될 테지.” 로크랄렌 폐기는 아직 ‘미래’의 일. 로크랄렌 자체는 이프린이 대마법사가 되는 그날까지 유지될 것이다.
“저······ 그러면······ 저는요?” 이프린이 머뭇머뭇 물었다.
나는 녀석을 보며 미래의 이프린을 떠올렸다.
홀로 385 년의 세월을 견디는 모습을 상상했다.
화가 났다.
그 녀석은 내 능력과 자존심을 무시했다. 나의 뜻을 거절했다. 대단히 건방진 고집이었다.
너는 혼자서, 그토록 거대한 시간을 견딜 수 있는 녀석이 아닌데.
“······.” 나는 이프린에게 다가갔다. 이프린은 둠칫거리면서도 도망치지는 않았다.
턱— “윽!” 녀석의 머리통에 손을 얹었다.
작고 가벼웠다.
“네 머리에는 아직 들어야 할 게 많다.” “······뭐라고요?” 아직은 텅 빈 이프린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프린은 미래로 돌아갔다. 그 미래에는 로크랄렌 전체가 폐기 되었으니,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해.” “······.” 그러자 녀석은 조금 섭섭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말없이 지하를 올라갔다.
“어, 데큘레인! 너 이자식!” 돌아가던 계단에서 만난 로제리오가 눈을 부라렸다.
역시, 자신이 박제되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네가 나를 배신해?!” “따라와라. 일은 다 끝났다.” “······뭐라? 끝나?” 함께 1 층 로비로 올라오자, 이미 학회의 거의 전원이 모여 있었다. 박제에서 벗어난 그들은 조금 멋쩍은 얼굴이었다.
그 중에는 학회장은 로크랄렌도 보였다. 뭔가 혼란스러운 듯, 제 쇄골 언저리에 줄만 남은 목걸이를 멍하니 만지작거린다.
“······어, 데큘레인 교수님!” “데큘레인 교수. 당신이 해결한 것이오?” “미, 믿고 있었소.” 학회의 인원들이 뒤늦게 다가왔다. 나는 로제리오에게 턱짓했다.
“로제리오. 문을 열지.” “오야.” 로제리오가 「연성」 을 해체했다.
쿠구구구궁─!
틀어막혔던 학회의 출구가 드러났고, 화창한 햇볕이 스며들었다.
“호오······ 거진 사흘만에 보는 햇볕이구마. 데큘레인 교수. 오해해서 미안했다잉?” 로제리오가 중얼거리고, 몇몇 마법사는 내 눈치를 살피며 밖으로 나간다.
이들은 ‘누군가’의 희생을 모르기에, 그저 이 정도의 반응만 내비칠 뿐이다.
“······아아. 학회장 로크랄렌입니다. 이번 학회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하여 중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로크랄렌이 확성 마법으로 말했다.
“다들 호텔로 돌아가 편히 쉬어주십시오. 출입 수속은 내일입니다. 다들, 호텔로 돌아가 편히 쉬어주십시오······” 이프린은 삐죽 튀어나온 입과 퉁명스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 * * 이튿날.
마력 탈진의 여파에 골골거리던 드렌트가 어느 정도 회복했고, 그 외 학회는 모두 취소되었다.
학회장 로크랄렌도 ‘재정비 시간’을 가지겠노라 말했으니, 이제는 떠날 시간이었다.
“재정비라니. 그냥 학회 전체를 지금 폐기하면 안되는 걸까요? 그럼 미래에도 그런 일이 없는 거잖아요.” 이프린의 지극히 합리적인 물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증거가 없다. 증거가 있더라도, 카이데자이트는 미래의 위협이다.
부유섬에서는 그 ‘남은 시간’ 동안은 괜찮지 않느냐고 반문할 테지.” 마법과 지식과 신비에 미친 섬.
부유섬의 외피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듯보이지만, 그 내막은 오히려 한없이 고지식하고 잔혹하리만치 냉정하다.
“아······.” “교수님~ 짐 정리가 다 되었어요!” “저도, 목발 짚고 가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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