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15
우물거리며 문서를 소화한 「고로의 입」은 이내 구슬 두 개를 뱉었다. 하나는 실비아, 하나는 이프린의 몫이었다.
“이 구슬은 뭔가요?” “개인용 수정구슬입니다. 통신이 가능하며, 위험 상황이 발생할 경우 보안 총책임자에게 신호가 갑니다. 그 외에도 여러 기능이 있으니 분실하지 않도록 유의 부탁드립니다.” 「고로의 입」 곁에 서있던 마법사의 말이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 이프린은 주머니에 넣었고, 실비아는 한동안 그 구슬을 바라보았다. 아마 보안 총책임자가 ‘그 교수’인 탓이겠지.
이프린이 쓰게 웃던 그때.
“······?” 복도의 저편에, 예의 그 사람이 또 다시 눈에 띄었다.
알렌 조교수······ 가 아니구나.
“닮았네.” 알렌 같았지만, 알렌이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흉부가 대단했다. 로브 안에서도 출렁이는 움직임이 선명했으니.
저건 이프린도 익히 아는 불편함이었다.
그녀의 옷차림이 항상 품이 넓은 로브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남들 시선도 시선이지만, 몸 크기에 맞게 옷을 입으면 너무 가슴만 꽉 조여서 답답하거든.
“아 참, 실비아. 너 컵라면이라고 아니······?” 그렇게 물으려고 보니 실비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진짜 친해지기 힘드네. 무슨 길고양이도 아니고.” 한숨을 푹 내쉰 이프린은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갔다.
* * * 유크라인 백작령의 오전, 덜컹거리며 나아가는 차 안.
─프리미엔 부국장. 오늘 중요한 미팅인거 알지.
“예.” 치안부국장 ‘릴리아 프리미엔’은 치안국장의 수정구슬에 건성건성 대답했다.
─교수님 심기에 거슬릴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말도록. 부디 입 조심을 하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데큘레인 교수는 요즘 가장 유력한 인물이다. 자네가 상대하던 평범한 귀족이 아니야.
“압니다. 끊겠습니다.” ─아니, 부국장! 네가 말 한마디 잘못하면 너 뿐만 아니라 치안국 전체가- 뚝- 통신을 끊었다.
다만 국장의 말대로 오늘 일정은 꽤 까다로웠다.
주제는 적궤 탄압, 위치는 로할락 수용소. 정확히는 ‘수용소 감사를 빙자한 데큘레인 미팅’이다.
“흠.” 프리미엔 부국장은 자신이 적궤 출신임을 철저하게 숨겼으나, 역시 데큘레인을 마주할 때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착은 멀었나?” “아뇨. 바로 저기입니다.” 운전기사의 말에 프리미엔은 창밖을 보았다.
[ 로할락 수용소 ] 황무지나 다름없는 죽음의 땅. 그 한복판에 한창 시공 중인 수용소가 있었다. 그곳을 노려보며 프리미엔은 시니컬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도착했습니다.” “그래.”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두리번거리며 데큘레인을 찾았다.
“교수님은 저곳에 계십니다.” 그때 다가온 새하얀 기사, 율리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높다랗게 뻗은 감시 망루. 데큘레인은 그 위에서 수용소를 굽어보고 있었다.
이토록 삭막하며 무더운 공간에서도 정장 차림이었다.
······저 교수가 하룻밤 만에 사살한 일족은 7 명.
프리미엔은 어떤 분노를 느꼈지만, 이내 평소처럼 그에게 다가갔다.
“교수님.” 데큘레인이 시선을 비스듬히 내렸다. 그렇게 프리미엔을 굽어보며 끄덕였다.
“왔군.” “예. 손님이 한 명 더 있습니다. 초대하지는 않으신 듯 합니다만.” 프리미엔이 턱 끝으로 제 뒤를 가리켰다. 자동차에서 내린 마법사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 데큘레인 교수님!” 땅딸막하지만 탄탄한 몸의 사내가 데큘레인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접니다 베탄!” 베탄.
베르흐트의 적궤 안건으로 데큘레인과 다투었던 베오라드 가문의 당주.
세상 험악하게 데큘레인을 쏘아붙였던 그가, 오늘은 가장 해맑은 미소를 데큘레인에게 지었다.
“베탄?” “예. 베탄입니다. 저번에는 너무 커다란 오해가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큰 뜻도 몰라 뵙고!” 베탄은 흡족한 눈으로 로할락 수용소의 터를 휘둘러보았다.
“그리하여 직접 사과의 말씀도 드릴 겸 찾아왔습니다만······ 참 좋은 곳입니다. 아주 좋은 곳이에요.” 대체 뭐가 좋다는 것인지.
프리미엔은 냉소 어린 눈으로 그들을 흘겼다.
“······그렇지. 좋은 곳이다.” 나지막이 답한 데큘레인이 망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프리미엔에게 물었다.
“프리미엔 부국장. 치안국에서 수용소 감사를 한다 들었다만, 어떤가?
중앙에서 내려온 지원은 조금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 프리미엔은 데큘레인과 베탄, 그리고 뼈대를 이룬 수용소를 번갈아보았다.
“수용소 따위에 무슨 감사가 필요하겠습니까. 교수님의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 말을 하면서, 심장이 찔리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이곳에 갇혀 죽어갈 일족을 떠올리니 입술이 바싹 말랐다.
“당연합니다! 이 훌륭한 생각에 무슨 감사, 또 허가가 필요하겠습니까.
교수님, 만약 베오라드의 인력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유크라인의 곁에는 언제나 베오라드와 이 베탄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 데큘레인은 어쩐지 베르흐트에서의 그가 떠올라 헛웃음을 지었다.
“뭐, 감사할 것도 없다면 굳이 이곳에 오래 있을 필요가 없지. 하데카인의 식당으로 가지.” “예!” “······예.” 힘찬 베탄과 달리 프리미엔은 떨떠름했다.
······.
하데카인으로 돌아온 데큘레인은 레스토랑 ‘빛과 소금’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3 성급 식당이 많은 하데카인에서도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이것 참, 제가 대접을 해야 하는 건데. 교수님. 언제 한 번 베오라드를 찾아오시면 융숭하게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 착석한 프리미엔은 데큘레인과 베탄을 번갈아보았다.
양 옆이 지옥이었다.
“영광입니다, 당주님.” 레스토랑의 지배인이 데큘레인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자네들이 결정하지. 손님인데.” 데큘레인은 흔쾌히 베탄과 프리미엔에게 양보했다.
프리미엔은 스테이크를 생각했지만, 그 메뉴판에서 뭔가를 발견한 베탄은 깨달았다는 듯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역시 데큘레인 교수님이십니다······ 자네?” “예. 말씀하십시오.” “우선, 에피타이저로 ‘로타일리 수프’ 세 접시 주시게.” “······.” 프리미엔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로타일리 수프.
문자 그대로, 로타일리로 만든 수프다.
그러나 ‘로타일리’는 버섯의 일종으로, 마기를 정화하는 것으로 유명한 동시에, 적궤족이 섭취하지 못하는 ‘세 가지 음식’ 중 하나다.
음식은 물론 해독제로도 쓰이는 최고급 재료인지라 접할 기회가 몹시 드물고, 먹으면 죽는다는 것도 아니지만, 적궤가 섭취할 경우 겉으로 태가 난다.
로타일리의 마기 정화 효과에 적궤의 피가 감응하는 것이다.
“······어떻소, 프리미엔 부국장?” 베탄이 넌지시 물었다. 프리미엔은 평소의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버섯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종류불문 싫어하는 축에 속합니다만······ 로타일리처럼 고급이라면 먹을 만하지요. 몸에도 좋지 않습니까.” 그 목소리는 태연하지만, 심장은 두근거린다.
“그렇지. 아주 좋지.” 베탄은 미소를 짓고, 데큘레인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 이 레스토랑에 온 것부터가 시험이었나.
부지불식간에 절벽으로 내몰린 프리미엔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이럴 때에는 그 어떤 신체적인 변화도 내보여서는 안 되었다.
“바실리를 곁들인 로타일리 수프입니다.” “하하. 고맙네.” 웨이터가 음식을 서빙했다.
오지 않길 바랐거늘.
베탄은 수프를 받자마자 한 숟가락을 들었고, 데큘레인도 고상하게 떠먹었다.
프리미엔은 우선 물 한잔을 들이켰다.
그런 프리미엔을 지켜보던 데큘레인이 물었다.
“버섯을 많이 싫어하나.” “예. 어렸을 적 시골에서 독버섯을 먹은 트라우마 탓입니다. 굶주림이 익숙한 깡촌 출신인지라.” 베탄이 끼어들었다.
“부국장, 그래도 로타일리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버섯이지. 몸에도 좋지만 맛도 그만큼 탁월해. 색다른 맛일 것일세.” “그렇군요.” 끄덕인 프리미엔은 수저를 쥐었다. 수프에 푹 묻었고, 천천히 퍼올렸다.
수저에 진득한 수프가 묻어났다.
그 순간 프리미엔의 시간은 한없이 늘어진다.
뚝, 뚝, 뚝.
수저를 적시며 흐르는 짙고 누런 액체.
레스토랑을 가득 메우는 귀족들의 고상한 웃음.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 박동.
필사적으로 유지하는 포커페이스.
······테이블 근처를 걸어가던 직원.
프리미엔은 「염동」으로 직원을 끌어당겼다.
“꺄아아악!” 순식간에 접질린 직원은 넘어지면서 식탁보를 움켜쥐었고, 쨍그랑─!
프리미엔의 수프 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며 박살났다.
찰나, 레스토랑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프리미엔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어허!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죄송,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직원은 연신 허리를 숙였다.
데큘레인은 수저를 놓고 프리미엔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캐치한 베탄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수프나 다시 가지고 오도록!” “네, 네. 죄송합니다. 수프는 제가 변상을-” “아니.” 데큘레인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 뜻을 오해한 베탄이 덧붙였다.
“그래. 변상은 괜찮으니 수프나 가지고-” “되었다.” “······예?” “하찮은 짓 하지 말지.” 데큘레인은 베탄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로서는 솔직히, 나대는 베탄이 귀찮았다.
“프리미엔 부국장은 내 손님이다.” “아······ 예.” 베탄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듯했지만,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프리미엔은 태연하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시 식사에 집중하는 레스토랑의 귀족들.
마음을 안정시키며 흐르는 클래식.
그 고아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식사도 이어진다.
에피타이저 이후, 메인디쉬가 나왔다. 프리미엔은 갈릭 스테이크를 썰었고, 데큘레인과 베탄은 고급스러운 파라니망 생선조림이었다.
“아, 혹시. 이번에 교수님도 수련도에 가십니까?” “그래.” “역시. 같이 가시지요. 저도 그곳에서 잠시 머무를 생각입니다. 성장할 마법사들을 볼 기회······” 베탄은 시종일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베탄의 몸은 단단했지만 체격이 왜소했고, 데큘레인은 키와 체격 전부 훌륭했기에, 키작은 도베르만이 인간에게 재롱을 부리는 꼴이었다.
“······.” 프리미엔은 고기를 씹으면서 데큘레인을 의심했다.
데큘레인, ‘술식 해석의 천재’라 불리는 수석교수가.
과연 자신의 「염동」 하나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리 고민하다 보니, 음식을 코로 먹는 건지 입으로 먹는 건지 똥구멍으로 먹는 건지.
어떻게든 스테이크를 처리한 프리미엔이 조심스레 물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만. 잠시, 자리를 좀 비워도 되겠습니까.” “아 그래. 다녀오지.” 데큘레인이 허락했다. 의자에서 일어난 프리미엔은 멍하니 화장실로 걸었다.
그 세면대를 움켜쥔 채 거울을 바라보았다.
“······멀미가 나는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를 파악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뚜벅, 뚜벅 걸어가 변기 커버를 열었다.
그 직후.
“───!” 먹었던 전부를 게워냈다.
하나도 소화가 안 된 스테이크, 와인, 풀떼기.
전부 토해낸 뒤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부국장.” ······그 바로 앞에 데큘레인이 있었다.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구역질을 했나.” “예. 체했나 봅니다. 교수님은 식사가 끝나셨습니까?” “베탄과 나는 끝났지. 한데 율리의 식사가 안 끝나서 말이다.” “······예. 그렇다면 저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프리미엔은 그를 지나치려 했지만, 등 뒤에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자네가 버섯을 싫어한다는 건 처음 알았군.” “예. 함께 식사를 한 적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 “음.” 데큘레인의 그 미묘한 침음이 거슬렸다. 프리미엔은 헛기침을 하면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마치 자신을 꿰뚫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프리미엔. 혹시 알고 있나.” “무엇을 말입니까.” “우리가 베르흐트에서 만났던 적이 있었지. 베르흐트의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했었어.” 프리미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베르흐트에서 만났었다. 함께 식사도 했었고.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그때 메뉴가 버섯을 곁들인 스테이크였다.” “······.” ······순간 프리미엔의 온몸이 굳었다.
데큘레인은 그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적막 속에서 프리미엔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푸른 눈.
감정 없이 텅 비어버린 귀신의 동공.
프리미엔은 그 악귀를 마주하며 자신의 인생에 대해 고민했다. 생사(生死)에 대해 생각했다.
뇌가 멈춰버린 듯 머리통이 아렸다. 단장이 꼬인 듯했고, 심장이 미친 듯 튀었다.
──그런데.
돌연 데큘레인의 입가가 뒤틀렸다.
마치 미소를 짓는 것처럼.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렇게 정정했다.
“농담이다. 그 오래전에 뭘 먹었는지······ 기억 날 리가 있나.” 턱- 그의 장갑 낀 손이 프리미엔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는 마치 치하하듯 두어 번 두드리고 말했다.
“오늘은 수고했다. 베탄의 무례는 내가 대신 사과하지.” “······아닙니다. 살펴 가십시오.” 때마침 식사를 끝낸 율리 기사가 헐레벌떡 나왔고, 데큘레인은 그녀와 함께 레스토랑을 떠났다.
“······.” 프리미엔은 잠시 가만히 서있었다.
이내 복도를 몇 발자국 걸었지만,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뚜벅 뚜벅.
아무 일없는 것처럼 걸어가 변기 커버를 들었다.
“───!” 한 번.
“───!” 두 번.
“───!” 세 번.
네 번.
다섯 번.
자신의 인생을 고민한 횟수만큼 게워냈다. 싯누런 위액이 흐를 때까지.
“······흠.” 그리고 다시 세면대에 섰다.
“좀 괜찮군.” 손끝이 떨렸지만, 거울을 보며 흐트러진 넥타이를 정돈했다. 허여멀게진 혈색을 건강하게 바꾸었다.
“그때 내가 뭘 먹었었지.” 프리미엔으로서는 영 기억이 나질 않았으나, 그날의 메뉴를 아는 녀석이 있을 터였다.
아니, 메뉴 따위는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얼굴이 뜨겁다.” 프리미엔은 냉수마찰에 가까운 세수를 했다. 아예 물을 틀어놓고 그 위에 면상을 처박았다.
솔다 승격. (1) 수련도로 나아가는 비행선 안.
베탄이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한데 그 작자는 끝까지 안먹었군요. 그 수프를.” “집착은 말지. 확실한 방법도 아닌데.” “······예. 뭐 그렇긴 합니다만. 차라리 제가 대신 먹을걸 그랬습니다.
아깝게 쏟기만 하고.” 적궤는 로타일리 한 송이(40g)를 적당히 섭취하면 숨이 거칠어지고 얼굴이 꽤 붉어진다. 물론 혼혈일 경우, 즉 적궤의 피가 옅을 경우에는 그 변화의 폭이 적으니 아주 확실한 판별법이라 할 수는 없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훨씬 비싸고, 수요가 공급을 압도하는 진미 ‘로타일리’를, 굳이 적궤 따위를 구분하는데 마구잡이로 쓸 수도 없고.
물론 프리미엔이 먹었다면 선명하게 태가 났겠지. 중요한 네임드인 그녀는 적궤의 피를 짙게 타고났으니.
“베탄, 자네는 심장을 열어서 확인했다더만.” “아~ 그건 죽이기 전까지 확인을 못하니 비효율적입니다. 죽이기 전에 적궤인지 알아야 고문을 할 수 있는데 말이지요. 그렇다고 벌레같은 것들에게 그 귀한 로타일리를 먹일 수도 없고 하여, 요즈음에는 혈마법 개발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베탄이 배시시 웃었다. 나는 그 미소에서 시선을 피했다.
징그러웠다.
[ 악당의 운명 : 사망변수 제압 ] ◆ 상점 화폐 +1 베탄의 자극이 계속되었다면 프리미엔이 어떤 행동을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덕분에 상점 화폐를 벌었다.
프리미엔이 짧은 순간 품은 사망변수를 제압한 대가였다.
사실 나는 고민을 했었다.
프리메엔에게 ‘네가 적궤인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말할지, 아니면 조금 더 이렇게 두고 볼지.
언젠가는 반드시 그녀의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으나, 아직은 시기상조인 듯하여 노선을 비틀었다.
“그런데, 로타일리가 맛있긴 하더군요. 역시 산의 보물 답습니다.” 베탄은 수프를 떠올리는 듯 입맛을 다셨다. 대단히 만족스러웠는지 그 눈이 멍했다.
“유크라인 영지는 참 비옥합니다. 로타일리를 수프로 만들어 먹다니요.” 버섯의 일종이나, 결코 다른 버섯과 동류가 될 수 없는, 비약에 가까운 음식. 까다로운 환경이 갖춰진 천혜의 자연에서만 자라는 진미.
마릭이 개방된 요즈음에는 가격이 더 치솟을 징조를 보이고 있다. 마기 해독에는 로타일리만한 것이 없으니.
“특선 메뉴라 그런지······ 스읍. 아직도 입안에 그 향미가 감돕니다.” “여름에는 언제든 가서 내 이름을 대게. 겨울이야 워낙 물량이 없으니 힘들겠지만, 여름에는 충분히 먹을 수 있을 테니.” 그러자 베탄은 감동한 얼굴이 되었다.
* * * 비행선을 타고 수련도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아침이었고, 일정의 일(日)은 더이상 하루가 아니었다.
황궁에 갔다가, 하데카인에 갔다가, 다시 부유섬에 갔다가, 비행선을 타고 마지막 수련도.
「철인」임에도 정신적인 피로가 적잖다.
“어?! 왔네요!” 비행선에서 내리자마자 이사장이 나를 반겼다.
“우리 일곱 번째 최강자!” “······.”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어지러웠다.
이시장은 해안가에서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내 옆의 베탄을 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탄이랑 같이 왔네요!” “하하. 교수님과 함께 하는 건 언제나 영광이지요.” 슬슬 베탄이 부담스러워지고 있었다.
“것보다, 데큘레인 교수! 그거 알아요?!” “뭘 말입니까.” “오는 길에 감독관 한 명이 죽었대요!” “······.” 그 심각한 소식을 해맑게 전달하니 왜인지 섬뜩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사장과 나란히 걸었다. 베탄은 세발자국 뒤에서 따랐다.
“안 놀라시네요!” “사인과 범인은.” “모르죠! 아직 조사를 안했는데! 나중에 결과 나오면 알려드릴게요!” 호사가답게 온갖 일에 관심이 많고, 떠드는 것을 좋아한다. 가만히 기다리면 알아서 정보를 늘어놓을 테지.
“그렇군요. 한데 제 숙소는 어디입니까.” 격무에 시달리느라 가장 중요한 마법 훈련을 못했다.
이제 곧 「중급 염동」의 끄트마리에 닿을 것 같았기에, 나는 혼자 수련할 장소가 필요했다.
“아! 따라오세요!” 수련도의 면적은 3 ㎢. 으레 말하는 여의도와 비슷하고, 축구장 300 개를 이어붙인 넓이다.
상당히 넓은 만큼, 섬에는 총 다섯 채의 건물이 있다. 각각 시험생 기숙관, 감독관 숙소, 컨트롤 타워, 보급소, 유크라인 대강당이다.
나는 그 중에서 ‘컨트롤 타워’로 안내를 받았다. 수련도의 북동 끝에 등대처럼 솟은 장소였다.
“여길 쓰시면 돼요!” 이사장이 문을 열었다.
컨트롤 타워의 내부는 평범했다. 인테리어는 고급 저택처럼 정돈되었고, 미리 깔끔하게 청소했는지 내 신경에도 거슬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거!” 이사장이 나에게 수정구슬을 건넸다.
“외부의 보안팀이 계속 시험 상황을 주시할 거예요! 특수한 일이 생기면 연락이 갈 건데!” 그리고는 후다닥 달려가 컨트롤 타워 우측면의 통유리를 가리켰다.
“이건 총책임자 전용 마법 거울인데, 혹시 사용법 아시나요?!” 나는 그 통유리에 다가갔다. 작게 마력을 불어넣으니 유리창에 비치는 풍경이 뒤바뀌었다. 인공위성으로 내려보는 듯한 수련도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수련도의 한 지점을 터치했다. ‘시험생 기숙관’이었다.
그러자 통유리가 해당 장소를 보여주었다.
나는 유리창에 손바닥을 얹고 휙 밀었다. 그 방향으로 풍경이 움직였다.
현대의 로드뷰처럼.
“오호라! 잘 사용하시네요! 이거 요즘 완전 최첨단 최신식 마공학기술인데?!” “······.” 나에게는 숨쉬듯 익숙한 사용법이다.
조금 그립기도 하다.
한 손에 쥔 세상, 스마트폰.
“설명은 필요 없겠네요! 그럼, 전 다시 아드린느 2 세랑 산책하러 갈게요!” “그러시지요.” ─앙! 앙!
아드린느는 아드린느 2 세와 함께 모험을 떠났다.
나는 마법 유리창으로 이곳 저곳을 보았다.
기숙관의 운동장에는 모험가 출신 마법사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고, 식당에는 이프린이 어떤 네임드와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유의 인물’들을 발견했다.
“······역시.” 첫 번째 솔다 시험에는 여러 미꾸라지가 많다. 아니, 이제부터 대륙의 모든 이벤트에 제단, 혹은 암흑가의 간섭이 심해질 것이다.
“신기합니다. 역시 부유섬에는 모든 마법 기술이 모이는 것 같군요.
교수님은 또 저 신비한 걸 한 눈에 보고 아시다니. 대단합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베탄의 기다란 찬사.
“······베탄.” 저 놈은 아직도 안 가고 있었다.
“예?” “이제 편히 쉬지 그러나.”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교수님도 편히 쉬십시오.”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베탄은 금세 떠나갔고, 나는 유리창을 구경하다 컨트롤 타워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휘이이이잉── 몰아치는 돌풍.
우측에는 까마득한 절벽과 구름이, 좌측에는 수련도의 정경이 보인다. 자연에 스민 마나는 대륙의 지상보다 2~3 배 정순하고 많다.
시야가 탁 트인 이곳에서 나는 가부좌를 틀었다.
그 뒤 마법의 ‘메모라이즈’를 전개했다.
◆ 메모라이즈 현황 :초·중급 염동 ( 49% ) ┏초·중급 화력 통제 ( 23% ) ┣초·중급 유체 조작 ( 18 % ) ┗금속 강화 (진척도 80% ) 자신의 온몸에 「염동」이라는 마법진을 새기는 행위.
그 고난과 극기의 단련을 시작하자마자 일대의 풀, 돌멩이, 나뭇가지, 낙엽, 흙모래가 요란하게 떨었다.
두우우우웅───!
온천지에서 공명과 진동이 발생했다. 노면이 자그맣게 흔들렸고, 회오리가 일었다. 순간적으로 자기장이 발생했고, 대기가 아지랑이처럼 휘었다.
내 육신의 「염동」이 중급으로 서서히 격상하면서, 너무 거대하고 복잡해진 마법이 스스로를 방출하는 것이었다······.
······.
컨트롤 타워와 멀리 떨어진 곳. 카릭셀은 망원경으로 그를 염탐하면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충분히 강한것 같네.” “그래? 진짜?” 그의 푸념에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래. 뭘 하려는 지는 모르겠지만, 「염동」으로 지상을 뜯어내려는 것 같기도 하고?” “나도 볼래.” “봐.” 카릭셀은 망원경을 건네고 어깨를 으쓱였다.
카릭셀의 마력적 재능은 ‘장비’와 관련되었기에, 그의 망원경은 수십 km 떨어진 방면도 훤히 들여다보았다.
“저게 「염동」인가? 「지진」이 아니라?” “그래. 아무튼, 저 교수의 암살 시도는 절대 불가능해. 실패할 게 뻔하고, 실패하면 오히려 상황이 악화될 테지. 성공해도 당연히 좋은 일은 없을 거다. 인정하지?” “······인정. 거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큰 거품이 아니었네.” 누군가는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카릭셀은 망원경을 회수했다.
······.
한창 극기 훈련 중.
떠오르는 알림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악당의 운명 : 사망변수 회피. ] ◆ 상점 화폐 +1 “······음?” 아무래도, 이 안에 나를 노리려는 놈이 있었던 듯했다.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뭐가 되었든 회피했다니 좋은 일이었다.
감사히 받아들인 뒤 훈련에 몰두했다.
* * * 이튿날.
아침이 되자마자, 여러 가문의 고문 마법사, 교수, 모험단장, 상단·기업 소속 마법사 등등이 속속 수련도에 도착했다.
그들의 목적은 스카우팅과 인맥이었다.
그들 모두는 수련도의 동측, ‘유크라인 대강당’에 모였다. 이름을 보면 알수 있듯 유크라인의 기부로 건축된 강당이었다.
이 강당은 1 층과 고층부 관람석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1 층에는 시험 참가자 1,000 여명이 곧 도착할 예정이고, 관람석은 그들을 스카우팅하려는 관계자의 자리다.
“다들 지정좌석에 앉아주시면 됩니다.” 나는 데큘레인 지정석에 앉았다. 통유리 너머로 강당이 훤히 내다보이는 1 등석이었다.
“교수님. 좋은 아침입니다. 하하하.” 베오라드 가문을 대표하여 참석한 베탄. 「크루막토」 상단의 대표 마법사 밀레. 맥퀸의 대표 루이나, 브란 가문의 대표 에센실 등등······.
“다들, 이 아크릴 판을 받아주세요.” 직원이 마법사들의 이름이 기록된 아크릴 판을 건네주었다. 성적 순으로 줄을 세웠는지 첫 페이지 1 등은 실비아였다.
녀석의 이름을 보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때.
“······아이고 데큘레인. 우리, 일곱 번째 최강자 아닌가?” 일레이드의 대표 길테온.
그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자약하게 그의 인사를 받았다.
“오랜만이오, 길테온.” 삽시간에 분위기가 냉각되었다.
우리를 살피던 이사장이 ‘호사가 더듬이’를 뿅 세우더니 끼어들었다.
“길테온! 길테온은 열 번째 최강자던데요! 데큘레인한테 추월당했어요! 세 단계나!” “하하. 그러게 말이야. 조금 아쉽긴 하나, 사실 당연하지. 나는 노화하고, 데큘레인은 성장하는 것을.” “그래도 한 번 겨뤄봐야 하지는 않겠어요?!” “음.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요즘 내가 일선에 안 나선다고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거든.” “맞아요 맞아요! 맞아맞아!” 싸움을 붙이면서 잔뜩 흥분한 이사장. 길테온은 방긋 웃었다.
“하! 다 늙어서 교수님에게 덤비실 수나 있겠습니까.” 이건 내가 아니었다. 어느새 내 심복이 된 베탄의 말이었다.
길테온은 그런 그를 조금 얼빠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허······ 참. 어느새 친해졌나.” “맞다! 아예, 두 분의 마전(魔戰)을 저 애들한테 보여주면 안 되나요?!
애들 기도 죽일 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게?” 익숙한 목소리가 이사장을 제지했다.
루이나 폰 슐로트 맥퀸이었다.
이사장이 눈을 부라렸다.
“당신은 뭐예요!” “시험 칠 애들 기죽여서 뭐하냐는 말이에요. 그리고, 언제부터 마법사를 전투력으로만 줄세웠나요? 그럴거면 파괴 계열 마법사 말고는 다 빠지라 그러지 그래요? 길테온 당주님도, 데큘레인 교수님도, 정작 여기 로제리오 마법사보다 등위 낮잖아요.” “음? 어허허. 내는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는디. 왜 갑자기. 허허허.” 로제리오가 제 분홍머리를 긁적이며 쓰게 웃었다.
말했듯이 그녀는 ‘연성·보조’ 계열의 천재다. 20 대 중반의 나이로 에테르 등위에 이른 계기는, 고작 하루만에 수만평의 성 한 채를 건축한 신화적 일화 덕분.
“아쉽구만. 일곱 번째 최강자와 자웅을 겨뤄보고 싶었는데. 혹시 아나?
썩어도 준치라고, 다 늙은 내가 이길지도. 아니, 이길 것 같네만.” 길테온의 말이 심기에 거슬렸다.
물론 실제로 붙으면 내가 후달리겠지만.
이따위 도발을 그저 허허거리며 받아들일 에고가 아니다.
“길테온.”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입 밖으로 무의식적인 분노가 흘렀다.
“그러다 죽습니다.” “음~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길테온은 미소를 지었고, 이사장과 베탄은 오옷! 하면서 흥미롭게 지켜보았고, 루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 한데 나는 길테온의 얼굴이 거슬렸다.
진심으로, 자신의 죽음을 바라는 표정이었다.
“······그만하게, 데큘레인. 길테온도. 이제 곧 시험 시작이니.” 최연장자인 긴달프가 근엄하게 제지했다. 나는 말없이 통유리 밖, 강당에 모여드는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솔다 승격 시험은 꽤 큰 이벤트다. 마법사는 물론 모험가도 참여할 뿐더러, 한 번 마탑의 마법사였다면 범죄자 전과자 따위를 구분하지 않는 부유섬의 특성 상, 어떤 돌발 사건이 발생할지 그 누구도 모른다.
“다들, 전달한 아크릴 판을 봐주세요. 거기 수험생들의 인적사항과 스펙이 기록되어 있거든요? 가장 주목할만한 대상에게 체크를 해주세요. 시험의 일환이니 꼭 부탁드려요······.” 마법사는 간곡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아크릴판에 수험생들의 인적사항과 스펙이 기록되어 있거든요? 가장 주목할만한 대상에게 체크를 해주세요. 시험의 일환이니 꼭······ 나는 이프린, 실비아, 그리고 몇몇 익숙한 이름들에 체크를 했다.
* 이프린은 좌석에 앉아 강당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다.
하긴, 솔다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성인 마법사’라 할만하니. 솔다 딱지를 바라는 모험가들도 많고, 이미 ‘솔다’이면서도 다시 재수한 마법사도 있다.
솔다 시험을 끝까지 잘 치러야 차후의 등위 승격도 쉬워진다고 하니.
“다들 반갑습니다!” 그때, 강당 위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울렸다.
제국 대학마탑의 이사장 아드린느. 대해처럼 광활한 마력용적과 막강한 파괴력으로 유명한 그녀는, 아이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이제 솔다 승격 시험을 시작하도록 할텐데! 저기, 관람석 보이시나요?!” 모두가 고개를 들어 그 위를 보았다. 통유리 너머에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사람이 많았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나 데큘레인.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러 온 사람들이 많아요. 물론 이미 모험단에 소속된 사람도 있겠지만, 잘 보이는 게 좋겠죠?!” 이사장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만세하는 포즈였다.
“이번 시험은 저분들이 여러분을 지켜볼 거예요! 시험 기간 내내 스토킹하지는 않겠지만, 열심히 잘 보이면 차후 커리어에 크나큰 도움이 될 거예요! 전부 마법계에서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 땅땅땅─ 이사장이 교탁을 세번 두드렸다.
“자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솔다 시험을 시작 할텐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천명은 너무 많아요! 숫자를 좀 줄여야겠어요!”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이내 그녀의 온몸에서 마력이 피어올랐다. 그 육신 전체가 하나의 마력 덩어리로 일변했다.
“──.” 아주 작은 중얼거림.
파아아아아─!
직후 파도처럼 번진 마력이 강당 전체를 잠식했고, 눈이 멀듯한 빛무리가 타올랐다.
“으윽.” “다들! 첫 번째 시험 시작이에요!” 눈을 감았던 모두가, 이사장의 그 말에 눈을 떴을 때.
“······미친.” 이프린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가 선 자리는 강당이 아닌 숲이었고, 방금 아드린느가 발현한 것은 「 대마법(大魔法) : 다중 순간이동」이었다.
대마법사 데마칸은 홀로 거대마법(巨大魔法)을 발현했다는데, 아드린느는 어느새 그 경지의 직전까지 이른 것이었다.
“어딜까 여긴······.” 새하얀 안개가 자욱한 풀숲.
이프린은 미간을 좁히고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100~200 명의 수험생들이 자신처럼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천명은 너무 많다더니, 20% 정도 씩 나눠서 다른 곳으로 보낸 건가.
“반갑습니다.” 그때 울려퍼진 소년의 목소리. 이프린은 흠칫 놀랐다.
웬 키작은 남자가 안개 한복판에 파묻혀 있었다.
“저는 솔다 시험의 감독관 ‘미믹’입니다.” 미믹. 신기한 이름이었다. 그는 평범한 로브와 크로스백 차림이었지만, 키가 상당히 작았다.
140cm 는 될까?
“솔다 승격 시험은 마법사로서의 능력과 자질과 소양을 평가합니다.
아카데미, 그리고 대학 이상의 실전적인 능력이지요.” 와아~!
어디선가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프린은 그쪽을 보았다. 베레모와 마스크로 거의 얼굴을 가린 여자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우선, 첫 번째 시험은 간단합니다.” 미믹은 크로스백에서 지도를 꺼냈다.
처음에는 분명 한장이었는데, 수백장으로 불어나더니 수험생들에게로 날아갔다.
“두 번째 시험의 목적에 닿으면 됩니다. 수단과 방법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프린은 지도를 보았다. 평범한 지도에 동그라미 표시가 여러 개 되어 있었다.
문제는, 현재 자신의 위치를 모른다는 것.
“표시된 목적은 하나가 아닙니다. 총 아홉이지요. 자, 출발해주세요.” 그렇게 말을 마친 미믹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이프린 씨!” “억! 아, 진짜. 깜짝 놀랐잖아요.” 이프린은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난 카릭셀을 흘겨보았다.
“하하, 죄송합니다. 같이 가실까요?” “······같이요?” 이프린은 다시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보아도 실비아는 없었다. 자신과 다른 곳으로 이동한 거겠지.
“그래요, 뭐.” “저기~ 저기요~ 괜찮으시다면! 저도 같이 가면 안될까요~?” 뒤늦게 어떤 맑고 나른한 목소리가 닿았다. 이프린은 다소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흘겼다.
“누구신데요? 자기 PR 부탁드려요.” “아, 그, 저는······ 저는 메이호예요! 마법을 배운지는 얼마 안 됐는데, 운 좋게 승격시험까지 치를 수 있게 됐어요!” “어디 출신이세요?” “유, 유렌 아니, 레오크 왕국 출신이에요~” “······유렌이에요 레오크예요?” “레오크 왕국이요~” 배시시 웃는다.
이프린은 팔짱을 낀 채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같이 가요. 전 이프린이에요. 여긴 카릭셀이고.” “반갑습니다.” “앗 네네~ 고마워요~ 짐이 안 되도록 열심히 할게요!” 이프린은 카릭셀, 메이호와 함께 팀을 이뤘다.
······그들의 영상을 나는 마법 통유리로 전부 지켜보았다.
“별 일 없어요?” 루이나가 물었다. 강당에서 나오자마자 나를 쫓아온 그녀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너는 오래 머무나?” “아뇨. 저희는 오늘 가는데요. 이 아크릴 마법판으로 보고만 꾸준히 받는 거예요.” 맥퀸 가문의 대표, 루이나는 오른손에 쥔 아크릴판을 흔들거렸다.
“왜요 보스, 계속 있을까요?” 루이나가 짓궃게 물었다. 그 눈꼬리가 여우처럼 휘었다.
“아니.” “맞다. 보스도 감독관이라면서요?” “아직 별 임무는 없다.” 감독관 역할은 이미 서면으로 전달받았으니,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겠지.
“보안은 괜찮겠죠? 아~ 하긴. 누가 일곱 번째 최강자를 건드리겠어.” 나는 혀를 찼다.
일곱 번째 최강자. 들을 때마다 손발이 오글거린단 말이지.
탁-!
커피를 다 마신 루이나가 회중시계를 보더니 잔을 내려놓았다.
“아, 비행선 시간 다 됐네. 그럼 전 갈게요 보스~” “아니.” 나는 그런 루이나를 불러세웠다. 루이나가 걷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생각이 바뀌었다.” “네?” “남아라.” “······네?” 루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다시 말했다.
“남으라고 말했다.” “······?” 루이나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 * * 한편, 실비아는 말을 탄 채 안개를 헤치고 있었다. 자신의 삼원색으로 창조한 말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내달리다가 잠깐 멈춰 지도를 보았다.
“······움직이잖아.” 지도에 표시된 동그라미가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과 분명히 다른 위치였다.
이게 왜 이러지, 에러인가, 불량인가, 아니면 목적지가 자꾸 바뀌는 걸까.
그 생각은 고작 15 초가 끝이었다.
“목적지는 건물이 아니야. 사람이야.” 실비아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건물이 아닌 사람.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고, 이렇게나 목적지가 많은 것이다.
아마도 두 번째 시험의 감독관일 테지.
“이랴.” 실비아는 고삐를 살살 당겼다.
타겟이 사람이라면, 굳이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 천천히 움직이며 위치를 파악하면 그 뿐.
“······.” 그러던 중 요상한 상자를 발견했다.
덩쿨 사이에 파묻힌 상자 하나.
실비아는 그것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실험의 일환일까.
잠시 뒤, 말에서 내려 그 상자에 손을 뻗었다 “멈춰!” 그때 울려퍼지는 목소리. 실비아는 흠칫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누구야.” 안개를 뚫고,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이 나타났다.
“안녕, 실비아 아가씨? 나는 레일리. 이쪽은 도즈무.” “······.” “왜 멈추라고 했냐면, 그건 미믹이라는 거거든. 상자 형상의 마수. 봐봐?” 레일리가 화염구를 발현했다.
키에에에엑─! 화염구에 닿자 상자는 비명을 내질렀고, 다리를 쭉 뻗더니 그대로 도망갔다.
“······영악한 놈이지. 아, 너무 상심하지는 마. 아무리 천재라도 경험이 부족하면 알기 힘들거든 저 녀석은.”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고 손을 뻗었으면 크게 다칠 뻔했다.
“저도 레일리 당신을 알아요.” “나? 나를? 어떻게?” “붉은 가넷 모험단.” 그러자 레일리는 감동 받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고마워~ 하긴, 우리가 요즘 좀 유명해지기는 했지. 후!” “솔다 시험은 왜 왔어요.” “음~ 내가 아직 솔다거든. 말이 좀 이상하긴 한데, 처음 시험 볼때 너무 망해서, 이 이상 올라가질 못해. 그래서 다시 보려고 왔어. 아, 이 옆에 놈도 비슷한 이유야. 얘는 도즈무.” 레일리가 방긋 웃었다. 그리고는 실비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야~ 삼원색으로 말도 만들고, 진짜 대단하네. 근데······ 실비아 아가씨.” “네.” “우리가 이 지도 보면서 의심스러운 점을 몇 개 발견했든? 그러려면 최소 두 개 이상의 지도랑 비교 대조를 해야되는데······ 보여줄 수 있겠어? 도즈무 거랑은 이미 비교했거든.” 레일리가 머리카락을 꼬면서 물었다. 도즈무라는 남자는 이 상황에 영 관심이 없는 듯 하품이나 하고 있었다.
“네. 보여드릴게요.” 실비아가 품 속의 지도를 내밀었다.
──바로 그 순간.
하품하던 도즈무가 먼저 손을 쭉 뻗어 그 지도를 낚아챘고, 레일리와 함께 빛의 속도로 달아났다.
우다다다다다──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는 두 사람을 실비아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니 상상도 못한 일이라, 도저히 어떤 반응을 어떤 식으로 보여야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돌아와.” 겨우 쥐어짜낸 목소리.
안개에 파묻혀 바스락거릴 뿐이다.
솔다 승격. (2) 실비아는 자신의 손에 남은 지도 조각을 쥐었다. 한낱 귀퉁이를 노려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법의 계열, 혹은 속성. 그 따위 것들은 지금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졌던 지도의 촉감을 기억했다. 조직을 떠올렸다. 기능을 되새겼다.
그러자, 삼원색이 형상을 이루었다.
그들이 앗아간 지도. 실바아가 느꼈던 그 물체가, 귀퉁이에서부터 흐물거리며 재생을 시작했다.
단 한 번도 시도한 적 없었지만, 이내 완벽하게 복구되었다.
되살아난 지도는 원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붉은 동그라미도 ‘똑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붉은 가넷 모험단의 레일리.” 실비아는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앙증맞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일레이드는 분노를 자양분 삼아 자라난단다. 죽일 수 없는 시련은, 오히려 일레이드를 더욱 강하게 만들지.
이게 바로 길테온이 말하는 성장인 걸까.
레일리. 도즈무.
나는 동화에서 본 당신들의 업적을 믿어준 건데.
날 배신한 대가가 무엇일지는 기대해도 좋아. 이 시험 도중 언젠가는 필히 만나게 될 터인데, 오늘의 배신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이제 안 속아.” 실비아는 자신의 경험이 부족했음을 인정했다. 그간의 아둔을 절감했다.
서서히, 실전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마석을 꺼냈다. 그것과 마력을 엮어 박쥐를 창조했다. 박쥐는 파닥거리며 날아가 자신과 눈을 공유했다.
박쥐로 사주를 경계하면서, 실비아는 자신의 지도를 보았다.
레일리는 왜 ‘세 개의 지도’가 필요하다 했을까.
문득, 시험 시작 직전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천 명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많다’고 그랬지.
그것으로 실비아는 깨달았다.
“목적지가 아니야.” 목적이 아닌, 표적.
이 지도에 표시되는 자들 전부가 자신의 표적이라면······.
쉬운 일이다.
“붉은 가넷 모험단의 레일리.” 그렇게 읊조리는 그녀의 눈은 이미 차갑게 가라앉았다.
······.
한편, 수련도 외곽의 해안가. 하늘의 섬에 펼쳐진 바다를 거닐며 도즈무는 중얼거렸다.
“길테온은 참 신기한 양반이다. 자기 딸을 괴롭히면 돈을 주겠다니.” 레일리가 피식 웃었다. 붉은 가넷 모험단 소속인 그들은, 솔다 시험에 참가 신청을 하자마자 길테온에게 황당한 의뢰를 받았다.
“도즈무. 마법사란 족속은 이해를 하려고 하지마요. 아무렴 이해가 안 되거든요.” “우리도 마법사잖아.” “우리는 그 사회가 싫어서 도망친 거고~ 근데 뭐, 길테온의 뜻은 대강 알 것 같긴 해요. 실비아는 어리잖아요. 경험 미숙으로 한 번 크게 치명적으로 속는 것보다, 우리한테 자잘하게 데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겠지요.” 사자는 새끼도 험하게 키우는 법이거든.
레일리는 중얼거리면서 지도를 꺼냈다. 실비아 것을 포함하여 총 네 장이었다.
“자~ 이제 다 잡았으니까······.” 레일리는 감독관에게 지도를 받자마자 그 뜻을 알았다.
지도의 동그라미 아홉 개는 표적을 뜻한다. 다만, 아홉 명의 지도를 전부를 빼앗을 필요는 없다.
지도를 세 개 정도만 겹치면 그 안에 숨겨진 마법진의 ‘일부’가 드러나고, 레일리 정도의 통찰이라면 일부로 전체를 추측할 수 있다.
“훠이!” 두우우웅─ 푸른 통로가 발생했다. 「근거리 포탈」이었다.
“완성~” 짝─!
도즈무와 하이파이브를 한 레일리는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음?” 어떤 인기척을 느꼈다. 정확히는 수련도의 바다 속에서 튀어나오는, 로브를 뒤집어 쓴 무리를 발견했다.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온 놈들은 수풀 속으로 전진했다.
“쟤네는 어떻게 올라왔대?” “······제단인가.” 도즈무의 말에 레일리는 입술을 삐죽였다.
“글쎄요. 뭐, 우리는 일단 가요. 이런 건 ‘보안 총 책임자’ 몫이잖아요?” “그 일곱 번째 최강자 말인가.” “그렇죠. 데큘레인 선배님 몫.” 피식 웃은 레일리와 도즈무는 「근거리 포탈」 안으로 함께 진입했다.
* * * 어두운 밤.
─붉은 가넷 모험단의 레일리. 용서 안 해.
나는 컨트롤 타워의 통유리에 비치는 실비아를 바라보다 화면을 껐다.
그 너머에 큼지막한 달이 떠올랐다. 희멀건 빛을 조명 삼아 안주머니의 [ 무제 노트 ] 꺼냈다.
“······.” 데큘레인의 기억이 담긴 아티팩트, 일기장.
이 안에는 내가 모르는 과거가 존재한다.
실비아와 그 아이의 어머니.
길테온과 데큘레인.
유크라인과 일레이드는 물론, 데큘레인과 그의 아버지도.
다만 나는 김우진으로서 저어하고 있다.
일기장 속 그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뒤섞인다면, 그때는 더 이상 김우진이 내가 아니게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지······.
“······웃기는 일이다.”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다. 이건 한낱 일기장 따위에 불과하다.
내 자아, 이토록 견고한 정신력으로 이겨내지 못할 기억은 없다.
─들리십니까?
일기장을 탐험하려던 순간, 안주머니의 수정구슬이 울렸다.
율리의 목소리였다.
“들린다.” ─아, 괜찮으십니까? 아쉽게도 율리는 부유섬에 오를 수 없었다. 저번 심포지엄 ‘증명의 자리’에 한 번 참석하긴 했으나, 그 이후로는 칼같이 엄격했거든.
“괜찮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그런데 그 음색이 사뭇 심각했다. 나는 작게 웃엇다.
“내 걱정으로 몸과 마음이 편찮나?” ─지금 그런 농담을 하실 때가 아닙니다.
괜히 무안했다.
“······무슨 일이지.” ─마력 재해로 부유섬의 비행선 전부가 작동을 정지했다는 소식입니다.
“흐음.” 비행선. 수련도와 부유섬을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
─그런데, 레이더에 또 다른 비행물체가 포착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수련도로 침입을 한듯 합니다. 비상시국이라는 판명을 받아, 지금 저도 그리로 가고 있습니다.
“온다니? 비행선이 작동 정지했면서.” ─방법이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치지지직- 수정구슬이 끊겼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기긴 할 모양이었다.
“큰일났어요!” 컨트롤 타워의 위층.
루이나가 우당탕탕 내려왔다. 오늘 하루만 더 머무르기로 한 그녀는 만년필을 쥔 채 숨을 몰아쉬었다.
“큰일이에요!” “비행선 말인가.” “······알고 있었어요?” 루이나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방금 보고를 받았다.” “아 정말. 프로젝트가 한창인데······ 대체 왜 남으라고 한 거예요 보스?” “······.” 사망변수 때문이었다. 물론 회피하긴 했지만, 사망변수가 있었다는 것은 곧 위험 요소가 존재한다는 뜻이었으니.
한데 루이나가 정말 남을 줄은 몰랐다.
요즘 묘하게 협조적이란 말이지.
“······말도 않네요.” 루이나는 삐죽이면서 커피 한 잔을 내렸다. 그리고는 내게 웬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복잡한 술식이 가득했다.
요즘 진행 중인 프로젝트인 듯했다.
“저는 여기서 막혔는데, 혹시, 가능하다면 힌트라도 주겠어요 보스?” “힌트?” 나는 「이해력」으로 들여다보았다. 이 마법의 구조는 대충 ‘원격 방호막’인 듯했다. 마수 방어에 꽤 도움이 될만한 발명품.
이전에 읽었던 서책 「고급 마법서 : 방호의 원리」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네. 방호막인데, 회로가 너무 비효율적이에요. 하루 유지하는데 마석 10kg 가 필요한데, 그럼 누가 쓰겠어요?” “한 번 확인해보지.” 나는 루이나가 쥔 만년필을 「염동」으로 조종했다. 그리고 특성과 머리가 말하는 대로 끄적였다.
사그락─ 사그락─ 증폭되는 사고, 무아지경의 뇌. 만년필은 루이나의 프로젝트에 마땅한 필기와 수정을 가했다.
소모 마력은 자그마치 2,000 정도였으나, 남아준 루이나에게 보답이라 하면 옳겠지.
“······받아라.” “흐응? 뭐 이렇게 빨라요. 보스. 그냥 낙서만 한 거 아니······.” 삐죽이며 내 첨삭을 읽어가는 그 눈이 휘둥그레진다.
“······잖아? 어머나.” 루이나의 반응은 솔직했다. 그녀도 역시 천재답게 금세 이해했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프로젝트에 도움될 서적을 최근에 읽었다. 돌아가면 빌려주지. 그동안 너는 이곳에서 내 일을 도우면 된다.” “일이면······ 보안이요?” 눈은 내 첨삭에 고정한 채, 입으로 묻는다.
“그래.” “한데, 제가 도움이나 되겠나요? 일곱 번째-” “최강자라는 말은 내 앞에서 하지 말지.” “······왜요 보스? 사실이잖아요.” 루이나가 고개를 들더니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나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덧없기는 해요. 그런 칭호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답하는 음색이 쓸쓸했다.
“네, 도와드릴게요. 보스는 무리하면 안 되니까.” 루이나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나는 말없이 마법 통유리를 다시 켰다.
먼 하늘 대신, 시험장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리고── 수상한 무리가 포착되었다.
······.
밤이 되어 추워지자 이프린은 땅굴을 팠다. 지지대를 만들어 내부를 안전하게 했고, 위에 낙엽을 덮어 위장에도 신경썼다.
예전 시골에서 ‘전쟁 놀이’를 하던 때의 경험을 살려, 어릴 적에는 손으로 만들었던 것들을 마법으로 대신했다.
“대단해요~ 완전 아늑해요~ 코지~” 메이호가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코쥐가 뭐예요. 여기 쥐있어요?” “코지예요. 아늑하다는 뜻의 유렌어예요.” “······레오크 출신이라면서요.” 이프린이 의심스레 묻자 메이호가 흠칫 놀랐다. 그녀는 아하하-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럼, 우리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는 걸까요~?” “흐아아암······ 좀 졸리긴 하네요. 근데 지도가 뭔지 알기 전까지는 자면 안 돼요.” 이프린은 하품을 하면서 제 지도를 내려놓았다.
“이 동그라미는 자꾸만 움직인단 말이죠? 짜증나게.” 보글보글- 그때 수프 끓는 소리가 들렸다. 이프린은 그쪽을 보았다.
카릭셀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입맛을 다시는 이프린에게 메이호가 물었다.
“근데 이프린 씨는 어디 출신이세요~?” “저요? 제국 마탑이에요.” “앗! 그럼 데큘레인 교수님도 아시겠네요~?” 메이호가 박수를 치면서 물었다. 이프린은 대강 대답했다.
“아 네. 그 교수한테 수업도 들었어요.” “와아! 대단해요 대단해요! 그럼 데큘레인 교수님이 스승인 거네요?” “······스승은 무슨. 오히려 원수예요.” “네에?!” 메이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수프를 끓이던 카릭셀도 흠칫 놀라 이프린을 보았다. 이프린은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이에요.” 역시, 누군가에 털어 놓을만한 말은 아니다.
이프린은 여전히 웅크리고 있었다. 복수할 그 날을 위하여.
······사실, 요즘에는 속된 말로 ‘현자 타임’이 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분노만으로 의지를 불태우기에 데큘레인과 유크라인은 너무 압도적이었으니.
처음에는 실비아와도 머리채를 붙잡으며 싸웠고, 강약약강인 귀족 교수들에게도 저항을 해봤지만, 그럴 때마다 쌓이는 건 벌점, 벌점, 벌점, 벌점.
게다가 귀족 무리에게 왕따 비스무리한 짓거리도 당하면서······. 이프린은 서서히 무뎌지고 있었다.
조금씩, 포기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인 걸까.
“자, 이제 수프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때 카릭셀이 수프를 그릇에 담아 내밀었다. 이 수련도에서 채집한 호박과 모험가 향료로 만든 수프였다.
이프린과 메이호는 한 숟갈 푹 퍼서 먹었다.
“와. 맛있어요.” “정말요~ 엄청 맛있어요 맛있어요~” “이 수프는 어떻게 만드신 거예요? 물도 없었는데.” “이런 게 제 재능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하하.” 카릭셀이 컵을 꺼냈다. 분명 텅 빈 컵이었지만, 그 안에 물이 자연발생했다.
“?!” 이프린은 크게 놀랐다. 그 뜻을 파악한 카릭셀이 설명했다.
“자세히 설명하면 복잡합니다만, 저는 「미다스의 손」이라 부르고 있지요." “굉장히 실용적인데요? 마법이면 저도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배울 수 있는 종류가 아닙니다. 이건 타고난 것이지요. 하하.” 카릭셀은 쑥스러운 듯 웃었고, 이프린은 아쉬운 눈치였다.
그러던 순간.
“쉿.” 돌연 카릭셀이 입가에 손을 얹었다. 이프린과 메이호는 소리 없이 수프를 먹었고, 카릭셀 눈 감은 채 땅 위에 오감을 집중했다.
바스락─ 바스락─ 여러 발소리가 모여들고 있었다.
위치는 이 근처.
아니, 정확히 이 은신처다.
카릭셀은 입술을 깨물었다.
“올라가야 합니다. 위에 적이 있어요.” “네? 적이요?” 땅 밑에 있어서는 금세 포위당할 것이었다. 카릭셀은 급히 천장을 열었고, 이프린과 메이호도 뛰쳐나갔다.
“······.” 올라서자 웬 검은 로브 차림들이 있었다. 완드나 스태프가 아닌 단검을 움켜쥔 괴한들. 이프린은 곧바로 자신의 팔찌를 예열했다.
“······죄송합니다. 아마 저 때문일 겁니다.” 카릭셀이 한숨을 내쉬며 한탄했다. 이프린은 카릭셀을 보았다.
“카릭셀이요?.” 그러자 메이호가 고개를 저었다. 메이호는 슬픈 얼굴이었다.
“아녜요. 아녜요. 저 때문일 거예요. 괜히 제가······.” 뭐야 이 두 사람.
이프린이 의문에 얼굴을 찌푸리는 중에도, 괴한들의 흉흉한 살기는 시시각각 다가온다.
“제가 막겠습니다.” 카릭셀이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살수들의 온몸에 예기가 깃들었다. 살기와 뒤얽히며 선명한 마력을 발산했다. 카릭셀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 분은 어서 도망-” 놈들은 그의 말이 끝맺어지기도 전에 달려들었으나─ ─ 이 순간 전체를 냉각시키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미리 경고하지.” 붕─ 떠올라 치밀던 살수들이 공중에서 멈칫했다. 도약이 흐트러지며 불완전하게 착지했다.
“시험 중의 수련도는 외부인 출입 금지다. 따라서 너희는 추방이며.” 놈들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면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바스락······.
바스락······.
수풀을 짓밟으며, 한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단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와 수험생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다면.” 데큘레인.
부우우웅── 그의 곁에 강철이 떠올랐다.
목강철 수리검 스무 자루가 살수들을 겨냥했다.
“죽이겠다.” 살수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말을 아주 잘 들었다. 몇몇의 관자놀이에는 식은땀마저 고였다.
데큘레인은, 오늘 유일하게 제 명성의 덕을 보고 있었다.
대륙의 일곱 번째 최강자.
로하칸이 인정한 적수.
그 칭호를 떠올리며 살수들은 몸을 떤다.
아무리 죽음이 두렵잖은 살수라 할지라도, 그 결말이 무가치한 개죽음이라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제 목숨의 문제가 아닌, 이른바 ‘가성비’의 문제라는 것이다.
로하칸의 털끝에도 못닿는 그들이, 어찌 데큘레인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린 갑시다. 어서요!” 그 틈을 타 카릭셀은 이프린, 미에호와 함께 도망갔다.
금세 사라지는 세 사람을 그저 지켜보는 것 밖에 할 게 없던 놈들은, 휘리릭─! 포기한 듯 반대로 달아났다.
기막힌 달음박질이었지만, 데큘레인은 목강철 한 자루를 그들의 추적으로 붙였다. 별반 다르지 않은 속력이었다.
* * * 같은 시각.
이프린과는 달리 몹시 평화로운 숲.
“여, 여기요. 받으세요 실비아 님. 드리겠습니다.” 실비아는 자신의 표적으로부터 세 번째 지도를 습득했다. 그리고는 세 장을 한데 모아 겹쳤다.
이후, 레일리가 그랬던 것처럼 마법진을 유추하여 「근거리 포탈」을 개방했다.
두우우웅─!
허공에 푸른 통로가 생겨났다.
“······.” 실비아는 방금 자신에게 지도를 빼앗긴 남자 마법사를 흘겨보았다. 무릎 꿇은 그는 「근거리 포탈」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뚜벅. 뚜벅.
실비아는 별 말없이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3 초 뒤, 그아아악─! 하는 괴성과 함께 그 남자 마법사도 포탈을 통과했다.
······혼자만 이용이 가능한 포탈이 아니었다. 그말인 즉, 굳이 싸울 필요도 없었던 것이었다.
또 뒤통수를 맞았다.
“휴, 휴우, 휴우······.” 바닥에 나자빠진 채 허덕이는 남자 마법사는 무시하고, 실비아는 주변을 둘러본다.
풍경은 지하. 어두운 벽면에 기다란 교회 의자가 몇개 쯤 놓여 있다.
시험에 통과한 마법사는 스무 명 쯤 되었다. 몇몇은 식사 중이었고, 몇몇은 자고 있었으며, 그 중에는 그 ‘두 사람’도 있었다.
레일리.
도즈무.
“어!” 눈을 마주치자마자 레일리는 흠칫 놀랐다. 그러나 곧 쓴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아~ 아가씨, 역시, 역시 오셨네요?” “······.” 실비아는 아무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 눈에는 얼음같은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레일리는 슬그머니 실비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에이~ 왜 그러세요~ 믿고 있었다구요~?” “만지지마.”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그게 말예요······ 저희는 다 이유가······.” 당장이라도 마법을 터트릴 듯한 기세. 살~짝 겁먹은 레일리는 슬그머니 도즈무를 찾았으나, 녀석은 어느새 도망가고 없었다.
레일리는 속으로 욕설을 뇌까렸다. 동료란 놈이 시발 장난하나.
“음. 스무 명인가요?” 때마침, 시험 감독관이 나타났다. 레일리는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고, 실비아는 쯧- 혀를 찼다.
“아직 많이는 안 왔네요. 그래도 미리 공지는 할게요. 다들 집중해주세요.” 감독관 미민은 소년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시험은, ‘멘토’와 ‘멘티’입니다.” 펜던트? (1) ······꿈 속의 실비아는 누군가의 팔에 누워 잠을 청한다. 참 따뜻하고 단단해서 베개로 삼기에 알맞다.
그런데 뭔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아, 살짜쿵 다가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너무한 애교일까 걱정스럽지만, 그렇지 않다는 듯 그는 오히려 손을 뻗어 자신을 감싸준다.
마음이 따뜻하게 차오른다.
누운 자리가 잔디처럼 푹신하고, 주변에 꽃이 피어나며, 나비와 꿀벌이 하늘하늘 날아다닌다.
온 사방이 아름답다.
이 세상 전부가 내 것만 같다.
그런데, 심장 한 구석은 여전히 아프다.
자신을 사무치도록 괴롭히는 어떤 의심 탓이다.
그 마음을 아는 걸까. 그는 자신을 더욱 꽉 껴안아준다. 그리고, 안심이 되는 말을 전한다.
실비아는 웃으며 그의 품에 안긴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고독을, 슬픔을, 혼자서 견디지 않아도 된다.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으므로······.
“······.” 실비아는 눈을 떴다. 먼저 천장이 보였다. 자신이 만든 인공 숙소였다.
뿌스럭뿌스럭-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눈물 한 방울이 묻어 나왔다. 아니, 손가락이 물기로 가득했다.
“······아.” 너무 행복한 꿈이었기에, 너무 괴로웠다.
그 동안 애써 막아두었던 감정들이 울컥 솟았다.
─네가 실비아를 망치게 두지 않겠다.
그 사람의 말이 다시금 귓가에 재생되었다.
실비아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호흡이 거칠어졌고, 공황에 빠진 듯 숨이 막혔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몸을 떨다 안주머니에서 시약병을 꺼냈다. 병에 담긴 약재를 알의 형태로 뭉쳤다.
꿀꺽— 집어삼켰다.
“하아.” 익사하는 듯했던 공황이 그 순간 멎었다. 실비아는 규칙적으로 호흡하며 진정했다. 그 뒤, 자신만의 공간을 해체했다.
휘이이이잉······.
삼원색이 걷어지고, 드러나는 풍경.
어느새 많은 사람이 주변에 있다.
“실비아. 역시 너였네.” 근처의 이프린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녀석은 카릭셀, 그리고 웬 여자와 함께 있었다.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한 이프린. 어떻게든 통과했네.” “훗. 나잖니. 아 맞다, 우리 습격도 당했단다? 웬 괴한들이 여기에 침입-” 이프린이 으스댔지만 실비아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때, 감독관 미믹이 시험 종료를 알렸다.
“자. 이제 72 시간이 지났으니 시간 종료입니다. 다들 모여주세요. 총 113 분은 1 차 시험 합격입니다. 탈락자 900 분은 따로, 다른 계열별 시험을 볼 예정입니다.
수험생들은 자리에 앉아 감독관을 지켜보았다.
미믹이 허공에 다수의 이름을 적었다.
“2 차 시험은 ‘멘토와 멘티’입니다. 면접 심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위의 감독관님들 중 한 분을 직접 선택하여, 직접 심사를 보러 가면 돼요.” 긴달프, 로제리오, 데큘레인, 이헬름, 크란시아 등등······ 명망이 드높은 마법사가 많았다. 특히 로제리오와 긴달프가 그러했다.
그러나 실비아의 시선은 이미 한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30 분 내로 결정하여, 감독관님들의 문 앞에 서주세요.” 기다란 복도의 어둠이 밝혀지며 면접실이 드러났다. 각 문패에 특정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실비아는 그 중에서도 [ 데큘레인 ]이라는 문에 다가갔다.
“데뷰탄 실비아와 데뷰탄 이프린. 두 분은 데큘레인 교수님에게 심사를 받으실 수 없습니다.” 돌연 미믹이 제지했다. 실비아는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그녀의 뒤에 선 이프린도 덩달아 갸웃거렸다.
“왜요.” “같은 대학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형평성에 어긋날 우려가 있지요.” “······.” 실비아는 하는 수 없이 [ 로제리오 ]를 선택했다. 어린 나이에 에테르 등위에 이른 마법사.
반면, 이프린은 조금 고민하다가 [ 긴달프 ]의 문으로 다가갔다.
“자. 이제 곧 시험을 시작할텐데, 감독관님들의 등위와 명성이 높을수록 면접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 유의해주세요!” 실비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데큘레인의 문을 구경했다.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있었다. 남자는 카릭셀이었고, 여자는 누군지 모르겠다.
* * * 카릭셀과 메이호는 데큘레인을 선택한 두 명이었다. 데큘레인의 까탈스러운 성격이 꽤나 유명했던지, 125 명 중에서 고작 두 명 뿐이었다.
“메이호 씨. 그럼,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네에~” 카릭셀은 방긋 웃고 [ 데큘레인 ]이라는 명패가 붙은 문을 열었다.
내부의 풍경 자체는 평범했다. 하얗고 깔끔한 방의 저편에 데큘레인이 앉아 있었다. 카릭셀은 문을 닫고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데큘레인 교수님. 일전에는 감사했습니다.” 카릭셀은 우선 반나절 전의 사건에 감사를 표했다. 데큘레인은 시덥잖은 말이 없었다.
“앉지.” “예.” 카릭셀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데큘레인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물었다.
“교수님. 혹시, 이 과정은 수정구슬로 녹음이나 녹화 중입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데큘레인은 대강 답하며 카릭셀의 보고서를 들었다.
서른 셋. 아이 셋. 카릭 셀.
카릭셀이 다시 진중하게 물었다.
“중요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내가 보고서를 작성할 뿐이다. 녹음 녹화 따위는 없지.” “그렇습니까.” 그러자 카릭셀은 왜인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데큘레인이 차마 상상도 못했던 말을 건넸다.
“교수님. 저는 적궤입니다.” “······?” 보고서를 훑던 데큘레인의 눈이 카릭셀을 보았다. 뜬금없는 선언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하하······ 처음부터 제 목적은 교수님을 ‘단 둘’이 만나뵙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일전에 두 번 만났지만, 그때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기다렸지요.” “시험 내용을 미리 알았나?” “예. 어느 정도는요.” “······.” 데큘레인은 일단 가만히 들었다.
“저는 교섭을 위해 교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저번의 ‘만민 대축제 테러 사건’은 저희 적궤의 소행이 아닙니다. 저희 일족은 그저 평화만 원할 뿐입니다.” 다만 어이가 없었는지, 그 자세는 여전히 보고서를 움켜쥔 채 굳어 있었다.
“그 전부는 제단의 농간이었습니다. 적궤의 대장로님께서도 성명을 발표하실 것입니다. 만약 원하신다면, 대장로님은 직접 제국 측과 대화를 나눌 의향도-” 그 순간 데큘레인의 얼굴이 나찰처럼 돌변했다. 몸을 카릭셀에게로 기울인 데큘레인은 그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대장로는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죽는다.” “······.” 카릭셀의 심장이 잠시 멎었다.
그러나, 이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대장로는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대외적인 등장과 동시에 사망 트리거, 돌발 이벤트가 미친 듯이 발동할 테니.
“아니, 만약 그가 제국의 땅을 밟거나 모습을 보인다면, 내가 직접 죽일 것이다.” 대장로를 죽이겠다는 말. 오래도록 살아남아야 할 대장로에게 전하는, 데큘레인의 강력한 경고.
그는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네 용기가 가상하고, 부유섬은 대륙의 어떤 율법에도 얽메이지 않으니, 네 발언은 이곳에 묻어두도록 하겠다. 그러나.” 그가 카릭셀을 노려보았다. 귀신처럼 날카로운 눈. 고작 시선으로 압도당한 카릭셀은 데큘레인의 위명을 실감했다.
“착각하지 마라. 지금은 감히 적궤 따위가 나설 때가 아니다. 그것도 내 앞에서.” “······.” “말살 당하기 전에 은닉해라.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충고다.” 카릭셀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교섭 실패였으나, 아직 할 말은 남았다.
처음부터 이 교섭이 통하리라 생각지도 않았다.
그의 목적은 애초부터 조금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를 로할락 수용소로 보내주십시오.” 그 전보다 훨씬 더 괴이한 소리였다. 데큘레인은 펜과 보고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저는 카릭셀보다 브롤린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이름에 데큘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브롤린은 중요한 네임드는 아니었지만, 친위대가 건넨 최중요 수배자 목록에 있었다.
“교수님은 저를 체포하여 실적과 명성을 얻고, 저는 로할락에서 일족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 “나쁘지 않은 거래이지 않습니까?” 데큘레인은 가늘어진 눈으로 카릭셀을 노려보았다. 카릭셀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데큘레인은 카릭셀의 정직한 의지를 시험했다.
“내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지금 너를 이대로 붙잡아 교수대에 올리면 될텐데.” “물론 교수님은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 록하크를 기억하십니까.” 록하크.
마법사 사냥꾼이자, 데큘레인이 처음 만난 적궤.
“록하크는 교수님이 진짜 귀족이라 말했습니다. 또한 교수님이, 적궤를 악마가 아니라 이해해준 유일한 귀족이라 말했습니다.” “······.” “그에게 한 말은 거짓이셨습니까.” 데큘레인은 베르흐트에서 적궤를 보호한 유일한 귀족이었고, 적궤임을 알면서도 로하크를 죽이지 않았다.
카릭셀은 마법사 데큘레인이 아닌 귀족 데큘레인을 믿었다. 귀족으로서 그의 기품에 호소했다.
“······가서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이지. 수용소에 갇힌 자들은 모두 단전이 철폐당할텐데.” 카릭셀의 수단은 옳았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저에게는 특수한 물건이 있습니다. 「미다스의 손」이라는 재능으로 제작한 물건들이지요. 미리 만들어놓은 것들은 단전이 철폐당하여도 계속 작동합니다. 그러니 부디, 제 개인 물품만 따로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절대 테러나 탈출을 위한 방도는 아닐 것입니다.” 카릭셀은 데큘레인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카릭셀의 특성을 김우진이 데큘레인에게 부여했던 것이었다.
“······.” 데큘레인은 아무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카릭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다만 어느 정도 확신은 있었다. 오직 ‘거래’로만 생각하여도 피차간 수지타산은 맞을 터였으니.
──마침내.
“나는 네 단전을 철폐하고, 팔다리 중 하나를 자를 수도 있다.” “예.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살벌한 허락이었다. 직후 카릭셀은 품 안의 수첩을 꺼내어 문장을 적었다.
자신이 어디서 어떻게 포획당할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데큘레인은 그 쪽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만약 이것이 술수라면, 나는 네 일족을 망설임 없이 몰살할 것이다.” “예. 교수님도 저를 배신하시지 않을 테니, 저도 반드시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카릭셀은 그렇게 답하며 허리를 숙였다.
제 정수리가 땅에 닿을 듯, 일족의 대장로를 죽이겠다 선언한 자를 믿으며.
“이제 썩 꺼지거라.”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가는 카릭셀을, 데큘레인은 바라본다.
뚜벅뚜벅 나아가는 그의 등은 대단히 넓다. 곧 도래할 고난의 미래는 생각하지도 않고, 단전의 철폐와 뒤따르는 고통을 두려워하기보다, 자신의 일족과 함께할 수 있다는 안도로 가득하다.
신기한 남자.
아니, 진정한 지도자.
그런 그에게 데큘레인은 묻는다.
“아이가 셋이라는데. 거짓 인적사항인가.” 잠시 멈춰선 카릭셀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은 아닙니다만, 제가 없어도 잘 살아갈 아이들입니다.” “흥. 공평한 놈이군.” 데큘레인은 입술을 비틀고 손을 휘저었다.
축객령이었다.
* 한편, 실비아는 로제리오의 면접실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로제리오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신기했다.
“너, 요걸 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 로제리오가 제 책상 위의 마법진을 가리켰다. 실비아는 그 마법진을 시각으로 재구성했고, 자신의 심상에 떠오른 풍경을 그대로 읊었다.
“도시예요. 뒤에는 산이 있고 중심부에는 강이 흐르는.” “좋아~ 합격.” “······.” 바로 합격.
실비아는 아이처럼 갸웃거렸다. 피식 웃은 로제리오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 술식은 마력 감응과 계열에 대한 이해가 확실해야만 볼 수 있데이.
평범한 마법사에게는 그저 선과 원의 집합으로 보이지. 재능이 조금 더 있으면 한 10 분 쯤 걸리려나. 근디 너는 10 초만에 봤어. 그니까 끝이제.” “······.” “어허? 그리 의심스런 눈으로 보지 말지? 무지하게 어려운 거거덩?”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그럼 이제 가면 되나요.” “그려. 잘 가고, 나중에 또 보자고. 부유섬으로 올거제? 부유섬에서는 조금 더 오래 같이 있자고.” “······.” 로제리오의 그 말.
실비아는 아무런 대답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
* [ 긴달프 ] 이프린은 긴달프의 명패가 붙은 문을 열었다. 문턱 너머는 기다랗고 어두운 통로였다.
“좀 본격적인가본데······.” 꿀꺽─ 침을 삼키고 발을 내딛었다.
물컹- 하면서 지면이 푹 파였지만, 급히 마력을 방사하여 발판을 만들었다.
그순간 머리 위에서 화살이 휘익— 날아들었다. 곧장 엮어낸 「배리어」로 방어했다.
휘이이이익─!
이번에는 사방에서 채찍들을 쇄도했다. 화염과 바람을 융화한 「화염뱀」을 전개했다. 화염뱀은 채찍보다 유연하게 휘어들어 그것들을 전부 집어삼켰다.
“후! 좋았어.” 이프린은 땀을 닦으며 자찬했다. 그러나 통로는 아직도 길었고, 웬 안개가 시야를 막았다.
담배 연기인지 뭔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후······ 후······.” 이프린은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았다.
공기 중의 짙고 무거운 마력이 온몸을 잡아당기는 듯했지만, 끈질기게 저항하며 포기 않고 전진했다.
그렇게─ 30m 에 불과한 통로를 자그마치 10 분 정도 걸었을까.
저편에 빛이 발생했다. 이프린은 미간을 좁히고 보았다.
긴달프, 동화 속 마법사와 똑닮은 할아버지가 긴 턱수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 이프린은 얼른 그에게 달려갔다. 긴달프는 그녀를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축하하네. 면접 합격이라네.” “······네? 이게 끝이에요?” “그래. 자네가 건너온 통로는 내가 직접 제작한 마법 함정이라네. 정신력, 마력, 마법적 임기 응변, 이 세 가지를 파악하는 함정이지. 그걸 통과할 정도면 충분해. 또, 굳이 면접이나 심사 자체가 복잡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솔다’인 것을.” “아······.” 바로 이해가 되었다.
데뷰탄에게나 솔다가 중요하지, 에테르나 모나크 등위에 이른 이 사람들은 그저 귀엽기만 할 테니.
“어디보자······ 자네 이름이······” 긴달프는 제 책상 위의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으나, 곧 뭔가를 떠올린 듯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이것 참. 잠깐만.” 긴달프가 이프린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흠칫 놀란 이프린은 앉은 자세를 바로했다. 무릎에 두 주먹을 얹고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왜 그러시나요?” “자네는······ 흐음······.” 미간을 찌푸린 채 침음을 흘리던 긴달프가 말했다.
“웃어보려무나. 로브도 벗고.” “네, 네? 로브, 로브를요?” “얼른.” 이프린은 의문 가득한 얼굴로 긴달프를 보았다.
이 할아버지, 혹시 인자한 변태인가?
설마, 다른 이유가 있겠지?
머뭇거리던 이프린은 우선 로브부터 벗었다.
“이제 웃어보렴.” “왜, 왜요.” “어서!” 그 재촉이 언젠가 시골 고향의 호랑이 촌장님 같았다.
이프린은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렇게 괴물같이 말고 말이다.” “괴물이라니요, 아니- 으헤헤헷!” 돌연 웃음이 터져나왔다. 긴달프가 마법으로 겨드랑이를 간지럽힌 탓이었다.
“으헤헤헤, 아, 아 왜이러세요 정말, 하지마, 흐읏! 이헤헷!” 그 맑은 미소를 본 긴달프는 허어-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아 정말, 왜, 왜 그러시는데요 도대체! 저, 저 신고할거예요?!” 마냥 웃던 이프린이 제 몸을 팔로 감쌌다. 긴달프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펜던트 안, 조수의 아이가 너였구나.” “······뭐가 저예요?” 긴달프는 떠올렸다.
언젠가, 데큘레인 자신에게 복원을 부탁했던 펜던트.
그 안에 담긴 사진의 아이.
긴달프는 아주 잠깐 그 사진을 보았으나, 그의 기억력은 확실했다.
“자네는 데큘레인과 무슨 관계지?” “예?” 긴달프가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이프린은 그저 어리둥절했다.
“무슨 관계라니······.” “솔직히 말해라. 내 눈은 속이지 못해.” 긴달프의 눈에 마력이 깃들었다.
조화 계열의 뜻은 곧 세계와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간의 교감. 해당 계열의 정점인 긴달프에게 참거짓의 세상 어느 무엇보다 판별은 쉬운 일이었다.
이프린은 긴달프의 눈치를 살피면서 대답했다.
“······원수인데요.” “원수?” “예.” “데큘레인이 자네 원수라고?” “······그 이상은 말 안해요.” 이프린은 입을 꾹 다물었고, 긴달프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팔짱을 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이프린은 돌연 화가났다.
“아니 왜 그러시는데요 진짜. 이게 심사예요?” “······신기하구나. 자네가 데큘레인을 원수로 생각하다니.” “뭐가, 왜 신기한데요? 그거 말 안하시면, 저 신고할지도 몰라요 진짜.” “신고? 무슨 신고 말이냐.” “제 로브 벗기셨잖아요. 억지로 간지럽히셨고. 이유가 있을 거 아녜요. 제가 납득할 이유가.” “······.” 긴달프는 어이없다는 듯 이프린을 응시했지만, 이내 나지막이 읊조렸다.
“자네는 데큘레인을 원수로 생각하지만, 데큘레인은 자네 생각보다 더 자네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듯해.” “······예, 뭐, 뭐라고요? 소중?” 이프린의 오만상이 일그러졌다.
데큘레인이, 그 데큘레인이 나를 어떻게, 소중하게?
웃음도 나오지 않는 개헛소리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닳고 헤진 펜던트를 복원해달라며, 심지어 나에게 ‘부탁’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긴달프는 그날의 일을 회상했다.
─긴달프 장로님.
─음? 데큘레인, 지금 자네가 나를 부른 겐가?
─예.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펜던트의 복원을 부탁드립니다.
“제 아버지와 원수지간이었던 내게, 데큘레인이 직접 부탁을 했어. 자존심 하나는 제 애비를 그대로 닮은 놈이.” 긴달프도 그때는 설마, 데큘레인이 자신에게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더랬지.
그런데 데큘레인은 자신에게 펜던트의 복원을 부탁했고, 그 대가도 지불한 뒤 떠났다.
“무슨 부탁이었는데요? 알려, 알려주세요!” 이프린이 주먹을 앙 쥐고 외쳤다. 긴달프는 그런 이프린을 흘겨보았다.
이 아이에게 받을 수 있는 대가는 얼마 없다.
아니, 아예 없다.
젊을 적에는 돈 안 되는 일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만······.
나도 다 늙어버린 겐가. 늙은이의 호기심과 짓궃음이 참 원망스럽다.
“데큘레인은 언젠가 나에게 펜던트 복원을 부탁했다. 그 펜던트에는 어릴 적 너와······ 크흠. 어릴 적 네 사진이 있었지.” 데큘레인은 분명 ‘자살한 조수’도 함께 언급했지만, 긴달프는 거기까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아주 소중한 물건이 아니라면 나에게 복원을 부탁하지도 않았겠지. 데큘레인 애비가 나를 워낙에 싫어했었거든.” 이프린의 몸이 굳었다.
시간이 정지한 듯, 그저 넋 나간 채 긴달프를 바라보았다.
“참 신기한 놈이다. 인정머리 없는 녀석이 웬 아이 사진이 담긴 팬던트를 지니고 다니기에, 그저 집안 사람인가 싶었더니······.” 긴달프가 쓰게 웃었다.
“그게 자기 제자의 어릴 적이었다니.” 이프린은 정신이 멍했다. 얼굴 주름,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이따금 콧구멍만 벌렁거렸다.
그런 이프린을 지켜보는 긴달프의 입가가 씰룩였다.
“허 참, 나도 다 늙었다. 어린 아이의 혼란스러운 얼굴 보는게 이리 즐겁다니. 껄껄껄껄.” 이게 바로 호사가의 길인가.
─맞아요! 맞아 맞아!
아드린느의 카랑카랑한 음성을 떠올리며, 긴달프는 대놓고 미소를 지었다.
펜던트? (2) [다음화가 있습니다만, 절대 구매하지 말아주세요! 제 실수로 중복화를 올려버렸습니다!] [혹시 구매하셨더라도, 다음날 환불해드릴 예정이니 너무 당황하지는 말아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흑흑 면목이 없네요...] ─── 91. 펜던트? (2) 이프린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긴달프를 바라보았다. 긴달프는 껄껄 웃으며 턱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펜던트.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데큘레인이 자신의 ‘어릴 적 사진’을 지니고 다닌다는 말이었다.
심지어 너무 닳아서 복원까지 부탁했단다.
“껄껄껄.” 아니, 데큘레인 그 교수가 도대체 왜?
아무리 고민해도 이프린으로서는 도저히 모를 노릇이다.
혹시 긴달프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재밌구만. 재밌어.” 그 또한 말이 안 된다.
방금은 조금 변태같긴 했지만, 긴달프 이 할아버지는 에테르 등위의 슈퍼-초-대단한 마법사.
그런 유명인이 왜 나 따위에게 이상한 거짓말을 해? 무엇을 바라고?
“······.” 동시에, 이프린은 그동안 데큘레인이 자신에게 내보였던 친절을 떠올렸다.
징계의 무마부터 동아리 개설 허가, 공평한 심사 등등.
그저 데큘레인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품은 죄책감의 일부라 생각했지만······ 머릿속은 이내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저, 펜던트라면-” “껄껄. 면접은 끝이다. 혹시라도, 데큘레인에게 내가 말했다고는 말하지 말거라. 다 늙어서 또 미움 받기는 싫으니 말이다. 아 참, 이건 부탁이 아니라 경고라네?” 긴달프가 씨익 웃었다.
이프린은 침을 꿀꺽 삼키고 긴달프를 보았다.
“······하나만 더 알려주시면.” “일만 엘네.” “네?” “내 한마디의 값어치다. 데큘레인은 기꺼이 5 만 엘네를 지불했지.” “5 만 엘네······ 저 혹시, 1 백 엘네는 안될까요? 제가 아직 학생이라-” * 쿵─!
면접실의 문이 닫혔다.
흥정 도중 쫓겨난 이프린은 비척비척 걷다가 카릭셀을 만났다. 카릭셀도 방금 막 면접이 끝난 듯했다.
데큘레인의 면접.
이프린은 눈을 반짝이며 얼른 달려갔다.
“카릭셀 씨! 카릭셀 씨!” “아, 예. 왜 그러십니까?” “면접 잘 봤어요? 면접 내용은 뭐였어요?” “아하하······. 그게······ 저는 모릅니다.” “?” 이프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릭셀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답했다.
“포기했습니다.” “······네?” “1 차 시험을 합격한 것만으로도 ‘솔다’를 준다기에······ 사실 그 이상은 필요 없거든요.” “아······ 하긴. 얼른 애기들 보고 싶으신가봐요?” 카릭셀의 처음 목적은 애초부터 솔다였으니. 이프린은 그렇게만 생각했고, 카릭셀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예. 그렇죠. 자꾸 눈에 선합니다.” “그래도, 나중에 대륙 돌아가면 언제 또 봐요. 제가 기가막히게 맛있는 식당 알거든요. 로아호크 아세요?” 끝까지 도전할 이프린은 아쉬웠지만, 어쨌든 솔다 시험 덕분에 좋은 인연을 얻었다.
“로아호크라······ 예. 좋습니다.” “엄청 맛있을 거예요!” 이프린은 카릭셀을 배웅할 겸 함께 복도를 걸었다.
장내에는 레일리, 도즈무 등 시험에 합격한 마법사와, 시험에 실패한 마법사들이 제각각의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 중 복도 구석, 삐죽 솟은 텐트는 실비아 거겠지.
시험을 치르느라 삭신이 피곤했던 이프린은 저 삼원색이 새삼 부러웠다.
“이프린 씨.” “네?” 이프린은 다시 카릭셀을 보았다. 출구의 문고리를 움켜쥔 카릭셀은 그녀를 보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몸 건강히 지내십시오.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래의 주축을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네? 미래의 주축이라니······.” 쿠구구구구궁─!
그때, 웬 지진이 발생했다.
이프린은 흠칫 놀라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쿵──! 쿵──!
이어지는 진동. 돌발에 익숙한 모험가들은 태연했지만, 마법사들은 꽤나 동요했다.
감독관 미믹이 말했다.
“다들 진정하세요. 별 일 없을 겁니다.” 그때 마침 데큘레인이 면접실 밖으로 나왔다. 선택자가 두 명 뿐인 그는 시간이 남아 돌았고, 수험생들의 시선을 받으며 걸었다.
어느새 텐트를 해체한 실비아도 그를 바라보았다.
뚜벅─ 뚜벅─ 이프린은 출구로 다가오는 데큘레인을 이리저리 살폈다. 정확히는 펜던트를 찾았다.
그의 몸에 펜던트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지만······ 저 성격에 티나게 둘리가 없었다.
갑자기, 데큘레인이 제 앞에서 멈췄다. 이프린은 그를 올려다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설마, 하는데 그가 말했다.
“비켜라.” “······아. 네.” 이프린과 카릭셀은 바로 자리를 비켰고, 감독관 미믹이 데큘레인에게 말했다.
“먼저 상황 파악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뒤따르겠습니다.” 데큘레인은 대답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출동하는 그의 등을 이프린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어······. 저는 시험을 못 치렀는데요.” 누군가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메이호였다. 그녀는 데큘레인의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입술을 삐죽였다.
“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끝날 겁니다. 다들, 안에서 기다려주세요!” 감독관 미믹은 다시 장내로 돌아갔고, 이프린은 시선을 옮겨 휑하니 열린 출구를 보았다.
“후우······.” 심호흡을 한 이프린은 슬그머니 문 밖으로 나갔다. 투다다다닥─ 방금 떠난 데큘레인을 쫓아 지하의 계단을 올랐다.
* * * ······솔다 시험의 보안 책임자로서, 나는 날아가고 있다.
비유 따위가 아닌, 문자 그대로 ‘날아가는’ 것이다. 목강철 여섯 개를 엮은 발판에 올라 슈우우웅─.
「철인」의 달리기보다도 훨씬 빠른 신기술이다.
“어제 그 놈들인가.” ─그건 모르겠어요. 일단, 이 마법 유리로도 안 보이네요.
수정구슬의 루이나가 말했다.
─이런 제길······. 온통 어둠 뿐이에요 어젯밤 내가 추격했던 놈들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었다. 강철의 공명으로도 그 향방은 알 수 없었다.
─조금 기다려 줄래요? 저도 출발할게요. 말타고 가면 금방이에요.
루아나가 재잘거리는 사이, 나는 먼저 문제의 장소에 도착했다.
“······.” 그리고 말문을 잃었다.
그만큼, 기이한 참상이었다.
─우선 「위스퍼」부터 보냈으니- “끊지.” 연락을 끊었다.
나는 그저 가만히 선 채, 망막에 맺히는 괴기스러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쫄쫄쫄─ 저 너머에서 개울물처럼 흐른 액체가 구둣굽에 닿았다.
······진득하고 붉은 피.
일대에 미친 듯 진동하는 비린내.
잘려진 살점과 헤집어진 내장.
절삭된 두개골에서 울컥이는 뇌수.
“······.” 나는 흔치 않게 당황스러웠다.
사람이었던 육체의 조각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파편처럼 찢겨진 육체들은 얼추 백 이상이었다.
나는 「염동」으로 놈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면상부터 온몸이 깔끔히 갈라진 시체가 다수였지만, 개중에는 네임드도 있었다.
‘드루만’이라는 제단의 행동 대장. 네임드 답게 격렬히 저항한듯 이리저리 잡아 뜯긴 채였다.
“신기하군.”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진동이 발생하고 채 1 분도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 고작 60 초만에 이렇게 많은 사람, 아니 한 부대를 학살했는지.
어떤 시체는 자로 잰 듯 정갈하게 나뉘었고, 또 어떤 시체는 뜯겨진 듯 지리멸렬했다.
마법인지 특성인지도 모르겠다.
흡사, 공간과 함께 통째로 잘려진 것처럼······?
“······본 적이 있다.” 공간과 함께.
절삭되는 살갗.
내 기억 속 선명하게 남은 어떤 장면이 재생되었다.
이 상흔은, 언젠가 ‘베론’의 손목을 앗아갔던 그 불가사의한 현상과 비슷한 종류였다.
······그때.
부스럭─ 수풀에 희미한 인기척이 일었다.
나는 그곳을 돌아보았다.
“······너.” 그 사이에 숨은 녀석.
이프린이 햄스터처럼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 “아. 저······.” 이프린은 데큘레인과 그 너머의 시체 산을 보았다. 강렬하게 꽂히는 그의 시선이 서늘했다.
그녀는 머뭇머뭇 한 발자국 다가가려 했다.
“오지마라.” 데큘레인이 제지했다.
달빛이 그의 날카로운 턱선과 콧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선명한 음영이 그 얼굴을 나누었다. 가면을 쓴 유령처럼.
“피 묻는다.” “······네?” 시체를 앞두고 선 그는 충분히 무서웠지만, 그 차가운 목소리가 오늘은 왜인지.
조금 다르게 와닿았다.
이프린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데뷰탄 이프린! 여기서 뭐해! 얼른 돌아가!” 뒤늦게 말을 타고 달려온 루이나였다. 이프린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데큘레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휘이이이잉──!
찰나, 수련도의 하늘에서 웬 비행 물체들이 다수 떠올랐다. 마공학 경비행기를 타고 긴급 출동한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침입자로부터 수련도를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진입하였으나······.
“아니 이게 대체!” 노면에 널브러진 수백의 파편과 살점.
남겨진 일은 시체 처리 뿐이었다.
데큘레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변명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내가 벌인 짓이 아니다.” “예? 아, 예······.” 기사들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데큘레인은 기사들의 면면을 살폈다. 온다던 율리가 보이지 않았다.
어떤 기사가 대신 말했다.
“율리 기사는 좀 늦을 것입니다. 오는 도중 길을 잃었습니다.” “······이해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녀에게는 「길치」라는 패널티 특성이 있었으니.
* * * 땡볕이 직각으로 쏟아지는 황무지.
유크라인의 대리 영주이자 데큘레인의 누이동생, 예리엘은 황궁의 사람들과 함께 [ 로할락 수용소 ]에 도착했다.
“참······.” 첫 감상은 그 광활한 넓이에 대한 감탄이었다.
“크게도 지었네.” 비아냥거리듯 중얼거리자 그녀 곁의 환관이 미소를 지었다.
“예. 그렇습니다. 백만 이상은 수용이 가능하겠지요.” “백만은 무슨······ 것보다, 수용은 언제부터 진행할 예정이에요?” 백만. 로할락은 면적만 따지면 그 이상도 머무를 수 있으나, 문제는 환경이다.
보급이 여의치 않은 지역이라 10 만명만 수용되어도 아사자가 속출할 테지.
이 황무지에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환관이 말했다.
“적궤는 음지에 다수의 결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결사들 우두머리를 여기에 박는다고요?” “아니요. 우두머리는 사형이되, 잔챙이들만. 또한 미신고 적궤부터 차례로 수용할 예정입니다.” 예리엘이 답답하다는 듯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그니깐. 그 미신고 적궤가 적궤인지 어떻게 구분하냐 이 말이에요. 기록이 잘못 되어서 적궤 아닌 사람을 가두면요?” “아~ 이럴때 선황 폐하의 지혜가 발휘되는 것이지요. 관련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또한, 알음알음 적궤의 목록을 작성한 지방의 기록도 있지요.
왜, 적궤의 출생은 꽤 악마스럽지 않습니까? 붉은 함에 쌓여서 태어난다니요.” “······.” 예리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환관은 논점을 전혀 못 잡고 있었다.
기록이 오류라면 어떻게 할 것이냐 물었더니, 더 오래 전에 다른 기록이 있었습니다- 이러면 어쩌자는거야 도대체.
“또한, 적궤가 섬기는 신전의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종교를 건드리겠다는 말예요?” “종교가 아닙니다. 이단입니다. 아마, 성당의 팔라딘들이 나서겠지요.” 예리엘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황제와 황실의 뜻이고, 데큘레인도 직접 나선 일이니, 유크라인 입장에서는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자신은 그 노동력을 활용할 생각이나 하면 된다. 적궤가 10 만이든 100 만이든, 그저 굶어 죽도록 놔두는 건 피차간에 낭비일 테니.
“아 참. 이번에 베탄 경이 빛과 소금에서 먹은 리타일리 수프에 대한 찬사가 자자하더군요.” “저는 별로 입맛에 안 맞던데요.” “아······ 그러십니까?” “뭐, 원한다면 자리 하나는 맡아드릴 수 있는데요.” “아! 그렇다면 저희, 네 명 분만- 억?!” 그때 황관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그 방면을 보니 웬 손가락만한 전갈이 부스럭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할락 전갈. 크기는 작지만 기사도 죽이는 맹독으로 유명한 녀석이다.
“영주 대리님, 조심, 조심하, 으아아악!” 환관은 난리법석을 떨었고, 예리엘은 그를 흘겨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요. 고작 전갈에 놀라서 여긴 어떻게 왔대.” “아. 저, 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 전갈은······.” “쉿. 애 놀라겠어요. 놀라면 날뛸 거거든요? 입 다물어요.” 예리엘이 전갈에게 손가락을 건넸다. 환관은 경악했지만, 전갈은 스르륵 순한 양처럼 다가와 그 얇은 손가락에 올랐다.
“······할락 전갈 아닙니까?” “맞아요. 로할락이니 할락 전갈이죠.” “조, 조심하십시오. 어마어마한 맹독입니다.” “쉿.” 예리엘은 전갈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어쩌다가 여기에 왔는지 물었다.
전갈은 근처에 부락이 있다고 대답했다.
“근처에 부락이 있는 것 같네요.” “오······.” 환관이 신기하다는 듯 감탄했다. 예리엘은 짓궃게 웃더니 전갈이 올라탄 손가락을 쭉 뻗었다.
“훠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아아아악─! 그만두십시오오오오───!” 반응이 대단했다. 예리엘은 헛웃음을 짓고 전갈에게 말했다.
“네 친구, 가족들이랑 함께 물러나렴.” “다시 봐도 참 신기한 재능입니다, 예리엘 씨.” 한데, 또 다른 환관이 다가왔다. 예리엘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반갑습니다. 7 년만인가요. 많이 자라셨군요.” 환관 졸랑.
그는 웬 호위 기사와 함께였다.
“흥. 환관이 호위 기사도 대동하네요? 황궁에 폐하가 아니라 환관을 섬기는 기사도 있나봐요.” “그런 구분은 없습니다. 환관도, 기사도, 모두 폐하를 위하여 노력하니 말이지요.” 졸랑의 답에 예리엘은 노골적인 비웃음을 지었다.
“그 까탈스런 졸랑께서 유크라인까지 직접 올 정도면, 요즘 많이 달아오르시나봐요? 폐하께서 저희 당주를 친애하신다는 소문 탓일까요?” 제국의 권력 구도는 보통 황제의 성품과 그 정통성에 따라 다르다.
선황 크레바임은 신권과 황권의 조화를 추구했으나, 사실 그 그늘에는 ‘환관’이라는 제 3 의 세력이 존재했다. 그들은 신권과 황권에 박쥐처럼 달라붙어 양측의 권력을 갉아먹었다.
“그럴리가요. 저희는 한낱 폐하의 그림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크레바임은 워낙 정통성이 확실한 군주인지라 환관이 날뛰지는 못했지만, 현황제 소피엔은 즉위 전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고, 아니 오히려 나태와 권태로 유명했던 덕분에.
환관들은 아마 자신들이 선대 이상의 권력을 얻으리라 자신했겠지.
그 예상은 멋들어지게 빗나갔다.
게으르다던 황제 소피엔은 본인의 정책을 아주 강력하게, 또 정력적으로 밀어붙였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신임을 얻은 자는 신하도, 환관도 아닌 데큘레인이었다.
“다만, 예리엘 씨에게 어떤 정보를 하나 전달하려 왔습니다.” “정보요?” “예. 유크라인 백작께서, 예리엘 씨에게 영지의 통치권을 맡기셨지요?” 졸랑은 여태 데큘레인과 예리엘의 행보, 유크라인 영지의 발전 과정을 토대로 유추한 확신을, 예리엘에게 그대로 물었다.
예리엘은 태연히 대답했다.
“통치권? 저는 그저 영주 대리일 뿐인데요.” “하하. 예. 그렇다 하더라도, 예리엘 씨.” 졸랑이 낮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백작님을 믿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풋.” 제 딴에는 뭔가 안다는 듯 중얼거리고 있지만, 예리엘은 피식 웃을 뿐이다.
나는 환관 따위의 술수에 말려들만큼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거든?
“유크라인 백작께서, 예리엘 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정말 ‘진정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그럼에도 졸랑은 끈질겼고, 예리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진정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닌 척 했지만, 그것은 예리엘의 마음 한 켠에 항상 도사리는 불안이었다.
“머지않아, 그 증거를 들고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졸랑이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예리엘은 가늘게 좁힌 눈으로 그의 정수리를 노려보았다.
“할 말 끝났으면, 로타일리 수프나 처먹고 꺼져요.” 그 이상은 말도 섞지 않겠다는 듯 빙글 돌아서 차에 오른다.
졸랑은 여전히 웃으면서 그녀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뤼겐. 주카켄이 약속했던 물건은?” 졸랑이 곁의 기사에게 물었다.
“이미 준비되었답니다.” “내용은?” “과거 유크라인 백작이 예리엘에 대해 언급했던 녹음입니다. 입수 경로는, 데큘레인이 암흑가를 손절하면서 인원 관리를 제대로 안 한 것 같더군요. 뭐 치명적인 것은 없었습니다만, 그 중 하나가 얻어 걸렸습니다.” 졸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빨리 받아와. 대가는 상관하지 말고.” 여태 환관 졸랑에게 눈엣가시는 유크라인이었다.
예리엘의 실무적인 능력과, 데큘레인의 대외적인 명성이 조화를 이룬 명문.
황제마저도 데큘레인을 총애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지금으로서는 그 둘의 균열 밖에는 답이 없었는데, 졸랑은 마침내 그 방법을 발견했다.
“궁금하구나. 저 아가씨가 언제까지 저렇게 싸가지 없게 굴 수 있을지······.” 그는 여우처럼 쿡쿡거리며, 저 멀리 사라지는 예리엘의 차량을 바라보았다.
* * * ······나흘 간의 솔다 승격 시험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물론 중간에 제단의 침입이 있었지만, 데큘레인 교수의 무지 잔혹한 활약─정작 본인은 부정했다만─으로 싱겁게 끝났다.
마지막인 3 차 시험까지 합격한 사람은 실비아, 레일리, 도즈무, 메이호, 이프린 외 40 인. 다시 유크라인 대강당으로 돌아온 그들은 솔다 뱃지 수여식에 참석했다.
“······솔다 이프린. 수고했어요!” 이사장 아드린느가 그녀에게 솔다 승격 상패와 뱃지를 건넸다.
“넵!” 솔다 3 단계 뱃지.
이프린은 자랑스럽게 받았다. 이걸로 솔다 다음 두 등위인 ‘켄들’과 ‘레겔로’ 까지는 쉽게 올라갈 수 있을 것이었다.
“솔다 실비아! 수고 많았어요!.” “네.” 이프린과 실비아는 뱃지, 상장, 로브를 품에 안고 내려와 의자에 앉았다.
“이프린 씨~ 고마워요~ 그때 나눠준 로아호크 고기 덕분에 통과했어요~” 옆자리에 앉은 메이호의 미소 섞인 말이었다. 이프린도 방긋 웃었다.
“뭘요. 그런데, 고기 맛있었죠?” “네네~ 엄청 맛있었어요~” “하핫. 나중에 제국 오시면 또 같이 먹어요~ 대신, 그때는 메이호 씨가 사요.” 이프린은 그렇게 떠들다가 문득, 강당 위 귀빈석에 앉은 데큘레인을 보았다.
그의 곁에는 긴달프와 로제리오가 함께였다.
그런데 갑자기.
“······?” 긴달프가 자신을 힐끗거리더니 데큘레인에게 뭔가 말을 걸었다. 그러자 데큘레인은 미간을 찌푸렸고, 이내 서류 가방에서 자그마한 펜던트를 꺼냈다.
“아······!” 펜던트.
저 펜던트가, 긴달프가 말하던 그것.
순간 이프린의 숨이 막혔다.
* * * “······어떤 복원이 잘못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서류 가방에서 꺼낸 펜던트를 긴달프에게 보였다. 긴달프가 갑자기 ‘그때 펜던트 복원에 조금 실수가 있었던 것 같네, 보여줄 수 있겠나?’ 따위의 말을 한 탓이었다.
“음······.” 긴달프는 펜던트를 지그시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 착각이었나보군. 잘 되었어. 역시, 내가 실수했을 리 없지.” “······.” 그리고는 껄껄껄 웃는다.
사람 귀찮게 이게 무슨. 나는 팬던트를 서류 가방에 도로 넣었다.
긴달프가 은근한 투로 되물었다.
“한데, 데큘레인 교수. 그 펜던트 안의 아이가 누군지는 물어봐도 안 알려줄 테지?” “아니 아까부터 뭔 말이여? 할아범. 나도 알려주면 안되나?” 호기심을 참지 못한 로제리오가 끼어들었다. 긴달프는 미간을 찡그리고 로제리오를 밀어냈다.
“어허. 어린 녀석은 썩 물러가.” “아 거 참. 오지게 치사하네.” 나는 관심 없이 행사에 집중했다.
그런데 긴달프는 자꾸만 나를 보고, 강당에 앉은 마법사 쪽을 보고, 또 나를 보더니, 껄껄껄 미소를 지었다.
“껄껄껄. 재밌구만. 참, 데큘레인 자네. 이제 곧 마탑도 개학인데, 혹여나 내게 부탁할 것 있으면 언제든 말하게. 내 무엇이든 하나는 공짜로 들어주지.” 그 웃음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왜인지 이사장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솔다 레일리! 승격 축하해요!” 와중에 수여식은 슬슬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면면은 마호, 이프린, 실비아, 그리고······ 지금 공간에는 없지만, 나는 오늘로써 확신했다.
꽤 오래 전 베론의 사건도.
당장 이틀 전에 있었던 학살 사건도.
전부······ 알렌.
그 녀석의 소행이었겠지.
“좋아요! 다들! 수고 많았어요~!” 이사장의 외침과 동시에 다들 박수를 쳤다. 나도 그들을 따라서 손뼉을 맞췄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자못 진했다. 얼굴이 뚫어지도록 응시하는 눈이었다.
거슬렸던 나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이프린.
녀석은 흠칫 놀라 눈을 피했지만, 주먹을 꽉 쥔 손이 뭔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제 솔다도 되었겠다, 또 어떤 건방진 술수를 꾸미려는 거겠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2 학기. (1) 쿵───!
흡사 운석이 추락하는 듯한 진동이 일었다. ‘수련도’와 수직선상의 지면에 내려앉은 충격이었다.
크레이터가 패일 만큼 과격한 착지였으나, 정작 그 장본인은 옷에 묻은 흙먼지나 툭툭- 툭툭- 대수롭잖게 털 뿐이었다.
“······이게 더 빠르네.” 알렌은 수련도에서 곧장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그말인 즉, 3,000m 높이의 상공에서 자유낙하한 것이었다. 적당히 속도를 조절하면서.
─설명해라. 왜 그랬지.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통신이 흘러들었다. 알렌은 귀에 손을 얹고 되물었다.
“네에?” ─어제 소식을 들었다.
“아하~ 그거요? 임무의 일환이었어요.” ─우리는 너에게 그런 임무를 내린 적이 없다.
알렌은 방긋 웃었다.
역시, 이 사람들은 말귀를 잘 못 알아 듣는다.
“네에~ 그래서 ‘일환’이라고 말했잖아요. 임무의 일환.” ─······.
저쪽은 잠시 침묵했다. 알렌은 로브가 깨끗해졌는지 점검했다.
조금이라도 더러우면 교수님이 싫어할 테니. 왜인지 그의 결벽증이 옮아버린 느낌이다.
─대상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
“······네에?” 뜬금없는 말. 알렌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작은 미소를 지었다.
“아~ 설마요. 저를 모르세요? 그 말 듣기 전까지는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어요.” ─······네 말대로 삼개월만 연장이다, 엘리. 그동안 확실히 정리하도록.
답신은 하지 않았다. 엘리는 방긋 웃고 통신을 끊었다.
그때였다.
“어? 저기! 저기 감독관님이다─!” 저편의 숲에서 어떤 아이 세 명이 헥헥거리며 달려왔다. 그들은 가슴팍에 각각 ‘칼로스’, ‘레오’, ‘리아’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감독관님. 감독관님이세요?” 그 중 리아라는 여자 아이가 물었다. 엘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아니에요. 그런데, 무슨 시험 중이신가봐요?” “아~ 저희가 모험가 시험을 치르는 중······ 앗! 도망가세요!” 세 아이가 뒤편을 돌아보더니 화들짝 놀라 알렌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알렌은 그쪽을 보았다.
쿵─! 쾅─! 쿵─! 쾅─!
커다란 마수가 달려오고 있었다.
곰인지 사슴인지, 곰보다 거대한 체격과 강철도 베어내는 사슴뿔이 섬뜩한 ‘베어호른’이었다.
“감독관님 아니면, 얼른 대피-” “괜찮아요. 먼저 가세요.” “네?” “가세요.” 엘리는 미소로 말했다. 세 아이는 우물쭈물하다가 떠났고, 크아아아아아─!
베어호른이 발광하며 달려들었다.
“안녕. 잘가.” 엘리는 웃으면서 허공에 손을 사선으로 그었다.
그저, 그 뿐이었다.
촤르르르륵─!
베어호른의 몸이 손짓에 따라 이분되었다.
절삭된 단면에서 핏물이 치솟았고, 엘리는 그 피보라 속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다.
그 순간.
풍경이 뒤바뀌었다.
그녀는 분명히 수풀 한복판에 있었으나─ 다음 발자국은 어떤 마을의 시장 한복판에 닿은 것이었다.
“어묵 두개에 1 엘네! 1 엘네!” “약초가 많아요 약초가~ 다들 구경하세요~” “마법 재료 많습니다! 여기서 사서 부유섬에 가서 되팔면 이득이에요!” 상인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엘리는 ‘로폰’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다.
“한 시간이면 제도에 도착하겠다.” 엘리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보폭」이 충전될 때까지 쉴 겸 노상으로 다가갔다.
“어묵 두개 주세요.” “예예~ 여기 있습니다! 어 참, 근데 아까는 무슨 마법이었대요? 갑자기 나타나시던데.” “아~ 눈이 좋으시네요. 별 거 아니었어요 근데.” 엘리.
그녀는 「공간」을 다룰 수 있다. 단순한 공간 이동 따위가 아닌, 문자 그대로 ‘공간을 다루는 것’이다.
본인의 공간을 어딘가로 전이할 수도 있지만, 타인의 공간도 어디로든 전이할 수 있다. 대가는 물론 막대한 마력.
엘리는 이 재능을 생명체를 죽일 때, 즉 머리와 몸을 분리할때 곧잘 쓰곤 한다.
물론 상대가 마력이나 마법 따위로 저항할 경우에는 조금 더 거친 힘이 필요하긴 하나, 그녀에 비해 현저히 격이 낮은 상대는, 그저 눈 한 번 깜빡이는 것만으로도 사지를 분해할 수 있다.
“······어묵이 맛있네요!” “하하. 많이 드십쇼. 두개에 1 엘네라 쌉니다.” “네에~! 두개 더 먹을게요!” 엘리는 어묵 꼬치 두 개를 동시에 움켜쥐었다.
* * * 시험이 끝나고 난 뒤, 부유섬의 대로변.
이프린은 종종걸음으로 실비아를 따라붙었다. 곁에는 메이호도 함께였다.
“이프린 씨~ 저희 이렇게 이렇게~ 미행해도 되는 걸까요~?” 메이호가 걱정스레 물었다. 이프린은 뒷목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미행이 아니라 그냥 같이 걷는 거예요.” “아~ 그런가요~?” 진짜로 나란히 걷는 수준이다.
지금 대화도 실비아가 듣고 있고, 어이가 없는지 귀도 쫑긋거린다.
그때 마침 실비아가 멈췄다. 부유섬의 어느 주택가였다. 이프린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크게 놀랐다.
그 하늘에는, 하늘이 아닌 또 다른 주택가가 있었다.
“저, 저게 뭐야!” 경악한 이프린. 우체통에서 신문을 꺼내던 어떤 마법사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위 아래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고, 마법사는 피식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부유섬의 주택가에는 공간 활용을 위해 마공학공간분할기법이 사용돼. 너는 멍청해서 그런 것도 모르는구나.” 실바아의 말이었다. 그녀는 태연히 현관문에 열쇠를 꽂았다. 이프린과 메이호는 슬그머니 다가갔다.
“여기가 네 집이니?” “응.” 이프린은 부러움에 침을 삼켰다.
세상에 마상에, 부유섬에 집이 있다니. 얘는 정말 다른 세계 사람이구나.
“여기 집값 비싸지 않니?” “1 천만 엘네.” “헐. 겨우 이만한 집이 1 천만 엘네?” “너무 비싸지 않나요~?” 이프린과 메이호가 입을 뜨악 벌렸다. 1 천만 엘네면 제도에서도 저택 한 채 매입할 거액인데, 실비아의 집은 아무리 봐도 20 평 남짓이다.
“부유섬은 원래 그래.” “아 하긴······ 실비아야. 그러면 이제 대학에는 안 올 거니?” “······.” 실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괜히 섭섭했던 이프린은 입술을 삐죽이면서 물었다.
“가끔, 놀러와도 되지?” “······.” 그러자 실비아는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턱짓하듯 끄덕였다. 이프린이 눈을 크게 떴다.
“응? 방금, 방금 너 고개 끄덕인 거니?” “그래.” 실비아는 여태 이프린에 대해 꽤많이 고민했지만, 결국에는 결정했다. 이제 이프린도 자신의 ‘장작’으로 삼을 것이었다.
라이벌이 없는 거보단 있는 게 나으니.
“나도 이제 부유섬 올일 많을 텐데, 그때 놀러올게.” “저도요~ 저도요~” “······.” 난데 없이 끼어든 메이호인지 미에호인지가 조금 거슬렸지만,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있어 실비아! 나중에 또 봐!” “잘있어요~” 해맑게 웃는 메이호와 이프린을 마지막으로, 쿵─!
현관문을 닫았다.
실비아는 이미 이삿짐이 완벽히 자리잡은 내부를 둘러보았다. 제도의 저택에 비해서는 비좁았지만, 오히려 좋았다.
혼자인데 너무 넓으면 외로울 테니.
실비아는 우선 침실로 들어갔다. 곰탱팬더와 날쌘돌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왔어.” 그렇게 말하자 푸드득─ 날개를 흩날리며 날쌘돌이가 날아왔다. 곰탱팬더도 망토를 휘날리며 폴짝─ 뛰었다.
둘 다, 그녀가 마석을 매개로 창조한 생명이었다.
실비아는 그들을 품에 안고 침대에 앉았다.
째깍- 째깍- “······.” 째깍- 째깍- 시계만 움직이는 텅 빈 방.
무료했던 실비아는 머리맡에서 미술 노트를 꺼냈다. 끄적- 끄적- 연필을 끄적이면서 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푸른 눈이 인상적인, 날카롭고 차가운 미남.
데큘레인이었다.
* * * 오랜만에 유크라인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수련과 이해에 몰두했다.
할 일이 많았다.
더 늘어지기 이전에 「중급 염동」 을 완성해야 했고, 이제 「설화석」도 어느 정도는 다룰 수 있게끔 연습해야 했으니.
「 설화석 이해도 : 23.1% 」 고작 23.1%의 이해도. 아직도 갈 길이 멀었지만, 다행히 2 할에 해당하는 귀퉁이는 제어가 가능했다.
“······나쁘지 않군.” 설화석은 명성만큼이나 신비한 금속이었다.
나는 「염동」으로 설화석의 귀퉁이를 탁구공처럼 응집했다.
가공하지 않은 설화석은 고무줄처럼 자유자재로 변화했다. 보자기처럼 펼쳐졌다가, 공처럼 응집되었다가, 가시처럼 뻗어댔다가······.
「염동」에 대한 감응성은 그 어떤 금속과도 비교를 불허할만했다.
똑똑─ 때마침 울린 노크.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나는 웃음을 참으면서 「염동」으로 문을 열었다.
“교수님. 간식입니다.” 율리. 일전의 ‘수련도 습격 사건’ 때 길을 못찾았다는 이유로 죄인을 자처한 그녀는 요즘, 시종의 임무를 대신하고 있었다.
“맛있게 드십시오.” 커피와 다과가 담긴 쟁반을 내 책상에 내려놓는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율리. 너무 상심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길치인 걸 어쩌겠어.” 그러자 율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수련은 잘 되어가십니까?” “방금 끝났다.” 8 할의 설화석은 금고에 보관했고, 나머지 2 할은 공 형태로 안주머니에 넣었다.
율리가 말했다.
“이제 곧 개강입니다.” “그렇지. 바빠지겠어. 너도, 나도.” 율리는 쓰게 웃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또 뭐지?” “유크라인 저택 근처의 유동 인구를 분석하였고, 그 중에서도 불규칙적인 시간대에 규칙적으로 배회하는 몇몇 인원을 포착하였습니다. 즉, ‘일반인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 자들의 신원을 파악한 명부입니다.
” 나는 그 문서를 읽었다. 대강 33 명 쯤 되었는데, 사실 이 정도 감시는 당연한 일이었다.
제단 뿐만 아니라 황실, 환관, 그 외 여러 귀족가문에게도 유크라인은 가장 대표적인 견제 대상이니.
“율리.” “예.” “고맙다.” 내 말이 쑥스러웠는지, 율리는 뒷목을 긁적이며 눈을 돌려 괜한 책장을 바라보았다. 가지런하게 정리된 책들은 전부 약재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 뜻을 눈치챈 듯, 율리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진다.
“아니요. 오히려 제가 고맙습니다.” 나는 요즘 율리를 치유할 방도를 공부하고 있다.
아니, 가장 좋은 방법은 사실,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율리와 함께하고 싶다는 내 욕심이, 그것만큼은 안 된다며 발악할 뿐.
“이제 돌아가지.” “예. 편히 쉬십시오.” 율리는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다시 혼자가 되어, 적막한 별채.
나는 율리의 커피를 홀짝이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 별빛이 반짝이고, 커피는 무척이나 쓰다.
“······직접 만들었군.” 커피 쯤은 시종에게 시키면 되는 것을. 이렇게 써서 도대체 뭘 어떻게 마시라는 건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커피를 마셨다.
하나도 남김 없이, 전부 다.
* * * 띠리리리- 띠리리리- 반쯤 열린 커텐 너머로, 8 월 중순의 햇볕이 쏟아지는 제국대학의 기숙관.
띠리리리- 띠리리리- 201 호에서는 알람이 울리고 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무지하게 시끄러운 알람.
“으으으······ 그만······.” 띠리리리- 띠릭- 이프린은 끙끙 앓면서 깨어났다.
“아······.” 숙취가 머리통을 짓뭉개지는 것 같았다. 요 근래 축하 파티가 너무 많았던 탓이었다.
줄리를 비롯한 평마탐동 뿐만 아니라, 고향 사람도 찾아왔을 정도이니.
“죽겠다······.” 침대에서 일어난 이프린은 터벅터벅 걸어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을 보면서 쪼르르르— 수돗물을 틀었다.
“······오늘이 면접이네.” 데큘레인의 조교 면접이 있는 날.
이프린은 긴장보다도 먼저, 아직 해소하지 못한 의문을 떠올린다.
“펜더트.” 덜 풀린 입으로 중얼거리는 단어, 펜던트.
이프린은 도저히 모르겠다.
왜 데큘레인이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인지. 자신의 사진이 담긴 펜던트를 도대체 왜 지니고 다니는 것인지.
혹시, 아버지의 죽음에 나도 모르는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프린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보았다.
“내가 인기가 많을 만하긴 한데 말이지.” 술냄새가 풀풀 풍기는 지금도 어디가서 꿇리는 외모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꾸미기만 하면 어느 누구보다 눈에 띌 테지. 이 상판대기도 물론이거니와, 줄리가 감탄할만큼 글래머러스한 곡선.
할아버지 할머니도 이 자체로 공무고시 합격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 교수도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풉.” 말하면서도 미친 소리라서 헛웃음이 흘렀다. 이프린은 쿡쿡 웃으면서 세면대의 물을 따뜻하게 데웠다.
그 뒤 잠옷을 벗고 「유체 조작」으로 구석구석 닦았다.
“아~ 이제 곧 학기 시작이네. 좋은 날 다 갔어~” 옷장에서 대충 헐렁한 박스티와 바지에 로브, 백팩을 걸치고 기숙관을 나섰다.
맴맴맴맴─! 맴맴맴맴─!
한여름의 매미 소리.
햇볕 가득한 교정을 지나 마탑에 도착.
“솔다 이프린 나가신다.” 이제는 데뷰탄이 아닌 솔다로서 엘리베이터에 올라, 77 층 버튼을 누른다.
띵─!
도착한 77 층 복도.
오늘은 면접 날인데도 77 층은 텅 빈 채다. 루이나 교수 층은 엄청 북적거리던데.
“앗! 솔다 이프린! 여기예요!” 복도의 책상에 앉아 면접을 기다리던 알렌이 손을 흔들었다.
흐흐. 솔다 이프린. 데뷰탄이 아니라 솔다다······ 이프린은 비실비실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들어가면 되나요?” “네! 이프린 씨가 마지막이에요.” “······.” 당연히 그러겠지.
크흠. 헛기침을 한 이프린은 집무실 문을 똑똑 노크했다.
─들어와라.
문을 열자 데큘레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정갈한 모습이었다.
이프린은 뚜벅뚜벅 다가가 그의 앞에 앉았다.
“이프린.” “예.
데큘레인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조교부터 지원, 맞나.” 물론 알렌은 조교와 조교수의 역할을 둘다 겸하지만, 굳이 조교 생활을 데큘레인 밑에서 할 필요는 없다.
평범하게 솔다 마법사로 마탑 생활을 하다가, ‘논공회’를 거친 이후에 데큘레인 밑에서 일하는 게 오히려 커리어적인 측면에서는 더 좋을지도 모른다.
“예. 맞습니다.” 그러나 이프린은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다. 어서 빨리, 데큘레인과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고 싶었다.
그런데.
“좋다. 그 의지를 높이 사지. 합격.” 쿵─!
데큘레인은 그 즉시 지원서에 도장을 찍었고, 막상 순식간에 일이 결정되자 이프린은 덜컥 겁이 났다.
“이렇게 바로요?” “지원자가 두 명 뿐이다.” “······.” 사뭇 처량한 말을 냉정하고 딱딱한 음색으로 전하는 데큘레인.
루이나에게 몰린 솔다가 백명 단위라는 것을 떠올린 이프린은,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그러다가 데큘레인의 말에 오류를 발견했다.
“어? 잠깐, 두 명이나요?” “······두 명 ‘이나’?” 데큘레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프린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그게 아니라요. 다른 한 명은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드렌트다.” “드렌트라면······.” “네 논문을 표절한 놈이지. 사과는 이미 했다 들었다.” “네. 맞아요.” 이프린은 드렌트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았다. 무릎도 꿇겠다는 걸 가까스로 말렸을 정도.
그런데, 그 드렌트가 왜 하필 데큘레인의 휘하에 지원을? 데큘레인한테 논문도 화형당했으면서.
데큘레인이 말했다.
“이프린.” “네.” “너는 마탑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연구 조교로 활동하게 될 거다. 월급이 지급될 것이며, 개강 전 연구 과제는 알렌에게 맡겨 두었으니 받아가도록.” “워, 월급! 네! 네 알겠습니다!” “돌아가라.” 이프린은 일어나면서 데큘레인을 힐끔거렸다. 데큘레인은 어느새 서류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니, 열중‘하는 척’일 수도 있다.
사실은 온 신경을 나에게 집중하고 있을 수도.
“갈게요.” 그게 부담스러워서 이프린은 도망치듯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알렌이 그녀를 맞이했다.
“솔다 이프린. 조교 합격 축하드려요!” “네? 아, 아하하. 네. 고마워요.” “따라오세요. 연구실로 가요.” 알렌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프린을 [ 조교 연구실 ]로 안내했다.
77 층의 연구실은 기숙관보다 훨씬 넓고 깨끗했다.
당장 바닥에 누워서 자도 되겠다······. 감탄하며 둘러보는 이프린에게 알렌이 말했다.
“여기가 이프린 씨 자리예요.” 이프린은 그쪽을 보았다. 데큘레인답게 고급스러운 의자와 책상이었다. 그 의자 뒤에 백팩을 걸었다.
“그럼, 이프린 씨. 이제 연구 과제 드릴게요.” “네. 주세요.” 쿵─!
책상에 두꺼운 책 한 권이 내려앉았다. 익히 아는 책이었기에 이프린은 의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흙속성의 근원」······ 난이도가 꽤 높긴 하지만, 연구할만하네요.” “네~ 맞아요~ 그리고 이것도.” 그런데.
쿵─!
책 한 권이 더 나타났다.
이프린은 살짝 당황했다.
“두 권이나 되네요······ 「 루팔렌의 기록 」이면 꽤 고난도 마법서 아닌가요?” “네~ 맞아요~ 그리고 이것도.” 쿵─!
세 권 째.
“저, 저기.”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자, 잠깐만요!” 쿵─! 쿵─! 쿵─!
마법서들이 연이어서 쌓이기 시작했다.
“이것도.” “그, 그만!” “이것도.” “제발 그만! 안돼!” 네 권이 아니었다. 다섯 권이 아니었다. 여섯 권도 아니었다.
「 불길의 이해 」, 「 바다 탐험록 」, 「 전반적인 속성 몰두 」, 「 사대 원소의 조화 」, 「 사대 원소의 주축 」, 「 바람의 계산 」······.
총 13 권.
“······.” “전부 연구 과제예요! 학기 시작 전까지 완전히 습득하라는 교수님의 명이에요!” 데큘레인은 이프린을 ‘탄소 연구’를 위한 사대원소(四大元素)의 표본으로 키울 생각이었고, 이프린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미친 건가.” “아닛! 그런 나쁜 말은 하면 안 돼요! 혹시라도 비속어를 쓰면, 영원히 조교수가 못 될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이거 받으세요.” 알렌이 이프린에게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이미 넋이 어느 정도 나가버린 이프린은 느릿느릿 되물었다.
“이건······ 또 뭐예요······?” “아. 마법서 비용은 데큘레인 수석교수님의 완전 부담이지만, 아직 저작 기한이 만료되지 않는 서적이 있어서요. 서적 비용과 달리, 저작 비용은 익히는 마법사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거 아시죠?” 그말인 즉, 영수증이라는 말이렸다.
이프린은 비틀거리며 그 가격을 보았다.
“······아.” “지금은 조금 비싸게 보일지라도, 원래라면 이 가격의 스무배를 지불해도 못 사는 고급 마법서적들이에요! ······저, 이프린 씨? 이프린 씨? 아, 아앗!
이프린 씨──!” 5 초 뒤, 실신했다.
* * * ······어두컴컴한 하데카인의 영주성.
“또 찾아와?” [ 로할락 수용소 ]과 관련된 황실 지원과 [ 지하 통로 ]의 수입 등, 서류를 장부를 점검하던 예리엘은 미간을 콰득 찌푸렸다.
“예. 드릴 물건이 있다면서······ 황실의 사람인지라 내쫓을 수도 없어 일단 객실을 내주었습니다.” 또 다시, 불청객 졸랑이 찾아왔다는 말이었다. 예리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뭘 준다는데. 주고 가라 그래.” “아시잖습니까. 말을 듣지 않습니다.” “쯧······.” 그때였다.
똑똑─ 영주 집무실에 노크가 일었다. 집사는 그 문을 흘겨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열어줘.” “예.” 집사가 문을 열었다. 그 밖에는 역시 졸랑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예리엘 씨.” 그는 뻔뻔하게 웃으며 예리엘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집사에게 말했다.
“자리를 좀 비켜주시지요.” “······.” 집사는 예리엘의 얼굴을 살피곤 자리를 떠났다. 졸랑은 생글생글 웃으며 어떤 아티팩트 목걸이를 책상 위에 올렸다.
“받아보시지요.” “참······ 안하무인이시네.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요?”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졸랑은 묘하게 자신만만했다. 예리엘은 그런 졸랑과 집무책상에 얹어진 목걸이를 번갈아 보았다.
갑작스레 영주 집무실에 얼굴을 들이민 이 환관 놈. 쥐새끼처럼 생긴 놈이 대체 무슨 술수를 벌이려는 건지.
“어서요. 그것만 보시면,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쯧- 뭐가 되었든, 저 놈을 꺼지게 하려면 어쩔 수 없다. 어떤 씨알도 안 먹힐 개수작을 부리려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예리엔을 혀를 차면서 그 목걸이를 들었다.
2 학기. (2) 하데카인의 영주성.
예리엘은 책상에 놓인 목걸이를 들었다. 대강 아티펙트, 그 중에서도 어떤 장면을 녹화한 악세사리인 듯했다.
“보시지요.” 졸랑이 손짓으로 권했다. 예리엘은 여전히 의심스런 표정이었지만, 이내 목걸이의 수정구슬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너희는 임무만 확실히 이행해라.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예리엘은 계속 영지에 처박아두면 되니.
익숙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예리엘은 아무 말도 없이 그 영상을 보았다.
─애초에 쓸모라곤 그것 밖에 없는 녀석이야.
졸랑은 그녀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지만, 예리엘은 적에게 동요를 보일 만큼 허술한 인물이 아니다.
─그 녀석은 행동 거지 하나하나가 하찮으니 아마 확실할 것이나, 임무 목록에 감시도 추가하지.
음성과 더불어 데큘레인의 모습이 일부 비친다. 제도의 저택, 화려한 의자에 앉은 데큘레인. 그가 와인잔을 흔들며 얼굴을 찌푸린다.
─녀석이 혹여나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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