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14
기말시험은 학점 평가의 35%를 차지하지만, 실비아는 나머지 65%에서 만점이다.
기말시험 이전 2 위 이프린과의 차이는 자그마치 20 점. 기말이 0 점이어도, 1 등에서 최상위권으로 내려온 것 뿐이다.
“······교수님.” “이 성적을 가지고 부유섬에 올라라.” 데큘레인은, 언젠가 했던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 실비아는 입술을 떨면서 데큘레인을 보았다.
야속.
그 단어를 실비아는 여태 알지도 못했다. 말해본 적도 없었다.
지금은,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탁— 데큘레인이 책을 덮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려는 것이었기에, 실비아는 붙잡았다.
“······아버지가 말했어요. 제가 교수님 휘하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 이불 자락을 움켜쥔 채 말을 이었다.
“일레이드와 유크라인은 앙숙이라고요. 서로 죽고 죽이는 숙적이라고요. 그것 때문인가요.” 데큘레인의 눈은 여전히 무심했다. 실비아는 피하지 않았다.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지만, 그이기에 참을만했다.
“실비아.” “네.” “나는 너를 단 한번도 일레이드라 생각한 적 없다.” 실비아의 심장이 작게 떨렸다. 그녀는 어떤 기대감을 간직한 채 되물었다.
“그러면요.” “······실비아.” 그 부름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실비아.” “네.” “실비아지.” “네.” 기이한 반복에 데큘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오류를 깨달았는지, 말을 구체적으로 바꿨다.
“······대마법사의 유력한 후보, 올해의 신인 마법사, 마법계의 기적, 권능에 이를 수 있는 재능, 그리고 일레이드의 아이.” 데큘레인은 하나 하나 읊었다.
이전의 데큘레인이었다면 미칠 듯한 질투를 느꼈을, 실비아에게 쏟아지는 찬사들이었다.
“너를 칭하는 문장은 이리도 많지만.” 물론.
지금의 실비아가 데큘레인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데큘레인은 그딴 것들에 신경도 쓰지 않고, 다만 무관심하기에.
“나에게 너는 그저 실비아다.” 그러나, 김우진으로서 해줄 말은 있었다.
“내 보호와 지도 아래에 있고, 가끔 올바른 충고가 필요한.”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가죽 장갑. 누군가와 살결이 닿는 것조차 저어하는, 닫힌 마음의 증거.
“내 학생이지.” 실비아는 아직 어리다. 어린만큼, 더 성장할 것이다. 그 몸도, 마음도, 마법사로서의 기량도.
“내 역할은 너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실비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항상 차가웠고, 따뜻했다. 그에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속 새싹은 아름답게 자라났다.
실비아는 그런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계속 자신의 마음에 담아 두길 원했다.
그래서, 말했다.
“아버지는 유크라인 가문과 교수님이 제 어머니를 헤쳤다고 했어요.” 그가 거짓이라 대답하길 기대하면서.
“아니죠. 거짓말인 거죠.”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교수님.” 그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투두두두둑······.
투두두두둑······.
비 내리는 소리만 울리는 고요한 병실. 심장이 멎을 듯한 답답함.
“아버지의 말은 거짓이에요.” 실비아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이에요.” 그가 해야할 말을, 스스로 되뇌이면서.
“······거짓말.”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가득 메우고, 이내 텅 비어버린 목소리.
실비아는 아무 말없이 창 밖을 돌아본다.
우죽죽 내리는 비. 그 유리창에 비치는 데큘레인이 보인다. 그는 여전히 무심하고 차가운 얼굴이다.
“······.” 유리 속 그를 보며 말했다.
“가세요.” * 나는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세상 밖에 빗발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칠흑의 하늘에 한순간, 섬광이 타올랐다.
───!
낙뢰가 어둠의 저편을 밝혔다. 어떤 남자의 그늘진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데큘레인 교수.” 말끔한 중년의 사내. 아름다운 금발과 와인색의 눈동자. 네임드 캐릭터, 그 중에서도 ‘광인(狂人)’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남자.
길테온.
“내 딸아이가 시험 도중 과로로 쓰러졌다 들었네만.” 그 목소리에는 일말의 걱정도 묻어 나지 않았다.
“자네 잘못인가? 아니면, 딸아이 잘못인가.” 천연덕스런 물음에 이유 모를 경멸이 일었다. 이는 데큘레인과 김우진에 공통되는 감정이었다.
“실비아에게 무슨 말을 했지.” 그러자 길테온의 눈매가 날카롭게 휘어들었다. 노려보는 듯하던 핏빛 동공은 이내 가늘어지며 눈웃음을 지었다.
“무슨 말이라 할 것은 없고, 데큘레인. 혹시 그 날을 기억하는가? 8 년 전, 일레이드와 유크라인이 전쟁을 벌이던 날.” 데큘레인의 기억은 아직 한정적이었다. 유크라인과 일레이드의 관계는 물론 앙숙이었으나, 그 자세한 내막에 대해 알 방도는 없었다.
애당초, 원본의 데큘레인과 실비아는 서로 증오하기만 했을 테니.
“그날. 떠나려는 시엘을 너희가 죽였지.” 시엘리아.
실비아의 어머니.
길테온의 ‘그날’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길테온의 그 말은 도화선처럼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길테온의 얼굴이 겹쳐진다.
8 년 전.
폭풍에 가까운 빗발이 휘몰아치던 날. 길테온은 데큘레인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데큘레인은 자신의 손을 본다. 그 손은 피에 젖은 장갑이다······.
“네가 실비아도 망치게 둘 순 없다.” 불완전한 기억이 내 머리를 헤집었지만, 금세 다잡았다. 고작 이 따위로 흔들릴 자아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놈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데큘레인. 이번에도 도망치는 것이냐?” “······.” 손아귀에 붙잡힌 듯 걸음이 멎었다. 몸 안에서 열기가 일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길테온에게 다가갔다.
“길테온.” “데큘레인 너는 항상 그랬지. 세상 고고한 척 만사를 굽어보면서, 정작 그 누구보다 겁이 많-” “길테온─!” 이 외침은 나도 모를 분노였다. 가슴 밑바닥에서 불덩이가 치밀었다. 고함이 복도에 메아리쳤고, 길테온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놈의 목전에 다가가 그 얼굴을 굽어보았다. 놈의 눈이 내 턱에 있었다.
“나는 네 속이 훤히 보인다.” “······내 속.” “실비아는 네 인형이 아니다.” 길테온은 야망에 미친 마법사. 대마법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 이 또한 그 일부에 불과할 터.
“방금, 실비아를 망치게 둘 수 없다 그랬나.” 나는 그리 뇌까리며 놈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길테온은 저항하려했지만, 「철인」의 힘에 어쩌지도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할 말이다, 길테온.” “뭐라?” “그 빌어먹을 가문의 망령이.” “······.” 길테온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내 입가에는 조소가 떠올랐다.
일레이드라는 그 가문은, 아니 오직 그 가문만이, 놈의 역린이었다.
“실비아를 망치게 두지 않겠다.” 이는 어쩌면, 데큘레인의 성격에서 파생된 분노의 잔여물.
실비아는 상관도 없다. 그 아이 조차도 지금은 구색, 혹은 구실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다만, 길테온을 진심으로 혐오하고 있다.
“시엘을 죽인 건 너다, 데큘레인.” 길테온도 비슷한 감정을 나에게 보냈다. 아니, 완벽하게 동일한 혐오일 것이었다.
놈은 먼 옛날의 눈으로 나를 직시했다.
“옛날에는 벌벌 떨기만 하던 놈이······ 많이 컸구나.” “길테온. 당신이 작아진 것이다.” 그때, 다시 한 번 낙뢰가 내리쳤다.
번쩍이는 세상.
복도 유리창에 비친 누군가의 모습을 나는 보았다.
길테온은 볼 수 없는 벽 뒤, 그곳에 실비아가 있었다.
어둠에 숨어서 떨던 아이는, 이윽고 세 번째 벼락이 도래했을 때.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다.
* * * 하늘이 맑다.
아름드리 나무의 잎사귀 사이로 조각난 햇볕이 내려앉고, 길가에는 활기와 웃음이 가득하다.
파릇파릇한 여름, 오후 3 시.
제국의 ‘로멜롯 광장’에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상반기를 마무리하는 축제다.
기말고사가 끝난 대학생, 휴가를 맞이한 직장인, 품앗이를 마친 농사꾼과 때를 맞춘 여행객 등등······ 온갖 사람이 가득한 광장에, 제국의 보부상이 집결하여 온갖 흥미로운 노상을 이루고, 다트와 실내 낚시 등 경품을 내건 온갖 게임이 많다.
“우와.” 이프린은 그 축제의 한복판에서 조금은 몽롱한 얼굴로 서있었다. 시골 촌사람인 그녀에게는 너무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다 맛있어보이네······.” “이피!” 줄리의 외침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줄리아, 페릿, 론도 등 평마탐동 부원들이었다.
“줄리~ 페릿~ 론도~” 이프린은 환하게 웃다가도, 문득 떠오른 생각에 표정이 어두워지고 만다.
“역시 걔는 안 오네.” “응? 이피. 누구 기다려?” “아니. 뭐······.” 실비아. 그 저택의 레테님에게 편지는 전달했지만, 역시 오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줄리. 가이드는 너한테 맡길게.” “응~ 오늘 재밌는 거 엄청 많을 걸? 이피, 지갑은 두둑해?” “충분하지.” 이프린은 광장을 거닐었다.
활기찬 분위기와 만연한 즐거움. 그들은 함께 웃고 떠들며 축제의 풍경을 감상했다.
“어?!” 그러다 문득, 감자 고로케 노상이 보였다.
3 엘네.
바로 사서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바삭한 겉 안에 촉촉한 식감이 있었다.
“오오. 이거 맛있다~ 어?! 저건 뭐지!” 문득, 만두 노상이 보였다.
2 엘네.
바로 사서 집어먹었다. 고기의 풍미가 입 안 가득 번졌다.
“오. 이것도 맛있네~ 어?! 저건 또 뭐지!” 문득, 와플이 보였다.
2 엘네.
바로 사서 귀퉁이를 뜯었다. 딸기 생크림이 달달했다.
“달다 달아. 맛있게 달아······. 어?! 저 녀석! 마침 목말랐는데!” 문득, 자두 음료수가 보였다.
2 엘네.
바로 사서 벌컥 벌컥 들이켰다.
지켜보던 줄리가 기막히다는 듯 물었다.
“······이피. 뭘 그렇게 많이 사?” “응?” 이프린의 두 손은 어느새 음식으로 가득하다.
문제는, 먹거리가 아직도 훨씬 많이 남아 있다는 것.
고민하던 이프린은 평마탐동 부원들에게 하나씩 내밀었다.
“아~ 나눠 먹으려구. 같이 먹자? 이거 고로케랑 만두 하나씩 먹으렴.” 줄리와 부원들이 쓰게 웃으며 음식을 건네받던 그때.
──나 로헤르크는 약속한다!
웬 절박한 외침이 광장의 소음을 뚫고 울렸다.
이프린은 정수리에 물음표를 띄웠고, 모두가 웅성거리면서 그 방면을 바라보았다.
──이 찬란한 하늘 아래, 더러운 것들로 가득한 지상에서!
광장의 구조물. ‘브리온델 독립문’의 아치 위에, 웬 괴한이 있었다.
그는 체인 로브 차림이었다. 검은색 벨벳 로브와, 어깨와 장골을 가로지르는 체인에 얽매인 책 한 권.
이프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사람 뭐니?” “글쎄~? 연기하는 같은데?” 동아리 부원들은 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광장의 축제에는 이런 이벤트가 하나 씩은 있기 마련이니.
──나는 루안느 신께 맹세한다!
“······루안느?” 그런데 대사가 생소했다.
루안느 신? 제국의 국교는 라니온 신을 믿는 블렛 정교일 텐데? 루안느라는 이름의 신이 있었나?
“줄리. 루안느가 뭐야?” 그렇게 물으면서 만두 하나를 먹었다. 줄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적궤가 믿는 신 아닌가?” “적궤? 적궤가 그 인종 말하는 거-” 이프린의 그 말이 채 끝맺어지기도 전에.
──배교도들에게 천벌을!
공해에 가까운 고성과 더불어.
거대한 폭발이 발생했다.
콰과과과과광———!
천지를 뒤흔드는 울림. 먼저 충격파가 전방위적으로 치달았고, 마기의 기폭( 起爆)이 연달았다.
끄아아아악────!
으아, 아아악──!
열풍과 폭연이 미친 듯이 밀려들었다. 폭발에 휘말린 건물이 붕괴되었고, 돌무더기들이 우르르 강하하기 시작했다.
활기찼던 축제가 한순간, 폭음과 비명이 뒤섞이는 아수라장으로 돌변한 것이었다.
“이피!” 줄리의 외침에 이프린은 바로 배리어를 방사했다.
그녀는 배리어를 가능한 크게 조절하여 민간인을 보호하려고······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 배리어에 닿는 충격이 없었다.
아니, 일대 자체가 아주 고요했다.
찢어지는 듯했던 비명도 사실은 무척 짧았다.
“뭐지······.” 의아함에 눈을 크게 뜨고 전방을 목도한 이프린은, 잠시 말을 잃었다.
멈췄다.
광장 전체가.
매섭게 퍼지던 연기, 무너지던 건물, 파도처럼 치밀던 폭발, 그 전부가.
허공에 붙박인 듯 머물러 있었다.
노면에 처박혀 아이의 머리를 짓누르고, 성인의 몸을 터트릴 붕괴의 파편들이······.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부스러기 하나 흘러내리지 않는다.
건물 밑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사람도, 자신이 보는 풍경을 의심하며 허송세월을 보낸다.
그만큼, 도망칠 생각조차 잊게 하는 환상이다.
“······.” 이프린은 멍하니 둘러보았다.
현실인듯 아닌듯, 비현실적인 세상.
광장의 만민은 저마다 같은 생각으로, 꿈을 꾸는 듯 정신이 멍하다.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그 덕분에 이프린의 시야는 더욱 선명하게 개인다.
“아.” 그렇게, 그녀는 그를 발견했다.
이 신비한 현장에서 단 한 사람, 움직이는 남자가 있다.
자약하게 걷는 마법사가 있다.
여전한 정장 차림의 그는, 이 공간의 모든 시선을 빼앗는다. 자리에 모인 만민이 그를 주시한다.
어떤 마력적 기감이나 감각 따위가 없어도, 그들은 알 수 있었다.
아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통째로 붙들어버린 듯, 이 몽환적이며 그 자체로 마법적인 마법의 주인은, 바로 저 사람.
‘데큘레인’ 임을.
어딜 감히──! 배교 따위가──!
데큘레인은 피토하듯 외치는 테러리스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놈은 독립문 정상에서 그의 손으로 빨려들었다.
마법의 종류는 「염동」, 대상은 놈의 로브를 얽맨 ‘체인’이었다.
“······.” 데큘레인은 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겁이 없었다. 공포가 없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두려워해야할 죽음에 대한 거리낌이 없었다.
“너.” “크흐—” 놈은 피식 웃으며 제 허리춤을 드러냈다. 그 안에 폭탄이 있었다.
데큘레인은 그저 경멸하며 입가를 비틀 뿐이었다.
띠딕─ 폭발 직전, 그보다 먼저 염동이 간섭하여 폭탄 내부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흥. 버러지 같은 것.” “이, 이 데큘레-” “더러운 입 닫아라.” 촤아아악─! 뒤이어 쇄도한 목강철 수리검이 놈의 목을 꿰뚫었다.
“크흐흐흐······.” 그러나 그 죽음의 순간, 놈은 웃으며 자폭했다. 목구멍에서 짙은 마기가 연기처럼 새었다. 마기는 덩어리를 이루어 데큘레인을 집어삼키려는 듯했지만, 어느 순간 쇄도한 검기에 의해 얼어붙었다.
기사 율리의 소행이었다.
“교수님. 동시다발적인 테러입니다.” 율리의 말에 데큘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인명피해를 최대한 줄일 생각인 듯했다.
“아, 저도 돕겠습니다!” 지켜보던 이프린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 당돌한 외침에 율리는 대견하다는 미소를 지었고, 이프린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 턱! 하며 그녀의 발목이 뭔가에 걸렸다.
“윽!” 나자빠진 이프린은 아으으- 앓는 소리를 내면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 데큘레인의 무서운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매에는, 평소와는 거리가 먼 주름이 맹금처럼 살벌했다.
“이프린.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편안히 꺼지도록.” 놈들이 자행한 테러의 종류는 ‘마기 폭탄’.
따라서 이 광장에는 마기가 짙었고, 데큘레인에게는 이프린을 자상히 대할 여유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넘어진 이프린을 율리가 일으켜세웠다. 율리는 이프린도 익히 아는 유명인이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율리 기사님. 팬이에요.” “너무 신경 쓰지는 마십시오. 교수님은 위험하여 제지하는 것이니. 이프린 님은 이 광장에서 민간인, 으븝-” 이프린을 배려하는 율리의 얼굴에 방독면이 달라붙었다. 데큘레인의 소행이었다.
율리는 자신의 얼굴에 달라붙은 방독면을 벗어 이프린에게 주었다.
“······예. 이걸 받으시고. 대피에 신경써주, 으븝—” 또 다른 방독면이 날아와 율리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율리는 그것도 벗어 이프린 곁의 줄리에게 주었다.
“네, 네. 그렇게 할게요. 이 광장을 지킬게요 저희는.” “예. 부탁드립, 으븝-, 부탁드립니다.” 세 번째 방독면이 율리에게 달라붙었고, 율리는 그제서야 데큘레인과 함께 떠났다.
“······.” 이프린은 그 두 사람의 등을 보았다. 천천히 걷는 데큘레인의 곁에는 강철 조각이 둥둥 떠따녔고······.
“와······.” 곧, 줄리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이프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데큘레인은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테러를 진화했다.
마기 폭발의 연기, 무너지는 건물, 치솟는 불길.
그 전부가 그의 손짓에 의해 통제되었다.
치명적인 마기 구름은 창공에 붙들린 채 내려오지 못했고, 박살난 건물은 안전하게 착지했으며, 화마의 힘은 삽시간에 줄어들었다 “저게 제국의 수석교수인가······.” 넋이 나간 듯한 읊조림은 뒤늦게 출동한 기사들의 목소리였다.
마찬가지로 이프린도 멍하니 있었지만, 곧 그녀의 어깨에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오호라. 데큘레인 저 녀석이 확실히 성장하기는 했구만. 그런데, 저 정도였다니! 언뜻 마력의 질도 격상한 것처럼 보이는데······ 과연 너희 말대로 노력의 천재가 맞았구나?” 로브를 뒤집어 쓴 괴한이 이프린을 들여다보며 방긋 웃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이프린은 경악하여 눈을 부릅떴다.
“로하카—” “쉿. 대륙 최악의 이름을 온동네 소문낼 셈이냐?” 로하칸이 이프린의 입을 막았다. 연신 고개만 끄덕이던 이프린은 머지 않아 자신의 잘못을 떠올리고 말았다.
“저, 저, 그 편지는 우편으로 전달했는데요. 혹시 제가 직접 전달했어야 했다면—” “음? 아, 그려. 우편이면 됐다.” “네, 네······ 죄송합니다. 직접 전달하기에는 너무 멀어서요. 제가 시험도 치러야 하고, 또-” “괜찮다니까. 일단은, 따라오려무나. 인명피해가 없도록 돕는 게 최우선이니.” “아뇨. 저 할 일이 많아서-” 이프린은 곁의 친구들에게 구조의 시선을 보냈지만, 전부 데큘레인을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에헤이. 따라오너라. 내 너에게 줄 것도 있으니” 로하칸은 이프린을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광풍. (1) 테러의 한복판을 거닐었다. 로하칸의 커다란 손에 붙잡힌 이프린은 이어지는 폭격을, 조각나는 건물들을, 터지는 폭탄의 참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이유를 물을 순 없단다. 미친 놈들이 벌인 미친 짓이니.” 쩌저저적─!
무너지는 동상에 로하칸이 마법을 발현했다. 그는 「염동」으로 붕괴를 막으려는 듯했으나, 데큘레인만큼 깔끔하지는 않았다.
“이런. 녀석처럼 정갈하게는 안 되는구나.” 피식거린 로하칸은 이내 본인의 마법으로 일대를 정화했다.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추락하는 건물의 파편들이 흙부스러기로 분해되었다.
폭연은 소멸되었으며, 불길은 하늘로 승화했다.
“뭐였어요 방금?” “나는 「원소화」라고 부른단다. 가공된 물질을 가장 일차원적인 원소로 녹여내지. 아마, 교과서에는 없을 게다.” “와.” 이프린은 감탄하면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어느새 시가지를 벗어나 있었다.
“······여긴 또 어디예요? 순간이동이에요?” 웬 동산이었다. 축제에서 공포로 뒤바뀐 광장은 저렇게나 멀어졌고, 평화로운 오두막이 목전에 있었다.
로하칸은 빙그레 웃고는 숨을 들이켰다.
“오랜만에, 어린 재능 앞에서 내 마법을 선보이는구만.” 그렇게 말하며 마력을 모았다. 그의 손에는 예전에 보았던 세계수의 나뭇가지가 있었다.
쿵─!
로하칸이 세계수로 노면을 찧었다. 그 충격에서 발생한 마법이 파동을 이루어 온천지로 나아갔다.
광장에 진득한 마기를 청소하는 대마법, 「정화의 흐름」.
“이쯤 해줬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수습하겠지.” “예, 예.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대마법을 썼더니 출출하구나. 이프린, 고기를 먹지 않겠냐? 어젯밤 잡은 놈이 하나 있단다.” “······고기요?” 이프린은 의심스레 되물었다.
와구—!
이프린은 고기를 뜯었다.
한 입 한 입이 맛있었다. 숙성은 안 되었는지 로아호크처럼 고급스러운 맛은 아니었지만, 투박한 새로움이었다.
“맛있네요. 제 까다로운 입맛에 맞을 정도면······.” “너는 아무거나 다 잘먹더만?”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로하칸은 바빴다. 그는 이 좁은 오두막 안의 이곳저곳을 빨빨 움직이고 있었다.
“뭘 다 잘 먹어요. 아니거든요.” “한데 네 친구는 어디갔지? 한 명 더 있었잖니.” “······아. 조금 몸이 안 좋아서 쉬고 있어요.” 이프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실비아는 급작스러운 과로로 시험 도중 탈진했다.
듣기로는, 기말 기간 내내 안 자고 안 먹었다나.
“근데 여태 여기서 살고 계셨던 건가요? 어떻게 안 들킬 수가 있었죠?” “음~ 이 오두막은 평범한 오두막이 아니란다. 내가 어찌 그 수십년동안 도망칠 수 있었겠니. 함선과도 같지.” “함선이요?” “그래. 왜 너희는 「제 9 계열」, 혹은 「특화 마법」이라고도 부르더구나.
마법사의 개인적 성향, 성격, 그리고 재능이 맞물려 발현되는 시그니처라나?” 시그니처 마법. 대륙의 마법사라면 누구나 원하는 궁극의 커리어.
이프린은 눈만 깜빡거렸다.
아, 입도 움직였다. 우물우물 고기를 씹었다.
“자. 보렴.” 로하칸이 오두막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벽난로 곁에 인테리어처럼 자리한 어떤 레버를 잡아당겼다.
쿵─!
한 번의 진동. 이프린은 고기를 씹다 움찔 떨었고, 로하칸은 피식거리며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아?” 그 문턱 너머를 본 이프린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녀의 커다란 눈이 오두막 밖 풍경에 고정되었다.
사막이었다.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고, 모래 섞인 열풍만 한가득 밀려드는 사막.
구경하는 10 초 사이에 입술이 말라붙는다.
로하칸이 천연덕스레 중얼거렸다.
“어떠냐? 신기하지?” “이, 이······.” 이프린은 주섬주섬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도, 돌려보내줘!” “하하하.” “웃지, 웃지 말고 얼른! 이 납치범아!” 붕붕─ 붕붕─ 커다란 범죄자의 몸을 서툴게 뒤흔들었다.
“보내줘!” “하하하하.” “보내달라구!” “당연히 돌려보내줄 게다. 데큘레인 고놈에게 혼날지도 모르니.” “······뭐라고요? 왜 데큘레인한테 혼나요.” “음? 너희 둘은 데큘레인 제자가 아니었더냐?” 이프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것보다, 여긴 어디에요 도대체?” “대륙 동부의 카할 사막이다. 이 말도 안 되는 기후에, 적궤의 마을이 여러 군데 존재하지.” “적궤면, 오늘 테러한 주동자들 아니에요?” 로하칸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이프린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적궤는 말살당하겠지. 소수 민족에 대한 탄압이 심해질 테야. 이 사막의 열풍보다 더한 광풍이 불어닥칠 것인데······ 이프린.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저 마법산데요. 정치인이 아니라.” “나도 이제 슬슬, 내 유지를 이을 녀석이 필요해서 말이다.” “유지요?” 로하칸의 비스듬한 시선이 이프린에게 닿았다. 왜인지 서글픈 눈이었다.
“그려. 마법사로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본인의 여명을 알 수 있단다.
나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 “······그럼 데큘레인 교수한테 시키면 되잖아요.” “고놈이 내 말을 듣겠냐?” 이프린은 데큘레인 특유의 에고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만하고 오만하고 존귀하고 또 고매한, 그 독선적인 기품.
“하긴. 누구 말도 안 들을 거예요. 신님이 하라고 해도 하기 싫으면 안할 것 같거든요. 아니, 안하겠죠.” “껄껄껄. 거 참 맞는 말이구나.” 로하칸은 웃으면서 오두막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구석에 널브러진 마법 주머니를 「염동」으로 가지고 왔다.
“자. 이 주머니에는 어린 재능에게 도움이 될 ‘비약’과 내가 작성한 ‘마법 훈련서’ 등등이 있지.” “······근데요?” 순간 이프린은 무척 기대하는 눈이 되었다.
“이걸 너와 네 친구에게 주지.” “······예? 왜요? 의심스러운데요.” 형식적인 의심이다. 이프린의 눈은 이미 마법 주머니에 고정되어 있으니.
로하칸은 작게 웃었다.
“마법사로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타인을 알 수 있단다. 물론 너처럼 단순한 사람에 한하지. 데큘레인처럼, 복잡하고 닫힌 놈은 절대 알 수 없지만.” “예? 실비아는 단순한 아이가 아니잖아요.” “아니. 그 아이는 어쩌면 너보다도 단순해. 아무튼. 받을 테냐?” 로하칸의 말에 이프린은 고민했다.
흑수(黑獸).
그 단어의 뜻은 검은 짐승.
알려진 바로 지상 최악의 범죄자인 이 로하칸은······ 너무 착한 영감님 같다.
“절반은 네 것이고, 절반은 네 친구의 것이다. 이름표도 써 놨단다?” “······.” 치열하게 고민하던 이프린은 힐끗- 흘겨보고는 홱 주머니를 움켜잡았다.
“알았어요.” “좋아. 내 물건을 받았으니, 이제 데큘레인은 너희에게 맡기마. 나중에 와서 부탁도 하나 할 거고.” “예? 부탁은 몰라도, 데큘레인을 왜 저희한테 맡겨요?” “음~ 아직 너희는 모를 테지만, 나는 미래를 조금 구경할 수 있거든.
길어봤자 2 주, 한달에 한하지만 말이다.”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로하칸에게 이프린은 경악했다.
“구라! 아, 아니 거짓말! 미래를 어떻게 봐요?” “놀랄 것은 없단다. 내 짧은 수명의 증거이니. 마법사는 하늘에 가까워질수록 진리를 터득하거든.
끼이익─ 로하칸이 문을 닫았다. 사막의 풍경이 가려졌다.
“나는 이제 길어도 2~3 년이지만, 이 세상에는 주축이 될 마법사가 많지.
이프린 네가 좋든 싫든, 데큘레인 고놈은 그 커다란 축이 될 것이다.” “헐.” “그래. 헐이지. 기둥이 될 수도, 파멸의 단초가 될 수도 있거든.” “저한테는 둘다 엄청 큰 문젠데요. 어떤 미래를 보셨길래요? 자세히 다시 보고 오시면 안돼요?” “하하하.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참. 내 마음대로 막 볼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말을 마친 로하칸은 다시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익숙한 제도의 대로변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이상했다. 하늘이 어둡게 변색되어 있었다. 어느새 밤이 되어버렸고, 테러도 정리된듯 고요했다.
이프린은 멍하니 로하칸을 올려다보았다.
“······영감님은 진짜 마법사 같네요.” “많이 듣는 말이다. 네가 나를 보는 것처럼, 나도 데마칸을 봤던 적이 있었지.” 대마법사 데마칸. 로하칸이 이 정도인데, 그는 얼마나 신비롭고 대단할까.
이프린은 잠시 하늘의 달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로하칸을 보았다. 아니, 로하칸이 서있던 자리를 보았다.
그와 오두막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프린.” 대신 흘러드는 서늘한 음색. 이프린은 흠칫 놀랐다.
너무 익숙해서 너무 무서운 목소리였다.
“교교, 교수님······?” 데큘레인.
그는 깎아지른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말에 이프린의 심장이 철렁였다.
“로하칸을 만났구나.” “아, 아니에요.” “그가 무슨 말을 했지.” 이프린은 긴장했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그림자같은 압박이 온몸 이곳 저곳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프린.” 그가 자신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불렀을 때.
“말해라.” “······비밀이에요!” 이프린은 그의 위압에 대항했고, 그렇게 외치면서 눈을 꾹 감았다.
“······.” 기다리던 질책은 없었다. 다만, 손에 움켜쥔 마법 주머니가 스르륵 데큘레인의 손으로 옮겨갔다.
“······아, 아! 주, 주세요! 돌려주세요!” 데큘레인은 그 주머니 안을 보았다. 이프린은 간식 뺏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했지만, 그는 태연했다.
꿀꺽─ 뺏어가겠지. 죄다 압수당하겠지. 이프린의 심장이 터질 듯 튀어오르던 그때.
“받아라.” “······어?” 데큘레인이 자신에게 주머니를 돌려주었다. 그의 주변 공기는 여전히 음산하고 위압적이었지만, 걱정했던 질책이나 압수는 없었다.
“말도 없이 사라지다니.” “······예?” “너를 찾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물론 그 얼굴과 목소리는 여전히 서늘하다만, 마치 걱정하듯 말한다.
적응이 안 되어서 무에? 거리던 이프린은 이내 그의 손에 쥐어진 포션 한 병을 보았다. 그 포션에는 [데큘레인]이라는 이름표가 달라붙어 있었다.
로하칸 영감님은, 일부러 자신을 데큘레인 근처에 배달한 것이었다.
“경찰서로 가라. 네 친구들이 널 기다리고 있으니.” 그 한마디를 남긴 뒤.
저벅─ 저벅─ 걸어가는 그 길쭉한 뒷모습을, 이프린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실비아는 오랫동안 잠을 잤다.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방에 땅굴을 팠다. 그 안에는 실비아와 날쌘돌이와 곰탱팬더 뿐이었다.
······그런데.
탁─! 탁─!
아까부터 자꾸만, 창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시간은 새벽 4 시 30 분.
탁─! 탁─!
무시하려했지만 거슬렸다.
감히, 어떤 겁 없는 놈이.
탁─! 탁─!
참다 못한 실비아가 커텐을 걷었다.
저택 밑에 멍청한 얼굴이 있었다. 돌멩이 던지려던 이프린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이프린.” 실비아는 다시 커텐을 쳤다. 동시에 돌팔매질이 재개되었다.
탁─! 탁─!
“······.” 딱 세 번 만 더 참을 거야.
계속하면 나는 너를 때려버릴 거야.
실비아는 매섭게 눈을 좁혔지만, 그 마음을 알았는지 돌팔매질이 멈췄다.
아니.
똑똑─ 돌팔매질이 노크로 바뀌었다.
실비아가 한숨을 내쉰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역시나 이프린이었다.
“누가 들어오래. 누가 들여보내줬어. 누가 문 열래.” “아 미안. 레테 하녀님이······” “나가. 나가. 나가나가.” “잠깐만. 이것만 봐. 너도 이거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이프린이 웬 주머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척 봐도 귀해보이는 서적이었다. 한순간 실비아의 눈이 반짝였다.
“로하칸, 그 영감님을 만났어. 우리한테 주는 선물이래.” “······.” “봐봐. 여기 네 이름표도 있잖아. [ 실비아 ].” 문서 수집광 실비아는 이프린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고, 이프린은 그녀 곁에 다가와서 앉았다.
“실비아. 넌 이제 뭐 할 거니?” 자연스럽게 진로를 묻는다.
실비아는 그녀를 게슴츠레 노려보았지만, 이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유섬에 올라갈 거야.” “부유섬?” “거기에서 고위 마법사가 돼서. 데큘레인 그 교수보다 더 대단한 마법사가 돼서······.” 실비아는 자신의 감정을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날의 장면은 그녀에게 거대한 충격이었고, 마음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뒤섞였다.
“돼서?” “그 다음은 몰라.” 이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큘레인 ‘교수님’에서 ‘그 교수’가 되었지만, 그 이유를 물을 만큼 눈치 없는 바보는 아니었다.
“어? 얘, 이거 라디오지? 신기하다. 나 처음 봐.” 이프린이 침대맡 서랍장에 놓인 라디오를 발견했다. 실비아는 그녀를 힐끗거리고는 라디오를 켜주었다.
─······대대적인 테러에 황실은 제국 비상계엄령을 내렸으며, 제국 대학의 마법 교수와 기사단장을 비롯한 핵심 요인들이 소집되었습니다.
“와. 진짜 목소리가 나오는구나.” 그 뉴스를 들으며 이프린은 로하칸의 말을 떠올렸다.
영감님이 말한 ‘광풍’은 어디에서, 어떻게 밀려올까.
─특히, 베르흐트에서 적궤를 옹호하여 마법계는 물론 정재계의 많은 비판을 받았던 데큘레인 수석교수의 귀추가 주목- 뚝.
라디오가 끊겼다. 실비아였다. 왜 꺼- 라고 말하려던 이프린은, 금방이라도 울듯한 실비아의 얼굴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실비아가 말했다.
“들을 거면 너 혼자 밖에 나가서 들어.” “······응.” 이프린은 라디오를 가지고 거실로 나왔다.
어두운 저택.
소파의 책상에 탁 올려놓고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실비아는 어떻게 했더라.” 그런데 아무리 시도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이프린은 멀뚱멀뚱 바라만보다가 말했다.
“말해.” 응답 무.
“······너 왜 말 안하니?” 한참을 기다리던 이프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반항인가······.” 팔짱을 낀 채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근엄하게.
“말하라.” “방금 말했던것처럼 말하라.” “당장 말하라!” “······너, 반항하니?” “아하~ 주인을 인식하는 거구나? 근데, 얘. 실비아가 나도 들어도 된다고 했단다? 허락을 받았다는 거지. 그러니까 입 열어.” “말해.” “말 하라고 했어.” “말 하라니까?!” 난생 처음보는 라디오는 반항이 심했고, 이프린은 하녀 레테가 오기 전까지 녀석과 입씨름을 벌였다.
* * * [ ······제국의 만민 대축제 중 동시다발적인 마기 폭탄 테러가 발발하였다. 축제가 한창인 광장을 비롯하여 총 18 곳이 표적이었다. ] [ 수석교수 데큘레인을 비롯한 마법사와 기사들의 출동으로 진압은 늦지 않았으나, 3 천여 명이 사망하고 1 만여 명이 다치는 등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하였다. ] [ 이 테러를 자행한 일족의 일부는 ‘적궤’로 확인되었다. 그들은 대륙에 만연한 적궤 차별에 반대하며, 또한 블렛 정교를 배교라 멸시하며 테러를 획책했다. ] [ ······지방과 중앙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상소가 치밀었다. 골자는 적궤 탄압이었다. ] [ 반년 전, 수많은 마법사를 살해한 ‘록하크’가 적궤로 밝혀지게 되었다.
마도를 중시하는 레오크 왕국은 적궤를 인종의 적으로 선언했다······. ] “네놈은 어떻게 생각하지? 테러 주동자의 절반 이상이 적궤였고, 그 탓에 지금 어마어마한 난리구나.” 그렇게 묻는 황제 소피엔은 웃고 있었다.
나로서는 대답할 말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알 로스가 언질했던 돌발 이벤트, 제단의 「광풍」은 적궤를 이용하는 것이었으니.
“적궤 확인은 어찌 하셨는지요.” “베탄. 그 가문 놈들이 어떤 방법을 개발했더군.” “어떤 방법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심장을 뜯었더니 결과가 나왔느니라. 확실히, 적궤의 심장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더군. 괜히 마의 혈족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어.” “······.” 대단히 무식한 방법이었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으나, 곧 방편이 없음을 깨달았다.
“유크라인이여. 짐은 이 여론에 어떤 저항을 못 하겠느니라.” 적궤 탄압은 거대한 흐름이다. 애당초, 중반부 메인 퀘스트의 전제 자체가 ‘적궤 탄압’이라 하여도 부족함은 없다.
“중앙, 지방 할 것 없이 상소가 드세다. 짐은 내 신하와 만백성의 뜻에 따를 것이니라.” 최대한 미루어지길 바랐지만, 이 시대는 결국 적궤를 탄압할 것이었다.
“우선은, 눈에 띄는 적궤부터 그들의 땅을 빼앗고, 재산을 몰수할 테지.” 적궤는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
대륙에 섞인 적궤와, 그렇지 못한 적궤.
전자는 외면과 언행에 제국인과 큰 차이가 없지만, 종교와 식성 따위로 구분이 가능하다.
후자는 언뜻 사투리로 말하고, 제국의 변방에 그들만이 거주하는 마을, 지역도 존재한다.
“적궤에 대한 분노가 그만큼 날이 서있느니라. 마법계는 물론이고, 상인 놈들도 돈 벌 기회라며 눈깔을 부라리고 있지. 왜, 부자 적궤도 많다나?” 방아쇠는 이미 당겨졌다. ‘제국 테러’라는 총탄은 격발되었고, 사상자는 만( 萬)단위였다.
나는 즐겁게 웃는 소피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일족이, 자신의 일족에 해악이 될 테러를 벌였군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이한 전개다.
일족을 위한다며 테러를 벌인 놈이, 왜 이 테러가 일족 전체에게 해악이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가.
당연히 이상하지만, 사실 상관은 없다.
이 테러는 그저 ‘구실’에 불과하다.
마침 칼춤을 추고 싶은 망나니에게 사형수를 내어주듯이, 적궤 탄압을 강렬히 원하는 제국 만민에게 그 명분을 쥐어준 것 뿐.
그렇기에 ‘광풍’이다.
이 광풍에 대적해서는 나 혼자 휩쓸리는 수 밖에 없다.
이제부터는 유크라인, 일레이드, 베오라드, 베탄, 너나 할 것 없다.
본격적으로 메인 퀘스트에 접어드는 시기.
적궤 탄압이 옳은 일이고, 적궤 옹호가 잘못으로 돌변하게 된다.
“받아라.” 생각에 잠긴 내게 소피엔이 어떤 신분증을 내밀었다. 나는 그 자그마한 카드를 보았다.
“‘레슈텔’이라 하지. 룬어로 호랑이라는 뜻이다.” [ 달성 보상 : 황제의 친위대 ] ◆ 상점 화폐 +1 ◆ 마력 +50 ◆ 아이템 카탈로그 한 장.
“짐이 따로 창립한 친위대이니라. 너는 짐의 스승을 자청하였으니, 그 품위도 유지할 겸 ‘R’이라는 등급으로 배정했다.” “그렇습니까.” “짐은 네가 유크라인에 걸맞은 위세를 보여주길 기대 중이거늘······ 어디, 너는 아직도 적궤를 옹호할 셈인가?
나는 소피엔을 바라보았다.
소피엔의 저의는 아직 알지 못하겠으나, 이 파도 속에서도 적궤 옹호를 고집한다면, 결말은 고립사일 것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영지 전체가 피말려 죽겠지.
“수용소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수용소라.” “예. 말살보다 덜 자극적이면서, 민중의 지지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디에 지을 셈이지?” “유크라인 영지는 땅이 넓습니다. 워낙 넓지만, 그 중에서도 ‘로할락’이라는 지역이 있지요.” “로할락? 그곳은 멸지와 근접한 지역이 아닌가?” 소피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할락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수가 출몰하는 고위험지역이다, 라고 세간에는 파다하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데큘레인. 너는 적궤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수용소는 그럴만하지만, 로할락이라니. 놈들을 죄다 사지로 보내려는구나?”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만 미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지요.” “흠. 이 테러로 미워할 이유가 생겼다는 것인가······.” 턱을 쓰다듬던 소피엔이 어깨를 으쓱이며 되물었다.
“한데, 그런 혐오시설을 자네 영지에 지어도 괜찮나?” “폐하께서 그만한 보상을 주실 것을 압니다.” “오호라?” 게슴츠레 웃는 소피엔의 등허리에서 꼬리가 솟았다. 잘못 봤나, 눈을 크게 떴더니 고양이였다. 예의 그 붉은털 먼치킨.
“좋다. 네가 수용하는 적궤의 수에 따라 마땅한 보상을 내어주지. 수용소 건립 비용도 중앙에서 지원할 것이다.” “더불어서, 본보기도 필요하겠지요.” “본보기?” “예.” 나는 머릿 속 기억을 떠올렸다.
적궤 중에서도 악인 캐릭터는 존재한다.
적궤라서 나쁜 게 아닌, 다만 악인이라서 나쁜 네임드.
잡아 죽이지 않으면 먼 훗날 메인 퀘스트는 물론, 적궤라는 일족 자체에 해악이 될 놈들.
“몇십명을 사로잡아 처형할 것입니다. 이제 마탑도 방학이라 무료하니, 직접 찾아 나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테지요.” 그렇게 답하자 황제는 말이 없었다.
[ 적궤는 예로부터 마의 일족이라 전해지며······ ] 적궤를 규탄하는 신하들의 상소를 읽던 나는, 침묵이 조금 오랫동안 이어지기에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데큘레인······ 네 믿음을 배신한 대가는 참으로 냉혹하구나?” 답지않게 놀란 목소리였다.
“그렇습니까.” 나는 단 하나의 거짓도 말하지 않았다.
적궤인 ‘범죄자’를 처형할 것이었고, 수용소를 건출할 것이었다. 그 장소는 ‘로할락’일 것이었다. 다만 로할락은, 이제 소문만큼 위험한 지역은 아니게 될 것이었다.
또한, ‘수용소’라는 단어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지만.
그 안에서 뭘 어떻게 할지는 오롯이 내 자율일 것이었다.
“그래. 적궤를 옹호하던 유일한 너였다. 한데 한순간에 이리 바뀌다니?
하하하하.” 소피엔은 그런 내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하긴, 소피엔은 설정 상으로도 적궤에 그리 좋은 감정이 없다.
“안 되겠다. 짐도 열심히 공부하지. 네 믿음을 배신하면 안 되겠느니라!” “5 분 뒤면 늘어지실 것을 다 압니다.” 흥- 소피엔이 입가를 비틀었다.
“짐에게 늘어지다니. 건방지구나. 좋다. 어디, 한 번 해보자꾸나. 오늘은 반드시 1 페이지 이상의 진도를———” “———귀찮아 죽겠느니라. 썩 나가거라.” 방금, 두 말이 거의 겹치듯이 들렸다.
아마 3 분일 것이었다. 황제는 룬어 몇 자를 외다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내 교재를 집어던졌다.
물론 룬어가 마력 뿐만 아니라 정신력도 요하는 힘이기는 하다만······.
“폐하. 5 분-” “에베벱— 에베— 퉤—! 이 빌어먹을 룬어를 다루느라 입안이 떫느니라.
나가라!” “······.” “졸리다. 짐은 잔다.” 소피엔은 자리에 드러눕더니 등까지 돌렸고, 나는 밖으로 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
광풍. (2) 카할 사막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낙타와 천막만으로 살아가는 민족이 있다.
본디 대륙 동부의 원주민이었지만, 이권에 얽혀 추방당한 불우의 일족.
차별과 탄압의 산증인 ‘적궤’가 바로 그들이다.
휘이이이이······.
모래바람이 천막을 두드리는 어둠 속에서, 그들의 지도자는 일족의 미래를 관통하는 고뇌에 휩싸여 있다.
“큰일입니다, 대장로님. 그놈들이 드디어 일을······.” 대장로 ‘주벡렌’은 사막에서 나도는 어두운 회오리를 응시한다.
증오는 저 소용돌이와도 같다. 순환하듯 휘감기며 끊어지지 않는다. 원한은 원한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
그 연쇄를 끝내는 방법은 어느 한 쪽의 절멸, 혹은 화합과 조화 뿐.
후자는 한낱 신기루 따위로 전락한 시대에서, 대장로 주벡렌은 ‘제단’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제단과 적궤의 종교가 언뜻 동일한 탓이었다.
“데큘레인 교수가 로할락에 수용소를 건립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주벡렌의 소극적인 태도에 실망한 적궤의 급진파는 종교적 교리가 비슷한 ‘것처럼 보이는’ 제단에 가담했고, 결국에는 이토록 끔찍한 사건을 저질렀다.
“일족들은 그곳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고요.” 주벡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큘레인.
유크라인의 후계인 그가 베르흐트에서 적궤를 옹호했을 적에는,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당연히 고마웠다.
“그래. 그는 베르흐트에서 우리의 시간을 벌어주었으나, 이번 테러는 우리 일족의 소행이었지. 그 새로운 당주는 배신이라 생각했을 터······.” 주벡렌은 유크라인의 전 당주이자, 데큘레인의 아버지 ‘디카일렌’을 기억한다.
자비라고는 터럭만큼도 없는 품부(稟賦)의 사냥꾼.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조차 길러내지 못한 가엾은 사내.
그는 유크라인의 어느 누구보다 유크라인 다웠지만, 결코 가문의 굴레에 얽메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주벡렌은 그가 두려웠다.
“유크라인을 배반한 대가는 언제나 지독했지.” “······예. 알고 있습니다. ‘악마를 두려워하라’.” ──악마를 두려워하라.
유크라인의 정언이다.
악마에 대한 경각심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유크라인이라는 가문의 전통과 위력을 드러내는 표어.
유크라인은 고대로부터 악마를 사냥하며 가장 악마를 닮아버린 일족이므로, 그들이 두려워하라는 ‘악마’는 악마 그 자체 뿐만 아니라, ‘그대들에게 악마가 될 유크라인 본인’을 뜻하기도 한다.
“광풍이 몰아칠 것이다. 우리의 말은 전부 변명이 될 것이고, 평화로운 규합은 더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적궤의 집단은 낮은 곳에 스미듯 퍼져 있다. 그 중에는 나름 규모를 갖춘 결사대 또한 존재한다.
“설익고 혈기왕성한 일족 전부를 통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꾹꾹 누르면 지금처럼 이탈한 일족이 일을 벌일 테지.” “······예.” “‘나무의 요람’ 녀석들에게 맡기도록 하마. ‘엘레솔’과 ‘카릭셀’이라면 잘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주벡렌은 먼 회오리를 바라보았다.
사막의 모래와 마나를 흡수하며 서서히 거대해지는 돌풍. 그 너머에서, 오래전 떠나보낸 벗들의 얼굴이 보인다.
휩쓸리며 울부짖는 기류가 그들의 비명같고, 토해지는 모래입자가 그들의 핏방울같다.
그 전부가, 자신을 부르는 듯하다.
“그간 내 생각 모자랐다······. 허나, 어찌하겠나. 이런 세상에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대장로 주벡렌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 파묻혔다.
* * * 사흘 뒤, 유크라인 백작령의 하데카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예리엘은 오랜만에 찾아온 당주에게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우리 영지에 수용소를 짓는다니!” “······.” “대답해! 요오오!” 침묵한 데큘레인은 오랜만에 영주석 앉았다. 평소 예리엘의 자리였다.
“나도 적궤는 물론 싫어! 근데 수용소는 아니지! 혐오시설이라고! 요오오!” “요오오 거리지마라.” 데큘레인은 예리엘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한참을 토해내던 예리엘은 씨근덕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서야 데큘레인도 본론으로 들어갔다.
“민가와는 거리가 멀다.” “어디에 지을 건데요롱롱.” “······반항인가.” “뭐가요를레이히.” “다시 묻지.” “반항 아닌데요.” 예리엘은 흥! 코웃음을 쳤고, 데큘레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대답했다.
“수용소는 로할락이 될 것이다.” “······장난해?” 예리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유크라인 백작령의 면적은 유렌 공국, 즉 한 나라에 필적할만큼 넓지만, 가용 토지는 그 절반에 불과하다.
마기 지대인 ‘마릭’은 물론이거니와, 저편의 멸지도 일부는 백작령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유보다는 관할이라는 표현이 옳다. ‘들끓는 마수를 민간에 들여보내면 안 된다’는 의무만 가득한 땅이니.
“아무리 적궤라도 인간이야.” 그 중에서도 ‘로할락’은 멸지와 인접한 최악의 지역이다.
프하이르덴 백작령 최북단의 교도소. ‘레코르닥’에 필적하는 지옥.
“거기는 사람 살-” “토달지말아라, 예리엘.” “······.” 데큘레인의 시선이 칼날처럼 달려들었다. 예리엘은 흠칫 물러났다.
데큘레인의 그늘에서 벗어난 지는 이미 오래되었으나, 이럴 때마다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적궤는 그렇다 쳐. 우리에게 떨어지는 이득은? 하나도 없잖아! ‘수용소가 지어진 영지’라는 별명 뿐인데요!” “구체적인 이익은 곧 황실에서 너에게 전달할테지.“ 영주석에서 일어난 데큘레인이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예리엘은 얼른 달려가 그 빈 자리, 원래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가겠다. 기초 공사에 필요한 원자재는 알아서 차출할테니 그리 알고.” “······하든가 말든가.” 의논도 없이 저 혼자 독단으로 벌인 일. 여기서 떼를 쓴다고 바꿀 수는 없을 테지.
예리엘은 데큘레인을 흘겨보았다.
끼이이익─ 그가 영주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 너머에는 데큘레인의 동행, 황실 기사와 제국 관료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적궤 탄압이 저리도 신나는 모양이었다.
“역시 데큘레인 교수님이십니다. 아, 이곳에서는 유크라인 백작님이라 불러야 하겠군요.” “로하칸을 제압하고, 제국 테러도 한순간에 진화한 백작님과 함께라면, 우주 끝까지도 갈 수 있을 듯-” 끼이이익─ 그 시끄러운 아첨들은 문이 닫히자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하아······.” 고요한 집무실. 혼자가 된 예리엘은 한숨쉬듯 중얼거렸다.
“로할락이라니. 로할락이라니······.” 그 로할락에 사람을 쑤셔박는다는 생각은 예리엘도 차마 해본 적이 없다.
물론 그의 저의는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 실리도 확실하다.
황실에서 마땅한 지원이 내려올 것이고, 적궤 수용소는 레코르닥처럼 ‘인간 성벽’으로 쓸만할 테니.
멸지에서 밀려드는 마수를 막기 위한 성벽.
로할락에 수용소를 놓으면 적궤들은 살기 위하여 스스로 마수를 막을 것이고, 그러다 전멸하여 부서진대도 손해는 없다.
시리도록 냉정하며 잔혹한, 지극히 데큘레인 다운 생각.
“요즘 좀 사람다워지나 싶더니.” 예리엘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요즘 데큘레인은 아예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하긴. 뭐가 사람다운건지 요즘은 모르겠네. 애당초 그 병신들이 테러를 벌인 탓이니까.” 예리엘이 맥없이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영주실의 문이 열리고 집사가 들어왔다.
“이번 주 마릭 지하 통로의 수입이 집계되었습니다” “응. 줘봐.” 별 생각 없이 장부를 보던 예리엘의 눈이 부릅뜨였다. 그 동공에 수백만의 엘네가 박혔다.
“······!” 돈돈돈─돈 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1 주일 수입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잖아! 입소문에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예. 예상보다 훨씬 많은 모험가가 몰려들었습니다. 그 덕에 지하 상가의 매출도······.” 돼지의 꽃을 비롯한 식당, 철물점, 장비점, 마법상점 등등의 물가는 웬만한 도시보다 30%는 비쌌지만, 돈보다 편의를 중시하는 모험가들은 거리낌없이 지불했다.
“조, 좋아, 좋은 일이야. 우리는 침착하고, 이렇게 빨아들이는 현금이 막히도록 두면 안 돼. 또한, 이 현금이 계속 흐르도록 해야해. 알겠지?!” “물론입니다.” 적궤든 뭐든, 예리엘에게 최우선은 자신의 영지 뿐이다.
제국도, 황실도, 황제도, 그 무엇도 사실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
어려서부터, 그리고 어른으로 자라난 지금까지.
예리엘에게 ‘자신의 것’이란 오직 이 영지 뿐이었으니.
“돌아가봐.” “예.” 집사를 돌려보낸 예리엘은, 이내 두 손을 양볼에 얹었다.
헤헤헤- 헤헤헤헤- 아이처럼 기뻐하면서 다시 장부를 보았다.
예상 수입의 자그마치 10 배.
······못참겠다.
흥분을 참지 못하겠다!
“꺄아 꺄아~ 꺄꺄~” 꾀꼬리마냥 노래부르며 턴테이블을 틀었다.
♩♬~ ♩♪♬~ ♪♩♬ ♪~ 울려 퍼지는 클래식. 그 속에서 예리엘은, 조금 서투른 왈츠를 추었다.
* * * 무더운 더위와 내리쬐는 태양.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모래만 없다 뿐이지 사막에 가까운 황무지.
로할락.
게임에서나 보던 그 풍경은 삭막하다 못해 황폐하다.
“교수님.” 곁에서 율리가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우물쭈물거리던 율리는 말했다.
“수용소를 건축하기에는······ 지반이 너무······ 약한 것 같지 않습니까······?” 조심스러운 물음.
그녀의 가문 프하이르덴에게는, 적궤와 제단에 대한 악감정이 충분하다.
아마 율리도 자이트에게 언질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토록 수줍게, 완곡하게 돌려서 ‘로할락은 너무하지 않나요’라 말하는 것일 테지.
“괜찮다. 말살보다는 수용이 나아.” 나는 이 로할락에 가능한 커다란 수용소를 지을 것이다.
먼 훗날, 어쩌면 여러 마도가문이 지금부터 착공 중일 수용소에서는, 문자 그대로의 학살이 벌어질 테니.
가능한 많은 적궤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이곳에서······ 사람이 살아 남을 수 있습니까······?” 나는 「대부호 재력가」의 눈으로 보았다. 로할락 일대의 수원지(水源地)가 한눈에 포착되었다. 저 지하수를 기준으로 터를 잡으면 될 것이었다.
“율리.” “예.” “나를 믿어라. 네가 우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 나는 안심하라는 미소를 지었고, 이내 율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 여기 원자재가 준비되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외침이 들렸다. 다수의 마차가 실어온 강철과 철골이었다.
부우우웅──!
나는 「염동」으로 그 전부를 띄웠다.
오늘 목적은, 수용소의 테두리를 장식할 철벽. 「염동」은 건축에 참 좋은 마법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읏!” 작은 신음이 그 무엇보다 통렬하게 내 심장을 건드렸다. 나는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아. 괜찮습니다. 선인장을 밟았나봅니다.” 율리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더운 건지, 아니면 아픈 건지.
턱에 고여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
어두운 밤. 유크라인의 영주성.
로할락에서 돌아오자마자 잠에 들었던 율리는, 어느 순간 급히 몸을 일으켰다. 심장에서 영혼이 튕겨나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하아······ 하아······.” 커다란 고통 이후, 상반신이 굳어버린 듯 답답했다. 한참 동안 호흡만 반복하던 그녀는 이내 객실 밖으로 나왔다.
“후우······.” 유크라인 영주성의 복도.
그 화려한 통로를 율리는 거닐었다.
“율리.” “!” 갑작스런 부름에 율리는 몸을 곤두세웠다.
저편의 복도, 어둠 속에 데큘레인이 서있었다.
그가 자신을 보며 말했다.
“몸은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 율리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워진 웃음이었다.
“······” 데큘레인은 말없이 다가왔다. 그 표정이 왜인지 처연했다. 율리는 일부러 밝게 물었다.
“황실의 임무는 언제부터입니까아~?” “······뭐?” “아······ 큼. 크흠. 목이 좀.” 헛기침을 한 율리는 다시 평소처럼 말을 이었다.
“다 들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저도 이제, 어느 정도 유도리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제 가슴에 손을 얹고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고개를 끄덕인 데큘레인이 답했다 “다음 주다.” “예. 절대 실패하지 마십시오. 실패한다면 화낼 것입니다.” “······.” 데큘레인은 침묵한 채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문득, 꽤 예전부터 이어지던 고뇌가 다시금 되살아났다.
“······율리.” “예.” 자신이 바뀌었음을 알린 것이 율리에게는 오히려 독이었다면.
애당초 데큘레인이라는 인물은 율리의 곁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면.
「악당의 운명」은 문자 그대로, 자신에게 ‘선인이 될 기회’조차 박탈하려는 것이 아닌가······.
“율리.” “예? 왜 두번이나 부르십니까?” 데큘레인이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쓸었다.
율리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가만히 받아들였다.
창밖에 스며든 보름달이 그를 비추었다.
“······.” 수정처럼 푸르게 반짝이는 눈. 그 안에 데큘레인의 슬픔이 바다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네 부상이 내 탓인 것을 안다.” “······새삼 왜 그러십니까. 그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그날의 보상은 충분히 받았습니다.” 데큘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마릭에서 있었던, 김우진이 데큘레인의 일기로 보았던, 그 순간의 장면이 떠올랐다.
“아니다. 그건 네가 받은 게 아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기어코 데큘레인을 포기하지 않은 기사, 율리.
그녀에게 회복이 불가능한 상처를 입힌 보상은, 프하이르덴이 유크라인에게 진 빚 5 천만 엘네의 탕감.
정작 장본인인 율리는 단돈 한 푼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받지 못했다.
그 당시의 데큘레인은 그러했다. 오히려 그녀에게 ‘임무 실패’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웠다.
그만큼이나 아버지의 책망이 두려웠고, 율리는 그 전부를 이해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든.” 율리의 머리카락을 다듬던 손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혹시 몰라서, 혹은 두려워서, 어루만지지도 못한 채 다만 조심스레 얹은 손.
“반드시 내가 되돌려 놓겠다.” 율리는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옛날같았다면 무서웠겠지만, 지금은 왜인지 안심이 되었다.
“······아니요.” 율리는 은은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심장의 통증은 조금 더 심해졌지만, 가슴 한 켠은 오히려 따스하게 차오르는 듯했다.
“제가 스스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데큘레인에게 그 미소는 달빛처럼 닿았다.
“그러니, 수단은 가려주십시오.” 직후. 율리는 돌연 그의 귓가에 손가락을 얹고 딱-! 튕겼다. 그의 표정이 애매모호하게 바뀌었다.
율리는 후후- 거리면서 말했다.
“표정이 너무 좋지 않으십니다. 얼굴을 피십시오. 교수님의 무표정은 학생들이 너무 무서워합-” 그때, 먀옹─!
돌연 울리는 커다란 울음.
“히헥!” 율리는 기이한 소리를 내며 데큘레인의 품에 돌진했다.
쿵─!
거의 몸통 박치기 수준이었지만, 데큘레인의 단단한 몸은 그녀를 쉽게 받아냈다.
“······?” 율리는 그 강철같은 가슴팍이 이상했다. 톡톡—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리고는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데큘레인.
“어디서 동화를 읽고 왔어. 놀란척이 너무 진부해. 이러려고 나를 붙잡았나?” “아, 아니! 아닙니다! 저, 절대 놀란 척이 아니라! 아니 애초에, 절 부른 것도 교수님이잖습니까! 저, 저기!” 크게 물러난 율리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갑자기 저 고양이가······.” 먀옹─!
고양이가 울면서 성큼 다가왔다. 석탄처럼 새카만 고양이였다.
“아는 고양이입니까?” “글쎄. 수행인이나 예리엘이 키웠다면 저렇게 꼬질꼬질하지는 않겠지.” 먀옹─! 고양이는 울면서 율리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너를 간택한 것 같다만.” “······.” 율리는 데큘레인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먀옹— 먀옹— 거리면서 몸을 부비적거리는 모습이······ “주인을 찾아줘야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율리는 고양이를 한 손에 들고 후다다닥—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 * * 방—학— 방—학— 방—학— 방—학— 아아— 방학이다— 이프린은 사흘 동안 신나게 놀았다. 물론, 로하칸 영감님이 내어준 마법 훈련서와 데큘레인의 「순수 원소의 이해」 복습은 꾸준히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직 데큘레인의 중간고사 마지막 문제를 풀지 못했거든.
“후.” 그러나 오늘은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
“후우.” 이프린은 부유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솔다 승격 시험」에 신청하는 날.
몸과 마음이 덜덜덜 떨린다.
“이피!” 줄 선 이프린의 뒤로 줄리가 나타났다.
“줄리, 왔어?” “응. 다른 애들은 오늘 좀 늦게 온대. 너 OT 끝난 다음에, 우리 집에서 고기나 먹자.” “당연하지!” 이프린은 세상 진지하게 대답했다.
오늘만큼은 반드시 로아호크를 섭취할 것이었다.
─탑승 준비해주십시오.
“왔다. 가자 이피.” “응.” 이프린과 줄리아는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입장권은 값비쌌지만, 교수 추천서 덕분에 무료였다.
우우우우웅— 1 초에 수십미터를 상승하는 마법 엘리베이터.
띵─!
1 분 쯤 지나니 부유섬에 도착했다.
이프린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메지세이온으로 들어갔고, 1 층 ‘프로마’ 플로어의 카운터로 다가갔다.
“저, 솔다 승격 시험 신청하러 왔는데요.” “서류와 신분증 부탁드립니다.” “넵.” 백팩에서 각종 증빙 문서 묶음과 신분증을 꺼냈다.
“데뷰탄 이프린. 확인했습니다. 승격 시험 비용은 1 만 엘네입니다.” 1 만 엘네.
이프린은 후- 심호흡을 하고 카드를 내밀었다. 손이 후덜덜덜 떨렸다.
“예. 오리엔테이션은 저 강당에서 진행됩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직원이 카운터 뒤편의 강당을 가리켰다.
“아, 네.” “이피~ 잘해~ 나는 마법 상점 좀 다녀올게~” “······으응.” 요즘 ‘돼지의 꽃’이 분점을 냈다는데, 그게 대성공했는지 줄리는 아예 갑부가 되었다.
한달에 무슨 1~2 만 엘네씩 쓰는 것 같단 말이지.
부럽다.
“아 긴장되네.” 아무튼.
이프린은 흡!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고 강당 안으로 쭈뼛쭈뼛 들어갔다.
“어?” 드넓은 강당의 좌석에서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했다.
노란 머리 실비아. 이프린은 그 곁에 다가가 앉았다.
“역시 너도 있네. 안녕?” “······.” 실비아는 이프린을 힐끗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프린도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기에,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응? 실비아, 여기 모험가도 있는 것 같지 않니?” “······.” “맞지?” “흔한 일입니다.” 입을 다문 실비아 대신, 이프린의 옆자리가 대답했다. 웬 20 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모험가 중에는 마법사도 많으니까요. 마탑 출신 모험가는 필수 학점을 채우지 않아도, 모험가 자격증을 2 년 이상 유지하면 시험이 가능합니다.” “아하~ 그래요?” “또한 올해는 모험가 시험과 솔다 승격 시험이 동시에 시행된다고 하더군요.
아마, 어떤 과정은 겹칠 겁니다.” 모험가와 부유섬. 사실 두 집단은 무지막지하게 다른 듯 보여도, 어느 정도 동질성이 존재한다.
부유섬의 초기 멤버와 모험 길드의 창립자가, ‘레헤플’이라는 인물로 똑같기 때문이다.
“아 정말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그러자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모험가 자격증을 보여주었다.
“와아? 모험가시네요?” “예. 반갑습니다. 3 년차 ‘카릭셀’입니다.” “3 년차면, 굳이 솔다 승격 안해도 되지 않아요?” 모험가는 보통 연차로 구분이 가능하다. 자격증만 따고 띵가띵가 놀다가는 1 년 만에 자격 압수이기에, 쌓인 연차가 곧 모험가의 실력을 증거한다.
“하하. 제가 자식이 셋이나 돼서 말입니다. 솔다와 데뷰탄, 임무의 단가 차이가 거의 2~3 배거든요.” “아하······ 잠깐, 세 명이요? 몇 살이신데요?” 이프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겉보기는 늙게 봐도 20 대 중반인데.
“서른 셋입니다. 결혼은 한 10 년 전에 했지요.” “헉!” 이프린이 놀라워하며 입을 가린 그때.
“이제부터, 간단한 OT 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OT 는 솔다 시험의 실제 감독관 중 한 분께서 맡아주셨습니다.” 마법사의 말과 함께 강당이 소등되었다.
그 뒤, 단상 위로 남자 마법사 한 명이 등장했다.
“······!” 순간, 이프린은 크게 놀랐다. 당장 그녀의 옆자리인 실비아도 몸을 크게 떨었다. 거의 진동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반갑다.”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첫 인사.
“나는 원소를 관장하는 ‘모나크’ 등위(等位)의 마법사.” 오늘, 솔다 승격 시험 오리엔테이션의 감독관은.
“데큘레인이다.” 제국대학의 수석교수, 데큘레인이었다.
광풍. (3) 이프린은 실비아를 힐끔거렸다. 처음에는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다. 그만큼 그 떨림은 거대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잦아들었다.
‘······고백했다 차였나.’ 유의미한 가설이었다. 고개를 주억인 이프린은 다시 데큘레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솔다 승격 시험은 총 세 단계로 나뉘어 있다. 단, 첫 번째 단계만 통과해도 솔다 승격은 확정이다. 두 번째, 세 번째 단계는 차후의 등위 승격에 관여하는 추가 시험이지.” 세 단계를 모두 클리어한 솔다는 다음 승격에 보너스를 받는다.
솔다라고 다 같은 솔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승격 시험은 수련도에서 진행된다.” 데큘레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섬의 풍경이 떠올랐다.
이프린도 익히 아는 섬, ‘수련도’였다.
“특정 기간 동안 합숙이 진행될 것이며.” 딱─!
다시 한 번 튕겨진 손가락. 이번에는 웬 기숙사의 모습이었다.
“이 숙소 안팎에서 솔다로서의 자격을 시험받게 될 것이다.” 이프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연, 전국에서 몰려든 탓인지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오늘은 0 단계 시험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조교수 알렌이 나타나 시험지를 나눠주었다. 이프린은 그 내용을 힐끗 보았다. 정체 불명의 마법진 6 가지가 기록되어 있었다.
“간단히 마법을 해석하는 능력을 파악한 뒤 수험증을 내어주도록 하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실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단상 위로 올라가 데큘레인에게 시험지를 제출했다.
이미 해답은 기록되어 있었다.
“교수님-” “데뷰탄 실비아. 합격.” “······저-” “수험증을 가지고 돌아가라.” 데큘레인이 수험증을 내밀었다. 실비아는 그를 올려다보면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내, 홱 손을 뻗어 그 수험증을 낚아챘다.
그렇게 강당을 나서는 실비아의 표정을 보며 이프린은 확신했다.
‘저 녀석, 차였구나!’ * 이프린과 실비아는 함께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의 손에는 수험증이 있었다.
“축하해. 이번에도 1 등이네.” 이프린이 말했다. 실비아는 그런 그녀를 흘겨보다 한숨쉬듯 중얼거렸다.
“······멍청한 이프린.” “오! 말했다!” “누굴 벙어리로 알아.” 실비아는 뚜벅뚜벅 빠르게 걸었다. 이프린은 그녀를 뒤쫓으면서 웃었다.
“여태 벙어리였잖아. 벙어리 풀렸으니까, 우리. 같이 시험 잘 보자?” “저도 부탁드립니다.” 갑작스레 끼어든 중저음의 목소리. 흠칫 놀라 돌아보니, 예의 ‘카릭셀’이었다.
서른 세 살, 애 세 명 딸린 유부남.
“카릭셀 씨. 은근 빨리 푸셨네요?” “하하. 뭐, 기본 아니겠습니까.” 참고로 1 등은 실비아였고, 2 등은 이름 모를 사람이었고, 이프린은 3 등이었다. 카릭셀은 4~5 등 사이겠지.
카릭셀이 물었다.
“한데, 데큘레인 교수와 잘 아는 사이십니까?” “알고 모르고 할 거 없이, 강의 수강생이에요.” “아~”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실비아는 어느새 저 멀리에 있었다. 이프린은 헐레벌떡 따라붙었다.
“얘. 같이 좀 가지?” “시끄러. 너 혼자 가.” “아 정말, 너는 진짜 왜 그러니? 왜 이렇게 삐딱해 사람이.” “건방진 이프린. 네가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 ······그렇게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카릭셀은 열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둔 채 지켜보았다.
“일레이드의 여식인가.” 적궤의 비밀 결사 「나무의 요람」. 그 소속인 카릭셀은 요즘 상당히 복잡한 마음이었다.
“······데큘레인.” 오늘 만난 데큘레인.
그는 적궤 입장에서 최고로 위험한 인물이다. 당장 로할락에 수용소를 짓는다는 미친 계획을 그대로 실현한 교수이니.
“일단은 관찰인가······.” 카릭셀은 이프린과 실비아의 뒤를 슬그머니 쫓았다.
솔다 시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저 두 아이는 아직 모른다. 그러니 얼마간은 곁에 있는 게 옳다. 당장 데큘레인의 인연이기도 하고 말이다.
“여러분들~ 같이 좀 가십시다~ 밥 사드릴게요~” 카릭셀은 어벙하게 웃으며 달려갔다.
* * * ─적궤의 처우와 관련된 ‘임퓨리엄 회의’ 결과. 황실은 적궤 구분을 위한 혈마법 개발에 적극 지원하는 한편, ‘적궤자진신고법’을 제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국 출신의 적궤가 자진 신고할 경우······.
상공을 떠다니는 부유섬의 비행선.
부르르르- 라디오를 들으며 생각하던 중, 품 안에서 자그마한 진동이 일었다.
나는 안주머니의 수정구슬 보관함을 꺼냈다. 고급스러운 상자 안에 다섯 개의 수정구슬이 놓여 있었다.
─들리나.
알 로스의 음성이었다.
“도청의 위험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주제에 따라 다르지.
“좋아. 말해라.” ─네가 말한 놈들의 소재를 파악했다. 받아 적어. 제국 서부, 로드맨 자작령, 페텐······.
나는 알 로스에게 어떤 네임드의 소재를 요구했었다. 이런 면에서 알 로스의 정보망은 대단히 믿을만했으니.
“확인했다.” ─어떻게 할 건가?
“뭘 묻나. 당장 저번 주에 적궤 탄압령이 시행되었는데.” ─수용소 행인가?
“아니. 죽여야지. 갱생이 불가능한 쓰레기들은, 미꾸라지처럼 물 자체를 더럽힐 테니.” ─풋.
알 로스는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아마, 이 녀석은 이 적궤가 어떤 적궤인지 아는 거겠지.
오늘의 타겟, 제크렉·제르텐·제케튼.
이 삼형제는 내가 아는 적궤 네임드다.
「삼형제의 테러」라는 돌발 이벤트의 주인이자, 「삼형제의 스크롤」이라는 성가신 함정 아이템의 발명가.
지금 당장이라도 쳐죽이고 싶은 미친놈들이지만······.
─이제 곧, 수련도에 도착합니다.
아쉽게도 이 비행선의 목적지는 수련도.
솔다 승격 시험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두우우웅······!
비행선은 작은 떨림과 함께 육지에 창륙했고, 지상에 내린 나를 익숙한 목소리가 불렀다.
“어! 저기 데큘레인이다!” 이사장이었다. 연안가에 서있던 이사장은 아장아장 달려와 웬 신문을 건넸다.
“데큘레인 교수! 이 신문 보세요!” “······신문?” 나는 크게 놀랐다.
이사장이 신문이라니?
세계 멸망의 전조인가?
받아보니, 실제로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언론이자 신문.
‘더 저널’의 특선 기사였다.
“이사장이 신문을 읽는다라······ 세계선이 어긋난 것인가.” “뭐라고요? 사람 놀려요 지금?! 이번에 테러도 있었고! 적궤 사건도 있었잖아요! 애국심 고취한다면서 더 저널에서 특선으로 편성한 기사예요!” 나는 그 표지를 힐끗 보았다.
「 제국의 최강자 13 인 : 일곱 번째, 수석교수 데큘레인 」 “하루에 한 명 씩 공개한다는데, 그 중 일곱 번째가 데큘레인 교수님이라고요!” 제국의 최강자 13 인.
그 제목부터가 심상찮았다.
“······흥미롭군요.” 나는 기사를 읽었다.
[ 적궤의 테러 현장. 지옥도로 돌변한 그 광장에서 가장 신비하며 마력적인 마법사는 단연 데큘레인이었다. 가히 공간 전체를 지배하는 듯하던 위용.
목격담만으로는 믿기 힘들 장면을 그는 선명한 사진과 영상으로 남겼다······.
······따라오는 루머로는, 제국 최악의 범죄자 ‘로하칸’과도 막상막하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루었다고.
3 년 간의 고뇌 끝에, 어떤 벽을 넘은 수석교수 데큘레인의 무력은 이제,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 차마 끝까지 읽지 못하고 이사장에게 반납했다.
“첫 번째는 자이트였고, 두 번째는 이사크였고, 세 번째가 저였거든요?!
드디어, 이제 저와 비슷한 급간까지 치고 올라온 걸까요?!” “그만 두시지요.” 제국의 최강자.
나를 제외한 나머지의 면면은 참 아득한 수준이다.
──「 제국의 최강자 13 인 」── 1. 겨울의 왕, 자이트.
2. 황실 기사단장, 이사크.
3. 이사장, 아드린느.
4. 황제의 기사, 케이론.
5. 아름다운 수라, 가네샤.
6. 야차 ‘로건’ 7. 수석교수 ‘데큘레인‘ ─────────── 저 어마어마한 이름 사이에 낀 ‘데큘레인’은 얼마나 어색한가.
헛다리도 이런 헛다리가.
“왜요? 데큘레인 교수를 이만큼이나 인정하고 있다는 건데요! 전 3 위라서 지금 화났어요! 당장 이사크 찾아가서 죽일거예요!” “그러진 마시지요. 서로 죽고 죽이라고 이런 기사를 낸 것이 아닙니다.” “교수님도 너무 낮아서 화난 거 아녜요?” “저는 겸손합니다만. 7 위라니 너무 높군요.” 물론 내 전투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마법 뿐만 아니라 육체도 전투에 올인한 수준이니, 웬만한 중급 이상 네임드와 견주어도 꿇리지는 않을 터.
특히 상대가 악마라면, 「유크라인」이라는 핏줄이 덕에 자신감이 충만하다.
······아무리 그래도 전체 7 위는 아니지.
“기사 내용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요? 신기하네요. 교수님은 좋아할 줄 알았는데?” “됐습니다. 이제 본론부터 들어가시지요. 호출은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긴. 당연히 승격시험 문제지라.” 언젠가 들었던 사투리였다.
나는 그곳을 돌아보았다. 분홍 머리의 마법사가 히죽 웃었다.
“오랜만이요, 데큘레인 교순님?” “······교순?” “교수요 교수, 교수 말이다 교순님.” 룬어 강연에서 보았던, 에테르 등위의 로제리오였다. 여전히 발음이 에러인 그녀는 긴달프와 함께 있었다.
“맞아요! 저희가 승격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교수님 역할이 있어요!” “무엇인지요.” “‘보안 책임자’예요! 제국의 일곱 번째 최강자잖아요! 테러가 한창인데, 시험 도중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아요?!” “······.” 일곱 번째 최강자.
계속 듣자니 머리가 아프다.
그러나 첫 번째 솔다 시험은 충분히 참여할만하다. 슬슬 돌발 이벤트와 트리거 등등이 많아지는 시기이니.
“알겠습니다. 다만, 자세한 내용은 서면으로 받지요. 오늘은 할 일이 있습니다.” “할 일이요?” 이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긴달프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허허. 할 일이 무엇인지 물어도 되나?”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사냥입니다.” * * * ······제국, 로드맨 자작령 근교의 도시 ‘페텐’.
어느 민가의 눅눅한 지하실.
“됐어! 이제 스크롤만으로 폭발을 일으킬 수 있어!” 제크렉·제르텐·제케튼.
일명 ‘제제제 삼형제’는 크게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 시발! 빌어먹을 제국 놈들 면상에 박아버리자고! 지금 당장 옆집부터 부술까 형?! 그 집 애새끼 존나 마음에 안들었는데!” 차남의 독기어린 말에 장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 이 스크롤을 고위 사제님들께 전달하는 게 먼저다.” 스크롤 폭탄.
별다른 매개도 필요 없고, 마력을 공급할 술자도 필요 없다. 게릴라 테러에는 안성맞춤인 획기적 발명품.
“그래~ 이거봐. 제단이 옳은 선택이었다니까! 제단 분들은 우리랑 이상이 맞아. 지원도 빵빵하게 해주고.” 막내가 말했다. 이번에는 장남도 만족스러운 듯 피식거렸다.
“그래. 우리는 버러지같은 제국과 제국민을 말살하고, 다시 신의 시대가 펼쳐지도록 제단을 도울 것이다.” “옳소! 옳소!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그때 차남이 헐레벌떡 올라가 맥주를 가지고 왔다. 삼형제는 각자의 잔에 맥주를 쏟았고,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신의 시대를 위하여.” “위하여!” 그 외침과 함께.
형제의 맥주잔이 맞닿은 그 순간.
───.
소리 없는 강철이 쇄도했다.
천장을 뚫고 강하한 강철 조각. 그 납색의 직선이 장남의 목을 관통했다.
“컥!” 짧디 짧은 단말마.
기이할만큼 급작스러운 사태.
한순간에 무너진 장남을 두 형제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꿈을 꾸는 듯 비현실적이었으나, 현실을 현실로 알리는 울림이 일었다.
쿵─!
지하실의 문과 전등이 동시에 파괴되었다. 공간에 칠흑이 내려앉았고, 그 어둠 속에서.
뚜벅— 뚜벅— 서늘한 발소리가 귓가를 얼어붙게 만든다.
“다, 당신.” 두 형제는 푸르게 반짝이는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형형한 안광이 누구의 것인지,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데큘레인······.” 그 이름이 불린 것만으로도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힌 푸른눈이 자신들을 노려본다.
그러나 넋을 잃은 것도 잠시. 장남의 죽음을 받아들인 두 형제는 분노로 끓어오른다.
“우리, 우리 형을—!” 그 즉시 목강철이 쇄도했다. 두 형제는 마력을 모아 배리어를 방사했지만, 열 자루의 목강철은 이 비좁은 공간을 터트릴 듯 휘돌았다.
콰과과과광──!
쏟아지는 타격에 배리어는 금세 박살났다. 그럼에도 목강철의 난도질은 멈추지 않았다.
끄아아악─! 크아아악──!
피육이 찢어지는 섬뜩한 소리.
처절하게 메아리치는 비명.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급히 뒤따라온 기사들이 지하에 불을 피웠다.
드러난 것은 벌집이 된 시체가 세 구. 적나라한 참상에 그들은 흠칫 놀랐다.
“죽, 죽어버렸네요.” 어느 기사가 중얼거린 순간, 데큘레인의 표표한 시선이 꽂혔다. 기사 모두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죽여야했지.” “예, 예! 맞습, 무조건 맞는 말씀이십니다!” 기사는 공포에 질린 채 대꾸했다. 데큘레인은 ‘사람이었던 그것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가지고 나가라.” “예! 예! 알겠습니다!” 여섯의 기사는 급히 시체를 짊어매고 나갔다.
잠시 혼자가 된 데큘레인은 삼형제의 마법적 유산을 응시했다.
[ 삼형제의 지면(紙面) 마법 ] 이 삼형제는 게임 플레이를 하면서도 지독하게 만났다. 「삼형제의 폭탄 스크롤」, 「삼형제의 기폭 스크롤」 등등······.
뭐만하면 폭발하면서 플레이어를 세상 귀찮게 만드는 미친 발명가. 악인과 광인의 카테고리에 모두 속하는 네임드.
“······이 기술은 내가 그대로 쓰도록 하지.” 데큘레인은 놈들의 연구 성과를 노획한 뒤 돌아섰다. 그대로 계단을 올라 지상에 섰다. 기사들은 마차에 시체를 싣고 있었다.
기사 한 명이 물었다.
“이제 돌아가실 겁니까?” “아니.” 데큘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이 소문이 퍼지기 전에, 가능한 많은 짐승들을 잡아들여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답하는 데큘레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주하는 기사들은 이유를 알 것 같은 오한과 공포를 느꼈다.
참고로, 오늘 율리를 대신하여 데큘레인의 호위를 맡은 그들은 황제 친위대의 말석이다. 등급으로는 ‘F’로 R 등급인 데큘레인과의 차이는, 조금 과장 보태어 데큘레인이 자살하라 명령하면 곧장 할복하는 게 도리인 수준.
“저기오는군.” 그때 데큘레인이 먼 곳을 가리켰다. 보고를 받은 치안 부국장, 프리미엔이 다가오고 있었다.
“프리미엔.” 성큼 달려온 프리미엔은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데큘레인은 프리미엔의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적궤 셋을 잡았는데, 나머지 처리는 맡기지.” “······.” 프리미엔의 눈이 마차 위의 시체에 닿았다. 표정 변화는 전무했다. 그녀는 자신을 숨기는 게 익숙한 인물이었다.
데큘레인이 말했다.
“대답?” “예.” 프리미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 * ──────────── ······8 월 1 일.
리아는 오늘 지하 통로에 왔어요. 모험 길드에 모험가 시험 신청도 했고요.
이 지하 통로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건축되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스토리 분기가 워낙 많기도 하고, 이 통로 덕분에 마릭 공략이 더 수월해지면, 메인 퀘스트에도 큰 도움이니까요.
“리아야. 이거 맛있다?” “네. 맛있어요.” 방금 가네샤가 말했어요. 지금 돼지의 꽃이라는 고급 식당에서 로아호크라는 고기를 먹고 있어요. 맛있긴 한데, 내 취향은 역시 단 건가봐요.
“어. 방금 레텍 지나갔다. 쟤 안죽었구나? 신기하네.” 지하 통로에는 모험가가 참 많아요. 네임드라 할만한 사람도 간혹 보이지요.
참, ‘게렉’이라는 광인 네임드도 만났어요. 살짝 눈이 마주쳤는데 심장이 멈출 뻔 했어요.
게렉. 대단히 무서운 광인 네임드. 저 녀석이 화나면, 통로 하나는 금세 지워질 테니까요.
“근데 가네샤. 마릭가서 뭐 할거예요?”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물었어요. 이 식당에는 아이스크림이 무료 제공이거든요. 현대든 이세계든, 잘나가는 식당 특징인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 알죠? 가끔 아이스크림이 공짜인 고기집 있잖아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리아씨.” 가네샤는 영 계획이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개인 스펙은 이 세계관에서도 수위권에 꼽히는 사람인데, 일상적인 면에서는 너무 털털하고 칠칠맞아서 영 믿을 수가 없어요.
“마석도 좀 캐고, 사냥도 좀 하고, 여러가지 할 일은 많긴 한데.” “으응~” 마석. 그리고 사냥!
좋네요 좋아요. 공짜 쩔을 받을 기회예요.
마릭은 아직 제 수준으로는 힘들지만, 가네샤는 전부 다 죽일 수 있을 거거든요.
“리아는, 괜찮아? 무섭지 않아?” “네. 괜찮아요.” 칼로스와 레오가 나이 제한에 걸려 들어오지 못한 것도 무지막지하게 좋아요.
귀찮은 녀석들, 안 보이면 걱정되고 허전하다가도, 거의 맨날 사람을 개빡치게 하거든요.
이 일상에 익숙해지는게 조금 그렇긴 하지만, 나쁘지는 않아요.
계속 성장하다보면 언젠가는 율리도, 실비아도, 자이트도, 알 로스도, 데큘레인도, 황제도, 그리고 신님도 만날 수 있겠죠.
신을 만나서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달라고 할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성장, 단 것.
성장, 단 것.
아니, 단 것 말고 성장.
오직 단 것.
아니 오직 성 장.
성 장 !
지금 내 마음 속에는 그것 밖에는 없어요······.
오늘의 일기 끝.
P.S) 이 일기를 언제까지 쓸 지는 모르겠지만, ‘나’라는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능한 오래도록 이어갈 생각이에요.
──────────── 일기를 작성한 리아는 주변 눈치를 스윽 살피고는 마법을 발현했다. 일기장은 한낱 기류가 되어 그녀의 몸에 문신처럼 달라붙었다. 플레이어의 필수 특성 중 하나인 「인벤토리화」 였다.
“후아······ 맛있게 잘 먹었다. 그럼, 리아. 이제 갈까? 레일리 기다리겠다.” “네~ 가요.” 리아는 맑게 웃으면서 식당 밖으로 나왔다.
* * * 나는 마탑 집무실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알렌은 뭔가 오묘한 얼굴이었지만, 곧 맑게 웃으며 내게 신문을 내밀었다.
“교수님, 이거 읽어보셨어요?” 예의 「제국의 최강자들」 이었다.
일곱 번째 최강자, 데큘레인.
“읽었으니 치워라.” “앗, 네에! 그러면, 이거요!” 알렌은 두 번째 서류를 건넸다. 이번에는 조금 좋은 문서였다.
「드렌트의 휘하 지원서」 “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드렌트와 이프린은 확보했다.
이프린은 역대급 재능이고, 드렌트도 나름 수재이니, 이 둘만 있어도 나름의 학파를 꾸릴 수 있다.
나는 무심코 알렌을 보았다. 알렌은 무표정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조금 어색하게 웃었지만, 이상하게 서늘했다.
“······가도 된다.” “네에~” 알렌은 집무실을 나섰고, 자리를 바꾸듯 율리가 들어왔다. 율리의 어깨에는 예의 고양이 ‘까망이’가 함께였다.
“교수님. 사흘 뒤입니까?” 그렇게 묻는 율리는 나보다도 심각했다.
“그래. 사흘 뒤다.” [ 황궁 퀘스트 : 악마의 거울 ] ◆ 상점 화폐 + 10 ◆ ???
악마의 거울.
드디어, 이 퀘스트가 목전으로 다가왔다.
“······예. 그런 점에서, 제가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여태 고민을 하던 것인데.” 율리는 세상 진지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나, 나는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그날. 이 까망이를 만나던 날. 저는 교수님의 육체에 깃든 가능성을 파악했습니다.” “나를 껴안은 날 말이냐.” “아, 헥, 그, 엑, 아니! 그게 아닌! 까망이를 만난 날입니다.” 율리는 얼굴이 확 붉어졌지만 금세 다잡았다.
한 번 놀린 건, 두 번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게 조금 아쉽기는 하다.
“교수님의 몸은 타고난 전사의 몸입니다. 한데, 황궁의 임무는 분명 위험할 테지요.” “······그래서?” “그러므로, 저. 율리 폰 데이아 프하이르덴이.” 율리가 제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교수님에게 체술과 검술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 나는 율리를 바라보았다.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조금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침묵과 적막이 우리를 휘감았다.
“······.” “······.” 그게 무안했던 듯, 섭섭했던 듯.
율리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이내 입술을 삐죽이더니, 스르륵─ 슬라임처럼 소리 없는 뒷걸음질로 도망갔다.
그제서야 나는 율리를 불렀다.
“잠깐. 돌아와라. 알겠다. 너에게 배우지.” 살짝 열린 문틈 사이.
─됐습니다. 제 가르침이 흔한 줄 알고 계시는 듯한데, 제 제자가 되길 바란 기사가 몇명이나 되는지 아십니까? 저도 아쉬운 것 없습니다. 아쉬운 것 없다고요······.
잔뜩 삐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각자의 미래. (1) 제도의 시가지와 멀지 않은 위치에, 호수와 개울은 물론 뒷산도 품고 있는 금싸라기 땅.
유크라인 저택의 부지는 넓다.
넓어도 너무 넓다. 요 근래 제도의 땅값이 폭등한 덕에, 저택 부지만 팔아도 중소 영지의 1 년 예산은 나올 것이다, 라는 말은 더 이상 우스개소리가 아니다.
제도 근교의 3 층 저택을 자력으로 매입한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는 율리도, 이 유크라인 저택에서의 하루하루는 꽤나 즐거운 듯하다.
하긴, 아침 조깅은 저택 뒷동산을 몇바퀴 돌면 끝나고, 검술 훈련은 운동장이 넓어 아무런 걱정 없이 기술연마가 가능하며, 저택의 삼시세끼는 3 성급 레스토랑에 준하니.
본디 데큘레인은 이 저택의 광활한 부지에 대단히 엄격한 기준을 두었지만, 나는 깔끔하기만 하다면 시종이 뭘 하든 상관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조심스레 건네는 ‘수입 서류’에도 웬만하면 허가를 했다.
듣는 귀가 탁월한 시종들은 이역만리의 이국적인 도기와 식기, 원두와 먹거리, 꽃의 씨앗과 카펫 따위의 소문을 들었고, 그 전부를 유크라인의 이름으로 수입했다.
덕분에 부지의 정원과 화원에는 온 세상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자라났고, 저택 내부는 온갖 풍취와 향미로 부풀었으며, 맑은 호수와 개울에는 여름 휴가를 지내기에 알맞은 공간이 조성되었다.
율리는 그중에서도 호수를 좋아하기에, 이따금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으면 어김없이 그 잔디밭에 누워있다. 새로 얻은 반려동물 까망이와 함께.
······이렇듯, 고급스러운 아늑함과 부담스럽지않은 풍요가 사람을 끌어안는 장소.
잠시라도 방문한 모두가 찬사를 아끼지 않는 곳.
파리지옥처럼 안란한 낙원.
바로 유크라인 저택이다.
“체술에 있어서는 기초체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택의 운동장에서 율리가 말했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경갑 차림이 아니었다.
회색 체육복.
“그러니······ 교수님?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율리가 갸웃거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갑옷이 아닌 차림을 오랜만에 보는데, 고작 그건가.” “아~ 그렇군요.” 내 불평을 그저 사실로 받아들인 율리는 제 옷을 주욱 잡아당겼다.
“기사단 시절부터 썼습니다. 꽤 좋은 물건입니다. 재질이 프무렌이라 앞으로도 20 년은 거뜬할 겁니다. ” “그렇군.” “예. 체술에 있어서는 기초 체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금세 돌아온 본론.
율리가 목검을 움켜쥐었다.
“우선 시범을 보여드리지요. 가장 간단한 ‘회전 동작’입니다.” 그리고는 휘이익─! 두 번 휘둘렀다.
처음에는 전방을 사선으로 그었고, 다음에는 돌아서서 후방을 그었다. 그 연계는 거의 동시였다. 언뜻 보기에는 율리가 두명이었나 의심할 정도.
“회전 동작. ‘스핀-무으브’라고도 합니다.” “스핀 무브.” “스핀 무으—브.” “······스핀 무브.” “흠. 아무튼 기사의 세계에서는 아주 기초적인 동작입니다만, 허리와 무릎에 걸리는 부하가 크기에, 기초 체력과 근육이 부실하면 부상의 위험이 있습니다.” 율리가 내게 목검을 건넸다. 나는 목검을 움켜쥐고 동작을 따라했다.
휙─! 휙─!
내가 생각하기에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 율리의 눈에 물음표가 잠깐 반짝였다. 그 상태로 두어 번 깜빡거리더니 다시 말했다.
“한 번 더 해보십시오.” 휙─! 휙─!
똑같이 반복했다.
“?” 두 번째 물음표. 율리는 나무 그늘 아래 놓아둔 제 커리큘럼 스크립트를 힐끗거렸다.
“언뜻 잘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마지막으로 한 번 만더 해보십시오.” 나는 예의 스핀 무으-브를 또 다시 선보였다.
“?” 그 눈동자에 세 번째 물음표가 떠올랐을 때 말했다.
“인정해라. 난 따라할 수 있다.” “······따라하실 순 있어도. 부상의 위험이 클 겁니다.” “안 다친다.” “그렇게 생각하실 순 있어도, 부상의 위험이 클 겁니다.” “앵무새인가?” “그래서 기초체력이 필수적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율리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제 딴에는, 나를 여타 마법사처럼 약골로 생각하고 기초부터 시작하려던 거였겠지.
“오늘은 우선 달리기입니다. 준비 되셨습니까?” “그래.” “예. 갑니다!” 율리가 달렸고, 나도 뒤따랐다.
헛둘- 헛둘- 율리의 달리기는 규칙적이었다.
나는 그녀와 두어발자국의 간극을 유지하면서 달렸다.
헛둘- 헛둘- 헛둘- 헛둘- 도중에 힐끗거린 율리가 말했다.
“열심히 쫓아오시는군요.” “그렇지.” “예. 계속 그렇게 하십시오!” 달리기는 계속되었다.
내 체력이 기사와 비견하여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철인」은 꽤 고급 특성이고, 단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괜찮겠지.
“괜찮으십니까?” 율리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 “으음.” 그러자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기초 훈련은 그렇게 이어진다.
“속도를 조금 더 올리겠습니다!” “그래.” 내가 예상외로 잘따라붙었는지, 율리는 내심 기를 죽이려는 듯 속도를 올렸다.
헛둘헛둘- 헛둘헛둘- 헛둘헛둘- 헛둘헛둘- 눈 깜빡할 사이에 열 바퀴 정도를 돌았다.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오······.” 율리는 여전히 멀쩡한 내가 놀라운 모양이었다.
「철인」의 기초체력이 이전보다 훨씬 성장한 느낌이었다. 아마 「마력의 질」 이 4 등급으로 격상한 덕분이겠지.
“이제 그만 하시겠습니까?” “아니. 괜찮다.” “······예.” 달리기는 계속되었다.
속도는 전력질주에 가까웠고, 어느새 몇 바퀴를 돌았는지 셀 수도 없게 되었다.
“······.” 문득, 나는 율리의 옆모습을 보았다. 율리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듯했다.
뒤늦게 깨달았다.
심장에 부상이 있을 때, 가장 커다란 문제는 기초 체력.
그 중에서도 심폐지구력이다.
다리를 멈췄다.
“그만 하지. 이제 힘들다.” “······그렇습니까?” 율리가 쓰게 웃었다. 스스로도 몸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안색이 어두웠다.
“교수님 기초 체력은 충분하십니다. 따로 운동을 하셨나봅니다.” 나는 말없이 율리를 보았다.
문득, 땀에 젖은 그녀가 아름다웠다.
“······율리. 네가 기사잖아.” “예. 그렇습니다만.” 율리는 당연한 말을 왜 하냐는 듯 갸웃거렸다. 나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니 열심히 했지.” “······.” 율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머리카락이 부스스 떠올랐고, 그 귀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귀여운 반응이었다.
“농담이다. 나 살려고 했다.” “······예, 예. 그렇습니까.” 정말 나 살려고 한 운동이었지만, 율리의 얼굴에는 이미 수줍은 홍조가 올랐다.
“식사나 하러 가지.” “예······.” 나는 먼저 식당으로 들어갔고, 율리는 머뭇머뭇 뒤따랐다.
함께 식사를 하는 내내 율리는 내 눈치를 살폈다.
식사가 끝나자 시종이 루왁커피를 내왔고, 그 고급 원두를 바라보는 율리의 눈이 올망졸망 빛났다.
“감사합니다~” 한 모금 한 모금. 소중하게 마시는 그녀를 보며 나는 미소를 숨겼다.
“율리. 슬슬 준비하지. 오늘은 황궁 교습이다.” “예. 알겠습니다.” 다시 호위 임무를 시작할 시간.
율리의 표정이 암사자처럼 돌변했다.
* * * ······황성의 대전(大殿).
‘황제 주재 회의’라는, 몹시 귀찮은 전통의 날.
소피엔은 권좌에 앉아 신하들을 굽어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신하들이 작성한 상소문이 가득했다.
“전하, 마릭 개방이 야기할 문제가 염려되옵니다. 지금이라도 되돌리는 것이 옳사옵니다.” “적궤야말로 시의적절한 일이며, 현재로서는 적궤에만 집중하는 것이 맞다고 사료되옵니다.” “적궤 탄압은 필시 저항을 일으킬 것인데, 그때 마릭에서 혼란과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제국은 안팎에서······.” 소피엔은 머리가 아팠다. 저 빌어먹을 놈들의 말을 듣기가 싫었다. 너무 귀찮아서 당장이라도 자살할 지경이었다.
“마릭 개방은 이미 결정한 일이다. 이상 듣지 않겠다.” “““아니되옵니다 전하!””” 신하들의 집단 외침에 소피엔의 이마 핏줄이 돋아났다.
선황폐하께서는 언제나 말씀하셨······ 신하의 상소를 이토록 무시하지 않으셨······ 모험가들이 마릭을 무분별하게 들쑤시면 악마가 출몰······ 등등.
놈들은 미친 사람처럼 이것저것을 씨부렸고, 그때 마침 케이론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폐하. 데큘레인이 도착했습니다.
소피엔은 그 말을 듣자마자 씨익 웃었다.
“되었다! 교습 시간이다. 썩 물러나도록!” “아니되옵니다 전하! 아직 그 무엇도 결정된 바가-” “룬어의 교습이니라. 짐이 데큘레인에게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너희들은 모르나?” 룬어.
소피엔에게 무적의 필살기.
룬어를 사사하는 이 날만큼은 신하들도 어찌 건드리지 못한다.
“아니면, 그 귀중한 교습 시간을 낭비하라는 말인가? 감당할 수 있겠나?” “······.” “룬어다 룬어. 룬어가 뭔지 모르나?” 그제서야 신하들은 꿀처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소피엔은 만족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겠다. 회의는 이것으로 끝이다.” ······.
“왔느냐.” 제국의 황궁, 배움의 장.
황제는 오늘따라 반가운 데큘레인을 미소로 맞이했다.
“예.” “오늘은 참 좆같은 회의가 있었느니라. 전통적인 황제 주재 회의라 빠질 수도 없었지. 병신같은 신하들이 이것저것 캐물었다. 내 한마디 한마디 꼬투리 잡는 꼴이 역겨웠어.” “그렇군요. 이제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의 룬어는 ‘ ”.다니입’ט ִיס ָה “······.” 데큘레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수업을 시작했고, 황제의 눈은 도끼처럼 날카롭게 되었다.
“따라해보시지요. ‘ ” .’ט ִיס ָה “베.” “베가 아니라. ‘ ”.’ט ִיס ָה “······.” 소피엔은 턱에 손을 괴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잇새에서 흐르는 한숨이 그 권태를 알렸다.
“ ”.ט ִיס ָה “······한데, 데큘레인. 너는 짐의 정책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를 않는구나?” “ ”.ט ִיס ָה “너는 그 빌어먹을 룬어만 씨부렁거린다.” 신하들에게 시달린 탓에 오늘 학습 의욕은 0 에 가깝다.
데큘레인도 그 사실을 깨달았고, 하는 수 없이 소피엔의 말에 집중했다.
“신하 놈들은 왜 마릭을 개방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안달이었다.
이유를 알든 모르든 반대할 것이면서, 또 정작 그 연장선인 적궤 탄압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면서 말이다······.” 말을 멈춘 소피엔은 나른한 얼굴로 데큘레인을 보았다.
“데큘레인. 너는 짐의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신하들이 왜 마릭 개방에 반대하는 것 같느냐?” “······.” 제국의 신하들이 마릭 개방을 반대했던 이유. 마릭이 이미 개방되었음에도, 필사적으로 그 문을 닫으려 노력하는 이유.
데큘레인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
즉답이었다.
“마석 공급량은 이미 충분한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마릭을 개방하여야 하는 것인지. 그런 논조로 다들 반대하는 것이겠지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생각합니다.” 소피엔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이내 입가를 비틀었다.
“흥. 그러냐. 너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명백히 실망한 투로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으나, 데큘레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다음을 이었다.
“한데, 이상합니다. 마석의 공급량이 어째서 충분한 것일까요. 광산은 분명 한정되어 있고, 수백년 간 그 채굴이 진행되었는데 말입니다.” 소피엔의 미간이 다시 날카롭게 돌변했다.
“계산상으로는 당연히 폐광되었어야 할 광산에서도 자꾸만 마석이 튀어나오지요. 광석을 소유한 상단들은 그 이유를 ‘채굴 기술의 발전’이라 둘러댑니다만.” “······.” 데큘레인의 그 말.
그녀는 슬그머니 등허리를 세웠다.
“또한 상단들은 그 마석의 시세를 저들끼리 정합니다. 시세 뿐만 아니라-” “공급량도 결정한다. 「로팔라시아」, 「베르모니아」, 「크루막토」. 이 세 상단이 주체다. 그 탓에 선황께서도 그 세놈들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어.” 데큘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거만하게 앉았던 소피엔의 몸이 그에게로 기울었다.
“황제가 한낱 상단의 눈치를 살핀 것이다. 웃기는 일이지.” 소피엔이 파악한 대륙의 내막은 간단하다.
지금 거대 상단들이 유통하는 마석의 70% 이상은, 사실 ‘제단’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수백년간 사람의 떼가 묻지 않은 멸지에도 마석 광산은 존재하므로.
소피엔은 데큘레인의 입을 주시했다.
얼른, 이 놈의 다음 말을 듣고 싶었다.
“예. 그러나 마릭이 개방되면 그 안의 무수한 마석이 채굴됩니다. 마릭에서 나는 마석은 상인의 유통망이 끼어들 여지가 없지요. 오직 황실의 권한입니다.” “덕분에 그 병신같은 놈들은 지금 비상도 비상이 아니지. 마릭의 마석은 그놈들에게 치명적인 위험이다. 놈들에게 돈을 받아 처먹은 신하들이 자꾸 지랄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 소피엔의 만면에 미소가 떠올랐다.
데큘레인은 그녀의 미소에 응했다.
“예. 그렇기에 마릭 개방은 폐하의 힘을 강화할 수단입니다. 또한, 거대 상단의 수장 중에 적궤가 있다면-” “그렇다. 그들 중 적궤가 있지. 짐은 안다. 이렇게 적궤를 조지면, 어디선가 ‘제단’이 딸려나올 것도 안다.” “제국에는 외적이 아닌 내적이 많군요.” “그렇기에 제국인 것이다.” 자신과 데큘레인의 문답은 마치 한 사람의 것처럼 이어진다.
소피엔으로서는 난생 처음 겪는 공감이었으나, 가장 핵심은 이 다음이었다.
이 핵심을 알지 못하면 데큘레인은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걸 아시면서도. 폐하께서는 내부가 아닌 외부의 멸지를 원정하겠다, 저에게 선언하셨지요.” 황제는 내부의 적을 알면서도 외부의 멸지에 칼끝을 겨누겠노라 말했다.
그러기 위하여 적궤를 탄압할 것이라 말했다.
그 논리의 흐름은 서서히 황제의 흉중에 닿고 있었다.
소피엔은 아주 오랜만에 아이처럼 흥분했다. 데큘레인의 말을 기다릴 수가 없어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마석은 첫 단추일 뿐이다. 마릭 개방으로 ‘제단’ 놈들의 애간장이 닳아오르면, 내 직접 ‘멸지 원정’을 선포할 것이다.” “멸지는 제단의 본거지이므로, 놈들은 위협을 느끼겠군요.” “위협을 느낀다면, 그 버러지같은 놈들이 할 짓은 자명하다.” “원정에 나서느라 텅 비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제국을 습격하겠지요.” “──그렇다면, 바로 그때.” 소피엔은 데큘레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한 존재의 올곧은 동공. 그 푸른눈이 수정처럼 아름답다.
“그들을 몰살하시겠군요.” “나는 놈들을 몰살할 것이다.” 거의 동시에 뱉어진 말.
이미, 황제의 미소는 입꼬리에 걸려 있다.
권태와 나태의 화신인 소피엔에게, 이 따위 통찰은 자연스러웠다.
노력은 단 한 조각도 들이지 않았다. 다만 숨쉬듯이 알게 되었다.
그녀의 지혜는 그런 종류였다.
아마, 이 데큘레인이라는 교수 놈도 그러할 것이었다.
“그렇지. 한데 짐은 너에게 처음부터 멸지 정복을 알렸느니라. 너는 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 “발설했다면, 저는 폐하의 적이 되었겠지요. 폐하께서는 오히려 제가 입방정을 바라셨겠지만.” “······오호. 거기까지 다 알고 있었나.” 데큘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이 전부가 ‘스토리 라인’의 일부이기 때문이었다.
“아하하.” 소피엔은 자신의 주변인들에게 습관처럼 시험을 내었다. 여태 그 시험에서 실패하지 않은 자는 케이론, 그리고 오늘날의 데큘레인 뿐이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폐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황권의 강화와 제단의 궤멸입니까?” “······.” 빙그레 웃던 황제의 얼굴이 금세 가라앉았다.
자신을 이해한 데큘레인에 대한 기쁨은 채 5 분도 지속되지 않았다.
“모르겠다.” 소피엔은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지독하게 나른한 그 모습은, 어쩐지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짐도 모르겠느니라.” 낮은 중얼거림.
그 넋두리에 대답처럼 돌아오는 말.
“그렇다면, 함께 찾도록 하지요.” “······?” 잠시 귀를 의심했다.
······함께 찾도록 하지요?
그 어떤 신하도, 심지어 케이론조차 감히 자신에게 하지 못한 말이었다.
“······.” 소피엔은 말없이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참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어떤 ‘의무감’이 가득했다.
그녀의 권태는 데큘레인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전체의 과제였지만, 그것을 모르는 황제는 영 어리둥절했다.
“그 목적을 찾기 위한 교습입니다.” “······.” 황제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도 데큘레인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윽고 소피엔이 손을 휘저었다.
“됐다. 이제 가라. 네 잘생긴 얼굴도 이제 슬슬 질린다. 남들보다는 좀 오래 버틴 듯하지만, 다음부터는 분장이라도 하고 오도록.” “아직 수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따라해보시지요. ‘ ”.’ט ִיס ָה “······뭐라?” “‘ ”.’ט ִיס ָה 데큘레인은 끈질겼고,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의 뜻을 들어주었다.
─ .ט ִיס ָה 룬어가 발현되었다.
그 뜻은 ‘비행’.
공간 전체가 부웅─ 떠올랐고, 그 감응을 확인한 데큘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가라.” ······.
교습 마법사, 즉 데큘레인이 떠난 ‘배움의 장’.
딱딱한 바닥에 누운 소피엔은 천장을 주시하며 중얼거린다.
“단 한 마디의 거짓이 없다.” 무의식적인 거짓말.
입에 발린 아첨.
습관적인 부정 혹은 긍정.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할 수 있을 터인데.
“또한 모르는 것이 없다. 백과사전을 인간으로 바꾸면 저 놈이 될 것 같다.” 소피엔은 데큘레인의 자기확신이 흥미로웠다.
놈은 자신의 생각, 계획, 근거, 그 전부를 알았다.
자신이 ‘멸지를 정복하겠다’는 말을 했던 첫만남의 순간부터, 이 마음을 통째로 꿰뚫은 것이었다.
“목표를 찾아주겠다는 오만한 헛소리도······ 어이 케이론. 너도 들었지.” 천장을 노려보던 눈을 비스듬이 내려 케이론을 보았다.
놈은 웃고 있었다.
“뭘 쪼개지.” “그게 말입니다, 폐하.” “뭐.” “혼사는 언제 치르실 것입니까.” “······케이론. 사형을 원하나?” 소피엔은 자신의 기사를 노려보았다. 나른함이 온몸을 잠식한 지금, 드물게 분노가 솟았다.
“짐을 자극하려했다면 성공이다. 칭찬하지. 네 과업 중 하나로 추가해라.” “그것이 아닙니다. 신하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병신들이.” 소피엔의 나이는 스물 초반. 딱 적정한 혼기다. 물론 살아온 세월은 그 곱절일 것이나, 아무튼 신체 나이가 그러하니.
“짐을 감당할 사내, 있을 리 없다.” “······.” 케이론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뭐.” “······.” 다만 저 문을 바라보았다. 닫힌 문이었다.
소피엔은 그 뜻을 금세 파악했다.
“데큘레인?” “······.” “미친놈인가. 남의 것을 뺏는 취미는 없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정치 실력이 늘었구나, 케이론. 기사 주제에.” 케이론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귀찮으니 너도 썩 꺼져라.” “예.” 케이론은 기다렸다는 듯 나갔다.
그를 쫓아낸 소피엔은 가만히 생각했다.
“데큘레인이라.” 그놈은 나와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니 그딴 성격을 가진 것도 이해는 간다. 세상에는 워낙 멍청한 놈들이 즐비한데, 그런 바보천치들을 상대하다 보면 열이 뻗치고 꼬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다행인가.” 소피엔은 피식 웃었다.
적어도 ‘동류’라 부를만한 놈을 하나 발견했다.
여태 긴가민가했지만, 오늘 확신했다. 덕분에 얼마간은 꽤 즐거울 수 있겠지.
지금 소피엔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풋. 건방진 놈. 뭐, 함께 목적을 찾아? 그것을 위한 교습?” 소피엔은 큭큭거리며 방금 전의 대담을 회상했다.
그리고, 한 시간 뒤에 질렸다.
······한 시간.
그녀에게는 꽤 오랜 시간이었다.
* * * 한편, 이프린은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건, 칫솔, 비누, 샴푸, 비상식량, 복습책,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
그것을 바라보는 이프린의 눈이 커진다.
“숙 성 로 아 호 크!” 줄리의 아버지가 꼭 합격하라며 선물로 준 로아호크 네 조각. 현재 가장 소중한 식량.
시험 도중 가장 지치고 슬플 때 하나씩 구워먹을 작정이다.
“후······ 이제 갈까.” 백팩을 맨 이프린은 심호흡을 하고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우선 행정관에 들러 후원자님에게 편지를 보낸 뒤, 교정을 거닐었다.
요즘은 장마철이라 날씨는 그닥이었다.
“언제 오시려나······.” 이프린은 교정의 시계탑 아래. 그 약속 장소에서 기다렸다.
오늘, 부유섬에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있었다.
“이프린 씨~ 여기예요~” 때마침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하녀장 레테 님이었다. 운전석의 그녀가 빵빵- 경적을 울렸다.
“네~” 이프린은 맑게 웃으며 뒷좌석에 앉았다. 옆의 실비아는 영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탑승 자체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실비아, 우리 같이 잘하자. 나도 3 단계까지 갈래.” “······건방진 이프린.” “헤헤.” 저 대사가 없으면 하루의 실감이 안 난단 말이지.
이프린은 마냥 웃었고, 실비아는 웬 변태보듯 기겁하더니 슬그머니 창가에 달라붙었다.
“자, 갈게요~” “넵!” 그들은 함께 부유섬으로 출발했다.
부우우웅─ 창 밖 흘러가는 풍경을 보며, 이프린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데큘레인의 밑에서 자신이 할 것들. 아버지의 과거와 그 죽음.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이프린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 반면, 실비아는 오직 데큘레인에 대해 생각했다. 떠올릴때마다 가슴이 아팠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듯 그녀의 마음에는─어쩌면 길테온의 계획대로─ 장작이 되어줄 사람이 생겼다.
그 장작은 너무 거대하고 메말라서, 아마 그녀가 대마법사된 이후에도 사위지 않을 것이었다.
“어? 저기 저 아저씨?” 그때 이프린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실비아도 그곳을 보았다.
전에 만났던 유부남, 카릭셀이 길가에 서있었다. 카릭셀도 두 사람을 발견한 듯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오! 이프린, 실비아 씨! 마침 잘 됐네요~ 같이 태워주시면 안됩니까~?
레테가 실비아의 눈치를 살폈다. 실비아는 한숨을 내쉬었고, 그 뜻은 곧 응낙이었다.
어차피 시험장에서 만날 사람. 굳이 나쁘게 대할 필요는 없으니.
각자의 미래. (2) 황제 교습을 마친 나는 율리와 함께 황궁의 복도를 걸었다. 율리는 황궁에서도 경계 태세를 유지했고, 그러던 중 졸랑이 나타났다.
“유크라인 공. 지하에 사건이 생겼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졸랑과 함께 황궁의 지하에 도착했다.
황궁의 어둠, 즉 「악마의 거울」로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런데.
“닫혔습니다. 곤란하게 되었지요.” 졸랑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나는 지하의 문을 보았다. 타르처럼 거멓고 메마른 조직에 뒤덮여 있었다.
“언제부터 이 상태였지.” “평범한 문이었지만, 오늘 돌연히 이렇게 되었습니다.” 졸랑이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마구잡이로 흔들었지만 열리지 않았다.
“기사 분들의 힘으로도 열지 못했습니다. 하여 어쩔 수 없이 전부 돌려보냈습니다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아직 때가 아닌 거겠지.” “때라면······ 유크라인 공. 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시는 겁니까?” “······.” 이 지하에 무엇이 도사리는지, ‘황궁의 어둠’이라는 퀘스트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이미 보았다. 플레이어였던 시절 클리어했으니.
“글쎄다.” 황궁의 어둠이란, 이 황궁의 주인이 품은 어둠.
즉 ‘소피엔의 과거’를 뜻한다.
따라서 이 지하에는 소피엔의 과거가 있다. 「악마의 거울」은 그 과거와 이어지는 통로다.
의문은, 악마는 왜 굳이 소피엔의 과거에 관여하려는가.
이유는, 소피엔의 죽음이 곧 이 세계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말했듯 소피엔이 죽으면 [ 게임 오버 ]다. 시스템 상 그렇다.
그만큼 대단히 중요한 퀘스트이나, 의외로 지금 당장 급한 건 또 아니다.
소피엔은 회귀자이므로, 그 과거를 탐험하는 퀘스트도 ‘수십 회차’의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들어가질 않았는데 어찌 알겠나. 돌아가겠다. 문이 열리면 그때 연락하도록.” “예. 그러도록 하지요.” 졸랑은 썩은 표정으로 돌아섰고, 율리는 의문스레 중얼거렸다.
“수상하군요. 어째서 황궁의 지하가 저렇게 되었을까요.” “너는 몰라도 돼.” “예?” “끼어들 생각도 말도록.” “······.” 율리의 눈이 뚱하니 좁혀졌지만, 이 지하의 과거는 그녀가 알아서는 안 되었다.
소피엔의 죽음.
그 전말에는 ‘프하이르덴’의 옛 당주, 즉 율리의 아버지도 일부 관여하였으므로.
“가지. 오늘은 일정이 많다.” “······예.” 우리는 함께 황궁을 나왔다.
성문 근처, 자동차에서 대기하던 렌이 수첩을 보며 말했다.
“다음 일정은 유크라인 백작령의 로할락입니다.” 그렇게 알리는 렌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랐지만, 나는 내색 않고 차에 올랐다.
“출발하지.” “예.” * * * 한편, 이프린과 실비아와 카릭셀은 함께 부유섬에 올랐다.
부유섬의 신비한 풍경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솔다 승격 시험의 장소인 수련도로 가려면 ‘비행선’이라는 신문물이 필수였다.
“휴우······.” 비행선 승강장에 도착한 이프린은 긴장과 기대를 동시에 했다. 당연히, 여태 비행선을 타기는커녕 눈으로 본 적도 없었거든.
“다들 가실까요?” 그나마 카릭셀이 있어 다행이다.
실비아는 아무런 말이 없는 반면, 모험가 출신인 카릭셀은 박학다식하고 말도 많으니.
“그냥 타면 돼요? 뭐 할 거 없어요?” “그럼요.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편안히 올라오시면 됩니다. 저 먼저 갑니다~” 카릭셀이 먼저 승강장의 높다란 계단을 올랐다. 이프린은 그 등을 멍하니 바라보다 뒤따랐다.
“으-!” 계단을 오르려던 그녀의 로브 후드를 실비아가 잡아당겼다.
“왜 갑자기?” “멍청한 이프린.” “뭐?” 이프린의 미간이 의문으로 좁혀졌다. 실비아는 말없이 그녀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아~” 곧 뭔가를 깨달은 이프린이 피식 웃었다.
“신발? 너 누굴 진짜 바보로 아니? 나도 알거든?”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사실 몰랐지만, 그래도 비행선인데 신발은 당연히 벗어야겠지. 카릭셀도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편안하게’라고 했으니까.
“먼저 올라갈게~” 이프린은 귀족처럼 우아하게 계단을 올랐고, 비행선에 타기 전에 신발을 벗었다. 그 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신발장을 찾았다.
“······어라.” 신발장이 없네.
개인 책임인가?
그때, 탑승객 한 명이 이프린의 발을 보더니 볼을 씰룩였다. 그 반응이 이상해서 주변을 살폈다.
······다 신발을 신고 있었다.
“풋.” 뒤따라온 실비아의 비웃음이었다.
실비아는 보란 듯 구두를 또각거리며 지나쳤고, 이프린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 저게 진짜!” 후다닥 신발을 신고 달려갔다.
그러던 중, 익숙한 얼굴과 머리카락이 언뜻 눈에 띄었다.
“······알렌 조교수님?” “이프린. 신발 다시 신었네.” 좌석에 앉은 실비아가 말했다. 그 빵빵한 볼에 웃음이 가득한 것 같았다.
“아~? 응 그래~ 재밌었니~? 너 재밌으라고 일부러 당해준거란다. 너 요즘 우울한 것 같아서 말이지······.” 이프린은 자존심을 부리며 지정 좌석에 앉았다. 실비아의 옆자리였다.
─305D 비행선, 이제 출발합니다. 안전벨트를 착용해주십시오.
안내 음성을 듣자마자 안전벨트를 찼다. 그 몸짓을 유심히 살피던 실비아가 이죽거렸다.
“안전벨트는 할 줄 아네.” “흥. 너 재밌으라고 일부러 당해준거라니까?” 부우우웅— 그 순간 비행선이 떠올랐다.
“으허어!” “너 뭐해.” 이프린은 본능적으로 실비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흠칫 놀란 실비아는 그녀를 뿌리치려했지만.
부우우웅─ “으허허어어.” 비행선이 흔들리자 이프린의 손이 억세졌다. 상당한 근력이었다. 실비아는 아둥바둥거리며 이프린을 밀어냈다.
“이거 놔.” “으허어어어, 뜬다. 뜬다, 읏, 으허어어······ .” “바보야 이것 좀 놔. 놓으라구.” 그럴수록 이프린은 오히려 온몸에 달라붙었다. 팔로 실비아의 허리를 꽉 움켜쥐었고, 이마를 어깨에 박았다.
“달라붙지 말고 멍청아. 이 멍청이가.” “잠깐, 나 멀미. 나 멀미나.” “!” “어, 어윽. 왜 이러지. 알러지 있나.” “비행선 알러지가 세상에 어딨어 멍청아. 아, 너 안 돼. 너 토하지마.
토하면 죽어. 토하면 나한테 죽어······ 앙.” * ······수련도에 도착한 이프린과 실비아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숙소를 배정받았다.
뭔가를 구경할 겨를은 없었다. 이미 밤이 늦어 온 세상이 어두웠다.
“데뷰탄 실비아와 이프린. 두 분은 503 호입니다. 시험은 48 시간 뒤에 시작하니, 그때까지 편히 쉬면됩니다. 이 서류에 날인을 찍고, 문 밖 「 고로의 입」에 넣어주세요.” “네~” 대답하면서 503 호의 문을 연 이프린은 크게 놀랐다.
방이 넓었다. 기숙사라기에 대학 기숙관을 떠올렸는데, 훨씬 넓었다.
“······우리 집보다 좋잖아?” 굉장히 커다란 방에 침대가 두 개. 책상도 두 개. 냉장고도 두 개. 화장실도 두 개. 소파는 하나.
전부 대칭적인 구조였다.
이프린은 멍하니 다가가 창밖을 보았다.
“와······ 바로 앞이 절벽이잖아? 구름도 보이네.” 쿠구구구—!
돌연 울리는 굉음.
실비아의 마법이었다. 녀석은 커다란 방에 벽을 세워 두 공간으로 나눴다.
“······참.” 이프린은 어이가 없었지만, 금세 납득했다.
실연한 실비아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테지.
“으쌰.” 이프린은 우선 짐을 풀었다. 냉장고에 로아호크를 보관했고, 초코바를 비롯한 비상식량은 로브 안주머니에 쟁였다.
그 뒤 시험 스태프가 건넨 문서를 보았다.
───[ 솔다 승격 시험 확인서 ]─── ◆ 시험 총 책임자 : 로제리오, 긴달프, 아드린느.
◆ 감독관 : 로팔, 미믹, 렐린, 데큘레인, 이헬름, 크란시아 외 13 인.
◆ 보안 책임자 : 데큘레인.
◆ 시험을 치르면서 기록되는 영상, 보고서는 대륙의 여러 마탑, 부유섬, 그리고 가문이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이는 스카우트 자료로 활용됩니다.
◆ 시험 도중 입는 부상에 있어서 부유섬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 본인 지문 : [ ] ──────────────────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니.” 괜히 무섭네.
똑똑— 마침 울리는 노크 소리.
흠칫 놀란 이프린은 자그맣게 말했다.
“누구세요······?” ─접니다 카릭셀. 드릴 게 있어서요.
“아~” 바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카릭셀이 방긋 웃고 있었다.
“이프린 씨······ 방은 좀 특이하네요? 제 2 인 1 실은 좀 다른데.” “이건 실비아가 했어요.” “오호. 그렇담, 이게 삼원색인가요. 과연 대단한 창조의 재능입니다.” 실비아가 완벽하게 두 공간으로─심지어 문도 두 개다─ 나눈 숙소. 카릭셀은 감탄하면서 둘러보았다.
“근데 왜요?” “아. 여기, 이걸 주려고 왔습니다.” 웬 원통형의 물건이었다. 갸웃거리는 이프린에게 카릭셀이 설명했다.
“이게 컵라면이라는 건데. 남부에서는 꽤 유행하고 있답니다. 그냥 스프를 풀고 끓는 물을 부어서 드시면 됩니다. 실비아 씨에게도 전해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마침 출출했는데.” “하하. 그럼, 내일 봅시다!” 카릭셀은 다시 나갔고, 이프린은 컵라면 두개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일단 하나는 실비아의 문 앞에 두고 똑똑- 노크했다.
벌컥- 실비아가 문을 열었다.
“얘. 선물 왔어. 가져가렴.” “······.” 실비아는 컵라면은 본 체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가니?” “고로의 입.” “아 맞다.” 이프린도 문서를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고로의 입」은 숙소 복도에 있었는데, 진짜 검정색의 거대한 입술이었다.
실비아가 먼저 그 안에 문서를 넣었고, 이프린도 따라했다.
우물우물─ 우물우물─ “웃기네 얘? 막 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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