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13

물건의 주인은 백스테이지 한복판에 등을 돌리고 서있었다. 알 로스는 그 뒷모습의 실루엣이 익숙했다. 
 “낙찰자분들 께서 오셨습니다.”  직원이 말했다. 그러자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내색은 않았지만, 알 로스는 꽤 크게 놀랐다. 
 데큘레인. 그는 햇볕을 등진 채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풍경이 무슨 후광처럼 찬연했다. 
 “낙찰을 축하하오.”  그는 한 손에 물건을 든 채 그리 말했다. 알 로스는 태연히 다가갔다. 
 긴장할 것은 없다. 데큘레인은 자신의 본모습을 알지 못하니. 
 “감사합니다.”  “이름이 솔레트, 인가.”  알 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보며 데큘레인은 미소를 지었다. 
 알 로스로서는 익숙한 웃음이었다. 그녀의 외모를 본 남자들은 언제나 함박웃음을 터트리곤 했으니. 
 다만 그 대상이 데큘레인인지라 얼마간은 꺼림측했다. 
 “호메렌의 조각 반지. 여깄네. 좋은 거래였어.”  “예.”  자그마치 2 천만 엘네나 들인 물건. 알 로스가 케이스에 담긴 반지를 받은 그때였다. 
 데큘레인이 그녀의 등 뒤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비아?”  “네.”  알 로스도 뒤늦게 그녀를 보았다. 
 정말로 일레이드 가문의 여식, 실비아였다. 
 “······‘로테린의 호박 브로치’. 네가 산 것이냐?”  “네. 여태 모은 용돈이에요.”  “기말고사로 바쁘지 않니.”  “괜찮아요.”  알 로스는 그 기이한 조합을 잠시 지켜보았다. 데큘레인은 당황한 듯했고, 실비아는 무표정이었지만 묘하게 밝았다. 
 “그럼 저는 이만.”  알 로스는 이내 밖으로 나갔다. 
 ─브로치가 예뻐요. 
 ─······. 
 ─교수님. 저녁은 드셨나요. 
 ─먹었다. 
 ─앗. 
 실비아든 뭐든, 시간을 끌어준다면 오히려 좋다······. 
 * * *  경매가 끝난 뒤, 나는 차에 올랐다. 
 “안녕히가세요.”  창문 밖에서 실비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백스테이지에서 나와 함께 근 30 분간 머물렀던 실비아의 머리 곁에는 ‘로테린의 호박 브로치’가 있었다. 
 “그래. 브로치는 잘 어울리는구나.”  “앗.”  실비아는 볼을 부풀렸고, 나는 창문을 닫았다. 
 “마탑으로 가지.”  “예.”  오늘의 운전기사는 제프였다. 
 미끄러지듯 출발하는 차량. 나는 평소처럼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논문을 꺼냈다. 
 [ 솔다 드렌트 논문 : 「지축 회전」 ]  저번주, 솔다 ‘드렌트’가 진로 상담을 하면서 첨삭을 부탁한 논문이다. 
 내 첨삭은 워낙 고부가 가치인지라 아무나 부탁한다고 받아들이지 않지만. 
 ─저 솔다 드렌트는 데큘레인 교수님의 조수가 되고 싶습니다! 
 드렌트는 내 휘하에 지원하겠다며 환심을 샀다. 나름 반성도 많이 한 것 같았기에, 계약서와 함께 받아들였다. 
 [ 「지축 회전」의 핵심 회로를 이렇게 설정했습니다. 이 회로의 역할은······. ]  “비효율적이다.”  흥- 나는 첫 단락부터 헛웃음을 지었다. 논문의 처음부터 비효율적인 회로가 발견되었다. 
 “너무 어리숙하고.”  회로의 흐름, 그 매듭과 연결이 단단하지 않았다. 「지축 회전」이라는 효과 자체가 너무 고난이도인 탓이었다. 
 “설정한 목표에 비해 능력이 부족하다.”  나는 계속 논문을 읽었다. 
 “나를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기특하긴 하나······.”  단 그 ‘발상’만큼은 나쁘지 않았기에, 발전의 여지는 있었다.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겠군.”  솔직히, 데큘레인의 휘하로는 과분한 재능이었다······. 
 ······. 
 ······한편, 알 로스는 데큘레인의 차량을 운전하고 있었다. 
 주카켄은 계획대로 운전기사 제프를 납치했고, 알 로스는 제 인형에 제프의 형상과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은 것이었다. 
 “······.”  알 로스는 백미러로 데큘레인을 보았다. 그는 웬 문서를 읽고 있었다. 
내용이 보이지는 않았다. 
 ‘이 정도 거리라면 들키지 않지.’  알 로스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자신의 인형은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다. 
 또한 ‘제프’라는 운전기사의 외양을 완벽히 취했으니, 시종에 관심이 없는 데큘레인은 영원히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 
 알 로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비효율적이다.”  돌연, 데큘레인이 말했다. 
 알 로스의 심장이 철렁였다. 저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 
 난데없이, 무엇이 비효율적이라는 말인가? 
 알 로스는 백미러의 데큘레인을 보았다. 그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너무 어리숙하고.”  알 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목표에 비해 능력이 부족하다.”  확실하다. 
 자신의 인형이 파훼당했다. 
 알 로스로서는 그 자체가 굴욕이었고, 의문이었다. 
 이게 어찌 가능하단 말이지? 내 인형을 이리 단숨에 파악하는 마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계획 실패다.’  알 로스는 그 말을 주카켄에게 전달하려했으나, 왜인지 이상했다. 묘한 위화감이었다. 
 자신을 알아차렸으면서도, 데큘레인은 왜 적의를 내비치지 않는가? 그 결계 안에서는 그리도 발작을 하더니. 혹, 그저 혼잣말인 것은 아닌가? 
 ······그리 고민하던 찰나. 
 “나를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기특하긴 하나······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겠어.”  교육. 
 그 거만한 어투에 알 로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동시에 깨달았다. 
 정보가 세었든 배신자가 있었든, 뭐가 되었든 그 방법은 모르겠으나, 데큘레인은 이 작전을 훤히 예상하고 있었다. 아마 배후가 누구인지도 이미 알 것이었으며, 애당초 이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 로스는 거친 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진정했다. 어차피 자신은 인형에서 벗어나면 그 뿐이었다. 
 주카켄. 
 만약 내가 이 놈을 데리고 간다면. 
 나머지는 네 몫이다. 
 사건. (3)  “······.”  논문을 읽으며 주절거리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다물었다. 다만 첨삭은 멈추지 않고 이어나갔다. 
 [ 틀리고 효율적이지 않은 부분이 많다. 발상은 유지하되······ ]  사실 ‘드렌트’는 논공회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벌였으나, 원래의 데큘레인이라면 언감생심에 가까운 재능. 휘하로 이프린 단 한 명만을 예상했던 나로서는 뜻 밖의 수확이었다. 
 혼잣말로 떠든 것도 본의 아니게 기분이 좋아진 탓이겠지. 
 나답지 않았다. 
 이제 나답다는 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흠.”  데큘레인의 성격은 「권위적」. 상대가 뛰어날수록 자신에게 숙이길 바라고, 이처럼 밑으로 기어들어올 경우에는 어떤 기쁨마저 느낀다. 
 그러나 지금, 내 몸에는 위화감이 가득하다. 
 정확히 코너링의 순간이 낯설었다. 특성 「철인」으로 예민하게 발달한 온몸의 감각. 알렌의 비밀을 파악했던 이 명민한 오감으로 인지했다. 
 운전대를 쥔 놈. 
 저 놈은 제프가 아니다. 
 “······.”  그러나, 섣불러서는 안 된다. 
 나는 결벽적인 마음으로 차 안을 휘둘러보았다. 「악당의 운명」에 감지되는 위험은 전무했다. 
 하긴, 이 차에 오르는 것 자체가 위험이었다면 이미 특성의 레이더에 포착되었겠지. 
 어쩌면 특성의 빈틈이라 할 수 있다. 
 「악당의 운명」은 위험을 알리는 것이 아닌, 오직 ‘사망으로 이어지는 변수’만을 표시하는 것이니. 
 나는 창문을 열었다. 평범한 풍경이 스치듯 흘러갔으나, 바깥의 바람이 밀려든 순간. 
 도로 전체가 선명한 적색으로 물들었다. 
 바깥은 사지(死地)다. 이 일대 중에서는 적어도 차 안이 가장 안전하다. 
 그렇게, 내가 현 상황을 인지한 순간. 
 [ 돌발 퀘스트 : 만남 ]  ◆ 상점 화폐 +1  퀘스트가 떠올랐다.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만남이라.”  나도 모를 미소가 흘렀다. 
 과연 누가 이런 몰상식한 미팅을 주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초대라고 생각하지.”  초대라 생각하면 편할 것이었다. 
 나는 백미러로 운전하는 놈을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놈은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그 손아귀에 땀방울이 맺혔다. 
 “걱정마라. 신사답지 않은 짓은 하지 않을 테니. 어차피, 넌 진짜가 아니지 않느냐.”  놈은 답하지 않았고, 아직 시간은 남았다. 나는 논문 첨삭이나 계속했다. 
 * * *  부우우웅─  게렉은 저 멀리 나아가는 데큘레인의 차를 노려보았다.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뒤쫓는 것이었지만, 살의가 충만한 게렉에게는 영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왜 죽이면 안 된다는 거지?”  게렉이 물었다. 차를 운전하던 알 로스는 태연히 대답했다. 
 “너, 게렉인가?”  “어. 게렉이다. 지금 너랑 같아, 알 로스. ‘본체’지.”  알 로스는 말없이 엑셀을 밟았다. 
 지금 데큘레인의 차를 운전하는 인형은, 알 로스가 본인의 영혼을 ‘일부’ 떼어내어 이식한 반(半) 인형이다. 
 비율은 7% 정도? 
 따라서 본체보다 지혜가 부족하고, 어리숙하며 미욱하다. 그러나 그 인형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본체에게 온전히 전달되며, 인형은 스스로가 본체인 줄 알고 행동한다. 
 이 ‘인형술’은 그래야만 완벽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인형임을 아는 인형은 생기 있게 움직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매사에 의욕이 없다. 임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본체의 명령도 이따금씩 거부한다. 
 그렇다고 인형 하나에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이식하기에는 ‘영혼 이탈’의 패널티가 너무 거대한 탓에, 나름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방식이다. 
 게렉이 중얼거렸다. 
 “근데, 저 인형 안에 들어간 영혼은 너한테 오자마자 죽는 거 건가? 자기가 인형인 것도 모르고?”  “그런 셈이지.”  “잔인하네. 네 인형에는 인격도 없나?”  “마땅한 희생을 치르고 있다.”  알 로스가 쓰게 웃었다. 게렉은 그녀를 힐끔겨리며 되물었다. 
 “무슨 희생?”  “지금의 나조차도, 내가 인형인지 본체인지 모르는 희생이지.”  “······.”  게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본체라 생각하는 자신조차도, 어떤 골방에 숨은 알 로스가 내어준 ‘영혼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이 기억도, 그 본체가 조작한 가짜일지도 모른다. 
 이는 불완전한 인간 주제에 가장 완벽한 인형을 제작한 대가. 
 완벽한 인형은 곧 사람이기에, 알 로스는 ‘자신도 인형일 수 있다는 의심’ 속에서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언니의 그런 점이 좋아.”  그러자, 게렉이 방긋 웃었다. 그 ‘언니’라는 단어에 알 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속이지 말랬지.”  “언니~”  게렉은 징그럽게 웃으며 알 로스에게 달려들었다. 알 로스는 여동생이 된 남정네를 어깨로 밀쳐냈다. 
 “언니~ 언니 너무 좋아~”  “달라붙지마. 운전 중이다.”  그나마 남자치고 예쁘장한 외모가 다행이지. 
 수염 그득한 산적처럼 생겼으면 이미 죽였다. 
 “어어어언니이이이이~”  “시끄럽다고, 젤린.”  이 녀석은 게렉이 아닌 젤린. 게릭의 인격 중 그나마 다루기 쉬운 아이다. 
 “근데, 언니. 저도 오래는 못 참아요. 저도 오빠만큼 데큘레인을 죽이고 싶으니까. 언니, 제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죠?”  “수십번 들었지, 게렉한테.”  알 로스의 대답에 젤린은 눈썹을 치근덕거렸다. 
 “흥. 그 멍청한 오빠는 다 뺏어간다니까요. 대화 화제도, 내가 전부 생각해둔 건데 자기가 다 말하고······.”  투덜거리던 젤린이 돌연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인지 바짓자락을 와락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한층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왜.”  “저는 진짜겠죠?”  알 로스는 고개를 돌려 젤린을 보았다. 
 “글쎄.”  인형사(人形師)이자 영혼사(形魂師)인 알 로스. 
 그녀가 게렉과 팀을 이룬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굳이 알려고 하지마라.”단순한 정신병의 여파일 수도 있는 게렉의 수많은 인격과. 
 본체가 내어준 ‘영혼의 일부’에 불과할 수도 있는 자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괜찮아.”  그 동질(同質)은 정체성이었다. 
 자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삶은 꽤나 불투명했고, 가끔 심장에 걸린 닻처럼, 모든 감정을 우울한 심해로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세상 만사가 다 그렇다. 무슨 일이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은 다시 괜찮아지지. 네 자아의 회복력을 믿으렴. 그리고, 얕게 살아.”  “······언니~”  젤린은 감동한 듯 그렁그렁하게 달려들었지만, 알 로스는 팔꿈치로 놈의 턱을 갈겼다. 
 “꺼져라. 게렉”  “쳇. 어떻게 알았지.”  젤린의 연기력은 뛰어나지만, 게렉은 아니다. 
 알 로스는 쯧- 혀를 차고 말했다. 
 “장난칠 시간 없어.”  알 로스는 인형의 귀로 데큘레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만남이라······ 초대라고 생각하지. 
 이 빌어먹을 교수님의 직감은 과연 놀랄만했다. 사실 인형임을 눈치챈 그 순간 계획 파기를 각오했으나, 그럴 경우에는 게렉이 독단으로 나서겠지. 
 더 최악이다. 
 “데큘레인은 이 만남을 초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자신이 있다는 거지.”  “그래? 신기하네. 하긴, 그 로하칸과 백중지세를 이루었다니까. 나도 그 영감은 못 죽였는데. 데큘레인은 언제 그렇게 강해진 걸까?”  그 순간이었다. 알 로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방금, 데큘레인이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을 한 탓이었다. 
 ─걱정마라. 신사답지 않은 짓은 하지 않을 테니. 어차피, 넌 진짜가 아니지 않느냐. 
 물론 그저 인형이기에 가짜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혹시. 
 만에 하나라도. 
 데큘레인이 제 ‘영혼’ 자체의 진위를 들먹인 것이라면······  “알 로스. 왜 그래?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인간의 영혼은, 그 누구도 진위를 가릴 수 없다. 
 신이 아니라면. 
 “이제, 곧 목적지다.”  때마침 목적지가 눈에 보였다. 제국의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진 공터. 개발 예정이라는 명목으로 텅 비어버린 지하였다. 
 “어흥~ 기대되는구만. 어흥~”  “게렉. 네 인격중에는 짐승도 있나.”  “있지, 당연히! 내가 키우던 놈이거든. 엽총을 휘갈기던 카우보이도 있다고? 
어흥~! ”  게렉은 호랑이처럼 울부짖으며 미소를 지었다. 
 * * *  차는 느리게 전진했다. 길가의 건물과 가로등이 서서히 종적을 감추었고, 어느 순간 차량 전체가 텅 빈 공터의 지하로 가라앉았다. 
 알 수 없는 공간이었다. 
 유리창 저편을 가득 메운 어둠. 
 차량은 털털거리며 나아가더니 그 한 가운데에서 멈췄다. 
 데큘레인은 운전석을 보았다. 제프는 어느새 마네킹이 되어 있었다. 
 알 로스였나. 
 다시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악당의 운명」으로 보기에 문제가 없었다. 
 “······.”  데큘레인은 차에서 내렸다. 
 지하였다. 전체적으로 주차장같은 공간이었다. 
 뚜벅— 뚜벅— 구둣굽 소리가 공동을 울렸다. 
 ─반가워. 
 우측에서 목소리가 닿았다. 
 데큘레인은 그쪽을 바라보았다. 추하게 경계 태세를 취하지는 않았다. 
사망변수가 없었으니, 그저 태연히 서있었다. 
 “오랜만이군~”  이내, 어둠을 외투처럼 걸친 남자가 나타났다. 데큘레인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았다. 
 주카켄. 
 암흑가의 네임드였다. 
 “아~ 멈춰 멈춰. 그 이상 다가오지는 말란 말이지?”  고작 한 발자국만 내딛었을 뿐이다. 주카켄은 요란하게 반응하며 손을 휘저었다. 괴상한 제스처였다. 
 “그 이상, 절대 움직이지 마. 딱 거기 서있어.”  데큘레인은 캐릭터 렌즈로 놈을 들여다보았다. 
 ──「 위정자 」──  ◆ 등급  :유니크  ◆ 설명  :정치를 하는 자. 
 :타협을 통하여 타인의 특성을 일부 흉내낼 수 있다. (단, 유니크 이하의 특성에만 한하고, 타협의 과정에 폭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  ──────  주카켄은 꽤나 특수한 네임드다. 육사두 중 유일하게 암흑가를 본거지로 삼은 놈. 
 암흑가는 제국의 위세가 아예 닿지 않는 지역은 아니기에 위험부담이 큰 편이지만, ‘위정자’라는 이명답게 온갖 뇌물로 자신의 이권과 지위를 공고히한지 오래다. 
 “너무 그리 딱딱하게 있진 말고. 잘생긴 얼굴 구기지 말란 말이지.”  놈은 육사두치고는 몹시 귀족적인 차림이었다. 연미복이라 하여도 부족함이 없었고, 우측으로 느끼하게 쓸어넘긴 보라색 장발은 제 설정을 확실히 대변했다. 
 “데큘레인. 평화로운 거래를 제안하겠어.”  데큘레인은 잠자코 놈의 말을 들었다. 
 “‘제단’에서 당신의 룬어를 원한다.”  “······.”  “그 해석본만 넘겨. 진위를 파악한 뒤, 가격은 5 할로 나누지. 최소한 1 억은 너에게 떨어질 거다.”  주카켄의 뒤편에는 로브 차림의 괴한이 있었다. 
 역시, 이 ‘만남’은 메인 퀘스트의 곁가지였다. 
 “어떤가?”  주카켄이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의견을 물었다. 
 데큘레인은 대답했다. 
 “말이 짧군.”  “······쓰읍.”  혀를 찬 놈은 긴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조금 화가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나를 보았다. 
 “데큘레인. 나는 당신을 알아. 그래서 평화적으로 해결하길 원한다. 또한, 네 룬어의 권리 전부를 넘기라는 게 아니지. 원한다면, 당신의 룬어에 ‘저작 마법’을 걸겠어. 제단의 윗대가리들만 볼 수 있게끔. 그러기 위한 마법사도 동행-”  “주카켄.”  데큘레인이 놈의 말을 끊었다. 
 “네가 나를 안다면. 그 말투부터 교정하지.”  이 살갗 안에서, 어떤 화가 들끓고 있었다. 놈을 대면하는 그의 심사가 어둡게 뒤틀리고 있었다. 
 “너 따위가 똑바로 볼 내가 아니다.”  그저 단순하게. 
 저 빌어먹을 건방이 너무 거슬려서 이 상황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귀족 흉내만내는 버러지같은 것이. 그딴 말버릇은 누구에게 배웠지.”  주카켄의 표정이 굳었다. 
 “······”  놈은 혀로 입술을 몇 번 핥더니 잠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제 뒷목을 부여잡으며 웃었다. 
 “당신은 여전히 오만하구나. 그런데, 지금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아. 정신 좀 차리라는 말이지.”  하아— 한숨을 내쉰 주카켄이 말을 이었다. 
 “제단은 간단히 당신의 두개골을 열고 뇌를 취득하면, 룬어를 얻을 수 있어. 
그건 당신도 싫겠지? 그리고.”  딱—! 
 주카켄이 손가락을 튕기자 결계가 발현되었다. 결계는 데큘레인의 발을 기준으로 반경 수십미터를 휘감았다. 
 놈은 그 결계 밖에서 자신을 노려보았다. 
 “결계다. 이 결계의 강도와 밀도는, 마법교수인 당신이 더 잘 알겠지.”  결계는 언뜻 보기에도 단단했다. 
 “또한 로하칸을 상대했다는 당신의 위명을 존중하여, 최대한의 예우를 준비했지.”  뒤이어, 서늘한 귀기가 바람처럼 치솟았다. 선연한 살의가 텅 빈 지하를 가득 채웠다. 
 어느 한 ‘인물’이 등장하며 일으킨 변화였다. 
 “데큘레인. 다시 말하지. 이건 부탁이나 제안이 아니다.”  데큘레인은 얼굴이 가려진 놈을 보았다. 웬 남자인 듯했지만, 면상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네 남자친구인가, 주카켄.”  그러자 주카켄은 흠칫 놀라더니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개미친 소리를 하고 앉아있네!”  “뱀의 머리 중 하나이면서 내가 그리도 두려웠나.”  “흥. 죽일 거였다면 진작에 죽였을 거다. 다만, 암흑가에서 당신이 그간 보였던 위세를 존중하는 바. 평화로운 해결을 원할 뿐이지.”  “그리 겁이 많아서는 사내라 할 수 있겠나?”  “······어이! 모습을 보여라. 데큘레인 교수님께서 정신을 못차리신다!”  그러자 저편의 어둠이 걷혔다. 데큘레인의 표정은 차게 식었다. 
 그는 사망변수를 풍기고 있었다. 아니, 존재 자체가 사망변수인 놈이었다. 
 “게렉인가.”  “그래. 당신도 알지. 이 유명한 놈.”  다중인격자 게렉. 광인(狂人) 네임드 중에서도 수위권에 꼽히는 전투력 괴물인 동시에, 데큘레인의 사망변수 덩어리. 
 데큘레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주카켄. 네가 저 놈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통제할 수 없어. 혹여나 당신이 그 결계를 해체한다면, 게렉이 당신을 죽일 테지.”  게렉의 발밑. 사망변수가 그림자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데큘레인은 그 적색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당신이 협상에 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게렉이 결계를 파괴하고 너를 죽일거다.”  그러나, 사망변수는 결계에 가로막혔다. 
 「악당의 운명」이 그에게 전하는 힌트였다. 
 “······이상하군.”  “후훗.”  데큘레인은 「이해력」으로 결계를 들여다보았다. 
 결계는 매개체를 활용하는 독립적인 계열 마법. 따라서 술자가 누구든, 다만 매개체에 의하여 작동한다. 
 다른 말로 하면. 
 언제든 그 주인이 바뀔 수 있다. 
 물론 어마어마한 연산 능력과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나에게는 충분한 능력이 있을 뿐더러, 이 결계는 규모가 작아서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  「이해력」의 눈으로 결계를 분석했다. 「육안」으로 결계에 내재한 마력의 흐름을 추적했고, 그 회로와 술식을 역산했으며, 결계의 매개를 손에 쥔 「 로켈록의 지팡이」로 수정했다. 
 결계를 완벽하게 탈취한 것이었다. 
 곧이어 데큘레인은 품 안에서 리볼버를 꺼냈다. 이미 여섯 발이 장전되어 있었다. 
 “오호. 멋진 악세사리군.”  주카켄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데큘레인은 그 총구를 들었다. 결계의 천장에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 
 총 다섯 발. 
 결계에는 흠집도 나지 않았지만, 덕분에 게렉의 시선을 끌었다. 
 “게렉. 내 말 들리나.”  “······들려요. 근데 전 게렉이 아니에요.”  게렉은 그렇게 대답했다. 데큘레인은 눈썹을 들썩이고 되물었다. 
 “누구지.”  “젤린. 제 오빠는 나오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무슨 수를 쓰든, 일을 그르치게 두지 않을 거예요.”  “귀엽군.”  젤린의 그 말에 데큘레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도, 보고는 있겠지.”  “······아니요. 당신이 무슨 속셈이든 통하지 않아요.”  젤린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데큘레인은 태연히 리볼버의 탄창을 확인했다. 
방금 다섯 발을 쏘았으니, 단 한 발이 남았다. 
 “장전된 탄환은 여섯 중 하나.”  그는 감정이 없는 듯 무심하게 말하며 철컥─! 탄창을 닫고 휘리릭 돌렸다. 
이것으로 어느 탄창이 비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게렉.”  그 순간 젤린의 눈이 부릅뜨였다. 데큘레인이 제 관자놀이에 총구를 얹은 탓이었다. 
 그는 마치, 자살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게임을 하지.”  주카켄은 오만상을 찌푸렸고, 그 저의를 파악한 젤린은 제 입을 틀어막았다. 
몸 안에서 게렉이 날뛰기 시작했다. 
 딸깍-  그가 리볼버의 공이를 뒤로 젖힌다. 그 서늘한 소리가 공동에 메아리친다. 
 기계는 냉정하게 작동하므로, 이제 그가 방아쇠를 당기면. 
 특정한 확률에 의해 탄창 안의 내용물이 솟구칠 것이다. 
 “네가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내 손에 먼저 죽을까.”  빈 탄창일지. 
 아니면 하나 남은 탄환일지. 
 나지막이 묻는다. 
 “아니면 내가 나를 죽이기 전에, 네가 먼저 깨어날까.”  데큘레인은 젤린을 지그시 바라본다. 당황한 주카켄이 어, 어이! 속지마라! 
저 마법사 놈이 무슨 술수를─ 따위를 중얼거리지만, 소용 없다. 
 이 ‘러시안 룰렛’에 마법이 작용하는지 아닌지는, 그 누구보다 마력에 민감한 그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니. 
 “너는 나를 이리 시시하게 보낼 것인지.”  찰칵— 하며 방아쇠에 손을 걸었다. 관자놀이에 총구를 얹은 채, 데큘레인은 미소를 지었다. 
 젤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자, 첫 발이다.”  철컥—! 그 텅 빈 격발음에 맞춰 젤린은 파르르 떨었다. 
 “운이 좋군.”  데큘레인은 다시 리볼버의 공이를 당겼다. 그러나 젤린은 고개를 저으며 버럭 소리질렀다. 
 “안 통해요!”  데큘레인의 미소는 여전했다. 그는 게렉의 인격인 젤린을 내려보며 말했다. 
 “······젤린이라했나.”  주카켄은 예우 따위를 따지며 게렉을 동반했지만, 오히려 패착이었다. 
 게렉은 그 어느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이니.물론, 적당히 화나면 데큘레인만을 표적으로 삼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 정신병이 극대화되면? 
 피아식별 자체가 불가능한 미치광이로 돌변하는 것이다, 이 게렉이라는 네임드는. 
 “어디······ 익사의 고통은 버틸만 하던가?”  젤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녀석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  나는 그 발밑을 보며 작게 웃었다. 사망 변수가, 이 결계를 제외한 온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다. 
 아마, 나에게만 적용되는 사망변수는 아닐 것이었다. 
 동거. (1)  ······언젠가, 제국의 서북부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100 여 가구가 옹기종기 살아가던 우묵하고 소박한 두메산골이었다. 게렉은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란 시골 청년이었다. 
 그곳의 하루하루는 평범하게 욕심 없는 삶이었다. 금은보화보다 하룻밤 일용할 양식을 원했고, 출세나 작위보다 농사일을 끝낸 뒤 친구들과 함께 마시는 밀맥주 한잔이 좋았다. 
 ······그 전부를 앗아간 마법의 해일을 게렉은 기억하고 있었다. 마을 전체가 수장되었던 참상이 아직도 뇌리에 선연했다. 
 영원이 잊지 못할, 어두운 밤에 미친 듯이 울리던 죽음의 비명. 파도에 허덕이던 차가운 신음. 번쩍이던 낙뢰와 심장을 두드리던 천둥. 
 파랗게 질려가는, 인간이었던 자들의 피부. 
 그의 마을은 어느날 휘몰아친 폭류에 휩쓸렸고, 가족과 이웃과 사촌과 친구와 연인이 모조리 수몰되었다. 
 유크라인 가문이 ‘악마 사냥’이라는 명목으로 일으킨 참극이었다. 
 모두가 죽었지만, 게렉은 살아남았다. 지푸라기를 움켜쥔 유일한 생존자였다. 
 지옥같았던 밤이 지난 뒤, 마을은 더 이상 마을이 아닌 호수가 되었지만, 게렉은 외롭지 않았다. 
 그 호수의 깊은 밑바닥을 들여다보며, 오히려 자신의 몸 안에서 충만해지는 존재감을 느꼈다. 
 그날 죽었던 여동생, 아버지, 어머니, 친구, 사촌, 이웃. 그와 평생을 함께하리라 생각했던 가족 11 명의 인격이, 자신의 육체에 품어진 것이었다. 
 그때 유크라인이 무너트린 둑은 마을을 수몰시켰지만, 그들의 영혼은 여전히 게렉의 몸 안에서 살아갈 것이었다······. 
 ······그런데. 
 “어디, 익사하는 고통은 견딜만 하던가.”  데큘레인의 목소리가 그날의 고통을 되살렸다. 게렉의 이성을 불태웠다. 
 그는 심장에서 치미는 어두운 외침을 들었다. 
 죽어가던 그들의 물기 섞인 괴성이었다. 
 *  “······미친놈.”  알 로스는 어둠에 숨어 현장을 지켜보았다. 결계에 갇힌 데큘레인은 자기자신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었고, 게렉을 노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귀족 특유의 상대를 능멸하고 깔아뭉개는 웃음이었다. 
 “두 발째.”  철컥─! 
 데큘레인이 방아쇠를 당겼다. 격발은 없었지만, 게렉의 몸에서 위협적인 마력이 피어올랐다. 
 “눈을 떠라, 게렉.”  데큘레인은 끊임없이 게렉을 자극하고 있었다. 인질이 자신의 목숨을 인질로 삼는 황당한 짓거리였지만, 게렉에게는 확실히 통할 방법이었다. 
 게렉은 ‘반드시’ 자신이 데큘레인을 죽이길 원한다. 
 자신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데큘레인을 죽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데큘레인이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것’또한 마찬가지다. 
 “······데큘레인.”  게렉이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 시선과 어조에는 악과 독이 가득하나, 데큘레인은 귀여운 강아지보듯 마주하며 입가를 비틀 뿐이다. 
 “그래. 네 마을을 수몰시킨 가문의 당주가 여기에 있다.”  저 교수는 도대체, 제단 놈들에게 룬어를 내어줄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는 각오인지. 
 이 지경이 되어서는 알 로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렉. 속지마라. 저 리볼버는 가짜다.”  주카켄이 침착하게 읊조렸다. 그는 결계 안의 데큘레인을 철저한 마안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가짜일지, 아니면 진짜일지. 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모르지만.”  데큘레인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내 운을 믿는다.”  격발했다. 
 ──! 
 그 자신감을 무색케하는 총성. 
 리볼버는 탄환을 발포했고, 데큘레인은 붉은 피보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거대한 파열이 메아리처럼 반복되었다. 
 ······. 
 고요했다. 숨소리조차 스며들지 않았다. 주카켄은 물론 알 로스마저도 당황했다. 
 “······이 뭔.”  죽었나? 저 결계 때문에 자세히 파악은 못하겠으나, 적어도 마법이나 마력의 간섭은 없었다. 
 그런데 데큘레인은 기사가 아닌 마법사다. 한낱 마법사 따위가 총탄의 살상력을 감당할 수 있을 리는······. 
 아니. 
 애당초, 지금 놈의 생사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 돌아버린 게렉의 눈에 그딴 것들은 상관도 없다. 
 “하긴, 쉬우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어.”  주카켄이 그리 처연하게 중얼거린 순간. 
 ────! 
 게렉이 폭주했다. 놈의 온몸에 흑색 마력이 갑주처럼 달라붙었고, 인간이 아닌 시커먼 괴이(怪異)로 돌변하여 일대를 박격했다. 
 입에서, 손에서, 발에서 온갖 마력이 발산하며 공간을 파괴했다. 주카켄의 부하, 경과를 지켜보던 제단의 마법사와 간부, 알 로스의 모든 인형······ 광폭한 짐승은 그 전부를 찢어발겼다. 
 놈의 발길질이 노면을 짓밟았고, 손톱이 천장을 반파시켰다. 아가리에서 브레스 비스무리한 마력포를 뿜어냈다. 그토록 패악적인 발광은 이 지하를 더욱 깊은 지하로 무너뜨렸다. 
 그 지옥도에서 멀쩡한 것은 다만, 데큘레인의 결계 뿐이었다. 
 *  인형에서 벗어난 본체, ‘알 로스’는 말없이 지하를 휘둘러보았다. 
 타닥타닥- 짓뭉개진 노면에서 잔불이 타올랐고, 데큘레인은 결계 안에서 자살한 시체가 되었으며, 게렉은 그 한가운데에서 탈진했다. 
 “생체신호가······ 없네.”  알 로스는 결계 안의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맥박은 정지했고, 심장도 물론 움직이지 않았다. 
 하아······. 
 옅은 한숨. 알 로스는 곧 으르렁거리며 게렉에게 다가갔다. 
 “멍청한 놈. 정말, 손 많이 가는 바보새끼.”  이 빌어먹을 미치광이가 인형을 모조리 박살낸 덕분에, 본체로 오는 수 밖에 없었다. 
 알 로스는 게렉을 업었다. 키만 큰 말라깽이인지라 그리 무겁지는 않았다. 
 ──바로 그 순간. 
 “······!”  찰나, 알 로스는 자신의 뒤에서 어떤 인기척을 느꼈다. 
 괴기스러운 한기가 등허리를 물들였다. 
 전율에 가까운 소름이었다. 
 그녀는 곁눈질로,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어떤 남자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좀 어지럽군.”  그 목소리가 알 로스의 의식을 휘어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꺾듯이 돌아보았다. 
 “허······?”  데큘레인. 
 도깨비불처럼 푸르른 그의 안광.그 서늘한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 로스.”  그가 이름을 불렀다. 알 로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본능적인 경계였다. 
 “게렉을 내놓아라.”  “······어쩔 셈이지.”  그 물음에 데큘레인은 태연히 대답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이. 
 “죽이면 편하지.”  그러나 알 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어주지 않는다.”  동료의식. 그 따위 멋드러진 낭만은 아니었다. 다만 게렉의 존재가, 훗날 자신의 인형술을 궁극적으로 완성시킬 재료인 탓이었다. 
 데큘레인이 입가를 뒤틀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지.”  알 로스의 마력이 형상을 이루었다. 지하를 밝히는 푸른 칼날이 데큘레인을 겨냥했다. 
 그녀는 전투를 각오한 것이었으나, 정작 데큘레인은 이상한 말을 했다  “보내는 수 밖에.”  “······?”  알 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데큘레인의 입장에서는 간단한 논리였다. 무력으로는 알 로스를 이길 수 없고, 그러니까 싸우면 지고, 머리도 어지러우니······. 
 “보낸다니?”  “돌아가는 김에 같이 가지.”  데큘레인은 대수롭지 않게 결계를 해체했다. 그리고는 게렉을 업은 알 로스의 어깨를 스쳐지났다. 
 고오오오오───! 
 무너질대로 무너진 지하는 꽉 막혀있었지만, 데큘레인은 「염동」으로 통로를 냈다. 알 로스는 미심쩍어하면서도 그 뒤를 따랐다. 
 “······당신, 어떻게 살아났지? 마법도 쓰지 않았잖아. 맥박도 멎었던데.”  “내 몸을 통제하는 일은 쉽다.”  데큘레인은 그렇게만 대답했다. 
 이내 지상으로 올라온 그는 알 로스의 차를 보았다. 현대로 따지면 벤츠에 준하는 고급차였다. 
 “운전은 네가 하지. 게렉은 트렁크에 넣고.”  “······.”  알 로스는 일단 그의 말을 따랐다. 데큘레인은 자연스럽게 상석에 올랐고, 알 로스는 운전대를 쥐었다. 
 “흠······.”  그녀는 백미러로 그를 보았다. 
 자세, 표정, 옷가지 그 전부가 고아하며 여유로웠다. 방금 자살 소동을 벌였던 놈치고는 놀랍도록 고품스러웠다. 
 “출발하지.”  누굴 비서로 아는 건지. 
 알 로스는 혀를 차며 자동차를 운전했다. 
 그렇게, 부드럽게 질주하던 차가 제국 변방의 어둠에서 포장도로로 진입했을 때. 
 알 로스가 물었다. 
 “······데큘레인. 그게 인간이 할 말이었나? 익사의 고통을 묻는다니.”  “······.”  데큘레인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게렉과 유크라인의 악연은 훤한 설정이었기에 이용했다. 다만 그 뿐이었으나, 마냥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닐 것이었다. 
 지독한 혼돈에서 게렉을 구원하는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방법 또한, 김우진은 알고 있으니. 
 “그보다, 내 경매에서 산 반지는 집에다 뒀나.”  “······.”  알 로스는 피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체를 들켰으니, 숨길 것은 없었다. 
 “잘 어울릴 테지. 너한테는.”  그러나, 데큘레인의 한마디 한마디가 자꾸 신경을 파고들었다. 그 말에 어떤 이면의 의미가 깃든 것만 같았다. 
 사람을 고민하게, 그리고 작아지게 만드는 화법. 「위압과 기품」이라는 특성은 그렇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잠시 멈춰주십시오! 
 저편에 웬 기사들이 도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알 로스가 차를 멈추자 남자 한 명이 다가왔다. 
 ─창문을 열고 신분증을······? 
 운전석의 알 로스를 들여다보던 그는 뒷좌석의 데큘레인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데큘레인 교수님?! 
 데큘레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요란을 피웠다. 
 ─여깄습니다! 교수님이 여기, 여기 교수님이 있습니다! 
 그 외침의 순간. 
 알 로스는 보았다. 자동차 앞유리 저편에서, 느릿느릿 일어나는 어떤 거한의 존재를. 
 ─무어라? 데큘레인 교수가? 
 프하이르덴의 당주, 자이트. 
 자이트 폰 브루강 프하이르덴. 
 그 괴물의 등장에 알 로스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는 4 년 전, 알 로스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준 유일한 기사였다. 
 ─어디. 
 저벅. 저벅. 저벅. 
 한 발에 남들의 세 걸음을 추월하는 거대한 보폭. 새하얀 백발을 흔들거리며 다가오는 자이트는 마치, 귀신 혹은 저승사자처럼······. 
 “어이구, 데큘레인 교수!”  어느새 당도한 그가 앞좌석의 창문을 손으로 내렸다. 그리고는 얼굴을 들이밀어 데큘레인과 알 로스를 번갈아서 보았다. 
 “이 묘령의 여인은 누구시지? 내 자네가 납치당했다는 신고를 받고 얼른 달려왔건만, 설마 불륜이었나?”  자이트가 미간을 세운 그때, 알 로스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여기서 데큘레인의 말 한마디면. 
 제 머리통은 자이트의 주먹에 수박처럼 으스러질 테니. 
 ‘저 뱀같은 놈은 설마 여기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백미러의 데큘레인 노려보며, 섣불리 그의 뜻에 따른 자신을 자책할 뿐. 
 “불륜이라니.”  데큘레인이 입을 열었다. 
 알 로스는 자신이 인형인지 본체인지 고민했다. 이때만큼 필사적으로 인형이길 바란 적이 없었다. 
 ······그런데. 
 “품위에 맞지 않습니다.”  데큘레인은 오늘. 
 두 번째로 이상한 말을 했다. 
 “그저,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난 행인입니다.”  귀로는 그 문장을 들었지만, 이해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자이트가 되물었다. 
 “행인?”  “예. 우연히 차가 지나가기에 동행을 부탁했습니다.”  알 로스는 데큘레인의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차에서 내렸고, 자이트에게 말했다. 
 “이제 자이트 공을 만났으니, 이 분은 보내도 되겠군요.”  “오호호. 한데 참, 아름다운 여인이시구만. 보내기 아쉬울만큼. 벌써 우리 기사 몇명이 반한 듯한 눈초리여.”  자이트의 능글맞은 말에 알 로스는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저 미친 2 미터 10 센치짜리 괴물 새끼. 
 “어이! 열어주거라!”  곧 기사들이 길을 터주었고, 알 로스는 느리게 운전하면서, 사이드 미러에 비치는 데큘레인을 보았다. 
 데큘레인 또한, 멀어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5 분 뒤. 
 잠시 갓길에 차를 세운 알 로스는 숨을 추스르며 데큘레인이 앉았던 자리를 힐끔거렸다. 
 편지와 수정구슬이 각각 하나 씩 놓여 있었다. 
 그녀는 우선 편지를 보았다. 
 [ 알 로스. 알고 있나? 혼돈은 비록 그 형상을 알 수는 없지만, 마냥 악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  [ 게렉도 분명 그러한 혼돈의 일부일테니, 그 녀석은 너에게 맡기마. 죽이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을 네가 직접 강구해라. ]  [ 이 수정구슬은 너와 나의 연결고리라 생각해라. 아무래도, 우리는 나쁘지 않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듯해. ]  그 필체를 읽으면서 알 로스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무슨 속셈인지.”  온몸을 팽팽하게 조였던 긴장이 탁- 하고 풀렸다. 
 심리적으로, 자신을 이만큼이나 몰아붙인 작자는 자이트 이후로 처음이었다. 
데큘레인과 함께하는 그 공간, 그 순간 자체가 부담이었다. 
 “알 수 없는 놈이다······.”  마치 심연으로 끌어당기는 듯한 위압. 넘치고 흐를 듯한 귀족적인 기품 속에,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괴물이 아가리를 벌린 채 기다리는 모양새. 
 “······?”  문득, 알 로스는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자신을 응시하는 매 한마리를 발견했다. 잘 만들어진 사역마였다. 
 “납치 신고가 있었다더니, 저 놈이 신고했나.”  시선이 마주친 놈은 이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갔고, 알 로스도 엑셀을 밟았다. 
 * * *  ······내 계획은 간단했다. 
 결계를 가능한 탄탄하게 재구성한 뒤 게렉을 자극하고, 회까닥 돌아버린 놈이 주변을 맹폭하는 동안, 나는 유유히 벗어나는 것. 
 그러기 위해서 「철인」에 대한 믿음과, 총탄의 위력을 조금이라도 낮추는 테크닉이 필요했다. 
 물론 「철인」의 성능은 확실히 믿었지만, 리볼버의 위력은 그때 처음 알았다. 
총구에 아주 희미한 마력을 그물막처럼 짜놓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 
 총을 맞아본 적이 있었어야지. 
 아무튼 그 뒤에는 「철인」을 활용하여 혈류의 속도를 인위적으로 낮추었고, 심장을 거의 정지에 가깝게하면서 가사(假死) 상태에 빠져들었다. 
 미칠듯 분노한 식인곰─게렉─이라도, 곁에 산 사람이 많으면 이미 죽은 시체는 안 건드리는 법이니. 
 “교수님. 정신이 멍하다거나 두통 따위의-”  오전 8 시. 
 잠시 휘말렸던 사건이 종결되어, 새들이 짹짹거리는 평화로운 아침. 
 “없다.”  나는 내 머리를 진단하려는 의사를 밀어냈다. 만에 하나라도 「철인」의 육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제대로 된 진단은 받아보시는 게 나을텐데 말입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릴리아 프리미엔의 말이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장소는 치안국의 본청, ‘이퀼리엄’. 부국장 프리미엔이 보호와 조사라는 명목으로 데리고 왔다. 
 “하루면 괜찮아진다.”  “폐하께서도 염려하신다고 합니다. 여기, 신하분들도 오셨지요.”  프리미엔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를 비켰다. 그녀 뒤에서 황실의 신하가 나타나 밀봉된 편지를 건넸다. 
 프리미엔이 중얼거렸다. 
 “굉장한 예쁨을 받고 계시는군요. 부럽습니다.”  “······예쁨?”  나는 프리미엔을 노려보았다. 프리미엔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신하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바로 읽어보길 원하십니다.”  “······그러지.”  나는 밀봉을 뜯었다. 내용은 고작 두 줄이었다. 
 [ 짐의 스승을 참칭하려는 놈이 납치 따위를 당하면 쓰나. 한 번 더 이런 일이 생길 경우, 경질을 각오해야할 것이다. ]  편지를 품 안에 넣었다. 그러자 신하가 말을 이었다. 
 “또한, 폐하의 뜻으로 호위 기사가 유크라인 공을 지킬 것입니다.”  “호위 기사?”  “예. 근 3 개월 간은, 유크라인 공을 중요 요인(要人)으로 분류하여 국가적인 보호가 필요할 것 같다는 폐하의 고견이십니다.”  신하의 전달을 프리미엔이 거들었다. 
 “맞는 말이군요. 룬어는 그만큼 중요한 마법이니, 탐내는 악한도 많지요. 
사실 어느 정도 예견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예견했으면 예방도 하지 그랬나?”  “······신하님은 이제 가십니까?”  “예.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신하는 허리를 숙인 뒤 떠나갔고, 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갑자기 두통이 일었다. 
 “필요 없다하면 황실 모욕이겠지.”  “그렇습니다.”  대답하는 프리미엔을 노려보았다. 이상하게 한 마디 한 마디가 거슬렸다. 
 “이만 가지.”  “지금 나가면 조금 곤란하실 텐데요.”  “곤란은 무슨.”  그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 어차피 금세 회복될 테니. 
 나는 복도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안내하겠다며 뒤따라온 프리미엔이 1 층 버튼을 눌렀고, 땡─! 
 문이 열리며 로비에 닿았을 때. 
 지금 나가면 곤란할 것이라는 프리미엔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참 다행입니다! 어찌나 걱정을 했는지······.”  “감히 어떤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이!”  로비에는 각료 대신, 상인과 기업가가 다수 모여 있었다. 그들은 내게 이것저것을 물었고, 걱정하는 척했지만, 가장 원하는 정보는 황제 소피엔이 보낸 ‘편지’의 내용인 듯했다. 
 “걱정 고맙군. 이제 다들 들어가지.”  나는 적당히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주차장에는 집사 로이가 새로운 차량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아무 문제 없어.”  “다행입니다.”  나는 차의 뒷좌석에 올랐다. 
 그렇게 앉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왜인지, 옆자리가 비어있지 않았다. 
 나는 내 옆을 점거한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묘사하자면, 경갑 차림의 기사였다. 
 “······여기서 뭐하지.”  차를 잘못 탔나?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 기사는 정좌한 채 말했다. 
 “임무 중입니다.”  “······무슨 임무.”  그제서야 기사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하얀 눈동자 속에 내가 담겼다. 
 “제가 데큘레인 교수님의 호위 기사입니다.”  율리. 그녀의 그 말이 내 입을 막았고, 문득 황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상 속 황제는 크크크크- 웃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컥─  그때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 
 “나왔어. 무슨 일 있었는지 제대로 말······?”  이번에는 예리엘이었다. 녀석은 자리에 앉자마자 휘둥그레진 눈으로 율리를 노려보았다. 
 “뭐예요, 당신은?”  “예리엘. 당신이라니.”  “······.”  예리엘은 말없이 눈썹을 찌푸렸다. 율리가 대답했다. 
 “오늘부터 저는 데큘레인 교수님의 호위 기사입니다.”  “호위?”  “예. 폐하께서 저에게 내린 임무입니다.”  “아니 진짜, 뭔 소리야?!”  예리엘이 오만상을 일그러뜨렸다. 
 * * *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을까 생각했었다. 다친 덴 없냐 물을까도 생각했었다. 
 근데, 역시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행색을 보니까 별 일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제와서 오빠 동생 노릇은 웃기는 일이라서. 
 그래, 확실히 하자고. 당주를 내어준다는 약속이 곧 관계의 회복은 아니라는 걸. 
 사실, 이쯤 되면 당주를 준다는 이유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 
 율리. 
 저 여편네 때문이겠지. 
 예리엘은 백미러로 율리를 노려보았다. 돌상처럼 사주를 경계하는 기사의 모습. 참 쓸데없이 진지하시고 진중하시다. 
 “쯧······.”  어떤 때는 궁금하기도 했다. 저 아둔하고 딱딱하며 고지식한 여자가, 예민하고 날카로운 데큘레인을 어떻게 사로잡았는지. 또 데큘레인은 어째서 저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근데, 호위기사면. 머무는 것도 저택에서 머물러요?”  “예.”  “뭬요?!”  예리엘은 화들짝 놀랐다. 
 반면 ‘공무 집행 모드’인 율리는 딱딱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처음으로 사립 기사단에게 내린 명령입니다. 
기한은 3 개월이니, 그때까지만 근처에 머물 예정입니다.”  “근처라면, 굳이 저택은 아니어도 되는 거 아닌가?”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입니다. 가장 작은 방 하나만 내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개인 저택에서 출근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고, 임무도 확실히 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나 어이가 없네. 예전에는 같이 살라고 해도 한사코 거부하더니 이게 뭔······.”  종알거리는 예리엘에게 데큘레인이 말했다.“예리엘, 조용히 좀 하지.”  “······와 나 누가 가족인지를 모르겠네? 진짜 서럽고 어이가 없어서.”  예리엘은 작은 소리로 꿍얼대며 창밖을 보았다. 하늘에 웬 매 한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우리 차가 이동하는 방면으로 자꾸만 뒤꽁무니를 따라붙는 꼴이었다  “쟨 쫓아오는거야 뭐야······.”  오늘, 예리엘은 별 게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거. (2)  ······대륙의 극동에는 ‘제단’이라는 비밀결사가 존재한다. 그들은 고대에 사망한 신의 부활을 목표로 하며, 새생명이 자라나지 않는 멸지(滅地)의 생츄어리에 거점을 두고 있다. 
 몰락한 신의 재림. 그들은 자신의 삶을 오롯이 그 목적에만 헌신한다. 
자신의 신념과 신앙을 결코 의심치않는다. 자신의 목숨조차 기꺼이 희생한다. 
 그들을 응집하는 매개가 ‘꿈’이기 때문이다. 
 어느날, 마치 계시처럼 내려온 한 자락의 꿈결. 
 신자들은 저마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목표를 바라본다. 신의 부름에 광신하며, 훗날의 강림을 위하여 자랑스러운 종교를 일군다. 
 ─신이하군. 
 그렇기에 제단은 데큘레인의 룬어를 원한다. 그 머릿속의 지식을 신께서 바라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꿈 속에 나타나 직접 그리 말하신 것이다. 
 ─그 교수는 제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걷는 것인가. 
 그러나 데큘레인은 제단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전 당주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위업’과 ‘명예’. 유크라인의 지상과제는 분명 그 두 가지였을 텐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자신이 룬어를 독점하길 원하는 것인지······. 
 ─무엇이든 상관 없다. 우리는 룬어가 필요하다. 룬어를 익히면, 그분과 소통할 수 있다. 
 신과의 소통을 가능케 할 언어. 그 지식이라면 보다 극진한 섬김이 가능하고, 강림을 앞당길 수도 있다. 
 ─주시하도록. 우리는 그 교수의 지식이 필요하다. 그도 언제까지고 협상을 거부할 수는 없을 테지. 적궤를 건드리도록. 
 데큘레인의 행보는 제단이 보기에도 기이하다. 
 대저 그 교수가 적궤를 옹호한 이유를 그들은 모른다. 한낱 인간의 속셈이면서도 알 길이 없다. 다만 그 ‘사실’을 철저히 이용할 뿐. 
 ─예. 
 제국은 이미 제단의 존재를 알고 있다. 지금은 뇌물을 받느라 정신이 없지만, 속으로는 자신들을 미치광이 취급하는 것도 알고 있다. 
 따라서, 제단은 자신들이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도 알고 있다. 
 ‘제단 또한 적궤를 옹호한다.’  그 한줄이면 충분할 것이다. 
 나머지는 분노에 먼 인간들의 몫이다. 
 * * *  유크라인 저택. 율리와 함께 도착한 앞뜰의 정원에는 손님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장 차림의 자이트였다. 
 “어~ 왔구만~”  자이트가 방실방실 웃으며 다가왔다. 
 “데큘레인 교수! 둘이 있으니 참 보기 좋구만. 율리 너도.”  “지금은 임무 중입니다. 사사로운 말씀은 자제해주십시오.”  율리는 딱딱한 표정으로 자이트를 쏘아붙였다. 어깨를 으쓱인 자이트는 새로운 차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오호라. 새 차인가? 이건 내가 타도 넉넉하겠구만. 한데, 나는 자네가 전에 타던 차가 더 좋았어.”  “그렇습니까.”  “그려. 이상하단 말이지. 디자인은 이게 더 고급이고 신형인 것 같은데······.”  아마 「미다스의 손」을 부여하지 않은 탓이겠지. 자이트의 오감은 아주 작은 「특성」도 선명히 느낄 테니. 
 “그건 그렇고, ‘제단’ 놈들을 만났다 들었소.”  돌연, 그의 음색이 칼날처럼 치밀었다. 내게 묻는 시선이 야수처럼 노골적이었다. 
 “예. 룬어의 지식을 원하더군요.”  ‘제단’은 게임을 플레이할수록 서서히 그 정체가 드러나지만, 사실 웬만한 네임드라면 이미 알고 있다. 
 어떤 네임드는 제단과 거래를 하고 뇌물도 받는 등 나름 호혜적이나, 자이트처럼 극히 혐오하는 네임드도 다수 존재한다. 
 “그럴 줄 알았지. 맨손으로 아가리를 찢고 내장을 뽑아도 시원찮을······”  “차 망가져요!”  그때 예리엘이 자이트의 손을 툭툭 쳤다. 자신도 모르게 창틀을 주무르던 자이트가 허허 웃으며 물러섰다. 
 “아~ 내 이 몸의 힘을 가끔 잊는다는 말이지. 자동차는 이래서 전장에 쓸 수가 없어. 몸으로 팍 밀어버리면 튕겨나니 원.”  “그건 자동차가 아니라 백작님 몸 문제죠.”  “그런가? 한데, 예리엘 사돈. 이 차는 신형인감?”  “아직 사돈은 아니지만, 네. 신형이에요.”  “오호라. 얼마인감?”  자이트가 얼굴을 활짝 폈다. 예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30 만 엘네예요. 사시게요? 프하이르덴 백작님의 부탁이라면, 번호표는 안 뽑아도 될 텐데.”  “······하하하! 비싸군! 안 사!”  자이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예리엘은 흥- 입술을 삐뚜룸이 올렸다. 
 “그것보다, 자이트 백작님도 오늘 머무실 건가요?”  “아니. ‘제단’ 의 소행임을 확인했으니 됐지. 내가 있으면 연애 사업에 방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자이트가 능글맞게 눈썹을 들썩였다. 율리는 화난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렸다. 
 “참, 사업하니 말하는 건데. 예리엘 사돈도 이번에 사업을 시작했다면서?”  “아니! 그걸 왜 말해요!”  빼액 소리를 내지른 예리엘이 내 눈치를 살폈다. 
 아무렴, 녀석은 내가 모르는 줄 알았던 거겠지. 실상은 사업을 시작한 그순간부터 렌과 에넨의 보고가 있었는데. 
 “예리엘.”  “······.”  흠칫- 몸을 떤 예리엘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힌다. 
 자이트는 무안한 듯 뒷목을 긁적였다. 
 “아~ 아무래도 사돈 독단이었던 모양이군. 그럼 나는 이만 가겠네~”  그렇게 떠나가는 거대한 백곰을, 예리엘은 이를 갈면서 노려보았다. 
 “예리엘.”  “······날씨좋당.”  “대답.”  “······아니, 그게······ 이제······ ‘자동’차가 ‘마’차보다는 더 사업성이······.”  더듬더듬 이어가던 예리엘은 금세 전략을 바꾼듯 퉁명스레 말했다. 
 “있어 보여서요. 왜요! 우리 가문에서도 공장 하나 만들면 좋잖아요. 
그리고, ‘브룬힐’ 그 가문 놈들이 자동차 하나 만드는 걸로 얼마나 싸가지없게 구는데요. ‘데큘레인 당주님 차는 내어드리겠지만, 예리엘 아가씨의 차는 예약이 밀려 있어서-’ 이 지랄 염병!”  예리엘은 푸우- 입김을 뿜어내며 제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슬며시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자동차 좀 만들겠다고요. 영지에 광산도 많은데.”  “만들지. 여태는 왜 안 만들었지.”  그러자 예리엘은 입을 떡 벌렸다. 그 반응으로 알았다. 당연히, 데큘레인 때문이었겠지. 제조업은 천한 것들이나 하는 짓이다─ 체통이 없다─ 뭐 이러지 않았을까. 
 “내가 투자한 철물점에 뛰어난 녀석이 있다. 그 녀석을 하데카인으로 보내고, 디자인은 오늘 내가 만들어주지. 그걸 토대로 시작해라.”  “철물점?! 당신이?!”  “······당신?”  눈을 가늘게 좁히자 예리엘은 제 입을 툭툭 두드렸다. 
 “그럼 전 이만······.”  그리고는 종종걸음으로 도망가버린다. 
 *  ‘가장 작은 방’을 달라는 율리의 말에 나는 저택에서 ‘가장 작은 객실’을 내주었다. 
 다만 객실은 문자 그대로 손님을 맞이하는 방이었기에, 화장실과 욕실을 비롯한 시설은 물론 드레스룸까지 딸려 있었다. 
 “여기를 쓰지.”  “너무-”  “저택에서 가장 작은 객실이다. 유크라인의 접대를 무시하지 말지. 이 이하는 없어.”  “······예.”  율리는 군말 없이 짐꾸러미를 침대에 올렸다. 
 “한데······ 무슨 구시대 사람도 아니고.”  나는 그녀의 짐꾸러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웬 보따리였다. 
 핸드백과 백팩, 심지어 여행가방도 발명된 시대에, 보자기로 싸맨 보따리. 
 “아. 생김새는 저래 보여도 마법 물품입니다. 웬만한 가방 2~3 개분은 합니다. 4 년 전에 정말 싸게 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자부심이 넘친다. 심지어 미소도 짓는 것을 보니, 이 보따리를 사던 그때 그 기억을 떠올리는 듯하다. 
 “당시에 제가 흥정을 참 잘했지요. 상인이 5 천 엘네를 제시하던 것을 단숨에-”  “무용담은 됐고. 공무 집행은 하루 24 시간인가?”  “예. 밤이 가장 위험할 듯합니다. 놈들의 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겠지. 한데, 그 두 번째가 1 년 뒤일수도 있다만? 1 년 내내 같이 살 바에야, 차라리 결혼하는 게 낫겠군.”  “······공무 기간은 삼개월 뿐입니다.”  율리는 내 눈을 피하면서 보따리를 풀었다. 
 확실히, 그 안에 물건이 꽤 많았다. 
 “받지.”  나는 율리에게 동전만한 수정구슬을 내밀었다. 율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무엇입니까?”  “이 저택의 결계와 연동된 수정구슬이다. 침입자가 발생한다면 가장 먼저 알 수 있지. 통신의 역할도 겸하기에 지하의 보안팀과 상시 통화가 가능해.”  “아~ 신기한 물건이 많군요.”  끄덕인 율리는 그 수정구슬을 가지려했지만, 나는 슬쩍 거두어들였다. 
 “다만, 구슬로 주기에는 자네가 너무 칠칠맞으니.”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어째서 칠칠맞습니까?”  율리가 눈썹을 찡그렸다. 
 나는 내 황금 넥타이 핀을 연성하여 목걸이로 만들었고, 수정구슬을 꿰었다. 
그 뒤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놀란 율리는 저항하려는 몸짓이었지만, 곧 내가 한 말에 잠자코 받아들였다. 
 “저번에는 내가 준 반지도 잃어버렸다면서.”  율리는 내가 선물한 반지를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기보다, 버렸겠지. 
 그렇게 웃던 나는 문득 얼굴이 굳었다. 
 “······.”  왜 내가. 
 이 기억을 가지고 있지  “저······.”  그 표정을 오해한 율리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조금은 당황스러웠고, 나는 그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밖으로 나갔다. 
 복도 벽에 기대어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선명하다.”  받기 싫어하는 율리의 손가락에 억지로 반지를 끼우는 장면. 그 손가락을 부서트릴 듯 거칠게. 앙 다문 채 눈물이 고인 율리. 
 내 것이 아닌 기억이, 내 것처럼 선명한 기분. 
 “아.”  나는 다시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한창 짐을 풀던 율리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를 돌아보았다. 
 “무, 무슨—”  침대에 놓아둔, 반 쯤 풀린 짐꾸러미. 
 그 안에 웬 봉제인형이 있었다. 
 “흐음······.”  내 시선이 그 인형에 닿자 율리는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팬더의 머리통을 잡고 제 등 뒤에 숨겼다. 
 “해, 행운의. 징크스, 징크스 같은 것입니다. 기사마다 각자 하나씩 가지고 있는-”  “객실의 열쇠다. 항상 잠궈놓도록. 내가 갑자기 찾아올수도 있으니.”  나는 그녀에게 열쇠를 주었다. 율리의 안색은 토마토였지만, 표정만은 기사처럼 엄숙하게 열쇠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아니면, 이 열쇠도 목에 걸어줄까.”  “괘, 괜찮습니다! 이제 나가십시오!”  율리는 내 등을 밀었고, 쫓겨난 나는 복도에 서서 웃었다. 
 그때. 
 “흥!”  불만 가득한 소리가 바늘처럼 귓속을 찔렀다. 돌아보니 예리엘이었다. 
 “좋아 죽으시네요 아주~”  “예리엘. 돌아간 거 아니었나?”  “······뭐요? 디자인 해준다면서요.”  “디자인?”  “차 디자인!”  “아, 그랬지. 따라와라.”  고개를 끄덕인 나는 예리엘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예리엘은 자꾸만 쫑알거렸다. 방금 웃는거 개 징그러웠음. 지네가 웃는줄. 평소에도 그렇게 좀 웃어봐라. 
 “시끄럽다.”  “······.”  서재에 오른 나는 종이와 만년필을 꺼냈다. 그 위에 현대의 지식과 「미적 감각」을 동원한 디자인을 그렸다. 
 물론 설계도는 아니다. 나는 디자인만, 나머지 설계는 공돌이들 몫. 
 “받아라.”  “두장이네?”  “하나는 차고, 하나는 시계다.”  “시계? 시계는 또 왜.”  예리엘이 내 허리춤을 힐끗거렸다. 
 “회중시계도 엄청 좋은거 차잖아요. 그거 안 쓸거면 나 주지?”  “내 철물점 직원에게 맡겨라. 알아서 잘 할 테니.”  “흥. 그럼 뭐······ ”  디자인을 품에 넣고 돌아서려던 예리엘이 멈칫했다. 
 “근데, 나 진짜 사업 벌여도 되는 거지? 갑자기 또 이걸로 이상한 말 안할거지? ······요?”  “대신 실패하면 회초리다.”  “······누가 맞아준대냐? 요?”  예리엘은 강하게 째려보고는 서재 밖으로 나갔다. 
 * * *  이튿날. 
 마탑에 출근한 나는 이사장에게 기말시험 계획서를 제출했다. 
 “······꽤 평범하네요?!”  이사장은 서류를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번 시험과는 엄청 다르잖아요!”  “괜찮습니까?”  “괜찮긴하지만······ 저번만큼의 파급력은 없겠네요.”  “생각만큼 평범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사장은 뭔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계획서를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는 또 다른 문서를 꺼냈다. 
 “참. 이번에 기조실장으로서 첫 인가를 냈던데요!”  “예.”  “그거 돈 엄청 먹는 프로젝트던데요! 무슨 초기 자금이 1 천만 엘네! 
미쳤나봐!”  “그만한 회수가 될 것입니다.”  “······.”  이사장은 조금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흘겼지만, 뭐 어차피 당신 책임이니까!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그럼, 같이 나가요! 호위기사 율리님 구경좀 하게!”  “역시, 이미 아시는군요.”  “역시라뇻! 벌써 저어~기 다도해까지 다 소문 났어요!”  나는 이사장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금세 도착한 1 층에는 율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율리 뿐만 아니라 프렌하임의 기사 여러명이 특정 포인트에 포진했겠지. 
 “오호! 율리 기사님! 오늘 아름답네요!”  율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갸웃거리는 이사장에게 내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공무 중에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사장은 왜인지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그럴까요······?”  빙그르르 돌더니 율리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는 흠흠- 헛기침으로 입을 예열한 뒤. 
 “율리기사님오랜만이네요! 반가워요 2 주만인가요?!”  쉴 새 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예전같았으면이임무를거부했을텐데! 
아무리황제폐하의명이라도본인이직접나서지는않으셨겠죠! 
그런데도받아들이셨네요! 세간에서도그게엄청신기한가봐요! 
소문이엄청빨리돌았어요!”  “······.”  “이제서로완전히화해한것이라고봐도좋을까요! 아니이미다화해했나봐요! 
그렇다면결혼도역시무리없이진행될까요?!”  “······.”  “대단하네요역시화해했군요! 침묵이곧긍정이라잖아요! 
교수님이아주걱정스러우셨나봐요! 이렇게직접호위를-”  “아 정말! 귀 터지겠습니다!”  율리의 외침에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 * *  이제, 다음주면 기말고사다. 
 그 탓에 평범한 학부, 기사학과, 마탑을 비롯한 대학 전체의 분위기는 초긴장이다. 
 도서관은 항상 사람으로 가득하고, 밤 9 시면 문을 닫던 식당도 24 시간으로 연장하고, 마탑의 마법사들은 시험 공부와 자기 계발은 물론, 호시탐탐 남을 견제할 기회를 엿보고······ 아무튼. 
 오늘은 데큘레인의 수업 [ 순수 원소의 이해 ]의 기말고사 공지가 있는 날. 
 자그마치 5 학점 강의의 기말고사 가치는 말해 입아프기에, 이프린은 공지 30 분 전 강의실에 도착했다. 
 “역시 많네.”  다 자신처럼 생각한 듯 150 명 중 140 명은 이미 온 것 같다. 
 이프린은 자리에 앉아서 공부를 하며 기다렸다. 
 그렇게, 오후 세 시. 
 딱 세 시 정각에 조교수 알렌이 들어왔다. 누가 데큘레인의 조교수 아니랄까봐. 
 “반가워요! 이 종이는 기말고사 개요예요. 다들 받으시고, 잃어버리시면 안됩니다~”  알렌은 헤실헤실 웃으면서 종이를 나눠주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시험일까. 후우~ 이프린은 심호흡을 하고 종이를 보았다. 
 “······?”  보면서 눈만 깜빡였다. 곧 종이를 위 아래로 뒤집었고, 그 후에는 다른 데뷰탄의 종이를 살폈다.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강의실의 모든 데뷰탄이 이프린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돌아가주세요~ 기말 시험은 3 주 뒤 월요일날에 시작합니다.”  알렌은 그렇게 퇴장했지만, 이프린의 의문은 여전했다. 의문을 해소해줘야 할 조교수가 나가버려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뭔데 이게?”  이프린은 종이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종이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러니까, 백지였다. 
 *  마탑 밖으로 나온 실비아는 종이를 노려보며 고민했다. 
 아무리 봐도 백지. 이리보고 저리봐도 평범한 백지일 뿐인데,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잃어버리지 말라’는 조교수의 단서가 있긴 했지만······ 이 종이가 그렇게 중요할까. 혹시 이 종이 자체가 시험일까? 
 마냥 걷던 실비아는 문득, 마법사 한 명을 발견했다. 
 건방진 바보 멍청이 낙하산 이프린. 
 녀석은 잔디밭에 누워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늘 높이 번쩍 들고 태양을 비췄다가, 그 상태에서 세로로 돌렸다가, 가로로 돌렸다가. 
 영 답이 나오지 않는지 종이를 움켜쥐고 부르르르르- 감전된 것처럼 몸을 떤다. 
 “······멍청이.”  경멸하듯 입매를 비튼 실비아는 그저 지나치려 했는데, 이내 어떤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었다. 
 이프린이 쥔 저 종이. 
 찢어버릴까. 
 그러면 탈락일지도 모르잖아. 
 “됐어.”  고개를 저었다. 
 이프린의 종이를 찢는다고 무조건 자신에게 이득이라는 보장은 없고, 귀족적이지 않은 짓은 이제 생각도 하기 싫다. 
 그때였다. 
 치지지지직─! 
 종이 찢어지는 요란한 소리. 
 실비아는 흠칫 놀랐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불의의 기습이었고, 그 대상은. 
 “어어어어억────?!”  이프린이었다. 
 깔끔하게 반절로 절삭된 이프린의 종이. 녀석의 두 눈알이 튀어나올 듯 띠용거린다.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어, 어, 어······.”  이프린은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입만 벌린 채 꺽꺽거리더니. 
 “누구야아아아아악──!”  한순간 성난 멧돼지처럼 돌변했다. 
 “어떤, 어떤──”  그리 외치는 이프린이, 실비아는 우스우면서도 가여웠다. 
 “어떤 나쁜놈이야아아아악────!”  에휴. 그러게 왜 마탑 근처에서 그러고 앉았니. 누구보다 냉혈하게 약점을 파고드는 게 마법사인데. 
 한숨을 내쉰 실비아는 저 바보같은 녀석에게 다가갔다. 
 가면. (1)  제국대학 근처의 유명 식당 ‘돼지의 꽃’. 
 “죽일거다!”  그렇게 외치는 이프린을, 실비아는 바라보았다. 버럭거리면서 로아호크를 뜯어먹는 꼴이 퍽 우스웠다. 
 “반드시 찾아서 죽일거다!”  이프린의 종이는 반으로 갈라져서 죽었다. 범인은 아직 모른다. 아마 영원히 모를 테지. 근처에 사람이 워낙 많았으니. 
 “멍청한 이프린.”  이프린이 고개를 홱 돌려 노려보았다. 표독스러운 눈빛에 억울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 알아도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찢어진 종이는 돌아오지 않아.”  “······놀리러 왔니?”  흥- 비웃어준 실비아는 자신의 종이를 꺼냈다. 이프린은 금세 부러워하는 얼굴이 되었다. 
 부우웅— 실비아의 배리어가 식탁을 비롯한 자리를 감싸 안았다. 
 “알렌 조교수는 시험 장소도 시간도 알려주지 않았어. 그러면서 이 종이를 잃어버리지 말라고 말했지.”  “······뭐 알아낸 거 있니?”  “아니. 아직은.”  여태 배운 것과 이 종이가 무슨 관련인지. 
 영 오리무중이지만, 실비아는 데큘레인과 그의 가르침을 믿는다. 
 “그러면. 너도 아직 모르면······.”  실비아의 눈치를 살피던 이프린이 머뭇머뭇 물었다. 
 “합심, 그, 같이, 할래? 우리, 조별과제도, 같이 했었는데, 기억나지?”  “멍청한 이프린.”  “왜, 왜애~? 내가 도와줄게. 나 그래도 2 등이잖니. 너 다음.”  이프린이 로아호크를 내려놓았다. 그만큼 절박했지만, 실비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한테는 종이가 없어. 나한테는 종이가 있고.”  “······그걸 누가 몰라.”  “아마, 이런 습격 사건은 더 많아지겠지. 아직 시험까지는 3 주나 남았으니까.”  “하아······ 울고 싶다.”  짐짓 훌쩍거리던 이프린이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녀는 불쌍한 척 눈물을 닦았지만, 실비아의 시선은 그 손수건에 집중되었다. 
 “······.”  손수건. 
 실비아는 제 곰탱팬더의 등허리를 장식한 손수건을 떠올렸다. 
 데큘레인이 자신에게 내어줬던 손수건의 문양과. 
 지금 이프린의 손수건이 똑같았다. 
 “너.”  머리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실비아가 급히 손을 뻗어 이프린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이프린이 움찔 떨었다. 
 “왜, 왜?”  “그거 어디서 났어.”  “뭐, 뭐를? 이 손수건?”  “그래.”  “······비밀인데.”  이프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실비아는 의외로 끈질겼다. 
 “말해.”  “내가 왜?”  이프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얘는 왜 또 이런 거에 신경을 쓰지. 손수건이 너무 고급이라 그런가. 
 헉, 설마 일레이드도 쉽게 못 구하는 명품 보물인가? 
 “말하면 합심할지도 몰라.”  “······.”  “로아호크도 사줄 수 있어. 시험 기간 동안.”  이번에는 진지하게 고민할만했다. 
 아닌 게 아니라, 어차피 후원자님은 익명이다. ‘후원을 받는다는 사실’만 말하는 거라면 배신이 아니지. 
 로아호크 때문은 절~대 아니다. 애도 아닌데 무슨 한낱 먹거리에 넘어간단 말이니? 또 내 성적이 잘 나와야 후원자님 보는 면목도 설 테니······. 
 이프린이 실비아를 힐끗거렸다. 
 “절대 훔친 건 아니야. 그건 믿어?”  “훔친게 아니면.”  이프린은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짤막하게 답했다. 
 “······후원자님이 주신 선물인데.”  “후원.”  실비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식탁 밑에 숨긴 주먹을 와득 움켜쥐었다. 
 “그래. 나도 후원이라는 걸 받았거든. 받을 줄은 몰랐는데.”  “네가 후원을 받아.”  “그래~ 나도 못 받을 줄 알았다고. 이 이상은 안 돼. 익명의 후원이라 이 이상 파고드는 것도 실례란다······ 근데 왜, 너 혹시 이 손수건 어디서 봤니? 왜 갑자기 물어?”  이프린의 눈은 의문으로 커지고, 실비아의 눈은 퉁명스레 가늘어진다. 
 “아니. 너랑 안 어울리는 물건이라서.”  “······참 나. 아무튼. 말해줬으니까 같이 하는 거다?”  “······.”  실비아는 아무 말 없이 고기만 썰었다. 이프린은 그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저 녀석의 표정은 언제나 모호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영 드러나지 않고, 웃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처음에는 그 가면처럼 딱딱한 모습이 마냥 껄끄러웠지만······. 
 “그 무언은 동의로 받아들이겠어요~?”  이제 마냥 나쁘기만 하지는 않다. 
 이프린이 경쾌하게 말꼬리를 늘리자, 실비아는 경멸하듯 노려보며 고기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 씹는 턱끝이 유독 거셌다. 
 * * *  한편, 율리는 마탑 근처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지금부터 자정까지는 데큘레인이 연구실에서 논문을 점검하는 시간. 
 잠시 동안의 휴식이었다. 
 아무리 간이 큰 놈이라도 마탑에서 납치 따위의 행각은 벌일 수 없고, 또 데큘레인 교수의 개인 연구를 방해해서는 안 되기에. 
 “······어느새 시간이 이만큼 흘렀네.”  가만히 창밖의 교정을 보고 있노라니, 옛날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여기서 조금만 더 걸으면 기사학과의 수련관이 나오고, 더 걸으면 기사단의 광장, 더 더 걸으면 제국황실 기사단의 웅대한 본관이 있다. 
 “······.”  대륙 모든 기사들이 꿈으로 여기는 황실 기사단. 
 저 환상의 전당에는 율리도 일전에 근무한 이력이 있지만, 이제는 한낱 과거에 불과하다. 돌아갈 수 없고, 돌이킬 수도 없는. 
 “율리!”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율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쪽을 보았다. 
 “여기 있었네.”  카페 입구에 기사 그웬, 라펠과 시리오가 있었다. 황궁 교습의 동료인 그들은 웃으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율리가 말했다. 
 “기사 시험 참관을 오셨습니까?”  “응? 아~ 겸사겸사.”  이 만남이 율리는 그저 반가웠지만, 그웬은 왜인지 미안한 얼굴로 뒷목을 긁적였다. 
 “뭐, 이것저것 말할 건 없고. 이거, 받아.”  그웬이 건넨 편지 한 장. 황실의 인장을 보며 율리가 눈을 크게 떴다. 
 “아! 저번의 그 임무로군요!”  “응. 근데, 너 지금 다른 임무 중인 거같은데······.”  “괜찮습니다. 이 임무도 데큘레인 교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잖습니까.”  율리의 그 말에 그웬은 더더욱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중요한 임무에 참여한다─ 는 사실만으로 아이처럼 기뻐하는 율리는 역시 참된 기사였지만······. 
 “······읽어봐.”  “옙!”  율리는 힘차게 대답하며 밀봉을 뜯었다. 
 그 순간부터 부풀어오르던 그녀의 기대는, 첫 문장부터 무참히 배신당하고 만다. 
 [ 비밀유지 서약서 ]  “비밀유지······?”  율리는 멍하니 그웬을 바라보았다. 설명을 요하는 눈이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웬이 한숨쉬듯 말했다. 
 “데큘레인이 참여하는 조건으로 너를 걸었어.”  “······예?”  “너 대신 데큘레인이 하는 거야. 함께가 아니라.”  “······.”  율리는 말없이 편지 내용을 읽었다. 
 환관 졸랑의 문장은 더욱 확실했다. 
 약혼자 데큘레인이 안위를 걱정하니 당신은 빠지시라. 다만 이 임무가 있었다는 사실은 결코 외부에 공개하지 않도록 하시라. 
 “······율리?”  율리는 오랫동안 입을 다물었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생생한 표정을 내보이다, 이내 편지를 와락 움켜쥔 율리가 짓씹듯 내뱉었다. 
 “······이 내용은 사실입니까.”  “응. 데큘레인, 못됐지?”  그웬이 쓴웃음을 지었다. 율리는 그 말을 듣지도 않고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양 볼이 한 번씩 도톰하게 튀어나왔다 들어갔다. 
 진심으로 화났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어째서-”  “어째서냐고?”  이번에는 라펠이 대신 대답했다. 율리는 그웬 뒤에 선 라펠을 바라보았다. 
라펠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데큘레인은 네 부상을 알고 있었다.”  “······제 부상을 말입니까?”  율리가 되물었다. 그웬이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 아직 안 나은 거. 여태 나은 척하던 거. 그놈은 신기하게 잘 알더라.”  “······”  “이 임무를 수행하는 황궁의 지하에는 마기가 가득하대. 그런데 네 부상에는 마기가 극독이잖아?”  임무 도중에 입었던 중상. 당시에는 사경을 헤맸으나, 이제는 극복했다. 
 적어도 율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데큘레인이 너를 교습 기사에서 탈락시키려던 것도 다 그거 때문이었어. 네 마력을 느끼고, 한눈에 알았나봐. 나름 수석교수라는 거겠지.”  걔는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뭐 어때, 이번에는 엿이나 먹으라지~ 그웬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음을 이었다. 
 “아마 부상 내력을 황실에 공개하는 건 그 자체가 네 커리어에 해악이 될 테니까, 제 나름의 방법으로 숨기려던 거겠지. 널 위해서. 너한테는 말도 안 하고.”  율리도 알고 있다. 만약 이 부상이 더욱 악화된다면, 수호기사의 자리는 멀어진다. 그녀가 입은 부상은 그런 종류다. 
 “데큘레인이 환관들, 특히 졸랑을 혐오하는 건 정평이 난 건 아니? 
그런데도, 너 대신 임무를 받아들인 거야. 하긴, 뭐. 당연히 그래야지. 
애초부터 그 자식 때문에 네가 다친 건데.”  유크라인과 환관의 관계는 최악이다. 비단 유크라인 뿐만 아니라, ‘고위 가문’이라 불리는 명가들은 환관들과의 알력 다툼이 심하다. 그 중에서도 프하이르덴과 유크라인은 유독 거칠고. 
 “아무튼. 율리 네가 나을 때까지 만이야. 이번에 만약 우리가 임무에 실패하면, 네가 나을 때까지 기다릴게. 너 없이 안 된다는 뜻일 테니까.”  “옳지~”  뒤편에서 시리오가 끼어들었다. 그웬은 찌릿 노려보았고, 시리오는 투덜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뭐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거야 뭐야······.”  “예. 알겠습니다. 이해했습니다. 이제 돌아가주십시오.”  율리는 완곡하게 떠날 것을 부탁했다. 그웬 삼인방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율리를 위해 자리를 비켰다. 
 “······.”  그녀는 홀로, 제 쇄골 아랫부근에 손을 얹었다. 
 선명한 멍울이 잡혔다. 그저 만지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통증이 일었다. 전부 극복한 줄 알았는데, 근래에 서서히 되살아나는 듯한 흉터였다. 
 “이번에도······ 알고 있었던 겁니까.”  율리는 데큘레인을 생각했다. 
 먼 옛날, 그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너무 거대한 애정은 자신을 옭아매었고, 짓눌렀으며, 그 총체는 폭력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였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확실히 변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물론 혹자들은 그 모습 전부가 연기라 말하기도 한다. 레일리도, 록펠도, 전부가 속아서는 안 된다며—  “연기 맞아요!”  “!”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율리는 크게 놀랐다. 진동이 난 것처럼 위이이잉 떨었다. 
 “아니면 말고요!”  테이블 곁에, 마탑 이사장이 방실방실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제가 혼잣말을 했습니까?”  “아뇨! 제가 개발한 독심술인데요! ‘물론 혹자들은 그 모습 전부가 연기라 말하기도 한다-’ 까지만 엿들었어요!”  율리가 눈을 부릅떴다. 
 “이, 이런! 무례합니다! 어딜 감히 사람 마음을 엿듣는 것입니까!”  “악!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욧! 저도 될줄 몰랐어요! 울애기 깜짝 놀랐잖아욧!”  “······울애기?”  율리는 뒤늦게 이사장이 움켜쥔 목줄을 발견했다. 그 아래에 웬 강아지가 있었다. 털이 풍성한 소형견이었다. 
 “오르메 스파르티잔 아드린느 2 세! 괜찮니?!”  ─앙! 앙! 
 “놀랐대잖아욧!”  율리는 그 강아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예······.”  강아지가 입을 벌리고 웃는다. 헥헥거리면서. 
 저 해맑게 웃는 얼굴과 툭 튀어나온 주둥이. 너무 귀여운 외모에 영혼을 빼앗길 것만 같다······. 
 그녀를 살피던 이사장이 데퉁스레 물었다. 
 “흠. 강아지 좋아해요?”  “예? 아, 아, 그, 좋······ 아닙니다. 임무 중입니다.”  “훗!”  그러자 이사장은 피식 웃더니 ‘오르메 스파르티잔 아드린느 2 세’를 율리의 무릎에 올려주었다. 
 율리는 단숨에 얼굴을 붉혔다. 강아지가 앙—! 하고 짖자 여태 딱딱했던 표정이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율리는 급히 마력 강기를 방사했다. 
 “그만두십시오. 진지합니다.”  이사장이 예의 '독심술 마법'으로 자신을 꿰뚫으려던 것이었다. 
 “쳇. 안 할 테니까 커피나 한 잔 사줘요!”  “······아~ 저 교정을 거닐던 날이 엊그제 같군요.”  율리는 딴청을 피웠다. 금세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모습에 혀를 내두른 이사장은, 커피 한 잔을 직접 주문했다. 
 * * *  째깍— 째깍—  하루가 지나가는 시간, 자정. 
 나는 밤늦도록 연구실에서 마법을 점검하고 있다. 
 “······막혔군.”  이프린의 아버지가 고안한 아이디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세월을 들인 연구, 자그마치 3 천장의 분량. 
 그 마법 개발 연구가 벽에 가로막혔다. 
 “······.”  나는 테이블에 가득한 문서들을 보았다. 
 술식과 마법진, 연산과 논리가 결합된 이 마법 논문은 구체적이고 체계적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나에게 이 발상의 ‘마지막 매듭‘을 실현할 재능과 마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미완성, 즉 ‘정제되지 않은 마법’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마력과 재능은 너무나 막대하다. 물론 정적인 마력은 마석으로 어느 정도 보충이 가능하지만, 역시나 재능의 결핍이 뼈저리다. 
 이 연구는 사대원소(四大元素)의 모든 재능이 필요한 마법. 그러나 데큘레인의 원소 재능은 두 가지, ‘흙[土]’과 ‘불[火]’ 뿐이니. 
 “쯧.”  「철인」이지만 머리가 아프다. 아마, 사흘 전에 리볼버로 내 두개골을 후려갈긴 탓도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이만하지.”  하는 수 없이, 연구 자료들을 「염동」으로 들어올렸다. 많은 분량의 문서들을 그대로 금고에 보관한 뒤 연구실을 나왔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문득. 
 알렌의 집무실이 눈에 띄었다. 
 [ 조교수 알렌 ]  77 층의 구석에 자그맣게 딸린 방. 아직도 그 불이 켜져 있다. 
 성큼 다가간 나는 똑똑─ 문을 노크하고 열었다. 
 “으브!”  책상에 엎드려서 자던 알렌이 황급히 깨어났다. 녀석은 잠이 가득한 얼굴로 종알거렸다. 
 “습. 느젝자이스네요 무스이리시빈까?”  “뭐라는 거지.”  “······느제오사. 안, 늦게까, 지 있으시네요 교수님.”  “기다리고 있었나?”  “아. 먼저 퇴근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에······”  나는 작게 웃었다. 알렌도 헤헤- 어벙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같이 퇴근하지.”  “아, 네에! 잠시만요! 일지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러자 알렌은 어딘가로 튀어나갔고, 나는 녀석을 기다릴 겸 사무실을 휘둘러보았다. 
 티끌과 먼지 하나 없는 책장에 하나 하나 잘 정리된 문서, 조교수가 된 이후로 꾸준히 써온 일지, 수강생 기록부, 강의 정리본, 성적표 등등······. 
 너무 성실한 조교수의 사무실이지만, 이 안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없다. 
 물론 공간 자체는 깨끗하다. 조교수 집무실이 아닌 깔끔한 ‘창고’라 불러도 무색하지 않을 만큼. 
 ──그러나. 
 정작 집무실 주인인 알렌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 체취도, 얼룩도, 심지어 족적도. 
 비단 이 집무실 뿐만이 아니다. 
 내 사무실과 마탑에서도, 녀석의 자취는 서서히 감추어지고 있다. 
 어쩌면 직업병과도 비스무리할 것이다. 
 떠나기 전에, 자신의 전부를 지우는 것. 
 녀석의 정확한 직업이 뭔지는 물론 모르지만 말이다. 
 “얼마 남지 않았나.”  그 탓에, 요즘 나는 실감하고 있었다. 
 알렌이 떠날 시간이 머지않았음을. 
 “······.”  나는 녀석의 책상에 놓인 책을 보았다. 내가 선물한 [ 순수 원소의 이해 : 
유크라인 개정본 ]. 
 열심히 공부하는 듯했지만, 온갖 군데에 물음표가 많았다. 다행히 기초 과정이 아닌 후반부의 심화 과정이었다. 
 “교수님.”  마침 알렌이 돌아왔다. 
 “그리고 이건. 다시 뽑아온 마법사 목록입니다! 이번에는 좀 나을 거예요······.”  녀석이 문서 한장을 보였다. 내 휘하에 지원하려는 마법사 목록이었다. 
 저번보다는 좀 나았지만, 여전히 내 성에는 차지 않았다. 
 나는 그 문서를 안주머니에 넣고 알렌을 내려보았다. 
 “알렌.”  “네에?”  “어느새 학기말이구나. 너에게도 중요한 시간일 텐데.”  학기말은 마탑의 누구에게나 바쁘고 중요한 시기. 누구 한 명이 돌연히 사라지더라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떠나기에는 이만큼 알맞은 때가 없지. 
 “아~ 그렇네요. 그런데 저는 괜찮습니다! 아직 조교수 자리도 벅찬걸요!”  녀석은 방실방실 대답했다. 
 저 표정이 나에게는 너무 익숙하지만, 조금은 건방지기도 하다. 대체 언제까지 숨길 작정인지. 
 “알렌, 내 곁에 몇년을 있었지?”  “수석교수님이 수석교수님이 된 이후로 줄곧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그동안 녀석은 어떤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까. 
 암살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관찰이었을까. 
 그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떠난다는 것은 곧 그 목적을 완수했다는, 혹은 완수하겠다는 뜻일 것이었다. 
 나는 녀석의 그 속내를 알고 싶다. 
 물론 알렌에게서 사망 변수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특성을 숨길 수 있음을 나는 경험으로 안다. 
 유세핀도 내 눈을 속였으니. 
 “······알렌.”  나는 녀석의 이름을 지그시 읊조렸다. 순박하게 갸웃거리는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동안 고마웠다.”  이별을 암시하는 듯 짧은 한마디. 
 그러자 알렌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네에?”  유리창 너머에서 자그맣게 흘러드는 달빛. 녀석의 얼굴에 하얗고 어두운 음영이 드리우며, 그 안의 감정이 드러난다. 
 순수한 놀라움과 갑작스러운 의문. 
 그 이상은 없다. 
 ······어느 정도 떠보려는 말이었거늘. 하긴, 고작 이 정도로 티를 낼 것이었다면 애초부터 들켰겠지. 
 “일전에, 내가 너에게 시험을 통과했다 했었지.”  “아, 네에!”  알렌이 가슴팍에 두 손을 모으고 앙 쥐었다. 
 “조교수 자리를 내어주시면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제 성실함만이 시험을 통과했다 하셨지요. 하지만 다음 단계가 있다고도 말씀을-”  “처음은 ‘성실’이었다면, 그 다음 단계는 ‘신뢰’였다.”  “신뢰······.”  멍하니 되풀이하는 알렌. 녀석의 어깨에 나는 한 손을 얹었다. 
 “알렌, 너는 내 믿음을 얻었어.”  “네, 네에?!”  알렌의 빵빵한 볼에 놀람이 깃들었다. 파르르- 흔들리는 볼살 속에 숨겨진 어떤 감정을 나는 보았다. 
 “내가 믿는 너를, 언제까지고 고작 조교수로 둘 수는 없지.”  “그, 그렇다면······.”  “다음 학기부터는, 너에게 교수 자리를 내어줄 생각이다.”  “······!”  알렌의 눈이 그렁그렁하게 되었다. 
 ······나는 이 녀석의 어느 부분이 진심이고, 거짓인지 모른다. 그걸 알지 못하기에 여태 곁에 둔 것이다. 
 언젠가 들은 격언처럼. 친구는 가까이, 하지만 적은 더 가까이. 
 다만 알렌이 내 적이라면 조금은 섭섭할 듯하니, 이는 설득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 너도 나를 믿고.”  나는 장갑 낀 손가락으로 녀석의 눈가를 닦았다. 검은 가죽 위에 투명한 물방울이 묻어났다. 
 “이 마탑에 남아라.”  알렌의 표정이 느리게 가라앉았다. 
 너무 놀라 굳어버린 알렌을 표현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인지. 
 “내가 허락할테니······.”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으므로. 
 그저 녀석의 눈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계속 내 곁에 있지.”  그때, 달이 모습을 감추었다. 
 떠오른 문장이 그늘진 얼굴을 가렸다. 
 ······[ 악당의 운명 : 사망변수 회피 ]  ◆ 보상 습득 :상점 화폐 +2  가면. (2)  집에 가는 척 돌아온 77 층의 조교수 집무실. 평온하고 아늑한 공간. 
 우측면에 책장 세 개가 일렬로 늘어서고, 그 끝에 조교수의 테이블이 있다. 
타자기와 연필통, 두툼한 전공책을 함께 올려놓을 수 있을만큼 넉넉한 테이블이다. 
 이 어두운 집무실을 습관적으로 쓸고 닦으며, 알렌은 유별난 감회를 느낀다. 
 데큘레인은 이미 떠나 없고, 저 먼 밤하늘에는 별빛이 스친다. 
 이상한 일이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그의 곁을 지킨 탓인가. 
 아니, 막상 그의 눈에 띈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그의 폭정과 편집증적인 완벽주의에 지친 모두가 떠나가고, 어쩔 수 없이 자신 혼자만 남은 것 뿐. 
 애초에 그의 눈에 띄는 것 자체가 계획에는 없던 일이다. 
 그래서 더욱 이상하다. 
 그와 함께하는 동안 자신은 그저 신나게 마법을 공부하고, 책을 읽고, 수업을 준비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평범한 조교수처럼 살았다. 마치, 예전부터 이런 삶을 바랐던 것처럼. 
 알렌은 눈을 감고 되뇌인다. 
 ─너는 내 믿음을 얻었다. 
 그간의 노고를 위로한다는 듯하던 목소리. 
 데큘레인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자신의 진실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믿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임을 모른다. 
 당신이 부르는 ‘알렌’이라는 이름도 자신의 본명이 아닌데. 
 ─계속 내 곁에 있지. 
 데큘레인의 그 마지막 부탁. 그에게 대답하던 자신을 떠올린다. 
 ─그럼요! 당연합니다! 
 라고. 
 ······천천히 눈을 뜬 알렌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당신처럼 알 수 없는 사람은 오랜만입니다.”  처음에는 죽어 마땅하다 생각했었다. 그저 정신병에 시달리는 귀족, 손끝만 한 번 움직이면 그 숨통을 끊어낼 수 있는 무능한 인간 따위라 치부했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그는 바뀌었고, 진심인 모습을 보였다. 그의 외면은 항상 차가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언뜻 느껴졌던 온기가 더욱 찬란했다. 그게 흥미로웠던 탓에, 자신도 모르게 그를 죽음에서 구한 것이었다. 
 베르흐트 열차 테러와 베론의 습격. 
 알렌은 그 전부를 지켜보았고, 베론의 손목을 직접 끊었다. 
 “하지만······ 당신의 믿음은 지키지 못할 것 같아요.”  서서히, 먼 하늘의 어둠에 균열이 발생한다. 
 밤이 깨어지며 드러나는 새벽빛. 동이 트는 풍경. 
 “······너무 오랜 임무였나봐요.”  자신이 ‘알렌으로서’ 바라볼 수 있는 일출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하루하루 몰입했던 이 세상에서 떠날 날도 머지 않았다. 
 아쉬워해서는 안 되었다. 
 자신에게는 그런 감정조차 허락이 되지 않으니. 
 “이만큼이나 알렌에 익숙해져버렸네요.”  알렌은 유리창에 이마를 대었다. 바깥에서 스며드는 한기를 느끼며, 묘하게 뜨거워진 코끝을 훌쩍였다. 
 * * *  한여름의 맑은 주말. 
 율리는 흔치 않은 빈둥거림을 즐기고 있다. 호위 대상 데큘레인은 별채에서 안전하고, 프렌하임 기사단의 업무도 수월하며, 루틴인 아침 훈련도 이미 끝낸 상황인지라. 
 “오오······.”  그녀는 저택의 휴게실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놀았다. 
 아닌 게 아니라, 수행원 휴게실에는 온갖 선진문물이 가득했다. 다양한 보드게임은 물론, 특히 ‘라디오’라는 것이 율리의 흥미를 잡아끌었다. 
 “수정구슬이 아니잖습니까. 어떻게 소리가 나오는 것이지요?”  “아~ 라디오요? 이건 저희도 처음 봤을때는 엄청 신기했어요. 이 안에 마석집전판?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걸로 주파수? 라는 걸 잡으면, 채널? 이라는 게 열 세 개 정도 있는데, 그 채널에서 방송? 하는 걸 들을 수 있다네요.”  마석집전판. 주파수. 채널. 방송. 
 전부 처음 듣는 단어다. 
 “신기하군요. 그렇다면, 이걸로 마상 전투의 중계도 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 가격은 5 천 엘네를 상회하는데 수명이 고작 1 년이라 부르주아의 전유물이나 다름 없지만, 요즘 제국의 언론사들은 저마다 ‘채널’이라는 것을 개설하고 있다. 
 “네. 굳이 티켓을 안 사도 중계를 들을 수 있어요. 보이지는 않아서 답답하긴 하겠지만요.”  우오오— 연신 감탄하는 율리의 무릎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제국의 시종인들이 함께 키우는 강아지였다. 
 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출장에서 돌아온 데큘레인의 직속 비서 ‘렌’이었다. 
 “호위기사님. 이제 일정입니다.”  “아, 예.”  율리는 금세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임무를 준비했다. 그녀의 평상복은 곧 경갑이었으니, 뭔가를 갈아입을 필요는 없었다. 
 ······.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정오. 
 나는 하데카인에 도착했다. 오늘의 첫 번째 일정은 ‘마릭 지하 통로’의 커팅식이었기에. 
 “어떻게 땅 밑에 열차 통로를 낼 생각을 하셨습니까? 하하하!”  “데큘레인 교수님의 안목은 언제나 감탄 뿐입니다!”  지하 통로의 입구에는 이미 많은 요인이 모여 있었다. 정재계에서도 꽤 유명한 얼굴들이었다. 
 나는 예리엘과 함께 그들을 맞이했다. 
 “지하 통로는 여기 이 데큘레인 당주님 아이디어였지만, 상가를 만드는 건 제 아이디어였어요.”  예리엘이 제 가슴에 손을 턱 얹고 온화하게 웃었다. 
 순간 장내의 수다가 멎었다. 그들은 숨죽인 채 내 눈치를 살폈다. 
 “맞는 말이지.”  그리 대답하자 그제서야 껄껄껄— 웃으며 예리엘에게 아첨했다. 
 “그렇군요! 역시, 데큘레인 교수님의 누이분 답습니다.”  “참, 그 총명함은 가문의 유전이란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역시 이 전체가 정치판이었고, 인맥판이었다. 그들은 나와 예리엘의 사이마저도 의심하고 있었다. 
 “자. 이제 커팅식을 시작합시다~”  그때 예리엘이 우쭐거리며 가위를 쥐었다. 
 우리는 다 함께 서서 통로의 입구에 늘어선 테이프를 잘랐다. 
 짝짝짝짝─  환호, 박수와 함께 지하 통로의 입구가 개방되었다. 
 그들은 함께 가자며 통로로 이끌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나머지는 예리엘의 몫이었으니. 
 “일정이 많아서 오늘은 이만. 자세한 내용은 예리엘에게서 전해 듣겠소. 이 사업은 예리엘의 관할이나 다름이 없거든.”  “아~ 그러십니까? 아쉽군요.”  “여흥은 하데카인에서 즐기시게.”  기대했던 듯 조금 아쉬운 표정들이었지만, 이내 예리엘의 뒤를 따라 통로로 들어갔다. 
 “율리, 돌아가지.”  “예.”  이후 나는 율리와 함께 돌아섰다. 
 그런데, 뒤따라오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율리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멈추십시오. 다가오기 전에 신원을 먼저 밝히십시오.”  과연 서슬이 시퍼런 음색이었으나, 묘령의 여인은 주눅들지 않고 대답했다. 
 “투자자.”  빵모자와 정장 차림. 나는 그 얼굴을 확인한 뒤 율리에게 턱짓했다. 
 “괜찮다. 안에 들어가 있지.”  “······예?”  “개인적으로 나눌 얘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켜라.”  “아, 예.”  율리는 머뭇거리면서도 차에 올랐지만, 창문 너머에서 이쪽을 지이이잉 노려보았다. 
 알 로스가 말했다. 
 “머리는 괜찮아뵈는군.”  “알. 너도 여기에 투자를 했나.”  “알? ······아, 나 말인가. 그래. 사업성이 있어 보여서 말이지.”  어깨를 으쓱인 알 로스는 돌연 어떤 정보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주카켄도, 제단도 여전히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마, 머릿속으로는 여러 생각을 하고 있을 테지. 계속 조심하도록.”  “······흠. 게렉은?”  게렉은 꽤 중요하다. 애당초 ‘광인 네임드’들은 게임에서도 특수한 취급을 받는다. 다루기 어려운 대신, 한 번 폭발하면 그 전투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아 전략 무기로 활용할 수 있으니. 
 “게렉은 잠시 지하에 있다. 그리고······ 제단이 습격을 준비하고 있다. 
그게 내가 여기에 온 이유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주변을 살핀 알 로스가 빵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습격?”  “자세한 건 알지 못한다. 이제 놈들이 독단으로 움직이려는 것 같으니, 정보가 세질 않아. 다만, 놈들 특성 상 성대하게 벌이겠지.”  “이유는.”  “광신도가 괜히 광신도가 아니지. 미친 머리는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는 언제든 주의해.”  알 로스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시스템이 떠올랐다. 
 「돌발 이벤트 : 광풍」  “수정구슬로 말하지 그랬나.”  “······그딴 구슬보다는 이게 더 안전하다.”  전달을 끝낸 알 로스는 곧장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차에 올랐다. 
 “마탑으로 가지.”  두 번째 일정은, 마탑의 프로젝트 시찰. 
 “예.”  렌은 별 말 없이 엑셀을 밟았지만, 내 옆자리의 시선이 조금 뜨거웠다. 힐끗 보니 율리가 사뭇 데퉁스런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누구였습니까?”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듯 묻는다. 
 “알 필요 없다.”  “······.”  율리는 입술을 삐죽이고 다시 정좌했다. 
 알 필요 없다하니 묻지 않겠습니다─ 라고 대답은 했지만, 전방을 노려보는 시선이 세상 퉁명스러웠다. 
 ······. 
 한편, 루이나는 연구실에서 마법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신청했던 자금도 전액 지원되었고, 왕실에서 함께 했었던 제자들도 돌아왔다. 
왕실 마탑은 재정 문제로 꺼렸던 프로젝트였으나, 기조실장의 「인가」 도장은 대단히 막강한 위력을 발했다. 
 당장 계획서를 제출하고 일주일만에 이 전부가 마련되었으니. 
 물론 그 탓에 요즘 ‘루이나가 데큘레인의 수하가 되었다─’, ‘아니 수하를 넘어 충견이 되었다─’ 따위의 가십이 돌았지만, 루이나는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데큘레인을 대하는 루이나의 마음은 이미 어느 정도 누그러진 것이었다. 
 “자자. 다들, 너무 마석 아낄 필요 없단다! 여긴 왕국이 아니니까! 재활용은 적당히 하고, 마음 껏 써도-”  그렇게 격려하던 차, 연구실의 문이 열렸다. 루이나는 그 너머의 인물을 보곤 흠칫 놀랐다. 
 “데큘레인 교수? 무슨 일이에요?”  “불시사찰이다. 기조실장의 업무지.”  데큘레인은 연구실의 마법사 16 명과 테이블을 차례로 살폈고, 그들은 엉거주춤 허리를 숙였다. 루이나가 팔짱을 낀 채 그의 옆에 섰다. 
 “걱정할 건 없어요. 오래전부터 준비한 아이디어였으니까. 자금 지원이 없어서 못했을 뿐이지, 성과는 확실히 날 거예요.”  “자신있나.”  “그럼요. 단, 문제는 비용이에요. 1 천만 엘네는 초기자원인 거고, 그 스무 배 가까이 늘어날 수 있거든요.”  2 억. 루이나는 일부러 비용을 부풀려서 말했다. 데큘레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러지.”  그는 어떤 의문이나 의심도 품지 않았다. 다만 서류에 체크를 한 뒤 밖으로 나설 뿐. 언제나처럼 정갈하고 완벽한 행동거지였다. 
 “······.”  그 평범한 모습이, 일련의 자태가, 루이나로서는 왜인지 착잡하다. 
 괜시리 한숨을 내쉰 그녀는 데큘레인을 뒤따랐다. 
 “저기요.”  그렇게 부르자, 멈춰선 데큘레인이 자신을 돌아보았다. 
 “자요.”  루이나는 그에게 사탕통을 내밀었다. 갑작스런 선물에 데큘레인의 눈썹이 짝짝이로 찌푸려졌다.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맥퀸 영지 특산물, 퀴리나 캔디예요. 여름에만, 그것도 아주 소량만 나는 거라 귀한 물건이에요. 우리 영지 효자 상품이죠.”  “그래서?”  “이 작은 통이 천엘네거든요? 더 비싼 값에도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섰고, 예약이 3 년 주기로 밀려 있죠.”  루이나의 그 PR 에도 데큘레인은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루이나는 그의 양복 주머니에 억지로 사탕통을 넣었다. 
 “당신이 안 먹어도, 약혼자는 좋아할 거예요. 확신해요. 이 사탕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율리. 그녀를 언급하자 데큘레인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다. 
 피식 웃은 루이나는 한 발자국 물러나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요.”  “······그래. 당황스럽지만, 받지.”  데큘레인은 주머니의 사탕통을 꺼내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30 분 뒤. 
 다시 차에 오른 데큘레인은, 멀뚱멀뚱 율리를 바라보았다. 
 “뭐요.”  아직도 삐진 율리의 얼굴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데큘레인은 혹시나 싶어, 품 안의 사탕통을 보란듯이 꺼냈다. 
 “어?”  그 브랜드를 보자마자 율리의 얼굴이 돌변했다. 
 간식 발견한 강아지처럼 갑자기 몸을 앞으로 쑥 앞으로 빼더니, 스읍- 침을 삼킨다. 어느새 커다래진 동공이 그 사탕통의 움직임을 이리저리 좇는다. 
 기막힌 효과에 데큘레인은 실소를 머금었다. 
 “그 물건은 어디서 나셨습니까? 맛있겠군요.”  “퀴리나 캔디인데, 알고 있나?”  “예. 그럼요. 어렸을 적부터, 저희들 사이에서는 꿈같은 사탕이었습니다. 
영원히 녹지 않은 사탕이지요.”  “······그래.”  뽕─ 뚜껑을 따고 사탕 한 개를 꺼냈다. 율리는 곧장 두 손을 접시처럼 모아서 내밀었다. 그 위에 올려주자 곧바로 입안에 넣었다. 
 우물우물- 우물우물-  우물거리는 그 만면에 기쁨이 가득하다. 이 사탕이 그렇게 맛있나.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끔 일을 잘하면 상으로 하나씩 주지.”  “······!”  그러자 눈을 부릅뜬 율리는, 그 어느 때보다 열렬하게 사주경계를 시작했다. 
 * * *  ······제국대학의 기말고사 시즌. 대학은 학부생, 마법사, 기사 할 것 없이 모두가 바빴고, 모두가 초췌했다. 대학 교정 전체가 어떤 진득한 무엇인가에 휩싸인 느낌이었다. 
 실비아는 아니었다. 
 오늘 시험도, 어제 시험도, 내일 시험도 전부 만점. 그녀의 만점 행렬은 아마 영원히 이어질 것이니. 
 “흥흥.”  흔치 않게 콧노래를 부르던 실비아는 문득, 로브 안주머니에 고이 넣어둔 종이 한 장을 꺼낸다. 
 [ 지원서 : 데큘레인 ]  어젯밤에 작성한 지원서. 
 데큘레인은 물론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지만, 어차피 정교수 심사의 최소 조건은 1 년이다. 
 실비아는 남은 6 개월 동안만이라도 데큘레인에게서 배우고 싶었다. 또한 그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나 왔어.”  “아가씨~ 오셨네요~?”  저택으로 돌아온 실비아에게, 수행원들이 맑은 웃음으로 맞이했다. 실비아는 평소와 다른 그들의 분위기가 의아했다. 왜인지 능글맞았다. 
 “아가씨. 어느새 친구를 사귀셨어요~ 저희한테 알리지도 않으시고~”  “무슨 소리야.”  친구라니. 나한테 친구가 어디 있다고. 살면서 한 명도 안 사귀었는데. 
 ······그 이유는 거실에 있었다. 
 “얘 뭐야.”  거실에서 웬 이프린처럼 생긴 녀석이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실비아는 조금 자세히 다가가서 보았다. 
 “코오오오······.”  이프린이 맞았다. 
 소파에 누워서 담요까지 두른 채로 고이 누워 자고 있다. 
 “코오오오······”  오늘 아침과 달리 뽀송뽀송한 걸 보니, 여기 와서 샤워도 한 것 같다. 
 “무례한 이프린.”  실비아는 팔짱을 끼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돌연, 저번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네가 후원자에게 보낸 편지지와, 이 손수건의 문양이 같다는 거야. 
 ─응. 그걸로, 후원자 님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 아깝게 얼굴은 못 봤어. 연극 보다가 울어버렸거든. 
 이프린의 손수건은 데큘레인 교수님의 것이다. 
 그렇다면, 이프린을 후원한 것도 데큘레인 교수님일 가능성이 크다. 
 실비아는 그 사실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짜증과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었다. 
 교수님은 왜 이 녀석만 챙겨주는 거지. 그의 아버지가 자살한 것 때문에? 
고작 그 이유로? 
 나를 조교수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프린에게 그 사실을 공개할지도 몰라요. 
 ······뭐가 되었든. 
 “코오오오······ 옼!”  실비아는 이프린의 코를 움켜쥐었다. 휘리릭─ 양 옆으로 크게 흔들었다. 
 “아아악!”  이프린은 비명을 내지르며 깨어났고, 실비아는 곧장 손을 닦았다. 
 “뭐, 뭐니 너!”  “왜 남의 집에 제멋대로 들어와.”  “아니 그렇다고 사람 자는데······.”  시뻘게진 코에 손을 얹었다. 엄청 아파서 눈물이 다 난다. 
 아, 이거 코피 아니야? 
 콧물이네. 
 실비아가 눈을 게슴츠레 좁혔다. 
 “왜 왔어.”  “······종이. 이 종이의 비밀을 알았어”  이프린의 그 말. 실비아의 정수리에 느낌표가 생겼다. 
 “알았다니.”  “에휴. 내가 이런 수모까지 겪으면서······ 아무튼, 봐봐. 그냥 보기에는 단순한 종이잖니? 그런데······.”  이프린이 종이를 쥔 채 순수 원소 마법을 발현했다. 평범하게 「물」의 원소였다. 데큘레인의 종이가 물에 흠뻑 젖었다. 
 “이 멍청멍청한 이프린이 너 죽어······.”  순간 격노한 실비아는 이프린의 목을 조를 뻔했지만, 곧 종이의 형태가 기묘하게 돌변하기 시작했다. 
 이프린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세웠다. 
 “종이는 뭘까. 나무지. 그런데, 나무는 흙과 물의 조합이지?”  물에 젖어 응축되던 종이는 곧, 사방으로 번지며 어떤 입체적인 공간으로 뒤바뀌었다. 
 “너무 쉬운거였어. 이 장소, 어딘지 알지?”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의 특수층에 속하는 40 층, 로케일의 숲. 
 “이 종이에는 시험 장소가 기록되어 있었던 거야.”  “······.”  실비아는 새삼스런 눈으로 이프린을 보았다. 내가 시험을 치르는 동안, 이 녀석은 이런 일을 했구나. 
 노예로 삼길 잘했다. 
 “훗! 어때? 이제 사줘!”  이프린이 콧김을 뿜어내며 말했다. 
 “뭐를.”  “약속했잖아. 로아호크.”  “······.”  실비아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시험 기간 동안 사주겠다 약속하긴 했지만, 이 녀석은 엊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로아호크를 원하고 있다. 
 “아 참. 오늘은 다 같이 가자. 너네 저택 직원분들이랑.”  “안돼.”  실비아는 고개를 저었지만, 흐뭇하게 지켜보던 수행원들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저흰 좋아요~ 아가씨 친구분이라면~”  그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옷을 갈아 입었다. 실비아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약속은 약속이고, 이프린이 문제를 해결한 것도 맞으니까. 데큘레인 교수님이라도 이렇게 했겠지. 
 “······그래.”  “오예~”  * * *  ······한 시간 뒤. 
 텅 비어버린 실비아의 저택에 누군가가 방문했다. 
 “아가~”  일레이드의 당주 길테온. 그는 제 딸아이를 부르며 들어갔지만, 실비아는 커녕 시종도 보이지 않았다. 
 거실을 휘둘러본 길테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택 전체가 텅 비어 있었다. 
 “단체로 외출을 했나.”  그는 뚜벅뚜벅 걸어가 실비아의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아가. 여기있니~?”  대답이 없다. 반응도 없다. 
 “······흠.”  뒷목을 긁적인 길테온은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아이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웬 팬더 인형만 침대 위에서 자신을 바라볼 뿐. 
 “하긴, 기말고사니까.”  애비가 보양식이나 좀 해줄랬더니. 투덜거리며 나가려던 길테온은 문득, 실비아의 책상 위에 놓인 웬 문서 한 장을 발견했다. 
 “성적표인가?”  길테온은 혹시 몰라 저택의 소리를 살핀 뒤, 살금살금 책상 위로 다가갔다. 
휙- 그 종이를 들었다. 
 “음······.”  처음 길테온의 얼굴에는 흥미가 가득했으나, 이내 서서히 굳어갔다. 안색은 차갑게 가라앉았고, 감정은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의 손에 핏줄이 돋아났다. 
 길테온은 저도 모르게 그 종이를 와락 움켜쥐었다. 
 ──[ 지원서 : 데큘레인 ]──  :저 실비아는 데큘레인 교수님 휘하에 자원하고 싶습니다. 저는 150 명의 데뷰탄 중 유일하게, 데큘레인 교수님의 중간고사에서 만접을 받은······  ──────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길테온은 이 정체 불명의 지원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구겨진 부분은 어떠한 훼손도 없이 반듯하게 복원되었다. 
 그러나, 길테온의 표정은 복원될 일 없이 그 어느때보다 험악하다. 
 “데큘레인의 휘하에 지원이라?”  실비아. 네가 데큘레인에게 연심을 품든, 동경을 하든, 그 어떤 감정을 간직하든 개의치 않는다. 어린시절을 스치고 사라질, 찰나의 열병에 불과할 테니. 
 하지만. 
 너는 실비아이기 이전에 일레이드다. 
 일레이드는 결단코, 유크라인의 밑에 있을 수 없다. 
 “허······.”  길테온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너무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게 하려던 탓이었다. 
 가문 간의 갈등. 전쟁. 마법사의 생리. 그 차갑고 냉혹한 세계가 너에게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다. 
 “······하하하하.”  그러나 이제, 때가 되었다. 
 이 이상 두고볼 수는 없다. 
 사자의 자식이 한낱 이리의 밑을 자처하는 꼴은, 가문의 불명예로 영원토록 남을 것이니. 
 ······실비아. 
 너는 이제 알아야 한다. 
 유크라인과 일레이드. 
 그 얽히고설킨, 그리고 질길대로 질긴.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는 악연의 연쇄를  길테온은 이제, 가면을 벗을 준비가 되었다. 
 그의 시험. (1)  투두두둑- 투두두둑-  식당의 창밖에는 한여름 소나기가 쏟아지고, 이프린은 우울함에 젖은 채 식사를 깨작인다. 
 “왜일까요. 인생은, 가끔 이렇듯 너무 엇나가네요. 되돌이킬 수 없을 만큼.”  “······.”  “난데 없이 절망이 찾아오면, 이를 단숨에 극복할 희망도 오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이만한 절망을 보상할 일은······ 흔하지 않죠.”  젓가락을 휘적이던 이프린은 결국 모든 식기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동그랗게 글썽이는 눈물이 애처로웠다. 
 “왜, 왜요? 맛있는데요.”  실비아의 하녀 레테와 엔델은 당황스러웠다. 그들에게는 이 스테이크도 충분히 맛있었다. 
 “얘는 다른 돼지만 좋아해.”  실비아는 태연하게 밥을 먹었다. 그녀에게는 주먹밥이든 볶음밥이든 돼지든 소든 상관이 없었으므로. 
 “왜지······. 왜 하필 오늘······.”  하지만 이프린은 처량하게 중얼거렸다. ‘돼지의 꽃’이 오늘 휴점한 탓이었다. 
 이프린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줄리한테 물어봐야겠다. 
 “멍청한 이프린.”  실비아는 꼴 좋다는 듯 입가를 비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프린은 무어라 대응할 힘이 없었다. 
 세 하녀 중 한 명은 실비아와 함께 가게를 나갔고, 두 명은 가만히 앉아서 이프린을 바라보았다. 
 힘이 쭉 빠진 이프린에게 말했다. 
 “처음이에요.”  “······네?”  “안주인님께서 돌아가신 이래, 아가씨가 친구 분을 데려오신 적은 적은 단 한 번도 없거든요.”  “아······”  이프린은 쓰게 웃었다. 
 사실, 실비아는 워낙 유명하기에 그 가문과 가족 관계에 대한 정보도 거의 공개되어 있다시피 하다. 그래서 마탑의 사람 뿐만 아니라, 대학의 평범한 학부생도 실비아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안다. 
 유명인의 고충이라는 거다. 
 “그래서, 이프린 씨가 직접 찾아왔을 때 어찌나 좋았는지 몰라요. 저택까지 스스럼없이 오셨잖아요.”  “아하하······ 스스럼은 있긴 했는데요······.”  솔직한 말로, 밖에서 알짱거리다가 눈에 띄어서 끌려오듯 한건데. 시종 분들이 너무 잘 대해주셔서 저도 모르게 샤워까지 하긴 했지만. 
 “아니에요. 정말, 처음이었어요. 모두가 아가씨를 어려워하고, 아가씨도 그렇게 막 코를 잡아 비튼다거나? 한 적은 없었거든요.”  “······그, 그런가요?”  “그럼요~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도, 실비아 아가씨와 친하게 지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이프린은 쉽사리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이들은 모르겠지만, 일레이드와 루나의 관계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으니. 
 “안 되나요······?”  “······네? 아뇨, 아뇨. 잘 지내야죠. 암.”  이프린은 짐짓 웃으면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리고는 먹다 만 스테이크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  실비아는 밤이 늦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당장 다음주 금요일이 데큘레인의 시험인지라 준비할 게 많았다. 물론 지원서 퇴고도 해야겠지. 
 “아가.”  그런데, 불 꺼진 저택의 거실. 
 그 한복판에 의외의 인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테온이었다. 
 “어머. 당주님. 언제 오-”  “레테, 자네는 나가 있지.”  사뭇 차가운 분위기였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시종 레테는 걱정스러웠지만, 이내 실비아를 남겨둔 채 밖으로 나갔다. 
 실비아는 갸웃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  길테온은 말없이 책상 위의 지원서를 툭툭 건드렸다. 실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멋대로 봤어.”  실비아는 급히 다가가 그 지원서로 손을 뻗었다. 굳은 얼굴의 길테온은 그녀를 막아내며 물었다. 
 “아가. 정말 데큘레인의 휘하에 지원할 생각이냐.”  “······응. 6 개월 동안만.”  그 말에 길테온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는 다만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아내를 똑닮은 딸아이였다. 
 “······실비아. 나는 네가 좋은 것만 듣고, 좋은 것만 보며 자라길 바랐다. 
나와는 다르게 말이지.”  그의 시선이, 거실 한 켠에 놓인 아내의 액자에 닿는다.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시엘리아. 그녀의 환하게 웃는 얼굴. 
 “마도가문 간의 갈등. 마법사라는 냉혈 짐승의 섭리. 그 세계가 너에게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어.”  길테온의 표정이 서서히 무너진다. 
 이는 연기가 아니다. 
 연기를 하러온 그도, 이 순간만큼은 불길처럼 일어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다. 
 “무슨 말이야.”  “······실비아. 네가 유크라인과 일레이드의 관계를 아느냐. 그 질긴 악연을 아느냐.”  실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의 가면을 벗어버린 길테온이 낯설었다. 무서웠다. 
 그렇게 뒷걸음질치는 실비아를 길테온은 무심히 지켜보았다. 
 “시엘리아.”  실비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 어머니의 이름. 실비아의 어깨가 가냘프게 떨렸다. 
 “아름다운 여인이었지. 과분한 아내였고, 좋은 어머니였다.”  길테온은 벌떡 일어나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어깨를 붙잡고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잘 들어라, 실비아.”  그는 짓씹듯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네가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시엘을, 유크라인이 죽였다.”  실비아의 눈이 느리게 뜨였다. 커지는 동공에 분노하는 길테온이 맺혔다. 
 그순간, 세상이 멀어지는 듯했다. 실비아는 귓속이 멍했고, 두려웠다. 
길테온이 길테온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는 다만 끓어오르는 불처럼······. 
 “데큘레인이 시엘리아를 죽인 것이다.”  그 말에 실비아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공포 앞에서 굳어버리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일레이드와 유크라인은 그런 관계다. 너는 그것을 알아야-”  길테온은 여전히 말을 이었지만, 실비아의 마음 속에는 이미 어떤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거짓말.”  “······.”  길테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실비아는 자신을 움켜쥔 길테온의 손을 밀어냈다  “저 알아요. 엄마가 고향을 떠났던 이유.”  “뭐?”  “엄마는 아빠를 싫어했어요.”  “······실비아.”  “그런데, 아빠는 그때도 거짓말을 했어요.”  “······.”  길테온은 헛웃음을 지었다. 
 문득, 데큘레인의 면상이 떠올랐다. 저 혼자만 존귀한 척 세상 모두를 내려보는 그 오만한 얼굴. 
 그리고 데큘레인 이전의 유크라인, 그 빌어먹을 교활한 능구렁이. 
 유크라인이라는 가문 전체가 길테온의 격노를 일으켰다. 
 “······그렇다면, 직접 물어보면 될 것 아니냐.”  그렇게 읊조리는 음색이 싸늘했다. 
 “놈은 결코 내 말이 거짓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길테온은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실비아는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제 아비인 나에게, 그릇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언젠가의 시엘리아처럼. 
 “직접 물어본 뒤에! 네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하려 했는지─!”  그는 크게 외치며 실비아의 지원서를 찢어발겼다. 
 여태, 아이에게는 단 한 번도 내보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놀란 실비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네가 네 마음으로 직접 느껴라. 그러면 알 것이다.”  그 말을 남긴 뒤 저택을 박차고 나섰다. 부술 듯 현관의 문을 열었다. 
바깥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시종들이 허리를 숙였다. 
 길테온은 그들을 무시하고 곧장 차에 올랐다. 
 ─······괜찮겠어. 
 품 안의 수정구슬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길테온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대답했다. 
 “그간 내가 방심했다. 아무리 시대가 태평하여도, 인물만큼은 혹독하게 연마했어야 했어.”  —형님, 자식교육이 너무 가혹한 거 아냐? 아직 어린 아이야. 힘들 수도 있을 텐데. 
 “하.”  길테온은 자신의 과거를 생각했다. 고작 일곱살에 호랑이의 간식이 될 뻔했고, 열세 살에 가장 친한 친구를 죽이는 것을 강요받았으며, 스무살이 되어서는 전쟁에 휘말려 어머니를 잃었다. 
 “고작 이 정도도 극복하지 못한다면, 일레이드가 아니다.”  그럼에도 길테온은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았다. 
 이 역경과 고난도 결국에는 일레이드였으므로. 일레이드의 야망은 그 삶 전체를 장작처럼 집어삼키며, 더욱 미친 듯이 타오르는 화마였으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실비아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한 번은 삐끗하더라도, 결국에는 다시 찬란하게 비상할 것이야.”  그렇게 뇌까리는 길테온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금요일의 이른 아침. 
 “끄으으으응~”  이프린은 하품을 하면서 기숙관을 나왔다. 
 이제 「파괴 계열의 이용」, 「보조 계열의 전환」 등등의 전공 필수 과목은 물론, 「제국의 역사」, 「범죄의 추적」등등 교양 과목까지, 거의 모든 시험이 끝났다. 
 전부, 하나도 빠짐 없이 만점인 것 같았다. 
 이제 남은 시험은 데큘레인의 「순수 원소의 이해」 뿐. 
 “제일 중요하다, 제일 중요해.”  5 학점 강의의 기말고사. 그 중요성은 말해 입아프다. 
 당장 이 시험 하나를 망친다? 전필 세 개를 A+ 받아도 무용지물이다. 솔다 시험, 교수 추천을 위해서는 무조건, 최소한 2 등은 필수······. 
 그렇게 각오하며 걷는데, 저 멀리서 노란 머리가 보였다. 
 아니, 그저 노랗다는 말로는 신비함을 표현할 수 없다. 실비아의 머리카락은 그만큼 특별하다. 
 순금과 햇볕을 반쯤 섞어놓은 듯한 광채. 폭포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윤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저 금발은, 남녀노소 누구나 부러워할 일레이드의 상징이다. 
 “실비아!”  이프린은 그 등에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실비아는 움찔 떨었지만 곧 평소의 경멸로 자신을 마주했다. 
 “오늘······ 응? 너 얼굴이 왜 그러니?”  “······.”  실비아의 낯을 본 이프린은 흠칫 놀랐다. 
 초췌했다. 다크 서클이 짙었고, 볼이 홀쭉했다. 
 “시험 잘 못봤니? 아니지, 아니잖아. 너 다 만점받았잖니. 소문 다 났는데?”  실비아는 아무 말 않고 이프린을 스쳐지났다. 이프린은 물론 의아했지만, 그녀의 뒤꽁무니를 놓치지 않았다. 
 “40 층이지?”  실비아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 40 층 버튼을 눌렀다. 그때까지도 녀석은 말이 없었다. 
 “······갑자기 쌩까니? 서운하게. 건방진 이프린- 안해?”  “······.”  이프린은 괜히 서운해서 입술을 삐죽였다. 
 참고로 마탑에는 ‘특수층’이라는 것이 있다. 데뷰탄에게는 잘 허락되지 않는 공간인데, 대개 10 층 단위로 나뉜다. 
 10 층, 20 층, 30 층, 40 층 이렇게 말이다. 
 그중에서도 40 층은 ‘로케일의 숲’이라는, 인위적인 마법으로 조성된 자연 풍경이다.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순간에는 이프린도, 실비아도 놀랐다. 
 온통 숲이었다. 완벽한 녹음이었다. 초목이 싱그러운 색을 발했고, 진한 햇볕이 선명하게 내리쬐었다. 
 “와······. 이런 게 특수층이구나.”  두 사람은 그 숲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얼마간 걷자 데뷰탄들이 보였다. 
 루시아, 벡크, 주페른 등 귀족 패거리는 물론, 줄리를 비롯한 평마탐동 동아리 부원들까지. 
 “이피!”  “줄리!”  이프린은 저도 모르게 달려가 그들을 껴안았다. 귀족들의 찌릿거리는 시선이 쇄도했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줄리 너도 알았구나!”  “응! 아 나는 겨우겨우 알았어. 한 2 주 걸렸다니까?”  그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프린은 실비아를 힐끗거렸다. 
실비아는 이 공간의 모든 사람에 관심이 없는 듯보였다. 
 ─그때. 
 “반갑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모두가 흠칫 놀라 자세를 바로잡았다. 
 숲의 언덕, 그 저편에 데큘레인이 자신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축하한다. 시험 장소를 찾아온 데뷰탄은 너희 117 명이다.”  “······.”  데큘레인을 바라보는 실비아의 시선이 멍했다. 
 저렇게나 좋을까. 이프린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시험의 주제는 이론과 직관의 융합이다.”  척 봐도 어려운 테마였다. 이프린과 마법사들은 금세 긴장했고, 집중했다. 
 “누누이 말했을 것이다. 이론이 없다면 직관은 흔들리고, 직관이 없다면 이론은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데큘레인은 마법을 발현했다. 「연성」이었다. 흙과 나무과 뒤섞이며 고급스러운 의자가 솟았다. 
 데큘레인 특유의 우아한 마법은 언제 보아도 신기했다. 
 “이 로케일 숲에는 이론과 직관을 뒤흔드는 마력 재해, 현상이 수시로 발생할 것이나, 흔들림 없이 과제를 완수하는 것이 너희의 목적이다. 알렌?”  말을 마친 데큘레인이 의자에 앉았다. 뒤이어 알렌이 나타났다. 알렌은 언제나처럼 웃고는 있었지만, 왜인지 힘이 없어 보였다. 
 “자~ 다들 시험지 받으세요~”  [1. 아래에 기록된 세 가지 마법을 차례로 발현하고 박제하시오. ]  [2. 순수 원소의 여덟 가지 속성을 한데 모아 박제하시오. ]  [3. 로케일 숲에서 목격한 마력 현상을 서술하시오. ]  [4. 다음 마력 재해의 술식을 해석하여 발현하시오. ]  [5. 다음 순수 원소의 반응성을 이 숲에서 증명하시오. ]  총 다섯 가지 문제. 이프린은 보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마법사들도 비슷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멘탈 관리가 필수다. 
 내가 어려운 건 남들도 어렵다. 그 마인드가 필요하다. 
 “몇몇 마법은 발현하는데 재료가 필요할 지 몰라요. 그 재료는 이 로케일 숲에서 구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조심하세요! 로케일 숲은 특수층이에요! 
특수층은, 위험하기때문에 특수층인거고요!”  “시험 시간은요?”  이프린이 물었다. 알렌은 에취-! 재채기를 한 번 하고는 대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시간의 제한은 없습니다! 또한, 혹시라도 위험이 발생하면 데큘레인 교수님에게 도움을 부탁하세요~”  알렌은 그렇게 말한 뒤, 동산으로 총총총 올라갔다. 그리고는 데큘레인 옆에 보자기를 펼치고 다소곳이 앉았다. 
 교수님~ 차 한잔 하실래요? 라고 묻는 목소리가 자그맣게 들렸다. 
 * * *  냇가에 앉은 실비아는 동산 위의 데큘레인을 힐끔거렸다. 그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데큘레인이 시엘리아를 죽인 것이다. 
 길테온의 그 말이 귓속에서 재생된다. 끊임없이 흘러든다. 
 데큘레인을 볼때마다, 분노에 가득 찬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진다. 
 “······.”  실비아는 고개를 휘저었다. 
 거짓말. 
 분명, 거짓말일 거다. 
 실비아는 그렇게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아마, 일레이드와 유크라인의 사이가 나쁜 것. 
 그것만 진실이고, 나머지는 거짓일 테지. 아버지는 항상 과장하고 속이니까. 
 “······시험.”  실비아는 다만 시험에 집중했다. 쪼그려 앉아서 문제지를 바라보았다. 
 탁─! 
 한데 돌연, 정수리에 차가운 통증이 치밀었다. 
 “아.”  아파서 머리를 움켜쥔 채 올려다보니, 하늘에서 우박이 쏟아지고 있었다. 
실비아는 얼른 천막을 만들었다. 
 [1. 아래에 기록된 세 가지 마법을 차례로 발현하고 박제하시오. ]  그 후 본격적인 풀이를 시작했다. 
 세 가지 마법을 차례로 발현하고 박제하시오. 
 어려울 것 없었다. 
 그저, 그저, 그저······. 
 ─직접 물어보면 될 것 아니냐. 놈은 결코 내 말이 거짓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머리 아파.”  실비아는 울먹이듯 중얼거리며 제 머리를 움켜쥐었다. 
 머릿속에서, 그 말이 떠나가지 않았다. 
 저 멀리 보이는 데큘레인. 
 자신의 뮤즈. 
 내가 동경하고······ 어쩌면 좋아하는 사람. 
 아버지는 저 데큘레인이 어머니를 죽였노라 말했다. 
 왜? 
 “······그래.”  한참동안 두통에 시달리던 실비아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을 끝내고 묻자. 
 이 시험부터 완벽하게 끝낸 뒤. 
 ─실비아. 이번에도 네가 만점이구나. 
 그 말을 들은 다음에, 데큘레인에게 묻자. 
 그러면 그는 분명 거짓이라 답할 것이다. 길테온에게 오해가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할 수 있어.”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실비아는 1 번 문제부터 풀기 시작했다. 
 실비아의 기량에 비해서는 너무 쉬운 문제였으나, 고작 5 분 뒤.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아.”  [1. 아래에 기록된 세 가지 마법을 차례로 발현하고 박제하시오. ]  순수 원소인 「물」을 활용하는 세 가지 마법을, ‘차례로’. 
 그런데 실비아는 이 세 가지 마법을 ‘융합’하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재능과 마력이 너무나 찬란하기에 범한 실수. 
 중간 규모의 마법 세 개가 난데없이 합쳐졌으니, 반작용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안돼.”  자그맣게 읊조린 직후. 
 파아아아아아아──! 
 마법이 터지며 물살이 발생했다. 물과 바람이 마법적으로 뒤섞인, 어마어마한 폭류가 솟구친 것이엇다. 
 실비아는 도망칠 틈도 없이 순식간에 휘말려들었다. 
 그의 시험. (2)  추억은 아주 작은 것들에 묻어 있다. 
 영주성의 복도를 걸을 때 길을 잃을까 꼭 붙잡았던 손. 
 정원에서 함께 키웠던 꽃. 
 자기 전 읽어주었던 동화책. 
 조르고 졸라서 입양했던 길고양이. 
 ······돌이켜보면, 실비아에게 추억은 고작 8 년에 한한다. 
 어머니와 함께한 그 시간이 8 년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기억은 모래알처럼 쌓인다. 가장 오래된 기억이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고, 그 위로 무수한 것들이 쏟아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거워지는 기억의 단층. 
 그 무게에 어떤 기억은 힘없이 파묻히지만, 어떤 기억은 결코 뒤섞이지 못한 채 파편처럼 남는다. 날카롭게 찌른다. 
 실비아의 기억은 그런 종류다. 모래 따위에 매몰되지 않고, 물길에 휩쓸리지 않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다.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도, 영원토록 바뀌지 않을 마음이기에. 
 그러나 언젠가부터, 실비아는 자신의 모래밭에 내리는 새로운 존재를 느낀다. 
 록하크에게서, 베르흐트에서, 잿더미의 남작에게서, 자신을 지켜주었던 교수.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슬픔을 품은 사람.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새싹처럼 자라났다. 그 황폐하고 메마른 자리에서 한 가닥 줄기를 싹틔웠다. 
 잠들기 전에,  가끔 추위에 몸을 떨때,  혹은 외로움에 숨 막힐 듯 답답할 때. 
 이제 자신은 그를 떠올린다. 
 실비아는 그 마음의 종류를 알고 있다. 
 알아 차리지 못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하다. 
 그래서, 더 괴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천천히 눈을 떴다. 
 천장이 새하얬다. 전등이 아른거렸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실비아는 한참동안을 가만히 있었다. 
 사그락—  책의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 그녀는 멍하니 눈을 옮겼다. 
 데큘레인 교수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제 시선을 느낀 것일까. 그는 책을 읽으며 말했다. 
 “시험은 끝났다.”  “······.”  그의 푸른눈이 자신에게 닿았다. 수정처럼 반짝였지만, 얼음처럼 차가웠다. 
 “학기 중 모든 성적이 완벽하니 A 는 충분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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