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12

알 로스가 물었다. 
 “근데 게렉. 너는 굳이 데큘레인을 노리는 이유가 있냐?”  “응?”  “그저 유명해서 죽이고 싶은거 아냐?”  게렉은 순박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곧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나는 뭐, 유크라인 가문에 이래저래 원한이 많지. 그놈들이 우리 마을을 수몰시켰거든.”  제 손가락으로 미간을 툭툭 두드린다. 
 “지금 내 머릿속에서 말을 하는 사람이 많잖아? 전부, 그때 죽은 내 가족들이야.”  ······‘다중인격’이라는 병리도 결국 유크라인 때문이었다는 건가. 
 나름 타당한 이유였다. 
 게렉이 되물었다. 
 “그러는 알 로스 너는?”  “없다. 나는 굳이 놈을 죽일 생각도 없지.”  물론 데큘레인과 사건은 있었지만 딱히 원한은 아니었다. 
 오히려 데큘레인은 죽이면 더 큰 문제가 생기는 벌집과도 같으니, 유크라인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미친 짓은 사양이다. 
 “왜? 알 로스, 네 부모도 출신은 마법사라 그랬잖아. 그러면 유크라인 가문이랑 원한이 있었을 수도?”  “······입 닥쳐라.”  알 로스의 부모는 그녀가 세 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 
 그 이유는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 
 “혹시 몰라? 데큘레인이 죽였을지도.”  “그때 데큘레인은 어린애였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말고 아가리 닫아 씨발아.”  “아니-”  알 로스가 게렉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죽일 듯 노려보며 뇌까렸다. 
 “계속 그따위로 씨부리면 너, 나한테 죽어. 내장을 찢어버리기 전에······.”  “아 미안해~ 이해해줘~ 갑자기 데큘레인이 날아가버렸잖아~ 열받아서 그래.”  “알았으면 일이나 준비해.”  틀어쥔 멱살을 놓았다. 
 사실, 그들은 처음부터 데큘레인을 습격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이 근처에서 수행할 임무가 있었을 뿐. 
 그런데 우연찮게 데큘레인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고······ 게렉, 글리퍼 등 현재 알 로스와 팀을 이룬 놈들이 발작해버렸다. 
 “아무튼, 나는 데큘레인 꼭 죽일거야.”  게렉은 편히 웃으며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내 가족들이 바라고 있어. 그렇지 동생? 
 ······응. 형. 바라고 있어. 나, 익사할때 얼마나 괴로웠는지 형도 알잖아. 
 ······그래. 알고 있어 아버지도 말했는걸······.”  그의 기괴한 대화를 무시하며, 알 로스는 신문을 읽었다. 
 [ 심포지엄 6 번 문제, 수석교수 데큘레인에 의해 종식되나? 증명의 자리······ ]  * * *  대륙을 유랑하는 ‘붉은 가넷 모험단’의 3 차 정착지, 유렌 공국. 
 “자. 읽어봐 다들. 이번해 모험가 시험 팜플렛이야.”  가네샤는 아이들과 함께 머무는 저택에서 팜플렛을 펼쳤다. 
 [ 제 133 회 모험가 시험을 준비하세요! 모험가 길드는 실력 있는 도전자를 기다립니다! ]  [ 37 페이지부터 길드 마스터 ‘고홀’의 일문일답이 있습니다! ]  [ 요즘 모험가 랭킹이 궁금하신가요? 47 페이지를 확인하세요! ]  칼로스·레오·리아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그 내용을 읽었다. 
 그런 아이들의 면면을 살피던 가네샤는 문득, 리아의 어깨 높이에 감탄했다. 
 “와~ 근데 리아는 금세금세 자라는구나. 골격이 확실히, 모험가 하기에 딱 알맞아. 너무 굵지도 않고, 너무 여리여리하지도 않고. 되게 탄탄한 몸이야.”  가네샤는 리아의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렸다. 리아는 간지러워서 그 손을 밀어냈다. 
 “아, 아항. 아, 하지망, 왜 그러세욧- 아핳-”  “3 개월만 더 있으면 레일리보다 크겠는데?”  “이씨. 갑자기 저는 왜요.”  소파에서 감자칩을 먹던 모험단원, 레일리가 혀를 쯧 찼다. 그녀는 다른 아이 두 명에게 화살을 돌렸다. 
 “칼로스, 레오. 너네는 좀 더디게 자란다? 리아는 벌써 160 찍겠는데 너넨 뭐니?”  그러자 두 남아는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을 구겼다. 
 “원래, 원래 리아가 저희보다 두 살이나 많아요. 그러니까 더 빨리 자라는거지······”  “그렇긴 하지. 결국엔 뭐, 너희가 더 커질거야. 원래 전부 유전이거든.”  “됐고, 레일리. 요즘 프하이르덴은 어때?”  가네샤가 물었다. 
 율리의 사촌인 레일리는 제국 소식통이나 다름이 없다. 그만큼 마당발이어서, 거의 모든 소문은 그녀의 귀로 스며든다. 
 어깨를 으쓱인 레일리가 대답했다. 
 “글쎄요. 요즘 별 소식은 없어요. 근데 또, 율리 기사님은 그 약혼자랑 화해한 것 같기도 하고~”  “데큘레인 그 교수랑 화해를 해?”  “네. 싸우지는 않아요 적어도.”  가네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꽤 놀란 그녀가 무언가 물으려던 그때. 
 “네에─?!”  돌연 리아가 크게 소리질렀다. 
 가네샤와 레일리, 두 사람은 동시에 리아를 돌아보았다. 
 “둘이 화해를 해요─?!”  무슨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얼굴이다. 
 레일리는 피식 웃었다. 어린 애가 요즘 신문을 좀 읽더니, 벌써부터 이런 소문에 관심을 가지나. 
 “응.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렇다는데, 왜?”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다니?”  “안 되는데!”  한데 그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더 요란하다.그럴 리가, 어떻게, 어째서, 왜, 아니 그러면 진짜 안 되는데······ 리아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자기 방으로 후다닥 도망쳤다. 
 “뭐야. 쟤 왜 그래요 단장님?”  “······그러게. 리아가 뭘 잘못 먹었나.”  어른 두 명은 그저 헛웃음을 짓고,  “아싸~ 그럼 리아 아이스크림도 우리가-”  칼로스와 레오는 리아의 아이스크림을 뺏어먹으려던 그 순간. 
 “내려놔 바보들아! 내놔! 내껀 내꺼야!”  리아의 방문이 열리더니, 우다다다- 달려나와서 아이스크림만 가지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 * *  부유섬 메지세이온 5 층 ‘그랜드 홀’은 오늘 뜬구름처럼 파다하던 소문, 즉 심포지엄 해결의 종식지로 결정되었다. 
 데큘레인이 제시한 심포지엄 6 번 문제의 해답. 그 전체를 증명하는 자리가, 이토록 격 높은 장소에서 개최되는 것이었다. 
 “······와. 우와. 와. 우와. 와······.”  운 좋게 참석한 이프린은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유명한 마법사가 무지막지하게 많았다. 심사위원석에는 에테르 등위 마법사가 로제리오, 긴달프, 이렇게 두 명이나 있었고, 그 외 루이나, 베카, 이헬름······. 
 심지어 황제 폐하의 동생 크레토 대군까지?! 
 “저 고양이는 뭐지.”  크레토의 옆자리에는 웬 붉은 고양이가 심드렁하게 누워서 하품하고 있었다. 
 “귀엽다.”  “시끄러워 이프린. 촌스럽게.”  실비아가 말했다. 이프린은 그녀를 째려보았다. 
 참고로, 두 사람은 ‘잿더미의 남작 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이번 티켓과 입장권을 얻었다. 
 “어어? 얘! 너 이프린이지?”  그때, 어떤 목소리가 이프린을 불렀다. 
 이프린과 실비아 둘다 그곳을 보았다. 
 “아? 그, 교수님 동생분?”  저번에 우연히 만났던 데큘레인의 동생, 예리엘.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래. 나야. 오랜만?”  “······덕분에 저 벌점 먹었어요.”  이프린이 볼을 부풀렸다. 예리엘도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미안. 근데 나도 마지막에 들켰어. 샘샘이지 샘샘.”  “그- 억!”  “안녕하세요.”  실비아가 이프린을 밀쳐내고 다소곳이 인사했다. 그녀는 예리엘에게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반가워요. 저는 실비아예요.”  온화하면서도 예의 넘치는 응대. 예리엘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아. 너, 일레이드의 실비아.”  “네.”  그러던 순간이었다.예리엘을 바라보던 실비아의 눈이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이프린도 마찬가지였다. 
 “······어.”  그녀는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과 그 아름다운 외모는 차치하더라도, 오직 마법사 뿐인 장소의 유일한 기사였기에. 
 데큘레인의 약혼자로서 예외적인 초대를 받은 사람, 율리. 
 경갑 위에 로브를 걸친 그녀는 예리엘을 발견하곤 반가워하며 다가왔다. 
 “예리엘 씨.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네. 안녕요.”  예리엘은 흥- 입술을 비틀 뿐이었다. 율리는 무슨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예리엘은 받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하는 수 없이, 율리는 쓰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소등하겠습니다  때마침 사회자의 말과 함께 조명이 꺼졌다. 
 ─이제부터, 15 년 간 미제로 남아 있었던 심포지엄 6 번 문항을 증명하는 자리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름처럼 광대하지는 않지만, 마법학술을 다루기에는 그 어디보다 영예로운 ‘그랜드 홀’. 
 저편의 단상에 커텐이 내려앉았다. 
 “후우······.”  이프린은 뭔가 차오르는 긴장에 옆의 실비아를 보았다. 
 “······실비아. 너 뭐하니?”  “······.”  실비아가 이상했다. 그녀는 대답도 없이, 지이이이잉─ 레이저처럼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좇으니, 새하얀 머리카락. 
 즉 율리의 뒤통수였다. 
 정리. (3)  ······30 분 전. 
 심포지엄 평가위원의 대기실  “루엘 언니. 이 해답 진짜가?”  에테르 등위의 마법사, 로제리오가 의문스레 중얼거렸다. 루이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되물었다. 
 “뭐가 진짜라는 건데?”  “이 해답을 정말 데큘레인이 섰냐 이말이다.”  분홍색 단발이 인상적인 ‘로제리오’는 에테르 등위의 거물이지만, 루이나에게 언니라 부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녀보다 나이가 어리다. 
 마탑에서 6 개월만 머물고 곧장 부유섬에 올라, 25 살의 나이로 에테르 등위에 도달한 ‘연성·보조’ 계열의 천재이니. 
 “응. 데큘레인이 직접 썼대.”  “······.”  로제리오는 여전히 못미더운 눈치였다. 다른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긴달프가 되물었다. 
 “정말이니? 데큘레인 고놈 성정을 내가 알아서 의심이 되는구나.”  이제 70 대에 접어든 긴달프는 백발, 턱수염, 동그란 안경 등 동화에서나 볼법한 노마법사의 표본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내는 이거. 이게 마음에 걸린단 말이제.”  로제리오가 ‘데큘레인의 정리’ 마지막 부분을 가리켰다. 
 [ ······이외에도 48 개의 룬어 해석에 성공했고 정리했으나, 주제와 맞지 않아 싣지 않았다. ]  “이것도 진짜여? 구라치는거 아이가? 지가 여러 룬어를 해석했다는디?”  루이나가 피식 웃었다. 
 “이거, 해석본 내가 얼핏 봤어. 읊어도 봤고.”  데큘레인은 자신에게 룬어 해석본을 일부 보여줬었다. 
 물론 그 자체가 엉터리 해석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룬어의 해석이 옳은지 아닌지는 의외로 구분이 쉬웠다. 
 그 발음을 읊으면 되었다. 룬어는 언어 자체에 마력이 깃들었기에, 올바르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필요했으니. 
 “데큘레인 그 작자, 언어에 재능이 있더라. 무슨 10 개 국어를 하던데.”  “흥, 그래? 내는 영 믿지를 못하겠는데.”  로제리오의 눈은 여전히 가늘었고, 긴달프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로제 네 마음대로 생각하렴~”  사실 루이나에게 룬어는 뒷전이었다. 
 그녀는 여태 데큘레인이 상정한 ‘5 년’이라는 기간에 매몰되어 있었다.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유크라인의 자본으로도 치유가 불가능한 병따위 어디에 있다고······. 
 그리 되뇌어도, 영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약속하지. 5 년이면. 네가 내 걸림돌이 되는 일도, 내가 네 걸림돌이 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는 왜 5 년을 약속했는가. 
 ─너는 나보다도 4 살이나 어리지 않냐. 아직 성장할 여지가 많으니, 시간은 확실히 너의 편이다. 
 그는 왜 그런 말을 했는가. 
 “······말이 안 되지.”  시간은 확실히 너의 편이다. 
 정상적으로 오만한 데큘레인이라면, 아니 데큘레인이 아니더라도, 심포지엄 문제를 해결하며 ‘시간은 너의 편이다’ 따위의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룬어를 해석한 영예와 위업은, 시간이 흐를수록 찬란하게 빛날 테니. 
 그러나 루이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에휴. 뭔 상관이냐.”  그간 데큘레인에게 당한 것들만 생각하면 여전히 치가 떨린다. 마음 한 구석, 그를 향한 증오는 아직도 잿불처럼 이글거린다. 
 허나 좋든 싫든 루이나는 철저한 마법사다. 약육강식에 익숙하고, 지극히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거다. 
 따라서 그녀는 격정에 타오르기보다, 자신의 실리를 냉정하게 설정한다. 
 가문의 마법비전. 
 수석교수라는 직함. 
 그 이외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에게 겪은 굴욕, 사사로운 감정, 가문의 원한 따위는 묻어두어도 좋다. 
 게다가, 데큘레인이 말하길, 어차피 5 년이면······. 
 “그카믄 이 ‘48 개 룬어 해석본’도 오늘 공개하는교?”  로제리오가 물었다. 루이나는 대답하기 전에 한숨처럼 말했다. 
 “그보다, 이제 그만 나오시지요.”  바람을 일으켜 대기실의 커텐을 걷었다. 
 그 뒤에는 키작은 이사장이 동상처럼 서있었다. 
 “······아항항.”  로제리오와 긴달프의 시선을 받으며 헤헤 웃더니, 두 주먹을 앙 쥐고 되묻는다. 
 “데큘레인이 48 개 룬어 해석본을 가지고 있다고요?! 룬어를 48 개나 해석했대요?! 그걸 오늘 공개한다고요?! 난리가 나겠네요?!”  “공개 할지 안할지는 물어봐야 알아요, 이사장님.”  “아니지! 이럴때가 아니지!”  이사장의 눈이 짓궂게 되었다. 당장 소문을 퍼트려야겠다— 는 호사가의 얼굴이었다. 
 깡총깡총 뛰어나가는 이사장의 뒷모습을 보며, 로제리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 언니도 참~ 여전하시구마.”  “네 사투리도 여전하네.”  “······내가? 뭐가. 나 표준어 스고 있↘는데요↗?”  로제리오의 고향은 제국 변방 로코코. 유독 거센 사투리로 유명한 시골 지방이다. 
 “하긴 너 정도면 양반이지. 나는 로코코 처음 갔을때는 다른 나라인 줄 알았어~”  “뭐요? 와~ 이 언니 지역감정 억수로 심하네. 그렇게 안 봤는데. 별로 안 다르거든요?”  “너 소싸움 발음해봐. 소-싸-움”  “······.”  로제리오는 입을 다물었다. 
 *  그랜드 홀의 정원은 400 명. 그 거창한 이름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심포지엄의 해답을 증명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장소다. 
 사실 ‘그랜드’라는 이름 자체도 틀린 뜻은 아니지. 
 300 여년 전, 부유섬의 설계자이자 대마법사 ‘로플랑’이 메지세이온을 건립했을 때, 가장 넓었던 홀이 이곳이었으니. 
 부유섬의 시작을 함께한 전통이라는 것이다. 
 “어떻, 어떠, 어, 어, 어, 어, 어, 어떻, 어······”  아마, 지금 알렌이 불안장애 증상을 보이는 이유다. 
 “진정해라.”  “네, 네. 네에.”  녀석은 자리에 앉아서도 안절부절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미친듯이 떨리는 오른손을 진정시키려고 왼손으로 콱 움켜쥐자, 이제는 그 떨림이 몸 전체로 번진다. 
 무슨 헬스장 덜덜이처럼. 
 “으브베베베베······.”  “······.”  저러는 모습을 보면, 나는 가끔 알렌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원래 성격이 저렇지는 않을 텐데. 
 참 자연스러운 연기다. 
 “후우. 후우. 후우······. 힉! 아, 히끅! 큰일이다, 갑자기 딸국질이······!”  나는 말없이 [ 룬어 해석 정리본 ]을 보았다. 마법계에서 해석을 끝낸 14 개의 룬어 외에 48 개의 룬어를 추가로 해석한 정리본. 
 처음에는 공개할까 생각도 했었지만, 하지 않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룬어 공개가 어떤 파장으로 이어질지 예측이 안 되기에. 내 머릿속에만 두는 걸로. 
 혹시 몰라, 맨해튼 프로젝트처럼 원자폭탄 급 재앙으로 이어질 수도. 
 “풋.”  한데, 참 이상한 일이다. 
 이 폰트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를 미소가 흐르곤 한다. 
 언젠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떠오르기 때문일까······. 
 ─김우진! 이거봐. 
 바래진 필름처럼 재생되는 옛적의 추억. 
 ─설정팀에서 구상 중인 룬어야. 히브리어랑 라틴어랑 반반 섞었다나? 
 그렇게 말하는 녀석은 두 손을 꽃받침처럼 제 턱 밑에 모았다. 으레 하던 귀여운 척이었다. 
 ─이제, 우진이 네가 깔끔하게 다듬기만 하면 돼. 폰트도 이것저것 해봐. 
조금 옛날 것처럼 보이게. 
 설정을 떠들며 나를 바라보는 눈이 맑았다. 
 ─우진이 너, 집중할때는 새삼 잘생겼단 말이지. 
 그녀의 이름은 유아라. 
 ─음음. 
 내 안에 남은 김우진의 기억. 
 ─뭐래. 그렇게 따지면 내가 더 아깝지······. 
 그러나, 서서히 흐릿해지는 목소리. 
 ─······. 
 시간이 꽤 흐른 탓일까. 
 이제서야, 잊을만할 것 같았다. 
 ······덜덜덜덜덜. 
 알렌의 진동 소리가 나를 현실로 이끌었다. 무슨 알람시계냐. 
 “알렌. 석판(石版)은?”  “여기, 여기 있습니다!”  알렌이 석판을 내놓았다. 커다란 마석을 판 형태로 가공한 뒤 룬어를 새긴 매개의 일종이었다. 
 ─똑똑. 
 그때 드디어,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노크였다. 
 “가지.”  알렌은 벌벌 떨면서 일어났고, 함께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따라오시지요.”  안내하는 마법사를 따라 커텐이 내려앉은 홀의 단상에 섰다. 
 “곧 시작하겠습니다. 두 분?”  “그러지.”  “네, 네, 네에.”  등 뒤에는 큰 칠판과 분필이 있었다. 30 년이나 된 홀이라 비품도 클래식이었다. 
 ─지금부터 제국황실 대학마탑의 데큘레인 수석교수가 심포지엄 6 번 문제의 해답을 증명하겠습니다.장내를 울리는 사회자의 목소리. 
 부유섬답게 시끄럽거나 요란하지 않고 조용하다. 
 스르르륵─  펼쳐지는 커텐 너머. 
 그랜드 홀의 정원은 가득했으나, 한 사람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율리. 
 지금의 나는 네가 어느 곳에, 어떤 인파에 파묻혔어도 금세 찾아내겠지. 
 성격이 되어버린 애정은 그런 것이니까. 
 ─오늘 증명의 심사위원은 에테르 등위의 로제리오, 긴달프, 모나크 등위의 루이나, 중독자 아스탈입니다. 
 나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는다. 언젠가 한 말처럼, 나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시선이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선민의식이라는 것이다. 
 “반갑습니다.”  나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수석교수 데큘레인입니다. 심포지엄 6 번 문제, 룬어의 증명을 시작하겠습니다.”  * * *  ······데큘레인의 정리는 차근차근 진행되었고, 그랜드 홀은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참석자들에게는 모두 ‘데큘레인의 정리’라는 제목의 문서가 배부되어 있었다. 
 “6 번 문항의 비문, 즉 룬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루어집니다.”  [ 빛과 뜻이 있는 곳에 신이 있나니. ]  [ 신께서는 인간의 추종이 두려워 스스로 모습을 감추시었다. ]  이 비문의 해석은, 이미 모나크 등위의 ‘로텐’이 언어학자 ‘프레인지’와 함께 절반 정도 이룬 바가 있었다. 
 따라서 특별할 것은 없었으나, 본론은 그 다음부터였다. 
 “여기서 두 번째 문장은 치우지. 쓸모가 없으니.”  “옙!”  데큘레인은 과감하게 두 번째 문장을 지웠다. 
 “오직 첫 번째 문장의 ‘빛’과 ‘뜻’과 ‘신’에 해당하는 세 룬어만이 마법회로의 역할을 겸하고, 나머지는 조합의 재료에 불과합니다.”  [ 빛과 뜻이 있는 곳에 신이 있나니. ]  [ א יΘ פה שיφ ש אור ומל חζ, ] יש  허공에 떠오른 첫 번째 문장. 
 룬어는 해석 자체를 거부하는 듯 고고했지만. 
 “이 룬어를 풀이하는 첫 번째 과정은 ‘분할’입니다.”  데큘레인은 그 룬어를 갈기갈기 해체했다. 문장 전체가 여러 조각으로 공중에 비산했다. 
 “첫 번째 문장은 총 13 개 음절이지만, 이 13 개의 음절에서도 45 번의 분절이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강’이라는 음절이 ‘ㄱ’, ‘ㅏ’ , ‘ㅇ’이라는 세 개의 음소로 분절되는 것과 유사하다. 
 룬어 또한 결국은 언어이기에. 
 “그러나 여기서 단순히 이 45 개의 분절을, 조합하는 경우의 수는 무수히 많습니다. 최소한 3,923,023,104,000 가지 이상이지요.”  삼조, 구천이백삼십억, 이천삼백십만, 사천가지 이상. 말이 이상이지, 사실 무량대수에 가까운 규모였다. 
 “그러나 그 숫자 속에 두 번째 과정이 있습니다. 가장 유의미한 룬어 조합을 ‘발견’하고 추리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부터, 데큘레인의 정리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분야로 접어들었다. 
 거의 두 시간 동안 무수한 룬어 조합이 파도처럼 펼쳐졌고, 그 파도는 어떤 도형으로 변했으며, 그 도형이 마법의 술식을 이루었다. 
 대저 어마어마한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 
 「이해력」이라는 특성이, 게임 디자이너 김우진의 머릿속 ‘설정 지식’과 결합된 뒤, 어떤 한계를 돌파한 결과물이었다. 
 “······이와 같습니다.”  위의 모든 과정을 두 마디로 요악하자면. 
 ─룬어를 분해하고, 그 조합으로 마법진을 만들었다. 단, 현대의 정석적인 마법진과는 아주 어긋난 형태였다. 
 로제리오가 물었다. 
 ─조합은↗ 확실합니까↘. 가짓수가 그렇게 많다면, 다른 조합도↗ 충분히↘ 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 목소리에는 사투리가 다수 섞여 있었다. 
 “룬어는 언어 그 자체로 이루어진 마법이지요. 용언과도 같아 목소리에 힘이 실립니다.”  솔직히 거슬렸지만, 데큘레인은 내색않고 말을 이었다. 
 “단전, 복강, 뇌가 아닌 ‘구강’으로 행하기에, ‘인간이 발음하기에 용이한’ 조합만을 추렸습니다.”  로제리오에게 ‘쌍시옷’ 발음이 힘든 것 이상으로, 인간이 발음할 수 없는 구조도 분명히 존재한다. 
 데큘레인은 그 점을 파고들었다. 
 ─음. 
 로제리오는 납득했고, 데큘레인은 알렌에게 눈짓했다. 후다닥 달려온 알렌이 마석판을 건넸다. 
 데큘레인이 마석판에 손을 얹었다. 
 “이제 해답을 시연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그랜드 홀의 정적에 고요한 열기가 일었다. 
 그를 지켜보는 눈에 흥분이 있었다. 
 “······.”  데큘레인은 눈을 감았다. 그 상태에서 신중하게, 오늘 증명했던 과정을 그대로 반복했다. 
 첫번째로 룬어를 분해했고, 두번째로 룬어 조합식을 간추렸고, 세번째로 그 조합을 마법진으로 재구성했고, 마지막으로. 
 알 수 없는 룬어를 중얼거렸다. 
 “───.”  빛과 뜻이 있는 곳에 신이 있나니. 
 그 한마디. 
 쏴아아아아······. 
 석판에서 푸른 빛이 떠올랐다. 바람이 휘몰아치며 환영이 떠올랐다. 미지의 풍경이 그랜드 홀을 가득 물들였다. 
 먼 옛날, 룬어가 일상이었던 시절이었다. 
 장면은 마치 사람의 시선을 빌린 듯 천천히 움직였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새하얀 바닥, 아름다운 조각상, 청빈한 유리, 그 신전의 가운데에 무릎을 꿇어 앉은 사제······.이윽고, 사제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채 입을 벌렸다. 
 ────. 
 아름다운 소리가 흘렀다. 청아한 울림이 홀 전체로 번졌다. 모두가 눈을 감았고, 귀를 열었다. 
 그 자체로 신성한 음색은, 아쉽게도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성냥처럼 순식간에 타올랐다가 사그라들었을 뿐. 
 ······. 
 썰물처럼 달려들었던 소리가, 밀물처럼 휩쓸려나간 적막. 
 술자 데큘레인은 말했다. 
 “이 비문은 신에게 바치는 찬송이었습니다.”  이미 소실된 마법이자, 먼 옛날 ‘신의 시대’의 편린. 
 혹자는 일견 찬송가에 불과하다 착각할지 모르나, 이 전체에 고고학적인 가치가 막대할 뿐더러, 해답에서 비롯된 아이디어는 또 다른 마법의 발명으로 이어질 것이다. 
 “증명은 끝입니다.”  데큘레인은 그렇게 정리를 끝냈다. 
 강당은 조용했다. 
 이슬비처럼 젖어든 룬어의 여운. 그 속에서, 심사위원 긴달프가 물었다. 
 ─······멋지군. 한데, 이게 끝인가? 
 ─그 외의 룬어를↗ 해석하여↘ 정리본으로 만들었다는↗ 단락이↘ 마지막에 있습니다만. 
 긴달프는 은근했고, 로제리오는 직설적이었다. 
 그 뜻을 이해한 데큘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해석본은 공개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흠. 공개하지↘ 못하는 게 맞습니까↗. 해석본이↘ 없는 것 아닙니까↗? 
 로제리오가 그렇게 물었다. 데큘레인은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 안주머니에서 문서를 꺼냈다. 
 “이게 그 해석본입니다. 48 자의 룬어를 해석한 내용은 이 안에 있습니다. 
복사본은 없고, 세상에 하나 뿐인 원본이지요.”  그러자 그랜드 홀이 자그마한 소란으로 부풀었다. 
 데큘레인은 그 해석본을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אתה──לאכ──לם ──”  룬어의 울림이 공간을 울렸다. 단 세 마디 읊조린 것만으로 대부분의 마력이 소모되었지만, 내용 증명으로는 충분할 것이었다. 
 “······이처럼 마법계에 공개되지 않은 다수의 룬어를 해석하였으나.”  데큘레인의 말이 뚝 멈췄다. 그는 자신이 제작한 해석본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그 주름이 고민으로 꿈틀거리는 듯했다. 
 “주제와 맞지 않고, 이 이상 룬어를 공개하면 악용의 여지가 없지 않기에.”  한순간, 불길이 일었다. 데큘레인이 일으킨 화마였다. 
 마력의 불은 그 손에 쥐어진 [ 룬어 해석 정리본 ]에 옮겨붙었다. 
 “이곳에서 파기하도록 하겠습니다.”  ───! 
 해석본은 불길에 휘감기며 기이한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 안에 기록된 룬어가 마력에 공명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마도 데큘레인이 3 년 동안 공들였을 연구는, 고작 재 따위로 스러져내렸다.─아? 
 강당은 침묵했다. 놀란 마법사들의 입은 어떤 소란보다도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으나, 정작 데큘레인은 재가 되어버린 해석본을 세상 무심하게 치운 뒤,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제 질의응답을 시작하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질문을 하는 이가 없었다. 
 * * *  「 플레이어 : 유리아 」  :레벨 ─ [ 7 ]  :마력 ─ [ 4,507 ]  :재능 등급 ─ [ 4 등급 ]  :재능 종류 ─ [ 기원 ]  :특성 ─ [ 3 개 ]  :성격 ─ [ 7 개 ]  :외양 ─ [ 금발·적안 ]  ······유아라는 텅 빈 침대에 누워 자신의 정체성을 생각한다. 
 허공에 너울거리는 푸른 활자. 레벨과 특성을 비롯한 캐릭터의 정보. 
플레이어라는 범주. 
 오직 리아만이 볼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오게 된 연유를 모른다. 
 과정도 모른다. 용의자도 모른다. 저의도 모른다. 그딴 걸 알 리가 없다. 
 이 현상 자체가 과학 따위를 아득히 초월한 미지이니. 
 그저, 야밤의 벼락이 회사 건물 전체를 달구었던 그 순간.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더니. 
 게임 속 플레이어가 되었을 뿐. 
 무슨 소설에서나 읽었던 전개였지만, 그 주인공들처럼 허우적거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본디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나름 캐릭터의 재능이 뛰어났고, 외모도 본래의 ‘유아라’ 그대로—사실 조금 더 예쁘장하긴 하다—였기에, 적응이 어렵지도 않았다. 
 문제는 시작 지점과 나이였다. 
 시작지는 게임의 메인 퀘스트와 멀찍이 떨어진 ‘다도해’. 
 나이는 원래보다 열 세살이나 어린 ‘열 네살’. 
 다행히 몸은 빠르게 성장했으며, 특유의 생존력과 향상심으로 마력 등급도 벌써 4 등급에 이르렀지만······. 
 “화해라니, 말도 안 돼!”  데큘레인. 
 이런 몸으로는 어떻게 대응할 수 없어 그저 방치해뒀던 그 빌런이, 무슨 술수인지는 몰라도 율리와 화해를 했단다! 
 세상에, 데큘레인이 화해라니! 
 “······.”  리아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닌 게 아니라, 율리와 데큘레인은 화해가 불가능한 관계다. 서로가 상극이지만, 율리의 마지막 퍼즐은 데큘레인이기 때문이다. 
 게임 시스템 자체가 그렇다. 
 핵심 네임드 ‘율리’의 스토리는 결국 데큘레인이다.그녀는 데큘레인에게 끝없이 시달리며 본인의 흉터를 극복하고, 영원한 겨울의 꽃으로 처절하게 피어난다. 
 따라서 화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터인데. 
 아니, 데큘레인과의 갈등이 있어야만 율리도 본인의 부상을 초극(超克)할 수 있을 터인데·····. 
 “아······. 혼란을 넘어 혼돈이다······.”  물론 의심이 되기는 한다. 
 자신이 플레이어가 된 것처럼, 데큘레인도 플레이어는 아닐까. 
 왜, 소설같은거 보면 막 망나니한테 빙의하고 그러잖아. 
 “······설마.”  어불성설이다. 
 지금 리아가 신문 따위로 얼핏 확인한 데큘레인의 행보는, 결코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애당초, 데큘레인은 플레이하기에 너무 극악의 난이도거든. 
 “쩝.”  그런데 또, 데큘레인하니까 괜히 그 녀석이 떠오른다. 
 데큘레인의 모델 김우진. 
 작가님한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질투도 났고, 왜 우진이 허락도 없이─ 따위의 불만도 많았지만, 사진으로 본 데큘레인은 그와 확실히 닮았다. 
 물론, 외모만. 
 “······잘 살고 있겠지.”  리아는 엷게 웃었다. 
 그는 부서지기 쉽고, 유유부단하며 나약하지만, 그만큼 섬세하고 상처가 많은 남자. 
 비록 끝까지는 함께하지 못한 채 이별하고 말았지만, 친구로서 곁에 있어주었던 너. 
 “만에 하나라도······ 너는 여기에 있지 않았으면 해.”  하지만. 
 아무리 보고 싶어도, 이 세상은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 
 너는 정말 아이같은 아이니까, 이런 개고생은 나 혼자로 족하다. 
 “가끔 그립긴 해두.”  리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저편에는 유렌 공국의 일상이 출렁이고 있었다. 
 “나쁘진 않아.”  하루하루 지날수록 김우진은 커녕 데큘레인과도 멀어지고 있지만, 그녀에게는 「모험가」 라는 특성이 있다. 
 ──「모험가」──  ◆ 등급  :유니크  ◆ 설명  :타고난 모험가의 자질. 
 :대륙을 유랑할수록 성장 속도가 상승한다. 
 :해금지역의 수에 따라 마력과 체력이 상승한다. 
 ──────  이 덕분에 오히려 성장이 가파를 뿐더러, 무엇보다 유렌에는 공주 네임드 ★마호★가 도사린다. 
 최우선 목표는 그녀에게서 퀘스트를 얻어내는 것.“후.”  상념을 털어낸 리아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샤샤샥- 움직여 책상 밑에 숨겨두었던 나무통을 꺼냈다. 
 우울할 땐 돈. 돈통을 보면 된다. 가끔 가네샤에게 받은 용돈이나, 몰래 잡일과 노가다를 뛰어서 번 돈을 모아둔 통. 
 다도해에서 대륙으로 건너 온 뒤 달마다 5 천 엘네 정도를 벌었는데, 아쉽게도 그 전부를 모을 수는 없었다. 
 가끔씩 이성을 잃어 젤리나 초콜렛 따위에 탕진하곤 했거든. 
 이 캐릭터의 성격이 너무 애같은 탓이었다. 
 아무튼, 지출이 많긴 하지만 모은 돈도 엄청 많다. 
 “후후후훗······.”  리아는 돈통을 꺼내 내용물을 살폈다. 
 손때가 돈벌레처럼 그득한 10 엘네 지폐 오십 장 묶음 열 개. 
 100 엘네 지폐 오십 장 묶음 한 개. 
 그 외 길가다가 주은 은화 세 닢과 동화 다섯 닢. 
 총 1 만 35 엘네. 
 한화 천만원 수준. 
 “이걸 불려나가는 거야. 암, 그렇지. 그렇구 말구.”  우선 삼만 엘네를 모아 유렌 재개발에 투자한 뒤, 그렇게 불린 돈을 다시 부동산과 도박으로 불리고······. 
 히죽─  음흉하게 웃던 리아는 문득, 다시 순박한 얼굴이 되어 눈을 깜빡인다. 
 “······과자나 사먹을까. 돈 많아서 괜찮을 것 같은데.”  멍하니 은화 세 닢을 움켜쥔다. 
 “아, 안돼!”  그러나 곧장 정신을 차리고 내려놓았다. 
 이럴 때마다 흠칫흠칫 놀란다. 성격의 강제인지, 살짝만 방심하면 멍하니 지폐 한 장을 꺼내고 있는 것이다. 
 돈을 모은다→ 흐뭇하게 지켜본다→ 잠깐 방심→ 어라 나한테 돈이 많네→ 과자 조금 사먹어도 괜찮을 거야→ 산 김에 초콜렛이랑 아이스크림도······ 이런 식의 흐름이다. 
 여기서 특히 초콜렛이 문제다. 이 세계관에서는 엄청 비싼 간식이라. 
 똑똑─  그때 치닫는 노크 소리. 리아는 곧바로 돈통을 숨겼다. 
 붉은 가넷 모험단에는 빚이 무지막지하게 많아서, 이 돈을 들키면 ‘나중에 줄 테니 우리한테 맡겨~’ 따위의 세뱃돈 뺏어가는 엄마처럼 굴 것같단 말이지. 
 “누구세여~”  리아는 최대한 해맑게 말하며 문을 열었다. 
 학기말. (1)  “그걸 왜 불질른단 말여? 나 이해가 안되는구만.”  “나름대로 뜻이 있지 않겠니.”  심사위원 로제리오, 긴달프와 이사장은 대기실에 모여 토론을 벌였다. 그들의 화제는 아직도 데큘레인의 돌발행동이었다. 
 “데큐레인이 중얼거린 룬어는 세 마디였제? 그 세마디에 룬어 열여덟개를 썼단 말이지? 마력의 파동은 분명히 느꼈고?”  물론 48 개는 데큘레인 특유의 과장일 수 있으나, 18 개의 새로운 룬어를 해석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업적이다. 
 데큘레인은 그 업적을 스스로 불태웠다. 
 신기한 일이다. 
 로제리오, 아니 마법계가 아는 데큘레인은, 자신의 연구를 자랑하지 못해 안달난 ‘공명(功名)의 마법사’일 텐데. 
 공감의 공 말고, 공명심의 공 말이다. 
 “‘잿더미’에도 룬어 해석이 공개되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가 아닐까요?!”  그때, 이사장의 필터 없는 말에 로제리오가 흠칫 놀랐다. 
 “아니, 뭐······ 하긴. 금마들 요즘 부유섬에도 스파이 쑤신다고도 하고.”  “그러니까요! 잿더미 이 나쁜 녀석들! 너네 때문에 룬어가 불탔어!”  “······커흠. 아, 예. 그렇긴 한디, 이사장님. 말이 너무 그, 가파르시다······.”  한창 대화를 나누는 그들 사이에서, 루이나는 홀로 심각하게 고뇌하고 있었다. 
 “······.”  데큘레인이 본인의 연구를 제 손으로 파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는 자신의 지혜와 총명으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혹시······.”  어쩌면, 그는 룬어에서 자신의 병을 치유할 단서를 구하려던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의 마법을 초월하는 고대의 권능을 바라며. 
 그러나 룬어에 치유의 기적 따위는 없었고, ‘악용의 소지’만 무수히 발견되었다. 
 그렇기에 스스로, 아무런 미련 없이 파기했다. 
 그 어떤 업적도, 지금의 그에게는 마땅한 영광을 줄 수 없을 테니······.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데큘레인이 등장했다. 한창 대화를 나누던 로제리오와 이사장은 흠칫 놀라 딴청을 피웠다. 
 데큘레인은 그들 중에서 긴달프를 바라보았다. 
 “긴달프 장로님.”  “음? 데큘레인, 지금 자네가 나를 부른 겐가?”  긴달프의 주름 투성이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예.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이라?”  “잠시 가능하시겠습니까.”  “가능은 하네만······.”  긴달프가 데큘레인과 함께 떠났다. 루이나는 두 사람이 나간 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호사가가 아니었지만, 이번 사건만큼은 궁금했다. 온몸이 절로 근질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사장이 풋 웃었다. 
 “루이나 교수도 나랑 똑같네요!”  루이나는 어이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니.요. 저는 이사장님과 달라요.”  “뭐가 다른데요~?”  루이나는 말없이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사장의 ‘호사가 안테나’가 발동했다. 
 편안하게 기운 등. 가소롭다는 듯한 눈. 손가락의 움직임. 작은 고민에 빠진 얼굴. 
 저 자세는 뭔가 알고 있을 때 나오는 거만함이다! 
 정보의 우위에서 나오는 자신감이다! 
 눈을 반짝인 이사장은 루이나의 옆자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뭐가 다른데요? 루이나 교수님~?”  “몰라요.”  “에이잉! 그러지 말고요······!”  아쉽게도, 루이나는 입이 무거웠다. 
 ······  [ 업적 달성 : 심포지엄 문제 해결 ]  ◆마력 +200  ◆상점 화폐 +2  “이 펜던트를 복원하는 것이 부탁인가.”  “예.”  한편, 나는 긴달프에게 어떤 펜던트를 내밀었다. 그 속에는 루나 가문의 부녀가 함께한 사진이 있었다. 
 “안의 사진이 중요합니다.”  “흠······ 사진이 조금 오래된 듯보이나, 어렵지는 않을 걸세.”  긴달프는 ‘조화’ 계열의 정점에 달한 네임드 마법사. 내가 굳이 그를 찾은 이유다. 
 “단, 나도 묻고 싶은 게 있네만.”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긴달프는 사진에 마법을 발현했다. 격을 가늠키 어려운 「복원·재생」이었다. 
 “48 개 룬어 해석은 진짜인가?”  “······물론입니다.”  나는 작게 웃었다. 긴달프는 껄껄- 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펜던트를 내밀었다. 
 “자. 받게.”  재생이 완료된 펜던트는 깨끗했다. 나는 그 뚜껑을 열고 안의 사진을 보았다. 
 “······.”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긴달프가 물었다. 
 “그 자는 아는 사람인가?”  “예. 제 조수였습니다.”  “조수?”  “자살했습니다.”  태연히 말하며 펜던트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긴달프는 짐짓 멋쩍은 척 볼을 긁적였다. 
 “보답을-”  “보답은 무얼. 오늘 자네 업적을 본 것만으로도 족해.”  역시, 네임드 긴달프의 성격은 설정 그대로였다.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으면, 그러니까 아무런 성의도 보이지 않으면, 앞으로는 어떤 부탁도 들어주지 않을 테지.나는 그에게 수표를 끊어서 주었다. 
 “작은 성의입니다. 받아주시지요.”  적정가 5 만 엘네였다. 곁눈질로 힐끗거린 긴달프는 허허- 인자하게 웃으며 수표를 받았다. 
 “뭐 이런 걸 다······ 내 사리사욕보다는 후학 양성에 쓰겠네.”  ······. 
 나는 메지세이온의 뒷뜰로 나왔다. 미리 약속했던 장소에 크레토는 물론, 예리엘과 이프린, 실비아도 함께 있었다. 
 나는 우선 크레토에게 목례했다. 
 “참석 감사드립니다.”  “하하. 무슨. 오히려, 눈이 크게 뜨이는 느낌이었어. 자네 강의는 참 대단해. 어찌 그런 발상을 했는지. 역시 왕도를 걷는 마법사라 할만해. 
그래서 말인데······.”  정말 룬어 원본은 그 하나 뿐인가? 크레토가 제 입술을 가리고 넌지시 물었다. 
 “예. 이제 이 세상에 원본은 없습니다.”  “······아깝지 않나? 오랫동안 몰두했다면서.”  “처음부터 파기할 생각이었습니다. 아직, 이 시대는 룬어를 사용할만큼 성숙하지 않았습니다.”  “성숙이라?”  “악인의 입에서 뻗치는 룬어는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돌변할 게 분명합니다. 
그럴 바에야, 없애는 게 낫지요. ”  그러자 크레토는 입을 반쯤 벌렸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부담스러울만큼의 존경이 있었다. 
 “참, 전에 부탁하셨던 책입니다.”  나는 서류 가방에서 [ 유크라인 : 순수 원소의 이해 ] 사인 초판본을 꺼냈다. 
 “이 귀한 걸 나에게 줘도 되나? 시중에는 판매하지 않는다면서.”  책을 바라보는 크레토의 눈이 반짝였고, 표지를 쓰다듬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귀한 것이기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때였다. 
 “너 이름이 뭐니?”  누군가에게 말하는 이프린의 목소리가 심상치않았다. 
 나는 조금 긴장한 채 그곳을 돌아보았다. 
 “흐흐. 귀엽다 너.”  ─······. 
 “다리 짱 짧네.”  이프린이 고양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고양이는 말없이 이프린을 노려보았다. 
 붉은털 먼치킨은 겉보기에 무척 귀여웠지만, 그 정체를 아는 나로서는 이프린의 명복을 비는 수 밖에 없었다. 
 “푸흣. 왜. 뭐. 그렇게 보면 어쩔건데. 자~ 이거 보렴~”  이프린은 강아지풀을 만들어서 고양이 앞에 흔들었다. 고양이는 그 풀에 손을 뻗었다. 
 쉭쉭— 쉭쉭— 이프린이 흔드는 풀을 따라 그 짧은 앞발이 움직인다. 
 빙의는 했어도, 원래 몸의 습관은 여전한 모양이다. 
 “아. 저 아이는 황실에서 내게 맡긴 고양이일세.”  크레토가 방긋 웃었다. 나는 뒤늦게 소피엔이 얌전한 이유를 깨달았다.크레토는 아직 저 고양이가 소피엔임을 모른다. 
 “이프린. 실비아.”  나는 일이 커지기 전에 그들을 불렀다. 
 “이번 잿더미의 남작 사건에 너희 두 데뷰탄의 활약이 컸었지.”  안주머니에서 수표책을 꺼내 각각 한 장 씩 끊어서 건넸다. 
 “보상이다. 가격 상관 없이, 부유섬에서 원하는 물건을 사라.”  실비아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프린은 숨막힐 듯한 얼굴이 되었으며, 뒤에서 지켜보던 예리엘은 경악했다. 
 “얘, 얘들아, 너네 그걸로 뭐 살거니······?”  타다다닥─ 다급히 달려온 예리엘은 그렇게 묻는 척 수표의 종류를 살폈다. 
그리고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이런 제길, 가문수표잖아요! 개인수표로 하지 왜!’  부유섬은 개인 수표를 받지 않는다. 
 ······. 
 한편, 율리는 혼자 부유섬을 구경하고 있었다. 
 “길이 복잡하구나.”  ······사실 길을 잃었다. 
 그랜드 홀 밖으로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정신을 차리니 부유섬의 시가지였다. 
 벽을 따라 걸으면 된다- 는 가장 기본적인 길찾기 명제가 부유섬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어떤 거리는 길 자체가 하늘로 붕 솟아 있었고, 어떤 거리는 땅 밑으로 쑥 내려앉아 있었으니 원. 
 “······음?”  그렇게 일대를 배회하던 율리는 우연히, 어떤 상점을 발견했다. 
 [ 브랜드 인형 상점 ]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부유섬에도 인형점이 있구나. 
 다가가서 보니 진열대에 귀여운 봉제인형이 많았다. 독수리, 토끼, 팬더······ 그 중에서 팬더를 보았다. 
 곰탱팬더. 
 다른 팬더와 다르게 눈탱이가 갈색인 녀석은, 율리가 어렸을 적부터 유명한 팬더 브랜드였다. 
 “······아?”  그런데, 돌연 주인장이 진열장을 열더니 곰탱팬더만 쏙 빼갔다. 
 방금 막 팔렸구나! 
 율리가 쓰게 웃으며 아쉬워하던 그때. 
 찰랑—  종소리와 함께 상점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나온 사람은 율리도 익히 아는 유명인, 실비아였다. 그녀의 품에는 곰탱팬더가 있었다. 
 “······.”  “안녕하십니까. 실비아 씨.”  “네.”  실비아는 이 갑작스런 만남이 조금 당황스러운 듯했지만, 곧 율리의 시선이 제 인형에 집중되었음을 캐치했다.실비아는 자랑스레 말했다. 
 “선물이에요.”  “누굴 주시려는 겁니까?”  “아니요. 제가 받았어요.”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조금 이상한 말을 하고 말았지만, 애당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선물의 정의는 ‘타인이 자신을 위해 구매한 물건’. 
 그런 점에서 이 인형의 가격을 지불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니, 선물이라 하여도 무리는 없다. 
 ······억지가 아니야. 
 나는 선물 받은 거야. 
 “선물 받았어요.”  실비아는 당당하게 곰탱팬더를 두 손으로 들었다. 그러자 율리는 귀엽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부럽습니다. 팬더를 실제로 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네. 어렸을 적에 곰탱팬더 실물을 봤어요.”  “오. 정말이십니까? 부럽습니다!”  “율리.”  그때, 율리의 뒤에서 익숙한 음색이 흘러들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실비아는 단번에 알았다. 
 데큘레인. 
 율리를 발견한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기 있었나.”  “아, 예.”  데큘레인의 시선은 뒤늦게 실비아를 보았다. 
 그가 율리에게 소개했다. 
 “실비아다. 재능이 넘치는 마법사지. 능히 이터널의 등위에 도전할만해.”  실비아는 데큘레인과 그 옆의 율리를 번갈아보았다. 그녀가 자랑스레 내보였던 곰탱팬더 인형은, 어느새 등 뒤에 숨었다. 
 “저도 압니다. 마침 대화를 하고-”  “저는 이만 갈게요.”  실비아는 율리의 말을 잘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떠나갔다. 
 율리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한데, 율리. 내 정리를 이해하긴 했나?”  데큘레인이 묻자 율리의 얼굴이 팡 붉어졌다. 
 사실, 무슨 말인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룬어에서 발생한 마력의 흐름만 느꼈을 뿐. 
 데큘레인은 작게 웃었다. 
 “되었다. 기대도 안 했으니. 애초에 자이트 때문에 찾아온 것이었잖아.”  그 말에 율리는 흠칫 떨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초대장은 물론 당주님께서 주셨지만, 여기 온 것은 제 의지였습니다.”  “그런가?”  “예. 진지합니다.”  “······그렇다면, 알렌?”여태 데큘레인의 뒤를 아장아장 따르던 조교수가 나타났다. 
 “네에.”  “율리의 관광을 도와주도록. 기사가 부유섬에 방문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  “앗, 네에. 알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율리 기사님!”  알렌이 방긋 웃으며 율리에게 허리를 숙였다. 
 “나는 이만 가지. 내가 있으면, 율리. 너나 나나 불편할 테니.”  “꼭 그렇지는-”  “꼭 그래야 하지. 안 그런가?”  그는 그렇게 되물었다. 
 그 뜻을 이해한 율리는 그저 쓰게 웃으며 끄덕였고, 데큘레인은 그녀를 남긴 채 떠났다. 
 “그, 그렇다면. 제가 관광 코스를······ 아, 우선 메인섬으로, 아, 메인섬 말고, 주변섬부터 가야 하나. 아, 아닌데, 그러면······ 아 혹시, 율리 기사님! 시간이 얼마 정도 있으신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시간에 따라 관광 코스가······.”  허둥지둥하는 알렌에게, 율리는 너그러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시간은 많으니, 너무 고민하실 것 없습니다.”  마음이 안정되는 음색이었다. 
 * * *  맑은 하늘. 커다란 태양. 흔들거리는 아지랑이. 고온 다습한 바람······ 제국의 여름을 정의하는 모든 조건이 지상을 가득 채운 어느날. 
 심포지엄 증명을 마친 나는 마탑에 금의환향했다. 이사진은 고층 플로어를 통째로 대절하여 환영회를 열었고, 교수들은 내게 찬사의 말을 건넸으며, 아드린느는 약속했던 직함을 내어줬다. 
 [ 기획재정조정실장 데큘레인 ]  사실, 마탑은 마법보다 황금으로 세워진 탑이다. 국가와 영지, 기업의 투자에 일희일비하며, 매년 공급받는 마석을 목숨처럼 여긴다. 
 이 탑을 굴리는 연료는 오직 돈이며,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장소다. 
 그러한 마탑에서, 나는 ‘재정’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틀어쥔 것이다······. 
 “교수님! 마지막 수업 계획서와, 진로 상담 주간 안내서입니다.”  그때 등장한 알렌이 여러 문서를 건넸다. 
 그 많던 마탑 강의도 이제 마지막에 이르렀고, 데뷰탄들은 진로를 고민할 때가 되었다. 
 “진로 상담이라.”  ‘진로 상담’은 데뷰탄 혹은 솔다 등위의 1~3 년차 마법사가, 교수에게 훗날의 조언을 구하는 것. 
 그런 점에서, 그 누구도 데큘레인에게는 신청하지 않을 테지. 
 “교수님에게도 세 명이나 신청했어요!”  알렌이 해맑게 말했다. 
 그 늬앙스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 명‘이나’?”  “아, 저, 그게! 그······.”  “괜찮다. 이미 알고 있으니.”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안다. 나가라.”  알렌은 몇번이나 뒤돌아보면서 밖으로 나갔고, 나는 후원 우편함에서 편지를 꺼냈다. 
 이번에도 이프린의 편지였다. 
 [ 안녕하세요, 이프린입니다 후원자님. 답장은 감사히 받았습니다. 이제 곧 방학이 되는데······ ]  그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서랍 속의 펜던트를 꺼냈다. 
 “······.”  내가 아는 이프린은 솔직하고, 제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하지 않은 녀석이다. 
 그 면모는 어렸을 적부터 이어진 듯, 사진 속 이프린은 여전히 맑게 웃고 있지만······. 
 “무엇 때문이냐.”  이프린의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행복한 이프린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그만큼, 무섭도록 딱딱한 표정이었다. 
 * * *  수요일 정오. 마탑 77 층. 
 실비아는 데큘레인 수석교수의 집무실 앞에 서서 노크했다. 
 똑똑─  기말고사 전후로 한달 간 이어지는 진로 상담 주간. 
 고민 많은 데뷰탄들은 여러 교수에게 상담을 부탁하지만, 그 교수 목록에 데큘레인은 없다. 
 위자보드에 적힌 말로는, ‘데큘레인의 직설적인 언행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나약한 너희들이나 그렇지. 
 똑똑─  그들을 가소롭게 여기며, 실비아는 한 번 더 노크했다. 
 조교수 알렌이 문을 열어주었다. 
 “아, 실비아 씨.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지금 다른 상담이 진행중이거든요.”  “안에 누가 있나요.”  “네~ 곧 끝날 거예요.”  실비아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알렌은 이번에 출시된 신식 타자기를 두드렸다. 
 탁- 타- 탁- 타-  상당히 느릿느릿한 독수리 타법이었다. 
 그렇게 한 10 분 쯤 기다리니 상담실의 문이 열렸다. 실비아는 고개를 들고 그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건방진 이프린······.”  당연히, 이프린일 줄 알았다. 
 “음? 실비아 씨?”  “······.”  그런데, 드렌트였다. 
 논공회에서 데큘레인에게 논문 화형을 당한 남자.“아, 의외인가요? 저도 그렇긴 한데······ 하하하. 아무튼. 수고하세요.”  드렌트는 무안한 듯 뒷목을 긁적이며 떠났다. 실비아는 영 이해가 안 되었지만, 곧 상담실 안으로 들어갔다. 
 수석교수의 상담실은 넓고 고급스러웠다. 아니, 어떤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가 공간을 기품으로 물들였다. 
 상담석에는 데큘레인이 있었다. 실비아는 다소곳이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데큘레인은 무심한 눈으로 물었다. 
 “의외구나, 실비아. 네가 진로 상담이라니.”  “네.”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상담이라 하기에도 뭐했다. 솔다 승격 시험에 패스한 이후의 진로는 이미 반쯤 확정적이었으니. 
 “그래. 네 고민은?”  “······.”  실비아는 언젠가, 이프린이 데큘레인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 지원할 겁니다. 교수님 휘하에.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힐 겁니다! 제 아버지는 왜 자살했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데큘레인은 그따위 건방지고 멍청한 마법사를 원하지 않을 것이었다. 오히려 저 멍청한 마법사라도 받아야 하나- 따위의 한탄을 했겠지. 
 그러므로, 실비아는 직접 나서기로 결정했다. 
 “제가 교수님의 휘하에 지원할까요.”  그녀는 되물었다. 확답은 데큘레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기에. 
 볼을 부풀리며 무릎에 올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  데큘레인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흔치 않게 놀란 얼굴이었다. 
 감동이라도 받은 걸까. 
 사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바로 실비아인데, 휘하에 지원한다고 하면 어떤 교수든 환영하지 않을 리 없다. 
 그건 데큘레인 교수도 마찬가지다. 
 1+1 이 2 인것처럼. 
 어떤 말이 돌아올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거다. 당연히 긍정일 테니까. 
 실비아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들이 팡팡 떠올랐다. 
 팡팡- 팡- 팡팡팡팡-  ······그러나. 
 “좋지 않은 선택이다.”  데큘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  실비아는 그의 행동을 잠시 납득할 수 없었다. 
 이제 고개를 젓는게 긍정이고, 고개를 끄덕이는게 부정인걸까. 그 사이에 사회적인 언어가 바뀐걸까. 
 “너는 누구의 아래에 있을 재능이 아니다.”  “······.”  그 말에 실비아는 당황했다. 저도 모르게 그 녀석을 들먹이고 말았다. 
 “이프린은요.”  “이프린은 키울만하지. 내 옛 조수의 딸이기도 하고, 너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으니.”  실비아는 멍하니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말갛게 부풀었던 볼이 홀쭉하게 쪼그라들었다. 
 “실비아. 너는 대마법사의 자질이니 차라리 부유섬에 올라라. 1 년에서 2 년이면 충분히 기량이 만개할 것이고, 대마법사에 도전할 시간도 충분할 것이다.”  ······진심이다. 
 데큘레인 교수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분명히 칭찬하고 있다. 
 그런데, 기분이 왜 이렇지. 
 왜 자꾸, 날카로운 바늘이 심장을 콕- 콕- 찌르는 것 같지. 
 “네가 지원한다 해도, 내가 받지 않을 것이다.”  치명타였다. 
 실비아는 시든 콩나물처럼 온몸을 숙였다.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만 있었다. 
 “······?”  데큘레인으로서는 의문이었다. 
 나름 성격에서 치솟는 시기질투, 뒤틀리는 심정을 억누르며 건넨 찬사였는데. 
 “실비아. 고개를 들어라.”  실비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반응이 범상치 않았다. 
 푹 숙인 눈꺼풀 밑으로 작은 빛이 반짝였다. 
 ······설마. 
 눈물은 아니겠지.학기말. (2)  상담실은 고요했다. 실비아는 우는 듯했지만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고, 나는 그저 지켜보았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찻잔. 그 안의 얼음이 녹아가며 찰랑였다. 창밖에서 흘러드는 햇볕의 각도가 서서히 기울었다. 
 “나는 우는 사람을 싫어한다.”  “울지 않아요.”  그 순간 실비아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실비아의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었지만, 말처럼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칭찬에 감동받았어요.”  “······.”  “데큘레인 교수님은 누구에게도 칭찬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해요.”  그렇게 변명하는 실비아의 목소리와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나는 품 안의 손수건을 꺼냈다. 
 “근데 저는 칭찬받았어요.”  “닦아라.”  “······.”  실비아는 두 손으로 손수건을 쥐었다. 그 눈이 물기에 반짝이는 보석처럼 투명했다. 
 그때, 상담 시간 20 분이 다 되었다. 
 “갈게요.”  시계를 힐끗거린 실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수건은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고, 예의가 넘치는 인사를 한 뒤, 상담실을 나선다. 
 나는 그 작은 등을 지켜보며 말했다. 
 “오늘 조언은 새겨듣도록.”  실비아가 우뚝 멈췄다. 
 그녀는 뒤돌아선 채 고개만 끄덕이고 떠나갔다. 
 ─안녕히가세요~  저 밖에서 알렌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닫힌다. 
 “······자기를 과소평가 하는 건지.”  실비아는 스스로 빛나는 마법사다. 
 당장 내년이면 정교수 임용도 충분한데, 굳이 다른 교수 밑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명백한 낭비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세계 전체의 손해. 
 하지만 이프린은 아니다. 그녀는 내가 연구하는 마법의 적격자이므로, 내 밑에서 더욱 성장할 수 있다. 
 “교수님!”  때마침, 알렌이 상담실 문 밖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10 분 뒤에는 데뷰탄 이프린입니다! 편히 쉬고 계세요!”  *  뚜벅이 이프린은 언제나, 항상 로브와 백팩 차림이다. 
 데뷰탄을 상징하는 푸른 로브. 30 엘네를 주고 산 큰 가방.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은 가성비였기에, 멀리서 보면 커다란 벽돌을 멘 것처럼 투박했는데, 오늘따라 유독 무거워 걸을때마다 철렁거렸다. 
 철렁- 철렁- 가방 밑에 소박하게 달아놓은 고양이 인형이 로브 등허리를 간질인다. 
 “아 어깨······.”엘리베이터에 도착하자 조금 쉴 겸 바닥에 내려놓았다. 
 띵─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금세 1 층에 닿았고, 다시 가방을 멘 이프린은 흠칫 놀랐다. 
 그 안에 실비아가 있었다. 
 같은 데뷰탄이니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문제는 분위기였다. 
 “······.”  실비아는 이프린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우울한 분노가 찌를듯 끼쳐왔다. 
가늘게 좁혀진 시선에는 네가 감히─ 어딜 감히─ 따위의 심정이 가득했다. 
 이프린은 우물쭈물 되물었다. 
 “뭐? 또 왜 그러니?”  “······.”  내심 ‘그 대사‘를 기다렸지만. 
 “낙하산.”  실비아는 다른 말을 씨부렁거리고 스쳐지났다. 
 “······괜히 찝찝하게. 낙하산은 또 뭐래.”  할 거면 하던거나 하지. 불길하게. 
 안 그래도 이번주 운세 별로인데 쟤까지 왜 저래. 타로점이라도 새로 봐야 하나. 
 77 층을 누른 이프린은 거울을 보며 ‘건방진 이프린-‘ 종알대는 것으로 그 찝찝함을 해소했다. 
 띵─  그렇게 도착한 데큘레인의 집무실. 
 “데뷰탄 이프린. 어서오세요~”  “넴.”  조교수 알렌의 안내를 따라 상담실 안으로 들어갔다. 
 “······?”  그런데, 수석교수 데큘레인은 명상하듯 올곧은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이프린은 그저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허물 없이 깨우기에, 데큘레인은 그녀에게 너무 멀고도 가시로 가득한 존재였다. 
 “교수님! 데뷰탄 이프린이 왔습니다.”  조교수의 그 말 덕분에 데큘레인이 눈을 떴다. 
 데큘레인은 이프린을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앉지.”  “예.”  이프린은 자리에 앉자마자 백팩을 풀었다. 그리고는 씩씩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은 진로 상담도 있지만, 솔다 승격 시험에 관련해서 문의를 드리고 싶습니다.”  “솔다.”  “예.”  가방 안에서 주섬주섬 서류들을 꺼냈다. 그녀는 실비아처럼 1 학기가 끝나자마자 솔다 시험에 도전하기 위하여 여러 준비를 했다. 
 “제가 여태 학과 수업에 열심히 참가했다는 증빙 서류들입니다.”  사실, 이프린으로서는 이게 여덟 번째 시도였다. 
 처음에는 신진 교수들을 찾아갔으나 그들의 추천서는 별 효력이 없었고, 렐린 등 종신 교수들은 이프린은 멸시하고 괄시했다. 
 괜히 쓴소리만 듣고 쫓겨났다. 
 “여기, 평마탐동 동아리에서 ‘잿더미 남작’ 습격 전조도 밝혔고, 그 외 여러 민간 봉사 활동 자료들과······.”  데큘레인은 무심히 바라보았다. 
 이프린은 웅변 대회의 어린이처럼 힘찼다. 상대가 그 어떤 교수보다 어려운 데큘레인이었기에, 불안과 긴장을 없애려는 이프린 나름의 방식이었다. 
 “제 학점은 중간고사 기준으로 전부 A+ 라인이지만, 만약 기말고사 끝날 때까지 유지한다면······.”  그렇게 말하면서 끊임없이 서류를 꺼냈다. 이프린이 준비한 자료들은 책상에 차곡차곡 산처럼 쌓였다. 
 “또한 마탑에서-”  “되었다.”  잠자코 듣던 데큘레인이 말을 끊었다. 이프린은 자리에 선 채로 우뚝 멈췄다. 
 “가지고 가라.”  “······.”  순간 이프린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었지만, 티내지 않고 다시 말했다. 
 “저도 솔다 시험 조항은 다 확인했습니다. 조금만 읽어봐주시면-”  “읽을 필요도 없다.”  “······아.”  이프린의 잇새에서 흐른 숨결이 약간 거칠었다. 
 그러나 놀랍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니. 
 “예.”이프린은 다시 주섬주섬 서류들을 백팩에 넣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며 데큘레인은 말했다. 
 “네가 기말시험에서 성적을 유지하면, 솔다 자격은 알아서 주어질 테니.”  “······예?”  퉁명스러웠던 이프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처럼 순수한 얼굴이었다. 
 “네가 전체 3 등 안의 성적을 보인다면, 교수 추천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그 말의 뜻은 확실했다. 기말만 잘 보면 솔다 시험 추천도 해주겠다─ 는 것이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이프린은 뒷목을 긁적였다. 
 “······만약시험패스하면교수님한테지원.”  그리고는 괜히 무안했던지, 한 호흡에 문장을 쏟아냈다. 
 데큘레인은 무심히 답했다. 
 “말리지는 않는다. 고생은 네 몫이니.”  “예.”  이프린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호랑이 새끼를 거두게 되는 것일 텐데. 1~2 년 뒤에도 그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 당신을 금세금세 성큼성큼 추월할 나다······. 
 이프린은 그날 부유섬에서 ‘노력의 천재’ 데큘레인을 인정했지만, 도전적인 마음가짐은 여전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나, 막상 떠나가려던 그때. 
 “잠깐.”  그 말 한마디에 온몸이 굳었다. 데큘레인 특유의 위압이었다. 
 이럴 때는 혹시 속마음이 들켰나— 내가 뭘 잘못했나— 따위의 생각을 하게 된다. 
 “수표를 아직 쓰지 않았더군.”  “······.”  이프린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고개를 삐그덕거리며 혼잣말처럼 물었다. 
 “안쓰면 뺏어가시려나······?”  “그렇지는 않지. 내가 준 것이 아닌, 마탑을 대표하여 준 보상이니.”  “아······ 사실 원하는 아직 물건이 없어서 나중에 꼭 필요할 때 쓰려고······ 했습니다. 보험처럼.”  데큘레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도 된다는 뜻이었고, 이프린은 머뭇머뭇 목례한 뒤 상담실을 나섰다. 
 “데뷰탄 이프린. 잘 가세요~”  “아, 네. 조교수님도요.”  알렌에게 인사한 뒤 집무실 문을 닫았다. 
 그 후에는, 잠시 벽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짜 이상하단 말이지.”  데큘레인의 공간은 그 공기 자체가 이질적이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위압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하다. 1 분이 10 분 같고, 심신에 와닿는 피로감은 그 격이 다르다. 
 이거봐. 아직도 심장이 쿵덕거리잖니. 
 “속내도 알 수가 없고.”  데큘레인의 흉중은 영 모르겠다. 
 그는 분명 아버지의 업적을 갈취했고, 아버지는 ‘서른살 솔다’라는 불명예 마법사로 자살했다. 
 하데카인 MT 에서 이프린은 그 내막을 직설적으로 물어보았지만, 데큘레인은 알려주지 않았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단호하게 부정했으면 시원하기라도 했을텐데. 
 “전부 다 내 몫이라는 걸까.”  그래도 데큘레인은, 최소한 이 마탑에서는 가장 신분을 따지지 않는 교수다. 
 본인의 치부를 밝히리라 천명한 나에게도 공평한 것을 보면 뭐. 
 “공부나 하자······.”  이프린은 벽돌 가방을 다시 메고 뚜벅뚜벅 걸었다. 
 * * *  ······대륙 여러 국가의 지도자·정치인·기업가들은 말한다. 
 잿더미에는 꿈이 없다. 희망이 없다. 삶이 없다. 그 무엇도 없다. 그곳에서 이뤄지는 것들은 모두 재에 불과하다. 
 개소리임을 알 로스는 알고 있다. 
 잿더미에도 삶이 있다. 희망이 있다. 아이가 있다. 
 ······물론, 아이를 기르기에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알 로스가 잿더미에 애향심 따위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야망이 거대한 사람이다. 다만 변방 왕국 출신의 고아에게 출세란 먼 세계의 이야기, 결코 넘을 수 없는 장벽이기에, 차선책으로 택한 곳이 잿더미일 뿐. 
 비공식 대륙 제일의 인형사, 알 로스의 인형은 제국 곳곳에 있다. 
 알 로스의 인형은 본인의 영혼과 연결되어 산사람처럼 행동하지만, 그 중 알 로스의 본 모습과 유사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알 로스에게는 외모가 콤플렉스인 탓이었다. 
 너무 아름다웠기에, 별 볼일 없는 똥파리들이 수도 없이 꼬였었거든. 
 “어서오십시오.”  그러나 오늘, 알 로스는 오랜만에 자신의 본모습으로 [ 블랙 크라인 호텔 ] 에 방문했다. 
 블랙 크라인은 요 근래 제도에 생긴 프라임 등급의 호텔이다. 숙박비는 제도에서 가장 비싼 축에 속하지만, 일상생활에 여러 에러가 많은 알 로스의 마음에는 차고 넘친다. 
 “예약을 했어.”  “네. 솔레트 님. 확인했습니다.”  이 호텔의 종업원들은 고객을 귀족 대하듯이 하는데, 그게 바로 알 로스가 특히 애정하는 점이다. 
 자신에게 알랑방구를 끼는 놈은 있어도, 귀족처럼 대해지는 것은 진짜 귀족이 아니면 어려우니. 
 이렇듯, 알 로스는 의외로 허례허식에 마음을 쓰는 타입이다. 그 전부를 겉으로 내색하지만 않을 뿐. 
 “37 층의 키입니다.”  알 로스는 이명 솔레트로 37 층을 예약했다. 블랙 크라인의 최고 플로어는 펜트하우스 50 층이었으나, 아직은 그만한 마일리지와 사회적 명성을 쌓지 못했다. 
 “식사는 라페린을 곁들인 푸아그라로 부탁하겠어.”  “예.”  알 로스는 예약한 키를 받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화려한 엘리베이터의 거울에 비치는 그녀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허리가 잘록한 것을 제외하면 완벽한 남성복이었다. 
 “······.”  알 로스는 습관적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언제 어떻게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는 행운의 상징이었다. 
 곧 37 층 객실에 도착한 그녀는 의자에 앉아 테블릿을 꺼냈다. 
 마탑의 위자보드와 유사한 물건으로, 현재 협력 관계인 ‘제단’과 소통하는 기기다. 
 ─데큘레인이 룬어를 해석했으나, 정리본을 파기했다. 
 ─룬어, 우리가 원하는 곳이 그 룬어에 있다. 신의 언어. 그것이 데큘레인의 머리에 있다. 
 ─데큘레인 생포가 필요하다. 단가는 3 천만 엘네로 설정하지. 
 데큘레인이 룬어를 해석했다는 부유섬 발(發) 소식. 
 제단 놈들은 그 정보를 듣자마자 데큘레인 납치에 3 천만 엘네의 현상금을 걸었다. 
 “······놈은 나를 알고 있었지.”  알 로스는 자신을 알 로스라 불렀던 데큘레인을 생각했다. 
 “여태까지는 평범하고 저열한 악인이었는데.”  근래의 데큘레인과 과거의 데큘레인은 확연히 다르다. 당장 알 로스가 설립하고 운영 중인 ‘사무실’에서 파악한 정보로는 그렇다. 
 “······주시할만하다. 나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뭐가 되었든 데큘레인은 충분히 위협적인 인물이나, 오늘 알 로스가 제국에 방문한 이유는 그가 아니다. 
 데큘레인 납치에 가담할 생각도 ‘아직까지는’ 없다. 그녀는 승리가 확실한 싸움에만 참여하는 성격이기에.테블릿을 내팽개친 그녀는 어떤 팜플렛을 보았다. 
 [ 헤일리치 유물 경매 ]  “호메렌의 조각 반지.”  오랜만에 발견한 마음에 쏙 드는 보물. 
 그 동안 이런 보물을 위하여 돈을 벌었으니, 이제는 마음 편히, 자신에게 선물을 투자할 시간이었다······. 
 * * *  한편, 상담을 모두 끝낸 뒤. 
 나는 집무실에서 [ 시스템 상점 ]을 보았다. 
 ──[ Lv. 2 시스템 상점 ]──  ■ 1. 모험가의 바람······  ······  ■ 5. 마력의 질적 강화 (2 단계)  :캐릭터 본연의 마력이 질적으로 강화된다. 
 :마력의 출력과 효율 소폭 상승. 
 :20 원  ────────────  “······더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  근래의 노력으로 화폐는 충분히 모았으니, 이제 때가 되었다. 
 차라리 지금 하자. 이번 주는 여러가지 스케쥴이 많아서 언제 또 시간이 날지 모른다. 
 결심한 나는 허공의 [마력의 질적 강화 (2 단계)]를 터치했다. 
 [ ‘마력의 질적 강화 (2 단계)’가 적용됩니다. ]  [ 이제 마력을 보다 정순하게 품을 수 있습니다. ]  시스템이 떠올랐다. 가만히 지켜보며 곧 도래할 고통을 기다렸다. 
 1 단계는 적당한 열감이었으니, 이번에도 그쯤 되겠지······ 라 생각하던 순간. 
 “······!”  갈비뼈가 찢어지는 듯하더니 입에서 검붉은 피가 튀었다. 나는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을 헐떡였다. 
 ───! 
 심장이 발작했다. 
 “······크.”  다행히 통증 자체는 한순간이었으나, 더럽혀진 책상이 거슬렸다. 나는 「염동 」으로 핏방울을 모두 모아 고온으로 태웠다. 
 똑똑─  교수님. 루이나 교수님이 방문하셨습니다─  그때 노크와 함께 알렌이 말했다. 
 “들어오라 하지.”  ─네! 
 문이 열리며 루이나가 들어왔다. 
 “예 보스. 접니다······?”  그러나 몇 발자국 내딛다 말고 흠칫 멈추더니 갑자기 코를 킁킁거렸다. 
 “무슨 일이지.”  “킁킁- 킁킁-”  “······.”  “킁킁-”  “못 본사이에 개가 되었나.”  “아니······ 아니에요. 개라니. 말씀이 심하시네요 보스.”  루이나는 내게 다가오다가 다시 움찔 굳었다. 그리고는 내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나는 손수건을 들어 입가를 닦았다. 피가 조금 묻어나왔다. 미간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이런 더러운 모습을 보이다니. 
 “용건이나 말하지.”  “여, 여기, 여기요. 보스.”  루이나가 엉거주춤 다가와 서류를 내밀었다. 
 “이번에 제가 시작하려는 연구의 기획안인데······.”  아무래도, 이게 마탑 기조실장으로서 첫 업무인 듯했다. 나는 그녀의 문서를 받아들였다. 
 “그럼, 그럼 이제, 이제 갈게요. 수고하세요.”  한데 루이나는 제 기획에 대한 어떤 어필도 않고,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당연히 될 거라 생각하는건가. 
 유크라인의 비호를 받아들인 모습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루이나의 계획서를 살폈다. 
 “흠.”  역시 루이나는 「대부호 재력가」의 눈으로 부족함이 없었기에, 더 볼 것도 없이 ‘인가’ 도장을 찍었다. 
 쾅─! 
 * * *  수요일 오후 3 시. 
 기말고사 전, 데큘레인의 마지막 수업. 
 “자자 줄맞춰서 서주세요!”  조교수 알렌이 먼저 150 명의 데뷰탄을 계열 별로 나뉘었다. 재능을 탄다는 조화 계열이 11 명으로 가장 적었고, 보조 계열이 35 명으로 가장 많았다. 
 “서라.”  오늘의 강의실은 개활지였다. 데큘레인 교수는 150 명 앞에서 말했다. 
 “학기의 마지막 수업이니 더 가르칠 것은 없다. 오늘은 계열 적용을 검사하고, 부족한 점을 지적할 것이다. 다섯 명 씩 나오도록.”  첫 번째는 보조 계열 다섯 명이었다. 
 “아무 마법이나, 가장 자신 있는 것을 보여라.”  데큘레인은 보조 계열 데뷰탄들이 구사하는 마법을 하나하나 지켜보았다. 
 “······유로잔. 「바람 갑옷」이군. 좋은 활용이다.”  “「녹빛 대지」. 일대를 속성화 하는 것은 괴수 토벌에 유용하지.”  데큘레인은 그들이 시전하는 모든 마법을 알고 있었다. 
 그 뿐이면 교수니까 그럴 수도 있다-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결정화」는 크게 보조 계열로 분류되지만, 마법진에는 조화 계열의 특성도 일부 있지. 너는 그 점을 간과했다. 실패의 이유다.”  “아······ 네!”  데큘레인은 구현에 실패한 마법의 정체도 파악했고, 심지어 그 마법이 올바르게 맺어질 수 있도록 조언까지 덧붙였다. 
 “다시, 다시 해보겠습니다!”  교수의 말을 받아들인 데뷰탄 페릿은 다음 시도에 성공했다. 
 “좋다. 다음 다섯 명······.”  ······데큘레인은 타인의 마법진을 「육안」으로 관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그의 머리 속에는 반년 동안 「이해력」으로 받아들인 마법진이 가득하다. 
 처음에는 얄팍했던 ‘마법적 지식’이 이제는 대해처럼 광활해진 것이었다. 
 물론 그 지식들은 ‘메모라이즈’와는 다르다. 모든 마법을 아는만큼 구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메모라이즈는 몸이 마법을 기억하여 무영창·무술식으로 발현하는 일종의 ‘습관화’이지만. 
 데큘레인은 본인의 몸에 직접 새긴 「염동」을 제외한 다른 마법은 전부 ‘이론’을 토대로 구현한다. 
 따라서 데큘레인의 마법과 지식은 일정하다. 
 일정하기에 흔들림이 없다. 
 흔들림이 없기에 확고한 ‘기준’이 될 수 있고, 누군가를 가르치기에 적합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데뷰탄에게 데큘레인은 거진 마법 백과사전이었다. 
 신기에 가까운 그의 눈썰미가 그저 경탄스러웠다. 
 “이프린.”  “예.”  그리고, 마침내 이프린의 차례가 되었다. 
 “갑니다.”  이프린은 자신이 선보일 수 있는 가장 복잡한 마법을 준비했다. 쉭- 쉭쉭- 회로를 이리저리 섞고 꼬고 숨긴, 복합 계열의 마법. 
 그저 보는 것만으로 마법의 정체를 파악하기에는, 아무리 데큘레인 당신이라도 쉽지 않을 터······! 
 데큘레인은 이프린의 마법진을 한 30 초 동안 들여다보았다. 
 “「소프라노」. 너한테는 별 쓸모도 없는데 난이도만 높은 마법이군.”  “어!”  순수원소 ‘바람’과 ‘소리’가 섞인 특수 마법, 「소프라노」. 
 효과는 참 미묘하다. 일대의 모든 소리를 고음역(소프라노)으로 바꾸는 것 뿐이니. 
 「사일런스」로 이어지는 일종의 징검다리마법─특정 마법을 배우기 전, 그 구조에 익숙해지기 위해 조금 더 쉬운 마법을 익히는 것─인데. 
 「소프라노」는 공간의 소리에 간섭하는지라 쓸데없이 복잡하다. 유명하지도 않다. 
 당장 다른 데뷰탄은 소프라노가 뭐야? 성악 아니야? 이러고 있으니. 
 “이프린. 장난을 치려 했나. 아니면 허세인가. 벌점 1 점이다.”  “아닙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벌점만은!”  그러나 데큘레인은 단번에 알아차렸고, 이프린은 황급히 제대로 된 마법을 선보였다. 
 드드드드······ 발밑이 꿀렁이며 그녀가 선 지면이 분화구처럼 변형되었다. 
데큘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맥의 분노」. 난이도가 있는 마법이긴 하나, 그 규모가 너무 조그맣군.”  “네. 사실 저도 그게 조금 마음에 걸렸습니다.”  “규모를 키우려면 간단하다. 마법진의 크기를 키워라. 자세한 내용은 후에 총정리하지.”“아. 네. 저 그러면······ 벌점은 없는 건가요······?”  “아니.”  “아악!”  데큘레인은 이프린을 무시하고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다음.”  다음은, 실비아였다. 아까부터 이프린만 노려보던 실비아는 데큘레인이 다가오자 뒤늦게 자세를 바로 잡았다. 
 “실비아.”  “······네.”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마법을 발현했다. 
 학기말. (3)  실비아는 마법을 발현했다. 그녀의 마법진은 느리게 구성되었고, 강의실 전부는 가득 기대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유력한 차기 대마법사 후보. 
 일레이드의 실비아는 과연 어떤 마법을 구현할지. 
 “······.”  실비아의 마법은 그 전제부터가 웬만한 교수를 아득히 초월하는 마력 용적이었다. 그녀는 막대한 마력으로 자신의 마법을 엮어나갔다. 
 “어?”  그러나,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이프린의 눈에는 서서히 의문이 깃들었다. 
 이프린은 알 수 있었다. 
 아니, 이프린도 알 수 있을만큼 실비아의 마법진은 어긋나 있었다.휘이이이잉──! 
 마력이 터질 듯 응집되었다. 어마어마한 돌풍이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휘몰아쳤다. 노면이 쓸렸고, 이프린의 로브 자락이 빨려들어갔다. 
 “······.”  데큘레인은 아무 말없이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법은 그저 증폭만 반복할 뿐,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까드드드득······. 
 마력의 구체가 지상을 그을렸다. 응집과 수축을 거듭하며 농밀하게 타올랐다. 
 이대로라면 결말은 그저 폭발일 것이었기에, 어느 순간. 
 데큘레인은 그녀의 술식 회로를 단절했다. 
 ······. 
 마법이 해체되었고, 강의실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실비아의 실패에 데뷰탄들은 그저 입술만 뻥긋거렸다. 
 “실패했어요.”  정작 파훼당한 장본인은 태연했다. 그녀는 조금 쭈뼛거리며 데큘레인을 올려다보았다. 
 “저도 아직 부족한 거예요.”  그러나 데큘레인의 시선은 차가웠다. 그는 실비아를 내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실비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불공평해요.”  “뭐가 말이지.”  “저는 잘해서 배울 것이 없다면서, 모자란 애들은 못해서 가르침을 받아요.”  몇몇 데뷰탄이 찔린 듯 어깨를 들썩였다. 
 “말이 안 돼요. 잘하면, 오히려 더 지켜봐주는게 맞잖아요.”  그는 나의 뮤즈이니까. 그를 만난 것 자체가 나에게는 행운이니까. 나는 이 마탑의 어느 누구보다도 그의 가르침에 적합하니까······. 
 실비아는 그의 밑에서 더 성장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데큘레인은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실비아도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불공평하지 않다.”  “불공평해요.”  “불공평한 건 네 재능이다.”  한순간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천재는 고충조차 범재의 그것보다 우월한가?”  김우진은 언젠가, 천재의 투정을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보다 재능이 넘치고 유학도 장학금으로 간 녀석이, 요즘 그림이 잘 안 된다며, 나한테만 기준이 너무 높다며······. 
 “그렇지 않다. 가르침이 필요 없는 너는, 가르침이 없으면 성장하지 못하는 자를 몰라.”  그는 그들이, 그 천재들이 어떤 고충을 겪는지, 어떤 슬럼프를 겪는지. 
 빌어먹을 만큼도 신경 쓴 적이 없다. 재능이 없어 피눈물 흘리는 노력쟁이들은 징징거리는 천재가 혐오스럽기에. 
 아마, 데큘레인도 그러했을 것이었다. 
 “실비아. 여긴 아카데미가 아니다. 네 투정은 누구도 받아주지 않아.”  “······.”  “견디기 싫다면 스스로 포기해라.”  그때 실비아는 고개를 숙였다. 
 “포기하기 싫다면, 네 재능에 걸맞는 사람이 되어라.”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칼날처럼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방금 네가 고의로 일으킨 마력 응집은 위험했다. 폭발했을 경우 인명피해가 발생했겠지. 벌점 10 점이다.”  벌점 10 점. 
 일반 교수는 내릴 수도 없는 최고점. 
 “와 10 점 미쳤다······.”  강의실의 모두가 경악하여 눈을 부릅떴고, 이프린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딱 그 순간 데큘레인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프린. 수업 도중 비속어 사용.”  “아, 아 잠깐만요! 안돼! 안돼!”  “벌점 1 점 추가.”  “안돼애애애액──!”  * * *  마탑의 학기말은 학부생이나 교직원 할 것 없이 바쁘다. 
 교수에게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거나 성과를 평가하는 시기이고, 마법사에게는 여러 시험(기말 혹은 승격) 준비 또는 논문을 작성하는 기간이며, 이때부터 영지·국가·기업·모험단의 스카우트 문의가 본격적으로 쇄도하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괴수 웨이브 대민·화력지원 등 여러 임무가 많으므로, 사실 1 학기말의 여름은 마법사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다. 
 “루이나 교수님. 이번 상담 주간에만 117 명이 상담을 부탁했습니다.”  루이나의 조교수, 왕국 마탑에서 함께하던 직속 제자 ‘젠킨’이 말했다. 
 117 명. 
 데큘레인의 자그마치 39 배. 
 왕국에서 쌓은 명성 덕에, 또 그 인품이 어느새 마탑에 소문이 난 덕에, 루이나에게 상담을 부탁하는 마법사는 끊이지 않고 있다. 
 “······.”  “······교수님?”  한데 정작 루이나 본인은 정신이 멍했다. 
 자꾸만, 방금 보았던 데큘레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피였지.”  “네?”  데큘레인의 입술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또한 집무실에 피비린내가 선명했다. 
작은 상처나 코피 따위로는 불가능한 냄새였다. 
 “역시······.”  각혈이었겠지. 
 루이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일로, 거의 확신하게 되었다. 
 데큘레인은 5 년 뒤에 죽는다. 
 “교수님?”  “······응? 아, 그래. 117 명. 하루 열명씩 받으면 되지.”  “예. 또한, 인가 서류가 내려왔습니다.”  “벌써? 세시간 만에?”  루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젠킨이 건넨 서류에는 기조실장의 [ 인가(認 可) ] 도장이 확실히 찍혀 있었다. 
 적어도 1~2 주는 예상했는데. 
 루이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풀리는구나. 예산도 확보됐으니까, 이제 예전 녀석들도 다 데리고 오렴.”  루이나는 왕국 마탑에 공식적으로 사직서를 건넸다. 수석교수 자리는 가장 믿음직한 제자가 물려받았지만, 자신을 따라오길 원하는 제자는 여전히 많았다. 
 “예. 이미 연락을 넣어두었습니다”  “그래. 가봐.”  젠킨을 돌려보낸 루이나는 가만히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넓네.”  제국마탑 47 층의 교수 집무실은, 왕국 수석교수의 집무실과 규모가 엇비슷하다. 
 왕국과 제국에는 이토록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풋. 5 년이라니······ 당신 업보라고 생각하지 그래?”  나름 냉소적으로 중얼거렸지만, 그 어투에는 어떤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루이나는 결국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데큘레인을 향한 복수심은 분명, 자신의 마음 한 켠을 불태웠던 열정이었다. 
자신의 삶을 채우는 커다란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 결말이 고작 이거라니. 
 “내 인생도, 당신 인생도. 참 지랄맞네요.”  여러모로 복잡한 마음이었다. 
 더 정확히는, 거지같았다. 
 * * *  모든 수업이 끝난 오후 6 시. 
 벌점 마지노선을 넘겨버린 이프린은 마탑 행정실에 끌려왔다. 
 “크하하하! 뭬야? 네 마지막 벌점은 데큘레인 수석교수의 것이로구나?!”  “······.”  “껄껄껄! 그래! 내 그분이 언젠가는 너의 그 안하무인을 참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  마탑의 선도를 자처하는 교수, 렐린은 호탕하게 웃으며 이프린에게 청소 도구들을 쥐어주었다. 
 청소 솔. 대걸레. 고무장갑. 세제 등등. 이프린은 그 전부를 바퀴 달린 바구니에 넣었다. 
 “썩 나가 이놈아! 얼른 청소나 해! 껄껄껄!”  “어디까지해요.”  “오늘은 3 층부터 4 층까지다! 껄껄껄!”  “······네.”  “하하하! 크흐흐흐! 껄껄! 하하하! 하하하하하! 껄껄껄!”  진짜 미친 사람처럼 웃네. 허파에 바람이라도 났나. 
 이프린은 입술을 삐죽이며 터덜터덜 밖으로 나갔다. 
 “에휴······”  참고로, 청소에 마법을 동원해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화장실의 갯수가 문제다. 마탑은 한층에만 화장실이 거의 열개 이상인데, 또 3~4 층이면 자그마치 20 개나 되니까. 
 “어쩐지 이번주 운세가 안 좋더라니. 타로점으로 무조건 바꿔야돼.”  이프린은 3 층부터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염동」으로 도구들을 다루려 했지만 영 힘들었다. 그래서 「물의 뱀」으로 일으킨 물보라에 세제를 섞었다. 
 컨트롤을 잘못하면 똥가루가 튀니까 조심조심 변기와 타일을 닦았다. 
 “······읏챠.”  그렇게 첫 번째 화장실을 청소하고 나왔을 때. 
 “아.”  3 층의 교수 엘리베이터 앞에서 데큘레인을 만났다. 
 그는 퇴근하는 듯 완벽한 정장 차림이었는데, 이프린의 행색을 보자 더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프린은 괜히 울컥했다. 
 당신 때문이잖아! 2 점 말고 1 점만 주지! 
 “교수님. 그런데 한 번에 벌점 10 점은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10 년만에 처음이라는데요.”  “너는 2 점이다.”  산수도 못하나? 데큘레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프린의 얼굴이 성난 불독처럼 되었다. 
 “아니요. 저 말고 실비아 말입니다.”  데큘레인은 그런 이프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프린.”  “예.”  그리고는 어이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내 문제를 이해한 데뷰탄은 실비아 뿐이다. 네가 걱정할 기량이 아니야.”  “······.”  이프린은 입을 다물었다. 
 뭐, 그렇게 말하니 할 대꾸가 없긴 하네. 중간 시험의 유일한 만점이니까. 
 띵—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데큘레인은 그 안에 올랐고, 이프린은 입술을 꾸기며 중얼거렸다. 
 “······내가 그 2 점을 안 받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프린은 다시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다. 
 3 층의 임직원 화장실부터 식당 화장실, 기본 화장실, 장애인 전용 화장실, 그 뒤 4 층으로 올라가 마법사 화장실······. 
 “데데데~ 데큘레인 바보~ 바~ 보~ 세상에서~”  재수가 제일~ 없지~ 요~  노동요처럼 흥얼거리는데. 
 턱—  바구니에 달린 바퀴가 누군가의 앞꿈치에 걸렸다. 
 “······?”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보았다. 
 실비아였다. 
 이프린은 우측으로 돌아 그녀를 지나치려 했지만, 실비아가 앞길을 막았다. 
이번에는 좌측으로 돌았는데, 또 막았다. 
 이프린의 미간이 팔자로 좁혀졌다. 
 “뭐하니? 얼른 비켜. 바구니로 밀어버린다.”  “건방진 이프린. 뭘 흥얼거리는 거야.”  “노동요라고 하지.”  “······.”  이프린은 조금 뒤늦게 실비아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다소 화가난 듯했고, 평상시와 다르게 다크서클이 짙었다. 
 “건방진 이프린. 너는 모르지. 네가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 바보니까.”  “······얘.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낙하산. 낙하산 펼 줄도 모르는 바보 낙하산.”  오늘 6 시부터 9 시까지, 벌점 10 점의 벌인 ‘로드란의 인성훈화’를 받으면서, 실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상상했다. 
 이프린이 데큘레인의 제자로서 자신을 추월하는 끔찍무도한 미래였다. 
 “에휴. 낙하산은 또 뭔진 모르겠지만, 나 방금 데큘레인 그 교수 만났거든?”  “건방진 낙하산.”  실비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말도 함부로 하는 이런 애를 도대체 왜······  그때 이프린이 말했다. 
 “너 혹시 그 교수 좋아하니?”  “미친.”  실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내뱉었다. 직후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가 한 말에 제가 충격받은 듯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풋. 좋아하나보네?”  “아니. 아니. 아니거든. 뮤즈거든.”  “그게 뭔진 모르겠는데, 그 교수가 너한테 어떤 말 한 줄 아니?”  “······나한테.”  “응. 너한테 뭐라고 했냐면.”  턱을 만지작거리며 방금 데큘레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실비아는 관심 없는 척 이프린의 입술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프린은 소곤소곤 말했다. 
 “데큘레인이, 자기를 이해하는 건 너 뿐이래.”  “······!”  순간 실비아는 숨 멎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네가 왜 그런 이상한 반항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너를 믿는다는 거 아니겠니?”  실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저기요?”  이프린이 실비아를 툭툭 건드렸다. 실비아의 입술은 파르르 떨렸지만, 어떤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 눈치를 살피던 이프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좋은 정보 줬으니까 오늘 저녁 사렴?”  “······.”  실비아는 눈동자만 굴려 이프린을 바라보았다. 이프린은 왜인지 입맛을 다시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럼, 방금 네 입에서 나온 말도 못 들은 걸로 할게.”  멍하니 있던 실비아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까지의 우울한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 
 제도의 유명 맛집 「돼지의 꽃」. 
 이프린은 실비아와 함께 단골식당에 도착했다. 
 “자~ 이프린. 여깄다!”  주인 아저씨가 로아호크 구이 세트를 내려놓았다. 
 지글지글─ 지글지글─  돌판에서 들끓는 치명적인 자태. 
 이프린은 벌써부터 침에 입이 고인다. 입에 침이 고이는 건가? 아무튼. 
 “오늘은 친구를 데리고 왔구나.”  “친구 아니야.”  실비아가 가늘게 노려보며 정정했다.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이고 되물었다. 
 “그려요? 그럼 무슨 사이시지요?”  “······.”  실비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프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얘가 제 노예예요.”  이프린이 화들짝 놀랐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니? 노예제 철폐된 지가 300 년인데.”  “하하하. 유쾌한 귀족분이시구만. 맛있게 드시지요. 이프린, 너도.”  아저씨는 껄껄 웃으며 떠나갔다. 이프린은 곧장 장갑을 끼고 로아호크의 뼈 부분을 쥐었다. 
 “이렇게 뼈를 잡고 뜯어 먹으면 돼. 엄청 맛있거든? 너도 먹어보렴.”  실비아는 그런 이프린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추레한 체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이프와 포크를 찾았다. 
 “······.”  그런데 원시인처럼 처먹는 이프린 때문인지, 식기가 아예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마법으로 직접 만들었다. 
 얌얌얌얌─  맛있게 뜯어먹던 이프린은 문득 실비아를 보았다. 실비아는 고기부분만 나이프로 잘라서 먹고 있었다. 
 이프린이 방긋 웃었다. 
 “어때. 맛있지?”  실비아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나는 미각이 없어.”  “······.”  이프린의 동작이 흠칫 멈췄다. 느리게 오물거리는 입술이 고기 기름으로 반들거렸다. 
 “······정말?”  “응.”  “왜? 그때 생선은 잘 먹었잖니.”  “그때는 배고팠어. 지금은 배고프지 않아.”  이프린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뒤늦게 끄덕였다. 하긴, 그때 실비아는 ‘맛있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아니. 살다가 잃어버렸어.”  “아······ 미안.”  이프린은 입을 다물고 고기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실비아를 힐끔거렸다. 
실비아는 정말 로아호크를 깨작거리고 있었다. 
 로아호크를 먹으면서도 저렇다니. 진짜 미각이 없는 게 맞구나······. 
 “그래도 이게 영양이랑 체력에도 엄청 좋아. 완전식품이라고 하지? 다 먹으면, 마력이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니까.”  “······.”  실비아는 반응이 없었고, 이프린은 쓰게 웃었다. 
 ─10 분 뒤. 
 “······.”  이프린은 실비아의 접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프린의 로아호크는 뼈만 남았지만, 실비아에게는 아직 살이 많았다. 
 “······쩝.”  괜히 아쉬워서 쩝쩝거리는 이프린에게 실비아가 말했다. 
 “너 먹어.”  “······어? 아, 괜찮은데······.”  “먹어.”  두 번 사양은 예의가 아니라 배웠다. 
 “응 그래. 고마워.”  실비아가 남긴 고기를 먹으면서, 이프린은 생각한다. 
 마탑에서 첫 만남도 최악, 가문간의 관계도 최악이지만······ 마냥 나쁘기만 한 녀석은 아닌 것 같네. 
 저거봐. 
 약속대로, 계산까지 자기가 다 알아서 하잖아? 
 * * *  째깍- 째깍-  평소라면 마법 복습으로 바쁠 새벽이지만, 오늘따라 초침 소리만 가득한 저택. 
 ─나를 이해하는 것은 오직 실비아 뿐이다. 
 실비아는 이프린의 그 말을 데큘레인의 음성으로 떠올린다. 
 ─나를 이해하는 것은. 
 직접 듣지 못하여 아쉽지만. 
 그저 상상만으로도 좋다. 
 바늘로 마구 찔린 듯했던 심장은 한순간에 나았고, 답답했던 마음도 이제 날아갈 듯 편안했다. 
 ─오직 실비아 뿐이다. 
 그러나, 마냥 행복에 겨워 소리 없이 미소를 짓다가도, 결국에는 슬퍼지고 만다. 
 그는 나를 이해하기에 놓아주는 것이다. 
 더 높은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곰탱팬더.”  실비아는 데큘레인에게 선물 받은 곰탱팬더를 꺼냈다. 그리고는 녀석의 등에 데큘레인이 준 손수건을 입혔다. 
 “이게 네 망토야.”  이른바 망토 곰탱팬더. 실비아는 그 귀여운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침대에 누웠다. 
 달빛이 스며드는 조용한 밤. 
 이불위에는 곰탱팬더가 있고, 침대맡에는 날쌘돌이가 있다. 그 어디에도 무서울 것은 없다. 그저, 이 세상이 나를 지켜주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나를 이해하는 것은 오직 실비아 뿐이다. 
 그 충일감 속에서, 다시 한번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실비아는 편안하게 잠들었다. 
 *  “······그런 일이 있었나. 데큘레인 그 빌어먹을 놈이.”  한편, 일레이드의 길테온은 영주 집무실에서 마탑의 공문을 받았다. 
데큘레인이 실비아에게 벌점 10 점을 부과했다는 내용이었다. 
 “공식 항의를 할까요.”  집사의 말에 길테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그마치 벌점 10 점. 
 길테온 본인도, 길테온의 부친도, 조부도, 증조부도, 일레이드의 어느 누구도 마탑에서 이만한 수모를 겪은 적은 없었다. 
 “괜찮아.”  20 년 전 같았으면 선전포고로 받아들였겠지만. 
 그러나 지금은 상관 없었다. 
 개의치 않았다. 
 “그대로 두지.”  길테온은 오히려 웃었다. 
 굳이 굴욕이라 생각할 것도 없었다. 
 지금부터 켜켜이 쌓여가는 감정들은 언젠가, 일레이드의 찬란한 불길을 일으킬 장작이 되어줄 테니. 
 “아이가 잘못했다면, 벌점도 받아 봐야지 않겠나?”  길테온은 그렇게 말하며 마탑의 공문을 불태웠다. 문서였던 그것은 금세 재가 되어 사그라들었다. 
 사건. (1)  ◆ 메모라이즈 현황  :초·중급 염동 (17%)  ┏초급 화력 통제  ┣초급 유체 조작  ┗금속 강화 (진척도 67%)  늦은 새벽. 
 나는 별채에서 「육안」으로 나타나는 「염동」의 마법 줄기를 점검했다. 
마력의 질은 업그레이드 되었지만, 한순간에 증폭된 힘을 적용하고 제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염동」을 발했다. 
 한 자루 목강철이 부웅 떠올랐다. 
 오늘의 목적은, 「염동」을 통한 ‘금속의 공명’으로 전자기파를 조작하는 것. 
 이전까지는 마력의 질이 저열해 시도조차 못했지만, 4 등급으로 올라선 지금은 충분히 도전할만했다. 
 지이이이이잉─  이 고급 기술의 가장 기초적인 활용은 ‘투명화’. 금속의 공명으로 가시광선을 분산·굴절하여, 목강철의 형상을 흐릿하게 숨기는 테크닉이다. 
 ───쿵! 
 원리는 그럴싸했지만, 제자리에서 진동하던 목강철이 치솟았다. 천장을 박살내고 추락하며 내 어깨를 후려쳤다. 
 38 번째 실패였다. 
 “어렵군.”  뻐근한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이 메커니즘을 제어하느라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고, 마력도 대부분 소진되었다. 
 마력의 질은 상승했어도 이 몸의 평범한 재능은 여전했기에, 조금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재능이라······.”  문득, 어제의 내가 실비아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재는 그 고충조차 범재의 그것보다 우월한가? 그렇지 않다. 가르침이 필요 없는 너는, 가르침이 없으면 성장하지 못하는 자를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시기와 질투였다. 이 ‘열등감’이라는 감정은 아마 데큘레인과 김우진의 공통분모일 것이었다. 
 데큘레인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악인이 되었고, 김우진은 열등감에 체념하여 모자란 놈으로 머물렀다. 
 둘 다, 극복은 못했지. 
 나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웃기는 일이다.”  그러나 어제 실비아에게 한 말만큼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실비아의 성장은 부유섬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다수의 이벤트와 퀘스트가 기다리는 그곳에서, 데큘레인을 추월할 것이다. 
 언젠가, 메인 퀘스트의 흐름에서 ‘대마법사 실비아’를 마주하기 위한 가장 옳은 선택.그게 바로 부유섬이다. 
 “······.”  나는 옷가지를 정리한 뒤 밖으로 나왔다. 집사 로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 오전 7 시였다. 
 “렌과 에넨은 떠났나?”  “예.”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매는 ‘정보 사무실’ 설립을 위하여 출장을 떠났다. 돌아올 때는 적당한 녀석 몇 명과 함께겠지. 
 로이가 말했다. 
 “그리고, 예리엘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 
 예리엘은 유크라인 저택의 찻실에 앉아 있었다. 녀석이 가지고 온 홍차 두 잔이 알싸한 향미를 풍겼다. 
 “커팅식 할 건데, 올 거예요?”  차를 홀짝이며 내게 묻는다. 
 “지하통로 개방 말예요.”  지하통로는 원래라면 마릭이 개방하고도 상당히 뒤늦게 뚫리는 통로다. 
 여기서 ‘상당히 뒤늦게’란 마릭 개방 후, 꾸준히 발생하는 인명 피해에 예리엘이 사업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시점까지, 최소한 1 년 이상이다. 
 즉 1 년이나 일찍 건축된 셈이다. 
 “도면은 있나?”  “영상이 있지요.”  예리엘이 수정구슬을 꺼냈다. 마력을 불어넣자 영상이 부우웅 떠올랐다. 
 “통로는 우선 우리 영지의 북단 마을 ‘서작비’에서 마릭의 입구까지 이어지는 약 80km. 어때?”  영상으로 보여지는 지하 통로는 한낱 토굴이 아니었다. 좌우폭과 높이가 쾌적할만큼 넓었고, 타일과 외벽도 현대적으로 깔끔했다. 
 “또, 이건 단순한 통로가 아니야. 봐봐. 마릭에서 일을 끝내자마자 바로 돌아가는 건 너무 피곤하잖아? 그래서, 상가도 만들었어요.”  그 뒤 수정구슬은 지하 상가를 비춘다. 
 문자 그대로 지하 상가다. 현대의 지하철을 떠올리면 쉽다. 
 “지금은 텅 비었지만, 입점을 기다리고 있어. 식당, 상점, 호텔 등등이 들어설 거고, 이러면 통행료 말고도 부가적인 수입을 더 올릴 수 있지. 
모험가들은 이 지하에서 마음껏 돈을 쓸거야.”  예리엘은 그렇게 말하며 팔짱을 꼈다. 그 의기양양한 모습은 과연 똘똘이 다웠다. 
 “하나를 시키면 열을 하는군.”  “······뭐. 내가 그렇지.”  뻣뻣한 목과 승천할 듯한 어깨. 
 예리엘은 웃음을 참으며 우쭐했다. 
 “좋다. 요즘 내가 투자한 상점이 많으니, 그 분점을 안에 내도록 하지.”  마법점 로포포, 철물점 록칸의 부두, 식당 돼지의 꽃 등등. 내가 투자하여 지분을 얻은 상점이 많다. 
 “아 그거!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아니 도대체 왜, 강제로 투자를 하는 거예요?”  갑자기 예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로서는 의아한 반응이었다. 
 “강제?”  “그래애! 투자 필요 없다는 상점 찾아가서 강제로 지분 뜯어냈다더만!”  “······.”  나는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하긴, 몇몇 상점은 지분 넘기는 것을 탐탁잖아했었지. 「대부호 재력가」로 보이는 상점은 죄다 골랐으니. 
 “그들이 거절 의사를 명확히 했다면······.”  그렇게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긴, 감히 거절의사를 표명한 회사 또는 상점은 내가 ‘직접’ 찾아가 설득을 했었지. 
 “······.”  나는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난데없이 찾아와서 지분 매각을 설득, 아니 협박하는 귀족 패거리. 심지어 그 흑막은 제국의 권세가라 할만한 유크라인이다······. 
 “······값은 제대로 쳐줬다.”  “아무튼!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에요?”  예리엘이 물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그러지.”  굳이 안 할 이유가 없다. 그 녀석들도 당장은 꺼리더라도, 훗날에는 결국 함께 윈윈할 테니. 
 결과만 좋다면 과정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이것저것 따지면서 횡보하기에는 남은 시간도 얼마 없으니. 
 “아 진짜······.”  “예리엘. 내 투자를 거절한 그놈들 잘못도 있다.”  그러자 예리엘은 경멸하듯 깊은 숨을 내쉬었다. 
 “아 됐고. 커팅식은 오실 거냐고요.”  “일정이 맞다면.”  “스케쥴? 아마 다음주 일텐데, 오늘 일정은 뭔데요?”  “폐하를 교습한 뒤, 잠시 경매장에 방문할 것이다.”  “또 경매할라고?! 아 미친! 개똥같네 진짜!”  예리엘은 다시 경악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판매하는 쪽이다.”  “······아하~ 또 화날 뻔 했네. 그리고, 이거.”  예리엘이 차 테이블 위에 놓아둔 상자를 내밀었다. 고급스럽게 포장된 상자였다. 
 “이건 유크라인 지하통로 시공사에서 전해주는 선물. 열어봐요.”  나는 「염동」으로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예상 외로 익숙한 물건이 있었다. 
 “뭔진 알지? 좀 생소하긴 해도.”  유크라인의 상징인 검정 바탕에 황금 문양이 돋을새김된, 일종의 고급 쇳덩어리. 
 리볼버. 
 “요즘 왕국 귀족 사이에서 유행중인 물건이라는데, 근접 살상력은 검보다 뛰어나다나? 강도 상대할때 호신 용으로는 나쁘지 않대.”  이 세계관에도 총은 있다. 평범하게 화약을 사용하는 권총이다. 물론 대중적이지는 않다. 
 자세한 이유는 뭐, 설정 팀 관할이다. 
 마나 강기를 뚫지 못하고, 기사의 동체시력이 총탄의 속도를 초월한다— 등등 간단한 이유일 테지. 
 “어때. 예쁘지······ 요?”  “그래.”  「미적감각」으로 보기에도 썩 좋은 물건이었고, 무기보다 공예품에 가까운만큼, 만족스러웠다. 
 이래서 사람이 선물을 하는 건가 싶다. 고작 물건 하나로 머릿속 시공사의 이미지까지 좋아지니 원. 
 “잘 만들었군. 받겠다 전해라.”  “아······ 그거······ 가질거야? 안 버리고요?”  예리엘이 은근한 투로 물었다. 
 “그래.”  “······뭐에다 쓸건데요? 마법사들 보통 이런거 싫어하지 않나. 난 버릴 줄 알고 그냥 보여준건데······.”  예리엘은 내가 손에 쥔 리볼버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서 열망과 탐욕과 실망이 일렁였다. 
 나는 리볼버를 좌우로 흔들었다. 커다란 눈이 따라서 움직였다. 
 “예리엘. 바로 돌아가나?”  리볼버를 안주머니에 넣고 물었다. 예리엘은 탄식하듯 대답했다. 
 “조금 쉬었다 갈 거예요~ 쉬었다가~ 요즘 격무에 시달리느라~ 나한테 선물할 물건 좀 찾고 있었는데~”  “편히 쉬어라.”  “아 씨 진짜. 짜증나네. 기분 바퀴벌레같아.”  “로이?”  나는 예리엘을 무시하고 로이를 불렀다. 
 “출발하지.”  “예. 차량은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황궁으로 갈 시간이었다. 
 * * *  “아 그냥 입 닦고 내가 먹을걸. 왜 보여줬지. 왜 보여줬지. 아아아 이 병신. 그걸 왜보여줘 이 병신 머저리야——”  한편, 본인의 방으로 돌아온 예리엘은 침대에서 발장구를 쳤다. 아쉬움에 온몸이 부르르르르 떨렸다. 
 “사냥할때 쓸려고 했는데.”  리볼버를 잃은 예리엘은 멍하니, 어떤 연극처럼 멋들어진 장면을 상상했다······. 
 까드득─  리볼버로 멧돼지 한마리를 겨냥하는 자신. 고요한 설산에는 오직 놈과 나 뿐이고, 저 멧돼지는 나무꾼을 열명이나 잡아먹은 괴물이다. 
 찬바람이 피부를 할퀴는 긴장의 순간. 
 ─네 미래는 내 손에 있다. 
 나는 한쪽 눈을 감고, 풍향과 거리를 철저히 계산한 뒤, 무심하게 방아쇠를 당긴다. 
 파앙—! 
 격발된 탄환이 질주하며 멧돼지를 꿰뚫는다. 껍질을 헤집고 근육을 찢으며 심장을 파괴한다. 
 괴물 멧돼지는 그렇게 죽고. 
 나는 총구에서 흐르는 열기를 입김으로 밀어낸다.─후······. 내가 잡았군요. 
 숨죽인 채 지켜보던 가신들이 달려나와 박수로 화답한다. 그 환호 속에서 예리엘은 피식- 가소롭다는 미소를 짓는다. 
 ······.그 기분 좋은 미래를 데큘레인이 앗아갔다. 
 “에휴. 이런 건 왜 또 닮았대. 그래도 혈연이라 이건가?”  예리엘은 벌떡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했다. 그리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오늘 그녀에게는 임무가 있었다. ‘정기 사찰’이었다. 
 “······.”  시종인의 눈에 띄지 않게 살금살금 계단을 올라, 우선은 서재에 잠입. 
 “어디보자······.”  데큘레인은 정리 결벽이 있으므로 어떤 서류를 어디에 놓았을지 예측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여깄다.”  ‘투자 현황’이라는 서류를 발견했다. 걱정스레 그 내용을 훑던 예리엘의 눈이 돌연 부릅뜨였다. 
 “이게, 이 숫자가 왜 이 지랄이지? 아니 말이 안 되잖아!”  요즈음의 소문대로 데큘레인은 억대의 엘네를 투자하는 큰손이었고, 그 수익은 나날이 흑자였다. 심지어 저번 경매에 탕진한 2 억 엘네도 이미 회수한지 오래였다. 
 “이 빌어먹을 오라버니가 도대체 뭔 짓을 하고 있길래······.”  예리엘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뭐가 되었든, 데큘레인이 한 짓이라 영 께림측했다. 
 “또 나 뒤처리 시키려고······.”  예리엘은 조심스레 그 서류를 넣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1 층에 섰는데, 마침 거실에서 웬 물건이 들어오고 있었다. 
 예리엘은 순수하게 되물었다. 
 “어이. 이것들은 다 뭐지?”  “붕대와 약재입니다.”  “붕대? 약?”  “예. 당주님께서 주문하신 것들입니다. 
 붕대. 약. 그걸 데큘레인이 왜 주문해. 아니, 주문을 해도 이렇게 많이? 
 예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렇게 많이 샀대?”  “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별채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별채라.”  예리엘은 창밖의 별채를 바라보았다. 혹시, 저기에다 루이나를 납치해뒀었나. 
 그때 시종이 다소 엄하게 말했다. 
 “아가씨. 저 안에는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예리엘 아가씨라도.”  “안 들어간다니까.”  그렇게 말했지만, 시종들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데큘레인에게서 높은 연봉과 복지를 받는 그들은 충성심이 만땅이었다. 
 “안 들어가. 난 방에 있을 테니까, 조금 이따가 밥이나 갔다줘.”  “예. 제가 함께 올라가겠습니다.”  “아니, 됐어.”  “문 앞에만 서있겠습니다.”  시종들은 단호했다. 기어코 막내 한 명을 예리엘의 옆에 붙였다. 
 “······너네 두고봐.”  예리엘은 으르렁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 * *  “네놈의 서적은 다 읽었다.”  다시 찾은 황궁. 소피엔이 내 개정본 [ 순수 원소의 이해 ]를 흔들면서 말했다. 
 나는 태연히 물었다. 
 “어떠셨습니까.”  “다 습득했느니라. 보아라.”  소피엔은 개정본에 기록된 모든 마법을 동시에 구현했다. 채 1 분도 안 되어, 온 사방에 순수 원소가 가득 떠올랐다. 
 “허접하더군.”  나는 내색 없이 감탄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총애, 인간을 초월한 재능인가. 
 “예. 확인했습니다.”  가지고 온 교습 일지에 오늘의 과정을 필기했다. 소피엔이 내 문서를 힐끗거렸다. 
 “무엇이냐.”  “교습 일지입니다.”  “가지가지하는구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 소피엔 폐하께서는 평범한 마법사가 한 학기 동안 익힐 마법서를 2 주도 채······ ]  일지를 작성하는 내게 소피엔이 물었다. 
 “한데, 네 약혼자는 실력이 별로더구나?”  “······.”  내 만년필이 우뚝 멈췄다.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율리는 훗날 기사의 정점에 오를 재능. 율리의 실력이 별로다— 는 말은, 1+1 이 3 이라는 것과 비슷한 오류일 텐데. 
 “왜. 네 약혼자를 욕하니 화가 나나?”  황제가 피식 웃었다. 
 나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소피엔은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거짓을 말하는 행위 자체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피엔의 성격이 그렇기에, 내 의문은 오히려 배가되는 것이다. 
 “조금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율리 기사는 제가 아는 기사 중에서 가장-”  “말 그대로다. 실력이 별로지. 물론 뛰어난 기사이긴 하나, 세간의 평과는 좀 다르더군.”  “······”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나는 스토리와 설정을 떠올렸다. 내가 플레이했던 게임에서 율리가 보였던 모습과, 그 스토리를 회상했다. 기사의 정점에 오른 율리가 데큘레인을 죽였던 그 장면을······. 
 “저번 수업에 너는 말했지. ‘─마법을 충분히 익혀, 제가 폐하께 그 이상 뜻을 드릴 수 없게 된다면. ‘또 다른 뜻’은 그때에나 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였나.”  소피엔이 내 성대모사를 했다. 
 “어디 이제, 짐의 질문을 받을 준비가 되었느냐.”  그녀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늘게 휘어진 홍염의 동공은 뱀처럼 마력적이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수업이 남았습니다.”  “······수업이 남다니.”  “두 번째 수업입니다.”  “말을 멈춰라. 짐은 방금 모든 마법을,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구현했느니라.”  “오늘은 기초 마법 테스트입니다.”  “아니, 이 빌어먹을 놈아! 네가 짐에게 가르칠 것이 어찌 남았단 말이냐!”  쾅──! 
 소피엔이 책상을 두드렸다. 그 미간이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분노한 마력이 아우라의 형상으로 피어올랐다. 
 권태로운 황제에게, 인내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소리 말고 그 눈을 크게 치뜨고 보아라! 짐의 마법이 네 마법보다 더 우월하지 않느냐?!”  맞는 말이다. 
 지금의 마법적인 역량은 황제가 나보다 우월하다. 아니,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 어느 마법사도 가벼이 초월할 신성(神聖)이다.그러나. 
 내가 그녀를 압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마법’이 있다. 
 “모든 일에 중요한 건 기초입니다. 만사에 체력이 중요하듯이 말이지요.”  나는 무심히 말하며 「염동」으로 만년필을 띄웠다. 
 “「염동」. 조작계열을 시작하기에 알맞은 기초 마법입니다. 물론 염동 또한 기초, 초급, 중급, 고급으로 나뉘어 있지만-”  “쓸데없다.”  황제가 말을 끊었다. 그녀는 내 눈을 살벌하게 노려보며 읊조렸다. 
 “데큘레인. 그동안 짐을 거친 마법사가 몇명인지 아느냐?”  “모릅니다.”  “33 명이다. 그 중에는 로하칸도 있었고, 벨라도멘도 있었지.”  로하칸은 말해 입 아프고, 벨라도멘 또한 에테르 등위의 마법사. 
 둘 다 어마어마한 거물이다. 
 “그들조차 짐에게 기초 마법 따위를 논하지는 않았다. 짐에게는 그 ‘기초’라는 것이 그 누구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맞는 말이다. 
 만약 평범한 마법사의 「염동」 출력이 10 이고, 조작 계열 마법사의 「염동」 출력이 20 이라면, 황제는 자기 혼자 그 10 배인 ‘100’이다. 
 기초 마법을 10 배만큼 구사하니, 고등 마법으로 갈수록 그 차이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기에 같은 마법을 구사하더라도, 황제는 무조건 남들보다 우위에 선다. 
 그녀는 기초 체력 자체가 이미 초인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렇습니까. 한데, 상관 없습니다. 저는 로하칸이 아니니.”  “······뭐라? 데큘레인, 너 뇌수가 터졌나?”  내 「염동」의 마법진은 육신 전체에 가득하다. 
 내 몸이 곧 「염동」이라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니며, 수치적으로 따지면 평범한 마법사의 50 배. 
 소피엔보다도 다섯 배나 우월하다. 
 “간단합니다. 30 분 안에 이 만년필을 탈취하시면 됩니다.”  “이놈이 왜이러지? 어이. 미쳤느냐?”  최소한 이 「염동」으로는, 황제는 나를 이길 수 없다. 
 그녀의 권태는, 내 「염동」이라는 벽에서 가로막힐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힘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설정하고, 게으름 없이 정진하시면, 언젠가 승리하실 수 있겠지요.”  “······지금 짐을 능멸하는 것이냐.”  소피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안온한 투로 말을 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만약 저를 이기신다면, 어떤 물음을 하시든 전부, 솔직하게 대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염동」으로 떠오른 만년필이 소피엔의 코 앞에 섰다. 
 “······질문 따위는 이제 필요 없다.”  소피엔은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솟구치던 아우라는 이미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고요는 오히려 격노의 방증이었다. 
 “네 목을 걸 수 있겠나.”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또한, 내 자극이 통했다는 증거였다. 
 “예. 물론입니다.”  나 또한 진심이었기에, 미소를 지었다. 여유로웠다.“가져가보시지요.”  소피엔에게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선사하는 것. 
 내 교습의 목적은 그것이다. 
 사건. (2)  소피엔은 허공에 붙박인 만년필을 그저 노려보았다. 그녀는 파괴계열의 「 화염구」, 보조계열의 「배리어」, 조작계열의 「염동」 등이 각 계열 마법의 기본이라 배웠다. 
 마법 자체의 출력에는 한계가 확실하기에, 마법사의 재능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기본 중의 기본. 
 “······.”  소피엔은 자신의 「염동」으로 만년필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만년필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거친 「염동」에 휘말린 ‘배움의 장’은 이미 반파되어 있었다. 
 노면이 뜯기고, 천장이 내려앉고, 기둥이 박살나고, 책장이 으스러지고······. 
 그 황폐한 공간의 한복판에서도 데큘레인은 여전히 자약한 얼굴이다. 조금도 힘든 기색이 없다. 숨결은 안온하며, 그 기품은 대단히 정갈하다. 그의 귀족스러운 자태는 소피엔에게 어떤 자극을 선사한다. 
 “······신기하구나.”  소피엔에게는 영민하고 예리한 기감이 있었다.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아직은 불가능한지 가늠하는 감각이었다. 
 데큘레인의 「염동」은 후자에 속했다. 물론 처음에는 인정하기 싫었으나, 이미 시간이 다 되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20 분이 지나버렸어.”  황제는 다만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도 자신에게 닿았다. 
수정처럼 반짝이는 신비한 동공이었다. 
 “네가 목을 건 자신감을 알겠다. 짐은 「염동」으로는 너를 이길 수 없느니라.”  소피엔이 피식 웃었다. 데큘레인은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제 개념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네가 짐에게 가르칠 개념이 남았느냐?”  “예. 저만 아는 개념을, 폐하께 내어드리려 합니다.”  “너만 아는 개념?”  “예. 그렇습니다.”  데큘레인은 황제의 말에 답하면서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평범한 마법진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형상이었다. 
 “신기하군.”  황제는 손에 턱을 괴었다. 마법진보다는 데큘레인 그 자체가 신기했다. 
 “나는 너를 안다. 문서로도 읽었고, 실제로 보았던 적도 있었지.”  소피엔은 정보국에서 내어줬던 ‘데큘레인 관련 서류’를 꺼냈다. 그리고는 곧장 데큘레인에게 내밀었다. 
 “죄다 틀리다. 하나도 맞는 것이 없느니라.”  “······폐하. 극비 서류입니다. 누군가에게 내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데큘레인은 그 서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소피엔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죄다 틀린 내용인데, 무엇을 어쩌라는 말인지. 
 “그들은 너의 재능이 가짜라 말했고, 남이나 속이는 사기꾼이라 말했느니라. 
한데 지금 내가 바라보는 너는 어떠하지?”  황제는 데큘레인을 응시했다. 그 독선적인 시선은 강렬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너는 이상한 것 투성이다. 짐은 네가 비밀을 숨기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느니라. 어떠한가?”  “예. 맞습니다.”  그 물음에 데큘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소피엔은 단지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거짓이 없다면, 이 장소에서 자신을 바라볼 자격이 충분했다. 
 “좋다. 언젠가, 짐은 너에게서 그 비밀을 뜯어내겠느니라.”  “폐하께서 수업에 열중하신다면, 그 순간은 그리 멀리 있지 않을 것입니다.”  데큘레인의 대답에는 기백이 있었다. 피식 웃은 황제는 그제서야 데큘레인이 선보인 마법진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이는 제가 폐하께 가르치고자 하는 마법입니다. 고대에서 가지고 온 개념이며, 현대에서 재창안한 마법의 유파입니다.”  “오호라. 그게 무엇이지.”  “룬(Rune)어입니다.”  “······룬어?”  소피엔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으나, 데큘레인은 담담했다. 
 “예.”  그는 기실 룬어를 파기하던 순간부터, 그 전체를 황제에게 가르칠 생각이었다. 황제의 권태를 타파하고, 훗날의 최종보스에 대적할 위대한 힘을, 그녀에게 내어줄 작정이었다  “파기했다 들었거늘?”  소피엔 또한 데큘레인의 심포지엄은 익히 알았다. 황실의 눈과 귀는 그런 소식들을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전달하는 창구이니. 
 “여전히 제 머릿속에는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이제부터 제 수업에 증거물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스승이 데큘레인이고, 제자가 소피엔이기에 가능한 수업. 
 오직 말과 마력으로 이루어지는 교감. 
 “······.”  바로 그 순간. 
 소피엔은 데큘레인의 저의를 깨달았다. 그를 노려보던 황제의 시선에 또다른 감정이 떠올랐다. 
 “제가 해석한 48 자의 룬어 전부를 폐하께 알려드리지요. 룬어로 행하는 「 염동」이라면, 저를 이길 수도 있습니다.”  하긴, 마법사가 제 연구를 그리 쉽게 파기할 리 없다. 하물며 그 연구가 룬어라는 대단한 것이라면, 대저 어떤 미친 놈이 그 전체를 세상에 파묻는다는 말인가. 
 대저 마법사란 이 세상에 미친듯이, 정말 미친듯이 자신의 족적을 남기길 원하는 족속일 터인데. 
 “그렇다면, 너는 지금.”  소피엔은 데큘레인의 뜻을 파악했다. 
 이 놈은 기다리고, 또 바라고 있었던 것이었다. 
 “짐 더러 네 수제자 노릇을 하라는 말이렷다?”  ‘룬어’라는 거대한 마법을 받아들일만한 초인을. 
 자신의 연구를 그 누구보다 고귀한 지위에서 이어갈 재능을. 
 “예.”  데큘레인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속내를 알아맞힌 황제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폐하께서는 제 룬어의 첫번째 수제자가 되실 겁니다.”  이 놈의 목적은 이것이었다. 
 첫 만남부터, 이따위 흑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룬어를 가르치면서 저는 폐하를 이해할 수 있고, 폐하 또한 룬어를 배우며 저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건방진 놈.”  소피엔은 웃었다. 썩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오히려, 이 대담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네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으나, 어디 한 번 노력은 해보거라······.”  데큘레인은 그 즉시 룬어를 조립했다.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그의 모습은, 너무 솔직하여 차라리 귀여울 지경이었다. 
 * * *  ······90 분 간의 수업이 끝난 뒤. 
 나는 배움의 장 밖으로 나왔다. 
 “유크라인 공.”  황궁의 복도를 걸어가던 중,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환관 졸랑이었다. 
 “교습은 끝나셨습니까?”  금발의 머리에 전형적인 환관의 복장. 작은 키와 하얀 피부, 자라지 않는 수염. 신하라기에는 시종처럼 정갈한 인물. 
 나는 이 졸랑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황궁에서도 비중이 꽤나 큰 네임드 신하였다. 또한 「황궁의 어둠」이라는, ‘악마의 거울’ 퀘스트의 주인이었다. 
 “끝났지.”  “그렇다면,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황궁의 지하 말인가?”  “······.”2  졸랑은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나 곧 표정을 가다듬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예. 맞습니다. 우선, 따라오시지요. 황궁에는 어느 곳에나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있습니다.”  나는 졸랑의 뒤를 따라 황궁의 복도를 걸었다. 황궁에는 수백 수천의 방이 있었고, 그중 한 군데로 졸랑은 안내했다. 
 향초가 아른거리는 텅 빈 방이었다. 
 “밀회에 알맞군.”  “하하. 예. 애당초 그런 목적의 방입니다.”  “환관도 연애를 하나.”  “뭐, 때에 따라 다르지요. 아무튼. 유크라인 공. 지금부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황궁의 어둠에는 무엇이 있는지······.”  황궁의 지하. 그 내막은 이미 안다. 
 황궁 지하에 도사리는 암흑, 그 속에는 악마의 산물이 존재한다. 
 아니, 악마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다만 그 거울은 이 세상의 이면을 비춘다. 
 그저 비출 뿐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거울은 동시에 이면세계의 통로로 이어지며, 지금 시점에서는 황궁의 지하를 잠식한지 오래다. 
 “······그렇기에, 저희는 그 지하를 정화할 사람을 모으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유크라인 공을 신뢰하고 계시니······.”  “좋다. ”  나는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이는 내가 테스트 플레이를 하던 시절에 이미 클리어한 퀘스트였으니. 
 “단, 조건이 있다.”  “무엇입니까?”  “율리는 배제하지.”  졸랑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는 곧 작은 소리로 웃었다. 
 “······고슴도치의 사랑이십니까?”  고슴도치의 사랑. 
 졸랑은 그저 우스개소리, 혹은 비아냥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그 문장은 내 뇌리를 강렬하게 꿰뚫었다. 
 추위에 몸을 떠는 고슴도치 두 마리는 서로 체온을 나누기 위하여 다가선다. 
그들은 함께 껴안으며 겨울을 버티려하지만, 결국에는 깨닫고 만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까워질수록, 온몸에 가득한 수많은 가시가 상대를 상처입힐 뿐임을. 
 “농담이었습니다.”  내 굳은 표정을 오해한 졸랑이 재빠르게 말을 바꾸었다. 
 “······되었다. 그리 알아듣지.”  “예. 알겠습니다. 율리 기사에게는 최대한 잘 설명하지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자리에서 떠났다. 머리가 꽤 복잡했고, 룬어를 가르치느라 마력을 다수 소모하긴 하였으나, 아직 일정이 남았다. 
 헤일레치의 경매장이었다. 
 * * *  ······제국의 가장 부유한 도시, 헤일레치는 온갖 재화와 진귀한 보물, 화려한 명품과 아름다운 예술품이 집결하는 유행의 선도지다. 
 알 로스는 헤일레치의 황금처럼 찬란한 햇볕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잿더미와 다른 활기가 이 부촌의 길거리에는 가득했다. 
 사그락 사그락, 거리며 그녀의 어깨에 작은 잎사귀가 내려앉았다. 그 잎사귀에서 음성이 흘러들었다. 
 ─알 로스. 
 알 로스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주카켄이다. 
 주카켄. 알 로스처럼 ‘제단’과 협력 관계이지만, 동시에 육사두(六蛇頭)의 여섯 뱀 중 한 마리이기도 한 놈. 
 “나는 참여하지 않는다 말했을 텐데.”  ─계획은 확실하다. 또한, 죽이는 게 아니라 생포다. 너와 게렉의 도움이 필요해. 위험 부담은 없어. 
 “······게렉은 계획에 도움이 되는 놈이 아니다. 데큘레인에 눈깔이 돌아버리는 놈이야. 네 조심스러운 성미와는 안 맞지.”  암흑가의 주카켄은 철두철미하다. 
 아마 ‘제단’이 데큘레인 생포에 3 천만 엘네를 내걸었을 때부터 책략을 생각했겠지. 
 그에 비하면 다중인격자 게렉은 미치광이 정신병자에 가깝다. 
 ─데큘레인이 로하칸과 격돌했었다는 걸 잊었나? 그에 걸맞은 무력이 필요하다. 최소한 게렉은 있어야 해. 
 “게렉은 데큘레인을 죽인다면 공짜로도 할 텐데.”  ─임무는 사살이 아니라 생포다. 
 대화를 나누며 걷던 알 로스는 헤일레치의 경매장에 도착했다. [ 크라인 ] 이라는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끊지.”  ─제단에서 ‘멸지의 마석’을 현상금으로 더했다. 그 15%를 주지. 네 인형과 게렉만 빌리겠다. 
 “······.”  멸지의 마석이라면 조금 탐이 난다. 
 주카켄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너는 인형만 빌려주면 된다. 지금 우측 길가에서 연초를 피우는 붉은 머리의 중년인이 보이나. 
 알 로스는 해당 방면을 보았다. 정장 차림의 운전기사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제프’다. 오늘 데큘레인의 운전기사지. 우리가 저 놈을 제압할 테니, 너는 인형으로 저 놈의 행세를 해라. 
 “바보야. 데큘레인은 내 인형을 눈치챘던 전력이 있어.”  자신의 인형을 꿰뚫어본 상대는 데큘레인이 처음이었다. 
 물론 놈이 알려준 힌트 덕분에, 이제 더 이상 인형에 잿가루가 낀다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데큘레인은 시종인에게 그리 큰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다. 도구처럼 생각하지. 별 일은 없을 것이다. 장담하지. 
 알 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최상급 마석이다, 알 로스. 마나 다이아에 준하는 보석도 있지. 인간의 손이 닿지 아니한 멸지의 마석. 탐나지 않나? 
 “······.”  ─나는 놈들이 내건 마석의 가치만 1 억 엘네로 추정하고 있다. 그 중 15%다. 
15%. 
 고민하던 알 로스는 말했다. 
 “2 할.”  ─······. 
 이번에는 주카켄이 침묵했다. 알 로스로서는 아쉬울 게 없었다. 
 데큘레인에게 사사로운 원한이 있긴 하나, 유크라인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싶진 않으니. 
 ─빌어먹을, 타결이다. 나 ‘암흑가의 위정자’ 주카켄은, 돈 먹는 하마 알 로스에게 2 할의 보상을 약속하지. 
 “좋아. 단, 다음부터는 이리 급하게 하지는 말지.”  ─기회는 그리 자주 오는 게 아니야. 오늘이 최선이다. 
 알 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 크라인 ] 안으로 들어갔다. 
 “신분증 부탁드립니다.”  “여기.”  “예. 솔레트 공. 확인했습니다.”  헤일레치의 경매장 [ 크라인 ]에는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이 귀족인 듯 옷차림이 아름다웠다. 아마 자신처럼 ‘호메렌의 조각 반지’를 노리는 거겠지. 
 알 로스는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2 시간 뒤. 
 “솔레트 공. 호메렌의 조각 반지 낙찰을 축하드립니다. 물품의 주인은 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낙찰에 성공한 알 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경매장 뒤편의 백스테이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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