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11

새롭게 그려지는 풍경에 환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작’ 환수 따위는, 그녀의 색에 저항도 못한 채 잠식당한 것이었다. 
 ······그렇게 잿가루는 사그라들었고, 체육관은 청량한 풀밭으로 일변했다. 
 이 또한 데큘레인에게서 얻은 영감이었다. 
 그의 중간고사에서 느꼈던 감동을, 재능으로 체화한 마법. 
 “이 풍경에서는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데큘레인은 일대를 훑었다. 어떤 ‘매개체’를 찾는 눈이었다. 
 “매개할 마석은 없어요. 전부 제 마력으로 이룬 거예요.”  실비아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자리에 선 채 데큘레인을 바라보았다. 
 “저 실비아예요.”  “······.”  “제가 누군지 아시잖아요.”  그렇게 되묻는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본인에 대한 믿음과 긍지로 단단했다. 강자로서 마땅한 자질이었고, 과연 귀족의 마음가짐이었다. 
 데큘레인도 만족스러운 듯했다. 
 “좋다. 마법적으로는 만점이구나.”  그러나, 실비아가 눈을 감았다 뜬 바로 그 순간. 
 데큘레인은 실비아의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다만, 육체를 유약하게 놔두지 말도록.”  잿더미의 남작은 기생자의 신체적·마력적 기량을 증폭시킨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그의 마법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힘에도 애를 먹게 된다. 
 마법사 ‘플레이어’가 운동을 하면 스텟 낭비일 수도 있지만, 플레이어가 아닌 마법사는 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탈락이다.”  데큘레인은 손가락을 뻗어 실비아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실비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아니에요.”  당당히 답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 전에······.”  “제가!”  먼 뒤에서 외침이 울렸다. 데큘레인은 돌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프린이었다. 
 “이미 결계의 핵을 탈취했습니다!”  이프린이 여기 보라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손에는 ‘결계의 핵’이 있었다. 
 그녀 오른손목의 팔찌가 마력으로 일렁였다. 
 “······크으읏!”  핵을 파괴하고 결계를 해체하는 것 또한, 일반적인 데뷰탄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겠으나······. 
 이프린은 일반적인 데뷰탄이 아니다. 
 휘이이이이잉─! 팔찌에서 휘몰아치는 마력이 결계의 핵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결계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부스스스스······. 
 지진처럼 땅바닥이 울컥거린다. 체육관 천장에서 가루가 흐른다. 
 하늘에 빗금이 새겨진다. 금방이라도 깨질듯, 공간이 쩌저저적 갈라진다. 
 그리고.째애애애앵──! 
 결계는 통유리처럼 박살났다. 
 츠스스스스······. 
 ······덧없이 비산하는 결계의 파편. 
 그 아래에서. 
 파편을 온몸에 받으며······. 
 “······하하하.”  데큘레인은 왜인지, 어딘가 속 시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대견하다는 듯이. 
 이 정도면 믿을만하다는 듯이. 
 “······.”  그렇게 웃는 교수를, 실비아와 이프린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미소는 처음이었다. 
 “······그래.”  이윽고, 그는 말했다. 
 “너희가 이겼다.”  “······!”  그 순간. 
 이프린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미는 환희를 느꼈다. 머릿속에서 ‘빵빠레─!’ 환청이 시끄럽게 울렸다. 감당하기 힘든 희열이 말초까지 솟구쳤다. 
 “이프린 실비아. 두 사람은 만점이다.”  어느새, 풍경은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평범한 강의실이었다. 
 “협동하는 자세, 그 태도가 주효했다.”  뒤늦게 강의실의 문이 열렸다. 탈락자들이 알렌의 인솔 하에 안으로 들어왔다. 이프린은 그 중에서 루시아의 얼굴을 찾았다. 
 기껏 도와줬더니 홀랑 도망가버린 싹퉁바가지. 
 “흥.”  그럼에도 루시아는 뭐 어쩌라고? 따위의 표독스런 눈길로 받아칠 뿐이었다. 
 “앉도록.”  데큘레인은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했고, 데뷰탄들은 자리에 앉았다. 
 이프린은 시계를 보았다. 6 시 정각은 이미 넘었다.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기숙관의 결계 사태를 기억하겠지. 오늘은 혹시라도 그런 사태가 다시 발생할 경우에 대한 대비였다. 물론, 실전적인 수업이기도 했다. 너희가 언젠가는 경험하게 될.”  데큘레인이 알렌에게 눈짓을 보냈다. 알렌은 바깥에서 방독면이 가득 담긴 박스를 가지고 왔다. 
 “만약 이런 사태가 재발할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협동이다. 또한 이 마기 방독면은 항시 소지하고 다니도록.”  데큘레인은 「염동」으로 방독면을 배부했다. 이프린은 싱글벙글 웃으며 방독면을 보았다. 
 “!”  그 눈이 크게 뜨였다. 
 보급품인줄 알았는데, 최고급이잖아? 이거 엄청 비싸지 않나? 
 “수고했다. 오늘 탈락한 사람은 자신이 왜 탈락했는지 곰곰이 생각하도록. 
조교수 알렌에게 부탁하면 자세히 알려줄 것이다. 그럼 이만.”  데큘레인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의실을 나섰다. 
 일찍 탈락한 마법사들은 시무룩한 채 터덜터덜 떠났지만, 성공한 이프린은 강의실에 남아 여운을 즐겼다. 
 마법사는 이렇게 성장하는 것이었나. 
 그 뿌듯한 정도가 격이 달랐다. 
 ─그래, 너희가 이겼다. 
 만족한 듯했던 데큘레인의 목소리.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정녕 어마어마한 아드레날린이 치밀어 정수리를 빡! 
하고 강타했다. 
 물론 데큘레인 교수도 어느 정도는 봐줬겠지만. 그 목강철인지 뭔지하는 애장은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뭐가 되었든, 두 번은 느끼기 어려울 감정이었다. 
 “후후.”  하지만 착각하지 말자. 
 그의 칭찬이 기쁜 게 아니라, 그를 이겼다는 사실 자체가 기쁜 것이니. 
 “······좋아.”  이프린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은. 
 오늘 만큼은······ 조금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될 것 같았다. 
 “오늘 저녁은 로아호크다······!”  *  모두가 떠나간 어두운 밤.데큘레인은 마탑 강의실의 칠판에 글씨를 작성했다. 
 ──[ 명심할 것 네 가지 ]──  1. 결계의 핵심을 간파할 것. 
 2. 정면승부는 자제할 것. 
 3. 살아남을 것. 
 4. 이 칠판이 너희와 나의 유일한 연결고리임을 명심할 것. 
 ────────  그 뒤. 
 데큘레인은 칠판에 「미다스의 손」을 부여했다. 손가락에서 피어오른 마력이 초록색 표면에 스며들었다. 
 언젠가, ‘잿더미의 남작’이 전조 없이 등장할 그때를 대비하여. 
 그가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남긴 조언이었다. 
 실전. (1)  요즘, 부유섬에는 흥미로운 소식이 맴돌고 있었다. 무료했던 섬을 신선하게 휘감는 새로운 바람이었다. 
 “······데큘레인 그 사람이?”  “예.”  황제의 동생, 크레토는 보고를 받자마자 놀란 얼굴로 웃었다. 
 “허······ 그러니까······ 이제 곧 6 번 문제가 해결된다고?”  “증명의 자리가 준비되었답니다.”  심포지엄, ‘증명의 자리’는 일단 그 해답에 설득력이 있어야만, 아니 거의 정답에 근접하지 않는 이상 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증명의 자리가 준비되었다는 것은 곧, 6 번 문제의 해결이 머지않았다는 뜻. 
 “대단하구나.”  크레토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물론 아직 해결이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 데큘레인의 팬으로서, 크레토는 믿음이 있었다. 
 “하긴. 이제 그도 날아오를 때가 되었지.”  크레토는 여전히 데큘레인의 중간고사를 잊지 못했다. 그 여운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자칫 잃을뻔했던 열정에 불을 지폈다. 
 그렇기에, 소피엔이 데큘레인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내심 부러웠다. ‘나도 그 교습에 껴달라’는 말까지 할 뻔했으니. 
 “그런데, 질 좋지 않은 소문도 있습니다.”  “질이 안 좋아?”  “예. ‘그곳’에서 그를 주시한다 합니다.”  ‘그곳’. 
 정상적인 마법사는 물론이거니와, 크레토의 호위기사 패스벤더조차 그 ‘화산지대’는 입에 담지도 않는다. 
 ‘잿더미’는 그만큼 상스러운 멸칭이므로. 
 “그놈들은 잘나가는 마법사에게 시비를 거는게 일상이긴 하다만······ 뭐, 상관은 없을 것이다. 요즘 속세에서 데큘레인의 강함은 유명하다.”  위력적인 실전 마법사. 로하칸과 용호상박, 막상막하를 이루었다는 데큘레인의 일화를─황실 기사단은 기밀로 붙였지만─ 크레토는 익히 알고 있었다. 
 “아무튼. 그 증명의 자리가 준비되면, 한 자리 부탁하지. 아니, 명령이다. 
꼭 구해놓거라.”  아마 티켓 경쟁은 무지하게 치열할 터였다. 웬만한 고위 마법사는 전부 그곳에서 만나볼 수 있겠지. 
 “예. 아무 문제 없을 것입니다.”  크레토의 당부에 패스벤더는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 
 한편, 같은 시간의 다른 부유섬. 
 메지세이온 고층부. 
 “신기하네! 정말 제출했네!”  이사장 아드린느는 개인 저택에서 위자드 아카데믹의 편지를 읽었다. 
 ‘데큘레인의 논문이 대단히 합리적이며, 해답일 가능성이 지극히 높으니 검산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6 번 문제라 들었는데 말입니다.”  “응! 진짜 6 번 문제야!”  이사장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검은 장발을 말총처럼 묶어내린 마법사. 앳되고 키작은 이사장에 비해, 차갑고 어른스러운 인상의 비밀 식객이었다. 
 “한데, 당신 때문에 데큘레인이 위험에 처한 건 압니까?”  “응? 데큘레인이 왜?”  이사장 아드린느는 진보적인 사람이었다. 적어도 ‘출신 성분’이나 ‘현재 소속’ 따위로 사람을 가리지는 않았다. 
 아드린느의 기준은 오직 ‘나에게 해악인가 아닌가─’였다. 
 “데큘레인을 벼르는 작자가 많습니다. 게렉, 그 정신나간 놈부터 글리퍼, 헬건······ 잿더미에서도 그 이름이 심심찮게 오르내리지요.”  다중인격자 게렉.살인귀 글리퍼. 
 산 시체 헬건. 
 전부 잿더미의 유명인들이다. 
 “다 당신이, 데큘레인이 강하다고 떠든 탓입니다.”  “엥?! 그게 왜 나 때문이지? 시아 너도 데큘레인한테 졌잖아!”  “······.”  본명 신시아. 
 현재 이명은 알 로스. 
 그녀는 약 10 년 전, 고작 열넷의 나이로 아드린느의 눈에 띄어 비공식 사사한 수제자이자, 한달 전, 마탑의 기숙 제 3 관에 결계를 설치한 범인이다. 
 “그때 저는 인형이었습니다. 본체였다면 이겼겠지요.”  “거짓말하네! 본체였으면 오히려 거기서 죽었을 걸~?”  “저는 그때 어떤 마법사도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10 년 전 신시아는, 대마법사의 재목까지는 아니었지만, 특정 계열의 정점을 노려봄직한 재능이었다. 
 그 자질을 꿰뚫어본 아드린느는 고아였던 그녀를 직접 교육했다. 
 “근데 그게 왜?”  “······그저 데큘레인의 목에는 잿더미의 현상금이 붙어 있다는 걸 알아두라는 말이었습니다.”  “알았어! 그것보다, 내 인형은?!”  알 로스는 제 가방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꺼냈다. 귀여운 소형견이었다. 
 “와아! 귀엽다······! 참, 얘 수명은 길겠지?!”  “예. 일부러 몸체를 작게 한 것도 그 이유입니다. 마력만 보장된다면 100 년 훨씬 이상······ 당신이 죽은 뒤에도 한참을 살아가겠지요. 한데, 왜 그리 수명에 집착하는 겁니까?”  “글쎄~?”  아드린느는 그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래살면 좋잖아!”  그녀는 자신의 혈통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수명 또한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요정의 시간은 너무나도 길다. 
 요정은 가장 오래 사는 인간의 두배, 아니 세배만큼이나 살아가며, 절대로 늙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형은, 오랫동안 살아 움직이는 인형만이, 그녀의 시간을 함께할 수 있다. 
 아드린느가 ‘알 로스’의 재능을 발견하고, 직접 가르친 역사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알 로스는 가끔 아드린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장난스럽고, 짓궂고, 얄궂고 얄밉지만, 스승이기에 못내 존중할 뿐이었다. 
 “그 논문을 제가 좀 봐도······.”  알 로스는 슬그머니 팔을 뻗었다. 
 “안돼! 홍채 인식이거든!”  이사장은 눈을 부릅뜨더니 그 논문을 자기 품안에 넣었다. 알 로스는 궁시렁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흠. 6 번을 풀었다라······.”  그녀는 문득 데큘레인과의 첫만남을 떠올렸다. 
 ─오물만도 못한 쓰레기. 사회에서 배척된 개버러지. 인간이라기에는 그 구성(構成)이 부족하고, 짐승이라기에도 도저히 귀여운 구석이 없는 구더기. 
재주는 그저 꿈틀거리는 것 뿐이고, 그 천하고 더러운 근본은 구제의 여지도 없지. 
 살벌하게 뇌까리던 음색. 분노하며 쏟아낸 그 악담과 저주. 
 물론 그들이 잿더미를 혐오하는 이유는 익히 알고 있긴 하지만. 
 “······생각할수록 화난단 말이다.”  곱씹을수록 얼굴에 열이 오른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그때 제대로 되갚아주지······.. 
 “앗! 움직인다! 움직인다~!”  이사장이 요란을 떨었다. 알 로스도 힐끗 보았다. 
 아드린느의 정순한 마력을 생명력으로 받아들인 소형견이, 깽깽거리며 그녀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풋-  알 로스는 작게 웃고 그녀의 저택을 떠났다. 
 * * *  월요일, 유크라인 저택. 
 나는 별채에 칠판을 설치했다. 마탑 강의실의 그것과 똑닮은 물건이었다. 
 ───「 쌍둥이 칠판 」───  ◆ 정보  :마석으로 제작된 칠판. 한 쌍이 하나다. 
 :「미다스의 손」으로 인하여 그 공명성이 상승되었다. 
 ◆ 범주  :기구 ⊃ 통신  ◆ 특수 효과  :이 칠판에 새겨지는 것은 다른 칠판에도 동일하게 전달된다. 
 :이 연결은 어떤 마력적인 작용에도 끊어지지 않는다. 
 [ 미다스의 손 : 4레벨 ]  ────────  결계 안팎에서 양방향 통신이 가능하도록 직접 제작하고, 「미다스의 손」으로 업그레이드까지 한 물건. 이 별채의 칠판에 활자를 쓰면, 강의실의 칠판에도 동일한 활자가 새겨진다. 
 이것으로 나는 데뷰탄들과 소통을 할 수 있다. 
 [ 5 등급 중간보스 이벤트 : 잿더미의 남작 ]  모두, 이 5 등급 보스전을 대비한 준비다. 
 물론 잿더미의 남작이 언제 등장할지는 모른다. 게다가 해당 이벤트에 교수 따위는 끼어들 수 없으므로, 이 이상 내가 관여할 여지도 없다. 
 “작은 도움이면 알아서 잘 해결할 테지.”  다행히, 데뷰탄 중 두 녀석은 확실히 똘똘하다. 
 시스템 특성의 도움이 없으면 으스대지도 못하는 자신과는 다르게, 이프린과 실비아. 두 사람은 역대급 성장력을 갖춘 네임드인 것이다······. 
 ─똑똑. 렌입니다. 
 나는 문을 열었다. 렌은 고개를 비스듬이 숙인 채 들어와 서류를 건넸다. 
 “주인님. 자이트 백작이 프렌하임 기사단을 인수하려 한다는 소문입니다. 그 외에 여러 정보들을 기록했습니다.”  “······자이트가?”  “예. 벌써, 예식장을 예약했다는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조금 곤란한 보고였다. 
 나는 일단 서류부터 읽었다. 
 “흠.”  그 세세함이 상상 이상이었다. 비록 직원 숫자가 렌과 에넨 둘 뿐이기에 아직 ‘범위’는 부족했지만, 내 주변 인물과 관련된 정보의 정확도는 충분히 만족할만했다. 
 “수고했다.”  이런 식이라면 월급이 아깝지 않지. 
 또한, 나는 렌에게 책 한권을 내밀었다. 현재 내가 개정 중인 [ 유크라인 : 
원소 마법의 이해 ]였다. 
 “이것은······?”  갸웃거리는 렌에게 말했다. 
 “요즘 자네 거처에서 이따금 마법 소리가 울리더군. 동생 에넨의 짓일 테지.”  “······.”  렌은 전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렴, 에넨은 예리엘처럼 남몰래 마법 공부를 하고 있었던 거겠지. 
 “죄송합니다. 제가 잘 교육시키겠습니다.”  “교육은 그 책이 한다. 내 수하에게 재능이 있다면, 오히려 나에게 좋은 일이지. 배우라 해라.”  “······.”  렌은 의외라는 듯 바라보았다. 
 다만, 오히려 저런 반응이 나를 거슬리게 한다. 하라면 하고, 받으라면 받으면 될 것을. 뭘 감사하다, 예상 밖이다, 따위의 표정을 드러내는지. 
 “받으라면.”  “예. 감사-”  “나갈 준비나 하지.”  “예.”  나는 렌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주차장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이나였다. 
 “보스. 기다리고 있었어요.”  “쫓아낼까요.”  렌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놔두지.”  “예.”  그러자 렌은 말없이 걸어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내가 먼저 탔고, 루이나도 잽싸게 옆자리를 점거했다. 
 오늘 그녀는 피곤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지.”  “폐하 교습하러 가시나봐요.”  “그래. 너는 내일 아니었나.”  “맞아요. 그저 전달하려는 정보가 있어서요······.”  어깨를 으쓱인 루이나는 서류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이 전부를, 사실은 ‘증명의 자리’에서 질문하려 했어요. 이미, 심포지엄 심사위원들에게 전달하기도 했고요.”“그런데? 
 “그런데, 만약 제가 그러면 계약 위반이 될 수도 있기도 하고, 보스도 저에게 기회를 줬잖아요. 그래서 저도, 보스에게 지금이라도 포기할 기회를 드리고 싶어요.”  자세히 들으니 뭔가 귀여운 협박 같았다. 나는 태연히 되물었다. 
 “포기할 기회.”  “네. 받아서 읽어보세요. 보스.”  루이나는 짐짓 예를 다하여 서류를 내밀었다. 
 나는 말없이 받아들었다. 
 과연, 내 6 번 문제의 해답을 분석한 내용이었다. 
 3 분 간 집중해서 읽었다. 
 “······루이나.”  “네?”  루이나는 미소를 숨겼다. 나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좋은 질문들이다. 이대로, 증명의 자리에서 질문하지.”  “······네? 
 루이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나 이내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니. 보스. 생각을 좀-”  “루이나.”  “······왜요.”  큼큼. 나는 헛기침을 두어번 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영 인정하기 싫은 것 같으니, 납득할 수 있게 어느 정도 개연성을 만들어 주도록 하자. 
 “잘 들어라. ‘이번 룬어 해석은’, ‘물론 운이 좋았지만’, ‘보다 확실하게 말하지’. ‘나는 예전의’, ‘데큘레인이 아니다’. ‘이 아이디어는’, ‘내가 직접 깨달은 결과다 ’. ‘이 언어 구사력은 그 증거지’.”  “······?”  루이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방금 내가 씨부린 언어들을 이해조차 못한 투였다. 
 “방금 나는 아홉 가지의 언어로 말했다.”  “······네?”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언어는 없다고 생각하면 옳지.”  물론 대륙에는 ‘제국어’가 현대의 영어처럼 공용어 위상이긴 하나, 왕국마다 어엿한 모국어가 있다. 
 또한 각종 부족어, 고어, 사어 등등······ 그 많고 다양한 언어를, 나는 오직 독서를 위하여 습득했다. 
 “장담하지. 나는 생전 처음 보고 듣는 언어도, 열흘이면 익힐 수 있어.”  특유의 허영심인지 데큘레인의 서재에는 이국어로 작성된 책이 많았는데, 하나 하나 번역본을 구하며 읽는 것이 너무 귀찮았다. 
 그 탓에 나는 해당 언어 자체를 배웠고, 이 대륙의 거의 모든 언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룬어도 언어의 한 종류지. 물론, 룬어이기에 오래 걸리긴 했다만. 
이 정도면 이해하나?”  “······.”  루이나는 말없이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허- 허허- 허- 로봇이 억지로 웃는 모양새였다. 
 “참······ 몰랐네요. 보스한테 언어적인 재능이 있었을 줄은.”  창백하게 중얼거린 루이나는 창문에 몸을 기대었다. 
 그 가냘픈 어깨가 축 늘어졌고, 텅 빈 시선이 풍경을 좇았다. 
 “뭘 그리 상심하지, 고작 이런 걸로.”  “······고작이라니요?”  루이나가 코끝을 찡그리고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작 ‘문제 해결’일 뿐이다. 너는 나보다도 4 살이나 어리지 않냐. 
아직 성장할 여지가 많으니, 시간은 확실히 너의 편이다.”  “······.”  “또한, 다시 한 번 약속하지. 5 년이면. 네가 내 걸림돌이 되는 일도, 내가 네 걸림돌이 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메인 퀘스트는 길지 않다. 이미 반년의 세월을 이 세상에서 보냈으니, 남은 시간은 길어도 4 년 쯤. 
 그러자 루이나는 힘없이 웃었다. 
 “······당신이라는 악연을 끊는 데 5 년이면, 충분히 값싸네요 보스. 근데 왜 하필 5 년이에요?”  “알 필요 없다. 자연스레 알게 될 테지.”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렌이 말했다. 창밖을 보니 목적지였다. 저편에 가득한 황성의 외벽이 짓누르는 듯 굳건했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렌. 루이나를 마탑으로 데려가라.”  “예.”  “······배려 고마워요, 보스.”  루이나가 안에서 손을 흔들었다. 
 부우우웅─  그렇게 차는 떠났고, 나는 황성으로 걸었다. 
 *  ······잿더미는 짙은 어둠 속에서 발아한다. 
 감정을 집어삼키는 기생충은 감정적인 결핍, 흉터를 파고든다. 
 숙주의 모든 생각을 암적으로 이끌며,  온갖 부정적인 마음에 파먹힌 자아가 고통스럽게 쪼그라든 순간. 
 가장 취약한 부분부터 시작하여, 결국에는 몸 전체를 점거하는 것이다······. 
 루이나는 비척비척 걸어 마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유독, 세상 전체가 흔들거리는 듯 어지러웠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23 층을 눌렀다. 
 23 층. 
 자신의 집무실. 
 그 허름한 공간의 의자에 멍하니 앉았다. 
 데큘레인은 5 년이라 말했다. 
 5 년. 
 그깟 5 년. 
 충분히 버틸 수 있는데.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지. 
 “······.”  루이나는 문득, 제 집무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보았다. 누가 멋대로 문을 열고 집무실 안까지 배송한 듯했다. 
 마도회에서 남긴 쪽지였다. 
 [ 마도회 퇴출을 알립니다 : 모나크 등위 루이나 ]  루이나는 그 문장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속 보이는 손절이었다. 
 나를 충동질했던 연놈들이, 나를 버리고 다시 데큘레인에게 붙으려는 수작이었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두근─  온몸이 뜨거웠다. 참을 수 없는 온갖 어두운 감정들이 두개골을 두드렸다. 
뜨거운 송곳이 관자놀이를 쑤시는 것 같았다. 
 이 씨발새끼들. 
 좆같은 개잡놈들. 
 “······.”  루이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어깨에서 잿가루가 피어올랐다. 
 시커먼 입자들은 거미줄처럼 번지며 23 층, 그 집무실 전체를 집어삼켰다. 
 *  20 층, 마탑의 스터디 룸. 실비아 팀은 과제 점검이 한창이었다. 
 “나는 다 확인했어. 이쪽은 이상 없어. 너는?”  “없어.”  이프린과 실비아가 부분부분을 지그시 들여다보던 그때. 
 문이 열리며 유로잔이 들어왔다. 그의 양손에는 군것질거리가 가득했다. 
휴식시간을 알리는 신호였다. 
 “마침 출출했는데. 땡큐.”  이프린은 곧장 손을 뻗어 오징어부터 꺼냈다. 
 유로잔이 말했다. 
 “이제 곧 시험이라 그런가. 스터디 룸이랑 도서관이랑 마법 훈련실도 꽉 찼더라. 데뷰탄은 죄다 모인 것 같던데?”  그럴 줄 알고, 이프린은 새벽 4 시부터 마탑 도서관의 자리를 맡아뒀다. 
 “아~ 이번 기말은 뭐든 좀 쉽겠지? 그 난리가 있었으니까.”  “모르지. 근데 넌 방학때 뭐하냐?”  “영지 돌아가야지. 난 마탑에도 오래 못 있을 것 같아. 우리 영지에 마법사가 꽤 필요하거든.”  남자 셋은 서로 잡담을 나누었고, 이프린도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과열된 머리를 식히던 그때. 
 쿵─! 쿵─! 
 웬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벽면에서부터 전달되는 소음이었다. 
 “뭐지? 누구 싸우나?”  쿵─! 쿵─! 끄아아아악─! 
 “!”  그 울림은 곧 비명으로 이어졌다. 화들짝 놀란 이프린과 팀원들은 곧장 스터디룸 문을 열고 나왔다. 
 “뭐, 뭐야!”  스터디룸 바깥의 복도. 웬 마법사가 뒤돌아서 있었다. 뒤통수를 보니 데뷰탄 동기 ‘로톤’ 같았다.이프린은 그에게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로톤? 맞지? 너 괜찮니? 누구랑 싸웠······?”  그 순간 로톤이 홱─ 돌아섰다. 그에게 동공은 없었고, 크게 벌린 입과 귀에서 검은 재가 토악질처럼 쏟아져내렸다. 
 “으아아악!”  이프린은 자신도 모르게 마법을 방출하여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는 곧장 스터디 룸으로 도망쳤다. 
 쾅─! 
 문을 닫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너, 너네도 봤, 봤니, 봤니?! 봤지!”  “······.”  남은 네 사람도 멍하니 있었다. 
 방금 광경은 그만큼 충격적이었기에,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게 무슨······. 아하~”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이프린이 피식 웃었다.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지금 나 꿈꾸고 있나보다. 공부하다 피곤해서 잠들었나봐. 안 그렇니?”  “······꿈.”  “응. 꿈 아니니? 나 어제 오늘 한 숨도 안 잤거든. 수련하느라.”  그러자 실비아가 움직였다. 아주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쭉 뻗어 이프린의 뺨을 후려갈겼다. 
 짜아아아악──! 
 대단한 파공음. 손목의 스냅을 이용한 스윙. 이프린은 목이 꺾인 채 엉거주춤 밀려났다. 
 “아······.”  그 상태에서 눈동자만 돌려 실비아를 보았다. 
 눈가에 물방울이 한움큼 맺혔다. 
 사람이 너무 아프니까, 비명도 나오지가 않는다. 
 그저 입술만 뻐끔- 뻐끔- 뻐금-  억울하고 아파서, 눈썹을 파르르 떨며 노려볼 뿐. 
 “너, 너······.”  “아파.”  “그럼 안 아프겠니! 그렇게 세게 갈겼는데!”  버럭거리는 이프린에게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그런데 아프면 꿈이 아니래.”  “······.”  “알려준 거야.”  이프린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닫았고, 실비아는 다른 남자 세 명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어때.”  맞기 싫었던 그들은 황급히 대답했다. 
 “마, 맞아 맞아. 절대 꿈아냐. 여기가 어떻게 꿈이냐 이프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응.”  ······데큘레인의 조언을 받아들여, 운동을 시작한 지 어느덧 닷새. 
실비아는 나름 성장한 신체능력을 느끼며 스터디룸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살짝 긴장도 되었다. 기괴하게 변한 로톤의 모습은 그녀에게도 사뭇 당황스러웠으니. 
 “나 진짜 억울······ 아 짜증나고 아퍼서 진짜······ 말 한 번 잘못한게 죄니? 죄냐구······.”  울먹이며 노려보는 이프린은 무시했다. 
 실전. (2)  질겅— 질겅—  이프린은 스터디 룸 바닥에 누워 오징어를 씹었다. 
 그러다 목이 좀 마른지 음료수를 마셨다. 
 꿀꺽— 꿀꺽—  세 모금 홀짝이고는 뭔가 부족한 듯 비닐봉지를 뒤적였다. 
 초콜렛을 발견한 그 눈썹이 치근덕거렸다. 
 “맛있는거 많이 사왔네. 먹어도 되지?”  “어······ 어. 과제는 너희 지분이 더 많으니까 나는 그런 거라도······. 
근데 너 안 아파?”  그런 이프린을 조금 기가막히다는 듯 바라보던 유로잔이 말했다. 
 “응? 아~ 뭐······ 이번에는 헛소리한 내 잘못이잖니.”  꿈이니 뭐니. 현실에 집중하는 마법사가 해서는 안 될 소리였다. 
 촵촵— 이프린은 초콜렛을 씹으며 실비아를 보았다. 
 그건 그렇고, 이거 시골에는 없던 맛이네. 무슨 초콜렛이 하얗대? 
 “······.”  실비아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마탑 밖의 날쌘돌이와 시야를 공유했다. 날쌘돌이는 마탑 근처를 비행하며 일대를 휘둘러보았다. 
 마탑은 일견 멀쩡했다. 대학의 사람들도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각에 마력을 주입하면······ 저층부 거의 전체가 잿가루에 파묻혔다. 
 치지직— 치지직—  날쌘돌이와의 연결도 곧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실비아는 ‘집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린 뒤 눈을 떴다. 
 “심각해.”  그녀는 무표정으로 말했다. 
 ““““심각?””””  네 명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마탑이 재에 휩싸였어.”  ““““마탑이?!””””  “그럼 우리 갇힌거야?!”  데인이 물었다.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층부가 잠식됐고 입구도 꽉 막혔어. 아무도 이 사태를 모르고 있는 것같아.”  “아무도?”  “잿가루 자체에 ‘환혹’의 성질이 가미된 듯해.”  “교수, 교수님들은? 교수님들이 도와주면 되지 않나?”  잿가루는 1 층부터 25 층까지를 뒤덮었다. 
 교수가 머무는 중층~고층부는 아직 그 사실조차 모르는 듯하고, 안다 하더라도 대부분 기말시험 준비 문제로 외부에 있을 것이다. 
 쿵─! 쿵─! 
 “으어!”  그때 스터디 룸의 문이 흔들렸다. 
 쿵─! 쿵─! 
 바깥에서 로톤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잿가루에 잠식당한 그는 문 여는 방법을 잊은 듯했지만, 주먹에서 번지는 잿불이 벽을 서서히 그을렸다. 
 “로톤 저 미친새끼, 어떻게 된 거야?”  “······후우.”  이프린은 심호흡을 했다. 
 눈을 감은 채 술식을 구성했다. 
 구성 원소는 ‘바람’과 ‘땅’. 
 쿵─! 쿵─! 쿵─! 
 “이, 이프린. 뭐할려고? 그냥 저대로 놔둬!”  “저대로 두면 문이 불탈거야.”  이프린은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로톤의 초점 없는 눈이 기괴했지만, 쫄지 않고 문을 열었다. 
 동시에 마법을 발현했다. 
 「보이지 않는 족쇄」. 
 바람에 땅의 성질을 부여하여 상대를 억류하는 마법. 
 크에에에에에───! 
 로톤은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들었으나, 이프린의 손아귀에서 발생한 바람이 놈을 휘감았다. 
 로톤의 몸이 관에 갇힌 듯 쪼그라들었다. 
 “이제 됐-?!”  놈은 돌연 입에서 잿가루를 뿜어냈다. 
 푸아아아─! 거멓게 쏟아지던 가루들이 코앞에서 멈췄다. 
 실비아의 배리어였다. 
 “······허. 깜짝 놀랐네.”  “비켜.”  실비아는 또각또각 다가가 로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초점 없는 눈. 
 검게 튀어나온 혈관. 
 그리고, 잿가루에 뒤덮인 맨발. 
 “······.”  맨발과 바닥이 맞붙어 있다. 
 마치, 서로 연결된 듯이······. 
 “지배당하고 있어.”  그 단서들로 실비아는 결론을 내렸다. 
 이 정체불명의 잿가루가 어디서 파생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법사의 뇌를 불완전하게나마 지배하고 있다. 
 “지배?”  “‘괴뢰화’의 한 종류. 좀비나 마찬가지야.”  고개를 끄덕인 이프린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복도를 둘러보았다. 
 복도의 천장, 벽면에 달라붙은 잿가루가 혈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전체가 잿불에 잠식당한 듯 후욱─고열이 끼쳐왔다. 
 “뜨거워. 복도 전체가 타고 있는 것 같아.”  이프린이 문을 닫고 실비아를 돌아보았다. 
 “여긴 위험해. 구조나 도움이 올 때까지 최대한 안전한 곳을 찾아야 해.”  “안전한 곳.”  “응. 내 생각에는······.”  가장 안전한 곳은 이프린도, 실비아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재의 열기 따위는 스며들지 않을, 최첨단 마공학 설계와 마석으로 이루어진 장소. 
 오직 수석교수의 강의실. 
 3 층, A-Class. 
 * * *  빼꼼—  이프린의 얼굴이 문 밖으로 튀어나왔다. 
 빼꼼—  그 위에 실비아도 나타났다. 
 두 사람은 지이잉— 눈동자만 굴리며 상황을 관찰했다. 
 복도는 온통 잿가루에 뒤덮여 섬뜩했지만, 로톤같이 좀비화된 놈은 없었다. 
 “괜찮아.”  이프린이 속삭이듯 한 말에 남자 세명이 나왔다. 그들은 저마다 방독면을 장착한 채 살금살금 움직였다.스터디 룸은 5 층. 
 이런 상황에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건 미친 짓이니, 루트는 비상 계단이다. 
 쉭— 쉭쉭—  이프린은 이동하면서 스터디 룸의 창문을 힐끔거렸다. 다들 사태가 발생하자마자 도망쳤는지 스터디 룸에 남은 데뷰탄은 없었다. 
 “!”  그렇게 전진하던 중, 선두 이프린이 급히 멈췄다. 
 실비아가 물었다. 
 “왜.”  “복도에 괴물이 엄청 많아. 열명은 넘는 것 같아.”  비상계단의 입구는 물론, 그 복도 근처에 괴물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이프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걸 다 죽일 수도 없고······.”  오히려 진짜 괴물이라면 마음 편히 죽이거나 부술 텐데. 
 다 같은 데뷰탄이라 뭐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실비아. 이 아래로 통로같은 거 못내니?”  “마탑의 층구조는 마공학 설계야. 천장과 바닥은 나도 건드릴 수 없어. 
대신.”  실비아가 바닥에 도면을 그렸다. 
 │비상계단││★│  │중앙복도│스터디룸 1│스터디룸 2 │  대강 5 층의 구조였다. 
 이 중앙복도에서 비상계단으로 이어지는 공간에 괴물들이 많았다. 
 “이 ‘스터디룸 1’에만 도착하면 별(★)표 자리에 통로를 만들어서 계단으로 진입할 수 있어.”  “계단에도 그 괴물들이 있으면?”  유로잔이 물었다. 이프린은 결연하게 대답했다. 
 “제압해야지. 일단, 시선을 끌 테니까 너희는 스터디룸으로 들어가.”  이프린은 팔찌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 뒤, 복도로 폴짝 뛰어나갔다. 
 “하아앗─!”  그녀는 강풍을 구현했다. 복도에 태풍처럼 막강한 기류가 치밀었고, 괴물들은 속절없이 밀려났다. 
 그 틈을 타 실비아와 멤버들이 스터디룸에 진입했다. 난리를 일으킨 이프린도 무사히 뒤따랐다. 
 “이프린. 괜찮아? 어디, 뭐 물렸다거나 한 데 없어? 너도 괴물 되는 거 아니지?”  유로잔의 물음에 고개만 끄덕였다. 
 실비아는 이미 스터디 룸의 벽면에 통로를 그렸다. 
 “가자.”  그들은 그 통로를 걸어 일단 비상계단에는 도착했다. 
 그런데. 
 그어어어어─── 그어어어어───  계단에 괴물들이 많았다. 상상 훨씬 이상이었다. 무슨 한 칸에 한 놈이었으니, 적어도 제압할만큼은 아니었다. 
 “너무, 너무 많은데? ”  “미안. 이건 예상 못했다.”  이프린도 당황한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실비아는 아니었다. 그녀는 입술에 검지를 얹었다. 
 “쉿.”  그리고는 그 망막에 마력을 모았다. 그녀의 눈이 알록달록하게 물들었다. 
 삼원색의 체현이었다. 
 “······.”  실비아는 계단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멀쩡하던 계단이 한순간 크게 출렁였고, 환상처럼 흐물거리더니, 이내 완전히 삭제되었다. 
 지우개가 연필을 지우듯, 고작 시선만으로 계단을 지워낸 것이었다. 
 쿠우우우웅─! 
 계단을 배회하던 수많은 괴물들이 통째로 추락했다. 실비아는 다시 계단을 복구한 뒤 눈을 감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 맺혔다. 
 “시, 실비아 씨. 진짜 완전 대마법······.”  “떠들 시간 없어.”  그들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멈춰.”  그렇게 도달한 3 층의 비상 통로 입구. 
 다만 그 안으로 들어가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실비아는 입구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다른 문을 만들었다. 그들은 실비아의 문을 통해 3 층에 발을 내딛었다. 
 역시, 3 층의 비상 통로는 괴물들이 틀어막고 있었다. 
 “가자.”  그들은 우선 A- Class 강의실을 찾았다. 
 매주마다 찾아온 길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걸림돌이 많았다. 복도를 배회하는 괴물이 수십 단위인 듯했다. 
 “어떻게 하지?”  “내가 시선 끌게. 너희가 문을 열어.”  이프린이 말했다. 우두둑─ 몸의 관절을 풀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이내 대열에서 벗어났다. 
 “───얘들아! 나 여깄어──!”  그 외침이 복도의 시선을 끌었다. 이프린은 곧바로 도망갔고, 실비아와 멤버들은 살금살금 달려 A-Class 강의실 문고리를 쥐었다. 
 드르륵─ 드르륵─  문이 잠겨 있었다. 유로잔과 남자들의 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실비아도 입술을 깨물었다. 
 “어, 어떻게. 이거 개망했는데······.”  그러나 실비아는 곧, 그 안에서 속삭이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사람이 있어.”  “이 안에요?”  쿵─! 쿵─! 
 실비아가 문을 두드렸다. 
 “열어.”  그 목소리가 전달되었을까. 강의실에서 소란이 일었다. 
 쿵─! 쿵─! 
 유로잔과 남자들도 합세해서 문을 두드렸다. 
 “열어! 열라고!”  “여기 실바아 씨도 있거든?! 안 열면 니들 다 뒤지는거야!”  실비아. 
 그 이름에 소란은 난리가 되었다. 
 쿵─! 쿵─! 
 “으아아!”  때마침 어그로를 끌던 이프린이 저 통로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 꼬리에 딸린 괴물은 최소 100 명이 넘는 듯보였다. 
 “문 열어─!”  이프린이 그렇게 외친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연 사람은 평민 줄리아였다. 그들은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마지막, 이프린이 아슬아슬하게 오자마자 문을 닫았다. 
 이프린은 심장을 부여잡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와, 허, 허, 와······. 어떻게든 도착은 했네······.”  “이피! 이피 괜찮아?!”  이프린에게는 익숙한 목소리, 줄리아였다.“줄리!”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줄리아를 껴안았다. 
 “참······ 너희는 실비아 씨만 아니었으면. 괴물들을 죄다 끌고오면 어떻게 하니? 나 참 멍청해서.”  그런데 볼멘 소리도 있었다. 요즘 이프린의 새로운 원수가 되어가는 루시아였다. 보랏빛 장발이 오늘따라 유독 재수가 없었다. 
 쿵─! 쿵─! 쿵─! 
 바깥에서 괴물들이 문을 두드렸다. 흠칫 놀란 줄리아가 그 문을 보았다. 
 “······이피. 이제 어떻게 해?”  쿵─! 쿵─! 쿵─! 
 “어쩔 수 없어.”  쿵─! 쿵─! 쿵─! 
 “도움을 기다려야지.”  부스럭─ 이프린은 제 품의 보따리를 꺼냈다. 군것질거리가 가득 담긴 봉지였다. 달리면서도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식량은 곧 생명이니까. 
 “근데 저건 뭐니?”  이프린은 문득 칠판을 바라보았다. 
 ──[ 명심할 것 네 가지 ]──  1. 결계의 핵심을 간파할 것. 
 2. 정면승부는 자제할 것. 
 3. 살아남을 것. 
 4. 이 칠판이 너희와 나의 유일한 연결고리임을 명심할 것. 
 ────────  “그냥. 저번에 시험한 거 정리같은데?”  “흐음······.”  줄리아의 대답에도 이프린은 그 칠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너희와 나의 유일한 연결고리. 
 그 아래에 놓인 분필. 
 “······.”  이프린은 그 분필을 들고 글자를 적었다. 
 [ 데큘레인 바보 ]  쿵─! 쿵─! 쿵─! 
 “아 깜짝이야 씨.”  그리고는 별 생각은 없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 * *  “폐하. 교습 마법사 데큘레인 공입니다.”  황제의 교습 공간─ 배움의 장. 
 시종이 황금 사자의 아가리에 달린 문고리를 두드리자, 황제의 목소리가 준엄하게 흘러나온다. 
 ─들어오라 해라. 
 그렇게 문이 열리면, 황제 소피엔이 다소 껄렁한 자세로 앉아 있다. 
 여전한 권태에 젖어 썩어버린 눈. 
 비스듬이 꼰 고개가 나를 위 아래로 훑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흥. 네 옷차림이 제도의 트렌드라더니. 확실히, 궁중을 배회하는 그 잡것들과 다르긴 하구나.”  나는 말없이 다가가 그녀 앞에 앉았다. 황제의 목전에는 체스판이 있었다. 
 “오늘도 체스입니까.”  “아니. 일단 그 전에 얘기나 나누지. 체스도 슬슬 질려간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매사에 열중하지 못하고 금세 식어버리는 인간상이니. 
 “로하칸을 만났다고 들었다.”  “예.”  “아쉽게 놓쳤다고.”  “······실력이 부족했습니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너만큼 하지도 못한 기사놈들은 얼마나 부족한 것이냐. 참, 로하칸이 네 스승이었다면서?. 
 “스승이라기에는 배운 것이 없지요.”  “······그래. 배울 게 없었겠지. 그 빌어먹을 놈 때문에 선황의 건강이 악화되었느니라. 놈은 태후 뿐만 아니라 선황도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읊조리는 황제의 음성에 분노는 없었다. 다만 노한 척할뿐이었다. 
 그녀에게는 감정도 권태로울 뿐이었다. 
 “데큘레인. 환관들이 말하길, 네가 대륙 최고의 두뇌 중 한 명이라고 들었다.”  “제가 말입니까.”  “그래. 경매로만 수억을 벌어들인 천재라나.”  요즘, 나도 모르는 소문이 많다. 로하칸의 숙적이니, 대륙에서 가장 똑똑한 인간이니 뭐니······. 
 “하여, 묻지. 짐은 원정을 떠날 생각이니라.”  “원정이라 하시면.”  “‘멸지’를 정복할 것이니라.”  황제가 책상 위에 지도 한 장을 올렸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내부의 후환을 없애야 하지. 짐은 적궤를 처단할 것이니라.”  다소 거슬리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황제의 눈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적궤는 내부의 후환이 아닐 듯합니다.”  “그걸 네가 어찌 알지.”  “대륙 최고의 두뇌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자 소피엔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무감하고 게슴츠레했던 그 눈이, 호선으로 휘었다. 
 “하─ 하─ 하─”  뭔가 로봇 같은 웃음이었다. 
 “웃긴 놈이구나.”  “거짓이 아닙니다. 저는 세상을 다르게 봅니다.”  적궤 학살을 막을 수 있다면, 대륙 최고의 똑똑이가 되어도 좋다. 
 황제가 입술을 비틀었다. 
 “흥. 그럼 알겠구나.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적궤가 내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는 것은. 짐은 우선 적궤를 처부수고, 스스로 멸지 원성을 나설 생각이니라. ”  “······스스로.”  “그래. 짐은 몸소 최전선에 설 것이다. 검을 휘두를 것이고, 마법을 구사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나를 역사에 남기는 방법이다.”  황제의 짓궂은 눈이 나를 주시했다. 
 그녀는 내 반응을 기대하는 듯했고, 나는 캐릭터 돋보기 렌즈에 표시되는 그녀의 ‘권능’을 읽었다. 
 ──「???」──  ◆ 등급  :권능  ◆ 설명  :??? 
 ───  돋보기조차 권능은 읽어낼 수 없었지만, 나는 이깟 돋보기 아니어도 황제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사망회귀」. 
 그녀가 품은 권태의 이유는 죽음의 결핍. 
 인간은 언젠가 죽음이 도래하기에 의욕적으로 살아가나, 그 죽음이 결여된 소피엔은 나태와 권태로 가득하다. 
 그렇기에 황제는 위험한 것이다. 
 인게임에서는 황제가 죽는 순간 ‘게임 오버’가 되고, 똑같이 세이버 로드 따위의 회귀를 하지만, 나는 플레이어가 아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황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으면 안 된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황제라는 존재 자체가 곧 나의 ‘사망변수’인 것이다······. 
 “그렇군요. 한데, 폐하께서는 마치, 본인에게 죽음이 없는 것처럼 말하십니다.”  ······나는 그렇게 물었다. 
 순간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그저 짓궂었던 눈동자가 홍염처럼 돌변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폐하께서 저에게 뜻을 구하실 건 오직 마법 뿐입니다.”  “무슨 뜻이냐 물었다.”  “마법을 충분히 익혀, 제가 폐하에게 그 이상 뜻을 드릴 수 없다면, ‘또 다른 뜻’은 그때에나 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법을 충분히 익히면. 
 그 뒤에나 알려주겠다는 말. 
 쾅─! 
 소피엔은 책상을 두드렸다. 
 “······짐을 능멸하는가. 내 분명 뜻을 말하라 했다.”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살벌하게 이글거렸다. 내 속을 잡아 뜯으려는 듯 매서웠다. 
 “폐하.”  나는 황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황제에게서 번지는 위압을 다만 앉아서 감내했다. 
 “저는 데큘레인입니다.”  그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한 번 품은 뜻은, 그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습니다.”  미소 짓듯 건넨 말. 
 소피엔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도드라졌다. 
 * * *  째깍······ 째깍······  이프린은 시계를 보았다. 
 밤 10 시. 
 사태 발생 12 시간 째. 
 아니, 어쩌면 24 시간 째. 
 창문은 이미 잿가루에 뒤덮였다. 
 온통 어둠 뿐이기에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다. 
 쿵─! 쿵─! 쿵─! 
 오라는 구조는 오지도 않고. 
 저 문 두드리는 소리만 끊임이 없다. 
 쿵─! 쿵─! 쿵─! 
 “아 미치겠다 진짜 저 씨······”  쿵─! 쿵─! 쿵─! 
 문은 부서지지 않지만, 저 소리 자체가 극심한 스트레스다. 
 귀를 막아도 뚫고 들어오는 빌어먹을 울림.“이거 결계, 결계 발동 못 시켜? 씨발 진짜. 씨바아아아아아아알!”  벡크가 발작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이프린이 한숨처럼 대답했다. 
 “암호를 모르잖니. 교수만 아는데.”  “닥쳐 씨발!”  “니가 물어봐놓고 왜 욕질이니?”  쿵─! 쿵─! 쿵─! 
 또 다시. 
 소리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쿵─! 쿵─! 쿵─!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일까, 아니면 마탑을 점거한 잿가루가 심력을 빨아들이는 것일까. 
 미친 정신병에 돌아버릴 지경이다. 
 “후······.”  이프린은 품 속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이럴 때를 대비한 간식이었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강의실의 데뷰탄 전부가 이프린을 돌아보았다. 
 “뭐, 뭐야 그거?”  “이프린. 너 그거 어디서 났어.”  오래 시달렸던 그들의 눈이 굶주림으로 반들거렸다. 
 “응. 어차피 나눠먹으려고-”  “······잠깐. 그, 그거 내꺼잖아!”  돌연 유로잔이 손을 뻗어서 봉지를 움켜쥐었다. 
 “유로잔? 너, 너 갑자기 왜그러니?”  “내 돈으로 샀어!”  유로잔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아, 알았-”  “내가 샀다고!”  정신이 나가버린 듯한 그 모습에 이프린은 흠칫 놀랐다. 그런데 곧바로 화가 났다. 
 왜 나한테 지랄이야. 
 “내가 샀어!”  “알았으니까 좀 놔!”  “네가 놔!”  “유치하게 왜 그래 진짜. 이 상황에서 너 혼자 먹을 거니?”  “내가 샀다니까! 씨발 좀 내놓으라고! 이 돈도 없는 거지새끼야!”  뜨드득─! 
 비닐이 찢어지며 과자와 초콜렛과 음료수가 흘러내렸다. 
 툭, 툭, 툭······. 
 굴러 떨어지는 먹거리를 좇아, 마법사들의 눈동자도 데구르르 구른다.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려던 그 순간. 
 “멈춰.”  실비아가 그들을 제지했다. 
 “한심해. 고작 먹을 것 가지고.”  “······흐응~”  그때, 다소 불손한 비웃음이 끼어들었다. 
 루시아였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실비아 씨?”  루시아는 물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썩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실비아 씨처럼 고귀한 귀족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해결책을 낼 것인지. 
그게 궁금하네요~?”  실비아는 그런 루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이렇게 했겠지. 
 “귀족이 양보해.”  “······뭐라고요? 오히려 귀족이 먹고, 힘을 내서, 평민들을 이끌어가야-”  “언제나 집착하는 품위. 이럴 때나 챙겨.”  “······허.”  루시아를 비롯한 귀족 패거리는 일그러진 얼굴로 실비아를 노려보았다. 
 그 사이, 이프린이 과자들을 챙겨서 교탁 앞으로 나왔다. 
 “공평하게 분배할게.”  “뭔 분배야! 그거 내가 샀다니까!”  “아 넌 좀 닥쳐!”  이프린이 쏘아붙이자 유로잔도 움찔 떨었다. 
 “가만히 있어. 대신, 나도 안 먹을테니까. 난 이미 많이 먹-”  쿠구구궁───! 
 그때, 어마어마한 소리가 강의실 전체를 진동시켰다. 흡사 천둥이었다. 
 “뭐야!”  모두가 놀라 그 문을 보았다. 
 쿵───! 
 입구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A-Class 는 분명 가장 단단한 강의실일 터인데. 
 쿵───! 
 벽에서 불길한 부스러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겨, 결계. 이거 결계 펼쳐야 될 것같은데?”  콰아아아앙───! 
 당장이라도 박살날 듯한 굉음. 
 강의실 칠판들이 바닥에 흘러내렸다. 
 콰아아아아앙───! 
 “꺄아아아악!”  비명이 강의실을 메웠다. 흐느끼는 울음이 거슬렸다. 덤벼- 덤벼-! 겁에 질려 악다구니를 내지르는 놈들이 시끄러웠다. 
 그 지리멸렬한 난장판 속에서 이프린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콰아아아앙───! 
 그러나, 어느 순간. 
 이프린은 교탁 뒤의 칠판을 보았다. 
 “······.”  다른 칠판은 모조리 뜯겨나간 상황에서. 
 저 혼자만 굳건한 하나. 
 ──[ 명심할 것 네 가지 ]──  1. 결계의 핵심을 간파할 것. 
 2. 정면승부는 자제할 것. 
 3. 살아남을 것. 
 4. 이 칠판이 너희와 나의 유일한 연결고리임을 명심할 것. 
 ────────  “······이 칠판이 너희와 나의 유일한 연결고리임을 명심할 것.”  이 칠판이 너희와 나의 유일한 연결고리임을 명심할 것. 
 유일한 연결고리······? 
 “아!”  이프린이 뭔가를 깨달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그락 사그락······. 
 칠판에 어떤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쿵───! 
 점점 더 심해지는 진동. 
 문이 아니라 벽 전체를 부술 듯한 타격. 
 비명과 울음과 고함이 처절하게 뒤섞이는, 그토록 대단한 아수라장 속에서. 
 마침내 완성된 한 문장. 
 [ 데큘레인이다. 말하도록. ]  그 순간.이프린은 울 것만 같은 심정이 되었다. 
 [ 단, 이프린은 벌점이다. ]  실전. (3)  [ 단, 이프린은 벌점이다. ]  “······.”  이프린은 그 문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현재, 극도로 치명적인 이 사태도 잠시 잊혀졌다. 자신의 벌점 숫자가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14 점. 
 여기서 벌점을 1 점이라도 더 받으면 매일매일이 청소 당번이다. 그것도 가장 구린 화장실. 
 조금 더 쌓여서 25 점이 넘으면, 기숙관 장학금 혜택이 취소된다. 예상 손해금액은 자그마치 한 학기에 5 만······. 
 이프린은 급히 분필을 들었다. 
 [ 데큘레인 바보는 이프린이 안했어요. ]  답장은 금세 도착했다. 
 [ 누가 했지 ]  “······.”  머뭇머뭇, 고민고민하다가 분필을 움직였다. 
 [ 실비ㅇ ]  “무슨 일이야.”  실비아가 다가왔다. 이프린은 돌부리에 걸린 마차처럼 덜컹거렸다. 
 “어? 어, 아, 이, 이게!”  로브 소매로 후다닥 글자를 지우고 말했다. 
 “이 칠판이 데큘레인 교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단다! 이프린은 그렇게 생각해!”  “······?”  다행히 자신의 모략을 눈치채지 못한 듯, 실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칠판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 칠판은 또 왜?”  “이피, 왜 그래?”  뒤늦게 루시아와 줄리아도 다가왔다. 그 외의 마법사들은 칠판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 
 거대한 충격이 다시 강의실을 뒤흔들었다. 이프린은 급히 문자를 보냈다. 
 [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에요. 결계 암호를 몰라서 강의실이 부서지기 직전이에요. ]  그러자, 칠판에 술식이 작성되기 시작했다. 
 탁─ 타탁─ 탁타탁─  규칙적이고 반듯한 판서 소리. 
 원과 선으로 이루어진 암호 술식이었다. 
 ────! 
 굉연한 타격에 벽면이 우지끈거렸다. 데미지가 누적되어 서서히 널빤지처럼 우그러지고 있었다. 
 몇몇 마법사는 이미 혼절했고, 대다수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이프린과 실비아와 루시아는 칠판만을 바라보았다. 
 ────! 
 벌써 수십번째 울림. 
 그로 인해, 벽이 무너지기 직전. 
 [ 술식을 발동해라. ]  암호 술식이 완성되었다. 
 실비아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마력을 방사하여 강의실 바닥에 술식을 그렸다. 
 고오오오오오······. 
 바닥과 천장 전체가 마석으로 이루어진 A-Class 강의실. 그 마력원(魔力源 )인 수정구슬을 작동시키는 암호가 풀리며 결계가 개방되었다. 
 쿵······. 
 벽을 두드리던 소리가 잦아들고, 공간은 순식간에 뒤바뀐다. 
 평화로운 초원이 잿가루의 어둠을 집어삼킨다. 
 이게, 건축 비용만 천만엘네에 달한다는 A-Class 강의실의 위용인가. 
 “휴······.”  이프린은 철푸덕 주저앉아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  실비아도 옅은 숨을 내쉬고 칠판을 보았다. 데큘레인의 글자가 쓰여지고 있었다. 
 [ 패닉하지 말고 진정하되, 상황에 집중해라. 이는 수업이 아닌 실전이다. 
꿈이 아닌 현실이다. ]  그때 루시아가 말했다. 
 “구조는 언제 오냐고 물어봐.”  데큘레인은 묻기도 전에 답신했다. 
 [ 수백의 데뷰탄이 인질로 잡혀 있으니 안팎에서 진입은 불가능하다. ]  [ 가장 최선은 너희가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다. ]  “아니. 이게 무슨 무책임한 소리래?”  그 순간 실비아의 매서운 시선이 쇄도했다. 루시아는 흠칫 놀라 어깨를 으쓱였다. 
 [ 외부에서 층마다 다른 마력 농도를 분석한 결과, 이 사태의 근원은 ‘23 층’으로 추정된다. ]  “23 층에 누가 있지?”  이프린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흐응~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루시아가 대답했다. 
 “글쎄. 외부 초빙 교수 한 명 집무실이 거기에 있다는데, 잘은 몰라.”  ······. 
 잿가루에 잠식당한 23 층은 그 전체가 거대한 둥지처럼 돌변했다. 공간의 중심에는 커다란 고치가 맥동했고, 온 사방으로 뻗어나간 거미줄이 고치에 양분을 공급하는 듯했다. 
 ─들어라······. 
 루이나는 그 고치 안에서 바스러질듯 메마른 목소리를 들었다. 
 ─완전한 침식이 필요하다······. 
 완전한 침식이란, 잿가루에 지배당한 데뷰탄들의 뇌를 집어삼키는 것. 마력과 양분을 모조리 흡수할 수 있지만, 그들이 되살아날 가능성은 없다. 
 ─완전한 침식이 필요하다······. 
 “싫어.”  그렇기에 루이나는 거절했다. 잿가루의 기생을 허용하였음에도, 가장 근원적인 인격은 여전히 단단했다. 신념과 소신이 그녀의 본능을 붙들었다. 
 ─완전한 침식이 필요하다······. 
 루이나는 눈을 떴다. 검게 물든 동공이 고치의 피막을 둘러보았다. 세상은 어두웠고, 마력은 무한했다. 
 ─완전한 침식이······. 
 퍽! 
 루이나는 주먹으로 고치를 가격했다. 시끄러운 목소리는 멎었으나, 분노만큼은 더욱 거세게 치밀었다. 
 이지러진 의식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이름을 읊조렸다. 
 “데큘레인······.”  * * *  초콜렛 세 개. 음료수 큰 통 두 개. 오징어 두 개. 젤리 하나. 과자 다섯 봉지. 크림파이 두 통. 껌 한 통. 귤 다섯 개. 
 이프린은 풀밭의 탁자에 식량을 늘어놓았다. 
 5 인이 기준이라면 꽤 많은 양이겠으나······. 
 “우리 몇명이지?”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절반 이상이 자고 있었다. 
 “······.”  이해는 되었다. 무지막지하게 시달렸으니. 
 실비아가 대답했다. 
 “51 명.”  51 명. 
 그 숫자도 숫자지만, 더 큰 문제는 식사량이다. 몸에 마력을 품은 마법사의 기초 대사량은 건장한 농부에 필적하니. 
 “······후.”  하는 수 없이 이프린은 분필로 문자를 보냈다. 
 [ 이 안에서 오래는 못 버틸 것 같아요. 저희 식량이 너무 부족해요. 그래서 제가 지하 매점으로 갈 생각······. ]  답신은 금세 도착했다. 
 [ 강의실 뒤편의 도구함을 살펴라. ]  이프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결계로 인해 공간은 뒤바뀌었지만, 도구함을 비롯한 비품들은 여전했다.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오, 오오!”  냉동고기, 물, 통조림 등등 다수의 음식이 비치되어 있었다. 아껴 먹으면 이틀 쯤 버틸 양이었다. 
 이프린은 감탄하여 중얼거렸다. 
 “저 교수는 이걸 어떻게 알고······.”  “미리 대비해놓은 거겠지, 멍청아. 마탑은 언제든 표적이니까. 밥이나 해.”  흥! 루시아가 코웃음을 치며 이프린의 머리카락을 쳐냈다. 이프린은 입술을 깨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뭘 째려봐! 그럼 내가하리? 난 요리하는 법 모르거든?”  “······너는, 진짜 이런 상황에서도 정신 못차리는구나?”  빡돈 이프린이 소매를 걷은 그 순간이었다. 
 [ 우선은 쉬고 있어라. 바깥에서 방법을 강구 중이니. ][ 만약, 안에서 다툼이 발생한다면 목격담에 따라 추후 벌점을 내리지.]  “······.”  어떻게 알았대. 
 하는 수 없이, 이프린은 으르렁거리며 식사를 준비했다. 마법으로 불을 피웠고, 그 위에 고기를 구웠다. 수프를 끓였고, 탁자에 올렸다. 
 그 향긋한 냄새를 맡은 마법사들이 하나 둘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 * *  황궁에서 나오자마자 도착한 유크라인 저택의 창고. 
 [ 밥은 먹었구요. 지금 쉬고 있어요. ]  [ 괴물들이 전부 저희 동기들이라서 어떻게 처리를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23 층에는 외부 초빙 교수의 집무실이 있대요 ]  “······루이나.”  나는 선 채로 칠판을 노려보았다. 
 잿더미의 남작이 루이나에게 기생한 것은 물론 큰 문제이지만, 의문이기도 하다. 
 루이나는 분명 마력 등급이 ‘3’에 달하는 네임드일 터인데. 
 “맹약 탓인가.”  맹약이 마력 등급에 영향을 끼친 것인가? 
 아니면, 내게 시달리며 정신력이 약화된 탓인가? 
 뭐가 되었든 그저 나쁘기만 한 상황은 아니다. 마력 등급이 후달리는 ‘잿더미의 남작’은 루이나를 완전히 잠식할 수 없을 테니. 
 똑똑─  때마침 로이가 들어왔다. 
 “주인님. 다들 도착했습니다.”  “들여라.”  “예.”  로이는 내가 호출한 교수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들을 맞이하려던 나는, 그러나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수석교수님. 저희가 왔습니다.”  진지하게 뇌까리는 자들은 렐린과 시아레 등등의 종신교수. 정작 내가 지망한 켈로단을 비롯한 신진 교수들을 그 뒤에 쭈그리처럼 있었다. 
 “여기, 기사들이 채집한 잿가루입니다.”  렐린이 시약병에 담긴 잿가루를 내밀었다. 
 나는 이 잿가루를 분석·이해한 뒤 ‘맞춤마법’ 을 제작할 생각이다. 잿더미의 남작이 루이나에게 기생한 이상, 평범한 방법으로는 쉽지 않을 테니.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뒤이어 다수의 비품이 창고 안으로 밀려들었다. 현미경, 테이블, 마석, 관련 마법서, 마도구 등등······ 전부 부유섬에서 직접 공수한 물건들이었다. 
 나는 그 전부를 「염동」으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쿵쿵쿵─ 몇 번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마탑 연구실처럼 바뀌었다. 
 더럽고 비효율적인 환경은 못 참는 성격인지라. 
 “오오! 대단하십니다! 어떤 도움이 필요하시든 말씀만 하십시오!”  “ ······도움이 있으면 좋지.”  렐린의 말에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렐린도 엄숙하고 비장하게 심호흡을 했다. 
 “예. 마탑이 습격당한 초유의 사태. 저희는 이미 각오가 되어-”  “단.”  나는 교수진 뒤에서 눈만 깜빡이는 어린 교수들을 가리켰다. 
 “너희 셋만 남아라.”  안경잡이 켈로단, 조화 마법의 권위자 제니퍼, 중독자 출신 그랜트. 
 참고로 알렌은 마탑 안에 갇힌 듯하지만,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가도 좋소.”  “······예?”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쓰잘데기없는 정치질, 공명심으로 신진교수들 의욕까지 깎아먹게 할 바에야, 아예 배제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다. 
 “어, 그, 수석교수님? 이들은 아직 연차가 차지도 않아 많이 부족한-”  “음. 내가 말을 잘못한 듯하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렐린의 표정이 밝아졌다. 
 “종신교수분들은 마탑 근처에서 용태를 살펴주시오. 아주 중요한 일이니 부탁드리는 것이오. 혹여나 더 큰 일이 생긴다면, 그곳에서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  입만 떡 벌린 종신교수들을 나는 염동으로 밀어냈다. 
 그 뒤, 남은 인원을 말없이 둘러보았다. 
 “저, 저희는 뭘 하면 될까유?”  켈로단이 조심스레 물었다. 
 “뭘 하긴.”  나는 그들의 책상에 수십권의 마법서를 내려놓았다. 전부 ‘괴뢰화’와 관련된 서적들이었다. 
 쿵쿵쿵쿵─! 산처럼 쌓인 마법서를 보며 당황하는 그들에게 말했다. 
 “핵심만 정리해라.”  * * *  [ 현재 잿가루에 효율적인 마법을 구상 중이다. ]  “아이씨! 마법을 만든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야! 몇주가 걸린다는거야 그러면!”  루시아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 탓에 강의실 분위기도 다시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물어봐! 언제까디 기다려야-”  “시끄러, 도로시.”  “······!”  실비아가 읊조린 말에 루시아는 크게 놀랐다. 그녀는 심장이 멈춘 듯 숨을 참더니, 타다다다─ 실비아에게 달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이름. 분명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갑자기 또······. 
 “도로시? 도로시가 누구니? 도로시가 누군데?”  루시아의 등 뒤, 이프린이 순박하게 중얼거렸다. 루시아는 실비아에게 두 손 모아 비볐다. 
 ─제발 제발······. 
 사실 루시아는 가명이고, 원래 이름은 도로시다. 
 세상에, 도로시라니! 너무 촌스러운 이름이어서 아버지에게 조르고 졸라 겨우 바꾼 건데! 
 “네가 조용히하면.”  “그럼요. 그럼요.”  실비아는 루시아를 밀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우리는 이곳에서 데큘레인 교수님을 도울 거야.”  “도, 돕다니요? 네~ 좋아요. 저는 그렇게 할게요~”  도로시, 아니 루시아는 실비아가 무슨 발언을 하기도 전에 동의했고, 이프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이어 실비어가 꺼낸 말은 사뭇 섬뜩했다. 
 “데뷰탄 한 명을 잡아서 해부할거야.”  * * *  ······소피엔, 예카테르 아우구스 폰 지프레인은 묻는다. 
 네놈들이 매년 매해 죽어가는 기분을 아는가? 
 전대륙이 알지도 못하는 불치병에 말라 비틀어지며, 한치 앞길도 모를 어둠을 그저 손더듬어 나아가는 막막함을 아는가? 
 그 병마가 몸을 집어삼키는 통증을 아는가? 
 정녕, 갈비뼈가 물어뜯기고 폐막에 송곳을 쑤셔박는 듯한 괴로움이었다. 
 하물며, 죽을때마다 되살아나 똑같은 괴로움을 처음부터 다시 인내하는 심정을 아는가? 
 이토록 빌어먹을 저주를 아는가? 
 나는 여덟 살의 나이에 수십 번을 죽었다. 1 년을 기다려 죽은 날도 있었고,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모가지를 자른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 죽고 죽어도,  눈을 뜨면 언제나. 
 1 월 1 일. 
 여덟 살의 아이는 호사스러운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본다. 황궁의 정원은 영원히 봄이다. 
 청초한 봄을 바라보며 사고하는 뇌는 익어가는데, 몸은 여전히 유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이질적인 감각. 해양을 떠다니는 쓰레기처럼, 썩어도 썩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답보. 
 무릇 인간은 삶을 원하며 발악한다는데. 
 나는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오히려 죽음을 바랐다. 죽고 나서도 죽어 없어지길 간절히 바랐다. 
 회귀할때마다 즐거웠던 것은 내 동생의 얼굴 뿐이었던지라. 
 그 귀여웠던 감정도 결국에는 퇴색되었던지라. 
 녀석을 보면서 버티는 것도 한계였던지라. 
 이 곁에는 항상 기사의 쇠냄새, 환관의 단내, 장사치의 돈냄새, 의사의 소독내, 약초꾼의 풀냄새만 가득했던지라. 
 삶, 그따위 지옥같은 순회에 미련이 없었다. 
 정열이 없었다. 감정이 없었다. 
 있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 고통에 절여진 생애가 통째로 무뎌지길 바랐다. 
 아프지 않게 무너지길 빌었다. 
 이 대륙은 과연 무애(無涯)하다는데, 턱없이 비좁은 황궁과, 자라지 않는 몸에 갇힌 채 살아갔던 나는 얼마나 불행한가. 
 아니, 불행조차 모르게 되어버린 나는 얼마나 불구인가······. 
 ······그렇게 죽고 죽으며, 내 안의 모든 것을 죽여버린 나를,  데큘레인.네놈이 아는가? 
 모르겠지. 
 나 또한 그 이해를 바라지 않았기에, 오직 한 명 나를 이해하는 자에게 매일밤 기도하며 원망했다. 
 내게 이딴 운명과 굴레를 부여한, 어느 누구도 닿지 못할 드높은 하늘에서, 혹은 작은 토막의 볕도 들지 않는 땅끝의 지하에서, 내 권태를 지켜보며 키득거릴 ‘당신’에게. 
 나는 나의 다짐을 보냈다. 
 신은 죽었다. 
 내가, 죽일 것이다. 
 “나는 분명 어렸을 적 데큘레인을 만났을 터인데······ 그때는 그리 특별한 인물이 아니었다. 면상말고는 눈에 띄는 녀석도 아니었어.”  물론 소피엔은 그 옛날의 불치병을 극복했고, 끝끝내 살아남았다. 이후로도 수없는 암살과 독살 시도가 있었고, 실제로 몇 번은 죽었으나, 전부 죽으면서 물리쳤다. 
 참, 덕분에 이 빌어먹을 회귀가 ‘1 년 주기’임을 알게 되었지. 
 아홉살에 죽으면 아홉 살이 되는 해의 1 월 1 일, 열 살에 죽으면 열 살이 되는 해의 1 월 1 일부터, 이 인생은 다시 시작한다. 
 ─폐하께서는 마치, 본인에게 죽음이 없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데큘레인은 그렇게 말했다. 
 “죽음이 없는 것처럼······.”  그저 나의 무모함을 에둘러 표현한 문장이었나. 
 “아니다.”  놈이 풍겼던 늬앙스는 확연히 달랐고, 데큘레인은 또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세상을 조금 다르게 봅니다. 
 세상을 다르게 본다. 
 놈의 시선에는, 그 ‘다르게’의 범주에는, 자신도 포함되었는가. 
 “케이론.”  “예.”  소피엔은 케이론을 불렀다. 
 “유크라인도 ‘그날’에 참석한 가문 중 하나였을 터다.”  자신을 수십번이고 죽였던 불치병은 사실, 독살이었다. 그 내막을 알았을 때에는 얼마나 허탈했던지. 
 “예. 대륙의 백작가는 전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용의자는 아마, 자신이 후계자로 등극하던 그날 참석했던 가문 중 하나. 
 소피엔은 그 범인을 발색하여 죽일 생각이었다. 사지를 찢고 삼족을 몰살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3 년 쯤 골몰하다 시시한 마음이 들어 끊어버렸다. 
 어차피 그놈들은 한 번의 죽음이 끝이다. 
 놈을 죽이고,  내가 죽어 회귀한 다음에,  되살아난 놈을 또 죽여도,  놈은 한 번만 죽는다. 
 당한 것에 비하여, 또 들이는 노력에 비하여 얻는 것이 썩 하잘것 없었으니, 아니 이 세상 자체가 짓뭉개진 싸구려에 불과했으니, 나는 지는 셈 치고 신경을 끊었다. 
 복수조차 귀찮았다.“만약 데큘레인에게 궁금한 바가 있으시다면 꼼짝없이 마법을 배우셔야 하겠습니다.”  한데, 그리 말하는 케이론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있었다. 소피엔은 이를 악물었다. 
 “케이론. 너도 참 인간이 덜 되었다. 언제는 소문만 듣고 데큘레인에게 하자가 있으리라 단정짓더니.”  케이론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오판이었습니다. 데큘레인, 그자는 오늘 솔직했습니다. 사람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폐하께서는 아시잖습니까.”  소피엔은 책상 위를 보았다. 데큘레인이 두고 간 [ 유크라인 : 원소 마법의 이해 ]. 금박과 보석으로 장식된 그 양장본이 쪽지와 함께 놓여 있었다. 
 ─1 장까지는 예습을 부탁드립니다. 
 케이론이 말했다. 
 “어서 공부하시지요.”  “······케이론.”  소피엔은 케이론을 노려보았다. 케이론은 어떤 표정도 보이지 않은 채 대꾸했다. 
 “예.”  “좆—까.”  그리 뇌까리며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케이론은 말없이, 못본 척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 
 “침소에 들겠다. 오늘은 무슨 일도 내 방에 들이지 말라.”  “책은 가지고 가시지요.”  “꺼지라 했다.”  소피엔은 곧장 내실로 올라갔다. 궁중 마법사와 신하들이 무슨 ‘마탑 사태’를 말했지만 무시했다. 
 털썩─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것들을 정리했다. 
 그 생각들은 전부, 단 하나의 감정으로 귀결되었다. 
 ······호기심. 
 “마탑 사태라 했나······.”  문득, 어떤 신하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흥. 
 코웃음 친 소피엔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실전. (4)  유크라인 저택의 임시 연구실. 
 나는 현미경으로 잿가루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마력을 불어넣고 「염동」 으로 갈기갈기 찢는 등, 입자 단위로 「이해」하려했다. 
 “······교수님! 이거 보세유!”  그때 켈로단이 크게 외치며 칠판을 가리켰다. 
 탁─ 타다탁─ 타탁─  초록 표면에 정교한 보고서가 작성되고 있었다. 
 [ 실비아예요. 괴뢰화 당한 데뷰탄 한 명을 포획해서 잿가루와 분리했어요. 
그 연구 결과예요. ]  잿가루가 어떻게 데뷰탄을 잠식했는지. 그 괴뢰화의 과정은 어떠했는지. 
 실비아가 자신의 마법으로 직접 표본을 분석하고 전달한, 거의 해부도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내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분리.”  잿가루와 데뷰탄의 분리. 
 만약, 「결계」 의 술식에 잿가루의 지배를 무력화하는 회로를 추가한다면? 
 그 뒤, 해당 결계를 ‘마탑 안에서’ 구성한 뒤 완성시킨다면? 
 “가능하다.”  특정 마법에 회로를 이식하는, 일명 ‘마법 짜깁기’는 이미 수십번도 더 해본 일이다. 당장 내 「염동」부터가 그렇게 만들어진 마법이니. 
 “예? 뭐가 가능하단 말씀이세유?”  켈로단이 물었다. 
 “······나는 ‘잿가루를 분해하는 결계’를 제작하고, 데뷰탄들에게 전달할 것이다.”  “결계를유? 너무 오래 걸릴 텐데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새로운 마법이 아니기에 마력 소모는 심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 분해」는 쓰레기 처리장에서도 사용되는 대중적인 마법이니. 
 “충분히 가능하다.”  내가 구상하고, 실비아와 이프린의 재능이 더해진다면, 당연히 가능한 일이다. 
 “저 교수님······?”  말없이 칠판을 노려보며 고민했다. 술식을 필기할 필요도 없었다. 이 전부는 모두 내 머릿속에서 진행될 것이었다······. 
 “주목—!”  집중을 흐트러트리는 고함. 
 나는 살인충동을 느끼며 입구를 돌아보았다. 
 이름 모를 남녀 열한명이 일렬로 서있었다. 황궁의 기사들이었다. 
 “주목하시오!”  기사가 재차 외친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흥. 시끄럽다. 
 황제의 음색이었다. 마땅한 예를 취하려던 나는 흠칫 멈췄다. 
 도도하게 모습을 드러낸 생명체는 황제가 아니었다. 
 ─이 빙의 상태에서는 귀가 예민하다. 시끄럽게 떠들지마라. 
 붉은털이 푸짐했고, 긴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지만, 다리가 짧았다. 
 고급스러운 외모의 고양이였다. 
 “폐하?”  ─그래, 데큘레인. 짐이 배운 마법 중 하나다. 밖에 나가는 건 영 귀찮아서 말이지. 어이. 꼬리 건들지말라. 
 “죄송합니다!”  “······.”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물론, 빙의는 ‘조화 마법’의 일부다. 지금처럼 생명체의 입과 눈을 빌리는 「완전 빙의」는 상당히 어렵지만, 황제라면 당연히 익힐 수 있다. 
 애당초, 보아라.지금 황제의 품종부터 먼치킨(Munchkin)이 아니던가? 
 황제가 품은 마력의 질은 현재 2등급, 차후 각성 이벤트를 치르면 1등급에 달하며, 마법과 검술은 물론, 세상의 모든 기술에 통달할 재능을 지닌 천하의 귀재. 
 황제 소피엔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공식 설정문은─  ‘신에게 가장 근접한 인간’. 
 그 나태함은 이 세상에 축복일 수도 있고, 저주일 수도 있다. 
 ─허리를 숙여라. 
 “예!”  허리를 굽힌 기사의 등 위로 다리 짧은 고양이가 점프했다. 
 ─어! 
 첫 시도는 실패. 
 기사의 큰 몸에 비해 다리가 너무 짧은 탓이다. 
 ─이 녀석. 더 낮추거라. 
 “송구하옵니다!”  먼치킨은 아예 엎드린 기사의 등에 올랐다. 만족스러운 듯 제 꼬리로 인중을 만지지작거리며 헹- 하고 웃었다. 
 ─나를 받친 놈. 조금도 움직이지마라. 다리가 짧아서 위태롭다. 
 황제가 앞발로 기사를 찰싹 두드렸다. 
 “예!”  ─소리도 지르지 마라. 
 “······.”  “다들 비키거라!”  그때, 궁중의 마법사 ‘게오르’ 마저 등장했다. 황제 고양이가 행차했다는 소문이 익히 퍼진 모양이었다. 
 “폐하! 빙의 마법을 이토록 완벽하게 익히시다니······!”  ─귀찮은 녀석. 어떻게 알았지. 
 게오르는 붉은 고양이를 감격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금세 진지하게 얼굴을 굳혔다. 
 “데큘레인 수석교수. 지금부터는 어찌 할 생각이시오?”  “잿가루를 분해하는 결계 마법을 발명할 생각입니다.”  “······결계를 발명해?”  “예. 오직 ‘잿가루만을 분해하는 결계’입니다.”  “새로운 결계를 창안하겠다는 뜻이오?”  게오르가 의심스레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 결계를 구상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하루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무어라?”  “놀랄 필요 없는 단순한 작업입니다.”  “아니, 말을 좀 자세히······.”  설명 따위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 
 나는 친절하지만 완고하게 말했다. 
 “뭐가 되었든 통솔은 제가 합니다. 책임도 제가 지고.”  게오르도 혀를 차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소. 그런데, 결계를 창안한다면 술식 두루마리는? 여태 작성한 게 있을 것 아니오.”  게오르가 물었다. 
 나는 아무 말없이 게오르를 바라보았다. 
 “······.”  “······?”  그 침묵은 조금 오래도록 이어졌다.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는 것이었으나, 그럴 시간 조차도 아까웠다. 
 나는 그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전부, 제 머리속에 있습니다.”  ─무어라? 
 고양이가 물었다. 
 굳이 덧붙이자면. 
 “암산입니다.”  * * *  새벽 3 시인지, 오후 3 시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실비아와 아이들은 멍하니 칠판을 올려다보았다. 
 “······.”  “······.”  “······.”  칠판 전체를 가득 메운 광활한 술식. 
 데큘레인이 직접 발명한 마법진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 너희가 이 결계를 구동할 수 있겠나. ]  “가능해.”  넋 나간 모두를 대신하여 실비아가 대답했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루시아도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요. 불가능하지는 않네요. 이 술식을 그릴 수만 있다면.”  데큘레인의 결계 설명은 세세하고 친절하다. 데뷰탄이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결계의 마법진이 너무 크다는 것. 
 전체 넓이가 3 층 플로어를 통째로 뒤덮는 수준이다. 
 “마법의 중심을 이 강의실로 하고, 술식은 내가 밖으로 나가서 3 층에 그릴게. 마력은······ 여기 마법사 많으니까 할 수 있지?”  이프린은 그렇게 말하며 강의실 내부를 휘둘러보았다. 
 자신을 제외하고도 50 명. 50 인분의 마력을 모은다면 결계 발동도 어렵지 않다. 
 “그래도 촉매는 필요하지 않을까? 결계를 우리가 구성하려면······.”  줄리아의 우려에 실비아가 자신의 목걸이를 풀었다. 
 줄 전체가 마나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아티팩트. 마력 보관과 마법 증폭을 비롯한 여러 효과가 잔뜩 담긴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이걸 촉매로 써.”  “······괜찮겠어요?”  그 목걸이의 가치를 아는 루시아가 놀란듯 물었다. 실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흥······ 그렇게까지 하신다면.”  하아- 한숨 쉰 루시아도 손목의 팔찌를 풀었다. 
 “이 두 개면 충분할 거예요. 내 팔찌도 2 천만엘네는 할 가보(家寶)니까.”  “2 천, 2 천만······ 그래. 그러면 술식은 내가 그리는 걸로.”  이프린은 그렇게 말하면서 싹둑─ 제 긴 머리카락을 단숨에 잘랐다. 루시아가 경악했다. 
 “너 또라이니? 그걸 왜 잘라? 네 머리카락은 촉매로 못쓰거든? 뇌가 없어?”  “아이 씨 진짜! 누가 촉매로 쓴대니? 움직일때 거슬리잖아!”  “이피, 괜찮아. 무시해 무시.”  줄리아가 이프린을 말렸다. 그리고는 제멋대로 잘린 머리카락을 예쁘게 다듬어주었다. 
 “됐다~ 이제 예뻐.”  “······.”  이어서 실비아도 긴 머리카락을 틀어 올렸다. 말총처럼 묶은 장발이 새하얀 뒷목 뒤로 흘러내렸다. 
 “와. 실비아 씨. 아름다우십니다.”  멍하니 박수치는 유로잔 등등을 보며, 이프린은 순간 후회가 되었다. 
 나도 그냥 묶었으면 되는 거였잖아? 
 “이프린. 너는 빠르니까 술식을 그려. 나는 적들이 네게 가지 못하도록 시선을 끌게.”  “시선?”  “응. 그때 실전 수업처럼.”  실비아의 말에 이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칠판에 쓰여지는 짧은 문장이 그들을 위로했다. 
 [ 믿고 기다리지. ]믿고 기다리지. 
 그 말 한마디면 되었다. 
 “그래. 가자.”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강의실의 결계를 해체했다. 
 그 즉시 쿵──! 하는 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이프린과 실비아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잿가루에 집어삼킨 데뷰탄과, 잿더미로 이루어진 거대한 골렘. 
 실비아가 놈들의 시선을 끌었고, 이프린은 「자가 염동」을 발현하여 3 층 천장에 찰싹 달라붙었다. 
 촤아아아아─! 
 실비아는 골렘들의 몸체에 새하얀 마력을 물감처럼 흩뿌렸다. 그 흰색은 곧 초고열의 화염, 백열(白熱)으로 돌변했다. 
 골렘들의 몸이 순식간에 타올랐다. 
 동시에, 실비아는 노면을 새파랗게 뒤덮었다. 색은 곧 빙판이 되었고, 그 위의 데뷰탄 괴물들은 몇 걸음 움직이지도 못한 채 허우적거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  크라켄의 촉수처럼 두꺼운 잿가루가 실비아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붕 솟았다가 노면에 내리찍혔다. 
 “앗······.”  신음은 그게 끝이었다. 그녀는 아픔조차 내색 않고 곧바로 촉수를 지웠다. 
다만 내상을 입은 듯 배 안이 뜨거웠다. 
 “······.”  실비아는 비틀거리며 어두운 복도를 보았다. 
 또각─ 또각─  구둣굽의 소리. 
 ─쓸모없는 짓이다.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그 존재를, 실비아는 바라보았다. 
 외부 초빙 교수 루이나. 왕국 마탑의 수석교수였던 그녀는 잿가루와 동화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신기한 재주를 지녔구나. 질투가 나네. 
 그녀의 목소리는 기괴했다. 콱 막힌듯 매캐한 음색이었다. 
 ─질투가 나니까 죽여야지. 
 히죽- 그 입꼬리가 찢어질듯 귀 끝에 걸렸다. 그 아가리에서 잿가루가 쇄도했다. 
 거대한 칼날의 형상이었다. 
 콰아아아아······. 
 실비아는 일대를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재의 검은 그녀에게 닿지도 못한 채 삭제되었다. 
 ─이게······ 삼원색이구나. 
 그 현상을 목도한 루이나는 감탄스레 중얼거렸다. 
 ─현실을 개벽하고, 현상에 간섭하고, 삼라만상을 재창조하는, 기적에 준하는 마법. 
 중얼거리는 틈을 타, 실비아는 창살을 그려 그녀를 가뒀다. 
 ─이 세상 전체를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기원(起源 )······. 
 똑똑- 창살을 두드리고, 혀로 핥아보던 루이나는, 이내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찰처럼 일그러진 그 얼굴로 증오하듯 내뱉었다.─이 개좆같은! 세상은 이렇게나 불공평해! 말이 돼? 씨발 이게 말이 되냐고! 
 그 즉시 잿가루가 폭발했다. 창살은 파괴되었고, 실비아는 루이나의 주먹에 배를 얻어맞았다. 
 속력과 무게가 실린 정권. 
 “앗!”  그대로 튕겨나가 벽에 처박혔다. 순간 가슴이 턱 막혔다. 부서진 갈비뼈가 폐를 찌른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흥. 잡기술로 자꾸 내 재를 지우는데, 상관 없단다. 패죽일거니까. 
 너무나도 확연한 차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통증이 온몸을 달구고, 두려움에 몸이 떨린다. 
 “······.”  그럼에도, 실비아는 도망치지 않는다.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마력이 다할 때까지는 버텨낼 것이다. 
 “······지지않아.”  또한, 버티는 것이 곧 승리라면.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냈던 실비아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었다. 
 ······. 
 째깍─  째깍─  째깍─  “다들. 정신 차리고 기다려.”  루시아는 강의실에서 데뷰탄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맡았다. 49 명 전원은 이미 마력을 예열했으니, 결계가 완성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적막 속에 울리는 초침소리. 
 심장의 요동. 
 나뭇잎처럼 떨리는 손. 
 루시아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째깍─  째깍─  째깍─  데뷰탄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몇몇 유약한 심성들은 곧 기절이라도 할 듯 심각했다. 
 “정신줄 놓지마! 제대로 안 하면 다음 학기부터 마탑 생활 제대로 못할 줄 알아!”  루시아의 카랑카랑한 외침에 모두가 억지로 정신을 차렸다. 
 째···깍···. 
 째···깍···. 
 째······깍. 
 그때, 서서히 늘어지던 초침이 멎었다. 
 이프린이 보내는 신호였다. 
 “지금!”  루시아를 비롯한 데뷰탄 전원이 마력을 방출했다.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고오오오······. 
 그들의 마력은 일단 촉매에 응집되었다. 
 실비아의 목걸이와 루시아의 팔찌. 두 보물은 49 명 분의 마력을 받아들인 뒤, 결계의 술식에 마력을 전달했다. 
 푸른 마력이 섬전처럼 치달았다. 
 쏴아아아아아────  망막이 부서질 듯한 빛이었다. 
 강의실 내부가 초신성처럼 타올랐다. 
 온몸의 마력이 순식간에 소모되었고, 탈진한 데뷰탄은 하나 둘 쓰러졌다. 
 “끄으읏······.”  루시아는 어거지로 버티며 마력을 불어넣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툭─! 하고 뒷목이 끊어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으!”  눈앞이 흐려지며 몸이 비틀거렸다. 루시아는 결국 바닥에 엎어졌다. 그 상태로 결계의 중심지를 보았다. 
 찬란했던 빛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마치, 열이 다한 모닥불처럼. 
 ······저렇게 두면 안 되는데. 
 생각은 그리 하여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루시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안 되는데······  감길 듯 감기지 않는 그 사이로,  어떤 환영이 떠올랐다. 
 익숙한 사람이 매정한 표정으로 자신을 굽어보았다. 
 데큘레인의 조교수. 
 알렌의 얼굴. 
 바로 다음 순간, 촉매의 빛이 그 어느 광원보다 휘황하게 되살아났다. 
마력은 태양처럼 이글거리며 전방으로 쇄도했다. 
 이내, 술식이 완성되었고─  플로어 전체가 섬광에 휘감겼다. 
 결계의 발현이었다. 
 ······. 
 ‘엄마. 야옹이는 왜 죽어요? 내가 얼마나 좋아해줬는데. 아껴줬는데. 죽으면 안 되는 거 아녜요? 왜 좋아해줬는데 저를 배신해요?’  ‘원래, 생명은 다 그렇단다. 더 좋은 나라로 떠나가는거야. 배신이 아니라, 먼 나라에서 실비를 기다리는 거란다.’  ‘거짓말······ 그러면, 그러면 엄마는, 언제까지 실비아랑 같이 있을 거예요?’  ‘음~ 언제까지 있을까~?’  ‘으앙. 으아아앙. 아아앙.’  ‘미안 미안. 울지마렴~’  ‘흐아아앙. 흐아아아아아앙.’  ‘우리 실비가 원할 때까지 있어줄 테니까.’  ‘앗. 그러면, 그러면······.’  실비아는 언제나 꿈을 꾼다. 
 그녀가 바라는 풍경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있기에. 현재는 그저 훗날을 위한 발판에 불과하기에. 
 밤새도록 앉아 마법서를 공부하거나,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식단 전체를 통째로 갈아서 먹는다거나, 매주 부유섬에 올라 정보를 찾는다거나······. 
 그 전부를 그저 ‘원해서’한 게 아니다. 
 ‘재미있어서’ 한 게 아니다. 
 한순간에 자신의 곁을 떠난 엄마. 
 무지개의 나라로, 야옹이와 함께 떠나간 그날. 
 자신의 삶을 채색하던 당신이 사라진 그때부터, 마탑의 마법사가 된 지금까지. 
 세상은 여전히 무채색이다. 
 짓뭉개진 유화처럼, 두텁고 불투명하다. 
 실비아에게 현재란 오래 머물기 싫은 곳이다. 
 시곗바늘을 돌려서, 눈을 꾹 감았다 뜨면, 부디 먼 미래이길 바란 적이 많다. 
 자신이 조금 더 어른이 되어, 모든 것에 무뎌지고, 이 기억이 덜 아파지길. 
 대마법사가 되어 그 하늘에 오르면, 엄마가 나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엄마도 나를 자랑스러워할테니까. 
 그녀에게 오늘이란······. 
 먼 훗날의 소풍을 더 즐겁게하기 위한 준비 기간일 뿐이다. 
 휘이이이잉······.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밀폐된 마탑에서 몰아치는 그 기류 덕분에, 실비아는 결계가 발현되었음을 인지했다. 
 ─아~ 쓸데없는 짓을 벌였네. 이 녀석들. 
 그러나 자신의 마력은 다했고, 루이나는 아직 저편에 있었다. 
 실비아는 제 쇄골 언저리에 손을 얹었다. 언제나 자신을 감싸주던 어머니의 유품이 없었다. 
 ─너는 일단 죽어. 
 루이나가 잿더미를 방출했다. 실비아에게는 방어할 마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  실비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쇄도하던 잿더미는 그녀의 코앞에서 멈췄지만, 그 광경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비틀거리다 넘어졌다. 
 툭─  등 뒤에서 뭔가가 그녀를 지탱했다. 
 벽처럼 단단했다. 
 실비아는 그 묘한 의문에 눈만 가볍게 떴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너른 가슴이 자신을 받치고 있었다. 
 “······실비아.”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실비아는 그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고개를 비스듬이 올렸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 말아라. 나는 네가 넘어지도록 두지 않아.”미소 짓듯 건넨 말. 
 실비아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 하나 꿈틀거릴 수 없었다. 
 마력 탈진이었다. 
 “너는 항상 믿음에 보답하는구나. 이제부터는 교수의 책임이다.”  실비아는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희미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의 옷깃을 부여쥔 채 잠들었다. 
 “편히 쉬렴.”  정리. (1)  실비아는 곤히 잠들었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규칙적이었다. 
 나는 그녀를 안전한 곳에 눕혔다. 그 뒤 적을 바라보았다. 
 잿더미의 남작. 
 놈은 일그러진 눈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사실, 맥퀸의 몸에 기생한 것 자체가 나에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멍청한 것.”  ─······. 
 “그러게 왜 몸에 맞지도 않는 녀석을 집어삼켰지.”  놈은 불완전했다. 7 할 쯤은 지배한 듯했지만, 나머지 3 할은 여전히 루이나의 몫이었다. 너무 뛰어난 네임드를 집어삼킨 탓이었다. 
 “너도 알 테지. 그 육체로는 내게 도전할 수 없다.”  또한, 그녀의 몸 안에 똬리를 튼 맹약은 여전하다. 
 놈은 나에게 어떤 해악도 가할 수 없다. 
 “막다른 길이다, 기생충.”  ─······! 
 나는 비웃듯 말했다. 그 경멸에 놈은 발작했다. 새카만 동공을 포악하게 부라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나조차도 예상 못했던 승부수를 던졌다. 
 콰아아아아아───! 
 남작은 루이나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잿가루에 휩싸인 기류가 온 사방으로 피어올랐다. 놈은 거대한 폭풍처럼 나를 휘감았고, 그 안에서 괴이한 얼굴을 드러냈다. 
 ─그래. 멍청했다. 
 잿더미의 남작은 허공에서 말했다. 히죽이며 웃었다. 
 ─허나 너라면 다르지. 
 놈은 그대로 나에게 스며들었다. 몸 안으로 놈의 입자가 흡수되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찢어질 듯 난폭한 목소리가 치밀었다. 
 ─별 볼일 없는 놈이 감히! 내게 기생충이라? 
 꽤 불쾌한 감각이었다. 놈은 내 무의식을 건드렸고, 모래 알갱이처럼 파헤쳐진 여러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자약하게 대답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하지.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  ─너 따위는 별 볼일이 없다! 너 정도는 충분히 잠식할 수 있다! 
 지그시, 눈을 감는다. 
 과거의 기억, 온갖 어두운 악행, 암적인 감정. 데큘레인의 자아가 혈관을 질주한다. 
 ······그 전부를 인내하며.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 
 “네가 감당할 수 있겠나.”  ─······. 
 잿더미의 남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황하는 놈의 모습이 훤했다. 
 나는 다만 미소를 지었다. 
 “열패감, 질투, 시기, 분노, 울화, 증오······.”  어떤 환혹과 충동에도 휩쓸리지 않는 자아. 
 “그따위 부르짖음은 오히려 클래식처럼 단아하지.”  데큘레인은 결코, ‘스스로 무너지는’ 인물이 아니다. 
 ─······크아아아아! 
 잿더미의 남작은 내 안에서 발버둥을 쳤다. 빠져나가려는 몸부림이었다. 나는 그렇게 두지 않았다. 
 “남작. 말해라.”  열어───! 열어────! 
 “그 밑에는 누가 있었지.”  나는 그저 궁금했다. 
 잿더미의 남작이 의식의 지하에서 마주한 존재가 누구였는지  “김우진이었나. 아니면 데큘레인이었나.”  ─────! 
 남작의 비명은 서서히 짐승의 그것처럼 돌변했다. 데큘레인의 자아에 휩쓸리며 지리멸렬하게 으스러졌다. 
 “안에 누가 있든 눈여겨 놓아라.”  놈의 난리 발작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그저 호수처럼 태연하다. 
 “그 밑바닥이 네 무덤이니.”  대답은 없었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이었다. 
 잿더미의 남작은 그렇게 소멸되었다. 
 나에게 흡수된 것도 아니다. 동화된 것도 아니다. 
 놈은 그저, 이 안을 가득 채운 ‘에고’에 압사하였을 뿐이다. 
 “쯧. 등신같은 것.”  내가 아닌 존재는, 내 안에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데큘레인이다. 
 “······.”  나는 노면에 쓰러진 루이나를 보았다. 
 잿더미의 남작이 내버린 육체는 기진한 채 잠들어 있었다. 
 * * *  루이나는 악몽을 꾸었다. 
 누군가를 질시하고 미워하는 꿈이었다. 열등감과 패배감에 절어 괴물이 되어가는 꿈이었다. 죽을만큼 싫어했던 ‘그놈’처럼 되어가는 꿈이었다. 
 루이나에게도 언젠가, 자신의 재능에 부풀었던 나날이 있었다. 스스로 맥퀸을 부흥시키리라는 믿음으로 자랑스러웠던 때가 있었다. 
 마법계에 한 획을 그으리라는 열정. 제국의 존경을 받는 마법 교수가 되리라는 바람. 자신만의 학파를 창안하여 대륙에 등불을 밝히리라는 마음······. 
 ······그 모든 것이 한 남자에게 가로막혔다. 
 “······.”  루이나는 눈을 떴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부여잡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층 전체가 잿더미였다. 대화재가 발생한 듯 온통 거멓게 그을렸고, 바닥에 잿가루가 산재했다. 
 그 속에 명패 하나가 파묻혀 있었다. 
 [ 23 층 : 외부 초빙 교수 루이나 ]  “이······ 이럴······.”  그제서야, 그녀는 꿈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놈에게 지배당한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그 희미한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루이나 폰 슐로트 맥퀸.”  “!”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크게 놀란 루이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가문의 원수가 있었다. 
 “······데큘레인.”  그의 벽안이 자신을 응시했다. 그 어떤 흔들림도 없이 직선적인 시선이었다. 
 그는 말했다. 
 “이 풍경은 꿈이 아니다. 네가 ‘그놈’과 함께 벌인 짓이지.”  “······네. 알아요.”  루이나는 고개를 숙였다.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 알고 있어요······.”  이제, 심신이 녹초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문득 후회도 되었다. 
 처음부터 고개를 숙였어야 했을까. 
 대항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다른 마법사처럼 그에게 조아렸다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도망칠 생각 없어요. 자수할게요. 제 잘못이에요.”  이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 
 루이나는 힘없이 말하며 눈물을 닦았다. 
 “아니.”  그런데, 정작 데큘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심하다는 듯 그녀를 내려보았다. 
 “그건 계약사항이 아니지. 너는 약속을 어기는 게 취미인가.”  “······.”  “만약 그렇다면, 참 혐오스러운 기질이다.”  루이나는 울컥 화가 났다. 
 “그럼! 제가 도대체 뭘-”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해라.”  데큘레인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숨이 거칠어진 루이나에게, 차근차근 다음을 이었다. 
 “너는 수석교수가 되어라······ 아니.”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정정했다. 
 “수석교수가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이런 상황에서 무슨—”  “이 전부가 네 잘못인가.”  그러자 데큘레인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모멸에 가까운 조소였다. 다만 그 대상은 루이나가 아니었다. 
 “물론, 네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 그런데 말이다. 자신을 탓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아. 네가 울어도 눈물만 흐르지, 세상은 관심도 주지 않아. 
알아주지도 않아. 그저 잊혀질 뿐이다.”  “······”  “다만 네가 네 잘못이 아니라고 하면, 네 잘못이 아닌 것이다.”  루이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지.”  뚜벅, 뚜벅. 데큘레인이 자신에게로 걸어왔다. 
 그의 구두는 자신의 무릎에 닿을 듯한 발치에서 멈췄다. 
 “루이나.”  그가 이름을 불렀기에, 그녀는 올려다보았다. 
 “유크라인은 한 번 품은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형편없이 나자빠진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가 내 손을 잡는다면.”  그의 푸른 눈에 비치는 자신은 숱검댕이였다. 너무 초라했고,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데큘레인은 그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 또한 너를 놓지 않는다.”  그의 깨끗한 장갑이,  재로 범벅인 자신의 손을 원한다. 
 “그게 유크라인의 울타리다.”  쏴아아아아······. 
 잿더미가 걷힌 마탑의 창문. 
 하늘이 드러난 그 너머에서 서광이 밀려들었다. 찬연한 빛무리가 어둠을 불태웠다. 
 “······.”  루이나는 침묵했다. 
 아니, 멍하니 그의 손을 붙잡았다. 본능이 움직였다. 
 “······.”  데큘레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으켜세워진 루이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돌아선 그는 잿더미의 한복판을 거닐었다. 
 바스락거리며 짓밟히고, 안개처럼 번지는 잿가루. 
 바람에 뒤섞여 매스껍게 흩날리는 입자. 
 그 속에서도 그는 더러워지지 않았다. 그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걸었다. 
 그런 그를 지켜보며, 루이나는 작은 의문을 떠올렸다. 
 저 남자의 등은 언제 저렇게 넓어졌을까. 
 그동안 운동이라도 열심히 한 걸까. 
 “참······.”  ······그러는 자신이 기가 막혀서, 루이나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 * *마탑이 웬 잿가루에 점거당한, 일명 ‘잿더미 테러’가 발생한 다음날. 
 “하하하. 그렇습니다. 암요 암요.”  대대로 법무국과 내무국의 국장을 배출하고, 조부께서는 장관도 역임하는 등, 자타공인 펜대로 출세한 명문 ‘제퍼슨’ 가문의 오늘은 갑작스런 접대로 바쁘다. 
 “역시 교수님이십니다~”  한창 상승세를 구가하는 대륙의 거물이 방문한 탓이다. 
 “아 당연하지요. 저는 이 보고서가 거짓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루이나 공도 뭐, 심성이 착한 분이시니까. 아 참, 이 친구는 데린 자작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현재 법무국에서 부국장을 역임 중인 ‘로페즈 데린’입니다.”  “능력이 출중한 친구입니다. 또 이 친구가 교수님 팬이라기에 제가 실례인 것은 알지만 소개를······ 아이고~ 뭐 이런 걸다~!”  제퍼슨과 로페즈, 두 사람은 교수가 준비한 작은 선물을 받아들인다. 
 명백히 성의의 표시. 
 법에 저촉될 것은 없다. 
 흐뭇하게 웃은 두 사람은 곧 그의 본론을 듣는다. 
 ······. 
 교수와의 만남을 끝낸 법무 부국장 로페즈의 저택.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아, 자네 잘 지냈나? 다름이 아니라. 내가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단 말이지. 
조심히, 조용히 오게”  부국장 로페즈는 수정구슬로 그의 가벼운 일을 도울 몇몇 사람을 부른다. 
그리고는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다. 
 “하하하. 내 이렇게 교수님과 인연을 트다니. 국장 자리가 머지 않았다는 신의 계시인가······ 요즘은 운이 참 좋구나!”  ······. 
 “영광입니다, 교수님. 법무국 인사과장 ‘게론’입니다.”  “내무국 부국장 ‘앨버그’입니다.”  “하하. 다들 앉게. 우리 교수님 불편해하시네.”  로페즈가 주선한 자리. 
 게론과 앨버그는 허리를 깊이 숙인 뒤 자리에 앉는다. 그런 그들에게, 이름 모를 교수는 보고서 한 장을 건넬 뿐이다. 
 “음. 이것이군요. 예. 당연합니다. 이미 뭐, 소문이 파다하니. 재판이 열리면, 아무런 문제 없이 끝날 것입니다.”  그런데 왜인지, 교수는 재판이 열리는 것조차 탐탁잖은 듯하다. 
 게론과 앨버그가 급히 정정했다. 
 “······그렇습니다만! 저희 역시 교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길 원합니다. 
다만 문제가 몇 개 있긴 한데. 저희가 치안국과 알아서 얘기를 나누겠습니다!”  ······. 
 앨버그, 게론, 로페즈, 제퍼슨. 
 관료 4 인방은 치안국 부국장 ‘릴리아 프리미엔’의 집무실을 찾아간다. 
 “프리미엔 부국장. 내 오늘 할 말이 있어 찾아왔네.”  “당신들과 할 얘기는 없으니 꺼지시지.”  “어허. 부국장! 누구의 제안인지는 듣고 답하게.”  프리미엔은 뭐 이런 버러지들이- 싶은 표정이지만, 그들의 말을 듣자 안색이 조금 바뀐다. 
 “만약 거절한다면, 그 교수 님께서 당신을 직접 찾아올 걸세.”  ‘그 교수’는 프리미엔으로서도 상대하기 뻑뻑한 사람이고, 보답해야 할 빚도 조금은 있다. 
 고민하던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 
 마침내 오늘. 
 모든 준비를 끝냈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암초를 만났다. 제퍼슨은 수정구슬로 조심조심 통화를 이었다. 
 “예. 죄송합니다.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요즘 쓸데 없이 정의감을 불태우는 관리가 있기에······.”  ······. 
 “법무국 출신입니다. 능력은 있는데 참 건방진 녀석이지요. 이 보고서도 확실한 조사가 필요하다나 뭐라나······.”  ······. 
 “직접 나서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가 금방······ 아, 예. 죄송합니다. 그 녀석의 이름은 조셉입니다.”  ······  조셉은 법원의 상급 관리였다. 
 그는 무작위 귀족의 자식으로 거의 평민에 가까운 신분이었만, 특유의 총명함으로 법무고시를 최연소 패스하고 법원의 관리가 되었다. 
 다만, 그 능력에 비해 인맥이 부실하여 안부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도 없지만.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오늘 그의 작은 집에 대학교수가 방문했다. 평범한 교수가 아니었고, 실제로 만나니 대단한 위압이었다. 
 “앉지.”  그는 마치 자신이 집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했다. 그 상전 태도를 조셉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는 조셉이 의자에 앉자마자 보고서를 내밀었다. 
 “마탑 잿더미 사태의 보고서다.”  “예.”  조셉은 빠른 눈으로 그 내용을 훑었다. 
 “이미 확인한 내용입니다. 그래도, 용의자 루이나의 귀책이 전혀 없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더욱 공정한 분석이······.”  “렌.”  교수가 그의 등 뒤에 기립한 수행원에게 손짓했다. 렌은 한 걸음에 다가와 기다란 상자 하나를 나무 책상에 올렸다. 
 허름한 책상의 흠집을, 고급스러운 상자가 가린다. 
 조셉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뇌물입니까?”  “······.”  순간 교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숨을 들이마시더니 다리를 꼬았다. 그 일련의 몸짓이 조셉을 강하게 압박했다. 
 “자네는 언사가 꽤 무례하군.”  “솔직하다는 말은 많이 들어-”  “직설적인 것과 예의 없는 것은 구분해야지. 안 그런가.”  “······.”  조셉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동물적인 본능이었다. 
 본디 법원에서도 강직하다 소문이 난 그였건만, 이 교수의 눈은 이상하게 마주하기 힘들었다. 
 “죄송합니다. 허나 뇌물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기회다.”  “······기회?”  “그렇지. 내 사람이 될 기회.”  교수가 보고서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이 보고서를 굳이 들여다보려는 자네의 마음가짐이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아닙니다. 더 확실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현장 조사도 공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가장 중요한 루이나 교수의 심문도 이루어지지-”  “그리 공정하려면 말이다.”  교수가 그의 말을 잘라냈다. 
 “자네는 가족을 두어서는 안 되었어.”  조셉의 눈이 커졌다. 교수는 표정 없이 의자에 몸을 묻었다. 비스듬이 뒤틀린 시선이 조셉을 노려보았다. 
 “아들이 여섯살이라지.”  “······.”  “어떻게, 사랑은 재미가 있나.”  조셉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너처럼 공정한 사람은, 자네의 아이와, 아내와, 타인을 똑같이 사랑하나?”  무심코, 조셉은 안방의 문을 보았다.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는 방. 
 교수가 말했다.“충분히 안다. 자네는 다른 썩어빠진 관리와는 다르고 정의롭지. ”  “······.”  “그러니, 다시 말하지. 이는 뇌물이 아닌 기회다. ”  교수의 시선이 조셉을 위아래로 훑었다. 꽉 움켜쥔 두 주먹이 눈에 띄었다. 
 “자네도 알 것이다. 아래부터 시작되는 정의는 아무런 쓸모도 없음을.”  “······.”  조셉의 입은 굳게 닫혔다. 다만 그 얼굴의 주름에서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에 또 보지.”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타이밍을 살핀 아내와 아이가 뒤따라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교수는 그저 웃으며 저택 밖으로 나갔다. 
 그 뒤, 밖에서 대기 중인 자동차에 올랐다. 
 “받았나.”  데큘레인은 잠시 기다리다가 렌에게 물었다. 
 렌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렌의 오감은 조셉의 집안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예. 상자를 열었고, 아내 분도 그 내용물을 보았습니다.”  “받겠군.”  어차피 저런 성격의 사람은 돈 따위는 주어도 받지 않는다. 아니, 받는다 하여도 쓰지를 않는다. 
 그렇기에, 그가 건넨 선물은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 아카데미 입학권 ]  [ 아카데미 평생 장학금 ]  “예. 지금 둘이 싸우고는 있습니다만······.”  ─자기는 제국 아카데미 입학이 어떤 건지 몰라요?! 돈이 있어도 안 되는 곳이잖아요! 
 ─생각 좀 하게 두라니까! 
 ─무슨 생각이 필요한 건데요! 그곳에서 우리 아이도······  “시간문제 일듯합니다.”  “그래.”  데큘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아니라면, 또 패물이 아니라면, 아무리 강직한 사람이라도 의외로 쉽게 받아들인다. 그게 아이와 관련된 ‘특권’이라면 더더욱. 
 어르고 달래는 것은 귀찮고, 또 효과가 확실하지도 않기에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사건을 무마하는 내 방식이고, 또한 인맥을 취하는 방법이다. 
 조셉, 저 남자는 우연찮게 발견한 보물이다. 
 그가 발하는 「대부호 재력가」의 광채는 꽤나 특별했으니. 
 “이제 가지.”  “예.”  차량은 렌의 운전에 따라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출발했다. 
 * * *  ······걱정했던 공판이나 재판 따위는 열리지도 않았다. 
 법무국과 내무국과 치안국은 데큘레인과 그 휘하 교수, 데뷰탄이 작성한 보고서에 [ 조사 완료 ]라는 인장을 찍었고, 관련 증인도 전부 루이나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이 사건은 오롯이 ‘잿더미의 남작’이라는 기생 영혼의 소행으로 종결되었다. 
 ─[ 황실 교습 마법사 탈락 ]─  마탑에서의 사건은 이해하는 바이나, 황제 교습 마법사의 소양 중에는 무결한 정신력 또한 포함되어 있는 바. 루이나 폰 슐로트 맥퀸은 황제 교습 마법사의 자리에서 박탈한다······  ────  따라서, 이 사건의 대가는 황실 교습 마법사 탈락과, 자신 때문에 고생한 데뷰탄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는 것 뿐. 
 물론, 사망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 주효했다. 
 “······허.”  루이나는 쓰게 웃으며 자신의 집무실을 올려다보았다. 
 [ 47 층 : 루이나 집무실 ]  어쩐 일인지 자신은 잿더미의 남작과 끝까지 싸우다 결국에는 삼켜진, 자신의 할 일을 다한 교수가 되었고, 집무실도 25 층이나 상승했다. 
 “이게 정치구나.”  아마 데큘레인의 공작 덕분이겠지. 
 과연, 그 어마어마함은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흐응······.”  루이나는 47 층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23 층에 비해 훨씬 넓고 깔끔한 집무실이었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만년필을 쥐었다. 우선 황실의 서한에 답장하는 일이 필수였다. 
 “······.”  그렇게 문장을 고민하다가 문득. 
 “5 년.”5 년이라는 시간이 떠올랐다. 
 “왜일까.”  계약서를 작성할 때부터 의문스러웠던 조항. 
 5 년. 
 왜 1 년도 아니고, 10 년도 아니고, 평생도 아니고, 하필 5 년 일까. 
 “······1 주 동안 칩거했었지.”  루이나는 종이에 필기까지 하며 골몰했다. 당시, 데큘레인의 칩거는 꽤 유별난 사건이었기에 루이나도 알고 있었다. 
 “여러 소문에 따르면, 그 이후부터 사람이 달라졌다는데.”  1 주 동안 칩거. 
 그 순간을 기점으로 데큘레인은 바뀌었다. 
 그렇다면, 그 1 주 동안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나? 
 아니, 굳이 충격적이지 않더라도 궁금하다. 
 도대체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그 강박적인 데큘레인이, 1 주일 동안 모든 일정을 무시한 채 칩거했는지. 
 ······그때. 
 루이나의 뇌리에 섬광처럼 스치는 한 단어. 
 “설마······?”  [ 시한부? ]  종이에 휘갈긴 그 단어를 만년필로 툭툭 건드렸다. 
 불치병에 시한부라면 5 년이라는 기간도 납득할만하다. 사람이 갑자기 바뀐 것에도 얼마간 개연성은 있다. 
 자신의 죽음이 멀지 않았더라면 누구나······. 
 “······에이 설마. 말도 안 되지.”  루이나는 애써 웃으며 서랍에 그 종이를 넣었다. 
 < 정리. (2) >  ······소복소복. 
 눈이 가라앉는다. 
 새하얀 가루가 흔들리며 지상에 쌓인다. 
 하나 둘, 금세 사라질 눈의 결정들이 많이 많이 모여 두터운 층을 이룬다. 
 땅을 뒤덮는다. 
 하얗게 물들인다. 
 ······소복소복. 
 내리는 눈은 그치지 않고, 지상에 닿은 눈은 녹지 않고, 겨울은 영원하지만,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아니, 의심하고 있다. 
 먼 훗날에는 이 차가움도 녹을 수 있을까. 
 기다리고 기다리면, 버티고 버티면. 
 눈이 물이 되고, 물이 땅을 적시며, 언젠가는 싹을 틔울 수 있을까. 
 ······나에게도. 
 봄이 올까. 
 율리의 삶은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대가로 삶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 세상에 태어나며 저지른 원죄였다. 
 ─와아······. 
 프하이르덴의 내성은 항상 눈이 내리는 겨울. 조그마한 아이는 새하얀 연무장에서 기사의 검무를 멍하니 지켜본다. 
 수많은 기사가 검을 휘두르며 땀을 흘리지만, 그 중에서도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가장 멋지다. 자랑스럽다. 아름답다. 
 멀리에서 보면 연극을 하는 것 같고, 가까이서 보면 춤을 추는 것 같으니. 
 ─······. 
 그때, 대련을 마친 오라버니가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에게서 흐르는 땀방울은 어느새 보석처럼 얼어붙었다. 
 ─아, 저어······ 그게에······. 
 율리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자이트는 율리에게 먼저 말을 거는 적이 없었다. 가문의 사람 모두가 그러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말하면서도, 언제나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 
 ─율리. 
 그런데, 그날만큼은 예외였다. 자이트는 왜인지 쓴웃음으로 율리를 바라보았다. 
 어린 율리는 크게 뜬 눈으로 자이트를 마주했다. 
 ─네, 네, 네에, 네에 오라버니. 
 ─너도, 검을 쥐어볼테냐. 
 ─······네엥? 
 율리의 마음 속, 기사라는 꿈은 그때부터 조각되었다. 
 기사는 주군을 섬긴다. 한 자루의 검이 되어 적을 베고, 본인의 신념을 간직한 채 신민과 국가를 수호한다. 
 그 안에 ‘자신’은 없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 가족과 가문에게서 어머니를 앗아간 자신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꿈이었다. 
 조금 먼, 옛날의 꿈이었다. 
 “······.”  율리는 눈을 떴다. 새벽 하늘은 어두웠고, 심장에 욱신거리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똑똑─  시종이 방문을 노크했다. 율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뻐근한 고통이 온몸으로 번졌지만, 조금만 참으면 사라질 것이었다. 
 “따뜻한 물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욕실에 들어간 율리는 멍하니 거울을 보았다. 그 표면에 맺히는 자신을 보며 그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1 년 내에 수호기사가 되지 못한다면, 어거지로라도 결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 곳에 머물러있지 말아라. 바보처럼 있지 말아라. 내가 마음이 바뀌어 너를 놓아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이제,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다. 
 * * *  [ 사이드 퀘스트 : 악마 정화 지원 ]  ◆ 상점 화폐 +2  한편, 제국 서부 하데카인 근처의 드팔렘 숲. 
 요즘 마기 농도가 짙어지고, 가고일 따위의 악마 관련 괴수가 출몰하는 등, 정화가 필요한 그 지역에 나는 와 있다. 
 성당에서 부탁하고 마탑에서 받아들인 정화 퀘스트다.“······흠.”  처음에는 마수고 뭐고 죄다 박살내며 술술 전진했지만, 어느 순간. 
 나는 사망변수로 점철된 지역을 발견했다. 
 일대 전체가 사망변수, 여태 보았던 그 어느 무엇보다 선명한 적색이었다. 
 “······.”  직감이 말한다. 저 안에 진입하면 무조건 죽는다고. 그저 평범하게 위험한 수준이 아니라고. 
 「악당의 운명」은 내 기량에 따라 작동한다. 
 일례로, 고작 고블린 몇 마리가 준비한 함정 따위는 특성의 레이더에 걸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숲은 다르다. 
 저편에는 내가 극복할 수 없는 적이 도사리고 있다. 
 “흐음······.”  물론, 상대가 악마라면 나는 강해진다. 
 그러나 마기의 농도가 이리 얄팍해서는 한계가 있다. 이 숲은 ‘크레바스 협곡’이나 악마의 결계처럼 마기가 진득하지 않으니. 
 “무슨 일이십니까, 교수님.”  내 뒤를 따르던 금발의 사제 ‘테르페’가 물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적당한 핑계를 찾았다. 
 쫄지 않은 것처럼 도망치는 방법······. 
 “돌아가지.”  별 말없이 발길을 되돌렸다. 테르페는 당황한 듯했다. 
 “아직 근원지에는 닿지도 않았습니다만.”  “탐색과 분석은 이 정도면 충분해. 나머지는 다음에 하지. 매사에 치밀한 준비가 있어야 화를 입지 않는다.”  나는 태연히 걸으면서 말했다. 
 “하고자 한다면 금세 끝낼 수 있으나, 너희에게도 악마를 퇴치하는 ‘신중한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함이다.”  테르페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30 분쯤 걸어 숲을 나왔다. 
 숲의 입구에는 예리엘과 가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리엘의 빵빵한 볼때기에 심통이 가득했다. 
 “일은 끝났나요?”  예리엘이 물었다. 테르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탐색이었고, 차후를 도모하기로 했습니다.”  그 말에 예리엘은 고개를 홱 돌려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무시하고 차에 올랐다. 
 테르페가 목례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예리엘 님.”  “네. 사제님도 수고요.”  대충 대답한 예리엘도 얼른 탔다. 녀석은 시트에 앉자마자 빽 소리를 내질렀다. 
 “왜! 왜 나는 안 된다는 건데?!”  “시끄럽다.”  “어차피 끝까지 가지도 않았다면서! 위험하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예리엘은, 유크라인의 장녀이자 하데카인의 대리 영주로서, 오늘의 ‘정화 작업’에 자신도 동행하길 원했다. 
 그러나, 나는 녀석을 전장에 둘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너는 방해다.”  “나도 유크라인이거든? 악마가 적이라면 충분히 활약할 수 있어!”  ······그렇지 않다. 
 예리엘, 너는 유크라인이 아니니까. 
 “멍청하게 굴지 마라. 책임자는 앞선에 나서지 않아. 또한 앞으로도, 혹시나 네가 전장에 참여한다거나 하면, ‘약속’은 없었던 걸로 할 테니 그리 알아라.”  “······.”  그러자 예리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디까지가 진짜야?”  녀석은 이를 갈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여태까지는 오라비인 척 잘 행세하더니, 오늘은 가신들 앞에서 그렇게 면박을 줘? 나 그 사람들 얼굴 어떻게 보라고?”  오늘 예리엘은 내가 보기에도 잔뜩 기대했다. 가신들에게 자신의 정통성도 주장할 겸 여러 장비도 주렁주렁 매달고 왔다. 
 당장 유크라인의 영토 근처에서 발생한 일이기도 했으니, 나름 책임감 또한 있었겠지. 
 나는 그런 예리엘을 무시했다. 따라가겠다는 예리엘을 거절했고, 속된 말로, 가신들 앞에서 쪽을 줬다. 
 “예리엘.”  “왜!”  “예리엘.”  “······왜!”  나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예리엘.”  “아 진짜 왜! ······요.”  예리엘이 입술을 삐죽였다. 녀석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다만, 이번만큼은 나도 물러설 수 없었다. 
 “애처럼 고집부리지 말아라.”  모두, 예리엘 너를 위한 일이니······. 
 “떼쓰지도 말아라. 이 정도는 말 안해도 알아야지.”  “······.”  “언제까지 어리게 굴 생각이냐.”  예리엘도 유크라인의 전통은 알 것이다. 
 답지 않게 고집을 부린 이유도 아마, 자신에게 그 전통이 이어졌음을 가신들에게 증명하기 위함이었을 터. 
 “네 지위에 맞게 행동해라. 마땅한 기품과 격조를 보여라.”  예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창틀에 몸을 기대었다. 머리카락에 가려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울듯했다. 
 작은 어깨가 흔들렸고, 숨소리가 거칠었다. 
 “부유섬으로 가지. 오늘은 할 일이 있으니.”  나는 예리엘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 
 “갔어? 갔다고?”  데큘레인이 훌훌 떠나가버린 드팔렘 숲. 기다란 침엽수림 사이에서, 숨 죽인 채 단검을 갈던 ‘게렉’이 물었다. 
 기다란 흑발을 뒤로 묶어내린 그는 「다중인격자」라는 이명에 어울리지 않는 미남이었다. 
 “갔다고 진짜?”  “그래. 갔다.”  그의 물음에 알 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렉은 재차 물었다. 
 “갔다고? 진짜로?”  “그래.”  “진짜로?!”  “갔다니까 시발아.”  “아~ 이럴 수가~!”  욕을 섞어 말하니 그제서야 납득한다. 
 이렇듯, 잿더미 놈들은 저마다 나사가 하나씩 풀려있다. 
 “설마 눈치챈 건가?”  “그래 병신아. 네가 그리 살기를 풍기는데.”  “데큘레인 그놈 겁쟁이였네. 오라고 한건데!”  알 로스는 그저 피식 웃었다. 
 데큘레인이 왜 게렉을 피했는지, 사실 그녀는 알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그의 음성이 재생되었다. 
 ‘너는 똥을 두려워서 피하나. 더러우니 피할 뿐이다.’  딱 그런 생각 아니었을까. 
 “아~ 짜증나네 이거. 아아아~”  게렉은 앓는 소리를 내며 나무 표면에 뒤통수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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