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10

“뭐지?”  그 틈 사이로 이프린은 고개를 들이 밀었다. 
 웬 단발의 여자가 데큘레인의 집무실을 뒤적이고 있었다. 
 이프린은 소리부터 내질렀다. 
 “누구야!”  “꺄아아악! 잘못했어요! 아무 짓도 안했어요!”  여자는 비명을 내지르며 우당탕탕탕 넘어졌고, 너무 놀라 눈물까지 고인 눈으로 이프린 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그러나 곧 표독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너네는 누구-”  콩─! 때마침 서랍 위에서 떨어진 마법서가 그녀의 머리통을 두드렸다. 
 “앙!”  그녀는 정수리를 부여잡은 채 끙끙 앓았다. 그러나 그 고통은 이내 분노가 되었고, 여자는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아이 씨댕 진짜, 야!”  이프린과 부원들은 흠칫 놀라 물러났다. 
 “당신, 당신 누구야! 다가오지마! 신고할거야!”  “누구긴! 이 집무실 주인 동생이다, 왜!”  “······예? 동생이요?”  “그래! 깜짝 놀랐잖아! 그러는 니들은 누구야! 팍 씨!”  예리엘의 손찌검 시늉에 모두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이프린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그······. 죄송합니다. 문이 열리길래.”  “됐고. 나도 따지면 너네 까마득한 선배거든? 무슨 일로 찾아왔어? 아니, 너 이름이 뭐야?”  예리엘은 아직도 정수리가 아픈지 긁적거리면서 이프린을 가리켰다. 
 “그게······.”  “얼른 대답해라? 언니 짜증나게 하지 말고. 나 아직도 아프거든? 
배상청구하기 전에 얼른!”  “······이프린입니다.”  “······뭐?”  그 순간 예리엘의 얼굴이 굳었다. 
 “이프린 루나?”  “예.”  “······.”  그러자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 되었다. 
 얼마 뒤, 예리엘은 이전의 화를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예리엘. 너네는, 무슨 일로 찾아왔니?”  “네? 아. 그게······.”  그때였다. 
 띵─! 
 열린 문 바깥에서, 엘리베이터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리엘은 눈을 크게 치뜨더니 곧장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숨어!”“예? 왜요? 왜 숨어요? 동생 분이시라면서요.”  “아니, 그게, 나도 말 안하고 몰래 왔단 말야! 그러니까, 아 씨! 왤캐 일찍왔대 저 사람은.”  사실 예리엘은 ‘데큘레인이 루이나를 납치했다’는 그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집무실에 잠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루이나가 실종되었다면 데큘레인 밖에는 그 주동자가 없으니. 의심하기 싫어도 의심하게 된다는 거다. 
 그리고, 정말 상상하는 것도 괴롭지만, 만약 정말 데큘레인의 소행이 맞다면 그 대책을 강구해야 하기도 하고······. 
 “그, 저희는 그냥 나가면-”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얼른! 얼른 숨어!”  예리엘은 데큘레인의 집무 책상 밑에 숨었다. 아랫 공간이 상당히 넓은 그곳은 의외로 들키지 않을만한 장소였다. 
 부원들도 그런 예리엘을 부러워하며 저마다 숨을 곳을 찾았다. 
 일상. (2)  예리엘은 성공적으로 숨었지만, 이프린과 부원들에게는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그들은 우왕좌왕 왔다갔다하다 어설프게 숨었다. 
 한명은 문 뒤에 숨었고, 한 명은 옷걸이 뒤에 숨었으며, 이프린은 부우웅─ 떠올라 불가사리처럼 천장에 달라붙었다. 
 「염동」의 자가활용이었다. 
 벌컥—  데큘레인이 문을 열었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외투를 옷걸이에 걸었다. 
 “교수님! 이번 주 공통 수업은 어떻게 진행할까요?!”  “서류만 놓고 가라.”  “네에!”  조교수와 함께였지만, 알렌은 곧 밖으로 나갔다. 그 뒤 데큘레인은 집무실 한복판에 멈춰섰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  생각에 잠긴 듯하던 데큘레인이 순간 고개를 위로 꺾었다. 
 그 천장에, 이프린이 있었다. 
 “아······. 아하하하······.”  발각당한 이프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데큘레인은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녀의 염동을 해체했다. 
 “으갸악!”  이프린이 떨어지기 전에 「유체 조작」으로 추락의 속도를 얼마간 늦췄다. 
그녀는 아프지 않게 바닥에 코를 박았지만, 데큘레인은 어떤 놀라움을 느꼈다. 
 방금 이프린의 염동에 간섭하느라 소모한 마력은─ 자그마치 「300」. 
 학기 초에는 재능만 찬연할 뿐, 마법적 완성도는 아직 햇병아리같은 녀석이었거늘. 
 그동안 데큘레인 본인의 기량도 어느 정도 상승했음을 감안하면, 대단히 가파른 성장세였다. 
 역시 ‘네임드’라는 건가. 
 질투에 가까운 마음이 일었지만 금세 털어냈다. 
 “······나머지도 다 나와라.”  데큘레인은 다른 부원들을 불렀다. 
 “······.”그 결과, 네 명의 데뷰탄이 데큘레인 앞에 서게 되었다. 
 그는 무섭도록 노려보며 말했다. 
 “수석교수 집무실 무단 침입은 최소한 징계, 심하면 퇴학까지도 가능하지.”  “죄, 죄송합니다!”  줄리아가 먼저 크게 외치고 무릎을 꿇었다. 이프린과 론도와 페릿도 뒤늦게 따랐다. 
 “사과는 필요치 않다. 이유나 제대로 말해라.”  “아 그게······.”  이프린은 고민했다. 
 저 책상 밑에 숨은 예리엘. 데큘레인의 동생을 판매하면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 있을 듯하다만······ 이프린에게는 의리가 있다. 
 “이걸 전해드리려 했습니다.”  우선 품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데큘레인은 「염동」으로 받아들었다. 
 “······그 술식을 이으니, ‘재의 응징을 기대하라. 너희들의 유약과 나약을 시험할 순간이 도래할 것이다.’라는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잿더미의 경고라는 말이냐.”  “예. 저희는 그렇게 추정하여 어서 빨리 이 소식을 알리려고······.”  데큘레인은 그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데큘레인이라도, 아니 오히려 데큘레인이기에, 이프린은 그도 다른 교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리라 생각했다. 
 ‘잿더미’는 그들의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이 없으니. 
 “······정상참작은 할만하다.”  그러나, 데큘레인의 반응은 여타 교수들과 판이했다. 그는 심지어 이해한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단침입은 벌점을 받아야 마땅하며, 무엇보다.”  여전히 차가웠지만, 확연히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데큘레인은 네 명을 차례로 훑었다. 
 “이 일은 너희 같은 데뷰탄이 신경쓸 일이 아니다. 잿더미가 맞다 하여도 교수 이상의 몫이지.”  “······교수님들은 저희 말을 들어주시지도 않았습니다.”  이프린은 분한 듯 주먹을 쥐었다. 데큘레인은 피식 입가를 뒤틀었다. 
 “안다. 그 늙은 개들은 그렇겠지.”  그 발언에는 모두가 놀랐다. 
 “다만, 이 마탑에 교수는 그들 말고도 많다.”  중견 종신교수들은 마법적 기량이 정체되어, 연구와 프로젝트에 집중한지 오래다. 
 그러나 이제 갓 20 대 중후반에 접어든 신진 교수. 그들 중에는 조화의 제니퍼, 안경잡이 켈로단, 그랜트 등 믿을만한 네임드가 있다. 
 “켈로단을 찾아라. 너희를 도화줄 수 있을 테니.”  애초부터 플레이어의 조력자로 셋팅된 네임드, 켈로단. 
 그라면 이프린과 동아리를 잘 이끌어줄 것이다. 
 “벌점은 1 점만 부여하지. 또한, 이 발견은 너희 평마탐동 동아리의 성과로 인정하마.”  “······예. 감사합니다.”  “이제 돌아가라.”  이프린과 부원들은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갔다.데큘레인은 저벅저벅 걸어 집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들이 내어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 재의 응징을 기대하라. 너희들의 유약과 나약을 시험할 순간이 도래할 것이다. ]  [ 5 등급 중간보스 이벤트 : 잿더미의 남작 ]  ◆ 중간 보스 처치 보상  :아이템 카탈로그 한 장  :상점화폐 +2  중간보스 이벤트. 
 듣기에는 거창하지만, 중간보스라고 무조건 특별하지는 않다. 
 당장 데큘레인부터가 중간보스 일뿐더러, 그 외에 중간보스라 할만한 놈들이 수십명은 되니. 
 그러나 이번 5 등급 이벤트는 다소 어렵다. 
 교수를 비롯한 외부 네임드의 도움 없이, 마법사 플레이어가 학생 네임드와 함께 극복해야하기에. 
 그런 점에서, 이 마탑에는 가장 큰 문제가 있다. 
 바로 ‘플레이어’가 없다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시스템을 활용하는 규격 외의 존재. 그가 구심점으로 네임드를 모아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하니 원. 
 “어쩔 수 없다.”  데큘레인은 마땅한 대비를 하기 위해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5 분 정도가 흘렀을까. 
 예리엘은 슬그머니 책상에서 나왔다. 
 “후. 다행.”  몸에 묻은 먼지를 털려 했는데, 먼지가 없었다. 미친 듯한 결벽증이었다. 
 어휴 진짜. 안 깨끗하면 죽는 귀신도 아니고. 
 한숨을 내쉰 예리엘이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문을 연 순간. 
 “예리엘.”  “꺄아아아악──!”  바로 곁에서 들린 목소리가 심장을 마비시켰다. 예리엘은 거의 발작하며 땅에 달라붙었다. 
 데큘레인은 그런 동생을 한심한 눈으로 굽어보았다. 
 “무슨 일이냐.”  “아, 아, 아니, 아니······ 알고 있었으면 미리 말하던가! 아 진짜, 내 심장······.”  “무슨 일이냐 물었다.”  예리엘은 데큘레인을 흘겨보고 몸을 일으켰다. 옷에 달라붙은 것들은 데큘레인이 염동으로 떼어줬다. 
 입술을 삐죽인 예리엘이 더듬더듬 말했다. 
 “······있잖아. 루이나, 루이나. 말이야.”  “맥퀸의 루이나 말이냐.”  “그래. 혹시나 해서 묻는데. 당신이 납치한 거 아니지? 소문이 파다하던데, 개소문이지?”  데큘레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예리엘은 단어를 정정했다. 
 “당신이 납치한 거 아니지요?”  “······루이나는 곧 풀려날 것이라더군.”  “응? 뭐야 그게?”  “돌아가라.”  데큘레인은 예리엘을 밖에 둔 채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예리엘은 그의 말을 곰곰히 생각했다. 
 루이나는 곧 풀려날 것이라더군. 
 루이나는 곧 풀려날 것이라더군. 
 루이나는 곧 풀려날 것이라더군. 
 그 문장과 음색에 담겼던 늬앙스를 깨달은 예리엘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진짜 저 미친놈이······!”  결국, 네가 납치했었다는 뜻이잖아! 
 * * *  ······한편, 실비아는 저택에서 마법 공부를 하고 있었다. 
 [ 데큘레인 : 순수 원소 이론 ]  [ 데큘레인 : 마력 재해 해석 ]  [ 데큘레인 : 논리로 보는 마법 ]  [ 데큘레인 : 계열 적용 ]  책장에는 데큘레인의 강의 정리본이 주제 별로 나뉘어 꽂혔고, 그녀가 열중하는 노트도 데큘레인의 강의 복습이었다. 
 똑똑─  그때 돌연 집중을 흐트러트리는 노크. 
 실비아는 그 문을 노려보았다. 슬그머니 틈이 벌어지며 익숙한 얼굴이 빼꼼 나타났다. 
 길테온이었다. 
 “······아! 공부 중이었니?”  길테온은 허허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실비아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고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곧 쉬는 시간이었다. 
 “하하하. 다행이구나, 아가.”  길테온이 안으로 들어왔다. 방을 둘러보던 그는 책장에 꽂힌 노트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데큘레인 정리본?”  “응.”  “요즘 수석교수의 강의가 마탑에서 유명하다는 소문은 들었다만, 상당히 열심히 정리했구나.”  “응. 도움이 많이 돼.”  실비아는 태연히 말했다. 길테온은 입술을 비틀었다. 
 내심 불만이었다. 
 “데큘레인에게는 이론보다는 실전을 배우는 게 나을 듯하다만.”  “실전도 배우고 있어. 이번 주 부터 실전일 거야.”  “······그러냐?”  데큘레인의 기량은 이제 길테온도 예상이 안 되었다. 
 당장 사흘 전 단신으로 악마의 결계를 깨트렸으니, 그 실전적인 전투 능력에 대한 소문은 마법계에도 파다했다. 
 심지어 그 사건을 두고 이사장은─  “데큘레인 교수의 실전 전투력은 말예요! 제 바로 밑단계인 것 같아요! 엄청 대단했어요!”라며 인터뷰를 했다. 
 곧 대마법사가 될 괴물 아드린느의 바로 밑이라니. 
 조금만 생각해도 개소리에 가까운 립서비스임을 알 듯하지만, 많은 어린 마법사들은 그렇게 믿으며 두려워하고 있다. 
 여태 데큘레인의 행보가 그만큼 파격적이었던 탓이다. 
 끼이이익······. 
 그때 방문이 다시 열렸다. 길테온과 실비아 모두 그쪽을 보았다. 실비아의 이복 남동생 길란드였다. 
 실비아는 그 작은 아이에게 말했다. 
 “감자도 왔네.”  “······감자 아니거든!”  길란드가 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실비아는 표정 변화 없이 대꾸했다. 
 “통감자.”  “아니라니까─!”  그 두 아이가 대화를 나누는 틈에, 길테온은 실비아의 침대 위에 놓인 미술 노트를 보았다. 그리고 별 생각 없이 들었다. 
 “······.”  표정이 굳었다. 
 무심코 펼친 미술 노트에는, ‘보기 싫은 얼굴’이 스케치되어 있었다. 
 한 장이 아니었다. 
 두 장도 아니었다. 
 노트 하나가 통째로······ 데큘레인이었다. 
 길테온은 노트를 내려놓았다. 복잡하고 딱딱한 얼굴로, 통감자 옥수수 운운하는 실비아를 보았다. 
 “아가야.”  “응.”  “지금, 묘지에 갈 생각인데. 너도 갈 테냐.”  “갔다 왔어. 이미.”  “······그렇구나.”  길테온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 혼자 다녀오마. 사이좋게 지내고 있거라.”  “감자도 데려가.”  “감자 아니라니까!”  “감자가 말하니까 시끄러워.”  두 아이를 남겨둔 채 밖으로 나왔다. 
 “······.”  길테온은 왜인지 정신이 멍했다. 온 세상이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운전기사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차는 그저 움직였고, 어느새 공동묘지에 닿았다. 
 “도착했습니다, 당주님.”  길테온은 차에서 내려 묘지의 길을 걸었다. 
 영혼이 통째로 뒤흔들리는 듯한 정념(情念). 
 그 속에서 도달한 묘비는 깨끗했다. 
 [ 시엘리아 폰 엘레민 일레이드 ]  비석은 청결했고, 잔디는 잘 관리되어 있었다. 
 당연히 실비아의 정성일 것이었다. 
 “······복잡하구만.”  무릎을 꿇은 길테온은 그 묘비를 보며 중얼거렸다. 
 실비아가 그린 데큘레인. 
 그 의미는 흠모와 애정인가. 
 아니면 존경인가. 
 그조차도 아니면, 어린 시절 한때 스치고 사라질 열병(熱病)인가. 
 구분조차 하기 싫고, 생각만으로도 정신이 우주로 날아가버리는 듯하다. 
 “시엘. 나는 당신을 잃을만 해서 잃었다고 생각하네만······”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버지로서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길테온이란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또 다시, 당신이 싫어할 방법이 떠오르고 말았소.”  이윽고 눈을 떴을 때. 
 일그러졌던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짙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오. 결국 당신 덕분에 우리 아이는, 그리고 일레이드는 더욱 위대해질 것이니.”  길테온은 그녀의 묘비에 한송이 꽃을 얹었다. 
 “당신은 이런 내가 질려 떠난 것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일레이드요.”  시엘리아는 죽어서도 일레이드의 땅에 묻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마법에 미친 망령의 아내가 된 것을 죽도록 후회했다. 
 “당신이 질렸든, 혐오했든, 미워했든, 핏줄은······ 혈족은 변하지 않아.”  유크라인이 악마를 사냥하고, 레바이론이 바다에 군림하고, 프하이르덴이 온기에 녹아내리듯이. 
 일레이드에게 야망은 그 자체로 ‘혈통’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아이도 결국에는 일레이드의 혈족이지.”  알맞은 ‘적’이 있다면, 죽도록 무너뜨리고 싶은 ‘상대’가 있다면. 
 실비아는 지금보다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대마법사에 훨씬 가까워질 수 있다.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은 일레이드를 더욱 강하게 만들기에. 
 “용서하지 않아도, 이해하지 않아도 되오.”  길테온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만약 내가 거름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나조차도 기꺼이 불속으로 집어 넣을 것이오.”  아이의 찬란한 금발과 타고난 성정은 태곳적 일레이드를 묘사한 그대로이니, 실비아는 일레이드의 피를 어느 누구보다 짙게 타고난 보석이다. 
 그 아이 전체가, 일레이드의 정수(精髓)인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마도명가의 200 년 역사 대대로 이어지는 비원── 대마법사. 
 누군가는 집착이라 욕하고, 망집이라 비하하지만, 길테온의 삶은 오직 그것을 위하여 이루어진 그릇에 불과하다. 
 “당신이 거름이 되어주오.”  길테온은 시엘리아의 죽음을 기억한다. 
 유크라인 가문. 
 그리고 데큘레인 그놈도, 시엘의 죽음에서는 자유롭지 않다. 
 온 세상 떳떳하게 ‘나는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데큘레인. 
 네가 시엘을 죽인 것이라 하여도, 너는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사실이니까. 
 그 죽고 죽임이 일레이드와 유크라인의 숙명이니까. 
 “당신 덕분에, 실바아가 사랑하는 당신 덕분에, 우리는 비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야.”  실비아가 데큘레인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든, 그 전부는 장작이 되어 ‘일레이드’라는 불길을 태울 것이다. 
 보다 농염하고 빛에 가까운 화마가 되어, 세상을 비추는 태양처럼 떠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부족하다면. 
 이미 죽은 아내의 시체를 파는 것으로도 모자라다면. 
 나는 나의 목숨조차 내어줄 수 있다. 
 “시엘리아. 데큘레인이 당신을 죽였소. 그러니 이제, 우리가 그것을 이용할 차례요.”  스스로를 훼손하며 강렬하게 타오르는 횃불. 
 일레이드의 각오란 그런 것이었다······. 
 * * *  이른 새벽. 렌이 운전하는 차량 안. 
 나는 내 옆자리를 보았다. 
 “······.”  루이나는 억지로 차창밖에 시선을 두었으나, 그 눈에서 한 줄기 물방울이 흘렀다. 
 가엾다거나하는 감정은 단 한 톨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김우진이었던 시절의 경험을 억지로 끌어올려 조금의 동정을 보였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  루이나가 고개를 홱 돌렸다. 
 “5 년 동안, 너는 오히려 유크라인의 울타리 안에서 성장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축복이라 할 수 있지.”  “추, 뭐, 추추, 출, 추보, 축복? 축보옥?!”  루이나는 기겁했지만, 나는 뻔뻔했다. 
 물론 루이나의 내력은 꽤 대단하다.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하고, 전임 이사장의 추천을 받아 남들보다 네 살은 어린 나이에 입탑한 재능. 
 그러나 내가 알기에, 루이나의 말로(末路)는 그리 좋지 않다. 당장 ‘침식’이 시작되면 맥퀸부터 공격받을 테니. 
 따라서, 정말 내 곁에 있는 것이 오히려 안전할지도 모른다. 
 “5 년이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지. 연봉으로 따지면······. 4 억 쯤 되나.”  “······.”  “네가 일년에 4 억을 벌 수 있겠나.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기객관화가 덜 된 것이니 생각을 고쳐먹도록.”루이나는 말없이 제 입술만 짓씹었다. 그러는 사이에 차량은 루이나의 저택에 도착했다. 
 “또한, 나는 제국마탑 외부 초빙 교수로 너를 추천할 것이다. 왕국 마탑에서는 더 이상 이룰 것도 없을 테니, 대학마탑에서 활동하도록.”  덜컥- 루이나는 문을 열고 땅에 발을 내딛었다. 
 “······그거 알아요?”  그리고는 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쾅─! 
 루이나가 문을 닫았다. 
 “······.”  나는 창문을 열었다. 떠나가는 그 뒷모습에 대고 손짓했다. 
 “멈춰라.”  “왜 그러시나요 보스?”  루이나는 비아냥거렸다. 
 “다시.”  “······뭘 다시할까요 보스.”  나는 가만히 루이나를 노려보았다. 루이나는 이죽거리며 다가와 다시 문을 닫았다. 
 쾅─! 
 방금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다시.”  “흥.”  쾅─! 
 이걸로 세 번. 
 “다시.”  내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았다. 
 “······.”  입술을 달싹거리던 루이나는 결국 다시 문을 열었고, 이번에는 살짝 닫았다. 
 “수고했다.”  그제서야 나는 치하의 말을 건넸다. 
 “······.”  “대답.”  “······네, 보스. 됐나요?”  “되었다.”  그 즉시 차는 출발했다. 백미러에 비치는 루이나는 이 차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마법사로서 그런 굴욕적인 맹약을 감내한 기분.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 * *  맑디 맑은 월요일. 여름햇볕이 온 세상을 내리쬐는 오늘은 ‘어둠의 산’ 실습이었다. 
 요 근래 사건 탓에 ‘악마의 산’이라고도 불리며 기피 대상이 되었으나, 황실에서 직접 지침이 내려왔다. 
 달에 한 번 이상은 꼭 실습을 하라. 무섭다고 피하는 것은 마법사의 소양이 아니다. 악마를 피해서는 언젠가 악마와 싸울 수도 없게 된다───  황제 소피엔의 명령이었다. 
 “자유 실습이다. 무슨 일이 있다면, 내 강철에 보고하라.”  다행스럽게도 오늘의 담당은 데큘레인이었다. 
 데큘레인은 어둠의 산 곳곳에 목강철을 띄웠다. 혹여나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신고가 가능하도록. 
 「미다스의 손」이 부여된 목강철의 다재다능한 활용법 중 하나였다. 
 ““““네에에! ””””  데뷰탄들은 해맑게 안심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장 데큘레인의 전투 능력은 이미 증명이 되었다. 
 따라서 어떤 괴물·마수·유령·악마가 나타나도, ‘수석교수 데큘레인’이라면 쉽게 죽여내리라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당장 이사장조차도 ‘데큘레인 교수의 전투력은 내 바로 아래 티어’라는 평가를 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그렇게 실습은 시작되었고. 
 “······얘 거지. 너 거기서 뭐하니?”  산 중턱의 냇가. 
 이프린은 물고기를 잡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루시아 패거리가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물고기 잡는 중.”  “그걸 누가 몰라? 왜 그 지지리 궁상을 떠냐고. 거지티내니?”  “먹으려고 잡지. 넌 생각을 못하니?”  “······하.”이들은 모른다. 어둠의 산에서 잡는 물고기가 얼마나 맛나고, 또 얼마나 마력에 도움이 되는지. 
 “어유. 저 그지 진짜. 야, 돈줄테니까 사먹어 그냥.”  “줘. 감사히 받을게.”  “······뭐? 와, 진짜 얘 보게. 아 그냥 꺼져!”  귀족들은 이프린을 기겁하며 지나쳤다. 그 뿐이면 다행이었지만, 돌연 이프린이 지탱하던 돌덩이가 빙그르르 움직였다. 
 마법이었다. 
 “어!”  철푸덕─! 
 이프린의 몸 전체가 개울에 빠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놈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들었다. 
 “아. 진짜 쟤네는 너무 싫다······.”  한숨을 내쉰 이프린은 다시 작살을 쥐었다. 
 그것으로 물고기를 두 마리나 잡았다. 
 “오늘은 입질이 좋네.”  그 토실토실한 놈들의 내장을 빼고, 비늘을 갈고, 꼬치에 꿰고, 모닥불을 피우고······. 그렇게 본인의 생존력을 과시하던 중. 
 “······?!”  어떤 묘한 감각이 이프린의 뇌리를 스쳤다. 정전기가 치솟듯 온몸이 찌릿 달아올랐다. 
 “뭐였지······?”  관자놀이 전체가 부르르 떨리는 듯한 마력적인 직감. 
 이프린은 몸을 일으켰다.타닥─ 타닥─  “스읍. 아, 침 고이네.”  고기 익어가는 소리에 다시 앉았다. 
 그때였다. 
 멀지 않은 수풀이 흔들리며 어떤 불청객이 나타났다. 
 “거기 누구니, 또? 이상한 짓 하지 마라. 보고 있으니까.”  저벅저벅 걸어나온 사람은 이프린에게도 익숙했다. 그녀는 이프린을 가늘게 노려보았다. 
 “······건방진 이프린.”  “······실비아?”  “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실비아가 눈썹을 팔짜로 좁혔다. 이프린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되물었다. 
 “왜? 아직 몇 시간 안 지났는데. 실습 벌써 끝났니?”  “너는 정말 바보구나. 지금 실습이 문제가 아니······.”  잠시 멈춘 실비아는 익어가는 고기를 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이프린은 두 꼬치 중 하나를 실비아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맛있을 건데.”  “······.”  실비아는 하려던 말도 잊고 돌의자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 옷차림이 이상하게 더러웠다. 마치 꽤 오랫 동안 이곳에 있었던 듯······. 
 “먹어도 돼. 다 익었으니까.”  “응.”  두 사람은 함께 고기를 먹었다. 
 와그작─  한 입 베어문 이프린은 황홀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고, 실비아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 맛있다······.”  어둠의 산에서 잡은 물고기는 역시 대단한 맛이다. 
 ······로아호크만큼은 아니지만. 
 넘버 투 정도? 
 와그작─ 와그작─  두 사람은 허겁지겁 생선을 먹어치웠다. 
 만남. (1)  ──[ 어둠의 산 실습 목적 ]──  어둠의 산 실습은 마법사의 실전력을 기르기 위함입니다. 
 오늘의 마나 농도는 그리 진하지 않으니, 강력한 마수가 출몰할 확률은 지극히 적습니다만, 안전을 위하여 고도 500m 이상은 입장 제한입니다. 
 데뷰탄이 채워야 하는 ‘어둠의 산 실습 점수’는 총 10 점입니다. 실습 기회는 학기 당 6 회 뿐이니 열심히 노력해주세요. 
 1. 마법 재료 발견  :3가지 이상의 약학·마법학 재료 분석 보고서 (3 개 당 1 점)  2. 마력 현상 목격  :시공간 또는 관념·추상적인 현상의 체험 기록물 (각 2 점)  3. 마수 전투  :마수의 시체 혹은 그 사살을 증빙할 기록물 (각 2 점)4. 마법적 깨달음  :어둠의 산에서 거머쥔 본인의 성장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제출 (최대 1 회, 1 점)  ※ 혹시 모를 ‘외부인’을 마주칠 경우, 반드시 지도교수에게 보고하세요! 
 ────────  “어둠의 산 실습······.”  이름 모를 사내는 어둠의 산 바닥에 흩어진 종이를 쥐었다. 수염으로 뒤덮인 입가가 풋- 비틀어졌다. 
 “실습이라······ 옛날 생각 나는구먼.”  그의 손에 쥐어진 종이는 곧 불타올랐고, 그 불길은 사내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에게로 옮았다. 여태 그를 추격했던 제국 정보국의 요원들이었다. 
 종이와 시체는 흔적없는 재로 사위었다. 
 “미안허이. 한데 뭐 어쩌겠나. 나도 살아야지.”  사내는 터벅터벅 걸었다. 그가 조성한 「혼돈의 결계」는 여전히 건재했다. 
 “······?”  그렇게 떠나가던 찰나에 문득, 어떤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뇌리에 꽂힐듯 정순한 마력이었다. 
 “흠······.”  그는 눈을 깜빡이며 해당 방면을 바라보았다. 바람의 정령이 마력의 냄새를 전달했다. 
 향기로웠다. 
 “······나도 이제 다 늙었구만. 별것이 다 궁금해지나.”  호기심을 참지 못한 사내는 한탄하듯 중얼거리고 경로를 수정했다. 
 * * *  어둠의 산. 제국 황실 대학 부지의 변두리이자, 제도에서도 무인도처럼 동떨어진 위험지역. 
 이 산은 이따금씩 마기도 발생하고 마력 현상도 심심찮은 만큼, 대단히 짙은 마나를 품고 있다. 
 환경이 그렇기에, 산에서 자란 물고기는 그 맛은 물론 영양과 칼로리도 대단한 것이다. 
 “아······. 이게 삶인가······.”  입안에 맴도는 생선의 맛과 포만하고 나른한 여운. 이프린은 제 매끈한 배를 문지르다가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근데, 무슨 일이었니?”  “······!”  꾸벅꾸벅 졸던 실비아가 뒤늦게 경계태세를 취했다. 
 “시간이 뒤엉켰어. 너는 몰랐겠지만.”  “엉켰다고?”  “나는 산에서 20 시간을 헤맸어.”  “뭐? 20 시간? 설마. 아직 해도 안 졌잖니.”  그러자 실비아는 마법으로 메트로놈을 ‘그렸다’. 그녀의 삼원색이 구현한 메트로놈은 1 초마다 뚝딱— 뚝딱— 거리며 시간의 흐름을 알렸다. 
 “내 체감 시간은 그래. 이 메트로놈은 정확히 72,653 번 움직였어. 20 시간 10 분 53 초.”  “······그래. 네 옷 보니까 알겠다.”  곰곰히 생각하던 이프린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실비아의 옷차림이 너무 큰 증거였다. 
 고작 서너 시간 만에 더러워질 위인이 아니거든, 저 세상 고고하고 존귀한 귀족께서는. 
 “나는 몰랐는데. 마력 현상인가?”  “너는 바보.”  “······나도 느끼긴 했거든? 일단, 강철한테 가자. 데큘레인의 강철.”  그러자 실비아는 다소 불만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한 일(一)자로 줄어든 눈이 이프린을 노려보았다. 
 “건방진 이프린.”  “하아······ 이번에는 왜 또?”  “데큘레인 교수님은 네 친구 아니야.”  그 말에 이프린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래. 데큘레인 교수 ‘님’, 그 수석교수 ‘님’이 무슨 일 생기면 강철에 보고하라 했잖니. 근처에 있었거든? 가자.”  이프린은 냇물을 따라서 걸었다. 실비아도 그녀를 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에 붙박인 목강철 수리검 한 자루가 발견되었다. 
 “이게 데큘레인 교수의 애장인가······”  “건방진 이프린.”  “······교수 ‘님’ 애장인가?”  가까이서 보니 꽤 신기한 도형이었다. 
 양 옆으로 뾰족한 고드름이랄까, 반듯한 수정이랄까. 
 아무튼 이프린은 목강철을 톡톡 두드리고 말했다. 
 “아아. 아아. 들리시나요?”  이프린은 잠시 기다렸다.이내 우우우웅······ 하는 공명과 함께 답신이 돌아왔다. 
 ─무슨 일이지. 
 “휴.”  이프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실비아에게 말했다. 
 “네가 말해.”  “······.”  실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헤맸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뭐니 또······.”  하는 수 없이 이프린은 직접 말했다. 
 “마력 현상이 발생한 듯합니다. 시간이 엉킨 것 같아요.”  ─그렇군. 
 “네.”  ─······. 
 딸칵-  하고 통신이 끊겼다. 당황한 이프린은 다시 신호를 보냈다. 
 “저기 저기, 교수님? 마력 현상입니다!”  ─어쩌란 말이냐. 
 “예?”  ─이건 실습이다. 너 알아서 해결하라. 마력 현상이라면 보고서 작성이나 제대로 하도록. 
 통신은 그렇게 끊겼다. 이프린은 멍하니 있었고, 실비아는 괜시리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몸짓은 왠지 뿌듯한 듯보였다. 
 “너라서 안되나봐.”  “······아으 진짜.”  이프린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됐고, 이거 통신 되는거면 시간은 멀쩡한 거 아니야?”  “냇가 주변은 괜찮은 것 같아.”  ─고것이 아니란다. 
 돌연 어떤 목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은 크게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부스럭── 수풀을 헤집으며, 웬 로브 차림의 중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발의 아이야. 이 시간 혼돈 현상은 내 결계란다. 운 안 좋게 너까지 걸려버렸던 듯한데, 미안했다.”  “······.”  이프린의 등에는 다수의 화염구가 응어리졌으며, 실비아는 단숨에 배리어를 메모라이즈했다. 
 “······어허허~ 살벌한 아이들이구만~? 설명을 해주는데도 그리 공격적인감?”  하지만 그에게는 적의가 없었다. 오히려 흥미로워하는 기색 뿐이었다. 
 “누구세요.”  이프린은 여전히 경계하며 물었다. 그러자 중년인은 풀썩- 뛰어서 단숨에 다가왔다. 그 키는 데큘레인만했고, 몸은 단단했다.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반갑다. 나는 ‘무르칸’이다. 증거는 요 지팡이고. 너희는 그래도 마법사이니 보면 알겠지? 「세계수의 파편」이란다.”  “······!”두 사람의 눈이 크게 뜨였다. 
 대륙의 동남 변방, ‘가할라 사막’에 거주하는 자들은 다소 이질적인 이름을 띈다. 그 사막 출신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사는 데마칸, 무르칸, 로하칸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무르칸이라는 이름은, 데마칸의 동생의 아들로도 유명하다. 
 그말인 즉───  대마법사의 친척이라는 것이다! 
 * * *  어둠의 산 초입. 
 실습은 정오에 시작했고, 오후 세 시가 되었으니, 데뷰탄들은 하나 둘 씩 복귀했다. 그들은 지도교수에게 실습의 성과를 보고했다. 
 “약초 확인했데이.”  “네~”  오늘의 지도교수는 총 6 명, 총책임자 데큘레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진교수였다. 그들은 명부를 들고 데뷰탄들의 실습 점수를 끄적였다. 
 “교수님들!”  그때, 젊은 기사 한 명이 마탑 쪽에서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는 웬 경찰 무리와 함께였다. 
 “큰일입니다!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유?”  되묻는 교수는 켈로단. 두꺼운 렌즈와 구수한 말투 탓에 ‘안경잽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남자였다. 
 “정보국에서 급보가 내려왔습니다. 지금, 로하칸이 어둠의 산에 진입했다는 소식입니다!”  “무어, 로하카, 로하칸─?!”  “예. 본인을 무르칸이라 사칭하다 정보국에 발각되었답니다.”  교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정보국 요원과 경찰도 추격을 시작했고, 기사의 지원도 요청했으니······.”  그 말이 끝맺기도 전에 그들은 산을 올랐다. 
 우루루루루루──  금세 산에 진입하여 도달한 중턱. 기사와 경찰의 숫자는 어느새 배로 늘어나 있었다. 
 “수석교수님! 큰일났어유!”  산중턱의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데큘레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곧바로 데큘레인에게 달려가 설명했다. 
 “······로하칸이 지금 어둠의 산에 있답니다!”  데큘레인의 반응은 이상했다. 로하칸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을 들었음에도 아주 태연했고, 오히려 그들이 풍기는 땀냄새를 더 거슬려하는 눈치였다. 
 “저, 혹시. 로하칸을 모르시나유?”  “안다. 내가 모르겠나.”  “아, 죄송, 죄송하구만유.”  그는 로하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현재 그의 악명도 알고 있었다. 
 현 시대 최악의 범죄자이자, 대륙에서 단 열 명 뿐인 ‘흑수(黑獸)’ 등위의 수배자. 
 ─[ 메인 퀘스트 : 로하칸의 사연 ]─  ◆개요  :로하칸의 사연  ◆목표  :로하칸과 조우. 
 ◆보상  :아이템 카탈로그 한 장  :상점 화폐 +1  ─────  동시에, 메인 퀘스트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거대 네임드. 
 로하칸은 악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 메인 퀘스트를 끝까지 이끌어 갈, 최종보스 전까지 ‘절대 죽어서는 안 되는’ 구심점 중 한 명인 것이다. 
 “수색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님도 함께하시겠습니까?”  기사 ‘라웨인’이 말했다. 
 데큘레인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책을 탁- 덮었다. 
 “좋다. 다만 나는 혼자 움직이지.”  “안 됩니다. 로하칸이 누구인지 정녕 알고 계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황실 마법사 수십명을 살해한 그 악명은-”  한 가득 모인 교수, 경찰, 기사들은 기함하며 데큘레인을 말렸으나. 
 “너희는 오히려 짐덩이일 뿐이니, 알아서 꺼지라는 뜻이다.”  그는 그들 전부를 경멸하듯 잘라낼 뿐이었다. 
 ······데큘레인으로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을 내쫓았어야 했기에. 
 다만 그 내막을 알 길이 없는 모두는 그의 넘치는 자신감, 아니 지극히 오만방자한 태도에 말을 잃었다. 
 “······예. 그러시지요.”  이윽고 라웨인을 필두로 한 기사들은 이를 악물고 그를 지나쳤다. 교수와 경찰들은 조금은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  그렇게 일대가 고요히 가라앉았을 즈음. 
 데큘레인은 혼자서 움직였다. 
 그의 수색 효율은 남들보다 월등했다. 
 “움직여라.”  산 속, 신속히 흐트러트린 목강철. 
 그는 그 전부와 공명하며 로하칸의 위치를 찾았다. 
 최우선 목표는, 저 기사들보다 먼저 로하칸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 * *  “그 망나니가 수석교수가 되었다니. 대체 무슨 술수를 쓴 게야?”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의 온기 속에서 무르칸이 말했다. 이프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실비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프린이 물었다. 
 “근데, 데큘레인 교수님을 잘 알고 계세요?”  “알다마다. 내가 그 녀석을 가르쳤거든.”  “늬에?!”  “······!”  이프린과 실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르칸은 피식 웃었다. 
 “······왜. 그리 놀랄 일이냐? 내 이름을 보면 알 터인데?”  “그, 언제, 언제 가르치신 거예요?”이프린은 계속 물었고, 실비아는 가만히 있었다. 귀족이 평민을 이용하는 흔한 방식이었다. 
 “고게 20 년 전이었나? 그때는 그 망나니도 참 어렸단다. 나는 그놈 교습 마법사였지. 돈이 부족했거든.”  “그때 그 사람은 어땠어요?”  어느 누구도 모르는 데큘레인의 어린 시절. 
 언제 어디서도 듣지 못할 야사(野史). 
 이프린의 재촉에 무르칸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놈은 신동이었다. 어린 놈이 대학 과정도 술술 배우더군. 그러나 심성은 곱지 않았지. 부모의 압박 탓도 있었겠지만, 공감이나 연민 따위의 감정이 없었어.”  그 옛날을 떠올리던 무르칸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법사가 대개 그렇긴 하지만 놈은 특히 심했다. 성악설의 산증인이라 해도 되었을까.”  “······.”  그 냉정한 평가에 이프린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실비아는 발끈한듯 말했다. 
 “지금 마법계에서 가장 기량이 출중하고 유명한 교수 중 한 명이에요.”  “엥? 그 녀석이 말이냐?”  “네.”  “어떻게 그렇지? 내 5 년 동안 속세와 연을 끊긴 했다만.”  실비아는 품 속에서 위자드 저널을 꺼냈다. 데큘레인에 대한 이사장의 인터뷰, 악마의 결계를 깨부순 일화 등등이 수록된 기사였다. 
 무르칸은 그 기사를 받아들고 읽었다. 
 “······허미? 아드린느의 바로 아랫 단계?”  [ 이사장 아드린느는 데큘레인의 활약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데큘레인 교수의 전투력이 제 바로 아랫 단계는 될 것이라 생각해요. 그만큼 실전적인 사람이거든요, 데큘레인 교수는. 정치적으로든, 마법적으로든.” ]  무르칸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 어린 놈이 이사장 되더니 벌써 노망이 났나. 전혀 아닐 터인데? 그 망나니의 재능은 평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모순.”  실비아가 끼어들었다. 무르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순?”  “신동인데 어떻게 재능이 없나요. 엉터리예요.”  “······하하하.”  무르칸이 웃었다. 그리고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담긴 정기가 선연하게 반짝였다. 
 “금발아, 너는 신동이면서 천재지. 허나 데큘레인은 신동이면서 한계가 명확했어. 나는 한눈에 알았지.”  “맞아 맞아.”  이프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에서야, 아버지의 편지로 읽었던 내용들이 나오고 있었다. 
 실비아는 그런 이프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만, 생각해보거라. 어릴 때 신동이라며 찬양을 받던 아이가, 자라면서 결국에는 평범해지는 자신을 느낀다면? 저보다 못났던 아이들이, 어느새 앞서나가는 것을 본다면? 허섭스레기라 비하하던 그들이, 언젠가 자신을 비웃어대는 상상을 한다면?”  무르칸은 그 옛날을 떠올렸다. 
 나름 안쓰러웠던 어린 녀석. 그런데 또 하는 짓거리를 보면, 안쓰럽긴 커녕 ‘더 망했으면─’ 하게 되었던 녀석. 
 “나는 데큘레인이 그 이상은 버틸 수 없으리라 생각했단다. 아니, 어떤 사람도 쉽게는 버틸 수 없을 운명이었지.”  데큘레인은 그때부터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기사들을 보니······ 가능성은 두 개가 떠오르는구나.”  “가능성요?”  “그래. 이 전부가 사기, 혹은 자작극이거나, 아니면······.”  무르칸은 어떤 생각을 하다가 작게 웃었다. 
 “······끝없이 노력했던가.”  “노력?”  이프린이 눈썹을 들썩였다. 실비아도 의문스런 얼굴이었다. 
 요리보고 조리봐도, 데큘레인의 이미지는 노력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니. 
 “그래. 녀석은 천재가 아니다. 그건 내가 확실히 보증할 수 있지. 그러나, 성실했단다. 다만 그 성실함도, 노력도, 크게 보면 재능이라 할 수 있지.”  무르칸이 기억하는 데큘레인은, ‘적어도’ 어렸을 적에는 성실했다. 스스로 성장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이 생각 자체가 고놈한테 속고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르칸은 실비아가 내어준 기사를 톡톡 건드렸다. 
 “만약 고놈이 정말 이만큼 성장했다면, 미친 듯이 노력했을 게다. 죽기 직전까지 자신을 몰아붙였을 게다. 그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마······ 이 세상에서 오직 ‘그놈만이 감내할 수 있었던 노력’이었을 게다.”  잠자코 그 말을 듣던 이프린으로서는 동의하기 힘든 말이었다. 
 데큘레인은 노력의 일환으로 아버지의 이론을 빼앗았는가? 
 노력의 일환으로 그런 파렴치한 짓들을 저질렀는가? 
 “그 노력이 본인의 재능을 극복할만큼이었다면······ 뭐, 보석처럼 생긴 놈이 공사판 돌덩이처럼 굴렀나보지.”  그러나, 이프린은 머지 않아 깨달았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데큘레인은 분명히 이론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그는······ 아버지의 이론을 흡수하려 무던히도 노력했던 것은 아닐까. 
 그 3 년 동안, 아버지가 남긴 모든 유산을 체득하고 체화했던 것은 아닐까. 
 누구보다 겸손한 자세로 아버지를 인정하고 정진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도 고놈을 너무 믿지는 마라. 성실이 곧 성품을 뜻하지는 않으니.”  “······.”  반면, 실비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애초부터 데큘레인이 ‘재능으로 이루어진 조각’이라 생각했다. 
 막연히, 자신과 비슷한 사람일 것이라고  그렇기에 조금은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그 오묘한 감정들이 마음을 간지럽혔다. 
 만약 무르칸의 말대로 그가 미친 듯이, 필사적으로 노력한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그가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오롯이 노력만으로 지금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었다면······. 
 실비아는 제 가슴에 두 손을 얹었다. 가슴의 맥박이, 유독 크게 뛰어오르고 있었다. 
 “자. 옛날 얘기는 됐고. 어떠냐. 너희도 내 가르침을 한 번 받아보지 않으련?”  “가르침이요?”  각각의 상념에 잠겨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떨었다. 
 “그래. 내 가르침은 조금 특별하거든. 내가 데큘레인의 재능을 어찌 파악했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  “예! 예! 예!”  “네.”  그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대마법사 친척의 가르침이라니? 이건 참을 수 없다. 팔다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받아야 한다. 
 “대신, 조건이 있다. 나도 속세에는 아내와 자식이 있는데, 그들에게 이 편지를 전해다오.”  무르칸은 품 속에서 편지를 꺼냈다. 이프린이 황급히 그 편지를 받았다. 
 “네! 받았어요! 이제 알려주세요!”  “허허허. 이 욕심 많은 녀석. 그래, 알겠다. 내 가르침이란 말이다······ 자 보아라.”  무르칸이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에서 정령이 발생했다. 크기는 작았지만, 이프린과 실비아는 경악했다. 
 끼이이이잉······. 
 수풍지화의 모든 속성이 결합된 정령, ‘빛의 스피엘’이었다. 
 자그마한 구체 크기의 스피엘은 심지어 두 마리였고, 각각 하늘을 멤돌다가 실비아와 이프린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욱!”  “······.”  이프린은 가슴을 움켜쥐었고, 실비아는 고요히 심호흡을 했다. 
 무르칸이 말했다. 
 “조심히 받아들여라. 요란 떨지 말고. 저 금발이처럼 조용히.”  “금발이가 아니라 실비아.”  “조용. 말하면 안 된다 금발아.”  실비아는 불만스러웠지만 곧 눈을 감았다. 
 이윽고, 뭔가 뜨거운 불덩이가 단전에 똬리를 트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그들은 깊이 호흡하며 그 불덩이와 몸을 연결시켰다. 
 “후우······ 후우······. 된 것 같은데요?”  “······.”  “아하하하.”  무르칸은 감탄하며 웃었다. 
 “과연, 너희는 내 예상대로구나. 대단한 재능이야.”  데큘레인은 이 스피엘을 받아들이고 사흘 밤낮을 앓았건만, 두 아이는 고작 15 분만에 체화한 것이었다. 
 “이제 스피엘은 너희 몸에서 성장을 도울 것이다. 내 가르침은 이런 종류지. 
재능이 뛰어난 놈에게는 연료가 되지만, 재능이 없는 놈에게는 오히려 열병이 돼.”  이프린과 실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이프린이 제 손에 든 편지를 보며 물었다. 
 “근데, 이 편지는 왜 직접 안 전해주시나요?”  “원래 노인네들에게는 다 사정이란 게 있잖냐.”  “으음.”  그때, 돌바닥에 다소곳이 앉은 실비아가 말했다. 
 “데큘레인 교수님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더 해주세요.”  “흠? 그게 궁금하냐?”  “네. ”  “흐음······. 내 시간은 별로 없지만······.”  오랜만에 재능이 넘치는 아이를 보니 흥이 나버렸다. 
 무엇보다, 아직 제 ‘결계’를 뚫은 놈은 한 명도 없는 것 같고. 
 “좋다. 내 그 녀석을 교습하면서 꽤 재밌는 일화들이 많으니 들려주마.”  실비아는 말없이 주먹을 쥐었고, 이프린은 음흉하게 웃었다. 
 “뭔가 부끄러운 일화먼저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데큘레인 그 놈이 예법은 기가막히게 지키지 않느냐? 내가 똥쌀때도 그것을 지키나 시험을 한번 해봤는데······.”  무르칸은 이러면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떠들었다. 두 아이의 반응이 너무 열렬했다. 이프린은 얼굴 표정이 흥미진진했고, 실비아는 아예 필기까지 했으니. 
 ──그러나. 
 “여기 계셨군요.”  멀지 않은 곳에서 흘러드는 목소리. 
 그 칼날처럼 차갑게 오른 음색이 한순간에 분위기를 잘라냈다. 
 “······!”  이프린과 실비아는 등허리에 돋아오르는 소름을 느끼며 그곳을 돌아보았다. 
 숲의 어두운 그늘. 
 그 짙은 음영 속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한없이 서늘했고, 등 뒤에서 강철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뚜벅- 뚜벅-  데큘레인은 천천히 걸었다. 그 우아한 움직임이 두 사람에게는 어떤 재앙보다 무서웠다. 
 이내, 그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섰다. 실비아와 이프린은 식은땀만 흘리며 굳어 있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어디까지 들었을지‘가 두려웠다. 
 “······그려. 오랜만이구나, 제자야.”  그렇게 말하는 무르칸의 낯빛은 어느새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예. 오랜만이군요.”  데큘레인은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답했다. 
 “로하칸.”  이 세상 전체가 아는 그의 이름. 
 현시대 최악의 범죄자이자, 제국을 적으로 둔 수배자. 
 황후 시해자 로하칸. 
 “······?”  데큘레인의 입에서 그 이름이 불리자, 실비아와 이프린은 순박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남. (2)  산은 어둠에 젖어들었고, 황량한 바람이 노면을 휩쓸었다. 모닥불이 뱉어내는 불씨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나는 로하칸을 바라보았다. 로하칸은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제자라 불렀지만, 별반 특별할 것도 없었다. 
 데큘레인의 과거는 워낙 거미줄 같아서, 이런 인연은 갑작스러우면서도 당연하다. 제국 곳곳의 네임드 중에는 오히려 이 녀석과 연이 없는 캐릭터가 드물지 않을까. 
 “로하칸?”  이프린이 로하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로, 로하칸이라니요? 저 세계수의 파편은······”  대마법사 데마칸의 애장은 세계수로 만들어진 지팡이. 그 이야기는 동화에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데마칸은 세계수의 나뭇가지로 지팡이를 만들었고, 남은 파편은 제 가족들에게 나눠주었다. 이프린과 실비아가 보기에 로하칸의 지팡이는 분명 세계수였다. 
 “결계는 어찌 통과한 게냐? 나름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것이다만.”  로하칸이 뒷목을 긁적이며 물었다. 
 결계 마법은 대개 그 성격에 따라 계열이 다르다. 일례로 공간을 넓히는 결계는 보조 계열, 인식을 속이는 결계는 환혹 계열이다. 
 그런 점에서 로하칸의 결계는 환혹. 내가 면역을 지닌 분야였다. 
 “이제 잡기술은 통하지 않습니다.”  “······오호. 잡기술이라?”  로하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의 근처에 선 이프린과 실비아를 보았다. 그런데 실비아가 없었다. 
 “저는 여기 있어요.”  ······어느새 내 등 뒤로 건너와 있었다. 
 “이프린.”  나는 이프린을 불렀다. 그러자 로하칸이 크게 놀랐다. 
 “이프린? 네가 그 이프린 루나냐? 루나 가문의 딸?”  “예? 저, 저를 아세요?”  “알다마다. 15 년 전인가? 네 애비의 두뇌는 나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지. 
네 애비는 요즘 뭐한다냐?”  이프린의 표정이 사뭇 굳었다. 이프린은 나를 보았고, 실비아를 보았지만, 결국 그 시선은 땅바닥에 고정되었다. 
 “······죽었습니다.”  “······.”  로하칸이 입을 떡 벌렸다. 
 민망한 듯, 미안한 듯. 그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아까운 일이구나. 성격은 좀 묘했지만,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이론 천재였는데 말이지.”  “아······.”  “데뷰탄 이프린.”  나는 이프린을 불렀다. 이프린은 갈팡질팡했으나, 곧 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로하칸에게 물었다. 
 “······정말 무르칸이 아니라 로하칸이에요?”  로하칸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미안허이. 내 이름을 부르면 다 도망가서 말이다. 무르칸은 내 죽마고우나 다름 없는 녀석인데, 이 지팡이는 고놈한테 빌린 물건이지.”  “황후 시해자 로하칸······.”  “거짓이라 할 수는 없다만, 그때에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로하칸은 선황제 크레바임의 벗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황후를 비롯한 수많은 궁중 마법사를 살해했고, 제국의 적이 되었다. 
 “그, 그럼······.”  이프린이 제 배를 더듬었다. 빛의 스피엘이 내려앉은 위치였다. 
 로하칸은 작게 웃었다. 
 “내 정령은 정상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래야 너희도 약속을 지킬테니 말이-”  “이프린, 실비아.”  나는 로하칸의 말을 잘라내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내려가라.”  그들은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 다음 전개에 목격자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나는 가장 차갑고 엄중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휘말리면 죽을지도 모른다.”  로하칸이 쯧- 소리를 냈다. 얼어붙은 듯했던 두 사람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가라. 내 강철을 따라가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이 결계에 휘말리지 않도록, 목강철 한 자루를 안내에 맡겼다. 등 뒤의 실비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지 마세요.”  “······가라.”  질 리가 없다. 
 그러나 이길 수도 없다. 
 당연히, 싸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초가 지나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징계를 내리지.”  이프린과 실비아는 내 강철을 따라 떠났다. 바스락─ 바스락─ 거리던 발소리는 점점 멀어지면서 소멸되었다. 
 휘이이이잉······. 
 차고 건조한 바람이 불었다.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흩날렸다. 
로하칸은 진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어떤 노력은 한 것 같구나. 네 마력이 예전에 비해 정순하다. 마력의 질도 노력으로 개선이 가능한 부면이었나?”  “당신은 여전히 젊어지고 있군요.”  로하칸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의 비밀을 관통하는 말이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 받아쳤다. 
 “싸울 셈이냐. 제자를 죽이기는 싫거늘.”  “피차 도발하여 좋을 일은 없을 텐데요.”  “······뭐라?”  나는 로하칸을 이길 수 없다. 성장이 모자라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따위의 이유는 아니다.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도 그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도발로 느꼈나? 경고였다만.”  “만용이십니다.”  “허, 만용?”  그럼에도 이 몸은 물러서지 않는다. 부러질지언정, 결코 굽히지 않는다. 
세계를 초월한 강자 앞에서도 자존(自尊)을 잃지 않는다. 
 명백히 데큘레인의 성격이지만, 이 점만큼은 나도 마음에 든다. 
 김우진은 항상 세태에 휘둘리기만 하던 남자였으니. 신념도 소신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꼴에는 이제 이골이 났다. 
 “만요오오옹~?”  “······.”  나는 눈을 감고 현재의 상황을 파악했다. 스물 중 열 다섯의 목강철은 아직도 산 이곳저곳을 쏘다니고 있었다. 
 “······결계를 헤매는 자가 157 명. 단순히 헤매는 자가 93 명. 결계를 해체하려는 자가 23 명. 길을 뚫고 오는 자가 37 명. 동남북에는 이미 포위망이 갖추어졌고, 황실 기사단의 전력이 응집되고 있군요.”  그렇게 말한 뒤 눈을 떴다. 로하칸의 시선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시간을 끌겠다는 것이냐. 그리 둘 생각은 없지.”  로하칸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나는 여전한 무표정으로 말했다. 
 “북서쪽으로 가십시오. 그쪽은 아직 허술합니다.”  “······?”  예열하던 로하칸의 마력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로하칸은 눈알이 튀어나올듯 크게 뜨고 깜빡거렸다. 
 “뭐여?”  “다만, 명심하십시오. 놓아드리는 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나는 말했다. 
 부디 로하칸이 다음부터는 신중하길 바라며. 애들 두 명에 한눈이 팔려 제국에 잡히거나, 혹시라도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어음······.”  로하칸은 뒷목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게 네 옛 정이냐?”  “태후를 살해한 자에게 정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한데, 안 궁금하나?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궁금합니다.”“음. 그렇다면 내 말을 믿을 텐가? 나는 제자를 버린 스승인데.”  “‘신전’을 파괴하러 오셨습니까.”  나는 단정하듯 되물었다. 뭔가 말하려던 로하칸이 숨을 헉 들이키고 입을 떡 벌렸다. 
 “너······ 그간 좀 다르게 자랐구나?”  “잡담할 시간은 없습니다. 떠나십시오.”  “······그래.”  그는 등을 돌렸다. 그러나 몇 걸음 걷다 말고 멈췄다. 그 상태에서 고개만 비틀어 나를 돌아보았다.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했다. 
 “데큘레인.”  “예.”  “······너는, 신을 믿나.”  어찌 보면 쌩뚱맞은 물음. 허나 메인 퀘스트의 핵심을 관통하는 말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저는 오직 저만을 믿습니다.”  신을 믿지 않는다. 
 데큘레인으로서도, 김우진으로서도.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하하.”  그러자 로하칸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자세다. 받아라.”  그는 나에게 책 한 권을 건넸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느 광신도들에 대한 이야기다. 언제 한 번 읽어보도록.”  ───「멸지탐망록(滅地探望錄)」───  ◆ 정보  :로하칸이 작성한 탐망록. 
 :멸지(滅地)를 횡단하며 파악한 광신도의 습성이 기록되어 있다. 
 ◆ 범주  :특수 ⊃ 서책  ◆ 효과  :??? 
 ────────  나는 품속에 넣었다. 
 “잘 있어라.”  그는 바람의 원소를 온몸에 받아들였고, 동시에 어떤 파괴적인 대마법을 발동했다. 
 쿠구구구구궁───! 
 대마법은 노면을 여러번 내리치며 대지 전체를 헤집었다. 온 사방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 뒤, 그는 북서쪽으로 질주했다. 
 “······이제부터인가.”  조금씩 ‘진짜 네임드’가 등장하고 있다. 황후 시해자 로하칸, 거인 세크트란, 신병 로드란, 권위자 칼라······. 
 이프린과 실비아 조차 해당 티어에 합류하려면 최소 2 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터. 
 이 세상은 넓고, 아직 퀘스트는 초반부에 불과하다. 
 [ 완료 : 로하칸의 사연 ]  ◆ 아이템 카탈로그 한 장 습득  ◆ 상점 화폐 +1  아이템 카탈로그는 특수한 보상이다. 플레이어에게만 주어지는 줄 알았는데, 어쨌든. 
 이건 나중에 쓰기로 하고. 
 “능구렁이처럼 세심한 영감.”  로하칸은 떠나면서 이 일대의 거의 전체를 훼손했다. 본인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쓸데없는 허세는 아니었다. 
 나는 그 저의를 알고 있었다. 
 우리 둘을 위한 ‘알리바이’였다. 
 나 또한 그 장단에 맞추기 위하여 사방에 퍼진 목강철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작업을 시작했다. 
 콰과과과과과광──! 
 열 아홉 자루의 강철은 이미 짓이겨진 대지와 초목을 한 번 더 찢어발겼다. 
자연물들은 휘몰아치는 강철에 으스러졌으며, 나와 록하크가 서있던 반경은 차마 형용하기도 힘든 참상으로 돌변했다. 
 내 마력을 모조리 소모하고도 억지로 쥐어짜낸 결과였다. 
 * * *  수십의 기사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성심의 기사 라웨인 뿐만 아니라, 뒤늦게 합류한 황실 기사단 부단장 ‘이사크’도 있었다. 
 제도의 거의 모든 전력이 어둠의 산에 집결한 것이었다. 
 ─────! 
 흔적을 찾아 달리던 그들은 이내 강대한 마법의 파동을 감지했다. 
 ─────! 
 연속으로 이어지는 박격이었다. 
 “북쪽이다. 따라오도록.”  이사크는 특유의 감응력으로 그 진앙(震央)을 예측했다. 기사들은 이사크의 뒤를 따랐다. 이사크에게 결계는 다만 적당한 방해물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산비탈을 내려오는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누구냐!”  기사들은 곧장 검을 뽑아 겨냥했다. 그 걸음걸이는 기사들에게 접근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모두가 긴장했으나, 곧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데큘레인 교수?”  이사크가 중얼거렸다. 
 제국 황실 대학마탑의 수석교수 데큘레인. 그가 내려오고 있었다. 
 “······.”  그의 보폭에는 여전히 기품이 넘쳤지만, 숨길 수 없는 피곤함이 묻어났고, 행색도 데큘레인 치고는 몹시 더러웠다. 
 “저 위에 무슨 일이 있었소?”  이사크가 물었다. 기사들 앞에 선 데큘레인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교수. 말해주시오.”  데큘레인은 자존심이 상한 듯한 표정을 내보였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속을 수 밖에 없는 연기였다.이윽고, 그가 말했다. 
 “······놓쳤소.”  “놓치다니? 로하칸을?”  “······.”  데큘레인은 말이 없었다. 그들을 다만 답답하게 내버려 둔 채 산길을 내려갔다. 
 이사크는 멀어지는 그의 등을 노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는지. 저 자가 로하칸을 붙잡을 기량이 되었나?”  “그럴 리가요. 오만하기만 한 자입니다. 어서 올라갑시다.”  라웨인의 말에 그들은 바람처럼 오르막을 내달렸다. 기사의 보폭은 쾌속이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그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게······.”  ······말을 잃게 만드는 위압적인 풍경이었다. 
 온통 불구덩이였다. 자연이 통째로 우그러진 듯 멀쩡한 부분이 없었다. 
사방에 크레이터가 패였고, 지면은 끔찍하게 뒤집어졌으며, 재와 마력과 핏방울이 한데 섞여 흩날리고 있었다. 
 지옥도 수라굴의 풍경이 이러할까. 
 무지막지한 마전(魔戰)의 현장에 기사들은 잠시 말을 잃었으나, 먼저 정신을 차린 부단장 이사크가 외쳤다. 
 “이만한 격전이었다면, 로하크 또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닐 것이다. 3 개의 분대로 나누어 다시 추격하라!”  로하칸의 무력을 고려하여 부대를 이루었던 그들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각각 북서, 북, 북동 방면이었다. 
 * * *  한편, 실비아와 이프린은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경찰들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곧장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참 내······ 아무 일도 없었다고?”  형사과 강력반의 심문실. 뽀글머리 수사관이 이프린에게 물었다. 
 이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리가. 로하칸을 만났는데, 아무 일도 없었을 리가.”  이프린은 심문을 받고 있었다. 처음 올때는 실비아도 함께였지만, 실비아의 심문은 3 초만에 끝났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거짓말.”  “······.”  “네 얼굴에 거짓말이 다 보인다, 아가야.”  수사관이 히죽 웃었다. 이프린은 로브 옷자락을 꽉 여몄다. 품 안에는 아직 로하칸의 편지가 있었다. 
 “말 안하면, 너 감옥 갈 지도 모른다~?”  “······.”  이프린은 이를 악물었다. 자백이나 밀고 따위, 성격에 맞지 않았다. 비록 그가 로하칸이었더라도······. 
 음흉하게 웃던 뽀글머리 수사관이 흥- 코웃음을 쳤다. 
 “어이! 거기 있냐! 얘 몸수색부터 하자!”  “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긴 무슨. 네가 자꾸 거짓말을 하는데, 수색이라도 해야지.”“전 범죄자가 아니에요. 몸수색은······.”  “뭘 모르네, 이 애가. 저기요. 아무리 제국대학 마법사라도, ‘흑수’ 등급의 범죄자에 대해 뭔가 하나라도 숨기면 그건 범죄예요. 어이! 안 들리냐! 
수색하게 오라니까!”  수사관이 고함을 내지르던 그때였다. 
 쾅─! 
 심문실의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렸다. 수사관은 화들짝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니, 씨. 심문 아직 안 끝났는데 누가 문을······!”  그렇게 뇌까리던 그는 곧, 다가온 귀족과 마주하게 되었다. 
 수석교수 데큘레인. 
 “······.”  “······.”  수사관은 입을 다물었고, 데큘레인은 이프린과 뽀글머리를 번갈아서 보았다. 
뽀글머리가 뒤늦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 수석교수님! 로하크와 한바탕 마전을 벌였다는 보고는 방금 들었습니다만, 괜찮으십니까?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어쩐 일?”  그렇게 되묻는 그의 눈가에는 주름이 잡혔다. 수사관을 역으로 심문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예, 예?”  “여기서 내 학생 두 명을 잡아갔지.”  “아~ 예! 그 분은 지금 바깥 소파에 편히 계십니다!”  뽀글머리는 말했다. 데큘레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실비아는 소파에 앉아서 숙면 중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별 탈 없이 매듭지으려면. 
 “나는 분명 둘이라 말했을 터인데.”  “······예?”  “나와라, 이프린.”  그는 이프린에게 말했다. 당황한 뽀글머리가 벌떡 일어났다. 
 “저, 안 됩니다!”  “······.”  데큘레인은 침묵했다. 그 압박에 지레 겁먹은 뽀글머리는 묻지도 않은 말을 이었다. 
 “저, 저 아이가 속이는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지.”  “이제부터 그걸 알아가려고······.”  데큘레인은 그런 수사관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 푸른 눈에는 사람 숨을 틀어막는 재주가 있었다. 
 그가 말했다. 
 “이름.”  “······예?”  “네 이름.”  “아 저 그게······.”  “세 번은 묻게 하지 말지.”  데큘레인의 시선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건방지게.”  “죄, 죄송합니다! 에코른 입니다!”  그때, 마침 소식을 들었는지 책임자가 달려왔다. 
 “어, 어어! 교수님! 여기 계셨군요! 야 이 새끼야! 허리 안 숙이고 뭐해! 
그 흑수 놈이랑 피터지게 싸운 교수님이신데!”  “아, 예. 안 그래도 그러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책임자와 수사관은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데큘레인은 그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이프린에게 말했다. 
 “이프린. 일어나라.”  “네······.”  이프린은 쭈뼛쭈뼛 일어섰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실비아는 심문실 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가지.”  “““안녕히가십쇼!”””  데큘레인은 통로를 걸었고, 경찰들은 그를 볼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실비아는 그 대우가 익숙한 듯했지만, 이프린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바깥의 도로에는 두 대의 차량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는 실비아, 다른 하나는 데큘레인의 것이었다. 
 “······이프린.”  차에 오르기 전. 데큘레인은 이프린을 돌아보았다. 
 “네.”  “저 수사관에게 빼앗긴 것이 있나.”  “······아뇨.”  이프린은 로브 안 주머니의 편지를 움켜쥐었다. 데큘레인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약속을 했다면 지켜야지.”  데큘레인은 그대로 차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문을 닫기 전에, 이프린이 물었다. 
 “저······.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실비아도 궁금한 눈치였다. 
 데큘레인은 옅은 숨결을 내쉬고 대답했다. 
 “너는 알 필요 없다.”  그렇게 답하는 데큘레인의 음성은 피곤에 젖어 있었다. 이프린과 실비아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다들 떠나라. 오늘 일은 그 누구에게도 함구하도록.”  데큘레인의 운전기사가 조수석 문을 닫았다. 그는 차에 올라 떠났고, 실비아도 자신의 차에 탔다. 
 이프린 혼자만 인도에서 멀뚱멀뚱 차를 보고 있었다. 
 “데려다줄까.”  “엉? 아, 괜찮아. 나는 걸어서 갈게. 마차나 차같은 건 타면 멀미 하더라고, 나는.”  “그래.”  부우웅─ 실비아의 차에 시동이 걸렸다. 그 두 사람의 차는 금세 도로 너머로 사라졌고, 부러운 듯 지켜보던 이프린은 뚜벅뚜벅 다리를 움직였다. 
 “하아······.”  오늘의 밤바람은 조금 무거웠다. 너무 드라마틱한 상황을 겪었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온몸이 물에 젖어 흐물거리는 것 같았다.“하.”  헛웃음이 새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인정해준 사람을 난생 처음 만났는데, 그게 ‘로하칸’이라니. 온 세상에 소문이 파다한 그 최악의 범죄자라니. 
 “편지 안 보내면 몸이 터지는 건 아니겠지······.”  이프린으로서는 여로모로 복잡한 하루였다. 
 “아 진짜 숨막힌다······. 울고 싶어······.”  ······. 
 실비아는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심스레 창문을 열었다. 스며드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언젠가, 베르흐트에서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놀랄 것 없다. 살상에만 특화된 무기이고 마법이니. 
 ─이 세상에 유용한 건, 실비아. 너같은 마법사의 재능이다. 마법은, 사람을 죽이려 만들어진 것이 아니지 않냐. 
 데큘레인의 그 말. 
 그때에는 그저 자신의 재능을 치하하는 줄 알았지만. 
 그의 노력을 깨달은 지금은. 
 조금은 다르게 와닿고 있었다. 
 해결. (1)  보름달이 맑은 안개를 흩뿌리는 밤. 
 실비아는 저택의 뒷뜰에서 조용히 생각하고 있었다. 
 “······.”  오늘,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가 수석교수이면서도 이론에 빠삭했던,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 능숙했던 그 이유를. 
 ─어릴 때 신동이라며 찬양을 받던 아이가, 자라면서 결국에는 평범해지는 자신을 느낀다면? 
 재능이 부족했던 그는 그 누구보다 강하게 노력했고, 이론이라는 왕도를 걸었다. 직관이 흔들렸기에, 톱니바퀴처럼 정교한 논리에 몰두했다. 
 ─저보다 못났던 아이들이, 어느새 저만치 앞서나가는 것을 본다면? 
 문득, 실비아는 떠올린다.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게 되는 슬픔. 어떤 벽에 가로막힌다는 무서움. 
자신보다 못난 사람이 자신을 추월할 것이라는 두려움. 
 나는 그 전부를 극복할 수 있을까. 
 ─허섭스레기라 비하하던 그들이, 언젠가 자신을 비웃어대는 상상을 한다면? 
 상상해보자. 만약 이프린이 나보다 더 나은 마법사가 된다면······. 
 실비아는 입을 앙다물고 볼을 부풀렸다. 
 “······건방진 이프린.”  가능성은 조금도 없는 일이지만, 생각만으로도 어지럽다. 
 그렇기에 더욱 놀랍다. 데큘레인은 이 감정을 노력으로 극복한 것이니. 
 “······.”  상념을 마친 실비아는 다시 명상에 몰두했다. 
 고요히 호흡하며 단전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다채로운 색조가 그녀의 안광을 알록달록 물들였다. 
 이윽고, 기원(起源)이 구현되었다. 
 밤의 어둠이 게워지며 밝음이 들어섰다. 지상에 꽃이 피었고, 나비가 날아다녔다. 따스한 바람이 불었고, 풀밭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녀의 ‘삼원색’이 구축한 풍경. 그녀가 품은 심상이 정원을 물들인 것이었다. 
 이 영역에서는 그녀의 색이 곧 자연법칙(自然法則)이었다. 
 “······.”  그 마법의 들판에서 실비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언젠가, ‘마법사의 행운’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타고난 재능. 
 두 번째는 걸맞은 노력. 
 세 번째는 자신의 뮤즈. 
 재능은 이미 알았고, 게으르지도 않았지만, 세 번째는 필요치 않다 생각했다. 
 뮤즈(Muse). 
 마법사에게는 특히 ‘영감’ 혹은 ‘자극‘이라 불리는 제 3 의 존재. 
 이제 실비아는 깨달았다. 
 자신의 세 번째 행운이, 조금 뒤늦게 다가왔음을······. 
 * * *  어두운 새벽. 나는 어둠의 산 입구에 앉아 아이템 카탈로그를 펼쳤다. 
 ──[ 초급 아이템 카탈로그 ]──  1. 기록 메모장. 
 2. 캐릭터 돋보기 렌즈. 
 3. 부화기······  ──────────────  카탈로그는 그 단어 뜻처럼 ‘물품 목록’이다. 나는 카탈로그를 소모하여 이 물품 중 하나를 얻을 수 있다. 
 단, 게임 플레이에 드라마틱한 영향을 끼칠 물건은 없다. 그저 조금 편리하거나 특이하거나 할 뿐. 
 ▶2. 캐릭터 돋보기 렌즈. 
 나는 「캐릭터 돋보기 렌즈」를 골랐다. A4 용지 크기의 카탈로그가 뿅- 하고 렌즈로 변했다. 
 “······.”  안경테도 뭣도 없이 렌즈 딸랑 하나. 
 당황스러웠지만, 염동으로 대충 눈두덩이에 얹으니 단안경처럼 되었다. 
 부스럭— 부스럭─  때마침 풀숲을 밟는 인기척이 일었다. 나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  눈이 마주치자 놀라는 목소리, 그리고 특유의 하얀 갑옷과 망토 차림이 나에게 익숙했다. 
 돋보기 렌즈는 그녀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한 개 파악했다. 
 ──「영원한 겨울」──  ◆ 등급  :고유  ◆ 설명  :영원히 얼어붙은 계절. 
 :혹독할수록 더욱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꽃. 
 ───────  고유 등급의 특성, 「영원한 겨울」. 
 율리가 말했다. 
 “교수님도 계셨군요.”  “왜. 있으면 안 되나.”  나는 일부러 쌀쌀맞게 되물었다. 율리는 멋쩍은 듯 뒷목을 긁적였다. 
 “아니요. 다만 소문을 들었습니다. 로하칸과 마전을 벌이셨다는······ 오늘은 쉬실 줄 알았습니다.”  이사장이 직접 어둠의 산 감시를 부탁했다. 
 자기도 황실에서 내려온 명령이라는데, 혹시 로하칸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나 뭐라나. 
 “······율리 너는. 기사단장이 이런 잡무도 맡나.”  “단장이기에 솔선수범하는 것입니다.”  “그 말대로라면 전쟁이 일어나면 지휘관부터 다 죽어야겠군.”  “아! 좋은 질문이십니다. 그것에 대한 해답은 기사교본 제 3 권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  나는 「초급 연성」으로 의자를 만들었다. 율리는 내 눈치를 주춤주춤 살피다가 앉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나를 힐끔거렸다. 
 “할 말이 있나.”  “아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운 저편에서 바람이 밀려들었다. 코끝에 짙은 마나와 풀냄새가 아른거렸다. 
 그때 율리가 물었다.“폐하 교습은 이제 다음주 이십니까?”  보통 교습 일시는 황제 마음이지만, 달에 1~2 번이 전통이다. 
 하여 다음 교습은 다음주 월요일이다. 
 “할 말이 없다면서.”  “······.”  율리는 입을 다물었다. 눈만 깜빡거리며 숲 속을 들여다보았다. 어떤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 귀가 쫑긋거렸다. 
 사주 경계에 매진하는 모습이었다. 
 “······흠.”  나는 회중시계를 보았다. 
 새벽 1 시. 
 교대까지는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다. 
 “율리.”  “예.”  “심심한데 체스나 두겠나.”  “······지금은 임무 중입니다.”  율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히 화가 났다. 
 “임무는 무슨. 로하칸이 이곳에 다시 돌아올거라는 의견은 어떤 바보의 것인지 궁금하다.”  “······.”  그러자 율리는 뭔가 찔린 표정이 되었다. 흐읍─ 숨을 들이키더니 계속 숨을 참고 있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너구나.”  “아, 그게······.”  “너도 참 멍청하다.”  “그, 기본입니다. 범인은 범죄현장에 돌아온다는······.”  “로하칸은 범인이지만 범인이 아니지. 나같으면 입구를 지키는 게 아니라 산 전체를 샅샅이 뒤지겠어. 어둠의 산에 들어온 목적을 알아내는 것이 최우선이니까.”  “······.”  율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피식 웃은 나는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새벽 4 시가 되었을 때. 
 ─프렌하임 기사단장 율리. 이만 철수하도록. 
 율리의 수정구슬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사크의 음성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정중하게 대답한 율리는 곧 나를 돌아보았다. 
 “······.”  율리의 배낭에서 체스판이 나왔지만, 나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어······ 응······.”  율리가 내 눈치를 힐끗 살폈다. 
 그럼에도 반응이 없자, 혼자서 두기 시작했다. 
 탁─ 탁─ 탁─  처연히 기물 움직이는 소리가 웃겼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 체스판을 보았다. 일전에 내가 선물한 것이었다. 
 “그렇게 두면 진다.”  “······그렇습니까~?”  율리는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나는 책을 덮고 의자를 돌려세웠다. 
 체스판을 사이에 둔 채, 율리를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잘 들어라. 처음부터 교습을 해줄 터이니······.”  율리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힘차게 답하는 얼굴에는 진지한 열의가 엿보였다. 
 진심으로, 체스 고수가 되길 원하는 듯했다. 
 * * *  이튿날. 
 나는 아침부터 이사장의 호출을 받았다. 개인 집무실 99 층으로 올라오라는 명령이었다. 
 “교수님! 여기 편지함이에요!”  그러나 그 전에, 알렌이 후원번호 39953 의 편지함을 전달했다. 
 문자 그대로 ‘편지함’. 내가 후원한 마법사들이 보내온 편지였다. 
 “그래. 수고했다.”  “네에!”  나는 편지함을 들고 100 층으로 올라왔다. 100 층은 그 플로어 전체가 [ 이사장 집무실 ]이었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거대한 집무책상이 떡하니 보였다. 
 “······.”  이사장은 그 위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묘사를 하자면, 얼굴만 기댄 게 아니라, 몸 전체를 책상에 누인 채, 새우처럼 웅크린 채, 커다란 꼬깔모자를 이불 삼아 자고 있었다. 
 “쿠르르르르르······.”  그 풍경을 보던 나는 문득 이사장의 혈통을 떠올렸다. 
 “흐으으으으응······. 
 지금으로서는 나만 아는 사실일 테지만, 이사장은 요정과 인간의 혼혈이다. 
거인족만큼이나 희귀한 혈통으로, 아마 전세계에 이사장 한 명 뿐일 것이다. 
 “쿠르르르르르······.”  굳이 책상 위에서 자는 이유는, 요정은 높은 곳을 좋아하기에. 
 “흐으으으으응······.”  “어휴.”  잠꼬대가 요란했다. 호흡장애가 의심되었지만, 근처 의자에 잠자코 앉아 기다렸다. 마침 할 일도 있었다. 
 나는 편지함을 열었다. 그리고, 그 내용물을 기대하며 손을 넣었다. 
 “······?”  잡히는 편지가 한 장 뿐이었다. 
 왜? 
 혹시 몰라 편지함을 위 아래로 흔들었다. 
 털털─ 털털─  먼지만 가득하다. 
 내 분명 서른 명은 후원했을 터인데. 아무리 익명의 후원이라도 보답 편지 정도는 보낼만 하지 않나. 
 ······하긴. 
 마법사란 원래 이런 족속이지. 애당초 후원 자체도 훗날 돌려받는 것을 전제로 하니. 
 나는 한 장의 편지라도 뜯었다. 
 [ 익명의 후원자 님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루나 가문의 이프린입니다. 후원자 님께서 재능을 알아주신 보잘 것 없는 데뷰탄 마법사이기도 합니다······. ]  그 이름이 익숙해서 헛웃음이 흘렀다. 
 [ ······저희 가문의 거처는 기댈 곳 하나 없는 작은 오두막입니다. 
오두막에서 사는 주제에 빚은 분에 넘게 많지요. 수시로 빚쟁이가 들락거린답니다. 
 저는 이름 뿐인 귀족의 딸이라 자연 속에서 자랐고, 많은 것을 스스로 구하는 삶에 익숙했습니다. 개구리와 토끼를 잡아먹었고, 낚시와 수렵은 특기 중 하나였습니다······]  다만 내용이 진지했고, 문체도 정갈했다. 
 내 입가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 ······노력하면 모든게 잘 될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제 생각처럼 잔잔한 바다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한순간 파도로 돌변하여 저를 밀어냈고, 부수었습니다. 제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단장이 끊어질 듯 통곡하셨던 것입니다······. 
]  편지에서 이프린의 목소리가 재생되는 듯했다. 
 [ ······저는 아버지의 꿈을 대신하고자, 할머니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마탑에 나섰지만, 하루하루가 살엄음판 같던 나날이었습니다. 
 그 절망 속에서 도래한 것이 당신의 후원이었습니다. 
 당신의 후원이, 차가운 하늘 아래 혈혈단신으로 살아가던 저에게 따스한 온기를 주었던 것입니다. 
 후원자님. 
 남부의 초원에는 로아호크라는 멧돼지가 있습니다. 들판을 자유롭게 뛰놀며, 유프란 깻잎만을 사료로 먹고 자라는 녀석들입니다······. ]  “로아호크?”  무심코 중얼거린 그때였다. 
 “흐으으응······.”  이사장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그녀는 잠이 가득한 얼굴이 나를 바라보았다. 
 “왔네······ 언제 왔대······ 자는데 왜 왔대······.”  늘어진 투는 평소의 이사장과 확연히 달랐다. 나는 편지를 안주머니에 넣고 말했다. 
 “부르셨기에 방금 도착했습니다.”  “······아 맞다······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암······.”  하품은 거의 1 분간 지속되었다. 그 뒤 느릿느릿 눈물을 닦았다. 
 “말하시지요.”  “흐아아암······. 심포지엄 문제 진척도에 대해 물어보려구······.”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마무리를 지을 예정입니다.”  “음······ 좋아요······.”  이사장은 곧 다시 잠에 들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 참······. 이번에 외부 초빙 교수가 루이나로 결정된 건 알죠······ 오늘 교수 환영식······.”  “예. 압니다. 상관 없습니다.”  “!”  이사장의 눈이 뿅 뜨였다. 그 동공이 고양이처럼 도드라졌다. 
 “상관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일까요! 둘은 앙숙 관계였는데?!”  “······.”  이렇듯 이사장은 소문, 그 중에서도 자극적인 가십을 좋아한다. 
 성격 자체가 그렇다. 일명 「호사가」. 
 “당시에는 그저 오해가 있었을 뿐입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그럴 수가! 거짓말하시네!”  “호출은 그것 때문입니까?”  “아뇨! 그건 아니고!”  이사장은 책상 아래로 내려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서랍에서 스크롤 한 장을 꺼냈다. 
 “여기요!”  [ 부유섬의 목소리 : 승격 시험 감독관 데큘레인 ]  부유섬에서 내려온 편지였다. 
 승격 시험 감독과 설계를 위하여 모나크 등위의 인력 ‘데큘레인’을 동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감독관.”  “네! 솔다 시험은 짧으면 1 주, 길면 한달인 거 알죠?! 모나크 등위는 부유섬에서 제안이 오면 필참이에요!”  “예. 압니다.”  “출세 했네요! 승격 시험도 관할하고! 아무튼, 좋아요! 그럼 갑시다! 교수 환영회 하러!”  이사장은 벌떡 일어나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띵─!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이사장이 말했다. 
 “만날 때마다 느끼는데, 데큘레인 교수는 키가 쓸데없이 크네요!”  나는 이사장을 내려보았다. 이사장은 거의 목을 꺾다시피하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사장님이 작은 겁니다.”  이사장은 아마 설정 상 150cm 초반일 것이다. 
 요정과 인간의 혼혈이기에, 진짜 요정만큼 작지는 않다. 
 “뭐라고요! 이 사람이 지금! 저는 딱 평균이거든요!”  “프하이르덴 백작을 만나면 기절하시겠습니다.”  “그 곰탱이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구요!”  “쉿. 조용히.”  나는 입술에 손을 얹었다.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척. 
 그러자 이사장도 따라서 숨죽였다. 
 “······왜요? 그 곰탱이한테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자이트 공은 여전합니다.”  “그럼 뭐 때문인데요? 말해봐요! 저 입 무거워요······.”  “······정 그러시다면.”  “얼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장도 긴장한 듯 침을 꼴깍 삼켰다. 
 “이사장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시끄럽습니다. 그래서 조용하라고 한 겁니다.”  “······뭐라고요?! 아 이 사람이 지금 장난치나!”  * * *  제국황실 대학마탑은 한 해에 2~3 회 외부 교수를 초빙한다. 그 인선은 왕국 마탑 출신일 수도 있고, 부유섬 출신일 수도 있고, 뜬금없이 모험가 출신일 수도 있다. 
 “다들! 외부 초빙 교수가 왔어요! 짝짝짝짝!”  이사장은 40 층의 파티홀에서 그들을 소개했다. 단아하게 치장한 여자는 루이나였고, 그 옆에 선 장발의 미남은 바르간이었다. 남자의 장발은 으레 현대에서 여신머리라 부르는 스타일이었다. 
 “루이나입니다. 연구 차, 또 경험을 쌓기 위하여 잠시 동안 이 마탑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바르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 중에서 바르간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이제 머지 않은 중간보스 ‘잿더미의 남작’······. 
 아, 저 바르간이 ‘무조건’ 중간보스라는 건 아니다. 
 평범한 교수 네임드일 수도 있고, 진짜 잿더미의 남작일수도 있다. 
 “두 분은 타국에서 엄청난 업적을 쌓고 돌아온 제국민이니, 다들 환영해주세요!”  이 게임에는 중간보스마다 각 개성이 있는데, 그중 잿더미 남작의 특색은 [ 난이도 랜덤 ]이다. 
 잿더미의 남작은 문자 그대로 형체가 없는 ‘잿더미’. 마력 등급 5 단계 이하의 네임드에 기생하는 특수한 중간보스다. 
 아마 이곳에 모인 교수 중 한 명에게 기생했거나, 기생할 준비를 하고 있겠지.“좋아요! 이제 다들 만찬을 즐기세요~! 루이나 교수 자리는 저기예요!”  그러는 사이 교수 소개가 끝났고, 루이나의 자리는 내 옆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데큘레인 교수랑 루이나 교수! 둘은 화해했다고 하니까요!”  이사장은 그렇게 외쳤다. 엘리베이터에서의 장난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그 탓에 교수들의 이목이 쏠렸으나, 정작 루이나는 태연했다. 
 “들었어요. 이번에, 심포지엄 문제에 도전한다면서요.”  “그렇지.”  “괜찮겠나요. 그 심사위원은 무척 깐깐히 심사할 텐데요. 당신 본인의 생각이 아니라면, 그 해답을 증명하는 자리에서 탈락하게 될 거예요.”  나는 루이나를 돌아보았다. 루이나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도 못했다. 
 “루이나.”  “······왜 그러시죠? 저는 진심으로 보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안다. 네가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루이나의 표정은 오묘했다. 경멸인지, 조소인지, 비난인지. 
 아무튼 많은 것들이 뒤섞인 눈으로 내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 네가 알던 데큘레인이 아니다.”  “······그래서, 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오늘, 늦어도 내일이면 다 끝난다.”  “오늘?”  “그래. 마지막 검산만 남았지.”  언제 중간보스가 등장할지 모르니, 남은 잡무들을 가능한 빨리 처리할 생각이다.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았고. 
 “흐응······ 검산.”  루이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열심히해요, 보스.”  * * *  나는 환영회가 끝나자마자 77 층의 데큘레인 연구실로 올라왔다. 드넓은 테이블에 룬어 해석본과 거의 완성된 술식, 그리고 10 만 엘네 짜리 최상급 마석을 늘어놓았다. 
 [ 6. 어떤 고대 비문(碑文)에는 다음의 술식과 더불어 룬(Rune)이 새겨져 있다. 과거에는 룬어가 회로의 역할도 겸했다 하는데, 이 고대의 술식을 유추하시오. ]  이 6번 문제의 핵심은 룬어의 활용이었다. 다만, 룬어는 그 하나하나가 전부 회로로 쓰일만큼 대단한 문자는 아니었다. 
 문제는 룬어의 ‘조합’이었다. 
 말했듯이, 심포지엄의 6번 문제에 쓰인 룬어는 총 14 자. 
 그 중에서 회로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단 세 개 뿐. 
 그 세 룬어를 다른 룬어와 조합하고,  부족한 마력은 마석으로 충당하며,  「이해력」을 고도로 동원한 채 술식을 이루면······  ────! 
 공명. 진동. 떨림. 
 해답임을 알리는 룬어의 울음. 
 “······너무 오래 끌었다.”  꽤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였던 문항이 해결되었다. 아니, 검산이 마무리되었다. 
 나는 그 답안을 그대로 마법 스크롤에 이식하고, 서류 가방에 갈무리한 뒤, 마탑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차량 앞에 렌과 에넨이 대기하고 있었다. 
 참고로 이전 운전기사였던 제프는 총괄 사무직으로 승진했다. 
 “오셨습니까.”  “부유섬으로 가지.”  “예.”  ‘위자드 아카데믹’의 본사는 부유섬에 있다. 
 나는 이 답안지를 그곳에 직접 제출하러 갈 생각이다. 
 ······부유섬에 도착하여, 심포지엄 문제의 심사위원 목록을 보았을 때. 
 나는 루이나가 보였던 애매모호한 반응을 납득하게 되었다. 
 [ 심포지엄 심사위원 : 모나크 등위 루이나, 중독자 아스탈, 에티넬 등위 로제리오 외 4 인 ]  해결. (2)  “······사흘 간의 추적 결과.”  대륙 최고를 자처하는 제국 기사단의 본관.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부에 속하며, 최고위 안건만이 상정되는 ‘신화의 원탁’. 
 “로하칸은 이미 제도를 탈출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늘 그 원탁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심혈을 기울였던 로하칸 체포 작전이 공식적으로 실패한 탓이었다. 
 “물론 지방 기사단과 경찰에 협조를 요청했으니 검문은 착실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보고자는 성심의 기사 라웨인. 
 부단장 이사크를 포함한 13 명의 고위기사는 원탁에서, 그 외의 단원들은 주변석에서 그의 말을 들었다. 
 “폐하에게 보고서를 작성하여—”  그때였다. 
 끼이이이익──  회의실의 대문이 훤히 열리며 단단한 음색이 흘러들었다. 
 “보고서 따위는 필요 없느니라.”  모두의 눈이 크게 뜨였다. 
 회의실 저편에서 다수의 기사가 진입했다. 그들은 나란히 도열하여 길을 만들었고, 그 사이로 타오르는 듯한 아우라가 찬란히 발했다. 
 “물론, 너희보다는 정보국의 그림자가 더 정확할 터이나······.”  제국의 현 황제, 소피엔 예카테르 아우구스 폰 지브레인. 
 제왕의 위엄을 지닌 그녀는 진정 태양처럼 등장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기사단 전체는 직급고하를 막론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우렁찬 외침이 오히려 시끄러운 듯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터벅터벅-  그녀는 위풍하게 걸어 주변석에 앉았다. 
 “짐은 너희의 회의를 직접 구경하겠느니라. 로하칸은 선황 폐하의 원수이니 이 정도는 해도 되겠지.”  날벼락이었다. 
 보고자 라웨인은 잔뜩 긴장하여 이사크를 보았다. 이사크는 턱짓으로 계속하라 일렀다. 
 “······예. 로하칸은 도주 과정에서는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았지만, 데큘레인과 유의미한 마전을 벌였습니다.”  라웨인이 기록물을 제시했다. 데큘레인과 로하칸의 마전, 그 현장이 담긴 수정구슬이었다. 
 고오오오······. 
 수정구슬에 마력을 주입하자 험악한 풍경이 떠올랐다. 
 ─아니? 
 ─뭔가 착각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이게 어찌 데큘레인의······. 
 장내가 술렁였다. 
 그만큼 일대의 노면은 지극히 험악했다. 자연물은 모조리 파괴되었고, 내딛을 곳 없이 지리멸렬했다. 
 “이게 데큘레인과 로하칸의 마전이었다?”  소피엔조차 의외라는 투로 물었다. 라웨인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예.”  “확실한가.”  “예. 이미 마탑에서 분석과 검증을 마쳤습니다. 데큘레인과 로하칸의 혈액도 검출되었습니다.”  ······사족이지만, 데큘레인의 「미적 감각」은 이따위 ‘풍경 조성’에도 작용한다. 
 말인즉, 단지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피차간 마전의 결과’로 보여야 한다는 의도에 따라 완벽하게 환경을 조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의미한 성과는 데큘레인 뿐이었구나?”  이사크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로하칸이 그저 마법적 역량만 특출났다면, 제국이 잡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로하칸은 기사의 몸에 마법사의 정신이 깃든 자였다. 
 이사크의 입장에서도 로하칸의 무력은 강대했고, 그렇기에 더더욱, 데큘레인의 실적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용호상박이라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어이. 입이 있으면 말을 하지. 제국의 원수를 그리 시원하게 놓치고도 아가리를 닫는다면 짐이 이해를 하겠나.”  소피엔의 음색에는 분노보다 비웃음이 짙었다. 
 기사들은 고개를 숙였고, 이사크가 말했다. 
 “······유의미한 성과라기에, 데큘레인은 패배했습니다. 또한 그가 죽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로하칸의 자비 때문일 것입니다. 로하칸과 데큘레인은 과거 사제관계—”  “변명할때는 말이 많지.”  소피엔이 입가를 비틀었다. 
 “제 친우의 아내를 죽인 놈이, 고작 사제 간의 추억으로 자비를 베풀어? 
로하칸은 데큘레인을 고작 3 개월 가르쳤고, 그마저도 반년치 돈을 받고 도망갔다더구만.”  “······.”  “되었다. 앞으로 로하칸 척살은 너희보다 데큘레인에게 맡기는 것이 더 효율적이겠어. 여기 더 있어봤자 들을 건 없어 뵌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황궁의 기사들도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한바탕 태풍이 몰아친 원탁은 쑥대밭이 되었다. 
 이사크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고, 라웨인은 데큘레인의 오만방자했던 음성을 떠올렸다. 
 ─말을 들어라. 너희는 오히려 짐덩이일 뿐이니, 알아서 꺼지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그저 로하칸이 두려워 도망치려는 줄 알았습니다.”  라웨인은 미간을 짚은 채 말했다. 이사크가 그를 바라보았다. 
 “한데······ 참 알다가도 모를 노릇입니다, 그 인간은.”  데큘레인이라는 위인은 기사단에도 유명했다. 당장 율리가 기사단원이었던 시절, 애먼 신입들을 괴롭혔던 자가 데큘레인이었으니. 
 “······데큘레인이 제 기량을 숨겼던 것이었을 수도 있고, 다만 원래 그 수준이었으나 우리가 과소평가했던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더 확실한 사실은.”  이사크는 그리 말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리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오늘,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로하칸. 
 내 언젠가는 반드시, 그 흑수의 수급을 취하리라······. 
 “아무튼. 이 보고서는 수정이 필요할 듯하네요.”  그때, 어떤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제국의 천재 기사 ‘로즈’였다. 
동시에, 이사크의 원탁에 보고서가 살랑살랑 내려앉았다. 
 문서 제목은 [ 인물 보고서 ─ 데큘레인 ]. 
 이사크는 그중 특정 단락을 보곤 헛웃음을 지었다. 
 「전투력 : 예상 5등급」  “이놈이 5 등급이면······.”  아드린느조차 당장 데큘레인이 자신의 바로 아래 티어라 말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개소리라 치부했으나, 뒤늦게 경험한 지금은 차고 넘치는 발언이었다. 
 “빌어먹을 정보국 자식들.”  이런 인물 보고서는 보통 ‘제국정보국’이 배부하는데, 가끔 이럴 때가 있다. 
 황실 기사단에 쓸데없는 경쟁심리를 불태우며, 엿먹으라는 의도로 명백히 틀린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사크는 곧장 펜을 들어 수정했다. 
 「전투력 : 예상 1등급」  아드린느, 로하칸, 자이트 등 만인지상(萬人之上)들의 전투력이 0 등급─측정불가─임을 감안하면,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지. 
 “정보국에게도 직접 보고서를 수정하라 전달하라. 더러운 들개 놈들이, 요즘 얕은 수를 너무 자주 부린다······.”  * * *  부유섬의 하늘에는 구름이 없고, 태양과 가깝기에 풍경이 선명하다. 덕분에 탁 트인 공중의 경치가 아름다우며 다채롭지만, 정작 오가는 사람들의 면면이 심심하다. 
 온통 로브 차림의 마법사 뿐이니. 
 “심포지엄 문제, 6 번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나는 메지세이온 근처의 [ 위자드 아토믹 ] 본사에 도착했다. 
 “모나크 등위 데큘레인. 논문 확인했습니다.”  당당하게 논문을 제출했지만, 담당자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아마 하루에도 수십명의 중독자가 문제에 도전하는 탓이겠지. 
 “모나크 등위시니, 검수는 빨리 될 거예요.”  그게 끝이었다. 
 담당자는 아무 말없이 타자만 두드렸고, 나도 곧장 밖으로 나왔다. 
헤에에에엑─ 6 번 문제를─?! 따위의 반응을 기대한 것은 또 아니었기에. 
 “······?”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가려는데, 웬 익숙한 뒤통수가 눈에 띄었다. 
 부유섬의 마법 상점. 
 그 창문 너머에서 쫑긋거리는 정수리.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 작은 머리에 손을 얹었다. 
 “으아아! 씨발 뭐야!”  순간 예리엘이 몸을 토네이도처럼 흔들었다. 그리고는 주먹을 찌를 기세로 돌아보았다. 나조차 놀랄만큼 격렬한 반응이었다. 
 “어떤 변태색······?”  나를 올려다보며 말이 멎었다. 
 곧 예리엘의 오만상이 일그러졌고, 나는 절레절레 저었다. 
 “말버릇이 참 아름답군.”  “······무슨, 갑자기 머리를 만지니까 그렇지! 내 머리 만지지마······ 요.”  예리엘은 두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나는 피식 웃고 되물었다. 
 “부유섬에는 무슨 일이냐.”  “나도 마법사거든요~ 오고 싶으면 오는 거지 무얼.”예리엘은 중얼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방금까지 녀석이 보던 물품을 확인했다. 
 고급 마법서였다. 
 “사지 그러냐.”  “······못사요.”  “왜지.”  “등위가 딸려서.”  참고로 부유섬에는 구매제한이 있다. 마탑 졸업도 못한 솔다 등위인 예리엘은, 고급 등급의 마법서를 살 수 없다. 
 “······그래.”  나는 그 마법서를 직접 샀다. 가격은 5 만 엘네로 꽤 비쌌지만, 그대로 예리엘의 품에 안겨주었다. 
 “가져가라.”  “······진짜?”  “그래.”  “······내가 마법 배워도 된다고?”  예리엘이 되물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전의 데큘레인은 혹시라도 예리엘이 자신을 추월할까 두려웠겠지. 
두려웠기에, 예리엘의 배움을 막았겠지. 
 “배워라. 너도 이제 네 안위는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지.”  나는 그딴 쫌생이가 아닐 뿐더러, 무엇보다 데큘레인에게는 적이 많다. 
 그 적들이 예리엘을 인질로 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그래요. 뭐. 호신술 정도는 나도······.”  “참. 예리엘. 너에게 전할 것이 있다.”  당황하는 예리엘에게, 나는 두툼한 문서 묶음을 건넸다. 첨삭이 끝난 논문이었다. 
 “일전에 약속했던 논문 선물이다.”  “응? 아~ 그거?”  알렌을 닮았던 마법사 파니엔. 
 “그 마법사는 요즘 뭘 하고 있지.”  “······폐인이 신세지 뭐.”  예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폐인?”  “당신이 논문 가져갔잖아요. 그래서 거의 포기상태예요.”  “포기라니.”  “그 마법사 논문, 그대로 빼앗으려던 거 아니었나? 소식 없길래 그런 줄 알았는데요.”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첨삭일 뿐이다. 그대로 돌려줘라.”  “······응? 진짜?”  “그래.”  예리엘은 뭔가 놀라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걸 믿어야돼 말아야돼- 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제 가방에 논문을 넣었다. 
 “이제 어디갈거야요?”  “마탑에, 수업 준비를 하러 간다.”  “수업 준비?”  “그래.”  머지 않아 도래할 잿더미의 남작. 
 학생들이 놈에게 대응할 수 있도록, 최대한 실전적인 수업을 준비할 생각이다. 
 * * *  ······한편, 루이나는 한순간에 버려진 자신의 처지를 절감하고 있었다. 
 그간 제국마탑의 종신교수들은 자신을 데큘레인의 대항마라며 어화둥둥하였으나,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평범한 외부 초빙 교수로 들어온 지금.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을 무시했다. 
 이해는 되었다. 
 자신은 데큘레인에게 패배했으니.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23 층은 너무하잖아.”  교수 집무실이 23 층이라니. 
 당장 수업층과 그리 멀지도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일반 마법사와 마주칠 수도 있는 저층부라니. 
 이제 갓 정교수로 임용된 병아리한테나 어울리는 집무실이라니. 
 “하아······.”  알고 있다. 
 데큘레인이 준비한 굴욕은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놈이 무슨 짓을 하든, 어떤 수모가 기다리든, 이 이상 자신을 꺾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전부를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5 년이라는 세월은 그리 길지도 않다. 
 무엇보다 해당 계약서에는 ‘데큘레인이 이사장이 되면, 루이나가 수석교수가 되도록 성심성의껏 노력한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었으니. 
 “화장실이······ 집무실 안에 없네. 
 두리번거리며 화장실을 찾던 루이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집무실 안에 화장실도 없다니. 집무실 안에 화장실도 없다니······. 
 세수라도 할 겸 밖으로 나갔는데. 
 “어머?”  문득, 교수 한 명과 마주쳤다. 
 시아레였다. 
 데큘레인에 끝까지 대항했던 자신과 다르게, 초장부터 그에게 달라붙었던, 그러나 훗날 자신이 출세하자 박쥐처럼 달라붙으려 했던 교수. 
 “루이나 교수. 집무실이 23 층이었어요?”  처음부터 신경을 긁는 말이었다. 
 “······네. 이런 경험도 나름 중요하니까요. 재미있어요.”  루이나는 생긋 웃었다. 시아레는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로 끄덕였다. 
 “네네~ 그럼, 수고해요~ 경험도 열심히 하시구요. 밑바닥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도, 루이나 교수 말대로 재미있을 거예요~”  떠나가면서 쿡쿡- 거리는 비웃음이 들렸다. 루이나는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찬물 세수를 했다. 
 “진짜 짜증난다······ 도와달랄때는 언제고.”  후. 얼굴을 닦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비좁은 책상은 마법서 세 권을 올려놓기에도 벅차지만, 꾸역꾸역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똑똑─  누군가가 노크했다. 루이나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문이 먼저 열렸다. 
 “루이나 교수님. 소포가 왔습니다.”  “······.”  놓고 가라는 말도 안했는데, 책상 위에 띡 올려놓고는 돌아간다. 
 왕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푸대접. 왈칵 솟으려는 눈물을 억지로 누른다. 
 “익숙해지자. 익숙해지자······.”  그렇게 마인드컨트롤하며 소포를 뜯었다. 
 소포에는 [ 6 번 문제 해답 ] 이라는 글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아~ 이게 데큘레인?”  루이나는 피식 웃었다. 
 심포지엄의 6 번 문제. 고대 비문의 룬어 마법. 
 어떤 생각으로 도전했는지, 이제는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 우선, 6 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룬어에 대한 해석이 선행되어야 했다. 룬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나는 독자적인 해석체계로 룬어의 뜻을 추론하고 조합을 구성했다. ]  첫 페이지는 서론이었다. 
 [ 비문의 룬어 중에서도 회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단 세 개 뿐이었다. 
그것을 토대로 룬어를 조합한 결과, 다음과 같은 술식을 구현할 수 있었다. 
]  이 다음부터는 본격적인 술식이었다. 
 문자, 활자 따위로는 서술할 수 없는 흡사 외계의 영역. 
 루이나는 안경을 걸치고 해답지를 읽었다. 
 심사위원의 업무는 틀린 점을 찾는 것. 나름 즐거운 일이었기에, 루이나의 입가에는 이미 미소가 깃들었다. 
 “······어디보자”  처음에는 짓궃음과 호기로움이었다. 
 그러나 한 줄,  두 줄,  세 줄,  네 줄······. 
 서서히 읽어나갈수록 루이나의 표정은 굳어갔다. 
 룬어의 해석. 
 발상의 전환. 
 술식의 서술. 
 논리의 연결. 
 해답의 구성. 
 데큘리인의 풀이는 마치 흩어진 조각을 모으는 듯했고, 모든 과정이 그 성격처럼 깔끔했다. 
 비정상적으로 정갈했다. 
 이론적인 허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데큘레인은 ‘오직 세 개의 룬어만이 회로로 기능한다’는 발상을 토대로 귀납적인 추론을 시작하였으나, 결국에는 연역적으로도 완벽한 결론이 되었다. 
 그 결론을 마법진의 형태로 검증하는 치밀함마저 있었다. 
 “이게······.”  루이나는 관자놀이를 찌르는 듯한 두통을 느꼈다. 
 해답의 내용을 검산하는 것보다 먼저, 어떤 욕지기가 일었다. 
 ─나는 네가 알던 데큘레인이 아니다. 
 데큘레인의 가증스러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다. 
 이게 그의 해답일 리가 없다. 
 그가,  직접,  이 논문을 작성했을 리 없다. 
 “잠깐만 잠깐만······.”  루이나는 심호흡을 했다.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데큘레인, 이건 니 생각이 아니잖아······”  이것은 데큘레인의 업적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업적인가?도대체 누가, 데큘레인에게 이 업적을 주었는가? 
 아니, 어차피 ‘증명의 자리’에서 탄로날 거짓말인데, 왜? 
 그 의문에, 데큘레인의 목소리가 다시금 재생된다. 
 마치, 이게 해답이라는 듯이. 
 ─나는 네가 알던 데큘레인이 아니다. 
 “닥쳐!”  루이나는 해답지를 와락 움켜쥐었다. 이론적인 면에서 데큘레인은 자신을 능가했던 적이 없었는데. ‘그놈’의 도움이 있었을 때에도 나에게는 부족했을 터인데. 
 “······말이 안 되잖아. 니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 니가, 니가 어떻게·····!”  자신의 마음 속에서 불길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난생 처음, 아니 살면서 데큘레인에게 느끼리라 생각도 못했던 감정이었다. 
 “어차피, 다 들킬 거짓말인데 도대체 왜······!”  그따위 열등감과 질투를 부정하며, 루이나는 다만 데큘레인의 저의를 고민했다. 이 해답은 데큘레인의 것이 아니라 처절하게 부르짖으며, 증명의 자리를 생각했다. 그를 철저하게 검증할 방안을 떠올렸다. 
 “기다려. 이번 만큼은 네 뜻대로 안될거니까······.”  ······오늘. 
 루이나의 하루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 * *  예행연습. 
 마탑 23 층의 어두운 밤. 
 교수 루이나 집무실. 
 그녀는 아직도 데큘레인 논문의 검증 방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뚝! 
 짓누르듯 써내려가던 만년필이 부러졌다. 
 툭─ 툭─  문서 위로 코피가 흘렀다. 
 “······.”  루이나는 그 핏자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지러웠다. 
 심장이 망치질하듯 쿵쾅거렸다. 
 의식의 밑바닥에서 괴괴한 감정이 치밀었다. 
 무심코, 창밖을 보았다. 
 회색 구름에 집어삼켜진 달. 
 온통 암흑으로 물든 세상. 
 그 유리창에 비치는 자신이 이상했다. 
 “······?”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분명 코피였을 텐데. 
 피눈물이었나. 
 쏴아아아아······. 
 돌연, 어깨에서 정체불명의 입자가 일었다. 마치 재가 흩날리듯 매캐한 기류였다. 
 “!”  루이나는 급히 제 어깨를 돌아보았다. 
 멀쩡했다.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미쳐가는 건가······.”  루이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긴, 요즘 너무 많이 시달리긴 했지. 
 데큘레인에게 납치를 당하고, 거의 일주일 간 아무 것도 못 먹고 아사 직전인 상태에서, 그딴 굴욕적인 맹약까지. 
 정신이 멀쩡한 지금이 오히려 기적이었다. 
 “집에서 쉬자.”  탁탁- 루이나는 문서 더미를 정리한 뒤 가방 안에 넣었다. 불을 끄고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그렇게 그녀는 밖으로 나갔지만. 
 꿈틀─  그 어둠 속에서, 이유 모를 맥박이 이어지고 있었다. 
 * * *  수요일 오후 2 시. 
 이프린은 마탑의 스터디 룸에서 조별과제를 하고 있었다. 다만, 과제 전체가 마무리 단계였기에 거진 잡담 뿐이었다. 
 “원카드!”  “아 씹! 존나 비겁하네!”  유로잔, 데인, 제펠. 
 남자 세 명은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고, 실비아는 과제 검산에 열중하는 듯 눈을 감았으며, 이프린은 편지나 읽었다. 
 [ 이프린 루나에게. 
 편지는 잘 읽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재능을 믿습니다. 그러니 본인도 본인의 재능을 믿고, 독선적이지 않되 굳건한 길을, 휘둘리지 않고 걷길 바랍니다. 
 성심을 다하여 정진, 노력하다보면 필히 좋은 결과가 기다릴 것입니다. ]  “다섯 줄이네~”  자신이 보낸 열페이지 분량의 편지에 비하면 짧지만, 답장을 주신 것으로도 감지덕지다. 
 아무리 생각해도 로아호크 이야기─로아호크처럼 최고의 마법사가 되리라는 다짐─는 괜히 쓴 것 같으니까. 
 이프린은 만족하며 편지를 보관했지만. 
 “······어?!”  난데없이 큰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는 로브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저번 대학교 축제 때, ‘슬픈 날의 초상’이라는 연극을 보며 꼴사납게 울었던 그때, 어떤 신사님이 주었던 최고급 손수건. 
 “잠깐만.”  이 손수건에 수놓아진 문양과. 
 “이거.”  편지의 귀퉁이에 새겨진 무늬. 
 “똑같다.”  이프린의 동공도 그 무늬로 변했다. 
 이게 어떤 가문의 상징······ 같지는 않다. 무슨 고급 메이커인 듯하지만, 우연은 절대 아닐 것이다. 
 “아~ 잠깐만. 아~”  이프린은 머리를 움켜쥐고 고민했다. 
 그때 그 사람 얼굴이 어땠더라. 찌질하게 울고 있었어서 눈 마주칠 엄두도 못 냈는데. 
 “······설마.”  아 설마. 
 설마, 정말 지켜보고 계셨던 건가? 
 내 재능을 문자 그대로 ‘눈여겨’ 보고 계셨던 건가? 
 “흐음······ 그렇다면.”  오랜만에 설레는군. 
 재미있군. 
 이프린은 어떤 떨림을 느끼며 짐짓 태연히 턱을 쓰다듬었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시끄러워. 멍청한 이프린.”  실비아였다. 
 그녀는 집중이 깨진 듯 뾰루퉁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안 미안~”  이프린은 해맑게 사과하며 입을 다물었고, 실비아는 다시 과제 검산에 집중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귀와 눈꺼풀이 자꾸만 쫑긋거렸다. 뭔가 다른 풍경을 보고 듣는 사람처럼. 
 방금 입가도 삐쭉- 하고 움직였다. 
 “맞다. 너희 소문 들었어? 로하칸.”  “······!”  카드를 두던 남자 세 명이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이프린은 괜히 찔려서 허리를 곧추세웠다. 당장 그 현장에 자신이 있었으니. 
 “로하칸? 알지. 근데 그거 뭐, 우리 아빠도 안 알려주더라. 기밀이래.”  “데큘레인 수석교수랑 로하칸이랑 싸웠다는 소문이 있긴 하던데.”  “설마. 그래도 상대가 로하칸인데. 수석교수라도 급이 다를걸?”  다행히 남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곧 수업이네. 이제 슬슬 가자.”  “이프린. 실비아 씨. 너넨 안 갈겨?”  남자 세 명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때마침 실비아도 눈을 떴다. 
 “어어. 가야지 가야지.”  그들은 스터디 룸의 금고에 두루마리를 보관했고, 다 함께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실비아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그날 일은 비밀인거 알지.”  “당연한 걸 왜 묻니. 날 정말 바보로 생각하는거니?”  “응.”  “······.”  띵─3 층에 도착했지만, 이프린은 조금 뒤늦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복도 근처에서 대기하던 귀족 마법사들이 우르르— 실비아에게 달려든 탓이었다. 
 무슨 아이돌이냐. 
 “실비아 씨! 들었어요! 이번에 로하칸의 결계를 간파했다면서요?!”  “대단해요~ 나중에 강연 한 번—”  뭐래. 결계 간파는 무슨. 쟤는 내 생선 꼬치만 얻어먹었는데. 
 이프린은 투덜거리며 A-Class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늘은 또 뭐 하나보네.”  들어가자마자 풍경이 심상찮았다. 휘둘러보니 대학교 교정이었다. 
 마탑을 제외한 카페, 체육관, 수업관, 정원, 골목길, 상가와 식당 등등, 대학부지가 그대로 구현되어 있었다. 
 “오······ 어?”  별 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았던 이프린은 크게 놀랐다. 
 자신이 들어온 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텅 빈 정원 뿐. 
 스산한 기운이 등허리를 훑었다. 
 “오늘 귀신특집인가. 근데 이게 순수 원소랑 무슨 상관일까······.”  귀신도 사실은 순수 원소였다, 뭐 이런 건가? 
 ─아아. 들리십니까. 
 그때 하늘에서 목소리가 내려왔다. 조교수 알렌의 음색이었다. 
 ─3 시 정각이 되었으니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여나 입장하지 못한 데뷰탄이 있다면, 지각으로 인한 실격입니다. 
 1 초라도 늦으면 실격. 데큘레인 다운 방식이었다. 
 이프린은 귀를 쫑긋 세웠다. 
 ─오늘 수업 주제는 ‘실전에서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이곳을 가상의 결계라 생각해주세요. 여러분들은 현재 결계에 갇힌 처지이며, 목적은 탈출, 제한 시간은 180 분입니다. 
 “으응.”  나름 흥미로운 수업 방식이었다. 
 ─사방에는 결계가 생성한 마물이 존재합니다. 또한, 오늘 데큘레인 수석교수님은 여러분들의 아군이 아닙니다. 교수님은 여러분을 탈락시키기 위하여 일대를 배회할 것입니다. 
 “데큘레인이?!”  그 말을 듣자 이프린은 오히려 만족했다. 합법적으로 데큘레인에게 도전할 기회였으니. 
 ─물론 데큘레인 교수님 외 여러 교수님들이 모니터링하고 있으니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큰 위험에 처하는 순간 ‘탈락’임을 명심해주세요. 이번 수업은 성적에 분명히 반영됩니다. 
 아우우우우─! 
 설명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웬 하울링? 
 이프린은 그곳을 돌아보았다. 
 눈동자가 시뻘건 들개였다. 놈은 입에서 잿가루를 뱉어대고 있었다. 
 ─데뷰탄 여러분들의 실전적인 마법 구사를 기대하겠습니다. 자, 이제부터 수업 시작! 
 조교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프린은 팔찌에 마력을 모았다. 
 크르르르릉─!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 들개 놈에게 마법을 발현했다. 
 원소 조합은 ‘물’과 ‘바람’이었다. 
 촤아아아악──  그녀가 사출한 물은 초고압의 반월형으로 응축되며, 초속 500m/s 이상의 속력으로 치달린다. 
 비록 사거리가 짧긴 하지만, 그 근접 살상·절삭력은 웬만한 검기에 준하는 파괴계열의 순수원소 마법. 
 데큘레인이 암기하라며 가르친 「수월(水月)」이다. 
 케륵······. 
 들개의 몸 전체가 사등분으로 나뉘었다. 
 “훗. ”  이프린이 어깨를 으쓱인 그때였다. 
 “꺄아아악─!”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소리가 울렸다. 
 “앗, 어디니!”  이프린은 곧바로 내달렸다. 
 온몸에 바람의 원소를 받아들여 그 소음은 작게, 다만 속도는 빠르게. 
 금세 도착했지만, 너무 늦어버렸던 듯. 
 사람은 없고 어떤 쪽지 한장만 놓여 있었다. 
 [ 셀리 탈락 ]  “미안. 더 빨리왔으면 됐을걸.”  아쉽네. 
 혀를 찬 이프린은 그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움직였다. 
 * * *  ······수업 시작 40 분 경과. 
 사방에 산재한 위협 속에서도 실비아는 도도하게 걷는다. 몸을 숨긴다거나, 기척을 죽인다거나 하는 추태는 결코 없다. 
 오히려 본인의 품격을 가감없이 드러낼 뿐. 
 그 우아한 빛에 이끌린 환수 놈들은 이를 드러내고, 또 아가리를 벌리지만, 감히 태양에 도전한 대가는 참혹하다. 
 놈들 전부가 열기에 그을리며 처절히 산화하는 것이다. 
 “실비아 씨?”  그러던 중, 누군가가 실비아를 불렀다. 
 루시아, 주페른, 벡크. 항상 함께 다니는 귀족 패거리였다. 
 루시아가 물었다. 
 “결계 탈출, 같이 하실래요?”  “······.”  실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네, 뭐. 그럼 힘내세요.”  루시아도 형식 상 물었던 듯 그저 스쳐지났다. 아니, 그렇게 지나쳤다가 돌연 반대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실비아도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멀지 않은 지평선에, 월등하고도 위압적인 품격을 발하는 귀족이 있었다. 
 수석교수 데큘레인. 
 적으로 돌변한 지금은 그 어느 누구보다 두려운 상대였다. 표표한 기세에 짓눌린 실비아는 바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출렁─! 
 한순간 땅을 물로 변환하여 잠수했다. 
 “······.”  그 상태에서 숨을 죽였다. 
 뚜벅─ 뚜벅─ 거리는 발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꺄아아아악! 
 얼마 지나지 않아, 찢어질 듯 퍼지는 비명소리. 
 아마 루시아 패거리가 붙잡힌 거겠지. 
 저 녀석들은 참 멍청하다. 교수님의 강철은 달리기 따위로는 절대 피할 수 없거늘. 
 자세한 매커니즘은 알지 못하지만, 한 번 레이더에 걸리면 땅으로 꺼지지 않는 이상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게 내가 땅으로 꺼진 이유지. 
 실비아는 지하에 처박힌 채 가만히 기다렸다. 
 그런데 조금 바보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많이 바보 같았다. 
 ─멈추세요! 
 ─······이프린. 정면대결은 푼수나 하는 짓이다. 
 ─정면대결이 아닙니다. 저희는 네 명······ 어! 너희 어딜 가니! 돌아와! 
 듣자 하니, 이프린이 구해준 녀석들이 도망친 것 같았다. 
 이어서 채채챙-! 하고 뭔가 날카로운 소리가 스파크처럼 튀었다. 
 이프린도 뒤늦게 마법을 발현하는 듯했지만······. 
 ─악! 아악! 아 잠깐! 으악! 으아아아악! 
 ······저 녀석은 괜히 멍청한 게 아니란 말이야. 
 실비아는 이프린의 비명─의외로 끈질기다─을 들으며 웃음을 참았다. 
 * * *  ······수업 시작 120 분 경과. 
 “그래도······ 후회는 없어.”  겨우겨우 도망친 이프린은 욱씬거리는 몸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근데, 루시아 그 빌어먹을 연놈들은, 기껏 구해줬더니 도망을 가? 나 진짜 어이가 없네. 
 4 대 1 은 충분히 해볼법했는데. 
 “참자. 참자.”  이프린은 화를 삭이며 결계를 탐색·분석했다. 정면돌파를 빠르게 포기한 그녀의 탈출법은 결계 해체였다. 
 “마수 종류는 골렘, 들개, 박쥐······ 박쥐?”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박쥐떼가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  놈들을 응시하는 이프린의 시선이 가늘게 좁혀진다. 
 “······일정한 경로를 이루며 공전한다.”  이프린은 바람에 마력을 실었다. 한 조각 마력이 박쥐에 달라붙었다. 그 마력은 박쥐와 함께 넘실거리며 이프린에게 어떤 유의미한 사실을 전달했다. 
 박쥐의 임무는 적을 탐색하고, 그 정보를 데큘레인에게 전송하는 것일 테지만, 놈들은 불규칙한 공전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공전에는 반드시 그 ‘중심’이 있어야 하므로, 회전의 궤적을 토대로 근원을 예상할 수 있다. 
 이프린은 눈을 감고 일대의 풍경을 떠올렸다. 그렇게 조감하며 박쥐떼의 횡보를 계산했다. 
 그 결과······. 
 부스럭─  “악! 누구야!”  이프린은 식겁했다. 
 돌연, 구석에서 괴한이 튀어나온 탓이었다. 
 “이프린. 안 죽었네.”  다행히 실비아였다. 이프린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아······ 수업에서 탈락해도 죽지는 않거든. 아무튼 잘 됐다. 
앉아보렴.”  이프린이 제가 앉은 땅바닥을 가리켰다. 그러자 실비아는 마법으로 의자를 만들었다. 족히 1m 높이의 의자였다. 
 그 위에 앉은 실비아는 이프린을 굽어보았다. 눈높이가 순식간에 어긋난 것이었다. 
 “······거기서 내려오지?”  “말해.”  “유치하게 그럴래?”  “말해.”  “······에휴. 아무튼, 탈출하려면 이 결계를 해체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해체하려면-”  “체육관.”  실비아가 먼저 말했다. 이프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아네. 결계의 핵은 저 체육관에 있는 것 같아.”  이프린이 골목 너머에 드러난 체육관을 가리켰다. 
 “······.”  “······.”  말없이, 눈빛으로 나눠지는 대화. 
 곧 합의한 두 사람은 함께 체육관으로 걸었다. 
 들개와 박쥐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이며 무사히 체육관 근처에 도달했고, 벽면에 바싹 달라붙었다. 
 이프린이 먼저 창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체육관 한복판. 
 문자 그대로 ‘최종보스’ 가 있었다. 
 “쉿. 데큘레인이다.”  데큘레인은 수십 수백의 환수와 함께였다. 자세히 보니 무슨 책을 읽는 듯했다. 
 실비아가 눈을 게슴츠레 좁혔다. 
 “건방진 이프린.”  “아 좀. 지금은 데큘레인이 우리 적이잖니.”  “······.”  이프린은 체육관을 들여다보았다. 
 그 구조는 일단 상당히 넓고, 사방이 탁 트인 개활지다. 그리고 결계의 핵은······ 하필이면 데큘레인이 지키는 정중앙의 허공에 넘실거린다. 
 이는 데큘레인의 설계대로, 알렌이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실전예행연습. 
 난이도가 마냥 쉬울 리는 없다. 
 “둘 중 한 명이 시선을 끌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내가 끌게.”  “아니.”  실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해.”  “······네가? 괜찮겠어?”  이프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당연히, 자기 몸에 좋은 일만 하려는 줄 알았는데. 
 “이프린 너는 멍청해서 시선을 끌 수도 없어.”  “······참 나. 그래. 너는 어떻게 할 건데? 저 체육관에서 어떻게 시선을 끌어? 보렴. 사방이 탁 트였잖니. 저 교수도 그걸 알고 저기에 핵을 놓은 건데.”  “너랑 나는 달라.”  실비아가 붓을 꺼냈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반듯한 직사각형과 손잡이를 그렸다. 
 그 네모는 이내 번듯한 실체로 구현되었다. 
 “이 아래로 가. 저 체육관 안까지 연결했어.”  “······도중에 막히는 거 아니니?”  “지금 의심하는거야.”  실비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손사래를 친 이프린이 뚜껑을 열었다. 
 확실히, 무슨 지하벙커처럼 되어 있었다. 
 “이건······ 진짜네. 인정 인정.”  감탄한 이프린이 손바닥을 뻗었다. 하이파이브를 하기 위함이었다. 실비아는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건방진 이프린.”  “응? 왜? 하는 법 몰라?”  “나대지마.”  “······.”  “어서 들어가. 나올 타이밍은 알아서 파악해.”  “그래.”  이프린은 통로로 들어갔고, 실비아는 터벅터벅 걸어 체육관의 문을 열었다. 
 과연, 저편에 데큘레인이 있었다. 또한 온갖 재로 이루어진 환수들이 그녀에게 적의를 발했다. 
 “의논은 끝났나.”  데큘레인은 여전히 책을 읽으며 물었다.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탁— 그가 읽던 책을 덮었다. 그게 신호였던 듯, 체육관 안의 온갖 환수들이 실비아에게로 쇄도했다. 
 “······.”  실비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삼원색을 방출했다. 
 쏴아아아아───  그녀의 단전에서 기원한 색이 세상을 물들였다. 
 평범한 체육관이었던 일대는 그녀가 ‘그리는 대로’ 바뀌었다. 
 적녹청(赤綠靑). 세 줄기 물감은 서로 뒤섞이며 모든 색을 이루었고, 서서히, 체육관을 가득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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