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a 4
강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창수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나, 조원으로 누가 들어오든 간에 크게 상관이 없었다.
김창수가 스타트를 끊었기 때문일까.
곧바로 한 학생이 나섰다.
“나도 같이 껴도 될까?”
“헉.”
“쟤가 왜?”
“정상훈이 강민혁이랑 한다고?”
그런데 이번에는 김창수 때와는 반응이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정상훈이라는 이름의 그는 강민혁과 마찬가지로 입학 당시 엄청난 화제가 되었었다.
이제는 몰락해버린 마법 명가(名家)의 자식.
그리고, 마법 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사람이 바로 정상훈이었다.
정상훈.
그의 가문인 ‘정씨 가문’은 백 년 전만 하더라도 마법의 명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만큼 마법의 발견은 대단한 것이었고, 몇몇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마법이야말로 인간의 미래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정씨 가문의 위세는 약해졌다.
내부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강화 문명의 발전으로 인한 마법의 도태였다. 마법은 어느 순간부터 대세에서 밀려버렸고, 명가라는 말도 옛말이 되어 정씨 가문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드물어졌다. 시대의 흐름에 정씨 가문은 이제 ‘몰락해버린 과거의 명가’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백 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 명맥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정상훈의 아버지다.
어렸을 때부터 마법사로서의 훈련을 받은 정상훈은, 최근에 아버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너와 같은 반에 강민혁이 있다고 들었다. 강민혁이 연구해내 더블 캐스팅과 마법의 형태 변화는 마법 학계의 혁명이다.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최대한 강민혁과 친해지거라. 그런 천재의 곁에 머문다는 사실만으로도, 네가 마법적으로 얻는 게 많을 것이다.”
아버지의 신신당부.
사실 그 말에 짜증이 조금 일었다.
아무리 정씨 가문이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하나, 그래도 마법의 명가다.
그런데 반대되는 세력인 수호문의 장남에게 빌붙으라는 말이, 정상훈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난 아버지와 달라.’
정상훈의 아버지는 실패했다.
명가로서의 기반을 모두 잃었고, 과거의 위세를 되찾기는커녕 그의 세대에서 이룬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정상훈은 본인이 마법의 천재임을 안다. 발전하는 속도가 남들과 달랐고, 마법 학과에 입학할 당시에도 당당하게 수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강민혁의 도움이 없더라도, 자신의 힘이면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강민혁의 동의에 정상훈은 조별 과제에 합류하였다.
그날 오후, 조별 과제를 위해 조가 한자리에 모인 상황에 정상훈은 곧바로 본인의 생각을 말했다.
“사실 이번 주제는 내가 관심 있게 공부하던 주제라, 이미 완성한 결과물이 있어.”
“정말?”
김창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에 반해 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강민혁의 모습에, 정상훈은 속으로 웃었다.
‘어디 계속 그럴 수 있나 보나.’
“어. 내가 연구한 마법은 파이어 볼트인데, 파이어 볼트의 체계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더 간략하게 캐스팅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생각이 나더라고. 그래서 얼마 전에 실험해본 결과, 우리가 알고 있는 파이어 볼트보다 캐스팅 시간을 무려 10초나 줄일 수 있었어. 사실 원래는 개인적으로 발표할 생각이었는데, 때마침 과제를 받았으니 이걸 주제로 발표하는 게 어때?”
“헐.”
김창수가 입을 떡 벌렸다.
말이 10초지, 그 정도의 캐스팅 시간을 줄인 것은 대박이다.
1서클 마법인 파이어 볼트라는 사실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김창수는 얼른 정상훈이 제시한 자료를 확인했다.
“대박, 진짜 되겠는데?”
자료에 문제점은 보이지 않았다.
김창수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수석 입학이라면서 엄지를 치켜세우는 그의 모습에, 강민혁도 자료를 넘겨받았다.
‘진짜네.’
정상훈의 설명대로였다.
그가 제시한 자료의 내용대로 마법을 캐스팅한다면, 최소 10초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이건 정상훈은 알 수 없는, 강민혁만 알고 있는 문제였다.
‘하급 마법서의 체계와 동일해.’
클리스만의 세상.
그곳에서 읽었던 하급의 파이어 볼트가, 딱 이런 체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강민혁의 생각을 알 수 없는 정상훈으로서는, 의기양양해 보이는 표정으로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어때?”
리액션을 바라는 물음.
지금 이 순간, 정상훈은 자신의 자료가 부족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31화. 8. 몰락한 명가의 천재(2)
파이어 볼트의 캐스팅 간소화.
말로는 쉽지만, 사실 그건 마법 학과 1학년생이 완성할 수 있는 수준의 결과물이 아니다.
‘천재라 이건가.’
천재.
마치 특별하지 않은 결과물인 것처럼 말하는 정상훈의 모습에서, 강민혁은 천재의 자신감을 보았다.
확실히 소문대로였다.
강민혁은 마탑 건설을 계획한 이후로, 마법 학과에 재학 중인 인재들에 대해서 조사했다. 나중에 마탑으로 영입할 옥석(玉石)을 가려내기 위한 사전 준비. 그러한 과정에서 정상훈은 강민혁의 레이더망에 들어왔다. 마법 학과 수석이라는 타이틀만 하더라도, 그는 알아볼 가치가 있었다.
‘어떻게 할까.’
정상훈의 눈치를 살폈다.
격정적인 리액션을 바라는 표정에, 강민혁은 속으로 웃었다.
천재를 길들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가 바라는 것을 충족해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상대가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
미래의 인재.
정상훈의 영입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와의 관계에서 확실히 우위를 점할 필요성이 있었다.
“대단하네.”
“그래? 사실 연구하면서 조금 고생하기는 했어. 파이어 볼트야 워낙 잘 만들어진 마법이라, 기존의 체계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는 게 정말 어렵더라고.”
정상훈이 신나서 떠들었다.
살짝 달아오른 그의 얼굴은, 강민혁이 자신을 인정해주었다는 사실에 상당히 기쁜 모양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강민혁이 분위기를 깼다.
강민혁은 그의 자료에 적혀진 체계에 볼펜으로 줄을 긋더니, 새로운 체계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네 자료를 보니깐 불필요한 과정이 있는 것 같아. 바로 이 부분. 파이어 볼트의 마나를 분배하는 부분에서, 다소 복잡한 과정 때문에 시간이 지체돼. 이걸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게 새로운 체계를 도입하고, 속성을 부여하는 과정에서도 체계를 조금 다르게 진행할 필요성이 있어.”
슥슥-
강민혁의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자료 위에 새로운 공식이 덧붙여지는 모습에, 정상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 너 설마·········.”
정상훈의 발견.
김창수가 놀란 것처럼, 그건 분명히 대단한 것이었다.
정상훈의 아버지도 연구의 결과를 보고는, 정상훈이야말로 새로운 미래를 열 인재라고 말했다.
그런 대단한 발견임에도 정상훈은 굳이 강민혁에게 공개하는 것을 택했다. 자신의 역작(力作)이, 더블 캐스팅과 마법의 형태 변화에 비해서는 별 볼 일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렇게라도 강민혁 앞에서 자신의 재능이 진짜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천재의 자존심에서부터 비롯된 행동임과 동시에, 아직 혈기 왕성한 나이가 보여줄 수 있는 치기 어린 호승심이기도 했다.
그런데 강민혁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점점 완성되어가는 강민혁의 마법 체계를 보면서, 정상훈의 눈동자에서 번지는 파문이 점점 커져갔다.
“··················이렇게 몇 가지를 바꾸면 더 효율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이건 아직 실험을 거치지 않은 예상이지만, 이 정도의 체계면 기존의 마법보다 20초 정도의 캐스팅 시간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화(火) 속성도 조금 더 부여했기 때문에, 위력도 강해질 테고 말이야.”
탁.
펜을 놓았다.
강민혁이 제시한 마법 체계는 중급 마법서의 것.
너무 놀란 나머지 확인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정상훈을 대신해서, 옆에 있던 김창수가 자료를 확인했다.
“와.”
그가 입을 떡 벌렸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재능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도 마법 학과 내에서는 제법 실력을 인정받는 사람이다. 그러니 적어도 마법을 알아보는 안목 정도는 있었다. 마법의 체계를 꼼꼼하게 확인해본 결과, 그는 강민혁이 제시한 마법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거 미쳤는데?! 상훈이가 말한 것보다 캐스팅 시간을 10초나 더 줄였어!”
쿵!
정상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급히 김창수의 손에 있는 자료를 낚아챈 그는, 안에 내용을 확인하고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떴다.
“너·········.”
범인(凡人)은 천재들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천재라고 불리는 정상훈의 세상에서도, 강민혁이 해낸 일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당혹스러웠다.
강민혁 앞에서는 겨우 몇 주 만에 완성한 결과물처럼 말했지만, 하급 공식을 알아내는 데만 해도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결과물이었다. 사람들이 정상훈을 천재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정상훈 또한 자신의 결과물을 보며 본인이 천재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마법의 체계를 새롭게 형성하는 것.
그건 보통의 재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김창수가, 둘을 번갈아 보며 호들갑을 떠는 것이고 말이다.
“너네 진짜 미쳤어.”
김창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호흡 곤란이 올 것 같은 기분에, 정상훈은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이, 이걸 어, 어떻게 알아낸 거야? 원래부터 연구하고 있었던 거야?”
속으로 빌었다.
제발.
자신과 마찬가지로 몇 년의 시간을 투자했기를.
만약 그런 경우라면, 강민혁의 재능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따라잡지 못할 수준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니. 방금 네 자료를 보는데 보완점이 보이더라고. 그래서 그걸 수정한 거야. 이게 가능한 이론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실험할 가치는 있을 것 같지 않아?”
정상훈의 세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하늘 위의 하늘.
자신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재능을 목격했다는 사실에,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사실 강민혁은 정상훈을 배려한 말을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자신도 조사하고 있었고, 네가 연구한 결과 덕분에 새로운 공식을 생각해낼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강민혁의 아버지는, 후계자 수업을 가르치며 항상 이런 말을 했다.
“본인이 쥐고 있는 것의 가치를 절대 떨어트리지 마라. 네가 1을 가지고 있다면 2처럼 보이게 하고, 2를 가지고 있다면 4처럼 보이게 하라. 만약 상황이 너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면, 그게 우연이든 아니면 네가 만들어낸 필연이든. 그걸 활용하는 것 또한 네 실력이다.”
동의한다.
정상훈에게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주기로 한 이상, 어중간한 태도는 계획을 망칠 뿐이다.
“하, 하하······.”
정상훈이 허탈하게 웃었다.
아버지의 말에도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진실이, 지금은 강제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민혁은 진짜 천재였어.’
더블 캐스팅.
마법의 형태 변화.
사실 그건 대마법사들도 이루지 못할 엄청난 업적이다. 그래서 강민혁의 발표 영상을 확인하며, 정상훈은 강민혁의 업적을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신과 같은 나이. 당연히 또래에서는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정상훈으로서는, 강민혁이라는 존재는 상식을 모두 무너트렸다.
그래서 발악했다.
꼭꼭 숨겨 두었던 자신의 역작을 공개하면서까지, 자신의 재능을 강민혁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강민혁은 ‘천재의 세상’에서도 상식적이지 않은 녀석이었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어.’
그의 아버지는 정상훈을 잘 안다.
마법사로서의 재능을 타고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던 정상훈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를.
그럼에도 강민혁 옆에 있으라고 말했다.
더블 캐스팅과 마법의 형태 변화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척척 발명해낸 천재의 옆에 머문다면, 그에게서 떨어지는 작은 콩고물조차도 그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기연이 된다.
정상훈이 말했다.
“충분히 실험할 가치가 있는 것 같아. 그럼 이걸로 발표하자.”
강민혁을 인정했다.
하지만, 완전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당분간은 강민혁을 주시하자.’
정상훈.
그로서는, 강민혁이라는 상식 외의 존재를 받아들일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감시 1일차.
정상훈은 교수들의 질문이 대부분 강민혁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3서클 화염 마법 파이어 웨이브(Fire Wave)의 체계를 설명해볼 사람? 강민혁, 네가 한번 말해봐.”
“더블 캐스팅의 원리는 마나의 기억으로부터········· 이거 참, 더블 캐스팅을 연구해낸 사람 앞에서 설명하려니 민망하구나. 민혁아, 네가 친구들을 위해 직접 더블 캐스팅에 대해 설명해주겠니?”
과한 관심.
그중에는, 노골적인 의도가 드러나는 질문도 있었다.
“얼마 전에 내가 실험 도중에 그라운드 웨이브(Ground Wave)의 특이점을 발견했어. 땅을 뒤흔드는 체계에, 다른 마법을 융합시킬 수도 있다는 가능성. 만약 이게 성공한다면 그라운드 웨이브는 정말 강력한 공격 마법이 되겠지. 혹시 민혁아. 이에 대해서 네 생각은 어떻니? 그라운드 웨이브에 융합할 만한 마법은 있는지, 또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했으면 좋을 것 같니?”
그건 수업을 빙자한 연구였다.
이학범과 강필두가 강민혁과 같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다른 교수들의 관심이 상당히 커졌다.
그런데 대단한 건 그때마다 강민혁의 답변에는 막힘이 없다는 것이다.
강민혁은 연구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말해주진 않았지만, 그 외에는 모르는 것이 없어 보일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일반 학생의 지식이라고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 오히려 교수들도 모르는 지식을 말함으로써, 교수와 학생의 입장이 뒤바뀌는 경우도 번번이 벌어졌다.
감시 2일차.
1일차와 상황은 비슷했다.
강민혁은 완벽한 수업 태도를 보여주었고, 교수들은 강민혁을 학생이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로 대했다.
그리고.
“블러드 문 마탑에서 캐비넷 세트를 지원해주기로 했습니다.”
“영국 마법 협회에서 여러분들을 위해 간식을 지원해주었습니다.”
“프랑스 마법 협회·········.”
여러 마법 단체들의 물량 공세.
그게 강민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지 않았다.
학교를 떠나 외부의 반응만 보더라도, 강민혁의 재능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감시 3일차.
밝게 빛나는 강민혁의 모습에, 정상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제는 인정했다.
강민혁은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적어도 학문의 영역에서는 강민혁을 따라잡을 수 없어. 그건 나뿐만 아니라, 이 학교 전체에 해당해.’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강민혁은 그 행적이 언론에 드러난 사람이다.
17살까지 검을 수련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마법 학과에 입학하자마자 보이는 모습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도피성 입학인 줄 알았던 강민혁은 실제로 마법의 천재였고, 그에게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얻기 위해서 마법 학과의 교수들과 세계적인 마법 단체들이 호의를 베풀었다. 그런 대단한 사람임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 정상훈은 현실을 부정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지식과 실력은 별개야. 아무리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한들, 마법사로서의 실력은 떨어질 수 있어.’
실전 수업에서의 활약은 보았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강민혁의 경지는 1서클.
그렇다면 결국 강민혁의 마법적인 능력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상훈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강민혁이라는 사람 앞에서 자존심을 완전히 버리기 위해서는, 강민혁의 모든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실력을 확인하지?’
다행히도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며칠 뒤.
실전 수업의 교수인 백동석 교수가, 1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입식 대련을 진행했다.
32화. 8. 몰락한 명가의 천재(3)
1학년 학생들은 입식 대련이 처음이었다.
그간의 교육 과정은 대부분 이론을 공부하거나, 아니면 몬스터를 상대로 한 실전 수업이 전부였다. 인간을 상대로 마법을 사용해본 경험이 없는 그들로서는, 백동석 교수의 모습에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백동석이 말했다.
“입식(立式) 대련은 단어 그대로 서 있는 상태에서 서로의 마법을 겨루는 행위를 말한다. 몸을 움직여서 마법을 피하거나, 아니면 물리적인 데미지를 입히는 행위는 허용되지 않는다. 공방의 모든 과정을 마법을 통해 진행해야 하며, 룰을 어길 경우 그 학생의 점수는 이유를 불문하고 F등급을 부여하겠다.”
“질문 있습니다.”
“말해.”
“그러다 마법에 맞아서 심하게 다치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한 질문이었다.
현재 학생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마법으로 인한 데미지였다.
실전 수업이야 몬스터를 쓰러트리면 피해를 입을 일이 없지만, 마법사간의 대결은 조금 다르다. 둘 중 한 명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 그렇다면 연약한 마법사의 몸으로 마법의 화력을 버텨내야만 한다. 강화 전사야 피부가 단단해서 괜찮다지만, 마법사에게 그것은 곧 치명상을 의미한다.
백동석이 웃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 대련장 바닥에는 일정 위력의 마법을 자동으로 보호하는 실드(shield) 마법이 설치되어 있다. 정해진 위치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위험 지역에 마법이 접근하는 순간 자동으로 실드가 발휘되는 것이지. 그러니 입식의 룰을 지키는 건 본인의 안전을 위해서도 염두해야 할 부분이다.”
“예.”
학생들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이해한다.
이들이 마법사의 교육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지만, 아직 10대 후반에 불과한 아이들이다. 경험이 결여된 그들의 상상력은 두려움을 낳기에, 백동석 교수는 그들을 헌터로 단련시킬 의무가 있다.
마법 학과의 역할.
100년의 역사가, 아카데미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일이다.
“이번 대련에서 내가 확인하고자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마법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 그리고 언제 마법에 당할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얼마나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느냐다. 대련의 패배가 무조건적으로 낮은 점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마법사답게, 마법사다운 전투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설명이 끝났다.
백동석이 한발 물러서며, 두 학생을 지목했다.
“1번 2번, 앞으로.”
대련이 진행되었다.
1번과 2번은 엇비슷한 실력자였고, 둘은 화끈한 화력 대결을 펼치더니 결국 1번의 승리로 끝났다.
백동석의 말대로 사고는 없었다.
1번이 사용한 윈드 커터(Wind Cuttur)가 2번의 육체를 난도질하기 직전, 바닥에서 파란빛이 일어나며 실드가 형성되었다. 2번 학생은 화들짝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사고가 일어나는 불상사는 없었다.
“방금 2번은 아주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분명히 윈드 커더를 막을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늦었다는 생각에 결국 도중에 캐스팅을 포기했다. 그건 마법사로서 실격이다. 마법에 적중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찰나의 시간 동안 집중력을 잃어선 안 된다.”
박한 평가였다.
2번의 고개가 푹 숙여지는 것을 시작으로, 차례로 다음 대련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련이 진행되는 상황에, 13번을 배정받은 오진영은 힐끗 강민혁의 모습을 확인하며 친구에게 말했다.
“내 상대는 강민혁이겠지?”
“아마도. 번호대로 진행한다면, 13번인 네가 14번인 강민혁과 붙겠지.”
“재밌게 됐네.”
오진영이 피식 웃었다.
사실 그는 강민혁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민혁이라는 사람보다는, 그의 배경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것이 정확하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아직 어린아이였던 오진영은, 아버지를 따라 수호문의 입문 테스트를 보았던 적이 있다.
당시 오진영에게 수호문의 입문은 꿈이었고, 그렇기에 어린 나이에 정말 열심히 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강화 전사로서 진영이의 재능은 전무합니다. 그러니 헌터의 길은 포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최소한의 재능도 타고나지 못했다면, 일반인의 삶이 진영이를 위한 최선일 수도 있습니다.”
문전박대.
오진영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 수호문에 입단하던 그때, 오진영은 그 문턱마저도 넘어갈 수 없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다행히도 마법에는 재능이 있어서 마법사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지만, 수호문이라는 단어는 오진영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일까.
강민혁이 싫었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은, 강민혁이 수호문의 후계자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하여튼 가진 게 많은 녀석들은 개념이 없어. 수호문의 후계자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인데, 그걸 제 손으로 포기하다니. 배가 부른 거지. 누구는 아예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했는데, 강민혁은 마법 학과에 입학하고서 마법이 마치 별거 아닌 것처럼 행동하고 있잖아.’
짜증이 났다.
현재 마법 학과에는 오진영과 같은 부류가 많다.
수호문이라는 주류의 배경을 타고난 강민혁이, 마법 학과에서 엄청난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것.그게 심기를 건드렸다.
주류에게 비주류의 영역을 침범당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용납되질 않았다.
“강민혁이 1서클이라고 했던가.”
“당연히 1서클이겠지. 강민혁이 지식적인 부분에서는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마법 학과에 입학한 지 겨우 몇 개월 만에 2서클을 형성했을 리는 없잖아. 사실상 1반에서 가장 만만한 상대가 바로 강민혁이야.”
“그렇지?”
오진영의 웃음이 짙어졌다.
1서클과 2서클의 대결.
결과는 뻔했다.
서클의 차이는 대단하기에, 오진영은 강민혁을 압살할 자신이 있었다.
“이번 대련에서 저 건방진 강민혁을 아주 작살 내버려야겠어. 마법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마법사는 결국 실력으로 말하는 법이야. 머릿속에만 있는 지식은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없지.”
몸이 달아올랐다.
강민혁과의 대결이 기대되었다.
그리고 그건, 한편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정상훈도 마찬가지였다.
‘오진영과 강민혁이라.’
괜찮은 매치업이었다.
오진영은 마법사로서 실력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강민혁이 상대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강민혁의 실력을 확인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강민혁의 패배는 확정적이지만, 불리한 상황에서 얼마나 마법적으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마법사로서도 재능을 보인다면, 정상훈은 아버지의 말대로 강민혁의 곁에 머물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마법적인 성장을 위해서,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마침내 시작된 대련.
그런데 그것은, 기다렸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파이어 볼.”
콰앙!
화르르르륵!
강력하게 타오르는 화염 마법에, 실드의 보호를 받은 오진영은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모두가 당황했다.
강민혁의 승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민혁이 2서클 마법을 사용한다고?”
새롭게 밝혀진 사실에, 마법 학과의 학생들은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보통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게 있다.
학문의 재능을 타고나서 마법에 입문하자마자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보고도 믿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학문의 영역이란 그렇다. 그 학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느냐도 중요하지만, 타고난 재능에 따라 학문을 해석하는 수준의 차이는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강민혁을 인정했다.
강민혁이 마법을 배운 시간은 짧지만, 그래도 연구자로서의 재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강민혁이 2서클 마법을 사용하는 건, 정말 말이 되지 않는다.
“·········강민혁. 설마 2서클을 형성했나?”
백동석이었다.
그조차도 믿기지 않는 모양인지, 당황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간결한 대답.
그에 학생들이 당황했다.
파이어 볼을 직접 목격했기에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대답으로 듣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이게 말이 돼?’
동시에 떠오른 의문이었다.
2서클.
그건 육체적인 성장이었다.
초등학생이 대학생의 지적 수준을 보여주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초등학생이 육체적인 성장으로 대학생을 능가하는 것은 지적인 성장보다 힘든 일이다. 하지만 강민혁은 해냈다. 분명히 마법에 입문한 시기를 따져보면 아직 초등학생이라고 할 수 있는 그가, 벌써 2서클을 형성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안다.
2서클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며, 그동안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바닥에 주저앉은 오진영은, 전의를 잃은 채 멍하니 강민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마법의 천재라 이건가.’
학술 대회 우승으로 지식의 수준은 증명했다.
그런데 지금 이 대련으로, 강민혁은 본인의 마법적인 재능도 심상치 않음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보여주었다.
백동석이 말했다.
“·········오진영을 제압한 강민혁의 방법은 매우 훌륭했다. 상대가 미처 방어 마법을 사용하기도 전에 속전속결로 승부를 보는 것. 이게 실전이었다면, 오진영은 단 일격에 죽었을 것이다.”
대련이 끝났다.
대련장에서 내려오는 강민혁의 모습에, 1반 학생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깨달았다.
본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민혁은 더한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정상훈은 대련에서 깔끔하게 승리했다.
마법 학과 수석다운 실력이었지만, 그는 입식 대련이 진행되는 내내 강민혁의 모습을 머릿속에 떨쳐낼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강민혁이 2서클을 형성한 건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정상훈을 충격에 빠트린 것은, 2서클을 형성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마법의 캐스팅 시간 때문이었다.
오진영은 방심하지 않았다.
강민혁을 이기겠다는 열의가 있었고, 그래서 대련이 시작되자마자 마법을 캐스팅했다.
그런데 마법을 먼저 완성한 것은 강민혁이었다.
순식간에 마법을 완성해낸 강민혁의 모습에, 오진영은 감히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전의를 잃었다.
‘빨라도 너무 빨랐어.’
순간 자기와 비교를 해보았다.
만약 강민혁과 자신이 동시에 마법을 사용한다면, 자신의 실력으로 강민혁보다 빠르게 끝낼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다’였다.
마법 명가의 출신이며, 어렸을 때부터 마법을 수련한 자신조차도, 강민혁보다 캐스팅을 빠르게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충격을 선사하였다. 이번 입식 대련이 강민혁의 실력을 확인할 기회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한 의문에 빠지고 말았다.
이제 강민혁이 대단한 건 알겠다.
학문적인 부분이며, 마법적인 재능 모두 뛰어나다.
그러나, 이 의문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정상훈은 무턱대고 강민혁을 찾아갔다.
강민혁을 직접 상대하고 싶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강민혁. 나랑 한번 붙자.”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마법 학과의 수석이고, 1대1 대결만 따지자면 마법 학과 1학년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강민혁의 반응은 이번에도 예상과 달랐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강민혁이 웃었다.
“그래.”
그의 예상은 맞았다.
강민혁은 기다리고 있었다.
오진영을 압도적으로 무너트리면 정상훈이 보일 반응.
정상훈은 자신의 선택이 자의라고 생각했겠지만, 그의 선택은 강민혁의 의도에서부터 비롯되었다.
33화. 8. 몰락한 명가의 천재(4)
강민혁과 정상훈은 자리를 옮겼다.
마법 대련장의 경우에는 수업 시간 외에 사용이 금지되어 있지만, 최병호의 총애를 받고 있는 강민혁에게 불가능한 일이란 없었다. 전화 한 통에, 단단하게 닫혀있었던 마법 대련장의 문이 열렸다.
마주 서는 두 사람.
정상훈이 말했다.
“궁금하지 않아? 내가 왜 너를 상대해보고 싶어 하는지.”
“별로.”
“이유도 모르고 날 상대해주겠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너는 동급생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고, 그렇기 때문에 너와 대결하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너와의 대결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을 테니까.”
상대를 인정했다.
하지만 정상훈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마치 동등한 위치인 것처럼 표현하는 말이, 자신의 실력을 우습게 보는 것만 같았다.
“그래, 네가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직접 확인해보지.”
삑-
대련장의 시스템을 작동시켰다.
허공에 떠오른 카운트 다운에, 강민혁과 정상훈은 서로를 주시하며 마나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삐익-
대련 시작.
시작을 알리는 소리에, 강민혁과 정상훈은 동시에 캐스팅에 들어갔다.
화악-
허공에 흩뿌려지는 마나.
정상훈은 곧바로 더블 캐스팅에 들어갔다.
더블 캐스팅은 벌써부터 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고, 정상훈과 같은 천재들은 이미 지식의 습득을 마친 상태였다. 마치 원래부터 자신의 기술이었던 것처럼, 정상훈의 손놀림은 능숙했다.
정상훈의 캐스팅 속도는 학과 내에서 탑 클래스다.
본인이 먼저 마법을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갑자기 강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디그(dig).”
“?!”
훅!
순간 정상훈이 위치한 땅이 폴싹 주저앉았다.
정상훈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디그라는 마법을 처음 접하기도 하지만, 대체 어떻게 이런 빠른 속도로 마법의 캐스팅을 끝냈단 말인가. 디그로 인한 피해는 없었지만, 휘청거리는 무게 중심에 정상훈의 캐스팅이 잠시 중단되었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
어렸을 시절.
강민혁은 그에 대해서 배웠다.
마법사를 손쉽게 제압하는 방법은, 힘과 힘의 대결이 아니라 힘을 애초에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더블 캐스팅은 매우 효율적인 스킬이다. 하지만 동시에 두 개의 마법을 형성함에 따라, 캐스팅 시간은 조금 더 걸릴 수밖에 없다. 시전자가 모든 과정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마나의 기억이라는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니 말이다.
강민혁은 그 점을 공략했다.
동시에 사용하는 두 개의 마법 중 하나를, 공격 마법이 아니라 상대의 캐스팅을 방해하는 것을 택했다.
미세한 차이.
그것만으로 강민혁은 우위를 점했다.
최상급의 마법과 강민혁의 계산 능력이 더해지자, 순식간에 공격 마법이 완료되었다.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
치지직.
1서클 전기 계열 마법.
강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밝은 불빛이, 그대로 정상훈을 덮쳤다.
만약 이 일격을 당한다면 승부는 끝이다.
겨우 1서클이지만, 강민혁이 라이트닝 볼트를 사용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캐스팅도 결국 육체로 마법을 완성하는 행위. 라이트닝 볼트의 마비 효과가 정상훈이 정상적으로 캐스팅을 진행하지 못하게 만들 거야. 그 사이, 1서클 마법으로 정상훈을 끝낸다.’
일명 짤짤이었다.
마법사간의 대결.
오진영을 압도적으로 무너트리기 위해서 2서클 마법을 사용했지만, 사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마법사는 신체 스펙이 떨어진다.
1서클 마법만 효율적으로 사용하더라도, 상대를 제압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록(Rock).”
빡!
허공에 바위가 소환되었다.
그것은 정확히 라이트닝 볼트의 길목에 소환되었고, 라이트닝 볼트는 의도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재밌게 노네.”
정상훈의 표정이 굳었다.
땅바닥이 주저앉아 캐스팅이 중단된 순간, 그는 황급히 기존에 준비하던 마법의 캐스팅을 취소했다.
직감했다.
강민혁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그래서 기본 원소 생성 마법을 사용하였고, 상대가 마법을 사용하는 타이밍에 맞추어서 바위를 소환하였다. 록은 파괴력이 없는 마법이다. 하지만 좌표 계산을 통해 마법의 길목에 소환하는 순간, 아무런 효과가 없는 록이 실드의 효과를 보여주었다.
뛰어난 마법 활용법.
정상훈이 ‘실드의 안전지대’를 벗어나더니, 말을 툭 내뱉었다.
“네가 검사 출신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어. 지금부터는 내 방식대로 너를 상대해주지.”
위험을 감수했다.
고정된 위치는 실드의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동시에 상대에게 고정된 좌표를 노출하게 된다.
그래서 안전망을 버렸다.
본래의 위치에서 벗어난 정상훈은, 빠른 계산으로 두 개의 마법을 캐스팅했다.
“파이어(Fire), 아쿠아(aqua).”
팍!
푸으으으.
두 원소의 조합.
아주 빠르게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두 개의 원소를 부딪치자 시야를 가리는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 안으로 사라지는 정상훈.
둘의 대결은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정상훈은 천재였다.
1서클 하급 마법을 개발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마법사가 싸우는 방식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좌표를 노출하지 않겠다 이건가.’
좌표 계산.
마법사가 캐스팅에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이유다.
그런데 정상훈은 자신의 안전을 포기함으로써, 강민혁이 자신을 쉽게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파이어 볼.”
콰앙!
화르르르르르륵!
정상훈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정상훈은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기에, 강력한 범위 마법을 예상 위치에 떨어트렸다.
강민혁이 안전지대를 벗어나도 상관없다.
안전지대에 있다면 공격을 당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파이어 볼의 범위 데미지는 강민혁에게 어떻게든 피해를 입힐 것이다. 그래서 본인의 위치를 숨기고, 범위 데미지로 공격하는 방법을 택했다.
정상훈의 머리 회전은 빨랐다.
그러나 강민혁도 그와 마찬가지로, 안전지대를 버린 지 오래였다.
‘제법이네.’
순간적인 마법 활용은 감탄이 나왔다.
마법사로서 고고한 자존심을 가진 그가, 강민혁의 짤짤이에 대응하는 방식은 매우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감각의 대결은 내게 유리하다.’
시야가 가려진 상태.
청각이 필요한 지금 이 시점에서, 강민혁은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스톤 볼(Stone Ball).”
타다닥!
보통의 스톤 볼과는 달랐다.
사람 머리만 한 바위를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돌멩이들이 사방으로 퍼졌다.
마치 크레모아 같았다.
강민혁은 자신의 귀에 마나를 집중시켰고, 예민한 감각으로 돌멩이에 걸리는 소리를 포착했다.
팍.
몸에 닿는 소리.
강민혁의 눈이 번뜩였다.
“파이어 볼트.”
화르륵!
빠르게 시도된 공격.
타오르는 화염에 시야가 걷히면서, 당황으로 얼룩진 정상훈의 표정이 보였다.
그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수증기로 시야를 가려놓았더니, 청각을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찾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상식 밖.
강민혁은 마법사처럼 싸우지 않았다.
마법을 활용하되, 그 생각은 마법사와 검사의 경계선에 있었다.
“제길.”
정상훈이 이를 악물었다.
파이어 볼트라도 직접 허용 당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그는 준비하던 마법을 취소하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로 몸을 날렸다.
이미 도박은 시작되었다.
안전지대에서 벗어난 순간부터, 이 싸움은 마법을 한 번이라도 맞는 순간 게임이 끝날 것이다.
정상훈의 서클이 마나를 강하게 뿜어냈다.
정상훈의 머리가 열리며, 정말 빠른 속도로 마법이 캐스팅되었다.
더블 캐스팅은 포기했다.
지금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는, 두 가지의 마법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빠르게 끝내야만 한다.
“윈드 피스트(Wind Fist).”
화악!
바람이 불었다.
수증기가 걷히며, 거대한 바람의 주먹이 주변을 휩쓸었다.
그의 캐스팅 속도는 정말 빨랐다.
강민혁처럼 최상급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는 2서클 마법을 마치 1서클처럼 사용했다.
최상위의 재능.
정상훈이 자신의 재능을 여실히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만약 강민혁이 평범한 마법사였다면, 정상훈의 반격에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은 힘으로 찍어누른다.’
정상훈이 확보한 시간적인 여유.
그것은 강민혁이 허락한 것이었다.
정상훈의 대응은 빠르고 신속하였으나, 강민혁은 그것을 넘어서는 힘이 있었다.
“파이어 랜스(Fire Lance).”
화르륵!
쾅!
화염의 창.
그것이 윈드 피스트를 집어삼키더니, 정상훈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작렬하였다.
정상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까지도 열을 올리며 전투에 임하던 그가, 지금만큼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너·········.”
파이어 랜스.
파이어 볼의 상위 마법으로서, 현재 마법서에 등록된 파이어 랜스의 등급은 3서클.
고로.
“3서클 마법사였던 거야?”
상식이 다시 한번 와르르 무너졌다.
그건, 정상훈으로서는 완벽히 굴복할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였다.
대련은 끝났다.
승리를 자신했던 정상훈은, 허망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졌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냥 진 게 아니다.
전투의 순수한 의미에서도, 그리고 마법사로서도 그는 강민혁에게 완벽히 패배했다.
‘강민혁의 마법 활용 능력은 대단했어. 캐스팅 속도 또한, 나보다 빠르면 빨랐지 느리지 않았어.’
게다가.
‘3서클 마법사였다니. 2서클인 것도 충격적인데, 대체 어떻게 3서클을 형성한 거지?’
마법사는 서클로 말한다.
강민혁이 자신이 3서클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순간, 정상훈은 강민혁을 받아들이 수밖에 없었다.
강민혁의 의도는 먹혔다.
강민혁은 견제를 통해 충분한 시간을 벌고, 일부러 3서클 마법을 사용하였다. 전에 마법서 보관서에 들렸을 때, 강민혁은 양쪽 세계의 마법을 비교하기 위해 마법서 몇 개를 확인했었다. 그중에 파이어 랜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급의 등급이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캐스팅을 끝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쪽 세상에서 사용하는 마법보다는 캐스팅 속도가 빨랐다.
3서클.
강민혁의 선택은 정상훈을 굴복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의도대로, 정상훈은 백기를 들었다.
“사실대로 말해줘. 언제 3서클을 형성한 거야?”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자신도 이루지 못한 경지에 올라섰다는 사실이, 정상훈으로서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학문에서는 자신이 밀린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마법적인 능력조차도 상대가 우위라는 사실은, 정상훈이 생각하는 가장 최악의 결말이었다.
강민혁이 말했다.
“며칠 전에 성과가 있었어.”
“·········내가 알기로는 넌 마법 학과에 입학하고서 마법을 익혔다고 들었어. 그게 사실이야?”
“그래.”
“미치겠네. 평생을 마법에 바친 나도 아직 2서클인데, 넌 겨우 몇 개월 만에 3서클에 오르다니.”
압도적인 재능.
정상훈은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알려진 사실만으로도 강민혁의 능력은 대단한데, 그 안을 들여다보니 심해(深海)처럼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강민혁은 그런 정상훈을 보았다.
정상훈에 대한 평가.
‘그는 마법사로서 대단한 재능을 타고 났어.’
완벽했다.
뛰어난 마법 활용법.
사고의 유연함.
특히 워 메이지(War Mage)로서의 재능을 보이는 모습에, 정상훈이 생각 이상의 천재임을 알았다.
자신은 클리스만의 지식이라는 혜택을 받았다.
만약 그러한 이점이 없었더라면, 솔직히 말해서 이번 대결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씨 가문의 후손. 그가 바라는 건, 마법사로서의 성공과 가문의 부흥.’
상대는 바라는 게 명확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강민혁은 그에게 말했다.
“상훈아.”
정상훈이 탐났다.
그는 투자한 만큼, 탐스러운 꽃을 피울 재능이다.
“내가 짧은 시간에 3서클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나만의 특별한 방법이 있기 때문이야. 그건 너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이고, 그 외에도 나는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여러 지식을 알고 있어. 그래서 네게 제안을 하나 할게. 아니, 이건 거래야.”
“거래?”
정상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법적인 성장.
그건, 마법사라면 물 수밖에 없는 미끼였다.
강민혁은 탐스러운 미끼를 정상훈의 눈앞에 살랑살랑 흔들며,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목적을 말했다.
“그래, 거래. 내가 너의 성장을 약속하는 대신에·········.”
1년.
그 시간 동안 차근차근 기초를 쌓는다.
나중에 마탑을 건설할 때, 그 뼈대가 될 기초를.
“나와 사제(師弟)의 연을 맺겠다고 약속해. 네가 날 스승으로 모신다면, 내가 너를 옳은 길로 인도해줄 테니까.”
사제의 연.
정상훈을 강하게 옭아맬 수 있는 수단임과 동시에, 천재를 제자로 둘 경우 얻는 이득은 많다.
실질적인 이득뿐만 아니라, 명예까지도.
“이런 미친.”
정상훈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강민혁은 항상 예상을 벗어나는 존재였지만, 이번은 그 정도를 넘어섰다.
아무리 강민혁의 능력을 인정한다지만, 자존심이 강한 정상훈은 강민혁의 거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거절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뒤.
“할게. 마법사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내 영혼마저도 네게 바칠게.”
그는 결국 미끼를 물었다.
강민혁이 보여준 모습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사제의 연이라는 제안은 뿌리칠 수 없는 강한 유혹이었다.
마법 학술 대회 우승.
뛰어난 지식과 마법적인 능력마저 갖춘 사람.
스승으로서의 강민혁은, 나이를 제외하고는 뭐 하나 모자랄 게 없는 대단한 존재였다.
그렇게, 강민혁은 이학범에 이어 마탑에 영입할 새로운 사람을 얻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오늘인가.’
클리스만과 약속한 날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 빙의는,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다.
34화. 9. 변화
허름한 실내 인테리어.
칙칙한 벽지.
이전에 경험했었던 여관방이라는 사실에, 강민혁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데.
“크윽.”
전신에서 밀려오는 통증에 강민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전에는 없었던 현상이다. 클리스만의 몸에 빙의할 때 시야가 흐릿해지는 증상은 있었지만, 육체적인 통증은 전혀 없었다.
혹시 빙의의 부작용인 것일까?
아니다.
부작용이라기엔, 매우 익숙한 형태의 통증이었다.
‘이건 타박상인 것 같은데.’
강민혁은 육체에 관해서 해박하다. 안에 장기가 손상되어 통증이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타박상으로 인해 생겨난 통증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타박상이라면 몸에 상처가 있을 터. 강민혁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가서 거울의 모습을 확인했다.
수척한 얼굴.
갈색의 더벅머리 아래로, 짙은 인상의 낯선 얼굴이 있었다.
클리스만.
생각해보니 그의 얼굴을 직접 확인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역시.’
옷을 걷어보니 예상대로 타박상이 있었다. 몸 곳곳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숨을 쉴 때마다 멍이 든 부위에서 통증이 일어났다. 이러한 형태의 멍은 분명히 ‘구타’로부터 비롯된 것이 확실하다. 본인이 자해로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의 상처는 아니니, 타인이 이렇게 만들었다는 의미일 터.
강민혁은 손을 확인했다.
구타에 대항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몸에 이렇게 멍이 들 정도로 맞았는데, 클리스만은 제대로 된 반항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해가 되질 않았다.
클리스만은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2000년의 마법 문명이 꽃을 피운 이 세상에서도, 클리스만의 지식은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가 원한다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고, 수많은 세력들이 클리스만을 이런 허름한 방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클리스만은 그러지 않았다. 세상에 자신의 지식을 공개하지 않았으며, 같은 아카데미 친구들에게 매일 무시를 당했다. 그리고 누구에게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구타의 흔적까지 보였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일부만 공개해도 삶이 완전히 달라질 텐데, 클리스만은 본인의 안위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클리스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화장실을 나왔다.
혹시라도 클리스만의 메시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방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사실 확인할 것도 없었다.
미니멀리즘(minimalism) 인테리어라고 우기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단출한 방 구조에는, 눈에 보이는 게 전부였다. 방금 일어나서 흐트러진 이부자리와 책상에 놓여 있는 한 권의 책.
그게 끝이었다.
그리고 책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3서클 마법서]
최상급 3서클 마법.
클리스만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강민혁에게 가장 필요한 ‘지식’을 넘겨줄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창밖으로 해가 떠오르는 상황에, 강민혁은 이만 마법서를 덮었다.
‘하루만으로는 시간이 부족해.’
3서클.
서클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강민혁이 기억해야 할 지식의 체계도 매우 복잡해졌다.
그리고 해당 마법을 활용하는 여러 갈래도 제시하다 보니, 하루 만에 통째로 외우는 것이 힘들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조급해지지는 않았다. 빙의는 시간을 하루로 제한하지 않는다. 그간 두 세계를 오가는 과정에서, 강민혁은 클리스만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몇 가지의 규칙을 알아낼 수 있었다.
[1. 한 달에 한 번, 클리스만의 몸에 빙의한다.]
이건 메시지를 통해 전달받은 사실.
[2. 클리스만이 제시한 목표(지식의 습득)를 달성하기 전에는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는다.]
강민혁이 본래의 세계로 복귀할 때는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지식의 습득이었다.
클리스만의 몸에 빙의되었을 때는 항상 습득해야만 하는 지식이 있었고, 강민혁은 그것을 만족할 만큼 습득하였을 때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복귀의 조건을 유추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3. 두 세계는 평행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형성되어 있는 시간대가 다르다.]
시간의 흐름이 달랐다.
클리스만의 세계에서 하루의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강민혁의 세상도 동일한 시간이 지나가진 않았다.
사실 그것이 가장 걱정이었다.
자신이 클리스만의 몸에 빙의되어있는 동안, 강민혁의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런데 항상 강민혁은 적절한 시간대에 눈을 떴다. 아침이 밝아 등교할 때나, 교수들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때.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강민혁은 자연스럽게 현실로 복귀했다.
그래서 하루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지금의 상황에서, 강민혁은 크게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하루로 부족하면 이틀.
이틀로도 부족하면 삼일을 공부하면 된다.
완벽하게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주목적이지, 조급하게 매달릴 필요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아카데미에 나가야겠지.’
아침이다.
클리스만의 삶도 있을 테니, 강민혁은 간단하게 짐을 챙기고는 여관을 나섰다.
아카데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하고 호화스러운 궁전이, 바로 클리스만이 다니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였다.
과연 최고의 교육 기관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외관만 보더라도, 클리스만의 세상에서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클리스만의 교실이·········.’
기억을 더듬어 자리를 찾았다.
그래도 그간 지내온 시간이 있어서 크게 어렵지 않았고, 강민혁은 곧 익숙한 공간을 찾았다.
아침이라 그런지 안에는 학생들이 없었다.
강민혁은 자신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앉았고, 3서클 마법서를 펼쳐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쇼크 웨이브(Shock Wave)]
‘현실에는 없는 마법이야.’
3서클 전기 계열 마법.
마법서의 설명대로라면, 쇼크 웨이브를 사용할 경우 강력한 충격파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 마법이 재밌는 부분은, 상대의 몸에 직접적으로 사용할 때 발경(發勁)의 효과가 발휘된다는 것이다.
육체 안.
내부의 타격.
아무리 강화 전사라 할지라도, 장기를 공격하는 쇼크 웨이브에는 버텨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근접전에서 직접적으로 타격하는 과정이 힘들겠지만, 만약 이 마법을 성공시킬 수만 있다면 강화 전사라 할지라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어.’
강화 전사.
그들의 단단한 피부는 마법사의 천적이다.
3서클 마법부터 그들을 상대할 실마리를 찾은 상황에, 강민혁은 3서클 마법서에 푹 빠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다른 학생들이 등교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강민혁에게 중요한 것은 일단 3서클 마법의 습득이었다.
그때였다.
3서클 마법서를 절반 정도 읽었을 때, 낯선 손이 불쑥 시야에 나타났다.
확!
“·········?!”
마법서가 사라졌다.
느닷없이 마법서를 채간 사내는, 고개를 홱 도는 강민혁의 모습에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보였다.
“오호, 뭘 그렇게 열심히 읽나 했더니 겨우 하급 3서클 마법서였어?”
강민혁은 자리를 박차 마법서를 빼앗으려고 했다.
그런데 상대가 하는 말에, 몸이 흠칫 굳어졌다.
‘하급 3서클 마법서라고?’
아니다.
자신이 읽고 있던 것은 최상급 3서클 마법서였다.
그런데 사내의 반응으로 보아, 자신이 읽는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을 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마법서의 내용을 나만 볼 수 있다는 건가.’
클리스만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분실, 강탈을 당할 위험을 대비해서, 마법서에 이런저런 장치를 해두었다.
마법서를 모두 읽으면 안의 내용이 사라지는 것또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그의 안배였다.
강민혁이 말했다.
“내놔.”
차가운 음성.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사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새끼가 정신을 못 차렸네. 뭐 내놔? 너 미쳤냐?”
그때, 강민혁은 확신했다.
‘이 녀석이다.’
클리스만의 몸에 생긴 멍.
그것의 가해자가, 자신을 적의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저 녀석이라고 말이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 저러네.”
“제임스가 발동이 걸렸으니, 한동안은 시끄럽겠네.”
제임스 체스터(James Chester).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로, 상대의 이름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너구나.”
강민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클리스만과 제임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강민혁은 클리스만의 문제를 방관할 수 없었다.
적어도 어떤 전후 사정이 있었든 간에, 클리스만의 몸에 멍이 생긴 일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
“하.”
제임스가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적의가 넘실거리는 눈빛으로 강민혁을 내려다보며, 당장이라도 한 대 날릴 기세로 말했다.
“어제는 가만히 맞기만 하더니, 오늘은 생각이 달라졌나 보네?”
예상은 맞았다.
제임스는 가해자였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실 항상 의문이었어. 대단한 집안을 등에 업은 것도 아니고, 마법사로서의 재능도 없는 네가 대체 어떻게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는지를. 그래서 학기 초반에는 네게 숨겨진 배경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너에게서 특별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어.”
그는 선민의식(選民意識)에 찌든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도 모르는 클리스만이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계속 다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녀석들은 대부분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어. 대단한 배경을 타고 났거나, 아니며 마법적으로 재능이 뛰어난 녀석들뿐이지. 그런데 넌 대체 뭐야? 어디서 굴러먹은지도 모르는 버러지 같은 새끼가, 우리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수업을 받는 것을 나는 용납할 수 없어.”
눈썹이 홱 올라갔다.
위협적으로 다가가더니, 분노를 토해냈다.
“알겠어, 이 버러지 새끼야? 이제부터 이 제임스 체스터가, 네게 지옥 같은 학교 생활을 선사해줄 거야.”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제임스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데.
훅!
“·········?!”
간발의 차이로 강민혁이 주먹을 피했다.
제임스가 놀라서 눈이 커다래지는 순간, 강한 충격이 그의 복부를 때렸다.
퍽! 콰다당!
“크윽.”
복부를 얻어맞은 제임스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제임스는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이 개새끼가.”
확!
마나가 흩뿌려졌다.
곧바로 캐스팅에 들어가는 그의 모습에, 강민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속이 뒤틀렸다.
어딜가나 항상 이런 녀석들이 있다.
본인만의 세상에 갇혀서, 본인의 기준에 어긋난다 싶으면 아무런 이유 없이 해를 가하는 녀석들.
‘쓰레기 새끼.’
정상훈과의 대결.
그는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그와의 대결은 상당히 신사적인 것이었다.
만약 강민혁이 정말 ‘승리’를 목적으로 했다면, 그는 1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확!
책상에 있던 연필.
그것을 잡아, 정확히 마나의 시작점에 던졌다.
캐스팅.
그 과정에서 물리적인 충격을 받을 경우, 마법사는 강한 충격을 받는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제임스는, 순간 일부의 마나를 컨트롤 하더니 연필을 막아냈다.
“어딜!”
팍!
연필이 튕겨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캐스팅을 마무리하려는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던 강민혁이 불쑥 그의 앞에 나타났다.
퍽!
“커억!”
그대로 작렬하는 니킥.
제임스의 얼굴에서 피가 튀어 오르며, 그의 몸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콰당!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
쓰러진 제임스의 뒤로, 경악한 학생들의 시선이 강민혁에게 꽂혔다.
35화. 9. 변화(2)
“끄으으·········.”
제임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흘러내리는 코피를 손으로 막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는 피는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정적.
지켜보던 학생들의 머릿속이 굳었다.
항상 조용했던 클리스만의 변화는,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탁!
“이런 씨발!”
“제임스!”
소식을 듣고 다른 반에서 제임스의 친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피를 흘리는 제임스와 그를 내려다보는 클리스만. 상황 설명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떤 전후 사정이 있었든 간에, 제임스의 친구들인 그들로서는 클리스만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개자식이.”
화악-
마나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캐스팅에 들어간 그들의 모습에, 강민혁이 곧바로 땅을 박찼다.
타닥.
책상을 넘어섰다.
몸을 날려 공격하려는 강민혁의 모습에, 2명으로 이루어진 제임스의 친구들이 양쪽으로 피했다.
“무식한 새끼.”
그중 한 명.
각진 얼굴의 사내가 움직이면서 캐스팅을 이어나갔다. 그건 강민혁의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보통 캐스팅 도중에 움직이면 마나가 전부 흩어지는데, 그의 마나는 안정적인 체계를 이루었다.
‘무빙 캐스팅?’
순식간에 완성되는 마법.
그들의 캐스팅 속도는,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라이트닝 볼트.”
치지직!
1서클 전기 계열 마법.
강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불빛이, 그대로 강민혁을 덮쳤다.
툭.
파파팍!
하지만 상대가 의도한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강민혁은 간발의 차이로 발로 책상을 위로 띄웠고, 그것을 내던짐으로써 라이트닝 볼트를 앞에서 막았다. 아직 상대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반대편으로 도망친 노랑머리의 사내가 캐스팅을 끝내는 순간, 강민혁의 몸이 사라졌다.
확!
퍽!
“크악!”
의자가 노랑머리에게 작렬했다.
동시에 강민혁은 노랑머리에게 달려들면서, 옆에 있던 연필을 다량으로 쥐어 각진 얼굴의 사내에게 뿌렸다.
확!
“흐읍.”
각진 얼굴의 사내가 당황했다. 연필 공격은 상당히 절묘했다. 마나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해서 캐스팅을 무산시켰고, 그 과정에서 마나의 역류(逆流) 현상이 일어났다. 파랗게 질리는 각진 얼굴의 사내. 그 순간, 허공에 떠오른 강민혁이 그대로 노랑머리의 가슴팍을 찼다.
퍽!
콰당!
노랑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리고 확실히 마무리하기 위해, 강민혁은 상대가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얼굴을 걷어차 버렸다.
퍼억!
“끄르르륵.”
피가 튀었다.
강민혁의 손속은 잔인했다.
상대에게서 살의(殺意)를 느낀 순간, 강민혁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생사가 걸린 싸움에서 자비란 오만함에서 비롯되는 멍청한 행동이다.’
아버지가 누누이 강조했던 부분이다.
이제 마지막.
각진 얼굴의 사내만이 남았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에 몸을 벌벌 떨었다. 캐스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마나의 역류 현상 때문에 마나도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며 강민혁은 피식, 웃었다. 강민혁의 세상에서 마법사가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 활용성을 떠나 강화 전사들에게 너무나도 만만한 먹잇감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쪽 세상의 마법사들은 괜찮았다.
움직이면서도 마법을 사용하고, 마법의 캐스팅 속도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랐다.
하지만.
‘내 상대는 아니야.’
강민혁.
수호문의 후계자.
전투의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라고도 불렸던 강민혁에게, 제임스 일행은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걸 상대도 알았다.
강민혁이 다가오는 모습에, 각진 얼굴의 사내는 마법을 취소하더니 황급히 태도를 바꾸었다.
“미, 미안해.”
눈물과 콧물을 흘렸다.
바닥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제임스와 노랑머리의 모습을 보니, 감히 대항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용서를 구했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면, 강민혁이 그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민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시작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시작한 이상 확실히 끝맺음을 해야만 한다.
꽈악!
“으악!”
강민혁의 손길이 각진 얼굴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머리가 뜯겨나갈 것 같은 통증에 비명을 지르는 그의 모습에, 강민혁은 그대로 뺨을 날리려고 했다.
그때였다.
“그만!”
“클리스만, 당장 멈춰!”
헐레벌떡 교실로 들어오는 사람들.
그들이 교수진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강민혁은, 다시 각진 얼굴의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던 것만 마무리하겠습니다.”
빠악!
“컥!”
홱 돌아가는 각진 얼굴의 고개.
마지막 상대까지 마무리하고서야, 강민혁은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전투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제임스의 얼굴은 처음과 달랐다.
코가 붉게 부풀어 오른 그는, 벤자민 우드(Benjamin Wood) 교수를 바라보며 화난 어조로 말했다.
“제 얼굴을 보세요. 일방적으로 맞았다니까요? 어디서 근본도 없는 녀석이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들어와서는, 이 제임스 체스터의 얼굴에 상처를 남겼어요.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면 아버지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무조건, 무조건 징계를 해주세요.”
체스터 가문.
영국의 마법 명가(名家)인 그들은,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서도 특별 관리를 받는 대상이다.
그들의 기부금만으로 호화스러운 건물을 올렸다는 소문이 돌 정도이니, 벤자민으로서는 제임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클리스만.”
“예.”
“제임스를 때린 이유가 뭐지?”
돌아가는 분위기가 보였다.
명문자제들의 말에, 벤자민은 이미 답이 정해진 것으로 보였다.
‘어딜 가나 인간은 똑같구나.’
계급 사회.
상류층에 해당하는 제임스를 건드린 일은, 쥐뿔도 없는 클리스만에게는 그 자체로도 중범죄일 것이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먼저 저를 때리려고 한 사람은 제임스입니다. 교수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게 원하는 대답이 있다면, 대답을 유도하지 마시고 그냥 솔직하지 말하십시오.”
“클리스만!”
벤자민의 눈썹이 홱 올라갔다.
그러나 강민혁은, 그의 살벌한 기세에도 눈빛을 죽이지 않았다.
화가 났다.
클리스만.
대단한 능력을 가진 그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임스 일행에게 대항했다. 자신의 행동이 클리스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클리스만이 자신을 위해서 희생하는 모습을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옳은 일을 행하는 것. 적어도 강민혁이 살아왔던 삶에서는,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라는 가르침은 인생 그 어디에도 없었다.
벤자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적당히 호통을 치면 클리스만이 움츠러들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이게 클리스만이라고?’
소심하고 조용한 학생.
그게 클리스만에 대한 기억이었는데, 이런 호전적인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혼자서 3서클 마법사 3명을 제압하다니.’
사실 아직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학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막 날아다니면서 제임스 일행을 쓰러트렸다고는 하는데, 말이야 쉽지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3서클 마법사 세 명. 그들의 능력이라면 근접하기도 전에 상대를 쓰러트려야 맞는 일이지 않은가. 의문투성이인 사건이었지만, 그가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체스터 가문을 건드리다니. 멍청한 녀석.’
이곳은 계급 사회다.
쥐뿔도 없는 클리스만을 보호해줄 만큼, 벤자민은 욕망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반성하는 기미가 없다면 징계위원회를 건의하는 수밖에.”
이때만 하더라도 문제는 악화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1시간 뒤.
다시 학생들을 불어들인 벤자민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제임스가 그간 클리스만을 괴롭혔다는 정황이 있어서, 클리스만의 행동은 정당방위로 끝내는 것으로 말이야. 그러니·········.”
“교수님!”
제임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연히 잘 해결될 줄 알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제가 맞았는데 이번 일을 이렇게 끝낸다고요? 진심이세요? 저 제임스 체스터에요. 체스터 가문의 장남이 다쳤는데, 제 아버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 뒷감당을 하실 수 있겠어요?”
위협이었다.
겨우 교수 주제에, 이번 일을 묻으려 하냐는 위협.
그런데 벤자민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제임스의 비위를 맞추던 그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위에서 결정된 사안이야. 아버지의 힘을 동원하려거든 그렇게 해. 이번 일은 내가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상황은 종료되었다.
강민혁도 어떻게 문제가 해결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교무실을 나온 뒤에 제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경고하는데, 다음에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아. 날 건드리려거든, 네 목숨을 걸 생각을 하고 달려들어. 네 가문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또 다시 이러면 네 목에 연필을 쑤셔버릴 생각이니까.”
제임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클리스만에게 일방적으로 맞았고, 가문의 힘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만 자리를 떠나는 클리스만의 모습에, 제임스는 볼을 꼬집음으로써 이게 현실인지를 확인했다.
이번 사건은 의문투성이였다.
첫 번째로는 클리스만은 어째서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두 번째로는 정황상 제임스의 가문은 대단한 명가일 텐데, 왜 아무런 징계도 없는 것일까.
상황의 전개가 상식적이지 않았다.
벤자민의 반응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는 클리스만의 진짜 능력을 모르기에, 처음에만 해도 클리스만을 죄인으로 몰면서 당장에라도 징계를 내릴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데 1시간 뒤에 태도가 바뀌었다. 그 말인즉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체스터 가문을 대신해서 클리스만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인데, 이게 말이 되질 않는다.
체스터.
누구나 알 정도로 명문 가문에,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주기적으로 기부를 한다.
배경도 없는 클리스만을 감싸줄 만큼, 체스터 가문의 힘이 아카데미 내에서 약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동급생들을 통해 알아보았다.
혹시 강민혁이 모르는, 클리스만의 특별한 배경이 있는지 말이다.
‘클리스만은 아무런 배경이 없는 것이 확실해. 사실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 마법에 재능이 없는 클리스만이, 배경이 없고서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입학할 방법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배경이 있다는 것일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체스터 가문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배경이?’
그건 추측이었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클리스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상황을 속 시원히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배경이 대단하다면.
클리스만은 동급생들에게 무시를 당하면서 지낼 이유가 전혀 없다.
결국 의문을 해소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민혁으로서는, 이번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클리스만은 육체적인 능력에 재능이 있어.’
제임스 일행과의 싸움.
그때 느꼈다.
강민혁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육체 반응에, 어쩌면 클리스만은 다른 곳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멍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묵묵히 괴롭힘을 당했을 클리스만을 떠올리니, 강민혁은 마음이 아팠다.
“클리스만.”
강민혁은 그를 모른다.
일기에 적힌 글 정도로는, 클리스만이 살아온 삶과 그라는 사람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를 남처럼 생각하진 않는다.
그가 자신을 구원해준 것처럼, 강민혁 또한 클리스만을 구원하길 바란다.
“이게 너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노트를 하나 폈다.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공간에, 강민혁은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인생이 변한 것처럼, 네 인생도 변했으면 좋겠어.”
[수호문의 마나 심법]
아마 이번 빙의는 조금 길어질 것 같았다.
수호문의 심법은 매우 복잡하기에, 글로써 풀어내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36화. 9. 변화(3)
사실 마나 심법을 전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있다.
강민혁이 먼저 길을 닦고, 클리스만이 그 흔적을 따라 마나를 운용하면 복잡한 과정을 생략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강민혁은 글로 전달하는 방법을 택했다. 자신은 선의라고 생각해서 행한 행동이, 혹시라도 클리스만에게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걱정한 것이다.
그래서 선택권을 넘겼다.
클리스만 본인이 마나 심법이 필요하다고 여긴다면, 자신이 마법 지식을 터득한 것처럼 그도 스스로 성장할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아카데미에서는 최상급 3서클 마법을 익히는 데 집중하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마나 심법을 이어서 완성했다. 정말 바쁜 나날이었다. 타인의 몸을 빌린다고 생각하니, 클리스만으로서 살아가는 동안 시간을 조금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한때는 자신이 빙의하는 동안 클리스만의 의식이 어떻게 되는지를 고민한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겨우 며칠.
클리스만으로서 지낸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강민혁의 행동으로 인해 주변의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그게 정말이야?”
“진짜라니까.”
“대박이네. 어떻게 제임스 패거리를 혼자 쓰러트릴 수 있었지? 클리스만은 1서클 마법사잖아.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대표적인 열등생이 그랬다고 하니까, 도무지 믿기지 않네.”
강민혁을 보며 속닥거리는 학생들.
그들은 이제 ‘클리스만’의 외형을 한 강민혁을 섣불리 건드리지 못했다. 그만큼 제임스 패거리와의 싸움은 임팩트가 대단했다. 2000년의 마법 문명이 발달한 이 세상에서, 육체적인 능력만으로 마법사를 쓰러트리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보통은 제대로 접근하기도 전에 마법사에게 박살이 나는데, 강민혁은 절묘한 몸놀림으로 제임스 패거리를 완전히 제압해버렸다.
경악.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학생들이, 충격적이었던 그때의 사건을 널리 퍼트렸다.
문제는 직접 목격한 학생들도 눈을 의심할 정도의 사건이다 보니, 소문의 진위를 의심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게 상식적인 반응이기는 했다. 강화 문명에서야 강화 전사 한 명이 마법사 세 명을 쓰러트리는 것이 특별하지 않은 일이나, 이곳은 그곳과 반대로 문명이 형성된 세계다.
그리고 상대가 제임스 체스터다.
체스터 가문의 장남이 다쳤음에도 강민혁이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헛소문이라는 가설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건드리지 말자.’
만일의 가능성.
예전에만 하더라도 클리스만이 출신이 불분명한 열등생이었다면, 이제는 괜히 꺼림칙한 마음에 클리스만을 건드리지 않았다. 덕분에 강민혁은 편하게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었다. 제임스 패거리도 강민혁과 마주할 때면 적의 어린 시선을 보일 뿐, 직접적으로 시비를 걸진 않았다.
‘좋은 현상이네.’
다행이었다.
우발적인 행동이 혹시라도 클리스만에계 폐를 끼칠까 걱정했는데, 이 정도면 이상적인 결과인 것 같았다.
“·········이것으로 오늘 수업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수업이 끝났다.
삼삼오오 모여 하교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강민혁이 마치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강민혁으로서는 익숙했다. 강민혁의 행동으로부터 비롯된 상황이 아니라, 애초에 클리스만의 학교 생활이 이랬다.
방과 후.
강민혁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예전에는 정해진 틀에 맞추어 움직였다면,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제임스 패거리와의 사건.
그것은 강민혁을 가두었던 틀을 깨부쉈다.
이전에는 항상 클리스만이 전달해주는 지식을 기계적으로 습득했다면, 지금은 본인이 직접 판단했다.
‘그들이 사용했던 스킬이 궁금해.’
제임스 패거리와의 싸움은 상당히 신선했다.
마법사가 무빙 캐스팅을 사용하는 데다, 캐스팅 속도도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처음에는 그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최상급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으나, 그건 아무리 봐도 현실성이 떨어졌다. 싸움을 지켜보던 학생들. 그들은 제임스 패거리의 기술을 익숙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최상급 마법은 클리스만의 세상에서도 보물로 취급하는 것이기에, 만약 자신의 가설대로라면 학생들은 분명히 놀라는 반응을 보였어야만 한다.
고로.
‘대중적으로 알려진 스킬일 거야.’
확신이 들었다.
더블 캐스팅과 마나 동화가 이쪽 세상에서는 일반적인 것처럼, 그것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바로 마법 도서관으로 향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마법 도서관은 아카데미생들만 열람 자격이 부여되는데, 그 찬란한 명성만큼이나 양질의 자료들이 많았다. 강민혁은 그중에서 원하는 서적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애초에 가치가 그렇게 높은 자료가 아닌 모양인지, 기초 서적들이 모인 곳에 위치 해있었다.
[무빙 캐스팅]
[서클의 상관관계]
일단 무빙 캐스팅을 먼저 확인했다.
[무빙 캐스팅(Moving Casting)]
[무빙 캐스팅의 탄생은 ‘마법사는 언제나 서서 마법을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캐스팅을 시전하는 상황에서, 육체적인 움직임은 마나의 체계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마법은 무조건 서서 사용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으나, 무빙 캐스팅의 기반이 되는 마나 컨트롤 방법이 생기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무빙 캐스팅의 문제점은 마나의 불안정함이다. 마법사가 마나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그 변화무쌍한 마나를 컨트롤할 능력이 있다면 무빙 캐스팅의 실현이 가능하다. 그 방법으로는·········.]
방법은 복잡하면서도 간단했다.
보통은 1의 방법으로 캐스팅을 한다면, 움직임에 따라 2로 변하는 체계를 미리 예상해서 대응하는 것이다. 웬만한 머리로는 사용할 수 없는 스킬. 하지만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무빙 캐스팅’ 정도는 기본 소양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단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마법에 재능이 있기 때문에 입학을 허가받은 것이니 말이다.
제임스의 자부심은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본인이 선택받은 존재임을 알기에, 근본도 모르는 클리스만을 배척하고 따돌리려고 했다.
다음은 서클의 상관관계.
[서클이 향상될수록, 높은 서클의 마법사는 낮은 서클의 마법을 보다 손쉬운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보통 1서클 마법을 캐스팅할 때는 한 개의 서클만을 사용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2서클 마법을 캐스팅할 때는 두 개의 서클. 그런데 1서클 마법을 캐스팅할 때 두 개의 서클을 사용해서 마나를 운용한다면, 캐스팅 시간이 대폭 감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황당할 정도로 간단한 방법이었다.
이것은 클리스만의 세상에서는 상식이었고, 이러한 지식을 기반으로 제임스 패거리는 빠르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이 방법에는 마나 소모량이 많아진다는 단점이 있으나, 충분히 활용 가치가 있는 기술이었다.
무빙 캐스팅으로 강민혁의 공격을 피했으며, 3서클보다 낮은 1서클 마법의 캐스팅을 빠르게 마쳤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든 그들의 전투가, 기초적인 지식을 익힘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건 혁명이야.”
강화 문명.
그곳에서 마법사의 약점은 무엇인가.
움직이면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위험에 노출되고, 캐스팅 시간이 매우 느리다는 것이다.
그런데 방금 읽은 책들은 그러한 문제점을 완벽하게 해결해주었다. 더블 캐스팅과 마법의 형태 변화가 마법사의 강점을 극대화 시켜주는 방법들이라면, 이번 것은 마법사의 단점을 보완해주었다.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졌다.
무빙 캐스팅과 서클의 상관관계만 잘 이용한다면, 전사를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다만.
‘이건 나만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이야.’
서클의 상관관계는 전제 조건이 있었다.
바로 직접 생성한 서클이어야 한다는 것.
약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나약한 서클로는, 강하게 몰아치는 마나의 흐름을 감당할 수 없다.
그리고 무빙 캐스팅도 마찬가지다.
무빙 캐스팅은 쉬운 기술인 것처럼 서술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강민혁도 현실에서 직접 확인해보지 않는 한, 자신이 무빙 캐스팅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책을 다시 읽었다.
혹시라도 놓친 것이 있는지 꼼꼼히 확인하였고, 새로운 지식들을 차곡차곡 머릿속에 쌓았다.
그리고 며칠 뒤.
3서클 마법을 모두 익힌 강민혁은,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현실.
익숙한 감각이 살아났다.
강민혁으로서 눈을 뜬 그는, 곧바로 마법 연무장을 빌렸다.
‘무빙 캐스팅과 서클의 상관관계를 확인하자.’
일단 서클의 상관관계.
3개의 서클을 이용해서 최상급 1서클 마법을 사용하자, 정말 빠른 속도로 마법이 완성되었다.
“파이어 볼트.”
화르륵.
한 5초 정도 걸렸을까?
정말 경악스러울 정도로 캐스팅 속도가 빨랐다.
최상급 마법과 서클의 상관관계를 이용한 콜라보는, 이쪽 세상의 상식을 완전히 무너트렸다.
‘이건 작은 성과가 아니야. 만약 내가 4번째 서클을 형성한다면, 1서클 마법을 거의 캐스팅 시간 없이 사용할 수 있어. 그 말인즉, 빠르게 접근하는 상대를 막아낼 수단이 생긴다는 거지. 보통 근접 전투는 5서클의 메모라이즈(Memorize)를 익힌 대마법사들의 전유물이라고 말하는데, 서클의 상관관계를 이용할 경우 상황이 달라져. 거기다 무빙 캐스팅만 사용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정말로 전장 한복판에서 활약하는, 워 메이지의 탄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강민혁은 곧바로 무빙 캐스팅을 실험했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결코 단순한 기술이 아니기에, 실현 가능 여부를 확인해야만 했다.
화악-
허공에 마나가 흩뿌려졌다.
강민혁은 옆으로 뛰면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나를 ‘무빙 캐스팅’의 방법에 따라 체계를 형성했다.
드드드드.
마나가 요동쳤다.
시전자의 의지가 아니라 제멋대로 흩어지려는 모습에, 강민혁은 그것에 맞추어 캐스팅을 이어나갔다.
동시에.
‘수호문의 마나 심법으로 마나를 안정시키자.’
그건 즉흥적인 방법이었다.
마나 심법은 강력한 공격 기술이 아니라, 마나를 컨트롤하는 방법을 말한다.
마나 룸에서 도움이 되었던 것처럼, 혹시라도 이번에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같이 운용했다.
그 결과.
“·········?!”
강민혁의 눈이 커졌다.
수호문의 마나 심법.
그 운용법에 따라 마나를 다스리자,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마나가 안정을 되찾았다. 덕분에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는 체계를 어렵지 않게 완성할 수 있었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했던가.
마나 심법은 마법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으나, ‘마나’라는 틀 안에서는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파이어 볼트.”
화르륵.
손에서 피어나는 불길.
강민혁은 제 자리에 멈추어서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 불길을 바라보았다.
“·········성공하다니.”
기뻤다.
아니,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성공에 대한 쾌감이 생겨남과 동시에, 강민혁의 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이렇게 쉬운 거였어? 마나라는 게, 내가 원하는 대로 손쉽게 움직여주는 그런 거였냐고.”
지난 과거.
강민혁은 마나로 인해 절망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무빙 캐스팅은 보통 몇 주는 훈련해야 익숙해지는 기술인데, 마나 심법을 활용한 강민혁은 너무나도 손쉽게 성공시켰다. 평범한 성과가 아니다. 강화 전사로 훈련했었던 지난 시간이 강민혁의 밑거름이 되었고, 전에는 알지 못했었던 마법적인 재능이 평범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었다.
“하, 하하.”
웃겼다.
검사로서 포기하며 인생이 무너져 내렸던 강민혁으로서는, 이 편안한 성취감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3서클.
최상급 마법.
더블 캐스팅과 무빙 캐스팅.
그 외에 여러기술들.
자신은 마법사로서 완성되었다.
클리스만의 세상에서는 아직 부족하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세상에서는 충분히 대단한 경지에 올랐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어.’
재능에 절망하던 과거는 끝났다.
현재의 자신은 이룬 것만으로도 자신감을 가질 자격이 있다.
‘며칠 뒤에 검술 학과와 합동 수업이 있다고 했지.’
검술 학과.
그들과의 합동 수업은 마법 학과의 학생들이 기피하는 일정이다.
그들과 비교되고 겨루는 상황에서, 마법사들은 애써 외면하던 ‘비주류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강민혁은 다르다.
오히려 이번 기회를 통해.
‘내가 가진 힘을 시험해볼 수 있겠어.’
검술 학과의 엘리트들.
그들은 평가의 잣대로 삼기에 매우 좋은 상대다.
강민혁은 검술 학과와의 수업이 매우 기대되기 시작했다.
37화. 10. 비주류의 현실
마법 학과 수석에 빛나는 정상훈.
그에게 가장 어려운 수업은 무엇일까?
이학범의 기초 이론? 백동석의 실전 수업?
아니다.
정상훈은 단언컨대, 자신의 앞에서 호랑이 선생님으로 변하는 강민혁의 수업이 가장 어렵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이걸 봐. 더블 캐스팅은 마나의 기억을 이용하는 방법이야. 네가 반복적으로 사용한 마법이 마나에 선명하게 남아서, 복잡한 과정을 쉽게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마나의 기억만을 믿어서는 안 돼. 결국 캐스팅을 완성하는 사람은 본인이고, 서클의 마나를 맹렬히 회전시키면서 캐스팅을 진행한다면 더블 캐스팅을 빠르게 끝낼 수 있어.”
“마법이란, 체내의 마나를 외부로 표출해서 ‘새로운 형태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말해. 그런데 만약 이때 자연의 마나를 같이 사용할 수 있으면 어떻겠어? 체내의 마나를 많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마법을 형성하는 최소한의 마나를 충족할 수 있겠지? 그러니 오늘부터 넌 마나에 동화하는 방법을 연습해.”
숨이 턱 막혔다.
마나를 맹렬히 회전시켜서 캐스팅을 빠르게 하는 것과 자연의 마나에 동화하는 등의 방법은, 정상훈의 상식을 완전히 무너트리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질문이 많았다. 마법사는 항상 탐구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정상훈은 본인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강민혁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강민혁의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결국 그의 말이 옳다는 결론을 내릴 때마다, 정상훈은 강민혁을 더 이상 동급생으로 볼 수 없었다.
‘·········강민혁은 괴물이야.’
동시에 확신했다.
강민혁을 따르다 보면, 언제고 본인이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만 하더라도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던 사이.
지금은 사제의 연을 맺었지만, 사실 둘의 관계는 아직도 신뢰를 보일 만큼 깊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강민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 관계는, 오히려 인간적인 관계보다 더 끈끈하지.’
강민혁이 원하는 것.
강민혁은 정상훈이 잘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건 마탑 건설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마탑이라는 것은 마탑주를 따르는 신봉자들의 세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마탑주가 뛰어난 마법사라면 사람들은 안정감을 느낄 것이고, 뛰어난 학자라면 마탑에서 마법을 배우길 희망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완벽한 조건을 갖춘 것은 아니다.
뛰어난 마법사이자 학자.
동시에 뛰어난 ‘스승’이기까지 한다면, 강민혁의 마탑은 마법사들의 마음을 단번에 휘어잡을 것이다.
‘정상훈의 성장이 내 지도력을 증명하게 될 거야.’
정상훈.
그가 뛰어난 마법사로 성장해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강민혁이 자신의 스승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것의 임팩트는 대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강민혁은 정상훈에게 엄격했고, 동급생의 사이가 아니라 철저하게 스승의 입장에서 대했다.
정상훈은 그에 군말 없이 따랐다.
가르침이 실제로 효과가 있기도 했고, 강민혁이 정상훈에게 바라는 것처럼 장상훈도 강민혁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성장과 가문의 부흥. 강민혁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정상훈은 강민혁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기회인지를 알게 되었다.
상부상조하는 관계.
깊은 신뢰는 없지만,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점이 있는 관계는 흔들리지 않는다.
더구나.
‘내게 힘이 있는 이상, 이 관계를 끊어낼 선택권은 정상훈에게 없어.’
“상훈아.”
“예.”
정상훈의 태도는 공손했다.
동급생이 아니라 스승으로서 대하는 모습에, 강민혁이 말했다.
“오늘의 가르침을 머릿속에 새겨넣어. 나에게 마법을 배우는 이상, 앞으로 세상에 알려진 상식과는 많이 다른 길을 걷게 될 거야.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내가 말하는 지식을 아무런 고민 없이 받아들이지 말고, 지금처럼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완전히 납득할 수 있어야 해. 그렇게 네가 나의 지식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그때는 넌 분명히 마법사로서 성장할 수 있을 거야.”
마음이 울렸다.
왠지 모르게 결연해지는 마음에, 정상훈이 강인한 의지를 보였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스승.
정상훈은, 이제 강민혁 앞에서 고개 숙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며칠 뒤.
드디어 합동 수업 날이 밝았다.
평소보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학생들을 두고, 백동석 교수가 말했다.
“며칠 전에도 얘기했지만, 오늘부터 2주일간 검술 학과와의 합동 수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2주간의 과정은 첫 번째 단계로는 던전 탐사, 두 번째 단계로는 수성전(守城戰), 세 번째 단계로는 생사 결투가 있다. 모든 단계는 성적에 따라 점수를 책정할 것이며, 우수한 성적을 받은 학생은 학과 결산 때 그 점수를 반영하도록 하겠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실전 수업의 분위기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들은 수업 자체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검술 학과 학생들에 대한 두려움도 조금은 엿보였다.
‘안쓰럽네.’
백동석이 쓰게 웃었다.
학생들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검술 학과와 마법 학과의 관계에서, 검술 학과는 절대적인 갑(甲)이다. 헌터 아카데미의 총장도 노골적으로 검술 학과를 지지해주기 때문에, 합동 수업에서 사고가 발생할지라도 검술 학과가 피해를 입는 일은 거의 없다. 그렇다 보니 마법 학과의 학생이 합동 수업에서 봉변을 당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지면서, 마법 학과 학생들은 이 합동 수업을 기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소문이 마냥 거짓도 아니다.
실제로 마법 학과의 학생이 다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걱정은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너희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잘 안다. 하지만 검술 학과와의 합동 수업은, 마법사로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관문이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험난한 사회에 나간다면, 너희들은 마법사에게 그리 친절하지 못한 현실의 벽에 부딪치게 된다. 결국 강화 전사와의 공생(共生)은 마법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고, 그것을 미리 예습하기 위해서 합동 수업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많이 배우도록. 검술 학과 학생들과의 수업에서, 너희들은 마법사로서 제 역할을 하는 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그래야, 너희가 마법 학과를 졸업하고도 마법사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어쩌면 비참한 말일 수도 있다.
좋게 돌려서 말했지만, 백동석은 강화 전사 없이는 마법사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게 현실이다.
마법 학과 수석의 정상훈도.
마법 학술 대회에서 우승한 강민혁도.
검술 학과와의 관계에서는, 자신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잠시 내려놓을 필요성이 있다.
백동석이 말했다.
“자, 그럼 E구역 사냥터로 이동하자.”
E구역.
학생들의 훈련을 위해서 던전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사냥터다.
검술 학과의 학생들은 숫자가 많아서 세 구역으로 학생을 나누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E구역에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검술 학과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한국에서 강화 전사에 재능이 있어 보이는 학생들은 전부 검술 학과나 수호문 같은 곳에 보내기 때문에, 학과 전체를 통틀어도 백 오십 명을 간신히 채우는 마법 학과와는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마법 학과 애들 왔네.”
“그래?”
검술 학과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들은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라도 보는 것처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마법 학과생들을 보았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검술 학과의 실전 교수인 김무진이 앞으로 나서더니,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조를 발표하도록 하겠다.”
조는 4인 1조.
강화 전사 세 명에, 마법사 한 명이 포함되는 일반적인 파티 배치였다.
[92조 검술 학과 이장후, 도재성, 장기용, 마법 학과 강민혁]
92조.
인원이 많다 보니, E구역에서 훈련할 조만 하더라도 100조가 넘어갔다.
강민혁은 ‘92조’라고 표시된 곳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곳에는 이미 자리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야, 진짜 강민혁이네?”
“강민혁을 이렇게 보네.”
그들은 강민혁을 알아보는 기색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검술 학과의 학생들은 강민혁과 동시대에서 강화 전사의 길을 걸었다.
어렸을 때부터 강민혁의 행보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보니, 10대 후반의 아이들에게 강민혁은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수호문의 후계자. 그가 마법 학과생으로 나타나니, 괜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장후가 말했다.
“92조의 조장으로서 지금부터 던전에 대해서 설명할게. 아, 동갑이니까 말은 놓을게.”
강민혁의 반응은 살피지 않았다.
수호문의 후계자였다면 태도가 공손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강민혁은 이제 후계자‘였던’ 사람에 불과하다.
“우리가 공략할 던전은 C급 던전이야. 던전 안에는 D급의 몬스터인 리자드맨(Lizardman)이 서식하고 있는데, 리자드맨 전사와 같이 상위 개체도 있어서 만만한 사냥터는 아니지. 그래도 뭐,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던전 공략은 나와 재성이가 선두를 맡고, 기용이가 후방. 그리고·········.”
시선이 강민혁에게 향했다.
이장후가 씰룩 웃었다.
“너는 알아서 해. 사실 마법사가 뭘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거든.”
명백한 무시였다.
“그렇게 하지.”
하지만 강민혁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합동 수업에서 마법사가 어떤 위치인지, 그에 관한 소문에 대해서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합동 수업? 그건 정말 마법사의 비참한 현실을 알려주는 자리라고 할 수 있어. 그래도 마법 학과생들끼리 지지고 볶고 할 때는 마법사에 대한 자부심이 있지만, 검술 학과생들과 같이 수업을 나가는 순간 그 환상이 와르르 무너지거든. 마법사의 힘이 없어도 강화 전사들은 충분히 강하다는 것. 그걸 확인하는 자리가 될 거야.”
김창수가 했던 말이다.
강민혁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괜히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일단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92조는 곧바로 던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개미굴처럼 다닥다닥 형성된 던전의 입구에, 이장후는 망설임 없이 내려갔다.
“웩.”
“냄새 봐.”
리자드맨 특유의 꿉꿉한 냄새가 올라왔다.
썩어서 고인 냄새.
리자드맨의 서식지를 처음으로 접하는 모양인지, 이장후와 그 일행의 표정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일행은 금방 리자드맨과 조우했다.
키에에엑.
“리자드맨이다!”
“준비해!”
슥!
아른거리는 횃불 아래로, 마침내 리자드맨들이 나타났다.
그 숫자는 세 마리.
비늘로 번들거리는 피부에, 뱀의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이족보행의 괴생명체가 곧바로 이장후 일행을 덮쳤다. 그들의 스피드는 매우 빨랐다. 마치 바닥에 미끄러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접근하였고, 날카롭게 뻗어 있는 손톱을 그대로 휘둘렀다.
캉!
카캉!
손톱과 검이 부딪치며 스파크가 일었다.
처음에만 하더라도 리자드맨이 당장 이장후 일행을 쓰러트릴 기세였으나, 그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이런 버러지 새끼가.”
화악!
이장후의 검에서 파란빛이 일었다.
오라.
그 강렬한 힘이 리자드맨의 손톱을 동강 내더니, 재빠른 검술로 가슴팍을 베어버렸다.
팍!
피가 튀었다.
짙은 녹색의 피가 얼굴에 튀자, 이장후는 고개를 틀어 피했다. 리자드맨의 피에는 마비 효과가 있다. 치명적인 독은 아닐지라도 맞아줄 이유는 없었다. 이장후는 곧바로 리자드맨의 가슴팍을 걷어찼고, 균형을 잃고 뒤로 쓰러지는 리자드맨의 모습에 곧바로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서걱!
가슴팍이 완전히 열렸다.
속살을 훤히 드러낸 리자드맨은, 바닥에 쓰러지더니 꿈틀거렸다.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모양인지, 애처로운 손길로 이장후를 공격하려고 날카로운 이빨을 힘없이 보였다.
“끈질긴 새끼.”
퍽!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이장후를 시작으로 도재성과 장기용은 차례로 리자드맨을 마무리하였다. D급의 몬스터인 리자드맨은 2서클 마법사들이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는 강적이다. 그런데 검술 학과의 학생들은 큰 무리 없이 리자드맨을 처리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마법사가 필요하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었던 현실이었다.
정말로 필요하지 않았다.
마법사의 지원이 없더라도, 그들은 D급의 리자드맨을 처리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가자.”
휴식을 취하지도 않았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걸음을 옮기는 이장후의 모습에, 강민혁은 속으로 웃었다.
‘재밌네.’
이장후는 지금 강민혁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마법사가 없어도, C급 던전의 공략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실제로 무력으로 증명하는 상황에, 강민혁은 김창수가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알 것 같았다.
‘마법사의 기를 죽이려는 건가.’
소문으로는 들었다.
검술 학과의 학생들이, 이번 수업을 통해 마법사를 길들인다고 말이다.
만약 평범한 학생이었다면, 리자드맨을 도륙하는 그들의 모습에 당연히 기가 죽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강민혁은 굳이 나서지 않았다.
실제로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도, 그들은 강민혁의 도움 없이 리자드맨을 처리했다.
그러다 사고가 발생했다.
여섯 마리의 리자드맨과 싸우는 상황에서, 리자드맨 한 마리가 뒤에 있는 강민혁에게 달려들었다.
이장후 일행은 그것을 보았다.
그런데도 적극적으로 리자드맨의 움직임을 막지 않았고, 리자드맨은 어느새 강민혁을 덮쳤다.
일촉즉발의 상황.
강민혁의 손에서 화끈한 불길이 일었다.
“파이어 볼.”
펑!
화르르르륵.
강력한 화염이 리자드맨을 덮쳤다.
그러나 리자드맨은 화염을 뚫고, 괴성을 지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끼에에엑.
그 순간.
확!
강민혁이 리자드맨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그러더니 어느새 꺼내든 단검으로 리자드맨의 목 뒷부분을 힘껏 찔렀다.
푹!
리자드맨의 눈이 풀렸다.
이장후 일행의 공격에는 끈질기게 저항하던 리자드맨이, 단 한 방에 무너져 내렸다.
털썩!
너무나도 가볍게 처리한 상황.
이장후 일행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강민혁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자드맨의 외피에 있는 점액질은 물리 피해를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어. 그래서 화염 계열의 마법으로 점액질을 태우고, 리자드맨의 급소라고 할 수 있는 목 뒷부분을 통해 뇌를 노리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지. 너희들처럼 가슴팍을 베고, 육체를 완전히 난도질하는 무식한 방법으로는 리자드맨을 상대로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야.”
툭 내뱉은 말.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이장후 일행은 웃을 수 없었다.
강민혁의 말처럼 리자드맨을 난도질해서 처리한 그들은, 강민혁 발밑에 쓰러진 리자드맨의 모습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38화. 10. 비주류의 현실(2)
현세대.
몬스터가 나타나고 강화 문명이 꽃을 피우면서, 강화 전사들은 절대적인 갑의 위치에 올랐다.
그래서 검술 학과 선배들은 1학년생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내렸다.
“합동 수업에서 똑똑히 보여줘. 강화 전사와 마법사의 상하 관계를. 지금이야 같은 학과생의 입장이지만, 사회에 나가면 강화 전사는 마법사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어. 너희와 마법 학과의 녀석들은, 출발 지점과 종착지가 엄연히 다르다는 뜻이지.”
합동 수업.
처음에 수업이 건의되었을 때, 그 취지는 정말 좋았다.
검술 학과와 마법 학과의 학생들이 미리 호흡을 맞춤으로써, 헌터로서의 기반을 닦는 아주 유용한 수업이었다. 하지만 서로의 위치가 나뉘면서, 검술 학과생들에게 합동 수업은 ‘훈계의 시간’으로 변했다.
마법사.
그들이 을(乙)의 위치임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도록, 강화와 마법의 차이를 보여주는 그런 시간.
이장후의 표정이 굳었다.
강민혁의 지적에,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우리도 알고 있었어.”
리자드맨의 특성.
사실 잘 알지 못했다.
던전에 대해서는 바로 직전에 알려줘서 정보를 알아볼 충분한 시간이 없기도 했고, 리자드맨 정도라면 크게 어려운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굳이 마법사와 협력할 방법을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라가 일렁이는 검으로 리자드맨을 도륙하는 순간, 마법사가 할 일이라고는 깊은 절망감에 빠지는 것뿐이다.
같은 나이.
같은 노력.
비슷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성장했지만, 서로가 택한 길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힘의 차이는 크다.
그러나 강민혁은 달랐다.
강민혁에게, 이장후 일행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을 조금도 선사하지 못했다.
‘수호문의 후계자로 있었을 때, 정말 많은 토벌에 나섰었지.’
리자드맨뿐만 아니라, 수도 없이 많은 몬스터를 상대했다.
그래서 강민혁은 웬만한 몬스터들의 특성이나, 그들을 공략하는 방법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았다.
강민혁이 말했다.
“너희들이 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해. 수호문의 후계자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도 검을 포기한 케이스는 이례적이었고, 당시에 여러 마법 단체들이 내 선택을 들먹이며 마법의 가능성을 말했으니까. 하지만 쉬운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어렵게 갈 필요는 없잖아? 이번 합동 수업이 너희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지만, 그게 성적을 포기할 정도의 이유는 아니잖아.”
정곡을 찔렀다.
이장후를 비롯해서, 도재성과 장기용의 표정이 움찔거렸다.
점수.
중요하다.
검술 학과는 마법 학과와는 다르게 학과생이 정말 많다. 비주류는 세상의 무시를 받는다면, 주류는 너무 많은 관심에 경쟁이 치열하다. 수많은 강화 전사들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길 희망하는 이장후 일행으로서는, 당연히 이번 합동 수업에서 좋은 점수를 획득하길 바라고 있다.
강민혁은 그걸 지적했다.
단순히 마법사를 배척하기 위해서, 효율적인 공략 방법을 포기하는 것은 정말 멍청하다고 말이다.
“어떻게 하지?”
“·········아씨.”
이장후 일행이 흔들렸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 정도로 강민혁이 제시한 방법은 매력적이었다. 강민혁이 먼저 선공으로 리자드맨의 점액질을 태운다면, 굳이 급소를 노리는 방법이 아닐지라도 리자드맨의 사냥 시간이 대폭 감소할 것이다. 검술 학과의 1학년생은 천 명이 넘는다. 이번 수업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은, 그 치열한 경쟁 체계에서 조금이라도 우위를 선점할 수 있음을 뜻한다.
자존심과 실리.
두 가지의 감정이 충돌했다.
그들로서는 강민혁이라는 존재가 달갑지 않았지만, 그건 실리를 포기할 만큼의 악의는 아니었다.
도재성이 말했다.
“그냥 강민혁 말대로 하자. 화염 마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빠르게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잖아. 어차피 앞으로 할 일도 많은데, 여기에서 발목을 잡힐 필요성은 없다고 생각해.”
그의 발언이 파문을 일으켰다.
마치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는 그의 발언에, 이장후도 굳었던 표정을 풀며 어색하게 말했다.
“그래, 그러자.”
던전에 진입한 지 겨우 10분 정도 지난 시각.
그들은 의도치 않게, 강민혁을 파티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상황이 변했다.
강민혁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합류하자, 사냥 속도는 이전과 비교될 정도로 눈에 띄게 빨라졌다.
“파이어 볼.”
펑!
화르르르륵!
강민혁의 선공(先攻).
이후 곧바로 이장후 일행이 리자드맨에게 달려들었다. 괴성을 지르는 리자드맨은 격렬하게 저항하였지만, 점액질이 완전히 타버린 그들의 피부로는 오러를 버텨낼 수 없었다. 두부가 썰리듯 가볍게 동강이 나버리는 육체에, 리자드맨은 제대로 된 반항도 하지 못하고 차례로 무너졌다.
그리고.
“라이트닝(Lightning)!”
빠지지직!
강민혁은 적절한 타이밍에 파티원들을 지원해주었다.
본인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것은 아니었지만,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호흡에 사냥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던전 깊숙이 진입하던 도중, 강민혁이 갑자기 손을 들었다.
“잠깐!”
“왜?”
강민혁이 바닥을 살폈다.
리자드맨이 탈피한 흔적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데다, 점액질의 양도 과도하게 많았다.
발이 푹푹 박힐 정도.
강민혁은 점액질의 색깔과 양을 꼼꼼하게 확인하더니, 일행을 돌아보며 본인의 생각을 말했다.
“이 공간에서 리자드맨의 대대적인 탈피가 진행되었어. 보통 리자드맨은 1마리의 동족이 탈피를 시작하면, 최소 3마리의 리자드맨이 그 주변을 지켜. 탈피한 흔적과 점액질의 양을 보았을 때, 이 주변에 최소 20마리의 리자드맨 무리가 있을 확률이 높아.”
“확실해? 내 감각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데.”
장기용이었다.
강화 전사는 오감(五感)이 발달했다.
본인의 청각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기 때문에, 강민혁의 조언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너희들이 내가 아는 지식에 반박할 타당한 의견이 있다면, 나도 별말 없이 너희를 따라가겠어. 하지만 그냥 부정하고 싶은 거라면 다시 생각해. 준비하고 싸우는 것과 그러지 않은 것의 차이는 크니까.”
“·········.”
고민은 짧았다.
밑져야 본전이기 때문에, 그들은 곧 벌어질 전투를 대비해서 주변을 충분히 확인하면서 전진했다.
그리고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어둠 깊숙이.
횃불이 닿지 않는 공간에 움츠려 있던 리자드맨들이, 인기척이 들리자마자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그때부터였다.
‘수호문의 후계자였던 강민혁의 경험은 틀리지 않아.’
그들은, 강민혁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기 시작했다.
잠깐의 휴식 시간.
이장후는 검을 닦아내며, 강민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대체 왜 포기했을까.’
아직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였다.
어떤 사람들은 강민혁이 후계자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그건 정말 멋모르는 소리다.
적어도 강민혁과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은 안다.
강민혁이 얼마나 대단한 검사였는지를 말이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전국의 강화 전사들이 참여한 무투 대회에서, 강민혁은 오로지 검술만으로 그들을 모두 무너트렸어. 그래서 더욱 충격적이었지. 저런 대단한 재능이 후계자의 자리를 포기하고 마법을 택하는 건, 검술을 갈고 닦는 우리 세대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어.’
한때 이장후 나이대의 우상이었던 사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강민혁에게 배반자의 낙인이 찍히며 인식은 좋지 않게 변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때의 모습이 보였다.
마법사라는 비주류의 길을 걷고 있음에도, 강민혁의 존재감은 밝게 빛났다.
‘결국 본인만이 그 정답을 알겠지.’
휴식이 끝났다.
이장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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