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a 3
리액션이 과했다.
하지만 그게 최병호만의 방식이었다.
계산이 빠른 사람이니만큼, 본인에게 이득이 될 것 같으면 간과 쓸개를 다 내줄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강민혁은 최병호를 보길 원했다.
“학과장님.”
“왜, 설마 벌써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건 아니지?”
“아니요. 오히려 저는 마법 학과에 남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왔어요.”
“정말?!”
학과장의 표정이 환해졌다.
마치 세상이라도 다 가진 것마냥 기뻐하는 그를 바라보며, 강민혁은 담담하게 말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 * *
클리스만.
그의 도움은 대가성 거래다.
마법 문명의 지식을 얻는 대신에, 강민혁은 이 세상에서 몬스터를 토벌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래서 그간 고민이 많았다.
수호문이라는 배경을 떼버리면 겨우 17살 학과생에 불과한 자신이, 어떻게 수많은 무력 단체들도 실패한 업적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결국 강민혁으로서는, 자신이 쥐고 있는 2000년의 마법 문명이라는 강력한 이점을 살리는 수밖에 없었다.
큰 그림을 그렸다.
앞으로의 미래.
그 첫 번째는 바로 마탑의 건설이었다.
‘나만의 세력이 필요해. 나와 같이 몬스터 토벌에 앞장설 사람들. 실력 있는 마법사들이 나와 같은 목표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는, 내 마탑의 특별함을 강조할 필요성이 있어. 그리고 2000년의 마법 지식이라면, 후발주자라 할지라도 마법 학계에서 자리를 잡는 것은 문제가 아니야.’
이학범의 영입.
마법 학술 대회의 출전.
이 모든 것은 마탑을 건설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시기상조다.
강민혁에게는 마탑을 건설할 만한 부와 명예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졌다.
‘내가 힘을 갖추어야 한다.’
두 번째.
바로 본인이 강해지는 것.
남들과는 다른 이점을 확보했지만, 강민혁은 아직 1서클 마법사에 불과하다.
수호문을 한국 최고의 세력으로 만들어낸 강덕철은, 차가운 어투로 항상 이렇게 말했었다.
“세력을 형성함에 있어 소속감은 매우 중요하다. 수호문의 사람들이 진심으로 수호문을 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가주의 역할이지만, 힘없는 인정(人情)은 의미가 없는 법이다. 민혁아. 무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약한 사람이 머리 위에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옳은 말이다.
강민혁이 아무리 대단한 마법 지식을 선보인다고 한들, 본인이 약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계획을 세웠다.
마법 학과에 1년간 남아서, 자신의 힘을 키울 시간을 확보하겠다고 말이다.
“제가 바라는 조건은 간단합니다. 제가 마법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마법 학과의 이름으로 모두 구해주십시오. 그리고 출석의 자유를 보장해주십시오. 좋은 점수를 달라는 건 아닙니다. 제가 개인적인 이유로 자리를 비우게 되더라도, 퇴학 처리만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조건을 말하고.
“대신 앞으로 1년간 마법 학과에 남을 거고, 그동안 제가 이루는 모든 업적들은 마법 학과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사용하셔도 됩니다. 당장 이번 마법 학술 대회의 우승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마법 학과의 가르침이 좋았다고 말하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제시하는 조건입니다.”
곧바로 대가를 말했다.
최병호가 환하게 웃었다.
강민혁이 말한 조건들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그런 수준이었다.
“당연하지! 내가 우리 민혁이를 위해서 무엇이든 못 해주겠어? 그것 외에도 말 만해. 네가 아카데미를 다님에 있어서 불편한 점이 있다면, 이 학과장이 그게 무엇이든 개선해줄 테니까.”
거래가 성사되었다.
이로써 강민혁은 1년의 시간을 얻었다.
‘현재 나는 수많은 세력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어. 그런데 학업을 목적으로 마법 학과에 남는다고 말한다면, 세력들의 호의를 받으면서도 선택은 회피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되겠지.’
성장할 시간.
그동안 남들의 호의를 거절할 생각은 없다.
강민혁이 선택한 애매한 포지션은, 졸업만 하면 강민혁을 영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부여할 터.
강민혁은 계산이 빨랐다.
후계자로서 17년을 살아온 그에게, 현실 직시와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은 단번에 보였다.
거절의 명분은 확보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명함의 주인들을 차례로 만날 차례야.’
때마침.
[존 웨슬리입니다.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가장 매력적인 먹잇감이, 먼저 연락을 보내왔다.
22화. 5. 인생의 변곡점(3)
서울의 한 카페.
강민혁과 간단하게 안부인사를 주고 받은 존 웨슬리는,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제가 이렇게 시간을 내달라고 한 이유는, 예상하셨겠지만 강민혁님을 영국 마법 협회로 모시기 위함입니다.”
칭호가 바뀌었다.
심사위원석에서는 강민혁 학생이라고 부르던 존 웨슬리가, 강민혁에 대한 존경심을 보였다.
“저희는 강민혁님의 연구 방식에 진심으로 반했습니다. 마나의 기억, 형태 변화 등 창의적인 시선으로 연구에 접근하는 방식을 들으며, 강민혁님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할 인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저희가 제시하는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더 이상의 미사여구는 붙이지 않았다.
대회 직후부터 귀가 닳도록 칭찬을 들었을 강민혁에겐, 입에 발린 칭찬보다는 실질적인 이득이 중요하다.
존 웨슬리가 서류를 하나 꺼내 넘겼다.
“계약서입니다. 강민혁님이 영국 마법 협회의 연구자로서 입회하실 경우, 저희는 연간 1000만 파운드(149억)의 연봉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영국 마법 협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최상부의 자료들도 열람할 수 있으며, 강민혁님 밑으로 최소 5명 이상의 연구원들을 붙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협회 내에서 강민혁님의 등급은 골드 클래스로, 저와 마찬가지로 협회장님 외에는 터치할 수 없는 독자적인 권한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영국 마법 협회는 무려 100년의 역사를 가진 세력이다.
그곳의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데, 존 웨슬리는 무려 골드 클래스를 제안했다.
골드 클래스.
세상에 알려진 바로는 영국 마법 협회에서 골드 클래스는 존 웨슬리를 포함해 겨우 3명밖에 되지 않는다. 권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리를 내줄 만큼, 그들은 강민혁의 중요성을 알았다.
하지만 강민혁의 반응은 덤덤했다.
계약서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 모습에, 존 웨슬리가 말을 덧붙였다.
“1서클 마법사라고 들었습니다. 만약 강민혁님이 원하신다면, 제가 직접 마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사제(師弟)의 연.
영국 마법 협회가 택한 초강수였다.
존 웨슬리는 세계가 인정하는 대마법사이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핑크빛의 미래를 뜻한다. 5서클 대마법사로 향하는 탄탄대로. 만약 마법에 욕심이 있다면, 지금의 조건을 거절하기 힘들 것이다.
존 웨슬리.
그 이름은, 그만한 힘이 있었다.
“좋은 조건이네요.”
강민혁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 할지라도, 2000년의 마법 문명을 얻은 강민혁에겐 큰 감흥을 선사하지 못한다.
고로 마음이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강민혁은 최소한의 예의로 제안을 모두 들은 뒤에, 자신의 목적을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어디에도 소속될 생각이 없습니다.”
“·········혹시 다른 곳과 이미 얘기가 끝나신 겁니까?”
“아니요. 당분간은 마법 학과에 계속 다닐 생각입니다. 제 연구와 성장은 모두 마법 학과로부터 비롯되었고, 섣불리 환경을 바꾸는 것보다는 기반을 다질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 마법 협회가 정말 좋은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당장 제게 그러한 혜택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돈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고, 1서클 마법사에게는 마법 학과라는 배경만으로도 성장은 충분하거든요.”
존 웨슬리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제자가 없다.
그런 자신이 제안한 파격적인 제안이 거절당하기는 했지만, 강민혁이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계속 말씀하시죠.”
“예.”
강민혁은 곰곰이 고민했었다.
애매한 포지션.
선택을 강요받지 않을 수 있는 상황에서, 호의를 가진 마법 세력들을 상대로 어떻게 이득을 취할까.
오랜 고민 끝에, 답을 생각해냈다.
“영국 마법 협회는 일 년에도 수십, 수백 개의 연구를 동시에 진행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저와 협약을 맺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영국 마법 협회의 힘으로 불가능한 연구가 있을 경우, 제가 참여해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바라는 대가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저는 영국 마법 협회와 상생(相生)하는 관계를 유지했으면 합니다.”
지금의 조건.
이건 다른 마법 세력들에게도 똑같이 제안할 것이다.
그것으로 강민혁이 얻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난제라 불리는 연구들을 성공시킴으로써 명성을 얻는다면, 그 세력의 인물들은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그렇게 존재감을 퍼트린다.
그리고 1년 뒤에 마탑을 건설할 경우, 자신에게 매료된 사람들을 포섭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먼 미래를 위한 계획.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존 웨슬리로서는, 강민혁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알겠습니다. 저 또한 강민혁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만큼, 강민혁님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기억해주십시오. 1년이 지나든, 10년이 지나든. 언제까지나 영국 마법 협회의 제안은 유효하며, 필요하다면 이 이상의 조건도 제시할 의향이 있다는 사실을요.”
거래 성사.
그때부터는, 편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 * *
한동안 바쁘게 지냈다.
다른 곳들과도 영국 마법 협회와 비슷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강민혁은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1년간은 무조건 마법 학과에 남을 생각입니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거취와 관련된 사항을 얘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그럴 경우, 제 제안은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하지만 강민혁의 단호한 태도에도, 상대들은 표정을 찌푸리기는커녕 모두 알겠다고 말했다.
절대적인 갑(甲)의 위치.
모두가 해결하지 못한 난제를 풀어낸 순간, 강민혁은 단시간에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올라섰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는 사이, 학과 내에서 강민혁의 위상은 달라졌다.
“강민혁은 진짜 천재가 아닐까?”
“당연히 천재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마법 학술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겠어?”
“어쩌면 조작된 결과일지도 몰라. 강민혁의 집안이 수호문이잖아. 그 정도 배경이면 뭐든 할 수 있지 않나?”
“에이, 그건 아니다. 수호문에서 강민혁은 낙오한 후계자잖아.”
강민혁의 업적에 감탄하는 사람들.
그 업적을 시기 질투해서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사람들.
예전에는 조금 유명한 학과생1 정도의 위상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학과생이 강민혁을 주시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민혁의 수상 이후, 마법 학과에는 ‘강민혁 클래스’가 개설되었다. 그건 강민혁이 직접 수업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학범과 강필두가 연구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마법의 형태 변화와 더블 캐스팅은 필수 과목일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고, 학년을 가리지 않고 강민혁 클래스를 배우기 위해서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특이한 변화는 하나 더 있었다.
끼익, 끼익.
“의자가 불편하네.”
무의식 중에 툭 뱉은 말이었다.
강민혁은 수업을 충실하게 받았는데, 아무래도 마법 학과는 지원이 많지 않다 보니 시설이 매우 노후되어 있었다. 딱 보아도 오래된 의자와 책상. 인체를 불편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에 아무 생각 없이 말했는데, 다음 날 수업에 참석하자 강민혁은 기적을 목격할 수 있었다.
“헐.”
“이게 뭐지?”
“책상이랑 의자가 싹 바뀌었네?”
의자와 책상이 모두 새것으로 바뀌었다.
그것도 하나에 몇백만 원이나 하는 고급형이었는데, 강민혁은 이 변화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학과장 최병호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찾아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이번에 대대적으로 책상과 의자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독일 마법 협회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는 데 있어 불편함을 토로한다는 말을 듣고, 무상으로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강민혁 학생, 의자는 괜찮죠?”
그때, 확신했다.
‘내 호감을 얻으려는 의도인가?’
1년.
강민혁이 말한 시간을, 독일 마법 협회를 비롯한 사람들은 경쟁의 시간으로 받아들였다.
그동안 강민혁의 마음을 최대한 회유해야만, 강민혁이 자유가 되었을 때 쟁취할 수 있다고 말이다.
굳이 호의를 거절할 필요는 없다.
이건 강민혁이 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니까.
달라진 위치.
달라진 환경.
강민혁은 마법 학술 대회의 기쁨은 이제 털어내고, 마법적인 성장에 몰두했다.
* * *
며칠 뒤.
기다리던 그 날이 찾아왔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울렁거림이 가라앉은 이후, 강민혁은 클리스만으로서 눈을 떴다.
‘·········교실인가?’
기억에 있는 공간이었다.
처음 클리스만의 몸에 빙의되었을 때, 강민혁은 이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당시에는 정신이 없어서 주변을 살피지 못했지만, 지금은 여유를 가지고 주변의 상황을 파악했다.
‘아직 쉬는 시간인가 보네.’
동급생들의 자리가 드문드문 비어있었다.
쉬는 시간인 모양인지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고 있었는데, 강민혁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이 강민혁에게는 편했다. 딱히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강민혁은 시선을 옮겨 책상 위에 펼쳐진 책을 보았다.
[2서클 마법]
그건 마법서였다.
책장을 넘기자, 안에는 강민혁이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체계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건?’
확실했다.
강민혁은 지난번 꿈에서 하급의 마법을 익혔는데, 이건 상급 이상의 마법으로 추정되었다.
캐스팅의 체계는 매우 간결하였고, 마법의 수식만 보더라도 위력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클리스만의 의도가 보였다.
이걸 익히라는 뜻일 터.
강민혁은 이곳이 교실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한동안 푹 빠져서 마법서를 탐독하였다. 그동안 수업이 진행되었지만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정도 마법서의 내용을 숙지했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 마법서의 글자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어?’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당황해서 주변을 확인했는데, 교수를 포함해서 동급생들은 그런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설마.’
저번에 익혔던 것은 하급이다.
그때 사서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출신들은 상급 마법서를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인즉.
‘동급생들조차 이 마법서의 내용을 보면 안 된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유추할 수 있는 가설이 있다.
비록 동급생들이 관심조차 가지지 않을 2서클 마법이지만, 이건 최상급(最上級)일 확률이 높다.
얼떨떨했다.
최상급은 매우 귀한 자료다.
이곳 세상에서도 보물로 취급하는 자료인데, 클리스만은 대체 어떻게 얻은 것일까?
복잡해진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어느새 수업이 끝난 모양인지 한 학생이 말했다.
“다음 수업은 개별 훈련실로 모이래.”
“아씨.”
“또 마나 룸(Mana room)이야?”
학생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강민혁은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옆에 있는 동급생에게 물어보았다.
“마나 룸이라는 게 뭐야?”
“뭐?”
동급생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강민혁을 마치 벌레 쳐다보는 듯이 바라보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진짜 가지가지 해라.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출신이 마나 룸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아니, 도대체 너는 어떻게 여기에 입학한 거냐? 씨발, 진짜 수준 떨어져서 수업이고 뭐고 받기도 싫네.”
강민혁이 원하는 답은 없었다.
그는 짜증만 내고는 떠나가 버렸고, 결국 강민혁은 교과서에서 마나 룸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마나 룸]
[마나로 구성한 공간. 이 안에서 훈련하면 성장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으며, 마나 룸이 개발된 이후로 서클의 업그레이드 기간이 대폭으로 줄어들었다. 마나 룸을 개발해낸 알렉산드르 도브첸코(Aleksandr Dovzhenko)는, 마법 학계의 혁명을 일으킨 대마법사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성장 촉진이라고?’
마법적인 성장을 바라는 지금.
클리스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확한 해답을 제시해주었다.
23화. 6. 성장
강민혁은 학생들을 따라 ‘개별 훈련실’로 걸음을 옮겼다.
교수로 추정되는 사내는 학생들의 출석을 체크하더니, 모두 모였다고 판단하자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각자 개별 훈련실로 들어가서 마나 룸 훈련을 시작한다. 최소 출력은 3단계고, 그 밑에서 농땡이 피우는 녀석들은 훈련 시간을 연장시키겠다. 그러니 최대한 집중해서 훈련에 임하도록.”
“예.”
학생들이 일제히 개별 훈련실로 들어갔다.
강민혁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비어있는 곳으로 향했고, 안에는 5평 정도 되는 공간이 있었다.
‘·········마법진?’
훈련실 바닥.
그곳에는 마법진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현실에서는 본 적 없는 특이한 형태의 마법진이 방바닥 전체를 차지했고, 육망성(Hexagram)의 꼭지점 부분에는 마나석이 존재했다. 파란 불빛으로 일렁이는 마나석. 강민혁은 교과서의 내용을 떠올리더니, 마나석의 배치를 출력 3단계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맞추었다.
그리고 중심부에 앉았다.
‘마나 룸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은 서클의 마나를 마법진으로 흘려보내는 것. 마법진의 체계에 따라 마나석의 마나가 활성화되고, 일시적으로 주변의 공간을 마나로 충만하게 만들어. 그때부터 훈련은 시작돼. 순도 높은 마나와의 결합으로 서클을 단련시키며, 동시에 더 많은 양의 마나를 축적 시킬 수 있어.’
설명대로 따랐다.
차분하게 서클의 마나를 일으켜서 바닥으로 내려보내자, 예상했던 것과 같이 마법진이 반응했다.
우우웅.
마법진의 형태에 따라 마나가 퍼졌다.
이윽고 꼭지점에 위치한 마나석에 마나가 닿자, 주변이 파랗게 물들면서 공간이 완전히 변했다.
확!
마나로 일렁이는 공간.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파랗게 변하는 모습에, 강민혁은 숨을 들이켰다.
“후읍.”
숨이 턱 막혔다.
너무나도 충만한 마나는 과도한 산소를 공급하였고, 머리는 현기증으로 핑핑 돌았다.
서클이 확장되며 주변의 마나와 동화되는 상황에, 강민혁은 최대한 침착하게 중심을 유지했다.
그런데.
‘서클의 힘이 너무 약해.’
서클.
마법의 핵심.
모든 마법의 근원이 되는 힘을 서클이라고 부르는데, 클리스만의 서클은 주체적인 성향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미약했다. 사실 1서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클리스만의 마나는 3단계 출력의 마나 룸에 그대로 휩쓸려버렸고, 강민혁은 주변의 상황을 이용해서 서클을 단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겹게 올라오는 기운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결국.
“웩!”
포기해버렸다.
클리스만의 서클이 고통스럽다고 비명을 지르는 상황에, 강민혁이라도 버틸 수가 없었다.
“·········이런 뜻이었던 건가. 저주받은 몸뚱이라는 게.”
클리스만은 말했었다.
자신의 몸뚱이는 마법을 구현해낼 만한 힘이 없다고.
그는 마법 문명이 찬란하게 빛나는 이 세상에서, 1서클의 힘도 내지 못하는 저주받은 육체를 타고났다.
사실 항상 의문이기는 했다.
클리스만의 마법 지식은 대단하다. 단순히 강민혁의 세상에서만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최상급의 마법서만 보더라도 그의 세상에서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데 클리스만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마치 하찮은 천민을 대하는 것처럼 까칠한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 만났던 앨버트 교수.
그리고 동급생들 모두.
그들은 클리스만의 입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면서, 클리스만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그간 내가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평범한 학생들이 입학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대단한 집안의 출신이거나, 아니면 뛰어난 마법 재능을 타고 나야 입학이 허락돼. 그런데 클리스만은 대체 어떻게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던 거지? 집안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본인은 1서클 마법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해. 그리고, 본인이 알고 있는 마법적인 지식도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았어.’
의문투성이였다.
생각해보면, 근본 없는 입학생이 분명한 클리스만을 대하는 동급생들의 태도가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고등 교육을 받고 있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클리스만의 입학이 못마땅했으리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런데 그때, 강민혁의 눈에 익숙한 물건이 보였다.
“·········어?”
마나석.
파란 불빛이 일렁이던 그게 마나의 힘을 잃자, 본래의 형태인 ‘붉은 빛의 마나석’으로 변해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붉은 마나석.
그건, 강민혁이 사는 세상에서 ‘쓰레기’로 통용되는 물건이었다.
* * *
마나석.
강화 문명을 탄생시킨 미지(未知)의 힘.
몬스터의 체내에서 추출할 수 있는 그것은, 색깔에 따라 두 종류의 마나석으로 구분할 수 있다.
‘파란 마나석.’
‘붉은 마나석.’
현재 강화의 재료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바로 파란 마나석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파란 마나석은 마나의 함유량이 높다. 가공할 경우 추출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파란 마나석을 위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붉은 마나석은 마나의 함유량도 낮을뿐더러 매우 단단해서 가공도 힘들다. 강화 문명 초창기만 하더라도 붉은 마나석을 활용하려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쓰레기로 취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지금.
강민혁은 새로운 가능성을 목격했다.
‘붉은 마나석이라니.’
마법진을 발동할 당시, 마나석에서 일렁이는 마나는 강민혁이 알던 붉은 마나석의 힘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도저히 해소되지 않는 의문에, 강민혁은 훈련이 끝나자마자 교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책을 펼쳤다.
‘붉은 마나석, 붉은 마나석········· 이거다!’
[마나석의 역사]
[마법 문명 초기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파란 마나석의 가치를 더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300년대 초반, 붉은 마나석의 진실이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붉은 마나석의 인식은 마나의 함유량이 적으면서 가공 또한 힘든 쓰레기였다. 그런데 진실은 그것과 달랐다. 붉은 마나석은 파란 마나색보다 더 양질의 마나로 구성되어 있는 보물이지만, 가공 과정에서 마나가 모두 자연으로 되돌아가며 함유 마나량이 낮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붉은 마나석의 마나를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가공법을 찾은 결과·················· 현재에 이르러, 붉은 마나석은 모든 마법 문명의 중심이 되었다.]
붉은 마나석의 진실.
충격적이었다.
이건 정말, 엄청난 발견이다.
‘보통 토벌 과정에서 얻는 붉은 마나석은 매우 헐값에 팔려. 파란 마나석과 비교하면, 그 값어치가 수백 배는 차이가 날 정도지. 그런데 붉은 마나석이 실제로는 더 좋은 등급의 마나석이라니. 만약 이 사실이 내가 사는 세상에 알려진다면, 세계 경제가 한바탕 난리가 날 거야.’
마나석.
강화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의 값어치가 달라진다면, 당연히 세상이 떠들썩해질 수밖에 없다. 파란 마나석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은 가격 폭락으로 힘을 잃을 것이고, 붉은 마나석의 값어치는 천정부지로 상승할 것이 뻔히 보였다. 지금에야 파란 마나석이 귀중한 보물로 취급받고 있지만, 언제고 마법 문명이 300년대 초반에 붉은 마나석의 순기능을 발견한 것처럼 변화는 찾아올 것이다.
중요한 정보다.
강민혁은 마나 룸의 체계를 익혀둠과 동시에, 붉은 마나석을 가공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마나 룸.
붉은 마나석.
강민혁은 그것들에 대한 지식을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숙지했다는 확신이 들었을 즈음, 언제나처럼 강민혁은 수면의 마수를 뿌리치지 못했다.
쿵.
책상에 얼굴을 떨구는 강민혁.
다시 현실로 돌아올 차례였다.
* * *
현실로 돌아온 강민혁은 곧바로 붉은 마나석을 구했다.
구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마법 물품을 판매하는 사이트에만 접속해도, 붉은 마나석을 헐값에 판매하겠다는 사람들이 널렸다.
[붉은 마나석 백 묶음, 백만 원에 급매합니다!]
거래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어차피 붉은 마나석은 사는 사람이 없다.
강민혁이 구매 의사를 밝히자, 판매자는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헐레벌떡 마나석을 바리바리 싸 들고 강민혁을 찾아왔다. 강민혁이 선뜻 돈을 건네는 상황에 환하게 웃는 그의 표정만 보더라도, 현재 강민혁의 세상에서 붉은 마나석의 가치가 얼마나 떨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강민혁은 일단 개인 연구실을 빌렸다.
최병호는 아예 전담 연구실을 배정해주겠다고 했지만, 일단은 빌리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붉은 마나석을 가공하는 방법은··················.’
[붉은 마나석을 보호하는 단단한 껍질은 일정한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체계의 흐름을 역류하는 방식으로 가공을 진행하면, 붉은 마나석은 균열이 일어나며 마나석의 마나가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고로, 일정한 체계를 따라 가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가공을 위해 마나 레이저(laser)를 샀다.
마나의 힘을 일점에 모으는 아티팩트인데, 마나석 가공에 대중적으로 사용한다.
강민혁은 교과서에서 보았던 내용대로 가공을 시작했고, 레이저의 강렬한 빛이 마나석 껍질을 파고들었다.
치이이익.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강화는 강민혁에게 익숙한 작업이다.
수호문의 교육 과정에는 이런 기본적인 것들도 포함되기에, 강민혁은 능숙한 장인처럼 손을 움직였다.
한 10분 정도 흘렀을까?
붉은 마나석의 표면에 일정한 체계로 마나가 파고들자, 갑자기 껍질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쩌저적.
손을 뗐다.
그리고 가만히 붉은 마나석의 변화를 지켜보자, 이윽고 붉은 마나석이 밝은 불빛을 뿌려댔다.
확!
“·········?!”
강민혁의 눈이 커다래졌다.
가공은 성공했다.
껍질이 벗겨진 붉은 마나석은, 매우 매력적인 빛깔을 보였다.
안에서 출렁이는 양질의 마나.
한눈에 보아도, 이 마나석이 얼마나 상급의 마나석인지를 알 수 있었다.
“정말 성공하다니.”
마나석.
이쪽 세계나, 저쪽 세계나.
마나석은 매우 귀하다.
모든 과정에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물품이기 때문에, 그 값어치는 당연히 폭등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 하급 마나석이 약 백만 원 정도에 판매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방금 가공해낸 붉은 마나석은 상급의 마나석과 비견될 정도였고, 그 정도의 파란 마나석은 수천만 원에도 팔린다.
강민혁이 붉은 마나석 하나에 투자한 금액은 만원.
겨우 만원으로, 강민혁은 수천만 원의 이득과 더불어 돈으로 구하기도 힘든 상급 마나석을 얻었다.
중요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붉은 마나석.
그것은 강화 문명에서 밝혀내지 못한 힘이다.
그 말인즉, 붉은 마나석은 강민혁이 독점(獨占)할 수 있는 힘이라는 뜻이었다.
24화. 6. 성장(2)
강민혁은 일단 마나석을 넉넉하게 가공해두었다.
마나석의 질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대부분 상급 마나석의 오차범위 안에서 완성되었다.
그리고 실험은 이만 마무리하였다.
아직 마나 룸이 남은 상태였지만, 연구실에서 진행하기에는 다소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마나 룸은 일정 공간을 마나가 충만한 상태로 만드는데, 혹시 외부에서 충격이 가해질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그에 대한 부작용은 다양하다 보니, 강민혁은 괜히 모험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강민혁은 아카데미 인근의 고급 주택을 구매했다.
애초에 수호문을 나오면서부터 새로운 거주지를 알아보던 상황이었는데, 마침 지하 벙커가 딸린 매력적인 매물이 나왔다. 벙커를 자신만의 비밀 실험실로 만들면 괜찮겠다는 생각에, 강민혁은 20억이라는 다소 비싼 금액에도 불구하고 계약 의사를 밝혔다.
정리는 금방 끝났다.
강민혁은 곧바로 벙커 안에 있는 5평짜리 창고 방에서, 어제 못했던 마나 룸 실험을 진행했다.
“마나 룸을 만드는 방법은·········.”
[마나 룸을 만들기 위해서는 5평 내외의 작은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닥에 마법진을 그려야 하는데, 마법진의 효과는 마나의 위력을 증폭시키고, 마나가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결계의 역할을 맡는다. 마법진을 모두 그리고 나면, 육망성의 꼭지점 부분에 마나석을 배치하면 된다. 이 마나석의 마나량에 따라 마나 룸의 위력은 달라지며, 출력은 총 5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교과서의 설명이었다.
강민혁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나 레이저를 활용해서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일정 형태를 반복적으로 그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약 30분 정도의 시간을 소모하자 얼추 클리스만의 세상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마법진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미리 가공해두었던 붉은 마나석을 육망성의 꼭지점에 두자, 마법진을 따라 마나의 불빛이 아른하게 피어올랐다.
마법진 완성.
이제는 직접 실험해볼 차례였다.
“아무래도 출력은 1단계가 좋겠지?”
클리스만의 세상에서는 3단계를 진행했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변수를 방지하기 위해서 1단계로 설정했다.
판은 깔렸다.
강민혁은 곧바로 마법진 중심부에 앉았고, 전에 했던 대로 마법진에 자신의 마나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우우우웅!
마법진이 진동했다.
여기까지는 기억했던 것과 동일했지만, 이후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확!
“흐읍!”
강민혁이 눈을 부릅떴다.
엄청난 압력이 강민혁을 덮쳤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사방에서 억누르는 엄청난 힘에 볼살이 파르르 떨렸다.
‘이, 이게 무슨.’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안전을 위해 1단계로 설정했다.
그런데 자신을 압박하는 힘은, 클리스만의 세상에서 느꼈던 3단계 그 이상이었다.
* * *
마나 룸의 원리는 이렇다.
[마법진이 가동될 경우, 육망성 꼭지점에 위치한 마나석의 마나가 공간 전체로 퍼져나간다. 이때 마나는 흡입력(吸入力)를 발생시킨다. 주변에 존재하는 자연의 마나를 빨아들여 일정 공간을 마나로 충만하게 만드는데, 각기 다른 마나가 결합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힘이 발생한다. 이 힘의 흐름을 이용해서 마나를 흡수하면 서클을 강화하고 마나의 양을 상승시킬 수 있지만, 반대로 압력에 굴복하는 경우 마나의 역류 현상이 발생한다. 심하지 않은 부작용으로는 구토와 같은 증상이 있지만, 최악의 상황에는 서클이 파괴되는 사례 또한 있다.]
그래서 출력이라는 안전장치가 있다.
사용자의 수준에 따라, 혹시 모를 부작용을 대비해서 출력을 적정 수준 이상으로 올리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을 염려해서 강민혁은 1단계의 출력을 설정했는데, 지금 발생하는 위력은 강민혁이 겪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3단계의 압력보다 1.5배 이상. 클리스만의 지식에 따르면 이보다 약해야 정상인데, 예상치도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이는 바로 두 세계의 차이로 인한 결과였다.
두 세계가 평형 우주에서 형성되었지만, 2000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있을뿐더러 형성된 문명도 다르다.
이게 바로 문제였다.
자연의 마나는 나무, 땅, 하늘 등등 모든 자연에서 배출되는 마나를 뜻한다. 마법 문명은 이러한 자연의 마나를 활용하는 여러 방법을 알아냈다. 마나 룸과 마나 동화 같은 방법들이 이에 해당하는데, 무려 2000년의 세월 동안 자연의 마나를 사용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자연의 마나보다 소모되는 마나의 양이 더 많아졌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자연의 마나가 발휘하는 힘이 약해졌고, 클리스만의 세상에는 이런 상황을 사회적인 문제로 거론하고 있었다.
반면, 강화 문명은 자연의 마나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강화 문명은 마나석의 마나를 추출해서, 인체에 주입하는 방식으로 인간에게 특별한 힘을 부여한다.
이건 인공적인 힘이지, 자연의 마나는 관계가 없다.
고로, 강화 문명의 세상은 자연의 마나가 충만한 상태.
마나의 농도가 짙은 이 세상에서 마나 룸을 사용하니, 그 압력은 당연히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쿠구구구.
“·········끄으윽.”
강민혁이 이를 악물었다.
이마의 핏줄이 툭툭 튀어나왔고, 감당할 수 없는 마나의 폭풍에 서클은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강민혁의 서클은 매우 단단하다는 것이다. 클리스만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서클은 마나의 폭풍에도 어느 정도 버텨주었고, 강민혁은 침착하게 마나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이 흐름에 대항하다간, 서클이 부서지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서클이 부서진다.’
대책이 필요했다.
최대한 마나의 흐름에 역류하지 않으면서, 강민혁은 교과서의 내용을 열심히 떠올렸다.
하지만 답이 없었다.
교과서는 감당할 수 없는 출력은 시도하지 말라는 경고만 할 뿐, 사고에 대한 대비책은 제시하지 않았다.
핑-.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잃을 뻔한 상황에, 강민혁은 본능적으로 수호문의 심법(心法)을 행했다.
수호문.
그곳에는 가문 대대로 전수되는 마나 심법이 있다. 육체로 주입된 마나를 원하는 흐름에 따라 움직이고, 육체를 강화시키는 방법. 강민혁이 어렸을 때부터 죽어라고 익혔던 마나 심법이 사용되는 순간, 정말 신기할 정도로 마나의 흐름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감당할 수 없었던 압력이, 차츰 참을만한 수준의 압력으로 변했다.
‘먹힌다!’
천만다행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활로를 찾은 강민혁은, 능숙하게 마나 심법을 운용했다.
그러자 강하게 몰아치던 마나가 강민혁의 의지에 따라주었고, 강민혁의 얼굴은 평화를 찾았다.
안정.
위기를 넘기자, 강민혁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나를 내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라면, 이 마나를 이용해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가설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강민혁은 마나를 운용해 서클로 옮겼다.
쿵쿵!
서클이 크게 요동쳤다.
서클의 마나가 파도처럼 밀려드는 마나를 흡수하며 몸을 크게 부풀렸고, 불순물이 섞인 마나는 모두 토해내면서 최대한 순수한 마나만을 빨아들였다. 서클이 활짝 열렸다. 강민혁의 서클이 마나의 통로가 되었고, 마나가 오가는 과정에서 서클은 이전과는 다르게 변해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나 룸이 효력을 잃고 원래의 상태로 변하자,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졌던 강민혁이 눈을 떴다.
번뜩!
강렬하게 빛나는 안광.
강민혁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벌써 2서클을 형성하다니.”
치열했던 순간.
강민혁은 그러한 고통 속에서, 심장 주위에 2번째 고리를 형성하였다.
* * *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2서클.
마법 문명에서는 정말 낮은 경지겠지만, 이쪽 세상에서는 최소 몇 년은 훈련에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그런데 강민혁은 벌써 2서클에 올라섰다. 처음에는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재차 확인해보았지만, 심장 주변에는 2개의 고리가 선명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엄청난 기연인데, 강민혁의 서클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서클과는 그 형태와 힘이 전혀 달랐다.
‘서클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어.’
마나 룸의 효과는 탁월했다.
마법 문명의 사람들이 높은 경지에 올라설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성장 장치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강민혁은 처음의 상황을 떠올렸다.
클리스만이 겪었던 3단계보다 약할 거라고 예상했다가, 마나의 폭풍에 그만 휩쓸릴뻔했다.
“이게 1단계라니. 그럼 5단계는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사실 수호문의 심법이 아니었다면, 강민혁의 서클이 아무리 단단하다고는 하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마나의 흐름을 안정화 시킨 심법의 힘과 강민혁의 정신력. 이 두 가지의 힘이 2번째 서클을 형성하는 기적을 낳았다.
1단계.
당분간은 그 이상 도전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단계별 압력이 2배라고 가정했을 때, 2단계의 출력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그나저나 벌써 2서클이라니.’
그냥 2서클이 아니다.
강민혁의 심장에 형성된 2개의 서클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크고 단단한 모습을 자랑했다.
그리고 안에 흘러넘치는 양질의 마나.
이건 2서클의 힘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비슷한 수준의 마법사들을 압살할 수 있어.’
서클 강화로 강해진 마법.
마나도 동서클 마법사보다 많은 데다, 마나 동화를 사용하면 더 많은 마나를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최상급 2서클 마법.
강민혁은 말이 2서클이지, 어쩌면 3서클 그 이상의 위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황당했다.
남들은 하나의 서클을 형성하는데도 몇 년의 시간을 투자하는데, 자신의 성장 속도는 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아마 2서클을 형성했다는 사실만 알려져도 사람들은 난리가 날 것이다. 마법 학술 대회 우승으로 학자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은 강민혁이, 마법사로서의 재능도 증명하는 것이니 말이다.
1년.
강민혁은 그 기간을 성장의 시간으로 잡았다.
사실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피가 끓었다.
노력한 만큼 성장하는 것.
아니, 강민혁은 그 이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과거 재능의 벽에 절망했었던 강민혁으로서는, 지금 이 순간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25화. 6. 성장(3)
강민혁의 일상이 달라졌다.
마법 학과에서는 수업 프로그램에 따라 착실하게 공부하면서, 방과 후에는 매일 마나 룸 훈련을 진행했다. 처음에야 갑작스러운 압력에 당황했었지만,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점차 1단계의 압력에 적응할 수 있었다.
“후우, 후우.”
규칙적으로 내뱉는 호흡.
마나 심법의 구결에 따라 마나를 운용하니, 파도처럼 밀려들던 마나가 잠잠하게 강민혁의 뜻을 따랐다.
시간은 약 1시간 정도.
무아지경으로 심법에 빠져들다보면, 어느새 시간은 끝나있었다.
‘벌써 끝났구나.’
마나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파랗게 물들었던 공간이 원래의 상태로 변하자, 창고 방 특유의 칙칙한 회색 벽이 눈에 보였다.
“그래도 내 과거가 도움이 되네.”
수호문의 심법.
아마 강민혁이 살면서 가장 악착같이 매달렸던 공부일 것이다. 어떻게든 심법으로 성과를 보기 위해서, 강민혁은 후계자의 자리를 포기하던 날까지 심법을 연마했다. 그래서 심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인데, 그게 마법을 배움에 있어 효과를 발휘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1단계는 안정적인 상태.
앞으로 약 보름 정도 1단계를 유지하다가, 출력 2단계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마나 룸 훈련을 매일 진행하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서클을 올릴 수 있어. 그만큼 마나 룸 훈련의 효과는 대단해. 딱, 한 가지의 단점이 있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말이야.’
훈련으로서는 장점밖에 없다.
훈련의 과정이 다소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훈련으로 얻는 효과를 생각하면 충분히 참을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클리스만의 세상이나 이쪽이나 동일하다. 바로 훈련을 진행할 때마다 상급의 마나석을 6개나 사용해야 한다는 것. 개당 수천만 원에 달하는 마나석 6개를 소모품으로 사용하다 보니, 현재의 시세를 따져보면 회당 1억이 넘어가는 황제식 훈련이었다.
강민혁은 3억 달러의 상금을 탔다.
그중 10퍼센트의 비율은 이학범에 넘겼으니, 현재 남은 금액은 한화로 약 3000억 정도.
아무리 재정적으로 넉넉한 강민혁이라 할지라도, 회당 1억의 훈련은 장기적으로 부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붉은 마나석의 비밀을 알고 있어.’
그건 정말 천운이었다.
클리스만이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민혁은 붉은 마나석의 비밀로 인해 마나석으로 소모되는 지출을 아낄 수 있게 되었다. 붉은 마나석은 시장에 1~2만 원에 판매되는 물품. 파란 마나석에 비해 쓰레기라는 평가를 받지만, 그래도 마나가 함유되어있는 만큼 고정적인 수요층이 있다.
일단 붉은 마나석 확보가 중요하다.
문제는, 자신이 이미 마법 학계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은 사람들이 주목할 확률이 높아. 내 이름으로 붉은 마나석을 다량으로 매수하면, 마법 학계의 사람들은 붉은 마나석에 특별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 물론 그들의 기술력으로는 아직 붉은 마나석의 비밀을 알아낼 수 없겠지만, 붉은 마나석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면 생길수록 시세가 높아질 수밖에 없어.’
결국 자신의 일을 대신 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입이 무거우면서 실력이 있고, 가장 중요한 건 강민혁이 전적으로 신뢰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마침 강민혁은 그런 사람이 한 명 떠올랐다.
‘일단 고영철을 만나자.’
고영철.
의식 저편에 가라앉았던, 후계자 시절을 같이 보냈던 이의 이름이었다.
* * *
수호문은 소규모 집단이 아니다.
문주인 강덕철을 중심으로, 수호문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이루는 여러 갈래들이 존재한다.
처음 수호문이 개문을 선포할 때부터 같이 고생했던 가신(家臣)의 가문들이 이에 포함되는데, 정판호를 비롯한 사람들은 수호문에 충성을 맹세했다. 지금 강민혁이 만나려는 고영철 또한, 정판수와 마찬가지로 가신의 아들이었다.
흑표범 고무진의 이남(二男).
헝클어진 검은 머리에 다크 서클이 짙게 내려온 그를 바라보며, 강민혁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혹시 예전에 했었던 약속 지금도 유효해?”
“어떤 약속을 말하는 거지?”
“알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앞으로 내가 하려는 일을 위해서는, 너의 힘이 반드시 필요해.”
“·········.”
고영철이 강민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고영철의 아버지인 고무진은, 수호문 내에서 정보부대를 맡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수호문의 정보를 취급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온갖 더러운 일 또한 처리한다.
어둠 속의 짐승.
그래서 흑표범이라고 불리는 고무진의 이남이 바로 고영철이다.
고영철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고무진의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그로 인해 음지와 관련된 일에서는 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고영철이 고무진의 후계자로 거론되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강민혁이 후계자의 자리를 포기하던 날 고영철 또한 장남에게 승계권을 완전히 넘겼다.
그리고 현재.
고영철로서는, 강민혁의 얘기가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그래, 네게 제안을 했었지. 만약 네가 후계자의 자리에 욕심이 있다면, 네 아버지를 쓰러트리는 한이 있어라도 어떻게든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넌 포기했잖아. 나와 친구들이 너를 끝까지 지지하겠다고 말했지만, 너는 수호문의 후계자 자리를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어. 그런데 지금에 와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음성은 차가웠다.
사나운 고양이처럼 잔뜩 날이 선 음성에, 강민혁이 할 수 있는 변명이라고는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고영철과 마찬가지로 강민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강민혁은 후계자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알아, 내가 너희들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거. 하지만 수호문은 내 것이 아니야. 아버지가 성장시켰고, 그 이전 세대의 조상님들이 지금의 수호문을 이루기 위해서 피땀을 흘렸어. 그래서 수호문을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어. 적어도 검문의 후계자로서, 나는 자격이 없는 것이 확실했으니까. 알잖아. 무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힘이 없는 지도자는 결국 지배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나보다 더 좋은 후계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내 욕심으로 인해 수호문을 무너트릴 수 없었어.”
솔직하게 말했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아직도 차가운 기색을 보이는 고영철을 바라보며, 강민혁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온전히 내가 만드는,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세력을 만들고자 해. 그때와 같은 일은 반복되지 않을 거야. 만약 내가 한계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뒤로 물러나지 않아. 수호문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지만, 지금 하는 모든 일은 내가 책임져야만 하는 일일 테니까.”
시작이 달랐다.
수호문.
대한민국의 4대 세력이라는 거대한 문파를 물려받기엔, 강민혁은 태생 하나밖에 내세울 게 없었다.
그래서 싫었다.
고영철과 하민성 같은 가신의 아들들이 강민혁을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강민혁은 오히려 그들의 확고한 태도를 보인 시기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만큼 강민혁이 겪었던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재능이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던 강민혁이, 그 날의 사건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힘.
수호문의 가주가 되기엔, 강민혁에겐 가장 중요한 게 없었다.
“하.”
고영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이 짜증이 나는 모양인지, 머리를 잔뜩 헝클였다.
“진짜 개같은 새끼.”
열이 받았다.
만약 강민혁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이해한다.
강민혁이 어떤 생각이었고, 강민혁의 선택으로 인해 수호문은 더 올바른 길로 나아갔다. 고영철 또한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결국 먼 미래를 위해서는 강민혁이 내려오는 게 맞았다.
참담했다.
표정을 잔뜩 일그러트린 그는,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딱 하나만 약속해. 그때는 내게 부탁하지 않았기에, 네가 남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어. 하지만 내게 손을 내미는 지금 이 순간부터, 너는 이제 자의로 포기할 수 없어. 끝을 보기 전까지는, 네 몸이 부서져라 노력해야 한다고. 이 하나를 내게 약속할 수 있어?”
고영철의 시선이 강민혁을 향했다.
그는 고무진을 똑 빼닮았다.
정보전에 타고난 천재였지만, 강민혁이 아니라면 수호문을 위해서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가문을 한바탕 뒤엎었던 그가, 지금 새로운 미래를 보고 있었다.
“약속할게.”
고영철이 피식, 웃었다.
약속.
이 대답을 듣기 위해 얼마나 기다렸던가.
강민혁과 지냈던 시간은 정말 즐거웠고,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재능을 수호문이 아니라 강민혁을 위해 쓰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말했다.
“그래, 그럼 내가 뭐부터 하면 되지?”
이제는 멈출 수 없다.
고영철을 얻은 지금 이 순간부터는, 강민혁도 최고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한다.
“일단 내가 자본을 대줄 테니, 너만의 독자적인 정보 세력을 만들어. 그리고 사람들 모르게 최대한 많은 양의 붉은 마나석을 확보해. 그게, 네게 처음으로 부탁하고 싶은 일이야.”
“아니.”
고영철이 헝클어진 머리를 넘겼다.
음영(陰影)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빛났다.
“이제는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해야지. 대장의 명령은 잘 받았어. 나는 내 역할에 충실할 테니, 나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을 생각이라면 이제 대장의 역할에 충실해. 나는 그거면 충분하니까.”
고영철.
강민혁이, 아주 뛰어난 그림자를 얻는 순간이었다.
* * *
강민혁은 고영철에게 곧바로 100억의 자금을 주었다.
그가 하는 일은 돈이 많이 들기도 하지만, 그에게 자신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고영철은 100억이라는 돈에도 놀라지 않았다.
수호문의 정보부대에서 일하다 보면 억 단위의 돈은 심심치 않게 보다 보니,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고영철과 헤어진 뒤에, 강민혁은 며칠 내내 훈련에 매달렸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내가 현재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자신의 수준을 파악하는 것.
그것은 싸움을 치름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현실을 파악할 필요성이 있었다.
문제는 마법 학과에서 진행하는 실전 훈련으로는 강민혁이 원하는 바를 충족할 수 없었다. 나중에 검술 학과와 같이 진행하는 합동 훈련 정도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어린 애 장난과 같은 실전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동급생들은 그것만으로도 벌벌 떨었지만, 강민혁은 그들과 달랐다.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생각했다.
‘던전 사냥이 괜찮을 것 같은데.’
현재 몬스터의 출몰 방법은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갑작스럽게 공간의 균열이 일어나는 랜덤 게이트와, 통로는 개방되었지만 몬스터가 밖으로 출몰하지 않는 던전 형태의 게이트.
강민혁이 택한 것은 후자였다.
던전은 보통 탐색을 통해 등급을 책정하기 때문에, 사냥의 권한만 확보하면 무리 없이 사냥을 진행할 수 있다.
사냥터를 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본인이 직접 헌터 협회에서 사냥터의 권한을 확보해도 되고, 아니면 이미 권한이 있는 다른 파티에 합류하는 방법도 있다. 강민혁의 경우에는 전자보다는 파티가 있는 것이 마법사의 능력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공식으로 운영하는 헌터 사이트에서 구인 글을 확인했다.
파티원을 구하는 글은 많았다.
다만 검색어에 마법사를 입력하면 그 수가 대폭으로 줄어들었는데, 그중 눈에 띄는 글이 있었다.
[D급 던전 파티에 참여할 마법사 구합니다.]
[현재 파티원은 세 명이 모인 상태고, 예전부터 호흡을 맞춘 파티입니다. 최소 2서클 이상의 마법사만 지원받으며, 저희가 마법사님에게 바라는 것은 보조적인 역할입니다. 주도적으로 몬스터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전투의 밸런스를 유지해주시면 됩니다. 보상의 분배는 3:3:3:1의 비율로 진행할 생각이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본문에 적힌 메신저로 연락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D급 던전.
2서클 마법을 실험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그리고 구인 글의 내용도 마음에 들었다.
글을 쓴 사람은 마법사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보상의 분배 또한 업계 표준치를 따랐다. 마법사는 보통 1의 비율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4서클 이상의 마법사부터는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구인 조건은 2서클로 명시되어 있기에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고로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강민혁은 곧바로 파티장에게 연락했고, 간단하게 조건을 확인한 뒤에 약속 시간을 잡았다.
그리고 다음 날.
“·········혹시 클리스만님?”
“안녕하세요.”
강민혁은 가명(假名)으로 파티원들을 만났다.
그것이, 강민혁이 마법사로서 처음으로 진행하는 파티 사냥의 시작이었다.
26화. 7. 마법사의 역할
며칠 전.
파티장인 김성호가 마법사 구인 글을 올리겠다는 말에, 같은 파티의 동생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굳이 마법사를 구할 필요가 있어요?”
“제 생각도 윤호와 같아요. 우리가 가려는 D급 던전의 특성상 마법사가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2서클 마법을 몇 번 사용하고 나면 빌빌거릴 게 뻔하잖아요. 분명히 마법사 하나 때문에 사냥 속도가 엄청 늦어질 텐데, 굳이 비율을 나누면서까지 구할 이유는 없다고 봐요.”
순하게 생긴 임윤호와 각진 얼굴의 정민철.
이제 막 스무 살 혈기왕성한 녀석들의 의견에, 김성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탐색 정보에 의하면, 우리 세 명으로도 무난하게 클리어할 수 있는 던전인 건 맞아. 하지만 탐색 정보가 항상 정확하지만은 않아. 생사(生死)가 걸린 싸움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는 죽음으로 직결될 텐데,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안전장치를 마련해두는 건 좋은 일이잖아? 겨우 1의 비율로, 우리가 변수를 대비할 수 있는 거라면 충분히 남는 장사라고 생각해.”
“하지만·········.”
“윤호야.”
김성호의 표정이 엄격해졌다.
동생들의 입장은 이해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일반인에 불과했던 세 사람은, 한날한시에 헌터가 되기를 결심했다.
셋이서 같이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고생했고, 지금은 D급 던전을 공략할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하지만 아직도 자신들이 얼마나 부족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강화액을 사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싶은데, 한 푼이 아까운 상황에서 1의 비율을 나누자니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RPG 게임처럼 목숨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김성호는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야할 의무가 있다.
이들의 맏형.
그리고 파티장으로서 말이다.
“우리가 몇 년간 성장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시체를 수도 없이 봤어. 그들이 처음부터 자신들의 죽음을 예상했다고 생각해? 천만에. 그들 모두 자신들의 수준에서는 충분히 공략 가능한 던전에 진입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예상치도 못한 변수에 죽고 말았어. 던전 곳곳에 널브러진 해골들이, 방심의 대가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증명한다고. 너희들도 그렇게 되고 싶어?”
“·········아니요.”
“하지만 마법사를 영입한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잖아요.”
고개를 숙이는 임윤호와는 다르게, 정민철은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김성호의 시선이 정민철을 향했다.
“알아. 3서클도 아니고 2서클 마법사는, 던전 사냥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 내가 마법사에게 바라는 것은 강력한 마법으로 몬스터를 쓸어버리는 게 아니야. 애초에 2서클 마법으로는 가능한 일도 아니고. 다만, 2서클 마법의 위력이라면 몬스터의 어그로를 분산시키는 정도는 가능해. 우리가 앞에서 싸우는 동안, 혹시 한쪽이 위험에 처하면 마법사의 마법으로 밸런스를 맞추는 거지.”
김성호의 판단은 항상 옳다.
동생들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불만 어린 표정을 드러내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구인 글을 올렸다.
김성호는 신중하게 마법사를 구했다. 마법사는 어중이떠중이가 정말 많은 직업이니만큼, 본인의 역할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 20명 정도 되는 마법사들의 제안을 모두 거절한 김성호는, 클리스만이라는 사람이 보낸 메시지에 눈길이 갔다.
[·········말씀하신 역할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앞에서 세 사람이 전투를 하는 상황에서, 혹시 한쪽의 밸런스가 무너지면 그쪽을 지원 사격해달라는 말씀이죠? 그렇다면 무조건 화력 위주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적절하게 마법을 섞는 방향으로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역할을 묻는 간단한 테스트.
클리스만은 가장 이상적인 답변을 해주었고, 김성호는 더 이상 망설일 것 없이 그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예정된 장소에 클리스만이 나타났다.
“·········혹시 클리스만님?”
“안녕하세요.”
그때까지도 동생들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1의 비율.
그걸 마법사에게 투자할 생각을 하니, 괜히 아까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 * *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래도 예의가 있는 모양인지, 동생들은 못마땅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
소개가 끝나고.
김성호가 말했다.
“탐색 정보를 말씀드릴게요. 저희가 공략할 던전은 D등급이 책정되었고, 보스 몬스터로는 홉 고블린(Hobgoblins)이 서식하고 있어요. 예상 고블린의 숫자는 150마리 내외인데, 문제는 홉 고블린으로 인해 F등급의 고블린이 E등급으로 상향되었어요. 그래도 웬만해서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머릿수에서 밀리는 상황이 온다면 적절하게 지원을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고블린.
몬스터들 중에 최하위 등급으로 분류되는 몬스터지만, D등급 몬스터인 홉 고블린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홉 고블린은 고블린의 머리다. 홉 고블린의 명령에 따라 무리를 형성하고, 무장을 갖추기 때문에 F등급이었던 고블린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한다. 잘만 공략한다면 김성호의 말대로 크게 위험할 요소는 없겠지만, 홉 고블린의 지능 수준에 따라 언제든 변수가 발생할 위험이 있다.
파티가 정비를 마쳤다.
곧바로 동굴의 입구처럼 형성된 차원의 균열로 들어갔고, 그러자 회색 빛깔을 띠는 동굴이 눈앞에 펼쳐졌다.
숨을 돌릴 여유는 없었다.
던전에 진입하자마자, 멀리서 고블린들의 소리가 들렸다.
끼룩, 끼룩.
끼룩, 끼룩.
“준비해!”
“예!”
김성호의 외침에, 임윤호와 정민철은 검을 강하게 움켜쥐며 전방을 주시했다.
고블린은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5마리의 고블린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들은 인간을 발견하자마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캬아아악!
전투가 시작되었다.
어느새 지척에 도달한 고블린이 단검을 찔러넣으려는 순간, 김성호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검에서 파란색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바로 체내의 마나를 공격적으로 발현시킨 오라(aura). 번개같이 휘두른 김성호의 검이, 그대로 고블린의 목을 갈랐다.
서걱!
피슈슉!
피가 튀었다.
확 올라오는 역겨운 기운에도, 김성호의 시선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네 마리.
빠르게 주변을 확인하자, 이미 임윤호와 정민철도 각자 눈앞에 있는 고블린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호흡은 매우 뛰어났다. 가장 먼저 고블린을 처리한 김성호가 임윤호와 정민철의 사각지대를 커버하였고, 덕분에 둘은 안정적으로 고블린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서로의 위치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공수에 고블린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정말 순식간에 전멸을 당했다.
털썩.
마지막 한 마리.
고블린이 쓰러지는 모습에, 정민철이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후아.”
인상적이었다.
헌터에 입문한 지 겨우 몇 년 되지 않은 사람들이라기엔, 확실히 전투에 재능이 있어 보였다.
‘괜히 비교가 되네.’
강민혁은 문득 실전 수업이 떠올랐다.
그래도 나름 유소년 아카데미에서 착실하게 수업을 받았던 학생들이, 2서클의 경지임에도 불구하고 고블린을 상대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이들은 벌써부터 능숙하게 고블린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강화 전사와 마법사의 차이였다. 마법사는 오랜 시간 캐스팅을 해도 고블린을 한 방에 처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데, 이들은 개개인이 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고블린을 단번에 절단하는 힘.
검에서 일렁이는 오라가, 마법사를 주류에서 배척시켰다.
“일단 부산물부터 확보해.”
“예.”
정비는 금방 끝났다.
사냥은 계속되었고, 중간에 마주치는 고블린들은 김성호 일행이 모두 처리했다.
그 과정에서 강민혁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할 게 없었다.
사실 이 정도의 페이스라면, 김성호 일행만으로 던전을 공략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역시 마법사는 괜히 불렀어.’
‘D급 던전 정도는 우리만으로도 충분하네.’
동생들의 불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강민혁에게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어차피 본인들의 힘만으로도 고블린을 충분히 처리하다 보니, 강민혁과 말을 섞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강민혁의 생각은 달랐다.
던전 깊숙이 이동할수록, 강민혁의 예민한 감각이 말했다.
‘아무래도 홉 고블린의 지능이 평균치를 웃도는 것 같아. 고블린들의 무장이 매우 잘 갖추어져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공격할 때 일정한 체계가 있어. 뛰어난 지도자 밑에서 잘 훈련된 고블린들이 보통 그런 성향을 보이지. 지금까지는 10마리 이하의 무리를 만나서 큰 문제 없이 고블린들을 처리했지만, 그 숫자가 많아지면 고블린들의 위력은 지금보다 강해질 거야.’
고블린은 많아질수록 강해지는 몬스터다.
머릿속에서 계속 울려대는 경고음에, 강민혁은 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최대한 주변을 경계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파티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 * *
갑자기 고블린의 숫자가 확 늘었다.
얼추 보아도 20마리 정도 되는 고블린의 습격에, 자신감이 넘쳤던 정민철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런.’
캬악!
훅!
기습적으로 창을 찔러넣는 고블린의 공격에, 정민철이 황급히 몸을 틀었다. 그리고 곧바로 반격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문제는 그에게 달려드는 고블린의 숫자가 많다는 것이다. 정민철로서는 결국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사방에서 쇄도하는 공격에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캉!
카캉!
검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그래도 나름 산전수전을 겪은 정민철은 차분하게 대응했고, 어떻게든 틈을 포착해서 고블린에게 일격을 먹었다. 허공에 흩뿌려지는 핏물. 동족의 죽음에 고블린들이 격하게 흥분하였고, 동귀어진(同歸於盡)의 기세로 달려드는 그들의 공격에 정민철이 그만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훅!
“·········?!”
고블린 한 마리를 놓쳤다.
살의로 번들거리는 고블린이 그대로 정민철을 덮치려는 순간, 고블린의 머리가 뒤로 꺾였다.
퍽!
“록 애로우(Rock Arrow).”
‘마법?’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강민혁의 모습이 보였다.
‘아, 마법사가 있었지.’
잠시 잊고 있었다.
하도 존재감이 없었던지라, 그는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정민철은 강민혁이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록 애로우에 맞은 고블린을 곧바로 처리했다.
전투는 치열했다.
각자 최소 7~8마리의 고블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아무리 나름 숙련된 파티라 할지라도 고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의 계획은 고블린 무리를 조금씩 빼내서 상대하는 것. 20마리나 넘는 고블린 무리를 한 번에 사냥하는 것은, 그들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치열한 접전.
그런데 위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강민혁의 마법이 적절하게 작렬했다.
“록 애로우.”
퍽!
처음에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 반복되자, 정민철의 표정이 변했다.
‘제법인데?’
마법의 타이밍이 완벽했다.
웬만한 상황에는 개입하지 않다가, 정확히 위기라고 판단되는 상황에만 마법이 작렬했다.
덕분에 정민철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혹시라도 공격을 당하면 밸런스가 무너지기 때문에 최대한 수비적으로 상대했는데, 강민혁의 커버에 수비가 한결 편해졌다. 강민혁의 마법이 강해서 고블린을 단번에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시간을 버는 정도만으로도, 정민철을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분위기가 편해졌다.
분명히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김성호 파티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이번에도 사각지대를 커버하는 강민혁의 마법에, 정민철은 결국 강민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해.’
2서클.
높은 경지가 아니다.
3서클 정도는 돼야 화력 면에서 위력을 발휘하는데, 강민혁은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다.
마법사가 달리 보일 정도였다.
마법사 하나로 이 정도의 안정감을 부여할 수 있다면, 정민철과 임윤호는 절대 강민혁의 합류를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법사에게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밸런스를 적절하게 맞춘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존재감이 없었던 강민혁의 가치가 급부상했다.
승기를 잡았다.
강민혁의 지원을 받으며 차례로 고블린을 쓰러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고블린을 처리했다.
서걱!
마침내 쓰러지는 고블린.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이 드는 순간, 김성호 일행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강민혁을 보았다.
그의 지원.
그 덕을 본 사람은, 정민철뿐만이 아니었다.
27화. 7. 마법사의 역할(2)
김성호는 전투 내내 동생들의 상황을 살폈다.
혹시라도 그들이 위험에 빠진다면, 김성호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동생들부터 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위험한 상황마다, 강민혁의 마법이 적절하게 작렬했다.
“록 애로우.”
퍽!
마법의 정확도가 정말 예술이었다. 몬스터와 한데 뒤엉켜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강민혁의 마법은 정확히 고블린의 머리를 노렸다. 아무리 1서클 마법이라 할지라도 급소를 타격하는 공격이다. 외피가 단단하지 않은 고블린으로서는, 그로기 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반복되는 강민혁의 지원.
임윤호, 정민철뿐만 아니라, 자신도 적절하게 지원해주는 상황에 김성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보통 실력자가 아니야.’
김성호는 그간 많은 마법사들을 보았다.
그렇기에 강민혁처럼 정확한 타이밍에 마법을 적중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거기다 강민혁의 캐스팅은 정말 빨랐다. 전투는 결국 10분 내외로 결판이 나는 싸움인데, 2서클 마법사에 불과한 강민혁이 그동안 10번 이상의 마법을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1서클 마법의 캐스팅을 평균적으로 1분 안에 끝낸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일부러 록 애로우를 사용하고 있어. 적과 아군이 혼잡하게 뒤얽혀 있는 상황에서, 범위 공격 마법을 사용하면 아군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감안한 선택이겠지. 대단해. 이런 마법사는 처음이야.’
그렇게 전투가 끝났다.
마지막 고블린을 마무리한 김성호는, 한숨 돌리더니 강민혁에게 다가갔다.
“정말 감사합니다. 클리스만님의 지원이 없었다면, 큰 위기에 빠질 뻔했습니다.”
“아니에요. 그게 제 역할인걸요.”
강민혁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실제로 지원만 해주었을 뿐, 고블린을 직접 처리한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김성호는 강민혁의 공을 크게 생각하는 모양인지, 진심이 담긴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웬만한 마법사들은 지원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클리스만님의 생각은 다르실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제가 경험한 바는 그렇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던전의 난이도가 생각보다 높은 것 같아서, 이번 사냥이 끝날 때까지는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김성호의 시선이 동생들을 향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에, 멀뚱히 서 있던 임윤호와 정민철도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다치지 않고 고블린들을 처리할 수 있었어요.”
편견을 버렸다.
실제로 본인의 가치를 증명한 강민혁을 무시할 만큼, 그들은 멍청한 부류가 아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그들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였고, 동생들의 진심에 김성호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들.’
이해한다.
그간 여러 마법사들을 경험하면서, 김성호 일행은 수준 이하의 마법사를 너무 많이 보았다. 그런데도 마법사를 파티에 합류시키겠다는 김성호의 의견에 당연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서클이 낮은 마법사의 경우에,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던전 사냥에서 제 역할을 하는 경우는 정말 드무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김성호의 판단은 옳았다.
만약 강민혁이 없었더라면, 최악의 결과는 아닐지라도 부상자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강민혁이 마주 웃었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던전을 클리어하려면, 제법 많은 전투를 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강민혁의 예상대로였다.
던전 사냥은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 * *
처음에 김성호의 동생들은 D급 던전이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던전에 진입한 지 벌써 1시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본인이 얼마나 자만했는지를 깨달았다.
“에이 씨!”
“또 고블린이야!”
끼룩, 끼룩.
휴식을 제대로 취할 시간도 없었다.
방금도 무려 20마리의 고블린을 처리했는데, 얼마 쉬지도 못한 상태에서 고블린의 소리가 들렸다. 도망칠 방법은 없다. 고블린은 후각이 매우 예민하고 추격에 능한 몬스터이기 때문에, 고블린에게 뒤를 내주는 것은 상책(上策)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정면에서 부딪치는 것이 생존 확률을 더욱 높이는 일임을 알기에, 김성호는 피로를 회복하는 약물을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삭-
“준비해!”
전투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던전 공략을 포기할 법도 하건만, 김성호 일행은 믿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
치지지직.
후방에서 발휘되는 마법에, 김성호 일행의 사각지대를 노리던 고블린 한 마리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라이트닝 볼트는 1서클 마법이나 마비 효과를 동반하는 마법이다. 고블린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전투를 속행하지 못했고, 덕분에 김성호는 가볍게 고블린을 처리할 수 있었다.
강민혁.
그가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김성호 일행의 사냥법은 변했다.
처음에는 다소 수비적인 모습으로 전투 시간은 오래 걸리더라도 안전한 방법을 택했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의 약점은 노출하였다. 고블린의 공격을 허용 당하면 매우 치명적이겠지만, 그들은 그 정도의 허점은 강민혁이 커버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록 애로우!”
퍽!
“나이스!”
이번에도 강민혁의 마법이 적절하게 고블린의 머리를 강타했다. 정민철은 주먹을 불끈 쥐는 것으로 강민혁의 마법에 찬사를 보내며, 곧바로 고블린들 사이로 몸을 날렸다. 확실히 김성호 일행은 기본기가 뛰어난 편이었다. 그들은 안정적인 공수 능력을 보여주며, 차례로 고블린을 처리했다.
벌써 수차례 진행된 전투.
강민혁으로 인해 훨씬 안정적으로 변한 양상에, 임윤호와 정민철은 이런 대화를 나누었었다.
“진짜 성호형이 이번에 제대로 구했네.”
“그런데 저 사람 마법 정말 잘 쓰지 않아? 뭔가 우리의 마음을 읽는 것처럼, 완벽한 타이밍에 마법을 사용해주잖아. 솔직히 전투를 치르면서 소름이 돋더라. 이런 기분은 난생 처음이야.”
공수(攻守)의 타이밍.
강민혁은 그 찰나의 순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김성호 일행이 공격을 시도할 때는 기다렸다가, 수비가 필요한 상황에만 기다렸다는 듯이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니 그들로서는 전투가 편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15마리 내에서 고블린 무리를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20마리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보니 강민혁의 영입은 신의 한 수였다. 1의 비율을 아까워했던 게 민망할 정도로, 제 역할을 완벽하게 해주었다.
사실 이러한 상황에는 그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강민혁의 마법적인 능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강민혁의 안목은 일반 마법사들과는 달랐다.
‘무리하게 공격적인 마법을 사용하지 말자. 보조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득을 볼 수 있어.’
수호문의 후계자.
한때 검을 쥐었던 사람으로서, 강민혁은 몬스터와 직접 싸워본 경험이 많다. 그래서 강민혁의 눈에는 김성호 일행이 원하는 공수의 타이밍이 보였다. 언제 공격을 시도하고, 언제 방어를 하는지. 근육의 움직임만 보더라도 대강 다음 동작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강민혁은 한발 먼저 그들이 원하는 타이밍에 마법을 사용해주었다.
과거의 경험.
그것이 여러모로 강민혁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마법사이면서도 검사였던 강민혁이기에, 김성호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보조가 가능했다.
D급 던전.
예상보다 던전의 난이도는 높았다.
하지만.
서걱!
마지막 고블린을 마무리하는 김성호.
마치 순풍(順風)을 탄 배처럼, 이번 던전 사냥은 큰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 * *
목표한 지점에 도달했을 때, 휴식을 지시한 김성호가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이제는 홉 고블린이 위치한 마지막 구역만 정리하면 끝이에요.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약 130마리의 고블린을 처리했으니, 탐사 정보만 정확하다면 마지막 구역에는 홉 고블린과 20마리 내외의 고블린 정도가 남았을 거예요. 그러니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마지막 구역을 공략하죠.”
전략은 체계적이었다.
정확히 탐사 정보를 토대로 진행하는 것이었지만, 강민혁은 의문이 있었다.
“탐사 정보는 정확한 건가요? 우리가 상대한 고블린들은 무장도 잘 갖추어져 있었고, 머릿수를 앞세워서 합공(合攻)을 할 정도로 영리한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그렇다면 홉 고블린의 지능이 생각보다 높다는 뜻인데, 이렇게 쉽게 일이 풀린다는 게 뭔가 찝찝해요.”
“음, 일리가 있네요.”
김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강민혁의 발언에 힘이 생긴 것도 있지만, 충분히 타당한 의견으로 보였다.
“탐사 정보가 항상 정확한 것만은 아니니까, 제가 몰래 마지막 구역을 확인해볼게요. 저희가 예상한 대로 20마리 내외의 고블린이 있다면, 정면으로 부딪친다고 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어요.”
“그렇게 하죠.”
금방 타협을 보았다.
충분한 휴식 뒤에 김성호는 정찰에 나섰고, 한 20분 뒤에 오더니 밝은 얼굴로 말했다.
“탐사 정보에 나온 것과 동일해요. 홉 고블린과 20마리 정도의 고블린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이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혹시 변수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이나, 마지막 구역을 확인한 이상 이 사냥의 끝을 봐야만 한다. 일행은 무장을 챙기고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우둘투둘한 땅을 지나 안쪽에 형성된 넓은 공간에 발을 딛자, 김성호가 말했던 대로 홉 고블린을 비롯한 20마리 정도의 고블린이 보였다.
탁.
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가 동굴 전체에 울려 퍼지는 순간, 홉 고블린의 매서운 눈빛이 김성호 일행을 향했다.
캬아아아악!
“전투 준비해!”
마지막 전투.
일제히 달려드는 고블린들의 모습에, 김성호 일행은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이제 20마리 정도의 고블린을 처리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D급의 몬스터인 홉 고블린만 조심하면 되기에, 강민혁은 이전과 같은 패턴의 마법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홉 고블린을 경계했다. 혹시라도 홉 고블린이 전투에 참여한다면, 곧바로 마법을 사용해서 시간을 벌어보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툭!
딸랑딸랑!
‘·········뭐지?’
홉 고블린의 행동이 이상했다.
그는 들고 있던 해골 지팡이를 바닥에 두드리는 행위를 반복하더니, 묘한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설마 주술?’
황급히 고블린들의 상태를 파악했다.
다행히도 주술은 아니었다.
광란(狂亂) 같은 주술은 휘하 몬스터들의 위력을 상승시키는데, 그러한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뭘까.
강민혁의 감각이 예민하게 돋아오른 그때, 홉 고블린의 뒤로 이상한 그림자들이 보였다.
키엑, 키이이엑!
키에에엑!
바로 뒤편.
동굴의 끝이라고 예상되었던 밑부분에서, 어디에 공간이 있었는지 고블린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얼추 50마리 정도 되는 고블린들이 추가로 모습을 드러내는 상황에, 김성호의 안생이 창백해졌다.
“제길!”
탐사 정보.
보통 탐사는 마법사의 패밀리어(familiar) 마법을 사용한다.
마법사가 계약을 맺은 패밀리어를 던전 안에 보내서, 던전에 서식하고 있는 몬스터의 종류와 숫자를 얼추 파악한다. 그러한 탐사 정보를 토대로 던전의 등급이 정해지는데, 이번 던전의 경우에는 홉 고블린 뒤편에 숨겨진 공간이 패밀리어에게 발각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김성호로서는 정찰과 기존 정보를 토대로 20마리의 고블린을 예상했으나, 그보다 많은 숫자가 버티고 있었다.
키르르륵.
홉 고블린이 사납게 웃었다.
마치 그는 이러한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이, 더욱 격하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키에에엑!
캬아악!
고블린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한눈에 보아도 감당할 수 없는 숫자에, 항상 침착하던 김성호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씨발.”
도망은 불가능하다.
이미 던전 깊숙이 들어왔기에, 이대로 뒤를 보였다간 오히려 당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정면 대결도 힘들다.
3~40마리라면 어떻게 해결하겠지만, 약 70마리에 버금가는 숫자에다가 홉 고블린도 있다.
이건 승산이 없는 싸움.
김성호가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그때.
“파티장님!”
“·········?”
“지금부터 파티의 화력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러니 역할을 바꿔서, 최대한 저를 지켜주세요.”
“아, 아니 그건.”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김성호는 2서클 마법사인 강민혁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말하려고 했지만, 강민혁은 귀를 닫았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
그렇다면 결국 다수의 적을 쓰러트릴, 강력한 화력이 필요할 터.
‘지금 이 자리에서 내 화력을 실험해본다.’
최상급 2서클 마법.
더블 캐스팅.
형태 변화 등등.
강민혁의 머릿속에 온갖 마법 지식이 떠오르더니, 적들을 휩쓸어버릴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28화. 7. 마법사의 역할(3)
캬악!
고블린들은 빨랐다.
순식간에 덮쳐오는 그들의 공격에, 임윤호와 정민철은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막아!”
“·········썅!”
이를 악물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블린들과 뒤얽히는 순간, 생사가 걸린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꺼져, 이 개새끼들아!”
서걱!
파랗게 일렁이는 정민철의 오라 소드가 고블린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렸다. 깔끔한 일격에 가장 먼저 달려들던 고블린이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한 마리가 죽었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다. 동족의 시체를 밟고 지나가 사방에서 공격하는 고블린들! 패기 넘치게 나섰던 정민철은 곧바로 수세에 몰렸고, 임윤호도 마찬가지로 뒤로 물러나기 급급했다.
캉!
카카캉!
정신없는 공방이 이루어졌다.
왼쪽에서 시도되는 공격을 막으면 곧바로 오른쪽을 공격당했고, 오른쪽 공격을 간신히 막고 나면 또 다시 왼쪽에서 고블린이 덮쳤다. 동시에 정면에서도 이루어지는 공격. 아무리 지능이 높은 고블린이라지만, 그들의 합공은 김성호 일행을 당황시킬 정도로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들의 최후방.
홉 고블린의 지시가, 고블린의 합공을 완성시켰다.
키룩, 키루룩!
딸랑딸랑!
방울 소리에 고블린들이 더욱 격하게 반응했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김성호도 결국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플랜 C!”
서걱!
고블린 하나를 베어버리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플랜 C.
공격이 아니라 서로의 포지션을 이용해서 최대한 수비적으로 맞받아치는 전술. 현재 김성호 일행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선택지기 때문에, 임윤호와 정민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김성호의 지시를 따랐다. 악착같이 달라붙는 고블린들을 베어버리며 서로의 등을 맡겼고, 그나마 사각의 한 군데를 동료에게 의지한 채 고블린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사방에 흩뿌려진 고블린들의 피에 후각은 이미 마비된 상태였지만, 죽지 않기 위해서는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곧 전멸이다.’
김성호의 속이 타들어 갔다.
나름 고블린들을 잘 상대하고 있었지만, 숫자가 너무 많은 바람에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실수였다.
탐사 정보의 정확도가 높다고는 하나, 조금 더 신중하게 확인했어야만 했다. 사실 그렇다 하더라도 패밀리어로도 발견하지 못한 공간은 놓쳤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동생들의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김성호로서는, 이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벼랑 끝.
이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마법사의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겨우 2서클.
마법의 활용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2서클 마법사가 낼 수 있는 화력에는 한계가 있다. 상대가 고블린이라서 화력이 어느 정도는 먹힌다고 해도, 마법사라는 직업은 결국 4~5번의 마법을 사용하고 나면 탈진에 빠진다. 그게 문제였다. 3서클 마법사라면 강민혁의 말처럼 무작정 수비에만 전념해보겠지만, 2서클 마법사이기 때문에 큰 활약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캉!
고블린의 공격을 막았다.
사납게 찢어지는 그의 이빨에, 김성호는 고블린의 머리를 날려버리며 홉 고블린의 모습을 확인했다.
‘결국 도박을 해야만 한다.’
홉 고블린.
그만 처리한다면 상황은 반전된다.
구심점을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에, 김성호는 위험을 감수하고 자리를 이탈하려고 했다.
그 순간.
“파이어 볼, 파이어 볼.”
화르르르륵!
마침 강민혁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작렬하는 불길.
순식간에 주변을 휩쓸어버리는 강력한 열기에, 앞으로 달려들려던 김성호의 몸이 경직되었다.
콰앙!
화륵, 화르르륵!
“이, 이게 무슨·········?!”
순간 눈을 의심했다.
비명을 지르는 수십 마리의 고블린들.
겨우 2서클 마법사라고 생각했던 강민혁이 발휘한 마법은, 분위기를 반전시킬 정도로 충분히 강력했다.
더블 캐스팅.
강민혁은 곧바로 두 가지의 마법을 동시에 준비했다.
서클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허공에 흩뿌려지는 모습에, 강민혁은 ‘마나 동화’로 주변의 마나를 끌어들였다.
‘최대한 여러 번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
상대의 숫자가 많다.
겨우 한두 번의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평균보다 많은 양의 마나를 보유한 강민혁으로서도 마나를 관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마나 동화는 캐스팅 상황에서 주변의 마나를 끌어들이는 기술. 일반적으로 마법 발현에 필요한 소모 마나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기에, 다소 과정이 복잡하더라도 마나 활용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
최상급 2서클 마법은, 그렇게 고블린들을 덮쳤다.
그런데.
콰앙!
화륵, 화르르륵!
“·········?!”
마법의 위력은 강민혁조차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화끈하게 타오르는 불길이 고블린의 외피를 새까맣게 태워버렸고, 몇몇 고블린은 열기를 참지 못하고 바닥에 픽픽 쓰러졌다. 이건 도저히 2서클 마법의 위력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얼추 3서클에 버금가는 수준. 자신이 만들어낸 화마(火魔)에, 강민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최상급 마법의 위력이라는 건가.’
최상급.
클리스만의 세상에서는 하급만 되더라도, 이쪽 세상보다 더 높은 퀄리티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클리스만의 세상에서도 보물로 취급하는 최상급 마법은, 마법의 위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강민혁은 마나 룸 훈련으로 인해서 서클이 평범한 마법사들보다 강해졌다. 강한 서클로부터 비롯되는 역동적인 마나는, 최상급 마법을 만나서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다. 심장에 형성된 서클은 두 개밖에 없었지만, 그 위력은 3서클에 버금갈 정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강민혁의 활약에, 김성호가 바락 소리쳤다.
“클리스만님을 지켜!”
“네!”
상황이 변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본인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강민혁의 마법은 충분히 강하다.
버티면 고블린을 모두 쓸어버릴 수 있다는 확신에, 김성호 일행이 강민혁의 앞을 겹겹이 막았다.
그러자 홉 고블린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키에에엑!
딸랑, 딸랑!
고블린들이 더욱 거칠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강민혁은 수비는 김성호 일행에게 맡긴 채, 마법 캐스팅에만 집중했다.
고블린은 화염 마법에 약하다.
그래서 어중간하게 다른 마법을 섞는 것이 아니라, 더블 캐스팅으로 파이어 볼을 집중적으로 준비했다.
보통 사람들은 마법의 위력을 이렇게 표현한다.
D급을 상대로는 3서클.
C급을 상대로는 4서클.
B급을 상대로는 5서클.
A급을 상대로는 마법사는 하등 필요가 없다고.
2서클 마법사가 활약하기에는 D급 던전은 난이도가 높은 무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블린은 2서클 마법에도 큰 충격을 받는 몬스터라는 것. 실제로 실전 수업에서도, 1서클 마법은 버텨내던 고블린이 마지막에 사용된 파이어 볼에 죽음을 맞이했다. 게다가 강민혁의 마법은 3서클의 위력을 발휘하다 보니, 마법이 발현되는 순간마다 고블린들은 죽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콰앙!
화르르르르르륵!
또 한 번의 재앙이 고블린들을 덮쳤다.
벌써 네 번의 마법.
그러나 강민혁은 캐스팅을 멈추지 않았다. 마나는 아직 충분했고, 70마리의 고블린을 모두 처리하기 위해서는 한두 번의 마법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계속되는 강민혁의 마법. 캐스팅은 빨랐으며,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강민혁은 평범한 2서클 마법사가 사용할 수 있는 그 이상의 마법을 사용했다.
마력이 폭발했다.
마법이 작렬할 때마다, 고블린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10번의 마법을 사용하고 나자, 강민혁으로서도 마나 고갈로 인한 현기증이 일었다.
핑-
‘이런.’
짜증이 났다.
마법은 생각보다 강했다.
그러나 이 정도 마법을 사용하고도, 고블린을 모두 처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짜증이 먼저 앞섰다.
만약 검사였다면.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이, 검 하나로 이들을 처리했을 것이다.
상식보다 강한 위력.
그것조차도 전투를 끝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강민혁의 활약에, 승산이 없던 싸움의 양상이 변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김성호였다.
강민혁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던 고블린을 처리하더니, 그가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금부터는 저희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제 남은 고블린의 숫자는 한 자리수.
패색(敗色)이 짙었던 김성호의 표정이, 지금은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드러냈다.격렬했던 전투가 끝났다.
결국 김성호 일행의 합공에 홉 고블린이 쓰러지며, 목숨을 위협하던 마지막 적마저 처리했다.
그러자.
털썩!
“후욱, 후욱!”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은 임윤호와 정민철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땀이 비처럼 쏟아지는 그들의 얼굴은, 방금의 전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보여주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강민혁의 마법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70마리의 고블린이라는 변수에 이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방금의 전투.
강민혁이 뿜어내던, 강력한 화력이 말이다.
‘2서클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방금 보여준 화력은 대체 뭐지?’
그들로서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2서클.
정해진 등급에서 보여줄 수 있는 화력에는 한계가 있을 텐데, 강민혁의 모습은 상식을 넘어섰다.
그건 단순히 화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김성호 일행이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강민혁이 무려 10번에 달하는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건 말이 안 돼.’
마법사.
그들은 강화액을 체내에 주입해서, 심장 주변에 강제로 서클을 형성한다. 심장은 아주 예민한 부위이기 때문에 많은 마나를 축적할 수 없고, 그렇기에 보통 2서클 마법사들은 4~5번 마법을 사용하고 나면 탈진하기 마련이다. 단언컨대 강민혁처럼 10번 이상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는 본 적이 없다. 4서클 이상의 마법사는 모르겠지만, 그 이하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걸까.
강민혁의 활약상에는 항상 의문이 붙었다.
강민혁은 완벽한 지원 능력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번 전투에서는 그가 승리의 주역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죽었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성호는 동생들과 짧게 의견을 주고받은 뒤에, 강민혁에게 다가가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클리스만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결국 홉 고블린을 마무리한 건 제가 아닌걸요. 저도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요. 이번 던전은 C급을 책정받아도 무방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동생들과 얘기해서 클리스만님의 비율을 절반인 5로 높이기로 했습니다. 사실 저희만의 힘으로는 클리어할 수 없었던 던전이라서, 그만한 대우를 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생들과 상의한 내용이었다.
강민혁의 비율을 높이자는 말에, 임윤호와 정민철은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덧붙인 말이 있었다.
그들은 은근슬쩍, 김성호가 하나의 제안을 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사실 이런 순간이 찾아올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아무리 김성호라 할지라도 마법사에게는 편견이 있었고, 같이 다닐 동료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일회성 관계만 맺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탐나.’
강민혁.
그의 능력은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다르다.
1대1 능력은 자신들이 앞설지는 모르나, 강민혁 하나로 인한 시너지는 그 폭발력이 대단하다.
그래서 말했다.
“·········혹시 앞으로도 저희와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파티 제안.
서로의 입장이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29화. 7. 마법사의 역할(4)
김성호의 제안은 의외였다.
사실 사냥을 진행하면서, 김성호가 일정 선을 긋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상대가 마법사라고 해도 예의는 지키지만, 굳이 친해지려는 노력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파티야.’
D급 파티.
겨우 몇 년 만에 이 정도 수준에 오른 것을 보면, 실력도 괜찮은 편이고 서로의 합도 뛰어나다. 무엇보다도 인성이 나쁘지 않았다. 임윤호와 정민철은 강민혁의 합류에도 불편한 기색을 크게 내색하지 않았고, 김성호는 중재자의 역할로서 강민혁의 편의를 최대한 챙겨주었다.
마음에 들었다.
무력이 지배하는 이 각박한 세상에서, 김성호 일행과 같은 파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수호문에 비하면 실력이 매우 떨어져.’
사람은 각자 보는 세상이 다르다.
강민혁은 수호문에서 자랐고, 김성호보다도 어린 정판수가 A급 몬스터를 토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예전에 강민혁과 같이 동고동락했던 친구들은 모두 그와 같은 괴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김성호 일행의 실력은 감탄을 자아낼 수 있을 만큼의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괜찮은 정도.
현재 수호문의 후계자인 그 녀석과 비교하면, 이들은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파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아.”
김성호가 아쉬운 기색을 보였다.
덩달아 시무룩해지는 임윤호와 정민철의 모습에, 강민혁이 말을 덧붙였다.
“사실 제가 사냥을 자주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시간이 불규칙적이라,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파티에 합류하는 건 가능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연락처를 받아놓고 시간이 될 때 연락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가능합니다!”
김성호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들의 실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안다.
그러나 강민혁은 김성호 일행이 마음에 들었고, 마침 정기적으로 같이 다닐 파티가 필요하기도 했다.
‘매번 새로운 파티를 구할 수는 없어.’
차라리 이게 나을 수도 있다.
만약 수호문의 친구들과 같이 사냥을 나섰다면, 수준 차이가 심해서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김성호 일행은 딱 강민혁과 비슷한 걸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 레벨이었고, 그들과 같이 사냥에 나서면 적절한 레벨대를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파티장인 김성호의 경우에는 마법사의 활용법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그들과의 호흡도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강민혁은 김성호의 연락처를 받았다.
그러자, 김성호가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클리스만님.”
“예?”
“이번에 사냥을 같이 하면서 느꼈습니다. 클리스만님은 이 정도 수준이 아니라,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사람이라는 사실을요. 하지만 저희도 반드시 강해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지금보다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드릴 테니, 저희를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결연함이 감도는 눈빛.
아마 그들에게도 특별한 사정이 있으리라.
세상에는 수많은 헌터들이 있지만, 일반인이었던 일행이 동시에 헌터를 지망하는 것은 흔치 않다.
강민혁이 싱긋, 웃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강민혁은 파티 사냥으로 얻은 것이 있다.
일단 첫 번째.
‘마법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확신.
마법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강민혁은 2서클 마법인 파이어 볼을 10번 사용해서, 무려 50마리가 넘어가는 고블린을 처리했다. 비록 고블린이 F등급의 최하위 몬스터라지만, 마법사 한 명의 화력이 50마리의 고블린을 집어삼킨 것은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지금이야 경지가 낮아서 2서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한계지만, 점점 성장해서 3서클 이상의 마법을 사용하면 폭발력은 더 강해질 터.
그때는 혼자서 일당백(一當百)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강화 전사들이 아무리 강하다지만, 많은 적을 상대하는 상황에서 마법사보다 뛰어날 수는 없다.
게다가.
‘내 마법에는 한계가 없어.’
3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은 그래도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들의 화력을 이용하는 것이 하나의 전술로 사용되는데, 문제는 A급 이상의 몬스터를 상대하면서부터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진다. 아무리 다수의 적을 한 번에 공격할 수 있을지라도, 피해가 전혀 없으면 무용지물이니 말이다.
그래서 마법사는 배척되었다.
검사들은 오라 웨이브라는 기술을 발명하며, 차라리 마법사 없는 사냥을 추구하는 부류도 많다.
하지만 강민혁은 다르다.
클리스만의 세상은 아직 발명되지 않은 6서클 마법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마법들도 있다. 만약 강민혁이 A급 몬스터에게 피해를 입히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마법사들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여기까지는 희망적인 생각.
이번 사냥이 마냥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강민혁은 마법의 위력을 확인함과 동시에, 자신의 현실이 아직 초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두 번째였다.
‘난 아직 약해.’
비슷한 등급의 마법사보다는 강하다.
하지만 수호문의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단언컨대 그들은 혼자만의 힘으로도, 강민혁이 애를 먹었던 70마리의 고블린을 학살해버렸을 것이다.
참 씁쓸했다.
고차원의 마법 문명을 얻고, 강민혁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분명히 마법 학계를 발칵 뒤엎을 정도로 대단한 성과이지만, 그게 강화 전사들과 비교하면 아직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발전한다.
맹수 우리였던 수호문에서는 항상 예민하고 성장에 목을 맸던 강민혁이, 마법 학과라는 다소 풀어진 환경에서 독기(毒氣)가 많이 옅어졌던 모양이다. 서클을 형성하는 정도에 기뻐하는 꼴이라니. 정말 성장을 바란다면, 비교 대상을 자신보다 밑이 아니라 위를 바라봐야만 한다.
꽉.
‘내가 잠시 자만했어. 난 지금 천천히 걸음을 내딛을 때가 아니라, 내 한계를 시험해야 할 때야.’
남들보다 스타트가 느리다.
클리스만의 지식을 얻었다고, 늦장을 부릴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다.
빨리 강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강민혁은, 자신의 목표를 이룰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마나 룸.’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나 룸을 세팅한 강민혁은, 1단계 아니라 2단계로 출력을 맞추었다.
‘마나 룸의 압력은 서클을 성장시키는 지름길. 내게 1단계에 충분히 적응할 시간적인 여유는 없어. 앞으로 1년 동안 최대한 성장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위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해. 내가 수호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호문에서는 강민혁을 독종이라 불렀다.
노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고, 하루의 모든 일과를 수련에만 매진하는 독종 중에 독종.
마법 학과에 입학하면서 잠시 자신의 모습을 잃었던 강민혁이, 이제야 본래의 모습을 조금 찾았다.
‘시작하자.’
마나를 일으키는 강민혁.
마나가 마법진을 따라 마나석에 닿는 순간, 공간이 새파랗게 변하며 강한 압력이 강민혁을 덮쳤다.
우우웅!
“크윽.”
마나 룸 2단계.
목숨을 건 훈련이 시작되었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마나가 일으키는 강력한 압력에, 식도를 자극하는 역한 기운을 당장 내뱉어내고 싶었다.
‘안 돼. 참아야 해.’
억지로 역한 기운을 억눌렀다.
이미 훈련은 시작되었다.
마나의 충돌이 잠잠해지기 전에 중심을 잃는다면, 이대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지도 모른다.
강민혁은 이를 악물고 마나를 운용했다.
1단계를 사용할 때는 수호문의 구결에 따라 마나가 얌전하게 따라주었지만, 거친 파도처럼 변한 2단계의 마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혈관 곳곳에서 강력한 충격이 일었다. 체내의 마나와 마나석의 마나, 그리고 자연의 마나가 엎치락 뒷치락하며 강민혁의 몸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쿵쿵!
몸이 부르르 떨렸다.
코에서는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강민혁은 온전히 마나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수호문.
그곳에서 강민혁은 혹독한 훈련을 경험했다.
몸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엄동설한에 밖에서 생활한 적도 있고, 정도 이상의 강화액을 투입하는 바람에 주화입마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강민혁은 불굴의 의지로 버텨냈다. 마나는 무형(無形)의 힘. 포기하지 않는 의지만 있다면, 어떤 위기에도 강민혁은 결국 목적을 이루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8살의 어린 나이에도 고된 훈련을 경험했던 자신이, 고작 마나의 압력에 굴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드득.
이빨이 부서졌다.
서클이 열리며, 주변의 마나를 빠르게 빨아들였다.
수호문의 심법.
수천, 수만 번을 반복했던 그것을 되뇌임에 따라, 노도와도 같았던 마나가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결국.
“하아.”
성공했다.
충격에 떨리던 몸이 안정되며, 2단계의 마나가 불안정하지만 강민혁의 의지를 따르기 시작했다. 강민혁은 그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마나를 운용해서 혈관 곳곳에 고여있는 불순물들을 제거하였고, 순도 높은 마나를 서클에 채워넣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차오르는 산소에 머리에서 현기증이 일었지만, 강민혁의 정신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나석이 빛을 잃어감에 따라, 강민혁을 압박하는 마나의 힘도 사라졌다.
화악.
“후욱, 후욱.”
끝났다.
강민혁이 털썩 고개를 떨구며,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었다.
머리는 식은 땀으로 범벅이 된지 오래였지만, 서클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힘에 표정만큼은 밝았다.
“·········성공했어.”
2단계 출력.
아마 클리스만의 세상에서는 4단계 정도의 출력으로 추정된다. 그쪽 세상에서도 수년 간을 훈련한 학생에게도 추천하지 않았던 단계를, 강민혁은 기어코 성공해냈다. 확실히 2단계는 1단계와 효과가 완전히 달랐다. 서클은 더욱 단단해졌고, 안에 저장되어 있는 마나의 양도 많아졌다.
강민혁이 피식, 웃었다.
그대로 땅바닥에 드러눕더니, 회색빛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클리스만. 넌 대체 왜 날 선택한 거니?”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법을 전혀 모르는 자신이 아니라, 존 웨슬리와 같은 대마법사가 클리스만의 지식을 얻었다면 벌써 6서클의 경지에 올랐을 것이다. 영국 마법 협회라는 대단한 배경을 이용해서 세력을 형성했을 것이고, 자신과는 다르게 벌써부터 마법사의 인식을 바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강민혁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제 겨우 2서클을 형성하고, 이제 겨우 2단계의 출력을 견뎌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계단들이 많기에, 클리스만의 선택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왜 나를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확실한 건 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강해지고 싶지만 강해질 수 없었던 내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생겼어. 목숨을 걸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활짝 웃었다.
행복했다.
원하는 대로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강민혁에게는 너무나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강민혁은 그 날부터 매일 2단계 출력으로 훈련을 진행했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을 정도로 출력의 강도는 강했지만, 강민혁은 성장을 위해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보름 뒤.
마나 룸 출력 3단계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긴 강민혁은, 심장에 세 번째 서클을 형성하였다.
마법에 입문한지 겨우 몇 개월 만에 벌어진 사건.
그건, 마법 학계의 혁명이었다.
30화. 8. 몰락한 명가의 천재
강민혁은 학기 초기에, 교수로부터 이런 수업을 들었다.
“마법 학과의 궁극적인 목적이 뭐냐고요? 음········· 마법사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기 위함도 있지만, 결국 마법사 또한 헌터의 한 갈래입니다. 경쟁이 치열한 바깥세상에서 헌터로서 제 역할을 하려면, 충분한 실전 경험과 실력을 갖추어야겠죠. 마법 학과에서는 그러한 과정들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완성한 교육 과정을 통해 도와드립니다. 아, 참고로 실력의 기준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세 번째 서클의 형성 여부입니다.”
교수는 3서클을 강조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실상 2서클 마법사는 헌터로서의 가치가 크지 않다.
기나긴 캐스팅 끝에 마법을 사용해봤자 위력이 대단하지도 않은 데다, 마법 몇 번이면 마나가 고갈이 되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러한 단점들이 3서클에 올라서면 어느 정도 해결된다. 마법의 위력도 훨씬 강해질뿐더러, 3개의 서클에서 공급되는 마나의 양은 제법 많다.
그래서 3서클이 마법사의 기준점이 되었다.
학사모를 쓴 졸업생이 3서클 마법사라면 그를 반기는 가족과 수많은 단체들의 영입 제의를 받지만, 2서클 마법사의 경우에는 보통 헌터로서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다. 3서클 이후부터는 언제 다음 경지로 올라갈 수 있을지 미지수이나, 적어도 3서클까지는 평범한 재능과 노력으로도 충분히 오를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마법 학과 2학년이었던 학 학생이, 본인만의 힘으로 3서클 경지에 올라서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난리가 났었다.
유소년 과정을 거친다 할지라도, 보통은 4학년 졸업반 때 간신히 3서클을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케이스다. 그런데 2학년에 진학하자마자 3서클을 형성한 천재의 이야기에, 수많은 단체들에서 영입 제의가 쇄도하였다. 그만큼 3서클의 기준은 상당히 대단한 것이고, 3서클을 얼마나 빨리 각성하느냐에 따라 4서클의 가능성도 예상할 수 있다. 참고로 그 학생은 현재 4학년 과정을 진행하고 있는데, 3서클에서도 발군의 자질을 보여서 영입하려는 단체들이 줄을 섰다.
이러한 이유들로 3서클의 의미는 컸다.
그런데 지금, 마나 룸의 3단계 출력을 버텨낸 강민혁은 심장에 형성된 3개의 서클을 느낄 수 있었다.
“3서클이라니.”
사실 출력을 높인 것은 도박이었다.
2단계에 약간 적응한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강민혁은 3단계로 출력을 높였다.
수호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편안한 수련은 독이다.”
근력 훈련을 하더라도, 수호문에서는 항상 부담되는 수준의 무게를 들게 했다. 근육이 힘들어서 비명을 지르지만, 그래도 어떻게 버틸 수는 있는 수준. 그때의 기억이 강민혁에게 채찍질을 날렸다. 2단계에 더 익숙해지기 전에, 곧바로 3단계에 도전함으로써 발전하길 바랐다.
도박은 먹혔다.
수호문의 심법은 생사의 고비에서 강민혁의 정신을 유지 시켜주었고, 3서클이 그 결과였다.
‘이런 사례가 있던가.’
없다.
적어도 마법 학과에서는, 강민혁의 나이대에 3서클을 형성한 마법사는 없다고 들었다. 그러니 2학년 때 3서클을 형성한 것이 엄청난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세계적인 대마법사들이야 더 이른 나이에도 각성했다는 사례가 있으나, 그들과 강민혁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법의 입문 시기.
강민혁은 유소년 과정 없이, 곧바로 마법 학과에 입학해서 3서클의 경지에 올라섰다.
그건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것이었고, 강민혁도 자신의 발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았다.
‘마나 룸의 효과가 컸어.’
성장 촉진.
마나 룸이 없었다면, 이런 빠른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갖추어진 환경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성장에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다.
“·········내가 마법에는 재능이 있구나.”
재능.
후계자의 자리를 포기하게 만들었던 그것.
클리스만의 지식이 말했다.
지금 자신이 보여주고 있는 성장 속도는, 클리스만의 세상에서도 대단한 것이라고 말이다.
다음 날 오전.
마법 학과에서 수업이 진행되었다.
‘마법서의 이해’라는 과목을 가르치는 하만석 교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열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에 프랑스 마법 협회에서 3서클 마법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의 캐스팅을 간소화하는 연구에 성공했습니다. 캐스팅 시간이 무려 20초나 단축이 되었고, 마법의 위력 또한 소폭이나마 상승하였죠. 이처럼 마법은 변하지 않는 지식이 아닙니다. 더 효율적인 마법 체계를 찾아낸다면, 이전보다도 발전된 형태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
마법서.
마법의 체계를 기록한 책.
그건 인간이 하나의 책으로 엮어서 마법서라고 부르는 것이지, 체계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강민혁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클리스만의 지식을 통해, 상중하로 나누어져 있는 여러 체계를 이미 공부하지 않았던가.
하만석이 말했다.
“지금부터 여러분들에게 조별 과제를 부여하겠습니다. 3명이 한 조를 이루어서, 새로운 마법 체계에 대한 리포트를 제출하십시오. 성공한 결과물을 제출하라는 게 아닙니다. 현재 고정되어있는 마법의 체계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 마법사로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사고의 유연성을 판단하고자 합니다. 시간은 딱 일주일 드리겠습니다.”
조별 과제.
학과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하만석 교수가 자리를 떠나자마자, 학생들은 친한 친구들에게 다가가서 곧바로 조를 형성했다.
그런데 강민혁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마법 학술 대회의 우승자라는 타이틀은, 높은 점수를 받는 보증수표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강민혁이라면 결과물을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급생들은 강민혁에게 섣불리 접근할 수 없었다. 그건, 애매한 위치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강민혁.
수호문의 장남이라, 학기 초기에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던 존재.
그가 마법적으로 성공하면서, 동급생들은 감탄과 동시에 강민혁을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체 왜?
수호문의 장남이 자신들보다도 마법적으로 재능이 뛰어난 것일까.
그래서 강민혁과 친해지는 것은 주변의 눈치가 보였다. 이들은 대부분 유소년 아카데미에서부터 관계를 맺어왔던 사이이기 때문에, 그러한 관계를 무시하면서까지 강민혁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강민혁이라는 존재가 탐나서 힐끔힐끔 눈치를 보는 학생들이 제법 있었지만, 무리 생활이라는 것이 그렇듯 제일 먼저 총대를 메려는 강심장은 없었다.
그때였다.
한 학생이, 강민혁에게 다가갔다.
“혹시 따로 생각해둔 사람 없으면 나랑 할래?”
그는 바로 김창수였다.
실전 수업에서 강민혁의 조장이었던 그는, 그날의 사건 이후로 강민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강민혁은 개쩌는 녀석이야!’
강민혁의 카리스마.
강민혁의 마법적인 능력.
아직도 그때의 순간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의 시선을 외면하면서까지, 강민혁과의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성적에 대한 욕심도 있었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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