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efato 7

손을 따라서 시선을 옮기자 범인을 알 수 있었다.
“헤헤.”
아까 보았던 그 꼬마가 입가에 기름을 묻혀가며 두 손으로 떡갈비를 야무지게 뜯어먹고 있었다.
“……?”
“맛있어!”
전진우가 마지막 남은 하나를 집자, 젓가락에 집혀 있는 떡갈비를 가만히 쳐다본다.
자기도 모르게 젓가락을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자, 눈이 메트로놈처럼 따라온다.
“…….”
결국 전진우는 떡갈비를 내려놓았다. 빛나는 눈동자로 그것을 받아먹은 꼬마가 방글거리며 전진우의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까치발을 살짝 들고는 손을 올린다.
“응! 착해, 착해!”
“순둥아. 음식 먹을 때는 이걸 사용하는 거라 했잖아.”
“아, 맞다!”
“하아…….”
손에 묻은 기름을 닦지도 않고 자신의 머리를 쓰담 거리는 이 꼬마를 보고 있자니, 문득 기를 세우고 있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이건, 내 거다.”
“……어. 그래. 잡채를 그렇게 좋아하면 말을 하지.”
대충 식사가 끝나고 배가 톡 튀어나온 꼬마가 이서진의 품에 잠이 들고 나서야 실내가 조용해졌다.
‘저놈은 신성 길드장이라기보다는 그냥 애 아빠 같군.’
사실상 무소속이니, 뭐니 하던 때와 달라 보일 것도 없었다.
“루비야. 잠시만 순둥이 좀 데리고 옆방에 가 있어 줄래?’
“알겠습니다. 성자님.”
두 방해꾼이 나가고서야 전진우가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할 얘기는 뭐지?”
“일단 대충 이거나 한번 봐봐.”
이서진이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 전진우에게로 내밀었다.
그곳에는 차우 길드의 그레이트 그레이프에 관한 내용 이외에도 신미란의 증언이 담긴 그들의 악행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그것을 진지한 표정으로 보던 전진우가 내뱉었다.
“쓰레기들이군.”
“의왼데. 네 입으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이걸 내게 보여주는 이유가 뭐지?”
“뭐긴. 내가 뭔 말을 할지 대충 감은 잡혔을 거 아니야?”
“차우 길드장에게 본보기를 보여 줄 셈이라면, 내가 아니라 더 적합한 사람들이 있을 텐데?”
“내 주변에는 하나같이 착한 사람들밖에 없어서 이런 일은 맡기기 좀 그래.”
“하. 유난을 떠시는군.”
“아니, 뭐. 스네이크잖아? 원래 뱀은 이런 식으로 더러운 일 잘하지 않나?”
“개소리. 네놈이 생각하는 것보다 뱀은 훨씬 깔끔한 생물이다.”
“아, 그러셔…….”
저런 식으로 맞받아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아까 말한 물약이란 건 무슨 뜻으로 한 말이지?”
“스네이크 길드가 황혼과 물약을 거래할 수 있도록 내가 잘 얘기해 볼게.”
“……그게 고작 이야기를 하는 수준으로 이루어질 거래라고 생각하나?”
“안 된다고 생각해?”
정해연과 이서진의 관계를 어렴풋이 떠올리던 전진우가 할 말이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저런 걸 자기 맘대로 쉽게 결정하는 거야?
아, 신성 길드장이라고 했었나.
아주 대단한 인물 납셨군.
“특별히 상등품으로.”
“……콜.”
속으로 하고 있던 비아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별들의 연회에서부터 황혼 길드장에게 접근한 목적이 바로 저것이었으니까.
“웬만하면 위쪽에서 손쓰기 전에 잡고 싶은데, 지금 어디 있는지를 모르겠단 말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친한 척 사진이라도 찍을 걸 그랬나.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그런 놈과 사진을 찍기에는 사진첩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불쌍했다.
“흠.”
전진우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말했다.
“그놈이 갈 만한 곳을 알 것 같기는 하다만.”
“오. 진짜?”
역시 뱀이라 그런 건가. 후각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었다.
어디 있는지를 안다면,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
“그럼 지금 당장 가자.”
“아니, 잠깐. 그 전에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봐라.”
“갑자기 웬 자리?”
전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난 이서진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스캔하기 시작했다.
무난하다고 할 수 있는 검은색 정장 차림.
그가 발끝까지 보고 나서야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 차림으로는 잡으러 못 갈 거 같은데.”
* * *
“어머. 진우 오빠. 너무 오랜만이다!”
“시끄럽고. 여기 이놈 좀 맡아줘.”
“여전히 까칠하다니까. 응? 이분은 또 누구래? 그새 새 친구라도 사귄 거야?”
“누가 이놈이랑……!”
“그럼 누군데?”
“……그래. 뭐, 비슷한 거라고 해두지.”
갑작스럽게 어디로 데려오나 했더니…….
전진우와 반갑게 인사하던 여성이 나를 거울 앞으로 인도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던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오! 괜찮은데? 꾸미는 맛이 있겠어!”
“대충 사람 구실할 정도로만 만들어 줘.”
“오늘도 놀러 가려고?”
“놀러 가기는 무슨…… 일이야, 일.”
“그런 말 하는 것치곤 얼굴이 좋아 보여? 웬일이래. 요즘은 그런 곳 안 간다고 들었는데.”
“시끄러워. 얼른 하기나 해.”
“네에~”
연예인들이나 올 법한 메이크업샵이다.
전진우는 이곳에 오는 게 한두 번이 아닌지, 익숙한 몸놀림으로 다리를 꼬고 머리를 손질 받고 있었다.
저놈, 저거…….
“안녕하세요~ 몸에 긴장 풀고 전부 다 저한테 맡겨주시면 돼요.”
자신을 이 메이크업샵의 원장이라고 소개한 그녀가 내 얼굴과 머리를 이리저리 보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성자라고 착각할 정도로 재빠른 손놀림이다.
“본판이 괜찮으니까, 딱히 손 볼 곳은 없을 거 같아요. 스타일만 좀 바꾸면 되려나?”
이걸로 메이크업은 두 번째인가.
광고 촬영할 때와는 다르게, 무언가 사심이 가득 담긴 저돌적인 움직임이었다.
“음. 약간 캐주얼한 스타일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녀는 이것저것 옷을 건네며 내게 몇 번이고 갈아입기를 요구했다.
……갑자기 패션쇼를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시간이 조금 흐르고, 거울 속에는 평소의 스타일과는 완전히 다른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약간 와일드하다고 해야 하나…….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만한 옷차림은 덤이었다.
어느새 옆으로 온 전진우가 그걸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럭저럭 봐줄 만하네.”
“……대체 그놈 잡으러 가는 거랑 이러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데?”
“가보면 알아.”
나는 말없이 그가 준비한 차를 타고 이동했다.
전진우의 말대로 가보면 아는 곳이긴 했다.
“진우 형님 아니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어. 들어가도 되지?”
“물론이지요.”
입구에 서 있는 줄을 무시하고, 가드를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간다.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조명과 귓가를 터뜨릴 만큼 큰 음악 소리가 나를 반겼다.
“여긴…….”
그제야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제대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뭐야? 클럽 처음 와? 하. 온갖 잘난 척은 다 하더니. 이거 완전 샌님이었군. 아, 신성 길드장이라고 했었나? 신성하신 분은 이런 곳에도 안 오는 모양이야. 하하!”
내게 우쭐한 표정을 짓고는 자신 있게 앞으로 걸어나가는 전진우.
‘저 자식…….’
마치 물 만난 고기라도 되는 듯, 신나 보이는 발놀림이다.
한숨을 쉬면서 전진우의 등 뒤를 따라갔다.
-스네이크의 망나니가 정신을 차렸다.
누가 낸 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만난다면 꼭 한마디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61화
21. 망나니를 사용하는 방법(3)
“젠장, 젠장!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갑작스러운 정부의 압박.
아무래도 그레이트 그레이프에 대해 알아버린 것 같다.
어떻게?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아직 대중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더욱 큰 뇌물을 준비하던가.
꼬리를 자르기 위해 희생양을 준비한다든가.
일단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약간의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이런 번화가에 있는 클럽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면.’
당장에 시간 정도는 벌어줄 수 있지 않을까.
이미 본국에 있는 허핑 길드에도 연락을 취하고자 했지만.
‘대체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정작 지금까지 잘되던 연락이 되질 않았다.
그는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꼬리 자르기.’
버림받은 것이다.
본거지에서는 연락을 받지 않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의사를 전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오늘 허핑 길드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어떤 사람과 겨우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괜찮아…….’
아주 잠깐 엇나간 것뿐이다.
금방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무것도 아니야.”
강남의 유명 클럽. VIP를 위한 2층의 객실에서 아리따운 여성이 따라준 고급 샴페인을 홀짝인 그가 초조한 얼굴로 시계를 들여다봤다.
평소에도 길드장들이 접대랍시고 데려오던 곳이었지만, 이번에는 반대였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그때, 문이 열리며 한 남성이 들어왔다.
“이런 곳으로 불러내다니. 갈 때까지 간 모양이야.”
“응? 오빠, 저 사람은 누구…….”
“다들 당장 나가!”
“예, 예?”
평소에 가면처럼 쓰고 있던 웃음은 사라지고, 초조한 표정의 박재한이 일갈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며 안에는 두 명의 남성만이 있을 뿐이었다.
최근, 한국에 있는 대형 길드장들이 너도나도 친분을 나누고 싶어 하는 차우 길드의 수장.
그에 반해 상대는 길드장도 아니었지만.
“……여기 앉으시죠.”
박재한이 재빨리 일어서고는 그 남성을 자리로 앉혔다.
이제껏 대접만 받던 그가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술을 따른다.
“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일단 술이라도 한잔…….”
“일을 그따위로 처리하고는 술이 넘어가냐.”
“……흡!”
“라고. 본국에 있는 길드에서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죄, 죄송합니다!”
결국 일말의 자존심마저 버린 채로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니, 저한테 이러셔봤자, 곤란할 뿐입니다.”
“허핑 길드 쪽에서는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어떤 무능한 작자로 인해 작전은 실패. 차우 길드장, 박재한은 본국으로 송환 조치한다.”
그 말을 들은 박재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본국으로 송환한다.
그것은 곧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 제발 그것만은!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흠…….”
천천히 샴페인을 한 입 음미한 남성이 제 앞에 꿇어앉아 있는 박재한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기분 좋네.’
뒷골목의 심부름꾼. 홍산호.
길드와는 다른 ‘조직’을 가지고 있는 그는 차우 길드의 행동을 관찰하고 허핑 길드에 보고하기 위해 그들이 심어놓은 인물 중 하나였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자신의 조직원들조차 모른다.
조직이란, 이곳에서의 활동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일 뿐이니까.
‘아쉽게 됐어.’
차우 길드장, 박재한.
그 또한 허핑 길드 소속 길드원이었다.
그것도 자신보다 꽤 높은 위치에 있던 정예 멤버.
원래라면 자신 같은 심부름꾼은 이렇게 내려다보지도 못하는 인물이지만…….
‘이것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도 있지.’
허핑 길드에게 버림받은 박재한의 취급은 이미 길드원조차도 아니었다.
그로서는 살기 위해서 한참 아래로 보던 인물에게 무릎을 꿇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주 잠깐, 가지고 노는 것 정도는 상관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 홍산호가 씨익 웃었다. 물론, 그 미소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박재한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꼭 안 된단 것은 아닙니다.”
“저, 정말입니까!”
“예. 길드에서도 당신이 그동안 해 온 일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하시고 계시니까요.”
“그, 그렇죠? 제가 허핑 길드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내가 어떻게 알겠냐.’
물론 방금 말들은 그가 지어낸 이야기였다.
어차피 그곳으로 가게 되면 어떤 말을 지껄이더라도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
이런 사소한 장난쯤은 상관없겠지.
어차피 듣는 사람 또한 이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자, 그럼. 술이나 한잔 따라주시죠.”
“예!”
강남에 있는 한 유명 클럽의 VVIP 객실 중 하나.
“……그렇단 말이지?”
그곳의 구석에 작게 뚫려진 구멍이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떤 직원도 알지 못한다.
단 한 명.
자신의 집보다도 클럽에서 살다시피 하던 망나니 한 명을 제외하고는.
“그런데 넌 이런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하하. 그러니까 네놈이 샌님이라는 거다. 나 정도 되면 이런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지.”
“……자랑이다.”
* * *
혹시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계속해서 구멍에 귀를 댄 상태다.
“근데 넌 뭐 하냐?”
그 와중에 전진우는 두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값비싼 양주를 컵에 따라서 가볍게 원샷하고 있는 중이다.
“……너 일하러 온 거 아니었냐?”
“하. 고작 이 정도 술을 마신다고 취하거나 하진 않아. 왜, 부럽나? 신성 길드장이라도 돈은 그렇게 많지 않나 봐? ……왜 웃는 거지?”
“아니야.”
얘가 내 통장에 찍히는 돈들이 얼마인지 알면 저런 소리는 안 할 텐데.
하긴 각성자가 고작 평범한 술을 마신다고 취하진 않겠지.
마침 목이 마르기도 하니깐…….
“나도 줘 봐.”
테이블 위에 있는 술 하나를 까고는 병째로 한 입 마셨다.
옛날에는 이런 비싼 걸 이렇게 마시게 될 줄은 몰랐는데.
소주 하나에도 지갑이 벌벌 떨었으니까.
“잠깐! 그건…….”
“음. 뭐야, 맛 괜찮네?”
술이라서 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달콤하니 먹을 만했다.
다시 한번 마시는데, 전진우가 눈을 좁히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마시니까 좀 아까운 건가?
쩨쩨하긴.
“……아무렇지도 않나?”
“당연하지.”
사실 아직도 그렇게 체감이 들진 않지만, 나도 각성자다.
얘도 나한테 기절까지 한 놈이라 안 그래 보여도, 꽤나 실력 있는 각성자인 건 틀림없고.
“……그건 그렇게 마셔도 될 술이 아닐 텐데?”
“뭐라는 거야. 너도 마셨잖아.”
“내가 마신 건 그게 아니라…… 하아, 아니다. 됐다.”
잠시 그러고 있자, 누군가 우리가 있는 객실로 들어왔다.
“진우 형님. 누가 이런 걸 놓고 갔습니다.”
“줘 봐.”
직원들과도 두루두루 알고 지내고 있는 전진우였기에 우리가 따로 감시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얘. 진짜로 부길드장 맞긴 한 건가?
자연스럽게 클럽의 직원을 부리는 게, 이 클럽의 수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상자?”
매니저 한 명이 가져다준 종이 쇼핑백을 열어보니 상자가 하나 있었다.
상자 안에는 평범한 인형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그 꼴이 참으로 수상했다.
“난데없이 이런 곳에 인형을 두고 갈 놈은 없지 않겠냐?”
“그건 모르는 일이다. 너 같이 이상한 놈이 한 명쯤은 더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얘는 무슨…….
마침 박명훈 팀장님을 보고 배운 걸 써먹을 때가 온 것 같다.
“……뭐 하는 거지?”
“조용히 해 봐.”
인형을 두 손으로 들고 내 몸에 있는 마나를 순환시킨다.
심장, 그리고 옆에 있는 마석 부분에서 무언가 빠져나오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번져나가던 마나가 내 손으로 모여들었다.
그것을 그대로 인형으로 천천히 흘려 넣는다.
물론 이런 평범한 물건에 마나를 투입하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것이 단순한 인형이라는 이야기일 때지만.
“별걸 다 하는군…….”
눈을 감고 있는데, 손끝으로 무언가 찌릿- 하는 느낌이 든다.
“……이거 순 미친 새끼들인데?”
“이게 뭔데 그러지?”
“폭탄.”
그것도 마석을 이용해서 만든 폭탄이다.
이런 걸 만드는 놈이 정말로 있을 줄이야…….
앙증맞은 사이즈의 곰 인형이었지만.
이 크기로도 클럽 내부를 전부 폭파시키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아마도 이딴 짓을 할 놈은 옆방에 있는 놈들뿐이겠지.
저들이 이곳을 나가는 순간 이 폭탄이 터지게 만들어놨을 것이다.
“……당장 어딘가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전진우 또한 심각한 표정이 되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니 마땅히 시간도 없었고.
애초에 따로 방법은 있었기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
내 손바닥에 마나가 퍼졌다.
어쩐지, 이전보다 더욱 밝게 보이는 그 빛으로 곰 인형을 감싼다.
“야.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라.”
“아,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전진우가 문 앞으로 갔다.
다시 집중한다.
내 안에 있는 마나가 이 안에 있는 자그마한 마석과 뒤섞일 수 있도록…….
사실 그렇게 큰 집중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이상해. 자네의 마나는 마치 저것들과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어우러지고 있어.
내 정화 작업을 보면서 박명훈 팀장님이 했던 말이었다.
확실히.
이 곰 인형 안에 있는 불안정한 마석은 내 마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곧이어 작업이 끝났다.
“……다 된 건가? 별로 달라진 건 없어 보이는데.”
“다 됐어.”
겉으론 이래 보여도 이미 안쪽에 있는 마석과 더불어 기폭장치에도 손을 써둔 상태다.
이것도 팀장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나온 방법이다.
마나를 흘려보내 전기가 흐르는 회로를 망가뜨린다.
마나의 조절이 능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내가 할 수 있단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솔직히 나 같은 경우에는 내가 조절한다, 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생각한 대로 움직여줬으니까.
……음료수를 만들려고 거기 있던 건데, 오히려 이상한 것들만 배워온 것 같단 말이지.
“이봐. 쟤네들 나가려는 거 같은데.”
“우리도 슬슬 움직이자.”
* * *
“정말로 괜찮은 게 맞겠죠? 잠깐이면 됩니다. 아주 약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내가 다 해결할 수 있다고요!”
“예. 걱정하지 마시죠. 제가 말을 전해두겠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그들이 도착한 곳은 경기도 외곽에 있는 선착장이었다.
밤이라서 그런지, 어둡고 인적이 드문 그곳을 멍하니 보는 박재한이 설마 하는 눈동자로 제 옆의 남성을 바라보았다.
“멍청하기는. 나는 단순한 심부름꾼일 뿐이야. 그런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뭐, 뭐야? 그럼 약속은…….”
“약속이라. 내가 한 약속은 널 본국에 있는 허핑 길드로 ‘얌전히’ 모셔오라는 것밖에 없었는데.”
차우 길드장, 박재한.
무력이 뛰어난 각성자는 아니었기에, 그는 지금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놈 한 명만 어떻게 한다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찰나에 홍산호가 움직였다. 그로서는 눈 깜짝할 정도의 시간.
“커헉!”
정신을 잃은 박재한을 보며 홍산호가 비웃었다.
“푹 잠들고 계시라고. 깨어나고 나면, 당분간 죽고 싶어도 못 죽을 테니까.”
박재한은 미리 준비해둔 배에 숨겨져 중국으로 밀입국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자택에선 비슷한 체격의 사람이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태워져 자살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작업들은 전부 심부름꾼인 자신이 하는 것이다.
“쯧. 귀찮네.”
“귀찮으면 그냥 데려가지 말고 이쪽으로 넘기는 건 어떠냐?”
“……누구지?”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껄렁껄렁한 걸음의 남자 한 명과 어딘지 낯익은 모습의 한 명.
어렴풋이 그 정체를 기억해 낸 홍산호가 말했다.
“신성 길드장인가?”
“아니. 난 그런 사람 아닌데.”
“그 옆에 있는 건 똘마니 같고.”
“누구한테 똘마니라는 거냐! 나는 스네이크의 부길드장, 전진우다!”
발끈해서 외치는 전진우를 이서진이 어이없다는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미안하다.”
“하하핫! 대단하신 인물 납셨군!”
홍산호가 그리 웃으며 눈을 굴렸다. 주변에 다른 기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저 두 명이서 온 건가?’
아니, 애초에 이 사단이 난 이유가 신성 길드장 때문이었나?
씨익.
좋은 생각이 들었다.
신성 길드장을 허핑 길드로 데려간다.
허핑 길드의 작전을 물거품으로 만든 장본인.
저만한 거물을 데려간다면, 길드에서도 자신을 높게 평가해 줄 테니까.
자신 있었다.
저쪽은 둘이었지만, 자신의 무력이 더욱 강하다는 확신.
“네놈들 둘이서 날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온 모양인데. 아주 큰 착각이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둘이라니?”
“……주변에 더 있다는 건가?”
“아니. 여기 있는 건 셋뿐이지. 너, 나, 그리고 얘.”
“……얘가 아니고, 전진우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아니라는 거지?
그런 의문을 표하고 있을 때, 이서진이 전진우의 등을 앞으로 밀었다.
“……뭐?”
“내가 왜 싸워. 싸우는 건 얘 혼자야.”
난데없는 행동에 두 명이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이서진이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가라. 망나니.”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62화
21. 망나니를 사용하는 방법(4)
“……아?”
전진우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앞이 아닌 뒤를 향해 달려들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야만 했다.
“크하하핫! 꼴에 길드장이라고 직접 나서지는 않겠다 이건가! 저 쫄따구 혼자서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어.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놈들뿐이군.”
자신을 무시하는 말투에 전진우가 이곳으로 오며 챙겨온 단검 두 짝을 허리춤에서 꺼냈다.
예리한 검날이 순간 이서진을 향했다가, 다시 앞쪽을 향한다.
홍산호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전진우가 작게 으르렁거렸다.
“네놈의 도움은 필요 없다. 방해만 될 게 뻔하니까, 뒤쪽으로 찌그러져 있어.”
“예이. 예이.”
“……큭!”
전진우의 말에 감사를 표하며 이서진은 냉큼 뒤쪽으로 빠졌다.
그 꼴을 보며 피식 웃은 홍산호가 말했다.
“너는 딱히 데려갈 생각이 없는데 말이야. 스네이크든, 뭐든, 너 같은 건 고려 대상이 아니거든.”
“멋대로 말하는 건 좋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제일 먼저 상황을 알아차린 건 이서진이었다. 처음 전진우를 만나고, 자신에게 달려들었을 때.
순간이지만,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었다.
처음 던전에 갔을 때 만났던 단검을 주력으로 사용하던 살인마.
그놈을 전진우와 비교하자면 과연 어떨까.
“……!”
비교할 필요도 없었다.
마치 뱀의 재빠른 움직임처럼 자세를 낮춘 전진우가 단숨에 홍산호의 앞까지 도달했다.
“방심하는 순간 네놈의 목을 물어뜯어 버릴 테니까.”
“오! 단순한 쫄따구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 움직임에 반응한 홍산호가 단숨에 뒤로 거리를 벌렸다.
‘……왠지 쟤한테만 하는 말이 아닌 거 같은데.’
꺼림칙함을 느끼는 동안에도 둘의 공방이 이어졌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단검을 든 두 손이 쉬지 않고 움직인다.
전진우가 압도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형태다.
“끅……!”
아까까지 보였던 웃음기는 사라지고, 홍산호가 전진우를 노려보았다.
촤악!
그의 몸을 두 자루의 단검이 재빠르게 긋고 지나간다.
유효타를 남겼음에도, 전진우는 얼굴을 찌푸릴 뿐이었다.
홍산호는 별다른 무기는 들고 있지 않았다.
“……단단하군.”
“그런 장난감으론 내 몸에 제대로 된 타격도 못 줄 거 같은데? 어때, 뒤에 있는 놈도 참가하는 게?”
“야. 전진우. 그렇다는데?”
“닥쳐라! 네놈은 가만히 있어!”
제 몸이 무기라는 듯, 그는 안으로 파고드는 전진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전진우가 날렵하게 그 손을 쳐내고, 옆으로 빠져나온다.
마치 바위를 연상시키는 단단한 몸이다.
아마 저것이 저놈의 고유 능력.
‘한번 잡히는 순간 위험하겠어.’
그래도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리저리 긁힌 몸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상관없다.’
아주 천천히.
상대방의 숨통을 조여 간다.
그것이 전진우의 방식이다.
제 몸을 한번 내려다본 홍산호가 혀를 차고는 중얼거렸다.
“이대로 즐기는 것도 좋겠지만, 아무래도 갈 길이 바빠서 말이야.”
거리를 벌린 홍산호가 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가락만 한 사이즈의 검은색 물체.
“알약?”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약이지.”
꿀꺽.
그것을 단번에 삼킨 홍산호가 포효를 내질렀다.
이 알약이 홍산호가 저 둘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던 이유였다.
몸에서 느껴지는 힘에 홍산호가 미친 듯이 웃었다.
“크하하하핫! 이 기분이야! 도저히 힘을 주체할 수가 없어!”
“……뭐지?”
홍산호의 얼굴과 찢어진 옷 틈새로 핏줄들이 파랗게 돋아났다.
상당히 기괴한 모습이다.
“죽어라!”
이제껏 맹렬하던 전진우의 공격이 멈췄다.
이번엔 자신의 턴이라는 듯, 홍산호가 그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약이 무언가 파워업을 시켜준 모양이야.’
저것을 삼킨 후에 홍산호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고, 약간이지만 몸이 비대해졌다.
‘하지만…….’
광기에 물든 눈.
그 모습이 상당히 불안정해 보였다.
힘겹게 공격을 피해내고 있던 전진우가 잠시 주춤하고 말았다.
그에게로 거대한 손이 덮쳐온다.
‘잡힌……!’
“아이기스의 방패.”
전진우의 몸이 홍산호에게 잡히기 직전.
그의 앞으로 낯익은 순백의 방패가 나타났다.
홍산호가 뻗은 손이 방패에 가로막힌다.
그 틈에 전진우가 냉큼 뒤쪽으로 물러났다.
방패를 보고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듯, 전진우가 얼굴을 찡그렸다.
“쓸데없는 짓을…….”
근처로 온 전진우를 보며, 이서진이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 하냐?”
“……아무것도 아니다.”
“그나저나 조금 힘들어 보이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네놈이 도와주지 않았어도, 저깟 공격에 맞을 내가 아니야!”
“도와줬단 건 알고 있나 보네?”
“…….”
이런 시시껄렁한 농담을 할 수 있는 것도 이상했다.
파X레인X가 변신하는 시간을 기다려주는 악당도 아니고, 원래라면 상대방 쪽에서 공격을 속행할 테니까.
“크흐? 크흐핫!?”
“……저놈은 왜 저러는 거지?”
“낸들 아냐.”
홍산호는 제 몸을 껴안고 이상한 웃음을 흘리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리 좋은 약은 아닌 모양이다.
“야. 솔직하게 말해. 진짜 혼자 잡을 수 있냐?”
“당연…….”
“자존심 부리지 말고.”
“……아주 약간. 저놈이 비겁한 수를 쓰는 바람에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군.”
진작에 그렇게 말할 것이지.
애초에 저쪽에서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듯이.
이서진 또한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거 받아라.”
“……이건 뭐지?”
“몸에 아~ 주 좋은 거.”
이서진이 건넨 물약을 보면서 전진우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노란색……?”
정확히 말하자면, 섭취하는 순간 신체 속도를 단숨에 상승시켜 주는 마법의 아이템이다.
정식 명칭은 ‘신속의 물약’
효과를 들은 전진우가 표정을 구겼다.
“나보고 저놈과 같은 꼴이 되라는 건 아니겠지?”
“유감스럽게도 부작용은 없어.”
“……그거까진 이해하겠다만, 그렇다면 이 나머지 하나는 뭐지?”
그렇다.
이서진이 꺼낸 것은 두 개의 물약이다.
“……보라색이라니. 마시기에는 껄끄러운 색 같은데.”
“군소리하지 말고 마셔. 네가 사춘기 어린애냐?”
상처를 치유하는 빨간색의 물약도.
마나를 회복하는 파란색의 물약도 아니었다.
“저 더럽게 단단한 놈을 두부로 만들어줄 거야.”“헛소리를…….”
그런 말을 뱉으면서도, 전진우는 단숨에 두 개의 물약을 제 입으로 털어 넣었다.
그걸 본 이서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가 스르륵 올라왔다.
-끄앙!
손에 쥐어진 손전등.
‘이거지.’
이전과는 다른 가벼운 몸놀림으로 앞으로 튀어나가는 전진우를 보며 그는 생각했다.
역시 뒤에서 지켜만 보는 버프 캐릭터가 최고라고.
* * *
신속의 물약을 사용한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었다.
* * *
「물약이 나오는 정수기+1」
설명: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정수기를 사용할 경우 물 대신 물약이 나온다.
생산 가능한 체력 물약[하급][중급] : 5ℓ, 3ℓ
생산 가능한 마나 물약[하급][중급] : 3.5ℓ, 2ℓ
시간 당 생산 회복률 : 1.2ℓ/600㎖, 600㎖/300㎖
*하루 두 번 섭취자의 신체 속도를 상승시키는 ‘신속의 물약’을 생산 가능합니다.
[신속의 물약 제조법]-체력 물약과 마나 물약을 각각 일정 비율로 섞고, 만드라고라의 뿌리를 잘게 빻아 첨가한다.
*현재 조건이 완료되지 않아 숨겨진 제조법이 존재합니다.
▷??의 물약
▷??의 물약
[…….]
[…….]
* * *
숨겨진 제조법.
혹시 다른 것을 섞어 보면 되지 않을까.
황혼의 연구실에서 박혀 있을 당시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하지만 저 ‘조건’이란 것이 문제였다.
‘어이없었지…….’
대체 저 조건이란 것이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해답은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운동을 하고 있을 때 해결되었다.
[??의 물약의 제조법을 위한 조건이 완수되었습니다!]
[조건-【만물의 주인】 이서진의 힘 스탯이 ‘3’ 이상이 된다.]
애초에 상태창을 잘 확인하지 않는 터라, 내 스탯이 몇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얼마나 높은지 간에 내 주변 인물들과 비교하면 한없이 낮을 테니까 괜히 주눅 들기도 하고.
어쨌든 조건이 나왔으면 간단했다.
새로운 물약의 제조를 위한 몇 가지 재료들이 공개되니깐.
연구실에 실험할 재료들은 썩어 넘쳤었다.
“잘 싸우고 있네.”
신속의 물약.
그리고 ‘괴력의 물약’이라고 이름 지은 신 물약을 동시에 섭취한 전진우는 그야말로 한 마리의 나비와도 같았다.
아니, 나비는 좀 귀여우니까. 장수말벌 정도로 할까.
“이, 쥐새끼가!”
뱀한테 쥐새끼라니.
신속의 물약은 원래부터 빠른 신체 속도를 가지고 있던 전진우의 몸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크헉!”
괴력의 물약은 전진우에게 부족했었던 파괴력을 높여주었다.
이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더욱 강한 공격을 퍼붓는다.
상대가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리가 없다.
“크아아아악!”
정말로 마물과 비슷한 포효를 내지른 그가 원망스러운 눈동자를 보냈다.
바로 앞에 있는 전진우가 아니라, 내 쪽으로.
“빛! 그 빛을 당장 치워!”
“응. 레이저 빔.”
손전등을 그들이 움직이는 곳에 맞춰 이리저리 비춘다.
* * *
*악惡 성향의 존재에게 일정 수준의 데미지와 디버프 효과를 부여합니다.
*선善 성향의 존재에게 일정 수준의 버프 효과를 부여합니다.
* * *
새로 추가되었던 손전등의 능력.
선善 성향은 내가 같은 편이라고 인식하는 대상.
전진우는 물약 외에도 손전등에 의한 버프 효과를 받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악惡 성향은 그 기준이 애매모호 했다.
내가 다른 편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저 디버프 효과란 것이 걸리지 않았으니까.
악惡 성향은 마물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눈앞에서 이성을 잃어가고 있는 저 녀석도 그 디버프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상황은 완전히 우세했다.
오히려 그 이상한 약을 먹지 않았다면, 조금은 고전하지 않았을까.
홍산호는 끊임없이 들어오는 공격의 흐름을 끊기 위해 일부러 틈을 내주며 무리한 공격을 했다.
‘이번 건 크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와는 달리 완벽한 치명타가 들어갔다.
왼쪽 팔을 축 늘어뜨린 홍산호가 다급하게 안쪽에 손을 넣었다.
“야. 망나니. 몸통 박치기!”
그러나 수많은 알약들을 입에 박는 것이 더 빨랐다.
홍산호의 몸은 비대해지다 못해, 완전히 부풀어 올랐다.
확실하다.
저 모습은 인간이 아니라, 마물이다.
“피해!”
전진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이제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홍산호가 노리는 것은 나였다.
마치 마물처럼.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해가 되는 인물을 알아챈 것이다.
‘아이기스의…….’
급히 방패를 만들어내기 위해 속으로 주문을 외고 있을 때.
쾅!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나타나더니, 내 코앞에 있던 홍산호가 저 멀리 바닷속으로 날아갔다.
정확히는 누군가에 의해 날려졌다.
신속의 물약과 괴력의 물약을 동시 섭취한 전진우도.
이상한 알약을 대량으로 삼킨 홍산호도.
“여기 있으셨군요.”
방금까지 지켜보고 있던 것이 마치 애들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움직임.
“정말로.”
약간의 꾸중과 많은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
“정말로.”
그동안 듣지 못했던 뾰로통한 말투와 살짝 부풀려진 양쪽 볼.
“걱정했잖습니까. 성자님.”
물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홍산호를 한번 바라보고.
가시 돋친 철퇴에 잔뜩 묻은 피를 두 번 바라보고 난 뒤.
드디어 현실감이 돌아온 내가 앞에 있는 백색의 소녀를 향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미안.”
반복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예전 던전에서도 그렇고.
……루비야, 대체 내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알고 오는 거니?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63화
22. 성자님의 말은 언제나 옳다(1)
어둠 속에서 순백의 수녀가 걸어왔다. 가시가 돋친 철퇴를 제 손에 들며, 내게로 올곧이 다가온다.
“이런 위험한 행동을 루비 몰래 하고 계실 줄이야.”
“어, 그게…….”
“성자님.”
“……응?”
루비는 연신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성자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루비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홍산호를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바라본 루비가 말을 이었다.
“성자님께서 저런 사악한 마귀에 힘을 쓰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성자님을 위협하는 존재들은 이 제가 전부 배제할 것이니까요.”
선착장에 흩날리는 스산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몸이 긴장되었다.
하지만 금방 풀어진다.
저곳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루비니깐.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내 궁금증을 말하자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던 루비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손을 허둥지둥 움직인다.
“비, 비밀입니다.”
……저렇게 말하니까 더 알고 싶은데.
하지만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도 귀여웠고, 별달리 캐묻진 않기로 했다.
실제로 아슬아슬하기도 했고.
“그나저나…….”
마물의 육체와 비슷한 형태가 된 홍산호.
그가 물속에 둥둥 떠다니는 걸 보자니, 이런 상황에도 헛웃음이 나왔다.
‘진짜로 터무니없네.’
지금 이곳에서 싸우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약물(?)로 한껏 파워 업을 한 상태다.
신속의 물약과 괴력의 물약을 섭취한 전진우.
거기다 홍산호는 수상한 약을 다수 섭취함과 동시에 몸이 완전히 변해 버렸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살인마, 정예 마물, 그리고 홍산호까지.
내가 위험하다 싶으면 휘둘러지는 사나운 철퇴.
힐끗-
철퇴를 보자, 돋친 가시 틈틈이 피가 묻어 있다.
“왜 그러십니까, 성자님?”
“……아니야.”
문득 궁금해졌다. 성인인 내가 보더라도 눈이 살짝 찌푸려지는 광경이다.
고작해야 스무 살도 안 된 루비가 저런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어보진 않았다.
그녀 나름대로 험난한 인생을 살아왔을 테니까.
-계시 속 그분을 위해서.
잠시간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자니, 문득 전진우가 떠올랐다.
아무런 소리도 안 나기에 잊어버렸네.
“……야, 넌 뭐 하고 있냐?”
전진우는 홍산호에게도 보이지 않던 완벽한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몸이 잔뜩 굳은 게 내 눈에도 보인다.
향하는 대상은 내 옆에 있는 이루비.
“성자님. 저 사람은…….”
축 늘어져 있던 루비의 철퇴가 아주 약간, 전진우를 향한다.
“당신은 성자님의 적입니까?”
“…….”
전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땀까지 흘리는 게, 아마도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이쪽의 말이 들리지 않는 거 같은데.
어쩔 수 없이 나는 루비의 귀에 살짝 속삭여줬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하자면, 꽤나 행동이 재밌는 놈이다.
껄렁껄렁하긴 해도, 본성이 나쁘다거나 하는 놈도 아니고.
그저 자존심이 너무 강할 뿐이다.
내 말을 들은 루비가 철퇴를 내렸다. 그리고 내게 보일 정도로만 눈이 살짝 커졌다.
“성자님, 죄송합니다만. 포X몬이 무엇입니까……?”
“이런 미친놈이……!”
루비의 입에서 나온 맥 빠지는 말을 들은 전진우가 그제야 자세를 풀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소리쳤다.
그러면서도 무기는 내 쪽으로 향하지 않게 조절하는 게 어지간히 의식하고 있나 보다.
대체 얘를 왜 무서워하는지 모르겠네. 맹목적이기는 하지만, 보다 보면 햄스터 같은 애다.
……나만 그렇게 보이나?
“전진우. 일단 저놈 좀 물에서 건지자.”
“……알겠다.”
가까이에서 본 홍산호의 모습은 역시 기괴했다.
대체 그 알약이 뭐길래 사람을 저렇게까지 바꿔놓을 수 있는 거지.
어지간히 급하게 입으로 털어 넣었는지 알약 몇 개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걸 몇 개 줍고는 기절해 있는 두 놈을 쳐다봤다.
일단 우리가 찾던 놈.
차우 길드장, 박재한.
얌전히 기절해 있는 꼴이 참 세상 물정 모르고 잘 자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홍산호를 보고 있는 전진우.
내가 봐도 조금 놀랍긴 했다.
옆구리가 움푹 파여 있는 모습.
괴력의 물약을 먹은 전진우가 공격했을 때에도 끄떡없던 그 몸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허억!”
난데없이 기절해 있던 박재한이 깨어났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선착장.
아마도 배에 태워져 밀입국이라도 하려 했던 거 같은데.
“이놈은 왜 멋대로 안심하고 난리야?”
“억!”
곧바로 얼굴을 걷어차 다시 잠들게 했다. 이놈들을 데리고 가야 했기에 성기사들을 불렀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 홍산호 또한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약을 먹기 전의 몸으로 돌아왔기에, 근처에 있던 밧줄로 포박을 해둔 상태였다.
“기억났다.”
저 얼굴.
내가 처음에 던전에 갔을 당시에 자신을 각성자 범죄 전담반이니 뭐니, 하면서 소개하던 놈이다.
뭔가 꺼림칙하다 했더니, 거짓말이었구만.
그는 깨어나자마자 나를 한번 노려보더니, 제 몸에 묶인 밧줄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완벽하게 묶었고, 혹시나 풀리더라도 주변에 우리가 대기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와그작!
무언가 어금니로 씹는 소리가 들린다.
“이 미친……!”
전진우가 당황하면서 곧장 홍산호의 입을 벌렸다.
“……어금니 안쪽에 독을 숨겨두고 있었어.”
곧장 홍산호의 몸이 미칠 듯이 경련하기 시작한다.
저런 식으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 정도라…….
어지간히 효력이 좋은 독약인 모양이다.
“대체 왜?”
전진우의 말에 나 또한 공감했다.
차우 길드장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인물.
잡힌 이상 여러 가지 심문이 이어질 것이지만.
그것이 망설임 없이 자살을 결심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중국의 허핑 길드라고, 들어는 보셨을 겁니다.
차우 길드장이 처음 만났을 당시에 꺼냈던 말이다.
저 한마디로 인해 많은 길드장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고.
실수였는지,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허핑 길드라…….”
“……결국, 죽게 되겠군.”
“얜. 뭔 소릴 하는 거야?”
물론 저대로 두면 금방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내가 전진우와 둘이서 온 이유는 루비에게 험한 것을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그런 내가 애 앞에서 누군가를 죽게 놔둘 리가 없잖아.
“……물약? 대체 언제?”
어느새 내 근처에 생겨난 물약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생체 인벤토리가 최고다.
원래대로라면 저 녀석은 죽고,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체로 끝나게 됐겠지.
정보를 넘기고 싶지 않아서, 죽기로 마음먹은 그 충성심은 인정한다만.
“내 앞에서는 누구라도 쉽게 죽을 수가 없거든.”
물약들의 뚜껑을 따, 녀석의 입에 미친 듯이 쏟아 넣기 시작했다.
* * *
혹시 모르니, 박재한은 재갈까지 물려가며 가둬둔 상태다.
홍산호는 넘기지 않고, 따로 맡겨둔 사람이 있었다.
이태영.
고문에 관해서라면 스페셜리스트라고 해야 할까.
평소에는 이유지에게 당하기만 하면서, 그런 쪽으로는 상당히 잔혹한 녀석이다.
그사이에 정부에서는 차우 길드와 관련된 모든 사업체들의 조사에 들어갔다.
하나같이.
파헤칠수록 더러운 구석이 나오는 것들뿐이었다.
어떻게 이리 빠르게 성장할 수 있나 했더니…….
막대한 자본을 이용한 뇌물.
약점을 알아내 상대방을 뒤흔들며 협박을 하는 등.
그동안은 꽤나 잘 감춰온 것 같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차우 길드장, 박재한이 이미 잡혔기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아마 꼬리를 잘랐겠지.’
그 배후가 허핑 길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자를 지원해 주던 세력이 발을 뗐다.
사람들은 차우 길드의 실체가 드러나자 큰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충격을 먹을 만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마석병의 유행에 대한 원인이 밝혀졌습니다.]
드디어 차우 길드의 최대 만행이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사람들은 분노했으며, 그 화살은 던전을 소유한 길드들에서,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차우 길드로 변경되었다.
좋아하며 마시던 음료수가 자신들의 몸에 끔찍한 마석을 심고 있었단 사실은 그리 쉽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차우 길드에 속해 있던 각성자 및 연예인들도 그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사실을 모른 채로 이용당했다 하더라도, 대중들에게는 비난의 화살이 향할 곳이 필요했으니까.
“……전 괜찮아요.”
씁쓸한 표정을 지은 신미란이 살며시 웃어 보였다.
“저 같은 경우에는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으니까요. 제가 받아들일 죗값일 뿐이에요.”
그중에서도 직접 이 사실을 증언하고, 그레이트 그레이프의 광고 모델이기까지 했던 신미란은 그 정도가 심했다.
‘솔직히 그렇게 크게 잘못한 건 없어 보이는데…….’
내게 차우 길드에 관한 만행을 말해준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있어선 큰 용기를 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몸소 앞에 나서서 차우 길드의 만행을 파헤치는 것에도 노력해 줬고.
“전 욕을 먹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욕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동생이 평범한 생활을 보내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예전에 주눅 들어 있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도 그녀는 더 이상 모델 생활을 이어가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일자리 정도는 마련해 줄 수 있다.
“신성 길드에서 스카우트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아, 저는 이런 사람이라고 하는데요.”
이번에 만든 명함을 고개를 숙인 그녀에게 살며시 내밀었다.
내 능청스러운 제안에 신미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어벙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물을 터뜨렸다.
“감…… 사합니다. 정말…… 로…….”
사실 이전부터 생각해 뒀었다.
신성 길드에는 저렇게 의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많이 필요했으니까.
결국, 한 가지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내 생각을 말하자, 그걸 들은 정해연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질색하시더니, 이번엔 자발적으로 나가시네요?”
“……크흠.”
“농담이에요. ……전 그런 면이 좋다고 생각하니까요.”
“뭐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해연이 배시시 웃었다.
사용하기로 한 방법이란, 별것이 아니었다.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의 광고를 찍은 후, 각 방송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쏟아져 나왔다.
신성 길드장.
이 아니라, 광고의 핵심이라고 봐도 무방한 루비에르트에게로.
물론 내게도 많이 오기는 했지만…… 루비에게 온 요청이 훨씬 많았다.
……길드장이라는 이미지보다는 좀 더 다가가기 쉬워서 그런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마도.
나는 대충 사람이 가장 많이 볼 것 같은 시간대의 프로 하나에 출연하기로 했다.
‘오늘의 Hit’라는 이름의 방송이었는데. 대충 최근에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인물들을 초대해 간편한 인터뷰를 하는 프로였다.
의외로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각성자들과 연예인들도 많이 출연했다고 하니 괜찮을 것 같았다.
인기도 많았고.
“서진 씨가 그 프로에 나간다고 하니까, 쌍수를 들고 환영하시던데요?”
“그래요?”
지금도 계속해서 러브 콜이 오고 있던 곳 중 하나니까.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조금 부탁 아닌 부탁을 받아서요.”
“……무슨 부탁이요?”
“대충 알고 계시잖아요?”
정해연이 눈짓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물론 그곳에 있는 사람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루비가 있었다.
덤으로 무릎 위에 앉아서 인형을 가지고 있는 순둥이까지.
“……그럴 줄 알았어요.”
* * *
“……대체 왜 이렇게 활동을 안 하는 거야?”
평범하던 20대 커리어 우먼, 방혜은은 요즘 들어 누군가가 자꾸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짝사랑이라도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연하.
거기다가 같은 여성이었다.
사실 직접 마주한 적도, 자주 마주친 적도 없었다.
[당신의 하루에 음료수 한 잔 어떠세요?]
회사 생활에 지쳤을 때, 우연히 봤던 광고 하나.
그래 봤자, 광고였기에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곳에 나온 한 인물에 그녀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훈훈한 얼굴.
훤칠한 키.
완벽한 비율을 가진 신성 길드장.
이 아니라.
그런 그의 앞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루비’라는 이름의 소녀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 미소를 한번 보고 난 뒤로는 따분했던 회사 생활이 조금은 밝게 변했다.
‘그런데…….’
새로운 연예인이라도 되는 건가 싶어서, 이곳저곳에 검색을 하고 다녔지만, 그 광고를 제외하고는 나오는 게 없었다.
그 흔한 프로필조차 없다.
자신 말고도, 그녀를 찾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나같이 단순한 광고를 보고 그녀의 미소에 빠진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루비는 국민 여동생이었다.
팬클럽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그 소녀는 알기나 할까?
“그리고 내가 그 팬클럽의 창설자라는 것도…….”
웃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다시 한번 어디에 얼굴이라도 비춰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광고를 돌려보고 있을 때, 팬클럽에 어떠한 글이 올라왔다.
-이것 봐!
단순히 어느 방송 편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오늘의 Hit」
그곳에 신성의 길드장이 나온다는 내용.
그렇다면 그곳에 그 루비라는 소녀도 나오지 않을까?
그들은 하나같이 기대감에 부풀어 본방을 기다렸고.
“……성자님이 뭐지?”
그들이 상상하던 것과는 약간은 다른 화면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64화
22. 성자님의 말은 언제나 옳다(2)
“오늘의 Hit! 오늘 모셔보실 분은…… 이야. 이거 정말로 나와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누군데 그러시죠?”
“요즘 이 사람보다 유명한 사람이 한국에 있을까요?”
“혹시……?”
“예. 그렇습니다. 오늘의 Hit. 게스트, 신성 길드장님이십니다!”
두 MC가 자리에서 일어나 멀리서 걸어오는 신성 길드장을 향해 인사했다.
‘……우와.’
오늘의 Hit의 메인 MC를 맡고 있는 나지현은 광고 속에서만 보던 신성 길드장의 모습에 남모르게 감탄했다.
슬랙스에 와이셔츠라는 간편한 복장.
신성 길드의 이미지 때문에 그럴까.
성직자 같은 차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의 외견은 다른 연예인과 비교하더라도 전혀 꿇리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야.’
셔츠 같은 것으로는 숨길 수 없는 넓은 어깨와 등.
길게 뻗은 다리와 완벽한 비율의 몸.
훈훈한 외모.
유명 프로의 MC를 맡고 있는 만큼, 연예인과 각성자들을 많이 봐왔던 그녀였지만, 이런 신체를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역시 길드장이라면 남다르긴 하구나.’
그래도 신성의 길드장이니 저래 보여도 좀 과묵하지 않을까.
그런 예상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프로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방송 분량을 뽑아내는 것이 그들의 일.
“예! 오늘은 신성 길드장, 이서진 님과 함께하게 될 텐데요…….”
곧이어 그의 뒤를 따라 나오는 인물을 보자마자, 공동 MC인 채상준의 말이 멈추었다.
프로로서 보여서는 안 되는 모습이었지만…….
“상준 씨, 상준 씨!”
“……아! 예. 사실 한 명의 게스트분이 또 계십니다!”
“요즘 이분을 모르면 말이 안 되죠! 화제의 인물.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의 메인 모델인 이루비 씨도 함께합니다!”
나지현은 이루비라는 이름의 소녀를 보자마자, 그의 옆에 있는 채상준이 순간 말을 멈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 대박이긴 하네.’
깔맞춤이라도 한 걸까?
신성 길드장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으로는 감출 수 없는 묘한 성스러움이 그녀에게 있었다.
MC들이 출연자들에게 미소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 나지현은 자신도 모르게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완전 귀여워.’
저런 분위기를 가진 소녀가 신성 길드장의 옆에 착 붙어서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눈썰미가 좋은 나지현이기에 알아챌 수 있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지만, 온 신경은 옆에 있는 신성 길드장의 걸음걸이에 맞춰 있다는 걸.
그녀에게는 그 모습이 마치 새끼 오리가 제 어미의 걸음을 따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 게스트가 자리에 착석하고 서로 간의 인사가 오고 간 뒤, 본격적인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이분한테는 죄송하지만…….’
아마도 시청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던 건 이 사람이 아닐까.
MC들이 가장 먼저 질문한 것은 이루비였다.
“이루비 씨라고 하셨나요? 오늘도 신성 길드장님과 함께해 주셨는데요. 혹시 신성 길드와는 무슨 관계이신지 대답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질문을 받은 이루비가 잠시 옆으로 고개를 돌려, 신성 길드장과 눈을 마주쳤다.
나지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하는 거지?’
신성 길드장이 익숙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제야 이루비가 입을 열었다.
“루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신성에서 이번에 계약한 전속 모델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요. 사실인가요?”
“저는 모델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현재 연예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이다.
어떠한 대답이 나올까.
두 MC도. 그것을 찍고 있는 카메라맨과 스태프들도 그녀의 입을 지켜봤고.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루비가 말했다.
“저는 그저, 성자님의 뜻에 따르는 충실한 종일 뿐입…… 읍.”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신성 길드장이 이루비의 입을 자연스럽게 막고는 말을 이었다.
“……제 개인 비서라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따로 모델은 아니고, 광고 촬영 동안 어색해하는 저를 위해서 같이 찍어준 것뿐이에요.”
“……예에.”
방금 종 어쩌구 하지 않았나?
그 후로 몇 번이고 MC들이 이루비를 향해 질문을 던졌으나, 대답은 하나같이 본인이 아닌, 옆에 있는 신성 길드장과 관련된 것뿐이었다.
“현재 광고로 인해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계신 데요! 소감 한번 들어볼 수 있을까요?”
“광고…… 성자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무척이나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시 차후 다른 광고라거나, 작품에 참가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제가 있을 곳은 언제나 성자님의 곁뿐입니다.”
“……그 성자님- 이라는 건 신성 길드장님을 가리키는 말인 거죠? 무슨 의미로 그렇게 부르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려운 질문이군요. 성자님은 성자님이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뿐인데,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답변이 이런 식이었다.
그럴 때마다, 옆에 있던 신성 길드장이 질문들에 관한 답을 해주었다.
‘약간 사차원 컨셉 같은 걸 잡고 있는 건가……?’
간혹 출연자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촬영 도중 보이는 저 맹목적인 모습은 도저히 지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쯤 되니깐, 오히려 그들의 관심은 옆에 있던 신성 길드장에게로 옮겨갔다.
이서진.
신성 길드장이라는 자리에 위치하면서도, 고지식해 보이지 않고, 행동과 말 또한 무언가 친숙하다.
‘거기다가…….’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는 MC라고 해도, 길드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과 인터뷰를 하는 것은 처음이다.
당연히 몸이 긴장할 수밖에 없겠지만.
‘어쩐지 몸이 편해.’
그의 앞에서는 긴장하기는커녕, 평소보다 더욱 가벼운 기분으로 대할 수 있었다.
그제야 그의 진면모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화면 너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나봐야 드러나는 진가.
이후의 관심이 전부 이서진으로 향했지만, 옆에 있는 소녀는 불만은커녕, 당연하다는 듯, 연신 추임새를 넣을 뿐이었다.
“성자님의 말이 옳습니다.”
‘이해가 돼.’
옆에 있는 저 소녀가 저렇게 따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후 여러 가지 질문들이 오갔다.
현재 상황이 상황인 만큼, 두 명의 MC가 언급을 피하고 있던 주제 또한 이서진 측에서 먼저 꺼냈다.
마석병을 불러일으키는 악마의 음료.
그레이트 그레이프.
그리고.
“……정말로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에 그런 효과가 있다는 거죠?”
광고에서도.
정부에서도.
여러 번 그 사실을 알려왔지만, 그러한 물건을 직접 제작한 신성의 길드장이 말하는 것은 역시 설득력 자체가 달랐다.
MC.
카메라맨.
스태프.
그들은 어느새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차우 길드에 대한 논란.
길드에 속해 있던 인물들에 대한 비난에 관한 의견을 밝혔을 때도 내심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도 저런 소신 발언을 한 사람들이 어떤 질타를 받았는지 알고 있으니까.
-네가 뭐라고?
저 사람에게 그런 말을 뱉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신성 길드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다는 ‘성수’.
물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마석병을 완치할 수도 있는 물건이라면 대체 얼마의 값어치를 가질까.
그런 물건을 음료수에 섞어 헐값에 판매한다.방송이 끝나갈 때가 되었을 때는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성자.”
왜 이루비가 그렇게 말했는지 이제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사람은 실존하는 성자다.
모두의 마음에 그런 생각이 자라났고.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루비의 말이 스튜디오 내에 울려 퍼졌다.
“성자님의 말은 항상 옳습니다.”
* * *
방송 외에도 몇 번의 야외 활동을 하게 되었다.
악수회.
라고 보면 될까.
정부 쪽 인사가 고개를 숙여 가며 부탁하던 일이다.
정부가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지급하게 될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
그것을 내가 직접 그들에게 나눠줬으면 좋겠다는 게 그쪽 의견이었다.
연탄을 나르듯이, 직접 찾아간다는 건 아니고.
가벼운 이벤트처럼 나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악수와 가벼운 대화 정도를 나누고 받아가는 형식이었다.
“……가벼운 이벤트라면서?”
끝이 안 보이는 줄을 보고 있자니, 입이 턱하고 벌어진다.
“안녕하세요!”
“영광입니다!”
사람들은 나와 가벼운 악수를 나누고, 음료수를 받아가기 시작했다.
“성자님.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응.”
루비도 내 옆에 자리했다.
사람들은 나와 악수를 하면서도 종종 힐끗-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루비를 쳐다봤다.
거, 입이 벌어지다 못해 떨어지시겠네.
하지만 의외로 내게 관심이 있는 사람도 많았다.
“방송에서 하시던 말씀.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사실 저도 최근에 몸에서 마석이 발견됐거든요,”
그는 두 손으로 내 손을 포개면서 밝게 웃었다.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방송을 보고 나니까 알 것 같더라고요. 저렇게 우리를 위해 노력해 주시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되겠구나. 하고요.”
나와의 인사를 끝내고, 그도 아쉬운 표정으로 옆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닌 척하면서도, 루비와 인사하지 못한 게 아까운 모양이네.
루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옆에 묵묵히 앉아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가 떠나면서 말했다.
“그럼…… 고마웠습니다. 성자님.”
아니. 대체…….
저런 오글거리는 말은 누가 퍼뜨리고 다니는 건가?
……그래. 방송에 나왔다고 했었지.
편집이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루비가 아닌, 평범한 사람에게서 저 말을 듣자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확 하고 붉어진다.
요즘 좀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보니까 전혀 아니었다.
“……성자님?”
그 말에 반응한 루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떠나가던 남성을 붙잡았다.
“그쪽 신도분. 루비하고도 악수를 나눠주실 수 있으신지요.”
“예, 예?”
루비가 뻗은 아담한 손을 영광이라는 듯이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는다.
표정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아니, 나랑 할 때는 저런 표정 안 지었잖아?
그것을 지켜본 뒷사람들 행동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성자님. 이렇게 알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성자님. 저희에게 이런 은총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하나같이 저런 오글거리는 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입으로 뱉고 있다.
내 얼굴색은 점점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의 그것처럼 변해갔다.
그들의 목적은 뻔했다.
저들이 저런 말을 할 때마다 루비의 기분이 눈에 띄게 좋아지는 게 보였으니까.
자신을 칭찬할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그 얼굴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흐물흐물 풀어진다.
그중에서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건 한 20대 여성이었다.
준비라도 해온 것일까. 나에 대한 찬송가를 아주 열창하시는데, 결국 루비의 얼굴이 흐물거리다 못해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우와…….”
“……화면이랑은 완전 다르잖아?”
“성녀님…….”
앞쪽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벌린다.
“뭐, 뭐야! 무슨 일인데?”
“우리도 보여줘!”
루비는 금세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지만, 나와 악수하는 여성은 기어코 살짝 눈물을 흘리면서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저, 팬카페 관리 정말 열심히 할게요…….”
……뭐라는 거야?
* * *
“집이다아!”
“와아! 집이다!”
일과가 끝나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나는 대자로 바닥에 뻗었다.
집으로 돌아온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황혼의 연구실에서 자고…….
그게 아니면, 신성 길드에서 머무르고…….
역시 스윗 하우스라고 해야 할까.
내게 있어서는 이곳이 가장 편안한 곳이었다.
“순둥아. 아빠 무겁다.”
“여기가 좋은걸!”
피식 웃으며 제 가슴에 머리를 대고 있는 순둥이를 쓰다듬었다.
어린 나이에 하나씩 있는 버릇 같은 거라고 할까.
요즘 순둥이는 저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의 가슴팍에 안기곤 했다.
-으응. 이게 아닌걸!
금방 그런 소리를 하면서, 다시 내 품에 안기긴 했지만.
내심 내 품을 좋아하는 거 같아서 뿌듯하고 그렇다.
요즘 운동을 한 보람이 있다니까.
가슴이 탄탄한 게 안기는 맛이 있을 것이다.
하하.
일은 순조롭다. 마석병에 걸린 사람들도 점차 줄어들고 있고.
‘……그런데 내 마석은 왜 그대로인 걸까?’
다시 한번 병원에 찾아가 봤지만, 내 마석은 작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조금 더 커져 있었다.
그렇다고 몸에 마기가 퍼지는 건 아닌데…….
그 누구보다 물약을 많이 먹는 나다. 사라진다면 진작 사라지고도 남았어야 할 마석.
“에휴. 모르겠다.”
“하핳. 간지러워!”
이렇게 순둥이를 안고 있으니, 그동안 있던 피로가 한 번에 밀려오는 기분이다.
나는 옷을 벗는 것도 잊어버린 채로 잠에 들고 말았다.
* * *
“아빠 잔다!”
어느새 해츨링의 모습으로 돌아온 순둥이는 이서진의 가슴팍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두근.
두근.
그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감각에 순둥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남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이다.
순둥이는 자신의 가슴팍에 자그마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두근.
두근.
조금 전 느꼈던 것과 같은 두근거림이 느껴진다.
평범한 심장 고동 소리가 아니었다.
자세한 건 잘 모르겠지만…….
이 사람이 아빠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소중한 것이었다.
자신과 같다.
항상 남들과 다른 모습에 불안해하던 순둥이에게 이것은 큰 위안거리였다.
‘순둥인 아빠만 있으면 되니까! 꼬물이도!’
위잉- 위잉-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품에 안겨 있는데, 무언가 훼방을 놓는다.
순둥이가 작달막한 두 손을 머리에 가져갔다.
“안 벗겨져!”
순둥이의 머리에는 어느새 제 머리 크기에 맞게 알껍질이 포개져 있었다.
폴리모프를 할 때면 머리핀의 형태로 변하는 알껍질.
자신의 머리에 있는 게 맘에 들지 않는지 순둥이가 투정을 부렸다.
껍질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진동한다.
이윽고 순둥이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순둥이가 허공을 노려보며 두 볼을 힘껏 부풀렸다.
“이상한 거! 아빠가 관심 주지 말랬어!”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고유 능력, ‘상위 마나 장악’을 획득하였습니다.]
[마나를 보다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됩니다.]
아직 태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해츨링으로서는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무시하며.
순둥이는 제 아빠의 품에서 소곤소곤 잠이 들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65화
23. 약간은 불편한 식사 자리(1)
[네놈. 약속은 대체 언제 지킬 생각이지?]
“아, 까먹고 있었네.”
내 휴대전화의 연락처에 추가된 전진우의 문자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을 꼬실 때, 물약의 거래를 주선해 준다는 말을 했었지.
[서진 씨. 이번에 길드로 한번 찾아와주시겠어요?]
[신성 길드장. 언제쯤 시간 괜찮겠나?]
[형님. 좀처럼 입을 안 여는데, 일단은 계속해서 고문해 볼게요.]
[…….]
[…….]
그 외에도 여러 문자들이 와 있었다.
내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을 날이 올 줄이야.
‘……이런 관심은 좋은데.’
바쁘기는 해도, 하나같이 내게 있어서는 반가운 사람들이다.
다만, 조금 달갑지 않은 관심이 있다면…….
“아빠 나온다!”
“여기도 아빠가 나와!”
텔레비전을 틀면 내 광고가 미친 듯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유일하게 참가했던 방송도 계속해서 재방송으로 나오는 중이고.
……아니, 타 경쟁 채널에도 재방송이 틀어지고 있는 건 무슨 경우야?
“헤헤. 이건 진짜 아빠다.”
텔레비전을 보다 말고 순둥이가 내 바지춤을 당기며 헤실거렸다.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자, 웃는 얼굴로 내 가슴팍을 바라본 순둥이가 구석으로 이동했다.
뭘 하고 있나, 지켜봤더니 그림자 속에서 꼬물이가 기어 나오더니, 순둥이의 손에 들린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많이 먹어야 해.”
-끄아앙~
순둥이가 동그란 돌 같은 것을 찾기에 가져다준 마석이다.
하나같이 값비쌌지만, 순둥이가 알인 시절부터 영양제처럼 넣어주던 것들이다.
태어난 후에도 먹긴 먹는구나. 그런 생각으로 잔뜩 구해놨는데…….
-끄윽.
……아주 살맛 나셨네.
빵빵해진 꼬물이의 배를 순둥이가 조심스럽게 만져준다.
기분이 좋은지 특유의 자세를 취하며 끄앙거린다.
순둥이도 그걸 보고 꺄르륵 거리며 따라 한다.
‘저 녀석 조금 크기가 커진 거 같은데.’
기껏해야 손바닥 반만 하던 꼬물이는 대충 한 뼘 정도의 크기가 되어 있었다.
문득, 기억 속에서 사람 하나를 그대로 삼키는 그룸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뭐. 꼬물이가 그런 나쁜 놈도 아니니까.
마물을 컨트롤하는 스위치.
꼬물이는 그걸 이용해서 새롭게 태어난 존재다.
정작 스위치 자체는 그 이후로 별로 쓸 일이 없었지만.
꼬물이의 존재는 내게 매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순둥이의 알에도 개방권을 썼었지.’
내 상태창을 둘러봐도, 순둥이의 알은 없었다.
의미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것뿐이었으니까.
순둥이의 알에 대한 정화율.
알이 깨지기 직전.
99.9%까지 올라갔던 것은 확인했었다.
‘확실하지가 않네.’
마지막 순간에 100%를 달성했는지, 제대로 보질 못했다.
“……뭐. 크게 상관은 없겠지.”
저렇게 귀엽게 자라주고 있으니까.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것이 아주 많은 순둥이는 일생 생활을 경험하며 무럭무럭 커가고 있었다.
되도록이면 세상의 좋은 면만 보여주고 싶단 게 내 바람이다.
이제는 일상에 없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는 순둥이.
순둥이 또한 나와 루비 못지않게 인기가 많았다.
이유지가 웃음 폭탄과 함께 보냈던 웹사이트 주소.
그곳은 어느 팬카페였다.
「성역聖域」
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사이트에서는 오로지 나와 루비 그리고 순둥이에 관한 이야기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차마 몇 분 못 보고 나왔다.
‘성자님’ 하고 부르는 것은 루비 하나만으로 충분했으니까.
의외로 카페에서 순둥이의 인기가 많았다.
이해는 한다.
뭐, 순둥이가 귀엽긴 하니까.
너무 귀엽다는 게 문제였다.
밖으로 나갈 때면, 순둥이를 알아본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사랑받는 것은 좋았지만, 나갈 때마다 그러니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었다.
나 또한 연예인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나갈 때마다 모자와 마스크는 필수로 끼고 있는 중이고.
‘폴리모프를 했을 때도 피곤하지 않을까.’
유독 폴리모프를 하고 나면 순둥이가 피로를 느끼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해츨링인 상태로 데리고 다니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건 안 되겠지.’
“순둥아. 씻고 나갈 준비 해야지.”
“네에~”
순둥이가 작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물방울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윽고 잔뜩 생겨난 물들이 순둥이의 손짓에 따라 허공을 헤엄친다.
마치 마법 소녀로 변신이라도 하듯이, 순둥이의 주변을 휩쓸었고 이내 뽀송뽀송해진 소녀 하나가 나타났다.
샤방한 원피스를 입은 순둥이가 한 바퀴 빙 돌더니 내 다리에 안겨든다.
……순둥아. 방금 뭐 한 거니?
“우, 우리 순둥이 마술도 할 줄 아네.”
“아빠도 해줄게!”
……덕분에 샤워할 시간이 줄어들어서 좋네.
무럭무럭 자란다는 건, 순둥이의 마술…… 이 아니라, 마법에 관한 것도 있었다.
따로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배우는 걸까.
폴리모프를 사용할 때도 그랬고.
설마…….
한 가지 생각이 들더니, 심각한 표정이 된 내가 중얼거렸다.
“순둥이는 천재가 틀림없구나.”
내가 생각해도 팔불출 같은 발언이다.
동시에 태클을 걸듯이, 내 앞에 무언가가 띠링! 하고 나타났다.
[스윗 하우스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새로운 물체 개방을 위한 퀘스트가 공개됩니다!]
* * *
“……그래도 상황이 많이 나아졌네.”
정해연이 길드 하우스의 앞을 바라보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이주 전까지만 해도 저 앞에는 시위대가 확성기를 들고 있었는데…….
“전부 서진 씨 덕분이지.”
마석병을 일으키는 음료수.
그것에 대항하는 음료수를 만들자.
피식.
정해연이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미소 지었다.
“재밌는 분이시라니까.”
언제나 그랬다.
일이 터질 때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평화로운 방식을 채택하신다.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야.’
그는 실력자다.
만약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이 차우 길드의 계략은 단숨에 막을 내렸을 것이다.
‘숨기시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前연금술사 길드장.
이제는 황혼의 대표 연금술사가 된 박명훈이 자신을 찾아왔었다.
-흐하하! 그런 인물을 몰래 만나고 있었다니,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 황혼 길드장!
그 후 이어진 대화에서 정해연은 확신할 수 있었다.
박명훈이 서진 씨의 정체를 알아챘다.
‘같은 연금술사라서 그런 걸까?’
어쩌면 호기심이 생기신 걸 수도 있다.
정해연은 잠시 둘을 생각해 보았다.
명실상부 자신이 봤던 그 어떤 연금술사보다 위대한 존재, 이서진.
대단하단 것은 알고 있었지만, 충분한 지원이 갖춰진 후, 무시무시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前연금술사 길드장, 박명훈.
‘만약 그 둘이 협동한다면……?’
상상만 해도 오싹했다.
세상이 날이 갈수록 달라지고 있다지만, 그 둘이 힘을 합쳤을 때, 대체 어떤 세상이 찾아올까.
그녀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미국에 있다던 그 연금술사도…….’
그 둘에게는 범접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하던 정해연이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언제쯤 오시려나.”
[아무래도 조금 늦을 거 같아요. 죄송해요, 해연 씨.]
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그를 보고 싶었다.
앞서 상상하던 것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이서진과 만나는 시간은 그녀에게 있어서 언제나 특별했으니까.
일에 치이는 동안 찾아오는 조그만 휴식이라고 해야 할까.
황혼의 길드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정해연이다.
만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손익을 위한 관계일 뿐.
감히 손익 같은 것을 따질 생각도 할 수 없는 이서진은 그녀에게 있어서 그동안 본 적 없던 새로운 인물이었다.
‘그러면서 불편하지도 않고.’
처음에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신성의 길드장.
희대의 연금술사.
매스컴에서는 ‘성자’라고 불릴 정도로 선한 사람.
그에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수호 길드장과 이런 식으로 협동하게 될 줄은 몰랐지.’
이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렇고.
만약 그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그것이 가능했을까?
끼익-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서진이 아닌, 매일 같이 보는 얄궂은 얼굴이었다.
“소성환.”
진지한 표정의 정해연이 그를 불렀다. 소성환은 평소 같은 장난기는 없고,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 뒷정리는 대충 끝난 거 같다. 아무래도 차우 길드 쪽에서 작업해둔 게 꽤나 많은 모양이라서 말이야.”
“이번 기회에 뿌리째 뽑아야 해.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이후에도 이런 일에 가담할 놈들이니까.”
“안 그래도, 하나하나 내가 손수 손봐주고 오는 길이야.”
“……고생했어. 소성환.”
“별말씀을. 누구 명령인데 당연히 따라야죠~”
피식-
대화가 끝나고, 다시 장난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온 소성환을 보며 정해연이 웃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이 만들어놓은 판이다.
최소한 도화선에 다시 불이 붙지 않도록 뒷정리 정도는 자신이 하고 싶었다.
다만.
“서진 씨한테는 비밀로 해줘.”
“쓰읍. 난 거짓말 같은 거 못 하는데. 어차피 형도 알 건 다 아는 거 아니야?”
“……그래도. 그냥 그렇게 해줘.”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럴게.”
이런 더러운 일을 자신이 시켰다는 것을 그는 몰랐으면 했다.
‘만약 그가 내게 실망한다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는 그와 거래하던 물약 때문이었지만.
이제 와서는 그가 만든 물약과 아티팩트보다, 이서진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언제까지고 자신을 친한 친구로 여겨줬으면 좋겠다.
그것이 정해연의 마음이다.
‘더러운 일은 내가 맡으면 돼.’
온갖 권모술수가 판치는 이곳에서 이서진, 그만은 언제나 그대로 있어 줬으면 했으니까.
똑똑-
“길드장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정해연의 얼굴에 미소가 담긴다.
드디어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
그 표정을 본 소성환이 어이없다는 듯, 정해연을 노려보았다.
“허. 얼굴 확 바뀌는 거 보소. 나한테도 좀 그렇게 대해주면 안 되냐? 악!”
정해연은 문 앞을 가로막는 소성환의 어깨를 치고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
* * *
“잘 지내셨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혼에서 살았었잖아요.”
“헤헤. 연구실이랑 길드 하우스는 다르죠.”
내 모습을 본 정해연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제 완전히 연예인 다 되셨는데요?”
“끄응…….”
나는 재빨리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어서 탁자 위에 올려놨다.
목이 타서 앞에 놓인 차 한 잔을 들이켰는데, 맛이 무언가 익숙했다.
“어때요? 아무래도 한 가지 음료수만 계속 먹기엔 그래서, 다른 곳에도 물약을 넣어보는 중이거든요.”
“맛있는데요?”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을 위해서 다양한 차 종류와 합쳐봤어요.”
차에서 우러나오는 이 향.
딸기가 아니라, 블루베리다.
마나 물약을 사용한 건가?
“일반인들은 몸에 마나가 쌓이지 않는 거 아니었어요?”
“네, 맞아요. 그 대신 몸에 마석이 생겨난 사람들은 달랐어요,”
정해연이 차를 입에 가져다 대며 설명을 시작했다.
마나 물약을 섭취할 경우, 마석을 향해 마나가 모여든다.
그리고 모여진 마나가 마석에 있던 마기를 조금씩 정화시킨다.
각성자가 마석병에 걸리지 않는 이유와 비슷했다.
그들은 항상 몸속에 마나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마석병에 한정하자면, 마나 물약이 더 효과가 좋을 거예요.”
확실히…….
“서진 씨만 괜찮다면, 이 마나 물약을 중심으로 한 음료를 하나 더 출시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저야 그러면 좋긴 한데…….”
“그러면 연구진에 따로 전해두도록 할게요.”
“……이거 너무 신세만 지는 거 같은데요.”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연은 항상 내 곁에서 전력으로 나를 도와주었다.
사실상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의 음료수 제작도 황혼에서 한 것이나 다름없다.
더불어 대량 생산에 필요한 시설들은 수호 길드에서 전적으로 맡아주었고.
일은 두 곳에서 진행했는데, 정작 주목받고 있는 것은 신성 길드다.
‘……생각해 보니 내가 한 게 전혀 없잖아?’
“없긴요. 서진 씨가 해주신 게 얼마나 많은데요. 음…… 예를 들면 얼굴마담이라거나?”
“…….”
“농담이에요. 하지만 정말로 서진 씨 덕분에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될 수 있던 거예요.”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전부 다, 내 주변에 있는 우수한 사람들이 일 처리를 잘해줬기 때문이다.
가만히 미소 지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정해연의 눈빛을 보자니, 부끄러워서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러자 정해연이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지으며 어떠한 주제를 꺼낸다.
“그러고 보니 팬클럽도 생기셨던데요?”
……여기서 그 애기를 꺼낸다고?
표정을 보니, 나를 수치사 시킬 생각인가 본데…….
그렇게는 안 되지.
“팬클럽이라고 하니까, 해연 씨는 진즉에 가지고 있지 않았나요? 팬클럽 이름이 뭐였더라…… 염제 정해연? 불의 공주 정해연?”
“아아아!! 잠깐, 잠깐! 잘못했어요. 제발 그만해 주세요…….”
얼굴이 붉어진 정해연이 이리저리 손을 흔든다.
하하. 내가 이겼다.
감히 팬클럽을 이용해서 나를 공격하려 들어?
정해연에게는 비밀이지만, 나는 여전히 정해연 팬클럽의 멤버다.
이곳저곳 다니면서도, 꾸준하게 카페 활동도 하고 있다, 이 말이야.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차를 들이켜는 정해연을 보니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온다.
‘좋네.’
역시 친한 사람들과 이런 식으로 농땡이를 필 때가 마음이 가장 편했다.
“그러고 보니 루비 씨가 안 보이네요?”
“루비는 오늘 휴가입니다.”
“……휴가요?”
“제가 줬어요. 언제나 너무 열심히 하길래 푹 쉬어줄 때가 됐다고 생각했거든요.”
매일 같이 내가 가는 곳이면 루비가 빠지지 않았다.
휴일도 없이.
누군가 본다면 악덕 사장이라며 욕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이상하네…… 그 루비 씨가 휴가를 원했다고요?”
정해연이 얼굴을 갸웃거린다.
사실 휴가를 내렸을 때, 루비의 반응이 매우 이상하긴 했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루, 루비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입니까?
잘못을 용서해달라느니.
루비가 더 잘할 테니, 버리지 말아달라느니.
누가 보면 휴가가 아니라, 해고라도 한 모습이라서 나도 당황했었다.
보다 못한 신백준 씨가 중재에 들어가 줘서 살았지…….
-길드장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조금 휴식이 필요하실 것 같거든요.
각성자라고 해도, 휴식은 취해줘야 한다.
고작 하루 정도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몇 번이고 말하자, 그제야 루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러고 보니 순둥이도 안 보이는데, 오늘은 혼자시란 거예요?”
“그…… 렇죠?”
“그러면 말이죠.”
정해연이 내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저랑 어울려주시는 거예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는 정해연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그때, 내 귀로 무언가가 작게 속삭였다.
‘우와. 놀러 간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글쎄요.”
나는 내 왼쪽 어깨를 몰래 쓰다듬고는 마주 잡은 손을 흔들었다.
[‘몸ㅁ 투ㅁㅁㅁ 만드는 커튼’의 능력을 개방하기 위한 퀘스트가 진행 중입니다.]
[퀘스트를 위해 일시적으로 물체의 능력이 개방됩니다.]
[…….]
[…….]
▷물체를 사용해, 상대방의 시선을 속이십시오. (0/3)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66화
23. 약간은 불편한 식사 자리(2)
“와보고 싶단 곳이 이런 데였어요?”
“왜요?”
“아니…… 뭐 의외라서요.”
“원래 저같이 성공한 커리어 우먼은 이런 일들이 더 신기하고 그런 법이에요.”
드라마 보셨죠?
거기서 재벌들이 이런 음식 먹으면 막 깜짝 놀라고 그러잖아요.
정해연의 말에 나는 어이없다는 듯 한차례 웃었다.
삼각 김밥 하나를 입에 앙다문 정해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음…… 속이 부실하네요.”
“그러게요. 편의점 김밥이 그렇죠, 뭐.”
“왠지 열 받네…… 저희도 확 이런 거 만들어서 팔아버릴까요? 재료 팍팍 넣어서!”
“그건 좀…….”
음료수에 이어서 김밥이라니.
이름은 성스러운 김밥…… 뭐 이런 건가?
“의외로 괜찮을 것 같지 않아요? 편의점답지 않은 퀄리티의 음식! 그럼 사람들이 막 환호하는 거죠. 와 ‘서진’했다. ‘서진’스럽네. 하면서.”
무시로 받아치자, 정해연은 ‘진짜 괜찮을 거 같은데…….’ 하고는 우물우물 밥을 씹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편의점 벤치에 앉아 라면과 삼각김밥을 먹는 정해연.
누가 상상이나 할까.
도도하다고 알려진 그녀가 저런 식으로 우아하게 삼각 김밥을 까고 있는 모습을.
나 또한 반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건 예상도 못 했다.
만약 그때, 미래를 보여주는 텔레비전이 있었더라도 믿지 않았겠지.
은근히 매웠는지, 입술에 붉은 기가 감도는 정해연에게 물었다.
“다음엔 어디로 갈 거예요?”
“오늘은 제가 에스코트해 드릴게요! 서진 씨는 따라오기만 하시면 돼요!”
대체 얼마나 대단한 곳을 데리고 가려고.
정해연이 향한 곳은 정말로 예상도 못 한 곳이긴 했다.
빨간 날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는 초등학교에 들어온 우리는 천천히 운동장을 거닐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겁니까?”
“아. 모르셨구나. 제가 여기 학교 이사장이에요.”
“…….”
하여간 백화점도 그렇고, 스케일 크게 논다니깐.
“어때요? 이제 좀 성공한 커리어 우먼으로 보이세요?”
예. 예.
여기가 이렇게 좁은 곳이었나. 어렸을 때는 되게 커 보였었는데.
“추억이긴 하네요…….”
“서진 씨도 초등학교 나오셨어요?”
……사람을 뭘로 보고 있는 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서진 씨는 어렸을 때부터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오시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평범하지 않기는 했지.
아니다.
초등학교 무렵에는 그나마 평범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그때 뭘 하고 놀았더라……?
“읏차.”
한 손으로 철봉을 붙잡은 정해연이 가볍게 팔을 굽혀 오르락내리락거린다.
이야…….
저게 되네.
역시 최상급 각성자.
운동 능력 하나는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다.
“음. 아마 서진 씨도 되지 않을까요? 그도 그럴게, 근래 소성환이랑 트레이닝 열심히 하셨잖아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뭐, 어때요. 한 번만 해봐요. 네?”
한 손으로 잡고 철봉을 자유자재로 오른다라…….
그러고 보니 나도 힘 스탯이 많이 늘기는 했지.
어디 한번 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고 한 손으로 철봉을 잡았을 때.
“어어?”“에에?”
내 몸은 마치 중력이 역전되듯이, 완전히 거꾸로 매달리는 형태가 되었다.
이것은 힘이니 뭐니, 그런 말로 설명될 것이 아니었다.
나 또한 당황하고 있었으나, 이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내 귀로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빠. 내가 도와줬어! 잘했지?’
……그래. 우리 순둥이가 최고다.
놀란 정해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재미있어서 그 상태로 팔을 여러 번 굽혀줬다.
철봉에 내려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정해연을 향해 말했다.
“이야. 이거 꽤 어렵네요. 해연 씨도 한번 해볼래요?”
“……치사해. 또 나 몰래 아티팩트 사용하고…….”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희 이제 다른 곳 가요!”
고개를 휙 돌린 정해연이 향한 곳은 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이었다.
어디 갈 거면, 따로 차를 타면 되는 거 아닌가?
“안 되죠.! 오늘은 서진 씨랑 저 둘만의…… 아, 아무튼 그런 거잖아요?”
단둘은 아닌데.
‘나도 있는데!’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다는 건가.
아무래도 아까 말했던 성공한 커리어 우먼의 일상생활이라는 컨셉이 아직 진행 중인 모양이다.
버스 하나가 들어오고 있을 때, 내가 물었다.
“버스 타시는 법은 아세요?”
“……서진 씨. 저를 대체 뭐로 보시는 거예요?”
“음. 성공한 커리어 우먼?”
도도한 표정의 정해연이 자연스럽게 버스에 올라타 카드를 가져다 대었다.
“어? 이게 왜 안 되지……?”
내 저럴 줄 알았다.
정해연이 카드를 이리저리 가져다 대며 당황한다.
카드를 보니,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다.
겉 부분은 금색 테두리로 장식되어 있고, 색상은 검은색.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카드다.
……저거 혹시 블랙카드 뭐 그런 건가?
정해연이 급하게 다른 카드를 꺼내려고 하길래, 내가 말했다.
“앞의 분 것까지 같이 찍어주세요.”
띡-
소리와 함께 카드가 찍혔다.
안쪽으로 들어가며 정해연에게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어때요? 해연 씨가 보던 드라마에서는 이런 장면 없었어요?”
“……읏.”
목적지는 종점인가.
자리에 앉아 있자니,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정해연의 몸이 내 쪽으로 기운다.
툭- 툭-
최상위 각성자라고 볼 수 없는 가녀린 팔뚝이 내 팔에 닿는다.
그럴 때마다, 평소에는 맡을 수 없는 좋은 향기가 내 코를 향해 넘실거렸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정해연은 창문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햇빛 때문일까, 어째선지 묘하게 뺨이 붉어 보였다.
한산했던 버스가 가득 차고, 이내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올라탔다.
나와 정해연은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에 앉으세요.”
우리 둘을 향해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부부끼리 심성이 아주 곱네요.”
그 말에 정해연이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
“부, 부부…… 서, 서진 씨랑 저는 부부가 아니라, 그냥 친한……! 읍.”
정해연의 입을 자연스럽게 막았다.
‘서진’이라는 이름에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본다.
흔한 이름이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복장은 또 어떤가.
둘 다 알이 없는 패션용 안경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다.
“……서진?”
“에이. 설마.”
“근데 그런 거 치곤 몸이 너무 좋은데……?”
“그럼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군데?”
재빨리 정해연의 손을 잡고 버스에서 내렸다.
……아. 내릴 때 찍는 거 깜빡했네.
아무리 돈이 쌓여 가도 이런 부분은 어쩐지 아까워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서진 씨. 그으…….”
“아. 죄송해요.”
“……아뇨.”
나는 이제껏 잡고 있던 정해연의 손을 놓았다.
그녀는 제 손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발걸음이 어쩐지 조금 상쾌해 보였다.
* * *
우리가 도착한 곳은 놀이공원이었다.
정해연은 도착하자마자 기념품 가게로 들어가더니, 내게 뿔이 달린 머리띠 하나를 씌우며 실실 웃었다.
“은근히 어울리는데요?”
“……이럼 들키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걱정할 게 뭐가 있어요?”
놀이공원을 오는 것도 처음인데, 오자마자 하는 게 머리띠라니.
나 또한 정해연의 머리띠를 골라주었다. 그녀는 제 머리에 있는 고양이 귀를 보면서 살짝 볼을 부풀렸다.
“마음에 안 들어요?”
“……서진 씨가 골라주신 거니 마음은 들죠. 그런데 꼭 누가 생각나는 거 같아서요…….”
무슨 소리래.
“어? 그건 왜 하나 더 사세요?”
“음. 기념품?”
나는 거대한 리본 머리띠 하나를 더 사고는 잠시 화장실을 들른다며 자리를 비웠다.
“순둥아. 불편하진 않아?”
“순둥이는 아빠 위에 있는 게 제일 좋아!”
“그래?”
나는 머리띠 하나를 꺼내서 순둥이의 머리에 가져다 댔다.
……이 껍질은 뭐래?
어쩔 수 없이 그 위에 겹쳐서 씌어주는데, 순둥이의 눈이 내 머리를 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표정을 한 순둥이가 말했다.
“우와! 아빠한테도 나랑 똑같이 뿔이 있어!”
“이게 아빠 진짜 모습이야. 순둥아.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이다?”
“응!!”
내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쉿- 하고 말하자, 순둥이가 작은 손가락으로 똑같이 따라 한다.
순둥이는 해츨링 상태였지만, 큰 리본이 달린 머리띠는 매우 잘 어울렸다.
‘그래. 이왕 놀러 온 건데.’
이렇게 숨고, 지켜보기만 해서는 별로 재미없을 것이다.
* * *
▷물체를 사용해, 상대방의 시선을 속이십시오. (3/3)
[개방을 위한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커튼’의 능력이 완전히 개방되었습니다!]
* * *
퀘스트는 진작에 완료한 지 오래다.
그동안 지나온 사람들이 몇 명인데.
정해연 같은 인물에게도 들키지 않을 정도면 이미 말 다했다.
……이 커튼이 그렇게 효과가 좋은 건가?
나는 순둥이의 몸에 둘러져 있던 커튼을 빼내고, 내 허리에 둘렀다.
커튼은 이내 투명해졌다.
“아빠가 숨으라고 했으니까. 순둥이 열심히 숨었어! 이렇게!”
순둥이는 두 손으로 제 눈을 가리더니, 잘 숨었지! 하고 방실거렸다.
순둥아. 자기한테 안 보인다고, 남한테도 안 보이는 건 아니란다.
하지만 귀여우니 상관없었다.
저 모습을 보고, 매몰차게 순둥이가 보인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거기다가…….’
허공에 물방울을 소환해 자유자재로 춤을 추게 하던 순둥이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순둥이 나름대로 무언가 따로 한 게 틀림없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가리고 있는 순둥이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는 물었다.
“순둥아. 아빠랑 같이 손잡고 놀고 싶어?”
“응!”
매지컬 순둥이가 순식간에 변신했다. 평상시 입던 원피스가 아니었다.
좀 더 뭐라고 해야 할까…….
텔레비전 프로에 나오는 아역들이 입을 만한 귀여운 옷?
물론 순둥이가 입는 것은 뭐든 귀엽지만.
“텔레비전에서 봤어! 아빠랑 놀 때는 이렇게 입는데!”
그렇게 순둥이의 손을 잡고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해연이 당혹스럽게 물었다.
“수, 순둥이 아니에요? 여기 어떻게…….”
충분히 당황할 만하다.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난 거니까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정해연이기에 완벽하게 납득시킬 수 있는 마법의 단어가 있다.
“순둥이는 용이잖아요.”
“예? 아아…… 에?”
용이라서 뿅- 하고 나타났다.
투명 드래곤이 쿠와와 울부짖었다.
그 누구라도 반박하지 못할 진리였다.
* * *
회전목마 같은 간단한 놀이기구를 몇 개 타고, 동물들이 모여 있는 사파리 공원으로 이동했다.
“우와…… 아빠! 거대한 얼룩 꼬물이가 있어!”
철창에 바짝 붙은 순둥이가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팬더를 쳐다보고 있다.
신기하게도 저 너머에 있는 팬더가 순둥이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안녀엉!”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정해연에게 말했다.
“괜히 미안하네요. 기대하셨던 거 같은데.”
“아니에요. 저도 사실 순둥이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으니까요.”
그녀는 순둥이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리본 머리띠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진짜 귀여워요. 제가 알고 있던 용이라는 생명체가 맞는 건지 의심이 될 정도로.”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마 모든 용이 저러진 않을 것이다. 순둥이를 제외하고 다른 용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하나가 더 있긴 하겠지.’
멸망용 ‘??????’.
순둥이의 진짜 부모로 추정되는 존재가.
“그러고 보니 언제까지 순둥이라고 부를 생각이에요?”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서, 앞으로도 계속 순둥이라고 부를 것 같은데…….
“그래도 이름은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순둥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거니까요.”
“……역시 그렇죠?”
성 : 순.
이름 : 둥이.
이럴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작명소 같은 곳을 찾아가서 남에게 순둥이의 이름을 대신 짓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순둥이의 아빠다.
겉모습이 다르더라도. 그것은 내게 있어서 변치 않을 사실이다.
“이건 제 생각인데요. 순둥이의 이름을 짓는 건 매우 신중해야 할 거 같아요.”
“당연하겠죠? 평생을 살아갈 이름이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순둥이는 용이잖아요?”
정해연이 대충 환상 속의 존재인 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평범한 인간들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매우 특별할 것이라고.
아마도 그 용의 정체성 자체를 정할 중요한 행위일 것이라고.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음…….”
“정하기 힘들면 순둥이 본인이 원하는 거로 하는 건 어떨까요?”
본인이 원하는 거라…….
순둥이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눈을 맞추고 물었다.
“순둥아. 혹시 가지고 싶은 이름이라도 있어?”
순둥이가 잠시 고민하더니,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꼬물…….”
곧바로 순둥이의 입에 사탕을 넣어주고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그래. 이름은 천천히 정하도록 하자.”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67화
23. 약간은 불편한 식사 자리(3)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서진 씨.”
“제가 할 소리예요. 에스코트 고마웠어요, 해연 씨.”
“후훗. 아, 잠시만요.”
정해연이 바짝 다가오더니, 보드라운 손을 내 뺨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내 얼굴을 통해 전해지고, 얼굴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묘한 숨을 내뱉으며, 내 귀를 향해 작게 속삭인다.
‘머리카락 붙으셨어요.’
얼굴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 하나를 살갑게 때줬다.
……그런데 이거 때준다고 이렇게 가깝게 붙나?
지근거리에서 정해연을 바라보는데, 그녀의 눈이 내가 아니라, 내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정해연이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 할게요. 더 이상은 미움받아 버릴 거 같거든요.”
나도 고개를 돌려, 정해연이 보고 있는 곳을 쳐다봤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뭘 본 거지?
* * *
“……들어오시죠.”
“이렇게 환대해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큭.”
내 앞의 남성이 입가를 부들부들 떨며 공손한 행동을 취하고 있다.
하나같이 귀빈(貴賓)을 모시기 위한 제스처.
‘여기가 전진우의 길드구나.’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스네이크의 길드 하우스.
오늘은 그곳에 방문하게 되었다.
전진우는 나를 안쪽에 있는 접객실로 안내했다.
길목마다 복도에 특이한 미술품들이 눈에 띈다.
황금으로 된 뱀 모양 조각상.
두 마리의 뱀이 하늘로 치솟고 있는 그림.
거대한 뱀처럼 꼬불꼬불 이어진 카펫.
‘……얘네 진짜 뱀 좋아하는구나.’
접객실 내부로 들어오고,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전진우가 턱짓으로 반대편 방향을 가리켰다.
“앉아라.”
“존댓말 컨셉은 그만두는 거냐?”
“나는 네놈과 정당한 거래를 한 것이다. 내가 굽히고 들어갈 필요는 없지.”
이 자식. 보는 눈 사라지니까, 바로 변하는 거 봐라.
“그렇긴 해.”
전진우가 내 앞으로 무심하게 생수 하나를 던졌다.
“목마르면 그거라도 마시던가 해라.”
……보통 차라거나 음료를 대접하는 거 아닌가?
이런 곳에서도 자존심 세우는 게 전진우답기는 했다.
나는 생수병을 하나 까고는 목을 축였다.
“그래서, 저번에 말했던 약속은 진행되고 있나? 얼마 정도 걸릴 것 같지?”
황혼과 스네이크.
각 길드 간의 중요한 계약이다.
황혼과의 물약 거래를 주선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사용하는 길드장들을 생각해 본다면, 어렵고, 긴 시간이 되리라.
“그거? 성사됐어. 다음 달부터 너희 길드로 물약이 들어가게 될 거야. 그것도 황혼의 상등품이.”
“……뭐라고?”
내 말에 전진우가 눈을 끔뻑거렸다.
“농담하지 마라. 그게 그렇게 쉽게 해결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안 믿네.”
의심스러운 눈을 보내고 있는 전진우를 쳐다보며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두 사람.
비즈니스적인 사고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신경전.
그런 것은 없었다.
어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을 때, 순둥이의 입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며 정해연에게 무심하게 물어봤었다.
-해연 씨. 혹시 스네이크 길드라고 알아요?
-음…… 들어본 거 같기도 한데…….
-어쩌다가 그쪽에서 이번 일을 도와주게 되어서요. 혹시 뭐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정해연에게 자세한 내용을 말하니, 그녀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그럼.
“……진짜였다고? 아니, 내가 그리 개고생할 때는…….”
내 말에 거짓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전진우가 허공을 향해 깊은숨을 내쉬었다.
어째선지 나를 노려보는 전진우가 말했다.
“그럼 더 이상 네놈이랑 마주치고 있을 필요는 없겠군.”
“뭘 또 그렇게 섭섭한 말을.”
전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접객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크하하하! 진우야! 이게 무슨 일이냐! 방금 황혼에서 연락이 왔어! 스네이크와 물약 공급에 대한 재계약을 맺겠다는구나! 그것도 최상급의 품질로!”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뱉던 사내가 나를 보고는 흠칫했다.
“이런. 손님이 와 있었군. 이거 죄송합니다. 혹시 낯이 익은데, 성함이……?”
누구지?
“……내 아버지시다.”
전진우가 매우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어쩐지.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가 비슷하기는 했다.
다만, 전진우와 다른 점이 있다면, 평소에 웃음을 많이 짓는 사람에게 드러난다는 팔자 주름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눈을 제외한다면, 선한 인상의 사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
“신성 길드장, 이서진입니다.”
“음! 신성 길드장…… 귀하신 분이 이런 곳까지는 어쩐 일로……?”
“스네이크의 부길드장님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폐가 되진 않았는지, 걱정되는군요.”
“하하! 폐는 무슨. 이곳에 눌러산다고 하셔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일어나지도, 앉지도 않은 어정쩡한 자세의 전진우를 보며 스네이크의 길드장이 말했다.
“그런데 진우야.”
“예. 아버지.”
“남들 앞에서는 길드장님이라고 부르라 했잖아.”
“……예.”
“그런데 넌 뭐 하고 있는 거냐?”
“네……?”
“이런 귀하신 분이 왔는데, 대접하는 게 고작 저딴 생수병 하나인 게 말이 돼! 당장 제대로 된 차를 가져오지 못해!”
“아, 저는 괜찮…….”
“네 발로 직접 가져오는 게 좋을 거다! 지금 당장!”
그의 호령에 전진우가 냉큼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천외천이라고 해야 하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전진우도 제 아버지한테는 안 되는 모양이다.
전진우의 아버지.
스네이크의 길드장이 사근사근 웃으며 반대편에 앉았다.
“이거 죄송합니다. 형편없는 아들놈 때문에 괜히 못 볼 꼴만 보여드렸군요.”
뭐라 해야 할까.
아까도 생각했던 거지만,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스네이크의 길드장.
좀 더 교활하고 날카로운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거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스네이크의 길드장, 전진명이라고 합니다.”
그가 웃으며 제 손을 내밀었다.
손과 손이 잡히는 순간, 전진명의 눈이 좁혀졌다.
가만히 내 손을 바라보고 있는 전진명에게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저희 진우와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는지……? 혹시 저놈이 또 사고라도 친 겁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나는 대충 전진우와 했던 일을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감동한 듯, 그가 제 손으로 촉촉해진 눈을 비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나이가 들면 모두 그러는 것일까. 전진우의 막장 행동들을 이야기하는 그는 근심이 많아 보였다.
“……차기 길드장이라는 놈이 그렇게 행동할 때는 눈앞이 캄캄했죠.”
“이해합니다.”
전진우와의 첫 만남을 이야기해 주니, 당장에 뛰어가서 무릎 꿇게 만들겠다는 걸 겨우 말렸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되게 평범한 사람이네.
그러고 있자니, 전진우가 석 잔의 차를 들고 돌아왔다.
“……차 가지고 왔습니다.”
손잡이 부분에 뱀 문양이 그려진 고급스러운 찻잔.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들이켰다.
* * *
어차피 길게 할 이야기도 없었다.
사실상 말을 전해주러 온 것뿐이니까.
“진우야. 신성 길드장님. 앞까지 모셔다드리고 오도록 해라.”
“……그걸 왜 제가.”
“하라면 해!”
전진우가 그 몰래 투덜대며 앞장섰다. 사실 필요 없었는데.
길드 하우스의 정문까지 나온 전진우가 멈춰 서더니 말했다.
“여기까지면 되겠지. 알아서 가도록 해라.”
“그래라.”
“……그런데 혹시 그건 따로 생각 없나?”
“어떤 거?”
“그때 선착장에서 내게 줬던 물약.”
아, 그거.
신체 강화의 물약을 말하는 모양인데.
나는 전진우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글쎄?”
“…….”
“너 하는 거 보고.”
처음부터 그렇게 막 퍼주면 쓰나.
미안하지만, 망나니를 단 한 번만 쓸 생각은 없다.
“자. 받아라.”
나는 녀석에게 노란색과 보라색의 물약이 든 병을 하나씩 던져줬다.
“앞으로 열심히 해. 이건 선수금이니까.”
“이딴 건…….”
“싫음 내놓고.”
“……받도록 하지.”
물약을 소중하게 옷 안쪽에 넣은 전진우가 고개를 들더니, 눈이 커지며 흠칫한다.
날 보는 건 아니고…….
뒤에?
‘아무것도 없는데?’
몸이 굳은 전진우가 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역시 차를 불러 직접 데려다주도록 하지. 기다리도록 해라.”
“갑자기 무슨 바람이래. 그런다고 해도 더 안 줄 거다?”
“음험한 놈. 왠지 안 보인다 싶더라니…… 만약을 대비해서 주변에 항상 대기시키는 거다, 이거냐?”
“뭐가.”
전진우는 다시 한번 뒤쪽을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별로 죽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 * *
“흐음. 진우 녀석. 그렇게 싫어하더니, 잘하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전진명이 황혼에게서 온 전화를 생각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자신이 따로 뭔가를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진우 녀석이 무슨 수를 쓴 것이겠지.
“진우 도련님께서 정말로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의 옆에 있는 최성필이 감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전에는 괴로워 죽겠다는 듯, 전진우에 대한 질 나쁜 행동을 보고하던 그였지만.
‘역시 한 길드의 수장이 될 자질이 있으셨던 거야.’
요즘 최성필은 전진우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에 불만이 전혀 없었다.
근래 보였던 모습도 그렇고, 그 유명한 신성 길드장과 저렇게 가깝게 연을 맺고 있는 것도 그렇고.
매일 같이 노름을 하던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뒤에서 부지런히 밑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대단해…….”
제 아들놈에게 환상을 품고 있는 최성필을 무시하고, 전진명이 상념에 빠졌다.
‘……그나저나. 말도 안 되는 인물이야.’
스네이크의 길드 하우스에 신성 길드장이 찾아왔다.
밑에서 전해온 보고에 그는 곧바로 접객실로 향했다.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온 더없이 큰 먹잇감.
여러 가지로 조사해 본 결과, 그는 한 길드의 수장이라는 것 치고는 조금 허술한 면이 있었다.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길드, 신성.
‘잘하면,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을지도.’
자그마한 흑심을 품었다.
문을 열기 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긴장하고 있단 것을 알아챘다.
‘이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
몸 안에 있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몸에 은근히 전해지는 압박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스네이크 길드장, 전진명.
그의 몸이 말하고 있었다. 이 안은 위험하다고.
그리고 그 안에 제 아들놈이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목적과는 별개로 스네이크의 차기 길드장을 혼자 둘 수는 없었다.
망나니이지만, 제 아들이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문 앞에서 느껴지던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안에 있는 것은 거만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제 아들놈과 생수를 마시고 있는 신성 길드장.
“이런. 손님이 와 있었군.”
우연을 가장하며, 그 사이로 섞여들었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그의 아들을 내쫓고 그를 응시했다.
평범하다.
그런 생각은 그의 손을 마주 잡는 순간 지워져 버렸다.
“왜 그러세요?”
태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신성 길드장.
‘……수호 길드장이 떠오르는군.’
안환재가 처음 자신을 만났을 때 했었던 장난.
그것을 현재 눈앞의 사내가 하고 있었다.
자신이라는 존재를 조사하듯이 파고드는 이질적인 기운.
아무리 마나를 끌어 올려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장난이 아니다.
허튼수작을 부리면, 가만히 안 둔다는 경고였다.
그 순간부터 전진명은 이자에게 무언가를 한다는 생각을 없애버렸다.
뱀.
사냥감을 잡아먹는 포식자는 최상위 포식자 앞에서 연기를 시작했다.
친근하고, 조금은 팔불출인 아버지의 모습을.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표정을 웃음으로 감추곤 했으니까.
그 이후로는 처음에 느꼈던 기운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긴장하고 있던 자신의 몸이 점점 풀어질 정도였다.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그만큼 힘의 조절이 능숙하다는 이야기니까.
“하아…… 피곤하군.”
전진명이 한숨 쉬었다.
진우, 저놈은 대체 어떻게 저런 사람 앞에서 저렇게 대담하게 행동하는 건지…….
“……진우가 고생이 많구만.”
어째선지 제 아들놈에게 연민이 가는 그였다.
* * *
“후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흑발의 머리를 뒤로 묶은 여검사가 검을 내렸다…… 그녀의 근처에 있던 환영들이 하나, 둘 사라져간다.
그녀는 음료수 하나를 들었다.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
요즘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필수라고 해도 좋을 에너지 드링크였다.
[지윤아. 오늘 할애비랑 오붓하게 식사라도 할까?]
“얼른 씻고 가자.”
안지윤.
수호 길드장, 안환재의 손녀딸인 그녀는 자신이 방금까지 검을 휘두르던 곳을 쳐다보았다.
특수 재질로 만들어진 훈련용 인형들이 이곳저곳 반으로 갈라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평범한 각성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해낸 안지윤은 불만스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 정도로는 부족해.”
구식 휴대전화를 켜자, 제 오빠가 보내온 문자가 나타난다.
[수호 길드 소속 안지훈. 2층 규모 던전 단독 공략 성공!]
[야, 어떠냐. 이제 좀 오라버니를 존경할 마음이 드냐?]
“…….”
벌써 각성자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자신과 비슷한 이름의 남성,
짜증 나는 자신의 오빠였다.
안지윤은 문자를 무시하고, 곧바로 휴대전화를 껐다.
“……고작해야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왜 나만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지윤아. 너는 아직 때가 아니다.
존경하는 할아버지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안지윤은 가슴 속에서 무언가 쿵 하고 눌러앉는 기분이 들었다.
“하아…….”
할아버지는 자신을 너무 애 취급한다니까.
나도, 나도…….
저 정도쯤은 할 수 있는데…….
할아버지의 기대를 만족시켜 드릴 수 있는데…….
문득 자신의 오빠 말고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분신을 단번에 알아챘음에도, 일부러 항복을 했던 사내. 이후 몇 번이고 그곳에 찾아갔지만, 다시 만나진 못했다.
아직도 안지윤은 품속에 신속환을 고이 간직한 상태였다.
‘다시 붙는다면, 다음번엔 제대로 이길 수 있어.’
입술을 문 안지윤이 손을 들었다.
짝!
제 뺨을 가볍게 친 안지윤이 혼자 속삭였다.
“자자. 지윤아. 웃자. 오늘은 오랜만에 할아버지랑 단둘이 식사하는 거라고!”
샤워를 끝마친 그녀가 풀어진 머리를 뒤로 묶고 발랄하게 웃어 보였다.
도착한 곳은 한정식 식당, 한빛.
자신의 할아버지가 죽고 못 사는 음식점이었다.
“하여간 여전하시다니까.”
그녀를 향해 종업원이 다가왔다.
“안지윤 님 맞으시죠?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있는 방문 앞.
“큼큼. 할아부지이~ 저 왔어요옵!”
목을 가다듬은 안지윤이 문을 열며 간드러지게 외쳤고.
“에?”
어딘가 낯익은 얼굴의 남성이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며,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68화
23. 약간은 불편한 식사 자리(4)
“음? 음식이 맘에 안 드는가?”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안환재와의 식사 자리. 가볍게 담소나 나누자는 그의 말에 나는 전진우와의 약속 이후 이곳으로 찾아왔다.
이미 밥은 먹은 지 얼마 안 됐지만, 어차피 이야기만 하러 온 거니까.
차우 길드장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고.
저번에도 함께 자리한 적이 있었기에 부담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상대는 수호 길드장이었지만, 그보다는 가깝게 느껴졌으니까.
실제로 자리에 앉고 몇십 분 동안은 내가 예상하던 그대로의 자리였다.
가벼운 식사 자리.
분명히 그랬었다.
내게 술 한 잔을 따라주며, 안환재가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하하. 미안하네, 서진 군. 내 손녀딸이 근처에 있다는 소리에 배라도 채우라고 불렀네만. 혹시 불편하게 한 건 아닌가 모르겠군.”
딱히 불편하진 않았다.
안환재의 마음이 이해갔기에.
나 또한 남들과의 식사 자리에 순둥이를 데려가곤 했으니까.
-할아부지이~ 저 왔어요옵!
서로 술잔을 나누는 고요한 자리에서 난데없이 울려 퍼진 그 코맹맹이 소리만 듣지 않았더라면 말이야…….
‘흠…….’
내 맞은편, 안환재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아서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흑발의 여성.
안환재의 손녀딸. 그와 이전에 술자리를 가졌을 때, 들었던 인물이다.
저 안환재가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이 떠나질 않던 보물 같은 손녀.
‘부끄러운가 보네.’
두 귀가 익을 듯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가끔씩 머리를 흔들며, 뒤로 묶인 포니테일도 같이 흔들린다.
조금 늦은 것 같지만, 나는 최대한 모르는 척을 해주기로 했다.
대충 물로 입을 적시는데, 내 귓가로 귀여운 목소리가 들린다.
‘순둥인 저 사람 싫어!’
커튼을 두르고 내 어깨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순둥이가 안환재를 보며 연신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조금 짓궂은 면이 있어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다.
내게 여러 가지 도움을 주곤 했으니까.
우리 순둥이는 왜 이리 저 아저씨를 싫어한대. 보아하니, 어린 애도 좋아하시는 거 같던데.
‘아빠한테 이상한 장난을 쳤었어! 찌리찌리하는 거!’
이상한 장난?
별로 장난이란 걸 당한 기억은 없는데…….
애초에 순둥이와 안환재가 만난 적이 있던가?
기억을 되새김질하고 있는데, 술 한 잔을 마저 기울인 안환재가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순둥이도 안 속을 만한 명연기를 펼치기 시작한다.
“큰일 났군. 길드 내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었는데 말이야.”
안환재가 나를 보며 미안하다는 듯, 주름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하네, 서진 군. 아무래도 이 늙은이는 먼저 가봐야 할 거 같네.”
“예…….”
마침 다행이긴 하다. 조금 전 있었던 일 때문에 나도 이 자리가 슬슬 불편해지고 있었거든.
그보다 아까부터 웬 서진 군?
평소에는 신성 길드장이라고 부르던 사람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문이 열리며 갑자기 직원들이 일제히 들어왔다.
각자 두 손 가득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있다.
끝을 모르고 입장하는 처음 보는 음식들의 향연.
“한 달 전에 예약하신 한빛의 특제 요리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
“내 정신 좀 보게. 이걸 깜빡하고 있었군. 자네에게 대접하려고 기껏 준비한 것을…… 이대로 버려야 하는 건가?”
……?
“아, 그렇지. 서진 군, 자네는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다가 돌아가면 되겠어. 이 늙은이가 준비한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 주게나.”
아니…….
“혼자 들면 심심할 테니, 내 손녀가 말동무가 되어줄 걸세. 내가 팔불출이라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손녀가 말을 조리 있게 아주 잘해요. 거기다 애교도 많지. 자네도 아까 보았지 않았…….”
“할아부지! 아…….”
자기도 모르게 말을 한 그녀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보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럼 오붓한 시간 보내시게나.”
“잠깐만요오……!”
우리를 번갈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던 안환재는 제 손녀의 애처로운 손짓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 *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자신의 할아버지와 오붓한 식사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온 순간부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사실 이해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할아부지이~
아아아!!
저런 낯간지러운 말을 내가 했다고?
그것도 남 앞에서?
‘과거의 내 입을 꿰매 버리고 싶어…….’
안지윤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맞은편에 있는 남성은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고 있었다.
하나같이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긴 하다.
평소보다 잔뜩 힘을 준 요리들.
저 사람이 누구길래, 할아버지가 저렇게 대접하고 있는 걸까?
꼬르륵-
‘……그러고 보니 나 아직 밥도 안 먹었네.’
그녀 또한 젓가락을 움직여 음식을 입에 넣었다.
‘맛있어…….’
평소라면 할아버지에게 맛있다며 잔뜩 애교를 부렸을 텐데.
슬쩍.
안지윤이 앞을 보았다.
‘그런데 뭐 하는 거지?’
음식을 꾸준히 집어가고 있기는 한데, 그것이 입으로 가지는 않는다.
젓가락이 향하는 곳은 그의 아래쪽.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위치로 음식이 반복해서 이동하고 있었다.
‘……뭐지?’
그럼에도 음식은 마치 누가 먹은 것 마냥, 계속해서 사라져간다.
안 그래도 머리가 아팠기에, 그녀는 결국 그것을 못 본 척하기로 했다.
‘너무 많아…….’
상 위에 놓인 음식들은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이곳에서 나갈 수 없게 작정을 하고 준비한 것만 같았다.
‘……더 이상은 못 먹겠다.’
무언가를 먹는 행위마저 관두자, 분위기는 미칠 듯이 어색해져 갔다.
다리가 저릿하다고 느낄 때쯤.
그녀의 귀로 남성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수호 길드장님의 손녀딸, 이라고 하셨죠?”
“예, 예? 아…… 예. 맞아요! 안지윤이라고 해요!”
“이서진입니다.”
안지윤을 배려하듯, 상대방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곧장 대답했다.
‘……미치겠네.’
이서진 또한 어색한 건 마찬가지였다.
막상 말을 걸기는 했는데, 더 이어갈 말이 없다.
애교가 많으시네요?
오늘 날씨 좋죠?
취미가 뭔가요?
‘아냐. 이건 아니야. 무슨 소개팅도 아니고…….’
“저희 할아부지…… 아니, 할아버님과는 무슨 관계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앞에 들린 말은 무시했다.
그에게 누군가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었기에.
‘무슨 관계라…….’
고민하던 그가 답했다.
“뭐, 비즈니스로 얽힌 관계라고 보시면 되겠네요.”
“아아…… 비즈니스…….”
수호 길드장.
자신의 할아버지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많았기에, 별로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태도가 이상했다.
평소처럼 상대방 쪽에서 할아버지에게 쩔쩔매는 형태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할아버지가 이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지.’
아마 이 자리도 원래는 그런 목적으로 마련된 게 아닐까 싶었다.
그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자신도 알지 않을까.
안지윤은 앞에 있는 남성을 예의주시했다.
‘이상하다……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저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글쎄요.”
휴대전화도 구식이요.
인터넷은 젬병이고, 뉴스조차 잘 보지 않으며 오로지 훈련에만 집중하는 그녀는 상대방이 그 유명한 신성 길드장이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대신, 자신의 기억 속에서 한 인물을 떠올렸다.
안지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때 항복했던 그 검사!”
“아…….”
이서진 또한 기억났다는 듯, 그녀를 향해 탄성을 내뱉는다.
그의 얼굴에 서서히 어색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때 먹튀 했다고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 * *
-번호. 하나만 주실 수 있죠?
그 후, 어색했던 분위기는 사라졌다. 그 대신이라고 하듯이, 호전적인 눈동자가 된 안지윤이 내게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안지윤]
-다음에 그때 보았던 체육관으로 와주실 수 있으세요?
그때, 재빠르게 항복을 하고 도망치듯 나왔던 것이 떠오른 나머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다시 재대결이라도 하자고 하는 걸까.
‘……나는 서포턴데 말이야.’
“성자님. 안녕하신지요.”
“뭐? 아…… 루비구나.”
밖으로 나와 한숨을 쉬고 있는데, 내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백발의 소녀가 서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루비다.
언제나처럼 갑작스레 나타나는 루비다.
대체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걸까.
솔직히 아침이 되자마자, 곧바로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아니지. 오히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쉬었단 거니까. 좋은 징조야.’
“루비야. 어때, 어제는 푹 쉬었어?”
“예. 지금이 정확히 성자님과 떨어진 지 24시간이 되는군요. 이제 루비가 성자님의 곁으로 복귀해도 되겠습니까?”
“응? 어, 그래…….”
시계를 확인하니, 어제 루비에게 휴일 어쩌구 했던 시간이 딱 지금이기는 했다.
……그걸 다 일일이 세고 있었다고?
‘하루’ 정도 떨어져 있자고 했더니, 정말로 24시간이라고 받아들인 모양이다.
뚜벅. 뚜벅.
그녀가 내 옆으로 점점 다가온다.
내 목에 자리 잡아 있던 순둥이는 어느새 인간 모습으로 변신을 끝마치고 루비의 앞에 서 있었다.
순둥이가 밝은 얼굴로 루비에게 손을 들었다.
“안녕!”
“순둥님…….”
“순둥이!”
“……응. 반가워. 순둥…… 아.”
오…….
루비가 누구에게 말을 놓는 건 처음 본다.
순둥이와 나이 차이가 나는 만큼,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평소에 루비가 순둥이를 대하는 모습을 본다면 절대 저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루비도 익숙하지 않은지, 순둥이와 대화를 하면서도 이래도 되나…… 싶은 표정을 짓고 있다.
그것이 만족스러운 듯, 방긋 웃은 순둥이가 두 손을 벌렸다.
“나 안아줘!”
순둥이가 자연스럽게 루비의 품속에 안겼다.
전에 봤을 땐, 저게 되게 무겁겠다고 생각했는데.
순둥이를 어깨에 달고 다니다 보니 그렇지 않단 걸 알게 되었다.
분명히 무겁다고 느끼는 게 정상인데, 아무런 무게도 체감되지 않는다.
순둥이가 무언가 수를 쓴 것이리라.
어제 철봉에 매달렸을 때 경험했던 중력 역전.
아마 그것과 관계 있지 않을까.
아빠가 무거울까 봐 신경도 써주고.
참 재주도 많은 딸이다.
루비는 순둥이가 불편하지 않게 두 손으로 편한 자세를 만들어 주고 있는 중이다.
참고로 루비에게도 이미 순둥이의 정체에 대해 밝힌 상태지만…….
-그렇습니까. 역시 성자님의 따님이시군요.
이 세상 반응이 아니었다.
내가 걷자, 순둥이를 안은 루비도 자연스럽게 옆에서 걷는다.
‘뭔가 이제야 좀 익숙하네.’
루비가 나와 함께 다닌 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다.
고작 하루 떨어져 있던 것뿐인데, 빈자리를 여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아닌데! 어제 하루 종일 같이 있었는…… 웁.”
익숙한 손놀림.
마치, 내가 루비에게 하던 것처럼, 루비가 순둥이의 입을 재빠르게 막았다.
재밌는 장난이라고 생각하는지, 순둥이가 입이 가려진 채 꺄르륵 웃는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자님.”
오늘 이곳에 찾아온 건 신백준 씨한테 들었나?
아침에 어디로 가는지 그에게 따로 문자를 보내놨으니, 아마도 그렇겠지.
요즘 들어 아침에 신성 길드로 들르지 않을 때도 많으니, 루비랑도 연락 수단이 필요하긴 할 텐데.
“루비야. 휴대전화 없다고 했었지?”
“성자님께서 들고 다니시던 네모나고 작은 물건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유감스럽게도 루비에게는 없는 물건입니다.”
그게 있으면 평소에 떨어져 있을 때, 연락하기 편할 텐데.
그렇게 말하자, 루비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묻는다.
“성자님과 언제든지 대화를 할 수 있는 겁니까?”
“응.”
“그런 신비한 물건이…….”
무엇을 상상하는지, 얼굴에 화색이 돈 루비가 안고 있는 순둥이의 두 손을 잡으며 꼼지락거린다.
“간지러워!”
저건 가지고 싶다는 거구만.
“하나 사러 갈까?”
그 말에 움직임을 멈춘 루비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성자님.”
길가에 널린 곳이 휴대전화 가맹점이었기에, 그곳에 들어갔다.
역시 시대가 시대인지라, 처음 보는 최신 폰들이 많았다.
“어서 오세요.”
직원이 얼굴을 힐끗거린다.
루비를 알아본 모양이지만 따로 말을 걸지는 않는 모습.
“이건 어떠신가요?”
그 대신 최대한 친절한 웃음을 섞으며 요즘 잘 나간다는 휴대전화 하나를 보여준다.
그걸 본 루비가 고개를 저었다.
“성자님과 같은 것으로 하고 싶습니다.”
내 건 나온 지 꽤 된 기종인데…….
뭐, 본인이 원한다니까.
휴대전화를 개통하는 법은 간단하다.
단순히 인적사항을 적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
루비가 펜을 잡고, 자신에게 내밀어진 종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루비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자신의 이름을 적는 평범한 칸.
그곳에 펜을 가져다 댄 루비는 이름을 적지 못하고, 그 상태로 멈춰 있었다.
시간이 흐른다.
직원이 어색한 웃음을 흘릴 때쯤.
아주 작게.
펜을 들고 있는 루비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본 내가 직원에게 말했다.
“혹시 제 명의로 하나 더 개통할 수 있을까요?”
결국, 내 명의로 휴대전화를 하나 더 만들었다.
그것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루비의 손에 얹어주었다.
루비는 제 손에 있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다가, 작게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성자님.”
“아냐. 그것 좀 잠깐만 줘 볼래?”
나는 루비의 전화번호부에 내 번호를 추가했다.
[이서진]
“이제 네가 원할 때마다 여기로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내면 돼. 아, 문자는 어떻게 하는 거냐면…….”
눈에 띄게 시무룩해 있던 루비는 내가 문자를 쓰는 법을 알려주자마자,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가 되었다.
[안녕. 루비야. 첫 휴대전화 축하해.]
화면을 뚫을 듯이, 오랫동안 쳐다보던 루비가 입을 열었다.
“이게 성자님의 문자…….”
그리고선 자그마한 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꾹꾹 터치한다.
철퇴를 휘두르던 때보다도 더욱 신중한 손놀림.
띠링!
이윽고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앗녕하시ㅂ니가. 성댜님.]
“이렇게 보내면 되는 것입니까, 성자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루비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인데 이 정도면 천재지, 뭐.
“성자님. 루비의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응. 뭔데?”
“그때 했던 그것.”
“그것?”
“찰칵, 하는 것 말입니다. 루비의 것에도 하나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루비가 자기 쪽에서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아마도 사진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내 휴대전화 속에는 예전에 루비와 찍었던 사진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만약에 만날 일이 있을 때,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찍은 사진.
찹쌀떡처럼 붙어 다녀서 막상 쓸 일은 없었지만, 원래 사진이란 게 그런 용도로 쓰는 건 아니니까.
현재를 기억하기 위해 찍는 것이 사진이다.
“그게 무슨 부탁이라고…… 자, 가까이 와.”
순둥이를 안은 채로, 루비가 내 옆에 바짝 붙는다.
‘오늘은 눈을 안 감네?’
전에 사진 찍었을 때가 생각난다.
무언가에 기도하듯이,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었지.
지금은 달랐다.
마치 이 순간을 제 눈으로 새기고 싶다는 듯, 두 개의 푸른 눈동자가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
“자, 찍는다.”
‘이름이라…….’
아주 작은 의문이 떠오르며, 찰칵-사진이 찍혔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69화
24. 노력의 보답(1)
대부분의 일이 일단락되고, 일상이란 것이 찾아왔다.
물에 약을 타는 놈이라든가, 이상한 약을 하는 놈이라든가…….
그런 놈들이 없는 생활은 매우 안락했다.
“이제야 좀 조용한 거 같네.”
-성자니이이임!
-루비야아아! 얼굴 좀 비춰주라!!
분명 안락했어야 하는데……?
“……혹시 저희 길드에서 뭐 잘못한 거라도 있습니까?”
“하핫. 아니요. 전부 다 신성 길드에 들어오고 싶다는 사람들이에요.”
“……여길요?”
한창 마석병이 퍼지고, 그 원인에 대한 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각 길드 앞에는 저런 식으로 사람들이 죽치고 앉아 있곤 했다.
지금 신성 길드 하우스 앞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있는 것이지만. 지끈거리는 머리를 잠시 진정시키고,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람을 쳐다보았다.
정장을 입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미소 짓고 있는 안내원.
단순한 안내원이라고 하기에는 그 외모가 두드러진다.
뭐, 당연한가.
원래는 모델이었던 사람이니까.
“일은 좀 어떠세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길드 하우스에 계신 분들도 전부 친절하시고요.”
“다행이네요.”
신미란이 내게 살며시 미소 지었다.
前차우 길드 소속 전속 모델, 신미란.
그녀는 내 권유를 받아 신성 길드에서 일하게 되었고, 1층에 있는 안내 데스크에서 업무를 보게 되었다.
대인기피증이 보이는 그녀를 위해 다른 편한 일을 준다고 했지만, 그녀가 선택한 것은 그 누구보다 사람을 자주 만나는 안내 데스크 직원이었다.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이니까요. 피하기만 해서는 될 것도 안 되잖아요?”
마음이 강한 사람이다. 신미란의 얼굴은 이전에 스튜디오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
아직도 그녀를 욕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반대로 옹호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내가 나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나아지겠지.
“길드장님 오셨습니까.”
“아. 신백준 씨.”
성기사단장, 신백준.
그의 등장에 신미란이 자신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저희 식구들이 좀 한 덩치하시긴 하죠.”
길드 하우스 내부에서도 갑주를 벗지 않는 그들이다.
나조차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데, 그녀라고 별수 있겠는가.
“밖에서 무슨 소란이 일어난 것 같아 나와 봤습니다만…….”
“아, 그게요.”
신백준에게 현재 상황에 대해 말해주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에 들어오고 싶다면,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겠죠.”
“예? 그래도 되는 거예요?”
“이전에도 이곳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분들은 많았습니다.”
하긴 대형 길드에다가 사회적으로 이미지도 좋은 곳이니까.
그런데 그런 것치고 길드 하우스 내에 상주 중인 인원이 너무 적지 않나?
“그럼 입사를 위해 따로 지원이라도 받나요?”
“사무직에 경우 인원을 모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저런 식으로 길드 앞에 있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대부분 전투직입니다.”
“전투조…….”
길드의 꽃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신성 길드에서는 성기사라고 불리는 자들.
성기사단장, 신백준 휘하에 있는 성기사의 인원은 총 스무 명.
내가 이곳에 온 이후로도 인원에 변동은 없었다.
신백준 씨의 말을 들어보면, 이전에도 별다를 것은 없었다고 하는데…….
타 길드에서는 상시 전투조를 늘리기 위해 따로 스카우터들도 존재하는 것에 비해, 신성에서는 전투조 증원을 위한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신성의 전투원이 되고 싶은데, 될 방법은 없으니 저렇게 앞에서 시위라도 하는 것이다.
“명색이 신을 지키는 방패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쉽게 받을 수는 없는 법이죠. 아주 간단한 테스트를 거칠 뿐입니다.”
“테스트?”
“길드장님께서 원하신다면, 기존에 하던 절차대로 하고자 합니다만. 어떠십니까?”
“예. 저도 그게 좋을 거 같아요.”
신성의 길드장 자리를 내가 이어받았다고는 해도, 길드와 관련된 일은 대부분 신백준 씨가 맡고 있는 상황이다.
내가 이래라저래라 하기보다는 그에게 믿고 맡기는 것이 맞겠지.
그가 밖으로 나가기에 나도 뒤를 따라갔다.
“이서진이다!”
“얌마. 길드장님이겠지!”
“아니야. 성자님이라고 부르라던데?”
내가 나가자 바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되었다.
그러나 내게 말을 걸려던 사람들은 내 옆에 있는 인물을 보고는 흠칫- 멈춰섰다.
“성기사…….”
“실제로 보니까 말도 안 될 만큼 크잖아……?”
굳어 있는 사람들에게 강대한 성기사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신에게 충성을 바치고 싶은 자, 누가 있는가.”
……응?
갑자기 말투가 변했다.
마치 옛날에 길에서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신백준 씨가 힐끔 내게 고개를 돌렸다.
투구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뜻은 전해졌다.
‘컨셉…….’
아무래도 이렇게 행동하는 편이 더욱 편하긴 하겠지.
실제로 저런 몸으로 저런 말투를 쓰니까 의외로 어울렸다.
……나는 못 할 거 같네.
“오오……!”
“멋지다……!”
역시 사람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공포심은 사라지고, 그들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성을 바치고 싶습니다아!”
“신의 방패가 되기 위한 길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몇 가지 시련을 통과해야만 진정한 성기사가 될 수 있는 법. 자네들이 그것을 감내할 수 있겠는가?”
“감내하겠습니다!!”
“그럼 따라와라.”
길드 앞에서 죽치고 있던 스무 명의 신체 건강한 남녀들이 하우스 내부로 들어왔다.
그들이 향한 곳은 성기사들이 평소에 사용하는 훈련장.
신백준이 말하는 시련이란 다름 아닌 체력 테스트였다.
문득 각성자 등록을 하던 때가 생각났다. 이곳에 들어오고 싶다는 것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이들은 전원 각성자였다.
그들은 시련이 단순한 체력 검사라는 말에 자신만만한 웃음을 보였고…….
“허어억!”
“주, 죽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명도 빠짐없이 훈련장의 바닥을 기게 되었다.
“한심하군. 고작 이 정도로 신의 방패가 되려 하였는가.”
“…….”
‘간단한’ 테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던 나는 그들을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이 수준 미달인 것이 아니다.
그냥 이 테스트라는 것이 말도 안 될 정도로 힘들 뿐이었다.
옆으로 다가온 신백준이 내게 말했다.
“음. 별로 힘든 것은 아닙니다. 저희가 매일 하는 훈련에 비하면, 저 정도는 스트레칭에 불과하니까요.”
……저게 스트레칭이라고?
“우웨엑!”
“커헉!”
스트레칭이라기엔 너무 심한데……?
바닥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한 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좌절.
그들은 다시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다시는 성기사가 되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아깝긴 하네.’
하나같이 타 길드의 스카우터들이 본다면 눈독을 들일 만한 수준의 사람들이다.
‘뭐. 전투조와 관련된 건 내가 관여할 게 아니니까.’
엄연히 신백준 씨의 관할이다.
신미란이 그들에게 에너지 드링크를 하나씩 나눠줬다.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
현재 대한민국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에너지 드링크였다.
“하아…….”
“이제 좀 살겠다…….”
음료수를 벌컥 마시고, 어느 정도 체력이 돌아온 그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기사들 또한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었고.
성기사들의 훈련 강도는 그들이 방금 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했다.
“무리야…….”
“이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역시 포기하려는 모양이다.
그들이 신미란의 안내를 받아 훈련장의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성기사들의 흰갑주를 연상시키는 순백의 머리카락.
“성자님. 이런 곳에 계셨군요.”
칙칙한 분위기의 훈련장은 루비가 들어오자마자 한결 화사해졌다.
루비는 자연스럽게 내 곁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옆으로 지나가는 그녀를 보며, 성기사 지원자였던 사람들의 눈이 저절로 돌아간다.
“루, 루비 님…….”
“진짜 성녀님이다……”
“저는 성녀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성자님을 모시는 수녀일 뿐이지요.”
무표정한 루비의 말에 그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눈빛이 부담스러웠기에, 나는 그들 대신 루비를 바라보았다.
‘……저건 뭐지?’
평소와 같은 루비였지만, 뭔가 다른 점이 있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던 루비의 머리에 앙증맞은 딸기 모양 머리핀이 있었다.
“제가 해드린 거예요. 어때요, 굉장히 잘 어울리죠?”
“…….”
신미란이 내게 속닥였다.
순둥이는 달걀 모양 머리핀을 하더니, 루비는 딸기야?
‘……뭐. 잘 어울리긴 하네.’
“이런 건 원래 말로 표현해야 하는 법이에요. 자자. 빨리요.”
신미란이 내 등을 툭툭 쳤다.
……막상 입 밖으로 뱉으려니까 되게 어색하네.
평소에 이런 말을 해봤어야지.
내 시선을 느낀 루비는 자신의 손을 머리로 가져갔다.
“역시 성자님을 모시는 자로서 이런 거추장스러운 것은 불필요하겠지요.”
머리핀을 떼는 손동작에 내가 곧바로 말했다.
“아냐. 그. 되게 잘 어울리네, 머리핀. 응. 너한테 딱이다.”
“그렇습니까.”
다시 차분하게 두 손을 앞으로 모은 루비가 이내 입구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물었다.
“저들은 무슨 일로 이곳에 오신 겁니까, 성자님?”
“아무래도 길드에 들어오고 싶다는 모양이야. 그것도 성기사를 지망한다는데.”
“성기사입니까.”
가만히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사람들에게로 루비가 걸어갔다.
“아주 바람직한 행동입니다. 신을 지키는 방패가 되기 위해서 몸소 이곳까지 찾아와주시다니.”
“예? 예! 그렇습니다! 저는 성자님을 지키기 위한 성기사가 되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 아.”
루비가 하도 성자님, 성자님. 그러다 보니까 저들에게도 옮은 것 같다.
신이 아닌, 성자를 지킨다고 말해 버린 남성이 다급하게 말을 바꾸려고 할 때.
루비의 흥분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습니까! 성자님을 지키기 위한 성기사가 되기 위해 이곳에 찾아와주신 겁니까!”
그의 앞에서 두 손을 모은 그녀를 본 상대방이 어쩔 줄 몰라 한다.
“신도님의 마음에 감복했습니다. 그런 숭고한 생각을 하고 계시다니! 혹시 뒤에 계신 분들도 전부……?”
난데없는 상황에 그들은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고. 기회를 포착했다는 듯,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희들 모두 성자님을 지키기 위한 성기사가 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아아! 어찌 이리도 고결할 수 있는지!”
한 명 한 명이 모두 귀중한 사람이라는 듯이, 루비가 손을 맞잡는다.
“저, 루비가 당신들을 응원하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려던 그들이 휙-하고 몸을 돌렸다.
좌절은 사라지고 불타는 눈동자가 되어 훈련장을 노려본다.
“으아아! 얼른, 얼른 다시 테스트를 보게 해주십시오!”
“성기사가 된다! 루비……아니, 성자님을 지키기 위한 성기사가 되겠습니다아아!”
“그것입니다! 모두들 큰 소리로 외치는 겁니다! 성자님을 위해서!”
“성자님을 위해서!”
이전에 악수회에서 들었던 성자님 찬양곡을 다 같이 부르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에서 즐거운 듯, 손을 번쩍 들고 있는 루비.
‘……이상한 곳에서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니까.’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자니, 신백준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저희 식구가 늘어날지도 모르겠군요.”
흐뭇한 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공감이었다.
……아마도 한두 명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 * *
“오. 이제는 그럭저럭 잘 피하는 거 같은데?”
하루 종일 미친 듯이 구르는 예비 성기사들을 보며 자극받은 걸까.
나도 그동안 하지 못했던 운동을 오랜만에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 간다.”
여기서 왼쪽.
그리고 오른쪽.
이전에는 미래시를 보고도 피하지 못했던 주먹들은 이제 아슬아슬하게나마 흘릴 수 있게 되었다.
맨 처음 훈련을 시작할 때부터, 내 목적은 단 하나였다.
회피.
상대방의 공격을 흘리는 것에 초점을 집중했다.
그리고 드디어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야…… 이게 어떻게 되지?”
연신 주먹을 내지르던 소성환이 감탄 섞인 말을 뱉었다.
“그럼 이건 어때. 이건. 이건.”
방금까지 본 스피드가 장난이라는 듯이, 더욱 날카롭고 빠른 주먹이 내 뺨을 스친다.
“아. 좀! 그거 하나 피한 게 그렇게 억울해요?”
“아니. 형이 하도 잘 피하길래…….”
“그 형 소리도 좀 그만하고요!”
“아니, 형을 형이라 부르지. 그럼 형 말고…… 누나?”
“아!”
오랜만에 하는 소성환과의 훈련 시간이다.
못 보던 사이 깐죽거림을 모아오기라도 한 건가. 점점 내 속은 타들어 가기만 했다.
“웅?”
“하아…….”
마음 같아서는 정말로 한 대 때리고 싶은데.
“그럼 내기 한 번 더 하는 건 어때? 저번이랑 내용은 똑같이.”
“안 합니다. 제가 미쳤다고 그걸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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