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efato 6
* * *
“……어우. 하마터면 늦을 뻔했네.”
“성자님. 다른 분들도 찾았다고 합니다.”
“미안해. 괜히 고생시켜서.”
“아닙니다, 성자님. 해야만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인명의 구조. 역시 성자 된 자로서 어울리는 행동이십니다.”
텔레비전으로는 그 사람의 위치까지는 나오지 않았기에, 찾는 데 애를 먹었다.
그나마 묘하게 가려져 있던 간판 하나를 발견해서 다행이지…….
미래를 보여주는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두 가지 정보.
하나는 내가 도저히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석병.
그것에 걸린 사람들은 마치 유행병이라도 돌듯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물약을 사재기하는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주 구매자였다.
“……그나마 이 사람들은 구해서 다행이네.”
텔레비전 속에서 보았던 그 사내였다.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나도 한때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가방에서 물약을 꺼내 기절한 사내의 입으로 흘려보냈다.
아마도 이거면 충분하겠지.
마석병의 초기 증상.
심장 부근에 아주 작은 마석이 생성된다.
원래대로라면 저런 크기의 마석조차도 없앨 방법이 없겠지만…….
업그레이드 후의 정수기.
그곳에서 흐르는 중급 물약을 섭취하면 그들의 몸속에 있던 마석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했다.
시중에 풀린 물약으로는 불가능한.
오직 우리 집 정수기에서 흐르는 순도 100%의 물약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증상이 점차 심화된다면, 물약으로도 해결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당장 내 몸에 박혀 있는 마석 또한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정수기에서 나오는 물량으로는 턱도 없겠네.’
이렇게 하나하나 물약을 마시게 해서는 끝이 없다.
마석병을 발생시키는 근본적인 원인부터 알아내어야 했다.
“성자님. 가시겠습니까?”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사회에 자리 잡은 던전을 문제 삼았지만.
아마 그것은 이 일과 상관없을 것이다.
마물이 있는 것은 던전 내부였으니까.
던전에 한 번이라도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그곳이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란 걸.
애초에 던전이 원인이었다면, 진작 터졌어야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던전에 들어가지 못하기에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마석병에 걸린 사람들은 각성자가 아닌 사람들뿐.
분노한 시민들은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질 대상이 필요했고.
그들이 찾은 것은 던전을 소유하고 있는 길드들이었다.
지금도 밤낮 가릴 것 없이 각 길드 하우스의 앞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신성 길드 앞에서도 적지만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물약을 구하지 못해 절박한 심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언제까지고 이대로 둘 수는 없다고 판단.
“응. 가야지.”
내일.
이 사태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서른 명의 길드장이 모인다.
* * *
“각 길드는 소유하고 있는 던전들을 즉각 폐쇄하라!”
“폐쇄하라! 폐쇄하라!”
이른 아침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한 건물의 앞에서 목이 찢어지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저기다! 저기 각성자다!”
각성자 한 명이 길드 하우스 내부로 들어가려 하자 시위대가 그를 막아섰다.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책임지실 생각이십니까!”
“……책임이라니. 저는 그냥 평범한 각성자일 뿐입니다!”
대다수의 길드 앞에서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매치 길드장, 정대건은 길드 하우스의 뒤쪽으로 나와, 시위대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정대건은 손수건으로 자신의 머리에 난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갈수록 상황이 심각해져 가는데.”
랭킹 22위에 위치한 그의 길드다.
당연히 길드가 보유 중인 던전의 숫자 또한 상당했다.
하나같이 길드를 책임지는 생명줄과도 같은 것들.
시위대가 요구하는 것은 하나였다.
던전의 코어를 부수고, 그것을 폐쇄한다.
“이제 와서 던전이 문제가 될 리 없잖아?”
연예계에서 인지도를 가진 각성자 한 명이 방송에서 이러한 의견을 소신껏 밝혔지만.
흥분한 사람들은 그를 질타하며, 욕할 뿐이었다.
현재 각성자를 주축으로 한 연예 매니지먼트 회사들은 길드와 마찬가지로 큰 타격을 입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던전에 가야만 하는 각성자들은 시민들의 눈초리에 아주 죽을 맛이었다.
일하러 갈 뿐인데, 모두가 자신에게 욕을 한다.
“반드시 제대로 된 대책이 나와야 할 텐데…….”
오늘, 이 사안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길드장들이 모이기로 했다.
만약이라도 던전의 폐쇄만큼은 안 된다.
현재 인류에게 있어서 던전은 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안에서 나오는 부산물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자원보다도 귀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구를 멸망에 빠뜨릴 뻔한 던전은 인류를 한 보 더 나아가게 할 거름이 되었다.
단시간에 지구의 과학 기술이 이토록 발전할 수 있던 것은 던전에서 나오는, 이제껏 지구에는 없던 수많은 자원들 덕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모이는 인원은 전부 각성자다.
최소한 그런 미친 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곧이어 모임이 진행되기로 한 건물에 도착했다.
화려한 복도를 지나, 이내 넓은 회의실의 문이 열린다.
자리를 안내받고, 그는 곁눈질로 이미 도착해 있는 인원들을 살폈다.
“매치 길드장님 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오랜만이군요.”
당연히 상위 길드끼리는 서로 간의 친분이 있다.
정대건은 몇 명의 길드장과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전에 황혼에서 열었던 연회에서 또한 만난 자들이다.
사회적으로 잘나가고, 한 그룹의 수장 자리를 맡고 있는 자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그들로서는 던전에서의 생활보다 더 힘든 나날이었다.
‘황혼에 수호…… 그리고 다른 상위 랭킹의 길드장까지 전부 모였네.’
가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각성자 전원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가장 안쪽에 있는 상석은 자리가 비어 있었다.
저곳은 부동의 1위, 헤븐 길드의 자리다.
‘이번에도 오지 않으려는 모양이네.’
신성 길드장의 자리 또한 공석이었다.
둘 다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신성의 길드장은 얼굴과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도 불참이라니, 정신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상석의 바로 옆자리에서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 길드의 수장들이 모인 자리다.
당연히 언행에는 조심해야 했지만, 그 말을 한 것이 수호 길드장이었기에 아무도 태클을 걸지 못했다.
실제로 그들을 모은 것도 안환재였으니까.
“이제 전부 온 건가?”
자연스럽게 회의를 이끄는 것은 길드 랭킹 2위, 수호의 길드장이 되었다.
공석은 단 두 자리뿐이었다.
‘안 오는 건가. 신성 길드장.’
작은 체구의 소녀를 떠올리던 안환재가 문을 바라보다가, 회의를 시작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고.
그때, 문이 열리며 안쪽으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가녀린 몸의 소유자였다.
“왔군. 신성 길드장.”
“……?”
안환재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 작은 소녀가 신성의 길드장이라고?
그동안 길드장 대행으로 활동하던 성기사단장이 아니었다.
사태가 사태인 만큼, 신성의 길드장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또각- 또각-
무수한 시선이 그녀에게 꽂힌다. 하나같이 경악스러운 눈빛이었다.
‘……저게 신성 길드장?’
그런 눈길을 무시한 채로 소녀는 걸어오다가 이내 멈춰 섰다. 신성 길드장의 지정석 바로 앞에서.
‘왜 앉지 않는 거지?’
잠시 자리를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의자를 뒤로 뺐다.
이제 앉으려나 하는데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난다.
“……?”
그때, 그녀의 뒤에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제야 사람들은 줄곧 뒤에 있던 존재를 알아챌 수 있었다.
앞에 있는 인물에 비하면 느껴지는 힘이 보잘것없었기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던 사내.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에겐 낯선 사람이었다.
“서진 씨?”
길드장들은 처음 보는 사내에 의문을 표했고.
그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
그것은 현재 그들이 가진 궁금증을 단숨에 해결해 줄 행동이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각 길드의 수장들.
저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바로 저 사내가 신성의 길드장이라는 의미였다.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흠. 진심인가? 뭐,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만.”
오로지 안환재 단 한 명만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루비에르트를 보았다.
그녀는 마치 수행원이라도 되는 듯, 그의 뒤에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표정이 좋아 보이는군.’
피식 웃은 안환재가 자리에 앉은 사내에게 말했다.
“자기소개라도 한번 해주는 게 어떤가. 이곳에 있는 자들이 자네가 누군지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그가 입을 열었다.
“신성 길드장, 이서진입니다.”
“……예에?”
바로 옆에서 어떤 여성의 맥 빠지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니,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하나 더.
그와는 좋지 못한 인연으로 엮인 스네이크의 부길드장, 전진우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무소속이라면서?”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52화
18. 저희도 만듭시다(2)
‘……저 녀석이 신성의 길드장이었다고?’
회의실의 말석을 자리하고 있는 스네이크 길드장의 대리, 전진우가 얼굴을 찡그렸다.
주변 길드장들 또한 전원 이서진의 자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을 신성 길드장이라 소개한 그는 주변에서 웅성대는 소리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황혼의 여식과 무언가 귓속말을 하고 있는 모습.
아까 전 굉장한 소리를 냈던 황혼 길드장은 신성 길드장이 속삭이는 말을 들으며 연신 눈이 커져가는 중이다.
도중 찌릿- 하는 표정으로 이서진을 바라보는 정해연.
그 눈빛에 이서진이 어색하게 웃는다.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사고가 떠올랐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신성 길드장과 황혼 길드장.
저 둘이 어떻게 알고 지냈으며, 어떤 사이인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거 같았다.
하지만 넉살 좋게 저곳에 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신성 길드장과 친분을 가진 사람은 없었으니까.
“……!”
“……?”
신성 길드장의 고개가 돌아가더니 시선이 그들 쪽을 향했다.
예사롭지 않은 눈빛.
‘저게 바로 신성 길드장인가……!’
그는 누군가를 발견하더니, 이내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무슨 행위지? 어떤 종교적인 제스처인가?’
단순한 인사라는 걸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성 길드장이 반가운 듯, 인사를 하고 있는 곳.
길드장들은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시선의 끝에는 얼굴이 붉어진 전진우가 있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인물이었다.
‘스네이크의 부길드장.’
부길드장이라는 직위를 달고 있으면서도 세간에서는 망나니라고 불리는 자.
오만방자하고, 방탕스러운 면모에 이곳에 있는 길드장 중에서 그와 깊은 연을 맺은 사람은 없다.
당연히 그런 자가 왜 이곳에 있는지.
스네이크 길드 내부에서는 ‘저 망나니가 대체 왜 저러는 거지……?’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갑자기 행실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사람도, 관심 있는 사람도 없었다.
고작해야 끝자락.
그래 봐야 말석이다.
황혼과의 계약 실패로 인해 등수가 확 꺾이고. 연달아 이어진 악재로 이곳에 자리할 수 있는 30위라는 턱걸이를 겨우 유지하고 있는 길드.
‘그런데 그런 인물이 저 신성 길드장과 아는 사이란 건가?’
어떻게?
왜 저런 놈이랑?
차마 전진우와도 친분이 없었기에, 물어보지 못했다.
사실 저렇게 얼굴을 붉히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말을 걸 엄두도 나지 않는다- 라는 게 더 정확했지만.
“쯧.”
전진우는 이내 혀를 차고는 고개를 돌렸다. 무시하는 게 편하다는 사실을 드디어 알아차린 것이다.
“마석병 사태에 대한 대책 회의를 시작하지.”
신성 길드장의 출현에 관심이 쏠려 있던 길드장들이 그제야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전체적인 상황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미확인 현상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마석병이 유행하고 있고, 그 대상은 일반 시민들 한정. 맞습니까?”
“그렇네.”
하나, 둘 의견을 내기 시작한다.
“……각 길드에서 소유 중인 물약들을 푸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물약을 다 내주고 나면 각 길드에서 던전의 공략은 어떻게 진행하라는 겁니까? 싸우다 죽으라는 말이에요?”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던전의 공략을 당분간 중지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기엔 생성되는 던전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기존에 소유 중인 던전까지 고려한다면 불가능합니다.”
“황혼에서 진행 중이라던 물약의 대량 생산이라면 어찌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한곳으로 시선이 몰렸다.
연금술사 길드와 합병을 하고 난 후, 완전히 날개가 돋친 황혼.
지금 대한민국에서 물약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지분을 가진 길드였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진행 중일 사안일 뿐이에요. 현재로써 물약을 생산할 방법은 각성자들의 수작업뿐입니다.”
“……끄응.”
믿을 구석이 사라진 사람들이 한숨을 쉬었다.
“근본적인 문제부터 생각해 보죠. 대체 이 마석병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요즘 들어 갑작스럽게 늘어나는 던전도 그렇고…… 혹시 정말로 던전 때문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니, 확신할 수는 없지. 근래 확실히 던전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난이도는 어려워지고.
던전이 폭주하지 않기 위해 하는 초기화 작업의 주기 또한 짧아지고 있다.
새로운 던전은커녕, 그들은 현재 자신들이 보유한 던전을 관리하기만 해도 힘들었다.
처음에는 더 많은 부산물을 얻을 수 있으니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적정선이라는 게 있다.
실질적인 대책은 나오지 않고, 전부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은 대책을 마련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한 명이 총대를 메는 것은 어떨까요?”
“……총대라면?”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던전을 폐쇄하는 겁니다.”
“뭐야? 당신 미쳤어?”
“지금 사람들이 원하는 것도 그것 아닙니까. 실제로 위쪽에서 각 길드가 소유할 수 있는 던전의 수를 제한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개소리군. 살기 편해지니까, 이제는 전부 국가 소속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야.”
“그러니까, 저희 쪽에서 먼저 선수를 치는 겁니다. 분위기가 더 가열되기 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각 길드장 사이에서 침묵이 감돈다.
자신의 길드가 아니라면 괜찮지 않을까…….
만약 지금 이곳에서 그 대상을 정한다면…….
“……스네이크 사정이 요즘 별로 안 좋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한 번 앞장서 주신다면, 사태가 해결됐을 때. 저희들끼리 의견을 모아 충분한 보상을 드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저도 그게 좋을 거 같은데.”
“저도 동의합니다.”
이곳에서 최약체라고 부를 만한 곳은 한창 하향세를 이어가고 있는 스네이크 길드뿐이다.
그 말에 가만히 있던 전진우가 씨익 웃었다.
“요새 가만히 있었더니 날 무슨 병신으로 보는 모양이군.”
“자네 무슨 짓인가!”
전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테이블 위에 발을 쾅! 하고 올렸다.
“총대 좋지. 근데 그냥은 재미없고. 나랑 1대1로 붙어서 진 새끼가 전부 뒤집어쓰는 거야. 어때?”
“무슨 터무니없는……!”
“왜? 쫄려?”
도저히 길드를 대표하여 온 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거친 언행.
줄곧 침묵하고 있던 한 길드장이 입을 열었다.
“일단 진정들 하시죠.”
“……크흠.”
대상을 확인한 전진우가 발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신성 길드장의 말에 끓어올랐던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때,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시간을 끄는 것이라면, 저희 쪽에서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습니다.”
“뭐?”
싱긋 웃는 얼굴의 사내.
“……차우 길드장 맞으시죠?”
“오.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차우 길드장, 박재한입니다. 황혼 길드장. 늦었지만,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서진 또한 아는 사람이었다.
한정식 식당, 한빛에 갔을 때. 처음으로 만났던 안환재.
그의 옆에 서 있던 사내였다.
“제 쪽에서 수를 써 외국에서 물약을 사오고, 그것을 전부 무상으로 풀도록 하겠습니다. 이거라면 상당한 시간을 벌 수 있을 테죠.”
“……타 국가에서 물약을 판매할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이라면 제가 작게나마 연을 맺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연이라면?”
“중국의 허핑 길드라고. 들어는 보셨을 겁니다.”
“……!”
들어는 봤다, 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곳이다.
중국, 그 넓은 대륙에서 17위라는 순위를 기록하고 있는 길드.
단순 순위로만 따지자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규모만으로 따지면 한국의 황혼 길드보다도 큰 곳이었다.
“그곳에 저희의 사정을 이야기하니, 물약을 판매할 생각이 있다는군요.”
“어느 정도나 되는 거죠?”
“못해도 수천 병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수, 수천 병……!”
“그거라면!”
당장에 급한 불을 꺼지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물약은 국가 자원으로 취급되는 물건이었기에 외국으로의 반출이 매우 까다롭다.
“어디에나 틈새는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그것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저희 쪽에서도 금액을 나눠서 부담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아, 그것에 관해서는 혹시 이번에 출현한 던전 몇 개를 받아가도 되겠습니까? 하하, 저도 별다른 이유 없이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거라면.”
모두들 수긍하는 분위기였고, 안환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그걸로 괜찮겠는가?”
“예. 충분합니다.”
“하아…….”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지도, 제대로 된 대책도 나오지 않았지만,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치 있었다.
“다들 지치신 모양이군요.”
그가 웃으며 어딘가로 전화를 하자,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차우 길드의 비서가 무언가를 들고 왔다.
“음료수?”
“저희 길드에서 이번에 낼 신상품입니다. 아직 시중에는 공개하지 않은 것이지요.”
“신상품이라면…… 그레이트 그레이프의?”
“예. 맞습니다.”
“오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제품이었다. 나온 지 얼마 안 된 물건이었지만.
국내에서는 코X콜X보다도 인지도가 높아지게 된 음료수.
“……그러고 보니 그레이트 그레이프가 차우 길드의 것이었군.”
“이곳에 오기 전에도 한 잔 마시고 왔는데, 계속해서 생각나더라고요.”
남녀노소 좋아하고.
그만큼 중독성이 강한 음료수였다.
“크으. 이 맛이야. 신상품이라더니, 이전 것보다 훨씬 맛있는 거 같은데?”
“요즘은 이거 없으면 못 살겠다니까.”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껏 드시지요.”
곳곳에서 감탄사가 일어난다. 맛없는 물약과는 비교도 안 되는 천상의 맛이었다.
“수호 길드장님. 한 잔 어떠십니까.”
“난 괜찮네.”
“아쉽군요. 이번에 한빛에서 식사 어떠십니까.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지.”
손수 일어나 각 길드장의 앞으로 음료수를 전달한다.
“황혼 길드장. 여전히 아름다운 분이시군요. 과연 젊은 나이에 그 정도 실적을 이룬 인물답습니다.”
웃으며 음료수를 내미는 박재한.
정해연은 그런 그를 껄끄럽다는 듯 쳐다본다.
첫 만남부터 여러모로 꺼림칙한 사내였다.
항상 웃고 있는 저 미소 뒤에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
그녀가 힐끗 곁눈질로 이서진을 보았다.
……물론 이분도 숨기는 게 아~주 많긴 하다.
신성의 길드장이라니.
서진 씨. 정말로 너무해. 어떻게 이런 사실을 감쪽같이 숨기고 있을 수 있는 거야?
얼마 되지 않았고, 자기도 갑작스럽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귓속말로 하긴 했지만…….
‘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이서진과는 다른 의미로 꺼림칙했다.
이번 일과는 별개로, 그녀는 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박재한은 이내 신성 길드장, 이서진의 앞으로 왔다.
“……신성 길드장. 이전에도 뵌 기억이 있습니다만. 맞으십니까?”
“예. 저번에 한빛에서 한번 만나 뵀었죠.”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는 생각했습니다. 하하. 그 당시에도 무언가 있는 사람이구나-그런 생각을 했죠. 그런데 신성의 길드장이었을 줄이야.”
“예. 뭐.”
그가 이서진에게 음료수 하나를 내밀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몸에 좋은 것이니, 마셔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몸에 좋다고요?”
“예. 물론이죠. 저희 쪽에서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었으니까요.”
갑자기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는 이서진.
박재한이 그것을 보며 말했다.
“멋진 시계로군요. 제가 모르는 브랜드로 보이는데, 혹시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냥 집에 굴러다니던 걸 차고 나온 것뿐이에요.”
“하하, 그렇습니까…… 그런데 시계가 조금 특이하네요.”
고장이라도 났는지, 현재 시각과는 전혀 엉뚱한 곳을 시곗바늘이 가리키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상하좌우로 계속해서 움직인다.
“T와 F…… 브랜드명인가요?”
“비슷합니다.”
“처음 들어보는군요.”
12시 방향에 있는 T라는 알파벳과 6시 방향에 있는 F라는 알파벳.
따로 시각이 적혀 있지도 않다.
별로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손목시계는 딱히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착용하는 것이 아니니까.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예. 얼마든지.”
“이 마석병 사태. 하루빨리 끝나길 바라시는 거죠?”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이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루빨리 밝혀져 해결되었으면 하고 깊이 바라는 중입니다.”
“예. 답변 감사합니다.”
“신성 길드장께서는 당연한 것을 물으시는군요.”
박재한은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이서진은 그가 떠난 뒤에 자신이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T 그리고 F.
‘……찾은 걸 수도. 이 사태의 원인.’
남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시계.
하지만 자신에게만은 특별해진 시계.
손목시계의 시곗바늘은 F라고 적힌 6시 방향을 확실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53화
18. 저희도 만듭시다(3)
각 길드장들이 모이는 대책 회의가 일어나기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미래의 정보를 보고.
현실에서는 마석병과 관련된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뭐야?”
* * *
「이서진의 스윗 하우스」
설명:【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거주하는 공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내부 구조를 변경시킬 수 있다.
▷하우스 내에 개방된 물건들의 효과가 미미하게 상승합니다.
▷개방된 물체의 수에 따라 하우스의 전체 면적이 늘어납니다.
현재 변경시킬 수 있는 평수 : 90평
◎현재 스윗 하우스의 숙련도가 가득 찬 상태입니다.
◎조건을 만족시켜 다음 단계로 업그레이드를 완료하세요.
▷퀘스트-하우스 내에 개방된 물체가 일정 수 존재할 것 (7/7)
▷보상-다음 단계로의 업그레이드.
* * *
느닷없이 스윗 하우스, 옥탑방의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애초에 내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고, 대부분의 물건들이 이곳에 있었기에 이쯤 되면 숙련도가 가득 차진 않을까-하고 생각하긴 했다.
솔직히 그렇게 큰 관심은 없었다.
현재 처한 상황들이 더 급했으니까.
마석병의 유행.
솔직히 말하면 정수기의 능력이 한층 더 강화됐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계속해오던 걱정도 있었다.
‘왜 더 이상 퀘스트가 나타나지 않지?’
평범한 사물을 특별한 아티팩트로 만들어주는 개방권.
그리고 그걸 얻기 위한 긴급 퀘스트.
내가 개입해야만 하는 일이 나타난다면, 언제나 상황에 맞게 퀘스트가 나타났다.
황혼과 도플갱어.
농협 본점에서의 그룸.
이유지와의 미확인 균열 탐사.
연회에서 일어난 일.
자기 입으로 이런 말 하기도 그랬지만.
하나같이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4층 던전을 클리어했을 때, 하나쯤은 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규모가 컸던 4층 던전에서는 퀘스트가 나오지 않았다.
“……별다른 정보도 없고.”
애초에 이 ‘퀘스트’라는 것이 나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얻어 본 적이 없었기에 어디 물어볼 곳도 없었다.
아쉽기는 했지만.
현재 있는 것들도 하나같이 오버 밸런스라고 부를 정도로 좋은 물건들이었으니 초조하지는 않았다.
지금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이 시계가 없었으면 조금 골치 아플 뻔했어.’
T와 F.
Truth or False
진실과 거짓을 밝혀주는 이 시계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쓸모 있었으니까.
양복을 사면서 함께 샀던 평범한 손목시계.
내게는 더 많은 물건들이 필요했다.
손목시계에 개방권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스윗 하우스의 2단계 업그레이드가 완료되고, 새롭게 나타난 능력,
그 어떤 것보다도 심플한 내용이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특별’하기도 했고.
옥탑방의 업그레이드.
나는 뭐 집이 로봇처럼 변신이라도 할 줄 알았지…….
[일정 주기마다 스윗 하우스 내부에 있는 물건들에 개방을 위한 퀘스트가 나타납니다.]
특별한 물건을 만들어주는 특별한 집.
즉, 그 말이다.
‘랜덤 개방권을 일정 주기마다 퍼준다는 거잖아……?’
그동안 개방권을 얻은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좀 더 확실한 수급처가 생긴 것이니깐.
어떤 어려운 퀘스트가 나올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ㅁㅁㅁ ㅁㅁㅁ 판별하는 손목시계’의 능력을 개방하기 위한 퀘스트를 공개합니다.]
[…….]
[…….]
▷상대방이 하는 말의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라(0/10)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퀘스트라고 불리는 게 이상하리만큼 쉬운 일이었다.
누가 질문하는데 굳이 거짓말을 하겠는가.
……나는 예외로 치고.
그래도 걸리는 점이 있긴 했다.
한 번이라도 판별에 실패할 시, 퀘스트는 종료.
숙련도의 초기화 같은 것이 아니라, 손목시계의 능력을 다시는 얻을 수 없겠지.
만약에 상대방이 장난으로라도 거짓을 말한다면, 실패할지도 모른다.
“……뭐 남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다행히도 내게는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귀여운 동생이 한 명 있었다.
“루비야. 지금 기분 어때?”
“당연한 걸 물으시는군요. 이렇게 성자님과 마주 보고 있을 때면, 제 기분은 언제나 날아갈 듯 행복합니다. 성자님이 이곳에 자주 오게 되시니 요즘은 더욱 그렇습니다.”
……아니, 너무 솔직한 거 같기도 하고.
조금 부끄러웠다.
[진실]
[진실]
그리고 진실.
혹시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쉽게 퀘스트가 클리어되었다.
그렇게 손목시계의 능력이 나타났다.
* * *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손목시계」
설명: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사용할 경우, 상대방이 하는 말의 진실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다.
*말이 진실에 가깝다면 시곗바늘이 T축으로 향합니다.
*말이 거짓에 가깝다면 시곗바늘이 F축으로 향합니다.
* * *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의 능력이었고.
‘저놈. 뭔가 있는 게 분명해.’
대부분의 길드장들이 그를 보며 호감을 표하고 있을 때, 그의 검은 속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해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 * *
이후로도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이거다! 라고 할 것은 나오지 않고 시간만 흘렀다.
이른 시일 내로 다시 한번 모이기로 하고, 이번 회의는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후우…….”
“피곤하네…….”
각자 지친 것처럼 보였지만, 일단 급한 불은 껐기 때문일까.
길드장들의 표정은 처음보다 한결 편해 보였다.
정부에서 어떤 방침을 세울지는 모르겠지만.
수천 개의 물약을 무상으로 푸는 것보다는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다.
차우 길드에서 물약에 대한 내용을 발표한다면, 당장에 시민들의 원성은 줄어들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시간 동안 근원을 찾아내고, 해결하는 것.
‘최소한 억울해서라도, 우리 잘못이 아니란 건 알려야겠지.’
애초에 던전이 원인이라고 해도, 딱히 길드의 잘못이 아니니깐.
각 길드장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우 길드장. 이럴 게 아니라, 같이 식사라도 어떠신가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저도 그렇습니다!”
길드장들의 관심이 박재한에게로 몰렸다.
중국의 대형 길드와 연을 맺고 있는 자.
그것도 꽤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자.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길드임에도 무섭게 성장해 대형 길드의 반열에 선 자.
저런 행동을 하는 게 이해가 갔다.
그들에게 나는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다행이다.
나에게 끈덕지게 달라붙었으면 꽤 위험했을 테니까.
……내가 아니라, 저들이.
내 뒤에 서 있는 루비의 무미건조한 눈빛이 그들을 향하다가, 나를 보고는 티 나지 않게 미소 짓는다.
“좋습니다. 저 또한 여러분들과 좀 더 많은 대화를 하길 원하니까요. 아, 부디 여러분들도 함께 가셨으면 좋겠군요.”
박재한이 싱긋 웃으며 나와 정해연에게 물었다.
나는 정해연과 잠시 눈을 맞추고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너랑 밥을 먹냐?
정해연도 같은 의견이었다.
“저희는 이후에 따로 할 일이 있어서요. 음~ 배가 고픈 거 같기도 한데. 서진 씨, 저희끼리 맛있는 거라도 먹을까요?”
……이야 이거 좀 센데.
“하하…….”
“그, 그렇습니까? 정말 아쉽군요…….”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고 딱 잘라 말하는 정해연.
밥을 먹긴 먹을 건데, 너랑은 먹기 싫다.
순간이지만, 박재한의 눈 끝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감정을 잘 숨기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바쁘시다니 어쩔 수 없네요. 다음에는 부디 함께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황혼 길드장. ……그리고 신성 길드장. 저는 당신에게 관심이 아주 많거든요.”
시계를 보았다. 말하는 족족 F에 가 있던 시곗바늘이 이번에는 T를 향해 있었다.
박재한이 했던 수많은 말 중 유일한 진실이었다.
……하필 왜 관심 있다는 말이 진짜고 난리야?
여러모로 기분 나쁜 놈이다.
박재한이 길드장들과 함께 회의실을 나갔다.
남은 것은 나와 정해연 그리고 안환재.
안환재 또한 이후 스케줄을 위해 회의실을 나갔다.
아, 또 하나 있네.
“넌 저쪽이랑 같이 안 가냐?”
“……별로. 저런 놈들 사이에 끼고 싶지는 않아.”
가고 싶지 않긴. 딱 봐도 권유조차 안 받았을 게 뻔하다.
저 자존심 강한 놈이 남들 다 끼는 곳에 못 끼고 얼마나 속이 끓을까.
괜히 웃겨서 피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밥은 먹었냐?”
“……내가 왜 그걸 네놈한테 말해야 하지?”
단순한 놈이다.
시계를 볼 필요도 없이 표정에는 내가 짜증 나 죽겠다는 듯, 오만상을 짓고 있었으니까.
최소한 박재한 같은 거짓말쟁이와 밥을 먹을 바에 이놈이랑 먹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밥이라도 한 끼 하려 했지. 뭐, 싫음 말고.”
“……그럴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더 이상 말 상대를 하기 싫었는지, 전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저놈, 저거 꽤 재밌는 놈이란 말이야.
그렇게 웃고 있는데, 옆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진 씨?”
……아, 맞아.
남을 보고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
평소와는 다른 그 음성에 나도 모르게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뒤로 주춤하는데, 누군가가 내 옆에 나란히 섰다.
루비에르트.
아니, 누구보다 든든한 내 여동생 루비다.
그래. 나도 이제는 한 길드의 수장이다.
이렇게 긴장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래. 당당하게…….
“……정말 너무해요.”
“죄송합니다앗!”
서운해하는 정해연의 표정에 곧장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정해연 팬클럽 정예 회원으로서 이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농담이에요.”
“…….”
정해연이 얼굴을 가리던 손을 치우고는 배시시 웃었다.
요즘 들어 장난기가 많아진 그녀였다.
그러나 꼭 장난만은 아닌지, 살짝 새침한 표정이 된다.
“서운한 건 사실이에요! 신성 길드장이라니! 어떻게 그런 사실을 그렇게 감쪽같이 속이실 수 있어요?”
잔뜩 볼을 부풀린 정해연이 나 대신, 내 옆에 있는 루비에르트를 쏘아보았다.
루비는 정해연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서 있을 뿐이었다.
“딱히 놀랄 일이 아닙니다. 저 같은 것보다, 성자님에게 더욱 어울리는 자리니까요. 물론, 성자님에게는 이마저도 한참 부족합니다만…….”
그 부동의 자세를 바라보던 정해연이 작게 한숨 쉬었다.
“하아…… 사실 이럴 거라고는 어렴풋이 생각은 했어요…… 던전에서 보았던 행동도 그렇고…….”
정해연이 중얼거린 말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물어보려 했지만, 그녀는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정해연이 나를 보며 미소 짓는다.
“뭐, 꼭 저한테 말해야 한단 법도 없으니까요. 저도 말 못 할 것도 있고…… 그래도 이렇게 중요한 거라면 남이 아니라, 서진 씨한테 직접 듣고 싶어요.”
정해연의 목소리가 갑자기 팍 작아졌다. 부끄러운 듯, 말을 더듬는다.
“저희. 치, 친구라면서요?”
“미안해요. 진짜로.”
딱히 속일 생각도 없었다.
말했던 대로, 워낙 바빠서 말할 틈이 없었던 거니까.
“이제 진짜 저한테 숨기는 거 없죠?”
“물론이죠.”
사이좋게 시선을 맞추고 웃고 있을 때.
쿵!
회의실의 문을 열고 안쪽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먼저 보이는 것은 원래라면 이곳에 길드장 대리로 출석했을 성기사단장, 신백준.
언제나 근엄하던 그의 자세는 마치 말 안 듣는 아이를 쫓는 것처럼 다급했다.
문을 연 사람은 신백준이 아니었다.
이런 회의실에 있기에는 한없이 어린 존재.
루비와 비교해도 작디작은 소녀가 해맑게 웃는다.
“아빠아! 이제 다 끝난 거 맞지! 보고 싶었어!”
“……죄송합니다. 서진 님.”
신백준이 면목 없다는 듯, 내게 고개 숙였다.
지금까지 이 회의실에서 들리던 그 어떤 목소리들보다도 충격적인 말에 정해연의 목이 천천히 돌아갔다.
“……숨기는 거 없으시다면서요?”
* * *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제가 잘 아는 곳이 있는데 어떠신지…….”
“이럴 게 아니라, 저희 길드로 가서 좀 더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뭐야? 누구 맘대로?”
“하하. 다들 진정하시죠. 저는 여러분들 전원과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박재한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주변을 훑었다.
하나같이 대형 길드의 수장들.
‘쯧. 거물은 없네.’
하지만 눈에 썩 차진 않았다.
첫 만남 이후로 별다른 연락이 없는 안환재와 눈여겨보고 있던 황혼의 여식.
특히 후자는 노골적인 적대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그놈을 어떻게든 포섭했어야 했는데.’
처음으로 정체를 드러낸 신성 길드장, 이서진. 조금 더 특별한 인물일 줄 알았으나 직접 만난 그는 별 볼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사내였다.
‘느껴지는 힘이 그리 대단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그의 뒤에 서 있던 키 작은 소녀에게선 이 주변에 있는 반푼이들보다 훨씬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탐이 난다.
‘신성 길드는 내부의 결속력이 대단하기로 소문이 나 있지.’
그런 자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꼭 안 될 거라는 법은 없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잘 된다면, 모든 것이 자신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흐…….”
그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면서, 밖으로 나가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거기, 스네이크의 전진우 씨 맞으신가요?”
마침 잘됐다.
저놈한테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아까 보니까 신성 길드장과 친분이 있어 보였다.
딱 봐도 가볍고 무식해 보이는 게 조금 놀아주면 알아서 길 것 같은 타입.
“어떠십니까. 같이 식사라도 하러 가시는 게?”
‘저런 놈이랑…….’
‘별 도움도 안 되는 놈일 것인데.’
주변에 있는 길드장들이 남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남 밑에 기생할 생각만 하는 기생충 같은 놈. 이런 기회를 놓칠 놈이 아니다.
그러면 자신들의 몫이 적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전진우는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딱히. 배가 고픈 게 아니라서요.”
“하하. 말 그대로 식사를 하자는 게 아니라, 담소라도 나누자는 뜻이죠.”
‘그런 뜻도 모르냐?’
“담소?”
전진우는 마치 사냥감을 탐색하는 뱀처럼 눈을 좁히고 박재한을 주시하였다.
누가 보더라도 사람 좋다고 말할 정도로 순한 인상이다.
-밥은 먹었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생각 난 한 사내의 얼굴에 다시 기분이 팍 상한다.
그놈도 꼴 보기 싫은 건 마찬가지지만…….
이 실실 웃는 표정은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나.
개소리였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놈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애를 썼겠지만…….
전진우가 그의 웃는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별로. 그쪽한테선 좀 구린 냄새가 나는 거 같아서 말이야.”
“……예?”
“너, 이 자식!”
“무슨 말버릇인가!”
“예이. 예이.”
콧노래를 부르며 전진우가 떠나갔다. 오늘로만 벌써 두 번째로 맞는 면박에 박재한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하…… 하하…….”
“저런 망나니 같은 놈 말은 무시하시죠.”
“맞습니다.”
잠깐이지만, 또 표정 관리를 실패할 뻔했다.
그래, 어차피 저런 떨거지는 필요 없다.
‘뱀이든 황혼이든 신성이든.’
전부 다 자신의 발밑에 놓게 될 테니까.
정작 안에서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박재한이 미소 지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54화
18. 저희도 만듭시다(4)
안환재가 이 상황을 보기 전에 나간 것이 다행이었다.
설명할 사람이 두 명이나 됐으면 골치 아팠을 테니까.
“아빠…… 아빠…….”
정해연은 그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순둥이가 부화하기 전부터 어렴풋이 고민해 오던 상황이다.
만약에 순둥이를 내 근처 사람들에게 공개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세한 사정은 말할 수 없는 동생이라고.
그런 식으로 둘러대기는 했지만…….
‘정작 날 순둥이랑 만날 수 있게 해준 건 정해연 덕분이란 말이지…….’
던전에서 나온 최중요 전리품인 멸망용의 알을 내게 준 것이 정해연이다.
그것이 ‘알’이라는 걸 말한 적 있는 만큼 그것에서 무엇이 나왔는지 궁금하기는 할 거다.
하지만 그런 부분에서는 티를 내지 않는다.
정해연 나름대로의 선이라고나 할까.
이전보다 확실히 편하게 대하는 게 보이지만.
너무 깊게는 다가오지 않으려 한다.
에이. 뭘 고민하냐.
굳어 있는 정해연에게 다가가 귀에 속삭여주었다.
“사실 얘 용입니다.”
“예에…… 예?”
두 손을 들어, 꼬물이의 자세를 따라 하며 놀고 있는 순둥이.
허망한 표정으로 순둥이를 바라보던 정해연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순둥이보다도 더 커진 거 같다.
“……성이 용씨라고요?”
“아뇨. 그 영화 같은 곳에서 나오는 애들 있잖아요. 뿔 달리고, 막 브레스 같은 것도 날리고.”
“난 그런 거 못 하는데!”
“그래. 그래.”
어떻게 들었는지, 아주 자연스럽게 내 말에 태클을 거는 순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정해연을 살폈다.
손전등의 업그레이드 퀘스트.
「나를 진심으로 믿어줄 사람이 존재할 것」
아마도 그중 하나가 정해연일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몰라도, 날 믿어주는 근처 사람들에게까지 숨길 필요가 있나 싶다.
물론 내 능력에 관한 것은 아직까지 말하기 좀 그랬지만.
항상 곁에 있을 순둥이에 대한 건 별로 숨기고 싶지 않았다.
루비에게도 아직 말해주지 않았다.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 말하긴 하겠지만.
나중에 살짝 전해주자.
“……그럼 서진 씨 자식은 아니라는 거예요?”
“마음으로 품은 자식은 맞죠.”
“결혼은 하지 않았다는……?”
“큰일 날 소리 하시네. 전 아직 독신입니다.”
정해연의 굳은 얼굴이 풀어지고, 화사하게 핀 꽃처럼 미소가 담긴다.
“그때 그 알에서 나왔던 게 이 아이…… 아직 결혼은 하지 않음…….”
계속해서 중얼거리던 정해연이 이내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내게 물었다.
“그럼 혹시 저 말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정해연의 표정을 보니 무슨 의도인지 알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위험한 것 아닌가.
‘말하길 잘했네.’
계속해서 무언가를 숨기기도 미안했는데.
순둥이의 정체에 대해 들었는데도 그녀의 얼굴에 먼저 떠오른 건, 호기심이 아니라 걱정이었다.
“아뇨. 말하는 건 해연 씨가 처음이에요.”
“그렇군요…… 예? 처, 처음?”
귀에 바람이라도 들어갔나.
“그, 그렇군요. 처음. 제가 처음이라는 말씀이시죠.”
정해연이 힐끔 내 옆으로 눈길을 준다.
……뭐지? 왜 가만히 있는 루비를 보고 입꼬리를 올리는 거지?
“그러니까 이 사실은 비밀로 해주세요.”
“……둘만의 비밀이다. 이거죠.”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정해연.
“걱정하지 마세요. 저 아이…….”
“순동이요.”
“예. 순둥이는 제가 반드시 지켜드릴 테니까요. ……그런데 애 이름이 순둥이라고요?”
……죄송합니다.
“안녕. 순둥아.”
“안녕! 인간 아줌마!”
“아, 아줌마가 아니라. 언니라고 해야지.”
순둥이와 놀아주고 있는 정해연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직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책상 위에 남아 있는 차우 길드의 음료수 하나.
-몸에 좋은 것이니, 부디 마셔주셨으면 합니다.
제 딴에는 숨 쉬듯 거짓말을 한 거겠지만, 덕분에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해연 씨.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 * *
“흐하하하하!”
“야! 길드장님 말려! 말리라고!”
“이제는 길드장이 아니라, 팀장이다! 흐하하하핫!”
“도, 돈이! 돈이 타오른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한 황혼의 연구소 부지.
그곳에 있는 연구동에서 한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멸균복을 입은 한 남성이 미친 듯이 웃으며 비커 안으로 마물의 뼛가루를 투입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근처에 있던 前연금술사 길드의 연구원, 강규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4층 던전에서 나온 정예 마물의 시체.
그들로서는 평소에 구경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저, 저거면 대체 가격이 얼마야……?’
연금술사 길드가 황혼의 산하로 들어가게 된 후.
황혼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연금술사 길드 사람들을 한데 모아 팀을 만들었다.
새롭게 생긴 황혼의 연구 4팀.
그것이 前연금술사 길드의 현재였다.
언뜻 보면 길드장에서 ‘고작’ 팀장으로 직위가 격하되었으니, 불만이 있지 않겠느냐.
그런 식으로 말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원래부터 타 길드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연구원들을 보유하던 황혼이다.
연금술사 길드로서는 그동안 본 적도 없는 규모의 지원.
그곳에서는 아까워서 사용하지 못했던 재료들이 이곳에서는 발에 치이도록 널려 있었다.
길드장이고 나발이고, 前연금술사 길드장, 박명훈은 이곳이 좋아 미칠 지경이었다.
“흐하하하! 진작에 올 걸 그랬군!”
“…….”
평소에도 괴짜 같은 물건을 잔뜩 만들어내던 그다.
터무니없는 지원과 함께 그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대체 게임기 같은 건 왜 만드시는 건데?’
“자아. 이번엔 뭘 만들어 볼까…….”
“……이거 정말 쓸모 있는 거 맞습니까?”
“당연하지! 내가 만든 것 중에 쓸모없는 건 없어!”
이러다 잘리기라도 하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되었다.
그때, 연구원 중 한 명이 식은땀을 흘리며 그들에게 달려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야?”
“화, 황혼 길드장께서 찾아오셨답니다!”
‘올 게 왔구나!’
강규범이 절망 섞인 눈동자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기어코 얻은 일자리가 이렇게 빨리 사라지게 되는구나.
얼마나 골칫덩어리였으면 길드장이 직접 찾아오겠는가!
“크하하하핫!”
“팀장님! 저희 진짜 망했다고요!”
“뭐. 가보면 알게 될 일이겠지. 내 예상으론 무언가 재미난 일이 생겨날 것 같단 말이야.”
그들은 실험실 밖으로 나와 멸균복을 벗었다.
밖으로 튀어나오는 악취에 강규범이 눈을 부라렸다.
“팀장님. 일단 씻고 나오시죠.”
“응? 왜. 불렀으면 빨리 가야지. 귀중한 우리 물주님 되시잖아?”
“그러니까 씻으라는 겁니다! 최소한 이야기는 나누고 잘리던가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쯧. 별 냄새도 안 나는구만.”
삼 분만에 몸을 씻고 나온 그가 흰색 가운을 걸쳐 입고는 말했다.
“가자고.”
“하아…….”
* * *
“크하하! 이거 누구신가. 우리 위대한 물주님 아니야?”
“박명훈 팀장님. 좋아 보이시네요. 연구소에서 지내는 데 불편한 점은 없으시고요?”
“불편은 무슨! 전에 있던 그 코딱지만 한 곳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야, 천국!”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다행이에요.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내 그러도록 하지.”
예상외로 좋은 분위기에 강규범이 당황했다. 이거 혹시 잘리지 않는 건가……?
“래피드 두더지의 마석을 이용해 만든 반응속도 향상을 위한 각성자용 훈련 도구. 감명 깊게 봤습니다.”
“뭐, 단순한 애들 장난감일 뿐이지.”
“……장난감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수준이 남달랐습니다만.”
“정정하지. 어른용 장난감으로.”
마치 각성자들의 그것처럼 신비한 능력을 사용하는 정예 마물들.
박명훈은 그들의 힘이 과연 어디서 나오는 걸까, 라는 의문을 품었고.
초점을 맞춘 것이 그들의 안에 있는 마석이다.
능력을 사용하는 정예 마물들의 신체에는 언제나 마석이 들어 있었으니까.
신세대 에너지원.
물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
그 정도로만 생각했지만. 마석은 마물들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한 일종의 코어였다.
즉, 마석을 집요하게 파고든다면, 생전에 그 마물이 사용하던 능력을 조금이라도 끄집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상은 들어맞았다.
‘그놈이 만드는 장비에 어떻게 능력치 보정 효과가 나타나나 했더니…….’
정예 마물 혹은 보스급의 사체로 만들어진 장비들.
그것들에는 약간의 능력 보정 효과가 일어난다.
일전에 이서진이 샀던 장비들도 그러했다.
신속성을 올려주는 물건.
진즉에 알고 활용하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해본 적 있나?”
“아직 해본 적은 없습니다. 근래 따로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요…….”
“아, 그렇군. 연구소 안에서만 지내서인지, 아무래도 바깥의 상황엔 영 어둡단 말이지. 고생이 많아.”
박명훈이 일전에 보고 받은 사실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뭐, 안 해봤다니 오히려 다행이군. 테스트를 위해서 하나 내놨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아직 실제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더군.”
“예? 어떤 점이요?”
“기계가 작동을 멈췄어.”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발명품이건만, 너무도 쉽게 고장 나버렸다.
마지막으로 그 게임기를 사용한 것이 젊은 각성자 부부로 보이는 남녀라고 한다.
둘 다 능력을 쓰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고.
그 둘이 할 때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다음.
그들의 귀여운 딸이 부모의 도움을 받아 두더지 게임을 했을 때.
두더지가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오류가 발생하고.
그 이후로 기계가 고장 났다고 한다.
‘꽤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래피드 두더지의 능력을 재현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크하하! 뭐, 별수 없지. 마석의 정화가 완벽하지 않은 이상 부작용은 따라올 수밖에 없으니까!”
물약 또한 그렇다.
괜히 각 길드에서 물약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 애를 쓰는 게 아니다.
순도.
마석의 정화율이 높을수록 효과는 더욱 증가하고, 부작용은 줄어든다.
‘그래서 더욱 만나보고 싶은 거지.’
마석의 정화율 100%.
순도 100%의 물약을 만들어내고, 황혼에 공급하고 있는 위대한 연금술사.
그뿐만 아니라, 신체 강화 효과가 있는 물약까지!
그를 넘어서기 위해 박명훈은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만한 능력이 되는 자가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 이해는 한다만.’
모든 국가에서 그를 탐내고, 접선하려 할 것이다.
만약에 포섭이 안 된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모르고.
‘아쉬워.’
실제로 박명훈도 중국의 한 단체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온 적이 있었다.
무한정에 달하는 인력 그리고 연구비.
어떠한 재료라도 공수해 올 수 있다는 제안을 약속받았다.
그 재료란 것이 ‘인간’일지라도.
그들이 위험해 보였기에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접촉해 온 후 길드를 나간 연금술사들이 몇 있었다.
박명훈 정도 되는 연금술사가 드물다뿐이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들은 물러났다.
물론 최저한의 연구비로 그만한 성과를 올리고 있단 것을 알았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재정적 상황으로 인해 꽃피우지 못하던 능력.
박명훈은 이곳 황혼에서 제 능력을 힘껏 발휘하고 있었다.
“이거 내 자랑만 했군. 날 만나러 온 목적이 있는 것 아닌가?”
“예. 이것에 대한 조사를 부탁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응? 자네는…….”
그제야 박명훈은 정해연의 옆에 있는 사내를 보았다.
연회에서도 보았지만, 딱히 인상이 남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박명훈의 관심은 그가 내민 물건으로 향했다.
“그레이트 그레이프. 한창 유행하는 음료수군. 우리 애들도 마시는 걸 본 적이 있어. 혹시 황혼에서 따로 제품이라도 내려는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 저희가 부탁드리고자 하는 건.”
탐스러운 포도가 캔의 겉면에 그려져 있다.
마약 같은 음료수.
엄청난 중독성으로 대한민국을 사로잡은 액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무언가’를 파악하고자 이곳에 왔다.
“이 음료수 안에 마석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 *
이야기를 들은 박명훈이 연구실 안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혹시 작업을 완료하는 데 얼마나 걸리실까요?”
최대한 빠를수록 좋지만, 아무래도 며칠은 걸리지 않을까 싶었다.
“며칠은 무슨. 잠깐만 있어 봐.”
박명훈은 그레이트 그레이프의 음료수 캔을 까고는 유리 비커에 쏟아 넣었다.
비커를 두 손으로 감싸더니, 이내 눈을 감고 집중한다.
‘뭘 하는 거지?’
박명훈의 이마에 살짝 땀이 맺힌다.
몇 분 뒤, 천천히 눈을 뜬 그가 크게 소리쳤다.
“이런 미친 새끼들!”
박명훈은 연신 걸걸하게 욕을 뱉으며 험담을 내뱉기 시작했다.
“개 같은 새끼들이 사람 마시는 거에다가 마기를 처담아?”
“방금 한 게 어떤 것이길래 그러시는 거예요?”
“……일종의 정화 과정이야. 주로 물약을 만들기 전, 마석에 이 작업을 하지. 내면에 있는 마나를 통해 마석 안에 있는 마기를 천천히 희석시키는 거야.”
여차하면 역으로 몸에 마기가 침입할 수도 있기 때문에 꽤나 위험한 작업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위험한 마기를 음료수에 담아서 팔았다.
“하. 이런 걸 좋다고 마셔댔으니, 사람들이 병에 안 걸리고 배기겠나?”
그렇게 위험한 것이라면 음료수가 시중에 풀리기 전에 발견되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기는 평범한 방법으로 색출이 불가능해. 각성자들이 마나를 통해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 빼고는.”
거기다가 들키지 않도록 따로 수를 써놨을 것이다.
한두 개도 아니고, 전국에 풀리는 물량만 해도 어마어마했으니까.
“어떤 놈이 음료수에 마기가 섞여 있다고 의심하겠나? 거기다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발견도 안 될 정도로 미미한 양이야.”
마치 1%의 과즙을 섞듯이 극소량의 마기를 투입해, 사람들의 몸에 아주 천천히 쌓이게 한다.
이 음료수가 나온 지도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쌓이고 쌓인 게 이제 와서 터진 것이겠지.
현재도 사람들은 이 음료수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몸에 마물에게서 흐르는 마기가 쌓여 간다는 사실도 모른 채.
“……당장 이 사실을 알려서 그레이트 그레이프가 퍼지는 걸 막아야 해요.”
그러는 게 맞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일어날 후폭풍이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제 평범한 물을 마실 때도 공포에 떨게 될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그놈이 가져온다던 물약도 없던 일이 될 테고.’
물약은 철저한 검사가 진행되기에 별다른 수를 쓰진 않을 것이다.
의도는 명백했다.
차우 길드의 이름으로 물약을 풀어, 이 상황에 이미지 메이킹을 제대로 하겠다는 뜻이겠지.
사실을 알린다면,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면, 마석병 환자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뭔가 익숙해.’
음료수에 마기를 담는다는 발상.
평상시에 내가 하던 것과 비슷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런 위험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극소량의 마기를 투입한 음료수.
그렇다면 그 반대도 가능한 것 아닌가?
“저희도 만듭시다.”
“네?”
난데없는 소리에 두 사람이 나를 쳐다봤다.
“만듭시다. 물약이 들어간 음료수.”
“……예?”
“뭐?”
얼마나 맛있는 걸 만들어서 사람들을 현혹시켰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음료수에 대한 제조라면 자신 있었다.
이서진 특제 음료수.
그것을 한국에 선보일 때가 왔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55화
19. 모델은 누가 합니까?(1)
이서진의 의견을 들은 둘은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아니, 안 될 것 같지는 않은데?”
박명훈이 골똘히 생각을 하고는 딱히 무리도 아닌 것 같다며 말했다.
“그야 마기를 넣는 것 자체는 아주 쉬운 일이지만, 그 반대는 사실상 불가능했거든.”
실제로 이전에도 여러 번 물약을 희석한다면 일반 가정에서도 쓸 수 있을 의학 용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몇 번을 희석한다고 해도, 그 효능은 어지간한 것들 보다는 뛰어날 테니까.
“하지만 완벽하게 정화되지 않은 물약으로는 불가능했지.”
엄연히 물약일지라도 일정량의 마기는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용 후, 회복 시간 동안에 일시적인 신체 능력 저하가 일어나는 것이고.
물론 치유 효과가 더 크기에 일반인이 먹더라도 그렇게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각성자들에 비해 그 효과가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애초에 그런 걸 조금 섞는다고 효과가 있을 수가 없지.”
그렇기에 모두 결론 내렸다. 물약을 희석시켜 대량 공급한다는 것은 현재로써는 불가능하다고.
정확히는 누군가의 정수기에 특별한 힘이 깃들기 전까지는 그랬다.
“……혹시 물약 하나 가지고 있는 것 있나?”
당연히 황혼의 물약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었다.“여기 있어요.”
이서진이 품에서 물약 하나를 꺼냈다.
박명훈은 그것을 받자마자 그레이트 그레이프가 들어 있는 비커 속에 극소량을 떨어뜨렸다.
고작해야 한두 방울.
치직-!
비커 안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잠시 후 내용물을 확인한 박명훈이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마기를 정화하는 물약이라. 터무니없군.”
그레이트 그레이프에서 검출되던 마기가 사라졌다.
물약이 평범한 음료수와 별다른 이상 없이 뒤섞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안에서는 아주 미미하지만, 마기 대신 그와 반대되는 것이 느껴졌다.
물약에서 느낄 수 있던 감각.
“……이거 정말로 될지도 모르겠어.”
* * *
방향은 정해졌다.
이제 할 일은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뿐이다.
[차우 길드장. 꺼림칙한 사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건 정도를 넘어섰군.]
안환재에게 또한 이 사실을 전해뒀다.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믿을 만한 우군이었으니까.
[흐하핫! 진짜로 그런 방법을 쓸 생각인가? 신성 길드장. 자네는 항상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는군.]
안환재 또한 우리가 하려는 일에 동의했다. 그뿐만 아니라, 적잖은 도움도 준다고 했고.
[물약…… 아니, 그 ‘음료수’의 대량 생산을 위한 생산설비들은 내가 따로 알아봐 두도록 하지.]
역시 수호 길드장.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 있었다.
“자, 이제…….”
우리가 할 일이야 뻔했다.
“마십시다.”
“아아…… 또…… 말인가요.”
섞고 마시고.
섞고 마시고.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마신다.
자신감 가득한 손놀림으로 정해연에게 방금 만든 신선한 음료수 하나를 내밀었다.
“어때요? 이번엔 진짜로 맛있죠?”
입술을 간신히 적실 정도로 음료수를 홀짝인 정해연이 나를 찌릿-노려보았다.
마치 루비처럼 단호한 눈빛이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 루비는 왜 저렇게 먼 곳에 떨어져 있지?
저런 곳에 있을 애가 아닌데?
“……서진 씨. 제가 정말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요.”
내가 제조한 음료수를 건넬 때마다 웃음기가 점점 적어지던 정해연이 이제 참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서진 씨는 다른 쪽을 도와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예?”
전혀 예상치 못한 제의에 나는 충격에 빠졌다.
다급하게 방금 만들어진 이서진 특제 음료수 37호를 맛보았다.
“음……!”
이번에 섞은 것은 자몽이었다. 자몽의 시큼함과 과하지 않은 달콤함.
그리고 물약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딸기향이 섞여서 그 맛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껏 만들었던 1, 2, 3, 4…… 아무튼 36호까지와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는 환상적인 맛이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이건 못 먹는 거!”
“잘했어요. 순둥아. 서진 씨…… 아빠가 이런 걸 먹이려 하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그래요.”
순둥이가 내가 만든 것을 보며 연신지지- 를 외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정해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런 식으로 쓰라고 알려준 말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걸 배워버린 거 같다.
결국, 음료수 제조 과정에 관한 건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했다.
결국.
……내가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흐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단 말이지.”
박명훈이 만들어진 음료수들을 보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음료수에 들어가는 것은 고작해야 한두 방울.
만약 정말로 음료수를 만들었는데 과즙이 저 정도만 들어간다면, 사기죄로 잡혀갈 수도 있는 상황!
당연히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너무 많은 물약을 투입하게 되면 주객전도다.
이 음료수의 가격대는 일반인도 부담 없이 살 수 있을 정도로 책정되어야 하니까.
“분명 그랬어야 했는데 말이야…….”
1층 던전에서 나온 작은 마석 하나.
그것을 앞서 만들었던 특제 음료수에 넣어놓은 지 며칠.
“……진짜로 효과가 있잖아?”
음료의 색은 기존과 달리 점점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걸 보며 혹시 마기에 집어삼켜진 것 아니냐, 그런 말을 했지만.
나만은 저것이 무슨 현상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주 착실하게 정화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약간이지만, 마석의 크기가 처음에 비해 작아져 있다.
내가 중급 물약을 먹였을 때 보였던 마석 소멸 현상이었다.
“역시 평범한 물약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물건이야.”
감탄사를 뱉던 박명훈의 혼잣말이 계속된다.
“……만약에 이미 제조된 물약이 아니라, 정화된 마석 그 자체를 받을 수만 있다면? 기존에는 없었던 신비로운 물건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지.”
박명훈의 눈이 탐구욕으로 가득 찼다.
그는 이내 집요하게 정해연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황혼 길드장! 원하는 것이 생겼네!”
“예, 예?”
“그 연금술사에게 말해서 물약 말고, 정화된 마석 자체를 공급받을 수는 없겠나? 오히려 그쪽에선 그것이 더욱 편할 것인데!”
“그, 그게…….”
정해연은 꾀죄죄한 박명훈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며, 난처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았다.
‘그렇게 보아도…….’
정수기에서 나오는 건 마석이 아니라, 이미 제조가 완료된 물약이다.
당연히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물약이 나오는지 알 방법은 딱히 없다.
……뚜껑을 까봐도 그냥 정수기 내부일 뿐이고.
‘또 하고 계시네.’
박명훈은 언제나 시간이 날 때면 마석의 정화를 시도하고는 했다.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툴툴대는 게 대부분이지만.
그의 손에서 분출되는 맑은 빛깔의 마나.
물약의 제조 과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저것만은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호기심에 자꾸 보게 되었다.
내가 흥미를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자, 박명훈의 근처에 있던 강규범이 웃으며 말했다.
“관심 있으세요?”
“예?”
“하하. 아무래도 마석을 정화하는 게 수작업인지라 인력은 얼마가 있어도 부족해서요. 혹시 관심 있으시면 일자리는 언제나 열려 있단 것만 알아주세요…….”
“내 팀에 어중이떠중이들을 끼워 넣을 생각은 없어. 너도 마찬가지야. 정화율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당장에 내쫓을 거다.”
“길드장님!”
“에잉. 이제는 팀장님이라니까. 흠…….”
박명훈은 날 잠깐 바라보더니 이내 씨익 웃었다.
그의 누런 이가 방금 보았던 마나보다도 더 밝게 빛난다.
“우리 물주님과 사이가 아주 좋은 것 같던데. 혹시 자네도 뭔가 있는 것 아닌가?”
“……아뇨. 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뭐, 특별한 건 없어 보이지만. 적어도 저 귀여운 애송이의 부모가 아닌가.”
쟤 정체가 용이란 걸 알면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쟈쟌~”
“오오!”
“비행기다! 비행기를 만들었어!”
“천재인 건가!”
순둥이는 어느새 이 연구소 내의 마스코트가 되어 있었다.
혹시 민폐가 되지는 않을까, 신성 길드에 따로 맡겨놔야 하나 생각했었는데 예상외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순둥이에게 잘 대해줬다.
“순둥 씨. 제가 잘할 수 있게 응원 한번 가능하실까요?”
“응! 기특해, 기특해!”
……아니. 저건 좀 이상한데?
순둥이가 그들을 따르는 게 아니라, 저들이 순둥이를 따르는 모양새다.
‘그러고 보니…….’
근래 연구원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이 있다.
“순둥아, 여기야. 여기.”
“이 새……!”
“야. 애 앞에서 욕하지 마!”
“이 나쁜 인간아! 새치기하지 마! 이번엔 나한테 오실 차례야!”
“하핳! 나쁜 인간~ 나쁜 인간~”
순둥이가 근처에 있으면 마나를 다루는 작업의 효율이 눈에 띄게 좋아진다느니 그런 소리가 나오는 모양이다.
뭐, 진심으로 하는 얘기는 아니겠지.
다들 순둥이와 어울려주고 있는 것일 거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박명훈이 말했다.
“궁금하면 한번 해봐야지.”
“그래도 됩니까? 위험하다면서요.”
“내가 위험한가? 자네가 위험하지.”
“…….”
“크하핫! 농담일세. 여기에 널리고 널린 게 물약인데 걱정할 게 어디 있나! 자네 영혼이 빠져나가도 다시 넣을 수 있을 정도인데!”
그렇긴 하다.
애초에 내가 따로 챙기고 다니는 물약도 있었고.
박명훈이 알려주겠다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멸균복을 뚫고 나올 기세인 냄새를 이 악물고 무시하며 눈앞에 집중했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어. 자, 여기 마석. 이걸 손에 들고…… 집중해.”
손을 올리고, 집중한다.
“자신의 몸에 있는 마나를 손으로 모은다고 해야 하나? 이미지를 연상하면 편해. 보통 심장에 마나가 모여 있으니, 그곳에서부터 온다고 생각하자고.”
……심장에서부터 마나를 뽑아낸다?
“음…….”
“뭔가 꿈틀거리는 감각이 안 느껴지나?”
“아니, 느껴지긴 하는데요.”
간질간질한 기분이 느껴지긴 한다.
그런데 느껴지는 곳이 심장이 아니라, 그보다 살짝 옆이었다.
내 몸에 눌러앉은 불청객이나 같은 놈이다.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이제는 아주 친구나 다름없다.
마치 하마가 된 듯이 매일 같이 물약을 먹고 있는데도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프거나 한 건 아닌데…….
내 몸 안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니, 심히 거슬렸다.
……물론 아이기스의 방패라던가.
신성 길드에서 보았던 그 요상한 게 몸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아니, 나 진짜 괜찮은 거 맞나?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는 법이지. 그럼 거기에 집중하게.”
이곳에 집중한다.
심장 옆에 붙어 있는 마석.
그것을 상상했다.
꿈틀!
박명훈이 말한 게 이 느낌인가?
“뭐, 처음에는 느끼기 힘들 테니까. 일단은 그것부터 집중하자…… 응?”
이것을 내 손바닥으로 인도한다.
마치 정수기에서 물이 나오는 것처럼 서서히 내 손으로 흐르는 마나를 떠올렸다.
“……꽤 재능 있는데? 야 규범아. 너보다 훨씬 나은 거 같은데. 그냥 너랑 얘랑 바꾸면 안 되냐?”
“팀장님!”
“아빠가 재밌는 거 한다!”
마치 내 의지에 반응하듯이, 마나가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성공한다면 어느 정도 될 것 같습니까?”
“글쎄. 솔직히 난 아직도 저 정화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건지 잘 모르겠거든.”
“팀장님도 말입니까?”
“마나랑 마기는 정반대의 성질이야. 물과 기름 같은 거지. 저걸 어떻게 어우러지게 하느냐가 문젠데…….”
“팀장님은 어떻게 하시는 데요?”
“이 새끼가 연습은 안 하고 거저먹으려고. ……뭐, 감이지. 감.”
“……결국, 모르겠단 거잖습니까.”
“쉿. 조용히 해. 애 집중하고 있으니까.”
“……자기 불리할 때만.”
근처에서 들리던 소음이 줄어든다.
마치 검을 들고 움직임에 집중하던 때와 비슷한 감각이다.
눈앞에 보이는 마석에게서 신기한 힘이 느껴진다.
이곳저곳으로 튀어나온 가시 같은 날카로움.
‘이게 마기인가…….’
이곳에 마나를 집어넣는다.
내 손에 무언가가 둘러졌다.
박명훈이 보여줬던 것과 비슷했으나, 그보다 더욱 밝게 빛난다.
“성자님. 이 빛은…….”
“호오.”
그러니까 이 마기란 것이 말을 더럽게 안 듣는다 이거지.
억지로 마나를 통해 제압하고, 희석시키면 된다고 했다.
‘응……?’
그런데 이 마기란 것들이 조금 이상했다. 내 마나가 마석 안으로 들어갔는데도 녀석들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는다.
마치 원래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내 몸에 있던 마나와 마석 속에 있는 마기가 고루 섞인다.
“…….”
“…….”
주변에서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내가 너무 집중해서 그런 걸까.
“다…… 됐나?”
그리고 이윽고 내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흐를 때가 되어서야 작업이 끝이 났다.
어두운색을 지니고 있던 마석은 마치 유리를 보듯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이거면 어느 정도 정화된 거죠?”
처음 시도했음에도, 성공한 게 신기한 것이다.
그렇게 어렵다고 느끼지는 않았으니, 아마도 실패작이겠지.
하지만 내 질문에 박명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루비가 나를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익숙한 눈빛이다.
‘……저 양반 눈빛이 왜 저래?’
하지만 이상한 것이 하나 더.
루비의 옆에 있는 박명훈이 루비와 비슷할 정도의 반짝거림으로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강규범이 입을 벌리고 있었고.
곧이어 박명훈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자네였군.”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56화
19. 모델은 누가 합니까?(2)
“정말 안 할 건가?”
“예.”
“정말, 정말로? 내가 이렇게 무릎 꿇고 빈다 해도 정말 그럴 건가?”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주변에서 일을 하다말고 이쪽을 바라본다.
자신의 상사가 외부인에게 무릎을 꿇는 것에 놀라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내게 동정 가득한 눈빛을 보낸다.
고작 며칠간 봤는데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 진짜 괴짜다.
“아, 좀! 왜 그러세요! 나이도 지긋하신 분이!”
“크하핫! 왜 이러긴, 내가 목표로 하던 사람을 만나게 됐는데, 나이가 뭐가 중요한가! 자존심 같은 걸 챙겨서야 발명은 할 수 없어!”
……어우.
뭣도 모르고 마석을 정화하고 며칠.
그 후부터 박명훈은 나를 끈덕지게 따라다녔다.
얼마나 끈질겼는지, 보다 못한 루비가 철퇴를 만지작거릴 정도였다.
“……전 팀장님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암. 그렇고말고. 그런 존재가 아니지. 자네는 그런 대단한 연금술사도 아니고, 평범한 20대 청년이란 거잖아. 맞지?”
“예. 그렇…….”
“평범한 20대 청년이 처음 한 정화에서 98%의 정화율을 뽑아냈다 이거지. 암. 평범하고말고.”
“……그 찾으시던 연금술사는 정화율 100%라면서요?”
“누구나 실수는 있을 수 있는 법이지. 거기다 이곳은 자네의 공방이 아니지 않은가. 환경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대단하다고 볼 수 있지. 아니, 자네란다. 그 위대한 연금술사 말일세.”
실수했다는 듯, 살짝 윙크한다.
수염 그득한 아저씨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내게 구애의 포즈를 취한다.
어우…….
저 얼굴로 저런 모습을 보이니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았다.
오히려 며칠 동안 참은 게 대단한 일이리라.
해방된 정해연의 미소 가득한 얼굴을 떠올리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뭘 원하시는데요?”
“그렇지이!”
그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와아!”
뭣도 모르고 따라 하는 순둥이.
순둥아 미안하지만, 기뻐할 때가 아니야.
네 아빠가 이러다가 정화 노예가 되어 버릴 거 같아.
“간단하네. 마석의 정화를 하고, 그것을 내게 제공해 주기만 하면 된다네.”
“……마석의 정화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하! 두말하면 잔소리지. 지금까지는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거라고! 자네도 연금술사니까 알 것 아닌가!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구만. 하하하!”
조용한 실험실 내부에서 그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입에서는 말하는 내내 침을 튀기고, 얼굴을 붉히는 걸 보니 정말로 발명이 좋긴 한가 보다.
‘그다지 상관없으려나?’
뭐. 이상한 걸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내 눈에는 엉뚱해 보이는 것도 많지만 정해연이 말하기로는 하나같이 대단한 물건이라 하니까…….
대단한 물건.
그러고 보니 내가 이전에 황혼의 백화점에서 산 물건도 연금술사들의 물건이라고 했었나?
그때 봤던 물건들 중에 이 사람이 만든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발명품 중에 뭔가를 팔려고 내놓지 않았느냐고.
“흠…… 그렇게 내놓은 물건이 하나, 둘이 아니라서 말이지. 아무래도 그땐 돈이 부족했으니까.”
“혹시 이상한 구슬 같은 건 모르십니까? 이 정도 크기인데요.”
“구슬, 구슬이라…… 아! 그래. 그런 실패작이 하나 있었던 것 같기도 해. 분명히 어떤 보스의 마석으로 만든 거였는데…… 잡은 놈 말을 들어보니 무슨 방패 같은 걸 소환한다고 했었나?”
……방패?
이런 미친.
“그런데 정작 작동 자체가 안 해서 말이지. 그래서 그냥 호구라도 하나 잡으려고 냅다 팔아버렸지. 다행히도 팔렸더라고. 흐흐. 1억을 주고 그런 걸 살 사람이 있다니 말이야.”
……그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 접니다.
아니, 아이기스의 방패를 만든 사람이 박명훈이었다고?
원래 명칭은 불완전한 아이기스의 방패다.
‘정당한 주인이 나타날 경우 사용할 수 있다고 했었지…….’
작동이 안 한 이유는 그것 때문일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보스급 마물의 능력.
박명훈은 그것을 불안정하게나마 아티팩트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 사람.’
“흐흐. 무얼 만들어 볼까요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신명 나게 이리저리 춤을 춘다.
겉으로는 이렇게 보이지만, 어쩌면 이 사람이 진짜 현존하는 연금술사 중 가장 위대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남들에게는 단순한 에너지원으로 보이는 마석을 가지고 신비로운 아티팩트를 만든다.
남들에게는 단순한 물건들을 가지고 나만의 특별한 아티팩트를 만든다.
‘나랑 비슷해.’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사람은 자신의 손으로 모든 걸 만들어낸단 것이다.
이러면 말이 달라진다.
아이기스의 방패 같은 것을 만들었다면, 이야기가 바뀌지.
노예고 뭐고, 뭐든지 할 수 있다.
만드는 물건들을 내가 사용할 수 있냐는 조건을 달자, 그가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럼. 다 가져가게나! 나는 발명만 하면 상관없어!”
그러면서도 그는 내게 살짝 물었다.
“아니면, 혹시 나랑 공동으로 작업 할 생각은 없나? 세상에 큰바람을 불러일으키자고!”
고개를 젓자, 그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다.
죄송하지만, 제가 만들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종이비행기 정도입니다.
* * *
드디어 물약을 첨가한 음료수의 최종본이 만들어졌다.
아무래도 서두르다 보니 퀄리티가 낮아지진 않을까 했는데, 역시 전문가들은 다른 것인가.
내가 만들었던 음료수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결과물이 나왔다.
이 정도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걸로 그레이트 그레이프를 이겨야 한다는 거죠.”
현재 차우 길드는 한국 내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길드가 되어 있었다.
타 길드 및 기업들도 마석병 사태에 막대한 기부를 했지만.
박재한.
그 거짓말쟁이가 한 것은 무려 대량의 물약을 무상으로 푼 것이니까.
순도 70%의 물약.
현재 최고 순도 74%를 자랑하고 있는 황혼의 물약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지만.
저런 식으로 대량으로 풀 수 있는 수준의 물건도 아니었다.
몸 안에 있는 마석을 없애는 것까진 불가능하겠지만, 진행 자체를 거의 멈추는 수준까지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봤자 시간 벌이에 불과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다.
결국은 마석병을 제거할 수 있는 치료제가 필요했다.
“맛있네요.”
그리고 이 음료수가 그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걱정되네요.”
물약을 섞은 음료수. 최대한 저렴하게 하려고 했지만, 결국 기존에 존재하는 음료수들 중 가장 비쌀 수밖에 없다.
다만, 이것이 ‘물약’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터무니없이 싼 가격이다.
고작해야 1% 들어갔다지만, 물약은 물약이다.
정해연은 시장에서 판매될 물약들의 가격에 혼란이 올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물약에 관한 것이라면 최고의 길드니까.
“지금 상황에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단 건 알지만요…… 어쩔 수 없는 거겠죠.”
물약을 구매하는 고객들은 대부분 던전에 들어가는 각성자들이다.
사람들이 물약의 가격에 대해 뭐라고 해도 그렇게 큰 타격은 없을 테지만, 아무래도 좀 그렇겠지.
“그것에 관해선 괜찮은 생각이 있어요.”
“괜찮은 생각이요?”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안에 소량이지만, 물약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음료수 안에는 물약이 들어간 게 아닌 겁니다.”
“예? 그렇지만…….”
“신성 길드에서 특별하게 제작한 ‘성수’가 들어간 거예요.”
“으음. 그거라면…….”
물약과는 개별적으로, 신성 길드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하는 성수.
기존에 있는 물약들로는 마석병의 치료가 불가능했다.
고작 물약이 들어간 음료수를 마신다고 어떻게 마석이 사라지겠는가!
그런 의견을 낼 사람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기존에 등장한 적이 없던 성수라면 다르다.
그래서 성수는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마석을 없앨 수 있는 것이냐 한다면…….
‘……뭐, 말 안 하면 되겠지.’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것을 마시고 발생하는 결과다.
의심을 품던 사람들도 효과만 확실하다면 이 성수란 것을 믿게 될 것이다.
내 물약과 비교해 본다면 그 정체에 대해 알 수 있을 테지만, 애초에 그 물약들은 황혼을 통해 각성자들에게만 판매되고 있다.
그리고 각성자들에게 마석병은 존재하지 않다.
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제는 이 음료수를 아~주 많이 팔기만 하면 된다.
“역시 저희도 그런 걸 해야 할까요?”
“확실히, 홍보를 하긴 해야겠죠.”
신성의 이름을 걸긴 하겠지만, 다짜고짜 마석병을 치료하는 음료수라고 하면 아무도 안 믿어줄 것이다.
그것을 믿을 수 있게 만들어 줄 존재가 필요했다.
쉽게 말하자면 그냥 이 음료수를 대표 할 모델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모델은 중요하다.
그 사람의 이미지에 따라서 홍보하는 물건이 달라 보이기도 하니까.
“좋은 사람 없을까요?”
“좋은 사람, 모델. 음…….”
정해연이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힐끔 내 얼굴을 쳐다본다.
시선은 점차 내 목, 몸, 다리로 이어진다.
……갑자기 왜 저런대?
“……하나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 것 같긴 해요.”
“정말요?”
역시 정해연이다.
나 같은 거랑은 인맥의 수 자체가 다르겠지.
“……저 그렇게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이분도 알게 된 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고요.”
“괜찮은 거예요?”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거라면 조금 곤란하다. 제대로 검증이 된 사람이 아니라면, 혹시나 나중에 무언가 밝혀져서 우리가 홍보하는 음료수에 큰 타격이 갈 수도 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럴 사람은 아니니까요.”
확신을 담은 어조.
정해연이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건 처음 본다.
“친한 사람이에요?”
내 질문에 정해연이 힐끔 내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친하죠? 예. 친해요. 응. 그분이 친하다고 말해줬거든요.”
……이거 좀 질투 나는데.
정해연은 나랑 가장 친할 줄 알았는데.
뭐, 나는 정해연이랑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아니, 저 사람도 별로 안 됐다 했지.
“외모는 어떻습니까?”
당연히 이 음료수를 대표 할 모델을 찾는 거다.
외모는 필수적인 사항이다.
내 질문에 정해연의 뺨에 홍조가 깃든다.
그녀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소곤거렸다.
“……제 입으로 말해야 해요?”
“예? 그럼 해연 씨 말고는 모르는데, 해연 씨가 말해야죠.”
“으으…….”
왜 저렇게 부끄러워한대.
“……아, 몰라. 괜히 장난쳤어.”
이상한 소리를 하던 정해연이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 말했다.
“예. 예. 잘생겼어요. 원래는 안 그랬는데, 볼수록 잘생겨진다고 해야 하나. 아, 몰라. 몰라. 아무튼, 그래요.”
잘생겼다.
남자인가?
“흠. 그렇다 이 말이죠. 성격은 어때요? 욕도 먹을 수 있으니, 웬만하면 좋았으면 하는데.”
“……성격도 좋고. 같이 있으면 편하고 그러죠.”
세상에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고?
오히려 우리의 모델을 해주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다.
대체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 걸까.
“……서진 씨도 아는 사람인데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성격도 좋고, 외모도 좋으며 믿음직한 사람.
머릿속에서 그동안 지나쳐온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거르고 거르기를 몇 번.
혹시 안환재……?
아니야.
그렇다면…….
“소성환은 절대 아니에요.”
“생각도 안 했습니다.”
음…….
내가 고민하고 있자, 정해연이 어깨를 들썩인다.
누가 보더라도 웃음을 참는 모양새다.
“왜 그러세요?”
“아니, 그게 조금 웃겨서요. 죄송해요, 서진 씨. 괜히 장난쳐서.”
“장난?”
“그러니까, 그 모델이 누구냐면요.”
“예. 누구냐면?”
“여기 있어요.”
“……여기 있다고?”
고개를 돌렸지만, 이곳에는 정해연과 나밖에 없었다.
……아니, 잠깐만.
덩달아 내 얼굴까지 붉어지며, 손발이 오그라든다.
부끄럼이 가득한 눈빛으로 정해연을 찌릿- 쳐다보았다.
“눈치채셨어요?”
“아니, 그럼 지금까지 말한 게 정말로……?”
“헤헤.”
정해연이 배시시 웃으면서 다시 한번 나를 향해 손짓했다.
“잘 부탁드려요. 모델분?”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57화
20. 너 말고, 네 옆에(1)
[당신의 하루에 산뜻한 포도 하나 어떠세요? 그레이트 그레이프!]
새로운 광고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로 향하는 길.
맹렬한 인기를 자랑하고 있는 차우 길드의 그레이트 그레이프.
그 음료수의 전속 모델인 신미란은 멍하니 창밖을 둘러보았다.
여기고, 저기고. 자신의 얼굴이 붙어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성공했네. 신미란.’
신미란.
무명의 삼류 배우였던 그녀는 목숨을 끊기 전날, 우연히 각성을 하게 되었다.
막상 각성을 했다고 해도, 던전을 들어가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해온 것은 일평생 누군가의 관심을 먹고 사는 것뿐이었으니까.
각성자이면서도, 연예인이었던 게 먹히던 거였을까.
조금이지만, 그녀는 이전에는 겪어본 적 없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것의 정점을 찍은 것이 차우 길드의 스카우트였다.
-저희 그레이트 그레이프의 전속 모델이 되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왜 자신에게?
그런 생각을 할 이유도.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음료수.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자신과 매우 어울린다 생각했으니까.
“이야. 신미란이. 한국에서 온통 네 이야기뿐이다. 흐흐. 출세했네, 출세했어.”
“…….”
매니저의 신명 나는 말에 신미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행복했다.
정확히는 자신이 광고하는 음료수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우연히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혹시나 하고 말하는데, 입단속은 잘하고 있지?”
“……예.”
“그래. 그거 못 하면 안 되지. 네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건데.”
“저, 매니저님…….”
“어, 왜.”
“……저 이거 그만하면 안 될까요? 그동안 받은 돈도 전부 돌려드릴게요…….”
대한민국을 좀먹고 있는 마석병.
그 원인이 그레이트 그레이프로 인해 일어나고 있단 걸 알게 되고 난 후로 그녀는 미칠 것만 같았다.
웃는 얼굴로 그 음료수를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마음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바라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좀 더, 다른 사람에게 미소를 줄 수 있는 그런…….
“야, 미쳤냐?”
“……!”
냉랭한 목소리에 그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어디 듣보잡 같은 놈 주워다가 키워 놓으니까, 이제 아주 살 만하다 이거냐?”
“…….”
“다시는 그딴 생각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지 않으면.”
적막이 흐르는 차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당신의 미소를 위해! 그레이트 그레이프!]
‘이럴 거라면 차라리 그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신미란은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막았다.
보지 않는다.
듣지 않는다.
자신이 할 것은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 * *
“……이거 괜찮은 거 맞나?”
“성자님. 정말 멋지십니다.”
“아빠가 얼굴에 낙서했어! 나도 낙서하고 싶어!”
응. 낙서 아니야.
마치 로봇처럼 언제나 좋다는 의견만 내는 루비와 순둥이의 말을 흘려듣고 정해연을 보았다.
“괜찮아요. 진짜 멋지다니까요?”
“하긴. 갈수록 잘생겨진다고 했었죠?”
“……그건 좀 잊어주시고요! 아우, 내가 왜 그랬나 몰라…….”
그때 일이 떠올랐는지, 정해연이 붉어진 얼굴에 손부채를 한다.
잊기는 무슨.
그렇게 사람 손을 오징어로 만들어놨으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해줘야지.
‘……난데없이 모델이라.’
장난인 줄 알았으나, 정해연은 진심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리가 있는 말이라 거절하기도 그랬다.
신성 길드에서 내는 마석병을 치료하는 음료수.
그동안 정체를 드러내지 않던 신성의 길드장.
원래는 루비의 이야기였지만, 이제는 내 얘기가 되었지…….
그리고 신성 길드장 본인이 홍보를 할 경우 일어날 긍정적인 효과들.
아무리 생각해도, 나만큼 적합한 사람이 없기는 했다.
그래도 얼굴에 이것저것 칠하고 나니까, 내가 봐도 봐줄 만하긴 했다.
‘이참에 본격적으로 연예계 쪽으로 간다든가?’
거울을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자, 정해연이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인다.
이런 말, 저런 말로 날 설득했지만, 결국에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라는 게 크다고 생각하는 건 내 착각인 걸까.
“……그만 갑시다.”
* * *
역시 대형 길드라고 해야 하나, 광고 촬영이란 게 이런 식으로 쉽게 진행되는 걸 줄은 몰랐다.
스튜디오에 오고 나니깐, 확실하게 체감이 간다.
텔레비전으로만 보던 곳에 내가 와 있구나.
스튜디오에선 이미 다른 모델이 광고를 찍고 있었다.
요 며칠간, 노려보던 포도 주스를 들고 상쾌한 웃음을 짓고 있는 여성.
‘저게 바로 그레이트 그레이프의 모델인가…….’
상당한 외모의 소유자다.
‘아무래도 급하게 잡느라, 날이 겹칠 수밖에 없었어요. 오히려 좋은 기회에요. 열심히 보고, 열심히 따라 하세요.’
경험이 없었기에, 베테랑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따라 하는 게 도움이 된다.
허어…… 저런 자세까지 취한다고?
이, 이렇게…… 인가?
내가 구석에서 무대 위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자, 내게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혹시 오늘 오시기로 한……?”
“아, 예. 맞습니다.”
“매니저분이시군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는 광고를 맡게 될 감독, 최상진이라고 합니다.”
“이서진입니다. ……그리고 매니저가 아니라 본인입니다.”
“예?”
최상진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다.
수녀, 루비에르트.
오늘은 일일 매니저, 이루비가 된 그녀가 나를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성자님?’
어쩐지 그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뭐 착각할 수도 있지.
“와! 포도다, 포도!”
“순둥아. 조용히 있어야지.”
“응!”
순둥이가 제 입을 앙증맞은 두 손으로 막고는 방실거렸다.
내가 텔레비전에 나온다고 말하자, 자신도 찍는 걸 보고 싶다고 말하는 탓에 데리고 오게 되었다.
순둥이와 루비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최상진이 이내 나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이거, 황혼의 길드장님에게 들었을 때는 믿지 못했는데, 역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던 이유가 있으셨군요. 겉보기로도 빛이 나십니다. 과연…….”
아니, 아까 전까지는 매니저라면서?
하지만 사회생활에 그런 사족은 필요 없는 법이다.
나는 최대한 신성해 보이도록 웃으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저도 반갑습니다. 오늘 모델을 맡게 될 신성의 길드장, 이서진입니다.”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강조 좀 했다.
* * *
그레이트 그레이프의 CF 촬영이 끝이 나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자, 준비합시다!”
와…… 텔레비전으로만 봤을 땐 몰랐는데 여기 이렇게 좁았구나.
그에 비해 앞에 있는 카메라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카메라의 렌즈가 하나같이 나를 비추고 있다.
“자연스럽게 하시면 됩니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한번 원하시는 자세를 취해보세요.”
……긴장하지 않으려고 해도.
힐끔.
구석 쪽을 보자, 순둥이를 대롱대롱 안고 있는 루비가 천천히 입을 벌린다.
[힘 내 세 요 성 자 님.]
입 모양을 읽은 내가 심호흡을 하고 자세를 취했다.
“너무 뻣뻣합니다!”
물론 호흡 한번 했다고 일이 잘 풀릴 리는 없다.
방금 찍었던 그레이트 그레이프의 모델은 되게 자연스러웠는데…….
‘오 신이시여.’
촬영된 영상을 봤더니, 무슨 목각 인형이 이리저리 춤을 추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에게 목각 인형의 슬픈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한다면 박수갈채를 보낼 정도의 퀄리티.
문제는 이게 달콤한 음료수를 홍보하는 광고라는 것이다.
……저게 나라고?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입을 벌렸다.
최상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위로했다.
……이 사람. 듣기로는 꽤나 열정적이게 촬영하는 스타일이라던데.
내가 촬영하는 동안에는 별로 그런 기색이 없었다.
“아무래도 조금 쉬었다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아닙니다! 처음이신데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시는 겁니다!”
끄응…….
아무래도 혼자 하려니까 그런가.
시선 처리도 그렇고, 부담돼서 미칠 것 같았다.
순둥이라도 껴안고 찍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진짜 이상하네.’
아니, 죽을 위기 같은 건 떨리지도 않더니만, 왜 이런 건 이렇게 살 떨리는 거냐고.
한숨을 쉬고 있는 내게 최상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혹시 하나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예. 말씀하세요.”
“아까부터 궁금했던 겁니다만, 저분은 누구신가요?”
최상진이 가리킨 곳에는 루비가 서 있었다.
누구냐라…….
복잡한 사정을 알려 줄 생각은 없었기에 간단하게 일일 매니저라고 말했다.
-제가 성자님의 일일 매니저인 겁니까…….
루비도 처음 그 호칭을 들었을 때는 어쩐지 조금 들뜬 듯이 보였고.
잠깐 내 눈치를 살피고 고민하던 최상진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혹시 저분도 같이 찍으실 순 없을까요?”
……예?
루비를 바라보자, 다시 한번 나보고 힘내라며 입 모양을 바꾼다.
아니, 루비야. 아무래도 내가 아니라, 너보고 힘내자는 거 같은데……?
* * *
“우와…….”
“야, 미친…….”
“오늘 오기로 한 모델 또 있었어?”
“아니, 처음 보는 사람인데…… 연예인 중에 저런 사람이 있었다고……?”
스튜디오 내부가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루비에게 광고 출연에 관한 내용을 이야기하자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최상진의 부탁이라기보다는 내가 너무 부담을 느끼고 있으니까, 그걸 덜어주려는 의도가 보였다.
원래 외부의 노출을 잘 하지 않던 애인데.
고마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날 생각해 주는 루비다.
‘그런데…….’
당연히 광고를 촬영하는 것이니, 그 전에 치장을 하는 것이 맞다.
루비 또한 메이크업을 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고.
그리고 루비가 돌아오는 순간, 이렇게 난리가 난 것이다.
루비의 옆에 있는 여성 한 명이 하얗게 불태웠다는 듯,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메이크업을 해준 건가?
“성자님.”
와. 아니, 근데.
“어, 어.”
“주변 분들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루비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요?”
어어. 아니야. 잘못한 게 아니라, 너무 잘한 게 문제인 거 같은데?
……이래도 되는 건가?
루비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첫인상은 신비롭다는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지만, 지금은 그것과 차원이 달랐다.
웨이브를 넣은 백발의 머리. 마치 달빛을 품은 것처럼 화사하다.
머리핀처럼 꽂혀 있는 흑색의 생화가 그녀의 머리색과 어우러져 더욱 생기 있게 보인다.
화려하진 않지만, 루비와 잘 어울리는 원피스. 이전에 놀러 갔을 때 입었던 것과 비슷해 보였다.
가장 놀라운 건 외모다.
우리 루비는 화장 같은 걸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예쁜 사람이 화장을 하면 더 예뻐지는 건가…….
그동안 성자님, 성자님. 거리기만 했지.
지금 루비의 모습은 가히 ‘성녀’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루비가 죄송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성자님. 역시 제게 이런 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성녀……아니, 루비야. 진짜 잘 어울려.”
“그렇습니까?”
“어. 내가 본 사람 중에 최곤데?”
“성자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루비는 정말로 기쁩니다.”
옆으로 다가온 최상진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브라보.”
그의 눈에서는 방금까지 볼 수 없었던 열정이 담겨 있었다.
* * *
“좋습니다. 좋아요! 브라보! 거기서 음료수를 한번 들어주시고! 아주 좋습니다아아앗!”
……아니, 저 사람 너무 흥분한 거 같은데?
나를 찍었을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루비와 내가 대충 모델이 할 법한 자세를 취했다.
기본적으로 루비는 내가 아는 각성자 중에서 가장 강한 축에 속한다.
당연히 몸을 쓰는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연스러웠다.
유연한 몸놀림으로 포즈를 취하자, 감독에게서 연신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이러면 되는 것입니까, 성자님.”
“응. 잘하고 있어.”
혼자 할 때는 몸이 굳은 것 같았는데, 둘이서 하니깐 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그런데 갈수록 카메라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루비에게로 향하는 거 같은데…….
“좋습니다! 좋아요!”
연신 ‘좋아요’를 외치는 최상진한테로 누군가 다가갔다.
까치발을 들고,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한다.
“나도 하고 싶어!”
순둥이였다.
최상진은 순둥이를 잠시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까지 넣어서 찍어봅시다!”
순둥이에게 별다른 치장은 하지 않았다. 대신 애들한테 어울리는 소품을 건네줬다.
순둥이가 제 손에 쥐어진 곰 인형을 보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으응. 나 이거보다 훨씬 귀여운 거 있어!”
그러고서 빛이 들지 않는 스튜디오의 구석으로 가더니, 검은색의 낯익은 무언가를 들고 왔다.
“자!”
“괜찮겠는데요?”
“그러게. 인형이 꼭 살아 있는 거 같잖아?”
……꼬물이가 여러모로 고생이 많네.
촬영은 계속되었다.
음료수를 들고, 여러 가지의 컨셉으로 사진을 찍는다.
순둥이가 들어오자, 분위기가 더욱 살아났다. 카메라맨들도 연신 순둥이를 향해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아니, 저기요. 절 찍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 같은데요?
계속되는 촬영에 지칠 법도 하건만, 루비도 순둥이도 전부 잘 따라주었다.
아, 꼬물이도 인형인 척하느라 애썼고.
“자, 남성분은 뒤쪽에 서 있으시고. 여성분은 아이를 품에 안아주세요!”
이거 이렇게 있으니까…….
“이번에 찍을 컨셉은 가족사진입니다.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하시고,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어주세요.”
딱 생각하고 있던 그대로의 컨셉이었다. 순둥이가 한 손으로 음료수를 들고 있고, 그런 순둥이를 루비가 껴안고 있다.
그리고 뒤에 듬직하게 서 있는 나.
키 차이가 나서 그런지, 확실히 어울리는 구도였다.
가족이라…….
평소에도 루비를 여동생으로 생각하던 나다. 이런 컨셉은 꽤나 자신 있었다.
자연스럽게, 루비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나머지 한 손을 머리 위에 쓰다듬듯이 올렸다.
아주 잠깐 루비의 몸이 떨리더니 이내 진정된다.
“지금 느끼시는 감정 그대로 표현해 주시면 됩니다! 가족끼리 있을 때, 그 느낌! 자, 찍습니다!”
대충 웃으면 되려나?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내 앞에서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가…… 족입니까…… 루비와 성자님이 한 가족…….”
찰칵!
사진이 찍힘과 동시에 스튜디오에 적막이 흘렀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루비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세상에.”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간신히 들린 누군가의 말.
루비가 내 쪽으로 몸을 돌리고 나서야 스튜디오 전체에 현실감이 돌아왔다.
나와 아주 밀접한 거리에서 루비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정말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성자님.”
평상시에 하고 있는 루비의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사람들 반응을 보면 루비가 뭔가를 한 거 같기는 한데…….
……얘, 대체 무슨 표정을 지은 거지?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58화
20. 너 말고, 네 옆에(2)
“……우와.”
누군가의 감탄 섞인 말소리.
다른 사람들도 입으로 내뱉지 않았다뿐이지, 다들 느끼는 감정은 똑같았다.
차우 길드 소속 모델, 신미란.
그녀는 광고 촬영이 끝났음에도 스튜디오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녀 자신도 모르겠다.
어차피 자신의 매니저.
아니, 매니저라고 부르기에도 뭐한 감시자는 자신의 활동에 큰 관심이 없었으니까.
신미란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무대 위를 보았다.
‘……정말이라고?’
자기도 모르게 엿들어버렸다.
저 사람이 신성 길드장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신성 길드장.
갑자기 광고 촬영이라는 파격적인 행보를 하고 있는 그에 대해 궁금했기에, 신미란은 무대 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신성 길드장은 평범했다.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단 게 이상할 정도로.
‘하지만.’
그의 매니저라고 했던가?
아마도 신성 길드 소속의 사람이리라.
이루비라는 이름의 앳된 소녀는 놀라웠다. 마치, 저 소녀가 신성 길드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성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왔으니까.
‘대체 어떻게.’
그녀는 신성 길드장이라는 남성과 다양한 컨셉의 포즈를 취하며 촬영을 했다.
촬영 동안에 그녀가 일관되게 보이는 표정은 무표정.
스튜디오에 있는 모든 사람이 생각했으리라.
저 얼굴에 약간의 미소라도 담겼으면 좋겠다고.
그 생각은 이내 실현되었다.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사진을 찍겠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변화가 일어나더니 이내 세상이 변하듯이, 무대 위에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신비스러움은 그대로 간직하고, 제 나이에 어울리는 천진함까지 담겨 있는 웃음.
정말로 행복하다는 듯, 미소 짓고 있는 무대 위의 이루비를 보며 신미란이 제 입술을 물었다.
‘……나도 사람들에게 저런 미소를 보여주고 싶다.’
자신이 목표로 하던 웃음이 저곳에 있었다.
그녀가 제 손에 집어져 있는 혐오스러운 음료수를 보았다.
그레이트 그레이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흉물.
‘그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음료수에 대한 사실을 알리자고.
신성 길드장.
평범하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의 곁에 있는 소녀가 그걸 증명했으니까.
분명히 선하고, 한없이 이로운 분이리라.
‘저 사람이라면…….’
이 지옥 같은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내려온 동아줄에 신미란이 손을 뻗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촬영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꽤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진 촬영이 끝이 났다. 몸 자체는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조금 지쳤다.
루비가 두 손에 무언가를 들고 왔다.
물론 우리가 홍보하는 그 음료수였다.
“성자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루비, 너야말로 고생 많았어. 미안하네. 모델은 나였는데.”
“아닙니다. 성자님이랑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정말로 영광이었습니다.”
꿀꺽.
음료수를 마시자, 아주 약간이나마 몸에 활기가 돈다.
에너지 음료라고 해야 할까.
내가 평소에 들고 다니던 물약과 비교조차 못 할 정도로 효과가 미미했지만, 기본적으로 물약이 첨가되어 있는 음료수다.
그 어떤 에너지 드링크에서도 볼 수 없는 효과가 이곳에 있었다.
“음! 빈말이 아니라, 이 음료수 정말로 괜찮은데요?”
스튜디오에 있는 사람들 또한 호평을 내뱉었다.
“저 원래 음료수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거는 계속 마셔도 될 거 같아요!”
당연하다.
그렇게 계속 마시라고 음료수를 만들어낸 것이니까.
이제 광고가 나가고, 열심히 발로 뛰어다니면서 홍보한다면 사건 해결을 위한 한 걸음을 내딛게 되리라.
“저기…….”
앉아 있는 내게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말이 그렇단 게 아니라, 정말로 주변을 둘러보는 게 행동거지가 의심스럽다.
자연스럽게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그레이트 그레이프의 광고 모델.’
“아까 광고 촬영하시던 분 맞으시죠?”
“예, 예!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그녀는 입이 떼어지지 않는지,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옆에 있는 루비에게로 시선을 잠시 돌렸다.
나 말고 루비한테 볼 일이 있는 건가?
그럴 수도 있다. 지금 스튜디오에 있는 사람들은 루비한테 말을 걸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것 같았으니까.
‘분위기 때문에 못 그러는 거 같지만…….’
촬영이 끝나자마자 평소의 루비로 돌아왔다. 어딘가 접근하기가 힘든, 그런 신비로운 분위기의 수녀로.
루비를 바라보던 그녀가 다짐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 말했다.
“……잠시 단둘이서 대화 좀 가능할까요?”
* * *
이서진이 신미란과 잠시 자리를 비우고, 루비에르트는 잠시 스튜디오 내부에 대기하고 있었다.
무대 위를 잠시 바라보던 루비에르트는 자신의 기분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런 곳에서 성자님과 그렇고 그런 것들을 한 거구나.
누군가와 사진을 찍는 것.
남들에게는 평범한 일이었지만, 자신에게는 아니었던 것.
이번으로 벌써 두 번째였다.
첫 번째도 성자님이었고, 두 번째도 성자님이었다.
사진이란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성자님과 함께해서 그런 걸까?’
“맛있어! 너도 먹어 꼬물아!”
신성 길드의 음료수를 마시며, 연신 발을 동동 구르는 작은 소녀.
순둥이가 인형에게 음료수를 가져다 대는 것을 본 루비에르트가 캔 하나를 더 가져왔다.
“제가 하나 더 따드리겠습니다. 성자님의 자녀님.”
“순둥이! 아빠가 날 좋아하는 사람은 이렇게 부른대! 애칭이랬어!”
“안 됩니다. 어찌 제가 함부로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
“그럼 순둥이 싫어하는 거야? 난 신기한 인간 좋아하는데! 우리 아빠 좋아하는 사람은 다 좋아!”
촬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루비에르트의 품속에는 순둥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어린아이라고 해도 꽤나 무게가 나가게 마련이다.
이런 식으로 장시간 안고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한테는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그녀에게는 더없이 가벼울 뿐이었다.
거기다가.
‘성자님과 비슷하게.’
가까이하고 있으면,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도 이렇게 꼬옥 안고 있으면 더욱 그러했다.
역시 성자님의 자녀라고 해야 할까?
“그럼 순둥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순둥이!”
“……순둥이 님.”
“순둥이라니깐!”
“……응. 순둥아.”
어쩐지 낯익은 듯한 상황. 루비에르트는 자신이 정말 이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내심 가슴 속 깊은 곳에 무언가 따뜻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성자님과 한 가족.’
묘하게 붉어진 얼굴의 루비에르트.
그녀를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던 한 남자가 씨익 웃었다.
‘마침 새로운 모델이 필요할 거 같았는데, 잘됐네.’
“안녕하세요.”
“……?”
그녀를 향해 남자가 다가갔다.
“오늘 촬영하신 거 잘 봤습니다. 하하, 원래부터 이쪽 일 하시는 사람이신가? 왜 난 못 본 거 같지?”
“…….”
‘……음.’
남자는 순간 당황했다.
아까 보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무표정이었음에도, 어쩐지 들떠 보이는 인상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길가의 돌을 상대하듯이,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뭐, 힘든 걸 수도 있지.’
자신이 스튜디오로 들어오자마자 보았던 그 미소.
이거는 놓쳐선 안 될 거물이었다.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이런 사람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차우 길드 산하 연예 엔터테인먼트 실장, 황범찬.
넘쳐나는 자본으로 여러 곳에 발을 걸치고 있는 차우 길드다.
현재 대다수의 연예 엔터테인먼트들이 죽을 쑤고 있는 것에 비해, 차우 길드에 속한 연예인들은 하나같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 촬영하러 온 신미란 또한 그러했고.
‘그런데 그 년은 어디 간 거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사냥감이 더 급했으니까.
그래 봤자 자신의 소속을 드러냈으니 금방 끝나겠지만.
“어떠신가요. 혹시, 생각 있으신가요?”
“별 관심 없습니다.”
예상 못 한 대답에 황범찬이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어라?’
현재 연예인들이 가장 오고 싶어 하는 곳이 바로 차우 길드다.
단순한 매니저.
그런 존재에게 자신 같은 사람이 접근한 이유를 그녀도 모르지는 않을 터.
원래 같았으면, 곧장 상대방 쪽에서 어떠한 반응이 와야 했다.
그리고 그 반응은 당연히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이어야 했고.
‘아, 그렇군.’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모르는 게 분명하다.
그녀는 어려 보였고, 그만큼 세상 물정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았으니까.
‘오히려 좋아.’
“제가 원래 이런 식으로 명함을 건네거나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차우 길드. 들어보셨죠? 그런 곳에서 당신에게 제의를 하고 있는 겁니다.”
“……차우 길드?”
그 말에 드디어 상대방이 반응했다.
아니, 그런데 차우 길드란 사실은 명함에 적혀 있는 건데?
……혹시 받고 나서 눈길도 안 줬단 건가?
“이거는 지지!”
‘얜 또 뭐야?’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연신지지- 를 외치고 있는 꼬마.
기분이 상했지만, 웃었다.
계약을 맺기 전까지는 웬만하면 좋은 이미지를 보이는 게 나을 테니까.
‘그리고 계약만 맺는다면…….’
그 후로는 완벽하게 족쇄를 채우리라.
“싫습니다.”
이 이상은 없을 정도로 완고한 거절. 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말에는 미미한 혐오감마저 들어 있었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이제는 그가 그녀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쪽 소속사에서 얼마를 주는지 모르겠지만, 차우 길드에서는 그의 몇 배는 더 많은 돈을 주지!”
“…….”
“그깟 어중이떠중이 매니저 짓거리하지 말고 스타가 되어 보자고!”
“……어중이떠중이?”
이제야 반응한 모습에 황범찬이 이거다! 라는 표정으로 연신 침을 튀기며 권유했다.
그 어중이떠중이가 신성 길드장이란 걸 모르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자님.’
루비에르트는 고뇌했다.
저것은 신성모독.
자신의 애병기는 지금 이곳에 없었지만, 맨손으로도 바닥에 기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이번 광고는 중요해.’
스튜디오 내부에 보는 눈들이 많았다.
결국 루비에르트가 취한 행동은 무시였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잠깐만!”
황범찬이 다급하게 루비에르트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
“너. 나쁜 사람.”
그녀에게 안겨 있던 꼬마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이 자식이…… 방해…… 커헉!’
그가 뻗었던 손이 멈추고, 몸이 비틀거렸다.
순간 황범찬은 자신이 무언가에 먹히는 장면을 보았다.
자신으로서는 확인조차 하지 못할 깊은 심연과도 같은 눈동자.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지만, 느껴지는 압박감은 그 이상이었다.
‘주, 죽는……!’
그는 결국 입에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뭐, 뭐야! 누가 쓰러졌어!”
때마침 스튜디오로 돌아온 이서진이 난데없는 상황에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또 왜 저래?”
* * *
신성의 야심작.
그레이트 그레이프에 대항할 음료수.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가 출시되었다.
“뭐야, 가격이 왜 이래?”
야심 찬 출발과는 다르게, 이 음료수의 초기 평은 좋지 못했다.
타 음료수와 비교해도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
거기다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개 문구까지.
[마석병을 치료하기 위한 음료수]
사람들은 분노했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든 팔아먹으려고 저런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하고.
하지만 곧이어서 나온 사실에 의해 그 여론은 서서히 뒤바뀌게 되었다.
-신성 길드에서 낸 거라던데?
-뭐? 거기서 갑자기 음료수를 왜 만들어?
-나야 모르지. 근데 차우 길드에서도 만드는데, 저기라고 못 할 게 있나?
-차우 길드랑 다른 길드가 같냐? 자기들 사리사욕 때문에 모르쇠로 방관하는 새끼들이랑 물약을 수천 개나 뿌리는 곳은 다르지.
-아니…… 그래도.
신성이면 믿을 만하지 않나?
그런 의견이 나왔다.
현재 차우 길드를 제외한 각 길드들의 이미지는 최악.
하지만 ‘신성’이라는 말에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시민들에게서 이미지가 좋았던 신성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봤자, 아직 소수였다.
아무리 신성이라고 해도 마석병을 치료한다는 건 말이 안 되었으니까.
그것도 고작해야 저런 음료수 같은 거로.
신성 길드에서 직접 제작한 ‘성수’를 섞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난 못 믿지.
-저렇게 비싼 걸 내 돈 주고 계속 사 먹으라고?
관심이 무르익어 가고, 때마침 신성 길드장이 직접 찍었다는 광고가 대한민국에 공개되었다.
-뭐? 길드장이 직접 광고를 찍어?
-신성 길드장이라고?
-한번 보기라도 할까?
-욕해도 보고 욕해야지.
신성 길드장.
그동안 누구도 알지 못했던 존재이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주목됐다.
이어지는 광고.
고작해야 30초 내외로 이루어지는 영상.
그렇기 때문에, 그 광고의 주체가 되는 모델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홍보하는 상품을 대표하는 인물이니까.
광고가 서서히 진행되었다.
그렇게 특별할 것은 없는, 평범한 광고라고 할 수 있었다.
-뭐야, 평범하잖아?
-괜히 기대했네.
하지만 단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었다.
누가 보아도 감독이 명백하게 의도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 법한 장면 하나가 광고의 끝부분에 하이라이트로 자리 잡아 있었다.
그 장면이 보인 것은 고작해야 일 초 남짓.
영상이 끝나고, 사람들은 전부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의 광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와. 미친.
-……야. 내가 뭘 본 거냐?
정해연이 예상했던 대로 신성 길드장이 직접 광고를 찍은 것이 도움이 됐던 걸까?
광고를 시청한 사람들의 반응이 급속도로 좋아지기 시작했다.
-……진짜 비주얼, 분위기 전부 미쳤다.
-저 사람 대체 누구야?
물약으로 인한 신체 변화.
꾸준히 하고 있는 신체 단련.
이서진의 몸은 같은 나잇대의 사람과 비교해도 충분히 훌륭했다.
저러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보면 모르냐? 신성 길드장이라잖아.
-아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신성 길드장.
강인한 성기사들을 이끄는 자!
-걔 말고, 그 옆에 있는 사람.
-……단순한 매니저라는데?
-누나아아! 절 가져요!!
-와. 애는 왜 이렇게 귀여워. ㅠㅠ.
-아역 배우가 들고 있는 인형 어디서 사는지 아시는 분!
-나 저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저거 음료수 언제부터 나온다고 했지?
저 음료수가 정말로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신성 길드장.
그가 아니라.
“……이건 예상 못 했는데.”
그의 옆에 있는 두 소녀로 인해.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59화
21. 망나니를 사용하는 방법(1)
“어, 뭐야. 그레이트 그레이프 없어요?”
“예에. 그게 워낙 인기가 많은 터라. 지금 있던 건 전부 다 나갔습니다.”
“아~ 나 그거 없으면 공부도 안 되는데.”
평소에는 음료수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였으나, 그레이트 그레이프를 접한 후로는 일상이 달라졌다.
마약을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마실수록 또 마시고 싶고, 중독성이 심한 음료수였다.
매일 같이 그것을 마시는 낙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입맛을 다시는 그에게 옆에 있던 친구가 다른 음료를 가리켰다.
“야. 이거 먹어보는 건 어떠냐?”
“엑. 더럽게 비싸잖아! 이걸 누가 사 먹어!”
“왜. 먹어 봐. 나도 먹어 봤는데, 저거보다 훨씬 낫더만.”
“……그래?”
“어. 거기다가 이거 광고하는 모델이 진짜…….”
“아~”
제 또래들 사이에서는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이야기다.
난데없이 등장한 정체불명의 신예.
포털 사이트에 쳐도 그 흔한 프로필조차 나오지 않았으며, 그 광고를 제외하고는 다른 활동이 일절 없는 신기한 인물이었다.
다만, 그 광고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불을 지피는 데에는 충분했다.
“……진짜 성녀님 같았지.”
“그 성녀님이 몸소 홍보하는 음료수를 안 마신다고?”
“아. 마신다, 마셔!”
음료수 한 캔에 무려 오천 원.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내밀은 그가 이내 뚜껑을 따 살짝 한 입 마셨다.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겠냐.
그런 생각이 들었었는데, 막상 마셔보니 생각이 확 달라진다.
“오…… 이거 되게 괜찮은데? 끝 맛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딸기향이 예술이야.”
“그렇지? 난 요즘 이거만 먹는다니까.”
“거기다가 이상하게 몸에 활기가 도는 거 같기도 하고.”
“나도 체대 쪽 지망하고 있는 형한테 들은 건데, 지금 운동하는 사람들도 죄다 이 음료수만 찾는데.”
“뭐? 에너지 드링크는 왜 내버려 두고?”
“그런 거보다 이게 더 효능이 좋으니까 그러지!”
“……이게 그 정도로 좋다고?”
다시 한번 홀짝이니 지친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요즘 들어서 꽉 막힌 것 같던 가슴도 뻥- 하니 뚫리는 거 같다고 해야 하나…….
“아. 여기 한 상자 남아 있었네요!”
진열대에 올라간 그레이트 그레이프를 보면서 친구가 어깨를 툭툭 친다.
“야, 네가 죽고 못 사는 거네. 저거 안 사냐?”
“음…….”
벌써 절반이나 마셔버린 음료수를 곁눈질하던 그는 결국 그레이트 그레이프도 하나 구매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뚜껑을 깠고.
입에 들어가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뱉어버렸다.
“욱! 뭐야, 맛이 좀 이상한 거 같은데?”
“뭐? 어제까지만 해도 그거 못 먹으면 열이 난다느니 그런 소리를 해놓고 무슨…….”
“아, 그러게. 이상하네…….”
“야. 그건 다 마셨냐? 안 마실 거면 나 줘라.”
“어딜.”
“아 치사한 새끼!”
“너도 사 먹던가.”
그가 절반 정도 남아 있는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를 원샷 했다.
속을 씻어내듯이, 감미로운 맛에 그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역시 이 맛이야.”
뭔가 거부감이 적다고 해야 하나?
이걸 먹기 전까지는 분명히 저 음료수가 최고였는데.
이제는 오히려 이것 외에는 다른 음료수는 생각도 안 난다.
“……쩝. 하나 더 살까?”
“거봐. 내가 맛있다 했잖아. 그런데 그건 어쩌게?”
“몰라. 버려야지. 맛대가리도 없는 거.”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이서진의 특제 음료수가 본격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 * *
“오늘 좋은 시간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아뇨. 저야말로.”
차우 길드장, 박재한은 대형 길드장 한 명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얼굴을 확 구긴 그가 중얼거렸다.
“원하는 건 더럽게 많군.”
한국에 터를 잡은 지 고작해야 3년.
차우 길드는 그 시간 동안 가파르게 성장해 대형 길드의 반열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당연히 그가 가지고 있는 뒷배 덕분이었다.
중국의 허핑 길드.
당연히 저들이 자신에게 이토록 집요하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그런 뒷배와 연을 맺고 싶어서였다.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다.
자신이 아니라, 다른 곳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니까.
‘이 모든 건 전부 다 내가 이룩한 건데.’
당연히 중국 본토에 있는 허핑 길드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꿈에도 꾸지 못했겠지만.
그는 자신이 아니었다면, 이 길드가 단기간 만에 이렇게 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잘 진행되고 있으니까.”
마석병의 유행.
처음부터 그런 일이 있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수천 개의 물약을 무상으로 뿌린 차우 길드.
당연히 대중의 관심은 차우 길드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차우 길드의 대중적 이미지는 나날이 높아져만 갔고, 덩달아 그레이트 그레이프의 소비 또한 많아졌다.
‘그게 제 살 갉아먹는 짓인 걸 모르고 말이야.’
이 음료수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라면, 죽어도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욕하고 있는 마석병의 발생 원인이었으니까.
그것도 모르고 애꿎은 길드들만 욕하고 있는 꼴이란.
박재한은 제 손에 놀아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이번에 출시하게 될 물건이라면…….’
그레이트 그레이프의 상위 버전.
당연히 음료수에 있는 마기의 비율을 더욱 높였다.
이것이라면 미약하게나마 각성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기가 높아질수록 거부반응 또한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걸 위해서 밑 작업을 해온 거니까.’
이미 주기적으로 음료수를 마시며 마기에 침식당한 사람들의 몸은 별 무리 없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 자신의 길드가 최강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본토에서도 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제조 및 배포 과정에도 미리 손을 써뒀기에 걸릴 위험도 없었다.
어차피 시간은 자신의 편이다.
“근데 거슬리는 게 있단 말이지…….”
신성 길드장.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 인물이었건만,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음료수라니.
차우 길드가 승승장구하는 걸 보고 따라 하기라도 한 건가?
거기다가 내건 슬로건도 이상했다.
[마석병을 치료하기 위한 음료수]
마치 그레이트 그레이프를 저격하기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실제로 사람들 사이에서 자사의 음료수와 비교되기도 했고.
‘뭐, 착각이겠지.’
그렇게 큰 타격은 없었으니까.
그보다 더욱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그때 신성 길드장 옆에 서 있던 소녀였다.
회의실에서 내내 보였던 그 날카로운 분위기는 어디 가고, 광고 속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보자니 더욱 가지고 싶었다.
신성 길드가 폭삭 망하기라도 한다면, 자신에게 오지 않을까?
‘못 할 것도 없지.’
미래를 꿈꾸며 연신 웃고 있는 그에게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사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사용하는 휴대전화.
문자를 확인한 그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길드장님. 큰일 났습니다!]
“웬 호들갑이야?”
문자의 내용은 간단했다.
국가가 움직였다.
당연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됐는데도 위쪽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거니까.
정부 쪽 사람에게도 따로 뇌물을 먹여놨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박재한의 생각이었으나, 현실은 달랐다.
[그…… 그레이트 그레이프가 전량 압수 조치되고 있습니다!]
“……뭐?”
정부가 차우 길드를 향해서 칼을 빼 들었다.
*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그만 웃어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진]
[사진]
[사진]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모델님. 소감 한마디 해주시죠!]
미친 듯이 날아오는 문자 폭탄.
물론 나한테 이런 짓을 할 사람이라곤 딱 한 명뿐이다.
……하필이면 얘한테 걸리냐.
이유지가 올린 사진에는 광고 속에서 최대한 산뜻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얼굴이 올라와 있었다.
저거, 감독님이 제일 강조하던 표정이다.
차마 거울 앞에서도 짓지 못할 상쾌함에 내 얼굴이 붉어진다.
[제발 지워.]
[싫은데. 싫은데. 싫은데~ㅋㅋ]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나서는 문자를 보낸다.
저번에 이유지의 사진으로 놀릴 때가 생각난다.
……이거 막상 당해보니까 진짜 짜증 나네.
[그러게, 누가 그런 사실을 감쪽같이 숨기래? 친구 섭섭하게.]
……뭐, 그건 할 말이 없긴 하다.
[말해주려 했는데, 딱히 시간이 안 나서. 문자로 이야기할 것도 아니잖냐.]
[흐응. 말은 잘하셔.]
문자가 끊기고, 난데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받자마자 이유지의 실실 웃는 목소리가 들린다.
-히히. 그럼 이렇게 전화로 하면 되잖아?
“……전화로도 좀 그렇지.”
-그러면 다음에 한 번 만나. 그 뭐냐, 순둥이도 데리고 오고. 요즘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맛있는 거라도 먹고 풀어야겠어. 우리 술도 마실까?
“……너 술은 진짜 좀 자제해라.”
얘가 또 사람 잡을 일 있나.
뭐, 그래도 저번 일에 대한 보답도 있고 만나서 밥 한 끼 거하게 사주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이 사건이 끝나고 나면 그래도 조금은 여유가 생기겠지.
아무것도 안 하던 백수 시절이 그리워질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근래 심각한 일들만 마주하다가, 이런 식으로 농땡이 피우니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네.
……이유지가 이래서 땡땡이를 자주 치는 건가?
-그러니까 누가 그런 자리를 넙죽 받으래? 누나가 요즘 너~ 무 바빠서 이것도 겨우 시간 내준 거니까, 고마운 줄 알아. 역시 나밖에 없지? 응? 응?
“뭐래. 이태영한테 문자 오면 숨겨달라고 전화한 거겠지.”
-윽…….
또 어디서 땡땡이나 치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누나는 또 뭐야? 전에는 오빠 어쩌구 하더니.
당한 것이 억울해서 전화를 끊자마자, 사진 하나를 보냈다.
[헹. 그때 그 사진이라면 이미 당할 대로 당해서 소용 없지롱.]
미안하지만, 이건 아직 쓰지 않은 신상이다. 두 볼을 잡혀 이상한 입 모양이 된 이유지의 사진을 보내고 폰을 집어넣었다.
연신 울려대는 진동을 무시하고, 잠시 스튜디오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내부에서 밀고자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음료수에 대한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부 고발자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다.
광고 모델인 그녀가 그 음료수에 대한 발언에 힘을 실어준다면, 진실을 알리는 데 힘이 될 테니까.
‘욕은 좀 먹겠지만.’
그녀도 협박당하고 있었다 하니, 별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거대한 세력에 일개 연예인인 그녀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없었을 테니까.
오히려 나한테 사실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생판 남이었으니까.
대다수의 내부 고발자가 좋지 못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더욱.
‘괜찮겠지.’
현재 신미란 및 그의 하나뿐인 동생은 신성 길드 하우스 내부에서 보호 중이다.
자신은 상관없었지만, 제 동생이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걱정이 컸던 모양이다.
신성 길드에 머무는 자들은 내가 보았던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강인한 성기사들.
밖으로 나갈 때도 그들과 함께할 테니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이다.
[당신의 몸에 있는 노폐물을 밖으로!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
“……어우. 쟨 뭔데 저렇게 웃고 있냐? 징그러워 죽겠네, 진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광고에 다급하게 채널을 돌렸다.
하지만 채널을 돌려도 여전히 내가 나온다.
몇 번을 보아도 익숙해질 수가 없는 광고였다.
결국,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현재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의 평판은 상당히 좋았다.
마석의 제거를 위해서는 꾸준한 섭취가 필요한 만큼, 아직 제대로 된 효능은 나오지 못했겠지만.
“기본적으로 몸에 활력이 도니까.”
박X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현재 저 음료수는 피로회복제로도 점점 유명해지고 있었다.
다소 비싼 가격으로 인해 불만을 토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납득한 표정으로 그것을 사 먹는다.
대형 길드가 쩨쩨하다느니, 그런 말을 뱉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솔직히 공짜로 풀어도 나한테는 전혀 타격이 없기는 한데.”
원래 이런 건 처음부터 제대로 정하고 가야 한다.
공짜는 안 된다.
애초에 지금 가격대도 최대한 이윤을 남기지 않는 방향으로 정한 거고.
애초에 내가 따로 조치를 취할 필요도 없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정부에서 할 일이다.
“이제는 슬슬 폭로할 때도 됐어.”
지금까지는 그에 대한 별다른 대책이 없었기에 놔둘 수밖에 없던 것이었고, 이제는 다르다.
그레이트 그레이프보다 중독성 있으면서, 맛있고, 몸에 좋은 음료수가 나왔으니까.
내가 만들진 않았지만, 이서진 특제 음료수다.
-그에 관해선 잠시만 기다려 주게나.
수호 길드장, 안환재의 말이었다.
정부 측에서 따로 나한테 연락이 왔었다. 정말로 그 음료수가 마석병을 해결할 수 있냐고.
나는 그것을 증명해 줬고, 그들은 좀 더 자세한 대화를 하길 원했다.
그에 관해선 안환재에게 맡겨뒀다.
상대는 전문가다.
나 같은 초보자보다는 그가 상대하는 게 훨씬 노련할 테니까.
뭐, 그들로서도 마땅히 방법이 없던 차에 뜬금없이 해결법을 제시한 사람이 나타난 거니깐, 웬 떡이냐 싶었겠지.
냉큼 버스에 올라탔을 것이다.
길드에 밀려 무능한 정부라는 타이틀이 붙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이곳은 국가다.
차우 길드의 범법 행위를 가만히 놔둘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 첫 시작이 차우 길드에 대한 확실한 견제.
시민들은 난데없는 그 행동에 당황하고 있었지만, 원래라면 더 일찍이 이루어져야 할 작업이었다.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T 그리고 F.
“그놈 과연 오늘 나올까?”
오늘 이 사태에 관한 길드장들의 두 번째 회의가 진행된다.
* * *
‘안 나왔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는데, 결국 차우 길드장은 불참을 선택했다.
사태 파악하느라 아마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겠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차우 길드장은 어디 간 거고?”
회의실 안에서 각 길드장끼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이전에도 보았던 사람들이다.
대부분이 차우 길드장과 같이 나가던 자들.
“다들 조용.”
수호 길드장, 안환재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대충 사태 파악은 됐을 거라 생각하네. 각자 소식통 하나씩은 있을 것 아닌가.”
“…….”
그들이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그 증명이었다.
아직 제대로 공개한 것이 아니기에,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차우 길드장이 이 일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정부가 난데없이 그들을 타겟으로 삼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흠. 혹시나 해서 묻는다만, 차우 길드장과 깊은 연을 맺는다던가, 그런 행동을 한 자는 없을 거라고 믿네.”
“……무, 물론입니다!”
……저 양반.
왜 다른 길드장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는지 알 거 같다.
처음 회의에 모였을 때도, 안환재를 중심으로 이 그룹이 형성되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심했다.
모두가 수호 길드장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옆에 있는 우리의 눈치도.
대형 길드의 랭킹은 쉽게 변동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길드가 힘을 가지는 나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서 다시 회의가 열리더라도 대부분 이 멤버라는 이야기다.
안환재는 이번 건을 계기로 좀 더 그들에 대한 발언권을 확실히 챙기겠다는 속셈이겠지.
‘진짜 무섭네…….’
안환재가 나를 보더니 살며시 웃는다.
뭐, 나한테 잘 대해주는 사람이 힘을 얻는다면 좋으니까.
사실 회의랍시고 모였지만, 이야기를 나눌 것도 없었다.
이미 대책은 신성, 황혼, 수호에서 전부 마련해 놨으니까.
이곳은 저들에게 그 결과를 보여주기 위한 자리일 뿐이다.
“저, 신성 길드장…… 혹시 이후에 시간 있으신지요?”
“긴히 할 이야기가…….”
“아뇨. 제가 좀 피곤해서. 배가 아프기도 하고.”
“그, 그렇군요…….”
미안하지만, 다른 버스를 타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박쥐를 기르는 취미도 없고.
그들이 힘없는 발걸음으로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대단하군. 신성 길드장.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준비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해연 씨 덕분이죠, 뭐.”
“아, 아니에요!”
회의실에 남은 사람들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이제 시간만 들인다면, 이 사태는 천천히 정리가 될 것이니까.
물론 회의실에 있는 모두가 화기애애한 건 아니었다.
오늘도 묵묵히 홀로 앉아 있는 전진우가 그 증거였다.
그가 일어나더니, 우리에게는 눈길도 안 주고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잘 보이려고 붙어볼 만도 한데, 하여간 자존심 하나는 강한 놈이다.
‘어떻게 할까.’
사건 자체는 이렇게 종지부를 찍겠지만, 아무래도 그 재수 없는 얼굴을 생각하자니 그냥 넘어가기가 싫었다.
“……?”
루비를 바라보자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이번에 광고를 찍으면서 느낀 점이다.
나 같은 것보다 훨씬 강한 애지만, 역시 루비한테는 그런 식으로 일상을 즐기게 해주고 싶다고.
내가 당장에 차우 길드장을 잡으라고 시킨다면, 그녀는 군말하지 않고 따르겠지.
신성 길드의 사람들도 그렇다.
내가 내리는 어떤 명령이라도 행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런 더러운 일을 내 식구들한테 시키고 싶지는 않지.’
그렇다고 생판 남한테는 또 시키기 그랬다.
적당히 고집 있으면서도, 순종적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계산할 줄은 아는 놈.
싫어하는 게 티 나면서도, 약속은 지키는 미련한 놈.
마침 여기 있었네.
“야. 전진우. 밥 먹었냐?”
“……저번에도 말했지만, 내가 어째서 네놈과 밥을 먹는…….”
“아니, 진짜로 밥 먹잔 게 아니고, 잠깐 이야기 좀 하자는 뜻인데. 그것도 모르냐?”
“쯧. 그 이상한 광고를 찍더니 정신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했나?”
몸이 긴장한 게 보이는데, 할 말은 또박또박한단 말이지.
역시 저놈이 적당할 거 같아.
“들어봐. 아마 너한테도 좋은 이야기가 될 테니까.”
스네이크의 망나니, 전진우.
원래 쓰레기를 상대하는 법은 저런 놈이 더 잘 아는 법이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60화
21. 망나니를 사용하는 방법(2)
마석병에 대한 첫 대책 회의가 이루어졌던 당일.
스네이크 길드의 집무실 안에서 두 사내의 목소리가 쥐죽은 듯 흘러나왔다.
“진우야.”
“예. 아버지.”
“네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름질 그만하고 길드와 훈련에 집중하게 된 거 난 좋은 일이라고 본다.”
“예.”
누군가가 들으면 평범한 부자지간의 대화 내용이다.
하지만 속사정을 알고 보면 그렇게 평범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한 길드의 수장이었고.
아들은 그 길드의 부길드장이었으니까.
더군다나.
“망나니, 전진우. 세간에서 너를 그렇게 부른단 사실 알고 있었냐?”
“남들이 절 어찌 부르던 전 상관 안 하…….”
“그래! 상관 안 하겠지. 당연히 망나니 같은 행동을 하고 다녔으니까!”
스네이크의 길드장, 전진명.
대한민국의 누구라도 부러워할 대형 길드의 수장이건만, 그는 매일 같이 걱정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권력, 돈, 여색에 빠진 뱀.
독사에게서 나온 이빨 빠진 도마뱀!
각성자들은 전진우를 그렇게 불렀다.
하나뿐인 자식이란 놈이.
스네이크의 부길드장이라는 놈이!
밖에 싸돌아다니는 꼴을 보면 속이 배배 뒤틀리는 것 같았다.
제어라도 해보라고 옆에 사람을 붙여놨지만, 그다지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그자에게 일을 몽땅 맡기고 자기는 놀러 나가기 바빴다.
포기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그 이변은 별들의 연회가 끝난 후, 훈련이랍시고 제 패거리들과 던전에 갔다 온 날부터 일어났다.
-……부길드장님께서 달라지신 거 같습니다.
그의 옆에 붙어 있던 수행비서, 최성필의 말이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저런 식으로 구라를 깐 게 한두 번이야 믿어주든가, 말든가 하지.
혹시 또 제 아들놈이 협박이라도 했나, 했지만.
그가 보여준 증거들은 정말로 자신의 아들이 정신 차렸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무슨 바람이 분 거지?’
그런 생각은 잠시.
그는 술을 마시며 소리 높여 웃었다.
“하하! 그렇지! 역시 내 자식놈이 망나니일 리가 없지!”
어찌 뱀의 자식에게서 토끼가 나오겠는가!
황혼과의 재계약 실패.
그 사실을 들었을 때는 당장 이놈을 삶은 물에 처박아 넣어야겠다고 이를 갈았지만.
‘정신만 차렸다면 실수는 되돌릴 수 있는 법이지.’
자신 또한 이 자리에 그렇게까지 올라왔다. 길바닥에 기어 다니는 지렁이에서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는 뱀으로.
각 길드장들이 모이는 대책 회의가 일어났을 때.
그가 가지 않고, 전진우를 보낸 것도 이유가 있었다.
‘내 몸도 이제는 예전 같지 않아.’
당장에 자신과 같은 세대인 수호 길드장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일선에서 뛰기에는 자신은 너무 늙고 쇠해졌다.
대한민국의 권력이 집중되는 자리.
누가 생각하더라도 좋은 기회다.
각 권력의 수장들과 친분을 나눌 수 있는 절호의 찬스.
별들의 연회에서는 실패했지만.
제 아들놈이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리라.
-특히 차우 길드와 연을 맺을 수 있게 노력해.
요즘 들어 급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주력 길드 중 하나였다.
전진명은 제 아들에게 몇 번이고 그 사실을 강조했고.
감격스럽게도 아들놈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의 면전에서 대놓고 시비를 거는 것으로!
이후로 차우 길드 쪽에 급히 연락을 넣어봤지만, 응답조차 해주질 않았다.
“진우야. 진우야.”
“예.”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놈한테서 그다지 좋지 못한 냄새가 나서 그랬습니다.”
“냄새는 무슨 냄새! 네놈이 어제 마신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것은 아니고?”
얼굴이 붉어진 전진명이 자리에 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뜩이나 길드 랭킹도 낮아져서, 그런 회의에서도 말석인 스네이크다.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차우 길드 쪽이 안 된다면…….
“진우, 네가 신성 길드장과 친분이 있다는 소리가 있던데.”
“어떤 놈이 그딴 헛소리를……!”
“누가 애비 앞에서 그딴 막말을 하라고 했어!”
“……그놈이랑은 아무런 친분도, 연관도 없습니다.”
저렇게 반응하는 것 보니까, 전혀 없는 것은 또 아닌 모양인데.
입을 꾹 다물고 말하질 않는다.
저 쓸데없는 고집은 버린 줄 알았는데, 제 성질 어디 가겠는가.
‘하아…….’
한탄을 하면서도 그는 다시 한번 전진우에게 강조했다.
“이번엔 정말로 제대로 해야 할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는 너에게 줄 수 없다.
아버지로서가 아닌, 길드장으로서 하는 이야기였다.
* * *
“……나는 분명 얘기를 하자는 말로 들었는데?”
“아니, 배고픈 건 진짜였으니까. 뭐해? 식기 전에 들어라.”
“……진짜 짜증 나 죽겠네.”
제 눈앞을 가득 채운 음식들을 보면서 전진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한정식 식당, 한빛.
그 또한 이곳은 몇 번이고 와본 적이 있다.
대부분이 자신보다 높은 사람들에게 알랑방귀를 뀌기 위한 목적이었다.
‘최소한 이놈이랑 올 자리는 아닌데.’
신성 길드장.
원래라면 자신 쪽에서 먼저 들이댈 만한 스펙이었으나, 저놈한테 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처음엔 무시하고 나가려 했으나, 자신에게 또한 괜찮은 제안이라는 이야기에 잠시 멈칫해 버리고 말았다.
‘물약.’
그 한마디에 결국 전진우는 이곳에 자리 앉게 되었다.
“빨리 이야기나 하지?”
“뭘 그리 급해. 일단 먹으라니까?”
“와아! 맛있는 거다!”
‘앤 또 뭐야?’
이 자리에는 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웬 꼬맹이 하나가 두 볼에 빵빵하게 음식을 와구와구 집어넣고 있었다.
이 코찔찔이는 뭐고. 왜 난 얘랑 밥을 먹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거기다가.
‘쟤는 아무래도 조금 껄끄럽단 말이지.’
지난번 던전에서도 이서진 옆에 딱 달라붙어 있던 소녀다.
거기다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사람이기도 하고.
지금도 그의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같았으면 제안이고 뭐고 들을 생각도 없이 뛰쳐나갈 정도로 불편한 자리다.
‘만약 이번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린 전진우가 젓가락을 들었다.
……그래. 밥 한 끼 먹는 것 정도야 참을 수 있다.
잡채 쪽으로 향하던 젓가락이 이서진의 손을 보고는 자연스럽게 옆으로 커브한다.
떡갈비라도 집으려던 차에 접시 위로 무언가 휙휙 하고 지나간다.
지나갈 때마다, 그릇에 담긴 떡갈비가 하나, 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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