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efato 5
-키아아악!
와이번은 자신에게 쏘아지는 공격에 화가 난다는 듯, 공중을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리고 원거리 공격을 하던 각성자를 향해 부리를 앞세워 하강했다.
“준비!”
일부러 열어둔 틈에 블랙 와이번이 걸려들었다.
수호 길드장, 안환재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제 몸만 한 크기의 대검을 들고 크게 횡으로 베었다.
부웅!
돌진해 오던 블랙 와이번의 가죽에 깊은 상흔이 남았다.
보스급의 몬스터에 저런 상처를 남기는 안환재를 보고 놀라야 할지.
저런 공격을 받고도 저렇게 멀쩡한 듯, 다시 날아오르는 와이번에게 감탄해야 할지…….
와이번은 타겟을 바꾸어 다른 곳을 노리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 곳이었다.
“성자님.”
줄곧 내 옆에 있던 이루비가 작게 속삭였다.
“성자님에게는 털끝 하나 닿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신속의 물약의 효과를 받은 이루비의 속도는 감히 내 눈으로 따라갈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첫 던전에서의 모습이 떠오른다.
작디작은 생명체가 하강한 와이번에게로 뛰어들었고.
콰앙!
-끼엑?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블랙 와이번이 옆으로 날아갔다.
비틀거리면서 다급하게 날아오르는 것을 보니 꽤나 충격이 큰 모양이다.
‘……이거.’
정해연의 검에 불이 넘실거린다.
그녀는 검을 휘둘러 와이번의 행동반경을 제한시켰다.
그 틈을 타 각각의 각성자들이 와이번에게 각자의 공격을 퍼붓는다.
내가 이제껏 본 적 없는 압도적인 움직임들.
‘……너무 쉽게 끝날 거 같은데?’
언뜻 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
이곳에 있는 것은 대한민국 최강의 각성자들이니까.
하지만…….
-끼에에에에에에엑!!!!
블랙 와이번의 비명 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친다.
가죽의 견고함도.
부리의 날카로움도.
하나같이 보스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이상하군.”
내 옆으로 다가온 안환재가 말했다.
“원래 던전의 보스란 게 저렇게 쉬운 놈입니까?”
“저놈도 쉽다고 말할 놈은 아닐세. 다만……”
나는 던전의 보스를 본 적 없었기에 잘 알지는 못했지만, 안환재는 안다.
각 던전의 보스 주변을 지키는 수많은 정예 마물들.
그것들이 이 던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저 블랙 와이번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각 층의 클리어 조건이 까다로웠으니까, 보스는 상대적으로 쉽다던가 그런 건 아닐까요?”
“그런 거라면 좋겠다만.”
블랙 와이번의 허름한 둥지.
던전을 공략하는 각성자들에게 제공되는 최소한의 정보다.
각각의 새마다 저마다 다른 둥지가 존재한다.
블랙 와이번의 허름한 둥지.
저만한 보스 몬스터가 대체 왜 저렇게 보잘것없는 곳에서 지내는 걸까.
보스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엉성한 날갯짓과 움직임들.
‘만약에…….’
둥지가 시간이 흘러서 허름해졌고.
저 블랙 와이번이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라면?
고작 가설일 뿐이지만, 내 심장이 계속해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끼에에엑!!!
각성자들에게 제압당해 울부짖는 블랙 와이번.
저항이 심했는지 다들 어느 정도 지쳐 보이지만, 크게 다친 사람 없이 잘 마무리된 것 같다.
-키엑!!! 키에에엑!!!!
소성환이 와이번의 목에 도끼를 내리쳤다. 머리가 잘리며, 비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끝난 건가?”
“밖으로 나가는 포탈은?”
마지막 층의 조건은 하나같이 동일하다.
던전에 존재하는 보스를 죽인다.
클리어를 상징하는 포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조건이 있는 건가?”
“끝까지 지랄 맞네.”
“일단은 이놈 해체 작업부터 진행하자고.”
정말로 다른 조건이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크에에에에엑!!
-쿠어어억!
이 던전의 보스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들 대열을 갖춰라!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새끼를 잃은 두 블랙 와이번이 분노에 가득 찬 포효를 내지르며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 * *
이제야 확신했다.
방금까지 상대했던 블랙 와이번은 새끼에 불과하다.
그도 그럴게, 저기서 날아오는 두 블랙 와이번의 몸 크기는 그보다 배는 컸으니까.
“이런 미친……!”
“모두 한곳으로 뭉쳐!”
두 마리의 블랙 와이번 근처에는 각성자들이 3층에서 상대했던 비행형 마물들도 다수 존재했다.
저것이 보스 몬스터를 지키는 정예 마물들이다.
-키엑! 키에엑!
-키에엑!
목이 잘린 와이번의 시체를 본 한 놈이 각성자들을 향해 날아왔다.
“수녀님의 앞을 지켜라!”
백색의 갑주를 입은 성기사들이 앞을 막아섰다.
절제된 동작은 그 무엇의 침입도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견고했다.
캉!
갑옷에서 불꽃이 튄다.
이제껏 흠집 하나 나지 않던 갑옷이 녀석의 부리에 움푹 파여 들어갔다.
“각자 앞에서 막는 틈을 타서 물약을 섭취한다!”
“……그렇지만, 지금 물약을 마신다면 순식간에 당할지도 모릅니다!”
“황혼에서 제공한 물약이다. 괜찮으니까 빨리 마시도록!”
안쪽에 있는 각성자들이 물약을 마셨다. 이런 상황임에도 그들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온다.
“이건……!”
“……미쳤어.”
체력을 회복한 그들이 상황을 살폈다.
공중에 떠 있는 두 마리의 보스몹과 그들을 지키는 정예 마물들.
“……아무래도 더 이상 뭉쳐 있을 순 없을 거 같은데.”
비행형 정예 마물들이 거대한 바위를 들고 그들을 향해 내던졌다.
“산개!”
결국, 그들은 각자 흩어져 마물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블랙 와이번의 시선은 우리가 끈다! 그 틈을 타서 나머지 놈들을 처리해!”
“예!”
안환재가 이끄는 수호 길드원들이 한 마리의 블랙 와이번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스는 하나가 아니다.
나머지 한 마리의 분노한 블랙 와이번을 보며 정해연의 불꽃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나머지 하나는 황혼에서 맡는다!”
“정해연!”
소성환이 정해연의 옆을 노리던 블랙 와이번에게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블랙 와이번이 상공으로 회피했고.
소성환의 공격에 주변 나무가 쩌적! 갈라졌다.
“……고마워.”
“집중해. 이거 잘못하면 죄다 뒤질 거 같으니까.”
“응.”
‘이서진 님은…….’
그녀가 보아왔던 그의 모습들은 믿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것은 연금술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전사로서의 재능 또한 그러했다.
소성환과의 단기 훈련.
황혼의 어떤 엘리트들이라도 고작 그 정도 시간에 그만한 경지를 끌어올리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시간이다.
고작 그 정도 시간으로는 4층의 보스급, 정예급 마물에 맞서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걱정하지 말자.’
모두가 각기 흩어져 싸우는 상황.
당연히 이서진 또한 위험하겠지만, 그에게 붙어 있는 사람을 생각하자면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신성 길드장, 루비에르트.
2층에서 보았던 하루 동안의 광기 어린 행동들.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진심으로 이서진을 위하고 걱정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할 일은 하나뿐이다.
“……이 조류 새끼를 얼른 불태워버리고 저쪽으로 합류해야겠지.”
* * *
안환재를 필두로 한 여섯 명의 전투원들이 블랙 와이번을 향해 달려들었다.
작게 활공하고 있었지만, 안환재에게 문제는 없었다.
노인의 그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튼튼한 하체. 그것을 기반으로 한 도약이 블랙 와이번에게 닿을 수 있게 하였다.
부웅!
그가 공중에서 휘두른 대검에 블랙 와이번의 가죽에 상흔이 남았다.
‘얕아.’
아까 전 상대했던 새끼와는 다르게 날개를 이용한 움직임이 현란했다.
상공에서 우위를 잡았을 경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이 마물은 알고 있는 것이다.
새끼를 잃은 분노로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으면 좋았으련만…….
“길드장님!”
“알고 있네.”
날아갈 듯 가볍던 그들의 몸이 마치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무거워진 것이 아니다. 원래대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신속의 물약 효과가 끝났다.
상황은 더욱 불리해져 가고 있었다.
“큭!”
상처 입은 각성자들이 각자 배급받은 물약을 마시려고 했다.
먹는 즉시 효과가 발동되고, 신체 능력의 저하도 없는 환상의 물약.
아직 물약은 충분하다.
이것만 있으면 전투를 이어갈 수 있다.
승산은 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공중으로 날아오른 블랙 와이번 두 마리가 아가리를 벌렸다.
-끼에에엑!!
-키에에엑!!
“윽?”
“귀가?”
엄청난 굉음에 초인의 경지에 이른 각성자들도 괴로워했다.
단순한 소음 공격인가?
그런 것뿐이라면 오히려 좋았다. 물약을 마실 시간을 번 것이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 이런 미친!”
“병이 깨졌다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물약의 순도는 점차 낮아진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특수 가공된, 물약의 전용 용기.
마물의 타격에도 끄떡없는 그 병이 두 블랙 와이번의 굉음에 전부 깨져 버렸다.
“……몸이 무거워.”
그뿐만 아니라 거슬릴 만큼 몸이 둔해졌다. 단순히 신속의 물약 효과가 끝나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단순한 소음 공격이 아닌 ‘피어(Fear)’
블랙 와이번이라는 보스 몬스터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 능력이었다.
가뜩이나 열세인데 몸까지 둔해진다. 체력 또한 회복할 수 없었다.
안환재가 블랙 와이번을 노려보았다.
‘……확신이 들지 않는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 * *
“성자님!”
루비가 내게로 달려드는 마물의 머리를 철퇴로 내리쳤다.
온 힘을 실은 타격.
머리가 터져 버린 마물이 축 늘어졌다. 하지만 마물은 하나가 아니다.
곧바로 또 다른 마물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성자님! 도망치세요!”
평소의 말투가 아닌, 절박함이 담긴 소녀다운 말.
“제가, 이 루비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성자님만이라도 이곳에서 멀리 도망치세요!”
“…….”
“성자님!”
칼을 빼 들고 앞으로 나섰다. 나를 지키는 루비를 향해 닥쳐오는 부리.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검으로 쳐냈다. 겨우 쳐낸 것뿐인데도 팔이 저려온다.
매 순간순간 미래시가 발동하고 있다. 위기의 순간을 보여주는 콘택트렌즈.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지키다 죽을 위기에 처한 이루비를 끝도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물약은.’
-끄앙…….
언제든지 뱉을 수 있다는 듯이, 꼬물이가 그림자 속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꼬물이의 몸속에 있는 물약들은 안전했지만, 도저히 먹을 타이밍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도 이 더럽게 넓은 던전에 있는 마물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하아…… 성자님…… 제발 도망치세요…….”
지친 듯 숨을 헐떡이면서도 그녀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나, 이서진의 안전.
“…….”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성자라고 부르는 루비에르트.
왜 그녀가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위해 저렇게까지 행동하는지.
성자.
선택받은 자.
계시 속 인물.
지난 밤, 신백준이 말해준 내용들이다.
나는 그런 거창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평범한 사람이다.
“하아…… 성자님…….”
자신을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대해주는 정해연.
깐죽대면서도 동네 형처럼 친근한 소성환.
강인해 보이면서도 무언가 위태로워 보이는 안환재.
-좋은 오빠가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작지만 반가운 인연들.
여기서 죽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끄앙!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꼬물이가 무언가를 뱉어냈다.
물약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손전등 하나.
[현재 손전등의 숙련도가 가득 찬 상태입니다!]
[‘성스러운 빛을 발하는 손전등’의 업그레이드 조건을 공개합니다!]
[【만물의 주인】 이서진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존재할 것(5/5)]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업그레이드가 진행됩니다!]
“하하…….”
이제껏 보아왔던 업그레이드 퀘스트들보다도 어이없고, 어려운 조건이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믿어주는 사람이 살면서 몇이나 될까.
어쩌면 평생 완료할 수 없을 퀘스트가 단숨에 해결되었다.
새로 생긴 손전등의 기능을 보면서 작게 웃었다.
‘진짜 성자 같은 것은 될 수 없겠지만…….’
나는 만물의 주인이다.
내게 쥐어진 이 보잘것없는 손전등 하나를 그 누구보다도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성자님……? 성자님! 무얼 하시는 겁니까!”
나는 곧장 달려 비행형 마물의 등 위로 올라탔다.
“올라가!”
-끼에엑?
등을 마구 내려치자, 놈은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성자님!!”
이대로 떨어지면 죽겠다, 싶을 정도로 높게 올라왔다.
하늘에 떠 있자, 아래의 풍경이 보였다.
꺼져가는 불을 붙들고, 블랙 와이번과 대치하고 있는 정해연.
너덜너덜해진 갑옷을 입고 망치를 휘두르는 성기사단.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마물의 공격을 받아내는 안환재.
하나같이 위태로운 장면들이었다.
손전등의 스위치에 손을 올리고,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개방된 물체 간의 시너지가 발생합니다!]
[‘성스러운 빛을 발하는 손전등’과 ‘지친 심신을 치유하는 방석’이 서로에게 반응합니다!]
다행이었다.
이렇게 높은 곳이라면 딱히 들을 사람도 없을 테니까.
날뛰는 마물의 등 위에서.
아래쪽으로 손전등을 조준했다.
그리고 외쳤다.
“빛이, 있으라!”
마물들 사이로 고립된 마흔 명의 각성자들.
그들을 향해 하늘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43화
15. 빛이 있으라(6)
“……뭐지?”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전투 중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 중 하나였지만.
갑작스럽게 내리쬐는 그 새하얀 빛에 도저히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태양 빛인가……?’
아니, 다르다.
던전에서 비추던 그 인공적인 빛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찬란한…….
“……어?”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각성자 한 명이 자신의 몸에 생긴 변화를 알아차렸다.
“몸이……?”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깎여나간 체력과 상처들.
그것들이 실시간으로 치유되고 있었다.
어떻게……?
물약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혹시 저 빛 때문에?
열세에 처해 있던 각성자들의 몸에 힘이 점점 돌아오기 시작했다.
“으랴앗!”
소성환의 맹렬한 도끼질에 블랙 와이번의 살이 떨어져나왔다.
처음과는 달리 지친 기색의 모습.
각성자들에게 당한 크고 작은 상처들.
그것을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네놈들한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모양이네.”
소성환이 씨익 웃었다.
지금이라면 혼자서라도 널 썰어버릴 수 있을 거 같아.
그가 곧장 블랙 와이번에게로 달라붙었다.
“기회다! 지금 당장 몰아붙여!”
안환재와 수호 길드의 전투원들이 거센 기세로 블랙 와이번의 몸에 수많은 자상을 남기기 시작했고.
“신의 가호가 함께한다!”
지쳐 있던 성기사들이 적들을 향해 무자비한 징벌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건.’
정해연은 잠시 와이번의 상대를 소성환에게 맡겨두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빛으로 인해 눈부셔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하늘에는 누군가가 떠 있었다.
계속해서 바라보자, 점점 눈이 빛에 익숙해지며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해연에게 있어서 익숙한 인물의 형상이었다.
‘……서진 씨?’
비행형 마물의 위에서 위태롭게 자세를 잡고 있는 이서진의 모습.
마물이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흔들더니 이내 지상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서진 씨!”
정해연이 추락 지점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그보다 한 발 더 빠르게 행동한 사람이 있었다.
공략이 시작되고, 단 한 순간도 이서진을 시선에서 놓친 적 없던 그의 충실한 수녀.
이루비.
자신이 가는 길목을 막는 마물들을 뛰어넘으며 정해연 본인조차 낼 수 없는 속도로 한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성자님!”
“떨어진다! 떨어져!”
온갖 폼을 다 잡았건만, 역시 낙하의 공포는 어쩔 수 없었는지 꼴사납게도 이서진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아악!”
이내 잡고 있던 마물을 놓친 이서진이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키엑?
이루비의 작은 신체가 도약했다.
가볍게 마물의 머리를 밟은 그녀는 다시 한번 공중에서 날아올랐다.
“죽…….”
그녀의 손이 앞으로 뻗어진다.
“나 죽는…… 다?”
아슬아슬한 순간.
이루비의 자그마한 두 손이 공중에서 이서진의 몸을 받았다.
성인 남성의 무게를 제 새끼 잡듯이 가뿐하게 잡은 이루비가 백색의 머리를 흩날리며 땅으로 착지했다.
‘이게 공주, 아니, 왕자님 안기인가…….’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 이루비가 이서진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은 동화 속의 존재를 직접 만난 어린아이와 같은 반짝임이었으니까.
“성자님…… 성자님……!!”
이루비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할 말이 많은 듯이, 이서진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오는 말은 성자님. 단 하나뿐이었다.
-키…….
콰앙!
“…….”
그 와중에도 다가오는 마물의 기척은 놓치지 않고, 단숨에 제압해 버린다.
가녀린 겉모습과 대비되는 그 살벌함에 이서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뭐라도 해줘야 할 거 같지만…….’
지금은 아직 전투 중이었다. 지금은 우세하지만, 언제 상황이 다시 뒤집힐지 모른다.
그는 손전등을 확인해 보았다.
방금 한 번으로 손전등에 충전되어 있던 모든 힘이 소진되었다.
손전등이 꺼졌음에도, 여전히 하늘에는 찬란한 빛이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저것의 지속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을 것이다.
그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루비의 전력이 꼭 필요했다.
“수녀님. 이곳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다녀오시죠.”
“……단장님.”
신백준이 이서진과 이루비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서진의 곁에 서, 쾅! 하고 전투 망치를 바닥에 내려놓은 그가 말했다.
“절대로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하죠. 맹세하겠습니다, 수녀님.”
그 말에 이루비가 작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성자님께서 만드신 절호의 기회이지 않습니까.”
이서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이루비는 빠른 속도로 전장을 향해 달려갔다.
한 번의 공격을 막는 게 전부였던 이서진에 비해, 그녀는 철퇴를 휘두르는 족족 마물을 하나씩 죽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서진은 눈을 좁혔다.
“……아무래도 평범한 오빠 행색은 무리일 거 같은데요.”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하잖아.
작게 한숨 쉰 이서진의 말에 신백준이 투구 속에서 작게 미소 지었다.
신백준은 여전히 이서진에게 등 돌린 상태로 전투 망치를 바닥에 꽂은 채 전방을 주시했다.
‘맹세하겠습니다.’
이서진은 알지 못했지만, 그 말은 단순하면서도 특별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성기사가 ‘맹세한다’라는 말을 꺼낸다는 건 단 하나의 뜻을 의미한다.
자신의 한 몸을 바쳐 그 사람을 지키는 방패가 된다.
수녀, 루비에르트.
성자, 이서진.
‘……모실 사람이 하나 더 늘어버렸군.’
* * *
상황이 역전되었다.
“황혼 길드장!”
“못 도망가게 둘러싸세요!”
-키에에엑!
-끼에엑!
날갯짓을 할 때마다, 떠오르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달라붙는 각성자들.
두 마리의 블랙 와이번이 한곳에 모였다. 그들을 지키던 정예 마물들은 이제 더 이상 없었고.
몰려드는 마물들은 스무 명의 각성자들이 진을 펼쳐 이곳으로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이놈들만 남았군.”
블랙 와이번을 포위한 안환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까지 보였던 지친 기색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까 그 빛은…….’
전투 중이던 안환재 또한 그 빛 너머를 바라보았다.
남들보다 더욱 발달 된 시력으로 인해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서진. 그가 이 빛을 만들었다는 건가?’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자신을 옥죄어오던 그 불길한 기운의 마나.
만약에 그가 이 상황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면, 그때 보았던 그 마나를 이용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그가 하늘에서 행한 것은 그것과는 정반대되는 신성한 마나를 담은 빛이었다.
마치, 어린양들을 따스하게 보듬어주는 듯한.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 가는 자신의 몸이 지금만큼은 그 누구보다 강인해져 있었으니까.
당연히 버프 형태의 고유 능력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렇게 광범위하고, 효과적인 것은 그로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각성자의 고유 능력은 개인의 역량에 따라 그 활용과 세기가 달라진다.
‘그렇다는 것은…….’
블랙 와이번과의 전투에 드디어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그에 관해서는…….
그때, 그들의 옆으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키엑?
눈앞의 각성자들을 경계하고 있던 블랙 와이번 중 한 마리가 자신의 안면에 가해진 공격에 비명을 질렀다.
안환재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머지 블랙 와이번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해내고 있는 인물을 보았다.
‘신성 길드장…….’
“우리도 합류한다!”
“블랙 와이번을 토벌하라!”
꺼져가던 정해연의 불꽃이 다시 격하게 타올랐다.
깃털을 불태우며 검을 내리그었다.
달라붙은 불은 꺼지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한 휘두름.
분노에 빠진 블랙 와이번의 부리 공격에 정해연이 노출되는 순간.
콰앙!
루비에르트의 공격이 들어갔다.
끔찍한 고통에 다시 와이번의 관심이 돌아갔고.
서걱!
정해연이 곧바로 검에 힘을 실어 날개 한쪽을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주변을 둘러싼 각성자들이 기겁했다.
저들이 각 길드의 길드장이란 것은 알고 있지만 대체 저 무위는 무엇이란 말인가?
“……무슨.”
“우리가 끼어들 틈이 없는데……?”
한 마리의 보스급 마물을 두 명의 여성이 완벽하게 제압하고 있었다.
한쪽이 공격을 넣는 순간에 다른 한쪽이 완벽한 타이밍으로 적의 시선을 끈다.
마치 몇 년이고 서로 합을 이뤄본 듯한 움직임이었다.
누군가 본다면 서로의 생각을 읽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빈틈없는 협동.
‘이 감정은 대체…….’
실제로 정해연은 묘한 감각에 빠져 있었다.
무희의 움직임처럼 불꽃의 춤을 추던 그녀에게로 어떠한 상념이 흘러들어왔다.
환희, 기쁨, 희열, 존경심 그리고 행복감.
무시무시한 마물을 상대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플러스 감정이었다.
정해연이 루비에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이 너무나도 행복해서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이.
그제야 정해연은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이 감정이 루비에르트의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이 감정이 향하는 방향은 오직 한 사람만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이것도 빛의 영향인가?’
마치 서로의 정신이 연결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서진.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연금술사.
‘이번이 두 번째구나…….’
직접적으로 그의 아티팩트를 체험하게 된 것이.
그 빛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만들어낸 비장의 물건 중 하나일 것이다.
그때 앉았던 방석의 효과와 비슷했다.
거센 공격이 자신의 앞을 스쳐도, 마음은 더욱 차분해졌고.
지쳐가던 몸은 전투가 진행됨에 따라 오히려 회복된다.
곁에 있는 루비에르트가 어떻게 행동할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기에, 움직임에 막힘이 없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정해연도 루비에르트와 같이 미소를 짓고 블랙 와이번에게 달려들었을 뿐이었다.
안환재를 필두로 한 각성자들 또한 나머지 블랙 와이번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거대한 날개가 잘린 와이번에게선 더 이상 이 던전의 보스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살려달라고 요동치는 마물일 뿐이었다.
안환재가 반대편을 보았다. 합이 맞는 그들 사이로 끼어드는 것이 오히려 방해였기에, 기어코 두 명이서 보스급 마물을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제야 그들을 비추던 빛이 하늘에서 사라졌다.
“클리어!”
“이쪽도 클리어!”
각성자들의 근처로 바깥으로 나가는 포탈이 생성되었다.
하지만 아직 할 것이 남았다.
근처에 있는 마물도 전부 제압되고, 모든 각성자들이 한곳으로 모였다.
“대체 아까 그 빛은 뭐였던 거야?”
“분명히 하늘에 누군가 떠 있었던 거 같은데…….”
“너네 혹시 들었…….”
그들이 먼저 꺼낸 주제는 4층 던전에 걸맞지 않은 난이도의 보스 이야기가 아닌, 전투 도중 하늘에서 터져 나온 신비로운 빛에 관한 내용이었다.
“서진 씨!”
“성자님!”
그들에게로 거대한 체구의 성기사 한 명과 그에게 안겨서 정신을 잃은 이서진이 다가왔다.
“서, 서진 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단순한 마나 탈진입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신백준은 평평한 바위 위에 그를 눕혔다.
정해연과 루비에르트가 곧장 기절한 그에게로 다가가 옆을 지켰다.
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도, 어째선지 두 사람의 마음이 편안해져 갔다.
‘…….’
그런 둘의 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안환재가 소리 높여 외쳤다.
“4층 던전, 블랙 와이번의 허름한 둥지 공략을 여기서 종료한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44화
16. 순둥이(1)
-!@#!@$
-$%@#%
……뭐지?
아, 맞아. 정신을 잃었었지.
아이기스의 방패를 다루며 느꼈던 익숙한 감각이다.
마나 탈진.
……아무래도 이놈의 손전등을 발동시키는 데 마나가 필요해진 모양이다.
그래도 손해 보는 기분은 아니다.
‘성능은 확실했으니까.’
* * *
「성스러운 빛을 발하는 손전등+1」
설명: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사용할 경우. 손전등에서 성스러운 빛이 나온다.
그 세기는 충전도에 따라 다르며 6시간을 기준으로 최대치가 충전된다.
*악惡 성향의 존재에게 일정 수준의 데미지와 디버프 효과를 부여합니다.
*선善 성향의 존재에게 일정 수준의 버프 효과를 부여합니다.
*이 기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시동어가 필요합니다.
▷시동어 : 빛이 있으라.
* * *
충전 최대치가 늘어났고, 추가 효과가 생겨났다.
쓰여 있는 그대로 빛을 쐰 사람에게 버프를 줄 수 있다.
지속 시간은 그렇게 길어 보이진 않았지만, 빛에 노출되는 전원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실로 사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개방된 물체 간의 시너지가 발생합니다!]
[‘성스러운 빛을 발하는 손전등’과 ‘지친 심신을 치유하는 방석’이 서로에게 반응합니다!]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 * *
「성스러운 치유의 빛을 발하는 손전등」
설명: 2단계 업그레이드가 완료된 두 물체의 능력 간의 시너지가 발생하며, 기능이 추가되었다. 성스러운 빛에 노출된 인원들의 심신을 치유한다.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같은 편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존재에 한해 적용 가능.
* * *
처음에는 정말로 이런 싸구려 방석이 없다고 욕했었는데.
이제는 절대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효자다, 효자.
그만큼 빛에 적용되는 방석의 추가 효과는 완벽했다.
전투 중에 물약을 마시지 않아도, 치유가 된다는 거니깐.
……이거면 더 이상 내가 앞에 나설 필요는 없겠네.
원래 버프 캐릭터는 지켜야 할 최우선 순위 중 하나다.
그나저나.
같은 편이라고 인식 한 사람에게만 적용된다니 진짜 다행이다.
기껏 패놓은 블랙 와이번이 치유되어서 마구 날뛴다고 생각하면 그보다 심각한 것도 없다.
-!#@$!
-@#$%
머리에 울리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찡그려진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야?
정신이 들긴 한 것 같은데, 눈이 잘 떠지질 않는다.
혹시 부작용이라도 있던 걸까.
정신은 깨어도, 몸은 깨어나지 않은 걸 수도 있다.
신기한 감각이네.
그 상태로 잠시간 아무 생각이라도 하고 있자니, 점점 소음이라고 생각했던 소리가 뚜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않아요?”
“……입니다.”
……?
누군가 내 볼을 꾸욱 누르는 것이 느껴진다.
“서진 씨, 얼굴이 확실히 이전보다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저로서는 성자님을 만나 뵌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터라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자님이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든 제게 있어서는 성자님일 뿐입니다.”
“그래요?”
“저 또한 해연 님처럼 성자님을 보다 더 일찍 알현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흐흠. 제가 서진 씨랑 좀 친하긴 한 편이죠. 저희는 치, 친구니까요.”
그때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우리 형은 아주 잘 자고 계시는구만. 던전에서 이렇게 평화롭게 잘 수 있는 사람은 형뿐일 거야.”
특유의 깐죽거리는 말투.
내가 정신을 못 차려도 저건 잊을 수 없지.
소성환이 분명했다.
“해체 작업이 거의 다 완료되었대. 아무래도 이제 곧 나가야 할 거 같은데, 깨우는 게 어때?”
“……고생이 많으셨는지, 아직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너의 그 쓸데없는 체력을 서진 씨에게 옮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야…….”
“……나는 쓰러져 있어도 된다는 거냐?”
“걱정하지 마. 대충 울퉁불퉁한 바위 위에 던져놔 주긴 할 테니까.”
“……진짜 너무하네.”
“언제쯤 일어나시는 걸까.”
시무룩한 소성환의 목소리.
사실 벌써 일어나 있었다.
나를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일어나자니 뻘쭘해서 이러고 있는 거지.
“그래? 흠…… 내가 보기엔 이미 깬 거 같은데.”
……평소에 눈치는 더럽게 없으면서, 이상한 곳에서 알아채는 게 빠르다.
“굳이 깨우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성자님을 업고 바깥으로 나가겠습니다.”
루비의 목소리.
아까 왕자님 안기를 당한 거로 모자라서, 저 조그만 몸에 업히기라도 한다면 내가 어떻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이제 슬슬 자연스럽게 일어나볼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소성환의 말이 이어졌다.
“아. 혹시 그거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 말이십니까?”
“그게 뭔데?”
소성환의 말에 두 여성이 관심을 가졌다.
“우리 한창 싸울 때 위에서 들렸던 소리 말이야. 그, 뭐였더라? 분명히 빛 뭐시기 였는데…… 아! 빛이 있…….”
아니. 저 양반이!
나는 곧장 기지개를 피며 일어났다.
막상 하고 나서야 기절 후에 깨어난 사람이 할 말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으아아! 잘 잤다. 잘 잤어.”
……자연스러움은 하나도 없네.
“뭐야, 진짜 일어났네?”
소성환이 나를 보며 히죽 웃는다.
저 표정, 분명히 들었다.
……그게 들렸다고?
각성자의 시력과 청력이 일반인보다 발달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만한 거리에서 말한 게 들렸다면…….
‘아…… 전부 들었단 거잖아…….’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을 참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정해연과 이루비.
시선이 마주치자, 정해연의 눈이 잠시 옆으로 돌아간다.
‘……그래. 모르는 척해주는 게 어디냐.’
“성자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응. 단순히 마나 탈진 때문에 그런 거니깐.”
꼬물이에게 마나 물약을 받아서 마시면 한결 나아지겠지만, 보는 시선도 있고 이미 전투도 끝난 마당이라 별로 필요성을 못 느꼈다.
내가 일어난 것을 확인 한 안환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일어났는가?”
“예. 다들 고생하고 있는데, 저 혼자 쉬는 거 같아서 죄송하네요.”
“아닐세.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여유롭게 대화하는 일조차 없었을 테니까.”
안환재는 내게 따로 그 빛에 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고 하듯 깊이 고개를 숙였다.
내가 아닌, 옆에 있는 루비에게로.
“정말 미안하군. 신성 길드장. 내가 큰 오해를 하고 있었네.”
안환재가 고개를 숙이는 걸 본 정해연과 소성환이 크게 눈을 떴다.
저런 행동을 쉽게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하셨나?
그의 행동에 루비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그러고는 나를 보며 한차례 웃고는 평소와 같은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성자님. 이번에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 * *
“뭐야? 진짜 이렇게 바로 돌아가게?”
“예. 아무래도 좀 피곤해서요.”
“하긴. 형이 가장 고생한 거 같긴 했지. 빛이…… 크큭. 아~ 우리 형, 진짜 최고야. 내가 형 하나는 제대로 뒀다니까?”
던전 안에서는 진짜 멋졌는데…….
무슨 끝나자마자 변신 풀린 것 마냥 저렇게 얄밉냐.
보다 못한 정해연이 소성환을 걷어찼다.
“악! 잠깐, 잠깐만!”
잘한다. 우리 정해연. 이 참에 몇 대 더 걷어차라.
“이거 받게나.”
안환재가 나에게 거대한 배낭 여러 개를 건넸다.
“아무래도 크기가 크기다 보니 몇 등분으로 나눠서 넣을 수밖에 없더군.”
“……전부 주시는 겁니까?”
“이걸 위해서 온 것 아닌가.”
블랙 와이번을 상대하면서 가장 골치 아팠던 건 역시나 저 날개다.
웬만한 가죽보다도 튼튼하고 날카로웠으니까.
분명히 그놈의 사체 중에서도 가장 값어치 있는 것이겠지.
배낭에 들어 있는 날개는 총 여섯 개. 세 마리의 블랙 와이번 날개가 전부 들어 있었다.
이렇게 전부 주면 다른 길드원들의 불만은 없나?
……저거, 저거. 따봉 날리는 거 봐라.
아무래도 모두 납득하는 분위기다.
“조만간 또 볼 수 있으면 좋겠군.”
“예. 식사라도 한번 하시죠.”
던전에 들어오기 전까진 이것저것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는데.
같이 사선을 넘어서 그런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실제로 안환재 주변에서 느껴졌던 묘한 느낌의 안개가 걷힌 느낌도 들고.
“성자님.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응. 들어가서 푹 쉬고.”
이제는 익숙해진 루비의 인사를 받으며 집으로 향했다.
* * *
블랙 와이번의 날개를 바리바리 싸 들고 곧장 스윗 하우스의 문을 열었다.
혹시라도 순둥이의 알이 지붕을 뚫지는 않았을, 계속해서 걱정했었다.
다행히 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괜히 울컥한다.
순둥이를 부화시키겠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 단계였다.
마치 장인의 그것을 보듯이 한 땀 한 땀 블랙 와이번의 날개를 빻기 시작했다.
……이거 더럽게 안 되네.
보스급 마물의 날개라서 그런지 너무 튼튼하다.
결국은 날개채로 물약 속에 넣기로 했다. 원래 사골국을 끓일 때도 뼈째로 넣지 않는가.
순둥이가 있는 곳에 보관해뒀던 물약들을 쏟았고.
블랙 와이번의 날개 두 쪽을 투하했다.
“오…….”
날개는 물약에 들어가자마자 천천히 녹기 시작했다.
물약 또한 점점 줄어든다.
알이 이것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지막 정화 과정이 진행됩니다!]
[멸망용의 알이 블랙 와이번의 날개를 흡수합니다!]
[정화율 99.1%]
[정화율 99.2%]
[…….]
점점 오르기 시작하는 정화율.
그에 맞춰서 그동안 미동도 없던 알이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둥아, 살아 있었구나!
저 메트로놈을 보자니, 그동안의 고생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다.
물약이 점점 줄어들고, 정화율이 끝을 달려가고 있을 때.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순둥이의 알의 근처에서 검은 기운이 사르르 피어오르고 있었다.
[멸망용 ‘?????’에 의해 알에 걸려 있던 고대 마법이 발동합니다!]
[정화율이 하락합니다!]
[정화율이 하락합니다!]
……뭐?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이 정화율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가득 차 있던 물약 또한 점점 검게 물들기 시작한다.
멸망용…….
순둥이가 아니라, 이 알의 본래 부모가 걸어 놓은 고대 마법이 정화를 방해하고 있었다.
대체 왜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저 개 같은 놈이 다 된 순둥이에 재를 뿌리려 하고 있다!
나는 곧장 배낭에 있던 네 쪽의 날개를 다 꺼냈다.
냉장고에 있는 물약들도 전부 붓는다!
그러자 다시 정화율이 오르기 시작한다.
[정화율 99.7%]
[정화율 99.8%]
쩌적!
“……?”
소리와 함께 거대한 알의 한 부분에 금이 갔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도, 알이 부화하려 하고 있다.
아무래도 저 빌어먹을 멸망용이란 놈이 건 마법은 정화가 완전히 완료되기 전에 강제로 알을 부화시키려는 모양이다.
“잠깐! 잠깐만!”
나는 상 위에 있던 테이프를 금이 간 곳에 다급하게 붙였다.
……이런 거로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어떻게 하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아니, 더 할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라, 생각!
이내 한 가지가 번뜩 떠올랐다.
‘……개방권.’
여차할 때를 대비해서 아직 사용하지 않은 하나의 개방권이 있었다.
그것도 ‘특별’이라는 이름이 붙은 개방권이. 시도할 생각을 해보진 않았지만, 만약에 이 알에 개방권을 사용할 수 있다면……?
[해당 물체에 개방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미친! 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이 마지막이었기에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상황은 가속화되었다.
쩌적! 쩌저적!
거대한 알의 중앙에 미칠 듯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알이 좌우로 미친 듯이 흔들리며, 집 안에 진동이 일어난다.
와락!
알을 끌어안았다.
쩌적!
“어…….”
이내 거대한 알이 반으로 갈라졌다.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알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순둥아? 순둥아?”
아니,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알이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뿐이었다.
거대한 알 속에서 쫑긋! 하고 작은 뿔이 튀어나왔다.
“순둥아?”
앙증맞고 귀여운 두 발이 알의 껍질을 붙잡았다.
조금씩.
안에 있던 생명체가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순둥아? 순둥이 맞니?”
생명이 태어나는 그 경이로운 장면에 나는 넋 놓고 이름만을 부를 뿐이었고.
“……순둥아?”
마침내 얼굴만을 빼꼼 드러낸 멸망용, 아니, 순둥이가 외쳤다.
“나 순둥이 아닌걸!”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45화
16. 순둥이(2)
이서진이 집으로 향했을 때.
남아 있는 세 명의 인원은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그들의 입이 열렸다.
“갔군.”
“워낙 종잡을 수 없는 분이시니까요.”
“성자님께서는 존재만으로도 세상에 이로우신 분. 저희 같은 사람들이 예측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안환재가 그 둘을 보고 말했다.
“어떤가. 잠시 대화라도 하지 않겠는가.”
“성자님께서 제게 휴식을 명하셨기에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습니다.”
신성 길드장, 루비에르트는 그 말과 함께 성기사단을 데리고 돌아갔다.
이서진, 그에 관련된 대화를 하면 곧잘 끼었지만, 그 외에는 일절 관심조차 없는 모습이다.
안환재가 작게 한숨 쉬었다.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저자도 마찬가지로 보이네만.”
“하하…….”
2층에서의 일이 떠오른 정해연은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결국, 안환재는 정해연과 단둘이 대화하기 시작했다.
이서진의 이야기가 아닌, 이번 던전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무엇이 말이죠?”
“아마 이 자리에서 4층 던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겠지.”
나오는 주기가 드물다뿐이지, 4층 던전은 이제껏 몇 번이고 나타났다.
하나같이 그 아래층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난이도였지만, 오늘 그들이 겪은 이 던전 정도는 아니었다.
각 층의 클리어 조건 또한 기껏해야 토벌 같은 간단한 것들뿐이었다.
무작위 워프라는 이런 함정 요소는 이제껏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고작 1층에서.
겪어보지 못한 미지.
엘리트인 그들이 방심하고, 대응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다.
“아마도 이 던전의 수준을 생각해 본다면…… 5층 던전 정도가 아닐까 생각되는군.”
“……5층 던전이요?”
“그래. 딱 한 번 경험해 본 적이 있지.”
이제껏 지구상에서 나타난 가장 큰 규모의 던전은 6층.
미국의 영토였고, 세계의 유망한 각성자들을 수없이 잡아먹은 괴물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보다 한 층 낮은 5층 던전.
대한민국에서 또한 총 두 번 열린 적이 있었다.
그곳 중 한 곳에 수호 길드가 지금처럼 참가 자격을 얻고 참가했었다.
정예 중의 정예만 골라서 참가했었지만.
각성자들이 대부분 중상을 입거나 사망했던 끔찍한 곳이었다.
결과적으로 던전의 클리어는 성공했으나.
결국 지속적인 초기화 작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던전의 코어를 부숨으로써 던전 자체를 붕괴시켰다.
그곳에서 지속적으로 나올 마물의 사체와 마석을 생각하자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 고집부리다가 참사가 벌어진 후에 수습하려고 해도 이미 늦었을 테니까.
정해연은 안환재의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정해연으로서는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때 그녀는 너무도 어렸으니까.
만약 지금 그녀가 그곳에 들어가게 된다면 어떨까.
모르겠다.
고작 4층 던전에 쩔쩔매는 자신이 그런 곳에서라고 활약할 수 있을까?
“거기다가 방금 들어온 소식이다만, 이번에 전국에서 3층 규모의 던전이 새로 나타났다는군.”
“정말입니까?”
의문이 들었다.
이걸 왜 자신한테 알려주는 거지?
지금 당장은 함께 싸웠을지 몰라도 원래는 경쟁 길드다.
던전이 나타났다면 길드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선점하는 것이 맞다.
곧이어 나오는 안환재의 말에 정해연은 그가 말을 꺼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세 개.”
“……!”
“총 세 개의 3층 던전이 새로 등장했다는군.”
이전에 황혼에서 공략했던 타락한 페어리의 무덤 또한 3층 던전이었다.
수호 길드와 소유권을 가지고 경쟁할 정도로 희귀한 층의 던전.
“그 밖에도 1, 2층 규모의 던전이 여러 개. 경쟁이고 뭐고, 이제는 오히려 타 길드에게 맡아달라고 부탁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르네.”
“…….”
기존에 표시된 층보다 더 난이도가 높아지고.
이전과는 다르게 높은 층의 던전이 이곳저곳 나타난다.
지금이야 좋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각성자들이 얻을 것은 많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다면?
현재의 각성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의 던전이 나타난다면?
“재앙이 벌어질지도 모르겠군요.”
“그래. 당장 우리 또한 그자가 없었다면 이곳에서 당할 뻔하지 않았는가.”
“보다 못한 서진 씨가 저희를 도와주시긴 하셨지만, 언제까지고 그분에게 의지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 의지할 수만은 없지.”
안환재는 손자, 손녀를 떠올렸다.
자신의 뒤를 이어갈 믿음직한 다음 세대의 각성자.
재능이 넘치고, 실력 또한 날이 지날수록 좋아지고 있었지만…….
그래 봤자, 그들뿐이다.
또 다른 인재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던전을 공략하는 것은 혼자가 아니다.
그를 받쳐주고, 등을 맡길 동료가 필요한 것이다.
‘아까 황혼 길드장과 신성 길드장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단 두 명이 보스급 마물을 압살할 정도의 팀플레이.
모든 각성자들이 그런 식으로 합을 맞출 수 있다면 어떨까.
이제껏 각성자들은 따로 교육을 받지 않았다.
대부분이 던전에 들어가 실전을 겪고, 몸으로 직접 배운 것들이지.
안환재 또한 그러했고.
대부분의 길드들 또한 그러했다.
교육 시설의 부재.
안환재가 마음속으로 고민하고 있던 문제에 답을 내렸다.
“이번 던전이 끝나고,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네.”
“예?”
평생을 던전에서 살다 죽을 사람인 줄 알았건만…….
정해연이 놀란 눈으로 바라봤고.
안환재가 이어서 말했다.
“각성자들을 교육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 걸세.”
“…….”
“더 안전하고, 체계적인 던전 공략을 위해서 말일세.”
생각해 본 적은 있다.
하지만 직접 그것을 실행한 사람은 없었다.
아니,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수호 길드장이라면…….’
그가 가진 인지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정해연에게 물었다.
“어떤가. 함께할 생각 없나, 황혼 길드장.”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다.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등장할 각성자 교육 시설.
그로 인한 이득은 둘째 치더라도, 그녀 또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정해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일단락되자, 무언가 떠올랐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런 게 또 있었다.
“이제는 소개팅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안 하시네요?”
“호오. 관심 있는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가능하네만.”
“아뇨. 사양하겠습니다…….”
“나도 싫다는 사람한테 굳이 강요할 생각 없네.”
“……전에도 몇 번이고 거절했습니다만.”
“그랬었나? 기억이 잘 안 나는군. 허허.”
‘역시 능구렁이 같은 양반이야…….’
정해연 또한 돌아가고, 혼자 남은 안환재가 누군가를 생각하며 웃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소개팅이라는 말은 좀 부담스럽겠군…… 가벼운 식사 자리 정도가 좋겠지.”
* * *
“나 순둥이 아닌걸!”
“…….”
내가 놀란 눈동자로 쳐다보자, 밖으로 나왔던 순둥이의 얼굴이 다시 안쪽으로 다급하게 들어갔다.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순둥이가 아니다.
혹시 뭔가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마지막 순간.
알이 부화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정화율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99.9%까지 정화된 것은 봤지만…….
만약 무언가 잘못되어 순둥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쑤욱-
“앗!”
“뭐야. 역시 순둥이 맞잖아.”
는 무슨.
알 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순둥이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순둥이는 나를 보자마자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이내 작은 두 앞발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자신의 두 눈을 가린다.
자기 시야에만 안 보이면 숨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귀엽네.’
저만한 크기의 알이다.
대체 어떤 드래곤이 나올까 궁금했는데, 막상 나온 것은 작디작은 크기의 해츨링이었다.
‘해츨링이라 부르는 게 맞겠지?’
닭이면 병아리.
개면 강아지.
고양이면 떼껄룩.
드래곤이면 해츨링.
누구에게 물어봐도 똑같이 대답할 모범 답안이다.
‘응. 역시 순둥이가 맞아.’
매일 같이 작은 알을 끌어안고 자던 나다.
막상 커지고 난 후에는 안고 자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지만, 순둥이 특유의 따스함은 부화한 후에도 똑같았다.
“……!”
공중에서 짧은 다리가 바둥바둥거리고, 꼬리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순둥이는 계속해서 손가락 틈새로 나를 확인하다가, 다시 가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방긋 웃으며 순둥이와 아이컨택을 했다.
“반가워. 순둥아.”
줄곧 바라왔던 순간이다.
고작해야 알에 불과했던 이 녀석에게 이렇게 애정을 주게 될 줄 몰랐다.
한 때는 멸망용이란 것에 기겁해 없앨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귀여운 애가 멸망은 무슨 멸망이겠어.’
귀여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멸망시킬 순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용은 막 태어났을 때부터 말을 할 줄 아는 건가?
막상 태어났다지만, 나는 순둥이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순둥아. 다시 한번 더 말해주면 안 돼?”
“……,”
부끄럼이 많은 건지, 아까 들었던 건 내 환청이었는지.
순둥이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이라고 하듯, 다른 소리가 울렸다.
꼬르륵-
그제야 순둥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배고파.”
* * *
“순둥아, 맛있어?”
“응!”
뭘 주면 좋을까 하고 고민했다.
마물의 사체를 주자 순둥이는 기겁을 하며 다시 알 속으로 도망쳤다.
분명히 계속해서 이걸 먹어왔는데 말이야.
결국에 내가 줄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고 사둔 젖병에 분유와 물약을 일정 비율로 섞어서 순둥이에게 주었다.
두 손에 든 젖병을 계속 떨어뜨리는 탓에, 결국 내가 들어서 먹여주기로 했다.
저리 좋을까.
“순둥아. 천천히 먹어야지.”
“응!”
혹시 먹을까 하고 여러 마물들도 준비해 놨었는데…….
다시 가져가라고 해야겠네.
“많이 먹어, 순둥아.”
허겁지겁 먹던 순둥이가 그 말을 듣고 멈칫하더니, 나를 보고 말했다.
“나 순둥이 아니야!”
“그래, 그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알에서 처음 태어나자 하는 말이 저거라니…….
나로서는 꽤나 충격이었다.
언제나 순둥이, 순둥이 불러와서 그것 외에는 딱히 부를 만한 호칭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멸망용.
그런 이름으로 순둥이를 부르고 싶진 않았다.
“그럼 우리 순둥이 이름이 뭔데?”
최대한 나긋한 목소리로 순둥이에게 웃으며 물었다.
먹는 것을 멈춘 순둥이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말했다.
“몰라!”
응. 그렇구나.
모를 수도 있지.
마침내 밥을 다 먹은 순둥이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내 집을 확인했다.
“여긴 어디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밥을 주었기 때문일까.
처음에 나를 대했던 것보다 경계심이 훨씬 줄어 있었다.
“우리 집.”
“우리 집?”
그렇다. 우리 집이다.
이제는 나만 살기에는 너무도 넓어진 곳.
앞으로는 순둥이랑 함께 살아가게 되겠지.
이렇게 작은 애라면 여전히 넓겠지만 말이야.
“너는 누구야?”
올 것이 왔다.
저 질문을 태어나자마자 받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보다 ‘너’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애라지만, 괜스레 섭섭하고 그러네.
날 누구라고 소개하면 좋을까.
“순둥이랑 줄곧 같이 있던 사람.”
“사람? 넌 사람이야?”
“응.”
순둥이는 자신의 꼬리와 손을 만지면서 이리저리 확인하더니 마치 모르던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나도 사람이구나!”
동그란 눈동자를 보자니, 역시 용이라도 애는 애다 싶었다.
말을 한다고 해서 성숙하다고 느꼈지만, 이제 태어난 지 하루도 안 된 아이일 뿐이다.
“아니, 넌 사람은 아니지.”
“사람이 아니야! 그럼 난 누구야?”
드래곤.
멸망용.
세상을 파멸시키는 존재.
그런 것보다 역시 더 어울리는 이름이 있었다.
“순둥이.”
“그게 정말 내 이름이야? 순둥이?”
……또 충격받을라. 조금 돌려 말하자.
“……이름은 아니고, 애칭 같은 거지.”
“애칭이 뭔데?”
“소중한 존재를 부를 때 하는 말.”
“내가 소중해?”
이 질문에는 가볍게 대답할 수 있다.
“응.”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뜬 순둥이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했다.
“그럼 넌 내 아빠야?”
“응?”
새삼 드는 의문이다만, 막 태어난 애가 저런 말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기분이 좋으면 알이 흔들렸을 때부터, 혹시 내 말을 알아듣는 것은 아닐까 생각은 했다만.
난 순둥이의 아빠가 아니다.
내가 아빠라면 정체도 모를 그 멸망용이란 놈과 교배를 했다는 의미니깐.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순둥이의 얼굴이 울상이 되어 간다.
“……아빠가 아니야?”
고민스러웠다.
내가 과연 이런 대답을 해도 될지.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진짜 아빠가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행동은 해줄 수 있으니깐.
……살면서 이 대사를 뱉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임 유어 파더.
“내가 네 아빠다.”
“와!”
그제야 순둥이가 내 가슴팍으로 뛰어들었다.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46화
16. 순둥이(3)
4층 던전에 갔다 온 이후로 며칠이 지났지만, 나는 그동안 집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누구한테 말하자면 방구석 폐인이냐고 들을 수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자. 여기서 먹을 수 있는 거랑 먹을 수 없는 게 뭐라고 했지?”
“으응…….”
나는 휴대전화로 사진 두 개를 순둥이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잘했어.”
순둥이가 화면 위쪽을 가리켰다.
화면에는 위아래로 각각 사람과 먹음직스러운 음식 사진이 있었다.
참고로 사람은 소성환의 사진을 사용했다.
‘……교육은 확실하게 해야지.’
이제 막 태어나서일까, 순둥이는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 같이 살아가야 하는 만큼,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기초 지식들은 필수였다.
“와아! 맞췄다!”
앙증맞은 뿔.
짧은 팔다리.
좌우로 흔들리는 꼬리.
커다란 눈동자.
멸망용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순둥이의 몸 색은 온통 새까맣다.
“아빠는 왜 안 까매?”
이따금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매우 곤란했다. 인체의 신비부터 가르쳐줘야 할까…….
깨진 알 속에 곧잘 숨곤 했던 순둥이는 이제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호기심을 표출했다.
참고로 알은 집 한쪽에 고이 보관해 둔 상태다.
개방권을 썼는데도 별다른 상태창이 나타나질 않는 게 이상했지만.
순둥이의 허물 같은 건데 버릴 수는 없지.
“이거 익숙한 느낌이야!”
방석 위에서 폭신하다며 밝게 웃는 순둥이를 보자니 나 또한 미소가 지어졌다.
“우와아…….”
순둥이는 현재 방석에 앉아 특제 우유가 든 젖병을 빨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중이다.
미래가 아닌, 평범한 TV 프로다.
“재밌어?”
“응!”
이런 모습을 볼 때면 괜히 가슴이 아팠다.
순둥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모습이 모습인지라, 밖으로 나갈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케이지…….’
같은 것은 조금 그렇지. 정 안 된다면 비슷한 거라도 찾아봐야겠지만.
순둥이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내 가족이다. 가족.
케이지에 가둬서 데려간다는 방식은 아무리 그래도 이상했다.
……대신 목줄이라면.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래.
띠링!
귀여운 햄스터 이모티콘과 함께 메시지가 도착했다.
[서진 씨. 언제쯤 시간 괜찮으실까요?]
“끄응…….”
안환재도 그렇고, 정해연도 그렇고 만날 사람들이 많았다.
바쁘다는 이유로 일주일 째 집에서 순둥이랑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집으로 부를 수도 없고.
띠링! 띠링! 띠링!
앙칼진 고양이 이모티콘이 계속해서 올라온다. ……이런 걸 보내는 사람은 하나뿐이지.
[야.]
[야야야야야. 서진서진서진.]
[왜 이리 전화를 안 받아!]
[나 심심해. 놀아주라, 응?]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이태영 빼고!]
[(기프티콘)]
[어. 확인했다! 야. 보고 있는 거 다 알아!]
……얘도 참 할 일 없나 보네. 문자 폭탄을 받으니 정신이 해롱해롱해진다.
이태영이 맡고 있는 그놈도 슬슬 처리할 때가 되었으니 진짜 나가긴 해야 한다.
“와아…….”
‘그렇다면 순둥이를 집에 혼자 둬야 한단 건데.’
불안해도 너무 불안했다.
순둥이.
누군가 보면 마물이라고 부를 해츨링을 맡길 만한 사람…….
정해연.
이루비.
이유지. 아 얘는 제외하고.
‘루비라면 들어주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좀 그랬다.
고민하던 끝에 문득 방법이 떠오른다. 굳이 사람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꼬물아.”
내가 이름을 부르자, 집 안에 있는 가구 틈에서 검은 생명체가 튀어나왔다.
-끄앙!
순둥이와 비교해도 한참 미니멀한 사이즈.
특유의 포즈로 등장한 꼬물이를 보며 순둥이도 마찬가지로 두 손을 들었다.
“우와! 맛있는 거다!”
-끄앙?
“먹는 거 아니야. 순둥아.”
역시 예상했던 대로 순둥이는 꼬물이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도망 다니는 꼬물이를 네 발로 이리저리 쫓아다닌다.
나는 도망가는 꼬물이를 한 손으로 붙잡았다.
-끄앙! 끄아앙!!
……얘가 주인한테 화내기는.
“자. 순둥아.”
“감사합니다아!”
“그래. 잘했어. 누군가한테 좋은 걸 받을 때는 그렇게 인사하는 거야.”
“응!”
한번 말하면 ‘톡’ 하고 알아들으니 진지하게 천재가 아닐까 싶었다.
-끄앙! 끄아악앙!
“하핳. 재밌어!”
……왜 비명 소리가 들리는 거 같지.
순둥이의 손에 붙잡혀 오도 가도 못 하는 꼬물이를 향해 내가 말했다.
“꼬물아. 네가 순둥이 잘 봐줄 수 있지?”
-끄앙?
“일이 좀 생겨서, 아무래도 조금 나갔다 와야 할 거 같아.”
“아빠. 나가? 나도 나갈래!”
“……순둥이는 다음에 데리고 가 줄게. 밖은 우리 순둥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거든.”
“……힝.”
진짜 가슴 아프네. 빨리 방법을 찾던가 해야겠다.
어린아이라면 자기도 나가고 싶다며 떼를 쓸 만도 하건만 저렇게 고개만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더욱 미안했다.
며칠간의 설명 끝에 순둥이는 본인이 나와 조금 다른 면이 있단 것을 이해한 것이다.
“올 때 맛있는 거 사올 테니까. 순둥아.”
“맛있는 거? 저거 말하는 거야?”
[오늘도 고생하는 당신을 위해! 달콤한 포도 주스 한 잔 어떠세요? 그레이트 그레이프!]
마침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일전에 한 번 먹고 입에 안 맞은 기억이 있는 음료수다.
광고를 하는 사람은 연예계 쪽에서 알아주는 모델.
‘……저런 거보다 내가 만든 음료수가 더 맛있지 않나.’
“그건 못 먹는 거!”
“잘했…… 아니, 먹을 수 있는 거야, 순둥아…….”
어째 저걸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이야…….
다들 미적 감각이 조금 이상한 것 같다.
순둥이도 드래곤이라 조금 입맛이 다른가.
[오늘 잠시 시간 될 거 같아요.]
[정말요?]
정해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곧장 오는 답변.
가까운 곳에 타고 갈 차를 보낸다고 한다.
“부우웅~”
마치 비행기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꼬물이를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을 보자니, 잠깐이라면 괜찮겠다 싶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순둥아, 옆으로 와 봐.”
“왜?”
“우리 귀여운 순둥이랑 사진 하나 찍어야지.”
“사진? 사진이 뭔데?”
“이런 거.”
찰칵!
그 소리에 놀란 듯 눈이 커진다.
“여기 내가 있어! 아빠도 있다!”
정확히는 꼬물이도 있었다.
여러 명이 찍히면 위치 추적이 안 되던데…….
다시 한번 찍어야겠네.
한 손으로 순둥이를 안아 들고 사진 한 장을 더 찍었다.
앨범을 누르자 확인되는 위치.
좋아. 이 정도면 괜찮겠네.
“그럼 우리 순둥이. 꼬물이 말 잘 듣고 있어야 한다.”
“응!”
-끄아앙!
……뭐, 진짜로 말은 못 하지만.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다.
그래도 꼬물이가 순둥이보다는 인생 선배니까. 고작해야 몇 주지만.
“꼬물이 너무 괴롭히지 말고.”
끼익-
문을 열고 나왔다.
일주일만의 바깥이었다.
* * *
“앗! 어서 오세요!”
“오늘도 운동하러 오셨어요?”
“우리 조장 콧대를 찍어 누르셨다면서요? 언제 한번 저랑도 한 판 하시죠.”
황혼의 길드 하우스. 근래 너무 자주 들렀기 때문인지 이곳저곳에서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한다.
……누가 보면 내가 길드원인 줄 알겠네.
하긴 사실상 절반은 황혼 소속이긴 하다.
물약 판매부터 4층 던전까지 황혼이 엮이지 않았던 때가 없었으니까.
화제의 길드장과 친하게 지내는 인물.
누가 본다면 나도 어딘가의 길드장이라고 착각하지 않을까.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정해연의 개인 비서인 한미나의 안내를 받아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정해연이 내게 웃으며 인사한다.
“잘 지내셨어요?”
“해연 씨는요?”
“얼굴 보기 귀하신 분보다야 못 지냈죠.”
“아……그건…….”
“헤헤. 죄송해요. 농담이에요. 별로 재미없었나요?”
이상하다…… 이런 식으로 하면 괜찮다 했는데…….
혼잣말을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정해연을 보자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이제 농담도 할 줄 아네.
던전에 다녀온 이후로 정해연이 내게 가지고 있던 어색함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조금 피곤해 보이기는 하지만.’
막상 잘 지내냐고 질문은 했지만 정해연의 눈 밑에 생긴 다크서클을 보면 대충 예상이 갔다.
오랜만에 나타난 4층 던전의 클리어.
그곳에 관한 관심이 이곳저곳에서 쏟아져 나왔을 테니까.
아무래도 수호 길드장은 이미지 자체가 좀 무섭고.
신성 길드장, 루비는 외부로의 노출을 잘 하지 않고.
남은 건 스물여섯의 나이에 길드장이 된 정해연뿐이니까…….
“……그래도 그보다 더 큰 화제가 있어서 견딜 만은 했어요.”
“더 큰 화제요?”
무슨 얘기지.
“수호 길드장께서 이번에 은퇴 선언을 하셨거든요. 더 이상 던전에는 들어가지 않으신단 거죠.”
“허어…… 왜요?”
“나이가 드시면서 또 다른 목표가 생기신 모양이에요. 역시 수호 길드장이라 해야 할지…….”
그 누가 안환재를 보고서 은퇴할 거라고 생각하겠는가.
당장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거짓말 말라며 코웃음을 치겠지.
그는 마치 던전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그럼 수호 길드는요?”
“길드장 자리는 당분간은 계속 지키고 계실 모양이에요. ……능구렁이 같은 양반. 얼른 물러나 주면 좋을 텐데.”
“예?”
“아니에요.”
생긋 웃는 정해연.
평소같이 내게 짓는 미소였지만, 어딘가 조금 무서웠다.
“그리고 앞으로 반년 동안 ‘블랙 와이번의 허름한 둥지’에서 나올 부산물들의 일 할을 서진 씨에게 제공하신다네요.”
“음…… 전 이미 값을 받은 거로 아는데요.”
“넣어두세요. 수호 길드장 나름대로 사죄의 표시라고 하니깐.”
4층 던전에서 나올 부산물들.
정예 마물도 넘쳐났고, 층도 높은 만큼 10%라고 해도 그 값어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받기야 받겠다만…….
“그리고 이번에 판매하게 된 물약 대금도 곧 지급되실 거예요.”
……점점 돈이 썩어 넘치게 되고 있네.
마땅히 쓸 곳도 없는데, 땅이라도 사둬야 하나.
“혹시 이다음에 일정 있으세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같이 식사라도 어떠세요?”
“아…… 그게…….”
집에서 기다리는 순둥이를 생각하자니 목으로 뭔가가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아직 시간도 별로 안 지났는데, 순둥이를 위한 물건 몇 개라도 사가도록 할까.
“밥은 좀 그렇고, 혹시 저랑 잠깐 어울려주실 수 있어요?”
“어, 어울려요?”
* * *
“……어울린단 게 이런 의미였군요.”
“하하…….”
우린 어느 대형마트에 있는 아동 완구 코너에 있었다.
“이런 거라면 저희 황혼 소유의 백화점으로 가면 됐을 텐데…….”
“이런 애들 장난감은 없을 거 아니에요.”
“……이제부터 추가될 거예요. 한 층을 장난감으로 가득 채울 거라고요.”
아니, 그건 좀…….
각성자들이 그런 장난감을 살 리가 없잖아.
“이건 어때 보여요?”
“으음~”
모자를 깊게 눌러쓴 정해연이 내 손에 든 장난감을 보기 위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좋은 향기가 내 코를 간지럽힌다.
평소보다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해연이 속삭였다.
“저도 애들 물건은 잘 모르는데…… 아마 괜찮지 않을까요?”
그런가.
나도 이런 걸 가지고 논 기억도 없어서 잘 모르는데.
“그런데 누구한테 선물하려는 거예요?”
“아…… 그게…….”
당신이 준 알에서 깨어난 귀염둥이 멸망용이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대충 둘러댔다.
“……그냥 친한 동생한테요.”
“아하. 그냥 친한 동…… 생?”
뭐야. 왜 저래.
패션 안경을 낀 정해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그녀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린다.
“세상에나…….”
……내가 아는 동생이 있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 그녀라면 아마도 서진 씨가 선물하는 거라면 뭐든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런가요.”
하긴 순둥이같이 착한 애면 뭘 받든 좋아하긴 하겠지.
그런데 웬 그녀.
결국, 몇 가지 장난감과 먹을거리를 사고 헤어졌다.
음…… 어울려달라 말하고, 이렇게 보내려니 미안하네.
“음~ 그럼 저 바람 맞았으니까. 다음에는 꼭 맛있는 식사라도 대접해 주세요.”
“하하. 저 돈 많아요. 얼마든지 사 줄게요.”
“진짜예요?”
장난감을 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던 정해연이 그 말에 방긋 웃었다.
* * *
“두 손 가득이네…….”
혼자 살면서 이렇게 장을 본 게 얼마 만일까. 식사도 대충 하고, 내가 즐길 만한 취미 같은 건 하나도 없었는데.
“전부 다 순둥이 거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집에서 누군가 자신을 기다려 준다는 사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값지고 귀한 것이었다.
“많이 삐져 있을라나.”
-슈퍼 로보캅. 출동!
이것을 가지고 놀 순둥이를 상상하자니 미소가 나온다.
“꼬물이한테는 뭘 주면 좋을까.”
순둥이를 잘 봐준 대가로 뭐라도 해줘야겠다.
……뭐라도 삼키게 해줘야 하나?
끼익-
집에 도착하고 문을 열었다.
“순둥아. 아빠 왔어.”
퇴근길 아버지처럼 오른손에 치킨을 들고 순둥이를 불렀다.
“자고 있나?”
일단 원래 있던 곳에는 없었다. 텔레비전도 켜져 있는 상태였고.
보통 이럴 때면 순둥이가 있는 곳은 정해져 있다.
“알에 있나 보네.”
자기가 태어났던 곳이라 그런 건가, 순둥이는 알 속에서 자는 것을 좋아했다.
“순둥아~”
자는 모습이라도 보려고 조심스럽게 웃으며 다가가는데.
“……어?”
알 속에도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다른 곳도 샅샅이 뒤져봤지만, 순둥이는 없었다.
“얘, 얘는 왜 안 나타나는 건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꼬물이도 내 소환에 응하지 않는다.
절대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로부터 몇 초가 지나서야 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순둥이가 사라졌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47화
16. 순둥이(4)
[슈퍼 로보캅 출동한다! 자매품 조립식 드래곤 장난감도 있어요.]
“우와아…….”
-@#%^
꼬물이를 오른손에 쥔 채로 텔레비전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순둥이.
광고가 끝나고, 곧이어 새로운 TV 프로가 나왔다.
[아빠! 여기! 여기!]
흔히 아빠가 자식과 여행을 다니는 내용을 다룬 힐링 프로그램이었다.
제 부모와 밖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것을 보는 순둥이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난 왜 이런 몸인 걸까?’
어둠 속에서 벗어나고,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처음 만난 존재가 있었다.
이제는 순둥이 본인이 아빠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
그렇다. 사람이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둥이에게 이서진은 며칠 동안이나 자세하고, 상냥하게 설명해 주었다.
자칫 상처라도 받을까 조심스럽게.
“아빠가 사람이면, 나도 사람인데…… 힝.”
다시 텔레비전을 보았다.
아빠의 손을 잡고 오순도순 걸어가는 모습.
순둥이가 상상해 보았다.
자신이 이 몸으로 아빠의 손을 잡고 다니는 모습을.
“으응. 무언가 이상해!”
순둥이가 네발로 걸어 어딘가로 향했다.
아빠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알려준 물건.
거울 속에서는 눈이 크고 귀여운 검은색 해츨링만 보일 뿐이었다.
그 누가 본다고 해도 사람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존재.
[꺄하하하핫!]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순둥이가 자신의 모습을 뚫어져라 보았다.
나도 저렇게 아빠랑 같이 나가고 싶다.
나도 아빠랑 같은 모습이 되고 싶다.
아직 부화한 지 얼마 안 된 해츨링의 호기심은 멈추는 법이 없었고.
그 호기심은 이내 우주의 어딘가에서 [마법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용족에게 미칠 듯한 성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귀엽기만 한 모습에 이서진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순둥이는 엄연히 용이었다.
그때, 집구석에 있던 알의 껍질이 순둥이의 머리 위로 날아오더니 사이즈에 맞게 변경되고는 살포시 내려앉았다.
-끄앙?
시간이 흐르고 거울 앞에는 누가 보아도 인간 꼬마라고 부를 존재가 서 있었다.
옆머리에 있는 앙증맞은 머리핀은 덤.
인간 꼬마, 순둥이가 거울 속 모습을 보고는 밝게 웃었다.
어딘가 제 아빠를 닮은 외견이다.
-순둥아. 지금 모습으로는 아직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아빠가 최대한 빠르게 방법을 찾아볼게.
“이거라면 아빠를 만나러 갈 수 있어!”
자신의 모습이 밖에 있는 인간들에게 낯설 수 있다, 라는 걸 인지한 용은 그들만의 고대 마법 ‘폴리모프(Polymorph)’를 자발적으로 터득하는 데 성공했다.
“아빠 만나러 가자!”
-끄, 끄앙?
그 말에 순둥이의 옆에 있던 작고 검은 생명체, 꼬물이가 놀란 소리를 내었다.
꼬물이는 밖으로 나가려는 순둥이의 다리에 찰싹 붙었다.
“꼬물이도 나가자고? 그래!”
-끄아아앙!!
급히 그림자 속으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순둥이의 손에 붙잡혀 버린 꼬물이.
아빠의 행동을 기억해 낸 순둥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순둥이의 첫 외출이었다.
* * *
[야.]
[야야야야야. 서진서진서진.]
[왜 이리 전화를 안 받아!]
[나 심심해. 놀아주라, 응?]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이태영 빼고!]
[(기프티콘)]
[어. 확인했다! 야. 보고 있는 거 다 알아!]
닭꼬치를 하나 입에 문 상태로 계속해서 메신저를 확인하고 있는 여성.
이유지는 이내 다시 문자를 보내려다가 신경질적이게 외쳤다.
“얜 왜 답장을 안 해!”
일주일 전쯤이었나, 며칠간 어디로 가야 할 것 같다는 말은 들었다.
어디 간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돌아왔다는 문자를 보자마자 어디 같이 놀러 가기라도 하려 했는데.
“흥이다. 누가 자기 말고 친구도 없는 줄 알아?”
입안에 가득 찬 음식을 꿀꺽 삼킨 이유지가 자신이 부를 만한 친구를 떠올리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
“……나도 혼자서 잘 놀 수 있다, 뭐.”
이유지가 속한 균열 관리부에도 근래 여러 가지 일이 있었기에 그녀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이렇게 시내로 왔다.
사실은 이서진의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이곳에 온 것이었지만.
‘그러고 보니 여기 근처에서 솜사탕을 먹었었지.’
문득 그때 자신이 했던 행동을 떠올린 이유지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솜사탕이 엄청 맛있어 보였던 거 같기도 하고?”
막상 생각하니까 먹고 싶어졌다.
이유지는 걸음을 옮겼고, 그때 봤던 그 솜사탕 가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 솜사탕 하나 주세요!”
“예. 여깄습니다.”
여전히 거대한 사이즈다. 이유지가 눈을 빛내며 그걸 먹으려 할 때, 그녀의 감각에 걸려드는 존재가 있었다.
‘꼬마네.’
동양인이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을 검은색 머리와 눈이었지만, 이 꼬마의 눈과 머리는 그것보다도 더욱 짙은 색으로 보였다.
마치 심연과도 같은 빛깔.
자신이 들고 있는 솜사탕을 보면서 침을 흘리고 있는 아이.
오른손에는 어딘가 낯익게 느껴지는 인형 하나를 꼭 쥔 상태였다.
‘왜 인형이 땀을 흘리는 거 같지.’
방금 살짝 움직인 거 같기도 하고…….
에이, 인형이 어떻게 움직이겠어.
피식 웃은 이유지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꼬마야. 이 솜사탕 먹고 싶어?”
“꼬마? 누가 꼬마야?”
“여기에 귀염둥이 꼬마가 너 말고 어디 있겠어.”
“맞아! 나 인간 꼬마야!”
특이한 애네.
꼬마라고 불렀더니 기쁘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다.
이유지가 선뜻 자신이 들고 있던 솜사탕을 내밀었다.
“이거 먹을래?”
“이게 뭔데?”
“솜사탕. 엄~ 처엉 달콤해.”
“나 먹어도 돼?”
“그럼.”
아이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솜사탕을 한 입, 입에 집어넣었다.
솜사탕을 먹자마자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이거 다 먹어도 돼.”
“진짜?”
넙죽 받던 아이가 이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아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아.”
“너, 진짜 예의 바르구나?”
부모님이 교육을 엄청 잘하셨네.
이유지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보호자는 어디 있는 거지?’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이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솜사탕을 다 먹은 아이가 이유지에게 인사하고는 어딘가로 가려 한다.
“꼬마야. 어디 가?”
“아빠 만나러!”
이 근처에 있는 건가?
이유지는 걱정되는 마음에 조금 거리를 두고 따라가 보기로 했다.
걷는 폼이 아장아장거리는 게 엄청 귀여웠다.
말은 유창한데, 정작 걷는 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 같다.
그렇게 아이를 따라가던 도중. 시민 틈에 가려져 아주 잠시 모습이 사라졌고.
“……어?”
그대로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이유지가 몰래 기감을 넓혔다가, 이내 당황했다.
“……왜 잡히질 않지?”
자신의 감각으로도 방금 보았던 그 꼬마의 기운이 잡히질 않았다.
말 그대로 어딘가로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혹시라도 보호자랑 합류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유지는 계속해서 그 꼬마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흘렀을까. 여전히 발견하지 못했을 때.
“응?”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왠지 모르게 아까 보았던 꼬마를 닮은 듯한 얼굴.
아니, 이럴 경우에는 그 꼬마가 얘를 닮았다고 해야 하나?
“바쁘신 내 친구가 여긴 왜 있대?”
“허억……허억…….”
“……뭐야. 너 괜찮아?”
다급한 얼굴의 이서진이 말했다.
“이유지. 나 좀 도와줘라.”
* * *
-끄앙! 끄앙끄앙!
“응? 돌아가자고? 안 돼! 아빠 만나야지!”
처음으로 밖으로 나오고, 순둥이의 눈에 보이는 것들은 하나같이 새롭고 재밌었다.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이 섞여 있던 이쁘장한 인간이 준 솜사탕도 정말 맛있었다.
텔레비전으로만 보던 세상과는 전혀 달랐다.
“우리 꼬마 친구. 이런 데서 혼자 뭐하고 계신대.”
순둥이에게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선글라스를 끼고,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사내.
하지만 순둥이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아빠를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똑같은 ‘인간’일 뿐이었다.
아, 방금 만났던 인간은 좀 다를지도!
순둥이가 자신의 앞에서 웃고 있는 인간을 보았다.
일전에 보았던 웃음들과는 그 느낌이 달랐다.
‘이건 못 먹는 거.’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할 때, 순둥이의 이목을 끌 만한 대사가 나왔다.
“아저씨가 맛있는 거 다 사 줄게. 치킨은 좋아하니?”
“그건 먹을 수 있는 거!”
“응? 하하. 대신 조용히 따라와야 한다.”
손안에 들린 꼬물이가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이미 순둥이는 낯선 남자를 따라간 후였다.
* * *
어두컴컴한 지하.
그곳에 어린아이들이 서로 모여 몸을 떨고 있었다.
“애들아. 괜히 울고 그러면, 아저씨가 싫어한다. 알겠냐?”
“……히끅!”
흉터 가득한 근육질의 남성이 한 말에 아이들은 숨죽인 채로 울 뿐이었다.
그의 옆으로 다가온 부하 한 명이 물었다.
“형님. 이제 한 명 더 데려온답니다.”
“그래? 잘됐네. 이번엔 좀 괜찮게 받을 수 있겠어.”
부하는 아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쟤네들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왜? 막상 팔 때 되니까 불쌍하고 그러냐?”
“에이…… 저 먹고살기도 힘든데요, 뭘.”
“그래. 신경 끄고 살아. 우린 돈만 받으면 되니까.”
생체실험이니 뭐니 하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로서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자신은 저 핏덩이들을 팔고 돈만 받으면 끝이었으니까.
“형님. 저 왔습니다!”
“오냐. 한 명 더 데려왔다고?”
“예. 형님.”
형님이라고 불린 자는 부하가 데려온 아이를 보았다.
애라고 해봐야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겁을 먹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째선지 이 아이는 방실방실 웃고 있을 뿐이었다.
“맛있는 거 어딨어?”
“꼬마야. 그런 게 어디 있겠냐. 너도 얼른 저쪽으로 가서 박혀 있어.”
“맛있는 거 없어?”
깊은 칠흑의 눈동자가 남성을 응시한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애 눈빛이 무슨……!’
자기가 이런 꼬마한테 겁을 먹었다, 이 말인가?
“한심한 자식. 애한테 쩔쩔매는 꼴하고는.”
“혀, 형님!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비켜.”
방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무서운 인상의 사내가 겁 없는 꼬마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꼬마야.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으면 애답게 굴어.”
“하핳! 못생긴 인간이다!”
“……이놈 애들 있는 곳에 박아놔.”
“예. 형님.”
찝찝한 표정의 부하가 말했다.
“형님. 저대로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으면 뭐. 넌 상품에 흠집이라도 낼 생각이냐?”
“그, 그건 아니죠.”
“곧 애들 데려갈 놈 올 거 같으니까, 준비해.”
“예.”
아이들이 모여 있는 철창.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린다.
“엄마아…….”
“히끅! 살려주세요…….”
순둥이는 그들 사이에 섞여 신기한 눈동자로 아이들을 보았다.
분명히 텔레비전이란 거에서 봤을 때는 이런 얼굴이 아니었는데?
어린애들은 좀 더 밝고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안녕!”
순둥이가 울고 있는 아이 한 명에게 인사했다. 현재 상황에 걸맞지 않은 밝고 쾌활한 목소리였다.
“……응?”
-같은 또래의 아이를 만날 때는 항상 웃으면서 인사하는 거야.
아빠가 알려주었던 사실이다.
원래라면 자신의 이름을 먼저 소개하라고는 했지만…….
순둥이는 기억나지 않는 척 그 과정을 건너뛰었다.
“으, 응. 안녀…….”
“어이, 꼬마들. 나갈 시간이다. 그만 질질 짜고 일어나.”
“아, 아저씨. 잘못 했어요!”
“엄마 보고 싶어요!”
“하. 자식들.”
아이들을 데리러 온 부하가 손을 들었다. 가볍게 말을 듣게 하는 정도는 괜찮겠지.
“폭력은 안 돼!”
소년의 앞을 순둥이가 막아섰다.
자신의 아빠가 말하기를 폭력은 나쁜 거라고 했다.
“이게 진짜 뒤지고 싶나!”
대신이라고 하듯이, 순둥이에게로 손이 날아온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순둥이에게 있어서, 사회에 있는 모든 지식은 자신의 아빠로부터 들은 것들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이서진이 제일 먼저 가르친 말이 있었다.
“아, 맞다!”
순둥이가 외쳤다.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지하에 폭발이 일어났다.
* * *
“내 이놈 자식들을 그냥…….”
“……일단 진정해. 흥분해 봤자 되는 건 없으니까.”
평소와 같으면 반대되는 입장이다.
이유지가 불같이 화내고, 나 혹은 이태영이 그것을 말리고.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을 만큼 화가 나 있었다.
도중에 위치를 확인했을 때, 집에 있단 사실에 안심하고 이후 확인을 소홀히 한 내가.
당연히 나가고 싶을 텐데, 그 맘을 헤아려 주지 못한 내가.
“별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실제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다만, 궁금한 것은 순둥이가 밖으로 나왔는데도 어떻게 아무런 소란이 없었냐는 것이다.
‘만약에…….’
저들이 순둥이를 비싸게 팔릴 마물로 착각해서 감금했다면…….
그때는 내가 이놈들을 싹 다…….
콰앙!
그때, 건물의 지하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이유지와 나는 속도를 높였다.
신속의 물약을 따로 안 챙겨놓은 게 아쉬울 정도로 급박한 사태.
“콜록! 콜록!”
연기에 눈이 가려져서 앞이 잘 안 보인다.
순둥이는……?
설마…… 그 폭발과 함께……?
“순둥아! 순둥아!”
다급하게 이름을 부르자, 연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빠!”
아마도 이 사태의 주범으로 생각되는 녀석들. 싸움은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들은 온갖 신음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으으…….”
“살…… 려줘…….”
연기가 걷히고 실루엣이 드러났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
주위에 펼쳐진 정체 모를 푸른 막 같은 것이 그들을 폭발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순둥이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꼬마가 해맑게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드는 중이다.
“아빠아~”
“…….”
예상과는 전혀 다른 현장의 모습에 나는 문득 어떠한 생각이 떠오르고 말았다.
-나, 순둥이 아닌걸!
우리 순둥이.
정말로 순하기만 한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48화
17. 신성 길드장(1)
“더러운 놈들.”
“이거 풀…….”
“지금 기분 X같으니까. 한마디라도 꺼내는 순간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 알아서 해.”
“…….”
이유지의 살벌한 눈빛을 본 범죄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이들의 보스인지, 각성자가 한 명 있었지만, 이유지가 손쉽게 제압하고 포박한 상태다.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우리가 있는 지하는 멀쩡한 곳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무언가 폭발한 흔적의 그을림.
그러나 단 한 곳만은 동떨어진 세계라는 듯, 아주 멀쩡했다.
“헤헤.”
내 앞에서 헤실헤실 웃고 있는 꼬마.
아니, 순둥이를 보자니 처음 알을 받았을 때만큼 혼란스러웠다.
“……순둥이 맞니?”
“응!”
하긴 이런 귀여운 애가 순둥이 말고 어디 있겠냐.
의외로 납득은 빨랐다.
대체 어떻게 저런 모습이 됐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순둥이가 무사하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혹시라도 숨어 있는 놈이 없나 주변을 살피던 이유지가 이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이태영.”
-선배! 대체 또 어디 가신…….
“어린 애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야. 위치 찍어 줄 테니까 팀원들 전부 데리고 와.”
-……예?
“그 얼빠진 소리는 뭐야? 내가 땡땡이라도 치는 줄 알았어?”
-아, 아니, 그게…… 알겠습니다. 선배.
나는 두 눈을 좁히며 이유지를 쳐다봤다.
“……너, 거짓말이 점점 능숙해지는 거 같다?”
“거짓말은 무슨.”
이유지가 내 등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아이들을 보더니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애들아. 많이 놀랐지?”
“누, 누나. 저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되긴. 저 나쁜 놈들 누나가 전부 혼내줄 테니까, 애들은 애들답게 집에서 엄마, 아빠한테 애교나 맘껏 부리면 돼.”
“으아아앙!!”
그제야 안심한 듯, 애들의 눈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평범한 성인 남성이라 해도 겁먹을 상황인데, 이런 애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나같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
물론 모두가 울고 있는 상황에서 혼자서 방실방실 웃고 있는 사람이 있긴 했다.
“우리 꼬마. 여기서 또 만나네?”
“와! 아까 봤던 착한 인간이다!”
“언니가 아빠 같이 찾아주려고 했는데, 혼자서 어디 갔던 거야.”
“아빠 찾았어!”
“응? 어디?”
순둥이가 내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 모습을 본 이유지의 표정이 서서히 변해간다.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 같던 이유지가 숨을 참았다.
혹여나 순둥이가 들을까 걱정이었는지 이유지는 단숨에 내게로 가까이 와서 귀에 소곤댔다.
‘야! 아빠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
나도 귀에 대고 마주 말했다.
‘그렇게 됐다.’
이것 말고는 딱히 해줄 말이 없네.
그 말에 더욱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파고든다.
내 몸과 이유지의 몸이 완전히 밀착되었다.
……땡땡이치고 군것질 실컷 하셨구만.
여러 음식 냄새와 살내음이 뒤섞여져 은은하게 풍겨온다.
‘그, 그럼 너 유부남이었던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저 애는 뭔데? 딱 봐도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데…… 너 대체 몇 살에…….’
‘사정이 있어서 그래. 피가 이어진 건 아닌데, 가족이나 다름없는 애야.’
‘……그, 그래? 그럼 저 애 부모는 누군데?’
이름조차 모르는 멸망용.
‘글쎄.’
대충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제야 내게서 떨어진다.
이유지가 순둥이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구부렸다.
“흠흠. 꼬마야. 아빠가 잘해줘?”
“응!”
“얘 진짜 귀엽다. 혹시 아빠가 마음에 안 들거나 하면 언제든지 나한테 와도 돼. 맛있는 거도 잔뜩 사줄게.”
순둥이가 귀여운 건 알겠지만, 저런 식으로 낚아채려는 건 아니지.
“난 아빠가 좋아!”
코가 찡해진다.
단 며칠뿐이었지만, 내가 자식 하나는 잘 가르친 것 같단 말이야.
이유지가 내게 소곤거렸다.
‘그런데 설마 애 이름이 순둥이야?’
‘……애칭 같은 거지.’
정작 중요한 이름을 아직 지어주질 않았다.
계속 순둥이라고 불러도 되겠지만, 이것은 단순한 애칭이다.
이름을 가진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자신의 정체성과도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중요하기에 함부로 지을 수가 없는 거고.
……고민을 좀 하긴 해야겠는데.
내가 고뇌에 빠져 있을 때도 이유지는 줄곧 순둥이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언니가 선물 사줄까?”
“선물이 먼데?”
“귀엽고 재밌는 거.”
“나도 있어!”
순둥이가 해맑게 손을 펼쳤다. 검은색의 인형을 보고는 이유지가 피식 웃었다.
“하긴 그 나이 때면 인형이 제일 좋은 선물이긴 하지.”
“인형 아니야! 꼬물인데!”
“그래, 그래. 선물 받은 건 소중하게 대해야 해. 알겠지?”
“응! 착한 인간!”
“언니라고 불러야지.”
“응!”
아까부터 들리는 말에 내가 잠시 끼어들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언니라고 하는데 잘못된 거 아니야?”
“응? 뭐가?”
“아니, 순둥이는 남자잖아.”
그 말에 이유지가 날 인간쓰레기 보듯이 바라본다.
“너 진심이야?”
“뭐가?”
“어딜 어떻게 봐도 여자애잖아.”
“……뭐?”
“이렇게 귀여운 애를 그동안 남자라고 생각한 거야? 애 목욕도 시켰을 거 아니야?”
……그동안 해츨링인 상태로 목욕했으니까 알 턱이 있나.
내 다리에 안겨 웃는 순둥이를 자세히 본다.
어딘가 나를 닮은 듯한 외견.
머리에 달린 귀여운 계란 껍질 모양의 머리핀.
오똑한 코와 커다란 눈동자.
남자애치고는 조금 긴 머리.
충격적인 상황들에 버벅대던 뇌가 드디어 정보를 받아들였다.
“세상에…….”
“너, 정말로 몰랐던 거야……?”
아니, 애초에 드래곤한테도 성별이 있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내가 그동안 여자애한테 순둥이라고 부른 거였다고?
……왜 그렇게 꺼리나 했더니, 설마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
큰 충격을 받고 굳어 있는데 나와 순둥이를 번갈아 보던 이유지가 장난스럽게 미소 짓는다.
“근데 아빠라고 부르게 하는 건 네가 그러라고 한 거야?”
“순둥이가 원했으니까. 나도 애한테 아빠가 되어준다고 했고.”
“그럼 나도 그렇게 불러줄까?”
“뭐?”
이유지가 혀를 짧게 하더니 제 딴에는 최대한 귀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압빠?”
“…….”
“이건 별론가? 그럼 오빠아?”
“……진짜 그만해라.”
“헤헤. 이거 재밌네. 가끔씩 써먹어야겠다.”
그렇게 이유지의 심각한 애교를 듣고 있자니, 이태영을 필두로 한 균열 관리부 1팀이 도착했다.
“아. 말하는 걸 잊었는데, 우리 이제 균열 관리부 아니야. 균열이 생성되는 게 줄어들면서 팀이 개편이 됐거든.”
“뭐? 그럼 지금은 어디 소속인데?”
“각성자 범죄 관리부 1팀.”
저번에 던전에서 만났던 각성자 범죄 전담반이랑은 다른 소속인가?
왜 게네를 안 부르고 이태영을 부르나 했더니…….
“이런 후레자식들을 봤나.”
“눈 안 깔아?”
도착하자마자 묶여 있는 범죄자들을 겁박하는 균열, 아니, 범죄 관리부 1팀을 보자니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범죄 관리부였던 것처럼 자연스럽네.’
각성자 범죄 관리부 팀장, 이유지가 범죄자들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니까, 저놈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전부 우리한테 달려 있다는 말씀이지.”
이유지가 마물을 찢던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몸이 떨린다.
부들부들-
“응? 꼬물아 왜 그래애?”
꼬물이는 무슨 진동기라도 되는 양 떨고 있다.
“언니는 이제부터 일해야 하니까, 순둥이는 아빠랑 손잡고 얼른 집으로 가야지?”
“응!”
“우리 오빠분도?”
“……예.”
이 뒷부분부터는 착한 어린이는 시청 불가였기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 *
“선배. 이놈들 어떻게 할까요?”
“지금 전부 다 뱉게 해. 뒤에 있는 놈들이 누군지. 애들 가지고 뭘 하려고 했던 건지.”
“예. 알겠어요.”
이서진과 순둥이가 사라지자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 이유지가 한 명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연행 후 법적인 처벌을 받게 해야 하지만, 이런 놈들한테 그런 가벼운 벌을 주고 싶진 않았다.
‘그러려고 이 자리를 맡은 거니깐.’
특히 어린 애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그녀에게 있어서 참을 수 없는 행위였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래. 계속 그렇게 해줘. 어차피 입을 여는 건 한 명이면 충분하니까.”
“흡……!”
거짓 하나 없는 그 살벌한 말에 이곳을 통솔하던 보스가 겁에 질린 채로 외쳤다.
“진짜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사람 한 명이 와서 돈을 주고 애들을 받아가야 했단 말이야!”
“그 새끼는 어디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이런 소동이 벌어졌는데 너라면 오겠냐? 젠장 대체 그 꼬마는 뭐였던 거냐고…….”
이유지는 순둥이라고 불리던 귀여운 꼬마를 떠올렸다.
난데없이 피가 이어지지 않은 자식이라니.
확실한 건 평범한 꼬마는 아니었다.
이들이 꾸준히 말하고 있는 참사의 주인공도 그렇고.
그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무언가 깊은 심연을 바라보는 것 같았으니까.
‘……귀엽긴 했지.’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제 친구를 믿었으니까.
“그래서 그 X자식들이 애들은 대체 왜 사들이는 거였는데?”
“……무슨 실험 같은 걸 한다고 했다.”
“……실…… 험?”
“그래. 어린 애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 실험이란 것 빼고는 몰라.”
인체 실험.
그 말을 듣자마자, 이유지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며 자신도 모르게 팔과 다리가 짐승의 그것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허, 허억! 괴물, 괴물이야! 살려줘!!”
“선배!”
다급하게 이태영이 달려왔다.
“선배.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일단 진정하세요!”
“……그놈들일지도 몰라.”
“예? 그놈들이라뇨?”
“애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 실험.”
“……정말입니까?”
그 말에 이태영 또한 눈이 가라앉았다. 이유지는 변해 버린 두 손과 두 발을 내려다보았다.
어째선지 온몸이 뜨거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손 되게 멋진데요?
언뜻 떠오른 누군가의 말에 이유지를 잠식하던 분노가 점차 가라앉았다.
진지한 표정의 두 사람이 시선을 맞췄다.
“선배.”
“그래. 태영아. 그놈들 찾은 거 같다.”
* * *
“순둥아.”
“……나 순둥이 아닌걸. 나쁜 아이인걸.”
“아냐. 순둥아.”
위험천만한 외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순둥이는 해츨링 상태로 커다란 알에 숨어버렸다.
별건 아니다.
그저 순둥이를 얼마나 걱정했고, 혼자서 행동하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해줬을 뿐이다.
그래. 순둥이에게 있어서는 처음으로 듣는 잔소리였다.
“순둥아. 얼굴 안 보여 줄 거야?”
“나쁜 아이 아니야?”
“그래. 그래도 걱정되니까, 어디 나가고 싶을 땐 꼭 아빠한테 말하고.”
“응!”
그제야 방긋 웃는다.
인간이든, 용이든 순둥이의 웃음은 한결같이 밝고 귀여웠다.
딩동-
그때 누군가 밖에서 벨을 눌렀다.
‘누구지?’
“순둥아. 아까 했던 그거 지금도 할 수 있어?”
“응!”
순식간에 새끼용의 모습이던 순둥이가 다섯 살 정도 크기의 귀염둥이 소녀로 변신했다.
옷도 귀여운 푸른색의 잠옷으로 바뀌었다.
‘……저게 그 폴리모프라는 거구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저런 걸 할 수 있다니.
보호자가 되어준다고는 했는데…….
어쩌면 순둥이가 나보다 훨씬 강한 거 아닐까?
“나갑니다.”
문에 뚫린 구멍을 통해 밖에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낯익은 얼굴이다.
“루비?”
“성자님. 안에 계신지요.”
일주일간 만나지 못했던 루비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루비도 한번 만나긴 해야 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다.
괜히 찾아오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하네.
“금방 열게. 잠시만.”
“저는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어도 괜찮습니다.”
문을 열자 수녀복을 연상시키는 옷을 입은 루비의 모습이 보였다…….
‘어울리긴 하는데.’
항상 저 복장을 입고 있는 건가?
문을 열어줬는데, 안으로 들어오진 않는다. 혹시나 하고 내가 안쪽으로 들어오라고 말하자 그제야 발을 떼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되게 엉뚱하단 말이야…….’
작은 햄스터한테 기다려! 하고 명령한 것도 아니고.
“성자님의 거처라면 제게 있어서는 성지와도 같은 곳입니다. 그런 곳에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는 법이지요.”
아, 예…….
루비가 안으로 들어오자, 집 안에 있던 순둥이가 튀어나왔다.
“우와! 또 신기한 인간이다!”
“성자님? 이분은 누구시죠?”
이유지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전해주었다. 루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기사들이 하던 행동과 비슷했다.
“성자님의 자녀분이시라면 제게 있어서는 성자님과 다름없는 존재입니다. 최대한 예를 표하는 게 맞는 것이지요.”
피가 이어진 자식은 아니다만…….
“마음으로 품은 자식이어도 그렇습니다. 성자님께서는 벌써 이 땅에 있는 많은 존재들을 마음속에 품으셨지 않습니까.”
아니, 그런 적 없는데.
그런 낯간지러운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물론 순둥이는 예외다.
루비는……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앉아 있어. 목마르지? 마실 거 가져다줄 테니까. 순둥이는 잠시 꼬물이랑 놀고 있어.”
“네에~.”
방석은 루비를 위해서 깔아주기로 했다. 오랜만의 손님인 만큼 힘을 줘서 특제 음료수를 만들고 자리로 돌아왔는데.
“응? 거기가 아니라, 반대편에 앉아야지.”
보통 사람과 대화할 때는 마주 보고 앉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루비가 앉은 곳은 내가 앉을 곳의 옆자리였다.
심지어 방석은 쓸쓸하게 방치된 상태다.
“그럼 내가 저기로…….”
반대편으로 이동하자, 루비가 다시 자리를 옮긴다.
“…….”
“제 자리는 언제나 성자님의 옆입니다.”
던전에서 자주 보았던 눈빛이다.
주로 내가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려 할 때.
아무리 내 말이라도 물러설 수 없다는 의미를 담은 기색.
“……그래.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성자님.”
무릎을 꿇고 다소곳하게 앉은 루비에게 음료수 한 잔을 건넸다.
“이것은…….”
“맨 처음 만났을 때 마셨던 거 있지? 그거랑 비슷한 거야.”
“그렇군요. 잘 마시겠습니다.”
조심스럽게 한 입 마시고는 내려놓는다. 별로 목이 마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정해연 이후로 이 집에 온 두 번째 손님이네.
소성환도 왔었지만, 그는 밖에만 있었으니까.
옛날에는 사람 한 명 초대하기에도 눈치가 보였었는데 말이야.
이제는 이 건물 자체도 내 것이고.
옥탑방의 내부 또한 남에게 보여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넓었다.
그런데 얘는 집 내부가 이렇게 넓은데 이상하단 생각은 안 하나……?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거야?”
“그것이…….”
딱히 정해진 용건이 없어도 괜찮았다. 처음에 루비가 신성의 길드장이란 걸 들었을 때는 조금 낯설었지만.
루비가 내게 보인 행동은 평소와 같았기에, 내가 느끼는 거리감도 금방 사라졌다.
신성 길드장이면서도, 내게 있어서는 여동생과 같은 존재다.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알고 지내는 길드장이 세 명이나 되는구나.
그들은 내게 허물없이 대해주지만, 아무래도 내가 무직인 만큼 조금 가슴이 아프긴 하다.
물약만 팔아도 먹고 사는 데에는 충분하지만…….
“저희의.”
따로 취미 삼아 일이라도 알아보는 건 어떨까.
나도 저 사람들처럼 길드를 만든다던가?
‘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응. 저희의?”
루비가 고개를 돌린 상태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보았던,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의미가 담긴 그 눈빛이었다.
“저희 신성의 길드장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49화
17. 신성 길드장(2)
“…….”
“죄송합니다. 제 말이 작아 들리지 않으셨던 모양이군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성의 길드장이…….”
“아니, 아니. 들었어.”
이렇게 잘 들려도 될까 싶을 정도로 내 귀에 아주 쏙쏙 박혔다.
일단은 할 수 있는 게 이 말밖에 없었다.
“왜?”
내 의문에 루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좀 풀어서 설명해 줄 수 있을까?”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하하핳!
순둥이의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신성 길드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사실 저희 신성 길드에는 길드장이 없습니다.”
“뭐? 루비 네가 길드장이라면서?”
“정확히 말하자면, 저는 지금껏 비어 있던 길드장의 대리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길드를 만든 길드장이 존재하지 않는데, 신성 길드라는 게 어떻게 탄생하겠는가.
“같은 뜻을 가진 자를 찾아 제가 한 명씩 길드로 모셔왔습니다.”
허어…….
고작해야 열아홉의 나이인 루비다.
겉으로 보면 한없이 여린 이 소녀의 스카우트에 그런 괴물들이 모인다고?
아니, 그것도 그건데.
대체 왜 루비는 그렇게까지?
“계시를 받았습니다.”
“계시?”
“언젠가 지상에 선택받은 자가 나타날 테니, 그를 위한 기반을 다져놓으라는 신탁이었습니다.”
“그건 신백준 씨랑 다른 성기사들도 받은 거야?”
“아뇨. 엄연히 저 혼자 받은 것입니다.”
“그 신탁이란 건 어떻게 받는 건데?”
“사실 한 번밖에 받아보지 못했기에, 저 또한 자세한 건 알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성자님.”
아니, 죄송할 건 없고.
그럼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네가 생각하기에, 그 신탁에서 말한 선택받은 자라는 게 나라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성자님 이외에 그 누가 선택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기도드릴 분이 이곳에 계시니까요!”
흥분했는지 갑자기 말이 높아진다.
좀 가라앉히라고 음료수를 내밀었는데, 그녀는 흠칫하더니 이내 조금씩 그걸 마셨다.
“……성자님이 주신 것을 마시지 않을 수는 없는 거겠죠.”
얘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
“성자님께서 던전에서 보이셨던 그 빛 때문입니다. 그것을 처음 보았던 것은 서울에 있는 농협 본점에서였고요.”
“아~ 이거 말하는 거야?”
나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손전등을 가져왔다.
딸칵!
“으음! 이것은…… 무언가 다릅니다, 성자님.”
당연하지.
시동어를 말하지 않으면 이건 그냥 손전등에서 나오는 빛일 뿐이다.
하도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에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봤자 실내라서 다 들리겠지만.
“빛이, 있으라.”
딸칵!
다시 한번 켜진 빛에 루비가 오오! 소리를 내며 감격스럽다는 듯, 두 손을 가슴팍에 모았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보았던 그 빛입니다, 성자님! 아아……이 어찌나 아름다울 수가…… 역시 성자님은 제 성자님이십니다!”
“저기 루비야. 네 눈에는 이게 뭐로 보여?”
간단한 질문이다.
손전등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마도 순둥이에게 물어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을까.
“으음…….”
루비는 잠시 고민하더니 답을 말했다.
“감히 제가 이것에 대해 말할 수는 없겠지만, 성자님께서 질문하셨으니 답하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그래. 얼른 말해. 단순한 손전등이라고.
“성물(聖物)이지 않습니까, 성자님.”
“…….”
이야. 이건 정말 예상 못 한 답변인걸.
출제자의 의도를 완전히 뛰어넘은 답안이니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할까.
딸칵! 딸칵!
소리가 날 때마다 루비의 눈동자도 똑딱똑딱 리듬에 맞춰 움직인다.
“응. 결정했어.”
“드디어 저희 신성의 길드장이 되시겠다는 겁니까?”
아니, 그거 말고.
아무래도 나를 너무 신성시하는 루비를 위해서 조금은 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사춘기 여동생처럼 ‘오빠랑 말 안 할 거야!’ 같은 게 되면 안 되니깐.
어디까지나, 적당하게.
“루비야.”
“예. 성자님.”
“놀러 가자.”
“……예?”
역시 사람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실컷 노는 것밖에 없지.
* * *
“서, 성자님. 이것은 무엇입니까.”
“우와! 갈색 꼬물이다!”
“이건 꼬물이가 아니라, 두더지란 거야.”
일명 두더지 게임.
게임 센터에 이게 아직도 있을 줄은 몰랐는데.
순둥이와 루비를 데리고 번화가에 있는 게임장에 도착했다.
“진짜로 몰라?”
“죄송합니다, 성자님. 제 지식이 미천하여…….”
두더지 게임 모른다고 미안할 것까지야.
“그럼 내가 해 볼 테니까, 다음에 따라 해봐.”
“알겠습니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망치를 잡았다.
어렸을 때, 몇 번 해본 기억이 있다.
얼마 없는 용돈을 모아 일주일에 한 번 게임하는 데에 쓰곤 했지.
그때도 내 실력은 또래 중에서는 최고라고 볼 수 있었다.
하물며 각성자가 된 지금은 두더지가 아니라, 여기서 마물의 대가리가 튀어나와도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Game Start!]
돈을 넣자, 두더지가 전부 아래로 내려갔고. 곧이어 한 마리의 두더지가 나타났다.
콩!
[10P]
아기자기한 소리와 함께 점수가 추가된다.
“봤지? 이런 식으로 올라오는 두더지를 이 망치로 때리면 되는 거야.”
“그렇군요. 마물을 잡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재밌겠다!”
루비가 망치를 보며 눈을 빛낸다.
그러고 보니 얘가 사용하는 무기가 철퇴였지…….
망치랑 여러모로 비슷한 구석이 있는 무기였다.
곧이어 두더지가 다시 나타났다.
뿅!
“……?”
뭔가 사라졌는데?
뿅! 뿅!
“아니, 무슨!”
각성자의 동체시력은 일반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물며 온갖 실력자들을 곁에서 봐왔던 나다.
무언가를 눈으로 좇는 거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는데…….
“아니, 좀, 맞아라!”
팡! 팡!
마구잡이로 올라왔다 사라지는 두더지를 내려치자니 나타나지 않는 미래시가 원망스러웠다.
“역시 성자님. 대단하십니다.”
“우와! 아빠! 50P래! 이거 높은 거야아?”
“…….”
……아니, 대체 뭐지?
이딴 걸 누가 하라고 만들어 놓은 거야?
기계를 살펴보니, 구석에 [각성자용] 이라고 아주 작게 적혀 있었다.
무슨 게임 센터에 이런 게 있는 건데?
카운터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이거 잘못된 거 아니냐고 물어봤다.
그는 어색하게 웃더니 익숙한 듯 설명했다.
“저희 사장님이 조금 괴짜라서요. 여기에 있는 게임들 대부분이 실력 있는 각성자들에 맞춰져 있는 것들이에요.”
“……장사가 되긴 합니까?”
“하하…… 여러 의미로 유명한 곳이라 손님이 오긴 해요. 정작 제대로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의외로 마니아층도 있어요.”
……마니아는 무슨.
평범한 각성자도 아니고, 이 정도 레벨이면 대한민국에서 소화할 수 있는 인원이 얼마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이걸 어떻게 만든 거래.
굳이 이런 걸 만드는 사람.
실로 괴짜라고 부를 만한 존재였다.
좀 더 정상적인 게임방으로 이동하려 하는데, 루비가 관심 있는 표정으로 망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볼래?”
“괜찮습니다.”
“왜. 한번 해봐.”
“……성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루비가 자그마한 손으로 망치를 쥐었다.
돈을 투입하자, 곧이어 두더지가 튀어나왔다.
콩!
역시 첫 두더지는 쉽게 나온다.
처음부터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악질 제작자의 수법이다.
그리고 나오는 두 번째.
저게 진짜다.
쾅!!
……뭐지? 두더지 게임에서 나서는 안 되는 소리가 나는 거 같은데?
쾅! 쾅!
점점 두더지가 나오는 속도가 빨라진다. 그럼에도 루비가 내려치는 곳에는 정확하게 두더지의 머리가 있었다.
이런 게임을 대체 누가 소화하나 했더니.
내 눈앞에 최상위 각성자인 루비에르트가 있었다.
[1020P]
[신기록!]
“성자님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것 같군요.”
어딜 봐서?
“나도 할래!”
순둥이는 키가 안 되었기에, 내가 몸을 들어 올려주었다.
“하핳. 꼬물이다, 꼬물이~”
이런 생각하기 진짜 싫었는데, 그래도 나보다 점수가 낮을 사람이 있단 게 조금은 안심이 되네.
아빠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고 해야 하나.
“…….”
[Error!]
[Error!]
“하핳!”
모든 구멍에 있는 두더지들이 위로 올라온 채, 알 수 없는 힘에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순둥이의 망치에 하염없이 머리를 맞고만 있다.
어째선지 두더지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로 보였다.
“재밌다! 재밌다!”
그래. 순둥이가 재밌어하면 되는 거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직원한테 말하고 수리비라도 건네줘야겠다…….
“성자님. 이것은 무엇입니까?”
“아빠, 이건 뭐야?”
그 외에도 과녁이 보이지 않는 총 게임.
먼지보다도 작은 과일을 베는 칼 게임 등.
여러 가지를 즐겼다.
물론, 나는 단 하나의 게임도 제대로 못 했다.
……게임이란 게 이리도 어려운 거였구나.
그래도.
“으음…….”
흥미로운 눈동자로 이리저리 게임을 하는 루비를 보자니, 상관없겠다 싶었다.
한참을 즐기던 루비가 이내 헛! 하는 소리와 함께 내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성자님. 저도 모르게 성자님에게서 눈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즐기라고 한 건데, 뭘.”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영락없이 제 또래의 소녀로 보였다.
아니, 따지고 보면 열아홉이니까, 그렇게 어린 것도 아닌가?
오히려 나이에 비해 외견이 너무 어린 것 같기도 한데…….
키가 작아서 그런가. 인형 같은 외모도 한 몫 거들 것이다.
물론 철퇴를 휘두르는 루비를 상상하자니, 이내 그 생각은 지워졌다.
“성자님. 이런 평범한 복장은 유사시에 성자님을 지키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 귀엽기만 하구만.”
“나는? 나는 어때?”
“당연히 순둥이도 귀엽고.”
하나의 옷만 입고 있는 것이 보기 그랬기에, 근처 옷가게에서 옷을 사주었다.
돈은 썩어 넘쳤기에, 이 옷가게를 사달라고 해도 사줄 수 있다.
흰색과 파랑 두 가지 패턴의 하늘하늘한 원피스.
비단 같은 은발의 머리카락과 물처럼 푸르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루비에게 더없이 어울렸다.
새로 산 옷을 입고, 군것질도 하였다.
“저는 초코 와플 하나 주세요. 순둥이는?”
“나는 저기, 저 동그란 거!!”
“아이스크림 와플 하나하고요. 루비는?”
“저는 성자님이 드시는 걸 보기만 해도 괜찮습니다.”
“어허. 빨리.”
“……그렇다면 성자님과 같은 것으로.”
그렇게 말하는 루비의 눈이 순간이지만, 딸기 쪽으로 향한 것을 보았다.
“그러지 말고 네가 먹고 싶은 거로 말해봐.”
“제가 먹고 싶은 것 말입니까. 그렇다면 성자님이 골라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성자님께서 주시는 것이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음…….”
나를 잘 따라주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자신의 의지를 반하면서까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나는 나대로.
루비는 루비대로.
사람마다 원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나 말고, 네가 마음속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걸 말하는 게 중요해.”
“제가 좋아하는 것…… 말인가요.”
어쩌다 보니 훈계가 되어 버리는 거 같은데.
내 말에 루비는 잠시 한 손을 가슴 부위에 가져다 대고는 눈을 감았다.
“와아!”
시간이 지나서, 순둥이의 와플이 먼저 나왔고.
결국, 내 것과 같은 것을 하나 더 시키려고 할 때, 루비가 작게 말했다.
“……딸기 와플이 먹고 싶습니다.”
딸기가 가득 들어간 와플을 한 입 베어 문 루비가 입가에 생크림이 묻은 것도 모른 채 살며시 미소 지었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보육원.
내가 후원하고 있는 곳 중 하나다.
어려서부터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위한 장소.
돈도 딱히 쓸 곳이 없고, 그냥 단순한 자기만족을 위해 여러 곳에 후원하고는 했다.
나도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이런 식으로 내게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뭐, 그냥 그런 생각도 들었고.
“아이고, 어서 오세요! 여기는 무슨 일로……?”
“그냥 애들 좀 보고 싶어서요. 말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해요.”
“하하! 아닙니다! 천천히 계시다 가세요. 혹시 차라도 한 잔……?”
“아뇨. 괜찮아요.”
한 번에 억이 넘는 금액을 후원하고, 매달 정기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후원하기로 한 뒤라 그런지 원장님의 행동은 가히 나를 신으로 모시는 듯했다.
“하하핳!”
순둥이가 보육원 내를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처음 보는 아이의 등장에 애들은 낯설어했지만, 순둥이 특유의 해맑음에 금세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애들이랑 대화라도 하려고 했는데,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네.
이럴 때 이유지라도 있으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구석에 동화책이 놓여 있었기에 그거라도 펼쳤다.
“옛날 옛적에 한 성자님과 수녀님이 살았는데요.”
아니, 보통은 왕자님이나 공주님. 뭐, 그런 거 아닌가?
제목도 특이하다. 성자 일대기.
용사도 아니고, 성자는 또 뭐야……?
동화책을 읽는 내게 흥미를 가지고 다가온 아이도 있었으나, 금세 질려 하고 자리를 떠났다.
어느새 근처에 남은 것은 단 한 명뿐이었다.
“성자님. 다시 한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어…… 그래…… 옛날 옛적에 한 성자님과 수녀님이…….”
“다시 한번 더 되겠습니까?”
……자기표현이 아주 확실해졌네.
좋은 현상이다.
루비는 계속해서 내게 동화책을 읽을 것을 부탁했다.
다른 것도 읽어줄까 했지만, 이상한 이름의 이 동화책 하나만을 원했다.
내용도 별거 없다.
수녀가 성에 갇힌 성자를 구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
보통은 반대 아닌가.
……이게 흔히 말하는 클리셰 비틀기일지도.
어느새 내게 붙어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댄 루비가 중얼거렸다.
“역시 성자님의 옆자리가 마음이 놓입니다.”
보육원을 나오자 슬슬 해가 지려고 했다.
오늘 루비와 했던 일들은 성자님이라거나, 선택받은 자가 할 만 한 일은 아니었다.
평범하고, 누구라도 할 법한 행동.
평범한 나.
이게 바로 내가 루비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이서진이었다.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어디에서나 볼 흔한 오빠.
……좀 돈 많고 친한 오빠?
“아니면, 한번 성자답게 행동해 볼까?”
성자답게라…….
대충 빛을 뿌리면서 ‘어린 양들아 이곳으로 모이렴’ 이런 대사를 하면 되는 건가……?
상상만 해도 오글거린다.
내 말에 루비가 고개를 저었다.
얘가 제일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성자님은 성자님인 채로 좋습니다.”
뭐…… 당사자가 그렇다면야.
어차피 그런 식으로 흉내 내봤자 어색하기만 할 것이다.
이제는 루비도 알겠지.
나는 신성한 자도, 그런 자를 따르는 성기사들의 수장이 될 사람도 아니란 것을.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의외의 말이다.
언제나와 같이 작별 인사를 할 줄 알았는데.
하루 종일 내가 끌고 다녔으니, 나도 어울려줘야겠지.
“…….”
“부담가지지 말고 들어오시죠. 성자님.”
내가 도착한 곳은 이제껏 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당연하다.
이곳은 신성의 길드 하우스였으니까.
……조금 더 적극적으로 놀았어야 했나?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50화
17. 신성 길드장(3)
황혼의 길드하우스는 평범한 회사 같았고.
수호의 길드하우스는 견고한 철벽 같았다면.
신성의 길드하우스는 말 그대로 성지(聖地)라도 온 기분이었다.
마치 노트르담의 성당과 같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수많은 창문들이 신비로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저기에 한 번에 빛이 들어온다면 그야말로 장관일 거 같은데…….
“선택받은 분을 어떻게 맞이할까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를 참고하였습니다.”
특정 종교가 있는 건 아니었구나.
루비 나름대로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실내에는 이전에도 보았던 성기사들이 서 있었다.
누가 보면 예술 작품이 아닌가,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엄연히 저건 사람이었다.
‘되게 답답할 거 같은데.’
길드 하우스 내에서도 저런 식으로 풀 무장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이제는 익숙한 덩치의 성기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수녀님. 외출은 즐거우셨는지요.”
“성자님과 함께하여 아주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성기사단장님.”
투구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 흐뭇하게 웃고 있을 아저씨의 모습이 상상이 갔다.
“서진 님도 안녕하십니까.”
“……예. 신백준 씨도 건강히 지내셨어요?”
“하하. 제가 고생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기절할 정도로 노력하신 건 서진 님이지요.”
하여간.
잠시 접객실로 들어가서 차라도 한 잔 마시기로 했다.
“나 졸려.”
하루 종일 뛰어노느라 지쳤는지, 순둥이가 눈을 비볐다.
솔직히 이전의 모습들을 보자면 지칠 리는 없겠지만, 그냥 아직 어린 애라 잠이 좀 많다.
“자고 있어. 순둥아.”
“응.”
순둥이를 무릎에 눕히고 조심스럽게 차를 마셨다.
신백준 또한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성기사단장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괜찮습니다.”
이전에도 보았지만, 엄청난 화상 자국과 흉터들이다.
궁금하다고 생각했는지, 신백준은 웃으면서 말했다.
“단순한 화상일 뿐입니다. 평소에는 투구로 가리고 있으니, 남에게 보일 걱정도 없지요.”
평범한 화상.
그렇다면 물약으로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것이다.
신백준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신성 길드나 되는 곳이 물약이 부족할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런 거라면 내가 무한정으로 지원해 줄 수 있었다.
“혹시 따로 치료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신백준이 고개를 저었다.
“제 나름대로의 다짐 같은 거라서요. 지금 당장은 이대로 놔둘 생각입니다.”
루비 또한 드물게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루비가 따로 명하거나 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나는 모르는 어떠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깊게 파고들지는 않기로 했다.
신백준이 화제를 바꿨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을 하셨는지, 들어 볼 수 있을까요?”
“놀았습니다.”
“예?”
“그냥 놀았어요.”
내 말에 엉뚱한 표정을 지은 신백준이 이내 크게 웃었다.
“하하! 그렇죠. 젊은 두 분이 같이 만나서 논다. 그게 당연한 것이겠죠.”
그럼 뭐라고 생각한 거래.
하도 성자, 성자 그러니까.
하루 종일 기도라도 하고 온 줄 아셨나.
“제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루비는 신백준 씨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루비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이야기를 하는 내내 얼굴에 옅은 홍조가 자리 잡아 있었다.
‘웃고 계시네.’
신백준은 마주 보고 앉아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딸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전에도 말했었다.
딸과 같은 존재라고.
“…….”
단순히 놀았을 뿐인데, 자랑할 게 그리도 많은 것인지 이야기를 계속하던 루비가 순간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저 혼자서 흥분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쉽네.
보기 좋았는데.
“그래서 보여주고 싶은 게 이 길드 하우스야?”
확실히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퀄리티였다.
“아닙니다.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순둥이를 소파에 눕혀두고 우리는 어느 장소로 이동했다.
“여긴?”
“평소에 제가 머무는 곳입니다.”
한창때 소녀의 방.
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정도로 휑한 곳이었다.
조금 어두운 것 같기도 했고.
“저것입니다. 성자님.”
방의 한가운데에 보관되어 있는 작은 수정 하나.
“제가 계시를 받았을 때 나타났던 신비로운 물건입니다.”
……계시란 건 진짜였던 건가.
사면이 투명한 유리로 된 케이스에 고이 들어 있었다.
별로 신비할 것도 없어 보이는데.
“성자님께서 나타나신다면 특별한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여,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수정이라고 하니까 아이기스의 방패가 떠오르네.
혹시 저것도 내 몸에 흡수되면서 무언가 능력이라도 주는 건가?
“열어봐도 돼?”
“성자님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신백준이 조심스럽게 케이스를 제거했고, 나는 좀 떨어진 곳에서 구슬을 지켜보았다.
“음…….”
……예상외다.
이런 곳에서 또 능력의 한계를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4층 던전에서 보았던 비석을 해석하지 못했던 것과 비슷하다.
[해당 물체는 현재로썬 탐색이 불가능합니다!]
아무래도 루비가 말한 대로 평범한 구슬은 아닌 모양이다.
“성자님?”
혹시 몰라서 손전등을 켜 이리저리 비춰보았지만, 무언가 정화된다던가 하는 낌새는 없었다.
“아, 미안.”
결국, 만져보는 수밖에 없나.
나는 구슬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딱히 변화라 할 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구슬이 내 손에 닿았고.
“……?”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음…….”
“딱히 별다른 변화는 없군요.”
“그러게…… 요?”
그 순간, 구슬에서 어마어마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시간차 공격이었냐?
“성자님!?”
“뒤로 물러서!”
신백준과 루비가 다급하게 나를 뒤로 잡아끌었다.
구슬에서 나오던 빛은 이내 한곳으로 응축되더니,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어딘가는 나다.
이거 튀어야 하나……?
“성자님!”
하지만 막을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다.
구슬은 가로막는 두 사람을 그대로 통과하고, 내 가슴속으로 쏘옥 하고 들어왔다.
내 몸에 무언가 들어오는 건 이걸로 두 번째다.
……이야. 아주 내가 꼬물이가 된 기분이야. 이러다 몸에 온갖 것이 가득 차겠는데.
“성자님! 괜찮으십니까!”
“어어. 별 이상 없는 거 같은데……?”
능력을 얻었다던가 하는 알람은 없었다. 대신이라고 하듯, 이상한 상태창이 나타났다.
[‘□□□ □□’을 □수하□습니다!]
“……무슨 하나도 안 보이잖아?”
“예?”
“아니야. 진짜로 이상 없는 거 같아.”
뭔 수?
당장 떠오르는 건 ‘흡수’했다는 것뿐인데.
문제는 뭘 흡수했는지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구슬을 톡톡 건드려보았으나, 다시 빛이 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역시 성자님이십니다! 성자님이 손을 댄 물건에선 전부 다 빛이 흘러나오는 거군요! 그 손으로 부디 이 루비의 머리를!”
루비의 눈에서 빛이 나오고 있긴 하다. 신백준이 구슬을 경계하며 내 앞에서 말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글쎄요…… 저도 뭔지 모르겠는데요.”
두다다다!
아기자기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달려왔다.
“아빠!”
놀란 표정의 순둥이가 내 품으로 안겨들었다.
“순둥아. 왜 그래?”
“응? 이상하다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순둥이가 까치발을 들어 수정을 만지려 한다.
“순둥아. 안 되지. 장난감 아니야.”
“괜찮습니다, 성자님. 원래부터 성자님에게 건네 드릴 물건이었습니다. 다만 저것이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
이리저리 수정을 살펴보고, 별다른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혹시 몰라 신성 길드에서 보유 중이던 우리 집 정수기표 물약도 끼얹어 보았고.
색의 변화는 없다.
딱히 오염됐다거나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아까 그 빛도 내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오염되었다고 말하기에도 무언가 익숙한 빛이었고.
결국, 순둥이에게 수정을 건넸다.
“우와! 이상하고 동그래!”
수정을 보면서 방실 웃던 순둥이가 구석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다.
자세히 보니, 그림자 속에서 꼬물이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아암~ 아~ 해야지. 꼬물아.”
-끄아앙~
……아니, 잠깐. 꼬물이가 수정을 먹고 있는 거 같은데?
내게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루비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로 인해 성자님이 위험에 빠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빛은 위험이라기보다는 성자님이 보이시던 그것과 비슷하더군요.”
루비가 재차 진지한 모습으로 내게 물었다.
“역시 성자님은 제게 있어서 성자님이십니다. 아까의 제안. 다시 한번만 더 생각해 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오늘 하루 동안 실컷 평범한 나를 보여줬음에도, 루비의 마음에는 변동이 없었다.
오히려 더욱 확고해진 눈빛을 하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길드장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신백준이 내 표정을 보고는 말했다.
“일에 관한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래부터 길드에 관한 일이라면 대부분 제 쪽에서 해결했으니까요.”
“……부끄럽습니다. 루비가 부족한 탓에.”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전에는 외부로의 노출이 없다시피 한 루비다.
대부분의 일은 성기사단장, 신백준 씨가 맡아서 했단다.
그가 진짜 길드장이 아닌가 하는 말도 꾸준히 나오는 모양이고.
‘어쩐다…….’
신백준도 은근히 내가 그 자리를 맡아줬으면 하는 눈치다.
신성 길드에 있는 성기사들은 전부 내게 호의적이었고.
대체 왤까.
이곳은 마음에 들었다. 기본적으로 길드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타 길드와 비교해서 대중에게 비치는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좋았다.
신성 길드가 담당하는 구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치안도 좋았고, 평상시에도 기부나 봉사 같은 것들을 밥 먹듯이 했으니까.
언뜻 보면 무서울 수 있는 흰 갑주는 이제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거기다 이곳은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마치 가족 같았다.
‘내가 그런 곳의 수장이 될 자격이 있을까?’
애초에 내가 없어도 충분히 돌아가는 곳이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진 님은 서진 님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만약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라도 저희가 한 몸 바쳐 도와드리겠습니다.”
“…….”
진지한 표정을 하던 신백준이 그 날 보았던 아저씨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 이렇게 무게 잡았습니다만, 사실은 단순한 욕심입니다. 길드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은 곳에 소속된다면 수녀님이 서진 님을 자주 만나 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요.”
“서, 성기사단장님!”
“수녀님은 이곳으로 돌아오실 때마다 성자님, 성자님 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이전에는 방 안에만 계셨는데 말이죠. 이제 와서 말하지만, 사춘기 딸을 대하는 것 같았다니까요. 하하.”
“……부끄럽습니다. 그만둬 주세요!”
루비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부끄러워하는 표정은 처음 본다.
두 사람의 모습에서 장난스러운 아버지와 딸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럼 나는 신백준의 아들 역할이려나?
‘하하…….’
그 모습을 보자니 쓸데없는 고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 가는 대로.
혹시 모를 위협들과 내 근처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도 좋은 기회겠지.
“예. 할게요.”
“정말입니까? 성자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미소 지은 신백준이 어딘가로 나를 안내했다. 수십 명의 인원을 수용 가능한 강당.
그곳에 신성 길드에 있는 성기사들이 단체로 나열했다.
“……꼭 해야 합니까?”
“일종의 의식 같은 겁니다. 얌전히 받아주시죠.”
……이거 제대로 낚인 거 같은데?
내 앞에 서 있는 철의 군대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주눅 들게 된다.
‘이럼 안 되지.’
중요한 순간이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처음으로 정규직(?)이 되는 순간이니까.
성기사들 사이로 루비가 걸어 나왔다. 방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루비의 찰랑거리는 은발은 아까 보았던 그 빛보다도 더욱 성스러워 보였다.
그녀가 두 손을 제 가슴에 모았다.
“수녀, 루비에르트. 성자님을 이 한 몸 바쳐 모시겠습니다.”
“성기사단장, 신백준. 성기사들의 대표로서 길드장님을 이 한 몸 바쳐 모시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모든 인원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던전 앞에서도 겪었던 순간이지만, 역시 익숙하지 않았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루비에르트, 이루비를 보면서 최대한 표정 관리를 위해 애썼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첫 취직이었다.
* * *
“……피곤하다.”
“집이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맨바닥에 뻗었다. 몸보다도 정신력이 바닥이 났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은 만큼, 웬만한 거엔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오늘 겪은 일은 한계치를 넘어섰다.
“나도!”
순둥이가 내 옆에 누워서 곧장 텔레비전을 튼다.
“순둥아. 손 씻고 와야지.”
“네에~”
……나도 씻어야 하긴 하는데.
귀찮아 죽겠네.
그러고 보니 오늘 텔레비전을 틀은 적이 없다.
가끔씩 빠뜨리는 때도 있고…….
아무래도 미래를 보는 텔레비전에서 쓸 만한 정보가 나오지 않는 것이 컸다.
“이제는 오히려 미래시가 메인 같단 말이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채널도 겨우 두 개고 얼마 안 걸리니, 순둥이가 오기 전에 확인해 두기로 했다.
혹시라도 도움이 되는 정보가 나올 수 있으니까.
“……길드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면 좋겠네.”
이제는 나도 책임감을 가져야 하니까.
기대감에 부푼 채로 텔레비전을 틀었다.
과연 무엇이 나올까.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두 채널에서 연이어 나오는 미래에 점차 내 눈이 가라앉았다.
[Ch.1]
[다음 속보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서 마석병의 초기 증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의 입장에 따르면, 갑작스럽게 늘어나고 있는 던전들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소식을 전하는 앵커.
[Ch.2]
[보영아 미안하다…… 엄마 미안해…….]
비관적인 말을 뱉으며 난간에 매달려 울고 있는 사람들.
두 채널이 말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었다.
내게는 그 무엇보다 익숙한 것이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뺏어 갔던 빌어먹을 마석병.
그것이 전국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51화
18. 저희도 만듭시다(1)
“……미안하다, 애들아. 정말 미안해…….”
중년의 사내가 두려움 가득한 눈동자로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떨어진다면 도저히 살 수 없을 만한 높이.
다리가 떨렸으며, 심장은 살고 싶다며 미칠 듯이 펌프질을 한다.
‘내가 죽지 않으면…….’
하지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게 있었다.
무엇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아내와 귀여운 자식들.
그들이 괴로워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주마등이라도 되는 걸까.
사내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기억들이 쏟아졌다.
행복한 추억.
괴로운 추억.
이윽고 최근에 들었던 가장 끔찍했던 기억으로.
-암이라도 되는 겁니까, 선생님?
-그것이…….
요즘 들어 몸이 허약해졌다 싶어서 병원에 찾아왔던 그다.
의사 선생님의 안색이 어두운 걸 보니, 아무래도 큰 병에 걸린 것 같았다.
‘아내한테 뭐라고 말해야 하지…….’
병에 걸린 거라면 치료비가 어마어마하게 나갈 것이다.
그래도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각성자라는 존재들과 던전이 나오는 시대.
불치병이라 불리던 대부분의 병들은 이미 치료법이 나온 후였으니까.
그렇다. 대부분이다.
-환자분의 몸속에 마석이 자리 잡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예?
의사의 말에 사내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마석병.
마물 혹은 정제되지 않은 마석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경우 몸에 마기가 쌓이며, 이내 그것은 마석으로 변화한다.
던전과 균열이 나타난 초기에 유행하던 병이었으며, 각성자와 길드라는 존재에 의해 질서가 정립된 지금으로써는 거의 없다시피 한 병이다.
각성자들은 마석병에 걸리지 않으니까.
그들의 몸에 흐르는 마나가 마기가 쌓이지 않게 막아준다.
마물이 나오는 던전은 각성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으며.
균열은 발생 예상 지역을 사전에 통보하고, 통제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마석병에 걸릴 이유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환자분 몸속에 존재하는 마석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엑스선 사진 하나를 보여줬다.
심장 옆에 콩알만큼 작은 무언가가 붙어 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심장을 움켜잡았다.
마석병.
현대 사회에 남은 불치병 중 하나.
수술을 통해 떼어낸다면, 그 즉시 마기가 온몸으로 퍼져 죽는다.
가만히 놔둔다면, 마석에서 흘러나오는 마기에 침식당해 서서히 죽어간다.
‘……죽는다.’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꾸준한 물약의 복용.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밤마다 가계부를 보며 한숨을 쉬는 아내를 떠올리며 그가 눈물 흘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물약을 구하고자 할 것이다.
집을 팔아서까지.
만약에 아내가 마석병에 걸렸다면, 그 또한 그랬을 테니까.
그런 모습은 절대로 볼 수 없다.
자신이 죽으면 된다.
결단을 내린 그의 몸이 점점 앞으로 기울었고.
“하. 드디어 찾았다.”
뒤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그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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