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efato 4

베테랑이야. 베테랑!”
나봉팔이 나머지 두 사람 중 소녀에게 먼저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소녀는 옆에 있는 부잣집 도련님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전 이서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이서진.
그의 이름을 들은 소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제 이름은 루비. 이루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성자님.”
* * *
처음 던전에 들어온 소감을 말하자면…….
음.
그냥 신기했다.
분명히 난 동굴처럼 생긴 입구를 통해 들어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이상한 숲에 도착해 있었다.
뭐야, 이게.
순간 이동이라도 한 건가.
“형씨. 멍 때리지 말고 주변 경계해. 던전 처음 와? 아, 맞아. 처음 온다고 했지. 하여간 이래서 초짜들이란.”
송민창이라는 남성은 내게 그런 말을 하더니, 진지한 표정을 하고 앞으로 나섰다.
검을 꺼내 들고 주변을 경계한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자세가 영…….
‘내 눈이 너무 높아졌나.’
상체는 너무 숙였고, 휙휙 거리며 돌리는 고개도 부자연스러웠다.
뭐, 틀린 말도 아니니깐.
나도 정신 바짝 차려야지.
‘…….’
“어…… 그러니까, 날 보지 말고 주변을 경계하라는데요?”
“그렇습니까. 성자님.”
던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옅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눈빛으로 내 얼굴이라도 뚫을 기세다.
아까부터 왜 이렇게 나만 쳐다보고 있냐…….
가만히 있기도 뭐 했기에 질문이라도 던졌다.
“혹시 혼혈이에요?”
“성자님에게는 제가 혼혈인 것으로 보이십니까?”
“아니, 뭐. 머리도 눈도 흔한 색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혼혈인 것으로 하지요.”
혼혈이면 혼혈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마치 내가 말해서 맞다는 듯이 말하는 건 또 뭐람.
“그런데 아까부터 성자님이라고 하는데, 혹시 고향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렇게 말해요?”
“성자님은 성자님이니까, 이렇게 부르는 겁니다.”
“끄응…….”
대화가 안 되는 거 같은데…….
“그런데 꼬마 아가씨는 이런 곳에 와도 되는 건가? 딱 봐도 미성년자 같은데, 집에 가서 우유라도 더 마시고 와야 하는 거 아니야?”
“어머. 애한테 왜 그래요~”
“아니, 나는 걱정돼서 그렇지. 뭐, 전부 다 내가 지키면 되니까 상관없지만. 하하!”
이루비는 송민창의 헛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관심은 오로지 나에게 쏠려 있었다.
“성자님의 나이는 어떻게 되십니까?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이신지요?”
무슨 맞선 자리니?
그때, 앞에서 초록색의 마물이 튀어나왔다.
드디어 전투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송민창이 잽싸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날카로운 검이 엉성한 몸놀림으로 고블린에게 쇄도했다.
-끄에에에엑!!!
그걸로 끝이었다.
전투고 뭐고 그런 거창한 단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방적인 죽음.
고블린에게는 제대로 된 무기조차 없었다.
고작해야 오른손에 든 짱돌 하나뿐. 사실 짱돌이 매우 위험한 무기긴 하지.
고블린의 시체를 발로 짓밟으며 송민창이 웃었다.
“헹. 이런 놈들은 나한테 걸리면 바로 이렇게 되는 거라고! 어때?”
“꺄아. 오빠, 진짜 멋지다!”
“흐흐. 기본이지, 기본.”
자신에게 달라붙는 박진주를 보며 헤벌쭉하게 웃는다.
자기가 말했던 주변 경계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인 모양이다.
저런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면, 충분히 근처에서 다른 놈이 올만도 한데 말이야.
다행히도 이놈뿐이었나 보다.
“일단 이 고블린의 가죽을 벗길 예정입니다만. 혹시 벗겨보신 분 있으십니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나봉팔이라는 사람이 말했다.
“아무도 없다면 제가 가죽 해체를 맡을 예정입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오오! 그래 주면 우리야 땡큐지!”
“대신 오늘 던전에서 얻을 총 수익에서 1할을 제가 따로 받았으면 합니다.”
“뭐야!?”
그 말을 하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고블린의 가죽을 벗긴다.
한두 번 벗겨본 게 아닌 솜씨다.
마치 가죽을 벗기는 게 고유 능력이라도 되는 듯이 깔끔하고 빨랐다.
“불만 있으시면 지금 말해주시죠.”
“그, 그래도 1할은!”
“전 괜찮은데요.”
“음~ 저도요~”
가죽에 흠집도 없었고, 자세한 금액은 알 수 없지만, 저런 퀄리티라면 밖에서도 가격을 훨씬 쳐줄 것이다.
오히려 1할만 더 받는단 것이 혜자롭게 보일 정도다.
저 사람이 바로 성자인 건가.
“성자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저도 괜찮습니다.”
나 말고, 저쪽이요. 저쪽.
“그,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주변이 찬성하자 송민창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고블린은 튀어나왔다.
기대한 게 무색할 정도로 시시하고, 쉬운 상대들뿐이었다.
그래도 처음으로 생명을 벤 감각은 신기했다. 사람이 아닌 마물인지라 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지만.
“던전에 처음 오신다더니, 혹시 따로 훈련이라도 받으신 적 있습니까?”
속성 과외를 요 며칠간 받기는 했지.
나봉팔이 나에게 다시 본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는 그 이후로 내게 여러 가지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고블린의 흔적을 찾는 법.
고블린들이 주로 하는 행동들.
솔직히 그렇게 영양가 있는 정보는 아니었으나, 공짜로 말해줄 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그냥 제 나름의 사과입니다.”
“사과요?”
뭔 소리래.
“저희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죠!”
“오. 좋아, 좋아. 난 찬성!”
딱히 쉴 정도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이미 자리까지 잡아놔서 거절하기도 뭐했다.
고블린이 튀어나올 것을 대비해 수풀이 없는 곳으로 빙 둘러앉았다.
“제가 좋은 차 하나 가져왔는데, 한 잔씩 어때요?”
“차? 좋지!”
“흠…….”
박진주가 배낭에서 보온병과 컵을 꺼냈다.
받자마자 넙죽 마시는 송민창.
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컵 안에 든 차를 바라보고 있자, 박진주가 눈웃음을 지었다.
“독이라도 들었을까 그래요?”
“뭐라? 사람을 그렇게 막 의심하고 그러면 안 되지!”
“걱정하지 마요. 독 같은 거 없으니까. 봐요.”
박진주가 똑같은 병에서 따른 차를 한 입 마셨다.
“어때요. 없죠?”
“그렇다면, 뭐.”
한입 마시자, 씁쓸한 맛이 내 혀를 괴롭힌다.
역시 내가 만든 특제 음료수가 훨씬 낫네.
마찬가지로 가만히 있던 이루비도 내가 마시자 그제야 따라 마셨다.
모두 한 잔씩 마시고, 다시 숲속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눈치껏 뒤로 빠져 배낭에서 보온병을 꺼냈다.
아무래도 찝찝하단 말이지.
‘크. 이 맛이지.’
특제 물약 한 잔을 마시고 있자니, 내 옆에 줄곧 붙어 있는 이루비가 신경 쓰였다.
“한 입 드실래요?”
“성자님이 주시는 거라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그렇게 둘이서만 귀한 걸 먹고 있자니, 앞에서 난리가 났다.
“쉿! 쉿!”
“미친, 대박이야. 대박! 흐흐하핫!”
왜 저러나 했더니, 고블린 한 마리를 보고 그러는 거였다.
그런데…….
“조금 크기가 다르네?”
“저건 홉고블린이라는 놈입니다. 이 던전에서 나타나는 정예 마물이죠.”
“저 녀석 하나만으로 오늘 수익은 대박이라고. 절대 놓치지 마!”
정예 마물인가.
그럼 저놈이 이곳 대빵이라는 거겠네?
“다 같이 덮치도록 하죠.”
그런 기대를 했으나, 사실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중간에 송민창이라는 사내가 자기 발에 걸려 위험하긴 했지만 내가 타이밍에 맞춰 끼어들었다.
“……안 도와줘도 됐수다.”
도와줘도 뭐라 하네.
뒤를 힐끗거리는 게 박진주라는 여자한테 잘 보이고 싶었나 보다.
던전 어쩌구 하더니…….
“그럼 제가 가죽 해체를…….”
이제 곧 있으면 이 던전의 끝이다. 예상보다 쉽게 끝났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돌연 송민창과 나봉팔이 앞으로 쓰러졌다.
“이건 대체…….”
“무, 무슨 일이여!”
“흐. 드디어 독이 몸에 퍼졌나 보네.”
요망한 웃음소리.
어떻게 이런 예감은 틀린 적이 없냐.
송민창과 나봉팔은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쓰러지지 않은 사람은 나, 박진주 그리고 이루비뿐이다.
상황을 확인하자마자, 나 또한 곧바로 쓰러진 척 연기를 했다.
내가 바닥에 쓰러지자 옆에 있던 이루비가 놀란 눈을 하였지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독이라고?”
“오빠~ 그러게 누가 남이 주는 거 넙죽 마시래? 하핫!”
“부, 분명히 너도 마셨잖아!”
“아~ 그거? 이거 미안해서 어째. 나는 오빠들 몰래 따로 해독제 마셨는데?”
“그게 무슨…….”
박진주는 이제껏 한 번도 꺼낸 적 없던 단검을 두 손에 쥐었다.
손에서 능숙하게 돌아가는 단검. 딱 봐도 검 꽤나 다루는 실력자다.
“오늘은 정말 운이 좋다니까. 멍청이들에다가 돈 많아 보이는 바보 도련님까지 걸리고.”
그녀는 혀로 입가를 훑더니 쓰러져 있는 나를 보고 웃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 오빠. 내가 그 옷들 전부 팔아서 좋은 곳에 써줄 테니까.”
팔기는 무슨. 이게 얼마짜린데.
박진주가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언제 일어날까.
타이밍을 재고 있는데, 내 옆에 서 있는 소녀에게로 박진주의 눈이 돌아갔다.
“어머. 꼬마야. 넌 어떻게 움직이는 거니?”
“…….”
“몸이 굳어서 말도 안 나오나 보구나. 불쌍해라. 언니가 특별히 너는 살려줄게. 밖에서 허튼 소리하면 알지? 여기 있는 오빠들 전부 마물들한테 운이 없어서 죽은 거다?”
아래를 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이루비를 무시하고, 내게 점점 가까워진다.
노골적인 살기에 정신은 더욱 뚜렷해졌다.
……좋아.
곧 온다.
하나, 둘, 셋 하면 일어나서 달려드는 거야.
기껏해야 며칠 배웠다고, 저런 놈과 대등하게 싸울 수는 없다.
방법이 있다면 한 가지.
기습뿐이다.
쓰러진 상태에서도 검은 내 손에 쥐어진 상태다.
상대는 알아차리지 못한 거 같지만.
“잘 먹을게. 오빠~”
하나.
“하핫. 대박이야, 대박~”
둘.
“특별히 오빠는 고통 없이 끝내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하는 겁니까.”
셋……?
“성자님에게 감히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이루비가 허리춤에 달려 있던 철퇴를 쥐었다.
그녀의 체구를 생각하자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기.
제대로 휘두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박진주도 그리 생각했는지 얼굴에 비웃음이 담긴다.
그리고.
“그거로 내려치게? 할 수 있으면 해…….”
쾅!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
지금 뭐가 지나간 거지?
마치 소성환의 주먹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던 것처럼 다시 한번 방금 상황이 재현되었다.
이번엔 잠깐이나마 볼 수 있었다.
웃고 있는 박진주에게로 달려드는 자그마한 생명체.
철퇴를 옆구리에 박아 넣기까지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그대로 박진주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커헉!”
나무에 들이박혀 축 늘어진 박진주.
그곳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내게로 달려온다.
피에 젖은 철퇴가 앞뒤로 살벌하게 흔들리고 있다.
얼굴에 피가 튄 상태로 이루비는 내게 기쁜 듯이 외쳤다.
“성자님! 사악한 마귀를 퇴치하였습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
……아니, 안심 못 할 거 같은데.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34화
13. 던전에서 만난 사람들(2)
진주인가 뭔가가 다가올 때보다 더욱 압도적인 긴장감이 나를 감싼다.
“성자님.”
오 마이 갓.
렌즈야.
이럴 때 발동하려고 능력 개방된 거 아니었니?
제발 무슨 미래라도 좀 보여줘 봐!
“성자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미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진심으로 날 걱정하고 있는 이루비뿐이다.
위기의 순간.
즉, 피에 물든 철퇴를 든 저 미치광이가 날 죽일 생각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역시. 사악한 저주에 당하신 것이로군요. 걱정하지 마시지요! 마귀가 죽는다면 저주는 풀릴 것입니다!”
“끄억…….”
옆구리가 깊게 파여 나무에 박혀 있는 박진주.
그런 공격을 받고도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이 용하다.
그녀는 이루비가 뒤를 돌자마자 미친 듯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으읍! 읍!”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듯 그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공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이야! 잘 잤다!”
저 눈빛.
정말로 죽일 생각으로 보였기에 일단은 일어났다.
“성자님! 몸은 어떠십니까!”
다시 타겟을 바꾸어 나한테 온다.
……그냥 놔둘 걸 그랬나.
등에서 식은땀이 미친 듯이 흐른다.
만약 여기서 날 공격한다면 이길 수 있을까?
내 몸에 두르고 있는 수십억의 장비들.
아이기스의 방패.
미래시.
장비째로 몸이 박살 나겠고.
방패는 과자처럼 부서질 테고.
미래시는 1+1처럼 내 죽음을 두 번이나 보여주겠지.
어느 것 하나 저 미친 철퇴 앞에서는 소용없을 것이다.
이럴 땐 역시 하나뿐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뻔뻔하게 나가겠다.
“예. 전 괜찮습니다.”
“저는 성자님이 잘못되신 줄 알고 정신이 어떻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응. 나도 내가 어떻게 될 줄 알았다.
‘일단…….’
박진주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의 입에 물약을 살짝 흘려주었다.
“감사합니다…….”
“고, 고맙수.”
송민창과 나봉팔이 내 뒤에 있는 이루비의 눈치를 본다.
방금 그런 모습을 봤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애초에 지금까지 나온 마물들에는 이루비가 나설 것도 없이 끝났으니까.
“저 사람은 어떻게 하죠?”
정신을 차린 나봉팔이 박진주를 가리켰다.
순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여야 하나?’
우리 모두를 죽이려던 놈이다. 당연히 죽이는 게 맞지 않을까?
톡톡-
누군가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터치했다.
“성자님. 표정이 어두우십니다. 역시 아직도 마귀의 저주가…….”
철퇴를 휘두르던 그 광기 어린 눈빛은 어디 가고 아까와 같은 신비로운 눈동자만이 남아 있다.
그걸 보자니 정신이 들었다.
“어차피 저 상태로 움직일 수도 없으니까, 밖으로 데려가서 넘기도록 하죠.”
“……저희는 한 것도 없으니,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됩니다.”
“이런 놈이랑 똑같은 놈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 손만 더러워지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렇군요. 그런 말씀이셨군요. 성자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저는 따르겠습니다.”
괜히 더 엮이고 싶지 않다.
죽인다고 해봤자 내 마음이 개운해지기는커녕 불쾌하기만 할 테니까.
이런 놈은 그냥 죽는 것보다 평생 감옥에 썩는 게 더 어울린다.
“…….”
송민창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진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저 양반도 좋은 교훈이 됐을 거다.
“그럼 나갈까요?”
* * *
던전의 옆.
1층 던전, 고블린의 숲을 담당하고 있던 공무원에게 안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했다.
그는 피를 토하고 있는 박진주를 보더니 안색이 노랗게 변했다.
‘아무렴 저런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저러겠지.’
“일단 경찰에 연락하죠.”
“상태가 저래도 꽤 실력 있는 각성자인 것 같던데, 평범한 경찰로 괜찮겠어요?”
“경찰 쪽에 각성자에 대응하기 위한 전담반이 있다니까 괜찮을 겁니다.”
내가 전화기를 들자, 공무원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하긴, 다른 시점에서 본다면 우리 넷이 범죄자고 박진주가 피해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세요, 그럼.”
얼마 안 있어 네 명의 건장한 남성이 도착했다.
“각성자 범죄 전담반 소속 홍산호입니다.”
자신을 소개한 홍산호는 대표로 앞에 나오더니,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우리 넷은 안에서 벌어진 일을 거짓 하나 없이 전했다.
“그렇군요. 일단 이 사람은 저희 쪽에서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따로 안 가도 됩니까?”
박진주는 현재 기절해 있었다. 던전 안에서의 상황을 확신할 수 없는 만큼. 저들 입장에서는 우리는 전원 용의자일 텐데.
“우선 이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다음에 출석을 위해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조금 찝찝한데.
“혹시 경찰 공무원증 한번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그 말에 나를 바라보던 홍산호는 이내 웃으며 공무원증을 꺼냈다.
“여깄습니다.”
……과민 반응이었나.
그들은 박진주를 태워 어딘가로 떠났다.
……그런데 이 사람들 왜 아무 말도 없냐.
나는 빠른 정리를 위해 밝게 말했다.
“그럼 몫은 4등분 하면 되는 거겠죠? 그래도 입이 하나 줄었네요.”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금전 문제는 원래 철저하게 해야 하는 법이다.
순둥이가 태어나면 필요한 용품들도 아주 많을 거고.
내 말을 들은 나봉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오늘 정산에서 빠지겠습니다.”
“예?”
나봉팔은 내게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아까 저희 입에 흘려주신 그거, 물약 맞으시죠? 그런 걸 먹어 놓고 뻔뻔하게 제 몫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옆에 있던 송민창도 말했다.
“나도 빠지겠수다. 그리고…… 안에서 했던 망언들 정말 미안했소.”
그러면 남은 게 나랑 이루비뿐인데…….
“제 몫은 필요 없습니다, 성자님. 그저 성자님 옆에 같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그 무엇보다도 값진 보상입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여기가 중요하다.
원래 끝맺음을 제대로 해야 하하 호호 하고 헤어질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각자 갈 길 가는 거지.
정부 소유 던전이라서 다른 곳에 팔거나 할 수는 없었다.
아까 보았던 공무원은 어디로 갔는지 없고, 다른 사람이 와서는 배낭 속에 있는 마물의 가죽, 마석을 가지고 갔다.
잠시 기다리자, 정산이 끝났다며 우리에게 찾아왔다.
얼마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정예 마물에 마석까지 나와서 그런지 액수가 상당했다.
‘800만 원…….’
괜히 각성자들이 던전에 들어가는 게 아니구나.
이루비와는 정확히 N등분을 했다.
계속해서 거절했지만, 금전 문제로 꼬투리가 잡히면 안 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사하고, 각자 돌아갔다.
“오늘은 고생 많으셨습니다. 성자님.”
성자.
하루 종일 들어서인지 이제는 익숙해진 그 말을 들으며 이루비에게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차피 하루 동안의 인연이다.
그 살벌했던 모습도 며칠이 지나면 사라지겠지.
“그쪽도 고생 많았어요.”
그래. 만나서 반가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 * *
“……그년. 내가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박진주.
본명 전혜영인 그녀는 이를 갈며 물약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옆구리에 절반을 바르고, 나머지는 단숨에 마셨다.
“……X발.”
물약을 사용했는데도 아직도 옆구리가 욱신거린다.
사실상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운이라고 봐야 하리라.
1층 던전, 고블린의 숲에 배정된 공무원 한 명과 내통하고 그곳에서 각성자들을 등쳐먹는 것까지는 좋았다.
어차피 던전에서 죽는 애송이 각성자들은 널리고 널렸다.
용의주도하게 기한을 두고 하는 작업인 만큼, 걸릴 만한 요소도 없었기에 그녀는 안심하고 이 놀이를 즐겼다.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놈들이 살려달라고 비명 지를 때 그 모습은 그녀에게 있어서 쾌락이었다.
고작해야 1층 던전.
각성자들의 수준도 보잘것없었기에 자신이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땅꼬마 같은 년한테 이런 꼴을 당하다니.”
온몸에 희귀 장비를 두른 부잣집 도련님 옆에 꼭 달라붙어 있던 흰머리 꼬맹이 하나.
고작 그런 년 때문에 일이 이렇게 망쳐질 줄이야.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녀를 데리고 간 사람들은 각성자 범죄 전담반 소속이 아니다.
마땅한 돈을 지불하고 사용하는 뒷골목의 심부름꾼들이지.
물약값.
심부름값.
자신에게서 나갈 돈을 떠올린 전혜영이 이를 악물었다.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안 되겠어.”
전혜영은 밤이 되었을 때,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골목길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누군가를 기다릴 속셈이다.
CCTV도 없는 구역.
누가 걸려들지는 모르겠으나, 그 땅꼬마한테 받은 굴욕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리라.
또각-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에 잠겨 모습이 잘 보이지 않지만, 크기를 보아하니 자신을 철퇴로 후려쳤던 그 년과 비슷해 보인다.
전혜영이 희열에 찬 웃음을 지었다.
마침 잘 됐어.
어둠 속에 있던 인물이 점차 다가오고, 꺼져 있던 가로등이 켜졌다.
얼굴이 드러나고, 상대를 확인한 전혜영의 눈이 커다래졌다.
“너, 넌!”
“성자님은 그리 말씀하셨지만. 그분을 모시는 자로서 성자님에게 해가 될 수도 있는 자를 가만히 놔둘 수는 없는 법이지요.”
흰머리 꼬맹이와 비슷한 체구일 줄 알았는데, 본인일 줄이야.
당황하던 전혜영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방심했던 것뿐이야. 이런 어둠 속에서라면 내가 질 리가 없어.’
그녀의 고유 능력은 어둠 속에 있을 때 빛을 발한다.
직접 복수할 수 있게 됐단 사실에 전혜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꼬맹아. 제 발로 찾아온 걸 후회하게 해줄게.”
“성자님에게 위협을 가한 죄는 속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체구를 이용해서 빠르게 달려드는 전투 스타일.
한 번은 당했지만,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는다.
“하! 속죄는 무…….”
전혜영이 입을 다물었다.
대체 언제?
자신은 능력으로 어둠 속에 있는 자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 상황에 심각하게 당황했다.
“수녀님.”
루비에르트의 뒤로 세 명의 성기사가 나타났다.
흰 갑주를 입고 전혜영과는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거대한 괴물들.
“이런 일을 맡기게 되어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수녀님. 저희는 신을 지키는 방패.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방패란 더러운 것들로부터 뒤에 있는 사람을 지키는 것.
성기사들은 자신들의 수녀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루비에르트는 아까 전 성자님이 하던 말씀을 떠올렸다.
-우리 손만 더러워지는 거잖아요, 그렇죠?’
“사악한 마귀를 상대할 때, 자신도 모르게 물들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 잘 알아들었습니다. 성자님.”
루비에르트가 두 손을 모아 짧게 기도했다.
“확실한 참회의 시간을 가져주시길.”
“자, 잠깐! 사, 살려주…… 커헉!”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서 무언가 뒤틀리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아침에는 훈련.
오후에는 던전.
정부 소유의 던전은 예약하기가 까다로웠기에, 타 길드가 보유한 던전에 이용비를 지불하고 참가하기로 했다.
안에서 얻은 부산물은 가질 수 없었으며, 무려 70%의 수수료를 떼고 돈으로 환산된다.
말 그대로 순수하게 던전을 체험하기 위한 사람들만이 이용하는 시스템이다.
딱히 돈이 아쉬운 게 아니었기에 나는 닥치는 대로 던전에 참여했다.
1층 던전.
혹시 다른 곳은 어떨까 했는데 전부 다 비슷비슷한 수준이었다.
천공 부리새의 깃털로 만든 신발.
지하 두더쥐의 부리로 만든 가슴 보호대.
하늘 사슴의 가죽으로 만든 건틀릿.
등등.
내 몸에 착용 되어 있는 것들은 전부 보스 혹은 정예 마물들의 사체로 만든 장비다.
하나같이 착용자의 민첩을 올려준다는 말도 안 되는 옵션을 가진 물건들.
방어보다는 기동성을 살리자는 의미에서 구매한 것들이다.
그렇다고 내구도가 낮단 것도 아니다.
엄연히 보스의 사체로 만들어진 장비니깐.
“신기하단 말이야…….”
제작과 관련된 고유 특성을 가진 장인이 만든 물건이라는데, 과장 좀 보태서 장비에 개방권을 사용하는 게 아닌가 의심도 했다.
덕분에 통장에 있는 대부분의 돈이 빠져나갔지만, 돈은 계속해서 들어올 것이기에 상관없었다.
오늘도 던전에 향하면서 첫 던전에서 있던 일을 떠올려보았다.
만약 이루비의 도움 없이 박진주를 상대해야 했다면 어땠을까.
기습이라는 확실한 선택지를 골랐지만, 지금이라면 일대일을 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물이 아니라, 사람이랑도 연습을 해보긴 해야 하는데…….”
소성환이랑 대련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대련이라기보다는 총알 피하기…… 뭐, 그런 느낌의 훈련이지.
“2층 던전에서는 뭐가 있을까.”
요 며칠 닥치는 대로 던전을 공략한 결과 내 각성자 등급은 한 단계 높아졌다.
그 덕분에 2층 던전의 출입도 가능해졌고.
더 빠른 등급 상승을 위해서.
좀 더 제대로 된 던전을 느껴보기 위해서 2층 던전으로 가는 중이다.
물론 2층부터는 대부분 길드 소유였기에, 이용비를 지불했지만.
1층 같은 경우에는 돈을 지불하고까지 던전을 이용하는 각성자는 없었는데, 역시 2층이라 그런지 나 같은 사람이 꽤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높이기 위해 던전으로 향하는 사람들.
“반갑습니…… 다?”
나는 던전의 앞에 먼저 도착해 있는 일단의 무리에게 인사를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어! 이서진 씨 아니세요?”
“아, 그…….”
“송도형입니다. 저번에 연회에서 뵌 적 있으시죠?”
아, 기억났다.
송도형.
뱀인지 뭔지 기분 나빴던 놈과 엮이면서 만났던 순한 인상의 사람.
아마 위트 길드의 길드장이었단 걸로 알고 있는데.
“던전 공략하러 오신 거예요?”
“예. 훈련 겸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길드장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보통 본인 길드가 소유한 던전들을 이용하던데.”
“하하…….”
내 말에 송도형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희가 보유한 던전의 수가 적어서요…….”
“아……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별로 틀린 말도 아닌데요! 거기다가 여긴 몇 안 되는 비행 타입의 마물이 나타나는 곳이거든요.”
오…….
그건 몰랐는데.
4층 던전의 메인 보스가 비행 타입으로 추측되는 만큼 미리 비슷한 놈을 겪어보면 좋을 것이다.
“이게 다 우리 길드장이 무능하기 때문이다, 이 말이야~”
“윤미주. 이 정도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던 것도 전부 길드장 덕분이야. 말조심해라.”
“장난이지, 장난. 하여간. 진지충이라니까.”
송도형의 뒤에 있던 두 인물이 말을 주고받았다.
같은 길드 사람인가?
“위트 길드의 임상욱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윤미주예요. 연회에 갔다 온 뒤로 울 길드장이 대단한 사람을 봤다면서 흥분해 있던데. 혹시 본인이세요?”
고지식해 보이는 안경을 쓴 사내와 약간은 말괄량이 같은 여자.
윤미주 쪽에서 길드장을 놀리면, 임상욱이라는 자가 주의를 준다.
송도형은 둘 사이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어색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꽤나 자유로운 분위기의 길드다.
마치 오래전부터 같이 지낸 듯이 서로 간의 어색함은 전혀 없어 보인다.
“저희 셋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거든요. 각성도 나란히 얍! 하고 되어버렸고. 그래서 이참에 길드나 만들자~ 하고 만든 게 위트 길드예요. 언제나 위트 있게! 어때요. 제가 지은 건데, 꽤 괜찮죠?”
어쩌다 보니 길드 탄생 이유까지 알게 되었네.
TMI가 꽤나 충실한 사람이구만…….
“죄송합니다…….”
“아뇨. 분위기 좋은데요, 뭘.”
던전에서는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과 행동한다.
그 때문인지 분위기가 딱딱하다 못해 굳어버리기 일쑤다.
어차피 전부 다 던전에서 나오는 마물들이 목적이지, 친목을 다지러 온 게 아니니깐.
마물도 마물이지만, 여러모로 사람 때문에 숨 막히는 곳이 던전이다.
셋이서 티격태격하고 있는 위트 길드 사람들을 보자니 그래도 오늘은 꽤나 느낌이 좋았다.
‘……이루비도 안 보이는 거 같고.’
하루 동안의 인연이라고 안심하던 것도 잠시.
그 이후 세 번에 한 번꼴로 같은 던전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성자님. 오늘도 안녕하신지요.
매번 같은 표정, 같은 대사를 뱉는 소녀.
그래도 첫 던전 같은 사건은 없었는지라, 그 날과 같은 임팩트는 받지 못했지만…….
원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그래도 그 폭탄이 나한테 터지진 않을 거 같아서 다행이지.’
성자님. 성자님.
이제는 내가 진짜 성자인 건가 싶을 정도로 익숙해진 호칭.
누구에게나 그렇게 말하는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에게는 말조차 걸지 않는다.
대화 상대라고는 오직 나 혼자뿐이다.
‘길게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이 과정도 전부 4층 던전을 위한 발판일 뿐이다.
던전에서 같은 각성자를 만나는 게 신기한 일도 아니고.
그저 아주 낮은 확률로 여러 번 겹친 거뿐이겠지.
“앞으로 몇 명 더 오나요?”
“2층 던전의 정원이 열 명이니까…… 앞으로 여섯 명이 더 오겠군요.”
여섯이라…….
조금은 밝은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면 좋겠네.
“하. 이게 누구야?”
익숙한 목소리를 가진 일단의 무리가 이곳으로 걸어왔다.
“……스네이크의 전진우네요.”
송도형이 작게 속삭였다.
그냥 지나가는 게 아닐까, 그런 기대를 했지만, 전진우를 포함한 다섯 명이 이곳으로 정확히 걸어왔다.
‘벌써부터 한숨 나오네…….’
저놈들이랑 같이 들어가야 한다고?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손가락 틈으로 마지막 한 명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름다운 백색 머리칼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검정과 흰색의 조화가 어우러지는 옷.
수녀복을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은 인물이 나를 보며 언제나와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성자님. 오늘도 안녕하신지요.”
하하. 돌겠네. 진짜.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35화
13. 던전에서 만난 사람들(3)
“위트인지 뭔지 하는 떨거지들에…….”
전진우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봤다. 곧장 표정이 찡그려지는 게 그때 있었던 일이 떠오른 모양이다.
“……알 수는 없지만, 더럽게 인기 많은 사람 하나. 특이한 조합이네?”
웬일로 저번처럼 막무가내로 덤벼들지는 않네.
“어때. 이마는 괜찮냐?”
“…….”
여전히 표정 관리는 못 한다.
“하. 스네이크 길드에 물약은 충분하니까 상관없다. 저런 약소 길드한테는 귀한 걸지라도 나한테는 물 같은 거거든.”
이야.
물약이 물 같은 거라고?
대단한 자신감이다.
쟤네 집에도 정수기 하나 마련했나.
그러고 보니 재밌는 사실을 하나 들었던 거 같은데.
조금만 더 놀려볼까?
반응이 확실한 놈이라 놀리는 맛이 탁월하다.
“길드에서 물약은 잘 사용하고 있고?”
“……그럼. 스네이크도 자체적으로 물약 생산이 가능하니까.”
“잘됐네. 괜히 나 때문에 그렇게 된 줄 알고 솔직히 좀 미안할 뻔했잖아.”
스네이크 길드는 연회 이후로 황혼 길드에서의 물약 공급이 완전히 끊겨버렸다.
현재 황혼의 물약은 연금술사 길드의 합병으로 인해 최전성기를 맞는 중이다.
이미 마의 70%는 깨버린 지 오래고 대량 생산의 발판까지 마련하고 있다는 것 같은데.
물론 내 물약은 논외로 치고.
그에 반해 시중에 풀려 있는 스네이크 길드의 물약은…….
“50% 정도면 꽤 괜찮지.”
정확히 내 물약 순도의 절반이었다.
말 한마디를 할 때마다 얼굴이 붉어진다. 이대로 계속 건드렸다가는 ‘펑’ 하고 터져 버릴 거 같다.
그는 눈을 부라리면서 내게 트집을 잡았다.
“그렇게 귀하신 분이 이런 누추한 던전에는 왜 온 거지? 집에서 발이나 뻗고 편하게 살면 될 텐데 말이야.”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말이야.
전진우는 내 옆에 있는 위트 길드의 사람들을 보고 말했다.
“떨거지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우월감에라도 취하고 싶었나? 그것참, 악취미군.”
“네가 할 소리냐?”
경호원이라도 되는 양, 전진우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각성자들.
하나같이 몸이 굳어 있는 게 평소에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예상이 갔다.
저 성격이 어디 가겠냐.
전진우는 우리 쪽을 한동안 보더니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우연히도 우리 전부 같은 던전에 들어가게 됐군.”
“그러게. 솔직히 벌써부터 앞이 막막하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말인데, 제안할 게 있다.”
갑자기 웬 제안.
“단순한 내기라고 말하는 게 맞겠군.”
내기.
그 말에 내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꽤나 흥미가 있어 보이는데, 어때?”
“무슨 내기를 할 건데?”
“마침 숫자도 딱 맞아떨어지잖아? 너희 다섯, 우리 다섯. 던전 내에서 더 많은 마물을 잡는 쪽이 이기는 거다.”
오. 녀석치고 꽤 정상적인 내기를 제안했다.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그래도 나 혼자서 넙죽 받아들일 순 없지. 뒤를 돌아서 송도형을 바라봤는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저 사람한테 별로 좋은 감정은 없으니까요. 솔직히 제대로 맞붙는다면 저희가 질 것 같지도 않고.”
역시 한 길드의 수장다운 발언이다. 아까 보이던 어수룩함은 사라지고, 비장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
“잠깐. 내기라 했으니, 승자에 대한 보상이 없을 수는 없지.”
전진우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패자가 승자의 다리 밑을 기는 것은 어떤가?”
다짜고짜 몸통 박치기를 시전할 땐 언제고, 수위가 확 낮아졌네.
생각해 보니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전진우한테는 최고의 벌칙일 거 같긴 하다.
“그럼 시간 지체할 필요 없이 곧장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아니, 잠깐.”
“뭐지?”
나는 전진우에게 다가갔다. 전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려 가드 자세를 취했다.
누가 보면 때리는 줄 알겠네.
“사진 하나 찍고 들어가자.”
“사진?”
“응. 사진.”
“……우리가 사이좋게 사진 찍을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나도 그렇긴 한데…… 뭐, 이 내기에 대한 증거 사진 정도라고 생각하면 괜찮을 거 같다.”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네 마음대로 해라.”
전진우의 옆에 나란히 서서 휴대전화를 들었다.
“자, 찍는다.”
* * *
던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송도형이 내게 말했다.
“2층 던전부터는 올라가기 위해서 각 던전마다 일정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가령 이 던전에서는 1층에 있는 마물의 일정 수를 잡는 것이 조건이죠.”
예상보다 꽤나 쉬운 조건이다.
“다만, 이 던전에 있는 마물들은 전체적으로 날쌔고 재빠릅니다.”
“제대로 싸울 생각은 안 하고, 이리저리 도망만 다닌다니까요?”
“아마 놈들을 쫓아다니다 보면 체력적으로 문제가 생길 겁니다.”
재빨라서 잡기가 힘들다 이 말인데…….
나는 뒤에 매고 있던 배낭을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안에서 익숙한 병들을 꺼냈다.
언제나 여유분으로 넉넉하게 챙기고 다닌다.
내 핵심 전력은 바로 이거니까.
노란색의 물약 다섯 개.
“이건 뭐죠?”
“물약……? 아니, 그보다 이 색은 대체…….”
상대가 얼마나 빠른지는 상관없다. 우리도 그만큼 빨라지면 된다는 거니까.
그걸로 끝이 아니다.
배낭에서 체력 물약을 꺼내 마치 이온음료 나눠주듯이 일행들에게 건넸다.
하지만 하나같이 사이즈가 남달랐다.
“페트병……?”
체력이고 뭐고, 지칠 틈을 주지 않는다면 그만이다.
국가가 허락한 마약.
이렇게 된 이상 물약 중독에 한 번 걸려보자고.
* * *
전진우는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행동을 개시했다.
“곧장 퍼져서 놈들을 잡아!”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토끼처럼 생긴 마물들. 귀여운 외견과는 다르게 귀에 달린 흉악한 칼날은 놈들의 속도와 함께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큭!”
기본적으로 따라붙는 것도 어렵고,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계속해서 생겨난다.
스네이크의 길드원 중 한 명이 곧장 물약을 마시려 하자, 전진우가 외쳤다.
“전투 중에 물약 섭취하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 물약은 전투가 모두 끝나고 소량 섭취한다!”
그놈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현재 스네이크 길드의 상황이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기는커녕, 지금의 자리조차 위험했다.
황혼 길드와의 거래가 끊겼다.
그것만으로도 던전을 이용하는 각성자들에게 있어 치명적이다.
스네이크 길드 또한 자체적으로 물약 생산이 가능하지만, 그래 봤자 50%의 순도다.
기존에 마시던 황혼의 물약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질 낮은 물약.
전투 중에 마신다면 자연스럽게 몸이 굼떠지고, 회복 속도 또한 느렸다.
‘……스피드가 중요해.’
상대는 이서진이다.
무슨 일인지, 정해연이 호감을 가지고 있고, 안환재와 단둘이 이야기할 정도의 인물.
원래대로라면 전진우 같은 자가 이런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되지만.
자존심이 존재 가치인 전진우는 뒷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든 이서진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해낸 게 이런 내기의 형식이다.
복수라기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소소한 것이지만.
자신의 발밑에 기어 다니는 꼴을 본다면, 조금이나마 우월감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잡았습니다!”
마물을 잡는 속도는 빨랐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스네이크 길드에서도 에이스라고 불릴 인물들이니까.
“스물다섯 마리.”
1층에 존재하는 칼날 토끼의 수는 총 백 마리. 이 정도 숫자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흐흐…….”
놈들이 자신의 다리 밑을 기는 것을 상상하며 웃고 있던 전진우한테로 길드원의 당황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 부길드장님!”
“뭐야? 잡담할 시간 있으면 한 마리라도 더…….”
그를 노려보던 전진우도 그제야 상황을 알아챘다.
“뭐, 뭐야! 어떻게 벌써?”
자신을 포함한 길드원들 발밑에 생겨난 작은 원형 포탈.
1층이 클리어됐다는 의미였다.
* * *
“자, 칼날 토끼의 발바닥. 양쪽 합쳐서 백 오십 개.”
“…….”
그런 걸 보여주지 않아도, 전진우는 이미 자신들이 패배했단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의 배낭에 있는 부산물이 그걸 증명하니깐.
입을 다물고 있던 전진우가 말을 내뱉었다.
“아직 2층이 남아 있잖아? 이 던전의 핵심은 2층에서 나타나는 비행형 마물이다. 고작해야 1층과는 비교도 안 되는 난이도지.”
“하! 말 더럽게 많네. 지면 진 거지 입을 뭐 저렇게 놀려?”
윤미주가 일부러 들리도록 크게 혼잣말을 했다.
언제나 주의를 주던 임상욱도 지금만큼은 그에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진우 또한 양심의 가책은 있는지 별다른 반응은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이서진이 말했다.
“좋아. 그럼 2층에서 제대로 하던가. 대신, 네가 지는 순간 조건은 한 가지 추가야.”
“……무슨 조건 말하는 거지?”
“그건 그때 가서 말해줄게.”
“그래도 미리 조건을 아는 편이…….”
이서진은 자신의 단기 스승에게 배운 기술을 이곳에서 써먹기로 했다.
“쫄?”
역시 효과가 좋은 기술인지, 전진우가 곧장 반응했다.
“좋다. 나중에 두말하지 마라.”
전진우는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자신 있다고.
1층에서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비행형 마물은 팀플레이가 없을 경우 잡기 힘들다.
저들이 급조된 팀인 것에 반해, 이쪽은 이미 몇 번이고 합을 맞춘 같은 길드원들이다.
‘하. 여유가 대단하시군.’
이서진이 휴대전화를 들어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을 본 전진우가 작게 조소했다.
던전 내에서 휴대전화는 기본적으로 사용이 제한된다.
작동하는 시간도 고작해야 몇 분이고, 사용할 수 있는 기능도 문자가 고작이다.
저것은 자신을 향한 의미 없는 도발일 뿐이다.
이서진은 휴대전화 속 앨범을 확인했다.
자신과 사진을 찍는 것이 어지간히 불편한지 인상을 쓰고 있는 전진우의 모습.
그것을 클릭하자, 이내 화면에 지도가 하나 나타났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지형.
바로 이곳 2층 던전 ‘겁쟁이 새의 초원’의 상세한 지도였다.
시간제한조차 없었다.
휴대전화의 위치 추적.
그것은 지구와는 다른 공간인 던전 안에서도 작동하였다.
지도 가운데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붉은 점을 확인한 이서진이 전진우를 보며 생각했다.
단 한마디의 변명도 할 수 없게 완벽한 패배를 선물해 주겠다고.
* * *
전진우 일행과 양쪽으로 갈라지고 난 후.
우리는 곧장 달려서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지도를 보며, 전진우의 위치를 확인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가는 방향을 한발 앞서간다.
그렇게 그 길목에 있는 모든 새를 사냥할 예정이다.
-끼에에엑!
문제는 저놈을 어떻게 빠르게 정리하냐는 건데…….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곧장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게 우리를 내려다본다.
초기화 과정을 거쳤으니, 이지가 있는 것은 아니겠고.
……유전자부터 깊숙하게 새겨진 신중함인가.
이름부터 겁쟁이 새라고 붙여진 이유가 있었구만.
시간이 지나자, 공중에서 하강하며 부리로 위협하는 녀석.
나는 곧장 속으로 외쳤다.
‘아이기스의 방패’
옆으로 산개해 피하려던 송도형의 앞으로 흰색의 방패가 나타났다.
방패에 공격이 막히자, 놈은 다시 한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방패를 확인한 일행들이 감탄사를 뱉었다.
“우와…… 방금 거는 대체 뭐예요?”
“고유 능력인가? 방패를 소환하는 건 또 처음 보는데…….”
의외로 가장 흥분한 것은 이때까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던 이루비였다.
“성자님! 방금 그 신성한 방패는 무엇입니까!!!”
이루비가 사라져 가는 방패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제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형이었습니다! 성자님!! 부디 다시 한번 그 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얘가 이렇게 텐션이 높은 애였나?
뭐, 누가 봐도 꽤나 멋진 방패니까. 어려운 것도 아니다.
마나 물약 또한 배낭에 넘치도록 있었으니까.
꿀꺽-
물약을 한 입 마시고, 다시 한번 놈의 공격을 방패로 막아냈다.
“오오……!!”
지상으로 내려오는 그 순간, 대기하고 있던 윤미주와 임상욱이 날개를 공략했다.
어찌 잡긴 했으나, 이대로라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화면을 확인하니, 꽤나 거리가 좁혀져 있었다.
‘……그냥 이기는 거로 만족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방패를 손으로 훑으며 연신 감탄사를 뱉는 이루비가 보였다.
저거, 저렇게 만질 수도 있는 거구나.
“만질 수 있다……?”
이거…….
에이. 아니야. 설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이루비 씨.”
“성자님.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제게 말을 높일 필요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루비면 충분합니다.”
나는 이루비에게 내가 생각한 방법을 말해줬다.
정작 말을 꺼낸 나도 어이가 없어졌기에 이야기를 끝마치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잊어줘요. 이런 게 될 리가 없잖아?”
“성자님. 혹시 제가 그것을 해낸다면, 미천한 저의 부탁 하나를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무슨 부탁을 하려고…….
아니, 그보다 설마 이게 된다고?
실험을 할 조류는 금방 나타났다.
“성자님. 시작하셔도 좋습니다.”
공중에 뜬 상태로 우리를 살피고 있는 녀석.
‘아이기스의 방패.’
아직 녀석이 공격하지도 않았건만, 허공에 방패를 만들어냈다.
위트 길드의 사람들도 혹시 실수라도 한 건가. 그런 눈빛을 보내고 있을 때.
이루비가 달려갔다.
어느새 빼 든 철퇴를 자그마한 오른손으로 꽉 쥐고는 눈으로 담기도 힘든 속도로 달리다가 이내 도약했다.
도약한 곳에는 허공에 소환된 아이기스의 방패가 있었다.
소환된 방패를 짓밟고 공중으로 점프한다는 발상.
말도 안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루비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해냈다.
이루비는 방패를 한번 밟고는 다시 한번 공중으로 도약했다.
-끼에에엑!
공중에서 행한 이단 점프로 녀석에게 도달한 이루비가 철퇴를 머리에 박아 넣었다.
깊숙하게 들어가 터지는 뇌수.
그걸로 끝이었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라운 기예.
마치 깃털이라도 되는 듯, 바닥에 살포시 착지한 이루비가 내게로 다가왔다.
“저를 루비라고 불러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성자님.”
“……그래. 루비야.”
* * *
“……말도 안 돼.”
역시 한 마리도 못 잡게 하는 건 무리였다. 허망한 표정의 전진우 앞에 놓인 것은 세 개의 부리였다.
세 마리.
전진우의 일행이 잡은 총 숫자다.
그리고 우리 앞에 쌓여 있는 스무 개가 넘는 부리들.
그래도 저 모습을 보자니, 계획은 그럭저럭 성공한 것 같다.
“그럼 이제 약속을 지켜야겠지?”
“……한 명만 다리 밑을 기면 끝나는 건가?”
“무슨 개소리야. 당연히 너희 전부 다 기어야지.”
지만 쏙 빠지려고 하네.
그건 안 되지.
“밖에서 나가서 할래. 아니면, 아무런 증거도 안 남는 여기서 할래.”
“……여기서 하겠다.”
스네이크 길드원들이 전원 무릎을 꿇었다. 전진우는 입술을 세게 물어 피가 날 때가 되어서야 행동을 개시했다.
우리는 녀석들이 잘 기어올 수 있도록 터널처럼 줄지어 섰다.
“야. 맞다. 내기 조건 하나 추가한다 했지.”
간단하다. 저놈을 다시 본다면 꼭 시켜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입으로 샤아아악- 소리를 내면서 기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싫다고?”
“……샤아아악.”
그렇지.
역시 뱀은 저런 소리를 내면서 기어야지. 이왕이면 혀도 날름거렸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36화
14. 내기의 승자(1)
“…….”
이거 생각보다…….
“되게 의외인데요?”
“그러게. 어떤 짓을 할지 몰라서 조금 긴장하고 있었는데.”
공감이다.
애초에 저쪽에서 제안한 내기이긴 했지만, 자존감 덩어리인 저 녀석이라면 무언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전진우는 자신이 입으로 뱉었던 벌칙을 충실히 수행했다.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자존심에 금이 간 것 같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는 생각하지 않는 거로 보인다.
오히려 그 근처에 있는 놈들의 눈빛이 더 이상하지.
그래도 끝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천천히 밖으로 나가는 포탈을 향해 이동했다.
* * *
밖으로 나온 그들은 각자 정산을 끝냈다.
여전히 이서진쪽을 노려보고 있는 스네이크 길드원들.
그에 반해 전진우는 뒤를 돌아 이미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부, 부길드장님!”
‘저렇게 가는 건가.’
얼굴을 기억했다니 뭐니, 그런 소리를 해놓고 그 이후로 뭔가 해오는 리액션도 없었고.
뭔가 되게 엉성한 놈이란 말이지, 저거…….
이서진은 배낭에서 물약이 든 병 하나를 꺼냈다.
“야.”
“……?”
짜증 섞인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전진우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무언가를 손으로 캐치했다.
대체 무슨 의도지. 하는 얼굴로 물약을 바라보던 전진우에게 이서진이 말했다.
“바닥 기느라 손 더러워진 거 같던데. 물약이라도 마시라고.”
“하. 누가 이딴 걸…….”
“마시기 싫으면 다시 내놓고.”
그 말에 전진우는 다시 뒤돌아 제 갈 길을 떠났다.
스네이크 길드원들도 전원 다급하게 전진우를 향해 뛰어갔다.
“성자님.”
‘아, 맞다. 얘가 있었지.’
전진우를 보면서 또 마귀니 뭐니 하면서 죽인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게 끝이야?”
“……? 무언가 더 원하는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성자님. 원하신다면 이 이후에도 제가 성자님을 모실 수 있도록 허락을…….”
“아니. 그게 아니라, 저놈 보고 뭐 다른 생각이 든다든가, 광기에 찰 거 같다든가 그런 거 없어?”
“광기. 말입니까.”
전진우의 뒷모습을 보던 이루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습니다. 성자님.”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이서진이 찝찝함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부길드장님. 저놈들 저렇게 둬도 괜찮은 겁니까?”
“원하신다면 저희가 알아서 몰래 처리하겠습니다. 어차피 약소 길드의 세 명과 평범한 각성자 두 놈이지 않습니까.”
전투원들이 옆에서 하는 말에 전진우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됐다. 하지 마라.”
“예? 그게 무슨…….”
“하지 말라면 하지 마. 그딴 말 할 시간에 네 그 병신 같은 행동이나 고쳐. 전투 중에 물약을 처마시려는 놈이 스네이크의 에이스 소리를 듣는다니, 쯧.”
“죄, 죄송합니다!”
전진우는 자신의 손에 들려진 물약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으로 그딴 내기를 한 건지…….
지는 사람이 상대방의 발밑을 긴다.
어린 애들 장난도 아니고.
누가 보면 정말로 승부라도 하고 싶어서 그런 줄 알 것 아닌가.
더욱 웃긴 건 그런 말을 꺼낸 게 전진우 자신이라는 거다.
“부길드장님. 이다음에 어떻습니까? 제가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친구들이 있는데요. 흐흐.”
전진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옆에서 손을 비비는 전투원.
평소대로라면 전진우 쪽에서 좋다며 소리칠 놀음에 관한 내용이었으나 반응이 시원찮았다.
전진우는 그를 무시하고 말했다.
“다음 던전으로 간다.”
“예? 부, 부길드장님!”
“불만 있어?”
“……아닙니다.”
전진우가 신경질적으로 물약을 개봉해 자신의 입에 들이부었다.
물약에서는 날 리 없는 향긋한 딸기향을 느끼며 전진우가 입술을 물었다.
“다음번엔 알몸으로 물구나무라도 서게 해주지.”
* * *
시간은 점차 흘러갔다.
훈련과 던전을 병행하기를 반복.
이제 4층 던전으로 향하기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크하핫. 이거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내 몸에 손은 댈 수 있겠어? 야, 이 옷에 달라붙는 먼지가 너보다는 더 재빠른 거 같은데?”
“이 주 동안 똑같은 걸 입는 조장님 옷이나 어떻게 하시죠. 손 못 대게 하려고 그런 더러운 수를 쓰는 겁니까?”
“……아니. 땀도 잘 안 흘리니까, 굳이 빨 필요 있나 싶어서…….”
“더러워 죽겠네요. 진짜.”
“…….”
이서진을 놀리던 소성환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진짜 냄새나나……?
그런 소리를 중얼거리는 소성환을 보며 그는 슬슬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훈련이 진행되면서 이서진의 검술 실력은 점차 그럴싸해졌다.
그래 봤자, 던전에서 구르고 구르던 각성자들의 실력과 비교하자면 하늘과 땅 차이였지만.
‘4층 던전으로 향하기 위한 조건도 곧 있으면 맞춰지고…….’
시간이 꽤 걸릴 줄 알았는데, 던전에서 만난 인연 덕분에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이루비.
처음에는 피를 묻힌 철퇴를 들며 ‘성자님’거리는 것이 정말 자신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천국에 보내 버린다는 의미인 줄 알았다.
‘약간 꺼림칙하긴 했지만, 알고 보면 착한 애지.’
겉보기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강한 소녀다.
이서진 한정이기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대놓고 호감을 표출하기에 미워할 수가 없었다.
아이기스의 방패를 내보일 때마다 감탄사를 흘리는 게 꽤나 귀여워 보이기도 했고.
여동생이 있었으면 저런 느낌인가.
이서진의 얼굴에 자그마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렇게 강한 사람이 왜 1층, 2층 던전에 다니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밸런스 붕괴인데 말이야.
“흐흐. 멍 때릴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움직이는 게 어때? 지금도 타이머는 흘러가고 있다고. 똑딱똑딱~”
저거 진짜 어떻게든 내가 이기고 만다. 이서진이 다시 한번 다짐을 했다.
물약을 마시고 다시 훈련에 돌입하려는 순간. 훈련실의 입구에서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오. 이거 우리 조장 아니야?”
이서진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본 적 없던 인물들이다.
소성환과 같은 전투 1조의 인원들.
그들을 보며 소성환이 미칠 듯이 웃었다.
“던전에서 잘 구르다 왔냐?”
“진짜 우리 전부 죽는 줄 알았어! 무슨 황혼의 모든 던전을 싹 다 정리하라는데…… 그때 대충한다니 뭐니, 그런 소리 한번 했다가 진짜 피똥 쌌다니깐?”
“정해연 성격 뻔히 알면서 그런 말을 했냐? 크큭.”
“그러는 조장도 길드장 물 뺏어 먹었다가 조인트 까였으면서.”
“…….”
이서진은 그들 하나하나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보기만 해도 그동안 던전을 돌아다니며 봤던 사람들보다 훨씬 강자다.
소성환급은 아니지만,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이길 생각을 할 수 없는 엘리트 각성자들.
‘……그런데 어째선지 루비가 더 강해 보인단 말이야.’
소성환과 대화하던 전투 1조의 인원들이 이서진을 쳐다봤다.
“그런데 거기 위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혹시 신입인가?”
“오. 신입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지.”
그들의 말에 소성환이 웃으며 말했다.
“이리 와서 얘 몸 좀 만져보라니까. 전에 너희들이 무에 걸맞은 신체 어쩌구 하던 게 여기 있다고.”
“에이. 말이 돼?”
“진짜라니까!”
그들은 이서진이 있는 곳으로 몰려오더니 일제히 감탄사를 내비쳤다.
“우와…… 미쳤네, 진짜.”
“포텐셜 자체는 조장보다 더 나은 거 같은데……?”
“어허. 선 넘는 소리는 하지 말고.”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이지만…….
이 정도라면 언젠가 황혼의 특급 에이스가 될 날도 오리라.
다들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신입 이름이 뭔데요?”
“그래. 우리 드디어 쉬는데 신입 끼고 술이라도 마셔야지? 캬. 진짜 얼마 만이냐. 목구멍 한번 불태워 보자고!”
“이서진이라고. 너희는 아마 못 들어봤을 거다.”
“……이서진?”
몇 주간, 황혼의 모든 던전을 돌아다니며 작업을 진행한 전투 1조원들.
당연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지만, 이동하는 도중 간단한 문자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황혼 길드에서 근무하는 수많은 직원들.
그들과 대화하면서 들은 적 있는 이름이다.
길드 내에 떠도는 소문이다.
길드장에게 남자가 생겼다느니, 하루 종일 훈련만 하는 괴물이라느니.
하나같이 허풍 같은 내용들.
다만 그것을 말한 사람들에 공통된 의견이 있다면…….
만약에 소성환과 정해연 사이에 그 인물이 있다면 절대로 개입하지 말 것.
“허억!”
“……무, 문에!”
“귀, 귀신이다!”
그들이 일제히 훈련실의 입구를 보고 소리쳤다. 자신들의 길드장이 벽에 기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너희들 왜 그래?”
혼자만 알아차리지 못한 소성환이 웃으며 이서진의 등을 친근하게 쳤다.
“사실 얘가 나랑 내기를 해서 말이야. 앞으로 일주일 안에 대련으로 나한테 유효타를 내야 한단 말이지. 하핫! 너희가 생각해도 웃기지? 그래서 이렇게 빡세게 굴리고 있다 이 말이야.”
소성환의 말을 듣고도 웃지 못하는 전투조원들.
던전에서 조차 느끼지 못했던 깊은 공포를 느낀 그들이 그 자세 그대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진짜 우리 전부 죽는 줄 알았어!”
“뭐?”
“오. 이거 우리 조장 아니야?”
“아니, 너희들 지금 뭐라는 거야? 야, 어디 가!”
마치 시간을 뒤로 감듯이 그들은 이내 입구를 지나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던전이 그렇게 힘들었나?”
또각또각-
의문을 표하는 소성환의 귀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 * *
4층 던전에 입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되었다.
진짜 훈련하는 시간을 빼면 던전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장이 없으리라.
끄윽.
배에 가득 찬 물약이 목까지 차오른 기분이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성자님.”
저 성자님 소리 듣는 것도 마지막이구나.
괜히 아쉽기도 하고 그러네.
“그동안 꽤 오래 만났는데, 번호라도 교환하는 건 어때?”
던전이 아니더라도 가끔씩 만나서 밥이라도 먹으면 괜찮겠지.
이런 살벌한 곳에서 만나는 것만 아니라면, 정말 여동생 대하듯이 식사 정도는 사줄 수 있으리라.
이래 봬도 돈 많은 오빠니까.
“번호. 말이십니까.”
“응.”
“죄송합니다, 성자님. 그런 것은 전혀 생각해 보지 못 한터라…… 현재 제 수중에 작고 네모난 물건이 없습니다.”
“그래?”
작고 네모난 물건은 뭐냐.
휴대전화를 말하는 건가.
뭐, 오늘이 아니더라도 만나는 날이 오긴 하겠지.
그때가 되면 던전에서 있던 일들을 추억 삼아 즐겁게 대화할 수 있으리라.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나쁜 애는 아니니까.
“저, 성자님.”
“왜?”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루비에게도 찰칵- 소리가 나는 무언가를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사진?”
“그렇습니다. 사진.”
손을 꼼지락대면서 말하는 게 혹시 실례가 되는 건 아닐까 조심스러워 보인다.
“그래. 사진 하나 찍는 게 뭐 대수라고.”
사진 하나만 있으면 번호가 없더라도 만나고 싶을 때 언제든 만날 수 있다.
……뭐, 내 쪽에서 무작정 찾아가는 건 조금 무서울 수도 있으니 막상 사용하진 않을 거 같지만.
나는 루비의 키에 맞춰서 몸을 낮췄다.
이 자세 은근히 불편하네.
내 옆에 바짝 붙은 이루비가 작게 속삭였다.
“성자님에게서는 무언가 특별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경건해지는 기분입니다.”
“……기분 탓 아닐까?”
얼마 전, 방석의 숙련도가 가득 찼기에 업그레이드를 위한 퀘스트를 진행했다.
역시나 어려운 것은 없었기에 금방 클리어했고, 나온 결과가 이거다.
* * *
「지친 심신을 치유하는 방석 +1」
설명: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사용하거나 권유할 경우, 앉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 준다.
【만물의 주인】 이서진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회복 효과가 증가한다.
*방석의 효과가 【만물의 주인】 이서진의 신체와 연결됩니다.
* * *
다른 만능 효과라도 나타날까 생각했는데, 생뚱맞은 기능이 나왔다.
앉는 것만으로도 사용자의 심신을 치유하는 방석.
그것이 내 신체와 연결되었다.
즉, 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심신이 치유된다는 뜻이다.
졸지에 애니멀…… 아니, 인간 테라피가 되어버렸다.
차라리 잘 됐다. 이대로 순둥이라도 껴안고 자면 효과가 조금이라도 있겠지.
‘사진 찍을 때 손 모으는 건 컨셉 같은 건가?’
사진을 찍는데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워낙에 신비로운 분위기라 그런지 어색하진 않고 오히려 잘 어울렸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성자님.”
“그래. 너도 잘 지내고.”
웬만하면 마귀들도 조심하고.
너 말고, 마귀한테 말하는 거지만.
* * *
아마 소성환이 생각하기에 내가 승부를 걸 곳이 어디라고 생각할까.
하루가 지날수록 실력이 늘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소성환 입장에서는 마지막 날에 승부를 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렇기에 내일.
남은 시간 5일이라는 애매한 시간에 승부를 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은 황혼에 가지 않고 또 다른 훈련장을 찾아다니는 중이다.
가능하면 훈련하고 있는 사람과 연습을 하는 것도 좋겠지.
황혼에도 전투원들은 많지만, 하나같이 나보다 수준도 높았고, 진심을 다한다면 소성환이 그 모습을 보게 된다.
최대한 방심에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다른 인물과 대결할 것이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있냐는 건데…….
황혼 길드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각성자 전용 체육관.
그곳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나오며 하는 대화가 들렸다.
“무슨 혼자서 10연승을 하고 있는데?”
“재가 걔 아닌가? 수호 길드…….”
“그런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있대?”
“낸들 아냐…… 딱 보니까 화풀이하러 온 거 같은데. 이제 할 놈도 없을걸.”
무슨 소리래.
안쪽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운동은 하지 않고 한곳에 모여 있었다.
뭘 그리 구경하나 하고 나도 비집고 들어가서 확인하는데, 가운데에 있는 링에 사람 둘이 올라가 있었다.
“큭!”
대련용 목검을 들고 상대방을 몰아붙이고 있는 한 여성.
뒤로 묶은 포니테일이 움직일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린다.
“하, 항복!”
상대방의 목 앞에 검이 들이 밀어지고, 이내 항복 소리가 나왔다.
“이거로 11연승이네.”
“……저 여잔 지치지도 않나?”
곧바로 뒤로 가서 숨 고르기를 한다.
다른 사람 눈에는 지치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반복되는 대련으로 인해 체력이 주는 것이 내 눈에는 보였다.
“더 도전할 사람 없어요?”
앙칼진 목소리가 좌중에 울려 퍼진다.
모두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외쳤다.
“절 이긴다면, 제가 소유하고 있는 ‘신속환’을 내주도록 하겠습니다!”
“뭐?”
“……그걸 상품으로 건다고?”
신속환.
들어 본 적은 있다.
정예 혹은 보스급 몬스터의 마석이 위치한 심장 부분.
그곳에 스탯을 영구적으로 올려준다는 구슬 형태의 알약이 매우 낮은 확률로 존재한다고.
귀하디귀한 것이기에 결코 저런 식으로 내걸 만한 물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주저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손을 든 것은 그때였다.
“뭐야?”
“……진짜로?”
사실 한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손을 든 것은 바로 나니까.
“제가 도전해도 될까요?”
저 빠른 검 놀림.
소성환과의 내기 전에 좋은 상대가 되겠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37화
14. 내기의 승자(2)
“제가 도전해도 될까요?”
도전자치고는 상당히 예의 있는 말투다. 안지윤은 손을 든 사람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번 도전자가 마지막이다.
자신에게 있어서 이것은 단순히 답답함을 풀기 위한 반항 같은 것이니까.
곱상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남성.
‘……전체적으로 몸 밸런스는 좋네.’
좋다.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근처에 있는 누구보다도 몸의 형태가 좋았다.
다만, 검 자체를 휘두른 것이 오래되지는 않아 보였다.
그것은 손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상대로는…….’
그럭저럭 괜찮으려나.
안지윤은 물을 한 입 들이켜고는 말했다.
“좋아요. 올라오세요.”
* * *
“여기 대련용 목검입니다.”
링 위에 올라가자 누군가가 내게 목검을 내밀었다.
맨 뒤에서 팔짱을 끼고 링 위를 지켜보던 사람이다.
여기 체육관 관장인가.
이런 식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좋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목검을 집어 들면서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손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감각.
응. 능력은 확실하게 적용되고 있네.
“몸 풀 시간이 필요하면 그래도 되는데요?”
“그러면 사양 않고 조금만 할게요.”
기초적인 자세로 조금만 몸을 풀어주기로 했다.
소성환. 그가 알려준 검술에는 투박한 면모가 있다.
직접적으로 검을 배운 것이 아닌, 실전을 통해서 익힌 것이기에 그러리라.
소성환말고도 정해연에게도 잠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받는 입장인 나보다도 몸이 굳어 있기에 그렇게 많이는 못 했지만…….
검을 사용하는 그녀이기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많이 얻었다.
“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데?”
내가 몸을 풀기 위해 검을 움직이는 것을 본 관중들이 제각각의 소감을 풀어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몸이 적당하게 예열되었다.
‘물약은…….’
마시지 말도록 하자.
어디까지나 연습이니까.
신속환.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없다고 해도 그렇게 아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 시작할까요?”
“예.”
시작과 동시에 자세를 잡고 눈에 힘을 주었다.
“……!”
팅!
서로의 목검이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역시 예상대로 몸놀림이 빠르다.
하지만…….
‘어째, 할 만한 거 같기도 한데.’
소성환.
이루비.
그가 최근 계속해서 보았던 사람들에 비하자면 눈이 못 쫓아갈 정도의 속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단 한 순간도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쾌검에 나는 별다른 수 없이 막기에만 집중했다.
중간중간 막지 못해 허용된 유효타에 살갗이 아려왔다.
그래도 물약 마시면서 폭풍 운동한 효과가 있긴 하네…….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
“승부가 안 되네.”
“완전히 밀리고 있잖아?”
당연하다. 내가 소성환에게 배운 것은 대부분 내 몸을 지키기 위한 방어 동작이었으니까.
애초에 내가 그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짧은 시간 동안 검을 배웠다고, 이리저리 휘둘러 무쌍이라도 한다면 그게 소설이지, 현실이겠는가.
검에 대한 이해도가 극도로 상승한다.
검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걸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만.
‘보인다. 오른쪽.’
방금과 같은 궤도. 손목을 노리는 것으로 보였지만, 오른쪽 허벅지다.
이제는 살짝 구분할 수 있게 된 미래시도 내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미래를 보여주었다.
-끝부분을 보지 말고, 공격이 시작되는 곳을 주시해.’
언제나 장난기 섞인 소성환이지만, 교육을 할 때만큼은 진지했다.
물체를 탐색하는 콘택트렌즈의 영향 때문일까.
상대방의 움직임이 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여전히 공격은 하지 못했지만, 점차 내 움직임은 자연스러워졌다.
아, 여기서는 이렇게만 움직이면 피할 수 있겠구나.
이 공격은 단순한 눈속임이구나.
진짜는…….
“……!”
이쪽.
내가 휘두른 검에 이제까지와 같이 맹렬한 기세로 들어오던 공격이 한 타이밍 늦춰졌다.
그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이제까지는 하지 않던 공격.
‘역시 공격은 못 하겠네.’
나름 회심의 한 방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쉽게 막혀버렸다.
끼엑- 거리던 마물들이랑은 반응 자체가 다르다.
그 이후에도 공방이 이어졌다.
“……이거 끝나긴 하는 건가?”
“어이, 거기!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가 봐!”
자기 아니라고 막말하고 있네.
내가 저 정도의 실력자를 어떻게 이기겠나.
애초부터 이곳에 온 목적 자체가 달랐다.
나보다 강한 상대로부터 오래 버티는 법.
이 잠깐의 움직임에도 새로운 것을 배워가고 있었다.
거기다가 보라.
“……하아.”
계속된 대련으로 인해 지친 모양인지, 처음과 같은 날카로움이 줄어들어 있었다.
미안하지만, 체력 하나만큼은 징그럽다고 말할 정도로 높이고 있거든.
공격도 이제는 완전히 눈에 익었다.
이거 어쩌면 이길 수 있을지도.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뒤로 잠시 물러나 있던 상대방이 달려들었다.
다만 아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뭐, 뭐야?”
“몸이 여러 개잖아?”
마치 증식이라도 된 듯이 늘어나, 좌우로 퍼진 포니테일의 여검사.
하하…….
이건 반칙 아니냐.
다섯 개의 검이 내 몸을 향해 쇄도했고…….
“항복.”
내가 외쳤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후련한 표정을 하고 있는 도전자에 비해, 승자인 안지윤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덕분에 좋은 것 많이 배우고 갑니다!”
이서진은 잽싸게 그곳을 벗어났다.
결투 내내 자신이 했던 소극적인 방어에 질타라도 먹을까 봐 그런 것이다.
사실상 경험치만 빼먹고 도망가는 것이었다.
“……저기, 잠깐!”
뒤늦게 안지윤이 사라지는 이서진을 향해 외쳤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좌중의 분위기도 미묘했다.
“12…… 연승 맞지?”
“그렇지. 능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말은 안 했으니.”
그렇다.
시작할 때부터 고유 능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안지윤이 앞서 상대하던 각성자들은 전부 본인들의 능력을 사용했으니까.
다만, 안지윤은 능력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 쓰지 않은 것뿐이다.
“그래도 대단하네. 결국 버티고 버티다가, 최후까지는 가긴 했잖아?”
“응. 어디 길드 소속이지 않을까.”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간 마나를 느끼며, 안지윤은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네 개의 환영. 한 명의 본체.
마나로 이루어진 환영체는 겉으로 보기엔 하나같이 진짜처럼 보인다.
당연히 이 능력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당황할 수밖에 없으나.
‘……분명히 날 봤어.’
검이 쇄도하는 그 순간.
분명히 상대방과 자신의 눈이 마주쳤다. 환영이 아니라, 본체의 자신.
마치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그 검은 눈동자에 안지윤은 자신도 모르게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우연이 아니다.
그 눈빛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으니까.
만약에 상대가 환상체에는 직접적인 데미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심지어 고유 능력조차 끝까지 사용하지 않았다.
이겼는데도, 가슴이 답답하다.
‘이러면 마치 내가 진 거 같잖아…….’
“그럼 신속환은…….”
“혹시 다시 도전자를 받을 생각은 없으십니까?”
“제가 도전하겠습니다!”
안지윤이 지친 것을 확인 한 각성자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었지만, 그녀는 그들을 무시하고 밖으로 향했다.
신속환.
소중한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선물한 귀한 물건이다.
할아버지는 같은 자리에 있던 오빠한테는 아무것도 선물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바닥으로 어깨 한 번을 툭 쳐줬을 뿐이다.
복용자의 스탯을 올려주는 알약.
“나도 이런 것보다…….”
띠링!
양반은 아닌지, 그 빌어먹을 오빠 놈한테서 문자가 왔다.
[야, 안지윤. 어디야?]
[안 알랴줌.]
[뭐?]
계속해서 울려대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흥. 이제야 조금 속 시원하네.
안지윤은 또 다른 체육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는 바람을 느끼며 안지윤이 중얼거렸다.
“……신속환은 보관해 두도록 할까.”
* * *
“자, 그럼 오늘도 즐거운 훈련 시작해 보자고!”
이제 앞으로 일주일인가.
소성환이 앞에서 몸을 풀고 있는 이서진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성장세다.
비록 4층 던전에 간다고 해도 활약할 일은 없을 테지만, 꾸준하게 훈련을 반복한다면 황혼의 전투조에도 꿇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뭐, 그런 거랑은 별개로 내기는 내기지만.’
자…… 이제 이 주 조금 지났나.
상당한 승부욕의 이서진이다.
힘 조절을 해가며 훈련을 하고 있지만, 매일 그 힘이 달라지고 있다.
가파른 성장세. 만약에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자신에게 유효타 정도는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이번 내기에는 아니겠지만.’
날카롭다 해봤자, 어차피 초심자의 그것이다.
“그럼 오늘도 대련해야지?”
“…….”
대답을 하지 않는다.
매일 같이 당하기만 하니까, 대답할 힘도 없나 보구만, 하하!
평소와 같이 소성환 쪽에서 들어간다.
‘역시…… 피하는 것 하나만큼은 대단해.’
공격은 아직 미숙하지만, 회피만큼은 마치 어디를 공격할지 아는 것처럼 이리저리 잘도 피한다.
역시나 오늘도 힘 조절을 다시 해야 한다.
목검을 휘두르며 공세를 이어갔다.
점차 이서진의 힘이 빠지는 것이 보인다.
계속되는 대련 때문인지, 이제는 언제쯤 이서진의 힘이 빠지는지 알 수 있었다.
방어 자세가 허술해지고, 서서히 몸에 목검이 스치는 횟수가 많아지고 있다.
이렇게 힘이 다하는 순간이 오면, 지금까지 방어만 해오던 이서진은 공격을 해오게 된다.
온 힘을 실은 마지막 어택.
‘이번에도 똑같네.’
내기의 조건은 몸을 스치기라도 하면 성공이다.
즉,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방어가 아니라, 공격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을 위한 행동이리라.
이서진이 휘두른 검이 소성환의 가슴 앞을 아슬하게 스쳤다.
‘끝이네.’
“오. 예리해. 예리해.”
실실 웃은 소성환이 몸에서 힘을 뺐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 아슬아슬했어?”
“…….”
어지간히 힘든지 말조차 안 나오는 모양이다. 이제 다가가서 살살 놀려주면서 등이라도 치면 되겠네.
그 순간.
“……꿀꺽.”
‘뭐지? 목 넘김 소리……?’
던전을 수없이 넘나들며 터득한 위험감지 센서.
설명할 수 없는 싸한 느낌을 받은 소성환은 곧장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뒤로 도약을 했지만.
“뭐, 뭐야? 벽?”
뒤에 벽이 있을 리도 없건만, 무언가에 막힌 소성환.
그리고 그에게로 이서진의 목검이 몰아쳤다.
마치 처음과 같은 재빠른 움직임이다.
“자, 잠깐만! 야! 타이이임!”
소성환이 그리 외쳤고, 이서진의 목검이 멈췄다.
물론 그 말을 듣고 멈춘 것은 아니었다.
“닿았네?”
소성환의 가슴팍.
그곳에 이서진의 목검이 확실하게 닿아 있었다.
* * *
이야. 드디어 해냈네.
그제야 소성환의 뒤에 나타났던 아이기스의 방패가 사라졌고.
기대고 있던 게 사라진 소성환이 뒤로 넘어갔다.
내가 뭘 당한 거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소성환에게로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아. 입에 머금고 있느라 혼났네.’
삼키지도 못하고,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입에 물약을 머금고 있자니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이걸 위해서 따로 연습까지 했던 걸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바닥에 앉은 채로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성환을 보자니, 그동안의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 같았다.
소성환은 능력을 쓰지 말라느니, 그런 규칙은 따로 말하지 않았다.
연습 도중에 물약과 능력을 사용할 이유 같은 건 전혀 없으니까.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나한텐 연습이 아니라, 실전인데.
사용할 수 있는 거라면, 사용하는 게 맞다.
아이기스의 방패로 퇴로를 막고, 물약을 삼켜 몸을 단숨에 회복하며 재빠르게 공격한다.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내 필살기다.
만약에 실패했다면, 두 번 다시 성공하지 못했겠지.
내기에서 이겼으니 무엇을 부탁하면 좋을까. 전진우처럼 바닥이라도 기게 해야 할까?
아니면…….
-내기라도 하나 하는 건 어때?
-난 간단한 거로 부탁할게.
-내가 이기면 형이라고 부르는 거야.
-쫄?
응. 역시 이거밖에 없네.
나는 소성환에게 손을 내밀면서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한 웃음을 지었다.
“성환아.”
“……어. 어?”
“형이라고 불러야지.”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38화
15. 빛이 있으라(1)
한옥 분위기가 물씬 나는 한정식 식당.
한빛.
대한민국의 정상급들이 애용하는 이곳에서 안환재는 한 인물과 마주 보고 있었다.
떡갈비 하나를 입에 집어넣은 안환재가 말했다.
“자네, 답답하지 않나? 그 투구라도 벗는 것이 어떤가. 식사조차 못 하고 있지 않은가.”
“괜찮습니다. 그분의 뜻이 아니라면, 타인의 앞에서는 벗지 않는다고 맹세했거든요.”
“……나도 고지식하다는 말은 많이 듣는다만. 자네는 좀 심하군.”
“신앙심이 깊다, 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온몸에 입고 있는 백색 갑주.
식당에서 입고 있을 만한 차림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상대방에 대한 무례였으며, 그 대상이 수호 길드의 안환재라면 억지로라도 벗는 것이 예의이다.
하지만 안환재는 별다른 불쾌감은 느끼지 않았다.
‘신성 길드.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뿐이군.’
안환재와 독대하고 있음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다.
안환재 특유의 ‘인사’를 했을 때도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한 길드의 수장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내력.
‘……성기사단장인가.’
“그분이라면 신성 길드장을 말하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죠. 외부인에게 자세히 말씀드리기엔 조금 그렇군요.”
“웬만하면 이런 자리에서는 길드장 본인과 이야기하고 싶었다만.”
“그분은 언제나 바쁘십니다. 최근 들어서는 더욱 그렇죠.”
신성 길드장.
외부로의 노출이 극도로 적은 인물.
얼굴 정도는 한번 본 적이 있지만,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대외적인 일은 언제나 성기사단장이 대리로 출석한다.
일각에서는 사실 신성 길드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었다.
“바쁘다니 의외군. 언제나 하는 일이라곤 자네들이 믿는다는 신에 대한 기도뿐이지 않은가?”
상대방의 속내를 조금 더 알아보기 위해, 안환재의 언행은 다소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안환재 본인은 그런 의도였겠지만, 실상은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에 대한 분노가 자신도 모르게 섞여 있었다.
“그랬었죠.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지금은 다른 방법이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개인적으로 신은 없다고 생각하네만. 그런 자들이 있다면 이 세상을 왜 이런 식으로 놔두겠나?”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 또한 종종 그러한 생각을 하곤 했죠.”
성기사단장이라는 자가 할 만한 발언은 아니었다.
그 대답을 들은 안환재의 눈이 가라앉았다.
‘……모르겠군.’
자신의 우군이 말했던 정체 모를 신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만난 것이건만.
그때 보았던 광기 어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신성 길드의 성기사들은 다소 광신도적인 모습이 있다고 들었는데.
신에 대한 모욕을 들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자는 지나치게 이성적이었다.
‘역시 그 수밖에 없겠어.’
4층 던전에 참여하는 길드.
수호 길드.
황혼 길드
그리고 이제까지 공백으로 있던 마지막 한 자리.
이들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기 위해서.
“혹시 신성 길드에서는 이번에 나타난 4층 던전에 관심 없는가?”
안환재는 적이라고 생각되는 인물들을 가까운 곳에 두기로 했다.
* * *
“이제는 진짜로 코앞이구나.”
거대한 알을 두 손 가득히 안고 있으니 마음이 좀 진정되는 것 같다.
사실 내가 아니라, 순둥이가 방석 효과를 이어받은 게 아닐까…….
“답답하지? 내가 곧 안에서 꺼내줄게.”
혹시나 하고 다른 비행형 마물들의 날개를 갈아서 넣어줬으나 역시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4층 던전을 위한 준비는…….”
소풍을 가는 어린아이처럼 하나하나 꼼꼼히 체크한다.
물약 오케이.
손전등 오케이.
휴대전화 오케이.
인간 방석 이서진 오케이…….
“텔레비전에서 그럴듯한 정보는 안 뜨네.”
혹시라도 공략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뜰까 하고 계속해서 봤었지만…….
4층 던전을 하루 앞둔 지금.
Ch.1에 4층 던전에 대한 성공 소식은 없었다.
……뭐, 당연한가.
고작 하루 만에 공략을 완료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Ch.2 에서도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들만이 나오고.
뭐야, 저건 서양인이잖아. 최소한 우리나라 사람을 보여 달라고…….
역시 직접 부딪치는 것 외에는 없다는 건가.
하긴. 열심히 훈련하긴 했지만, 사실상 4층 던전에서 내가 할 일이라곤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뿐이겠지.
“아직 챙겨갈 물건이 하나 더 있기는 한데…….”
물약에 담긴 동그란 형태의 물건을 보았다.
‘마물을 컨트롤하는 스위치.’
* * *
「마물을 컨트롤하는 스위치」
설명: 이 스위치의 소유주가 될 경우 ‘그룸’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기존에 있던 소유주가 변경 되었습니다.
*보유하고 있던 그룸들의 통제권이 사라집니다.
특이 사항: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사용할 경우, 언제든지 그림자가 있는 곳에 그룸을 소환할 수 있다.
* * *
찜찜하다는 이유 하나로 넣어 놨었는데.
진짜로 상태가 이상한 물건이었다.
“이제는 좀 괜찮긴 하네…….”
이것을 처음 넣었을 때는 담겨 있던 물약이 검게 변질되었다.
이전에도 보았던 현상이다.
순둥이의 알처럼 이것도 오염된 물건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검은 물을 흘리는 이걸 사용할 수도 없어서 그냥 놔뒀었지만…….
“이제는 사용할 수 있겠지?”
더 이상 물약이 오염되지 않았다.
정화가 완료되었다면 내 몸에 해로운 건 없을 것이다.
순둥이의 알을 매일 같이 만지고 있는 내가 그 증거다.
“그룸을 통제한다라…….”
잘 상상이 안 가는데…….
일단 확인해 보는 게 맞겠지.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보냈다.
[이태영. 남는 그룸 없냐?]
* * *
곧바로 균열 관리부로 향했다.
생포한 그룸들은 전부 죽었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이태영이 한 마리 살려둔 상태였다.
이놈의 신체적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서 몇 마리는 살려뒀다는데.
한 마리만 남았다는 거는…….
굳이 묻지 말도록 하자.
“이건 왜요? 또 저번처럼 가져가려고요?”
“음. 비슷하지.”
“포장하는 거 도와드릴까요?”
이태영이 말하는 포장이란 해체 작업을 말한다.
누군가 들으면 섬뜩해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세요, 그럼. 전 시간 됐으니까, 옆에 좀 가 있을게요.”
“그래.”
이태영이 나가고 잠시 후, 벽 너머에서 끄아아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업은 잘 되어가고 있구만.
비명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다시 앞을 보았다.
-끄르르르…….
그림자 하나 없이 밝은 공간에서 속박된 그룸.
검은 형체에 달린 두 개의 흰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이런 놈이 통제가 될지는 모르겠네.”
통제한다고 해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놈도 아니고.
그저 이것에 개방권을 사용했으니, 아까워서라도 확인해 봐야지.
“대충 스위치를 누르면 되는 건가?”
나는 그룸을 앞에 두고 스위치를 꺼냈다.
동그란 버튼을 꾸욱- 하고 눌렀고.
“어?”
앞에 있던 그룸이 점차 흐릿해지더니, 이내 내가 들고 있는 스위치 안으로 쏘옥- 들어왔다.
“우왓!”
이거 뭐야.
통제 어쩌구 하더니, 왜 여기로 빨려 들어오는 건데?
“……소환할 수 있다고 했나?”
나는 대충 스탠드 하나를 꺼 그림자를 만들고 그 앞에서 다시 한번 스위치를 눌렀다.
꼬물-
그림자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긴장 상태를 유지했고.
-끄앙!
“……얘 왜 이렇게 작냐?”
그룸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작은 검은색의 꼬물이를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 * *
집 안에 있는 그림자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녀석을 보며 생각했다.
‘저거…… 도움은 안 될 거 같네.’
이유지한테 하도 당하던 놈이라 그렇지.
기본적으로 전투력이 있는 마물이다.
그렇기에 그룸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써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무슨 손바닥보다도 작네.”
내 그림자에 나타난 그룸이 두 손을 벌리고 끄앙! 하며 울었다.
그룸이 상대방을 위협할 때 하는 특유의 자세다.
물론 지금 이건 하나도 안 무서웠지만.
“흠…….”
쓸모가 뭐가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이 녀석에게 맡길 중대한 미션이 생각났다.
“……순둥이가 태어날 때 손에 쥐여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딱 사이즈도 장난감 같은 게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았다.
겉보기도 마물답지 않게 귀여웠고.
뭐라 설명해야 할까…….
검은색 동그라미에 달걀 흰 자 두 개가 나란히 있다.
이쑤시개 같은 팔다리는 덤이다.
작으면서 있을 건 다 있구나.
“그것만으로도 역할은 충분하지.”
던전에는 도움이 안 될 거 같지만.
사실 전력으로 따지자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실력이 하나같이 말이 안 됐기에 굳이 필요 없었다.
-끄앙.
“야. 그건 아니지!”
그룸이 뭘 하나 지켜보고 있었는데, 내가 잘 정리해 놓은 물약을 삼키려 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입에 들어간 상태다.
저 작은 몸으로 입만 커져서는 야무지게 들어간다.
“그러고 보니 얘네 뭔가를 계속 삼키고 그랬지…….”
은행에 갔을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그룸의 배 안에 들어 있던 로또 용지와 사람들의 귀중한 물건들.
진짜 사람도 삼켰었다.
‘진짜 먹네…….’
어느새 물약병 하나를 꿀꺽 삼켰다.
이미 먹은 건 어쩔 수 없나.
어차피 하나 더 따르면 되니깐.
“너 배탈은 안 나냐?”
말을 알아듣기는 하는 건가.
그런 농담을 하고 있는데, 녀석이 입을 벌리더니 다시 물약을 꺼냈다.
“어?”
계속해서 자기 몸이랑 비슷한 크기의 물약을 입에 집어넣는다.
“다, 다시 한번 꺼내봐.”
-끄앙!
내 말에 녀석은 물약병을 입에서 꺼냈다. 몸 안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아무런 쓸모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모습을 보자니 무언가가 떠오른다.
“……인벤토리?”
-끄아앙!
꼬물이가 울부짖었다.
* * *
“이곳부터는 출입 금지입니다.”
“오늘은 수호 길드가 4층 던전을 공략하는 날 아닙니까!”
“이번 던전에 황혼 길드가 참가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전에 보았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3층도 아니고, 무려 4층 던전이다.
마치 축제라도 벌이듯이 화려한 던전 출정식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전에 황혼에게 그런 일도 있었고, 앞으로 민간인들을 던전 근처에 출입시키는 건 자제하기로 했어요.”
그런 일…….
내가 물약을 뿌린 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정해연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가 첫 만남이었네요. 서진 씨. 막상 인사는 못 했었지만.”
……기억하고 있네.
그래도 드디어 오늘이구나.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과연 지난 삼 주가 의미 있었을까.
“흐흐. 떨리냐?”
옆자리에 있는 소성환이 심심한지 깐죽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형. 어차피 4층이라고 해봐야 마물 나오는 건 똑같으니까. 싹 다 베어 넘기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렇지, 형?”
“……형?”
소성환의 말에 앞에 앉아 있던 정해연의 눈동자가 커진다.
……이 양반, 진짜.
“표정을 왜 그렇게 하고 있어, 형? 내가 형이라고 부르는 게 잘못된 게 아니잖아, 형. 그렇지, 형?”
“아, 진짜!”
“큭큭.”
소성환과의 내기에서 승리하고, 벌칙을 시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느새 고통받는 것은 내가 되고 있었다.
“저, 저기. 서진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 거였죠……?”
정해연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내게 말했다.
요 며칠간 소성환이 내게 형이라고 부를 때마다 주변 반응이 죄다 저랬다.
소성환의 얼굴은 스물여섯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노안이다.
그런데 그런 소성환이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
하나같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소성환 전투조장님이 형이라고 부르는 거면 대체 저 사람은 몇 살인 거야?’
‘……확실히 동안이긴 한 거 같은데.’
미안하지만, 동안이 아니라 원래 그 나잇대다.
“혹시 연상이셨던 겁니까?”
“……예?”
잠시 침묵하던 정해연이 내게 물었다.
떨리던 눈동자는 어디 가고, 어쩐지 약간 들뜬 표정이었다.
“아뇨. 전에도 말했다시피 스물넷입니다.”
“아…… 그, 그렇군요…….”
왜 실망하는 거지.
어차피 나랑 두 살밖에 차이 안 나면서.
소성환과 동갑이라 했으니까 스물여섯이 맞을 거다.
“악! 난 갑자기 왜 때리는 건데?”
“누구 때문에 괜히 기대했잖아!”
정해연이 소성환의 다리를 찼다.
뭘 기대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맞는 것을 보니 속 시원하다.
소성환은 저렇게 주기적으로 맞아줘야 정신을 차린다.
“……이곳에 내 편은 아무도 없구나.”
차가 멈추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왔군. 황혼 길드장.”
“오랜만이네요. 수호 길드장. 저번에 전화 드렸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죠?”
전화.
그 부분을 강조하면서 말한다.
“하하. 미안하네. 지금 생각하니 꽤나 유치한 행동이었던 거 같군.”
안환재가 나를 보았다.
“가벼운 몸풀이 정도는 됐을 거라고 생각하네. 던전을 겪어보니 어떤가?”
“……뭐. 색다르긴 했죠.”
“나름대로 낭만이 있는 곳일세. 이 나이를 먹고도 새로운 던전에 들어갈 때면 항상 긴장되고 떨리지.”
안환재가 던전을 보고는 눈에 힘을 주었다.
“이번 던전도 여러 가지 의미로 새로울 것이라고 믿고 말일세.”
「블랙 와이번의 허름한 둥지」
솟아오른 비석 최상단에 적혀 있는 이름이다.
밑으로 다른 말들이 적혀 있기는 했는데,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대상 물체를 탐색합니다.]
[탐색 실패]
[현재로썬 해석이 불가능한 언어입니다!]
솔직히 나라면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현재로썬.
언젠가는 읽을 수 있을 때가 온다는 거다.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것을 읽을 수만 있다면 앞으로 나타날 던전들의 공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내가 던전에 들어갈 일은 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다 모였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수호 길드, 황혼 길드의 정예들뿐이다.
이 중에서 내가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없겠지.’
던전에 들어갈 때가 다가오니까, 소성환도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장비를 체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원은 이걸로 끝인가요?”
수호 길드에서 스무 명.
황혼 길드에서 열 명.
“4층 던전은 최대 마흔 명 제한인 거 맞죠?”
혹시 이대로 서른 명으로 공략하는 건가?
“이제 도착했나 보군.”
바닥이 울린다.
익숙한 광경이다. 이전에 길거리에서 보았던 성기사들이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다.
……마지막 멤버가 신성 길드였어?
‘든든하긴 하겠네.’
저 덩치를 보라.
어떤 마물이 오더라도 흠집 하나 못 낼 것이다.
“……신성 길드장.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저게 신성의 길드장이라고?”
안환재를 비롯해서 주변의 각성자들이 술렁인다.
신성 길드장이라…….
나 또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신의 미친 방패라고 불리는 저 성기사들의 수장.
분명히 평범한 인물은 아니리라.
성기사들이 좌우로 갈라지고, 그 안에서 한 인물이 걸어 나왔다.
방금까지 보았던 그 성기사들이 작아 보일 정도로 거대한 체구다.
‘저게 신성 길드장이구나.’
엄청난 덩치다. 균열 관리부의 사람들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2M는 넘어 보인다.
“이렇게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군. 신성 길드장.”
안환재가 손을 내밀자 신성 길드장이라고 생각했던 성기사가 옆으로 물러났다.
그 뒤에서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은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안환재와 비교해도 한참 작은 체구다.
그녀는 안환재의 손을 마주 잡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단한 내력이군.”
잠시간의 인사말이 이루어지고, 신성 길드장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와 함께 움직이는 성기사들.
그들은 신성 길드장의 걸음에 맞춰, 조금씩 내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신성 길드장이 멈추자.
성기사들이 단체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 쪽을 향해서.
신성 길드장.
내게는 루비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소녀가 두 손을 모으고는 말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성자님.”
……루비가 신성 길드장이었다고?
당혹스러운 상황.
나는 충격에 말이 나오지 않았고.
“……서진 님?”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보다 더 충격받은 표정의 정해연이 있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39화
15. 빛이 있으라(2)
-이번 던전에는 수호와 황혼 그리고 신성 길드가 참여하게 될 거네.
공략에 들어가기 하루 전.
정해연은 안환재에게서 갑작스레 밀담을 요구받았다.
당연히 공략에 관한 것인 줄 알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보다 더 무거운 내용이었다.
수호 길드장, 안환재의 그림자라고도 부를 수 있는 신태웅의 죽음.
안환재의 곁에 항상 머물던 인물이었기에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정해연 본인에게 있어서는 소성환과도 같은 존재.
-내 손으로 죽였지.
심지어 심복을 죽인 것이 안환재 본인이란 사실을 들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정해연은 의문을 가졌다.
왜 이런 것을 자신에게 말하는 것일까.
어찌 보면 이것은 안환재의 큰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 사실을 이용한다면?
-이것은 던전 공략이면서도 일종의 덫이네. 자네에게는 상의 하나 없이 결정하게 돼서 정말 미안하군. 늙은이의 부탁일세. 큰 빚 하나 달아둔다 생각해 줄 수 있겠나?
눈을 마주친 안환재가 낯설었다.
매사 냉철하고 읽을 수 없을 것 같던 그의 감정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읽을 수 있었다.
손실과 이득을 따지지 않는 순수한 복수심.
-신성 길드장이 그곳에 올 걸세. 만약에 던전 내에서 그들이 수상한 행동을 보인다면…….
황혼 길드와 수호 길드의 협동 공략.
그것은 비단 던전 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만난 적이 없는 거네. 알겠나?
그렇기에 정해연은 더욱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서, 서진 님?”
이제는 입에 붙게 된 자연스러운 호칭도 잊어버릴 만큼.
“오늘은 잘 부탁드립니다, 성자님.”
단체로 한쪽 무릎을 꿇은 성기사들.
마치 제 주인을 모시듯이 두 손을 모은 신성 길드장.
그 대상이 연금술사, 이서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안환재 또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신성 길드와 연을 맺고 있는 건가?’
문득 첫 만남 때 자신의 마나를 침식하던 그 불길한 마나가 떠올랐다.
만약에 저 사내가 신성 길드와 한패라면?
서른 그리고 열.
스물아홉 그리고 열하나.
고작 하나의 추가 반대로 갔을 뿐이건만, 마음속 천칭이 평행을 이루게 되었다.
침묵 속에서 온갖 상념들이 퍼져나가고 있을 때.
당연히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이서진 본인이었다.
“……신성 길드장과 아는 사이셨던 겁니까?”
“그게…….”
아니…….
당연히 그냥 자신을 잘 따르는 동생 정도로만 보고 있었지.
신성 길드장은 뭐고, 저 뒤에서 무릎 꿇고 있는 성기사들은 뭐란 말인가.
‘신성의 길드장과 하층 던전에서 만나 친해진 사이라 하면 믿기나 할까?’
고작 그 인연 때문에 저 사람들이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 하면…….
‘나라도 안 믿겠네.’
오랜 시간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는 그보다 더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어릴 적에 알고 지내던 친한 동생입니다.”
“……예?”
“……뭐라?”
……다른 거로 할 걸 그랬나.
* * *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던전에 들어갈 시간.
입구에서 벌어질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각 길드의 최정예들이 우선적으로 들어갔다.
약 오 분간의 시간이 지나고, 던전 내에서 알림이 도착했다.
[이상 없습니다.]
“진입한다!”
나 또한 중간에서 진입 준비를 했다. 신성 길드의 성기사들은 이미 안쪽에 있건만 루비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곁에 붙어 있었다.
마치 얼마 전에 같이 다녔던 그 던전들처럼.
‘……문제는 얘가 신성 길드장이란 거잖아.’
지나칠 정도로 강하단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길드장 같은 거라곤 생각 못 했지…….
이런 작은 애가 그런 대형 길드의 수장일 줄 누가 상상하겠는가.
“어디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성자님?”
“…….”
그런 대형 사건을 저질러 놓고 정작 이루비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내 곁에 바짝 붙어서 보폭을 맞춰 걷는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시선들이 좀 많이 따갑네…….
세 개의 길드.
마흔 명의 인원이 무사히 던전 내부로 들어오자마자 각자 방진을 이루었다.
그 내부에 각 길드장들이 모이고, 이내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타 던전과 비슷하게 1층의 조건은 토벌이 아닐까요?”
“무언가를 찾는 것일 수도 있겠지. 물론 마물을 토벌하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하겠다만.”
“…….”
각 길드장들의 말.
신성 길드장, 루비에르트.
아니, 이루비라는 이름의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아니,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난 길드장도 아닌데?
정해연과 안환재도 날 보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일단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슨 의견을 내겠냐.
그렇습니다. 아, 물론 그렇고말고요.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방침이 정해지자 각성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이동하지도 않았는데 마물들이 우리를 향해 몰려든다.
2, 3층의 정예 몬스터 혹은 1층의 보스급이라 불리는 마물들.
고작 초입부인데도 마물들의 수준이 남달랐다.
하나같이 협동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면 고전할 수도 있을 만한 놈들.
그런 마물들을 향해 단 한 명의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할게.”
익숙한 인물이었다.
황혼 길드의 소성환.
평소에 있던 장난기는 단 하나도 없이, 소성환은 진지한 표정으로 거대한 도끼를 치켜들었다.
하늘을 향해 높게 들린 슈퍼 울트라 자이언트 액스.
한 걸음 앞으로 움직인 소성환이 있는 힘껏 도끼를 내리쳤다.
그리고…….
쩌저적!
‘와…… 미친…….’
바닥이 세 갈래로 갈라지며, 그 경로에 있던 마물들이 모조리 반 토막이 나버렸다.
거대한 도끼를 들어 올려 어깨에 기댄 소성환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클리어. 이동합니다.”
내가 알던 소성환이 맞나?
진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겁나 멋지네.
‘대한민국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각성자들의 수준. 한 번쯤은 확인해 보고 싶지 않나?’
솔직히 강하단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던전에서만 볼 수 있는 각성자들의 무위가 내 앞에 펼쳐졌다.
각 길드장은 나서지 않았다.
그럼에도 상황은 압도적이었다.
“……내가 할 건 없겠네.”
저런 괴물들 사이에서 뭘 하겠냐.
그래도 몸도 탄탄해지고,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렇습니다. 성자님이 나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내 옆에 있는 이루비가 말했다.
신성 길드의 성기사들은 상상했던 그대로의 압도적인 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엇으로 만들어진지 조차 모를 그들의 갑옷은 마물들의 공격에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말 그대로 열을 맞춰서 마물을 ‘분쇄’하는 중이다.
……저 양반들은 망치를 쓰는구나.
내 몸보다 큰 전투 망치를 이리저리 휘두른다.
그 일련의 행동에 마물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짓이겨질 뿐이었다.
솔직히 풍압만으로도 평범한 사람은 뒤로 날아갈 것 같았다.
“성자님은 그저 뒤에서 안전하게 계시면 되는 것입니다.”
나 혼자 이렇게 있기도 뭐 했지만, 할 것도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궁금한 걸 물어보기로 했다.
“저, 그 루비에르트…… 님?”
“루비입니다. 성자님.”
“이루비 님……?”
“루비입니다. 성자님.”
“……그래, 루비야.”
그냥 부르기 어색해서 높임말을 사용했는데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신성의 길드장이라고 했지?”
“그다지 중요한 직책은 아닙니다. 이렇게 성자님 곁에 있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맞긴 하다는 거네.
“절대로 성자님을 속인다거나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긴 하지.
던전에 다니는 동안 루비에게서 여러 가지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단 한 번도 나는 루비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런 소녀가 던전에 들어오는 이유.
말하기에는 꽤나 곤란한 사정일 게 분명 했으니까.
결과적으로 내 예상이 맞긴 했다만…….
또각- 또각-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들린다.
뒤쪽에 있던 정해연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신성 길드장. 저번에 한 번 뵌 적 있으시죠?”
정해연이 나긋나긋한 웃음을 지으며 루비에게 말을 걸었다.
“예. 처음 뵙겠습니다. 황혼 길드장.”
“……처음?”
나한테 말을 걸 때와는 다르게 ‘관심 없다’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둘 다 나와 연이 있는 만큼, 친하게 지내면 좋을 텐데.
“루비. 이쪽은 황혼 길드장, 정해연. 내…….”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러고 보니 정해연과 나와의 관계를 정확히 설명할 만한 게 없었다.
계약 관계.
누나, 동생 관계.
주종 관…… 아니, 이건 아니고.
언제나 만날 때마다 잘해주고, 대화하다 보면 편하고, 즐겁고.
그래. 이게 그나마 맞지 않을까.
“친구야.”
“……친구 말씀이십니까?”
내 말에 루비는 그제야 정해연의 얼굴을 기억하겠다는 듯, 자세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 또한 정해연을 보았다.
혹시 내 멋대로 친구라고 부른 걸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을까.
“친구…….”
묘하게 얼굴이 붉어진 정해연이 활짝 웃었다. 조금 전에 인사를 하며 보았던 그 표정보다도 자연스러운 웃음.
“서진 씨와는 어릴 적에 알고 지내던 친한 동생이라고 하셨죠?”
“……?”
아니, 저 말을 진짜로 믿었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를 쳐다보는 루비.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렇습니다. 성자님에게는 어릴 적에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루비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벅차오르는 듯, 반짝이는 눈동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힘이 들 때면 언제나 성자님을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그분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고, 이것은 루비가 겪어야 할 시련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 동네에서 알고 지냈다는 뜻 아니었어요?”
“하하. 그 뭐냐, 하루도 못 참을 정도로 절 의지하고 따랐다는 뜻이죠.”
와…… 무슨 연기가 저렇게 리얼하냐.
순간 나도 모르게 넋이 나가는 줄 알았다.
“신기하네요.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 그 ‘성자님’이라는 건 무슨 뜻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성자님은 성자님이기에…….”
“……애칭 같은 겁니다. 애칭. 저도 편하게 루비라고 부르고 있고요. 그치, 루비야?”
“그렇게 불러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성자님.”
“애칭…….”
애칭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곱씹던 정해연이 고개를 들었고.
“저도 애칭을…….”
앞 열에서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발견한 것 같습니다!”
길드의 수장들이 앞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던전 입구에서 보았던 비석과 같은 것이 있었다.
“제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탐색계 각성자로 보이는 인물이 앞으로 나와 비석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1층의 클리어 조건은 섬멸이 아니라, 이 비석에 꽂을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비석에 존재하는 네 개의 구멍.
모양으로 봐서는 열쇠를 찾으라는 거 같은데…….
“아까 마물의 사체 안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수호 길드의 사람이 안환재에게 열쇠 하나를 건넸다.
“이걸 저곳에 끼워 넣으면 된다는 거군.”
“사실상 토벌이랑 다를 건 없네요.”
“아직 몸도 안 풀렸는데 오히려 잘됐네.”
공감이다.
저 열쇠가 어떤 마물한테 있을지 모르니깐.
차라리 속 편하게 마물을 몇 마리 잡으라는 형식이 더욱 편하지.
대다수의 1, 2층 던전의 클리어 조건도 토벌이었고.
1층의 마물 수준도 파악되었다.
위험 요소는 없다.
우리는 재빠르게 이동하며 열쇠를 찾아다녔다.
말 그대로 토벌이랑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네 개의 열쇠가 모이고, 다시 비석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 구멍에 열쇠를 넣으면 2층으로 넘어가는 것이군.”
“1층이니만큼 별다른 함정 같은 것은 없을 겁니다.”
생각보다 클리어 조건이 쉽다.
아직 1층이라 그런가.
하긴 이 정도의 정예들이 모인 것이다. 다음 층으로 간다고 해도 별반 다를 것은 없겠지.
아마 던전 클리어 자체도 쉽게 진행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비석이라…….”
내가 경험했던 던전에서는 이렇게 뜬금없이 비석이 나오는 경우는 없어서 꽤나 신기했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앞으로 갔다.
어느새 구멍에는 세 개의 열쇠가 꽂혀 있었다.
아까 비석을 탐색했던 각성자가 마지막 열쇠를 꽂아 넣는 중이다.
탐색계 각성자가 저걸 조사하면 클리어 조건이 나오는 건가 본데…….
탐색은 나도 가능했다.
[대상 물체를 탐색합니다.]
[탐색 성공]
[비석에 네 개의 열쇠를 꽂아 넣을 경우. 다음 층으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 정보를 본 거겠지. 나 또한 보였다.
그런데 또 다른 정보도 보이기 시작했다.
[‘물체를 탐색하는 콘택트렌즈’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숨겨진 정보를 표시하기 위한 조건을 공개합니다.]
[조건-비석에 세 개의 열쇠가 꽂혀 있을 것]
[조건 달성]
[숨겨진 정보를 표시합니다!]
숨겨진 정보?
방금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비석에 꽂아 넣는 열쇠 중 푸른색의 열쇠를 포함하지 않을시, 다음 층으로 이동할 때 무작위 워프가 일어난다.]
무작위 워프……?
무슨 소리지?
던전에서는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다음 층으로 이동할 경우 모든 인원이 한 곳으로 모이게 된다.
그렇기에 인원을 나눠서 클리어 조건을 만족시키는 경우도 많았고.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무작위 워프라는 게…….’
제각각 떨어진 위치로 이동되는 것이라면?
2층에서도 마물이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곳에 나 혼자 떨어지게 된다면?
‘이런 미친.’
비석에 꽂히는 열쇠 중에 푸른색은 없었다.
“잠깐……!”
다급하게 외쳐봤지만, 이미 열쇠는 비석에 꽂힌 후였다.
열쇠가 꽂힌 비석은 바닥으로 가라앉았고, 우리들의 아래로 각자 원형 포탈이 나타났다.
2층으로의 워프가 진행되고 있다.
“성자님?”
다급하게 옆에 있는 루비의 몸이라도 잡으려 했으나, 몸이 붕 뜨는 감각과 함께 나는 어딘가로 이동되었다.
그래, 아니겠지.
그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내가 예상했던 것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단 걸 증명해 주었다.
어떤 마물이 와도 문제없을 것 같던 수십 명의 엘리트 각성자들.
그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크어어어어어!!!
대신이라고 하듯, 저 멀리 보이는 강력한 마물들.
4층 던전.
마흔 명의 각성자들이 힘을 합쳐 공략하는 곳이자, 절대로 혼자서 돌아다니면 안 되는 마굴.
“하하…… 진짜로 쉽게 가는 법이 없네.”
그곳에 나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40화
15. 빛이 있으라(3)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비석에 열쇠를 꽂았고, 그것이 옳았단 걸 증명하듯이 바닥에 다음 층으로 가는 포탈이 생성되었다.
그렇다면 마흔 명의 각성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어야 했다.
‘전부 어디로…….’
소성환도.
이서진도.
각 길드의 전투원들도.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성…… 자님?”
‘신성 길드장…….’
아니,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해연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신성 길드장, 루비에르트가 있었다.
“……성자님?”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었다.
마치 조각상을 보듯, 감정 없는 표정.
“성자님! 어디 계신 겁니까!”
하지만 지금 정해연이 보고 있는 루비에르트는 무언가 이상했다.
자신의 옆에 누군가 없다는 것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반복해서 흔든다.
무표정이었던 그녀의 얼굴에 한 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상실.
“성자님! 대답해 주십시오!”
“이 일대에 있는 모든 마물을 불러들일 셈인가?”
뒤에서 들려온 말에 정해연이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수호 길드장 안환재.
지금 이곳에는 세 명의 길드장이 함께 모여 있었다.
“……아무래도 트랩에 걸린 모양이군. 하. 고작 1층이라면서 방심하고 있었다니.”
어이가 없을 정도로 물러져 있었어.
안환재가 얼굴을 구겼다.
던전 공략을 하는 와중에도 이렇게 해이해져 있는 꼴이라니…….
그날 이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정상적인 사리판단이 이루어지질 않는다.
-길드장님은 너무 저돌적인 면이 있으십니다. 슬슬 몸도 생각하셔야죠. 도련님, 아가씨 결혼하시는 모습까진 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항상 자신의 옆에 있었던 한 인물이 떠올랐다.
그제야 안환재는 아주 조금이나마 흐트러져 있던 정신이 돌아올 수 있었다.
“…….”
안환재가 루비에르트를 보았다.
‘아까 보았던 그 압력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군.’
손을 맞잡은 순간 느꼈던 거대한 내력.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저 모습은 마치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의 울부짖음 같지 않은가.
“안 되겠습니다. 지금 당장 성자님을 찾아야 합니다!”
“진정부터 하게. 각 길드에서 정예라고 부를 정도로 강한 각성자들이야. 제 한 몸 살피는 것쯤은 가능하겠지.”
안환재가 생각하기에 이서진 또한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이 순간에도 성자님이 어떤 위험에 빠져 있을지 모르십니다! 제가…… 저 루비가 옆에서 보필해 드려야 합니다!”
“하.”
말이 통하질 않는군.
안환재가 내뱉었다.
“이서진, 그가 신이라도 되는가? 지금 자네가 하고 있는 행동은 마치 광신도의 그것과도 같아 보이는군.”
“……그분은 당신이 함부로 말할 존재가 아닙니다.”
“못 말할 것은 또 뭔가. 그는 인간이야.”
자신을 옭아맬 정도로 강한 마력을 지닌 인물이지만.
그 또한 인간이다.
언제, 어디서 죽게 될지 모르는 생물.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성자님이 죽는다?”
루비에르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눈에 초점이 흐려지고 광적인 빛이 감돈다.
그것을 본 안환재가 순식간에 마나를 끌어 올렸다.
‘저 눈빛. 어쩌면 정말로…….’
폭발하기 직전의 대치가 이루어졌고.
“그만들 좀 하세요! 이곳은 던전 내부입니다!”
정해연이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세 명의 길드장.
세 개의 마력.
서로의 마나가 허공에서 부딪치다가 이내 흩어졌다.
“못 볼 꼴을 보였군. 우선은 길드원들을 찾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지. 이서진, 그도 마찬가지야.”
“……알겠습니다.”
철퇴를 꽉 쥐고 있는 루비에르트를 보자니, 정해연은 이서진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하아…….’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저 루비에르트라는 인물에 대해서.
아까 대화할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 이서진이 있냐, 없냐 뿐이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걸까.’
어릴 때 친하게 지낸 동생.
그런 단순한 거짓말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메시지였다.
자신과 연을 맺고 있는 루비에르트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말을 돌려 한 것이다.
‘……혹시, 수호 길드장과 한 밀담에 대해 알고 계신 건가?’
신성 길드장과는 어쩌다 알게 된 것일까.
왜 그녀는 그에게 저토록 맹목적인 모습을 보이는가.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의 모습은 정말로 그인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정해연의 머릿속을 점점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아.”
-크어어어악!
소리를 듣고 찾아온 마물이 울부짖었다.
생각은 나중에 하자.
“지금은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정해연의 칼이 불에 휩싸였다.
* * *
‘아이기스의 방패!’
-크억?
방패에 부딪혀 잠시 주춤하는 마물.
나는 곧장 안쪽으로 파고들어 목을 베었고, 뒤로 빠져나왔다.
-크어어억!
마물이 미칠 듯이 날뛰기 시작한다. 다급하게 옆으로 몸을 날렸다.
신속의 물약 효과로 인해 몸은 평소보다 날렵했고 위기 상황에 미래시도 발동했다.
물약병을 입에 물고, 싸우기를 반복하자 이내 마물이 쓰러졌다.
쿠웅!
그동안 상대했던 정예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놈이었다.
문제는 이 같은 놈이 지천에 널려 있다는 것이다.
마석을 캔다든가, 가죽을 벗기는 여유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일단 몸을 숨기자.”
이곳에 오기 전 훈련을 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그 날들이 아니었다면, 이곳에서 도망치는 것조차 불가능했겠지.
‘이렇게 수가 많은 걸 보니 2층의 조건은 토벌인가?’
아니다.
확신하지 말자.
1층에서도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호되게 봉변을 당하지 않았나.
“동굴이다.”
숨을 곳을 찾으며 헤매다 보니,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혹시나 안쪽에 있을 마물에 대비해 돌을 던지며 일부러 소음을 내보았다.
그래도 깊은 곳에 잠들어 있을 수도 있으니 입구 쪽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하아.”
자리에 앉아 물약을 마시려 했으나 어느새 병은 비어 있었다.
이래서 물약은 페트병에 담아서 마셔야 하는 건데…….
“꼬물아.”
아무도 없는 바닥에 대고 말했다.
물론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는 그림자가 존재했으니까.
-끄앙!
그룸 특유의 만세 포즈를 취하며 꼬물이가 나타났다.
“나 물약 하나만 줄래?”
-끄엑.
꼬물이는 곧장 입에 손을 넣어서 물약 하나를 꺼내줬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꼬물이는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고맙다.”
혹시나 하고 꼬물이한테 물약을 넣어놓기를 잘했지.
너무 많이 넣었는지 배가 좀 빵빵하기는 하지만.
미안하다, 꼬물아.
끄앙. 끄앙. 그것 말고는 대화도 안 되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썩 위안이 되었다.
휴대전화를 열어서 앨범에 들어갔다.
나에게 바싹 붙은 상태로 찍혀 있는 이루비의 사진.
4층 던전 일지라도 휴대전화의 위치 추적기능은 잘 발동했다.
“점점 멀어지고 있네.”
아무래도 저쪽에서는 내가 있는 곳을 알 수 없는 만큼 엇갈릴 수밖에 없다.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을 테니까.’
던전에서의 휴대전화 사용은 매우 제한적이다.
마석을 이용해 특수 제작된 일회용 휴대전화.
고작해야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바깥의 인원에게 문자 한 통을 보낼 정도일 뿐이다.
초기화 과정을 거쳤다면 조금 더 오래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휴대전화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저쪽으로 가야 한다는 건데…….
“가다가 죽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흩어진 마흔 명의 각성자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생존을 위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길 가다가 만나기라도 한다면 큰 도움이 될 텐데.
휴대전화에는 소성환과 정해연 또한 찍혀 있었다.
뻣뻣하게 거리를 유지한 채로 찍힌 정해연과 나와의 내기에서 져 울상인 표정의 소성환.
“정해연은 루비랑 함께 있는 모양이네.”
최상위 각성자인 둘이다.
저곳에 합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자.
더 멀어지기 전에 슬슬 이동할까.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행동이 매우 조심스럽다.
부스럭-
자리에서 일어나자 풀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
-끄앙!
“쉿.”
꼬물이를 그림자 속으로 돌려보내고, 검을 들었다.
만약에 마물이라면 곧장 달려들어 선공을 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나타난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언뜻 멀리서 본다면 누군가는 그를 마물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거대한 덩치의 남성.
흰색 갑주를 입은 성기사가 내게 말했다.
“이런 곳에 계셨군요.”
일전에 보았던 성기사단장이었다.
* * *
성기사단장이 합류하자, 마물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 어마어마한 성기사들을 통솔하는 사람답네.’
저 거대한 전투 망치가 나를 향하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하자.
……그보다 2층이 왜 이렇게 넓지.
이곳 던전의 내부는 이름 모를 숲이었다.
바위며 나무며 장애물이 많았기에, 이동하기가 꽤 불편했다.
거기다가 저쪽은 계속해서 멀어져가는 중이고.
던전 내부에서도 시간은 흐른다.
숲은 점점 어두워지고, 앞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끄에에엑!
어둠 속에서 마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또 다른 동굴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이곳에서 밤을 보내도록 하죠.”
불을 피운다든가 하는 형편 좋은 짓은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입구를 주시한 채로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명색이 4층 던전인 만큼 짐꾼에 인원을 투자할 순 없었기에, 마물과 싸우는 전투조를 제외한 대기조들이 한곳에 배낭을 모아두기로 했었다.
문제는 식수가 담긴 튜브 팩, 던전 내에서의 식사를 위해 만들어진 에너지바.
물자를 가득 넣어놓은 배낭을 가지고 있는 대기조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이다.
다음 층으로 이동할 시, 각성자들은 한곳으로 모인다.
그 대전제가 처음으로 깨지게 되면서 발생한 사태다.
‘……좀 찝찝하긴 하지만.’
이것저것 삼키기를 좋아하는 꼬물이 덕분에 굶을 일은 없게 되었다.
나는 성기사단장의 시야에 안 보이는 곳에 꼬물이를 소환하고는 2인분의 식량을 꺼냈다.
-꾸엑.
“배고프시죠? 드세요.”
“이걸 어디서…….”
“몇 개 따로 챙겨놨었습니다.”
“그렇군요. 저는 괜찮습니다. 앞으로 합류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데 그걸 드시고 힘을 보충하시죠.”
아니…….
사실상 마물을 잡는 것은 내가 아니었기에 먹지 않으면 곤란했다.
결국, 그는 내가 내민 식량을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니 저 상태로 어떻게 먹지?’
성기사단장은 던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온몸을 뒤덮는 갑주와 헬멧을 쓰고 있는 상태다.
“답답해 보이는데, 벗고 드시는 건 어때요?”
“…….”
성기사단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군요.”
투구를 벗은 그의 얼굴은 상상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덩치에 맞는 강인한 외모는 맞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화상 자국으로 가득했다.
“흉측한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따로 밖으로 나가 식사를 하겠습니다.”
“아뇨, 아뇨!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아요. 여기서 같이 먹죠.”
“그러시다면야.”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에너지바를 꼭꼭 씹어 먹기 시작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아까 전 길을 걷다 보니 몇몇 나무 위에 식용 가능한 열매들이 있더군요.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정도는 구분 가능한 사람들이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시지요.”
하긴.
던전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람들이다.
난 내 걱정만 하면 되겠지.
몸에 비해 너무도 작아 보이는 에너지바를 먹고 있는 성기사단장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뜬금없이 나에게 무릎 꿇은 것도 있었고.
루비와 같은 길드의 사람들이라면 조금은 특이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하.”
그래도 외부적으로 이미지가 나쁜 길드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좋다.
주기적으로 사회에 봉사며 기부며 여러 가지를 하고 있으니까.
일각에서는 신성 길드가 믿는 신이 누구냐며 신도가 되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던데.
……그런데 진짜 누구지?
지구상에 존재하던 여러 종교를 생각하다가 이내 털어냈다.
그런 평범한 게 아닐 것 같았다.
좀 예민할 수도 있는 주제라서 조심스럽게 물어봤는데 흔쾌히 대답해 줬다.
“사실은 저도 잘 모릅니다.”
이건 너무 흔쾌한데요.
“저는 길드장님의 뜻을 따르는 것뿐이라, 그녀가 믿는 신이 존재하는지, 무엇인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의 이야기가 계속됐다.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리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외부로의 활동도 거의 하지 않으셨죠. 그저 같은 곳에 앉아 하염없이 기도만 하시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계시를 기다린다는 말과 함께요.”
외부로의 활동을 하지 않는다라…….
그동안 루비의 모습을 생각하자면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너무 자주 하던데?
“그래서인지 요즘 길드장께서 보이는 행동은 내부에서도 말이 많습니다. 혹시 계시의 그분이 나타난 것은 아닌가 하면서요.”
계시의 그분이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루비가 내게 취하는 행동들을 생각하면 그것이 나를 가리킨단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대체 나의 뭘 보고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나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루비와 나와의 관계?
그녀가 나에게 보내는 신뢰에 대한 이유? 내가 그들이 말하는 계시 속 인물인가?
어느 것 하나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긴장된 표정으로 성기사단장을 바라봤고.
마침내 성기사단장의 입이 열렸다.
“당신은 신이십니까?”
“…….”
……예?
머릿속에서 생각해 뒀던 모든 대답들이 쓸모없게 되었다.
잠시간 정적이 흐르고,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농담이었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진짜.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41화
15. 빛이 있으라(4)
“농담이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고지식함의 극한으로 보이는 사람인데…….
의외로 장난도 칠 줄 안다.
“진짜 신이시라면 이렇게 고생하고 있을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손 몇 번 휘둘러서 위기 같은 것은 금방 해결할 수 있겠지.
최상위 각성자들이 있다는 것 하나만 믿고 방심하다가 화를 당하는 일도 없었을 테고.
“이서진 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불러주세요. 말은 안 높이셔도 되고.”
“하하. 그럴 수는 없죠. 저희 길드장께서 극존칭을 사용하는 분 아닙니까.”
그것도 그런가.
그렇다면 루비한테 말을 놓으라고…….
……이것도 안 될 거 같네.
“전 어떻게 불러드리면 될까요? 성기사단장님?”
“어감이 그렇게 좋진 않군요. 미천한 종 어떻습니까.”
“…….”
“신백준이라고 불러주시죠. 제 이름입니다.”
신백준.
기억해 뒀다.
사람 놀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
그는 날 보며 웃다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서진님께서는 길드장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냐라…….
저쪽이 날 대하는 태도와는 다르게, 내가 루비를 보고 떠올리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외동으로 살아왔고, 어린 나이에 가족을 여의어서 그런지 그녀는 나에게 없던 귀여운 여동생으로만 보였다.
내 의견을 전하고 나서야 혹시 실수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모시고 있는 길드장이니까.
신백준이 웃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예?”
“수녀님께서는 아직 어리시지 않습니까. 고작해야 열아홉. 길드장이라는 직위를 맡기에도, 던전에 들어오기에도 미숙한 나이입니다.”
수녀님이라고 부르는구나.
설마 했는데 진짜 스무 살도 안 될 줄은 몰랐네.
던전엔 어떻게 들어온 거야?
“저 같은 아저씨한테는 여동생이라기보다는…… 딸…… 이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리겠군요.”
신백준은 잠시 눈을 감고, 벽에 등을 기대었다.
딸.
그렇게 말했을 때, 그에게서 어떠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부모님을 떠올릴 때와 비슷한 종류의 감정이었다.
“사실 궁금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지만, 혹시나 수녀님께서 믿는 분이 악인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었거든요.”
난 그렇게까지 착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악인이냐고 물으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만약 내가 악인이었다면 어쩔 생각이었지…….
“하하. 아니시잖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알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그의 옆에 세워져 있는 전투 망치가 유독 커 보였다.
애써 무시하며 그에게 말했다.
“그래서 제 답변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거짓말 하나 없이 순수하게 느낀 점을 내뱉었다.
그는 대답 대신이라고 하듯, 일어나더니 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리한 부탁일지도 모르겠지만, 수녀님의 좋은 오빠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예.”
……저건 신성 길드 특유의 인사 같은 건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성기사’라기보다는 이웃집 아저씨가 떠오르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제야 이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이 양반. 일부러 이러는 거였네…….’
정정하자.
사람 놀리는 걸 아주 많이 좋아하는 이웃집 아저씨로.
* * *
교대로 쪽잠을 자서 그런지, 살짝 머리가 찌뿌둥했다.
물약을 한 모금 마시니 그나마 살 것 같다.
저 아저씨는 잔다는 말만 하고, 안 잔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쌩쌩하지…….
해가 뜨자마자 계속해서 이동한 덕분인지, 정해연과의 거리를 점점 좁힐 수 있었다.
이제는 거의 다 따라잡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신백준과 내 밑으로 포탈이 나타났다.
2층의 조건이 클리어되어서 다음 층으로 이동한다는 의미였다.
“신백준 씨!”
그것을 보자마자 나는 그의 몸을 와락 안았다. 다시 한번 무작위 워프를 한다면 진짜 망한다……!
마치 이것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아주 꽉 쥐어 잡았다.
손을 놓지 않은 상태로 잠시 시간이 흐르고, 눈을 뜨자 주변에서 수십 개의 기척이 느껴졌다.
마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위기 같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여긴?”
“조건 클리어한 게 누군진 몰라도 감사합니다아!”
제각기 환호의 소리를 내지르는 마흔 명의 각성자들.
우리는 다시 한곳에 뭉치게 되었다.
그들은 곧장 식량을 찾기 시작했다.
“무, 물부터 줘!”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나는 곁눈질로 신백준을 보았다.
그는 다시 투구를 착용한 상태라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알아서 잘 먹고 있을 거라면서요?
신백준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소성환이다.
온몸에 진흙이 묻은 채로 옷을 벗고 있었다.
“야이씨…… 하필이면 이럴 때 워프 되고 난리냐…….”
그는 다급하게 바위 뒤로 숨더니 진흙을 대충 닦아내고 옷을 입었다.
어디 진흙탕에서 마물이랑 질펀하게 놀기라도 했나 보네.
“성자님! 성자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각성자들 사이로 조그마한 생명체가 ‘뿅’ 하고 튀어나왔다.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 모습이 꽤나 애처로워 보인다.
“어…… 안녕?”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손을 들어주었다.
푹- 하고 무언가가 내 가슴팍에 안겨 들어왔다.
“성자님……성자님……죄송합니다. 전부……전부 다 루비가 부주의한 탓에 벌어진 일입니다…….”
얘 왜 이런다냐.
이거 진짜 당황스럽네…….
신백준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그는 두 손을 들어 어떤 행동을 취할 뿐이었다.
……머리라도 쓰다듬으라고요?
손을 머리 위에 올리자, 미칠 듯이 떨던 루비의 몸이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다.
이야, 인간 방석 이서진이 여기서 사용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어느새 다가온 정해연이 내 앞에 섰다.
나는 그녀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서진 씨.”
“예. 해연 씨도요.”
사실 저쪽은 걱정 안 했다. 워낙에 강한 사람들이어야지.
근데 그런 것치고는 정해연 얼굴이 꽤나 피곤해 보이는데.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예…… 아주 많은 일이 있었죠…….”
아무래도 마물한테 많이 시달렸나 보다.
2층의 조건이 클리어된 것도 정해연 쪽이 마물을 많이 잡아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안환재는 이쪽을 한번 보더니 길드원들을 수습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꽤나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모두들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공략조의 대표라고 부를 수 있는 안환재가 각성자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공략을 위한 행동 방침을 듣고 있자니 안겨 있던 루비가 꼬물거렸다.
“이제 괜찮아?”
“……죄송합니다, 성자님. 부끄러운 꼴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게 정말로 창피한 모양이다.
이런 표정은 처음이네.
……정해연의 표정은 또 왜 저래?
“……정말로. 서진 씨가 이곳에 있어서 다행입니다.”
도움은 하나도 안 되고 있다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이후로 공략이 재개되었다.
안환재의 방침대로 각자 5인 1조로 움직이게 되었다.
“조금은 떨어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안 됩니다, 성자님.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아예 내 옆에 찰싹 붙어 있는 루비에게 그렇게 말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비석입니다!”
비석.
그 소리에 모두 얼굴을 찡그렸다.
곧바로 탐색계 각성자가 앞으로 나가, 클리어 조건을 확인했다.
이번엔 절대 안 당하지.
[비석에 네 개의 열쇠를 꽂아 넣을 경우, 마지막 층으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1층과 같은 조건이었다.
그렇다는 건…….
[숨겨진 정보를 표시합니다!]
[각 구멍에는 시계 방향으로 각각 빨강, 초록, 주황, 파랑의 열쇠를 꽂아 넣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음 층으로의 무작위 워프가 일어난다.]
진짜 던전이 어디서 오고, 누가 만든 건지는 모르겠는데.
내 앞에 있다면 한 대 쥐어박기라도 하고 싶다.
“기, 길드장님! 열쇠의 색깔이 여러 개입니다!”
“비석 뒤에 무언가 적혀 있습니다.”
“……시계 방향? 열쇠를 순서대로 꽂으라는 건가?”
아무래도 3층을 돌아다니면서 이 비석에 대한 힌트를 얻어야 하는 방식인가 보다.
문제는 2층에서도 느꼈지만, 이곳 내부가 더럽게 넓다는 것이다.
“……흩어져서 찾아보는 수밖에 없나?”
나는 정해연에게 저 비석에 꽂아 넣을 열쇠들의 순서를 말해주었다.
“그걸 서진 씨께서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저 이래 보여도 탐색계 각성자잖아요.”
“……그거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셨어요?”
각성자 등록을 끝마친 날.
현수막을 들고 온 정해연에게 해줬던 말이었다.
정해연은 앞으로 가 안환재에게 내 말을 전해주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방침을 정했다.
“확신할 수가 없으니, 몇 개의 힌트를 더 찾아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당연한 말이었다.
이곳에서 저 숨겨진 정보를 볼 수 있는 것은 나뿐이었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마땅치 않으니까.
“찾았습니다!”
두 시간을 돌아다닌 결과.
첫 번째 힌트를 찾았다.
6시 방향에 주황 열쇠.
내가 말한 정보와 일치했다.
“하나만 더 확인하지.”
세 시간이 지나고, 다시 또 하나의 비석을 찾았다.
12시 방향에 빨강.
두 개의 힌트.
그때가 되어서야 안환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힌트가 적힌 비석은 어느 동굴 안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나머지 힌트 또한 우리가 찾기 힘든 으슥한 곳에 숨어져 있겠지.
‘누가, 네 뜻대로 행동할 거 같냐.’
두 개면 충분하다. 두 개면.
마물의 사체에서 나온 열쇠를 비석에 순서대로 꽂았다.
그리고.
“각자 손을 잡도록!”
우리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각자 손을 잡았고.
2층과는 달리, 다 같은 장소로 워프할 수 있었다.
“하…… 마지막 층이네. 재빠르게 잡고 얼른 이 빌어먹을 곳에서 나가자고.”
공감이다.
「블랙 와이번의 허름한 둥지」
우리는 이 던전의 보스가 있을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걸릴 줄 알았으나, 의외로 빠르게 발견했다.
-끼에엑!
블랙 와이번이 둥지 위에서 허공을 향해 포효했다.
……역시 던전의 보스.
느껴지는 포스가 보통이 아니었다.
곧바로 돌입하지 않는다.
던전의 보스인 만큼 만반의 준비를 하기로 했다.
“이건 뭐지?”
“노란색?”
각성자 한 명당 물약 하나씩을 분배해 주었다.
신속의 물약.
“……자양강장제가 아니었군.”
어쩐지 이상하다 싶더라니.
안환재가 작게 중얼거리며 그것을 마셨다.
나머지 각성자들도 그것을 들이키자마자 제각기 놀란 반응을 보인다.
“뭐, 뭐야!”
“미친! 몸이 날아갈 것 같잖아?”
“황혼에서 개발한 물건인가?”
“이건 혁명이야!”
“연금술사 길드장의 결과물인가?”
흥분할 만도 하다.
고유 능력으로 육체 강화를 가진 각성자도 있다.
그런 특수한 힘을 고작 물약 하나로 재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전에 저에게 주셨던 그 성수로군요. 성자님을 제대로 보필해드리지도 못했는데,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될는지…….”
아니다. 이 수녀야. 그냥 평범한 물약이다.
“이 물약, 수호 길드에 따로 판매할 생각은 없나?”
“아쉽게도 아직 판매 가능한 물건이 아니라서요.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요.”
“……그 말은 이 물약의 제조를 황혼에서 한 게 아니란 말이군.”
안환재의 눈빛이 잠시 나를 스쳤다.
“일단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하죠.”
“이 물약에 정해진 이름이라도 있나?”
“이것을 만드신 분께선 ‘신속의 물약’이라고 이름 지으셨습니다.”
“신속의 물약…….”
안환재는 자신의 몸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돌려 블랙 와이번을 직시했다.
“확실히 그렇군.”
자신들의 몸에 생긴 변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각성자들에게 안환재가 선포했다.
“지금부터 블랙 와이번의 공략을 시작한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42화
15. 빛이 있으라(5)
전원 무기를 꺼내 들고 둥지를 향해 다가갔다.
수많은 기척.
둥지에 앉아 있던 블랙 와이번이 침입자들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각성자들을 중심으로 대열을 갖추어라!”
일단은 블랙 와이번을 둥지에서 끌어내리는 게 급선무였다.
마나로 이루어진 화살과 화염구가 와이번을 향해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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