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efato 3
“……강한 사람이요?”
“아니에요.”
그는 누군가를 생각하는 건지, 피식 웃더니 연회가 열리는 건물로 걸어갔다.
저 사람도 연회에 초대된 사람이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해준 인물.
길드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위트 길드의 송도형입니다!”
걸어가던 남성이 말했다.
“무소속. 이서진입니다.”
* * *
겉으로 봤을 때도 근사했지만, 안으로 들어오자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마치 궁전을 보는 듯한 화려한 실내.
이런 곳에 오는 것은 처음이다.
나는 내 복장을 내려다보았다.
이전에는 입어본 적 없는 양복 풀 세팅.
옷이 날개라고 했던가, 내 모습은 나 자신이 보아도 꽤 봐줄 만했다.
이 정도면 꿀리지는 않겠지.
……양복 안주머니가 살짝 튀어나온 게 흠이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순둥아, 미안하다.’
오늘을 위해서 알에게 사용하고 있던 손전등을 가져왔다.
물약의 성능이 더욱 높아져서 그런지, 손전등이 없어도 무슨 일이 일어난다든가 하는 건 없었다.
남아 있던 모든 사체들도 전부 주고 왔으니,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귀여운 새끼가 태어나는 건 아닐까?
그건 좀 기대되네.
뭐, 아직 부화 시간이 며칠은 남아 있지만.
“이쪽으로 오시죠.”
입구에 서 있자니, 누군가 와서 나를 안내해 주기 시작했다.
HH.
황혼의 사람이다.
나를 안내하면서도, 내가 누군지 궁금하다는 듯 힐끔힐끔거린다.
고위 각성자? 정치인? 연예인?
그런 물음이 얼굴 위로 떠오르는 것 같다.
미안하지만, 일반인이다.
끼익-
도착한 곳에서 처음 느낀 것은 세상에 이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하나같이 아는 사람들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란 건 아니고…….
대부분 대중매체에서 본 사람들이지.
외국인들도 있었다.
맛있는 음식들도 많이 준비돼 있다더니 확실히 그랬다.
간간이 보이는 음식들은 내게도 낯익었다.
저번에 한식집에서 먹었던 거랑 비슷해 보이는데.
나도 간단하게 음료수 정도 마시면서 시작해 볼까.
‘음. 내 특제 주스보다는 맛없네.’
그렇게 홀짝거리며 사람 구경을 하고 있자니, 정말로 내가 아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황혼 길드의 정해연.
그녀는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실내 출입이 허락되는 몇 안 되는 기자가 그녀를 인터뷰하고 있었고, 그녀는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간다.
“역시 대단하네.”
종종 독특한 모습을 보여줘서 잊기 쉬웠지만.
정해연은 황혼이라는 거대 길드의 수장이다.
그것도 이란 연회를 연 장본인이고.
그녀가 웃으며 이야기할 때마다, 카메라가 쉴 새 없이 터진다.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연회다 보니, 얼굴 사진이나 몇 개 올라가겠지.
……아니. 저 사람 셔터 손놀림이 왜 저래.
애초부터 얼굴 사진 말고 다른 건 찍을 생각이 없는 거 같은데?
이해는 한다.
냉철하고 도도하다는 헛소문이 나 있는 그녀다.
정해연의 웃는 모습을 찍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음, 그런데 아쉽네.
“저 각도보다 왼쪽에서 찍는 게 더 예쁘게 나올 텐데.”
“저 각도보다 왼쪽에서 찍는 게 더 예쁘게 나오시는데…….”
“……?”
“……?”
내가 작게 중얼거린 소리가 메아리치듯이 울려 퍼졌다.
아니, 울린 게 아니라 내 옆에서 똑같은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가슴에 있는 명찰을 보니 ‘한미나’라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내 옆에 서서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정해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흠.”
“흠흠.”
우리는 서로 어색한 눈웃음을 짓고는 다시 앞을 보았다.
이럴 때가 아니다. 보기 힘든 장면인데 많이 봐 둬야지.
이래 보여도 정해연 팬클럽 회원 중에 하나다.
인터뷰를 하고 있는 사람도. 사진을 찍는 사람도 하나같이 얼굴이 헤벌쭉하다.
정해연의 미소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볼수록 미소가 살짝 어색했다.
일전에 보았던 나이에 걸맞은 순박한 웃음이 아닌, 꾸며낸 듯 완벽한 미소다.
얼굴도 평소보다 지쳐 보인다.
가까이에서 여러 번이고 세심하게 본 사람이 아니면 못 알아챌 정도의 페이스 컨트롤.
이만한 규모의 연회다.
당연히 여러 가지 신경 쓸 것이 많았겠지.
그래도.
“좀 더 밝게 웃는 게 더 매력적인데.”
“조금 더 밝게 웃으면 훨씬 귀여우신데…….”
“……?”
“……?”
이 사람…….
웃음을 지우고 서로를 탐색하듯 눈싸움을 하기를 잠시.
누군가 나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오. 이거 음료수남 아니야.”
접시에 올라가 있는 음식의 산.
떨어뜨리지도 않고, 걸어 다니며 자연스럽게 먹는 묘기를 부린다.
근처를 보면 전부 귀공자라도 되는 듯이 분위기가 답답했는데.
이 사람은 쓸데없이 너무 자유롭다.
“그때 복부 얻어맞으신 분? 맞죠?”
“이야…… 알았어요. 음료수남이라고 안 할 테니까. 평범하게 얘기해요. 누가 정해연 지인 아니랄까 봐 한마디를 안 지네…… 이거 진짜 서러워서 살 수가 있나…….”
“해연 길드장님 지인이시라고요?”
옆에 있던 사람이 깜짝 놀라며 입을 가렸다.
“어머. 어머. 세상에.”
그러면서 제자리에서 발을 미칠 듯이 구른다.
이모티콘이라느니.
문자의 주인공이라느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그녀가 내게 산뜻한 미소로 손을 내밀었다.
“해연 길드장님 개인 비서 한미나라고 해요!”
방금까지 탐색을 하던 기색은 어디 가고, 귀한 손님이라도 맞이하듯이 깍듯하게 대한다.
어쩐지 정해연에 대해 잘 안다고 했더니, 개인 비서였나.
“잘 부탁드려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악수를 나누고 있자, 소성환이 입에 있는 음식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정해연이 초대한 거예요?”
“예. 그렇죠.”
안주머니에 넣어놨던 초대장을 건네자, 그가 갸우뚱한 표정을 짓는다.
“이건 우리가 단체로 발송한 초대장이 아닌데…….”
소성환이 반짝거리는 초대장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 * *
☆초대장☆
황혼 길드가 주최하는 별들의 연회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본 연회에서는 그동안 경험한 적이 없던 서비스와 만찬이 제공되며, 오직 당신만을 위한 무대가 준비될 예정입니다!
귀찮으시다면 오실 필요는 없으시지만…… 그래도 부디 와주셨으면 하는 바에 초대장을 보냅니다!
* * *
“……뭐 이리 길어?”
“기껏해야 ‘별들의 연회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하나만 보내는 거 아니었어요?”
“무슨 별까지 그려져 있네.”
“저거 직접 그린 거 같은데요?”
원래 다 이런 거 아니었나?
초대장이 거기서 거기지 뭐.
저쪽에서 이야기하던 정해연이 모여 있는 우리를 발견했다.
순간 눈동자가 커지며, 이곳에 오고 싶다는 분위기를 마구 뿜어댄다.
‘안 되지.’
정해연에게는 이미 언질을 해둔 상태다.
되도록 이 연회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자고.
E급 축하 사태는 정해연 쪽에서 손을 써두었는지, 뉴스 같은 게 따로 뜨지는 않았지만.
이 연회에서 내 정수기에서 나온 물약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동안 본 적 없는 무소속의 남자와 즐겁게 대화하는 정해연.
사실 밝혀져도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이미 황혼 길드와 독점 거래를 한 상태니, 다른 길드가 몰려드는 것 같은 귀찮은 일은 사양이었다.
그 대신 잔뜩 시무룩해하고 있는 햄스터 이모티콘 폭탄을 받았지만.
약속대로 정해연은 내 쪽으로 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곧장’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는 게 맞았다.
“안녕하세요. 이 주최를 맡게 된 황혼 길드 정해연이라고 합니다.”
“허억!”
그녀는 내부를 돌아다니며, 한 명, 한 명한테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최자로서 이곳에 초대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은 아주 평범한 행위.
그녀는 이내 대부분의 사람과 인사를 끝마치더니 내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몹시 즐거운 표정이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저는 스네이크의 부길드장…….”
그녀가 오는 길목에 다른 사람이 있었음에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소성환 전투조장님. 이런 곳에 있으셨군요.”
“저, 전투조장님?”
소성환이 먹고 있던 음식을 재빨리 삼켰다.
마치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뱉을 것 같다는 듯이.
“제 비서 한미나 씨도 여기 계셨군요. 연회는 즐기고 계신지요. 음? 이분은 누구시죠?”
이야.
아주 자연스러운 연기다.
세상에 곧장 영화 한 편 찍어도 되겠네.
“아니, 얘가 며칠 밤 동안 연회 준비하다가 미쳤나. 네가 초대해 놓고 뭔 새삼스레 모르는 처…… 아악!”
“왜 그러시죠? 몸이라도 안 좋으신 것은 아니신지?”
“아니, 네가 발을…….”
“제가요?”
“아뇨. 제가 음식을 먹다가 그만 발을 씹었다고요…….”
정해연이 마치 날 처음 만난 사람처럼 내게 인사했다.
“반가워요. 저는 황혼 길드의 정해연이라고 해요. 드레스 코드가 매우 멋지신데요?”
하여간…….
나도 그 장단에 맞추기 위해 손을 들었는데, 또 다른 손이 끼어들었다.
“이거 못 들으신 모양이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스네이크의 부길드장인 전진우라고 합니다. 레이디.”
“…….”
정해연의 얼굴이 한순간 썩었다가, 이내 펴졌다.
그녀는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예. 반가워요.”
“영광 입…… 아니, 왜 손에 손수건을 감싸고 계신 거죠?”
“제가 손에 땀이 좀 많아서.”
어느새 꺼낸 손수건을 손에 감아 악수를 끝마친 정해연은 그것을 벗고선 내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맞잡았다.
“반가워요.”
손에 땀 같은 것은 없었다.
전진우는 계속해서 정해연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 연회는 정말 규모가 대단하군요.”
“다른 길드 주최일 때도 이랬어요.”
“정해연 길드장님만의 독특한 개성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글쎄요. 당신 입은 좀 독특한 거 같긴 한데.”
물론 계속해서 말은 하고 있지만, 대화는 되고 있지 않았다.
전진우는 남몰래 입술을 물더니, 이내 나를 보았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 계신 분들 수준도 하나같이 대단한 분들 아닙니까.”
황혼의 전투조장 소성환.
황혼의 길드장 정해연.
그녀를 보좌하는 개인 비서 한미나.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한 칭찬을 계속하더니 본론을 꺼냈다.
“유독 이 파티에는 각성자분들이 많더군요. 하하. 뭐, ‘길드 간의 모임’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요.”
길드 간의 모임이란 걸 왜 강조하지.
설마 나 들으라고 저러는 건가?
“여기 계신 정해연 길드장님만 해도 초기 각성 등급으로 S를 받으신 분 아닙니까. 그 옆에 계신 소성환 씨도 A+를 받으신 분이구요.”
그는 부끄럽다는 듯이, 자신을 가리키고 말했다.
“저 또한 A라는 등급을 받았습니다. 여기 계신 사람들에 비하면 매우 부끄럽습니다만…….”
그는 표정을 지우고는 나를 ‘공손히’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곳에 한 사람이 더 계셨군요. 이서진…… 씨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느 길드 소속인지 여쭤 봐도 되겠는지요?”
“무소속이라니깐요? 아까 얘기도 나눠놓고 뭐 처음 듣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어요?”
“크흠. 그, 그랬군요. 제가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다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주최자 앞에서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이다.
그래. 나 백수다. 이 자식아. 불만 있냐?
“그렇다면 각성자 등록은 하셨는지요?”
“했죠.”
“어느 등급이신지?”
“E급이요.”
“어디 보자 E급…… 하하. 정말이십니까?”
그제야 한 건 잡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린다.
“이거, 이거. 아무래도 능력은 그다지 좋지 못하신 듯하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세상은 넓으니, 당신을 원하는 사람은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E급’이라도 말이죠.”
그가 자신의 재밌는 농담을 자랑하듯이 주변을 살폈지만, 그 누구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 그러고 보니. 정해연 길드장님도 철저하게 실력자 위주로 길드를 키우셨다고 했죠? 혹시 길드가 원하는 인재상이라도 따로 있으신지요?”
곧장 분위기를 살핀 전진우가 말을 돌렸다.
그것이 통했는지, 이번에는 정해연도 대답을 했다.
“매력적인 인재상 말이죠?”
“예. 그렇습니다.”
“흠…….”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나와 눈을 한번 마주치고는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외견은 평범했으면 좋겠네요. 사는 곳도 겉으로 보면 허름해 보였으면 좋겠고.”
무슨 그런 인재상이…….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기왕이면 제 목숨도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래를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으면 좋겠고요.”
“하하…… 황혼 길드는 원하는 인재상이 뚜렷하군요.”
정해연이 한 가지 까먹었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리고 등급은 E급 정도면 괜찮겠네요.”
그녀가 웃었다.
현수막을 펼칠 때 봤던 그 미소였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25화
9. 별들의 연회(3)
스네이크의 부길드장 전진우는 현재 혼란에 빠져 있었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애송이 한 명을 쪽 주는 동시에 자신을 어필할 생각이었는데, 어필은커녕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무소속에 E급이라며?’
입구에서의 그 사건 이후, 혹시라도 건드렸다가 해라도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재빨리 저 이서진이라는 놈에 대해 알아보았다.
실제로 전진우는 놀랐다.
‘저렇게 평범한 놈이 이런 곳에 온다고?’
이렇게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마땅히 주목할 점도 없었으며, 부모조차 없는 고아였다.
그런데 지금 이 광경은 뭔가.
마치 저놈 주변에 사람이 몰려드는 것 같지 않은가.
‘원래 저 자리는 내 것이어야 하는데!’
하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 있어 보인다.
정해연.
냉철하다는 평가와는 달리 저렇게 헤실헤실 웃고 있다.
저런 놈한테도 저렇게 웃어줄 정도면 자신은 어떻겠는가.
평범한 인상이 좋다고 한 것도, 근처에 기자가 있으니 서비스 멘트로 해준 것이겠지.
전진우는 이서진과 대화를 하고 있는 정해연에게 어깨를 살짝 터치했다.
어느 여자든 간에 자신이 이런 식으로 가볍게 신체 접촉을 해준다면 호감을 가지곤 했다.
“이런 곳에 있지 말고, 저쪽에 가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 말에 미소 가득하던 정해연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옆에 있는 소성환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한미나도 다른 곳을 보면서 모르는 척했다.
정해연이 전진우에게 밝게 웃었다.
‘역시……!’
“싫으니까. 저쪽으로 꺼져요.”
“……응?”
얼굴에 만개한 미소와는 다르게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더없이 냉랭했다.
눈도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못 알아들어? 네까짓 거랑 마주 보고 있기 괴로우니까 내 앞에서 사라지라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그 말에 전진우가 제정신을 차렸다.
“어…… 그, 그게…….”
냉랭한 분위기 속.
소성환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기를 넘어, 두 주먹을 입에 넣게까지 되었을 때, 이서진이 정해연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 순간 마치 봄이 되듯이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했다.
그녀는 흠흠-하고 제 어깨를 한번 보더니, 다시 미소 지으며 기자를 바라봤다.
“방금 멘트는 모른 척해주실 거죠?”
“무슨 멘트 말씀이십니까?”
눈치가 빠른 카메라맨이 곧장 대답했다.
그들은 황혼과 정해연 쪽에 우호적인 기자.
그런 걸 떠나서라도 저 미소 앞에서는 어떤 부탁도 거절하지 못하리라.
전진우는 고개를 떨구며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 * *
“X발! X발!”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분노로 가득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전진우는 애꿎은 화장실의 문을 걷어차며 화를 풀고 있었다.
‘후. 이놈이고 저놈이고 날 무시해?’
황혼 길드 정해연.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달리 웃음이 많은 여자이기에 쉬울 줄 알았다.
하지만 정해연은 애초부터 자신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여자를 홀리든 뭐든지 간에 대화라도 통해야 뭘 해보던가 할 것 아닌가.
‘전부 다 그놈 때문이야.’
가진 것이라곤 쥐뿔도 없던 그 이서진이라는 놈.
정해연의 관심은 오롯이 그 평범한 놈에게 향해 있었다.
그놈만 없었더라도 좀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을 게 분명하다.
끼익-
그때, 화장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표정 관리조차 되고 있지 않던 전진우는 들어온 상대를 보고는 마음을 놓았다.
아니, 오히려 흥분했다.
“이, X새끼가!”
“뭐야. 여기가 개전용 화장실이었어? 미안합니다. 이용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바로 나갈게요.”
“뭐, 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능청스러운 표정과 말에 전진우가 흥분했다.
이제 더 이상 못 참겠다.
그가 능력을 사용해 이서진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능력 사용하는 순간. 이쪽으로 전부 몰려올 건데 괜찮겠냐?”
“…….”
확실히.
연회에서 능력 사용은 금지다.
사용하는 즉시. 건물에 배치된 탐색계 능력자들로 인해 위치가 발각되고 구속될 것이다.
대형 길드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피식-
뭐야, 왜 저리 나대나 했더니…….
“그것 때문에 그렇게 자신 있었나 본데. 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까득-
전진우가 화장실 세면대에 있는 수도꼭지에 손을 대었다.
뿌득!
뒤틀리는 소리가 들리며 수도꼭지가 떨어져 나왔다.
화장실 바닥이 곧장 물바다가 되었다.
“그까짓 능력 쓰지 않아도 널 족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전진우가 비웃음을 날렸다.
“고작 E급 새끼 주제에 그렇게 기어오르고 하면은…….”
“거. 더럽게 시끄럽네.”
“……뭐?”
“스네이크 어쩌구 하더니. 이름 진짜 잘 짓긴 했다, 야. 혀가 무슨 뱀 혀보다 더 기네.”
“이, X발 새끼가!”
이서진이 웃으며 안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유리병의 감촉.
이걸 사용할까?
앞을 보자, 전진우는 금방이라도 달려올 기세였다.
고민하던 이서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쓰지 말자.’
곧장 저런 놈 때문에 이런 곳에서 개시할 수는 없지.
“죽여 버리겠어!”
역시 이제껏 본 적도 없던 규모의 연회.
화장실도 럭셔리하고 넓었다.
이서진은 말하는 사이에 스스로 구석으로 몸을 움직인 상태였다.
‘하! 병신이잖아? 스스로 코너에 몰리는 놈이 어디 있어?’
그리고 자신은 그런 병신에게 욕을 먹었다.
그 사실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전진우가 제자리에서 뛰쳐나갔다.
각성자가 되면 신체 능력이 일반인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당연히 순간 가속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걸 알고 있기에, 이서진은 이미 행동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딸칵!
“크윽!”
정면에서 비쳐오는 빛에 전진우가 눈을 감았다.
고작 한다는 게 손전등으로 시야 가리기였냐?
‘그런데 이거 어쩌냐. 시야 같은 거 없어도 네놈이 앞에 있는 건 아는데!’
양옆으로 도망갈 곳도 없었다.
이대로 짓뭉개주마!
그런 전진우를 보면서 이서진의 눈이 가라앉았다.
시동어도 필요 없었다.
애초부터 이것은 손전등이다. 어두운 곳을 비춰주거나 혹은 순간 상대방의 시야를 가려주는 용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전진우의 앞에 자신만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기만 하면 되는 거다.
부딪친다면 절대로 그냥 끝날 리가 없는 돌진 속도.
반대로 말하자면, 무언가에 막혔을 때의 반동 또한 크다는 거다.
입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이기스의 방패’
이서진의 앞에 새하얀 방패가 나타났으나, 이미 흰 빛에 시야가 잡아먹힌 전진우는 볼 수 없었다.
“죽어!”
쾅!
무언가 딱딱한 것과 부딪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전진우가 뒤로 넘어갔다.
‘대체 무슨…….’
전진우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내 시야가 이상해지고 있는 거지?
공격한 건 나인데?
자신이 데미지를 입을 것이라곤 단 한 순간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지금 여기서 넘어지면 끝이다!’
이명이 들리고, 충격에 정신이 온전치 못함에도 그는 여기서 넘어지는 것이 위험하단 사실만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무, 물이!’
그러나 자신이 부순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온 물로 인해 어느새 이곳까지 흥건하게 적셔 있었다.
균형을 잡을 수 없다.
그래도 어떻게든 중심을 잡고자 했으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맙다. 네가 단순한 놈이어서 다행이야.”
자신의 몸 위에 내리쳐지는 발.
쾅!
그 무게까지 합해져 전진우는 바닥에 머리를 세차게 박았다.
아무리 각성자라고 해도 온몸에 가해진 충격에 더해 후두부 타격으로 인한 뇌진탕은 버텨낼 수 없었다.
바닥에 기절한 전진우를 보면서 이서진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다.
“흡!”
위트 길드의 송도형은 화장실에서 벌어진 참사에 당황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서진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던 그였기에, 혹시나 하고 찾아온 것인데 자신의 생각과는 반대의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괘, 괜찮으세요?”
송도형이 급하게 달려왔다.
이서진이 자신을 향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송도형을 보며 당황했다.
‘아니, 쓰러진 건 얜데?’
바닥에 있는 놈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어떻게 이놈을…… 아니, 그보다 도망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제가 왜 도망가겠어요.”
“하지만…….”
설마 능력도 사용하지 않고 전진우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인가?
시간이 흘러도, 경비원들은 몰려오지 않았다.
분명히 능력을 사용했으나, 탐색계 각성자들에게 걸리지 않은 것이다.
‘역시 내 방패.’
아이기스의 방패.
신비한 구슬로부터 얻은 능력.
이것을 사용하면 몸 안에 있던 마나가 빠져나가며 자신의 근처에 순백의 방패를 소환시킬 수 있다.
효과만 들으면, 절대로 탐지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지만.
‘조금 특이해.’
보통의 각성 능력들이 사용자의 몸을 매개체로 사용한다고 하면, 아이기스의 방패는 몸 안에 흡수된 구슬을 매개체로 발동한다.
내가 직접 마나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구슬이 내 몸에 있는 마나를 흡수해서 능력을 사용한다.
즉.
내가 사용하는 것이 맞지만, 주체자는 내가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대상으로 한 탐지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실험이 도움이 됐어.’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탐색계 각성자들이 모였다는 균열관리부 1팀.
이유지 녀석이 아니었다면, 쉽게 시도하지 못할 실험이었다.
탐색에 걸리지 않는 능력.
어찌 보면 악용의 여지가 충분했으니까.
‘응? 넌 안 그럴 거잖아?’
당연하다는 듯 말하던 이유지를 생각하며 이서진이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두는 건 좀 그러니까 사람이라도 부르죠.”
“예…….”
이서진이 화장실을 나가고, 송도형은 기절해 있는 전진우를 보았다.
얼굴에 터진 코피. 후두부 쪽에서 흘러나오는 피.
그에 반해 이서진은 아무런 상처조차 없었다.
‘무소속. 이서진입니다.’
“……뭐 하는 분이시지?”
송도형은 그 여유롭던 미소를 떠올리며 전진우의 몸을 꾸욱 밟았다.
* * *
연회도 무르익어가고, 드디어 하이라이트라고 부를 만한 일정이 찾아왔다.
“지금부터 각 길드의 성과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사실상 자랑 시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번 연도에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발표를 하는 것이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혼자 앉아 있는데 머리를 붕대로 감싼 전진우가 내게 다가왔다.
“너, 이 자식! 감히 비겁한 짓을!”
“뭐래.”
옆에서 자꾸 뭐라 종알거린다.
난 앞에 집중하고 싶은데.
계속 무시하고 있자니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옆에 앉아도 되겠나?”
“이놈한테 볼 일 있으니까 꺼져!”
전진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흐음. 늙은이한테 언행이 너무 과하군. 이거 충격이라도 받아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
그제야 말을 건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전진우의 몸이 굳었다.
마치 천적을 만난 뱀의 모습.
“이자와 이야기할 게 있으니, 자네는 다른 자리를 이용하는 게 어떤가?”
“그, 그러겠습니다!”
“그래. 저 자리가 좋겠군.”
노년의 남성이 한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뿐이었다.
“저긴…….”
“불만 있나?”
“아, 아닙니다!”
전진우가 재빨리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화장실에서 보았던 그 속도보다도 빠르게.
이야. 진작에 저 속도로 달려오지.
그럼 혹시 몰랐잖아?
“요즘 젊은이들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양이야. 그 전에 자신의 주제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이거늘. 쯧.”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은 노인이 나를 보며 말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반갑습니다. 어르신. 전에 한 번 뵌 적 있으시죠?”
“허허. 이거 기억해 주니 영광이군!”
수호 길드장 안환재가 호쾌하게 웃었다.
정해연의 지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왜 내 옆에 앉는 거지?
수호 길드장은 거물이다.
이 사람의 옆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은 차고 넘쳤다.
실제로 내 쪽으로 따가운 시선이 모여들었다.
‘이러면 떨어져 앉은 보람이 없잖아…….’
안환재는 강당의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정해연을 보며 웃었다.
“참으로 굳센 여성이지.”
“그렇죠. 매력적인 여성이기도 하고요.”
“호오. 그래서 황혼 길드장과 연을 맺은 건가?”
연을 맺은 건 어떻게 아셨대.
물약에 관한 건 모르는 모양인데.
“딱히 그런 건 아니고요.”
“허허. 어떤가, 나하고도 자그마한 인연을 맺을 생각은 없나?”
……정말 모르는 거 맞나?
황혼과의 독점 계약을 떠올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유감스럽게도 안 될 거 같네요.”
“흠. 어떤 조건인지는 몰라도 황혼이 제시한 것의 배를 제안하지.”
“죄송합니다.”
언제든지 계약을 파기할 수 있긴 하다.
이 사람과 새로운 계약을 맺는다면 더 많은 부를 얻을 수도 있겠지.
긴장조차 없이 수많은 길드의 수장들을 앞에서 직접 마이크를 잡은 정해연.
그 빛나는 모습을 보자니, 역시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애초에 돈이 그렇게 많아 봤자 평생 쓰지도 못하고.
아쉽군, 아쉬워. 그런 소리를 하며 웃는 안환재를 보자니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런 사람이 이런 곳에서 죽는다고?
“갑자기 이런 말 하긴 좀 그렇긴 한데, 혹시 원한 받을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시시한 질문이군.”
그가 좌중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한 같은 것은 사소한 것일 뿐이야. 내가 이곳에 올라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놈들에게 질투와 시기를 받은 줄 아나?”
안환재가 양복을 걷어 자신의 팔을 보여주었다.
상처로 가득한 근육질의 팔.
“지금까지 내가 살아 있는 게 그 증거일세.”
……역시 대단한 사람이다.
아니, 그런데 오늘 죽으신다고요.
“자네라면 이 말을 이해할 거라고 믿네.”
죄송하지만, 저는 칼에 찔리기만 해도 죽는 힘 없는 소시민일 뿐입니다.
자신이 하는 생각에 확신을 가지는 인물이다.
내가 당장 미래에 대해 말한다고 해도 믿지 않겠지.
대신 어떤 물건을 건넸다.
“이거 받으시죠.”
“음? 이게 뭔가.”
“그냥 몸에 좋은 자양강장제 같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하하. 늙은이 배려해 주니 고맙군.”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는데, 안환재에게로 누군가 다가왔다.
그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내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곧장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길드장님. 잠시 시간 되시겠습니까?”
“하하. 자네가 언제부터 그런 격식을 차렸다고 그러나.”
“공적인 자리이지 않습니까.”
“알겠네. 가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안환재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했다.
“때로는 가까운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으실 겁니다.”
“충고 고맙네.”
안환재가 떠나고 나자, 앞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흰색 가운을 입은 수염의 중년인이 또각또각 앞으로 나왔다.
“뭐야, 누구지?”
“연금술사 길드장 아니야?”
“무슨 생각으로 연회에 온 거래?”
술렁거리는 좌중.
가운을 입은 남자가 크게 소리쳤다.
“당연히 성과를 발표하러 온 거 아니겠나!”
그가 쾅! 하고 유리병 하나를 내려놓았다.
“뭐야, 포션인가?”
“그런데 색이…….”
분위기가 바뀌었다.
“현재 존재하는 물약의 최고 순도가 몇인 줄 아나!”
그의 외침에 누군가 답했다.
“황혼 길드의 69% 아닙니까?”
“그래. 마의 70%는 넘지 못했지. 오늘로써 그 벽이 깨질 것이네.”
그가 자신의 물약을 가리키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또 다른 이변이 일어났다.
우리가 들어왔던 출입구가 막히고, 강당 내에 수많은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왔다.”
아주 싹싹 긁어온 모양이네.
이게 너한테 남은 모든 균열이냐?
혼란스러운 좌중 사이로 정해연이 저 멀리서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냈다.
언제나 나를 위기에 빠뜨렸던 균열.
언제, 어느 때에 나타날지 모르는 그것은 내게 위기였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 나타날지만 안다면, 그것은 위기가 아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위험을 ‘기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이크를 들고 있는 정해연이 외쳤다.
“지금부터 물약 시음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이건 기회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26화
9. 별들의 연회(4)
정해연의 이해할 수 없는 말.
그것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들의 주변으로 열린 균열들.
아직은 균열에서 마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강당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비명 소리가 들린다거나, 패닉에 빠진 사람도 없었다.
아니, 없는 것은 아니다.
“대, 대체 무슨 일이야!”
각성자가 아니면서도 초대장을 받은 고위 계층들이 혼란에 빠졌다.
일반인을 제외한 나머지 각성자들은 자리를 지키고 현 상황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성과 발표를 진행하던 도중 갑자기 균열이 나타났다. 곧장 출입구로 달려야 할까? 아니, 흩어지는 것은 위험해.’
던전 속에서 언제나 긴장을 풀지 않는 각성자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균열의 수가 너무 많아.’
그에 반해 이쪽은 일반인을 낀 것도 모자라, 각성자의 수도 적었다.
이곳은 각 길드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인 발표 자리.
각 조직의 수장급들만이 존재한다.
수행원들은 전원 다른 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사태를 알아챈다면 곧장 달려올 테지만…….’
이곳에서도 그런데 딴 곳이라고 안전할까?
“입구가 막혔어!”
대기업의 오너 한 명이 빠르게 출구로 달려갔으나, 문이 막혀 있었다.
균열이 마물을 뱉으려는 징조가 보인다.
자리를 이탈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길드 랭킹 12위, 더스트의 길드장 송대호가 소리쳤다.
“다들 자리를 지킵시다!”
그 말대로 전원 구석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을 가운데에 놓은 반원형 배치.
-그르르.
-그어억!
때마침 균열에서 빠져나온 마물들이 각성자들에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균열에서는 소수의 마물만 나온다는 상식을 깨부수듯이,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마물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런 사태가 벌어졌으니, 외부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조금만 버티면 곧 지원군이 올 것이다.
하지만 끝없이 밀려오는 마물들의 파도에 각성자들은 서서히 지쳐갔다.
이럴 때 수호 길드장이라도 있으면, 그만큼 든든한 게 없을 테지만 그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진 후였다.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이러다 전부 다 죽겠어!”
‘입만 털 줄 알고 아무것도 못 하는군.’
정치인 한 명의 말에 잠시 울컥했으나,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송대호는 자신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물약을 보았다.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다.
싸움을 이어가려면 당장에라도 물약을 마시는 게 좋겠지만…….
‘지금 상황에 먹는 건 자살이나 마찬가지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순도가 높은 황혼 길드의 물약이다.
순도는 69%
하지만 기본적으로 물약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 혹은 끝난 후에 먹어야 한다.
물약을 먹으며 일어나는 신체 회복.
물약이 온몸으로 퍼지며 신체에 녹아든다.
다만, 최대한 정화했음에도 남아 있는 마기로 인해 회복이 진행되는 동안 신체 능력이 일시적으로 저하된다.
그래서 물약을 먹을 때는 믿을 만한 동료와 서로 교대를 하면서 마시는 것이다.
서걱!
송대호의 칼질에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던 마물 하나의 목이 떨어졌고.
곧바로 그 자리를 다른 마물이 채웠다.
“끝이 보이질 않아.”
촘촘하게 짜인 포지션.
교대로 물약을 마신다든가 하는 속 편한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안쪽에 계신 분들은 지금 상자에 있는 포션 꺼내서 열어주세요.”
현재 상황에서 물약을 마시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다만 그 말을 하는 것이 황혼의 길드장인 것이 문제였다.
“……지금 물약을 마신다면 몰려드는 마물들한테 집어 삼켜질 겁니다.”
정해연 또한 구르고 구른 각성자다.
이 말의 뜻을 모를 리가 없다.
그렇기에 저리 완고하게 포션을 섭취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괜찮습니다.”
정해연이 몸소 시범을 보여주겠다는 듯, 마물을 베어내고 잠깐 사이에 물약을 마셨다.
하지만 정해연은 신체 능력이 저하되기는커녕,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몸놀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슨…….”
나머지 인원들도 물약을 마시고서야 정해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 반동이 전혀 없잖아?”
“신체 회복 속도가?”
신체 능력이 그대로일 뿐만 아니라, 회복 속도가 기존의 물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이거라면…….”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싸워나갈 수 있다.
상처가 생겨도 아무런 부작용 없이 회복된다.
싸움 도중에 물약을 섭취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생존율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서야 각성자들은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하나같이 고위 각성자들.
각각의 능력도, 움직임도 보통의 각성자와는 궤를 달리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있었다.
‘……저게 황혼 길드장이라고?’
‘저런 몸놀림이 가능한 사람이었나?’
정해연의 칼에서 화염이 넘실거리며, 차례차례로 마물을 불태워갔다.
마치 춤을 추는 무희와 같이 가벼운 몸놀림.
일렁이는 불처럼 정해연의 볼에 홍조가 나타나 있었다.
‘이게 서진 씨가 말한 특별한 물약……!’
노란색의 물약을 마시자마자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이미 옛적에 이것에 대한 정체를 본 적이 있었으니까.
균열 앞에서 마물에게 여유롭던 이서진의 모습.
「신체 강화의 물약」
그중에서도 신체 속도와 관련된 효과.
날아갈 듯 가벼운 이 몸을 보자니 그야말로 ‘신속’의 물약이라고 불러도 되리라.
‘아아……드디어……!’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음에도, 정해연은 이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아직 하급입니다.’
처음 그분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너와의 관계는 아직 이 정도일 뿐이니, 앞으로 관계에 대해서는 지켜보겠다는 말.
아침에도, 밤에도 혹시라도 관계가 끊기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주셨다.
정해연은 신호를 보내고, 곧바로 사라진 이서진을 생각하자 얼굴에 미소가 담겼다.
그녀는 이 감정을 기억하며 점점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흥분.
희열.
-크르르륵!
-크아아아!
상대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자신이 할 것은 이 물약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는 것뿐이다.
“확실하게 테스트하겠습니다.”
정해연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 * *
“아직 발표가 진행 중인데, 이런 곳에 부른 이유가 뭔가?”
“딱히 이유랄 것은 없습니다. 그저 길드장님과 술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었죠.”
“뭐라?”
“어차피 발표에는 관심이 없지 않으셨습니까.”
“하하. 날 너무 잘 아는군. 그런 소꿉장난에는 관심이 없긴 하지.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기도 했고.”
“……목적 말씀이십니까?”
“아닐세.”
안환재는 가죽 의자에 자신의 몸을 앉히며 생각했다.
황혼 길드장과 연을 맺은 이서진이라는 남자.
다시 만난 그는 이전에 보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때, 자신을 가지고 놀 듯 위협하던 그 불길한 마나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마나를 이용해 조금씩 그를 자극했지만, 역으로 침식하기는커녕 그에게서 마나 자체를 느낄 수 없었다.
‘숨기고 있군.’
“한 번이면 족하다는 건가.”
더욱 자세히 파악해 보고 싶었거늘.
안환재가 잠시 눈을 감고 누워 있자, 신태웅이 와인 하나를 잔에 따라 그에게 가져왔다.
“한 잔 어떠십니까.”
“와인이라…… 나는 소주가 더 입맛에 맞다만.”
“이런 곳에 왔으면 한 잔은 해줘야 예의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자신과 같은 위치의 사람일 경우, 남이 주는 것에 대해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와인을 건넨 사람은 신태웅이다.
자신의 오른팔과도 같은 사내.
와인 잔을 입에 가져다 대는 순간.
방금 있던 일이 떠올랐다.
-때로는 가까운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으실 겁니다.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철혈의 노장이라 불릴 정도로 오랜 시간 전장에서 살아온 그다.
그만큼 위기에 관한 본능만큼은 누구보다 예리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안환재가 신태웅을 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자신의 우직한 우군.
자신의 길을 같이 걸어주는 친구와도 같은 존재.
당연히 고작 몇 번 만난 정체 모를 사람보다도 신뢰하는 사람이지만.
아주 약간, 안환재의 감각이 꿈틀거렸다.
‘…….’
“건배라도 하시겠습니까?”
“됐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되었는지 아나?”
안환재가 와인 잔을 잠시 내려놓았다.
“글쎄요. 벌써 20년쯤 지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오랜 시간 동안 자네는 내 곁에서 많은 일들을 해줬어.”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전부 다 길드장님께서 이룩하신 일이지요.”
“되고자 한다면, 한 길드의 수장조차 될 수 있는 자네가 왜 내 곁에 머무는 걸까. 한때는 그런 생각도 했었지.”
안환재가 자신의 우군을 보며 물었다.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약간의 떨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혹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그 약속, 기억하나?”
“흠…… 너무 오래된 일 아닙니까. 아무래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하하.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그 말에 안환재가 눈을 감았다.
신태웅과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길드명은 수호 어떠십니까.
-그 누구도 다치지 않게, 길드장님과 저희들이 모두를 지키는 겁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저희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목표이자 맹세.
앞으로도 잊지 않을 그 말들을 떠올리며 안환재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방금과는 확연히 다른 눈빛이 된 그가 말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그때였군. 자네가 밤에 갑자기 자신의 몸이 이상하다며 전화를 걸었을 때. 고작 아프다는 이유로 나에게 말을 할 리가 없지. 자네는 지독하게도 강인한 사내니까.”
“자꾸 무슨 말을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길드장님.”
안환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자신의 애검은 없다.
벽에 걸려 있는 검 하나를 빼고는 손에 쥐었다.
“다시 한번 묻지. 자네의 목표는 무엇인가.”
“…….”
평정을 유지하던 신태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광인의 그것과도 같은 표정이 된 신태웅이 소리쳤다.
“나이도 드셨는데, 이대로 편하게 가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
“제 목표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제가 믿는 신의 말을 섬기고, 몸종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안환재의 양복 안에 이서진이 건네준 유리병이 출렁거렸다.
자양강장제.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분명 이 상황을 위한 무언가를 준 것이겠지.
안환재는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
다만, 검을 두 손으로 꽉 쥐며 자신의 친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먼저 가 있게나. 머지않아 따라갈 테니. 그곳에서도 우리의 오랜 약속을 위해서 미리 터를 잡아놓게나.”
“아아, 신님!”
“자네가 길드장인 것도 좋겠지. 이번에는 내가 자네 곁에서 열심히 보필해 주도록 하겠네.”
“제게 이 어리석은 자를 구원할 힘을!”
“고마웠네. 친우여.”
까득- 까드득-
신태웅의 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동시에 안환재가 검을 내질렀다.
* * *
군영철.
균열을 소환하는 기이한 힘을 얻게 된 자.
그는 완성되어가고 있던 퍼즐에 이상이 생겼단 걸 알아챘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어.”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작업이다.
지금쯤이면 수많은 균열들에서 나온 마물들로 인해 각 길드의 수장들이 목숨을 잃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보는 마물들의 비명 소리뿐이었다.
군영철은 신속하게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만한 규모를 위해서는 직접 올 수밖에 없었다.
즉, 몸이 노출되었다. 육체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그였기에, 되도록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다시 하면 된다. 이곳에서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현재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정신은 전부 갑작스레 나타난 균열로 몰려 있는 상태였다.
자신을 신경 쓸 사람 같은 것은 아무도 없다.
원래대로라면 그랬다.
“이 자식. 여기 있었네.”
“커헉!”
뒤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
군영철이 바닥을 굴렀다.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잡고 들어 올리고 있었다.
대체 누가?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을 때.
서로의 얼굴이 마주쳤다.
의문의 사내가 미소 지었다.
“내가 그 잘난 얼굴 한번 본다고 했지.”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27화
10. 나도 함께(1)
여기고 저기고 전부 혼란에 빠진 사람들뿐이라서 찾기 쉬웠다.
원래 현장에 나타난 범인은 그 거동부터가 의심스러운 법이거든.
녀석을 발견하자마자 품에서 노란색 물약을 꺼냈다.
그것을 들이마시자마자, 몸이 가벼워지며 녀석과 단숨에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크흑!”
아무래도 신체 능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렴 저런 개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신체 능력도 좋으면 그건 반칙이지.
“크흑! 무슨 짓이냐!”
“무슨 짓이긴.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누구랑 착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곳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나가려던 것뿐이다!”
“그래?”
하긴.
거동이 수상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 잡는 게 정상은 아니지.
‘역시 강화해두기를 잘했어.’
* * *
「물체를 탐색하는 콘택트렌즈 +1」
설명: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착용할 경우 눈에 보이는 물체를 탐색할 수 있다.
*렌즈 착용 시 착용감과 시력 보정 효과가 적용됩니다.
*타인은 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을 탐색할 수 있습니다.
+마나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 * *
이놈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고민 끝에 콘택트렌즈에 선택 강화권을 사용했다.
다행히 쌓인 숙련도는 다음 단계로 이월되었고.
내게 깔아뭉개져 있는 녀석의 온몸에는 수상한 ‘검은 선’이 이리저리 퍼져 있었다.
그 선이 향하는 곳은 정확히 균열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이렇게 잘 보이는데 구라 칠 걸 구라 쳐야지.
“너, 의외로 평범한 놈이었구나.”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하도 균열로 귀찮게 굴길래 나는 무슨 고대 악마라도 되는 줄 알았지.
균열을 생성시킨 것은 이놈이 맞다.
그런데 좀 찝찝하네.
이렇게 쉽게 잡힌다고?
녀석은 내가 풀어주지 않을 걸 알았는지, 더 이상 몸부림은 치지 않았다.
대신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입에서 무언가를 뱉었다.
“푸하.”
무슨 버튼 같은데.
저런 걸 입에 집어넣고 다녔다고?
“알사탕이냐?”
“흐흐. 그런 시답잖은 농담하는 것도 지금뿐일 거다.”
녀석의 잘난 얼굴이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지금부터 서울시 안에 있던 모든 그룸들이 이곳으로 몰려올 거다!”
“그게 아직도 남아 있냐?”
“……그래. 네놈이었구나. 미확인 균열들을 이리저리 파헤치고 다녔던 놈.”
엎드려 버둥거리는 놈의 등을 세게 누르자, 억 소리를 내면서 신난 듯이 설명한다.
“네놈 때문에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 정도로도 너 하나 찢어발기는 데는 충분해.”
“그래?”
“너, 전투계 각성자가 아니잖아?”
“그런 놈한테 깔려 있는 놈이 뭐라는 거야.”
“으윽!”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동그란 버튼을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
아, 진짜 더러워 죽겠네.
대충 그것을 밑에 있는 놈의 옷에 닦고는 자세히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버튼 같은데.
“그냥 이거 누르면 취소되는 거 아니냐?”
“흐흐. 멍청한 놈. 그런 걸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당연히 나 같이 선택받은 자들만이 누를 수 있는 버튼이다!”
아니, 그렇게 말해도.
[해당 물체에 개방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네놈이 그렇게 여유 부릴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이게 되네.
[개방권을 사용하셨습니다.]
[해당 물체는 ‘군영철’에게 귀속된 물건입니다.]
[개방권으로 인해 물체의 소유권이 넘어옵니다!]
[해당 물체가 【만물의 주인】 이서진에게 귀속됩니다.]
아직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개방권을 쓰자마자 소유권이 넘어와 버렸다.
물론 그걸 알 리가 없는 놈은 아직도 신난 듯이 지껄이고 있었다.
“곧 있으면 그룸들의 손에 네 몸은 갈기갈기 찢어지겠지!”
딸칵-
“……응?”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작동 잘되네.
나는 녀석의 얼굴에 버튼을 가져가 반복해서 누르기 시작했다.
“야. 잘 눌러지는데? 이렇게 하는 거 맞냐?”
“이, 이럴 리가 없다!”
없기는 무슨.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녀석은 이내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날 풀어주는 건 어떠냐?”
“싫은데.”
“이곳에서 나가기만 한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부를 얹어주지.”
“미안한데, 나 돈 많아.”
“…….”
결국, 녀석은 협상을 위한 메인 떡밥을 꺼냈다.
“이 건물 어딘가에 미확인 균열 몇 개를 설치해 놨다. 각성자들은 현재 위쪽으로 몰려가 있었지? 곧 있으면 그 균열에서 나온 마물로 인해 일반인들이 죽게 될 거다.”
내가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히죽 웃는다.
“이래도 안 받아들인다고?”
안 그래도 생각하고 있었다.
균열에 관해서는 아주 개코인 친구가 하나 있거든.
아니, 캣 코인가?
부웅-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형님.
“찾았냐?”
-예. 건물의 지하에서 미확인 균열 발견했습니다.
“이유지는?”
-그게…….
이태영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익숙하고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X새끼 어디 있어!
-선배, 제발 진정 좀……!
이상한 비명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통화가 끊겼다.
하도 목소리가 커서 통화 소리가 들렸는지, 밑에 있는 놈은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잘나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거 어쩌냐.
“너 아무래도 ㅈ 된 거 같은데.”
* * *
미확인 균열을 막아내고, 내 쪽으로 이태영과 이유지가 합류했다.
“선배. 아직 죽이면 안 돼요!”
“놔! 저 X발 새끼. 당장 찢어버리게!”
다짜고짜 죽여 버리겠다며 달려드는 이유지 때문에 한바탕 고생을 하긴 했으나, 결국 균열관리부의 사람이 속박 후 데리고 갔다.
덩치 형님들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룸이고 뭐고 나오면 바로 찢어버릴 거 같고.
“아이씨!”
성이 풀리지 않는지, 이유지는 애꿎은 바닥만 차고 있다.
“야. 진정 좀 해라.”
“어떻게 진정을 해! 저 X새끼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거, 입에 개가 많으시네.
“그래도 이제는 잡았으니까, 사람들이 좀 더 안전해질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그렇지?”
결국 한숨을 푹 내쉰 이유지가 내 등 뒤를 졸졸 따라왔다.
“……그런데 저놈이 오늘 나타날 건 어떻게 안 거야?”
어떻게 알았냐라…….
머릿속에서 수천 가지 답변이 조합되었다가, 이내 최고의 답을 찾아냈다.
나는 이유지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당연히 감이지.”
“너. 진짜 얄밉다.”
* * *
이서진과 이유지는 정해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소성환과 다른 길드의 수행원들도 이곳에 모여 있었다.
‘아무래도 저쪽도 잘 해결된 거 같네.’
소성환에게도 노란색의 물약을 전해 뒀었다.
연회 도중에 나타난 균열. 그리고 연회를 주최한 황혼 길드.
난리가 날 법도 했지만,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의 난리였다.
“화, 황혼 길드장! 아까 그 물약은 대체 뭐지?”
“황혼에서 새로 생산해 낸 물약인가?”
“부디 우리 길드에 우선적으로 판매해 주게!”
물약 시음회가 제대로 통한 모양이다.
아까 보았던 것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정해연.
그녀에게로 누군가가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아까 앞으로 나왔던 흰 가운의 사내였다.
“연금술사 길드장님.”
“…….”
이리저리 떠들던 사람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미 온 정신은 전투 중에 마셨던 그 물약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박명훈이 가져온 물약도 기존의 것과는 그 색 자체가 달랐다.
마의 70%.
그 벽을 깬 것이 분명하리라.
“이 물약의 순도가 얼마인가?”
무미건조하게 물은 말에 정해연이 답했다.
“100%입니다.”
“100%!”
“미친! 그런 게 가능하다고?”
“……황혼에서 만들어 낸 건가?”
“아닙니다.”
정해연이 순간 이서진의 쪽을 바라봤다가, 박명훈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저로서는 감당조차 할 수 없는 위대한 연금술사께서 만드신 물약입니다.”
“그럼 황혼의 물약은 그대로란 건가?”
“……예. 69%. 그것이 저희의 최고 순도입니다.”
“그렇군.”
박명훈이 미소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순도에 좌절하거나, 절망한 것이 아니었다.
이전보다 더욱 빛나고 있는 열정적인 눈빛.
“결국, 황혼을 이겼군. 연금술사들이 틀리지 않았단 게 증명된 거야!”
“…….”
“그자는 황혼과 연을 맺고 있는 건가?”
“그분의 자비로 작게나마 맺고 있습니다.”
“흐하핫! 그렇단 말이지!”
박명훈이 상념에 잠겼다.
목표로 해오던 대형 길드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연금술사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렇다면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순도 100%의 어마어마한 물약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연금술사.’
넘을 수조차 없는 벽처럼 보였지만, 박명훈에게 있어서 실험이란 언제나 그랬다.
벽이 보였기에, 자신은 이 일에 흥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인생 최대의 벽이 나타났다.
“이거 흥분되는군.”
얼마가 걸리더라도 따라잡고 말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 되는 것이 있다.
막대한 연구비.
박명훈이 자신의 뒤를 보았다.
연회에 같이 따라온 몇 안 되는 연금술사들.
그들이 박명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황혼에 남는 자리 있나?”
“그 말씀은…….”
“내가 돈을 좀 헤프게 쓰는 편인데 말이야. 그래도 된다면 그쪽과 일해보고 싶군.”
“영광입니다.”
박명훈과의 대화가 끝나고, 각 길드장들이 정해연에게 다시 몰려들려고 할 때, 그녀 앞으로 누군가가 다가갔다.
그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길드장들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균열 관리부의 미친 고양이.
예로부터 황혼 길드장과는 좋지 않은 사이였기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정해연이 먼저 이유지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로군요.”
“그러게요. 오랜만이네요.”
“우선, 균열 관리부 쪽에서 신속하게 대응해 주신 것에 관해 감사 인사 드리겠습니다.”
“균열 막는 게 우리 역할인데요. 뭘.”
의외로 얌전히 대화하는 둘에 근처 사람들이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그때, 이유지가 돌연 뒤쪽을 보며 이서진을 가리켰다.
“서진이가 알려줘서 대응할 수 있었던 거기도 하고요.”
“……서진이?”
“아.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으셨나? 이서진이요. 제 친구인데.”
“…….”
안심하던 사람들이 숨을 들이 삼켰다.
갑자기 공기가 무거워졌다.
“……아무리 친하셔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말을 높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응? 친구한테 어떻게 말을 높여? 아, 그쪽은 서진이랑 별로 안 친한가 보구나.”
“그랬었죠. 당신은 예전부터 예절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분이셨죠.”
“……흐응. 지금 그거 시비 거는 거?”
“시비라니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느낀 소성환과 이태영이 조심스레 다가갔다.
“저기…… 길드장, 일단은 좀 진정하고…….”
“저기…… 선배, 일단은 좀 진정하시고…….”
“조용히 안 해?”
“조용히 안 해?”
두 포식자의 눈빛에 소성환과 이태영이 곧장 피식자로 변했다.
“네…….”
“예…….”
점점 언성은 높아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조심스레 문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역시 자본주의의 개라서 그런가? 돈이 되는 것만 보이면 못 견디겠지?”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개’ 아니십니까. 아니, 그보다는 고양이과 동물이 더 어울릴까요? 어느 쪽이나 짐승이란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요.”
“하핫! 짐승한테 할퀴어져 봐야 정신 차리겠네?”
“그러고 보니 털갈이할 시기가 온 것 아닙니까? 제가 손수 불로 지져드리도록 하죠.”
결국, 이서진이 끼어들었다.
양손이 각각 정해연과 이유지의 어깨에 올라갔다.
““또 누구……!””
“일단 진정들 좀 하세요.”
그 대상이 이서진이란 걸 알아차린 둘이 그제야 행동을 멈췄다.
이서진이 고개를 돌려 소성환과 이태영을 찾았다.
원래 이런 건 저 둘이 하던 거 아니었나?
“저기 번호 좀…….”
“아, 예. 고생이 많으시네요…… 010…….”
‘뭐 하는 거야?’
둘은 정해연과 이유지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서로 번호를 교환하고 있었다.
* * *
* * *
-특별 퀘스트-
「미확인 균열을 소환하던 의문의 남성을 제압하십시오.」
보상: 선택 개방권, 랜덤 개방권, 특별 개방권.
* * *
“개방권이 쏟아져 내리네.”
요즘 들어 퀘스트 자체가 좀 적은 기분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한 번에 얻게 되니 만족스러웠다.
아직 내가 사용하지 못한 물건들도 많았으니까.
무엇을 개방하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차근차근히 고민해 봐야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하나하나가 전부 골치 아프고 피곤한 일들뿐이었다.
‘수호 길드장.’
텔레비전으로 본 미래에서 살해당했던 남성.
결국, 그는 살아 있었다.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는 그에게 물약 한 병을 내밀었으나,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고마웠네. 다음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나.’
무척 힘없는 얼굴을 한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없었다.
“하아…….”
처음 목적은 간단하게 식사나 즐기고 올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이래서 사람들이 애니멀 테라피를 찾는 건가……?
우리 집에도 비슷한 게 하나 있다.
“아, 순둥이 보고 싶다. 격렬하게 순둥이가 보고 싶다!”
그 동글동글한 알.
좌우로 흔들리는 메트로놈!
안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따뜻하던, 작고 소중한 알을 생각하니 욕망이 점점 커져갔다.
“내가 진짜 집에 돌아가자마자 순둥이부터 껴안는다.”
이제 곧 세상에 태어나는 순둥이다.
그런 아담한 알에 들어 있는 생명체는 얼마나 작고 귀여울까.
솔직히 이제는 용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어느새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애가 되었다.
원래 애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전부 아니겠어?
내 걸음은 빨라졌고, 이내 우리 집 문 앞에 도착했다.
문 여는 시간도 아깝다.
나는 얼른 힐링을 받고 싶단 말이다!
“순둥아. 순둥아. 내 얘기 좀 들어줘라…… 오늘 무슨 일이 있었냐면…….”
딸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실내의 풍경이 보였다.
평범한 옥탑방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의 스윗 하우스.
“순둥아……?”
그곳에는 미니 오리 욕조에 몸을 담구고 있는 작은 알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작은 알 같은 것은 없었다.
“순둥아아아아악!!”
천장에 닿을 정도로 크고 거대한 알이 나를 반겼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28화
10. 나도 함께(2)
갑작스럽게 타조알보다도 거대해진 순둥이.
‘렌즈가 잘못된 건가?’
그래. 빛의 굴절 때문에 지금 순둥이가 저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잖아.
눈에 의지하지 않겠다.
믿을 것은 내 촉감뿐이다.
큼직-
“……역시 커진 게 맞잖아.”
좌우로 거대해진 알 때문인지 집 구조도 그에 맞게 변해 있었다.
바닥에 처참하게 부서져 생을 마감한 미니 오리 욕조가 보인다.
“고생 많았다. 오리야.”
일단은 알의 상태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이렇게 큼직하니 안는 맛은 있겠네.
손을 좌우로 넓게 펼쳐 안아 봐도 절반조차 덮지 못한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다.
“……따뜻하긴 하네.”
이 익숙한 온도. 순둥이가 맞다.
생명에는 이상이 없다는 증거다.
살아 있다는 건 확실하니 한 시름 덜었다.
이런 현상이 벌어질 만한 이유.
어차피 단 하나밖에 없다.
* * *
「멸망용 ‘?????’의 오염된 알」
설명: 타락한 요정들이 드래곤의 레어에서 몰래 훔쳐온 멸망용의 알이다. 자신들의 주인으로 삼기 위해 부화를 시도했으나, 침입자들로 인해 저지되었다.
▷정화 과정이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정화율: 99%
* * *
98%이던 정화율이 99%로 올라 있었다.
쓰여 있던 부화 시간도 사라져 있었고.
“정화가 거의 끝났다는 건데…… 그거 때문에 알이 커진 건가?”
연회에 가기 전,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마물 사체들을 곱게 갈아서 넣어주고 나왔다.
알이 커지면서 욕조가 깨졌다면, 당연히 물약으로 바닥이 흥건했어야 한다.
물약은 자연적으로 증발하지 않다는 걸 이미 확인했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보고 있자니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냥 다 빨아들였네.”
기껏해야 미니 욕조다.
고작 그 정도 흡수했다고 저리 커질 리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영향은 끼쳤으리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손전등을 꺼냈다.
“빛이, 있으라!”
손으로 들고 이곳저곳 골고루 빛을 묻혔지만,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것 때문은 아니라는 건데.
다음으로 할 것은 언제나 하던 반신욕이다.
기존에 있던 물약을 전부 빨아들였으니, 이것은 통할 수도 있다.
“……거대 욕조를 사야 하나?”
아니, 이 정도 크기가 들어갈 욕조가 있을 리가 없지.
다행히도 우리 집은 자유자재로 변형 가능한 변신 로봇과도 같다.
저 거대한 순둥이를 옮길 순 없으니, 집 구조를 바꾸기로 했다.
순둥이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주변에 벽을 세운다.
온천과 비슷한 구조가 우리 집 옥탑방에 나타났다.
이전과 같은 완벽한 균형을 갖춘 구조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딴 거 신경 쓸 때가 아니다.
* * *
「물약이 나오는 정수기+1」
설명: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정수기를 사용할 경우 물 대신 물약이 나온다.
생산 가능한 체력 물약[하급][중급] : 5ℓ, 3ℓ
생산 가능한 마나 물약[하급][중급] : 3.5ℓ, 2ℓ
시간당 생산 회복률 : 1.2ℓ/600㎖, 600㎖/300㎖
*하루 두 번 섭취자의 신체 속도를 상승시키는 ‘신속의 물약’을 생산 가능합니다.
[신속의 물약 제조법]-체력 물약과 마나 물약을 각각 일정 비율로 섞고, 만드라고라의 뿌리를 잘게 빻아 첨가한다.
*현재 조건이 완료되지 않아 숨겨진 제조법이 존재합니다.
▷??의 물약
▷??의 물약
…….
…….
* * *
하급에 비해 중급은 생산 가능한 물약이 적었지만, 당연히 순둥이한테는 비싼 것만 먹여야 한다.
제조법 찾는다고 개고생을 한 신속의 물약도 넣기로 했다.
거기다가 남아 있는 마물의 사체들도 아낌없이 섞는다!
인간으로 따지면 몸에 좋다고 소문 난 온갖 약초들로 만든 약을 먹는 것과 같으리라.
마치 어린아이가 집을 수영장으로 만들 듯이, 순둥이가 있는 곳에 물약을 쏟았다.
“…….”
깨끗한 물약이 새로 들어오면 기분 좋은 듯 흔들리던 알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물약을 흡수하는 기색도 없었고.
나는 물약을 손으로 퍼 알에 골고루 묻히면서 한숨 쉬었다.
“왜 먹지를 못하니!”
야속하기만 한 알을 바라보고만 있을 때.
눈앞에 새로운 정보가 나타났다.
[탐색을 시작합니다.]
[기존에는 탐색되지 못한 정보가 발견되었습니다.]
[정보를 표시합니다.]
렌즈를 처음 착용했을 때와 비슷하다.
하지만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정보들이 나타났다.
[알을 완벽하게 정화하기 위해서는 ‘블랙 와이번의 양쪽 날개’가 필요합니다!]
[멸망용의 알이 부화를 위한 안정기에 들어갑니다.]
[안정기에 들어간 알은 삼십 일 후 부화합니다!]
‘이런 정보는 안 보였었는데…….’
아마도 콘택트렌즈를 강화하면서 추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 모양이다.
……처음부터 보여주면 얼마나 좋아?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괜히 겁먹었네.
“블랙 와이번이라.”
들어본 적은 없는데.
하긴 순둥이한테 갈아주던 마물들도 하나같이 나한테는 낯선 놈들이긴 했다.
이런 건 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잘 알지.
이제 판매하게 될 물약 값이면 충분히 구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정해연에게 문자를 날렸지만, 예상외의 답변이 날아왔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마물인지라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정해연이 모른다면 던전에서 나오는 마물이 아닐 수도 있다.
균열에서 나오는 거라면 또 한 사람 있지.
[응? 글쎄. 나도 처음 듣는 이름인데…… 잠깐만! 이태영한테도 물어볼게.]
각각 던전과 균열에 있어서는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는 둘이다.
그 둘이 모른다면 내 근처에 알 만한 사람은 없다.
“이렇게 보니까 나 진짜 아는 사람 없구나.”
옛적에 알던 사람들은 이미 연락이 끊긴 지 오래고.
근래 들어서야 친해진 사람도 고작해야 세 명이 끝이다.
아, 그러고 보니 애매한 관계가 한 명 더 있었다.
띠링!
때마침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있던 사람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만. 언제 시간이 괜찮을 것 같나?]
수호 길드장, 안환재.
황혼보다도 길드 랭킹이 높으며, 던전을 주 무대로 일삼아 활동하는 인물.
[오늘이라도 가능합니다.]
이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물건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것이 우선이다.
수건 얹듯이 방석을 알 위에 살포시 올려주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기다려. 순둥아. 내가 맛있는 거 가져다줄 테니까.”
* * *
대형 길드 하우스의 방문.
이제껏 황혼 길드 하우스밖에 가보지 않았지만, 수호 길드의 하우스는 겉으로 보기에도 무언가 남달랐다.
“……뭔가 분위기가 익숙한데.”
황혼의 길드 하우스가 현대식 기업 건물 느낌이라고 한다면 이곳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언가의 침략으로부터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철조망과 건축물들.
“이서진 님 맞으십니까.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각성자로 보이는 사람이 입구에서 나에 대한 검사를 했다.
안에 입장하고 나서도 차를 타고 한동안 이동해야 했다.
보초를 서는 사람들의 행동이 묘하게 익숙한 게 나도 모르게 거부감이 느껴진다.
‘장소도 그렇고…….’
이제는 마물의 서식지가 되어버린 북한.
그곳과 가장 밀접하게 위치한 강원도 철원 일대가 수호 길드의 영역이다.
곳곳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사람들은 군복만 안 입었다뿐이지, 하는 행동은 군인과 똑같았다.
물론 수시로 마물이 내려오는 만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일반인이 아니다.
전원이 각성자.
각성자를 경비원으로 쓴다니…….
대부분의 인원이 수호 길드와 계약을 맺고 이곳에 있단 걸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했다.
수호 길드장이 머물고 있는 길드 하우스는 방금까지 보았던 건축물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한옥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저번에 갔던 음식점도 여기랑 비슷했지.
나이 든 사람 중에서는 한옥 취향인 사람이 많다던데, 수호 길드장도 그런 건가.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안내를 받고 접객실에 앉아 있자, 곧이어 안환재가 들어왔다.
언제나와 같이 갑옷이라도 입은 듯한 거대한 풍채였지만, 약간이나마 노쇠해져 보였다.
“먼 길 찾아오게 해서 정말 미안하군. 자네. 식사는 했나?”
“아직 안 했습니다.”
원래 연장자가 저런 질문을 할 때는 먹어도 안 했다고 하는 거다.
“간단하게 술 한잔이라도 어떤가.”
저렇게 높은 사람은 무슨 술을 마시나 했더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소주였다.
“와인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입맛에 맞지 않아서 말일세. 원한다면 자네는 다른 걸 마셔도 되네.”
“아뇨. 저도 소주 좋아합니다.”
두 손으로 잔을 받고 서로 한 잔을 들이켰다. 술이 들어가자 어색한 기류도 살짝 흐려졌다.
역시 내 물약 다음으로 위대한 물이라니까.
“일단은 감사 인사부터 해야겠군. 자네가 했던 조언이 결과적으로는 날 살린 셈이 됐어.”
안환재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상 위에 내려놓았다.
노란색의 액체가 들어 있는 유리병.
내가 일전에 건네준 신속의 물약이었다.
“이건 돌려주도록 하지.”
“그냥 선물입니다. 넣어두세요.”
아무래도 필요 없었나 보네.
그때 보았던 피들은 전부 상대방 거였나.
분위기가 수호 길드장과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람 같던데…….
“내 오른팔과도 같은 존재였네.”
내가 궁금해한다고 생각했는지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저 정도 술로는 취하지 않을 텐데도 어째선지 그의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길드를 창설할 때부터 이어져 왔던 인연.
이십 년이나 된 친우를 자기 손으로 벤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했군.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한 자리인데 말이야.”
“아닙니다.”
“미안하네. 늙은이 푸념 들어준다고 생각하게나.”
그는 이후 일상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대부분의 노인이 그러듯 자식 자랑에 관한 내용이었다.“손자, 손녀가 내 걱정을 엄청나게 하더군. 언제든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몸이 늙으면서 마음도 약해진 모양이야.”
한 번도 웃지 않던 그가 손주들의 이야기를 할 때는 평범한 할아버지처럼 미소를 지었다.
연회장에서 보았던 그 살벌한 기세와는 완전 딴판이다.
이제는 나도 조금씩 술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은 한 병 두 병 비어져 갔다.
안환재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들은 하나같이 흥미로웠다.
각성자로서 살아온 그의 이야기는 안환재가 ‘철혈의 노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게 해주었다.
붉어진 얼굴.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그의 눈빛이 나를 응시했다.
“자네는 그런 인물에게 빚을 지운 거네.”
사실 빚이라고 하기에는 어느 정도 과장이 있다.
안환재는 고작 주변을 살펴보라는 조언 하나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한 것이다.
나는 아주 사소한 계기만 마련했을 뿐이다.
실제로 내가 건네준 물약은 마시지도 않았고.
“혹시 원하는 거라도 있는가.”
그럼에도 필요한 것이 있었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잠시 말을 고르고 있자니, 안환재가 말했다.
“아무런 소속이 없다면 수호 길드에 들어오는 것은 어떻겠나.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대우를 해주지.”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이곳 분위기는 저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재입대는 사절이다.
나는 아쉬워하는 그에게 말했다.
“블랙 와이번이라는 놈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흠. 그 이름에 대해선 어디서 들은 겐가?”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 순둥이 줄 사료로 뜬 이름이라고 말하기에는 아무래도 좀 그렇지.
“하긴. 자네 같은 사람이라면 알아도 이상할 건 없겠지.”
안환재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알고 있지. 혹시 그놈을 원하는 건가?”
“정확히 말하자면 녀석의 두 날개를 원합니다.”
“날개라…… 원한다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좋았어.
의외로 쉽게 해결됐다.
“그곳이 우리 수호 길드에서 공략하게 될 4층 던전이라는 것은 알고 있을 테고.”
예?
“던전의 이름이 ‘블랙 와이번의 허름한 둥지’인만큼 아마도 던전의 보스에 해당하는 놈이겠지. 그놈의 날개를 원한다라…….”
던전의 보스였다고?
그것도 4층 규모 던전?
이제껏 순둥이에게 줬던 마물들은 기껏해야 2층 아래 던전에서 나오는 놈들뿐이다.
그렇기에 정해연에게 부탁해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런데 갑자기 4층이라니…….
대한민국에 4층 규모의 던전이 나타난 지 오래된 만큼 그 가치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클 것이다.
마물의 사체는 각성자들의 장비를 만들기 위한 주재료니깐.
“무사히 공략이 완료된다면 못 줄 것도 없지. 반발이 심할 테지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면 될 테고. 문제는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지만.”
“던전에 수호 길드만 참가하는 것이 아닌가요?”
“수호 길드가 들어갈 인원은 스무 명이네. 4층 규모인 만큼 총 마흔 명이 들어갈 수 있으니, 나머지 스무 명은 타 길드로 채워야겠지.”
그것이 정부에서 정한 방침이니까.
안환재가 술 한 잔을 들이켰다.
아, 그런 거구나.
잠깐 그렇다면 꽤 좋은 생각이 있다…….
“이미 내정해 놓은 길드가 있으십니까?”
“들어오고자 하는 곳은 많네. 물론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오려는 자는 없겠지만. 던전은 수호 길드에서 소유하게 된다고 해도, 부산물은 그곳에서 나눠 가져가려 할 걸세.”
이번에 거래하게 될 중급 포션과 신속의 물약을 내세운다면 황혼은 선뜻 내게 부산물을 양보할 것이다.
황혼 길드의 무력이 타 길드에 비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내게 우호적인 황혼이 이 던전 공략에 참가해 준다면 여러모로 과정이 수월해질 것이다.
“혹시 황혼 길드를 그곳에 넣으실 생각은 없습니까?”
“그렇게 간단하게 정할 문제는 아니다만…….”
안환재는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나를 보고는 작게 미소 지었다.
“자네가 가벼운 약속 하나만 해준다면 못 할 것도 없지.”
“무슨 약속 말입니까?”
“어려울 것 없네. 이번처럼 식사 한 번만 같이해 주면 될 뿐이지.”
“그런 거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럼 황혼의 여식에게는 말을 전해두도록 하지.”
겉으로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말재주가 좋으신 분이다.
이런 분과 술자리를 가지는 거면 언제든 환영이지.
“던전은 언제 들어가실 생각입니까?”
“계획대로라면 삼 주 후가 되겠지.”
삼 주.
알의 부화 시간이 한 달 남은 걸 생각한다면 딱 들어맞는다.
집에서 알을 보살피고 있다가 던전의 공략이 끝나면 그때 날개를 받기만 하면 된다.
이거 구한다고 또 어떤 고생을 해야 하나 살짝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쉽게 해결됐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네.”
……역시 거저먹을 순 없나 보네.
이 정도만 해도 수호 길드장 입장에서는 내게 엄청난 배려를 해줬다.
오히려 조건 정도로 끝나는 게 다행인 것이다.
머릿속으로 나올 만한 조건들을 생각해 보았다.
돈, 물약.
원한다면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는 것들이다.
순둥이를 위해서라도 와이번의 날개는 포기할 수 없었기에 어지간한 건 따를 생각이다.
“예. 조건이 뭡니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각성자들의 수준. 한 번쯤은 확인해 보고 싶지 않나?”
“……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의미를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내게 안환재가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도 함께 가는 걸세.”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29화
11. 내 몸이 이상하다(1)
적막한 달이 떠오른 밤.
그것을 안주 삼아 안환재는 조용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역시 혼자 마시는 건 적적하군.”
비어 있는 앞자리를 보며 안환재는 방금까지 그곳에 있었던 인물을 떠올렸다.
이서진.
기이한 사내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사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허술한 면도 있고.
술을 마시는 내내 보였던 빈틈들.
아니, 일부러 내보인 건가.
실제로 같이 술을 마셔보니 자신의 손주와 비슷한 또래의 청년으로밖에 안 보였다.
안환재는 이서진의 과거 행적들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꾸며지고, 만들어 낸 가짜 정보들뿐이었다.
어디서 볼 수 있을 법한 불행한 인생을 살아온 사내.
감추는 것보다는 드러내는 것이 더욱 안전하단 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그의 정보는 약간의 조사만 한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그런 걸 믿는 놈은 병신이거나 머저리뿐이겠지.’
애초에 숨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덫을 깔고 있는 걸 수도 있다.
‘깊게 파고들진 말아야겠군. 더 들어갔다간 등을 돌리게 될지도 몰라.’
적대할 생각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단순한 궁금증일 뿐이었다.
이서진에 대한 생각을 끝마친 안환재가 술병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이런 식으로 마실 때면 언제나 자신에게 잔소리를 하던 사내가 있었다.
-제 목표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제가 믿는 신의 말을 섬기고, 몸종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자신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도는 말이다.
신.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각 종교들에서 나타내는 신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좀 더 이질적인 무언가.
‘신성 길드. 그자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근래 활동 자체를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덕분에 길드 랭킹 또한 낮아졌으나, 그들이라면 신경조차 쓰지 않겠지.
외부에서는 신성 길드장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다.
‘시기가 미묘해.’
혹시 신성 길드가 그 신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추측일 뿐이지만, 조금 더 상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이보게 태웅이. 거기 있…….”
이십 년 넘게 말해왔던 익숙한 문장은 더 이상 그의 입에 머물지 못했다.
술에 취하고자 계속해서 마셨지만, 이서진의 권유로 자양강장제를 먹은 후로는 더 이상 취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조금 쓸쓸하군.”
안환재에게 신태웅의 빈자리는 여전히 낯설었다.
* * *
아무런 빛도 들어오지 않는 방.
어둠 속에서 소녀 한 명이 무릎을 꿇은 채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은 알 수 없었으며, 언제 이곳에 들어왔는지도 잊어버렸다.
그저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성기사단장, 신백준이 물었다.
“수녀님은 아직 안에 계신가?”
“예. 단장님. 그 날 이후로 계속해서 안쪽에 계십니다.”
“……평범한 예배라고 하기에는 너무 오래됐군.”
은행에서 있던 사건 이후로 어딘가 이상한 모습을 보이시던 수녀님이다.
뒤돌아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오시도록 해야겠다.”
“예배 중에는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신성 길드가 또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바깥의 소문 같은 것은 알 바 아니었다.
그저 수녀의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길드장이라고 해봤자,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소녀일 뿐이다.
“무언가 이상이 생기신 걸 수도 있지 않은가.”
“그건…….”
“내가 직접 확인하도록 하지.”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성기사 또한 그런 수녀가 걱정되었는지 고민 끝에 자리를 비켰다.
성기사단장이 문을 열자 안쪽으로 빛이 새어 들어갔다.
그제야 수녀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괜찮으십니까. 수녀님.”
“신탁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수녀님?”
수녀라고 불린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시간을 무릎 꿇어 있었음에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멀쩡했다.
“역시 예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제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곁에서 모시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녀의 눈이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간질이는 새하얀 빛.
그 빛을 바라보며 루비에르트가 속삭였다.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성자님.”
* * *
-자네도 함께 가는 걸세.
“말이 돼?”
어떤 조건이든지 받아들일 생각이었지만, 저건 논외였다.
아이기스의 방패. 신체 강화의 물약. 수많은 물약들.
자신을 보조할 것들은 많았지만, 정작 내 본신의 능력은 터무니없이 허접했다.
4층 던전.
안환재, 정해연을 비롯해서 대한민국 대표 각성자들이 공략을 시도한다.
말 그대로 공략이다.
나 같은 게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든 스펙을 키우던가 해야겠지.”
일단은 당장에 얻은 것들부터 확인해 보자.
랜덤 개방권으로 얻게 된 물체부터.
집 안에 있는 물건을 뒤적거렸지만 개방된 물건은 없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내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역시 휴대폰의 능력이 개방되어 있었다.
……오히려 너무 자주 사용하는 물건인지라 까먹고 있었네.
* * *
「위치를 추적하는 휴대전화」
설명: 【만물의 주인】이서진이 사용할 경우, 휴대전화 앨범에 찍혀 있는 사람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
*사진 속에는 해당 인물과 【만물의 주인】이서진이 함께 찍혀 있어야 한다.
* * *
위치를 추적한다라…….
그런데 조건이 왜 저래?
“딱히 내 스펙을 높여줄 만한 물건은 아닌 것 같고.”
이번에는 동그란 스위치에 눈이 갔다.
“그다음은 이건데…….”
깨끗하게 세척을 하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찝찝한 물건이다.
그놈의 입에 들어 있던 스위치니깐.
* * *
「마물을 컨트롤하는 스위치」
설명: 이 스위치의 소유주가 될 경우 ‘그룸’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기존에 있던 소유주가 변경되었습니다.
*보유하고 있던 그룸들의 통제권이 사라집니다.
특이 사항: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사용할 경우, 언제든지 그림자가 있는 곳에 그룸을 소환할 수 있다.
* * *
“여러모로 수상하긴 하네.”
기본적으로 그룸은 마물이다.
마물을 조종하는 스위치.
이런 종류의 아티팩트가 있단 건 들어본 적이 없다.
혹시 그놈이 직접 만든 건가?
“균열 관리부 쪽에서 데려갔었지.”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한번 그놈 얼굴을 보러 가야겠다.
그만한 테러를 일으킨 놈이다.
혹시 다른 배후가 없는지 확실하게 알아내야 한다.
뭐, 내 목적은 이 스위치를 어디서 얻었는지 알아내고, 사용해도 별 탈이 없나를 알기 위해서지만.
혹시 모르니 이것도 물약에 넣어놓기로 했다. 그 더러운 입에 들어 있었단 것만으로 정화할 이유는 충분했으니까.
“결국, 둘 다 신체 스펙과는 관련이 없었네.”
최소한 아이기스의 방패처럼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것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룸…….
그놈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면 유용할지도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마물인지라 남들 앞에서 드러내기엔 그랬다.
내게 필요한 것은 실전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무력이다.
만약 4층 던전에 간다고 해도, 내가 싸우게 될 일은 없을 테지만, 만약이란 게 있는 거다.
한숨을 쉬고 내 살길을 위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나를 살려줄 것은 언제나 정수기에서 나오는 물약뿐이다.
“……이제 어느새 중급인가.”
내 몸 안에는 아직도 마석병으로 생긴 마석이 존재한다.
물약을 먹기 시작한 후로 별다른 통증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꺼림칙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이번에 중급 물약을 먹으면서 완전히 사라져 주면 좋을 텐데.”
물약을 꾸준히 먹기 시작했을 때, 내 신체는 눈에 띌 정도로 좋아졌다.
중급의 물약을 먹는다면 또 다른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꾸준히 먹고 있으니까, 무언가 달라지는 점이 있긴 하겠지?”
그렇게 평소와 같이 물약을 한 잔 마셨고.
“……?”
심장 부근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 멀쩡하다가 갑자기 이런다고?
이미 강화가 완료된 정수기다.
웬만한 내상은 단숨에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통증은 더욱 심해져 갔다.
“커헉!”
내 입에서 검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위험 신호다.
내 신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
예전이라면 몰라도 이제는 죽고 싶지 않다.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건지 알게 되었으니까.
내가 취할 행동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미친 듯이 내 몸속으로 물약을 흡수시킨다.
내 안에서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면, 반드시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그렇게 떨리는 팔로 미칠 듯이 물약을 쏟았고.
“아.”
정신을 잃었다.
* * *
“……맨날 나만 시킨다니까.”
오늘 오전 황혼 길드에 한 사건이 벌어졌다.
수호 길드에서 진행하기로 한 4층 던전의 공략.
그곳에 황혼 길드와 함께하고 싶다는 안환재의 연락이 왔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미 황혼과는 같이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받았었기 때문에 이 변심은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정해연 말대로 음료수남한테 뭔가 특별한 게 있나?”
황혼 길드에서 판매하게 될 순도 100%의 물약.
정작 그 자세한 출처를 소성환은 듣지 못했다.
‘정말로 그 음료수남이 연금술사 같은 걸지도 몰라.’
그 남자가 나타난 뒤로 물약이 공급되기 시작했으니 당연한 추측이리라.
‘이번 건도 그렇고.’
만약에 수호 길드장에게 어떠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면, 확실하게 음료수남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게 정해연의 말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손수 전투조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자신이 데리러 가는 것이다.
‘……나 진짜 길드에서 높은 자리인 건 맞겠지?’
저번에 수상한 돌을 가져오란 것도 그렇고.
사실은 자신이 길드의 전문 심부름꾼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긴가.”
꽤나 구석진 곳에 산다.
옥탑방 쪽으로 올라간 소성환이 문에 노크했다.
똑똑-
“안쪽에 없나?”
정해연이 통화하기로는 집에 있다고 그랬었는데.
“이대로 나 혼자 돌아갔다가는 또 어떤 지랄을 할지 모르는데…….”
소성환은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노크를 반복했다.
“……누구세요?”
“황혼 길드 소성환입니다.”
이윽고 문이 살짝 열리며, 얼굴만을 내놓은 이서진이 나타났다.
“……늦게 열어서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예에…….”
소성환이 전장에 선 듯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확실해.’
얼굴 이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문틈 사이로 짙은 혈향이 풍겨왔다.
그리고 언뜻 보인 혈흔.
아마도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양이다.
안쪽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리고 어지러운 듯, 머리를 손으로 잡고 있는 이서진이 나타났다.
소성환은 그 모습을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지금 몸이 좀 안 좋아서.”
“…….”
왜 지금껏 알아차리지 못했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는데?
한 때 전투조의 일행들이 떠들던 주제가 있다.
무에 어울리는 육체란 게 존재하는가.
평범한 존재도 각성만 하면 초인과 같아질 수 있는 세상이었기에 소성환은 그 의견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누군가 무武에 걸맞은 신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자신은 손쉽게 답변할 수 있었다.
이 음료수남이 그렇다고.
‘확실히…….’
단련된 신체는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신기했다.
저 빈틈조차 없이 완벽한 밸런스를 가진 육체가 세공되지 않은 보석과 같다는 뜻이니까.
“저, 저기요?”
소성환은 자신도 모르게 이서진의 몸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볼 때도 엄청났지만, 직접 만지니 감탄만 나온다.
연금술사라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을 비웃었다.
‘맞아. 이럴 때가 아니지.’
그제야 소성환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절대 비위에 거슬리는 행동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모시고 와.
-명심해. 또 허튼짓하지 마!
길드장의 말을 떠올린 소성환이 차분히 말을 골랐고.
이내 뱉었다.
“혹시 훈련받으실 생각 없습니까?”
* * *
바닥에 웅덩이가 질 정도로 엄청난 양의 검은 피.
‘……이게 전부 내가 흘린 피라고?’
확실히.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이만한 피를 흘렸다면 과다출혈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물약이 아니었다면 확실하게 죽었을지도 몰라.’
힘이 빠져 그대로 엎드려 있자니, 피 웅덩이에서 고약한 썩은 내가 올라왔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똑똑-
아까부터 계속해서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내려 내 몸을 보았다.
피에 절였다고 말해도 좋은 상태다.
……이 꼴로 나갈 수는 없지.
고개만 내밀고 상대를 확인했다.
황혼 길드의 소성환.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니라, 샤워까지 해야 할 것 같다.
온몸에서 지독한 냄새가 난다.
대체 저 피의 정체는 뭐지?
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어 몸에 뜨거운 물을 끼얹으니 조금은 정신이 들었다.
“하아…….”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무언가 잘못된 건가?
아니, 살아 있으니 최악의 사태는 아니란 건데…….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
그제야 나는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게 내 몸이라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30화
11. 내 몸이 이상하다(2)
“……역시 내가 갔어야 했나?”
연회에서의 말씀도 있고, 되도록 직접 찾아가는 것은 자제한다고 소성환을 보내긴 했는데 아무래도 불안했다.
“그래도 맡은 바 일은 잘하는 게 소성환이니까.”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가는 것보다야 면식이 있는 소성환이 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거기다가 고작해야 길드로 모시고 오라는 것 하나뿐이다.
목숨을 걸고 던전으로 들어가는 각성자들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쉬운 임무다.
“그런데 좀 늦는 거 같은데.”
도착하는 즉시 이곳으로 와달라고 했건만, 혹시 아직도 못 온 건가?
무슨 일이 생겼다-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성환은 황혼 길드의 전투조장이었으니까.
정해연 본인을 제외한 길드원들 중에서는 가장 강한 사람이다.
무슨 일이 있었다면 연락 하나정도는 남길 수 있을 정도의 강자.
“……마중 정도는 괜찮겠지?”
찾아가는 것은 아니니깐.
응.
간단하게 산책한다는 느낌으로 앞에서 어슬렁거리기만 한다면 상관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정해연이 길드 내부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헉!”
“……야, 얼른 도망가자.”
정해연을 마주친 전투원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을 취하며 방향을 바꿨다.
건물의 입구에 서 있어도 소성환은 도통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를 확인한 안내 데스크의 사람이 말했다.
“길드장님. 왜 이런 곳에 계세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혹시 소성환 전투조장님 말하시는 거예요?”
정확히는 소성환이 모셔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거였지만, 넓게 보자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예.”
“이상하다. 전투조장님 이미 길드로 돌아오셨는데요? 연락 못 받으셨어요?”
“……그래요? 혹시 옆에 같이 있는 사람이 있었나요?”
“아~”
그 말에 안내 데스크에 있던 여성이 잠시 얼굴을 붉혔다.
“같이 온 사람이 있기는 했는데…… 혹시 이번에 황혼에 새로 들어오시는 분이에요?”
“그건 왜요?”
“헤헤. 처음이시면 제가 직접 이곳저곳 안내라도 해드리려고 했죠. 덤으로 애인 없냐고 은근슬쩍 물어보기도 하고요.”
“…….”
‘서진 씨가 아니신가?’
물론 자신이야 그분의 능력을 확인했으니, 숨겨져 있는 기품을 느낄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평범한 외견으로 보일 것이었다.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훈련실 쪽으로 가시던데요?”
“……훈련실?”
곧장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는데, 대체 왜 그곳으로 간 거지?
가끔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소성환이다.
도저히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일단 그곳에 있다고 하니 정해연은 훈련실로 향했다.
명색이 각성자의 신체 단련을 위한 장소라 그런지 훈련실 또한 외부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전부 각성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최첨단 설비들뿐이다.
던전에 갈 일이 없을 때는 황혼 길드 소속의 전투원들은 이곳에서 자기개발을 위해 훈련을 한다.
그런 훈련실에서 정해연은 자신이 찾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지! 이야, 이거 진짜 물건이네. 흐흐. 자세가 아주 완벽한데?”
벤치 프레스를 하고 있는 인물을 보며 소성환이 흐뭇하게 웃었고.
“……소성환?”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웃고 있던 표정 그대로 몸이 곧장 굳어버렸다.
“기, 길드장? 여긴 왜…….”
“내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위로 올라오라고 하지 않았었나……?”
“아…… 아…… 맞다, 맞아. 하하…… 까, 까먹고 있었네? 나도 모르게 신나서 그만.”
“까먹어?”
이놈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정해연이 다리를 들어 올리려던 차에 운동을 하고 있던 인물이 기구에서 일어났다.
“후. 진짜 힘드네…… 어? 오랜만이네요. 해연 씨. 연회 이후로는 처음이죠?”
낯익은 목소리다.
정중히 모셔오라고 했더니, 이런 곳에서 몸을 혹사시키고 있을 줄이야.
죽일 듯이 소성환을 째려보던 눈빛을 거두고 이서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에?”
얼굴은 땀으로 가득했고, 숨은 거칠게 토해내고 있다.
땀으로 인해 흰 티가 달라붙어 몸의 윤곽이 드러난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정해연이 다급하게 소성환 쪽을 힐끗 쳐다봤다.
“응? 왜 그래? 네가 데리고 오라면서?”
“서진…… 씨?”
당황스러워하는 정해연에게 이서진이 머쓱 웃으며 말했다.
“저 맞습니다.”
* * *
“……예. 그러니까 오늘 오전에 수호 길드에서 온 연락…… 때문에 이렇게 모시게 됐는…… 데요.”
말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내 얼굴을 쳐다본다.
……이거 부담스럽네.
하긴 나 자신도 어이가 없는데 남이 보기엔 어떻겠는가.
거울로 확인한 내 모습은 마치 모나리자를 보는 듯이 완벽한 조형…… 아, X바. 도저히 이렇게는 못 말하겠네.
아무튼 전체적으로 보자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사람이 눈, 코, 입 달려 있는 건 다 똑같지 않겠는가.
다만 그 눈, 코, 입의 배치가 아주 약~간 달라졌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내 인상은 크게 변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를 자주 보던 사람이라면 당황할 만도 하다.
“혹시…….”
“……수술 안 했습니다.”
“아, 아뇨. 절대 그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서, 서진 님께서는 원래부터 얼굴에 빛이 나셨으니까요!”
……저거. 갑자기 ‘님’ 자 쓰는 거 보니까 거짓말이네.
자주 어울리다 보니까 알 수 있는 정해연의 버릇 중 하나다.
당황하면 갑자기 나한테 높임말을 쓴다.
“이게 본래 얼굴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나오기로 했다.
솔직히 그 짧은 시간 안에 성형을 어떻게 하겠는가.
“……! 본래 얼굴 말입니까?”
“예.”
솔직히 개소리라고 치부해도 당연한 말이었지만, 정해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마구 끄덕이기 시작했다.
뭐야, 왜 저래?
“음음. 그렇군요. 그런 거였군요.”
유레카를 외칠 것 같던 정해연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혹시 수호 길드장과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어쩐지…….
저 말 하려고 부른 거 같기는 했다.
소성환이 다짜고짜 훈련실로 데려가기는 했지만.
대충 안환재와 했던 이야기들을 요약해서 정해연에게 알려주자 눈이 커다래진다.
“저희 황혼 길드를 그곳에 갈 수 있도록 손을 쓰셨다고요?”
손을 쓴 것까지는 아니고…….
솔직하게 말하자니 초롱초롱한 정해연의 눈빛이 부담스러웠기에 약간의 포장을 하기로 했다.
“어째서 그런……?”
“그냥 여러 가지로 신세지기도 했고, 거기다가 저희 친구 비슷한 거잖아요. 맞죠?”
“치, 친구…….”
연회에서도 내 말에 의심 하나 없이 믿어주고, 따라주던 정해연이다.
실제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정해연이 기쁜 듯 미소 지었다.
“그런 거라면,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빼먹은 게 있는데, 아마 저도 그곳에 가게 될 거 같아요.”
“예에?”
내 말에 웃고 있던 정해연이 단숨에 심각한 표정으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황혼 길드 정해연입니다.”
정해연이 심각하게 말을 하는 도중. 스피커 모드가 눌렸는지, 대화 내용이 여기까지 들려온다.
“이서진 씨께서 반드시 참가해야만 하는 겁니까……?”
-형식상으로나마 그럴 수밖에 없네. 던전에 참가조차 하지 않은 자에게 부산물을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전화를 끊은 정해연이 한숨을 쉬며 내게 말했다.
“혹시 서진 씨는 던전에 들어가 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뇨. 한 번도 없어요.”
“끄응…….”
정해연이 던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아무나 던전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층마다 참여할 수 있는 각성자의 등급이 존재하죠.”
이미 클리어가 완료된 1층이라면 각성증을 받은 누구라도 가능.
2층은 1층을 일정 횟수 클리어해 E급에 도달한 각성자들부터 가능하다.
“어. 그럼 전 바로 2층에 들어갈 수 있겠네요?”
“그게…… 각성센터에서 받은 등급은 일종의 적성 등급인지라, 기본적으로 실제 등급은 전원 F급에서 시작해요.”
어…… 그럼 이 말은…….
“4층 던전의 자격은 하다못해 C급은 되어야 합니다. 이것도 짐꾼이라는 자격으로 겨우겨우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죠. 사실상 4층 이상부터는 짐꾼에 인원을 분배하지 않습니다만…….”
그러니까 한 번도 던전에 들어가지 않은 F급인 나는 삼 주 안에 세 단계를 건너뛰어야 한다는 거잖아?
그러면 나는 던전에 들어가 등급을 높여야 한다는 거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정해연이 내게 말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요. 쉬운 방법이 있으니깐요. 저희 황혼의…….”
부응!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나 하고 말하지만, 등급을 높이기 위해 황혼이 끼어드는 짓은 하지 않는다고 믿겠네.
“……괜찮습니다. 황혼의 길드원과 함께 들어갈 수 없다고 해도, 저희가 소유하고 있는 검증된 던전들만을 이용한다면…….”
안환재에게 말이 흘러가지 않도록 음소거 버튼을 눌러놓은 정해연의 폰에서 또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황혼이 소유하고 있는 던전에 들어가는 것도 안 되네.
“이이익!”
당장에 음소거를 풀고 무언가를 하려던 정해연에게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미 다 클리어된 던전들이고, 그렇게 위험할 것 같지는 않거든요.”
이거는 진심이다.
이미 공략법이 전부 나와 있고, 보스가 나타나지 않는 던전.
물약도 빵빵하고, 여차하면 아이기스의 방패도 있다.
내 상황을 알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나에게 훈련을 시켜준다던 소성환까지 생각하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서진 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리고 사실 궁금하기는 했다.
항상 부러워하던 각성자들.
그리고 그 각성자들이 향한다는 던전.
균열에서도 마물은 나오지만, 아무래도 분위기 자체가 다를 것이리라.
“후…… 저희 황혼에 있는 훈련실을 이용하는 것 정도는 상관없겠지요. 언제든지 찾아와서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공짜로요?”
내 농담에 재밌다는 듯, 정해연이 웃었다.
“원하신다면 훈련실을 통째로 대관하셔도 좋습니다. 물론 공짜입니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고.
* * *
이서진이 다시 훈련실로 향하고, 정해연은 자리에 남아 차를 홀짝였다.
이런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차라리 잘된 것일 수도 있다.
그만큼 자주 황혼 길드에 와주신다는 거니깐.
“보고드릴 것들도 많고.”
이제 물약의 판매가 본격적으로 시작 된다. 중급품의 물약까지 생각한다면, 계약 조건 또한 상당 부분 조율이 필요하리라.
-신속의 물약은 아직까지는 판매하지 않는 거로 하죠.’
-아, 물론 계속해서 일정량 건네드릴 테니까 해연 씨가 마시고 싶으면 마셔도 돼요. 물론 공짜로요.
향기로운 차가 목으로 넘어가며 정해연의 얼굴에 천진난만한 미소가 나타났다.
“정말 언제 봐도 신기한 분이시라니깐.”
익숙해질 것 같으면, 숨겨뒀던 것들을 하나씩 공개해 주시고.
……그래도 그렇게 갑자기 맨얼굴을 드러내는 건 반칙 아니야?
정해연이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곳에는 일전에 말했던 ‘매력적인 인재상’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겉으로 보면 허름한 집]
[생명의 은인]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래]
[인간적인 매력]
[…….]
[…….]
[평범한 외견]
“……흠흠.”
정해연은 마지막 줄을 볼펜으로 긋고는 수첩을 닫았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31화
근력운동을 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단순히 얼굴만 조금 바뀐 것이 아니다.
“삼 주 후에 4층 던전으로 따라가게 됐다고요?”
운동을 하면서 소성환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전하자, 그가 흐뭇한 미소를 거두고 얼굴을 구겼다.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
“그럼 그 양반은 대체 왜 따라오라고 하는 거래요?”
“글쎄요…….”
행동으로 봐서는 나를 너무 높게 평가하고 있는 거 같다.
내가 황혼에 물약을 공급하는 사람이라는 거도 모르는 것 같고.
“씁. 공략된 던전이 어렵지는 않다고 해도 엄연히 던전이거든요.”
“그렇죠.”
“최소한 마물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 하나는 있어야 한단 건데…… 혹시 뭐 그런 거 있어요?”
마물에 대항할 수단이라…….
내가 지금까지 손으로 직접 마물을 잡은 거라고는 한 번뿐이다.
“아, 그거 있잖아요. 그거.”
“그거?”
“짱돌 마스터 아니신가. 영상 보니까 아주 살벌하게 내려치시던데.”
“…….”
그렇게 말하며 소성환이 낄낄 웃는다.
그 모습이 너무 얄미워서 나도 모르게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다.
정해연이 왜 그렇게 행동하나 했더니…….
잠깐 어울렸다고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음. 그러면 간단하게 무기 쓰는 법이라도 하나 배웁시다. 삼 주간 속성 과외로 해주죠.”
오…….
무기를 사용한다고 하니 뭔가 본격적으로 느껴진다.
“보통 무슨 무기를 쓰는데요?”
“짱돌…… 은 농담이고. 각성자들 마다 사용하는 무기들이 다 제각각이라서 모르겠네. 저 같은 경우에는…… 잠시만요.”
소성환이 잠시 어딘가로 사라지더니, 이내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백 년 묵은 나무도 한 방에 베어낼 수 있을 거 같은 거대한 도끼다.
“제 애병기에요. 슈퍼 울트라 자이언트 액스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너무 큰 거 아니에요?”
“모르는 소리. 이 정도는 되어야 베는 맛이 난다니깐요?”
저건 ‘벤다기’보다는 ‘짓뭉갠다’라는 게 맞는 거 같은데.
“한번 들어 봐요.”
소성환의 권유에 도끼를 들었고, 곧장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내 팔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웬만한 사람들은 들지도 못하는 거예요. 3층 던전에서 나오는 헤비 스토닉이라는 놈 사체로 만든 건데 그놈 몸이 더럽게 무겁고 단단하거든요.”
그래도 들고 있는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 * *
〈이서진〉
힘: 1.7
민첩: 1.9
체력: 3.1
마력: 3.2
고유 능력: 【만물의 주인】, 【아이기스의 방패】
「현재 개방된 물체 목록」
▷정수기(2단계): 물 대신 물약이 흐른다.
▷텔레비전(2단계): 채널마다 무작위로 미래를 볼 수 있다.
▷방석 : 앉는 자의 심신을 치유해 준다.
▷손전등 : 사악한 것을 정화하는 빛이 나온다.
▷옥탑방 : 내부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
▷콘택트렌즈(2단계) : 눈에 보이는 물체를 탐색할 수 있다.
▷스위치 : 마물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
▷휴대전화 : 앨범에 찍힌 상대방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
◎현재 방석의 숙련도가 가득 찬 상태입니다.
* * *
오랜만에 꺼내보는 내 상태창이다.
하도 개방된 게 많아서 이제는 확인하는 데도 오래 걸리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치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마력이다.
썩어나는 게 물약인지라 시간 날 때마다 아이기스의 방패를 소환하고 놀면서 마나 탈진 증상을 일으켰으니까.
마나 탈진이 일어날 때마다, 아주 조금씩 마나 통이 넓어진다는 걸 알아챈 이후에는 버릇처럼 하고 있는 중이다.
힘이랑 민첩은 뭐…….
……내가 싸울 일이 어디 있었겠냐.
“소성환 씨는 힘 스탯이 얼마나 되길래 이런 걸 드는 거예요?”
“음. 원래 남한테 스탯 알려주는 건 여기 업계에서 금칙인데…… 뭐, 대충 말하자면 8은 넘었죠.”
미친.
단순 수치로 따지면 대충 나보다 4배는 힘이 강하다는 거다.
물론 스텟이 그렇게 단순한 방식으로 적용되는 건 아닐 테지만.
“그보다 소성환 씨는 너무 딱딱한 거 아닌가? 앞으로 삼 주 동안 매일 만날 사이인데, 아무래도 그건 좀 아니지.”
“그럼 뭐라고 부르면 되는데요?”
“깔끔하게 형님?”
“소성환 전투조장님.”
“……성환이 형?”
“황혼 길드 소속 소성환 전투 1조장님.”
“……그래요. 편하게 조장님이라고 부르세요.”
“예. 조장님.”
리액션이 풍부한 사람이네.
이런 말 하기는 그러지만, 얄밉기도 하고. 조금 놀리는 맛이 있는 사람이다.
어쩐지 이태영이 떠오르는데.
“말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어차피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 거 같은데.”
“그래요? 이야. 선심 썼네. 나이가 스물넷이라고 했나?”
“예.”
“흠. 내가 길드장이랑 나이가 같으니까, 확실히 연상이네.”
뭐?
저 얼굴로 정해연이랑 같은 나이였다고……?
“뭐야. 그 얼굴은. 충격이라도 먹은 표정인데.”
“그래서 보통의 각성자들은 어떤 무기를 사용한다고요?”
“그거 아까 말하지 않았나……?”
소성환은 자신의 얼굴을 애처로운 손놀림으로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일단 원하는 무기라도 있어?”
원하는 거라.
일단 저렇게 무식하게 큰 도끼는 무리다.
내가 들 수 있으면서도, 대중적인 무기.
“역시 검이 가장 낫지 않을까요?”
“그게 가장 무난하긴 하지. 길드장도 검이고, 우리 전투조 대부분도 검이거든. 아, 총은 논외야. 그건 던전에서 못 써먹으니까.”
소성환이 내게 목검 하나를 던졌다.
목검은 가벼울 줄 알았는데, 꽤나 묵직했다.
“일단 근력운동이랑 간단하게 검 휘두르는 정도만 연습하자고.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그래 봤자 삼 주니깐.”
목검을 주시하면서,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떠올렸다.
과연 이런 병장기들을 상대로 능력을 개방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각성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검에서 불이라도 튀어나온다든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검술과 관련된 고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게 있는 것은 선택 개방권과 특별 개방권.
‘특별’ 개방권이라길래 무언가 다르겠지, 하고 살펴봤지만, 선택 개방권과 다를 바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연회에서 있던 일도 있고, 최소한 하나 정도의 개방권은 남겨 놓을 생각이다.
지금 사용할 것은 선택 개방권.
차라리 엄청나게 비싼 검을 사서 그걸 개방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면서 목검을 노려보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해당 물체는 병장기 중 ‘검’에 해당하는 물건입니다.]
[개방권을 사용할 경우 모든 종류의 검에 개방된 능력이 적용됩니다.]
걱정 하나는 덜었다.
다른 물건들과는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게 능력 공유라니.
이러면 나중에 다른 검을 사용한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재능이라서 말이야. 오히려 너 같은 경우에는 무기를 사용하는 것보다는 몸을 이용한 격투술이 나을 수도 있어.”
[개방권을 사용하여 ‘검’의 능력을 개방하시겠습니까?]
[새로운 물체의 능력을 개방합니다.]
“그러니까…… 응? 표정이 왜 그래?”
“…….”
이제껏 개방하면서 보았던 신비한 능력들.
개방된 검의 능력은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명료했다.
* * *
「수련용 목검」
설명: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사용할 경우, 검에 대한 이해도가 극도로 상승한다.
* * *
오른발을 살짝 뒤로 뺀다.
허리는 꼿꼿하게 일직선으로.
무작정 팔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지탱하고 있는 다리부터 시작한다.
허리.
어깨.
그리고 일련의 동작이 검을 든 팔까지 도달했을 때.
검을 휘둘렀다.
부웅!
자연스러운 내려치기에 소성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식으로 휘두르는 거라고. 아주 완벽해. ……응? 뭐야, 난 아직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무기에 대한 능력 개방.
물체에 특별한 무언가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단순하게 만물의 주인인 나에게 이 물건의 사용법을 알려줄 뿐이다.
“역시 검이 마음에 드는 거 같아요.”
물론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특별했다.
* * *
따로 볼 일도 있었고, 오늘 연습은 이 정도로 끝내기로 했다.
황혼 길드에서 나와 도로를 걸으며 생각했다.
‘진작 시도해 볼 걸 그랬어.’
아이기스의 방패를 얻은 이후로 그와 비슷하게 내 몸을 지킬 수 있을 만한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되도록 사용하기 간편할 거 같은 것 위주로.
그중에서 무기들은 예외였다.
물건들에 얼마나 좋은 능력이 개방되더라도 결국 그걸 사용하는 것은 나다.
아무리 좋은 명검을 개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루지 못한다면 말짱 꽝이다.
“그래도 한시름 놓았네.”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검을 사용하기 위한 이해도를 높여주는 거니깐.
꾸준하게 연습한다면 여차할 때 내 몸을 지키기 위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훈련만 하는 건 재미없으니까, 내기라도 하나 하는 건 어때. 요 삼 주간 내 몸을 단 한 번이라도 스칠 수 있으면 네 승리인 거야. 뭐, 당연히 내가 훨씬 유리하니까. 난 간단한 거로 부탁할게. 내가 이기면 형이라고 부르는 거야. 어때?
소성환이 꺼낸 말이었다.
검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다고 해도, 가능할 리가 없는 내용이다.
당연히 거절하려던 찰나 들려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욱하고 받아 버렸다.
-쫄?
그 말 듣고 내뺄 수는 없지.
……뭐 괜찮은 수단 같은 거 없을까?
소성환은 베테랑이다.
어떤 짓을 해도 공격은 먹혀들지 않겠지.
한순간만 방심을 이끌면 된다.
곰곰이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적 소리가 미친 듯이 들리며 앞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꺄아악!”
앞을 보니, 어린아이 한 명이 차에 치여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난데없이 일어난 상황.
그것을 보며 곧장 휴대폰을 들어 119에 전화를 하려던 차에 눈에 보이는 장면이 바뀌었다.
차가 달려오고 있었고, 아이는 아직 차에 치이기 전이었다.
나는 곧장 달려 아슬아슬하게 아이를 구해냈다.
“꺄악!”
비명 소리는 그대로 터져 나왔으나, 치인 사람은 없었다.
“으아아앙!”
……뭐지?
분명, 이 아이는 아까 차에 치였었는데?
알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하고 있을 때, 메시지가 정답을 알려줬다.
[개방된 물체 간의 시너지가 발생합니다!]
[현재 2단계 업그레이드가 완료된 물체-물약이 나오는 정수기, 미래를 보여주는 텔레비전, 물체를 탐색하는 콘택트렌즈]
[‘미래를 보여주는 텔레비전’과 ‘물체를 탐색하는 콘택트렌즈’가 서로에게 반응합니다!]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 * *
「미래를 탐색하는 콘택트렌즈」
설명: 2단계 업그레이드가 완료된 두 물체에 능력 간의 시너지가 발생하며, 기능이 추가되었다. 몇 초 후의 미래를 탐색할 수 있다.
*숙련도가 낮은 상태입니다.
*현재 제대로 제어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위기의 순간 혹은 절호의 순간 능력이 발동합니다.
* * *
개방된 물체 간의 시너지.
텔레비전에서 물약이 흐르지도 않고, 업그레이드된 물체도 적었기에 잊고 있었다.
미래를 탐색하는 콘택트렌즈…….
말도 안 되는 그 기능을 보고 있자니, 누군가의 웃음 가득한 얼굴이 떠올랐다.
-쫄?
찾았다.
괜찮은 수단.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32화
12. 속성 과외(2)
“텔레비전에 이어서 이제는 진짜 미래인이라도 된 기분이네…….”
진구만 있으면 완벽할 거 같은데 말이야.
고작해야 몇 초 뒤의 미래지만,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둘 중 어느 것이 더 낫다, 하고 비교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둘 다 내 거니깐 상관없기도 하고…….’
위기의 순간 혹은 절호의 순간.
방금 같은 상황은 ‘나’에게 있어서는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내 인지 범위 안에 있는 누군가의 위기에도 반응하는구나.”
미래시.
원할 때 사용할 수만 있다면 엄청난 카드가 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도 언제, 어디서 죽음의 위기가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내가 인지하기도 전에 죽는다면 방패고 물약이고 아무 소용이 없다.
“이걸 훈련할 방법은 없나?”
숙련도의 부족.
즉,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많이 사용하면 된다.
문제는 위기 혹은 절호의 순간을 계속 겪어야 한다는 건데.
전쟁터…… 같은 곳은 아무리 그래도 아니지.
‘위기’라는 것이 정확히 어느 범위인지 모르는 만큼 함부로 행동하기가 힘들었다.
고민을 하며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전에 같이 미확인 균열을 조사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균열 관리부로 찾아온 것은 처음이다.
이태영에게 말을 전해놨기에 출입은 어렵지 않았다.
곧장 균열 관리부 1팀 쪽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에는 수많은 전자기기들이 늘여져 있었다.
모니터에서는 마치 날씨를 확인하듯, 전국에서 발생하는 균열을 감시 중이다.
균열 관리부 1팀.
회식 자리에서 봤던 덩치 형님들이다.
이전에 봤을 때는 그다지 매칭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들을 보니 하나같이 멋있었다.
‘역시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단 건가…….’
그런 멋진 사람들 중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상석에 앉아 여유롭게 초코우유를 마시고 있는 게으름뱅이 하나.
나는 그 뒤로 몰래 접근해 의자를 확 하고 뒤로 젖혔다.
“왁!”
귀여운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와중에도 초코우유에 꽂아 놓은 빨대를 입에서 떼놓지 않는 이유지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굴려놓고 너 혼자만 농땡이 치고 있냐?”
“어떤 놈이…… 응? 뭐야. 네가 여기 왜 있어?”
“이태영한테 볼 일 있어서.”
“……그래? 마침 잘 왔다. 전에 물어봤던 그 마물 말인데.”
“어. 그건 대충 해결된 거 같아.”
“다행이네. 사실 근처에 물어봤는데 아무도 모르더라고.”
내가 온 것을 확인한 이태영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선배. 물어볼 사람이 딱히 저 말고는 없잖습니까.”
“닥쳐.”
“…….”
그래도 계속해서 마음 써준 게 기특했다.
나는 툴툴대고 있는 이유지에게 선심 쓰듯 말했다.
“어쨌든, 고맙다. 고생했으니까 선물이라도 하나 줄까 하는데.”
“에? 갑자기 웬 선물. 무슨 선물인데?”
“맞춰봐.”
“흐음. 먹을 건가? 혹시 달콤한 초콜릿이라던가?”
“지금도 초코우유 마시고 있으면서 무슨…….”
“당은 채워도 채워도 모자란 법이야. 초콜릿이 아니면 뭔데?”
“거의 맞출 뻔했는데 틀렸어. 선물은 특별히 나랑 사진 찍을 수 있는 기회야.”
“엑.”
내 말에 이유지가 날 징그럽다는 듯이 본다.
“그게 어떻게 선물이야?”
“아니. 너한테는 선물 맞지 않나…… 너 사진 찍는 거 좋아하잖아?”
“응? 무슨 사진……아!”
고개를 갸우뚱하던 이유지가 그 말뜻을 이해했는지 얼굴이 붉어진다.
아직도 내 휴대폰 속에는 죽을상으로 감사패를 받던 이유지의 사진이 보관되어 있다.
“야, 너 죽는다. 진짜!”
“크흐흑. 아니, 난 진짜로 그런 줄 알았지. 그래서 안 찍을 거냐?”
“안 찍어!”
“싫으면 말고. 이태영. 나랑 사진 한 장 찍자.”
어차피 실험 대상은 하나면 충분하다.
나는 곧장 이태영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사진이라…… 생각해 보니 저도 누군가랑 사진 찍은 적은 딱히 없는 것 같네요.”
“그래?”
“……예. 항상 일에 치여 살다 보니까 도저히 사진 찍을 몰골이 아니더라고요.”
누가 보면 사건 현장 기록해 놓은 사진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태영이 그런 농담을 했다.
나는 낄낄대면서 이태영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 보니 가득 내려와 있던 녀석의 다크서클이 많이 줄어 있었다.
그 덕분인지 평소보다 더 젊어 보이기도 했고.
노안의 원인은 피로였구나, 태영아…….
“그놈 잡고 나서 전국에 나타나던 미확인 균열이 현저히 줄어들었어요. 역시 놈이 원흉이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그놈은?”
이태영이 이유지의 눈치를 보더니 귓속말로 내게 말했다.
“지하실에 가둬놨습니다.”
“좀 있다 확인하러 가도 되지?”
“예? 뭐 때문에요?”
“확인할 게 있어서. 그 녀석 잡을 때 조금 이상한 게 있었거든.”
“원래 외부인은 출입 금지인데…… 뭐, 형님은 괜찮을 거 같네요.”
찰칵-
사진은 제대로 찍혔다.
얼굴이 아주 약간 달라진 만큼 사진 속에도 더 이상 오징어는 없었다.
이태영이 나와 사진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물었다.
“형님. 이제 와서 묻는데, 얼굴이 평소보다 좀 다른 거 같은데요?”
소성환도 그렇고, 이태영도 그렇고.
둘 다 알아차리는 게 늦다.
……사실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거 아니야?
“그래? 뭐가 달라졌는데?”
“에. 뭔가 설명이 어렵네…… 그동안 얼굴에 가면이라도 쓴 건 아니죠?”
말이 너무 심한데.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아서 더욱 가슴 아팠다.
“미안하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사진을 보는 척하면서 기능을 확인해 보았다.
이태영과 내가 나란히 찍힌 사진.
그것을 클릭하자 화면에 지도가 나타나더니 이내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균열 관리부가 클로즈업되었다.
균열 관리부 내에 찍혀 있는 빨간 점.
이게 이태영이리라.
이렇게 알려준다는 거였구나.
마치 GPS를 보는 것 같다.
발동 조건이 이상하긴 하지만, 상대방의 위치를 알 수 있단 점은 꽤나 유용하다. 필요한 때가 오겠지.
이제부터 내 취미는 누군가랑 사진 찍기다.
“어쨌든 고맙다.”
“사진 한 장 찍었다고 고맙긴요. 그럼 이제 갈까요?”
“……나도 한 장 찍어.”
내가 이태영과 둘이서 이야기하는 걸 지켜보고 있던 이유지가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끼리만 서로 웃으며 대화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잔뜩 삐친 표정이다.
“안 찍는다며?”
“너 지금까지 이상한 사진만 봐왔잖아? 가만히 있으려니까 내가 너무 억울해서.”
생각해 보니 첫 만남 때도 얘랑 사진 찍었었지. 그때도 여러 가지 요구하는 기자 때문에 잔뜩 심통이 나 있는 표정이었다.
내 취미이기도 하고 사진 찍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니깐.
“그럼 찍는다.”
“잠깐만!”
“……무슨. 별꼴 다 보여 놓고 이제 와서 거울을 보냐?”
“흐응. 누구와는 다르게 나는 귀여워서 사진빨도 잘 받거든. 이왕 찍는 거 잘 나와야지.”
이태영과 마찬가지로 이유지 또한 한결 피로가 풀린 얼굴이다.
평소에는 특유의 뚱한 표정 때문에 가려져 있지만, 얼굴만 보자면 꽤나 귀여운 편에 속한다.
머리를 살짝 정돈한 이유지가 두 손가락으로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다.
“됐다. 자, 그럼 찍자!”
“제가 찍어드릴게요.”
“아니. 나도 너네처럼 찍을래.”
이유지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는 어깨동무를 한다.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내 뺨에 닿고, 달콤한 복숭아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야. 머리카락 때문에 간지럽다.”
“왜? 더 간지럽게 해줘?”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이유지의 왼쪽 팔이 짐승의 그것으로 변했다.
날카로운 발톱이 내 목을 조심스럽게 둘렀다.
완전히 호랑이한테 붙잡힌 인간이다.
“야, 무슨…….”
“이거 좋아한다며? 내가 특별히 서비스해 주는 거야. 어때, 고맙지?”
어깨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허튼짓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보였다.
이야. 사진 한번 찍는데 이렇게 살벌할 수가 있나.
팔을 쭉 뻗어 사진을 찍으려다가 문득 실험할 게 생각났다.
사진에 찍힌 사람의 얼굴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제대로 적용되는가 하는 아주 중대한 문제다.
절대로 장난 같은 것이 아니다.
“셋 하면 찍는다.”
“좋아. 내가 센다? 하나, 둘.”
“셋.”
“세…… 엑?”
사진이 찍히는 순간.
반대쪽 손으로 이유지의 양쪽 볼을 붙잡았다.
“웁!”
문어의 입처럼 동그래진 이유지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가 사진에 찍혔다.
역시 사진은 잘 나왔다.
나는 곧장 어깨동무를 풀고 빠져나왔다.
“뭐 하는 거야!”
오…….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찍히기만 한다면, 대상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어도 위치 추적이 가능하단 게 증명되었다.
“제대로 다시 찍어!”
“미안하지만, 특권은 여기서 끝이야.”
미리 밖으로 빠져나가 있던 이태영을 따라서 도망쳐 나왔다.
* * *
지하실로 가기 위한 엘리베이터 속.
아까 그 모습을 떠올리며 실실 웃고 있던 내게 이태영이 내게 말했다.
“앞으로도 선배랑 친하게 지내주세요. 형님.”
“네가 무슨 초등학교 때 햄버거 돌리시는 학부모냐?”
“하하…… 선배가 저래 보여도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요.”
지하실에 도착하자 온몸이 묶여 있는 군영철이 보였다.
“어우. 야.”
그냥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온몸이 무언가에 긁히고 베인 상처가 가득하다.
손톱도 전부 다 빠져 있었고, 성한 곳이 없었다.
이태영이 손가락을 들어 코로 가져가더니 살짝 윙크했다.
“선배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얘. 은근히 살벌한 구석이 있네.
“형님도 별로 놀라시진 않네요.”
어째선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패닉에 빠질 만한 일들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된 나다.
예전에도 무서운 건 딱히 없었지만, 근래는 더하단 말이지.
나는 품속에서 스위치 하나를 꺼내서 묶여 있는 놈에게 다가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배후 같은 건 없어.”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리는 군영철.
나는 놈의 뺨을 툭툭 치고 내 얼굴을 확인시켜줬다.
“너는……!”
“잘 있었냐?”
“네놈 때문에 모든 게 망쳐졌다!”
“그러게 누가 그런 짓 하고 다니라 했나.”
나는 스위치를 군영철에게 보였다.
“……! 그건 네놈이 다룰 물건이 아니다! 당장 내놔라!”
“왜? 소중한 거라도 되냐?”
“하! 네놈이 그것의 가치를 어떻게 알겠나! 어떤 꼼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네놈이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누가 줬는데?”
“그거야 당연히……!”
자연스러운 유도에 답을 꺼내려던 녀석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흐흐…… 그런 유도 심문에 넘어갈 것 같으냐?”
“아니, 이미 넘어갔는데.”
저런 반응을 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배후가 있다는 뜻이다.
누구인지 말할 필요는 없다.
이 녀석의 본거지를 확인할 아주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지금 뭐 하는 거지?”
“뭐 하긴 사진 찍는 거 처음 보냐?”
“……사진?”
이야 앵글 잘 나오네.
느와르 영화라도 찍고 있는 거 같아.
내가 범인이고, 이놈이 피해자.
실상은 정반대지만.
“자, 찍는다.”
이왕 찍는 거니까 웃어라.
스마일.
* * *
다음 날.
어제와 같이 황혼 길드의 훈련실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내 몸이 버틸 수 있는 아슬아슬한 수준의 강도.
소성환이 날 징그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렇게 하루 종일 무식하게 운동하는 놈이 어디 있어?”
그도 그럴 게 아침에 와서, 해가 질 때까지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오로지 운동만 반복했다.
물론 쉬는 시간이 있긴 하다.
꿀꺽-
체력을 회복시켜 주는 물약이 있는데, 굳이 쉬는 데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보통 이런 식으로 몸을 혹사하면 육체에도 무리가 간다는데, 변화한 몸 그리고 물약 때문인지 이상은 없었다.
물론 정신적인 피로는 무시할 수가 없었지만, 그건 머릿속에 있는 순둥이의 알을 상상하면 오기로라도 버틸 수 있었다.
소성환이 내 페트병을 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그거 음료수 맞지? 나도 한 입만 줘라.”
“싫습니다.”
“치사하긴…… 최소한 어디서 파는 지라도 알려주면 안 되냐?”
어디서 팔긴.
당신이 속한 황혼 길드에서 팔지.
페트병에 담겨 있어서, 물약이라고는 생각 못 하나 보다.
“자, 그럼 오늘도 한 판 해야지?”
실실 웃는 얼굴.
저 모습을 보자니, 더욱 오기가 생긴다.
소성환이 링 위에 올라가 내게 들어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난 가만히 있을 테니까, 네가 계속해서 들어와.”
“그거 말인데, 좀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조장님 쪽에서 들어오고, 저는 피하고.”
“야…… 그게 상식적으로 될 거 같다고 생각하냐?”
“직전에 멈추시면 되잖아요.”
“씁…… 뭐,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니까. 알았어. 한번 해보자.”
붕!
인지할 수도 없는 속도로 소성환의 주먹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몇 초 후.
똑같은 공격이 다시 나를 향해 날아왔다.
오른쪽 뺨. 물론, 피할 수는 없다.
눈으로나마 쫓기 위해 안간힘을 써 볼 뿐이지.
“이 정도면 되냐? 야, 솔직히 이건 피하고 뭐고 할 게 아닌데?”
“아뇨. 딱 좋아요. 계속 이렇게 해주시면 됩니다.”
“……너 무슨 이상한 취향 있는 건 아니지?”
소성환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무시하고 방금 그 감각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찔한 감각.
만약 진심이었다면 그대로 안면에 주먹이 박혔겠지.
“지금이라도 그냥 내기 포기하고 형이라고 부르는 건 어때? 내가 말했는데도 솔직히 양심에 찔리는 내용이란 말이야. 흐흐.”
“그러면 재미없잖아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죠.”
“오. 그런 마인드는 좋아. 우리 전투조들보다도 괜찮은데? 이참에 그냥 황혼에 들어오는 건 어때? 내가 잘해줄게.”
웃고 있는 게, 정말 자신이 한 방 먹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거면 된다.
절대 닿을 리가 없다고.
내기의 승자는 자신이라고.
그 마음이 단 한 순간의 방심을 유도할 것이다.
나는 소성환을 향해 마주 웃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33화
13. 던전에서 만난 사람들(1)
수건을 적셔 알을 반짝반짝 닦으며 할 일을 체크했다.
어차피 훈련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다.
“첫 던전인가…….”
각성자의 등급을 높이기 위해서 던전에 가게 되었다.
오전에는 황혼 길드에서 소성환과 훈련을 하고.
오후에는 던전에서 실전을 겪는다.
완벽하게 짜인 플랜이다.
내가 살면서 이런 식으로 계획적인 삶을 살았던 적이 있었던가.
“조금 긴장되네.”
삼 주 후에 4층 규모의 던전에 따라가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처음 겪는 던전이기에 기대되기도 하면서도 긴장되었다.
“아무래도 던전이라면 챙겨갈 물건들이 많겠지?”
소성환만 해도 그 거대한 도끼를 들고 다니고. 황혼에서 본 전투조들도 전부 비싸 보이는 장비들을 착용하고 있었다.
“나도 장비를 사야겠어.”
당시 백화점에서 확인한 장비들의 가격을 떠올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부분이 억대의 물건들이다.
특히 던전 보스의 사체로 만들어진 장비 같은 경우에는 그 가격이 수십억에 다다르는 경우도 있다.
보통의 마물들과는 다르게 던전의 보스는 초기화 과정을 거치기 전, 단 한 번만 출현하니까.
이따금 나타난다는 정예 마물 또한 보통의 마물과는 가격이 남달랐다.
“음…… 정예 마물로 만든 장비 정도는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막상 로또에 당첨되고 제대로 써 본 적이 없네.
후원 몇 번 했고…… 옷 몇 벌 사고…….
그나마 값나가는 걸 산 게 아이기스의 방패뿐이다.
그때는 던전에 들어갈 거란 생각을 못 했으니깐.
저번에 못 한 쇼핑이나 제대로 할까.
물론 적당한 선에서.
부웅-
정해연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어차피 매일같이 황혼에 출석하는데, 직접 말하면 되지 않나?
별다른 내용은 아니었다.
이전에 만났을 때도 들었던 말.
[물약의 판매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파는 거구나. 아무래도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네.
“잠깐…….”
잊고 있었던 당연한 사실을 떠올렸다.
팔렸다.
그 말인즉슨…….
나는 조심스럽게 인터넷 뱅킹 어플을 눌렀다.
“일…… 십…… 백…… 천……만…… 십억…… 백억…….”
끝없이 밀려오는 0의 향연에 허탈한 웃음소리만이 튀어나왔다.
“허허…….”
……이거 다 쓸 수는 있을까?
* * *
각성자.
던전을 떠도는 자들.
남녀노소 나이를 구분하지 않고 가장 선호하는 직업 중 하나다.
언제나 인기 있는 이유는 하나다.
돈이 되니까.
사회적으로 유명한 각성자가 한 방송 매체를 통해 자신의 수익을 공개했다.
그야말로 일인 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금액.
그 전까지는 지구를 지키는 영웅 비슷한 포지션이던 그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돈 많은 영웅.
‘목숨을 건다.’
혹자는 말한다.
전부 먹고 살자고 그러는 건데 목숨까지 거는 건 너무 한 것 아니냐!
그러기엔 너무나도 큰 금액이었다.
결국 각성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하루하루 늘어만 가고 있다.
각성의 조건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단순히 운이라는 소리도 있다.
각성자가 되었다.
던전에 들어갈 자격을 충족했다는 의미이며.
그야말로 로또에 당첨된 급의 운이 작용했다는 뜻이다.
“각성자가 되기는 했는데…….”
하지만 각성자라고 해서 모두 같은 각성자는 아니다.
개인마다 다른 고유 능력들.
애매한 능력을 얻게 된 각성자들은 맘 놓고 기뻐할 수가 없었다.
각성을 했으니 평범하게 살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높은 층의 던전으로 향하자니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 것 같고.
길드에 들어가고 싶어도 스카우터들은 접근조차 한 적 없다.
어디에서 볼 법한, 일반인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평범한 각성자들.
그런 자들이 모이는 곳이 1층 던전이다.
“오늘은 겨우 하나 예약했네.”
그렇다고 1층 던전의 수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돈 되는 던전은 길드의 소유였고, 그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각성자들은 던전을 이용하려면 국가 소유의 던전을 예약해야만 했다.
물론 1층 던전일지라도 웬만한 직업보다는 수익이 좋았기에 예약을 잡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인 없는 던전을 떠도는 자들.
남겨진 자, 떠돌이.
초기 각성 등급 E+를 받은 나봉팔도 떠돌이 중 하나였다.
1층 던전의 정원은 총 5명.
나봉팔은 인천 동구에 있는 1층 던전 ‘고블린의 숲’ 앞에서 이후에 올 각성자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해.”
어느새 던전은 지구에 완전히 녹아들게 되었다.
그 옛날 사람들에게 미래에 괴물이 나오는 던전이 도심 속에 있다고 말해준다면 어떻게 될까.
1층 던전 고블린의 숲.
동굴처럼 생긴 형태의 입구 옆에 솟아오른 작은 석판.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언어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해석할 수 있는 것이라곤 최상단부에 위치한 던전의 이름뿐이다.
“안녕하십니까.”
“예. 안녕하슈.”
오후 2시에 던전에 들어가기로 예약되어 있는 각성자들이 속속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오…….’
핫팬츠에 배와 어깨가 드러나는 배꼽티를 입은 젊은 여성이 요사한 웃음을 지으면서 다가왔다.
기본적으로 던전은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곳이다.
당연히 저런 복장은 던전에 어울린다고 할 수 없었지만.
‘내 알 바는 아니지.’
이미 1층 던전을 여러 번 와 본 경험이 있는 그다.
애초에 다섯 명이 아닐지라도 충분히 공략이 가능한 곳이고.
나봉팔 본인 또한 고블린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간단한 옷을 입고 있을 뿐이었다.
‘나야 눈요기하고 좋지.’
그만 그런 것이 아닌지, 방금 도착한 다른 남성 또한 그 여성을 계속해서 힐끗 쳐다보고 있다.
“앞으로 두 명 남았나?”
“거. 어차피 1층 던전인데 이대로 들어가는 건 어떻수?”
‘허세 부리기는.’
헤벌쭉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가 허리를 곧게 펴며 허세를 부리고 있다.
그 노골적인 속내에 나봉팔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각성자라고 해서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있는데, 저런 걸 보면 어딜 가나 사람은 똑같다.
‘크흠.’
물론 계속해서 눈이 돌아가는 나봉팔 또한 그러했으나, 본인은 저 녀석보다는 낫다고 자기 위안을 할 뿐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때, 저 멀리서 한 명의 남성이 걸어왔다. 사실 늦은 것도 아니었다.
아직 들어가기까지는 십오 분 정도 남았으니까.
다만, 형식상으로나마 일찍 모이는 것이지.
“당신. 던전이 장난인 줄 알아?”
껄떡거리고 있던 남자가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은지 호통을 쳤지만, 이내 보인 사내의 모습에 모두가 움츠러들었다.
“제가 던전은 처음인지라. 죄송해요.”
‘……무슨 장비가 저래?’
던전이라고 해봤자 1층이다.
위험하지도 않고, 고작해야 ‘앵벌이’라고 부르는 게 어울리는 난이도.
돈 많은 일반인들이 시계, 차, 집 같은 거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낸다면.
각성자는 자신의 장비로 본인을 과시한다.
‘대충 봐도 수십억은 넘을 거 같은데……?’
입고 있는 옷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그가 신고 있는 부츠는 알 수 있었다.
‘천공 부리새’의 깃털로 만든 신발.
착용자의 민첩을 올려주는 보스급의 장비다.
그로서는 살 수도, 구경할 수도 없는 물건이다.
분명히 던전이 처음이라고 했었다.
‘어디 부잣집 도련님이 던전 체험이라도 하려고 왔나 보군.’
간혹가다 저런 사람들이 있기야 하다.
공원이라도 돌 듯, 값비싼 장비를 사용해 무쌍을 하는 놈들.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었기에 신경 끄는 게 심상에 이롭다.
“어머. 오빠, 옷 정말 멋진데?”
“……큭.”
열심히 자기 어필을 하던 남성이 그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그 한심한 모습을 지켜보던 나봉팔이 몰래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럼 다 오신 거죠?”
한 명이 비었지만, 이렇게 되면 분배할 인원이 적어지니 오히려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또 다른 인물이 걸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위치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위치라 해봐야 인터넷에 치면 전부 나오는데 뭐가 오래 걸린다는 거야?
불만을 내비치려던 나봉팔이 다가오는 인물을 보고 입을 닫았다.
조금 전에 왔던 사내와는 다른 느낌의 침묵이었다.
자신의 어깨높이에 닿을까 말까 한 아담한 체구의 소녀.
혼혈이라도 되는지,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의 머리가 돋보였다.
누가 봐도 이런 던전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클럽에 놀러 온 듯한 복장의 여자 한 명.
어디 잘 사는 부잣집 도련님 한 명.
신비로운 분위기의 소녀 한 명.
껄떡거리는 양아치 같은 놈 한 명.
‘……이거 괜찮은 건가.’
남은 시간은 3분.
어찌 됐든, 이 사람들과 같이 들어가야 한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들 한번 하죠. 제 이름은 나봉팔입니다.”
“흐흐. 형씨, 이름이 유치한데? 난 송민창이요.”
“박진주예요~ 오빠들 오늘 신세 좀 질게요?”
“그럼! 내 등만 졸졸 따라다녀! 내가 이래 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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