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efato 2

부분이 모르는 것들이다.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할 정도의 퀄리티 높은 음식들.
‘맛있다!’
이서진은 급하게 음식을 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정해연이 젓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조기의 살점을 뜯어먹고 있었다.
“크, 크흠…….”
너무 게걸스럽게 먹었나. 시선이 마주치자 정해연이 눈웃음을 짓는다.
“음식은 입에 맞으신가요?”
“아. 예! 되게 맛있는데요. 처음 먹어보는 것들뿐이고.”
“후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원하신다면 앞으로도 종종 이곳에서 식사를 하도록 하죠.”
“그거 좋죠!”
평범하게 음식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남아 있던 어색함이 사라졌다.
대형 길드장과 평범한 하루살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이서진은 지금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식사를 끝마치고 디저트를 먹고 있을 때쯤.
“사실 오늘은 드릴 것이 있어서 이곳으로 모시게 됐습니다.”
“예?”
이 음식으로도 충분한데.
정해연은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이상한 알이 담긴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뭐지? 타조알인가?’
“제가 이전에 공략했던 던전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타락한 페어리의 정원이었나요?”
“예. 맞습니다. 이것은 그곳에 있던 요정들이 지키고 있던 알입니다.”
정해연은 케이스를 이서진에게로 넘겼다.
“이걸 왜 저한테……?”
“이전에 말했지 않습니까. 저희를 구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을 드리겠다고. 이것이 그 답례입니다.”
마치 수석을 연상시키는 새까만 색의 돌.
이서진은 이것이 뭐냐는 듯 정해연을 바라보았다.
“부끄럽습니다만, 저희 길드 쪽에서도 이것이 무슨 용도의 물건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요?”
“예. 연금술사 길드에 감정을 요구할까도 했지만 관뒀습니다.”
“예? 왜요?”
“이서진 님이라면 유용한 곳에 사용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굳이 멀리까지 갈 필요 있겠습니까.
정해연이 작게 웃었다.
“…….”
정해연의 추측대로 이서진은 이것이 무슨 용도의 물건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이곳저곳 만지면서 바라보고 있자 나타난 상태창.
마치 집에 있는 물건들을 확인할 때와 비슷했다.
[해당 물체의 정보를 표시합니다.]
[경고! 해당 물체에는 정보 차단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스캔 대상 【만물의 주인】 이서진]
[강제적으로 정보를 열람합니다!]
* * *
「멸망용 ‘?????’의 오염된 알」
설명: 타락한 요정들이 드래곤의 레어에서 몰래 훔쳐온 멸망용의 알이다. 자신들의 주인으로 삼기 위해 부화를 시도했으나, 침입자들로 인해 저지되었다.
*부화까지 720시간 28분 23초 남았습니다.
*오염된 상태에서 알이 부화할 시 멸망용이 깨어나며, 해당 위치에 10층 규모의 던전 『멸망용의 분노』 가 강림합니다.
*현재 알에는 파손 보호 마법, 마력 차단, 정보 차단 마법 등의 고대 마법이 걸려 있는 상태입니다.
* * *
“마음에 드십니까?”
“…….”
이서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무슨…… 핵폭탄을 선물해 줬는데?’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14화
5. 오염된 알(3)
‘나 멕이는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초롱초롱한 정해연의 눈동자를 보자니 그런 의도는 전혀 없는 모양이다.
“마음에 드십니까?”
“……그렇죠. 아주 멋진…… 알이네요.”
“……! 그것이 알이란 말입니까?”
“뭐, 돌 같지는 않고, 이만한 크기에 동그란 모양하면 알밖에 없죠.”
“그렇군요. 혹시 무슨 알인지도 아십니까?”
무슨 알이냐라.
현재 지구상에서 나타났던 가장 큰 규모의 던전은 6층이다.
그것만으로도 인류는 꽤나 큰 피해를 겪어야 했다.
이 타조알 같은 게 멸망용이라는 생물의 알이고.
그것이 곧 부화를 하며, 잘못하면 10층 규모의 던전이 서울 한복판에 강림한다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거까진 모르겠네요.”
“그렇습니까. 그래도 역시 서진 님에게 드리길 잘한 것 같습니다. 저희는 그것이 알이라는 것조차 알 수 없었거든요. 혹시…… 요정의 알인가?”
톡톡-
알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면서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는 정해연.
완전히 호기심에 찬 모습이다.
‘조용히 하자.’
당장 부화한다면 모를까, 이것이 부화할 때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대충 한 달 정도인가.
아예 방법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얼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떠올랐기에 입 다물고 있기로 했다.
알을 들어보았다.
두 손 가득히 들어오는 묵직함.
이 안에 그렇게나 무서운 생명체가 있단 말이지.
꿈틀!
“뭣…….”
잠깐이지만, 알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 떨어뜨려 깨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나는 케이스에 공손히 알을 집어넣고는 식어버린 음식을 한 입 넣었다.
“음.”
방금까지 맛있게만 느껴졌던 음식들이 어쩐지 약간 쓰게 느껴졌다.
“음식 더 시켜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그렇습니까. 오늘은 즐거웠습니다. 이서진 님.”
내게 공손히 말하는 정해연을 보고 있자니, 이전부터 신경 쓰이던 것이 떠올랐다.
“말 좀 더 편하게 하셔도 돼요.”
“예, 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해연은 나에게 있어서 지나칠 정도로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앞으로 한두 번 만날 것도 아니고, 이 딱딱한 호칭도 바꿀 때가 됐지.
“그. 그럴 수는…….”
“그럼 저도 황혼 길드장님이라고 부를게요.”
“그건 안 됩니다!”
그녀는 고민하듯 머리를 싸매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 씨로 괜찮겠습니까?”
“예. 그거면 충분해요. 해연 씨.”
남들과는 평범하지 않던 몸으로 친구조차 없던 나다.
정해연은 이래도 되나 싶은 얼굴로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친구 하나 생겼다는 기분에 흐뭇하게 웃었다.
* * *
“그럼 그만 일어나죠.”
끼익-
“응?”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그들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
“이거 황혼 길드장 아닌가. 이런 곳에서 다 보는군!”
수호 길드장 안환재.
그는 아침부터 술이라도 걸친 것인지 붉어진 얼굴로 정해연을 응시했다.
“……예. 안녕하셨는지요.”
“별로 안녕하진 못하군. 아무리 나라도 이전에 자리를 파한 사람을 이런 곳에서 만나는 건 그렇게 달갑지가 않아.”
“그건 죄송하게 됐습니다. 조만간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중요한 일이 있었는지라.”
“중요한 일이라…….”
안환재의 눈이 정해연의 옆에 있는 인물에게 돌아갔다.
“그자와 식사를 하는 것이 나보다 더 중요하다 이건가?”
본 적 없는 얼굴이다.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인상.
저런 시원찮아 보이는 사람이 수호 길드장인 나보다 중요한 인물이라 이거군.
안환재의 얼굴에서 술기운이 사라지며, 그의 눈동자가 옅은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지금 무슨 짓을……!”
“기다리시죠.”
안환재의 옆에 있던 인물이 정해연을 가로막았다.
찌릿-
싱긋 웃는 표정으로 자신을 가로막는 사내.
일부러 밖으로 흘리는 힘으로 판단하건대,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쩌란 거야?’
잠시간의 눈싸움이 벌어지고, 그는 이제 됐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옆으로 비켜섰다.
정해연은 곧바로 안환재와 이서진의 사이를 막아섰다.
‘잠깐이지만 방치해 버렸어.’
지금 안환재가 한 짓은 보이지 않는 힘 싸움이다.
자신의 마나를 이용해 상대방을 압박하는 행위.
비슷한 수준의 각성자라면 맞받아칠 수 있겠지만.
이서진은 다르다.
그는 연금술사다.
노년의 나이에도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안환재의 기운을 받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장 혼절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랬어야 했는데…….
“……어?”
이서진의 얼굴을 본 정해연이 자신도 모르게 기운 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서진이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는 사람이에요? 혹시 할 이야기 있으면 저 혼자 돌아가도 되는데.”
안환재의 압박을 면전에서 받았음에도 아무런 변화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신경 써주면서 살짝 웃는다.
“오늘 식사 맛있었어요. 다음에 또 와요. 그땐 제가 살 테니까.”
조금 전부터 미세하게 흔들리는 케이스.
이서진은 그것을 두 손으로 제 품에 안았다.
앞에 있는 노년의 사내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누굴 만나나 했더니, 범상치 않은 인물이긴 하군.”
“지금 무슨 짓을 하신 건지 아십니까……!”
정해연이 분노했다.
자신의 소중한 손님에게 그런 짓을 한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주변 공기가 가라앉으며 그녀의 눈이 붉게 물든다.
안환재는 웃으며 그녀의 기운을 받아냈다.
“장난일세 장난. 나한테 있어선 악수나 다름없는 행동이지. ……오히려 아무 반응도 없으니 이 늙은이가 부끄러워지는군.”
큭-
정해연이 입술을 물었다.
몰아붙이던 기세는 사라지고, 어느새 자신이 미세하게 밀리고 있었다.
서진 씨는 이런 것을 직접 받아냈다는 건가?
안환재가 돌연 기운을 풀었다.
“그만하지. 이 늙은이가 주책을 부렸군. 그 친구에게도 미안하다고 전해주게나.”
이만 들어가지.
안환재가 방으로 들어가고, 정해연이 이서진을 쫓아 건물 밖으로 나갔다.
“힘 조절이 능숙하십니다. 역시 수호 길드장님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려. 아무래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진심을 낼 수는 없지.”
그렇게 말하는 안환재의 눈이 가라앉았다.
처음엔 단순한 테스트였다.
손주와의 소개팅은 단호하게 거절해 온 정해연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감싸듯이 지키고 있는 사내.
그 모습을 보자니 잠시 짓궂은 행동을 하고 싶었다.
안환재의 오래된 악취미.
과하게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상대방의 수준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정도면 충분하다.
‘……!’
하지만 안환재는 압박을 가하는 순간, 자신의 마나가 그의 근처에서 허무하게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촘촘하게 짜인 방어벽.
오히려 자신의 마나를 침식하는 불길한 기운에 그는 급하게 힘을 거두어야만 했다.
타인의 마나에 간섭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 사람과의 실력 차이가 확연하게 나야지만 가능한 행위.
그가 한 것은 어린아이의 장난을 받아내는 어른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다만, 그 어린아이란 것이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각성자인 안환재라는 게 문제였다.
‘……그런 인물과 연을 맺고 있었다는 건가. 황혼 길드장.’
“무슨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닐세. 어서 들지.”
노년에 맞지 않는 강한 투쟁심이 그의 눈에 깃들었다.
* *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조심스럽게 알을 내려놓았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했는데.”
분명히 움직였다.
특히 복도에 있을 때는 그 흔들림이 심해서 떨어뜨릴까 봐 조마조마했지.
“내가 널 어쩌면 좋냐…….”
* * *
「멸망용 ‘?????’의 오염된 알」
설명: 타락한 요정들이 드래곤의 레어에서 몰래 훔쳐온 멸망용의 알이다. 자신들의 주인으로 삼기 위해 부화를 시도했으나, 침입자들로 인해 저지되었다.
*부화까지 719시간 37분 23초 남았습니다.
*오염된 상태에서 알이 부화할 시 멸망용이 깨어나며, 해당 위치에 10층 규모의 던전 『멸망용의 분노』 가 강림합니다.
*현재 알에는 파손 보호 마법, 마력 차단, 정보 차단 마법 등의 고대 마법이 걸려 있는 상태입니다.
* * *
다시 확인해 보아도 어마어마한 놈이다.
이 알이 깨어난다면 10층 규모의 던전이란 재앙이 강림하게 될 터.
“오염된 상태라면 그렇겠지.”
그렇다면 이 알을 ‘정화’한다면 어떻게 될까?
오염에서 벗어난 알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던전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정화한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수중에는 그것을 위한 물건들이 존재했다.
「물약이 나오는 정수기」
집 근처에서 사 온 미니 욕조에 물약을 쏟아 넣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친 심신을 치유하는 방석」
방석의 위에 욕조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스러운 빛을 발하는 손전등」
“빛이, 있으라!”
딸칵!
소리와 함께 손전등이 켜졌다.
손전등을 줄에 매달아 욕조 위에 두었다.
이것은 세 가지 물건을 활용한 삼신기.
조심스럽게 알을 들어 욕조 안에 넣었다.
“무슨 달걀 삶는 것도 아니고.”
모양새는 이상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멸망용 ‘?????’의 오염된 알」이 성스러운 힘에 노출됩니다!]
[정화율-1%]
“좋았어!”
예상했던 대로 정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기쁨도 잠시, 욕조에 담아두었던 물약들이 빠른 속도로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오염된 물약을 그냥 버릴 수도 없기에 기존에 있던 물약이랑 일정 비율로 섞은 다음에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 때마다 욕조에 물약을 갈아주기를 반복했다.
“옳지, 옳지. 착하다.”
기분이 좋은지, 양옆으로 흔들리는 알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한숨이 나온다.
“애완 강아지 목욕시키는 것도 아니고, 애완 알을 목욕시킨다라…….”
당분간 집에 사람 부르는 건 자제해야겠네…….
그토록 꿈에 그리던 평범한 일상을 얻게 된 지 며칠.
난데없이 알을 키우게 되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15화
6. 저게 왜 보이냐(1)
“으어어…… 살려줘…….”
“선배, 이거 마시고 하세요.”
“오! 땡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입 빨아먹은 이유지가 살겠다는 듯, 파-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뒤로 몸을 젖히며 끄윽-하고 기지개를 켰다.
“일이 너무 많잖아…….”
“일이 많을 때가 다행인 거로 아세요. 그나마 미확인 균열은 없다는 거니까.”
그 소리를 듣자마자 소름이 돋는다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떤다.
“어우. 끔찍한 소리 좀 하지 마라. 저번 일 생각만 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네…….”
피식 웃은 이태영이 아직 마시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그녀에게 건넸다.
“요즘 들어 심해지고 있긴 하네요.”
“그렇지? 이게 다 이 멍청한 기계가 못 잡아낸 탓이라고.”
쾅쾅-
균열 감지기를 내려치는 행동에 이태영이 기겁을 했다.
“그거 고장 나면 선배 몸에 균열이 나버릴 텐데.”
“아, 몰라. 몰라.”
그들 말고도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전국에서 발생하는 균열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균열 관리부 소속의 인재들이다.
[이번 달 내에 나타난 미확인 균열만 3개. 이대로 괜찮은가?]
[균열 관리부의 관리 미흡. 시민들 불안감에 휩싸여……]
“관리 미흡은 무슨! 저거 쓴 놈 누구야!”
“또 뉴스 보고 계시네. 그런 거 보지 말라니깐…….”
“아니,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전부 이 멍청한 기계가 못 잡아내서 그런 거 아니야! 이 멍청한 놈이!”
“선배! 진짜 부서진다고! 야! 이 새꺄!”
결국 기계로부터 멀리 떨어뜨리기로 결심한 이태영은 그녀를 끌고 쉼터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잊진 않으셨죠?”
“뭘?”
“미확인 게이트 대처해 준 각성자한테 감사패 전하기로 한 거요.”
“아~ 그거…….”
“그 사람 아니었으면 분명 뭔 일 일어났을걸요.”
그 일이 마물에 의한 살인이란 사실은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이태영은 그 각성자에 대한 것을 떠올리고는 말했다.
“예.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게 있던데요.”
“싸우는 모습이 이상하긴 하더라.”
“아니, 그게 아니라. 신원 조회를 해보니까 민간인으로 나오더라고요.”
“잘못 검색한 거 아니야?”
“아뇨. 24세 이서진. 맞습니다. 무직이고요.”
“흠…….”
균열에서 나오는 마물을 대하는 태도를 봐서는 확실하게 각성자다.
자신의 각성 사실을 협회에 등록하지 않은 미확인 각성자.
몇 년 전 일어난 그 사태 이후로 확실하게 불법이 된 사항이다.
“……뭐. 깜빡했나 보지.”
“예? 설마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이거 보고하지 않아도 됩니까?”
“그 사람 아니었으면, 우린 욕먹는 수준으로 끝나지도 않았겠다며? 그냥 감사패 건네면서 조용하게 한마디 전해.”
“예. 그렇게 하죠.”
“하여간…….”
균열이란 건 왜 나오는 건지.
신인지 뭔지는 몰라도 나한테 잡히면 죽여 버릴 거야.
까득-
이유지는 얼음을 잘게 씹었다.
* * *
[균열 관리부 소속, 이태영입니다. 지난번 미확인 게이트를 막아주신 것에 대한 감사패를 전해드리기 위해 연락드렸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런 게 있었지.”
근래 하도 기이한 일들을 많이 겪어서인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는 포상금 같은 거에 연연할 필요도 없고…….”
[잔고 : 4,030,000,000]
보고 또 봐도 내 잔고라는 게 믿기지 않는 금액이다.
1등 당첨 금액이 12억.
5게임이니깐 60억이었지만, 세금을 떼고 나니 40억 2천 정도가 들어왔다.
억이라…….
내가 지난 세월동안 죽을 각오로 모아둔 돈이 천만 원이다.
저 돈 모으겠다고 병은 더 악화되어가고, 약 값은 꾸준하게 나가고…….
그래도 살아가는 데 희망이라도 얻자고 꾸준히 모았었는데.
“이제 그 시절로 돌아가면 수술도 가능하겠네.”
물론 지금에서는 수술도 보험도 필요 없었다.
물 한 잔이 내게는 그 어떠한 약보다 더 효과 있었으니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도 꽤 오래 살았어.”
성인이 되자마자 이곳에 왔으니까 대충 4년인가.
이 옥탑방에 살게 됐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돌아올 곳이 생긴 것만 같아서.
로또에 당첨되고 나서는 이사를 가려했지만, 역시 이곳에서 사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물론 내 스위트 하우스의 크기가 커져서 하는 얘기는 아니다.
“어이구, 총각.”
“안녕하세요. 아저씨.”
밑으로 내려가자 주인집 아저씨가 있었다.
1층에 주인집이 있었지만, 그곳에 살진 않으시고, 가끔 찾아올 때나 마주치는 분이시다.
흔히 말하는 건물주.
“요즘 잘 지내고 있어? 옥탑방에 있으면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전혀요. 아늑하고 좋은데요.”
“하하. 그래?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다행이네.”
나는 아저씨에게서 무언가를 받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포도맛 음료수.
물약이 아니라, 진짜 음료수를 먹는 것은 꽤 오랜만이네.
“마침 할 이야기도 있어서 말이야.”
“할 이야기요?”
“응. 아무래도 이 건물을 팔아야 할 것 같아서.”
“예? 갑자기 왜요?”
“하하. 급하게 돈 필요한 곳이 있어서 말이지. 꽤 믿을 만한 정보가 들어왔거든.”
아.
투자 얘기하는 거구나.
역시 건물주.
“쓰읍. 그래서 만약 주인이 바뀌면 계약 조건 같은 것들도 나중에 변경될 수 있으니까 전해주려고.”
“그렇군요.”
“이거, 참. 시세보다 낮게 내놓기는 했는데, 언제 팔릴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급한데 말이지.”
건물에 있는 집을 사는 것도 아니고, 건물 그 자체를 사는 것이다.
더군다나 외진 곳에 있는 허름한 주택.
이런 곳을 사려는 사람은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거나, 벼락부자가 된 사람뿐일 거다.
“아저씨. 이 건물 아직 안 팔렸다고 했죠?”
“응?”
그리고 난 둘 다 해당된다.
“제가 살게요. 이 건물.”
* * *
“여긴가?”
“이쪽입니다!”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기를 반복.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빨리 차를 사든가 해야지, 원.
“반갑습니다. 이서진 씨. 저번에 문자 드린 균열 관리부 소속. 이태영이라고 합니다.”
“이서진입니다.”
나를 안내하던 이태영이라는 사람은 간단하게 수상식에 관해 설명했다.
“사실 별거 없습니다. 그냥 그 지역 의원님이랑 사진 몇 방 찍고, 저희 쪽에서 감사패 전하는 거 찍고. 사진만 죽어라 찍죠.”
인터넷 뉴스에 자기 사진 올라가 있으면 기분이 이상하다고 한다.
내 얼굴이 저렇게 생겼었나 하고.
“그건 이미 익숙해서 괜찮을 거 같은데요.”
“아, 그 음료수남이라고…….”
내가 균열에서 나온 마물과 싸웠던 모습이 한때 영상으로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마물을 대하는 태도가 불량이라느니. 진지하지 않다느니. 마물만 잡으면 되는 것 아니냐. 여유 있어 보여서 좋다 등.
찬반 논란이 진행되고 있길래 금방 신경을 껐다.
정작 당사자는 그런 여유도 없었는데.
“하하…… 사실 저도 몇 마디 거들었거든요. 영웅이나 다름없는 사람한테 무슨 말이 많냐면서…….”
너였냐.
그는 머쓱하게 웃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참사를 막아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정말 고개를 몇 번 숙여도 모자라네요.”
이럴 때 할 대사는 정해져 있다.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오. 그 말 좋습니다. 좀 있다가 수상식에서도 부탁드립니다.”
“영웅이니, 뭐니, 하면서 기사에 올라오는 건 아니겠죠?”
“……하하. 세상이 팍팍하다 보니 사람들이 그런 말을 좋아하더라고요.”
한동안 또 내 얼굴이 이곳저곳에 돌아다니겠네…….
상념을 털고 이곳에 오면서 궁금하던 사실을 물어봤다.
“그런데 미확인 균열이란 게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겁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대부분의 균열은 저희 쪽에서 전부 잡아내니까요.”
잠시 안에서 대기하라는 말에 그와 나는 자리에 앉았다.
나에게 건네지는 포도맛 음료수.
……이거 요즘 유행이라도 하나.
“사실 잡아낸다고 하기도 뭐하죠. 저희가 하는 거라곤 그동안 일어났던 균열들의 파장을 기록하는 것뿐이니까요.”
그리고 그와 같은 파장이 일어나면 균열이 나타날 것을 예측하고, 예보한다.
기상청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이 자연재해를 예측한 지도 백 년이 지나지 않았다.
고작해야 나타난 지 삼십 년이 지난 균열을 인간이 완벽하게 정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예. 미확인이라는 것은 아직까지 나타난 적이 없는 균열이라는 뜻이니까요. 끔찍한 일이지만, 앞으로도 미확인 균열은 계속해서 나타날 겁니다.”
그런 말을 하는 이태영의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진하게 있었다.
“하하. 이거 일반인에게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들려드렸네요.”
이런 이야기를 어디 가서 들을 수 있겠는가.
모르던 사실도 알게 되고, 내게는 꽤나 유익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저렇게 조심스럽게 말하지.
꿀꺽-
목 넘김 소리가 들린다.
“각성자 등록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입니다…….”
그의 눈빛에서 불안과 동요가 느껴졌다.
이제껏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그의 몸이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긴장 상태란 것도.
각성자 등록.
그것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게…….”
“대체 어떤 이유가…….”
“까먹었습니다.”
“예?”
“제가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지고.”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정말 그런 걸 어쩌겠는가.
변명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각성하고 나서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서 생각도 못 했다.
“정말 그런 이유였다니…….”
똑똑-
딱 좋은 타이밍에 나오라는 신호가 들렸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네요. 이른 시일 내로 등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까지야.”
“저희도 은인이 체포되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리 말하며 싱긋 웃는다.
저 얼굴을 보자니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자,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들이 보였다.
이전에 보았던 던전 출정식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나도 모르게 살짝 긴장했다.
저 기자들이 나를 찍으러 왔다 이거지…….
셀카도 찍지 않는 나다.
그런 나를 누군가가 찍는다고 하니 무진장 어색했다.
대충 시의원이라는 사람과 인사를 하고, 이유지라는 이름의 균열 관리부 팀장이 내게 감사패를 주기 위해 단상 위로 올라왔다.
마찬가지로 다크서클이 심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피곤함에 찌든 표정으로 나와 나란히 섰다.
“자, 웃으시고. 이 감사패 같이 들고 계시면 됩니다.”
“자, 찍습니다. 스마일.”
“선배. 좀 웃으세요. 제발!”
기자들의 카메라가 터지며, 어색하게 서 있는 내 모습이 찍힌다.
옆에 있는 사람도 죽을상으로 찍힌 게, 전혀 수상식 같아 보이진 않았다.
“에이. 감사패 받는 분 표정이 너무 굳어 계시네.”
“옆에 분 조금만 더 밝게 웃어주세요!”
“더 가까이 붙으세요!”
원하는 거 더럽게 많네.
작은 중얼거림이 옆에서 들렸다.
공감되는 말이었기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좋습니다!”
‘어?’
한창 잘 진행되나 싶었는데, 다시 내 표정 때문에 중지됐다.
왜 그러냐는 듯, 모든 사람들이 날 바라봤지만, 내 눈은 기자들의 바로 뒤편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허공의 갈라짐.
‘저게 왜 보이냐…….’
균열을 막은 것에 대한 감사패를 받는 자리.
그곳에서 또 다른 균열이 나타나고 있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16화
6. 저게 왜 보이냐(2)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으나, 이전보다 향상된 시력은 빌어먹게도 저것이 균열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었다.
“뒤에 뭐가 있나?”
“아무것도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내가 바라보는 곳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당연하다. 그곳엔 ‘아직’ 아무것도 없으니까.
[미확인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탐색을 시작합니다.]
[균열 확인]
[균열 발생까지 30분 남았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예고 메시지.
나는 어지럽다는 핑계로 잠시 내려와 한쪽에 있는 렌즈를 빼냈다.
왼눈과 오른눈을 번갈아 보기를 반복.
이것이 왜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남들은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을 볼 수도 있다더니…… 이런 거였어?”
* * *
「물체를 탐색하는 콘택트렌즈」
설명: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착용할 경우 눈에 보이는 물체를 탐색할 수 있다.
*렌즈 착용 시 착용감과 시력 보정 효과가 적용됩니다.
*타인은 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을 탐색할 수 있습니다.
* * *
내가 집을 나오기 전, 개방권을 사용해 능력을 해방한 물건이다.
콘택트렌즈.
시력이 안 좋았기에 안경과 렌즈 사이에서 어떤 것을 개방할지 고민했다.
결국 선택한 것이 콘택트렌즈.
이유는 별거 없다.
나한테 안경이 안 어울리니까.
누가 들으면 고작 그런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 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런 마이너스 요소를 최대한 줄이는 게 중요하다.
어쨌든 다행스럽게도 렌즈에서 내가 바라던 기능들이 나왔다.
착용감과 시력 보정 효과.
선명하게 보이는 건물들과 착용하지 않은 듯한 착용감.
그리고 이름부터 알 수 있듯이 물체를 ‘탐색’하는 능력.
[탐색을 시작합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물체는 ‘돌’입니다.]
……솔직히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돌이 돌인 걸 모른단 말인가.
모르는 것만 해도 요즘은 인터넷만 검색하면 다 나온다.
하지만 애초부터 시력 보정이 목적이었으니 만족하고 넘어갔었는데.
“균열이 보인다니.”
탐색 및 탐지 스킬을 가진 각성자들은 많다.
타인의 상태창을 훔쳐보던가, 주변의 숨겨진 함정을 밝혀낸다든가.
하지만 아직까지도 균열을 탐지할 수 있는 각성자는 없다.
‘오직 나만이 균열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아. 예. 잠깐 빈혈기가 있어서.”
“그래요? 각성자가 빈혈이 일어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이 균열에 대해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결심했다.
아무래도 사람 목숨이 달려 있는데 말해야지.
“저기…….”
부웅-
“아. 잠시만요.”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받은 이태영의 얼굴이 심각해져 간다.
“예. 예. 당장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주변 민간인 통제하고, 나머지 분들도 신속하게 움직여 주세요.”
전화를 끊은 이태영이 날 보았다.
“아무래도 수상식은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인 균열 발생이 일어났다고 하네요.”
이유지 또한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단상에서 내려와 이쪽으로 다가왔다.
“뭐야? 뭔 일인데?”
“선배. 지금 당장 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이태영의 말을 들은 이유지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여간. 이놈들은 적당히가 없어요. 적당히가. 미확인이면 미확인만 나올 것이지, 동시에 튀어나오는 건 뭐야?”
“이전에 나왔던 균열들이라 다행이긴 한데, 하나같이 중형급 이상 균열이에요.”
“이번에 대처 잘못하면 우리 진짜 ㅈ 되는 수가 있어.”
“무슨 말을 그렇게…….”
“뭐. 맞잖아.”
쯧-
혀를 찬 이유지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 균열 막아주신 건 감사하고요. 방금 대화 들으셨죠? 아무래도 개 같은 균열 때문에 가봐야 할 것 같네요. 그쪽도 조심해서 가세요.”
이제 기자들은 내게 관심조차 없었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제각기 빠르게 철수하고 있었다.
이곳은 구석진 공터.
얼마 안 있으면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탐지되지 않은 균열에서 튀어나온 마물이 이 일대를 돌아다니겠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예? 저희 바쁜…….”
“대략 삼십 분 뒤에 이곳에서 균열이 열릴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얼굴을 찌푸린다.
이유지가 옆에 있는 이태영의 옆구리를 치며 물었다.
“야. 이태영. 지금 여기서 균열 열린다는 신호 온 거 있냐?”
“아뇨. 이 근처에는 없어요. 그보다 지금 빨리 가봐야 한다니까요?”
“흠. 그렇다는데요.”
이거 뭔 내 눈을 대신 보여줄 수도 없고, 증명하라면 딱히 증명할 방법이 없다.
정해연에게 연락을 할까?
아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균열에서 튀어나온 마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
물약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어쩐지 꺼림칙하단 말이야.’
동시다발적인 균열 생성.
그리고 마치 시선 돌리기라는 듯, 이런 구석진 곳에 나타나는 미확인 균열.
마치 누군가가 ‘계획’한 것 같은 짜임새다.
“흠.”
내가 의견을 굽히지 않자, 이태영이 알겠다는 듯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경찰에게 따로 연락을 해둘게요. 소형 균열에서 나오는 마물 정도면 총기로도 충분히 제압이 되니깐.”
내가 이전에 상대했던 샤프 하운드 또한 그랬다.
민간인과 다를 바 없는 나도 처리한 마물이다.
분명 그 정도로도 충분하겠지만…….
하는 수 없지.
“제가 미확인 균열을 감지할 수 있는 고유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럽니다.”
“뭐, 뭐라고요? 그걸 지금 믿으라고…….”
균열을 감지할 수 있는 건 맞으니까 거짓말이 아니다.
물론 그동안 나온 적 없는 능력이기에 믿기는 힘들겠지.
그때 돌연 이유지가 앞으로 나왔다.
“그래? 내가 여기 남지, 뭐.”
“예? 선배!”
그렇게 정하기로 한 이상 그걸로 끝이라는 듯,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 대체 무슨 근거로 여기 남겠다는 건데요?”
그 말에 이유지는 당연하다는 듯, 팔짱을 끼며 말했다.
“당연히 내 감이지.”
* * *
열리기 직전인 중형급 균열 앞에 선 이태영이 얼굴을 찌푸렸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균열을 탐지할 수 있는 탐지계열 각성자라고 했나.
믿을 가치도 없는 거짓말을 한 그에게 실망했다.
“말이 되는 거짓말을 해야지.”
자신이 속한 곳은 균열 관리부다.
대한민국을 대표한다고 해도 될 만큼 탐지계열 각성자가 많은 곳.
그런 곳에서 근무하는 이태영이기에 그들에 대한 것은 샅샅이 알고 있었다.
타인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눈을 굴리는 걸 쉬지 않는 족속들.
그러나 이서진은 자신에게 집중은커녕, 오히려 포도맛 음료수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다.
거기다가 결정적으로 탐지 계열 스킬도 스킬이다.
사용하려 한다면, 어떻게든 마나의 흐름에 변동이 있게 마련이다.
협회에 등록되지 않은 각성자.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런 존재를 자신이 눈을 뗄 리가 없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는 스킬을 사용하는 낌새조차 없었다.
“그럼 역시 목적은 선배인가.”
자신이야 옆에서 온갖 히스테리한 짓을 많이 봤다지만, 외모만큼은 기관 내에서 소문이 자자한 그녀다.
처음 만난 그에겐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터.
“뭐, 그게 거짓말이란 게 들통 나는 순간 그런 생각은 곧장 없어지겠지만.”
마물이 아닌, 이유지를 제압하려고 쩔쩔매는 경찰을 상상하면서 이태영이 폰을 들었다.
어느새 올라온 이서진과 관련된 뉴스.
댓글난에 간단한 말 하나를 쓴다.
-이 사람 순 거짓말쟁이던데.
그는 올라가는 추천 수를 확인하고는 피식 웃었다.
* * *
“…….”
“……”
아무도 없는 공터에 있는 두 명의 남녀.
마찬가지로 아무런 말도 없는 상황에 나는 부담스럽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거 진짜 나오는 건 맞겠지?’
양반 다리를 하면서 눈을 감고 있는 이유지를 보자니, 균열이 나타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삼십 분이 지났을 무렵.
허공에서 서서히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무뿌리가 뻗은 듯, 복잡한 모양.
분명 삼십 분 전에 봤던 그 균열이 맞았다.
‘그런데 아직 경찰이 도착 안 했는데?’
이곳에 있는 것은 싸움은 할 줄도 모르는 평범한 남성 하나와 마찬가지로 균열 ‘관리’부 소속의 팀장뿐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곳에 전투 병력은 아무도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이유지는 균열이 발생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저기요. 지금 균열이…….”
나타난 것은 소형 균열.
이태영의 예상대로 무장을 한 경찰이라면 충분히 제압 가능한 마물들이 나오는 구멍이다.
하지만 균열에서 나온 것은 익숙한 검은 형태의 마물이었다.
그룸.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마물.
-!@#$%
균열 밖으로 나오자마자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놈.
그 존재는 재빨리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다가 공터에 앉아 있는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
재빠르게 경계 태세를 하는 모습.
이전에도 느꼈지만, 이성이 있는 놈이다.
소형 균열에서는 나올 수 없는 종류의 마물.
‘……이거 위험한데.’
손전등을 가져왔으면 모르겠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다가 아직 태양이 떠 있는 오후.
그룸이 공격을 할 수 있는 밝은 곳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약을 빨면서 짱돌로 내려치는 거로 해결될 놈이 아니다.
그건 본능에 충실한 마물이었기에 가능했던 꼼수.
지금이라도 이유지를 데리고 도망쳐야 한다. 그렇게 결심했을 때,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도망……?”
그녀의 눈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마치 짐승의 눈을 연상시키는 길고 날카로운 호박색 눈동자.
그녀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야, 진짜였네?”
만약 거짓말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들떠 있는 말투.
“이성을 가진 놈이에요. 경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유지가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읏차! 경찰?”
이어서 보이는 장면은 눈동자 같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신기한 현상이었다.
그녀의 다리가 짐승의 털로 뒤덮이며 엉덩이 부위에 기다란 꼬리가 나타났다.
“나 혼자면 충분해.”
경계 태세를 하고 있던 그룸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도망쳤다.
그리고 동시에 이유지의 몸이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순식간에 뒤를 잡힌 마물이 제압당한 채로 바닥에서 버둥거린다.
뿌득- 뿌드득!
팔 다리가 비틀리는 기괴한 소리.
-!@#!@$
사지가 부러진 그룸을 뒤로한 채, 이유지가 천천히 다가왔다.
뒷걸음질 치던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그녀가 웃었다.
“우리 동업 하나 하죠. 어때요?”
사냥감을 발견한 포식자와 같은 미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없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17화
7. 동업자(1)
“우와…….”
“저 사람 비율 되게 좋다.”
평소와 같은 아침.
이제는 하루 일과가 된 조깅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이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좋다는 거지?
고개를 돌려 확인해 봤지만, 이 근처에는 나밖에 없었다.
‘……나인가?’
혹시나 싶어서 손을 살짝 들어줬는데, 역시 이건 아니었는지 질겁하면서 고개를 돌린다.
‘아…… 하지 말걸.’
나는 자그마한 수통에 담아온 물약을 한 입 마셨다.
처음 운동할 때는 겨우 몇 분 뛰고 한 입 마시고 그랬었는데.
이제는 운동이 끝날 때 한 입 마셔주는 거로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몸이 좀 달라진 거 같기도 하고…….”
원래 자기 자신이 변했다는 건 잘 알아채지 못한다고 했나.
평생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말을 듣고 나니, 나 자신을 잠시 돌아볼 수 있었다.
굽혀져 있던 허리가 펴졌고, 뒤틀려져 있던 골반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덕분인지 키도 약간 커진 기분이다.
이제 어디 가서 180이라고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을 정도.
“물약 때문인가?”
고작 조깅 좀 했다고 몸이 변한다면 이 세상 사람들은 전부 다 전투 병기일 것이다.
내가 이 물약을 마신 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다.
목마르면 마시고, 숨차면 마시고, 심심하면 마시고, 영화 보다가 마시고.
황혼 길드에 보낼 예정인 물약을 제외하고도 그 양은 충분했기에 일단 마시고 봤다.
나는 내 심장 부근에 손을 올렸다.
“이제 괜찮은 건가?”
심장을 조여 오던 고통은 이제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치병이라 불리던 마석병.
마석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닌 만큼, 계속해서 물약을 먹어 줄 필요는 있을 것이다.
“……물론 집에 물먹는 하마가 있기는 하지만.”
집에 도착하고 샤워를 끝냈다.
밖으로 나오자, 이제는 완전히 상전이 된 알이 보였다.
* * *
「멸망용 ‘?????’의 오염된 알」
설명: 타락한 요정들이 드래곤의 레어에서 몰래 훔쳐온 멸망용의 알이다. 자신들의 주인으로 삼기 위해 부화를 시도했으나, 침입자들로 인해 저지되었다.
*부화까지 580시간 37분 23초 남았습니다.
*오염된 상태에서 알이 부화할 시 멸망용이 깨어나며, 해당 위치에 10층 규모의 던전 『멸망용의 분노』 가 강림합니다.
*현재 알에는 파손 보호 마법, 마력 차단, 정보 차단 마법 등의 고대 마법이 걸려 있는 상태입니다.
▷현재 정화가 진행되는 중입니다.
▷정화율: 27%
* * *
‘이거 아슬아슬한데?’
정화에도 꽤 진척이 있었는지, 미니 욕조에 들어가 있는 알은 이제는 회색빛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밝아져 있었다.
군데군데 얼룩도 보이는 게 원래 얼룩말…… 아니, 얼룩알이었던 모양.
손가락으로 툭툭 찌르자, 알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마치 하지 말라는 의사 표현 같다.
예측에 불과하지만, 이 녀석은 알 안에서도 이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역시 멸망용이라는 섬뜩한 이름의 새끼라서 그런가…….’
이제는 언뜻 귀여워도 보이는 이 알이 10층 규모의 던전을 강림시킨다라…….
갈수록 정화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기에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다.
“역시 이건 선택이 아닌 필수인 모양이네.”
[탐색을 시작합니다.]
[해당 물체는 ‘멸망용의 알’입니다.]
[현재 대상의 정화 과정이 진행 중입니다.]
[정화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다수의 재료들이 필요합니다!]
[간드라모라의 귀, 그룸의 온전한 수정, 검은 뿔사슴의 심장, 도플갱어의 육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자세한 정보.
콘택트렌즈 덕분에 정화를 촉진 시킬 방법을 알아냈다.
마치 어미 새가 자신의 새끼한테 벌레를 물어다 주듯이, 나 또한 이 녀석에게 마물들을 가져다 바쳐야 하는가 보다.
그룸과 도플갱어를 제외하면 들어본 적도 없는 마물들이다.
애초에 나는 전문적인 탐색자도 아니었으니까.
“대신 잘 알 거 같은 사람이 있긴 하지.”
곧장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해연씨. 잘 지내시죠?]
[예. 잘 지냅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연락 주셨나요?]
‘……뭐야?’
문자를 보내자마자 곧바로 답변이 왔다.
……자동 응답인가?
[많이 바쁘시면 나중에 얘기할게요.]
[아뇨! 안 바쁩니다! 마침 한가해서 미칠 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던 모양.
덜컹덜컹-
알의 흔들림이 심해졌다.
물약이 오염되었으니, 빨리 갈아달라는 녀석 나름의 투정이다.
[혹시 통화 가능해요?]
내가 먼저 보냈는데 기다리라고 하기도 그렇다.
무선 이어폰을 착용한 채로 알을 옮기고 있자니 연락이 왔다.
[황혼 길드 정해연]
이름이 너무 딱딱한가.
“여보세요?”
-예. 전화 받았습니다. 황혼 길드 정해연입니다만. 이서진 님이 맞으신지요?
무슨 친구 집에 전화 거는 사춘기 꼬마도 아니고…….
아무튼, 꽤나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연락드렸는데, 혹시 뭐 하나만 구해주실 수 있어요?”
-어떤 것 말인가요?
나는 대충 눈에 보이는 마물의 신체 부위들을 읽어줬다.
-음. 대부분은 제가 구할 수 있는 것이군요. 하지만 몇몇 마물들은 던전이 아닌, 균열에서만 나오는 마물인지라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습니다.
“아, 그러면 그것들은 빼고 구해주세요. 대금은 바로 보내드릴게요.”
아직 물약의 판매가 진행되지 않았지만, 로또 당첨금이 있어서 수중에 있는 돈은 충분했다.
-예. 알겠습니다. 구해지는 즉시 댁으로 보내드리도록 하죠.
그런데 일반인이 갑자기 이런 것들을 구하려고 하면 뭔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나.
정해연은 내가 이걸 구하는 게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앞으로도 필요한 재료가 있다면 사양 말고 언제든 연락 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대금 말입니다만…….
“아, 예. 지금 당장 보낼게요. 계좌 불러주세요.”
-그…… 대금 대신에 저도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부탁을 할 예정이길래 분위기를 이렇게 잡지.
정해연에게는 꽤나 신세를 지고 있었기에 되도록 들어 줄 생각이었다.
물론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지만.
……보증이라도 서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조만간, 황혼 길드에서 주최하는 길드 간의 모임이 있습니다. 혹시 그 자리에 참석해 주실 수 있는지요?
내가?
난 길드원도 아닌데.
-그곳에서 서진 님의 물약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뜻깊은 순간인 만큼 함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아. 그런 거라면 나와 상관 있는 이야기다.
알았다고 말하자, 전화가 끊겼다.
[그럼 그 날 봬요. 서진 씨. ㅎㅎ.]
[아! 맛있는 음식들도 많이 준비될 예정이니 부담 가지지 말고 오시면 됩니다!]
전화로는 잔뜩 굳어 있더니, 문자로 하니까 한결 부드러워졌다.
[오! 그럼 무조건 가야죠.]
[(볼 빵빵한 햄스터 이모티콘)]
친구 사이에는 이렇게 이모티콘을 보낸다고 들었다.
이 정도면 꽤나 자연스러웠겠지?
우리 알 기저귀도 다 갈아줬겠다.
이제 슬슬 약속 시각이 되었기에 밖으로 나가려는데, 돌연 문자가 왔다.
[(해바라기 씨에 파묻혀 있는 햄스터 이모티콘)]
지금 이거 고민한다고 늦게 보낸 거야?
피식-
“하여간 별난 사람이라니까.”
* * *
“……으으으으음.”
한 그룹의 수장은 언제나 앞날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다고 했던가.
황혼 길드의 비서, 한미나는 지금 그 말에 극히 공감하고 있었다.
‘뭘 생각하시길래 저렇게 고민하고 계실까.’
분명 자신과 같은 범인이 하는 생각과는 차원이 다를 게 분명했다.
‘어어? 나한테 오는 건가?’
그때, 돌연 황혼 길드장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저 혹시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예, 옙!”
아랫사람들에게 말을 잘 걸지 않는 그녀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에게 찾아오다니.
“뭐든 물어만 주세요! 제가 답변할 수 있는 거라면 해드릴게요!”
정해연의 N호 팬클럽인 한미나는 자신의 아이돌이 말을 걸어주는 상황에 다짐했다.
자신의 모든 걸 걸어서라도 그녀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겠다고.
“혹시 이것이 뭔지 아십니까?”
정해연이 내민 구식 휴대폰에는 한 햄스터가 음식을 볼에 밀어 넣고 있는 이모티콘이 있었다.
‘뭐지? 새로 발견된 마물인가?’
한미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그냥 평범한 이모티콘이었다.
“이모티콘 같은데요?”
“이모…… 티콘?”
“아. 이거 이렇게 눌러서 구매하면 사용할 수 있어요.”
순식간에 터치패널을 조작해 이모티콘 하나를 구매했다.
“오오…… 이런 것이었군요.”
‘그런데 이거 물어보려고 그렇게 심각했던 건가?’
그때,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소성환이 푸하핫- 소리를 내면서 다가왔다.
“야. 무슨 이모티콘도 모르냐. 너 혹시 그 뭐냐. 틀…… 틀…… 그거냐?”
“틀?”
“아, 그래 틀딱! 틀니 딱딱이냔 말이야.”
정해연이 알아듣지 못하고 있자, 한미나가 조심스럽게 뜻을 말해줬다.
그 순간 한미나는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정해연의 발이 움직였다.
복부를 얻어맞은 소성환이 바닥에 엎어졌다.
“커헉!”
‘일부러 매를 버는 타입이시란 말이야…….’
둘 다 마물을 상대할 때는 진지하고 멋진 사람들인데.
평소에는 저렇게 애 같은 모습이다.
‘뭐, 그런 게 좋은 거지만.’
소성환이 정해연에게 붙잡혀 방으로 끌려가는 걸 보는 한미나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말했던 건 알아봤어?”
“쓰읍. 아파라. 어. 알아봤지.”
이전과 같은 장난스러움은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이 된 소성환이 말했다.
“아무래도 배후가 있긴 한 모양이야.”
던전 공략 당시 지원조 사이에 섞여 있던 도플갱어들.
도플갱어가 뒤집어쓰고 있던 길드원들의 신원을 조사해 본 결과, 분명히 전날까지는 멀쩡했던 사람들이다.
하나같이 혼자 살고. 전투 계열 각성자가 아닌 자들.
하룻밤 사이에 던전에 참가할 예정이던 길드원 셋이 죽고, 도플갱어로 대체되었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비정상이다.
실제로 그 사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자신들은 던전 내에서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누가 보냈는지는 알아냈고?”
“아니. 못 알아냈어.”
욕설을 날리고도 남을 만큼 담백한 말투.
하지만 정해연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평소에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그였지만, 일과 관련된다면 누구보다 진지하단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단 말이야.”
“뭐가 이상한데?”
“도플갱어들이 자결했어.”
“……걔들이?”
타인의 몸으로 의태하고 숨어 지내는 마물.
자신의 목숨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놈들이 도플갱어다.
그런 놈들이 자신의 몸이 붙잡혔다는 이유 하나로 자결을 했다고?
“평범한 일은 아니네.”
이성이 있는 마물이라고 하지만, 생존 욕구가 무엇보다 강한 놈들이다.
그런 놈들을 ‘대의’를 위해 자결할 수 있게 만들 정도의 인물 혹은 조직.
‘그분은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연금술사 이서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었으며.
어째서 자신을 도와주었을까.
언제나 평범함을 연출하고 있는 그였으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건 분명했다.
만약 자신이 이 일에 대한 배후를 묻는다면 어떨까.
알려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
‘겨우 이 정도도 알아내지 못하는 나와 더 이상 교류해 줄 리가 없어.’
황혼 길드가 대한민국의 5위 안에 있는 길드라고는 하나, 1위는 아니다.
언제든지 기준에서 미달된다면 더 이상의 관계는 없을 것이다.
넓어진 옥탑방의 내부를 생각하던 정해연은 고개를 저었다.
“혼자 사는 길드원들은 당분간 길드에 있는 숙박 시설로 옮기라고 해. 던전 내에서도 되도록 3인 1조로 행동하라고 하고.”
“오케이.”
적막이 감도는 방 안.
일 얘기가 끝난 소성환이 그제야 궁금했던 사실을 물었다.
“야. 그런데 웬 이모티콘이냐? 평소에 문자는커녕 전화로 명령밖에 안 하던 놈이.”
“…….”
“누구한테 문자를 보내길래 그렇게 싱글벙글하면서 이모티콘까지 사셨대.”
“…….”
“햄스터 이모티콘이었나? 푸핫! 너무 취향이 애 같은 거 아니야?”
정해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먹에 두르고 있는 붉은 기운.
마나를 한껏 개방했으며, 마물을 상대한다는 의미의 행동이었다.
“불쌍한 소성환. 도플갱어한테 몸을 뺏긴 모양이야.”
“응? 무슨 소리야? 나는 그런 적 없는데?”
“그래? 그러면 확인해 보면 되겠네.”
도플갱어는 마나를 담은 공격을 죽기 직전까지 받을 경우 의태가 풀린다.
“지켜주지는 못했지만, 복수는 해줄게. 소성환.”
“이, 이러지 마. 길드장! 나 소성환 맞아, 맞다고!”
정해연의 주먹이 소성환의 복부에 깊게 꽂혔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18화
7. 동업자(2)
“오, 오셨습니까아!”
“……?”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이태영이 나를 반겼다.
……근데 반기는 게 조금 과한데?
이태영은 두 팔을 바닥에 대고 물구나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저게 소문으로만 듣던 그렌절이라는 것인가.
각성자들이 평범한 신체가 아니라지만, 저런 게 진짜로 되긴 하는구나.
아니, 감탄할 때가 아니지.
“제가 몰라서 그러는데 균열 관리부에서는 전부 다 이렇게 인사합니까?”
난 저거 할 자신 없는데.
“그게…….”
“흐하핫! 야, 각도가 직각이 아니잖아. 얼른 제대로 안 해?”
“선배!”
“왜?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내 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이유지가 그렌절을 하고 있는 이태영을 발로 툭툭 건들고 있음에도, 균형은 흔들리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의 신체 능력.
내려오라고 해도 꿋꿋하게 오 분을 채운 그는 이내 원 상태로 돌아오고 고개를 숙였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날 의심하고 있었다고 한다.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당장 말하는 나도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입술에 침까지 발랐으니까.
“별로 신경 안 써요.”
“정말입니까?”
“예. 그러니까 이제 고개 좀 들어요.”
한동안 얼굴을 마주할 사람인데 이건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정해연도 처음엔 저렇게 굳어 있었지.’
내가 그렇게 대하기 힘든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자니, 이유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동업자분은 잘 모르시나 본데, 균열을 감지한다는 게 평범한 일은 아니라서. 애가 쪼다같이 굳어 있는 것도 그럴 만한 일이야.”
“제가 처음이라고 했죠?”
“그렇죠, 뭐. 애초에 그런 능력이 있으면 우리가 이리 뭐 빠지게 고생할 일은 없잖아요?”
“선배. 또, 또 말투가…….”
“너, 전에부터 내 말투가지고 딴지 거는데, 내가 요즘 너무 많이 풀어줬나?”
“……풀어준다는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나.”
“어쭈. 죽는다?”
이유지가 이태영의 목에 팔을 둘렀다.
조금 전 보았던 그 신체 능력이면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유지의 오른팔이 서서히 변해간다.
온 힘을 다해서 벗어나려는 이태영을 가볍게 누르며 그녀가 목을 졸랐다.
“아! 악! 선배! 나 진짜 죽어!”
“엄살은. 기껏해야 힘 절반도 안 줬구만.”
“……이게 짐승인지, 인간인지. 이러다가 진짜 네 발로 달리는 거 아니야?”
마치 어느 짐승의 다리를 보듯이, 털로 뒤덮인 거대한 팔.
손톱도 짐승의 그것처럼 길고 날카로웠다.
그걸 신기하게 보고 있자니, 익숙하다는 듯 이유지가 피식 웃었다.
“이게 제 능력이에요.”
수인화.
신체 부위를 짐승의 그것처럼 변형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다른 신체는 인간인데, 털로 뒤덮인 팔을 보고 있자니…….
‘완전 멋진데?’
변신에 대한 로망이 있던 나다.
이왕이면 나도 저런 간지 나는 능력을 얻고 싶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니, 렌즈를 낀 눈이 약간 욱신거린다.
그래, 그래.
딴 생각해서 미안하다. 너희가 최고다.
“저번엔 거창하게 동업이라고 하긴 했는데, 그냥 이 일대 돌아다니면서 균열 나타나는 것만 알려주면 돼요.”
처음이니까 악수라도 해야 하나?
고개를 갸웃거린 이유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 수인화가 풀리지 않은 오른쪽 팔이 아닌, 인간 형태의 왼쪽 팔이다.
아쉽네. 저 손 만져보고 싶었는데.
“예.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불편한 거 있으면 전~부 다 이놈한테 말하면 되니깐 사양하지 말고요.”
“커…… 커헉!”
“일단 빨리 뛰어가서 시원한 음료수라도 사와. 이 셔틀아.”
“……갑니다. 가면 되잖아요.”
“아,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나도 그거.”
고개를 끄덕인 이태영이 빠른 속도로 뛰어갔다.
마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익숙한 몸놀림이다.
“그럼 가볼까요?”
이제부터 지긋지긋한 일 시간이네.
혀를 차는 이유지를 보자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이 사람 나랑 생각하는 게 비슷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찍은 사진 올라온 거 보셨어요?”
어색함을 깨기 위해 공통적인 화제를 꺼냈다.
이유지가 기분 나쁘다는 듯 얼굴을 확 찡그린다.
“뭐 씹은 듯한 얼굴로 나왔던데. 이대로 그놈들 확 엎어버리러 갈래요?”
“하하…….”
어째 말하는 게 다 농담 같지가 않냐.
“다 좋다고만 하던데요, 뭘. 그에 반해 전 무슨 악플이 ‘좋아요’ 1,500개 정도가 박혀 있던데…….”
이유지에 대한 이야기는 외모에 대한 칭찬밖에 없었지만, 나에 관한 댓글은 역시 이상한 댓글이 있었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푸하핫-”
작게 중얼거리자, 이유지가 입을 가리면서 미친 듯이 웃는다.
……내가 그렇게 웃긴 말 했나?
한참 동안 웃기를 반복하던 이유지가 이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요. 그런 놈들 죄다 밖에서 음료수 셔틀이라도 하고 있을 걸요?”
때마침 이태영이 음료수를 가지고 달려왔다.
꽤 먼 거리를 갔다 왔음에도 땀 한 방울 안 흘린 모습이다.
“왜 그렇게 웃고 있어요? 나 빼고 재밌는 이야기라도 했나.”
“아. 했지. 어떤 악플을 다는 놈에 대한 이야기.”
“커, 커헉!”
겉으로만 그렇지, 역시 힘들긴 한 모양인지 방금 마신 음료수를 힘차게 뱉어낸다.
“뛰자마자 음료수 마시면 소화 안 된대요.”
“……감사합니다.”
휴지를 건네자, 그걸로 얼굴을 닦던 이태영이 힐끗 이유지와 눈을 마주친다.
그렇게 한참을 아이 컨택하던 이태영은 고개를 떨궜다.
“……혹시 단 거 안 당기세요?”
“어머. 마침 출출한 걸 어떻게 알았대. 우리 태영이. 역시 센스쟁이야.
“큭!”
둘의 콩트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온다.
피식-
당분간 지루하진 않을 거 같네.
* * *
“오늘 고생하셨고, 내일도 그 시간에 나오시면 돼요.”
“예. 그럼 내일 보죠.”
“야호! 드디어 퇴근이다!”
“선배. 무슨 소리예요. 저희는 이제 야근해야죠.”
“아악!”
그녀가 말했던 대로 동업이라고 할 만한 거창한 일이 아니었다.
저번 공터처럼 주로 으슥한 곳 위주로 돌아다니며, 균열을 탐지했다.
그리고 하나의 미확인 균열을 발견했다.
그곳에서는 이전과 같이 그룸이 나타났다.
녀석은 나오자마자 우리를 보더니 곧바로 그림자 속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이유지에 의해 제압당했다.
이전에도 보았던 그 압도적인 스피드.
“……내가 할 건 아무것도 없었지.”
손전등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것은 한창 알의 정화 과정에 쓰이고 있었기에 들고 올 수가 없었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거라곤, 그저 시력 보정용 콘택트렌즈와 보온병에 담아 온 우리 집 정수기의 물뿐이다.
“만약 나 혼자서 미확인 균열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체력은 이제 좀 좋아졌다지만, 그 점을 제외하면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나다.
이유지는 손쉽게 제압했지만, 과연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절대 못 하겠지.”
최소한 내 몸을 지킬 수단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결국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하나의 답을 찾아냈다.
“……돈 뒀다가 뭐 하겠어?”
자신의 무력에 자신이 없다면, 아이템으로 둘둘 두르면 되는 거 아니겠어?
마침 이 근처에 각성자들이 이용한다는 백화점 하나가 있었다.
“구경이라도 하고 갈까?”
하지만 막상 백화점 앞에 도착하니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나, 각성증 없잖아?”
저번에 이태영이 말한 것도 있었기에 등록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직도 가지 않은 상태다.
“그냥 돌아가야 하나.”
입구를 어슬렁거리고 있자, 경비로 보이는 사람이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그게…….”
“이곳은 B급 이상의 각성자만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입니다. 확인을 위해 성함을 불러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서진입니다.”
나도 모르게 이름을 말해 버렸다.
그보다 B급 이상이 아니면 못 들어가는 거냐…….
애초에 각성증이 있었더라도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아무래도 상류층만의 공간인 것 같다.
‘별수 없나.’
그대로 돌아가려는데, 경비가 나를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자, 잠깐. 이름이 ‘이서진’ 맞으십니까?”
“……예. 맞는데요?”
큰일 났다.
각성증 없단 걸 알고 체포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그는 제 품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더니, 그것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의 표정이 점차 당황으로 바뀐다.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예?”
“이곳의 VIP로 등록되신 분인 줄도 모르고…….”
고개를 숙이는 경비원.
그제야 백화점에 큼지막하게 적혀져 있는 이니셜이 보였다.
HH.
‘……이거 황혼 길드 소유였어?’
* * *
거리를 돌아다니기 위한 간단한 옷차림.
이런 고급스러운 백화점에 온다면, 마치 드라마처럼 내 행색을 보고 퉁명스럽게 대하는 직원이 있을 줄 알았다.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백화점을 이용하고 있던 각성자들이 이쪽을 돌아본다.
갑작스럽게 모이는 시선에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부터 저희 매니저 다섯 명이 완벽하게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저 혼자서 둘러보면 안 될까요?”
“예?”
구경하러 왔는데, 옆에서 직원이 붙어 다니는 것만큼 부담스러운 일이 없다.
“그, 그럼 이 호출기를 가져가 주십시오. 버튼을 누를 경우 곧바로 달려가겠습니다.”
“예…….”
나는 곧바로 그곳을 벗어났다.
조금이라도 여기 있었다간 수치사 할 게 분명해.
출입이 엄한 곳인 만큼, 직원들은 하나같이 친절했다.
“그런데 가격은 너무 불친절한 거 아니야?”
나름대로 돈을 가지고 있었기에 구경하다가 좋은 물건이 있으면 사려 했으나, 무슨 가격이 기본 억대다.
“……저거 하나가 우리 집 건물 몇 채 값이네.”
눈으로 보기만 해도 배부르단 게 이런 느낌이었던가.
배가 부른 게 아니라, 그냥 찢어질 것 같다.
사려면 살 수 있었지만, 내 몸으로는 쓸 수 없는 물건들이다.
돼지 목의 진주들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돌아갈까.”
호출기를 눌러 밖으로 나가려는데, 마구잡이로 모여져 있는 물건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화려하게 진열되어 있던 다른 것들과는 달랐다.
“이건 뭐예요?”
“떨이 상품이에요. 하나같이 하자가 있던가, 일회용인 것들밖에 없죠.”
이런 곳에서도 그런 걸 파나.
“이곳 점포에서는 연금술사나 대장장이들의 발명품들이 판매되고 있거든요. 최근에서야 생겨난 곳이죠.”
연금술사와 대장장이의 발명품이라…….
꽤나 흥미로워서 둘러보았는데, 정말 하자가 있는 것들뿐이었다.
화려한 빛을 발사하는 막대기라거나.
자동으로 필기를 해주는 볼펜이라거나.
‘……저건 그냥 폭죽 아니야?’
저래놓고 가격은 1억이란다.
양심에 털이라도 난 건가.
저런 식으로 진열되어 있던 것도 이해가 갔다.
그래도 이런 게 구경할 때는 가장 재밌는 법이지.
이리저리 뒤적거리자, 안쪽에서 작은 구슬 같은 게 나왔다.
“어? 그건 처음 보는 물건인데…… 아무래도 이상한 게 섞여 들어간 것 같네요.”
직원이 구슬을 회수해 가려 했지만, 나는 그 구슬을 꽉 쥔 채로 놓지 않았다.
[탐색을 시작합니다.]
[해당 물체는 ‘불완전한 아이기스의 방패’입니다.]
* * *
「불완전한 아이기스의 방패」
설명: 구슬을 깨뜨릴 시, 단 한 번 시전자를 보호하는 방패가 나타난다.
*숨겨진 조건이 있는 물체입니다.
*정당한 주인이 나타날 경우, 구슬은 몸속으로 흡수되며, 스킬 ‘아이기스의 방패’ 가 생성됩니다.
[해당 물체가 【만물의 주인】의 특성을 가진 자와 공명합니다!]
* * *
내 손 안에서 구슬이 미칠 듯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제대로 된 주인을 찾았다는 듯이.
“저, 이거 살게요.”
가격은 1억.
내 인생에서 가장 합리적인 소비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19화
7. 동업자(3)
만물의 주인.
평범한 물건을 나만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아티팩트로 만드는 능력.
언뜻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 원래부터 특별한 아티팩트라면?
“그 결과가 이거란 말이지.”
내 손바닥에서 굴러다니는 작은 구슬.
구슬치기할 때 꺼내놓으면 이목 하나는 제대로 받긴 하겠네.
분명 백화점에서 봤을 땐, 그냥 평범한 흰 구슬이었는데 이제는 굴릴 때마다 오색빛깔로 찬란하게 빛난다.
이제 이걸 몸에 흡수하면 된다는 건데.
“설마 먹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정, 수가 없다면 그러겠지만, 그건 마지막에나 할 일이다.
일단은 내 심장 부분에 구슬을 가져다 대었다.
몸속.
그중에서도 흡수라고 한다면 당연히 심장이지.
그러고 있기를 잠시.
구슬이 조금씩 흐려지더니, 이내 몸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어어?”
생살을 찢고 들어오는 기이한 감각…… 같은 것은 없었다.
대신 몸속에서 자그마한 열기가 느껴졌다가, 사라졌다.
[‘불완전한 아이기스의 방패’가 흡수되었습니다!]
[스킬, ‘아이기스의 방패’가 생성되었습니다!]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속으로 외치면 되는 건가.
그렇게 이리저리 행동한 결과 스킬이 발동되었고.
잠시 후, 심각한 표정이 된 내가 중얼거렸다.
“……이거 대박인데?”
* * *
* * *
「미래를 보여주는 텔레비전」
설명: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텔레비전을 사용할 경우 미래를 볼 수 있다.
현재 개방된 채널 : Ch.1(하루 뒤)
현재 사용 가능한 횟수 : 하루 한 번
◎현재 숙련도가 가득 찬 상태입니다.
◎조건을 만족시켜 다음 단계로 업그레이드하세요.
▷퀘스트-채널에서 본 미래의 방송을 타인에게 이야기하라(5회) [미래를 보여주는 텔레비전에 대한 노출은 하지 말 것]
▷보상-다음 단계로의 업그레이드.
▷실패시-숙련도의 초기화
* * *
정수기에 이어서 텔레비전의 숙련도 또한 가득 찼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하던 녀석이기도 하다.
미래를 보여주는 텔레비전.
이것 덕분에 로또에도 당첨되고, 황혼 길드와도 연을 맺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그 후로는 영 괜찮은 정보가 나타나지 않았다.
배부른 소리 마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사람 욕심이란 게 그런 것 아니겠는가.
Ch.1이 보여주는 것은 하루 뒤에 방영되는 공영방송.
그렇다면 Ch.2는 어떤 미래를 보여줄까?
“이건 조건이 좀 특이하긴 하네.”
다른 사람에게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라.
순간이지만, 으슥한 곳에 끌려가 미래의 정보를 뱉으라며 고문당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정보는 고작해야 연예인 누구와 누가 사귄다거나, 모 길드에서 어떠한 던전의 공략에 성공했다.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수준이다.
균열 관리부의 둘과 다니는 일이 많을 것이니, 은근슬쩍 얘기를 꺼내면 쉽게 클리어되겠지.
“그럼 우리 귀염둥이 알. 오늘은 이 형님이 손전등을 가져가도 될까요?”
부둥- 부둥-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알을 보자마자 포기했다.
성스러운 빛을 발하는 손전등은 기본적으로 충전식이지만, 저렇게 24시간 켜놓을 수도 있다.
저러다 고장이라도 나는 건 아닌가 걱정은 됐지만,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
“저렇게 켜놓는 만큼 숙련도도 쑥쑥 오르고 있을 테고.”
오늘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약속 시각이 되기 전, 재빠르게 각성자 등록을 하기 위해서였다.
지하철에 탑승하자마자, 휴대전화에 진동이 울린다.
문자가 도착했다. 정해연이었다.
[어제 저희 백화점에 들르셨다면서요?]
정해연의 귀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딱히 숨길 내용도 아니었기에 그렇다고 답장했다.
[미리 말씀해 주고 오시지…… 혹시 불편하신 점이나, 무례하게 군 직원은 없고요?]
오히려 너무 친절해서 불편할 정도긴 했다.
거기다가 그 안에 진열된 물건들을 보자니,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했고.
[괜찮은 물건 하나도 없었을 텐데…… 말하고 가셨으면 더 좋은 물건 보여드릴 수 있었을 텐데…….]
[(시무룩한 햄스터 콘)]
나를 무슨 욕망의 화신 정도로 보고 있는 건가.
문자를 주고받다 보니, 각성자 센터에 도착했다.
대충 과정을 들어보니, 신체검사 및 마나 감응력 테스트, 스킬 시연 같은 것을 한다는데.
거창한 것은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적어도 신체검사에서 쪽은 안 당하겠어.
근래 튼튼해진 내 몸을 만지작거리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소지하신 물품은 이쪽으로 제출해 주세요.”
“예. 잠시만요.”
[저 들어가 봐야 해서 잠시 답장 못 할 것 같아요.]
[예? 어디를요?]
[각성자 신청하러 왔거든요. 지금 센터인데 검사받을 차례라서.]
[예?]
이어서 문자가 붕-붕-하고 울렸지만, 앞에 있는 직원의 눈빛이 무서웠기에 휴대폰을 끄고 제출했다.
“아, 혹시 물은 들고 가도 되나요?”
* * *
각성자.
균열, 던전과 함께 나타난 신비로운 힘을 가진 자들.
마물과 맞서 싸울 귀중한 인력들이기에 그들에 대한 관심은 끊이지 않는다.
물론 각성자 센터에도 능력 있는 신인과 계약하기 위해 길드의 스카우터들이 항시 대기 중이다.
“오늘 네오 학원 출신 각성자 세 명이 이곳에 있다니까, 나오자마자 접근해. 절대 뺏기지 마!”
“신체계 말고 염력계나 원소계 각성자들한테 주목해.”
그들 옆으로 각성자 무리가 지나간다.
“스타트가 중요해. 스타트가.”
이번에 각성자 등록을 하러 온 김연오 또한 그런 스카우트의 눈에 들어 상위 길드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위 10대 길드라 불리는 거물들.
가장 기초인 지구력 테스트가 실행되었고, 그런 것에서조차 버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X신들.’
여기가 얼마나 중요한 무대인데, 최소한 체력은 기르고 왔어야지.
체력 테스트는 형식상으로만 보는 거라고 해도 그 부분까지 확인하는 길드도 존재한다.
‘그런데 얜 뭐야?’
김연오는 옆에서 나란히 달리는 남성을 보았다.
꽤 높은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자신과 속도가 엇비슷하다.
‘……몸은 뭐 나쁘진 않네. 내가 더 낫지만.’
김연오는 달리는 와중에 개인적으로 가져온 이온음료를 마셨다.
이곳에서 배급을 해주긴 하지만, 그것은 싸구려라 입에 대기도 싫다.
옆에 있는 남자도 따로 가져왔는지, 물 한 모금을 마신다.
‘후. 이대로 속도를 유지하자.’
그때, 옆에 있던 남자가 돌연 속도를 높였다.
마치 체력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뭐, 뭐야!”
김연오 또한 곧장 뒤쫓아가려 했으나, 이미 소진된 체력으로 인해 금방 뒤처지고 말았다.
“김연오. 체력 평가 A!”
“이서진. 체력 평가 A!”
페이스를 잃을 뻔했지만, 어찌어찌 완주는 했다.
‘대체 쟨 뭐 하는 놈이야?’
육체계열 각성자인 게 분명해.
김연오가 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후로도 여러 가지 테스트가 이어졌다.
대부분이 A.
마나 감응력이 B인 게 흠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이곳에서 가장 의미 있는 테스트는 시작하지도 않았다.
“56번, 이서진. 앞으로 나오세요.”
김연오의 차례가 되기 전.
체력 평가 때 나란히 달렸던 그 남자가 테스트를 시작했다.
“자신이 각성한 능력을 이곳에서 펼쳐주시면 됩니다.”
이 각성자 등록에서 제일 중요한 메인 테스트.
‘육체계 각성자니까, 아무래도 대련을 요구하겠지?’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멈춰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이리저리 고민하더니, 이내 심사관이 걸치고 있는 물건을 가리켰다.
“그거, 92년도에 제작된 Z사의 한정판 목걸이 맞죠?”
“탐색계 각성자입니까? 혹시 이것을 제작한 사람을 알 수 있다던가 하는 건가요?”
“아뇨. 그게 끝인데요.”
“…….”
물건이 한정품인지,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게 뭐란 말인가.
그것은 균열, 던전에 들어갈 각성자로서 딱히 필요한 능력도 아니었다.
심사관은 고개를 젓더니, 그에게 F급 능력이라는 등급을 주었다.
아까 보니까 체력이랑 마나 감응력 테스트에선 꽤 높은 등급을 받았던 거 같은데.
스킬 부분에서 저러면 말짱 꽝이다.
결국 각성자를 결정하는 것은 특별한 능력 하나였으니까.
‘……근데 탐색계 각성자인데 체력이 그렇다고?’
사내는 종합 E급이라는 등급을 받았다.
앞에서 얼마나 좋은 등급을 받았든, 능력이 별로면 이렇게 된다.
주변에서는 불쌍하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정작 그걸 받은 당사자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스카우터들도 별로 관심 없다는 듯,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좋았어.’
김연오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원래 좀 덜 떨어지는 것들이 앞을 자리해 줘야 자기 같은 사람들이 더욱 빛나는 법이다.
“57번, 김연오, 능력을 펼쳐주시면 됩니다.”
“예.”
김연오는 숨을 들이쉬고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오!”
“제대로 된 놈 하나 나왔는데?”
불타오르는 김연오의 몸을 본 스카우터들이 눈을 빛냈다.
불과 물 같은 원소계의 속성은 그 자체로도 희귀한 능력이기에 등급도 높게 판정되는 경향이 있다.
“김연오, B+”
‘쯧.’
능력을 오래 유지할 수 없었기에, A급은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검사가 끝나고, 각성증을 받은 응시자들이 밖으로 나왔다.
“김연오씨. 현재 계약된 길드는 있으신가요?”
“저희 호량 길드에서는 업계 최고의 대우를 해 줄 것을…….”
‘싹 다 잔챙이잖아?’
스카우터들이 잔뜩 몰리긴 했지만, 전부 다 쭉정이들뿐이고 대형 길드가 없다.
“황혼 길드다!”
“정해연 본인이 찾아 왔잖아?”
‘뭐라고?’
김연오가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염계열 능력자.
대한민국에서 그쪽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황혼 길드장, 정해연이다.
김연오 또한 그녀와 같은 계열의 각성자.
‘날 스카우트하러 온 게 분명해!’
김연오의 얼굴이 희열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그 생각은 정해연이 그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오기 시작했을 때, 확신이 되었다.
김연오가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좋습니다! 자세한 계약 사항부터 볼까요?”
그러나 정해연은 그런 그를 지나쳐 뒤쪽으로 향했다.
‘……왜 여기가 아니라, 저쪽으로?’
그곳에는 자신이 무시했던 E급의 사내가 있었다.
좌중이 술렁이고, 누군가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저기 봐!”
“저게 뭐야?”
“……현수막?”
모두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서는 거대한 현수막이 펼쳐지고 있었다.
[경! 각성자 이서진 E급 기념! 축!]
정해연이 E급의 사내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스카우트하러 왔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떨궜다.
* * *
“……야근이라도 했어요? 무슨 우리보다 표정이 더 퀭하네.”
“마음고생을 좀 하긴 했죠.”
이태영이 건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만졌다.
고작해야 몇 시간 전 일이지만, 방금 일어난 것처럼 얼굴이 화끈했다.
스카우트.
라고는 하지만, 두각을 드러내는 각성자들은 이미 센터에 가기 전, 정보력 있는 길드들에게 컨택을 받는다.
센터에 있는 사람들은 미리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
그곳에서 대기하는 스카우트들 또한 진흙 속에 진주라도 찾고자 대기하는 것이다.
그렇다. 진흙이다.
그 어떤 진흙탕에 길드장 본인이 찾아오겠는가.
그것도 평범한 길드도 아니고, 대형 길드의 수장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 황혼의 길드장이 나타났다.
주변에 있던 스카우터들의 시선이 내게로 몰리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곧장 얼굴을 가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당황하며 말을 하는 정해연의 얼굴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그렇지만. 이런 중요한 곳에서 혼자 돌아온다면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학교 졸업식이냐?
애초에 높은 등급을 받을 거라면, 다른 물건들을 보여주면 된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고, 능력의 노출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에 일부러 그런 등급을 받았다.
물론 스카우트에 관한 내용은 농담이었는지 더 이상 꺼내지는 않았다.
‘농담 맞겠지?’
계속해서 힐끔 눈치를 보던 정해연을 생각하다가 털어냈다.
‘더 생각해 봤자, 머리만 아프니까…….’
밝은 표정에 밝은 기운이 깃든다.
나는 다크서클이 그득한 두 사람을 향해 한껏 미소 지었다.
“오늘도 일합시다, 일!”
“그래요…… 일…….”
“와아…… 신난다…….”
그에 맞춰 두 사람도 즐겁다는 듯이, 두 손을 흐느적거린다.
둘을 바라보며 타이밍 좋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인천 방면에 새로운 던전이 나타났다는데요.”
「채널에서 본 미래의 방송을 타인에게 이야기하라(2/5)」
나도 내 일을 시작할 시간이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20화
7. 동업자(4)
미확인 균열 작업은 꽤나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알의 정화도 꽤 많이 진행되어, 이 정도라면 제시간에 맞출 수 있을 거고.
여러모로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날들이다.
……얼마 전에 조금 부끄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그와 관련된 기사라도 날 줄 알았는데 별 반응은 없었다.
그 난리를 펼쳤는데도 조용하니까 오히려 무섭네.
균열 관리부의 이태영 또한 일이 잘 풀리는지 근래 표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근래 발생한 미확인 균열들을 분석한 결과, 일정한 패턴이 있단 걸 알아냈어요.”
균열 관리부에서는 점차 미확인 균열에 대해 감을 찾기 시작했고, 동시에 균열이 열리는 것은 점차 뜸해졌다.
이유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태영에게 말한다.
“야, 이태영. 아무래도 이건 인력 낭비인 것 같다.”
“예?”
“어차피 균열에서 나오는 놈은 나 한 명으로도 충분하니까, 넌 다른 곳 가서 일해라.”
“아니, 선배!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자기 혼자만 꿀 빨……! 읍!”
요 삼 일간 균열은 발견되지 않았고, 나는 이유지와 단둘이 거리를 돌아다니게 되었다.
계속해서 붙어 다닌 탓에 어색하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그냥 털털한 친구 한 명과 먹거리 탐방하러 다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저거 좀 먹고 가죠. 출출해 죽겠네.”
왜 저 말이 안 나오나 했네.
유독 먹성이 강한 이유지다.
평소에도 균열 탐색을 하는 도중에 이렇게 길거리에서 무언가를 사 먹곤 한다.
“와아! 솜사탕이다!”
앞 차례의 꼬마가 받은 솜사탕을 보면서 살짝 침을 흘린다.
저렇게 좋을까.
“자, 솜사탕 나왔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1인 1 솜사탕이 나왔다.
……솜사탕이 왜 이렇게 커?
이걸 혼자 다 먹으라고?
이유지는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음~”
달콤한 솜사탕이 입에 들어가자, 좋아 죽겠다는 듯 행복한 표정으로 뺨을 만진다.
‘리액션 좋네.’
사람들이 방송을 보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인가.
야금야금 뜯어 먹으며 이유지의 먹방을 감상하고 있는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앙!”
바닥에 떨어진 솜사탕.
방금 보았던 그 꼬마였다.
“으이구. 조심 좀 하지.”
이유지는 자신이 들고 있던 솜사탕을 꼬마에게 내밀었다.
“언니가 이거 줄 테니까 그만 울어.”
“……정말요?”
“응. 난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해.”
떨리는 손으로 아이에게 솜사탕을 건넨다.
무슨 저런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 거짓말을 하냐.
이유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시 기다렸고, 곧이어 부모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감사 인사를 했다.
“예쁜 언니. 안녕!”
“그래. 또 맛있는 거 먹겠다고 엄마 손 떨어뜨리지 말고. 이 먹보야.”
이유지는 아이가 사라지자마자 곧장 솜사탕 점포를 다시 찾았다.
“아저씨. 여기 솜사탕 하나만 더 주세요.”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지금 기계에 문제가 생겼는지 작동을 안 해서 말이야.”
“아아…….”
낙담하는 그녀에게 솜사탕을 내밀었다.
어차피 나 혼자서는 다 먹지도 못하는 양이니깐.
그녀가 푹신푹신하게 흔들리는 솜사탕을 멍하니 보더니, 이내 흐뭇하게 웃었다.
“흐응. 그쪽 의외로 괜찮은 사람이었네요?”
먹을 거 하나 줬다고 사람 인상이 휙휙 바뀐다.
그러면 지금까지는 아니었다는 건가?
“으음! 달아~”
처음에 보았을 때는 좀 사나운 느낌이 강한 사람 같았는데.
며칠 같이 지내다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단 말이야.
“저 원래 착해요. 성격이 이래서 다들 몰라보는 거지.”
“그런 걸 보통 자기가 말하나?”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요. 뭘.”
수난을 겪는 이태영의 모습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딱히 이태영을 제외하고 말을 거는 모습을 못 봤다.
“능력 때문인지, 아무래도 다가오는 사람이 적어서 그래요. 짐승 같은 팔다리. 보통은 다 징그러워하잖아요?”
수인화를 한 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느다란 팔이 위아래로 휘적거린다.
그녀가 킥킥 웃었다.
“그래서 친한 사람한테 더 막 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쵸?”
원래 소중할수록 더 잘해줘야 하는 법이다.
소중한 사람이라…….
내게는 조금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말이다.
이참에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로 했다.
“수인화라는 게 단순히 육체 변화만 일으키는 건가요?”
“음. 기껏해야 팔 하나, 다리 하나 바꾸는 거면 그렇긴 한데요. 아무래도 힘을 많이 쓸수록 성격이 아주 약~ 간 사나워지는 거 같기도 하고…… 원체 착해서 별로 티는 안 나지만.”
균열에서 나온 마물을 웃으며 찢어대던 그녀를 떠올리자, 등골이 오싹했다.
그게 ‘조금’이라고?
그냥 약간 솔직해지는 거지, 뭐…….
이유지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수인화 된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이랑 되도록 접촉 안 하려 해요. 고양이들 보면 제 주인한테도 못 만지게 하면서 까탈스럽게 굴잖아요?”
갸릉-
그녀가 오른손을 내 쪽으로 휘적거린다.
비유가 뭔가 좀 이상하면서도 맞는 것 같았다.
고양이.
이태영을 할퀴는 모습을 상상하자 웃음이 나왔다.
“이태영, 걘 제외야. 깐죽거리는 게 한 대 안 때리고는 못 참겠다니깐?”
평소와 같이 수다 떨기를 반복.
마침내 균열 한 개를 발견했다.
“여기 하나 있네요.”
“으. 지긋지긋해.”
막다른 골목의 깊숙한 곳.
십 분도 채 안 남은 균열 하나가 있었다.
그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부르르-
이유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녀는 문자를 확인하고는 내게 말했다.
“좋은 소식이네요. 아무래도 지금 이 균열, 저희 쪽에서 신호를 잡아낸 모양이에요.”
십 분 정도 남은 아슬아슬한 균열이지만, 잡아냈다는 것이 중요한 거다.
이로써 사람들은 균열로부터 조금 더 안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유지가 피곤하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곧 있으면 이 동업도 끝날 거 같네요.”
“아아-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좋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이유지의 표정은 좋아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니 역시 선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쪽 덕분이에요. 이거 보답을 뭐로 드리면 좋을까~”
균열에서 나오는 마물의 시체들은 전부 내가 가져가서 알의 정화 과정에 사용하는 중이다.
그 외에도 균열에서 필요한 다른 재료들도 제공받고 있는 중이고.
가루로 만들어서 욕조에 있는 물약과 섞으면 끝이다.
마치 입욕제라도 탄 듯이 좋아하는 알을 보면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가 나온다.
……아니, 아빠 미소는 무슨.
상대는 멸망용이다. 정신 차려라!
“놉. 그런 거로 퉁 칠 수는 없죠.”
원래 나 같은 외부인에게 균열의 마물을 넘겨주는 건 위험한 일이기에 그 정도로도 충분했는데…….
뭐, 더 준다니 사양할 생각은 없다.
서서히 골목의 끝에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 어떤 놈이려나. 지긋지긋한 그룸은 아니겠지?”
마침내 균열이 열리고, 안쪽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여유롭게 기다리던 우리 둘의 얼굴이 이내 당황으로 일그러진다.
“……사람?”
“허억, 허억! 살았다! 저기요, 저 좀 도와주세요!”
균열에서 사람이 나온다고?
이제껏 마물만 나오던 균열이었기에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당황한 이유지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저거, 도플갱어에요.”
“정말요?”
도플갱어들이 어디서 나오나 했더니, 균열에서 튀어나오는 놈들이었군.
저런 식으로 미확인 균열을 통해 인간 사회에 숨어들 줄이야.
이유지는 내 말을 듣자마자, 사내에게 달려들더니 바닥에 눕혀 팔을 뒤로 꺾었다.
평소에 곧바로 사지를 찢던 것과는 다르게 친절한 제압이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컥! 지, 진짜란 말이에요! 저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이거 진짜 도플갱어 맞아요?”
이유지가 사내에게서 눈을 떼고 내 쪽을 보았다.
사내의 너무도 리얼한 반응.
균열에서 나온 마물들만을 상대한다는 생각의 고착화.
이미 제압이 완료된 균열 속에서 나온 존재.
이유지가 방심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떨쳐낼 수 없는 꺼림칙함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던 나만이 지금 일어나는 일을 가장 먼저 파악할 수 있었다.
골목의 양옆.
건물의 그림자에서 검은 존재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룸은 어둠 속에 숨어 사는 마물.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그룸들이 그녀를 응시했고, 바닥에 엎어져 있던 사내의 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위험……!”
위기의 순간이 오면, 세상이 느려진다고 했던가.
내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자신과 다르게 이유지는 강인한 각성자다.
기습을 맞고도 충분히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맞아…….’
그에 비해 나는 고작해야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몸뚱이다.
그래, 내 역할도 균열을 알려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이다. 내 시야에 당혹스러운 표정의 이유지가 보인다.
순간 그녀가 내 쪽을 보고는 눈빛으로 말한다.
도망치라고.
-우리 동업 하나 하죠, 어때요?
개소리.
내 몸만을 챙기기 위한 자기합리화에 혐오감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지나간 생각을 뒤로하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동안 꾸준히 했던 달리기 덕분에 거리는 금세 좁혀졌다.
“……미친!”
“숙여!”
이유지의 발밑에 있던 사내가 부풀어 오르는 것과 동시에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굴렀다.
그리고 외쳤다.
“아이기스의 방패!”
거대한 은빛의 방패가 엎드려 있는 우리 둘의 위로 나타났다.
퍼엉!
무시무시한 폭발음과 함께 몸이 흔들렸다.
방패가 깨지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역시 이거 성능이 대단하다.
“금조차 안 갔어.”
대신 내 몸에 압도적인 탈력감이 느껴진다. 마나가 단숨에 빠져나간 것이다.
고작 한 번 썼는데도 이 정도라니.
방패가 사라지는 즉시 마물이 덮쳐 온다면 나는 그대로 당하고 말겠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이 X새끼들이!”
내 밑에 깔려 있던 이유지의 양팔과 양다리가 변하며 처음 만날 때 보았던 꼬리가 나타났다.
쫑긋!
머리카락이 위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앙증맞은 귀까지 돋아난다.
“네놈들 다 뒤졌어!”
분노한 이유지가 그룸들을 찢어버리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곱 마리의 그룸 시체 사이에서 이유지가 대자로 뻗었다.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뺨에 붙어 있다.
힘이 빠진 모양.
이유지는 바닥에 누운 채, 입만 뻐끔거렸다.
“아까 그건 뭐예요?”
“제 능력이요.”
“탐색계 각성자라면서요?”
“그랬었죠. 뭐, 능력이 하나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담담한 내 말을 듣던 이유지가 킥- 하고 웃었다.
나는 누워 있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하마터면 둘 다 죽을 뻔했는데, 왜 뛰어들어 왔어요?”
왜 뛰어들었냐라.
그거야 당연히.
“이게 동업자란 거니깐.”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은 동업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핫!”
바닥에 누워 있는 이유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으려다가 흠칫하고는 자신의 양손을 확인했다.
완전한 수인화.
평범한 인간의 팔 같은 건 없었다.
“징그럽진 않아요?”
“처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그 손 되게 멋진데요? 딱 내 취향이야.”
“그으래요? 보는 눈이 있으시네!”
끙차-
이유지가 내 손을 붙잡으며 일어났다.
예상대로 푹신푹신한 감각이 기분 좋았다.
“동업자. 그렇죠. 동업자.”
그 말이 좋은지, 몇 번이고 되새기던 이유지는 내가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동업자한테는 낯간지럽게 존댓말 안 하는데 그래도 되지?”
“……어어. 그래.”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네.
나야 이런 식으로 편하게 말하는 게 더 좋긴 한데.
의문이 있다.
“야. 그러면 그동안은 왜 존댓말 한 건데?”
그 말에 이유지가 당연하다는 듯, 팔짱을 끼며 말했다.
“당연히 내 맘이지!”
아, 그러세요.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21화
8. 한 가지 다짐(1)
“전원 대기!”
“대기!”
쾅!
노년의 남성이 대검을 땅에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집단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저 멀리 거대한 몽둥이를 들고 있는, 우락부락한 육체의 마물이 서 있었다.
3층 던전의 보스, ‘외눈 거인’
단순 육체 계열의 보스인 만큼 공략이 어렵지는 않을 테지만, 그것은 집단으로 공격을 할 때의 이야기다.
“……길드장님 정말로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몸은 걱정하지 말고, 자네 몸이나 챙기게. 얼마 전에 갑자기 몸이 이상하다느니,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나?”
“제가 그랬습니까? 기억이 잘…….”
“쯧쯧. 나보다 젊은 놈이 치매라도 왔나 보군. 이참에 휴가라도 가는 게 어떤가? 한 달 푹 쉬다가 돌아와.”
“연세도 많으신 분이 이렇게 위험천만하게 다니시는데 제가 어떻게 쉽니까?”
“뭐? 크하하핫!”
그 말에 남성이 크게 웃었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에게 저따위 말을 지껄였다면, 당장에라도 내리쳤을지도 모른다.
“윽?”
“……읏!”
고작 웃음소리에 불과했지만, 정렬해 있던 대열에 뒤틀림이 일어났다.
재빨리 자세를 바로 잡은 수호 길드의 신입 전투원 한 명이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저게 철혈의 노장…….”
안환재는 자신의 옆에 있는 사내를 보았다.
오랜 시간 자신을 보좌하며, 온갖 시련을 헤쳐온 측근.
신태웅.
그가 믿는 몇 안 되는 인물들 중 하나였다.
‘제 아비 뒤질 날만 기다리는 자식 놈들이랑은 다르지.’
안환재에게 있어서 낯선 사람보다도 믿어선 안 되는 게 자신의 혈연이었다.
‘쯧. 자식 농사를 잘못한 내 탓이겠지.’
본인이 생각해도 자신은 가정에 충실한 남편은 아니었다.
아내를 일찍 여의고, 길드와 던전에만 미쳐 살았으니까.
‘하지만 그 꼴을 용인할 생각은 없다.’
원래라면 자신이 길드장에서 내려오는 즉시, 신태웅에게 자리를 넘길 생각이었다.
“저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입니다. 거기다 이제는 적합한 후계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정말 다행이야. 그딴 쓰레기들한테서 그런 애들이 태어나다니, 놀랄 노릇이지.”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분명히 천국에 있는 임자가 힘을 써 준 것이리라.
할아버지같이 강인한 사람이 되겠다며 소리치던 손자, 손녀를 생각하면 진심으로 미소가 지어지곤 했다.
“도련님이 얼마 전에 각성자 등록을 끝마치셨다 했죠?”
“이제 곧 길드의 말단으로 들어온다더군. 마음 같아서는 곧장 부길드장 자리에라도 앉히고 싶은데 말이야.”
“원하지 않으리란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지.”
자신이 자랑할 만한 정직한 사내다.
대한민국에서 5년 만에 나온 각성 등급 S.
모두가 주목하는 ‘슈퍼 루키’가 그의 손자였다.
귀염둥이 손녀딸은 A+를 받았다며 심통이 가득 나 있었지만.
‘이번에 던전 공략이 끝나면 선물이라도 하나 사줘야겠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안환재를 향해 신태웅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조만간 황혼 길드에서 주최하는 모임이 있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정대로 거절 의사를 밝힐까요?”
“흠.”
황혼 길드장 정해연.
고작 스물여섯이라는 나이에 대형 길드의 수장 자리에 앉은 굳센 여성.
자신이 손주의 짝으로 점찍어 놓은 인물이기도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군.’
기껏 4층 던전의 자리를 미끼로 소개팅을 성사시키나 했더니, 어느 순간 물거품이 됐다.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었을 텐데.
무언가 다른 요소가 끼어들었다.
안환재는 한 인물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잠시나마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한 사내.
“그자로군.”
“예?”
“아닐세.”
황혼의 길드장과 인연이 있어 보였다.
“모이라고 만든 자리인데, 안 가면 쓰겠나? 그 날 직접 가겠네.”
“……직접 말이십니까?”
그곳에 간다면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진짜로 혼자 가실 겁니까?”
“그냥 가벼운 운동이라고 생각하게. 금방 끝날 테니.”
점점 늙어가는 몸.
치고 올라오는 차세대 각성자들.
새로 발견된 4층 규모의 던전.
안환재는 아직 자신이 전장에 서도 되는지 묻기 위해 이곳에 왔다.
“적어도, 저 안에 있는 놈한테 뒈지지 않을 거란 건 확신할 수 있겠군.”
노장이 검을 들었다.
* * *
“저희 송별회 하죠!”
“송별회?”
“아. 송별회가 아닌가? 그럼 우리 동업자를 위한 감사 파티!”
“그런 거라면 저도 찬성입니다!”
대뜸 이유지가 그런 말을 했다.
이태영도 옳다구나-하면서 받아들였고.
‘아니, 이 사람들 평소에도 먹기만 하더니, 이번에도 먹자판이야?’
물론 나도 찬성이었다.
“자자. 하루 이틀 만난 사이도 아닌데, 빼지 말고!”
“정확히 말하면 이 주 정도 만났지.”
“징그럽게 그걸 또 세고 있어?”
“선배! 균열 관리부 사람들도 부를까요?”
“그래! 다 불러! 다! 오늘은 내가 쏜다!”
“……어차피 선배가 쏘는 게 아니고, 법카잖아요.”
“어허. 그러면 넌 네 돈으로 사 먹던가.”
“선배 최고! 법카 최고!”
고작해야 삼겹살 정도 먹을까 했었는데, 그날 밤 도착한 곳은 유명한 한우 전문점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신이 난 이유지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역시 고기는 소지!”
“자기 돈 아니라고 이러시기는……물론 고기는 소죠!”
미확인 균열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 된 공을 인정받아 이유지가 속한 균열 관리부 1팀 전원이 두둑한 포상을 받은 모양이다.
“오늘만큼은 마음껏 먹어도 별 탈 없을 거야!”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먹을 생각인가.
이유지의 식성이라면 농담이 아닐 것 같다.
돈이야 나도 많았지만, 역시 공짜로 얻어먹는 고기의 맛은 각별했다.
살짝 구운 업진살을 입에 넣자 곧바로 기분 좋은 소리가 나온다.
“크으. 녹는다, 녹아.”
“하핫. 무슨 아저씨 같아!”
미리 소고기를 몇 점 먹고 있자, 이유지의 팀에 속한 관리부 사람들이 등장했다.
“다들 여기예요!”
이태영이 손을 든 곳에는 마치 씨름이라도 할 것 같이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와, 미친.’
“이쪽은 저희 균열 관리부 1팀 사람들이고. 그리고 이쪽은…….”
나도 키는 어디 가서 꿇리진 않는데, 죄다 나보다 크다.
그런 사람들이 동시에 날 내려다보고 있으니 식은땀이 나오려던 차에, 세상이 거꾸로 변했다.
아니, 거꾸로 변한 건 내가 아니라 저들이었다.
“와우. 단체 그렌절.”
“이서진 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균열 관리부를 도와주신 것에 대해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모습을 보며 배꼽을 잡던 이유지가 이태영의 옆구리를 젓가락으로 찔렀다.
“야, 너는 안 하냐?”
“예? 선배 제가 왜…….”
이유지가 작게 입 모양으로 뭐라고 했다.
댁글?
뭐라고 말하는 거야.
“아이씨. 하면 되잖아요, 하면!”
“흐히히핫! 장관이다, 장관!”
이곳은 균열 관리부에서 통으로 대여했기에 우리 말곤 아무도 없었다.
줄어드는 고기를 보고 있자니, 저 멀리서 주인아저씨가 흐뭇하게 우리를 바라본다.
벌써 소 몇 마리는 통째로 해치운 것 같다.
먹는 기세는 멈출 생각이 없고.
나는 익지도 않은 고기를 와구와구 먹고 있는 이유지에게 물었다.
“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양 볼이 빵빵해진 이유지가 젓가락질을 멈추고 나를 돌아본다.
“웅? 머가 궁금한데?”
“너희 팀 이름이 균열 ‘관리’부 맞지?”
꿀꺽-
“그렇지.”
보통의 관리직이 가질 법한 육체를 생각하고 있자니, 이유지가 피식 웃는다.
“말 그대로지, 뭐. 각 팀마다 일정 구역에서 나오는 균열을 관리해. 그러면 여기서 퀴즈!”
“무슨 갑자기 퀴즈래.”
“발견된 균열에는 누가 갈까요~?”
그야…….
균열을 막는 것에는 각성자가 필요하겠지.
“딩동댕~”
“……전에 관리부 사람들은 대부분 탐색계 각성자라고 하지 않았냐?”
“맞아. 저 사람들 전부 다 탐색계 각성자들이야.”
세상에.
들어선 안 될 것을 들은 것만 같다.
“킥. 우리 1팀만 특히 유별난 거지. 다른 곳은 평범해. 정작 나만 봐도 탐색이랑은 쥐뿔도 상관없잖아?”
“그렇긴 하지. 넌 탐색이랑 안 어울려.”
“어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눈을 좁히길래, 얼른 화제를 돌렸다.
화제를 돌리는 데는 이것만 한 게 없지.
“자, 고기에 소주가 빠질 수 없겠지?”
“역시 너 나랑 통하는 구석이 있다니깐!”
수상식에서 같이 찡그리며 사진이나 찍던 사람과 이렇게 잔을 주고받게 된다라…….
‘나쁘지 않네. 아니, 좋아.’
주변이 시끌벅적하니 좋았다.
혼자 먹는 게 아니라서 더 좋았고.
“쨘! 자, 빨리. 한 잔 더. 쨔안~”
한 잔, 두 잔 들어가고 있자니, 관리부 사람들과 잠시 어울리고 있던 이태영이 기겁을 하며 다가왔다.
“미, 미친! 지금 선배 술 마신 거예요?”
“……? 예. 이유지, 얘. 성인 아니에요?”
“아니, 당연히 성인이긴 한데. 선배 술버릇이 워낙 고약…….”
“야아. 이태여엉!”
“허억!”
어느새 엎어져 있던 이유지가 고개를 들었다.
머리는 산발이고, 입가에 침 자국이 생겨 있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가 이태영에게 다가간다.
“너, 임마. 선배한테 자꾸 말대꾸하고 말이야. 어!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고오…… 직급도 높은데에!”
“무슨 소리입니까. 선배. 전 언제나 선배를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진짜로…… 악! X바…… 아아악!”
입에 발린 말로 넘어가려던 이태영이 이유지에게 잡혔다.
이태영은 모든 걸 포기하고, 우리와의 술자리에 동참했다.
“으허헝.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선배가 언제나 저만 괴롭히고…….”
결국, 만취가 된 이태영이 내게 하소연을 한다.
이럴 땐 그냥 고개만 계속 끄덕여주는 게 최고다.
“크흑. 이런 거 어디 가서 말할 데도 없어서…… 거기다 선배도 나 말고는 친한 사람이 없어서…… 나만 괴롭…….”
지금 보니까 이유지는 이곳에 오고부터 지금까지 쭉 우리하고만 어울리는 중이다.
다른 사람과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건 아니지만, 존댓말을 사용하며 확실하게 거리를 둔다.
상대방 또한 그랬다.
계속해서 같은 푸념만 반복하던 이태영이 돌연 내게 물었다.
“저도 형님이라 불러도 됩니까?”
“예?”
“그, 뭐냐! 선배랑은 말 놓았잖아요. 저, 선배가 누구랑 친구 먹고 그러는 거 처음 봤습니다!”
크으-
잔 하나를 더 비운다.
나는 냉큼 술을 뺏어서 옆자리에 놓았다.
자세히 보니 이거 각성자들 취하라고 만든 특제 술이다.
내일 고생 좀 하겠네.
“좋아요. 그러죠, 뭐.”
“진짜죠? 말 편하게 하세요! 저 이래 봬도 스물두 살이니까!”
“……뭐?”
……고생을 좀 많이 하긴 했네.
흰머리가 가닥가닥 나고,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는 외견에 당연히 나보다 나이 많을 줄 알았지.
“으어어…… 형님…… 죄송해요…… 사실 그 댓글 저예요……!”
“으으…… 솜사탕이…… 하나……둘…….”
결국, 두 사람 다 뻗었고, 나는 바람이라도 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을 보고 있자, 이유지와 만나며 생겼던 퀘스트가 다시 나타났다.
* * *
-특별 퀘스트-
「균열 관리부 소속 이유지, 이태영을 도와 미확인 균열에 대해 조사하십시오!」
보상: 개방된 물체에 대한 새로운 사용법. 선택 개방권.
현재 조사 된 균열 : 10/10
* * *
미확인 균열에 대한 조사.
세상을 좀 더 평화롭게 만든다느니, 그런 거창한 이유로 시작하게 된 건 아니었다.
……물론 처음에는 이유지의 돌진에 나도 모르게 끄덕거린 건 맞지만.
알의 정화를 위한 부산물들.
마음이 잘 통하는 두 사람에 대한 호감.
선택 개방권.
이것들도 조사를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지만, 메인은 따로 있었다.
‘개방된 물체에 대한 새로운 사용법이라…….’
벌써 몇 개나 되는 물건들의 능력을 개방해 왔지만.
아직 나는 이 능력에 대해 긴가민가했다.
앞으로도 나올지 모르는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단순히 물건을 개방하는 거로도 충분할지 모르지만.
새로운 사용법을 알려준다는데, 먹지 않을 이유가 없지.
퀘스트 자체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거저다, 거저.
“후우…….”
아직 퀘스트 완료 문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궁상맞게 저것이 뭘까 생각이나 하고 있자, 이유지가 걸어 나왔다.
“여기 있었네에~?”
이유지는 헤실거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를 보자니 아직 해야 할 과제가 하나 남아 있었단 게 떠올랐다.
피식-
솔직히 텔레비전에서 이게 나왔을 때는 깜짝 놀랐지.
결국 이것 때문이었구만?
나는 술기운으로 강아지처럼 실실 웃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너, 내일은 표정 관리 진짜 잘해야 할 거다.”
“으응? 표정 관리이?”
“그래. 웃으라고.”
“……우서어?”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유지.
뭐, 나는 말해줬으니까.
[▷퀘스트-채널에서 본 미래의 방송을 타인에게 이야기하라(5회)(클리어!)]
[「미래를 보여주는 텔레비전」의 업그레이드가 완료되었습니다!]
* * *
다음 날.
인터넷을 통해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그 미래를 확인했다.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아, 심각하다면 심각한가.
포털 사이트 메인에 대문짝만하게 사진 하나가 박혀 있다.
[연속으로 미확인 균열을 막아 낸 균열 관리부 1팀!]
[팀장, 이유지에게 감사패 전달!]
“크흐흑. 표정 대단하네.”
사진 속 이유지는 첫날 보았던 표정보다도 훨씬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22화
8. 한 가지 다짐(2)
한 번만 볼 순 없어서 사진을 저장하며 실실 웃고 있자니, 이태영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장하다! 휴대폰!
연락 올 사람이 늘었구나.
[형님.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응.]
[……제가 뭐 말실수하거나 그런 건 없고요?]
말실수?
그러고 보니 댓글이 뭐라 했던 건 기억하는데.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이 녀석이 쓴 거였구만.
[응. 없어.]
뭐, 그래도 너그럽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어차피 인터넷상에서는 이미 내 이야기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대한민국에서 5년 만에 나타난 S등급, 안지훈. 수호 길드로 향하다!]
오랜만에 나타난 초기 등급 S의 각성자 때문에 한국은 물론이고, 외국도 떠들썩하다.
소식을 접한 외국 길드의 스카우터들도 급하게 날아온 모양이지만, 이미 갈 곳을 정한 것 같다.
마주치진 못했지만, 아무래도 내가 각성자 신청을 했던 그 날.
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치렀던 모양이다.
E등급과 S등급.
비교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그 덕분에 난 완전히 묻힌 것 같지만.”
그런 슈퍼루키라면 고작 E등급인 나는 거론조차 안 될 만도 하다.
오히려 좋았다.
아직도 길을 지나다니다 현수막을 보면, 순간 몸이 떨리곤 하니깐.
[특별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선택 개방권을 획득합니다.]
[현재 사용하지 않은 개방권 및 강화권이 존재합니다.]
드디어 퀘스트 보상이 들어왔다.
‘완전히 잊고 있었네.’
개방권은 제때제때 잘 썼는데, 아무래도 강화권이 애매했다.
솔직히 숙련도는 자연적으로 오르고 있으니 아깝다라는 생각도 있고.
[선택 강화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해당 강화권은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은 1단계의 물체에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콘택트렌즈. 방석. 손전등.
역시 조금 더 고민해 보자.
[개방된 물체에 대한 새로운 사용법이 공개됩니다!]
가장 궁금하던 내용이다.
대체 새로운 사용법이 뭐야?
[개방된 물체끼리 능력 간의 시너지가 발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건-2단계 업그레이드 이상 완료된 물체에 한정]
“……그러니까 내가 개방한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거지?”
당장 2단계 업그레이드가 임박한 것이라곤 물약이 나오는 정수기 하나뿐이다.
텔레비전과 정수기.
……텔레비전에서 물약이라도 새어 나오는 건 아니겠지?
“일단 손해 보는 건 아닐 거야.”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하나같이 좋은 능력들이니까.
뭐, 때가 되면 알아서 알게 되겠지.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신경 쓰기로 했다.
나는 순식간에 기대에 가득 차올랐다.
“이제 드디어 Ch.2네.”
진짜 마음 같아서는 리모컨 같은 거로 채널을 마구 넘기고 싶었는데.
실제로 리모컨을 개방해 볼까 했지만, 그건 아무리 그래도 좀 그랬고.
“그냥 단순하게 채널을 바꾸면 되는 건가?”
딸칵-
버튼을 누르자 채널이 바뀐다.
[Ch.2]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새로운 미래에 대한 방송이 흘러나왔고.
“…….”
부풀어 올라 있던 기대는 단숨에 터져 버렸다.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Ch.2에서 흘러나오는 미래를 보았다.
낯선 방 안.
피범벅이 된 바닥.
한 명의 노인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광기에 가득 찬 표정의 남성까지.
서로 간의 짧은 대화가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왔고, 노인은 숨을 거두었다.
남성이 중얼거렸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길드장님. 도련님에게는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죽음 또한 거룩한 희생이 되기를.”
남성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낯익은 인물이 나타나면서 텔레비전이 꺼졌다.
나는 십 분간 꺼져 있는 텔레비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휴대폰으로 문자 하나를 보냈다.
「황혼 길드 정해연」
[해연 씨. 저희 모임이 언제라고 했죠?]
[앞으로 정확히 일주일 뒤예요! 저, 그보다 저번에 있었던 일은 제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일주일인가.”
미래를 보여주는 텔레비전.
Ch.2는 어떤 개인의 일주일 뒤 미래를 보여주고 있었다.
* * *
[야야야야. 급해. 급해. 빨리 답장해.]
[뭐.]
[……넌 인터넷 같은 거 잘 안 하지?]
[그건 갑자기 왜?]
[아니…… 그냥 당분간 들어가지 말라고! 인터넷 그거 별로 볼 것도 없더라. 재미도 없고. 응.]
[그래? 하긴 영혼 나간 표정으로 흐물거리는 네 얼굴 말고는 볼 게 없긴 하더라.]
[뭐? 야!]
붕- 붕-
계속해서 울리는 문자 소리를 무시하며 작업을 계속했다.
피식-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이유지의 표정을 떠올리니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그래. 뭐, 아직 일어난 미래도 아니니깐.”
일주일 뒤.
황혼 길드에서 주최하는 모임에서 어떤 사람이 죽는다.
이전에 정해연과 식사를 했을 때, 복도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다.
언뜻 보기만 해도 강인한 몸을 가지고 있던 노인.
그땐 몰랐는데, 꽤나 유명한 인물이었다.
길드 랭킹 2위. 수호 길드장, 안환재.
‘그런 사람이 대체 왜 거기서 죽어가고 있던 거지?’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겠다.
텔레비전이 보여준 미래에서는 이미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였으니까.
다만 알 수 있는 건, 문에 서서 충격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정해연의 얼굴과 이후 일어날 일에 대한 예상 정도.
“명색이 중요한 자리인데, 그렇게 망칠 수는 없지.”
내 물약을 처음으로 세상에 보이게 될 장소다.
지인의 아는 사람이 죽는 걸 그냥 내버려 두기도 그랬고.
“이 정도면 되려나?”
나는 가방에 잔뜩 들어 있는 보온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물은 녹차, 보리차, 옥수수차 등.
물론 평범한 차는 아니다.
하나같이 물약과 섞어서 만든 내 비장의 음료니까.
* * *
「물약이 나오는 정수기」
설명: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정수기를 사용할 경우 물 대신 물약이 나온다.
생산 가능한 체력 물약[하급] : 5ℓ
생산 가능한 마나 물약[하급] : 3.5ℓ
시간당 생산 회복률 : 1.2ℓ/600㎖
◎현재 숙련도가 가득 찬 상태입니다.
◎조건을 만족시켜 다음 단계로 업그레이드하세요.
▷퀘스트-정수기에서 나오는 물약을 100명의 사람에게 마시게 할 것. (2/100)
▷보상-다음 단계로의 업그레이드.
* * *
딱히 급할 것도 없었기에, 판매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해결하려고 놔두고 있던 건데 계획이 바뀌었다.
‘그 정도 상처라면 아무래도 하급으로는 무리겠지.’
시중에서 판매하는 것들과는 그 효과가 차원이 다르단 걸 알고 있지만, 그래 봤자 하급이다.
더 높은 등급의 물약이 필요하다.
퀘스트 조건은 100명.
남은 인원 98명.
대충 시음회라고 하면서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방법도 있겠지만…….
한 장소를 떠올렸다.
“거기가 좋겠네.”
가는 길을 찾을 필요도 없다.
한 때, 눈만 감아도 떠오르던 곳이었으니까.
끼익-
현관문을 열고 나왔는데, 누군가가 옥상에 서 있었다.
근래, 누구보다 많이 봤던 낯익은 얼굴이 나를 창백해진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허억…… 허억……!”
“야, 이유지. 여긴 왜…….”
“우에에에엑!”
“아…….”
건물의 옥상에 쏟아지는, 소고기였던 것들의 잔재.
마치 초원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소들의 물결에 눈을 감았다.
이거 산 지 얼마 안 된 건데…….
* * *
“……그래서 대체 왜 온 거냐?”
“네가 답장을 안 하니…… 게헥!”
“그래. 그래.”
누가 말하길 아무 이유 없이 소고기 사준다는 사람은 없다고 했는데.
이게 그 결과인 건가.
나는 이유지의 등을 치면서, 보온병 하나를 건넸다.
“야. 먹어라.”
“……으으. 나 숙취해소제가 필요해…….”
“그거보다 훨씬 좋은 거니까. 잔말 말고 먹어.”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효과적인 숙취해소제일 거다.
내용물을 통째로 비운 이유지는 그제야 살겠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푸하! 우와. 이거 효과 죽이는데? 맛은 좀 이상하지만.”
이상하긴 무슨.
얼마 전에 완성한 이서진 특제 혼합 물약 주스다.
딸기와 블루베리 맛이 오묘하게 섞인 게 일품이지.
“그런데 너 오늘 근무하는 날 아니었나?”
“으, 응?”
내 말에 이유지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말을 더듬는다.
“오, 오늘 쉬는 날이야! 그 내가 말했잖아. 위에서 포상 내려왔다고. 포상 휴가야, 포상 휴가!”
“그래?”
그럼 뭐 상관없긴 한데.
마침 혼자 가기도 적적했는데 잘됐네.
“야. 네가 방금 마신 거 진짜 비싼 거거든?”
“헹. 음료수가 비싸 봐야 얼마나 비싸겠어.”
“그러니까 오늘 내 일 좀 도와라.”
“일?”
능력까지 써가면서 이곳에 달려왔는지, 꼬리가 돋아나 있다.
좌우로 흔들리는 꼬리를 보면서 생각했다.
원래 어르신들 맘 녹이는 데는 애완동물 재롱만 한 게 없다.
* * *
몇 년이 지났는데도 익숙한 길목을 보자니, 옛 생각이 났다.
여기서 자주 놀곤 했는데.
저기 담장에 적혀 있던 낙서는 그대로구나.
“흐흥~”
……그런데 잰 왜 평범한 길 내버려 두고 담장 위를 걷고 있대.
“꽤 후미진 곳이네. 여기가 어디길래 오자고 한 거야?”
“내가 살았던 곳.”
“으, 음! 나는 원래 이렇게 빈티지한 곳이 더 좋더라!”
보통 이런 곳을 빈티지하다고 하나…….
졸지에 탈룰라가 되어 버렸다.
“옛날 생각나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살았던 동네다.
정말 하나도 안 변했네.
그렇게 걷다 보니 낡은 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행복 양로원.
“도착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함께 손잡고 왔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단 한 번뿐이었지만, 그 기억은 내 어린 시절에 얼마 없는 좋은 추억 중 하나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쪽에 있던 어르신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으잉?”
“누구여?”
어떻게 인사를 해야 옥장판 판매상 같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이유지가 먼저 앞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어르신들!”
“허허. 이쁘장한 아가씨가 이런 곳엔 어쩐 일이래.”
나를 보실 땐 웬 도둑놈인가 싶은 눈빛으로 보시던 분들이 이유지가 앞으로 나오자 눈웃음을 지으신다.
……얘 데려오길 진짜 잘했네.
“앗. 제가 잘못 찾아왔나 봐요. 여긴 전부 다 멋쟁이분들밖에 없네?”
“뭐여? 흐허허허!”
“아가, 말도 참 예쁘게 하네.”
호칭도 어느새 아가로 변해 있었다.
어르신들 틈에서 대인기인 그녀를 보고 있자니, 할머니 한 분이 내게 다가왔다.
“여긴 어쩐 일로 왔수……? 응?”
할머니는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혹시 전에 저 위에서 살던 이씨 총각네 집 아들 아니여?”
그 시절의 기억은 흐릿흐릿하지만, 이분이 내 손에 사탕을 쥐여주셨던 기억은 어렴풋이 있었다.
“예. 건강하셨어요, 어르신?”
“아이고. 아이고. 이게 웬일이여…….”
할머니는 내 손을 꽉 쥐시며 말했다.
“이씨네 부부 그렇게 되고 그 어린 것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어…… 우리라도 챙겨줬어야 하는 건디. 미안혀, 미안혀…….”
“그러지 마세요. 저 잘살고 있어요.”
“하늘이 도왔구먼. 참말로 다행이여…….”
문득 또 다른 분이 생각나 그분의 근황을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할머님의 상태도 그렇게 좋진 못하셨으니까.
응. 역시 오길 잘했다.
“안에 들어와서 따뜻한 차라도 한잔하고 가. 응?”
“제가 준비해 온 차가 있는데 같이 마셔요.”
나는 가방에 가득 담아 온 보온병들을 내려놨다.
“어르신들! 차 한 잔씩 하세요!”
그 말에 한껏 재롱을 부리던 이유지가 벌떡 일어나더니 이곳으로 온다.
차 옮겨 담는 걸 도와주는 이유지를 보면서 할머니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신다.
“그래서 저 아가씨는 새색시여?”
“아뇨. 색시는 아니고…….”
“그럼 무슨 관계인디?”
굳이 호칭을 정하자면…….
이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집사.
* * *
행복 양로원의 관리인인 최명혜는 거듭되는 관리비 부족으로 근심이 많았다.
아무래도 무료 양로원인 만큼 지원도 마땅치 않았고, 그로 인한 시설 악화와 부실한 식단.
거기다 장소가 외지다 보니, 후원도 많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폐업하게 될지도 몰라.’
그러면 저 갈 곳 없는 분들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최명혜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진기한 광경을 보게 된다.
“허이, 두이!”
어르신들이 단체로 체조를 하고 계시는 거였다.
“그렇게 과하게 움직이시면 위험해요!”
하지만 다들 정말로 무리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진 않았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몸이 새것 같구먼!”
“새로 태어난 기분이여!”
“내 만성 허리 통증이 사라졌어. 허허!”
최명혜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고 있을 때,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행복 양로원에 후원을 하고 싶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상담을 통해 전해드린다는 말이 있었고.
그녀는 적혀 있는 액수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게 대체 얼마야?”
* * *
“으아. 오랜만에 재미있게 놀았다.”
“나중에는 네가 더 즐기는 거 같던데.”
“흐. 다 착하고 좋으신 분들이더라.”
“너 원래 낯가리지 않았냐?”
“착한 사람은 예외야. 날 봐봐. 내가 착해서 어르신들이 다 날 좋아하시잖아.”
할 말은 많았지만 하지 않으마.
이유지 덕분에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물약값은 충분히 했다고 볼 수 있다.
부웅-
이유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소리를 듣자마자, 확인도 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꺼버렸다.
“뭐야. 전화 안 받아?”
“하하…… 스팸 전화인 거 같은데…….”
“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알아?”
부웅-
이번엔 내 휴대전화다.
열어서 확인하려는데, 이유지가 잽싸게 내 것을 가로채 갔다.
“뭐 하냐.”
“이야! 네 휴대폰 진짜 신기하다! 이런 게 최신 스마트폰인가?”
“……네 거가 내 거보다 더 최신이거든?”
“그, 그런가?”
당황하며 핸드폰을 뒤로 숨기는 모습을 보자니, 어쩐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충 저기서 미친 듯이 달려오는 사람과 관계가 매우 커 보이는데.
“선배!!!”
“……!”
“너, 땡땡이쳤지.”
머리는 산발에, 평소보다 더 진한 다크서클을 하고 있는 이태영이 울상을 지으며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선배. 그렇게 도망가시면 어떻게 해요! 내가 진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아하하…… 미안.”
“형님! 제 전화도 안 받아주시고!”
“야. 난 무죄야.”
이유지가 쥐고 있는 내 폰을 가리키자, 이태영이 한숨을 쉬며 그것을 뺏어 내게 건네줬다.
이유지가 다급한 얼굴로 이태영에게 뭔가 말하는 게 보인다.
저걸로 마구 부려먹고 있었구만.
“야. 댓글 얘기라면 이미 술자리에서 다 들어서 알고 있다.”
“……!”
“혀, 형님. 진짜요?”
“어. 근데 별로 신경 안 써.”
“진짜요? ……들으셨죠? 선배.”
“야아! 배신하는 게 어디 있어어어!”
배신은 무슨.
이유지가 이태영에게 양팔을 잡혀 끌려가고 있었다.
평소와는 상황이 역전된 모습.
표정이 울상인 게, 돌아가면 산더미 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도 이제 돌아가 볼까.”
잠깐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저 위로 올라가면, 예전에 살던 집이 나온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리움도 많은 그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곳.
하지만 가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달라진 것이 없었으나.
내 삶은 많은 게 달라졌다.
이곳에 오고 나서야 제대로 정할 수 있었다.
‘멋들어지게 살고 싶다.’
한 때, 항상 하던 생각이다.
각성을 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살 것이라고.
하지만 각성을 하자,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우연히 얻은 능력을 가지고 잘난 듯이 사는 게 맞을까.
능력이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놈인데.
실제로 이 능력을 얻지 못했다면 옥탑방에서 쓸쓸하게 죽었을 텐데.
그래도.
“이제 그런 생각 안 하기로 했어.”
능력이 있든 없든, 어느 쪽이든 나니깐.
어수룩한 면도, 약간은 이기적인 면도.
전부 다, 나 이서진이라는 사람이다.
사람이 어느 한순간에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멋들어지게 산다.
내게 그것은 비싼 차를 탄다거나, 맛볼 수 없는 음식을 먹는다든가 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동안은 누릴 수 없던 평범하고 즐거운 삶.
소소한 행복.
이 능력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된 인연들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그놈들부터 어떻게 해야겠지.”
근래 내 근처에서 벌어진 사건들.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가 벌인 일이 틀림없다.
예상이 맞다면, 반드시 일주일 뒤에도 나타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신경 쓰기로 했다.
이전부터 계속해서 내 눈에 들어오는데.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그 잘난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고.”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23화
9. 별들의 연회(1)
대한민국의 10대 길드.
그들이 매년 번갈아가며 개최하는 모임.
일명.
「별들의 연회」
일 년에 한 번 주기적으로 열리는 이 연회는 길드들에게 있어 매우 뜻깊은 자리다.
“……초대는?”
“와, 왔어! 왔다고!”
“예스으으으!!”
“야. 이거 장난 아니지? 장난친 놈 있으면 지금이라도 나와! 당장 죽여 버릴 거니까!”
“으아아아아!”
[별들의 연회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단순한 편지이지만,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고작 모임 하나 가지고 뭘 그렇게 유난을 떠느냐.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백이면 백 초대를 받지 못한 놈들이나 하는 이야기다.
세상에 필요불가결한 각성자.
각성자들이 설립한 길드.
그런 길드들 중에서도 정점에 위치하는 10대 길드.
그들과 같은 모임에 참여하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길드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
그런 연회인 만큼, 그곳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제각각 그곳에 향하는 이유가 다르다.
누군가는 고위 각성자들과 연을 맺기 위해서.
누군가는 곧 있을 선거 유세를 위해서.
그리고 누군가는…….
“길드장님 안 나오신 지 얼마나 되셨지?”
“어림잡아 반년은 넘으셨지…….”
“……밥은 드시고 계신대?”
“하루에 두 번은 문 앞에 밥 놓고 가니까…… 그거 없어지는 거 보면 살아 있으신 거 같긴 한데…….”
흰색 가운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한 달째 굳게 닫힌 문을 보며 걱정스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금술사 길드.
마물의 부산물을 이용해서 온갖 발명품을 만드는 이들.
한때는 그럭저럭 큰 규모의 집단이었지만, 이제는 길드라고도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간소한 모임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연금술사라고 부른다.
“……역시 대형 길드하고는 경쟁할 수도 없는 건가.”
연금술사 길드인 만큼 남들에게 내세울 만큼 앞서가는 발명품이 있었다.
물약.
수작업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소수인 그들도 대형 길드에 승부를 걸어볼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옛날이다.
“황혼 길드가 69%까지 끌어올렸다 했지?”
“거긴 무슨 괴물들밖에 없나.”
생산량도 생산 속도도 밀릴 수밖에 없는 그들이기에 승부를 걸어볼 만한 것은 오직 ‘순도’뿐이다.
하지만 그것에서조차 그들은 황혼 길드를 이기지 못했다.
타 길드에 비교한다면 높은 순도이기에, 자존심만은 어찌 지키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황혼에게 연금술사 길드라는 이름을 넘겨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비웃음 소리도 들리고 있다.
실제로 합병을 제안하는 대형 길드들도 많았고.
이곳과는 전혀 다른 빵빵한 지원과 인력.
길드장은 그 모든 걸 거절했다.
결국, 그들은 연금술사 길드 내부의 인재들을 빼가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비교할 수조차 없는 연봉과 복지.
따라가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리라.
“그럼 넌 왜 안 따라간 거냐?”
“따라가면 길드장님 혼자 저러고 있다가, 아사할 게 뻔한데 어떻게 그러냐?”
“……하긴. 길드장이 해준 게 있는데 배신은 하지 말아야지. 그 개자식들.”
“너무 욕하진 마라. 걔들도 먹고살려고 그러는 거잖냐.”
“후…….”
그는 손에 들린 초대장을 보았다.
별들의 연회.
영광스러운 자리이지만, 그들은 이 자리가 부담스러웠다.
“하필이면 황혼 길드 주최냐…….”
“거기 갔다간 길드장님 쓰러지실지도 몰라.”
“역시 이건 거절해야겠지?”
“……이거 팔 수는 없냐?”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그렇겠지?”
아쉽네.
그런 소리를 뱉으며 편지를 접는 순간.
쾅!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됐어! 됐다고!”
“길드장님?”
“연구소 안에서는 팀장이라고 부르라 했잖아!”
“진짜 팀장님이다!”
온몸을 뒤덮은 멸균복이 벗어지면서 처참한 몰골이 드러났다.
깎지 않은 수염은 지저분하게 나 있었고, 머리도 기름에 절어 산발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웨에에엑!”
“이게 무슨 냄새야!”
극도로 농축된 땀 냄새가 옷 안에서 퍼져 나왔다.
대체 얼마나 안 벗고 있던 거야?
‘설마, 내내……?’
연구원들은 급하게 코를 막았다.
“그보다 팀장님 대체 뭐가 됐다는 겁니까?”
저렇게 흥분하는 모습은 처음이기에 연구원들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온갖 괴짜 같은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다.
이번에는 대체 어떤 걸 만드셨을까.
하지만 그것은 발명품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저 손에 들린 거!”
“저, 저거 설마!”
“드디어 눈치챘군.”
그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그마한 유리병에 들어가 있는 액체.
“성공하신 겁니까?”
그는 대답 대신 연구원들에게 다가갔다.
그들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지만, 그의 관심사는 편지였다.
[별들의 연회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몇 년간은 오지도 않았던 초대장이다.
만약 온다고 하더라도 가지 않았을 것이고.
보낸 곳은…… 황혼 길드.
잘됐군.
“어쩌실 생각입니까……?”
“알려주러 가야지.”
“무엇을…….”
황혼 길드에조차 볼 수 없던 진한 색깔.
그는 대답 대신 자신 있는 손놀림으로 병을 내려놓았다.
“연금술사들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누군가는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그곳으로 향한다.
연금술사 길드장, 박명훈이 미소 지었다.
* * *
연회에 초대되는 인물들은 대부분 정해져 있다.
대형 길드 혹은 대형 길드는 아닐지언정, 그들과 직간접적인 교류가 있는 길드 혹은 정재계의 인물.
길드 랭킹 26위. ‘스네이크’의 부길드장인 전진우도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이번에 아버지는 모임에 못 나가신다고 했지?”
“예. ……아무래도 부길드장님께서 대신 참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그가 아니라, 부친인 길드장에게 온 초대장이었다.
“가야지, 뭐. 별거 있겠어? 거기다가 이번 기회에 아버지보다 내가 낫다는 걸 증명하면 되겠지.”
전진우가 웃으며 턱을 괴었다.
오히려 잘됐다.
이번에 잘만 해결한다면 길드장 자리를 넘기고 은퇴라도 하라고 권해드려야겠어.
“황혼 길드인가.”
마침 이번 연회의 주최자가 황혼 길드였다.
각성자들에게 있어서 목숨과도 같은 물약을 가장 순도 높게 생산하는 곳.
당연히 스네이크 길드 또한 황혼 길드에서 일정량의 물약을 사들이고 있었다.
순도 65%의 물약.
그것만으로도 타 길드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지만.
그는 그보다 상등품을 원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아버지가 여자 다루는 법을 몰라서 그래. 노친네라 그런가. 큭큭. 길드장이라고 해봤자, 새파랗게 어린년이잖아?”
황혼 길드 정해연인가.
잘만 구슬리면 물약은 물론이고, 더 높은 곳을 위한 도약도 가능할 것이다.
자신 있었다.
여자들에게 호감을 사는 일 따위는 자신에게 있어서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으니까.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곧바로 버릴 테지만.’
“그보다 기분 나쁘네. 날 의심한단 거야, 뭐야?”
“무, 물론 저는 부길드장님을 믿고 있습니다만…….”
“쯧. 하긴 너 같은 놈이랑 무슨 말을 하겠냐.”
전진우의 수행비서, 최성필은 그 말을 듣고 몰래 주먹을 쥐었다.
자신보다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저런 이야기를 듣고도 참아야 한다니.
하지만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면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아버지가 시킨 일이나 똑바로 처리해 놔. 돌아오고 나서 다 확인해 볼 테니까.”
확인은 무슨.
할 일을 전부 다 자신에게 떠넘기고, 정작 부길드장인 본인은 일조차 안 하면서.
할 줄 아는 거라곤 여자를 낀 노름질뿐이다.
저런 놈이 차기 길드장이라니…….
역시 인생사는 혈연이 전부다.
자신에 대한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길드를 나가는 전진우를 보면서 그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이 길드 괜찮을까?”
그저 별 탈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시간은 흘렀고, 어느새 연회에 가기 하루 전이 되었다.
물론 하루 전이든, 이틀 전이든 지금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쿵!
쿵!
이제는 매우 익숙해진 방아질이다.
나는 곱게 빻은 마물의 사체를 곧장 물속으로 털어 넣었다.
물약과 함께 잘 섞이도록 손수 저어주고…….
혹시 물 온도가 내려가지는 않았는지 온도계로 섬세하게 확인해 준다.
와.
진짜 내가 들어가는 욕조도 이 정도로 열심히 준비하진 않는데.
그래도 이런 짓이 전부 다 헛된 짓은 아니라고 생각하니 자괴감은 있을지언정 마음만은 편했다.
* * *
「멸망용 ‘?????’의 오염된 알」
설명: 타락한 요정들이 드래곤의 레어에서 몰래 훔쳐온 멸망용의 알이다. 자신들의 주인으로 삼기 위해 부화를 시도했으나, 침입자들로 인해 저지되었다.
*부화까지 72시간 18분 38초 남았습니다.
*오염된 상태에서 알이 부화할 시 멸망용이 깨어나며, 해당 위치에 10층 규모의 던전 『멸망용의 분노』 가 강림합니다.
*현재 알에는 파손 보호 마법, 마력 차단, 정보 차단 마법 등의 고대 마법이 걸려 있는 상태입니다.
▷현재 정화가 진행되는 중입니다.
▷알의 정화가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정화율: 98%
* * *
[멸망용의 알이 검은 뿔사슴의 심장을 흡수합니다!]
[멸망용의 알이 그룸의 온전한 수정을 흡수합니다!]
“……좋아. 여유로워. 이제 거의 다 됐어.”
처음과 같은 새까만 돌은 어디 가고.
이제는 누가 보더라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밝고, 탐스러운 알이 미니 오리 욕조 위에 떠 있었다.
이 알과 만나게 된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네.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추억이라고 부를 게 물 갈아준 것밖에 없구나.
부화를 위한 타이머도 이제 대략 삼 일 정도밖에 안 남았다.
정화율은 98%.
지금까지의 속도를 고려한다면 완전하게 안정권이다.
과연 이 알에서는 어떤 생명체가 나올까.
정화를 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 생명체가 선한 존재라고 볼 수 있을까?
“……나쁜 놈이면 여기서 태어난 놈을 죽여야 하나?”
처음에는 귀찮아했지만 손수 기저귀도 갈아주고, 먹이도 주면서 잔뜩 정이 든 녀석이다.
가능하면 죽인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제발 순둥순둥하고 귀여운 애로 태어나주렴.
들썩! 들썩!
“아이고. 그랬어요? 우리 순둥이도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순둥이.
태명 비슷하게 지어준 이름이다.
물론 마음에 들진 않는지, 이름을 부를 때마다 미친 듯이 알이 흔들린다.
그래. 마음껏 흔들어봐라.
그래 봤자 넌 알이잖아. 하하.
좌우로 튀는 물.
욕조 안의 물약은 이전보다 더욱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수기의 단계가 업그레이드되면서 ‘중급’의 물약이 생산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것까지는 예상했던 부분이다.
아마 다음 단계에는 상급의 물약이 나오겠지.
“그런데 이건 몰랐단 말이야.”
집구석에 따로 빼놓은 상자 하나.
상자에 들어 있는 물약도 단 열두 개뿐이었다.
정수기에서 나오는 물약은 그 자체로 특별했지만.
이것은 조금 다른 의미로 ‘특별’했다.
기본적으로 물약은 빨간 물약과 파란 물약뿐이다.
일부러 구별할 수 있게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만, 효과 또한 색처럼 두 가지뿐이다.
체력을 회복시키는 빨간 물약.
마나를 회복시키는 파란 물약.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곳에 하나가 추가될 것이다.
이번 연회에서 활약하게 될 키포인트.
[조금 특별한 물약이 있는데, 사람 한 명만 보내주시겠어요?]
“너만 믿는다.”
나는 노란색의 물약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24화
9. 별들의 연회(2)
“……여기가 연회 장소.”
길드 ‘위트’의 송도형은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전방에 있는 빌딩을 응시하였다.
“우리 길드 하우스랑은 차원이 달라.”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들 또한 어디서 한 번씩 봤던 사람들이다.
‘……나도 한 길드의 대표로 이곳에 온 거야.’
하지만 연회에 초대받은 건 처음이었고,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왜 우리 길드한테 초대장이 온 거지?’
그게 의문이었다.
위트 길드.
길드장인 자신을 포함해서 열 명밖에 없는 소수 길드다.
길드라고 부를 수조차도 없을 정도의 처참한 규모.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기회야.”
자신을 믿고 따라와 주는 길드원들을 위해서라도 이곳에서 성과를 거두리라.
후아-
심호흡을 크게 하고 걸음을 내디뎠다.
툭-
그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 부딪혔다.
자신이 부딪친 게 아님에도, 송도형은 즉각적으로 사과를 위해 몸을 틀었다.
이 통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각 길드의 수장급이니깐.
“죄송합니다.”
“아뇨. 저야말로.”
남성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송도형에게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전진우라고 합니다.”
전진우…… 전진우…… 딱히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혹시 이 사람도 처음 온 건가?
자신과 같은 처지를 발견한 게 기쁜 건지 송도형이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송도형입니다!”
“어디 길드 소속이신가요? 연회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인 것 같은데. 혹시 누군가의 대리인이신가요?”
“아뇨! 저는 위트 길드의 길드장입니다. 이번에 처음 초대받은 것이 맞아요.”
“……위트 길드?”
“예.”
“쯧. 뭐야. 쓰레기였잖아.”
“……예?”
송도형은 이질적인 목소리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소는 그대로였으나, 전진우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워져 있었다.
아직 내부가 아니다. 보는 눈이 많다.
전진우는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작게 속삭였다.
“들어보지도 못한 똥통 길드가 감히 내 어깨를 치고 그냥 가려 하네?”
“예? 제가 친 게 아니라 그쪽이 친 거잖습니까!”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려고? 위트 길드라고 했지? 난 스네이크의 부길드장이다. 똑똑히 기억했어.”
스네이크 길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에 송도형의 얼굴이 굳어갔다.
질이 안 좋은 녀석들이다.
“모처럼 좋은 날이라 웃고 가려는데 안 되겠네. 너 때문에 내 어깨가 빠진 거 같은데 어떻게 할까? 나도 하나 뽑아줘야 마음이 풀릴 거 같은데.”
“그, 그게…….”
툭!
“아이씨. 또 누구야!”
전진우가 짜증 가득한 소리를 내었다.
이번엔 어떤 놈이지?
“뭐야. 안 부러졌네.”
이놈도 처음 보는 얼굴이다.
전진우는 끓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혹시 어디 길드 소속이세요? 전 스네이크 길드의…….”
“난 길드 없는데.”
“……예?”
“무소속이라고. 무소속.”
그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전진우가 주변이고 뭐고 제 성질을 드러내려 할 때, 남성이 말했다.
“여기서 난리 치려고?”
“…….”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인다.
본 적 있는 얼굴이다.
자신의 길드보다 높은 순위의 길드장.
전진우는 이를 물고는 등을 돌렸다.
“너, 얼굴 기억했어. 좀 있다 봐.”
전진우가 사라지고, 송도형이 사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도와준 건 아니고…….”
어깨로 길을 막고 있길래.
그렇게 말하며 살며시 미소 짓는 사내에게 송도형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때문에…… 괜찮으시겠어요? 왜 그러신 거예요? 상대는 스네이크의 부길드장인데…….”
“그냥 웃겨서요.”
“예? 뭐가요?”
“진짜로 강한 사람은 겸손이 몸에 배어 있는데, 저런 놈이 저렇게 행동한다는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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