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efato 1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01화
프롤로그
세상엔 여러 정수기가 있다.
하지만 그중 우리집 정수기는 조금 특별하다.
“물이나 마셔 볼까?”
칼에 찔린 상처도.
수술을 해야 할 병조차도.
“크으. 물 맛 좋다.”
물 한 잔이면 충분하다.
왜냐고?
우리 집 정수기에선 물약이 나오니까.
“이건 또 왜 이러냐.”
그런데 다른 물건들도 무언가 이상하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02화
1. 내 정수기가 이상하다(1)
“여기 7번 테이블에 고기 추가요.”
“서진 씨. 지금 홀로 좀 가줘!”
“예? 그렇지만…….”
“지금 사람 없어서 홀 미치겠으니까. 빨리!”
“예.”
주방에 다급하게 들어온 사장님의 말.
나는 설거지를 멈추고, 홀로 나가서 서빙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 정도 흘렀을 때, 몸에 반응이 왔다.
“저기요.”
“예. 갑니…… 커억!”
주문을 받고 자연스럽게 고기를 테이블로 가져가려던 찰나.
내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앞으로 쓰러진다.
“꺄악!”
“뭐, 뭐야!”
들고 있던 쟁반이 앞으로 엎어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가 핑 도는 것만 같았지만, 쓰러진 상태로 급히 말했다.
“죄, 죄송합니…… 다.”
“누가 구급차 좀 불러 봐요!”
“……괜찮습…… 니다.”
심장 부근을 움켜쥐고, 급하게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손에 들어오는 작은 통. 그곳에서 약을 꺼내 물도 없이 삼켰다.
그렇게 3분 정도 엎드려 있었을까. 식은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오려던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보더니 발을 돌린다.
안쪽에 있던 사람들도 밥 먹는 걸 멈추고 전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거 또 망했네.’
내가 쏟은 그릇을 치우려고 하자 같이 일하던 사람이 만류한다.
“제가 할 테니까. 서진 씨는 들어가서 쉬세요.”
“제가 할 수 있…….”
“괜찮으니까. 들어가세요.”
익숙한 일이었다. 어쩐지 이번엔 오래간다 싶더라니.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고, 뒤쪽으로 빠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가게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다른 직원들은 전부 퇴근했을 때, 나는 사장님과 대면했다.
“미안하지만, 내일부터는 나오지 말아주게나. 오늘까지 일한 몫은 다음 월급날 보내주도록 할 테니까.”
“죄송합니다.”
“쯧. 자네가 미안할 게 어딨겠나. 자르는 입장에서 말하긴 뭐 하지만, 좀 더 괜찮을 것 같은 일을 찾아보게.”
“예.”
오늘도 알바하던 곳에서 쫓겨났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겨우 찾은 알바 자리였는데.”
빌어먹을 심장.
왜 하필 그때 그 지랄인 거야?
그래서 되도록 주방에만 박혀 있겠다 한 건데.
야속한 마음을 담아 왼쪽 가슴을 작게 주먹으로 두드렸다.
“하아…….”
집으로 가려던 찰나에 포장마차가 보인다.
술은 가급적 먹지 말라고 했지만 오늘은 마시지 않고는 못 버티겠다.
“여기 술이랑 가장 싼 안주로 하나 주세요.”
자리에 앉아 잔치국수를 안주로 술을 마셨다.
물론 같이 먹을 사람도 없었다.
주변을 봐도 혼자 먹는 사람은 나 혼자뿐.
“킥…….”
괜히 궁상맞다고 생각하며 술을 한 잔 비웠다.
내 인생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갈수록 상념은 깊어져 간다.
분명 자신도 평범하던 때가 있었다. 부모님 두 분 다 살아계시고, 평범하게 친구도 있던 때가.
부모님은 내가 중학교를 마칠 무렵 갑자기 돌아가셨다.
두 분이 마석병을 앓고 있었단 사실은 그때야 알았다.
그 빌어먹을 마석병이 내게도 잠들어 있었단 현실도.
집이 가난했기에 진통제를 먹어가며 겨우 버티셨던 모양이다.
나 또한 그랬다.
마석병을 치료하기 위한 기술은 현재 없었으며, 그 비슷한 거라도 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마땅한 보험조차 없는 나였기에, 방법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 애초에 마석병은 보험 적용도 안 됐었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
그나마 버는 돈으로 진통제라도 사가며 간신히 생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이어가는 생이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다시 술이 생각났다.
벌써 한 병을 다 마셨는지, 비어 있는 술병을 들며 사장님을 부르려 했다.
“여기 술 한 병…….”
‘아차’ 하고 든 생각에 주머니를 뒤졌다.
구겨진 천 원짜리 여덟 장.
얼마 없는 돈을 세고서 한숨을 내쉰다.
나 주제에 술은 무슨 술이냐.
나는 마지막 한 잔을 들이켜고는 계산을 했다.
“술 하나 맘대로 못 마시는구나.”
어차피 많이 먹어봐야 좋을 것도 없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마신 술이라 그런지 조금이나마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상태여도 큰소리칠 자신은 없었기에, 소심하게 뱉어본다.
“나도 멋들어지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
각성자인지 뭔지 하는 사람들은 진짜 멋지게 산다던데.
자신과는 다르게 몸도 괴물이라고 불릴 정도로 튼튼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의 1%만이라도 몸이 건강하다면 이런 고생 같은 건 할 필요도 없을 텐데.
“후우…….”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지 심장 부근이 아파져 온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 잠시 숨을 돌렸다.
점점 괜찮아지려는데 술에 취한 노파가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으잉? 어디 길을 막고 지랄이여, 지랄이!”
거슬린다는 듯 미는 손. 살짝 터치하는 수준이었지만 내 몸은 허무하게도 뒤로 넘어갔다.
꽈당!
벽에 몸을 부딪치자 다시 심장이 크게 뛴다.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크게 쉬었다.
“후우…… 얼른 집에 가자.”
집에 가서 약 먹고 쉰다면 괜찮으리라.
허름한 빌라 위에 있는 옥탑방.
그곳이 내 보금자리였다.
겨우 도착하고서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끼어 맞춘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심장 쪽의 격통이 심해졌다.
“커헉! 야, 약이…….”
다급하게 정수기 앞으로 가서 품 안에 있는 진통제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통은 나오지 않았다.
“아까 부딪쳤을 때…….”
그때 떨어뜨린 건가?
“허억…… 허억…….”
가만히 있어도 진정될 때가 있었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봤을 때, 이건 약이 없으면 위험할 것 같았다.
“흐흐…….”
고작 약 하나 못 먹는다고 죽는 몸이라.
갑자기 모든 게 허무해졌다.
심장 소리가 점점 커져가며, 내 입도 바싹 마른다.
-평상시에 물 많이 드셔야 합니다.
지금 죽게 생겼는데, 이 말이 왜 떠오르냐…….
억지로 다리를 끌며, 정수기 앞으로 몸을 움직였다.
“물이라도 먹고 가자.”
최소한 갈증이라도 풀고 가면 덜 억울하겠지.
컵도 보이지 않았기에, 대충 두 손을 모았다.
그렇게 정수기에서 나온 물을 손바닥에 받아 한 번에 들이켰다.
“크. 달다!”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나왔다.
그래 봤자 그냥 물이지만 어째선지 너무 달았다.
죽기 직전 마셔서 그런가.
원효대사가 마셨다던 해골 물도 이런 맛이었을까.
‘킥. 죽을 때 되니 별 이상한 생각까지 하게 되네.’
어쩐지 몸이 졸려온다. 나는 정수기 앞에서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 * *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우리 집 천장이었다.
“살아 있는 건가?”
분명히 숨넘어가기 직전이었는데…….
약도 먹지 않았다.
고작해야 필터를 언제 청소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오래된 정수기에서 나온 물을 한 잔 마셨을 뿐이다.
“……몸이 어째 가벼운데?”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찌뿌둥하던 몸도 오늘따라 괜찮았다.
“……운이 좋았네.”
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막 일어나서인지 목이 말랐다.
“어제는 갈증이라도 풀고 죽자 했으면서.”
막상 일어나니 목이 마르냐.
혼자 낄낄대면서 컵을 들어 정수기에 가져다 댔다.
실실 웃던 내 얼굴이 점점 굳기 시작한다.
무언가 이상했다.
“……? 이게 무슨 색이야?”
정수기에서 빨간 물이 나오고 있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03화
1. 내 정수기가 이상하다(2)
“……?”
헛것을 보는 건가. 따랐던 물을 싱크대에 버리고, 다시 물을 따랐다.
“뭐야. 왜 이래?”
눈을 비비고 봐도 다시 한번 빨간 물이 나온다.
“녹이라도 슨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정말로 어제 먹었던 물이 해골 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렇게 새빨간 물을 맛있게 먹었다고?
‘크. 달다? 이런 미친놈. 저런 걸 먹고 그런 생각을 했다고?’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분명했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왼쪽에 있는 뜨거운 물을 받았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뭐야. 이건 또 파란색이야? 하하. 미치겠네. 진짜.”
정수기에서 빨간 물과 파란 물이 나온다.
무슨 초등학교 때 듣던 화장실 괴담도 아니고.
킁킁.
“……냄새는 또 이상한 거 같진 않은데.”
빨간 물과 파란 물을 둘 다 따라놓고 냄새를 맡았다.
녹 냄새가 날 것 같았지만 하나도 나지 않았다.
미친 소리 같지만 약간 달콤한 냄새가 난다.
“달콤하긴 무슨. 내가 미쳤지.”
솔직히 좀 고민된다.
……어차피 냄새도 좋은데 마셔도 되는 거 아닐까. 목도 마르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어째선지 이 물이 매우 맛있어 보였다.
그렇게 아주 살짝.
빨간 물이 담긴 컵을 입에 대었다.
고작해야 입술을 적실 정도.
별 이상한 맛도 안 나기에, 결국 한 번에 물을 삼켰다.
“색만 이럴 뿐이지. 그냥 평범한 물인가? ……약간 딸기 맛이 나는 거 같기도 하고.”
혹시나 싶어서 파란 물도 먹어봤다.
분명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이었을 텐데 뜨겁진 않았다.
오래됐으니 고장이라도 난 건가.
“이것도 별로 이상하진 않네. ……이건 무슨 블루베리 맛이 나냐. 나 진짜 미쳤나?”
별 희한한 일도 다 있구나.
나는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여기도 그러면 어쩔까 했는데, 다행히도 샤워기에선 정상적인 물이 나왔다.
“기사님을 부르든가 해야지, 원.”
고작 두 잔 마신 거로 몸에 이상이 생기진 않겠지만, 매일 마시는 식수이니만큼 빨리 고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당일치기 알바라도 찾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어제 돌아왔던 길목을 다시 거슬러가자 무언가를 발견했다.
“찾았다.”
구석에 작은 사이즈의 약통이 있었다.
어제는 이게 없어서 죽을 뻔했었지.
안을 보니 약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중에선 구할 수 없는,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강한 마약성 진통제다.
“내일 한번 들러야겠네.”
그리 중얼거리며 폰을 켰고 ‘급구’라고 적힌 문구에 곧장 전화를 걸었다.
* * *
시내에서 하는 전단지 알바.
시간도 4시간으로 짧고, 그리 험한 일도 아닌지라,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건네는 동안에도 몸에 활력이 가득 넘쳤다.
‘힘이 넘친다!’
특별히 먹은 것도 없는데, 몸에서 힘이 넘친다니.
이렇게 몸이 활기찼던 때가 언제였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오…….”
“총각. 전단지 나눠주는 솜씨가 일품이네, 일품!.”
같이 전단지를 나눠주시던 아주머니가 내 등을 두드리며 웃으신다.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을 듯이’ 힘들단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나였기에 이 정도의 고통은 오히려 반가운 수준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전단지 알바가 끝이 났다.
나는 별 이상은 없나, 몸 상태를 확인했지만.
오히려 내 몸은 아쉽다는 듯, 열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거 이대로 계속해도 되겠는데.’
자연스럽게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항상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
그럼 몸 걱정할 일도 없을 텐데.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오늘 하루 동안 단 한 알의 진통제도 먹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하루에 몇 알은 주기적으로 먹었었는데…….
“이상하단 말이야.”
아프던 사람이나 동물이 죽기 전날에는 마치 병이 나은 듯이 건강해 보이는 경우가 있다.
“……혹시 나도 그런 거 아냐?”
약도 받는 김에, 내일 병원에 들러 진단을 받는 게 좋겠다.
마석병은 불치병인지라, 진단을 듣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간단하게 편의점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물을 마셨다.
“역시 빨가네.”
여전히 정수기의 물은 알록달록했다.
한 번 마셨는데, 두 번은 못 마시랴.
나는 정수기 물을 원샷하고 잠에 들었다.
* * *
“예? 뭐라고요?”
병원에 들른 나는 의사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었다.
마석병이 악화되어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방금 말했던 대로입니다. 이서진 씨의 몸을 갉아먹고 있던 병이 조금이나마 완화되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 병이 약화되고 있다.
“혹시 병이란 게 이런 식으로 갑자기 치료된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나요?”
“드물지만 있긴 하죠. 암 말기를 판정받은 환자분이 시골에서 요양하시다가 완치하시는 경우도 있고요. 하지만…….”
인류에게 있어서 암은 더 이상 불치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석병은 다르다.
마물이 등장하면서 나타난 희귀병.
심장 부근에 생겨난 마석이 조금씩 커지며 몸을 마기로 오염시킨다.
치료가 불가능한 병.
그나마 증상의 완화를 위한 방법이라면.
“설마…….”
의사 또한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혹시 물약을 섭취하신 것 아닙니까?”
“하하…… 아뇨. 제가 그럴 돈이 어디 있겠어요.”
“그게 아니라면, 정말 기적이군요. 그래도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거나 할 수 있으니, 주기적으로 검진은 받으셔야 합니다.”
“예.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전부 다 환자분의 간절한 의지 덕분이지요.”
병원에서 나오는 길. 접수대에 있던 접수원이 웃으며 처방전을 줬다.
의사의 조언에 따라 강도를 낮춘 진통제.
마석병의 증상이 줄어들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꿈은 아니겠지.”
내가 물약을 먹을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물약은 몇백만 원이 넘는 거금의 물건이다.
거기다 마석병을 완화시킬 정도로 품질이 좋은 물약은 나로선 구하지도 못하고.
병이 나을 만한 특별한 요소가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정수기에서 흐르던 특이한 물이 생각났다.
“……혹시.”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신체를 회복시키는 물약은 빨간색이라 들었다.
마나를 회복시키는 물약은 파란색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그리고 우리 집 정수기에서 나오는 물 또한 빨간색과 파란색이다.
“에이. 설마.”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몸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집으로 가고 있었다.
정수기가 제 발로 도망갈 일도 없을 텐데, 급한 마음에 뛰다 보니 내 몸은 땀으로 가득했다.
“후우…….”
집에 도착했다.
곧바로 정수기에서 물을 따랐다.
여전히 찬물이 나올 곳에서는 빨간색 물이 나왔다.
그걸 잠시 지켜보다가.
꿀꺽.
물을 삼켰다.
“으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가 진짜 물약을 먹어봤어야 알지.
그래서 한 가지 실험을 하기로 했다.
누가 보면 미친 짓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으으…….”
칼을 내 손바닥에 겨눴다.
그리고 스윽!
“씁…… 따갑네.”
손바닥에서 피가 흐른다.
물약은 신체에 있는 상처를 낫게 해준다고 들었다.
만약 이 물이 정말로 내가 아는 그 물약이라면.
“……!”
물을 마시자마자. 내 손바닥에 있던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눈치채는 게 늦었지만, 여기까지 뛰어왔는데도 호흡은 지나치게 정상이었다.
“이게 진짜로 물약이라고?”
그럼 옆에 있는 파란색 물은 마나 물약이리라.
“하하…….”
세상에 대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이런 싸구려 정수기에서 물약이 나온다고?
애초에 정수기에서 나오는 물이란 그저 수돗물을 정수하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에 정수기에서 물약이 나온다면, 이미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정수기에선 물약이 콸콸 나와야 했다.
“그랬다면 세상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고.”
이 정수기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집에 있던 것을 팔지 않고 가져온 것이다.
원래 있던 집은 팔렸지만, 그 안에 있던 추억 담긴 가구들은 이사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하지만 특별한 물건은 아니었는데.”
그냥 어느 가정집에서처럼 평범하게 산 기구일 뿐이다.
혹시 얼마 나오다 멈출까 싶어서 1.5ℓ 페트병에 물을 담기 시작했다.
정수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빨간색 물을 콸콸콸 뱉었다.
그러다가 세 병쯤 가득 따르니 점점 나오는 양이 적어지기 시작했다.
그쯤에서 그만두었다.
혹사시켰다가 고장 날지도 모르니까.
“……이 정도면 됐겠지?”
세 개의 페트병에 가득 담긴 체력 물약을 보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의 부모님도 돈이 있었다면 살아계시지 않았을까.
나도 돈이 있었다면 다른 또래들과 비슷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얼마 안 되는 삶을 돌이켜보았고 언제나 문제 되는 건 돈이었다.
그렇다면 이 물약을 가지고 할 일은 하나뿐이다.
어느 정도는 내 치료를 위해 마시고.
나머지는…….
“이걸 팔자.”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04화
2. 텔레비전도 이상하다(1)
“물약 팝니다. 아주 신선한 물약입니다.”
“뭐야? 웬 물약이래.”
던전의 앞.
누군가가 자리를 잡고 물약을 판매하고 있었다.
병은 고급졌으며, 담겨 있는 액체의 색도 빨강.
겉으로만 보자면, 완벽한 체력 물약이었다.
“혹시라도 물약을 안 챙겨 오신 분이나, 더 필요하신 분들은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 장만하세요. 특별히 특가로 모시겠습니다.”
“이게 물약이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손님. 때깔 보시죠. 이게 물약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무려 HH 길드에서 만든 체력 물약입니다!”
그 유명한 HH의 물약.
평범한 각성자들은 구매할 수도 없는 물건이기에, 관심은 커져갔다.
“HH의 물건이 여기서 왜 팔리고 있습니까?”
“사실 이건 공식적으로 파는 물건은 아닙니다. 하나같이 약간의 하자가 있어서, 폐기 처분되기 전의 물건을 들여온 것이죠.”
사내는 말조차 더듬지 않으며 입을 놀렸다.
“하자가 있다고 해도 걱정하지 마시죠! 그래 봤자, 사용하는 것에는 이상 없는 것들입니다!”
반응이 없자, 그가 외쳤다.
“오늘 준비한 물량은 이게 전부입니다! 선착순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나 줘보세요.”
선착순이라는 말에 물약을 사기 위해 각성자 한 명이 손을 들었고, 사내가 씨익 웃었을 때.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이게 진짜 물약이라는 말이지?”
“그럼요! 이 때깔부터 고운 걸 보세요!”
“확인해 보도록 하지.”
그 말을 한 각성자는 돌연 자신의 팔뚝에 단검을 그었다.
“……!”
“세상에.”
갑작스러운 행동에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고, 그가 좌판 위에 올려져 있던 유리병을 낚아챘다.
“지금 뭐 하시는 짓입니까!”
“물약을 확인할 때 이만한 방법이 없지.”
“귀, 귀한 물건입니다! 이런 식으로 헛되게 사용하실 생각입니까?”
“그거야 이게 진짜라면 속이 좀 쓰리긴 하겠지.”
꿀꺽-
목 넘김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사내의 상처에 주목했다.
유리병 안의 내용물을 먹었음에도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가짜군.”
“그, 그게…….”
“가끔가다 있지. 너 같이 각성자들 등골 빼먹으려는 놈들.”
“히익!”
자신의 뺨을 스친 단검에 가짜 물약을 판매하던 사내가 뒤로 넘어갔다.
“다신 얼씬거리지 마라.”
“예, 예!”
그는 가짜 물약들을 챙기지도 않고 줄행랑을 쳤다.
각성자들도 단순한 해프닝에 웃으며 흩어지려는 찰나.
짙은 빨간색의 액체가 들어간 페트병.
그것을 들고 있는 인물이 보였다.
사내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물약을 판매하러 온 건가?”
“……예? 아니요. 이건 그냥 음료수예요. 음료수.”
“그렇군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방금 이런 사건이 있었던 터라,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아뇨. 그럴 수도 있죠. 이해해요.”
페트병 가득 채워져 있는 빨간색의 액체.
방금 사기꾼이 내보였던 가짜의 색보다도 짙은 붉은 색이었다.
사내는 던전으로 향하면서 피식 웃었다.
“저런 게 물약일 리가 없는데 말이야.”
1.5ℓ 크기의 병에 담겨 있는 물약이라…….
저런 색, 저만한 양의 물약이 존재한다면 그야말로 생명이 몇 개나 있다고 해도 되리라.
* * *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단순히 현장을 탐색한다는 의미로 와본 것이었지만, 역시나 이런 곳에서 물약을 판매한다는 것은 안 될 것 같다.
“저런 사기가 의외로 자주 일어나나 보구나.”
아까 보았던 그 사기꾼의 물약은 꽤나 그럴듯해 보였었다.
그런데도 각성자들의 예리한 눈빛은 피해갈 수 없었지만.
그에 반해 자신은 어떠한가.
복장은 추리닝이요.
물약 또한 페트병에 담겨 있었다.
“저런 사기꾼들도 실패하는데, 내가 판매한다고 하면 몰매라도 맞겠어.”
멋스러운 병에다가 옮겨 담는다고 해도 통할 것 같지는 않다.
아니, 통해도 문제다.
이 물약이 진짜라고 판단한 순간, 그들은 돌변할지도 모르니까.
직접 와보고서야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 행동은 너무 위험하다.
그럼 이건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마셔야지.
“크으. 맛있긴 하네.”
어제까지만 해도 물약은 구경조차 못 했는데.
이렇게 가득 담아 마시고 있는 상황이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운동이나 하면서 갈까.”
마석병으로 인해 운동은 함부로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물약이라는 최고의 진통제가 있다.
좋은 기회다 싶어서 냅다 뛰기 시작했다.
얼마 뛰지도 못해 숨이 헉헉거린다.
“꿀꺽!”
곧바로 페트병에 있는 물약을 마셨다.
지쳤던 몸에 활기가 돌고 금방 숨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이거면 운동은 걱정 없겠는데?”
그 누가 숨이 찬다고 귀한 물약을 이온음료 마시듯이 하겠나.
남들은 누리지 못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을 때였다.
집으로 가는 길목.
그 한복판에 갑자기 노이즈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저건…….”
지직-
서서히 허공이 갈라진다.
현대 사회에서 허공이 갈라지는 이유는 단 하나다.
던전과는 다르게 자그마한 통로를 만들며 나타나는 재난.
-크르르륵.
균열.
균열이 발생하면 그곳에서 마물이 튀어나온다.
던전과는 다르게 마물의 위험도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ㅈ됐다……!’
그거야 각성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거지.
나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균열의 징조를 파악하고 그 근처에 각성자가 배치되었겠지만.
이상하게도 근처에 대기 병력 같은 건 없었다.
“일단 튀자.”
곧장 뒤로 돌아 도망가려고 하는데, 괴물의 눈이 균열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꼬마에게 돌아갔다.
“아…….”
“오빠아…….”
인형을 안고 겁에 질려 있는 어린 소녀.
그런 소녀의 앞을 비슷한 또래의 어린 소년이 막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도망칠 수가 없었다.
저런 꼬마도 자기 동생 살리겠다고 저러는데, 다 큰 어른인 내가 도망간다고?
“야, 이 똥개 새끼야!”
-크륵?
내 외침에 사나운 개의 모습을 한 마물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 너 이 새끼야! 뭘 그리 처먹었길래 네 아가리 냄새가 여기까지 나냐! 이 똥개 새끼야!”
-크르르륵!!!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화난 모습을 보니 대충 의미는 전해진 모양이다.
앞에 있던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나를 향해 잽싸게 달려온다.
‘X발……! 빠르잖아?’
달려오는 걸 보자마자 옆으로 굴렀다.
그래 봤자 겨우 한번 피한 것뿐.
괴물은 곧바로 경로를 틀더니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나는 급하게 왼쪽 팔을 들어 개의 아가리를 막았다.
말이 좋아 막았다지, 그냥 왼팔이 물어뜯기고 있는 거다.
“아아악!”
산채로 짐승에게 물어뜯기는 고통.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정도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팔이 산채로 뜯겨나가리라.
“그, 그래……!”
나는 급히 오른손에 들고 있던 페트병을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이빨로 뚜껑을 까 내용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크르?
마물이 이상하다는 듯 소리를 낸다.
금방이라도 뜯어질 거 같던 내 팔이 실시간으로 재생된다.
신경이 마비됐는지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이젠 이판사판이다.
“이게!”
바닥에 있던 짱돌 하나를 주웠다.
그리고 내 팔을 물고 있는 괴물의 머리에 쾅! 하고 내리쳤다.
-깽!
그러자 더 강하게 무는 녀석.
나는 입술을 질끈 씹으며 녀석에게 말했다.
“마음껏 물어뜯어라. 이 똥개 새끼야.”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해보자.
내 가방에는 아직도 두 개의 페트병이 남아 있었다.
* * *
“혀, 형! 정말 감사합니다!”
“오빠…… 훌쩍! 고, 고맙습니다!”
“어…… 그래. 위험하니까. 얼른 돌아가라.”
“네!”
진작에 도망간 줄 알았던 아이들이 싸움이 끝나자 내게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사실 싸움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난장판이었다.
똥개 새끼는 내 팔을 계속해서 물어뜯었고.
나는 페트병을 입에 물고서 짱돌을 내리쳤다.
하지만 끝내 서 있는 사람은 나였다.
“끄윽…….”
트림이 나왔다.
마물이랑 싸우고 배불러서 힘들어하는 사람은 나뿐일 거다.
뒤늦게 경찰이 도착했다.
“균열 감지 시스템에 오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각성자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나 각성자 아닌데.
싸늘하게 죽어 있는 마물을 보고는 날 각성자로 오해한 모양이다.
그도 그런 게.
내 몸은 상처 하나 없었다.
대신이라고 하듯 옷은 이리저리 긁혀 넝마가 되어 있었지만.
‘……이거 집까지 어떻게 가냐.’
“타시죠.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오. 그거 고맙네요.”
“무슨 소립니까. 시민의 안전을 지켜주신 영웅에게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집으로 도착하고 그는 내게서 연락처를 받아갔다.
이번 일에 대한 감사패와 포상금이 지급될 때 연락을 준다고 한다.
물약도 못 팔고 빈털터리로 온 내게는 환영할 일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한숨을 쉰다.
“에휴. 이 물약은 대체 어떻게 파냐.”
집으로 돌아와 다시 정수기를 확인한 결과.
물약은 계속해서 나왔다.
막상 물약이 줄줄 나오는 건 좋았지만. 팔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이게 진짜 물약이란 걸 밝히는 방법은 쉽지.”
아까 그 각성자가 했던 대로, 내 팔에 상처라도 내면 될 것이다.
하지만 관뒀다.
“잘못 엮였다간…….”
물약이 든 1.5ℓ 페트병을 잔뜩 가지고 다니는 사람.
거기다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외견.
주변에는 각성자들이 가득.
어디 던전에 끌려가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기업 같은 곳에 맡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물약을 공급하고, 기업 측에서 고급스러운 병에 넣어 판다.
어차피 정수기에서 물만 담으면 됐기에 내가 하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런데 그런 곳이랑 내가 연을 어떻게 맺어?”
날 호구처럼 대하지 않을 곳.
내게 호의를 가지고 공정한 계약을 맺어줄 사람.
이런 인물을 구할 방법이 마땅치가 않았다.
“아, 몰라. 몰라.”
머리가 아파져 왔다.
이만한 물건을 가지고도 팔 수가 없다니.
나는 한숨 돌릴 겸 텔레비전을 켰다.
크기가 아담한 옛날식 텔레비전.
이것 역시 이전에 있던 집에서 가져온 물건이다.
* * *
[Ch.1]
[속보입니다. 17일 오후 5시경. 던전 공략을 위해 들어갔던 황혼 길드 소속 전투원들이 던전 내에서 전멸했다고 합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던전에 진입한 길드원 중에 도플갱어가 있던 것으로 파악…….]
* * *
“쯧. 무슨 저런 일이 다 있냐.”
도플갱어는 인간의 형태로 변신할 수 있는 마물이다.
어떻게 잠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들키지 않고 던전에 들어갔다면 게임 끝이다.
“던전 안에서 한 명이 대놓고 트롤 했으면 결과는 뻔하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 던전이다.
그런 곳에서 등을 맡긴 동료가 도플갱어다?
단번에 전멸하기 딱 좋았다.
“불쌍하네. 도플갱어란 걸 알기만 했어도 저리되진 않았을 텐데.”
의태 능력이 뛰어나서 그렇지 본신의 무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고 평가되는 마물이다.
웬만한 마물보다는 강하겠지만, 황혼 길드 소속 전투원들이라면 금방 제압했겠지.
“에휴. 다른 거나 봐야지.”
가뜩이나 우울해서 텔레비전을 켰는데, 화면 속에서도 암울한 이야기가 나온다.
채널을 바꾸려고 리모컨을 눌렀다.
그런데 다른 채널로 넘어가지지 않는다.
[Ch.1]
그 채널에서 황혼 길드가 도플갱어에게 당했다는 소식만 반복해서 나온다.
“어우. 이 고물.”
이것 또한 오래된 물건이었기에 그럴 만했지만, 채널 하나만 나오는 건 또 뭔가.
“아니, 잠깐만.”
계속되는 뉴스를 보다 보니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황혼 길드가 참사를 당한 것은 17일 오후 5시.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5시가 맞긴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속보입니다. 17일 오후 5시경…….]
“……오늘은 16일인데?”
텔레비전 속 뉴스는 하루 뒤의 소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05화
2. 텔레비전도 이상하다(2)
황혼 길드장 정해연.
대형 길드의 길드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지닌 그녀는 지금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후. 내일 있는 던전 공략은 절대 실패해선 안 돼.”
「타락한 페어리의 무덤」
이번에 나타난 던전의 이름이었다.
이곳의 공략권을 낙찰받기 위해서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모르겠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무조건 성공시킬 예정이었다.
“길드장님. 너무 걱정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런가? 자꾸 불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
“하하. 그럴 땐 웃긴 거라도 보면서 긴장을 푸는 건 어떻습니까.”
“웃긴 거?”
“웃긴 거라기보다는 신기한 영상입니다만…….”
황혼 길드 소속 전투원 정성진.
그가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틀더니 제 길드장에게 내밀었다.
“영상?”
“예. 어제 미확인 균열 나타난 건 알고 계시죠?”
“응. 지나가던 각성자가 막았다면서? 진짜 다행이지. 시민이라도 죽었으면 우리 공략도 미뤘어야 했을걸? 하여간 균열 관리부 놈들은 대체 뭐 하는지.”
“예. 이건 당시 있었던 일을 한 시민이 찍은 건데, 상황이 참 묘합니다.”
“상황이 묘하긴 뭐가 묘해. 균열에서 나오는 마물이 거기서 거기지.”
영상을 틀자마자 들린 것은 개가 짖는 소리였다.
샤프 하운드.
균열에서 나타나는 2성급 몬스터.
특유의 날카로운 이빨이 위험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숙련된 각성자라면 어찌 제압할 수 있을 터.
분명히 영상 속에 있는 각성자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하하. 이게 대체 뭐야?”
영상 속 남성은 샤프 하운드와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
샤프 하운드가 남성의 팔을 물어뜯고. 남성은 그런 하운드의 머리에 돌을 내리친다.
그야말로 개싸움.
“햐……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저 여유.”
“여러 의미에서 대단하긴 하네.”
그도 그런 게. 남성은 마물을 상대하면서 여유롭게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페트병에 든 음료수를 마치 생명수라도 되는 양 벌컥벌컥 마신다.
신기한 것은 물어뜯기는 남성의 팔에 상처가 하나도 없다는 거다.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네.”
“그렇죠? 육체 관련 능력치가 얼마나 높으면 저게 되지?”
“능력치와 더불어서 재생과 관련된 고유능력도 가졌을 것 같아.”
결국, 샤프 하운드의 머리가 박살 나면서 영상이 끝이 났다.
“어디 소속이래?”
“그게…… 아직 신원 파악이 안 된 모양입니다.”
“뭐? 저만한 각성자라면 어디에 소속되어 있을 게 분명한데?”
“그러게 말입니다. 혹시 무소속이라면 저희 쪽에서 스카우트하면 좋을 텐데요.”
“응.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해. 저런 각성자 찾기 쉽지 않으니까.”
조금 독특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리 중얼거리며 정해연이 눈을 감았다.
이상한 사람을 봐서인지 조금은 차분해진 것도 같았다.
재밌다는 듯, 영상을 여러 번 돌려보는 정성진.
눈을 감고 기도하는 정해연.
둘 중 그 누구도 영상 속 사내가 마시고 있던 것 페트병 속 액체가 물약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 * *“예. 정수기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필터를 교체한 지 오래된 것 같은데 교체해 드릴까요?”
“아뇨. 그건 괜찮아요.”
“하하. 그나저나 이렇게 오래된 정수기는 처음 보네요.”
정수기 A/S 기사는 그리 말하며 웃었다.
나는 출장비를 건네며 그를 돌려보냈다.
“……아무래도 나한테만 보이는 것 같은데.”
정수기에서 물약이 나온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그래서 기사를 불렀다.
그 누구도 정수기에서 물약이 나온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기에 시도한 일이었다.
여차하면 녹물이 나온다, 하고 돌려보내면 되니깐.
“하지만 그냥 물로 나왔지.”
기사가 물을 따랐을 때는 평범한 물이 나왔다.
더 이상 물약이 안 나오는 줄 알고 식겁했으나.
다행히 내가 눌러보니 제대로 알록달록한 물약이 나온다.
“대체 뭐냐, 넌.”
이것뿐만 아니라 텔레비전도 이상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이 정수기와 텔레비전이 특별한 물건 같진 않다.
“그렇다면 달라진 건 나라는 이야기인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수기를 노려보자 허공에 무언가가 튀어나온다.
* * *
「물약이 나오는 정수기」
설명: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정수기를 사용할 경우 물 대신 물약이 나온다.
생산 가능한 체력 물약[하급] : 4.5ℓ
생산 가능한 마나 물약[하급] : 3ℓ
시간당 생산 회복률 : 1ℓ/500㎖
* * *
“이건 대체…….”
이런 요상한 게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상태창.’
띠링!
* * *
〈이서진〉
힘: 1.2
민첩: 1.2
체력: 1.1
마력: 1.0
고유 능력: 【만물의 주인】
「현재 개방된 물체 목록」
▷정수기 : 물 대신 물약이 흐른다.
▷텔레비전(New!) : 채널마다 무작위로 미래를 볼 수 있다.
* * *
“진짜로 각성한 거였어.”
언제 각성한 거지?
각성을 했다면 했다고 메시지가 뜨는 게 맞을 거다.
하지만 난 기억이 없다.
“아…… 혹시 쓰러졌을 땐가?”
며칠 전. 물 한 잔 마시고 죽자면서 모든 걸 포기했을 때.
그때라면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뭐가 나타났든 눈에 안 들어왔으리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내가 각성을 했다는 거다.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물약을 팔러 갔을 때도 각성자들의 모습에 괜히 위축이 되었었다.
하지만 이제 나나 그들이나 다를 것은 없었다.
“아니, 다르긴 하지.”
일단 능력치 자체가 처참했다.
……아무리 약골이라지만.
기본 능력치 중에 2가 넘는 게 없다.
평범한 사람이 1.5의 능력치를 가지는 걸 생각하면 실로 안타까운 수준.
하지만 고유 능력을 생각하면 전혀 아쉬울 게 없었다.
“만물의 주인이라…….”
* * *
【만물의 주인】
-특정한 물건 및 물체들을 특별하게 사용할 수 있다.
* * *
특별하게.
물론 나만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그것의 첫 번째가 물약이 흐르는 정수기.
그리고 두 번째가…….
“미래를 보여주는 텔레비전이라고? 이거 미쳤잖아!”
어제 보았던 황혼 길드의 전멸 뉴스.
그것은 분명 오늘 나올 뉴스였다.
텔레비전을 쳐다보자, 정수기와 마찬가지로 상세한 정보가 나타난다.
* * *
「미래를 보여주는 텔레비전」
설명: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텔레비전을 사용할 경우 미래를 볼 수 있다.
현재 개방된 채널 : Ch.1(하루 뒤)
현재 사용 가능한 횟수 : 하루 한 번.
* * *
“하루 뒤. 역시 저 텔레비전은 하루 뒤의 미래를 보여주는 거였어.”
하루에 한 번뿐이라는 횟수 제한이 있었지만.
미래를 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사기였다.
“거기다가 ‘현재’라고 하니까, 분명히 더 개방할 수 있는 수단이 있을 거야.”
정수기, 텔레비전.
둘 다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터.
Ch.1이 하루 뒤의 미래를 보여주는데, 다른 채널이라면 어떨까?
“더 먼 미래를 볼 수 있겠지.”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이 미래를 안다라…….
마치 소설 속에서 보던 회귀자라도 되는 기분이다.
“……혹시 다른 물건들도 되나?”
만물의 주인이라고 했으니, 이 두 물건만 해당되는 건 아닐 거다.
나는 돌아다니며 가스레인지, 허름한 장롱 같은 것들을 만져봤다.
특별한 사용법 같은 것이 나타나는 대신 다른 메시지가 나타났다.
[개방권이 부족하여 해당 물체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퀘스트를 클리어할 경우 개방권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
[만물의 주인, 이서진에게 적합한 일을 검색 중입니다.]
* * *
-긴급 퀘스트!-
「도플갱어에게 전멸당할 운명인 황혼 길드를 구하라.」
보상: 랜덤 개방권, 선택 개방권.
* * *
난데없이 황혼 길드와 도플갱어에 대해 나왔지만, 이목을 끄는 건 그 밑에 있는 보상이었다.
“그러니까…… 이걸 하면 더 많은 물건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지?”
물약이 나오는 정수기.
미래를 보여주는 텔레비전처럼.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10시.
인터넷을 확인하자, 황혼 길드가 공략할 던전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이거 서둘러야겠네.”
그들이 전멸할 시각은 5시.
황혼 길드가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도플갱어의 정체를 밝힐 필요가 있었다.
황혼 길드가 공략할 던전의 위치는 찾기 쉬웠다.
애초에 던전은 맨땅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신비한 현상이다.
그런 곳을 숨길 수 있을 리가 없지.
간단하게 검색 몇 번으로 위치를 찾았다.
다행히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제 준비하자.”
물론 평범한 사람인 내가 무력으로 도플갱어를 드러낼 순 없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그놈을 끄집어낼 것이다.
던전의 위치를 찾으며 하나 더 알아낸 정보가 있다.
도플갱어에 관한 정보.
마나로 이루어진 강한 공격을 받으면 의태가 풀린다.
거기서 한 가지를 생각했다.
마나로 이루어진 공격.
물약은 마나를 이용한 정화 과정을 거친 물건이다.
그렇다면 그 물약을 그들의 몸에 가득 붓는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그만한 양을 한 번에 부을 바에 대부분은 공격하는 것을 택할 것이다.
아까우니까.
하지만 난 다르다.
물약이 아깝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우리 집 정수기에선 버튼만 누르면 물약이 계속 나오거든.”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06화
3. 불공정 계약(1)
길드는 던전을 공략하러 갈 때.
그 과정을 화려하게 준비한다.
자신들의 길드가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일종의 과시였다.
황혼 길드의 던전 출정식도 비슷했다.
이미 던전의 근처에는 군인들과 경찰들로 통제가 되어 있었고 기자들 또한 잔뜩 깔려 있었다.
“예! 이제 곧 있으면 황혼 길드원들이 던전의 공략을 위해서 이곳으로 도착합니다!”
오랜만에 나타난 3층 규모의 던전이었기에 대중의 관심도 높았다.
“와. 왜 이렇게 사람이 많냐.”
“다들 던전 공략한다니까 구경 왔나 보지. 어차피 안쪽은 보지도 못하는데 뭐하러 온대.”
“그러는 너는 왜 왔냐?”
“그야 당연히 정해연 보러 왔지!”
“아…… 그건 인정.”
황혼 길드장 정해연.
그녀는 수려한 외모로 인기가 있었다.
일각에서는 까칠하면서도, 냉랭한 성격이 단점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을 좋아하는 팬도 많았다.
“정해연 파이팅!”
“누나 이뻐요!”
차량에 탑승해 있는 황혼 길드의 멤버들이 그 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여전히 인기가 많으시네요. 길드장.”
“시끄러워. 대중들 앞에서 바지라도 까보고 싶니?”
“……죄송합니다.”
놀리려던 길드원은 본전도 뽑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 가자.”
“이거 오랜만이군. 황혼 길드장.”
정해연이 차 밖으로 나오자마자,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정해연은 자신도 모르게 구겨지는 얼굴을 참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예. 어르신도 안녕하셨어요?”
“나 같은 늙은이는 뭐, 할 것도 없으니 빈둥대기나 할 뿐 아니겠나.”
‘개소리.’
하마터면 저 양반한테 이 던전을 통째로 뺏길 뻔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그렇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지, 지금! 황혼 길드와 수호 길드. 각 길드장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방송.
그것이 정해연을 인내하게 만들고 있었다.
까득-
정해연이 억지로 웃는 미소를 보이자 주변에 있던 팬이 더 큰소리를 지른다.
“누나아!”
물론 그 둘의 관계를 알고 있는 황혼 길드원들은 이 어색한 상황에 식은땀을 흘리며 눈치만 볼 뿐이었다.
“허허. 그나저나 참 아쉽게 됐어. 이번 던전은 꼭 이 노인네가 공략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아쉽긴요. 나이도 드셨으니 물 좋은 곳에 가서 쉬시는 건 어떠신가요, 어르신. 혹여나 던전에서 잘못되시는 건 아닌지 소인은 걱정됩니다.”
“걱정해 줘서 고맙구먼. 어디…… 저번에 내가 말했던 건 생각해 봤나?”
“저에겐 무척이나 매력적인 제안이었습니다만. 연애나 결혼은 아직 생각이 없거든요.”
“에잉. 그냥 소개팅만 받아보라니깐. 내 손주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괜찮은 놈인디.”
‘능구렁이 같은 양반. 그걸 계기로 황혼 길드를 차지할 생각인 걸 모를 줄 아나.’
정해연은 포커페이스가 끊어지기 전에 자리를 이탈하기로 마음먹었다.
“생각은 해보죠. 그럼 전 이만. 황혼 길드원, 이동.”
“이, 이동!”
정해연과 길드원들은 던전으로 향했다.
그들이 움직이자 함성 소리와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울려 퍼진다.
-와아아아!
-정해연 단독 샷. 반드시 찍어!
군중들이 서 있는 펜스 사이로 걸어가는 황혼 길드원.
앞장서는 것은 정해연을 필두로 한 전투조였다.
사실상 길드를 이끌어가는 핵심 멤버들.
그리고 그 뒤에서 거리를 두고 오는 것이 전투조를 지원할 보급 병력들이다.
군중들의 눈길은 당연히 전투조들에게로 쏠려 있었다.
-멋있다. 정성진!
-누나. 절 가져요!
당연한 일이다.
시민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영웅이었고, 스타였다.
그들을 보조하는 사람들은 이를테면 그림자 같은 존재.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그런 존재들을 주시할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 펜스의 앞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음료수통을 들고 있는 남성을 제외하고는.
무기, 폭발물, 독극물.
허락받지 않는 물건들은 이곳에 배치된 탐색계 각성자들로 인해 철저하게 검사된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포착되지 않는 단 하나의 물건이 있다.
검사할 필요도 없거니와, 해를 주기는커녕 인간에게 이롭기만 한 물건.
사내의 페트병 안에 든 액체.
성스러운 ‘물약’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야. 들리냐. 우리한테 환호하고 있잖아.”
“환호는 무슨. 앞에 있는 전투원들한테 하는 거지. 우리 같은 떨거지들은 논외라고.”
“그런…… 어, 비 오나?”
“무슨 비?”
배낭을 메고 앞을 따라가던 지원조의 두 명은 갑작스레 느껴지는 물기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물이 나오는 진원지는 하늘이 아니라 관중석이었다.
“다, 당신 뭐 하는 겁니까!”
한 사내가 두 개의 페트병을 양손으로 휘두르고 있다.
각각의 페트병에서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물이 그들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테, 테러다!”
지원조의 그 말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도망가!”
“앞에서 독극물 테러가 일어나고 있다!”
경비원들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달려오고, 앞쪽에 있던 전투조들이 뒤를 돌아봤을 때.
변화가 일어났다.
“끄어어어…….”
“끄르르륵!”
“끄에엑!”
물에 맞은 지원 조 중 세 명의 사람이 이상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2M가량의 크기에 팔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긴 검은 존재.
곧장 그 정체를 알아본 정해연이 재빠르게 외쳤다.
“도플갱어다! 전투 준비!”
“예!”
페트병을 휘두르던 사내를 잡으려던 경비원들은 시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힐끗-
포위망을 구성한 정해연이 펜스 너머를 보았지만, 의문의 남성은 군중들 사이에 섞여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집중해! 신속히 제압한다!”
* * *
“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나는 모자와 마스크를 벗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되는 줄 알았네…….”
긴가민가했지만, 어떻게든 성공시켰다.
지금 생각하면 꽤나 무모한 작전이었다.
경찰과 군인들이 촘촘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고, 수상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각성자들에게 탐지돼 그들에게 끌려갔다.
펜스 앞까지 비집고 간 것도 운이요.
페트병에 든 물약이 의심받지 않은 것도 순전히 운이었다.
“……특히 물약을 뿌리기 전에 제압당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지.”
그래도 무사히 뿌려서 혼란을 틈타 잡히지도 않고 빠져나왔으니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도플갱어가 세 마리였다니…….”
뉴스에서는 정확한 수가 표시되지 않았기에 당연히 한 마리일 줄 알았다.
“세 마리의 도플갱어면 충분히 전멸할 만하지.”
인터넷에는 긴급 뉴스들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페트병을 휘둘러 물을 뿌린 이상한 남성에 대한 글은 없었다.
[오늘 오후 4시경, 황혼 길드의 던전 출정식 도중 도플갱어가 나타나……]
[황혼 길드의 전투조의 빠른 대처로 인해 피해자는 없는 것으로……]
[황혼 길드장 정해연. ‘공략은 미루지 않는다. 금방 태세를 정비하고 던전에 입장하겠다.’ 선언.]
“왠지 미안하네.”
결과적으로는 참사를 막았지만, 나 때문에 그 소란이 났다는 걸 생각하면 어쩐지 양심이 찔렸다.
“이걸로 떡밥은 뿌렸는데…….”
개방권이 욕심나서 한 것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대형 길드에게 빚을 지운다면 내 물약 판매 계획에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빚이 있는 사람에게 불공정 계약을 하려 하진 않겠지.
“성공이냐, 실패냐.”
그리고 이튿날 오후.
황혼 길드의 던전 공략이 무사히 완료됐다는 뉴스가 떴다.
“퀘스트는?”
30분이 지나자 기다리던 퀘스트 완료 문구가 나타났다.
* * *
-긴급 퀘스트 완료-
「도플갱어에게 전멸당할 운명인 황혼 길드를 구하라」
보상: 랜덤 개방권, 선택 개방권
* * *
[보상을 획득합니다.]
[랜덤으로 하나의 물체가 능력을 개방합니다!]
“오오!”
어떤 것이 개방되었을까.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을 이것저것 뒤적이고 있을 때.
똑똑-
내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나타났다.
“누구지?”
딱히 지금 시간대에 올 만한 사람은 없는데.
황혼 길드가 던전 공략을 완료한 지도 겨우 삼십 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쪽에서 어떠한 행동을 취한다면.
최소한 다음 날이 되어야 올 것이다.
그래도 모른다.
황혼의 길드장이 나오자마자 누군가를 시켜 나한테 보냈을지.
꿀꺽…….
이제 저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결과가 정해진다.
경찰이라면 말 그대로 망한 거다.
어제 한 행동에 대해 경찰서로 가 책임을 묻게 될 터.
만약에 황혼 길드의 사람이라면 내가 한 행동의 의미를 알아보고 찾아왔을 것이다.
“안에 계십니까?”
문 너머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고운 목소리다.
나는 문에 있는 구멍으로 밖에 있는 사람을 살펴보았다.
“허억!”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놀란 나머지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황혼 길드장. 정해연입니다. 안쪽에 계신지요?”
……길드장이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07화
3. 불공정 계약(2)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수행원이나 비서.
하다못해 던전에 참가하지 않은 말단 길드원이 올 줄 알았다.
설마하니 이틀에 걸쳐 던전을 공략한 길드장 본인이 올 줄은…….
“안에 계십니까?”
“아. 예! 지금 열겠습니다!”
혼란에 빠져 잠시 방치하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지.
얼마나 중요한 상대인데.
끼익-
허름한 문이 열리고 밖에 있던 상대가 드러났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적갈색의 중단발 머리.
펜스 너머에서 봤을 때도 느낀 거지만. 이렇게 바로 앞에서 보니까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예뻤다.
팬클럽이 있는 이유가 있구나.
‘……나도 팬클럽이나 가입할까.’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드, 들어오세요.”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라서 집 안은 어질러진 상태였다.
나는 그나마 깨끗한 곳에 책상을 펴고는 하나뿐인 방석을 그녀의 자리에 놔줬다.
“고맙습니다.”
“하하…… 뭘요.”
적막이 흐른다.
분명 이틀 전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하러 왔을 텐데,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
그 대신 정해연은 계속해서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하는 중이다.
……방석이 싸구려라 그런가.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목마르시죠? 마실 거라도 드릴게요.”
“아, 저는…….”
나는 이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서 마실 것 핑계로 일어섰다.
……젠장. 커피고 음료수고 아무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물이라도 주려는데 정수기에선 알록달록한 물약이 나왔다.
‘대충 음료수라고 속이면 될지도…….’
컵에 담아 정해연에게는 파란색의 물을.
내 앞에는 빨간색의 물이 든 컵을 놓았다.
“……!”
순간 정해연의 눈이 커진다.
마시라고 준 물을 마시진 않고 빤히 쳐다만 본다.
“큼큼. 저기 저희 집에는 무슨 일로…….”
“아. 실례했습니다. 이곳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녀가 사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그곳에는 페트병을 휘두르고 있는 내 모습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어우. 무슨 포즈가 저래.’
쌍검이라도 휘두르는 듯 비장한 자세다.
사진으로 보니 쪽팔려 죽을 것 같네.
“이 사진 속 인물. 본인이 맞으신지요?”
“예. 맞습니다.”
어차피 이미 다 조사하고 왔을 터.
평범한 소시민인 내 신상 따위는 날아다니는 낙엽 같은 거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이 병에 담겨 있던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혹시 평범한 인간을 도플갱어로 만드는 것이라거나…….”
순간 눈빛이 변하는 것 같았기에, 곧바로 대답했다.
“아뇨! 그냥 평범한 물약입니다!”
“물약…… 말입니까?”
큰일 날 소리를 한다. 저런 오해가 생겼다가는 계약이 문제가 아니다.
슬기로운 감방 생활 시작이다.
“그렇군요. 납득했습니다. 늦었지만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덕분에 별 탈 없이 던전의 공략을 끝마쳤습니다.”
“한 것도 없는데요, 뭘.”
“이 건에 관해선 반드시 보답을 해드리겠습니다.”
정해연이 책상에 머리를 박을 정도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거 진짜 부담되네.’
하지만 이해는 되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던전 공략에 방해가 될 요소를 내가 사전에 드러낸 것이니까.
내게 있어서 보답은 정당한 계약으로 충분했다.
황혼이라는 대형 길드와 맺는 믿을 수 있는 약속.
“실례합니다만, 이런 일을 행하신 것에 대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사람 죽을 거 뻔히 아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단 것도 있고.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다른 이유라 하면?”
어떤 비장한 이유라도 듣겠다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의 정해연.
후릅-
물 한 모금을 마시고는 말했다.
“혹시 물약 사실 생각 없습니까?”
“예?”
정해연의 눈이 끔뻑거렸다.
결과만으로 따지면 이서진의 물약 판매는 성공이었다.
“그럼 다음번에 계약서 작성을 위해 저희 측에서 모시겠습니다.”
“예. 기다릴게요.”
정해연이 일어나려 하자, 이서진이 물었다.
“물은 안 마시세요? 그거 몸에 좋은 건데.”
“마, 마셔도 되는 겁니까?”
당연히 마시라고 준 거죠.
이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해연은 마치 귀한 걸 먹듯이 조심스레 물 한 잔을 전부 비웠다.
“후아…….”
시원하다는 듯 목소리를 낸다.
‘목말랐나 보네.’
“시, 실례했습니다.”
정해연은 인사하고는 집 밖으로 나왔다.
긴장된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건물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정해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죽는 줄 알았네…….”
혹시라도 자신이 실례되는 말은 하지 않았나.
그녀는 시종일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대단했어.”
* * *
이틀 전.
던전 출정식 당시 도플갱어 사건.
수상한 사내가 어떠한 액체를 뿌리자 그걸 맞은 세 명의 사람이 도플갱어로 변했다.
그녀는 던전에 들어가기 전.
그들의 몸에 뿌려진 액체에 대한 것과 그것을 뿌린 남자의 신상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다.
혼란스러운 상황.
가까스로 던전 공략을 마치자마자 그녀가 들은 것은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 극도로 정제된 고순도의 물약이었습니다!”
“……물약이라고?”
“예. 의태하고 있던 도플갱어들이 그 물약에 맞고 정체가 드러난 것 같습니다.”
“물약을 맞고 도플갱어의 의태가 풀린다고? 대체 얼마나 순도가 높길래?”
“그게…… 100%입니다.”
“응?”
정해연은 자신의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100%.
그 어느 국가, 길드를 둘러봐도 그 정도로 정제된 물약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잘못 파악한 거 아니야?”
“……이물질이란 것 자체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불필요한 요소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물약입니다.”
물약은 마물의 마석을 가공해서 생산된다.
마기로 가득한 마석이기에 자체적으로 정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황혼 길드에서 자체 생산되는 물약의 순도는 평균 65%.
상등품은 69%
이것도 타 길드와 비교하면 가히 압도적인 수치였다.
저 정도의 물약은 생산되는 양도 한정되었으며, 나오는 족족 특정 인물들에게 팔려나간다.
그런데 100%라고?
“하하…….”
정해연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웃겨서가 아니라, 당혹스러움에 나오는 웃음이었다.
순도 100%의 물약을 마치 물 뿌리듯 뿌린 남자.
그 어떤 단체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당연히 본인이 만든 게 분명할 터.
그렇다면 그 정체는 뻔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연금술사’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자신을 도와줬다.
분명히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런 사람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정해연은 공략이 끝나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곧장 연금술사의 거주지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허름한 빌라에 위치한 옥탑방이었다.
‘이곳이 그분이 계신 곳.’
그만한 연금술사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세상에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살려는 목적인 게 분명하리라.
“지금 열겠습니다.”
긴장된 눈빛으로 안에 있는 사내를 보았다.
연금술사가 아니었다면 기억조차 하지 않을 인상.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얼굴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연금술사의 거주지는 잡동사니 및 쓰레기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정말 연금술사가 맞나?’
그런 의문을 잠시 가졌을 때, 그분이 방석 하나를 건넸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방석에 앉는 순간.
‘……!’
정해연 정도의 실력자가 되면 자신의 상태에 대해 민감하다.
방석에 앉는 순간 정해연은 자신의 피로가 빠른 속도로 풀려가는 것을 느꼈다.
혹시나 싶어 방석에서 몸을 뗐다가, 앉았다가를 반복하자 확신했다.
이 방석.
아티팩트다.
그것도 앉은 사람의 피로를 빠른 속도로 풀어주는 신비한 방석.
그걸 알아채자마자 정해연은 소름이 돋았다.
잡동사니로 생각했던 원룸 속 물건들이 하나하나 진귀한 보물들로 보였다.
‘이것도, 저것도 전부 아티팩트……!’
분명, 이 집도 ‘일부러’ 이렇게 보이도록 수를 써둔 것이리라.
의심은 사라지고, 미칠 듯한 긴장감만이 남았다.
‘진정하자. 정해연. 너는 황혼의 길드장이야. 절대로 동요를 내비쳐서는 안 돼.’
그러한 포커페이스는 그가 가지고 온 마실 것으로 인해 단숨에 깨져 버렸다.
‘……이게 이물질이라고는 없는 완전한 물약.’
음료수라도 내주실 줄 알았더니, 갑자기 이런 물건이라니.
그것도 마치 이런 물약 따위는 차고 넘친다는 듯 일부러 허름한 컵에 따랐다.
‘아아…… 이런 물건을 저런 컵에 담다니…….’
최고급의 유리병에 담아도 모자랄 판에…….
‘이것은 시험이야. 저 물을 내게 보이면서, ‘내가 이 정도 되는 연금술사다’라고 말하고 있는 거라고.’
미칠 듯이 먹어보고 싶었지만, 먹지 않았다.
그 뒤로 어떻게 말했는지조차 잘 기억이 안 난다.
횡설수설.
마치 면접을 보는 응시생마냥 긴장된 자세로 어떠한 말을 계속 뱉었다.
그리고 마침내 연금술사의 입에서 목적이 나왔다.
“물약 사실 생각 없습니까?”
이건 무조건 잡아야 한다.
정해연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계약에 관한 건은 다음에 하도록 하고 이만 일어나기로 했다.
‘아아…….’
마시지 못한 물약이 눈에 아른거린다.
하지만 이것은 무언가 테스트일 것이 분명…….
“안 마시세요? 그거 몸에 좋은 건데.”
“그, 그래도 됩니까?”
정해연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조심스럽게 컵을 들고 물약을 마셨다.
‘아…….’
그것은 사막에서 찾은 오아시스요.
‘성수’ 그 자체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소모되어 있던 마나가 단숨에 차올랐다.
정해연은 자신의 길드로 돌아가면서 다짐했다.
저런 연금술사와 인연을 맺을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다.
이것은 시험이다.
내가 과연 그 자리에 어울리는가 하는 위대한 연금술사의 시험.
“반드시 최고의 대우를 해드리겠어.”
그 어떤 던전보다도 어렵고 중요한 일이 되리라.
* * *
“후. 긴장돼 죽는 줄 알았네.”
역시 대형 길드의 길드장이라 그런가, 포스가 남달랐다.
“그런데 듣던 거랑은 이미지가 좀 많이 다르네.”
까칠하다느니, 성격이 안 좋다느니, 냉랭하다느니.
세간에서 떠돌던 그런 말들은 전부 개소리였다.
그녀는 일반인인 내게 과할 정도로 예의 있게 대했다.
“오히려 부담스러울 정도였지…….”
이런 싸구려 방석에 앉히다니.
분명 저런 사람들은 오리털 방석 같은 곳에 앉을 텐데!
못 된 방석.
방석을 치울 생각으로 그것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앞에 상태창이 나타났다.
* * *
「지친 심신을 치유하는 방석」
설명: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사용하거나 권유할 경우, 앉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 준다.
【만물의 주인】 이서진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회복 효과가 증가한다.
* * *
“랜덤으로 된다더니 이런 방석에도 되는 거였어?”
앉자마자 묘하게 마음이 편해지면서 몸이 노곤해진다.
물약과는 다르게 지친 마음까지 회복한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이제부터 넌 싸구려가 아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고급 방석이다.
“그나저나 권유하는 사람도라…….”
정해연에게도 적용되었다는 뜻이다.
이 방석 덕분에 그래도 조금은 점수를 땄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만족이 되었다.
계약을 위한 밑밥도 수거했겠다…….
그럼 이제.
“텔레비전이나 볼까?”
하루 한 번, 미래를 보여주는 텔레비전.
당연히 매일 꾸준히 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처음과 같이 대박 정보가 뜨지는 않았다.
“어제는 연예인 A씨가 열애 중이라는 뉴스가 나왔었지…….”
쓸모없는 정보였다.
“이번엔 좋은 정보로 부탁드립니다.”
나는 방석에 무릎 꿇고는 텔레비전에게 기도를 올렸다.
띠링!
텔레비전이 켜지며 화면에 방송이 나온다.
“어. 어어어?”
그것은 내게, 아니, 전 국민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방송이었다.
* * *
[Ch.1]
[당첨은 공이 나오는 순서와 관계없이 당첨번호만 맞으면 됩니다.
로또 발행을 위해 조성된 기금은 공익 목적 기금에 쓰이게 됩니다.
자, 첫 번째 행운의 숫자…….]
* * *
“시, 심 봤…… 아니, 번호 봤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08화
3. 불공정 계약(3)
“흐흐흐흥.”
토요일 오후. 복권판매점을 하고 있는 윤판성은 밀려오는 손님에 바쁘게 움직였다.
매주 토요일은 로또 번호를 발표하는 날.
당연히 그 날은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내가 보기엔 이번엔 2, 15, 19가 유력해.”
“아니라니까 그러네. 내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말이야…….”
‘하하. 다 부질없지.’
자칭 로또 전문가들을 보면서 윤판성은 웃었다.
로또에 전문가가 어디 있겠는가. 그저 맞춘 사람은 천운이 따랐을 뿐이다.
막말로 로또에 당첨됐다면 이런 곳에서 죽치고 있는 게 아니라, 진작에 다른 곳으로 놀러 갔을 터.
‘뭐. 다 절박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만 원. 자동이요.”
“예.”
많은 사람들이 로또를 사는 만큼 방식도 제각각 다르다.
그저 운을 믿고 자동으로 하는 사람도 있으며, 꿈에서 봤다고 수동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런 부류도 있다.
‘이번에도 있구만.’
같은 번호의 로또를 여러 장 사는 것이다.
이 20대 중반의 사내가 내민 로또 용지도 그랬다.
‘좋은 꿈이라도 꿨나 보네.’
이미 당첨이라도 됐다는 듯이 찢어지게 웃고 있는 남성.
그는 로또를 제 품에 간직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 * *
“아주머니.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아이고, 총각. 다 못 먹어.”
“괜찮으니까 주세요!”
“난 말렸어.”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로또 용지를 보았다.
돈이 생긴다면 이런 걸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비록 당장은 돈이 없으니 김밥X국에서 전 메뉴를 시켜보는 것밖에 못 했지만.
음식이 차례차례 상 위에 놓인다.
‘음…… 역시 다는 못 먹겠지?’
“애들아. 너희들 이거 먹을래?”
“우와! 형, 정말 그래도 돼요?”
“그래. 먹고 싶은 거 다 골라가.”
“대박!”
옆 테이블에서 김밥 한 줄을 여러 명이 나눠 먹는 꼬마들에게 음식을 양보했다.
나는 참치김밥의 꽁다리 부분을 한 입 먹으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로또 용지를 보았다.
‘이거면 대체 얼마냐.’
저번 로또 1등 당첨금이 25억이었나.
똑같은 번호로 다섯 게임을 샀으니 받는 비율도 상당할 것이다.
조사해 보니 5장까지는 같은 번호로 사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길래 나도 그렇게 구매했다.
아마 별다른 의심은 받지 않을 것이다.
세상 살면서 로또 5등조차 당첨된 적이 없었는데.
막상 1등에 당첨된다니 손이 떨리긴 했다.
‘국물에 떨어질라.’
조심스럽게 품속에 있는 주머니에 넣었다.
물약을 팔면 수익이 나올 테지만.
아무래도 실제로 돈을 받기까지 시간이 걸리니까.
“끄윽. 계산이요.”
“21만 4천 원입니다.”
“……할부는 안 되죠?”
막상 계산하려고 하니 손이 떨렸다.
하지만 흔쾌히 카드를 내밀었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랜만에 시내 구경이라도 할까 싶어서 돌아다니는데 땅이 쿵쿵거리며 울리는 소리가 난다.
“뭐야?”
지진이라도 났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흰 갑주를 입은 일단의 무리가 오와 열을 맞춰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신의 기사들이 가는 길을 막는 자, 누가 있는가.”
그들이 걸을 때마다 길에 있던 사람들이 옆으로 갈라진다.
“어우. 저놈들 또 저러네.”
“이 날씨에 무슨 갑옷이야. 쟤넨 덥지도 않나?”
“왜 난 멋지기만 하구만.”
갑주를 입은 무리가 내 앞에 서서 날 내려다보았다.
“거기 청년. 길을 비키시오.”
덩치가 무슨 내 2배는 되는 것 같다.
갑옷을 입었다고는 해도 비정상적인 크기다.
위압감 장난 아니네.
어느새 내 몸은 자연스럽게 옆으로 빠져 있었다.
“고맙소.”
갑주를 입은 20명의 사람들이 저렇게 돌아다니니 땅이 울릴 만도 하다.
‘저 사람들이 성기사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인가.’
꽤나 유명한 사람들이기에 나도 알고 있다.
이런 찜통에 저런 갑옷을 입을 사람들은 흔치 않으니까.
자신들이 신의 기사라며 성기사라 자칭하는 집단.
길드, ‘신성’의 길드원들이다.
이름만 들으면, 이리저리 신비한 힘을 사용할 것 같은데.
막상 성스러운 힘 같은 걸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하긴 그런 힘 같은 게 없어도…….”
저런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단체로 덮치면 못 잡을 마물이 어디 있겠냐.
애초에 성스러운 힘.
신성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애매하다.
마법이랑 다를 게 없는 것 아니냐고 각성자들은 말하는데.
그들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때가 되면 나타난다나 뭐라나.
“뭐, 나랑은 관계없는 사람들이지.”
내가 저 갑주를 입는 상상을 해보았다.
입는 건 둘째 치고 움직이지도 못할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저질 체력에 암울해졌다.
“일단 체력을 기를 필요는 있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현대 사회다.
저번처럼 길 가던 도중에 균열이라도 나타나면 어쩌겠는가.
내 고유 능력인 만물의 주인.
특별한 물건을 만들어줄 뿐, 내 몸을 강화한다거나 하는 요소는 없다.
“그럼 내가 직접 뛰어서 기를 수밖에 없지.”
나는 가방을 열어 물약이 가득 든 페트병 하나를 꺼냈다.
이렇게 언제나 하나쯤은 가지고 다닐 생각이었다.
내 예비 목숨과도 같은 거니깐.
“밖에서 물약을 못 얻는 게 아쉽단 말이지.”
음식점에서 확인해 본 사실이다.
그곳에 있는 정수기에선 평범한 물이 나왔다.
“뭐, 집에서 받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지금은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물약을 마시며 집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참으로 사치스러운 짓이다.
뛰면 뛸수록 물약을 마시는 주기가 길어진다.
체력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것이리라.
“첫 목표는 일단 일반인 정도의 체력…….”
일부러 운동도 할 겸 평소와는 다른 코스로 돌아갔다.
빌라 앞에 도착하자, 이런 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세단이 주차되어 있었다.
“누가 이런 곳에 이런 차를 세워놨대.”
지나가다 긁기라도 했다간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차에서 누군가 내렸다.
“이서진 씨. 맞으십니까?”
“예, 예?”
아니. 저 안 긁었는데요?
“황혼 길드장, 정해연 님께서 만나고자 하십니다.”
“아아.”
계약 건으로 곧 부른다더니 오늘이었어?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인데.
의외로 성격이 급한 사람인 모양이네.
휴대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와 있었다.
무음이라서 그런지 확인을 못 했네…….
“제가 운동을 하고 와서 그런데 잠시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예. 그럼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비즈니스 관련으로 가는 건데 이런 복장은 아니다.
땀 흘려서 냄새도 나고.
나는 빠르게 샤워를 끝마치고는 그나마 정상적인 옷 몇 벌을 꺼냈다.
그래 봤자 평범한 슬랙스에 흰 셔츠였지만.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얼른 가시죠.”
“예.”
이런 차는 처음 타는 거라서 긴장된다.
오오. 역시 시트가 대중교통이랑은 다르구나.
푹신푹신하고, 잠이 솔솔 온다.
나도 모르게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크흠.”
너무 주책이었나.
부끄러운 마음에 운전석의 사람을 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작게 미소 짓고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에이, 쪽팔리네.’
몸을 뒤로 파묻자, 푹신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 * *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곳은 서울에 있는 한 고층 빌딩이었다.
일명 황혼의 길드 하우스라고 불리는 곳.
대한민국의 10대 길드 중 하나인 황혼인 만큼 가히 대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크기다.
‘정신 차리자. 이서진. 기죽지 마라.’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지만, 금방 털어내었다.
오늘은 이곳으로 면접이 아니라, 대등한 계약을 맺기 위해 온 것이니까.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는 게이트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작아져 가는 밖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곧이어 최상층에 도착했다.
길드장에 어울리는 화려한 방.
자리에 앉아 있던 정해연이 일어나고는 나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서진 님.”
“아뇨.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이야, 역시 고급 시트라 그런지 잠이 솔솔 오던데요. 우리 집에 있는 싸구려 방석이랑은 달라.”
분위기를 돌릴 겸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정해연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곧장 얼굴을 굳혔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모시러 갈 때는 절대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매우 좋았다는 말입니다!”
굳어진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야겠다.’
분위기를 좋게 하려 할수록 뭔가 이상해진다.
계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나마 숨이 트였다.
“혹시 예의 그 물약을 가지고 오셨는지요?”
“그럴 것 같아서 하나 챙겨왔어요.”
앞으로 판매하게 될 상품이다.
다시 한번 보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해 미리 하나 챙겼다.
페트병에 있는 거로 가져오기는 그래서 대충 근처에서 산 1ℓ짜리 보온병에 담아왔다.
‘무슨 음료수 팔러 온 잡상인 같네.’
그렇게 피식 웃었으나. 정해연은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많은 양이라니. 거기다가 이 병. 겉으로 보기에도 특별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역시라고 할 수 있겠군요.”
“아뇨. 그냥 집 근처에서 산 건데.”
신비하다느니, 역시 감각이 있으시다느니. 그런 소리를 뱉던 정해연이 순간 몸을 멈췄다.
“그, 그러시군요. 혹시 저희 측에서 전용 용기를 보내드릴 테니 앞으로는 그곳에 담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저야 좋죠.”
고급스러운 병 같은 걸 인터넷에서라도 찾아봐야 하나 고민했는데 잘 됐다.
“그럼 한 달에 전용 유리병을 스무 개. 이서진 님의 댁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건…….”
“역시 너무 많으십니까? 하긴 이만한 물건이라면 제조 과정이 쉽지 않겠죠. 한 달에 열 개면 충분하겠군요.”
“아니. 턱없이 부족해서요.”
“……부족하다고요? 혹시 물약의 생산량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현재 최대치가 4.5ℓ고 시간당 1ℓ 회복되니까.
“대충 20ℓ는 넘을 거 같은데요?”
“2, 20ℓ! 한 달에 그 정도나 되는 물량을 확보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한 달이 아니라 하루다.
거기다 마나 물약까지 합하면 거의 40ℓ다.
하지만 충격받은 모습을 보자니 그 말은 아껴두기로 했다.
“마, 말도 안 돼.”
정해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이내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찰싹 쳤다.
뭐야. 저거 무서워.
“역시 범상치 않은 인물이시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그녀가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정도나 되는 물량을 저희 쪽에 맡겨주신다는 말이죠?”
“예. 그렇죠.”
내가 무슨 인맥이 있겠는가.
아는 사람이라곤 황혼 길드장뿐이다.
인맥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
“부끄럽게도 제가 아는 사람이 정해연씨밖에 없어서요.”
“……!”
그런 말을 전했는데, 몸을 전율하면서 눈을 크게 뜬다.
또 왜 저래?
“그렇군요. 믿을 사람이 저밖에 없다. 이 말씀이시군요.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주먹을 불끈 쥔다.
저번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정해연에 대한 소문은 전부 헛소리가 틀림없다.
이렇게 착한 사람이 그런 음해를 듣는다니 팬클럽 N호인 나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저희 측에서 내미는 조건입니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시다면 부디 말씀해 주세요.”
“예.”
본디 계약서란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하게 읽는 거라고 배웠다.
내가 계약에 대해 뭘 알겠냐만 그래도 대충 볼 생각은 없었다.
‘정신 차리자, 이서진. 여기서 코 꿰일 수가 있는 거야!’
아무리 친절해 보여도 그 속은 흉할 수가 있는 법.
나는 뚫어져라 계약서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5분 뒤.
“……저기. 이 계약이 진짜 맞나요?”
“역시 그거로는 성에 안 차시는 모양이군요. 다시 해오겠습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공정한 계약.
그것만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건만 내가 보게 된 것은 살면서 보아온 어떤 것보다 ‘불공정 계약’이었다.
* * *
이서진(이하 ‘갑’ 이라 칭한다)과 황혼 길드 길드장 정해연(이하 ‘을’ 이라 칭한다) 은 ‘갑’이 제조한 물약을 위탁 판매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1) 갑은 을이 물약을 판매하도록 일정한 기준에 따라 을에게 물약을 위탁하며…….
2) 갑이 을에게 위탁한 물약은 규정에 따라 갑이 을에게 반환을 요구할 수 있고, 을이 갑의 반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해당 물약의 시장 가치의 10배의 금액을 지불한다.
3) 을은 갑이 위탁한 물약이 판매되었을 경우 갑의 요구에 따라 판매자의 정보를 공유하여야 한다.
4) 갑은 원하는 때, 원하는 물량을 을에게 공급할 수 있다.
5) 갑은 언제든지 계약을 해지할 수 있으며, 을은 그에 대한 거부 행사를 할 수 없다.
6) 을은 갑에게 물약 판매 금액의 전액을 지급하며, 해당 금액의 10%를 추가 지급한다.
…….
…….
…….
* * *
대충 이런 내용이 쫘르륵 있었다.
이게 뭐냐는 듯한 눈빛으로 정해연을 쳐다봤으나.
그녀는 마치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 마음에 안 드십니까……?”
“…….”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09화
4. 로또 1등이어도 옥탑방에 삽니다(1)
힐끗.
계약서를 진지하게 보는 척하면서 몰래 정해연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시종일관 불안해 보였고, 이 계약이 성사되지 않는 건 아닐까- 라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또한 심각했다.
‘이거 제대로 걸린 거 아니야?’
어느 곳에 ‘갑, 이서진이 노예가 된다’라는 항목이 있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서가 있을 수가 없다.
계약의 해지도 내 마음대로.
물약의 판매 금액은 오롯하게 내 것이오. 그뿐만 아니라, 그 금액의 10%를 추가 지급한단다.
아니, 그럼 저쪽에서 가져가는 것 자체가 없잖아?
물론 ‘없다’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계약서에는 적히지 않은 것에 관하여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정해연 또한 그에 관한 말을 하려는 모양.
“이 물약 판매에 대한 독점권을 얻고 싶습니다.”
저들에게 이득이라고 할 법한 것은 저것뿐이었다.
물론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예. 그렇게 하죠.”
“저, 정말입니까?”
솔직히 계약서에 독점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어도 흔쾌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런 조건을 내미는데 고작 그 정도도 못 해주겠는가.
“물론 계약서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은 내용이니 반드시 지킬 이유는 없으십니다.”
지키지 않을 이유도 없었고, 양심이 그딴 짓을 하면 넌 사람도 아니라고 짖고 있었다.
워워. 진정해 양심. 난 아직 사람이라고.
“혹시 물약의 등급이 어느 정도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어디 보자.
“아직 하급입니다.”
정수기를 강화할 수단이 생기면, 거기서 흘러나오는 물약의 등급 또한 달라질 것이다.
아직은 하급이지만 훗날엔 더 높은 등급을 가질 터.
“……그렇군요.”
역시 하급이라 조금 아쉽나.
정해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다시 한번 계약을 맺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른 시일 내에 물약의 전용 용기를 댁으로 보낼 테니 납품을 원하실 때마다 이 번호로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
* * *
「황혼 길드장 정해연」
010-XXXX-XXXX
* * *
“제 직통 번호입니다. 아는 사람이 극히 적죠.”
아니, 뭐 직통 번호씩이나.
그냥 아무한테나 해도 될 텐데.
저쪽에서 저자세로 나와 주는 만큼 내 긴장도 풀어졌다.
여러모로 나한테 좋은 거래다, 라고 만족하고 있자 정해연이 식사를 권유했다.
“제가 아는 좋은 식당이 있습니다. 계약 성사 건도 축하할 겸해서 바쁘지 않으시다면 간단하게 식사 어떻겠습니까.”
“좋죠.”
저런 미녀라면 길가에서 떡볶이를 먹어도 진수성찬이리라.
나와 정해연이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할 때.
그 안에서 누군가가 내렸다.
“응? 뭐야. 길드장이 매일같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길래 찾아와 봤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남성이 나를 묘한 눈동자로 쳐다보더니, 이내 호들갑을 떨며 손가락질했다.
“오. 어디서 봤다 했더니 그 음료수남 아니야!”
음료수남?
“이야. 우리 길드장 직접 발로 뛰어다니면서 계약한 거야? 크으. 가뜩이나 전투조 부족했는데 잘됐네! 나보다 어린 거 같은데, 반갑다! 앞으로 내가 네 선배다!”
자연스럽게 악수를 권하길래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내 손이 남성의 손에 닿으려는 순간.
작고 부드러운 손이 남성의 거친 손을 매몰차게 쳐버렸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으, 응? 아니, 이제 한 식구니까 인사나 나눌 겸해서…… 왜, 왜 그렇게 화를 내…… 세요. 길드장.”
옆에 있는 내가 봐도 숨이 넘어갈 거 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해연은 내게 몸을 틀고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무래도 식사는 다음에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다음번에 반드시 최고의 대접을 해드릴 테니 오늘은 이만…….”
“아, 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기에 나는 얼른 엘리베이터를 탔다.
닫히는 문 사이로 정해연의 발이 남성의 복부를 걷어차는 것이 보였다.
‘……소문이 전부 거짓은 아닐지도.’
* * *
“커, 커헉! 기, 길드장 대체 왜 그래! 나 이러다 죽어!”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신 지 알고나 하는 얘깁니까?”
“무섭게 왜 존댓말을 해!”
정해연은 남성을 걷어차는 거로도 모자라 화가 덜 풀렸는지 검을 빼 들었다.
정해연의 눈을 보고 진심이란 걸 깨달은 남성.
황혼의 전투 1조장 소성환은 곧바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 실수. 죽음으로 갚으십시오. 당신의 목을 베어 보낸다면 조금이나마 화가 풀리실 터.”
“자, 잠깐만! 일단 내가 미안해! 전부 미안하니까 설명이라도 해줘봐!”
계속되는 사과를 무시하고 정해연이 책상 위를 보았다.
-이건 선물로 드릴게요.
물약이 가득 든 보온병을 보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진정되었다.
“후…….”
마음 같아서는 연금술사님의 공방에 있는 그 방석에 당장에라도 앉고 싶은 기분이다.
“아니. 저 사람이 대체 누군데 그래? 저 사람 음료수남 맞잖아!”
“……음료수남이 대체 뭐죠?”
“아니, 너도 저번에 봤을 거 아냐? 그 음료수 마시면서 똥개 짱돌로 때려잡던 특이한 놈!”
“제가 항상 말했죠. 둘이 있을 때도 예의를 지키라고.”
“그, 그래. 길드장. 너도 전에 봤다면서!”
음료수남.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길드원의 권유로 봤던 어느 영상.
‘저 연금술사님이 영상 속 그 사람이라고?’
“기억나지? 그래서 나는 그냥 스카우트 관련해서 얘기한 줄 알았지…….”
남성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해연은 소름이 돋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생산계와 전투계는 다르다.
그것은 각성을 했을 때부터 정해진 ‘역할’ 같은 것이다.
생산계의 각성자가 아무리 자신을 단련해도 마물의 공격으로부터 그렇게 태연하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런 여유를 가지면서 마물을 상대할 수 있었던 걸까?
‘육체 강화와 관련된 아티팩트…… 혹은 강화 물약.’
여러 집단에서 만들기 위해서 온갖 물자며 인력을 갈아 넣고 있는 환상의 물약 중 하나였다.
평범한 인간을 각성자와 비견될 정도의 육체로 만드는 물약이 있다면 그야말로 ‘군단’을 이룰 수도 있을 테니까.
‘무서운 사람.’
그리고 그런 환상의 물약을 이서진, 그 연금술사는 만들어 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몸소 실험까지 하는 행동력까지!
‘아직 하급이라고 하셨지.’
자신과 거래하게 될 물약의 등급은 하급.
그 말은 자신에게 건네줄 수 있는 것은 ‘아직’ 이 정도라는 뜻이다.
나를 지켜보겠다는 것이며, 더 좋은 물건을 받기 위해서는 행동으로 보이라는 의미다.
까득-
정해연이 입술을 물었다.
“진작에 알았으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건데…….”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성급해서 이런 일을 벌이다니.
젊은 나이에 대형 길드장이 되었다고 느슨해져 있던 게 분명하다.
그런 분노는 앞에 꿇어앉아 있는 남성에게로 향했다.
“안 되겠습니다. 역시 당신 죽어줘야겠어요.”
“응? 아니, 잠깐만! 갑자기 또 왜 그러는데!”
* * *
[이번 주 로또 번호를 발표합니다!]
“크으으으…….”
이미 결과를 알고 있지만 직접 보는 거는 또 다르다.
텔레비전에서 숫자가 불리고, 나는 다섯 개의 게임에 동그라미를 친다.
“올 빙고다!”
옥탑방이 떠나가라 웃었다.
이거 상금 받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더라?
그래, 농협.
농협 본점에 내리진 말고 근처에 내려서 걸어가라고 했지.
“……옷도 양복으로 입으라 했어.”
눈에 띄지 않게 말이다.
인터넷에서 본 귀중한 정보였다.
“허허. 무슨 좋은 일 있으시나 보네요.”
“네, 네?”
“그 양복도 새것 아닙니까. 어디 첫 출근이라도 하시는 모양입니다.”
“아…….”
눈썰미가 좋은 택시기사였다.
수중에 양복이 없었기에 이번에 큰맘 먹고 마련한 양복이었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나는 양복 안주머니에 있는 로또 용지를 만지작거리며 택시에서 내렸다.
“이거 좋은 일 있어서 드리는 겁니다! 따따블이요!”
축하를 빌어준 택시기사님에게도 한턱 거하게 냈다.
삐걱거리는 몸놀림으로 농협 본점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당장에라도 누가 내 로또 용지를 들고 도망칠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지.’
내가 1등이 됐는지 어떻게 안 단 말인가.
본점이라 그런지, 아침에도 사람이 많았다.
번호표 뽑고 가서 1등에 당첨됐다고 몰래 말하면 되나…….
긴장된다.
번호표를 뽑고 얼마간 기다리자, 내 차례가 되었다.
“후우…….”
이제 인생 제대로 피는 거다. 이서진!
벅찬 마음을 진정시키며 당당하게 걸어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툭-
실내가 암전되었다.
아직 대낮이라 불이 꺼졌어도 창문으로 비치는 빛에 인해 조금이라도 밝았어야 했는데, 실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어둠이 되었다.
“무, 무슨 일이야?”
“정전인가?”
사람들 중 한 명이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핸드폰의 불을 켰고.
뚜득-
핸드폰의 주인은 갑자기 나타난 검은 물체에 의해 먹혀 사라졌다.
“꺄아아아악!”
“대, 대체 뭐야!”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고 있을 때.
누군가가 외쳤다.
“우, 우리 아이가 없어요!”
사람들이 서로를 부르며 애타게 찾는다.
누군가는 귀중품이 없어졌고.
누군가는 소중한 연인이 사라졌다.
나는 심각한 상황임에도 나도 모르게 양복 주머니로 손이 갔고…….
“하하하.”
빈 주머니를 펄럭거리며 허망하게 웃었다.
“X발.”
내 로또가 사라졌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10화
4. 로또 1등이어도 옥탑방에 삽니다(2)
여기저기서 들리는 비명 소리. 눈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인간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런 도둑놈이!!’
나 또한 그랬다.
하지만 내 이성을 잃게 만드는 것은 비명 소리도 어둠도 아닌, 무언가에 대한 ‘상실’이었다.
“내, 내 로또 용지를 훔쳐갔어!”
세상에나.
절대 안 잃어버리려고 10초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확인까지 했었는데.
불이 꺼진 틈을 노려서 내 1등 당첨용지를 훔쳐갔다.
로또 1등은 마물마저 눈독 들이게 할 위력을 가졌던 것이다.
“나, 난 나갈 거야!”
타다닥!
패닉에 빠진 한 남자가 어딘가로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출입구 쪽이겠지.
‘그래. 문을 열면 바깥의 빛이 들어올 테니까…….’
내 로또를 훔쳐간 놈의 얼굴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남성이 문을 열었다.
곧이어 문틈 사이로 빛이 쏟아진다.
“바, 밖이……! 커헉!”
아주 잠깐의 시야.
살았다는 듯 안심한 표정을 한 남성이 나타났고.
-@#%@$
다시 뒤에서 등장한 검은 실루엣이 그 남성을 잡고 사라졌다.
문이 닫히고 다시 은행 안은 어두워졌다.
“…….”
나는 바닥을 짚어서 벽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최소한 등이라도 기대고 있으면 앞쪽만 신경 쓰면 되니까.
‘이상한데.’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눈을 계속해서 끔벅거렸다.
이상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어둠은 없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 사물의 형체라도 보이는 것이 정상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눈은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것도 저 이상한 놈이 한 짓이겠지.’
테러…… 라기보다는 마물의 소행이라고 봐야 할까.
이런 이상한 테러를 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진작에 인질로 잡거나, 총을 들이밀었겠지.
‘조용해.’
주변에서 들리던 비명 소리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마물이 사람을 잡아갔으니, 자신의 위치를 들키지 않으려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이 침묵을 깰 방법은 간단하다.
“아아.”
“……!”
“……?”
가볍게 목에 힘을 줘서 소리를 냈다.
마물은 날 덮치지 않았다.
앞선 두 번의 습격에서 사람들은 비명 소리를 질러댔으나, 마물은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시야를 차단하는 마물.
아마도 소리를 듣지 못하는 놈이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까.
“흐, 흑…….”
“거, 거기 누구 있어요?”
내가 말문을 트자, 사람들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 다들 살아 계세요?”
“저 살아 있어요!”
“우, 우리 아이가 없어졌어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다시 혼란에 빠지려고 할 때, 내가 말했다.
“일단 다들 이쪽으로 모이죠. 뭉쳐 있으면 그나마 안전할지도 모르잖아요.”
“그, 그쪽이 어딘데요? 저 아무것도 안 보여요!”
“제가 계속 소리를 낼 테니까, 이쪽으로 기어오세요.”
박수 세 번 시작.
짝짝짝-
마치 어린아이들을 인도하는 유치원 선생님처럼 박수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소리에 이끌려 내 쪽으로 몰려왔다.
“소, 손 좀 잡아도 될까요?”
언뜻 들으면 이상한 소리였지만, 원래 무서운 상황일수록 타인의 온기가 그리운 법이다.
흔쾌히 손을 내밀었다.
“예. 그러세요.”
“가, 감사합니다.”
작고 부드러운 손이 벌벌 떤다.
“저기 저도 잡아도 됩니까?”
“안 됩니다.”
“예?”
바로 옆에서 아저씨의 아쉬운 목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기대 언제 올지 모르는 습격에 무서워하고 있었다.
정상이다.
이런 상황이 온다면 누구라도 무서워하는 게 맞는 거다.
‘그런데 나는 왜 아무렇지도 않지?’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한때 이성을 잃긴 했지만, 그것은 공포가 아닌 분노로 인한 것이다.
“……구조대가 올까요?”
“오겠죠”
오긴 올 거다.
이곳은 서울에 있는 농협 본점이었으니까.
구조대가 올 때까지 우리가 안전할 수 있을지가 문제다.
언제 저놈이 태세를 바꿔 우리를 공격할지 모른다.
잡혀간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서 사라진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주신 소중한 물건이에요. 잘 때도 몸에 달고 자는 건데.”
“딸아이가 처음으로 준 생일 선물이지.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야. 딸이랑 같이 온 게 아니라서.”
“고생해서 얻은 제 하나뿐인 아들이에요…… 제발 누가 좀 도와주세요…….”
이야기를 들어볼수록 공통점이 있었다.
사라진 것은 각각이 가지고 있던 ‘소중한 것’이다.
자신의 몸에서 뗄 수 없는 그런 것들.
나 또한 그러했다.
“구해야 합니다.”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구합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고 대응할 수단조차 없는걸요.”
“그냥 이대로 기다리는 건 어때요? 너무 위험할 거 같아요.”
고개를 저었다.
* * *
-긴급 퀘스트!-
「서울 농협 본점에 나타난 마물 ‘그룸’을 퇴치하십시오.」
보상: 랜덤 개방권, 선택 개방권, 선택 강화권.
특이 사항: 그룸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을 삼키는 버릇이 있습니다. 삼켜진 것은 시간이 지날 시 그들의 뱃속에서 소화됩니다.
* * *
이것만 보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주변이 보이지 않는데도 내 눈에 비치는 이 퀘스트.
역시 마물이 맞았다.
그리고 그런 놈을 퇴치하란다.
내 신체는 일반인에 비해 다를 것도 없다.
이런 위험한 일은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특이 사항이 눈에 걸렸다.
훔쳐간 것들을 소화시킨다.
소중한 물건들이 없어지고, 사라진 사람들이 죽는다는 의미다.
내가 알게 된 사실을 겉으로 말하진 않았다.
무슨 혼란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 대신 누군가를 찾았다.
“혹시 이곳에서 일하시는 분 계십니까?”
“예? 제, 제가 이곳 지부장입니다만…….”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렸다.
손 안 잡아줬다고 아쉬워하던 아저씨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곳 지리 잘 아시죠?”
“예…… 잘 알긴 합니다만. 출구는 가봤자 괴물한테 노려질 뿐일 텐데요?”
저 긴급 퀘스트라는 것이 나온 것도 벌써 두 번째다.
도플갱어로부터 황혼 길드를 구하라거나.
보이지도 않는 마물을 무력화하라거나.
터무니없는 조건들뿐이었지만.
이 퀘스트라는 것은 내가 가진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첫 번째는 「물약이 나오는 정수기」를 이용해서 해결했고.
두 번째는…….
「선택 개방권」
아직 사용하지 않은 개방권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남들에게는 평범한 물건을 ‘특별하게’ 사용하는 것뿐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이런 어둠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답은 금방 나왔다.
“이곳에 손전등이 어디 있죠?”
* * *
“허허. 들게나, 어서 들어.”
“제가 낮술은 안 하는 편이라서요.”
“에잉. 노인네 혼자 궁상맞게 마시라 이건가?”
“……한 잔만 하도록 하죠.”
정해연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는 술잔에 담긴 술을 들이켰다.
“오오. 시원하구만. 자자, 한 잔 더 받게나.”
수호 길드장, 안환재가 크게 웃었다.
술을 걸쳐서인지 붉어진 얼굴.
누가 봐도 술을 좋아하는 평범한 노년의 사내였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그런 그를 보며 정해연이 말했다.
“저희가 술이나 하러 온 건 아니지 않습니까.”
“급해. 젊어서 그렇게 급하면 될 것도 안 되는 법이야.”
“새로 나타난 4층 던전의 협동 공략. 저희와 함께한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3층짜리 던전 공략하고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위험한 곳에 들어가려 하나?”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변한다.
정해연이 얼굴을 굳혔다.
‘실수였어. 저 능구렁이 같은 양반이 갑자기 발을 뺐을 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새로운 4층 규모의 던전이 나왔을 줄이야…….
‘타락한 페어리의 무덤’에 온 집중을 다하느라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이 공략을 끝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소유권이 넘어간 후였다.
“……어차피 외부의 조력을 받기로 결심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그게 기운 빠진 호랑이를 말하는 건 아니야.”
안환재는 술 한 잔을 마시더니 웃으며 말했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않나. 우리 손주랑 소개팅 한 번만 해보라고. 그거면 내가 확실하게 자리를 만들어주지.”
또 저 얘기.
하지만 밥 한 끼 먹는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황혼 길드 소속 보좌관이었다.
‘내가 심각한 일이 아니면 절대로 열지 말라고 했을 텐데.’
4층 던전의 공략이라는 무엇보다 중요한 협상을 하는 중이다.
정해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뭡니까? 급한 게 아니라면 나중에 듣도록 할게요.”
“……그게. 서울에 있는 농협 본점에 그룸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곳은 우리 담당 구역이 아니잖아요? 고작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거예요?”
“허허. 황혼 길드는 세상사에 걱정이 많은 모양이로군.”
정해연이 보좌관을 노려봤다.
이 일이 끝나면 당장 잘라버릴 것이다.
보좌관은 땀을 흘리며, 그녀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그곳에 갇힌 사람들 중에 낯익은 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이름이 이서진이라고…….”
정해연의 눈이 커졌다.
갈무리 되어 있던 마나가 외부로 흘러나온다.
그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온 목적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행동이었으나.
“으, 응? 자네 지금 어디 가려는 겐가?”
“중요한 일이 생겼습니다. 이만 실례하도록 하죠.”
“……지금 가면 이 일은 없던 거로 할 거다만?”
“상관없습니다.”
이제 그런 것은 아무 상관 없었다.
정해연은 밖으로 나가자마자 전투조의 조장들에게 전화했다.
“지금 길드 내에 있는 전투조 전부 집합해. 한시가 급하니깐 당장 튀어오라고 전해!”
심장이 뛰고 숨이 가빠져 왔다.
연금술사 이서진이 마물에게 위협받고 있다.
인류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가 위기에 처했다!
4층 던전 같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일.
정해연의 얼굴이 초조함으로 가득 찼다.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 * *
“돌입하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안에 연금…… 사람들 고립된 거 안 보여!”
“이곳은 저희 신성 길드의 관할 구역입니다. 외부인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닙니다.”
까득-
정해연이 앞에 있는 인물을 노려보았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시지요. 경고입니다.”
“경고를 무시하면 신의 방패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흰 갑주를 입은 성기사들이 정해연과 대화하던 상대를 지키듯 앞을 가로막았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인물들.
“괜찮습니다. 단순히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수녀님.”
“형제들의 마음은 감사하오나 지금은 뒤로 물러나 주시지요.”
“예. 알겠습니다.”
그런 강인한 존재들.
2M에 근접하는 성기사들이 앞에 있는 인물의 말에 주저하지 않고 따른다.
그런 일이 가능한 사람은 단 하나뿐이다.
‘아마도 저게 신성 길드장…….’
자신도 젊은 나이에 길드장의 자리에 있었지만.
도저히 앞에 있는 인물은 한 길드의 수장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흰 머리에 수녀복을 입고 있는 아담한 체구의 소녀.
저것이 ‘신의 미친 방패’ 라고 불리는 성기사들을 다루는 길드, 신성의 길드장이었다.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야.’
공식적인 자리에도 항상 불참하던 그녀가 왜 갑자기 이런 곳까지 찾아온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맞잡고 정해연에게 말했다.
“저 또한 안에 있는 사람들이 걱정되오나. 섣불리 진입했다간 안에 있는 마물이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곧바로 잡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룸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마물. 자칫하다간 그림자에 숨어 도시 속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그러면 큰 참사가 벌어질 터.
탁- 탁-
대광량 조명 스탠드들이 은행의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조명으로 주변 그림자를 차단하는 동시에 진입한다면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금방입니다. 악을 상대할 때는 그 누구보다 침착해야 하는 법. 그것이 신의 가르침입니다.”
성기사들은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도록 만전의 태세를 갖췄다.
“저, 길드장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여기서는 물러나시는 편이…….”
정해연의 뒤에 있던 황혼 길드 전투조들이 물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연금술사께서 위험할지도 모른다.
도저히 참지 못한 정해연이 그들에게 돌입 신호를 보내려던 찰나.
“……?”
이변이 발생했다.
“……누가 스탠드를 작동시킨 거죠?”
“수녀님. 스탠드가 아닙니다!”
“……!!”
어둠에 고립된 은행 안.
그곳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11화
4. 로또 1등이어도 옥탑방에 삽니다(3)
“일단 사각지대로 이동하죠. 그곳으로 가면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지부장과 나는 바닥에 엎드려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그런데 손전등은 어디다 쓰시려는 겁니까?”
“아직 모르죠. 사용할 수 있을지, 없을지.”
“너무 위험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손전등을 얻고 나면 저한테서 멀리 떨어지세요.”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녀석은 빛을 싫어할 것이다.
빛이 나타나는 즉시, 그곳에 있던 사람을 잡아먹었으니까.
손전등이 녀석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어쩌면 방석처럼 손전등의 빛을 쐰 사람의 심신을 치유해 줄 수도 있다.
‘그러면 진짜 망하는 거고.’
손전등을 들고 있는 나를 단숨에 집어삼키겠지.
‘일단 능력이라도 확인하자.’
그래도 생각나는 거라곤 그것밖에 없다.
벽을 짚는 손의 감촉을 믿고 앞으로 나아간 지도 잠시.
“이곳에 넣어놨던 거로 기억합니다.”
이곳이라고 해봤자 안 보인다.
드르륵-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찾았습니다!”
“어디요?”
그는 내 손 위에 무언가를 올려놨다.
그것을 만져서 형태를 확인했다.
대충 내가 알던 손전등이 맞았다.
이리저리 살피다가 버튼을 발견했다. 그리고 버튼 위에 손이 올라갔을 때.
“주, 주변에 누가 있는 것 같습니다.”
“…….”
말하지 않아도 안다.
우리가 있는 곳을 기준으로 12, 9, 3시 부분에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우리를 제외하곤 전부 구석에 있으니까.
이놈들은 이 사건을 만든 그룸이라는 녀석들일 거다.
……한 명이 아니었다.
나를 이곳까지 안내한 지부장이 내 팔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어떻게 하죠?”
“일단 공격하려는 의사는 없는 것 같은데요.”
물론 불이 켜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손전등이 켜지는 순간을 이용해서 나를 잡아먹을 셈이겠지.
“일단 먼저 돌아가세요.”
그 말에 내 손을 잡고 있던 아저씨는 급하게 돌아갔다.
‘……거, 칼 같은 사람이네.’
나도 조심스럽게 구석으로 이동했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녀석들은 간격을 유지하며 나를 따라왔다.
‘스토커도 아니고, 이거 원.’
일단 무시한다.
내가 확인할 건 이 물건의 능력이니까.
손전등이 있는 곳에 시선을 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곧이어 내 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개방권을 사용하여 ‘손전등’의 능력을 개방하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물체의 능력을 개방합니다.]
-!@#@!$
-%@#$@
-%%@#!
갑자기 내 근처에 있던 녀석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 손전등의 능력을 개방한 것뿐이다.
손전등의 능력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놈들이 내가 들고 있는 이것을 경계하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이것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덕분에 확인할 필요도 없어졌다. 이것들아.”
나는 손전등의 스위치에 손을 올리고 숨을 들이쉬었다.
이런 상황이 오면 꼭 해보고 싶은 대사가 있었다.
“빛이, 있으라!”
* * *
건물 안에서 빛이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황혼 길드의 전투원들이 진입했다.
성기사들에게 ‘수녀’라고 불리던 인물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놀란 듯이 굳어 있었다.
“우리가 해결한다. 안쪽으로 진입하자마자 사람들부터 보호해!”
“예!”
때마침 건물 주변에 있던 스탠드들이 켜졌다.
전투원들이 모자에 달린 후레쉬를 켜는 순간.
건물 안에 불이 들어왔다.
“뭐, 뭐지?”
사람들은 구석에서 서로를 껴안고 있었고.
안쪽에 있을 줄 알았던 그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대신이라고 하듯이 검게 물든 땅 가운데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남성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찾았다아아!”
그의 손에는 로또 용지가 들려 있었다.
* * *
“정말 괜찮으십니까?”
“예. 아무 데도 안 다쳤어요.”
정해연이 이서진에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이서진은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나 생각하다가 이내 감격했다.
역시 대기업이라 그런지 애프터서비스가 확실하다.
‘그렇다고 이렇게 한걸음에 달려올 줄은 몰랐는데.’
애초에 이곳은 신성 길드 관할이다.
황혼 길드의 전투원들이 이곳으로 온 거면 괜한 시비가 붙을 수 있다.
당연히 신성 길드의 성기사들도 근처에 있었다.
그들은 마치 누군가를 지키듯이, 동그란 형태로 무언가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보다, 이런 곳엔 어쩌다 오시게 된 겁니까?”
“아, 그게…….”
로또에 당첨되어서. 그런 말을 하려다가 다물었다.
로또에 당첨되었다는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 했던가.
이것 또한 그가 인터넷에서 보았던 지식이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개인적인…… 아아!”
정해연은 알겠다는 듯이 탄복했다.
뭐야, 들킨 건가?
이서진은 손안에 있는 로또 용지를 강하게 쥐었다.
“그렇군요. 이곳에 마물이 나타날 줄 알고 찾아온 것이었군요…….”
혼자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알아챘네.’
“그, 그렇죠? 운이 좋았죠.”
로또에 당첨되었으니 운이 좋았다 볼 수 있었다.
정해연에게 들켰으니 밥이라도 한 끼 사줘서 입막음을 시켜야 하나?
이서진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들것 가져와!”
성기사들과 황혼 길드의 전투원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옮겼다.
“상태가 안 좋습니다!”
“지금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서진이 그 모습을 보고는 가방에서 물약이 든 병 하나를 꺼냈다.
“저 사람들한테 먹여주세요.”
“예? 하지만…….”
저곳에 있는 사람 덕분에 마물의 특성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자신한테는 물이나 다름없는 것이었기에 아깝지도 않았다.
“알겠습니다.”
정해연이 병을 전투원에게 건네자, 그가 사람들에게 그것을 먹이기 시작했다.
물약을 먹은 꼬마와 사내의 상태가 급속도로 좋아졌다.
어둠 속에서 흐느끼던 목소리의 주인이 눈을 뜨고 있는 어린아이를 끌어안는다.
“아가! 우리 아가!”
“으으…….”
이서진은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뒤돌았다.
아무래도 보는 시선이 많다.
오늘 당첨금을 수령하기엔 글렀다.
‘다음에 와야지.’
“가시는 겁니까?”
“예. 할 일도 많고요.”
“그렇군요…….”
그를 붙잡고 싶었으나, 자신은 이곳의 상황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정해연이 신성 길드장을 찾아서 성기사들에게 찾아갔다.
“이 안에 있으신 거 같은데, 잠시 이야기 좀 하실 수 있나요.”
관할 구역을 무시하고 황혼 길드 멋대로 난입한 죄.
저쪽에서 항의한다면 꽤나 크게 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음에 찾아오시죠.”
“이곳은 비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견고한 성기사의 벽에 정해연은 결국 물러섰다.
역시 일부러 안 만나주고 정식으로 항의할 생각이야.
그런 생각을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안쪽에 있는 인물에게 황혼 길드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아아……!”
성기사들이 만든 벽 가운데.
수녀는 고개를 숙인 채 전율에 떨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태양 빛이 그녀를 내리쬐고 있었다.
강렬했지만, 건물 안에서 뿜어져 나오던 그 찬란한 빛에 비하면 한심할 정도였다.
“드디어, 드디어 오신 거군요!”
언젠가 나타나리라 믿었다.
성스러운 힘을 다루는 자.
신의 대행자.
「언젠가 강렬한 빛과 함께 너를 인도할 자가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계시다.
그 존재를 맞이할 수 있게 준비해 왔다.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진 자들과 길드를 만들었다.
주위에서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성기사들과 수녀는 믿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보답이라고 하듯, 악을 물리치며 계시 속 인물이 드디어 이 땅에 강림하였다.
두 손을 마주 잡고, 감고 있던 눈을 뜬 수녀가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다.
“수녀, 루비에르트, 이 한 몸 바쳐서 모시겠습니다.”
루비에르트는 바닥에 꿇어앉아 한참이 지나도록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 * *
정작 당첨금을 수령하지는 못 했지만, 이미 돈은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행복한 미래를 그리는 일만 남았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다.
이 정든 집을 떠날 때가 됐다고.
안쪽에 있는 가구들은 옮기면 되겠고.
더 나은 거주 환경을 위해선 이사할 필요가 있었다.
“참으로 좁은 곳이었지.”
허름한 옥탑방.
내 아늑한 스위트 하우스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너무도 좁게만 느껴졌다.
“돈이 생겼으니까…….”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이사를 가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돈이 생기고 나니까, 지금까지 살던 곳이 좁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동안 신세를 졌으니까 나 혼자 조촐하게 파티라도 열까.”
좁은 집에서 나 혼자 여는 축하 파티.
마지막 작별을 위해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내일부턴 이사 갈 집을 찾기 위해서 꽤나 바쁠 테니까…….
오늘 당장 할까?
어느새 빌라 앞에 도착했다.
계단을 올라, 문을 열쇠를 꺼냈다.
겨울엔 더럽게 춥고 여름엔 더럽게 더운 우리 집.
하지만 이제는 안녕이었다.
내가 미안하다. 다음엔 더 좋은 주인 만나라.
찰칵!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쾅!
문을 세게 열었다.
이제는 안녕.
나를 보살펴주던 스위트 하우스야.
“안녕…… 우리…… 집?”
집으로 들어간 지 삼 초.
문을 열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바깥 풍경과 현관문 안을 번갈아 보기를 한참.
나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내 집 맞는데?”
몇 번을 살펴봐도 내 집이 맞았다.
고작해야 10평 남짓한 집.
“……그런데 여기 왜 이렇게 넓냐?”
한바탕 소란을 마치고 돌아온 내 보금자리.
좁고 허름했던 곳은 어디 가고.
마치 호텔의 스위트룸처럼 넓은 집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12화
5. 오염된 알(1)
자신이 머물 곳 하나 없이 헤매고 있을 때, 언제나 돌아올 곳이 되어줬던 옥탑방.
몇 년씩이나 살았던 곳이지만 이렇게 낯설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다.
“……누구 집이 이렇게 넓대.”
누구 집이긴.
당연히 내 집이었다.
마치 호텔에 들어온 것처럼 깔끔하고 넓은 공간.
가구들이 추가되거나 그러진 않았다.
넓어지기만 하고 텅 빈 내부를 보고 있자니 이전과의 차이가 더욱 두드러졌다.
‘혹시 주인집 아저씨가 나 몰래 리모델링이라도 한 건가?’
……아니, 그렇다고 해도 넓어지는 건 말이 안 되잖아.
한없이 낯선 공간이었지만, 둘러보니 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그래도 낯익은 것도 있네.”
생소한 집 사이에서 친숙하고 반가운 물건들.
이제는 내 보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수기와 텔레비전.
아, 방석 너도.
넓어진 내부에 맞춰서 기존의 가구들도 각자 어울리는 공간에 위치해 있다.
아마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하나겠지.
랜덤 개방권.
* * *
-긴급 퀘스트 완료-
「서울 농협 본점에 나타난 마물 ‘그룸’을 퇴치하십시오.」
보상: 랜덤 개방권, 선택 개방권, 선택 강화권.
* * *
[보상을 획득합니다.]
[랜덤으로 하나의 물체가 능력을 개방하였습니다.]
집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니 역시나 상태창이 나타났다.
* * *
「이서진의 스윗 하우스」
설명:【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거주하는 공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내부 구조를 변경시킬 수 있다.
▷하우스 내에 개방된 물건들의 효과가 미미하게 상승합니다.
▷개방된 물체의 수에 따라 하우스의 전체 면적이 늘어납니다.
현재 변경시킬 수 있는 평수 : 50평
* * *
“스윗 하우스는 뭐야, 스윗 하우스는.”
내가 평소에 그렇게 부르긴 했지만.
상태창도 그런 식으로 이름 지을 줄은 몰랐다.
그동안 물건들의 능력들을 개방해 왔다면.
이것은 그 물건들을 보관하는 상자로 보면 될 것 같네.
내부에 있는 물건들의 효과를 높여준다고 했지?
확인해 보니 정수기는 물약의 회복률 및 전체 생산량이 늘어나 있었고.
방석은…… 더욱 푹신해졌다.
텔레비전은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더 도움이 되는 미래 정보를 보여주겠지.
거기다 스윗 하우스만의 능력도 신기했다.
“내부를 변경시킬 수 있다고?”
현관문에 서서 집안의 구조를 상상했다.
화장실은 조금 넓었으면 좋겠는데.
그러자 화장실 근처의 공간이 마치 찰흙 놀이를 하듯이 변경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
나는 화장실 문을 열어보았다.
“오와…… 무슨 사우나가 있네.”
솔직히 이 화장실 하나가 이전의 집보다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화장실이 커진 만큼 다른 공간이 지나치게 줄어들었다.
“밸런스가 안 맞아.”
다시 현관문으로 돌아와 집 구조를 바꾸기 시작했다.
한 번 감을 익히자, 마치 심X를 하듯이 내 집을 3인칭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분명히 난 현관에 서 있는데 내 시야는 집 내부를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진짜로 게임이라도 하는 기분이야.”
피곤하다는 생각도 없이 집안을 이리저리 주무르면서 시간을 보냈다.
“결국, 처음에 되어 있던 거로 돌아왔네.”
내 취향을 고려했는지 자동으로 만들어져 있던 처음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평수도 최대가 50평이지.
원한다면 줄일 수도 있었다.
이전에 있던 구조와 똑같이도 만들어 봤다.
향수가 젖는다거나 그런 생각도 없이 곧바로 바꿔 버렸지만.
“가구들 좀 추가해야겠어.”
넓어진 집 안.
바닥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직 확인해 볼 게 더 남았다.
“이거 가져왔다고 신고당하거나 그러진 않겠지?”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손전등 하나.
그래도 은행에서 마물 퇴치도 하고 사람들도 구했으니까 이 정도는 봐주리라.
* * *
「성스러운 빛을 발하는 손전등」
설명: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사용할 경우. 손전등에서 성스러운 빛이 나온다.
그 세기는 충전도에 따라 다르며 3시간을 기준으로 최대치가 충전된다.
*악惡 성향의 존재에게 데미지를 입힙니다.
*이 기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시동어가 필요합니다.
▷시동어 : 빛이 있으라.
* * *
은행에서 그룸을 없앨 때, 대충은 예상했었다.
생각했던 그대로 악을 정화하는 빛이다.
게임으로 따지면 홀리 라이트 비슷한 건가.
“아니, 그런데 저건 뭐야.”
맨 밑에 이상한 것이 있었다.
시동어.
장난으로 외쳤던 내 대사가 이 손전등을 작동하기 위한 주문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이거 지금이라도 못 바꾸나.”
그때는 상황에 취해 했던 것이고.
저걸 맨정신에 한다는 건 조금 부끄러운데.
“……뭐. 그렇게 많이 쓸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현재 가장 많이 쓰는 거라곤 물약이 나오는 정수기와 미래를 보여주는 텔레비전 정도다.
“꽤 많은 물건이 개방됐지.”
오랜만에 개방한 물체들도 볼 겸해서 상태창을 열었다.
* * *
〈이서진〉
힘: 1.2
민첩: 1.2
체력: 1.3
마력: 1.0
고유 능력: 【만물의 주인】
「현재 개방된 물체 목록」
▷정수기 : 물 대신 물약이 흐른다.
▷텔레비전 : 채널마다 무작위로 미래를 볼 수 있다.
▷방석 : 앉는 자의 심신을 치유해 준다.
▷손전등(New!) : 사악한 것을 정화하는 빛이 나온다.
▷옥탑방(New!) : 내부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
◎현재 정수기의 숙련도가 가득 찬 상태입니다.
* * *
숙련도가 가득 찼다고?
* * *
「물약이 나오는 정수기」
설명: 【만물의 주인】 이서진이 정수기를 사용할 경우 물 대신 물약이 나온다.
생산 가능한 체력 물약[하급] : 5ℓ
생산 가능한 마나 물약[하급] : 3.5ℓ
시간당 생산 회복률 : 1.2ℓ/600㎖
◎현재 숙련도가 가득 찬 상태입니다.
◎조건을 만족시켜 다음 단계로 업그레이드하세요.
▷퀘스트-정수기에서 나오는 물약을 백 명의 사람에게 마시게 할 것. (0/100)
▷보상-다음 단계로의 업그레이드.
* * *
“나왔다.”
개방한 물건을 강화하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방법이 숙련도.
단순히 많이 쓰면 되는 것이었다.
특히 정수기의 업그레이드는 반가웠다.
병원에서 확인한 결과, 아직도 내 몸 안에는 빌어먹을 마석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하급이 아닌, 중급. 상급의 물약을 섭취한다면 언젠가 이걸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되면 잘 쓰지 않는 것들도 자주 써줘야겠는데.”
훗날 어떤 기능이 추가될지 모르니깐.
곧장 방석에 주저앉아 퀘스트를 보았다.
백 명의 사람에게 물약을 마시게 하라.
솔직히 저건 퀘스트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내가 직접 뛸 필요도 없다.
띵동!
“계십니까?”
마침 도착한 모양이다.
“황혼 길드에서 왔습니다. 물약을 담을 전용 용기를 가져왔습니다만.”
“밖에다 놔주세요.”
“괜찮겠습니까?”
“예. 가져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자기 넓어진 집을 외부인에게 보여주기도 그랬으니까.
대충 문 앞에 두면 내가 안쪽으로 나르면 되겠지.
바깥에 있는 사람이 가고 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옥탑방 앞.
건물의 옥상에는 스무 개의 상자가 쌓여 있었다.
“……그냥 안쪽으로 들어오라고 할걸.”
이만한 양을 여기까지 들고 온 것도 신기하다.
기껏해야 한 상자일 줄 알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안쪽으로 들여서 물이라도 한잔 대접할 걸 그랬다.
“오랜만에 상자나 날라보자.”
집안으로 들여서 넓어진 거실 한구석에 놓았다.
상자를 뜯어보니 딱 봐도 고급스러운 유리병들이 줄지어서 들어 있다.
“허어…….”
이 유리병 하나만으로도 값이 꽤나 나갈 것 같은데.
띠링!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밖으로 꺼내고 있자, 휴대전화에 문자가 도착했다.
내게 문자가 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황혼 길드장, 정해연.
[서진 님. 물약의 용기는 잘 도착했습니까?]
항상 피싱 문자들이나 오던 휴대전화인데. 이렇게 직접 문자를 받자니 괜히 감격이네.
“얼른 답장해야지.”
[넵. 잘 받았습니다. 이 유리병에 물약을 옮기면 되나요?]
[예.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뇨. 힘들 일도 아닌데요.]
힘든 일이 아니긴 하다.
정수기에서 물 따르는 것이 힘들 체력이라면 나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물건을 상자 같은 곳에 넣어놔도 돼요?]
[파손 방지 마법이 걸려 있는 상자입니다. 물론 서진 님께서 보시기에는 하찮은 수준이겠지만. 유리병이 파손될 일은 없을 겁니다.]
[아하.]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
나는 파손 방지 마법이니 그런 거 모른다.
조심스럽게 들었다 놨다 하면 그게 파손 방지지.
상자 하나당 열 개의 유리병이 들어 있었다.
대충 용량은 125㎖.
한 상자당 대략 1ℓ다.
화학 약품을 넣어놓는 시약병이 대충 이만한 크기였다.
“이렇게 작은 곳에 넣으라고?”
페트병이랑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병이다.
뭐 그래도 여기에 넣어달라니 그래야지.
나는 정수기 입구에 유리병을 대고 물약을 따르기 시작했다.
대충 반반 갈라서 체력 물약, 마나 물약으로 담으면 되겠지?
“금방금방 되네.”
병이 하도 작아서 그런지 입구에 대는 순간 꽉 찬다.
현재 생성 가능한 체력 물약은 5ℓ.
마나 물약은 3.5ℓ다.
“일단은 3상자씩만 따라볼까.”
과정은 순식간이었다.
“오…….”
고급스러운 병에 담겨 있는 물약을 보자니 뭔가 다르긴 했다.
너희들 이렇게나 고급스러운 놈들이었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함부로 페트병 같은 곳에 넣다니…….
아빠가 미안하다.
“목마르네.”
물론 내가 마실 물은 페트병에 넣어진 채다.
저런 조그만 병으로 찔끔찔끔 어떻게 먹어.
“나머지 네 병은 몇 시간 뒤에 하면 되겠고.”
알아서 시간이 지나면 충전되니깐.
상자 안에 병을 넣고 정리하고 있자 다시 문자가 왔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 때문에 조금 문자가 늦었습니다. 언제든 원하시는 때에 제게 연락을 주시면 물약을 받으러 가겠습니다.]
[언제든지요?]
[예. 아무래도 과정이 과정인지라 시간이 걸릴 것이지 않습니까. 개수가 몇 개든 완성되는 대로 찾아가겠습니다.]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고 물약이 가득 담긴 유리병들을 보았다.
이미 다 했는데?
[사실 이미 몇 개 정도는 채워놨거든요.]
[정말입니까? 혹시 몇 개 정도의 물량인지…….]
하나, 둘…….
[여섯 상자 정도요.]
“뭐야, 왜 답장이 안 오지?”
몇 분이 흐르고, 문자 대신 전화가 걸려왔다.
받자마자 정해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귀로 들려온다.
-지금 당장 댁으로 찾아 봬도 되겠습니까?
“어……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뚝-
“……그런데 일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13화
5. 오염된 알(2)
“클리어!”
“이쪽도 클리어!”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숲. 하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한없이 굳어 있었다.
“……끝인가?”
주변을 확인한 사람들이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제각기 칼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자리에 앉아 교대로 포션을 마신다.
“후…… 그래도 처음이랑은 비교가 안 되네.”
“당연한 소릴 하네. 마물이 이지를 가지고 있냐, 없냐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황혼 길드의 전투원.
그들은 이전에 공략했던 타락한 페어리의 무덤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 날파리 같은 놈들.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단 말이야.”
“……그동안 본 마물들이랑은 차원이 다르게 영리했지.”
공략 당시.
요정들은 제 수하에 있는 마물들을 조종하며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전투원들은 휴식조차 제대로 못 하고, 죽을 각오로 공략을 진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그렇게 똑똑하던 놈들이 지금은 앞뒤 안 가리고 튀어나오니.”
한번 공략이 완료된 던전은 일종의 ‘초기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마물은 되살아난다.
하지만 처음에 있던 마물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들은 게임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몬스터처럼 이성을 잃고, 침입자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게 된다.
“뭐, 앵벌이 한다는 느낌 나서 나쁘진 않긴 한데. 시시하단 말이야.”
“X랄. 너 아까 보니까 요정한테 목 긁히는 거 봤구만.”
“야, 야! 방심해서 그래. 방심해서!”
“누가 방심했다고?”
“흡!”
자신의 치부를 숨기려던 전투원 중 하나가 뒤에서 들려오는 스산한 목소리에 땀을 흘렸다.
“기, 길드장…… 제가 진짜로 방심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자그마한 방심들이 모여서 언젠가 목숨을 잃는 거야.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다른 던전의 청소 작업은 네가 전담해서 맡도록 해.”
“저 내일 휴일인데…….”
“그래서?”
“던전에 피크닉 가고 좋다고요…….”
이게 다 경험 부족이라서 그래.
그렇게 중얼거린 정해연은 뒤쪽에서 들리는 한숨 소리를 무시하고 보온병 하나를 꺼냈다.
“조금만…….”
‘마신다’라기보다는 ‘적신다’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소량의 목 넘김.
“후후.”
회복은 쥐꼬리만큼 됐지만, 기분은 좋아졌기에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아껴 먹어야지.’
그렇게 웃으며 보온병을 가방에 내려놓았을 때.
“오. 뭐야, 물이야? 나도 한 입 마실래.”
전투 1조장 소성환이 곧바로 병을 낚아채 내용물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크으. 뭐야, 딸기 맛이네? 흐흐. 이거 좋다.”
“이, 이익……!”
“뭐, 뭐야?”
“적습인가?”
전투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전투원들이 갑작스레 퍼져 나오는 짙은 마나에 곧장 일어섰다.
“또 왜, 왜 그렇게 화를 내는데! 고작 음료수 하나 마신 거 가지고!”
“고작 음료라고? 고작 음료라고?”
저것은 위대한 연금술사가 자신에게 선물한 귀중한 물약이다.
자신도 정말 힘들 때만 적시듯이 마시고 있던 건데…….
보온병 안에 들어 있던 물약은 절반이나 사라져 있었다.
“절반이라…… 딱 적당한 수치네요. 정확히 목숨이 절반 정도 날아갈 준비를 하세요.”
“아니, 갑자기 또 존댓말은 왜…… 그보다 우리 아직 던전 안이라고?”
“잘 아시네요. 던전 안에선 누가 죽든 간에 문제 될 것은 없으니까요.”
증거가 안 남으니까.
그렇게 말한 정해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정해연과 눈을 마주친 전투원들이 미칠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던전에서 사람 죽는 거야 흔한 일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길드장님!”
“야, 이 놈들아!”
소속 전투원들의 배신에 소성환이 울부짖었다.
보온병에 든 것을 마시고 난 후로 느껴지는 활력에 얼마간 저항을 해 보았지만, 분노한 정해연을 막을 순 없었다.
“커헉! 길드장. 나야, 소성환. 나 기억하지……?”
“죄송합니다만, 제 길드에 그런 이름은 없었던 거 같군요.”
발밑에 소성환을 깔아 놓고, 휴대폰을 들었다.
마석을 이용해 만들어진 휴대폰.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몇 분에 일회용이지만, 던전 내에서 외부와 소통하기 위한 귀중한 물건이다.
원래 폰과 연동해 놨으니,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어디 보자.”
정해연이 빠르게 핸드폰을 훑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연금술사님에게 보낼 문자가 늦어져 버렸다.
“얼른 보내야지.”
이 휴대폰에 저장된 인물은 몇 없었지만, 최근에 저장된 이서진의 이름은 맨 위에 있었다.
[ㄱ. 연금술사 이서진☆]
별로 강조된 그 이름을 꾹 눌러 메시지를 작성했다.
톡톡-
던전에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차분히 울려 퍼진다.
[죄송합니다. 급히 처리해야 할 문제 때문에 조금 늦었습니다.]
“끄윽…….”
아래에서 들리는 소음을 무시하고 문자를 계속했다.
물약의 확보.
각성자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으니깐.
[사실 이미 몇 개 정도는 채워놨거든요.]
“역시!”
순도 100%의 물약을 벌써 만들었다니.
누가 보면 정수기에서 나온다고 해도 믿을 만한 속도다.
“하나? 둘?”
혹시 세 개 이상 만드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답장이 도착했다.
[여섯 상자 정도요.]
그 활자를 정해연이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내 휴대폰이 검은 화면이 되었을 때. 발에 힘을 주며 말했다.
“소성환.”
“네, 넵! 접니다. 소성환! 황혼 길드 에이스 전투조장 소성환이요!”
“이 던전, 나머지 공략은 나 빼고 가능하겠지?”
“뭐, 잘못하면 제가 죽을 수도 있겠지만, 어찌어찌 가능하겠죠? 그런데 그건 왜요?”
“잘됐네. 난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볼 테니 이곳은 알아서 처리해.”
“예……?”
“아니면.”
꾸욱-
“내가 처리할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가 말끔하게 청소하고 가겠습니다!”
정해연은 전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출구를 향해 뛰어갔다.
“……갔나?”
정해연이 사라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소성환.
그가 한숨을 쉬었다.
요즘 들어 자신에 대한 대우가 너무 각박해진 거 같은데…….
“야. 너희들은 그러고도 내 팀원들이냐?”
“조장님이 저희 돈 주시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고개를 떨군 소성환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쩝…….”
입가에 딸기향이 남아 있다.
맛대가리가 없는 물약과는 차원이 다른 달콜함.
“……어디서 파는 건지 물어봐야 했는데.”
요즘 음료수는 꽤 잘 나온단 말이야. 소성환이 중얼거렸다.
* * *
똑똑-
상자들을 구석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자니 노크 소리가 들린다.
아니. 벌써 왔다고?
아무래도 이 근처에 있었나 보다.
그러니까 쉽게 온다고 말을 했겠지.
끼익-
문을 열었다.
저번에 보았던 그 도도한 표정의 황혼 길드장.
‘……이 아니네?’
건너편에는 땀으로 엉망진창이 된 정해연이 서 있었다.
“허억…… 헉……! 저, 저 왔습…… 니다. 이서진 님.”
딱 봐도 죽기 일보 직전이기에 시원한 체력 물약 하나를 건네줬다.
“이, 이렇게 귀한걸.”
힘들긴 한 건지 마다치 않고 마신다.
대형 길드의 수장에 위치한 각성자다.
저런 존재가 저렇게 힘들어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되는 거리를 뛰어온 것일까.
“이것도 드세요.”
마나 물약도 하나 내밀었다.
가끔 블루베리 맛 음료수가 끌리면 마시려고 냉장고에 넣어 둔 거라 시원할 것이다.
두 물약을 섭취하고 나서야 정해연이 호흡을 되찾았다.
“못 볼 꼴을 보여드렸군요…… 죄송합니다. 한 시라도 빠르게 확인하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런데 급한 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뇨. 이제는 아닙니다. 이것보다 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단호했다.
뭐, 본인이 그렇다니 내가 뭐라 할 것은 아니었다.
“일단 앉으세요.”
심신을 치유하는 방석을 건네고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그래도 나름 넓어진 집이라 그런지 이전보다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물약과 커피를 일정 비율로 섞은 환상의 음료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갔다.
물약도 어찌 보면 물이다, 라는 생각에 만들어 봤는데 그 맛이 꽤나 일품이다.
참고로 딸기향이 나는 커피다.
“잘 마시겠습니다.”
방석의 효과 때문인지 정해연은 침착해 보였다.
나는 상자를 가져와 물약부터 확인시켜줬다.
“정말이었군요. 아니, 서진 님을 의심한 것은 아닙니다만. 수작업일 텐데 어떻게 이런 속도를…….”
물약은 제조를 담당하고 있는 각성자들이 전부 수작업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마석에서 원료를 추출하는 건 그렇다 치고.
그것을 정화하는 과정은 꽤나 까다로웠기에.
물론 나는 누르기만 하면 나오지만.
“으음? 음…….”
나는 오묘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정해연에게 말했다.
“저, 혹시 하나만 부탁해도 됩니까?”
“예.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처음으로 거래하게 될 물약들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판매할 수 있을까요?”
“그 말은…….”
“아. 물론 그 뒤로는 누구에게 판매하든지 상관없어요. 황혼 길드 쪽에서 모든 물량을 사용해도 되고요.”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역시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계셨군요.”
냉장고에 넣어뒀던 물약들까지 옮겨서 대략 열두 상자.
백이십 개의 물량을 확보해 놓은 상태다.
한 명씩에게만 팔아도 퀘스트는 금방 클리어될 것이다.
“물약은 내일 사람을 시켜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취급이 중요한 물건인지라.”
“예.”
“그리고 혹시…….”
정해연이 방석에서 잠시 몸을 꼼지락대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식사하셨는지요?”
“아뇨. 안 했어요.”
“음! 그럼 이전에 말했던 대로 제가 확실하게 대접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저야 고맙죠.”
정해연은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나한테 밥 사주는 게 그렇게 좋나.
오히려 저런 사람과 밥을 먹는 내가 영광이다.
‘진짜 이쁘긴 하네.’
길드장이기는 하지만 나이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다.
평소에는 무겁고 날카로운 인상이었으나.
저런 식으로 웃으니 앳된 외모가 엿보인다.
‘팬클럽 중에서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본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카페에 자랑이라도 할까.
어차피 믿어주지도 않겠지만.
정해연이 온다고 해서 옷도 갈아입어 놨기에 따로 준비할 건 없었다.
“그럼 나갈까요?”
나는 나가기 전에 정해연에게 물었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궁금하던 사실이다.
“그런데 이 집 뭔가 달라진 거 없어요?”
“아. 그것 말씀이십니까.”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넓은 실내.
누구라도 안쪽을 보면 놀랄 것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미 이전에 집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내 질문에 정해연은 자그마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조금 정도는. 저에 대한 신뢰가 생기신 것 같아 기쁩니다.”
물론 신뢰하고 있다.
근데 집 어떠냐고 물은 건데 저런 말은 왜 나오는 거야.
정해연이 먼저 나가고, 따라 나가려는데 상 위에 보온병이 있었다.
이전에 내가 주었던 그 보온병이다.
“얼마 안 남았네.”
아무래도 매일같이 마물을 상대하다 보면 물약이 남아나질 않겠지.
나는 정수기에 보온병을 대고 순식간에 리필을 했다.
“이거 놓고 갔어요.”
“이런 실수를…… 응?”
정해연이 보온병을 이리저리 흔든다.
가득 찬 물약이 출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모자란 거 같아서 채워 넣었어요.”
정해연이 멍한 표정으로 보온병을 바라본다.
“앞으로도 다 마시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채워드릴 테니까.”
사업 파트너한테는 공짜다.
가만히 날 바라보던 정해연이 이내 보온병을 끌어안으며 웃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 * *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한정식 식당.
「한빛」
대형 길드장, 대기업 총수, 정재계의 유명인사 같은 VIP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음식점이다.
제대로 된 예약 없이는 찾아올 수도 없으며, 그 예약조차도 예약자의 신분을 철저하게 따지는 상류층만의 전용 식당.
‘분위기 좋은데? 이런 곳이 있었나?’
물론 그런 사실은 알지 못하는 이서진은 그저 신기해할 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려 연못이 있는 정원을 거쳐 입구로 도착하자 그들을 반기는 건 줄지어서 있는 종업원들이었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대접에 이서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 모습을 본 정해연이 급하게 앞으로 나섰다.
이름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정해연 정도의 인물이라면 그 얼굴이 신분을 보장하니까.
“안쪽으로 들어오시죠.”
고작 둘이서 먹는 곳이라기엔 지나치게 넓은 한옥 스타일의 내부.
곧이어 상 위로 무수히 많은 음식들이 올라왔다.
‘우, 우와…….’
“……갈비찜이 저런 고급스러운 곳에 담겨 있는 음식이었구나.”
한식이라길래 아는 음식이 있을 줄 알았는데,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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